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와 헬레니즘 1 -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만남 연구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40
마르틴 헹엘 지음, 박정수 옮김 / 나남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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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드로스와 그 후에 형성된 디아도코이 왕국에 의해 생성된 초기 헬레니즘 문명은 동방세계 전체가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들에게도 일차적으로는 매우 비종교적인 세력으로 다가왔다." 헬레니즘 문명은 무엇보다 전쟁 수행 능력에서 두드러졌고, 이들의 세련된 전쟁기술은 유대인들의 "유대교 묵시문학과 성전聖戰 사상, 그리고 후기의 마카베오 봉기로 이어지는 유대교의 팽창정책을 가능하게 했다." 이와 더불어 제국이 집행한 억압 통치와 세금 체제, "특히 모든 종류의 세금징수를 도급으로 집행하는 전형적인 그리스의 제도"는 그 후 수세기 동안 유대지역의 견고한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은 유대 지역의 대제사장과 '원로회' 조직인 '산헤드린'(Synhedrion) 간의 미묘한 균형을 분할 통치에 이용했고, 여기서 유대 성전국가라는 '정치체政治體'가 발전한다.(211)


그리스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에 봉직하면서 팔레스타인의 부를 철저하게 이용하여 이익을 증대했다." 그들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넘어 아라비아 쪽으로, 더 나아가 에게 해와 소아시아 서쪽 지역과도 무역을 강화"했으며, 낯선 국제 교류의 증대는 유대인들의 이주를 촉진하여 각지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낳았다. "유대교의 디아스포라는 한편으로는 유대인 용병들과 이주민들을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예들을 통해서 더욱 확장되었고 이집트와 키레나이카 (Cyrenaika) 지역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기원전 3세기에 지속된 오랜 평화는 경제적 발전을 촉진했고,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에까지 진출한 페니키아인들의 무역식민지 활동은 "비유대적인 환경과의 분리를 추구하는 유대 신정주의적인 프로그램을 진정한 시험대"에 오르게 했다.(212)


이제 유대사회의 지도층은 "헬레니즘 문명이 그들에게도 제공한 경제적, 사회적 상승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계속해서 성전국가의 무위無爲의 잠에 빠져 분리주의적인 외피外皮를 입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기원전 246-222년) 시대에 토비아스 가문의 요셉이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징세도급관의 수장首長으로 놀랍게 부상"했던 사례는 이 새로운 정신이 발휘되는 공간을 차지하고자 했던 시도들의 흔적이다. 여기서 본질적인 것은, "헬레니즘이 경제적 영역에서 결코 급격한 단절을 초래하지는 않았으며, 팔레스타인은 페니키아라는 매개를 통해 이미 페르시아 시대에 시작된 발전을 더욱 강화"하고 거기에 올라탔다는 점이다.(213)


그렇지만 "헬레니즘 문명에 대한 관심은 주로 예루살렘의 풍요로운 귀족들에게 한정되었다. 강력한 경제적 착취나, 새로운 지배자들과 그들을 모방하는 자국 내 귀족들이 경제적 이익추구에만 몰두해 사회적 배려에 무관심하게 되어 하층민들과 지방 주민들의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묵시적 사변思辨에 대한 토양과, 바르 코흐바(Bar Kochbar) 봉기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이 된 후대의 봉기를 위한 토대를 제공했다."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가난과 불평등의 사례는 바로 이러한 배경 아래 벌어진 고난의 기록들이다. "헬레니즘은 거의 모든 삶의 영역을 포괄하는 서로 뒤엉킨 총체적 세력"이었고, 따라서 "비非그리스인이 이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다리를 필요로 했으니, 그것은 헬레니즘 세계의 모든 것을 연결하는 통용 그리스어 '코이네'(Koine)였다."(213-4)


"기원전 175년 안티오코스 4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리스어는 더욱 폭넓게 확산"되었고, "대제사장 야손이 예루살렘에 김나시온을 건립하면서 그 발전은 정점에 이르렀다." 당시 유대교 상류층의 헬레니즘화 과정은 "유대교가 헬레니즘적 환경에 완전히 동화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그리스식 폴리스를 세움으로써 친親그리스적인 귀족들의 특권을 강화하고 보수적인 집단을 무력화"하려 했다. 서기관 그룹에서 유래한 율법학자 계층은 이에 대한 저항운동을 벌이면서, "모든 백성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것"을 저항의 지향점으로 삼았고, 수백 년간 지속된 전통 수호의 종착점은 기원후 2세기의 '랍비단(Rabbinat)'으로 모아졌다. 그러나 "분명하게 반反헬레니즘적 경향이 있는 이 운동도 그리스식 교육이론의 방법과 형태"를 띠었다."(357-8)


"그리스식 교양교육의 침투는 팔레스타인에서 그리스어로 기록된 유대교 문학이 시작된 것으로도 입증된다." 유대문학은 유대인 자신들의 역사를 주로 다루었으며, "에녹과 아브라함을 모든 민족에게 문명을 전달한 자로 각색했다. 반면 제사장이자 유대인이었던 에우폴레모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특별히 강조하는 방식으로 유대 민족사를 묘사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던 키레네의 야손은 그의 방대한 작품에 헬레니즘적 개혁이 일어났던 당시의 가장 최근 사건들과 유다 마카베오의 독립투쟁을 헬레니즘적 역사기록 같은 장중한 방법으로 서술했다." 하스모니아 왕조는 새로운 유대인 독립 국가의 "종교적, 민족적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문학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팔레스타인 모국 밖으로 확산되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3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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