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와 헬레니즘 2 -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만남 연구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41
마르틴 헹엘 지음, 박정수 옮김 / 나남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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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시라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대교가 헬레니즘 문명과 만나, 양측 모두에게 아마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을 첫 번째 시기의 끝지점이자, 비판적인 저항이 시작되는 새로운 시대였다. 그는 대략 기원전 180-175년, 예루살렘에서 헬레니즘적 개혁이 시도되기 직전에 예루살렘 상류층과의 대결에 휩싸인다." 벤 시라가 볼 때, "그들은 율법을 배교한 자들이었고, 하나님이 인간 개개인에게 요구하시는 행함이란 이 세계에서 의미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믿는 자들이었다. 그는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정당한 신적 보응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항변한다." 벤 시라는 인류의 중심이 여전히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유일하고 놀라운 역사를 가진 이스라엘"이라는 신정론을 펴면서, 옛 예언자들의 표현을 빌려 "이스라엘의 민족적이고 종말론적인 구원이 도래하기를 탄원한다."(423)


벤 시라가 "유대 지혜의 '민족주의화' 과정에서 '지혜'를 모세의 토라와 동일시"했듯이, 아리스토불로스는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모세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유대인과 피타고라스 모두에게 숫자 '7'은 거룩했다는 사실을 통해 '지혜'와 '로고스'가 세계의 영적인 질서원리가 되고, 동시에 개인의 지각과 도덕적 의지의 토대가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지혜전승에서 역사에 대한 문제는 후퇴한 반면, 그 중심에 우주론적이고 개개의 인간학적 관심이 놓인다는 점이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바리새주의적 전통에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존재론적 의미가 토라에 부여되고, 토라는 모든 랍비적인 삶과 사고의 중심과 목적이 된다." 이러한 '토라 존재론'이 가져온 하나의 결과는 "역사의식의 상실"이었다.(424-5)


마카베오 봉기시대 초기에 우리는 예언자들의 유산을 지키면서 유대교 묵시사상의 근원을 형성했던 하시딤을 만난다. "다니엘서, 그리고 에녹1서의 가장 오래된 전승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하시딤적인' 묵시사상의 전형적인 요소는 세계사에 대한 통일적 관점이다. 이 세계사의 중심에 바로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의 여정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임박한 종말로 치닫는다. 여기서 현재, 즉 마지막 시기에 인간의 교만과 배교는 정점에 다다른다." 유대교 묵시사상은 "근본적으로 헬레니즘의 신탁문학이나 점성술에 기초한 '세계순환론'과 구별된다." 이제 지혜와 예언이 서로 합류한다. "예언자는 현자요, 현자는 예언자이다. 지혜와 계시를 이해함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사상적 발전은 그리스적인 합리주의에 대한 동방세계 종교들의 대응이라는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425-6)


유대교 묵시사상의 "끝자락에 에센파 공동체가 존재한다. 이들은 대략 기원전 150년 정도에 '하시딤'에서 분리되었다. 이때는 마카베오 가문의 요나단이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직에 앉자, '의義의 교사'가 그 동료들과 예루살렘의 제의중심적인 공동체를 떠나 엄격한 규율과 높은 정신적 요구를 받아들이는 수도승적인 종단을 설립하였을 때였다." 에센파는 '두 영靈'에 관한 "결정론적이고 이원론적인 교의를 통해 묵시적인 역사관에 체계적인 토대를 부여"하고자 했고, "지혜전승에 담긴 인간학적인 요소를 구원론을 위한 인간학"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그러한 앎은 "천상의 세계를 포함하여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존재와 사건' 전체를 파악하고, 더 나아가 신비한 세계관이 가진 '학문적' 수단들로 역사와 인간의 운명에 관한 비밀을 파악하려는 욕구"의 발로였다.(426-7)


