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왕국 프로이센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 박병화 옮김 / 마티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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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가(家)


"브란덴부르크 일대는 상당 부분이 척박한 토질이었고, 따라서 농산물 수확이 저조했다. 그곳의 장원 제도는 서유럽이 보여준 도시 발달을 자극할 만한 충분한 잉여 노동력을 내보내거나 구매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장래성 없던 이 영지가 어떻게 강력한 유럽 국가의 심장이 되었을까? 열쇠는 통치 왕조의 분별력과 야망에 있다. 호엔촐레른 가문은 남부 독일에서 떠오르는 최고의 귀족 가문이었다. 1417년에 작지만 부유한 영지인 뉘른베르크의 성주 프리드리히 폰 호엔촐레른은 브란덴부르크를 그곳의 당시 영주인 지기스문트 황제로부터 헝가리 금화 40만 길더를 주고 구매해 땅은 물론 세력까지 얻었다. 브란덴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선출권을 가진 7대 선제후국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때 신성로마제국은 유럽 독일어권의 크고 작은 국가들을 이어 만든 조각이불 같은 형태였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라는 새로운 칭호를 얻은 프리드리히 1세는 오늘날 유럽 지도에서 사라진 정치 세계로 진입했다."(36-7)


2 / 참화


"30년전쟁 기간에 독일은 유럽판 대재앙의 무대가 되었다.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2세 황제와 신성로마제국 내 프로테스탄트 세력 간의 대치 상황은 덴마크와 스웨덴, 에스파냐, 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까지 휘말리며 확대되었다." "육지로 둘러싸여 무방비 상태에 있던 브란덴부르크로서는 이 전쟁이 선제후 국가의 온갖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재앙이었다. 갈등의 결정적인 고비에서 브란덴부르크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나라의 운명은 전적으로 다른 나라의 손에 달린 꼴이 되었다. 선제후는 국경을 지킬 능력도 없었고, 백성을 지휘하고 지켜줄 수도 없었으며, 자신의 직위조차 유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마르크 지역으로 군대가 밀려오는 동안 법은 무용지물이었다. 지역 경제는 마비되었고, 일과 가정 생활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파괴되었다. 1세기 반이 지난 뒤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선제후의 땅이 〈30년전쟁 동안 너무 황폐해져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참혹한 흔적이 역력하다〉라고 썼다."(55-6)


"모든 것을 말살한 30년전쟁의 광기는 현실과 무관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집단 기억에 토대를 둔 세계관에 영향을 주었다는 의미에서 신화가 되었다. 토머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국가를 사회의 구원책으로서 합법적으로 독점 권력을 행사하는 체제로 찬양한 것은 종교적인 내전의 광기 때문이었다. 그는 질서와 정의가 사회적 갈등에 매몰되는 것을 보느니,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군주 국가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것이 확실히 더 낫다고 역설했다. 작센의 법학자로서 홉스의 영향을 받은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독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무엘 푸펜도르프는 마찬가지로 국가의 필요성에 대한 근거를 폭력과 무질서로 둘러싸인 암흑 세계에서 찾았다." "권력의 집중을 통해 무질서를 제압해야 하는 필연성에서 국가의 정통성이 나온다는 주장은 근대 초기의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지만, 브란덴부르크에서 유난히 큰 공감을 얻었다."(77)


3 / 독일의 특별한 빛


"참담하고 절망적이었던 1640년에 비춰볼 때, 17세기 후반 브란덴부르크의 부활은 놀라울 따름이다. 1680년대에 접어들었을 때 브란덴부르크는 병력 2만에서 3만을 오가는 규모의 군대를 보유했다. 소규모의 발트 함대도 생겼고 아프리카 서해안에 자그마한 식민지도 확보했다. 동부 포메른으로 건너가는 지협은 선제후의 영지를 발트해안과 연결시켜주었다. 브란덴부르크는 바이에른이나 작센과 동등한 힘을 갖춘 지역 세력이었으며 주요 평화협상에서 인기 있는 동맹국이자 주요 당사국이었다. 이런 변화를 앞서서 추진한 인물은 '대선제후'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빌헬름(재위 1640~88년)이었다." "그의 세대에 와서 호엔촐레른 가문은 1613년에 요한 지기스문트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방향 설정을 비로소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646년에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오라녜 공작의 19세 된 딸 루이서 헨리에터와 혼인함으로써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결속을 강화했다."(81-3)


"선제후는 자신의 몸값을 올리고 자국 군대의 군사 보조금을 타내기 위해 끊임없이 동맹 파트너를 바꾸었다. 이는 의도적으로 갈피를 안잡는 정책이었는데, 여기에는 황제에 대한 선제후의 충성심이 흐릿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미래의 국가 복지를 위해 신성로마제국을 없어서는 안 될 상대로 보았다. 물론 제국의 이해관계가 합스부르크가 황제의 관심사와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선제후는 때로 황제의 이해관계에 맞서 제국의 제도를 수호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보았다. 하지만 황제는 브란덴부르크의 창공에 뜬 항성이었다. 그러므로 선제후가 자신의 후계자에게 〈네가 황제와 제국에 대해 품어야 할 존경심을 늘 명심하라〉고 경고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황제에 대한 반역적인 분노와 제국이라는 오랜 제도에 대한 뿌리 깊은 존경심(적어도 존경심을 쉽게 거두지 못하는 태도)의 기묘한 조합은 18세기 후반까지 지속된 프로이센 외교정책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98-100)


4 / 왕권


"1701년에 베를린은 이전에 종종 그랬듯이 국제 정세의 덕을 톡톡이 보았다. 황제는 브란덴부르크의 지지가 절실하지만 않았다면, 아마 선제후의 국왕 즉위에 협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합스부르크 왕조와 부르봉 왕조의 역사적인 싸움은, 루이 14세의 손자를 공석 중인 에스파냐 왕위에 앉히려는 프랑스의 계획에 맞서 유럽 열강이 동맹을 맺었을 때 새로운 유혈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격전이 벌어질 것을 예상한 황제는 자신이 양보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양 진영으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은 선제후는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1700년 11월 16일, '왕위 조약'을 대가로 황제 편에 서기로 결심했다. 이 합의에 따라 프리드리히 1세는 분견대 8천 명을 황제에게 보내고 그 밖에도 합스부르크가를 여러 모로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빈의 궁정은 새로운 왕위의 제정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그리고 유럽 열강 사이에서 그 자리가 널리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한다는 데 동의했다."(124)


"1713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의 2대 국왕으로 즉위했을 때 프로이센군의 병력은 4만 명이었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1740년에는 8만 명으로 규모가 확대되어 있었다. 그 결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당대에 인구나 경제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많다는 인상을 주는 군대를 과시했다. 그에 소요되는 엄청난 비용에 대해서, 왕은 잘 훈련되고 독립적인 재무 구조를 갖춘 군사력만이 국제적인 분쟁에서 자신에게 자율성을(자신의 부친과 조부에게는 없었던) 보장해준다는 말로 정당화했다. 하지만 군대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생각이 있었을 수도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재위 기간 내내 외교정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실제로 군대를 배치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한 사실을 보면 이런 판단에 힘이 실린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군대의 절대복종에 몹시 마음이 끌렸다." "군대는 물론 정책상의 기관이지만, 이 군주가 품고 있던 세계관의 인간적이고 제도적인 표현이기도 했다."(152-4)


5 / 프로테스탄트


"1691년 3월 21일, 드레스덴의 작센 궁정에서 루터교 수석설교사로 있던 필리프 야코프 슈페너는 베를린 교회의 고위 성직에 취임했다. 이것은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말해 도발적인 임명이었다. 슈페너는 논란을 일으킨 종교개혁 관련 운동에서 널리 알려진 지도자였다. 그는 1675년에 『경건한 소망』(Pia Desideria)이라는 소책자를 출판하자마자 악명을 떨쳤는데, 이 책은 당시 루터파의 종교 생활에 담긴 여러 가지 결함을 비난했다. 그는 정통파 교회가 교리의 정확성을 옹호하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목회자에 대한 보통 기독교인들의 요구는 등한시한다고 주장했다. 루터교 교구의 종교적 삶은 무기력하고 생기를 잃었다는 것이다. 경건하고 이해하기 쉬운 독일어로 슈페너는 다양한 구제 방법을 제안했다. 경건한 토론 모임을 만들어 기독교 공동체의 영적 생활에 새 활력을 불어넣자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슈페너는 이것을 '경건한 자들의 모임'(collegia pietatis)이라고 불렀다."(188)


"브란덴부르크가 경건주의에 협력한 이유는 (선제후의) 칼뱅파 가문에서 겪는 종파상의 독특한 난관 때문이었다. 루터파의 격렬한 비판을 억누르기 위한 거듭된 노력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고 두 종파가 자발적으로 통합할 가능성은 여전히 요원했다. 따라서 종파 간의 다툼에 대한 슈페너의 거리낌 없는 비난은 선제후와 그의 가족에게는 달콤한 선율처럼 들렸다." "슈페너는 언제나 기존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성찬식이나 교리에서 전통을 존중했다. 그리고 절대 통합운동을 지지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프로테스탄트 신앙에서 칼뱅파와 루터파의 경계를 초월하는 종파적으로 불편부당한 기독교 정신의 윤곽을 그려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교리와 성례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진정한 사도교회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경건주의는 프로테스탄트 두개 종파에 대한 최고 감독권을 요구한 프로이센 군주제의 주장에 대한 '내적 토대'를 굳건히 해주었다."(191-2)


