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인류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4
존 모나한.피터 저스트 지음, 유나영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주 짧은 소개


"인류학은 지리상의 발견과 식민주의, 자연과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했다. 19세기, 다윈 진화론으로 이어지는 철학 사조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인류학자들은 사회·문화적 진화의 단계를 재구성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에드워드 타일러와 루이스 헨리 모건 같은 인물들은 문자 체계부터 결혼 관습까지, 가장 원시적인 기원부터 그것이 현대에 나타난 양상까지 모든 것을 망라한 저작을 발표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인류학자들은 가장 중요하게는 식민 관료, 선교사, 여행가, 기타 비전문가들의 기술에 의존하여 1차 자료를 얻는 데 더이상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민족지학자로서 자신만의 정보를 직접 얻기 위해 '현지(field)'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민족적 선구자들의 시대 이래로 인류학이 상당히 많이 변화하긴 했어도 여전히 민족지는 인류학을 다른 사회과학과 구분 짓는 요소 중 하나이며, 아마 모든 인류학자들이 민족지 기술의 중요성에 동의할 것이다."(9-10)


"20세기 초에 인류학자들은 대체로 단순한 기술을 지닌 소규모 사회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일부분 식민주의가 도래하면서 급속히 바뀌고 있던 생활 방식을 기록하려는 열망의 발로였고(물론 이들 사회가 서구와 접촉하기 이전에 변치 않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착각이지만), 일부는 인간 제도의 '본질적' 혹은 '기본적' 형태에 다가가려는 열망의 발로였다(이들 사회가 더 '초보적'인 법이나 종교 등을 지녔다고 가정하는 것 또한 착각이지만). 20세기 후반의 주류 인류학은 자신을 자연과학 전통에 속하는 학문으로 보는 시각에서 멀어졌고, 보다 해석적이고 인문학적인 접근법을 채택했다. 또한 비서구·소규모 촌락에만 맞추었던 초점을 전환하여, 도시의 산업화된 환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노동조합, 사교 클럽 등 기존 사회학의 범주에 속했던 집단으로까지 대상을 넓혔다. 그럼에도 인류학은 모든 사회를 염두에 두고 그들 모두를 똑같이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그 범위에 있어 대체로 비교 연구의 성격을 띠고 있다."(10)


1 동고에서의 다툼: 현지조사와 민족지


"인류학자가 하는 일은 다른 무엇보다도 민족지(ethnography)다. 문화인류학자나 사회인류학자에게 민족지란 생물학자의 실험실 연구, 역사학자의 문헌조사, 사회학자의 설문조사와도 같다. 흔히─완벽히 정확한 용어는 아니지만─참여관찰(participatory observation)이라고도 불리는 민족지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이해하려면 그들과 장기간에 걸쳐 긴밀히 상호작용하면서 관찰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명백히 단순한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있다. 전통적으로 인류학자들이 자기가 연구하는 공동체 안에서 장기간─때로는 한 번에 몇 년씩─거주하며 그 사람들과 최대한 많은 생활을 공유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현지조사에 몰입하는 과정은 사람들을 꾸준히 인류학으로 끌어들이는 독특한 경험이자 도전일 수 있다. 또한 참여관찰은 타인들이 세상을 보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깊이 이해하며 흔히 우리 자신의 선입견과 믿음에 제동을 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 같다."(26-8)


"민족지적 방법은 뜻밖의 발견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서베이나 통계 조사 같은 고도로 연역적인 사회과학 방법론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힘과 유연성을 지닌다. 실제로 인류학자들이 현장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연구 주제들이 있는 반면에, 현장의 실제 상황과 일상적 사건들이 우리 앞에 우연찮게 떨구어놓는 주제들도 있다. 민족지에서 뜻하지 않은 발견의 임의적 성격은 훌륭한 민족지학자가 현장에서 보내는 시간의 길이를 통해 보완할 수 있다. 그래서 조사가 끝날 무렵에는 이렇게 우연한 방식으로 대부분의 중요한 사회 현상을 접하게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민족지 현지조사가 제공하는 경험적 맥락이 없이는, 사회적 사건의 외견과 그 '실체' 사이의 불일치를 포착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인류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에서 통찰을 이끌어내기 위해 전통적으로 의존해온 강점 중 하나이자, 전통적인 민족지 현지조사가 장기간의 초기 조사를 중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34-6)


"민족지학자는 사회생활의 어떤 특정한 측면을 연구할 의도를 가지고 현지에 간다. 그 주제는 생태적 적응, 토착 신앙, 성별 관계, 풀뿌리 정치 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민족지학자는 준비 없이 모험에 뛰어들지 않는다. 대부분의 인류학자는 자신이 현지조사를 하려는 지역의 역사와 과거 민족지 문헌을 몇 년씩 공부하면서 준비를 시작한다. 인류학자들은 자신이 연구하는 사람들의 언어로 통역 없이 현지조사를 수행하는 것을 의무로 여겨왔으므로, 민족지학자 또한 몇 개 언어를 최소한 통용 가능한 수준으로 구사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일반적인 준비 외에도, 민족지학자는 자신이 조사하고자 하는 문제와 관련된 보다 전문적인 분야의 훈련을 받곤 한다. 예를 들어 아마존 원주민의 약용 식물을 조사하려는 연구자는 통상적인 식물학도 공부해야 하지만,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식물을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하고 이용하는지도 익혀야 한다. 인류학자는 항상 〈어떤 지역의, 무엇에 대한〉 인류학자다."(38-9)


"참여관찰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민족지학자가 공동체를 일종의 시공간적으로 고립된 모습으로 재현하고픈 유혹에 빠진다는 것이다. 특히 1930~40년대의 '고전적' 기술에서 많은 민족지학자들은 '민족지적 현재'라는 것을 적용하여, 공동체와 이웃한 다른 사회나 그것을 둘러싼 국가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은 채, 공동체가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 역사적 맥락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실제로 자기 모험의 낭만에 휩쓸린 인류학자들이 사회의 '훼손되지 않은' 전통을 그 사회의 성원들보다 오히려 더 높이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민족지적 현재'에 대한 또다른 비판은 민족지학자들이─마치 자신이 제시하는 정보를 이끌어내는 데 자신이 능동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것처럼─전지적 삼인칭 시점으로 글을 쓰는 경향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문제에 접근할 때, 우리는 민족지 기술의 독특함을 상대적인 시공간적 맥락에 놓아줄 문화 상호 간의 비교가 없으면 민족지는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44-6)


2 벌 유충과 양파 스프: 문화


# 문화에 대한 인류학적 정의들

1. 에드워드 타일러(1871) : 광범위한 (비교) 민족지적 의미에서 보았을 때, 문화 혹은 문명이란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 관습, 그밖에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이 획득한 능력과 습관들을 포함하는 복합적 총체이다.

2. 프란츠 보아스(1930) : 문화는 한 공동체의 사회적 관습의 모든 발현, 자신이 속한 집단의 관습에서 영향을 받은 개개인의 반응, 그리고 이러한 관습에 의해 결정된 인간 행동의 산물들을 포괄한다.

3. 브로니스와프 말리노프스키(1944) : 문화는 도구와 소비재로, 다양한 사회 집단의 입헌 헌장으로, 그리고 인간의 사고와 기술, 신앙과 관습으로 이루어진 통합적 총체이다. ······사람은 바로 이것에 의존하여 당면한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다.

4.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83) : 문화는 자연적인 것도 인위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유전자에서 유래한 것도, 합리적 사고에서 유래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대부분 그 기능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따르는 의식적으로 고안되지 않은 행동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5. 레나토 로살도(1989) : 문화는 인간의 경험을 선택하고 조직하여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문화는 일상적인 것과 심오한 것,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 우스운 것과 숭고한 것 모두를 포함한다. 문화 자체는 고급과 저급도 아니며 어디에나 배어들어 있다.

6. 워드 H. 구디너프(1963) : 문화는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기준, 무엇이 될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기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를 결정하는 기준, 그것에 대해 무엇을 할지를 결정하는 기준, 그것을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7. 마거릿 미드(1937) : 보편 문화(Culture)는 인류가 발전시켰고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습득된 전통적 행동들의 총체적 복합체이며, 특수 문화(a culture)는 주어진 사회, 사회 내의 한 집단, 특정 종족, 특정 지역, 특정 시기에 특유하게 나타나는 전통적 행동의 형태를 의미한다.

8. 애덤 쿠퍼(1994) : 문화는······ 학습된, 적응 가능한, 상징적인 행동으로, 완전하게 발달한 언어를 토대로 하며, 기술적 독창성, 즉 기술의 복합과 연관되어 있고, 이러한 기술의 복합은 다시금 공동체 사이의 교환 관계를 조직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20세기 초에 프랑스의 사회이론가 에밀 뒤르켐과 그의 조카 마르셀 모스는 인간의 분류 능력이 우리가 지닌 사회적 본성의 연장이라고 주장했다. 〈사회는 단지 분류적 사고의 준거 모델일 뿐만 아니라, 분류 체계의 틀로서 기능하는 그만의 고유한 틀이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분류는 정말로 보편적이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것은 구별하고자 하는 인간의 성향이 창출해낸 분류가 인간 정신의 이원적 본성에 의해 형성된 보다 근본적인 '심층 구조'의 표면적 재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뒤에 미셸 푸코의 영향을 받은 인류학자들은 문화적으로 부과된 의미 범주들이 불평등과 억압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문화적 분류의 내용을 통제하는 능력을 사회 내 권력의 주된 원천으로 보았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 같은 사회적 분류 범주들과 여기에 결부된 온갖 사회·정치·경제적 의미들의 경합(contestation)은 권위에 저항하는 주된 방식이 된다."(70-2)


"문화가 통합된 총체이자 통합시키는 총체라는 생각은, 외견상 별개의 것처럼 보이는 믿음이나 행동들 하나하나의 기저에 보다 근본적인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는 거대한 모더니즘적 통찰에 일부분 기반하고 있다. 마르크스에게 현실을 결정하는 것은 생산 양식이었다. 뒤르켐에게 그것은 사회였다. 프로이트에게 그것은 무의식이었다. 그리고 보아스의 뒤를 이은 많은 인류학자에게 그것은 문화 자체였다. 그 총체의 본질에 대한 개념을 중심으로 인류학의 서로 다른 학파들이 형성되었다. 보아스의 제자였던 루스 베네딕트는 문화를 '게슈탈트(Gestalt), 즉 하나의 총체적 패턴으로 인식했다." "클리퍼드 기어츠는 마치 소설이나 시를 읽듯이 문화도 텍스트로 읽을 수 있다고 보았다. 기어츠에 따르면 이러한 트릭은 그 사회의 성원들 스스로를 사로잡는 문화적 '텍스트'를 찾아내고, 이를 그들이 보는 방식대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텍스트'의 주제가 사회의 다른 측면을 조명하는 방식까지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다."(74-6)


"그 반대편 극단에는 문화가 통합된 것임을 부인하거나, 문화란 '넝마조각 같은 것', 즉 복잡하지만 본질적으로 임의적인 역사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응수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게서 나왔다. 그는 주어진 문화에서 발견되는 요소들의 역사적 기원이 제각각이기는 해도, 이것들은 '브리콜라주(bricolage)'─문화의 잡동사니들이 애초에 의도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근본적 패턴에 들어맞는 용도를 새롭게 부여받은 일종의 콜라주─로서 한데 엮여 있다고 지적했다. 보다 최근 들어서, 근본적 기반이라는 모더니즘적 가정을 부인하는 인류학자들은 이 '브리콜라주' 개념을 이용하여, 문화적 요소를 계속 뜯어고치고 던져버리고 재생시켜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복합체로 만드는 과정이 바로 문화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봄으로써 이들은 문화의 본질화라는─문화를 역사 바깥에 존재하며 인간이 주체성을 발휘할 여지가 없는 대상처럼 취급하는─문제를 피해갈 수 있다."(78-9)


"여러 난점에도 불구하고, 인류학의 문화 개념은 우리 학문 분야가 현대 사상에 한 가장 중요한 기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공동체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기반이 근본적으로 임의적이며 학습된 것임을 밝혀낸 문화 개념은, 인종주의나 민족적 쇼비니즘, 그리고 19세기 인류학의 상당 부분을 특징지었던 '과학적' 인종주의와 대적하는 막강한 무기였다." "당시 미국에는 이주민 중 특정 민족이 유전적으로 '약하고' '열등하다'는 식의 믿음이 팽배해 있었는데, 영원한 경험론자였던 보아스는 어떤 민족이든 일단 미국에 와서 건강 및 영양 상태가 개선되면 급속이 누구 못지않게 강건해진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믿음을 타파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생물학적 유전보다는 환경이 인간의 특성과 행동을 결정하는 주된 요인이라는 보아스의 확신은 그의 일부 제자들에게 계승되어 문화결정론이라는 이론으로 발전했고, 이는 우리가 아직까지도 벌이고 있는 '본성 대 양육' 논쟁에서 정점에 다다랐다."(81-2)


3 어느 짧은 만남: 사회


"우리는 자기 정체성의 많은 측면을 우리가 속한 다양한 집단으로부터 얻는다. 인류학자들은 행동을 문화가 제공한 인지 지도의 결과물로 보았다. 하지만 인간 행동이 '사회적' 종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지닌 본성의 한 측면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두가 알 듯이, 우리는 그 안팎의 관계가 '규칙'의 지배를 받는 집단들로 조직되며,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이러한 기능은 개별 구성원이 죽은 뒤에도 지속된다. 우리는 문화를 '지녔지만' 사회에 '속해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문화에 대한 관심은 사람들이 주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알아내고 그들의 행위를 틀에 끼워맞추고 다른 이들의 행위를 해석하려는 열망에 의해 촉발된다. 사회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지배하는 규칙과 질서,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는 방식, 활동이 조직되는 방식에 대한 이해와 더 관련이 있다. 이 두 접근법은 같은 복잡한 대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것일 뿐, 서로 전혀 배치되지 않는다."(91-2)


"레드클리프브라운을 비롯한 '구조기능주의자' 혹은 '기능주의자'들은 사회구조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개인과 집단 간 관계의 패턴을 기술했고, 이러한 패턴을 그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경향이 있었다. 말리노프스키 같은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기능이 그가 말한 '욕구의 원칙', 즉 식량과 주거 등 사회 개별 성원들이 지닌 기본적 욕구 충족과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또다른 학자들은 이러한 기능이 사회 제도의 작동 및 영속성과 더 큰 관계가 있으며, 사회관계의 유지에 필요한 일종의 경비라고 보았다. 기능주의자들은 사회 제도가 '항상성 평형 상태'에서 스스로 영속하며 사회구조가 행동을 제약한다고 보았으므로, 사회 변화를 설명할 수 없는 사회관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기능주의자들이 기술한 많은 사회가 식민지였고 엄청난 변동과 재편을 겪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이는 특히 중대한 결함이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사회생활의 역동적 특질과 개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더 기울고 있다."(99-10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호혜성, 교환, 동맹을 본질적인 사회관계로 여겨, 사회구조가 집단 간 결혼 파트너의 흐름을 조직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레비스트로스가 볼 때, 친족 집단 간의 다양한 동맹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와 우선혼(preferential marriage, 배우자감으로 더 우선시되는 후보는 있지만 특정 범주의 친척과 결혼해야 한다는 강제 규정은 없는 혼인 방식)을 하는 사회 간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사회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유기체 모델에서 사이버네틱 모델로 바꾸어놓은 이들 중 한 사람이다. 이에 따라 사회의 부분들은 신체 기관과 유사하기보다는 정보 체계 내의 데이터 흐름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좀 더 최근의 인류학자들은 사회구조 자체의 본질에 대한 관심이 줄고, 사회에서 권력 관계가 유지되고 경합하는 방식으로 주의를 돌리는 듯하다. 그들이 볼 때, 사회구조란 순수하게 국지적인 전통의 산물인 마큼이나 글로벌한 정치·경제적 힘의 산물이기도 하다."(101-2)


"막스 베버는 합리화(rationalization) 개념으로 전통 사회와 현대 사회의 제도적 관계의 차이를 설명한다. 제도─상대적으로 독립되고 지속적이고 자율적인 행동과 이데올로기의 패턴─가 그 속의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수행하는 과업을 중심으로 조직된다는 것이다. 베버에 따르면, '전통' 사회의 개인이 속한 집단은 서로 중복되는 다수의 역할을 수행하며, 그의 삶의 모든 측면과 연관된 사회적 자아를 구성한다. 반면에 '현대' 사회가 일반적으로 지닌 '합리적 제도' 내에서는 개인의 특정한 과업 수행 능력이 그의 사회적 자아의 어떤 측면보다도 중시된다." "베버와 그의 많은 추종자들에게 현대적 제도의 정수는 관료제다. 이는 '관료에 의한 지배'로 흔히 전형화되지만, 베버는 관료제를 이해하는 핵심이 개개인을 초월한 목표를 위해 대규모 집단을 조직하고 절차에 대한 명시적 규칙을 통해 구성원들의 행위를 조절함으로써 현대의 행정적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에 있다고 여겼다."(102-6)