한편, "하시딤적인 묵시사상의 중심에 초자연적인 계시가 수용된다. 이 계시는 (선지자들의) '원原 계시'와 경험적 지식에서 얻은 전통적 지혜를 능가하고, 또한 그리스인들의 합리적인 사고를 능가한다"고 알려졌다. 에센파 사람들에게 "이 지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계시'를 통한 '구원의 지식'이 된다."(431)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는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존재로서 어려움을 지고 살아가는 하층민들과 관계된 일이었다." 따라서 "강력한 종말론적 희망과 그에 부합하는 역사관이 초기 바리새주의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에 그리 낯선 것은 아니었다." 현실의 고난에서 태동한 "헬레니즘적 개혁에 대한 저항과 마카베오 봉기가 만들어 놓은 상황은 근본적으로 신약시대의 팔레스타인의 종교적 상황을 규정함은 물론, 디아스포라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4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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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와 헬레니즘 1 -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만남 연구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40
마르틴 헹엘 지음, 박정수 옮김 / 나남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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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드로스와 그 후에 형성된 디아도코이 왕국에 의해 생성된 초기 헬레니즘 문명은 동방세계 전체가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들에게도 일차적으로는 매우 비종교적인 세력으로 다가왔다." 헬레니즘 문명은 무엇보다 전쟁 수행 능력에서 두드러졌고, 이들의 세련된 전쟁기술은 유대인들의 "유대교 묵시문학과 성전聖戰 사상, 그리고 후기의 마카베오 봉기로 이어지는 유대교의 팽창정책을 가능하게 했다." 이와 더불어 제국이 집행한 억압 통치와 세금 체제, "특히 모든 종류의 세금징수를 도급으로 집행하는 전형적인 그리스의 제도"는 그 후 수세기 동안 유대지역의 견고한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유대 지역의 대제사장과 '원로회' 조직인 '산헤드린'(Synhedrion) 간의 미묘한 균형을 분할 통치에 이용했고, 여기서 유대 성전국가라는 '정치체政治體'가 발전한다.(211)


그리스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에 봉직하면서 팔레스타인의 부를 철저하게 이용하여 이익을 증대했다." 그들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넘어 아라비아 쪽으로, 더 나아가 에게 해와 소아시아 서쪽 지역과도 무역을 강화"했으며, 낯선 국제 교류의 증대는 유대인들의 이주를 촉진하여 각지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낳았다. "유대교의 디아스포라는 한편으로는 유대인 용병들과 이주민들을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예들을 통해서 더욱 확장되었고 이집트와 키레나이카 (Cyrenaika) 지역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기원전 3세기에 지속된 오랜 평화는 경제적 발전을 촉진했고,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에까지 진출한 페니키아인들의 무역식민지 활동은 "비유대적인 환경과의 분리를 추구하는 유대 신정주의적인 프로그램을 진정한 시험대"에 오르게 했다.(212)


이제 유대사회의 지도층은 "헬레니즘 문명이 그들에게도 제공한 경제적, 사회적 상승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계속해서 성전국가의 무위無爲의 잠에 빠져 분리주의적인 외피外皮를 입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기원전 246-222년) 시대에 토비아스 가문의 요셉이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징세도급관의 수장首長으로 놀랍게 부상"했던 사례는 이 새로운 정신이 발휘되는 공간을 차지하고자 했던 시도들의 흔적이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은, "헬레니즘이 경제적 영역에서 결코 급격한 단절을 초래하지는 않았으며, 팔레스타인은 페니키아라는 매개를 통해 이미 페르시아 시대에 시작된 발전을 더욱 강화"하고 거기에 올라탔다는 점이다.(213)


그렇지만 "헬레니즘 문명에 대한 관심은 주로 예루살렘의 풍요로운 귀족들에게 한정되었다. 강력한 경제적 착취나, 새로운 지배자들과 그들을 모방하는 자국 내 귀족들이 경제적 이익추구에만 몰두해 사회적 배려에 무관심하게 되어 하층민들과 지방 주민들의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묵시적 사변思辨에 대한 토양과, 바르 코흐바(Bar Kochbar) 봉기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이 된 후대의 봉기를 위한 토대를 제공했다."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가난과 불평등의 사례는 바로 이러한 배경 아래 벌어진 고난의 기록들이다. "헬레니즘은 거의 모든 삶의 영역을 포괄하는 서로 뒤엉킨 총체적 세력"이었고, 따라서 "비非그리스인이 이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다리를 필요로 했으니, 그것은 헬레니즘 세계의 모든 것을 연결하는 통용 그리스어 '코이네'(Koine)였다."(213-4)


"기원전 175년 안티오코스 4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리스어는 더욱 폭넓게 확산"되었고, "대제사장 야손이 예루살렘에 김나시온을 건립하면서 그 발전은 정점에 이르렀다." 당시 유대교 상류층의 헬레니즘화 과정은 "유대교가 헬레니즘적 환경에 완전히 동화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그리스식 폴리스를 세움으로써 친親그리스적인 귀족들의 특권을 강화하고 보수적인 집단을 무력화"하려 했다. 서기관 그룹에서 유래한 율법학자 계층은 이에 대한 저항운동을 벌이면서, "모든 백성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것"을 저항의 지향점으로 삼았고, 수백 년간 지속된 전통 수호의 종착점은 기원후 2세기의 '랍비단(Rabbinat)'으로 모아졌다. 그러나 "분명하게 반反헬레니즘적 경향이 있는 이 운동도 그리스식 교육이론의 방법과 형태"를 띠었다."(357-8)