"경건주의자들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왕조의 통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기여한 것은 동시대의 뷔르템베르크 경건주의 운동이나 체제 전복적인 영국의 청교도주의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루터교 내부의 제5열로서 경건주의는 칼뱅파의 신앙고백 규정이나 역대 선제후가 내릴 수 있었던 어떤 검열 조치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이념적 도구였다. 하지만 경건주의자들은 단순히 통치자를 보좌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들은 폭넓은 토대를 둔 프로테스탄트의 자발적 운동에서 얻은 에너지를 새롭게 위상이 올라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왕조의 공공사업에 공급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국가의 목표가 양심적인 시민의 목표가 될 수도 있고 국가에 대한 봉사는 단순히 의무나 사리사욕에 의해서가 아니라 포괄적인 윤리적 책임감에 의해서도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홍보했다. 그러면서 통치자와 백성의 관계를 넘어서는 연대공동체가 출현했다."(205-6)


6 / 땅에 있는 권력


"18세기 마지막 30여 년간, 도시 기반의 상공업 구조에서 일어난 변화는 (전통적으로 군림하던 길드 조합원보다) 주로 상인과 기업가, 제조업자로 이루어진 신흥 엘리트를 만들어냈다." "이런 경향은 특히 중소 도시에서 두드러졌다. 여기서는 지역 행정이 전적으로 자원봉사를 하는 명사의 도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프로이센 도시의 통치는 오로지 녹봉을 받는 국가공무원의 손에 달렸다기보다 시민계급의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요소로서 만만찮은 자원을 가진 지역의 자발적인 노력에 좌우되었다는 것이다. 프로이센 영토에 있는 도시에서 '쇠퇴한' 것은 (실제로는 서유럽의 상당 부분에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장인조합의 풍습 및 예법에 의해 유지되는 전통적인 신분체제의 특권과 지역의 자율성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대체한 것은 사업의 팽창과 시 업무의 비공식적 리더십을 수용함으로써 그들의 야망을 표현한 새롭고 역동적인 엘리트 계층이었다."(225)


"프리드리히 2세가 1752년에 언급한 '프로이센의 힘'은 국내의 부가 아니라 독특한 '산업 분야의 근면'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대선제후의 집권 이후, 국내 산업 발전은 호엔촐레른 정부의 핵심 목표 중 하나였다. 이후의 선제후와 국왕들은 토착 노동력을 확대하기 위해 이민을 받아들이고 토착 기업의 기초를 다지고 육성함으로써 이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다. 일부 기존 기업은 수입 금지와 관세로 보호받았다. 불확실한 생산 품목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되거나 엄청난 이익을 포기해야 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정부 스스로 전매권을 행사하며 관리자를 임명하고 자본을 투입하고 품질 관리를 하며 영업이익을 거두어들였다. 중상주의 원칙에 따라, 원자재를 가지고 다른 데서 가공하기 위해 해당 지역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프리드리히가 국왕으로서 먼저 내린 결정 하나는, '상업과 제조업'을 감독하는 새로운 행정기관인 관리총국의 제5부를 창설하는 것이었다."(249-50)


7 / 지배권을 위한 투쟁


"1740년 12월 16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브란덴부르크 병력 2만 7천 명을 이끌고 방비가 허술한 합스부르크의 슐레지엔 국경을 넘었다. 겨울철 원정이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은 적진을 휩쓸었고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6주밖에 지나지 않은 1월 말이 되자, 수도인 브레슬라우를 비롯해 슐레지엔의 전 영토는 사실상 프리드리히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 침공 작전은 프리드리히의 생애에서 단일한 정치적 사건으로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외교 및 군사 부문의 고위 고문관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 단독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슐레지엔의 획득은 신성로마제국 내의 정치적 균형에 항구적인 변화를 불러왔고 프로이센을 강대국 간의 줄타기라는 위험한 미지의 세계로 몰아넣었다. 프리드리히는 이 침공이 국제적인 여론에 미칠 충격파를 잘 알고 있었지만, 손쉬웠던 이 겨울 원정을 시작으로 앞으로 전개될 유럽의 변화는 거의 예측하지 못했다."(263)


"배후 동기의 상대적인 무게가 어디에 있든, 슐레지엔 침공은 프리드리히를 새로 취득한 지방의 통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길고 험난한 싸움으로 몰아넣었다. 오스트리아는 1741년 봄에 반격했지만,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동력은 4월 10일 브레슬라우 남동쪽의 몰비츠에서 프로이센에 패배함으로써 무너졌다. 이것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라고 알려진, 영토 분할을 둘러싼 전면전의 서막이 오른다. 5월 말,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님펜부르크 조약을 통해 황제 선출에 후보로 나선 바이에른의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를 지원했다." "(오스트리아에 맞선) 님펜부르크 동맹이 프리드리히의 이익에 보탬이 되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가 분할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고, 오스트리아를 희생시킨 대가로 작센이나 바이에른이 세력을 키우는 것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 "1742년 여름, 프리드리히는 동맹국들을 포기하고 오스트리아와 단독 강화를 맺었다."(277-8)


# 2차 슐레지엔 전쟁(1744~45년) 승리 후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소유권 확정


"이제 프리드리히는 자신이 (반프로이센 동맹을 결성한) 세 개 강대국─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의 적군에 포위되었고, 1757년 봄이면 합동공격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자신을 상대로 군대를 모으지 않겠다는 것과 공격을 시작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장하라고 요구했을 때, 그녀의 대답은 불길할 정도로 불확실했다. 그러자 프리드리히는 적이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선제 공격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1756년 8월 29일, 프로이센군은 작센 선제후국을 침공했다. 이때 프로이센의 선제 공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고 그만큼 충격이 컸다. 이는 왕 혼자서 내린 결단이었다." "'예방전쟁'으로 시작한 작센 침공은 적들이 군사력을 완벽하게 끌어모으기 전에 프리드리히가 전쟁을 시작하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민감한 (베를린에서 8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역을 통제할 수 있게 해주었다."(283-4)


"사실상 모든 연합군 전투가 그렇듯이, 그들에게는 동기부여와 신뢰의 문제가 있었다. 프로이센이라는 '괴물'을 쓰러트리는 것에 목표를 둔 마리아 테레지아의 집착은 좀 더 제한적인 목표를 가진 대부분의 다른 동맹국들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관심은 기본적으로 대서양상의 갈등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에 그들은 로스바흐에서 프리드리히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뒤(1757년 11월 5일) 프로이센과 싸우는 것에 급속히 흥미를 잃었다. 재협상 끝에 1759년 3월에 체결된 제3차 베르사유 조약의 틀 안에서 프랑스는 동맹군에게 약속한 군대 및 재정 지원을 중단했다." "동맹세력 안에서 가장 강력한 축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었지만 여기도 문제는 있었다. 양국 어느 쪽도 이 전쟁에서 동맹 상대가 과도한 이익을 얻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결정적인 상황에서 이런 불신은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승리를 굳히는 데 군사력을 사용하기를 망설이는 태도로 이어졌다."(286)


# 3차 슐레지엔 전쟁(7년 전쟁, 1756~63년)도 프로이센의 승리로 마감


"프리드리히가 국가의 사회적 의무, 특히 목숨과 신체를 아끼지 않고 그의 군대에 복무했던 사람들에 대한 책무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은 무엇보다 1763년의 여파에서였다. 프리드리히는 1768년에 〈전체 국민을 위해 자신의 신체와 건강, 체력 나아가 목숨까지 바친 병사는 자신이 모든 것을 걸며 지켜주려고 한 바로 그 사람들에게 혜택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베를린에는 장애인이 된 상이군인 600명을 수용할 보호시설이 세워졌고 전시구제자금을 위한 기금을 조성해 농촌 고향으로 돌아가 가난에 시달리는 귀환병사에게 보조금을 지급했다. 궁핍한 환경에 내몰린 군인들을 위해 소비세와 관세, 담배 전매사업과 관련한 저임금 노동 및 간소한 정부 고용직이 마련되었다. 아울러 아주 일반적인 의미의 사회보장이라는 측면에서, 프리드리히는 식량 부족, 높은 물가와 기근에 대응하기 위해 곡물소비세와 창고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302)


"처음으로 제국의 정치적 삶은 권력 양극단의 균형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이중 축'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1778년 바이에른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촉발된 갈등은 오스트리아가 혼자서 프리드리히에 맞서는 것을 얼마나 원치 않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다른 독일국가들의 반응이었다. 이들 중 다수는 프리드리히를 합스부르크가가 자행한 강압적인 권력 게임에 맞서 싸우는 제국 통합의 수호자로 바라보면서 프로이센 편을 들었다. 1785년 요제프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바이에른과 바꾸려는 두 번째 시도를 하자, 프리드리히는 다시 한번 황제의 계획에 맞서는 제국 수호자로 등장했다. 이해 여름, 그는 작센과 하노버, 소수의 군소 영방 대표들과 제휴하고 '영주동맹'을 맺었다. 이들의 목표는 황제의 계획에 맞서 제국을 수호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프리드리히가 배운, 상대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방식이었다."(306-7)


8 / 감히 알려고 하라!