"대체로 우리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여길 때는 그것을 높이 평가하게끔 배웠기 때문이지 그것이 본질적으로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좋은 와인이나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취향은 대다수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돈과 공을 들인 교육의 일부로서 습득된다. 우리가 이런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드러낼 때는 그것을 진정으로 음미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감식안이 있고, '삶의 더 좋은 것들'의 진가를 알아볼 능력이 있는 엘리트의 일원이며, 싸구려 포도주와 이발소 그림이 취향의 최대치인 이들보다는 우월하다는 메시지도 드러내고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것을 '문화자본'이라고 불렀다. 부르디외는 마르크스와 베버의 통찰을 결합하여,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사회가 전문화되고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지니며 위계적으로 조직된 무수한 장(field) 또는 제도(예술, 과학, 법률, 경영, 대중 매체 등)들로 분리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지위를 얻기 위해 끊임없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보았다."(112-3)


4 페르난도가 아내를 얻고자 하다: 성과 혈연


"누요와 도우 동고의 사례에서 우리는 결혼이 관련 집단들 사이의 부(wealth)의 이전과 결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부의 이전은 결혼에 합법성을 부여하며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노동력이나 장래의 자녀에 대한) 권리가 이전되었음을 인정하는 역할을 한다. 신부대(brideprice)는 신랑측 집단에서 신부측 집단으로의 부의 이전이다. 신부봉사(brideservice)는 신랑측 집단에서 신부측 집단으로 노동력을 이전하는 것이다. 일부 유럽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지참금(dowry)은 신부측에서 신랑측으로의 부의 이전이라기보다는 신부가 자기 집안에서 상속받은 몫에 해당한다. 신부대는 흔히 현금으로 지불하지만 사치재인 경우도 많다. 결혼하고자 하는 젊은 남성은 신부대 지불에 필요한 사치재의 조달을 흔히 자기 친족 집단의 연장자들에게 의존한다. 집단의 연장자들이 이런 귀중품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은 그가 책임감과 충성심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며, 그가 성인의 문턱을 넘어섰다는 자격증을 수여하는 셈이다."(124-5)


"한 명의 파트너와 평생 유대를 지속하리라는 전제가 통하지 않는 사회들도 많이 있다. 한 남성이 둘 이상의 아내를 가질 수 있는 일부다처제(polygyny)는 흔하다. 반면, 한 여성이 둘 이상의 남편을 가질 수 있는 일처다부제(polyandry)는 그보다 훨씬 드물며, 티베트와 인도 북부 고산 지대의 사례가 잘 알려져 있다. 적어도 티베트의 일처다부제는 일부다처를 거꾸로 뒤집은 것이 아니고, 주로 형제들이 한 여성과 공동 결혼을 한다. 일처다부의 인구학적 결과는 일부다처의 인구학적 결과와 정반대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몇 년에 한 번씩만 출산을 할 수 있고 대개는 한 번에 한 명씩만 낳으므로, 일처다부혼은 인구 증가를 억제하고 토지와 같은 상속 가능한 유산을 보존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일부다처제는 인구 증가를 촉진하며 토지 자원을 자손들에게 빠르게 분산시킨다. 일부일처제,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는 전혀 상호배타적이지 않지만, 주어진 사회의 경제적·생태적 조건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날 수 있다."(129-30)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이상화된 관점에서 볼 때 친족의 최소 단위에는 아내의 남자형제가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아내의 남자형제는 아내를 그 남편에게 '준' 가족을 대표한다. 레비스트로스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결혼은 두 남성이 여자 형제를 교환하고 이 결혼에서 생긴 자손들이 다시 사촌끼리 결혼함으로써 동맹을 갱신하는 형태의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우리에게는 조금 괴상하거나 심지어는 근친상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사촌 간의 결혼이 허용되거나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의무인 사회들도 많이 있다. 남성들이 외삼촌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몇 세대 계속되면, 그 남성 자손들의 두 가계 사이에 결혼 동맹이 형성된다. 또 남성들이 친삼촌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몇 세대 계속되면(이는 중동에서 훨씬 선호되는 패턴이다) 단일한 부계 혈통이 강하게 유지된다. 만약 이것이 유목 사회라면 그 집단이 소유한 가축 떼를 한데 모아서 유지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134-5)


"전세계적으로, 피(또는 모유, 뼈, 그밖에 생식 행위를 통해 전달된다고 여겨지는 물질)를 나눈 개인들이 강한 유대에 의해 서로 결속된다는 관념은 가내 및 자녀 양육 집단의 토대를 이룬다. 하지만 이는 훨씬 더 큰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실체의 토대를 이루기도 한다. 많은 사회, 특히 아프리카 사회에서 혈통을 공유한다는 이데올로기는 사회가 조직되는 주된 방식이다. 종족(lineage)은 알려진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리고 씨족(clan)은 그 구성원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인식하는 종족들의 집단이지만 여기서는 그 친족 관계를 정확히 따지기가 불가능할 수도 있으며, 이 조상이 신화적 존재나 특정한 사물이나 동물 토템일 수도 있다." "많은 경우에 결혼이란 우리 사회에서처럼 새롭고 독립된 사회 단위를 이루는, 단지 두 개인의 결합이 아니다. 세계의 아마도 대다수 사회에서 결혼은 두 집단 간의 결연이라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136-7)


5 라 보세가 바카르가 되다: 카스트, 계급, 부족, 민족


"토템 씨족은 전세계에 걸쳐 놀라울 만큼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정체성 구분은, 출생의 우연을 제외하고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 사람들이 '한 동물종이 다른 동물종과 다르듯이 나의 집단은 다른 집단과 다르다'고 선언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이런 식의 차이를 위한 차이 만들기는 현대 세계로도 그대로 옮겨진다. 그래서 크게 놓고 보면 서로 구분이 안 가는 미국의 칼리지와 대학들이, 토템 명명과 거의 같은 식으로 저마다 독특한 엠블럼과 색깔을 달고 모교의 스포츠 팀 이름을 붙이고서 자기들끼리 맹렬한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해서 얻는 게 무엇일까? 일부분 이는 소속감을 증진시키며, 학생과 동문들이 열광적이고 의례적인 연대감의 표출에 참여할 수 있는 많은 기회─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운동 경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뒤르켐은 이런 종류의 경험을 '집합 흥분(collective effervescence)'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이것을 사회적 연대의 핵심에 놓았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경험의 뿌리로 규정했다."(144-5)


"그런가 하면 서로 다른 무수한 부분들의 복잡한 상호의존에 기반하여 연대가 이루어지는 크고 복잡한 사회들은, 스스로가 동질적 실체라는 환상을 구축하는 데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곤 한다. 이런 과정은 20세기 식민 제국의 해체 이후에 출현한 신생 국가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그들은 국어를 제정하고 학교에서 공통의 역사를 가르치며, 공유된 역사에서 끌어온 애국적 인물과 상징들을 신생 국가의 대표로 내세웠다. 각종 국가 상징물과 국민국가를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 신화를 차용한 정교한 시민 의례가, 공통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수단으로서 만들어지고 시행되었다. 뒤르켐은 이것을 '집합 표상(collective representations)'이라고 일컬으며 사회적 연대의 상징적 속성을 인정했다. 단순하고 동질적인 사회들이 그 미미한 차이를 가지고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데 열중하는 한편, 복잡하고 이질적인 사회들이 그 유기적 다양성으로부터 통일을 이루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아이러니로 느껴진다."(145-7)


"인종과 종족은 어떻게 구분될까? 두 범주 모두 '문화적으로 구성된(culturally constructed)' 범주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생물학적─흔히 그릇된─사실과 조금 관계가 있긴 하지만 주로 사회적인 범주로서 자신과 타자를 흔히 도덕적인 뉘앙스로 규정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종족성은 문화·언어·종교의 요소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말레이인'의 법적 정의에는 그가 무슬림이라는 항목이 포함된다. 한편, 인종은─이것 또한 문화적으로 구성된 범주이지만─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이를테면 피부색 같은) 특성을 강조하며, 모든 인간 유형의 생물학적 기원에 대해 포괄적 설명을 제시하는 민속이론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론들은 예컨대 세계의 '인종들'이 노아의 아들들에서 기원했다는 생각처럼 신화적인 토대에 뿌리박고 있다." "보아스는 인종주의 이론에 맞서는 것이 인류학의 중요한 공적 사명이라고 여겼고, 그의 제자인 루스 베네딕트는 1940년에 집필한 책에서 '인종주의(racism)'라는 용어를 고안했다."(154-6)


"우리가 종족에서 공통의 핏줄에 기반한 정체성을 본다면, 인종에서는 공통의 신체적 특성에 기반한 정체성을, 민족주의에서는 공통의 유산과 경험을 기반으로 삼은 국가를 본다. 거의 모든 현대 국가들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포괄하므로, (정치적 자치를 표방하는) 민족주의는 특정한 종족이나 인종의 정치적 표현일 때가 많다. 민족주의는 현대 세계에 너무나 깊숙이 배어 있어서 우리는 '민족(nation)'과 '국가(state)'를 흔히 혼용해서 쓴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수립된 국가가 없어도(혹은 쿠르드족처럼 몇몇 국가에 분산된 상태로도) 존재할 수 있으며, 국가─중앙집중화되고 관료화되었으며 그 통제권이 주어진 영토 전역에 미치는 정치 단위─또한 민족주의가 아닌 다른 원리를 기반으로 수립될 수 있다. 국민들이 명백히 하나의 언어나 관습이나 유산을 공유하지 않는 많은 현대 국가에서도 그러한 것을 고취하는, 말하자면 공통된 전통을 '발명하는' 프로그램에 엄청난 자원이 투입된다."(156-7)


6 누요에서의 축제: 사람들의 소유물


"호혜적 거래가 언제나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것은 아니며, 언제나 주는 이와 받는 이 사이의 평등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많은 경우에는 주는 쪽이 받는 쪽보다 물질적인 면에서는 아니라도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여겨지며, 준 선물과 동등하거나 (가능하다면) 보다 나은 답례가 올 때까지 그 우월한 위치를 누린다. 받은 선물에 대해 정확히 똑같이 답례하는 것은 적대적인 행위로 비칠 수도 있는데, 이는 교환으로 쌓아올린 관계를 사실상 끝내버리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호혜성의 정치를 보면, 공동의 연대 말고 다른 것도 교환의 동기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미국과 캐나다 북서부 해안의 아메리카 원주민 집단들 사이에서 행해진 경쟁적 교환이 그 적절한 사례다.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집단들은 '포틀래치(potlatch)'라는 행사를 열어서 상대방이 쉽게 답례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선물을 주려고 노력했다. 이는 그들의 우월한 경제적·사회적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다."(176-7)


"이런 식의 비대칭은 물질적 재화로 답례할 능력이 전혀 없는 의존 관계에서도 작동한다. 이런 경우에는 복종이나 경의나 충성으로밖에 보답할 길이 없다. 의존 관계가 사회경제 체제의 일부로 자리잡은 사회에서 그 결과는 '피후견 관계(clientage)', 즉 부유하거나 힘 있는 후견인과 그들에게 물적 자원이나 보호를 의존하는 이들 사이의 관계가 된다. 가장 덜 모멸적인 후견-피후견 관계에서는 후견인 측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의식을, 피후견인측이 진정한 충성심을 유지한다. 좀더 착취적인 상황에서 피후견 관계는 후견인측의 갈취나 다름없어진다." "이렇듯 경제 관계는 정치·사회적 관계 속에 떼어낼 수 없이 묻어들어 있기 때문에, 그 사회의 수많은 다른 측면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로 실물 경제를 이야기하기란 어렵다. 문제는 우리가 자본주의 경제에 너무 깊이 매몰되어 있어서 시장에서 사고파는 행위만이 유일한 '경제' 행위이며 국민국가만이 그러한 활동의 유일한 배경이라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178-9)


"사람들이 무언가를 원할 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경제학자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식량, 주거 등등)를 열거하며 대답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소비 결정에는 다른 변수들도 개입한다. 심지어 식량 같은 인간의 필수 요소도 문화적 변수에 의해 굴절된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신세계에 처음 도착했을 때, 주변에 옥수수, 사냥감, 과일, 채소가 풍부했는데도─그들이 건강한 식단의 필수 요소라고 믿었던─포도주나 밀이나 올리브유를 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굶주리고 있다고 믿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과시적 소비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 대다수와 다르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특정한 물건을 원한다. 하지만 유능한 광고 회사 경영진이라면 모두 알다시피, 자신이 어느 집단의 일원이고 어느 집단의 일원이 아님을 표시하고픈 소비자의 욕망은 의복에서 자동차에 이르는 광범위한 상품의 매출을 올려주는 일등공신이다. 따라서 소비는 저절로 되는게 아니라 학습해야 하는 것이다."(181-2)


"신디 로퍼가 말했듯이, '돈이 모든 걸 바꾼다'. 단순한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호혜와 교환의 정치에서 거래의 '경제적' 가치는 거래로 맺어지는 사회관계에 종속된다.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각각의 거래는 교환에 참여하는 개개인만큼이나 독특하다. 말리노프스키는 트로브리안드제도 사람들이 다른 멜라네시아 섬사람들과의 복잡한 교환 '고리(ring)'에 참여하는 것을 관찰했다. 이 고리에 참여하는 개인들은 평생토록 맺어진 교역 파트너와 모종의 재화를 교환하기 위해 먼 거리를 여행한다. 이 '쿨라 고리(kula ring)'를 따라 물품들이 순환하면서 그것이 거래되어온 역사와 그 이전 소유자들의 내력도 함께 순환하므로, 각각의 교환과 각각의 물품은 독특한 생애사를 지니게 된다. 현대 경제의 주춧돌인 화폐와 시장 교환은 정확히 그 반대의 효과를 띠며, 이는 매우 의도적인 것이다. 가치를 공통의, 규격화된, 태환 가능한 표준으로 환원하면 교환의 효율이 그 속도와 총량 면에서 현저히 증대하기 때문이다."(183-4)


7 비마에서의 가뭄: 사람들이 믿는 신


"비록 그 연관성이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종교와 사회는 서로를 반영하는 모델인 동시에 서로를 형성하는 모델이다. 우주론적 명제와 사회 구조 사이의 이런 유사성은 종교와 사회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암시해왔다. 종교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은 종교의 일상적 실천에, 그리고 이것이 다른 사회생활과 연결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뒤르켐은 사회적 범주화의 기본 형태를 종교에서 찾을 수 있으며 사람들은 우주론을 통해 사회를 표상하므로 사회와 종교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종교적 의례가 '사회가 그 자신을 숭배하는' 한 예라는 말은 이 개념을 투박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보다 덜 결정론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여, 종교가 집단과 개인을 동원해 위기와 난관을 헤쳐나가는 방식을 강조한 학자들도 있다 일례로 통과의례(rites of passage)에서, 개인이 한 사회 정체성을 벗고 다른 정체성으로 옮겨가는 위태로운 이행은 흔히 사회의 가장 정교한 의례를 통해 이루어진다."(196)


"유럽의 민속학자인 아르놀드 방주네프는 사람들이 사회를 방이 많이 있는 큰 집으로 상상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각각의 방은 서로 다른 사회적 지위를 상징한다. 통과의례는 사람들을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놓음으로써 그들이 낡은 지위를 벗고 새 지위를 얻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한 이행 중에 개개인을 옛 지위로부터 들어내어 새로운 지위의 휘장을 수여하기 위해 고안된 의식이 치러지며, 의식에서 이 과정은 흔히 죽음과 재생의 은유로 묘사된다. '문턱에' 선 개인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특별한 지위를 가지며, 이 지위는 흔히 특별한 의복을 입음으로써, 신체 외관을 변화시킴으로써, 혹은 금욕을 견딤으로써 표시된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세례식처럼 태중에서 유년으로, 유대교의 미츠바처럼 유년에서 성년으로, 결혼식처럼 미혼에서 기혼으로, 장례식처럼 산 상태에서 죽은 상태로 옮겨다주는 종교적 의례에 익숙하다. 졸업식이나 취임식 같은 세속적 통과의례 또한 우리에게 익숙하다."(196-7)


"기존에 확립된 믿음이 삶의 문제에 대해 더는 적합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식민 정부나 신식민 정부에 종속된 사회들은 이런 갑작스럽고 압도적인 변화를 겪는 일이 많은데, 그로 인한 혼란을 전통 종교의 믿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강렬한 종교 운동이 발생할 수 있으며,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설명과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는 어떤 선지자가 이런 운동을 이끌곤 한다. 이를 천년왕국 운동(millenary movement)이라 하는데, 이런 운동을 이끄는 개인들은 성스러운 권위를 가지고 발언하며, 그러한 권위에 힘입어 삶의 온갖 위기에 대한 해결책의 일부로서 광범위한 종교적·세속적 변화를 도입하기도 한다." "세계의 많은 대형 종교들도 시작은 일종의 부흥 운동으로부터, 즉 자신의 문제에 대해 기존의 신앙이 제시하는 것보다 더 포괄적인 해답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상상력에 카리스마적 선지자의 예지가 불을 붙이면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199-203)


