강철왕국 프로이센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 박병화 옮김 / 마티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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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가(家)


"브란덴부르크 일대는 상당 부분이 척박한 토질이었고, 따라서 농산물 수확이 저조했다. 그곳의 장원 제도는 서유럽이 보여준 도시 발달을 자극할 만한 충분한 잉여 노동력을 내보내거나 구매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장래성 없던 이 영지가 어떻게 강력한 유럽 국가의 심장이 되었을까? 열쇠는 통치 왕조의 분별력과 야망에 있다. 호엔촐레른 가문은 남부 독일에서 떠오르는 최고의 귀족 가문이었다. 1417년에 작지만 부유한 영지인 뉘른베르크의 성주 프리드리히 폰 호엔촐레른은 브란덴부르크를 그곳의 당시 영주인 지기스문트 황제로부터 헝가리 금화 40만 길더를 주고 구매해 땅은 물론 세력까지 얻었다. 브란덴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선출권을 가진 7대 선제후국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때 신성로마제국은 유럽 독일어권의 크고 작은 국가들을 이어 만든 조각이불 같은 형태였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라는 새로운 칭호를 얻은 프리드리히 1세는 오늘날 유럽 지도에서 사라진 정치 세계로 진입했다."(36-7)


2 / 참화


"30년전쟁 기간에 독일은 유럽판 대재앙의 무대가 되었다.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2세 황제와 신성로마제국 내 프로테스탄트 세력 간의 대치 상황은 덴마크와 스웨덴, 에스파냐, 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까지 휘말리며 확대되었다." "육지로 둘러싸여 무방비 상태에 있던 브란덴부르크로서는 이 전쟁이 선제후 국가의 온갖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재앙이었다. 갈등의 결정적인 고비에서 브란덴부르크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나라의 운명은 전적으로 다른 나라의 손에 달린 꼴이 되었다. 선제후는 국경을 지킬 능력도 없었고, 백성을 지휘하고 지켜줄 수도 없었으며, 자신의 직위조차 유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마르크 지역으로 군대가 밀려오는 동안 법은 무용지물이었다. 지역 경제는 마비되었고, 일과 가정 생활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다. 1세기 반이 지난 뒤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선제후의 땅이 〈30년전쟁 동안 너무 황폐해져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참혹한 흔적이 역력하다〉라고 썼다."(55-6)


"모든 것을 말살한 30년전쟁의 광기는 현실과 무관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집단 기억에 토대를 둔 세계관에 영향을 주었다는 의미에서 신화가 되었다. 토머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국가를 사회의 구원책으로서 합법적으로 독점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로 찬양한 것은 종교적인 내전의 광기 때문이었다. 그는 질서와 정의가 사회적 갈등에 매몰되는 것을 보느니,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군주 국가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것이 확실히 더 낫다고 역설했다. 작센의 법학자로서 홉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독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무엘 푸펜도르프는 마찬가지로 국가의 필요성에 대한 근거를 폭력과 무질서로 둘러싸인 암흑 세계에서 찾았다." "권력의 집중을 통해 무질서를 제압해야 하는 필연성에서 국가의 정통성이 나온다는 주장은 근대 초기의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지만, 브란덴부르크에서 유난히 큰 공감을 얻었다."(77)


3 / 독일의 특별한 빛


"참담하고 절망적이었던 1640년에 비춰볼 때, 17세기 후반 브란덴부르크의 부활은 놀라울 따름이다. 1680년대에 접어들었을 때 브란덴부르크는 병력 2만에서 3만을 오가는 규모의 군대를 보유했다. 소규모의 발트 함대도 생겼고 아프리카 서해안에 자그마한 식민지도 확보했다. 동부 포메른으로 건너가는 지협은 선제후의 영지를 발트해안과 연결시켜주었다. 브란덴부르크는 바이에른이나 작센과 동등한 힘을 갖춘 지역 세력이었으며 주요 평화협상에서 인기 있는 동맹국이자 주요 당사국이었다. 이런 변화를 앞서서 추진한 인물은 '대선제후'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빌헬름(재위 1640~88년)이었다." "그의 세대에 와서 호엔촐레른 가문은 1613년에 요한 지기스문트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방향 설정을 비로소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646년에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오라녜 공작의 19세 된 딸 루이서 헨리에터와 혼인함으로써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결속을 강화했다."(81-3)


"선제후는 자신의 몸값을 올리고 자국 군대의 군사 보조금을 타내기 위해 끊임없이 동맹 파트너를 바꾸었다. 이는 의도적으로 갈피를 안잡는 정책이었는데, 여기에는 황제에 대한 선제후의 충성심이 흐릿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미래의 국가 복지를 위해 신성로마제국을 없어서는 안 될 상대로 보았다. 물론 제국의 이해관계가 합스부르크가 황제의 관심사와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선제후는 때로 황제의 이해관계에 맞서 제국의 제도를 수호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보았다. 하지만 황제는 브란덴부르크의 창공에 뜬 항성이었다. 그러므로 선제후가 자신의 후계자에게 〈네가 황제와 제국에 대해 품어야 할 존경심을 늘 명심하라〉고 경고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황제에 대한 반역적인 분노와 제국이라는 오랜 제도에 대한 뿌리 깊은 존경심(적어도 존경심을 쉽게 거두지 못하는 태도)의 기묘한 조합은 18세기 후반까지 지속된 프로이센 외교정책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98-100)


4 / 왕권


"1701년에 베를린은 이전에 종종 그랬듯이 국제 정세의 덕을 톡톡이 보았다. 황제는 브란덴부르크의 지지가 절실하지만 않았다면, 아마 선제후의 국왕 즉위에 협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합스부르크 왕조와 부르봉 왕조의 역사적인 싸움은, 루이 14세의 손자를 공석 중인 에스파냐 왕위에 앉히려는 프랑스의 계획에 맞서 유럽 열강이 동맹을 맺었을 때 새로운 유혈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격전이 벌어질 것을 예상한 황제는 자신이 양보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양 진영으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은 선제후는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1700년 11월 16일, '왕위 조약'을 대가로 황제 편에 서기로 결심했다. 이 합의에 따라 프리드리히 1세는 분견대 8천 명을 황제에게 보내고 그 밖에도 합스부르크가를 여러 모로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빈의 궁정은 새로운 왕위의 제정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그리고 유럽 열강 사이에서 그 자리가 널리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한다는 데 동의했다."(124)


"171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의 2대 국왕으로 즉위했을 때 프로이센군의 병력은 4만 명이었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1740년에는 8만 명으로 규모가 확대되어 있었다. 그 결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당대에 인구나 경제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많다는 인상을 주는 군대를 과시했다. 그에 소요되는 엄청난 비용에 대해서, 왕은 잘 훈련되고 독립적인 재무 구조를 갖춘 군사력만이 국제적인 분쟁에서 자신에게 자율성을(자신의 부친과 조부에게는 없었던) 보장해준다는 말로 정당화했다. 하지만 군대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생각이 있었을 수도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재위 기간 내내 외교정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실제로 군대를 배치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한 사실을 보면 이런 판단에 힘이 실린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군대의 절대복종에 몹시 마음이 끌렸다." "군대는 물론 정책상의 기관이지만, 이 군주가 품고 있던 세계관의 인간적이고 제도적인 표현이기도 했다."(152-4)


5 / 프로테스탄트


"1691년 3월 21일, 드레스덴의 작센 궁정에서 루터교 수석설교사로 있던 필리프 야코프 슈페너는 베를린 교회의 고위 성직에 취임했다. 이것은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말해 도발적인 임명이었다. 슈페너는 논란을 일으킨 종교개혁 관련 운동에서 널리 알려진 지도자였다. 그는 1675년에 『경건한 소망』(Pia Desideria)이라는 소책자를 출판하자마자 악명을 떨쳤는데, 이 책은 당시 루터파의 종교 생활에 담긴 여러 가지 결함을 비난했다. 그는 정통파 교회가 교리의 정확성을 옹호하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목회자에 대한 보통 기독교인들의 요구는 등한시한다고 주장했다. 루터교 교구의 종교적 삶은 무기력하고 생기를 잃었다는 것이다. 경건하고 이해하기 쉬운 독일어로 슈페너는 다양한 구제 방법을 제안했다. 경건한 토론 모임을 만들어 기독교 공동체의 영적 생활에 새 활력을 불어넣자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슈페너는 이것을 '경건한 자들의 모임'(collegia pietatis)이라고 불렀다."(188)


"브란덴부르크가 경건주의에 협력한 이유는 (선제후의) 칼뱅파 가문에서 겪는 종파상의 독특한 난관 때문이었다. 루터파의 격렬한 비판을 억누르기 위한 거듭된 노력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고 두 종파가 자발적으로 통합할 가능성은 여전히 요원했다. 따라서 종파 간의 다툼에 대한 슈페너의 거리낌 없는 비난은 선제후와 그의 가족에게는 달콤한 선율처럼 들렸다." "슈페너는 언제나 기존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성찬식이나 교리에서 전통을 존중했다. 그리고 절대 통합운동을 지지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프로테스탄트 신앙에서 칼뱅파와 루터파의 경계를 초월하는 종파적으로 불편부당한 기독교 정신의 윤곽을 그려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교리와 성례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진정한 사도교회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경건주의는 프로테스탄트 두개 종파에 대한 최고 감독권을 요구한 프로이센 군주제의 주장에 대한 '내적 토대'를 굳건히 해주었다."(191-2)


"경건주의자들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왕조의 통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기여한 것은 동시대의 뷔르템베르크 경건주의 운동이나 체제 전복적인 영국의 청교도주의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루터교 내부의 제5열로서 경건주의는 칼뱅파의 신앙고백 규정이나 역대 선제후가 내릴 수 있었던 어떤 검열 조치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이념적 도구였다. 하지만 경건주의자들은 단순히 통치자를 보좌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들은 폭넓은 토대를 둔 프로테스탄트의 자발적 운동에서 얻은 에너지를 새롭게 위상이 올라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왕조의 공공사업에 공급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국가의 목표가 양심적인 시민의 목표가 될 수도 있고 국가에 대한 봉사는 단순히 의무나 사리사욕에 의해서가 아니라 포괄적인 윤리적 책임감에 의해서도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홍보했다. 그러면서 통치자와 백성의 관계를 넘어서는 연대공동체가 출현했다."(205-6)


6 / 땅에 있는 권력


"18세기 마지막 30여 년간, 도시 기반의 상공업 구조에서 일어난 변화는 (전통적으로 군림하던 길드 조합원보다) 주로 상인과 기업가, 제조업자로 이루어진 신흥 엘리트를 만들어냈다." "이런 경향은 특히 중소 도시에서 두드러졌다. 여기서는 지역 행정이 전적으로 자원봉사를 하는 명사의 도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프로이센 도시의 통치는 오로지 녹봉을 받는 국가공무원의 손에 달렸다기보다 시민계급의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요소로서 만만찮은 자원을 가진 지역의 자발적인 노력에 좌우되었다는 것이다. 프로이센 영토에 있는 도시에서 '쇠퇴한' 것은 (실제로는 서유럽의 상당 부분에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장인조합의 풍습 및 예법에 의해 유지되는 전통적인 신분체제의 특권과 지역의 자율성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대체한 것은 사업의 팽창과 시 업무의 비공식적 리더십을 수용함으로써 그들의 야망을 표현한 새롭고 역동적인 엘리트 계층이었다."(225)


"프리드리히 2세가 1752년에 언급한 '프로이센의 힘'은 국내의 부가 아니라 독특한 '산업 분야의 근면'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대선제후의 집권 이후, 국내 산업 발전은 호엔촐레른 정부의 핵심 목표 중 하나였다. 이후의 선제후와 국왕들은 토착 노동력을 확대하기 위해 이민을 받아들이고 토착 기업의 기초를 다지고 육성함으로써 이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다. 일부 기존 기업은 수입 금지와 관세로 보호받았다. 불확실한 생산 품목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되거나 엄청난 이익을 포기해야 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정부 스스로 전매권을 행사하며 관리자를 임명하고 자본을 투입하고 품질 관리를 하며 영업이익을 거두어들였다. 중상주의 원칙에 따라, 원자재를 가지고 다른 데서 가공하기 위해 해당 지역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프리드리히가 국왕으로서 먼저 내린 결정 하나는, '상업과 제조업'을 감독하는 새로운 행정기관인 관리총국의 제5부를 창설하는 것이었다."(249-50)


7 / 지배권을 위한 투쟁


"1740년 12월 16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브란덴부르크 병력 2만 7천 명을 이끌고 방비가 허술한 합스부르크의 슐레지엔 국경을 넘었다. 겨울철 원정이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은 적진을 휩쓸었고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6주밖에 지나지 않은 1월 말이 되자, 수도인 브레슬라우를 비롯해 슐레지엔의 전 영토는 사실상 프리드리히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 침공 작전은 프리드리히의 생애에서 단일한 정치적 사건으로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외교 및 군사 부문의 고위 고문관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 단독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슐레지엔의 획득은 신성로마제국 내의 정치적 균형에 항구적인 변화를 불러왔고 프로이센을 강대국 간의 줄타기라는 위험한 미지의 세계로 몰아넣었다. 프리드리히는 이 침공이 국제적인 여론에 미칠 충격파를 잘 알고 있었지만, 손쉬웠던 이 겨울 원정을 시작으로 앞으로 전개될 유럽의 변화는 거의 예측하지 못했다."(263)


"배후 동기의 상대적인 무게가 어디에 있든, 슐레지엔 침공은 프리드리히를 새로 취득한 지방의 통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길고 험난한 싸움으로 몰아넣었다. 오스트리아는 1741년 봄에 반격했지만,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동력은 4월 10일 브레슬라우 남동쪽의 몰비츠에서 프로이센에 패배함으로써 무너졌다. 이것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라고 알려진, 영토 분할을 둘러싼 전면전의 서막이 오른다. 5월 말,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님펜부르크 조약을 통해 황제 선출에 후보로 나선 바이에른의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를 지원했다." "(오스트리아에 맞선) 님펜부르크 동맹이 프리드리히의 이익에 보탬이 되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가 분할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고, 오스트리아를 희생시킨 대가로 작센이나 바이에른이 세력을 키우는 것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1742년 여름, 프리드리히는 동맹국들을 포기하고 오스트리아와 단독 강화를 맺었다."(277-8)


# 2차 슐레지엔 전쟁(1744~45년) 승리 후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소유권 확정


"이제 프리드리히는 자신이 (반프로이센 동맹을 결성한) 세 개 강대국─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의 적군에 포위되었고, 1757년 봄이면 합동공격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자신을 상대로 군대를 모으지 않겠다는 것과 공격을 시작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장하라고 요구했을 때, 그녀의 대답은 불길할 정도로 불확실했다. 그러자 프리드리히는 적이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선제 공격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756년 8월 29일, 프로이센군은 작센 선제후국을 침공했다. 이때 프로이센의 선제 공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고 그만큼 충격이 컸다. 이는 왕 혼자서 내린 결단이었다." "'예방전쟁'으로 시작한 작센 침공은 적들이 군사력을 완벽하게 끌어모으기 전에 프리드리히가 전쟁을 시작하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민감한 (베를린에서 8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역을 통제할 수 있게 해주었다."(283-4)


"사실상 모든 연합군 전투가 그렇듯이, 그들에게는 동기부여와 신뢰의 문제가 있었다. 프로이센이라는 '괴물'을 쓰러트리는 것에 목표를 둔 마리아 테레지아의 집착은 좀 더 제한적인 목표를 가진 대부분의 다른 동맹국들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관심은 기본적으로 대서양상의 갈등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에 그들은 로스바흐에서 프리드리히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뒤(1757년 11월 5일) 프로이센과 싸우는 것에 급속히 흥미를 잃었다. 재협상 끝에 1759년 3월에 체결된 제3차 베르사유 조약의 틀 안에서 프랑스는 동맹군에게 약속한 군대 및 재정 지원을 중단했다." "동맹세력 안에서 가장 강력한 축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었지만 여기도 문제는 있었다. 양국 어느 쪽도 이 전쟁에서 동맹 상대가 과도한 이익을 얻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결정적인 상황에서 이런 불신은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승리를 굳히는 데 군사력을 사용하기를 망설이는 태도로 이어졌다."(286)


# 3차 슐레지엔 전쟁(7년 전쟁, 1756~63년)도 프로이센의 승리로 마감


"프리드리히가 국가의 사회적 의무, 특히 목숨과 신체를 아끼지 않고 그의 군대에 복무했던 사람들에 대한 책무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은 무엇보다 1763년의 여파에서였다. 프리드리히는 1768년에 〈전체 국민을 위해 자신의 신체와 건강, 체력 나아가 목숨까지 바친 병사는 자신이 모든 것을 걸며 지켜주려고 한 바로 그 사람들에게 혜택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베를린에는 장애인이 된 상이군인 600명을 수용할 보호시설이 세워졌고 전시구제자금을 위한 기금을 조성해 농촌 고향으로 돌아가 가난에 시달리는 귀환병사에게 보조금을 지급했다. 궁핍한 환경에 내몰린 군인들을 위해 소비세와 관세, 담배 전매사업과 관련한 저임금 노동 및 간소한 정부 고용직이 마련되었다. 아울러 아주 일반적인 의미의 사회보장이라는 측면에서, 프리드리히는 식량 부족, 높은 물가와 기근에 대응하기 위해 곡물소비세와 창고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302)


"처음으로 제국의 정치적 삶은 권력 양극단의 균형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이중 축'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1778년 바이에른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촉발된 갈등은 오스트리아가 혼자서 프리드리히에 맞서는 것을 얼마나 원치 않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다른 독일국가들의 반응이었다. 이들 중 다수는 프리드리히를 합스부르크가가 자행한 강압적인 권력 게임에 맞서 싸우는 제국 통합의 수호자로 바라보면서 프로이센 편을 들었다. 1785년 요제프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바이에른과 바꾸려는 두 번째 시도를 하자, 프리드리히는 다시 한번 황제의 계획에 맞서는 제국 수호자로 등장했다. 이해 여름, 그는 작센과 하노버, 소수의 군소 영방 대표들과 제휴하고 '영주동맹'을 맺었다. 이들의 목표는 황제의 계획에 맞서 제국을 수호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프리드리히가 배운, 상대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방식이었다."(306-7)


8 / 감히 알려고 하라!


"프로이센 계몽주의는 대화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것은 자유롭고 자율적인 주제를 놓고 벌이는 비판적이고 공손하며 제한이 없는 대화 같았다. 대화가 중요한 것은 예리하고 정제된 판단을 허용해주기 때문이다." "1741년 쾨니히스베르크에 설립된 협회를 포함해 초국가적인 프로젝트라고 할 '독일협회'의 규약은 회원들이 결실이 풍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식적인 조건을 명백히 규정했다. 낭독회와 강의에 이어 토론이 벌어지는 동안 회원들은 독단적이거나 분별이 없는 논평을 피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신 낭독의 형식과 방법, 내용을 가지고 구조적인 비평을 해야 했다. 이들은 칸트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성의 신중한 언어'를 사용해야 했다. 논제 이탈과 방해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모든 회원은 궁극적으로 발언할 권리를 보장받았지만, 차례를 기다린 다음에 가능하면 간결하게 말해야 했다. 풍자적이거나 조롱조의 소견과 도발적인 말장난은 용납되지 않았다."(347-8)


"독서회와 프리메이슨 지부, 여러 애국협회도 모임의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이런 신흥 공론장을 나태하고 수동적이며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 집단이나 반대파 혹은 반란을 모의하는 세력으로 생각하면 잘못이다. 프로이센 계몽주의를 유지한 사회적 네트워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국가와 가까웠거나 사실상 부분적으로 국가와 동일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프로이센 계몽주의를 키워낸 지적 전통의 문제였다. 프리드리히 3세 재위 기간에 프로이센 대학교에서 확립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치하에서 계속 뿌리를 내린 중상주의나 국가에서 행정적으로 지원하는 '과학'과의 연결고리는 대단히 천천히 단절되었다. 게다가 프로이센 인텔리겐치아의 사회적 지위도 이런 전통에 한몫했다. 당대의 프랑스 문단에서는 독립적인 활동을 하던 사람 혹은 프리랜서 작가가 중요한 역할을 한 데 비해, 프로이센 계몽주의를 지배하던 집단은 공무원 집단이었다."(351-2)


"진보적인 학자나 작가, 사상가들로서는 국가를 계몽주의 프로젝트의 파트너로 보기가 쉬웠다. 통치자 자신이 계몽주의 가치관의 유명한 옹호자였기 때문이다. '계몽주의 시대'와 '프리드리히 시대'가 동의어라는 임마누엘 칸트의 발언을 환심을 사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18세기 유럽의 전체 군주 가운데 프리드리히는 계몽주의의 가치와 사고방식을 가장 열심히 구현했다." "1784년의 기념비적인 글에서 임마누엘 칸트는 권력과 계몽주의가 똑같은 한 명의 군주 손에 들어갈 때, 정치적 자유와 시민의 자유의 관계는 완전히 변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계몽 군주가 있는 곳에서는 군주의 권력이 시민사회에 위협이 되기보다 자산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칸트는 그 결과가 역설적이라고 말했다. 진정으로 계몽된 통치자 밑에서는 정치적 자유의 적당한 제약이 오히려 '대중이 온갖 능력을 활짝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354-7)


"1794년에 반포된 프로이센 국가의 보통법만큼 18세기말 프로이센의 과도기적 상태를 잘 기록한 것은 없을 것이다." "보통법에서 정말 흥미로운 것은, 그 안에 서로 다른 관점이 들어 있다는 점이 아니라 서로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법전은 이미 지나간 세계, 각각의 질서가 국가와의 관계에서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중세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창안한 세계, 성문화 작업이 끝날 무렵 이미 해체되고 있던 세계로 후퇴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모든 시민이 '자유롭고' 국가에 주권이 있으며, 왕과 정부가 법으로 규정된 세계를 예견하고 있기도 하다." "마담 드 스탈은 프로이센이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한쪽은 군사적이고 다른 한쪽은 철학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전통과 혁신이라는 양극단이야말로 호엔촐레른 국가의 역사적 궤적을 정의한다."(388-91)


9 / 오만과 인과응보: 1789~1806년


"1791년 8월 27일 오스트리아 황제와 프로이센 국왕이 공동 발표한 필니츠 선언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원칙적인 반대를 천명한 것이었다. 선언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통치자는 그들의 '형제'인 프랑스 국왕의 운명을 〈모든 유럽 군주의 공동관심사〉로 간주한다는 언급으로 시작했다. 그런 다음 프랑스 왕이 가능한 한 빨리 〈완벽하게 자유로운 상태에서 왕정의 토대를 확인할 수 있는 위치로〉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제안한 공동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무력 수단〉으로 〈신속하게 제안할 것〉이라는 약속으로 끝을 맺었다. 표현은 비록 흐리멍덩했지만, 이것은 각 왕조의 반혁명 연대에서 나온 명확한 선언이었다." "동맹국이 실제로 프랑스를 침공할 것인지, 한다면 정확하게 어느 시점에 할 것인지는 불분명했지만, 1792년 4월 20일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선전포고를 하자 군사적 충돌은 불가피해졌다."(398-9)


"프로이센군은 공식적인 동맹군으로 남아 있었지만 정신이 다른 데 가 있었기 때문에 원정 자원을 일부밖에 투입하지 못했다. 베를린 정부의 마음을 어지럽힌 것은 폴란드의 상황이었다." "1788~91년에 러시아가 큰 희생을 치른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때문에 꼼짝 못하고 있는 사이,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왕과 폴란드 개혁파는 정치 체제의 변화를 추진할 기회를 잡았다. 1791년 5월 3일에 반포된 폴란드 신헌법은 최초로 세습 왕조와 중앙 정부의 틀을 다듬었다." "하지만 1794년 10월 10일 바르샤바 남동부에 있는 마체요비체에서 러시아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리하여 3차이자 최종적인 폴란드 분할의 길이 열렸다. 1795년, 폴란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동부에서 기대 이상으로 목표를 달성한 프로이센은 (다시 한번 동맹국을 저버리고) 지체 없이 서부의 반프랑스 동맹에서 발을 빼내어 1795년 4월 5일, 바젤에서 프랑스와 단독으로 강화조약에 서명했다."(401-5)


"하지만 프로이센이 이룩한 것은 보기보다 깨지기 쉬운 것이었다. 지난 6년 동안 프로이센은 사실상 모든 유럽 국가와 스스로 동맹을 맺었다가 파기했다. 잘 알려진 왕의 비밀외교 취향과 혼란스러운 이중거래는 그를 외톨이로 만들었고 외교적인 문제에서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곧 프로이센은 강대국의 지원이 없으면 독일의 휴전선을 방어할 수 없고, 따라서 중립 지대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경험해야 했다. 그와 달리 더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폴란드가 유럽 지도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폴란드를 상대로 강대국이 자행한 영토 분할의 도덕적 무도함을 차치하고라도, 폴란드가 독립해 있으면 동부의 3대 강국 사이에서 완충지대로서 또 중재자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더 이상 폴란드가 존재하지 않는 이제, 프로이센은 사상 처음으로 러시아와 방어가 불가능한 긴 국경을 공유하게 되었다."(406-7)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처음에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나폴레옹과 협상을 하려고 했지만 그의 시도는 퇴짜를 맞았다. 베를린은 10월 24일에 점령되었고, 그로부터 3일 후에 나폴레옹이 수도에 입성했다." "1806년 10월 하순부터 1807년 1월까지 프랑스군은 주요 요새를 강제로 점령하거나 항복을 받아내면서 프로이센 영토를 계속 유린해나갔다." "1807년 6월 25일 황제 나폴레옹과 차르 알렉산드르는 강화를 위해 만났다." "차르의 압박에 못 이긴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이 국가로서 존속하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틸지트 조약(1807년 7월 9일)에 따라 프로이센은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남은 것은 브란덴부르크와 포메른(스웨덴령은 제외), 슐레지엔, 동프로이센 그리고 여기에 폴란드 1차 분할 때 프리드리히 대왕이 획득한 회랑 지대가 전부였다. 2차와 3차 분할 때 획득한 폴란드 지방은 동부에 프랑스-폴란드 위성국가를 위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떨어져나갔다."(423-7)