"프로이센 계몽주의는 대화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것은 자유롭고 자율적인 주제를 놓고 벌이는 비판적이고 공손하며 제한이 없는 대화 같았다. 대화가 중요한 것은 예리하고 정제된 판단을 허용해주기 때문이다." "1741년 쾨니히스베르크에 설립된 협회를 포함해 초국가적인 프로젝트라고 할 '독일협회'의 규약은 회원들이 결실이 풍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식적인 조건을 명백히 규정했다. 낭독회와 강의에 이어 토론이 벌어지는 동안 회원들은 독단적이거나 분별이 없는 논평을 피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신 낭독의 형식과 방법, 내용을 가지고 구조적인 비평을 해야 했다. 이들은 칸트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성의 신중한 언어'를 사용해야 했다. 논제 이탈과 방해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모든 회원은 궁극적으로 발언할 권리를 보장받았지만, 차례를 기다린 다음에 가능하면 간결하게 말해야 했다. 풍자적이거나 조롱조의 소견과 도발적인 말장난은 용납되지 않았다."(347-8)


"독서회와 프리메이슨 지부, 여러 애국협회도 모임의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이런 신흥 공론장을 나태하고 수동적이며 정치에 무관심한 시민 집단이나 반대파 혹은 반란을 모의하는 세력으로 생각하면 잘못이다. 프로이센 계몽주의를 유지한 사회적 네트워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국가와 가까웠거나 사실상 부분적으로 국가와 동일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프로이센 계몽주의를 키워낸 지적 전통의 문제였다. 프리드리히 3세 재위 기간에 프로이센 대학교에서 확립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치하에서 계속 뿌리를 내린 중상주의나 국가에서 행정적으로 지원하는 '과학'과의 연결고리는 대단히 천천히 단절되었다. 게다가 프로이센 인텔리겐치아의 사회적 지위도 이런 전통에 한몫했다. 당대의 프랑스 문단에서는 독립적인 활동을 하던 사람 혹은 프리랜서 작가가 중요한 역할을 한 데 비해, 프로이센 계몽주의를 지배하던 집단은 공무원 집단이었다."(351-2)


"진보적인 학자나 작가, 사상가들로서는 국가를 계몽주의 프로젝트의 파트너로 보기가 쉬웠다. 통치자 자신이 계몽주의 가치관의 유명한 옹호자였기 때문이다. '계몽주의 시대'와 '프리드리히 시대'가 동의어라는 임마누엘 칸트의 발언을 환심을 사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18세기 유럽의 전체 군주 가운데 프리드리히는 계몽주의의 가치와 사고방식을 가장 열심히 구현했다." "1784년의 기념비적인 글에서 임마누엘 칸트는 권력과 계몽주의가 똑같은 한 명의 군주 손에 들어갈 때, 정치적 자유와 시민의 자유의 관계는 완전히 변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계몽 군주가 있는 곳에서는 군주의 권력이 시민사회에 위협이 되기보다 자산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칸트는 그 결과가 역설적이라고 말했다. 진정으로 계몽된 통치자 밑에서는 정치적 자유의 적당한 제약이 오히려 '대중이 온갖 능력을 활짝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354-7)


"1794년에 반포된 프로이센 국가의 보통법만큼 18세기말 프로이센의 과도기적 상태를 잘 기록한 것은 없을 것이다." "보통법에서 정말 흥미로운 것은, 그 안에 서로 다른 관점이 들어 있다는 점이 아니라 서로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법전은 이미 지나간 세계, 각각의 질서가 국가와의 관계에서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중세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창안한 세계, 성문화 작업이 끝날 무렵 이미 해체되고 있던 세계로 후퇴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모든 시민이 '자유롭고' 국가에 주권이 있으며, 왕과 정부가 법으로 규정된 세계를 예견하고 있기도 하다." "마담 드 스탈은 프로이센이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한쪽은 군사적이고 다른 한쪽은 철학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전통과 혁신이라는 양극단이야말로 호엔촐레른 국가의 역사적 궤적을 정의한다."(388-91)


9 / 오만과 인과응보: 1789~1806년


"1791년 8월 27일 오스트리아 황제와 프로이센 국왕이 공동 발표한 필니츠 선언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원칙적인 반대를 천명한 것이었다. 선언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통치자는 그들의 '형제'인 프랑스 국왕의 운명을 〈모든 유럽 군주의 공동관심사〉로 간주한다는 언급으로 시작했다. 그런 다음 프랑스 왕이 가능한 한 빨리 〈완벽하게 자유로운 상태에서 왕정의 토대를 확인할 수 있는 위치로〉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제안한 공동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무력 수단〉으로 〈신속하게 제안할 것〉이라는 약속으로 끝을 맺었다. 표현은 비록 흐리멍덩했지만, 이것은 각 왕조의 반혁명 연대에서 나온 명확한 선언이었다." "동맹국이 실제로 프랑스를 침공할 것인지, 한다면 정확하게 어느 시점에 할 것인지는 불분명했지만, 1792년 4월 20일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선전포고를 하자 군사적 충돌은 불가피해졌다."(398-9)


"프로이센군은 공식적인 동맹군으로 남아 있었지만 정신이 다른 데 가 있었기 때문에 원정 자원을 일부밖에 투입하지 못했다. 베를린 정부의 마음을 어지럽힌 것은 폴란드의 상황이었다." "1788~91년에 러시아가 큰 희생을 치른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때문에 꼼짝 못하고 있는 사이,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왕과 폴란드 개혁파는 정치 체제의 변화를 추진할 기회를 잡았다. 1791년 5월 3일에 반포된 폴란드 신헌법은 최초로 세습 왕조와 중앙 정부의 틀을 다듬었다." "하지만 1794년 10월 10일 바르샤바 남동부에 있는 마체요비체에서 러시아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리하여 3차이자 최종적인 폴란드 분할의 길이 열렸다. 1795년, 폴란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동부에서 기대 이상으로 목표를 달성한 프로이센은 (다시 한번 동맹국을 저버리고) 지체 없이 서부의 반프랑스 동맹에서 발을 빼내어 1795년 4월 5일, 바젤에서 프랑스와 단독으로 강화조약에 서명했다."(401-5)


"하지만 프로이센이 이룩한 것은 보기보다 깨지기 쉬운 것이었다. 지난 6년 동안 프로이센은 사실상 모든 유럽 국가와 스스로 동맹을 맺었다가 파기했다. 잘 알려진 왕의 비밀외교 취향과 혼란스러운 이중거래는 그를 외톨이로 만들었고 외교적인 문제에서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곧 프로이센은 강대국의 지원이 없으면 독일의 휴전선을 방어할 수 없고, 따라서 중립 지대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경험해야 했다. 그와 달리 더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폴란드가 유럽 지도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폴란드를 상대로 강대국이 자행한 영토 분할의 도덕적 무도함을 차치하고라도, 폴란드가 독립해 있으면 동부의 3대 강국 사이에서 완충지대로서 또 중재자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더 이상 폴란드가 존재하지 않는 이제, 프로이센은 사상 처음으로 러시아와 방어가 불가능한 긴 국경을 공유하게 되었다."(406-7)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처음에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나폴레옹과 협상을 하려고 했지만 그의 시도는 퇴짜를 맞았다. 베를린은 10월 24일에 점령되었고, 그로부터 3일 후에 나폴레옹이 수도에 입성했다." "1806년 10월 하순부터 1807년 1월까지 프랑스군은 주요 요새를 강제로 점령하거나 항복을 받아내면서 프로이센 영토를 계속 유린해나갔다." "1807년 6월 25일 황제 나폴레옹과 차르 알렉산드르는 강화를 위해 만났다." "차르의 압박에 못 이긴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이 국가로서 존속하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틸지트 조약(1807년 7월 9일)에 따라 프로이센은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남은 것은 브란덴부르크와 포메른(스웨덴령은 제외), 슐레지엔, 동프로이센 그리고 여기에 폴란드 1차 분할 때 프리드리히 대왕이 획득한 회랑 지대가 전부였다. 2차와 3차 분할 때 획득한 폴란드 지방은 동부에 프랑스-폴란드 위성국가를 위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떨어져나갔다."(423-7)


10 / 관료들이 만든 세계


"1806~7년에 패전과 굴욕의 여파 속에서, 대신과 고위 관료로 구성된 새 정부 지도부는 프로이센 정치 행정부의 구조를 개편하고, 경제 규제를 철폐하며, 농촌 사회의 기본 규칙을 새로 짜고, 국가와 민간 사회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일련의 정부 칙령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개혁의 문을 열어젖히도록 만든 것은 바로 패전의 규모였다. 전통적인 사회 구조 및 행정 절차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자 오랫동안 내부로부터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에게 기회가 찾아왔고 반대파들은 침묵하게 되었다. 전쟁은 종래의 수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재정 부담을 안겨주었다." "여기서 나온 위기감은 강력하고 일관된 행동 계획과 그런 실태를 설득력 있게 전파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이처럼 모든 면에서, 나폴레옹의 승리라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은 프로이센 국가 내에서 이미 움직이고 있던 힘을 한데 모으고 그것을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432-3)