8 냐뉴 마리아가 벼락을 맞다: 사람들의 자아


"내가 누구이고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 상식의 기본 토대를 이루는 듯 보이는 개념처럼 우리 삶의 경험의 대단히 본질적인 측면들도 실은 문화들 간의 엄청난 차이에 좌우된다." "서구인들은 인격으로서의 자신을 볼 때, 자신을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 자신─그리고 우리의 자아─에 대한 이런 식의 관념에서 나온 것이 바로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다. 예컨대, 미국의 어린이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누구나 커서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역사적·정치적 현실은 일단 접어두고, 이런 관념은 우리 모두가 똑같이 지닌 역량과 권리에 토대를 둔 인격(personhood)─여기서 우리는 자아에 대한 관념이 더 포괄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를 표명하는 방식을 가리키기 위해 '인격'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의 개념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이 맥락에서의 인격은 우리를 서로 다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같게 만드는 것에 의거하여 정의된다."(212-3)


"그러나 인격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거의 정반대인 듯한 사회들도 있다. 중앙아메리카의 또다른 민족인 마야인의 언어에는 '비니크(vinik)'라는 단어가 있다. 초기의 스페인인 관찰자들은 이 단어를 처음에 '개인(individual)'으로 번역했지만, 좀더 면밀히 들여다보니 이 단어는 보다 미묘한 다른 의미들을 띠고 있었다. 1699년 스페인의 사제이자 언어학자인 프란시스코 바레아 신부는 '비니크'가 〈인격(person)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언어에는 '나의 인격'이라든지 '당신의 인격'이라는 말이 없다······ 그보다 이는 '나의 족속(people of my nation)'이라는 뜻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마야어의 '비니크'는 또 '스물(20)'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이데올로기에 따라 인간에게는 스무 가지의 기본 유형이 존재하며, 이 유형들은 서로를 보완하고 뒷받침한다." "따라서 마야어의 '비니크' 개념은 이른바 '관계적 인격 개념'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여기서 인격이란 인간 개인에게 고착된 지위가 아니라 집단의 속성인 무엇이다."(213-5)


"중앙아메리카 달력은 태양년(360일)을 20일씩 18개월로 나누었는데 한 해의 마지막 닷새는 이름 없는 날 혹은 불길한 날이었다. 이때는 일종의 시간 바깥에 놓인 시간으로 여겨졌고(많은 지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여긴다), 온갖 나쁜 일─특히 세상의 종말─이 일어날 수 있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금기, 단식, 의례를 엄수하면서 근신했다. 이 시기에 태어난 불운한 아이들은 운명을 갖지 못했다─다시 말해서 정체성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이 결여되어 있었다. 일부 민족지 자료와 사료는 이 이름 없는 닷새 동안에 태어난 아이들이 명확한 신체적 형태를 갖추지 못했으며,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죽도로 방치되었다고까지 기술하고 있다. 그러니까 당시 중앙아메리카에서는 모든 인간이 저절로 인격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집단 내에서 자기 자리를 얻지 못하고 사회 밖으로 완전히 추방된 이 불운한 아이들의 사례는 앞에서 논의한 관계적 인격 개념과 일치한다."(218)


"인격과 자아의 개념은 인류학자들 말마따나 문화적으로 구성된다. 한 문화의 구성원들에게는 너무 당연하고 정상으로 보이는 관념이 실은 특수한 역사적 전통의 산물이며 문화에 따라서 다르다는 말이다." "의료인류학자들은 신체 각부와 그 기능에 대한 관념이 '문화 특이적 증후군'을 초래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이런 관점을 적용해왔다. 사람의 몸은 세상 어디에서나 기본적으로 같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아파야 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의 핵심은 자신의 몸과 환경에 대한 지각이 그의 상대적인 건강 상태와 아주 큰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가령, 거식증과 폭식증은 신체적 아름다움에 대한 비현실적 지각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화 특이적 증후군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또한 이런 섭식 장애는 성별, 연령, 계급에 민감하여 특히 젊은 백인 중산층 여성에게서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신체 생리와 사회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또하나의 지표다."(218-20)


후기: 우리가 배운 몇 가지 것들


"'사람 사는 건 어디나 같지만 간혹 다를 때도 있다.'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보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지난 한 세기동안 인류학자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가르침이며, 좀더 면밀히 들여다보면 전혀 사소한 것이 아니다. 우선 이는 인간의 어떤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가르침을 준다. 누가 '그러나 자고로 인간의 본성이란······' 식으로 일장 연설을 시작하면 일단 나가는 문이 어디 있는지부터 찾아라!" "인류학자들이 인간 행동의 보편법칙을 일반화하려 할 때마다 그 법칙들은 경험적으로 틀렸거나 시시하리만치 하찮은 것으로 드러나곤 했다. 이는 인간에게 진정으로 보편적인 것을 알아내려는 시도들을 폄하하거나 우리가 그런 시도 덕분에 많은 걸 배웠음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인간 문화가 낳은 모든 변이를 포괄할 만큼 광범위하면서 그런 변이들을 낳은 특수한 문화적 맥락에 부합하는 패턴을 식별하려는 시도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위험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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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5
데이비드 밀러 지음, 이신철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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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철학은 왜 필요한가


"여기서 내가 언급하는 정부(government)는, 특정한 시점의 사회 속에서 권력을 지니는 사람들의 집단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어떤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국가, 즉 그것에 의해 권력이 행사되는 내각, 의회, 법원, 경찰, 군대 등과 같은 정치 제도보다 더 광범위한 어떤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규칙과 관행 및 제도들 전체다. 누가 무엇을 누구와 함께 행할 수 있는지, 누가 물질적 세계의 어떤 부분을 소유할지 등을 알기 위해 서로 협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아마도 여기서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불가결하다는 것을 아직은 당연시할 수 없다. 정치철학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는 왜 우리에게는 애초에 국가가, 좀더 일반적으로는 정치권력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좋은 정부'가 과연 국가를, 혹은 관습적인 의미에서의 정부를 가질 필요가 있는지 여부는 일단 열린 물음으로 남겨놓고자 한다."(15-7)


"정치철학이라는 주제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은 정치란 권력 행사에 관한 것이며, 권력을 지닌 사람들─특히 정치인들─은 정치철학의 저작들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치철학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영향력을, 때로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홉스의 시대에는 오직 소수의 극단적 급진주의자들만이 민주주의를 정부의 한 형태로서 믿었다는 점을 생각해볼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그 밖의 정부 형태가 어떻게 정당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민주주의를 당연시한다. 이러한 변화에 관한 이야기는 복잡한 것일 수밖에 없지만, 거기에 내포되는 불가결한 요소로서 민주주의에 찬성하며 논의를 펼친 정치철학자들의 역할이 있었고, 나아가 그들의 관념이 받아들여지고 대중화되어 정치의 주류로 편입되어왔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이가 장 자크 루소일 것이다."(23-6)


"오늘날 거의 모든 정치철학자는 좋은 정부란 모종의 민주주의를 의미해야만 한다는 것을 당연시한다. 요컨대, 어떤 방식으로든 인민이 통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전의 여러 세기 동안에는 그와 반대되는 견해가 우세했다. 좋은 정부란 현명한 군주정이나 개명한 귀족정이나 재산가들의 정부, 혹은 이것들의 혼합체를 의미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옳고 우리의 선조들은 단적으로 틀렸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민주주의가 성공적으로 기능하려면 일정한 전제조건들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부유하고 문화적 소양을 갖춘 인구, 사상이나 의견의 자유로운 교류를 위한 대중 매체, 사람들에게 경의를 살 만한 기능적인 법률 체계 등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은 최근까지도 쉽사리 획득될 수 없었으며, 또한 하룻밤 사이에 갖춰질 수도 없었다. 민주주의적 관념들의 영향력 있는 원천이었던 루소조차도 민주주의는 인간이 아니라 신들에게만 적합한 것이라고 말했다."(34-5)


2 정치권력


"국가가 정치권력을 행사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치권력에는 두 측면이 존재한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권위'로서, 바꿔 말하면 사람들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명령할 권리를 가지는 것으로서 인식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법을 지킨다고 할 때 그들이 그렇게 하는 까닭은 대개 법을 제정하는 주체는 법 제정의 권리를 가지며 자신들은 그에 상응하여 법을 준수할 의무를 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법 준수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제재라는 위협에 의해 준수를 강요받게 된다. 법 위반자들은 체포되어 처벌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측면은 상호보완적이다." "그래서 정치권력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권위와 강제되는 준수를 결합한다. 그것은 어떠한 강제도 없이 제자들이 그 가르침에 따르는 현자의 권위와 같은 순수한 권위도 아니고, 당신에게서 지갑을 빼앗는 강도의 폭력과 같은 순수한 힘도 아니며, 그 두 가지가 섞인 것이다."(42-3)


"그러나 우리가 왜 정치권력을 필요로 하는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홉스는 정치적 통치 없는 '인간의 자연 상태'를 삶에 필요한 것들을 둘러싼 잔인한 경쟁의 상태로서 묘사했다." "홉스가 이런 비관주의적 결론에 도달한 것은 사람들이 본성상 이기적이거나 탐욕스러우며, 따라서 정치권력에 의해 제약받지 않으면 자신들을 위해 가능한 한 더 많이 움켜쥐려고 할 것이라는 그의 믿음 때문이라고 자주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홉스의 진정한 논점을 놓치고 있다. 그 논점은 신뢰가 부재할 때는 사람들 사이의 협조가 불가능하며, 그 신뢰는 법을 강제할 수 있는 상위의 힘이 없는 곳에서는 훼손되리라는 것이다. 홉스가 '자연 상태'에 결여되어 있다고 묘사하는 것들은 무엇보다도 우선 많은 사람에게 남들도 스스로의 역할을 다하리라고 기대하면서 함께 일할 것을 요구하는 것들이며, 정치권력이 부재할 때 그러한 기대를 품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43-6)


"홉스를 포함하는 정치철학자들은 종종 정치권력에 대한 엄격한 복종이 없다면 그 권력은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논해왔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국가나 그 밖의 형태의 정치권력은 사람들이 (보편적이라기보다는) 대체로 권력에 복종하고 싶어하는 한에서 존속하고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제한된 형태의 불복종, 특히 시민 불복종─이는 불법적이지만 비폭력적인 형태의 정치적 저항이며, 그 목적은 정부에 대해 정책을 변경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데 있다─이라고 불리는 것에 문을 열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시민 불복종을 옹호하는 논의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만약 특정한 법이 매우 불공정하거나 억압적이라면, 또는 국가가 의사결정을 할 때 소수자의 관심사에 귀기울이기를 거부한다면, 법적 수단에 의한 저항이 효과적이지 않을 경우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 의무가 모든 경우에 구속력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66-7)


3 민주주의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정치 체제는 실제로는 통치에서 매우 제한된 역할만을 시민들에게 부여한다. 시민들은 주기적인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들은 때때로 헌법상의 중대한 문제를 결정해야 할 때 국민 투표라는 형태로 의견을 표명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과 관련된 쟁점들에 관해 자신들의 대표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단체를 조직하는 것이 허용된다. 하지만 그 정도가 그들이 가진 권력의 한계다. 민주 사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진정한 힘은 극소수 사람들─정부 각료나 관료, 그리고 어느 정도의 범위로 한정된, 의회나 여타 입법 기관의 구성원들─의 수중에 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되어 있는지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이유로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정치적 결정의 배후에 놓인 쟁점들을 이해할 '능력'이 단적으로 없으며, 그래서 이러한 사안을 다루는 데 더 뛰어난 자질을 갖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결정을 맡긴다고 하는 널리 퍼져 있는 믿음을 들 수 있다."(73-5)


"우리는 평범한 시민들의 정치적 역할이 주로 선거 때 투표하고 이따금 뭔가 특별한 이해가 걸릴 때 행동하는─예를 들어 그들의 뒷마당으로 도로가 새로 뚫리거나 주택이 들어서기로 한 것에 대응하는─식으로 제한되는 가운데 우리의 민주주의가 불완전한 채로 머문다는 사실에 대해 우려해야 할까? 나는 우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치'를 의미하는 영단어 'idiot'은 그리스어 'idiotes'에서 유래했는데, 그것은 본래 완전히 사적인 존재로 살며 도시국가의 공적 생활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자신의 정치적 지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한, 대개는 천치들인 셈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리는 지방 정치에 대한 참여나, 시민 배심원단과 그 밖의 유사한 기관에 참여할 대중 구성원을 무작위로 선출하는 것과 같은 참여의 형식을 발전시킴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능동적인 시민으로서의 생활 양식(citizenship)의 경험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88-9)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실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다수자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헌법상의 장치는 소수자가 다수자에 의해 고통당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중요한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민을 평등하게 처우할 것을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는 더 멀리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한 체제는 기본권이 문제가 아닌 경우들에서도 다수자가 최종적인 결정에 이르기 전에 소수자의 관심을 적절히 고려할 수 있도록 보장하려고 해야 한다. 이를 위한 열쇠가 공개 토론이다. 거기에서 양측은 서로의 입장에 귀기울이고, 가능한 한 양측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다수자를 형성하는 사람들은 토론을 하기 전 단계부터 자신들이 가장 선호하는 해결책에 찬성 투표만 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대신에 그들은 상대편의 주장을 들어보고 나서 판단을 형성하려고 해야 한다. 때때로 그들은 서로 동의할 만한 일반적 원리를 발견해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95)


4 자유와 정부의 한계


"정부가 더 많은 것을 할수록 민중의 자유는 그만큼 점차 감소한다는 일반적으로 견지되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정부는 종종 자유를 제한하기도 하며, 때로는 정당하게, 때로는 정당하지 않게 그러하다(예를 들어 안전띠와 관련된 법률은 자동차 이용자의 자유를 제한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 법률이 구하는 생명에 의해 그것이 정당화된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활동이 관련 조처가 없었으면 비용 때문에 불가능했을 선택지를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방식으로 자유를 증대시키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다만 정부가 자유의 내적 측면, 즉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열린 선택지 중에서 참다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관련해서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비교적 적다. 이 자유는 이 자유는 종종 (이사야 벌린이 「자유의 두 개념」이라는 강의에서 명명한 바대로) '적극적 자유'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외적 요인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선택지를 갖는다는 의미의 '소극적 자유'와는 구별되는 것이다."(110-1)


"우리는 (개개인이 모종의 독립성을 바탕으로) 참다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내적 자유를 어떻게 증진할 수 있는가? 한 가지 방법은 사람들에게 폭넓은 선택지를 제시함으로써 그들이 어떤 일련의 믿음이나 하나의 삶의 방식만을 올바른 것이라고 당연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반대로 자기네 구성원들의 선택을 통제하고자 하는 종교 교과나 정치 체제는 자신들이 상찬하는 삶의 방식에서 벗어난 것을 그 구성원들이 보거나 경험하지 못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선택의 자유를 증진하고자 하는 정부는 (사람들을 새로운 삶의 방식이나 새로운 형태의 문화 등을 접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다양성을 키워가면 된다." "그러나 외적 자유와는 달리 내적 자유는 보장될 수 없다. 독립적인 성향을 타고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순종적인 성향을 타고난 사람도 있다. 정치로 가능한 것은 그저 자기 나름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좀더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113)


"존 스튜어트 밀은 어떤 사람의 행위가 본인을 제외하고 누구의 이익도 침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기 관계적'일 때, 그 행위에 결코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밀은 이 원리가 사상 및 표현의 자유와 개인이 스스로 원하는 방식대로 살 자유, 즉 어떻게 입고, 무엇을 먹고 마시며, 어떤 문화적 활동을 추구하고, 어떤 성적 관계를 맺으며, 어떤 종교를 따를 것인지 등등의 자유를 정당화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경계선을 긋는 것은 가능할까?" "표현의 자유는 중요하지만, 모든 표현에 똑같은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예배드리고 정치 토론에 참여하며 예술적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일터에 (불쾌한) 포스터를 붙이거나 조야한 인종차별적 구호를 외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즉,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행동이 지니는 가치를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부과할 수 있는 비용과 비교하고, 숙고하여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114-9)


5 정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제시된 아주 오랜 정의에 따르면, 〈정의(正義)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고자 하는 항구적이고 영속적인 의지〉인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그리 유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기는 한다. 첫째, 정의란 개개인이 올바른 방식으로 대해지는 것에 관한 문제임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정의란 사회 전체가 부유한지 가난한지, 문화적으로 풍성한지 불모인지 등과 같은 문제가 아니다." "둘째, 앞에서 제시된 정의의 〈항구적이고 영속적인 의지〉라는 부분은 사람들이 자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대해져야만 한다는 것이 정의의 중심적 측면임을 우리에게 상기키셔준다. 한 사람의 인간을 통시적으로 대하는 데서는 일관성이 있어야만 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역시 일관성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만약 내 친구와 내가 같은 자질을 가지고 있거나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다면, 우리는 상황에 따라 같은 혜택이나 같은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135)


"한 가지 지적해둘 것은 정의가 사람들이 받는 처우뿐만 아니라 그러한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따라야 할 절차와도 관련되는 바가 많다는 점이다. 형사상의 정의에 관해 생각해보면 이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문제가 되는 것은 죄를 범한 사람이 그 범죄에 비례하여 처벌되고 무고한 사람은 풀려나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정의로운 결과가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판결에 이르기까지 적절한 절차가 지켜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양측은 각각 자신의 주장을 진술할 수 있어야 하고, 판사는 어느 한쪽을 편들고자 할 만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 이런 절차가 중요한 것은 부분적으로 그것이야말로 올바른 판결에 도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며, 나아가 법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진술할 기회를 얻고자 하고 다른 피고인에게 적용되는 것과 똑같은 규칙이 자신에게 적용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그런 절차에 의해 응당한 존중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140)