10 / 관료들이 만든 세계


"1806~7년에 패전과 굴욕의 여파 속에서, 대신과 고위 관료로 구성된 새 정부 지도부는 프로이센 정치 행정부의 구조를 개편하고, 경제 규제를 철폐하며, 농촌 사회의 기본 규칙을 새로 짜고, 국가와 민간 사회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일련의 정부 칙령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개혁의 문을 열어젖히도록 만든 것은 바로 패전의 규모였다. 전통적인 사회 구조 및 행정 절차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자 오랫동안 내부로부터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에게 기회가 찾아왔고 반대파들은 침묵하게 되었다. 전쟁은 종래의 수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재정 부담을 안겨주었다." "여기서 나온 위기감은 강력하고 일관된 행동 계획과 그런 실태를 설득력 있게 전파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이처럼 모든 면에서, 나폴레옹의 승리라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은 프로이센 국가 내에서 이미 움직이고 있던 힘을 한데 모으고 그것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432-3)


"구제도 아래서 개인 보좌관의 영향력은 왕이 어느 쪽으로 귀를 기울이는가에 따라 들쑥날쑥했다. 어느 날 조심스럽게 주장을 펼치고 설득을 해서 결정된 안건도 바로 그 다음 날 물거품이 될 수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새로운 제도하에서는 다른 대신들과 '함께' 공동 작업을 벌이면서 왕을 '관리'하는 것이 가능했다." "개혁 진영에서는 항상 왕에게 더 과감한 결정기구에 대한 통제권을 제공함으로써 군주의 권위를 확대하고 강화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라는 점을 강조했다(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척이나 불손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실제로는 자문이라는 빗장을 걸어 잠금으로써 왕의 운신의 폭을 제한했다. 이들은 좀 더 광범위한 국가의 책임과 의무 구조에 군주제를 묶어놓고 관료화할 작정이었다. 왕은 이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슈타인이 앞으로 왕이 반포하는 법령은 다섯 명의 대신이 서명할 때만 효력이 발생되도록 하자고 건의했을 때 묵살했다."(444-5)


"군 개혁을 주도한 샤른호르스트는 나폴레옹의 사단 체제를 프로이센에 도입하고 예비군으로 지역민병대를 설치할 것을 주문했다. 크네제베크(프로이센 토박이)를 비롯한 다른 장교들도 순수하게 '민족적인' 프로이센군의 창설을 내다보는 야심찬 계획을 수립했다." "이들은 카스트 제도 같은 장교단의 배타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군대는 절도 있는 애국심의 보고가 되어야 하고, 1806년에 명백히 결여되었던 활기와 책임감을 불어넣는 존재여야 했다. 샤른호르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군인정신의 함양과 고취를 통해 군대와 국민을 좀 더 유대가 굳건한 연합체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군과 프로이센 '국민' 간에 이같이 새로운 관계를 다각도로 달성하는 효과를 올리기 위해, 개혁파는 보편적인 병역 의무를 주장했다. 직접 군에 입대하지 않는 사람은 향토 방어를 위해 복무하도록 하고, 프로이센 사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해온 (특히 도시에서) 병역 면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46-9)


"프로이센 발전의 특이성을 파악하는 한 가지 방법은 나폴레옹 시대에 독일 지역 각국에서 진행된 광범위한 개혁 활동의 맥락에서 조명해보는 것이다. 바덴,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3국 역시 이 무렵에 집중적인 행정개혁을 겪었는데, 거기서 빚어진 결과는 헌법개혁이라는 본질적으로 훨씬 더 파급력이 큰 것이었다. 3개국 모두 헌법과 전국 선거, 의회를 받아들였다. 법안을 통과시키려면 의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이런 배경으로 볼 때, 1823년 이후 프로이센에 새로 설치된 주의회(Land-tag)는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한편, 프로이센 사람들은 경제 근대화에서 일관되게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뮌헨과 슈투트가르트의 개혁파가 구체제의 중상주의가 걸어왔던 보호주의 노선을 옹호한 데 비해, 프로이센 사람들은 무역과 제조업, 노동시장의 규제 철폐에 목표를 두었다." "이렇게 프로이센은 남부 독일 3개국보다 덜 '근대적인' 헌법 체계를 가진 채 나폴레옹 시대를 벗어났다. 대신 국민경제는 더 '근대적'이었다."(466)


11 / 강철 시대


"1809년 봄이 되자, 승리의 여신은 마침내 나폴레옹을 외면한 것처럼 보였다." "이 상황은 군주 주변의 인물들을 분열시켰다. 일부는 러시아의 지원 없이 프랑스에 선제 공격을 하는 것은 프로이센으로서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군 개혁파와 외무대신 아우구스트 프리디르히 페르디난트 폰 데어 골츠, 법무대신 카를 프리드리히 바이메를 비롯한 나머지는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촉구했다. 그런데도 왕은 완강하게 방임정책을 고수했다. 자칫 국가의 완벽한 멸망을 부를지도 모를 어떤 움직임도 자제하는 것이 그의 정책이었다. 하지만 당대의 많은 사람들의 눈에 국왕이 신중하게 기다리는 태도는 비열하고 비난받아 마땅해 보였다." "1809년의 위기 기간에 군주는 강제 퇴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일시적인 몽상일 수도 있지만, 혁명기의 격동적 상황에서 나온 덧없는 감정이 전통적인 군주의 자화상을 얼마든지 뒤바꿔놓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474-9)


"1813년 3월 17일,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결별한다고 공식 선언했고, 3월 25일에는 러시아와 칼리시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을 통해 러시아의 차르와 프로이센 국왕은 통일 독일에 대한 구상을 추진하기로 약속함으로써 국민적 열기를 견인할 길을 모색했다." "6월 4일 이후, 연합군의 정책에서 가장 시급한 목표는 오스트리아를 설득해 연합군에 합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외무대신인 클레멘스 벤첼 폰 메테르니히는 1813년 초 이래로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미 러시아를 발칸반도 최대의 위협으로 보고 있었고 독일에 대한 나폴레옹의 지배권이 러시아의 손에 넘어가는 것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화 중재를 위한 메테르니히의 노력이 나폴레옹의 비타협적인 태도로 실패하자, 오스트리아는 마침내 연합군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힘의 균형은 프랑스에 불리한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496-9)


"프로이센군은 1813년의 원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제로 그들은 연합군의 지휘 체계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구성원이었다. 뷜로는 명목상 신중한 성격의 북군 소속 군단장 베르나도트의 부하였지만, 원정 기간에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차지하기 위해 몇 차례의 중요한 고비에 상관의 명령을 무시했다." "이와 똑같은 흐름은 이듬해의 원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 1814년 2월에 연합군이 프랑스 국경으로 접근하자, 슈바르첸베르크와 메테르니히는 지금이야말로 전력이 약화된 나폴레옹에게 강화를 제안할 때라고 주장했다. 나폴레옹은 무사히 황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도 늦추지 말고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압박한 사람은 블뤼허였다." "프로이센의 전쟁기획자들은 나폴레옹군을 궤멸시켜 그가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자는 야심찬 목표를 겨냥했다. 이런 전쟁관은 훗날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진다."(506-7)


"조국에 대한 공훈을 기리기 위해 도입된 새로운 훈장만큼 프로이센 전시 동원 체제의 대중적인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없을 것이다. 왕실 주도로 설계되고 도입된 철십자훈장(Der Eiserne Kreuz)은 모든 계급을 대상으로 수여되는 프로이센 최고의 훈장이었다. 〈병사도 장군과 동등한 조건이다. 장군과 병사가 똑같은 훈장을 단 것을 본 사람은 누구나 장군이 훌륭한 지휘를 통해 그것을 받은 데 비해 병사는 한정된 자신의 영역 내에서도 그것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여기서 처음으로 용기와 솔선수범은 계급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미덕이라는 인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프로이센은 이때 '강철 시대'(eiserne Zeit)였다. 이리하여 철십자훈장은 이 전쟁을 기념하는 상징으로 변했다.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한 뒤, 왕은 모든 프로이센의 깃발과 기장에 철십자훈장을 넣고 전쟁 내내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철십자훈장은 처음부터 프로이센의 '기억의 공간'으로 설계되었던 것이다."(511-2)


12 / 역사를 통한 신의 행진


"프로이센은 독일 국가들의 미래의 조직에 관한 복잡한 협상에서 그들의 뜻을 관철하지 못했다. (하르데베르크와 훔볼트가 대표로 활동한) 프로이센이 원한 것은 강력한 중앙집행기관을 갖춘 독일이었다. 이것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군소국들에 대한 권한을 공유하는 체제로서, 간단히 말해 '강력한 주도권을 행사하는 이원 체제 방식'이었다. 이와 반대로 오스트리아는 중앙기관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느슨한 독립국가 연합을 선호했다. 1815년 6월 8일에 합의를 본 독일 연방약관(Deutsche Bundesakte)은 프로이센의 구상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승리를 의미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프로이센 국가의 미래라는 측면에서, 나폴레옹 이후에 찾아온 안정 상태의 중요성을 떨어뜨린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 호엔촐레른 왕국은 독일 북부 전역에 걸친 거대한 땅덩어리가 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한 19세기 프로이센의 (그리고 독일의) 정치적·경제적 발전은 무시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531-2)


"1815년의 협상 결과 사상 최초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보다 더 많은 '독일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독일 연방은 베를린이 북부 독일을 공식적으로 지배할 수 있도록 해주줄 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프로이센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전체적인 시스템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선에서 비공식적이고 제한된 주도권을 행사할 정도로는 융통성이 있는 집행기구를 두었다. 독일 연방이 영토를 초월한 자체의 제도를 확립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프로이센이 주도권을 행사할 문은 열려 있었다. 1815년 이후 프로이센 행정부가 주목한 것은 특히 관세 일원화와 연방 안보정책 두 개 분야였다. 이 두 가지는 프로이센이 발전시킨 분야로서, 1848년 혁명 이전에 수십 년간 '독일 정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1834년 1월 1일에 발효된 독일 관세동맹(Zollverein)으로 현실화된 관세의 일원화는 독일 영토에서 영향력과 특권을 놓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벌어진 오랜 경쟁을 위한 새로운 터전이 되었다."(532-5)


"프로이센의 협상대표단은 1818~19년에 좀 더 응집력이 있고 '민족적'인 색깔을 띤 (베를린의 지휘를 받는) 연방 군대를 창설하기 위해 애썼지만,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는 군소국 대표는 독일 군소국의 군사적 자율성을 양보하는 그 어떤 방안도 지지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이 국가들은 독일에 연방 군사기구를 두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이것은 강력한 연방기구가 궁극적으로는 프로이센에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한 오스트리아의 마음에 드는 결과였다. 연방 군사정책을 시험해볼 최초의 기회는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과 더불어 찾아왔다. 혁명사상의 침투와 나폴레옹 침략은 여전히 기억에 생생했고, 당대 사람들, 특히 남부 사람들은 1830년 여름의 격동적인 상황이 (1790년대처럼) 서부 독일에 대한 침략으로 이어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프로이센의 정책입안자들은 때를 놓지지 않고 프랑스가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프로이센에 이롭게 이용하는 데 (단기적으로는) 성공했다."(537)


"보수파는 오래전부터 어떤 형태의 '국민' 대표성에도 반대해왔다. 그들이 볼 때, 실현 가능한 대표성의 형태는 사회 내부에 역사적인 뿌리가 있는 기존 신분제의 이익과 특권에 맞춰야 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프로이센 국민을 차별성이 없는 전체로 묘사하는 헌법은 반란과 무질서를 조장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메테르니히는 1818년 11월, 비트겐슈타인 왕자에게 프로이센 왕은 〈지방 신분제의회를 설치하는 것보다 더 나가면 절대 안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1823년 6월 5일의 일반법을 통해 정부는 국민에게 의도를 드러냈다. 프로이센은 성문 헌법도 국민 의회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 왕의 백성들은 지방의회로 만족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보수 경향은 개혁 이전 상태로 복귀할 수도 없었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개혁을 멈추게 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보수파는 점점 개혁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사고(가령 '국민'이라는 관념)를 채택하고 마음속에 받아들였다."(549-53)


"1831년에 프로이센 왕국의 인구는 1,315만 1,883명이었다. 이 중에서 약 543만 명(약 41퍼센트)이 작센과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지방에 살았는데, 이들 지역은 1815년 이후에야 프로이센 땅이 된 곳이었다. 여기에 1793년 폴란드 제2차 분할에 따라 프로이센에 병합된 포젠 대공국의 주민들까지 더하면 그 비율은 50퍼센트 가까이 올라간다." "따라서 (전국적인 의회와 헌법이 부재하던) 프로이센 왕국은 행정적인 의미에서 여기저기 흩어진 형태로 남아 있었으며, 언어와 문화의 측면에서도 조각보 같은 구조였다." "국가는 모든 프로이센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한 유일한 기관이었다. 하필 이 시기에 국가의 개념을 둘러싼 담론이 전례 없이 활발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815년 이후 프로이센 국가의 위엄을 널리 알리는 데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은 없다." "헤겔에 이르러 국가는 시민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 주체에게 보편성을 되찾게 해주는 신성해 보이는 기구가 되었다."(577-82)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의 아들로서 새 '프로이센인'이 된 마르크스는 1836년에 법학과 정치경제학의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베를린에 왔다. 마르크스에게 헤겔 사상과의 진정한 첫 만남은 종교적 개종과 비슷할 정도로 강렬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는 1837년 11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며칠간은 전혀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했습니다. 지저분한 슈프레 강변의 밭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고 [···] 집주인의 사냥에도 따라나섰지요. 베를린 길모퉁이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부둥켜안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답니다.〉 훗날 마르크스는 관료 계층을 '보편적인 신분'으로 본 헤겔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와 상관없이 헤겔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프롤레타리아를 '일반 이익의 순수한 화신'으로 이상화한 마르크스의 생각이 헤겔 철학의 개념을 유물론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마르크스주의도 프로이센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587)


13 / 정치적 혼란의 확산


"1840년 신분제의회의 충성 맹세에 따라 신문지상에서 논쟁이 벌어지자, 쾨니히스베르크 주지사인 테오도르 폰 쉔은 『어디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을 저술하여, 〈삼부회가 있을 때만 우리 나라에 공적 생활이 시작되고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쉔의 저서에 대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반응은 날카롭고 솔직했다. 왕은 자신과 백성 사이에 끼게 될 '종잇조각'(헌법)을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프로이센을 계속 '가부장적' 방식으로 다스리는 것이 자신의 신성한 의무라고 선언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즉위에 뒤따른 정치적 좌절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정치 환경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정치적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고 격화되었다. 의사이자 유대인 급진파였던 요한 야코비는 1841년 그의 팜플릿 「네 가지 물음에 대한 동프로이센인의 답변」에서 양보나 호의로서가 아니라 '빼앗길 수 없는 권리'로서 국민의 '합법적인 국정 참여'를 요구했다."(598-600)


"1840년대 프로이센 땅에서 많은 소요와 기아로 인한 폭동이 일어났지만, 슐레지엔 직조공의 반란처럼 여론의 지지를 받은 것은 없었다." "여기에는 공장의 노동 조건, 인구밀집 지역의 주택 문제, 신분조직의 해체(예를 들면, 길드와 신분에 따른 지위 등), 경쟁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경제로 변화, 새로 부상하는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종교 및 도덕의 타락 등 복합적인 문제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대하고 핵심적인 문제는 하층계급이 점차 가난해지는 '궁핍화' 현상이었다. 당시의 '빈궁'(Pauperism) 상황은 여러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전통적인 빈곤의 형태와 달랐다. 그것은 질병과 부상 혹은 흉작에 따른 개별적인 우연의 산물이라기보다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현상이었고 게절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었다. 이때의 빈곤은 장인계급(특히 도제와 조수)과 영세자작농처럼 그 이전 시기에 상대적으로 지위가 안정적이었던 사회 집단을 삼키는 특징을 드러냈다."(611-2)


"생존을 위한 폭동은 자발적이고 비정치적인 동기에서 일어날 때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고도로 정치적이었다. 그것은 참여자의 주변 영역 너머로 확장된 정치화 과정을 촉진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와 보호무역주의자는 물가 상승과 정부의 복지부동에 따른 대량 빈곤, 자유주의 관료들이 도입한 규제 해제식의 개혁을 비난했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공장 시스템'을 비난하기도 했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산업화와 기계화는 사회를 위기에 빠뜨린 원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책이라고 주장하며, 투자를 방해하고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 정부 규제의 철폐를 요구했다. 1844~47년의 사회적 위기에 놀란 보수파는 이후 19세기 독일식 복지국가를 내다보는 처방으로 실험을 했다. 생존 폭동은 특히 급진파에게 그들의 수사와 이론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더 날카롭게 벼릴 기회를 제공했다." "자원을 둘러싼 극심한 사회적 갈등은 프로이센의 정치적 분화의 속도를 촉진하는 부정적 에너지를 방출했다."(617-8)


14 / 프로이센 혁명의 찬란함과 비참함


"1848년 2월 말, 베를린 시민은 혁명 소식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1847년 겨울에는 스위스의 진보적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보수적인 가톨릭 주와 내전을 벌이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자유주의적 헌법을 실현한 새로운 스위스 연방주가 탄생했다. 그 다음 이탈리아반도의 불안한 정세에 대한 보고가 있고 나서, 1848년 1월 12일에는 팔레르모에서 반란군이 권력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로부터 2주가 지난 뒤, 나폴리 왕이 이탈리아 군주로서는 처음으로 국민에게 헌법을 양보하자 팔레르모 혁명의 성공이 확인되었다. 베를린을 흥분시킨 것은 무엇보다 프랑스에서 날아온 뉴스였다. 2월에 자유주의 반체제 운동은 군대와 시위대의 유혈 충돌로 절정에 오르면서 파리에서 세를 얻었다." "파리로부터 프로이센의 수도로 뉴스가 들어오자, 베를린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정보를 수소문하면서 토론을 벌이기에 바빴다. 독서클럽과 커피하우스, 온갖 종류의 공공시설은 사람들이 터질 듯이 들어찼다."(633-4)


"거리를 휩쓰는 군중의 '투지와 불손'이 격화되는 것에 놀란 베를린 경찰국장 율리우스 폰 미누톨리는 3월 13일 시내에 새로운 군부대의 투입을 요청했다. 군중과 진압부대는 시가지를 장악하기 위해 싸우는 집단적인 적대세력이 되었다." "3월 18일, 베를린 전역에서 손에 잡히는 것들로 즉석에서 만든 바리케이드가 생겨났다. 이 임시변통 장벽에서 대부분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시가지 곳곳에서 비슷한 형태로 치러졌다." "긴장이 고조되던 이튿날 정오 직후에 내려진 왕의 군대 철수 결정은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아주었다. 이것은 3월 18~19일 밤에 있었던 잔인한 전투─300명이 넘는 반군과 100여 명의 장병이 희생된─를 감안하면 중요한 결정이었다." "이로 인해 국왕은 수도의 격렬한 대치 상태로 인해 명성을 더럽히지 않은 공적 인물로 떠올랐다. 이것은 독일 지역의 문제에서 프로이센이 주도권을 행사할 기회가 혁명에 의해 주어졌다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636-43)


"허약한 베를린의 정치적 타협을 가장 뒤흔든 것은 민간과 군당국 사이의 관계 설정이었다. 이는 프로이센의 다음 세대가 다시 맞닥뜨려야 하는 문제였다. 7월 31일, 슐레지엔의 도시 슈바이트니츠 지역의 군 사령관이 멋대로 내린 명령에 따른 격렬한 충돌로 민간인 1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폭력사태가 번졌고 그 와중에 브레슬라우 의원 율리우스 슈타인은 군 장병이 헌법적 가치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기준을 도입하자는 발의를 했다." "국왕과 의회 간의 힘겨루기가 이어지던 11월 3일에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시민군이 해산(무장해제)되었다. 정치 클럽이 폐쇄되고 급진적인 신문 중에 유명한 것은 폐간되었다." "11월 9일, 브란덴부르크 신임 수상은 국민의회 임시의사당으로 가서, 의회는 브란덴부르크 시에서 모이는 11월 27일까지 휴회할 것이라는 발표를 했다. 많은 의원은 11월 27일에 브란덴부르크 시에서 모이려고 했지만, 이내 흩어지면서 국민의회는 12월 5일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648-50)


"군대의 충성이란 그렇게 간단한 현상은 아니었다. 결국 그것은 프로이센 시민의 군대였다. 대다수의 병사가 혁명을 지지한 바로 그 사회 계층에서 뽑혀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 많은 군인이 탈영하거나 복무를 거부하지 않았는지, 또 왜 군대 내에 혁명조직을 결성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묻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일부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군 지휘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부대원 대다수는 계속 왕과 그들의 사령관에게 충성했다." "이들이 왕에게 순종하는 동기는 지역의 조건과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양했지만, 결정적인 요인이 하나 있었다. 각 지역의 반란에 대한 진압 임무를 맡은 병사들 사이에는, 그들이 혁명을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보호'하는 것이며, 다만 급진파의 무정부적 혼란에 맞서 헌법을 수호하고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혁명 세력 내의 주도권이 빠르게 급진 좌파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에 의해 일정한 신뢰를 얻었다."(654-5)


"J. P. 테일러의 말을 빌리자면, 1848년 프로이센의 봉기는 프로이센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기회를 놓치게 만든 '갈림길'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구세계와 신세계 사이에 놓인 분수령이었다. 1848년에 시작된 10년의 세월은 정치적·행정적 현실의 엄청난 변화, 즉 '정부혁명'의 과정이었다." "이제 프로이센은 (자체의 역사에서 최초로) 선출된 의회를 가진 입헌국이었다. 이런 사실 자체가 프로이센 왕국의 정치 발전을 위해 전적으로 새로운 출발점을 만들어냈다. 1848년의 프로이센 헌법은 선출된 의회가 입안했다기보다 국왕에 의해 선포된 것이었지만 이 헌법은 대다수 자유주의자와 온건 보수파로부터 좋은 평을 들었다." "그것이 자유주의자들이 요구해온 것을 대부분 반영했으며 그런 점에서 '인민의 작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의회의 비준을 거치지 않고 공표함으로써 자유주의 원칙을 어겼다는 사실은 거의 무시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헌법은 '프로이센의 공적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676)


"대부분의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프로이센에서도 혁명 기간에 발생한 정치적인 인쇄물과 정치적인 독자층이 확대된 현상은 되돌릴 수 없는 물결이었다. 정부는 여론을 형성하는 사업에 좀 더 유연하고 협조 체계가 잘 이루어진 접근방식으로 대처했다." "만토이펠 수상은 정부가 각 부처 내의 독점적인 정보원을 활용해 국가의 활동과 외국의 사건과 관련한 뉴스를 알려야 한다고 보았다." "정부 활동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사전에 정립해야 한다는 만토이펠의 혁신은 부담스러운 검열기구로 언론의 글감을 걸러내는 시스템에서 뉴스와 정보의 미묘한 차이를 만드는 방법으로 변화를 이끌어나갔다. 이 모든 것은 1848년에 의해 만들어진 변화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증거였다." "만토이펠의 현금을 우호적인 기자와 편집자에게 지급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 중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1851년의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에서 프로이센 의원이 된 인물이었다."(683-4)


15 / 네 개의 전쟁


"1859년에 발발한 이탈리아 (통일)전쟁이 프로이센의 국가정책을 새로운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당대 사람들이 볼 때 이탈리아와 독일이 곤경에 처한 상황이 유사하다는 것은 명백했다. 양쪽 모두 (교육받은 엘리트 계층 내에서) 역사적·문화적 민족성에 대한 강렬한 정서가 왕조 및 정치적 분열이라는 현실과 공존했다. 또 양국 모두 오스트리아가 민족 통합에 방해가 된다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뚜렷한 유사점은 피에몬테와 프로이센 사이에도 있었다. 양국 모두 자신만만한 관료체제와 근대화의 개혁으로 주목받았으며 (1848년 이후로) 입헌군주국이었다. 그리고 대중의 민족주의를 억압하는 동시에 자국의 이익 범위 안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군소국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작전을 펼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따라서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에 열광하는 소독일 옹호자들은 1859~61년에 일어난 이탈리아 사태를 자연스럽게 독일의 정치 지형에 투사하게 되었다."(689-90)


"비스마르크는 1862년 가을에 베를린에서 수상에 임명되었다. 그의 목표는 국왕의 권력과 군대의 능률을 보호하면서 '의원들 대다수의 이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2년 복무라는 자유주의자의 요구를 들어주는 한편 군대의 병력을 증강하고 핵심 영역에서 정부의 통제력을 확보하는 수정된 군사개혁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런 작전은 지지를 유보하도록 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에트빈 폰 만토이펠의 저항 때문에 실패했다. 그것은 권력 측근의 해묵은 문제였다. 비스마르크는 지위를 유지하는 열쇠는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 모든 정적을 무력하게 만다는 것임을 즉각 깨닫고 그에 걸맞게 자신의 정책을 바꾸었다. 타협을 포기한 비스마르크는 오로지 군주와 그의 이익에 전념하겠다는 것을 확실하게 왕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개적인 대립정책으로 전환했다. 그는 곧 왕에 대한 영향력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702-3)


"덴마크 전쟁은 덴마크가 어쩔 수 없이 강화를 청한 1864년 8월 1일에 끝났다. 이 분쟁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세 가지다. 첫째,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보다 군사력이 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세기 동안 전투 경험이 없는 군대로서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분쟁의 두번째 두드러진 특징은 정치적 리더십이 군의 리더십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점이다. 덴마크 전쟁은 프로이센으로서는 민간 정치인이 통제권을 행사한 최초의 군사적 분쟁이었다. 전쟁 내내 비스마르크는 갈등의 전제가 자신의 외교 목표에 확실히 기여하도록 유도했다." "마지막으로 전쟁 기간 내내 우위를 차지한 비스마르크의 위상은 긴장과 동시에 반감을 두드러지게 유발했다." "프로이센 최고 지도층은 1848년의 혁명 이후 자리잡은 민군 관계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회피하고 외면해왔다. 이것은 1918년에 호엔촐레른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프로이센(그리고 독일)의 정치에 붙어 다녔다."(707-12)


# 전쟁 결과 :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양 공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가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국에게 이양되면서, 프로이센의 대오스트리아 전쟁의 단초로 작용한다.