"그리스식 교양교육의 침투는 팔레스타인에서 그리스어로 기록된 유대교 문학이 시작된 것으로도 입증된다." 유대문학은 유대인 자신들의 역사를 주로 다루었으며, "에녹과 아브라함을 모든 민족에게 문명을 전달한 자로 각색했다. 반면 제사장이자 유대인이었던 에우폴레모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특별히 강조하는 방식으로 유대 민족사를 묘사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던 키레네의 야손은 그의 방대한 작품에 헬레니즘적 개혁이 일어났던 당시의 가장 최근 사건들과 유다 마카베오의 독립투쟁을 헬레니즘적 역사기록 같은 장중한 방법으로 서술했다." 하스모니아 왕조는 새로운 유대인 독립 국가의 "종교적, 민족적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문학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팔레스타인 모국 밖으로 확산되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3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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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 하권 - 역사적 예수, 복음서의 예수 그리고 하나님 나라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2
제임스 던 지음, 차정식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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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서 저자들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경구투의 권고를 반복하면서, 듣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예수가 말한 것이 제대로 (회중에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암시"(28)가 담겨 있다. 예수의 선교는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 핵심이며, 예수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정점을 이룬다.(60) 이를 대표하는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하나님의 의가 편만해지며, 지금-오늘 필요한 빵을 바라며, 빚이 탕감되고, 책임을 완전히 포기하려는 유혹에 직면하여 결연히 반응하고, 잠정적인 법정 기소에서 건짐받기를 구하는 기도"이다.(64)


그러나 예수는 "가난이나 사유 재산 폐지의 부름을 이상화하지도, 절대적인 평등주의를 전파하지도 않았다. 그는 어떤 소유물도 신뢰하지 않을 수 있는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마음에 가깝다는 것을 적시하였을 뿐이다."(71) 유대인들은 종파주의적 관점에서 율법위반자들을 '죄인'으로 간주했지만, 예수는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을 언약 바깥으로, 하나님의 은혜 너머로 내치듯 취급한 이스라엘 내부의 경계선 두르기에 반대했다." 그렇기에 "예수는 '죄인들' 자체보다 경멸적으로 '죄인들'을 정죄한 자들을 더욱 비판"했으며, 가난한 자들의 입지를 긍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편협한 규정과 도덕 관념으로 '죄인들'로 간주된 자들의 입지 또한 긍정"하고자 했다.(80)


율법을 가르칠 때 예수가 차별화한 지점은 "모든 구절들을 똑같이 구속력이 있다거나 외관상 모순되는 것들을 조화시킬 수 있다고 추정하기보다 한 구절을 다른 구절과 대립적으로 설정한 것이었다."(117) 가령,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거나 병을 고치는 이야기에서 논쟁으로 삼은 문제는 "안식일이 지켜져야 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예수는 "안식일을 언약에 대한 충성의 지표로 다루는 데 관심"이 없었으며,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제아무리 신성한 것이 있더라도 선을 행하거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어느 경우에도 잘못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124-5)


기름 부음은 전통적으로 '왕, 제사장, 예언자'라는 세 가지의 역할과 연관되어 있다. 왕적 메시아는 "모든 자를 위해 정의를 집행하는 강력한 통치자"이며, "악을 뿌리 뽑고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멸망시키는 호전성"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186) 비록 예수가 메시아를 참칭하고 성전을 파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지만, 예수는 메시아라는 호칭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는 결코 한 번도 자신에 대해 '메시아'라는 직함을 사용하거나 다른 자들이 그에게 적용한 것을 솔직하게 환영한 것으로 회고되지 않기 때문이다(막 14.62은 유일한 예외이다)."(228)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막 14.62)