"아마도 사회 정의─사회 전체에 걸쳐 편익과 비용의 공정한 분배를 보장해야 한다는 관념─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해석은 존 롤스에 의해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저작인 『정의론』에서 정의로운 사회가 충족시켜야 하는 세 가지 조건을 논하고 있다. 첫째, 정의로운 사회는 개개의 구성원에게 그 밖의 모든 구성원을 위한 똑같은 자유와 양립하는 한, 가장 광범위한 일군의 기본적 자유(투표권과 같은 여러 정치적 자유를 포함)를 부여해야만 한다. 둘째,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회적 지위─예를 들어 고소득 일자리─는 기회의 평등에 기초하여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만 한다. 셋째,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정당화되는 것은 그것들이 사회에서 가장 형편이 나쁜 구성원들의 이익이 되도록 작용하는 것으로 보일 때, 다시 말하면 그것들이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일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더 많은 자원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흘러들 가능성이 있는 경우다."(155-7)


6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


"오늘날 상당한 정치적 관심을 받고 있는 페미니스트와 다문화주의자들은 종종 자신들과 관련되는 쟁점들, 즉 개인의 정체성의 본성,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의 구분이 가능한지 여부, 문화적 차이에 대한 존중 등을 둘러싼 쟁점들이 앞에서 검토한 권력, 민주주의, 자유와 정의에 관한 물음들을 대체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정치 자체의 본성이 변해버렸다." "그들은 사람들이 서로 정치적 관계를 맺고 있는 공적 영역과 그 관계가 비정치적인 사적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문제의 여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정치를 훨씬 더 편재적(遍在的)인 현상, 즉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간섭하는 현상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도전은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구호로 요약된다. 그 경우 정치권력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국가가 그 국민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남성이 여성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162-7)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제부터는 이러한 관계를 정치적인 것으로서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정치는 권력에 관한 것, 즉 누가 권력을 쥐어야 하고, 권력은 어떻게 통제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지만, 모든 권력관계가 정치적 관계인 것은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지적은 본래적으로 정치적인 본성을 둘러싼 것이라기보다는 그 관계를 다루는 데서 보이는 '정치의 태만'을 둘러싼 것이다." "즉, 여성에게 적절한 신체적 안전, 특히 가정 내 폭력으로부터의 보호를 보장하지 못했으며, 여성이 삶의 여러 중요한 영역에서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보장하지 못했고, 여성에게 개인으로서의 자유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다. 바로 이런 정치의 태만에 의해 개인적 삶의 공간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권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며, 그렇게 된 명백한 이유의 하나가 여성이 여러 세기 동안 관습적 의미에서의 정치로부터 거의 전적으로 배제되어왔다고 하는 것이다."(168-71)


"여기서 민주주의의 문제로 옮겨가자. 보통선거제를 시행하는 사회에서 페메니스트와 다문화주의들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는 입법부인 의회 내에서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 및 문화적 소수자들의 대표가 상대적으로 소수라는 것이다." "대표의 수가 인구수와 엄밀하게 비례해야 한다는 것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의미 있는 관점이 입법 기관에서 적절한 방식으로 대표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당사자가 반대편의 주장에 기꺼이 귀기울이고, 공정함이라는 기준에 의해 주장을 평가하며, 그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바꾸는 것도 마다치 않는다는 것이 전제된다. 특히 소수자 집단들의 경우에는 민주주의가 가능한 한 그렇게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단적으로 소수자다. 만약 모두가 오로지 자신의 분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할 뿐이라면, 소수자들은 질 수밖에 없다. 논쟁의 힘은 그들에게 유일한 무기이다."(179-82)


7 국민, 국가, 그리고 전 지구적 정의


"사제인 윌리엄 윙은 일찍이 〈국민이라는 것은 그 선조에 관한 망상과 그 이웃사람에 대한 공통의 증오에 의해 결합된 사회〉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국민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며, 나쁜 목적뿐만 아니라 선한 목적을 위해서도 유용하다. 우리가 국민이라고 부르는 집단들은 대개의 경우 공통의 언어, 오랜 시간에 걸쳐 함께해온 역사, 문학적 형식뿐만 아니라 물리적 환경─마을이나 도시의 건설 방식, 경관의 양식, 기념물, 종교 건축물 등과 같은─을 통해서 표현되는 문화적 특징 등을 공유한다. 이러한 문화적·물리적 환경 속에서 새로운 세대가 자라날 때, 그들은 분명 이런 공통의 유산에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비록 그런 유산의 여러 측면에 반항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말이다." "국민국가는 정치적 단위로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왔다. 즉, 국민국가는 제국의 군대에 압도되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크기를 갖지만, 동시에 저항이 필요할 때 그 구성원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200-3)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지각된 유사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는 우리와 이런저런 형태로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관련된 설명에 대해 고찰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은 사람들이 확장된 친족 집단 안에서 서로 협력하며 내부자와 외부자를 구별할 줄 알아야 했던 인간 진화의 초기 단계로부터 물려받아온 특성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외모나 발화 면에서 저마다 각양각색인 거대 규모의 사회에서는 신뢰가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의견이 갈리는 상대와 정치적인 불화를 겪을지도 모르며, 심지어 그런 사람들이 치켜세우는 것을 경멸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여전히 제법 많은 것(언어, 역사, 문화적 배경)을 우리와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적어도 민주적 통치의 규칙이나 정신을 존중하기는 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205-6)


"현재 이러한 통치 형태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국민국가에 대한 무수한 추도문들은, 그 대안으로 코즈모폴리터니즘(세계시민주의)을 가리키고 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코즈모폴리터니즘은 실현 가능성이 낮고 매력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정치철학자들은 종종 세계 시민의 이념을 다르게, 즉 정부의 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개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제안으로서 해석한다. 그 제안이란 우리가 품고 있는 국민적인 것이나 그 밖의 애착과 같은 좁은 마음을 극복해서 마치 자기 자신이 세계 시민인 듯이, 바꿔 말하면 어디에서든 동료인 인간 존재에 대해 동등한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정치적 권위는 여전히 특정 국민국가에 국한되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전 지구적 정의를 증진하기 위해 사용해야 하며, 자신이 속한 정치 공동체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우선권을 주려고 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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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철학 - 원서 전면개정판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42
레이먼드 웍스 지음, 박석훈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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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연법론


"『국가론』에서 키케로는 자연법이 보편적이고 변하지 않는다는 점, 자연법이 '상위' 법으로서의 위상을 가진다는 점, 자연법이 이성을 통해 인식될 수 있다는 점(자연법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적'이다)을 부각시키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법을 네 가지 범주, 즉 영원법(eternal law), 자연법(natural law), 신법(divine law), 인정법(human law)으로 구별한다. 영원법이란 신적 이성으로서 오로지 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자연법이란 영원법이 이성적 피조물, 즉 인간에게 분여(分與)된 것으로서 이성을 통해 밝혀낼 수 있다. 신법은 성경에 쓰인 계시를 통해 확인된다. 인정법은 인간이 그 이성에 힘입어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 제정한 것이다." "자연법의 내용은 실천적 합리성(practical rationality)의 원리들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원리들을 기준으로 인간의 행위가 합리적인지 여부를 평가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바로 이러한 특성 때문에 자연법을 '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16-9)


"자연법의 세속화, 즉 자연법을 신으로부터 떼어놓는 작업에 대해 논하자면, 네덜란드 출신의 휴고 그로티우스(1583~1645)를 빼놓을 수 없다. 그로티우스는 자신의 저서 『전쟁과 평화의 법』에서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자연법의 내용은 똑같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국제법 분과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자연법의 원리들은 법이 개인의 자연권(natural rights)을 침해했다는 논리로 (특히 미국 독립 혁명이나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혁명을 정당화하는 데 원용되어왔다." "일부 사회계약론자들은 사회계약(social contract)에 터 잡아 정치적 권리와 의무를 구성하면서 자연법을 원용했다. 사회계약은 법적으로 엄밀히 보면 계약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기 자신의 동의 없이는 다른 사람의 정치적 권력에 복종할 수 없다는 사상을 표현한다. 이와 같은 사회계약론은 존 롤스(1921~2002)의 정의론을 비롯한 자유주의 사상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22-4)


"홉스의 주장에 따르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개인의 이기심과 사회계약만으로도 자연법론자들이 생각하는 불변의 자연법과 동일한 종류의 법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한다. 즉 자연 상태에서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평화(peace)가 첫 번째 자연법이어야 한다는 것이 홉스의 결론이다. 두 번째 자연법은,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모두가 (타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한) 일정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는 것이 계약이고, 이는 도덕적 의무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홉스는 이러한 계약이 체결된다고 하여 곧바로 평화가 보장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평화가 보장되려면 사람들이 계약을 이행해야 한다. 이것이 홉스가 말하는 세번째 자연법이다." "홉스가 보기에, 계약으로 정한 서로의 의무를 위반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정치적 주권자에게 계약을 위반한 자를 응징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다."(26-7)


"홉스의 구상과는 정반대로, 존 로크(1632~1704)는 사회계약 이전의 삶을 낙원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자연 상태에도 중요한 결점이 하나 있다고 한다. 바로 자연 상태에서는 소유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달리 문제삼을 것이 없는 자연 상태의 유일한 결점을 바로잡기 위해서 사람들은 사회계약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일부 포기했다는 것이 (특히 『통치론』에서 나타나는) 로크의 생각이다." "로크가 보기에, 사회계약을 통해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자연권이 보장되고 각자는 사적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다. 홉스가 자연권이 자연법보다 먼저 존재하고 자연법은 자연권에서 도출된다고 했던 반면, 로크는 자연법, 즉 이성에서 자연권이 도출된다고 했다. 만인이 만물에 대한 자연권을 가진다는 것이 홉스의 생각이라면, 로크는 자연권으로서의 자유권은 자연법과 그에 기초한 지시, 즉 다른 사람의 '생명, 건강, 자유, 재산'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에 의해 제한된다고 한다."(28-9)


"장 자크 루소(1712~78)의 이론에서는 사회계약에 견주어볼 때 자연법의 중요도는 떨어진다. 홉스나 로크의 사회계약에 비하면 더욱더 추상적인 루소의 사회계약은 (그가 집필한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합의이며, 개인은 이러한 사회계약을 통해 루소가 '일반 의지(general will)'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가 된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강제'되어야 한다는 루소의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기로 유명하지만, 이는 개인들이 자유 의지를 포기함으로써 국민 주권을 창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나아가 분할할 수도 없고 양도할 수도 없는 '일반 의지'가 이기적인 개인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개인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규칙을 준수하도록 강제되어야만 한다." "일반의지를 지탱하는 사회계약은 특정 파벌이나 특정 계급의 이익에 맞서 사회 전체를 지키고자 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국가의 절대 권력과 개인의 권리가 서로 균형을 이루게 된다."(29-31)


"19세기에 두 가지 강력한 반론이 등장하면서 자연법론의 영향력이 감소하게 되었다. 첫째는 법실증주의와 관련된 입장들로서 자연법론에 대한 강력한 반론을 제기했다. 둘째는 도덕적 추론에는 합리적인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윤리학에서는 비인지주의non-cognitivism로 불리는) 입장으로서 자연법에 대한 깊은 회의를 낳았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객관적으로 알 수 없다면, 자연법의 원리는 주관적 견해에 불과할 따름이고, 그렇다면 이를 두고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19세기에 쇠퇴했던 자연법론은 20세기에 부흥을 맞이한다. 이는 세계대전 이후 인권에 대한 인식과 「국제연합 헌장」, 「세계 인권 선언」, 「유럽 인권 조약」, 「1959년 법의 지배에 관한 델리 선언」과 같은 선언에 담긴 인권에 관한 문언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자연법을 법률의 효력을 상실시키는 헌법적 의미에서의 '상위법'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실정법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게 된 것이다."(32-3)


2 법실증주의


"'실증주의(positivism)'라는 용어는 '내려진(laid down)' 또는 '세워진(poised)'이라는 뜻의 라틴어 'positum'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법실증주의자들은 법을 누군가에 의해 '내려진 법'이나 '세워진 법'으로 이해한다. 법실증주의자들은 법 효력의 밑절미에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고 여긴다. 쉽게 말해, (과학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법실증주의는, 법을 인간의 제정 행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자연법론의 입장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법실증주의자치고 '있는 법'이 (연구와 분석을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있어야 할 법'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달리 말해, '존재'(실제로 존재하는 것)와 '당위(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것)를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는 점을 모르는 법실증주의자는 없다." "법실증주의자들은 하나같이 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이 무엇인지를 밝혀낼 때까지 도덕적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55-6)


"계몽주의 정신의 영향을 받은 제레미 벤담(1748~1832)은 영국의 보통법(common law)을 냉철한 이성을 통해 조명했다. 벤담이 보기에, 보통법은 언제나 불확정적이다. 불문법(unwritten law)은 본래 모호하고 불명확하기 마련인데, 불문법에 해당하는 보통법은 모든 사람이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없고, 따라서 보통법을 통해 사람들에게 특정한 행동을 명령하거나 금지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보통법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벤담에게 그러한 체계적 접근이란 다름 아닌 법전을 편찬하는 것이었다. 법전이 있다면 법관의 권력은 현저히 제한될 것이다. 사법부의 기능은 법을 해석하는 일보다는 법을 그대로 적용하는 일에 집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법의 영향을 받아 이미 1804년에 2281개의 조문으로 구성된 '나폴레옹 법전'이 공포되었던 대륙법계의 경우와는 달리, 영미법 국가에서 모든 법을 법전에 담아내기란 여전히 요원한 일이었다."(57-9)


"벤담의 제자였던 존 오스틴(1790~1859)이 제기한 법학의 영역에 관한 이론은 '법이란 주권자의 명령'이라는 생각에서 그 핵심적 성격을 찾을 수 있다. 오스틴에 따르면, 명령이 아니라면 애초에 법이 아닌 것이며, 일반적인 명령만이 법으로 인정된다. 그리고 주권자가 내린 명령만이 '실정법'에 해당한다. 오스틴은 법을 명령으로 이해했으므로, 관습법과 헌법, 국제법을 법학의 연구 대상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관습법과 헌법, 국제법은 이를 제정한 주권자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오스틴에 따르면, 제재란 주권자가 바라는 바를 준수하지 못한 사람에게 부과되는 손해나 고통, 해악으로 정의된다. 명령을 어기는 자에게 제재가 가해질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스틴에 의하면, 최소한의 손해나 고통, 해악이 가해질 수 있다는 위협(threat)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제재가 부과될 가능성이 없어 한낱 바람을 표현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라고 본다."(62-3)


"허버트 하트(1907~1992)의 법실증주의는 법을 대체로 강제라고 파악하는 벤담과 오스틴의 법실증주의와는 사뭇 다르다. 하트는 법을 해당 공동체에 실재하는 사회적 관행을 기술함으로써만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 현상으로 파악한다." "하트는 공리주의와 오스틴과 벤담이 주장한 법명령설로부터 벗어난 법실증주의를 기획했다. 특히 법명령설에 대한 하트의 반박은, 법이란 총 든 강도의 명령, 즉 제재의 부과를 전제한 명령을 넘어서는 무엇이라는 생각에 기초한다. 하트의 이론의 핵심은, 법을 다루는 공직자들이 입법 절차를 규정한다고 인정하는 기본 규칙들이 존재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규칙들 가운데 하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승인규칙(rule of recognition)이다. 승인규칙은 법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헌법적 규칙이며, 법을 집행하는 공직자들은 이 승인규칙을 어떤 규칙이 실제로 규칙에 해당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효력 조건이나 기준을 명시한 규칙으로 인정한다."(68-71)


"칸트의 영향을 받은 한스 켈젠(1881~1873)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 같은 일정한 형식적 범주를 적용해야만 객관적인 실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즉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식적 범주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본규범(basic norm)과 같은 형식적 범주가 필요하다. 근본규범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법체계의 토대에 자리잡고 있다." "켈젠은 실정법의 규범들, 즉 누군가 행위 X를 저지르면 공직자는 그 행위를 저지른 자에게 제재 Y를 부과해야 함을 선언하는 '당위'만을 법학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윤리적 요소 일체를 법으로부터 없애버릴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켈젠은 '순수한(pure)' 법학을 통해 법의 도덕적·사회적·정치적 기능과 같이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을 배제한다. 켈젠이 보기에, 법의 목적이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폭력의 독점화(monopolization of force)이다."(78-9)


"허버트 하트 같은 '연성(soft)' 법실증주의자들은 도덕적 내용이나 가치가 법의 효력을 갖기 위한 조건에 포함되거나 편입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와 달리 조셉 라즈(1939~  )는 법이 자율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즉 법의 내용을 확인하는 데 도덕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라즈에 따르면, 법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존재한다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관습과 제도, 법체계에 참여하는 이들의 의도에 대한 사실 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하나의 사실이지, 결코 도덕적 판단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즈는 '경성(hard)' 법실증주의자나 '배제적' 법실증주의자로 분류된다. '배제적'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라즈는 법을 통해 (도덕으로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행위를 이끌 수 있기 때문에, 법이 권위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달리 말해, 법은 가장 중요한 행위 규범이며, 권위의 궁극적인 원천이다."(85-6)