"1866년 프로이센 승리의 주역은 참모총장인 헬무트 폰 몰트케였다. 보헤미아에서 몰트케는 덴마크에서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혁신적인 전략을 펼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전쟁에 임하는 그의 접근법은 프로이센군을 최고 속도로 공격 지점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소규모로 쪼개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개별 부대를 마지막 순간에 한곳으로 집결하게 해서 적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의 이점은 비좁은 국도와 단선 철도에 따른 수송 부담을 줄이고 교통체증을 피하는 데 있었다. 야전군의 증가된 진격 속도와 기동력은 적군보다 프로이센군이 결정적인 전투의 시기와 무대를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또한 철도와 도로, 전신 같은 최신 기반시설 자원을 교묘하게 활용하고자 하는 동원 개념이었다." "이 접근법의 단점은 각 부대가 진로를 이탈하거나 서로 속도를 조절하는 데 실패하면, 적군이 월등한 병력으로 이들을 각개 격파할 수도 있는 위험이 따른다는 것이다."(721-2)


"새롭게 탄생한 프로이센 보병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장교의 명령에 따라 적군이 있는 방향으로 모여드는 가축 떼가 아니라 전투의 전문가였다." "그 결과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 사이에는 야전 운영의 차이가 점점 커졌다. 오스트리아군이 '총검 돌격 전술'을 가다듬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특히 1859년의 재난 이후) 프로이센군은 바늘총에 중점을 둔 '화력 전술'에 초점을 맞추었다. 몰트케는 전투 현장에 질서정연한 보병부대를 방어적인 전술로 배치하는 동시에 대단위 부대는 공격적인 전술로 배치하여 유연성과 속도를 조합하는 능력이 있었다. 이와 달리 오스트리아군은 전략적으로는 방어에, 전술적으로는 공격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보헤미아에서 벌어진 전쟁은 속도의 이점이 사거리의 이점을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총검을 꽂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보병들은 유리한 위치에서 후장총으로 무장한 보병이 쏘아대는 연속 사격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724-5)


# 전쟁 결과 :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을 해체하고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북독일 연방을 창설하는 것에 동의했다. 남독일 국가들은 프로이센과의 동맹협정에 서명해야 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야기하는 안보 위협이 통일을 촉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3세 황제는 1866년에 프로이센이 거둔 어마어마한 성공에 충격을 받고 그것이 프랑스의 이익을 위협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프랑스가 전통적인 의미에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사실에 분노했다. 1867년 봄, 비스마르크는 룩셈부르크 위기라고 알려진 외교 전략에서 이런 긴장을 활용했다. 룩셈부르크를 통합해서 기대를 충족하라고 은밀하게 나폴레옹 3세를 부추기면서 먼저 독일 신문에 나폴레옹의 계획에 대한 소식을 흘렸다. 이 뉴스가 민족주의적인 분노를 유발할 것이고, 비스마르크 자신은 국민의 뜻을 집행하는 명예와 신념에 따르는 정치가로 부상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위기는 독립 공국으로서 룩셈부르크의 지위를 보장하는 국제회의를 통해 해결되었지만, 비스마르크가 예상했듯이 간단히 프랑스의 선전포고로 이어질 수 있는 결말이었다."(734-5)


"그러다가 에스파냐 왕위에 대한 호엔촐레른가의 계승 자격을 둘러싸고 다시 프랑스와의 갈등을 이용할 기회가 찾아왔다." "이것은 1864년 및 1867년과 마찬가지로 비스마르크를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위기였다. 그는 누구보다 왕조의 메커니즘과 대중 민족주의의 힘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활용하는 데 능숙한 인물이었다. 비스마르크의 기량과 술책은 탁월하기도 했지만 기만적이기도 했다. 이 상황은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니 프랑스가 그의 손에 놀아났다고 말한다면 과장일 것이다. 전쟁도 불사하려는 프랑스의 준비 태세는 비스마르크의 행위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유럽의 국제질서 속에서 특권적 지위가 축소되는 그 어떤 사안에도 원칙적으로 반대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1870년에 프랑스가 전쟁을 벌인 것은 그들이 승리할 것(충분히 타당한 근거가 있다)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스마르크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획했다'고 말하는 것도 과장일 것이다."(735-7)


# 전쟁 결과 : 프랑스 정부군이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강화 조약이 조인되었다. 남독일 국가들과의 통일이 진전되고 독일제국이 선포되어 빌헬름 1세가 황제로 즉위했다.


"1870년의 전쟁 이후 부상한 두 가지 요인(베를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사이의 긴밀한 유대 그리고 프랑스와의 지속적인 반목)을 통일 이후 수십 년간 유럽 정세의 상수로 본다면, 왜 프로이센-독일이 1914년 이전 수십 년간의 아주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고립 상황을 피하기 어렵다고 보았는지를 더 쉽게 알게 된다. 파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의 주요 목적은 반독일 동맹을 결성해서 독일을 견제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협력 체제를 위해 가장 매력적인 상대는 러시아였다. 베를린은 러시아를 독일의 동맹 체제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그런 프랑스의 의도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양쪽을 섞는 동맹 체제는 그 어떤 형태라고 해도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외교정책은 점점 발칸반도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곳은 빈의 이익이 곧장 러시아의 이익과 충돌하는 지역이었다."(743-4)


16 / 독일로 합병되다


"공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새 독일 안에서 프로이센의 위치는 1871년 4월 16일의 제국헌법(Reichsverfassung)에 의해 규정되었다. 이 주목할 만한 문서는 복잡한 역사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독일제국을 세우기 위해 모여든 독립 군주국들의 야망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져야 했다는 말이다. 비스마르크 자신은 주로 프로이센의 영향력을 다지고 확대하는 일에 관심을 쏟았지만, 이런 정책은 바덴이나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정부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 결과로 나온 헌법은 유난히 각국에 위임된 성격이 강했다. 사실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헌법이라기보다는 독일제국을 세우는 데 합의했던 주권국들 사이의 '조약'이었다." "새 제국이 통치 영주의 연방, 즉 '영주동맹'이라는 취지에 따라서, 제국의 각 구성국은 그들 자체의 의회 입법부와 헌법을 계속 유지했다. 즉, 복수의 독일 왕위와 궁정이 그대로 남은 상태에서 각국은 여전히 다양한 특권과 전통적인 위세를 떨쳤다."(748)


"비록 비스마르크 수상은 언제까지나 독일이 '영주동맹'으로 남을 거라고 주장했지만, 헌법에서 보장한 연방상원의 권한은 결코 충족되지 못했다. 그렇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단순히 군사적으로나 영토의 크기로나 프로이센의 위상이 지나치게 앞선다는 현실이었다. 연방 전체에서 영토 면적으로 65퍼센트를, 인구로는 62퍼센트를 차지하는 프로이센이 사실상 연방의 주도권을 행사했다." "프로이센의 독보적인 위치는 제국 행정기관의 상대적인 부실함으로도 나타났다. 신통찮은 제국 행정부는 폭증하는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새 부처가 세워진 1870년대에 등장했지만 계속 프로이센 행정조직에 의존했다. 제국 관청(외무, 내무, 법무, 체신, 철도, 재무)의 각부 수장은 정확하게 말하면 장관이 아니라 제국 수상에게 직보하는 낮은 직급의 차관이었다. 프로이센의 관료기구는 제국의 조직보다 규모가 컸으며 이 상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750-1)


"프로이센의 헌법은 시간의 변화를 좇아가지 못했지만, 프로이센의 정치문화는 그렇지 않았다. 보수당의 주도권은 인상적이었으나 동시에 중요한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는 것이기도 했다. 제국의회의 의원들(이들은 다수가 사회당이거나 자유당 좌파였다)이 포진한 프로이센과 주의회 의원들이 지배하는 시골의 프로이센은 양극단으로 갈렸다." "보수파 일색의 중심지 바깥에서, 특히 서부 지방과 다수의 도시에서는 왕성한 중산층의 정치문화가 두드러지게 융성했다. 많은 대도시에서는, 제한적인 도시 선거 덕에 유지된 자유당 과두 체제가 기반시설의 합리화나 사회복지 같은 정책을 주관했다." "1890년의 선거에서 사민당은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최다득표를 한 독일 정당이 되었다." "20세기로 바뀔 무렵, 프로이센은 유럽에거 가장 크고 잘 조직된 사회주의 운동의 구심점이었는데, 이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대한 적절한 존경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었다."(754-6)


"한편, 프로이센 정부는 유대인의 공직 응모에 대한 차별정책을 지속했다. 심지어 1890년대에는 유대인 시민이 기독교식 성(姓)을 채택하는 것까지 막기 시작했다. 반유대주의자들은 누가 유대인인지 아닌지 혼란을 일으킨다는 인종주의적 이유로 유대인의 성씨 개명을 반대했다. 프로이센 정부 당국(특히 보수적인 내무장관 보토 폰 오일렌부르크)은 기존의 방침에서 벗어나 특별히 유대인 지원자를 차별하기 위해 반유대주의 기조를 따랐다. 1916년 10월,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전방에서 현역에 복무하는지를 판단할 목적으로 프로이센 전쟁장관이 실시한 '유대인 통계조사'도 같은 이치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국망치연맹'(1912년 설립) 같은 전국적인 반유대주의 조직은 오래전부터 독일 유대인은 조국 수호에 자신의 몫을 다하지 않고 전쟁으로 이득을 보는 자들이라는 주장을 펼쳐왔다. 이들은 전쟁 발발 이후, 특히 1915년 말부터 익명의 비난과 불만 제기로 프로이센 전쟁부를 맹공격했다."(782-3)


"황제의 임무에 대해서는 독일 헌법에 확실한 근거가 없었고, 그와 관련한 정치적인 전통도 없었다. 가장 분명한 것은 황제 대관식이 열린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1888년에 즉위한 빌헬름 2세도 이런 약점을 알았다. 그는 즉위하면서 자신의 직무를 황제의 위상에 맞게 격상시키기로 단단히 결심했다. 그는 끊임없이 여러 독일 국가를 여행했고, 독일 국민에게 새로운 집을 지어준 성스러운 전사로서 조부를 찬양했다. 그리고 새로운 경축일과 기념일을 도입했다. 말하자면, 프로이센 왕위의 헌법적·문화적 벌거숭이 상태를 국가의 역사라는 외투로 가리려고 한 것이다. 그는 독일 대중에게 자신이 '제국 개념'(Reichsidee)의 화신으로 비쳐지게 했다. 이렇게 독일인의 마음에 황제 지위가 정치적·상징적인 현실로 자리 잡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와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연설이었다." "빌헬름 개인에게 연설은 그가 종종 자각하는 정치적 압박과 무기력한 상황에 대한 보상이자 효과적인 통치 도구였다."(794-5)


"프로이센 왕조의 마지막 며칠간은 비극적이라기보다 차라리 우스꽝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빌헬름 2세는 측근들이 숨기는 바람에 1918년 독일의 공세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최악의 뉴스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9월 29일 루덴도르프로부터 패전이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바로 눈앞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 통치자로서 빌헬름의 미래가 경각에 달렸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종전이 임박한 몇 주간, 특히 10월 중순 검열이 완화되고 나서 폭넓게 논의되었다." "11월 9일 오후 2시에 그가 프로이센 왕이 아닌 황제로서 퇴위에 관한 성명서에 막 서명하려고 할 때, 신임 제국총리인 막스 폰 바덴이 이미 한 시간 전에 황제가 두 개의 직위에서 퇴위했다고 발표했으며 정부는 사회민주당 소속인 필리프 샤데만의 수중에 넘어갔다는 소식이 사령부로 들어왔다." "충격에 빠진 빌헬름은 1918년 11월 10일 이른 시간에 네덜란드 국경을 넘은 뒤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815-7)


17 / 종말


"패전 이후에도 프로이센 주는 살아남았다. 온건 노선의 사민당 지도부가 정책적으로 연속성과 안정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통일 공화국에 약속한 정책을 제쳐놓고 여전히 멀쩡한 프로이센 정부의 기능을 유지하겠다는 의미였다. 1918년 11월 12일, 대(大)베를린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 집행위언회는 지방자치단체 및 국가 단위의 모든 행정 관청은 기능을 계속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튿날 혁명 집행위원회는 「프로이센 인민에게!」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면서 〈철저하게 반동적인 과거의 프로이센을 (···) 완벽하게 민주적인 인민궁화국〉으로 바꿀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11월 14일, 사민당과 더 좌파 색을 띠는 독립사민당의 의원들로 구성된 프로이센 연립정부가 수립되었다. 공무원들은 그들의 충성이 소멸한 왕정이 아니라 혁명위원회가 관할하는 현재의 프로이센 주를 향한 것임을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에 확실하게 다짐하면서 변화를 이끌었다."(829)


"마치 세상이 뒤집힌 것 같았다. 프로이센은 패전과 혁명을 거치면서 정치 시스템의 양극단이 반대로 바뀌었다." "1920년 11월 30일에 나온 프로이센 헌법에 따르면, 새 프로이센의 주권은 '국민 전체'의 손에 있었다. 프로이센 의회는 더 이상 상급기관에 의해 소집되거나 해산되지 않고 헌법이 정한 법률에 따라 자체적으로 소집했다. 독일 대통령 한 사람에게 엄청난 권력이 집중된 바이마르 (국가) 헌법과는 대조적으로, 프로이센 체제에는 대통령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센은 바이마르 공화국 자체보다 민주적인 요소는 더 철저하고 권위주의적인 요소는 더 약했다." "프로이센은 독일에서 '민주주의의 보루'이자 바이마르 공화국 내에서 정치적 안정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바이마르의 정치가 전국적인 차원에서 극단주의와 갈등, 정부의 빠른 교체 같은 특징을 보인 데 비해, 프로이센의 대연정은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온건개혁의 길로 나아갔다."(840-1)


"하지만 그 변화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 우리가 사법제도에 초점을 맞춘다면 새 집권층의 업적은 대수로울 것이 없다." "판사 대부분이 좌익 정치범에게 강경하고 극우 범죄에 관대하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이 분야에서 국가가 급진적 행동을 취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판사의 기능적·개인적 독립에 대한 깊은 존중이었다(특히 자유주의자와 가톨릭 중앙당 연정 파트너 사이에서). 판사의 자율성(정치적 보복과 영향력 행사로부터의 자유)은 사법 절차의 진실성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간주되었다. 일단 1920년에 이 원칙이 프로이센 헌법에 소중하게 반영된 이상, 사법부의 반공화주의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신임 판사를 임명하는 절차를 바꾸고 정년제를 도입함으로써 미래를 위한 개선을 약속했지만, 1920년에 도입한 제도는 효과를 볼 만큼 오래 가지 못했다. 1932년 베를린 헌법재판소의 한 재판관은 프로이센 판사 중에 공화주의자가 5퍼센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으로 평가했다."(842-3)


"프로이센 연립정부는 당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 곧 점진적으로 공화국화를 추진하는 길로 나아갔다. 다만 그들은 이런 정책이 완벽한 효과를 내기 전에 독일 공화국이 소멸될 것이라는 점은 알지 못했다. 아무튼 프로이센의 존립에 대한 진정한 위협은 국가공무원 조직이 아니라 국가 조직 바깥의 강력한 이익집단에서 발생했고, 이는 결국 공화국의 몰락에 기여하게 되었다. 스파르타쿠스단의 반란 위협은 1919~20년에 진압되었지만, 극좌파는 선거에서 꾸준히 적지 않은 지지를 받았다." "우익 세력은 이들과 이념적으로는 다르다 해도 과격하고 단호한 점에서는 마찬가지였고 수적으로는 훨씬 많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프로이센의 (또한 독일 전체에서 일반화된) 정책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보수적 환경'이 새 공화국의 정치문화에 전혀 수용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후에 등장한 지리멸렬하지만 규모가 큰 야당 극우 세력은 새로운 질서의 합법성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845-6)


"1932년 7월 17일 '알토나의 피의 일요일'에 나치는 (주로 공산주의자가 많은) 노동계급 거주 지구를 행진하며 도발했다. 이에 따른 혼전의 와중에 (경찰의 발포로) 18명이 피살되고 1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파펜과 각료들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프로이센 정부가 법질서 수호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이 준군사조직의 활동 금지를 풀어준 사람이 파펜 자신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기막히게 어이없는 혐의였다) 총리는 1932년 7월 2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해서 긴급명령권을 발동해 오토 브라운 프로이센 수상이 이끄는 정부를 해산시키도록 했다. 프로이센의 장관들은 '판무관'으로 대체되었다." "사민당 지도부는 이렇게 터무니없는 불법 행위에 지극히 소극적이고 체념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미 몇 주 전부터 해산 조치가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이것을 막기 위한 어떤 계획이나 조직적인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859)


"사민당 지도부가 이토록 무기력한 반응을 보인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프로이센의 사민당과 그들의 연정 파트너는 1932년 4월 지방의회 선거에서 주의회의 다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실패한 뒤로 이미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원칙에 충실한 민주주의자로서 그들은 유권자의 심판에 의해 정치적으로 힘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오토 브라운처럼 준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 관료 집단이 반란을 감행하는 것이 내킬 리 없었다. 그는 자신의 비서에게 〈40년간 민주주의를 신봉해온 내가 반란군의 수괴가 될 수는 없지〉라고 말했다. 브라운과 그의 수많은 동료는 긴 안목으로 볼 때 국가의 중앙집권화와 프로이센의 분할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혹시 이 때문에 쿠데타 세력의 정치적 책략에 의해 섬뜩한 일을 당하더라도 국가권력이란 사안을 위협하는 일은 그들로서는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권력의 균형추는 프로이센 정부의 반대편으로 기울었다."(860)


"(괴벨스가 주도한) 나치의 프로이센 과거 읽기는 기회주의적이고 왜곡되었으며 선별적이었다. 그리하여 프로이센 주의 전체 역사는 인종차별적 사고에 물든 민족적인 독일 역사의 패러다임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치는 프로이센 계몽주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나치는 민족주의적 공약 때문에 프로이센의 개혁가인 슈타인을 높이 평가했지만, 대조적으로 친프랑스 성향의 '현실정치가'이자 프로이센 유대인의 해방론자인 하르덴베르크는 완전히 무시했다. 또 피히테와 슐라이어마허에게는 열광했지만 헤겔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관심을 별로 보이지 않았다. 국가의 초월적인 위엄을 강조하는 헤겔의 견해가 나치의 '민족주의적' 인종차별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치가 내세우는 프로이센은 전설적인 과거의 파편 중에 번쩍이는 것들을 모아놓은 물신 숭배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가공된 기억이고 정권의 가식에 대한 부적 기능을 하는 장식품 같은 것이었다."(880-1)


"따라서 1943년 1월의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프로이센 정신'이라는 요소는 연합군이 채택한 무조건 항복이라는 정책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45년 가을이 되자, 점령지 독일을 다스리는 영국의 여러 행정기관에서는 (확실히 쓸모없는 형태로) '송장이나 다름없이 빈사 상태에 빠진 프로이센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명줄을 유지해봤자 '위험한 시대착오 정신'만 조장하리라는 것이었다. 1946년 여름, 이런 생각은 재독일 영국행정부의 확고한 정책이 되었다." "미국과 프랑스 대표도 이런 견해에 전적으로 동조했다. 단지 소련만이 꾸물거리며 결정을 미뤘는데, 주로 소련이 궁극적으로 통제권을 확보할지도 모르는 통일 독일의 중심축으로 프로이센을 이용할 수 있다는 희망을 스탈린이 여전히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47년 2월 초가 되자, 그들도 보조를 맞추면서 프로이센 주를 법적으로 종료시키기 위한 길이 열렸다."(8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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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36
로베르트 미헬스 지음, 김학이 옮김 / 한길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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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서문


"정치나 종교문제에 대하여 자신과 다른 의견을 들으면 심장이 요동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을 건드리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들과는 토론이 불가능하다. 심장이 요동치면 두뇌는 멈추기 때문이다." "사회학의 과제는 어떤 체계를 만드는 것이라기보다 통찰을 전달하는 데에 있고, 해결책을 발견하기보다는─개인과 집단의 삶을 둘러싼 많은 문제들은 그 어떤 해결책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넓은 의미에서 항상 '열려' 있다─어떤 한 경향과 그에 대한 반대 경향, 어떤 한 원인과 그에 대한 반대 원인, 간단히 말해 사회생활의 그물망을 가능한 한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도록 제시하는 데에 있다." "이 문제는 현재에 속한 현상이나, 현재에 인접한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다. 이러한 연구에는 연구 대상의 윤곽을 뚜렷하게 해주고 실루엣의 테두리를 분명하게 해주는 시간적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모든 사실적 비판과 선의의 충고에 귀를 열어놓을 것이다."(27-32)


서론


"논리적으로 보자면 혁명은 근본적인 변혁, 즉 전복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혁명이란 개념을 반드시 어떤 특정한 계급에게만 국한시킬 필요도, 어떤 특정한 외적(外的) 폭력 형태에만 연관시킬 이유도 없다. 그 어느 계급이, 위로부터건 아래로부터건, 무력을 사용하건 합법적인 수단 혹은 경제적 방법을 사용하건, 기존의 국가 질서에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한, 그것은 혁명적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혁명적-반동적(보수적인 것과 반대된다)이란 개념과 혁명-반혁명의 개념은 하나로 융합된다. 혁명적 전복과 반동적 전복의 차이점은, 혁명적 혁명가들은 어떤 새로운 것, 역사적으로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 혹은 최소한 자기 나라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목표들을 지향하는 데 반하여, 반동적 혁명가들은 역사적으로 이미 존재했었지만 이제 다시 달성되어야 하는 목표를 외관상 똑같은 방식으로 도달하려 한다는 점에 있을 뿐이다."(50-1)


"근대의 정당정치에서 귀족정은 민주주의의 형태를 띠는 반면, 민주주의는 귀족적인 내용으로 채워진다. 한쪽에는 민주주의의 형태를 띤 귀족정이, 다른 한쪽에는 귀족적인 내용을 담은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정당정치의 토대가 외면적으로 민주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에만 집중하다가는, 모든 정당이 귀족정,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두정으로 변형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과두적 경향을 밝히는 데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관찰 대상은 바로 민주적인 정당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사회혁명적인 노동자 정당들의 내부 구조이다. 보수적인 정당들은 선거 기간을 제외하면 과두적 경향을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연하다는 듯이 드러낸다. 이는 보수 정당의 성격이 원칙적으로 과두적이니만큼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혁명을 지향하는 정당들조차 보수 정당 못지 않게 과두적 경향을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데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 책의 대단히 중요한 소재이다."(61)


제1부 지도자의 형성


"조직 없는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대중은 오로지 조직 속에서만 지속성을 얻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단 몇 마디만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계급'은 사회 전체에 대하여 특정한 요구들을 내걸고, 그 계급의 경제적 기능에서 도출된 이데올로기와 '이상들'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 이를 위해 계급은 경제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도 전체의 의사를 결집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유일한 수단은 조직이다. 조직은 가능한 한 최소한의 힘을 소비한다는 최소비용의 원칙에 입각하며, 동일한 이해관계에 따른 연대(連帶)에 기반한다. 그러므로 조직은 약자가 강자에 대항하는 투쟁에 동원할 수 있는 최적의 무기이다." "그리하여 조직의 메커니즘은 견고한 구조를 창출함으로써 조직화된 대중을 심대하게 변화시킨다. 그리고 조직은 대중과 지도자의 관계를 역전시킨다. 조직은 정당과 노동조합을, 지도하는 소수와 추종하는 다수로 이분(二分)시키는 것이다."(77-9)


"대중을 지배하기란 소수를 지배하는 것보다 용이한 법이다. 왜냐하면 대중의 동의는 폭발적이고 불가항력적이며 무조건적이고, 그들이 일단 어느 한쪽으로 쏠리게 되면 그에 저항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민집회는 어떤 주제에 대하여 진지한 견해를 개진하고 논의하거나 세세하게 다루는 곳이 아니다. 작은 모임에서는 이성적인 토론이 가능하지만, 거대 집단이 한곳에 모이면 갑작스러운 공포와 무의미한 환호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우리는 선발된 대의원들이 모인 전당대회에서 결의안이 구두(口頭) 환호나 표결을 통하여 일괄적으로 통과되곤 한다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그때 통과된 결의안들은 대의원이 50명씩 모인 곳에서는 그리 쉽게 통과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혼자 있거나 몇몇이 모여 있을 때보다 대중으로 있을 때, 말과 행동에서 논리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대중병리적 현상이다. 다수는 개인을 소멸시키고, 개성과 책임감을 마모시킨다."(82-3)


"근대 정당은, 정당이란 단어의 정치적 의미에서 '전쟁 조직'이다. 정당이 준수해야 하는 전술학의 기본 법칙은 전투 태세이다. 사민당을 창당한 페르디난트 라살은 자신의 독재적 지위가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당원이란 지도자를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지도자의 손에 들린 망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앙집권은 예나 지금이나 결정의 신속성을 보장한다. 대규모 조직은 그 자체로 둔중한 기구이다. 만일 대중 정당이 신속한 결정이 요청되는 일상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대중으로 하여금 제한적이나마 일정한 판단력을 갖추도록 조치해가면서 당을 운영한다면, 시간적 손실과 공간적 거리 때문에 순수한 형태의 민주주의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러한 당 운영은 결정을 지연시키고 호기를 놓치게 만들 것이며, 정당에 필수적인 정치적 유연성과 타 정당과의 연대 능력을 손상시킬 것이다. 전쟁을 치르는 근대 정당에서는 따라서 엄격한 위계질서가 불가피하다."(94-5)


"근대 정당이 일상적인 투쟁에서 명령의 신속한 전달과 정확한 이행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카이사르주의가 필수적이다. 네덜란드의 사회주의자 반 콜은, 진정한 정당 민주주의는 투쟁이 종결된 뒤에나 가능하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심지어 일시적으로는 전제주의(Despotismus)가 요청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자유는 신속한 실천력에 굴복하여야 하고, 대중이 소수의 의지에 종속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최고 덕목이다." "반 콜의 발상 속에는 근대 정당의 요체가 들어 있다. 민주주의는 투쟁하는 정당의 '일상생활용품'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전투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당에게 필요한 것은 '동작을 둔하게 만들지 않는 가벼운 무장'이다. 앞으로 더 설명하겠지만, 정당이 인민투표와 같은 민주주의를 위한 예방 조치들을 적대시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고, 정당에게 카이사르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단히 중앙집권적이고 과두적인 위계 질서가 필요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95-6)