흥미로운 대목은 예언자로서의 예수이다. "종말론적 기대의 견지에서 예언자의 역할은 거의 왕적 메시아의 그것만큼 현저하였고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의 희망보다 더 넓게 확산되어 있었다."(231) 예수 자신이 "이사야 예언을 자신의 선교를 위해 교훈적이고 영감적이라고 보았으리라는 것은 매우 개연성이 높다."(241) 예수는 "열두 제자들의 선택,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 것, 치유와 축귀 활동, 예루살렘 입성, 성전에서의 상징적 행동, 그리고 마지막 만찬 등", 예언자들의 방식대로 행동했으며, 따라서 우리는 "가난한 자와 죄인의 명분을 옹호함에 있어 예수가 자신의 선교를 고전적 예언자의 우선권에 따라 자의식적으로 구상했을 가능성을 주목해야 한다."(242-3)


*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거부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거부하는 것이라. (눅 10.16)


더욱이, 예수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아버지'로 호칭한다. 즉, 예수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그 나름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감각적 이해를 표현"(310)하며, "예수의 자기 이해에 결정적이었을 뿐더러 심지어 핵심적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아울러 그러한 아들 됨 의식은 종말론적 내재성과 긴박성 가운데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직접적 권위의 원천이었음에 틀림없다." 예수 전통이 시사하는 바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기도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제자들을 같은 '아들 됨' 의식으로 유도했으며, 아울러 예수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도 아버지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터하여 살도록 격려했다"는 사실이다.(318-9)


* 나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 11.3/눅 7.23)


공관복음의 개요를 살펴보기만 해도 "모든 복음서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으로 다양한 가르침을 베풀고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하는 것에 이어 예수의 체포, 심문, 처형이 이어지는 형태로 된 그 마지막 기간에 대한 공통된 틀로 짜여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특징의 가장 명백한 설명은 그 틀이 전통화 과정 내에 일찌감치 고정되었고 복음서로 기록되는 전환기를 통틀어 그 상태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는 그 참여자들의 기억에 뿌리내려 그들에 의해 그 틀 속에 자리 잡은 전통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그의 고난에 대한 기억은 곧바로 그리스도교 영성에 강력한 요인이 되었다."(374-5)


예수의 십자가형과 죽음에 대한 전통은 "처음부터 성서적 암시를 부각시키고 전반적으로 영적인 교화의 성격을 부여하고자 형성된 흔적이 역력하다. 그것이 시작부터 예수의 죽음이 기억된 방식이었다."(392) 한 가지 주목할 지점은, 예수 전통이 "예수의 처형에 바리새인이 연루된 어떤 기억도 보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대제사장들(archiereis)은 꾸준히 부각된다. 수난 서사와 관련되는 한, 유대인 쪽에서 예수의 체포와 정죄라는 드라마를 펼치는 주연 배우들은 대제사장들이었다. 이는 나아가 예수의 체포와 정죄 배후에 작용한 결정적인 요인들이 토라가 아니라 성전과 대제사장의 권위에 대한 쟁점들이었음을 분명히 암시한다."(397-8)


"정결 체제는 지배 계층의 이데올로기"였으며, 성전은 이러한 관심들의 중심에 놓여있기에, "예수가 정결 의식을 무시한다는 보고들"은 종교 권세자들의 심기를 거스르기 충분한 대목이었다.(401-2) 따라서 우리는 예수가 "그의 가장 강력한 적대자들의 손아귀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과 다름없는" 예루살렘 여정을 거행한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복음서 저자들은 부활 사건이 가져온 본격적인 안목에 비추어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전체의 순서가 예정되어 있었다는 확신을 가졌다. 누가는 특히 하나님이 미리 정한 '계획', 곧 발생한 것의 신적인 필연을 강조하며 불길한 말로 예루살렘 여정의 이야기를 시작한다."(403-4)


부활에 관해 "바울이 공명하는 초기의 고백적 공식문구 하나는 로마서 1.3-4이다." 여기에는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예수의 부활을 최종적 부활"과 동일한 지평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파악한다.(503) 바울은 그리스도 부활의 의의를 '첫 열매'로 묘사하는데, 이 이미지는 "죽은 자의 추수로서의 부활에 해당된다." 그러한 은유는 "예수의 부활을 마지막 부활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이며, 예수 사후 "그리스도교의 첫 설교가 예수의 메시지를 반복하여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에 대한 선포"임을 보여준다. 즉, "예수의 복음에서 예수에 대한 복음으로, 선포자 예수에서 선포의 대상 예수로 방향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511-2)