3 로널드 드워킨: 법은 도덕과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로널드 드워킨(1931~2013)만큼이나 법실증주의를 집요하게 비판한 사람도 없다. 드워킨에 따르면, 〈법은 실제로 도덕과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따라서 법률가와 법관이 하는 일은 민주 국가의 정치철학을 연구하는 일과 다름없다.〉" "법관은 (논쟁적인 사안의) 해석 과정에 관여함으로써 도덕적 주장과 유사한 논증들로 가득한 세계에 진입한다. 바로 이러한 법의 해석적 차원(interpretive dimension)은 드워킨 법이론의 근간을 이룬다." "드워킨이 보기에, 법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하트의 주장처럼) 오로지 규칙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 아닌 기준도 포함된다. 판결하기 어려운 사안을 맡은 법관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이러한 (도덕적 또는 정치적) 기준들, 즉 원리(principle)와 정책(policy)을 논거로 삼게 될 것이다. 결국 드워킨의 법철학에는 법 원리와 도덕 원리를 구별 짓는 승인규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과 정치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법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96-102)


"드워킨은 법은 본질적으로 '해석적 현상'이라고 본다. 드워킨에 의하면, 모든 법적 문제에는 단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법관은 정답을 찾아낼 의무를 진다. 법관이 찾은 해답이 정답이라면, 그 해답이 법관이 속한 사회의 제도적 역사와 헌법적 역사에 가장 잘 부합하고 도덕으로 뒷받침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드워킨은, 법이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에 방점을 찍고, 이를 토대로 법실증주의를 논박한다. 권리를 공공복리를 비롯한 다른 고려 사항들보다 훨씬 중요하다. 판결하기 어려운 사안에 대한 결론이 법관의 개인적 소신, 직관, 폭넓은 재량 등에 의해 좌우된다면, 개인의 권리는 심각하게 위축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 개인의 권리는 공동체의 이익보다 후순위로 밀려날 수도 있다. 이와 달리, 드워킨은 개인의 권리를 '법의 일부'로 인정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결국 드워킨은 법실증주의자들보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데 더욱 적합한 이론을 구성해낸 것이다."(103-4)


"드워킨이 보기에, 관행주의(나 법실증주의)는 법의 효력 기준을 둘러싼 논쟁들로 말미암아 많이 망가지고 말았다. 법실증주의자들은 승인규칙을 통해 X가 법이라고 확인되면 그 사실에 토를 달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즉 규칙의 기원(pedigree)이 규칙의 효력(validity)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드워킨의 생각은 다르다. 승인규칙에 포함된 기준들만으로는 법의 효력 기초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을 두고 드워킨은 법실증주의자들이 '의미론적 독침(semantic sting)'에 찔려 있다고 비판한다. 즉 법실증주의자들이 법에 관해 벌이는 논쟁은, 알고 보면 '법'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둘러싼 의미론적 논쟁이라는 것이다." "드워킨은 이러한 법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즉 어떤 주장이 타당한 경우를 확인하기 위한 기준들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규정할 수 없음에도 어쨌든 이러한 기준들이 존재해야만 유의미한 논쟁이 가능하다는 가정은 틀렸다는 것이다."(110-1)


4 권리와 정의


"(그 대상이 법적 권리이건 도덕적 권리이건 간에) 권리는 법과 법체계의 도처에 퍼져 있기에 법철학의 핵심 주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정의라는 이상은 법체계 내부에서도 손꼽히는 가치에 해당하지만, 정의의 보편성을 강조하다보면 법 자체를 초월하려는 열망이 일어나기도 한다." "'권리란 무엇인가'에 응답하는 이론은 두 가지로 대변된다. 첫번째 이론은 '의사설(will theory)'로 알려져 있다. 즉 내가 무엇을 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할지 말지를 선택할 가능성이 실제로 보장된다는 뜻이다. 의사설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자기실현이 강조된다. 두번째 이론은 '이익설(interest theory)'로 불린다. 이에 따르면, 권리는 단순히 나의 선택 가능성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특정한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이익설이 더 나은 설명을 제시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126-8)


# 이익설이 의사설을 반박하는 논리

1. '나의 권리'에는 다른 이가 내가 그 권리를 행사하도록 허용할 의무가 있다는 뜻을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할 권리나 특정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법에 의해 제한될 수 있다.

2. 권리에는 '실체적 권리'와 구별되는 '실체적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권리'가 있다. 가령, 어린아이에게 특정한 권리를 선택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 권리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오늘날 정치적·법적 논의에서 인간의 권리, 즉 인권이라는 개념의 위상은 하늘을 찌른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거나 신문 기사를 읽어보라. 인권과 무관한 보도는 찾기 어렵다. 인권 개념은 ('자연권'의 형태로) 중세에 이르러 처음 등장했지만, 17~18세기를 거치면서 인권은 종교적 색채에서 벗어나 이해되기 시작했고, 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적 운동에 해당한다. 이러한 운동의 밑절미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깔려 있다. 즉 우리 각자는 인간으로서, 다시 말해 바로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종, 종교, 성별, 나이와 상관없이 다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기본적 권리들을 부여받았다는 생각이다. 그러한 권리들이 법률에 규정되어 있는지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또 그러한 권리들이 '상위법'에 해당하는 자연법에서 도출될 수 있는지 여부도 별다른 의미가 없기는 매한가지다. 국제연합에서 1948년에 채택한 「세계 인권 선언」에는 인권을 보편적인 가치로 이해하고 보장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이 담겨 있다."(134-6)


"정의가 단순한 개념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의에 관한 논의는 대부분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같은 것들은 같게, '다른 것들'은 다른 정도에 비례하여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 곧 정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다시 '교정적(corrective)' 정의와 '배분적(distributive)' 정의로 구분한다. 교정적 정의는, 법원이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 대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을 때 문제된다. 배분적 정의는, 각자에게 응분의 몫을 나눠주고자 하는 상황과 관련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배분적 정의는 주로 (법관이 아니라) 입법자가 고려할 주제에 해당한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서는 정의를 〈각자에게 응분의 몫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의지〉로 규정한다." "즉 정의의 핵심 속성 세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중요한 존재라는 점, 누구나 일관되고 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점, 누구나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143-4)


"공리주의자들에 따르면, 정의란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벤담식의 행위 공리주의─어떤 행위가 옳은지 그른지는 그 행위의 결과가 좋은지 나쁜지로 정해져야 한다─나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좋음은 유쾌함과 불쾌함이 아니라 경험의 질에 의해 결정된다─가 그다지 큰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밀이나 벤담이 자기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좋아해야 마땅한' 것들을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 대체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 공리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정도를 최대로 늘리는 일에 대해 논의한다. 즉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충족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개인의 선택권을 도외시하는 '좋음'에 관한 어떠한 이해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공리주의가 상당히 매력적인 이유는, 정의의 기준을 따질 때 도덕적 직관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쉽게 와닿는 인간의 행복을 제시하기 때문이다."(150-2)


"존 롤스(1921~2002)는 공리주의로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으며, 사회의 행복이 불평등을 통해 극대화되는 것이 확실하다 해도 불평등을 지지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처사라고 주장한다. 롤스에 따르면, 행복은 이익과는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행복은 자존감(self-respect)과 같은 '사회적 기본 가치(primary social goods)'와 관련을 맺는다. 특히 정의의 문제는 행복의 문제에 앞선다고 롤스는 생각한다. 즉 오로지 어떤 쾌락이 정의롭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만 그러한 쾌락이 가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문 자체가 정의에 부합하는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토머스가 고문을 하면서 얻는 쾌감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리주의자들이 '무엇이 좋은지'를 기초로 '무엇이 옳은지'를 정의한다면, 롤스는 그와 반대로 '무엇이 좋은지'보다 '무엇이 옳은지'가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라고 보는 것이다."(160-1)


5 법과 사회


"에밀 뒤르켐(1858~1917)은 사회는 어떻게 해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사회적 응집력을 촉진하고 유지하는 데 법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나아가 뒤르켐은, 사회가 종교의 힘이 퇴색하고 집단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진보함에 따라 법의 주안점이 형벌(punishment)보다는 배상(compensation)에 놓이게 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렇지만 형벌을 통해 집단의 도덕적 태도가 표명되는 것이고, 형벌이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회적 연대(social solidarity)가 지속된다고 한다." "형벌은 뒤르켐이 이해하는 범죄의 핵심 요소에 해당한다. 즉 국가는 국가를 거스르는 자에게 형벌을 부과함으로써 집단의식을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뒤르켐은 형벌을 〈사회가 특정한 행위 규범을 위반한 사회 구성원에 대응하여 작동하는 조직을 매개로 경중을 나누어 부과하는 강렬한 반작용〉으로 정의한다."(176-9)


"막스 베버(1864~1920)는 사람들이 법을 준수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유형의 정당한 지배를 제시한다. 첫째, 전통적 지배(traditional domination)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규칙과 권력의 신성함을 통해 정당화된다고 여겨진다.〉 둘째, 카리스마적 지배(charismatic domination)는 〈한 개인의 아주 신성한 일에 대한 헌신, 엄청난 용기, 본받을 만한 성품〉에 기초한다. 셋째, 법적-합리적 지배(legal-rational domination)는 〈제정된 규칙의 합법성 및 그러한 규칙에 따라 권위를 갖게 된 자들의 명령권에 대한 믿음〉에 의존한다. 물론 이 세번째 유형이 베버가 설명하는 법의 핵심 특성에 해당한다. 그리고 법적-합리적 권위라는 개념이 (법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는 법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객관적인 관점을 확보한다는 점을 입증하는) 베버의 가치론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법적-합리적 지배와 현대 관료제 국가가 상호관련을 맺는다는 것이다."(184)


"카를 마르크스(1818~83)에 따르면, 법은 경제적 토대를 '반영'하며 계급을 억압하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계급 없는 사회에서는 법이 필요 없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법을 유물론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일이 난관에 부딪힐 때가 많다. 바로 국가가 노동자 계급의 삶의 질을 높이는 개혁적 법률을 제정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법률도 지배 이데올로기나 지배계급의 이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내놓는 대답은, 국가는 '상대적 자율성(relative autonomy)을 띤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자본주의 국가라고 해서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무한히 행사할 수는 없고, 사회적 세력들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대해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즉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국가란 알고 보면 〈부르주아지 전체의 공동 사업을 관장하는 위원회〉에 불과한 것이다."(189)


6 비판적 법이론


"넓은 의미에서 비판적 법이론의 입장을 견지하는 법이론가들은 오랜 기간 법철학의 핵심으로 여겨져온 이론적 기획들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논지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또 비판적 법이론에서는 자연의 이치로 여겨지는 것들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여성주의 법철학에서는 '남성중심사회(patriarchy)'가, 비판적 인종 이론에서는 '인종(race)'이, 비판법학에서는 '자유 시장(free market)'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메타 서사(metanarratives)'가 문제시된다." "비판적 법이론가들의 주된 목표는 법의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토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토대를 통해서는 법과 법체계가 제대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한다. 비판적 법이론가들은 법을 다른 영역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분야로 여기는 생각에도 반대한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법은 (정치나 도덕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이고 명확한 개념으로 표현되는데, 비판적 법이론가들은 법이 그러한 개념일 리 없다고 주장한다."(206-7)


"1970년대에 미국에서 출현한 비판법학(Critical Legal Studies)은 법체계의 기초에 놓여 있는 신념들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첫째, 비판법학자들은 법은 체계가 아니며, 모든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불확정성(indeterminacy)의 원리로 불린다. 둘째, 비판법학자들은 자율적이고 중립적인 형태의 법적 추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반-형식주의(anti-formalism)의 원리로 불린다. 셋째, 비판법학자들은 인간 관계에 대한 유일하고 정합적인 견해가 법리로 요약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비판법학자들은 법리를 통해 (대개는 상충하는) 여러 가지 견해가 드러난다고 여기며, 그 가운데 어떠한 견해도 지배적일 만큼 정합적이거나 설득력이 있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이는 모순(contradiction)의 원리로 불린다. 넷째, 비판법학자들은 (설령 합의가 이루어진 경우에도) 법이 사회적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이라 여길 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비주류(marginality)의 원리로 불린다."(222-3)


7 법을 이해하기: 아주 짧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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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8-29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잘 모르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nana35 2022-08-29 21:14   좋아요 0 | URL
북다이제스터 님의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면 저에게도 기쁜 일이네요. 감사합니다.
 
종교개혁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11
피터 마셜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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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학교에서 가르치는 방식과 달리, 종교개혁은 '종교사'에 국한되지 않는 그 이상의 사건이었다. 전통적인 교회사가들은 이념의 우위, 즉 현실을 변혁하는 새로운 신학과 세계관의 힘을 역설한다. 이와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유행을 타는 사회학·문학 이론의 수용자들은 본능적으로 '해체'하고자 하고, 종교적 원칙이나 의례 형식 이면에 놓인 '실질적인' 정치적 동기, 계급에 기반한 동기, 경제적 동기 등을 분별해내려 한다. 그렇지만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엄격히 구별하면서 시작하는 모든 접근법─근본적으로 근대적인 접근법─은 우리에게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16세기와 17세기에 대다수 사람들의 일상 생활은 대단히 신성화되었고, 종교는 철저히 세속화되었다. 그렇기에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행위와 동기에서 '종교'를 말끔히 분리해내기란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극히 어려운 일이다. 기실 종교개혁이 역사에서 중대한 변혁적 계기였던 까닭은 이 모든 범주들이 상호작용했기 때문이다."(21)


1 종교개혁들


"(신학의 전체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루터의 '급진화'는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명석한 정통파 논적 요한 에크와 논쟁하는 가운데 훤히 드러났다. 그전까지만 해도 루터는 관례에 따라 교황에 맞서 공의회의 권위에 호소했다. 그러나 에크가 루터를 얀 후스에 빗대며 몰아붙이자 루터는 그 보헤미아 이단자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의해 부당한 판결을 받았고 교황과 마찬가지로 공의회도 신앙 문제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루터에게 오류가 없는 종교적 권위의 원천은 성서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라이프치히 논쟁 이후로 루터에게 후퇴란 없었다. 1520년 레오 10세에 의해 파문을 당하자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교황의 파문 교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특유의 방식으로 대응했다. 또한 루터는 일련의 팸플릿을 발행하여 교회의 '바빌론 유수'를 규탄하고, 교회법에 순종할 필요성을 부인하고, 성사(聖事)의 수를 7개에서 3개로 줄이고, 황제와 독일 귀족에게 교회 개혁에 동참하라고 요청했다."(31)


"로마에 항거하는 것이 루터만의 소임은 아니었다. 루터는 어떠한 구체적인 의미에서도 개혁 운동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루터는 선지자였고, 종교개혁은 초기부터 서로 별개의 복수 종교개혁들을 포함했다." "스위스 도시 취리히에서 활동한 츠빙글리는 인문주의 배경이 더 탄탄했고 교회 내 몽매주의를 매섭게 비판한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의 저술을 숙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루터와 달랐다." "권위 문제와 관련하여 츠빙글리는 루터와 비슷한 입장에 도달했다. 다시 말해 진리의 유일한 토대는 성서였고, 교황과 공의회의 권력은 허상이었다. 츠빙글리에게 '95개 논제'와 같은 순간은 1522년 사순절에 찾아왔다. 이때 그는 부활절 준비 기간에 육식을 삼가는 교회 규칙을 보란듯이 위반하는 소시지 식사를 주재했다. 그런 사안에서 기독교인의 '자유'는 루터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츠빙글리의 가르침에서도 중심 뼈대였고, 의심할 나위 없이 대중에게 호소하는 중요한 요소였다."(34-5)


"1525년 이후 종교개혁은 '길들여졌고', 개혁은 점잖아졌다. 루터주의와 사회적 급진주의가 분리되자 당시 지지자들이 '복음주의'라 부르던 신앙을 제후들이 채택할 길이 열렸다." "루터주의가 종교적 개혁의 고동치는 심장박동을 잃어가는 사이에 탄생한 제2종교개혁의 탄생지는 예상 밖의 장소였다. 바로 스위스 연방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인구 1만여 명의) 도시 제네바였다." "법률가로 훈련받은 칼뱅은 1534년에 프랑스에서 신교 동조자들에 대한 탄압을 피해 달아나기 전까지 관례적인 학자 경력을 쌓은 인물이었다." "사실 (설교사 외에 어떠한 공식 직책도 없었던) 칼뱅은 제네바에서 권위를 확고히 세우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다. 칼뱅이 결국 성공한 주된 이유는 제네바 인구의 두 배가 넘는 망명자들이 16세기 중엽 수십 년간 이 도시에 정착하여 그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칼뱅은 제네바 서쪽의 덩치 큰 이웃 프랑스에서 위그노라고 알려진 신교도들의 조직과 태도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40-50)