"지도체제는 강제적이지만, 선거체제는 그렇지 않다. 선거는 참여의 의무가 아니라 권리에 기반한다. 그리고 선거의 권리가 선거의 의무로 대체되지 않는 한, 다수가 자발적으로 포기해버린 권리를 소수가 이용하여 무관심한 대중에게 법을 강요할 가능성이 항존한다. 따라서 민주 정당 대부분의 참여 활동은 사다리꼴이다. 가장 낮은 곳은 지역 유권자들이 점하고, 그 위에는 유권자의 10분의 1에서부터 30분의 1 정도에 불과한 지구당 당원들이 존재하며, 그 윗자리는 다시 훨씬 더 적은 수의 정기적인 총회 참석자들이 차지한다. 그 위에 당 관리들이 자리잡고, 마지막의 최상층에는 당 관리들과 빈번한 사적 접촉을 나누는 대여섯 명의 당 수뇌부가 위치한다. 그리고 당의 결정권 및 통제권은 수와 반비례한다." "다수는 자신을 대신하는 소수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소수의 지도를 받고자 하는 대중의 욕구는 곧잘 영웅 숭배로 연결되고, 그 욕구는 조직화된 노동자 정당에서도 한계를 모른다."(107-8)


"대중은 개인숭배에 대한 강력한 충동을 갖는다. 대중의 원초적 이상주의는, 혹독한 일상의 삶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면 할수록 더욱 맹목적으로 매달릴 세속의 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버나드 쇼가 귀족정은 우상의 집합인 반면 민주정은 우상 숭배자의 집합이라고, 그 특유의 역설로 꼬집은 데는 진리의 일단이 들어 있다. 물론 당원 대중이 때때로, 흑인들이 물신(物神)을 두들겨 패듯 자신들의 우상을 팽개치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때에도 대중은 내동댕이친 우상을 다시 세워놓는 물신숭배자의 심리에 따른다." "게다가 숭배는 숭배 받는 사람을 과대망상증 환자로 만들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턱없이 오만한 대중 지도자를 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지도자의 오만한 자기 현시는 대중에게 암시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그에 따라 대중의 경외감은 더욱 고조되고, 그 과정 속에서 지도자의 자기 현시 그 자체가 지배 권력의 중추가 된다."(120-9)


"정당 제도의 근대적 발전과 더불어 조직의 형태가 고정되면 될수록, 임시직 지도자들은 직업적 지도자들로 대체된다." "대중은 항시적으로 자신들을 대표하고 자신들의 일을 처리해주는 소수의 개인들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것이다." "그와 함께 민주적 통제를 받는 영역이 점점 감소한다." "그리하여 복잡한 구조를 갖춘 거대 조직이 나타나고, 분업의 논리에 의하여 관할 영역이 분화되고, 분화된 영역이 다시 한 번 세분화된다. 그리하여 결국 모든 것을 포괄하면서도 각 기관의 업무가 엄격하게 구분된 관료제가 형성된다. 당무 교리문답의 제1조 역시, 업무의 전달 경로를 정확하게 준수하는 것이 되고, 당의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던 모든 노력은 당의 계서화(階序化)로 귀결된다. 당의 계서화는 당이 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다. 정당 조직의 과두제적이고 관료적인 경향은 따라서 실천적인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조직의 원칙 그 자체의 필연적인 산물이다."(142-3)


"(대중이) 접근하기 힘든 업무를 담당하는 지도자는 불가결한 지위에 도달한다. 전문성 덕분에 지도자는 당원들의 우위에 올라서고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격상되는 것이다. 지도자들의 전문성은, 그들이 의원으로서 습득하게 되는 경험과 사회적 지식, 특히 의회 상임위원회에서 획득하는 전문 지식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의회 상임위원회는 의회 안의 과두제, 다시 말해 의회라는 과두제 안의 또 하나의 과두제의 출발점이자 중추이다." "각종의 정당 집회에서 특정 사안에 대한 담당자나 발제위원 혹은 전문가로서 등장하는 그 사람들, 다시 말해 해당 사안을 철저하게 꿰뚫고 있고, 너무도 간단하고 뻔한 문제조차 적절하게 삭제하고 변경하고 전문용어를 구사함으로써 오로지 자신들만이 해명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문제로 둔갑시키는 그 사람들은, 이론적으로는 대중의 대표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느덧 대중이 정신적으로 결코 접근할 수 없고 기술적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존재들이 되는 것이다."(148-9)


"사실 지도자 권력의 가장 견고한 기반은 바로 대중의 무능이다." "모든 관리 업무, 다시 말해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권위가 요구되는 모든 전술적·행정적 사안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독재', 즉 민주주의 원칙으로부터의 이탈이 필수적이다.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악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인 필요악이다. 사회민주주의란 모든 것을 인민을 '통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인민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결정적인 것은 지도자의 선의와 통찰력이다. 머릿수에 의해 결정되는 다수결은 단지 가장 일반적인 원칙을 제정할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 전술적으로 중요한 모든 사항은 지도자가 결정한다. 이는 소수가 전체 당의 이름으로 정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투쟁 정당이다. 민주주의는 목표일 뿐 수단이 아니다."(151-4)


제2부 지도자 권력의 사실적 특징


"관료제는 본질적으로 분업에 기초한다. 분업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기능의 세분화, 전문화, 독점화가 두드러진다. 특히 프로이센-독일처럼 당이 경찰과 행정 관료와 형법으로부터 억압을 받는 곳에서는, 억압의 암초를 피해가면서 당을 안전하게 이끌고 갈 노련한 조타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당은 당의 발전을 조심스럽게 보존함으로써 어느 정도나마 항구성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계기도 있다. 노동운동은 정치적 노동운동이든 경제적 노동운동이든 상관없이, 국가 행정 관리들이 그렇듯이 관리직의 재직 기간이 어느 정도 길어야 한다. 노동운동 지도자가 훌륭한 공무원처럼 업무에 정통하게 되기까지는, 업무에 익숙해질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연속성이 부재하는) 순수 민주주의에는 주권 대중의 이의(異意)로 인한 결단력 부족과 안정성의 부재, 한마디로 말해 '영원히 변화하는 민주주의'라는 문제점이 있다. 정당은 이를 피하려고 노력한다."(169-71)


"당원의 결속력과 지속성은 부분적으로 당 조직의 견고성과 재정 능력에 의존한다. 정당이 직원들에게 비록 월등한 수준은 아니라 할지라도 만족할 만한 정도의 급여를 지불하면, 당에는 당원들이 쉽게 끊을 수 없는 끈이 만들어진다. 독일 사민당 당직자들이 파렴치한 외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던 것은, 독일 사회주의 운동이 당에 대한 봉사를 현금으로 보상한다는 원칙을 정립하였기 때문이다. 그 원칙은 동시에 당 관료제와 당의 중앙 권력을 강화한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등의 사회주의자들이 부분적으로는 오늘날까지도 자발적 봉사에 의존하는 (말과 글의) 선동 활동을 전개하는 데 반하여, 독일 사민당은 언론과 농촌에 대한 선동 등 모든 선동 활동에 보수를 지급하고 있다. 전자에서는 개인적인 협조, 희생정신, 활력, 열광 등이 동기로 작용하지만, 후자에서는 금전적인 보수를 배경으로 하는 규율, 지조, 의무감이 동인(動因)으로 작용한다."(188-9)


"아울러 노동운동 지도자들에게 낮은 급여를 제공하는 것, 특히 노동조합 운동의 유소년기에는 때때로 의식적으로까지 적용되었던 그 방식이 업무 태만을 막을 만한 적절한 안전 장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동안 입증되었다. 인간 대부분은 이상주의만으로 의무 이행에 최선을 다하지는 않는다. 열광은 장기적으로 창고에 저장해놓을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관리에게 적절한 보수를 지급하는 것은 또 다른 두 가지 이유에서도 필수적이다. 첫째는 사회주의적 도덕 때문이다. 어떤 노동이든, 노동에 대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원칙이 그것이다. 노동의 사회적 가치에 합당하지 않게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를 빌리자면 착취이다. 두 번째는 현실정치적인 이유이다. 지도자에게 적은 보수를 준다는 원칙은, 모든 것을 지도자의 이상주의에 거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보수가 낮으면 부패와 사회적 타락이 생긴다."(197-8)


"언론은 지도자가 대중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하고, 보존하고, 강화하는 강력한 무기이다. 언론은 물론, 유명한 선동 정치가가 집회 연설을 통하여 청중에게 행사하는 직접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언론이 발휘하는 영향력의 범위는 훨씬 더 넓고, 쓰인 언어는 말해진 언어보다 더 멀리 전달된다. 그러므로 언론은 지도자 개인의 명성을 대중에게 알리고, 그의 명성을 증폭시키기에 가장 적합한 수단이다. 노동조합과 정당의 기관지는 언제나 지도자에 대한 찬사로 채워진다. 〈사심 없는 희생〉이나 〈냉철한 지성과 강인한 인내력을 갖춘 뜨거운 이상주의〉와 같은 찬사들은 마치 그것만으로도 강력한 노동자 조직을 제련해낼 수 있는 것처럼 기관지의 지면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이런 아첨은 원래 부르주아지의 것이었다." "그리고 지도자로의 상승을 열망하는 사람이 언론에 자기 이름을 싣는 것은, 대중에게 자신을 알리고 친숙하게 함으로써 더 높은 직책으로 상승하는 방법이기도 하다."(199-201)


"정당의 관료제가 강화되면 사회주의 이념의 근본적인 두 가지 요소, 즉 원대한 이상주의적 사회주의 문화에 대한 헌신과 국제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약화된다. 이제 문제는 이념이 아니라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국내에 선동과 조직 활동의 문이 열리게 되자, 사회주의자들의 머리는 불멸의 원칙들 대신 일상적인 정당활동의 요건들에 대한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전문적인 지식을 얻지만, 시야의 너비와 무게를 잃는다. 그들이 산재보험법과 퇴역보험법에서 저주스럽고 교활한 술수를 가려낼 수 있게 되면 될수록, 그리고 그들이 공장감독법, 영업재판소, 소비조합 점포의 두루마리 상표, 도시 가스 등의 가스 사용량 등등의 특수 문제들을 꿀벌의 성실성으로 파악하게 되면 될수록, 그만큼 그들은 노동운동의 의미를 협소한 의미에서조차 견지하기 힘들어 하게 된다." "그처럼 사물의 근본을 꿰뚫는 '폭넓은' 사고를 상실하고 전문성 속에 함몰되는 경향은 근대적 발전 경향 그 자체이다."(247-8)


"지도자들이 최소한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의 이론적 주인인 대중의 의지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때로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의 허약하고 통속적인 본성을 이용한 선동정치일 뿐이다. 선동가들은 대중의 의지에 아첨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대중을 앙양하고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대신, 마치 대중의 노예가 되어 대중 발끝에 엎드리는 것 이외에 그 어떤 야심도 없는 양 연극을 선보이면서, 실제로는 대중에게 멍에를 씌우고 대중의 이름으로 지배하려는 자들이다. 그들 중에서 보다 솔직하고 보다 윤리적인 자들의 성공 비결은, 〈자신들이 숙고하여 작성하고 실천한 계획에 대중의 강력하고 맹목적이며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을 짜맞출 수 있었다〉는 것뿐이다." "그의 복종은 그저 잠정적이고 유보적인 것에 불과하다." "부정(不貞)한 자는 걱정을 하고, 강력한 자는 거스른다. 그러나 지배하는 자는 선동가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민의 위탁을 팽개치거나 겉으로만 수행하는 척하면서, 뒤에서 지배한다."(265-6)


"민주주의에서 출현한 과두제의 존립을 위협하는 두 개의 적대적인 힘이 있다. 첫째는 대중의 민주주의적 저항이고, 둘째는 그와 관련되면서 그 결과이기도 한 군주정으로의 이행이다. 군주정의 성립은 과두 정치가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위험은 아래와 옆으로부터 오는 셈이다. 한쪽은 봉기이고, 다른 쪽은 찬탈이다. 따라서 근대의 모든 국민정당에는 진정한 동료애, 즉 인간적인 신뢰의 결핍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잠재적인 투쟁 상태,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린, 지도자들 간의 상호 불신에서 비롯된 흥분된 대치상태가 나타난다." "시칠리아의 몇몇 도시에서는 정당들이 뒤엉켜 싸우는 것을 놓고 부유한 사람들과 부유하게 된 사람들 간의 투쟁이라고 조소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귀족(과 지주)과 졸부(상인, 공공사업 업자, 공장주 등)의 투쟁인 것이다. 근대 민주 정당에서도 금전적인 측면은 없지만, 그와 비슷한 투쟁이 벌어진다."(269-70)


"기존 지도자에 대하여 지도자 후보가 반기를 드는 것은, 정당 조직 그 자체와 체제로서의 지도자 지배에게 위험한 것이 아니다. 현재의 혁명가는 장래의 반동이다. 우리는 지도권을 둘러싼 투쟁의 복잡다단한 양상 속에서 다음과 같은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국제 노동운동사는 연륜이 비교적 짧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근대 사회계급의 역사보다 거만하고 권위적인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근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는 자기편에게 버림받아 쓰러지고 먼지 속으로 사라져간 용병 대장들의 사례들을 전해준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드물다. 대중이 지도자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는 극히 드문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지도자들과 갈등에 빠져든 새로운 지도자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힘있는 자로 거듭나는 경우, 즉 새로운 지도자가 기존의 지도자를 끌어내리고 그를 대체하는 데에 성공하는 경우가 통상적이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민주주의가 거둔 성취는 신속하게 무로 돌아가고 만다."(283-4)


제3부 대중 지도의 심리적 영향


"대중은 지도를 욕구하지만 지도권에 무관심한 것과 대조적으로, 지도자에게는 타고난 권력욕이 있다. 그리하여 조직의 기술적 논리 때문에 발생한 과두 민주주의는 권력욕이라는 지도자의 보편적인 인성에 의하여 더욱 강화된다. 조직, 관리, 전략의 필요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심리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바이지만,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적어도 경력 초기에는 자신이 대변하는 원칙을 확신한다. 르 봉의 말은 아주 적절하다. 〈지도자는 처음에 대체로 일개 추종자에 불과하다. 그러다가 그는 스스로 사도가 되려는 마음을 품는다.〉 지도자는 대중으로부터 나오고, 대중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의 본능적인 행위가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 채, 또 그 어떤 개인적인 속셈도 품지 않은 상태에서 부지불식간에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확고한 당 조직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장차 지도자가 되기 위한 첫 단계를 밟기 위해서는 그 지도자의 개인적인 열의가 전제되어야 한다."(287-8)


"시간이 경과하면서 지도자들에게 나타나는 심리적인 변화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다. 대중의 지휘관이 된 사람 모두가 과거 한때, 지휘관이 되기를 꿈꾸었던 사람인 것은 아니다. 프랑스 격언에도 있지 않은가. 〈성공한 사람 모두가 출세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사실 지도자가 되려는 분명한 의식적, 무의식적 의지를 가지고 입당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은 그저 희생 정신과 투쟁 정신, 혹은 기존의 관계 및 그 책임자들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운동에 참여한다. 그들은 이상주의자답게 모든 당원들을 형제로 간주하고, 모든 당 집회를 이상으로 가는 도정의 정거장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운동의 와중에 천부적인 혹은 습득된 능력 때문에 지도자가 된다. 그렇게 하여 일단 지도자로 올라선 사람은 결코 정치적 지위가 낮았던 과거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모든 권력 의식은 과대망상을 부여한다." "권력은 권력을 장악한 자의 인간적 성격까지 변화시킨다."(292-3)


"황제로서의 공적 활동에서 나폴레옹 1세는 자신의 권력이 오로지 프랑스 인민의 의지에서 비롯되었음을 과시하였다. 이집트에서의 피라미드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명성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그는 종전까지 입법부 의원들에게만 주어지던 인민의 제1대표라는 칭호를 자신에게 수여하여야 할 것이라고 명령조로 요구하였다. 그리고 인민투표에 의하여 황제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권력이 오로지 인민 대중에 근거한다고 선언하였다. 인민에 의하여 헌법적으로 승인된 일인독재, 이것이 바로 인민주권에 대한 보나파르트주의적 해석이다." "보나파르트주의는 전체의지에서 기원하였으되 그 기원으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 주인이 된 개별의지에 대한 이론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독재가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선거로 선출된 독재자에게 그것은 모순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인민 다수의 의지를 구현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 반대하는 것은 모두 비민주적이 된다."(298-301)


"근대의 민주적인 혁명 정당들과 노동조합의 역사는 보나파르트주의와 유사한 면모들을 드러낸다. 원인은 자명하다. 보나파르트주의가 성공할 수 있는 곳은 언제나 민주적 대중이 존재하는 곳이다. 따라서 정부의 적대자는 항상 인민주권에 의거하여 분쇄된다. 왜냐하면 보나파르트주의는 대중에게 자신들이 지배자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인민 대중의 권력 위임이 마치 인민이 법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고 투쟁한 것인 양 나타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서는 권력 위임을 통한 인민의 주권 포기가, 보기 싫은 정통 세습 군주정처럼 형이상학적인 신(神)의 도움이 아니라 인민의 의지를 통하여 적법하게 이루어진다. 따라서 선출된 국가 수반은 대중의 자유로운 의지 행위, 즉 대중의 자의적 행위를 통하여 출현한 대중의 창조물이다. 이는 대중 개개인에게 자족감을 안겨준다. 〈내가 그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으면, 그는 지금의 그가 되지 못했을 거야.〉 〈내가 그를 뽑았어.〉"(302-4)


제4부 지도자에 대한 사회적 분석


"억압상태가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이 그것을 '의식'하는 것이 계급투쟁의 역사의 동인(動因)이다. 따라서 근대 프롤레타리아트가 즉자적(卽者的)이고 대자적(對者的)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사회문제'가 대두하지 않는다. 계급투쟁이 혼몽한 잠복 상태에서 영원히 머무르지 않기 위하여 필요한 토대는 계급의식이다. 이것이야말로 계급투쟁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자신들을 짓누르는 억압을 처음에는 본능적으로만 감지한다. 교육을 받지 못한 그들로서는 미궁과도 같이 어지러운 세계사의 방향을 결코 통찰할 수 없다. 심리적 역사법칙이라고 간주할 만한 것이 있다. 오랜 문화적 소외와 권리의 박탈로 인하여 쇠잔해지고 스스로에게 절망해버린 계층과 계급은, 자신의 계급 동지 외에 '상위'(上位)─이 기계적인 단어를 계속 쓰자면─계급이 함께 말할 때 비로소 강력한 행동을 취하기 위하여 몸을 일으킨다는 것이다."(320-2)


"사회주의 이론은 철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 등 지식인들의 저술에서 나온 것이다. 수많은 사회주의 강령에서 지식인의 언어가 아닌 단어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사회주의의 태두들은 몇몇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일차적으로 지식인들이었다.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가들은 이차적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자발적인 프롤레타리아트적(proletaroid) 운동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정신적, 경제적 생활수준의 개선을 선망하던 본능적 움직이었을 뿐이다. 그것은 저주스러운 현실의 객관적 원인을 인식한 인간의 행위였다기보다, 현실에서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불만들을 기계적으로 분출해버리는 운동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적' 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바뀌고, 무의식적이고 무목적적이며 본능적인 반란이 비교적 분명하고 명시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전환한 것은 노동자들에게 지식이 결부되었던 때였다."(322-3)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자식들' 중에 사회주의의 이념을 받아들임은 물론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다 못해, 자신의 깨달음이 지시하는 대로 인간 해방의 목표에 자신의 삶을 조건 없이 바치기 위하여 친구, 친척, 부모, 사회적 지위, 사회적 명예 등을 포기해버린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초년생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생업에 전적으로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이 속하는 계급 자체는 그들의 이탈에서 별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전체로서의 계급은 결코 특권적인 지위를 자진해서 내놓지 않는다. 왜냐하면 계급은 '가련한 형제'를 위하여 퇴장해야 할 만한 그 어떤 도덕적 동기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계급 이기주의'가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 역시 계급 이기주의를 갖는다. 그러나 역사적인 이유로 인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수한 계급이해는 궁극적으로─적어도 이념에서는─인류의 무계급 이상(理想)과 일치한다."(332)


"많은 젊은 부르주아지들이 가슴속에 선한 의지의 지순한 불꽃을 품고 갈채와 명예와 돈을 도외시한 채 사회주의에 뛰어든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을 평화롭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의 내적 확신을 외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발걸음을 내디디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 외에 다른 부류의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도 있다. 즉 개인적으로 불만이 있는 사람, 야심가, 성격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신경쇠약자 등이 그들이다. 국가의 권위를, 그것을 장악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혐오하는 사람은 많다. 이는 높이 매달린 포도와 여우에 관한 우화와도 같은 것이다. 그 우화는 시기심과 만족되지 못한 지배욕을 나타낸다. 이것은 대가족 속에서 자라난 어느 가난한 방계(傍系) 출신의 후손이 부유하고 권세 있는 사촌에 대해 느끼는 증오와 질투이며, 귀족적인 로마에서 둘째가 되느니 차라리 프롤레타리아트적인 갈리아에서 첫째가 되려는 자존심이다."(348-50)


"계급투쟁은 계급투쟁에 봉사하는 기구들을 창출한다. 문제는 그 기구들이 정당 내부에 사회적인 변화와 변형을 일으킨다는 데 있다. 그 기구들을 통하여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수적으로는 아주 적지만 질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일부가 낮은 지위로부터 벗어나 점차 부르주아 계급으로 이동한다." "일찍이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일부의 지혜롭고 야심적인 노동자들은 강철과 같이 근면하고 주어진 기회를 영리하게 이용하는 데다가 행운의 도움까지 받아서 기업가로 상승하였다." "오늘날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기계적인 손놀림만을 요구하는 단순하고 협소한 대공장에서 자신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과거에는 '노동'이 제공해주던 사회적 상승의 가능성을 이제는 근대적인 '노동운동' 속에서 찾고 또 발견한다. 노동운동은 그들에게 새로운 생계 수단과 높은 생활수준을 제공하고, 사회적 상승의 사다리까지 되어준다. 그리고 그 기회는 조직의 성장과 더불어 증가한다."(367-9)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의 '육체'노동으로부터 '정신'노동으로의 전환은 자신의 존재 전체를 포괄하는 폭넓은 변신 과정으로 연결된다. 해당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트에서 이탈하여 점차 소시민에 편입되는 것이다. 우선은 다만 직업적, 경제적으로만 그러하다." "정당이나 노조의 관리직이 노동자를 곧장 자본가로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노동계급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는 했기 때문에, 〈상승한 노동자〉(gehobene arbeiterexistenz)라는 사회학적으로 적절한 용어가 생겨난 것이다." "그들은 비록 노동 대중과 지속적으로 접촉하지만, 그들에게는 심리적 변화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 변화는 우리가 언급한 경제적 변화를 넘어선다. '생활수준이 상승한 노동자'가 언제나 새로운 환경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도덕적 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사회정치적 교양 수준이 그를 변화된 생활수준으로부터 보호할 만큼 높은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의 계급적 순수성과 이념적 통일성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373-5)


"설령 탈프롤레타리아트화된 사회주의자 스스로가 사민당 신문 편집인이나 의회 의원으로 명예롭게 늙어가면서 노동해방의 진정한 투사로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 자녀들, 즉 딸뿐만 아니라 아들 역시 아버지의 사회적 상승이 그들에게 가져다준 새로운 계급으로 살아간다. 이는 물질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념적으로도 새로운 계급에 곧바로 동화된다. 예컨대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새로운 계급 출신과 결혼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노동계급을 연결해주던 유일한 연결 고리였던 공통의 정치-사회적 이념에 대한 믿음은 자식들에 이르러서는 정치적 무관심으로 바뀌어버린다. 요컨대 노동자를 가족 단위로 고찰하면 구(舊)노동자는 빠르든 늦든 새로운 환경에 흡수되고 마는 것이다. 부르주아적으로 성장하고, 아버지보다 훨씬 좋은 학교에 다녔으며, 부르주아적인 관심 속에 살아가는 자식들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부르주아화 이전의 반부르주아적 기원을 생각해낸다."(376)


"영미(英美)의 비교적 규모가 큰 노동조합들은 거의 모두 조합주의(Korporativismus)의 경향, 즉 노동귀족의 경향을 드러낸다. 이미 성장한 노동조합은 더 이상 선전활동을 벌이지 않는다. 가입을 촉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타인이 접근할 수 없도록 주변에 철조망을 치고, 가입비를 인상하거나 전문적인 직업교육 이수 증명을 요구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조직의 외적 성장을 막는다." "유럽에서도 파당 및 도당의 형성(과두적 경향)이 활발하다." "나폴리의 군수 노동자들은 정부에게, 〈노동자를 교체할 때 새로 채용되는 노동자 중 최소한 3분의 1은 현재 근무중인 노동자 가족, 즉 아버지와 동일업종에서 성장한 사람들 중에서 뽑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 노동자들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듯 그렇게 세상 물정에 어둡거나 뒤처진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계급투쟁이 민주주의를 통하여 귀족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 집단이 귀족화되는 것이라는 사실은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다."(390-2)


"지배의 열정이 고도로 발달하는 쪽은 통상적으로 과거에 노동자였던 사람들이다. 자본에 봉사하는 임금노동자라는 예종의 사슬로부터 방금 벗어난 그는 대중이 부과하는 예종의 사슬에 묶이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싫어한다. 그는 오히려 자유사상가라도 된 양 방종에 빠져든다. 모든 나라의 경험으로 미루어,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성장한 노동 지도자들이야말로 두드러지게 자의적이고, 추종 대중의 반론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오만하고 이기적이라는 점, 이제 갓 소유하게 된 권위를 지키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인다는 점, 자신에 대한 비판은 무엇이건 굴욕과 멸시로 간주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지난 시절을 상기시키려는 악의적인 시도로 받아들이는 것 등은 바로 벼락 출세자의 특징이다." "노동자 출신의 노동지도자들은 자신이 새로운 관리 업무를 맡으면서 과거의 노동을 포기하게 되었고 계급 또한 바뀌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면 불쾌해한다."(401-2)