"구제도 아래서 개인 보좌관의 영향력은 왕이 어느 쪽으로 귀를 기울이는가에 따라 들쑥날쑥했다. 어느 날 조심스럽게 주장을 펼치고 설득을 해서 결정된 안건도 바로 그 다음 날 물거품이 될 수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새로운 제도하에서는 다른 대신들과 '함께' 공동 작업을 벌이면서 왕을 '관리'하는 것이 가능했다." "개혁 진영에서는 항상 왕에게 더 과감한 결정기구에 대한 통제권을 제공함으로써 군주의 권위를 확대하고 강화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라는 점을 강조했다(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무척이나 불손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실제로는 자문이라는 빗장을 걸어 잠금으로써 왕의 운신의 폭을 제한했다. 이들은 좀 더 광범위한 국가의 책임과 의무 구조에 군주제를 묶어놓고 관료화할 작정이었다. 왕은 이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슈타인이 앞으로 왕이 반포하는 법령은 다섯 명의 대신이 서명할 때만 효력이 발생되도록 하자고 건의했을 때 묵살했다."(444-5)


"군 개혁을 주도한 샤른호르스트는 나폴레옹의 사단 체제를 프로이센에 도입하고 예비군으로 지역민병대를 설치할 것을 주문했다. 크네제베크(프로이센 토박이)를 비롯한 다른 장교들도 순수하게 '민족적인' 프로이센군의 창설을 내다보는 야심찬 계획을 수립했다." "이들은 카스트 제도 같은 장교단의 배타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군대는 절도 있는 애국심의 보고가 되어야 하고, 1806년에 명백히 결여되었던 활기와 책임감을 불어넣는 존재여야 했다. 샤른호르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군인정신의 함양과 고취를 통해 군대와 국민을 좀 더 유대가 굳건한 연합체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군과 프로이센 '국민' 간에 이같이 새로운 관계를 다각도로 달성하는 효과를 올리기 위해, 개혁파는 보편적인 병역 의무를 주장했다. 직접 군에 입대하지 않는 사람은 향토 방어를 위해 복무하도록 하고, 프로이센 사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해온 (특히 도시에서) 병역 면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46-9)


"프로이센 발전의 특이성을 파악하는 한 가지 방법은 나폴레옹 시대에 독일 지역 각국에서 진행된 광범위한 개혁 활동의 맥락에서 조명해보는 것이다. 바덴,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3국 역시 이 무렵에 집중적인 행정개혁을 겪었는데, 거기서 빚어진 결과는 헌법개혁이라는 본질적으로 훨씬 더 파급력이 큰 것이었다. 3개국 모두 헌법과 전국 선거, 의회를 받아들였다. 법안을 통과시키려면 의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이런 배경으로 볼 때, 1823년 이후 프로이센에 새로 설치된 주의회(Land-tag)는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한편, 프로이센 사람들은 경제 근대화에서 일관되게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뮌헨과 슈투트가르트의 개혁파가 구체제의 중상주의가 걸어왔던 보호주의 노선을 옹호한 데 비해, 프로이센 사람들은 무역과 제조업, 노동시장의 규제 철폐에 목표를 두었다." "이렇게 프로이센은 남부 독일 3개국보다 덜 '근대적인' 헌법 체계를 가진 채 나폴레옹 시대를 벗어났다. 대신 국민경제는 더 '근대적'이었다."(466)


11 / 강철 시대


"1809년 봄이 되자, 승리의 여신은 마침내 나폴레옹을 외면한 것처럼 보였다." "이 상황은 군주 주변의 인물들을 분열시켰다. 일부는 러시아의 지원 없이 프랑스에 선제 공격을 하는 것은 프로이센으로서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군 개혁파와 외무대신 아우구스트 프리디르히 페르디난트 폰 데어 골츠, 법무대신 카를 프리드리히 바이메를 비롯한 나머지는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촉구했다. 그런데도 왕은 완강하게 방임정책을 고수했다. 자칫 국가의 완벽한 멸망을 부를지도 모를 어떤 움직임도 자제하는 것이 그의 정책이었다. 하지만 당대의 많은 사람들의 눈에 국왕이 신중하게 기다리는 태도는 비열하고 비난받아 마땅해 보였다." "1809년의 위기 기간에 군주는 강제 퇴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일시적인 몽상일 수도 있지만, 혁명기의 격동적 상황에서 나온 덧없는 감정이 전통적인 군주의 자화상을 얼마든지 뒤바꿔놓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474-9)


"1813년 3월 17일,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결별한다고 공식 선언했고, 3월 25일에는 러시아와 칼리시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을 통해 러시아의 차르와 프로이센 국왕은 통일 독일에 대한 구상을 추진하기로 약속함으로써 국민적 열기를 견인할 길을 모색했다." "6월 4일 이후, 연합군의 정책에서 가장 시급한 목표는 오스트리아를 설득해 연합군에 합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외무대신인 클레멘스 벤첼 폰 메테르니히는 1813년 초 이래로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미 러시아를 발칸반도 최대의 위협으로 보고 있었고 독일에 대한 나폴레옹의 지배권이 러시아의 손에 넘어가는 것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화 중재를 위한 메테르니히의 노력이 나폴레옹의 비타협적인 태도로 실패하자, 오스트리아는 마침내 연합군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힘의 균형은 프랑스에 불리한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496-9)


"프로이센군은 1813년의 원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제로 그들은 연합군의 지휘 체계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구성원이었다. 뷜로는 명목상 신중한 성격의 북군 소속 군단장 베르나도트의 부하였지만, 원정 기간에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차지하기 위해 몇 차례의 중요한 고비에 상관의 명령을 무시했다." "이와 똑같은 흐름은 이듬해의 원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 1814년 2월에 연합군이 프랑스 국경으로 접근하자, 슈바르첸베르크와 메테르니히는 지금이야말로 전력이 약화된 나폴레옹에게 강화를 제안할 때라고 주장했다. 나폴레옹은 무사히 황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도 늦추지 말고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압박한 사람은 블뤼허였다." "프로이센의 전쟁기획자들은 나폴레옹군을 궤멸시켜 그가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자는 야심찬 목표를 겨냥했다. 이런 전쟁관은 훗날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진다."(506-7)


"조국에 대한 공훈을 기리기 위해 도입된 새로운 훈장만큼 프로이센 전시 동원 체제의 대중적인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은 없을 것이다. 왕실 주도로 설계되고 도입된 철십자훈장(Der Eiserne Kreuz)은 모든 계급을 대상으로 수여되는 프로이센 최고의 훈장이었다. 〈병사도 장군과 동등한 조건이다. 장군과 병사가 똑같은 훈장을 단 것을 본 사람은 누구나 장군이 훌륭한 지휘를 통해 그것을 받은 데 비해 병사는 한정된 자신의 영역 내에서도 그것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여기서 처음으로 용기와 솔선수범은 계급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미덕이라는 인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프로이센은 이때 '강철 시대'(eiserne Zeit)였다. 이리하여 철십자훈장은 이 전쟁을 기념하는 상징으로 변했다.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한 뒤, 왕은 모든 프로이센의 깃발과 기장에 철십자훈장을 넣고 전쟁 내내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철십자훈장은 처음부터 프로이센의 '기억의 공간'으로 설계되었던 것이다."(511-2)


12 / 역사를 통한 신의 행진


"프로이센은 독일 국가들의 미래의 조직에 관한 복잡한 협상에서 그들의 뜻을 관철하지 못했다. (하르데베르크와 훔볼트가 대표로 활동한) 프로이센이 원한 것은 강력한 중앙집행기관을 갖춘 독일이었다. 이것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군소국들에 대한 권한을 공유하는 체제로서, 간단히 말해 '강력한 주도권을 행사하는 이원 체제 방식'이었다. 이와 반대로 오스트리아는 중앙기관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느슨한 독립국가 연합을 선호했다. 1815년 6월 8일에 합의를 본 독일 연방약관(Deutsche Bundesakte)은 프로이센의 구상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승리를 의미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프로이센 국가의 미래라는 측면에서, 나폴레옹 이후에 찾아온 안정 상태의 중요성을 떨어뜨린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 호엔촐레른 왕국은 독일 북부 전역에 걸친 거대한 땅덩어리가 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한 19세기 프로이센의 (그리고 독일의) 정치적·경제적 발전은 무시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531-2)


"1815년의 협상 결과 사상 최초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보다 더 많은 '독일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독일 연방은 베를린이 북부 독일을 공식적으로 지배할 수 있도록 해주줄 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프로이센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전체적인 시스템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선에서 비공식적이고 제한된 주도권을 행사할 정도로는 융통성이 있는 집행기구를 두었다. 독일 연방이 영토를 초월한 자체의 제도를 확립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프로이센이 주도권을 행사할 문은 열려 있었다. 1815년 이후 프로이센 행정부가 주목한 것은 특히 관세 일원화와 연방 안보정책 두 개 분야였다. 이 두 가지는 프로이센이 발전시킨 분야로서, 1848년 혁명 이전에 수십 년간 '독일 정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1834년 1월 1일에 발효된 독일 관세동맹(Zollverein)으로 현실화된 관세의 일원화는 독일 영토에서 영향력과 특권을 놓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벌어진 오랜 경쟁을 위한 새로운 터전이 되었다."(532-5)