"가톨릭교는 자체 종교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유서 깊은 위력에 의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의 충격에 자신을 노출하기도 하면서 스스로를 뜯어고쳤다. 그 과정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가장 중요한 개혁은 모든 교구에 성직자 양성─중세에는 명백히 마구잡이 과정이었다─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라는 교령이었을 것이다." "공의회가 마무리될 무렵, 아직 갈 길이 멀기는 했지만 가톨릭 개혁은 부인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둔 터였다. 우선 논란이 분분한 거의 모든 쟁점에 관한 가톨릭 교리를 명료하게 밝힘으로써 단일한 로마 가톨릭교회─종교개혁 이전 유럽에서 공존했던 더 엉성한 표현인 '가톨릭교들(Catholicisms)'을 대체했다─의 통일된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평신도를 위한 표준화된 교리문답서(종교 교육서)를 공인했고, 미사 집전의 균일한 순서를 정했다. 그리고 15세기 공의회들과는 반대로 교황직의 권한을 약화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했다."(58-61)


"17세기 후반에 종교 전쟁의 시대, 종교개혁의 시대가 끝났다는 견해는 어느 정도 참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네덜란드 침공을 환영한 현지 가톨릭 소수집단이든 가톨릭교를 고수한다는 이유로 국왕 제임스 2세를 1688년에 폐위시킨 잉글랜드의 열렬한 반가톨릭 신교도들이든, 분명히 루이를 가톨릭의 대의와 동일시했다. 그보다 3년 전인 1685년에 루이는 거의 한 세기 동안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에게 예배할 권리를 허용했던 낭트 칙령을 철회함으로써 정치적 절대주의와 종교적 승리주의를 결합하는 놀라운 실례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는 억압과 반란, 추방과 진실하지 않은 개종의 물결, 그리고 국경을 건너간 망명자들이 쓰라린 원한을 키우고 현지인들 사이에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사태였다. 한 세기 반 동안 종교개혁들은 유럽 정치생활과 문화생활의 주요 동력이었다. 종교개혁이 그 기능을 아직 다하지 않은 때에 계몽주의 시대가 동트기 시작했다."(68-70)


2 구원


"가톨릭교회가 신자들에게 '선행'을 실천하여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지난날 가르쳤거나 오늘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신교도뿐 아니라 일반 가톨릭교도 사이에서도 흔한 오해다. 위대한 신학자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역설한 대로, 구원은 권리가 아니라 초대에 응하는 것이었다. 중세 가톨릭 신학은 하느님이 자유롭게 자의로 죄인에게 '은총'을 제안한다고 보았다. 은총이란 하느님이 자격 없는 인간에게 베풀어 영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호의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은총 제안을 받아들일 때 의롭게 되었고, 하느님의 계명이 요구하는 선행을 행함으로써 그 제안에 응했음을 입증해 보였다. 까다로운 점은 누군가 하느님의 초대에 토를 달지 않고 '네'하고 응한 사람으로 여겨질 만큼 선행을 충분히 행했는지를 아는 일이었다. 중세 후기에 학구적 신학은 하느님은 인간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결코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말로 사람들을 안심시켰다."(73-4)


"청년 수도사 시절 루터는 자신이 무가치하고 하느님의 호의를 얻으려는 수도생활이 부질없다는 생각으로 고뇌했다." "그 위기를 해소한 촉매제는 성 바울로의 정경(正經) 서한, 특히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로마서 1장 17절)라는 말이었다." "루터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희생한 결과로 하느님께서 여전히 완전한 죄인일지라도 개개인을 의인으로 받아들이기로 선택하신다고 결론 내린 순간, 불안과 자기혐오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났다." "하느님 계명의 역설적인 점은 그것을 이행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가치함을 확신시킨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저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하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신께서 그들을 받아들이실 거라는 '기쁜 소식'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루터주의는 '이신득의'(以信得義: 믿음을 통해 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 교리를 믿는다." "이제 구원은 참된 기독교 생활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었다."(75-6)


"사실 예정론을 다듬어 최종 형태를 내놓은 사람은 제네바에서 칼뱅을 계승한 테오도뤼스 베자(1519~1605)였다. 그는 세상의 창조와 아담의 타락 또는 '탈선' 이전부터 하느님이 모든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정해두었다고 결론 내렸으며, 이 교리는 '타락 전 예정설'이라는 위압적인 이름으로 불려왔다. 이 교리를 논리적으로 더 밀고 나아가면 그리스도가 모두를 위해 돌아가셨을 리 없고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결론, 즉 '제한 속죄'에 이른다. 하느님은 왜 이렇게 했고, 어째서 겉보기에 무작위로 일부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버렸을까? 그렇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예정은 칼뱅주의 하느님의 전적인 초월성, 주권, 그리고 인간이 상상한 속박에서 자유로움을 나타내는 궁극적 상징이었다. 가톨릭측은 그 교리가 하느님을 폭군으로 만든다고 비판했고, 16세기 후반에 일부 루터파도 그 비판에 얼마간 동의했다. 그들은 루터 자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예정은 인간 행위에 대한 신의 예지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79-80)


"칼뱅파만이, 더 넓게 말해 신교도만이 예정론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 17세기에 가톨릭권 유럽, 특히 프랑스는 얀선주의 현상─일종의 가톨릭 청교도주의─의 무대였다. 얀선주의는 네덜란드 신학자 코르넬리스 얀선(1585~1638)이 예수회의 루이스 데 몰리나를 공격한 데서 연원했는데, 몰리나는 인간의 선행에 대한 하느님의 예지로 인해 그 행위의 자유로운 성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얀선주의는 인간의 선행 역량을 아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를 칼뱅주의와 공유하여 인간은 은총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고 가르쳤다. 얀선주의의 가장 유명한 옹호자였던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 예수회를 매섭게 비판했고, 『팡세』에서 철학적 이성이 아닌 신앙을 하느님에 대한 앎의 토대로 제시했다." "중요한 대중 운동이 되기엔 너무 지적이고 도덕적으로 너무 엄격했던 얀선주의는 가톨릭교를 '단일체'로 여기는 견해를 반박하는 사례, 그리고 종교개혁이 묘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었음을 상기시키는 사례다."(81-2)


"구원에는 개인의 운명보다, 심지어 지역 공동체의 운명보다도 넓은 차원이 있었다. 기독교 서사에는 결론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 세상의 종말,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 사건들은 성서의 묵시록 또는 그리스어로 아포칼립스(Apocalypse)에서 장관을 이루는 불투명한 이미지로 예언되었다. 묵시록은 신통찮은 시간표도 제공했다. 우주에서 그리스도에 적대하는 악마─적그리스도─가 1000년간 갇혀 지내다가 세상으로 풀려나고 결국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이 최후의 결전인 아마겟돈(Armageddon)을 벌인다는 시간표였다. 신자들에게 다짐하는 약속도 있었다. 세상이 파괴되고 죽은 자들이 부활하기에 앞서 그리스도가 1000년간 지상을 다스리는 지복천년을 누릴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다가오는 세계 종말에 대한 강렬한 관심은 (적어도 유럽에서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종교의 변두리에 있었던 괴짜들의 특권이 아니었다. 루터 본인이 〈말세의 혼돈의 그림자 안에서〉 살고 있다고 확신했다."(96-7)


3 정치


"종교개혁에 제일 먼저 진지한 열정을 보인 지역 통치자들은 기존 국가의 군주들이 아니라 그렇게 되고픈 이들, 즉 황제의 명목상 종주권 아래 크기로 보나 실속으로 보나 왕국이라기엔 미흡한 독일 영지를 통치하던 제후들이었다. 그 연관성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독일 제후들은 척 보기에도 루터의 대의를 받아들여 얻을 것이 많았다. 정치 면에서 그들은 자기 영토에 있는 교회의 행정을 통치기구에 통합하여 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황제를 상대로 책략을 구사할 자유를 더 많이 주장할 수 있었다. 재정 면에서 그들은 (비교적) 떳떳한 마음으로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수도원의 땅과 기부금을 몰수하여 교회의 부를 강탈할 수 있었을 것이다." "루터는 세속 권력을 일종의 필요악으로 여겼다. 이따금 '두 왕국론'이라 불리는 것에서 루터는 '하느님의 왕국'은 신께서 어련히 다스리실 테지만 교회 조직의 외형을 포함하는 '세속의 왕국'은 적법한 정치적 강제의 영역이라고 보았다."(106-8)


"종교개혁기는 유럽에서 이데올로기 전쟁이 거의 끊이지 않은 시대였고, 국가들이 영토 확장 또는 주권자의 명예와 영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서로 싸운 첫 시대였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 전쟁이 한쪽의 완승으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십중팔구 종전을 위해 교전국들이 문자 그대로 합의를 보아야 했다." "제국 내에서 양심의 자유와 사적 숭배의 자유 같은 권리들을 승인받지 못했다면, 어느 쪽도 30년 전쟁을 종결지은 조약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진짜 아이러니가 있는데, 종교적 용인 그 자체를 절대선으로 여긴 이는 사실상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적 반대파를 제거할 수 없다면 평화의 대가로 타협해야 했고, 그리하여 전쟁의 예기치 못한 결과로 용인이 자리잡았다. 이런 이유로 지난날 종교개혁들이 단호히 고수하고자 했던 가정들 중 일부─종교적 충성과 정치적 충성의 융합, 기독교 문화와 시민사회의 완전한 일치─가 서서히 흐트러지기 시작했다."(115-9)


"종교개혁은 더 직접적이고 자의식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권위의 기존 위상에 도전하기도 했다. 상이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신민들이 통치자에게 항거한 것은 그 자체로 보면 정치적 사실이었지만, 내심 그들은 자신들이 취하는 조치가 법적·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느끼기를 원했다. 그 결과 또 하나의 중대한 국면이 전개되었다. 다시 말해 정치적 복종의 한계가 전례없이 이론화되었고, 종속 집단의 저항에 관한 성숙한 이론들이 명료하게 표현되었다." "카를 5세의 적의에 직면한 신교 제후들을 위해 루터파 신학자들은 정치적 복종에 관한 교리와 입헌 이론을 절묘하게 결합했다. 그들에 따르면 모든 통치자에게는 참된 종교를 보호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의무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독일 제후들은 황제와 공동으로 제국의 좋은 질서를 책임져야 했다. 만일 황제가 참된 종교를 지탱하는 의무를 게을리하면, 적그리스도 교황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면, 그에게 적법하게 저항할 수 있었다."(119-20)


"일각의 견해와 달리 칼뱅 역시 원칙에 입각한 저항을 지지한 혁명가가 아니었다. 『기독교 강요』에서 칼뱅은 일부 국가들의 헌법에 따라 〈인민의 자유의 수호자들〉이 (고대 스파르타의 민선장관이나 로마의 호민관처럼) 폭정을 막아내는 일을 용인받는다고 말했을 뿐이다. 신중하게도 칼뱅은 근대 왕국들의 신분제 의회 또는 의회가 '아마도' 그 기능을 수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칼뱅이 '거짓된' 숭배의 참상을 집요하고도 신랄하게 비난하고 참된 기독교도라면 그것을 멀리할 의무가 있다고 역설한 것은 적어도 소극적인 저항과 시민 불복종을 권유한 것이었다. 칼뱅의 추종자들 중 일부가 칼뱅의 입장보다 덜 모호하고 더 급진적인 논증을 개진한 까닭은 독일의 연방 권력구조를 결여한 지역들에서 실제로 박해를 당하고 대항-종교개혁이 시작되자 그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심지어는 사악한 통치자는 전복되거나 살해될 수도 있다는 폭군 살해론으로까지 나아가기도 했다."(120-1)


"종교 전쟁─종교적 소수파를 마지못해 공식 용인한다는 혼란스럽고 예기치 못한 결과로 이어진─이라는 대변동이 잦아든 뒤 즉각 나타난 종교개혁의 결과는 정치적 권위의 강화와 공고화였다. 주목할 만한 몇몇 예외(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같은)를 빼면, 17세기 후반 유럽 국가들의 기조는 '절대주의'였고, 대의기구는 쇠퇴했으며, 군주의 구속받지 않는 권력 행사가 절대선으로 제시되었다. 저항 이론들은 폭력적이고 분열적이었던 가까운 과거의 산물로서 한물간 것이 되었다. 그러나 통치자, 피치자, 신의 3자 관계의 계약적 측면에 근거하여 숙고한 끝에 정치적 불순종에 대한 정당화를 정식화한 논변들은 미래에 아주 중요했다. 물론 정당화 논변을 창안한 이들의 목표는 민주정 수립이나 정치적 자유 그 자체가 아니라 '우상 숭배'와 '이단'의 근절이었다. 그럼에도 그 작업들은 18세기에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끼쳤고, 그리하여 새롭고 판이한 정치적 세계가 열리는 과정에서 일익을 담당했다."(125)


4 사회


"전근대 사람들에게 '공동체'에 투자하는 활동은 생활양식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근본적으로 농업(인구 절대다수의 직업)은 공동체가 합의한 관습에 따라 모두가 씨를 뿌리고 쟁기질을 하고 때가 되면 함께 수확하는 집단 활동이었다. 생계유지가 집단 활동이었던 것처럼 수확 실패, 전염병, 기상 이변, 전쟁 등 목숨을 위협한 주된 원인들도 집단으로 겪는 역경이었다. 이런 난관은 지금도 보험증서에 깨알 같은 글자로 끼워 넣는 표현처럼 '신의 행위'[불가항력 또는 천재지변을 뜻함]로 보였다. 주님이 개개인에게 상이나 벌을 주기도 했지만, 공동체 전체가 주님의 심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모두의 행위가 모두의 소관이 되었다. 소수의 부도덕한 행실이나 이단이 신의 노여움을 사서 사회에 천벌이 내리면 그들을 용인한 모두가 고통받을 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남편, 아내, 자식, 이웃 등과 함께 천국에 가기를 원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129-30)


"종교 조직과 사회 조직 모두의 주요 구역은 교구였다. 교구는 그 경계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이 응당 속해야 하는 지역의 행정 단위였다." "신교는 국교로 인정받은 곳에서 기존 교구 체계를 유지했고, 공동체 결속, 감독, 통제를 목회 임무의 주요 특징으로 삼았다. 이런 맥락을 고려해야만 출교(가톨릭 종교재판소가 공표했든 제네바 종교국이 공표했든)가 불러일으켰던 격정을 이해할 수 있다. 출교는 사회적 불명예의 원천(적어도 공동체에서 덕망 높은 이들에게는)이었을 뿐 아니라, 공동체 생활에 극히 중요한 행사에서, 무엇보다도 이웃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지위와 좋은 평판을 상징하던 성체성사에서 배제하는 조치이기도 했다. 출교당한 자는 대부모(代父母) 자격도 금지되어 성체성사에서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빛바랜 흔적처럼 남아 있지만 당시 대부모 제도는 세례를 받는 아이에게 평생의 후원자를 정해주고 가족들 사이에 영적 친족의 유대를 만들어내는 필수적인 사회 제도였다."(130-2)


가톨릭 문화에서 '자선(charity)'은 오늘날처럼 단순히 불우한 이들을 향한 이타심을 뜻했던 것이 아니라, 모든 동반자에게 하느님의 호의를 돌려주는, 사회관계가 바로잡힌 상태를 뜻했다." "그러나 신교 개혁가들이 보기에 빈자들에게 주는 행위는 '선행'이 아니었고, 그런 행위를 통해 영적 이로움이 교환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빈자들이 특히 그리스도를 닮았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통념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가난을 진지하게 다루었고, 가난을 낭만화하던 관행을 그만두었으며, 구제 계획의 적절한 우선순위를 정해 '자격 있는 빈민'을 지원했다. 어쩌다 한 번씩 차별을 두지 않고 베풀던 기존의 자선 형식은 사실 종교개혁 이전부터 일부 지역들에서 바뀌기 시작했다." "루터의 비텐베르크를 시작으로 많은 신교 도시들이 비슷한 계획을 실행하여 구걸을 금지하고, 빈민을 지원하는 '공동 기금(common chest)'을 마련하기 위해 주기적 모금을 지시하고, 때로는 도시 구빈원을 설립했다."(133-4)


"가족은 신교의 핵심 사회 제도이자 기독교 공동체의 기초 단위인 동시에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축소판이었다. 칼뱅은 개별 교회를 닮은 가정에서 아버지가 목사 역할을 하며 집안 신도들인 아내와 자녀, 하인을 규제하고 지도한다고 보았다. 종교개혁기는 아버지들이 지배한 시대였다. 가족과 가정생활에 관한 이 시대의 기본 전제를 가리키는 적절한 표현은 가부장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은 자녀의 유년기에 복잡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어린이는 나머지 인류와 마찬가지로 선천적으로 결백한 존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악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부모는 자녀를 매로 다스렸고, 억누르고 제지했으며, 교리문답의 메시지를 주입했다(이 동사의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의미로). 그러나 구약이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한 것처럼 신약은 아버지들에게 〈자녀를 못살게 굴지 마십시오〉라고 지시했다. 자녀는 하느님의 선물이었고, 개혁가들은 자녀를 야육하고 보살펴야 한다고 가르쳤다."(140-2)