*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 1.3-4)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예수 전통을 통하여 여전히 예수를 청종하고 만난다. 예수는 그 속에서 말하고 토론하고 식탁 교제를 나누며 치유한다. 예수 전통이 강대상이나 무대, 거룩한 공간이나 이웃이 앉아 있는 방에서 읽히는 것을 듣는 가운데 우리는 최초의 제자 및 교회 집단들과 더불어 앉는다. 그들이 예수에 대한 기억을 나누었을 때, 예수의 제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키워갔을 때, 증언과 논쟁을 위해 스스로 준비했을 때, 그 예전을 거행하고 그 가운데서 삶과 예배를 위한 참신한 교훈을 배웠을 때, 바로 그 시절의 그들과 우리는 함께 앉는 것이다. 그 전통을 통해 누구든지 그리스도교가 발원한 예수, 기억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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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 상권 - 역사적 예수, 복음서의 예수 그리고 하나님 나라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1
제임스 던 지음, 차정식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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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장 중심 요약


그리스 고전들을 재발견한 르네상스인들은 당시의 세계가 중세 후기의 세계와 매우 다르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았고, 그 고전들을 원어로 읽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 줄 방안을 모색했다. 역사 인식의 각성과도 같은 이러한 관심과 전개는 그리스도교 기원사에 대한 근대 학문 연구의 주요 원리와 방법을 낳았는데, "그 첫째가 역사언어학으로, 이는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저술 당시 그 단어와 문장이 사용된 방식을 참조하여 문헌의 원어에 비추어 면밀하게 분별하는 것이다. 둘째는 본문비평으로, 상이한 사본에서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의 전승과 편집에 의해 변개된 것을 포착하고 바로잡아 최선을 다해 원래의 문헌을 재구성하는 기술이다."(57-8)


종교개혁가들은 "서구 교회가 예수의 사도들과 교부들 당시의 교회에서 변해왔다고 믿었는데, 그 변화는 단순히 역사의 전개 과정 차원에서 비롯된 변화가 아니라 신약성서, 사도들, 교부들이 제시한 정당성을 한참 벗어난 변화"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16세기 서구 교회의 내부 논쟁에서 공유된 두 가지 인식은 "첫째, 교회의 전통이나 가시적인 형식과 실천은 때로 교정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 과거는 남용되는 현재에 대한 적절한 비평의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60) 종교개혁가들은 "성서에는 스스로 해석하는(sui ipsius interpres) 힘이 있다"고 강조했고, 이를 바탕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도전했다.(62)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비판하는 르네상스의 관심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지점은, 교회와 관련하여 예수가 진정 무엇을 의도하였는가라는 결론을 제기하는 부분이다."(64) 이는 도그마로부터의 탈주를 낳았고, 예수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핵심교리를 다시 확신하려는 노력이 배가되었다. "계몽주의(대략 1650-1780년)와 함께, 신앙과 역사의 긴장도 점점 양극화되었다."(65) 이때는 '역사적 예수 탐구'가 시작된 시기이며, "새로 등장한 자연과학이 제공한 패러다임을 따라 과거를 탐구"하는 '과학적 탐구 모델'이 발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과학적 탐구 모델은 "이후 150년간 '역사적 예수 탐구'를 지배한 도구가 된 역사비평 방법으로 조율되었다."(67-8)


※ 과학적 역사비평 방법

1. 실증주의 : 역사(과거)에는 그 역사학(학문 분야)이 자연과학과 유사하게 취급되도록 할 만한 객관성이 있다.

2. 역사주의 : 역사가는 스스로 역사적 사실을 다루면서 불편부당하고 객관적이며, 따라서 편견이 담긴 가치 판단을 피할 수 있다.

3. 계몽주의 : (하느님이 주신) 인간 이성은 참된 사실과 거짓 사실을 분별하는 과학적인 척도이다.

4. 뉴턴의 가설 : 세계는 인과관계의 '닫힌 체계'로서 불변의 법칙을 따르는 복잡한 기계와 유사하며, 따라서 모든 사건은 예측 가능하고 원인의 결과는 관찰 가능하며, 신의 개입 여지는 없다.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주의 안에서 시도된 이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반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슐라이어마허를 통해 신학에 들어온 낭만주의의 영향은 "경건주의의 대체물로 찾아왔다."(78) 그는 예수를 ‘종교적 인격체’로 보았고, 이후 헤르만은 "예수에 대한 종교에서 돌이켜 예수의 종교로!", 곧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교제를 위한 기초로서 ‘예수의 내면적 삶’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갔다.(80) 하르낙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하나님의 아버지 됨,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 그리고 사랑의 중요성"으로 요약했다. "하르낙에 의하면 '예수에 대한 진정한 신앙은 교리적 정통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가 행한 대로 행하는 차원의 문제'였다."(82)