"프로이센의 협상대표단은 1818~19년에 좀 더 응집력이 있고 '민족적'인 색깔을 띤 (베를린의 지휘를 받는) 연방 군대를 창설하기 위해 애썼지만,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는 군소국 대표는 독일 군소국의 군사적 자율성을 양보하는 그 어떤 방안도 지지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이 국가들은 독일에 연방 군사기구를 두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이것은 강력한 연방기구가 궁극적으로는 프로이센에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한 오스트리아의 마음에 드는 결과였다. 연방 군사정책을 시험해볼 최초의 기회는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과 더불어 찾아왔다. 혁명사상의 침투와 나폴레옹 침략은 여전히 기억에 생생했고, 당대 사람들, 특히 남부 사람들은 1830년 여름의 격동적인 상황이 (1790년대처럼) 서부 독일에 대한 침략으로 이어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프로이센의 정책입안자들은 때를 놓지지 않고 프랑스가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프로이센에 이롭게 이용하는 데 (단기적으로는) 성공했다."(537)


"보수파는 오래전부터 어떤 형태의 '국민' 대표성에도 반대해왔다. 그들이 볼 때, 실현 가능한 대표성의 형태는 사회 내부에 역사적인 뿌리가 있는 기존 신분제의 이익과 특권에 맞춰야 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프로이센 국민을 차별성이 없는 전체로 묘사하는 헌법은 반란과 무질서를 조장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메테르니히는 1818년 11월, 비트겐슈타인 왕자에게 프로이센 왕은 〈지방 신분제의회를 설치하는 것보다 더 나가면 절대 안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1823년 6월 5일의 일반법을 통해 정부는 국민에게 의도를 드러냈다. 프로이센은 성문 헌법도 국민 의회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신 왕의 백성들은 지방의회로 만족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보수 경향은 개혁 이전 상태로 복귀할 수도 없었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개혁을 멈추게 할 수도 없었다. 더욱이 보수파는 점점 개혁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사고(가령 '국민'이라는 관념)를 채택하고 마음속에 받아들였다."(549-53)


"1831년에 프로이센 왕국의 인구는 1,315만 1,883명이었다. 이 중에서 약 543만 명(약 41퍼센트)이 작센과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지방에 살았는데, 이들 지역은 1815년 이후에야 프로이센 땅이 된 곳이었다. 여기에 1793년 폴란드 제2차 분할에 따라 프로이센에 병합된 포젠 대공국의 주민들까지 더하면 그 비율은 50퍼센트 가까이 올라간다." "따라서 (전국적인 의회와 헌법이 부재하던) 프로이센 왕국은 행정적인 의미에서 여기저기 흩어진 형태로 남아 있었으며, 언어와 문화의 측면에서도 조각보 같은 구조였다." "국가는 모든 프로이센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한 유일한 기관이었다. 하필 이 시기에 국가의 개념을 둘러싼 담론이 전례 없이 활발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815년 이후 프로이센 국가의 위엄을 널리 알리는 데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은 없다." "헤겔에 이르러 국가는 시민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 주체에게 보편성을 되찾게 해주는 신성해 보이는 기구가 되었다."(577-82)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의 아들로서 새 '프로이센인'이 된 마르크스는 1836년에 법학과 정치경제학의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베를린에 왔다. 마르크스에게 헤겔 사상과의 진정한 첫 만남은 종교적 개종과 비슷할 정도로 강렬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는 1837년 11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며칠간은 전혀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했습니다. 지저분한 슈프레 강변의 밭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고 [···] 집주인의 사냥에도 따라나섰지요. 베를린 길모퉁이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부둥켜안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답니다.〉 훗날 마르크스는 관료 계층을 '보편적인 신분'으로 본 헤겔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와 상관없이 헤겔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프롤레타리아를 '일반 이익의 순수한 화신'으로 이상화한 마르크스의 생각이 헤겔 철학의 개념을 유물론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마르크스주의도 프로이센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587)


13 / 정치적 혼란의 확산


"1840년 신분제의회의 충성 맹세에 따라 신문지상에서 논쟁이 벌어지자, 쾨니히스베르크 주지사인 테오도르 폰 쉔은 『어디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을 저술하여, 〈삼부회가 있을 때만 우리 나라에 공적 생활이 시작되고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쉔의 저서에 대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반응은 날카롭고 솔직했다. 왕은 자신과 백성 사이에 끼게 될 '종잇조각'(헌법)을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프로이센을 계속 '가부장적' 방식으로 다스리는 것이 자신의 신성한 의무라고 선언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즉위에 뒤따른 정치적 좌절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정치 환경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정치적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고 격화되었다. 의사이자 유대인 급진파였던 요한 야코비는 1841년 그의 팜플릿 「네 가지 물음에 대한 동프로이센인의 답변」에서 양보나 호의로서가 아니라 '빼앗길 수 없는 권리'로서 국민의 '합법적인 국정 참여'를 요구했다."(598-600)


"1840년대 프로이센 땅에서 많은 소요와 기아로 인한 폭동이 일어났지만, 슐레지엔 직조공의 반란처럼 여론의 지지를 받은 것은 없었다." "여기에는 공장의 노동 조건, 인구밀집 지역의 주택 문제, 신분조직의 해체(예를 들면, 길드와 신분에 따른 지위 등), 경쟁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경제로 변화, 새로 부상하는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종교 및 도덕의 타락 등 복합적인 문제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대하고 핵심적인 문제는 하층계급이 점차 가난해지는 '궁핍화' 현상이었다. 당시의 '빈궁'(Pauperism) 상황은 여러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전통적인 빈곤의 형태와 달랐다. 그것은 질병과 부상 혹은 흉작에 따른 개별적인 우연의 산물이라기보다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현상이었고 게절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었다. 이때의 빈곤은 장인계급(특히 도제와 조수)과 영세자작농처럼 그 이전 시기에 상대적으로 지위가 안정적이었던 사회 집단을 삼키는 특징을 드러냈다."(611-2)


"생존을 위한 폭동은 자발적이고 비정치적인 동기에서 일어날 때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고도로 정치적이었다. 그것은 참여자의 주변 영역 너머로 확장된 정치화 과정을 촉진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와 보호무역주의자는 물가 상승과 정부의 복지부동에 따른 대량 빈곤, 자유주의 관료들이 도입한 규제 해제식의 개혁을 비난했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공장 시스템'을 비난하기도 했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산업화와 기계화는 사회를 위기에 빠뜨린 원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대책이라고 주장하며, 투자를 방해하고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 정부 규제의 철폐를 요구했다. 1844~47년의 사회적 위기에 놀란 보수파는 이후 19세기 독일식 복지국가를 내다보는 처방으로 실험을 했다. 생존 폭동은 특히 급진파에게 그들의 수사와 이론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더 날카롭게 벼릴 기회를 제공했다." "자원을 둘러싼 극심한 사회적 갈등은 프로이센의 정치적 분화의 속도를 촉진하는 부정적 에너지를 방출했다."(617-8)


14 / 프로이센 혁명의 찬란함과 비참함


"1848년 2월 말, 베를린 시민은 혁명 소식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1847년 겨울에는 스위스의 진보적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보수적인 가톨릭 주와 내전을 벌이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자유주의적 헌법을 실현한 새로운 스위스 연방주가 탄생했다. 그 다음 이탈리아반도의 불안한 정세에 대한 보고가 있고 나서, 1848년 1월 12일에는 팔레르모에서 반란군이 권력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로부터 2주가 지난 뒤, 나폴리 왕이 이탈리아 군주로서는 처음으로 국민에게 헌법을 양보하자 팔레르모 혁명의 성공이 확인되었다. 베를린을 흥분시킨 것은 무엇보다 프랑스에서 날아온 뉴스였다. 2월에 자유주의 반체제 운동은 군대와 시위대의 유혈 충돌로 절정에 오르면서 파리에서 세를 얻었다." "파리로부터 프로이센의 수도로 뉴스가 들어오자, 베를린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정보를 수소문하면서 토론을 벌이기에 바빴다. 독서클럽과 커피하우스, 온갖 종류의 공공시설은 사람들이 터질 듯이 들어찼다."(633-4)


"거리를 휩쓰는 군중의 '투지와 불손'이 격화되는 것에 놀란 베를린 경찰국장 율리우스 폰 미누톨리는 3월 13일 시내에 새로운 군부대의 투입을 요청했다. 군중과 진압부대는 시가지를 장악하기 위해 싸우는 집단적인 적대세력이 되었다." "3월 18일, 베를린 전역에서 손에 잡히는 것들로 즉석에서 만든 바리케이드가 생겨났다. 이 임시변통 장벽에서 대부분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시가지 곳곳에서 비슷한 형태로 치러졌다." "긴장이 고조되던 이튿날 정오 직후에 내려진 왕의 군대 철수 결정은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아주었다. 이것은 3월 18~19일 밤에 있었던 잔인한 전투─300명이 넘는 반군과 100여 명의 장병이 희생된─를 감안하면 중요한 결정이었다." "이로 인해 국왕은 수도의 격렬한 대치 상태로 인해 명성을 더럽히지 않은 공적 인물로 떠올랐다. 이것은 독일 지역의 문제에서 프로이센이 주도권을 행사할 기회가 혁명에 의해 주어졌다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636-43)