"학자들은 여성이 종교개혁에 끼친 영향은 간과한 채 종교개혁이 여성에게 끼친 영향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곤 한다. 여성은 종교적 변화에 적극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당대의 통념이었지만, 많은 여성이 변화에 동참해 열렬하고 심지어 광신적인 당파심을 드러냈다. 메리 튜더의 체제에 의해 화형당한 신교도들 가운데 눈에 띄게 높은 비율(280여 명 중 51명)이 여성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신교 체제에서 여자들은 잉글랜드 가톨릭교를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남편과 별개인 법적 정체성이 아내에게 없거니와 남편이 교회에 다니는 한 아내에게 '영국 국교회 거부'를 이유로 벌금을 물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이용했다. 여성 행동주의는 성장중인 '자발적' 종교의 세계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은 국교회들에서도 대개 가장 헌신적이고 독실한 구성원이었다. 근대 서구 문화의 뚜렷한 특징인 종교의 여성화는 가부장적 시대에 확고히 뿌리내리고 있었다."(146-8)


5 문화


"종교개혁 이전에 종교는 예배자들의 감각 범위 전체를 사로잡을 정도로 대단히 감각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시각적 측면이 도드라졌다. 으리으리한 대성당부터 변변찮은 예배당까지, 교회들은 제단화, 프레스코 벽화,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들을 정교하게 새긴 조각상 같은 이미지들로 가득했다. 십자가에 못박힌 커다란 그리스도 조각물(잉글랜드에서는 루드rood라고 불렀다)은 제단 공간과 본당 회중석을 나누는 칸막이의 맨 위에 걸린 채로 교회의 시선을 지배했다. 종교 이미지를 옹호하는 고전적 논변은 그런 이미지가 문맹자들을 위한 교훈적 도구, '평신도들의 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정을 담아 조각하고 그리고 금박을 입힌 성인 이미지, 평신도들이 헌금을 바쳐 비용을 대고 촛불을 밝혀 공경한 그 이미지는 단순한 그림 글자 이상이었다. 이미지는 신성한 권능의 프리즘으로, 예배에 참석해 집중하는 신도들이 가장 주목할 법한 위치이자 그들의 기도가 가장 응답받을 법한 위치에 있었다."(157-8)


"16세기 종교개혁은 이 비범한 유산을 거부하고 태반을 파괴했는데, 교양이 없거나 예술의 힘을 알아보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힘을 더 예민하게 감지했고 우상숭배의 위험을 몹시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종교 이미지에 대한 주요 개혁가들의 태도는 제각기 달랐다. 루터는 본인이 그림이나 조각의 힘에 별로 감명받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미지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루터가 보기에 이미지들 자체는 멜란히톤이 개진한 신학적 범주인 '아디아포라(adiaphora)'의 사례들, 즉 도덕적 해이와 무관하게 교회가 보유해도 되고 버려도 되는,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점이었다. 이미지를 숭배하거나 신에게 상을 받기를 기대하며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은 가증스러운 짓이지만, '약한 자들'을 지도하는 수단으로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은 용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루터파 뉘른베르크의 교회들에서 귀중한 고딕 예술 작품이 살아남았다."(159-60)


"시각 이미지의 종교적 유용성에 어느 정도까지 열려 있었던 루터주의의 입장을 개혁파 전통의 지도자들은 공유하지 않았다. 츠빙글리는 스스로 인정하는 감정가였지만(〈빼어난 그림과 조각상은 그 자체로 내게 큰 기쁨을 준다〉), 그런 이미지가 교회 안에 자리하거나 예배에서 어떤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런 역할을 허용하는 것은 마땅히 하느님 한 분만이 받아야 하는 경의를 중간에서 가로채 엉뚱한 방향으로 보내고, 인간이 만든 사물을 신뢰함으로써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주권을 모욕하는 꼴이었다. 루터와 츠빙글리 이후 갈라진 노선들은 성서의 이정표들에 대한 서로 다른 독해를 반영했다." "칼뱅에 따르면 〈하느님을 표상하려 시도하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그 형상들과 그분은 전혀 닮지 않았으므로 그분을 묘사하려는 모든 시도는······ 그분의 주권과 영광에 대한 무분별한 모욕이다〉. 이미지는 말 그대로 우상, 그릇된 숭배의 버팀목, 모든 기독교 공동체에서 제거해야 할 전염병이자 오염물이었다."(161-3)


"가톨릭 종교개혁은 (신교에 맞서) 성상의 가치를 다시 역설하는 한편 예술을 통해 신도들과 하느님을 연결할 새로운 방법을 궁리했다." "가톨릭이 이용한 예술에는 신교에 대적하는 전투적인 측면, 성상 파괴자들에게 '엿을 먹이는' 측면이 있었다. 가톨릭은 동정녀 마리아 이미지로 군기(軍旗)를 장식했는가 하면 1620년 백산 전투에서 이단자들을 완파하고 1571년 중대한 레판토 해전에서 무슬림들을 무찌른 공을 '승리의 성모'에게 돌렸다. 이단은 의인화된 형태로든 루터나 칼뱅을 닮은 인물의 형태로든 승리자 가톨릭에 짓밟힌 모습으로 자주 시각화되었다." "이미지가 신앙의 진리를 전하는 교훈적 역할을 수행한 저 멀리 신세계와 아시아에서는 종교 예술이 개종 캠페인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예수회는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는 이미지의 능력을 확신했다. 그렇다 해도 전도를 받은 각양각색의 사회들은 유럽의 기독교 모델을 그저 흡수한 것이 아니라 토착 전통과 환경에 맞추어 조정했다."(167-9)


"〈음악은 신의 말씀 다음으로 가장 높이 칭송받을 가치가 있다.〉 마르틴 루터는 음악 애호가이자 능숙한 류트 연주자였고, 노래를 이용해 성직자와 평신도를 가르는 벽을 허물고 회중을 예배에 직접 참여시키려 했다." "훗날 루터가 작곡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는 수백 년간 신교의 애창곡이었다." "루터는 종교음악에 관대하게 접근했다. 라틴어 텍스트를 허용했고, 다성음악에 감탄했다. 종교음악에 관한 한 루터는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보다 교양 수준이 높았다. 에라스뮈스는 〈우렛소리 같은 소음과 우스꽝스럽게 뒤섞이는 성부들〉을 싫어했고, 현학자마냥 음악은 성서 텍스트를 명료하게 수용하는 데 필요한 수단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루터 이후 루터교 음악은 새롭고 모험적인 경로로 들어섰다." "루터가 처음으로 시도한 코랄(chorale) 실험과 그 실험의 직계 후계자로서 역사상 가장 창조적인 천재인 J. S. 바흐의 전집 사이에는 뚜렷한 연속성이 있다."(173-5)


"루터처럼 재능 있는 음악가이긴 했으나 츠빙글리는 음악을 회화와 거의 같은 범주에 집어넣었다. 다시 말해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하느님 경배를 음악이 어지럽힌다고 보았다. 취리히의 교회들은 오르간을 치웠고, 예배에서 모든 형태의 노래와 성가를 뺐다. 칼뱅 역시 오르간과 악기를 거부하긴 했지만,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성서 자체에 주님을 노래로 찬양하라는 지시가 담겨 있다는 사실에 더 공감하여 다윗의 시편을 찬양용 가사로 제공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전례 음악에 내린 처방은 시각예술에 관한 지시와 비슷했다. 교회음악은 〈음란하거나 불순한〉 함축을 피해야 했고, 속가의 선율을 차용해 작곡하는 미사곡(소위 '패러디 미사곡')이 금지되었다. 가사는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16세기 후반에 다성음악 작곡가들은 역설적으로 이런 제약 덕분에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미사곡과 모테트 중 일부를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다."(175-8)


# 모테트(motet) : 시편의 시를 비롯한 성서 구절에 곡을 붙인 무반주 다성 성악곡


6 타자


"이단은 최악의 범죄, 하느님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범죄였다. 이단자에게 교수형은 문자 그대로 과분한 처벌이었고, 이단자의 육체를 불태우는 것은 사회를 정화하는 의식, 이단자의 영혼을 틀림없이 집어삼킬 지옥불을 예고하는 상징적 행위였다. 루터가 속했던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사 두 명이 브뤼셀에서 화형당한 1523년부터 17세기 중엽까지 서유럽에서 남녀 약 5000명이 종교적 믿음을 이유로 법적으로 처형되었다. 그들은 교회와 협력하는 국가 권력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들 대다수는 특히 이 기간의 초기에 가톨릭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다. 나중에 잉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에서 신교도들은 가톨릭교도들, 특히 사제들을 사형에 처했다." "순교자들과 순교자가 되려는 이들은 어느 종교 집단에서나 소수파였지만, 변화의 속도를 올리고 타협을 무산시키는 힘을 가진 소수파였다. 그들은 대의의 빛나는 상징이자 연약한 교우들을 격려하는 존재로서 열렬한 추모를 받았다."(185-7)


"이단이나 가톨릭교도의 반역죄에 대한 처형은 대부분 1600년 이전에 집행되었다. 교파들을 가르는 경계선이 갈수록 선명해지고 완고해졌음에도, 종교적 소수집단을 박해하여 일소할 수 없다는 것이 여러 지역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국가의 경계 안에서 단 하나의 종교만 믿는다는 허구를 지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비국교도들이 일요일마다 국경을 넘는 관행(Auslauf, 달아나다)이 암묵적으로 허용되었다." "용인과 관용은 같지 않다. 후자는 다양성 그 자체의 수용을 함축하는 근본적으로 근대적인 태도이자 상반된 관점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당국들은 원칙이 아니라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비국교도들을 마지못해 '용인'했다. 보통 평화가 종교적 내전보다는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사적 숭배의 권리를 인정한 이유이기도 했다. 공동체들 내에서 용인은 협의된 사회적 관행이었으며, 종교개혁 시대 막바지에 '관용의 등장'이 곧장 이루어진 곳은 없었다."(190-2)


"이슬람은 중세의 기독교권 유럽에서 주요한 정치적·문화적 '타자'였다. 대체로 신교도들은 무슬림들을 가톨릭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함께 싸우는 전우로 환영하지 않았다." "이슬람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고, 따라서 루터에게 무슬림은 그저 하느님의 적이었다. 가톨릭권 유럽 대부분에서 유통기한을 한참 넘겨서까지 쓰여온 십자군 수사법을 루터는 구사하지 않았다. 복음을 전한답시고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다가오는 최후의 날들과 오스만 제국을 확실히 연관지었고, 그의 마음속에서 교황과 '튀르크족'은 적그리스도 역할을 줄곧 분담했다. 중세의 일부 논자들은 이슬람을 엇나간 '기독교 분파'로 여겼고, 원론적으로는 이슬람과의 공통 기반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앙 간 대화'는 루터의 어휘에 없는 표현이었다. 1542년 루터는 라틴어로 번역되어 인쇄된 코란을 후원하는 데 일조했는데, 종교적 개방성을 가져서가 아니라 적의 견해를 알리고 논박하기 위함이었다."(193-5)


"튀르크인이 가깝지만 외부에 있는 '타자', 즉 기독교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었다면, 오랜 세월 기독교 사회 내부에서 염증성 이물질로 존재해온 유대인은 다른 종류의 난제였다. 대체로 보아 세속 당국과 종교 당국은 도시 경제와 국가 재정 조달 측면을 유념하여 민중의 반유대 폭력을 제지하려 했지만, 고중세와 중세 후기에 대중적·공식적 반유대 감정은 더욱 격화되어 1290년 잉글랜드에서, 1306년 프랑스에서, 1492년 에스파냐에서(그라나다 정복을 기념해), 1497년 포르투갈에서 유대인이 추방되었다. 유대인이 잔류를 허용받은 곳에도 그들을 향한 분노가 두고두고 폭발할 가능성이 남아 있었으며, 유대인이 기독교도 소년들을 납치하고 살해하여 그들의 피를 유월절 무교병(無酵餠)을 굽는 데 사용한다는 '피의 비방'이 그런 분노를 부채질하곤 했다. 이와 관련된 혐의는 성체 신성모독이었다. 기독교인은 유대인이 축성받은 성찬용 제병을 훔쳐서 고문함으로써 예수의 육신에 대한 폭력을 영속화하려 든다고 믿었다."(196-7)


"비기독교인 타자와의 가장 난처한 조우는 기독교 유럽 안쪽도 아니고 경계도 아닌 저 멀리 해외에서 이루어졌다. 그 이역만리에서 가톨릭교도들(그리고 뒤늦게 신교도들)은 종교개혁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들은 오래된 금언인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를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배타성의 극치인 이 언명은 이교도들을 시급히 포섭하라는 주문, 그들을 개종시켜 그들의 영혼을 영원한 지옥살이로부터 구하기 위해 지치지 말고 힘쓰라는 주문이기도 했다. 그럴 기회는 문자 그대로 거의 무한했다." "그렇지만 인간의 본질적 가치라는 문제는 아메리카 대륙을 복음화하는 동안 진지한 논쟁의 주제였다. 코르테스와 피사로가 아스텍 제국과 잉카 제국을 파괴한 것이야 정치적 기정사실이었지만,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같은) 일부 성직자들은 그 이후 정복자 지주들이 토착민 노동을 착취하는 상황이 선교 활동을 가로막는다고 보았다."(201-3)


"동양에서 기독교의 호소력을 특히 사회 엘리트층까지 넓히려던 시도를 개척한 이는 로욜라와 함께 예수회를 창립한 프란시스코 사비에르(1506~1552)였다. 일본에서 포교 활동을 펼친 사비에르는 '적응주의' 노선을 택해 기독교와 정반대되지만 않으면 지역 전통을 포용했다. 또다른 예수회원 로베르토 노빌리는 인도에서 같은 접근법을 택해 상위 카스트인 브라만처럼 입고 먹었고, 시체 태운 재를 뿌린 강물에서 목욕하는 의식 같은 기독교 개종자들의 '사회적' 관습을 허용했다. 역시 예수회 수사들이 순응책을 구사한 중국에서는 마테오 리치(1551~1610)와 그의 후계자들이 고관처럼 차려입었고, 지도 제작술과 천문 관측술로 중국의 학구적인 행정 계급에 감명을 주었다. 기독교를 생경한 수입품이 아니라 기존 신조의 완성형으로 제시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리치는 '하느님', '천국' 같은 개념들을 유사한 한자 용어로 표기하도록 장려했고, 유교의 조상 숭배는 가톨릭교와 완전히 양립 가능한 민간 제례라고 말했다."(205-6)


7 유산


"19세기 후반에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 특히 칼뱅주의자와 청교도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고무했다는 영향력 있는 이론을 내놓았다." "근래 역사가들은 대체로 이 테제에 설득력이 없다고 보면서 거리를 둔다. 자본주의적 번영은 오스만 제국이 팽창한 15세기 이래 경제적·정치적 우위가 지중해에서 (가톨릭권 프랑스를 포함하는) 대서양 세력들로 넘어간 더 장기적인 추세의 일부였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어 보인다. 오늘날 베버의 다른 근대화론은 예전보다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그것은 신교가 초월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종교로서 생활환경에 관한 초자연적이고 마술적인 믿음에 치명상을 입혔고, 광범한 '세계의 탈주술화'를 촉진했다는 견해다." "그러나 학자들이 발견한 증거에 따르면 다름 아닌 근대의 신교권 유럽 전역에서 종교 문화들은 징후와 징조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흠뻑 빠져 있었고, 마귀와 천사가 활동한다고 상상했다."(215-6)


"기적 개념, 아울러 악마를 비롯한 영적 존재들이 인간사에 개입한다는 믿음이 용인될 가능성은 적어도 교육받은 계층에서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것은 관례상 '과학혁명'이라고 뭉뚱그리는 현상에 수반된 변화였다." "일각에서는 신교가 근대 과학을 후원한 사실이 가톨릭교가 근대 과학을 적대한 사실만큼이나 자명하다고 본다." "그러나 신교가 과학의 전제조건이라는 생각은 무엇보다 중세 유럽에 추론하고 실험하는 활기찬 전통들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그럴싸할 뿐이다. 여하튼 신교의 핵심은 구속받지 않고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 있는 텍스트에 복종하는 것이었으며, 오늘날 많은 신교도들이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근거로 들어 진화론에 반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펴보는 기간 내내 숱한 신교도들이 구약성서 여호수아기에서 기브온 위에 '멈추어 있는' 해를 언급한다는 이유로 지동설에 반대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종교개혁기의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217-8)


"그렇다면 이 모든 불협화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이 근대 세계의 시작을 우렁차게 알린 서곡이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로는 무엇이 남는가?" "그것은 바로 종교개혁기에 대두한 세력들의 역동적인 상호작용과 의도하지 않은 결과의 법칙에서 찾아야 한다.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결과들은 실은 역설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가톨릭 종교개혁은 사회적·종교적 균일성의 창출을 지향했으나 목표와 달리 다원주의의 형태들을 산출했으며, 그 형태들은 뒤이어 세계의 가장 먼 지역들에 수출되어 모방되었다. 종교개혁은 국가의 정치적·정신적 권력을 강화하겠노라 약속했지만, 국가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문법과 어휘를 낳아놓았다. 종교개혁은 이단과 그릇된 믿음을 뿌리 뽑고자 했지만, 예전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정도까지 주춤주춤 오류를 용인했다. 종교개혁은 사회 전체를 신성화하겠다고 나섰지만, 장기적으로 사회가 세속화될 여건을 조성했다."(219-20)