19세기 후반의 자유주의적 정서는 '역사적 예수' 탐구에 종말론을 다시 도입했다. 바이스가 보기에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적 수단으로 실현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월적 개입의 행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나라였다. 그것은, 윤리적으로 순수한 사회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질서를 끝장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종말론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제자들의 사회에서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였다."(91-2) 그리고 이는 "예수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탐구가 결국 신앙을 설명해야 한다는 정신 번쩍 나게 하는 깨달음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 예수'에 관한 모든 탐구와 해석은 '막다른 골목'에 불과했다.(96-7)


1차 세계대전이 펼쳐낸 파괴적인 현실은 '역사적 예수' 탐구의 주요 방법론을 폐기하기에 이른다. "선포된 말씀을 강조한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와 엄격한 '결단주의'에 입각한 불트만의 실존주의"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추가 탐구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99-100) 자유주의 개신교에 조종弔鐘을 울린 칼 바르트는 "우리 눈이 분별할 수 있는 한, 역사 안에는 신앙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언명하였다.(125) 불트만은 초기 공동체의 메시지인 예수의 가르침 전통이 지속적으로 보존되어 왔으며, 현재의 삶에 양식을 부여한다는 '삶의 자리'(Sitz-im-Leben) 개념을 천명하였다.


20세기 초 종교사학파는 "그리스도교를 1세기 그리스-로마 세계에 등장한 많은 종교 운동 가운데 하나로 이해"(101)하면서, '그리스도교의 헬레니즘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타이센은 예수 전통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견유학파의 유랑 철학자에 빗대어 조명"하였고, 호슬리는 예수의 탈정치화에 맹렬히 반대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상의 끝으로서 ‘우주적 파국’을 뜻하는 옛적의 묵시적 종말론보다 사회의 회복과 사회적 삶의 갱신을 표상하는 '정치적 은유와 상징'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4-5) 크로산은 "급진적 평등주의를 요청하고 '브로커 없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소작농이자 유대적 견유철인'으로서의 예수를 결론으로 제시한다."(112-3) 


'역사적 예수' 탐구에 엄격한 역사적 방법론을 적용하지 않고 "신앙의 영역('이성이라는 필연적 진리')을 따로 상정"(122)해야 한다는 줄기찬 의문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류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가 재개되어야 할 것인지의 질문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시 제기한 사람들은 불트만의 학생들이었다." 케제만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를 너무 날카롭게 분리시켜 비연속성의 차원"으로 넘어가면, 역사적 예수를 "신화 속으로 해체해버릴 위험, 곧 가현설(docetism)의 위험"이 있다고 말했고, "공관복음서의 체제와 형태 자체가 (이미) 예수의 생애사를 신앙의 구성 요건"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지적했다.(132-4)


"20세기 후반기의 예수 생애 연구에서 가장 희망적인 진척은 예수를 무엇보다 유대인으로 봐야 한다는 인식과 그 결과에 대한 보다 명확하고 공고한 파악이었다. 이러한 흐름을 ‘역사적 예수의 제3의 탐구’로 구분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초상을 구축하려는 어떤 시도도 예수가 1세기 환경에서 살았던 1세기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확신이었다."(141) 여기에 더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저자에서 독자로, 텍스트 배후의 독서에서 그 전면의 독서로, 창문으로서의 텍스트에서 거울로서의 텍스트 이해"로 복음서 연구의 축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제 의미는 "단순히 텍스트 ‘안에’ 존재하지 않고 독서의 행위 가운데 독자에 의해 창조된다."(152)


우리는 "자료에서 사실이 발견되기까지 해석과 해석자가 연루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역사에서 문제가 되는 사실, 역사를 앞으로 움직이는 사실은 결코 의미가 제거된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단순히 일시적인 것 이상의 사실은 늘 의미 있는 것으로 경험되는, 그것의 의미/의의 내에서의 사실이다."(169) 가다머의 ‘영향사’(Wirkungsgeschichte) 개념에 따르면,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시간적 거리는 외려 '이해를 가능케 하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조건'이며, 그 사이에 끼어드는 전통은 우리의 일부이다." 해석자의 의식은 "어느 정도 텍스트의 산물이다." 텍스트는 해석자의 의식을 '만들어내서'(effected), '효과적'(effectual)으로 올바른 질문을 찾도록 이끌어준다.(187-8)