"허약한 베를린의 정치적 타협을 가장 뒤흔든 것은 민간과 군당국 사이의 관계 설정이었다. 이는 프로이센의 다음 세대가 다시 맞닥뜨려야 하는 문제였다. 7월 31일, 슐레지엔의 도시 슈바이트니츠 지역의 군 사령관이 멋대로 내린 명령에 따른 격렬한 충돌로 민간인 1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폭력사태가 번졌고 그 와중에 브레슬라우 의원 율리우스 슈타인은 군 장병이 헌법적 가치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기준을 도입하자는 발의를 했다." "국왕과 의회 간의 힘겨루기가 이어지던 11월 3일에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시민군이 해산(무장해제)되었다. 정치 클럽이 폐쇄되고 급진적인 신문 중에 유명한 것은 폐간되었다." "11월 9일, 브란덴부르크 신임 수상은 국민의회 임시의사당으로 가서, 의회는 브란덴부르크 시에서 모이는 11월 27일까지 휴회할 것이라는 발표를 했다. 많은 의원은 11월 27일에 브란덴부르크 시에서 모이려고 했지만, 이내 흩어지면서 국민의회는 12월 5일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648-50)


"군대의 충성이란 그렇게 간단한 현상은 아니었다. 결국 그것은 프로이센 시민의 군대였다. 대다수의 병사가 혁명을 지지한 바로 그 사회 계층에서 뽑혀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 많은 군인이 탈영하거나 복무를 거부하지 않았는지, 또 왜 군대 내에 혁명조직을 결성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묻는 것이 합리적이다. 물론 일부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군 지휘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부대원 대다수는 계속 왕과 그들의 사령관에게 충성했다." "이들이 왕에게 순종하는 동기는 지역의 조건과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양했지만, 결정적인 요인이 하나 있었다. 각 지역의 반란에 대한 진압 임무를 맡은 병사들 사이에는, 그들이 혁명을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보호'하는 것이며, 다만 급진파의 무정부적 혼란에 맞서 헌법을 수호하고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혁명 세력 내의 주도권이 빠르게 급진 좌파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에 의해 일정한 신뢰를 얻었다."(654-5)


"J. P. 테일러의 말을 빌리자면, 1848년 프로이센의 봉기는 프로이센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기회를 놓치게 만든 '갈림길'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구세계와 신세계 사이에 놓인 분수령이었다. 1848년에 시작된 10년의 세월은 정치적·행정적 현실의 엄청난 변화, 즉 '정부혁명'의 과정이었다." "이제 프로이센은 (자체의 역사에서 최초로) 선출된 의회를 가진 입헌국이었다. 이런 사실 자체가 프로이센 왕국의 정치 발전을 위해 전적으로 새로운 출발점을 만들어냈다. 1848년의 프로이센 헌법은 선출된 의회가 입안했다기보다 국왕에 의해 선포된 것이었지만 이 헌법은 대다수 자유주의자와 온건 보수파로부터 좋은 평을 들었다." "그것이 자유주의자들이 요구해온 것을 대부분 반영했으며 그런 점에서 '인민의 작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의회의 비준을 거치지 않고 공표함으로써 자유주의 원칙을 어겼다는 사실은 거의 무시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헌법은 '프로이센의 공적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676)


"대부분의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프로이센에서도 혁명 기간에 발생한 정치적인 인쇄물과 정치적인 독자층이 확대된 현상은 되돌릴 수 없는 물결이었다. 정부는 여론을 형성하는 사업에 좀 더 유연하고 협조 체계가 잘 이루어진 접근방식으로 대처했다." "만토이펠 수상은 정부가 각 부처 내의 독점적인 정보원을 활용해 국가의 활동과 외국의 사건과 관련한 뉴스를 알려야 한다고 보았다." "정부 활동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사전에 정립해야 한다는 만토이펠의 혁신은 부담스러운 검열기구로 언론의 글감을 걸러내는 시스템에서 뉴스와 정보의 미묘한 차이를 만드는 방법으로 변화를 이끌어나갔다. 이 모든 것은 1848년에 의해 만들어진 변화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증거였다." "만토이펠의 현금을 우호적인 기자와 편집자에게 지급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 중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1851년의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에서 프로이센 의원이 된 인물이었다."(683-4)


15 / 네 개의 전쟁


"1859년에 발발한 이탈리아 (통일)전쟁이 프로이센의 국가정책을 새로운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당대 사람들이 볼 때 이탈리아와 독일이 곤경에 처한 상황이 유사하다는 것은 명백했다. 양쪽 모두 (교육받은 엘리트 계층 내에서) 역사적·문화적 민족성에 대한 강렬한 정서가 왕조 및 정치적 분열이라는 현실과 공존했다. 또 양국 모두 오스트리아가 민족 통합에 방해가 된다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뚜렷한 유사점은 피에몬테와 프로이센 사이에도 있었다. 양국 모두 자신만만한 관료체제와 근대화의 개혁으로 주목받았으며 (1848년 이후로) 입헌군주국이었다. 그리고 대중의 민족주의를 억압하는 동시에 자국의 이익 범위 안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군소국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작전을 펼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따라서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에 열광하는 소독일 옹호자들은 1859~61년에 일어난 이탈리아 사태를 자연스럽게 독일의 정치 지형에 투사하게 되었다."(689-90)


"비스마르크는 1862년 가을에 베를린에서 수상에 임명되었다. 그의 목표는 국왕의 권력과 군대의 능률을 보호하면서 '의원들 대다수의 이해'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2년 복무라는 자유주의자의 요구를 들어주는 한편 군대의 병력을 증강하고 핵심 영역에서 정부의 통제력을 확보하는 수정된 군사개혁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런 작전은 지지를 유보하도록 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에트빈 폰 만토이펠의 저항 때문에 실패했다. 그것은 권력 측근의 해묵은 문제였다. 비스마르크는 지위를 유지하는 열쇠는 왕의 신임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 모든 정적을 무력하게 만다는 것임을 즉각 깨닫고 그에 걸맞게 자신의 정책을 바꾸었다. 타협을 포기한 비스마르크는 오로지 군주와 그의 이익에 전념하겠다는 것을 확실하게 왕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개적인 대립정책으로 전환했다. 그는 곧 왕에 대한 영향력에서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702-3)


"덴마크 전쟁은 덴마크가 어쩔 수 없이 강화를 청한 1864년 8월 1일에 끝났다. 이 분쟁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세 가지다. 첫째,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보다 군사력이 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세기 동안 전투 경험이 없는 군대로서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분쟁의 두번째 두드러진 특징은 정치적 리더십이 군의 리더십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점이다. 덴마크 전쟁은 프로이센으로서는 민간 정치인이 통제권을 행사한 최초의 군사적 분쟁이었다. 전쟁 내내 비스마르크는 갈등의 전제가 자신의 외교 목표에 확실히 기여하도록 유도했다." "마지막으로 전쟁 기간 내내 우위를 차지한 비스마르크의 위상은 긴장과 동시에 반감을 두드러지게 유발했다." "프로이센 최고 지도층은 1848년의 혁명 이후 자리잡은 민군 관계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회피하고 외면해왔다. 이것은 1918년에 호엔촐레른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프로이센(그리고 독일)의 정치에 붙어 다녔다."(707-12)


# 전쟁 결과 :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양 공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가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국에게 이양되면서, 프로이센의 대오스트리아 전쟁의 단초로 작용한다.


"1866년 프로이센 승리의 주역은 참모총장인 헬무트 폰 몰트케였다. 보헤미아에서 몰트케는 덴마크에서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혁신적인 전략을 펼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전쟁에 임하는 그의 접근법은 프로이센군을 최고 속도로 공격 지점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소규모로 쪼개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개별 부대를 마지막 순간에 한곳으로 집결하게 해서 적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의 이점은 비좁은 국도와 단선 철도에 따른 수송 부담을 줄이고 교통체증을 피하는 데 있었다. 야전군의 증가된 진격 속도와 기동력은 적군보다 프로이센군이 결정적인 전투의 시기와 무대를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또한 철도와 도로, 전신 같은 최신 기반시설 자원을 교묘하게 활용하고자 하는 동원 개념이었다." "이 접근법의 단점은 각 부대가 진로를 이탈하거나 서로 속도를 조절하는 데 실패하면, 적군이 월등한 병력으로 이들을 각개 격파할 수도 있는 위험이 따른다는 것이다."(721-2)


"새롭게 탄생한 프로이센 보병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장교의 명령에 따라 적군이 있는 방향으로 모여드는 가축 떼가 아니라 전투의 전문가였다." "그 결과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 사이에는 야전 운영의 차이가 점점 커졌다. 오스트리아군이 '총검 돌격 전술'을 가다듬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특히 1859년의 재난 이후) 프로이센군은 바늘총에 중점을 둔 '화력 전술'에 초점을 맞추었다. 몰트케는 전투 현장에 질서정연한 보병부대를 방어적인 전술로 배치하는 동시에 대단위 부대는 공격적인 전술로 배치하여 유연성과 속도를 조합하는 능력이 있었다. 이와 달리 오스트리아군은 전략적으로는 방어에, 전술적으로는 공격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보헤미아에서 벌어진 전쟁은 속도의 이점이 사거리의 이점을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총검을 꽂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보병들은 유리한 위치에서 후장총으로 무장한 보병이 쏘아대는 연속 사격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724-5)