"이 모든 말은 종교개혁의 주된 유산이 분열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처하기 위해 출현한 전략들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통일된 '기독교권'이라는 중세의 이상─기독교의 정치적·사회적 가치들을 공유함으로써 안팎으로 완전한 통합체를 형성하는 지역 사회들로 이루어진 가족─은 언제나 현실보다는 오히려 염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과 인간의 화목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와 관련하여 종교개혁들은 서로 화목할 수 없는 계획들을 추진했고, 그로써 기독교의 염원과 그 염원이 희미하게 투영된 사회의 관습을 영구히 박살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도들 중에서도 가장 완고한 분파들만이 종교개혁 시대의 절대적 확실성에 매달린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한 오래된 물음들─인간 존재의 궁극적 의미와 목표에 관한 물음, 사회 구성원들의 상호 의무에 관한 물음, 양심과 정치적 복종 사이의 균형에 관한 물음─은 지금도 올바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의 주목을 끌고 있다."(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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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세계대전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6
마이클 하워드 지음, 최파일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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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4년 유럽


"18세기 말까지 유럽 국가들은 사회적으로 동질적이었다. 여전히 지주 귀족층이 지배하고, 국교회에 의해 정통성을 확보한 유서 깊은 왕가들이 통치하는 농업 사회였다. 100년이 지나 이 모든 것은 완전히 바뀌거나 불안정한 변화의 길을 걸었다." "1914~18년의 대전쟁은 지구상의 모든 대양에 걸쳐서 벌어졌고 최종적으로는 교전국이 모든 대륙을 아울렀으니 마땅히 〈세계대전〉으로 불릴 만하다. 그러나 이 전쟁이 최초의 세계대전은 아니었다. 지난 300년 동안 유럽 열강은 지구 곳곳에서 서로 싸워왔다. 전쟁에서 싸웠던 사람들은 이 전쟁을 그냥 '대전쟁(the Great War)'이라고 불렀다. 앞선 모든 세계대전들처럼 이 전쟁도 처음에는 유럽 강대국들이 서로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상충하는 야심에서 비롯된, 오직 유럽에 국한된 갈등으로 시작되었다. 전쟁이 이토록 끔찍하게 전개되고 파국적인 결과가 초래된 이유는 전 지구적 규모 탓이 아니라 발전된 군사 기술과 전쟁을 수행한 국민들의 문화가 결합된 탓이다."(8-10)


2 전쟁 발발


"1899년에 출판된 선구적 저작 『미래의 전쟁』에서 폴란드인 저자 이반 블로흐는 치명적인 무기들로 싸우는 미래의 전쟁에서 공세에 나서기는 불가능할 거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1899~1902년에 영국은 남아프리카의 전쟁에서 보어인 라이플 소총수들의 실력과 용기에도 불구하고 결국 승리해 그 지역을 평정했다. 승리의 주된 요인은 뜻밖에도 군사 개혁가들이 오랫동안 소멸을 예견해온 기병의 활용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례는 1904~05년 양측이 최신 현대 무기로 싸운 러일전쟁이다. 일본군은 정교한 보병·포병 전술과 병사들의 사생결단식 용기의 결합으로 연전연승하며 러시아가 강화를 요청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유럽의 군대들이 얻은 교훈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죽기를 각오한 병사들로 이루어진 군대로 여전히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큰 교훈은 승리를 조기에 얻어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전쟁을 일찍 끝내는 유일한 길은 공세를 취하는 것이었다."(33-5)


3 1914년: 개전 국면


"전쟁은 이제 전 국민적 사안이었다. 실제로, 사회가 갈수록 세속화돠면서 대문자로 시작하는 〈Nation〉(민족)이라는 개념은 온갖 휘황찬란한 군사적 위용 및 역사적 유산과 더불어 준(準)종교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징병제는 이러한 의식화 과정을 도왔지만 거기에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다. 1916년까지 징병제가 도입되지 않은 영국의 여론은 대륙 어느 곳 못지않게 굉장히 민족주의적이었다. 다윈 이론에 물든 사상가들에게 전쟁은 말랑말랑한 도시 생활이 더이상 가져다주지 못하는 '남자다움'을 시험하는 무대로 비쳤다. 진보가 자연 세계에서 나타나는 종들 간의 생존경쟁처럼 민족 간 협력보다는 경쟁의 결과인 세계 혹은 그렇다고 모두가 믿었던 세계에서, 그러한 '남자다움'은 민족이 저마다 '생존의 적자가 되고자' 한다면 꼭 필요한 덕목으로 여겨졌다. 자유주의적 평화주의는 서구 민주주의에서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지만 특히 독일을 비롯하여 도처에서 도덕적 타락의 징후로 여겨졌다."(48-9)


"덧붙여 모든 정부는 저마다 전쟁을 정당화하는 그럴싸한 구실을 내세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숙적 러시아가 촉발한 해체 공작에 맞서 자신들의 유서 깊은 다민족 제국의 존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슬라브 동포들을 보호하고, 자신들의 민족적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 그리고 맹방인 프랑스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오랜 숙적이 자행한, 전적으로 자신들이 도발하지 않은 공격에 맞서 정당방위 차원에서 싸우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국제법을 옹호하고 나폴레옹 시대 이래 최대의 대륙발 위협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단 하나 남은 맹방을 대신하여, 그리고 자신들이 마땅히 세계 강국의 지위에 오르는 것을 막으려는 질투심 많은 서쪽의 적수들, 또 그들과 손잡은 동쪽 슬라브족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이상이 각국 정부들이 자국민들에게 내세운 근거들이었다."(50-1)


4 1915년: 전쟁이 계속되다


"전쟁은 이제 전통적인 세력 다툼을 넘어 갈수록 이데올로기 충돌 양상을 보였다.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이 전쟁을 경쟁 강국의 도전에 맞서 영(英)제국을 수호하는 일로 보았다면, 자유주의자들은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군홧발에 맞서 법과 규칙,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투쟁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프로이센 군국주의가 벨기에를 다루는 방식은 독일이 승리하면 유럽이 직면한 현실을 미리 맛보게 해주는 셈이었다." "독일의 학계와 지성계도 이 전쟁을 한편으로는 슬라브족 야만주의에 맞서고, 다른 한편으로는 퇴폐적이고 경박한 프랑스 문명과 앵글로색슨의 조야한 상점 주인식 물질주의에 맞서 쿨투어(Kultur), 즉 독일만의 독특한 문화를 수호하는 투쟁으로 묘사하는 데 합세했다. 이는 군국주의적이라고 비난받는 전사의 미덕에 의해 수호되는 문화였다. 그러한 '대중의 열정'은 교전국들이 전쟁을 계속해나가겠노라는 결의에서 적어도 정치적 계산이나 군사적 계산만큼 중요했다."(67-71)


"1915년 내내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갈수록 강도를 더해가는 공격을 감행하는 가운데 엄청난 희생을 치러가며 새로운 종류의 전쟁 기술을 터득했다. 3월에 전개된 연합군의 초기 공격은 쉽게 격퇴되었다." "1914년 이전의 포탄은 공중에서 터져서 기동전에 효과적인 유산탄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제 필요한 것은 가시철조망으로 보호된 진지를 완전히 파괴하고, 참호 안의 적 보병들을 무찌르고, 수비대를 지원하기 위해 전방으로 이동하는 적의 예비 병력의 발목을 붙잡고, 대항포격으로 적의 대포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고도로 폭발력 강하고 무거운 포탄이었다. 게다가 보병에 의한 공격은 일제 엄호 포격과 긴밀한 협조를 이루어야 했는데, 그러자면 일급 참모 업무뿐만 아니라 믿음직한 통신수단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동식 무전기가 없는 상황에서 이용 가능한 통신수단은 연락병과 전서구(傳書鳩), 그리고 적이 일제 포격을 가할 때 가장 먼저 파괴되는 전화선뿐이었다."(92-3)


5 1916년: 소모전


"사실, 전쟁은 국가들이 더 잘 조직되고 더 단단히 결집되도록 만들었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어디서나 정치문제의 중심이었던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유예되었다. 노동계급 지도자들은 행정적·정치적으로 책임 있는 자리를 맡게 되었다. 노동력 부족으로 그들은 새로운 협상력을 얻었다. 대학 출신 전문가와 실무가들에 의해 강화된 관료조직은 국민 생활에서 갈수록 더 많은 영역을 장악해나갔고, 많은 경우에 그때 얻은 권한을 전후에도 상실하지 않게 된다." "입대한 사람들이 일하던 자리를 부분적으로 메운 여성들은 간호와 복지 분야뿐 아니라 사무실과 공장, 농업 부문에서도 갑자기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면서 사회의 균형 전체를 바꾸고 있었다. 1918년에 이르자 그러한 변화는 새로운 인민대표법에 반영되어 영국의 경우, 30세 이상의 여성을 포함해 유권자가 700만 명에서 2,1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거의 전쟁의 부산물로서, 영국은 완전한 민주주의에 근접한 나라가 되어갔다."(99-102)


"1915년 말까지 독일군은 어디서나 승리를 거두었지만 종전을 앞당길 수는 없었다. 다급해진 팔켄하인은 자신이 동부에서 성공했던 수법에 눈길을 돌렸다. 다름 아닌 소모전이었다. 프랑스가 말 그대로 피를 모두 흘려 죽을 때까지 프랑스군을 파괴해야 한다. 그러자면 프랑스군이 도저히 상실해서는 안 될 땅을 되찾기 위해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 하는데, 문제의 땅은 베르됭 요새가 될 것이었다. 베르됭은 전략적 중요성은 없었지만 취약한 전선의 돌출부에 자리잡은, 프랑스의 위대한 군사적 영광들과 관련된 역사적 장소였다." "베르됭 공세로 양측은 5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프랑스인들에게 이는 위대한 승리였지만 프랑스군을 거의 산산조각 낸 승리였다. 독일측에는 최초의 부정할 수 없는 실패였고, 군대와 국민 양측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팔켄하인은 8월에 해임되었고, 카이저는 충직한 루덴도르프를 대동한 힌덴부르크를 참모총장에 새로 임명했다."(108-11)


6 미국이 참전하다


"해상 봉쇄에 시달리던 독일 정부는 이에 맞서 무제한 잠수함전을 펼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는 사실, 즉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미국의 참전이 실질적 효과를 보일 때쯤이면 전쟁은 이미 자신들의 승리로 끝났으리라고 계산했다." "더구나 독일 해군 참모부는 영국이 어떠한 용도로든 이용할 수 선박이 800만 톤분밖에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일 잠수함이 영국 선박을 격침시키는 것을 한 달에 60만 톤분으로 늘리고 중립국 선박이 겁을 먹고 영국에 접근하지 않게 된다면, 6개월 안으로 영국은 곡물이나 고기 같은 필수 식량이 바닥날 것이다. 영국의 석탄 생산량은 갱도 버팀목으로 쓰는 스칸디나비아 목재가 부족하여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이는 철과 강철 생산의 감소로 이어지고, 이로써 침몰된 선박을 대체할 선박의 건조 능력을 감소시킬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참전을 하든 안하든 6개월 안으로 영국의 항복은 통계상으로 확실했다."(124-9)


"최고사령부의 결정은 1917년 1월 9일에 내려졌지만, 워싱턴 주재 독일 대사는 1월 31일에 가서야 영국 제도로 접근하는 모든 선박에 대한 무제한 잠수함전이 이튿날부터 개시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윌슨은 즉각 독일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하지만 아직 선전포고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이제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전제했다. 이에 따라 독일 외무상 아르투어 침머만은 이미 1월 16일에, 미국과 이따금 적대 행위를 주고받는 상태에 있던 멕시코 정부에 전보를 보냈다. '멕시코가 (미국에 상실한) 텍사스와 뉴멕시코, 애리조나 영토를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독일 측의 아낌없는 재정 지원과 함께 두 나라가 공동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공동으로 강화를 맺는' 동맹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미국 내 반응, 특히 그때까지 고립주의적이었던 서부의 반응은 결정적이었다. 선박 몇 척이 더 격침되자 윌슨은 다른 대안이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1917년 4월 5일, 윌슨은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했다."(135-6)


7 1917년: 위기의 해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1917년 공세에서 전년도의 참사들(베르됭과 솜 강 전투)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4월 16일, 니벨이 엔 강 너머 슈맹데담의 숲이 우거진 고지대를 향해 대대적으로 예고한 대공세를 개시했을 때, 여건은 이보다 더 나쁠 수 없었다. 독일군은 사전에 충분한 경고를 받았다. 프랑스군의 계획은 독일군이 힌덴부르크 선으로 퇴각함으로써 이미 틀어졌다." "열흘 동안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13만 명이 넘었다. 니벨은 베르됭의 영웅 페탱으로 교체되었지만, 프랑스군 병사들은 이미 참을 만큼 참은 상태였다. 프랑스군은 무너졌는데, 이는 온전한 반란이라기보다는 부대 전체가 명령에 불복종하고 전선으로 복귀하기를 거부하는, 민간의 파업에 가까운 상태였다. 페탱은 엄중한 처벌은 최소화한 채, 대체로 부대의 여건을 개선하고 대규모 공세 작전을 자제하는 방식으로 부대를 재정비했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군은 그 해의 남은 기간 동안 별다른 기여를 할 수 없었다."(144-5)


"1916년 솜 강 전투의 인명 손실로 로이드 조지는 서부전선에서 공격을 계속하는 게 과연 현명한 전략인지 깊이 회의했고, 1917년 내내 최고사령부에게 다른 데로 눈길을 돌려보라고 촉구했다." "그 결실이 12월 11일, 영국군의 예루살렘 입성이다." "앨런비의 승전으로 영국은 중동에서 잠깐 동안 헤게모니를 확립하게 된다. 무엇보다 1917년 11월에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한다는 약속을 이행할 수 있게 됐다. 안타깝게도 벨푸어는 현지 주민들이나, 군사 지원의 대가로 영토를 약속 받은 아랍 통치자들과 상의하지 않고 약속을 해버렸다. 1916년 영국과 프랑스 외무부 관리들이 중동 지역을 양국의 세력권으로 분할한다고 합의한 내용(사이크스-피코 협정)도 마찬가지였다. 양립할 수 없는 이런 의무 조항들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는 2차 세계대전 때까지 중동 지역을 혼란에 빠트렸으며, 21세기가 시작된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고통스러운 숙제를 남겼다."(155-62)


8 1918년: 결정의 해


"1918년, 독일 최고사령부의 걱정거리는 서부로부터의 위협이 아니라 독일 내부의 상황이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의 기운은 독일에까지 뻗쳤으며,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점점 더 힘이 실렸다." "최고사령부와 그들의 민간인 지지자들이 보기에 병합이나 배상금이 없는 강화라는 제국의회의 주장에 굴복하는 것은 사실상 전쟁에서 지는 것이었다. 그것도 더이상 독일의 외부 적들에 맞선 전쟁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독일의 가치를 파괴하려고 작심한 듯한 국내 세력들에 맞선 전쟁에서도 패배하는 것이었다. 루덴도르프의 시각에서 후방 전선이 모조리 붕괴하기 전에─더 중요하게는 절망적인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기 전에─적대 세력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부전선에서의 승리, 압도적인 타격으로 연합국의 전의를 앗아버려 독일의 강화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승리였다. 이것이야말로 독일의 진정한 '마지막 패'일 터였다."(167-71)


"1918년 초, 프랑스에는 이미 미군이 100만 명이나 들어와 있었다. 물론 아직 전투 조직으로 편성되지는 못한 상태였지만, 그들은 금방 배웠다. 무엇보다 훤칠하고 쾌활하며, 잘 먹고 잘 자란 미국 중서부 출신 젊은이들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무한한 낙관주의와 더불어 지친 연합국 동료들에게 이 전쟁에서 질 리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8월 초 이래로 독일군은 추가로 22만 8,000명을 잃었는데 그중 절반은 탈주로 인한 것이었다. 기지에 주둔중인 부대는 국내로부터 전해지는 갈수록 비관적인 소식에 전염되고 공산주의 선전에 영향을 받아, 군사 반란까지는 아니라 해도 파업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 "9월 27일, 미군이 합류한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24시간 동안 100만발에 가까운 집중 포격으로 힌덴부르크 선의 본선을 공략했다. 이 공격은 마침내 루덴도르프의 기를 꺾었다. 9월 29일, 그는 카이저에게 이제 전쟁에서 승리할 가망은 없다고 보고했다. 파국을 피하는 방법은 조기 휴전뿐이었다."(178-85)


9 강화 합의


"베르사유 평화 협정은 악평을 들어왔지만 그 조항들 대부분은 세월의 시련을 견뎌냈다. 조약이 탄생시킨 국가들은 국경선이 약간 변동되긴 했지만 지난 세기 말까지 살아남았다."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의 존재로 야기된 '동방 문제'도 완전히 해소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남아 있었으며, 적어도 동쪽 국경선에 관한 결정은 반드시 뒤집으려 했다. 균형을 회복하려는 프랑스의 시도는 소련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불신, 동유럽 동맹국들의 허약성,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유사한 시련을 겪지 않으려는 자국민들의 심한 거부감으로 인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국민들도 마찬가지로 개입하기를 꺼렸다. 국내 문제와 제국의 문제들 외에도 점점 더 대중의 뇌리를 사로잡는 전쟁에 대한 끔찍한 이미지 때문에, 연이은 정부들은 독일의 요구를 거부하기보다는 들어주는 식의 해법을 추구하게 되었다."(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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