"역사적 객관성이라는 계몽주의적 이상은 역사적 예수 탐구에 가짜 목표를 투사했다. 왜냐하면 그 초창기부터 탐구자들은 복음서 텍스트 배후에, 또 그것이 담아낸 전통들의 배후에 어떤 ‘역사적 예수’가 있다고 가정해왔기 때문이다." 되돌아 보면, ‘역사적 예수’는 "공관복음의 자료를 사용하여 19세기와 20세기에 구성해놓은 결과이지, 그때 당시로 되돌아간 예수와 우리가 복음서 전통 속의 예수상을 비판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역사 속의 인물은 아니다."(191-2) 공관복음은 예수의 제자들이 행한 일과 기억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고, 그 "과거를 다시 현존하게 함으로써(Vergegenwartigung), 과거와 현재의 지평을 융합하는 ‘기억함’의 과정인 것이다."(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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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공부의 기초 -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는 간단한 틀
앨런 존슨 지음, 이솔 옮김 / 유유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세상을 오로지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로 설명한다. 개인주의가 정착된 사회에서 나고 자랐다면 "사회란 곧 사람이라는 개념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문제는 이 접근법이 사회에 참여하는 개인의 차이, 개인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 사회와 연결되는 관계를 무시한다는 점이다."(35) 사회학은 사회구성원들이 맺고 있는 특정한 '관계들'에 주목한다. 사회에 관한 "사회학의 단 한 가지 가르침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보다 커다란 것의 일부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이해하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속해 있는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그것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36-7)


가령, 사회가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때 특권계층이 그것을 개인적인 비난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시스템을 사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40) 남성 우위의 사회에서 남성은 가사를 '도와주는' 경우를 제외하면 "남자가 집안일을 동등하게 나누어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지 않는다. 개인적인 층위에서 여자는 남자가 재수 없게 행동한다고 생각할 테고, 남자는 여자가 잔소리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다른 형태의 사회였다면 이런 언쟁을 시작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회였다면 두 사람 모두 집안일과 자녀 양육에 책임을 느꼈을 수도 있다."(49-50) 


개인주의 모형은 "충분한 수의 개인들이 변화하면 시스템 역시 변화할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러나 사회적 삶은 "개인적 성품이나 행동의 산물이 아니며 사람들이 사회 시스템에 참여함으로써(즉, 특정한 사회적 맥락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그 관계가 변하지 않으면 시스템도 변하지 않는다. "개인주의 모형이 효과가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개인적인 해결책은 대체로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생겨나며, 개인적인 필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최소 저항의 길이라는 데 있다. 일단 개인적인 해결책을 찾고 나면 목표를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상황을 개선하려 애쓰기보단 문제를 방치할 가능성이 커진다."(64-5)


이런 상황을 "더 복잡하고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는 우리가 모두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각각의 시스템에서 다양한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상황을 다르게 경험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다르게 형성되고, 여러 부분에서 한계를 가진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스템에 참여한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보다 큰 어떤 것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할 때 이 "우리는 단일한 대상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사회적 삶에는 복수의 '우리'가 존재하며, 사회학을 공부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이 다양한 '우리'의 존재가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내는 것이다."(73-4)


언어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한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현실은 '실제' 현실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발전시켜 온 개념들로 구성돼 있다. 이런 모든 개념이 결국 문화가 된다. 문화는 우리가 자신을 포함한 다른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낸 도구이다."(84) 문화적 믿음을 가지면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모습을 당연한 것으로 지각하고, 우리의 존재가 자명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자명한' 것이 꼭 진실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특정한 문화권에서만 의심의 여지없는 진실로 간주될 뿐이다."(97)


많은 문화적 개념들은 "복잡한 사회 현실을 구축하는 데 사용되는 기본적인 현실에 대한 문제를 넘어서는데, 그 중 하나가 가치이다." 가치는 "사회적 삶의 다양한 측면을 수직적 차원으로 재편해 대략적인 위계를 구축한다. 즉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의 경우 단지 우리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의해서만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99-100) 나의 선택이 내가 속한 문화가 제공하는 '제한된 제안'의 경계 안에 머무른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자유로운' 선택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가치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원한다."(105)