제5부 지도자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예방 조치들


"모든 형태의 직접적인 인민 통치에 가해지는 비판은 인민투표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대중 의지의 항구적인 표현 수단으로서 인민투표가 갖는 결정적인 약점은 대중의 미성숙에 있다. 설혹 대중이 성숙하다고 하더라도 인민투표를 실시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또한 인민투표는 특히 신속한 결정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활동하는 정치적이고 투쟁적인 정당에게 성격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제도이다. 그것은 오히려 순발력을 저해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은 교묘한 질문을 이용하여 대중을 손쉽게 기만할 수도 있고, 불분명하게 질문함으로써 답변을 불분명하게 유도한 뒤 그 결과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도 있다. 전체투표는 절대적이며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그 본질로 인하여 능란한 사기꾼의 지배를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상드는, 대중의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인민투표는 민중의 자유에 대한 암살 행위라고 말하였다."(442-3)


"(부르주아지 출신 지도자들을 프롤레타리아트화하는 작업은) 다음과 같은 심리적 통찰에 기초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도, 사회혁명 정당에 소속된 모든 사회 계층과 부류들을 아우르는 '사회적 동질성'이 있어야만, 고질적인 지도부의 해악 몇 가지를, 그 싹까지 잘라버리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현저하게 약화시킬 수 있는 예방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방식의 평등은 윤리적 요청이기만 하였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 정당의 과두적 경향의 발전을 막거나 멈추도록 하는 출구로 간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볼셰비키가 러시아 인민 속에서 거둔 성공의 열쇠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그들의 인민적이고 일상적인 언어 구사와 소박한 생활방식에 있을 것이다. 이는 특히 레닌에게 해당된다. 그러나 그러한 경이로운 시도는 이데올로기적인 영역만을 건드리는 것이고, 기껏해야 정당에 대한 광신을 낳을 뿐이다. 그것으로 지도자들이 대중의 사고와 현실 속으로 소멸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450-2)


"생디칼리슴은 민주주의의 국가체제가 명명백백한 '소수의 지배'임을 폭로하였다." "그렇지만 생디칼리슴이 무게 중심을 조합적 행동에 두려 하면 할수록, 생디칼리슴 스스로가 여러 면에서 과두정으로 귀결된 위험성은 커진다. 혁명적인 노동조합 집단에서조차 지도자들이 추종 대중을 우롱할 만한 구실은 얼마든지 있다." "프랑스 생디칼리스트들은 빈번하게, '직접행동'이야말로 노동계급이, 대표되는 대중으로서가 아니라 자주적인 대중으로 나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리고 배신, 탈선, 부르주아지화에 불과한 모든 대의체제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생디칼리스트들은 그 일방적인 이론이 정당에만 적용되고 극히 혁명적인 노동조합을 포함하는 노동조합 운동에는 적용되지 않기라도 하듯이 말한다. 그러나 노동조합도 조직의 구조에서 노동자 정당과 동일한 기본 원칙에 입각한다. 대중의 이해관계가 몇몇 선출된 자에 의하여 대변되는 것이다."(453-5)


"생디칼리스트들은 파업을 프롤레타리아트가 벌이는 직접행동의 만병통치약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파업은 정치적인 인물이 자신의 조직적 재능과 지휘 능력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정치 파업인 총파업에서 그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전문적인 노동지도자에게 경제파업은 직업 군인에게서의 전쟁과도 같은 것이다. 파업과 전쟁은 그들에게 신속하고 빛나는 상승의 기회를 제공한다. 노동지도자들 중에는 거대 파업을 주도하여, 영어로 말하자면 경영하여(manage) 인민의 눈을 붙잡고 여론과 정부의 주목을 받음으로써, 최고의 명예직과 생계 수단을 확보한 인물이 많다." "따라서 그들이 정당보다 더욱 강력한 지도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특정한 전제조건하에서는 파업과 직접행동의 '이념'을 이론적으로 선전하는 것만으로도, 대중 지도자가 권력과 영향력을 확보하고 대중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생명의 나무에서 황금 사과를 따기에 충분하다."(456-8)


"정당의 조직화가 계서적이고 과두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끊임없이 지적한 최초의 이론가들은 아나키스트들이다. 이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나 생디칼리스트들보다 훨씬 더 명료하게 조직의 위험성을 통찰하였다. 그들은 권위를 부자유와 예종, 아니 지구상의 모든 해악의 전주곡으로 간주하고 배격한다. 그들에게 강제란 〈감옥 및 경찰과 동의어〉이다. 그들은 지도자의 개인주의가 얼마나 쉽게 추종 대중의 사회주의를 억제하고 마비시키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명료하게 통찰한 그 위험에 빠져들지 않기 위하여, 온갖 종류의 실천적인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좁은 의미에서의 정당을 조직하지 않는다. 그들은 추종 대중을 고정된 틀 속에 조직하지도 않고, 정관을 마련하지도 않으며, 선거, 당비, 배타적인 집회 등의 의무와 업무를 추진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아나키즘 지도자들에게서 사회민주당 지도자들보다 강력한 이념적 면모가 부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465-6)


"우리는 아나키즘 지도자들 가운데에서 성실하고 학구적이고 사심 없는 사람들, 박애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각별한 애정을 갖고 돌보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아나키즘 지도자들이 정치의 장에서 움직이는 조직화된 정당의 지도자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훨씬 더 도덕적이라고 해서, 그들에게 지도자의 특성과 욕구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탁월한 아나키스트들이 생애의 수많은 날들을 바쳐가면서 지도자의 권위를 배격하는 이론 투쟁을 벌였지만, 그들 내부에 있는 자연적인 지배 욕구를 소멸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과 정당 지도자들과의 차이점은, 정당에서는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지배의 수단을 아나키즘 지도자들이 사용한다는 데 있을 뿐이다. 그것은 사도(司徒)와 연사(演士)의 수단들, 다시 말해 사상의 정열적인 힘, 희생의 위대함, 확신의 깊이 등이다. 그들은 기술적인 필요성에 입각하여 조직을 지배하는 대신, 추종 대중의 감정을 지배하는 것이다."(466-7)


제6부 종합: 조직의 과두적 경향


"혁명을 표방하는 정당이 보수적인 내적 본질을 갖기에 이르는 기나긴 사슬의 마지막 고리는 정당과 국가 사이의 관계이다. 중앙집권적인 국가 권력을 타도하기 위해서 탄생한 정당은, 국가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역시 거대하고 견고하게 조직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노동자 정당은 고도로 중앙화된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랑하는 자신의 조직 원리는 타도의 대상인 국가의 조직 원리와 동일하게 된다. 그 원리는 권위와 규율이다." "권위적인 국가와 똑같은 수단으로 조직된 그 혁명 조직의 지도자들은 결국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국가라는 거대 조직에 대립하는 자기 정당은 비록 조직 문제에서는 기적을 연출해낼지 모르지만, 국가에 비해서는 여전히 취약한 축소판에 불과하며, 따라서 조만간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국가와의 모든 힘겨루기는 자신들의 처절한 패배로 끝나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당의 설립자들이 창당할 때 내걸었던 희망과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475-7)


"오늘날 우리는 정당의 조직 역량과 강도가 커지면서 혁명적 동력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조심성과 우려가 그만큼 커지는 현상을 목격한다. 당 조직의 확대와 당 정치의 조심성 사이에는 내적인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 국가로부터 위협받으면서도 존립의 근거를 국가에서 찾는 정당이 비대해지자, 그 정당은 국가를 과도하게 자극할 만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회피하려고 불안하게 노력하는 것이다." "초창기에 그들의 목표는 혁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혁명적 수단을 원칙적으로 선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부득이한 상황에서 그들은 수단도 혁명적이라고 외쳤다. 그 정당이 이제 연륜이 쌓이자, 혹은 정치적으로 성숙해지자, 혁명에 대한 본래의 신념이 수정된다. 자신들의 정당은 〈최선의 의미에서〉 혁명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당은 검찰이 주시하는 수단에서는 혁명적이지 않고, 오로지 회색의 이론과 흰색의 종이 위에서만 혁명적이라고 서슴지 않고 선언하는 것이다."(477-9)


"이제 만일 강력하고 대담한 전술을 택한다면 (반세기 동안 당이 애써 구축한) 그 모든 것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다시 말해 수십 년 간에 걸친 노력과 수천 명에 달하는 당내 상하위 간부진, 한마디로 '당' 전체가 위태로워지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대담한 전술을 구사한다는 것은 점차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 되어간다. 이미 성취한 것에 대한 집착,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삶이 당의 존재에 거의 전적으로 매여 있는 수많은 성실한 가장(家長)들의 개인적인 욕심, 또한 전시(戰時)에 빈번하게 나타나듯 국가가 당을 해산해버린다면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으로 파탄을 맞게 되리라는 불안감, 부당한 감상주의와 정당한 이기주의, 이 모든 것이 작용함으로써 당에는 일말의 과감성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여전히 혁명적인 언어가 사용되지만 현실에서 그 당은 기껏해야 입헌적인 야당의 임무를 다하는 정당으로 전락한다. 여기에서도 결과는 원인보다 오래간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독일 사민당의 상태였다."(481-2)


"(정당의 경우처럼) 분업에 의하여 등장한 기관이 공고화되면, 그 속에 기관 자체의 이해관계, 즉 기관을 위한 기관에 대한 이해관계가 발생한다는 것은 변경 불가능한 사회법칙이다. 그리고 조직 자체의 이해관계가 생겨나면, 그것에는 조직원 전체의 이해관계와 충돌하고 대립하는 측면들이 나타난다. 그것만이 아니다. 다양한 사회 계층들이 사회적 기능에 따라 독자적으로 결집되어 기관을 조직하면, 그 기관들은 다시금 고유한 이해관계를 내세우게 된다. 한 지배층이 또 다른 지배층으로 교체될 필연성과 그로부터 도출된 과두정의 법칙, 즉 인간이 대규모 단체로 조직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조직 형태로서의 과두정의 법칙이 유물사관을 배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유물사관을 보충한다. 역사가 부단한 계급투쟁으로 구성된다는 학설과, 계급투쟁이 구(舊)과두정에 합류하는 새로운 과두정으로 귀착될 뿐이라는 학설 사이에는 그 어떤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504)


"그렇게 사회주의자들은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그렇지 못하다. 사회주의자들이 승리하는 순간 사회주의는 몰락한다. 대중이 전력을 다하여 지도자들을 교체한 뒤 만족해하는 것은 가히 희비극이라 할만하다. 노동자들에게는 오로지 〈정부를 충원하도록 하였다〉는 명예만이 남을 뿐이다. 선의의 이상주의자들조차 일단 지도자가 되면 단기간 내에 지도자의 일반적 속성들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반(反)낭만주의자들이 1833년 경에 그런 회의감을 다음과 같은 신랄한 풍자 속에 담아냈던 것은 역사적으로 그럴 만하였기 때문이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길거리에서 총질을 하는 사람들이 벌이는 것이 혁명인가? 그런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창문이나 깨뜨릴 뿐이고, 거기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리장수밖에 없다. 이런 흥분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투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사람들을 깔아뭉갠다. ······혁명이란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는 정직한 인민을 선동하려는 노력일 뿐이다.〉"(505-6)


결론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에서 과두 체제가 형성되는 것은 '유기적인' 과정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사회주의적인 조직이든 아나키즘적 조직이든 할 것 없이, '모든' 조직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다. 할러가 이미 지적한 대로, 모든 조직 관계에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자연적으로 형성된다. 따라서 모든 정당 조직은 민주적 토대 위에 선 강력한 과두정이다. 어느 곳이나 선출하는 자와 선출되는 자가 있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선출된 지도자는 선출한 대중을 지배한다. 조직의 과두적 구조는 조직의 민주적 토대에 의하여 숨겨진다. 후자는 당위이고, 전자는 현실이다. 이러한 본질적 차이는 대중에게 철저하게 은폐된다." "문화적으로 우월하고 말솜씨도 뛰어난 지도자들의 견고한 연설에 지속적인 영향을 받은 나머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하나의 고정 관념이 생겨난다. 투표를 통하여 자신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대변인에게 위임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자신이 〈지배에 한몫〉한 것이라는 관념이 그것이다."(509-10)


"사회주의자들이 공권력을 장악한 뒤에 대중에게 약간의 통제권을 제공하면 지도자와 추종 대중 간의 이해관계가 완벽하게 합치되리라는 생각은 매우 비과학적인 가정이다." "(사회주의가 인간을 신으로 만들 것이라는 주장과 달리) 우리가 사실로 확인한 대중의 미성숙은, 민주화가 진전되어 사회주의가 이룩되면 곧바로 소멸되어버릴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이는 대중의 본질 그 자체로부터 해명된다. 대중은 조직되더라도 자기 앞에 놓여 있는 복합적 문제의 해결에 본질적으로 무능하다. 대중은 노동분화와 전문화와 지도를 필요로 하는 무정형의 군집이다. 〈인류는 지배당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인류에 혐오감을 느낀다〉라고 프루동은 1850년에 감옥에서 썼다. 개별적인 인간은 대개 천성적으로 지도에 의존한다. 근대적 삶의 기능들이 분화되면 분화될수록, 그 경향은 더욱 커진다. 그리고 개별적인 인간들로 구성된 조직은 개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지도에의 욕구를 갖는다."(513)


"민주주의의 본질은 각 개인의 정신적 비판 능력을 강화하고 촉발시킨다는 데에 있다. 비록 민주주의 조직이 관료화되면서 그러한 통제 능력이 크게 약화되지만, 본질은 그렇다." "과두적 현상이 역사적으로 필연적이라고 해서, 민주주의자들이 그에 대하여 투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력이 오랜 동지들은 숙명적으로 지도자, '사회학적 의미에서의 지도자'가 된다. 그러나 정치 활동에 찌들고 분노하여 정치의 장을 떠나고 그로써 그 지도자들을 통제하지 않은 채 방치하는 것은, 조직의 이념을 손상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권력을 예감할 수조차 없는 수준으로까지 확대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서두에서 지적하였듯이 조직이란 오늘날의 모든 사회 계층, 특히 재정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과두적 위험성을 있는 그대로 명료하게 직시하여야만, 과두정의 위험을 막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515-6)


"역사 속의 민주주의의 흐름은 몰려오는 파도와 같다. 파도는 항상 바위에 부딪쳐 깨진다. 그러나 파도는 영원히 다시금 몰려온다. 파도가 연출하는 연극은 격려와 절망을 교차시킨다. 민주주의는 일정한 발전 단계에 도달하면 곧바로 타락하기 시작한다. 그때 민주주의는 귀족정의 정신을, 때로는 귀족정의 형식까지 받아들이고, 한때 민주주의가 투쟁하였던 귀족정과 유사해진다. 그러면 다시 민주주의의 내부에서 민주주의의 과두적 성격을 지책하는 새로운 비판자들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들은 영광의 투쟁기와 불명예스럽게 지배에 참여하는 시기를 겪은 뒤에, 마침내 다시 구(舊)지배계급 속으로 흡수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내건 새로운 자유의 투사들이 또 다시 등장한다. 청년의 치유할 수 없는 이상주의와 노년의 치유할 수 없는 지배욕 사이의 가공스러운 투쟁은 그렇듯 끝없이 이어진다. 언제나 새로운 파도가 언제나 똑같은 바위에 부딪친다. 이것이 정당사의 심원한 서명(署名)이다."(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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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한 성찰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02
조르주 소렐 지음, 이용재 옮김 / 나남출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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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1장 계급투쟁과 폭력


"나는 우선, (부르주아들이 그리 가혹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화평론자들의 이론과 행동은 의무라는 관념에 토대를 두는데, 법이란 엄밀한 규정을 추구하는 것임에 반해 의무란 전혀 결정되지 아니한 그 무엇이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이러한 차이는 법이 생산의 경제 속에 실질적 기반을 갖는 데 반해 의무는 체념, 선의(善意), 희생 따위의 감정에 토대를 둔다는 점과 관련된다. 그런데 의무감에 따르는 자가 충분히 체념했는지, 충분한 선의를 가졌는지, 충분히 희생했는지 과연 누가 판단할 수 있겠는가?" "경제영역에서 사람들은 일정한 이익을 포기해야 할 때 느끼는 거부감의 정도에 따라 자신의 의무에 한계를 설정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고용주가 늘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자부할지라도, 노동자는 정반대로 생각할 것이다. 이 경우 어느 쪽이 옳다고 쉽사리 단정할 수는 없다. 고용주는 자신이 영웅적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믿을 것이며, 노동자는 이른바 이 영웅심을 파렴치한 착취로 받아들일 것이다."(97-8)


"만일 노동자들이 고용주의 강요를 아무 저항 없이 참아냈다면, 이는 노동자들이 고용주의 의지가 경제적 불가피성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좌우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업이 끝나고 나면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었으며, 아래로부터 강한 압박을 가했다면 고용주로서는 이른바 경제의 속박이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단을 스스로 찾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노동자들은 고용주들이 애당초 어떤 양보도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던 것을 잊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고용주들이 무지하거나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는 (실질적 한계 내에서) 구속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사실상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완벽하게 자유로운 것인 양 추론한다. 그들이 보기에 이러한 자유를 속박하는 것은 경쟁에 따른 필요가 아니라 기업주의 무지이다. 이리하여 맑스 사회주의에 담긴 계급투쟁 이론의 정식 중 하나인 '생산의 무한성'이라는 관념이 도입된다."(102)


"나는 여기서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관계에 대해 클레망소가 보여준 성찰을 인용하고자 한다. 〈적으로 하여금 더 많이 요구하도록 하는 데, [항구적 양보정책보다] 더 나은 수단은 없다. 인간이든 권력이든 그저 양보만 한다면 결국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셈이 될 것이다. 사는 자는 저항한다. 저항하지 않는 자는 산산이 깨질 것이다(〈여명〉, 1905년 8월 15일).〉 폭력위협 앞에서 늘 양보하는 식의, 말하자면 부르주아지의 비겁성에 기반을 둔 사회정책은 부르주아지가 사형언도를 받았으며 부르주아지의 소멸은 이제 시간문제일 따름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게 마련이다. 따라서 폭력을 동반하는 개개 투쟁은 일종의 전위전이 되어버리며,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비록 대규모 전투가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충돌이 일어날 때마다 파업노동자들은 그것이 곧 나폴레옹 전투(섬멸전)의 시작이기를 바란다. 이리하여 파업관행으로부터 파국적 혁명이라는 관념이 생겨난다."(107-8)


제2장 부르주아지의 쇠퇴와 폭력


"맑스에 따르자면, 자본주의는 그 본성에 따른 내재적 법칙에 의해 마치 유기체의 진화에 나타나는 극도의 엄밀성을 띠고서 현재세계를 미래세계의 문턱으로 이끄는 길에 접어들게 된다. 이 흐름은 자본주의가 구성되는 오랜 단계를 거치게 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몫으로 남겨진 자본주의의 신속한 파괴로 끝을 맺는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가 얻게 될 유산, 즉 현 체제를 전복시킬 인간들과 이러한 파괴를 낳을 수단들을 창조하게 되나, 그와 동시에 이러한 파괴작업은 생산과정에서 획득된 결과들을 보존하는 메커니즘을 작동시키게 된다. 자본주의는 노동하는 새로운 방식을 낳는다. 즉 자본주의는 임금에 가해지는 압박을 통해 노동자계급을 혁명조직으로 몰아넣게 되며, 기업주들을 끊임없이 파산으로 몰고가는 경쟁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위축시킨다.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는 노동의 조직이라는 커다란 문제를 해결한 연후에 결국 자본주의를 전복시키게 될 원인을 잉태하게 되는 것이다."(123)


"자본주의는 역사의 진전을 위해 가져다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현 사회로부터 끄집어낸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들이 떠맡은 혁명적 역할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기만 하면 된다. 줄기찬 비판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조직들을 완성할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의 역사에서는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제도들을 구축할 수 있도록, 대기업에 고용된 생산자로서의 자신의 위치에서 연유할 뿐 부르주아적 사유에서는 아무것도 빌려오지 않은 자신만의 사상을 형성할 수 있도록, 나아가 오늘날 부르주아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유의 습속이 몸에 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에게 저항조직들에서 출현하는 맹아적 구성체들을 어떻게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가를 일깨워주어야 한다." "부르주아지가 열과 성을 다해 자본주의적이 될수록, 프롤레타리아트가 투쟁정신으로 충만하고 자신의 혁명적 힘을 신뢰하면 할수록, 운동의 성공은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124-5)


"노동자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의 선의에 대해 우리의 배은망덕으로 보답하는 것, 인류의 박애를 호소하는 자의 설교에 욕설로 맞서는 것, 사회평화를 주창하는 자의 제안에 주먹질로 답하는 것, 이러한 일들은 물론 조르주 르나르 부처가 내세우는 사교계 사회주의의 규범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부르주아들에게 그들 자신의 일에, 아니 그들 자신의 일에만 전념하라고 알려주는 아주 실제적 방안이다. 폭력의 성격에 대해 누구도 환상을 품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민주정치의 설교자들이나 정부의 대표자들을 세차게 몰아붙이는 것이 아주 유용하다고 나는 믿는다. 폭력은 그것이 계급투쟁의 노골적이고 명확한 표현일 때에만 역사적 가치를 지닐 수 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가 어떤 수단을 부려서든, 사회과학의 도움으로서든, 아니면 숭고한 감정에 충만해서든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너그러운 환대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스스로 여기게끔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127-8)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예상치 못한 하나의 새로운 사실에 직면해 있다. 즉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힘을 완화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맑스주의의 개념이 이제 수명을 다한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사회평화가 갈등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바로 그 순간에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이 무대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은 미래의 혁명을 담보할 뿐만 아니라 박애주의에 얼이 빠져 있는 유럽의 국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옛 활력을 되찾도록 해주는 유일한 수단으로 보인다. 이러한 폭력은 자본주의로 하여금 자신의 물질적 역할에만 전념케 하며, 예전에 지녔던 자본주의의 전투적 특질을 다시 회복시켜주는 경향이 있다. 날로 막강해지고 견고한 조직을 갖춘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이 산업투쟁에서 강인한 적대자로 남도록 밀어붙일 수 있다. 정복욕에 굶주리고 부유한 부르주아지에 맞서서 하나로 뭉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일어선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그 역사적 완성형태에 도달할 것이다."(129-30)


제3장 폭력에 대한 편견들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이 지난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을─가령 프랑스대혁명 중 벌어진 1793년의 공포정치 같은─들추어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는 그저 약간의 관찰만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혁명감찰위원회, 거칠고 의심 많고 공포에 질린 경찰들의 폭력, 단두대의 비극 따위를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의회사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은 다정다감한 목자(牧者)이고, 폭력에 대한 증오라는 한 가지 열정만을 갖고 있으며, 자신들의 심장은 선행의 감정으로 충만해 있다는 사실을 일반 대중에게 설득하려고 왜 그리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기꺼이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에 맞선, 부르주아지의 보호자라고 자처한다. 그리고 그들은 박애주의자로서의 자신들의 위엄을 고양할 요량으로 아나키스트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때는, 그들은 비겁과 위선도 서슴지 않으면서 한순간에 그 관계를 끊어버린다."(146-7)


"구체제의 근본사상 중 하나는 왕권에 장애가 되는 모든 권력체들을 일소하기 위해서 형사소송 절차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원시사회들에서 형법은 애당초 지배자와 그의 은총을 받은 특권자들에게 부여된 일종의 보호막이었다. 법의 힘이 주민들 모두의 인신과 재산을 아무 차별 없이 보호해주게 된 것은 훨씬 나중에 와서의 일이다. 중세는 고래(古來)의 습속으로 회귀하고자 했던 만큼, 재판과 관련된 아주 케케묵은 사상들이 다시 등장했으며 재판소의 임무가 군주의 위대함을 인식시키는 일로 간주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한 역사적 사건이 이러한 형법체제의 놀라운 발전을 촉진했다. 종교재판소는 당국을 귀찮게 하는 사람들을 빈약한 증거만으로도 가혹하게 벌하고 다시는 당국에 대들지 못하게 만드는 법원들의 모델이 되었다. 군주정은 종교재판소에서 많은 절차들을 빌려왔으며 거의 항상 그 원칙들을 따랐다." "즉, 재판의 목적은 법률이 아니라 국가였던 것이다."(152-3)


"섬너 멘느는 18세기 말 이후에 정부와 시민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지적한다. 옛날에 국가는 항상 선량하고 현명한 것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국가의 운용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중범죄로 취급되었다. 반면에 자유주의 체제는 자유로운 시민이 최선의 방책을 선택할 수 있으며, 이제 주인에서 종복으로 변한 정부를 비판하는 일이 시민의 권리들 중 으뜸가는 권리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멘느는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내가 보기에 그 원인은 우선 경제적 차원에 있는 듯하다." "우리는 아마도 1793년에 활약했던 인물들보다 더 훌륭하지도 더 인간적이지도 않으며 타인의 불행에 더 민감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아마도 그 당시보다 더 비도덕적이리라는 것도 기꺼이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그토록 많은 희생제물을 갖다바쳤던 국가라는 신에 대해 우리 선조들만큼 미신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156-7)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은 정적(政敵) 숙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은 순수한 전쟁행위 그 자체인바, 군사적 시위의 효과를 갖고 계급간의 분리를 확보하는 데 이바지한다. 전쟁과 관련된 모든 것은 어떠한 증오도 복수심도 없이 진행된다. 전쟁에서 패배한 자는 살해당하지 않으며, 군대가 전장에서 겪었을 허망한 일들을 비전투원들로 하여금 감내하게 하지도 않는다." "생디칼리슴이 구체제와 교회에서 나오는 낡은 미신들을 버리고 발전하면 할수록, 사회적 갈등들은 더욱더 교전 중인 군대와 유사한 순수한 투쟁의 성격을 띨 것이다. 우리는 미래로 향한 사법권이라는 고도로 이상화된 무언지 모를 어떤 영장을 집행하라고 인민에게 가르치는 사람들을 아무리 비난해도 지나치지 않다. 계급투쟁의 관념에 의해 폭력의 관념이 새롭게 정의되는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1793년의 온갖 유혈극을 낳았던 국가에 대한 개념을 그대로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163-4)