# 전쟁 결과 :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을 해체하고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북독일 연방을 창설하는 것에 동의했다. 남독일 국가들은 프로이센과의 동맹협정에 서명해야 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야기하는 안보 위협이 통일을 촉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폴레옹 3세 황제는 1866년에 프로이센이 거둔 어마어마한 성공에 충격을 받고 그것이 프랑스의 이익을 위협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프랑스가 전통적인 의미에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사실에 분노했다. 1867년 봄, 비스마르크는 룩셈부르크 위기라고 알려진 외교 전략에서 이런 긴장을 활용했다. 룩셈부르크를 통합해서 기대를 충족하라고 은밀하게 나폴레옹 3세를 부추기면서 먼저 독일 신문에 나폴레옹의 계획에 대한 소식을 흘렸다. 이 뉴스가 민족주의적인 분노를 유발할 것이고, 비스마르크 자신은 국민의 뜻을 집행하는 명예와 신념에 따르는 정치가로 부상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위기는 독립 공국으로서 룩셈부르크의 지위를 보장하는 국제회의를 통해 해결되었지만, 비스마르크가 예상했듯이 간단히 프랑스의 선전포고로 이어질 수 있는 결말이었다."(734-5)


"그러다가 에스파냐 왕위에 대한 호엔촐레른가의 계승 자격을 둘러싸고 다시 프랑스와의 갈등을 이용할 기회가 찾아왔다." "이것은 1864년 및 1867년과 마찬가지로 비스마르크를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위기였다. 그는 누구보다 왕조의 메커니즘과 대중 민족주의의 힘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활용하는 데 능숙한 인물이었다. 비스마르크의 기량과 술책은 탁월하기도 했지만 기만적이기도 했다. 이 상황은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니 프랑스가 그의 손에 놀아났다고 말한다면 과장일 것이다. 전쟁도 불사하려는 프랑스의 준비 태세는 비스마르크의 행위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유럽의 국제질서 속에서 특권적 지위가 축소되는 그 어떤 사안에도 원칙적으로 반대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1870년에 프랑스가 전쟁을 벌인 것은 그들이 승리할 것(충분히 타당한 근거가 있다)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스마르크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계획했다'고 말하는 것도 과장일 것이다."(735-7)


# 전쟁 결과 : 프랑스 정부군이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강화 조약이 조인되었다. 남독일 국가들과의 통일이 진전되고 독일제국이 선포되어 빌헬름 1세가 황제로 즉위했다.


"1870년의 전쟁 이후 부상한 두 가지 요인(베를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사이의 긴밀한 유대 그리고 프랑스와의 지속적인 반목)을 통일 이후 수십 년간 유럽 정세의 상수로 본다면, 왜 프로이센-독일이 1914년 이전 수십 년간의 아주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고립 상황을 피하기 어렵다고 보았는지를 더 쉽게 알게 된다. 파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의 주요 목적은 반독일 동맹을 결성해서 독일을 견제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협력 체제를 위해 가장 매력적인 상대는 러시아였다. 베를린은 러시아를 독일의 동맹 체제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그런 프랑스의 의도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양쪽을 섞는 동맹 체제는 그 어떤 형태라고 해도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외교정책은 점점 발칸반도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곳은 빈의 이익이 곧장 러시아의 이익과 충돌하는 지역이었다."(743-4)


16 / 독일로 합병되다


"공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새 독일 안에서 프로이센의 위치는 1871년 4월 16일의 제국헌법(Reichsverfassung)에 의해 규정되었다. 이 주목할 만한 문서는 복잡한 역사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독일제국을 세우기 위해 모여든 독립 군주국들의 야망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져야 했다는 말이다. 비스마르크 자신은 주로 프로이센의 영향력을 다지고 확대하는 일에 관심을 쏟았지만, 이런 정책은 바덴이나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정부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 결과로 나온 헌법은 유난히 각국에 위임된 성격이 강했다. 사실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헌법이라기보다는 독일제국을 세우는 데 합의했던 주권국들 사이의 '조약'이었다." "새 제국이 통치 영주의 연방, 즉 '영주동맹'이라는 취지에 따라서, 제국의 각 구성국은 그들 자체의 의회 입법부와 헌법을 계속 유지했다. 즉, 복수의 독일 왕위와 궁정이 그대로 남은 상태에서 각국은 여전히 다양한 특권과 전통적인 위세를 떨쳤다."(748)


"비록 비스마르크 수상은 언제까지나 독일이 '영주동맹'으로 남을 거라고 주장했지만, 헌법에서 보장한 연방상원의 권한은 결코 충족되지 못했다. 그렇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단순히 군사적으로나 영토의 크기로나 프로이센의 위상이 지나치게 앞선다는 현실이었다. 연방 전체에서 영토 면적으로 65퍼센트를, 인구로는 62퍼센트를 차지하는 프로이센이 사실상 연방의 주도권을 행사했다." "프로이센의 독보적인 위치는 제국 행정기관의 상대적인 부실함으로도 나타났다. 신통찮은 제국 행정부는 폭증하는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새 부처가 세워진 1870년대에 등장했지만 계속 프로이센 행정조직에 의존했다. 제국 관청(외무, 내무, 법무, 체신, 철도, 재무)의 각부 수장은 정확하게 말하면 장관이 아니라 제국 수상에게 직보하는 낮은 직급의 차관이었다. 프로이센의 관료기구는 제국의 조직보다 규모가 컸으며 이 상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750-1)


"프로이센의 헌법은 시간의 변화를 좇아가지 못했지만, 프로이센의 정치문화는 그렇지 않았다. 보수당의 주도권은 인상적이었으나 동시에 중요한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는 것이기도 했다. 제국의회의 의원들(이들은 다수가 사회당이거나 자유당 좌파였다)이 포진한 프로이센과 주의회 의원들이 지배하는 시골의 프로이센은 양극단으로 갈렸다." "보수파 일색의 중심지 바깥에서, 특히 서부 지방과 다수의 도시에서는 왕성한 중산층의 정치문화가 두드러지게 융성했다. 많은 대도시에서는, 제한적인 도시 선거 덕에 유지된 자유당 과두 체제가 기반시설의 합리화나 사회복지 같은 정책을 주관했다." "1890년의 선거에서 사민당은 극심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최다득표를 한 독일 정당이 되었다." "20세기로 바뀔 무렵, 프로이센은 유럽에거 가장 크고 잘 조직된 사회주의 운동의 구심점이었는데, 이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대한 적절한 존경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었다."(754-6)


"한편, 프로이센 정부는 유대인의 공직 응모에 대한 차별정책을 지속했다. 심지어 1890년대에는 유대인 시민이 기독교식 성(姓)을 채택하는 것까지 막기 시작했다. 반유대주의자들은 누가 유대인인지 아닌지 혼란을 일으킨다는 인종주의적 이유로 유대인의 성씨 개명을 반대했다. 프로이센 정부 당국(특히 보수적인 내무장관 보토 폰 오일렌부르크)은 기존의 방침에서 벗어나 특별히 유대인 지원자를 차별하기 위해 반유대주의 기조를 따랐다. 1916년 10월,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전방에서 현역에 복무하는지를 판단할 목적으로 프로이센 전쟁장관이 실시한 '유대인 통계조사'도 같은 이치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국망치연맹'(1912년 설립) 같은 전국적인 반유대주의 조직은 오래전부터 독일 유대인은 조국 수호에 자신의 몫을 다하지 않고 전쟁으로 이득을 보는 자들이라는 주장을 펼쳐왔다. 이들은 전쟁 발발 이후, 특히 1915년 말부터 익명의 비난과 불만 제기로 프로이센 전쟁부를 맹공격했다."(782-3)


"황제의 임무에 대해서는 독일 헌법에 확실한 근거가 없었고, 그와 관련한 정치적인 전통도 없었다. 가장 분명한 것은 황제 대관식이 열린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1888년에 즉위한 빌헬름 2세도 이런 약점을 알았다. 그는 즉위하면서 자신의 직무를 황제의 위상에 맞게 격상시키기로 단단히 결심했다. 그는 끊임없이 여러 독일 국가를 여행했고, 독일 국민에게 새로운 집을 지어준 성스러운 전사로서 조부를 찬양했다. 그리고 새로운 경축일과 기념일을 도입했다. 말하자면, 프로이센 왕위의 헌법적·문화적 벌거숭이 상태를 국가의 역사라는 외투로 가리려고 한 것이다. 그는 독일 대중에게 자신이 '제국 개념'(Reichsidee)의 화신으로 비쳐지게 했다. 이렇게 독일인의 마음에 황제 지위가 정치적·상징적인 현실로 자리 잡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와중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연설이었다." "빌헬름 개인에게 연설은 그가 종종 자각하는 정치적 압박과 무기력한 상황에 대한 보상이자 효과적인 통치 도구였다."(794-5)