가치는 어떻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제안에 머무르는데, 여기에 '반드시'를 더하면 규범이 된다. 에밀 뒤르켐은 문화적 규범을 공유하는 "이 '우리'라는 집단의식을 사회적 삶에 필요한 토대이자 사람의 행동을 통제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보았다. 이 집단의식이야말로 도덕성의 진정한 의미와 관련된다. 도덕성이란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한 규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과 그 시스템에 속한 사람들의 본질을 이루는 것을 공유하는 의식이다."(115-6) 소속감과 관련된 도덕성은 규범을 위반한 자들을 일탈자로 취급하는데, "이때 등장하는 것이 낙인stigma이다." 낙인 현상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117)


갈등 관점conflict perspective은" 주로 사회적 불평등의 양식을 둘러싼 갈등의 장으로서의 시스템에 집중한다. 우리는 현실을 정의하고, '열등함'과 '우월함'을 구분하고, 게임의 규칙을 정의하는 데 사용할 개념을 대부분 문화에서 찾는다. 따라서 특권 집단이 힘을 사용해 특권의 영속화를 노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존할 문화를 형성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119) 여기에는 사회적 맥락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정 상태뿐만 아니라, 특정 문화의 틀 안에서 매체나 도구로 쓰이는 물질을 사용하는 방식도 포함된다. "미디어 권력의 가장 정교한 쓰임이란 인쇄되고, 영화화되고, 방송되는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방식으로 말해지지 않는 내용에 있다."(138)


사회구조란 "사회적 삶의 모든 층위에서 사회관계가 구성되는 방식"이자, "시스템 속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분배 방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든 시스템은 어떤 방식으로든 가치 있는 자원과 보상을 분배한다."(154) 막스 베버는 힘을 "대항 세력에 맞서 사건, 자원,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협동과 나눔이나 소속감과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체험 같은 이타적 힘도 존재하지만, 세계는 베버의 정의에 충실한 "특권과 차별의 형태를 띤 힘"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체계화되어 있다.(183-4) 따라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의 분배와 그것을 얻기 위한 기회의 분배 사이의 간극이 커질수록 일탈 행동의 발생 확률 또한 높아진다."(172) 


"사회적 삶의 핵심은 사람과 사회 시스템, 그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중요한 관계는 이것만이 아니다. 사람과 사회 시스템은 모두 물리적인 환경과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학생들과 교사가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는 교실이나, 판사와 성직자가 높은 단 위에 올라선 법정과 교회의 구조는 "힘과 지위의 차이를 강조하고 강화한다."(215-6) 환경이 '파괴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문화의 가치 시스템이 중요하게 여기는 자연의 어떤 상태가 위기에 처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치는 자연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문화에 존재하는 것이다. 생태계는 어떤 상태를 다른 상태보다 더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223)


"자아가 강력한 개념인 까닭은 우리가 그것을 개념이라 여기며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고 만질 수 있는 다른 것들처럼 자아가 실재하기라도 하는 양 행동한다." 자아 개념은 "다른 사람과 사회 시스템과의 관계 속에 우리를 위치시킨다."(247) '특정한 타자'는 "거울처럼 행동하며 우리에게 이미지를 반사한다." 우리는 '특정한 타자'와 관계 맺는 복잡한 사회화 과정을 거쳐 '일반적 타자' 개념을 이해한다. "일반적 타자는 구체적인 사람도 아니고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도 아니다. 일반적 타자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사회적 상황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다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다."(254-5)


"사회적 삶을 극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애초에 진정한 사회적 자아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최고의 인상을 만들고 공연을 보호하고 누군가의 관객을 연기하려고 애쓰는 모든 것이 한낱 냉소적인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과 모순되는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 해도 그 역할을 연기하는 사람은 여전히 나 자신이며, '진정한 나'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 역할을 거부하는 '나'보다 진정성이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다."(264-5) 문제는 우리가 인상을 연기하거나 관리하기 때문이 아니라, "엄청나게 복잡한 우리의 자아와 우리가 참여하는 사회적 삶을 계속 인지하면서도 그 역할들을 통합하지 못할 때"이다.(266)


"사회학 실천의 어려운 점은 사회적 삶에 참여하는 과정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최소 저항의 길을 따름으로써 예측 가능한 결과를 초래하는 방식으로 시스템이 체계화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단순한 참여자가 아니게 된다. 차이를 만들어 낼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삶을 만들어 가는 주체이므로 사회학 실천을 통해 우리의 참여와 그 결과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차별과 억압을 '큰' 문젯거리로 생각하는 것과 그 문젯거리가 우리의 정체성 그리고 삶의 방식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상당히 다른 문제다."(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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