"(국가권력을 쥐고자 하는) 의회사회주의자들은 반애국주의가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타협 불가능한 것을 타협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많은 혜택을 약속해주는 소중한 국가를 포기할 수 없다." "따라서 혁명적 생디칼리슴과 국가 사이에 어떤 절대적 대립관계가 존재한다는 데는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대립은 프랑스에서 반애국주의라는 특히 신랄한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이는 정치인들이 사회주의의 본질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혼동을 불어넣기 위해 온갖 지식을 다 동원했기 때문이다. 애국주의의 지평에서는 어떤 타협도, 중도적 위치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온갖 부류의 부르주아들이 사회주의를 타락시키고 노동자들을 혁명사상에서 떼어놓기 위해 모든 유인수단을 다 동원할 때, 생디칼리스트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확실히 해야만 하는 곳이 바로 이 애국주의의 지평이다."(166-7)


제4장 프롤레타리아의 파업


"온갖 부류의 야심가들이 만들어낸 이 시끄럽고 수다스러우며 위선으로 가득 찬 사회주의, 몇몇 어릿광대에게나 재미를 주고 타락한 자들이나 찬미하는 이 사회주의의 반대편에 어떤 것도 모호하게 남겨두려 하지 않는 생디칼리슴이 서 있다." "생디칼리슴이 지향하는 바를 따르려면, 대립점들을 희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두드러지게 드러내야 한다. 서로 투쟁하는 집단들을 가능한 한 뚜렷한 모습으로 고착시켜야 한다." "이러한 결과들을 확실히 얻어내는 데는 언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현대사회에 맞서 사회주의가 벌이는 전쟁의 다양한 양태들에 대응하는 감정의 덩어리를, 모든 세밀한 분석에 앞서서 한 덩어리로서 그리고 단 한번의 직관으로 일깨울 수 있는 총체적 이미지들에 호소해야만 한다. 생디칼리스트들은 사회주의 일체를 총파업이라는 드라마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다. 모든 선이 명확하게 그어지며 따라서 사회주의에 대한 한 가지 해석만이 남을 뿐이다."(174-5)


"신화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화들을 역사의 흐름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에 대한 모든 논의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직 중요한 것은 전체로서의 신화 자체이다." "설사 혁명가들이 총파업에 대한 환상적 청사진을 품음으로써 완전히 오판했다고 할지라도, 그 청사진은 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차적 힘의 요소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총파업 이념의 의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정치가와 사회학자 또는 학문의 실용성을 내세우는 자들 사이에 오가는 모든 토론방식을 접어두어야만 한다. 우리는 상대방이 논박할 수 있다고 믿는 테제의 가치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이 입증하고자 애쓰는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 즉, 총파업이 부분적으로 현실성이 있는가, 아니면 단지 대중적 상상력의 소산인가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 교의가 기대하는 모든 것을 총파업이 포괄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180-1)


"이러한 문제를 풀려면, 우리는 더 이상 미래에 대해 현학적으로 추론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철학, 역사학, 경제학 등에 대한 고매한 성찰에 빠져서는 안 된다." "총파업이란 사회주의의 모든 것이 담긴 신화, 달리 말하자면 현대사회에 맞서서 사회주의가 벌이는 전쟁의 다양한 표현들에 부합하는 모든 감정을 본능적으로 일깨울 수 있는 이미지들의 총화이다. 파업은 프롤레타리아에게서 그들이 가진 가장 숭고하고 가장 심원하며 가장 역동적인 감정을 일깨웠다. 총파업은 이 감정들 모두를 하나의 조감도 안에 결집하며, 이렇게 결집함으로써 그것들이 제각기 가장 강렬한 색체를 띠게 한다. 개별 투쟁들의 쓰디쓴 기억에 호소하면서 총파업은 의식에 주어진 모든 지엽적 투쟁들을 활기찬 생명력으로 채색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언어로는 충분히 명확하게 전달할 수 없는, 사회주의에 대한 직관을 얻는다. 요컨대 우리는 순간적으로 포착한 전체 속에서 직관을 얻는 것이다."(181-2)


제5장 정치적 총파업


"우리가 정치적 총파업을 혁명적인 동시에 의회주의적인 사회주의자들의 핵심전술로 간주한다면, 이들과 생디칼리스트들 사이의 명확한 차이를 식별해내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우선 우리는 정치적 총파업이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지를 공격하는 싸움터에 집중된 계급투쟁을 결코 전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여기서는 두 적대진영으로의 사회분리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러한 유형의 폭동이란 사실 어떤 사회구조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대다수 혁명들은 여러 불만집단들 사이의 동맹의 결과였다. 사회주의 저술가들은 흔히 가난한 계급들이 봉기하더라도 결국 새로운 지배자의 수중에 권력을 쥐어주는 것 외에 어떤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학살당하고 마는 여러 사례들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지배자들은 낡은 권력체들에 맞선 인민들의 일시적 불만을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223-4)


"정치적 총파업의 개념에서 보자면, 프롤레타리아의 조직 일체가 혁명적 생디칼리슴 안에 포괄되어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생디칼리스트의 총파업이 더 이상 혁명의 전부일 수 없으므로, 노동조합들과 나란히 별도의 기구들이 조직될 것이다. 파업은 때맞추어 터뜨려야 할 많은 여러 사건들과 절묘하게 결합되는 보급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노동조합들은 정치위원회들의 추진력을 받아들여야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사회주의 운동의 지적 상층부를 대변하는 위원회들과 완벽하게 보조를 맞추어나가야만 할 것이다." "정치적 총파업은 아주 다양한 사회집단들 모두가 국가의 마술적 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믿음은 쇠퇴하는 집단들에게서 특히 잘 나타나는데, 달변가들이 마치 만능인 양 처신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믿음에 기대서이다. 정치적 총파업은 박애론자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큰 도움을 얻는데, 이러한 어리석음은 대개 부유한 계급들의 쇠퇴에 따른 결과이다."(224-6)


"나는 절대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변화라는 혁명의 특성을 줄곧 유지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이러한 특성이야말로 사회주의에 그 숭고한 교육적 가치를 부여하는 데 널리 기여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추구하는 이 진지한 과업은 우리 정치인들을 따르는 한량 고객님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총파업은 미래사회에 대한 청사진들로 가득 차 있다. 정치인들은 부르주아지들을 안심시키고자 하며, 인민이 자신의 아나키즘적 본능에 빠져들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부르주아지에게 약속한다. 정치인들은 자신들로서는 결코 거대한 국가기구를 폐기할 생각이 없으며, 따라서 현명한 사회주의자라면 두 가지를 원한다고 부르주아지에게 설명한다. 그 하나는 국가기구를 장악해서 그 기능을 완벽하게 다듬고 자신의 친지들에게 최선의 이익이 돌아가도록 운용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정부의 안정성을 확보해서 사업가들에게 더 많은 이득이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227-8)


"소위 말하는 절제된 사회주의(socialisme sage)를 연구한 저자들은 누구나 이 절제된 사회주의라는 것이 두 집단으로 나뉜 사회를 전제한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 하나는 정당으로 조직된 엘리트 집단이다. 이 집단은 사고력을 지니지 못한 대중을 대신해서 몸소 사고하는 사명을 떠맡으며, 대중에게 자신들의 높은 지식을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짐짓 스스로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 다른 하나는 생산자 전체이다. 정치 엘리트는 자신의 지식을 사용하는 것 외에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프롤레타리아가 자신들을 먹여 살리고 금욕생활자와는 전혀 닮은 점이 없는 자신들의 생계를 보장해주는 것을 본원적 정의(그들만이 이 정의의 소유자이다)의 원칙에 부합되는 일로 여긴다. 이러한 분리는 아주 명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굳이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관변 사회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정당에 대해 마치 그 자체가 고유한 생명을 지닌 유기체인 양 말한다."(229)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모든 활동은 대중을 자본주의 경제의 조건들에 복속시키는 데,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하는 데 집중되어 온 반면, 혁명활동은 자유로운 인간들을 창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통치자들은 프랑스의 도덕적 통합을 실현한다는 사명을 자임하고 있다. 이러한 도덕적 통합이란 생산자들을 우월한 지성을 지닌 지도자들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일하도록 만드는 기계적인 기율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생디칼리슴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은 바로 민주주의를 모방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생디칼리슴으로서는 부르주아지의 정치형태를 모방하는 노동조합들의 지배를 받느니보다, 차라리 당분간 허약하고 무질서한 조직들로 만족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들은 이 점에서 판단을 그르친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을 부르주아지를 모방하는 길로 몰아넣고자 하는 부류는 바로 생디칼리스트의 총파업의 적이며, 또 그들 스스로 적이라고 자백했기 때문이다."(250-1)


제6장 폭력의 윤리성


"법전(法典)들은 폭력에 대한 온갖 대비책들을 담고 있고 교육은 우리의 폭력성향을 한껏 누그러뜨린다는 목적 아래 이루어지는 까닭에, 우리는 폭력행위란 야만으로의 후퇴의 한 표현이라고 본능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온화함의 미덕을 내세우는 자들에게, 폭력은 경제적 진보를 저해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일정한 한계를 넘어설 경우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양보가 여기서 제기하는 이론에 대한 반대논거로 이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폭력을 단지 그 이데올로기의 결과라는 관점에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노동자들로 하여금 경제적 투쟁들을, 미래를 결정지을 위대한 전투의 축소판 이미지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유혈이 동반된 잔혹행위가 대규모로 발현되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거리낌 없고 충직한 반동적 태도가 프롤레타리아의 폭력만큼이나 계급들 간의 분리에 큰 기여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255-8)


"옛날의 위험한 계급들은 아주 단순한 위법행위, 가장 쉽게 저지르는 위법행위, 즉 오늘날 경험도 판단력도 없는 젊은 부랑아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위법행위를 저지르곤 했다. 하지만 이러한 난폭성의 행위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인가 비정상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만일 난폭성이 엄청날 경우 우리는 피고인이 과연 건전한 상식의 소유자인가를 묻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명백히 범죄자가 도덕적으로 교화되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들이 경제여건의 변화에 따라 행동양식을 바꾸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옛날의 잔혹성은 지능적 수법으로 대체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대개 금전적 손실은 일상적으로 겪는 문제인 만큼 쉽사리 회복될 수 있는 사건인 반면에 신체적 위해는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지능범죄를 흉악범죄보다 훨씬 덜 위험한 것으로 여기게 되며, 범죄자들은 재판에서 반영되는 이러한 변화를 이용한다."(269-71)


"노동조합을 민주주의 정부의 보조기구 역할을 하는 정치 범죄죕단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1884년 이후 발덱루소가 추진한 계획이었다. 노동조합은 프리메이슨 단(團)이 떠맡았던 역할과 비슷한 역할을 할 것이었다. 후자가 관료들에 대한 사찰기능을 했듯이, 전자는 행정당국에 비협조적 고용주들의 이익을 위협하는 역할을 맡았다. 프리메이슨 단은 훈장으로 포상을 받았으며 그 측근들도 많은 혜택을 얻었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고용주들에게서 더 많은 임금을 얻어낼 권리를 보장받았다." "이 체제가 순조롭게 기능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노동자들이 온순하게 처신해야만 한다. 폭력은 눈에 띄지 않게 뒤로 물러서야 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욕구도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에게 제공되는 뇌물의 원칙, 즉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적당한 선에서 조절할 줄 아는 한, 사람들은 정치인들을 눈감아준다는 원칙과 동일한 원칙이 여기서도 적용되어야 한다."(286)


"우리는 사상사가들이 고매한 격률이라고 이름 붙인 격률이 대개 아무런 효력도 없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것은 스토아학파의 경우에 명백한 사실이었으며 칸트철학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 타당한 사실이다." "인간이 윤리성에 어긋나는 여러 성향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인간 내부에 어떤 강력한 원동력, 즉 모든 의식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성찰된 타산이 정신 속에 스며들기 전에 활동하는 어떤 신념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윤리적 확신은 결코 의지적 개인의 추론이나 교육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기꺼이 참여하고자 하며, 또한 명료한 신화들 속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일종의 전쟁상태에 의존한다. 가톨릭 국가들에서 수도사들은 세상을 제압하고 자신들을 굴복시키고자 하는 악의 제왕에 맞서 투쟁을 벌인다.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에서는 군소 광신종파들이 그 역할을 떠맡는다. 바로 이러한 전쟁터가 기독교 윤리로 하여금 어떤 숭고성의 특징을 가지고 유지될 수 있도록 해준다."(292-5)


"많은 식자들의 견해에 따르자면, 영국에서 지금 벌어지는 파업들에 나타난 폭력에서 간계로의 이행은 아무리 예찬해도 지나치지 않다. 노동조합들은 외교적 언사로 치장된 협박을 구사할 권리를 얻어내려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노동조합들은 조합대표가 조업 중인 노동자들에게 노조의 지침을 따르면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설파하면서 공장을 돌아다닐 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기 원한다." "영국에서는 오래전부터 폭력이 모든 혁명적 성격을 상실한 것이 사실이다. 직업적 이익을 주먹다짐을 통해 추구하든 간계를 통해 추구하든, 이 두 방식 사이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영국 노동조합의 평화적 전술에는 선량한 나리들의 몫으로 남겨 두는 편이 나을 어떤 위선이 담겨 있다. 총파업 관념이 존재하는 나라에서는, 파업 중에 노동자들과 부르주아 대표들 사이에 주고받는 다툼은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아주 원대한 결과를 가져오며 숭고성을 낳을 수 있다."(299-300)


제7장 생산자의 윤리


"오랫동안 사회주의자들을 지배한 미몽(迷夢), 곧 선거 민주주의는 여러 면에서 주식거래소의 세계를 닮았다. 두 경우 모두 대중의 순진함을 이용해야만 하고, 거대신문의 협조를 매수해야만 하며, 온갖 간계를 다 동원해서 행운의 도움을 요청해야만 한다. 몇 년 안에 거덜날 시끌벅적한 사업을 시장에 들여오는 금융자본가와, 실행방안도 없고 결국 의회 서류뭉치로만 남을 온갖 개혁안들을 동료 시민들에게 남발하는 정치인 사이에는 그다지 큰 차이점이 없다. 이 두 부류는 생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생산을 통제하려 하고, 생산을 잘못 인도하고 있으며,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생산을 이용하려 한다.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현대산업의 경이적 발전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 세계는 부가 넘쳐흐르므로 그중 상당한 몫을 훔쳐내더라도 별로 생산자들의 원성을 사지 않을 것으로 쉽사리 단정한다. 납세자들을 폭동으로까지 내몰지는 않으면서 짜내는 것, 유력 정치인이나 금융자본가가 가진 기술이 바로 이것이다."(313)


"무엇이 과연 규율(規律)이라는 후대에 생긴 관념을 대신했는가를 승전을 거듭하던 나폴레옹의 군대에서 찾아보고자 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당시에 병사들이 말단 졸병의 가장 사소한 실수만으로도 전체의 승리와 모든 전우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라고─따라서 병사들이 그 확신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라고─말할 수 있다. 이것은 병사들이 승리를 가져오는 요인들의 상대적 가치를 염두에 두지 않으며, 따라서 모든 것을 질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관점에서 고려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이와 유사한 기백을 우리는 총파업에 열중하는 노동자 단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노동자들은 사실상 혁명을 개인주의적이라고 칭할 수 있는 거대한 봉기로 생각한다. 각자는 가능한 최고의 열정을 가지고 진군하고, 자신의 생각에 비추어 움직이며, 자신의 행동을 정교하게 조합된 어떤 총괄적인 원대한 청사진에 종속시키려 하지 않는다."(340-1)


"프롤레타리아는 민주주의의 비속한 본능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프롤레타리아는 고위관료로 변신한 옛 동지 앞에서 네 발로 기기를 결코 원치 않으며, 장관님 댁 사모님들의 화장실 앞에서 안락에 빠져들기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혁명적 대의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늘 아주 겸허한 삶의 조건 속에 머물러야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은 남의 이목을 끌지 않으면서 조직활동을 계속한다." "만일 아무 불평 없이 투쟁하고 아무 이익도 구하지 않으면서 역사의 원대한 과업을 성취하는 인간들의 자기헌신을 역사가 포상한다면, 우리는 사회주의의 도래를 확신할 수 있는 새로운 이유를 갖게 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주의는 지금껏 인간에게 알려진 가장 숭고한 윤리적 이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땅 밑에서, 부르주아 사상가들의 도움 없이 만들어질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다. 탄생할 것은 미덕, 즉 부르주아 지식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미덕, 하지만 문명을 구원할 수 있는 미덕이다."(320-2)


옮긴이 해제


# 소렐의 사상 편력

1. 제1기(1893~1897년) : 1891년 파나마운하의 개발이권을 놓고 권력과 재벌이 야합한 부패스캔들이 터진다. 부르주아 정권의 탐욕과 기만을 목도한 소렐은 부르주아 지배체제에 대한 단호한 비판자이자 맑스주의 이론가로서 입지를 굳혀나갔다.

2. 제2기(1898~1902년) : 드레퓌스 사건에서 중도적 또는 방관적 입장을 취한 프랑스 노동당과 달리 공화정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공화주의 세력과의 연합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인 소렐은 베른슈타인의 뒤를 이어 개량적 사회주의의 길로 접어든다.

3. 제3기(1903~1908년) : 1902년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친드레퓌스 진영의 부르주아 급진 정부가 부패와 권력다툼으로 물들어가자, 소렐은 이를 비판하면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즉 혁명적 생디칼리슴의 대변인을 자처한다.

4. 제4기(1909~1913년) : 소렐은 (아마도) 1909년의 대규모 노동자 파업이 빚은 폭력사태와 정부의 유혈진압을 계기로 혁명적 생디칼리슴에 대한 신뢰를 점차 거두었고, 극우 왕정주의 노선을 이끌던 샤를 모라스 같은 이와 친교하기 시작한다.

5. 제5기(1915~1921년) : 전쟁의 참상을 접하면서 극우파 진영으로부터 등을 돌린 소렐은 돌연, 서구사회의 쇠락을 치유할 마지막 희망이자 새로운 시대를 개척할 선구자로서 러시아의 레닌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게 마음을 의탁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폭력이라는 말을 〈타인에게 위해를 끼치는 난폭한 힘〉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사회학적 문맥에서 고찰해볼 때, 우리는 폭력을 한편으로 기성 지배체제가 휘두른 제도적 강압이나 강자의 약자에 대한 물리적 강제와 같은 억압의 폭력과, 다른 한편으로 지배체제에 대한 탈법적 항거나 생존을 위한 방어적 저항과 같은 해방의 폭력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소렐은 전자의 경우는 '무력'(force)으로 후자의 경우는 '폭력'(violence)으로 구분해서 부를 것을 제안한다. 〈무력이 소수 지배자의 통치질서를 강제하는 힘이라면, 폭력은 기존 질서의 파괴를 지향하는 힘이다.〉 그는 프랑스대혁명 당시 강압적 공포정치를 이끈 부르주아의 무력과, 총파업을 통해 지배체제를 파괴하고자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을 명확히 구별한다.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은 부르주아의 무력과는 달리 〈어떤 증오도 복수심도 불러일으키지 않으며〉 영웅적으로 표출된 〈계급투쟁 감정의 순수하고 단순한 형태〉일 뿐이다."(408-9)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이 순수한 계급감정으로 표출되는 것이 바로 총파업이다. 생디칼리슴은 사회주의 일체를 총파업의 틀 안에서 생각한다. 소렐이 총파업 테제를 승인한 것은 그것이 한편으로 자본주의 체제와 투쟁하는 구체적 방법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의회정치, 특히 의회사회주의를 거부한다는 실천적 표현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소렐이 프롤레타리아의 혁명무기인 총파업을 궁극적으로 맑스주의의 본질을 구현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을 고양시킬 사회적 '신화'(mythe)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맑스주의를 과학적 진리인 양 받아들인 정통 맑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소렐은 맑스주의를 인간의 해방을 추구하는 운동의 신화적 표현, 즉 일종의 '사회시(社會詩)'로 받아들였다. 그에게 사회주의란, 우선 직접 행동을 통해 인간의 완전한 해방에 이르는 윤리적 원칙이자 정신적 상태를 의미했다."(409-10)


"맑스주의를 과학적 명제이기에 앞서 사회적 통찰력으로 받아들인 소렐에게 맑스의 계급투쟁과 혁명이론의 핵심을 현대세계에 구현한 것이 바로 총파업 신화이다. 이렇게 볼 때, 사회주의 사상사에서 소렐의 독창적 면모는 그가 생디칼리슴의 총파업 신화를 통해서 맑스주의에 프롤레타리아 행동의 신화적 조직화라는 역할을 부여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궁극적으로 맑스주의가 진정으로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한 이론이 되려면, 그 혁명적 신화로서의 차원, 즉 노동자계급을 결집하는 행동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되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20세기 초에 제도권 사회주의라는 개량주의의 덫에 걸려 있는 맑스주의는 혁명적 생디칼리슴의 비전과 결합함으로써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며, 노동자계급의 이념으로서의 진정한 혁명성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소렐이 묘사한 혁명적 생디칼리슴은 바로 총파업 신화로 단련된 프롤레타리아의 생명력을 얻어 쇄신된 맑스주의에 다름 아니었다."(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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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탄생 - 뇌과학으로 풀어내는 매혹적인 스토리의 원칙
윌 스토 지음, 문희경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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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내가 보기에 플롯에 대한 기존의 접근법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플롯 구조에 집착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나는 플롯을 마법의 공식처럼 떠받든 탓에 간혹 요즘의 이야기가 가볍고 단조로운 느낌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플롯만 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므로 플롯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인물에게로 돌려야 한다. 우리는 자연히 사건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결함이 있고 매력적이고 구체적인 누군가의 역경을 보면서 응원하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소파 쿠션에 머리를 박기도 한다. 플롯 표면에 드러난 사건도 물론 중요하고 플롯 구조가 제 기능을 다하고 규율을 따라야 하지만 플롯이 존재하는 이유는 결국 그 안의 인물을 위해서다." "나는 강렬하고 심오하면서도 독창적인 플롯은 주요 원칙을 나열한 목록이 아니라 인물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믿는다. 풍성하고 진실하며 서사적 놀라움이 가득한 인물을 창조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 인물이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알아보는 것이다."(18-20)


1장 만들어진 세계


"진화론에서는 우리의 목적이 살아남아 번식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이성에게 좋은 짝이라는 확신을 주려면 매력이나 지위, 명성, 구애 의식과 같은 사회적 개념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결국 뇌의 궁극적인 사명은 상대를 통제하는 일이다. 뇌는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과 그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지각하고 그 사람들을 '통제'해야 한다. 세계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배워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뇌는 세상을 통제하기 위해 항상 예기치 못한 상황을 경계한다. 뜻밖의 변화가 위험을 불러오고 우리의 목숨을 노릴 수도 있기 때문인데, 한편 그런 변화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뜻밖의 변화라는 우주의 갈라진 틈새로 미래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변화는 희망이자 약속이고 더 나은 내일로 가는 굴곡진 여정이다. 삶에서 예기치 못한 변화와 맞닥뜨릴 때 우리는 알고 싶어 한다." "예상 밖의 변화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 호기심이야말로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독자가 느껴야 하는 감정이다."(31)


"예기치 못한 변화만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뇌가 세계를 통제하려면 우선 그 세계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호기심을 가진다. 태어난 지 9주 된 아기도 이미 한 번 본 이미지보다 낯선 이미지에 더 끌린다. 2세에서 5세 사이의 아이들은 보호자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을 약 4만 개나 던진다. 작가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독자에게 그 세계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으면서 정보에 대한 갈증을 자극한다." "호기심은 소문자 n 모양의 그래프를 그린다. 질문의 답을 전혀 모르면서도 안다고 확신할 때 호기심이 가장 적다. 호기심이 가장 큰 구간(작가가 개입하는 영역)은 조금은 알 것 같지만 확신이 들지 않는 경우다. 뇌 스캔을 해보면 호기심이 생길 때 뇌의 보상체계가 약간 자극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말하자면 우리가 이야기에서 답을 궁금해하거나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싶어하는 것은 마약이나 섹스나 초콜릿을 갈망하는 현상과 유사하다는 것이다."(37-8)


"뇌는 외부 세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정보를 받아서 신경계 모형으로 변환한다. 책의 글자를 눈으로 훑으면 글자에 내포된 정보가 전기 파장으로 변환되고, 뇌가 그 파장을 받아 글자들이 제공하는 정보의 모형을 생성한다." "독자의 뇌는 작가가 원래 상상한 모형의 세계를 각자 다시 구축하는 것이다." "베르겐에 따르면 우리가 단어를 읽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모형이 생성되기 시작한다. 한 문장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모형이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작가가 단어를 배치하는 순서가 중요하다. 이런 이유에서 '제인이 새끼고양이를 아빠에게 주었다Jane gave a Kitten to her Dad'와 같은 타동구문이 '제인이 아빠에게 새끼고양이를 주었다Jane gave her Dad a Kitten'와 같은 이중타동구문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작가는 독자의 마음에 상영되는 영화를 만들어주는 셈이므로 영화와 같은 순서로 단어를 배치하면서 독자의 머릿속 카메라가 문장의 각 요소를 발견하는 과정을 상상해야 한다."(48-50)


"뇌는 외부 세계의 모형을 구축하듯이 마음의 모형도 만든다. 우리의 사회생활 무기고에 들어 있는 중요한 이 기술을 '마음 이론mind theory'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기술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느끼며 어떤 모의를 하는지 그들이 앞에 없어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능력을 극단적으로 과대평가하는 경향도 있다. 인간의 행동을 수치로 정확히 수량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터무니없기는 하지만, 실제로 일부 연구에서는 모르는 사람들끼리는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20퍼센트만 정확히 판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구와 연인 사이라면? 기껏해야 35퍼센트다. 사실 타인의 생각을 읽을 때 발생하는 오류가 인간 드라마의 주된 원인이다.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통제하려 할 때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를 잘못 예측하는 순간 불행히도 반목과 싸움과 오해가 싹터서 인간관계에 예기치 못한 변화의 파국적 소용돌이가 일어난다."(58-60)


"신경과학자들은 은유가 인지 차원에서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연구자들은 우리의 뇌가 기본적인 방식으로 사랑과 기쁨, 사회와 경제 같은 추상적 개념을 이해한다고 설명한다. 추상적 개념을 물리적 속성이 있는 개념, 가령 생기가 돌고 따뜻하고 늘어나고 줄어드는 개념과 결부시키지 않고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뇌 스캔 연구에서는 더 강력한, 은유의 두 번째 용도가 드러난다. 한 연구에서 참가자들이 〈그는 거친 하루를 보냈다〉라는 문장을 읽으면 〈그는 힘든 하루를 보냈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보다 촉감과 관련된 신경 영역이 더 많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연구에서는 〈그녀는 막중한 짐을 짊어졌다〉라는 문장을 읽으면 〈그녀는 부담을 느꼈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보다 신체 운동과 연관된 신경 영역이 더 많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자는 이렇게 표현된 문장을 읽을 때 짐을 짊어지는 무게와 긴장을 '느끼고' 거칠고 고단한 하루를 '피부로 느끼는' 것이다."(68-70)