"프로이센 왕조의 마지막 며칠간은 비극적이라기보다 차라리 우스꽝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빌헬름 2세는 측근들이 숨기는 바람에 1918년 독일의 공세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최악의 뉴스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9월 29일 루덴도르프로부터 패전이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바로 눈앞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 통치자로서 빌헬름의 미래가 경각에 달렸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종전이 임박한 몇 주간, 특히 10월 중순 검열이 완화되고 나서 폭넓게 논의되었다." "11월 9일 오후 2시에 그가 프로이센 왕이 아닌 황제로서 퇴위에 관한 성명서에 막 서명하려고 할 때, 신임 제국총리인 막스 폰 바덴이 이미 한 시간 전에 황제가 두 개의 직위에서 퇴위했다고 발표했으며 정부는 사회민주당 소속인 필리프 샤데만의 수중에 넘어갔다는 소식이 사령부로 들어왔다." "충격에 빠진 빌헬름은 1918년 11월 10일 이른 시간에 네덜란드 국경을 넘은 뒤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815-7)


17 / 종말


"패전 이후에도 프로이센 주는 살아남았다. 온건 노선의 사민당 지도부가 정책적으로 연속성과 안정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통일 공화국에 약속한 정책을 제쳐놓고 여전히 멀쩡한 프로이센 정부의 기능을 유지하겠다는 의미였다. 1918년 11월 12일, 대(大)베를린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 집행위언회는 지방자치단체 및 국가 단위의 모든 행정 관청은 기능을 계속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튿날 혁명 집행위원회는 「프로이센 인민에게!」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면서 〈철저하게 반동적인 과거의 프로이센을 (···) 완벽하게 민주적인 인민궁화국〉으로 바꿀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11월 14일, 사민당과 더 좌파 색을 띠는 독립사민당의 의원들로 구성된 프로이센 연립정부가 수립되었다. 공무원들은 그들의 충성이 소멸한 왕정이 아니라 혁명위원회가 관할하는 현재의 프로이센 주를 향한 것임을 '노동자 및 병사 평의회'에 확실하게 다짐하면서 변화를 이끌었다."(829)


"마치 세상이 뒤집힌 것 같았다. 프로이센은 패전과 혁명을 거치면서 정치 시스템의 양극단이 반대로 바뀌었다." "1920년 11월 30일에 나온 프로이센 헌법에 따르면, 새 프로이센의 주권은 '국민 전체'의 손에 있었다. 프로이센 의회는 더 이상 상급기관에 의해 소집되거나 해산되지 않고 헌법이 정한 법률에 따라 자체적으로 소집했다. 독일 대통령 한 사람에게 엄청난 권력이 집중된 바이마르 (국가) 헌법과는 대조적으로, 프로이센 체제에는 대통령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센은 바이마르 공화국 자체보다 민주적인 요소는 더 철저하고 권위주의적인 요소는 더 약했다." "프로이센은 독일에서 '민주주의의 보루'이자 바이마르 공화국 내에서 정치적 안정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바이마르의 정치가 전국적인 차원에서 극단주의와 갈등, 정부의 빠른 교체 같은 특징을 보인 데 비해, 프로이센의 대연정은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온건개혁의 길로 나아갔다."(840-1)


"하지만 그 변화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 우리가 사법제도에 초점을 맞춘다면 새 집권층의 업적은 대수로울 것이 없다." "판사 대부분이 좌익 정치범에게 강경하고 극우 범죄에 관대하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이 분야에서 국가가 급진적 행동을 취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판사의 기능적·개인적 독립에 대한 깊은 존중이었다(특히 자유주의자와 가톨릭 중앙당 연정 파트너 사이에서). 판사의 자율성(정치적 보복과 영향력 행사로부터의 자유)은 사법 절차의 진실성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간주되었다. 일단 1920년에 이 원칙이 프로이센 헌법에 소중하게 반영된 이상, 사법부의 반공화주의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신임 판사를 임명하는 절차를 바꾸고 정년제를 도입함으로써 미래를 위한 개선을 약속했지만, 1920년에 도입한 제도는 효과를 볼 만큼 오래 가지 못했다. 1932년 베를린 헌법재판소의 한 재판관은 프로이센 판사 중에 공화주의자가 5퍼센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으로 평가했다."(842-3)


"프로이센 연립정부는 당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 곧 점진적으로 공화국화를 추진하는 길로 나아갔다. 다만 그들은 이런 정책이 완벽한 효과를 내기 전에 독일 공화국이 소멸될 것이라는 점은 알지 못했다. 아무튼 프로이센의 존립에 대한 진정한 위협은 국가공무원 조직이 아니라 국가 조직 바깥의 강력한 이익집단에서 발생했고, 이는 결국 공화국의 몰락에 기여하게 되었다. 스파르타쿠스단의 반란 위협은 1919~20년에 진압되었지만, 극좌파는 선거에서 꾸준히 적지 않은 지지를 받았다." "우익 세력은 이들과 이념적으로는 다르다 해도 과격하고 단호한 점에서는 마찬가지였고 수적으로는 훨씬 많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프로이센의 (또한 독일 전체에서 일반화된) 정책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보수적 환경'이 새 공화국의 정치문화에 전혀 수용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후에 등장한 지리멸렬하지만 규모가 큰 야당 극우 세력은 새로운 질서의 합법성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845-6)


"1932년 7월 17일 '알토나의 피의 일요일'에 나치는 (주로 공산주의자가 많은) 노동계급 거주 지구를 행진하며 도발했다. 이에 따른 혼전의 와중에 (경찰의 발포로) 18명이 피살되고 1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파펜과 각료들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프로이센 정부가 법질서 수호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이 준군사조직의 활동 금지를 풀어준 사람이 파펜 자신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기막히게 어이없는 혐의였다) 총리는 1932년 7월 2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해서 긴급명령권을 발동해 오토 브라운 프로이센 수상이 이끄는 정부를 해산시키도록 했다. 프로이센의 장관들은 '판무관'으로 대체되었다." "사민당 지도부는 이렇게 터무니없는 불법 행위에 지극히 소극적이고 체념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미 몇 주 전부터 해산 조치가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지만, 이것을 막기 위한 어떤 계획이나 조직적인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859)


"사민당 지도부가 이토록 무기력한 반응을 보인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프로이센의 사민당과 그들의 연정 파트너는 1932년 4월 지방의회 선거에서 주의회의 다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실패한 뒤로 이미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원칙에 충실한 민주주의자로서 그들은 유권자의 심판에 의해 정치적으로 힘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오토 브라운처럼 준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 관료 집단이 반란을 감행하는 것이 내킬 리 없었다. 그는 자신의 비서에게 〈40년간 민주주의를 신봉해온 내가 반란군의 수괴가 될 수는 없지〉라고 말했다. 브라운과 그의 수많은 동료는 긴 안목으로 볼 때 국가의 중앙집권화와 프로이센의 분할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혹시 이 때문에 쿠데타 세력의 정치적 책략에 의해 섬뜩한 일을 당하더라도 국가권력이란 사안을 위협하는 일은 그들로서는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권력의 균형추는 프로이센 정부의 반대편으로 기울었다."(860)


"(괴벨스가 주도한) 나치의 프로이센 과거 읽기는 기회주의적이고 왜곡되었으며 선별적이었다. 그리하여 프로이센 주의 전체 역사는 인종차별적 사고에 물든 민족적인 독일 역사의 패러다임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치는 프로이센 계몽주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나치는 민족주의적 공약 때문에 프로이센의 개혁가인 슈타인을 높이 평가했지만, 대조적으로 친프랑스 성향의 '현실정치가'이자 프로이센 유대인의 해방론자인 하르덴베르크는 완전히 무시했다. 또 피히테와 슐라이어마허에게는 열광했지만 헤겔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관심을 별로 보이지 않았다. 국가의 초월적인 위엄을 강조하는 헤겔의 견해가 나치의 '민족주의적' 인종차별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치가 내세우는 프로이센은 전설적인 과거의 파편 중에 번쩍이는 것들을 모아놓은 물신 숭배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가공된 기억이고 정권의 가식에 대한 부적 기능을 하는 장식품 같은 것이었다."(880-1)


"따라서 1943년 1월의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프로이센 정신'이라는 요소는 연합군이 채택한 무조건 항복이라는 정책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45년 가을이 되자, 점령지 독일을 다스리는 영국의 여러 행정기관에서는 (확실히 쓸모없는 형태로) '송장이나 다름없이 빈사 상태에 빠진 프로이센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명줄을 유지해봤자 '위험한 시대착오 정신'만 조장하리라는 것이었다. 1946년 여름, 이런 생각은 재독일 영국행정부의 확고한 정책이 되었다." "미국과 프랑스 대표도 이런 견해에 전적으로 동조했다. 단지 소련만이 꾸물거리며 결정을 미뤘는데, 주로 소련이 궁극적으로 통제권을 확보할지도 모르는 통일 독일의 중심축으로 프로이센을 이용할 수 있다는 희망을 스탈린이 여전히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47년 2월 초가 되자, 그들도 보조를 맞추면서 프로이센 주를 법적으로 종료시키기 위한 길이 열렸다."(8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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