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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와 헬레니즘 2 - 기원전 2세기 중반까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만남 연구 ㅣ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41
마르틴 헹엘 지음, 박정수 옮김 / 나남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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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시라가 활동하던 시기는 "유대교가 헬레니즘 문명과 만나, 양측 모두에게 아마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을 첫 번째 시기의 끝지점이자, 비판적인 저항이 시작되는 새로운 시대였다. 그는 대략 기원전 180-175년, 예루살렘에서 헬레니즘적 개혁이 시도되기 직전에 예루살렘 상류층과의 대결에 휩싸인다." 벤 시라가 볼 때, "그들은 율법을 배교한 자들이었고, 하나님이 인간 개개인에게 요구하시는 행함이란 이 세계에서 의미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믿는 자들이었다. 그는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정당한 신적 보응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항변한다." 벤 시라는 인류의 중심이 여전히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유일하고 놀라운 역사를 가진 이스라엘"이라는 신정론을 펴면서, 옛 예언자들의 표현을 빌려 "이스라엘의 민족적이고 종말론적인 구원이 도래하기를 탄원한다."(423)
벤 시라가 "유대 지혜의 '민족주의화' 과정에서 '지혜'를 모세의 토라와 동일시"했듯이, 아리스토불로스는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모세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유대인과 피타고라스 모두에게 숫자 '7'은 거룩했다는 사실을 통해 '지혜'와 '로고스'가 세계의 영적인 질서원리가 되고, 동시에 개인의 지각과 도덕적 의지의 토대가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지혜전승에서 역사에 대한 문제는 후퇴한 반면, 그 중심에 우주론적이고 개개의 인간학적 관심이 놓인다는 점이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바리새주의적 전통에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존재론적 의미가 토라에 부여되고, 토라는 모든 랍비적인 삶과 사고의 중심과 목적이 된다." 이러한 '토라 존재론'이 가져온 하나의 결과는 "역사의식의 상실"이었다.(424-5)
마카베오 봉기시대 초기에 우리는 예언자들의 유산을 지키면서 유대교 묵시사상의 근원을 형성했던 하시딤을 만난다. "다니엘서, 그리고 에녹1서의 가장 오래된 전승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하시딤적인' 묵시사상의 전형적인 요소는 세계사에 대한 통일적 관점이다. 이 세계사의 중심에 바로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의 여정이 존재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임박한 종말로 치닫는다. 여기서 현재, 즉 마지막 시기에 인간의 교만과 배교는 정점에 다다른다." 유대교 묵시사상은 "근본적으로 헬레니즘의 신탁문학이나 점성술에 기초한 '세계순환론'과 구별된다." 이제 지혜와 예언이 서로 합류한다. "예언자는 현자요, 현자는 예언자이다. 지혜와 계시를 이해함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사상적 발전은 그리스적인 합리주의에 대한 동방세계 종교들의 대응이라는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425-6)
유대교 묵시사상의 "끝자락에 에센파 공동체가 존재한다. 이들은 대략 기원전 150년 정도에 '하시딤'에서 분리되었다. 이때는 마카베오 가문의 요나단이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직에 앉자, '의義의 교사'가 그 동료들과 예루살렘의 제의중심적인 공동체를 떠나 엄격한 규율과 높은 정신적 요구를 받아들이는 수도승적인 종단을 설립하였을 때였다." 에센파는 '두 영靈'에 관한 "결정론적이고 이원론적인 교의를 통해 묵시적인 역사관에 체계적인 토대를 부여"하고자 했고, "지혜전승에 담긴 인간학적인 요소를 구원론을 위한 인간학"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그러한 앎은 "천상의 세계를 포함하여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존재와 사건' 전체를 파악하고, 더 나아가 신비한 세계관이 가진 '학문적' 수단들로 역사와 인간의 운명에 관한 비밀을 파악하려는 욕구"의 발로였다.(426-7)
한편, "하시딤적인 묵시사상의 중심에 초자연적인 계시가 수용된다. 이 계시는 (선지자들의) '원原 계시'와 경험적 지식에서 얻은 전통적 지혜를 능가하고, 또한 그리스인들의 합리적인 사고를 능가한다"고 알려졌다. 에센파 사람들에게 "이 지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계시'를 통한 '구원의 지식'이 된다."(431)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는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존재로서 어려움을 지고 살아가는 하층민들과 관계된 일이었다." 따라서 "강력한 종말론적 희망과 그에 부합하는 역사관이 초기 바리새주의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에 그리 낯선 것은 아니었다." 현실의 고난에서 태동한 "헬레니즘적 개혁에 대한 저항과 마카베오 봉기가 만들어 놓은 상황은 근본적으로 신약시대의 팔레스타인의 종교적 상황을 규정함은 물론, 디아스포라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4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