"현실에 관한 심오한 질문에 대해서도 인간의 뇌는 이야기로 향한다. 정교한 신피질에서 '세상에서 무슨 일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이론과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면 현대의 종교는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종교는 단지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심오한 질문에 답해준다. 무엇이 선인가? 무엇이 악인가? 나의 모든 사랑과 죄책감과 증오와 욕망과 질투와 공포와 애도와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는 나를 사랑해줄까?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런 질문의 답은 당연히 데이터나 방정식으로 나오지 않는다. 주로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고 의지를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로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누군가는 영웅이고 누군가는 악당이지만 모두가 의미가 있는 뜻밖의 사건으로 구축된 극적이고 변화무쌍한 플롯의 공동 주연이다." "인과관계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근간이며 뇌는 원인과 결과를 연결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동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76-7)


"하지만 모든 작가는 어떤 독자를 타깃으로 정하든 간에 서사를 지나치게 통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고 방치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지나치게 설명을 늘어놓는 것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인과관계는 말로 표현하기보다는 '보여줘야' 하고, 설명하기보다는 암시해야 한다. 아니면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 식어버리고 독자나 관객은 지루해진다. 나아가 이들이 이야기에서 소외될 수도 있다. 설명에 빈틈을 남겨둬 독자나 관객이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자유롭게 예상하고 방금 그 일이 왜 일어났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자기만의 감정과 해석을 넣을 수 있어야 한다. 독자의 예상과 가치관, 기억, 연결, 감정을 이야기에 끼워 넣는데, 이들 요소가 모두 스토리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어떤 작가도 자기 머릿속 세계를 타인의 마음에 완벽하게 이식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두 세계가 서로 맞물려야 한다. 독자가 작품에 푹 빠지기만 해도 오직 예술에서만 가능한 힘의 공명이 일어날 수있다."(81-2)


2장 결함 있는 자아


"이야기가 시작될 때 결함이 구체적으로 정의된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인공이 세계에 관해 갖는 오류를 보면서 우리는 그에게 공감하고, 오류의 원인에 대한 암시나 단서가 나오는 동안 주인공의 약점에 흥미를 느끼며 그가 벌이는 싸움에 감정적으로 몰입한다. 주인공이 플롯의 극적 사건을 거치면서 변화하는 동안 우리는 그를 응원하게 된다. 문제는 사람이 변하기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신경과학과 심리학에서 그 '이유'를 정확히 통찰하기 시작했다. 결함은, 특히 우리가 인간 세계에 관해서 그리고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범하는 실수는 단지 우리가 이런저런 일들에 관해 생각하고 간단히 공감하거나 무시하기로 선택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결함은 우리의 환각 모형에 스며들고 지각의 일부와 현실에 대한 경험을 이루므로 우리 자신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깊은 차원의 변화를 거부하는 마음과의 싸움에 뛰어든 사람들을 '영웅'이라고 부른다."(89-90)


"누구도 모든 것에 대해 옳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스토리텔링 뇌는 우리가 모든 면에서 옳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우리의 편향과 오류와 편견에 관한 불길한 사실은 그것들이 진실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남들은 다 '편견'에 치우치고 우리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처럼 느낀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순진한 사실주의'라고 부른다." "그렇다. 우리의 환각 모형이 틀렸다고 해도 우리는 뇌에서 우리를 위해 만든 현실에 거의 의문을 품지 않는다. 어쨌든 그것이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환각에는 나름의 기능이 있다. 우리의 신경 모형을 구성하는 작은 신념 하나하나는 우리의 뇌에 외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려주는 작은 지침과 같다. 〈꽉 잠긴 잼 뚜껑은 이렇게 따라. 경찰한테는 이렇게 거짓말을 하라. 상사에게 유능하고 분별력 있고 정직한 직원으로 보이고 싶으면 이렇게 처신하라.〉 이런 지침이 우리의 환경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준다."(91-3)


"문화는 현실과 허구의 인물들이 결함이 있고 특별한 사람이 되어가는 또 하나의 경로다. 흔히 '문화'라고 하면 오페라나 문학 혹은 패션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떠올리지만 사실 문화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신경 모형에 깊숙이 녹아있다. 문화는 현실에 대한 환각을 구축하는 신경 기제의 일부를 형성하며 우리가 삶을 경험하는 렌즈를 왜곡하거나 좁히는 식으로 우리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이를테면 도덕 원칙을 목숨 걸고 준수하게 하거나 어떤 음식을 맛있다고 지각하는지 결정하는 식이다." "이와 같은 문화 규범은 유년기의 신경 모형으로 통합된다. 유년기는 뇌가 특정 환경을 가장 잘 통제하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신속하게 찾아가는 시기다. 0세에서 2세 사이에는 뇌에서 1초에 약 180만 개의 뉴런 연결이 생성된다. 이런 높은 유연성(혹은 '가소성')의 상태는 청소년기 후기나 성인기 초기까지 이어지며 어느 정도 놀이를 통해 자신이 속한 환경의 규범을 습득한다."(108-9)


"우리는 머릿속 환각 모형이 정확하다고 우리 자신을 설득하면서 삶을 체계화한다. 우리의 신경 모형과 일맥상통하는 예술과 미디어와 이야기에서 즐거움을 찾고, 어긋나는 대상에 대해서는 거슬리게 받아들이거나 거리감을 느낀다. 우리의 신경 모형의 정당성을 대변하는 문화 지도자에게 갈채를 보내며 우리와입장이 반대인 사람을 만나면 일단 부정하고 본다. 불안을 느끼고 화를 내고 복수심을 느끼면서 그 사람이 실패하고 수모당하기를 바랄 수도 있다. 우리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옆에 두려고 한다.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은 논쟁거리에 대해 함께 같은 생각을 나누면서 '유대'를 형성하는 시간이다." "우리가 지키려고 싸우는 신념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관과 통제 이론을 이루는 믿음이고, 따라서 이 신념에 대한 공격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자체를 공격하는 셈이 된다. 이야기에서는 이런 신념과 이런 공격이 가장 중요한 스토리를 이끌어낸다."(119-21)


"우리가 현실과 이야기에서 접하는 갈등은 주로 이런 신경 모형과 세계 모형을 방어하는 행동과 연관된다." "좋은 이야기에는 발화점이 있다. 독자는 이야기를 읽다가 발화점이 오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집중한다. 감정이 증폭되고, 호기심과 긴장감이 살아난다. 발화점은 결국 주인공이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는 사건들 중 첫 번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주인공의 결함 있는 통제 이론의 중심부에 진동을 일으키고 이 진동이 결함의 핵심을 건드리므로 주인공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과잉 반응을 보이거나 이상해 보이는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인물과 플롯 사이에 격렬한 불꽃이 튄다는 무의식적 신호다.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통제 이론이 검증받고 결함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자 이야기 사건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 그리고 사건에 의해 촉발된 드라마는 주인공에게 결정을 요구한다. 결함을 수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121-2)


"뇌의 영웅 만들기 장치는 자동적이고, 대개는 잠재의식 차원의 직감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세계 모형에는 인종차별적이거나 성차별적 신념이 들어 있다. 그래서 흑인이나 백인, 여자나 남자를 만날 때 미묘하게 부정적인 감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런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데는 정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따라서 영웅 만들기 장치는 그 이유를 찾아내야 하고 주어진 임무를 잘 해낸다. 설득력 있는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도덕적 우월성은 사실 '유난히 강력하고 보편적인 긍정적 착각의 한 형태'다." "연구자들은 폭력과 잔혹성의 네 가지 일반적인 원인을 찾아냈다. 탐욕(야망), 가학증, 높은 자존감, 도덕적 이상주의다. 대중적인 신념과 진부한 이야기에서는 탐욕과 가학증을 주된 원인으로 잡는다. 그런데 이들 원인은 극히 사소하다. 알고 보면 높은 자존감과 도덕적 이상주의가 대다수 악행의 원인이다."(127-9)


"물론 이야기 유형마다 강점과 심리적 복잡성이 다르지만 인물이 없는 플롯은 그저 빛과 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바로 그 순간에, 바로 그 사람에게, 바로 그 변화 사건이 일어나면서 의미가 발생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물의 갈등은 그 자신과 외부 세계 사이에서 일어난다. 인물은 머릿속에 든 세계 모형 속에 살면서 그 모형을 현실이라고 경험하는데, 모형 자체에 결함이 있으므로 실제 외부 세계를 통제하는 능력이 손상된다. 혼돈이 일어나고 인물의 세계 모형이 깨지기 시작한다. 인물은 서서히 통제력을 잃고 그 결과로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나 사건들과 더 극적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의 인물이 외부 세계와만 전쟁을 치르는 것이 아니므로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인물은 자기 자신과도 전쟁을 치른다. 주인공은 자신의 잠재의식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가담한다. 결국 모든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근본적인 질문, 곧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핵심이다."(136-7)


3장 극적 질문


"'우리'는 우리의 신경 모형 속에 있다. 우리의 화자는 단지 우리의 행동을 비롯해 머릿속의 통제된 환각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고 설명할 뿐이다. 모든 현상을 연결해서 우리가 누구이고 왜 그렇게 행동하고 왜 그런 느낌을 받는지에 관해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엮는다. 우리가 흥미진진한 신경계의 쇼를 통제한다고 느끼게 해준다. 엄밀히 말하면 거짓말은 아니다. 이를 작화증作話症이라고 하는데,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리사 보르톨로티 교수는 우리가 작화할 때는 〈허구인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믿고 전달한다〉고 설명한다. 즉 우리는 항상 작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뇌의 화자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우리가 하는 행동을 (혹은 누구에게 묻는지에 따라 전적으로) 통제하는 신경 구조에 거의 접근하지 못한다. 화자는 우리의 감정과 행동의 진정한 원인인 회로와 동떨어져 있어서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고 왜 그런 상황에 있는지에 관해 들려줄 만한 그럴듯한(대개는 영웅적인) 이야기를 급조해야 한다."(144-6)


"인간 조건에 관한 무섭고도 흥미로운 진실은 누구도 극적 질문의 답을 모른다는 것이다. 질문 자체가 우리 자신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왜 그렇게 느끼는지 알 수 없다. 왜 우울한지 가설을 세우면서, 도덕적 신념을 정당화하면서, 음악이 감동을 주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만든다. 우리의 자아 감각은 신뢰할 수 없는 화자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전히 통제한다고 믿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우리가 누구인지 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그래서 인생이 그렇게 골치 아픈 싸움이 될 수 있고 우리가 수수께끼 같고 자기 파괴적인 행동으로 스스로를 실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야기에서 극적 질문이 그렇게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는 주인공이 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시시각각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는 사이에 극에 압력이 생기고, 플롯이 전환되는 사이에 주인공은 대개 의도치 않게 드러난 자신의 모습에 놀란다."(147-8)


"우리 머릿속에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모형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다양한 모형도 들어 있어서 각각의 모형은 주도권을 차지하려고 끊임없이 싸운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모형이 전면에 나서고, 그 모형은 화자 역할을 맡아서 열정적이고 설득력 있게 주장을 펼치고 대개는 논쟁에서 이긴다.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 교수는 우리의 의식 아래 차원에서는 지배권을 두고 〈끊임없이 싸우는 작은 자아들의 시끌벅적한 민주주의가 구현된다〉고 말했다. 우리의 행동은 '그 싸움의 최종 결과일 뿐'이다. 그사이 작화를 담당하는 화자는 밤낮으로 일하면서 일상에 논리를 짜 넣는다. 가령,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고 여기서 내 역할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 같은 작업은 〈뇌의 주요 역할 중 하나다. 뇌는 민주주의의 다채로운 행동에 타당성을 부여한다는 확고한 목표에 따라 이야기를 만든다.〉" "좋은 이야기에서 인물은 이런 특징은 반영하며 그의 성격은 '3차원'이 넘는다."(151-4)


"영화에서는 생애 전체를 약 90분 안에 전달하면서도 어느 정도 완결된 느낌을 준다. 이때 흥미로운 대화의 비결은 압축에 있다. 인물이 쓰는 단어는 진실하게 들리면서도 의미를 가득 담고 있어야 한다." "대사에 심오한 진실이 가득 담겨 있어야 독자나 관객이 대사에서 진실을 깊이 흡수하고 고도로 사회적인 뇌를 작동시켜 인물의 마음 모형을 신속히 구현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의 모든 원칙이 대화의 기술로 통합된다. 대화는 변화무쌍해야 하고 무언가를 원해야 하며, 인물의 개성과 관점을 풍부하게 담아야 하고 의식과 잠재의식 두 차원 모두에서 작동해야 한다. 대화는 우리가 인물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정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인물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고, 어디로 가고, 어디에 있었는지 말해준다. 그리고 인물의 사회적 배경, 개성, 가치관, 지위에 대한 감각, 진정한 자아와 겉으로 드러난 거짓 사이의 긴장,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서사를 전개시키는 은밀한 고뇌를 알려준다."(172-4)


"소문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에 관해 알려주고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기 위해 존재한다. 대부분 도덕규범을 위반한 내용, 집단의 규율을 깨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사람들의 도덕적 분노를 자극해서 소문 속 인물을 공격하든 방어하든지 간에 어떤 식으로든 행동하게 만듦으로써 집단에 우호적인 행동을 유지한다. 우리가 좋은 책이나 영화를 즐기는 이유는 책이나 영화에서 이런 원시적인 사회 정서를 자극하고 이용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브라이언 보이드 교수는 〈이야기는 사회 감시에 대한 강렬한 관심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이야기는 〈우리가 사회 정보에 주목하게 만들고〉 소문이나 시나리오나 책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감시하는 행동의 과장된 형태〉를 보여준다." "이야기는 우리의 생존에 중요했다. 우리의 뇌는 지금도 여전히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소문은 인간의 보편적인 행동이고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약 3분의 2가 사회적인 주제에 관한 것이다."(179-80)


"도덕적 분노만이 스토리텔링의 즐거움을 더하는 원시적 사회 정서가 아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우리가 두 가지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한 가지는 사람들과 '잘 어울려서' 그들이 우리를 좋아하고 이기적이지 않은 부족민으로 여기게 만들려는 욕망이고, 다른 한 가지는 사람들을 '앞질러서' 우리가 최고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인간은 소통하고 지배하고 싶어 한다. 두 가지 욕망은 양립하지 않을 때가 많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앞지르고 싶은 마음은 부정직과 위선과 배신과 마키아벨리적 묘책처럼 들린다. 이런 두 가지 욕망의 갈등이 인간 조건과 우리가 인간 조건에 관해 들려주는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출세란 지위를 얻는 것으로, 인간의 보편적 갈망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폭넓은 목표 지향적 활동'에 참여한다. 다시 말해서 삶의 지극히 고상한 플롯과 활동의 기저에는 지위를 향한 충족되지 않는 갈증이 있다."(185-6)


"흔히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은 심리적 진실에 있다고 말한다. 최근 연구되고 있는 마음의 과학에서 이 말이 놀라울 정도로 입증되었다. 셰익스피어는 항상 '심리적으로든 신학적으로든 사람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의 회의적인 태도가 전적으로 옳았다는 사실이 현대의 과학으로 입증된 것이다. 사실 누구도 자신이 어떤 행동을 왜 하는지 잘 모른다. 리어 왕도 이아고도, 나도 당신도 마찬가지다. 셰익스피어는 인물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관객이 그 이유를 짐작할 여지를 남겨서 관객의 가축화된 뇌를 훌륭하게 가지고 놀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인간 행동의 원인과 결과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없다. 셰익스피어는 극적 질문의 답을 모호하게 제시함으로써 타인과 그의 기묘함에 대한 우리의 무한한 호기심에 접근한 다음, 인물과 작품에 경이롭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또 우리가 이야기에 끼어들 여지를 남겼다."(218)


4장 플롯과 결말


"목표는 삶에 질서와 가속도와 논리를 부여하며, 현실에 대한 환각에 서사적 구심점을 제공한다." "우리가 행동하고 싸우고 '살아가도록' 이끌어주기 위해 우리의 영웅 만들기 뇌는 끊임없이 우리가 더 나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처럼 사고하기를 바란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낙관주의와 운명이라는 착각으로 삶의 플롯을 밀고 나간다." "목표 지향성은 긴장감 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낳는다. 주인공이 목표를 추구하는 사이 우리는 그가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함께 느낀다. 주인공이 상을 거머쥐면 그의 기쁨에 공감하고 주인공이 실패하면 함께 좌절한다. 이야기 이론가 크리스포터 부커는 탄탄하게 구축된 플롯에 흐르는 '수축'과 '이완'에 관해 설명한다. 부족적 사회 정서가 누구를 응원하고 누구의 죽음을 갈망해야 할지 말해준다면, 목표에 대한 우리의 이런 반응은 이야기라는 롤러코스터에서 꼭대기와 밑바닥을 이루고, 언어 이전에 수백만 년 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생명체의 보편적인 언어를 쓴다."(232-5)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도록 태어났다. 힘들지만 의미 있는 목표를 추구하면서 번창한다. 뇌의 보상 기제는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이 아니라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상승한다. 무언가를 추구하는 과정들이 쌓여서 인생이 되고 플롯을 만드는 것이다." "위협적이고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의 목표는 그 변화를 다루는 것에 있다. 목표가 우리를 사로잡는다. 통제해야 하는 세계가 좁아진다. 일종의 인지적 터널로 들어가서 해야 할 일만 보인다. 우리 앞의 모든 것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이거나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된다." "극에서 반응하고 결정하고 선택하고, 어떤 식으로든 혼돈을 통제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인물은 진정한 주인공이 아니다.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는 누구인가?〉라는 극적 질문의 답이 사실상 달라지지 않는다. 인물은 자기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긴 하지만 서서히 지루하게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238-9)


"나아가 플롯은 변화의 교향곡을 조율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상위 차원의 인과관계는 이야기 사건과 그 여파의 영향을 받고 하위의 잠재의식 차원에서는 인물이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의해 놀랍고도 의미 있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미워할지 말해주는 부족적 정서에 변화가 일어나고, 서사의 정상과 바닥을 이루는 수축과 해방의 목표 지향적 정서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그뿐 아니라 인물이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인물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세우는 계획도 달라질 수 있고 목표 자체도 달라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에 대한 이해도 달라질 수 있으며 관계에 대한 이해도 바뀔 수 있다.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극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독자의 이해도 바뀔 수 있다. 두 번째 주요 인물(그리고 세 번째 인물)도 달라질 수 있고 정보의 격차가 벌어지고 좁아졌다가 완전히 닫힐 수도 있다. 변화는 그런 식으로 계속 이어진다."(247)


"모든 이야기가 변화라면 당연히 변화가 멈출 때 이야기도 끝날 것이다. 주인공은 발화점부터 외부세계에 대한 통제력을 얻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었다. 이야기가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면 그 과정이 성공적인 셈이다. 외부 세계에 대한 뇌의 모형과 통제 이론이 갱신되고 향상될 것이고, 주인공은 마침내 혼돈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보았듯이 통제는 뇌의 궁극적인 사명이다. 우리의 영웅만들기 뇌는 항상 우리가 실제보다 세상에 대한 통제력을 더 많이 가진 것처럼 느끼게 해주려고 한다." "우리는 통제력을 잃으면 적극적이고 영웅적인 인물이라는 자아 감각을 잃고 결국 불안하고 우울하고 심각한 상태로 치닫는다. 뇌는 이런 상태를 피하기 위해 영웅적인 우리 자신에 관한 설득력 있고 교묘하고 단순한 이야기를 지어낸다. 심리학자 티모시 윌슨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의 중요한 요소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다.〉"(252-3)


"이야기는 진실한 위안을 준다. 고도로 사회화된 종인 우리가 받은 저주는 우리를 통제하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만나는 모두가 타인과 잘 어울리고 성공하고 싶어하므로 우리는 거의 항상 상대에게 조종의 대상이 된다. 우리의 환경은 가벼운 거짓말과 절반의 미소가 뒤섞여 있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즐겁게 만들고 타인과 외부에 순응하게 만들려고 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통제하기 위해 잘못과 실수와 고통을 열심히 위장한다. 사교성이 우리의 감각을 마비시킬 수 있고,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소외당할 수도 있다. 오직 이야기에서만 온갖 가면이 벗겨진다. 이야기에서 누군가의 결함 있는 마음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만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얻는다. 우리만 갈등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만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야기는 어두운 두개골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외롭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선물한다."(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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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과학 - 운명과 자유의지에 관한 뇌 과학
한나 크리츨로우 지음, 김성훈 옮김 / 브론스테인 / 202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 자유의지냐 운명이냐


"생물학적 메커니즘은 뇌에서 생기는 대부분의 장애에 기여하지만 직접적인 방식으로 장애를 야기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사람에게 조현병이 생길 위험 중 80퍼센트는 결국 갖고 태어난 유전자 때문에 생긴다. 그러나 여기에 관여하는 180개 정도의 유전자가 서로 서로, 그리고 사람의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은 아직 완전히 풀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음식의 선택, 사교성 같은 성격의 한 가지 측면인 친구관계 스타일, 혹은 신념 같은 문제로 오면 여기에 기여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은 아주 미묘하고, 서로 서로, 그리고 환경적 요인과 상호작용하는 방식 또한 대단히 교묘해진다. 그렇다고 이 영역에서 한 개인의 선택과 행동이 자신의 의식적 통제를 벗어난 선천적인 생물학적 요인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냥 운명이라는 개념에서 운명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비극적인 암시를 덜어내고, 도달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은 종착지라는 개념으로 운명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22-3)


"과학은 인간 모두가 신경생물학에 크게 휘둘리며, 어떤 결정이나 행동을 보이기 쉬우며, 특정 질병에 걸리기 쉽다고 주장한다.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 한 수준에서 보면 모두는 아무리 고유의 복잡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저 인간이라는 하나의 동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 주 목적은 타인들과 상호작용하며 정보를 교환하여 집단의식collective consciousness에 기여하고, 운이 좋다면 자신의 유전 물질을 후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이런 기본 목표를 추진하기 위해 깊은 욕구가 작동 중이고, 이런 욕구들은 대체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 심지어는 행동 중에서 좀 더 개성적인 측면이라 생각하는 부분, 직감적으로 느끼기에 분명 선천적이 아닌 후천적인 산물이고, 그래서 의식적 통제 아래 놓여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들─대단히 추상적인 의견이나 성격적 특성들 같은─도 사실은 우리가 갖고 태어나 어린 시절을 거치면서 강화된 선천적 요인에 의해 깊숙한 수준에서 형성이 된다."(35)


"뇌의 지도가 점점 더 분명하게 밝혀짐에 따라 자유의지가 차지하는 공간이 실제로 줄어들고 있다면, 그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상상했던 것만큼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주장에는 위험이 따라온다. 개인의 수준에서 보면, 이런 주장은 마음을 불편하고, 불안정하게 한다. 자신의 행동이 상황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믿는 사람은 자기권한이 약해져서 사회적 책임감이 결여된 행동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모두가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한다면 사회에 파멸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신경과학은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생각만큼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기적인 개인주의로 빠져들 필요는 없음을 설득하는 논거를 개발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질문의 해답은 아직 유아기에 머물고 있는 과학에 달려 있다. 따라서 한동안은 자유의작 착각에 불과해도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37-8)


2 발달 중인 뇌


"아이의 처음 몇 년이 그 아이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이때는 인지 기능이 폭발적으로 발달하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역동적인 시기다. 심리학에서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문 분야의 전문가들이 내놓은 수십 년 치의 연구를 보면, 이른 아동기의 환경 및 경험의 영향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평생 지속되는 효과를 낳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을 설명해 줄 타당한 해부학적 이유가 존재한다. 뇌의 정보 처리의 기본 구성 요소인 뉴런, 즉 신경세포는 아기가 엄마 배 속에 있는 동안에 주로 만들어지지만 모든 뉴런들을 연결하는 복잡한 과정은 대략 처음 3년 동안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열 달을 다 채우고 태어난 아기의 뇌는 부피는 성인 뇌의 25퍼센트 정도에 불과하지만 성인과 비슷한 수의 뉴런이 들어 있다. 아이가 만 3세가 될 즈음에 아기의 뇌는 평균적으로 성인 뇌의 80퍼센트 정도 크기로 발달한다."(46-7)


"아기와 어린 아이들의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거대한 도약은 바로 기존의 뇌 구조물에서 일어나는 '배선wiring up' 때문이다. 뇌의 서로 다른 영역들은 서로 다른 기술을 학습하는 특별히 민감한 시기가 따로 있다. 이때는 새로운 배선이 대단히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가령, 언어 습득과 청각 기관hearing system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면, 이 둘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이들의 발달 과정을 보면 아기들이 어떻게 자신의 특정 환경에 맞게 미세하게 조정된 선천적 기술을 갖고 태어나는지 알 수 있다. 청력에 장애가 없는 아기들은 모두 성숙한 달팽이관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음의 높이와 크기를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은 또한 모든 언어를 아우르는 세계 시민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전 세계 어떤 언어에서 사용되는 음소phoneme라도 듣고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모국어에 노출됨에 따라 아기는 자신의 환경에서 나타나지 않는 음소를 듣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50-1)


"새로운 기술을 연습하거나,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자각함에 따라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신경 연결이 강화되어 학습이 기억으로 응고된다. 그 기억을 되풀이해서 끄집어내면 그 기억은 뇌 속 전기 신호의 기본 설정 경로가 된다. 이렇게 해서 학습된 행동이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사용되지 않는 신경 연결은 결국 가지치기를 통해 소실된다. 신경세포들 사이의 연결은 대부분 전기 신호에 반응해서 모양을 바꾸는 '가지돌기가시dendritic spine'라는 극소의 구조물에서 일어난다. 학습이 일어남에 따라 가시돌기가지는 이웃의 활발한 신경세포와 접촉하기 위해 가지를 뻗는다. 가지돌기가시가 부풀어 오르다 결국 두 개의 딸가지daughter spine로 쪼개지면서 회로 연결이 두 배로 늘어난다. 각각의 신경세포는 이런 과정을 통해 10,000개까지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전체적으로 대략 100조 개 정도의 연결이 만들어진다. 이런 연결들을 통틀어 '커넥톰connectome'이라고 부른다."(53-4)


"청소년기가 시작될 즈음 뇌는 이미 자신의 네트워크 안에 잘 확립된 신경 고속도로가 가동 중이지만 추가적으로 계속해서 연결을 만들어 가는 것과 동시에 잘 사용되지 않는 신경로를 더 많이 가지치기하기 시작한다. 가지치기는 평생에 걸쳐 일어나는데 10대의 앞이마겉질prefrontal cortex은 그런 시냅스 가지치기가 대량으로 일어나는 장소다. 이 뇌 영역은 자기가 배워 왔던 내용을 가다듬고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축해 나가는 일을 동시에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대단히 역동적인 시기에는 앞이마겉질에서 정보가 처리되는 방식과 보상회로를 비롯한 다른 심부 영역의 정보 처리 방식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 결과로 청소년은 즉각적인 만족과 보상에 대단히 예민해지지만 충동 조절 능력과 의사 결정 능력은 아직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상태가 된다. 평균적으로 10대들은 안전책을 강구하지 않고 즉각적인 황홀감을 좇아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64)


"청소년의 뇌 발달에서 중요한 측면이 한 가지 더 있다. 10대 시절에는 뇌의 회백질grey matter이 줄어든다. 앞이마겉질에서는 무려 17퍼센트나 줄어든다. 회백질은 중추신경계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곳은 시냅스 접합이 일어나는 대량의 수상돌기 가지와 신경세포의 세포체, 그리고 거기에 동반되는 지지세포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우리 뇌의 대부분을 형성하며 척수를 타고 아래로도 이어진다." "회백질의 일부는 백질white matter의 확장으로 대체된다. 백질은 신경세포의 긴 회색 실린더 모양 구조물인 축삭돌기axon 둘레를 감싸서 코팅하고 있는 지방을 일컫는 이름이다. 이 코팅은 축삭돌기의 절연을 도와주어 전기 신호가 뉴런에서 뉴런으로 더 빠르고 온전하게 전달될 수 있게 해 준다. 10대의 뇌 발달 과정에 일어나는 다양한 과정들이 모두 합쳐져서 청소년 커넥톰의 개선을 도와 자잘한 수많은 가지로 구성되어 있던 시스템을 그보다 숫자는 적지만 고속의 신경로를 갖춘 시스템으로 업그레이드해 준다."(64-5)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므리강카 수르는 뉴런들 사이의 연결이 일단 어느 단계까지 강화되면 이웃한 연결을 녹이는 유전자 스위치가 켜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뇌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회로를 최적화하여 효율성을 유지한다. 뇌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이미 시도를 통해 검증이 된 이런 신경로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나이 든 뇌는 귀, 눈, 기타 감각기관을 통해 유입되는 새로운 정보보다는 기존의 경험과 예상을 더 중시한다. 이 경우에도 이런 전략은 역시나 말이 된다. 외부 세상으로부터의 정보를 수집하는 시스템들은 어느 시점에 가서는 망가지기 시작할 것이다. 뇌는 이미 경험을 구축하고, 기억을 저장하고, 정신적 전략을 검증하고 연마하는 데 엄청난 인지 에너지cognitive energy를 소비한 상태다. 나이 든 뇌는 새로운 경험이나 지식보다는 과거의 것에 더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지혜와 경직된 사고는 정반대의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72-4)


3 배고픈 뇌


"과거에는 사람들의 비만을 멈추어 줄 유전자 압력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의 칼로리 섭취를 낮추게 만드는 유전자 돌연변이는 후대에 전달될 가능성이 떨어졌다. 음식이 귀하고 음식을 사냥하거나 채집하는 데 상당한 에너지가 들어가는 환경에서 이런 돌연변이를 갖고 태어난 사람은 번식의 기회를 얻기 전에 죽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반면 먹을 것이 풍부한 지금의 환경에서는 비만을 야기하는 돌연변이들이 인구 집단 속으로 파고들었다. 물론 지금은 환경이 아주 달라져 있지만 문제는 진화의 시간 척도가 아주 길다는 점이다. 환경이 이렇게 변한 것은 불과 한 세기 동안의 일로 포유류의 진화 시간에서 대략 0.00004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자기가 원하는 것은 언제라도 먹을 수 있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진화가 지금의 음식 배달 환경을 따라잡으려면 2천 년 정도는 걸릴 것이다."(97-8)


"전 세계 인구 중 절반이 FTO 유전자(체지방량 및 비만 관련 단백질)를 비만의 확률을 25퍼센트 높이는 버전으로 갖고 있었다. FTO의 이 유전자 변이를 2개 갖고 있는 사람(전 세계 인구의 1/6이 여기에 해당한다)은 원래 나가야 할 체중보다 3킬로그램 더 무거울 것이고 비만이 될 위험은 50퍼센트 더 높다. 이 유전자는 보상체계를 구성하는 회로가 아니라 시상하부에서 발현된다. 하지만 이것은 몸에게 더 많은 영양분이 필요하다는 지시를 내려서 보상체계의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이것은 사람이 계속 깨어 음식을 먹게 만든다." "개인적 식욕은 대체로 고유의 유전자 꾸러미를 물려주기 위해 오랜 세월 진화한 회로에 의해 프로그램되어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의 뇌는 고지방, 고당분 음식을 추구하도록 진화되어 왔다. 개인별로 이런 욕구가 얼마나 강력할지는 그 사람이 타고난 유전자와 뇌의 배선에 달려 있다. 체중 감량이 그토록 어려운 경우가 많은 이유는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99-101)


"유전자 발현 과정에서 환경적 요인이 맡는 역할은 근래에 들어서야 발견되었고, 이것을 후성유전학적 조절epigenetic regulation이라고 한다. 후성유전학은 세포들이 똑같은 유전 암호를 갖고 있음에도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식욕의 후성유전학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동안에 태어난 네덜란드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한 장기 연구에서 형태가 잡혔다." "연구 결과 수정 당시 영양 상태가 심각하게 불량했던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동들은 나중에 비만과 당뇨에 걸릴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즉, 아이가 먹을 것이 귀한 환경에서 자란 경우에는 그 아이의 대사가 모든 것이 풍족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고생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환경이 가혹해도 이런 환경에 의해 변화를 겪은 것은 DNA 암호가 아니다. 변화한 것은 유전자의 행동 방식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다음 세대, 그리고 그다음 세대로 전달된다."(108-9)


"이런 연구 결과들은 환경과 유전적 운명을 살짝 비틀어서 음식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바꿈으로써 더 건강한 음식 선택으로 이끌고, 더 나아가 미래 세대에 이득이 되도록 유전적 반응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알코올을 이용한 의미 있는 연구에서 보여주었듯이 이런 연구 결과를 적용해서 중독성 행동이나 강박적 행동에서 멀어지게 만들 수만 있다면 수백만 명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선호도와 식욕이 어떻게 미리 결정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정해져 있는 운명을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 줄 것으로 보인다. 후성유전학은 또한 유전적 변화가 더 이상 기나긴 진화적 시간에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며, 물려받은 회로와 살고 있는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이 대단히 복잡함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은 이제야 이런 부분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 잠재력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111-2)


4 보살피는 뇌


"미국에서 재현이 이루어진 한 흥미로운 실험에서는 여성들이 짝을 평가하는 기준 중,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선호하는 파트너의 냄새 맡기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여성들이 면역계가 자기와 아주 다른 남성의 체취를 훨씬 선호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주조직적합성복합체major histocompatibility complex, MHC로 알려진 100개 정도의 유전자 때문에 생긴다. MHC는 면역계가 병원체를 비롯한 외부 이물질을 알아볼 수 있게 도와주는 단백질 정보를 암호화하고 있다. 이 유전자들은 당신 몸에서 나는 체취를 결정하고, 당신의 면역계 구성을 결정하는 두 가지 역할을 맡고 있다. 자신과 다른 유전자 변이를 갖고 있는 배우자를 만나면 거기서 나온 자손은 감염에 대해 훨씬 광범위한 저항능력을 갖게 되어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이 여성들은 말 그대로 자기와 유전자 궁합이 제일 잘 맞는 남편감을 냄새로 알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유전자와 뇌에 새겨진 완전히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보인다."(128-9)


"뜨거운 초기 연애 시절 이후로도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몇몇 신경화학 물질이 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배우자의 부드러운 손길은 피부에 있는 신경말단을 자극해서 뇌의 시상하부 영역으로 전기신호를 보낼 수 있다. 그러면 이 영역에서는 프로호르몬pro-homone인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옥시토신은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으며 엄마와 신생아 사이의 유대감 형성에서 특히나 중요하게 작용한다. 옥시토신은 대단히 강력한 물질이며 알코올과 비슷한 방식으로 작용해서 앞이마겉질과 둘레계통limbic system(동기, 감정, 학습, 기억을 지배)의 억제신경세포를 활성화한다. 이 억제신경세포를 활성화함으로써 스트레스와 불안을 약화시키고 (사회 구성원들이 거부감을 느낄 만한 행동을 제약하는) 사회적 억제social inhibition에 브레이크를 건다. 이렇게 하면 행복, 긴장 완화, 신뢰 등의 느낌을 강화하기 때문에 성적 절정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133)


"코델리아 파인이 인용한 한 연구는 필요야말로 발명의 이버지임을 입증한다. 수컷 쥐는 보통 새끼를 돌보는 일에 주도적으로 나서지 않지만 만약 수컷 쥐가 새로 태어난 새끼와 함께 굴속에 남아 있고 그 새끼를 돌볼 어미가 없다면 수컷 쥐는 새끼의 털을 고르고, 돌보고, 심지어 둥지를 짓는 일까지도 완벽한 능력을 보여 준다. 시간이 이틀 정도 걸리기는 하지만 머지않아 수컷은 마치 새끼를 돌보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새끼에게 착 달라붙어 지낸다." "양쪽 성 모두에서 육아 행동은 애착과 돌봄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깊숙하게 자리 잡은 선천적 욕구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 호르몬, 환경이 모두 중요하며 이런 것들을 모두 함께 평가하지 않고서는 행동에 대해 신뢰할 만한 설명을 내놓을 수 없다." "애착은 번식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고, 보상회로를 통해서도 동기가 부여된다. 육아는 생존에 필요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큰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145-7)


"다른 사람에게 애착을 느끼고 함께 교류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좋은 일이다. 진화심리학 교수 로빈 던바는 이 주제와 관련한 연구에 대해 말해 주었다. 이 연구는 심장마비 이후의 회복 여부를 말해 주는 최고의 예측인자는 하루 한 갑씩 태우는 흡연 습관을 끊느냐, 혹은 콜레스테롤이 뚝뚝 떨어지는 감자튀김을 끊느냐 등의 여부가 아니라 자신을 뒷받침해 주는 인적 네트워크와 우정이 얼마나 강력한가에 달려 있음을 보여 주었다. 포옹, 걱정의 표현, 웃음 등 애정이 담긴 신체적 접촉은 엔도르핀의 생산을 촉진해 준다. 엔도르핀은 면역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회복 속도와 감염에 대한 저항성을 높여 주고, 기분도 좋아지게 해 준다." "로빈은 인류가 눈확앞이마겉질orbital prefrontal cortex(눈 바로 뒤에 자리 잡고 있는 뇌 영역으로 충동을 억제하고 감정을 처리하는 일에 관여한다)을 발달시키던 것과 때를 같이해서 든든한 우정을 구축하고 가꿈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는 이러한 능력을 진화시켰다고 믿고 있다."(148-9)


5 지각하는 뇌


"'버전'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객관적 현실이라는 것이 사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물리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사람이 세상을 살짝 다른 방식으로 지각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뇌의 독특한 왜곡, 내재된 필터와 인지편향 등, 자기만 갖고 있는 뇌의 특성 덕분에 자기만의 맞춤형 '현실'에서 살고 있다. 세상에 대한 인간의 지각은 정확한 스냅사진이 아니라 그냥 주관적인 환상에 불과하다. 이것은 전에 무엇을 보고 살았는지를 바탕으로 결정된다." "당신이 매일 매일 경험하는 하루는 모든 감각을 통해 뇌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막대한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이 모든 정보는 당신이 기존에 세상을 어떻게 당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했는가 하는 색안경을 통해 처리된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자기가 예상한 것만을 보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다."(165-6)


"거대하고, 정교하고, 강력한 뇌가 어째서 세상의 근사치를 제공하는 데서 만족하는 것일까? 만약 지각이 다른 수많은 인지 기능이 의존하는 플랫폼이 맞다면 지각을 바로잡는 것은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뇌가 환상을 다루지 않고 정확한 현실을 다룬다면 재앙을 낳을 수 있는 판단 오류의 가능성이 더 낮아지지 않을까? 그 대답은, 그러기에는 뇌가 너무 바쁘다는 것이다. 바빠도 너무 바쁘다. 게다가 지각은 뇌가 동시에 처리하고 있는 사실상 무한히 많은 과제 중 하나에 불과하다. 잠정적인 버전의 현실을 만들어 내기 위해 뇌는 귀, 눈, 코, 그리고 다른 감각 기관에서 유입되는 신호들을 전하를 띤 나트륨 이온과 칼륨 이온으로 변환해서 그 이온들을 신경세포 안팎으로 펌프질해야 한다. 또 뇌는 그 결과로 생기는 전기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정교하고 복잡한 회로판인 커넥톰 여기저기로 시속 400킬로미터의 속도로 내보내야 한다."(168)


"안타까운 일이지만 뇌가 현실에 대해 일관되고 안정적인 착시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이 때로는 엄청난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조현병으로 진단받은 사람이 2천 5백만 명이나 된다는 것이 그 예다. 이들은 망상이나 환각 같은 증상을 통해 심각하게 왜곡된 지각을 경험할 수 있다(정신병)." "이런 사람들도 눈으로는 나머지 사람들과 똑같은 정보를 수집하고 있지만 하향식으로 그 정보를 해석하고 가정을 세우는 과정이 바뀌어 있다. 조현병 진단을 받은 사람들의 뇌를 분석해 보면 학습, 기억, 추론, 유연성. 고등 인지 조절에 관여하는 회로(해마의 눈확앞이마겉질)에 신경 연결이 더 적은 것으로 나온다. 전체적으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조현병 환자들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보를 걸러 내고 이 지식을 이용해서 자기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내용에 대한 지각에 영향을 미치는 하드웨어에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172-4)


"병든 신념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지각 결함을 완화하는 손쉬운 방법은 바로 밖으로 나가 자신을 새로운 경험, 혹은 새로운 의견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어떤 수준에서 보면 뇌는 이런 문제 제기에 저항하는 습성이 있다. 세상의 작동 방식에 대한 기존의 가정을 재평가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정보는 뇌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그런 변화에는 에너지와 관심이라는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뇌는 그런 문제 제기를 걸러 내는 데 아주 능숙하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 놓기가 그리도 힘든 이유를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는 뇌가 선천적으로 보수적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과 균형을 잡기 위해 또 다른 경쟁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바로 새로움을 탐구하고 추구하고 싶은 욕구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 개념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을 즐기도록 어느 정도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 같다. 이것은 인간이 집단의식collective consciousness을 형성할 수 있게 도와준다."(181-2)


6 믿는 뇌


"우리가 믿는 내용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입력되는 내용과 함께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은 지각의 메커니즘으로부터도 유래한다. 신념은 자기만의 독특한 현실감sense of reality을 통해 형성되고 또 그와 동시에 압축된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좌우하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 초기에 습득한 신념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인간은 정치나 축구에 대한 의견을 갖기 오래전에 이미 세상의 본질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만약 당신이 어린 유아기에 세상은 믿을 만한 곳이어서 자신이 고통받을 때면 어디선가 보호자가 나타나 도와줄 것이라는 신념을 형성한다면 그 신념은 자기강화적self-reinfocing 경향을 가질 것이다. 그와 반대로 세상은 자기에게 무관심하고 적대적이라는 신념도 자기영속적self-perpetuating일 수 있어서 가끔은 한 개인의 인생에 비극적인 결말을 갖고 오기도 한다."(199-200)


"뇌를 끝없이 쏟아지는 정보로부터 지속적으로 의미를 추출해 내려 애쓰는 '신념 엔진'이라 생각할 수 있다. 뇌는 자기가 받아들이는 모든 감각 입력을 분류하고 상호참조해서 패턴을 생성함으로써 이것을 해내고 있다. 대체로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이 작업의 목표는 의식적 인지conscious cognition로 하여금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능력이기는 하지만 항상 결함 없이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뇌는 특정한 사실로부터 일반화하는 데 약점을 가지고 있다. 보통 일단 누군가가 똑같은 맥락에서 똑같은 경험을 두세 번 정도 겪게 되면 그 사람은 이것이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기꺼이 주장하게 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현실을 모형화한다. 그리고 이 예측 과정은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게 도와준다. 이것은 '직접 경험 경로direct-experience pathway'라는 것을 통해 행동을 빚어내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201)


"직접 경험 경로에 덧붙여 사회적 경로social pathway도 존재한다. 이 경우 정보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달된다. 우리는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평가하고 그 내용을 자신의 세계관에 포함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는 데 인생의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인간에게는 사회적 경로가 대단히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세상에 대해 숙고하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고, 언어를 통해 개인적 신념을 소통할 능력을 가지고 진화해 왔다. 언어는 오래도록 인간 인지능력의 정점으로 여겨져 왔고, 이론을 만들고 소통하는 능력에서 언어가 담당하는 역할은 대단히 흥미롭고도 중요하다." "문제는 일단 뇌가 무언가에 대한 신념을 구축하고 나면, 그것이 아무리 불완전하고 결함이 있더라도 새로 고칠 생각을 않는다는 점이다." "뇌는 오히려 이런 신념에 빠져들어 그와 모순되는 정보들을 무시하고 그 신념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만 찾아다니면서 강화해 나간다."(202-4)


"이 모든 신념 구축에는 분명 사회적 효용social utility이 있지만, 늘 그렇듯이 진화를 통해 보존된 보상체계가 그런 활동을 유용할 뿐만 아니라 즐겁게 만드는 데도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신념이 없었다면 바퀴, 배, 위생시설, 소설, 오페라, 현대무용, 무균 외과 수술 기법 같은 것들을 발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놀라운 결과에 더해서 신념은 무형의 자산도 제공할 수 있다. 개인과 사회 전체의 안녕과 행복을 크게 증진시켜 준다는 뜻이다. 신념은 자부심과 목적의식을 부여해 준다. 신념은 엄청난 보상의 느낌을 부여할 수 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무수히 많은 사회에 엄청난 해악을 끼쳐 왔다. 예를 들어 성적 지향 같은 문제에 죄책감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종교적 신념은 그런 부분을 지지하는 사람의 안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뇌 활동의 한 범주로서 신념은 전체적으로 이롭게 작용해 왔다."(208-9)


7 예측 가능한 뇌


"생체지표biomarker란 한마디로 생물학적 상태나 질병을 예측할 수 있는 측정 가능한 표지를 말한다. 예를 들어 혈구세포에 항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감염의 생체지표다. 그리고 BRCA1이나 BRCA2 유전자의 특정 돌연변이는 유방암에 걸리기 쉬운 정도를 말해 주는 유전체 생체지표다. 신경과학의 발달 덕분에 이제는 특정 행동을 하는 성향이 있을 때 특정 정신질환에 걸릴지 여부, 그리고 특정 치료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점점 더 세밀하고 선택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생체지표들이 확인되고 있다. 기존에는 미신과 미스터리로 바라보았던 질병들의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했고, 환자에 따라 맞춤형 치료가 더욱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날이 머지않았다. 지금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릴지 여부를 증상이 발현되기 최고 30년 전에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진단 검사들이 나와 있다." "이렇게 우리는 선천적 요인을 후천적 요인과 분리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237-41)


"건강을 넘어 사회적인 문제로 시선을 돌리면 도덕적 고려뿐만 아니라 정치적 고려까지도 그림에 넣어야 한다. 에든버러 대학교의 통계유전학자 데이비드 힐 박사의 연구는 높은 지능과 연관된 유전자가 장수, 행복, 높은 사회경제적 지위와도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연구가 말하는 대로 인생에서 중요한 이런 측면에 작지만 의미 있는 유전적 요소가 들어 있다면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해지는 빈곤을 줄이기 위한 대책에 대해 논의할 때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낮은 사회경제적 환경에서 자라는 것이 신경발달에 불리하다는 것은 이미 연구를 통해 시사된 바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새로운 유전학 지식이 그런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시스템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오히려 강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위험한 부분은 정치가와 다른 사람들이 생물학을 불개입non-intervention의 논거로 사용한다는 것이다."(247)


"우리는 일부 정신질환에서 환경과 생물학의 상호작용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 가고 있지만 누가 이런 질환에 걸리고, 또 누가 안 걸릴지 예측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예를 들어 어째서 어떤 형제는 아동 시절의 정신적 외상으로 만성 우울증에 걸리고 어떤 형제는 기적처럼 마음이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을까?" "회복력이란 역경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인생관을 유지하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회복력은 복잡한 현상이지만 유전적 요인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에 관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유전자 중 하나는 뇌유래신경영양인자brain-derived neurotrophic factor, BDNF다. 이것은 기존 뉴런의 생존을 뒷받침하고, 새로운 뉴런의 성장을 촉진하고, 뉴런들 사이의 연결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는 대단히 유용한 화학물질을 생산한다. 이 유전자의 한 변이인 Val66Met은 BDNF가 아주 높은 농도로 발현되도록 지시한다. 이 유전적 변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뇌가 아주 튼튼하다."(264-6)


"하지만 잠시 유전적인 기여 요인에만 국한해서 생각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회복력에 관여하는 특정 BDNF 변이를 단일 유전자로 찾아내면 그만인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유전자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르게 반응하고, 반응의 크기도 환경의 촉발 요인에 따라 커지고 작아진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듯이 회복력처럼 복잡한 특성의 경우 수많은 유전자가 관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생물학적 개념으로 이해해 보자면 회복력은 고난에 반응하는 수많은 서로 다른 행동을 아우르는 대단히 복잡한 현상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테마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불행하게도 사회적 불안, 충동성, 취약한 감정 조절의 성향을 갖게 만드는 유전자 레퍼토리를 갖고 있는데 학대, 부상, 질병, 유기 등의 심각한 스트레스 요소도 경험한다면 당신의 정신건강을 더욱 손상시킬 일련의 강력한 환경적, 사회적 요인을 촉발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당신의 유전자 성향을 영속시키게 된다."(266-7)


# 다유전자성polygenic : 어떤 특성이 나타나는 데는 단일 유전자가 아니라 여러 유전자가 관여한다는 의미


8 협동하는 뇌


"실수투성이 뇌가 일반화하기 좋아하는 것들 중에서, 인간의 본성은 주요 대상 중 하나다." "나는 생물학이 인생 궤적을 좌우한다는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두는 자기가 바라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관점이 아무리 매력적일지언정 그 관점 역시 옹호하지 않는다. 사실 인간은 진정한 제약과 타고난 재능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런 개성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인간의 본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없다. 우리가 종의 전체적 특성을 공유하는 것은 사실이다. 개인의 수준에서는 생물학이 상당히 결정론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 집단이 전체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는 것은 또 하나의 지나친 단순화 모형이다. 그렇게 얘기하면 수십 개의 고유한 현실 모형인 뇌가 서로와 마주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장엄한 복잡성과 유연성, 수십억 명이 제각기 찾고 있는 고유한 현실 모형들이 부정되어 버린다."(285-6)


"개인적으로 보면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행동에서 끝없이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고유의 신경생물학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다. 패스트푸드를 먹고, 지역 선거에 투표를 하고,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면 발끈하는 것도 다 그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법률 제정, 개입, 정책 입안 등을 통해 환경을 바꿈으로써 거시 수준의 변화가 만들어진다면 특정 행동 쪽으로 우리를 집단적으로 유도하고 유지해서 집단 수준에서 큰 변화를 일구어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항상 패스트푸드 대신 케일 샐러드를 선택하고, 지역 민주주의 활동에 참여하고, 철창신세를 지는 일이 없도록 인간관계에서 감정을 충분히 다스린다. 반면 어떤 사람은 도넛을 입에 달고 살고, 선거일에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만 보고, 옆 차선에서 바보같이 운전하는 사람에게 주먹을 날린다. 대부분 사람들의 행동은 이 중간 어디쯤에 해당해서 맥락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맥락에 따라 이런 성향이 북돋아질 수도, 약화될 수도 있다."(288-9)


"사회 전반에서 더욱 폭넓게 그런 접근 방법을 추구하기로 결정하려면 자기 자신과 타인 안에서 연민, 협동, 호기심, 그리고 비판적이지 않은 마음가짐을 북돋을 필요가 있다." "수천 년에 걸쳐 인류가 개념(혹은 밈, 아이디어, 행동)의 전파를 가속하는 엄청나게 다양한 활동들을 만들어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저녁에 마을을 거닐며 이웃과 나누는 대화, 모닥불 주변으로 둘러앉아 나누는 이야기, 시각 미술 전시나 음악 연주, 나이트클럽이나 술집에 가기 등 모든 사회적 모임과 예술 표현은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해 준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통해 직접 경험하지 않았던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도 흡수할 수 있다. 신경촬영 기술은 이런 '밈 전염' 방식에 대한 노출이 증가하면 뇌 속에서 극적이고 지속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사람이 그런 활동에 많이 참여할수록 뇌의 연결성도 증가한다."(307-9)


"인생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신경과학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라고 대답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수록 운명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주장에 더 큰 힘이 실린다. 우리는 방대하고 복잡한 행동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배어들고, 놀라운 메커니즘을 통해 세대를 거쳐 전달되고, DNA 암호 속에 새겨지고, 또 유전자 볼륨 조절 다이얼을 통해 정신을 구성하는 회로의 구축을 지시하는지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각하는 세상과 현실감은 본질적인 정보 처리의 제약을 안고 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안고 있는 운명을 믿게 만든다. 반면, 뇌의 또 다른 특성인 가소성, 활력, 유연성은 행동, 나아가서는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여지를 남긴다. 하지만 개개인의 습관을 깨뜨리려면 인내심과 함께 자아성찰, 그리고 타인과 소통하고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는 능력도 필요하다. 우리가 번성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한다."(3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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