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 하권 - 역사적 예수, 복음서의 예수 그리고 하나님 나라 ㅣ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2
제임스 던 지음, 차정식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2년 1월
평점 :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경구투의 권고를 반복하면서, 듣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예수가 말한 것이 제대로 (회중에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암시"(28)가 담겨 있다. 예수의 선교는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 핵심이며, 예수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정점을 이룬다.(60) 이를 대표하는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하나님의 의가 편만해지며, 지금-오늘 필요한 빵을 바라며, 빚이 탕감되고, 책임을 완전히 포기하려는 유혹에 직면하여 결연히 반응하고, 잠정적인 법정 기소에서 건짐받기를 구하는 기도"이다.(64)
그러나 예수는 "가난이나 사유 재산 폐지의 부름을 이상화하지도, 절대적인 평등주의를 전파하지도 않았다. 그는 어떤 소유물도 신뢰하지 않을 수 있는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마음에 가깝다는 것을 적시하였을 뿐이다."(71) 유대인들은 종파주의적 관점에서 율법위반자들을 '죄인'으로 간주했지만, 예수는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을 언약 바깥으로, 하나님의 은혜 너머로 내치듯 취급한 이스라엘 내부의 경계선 두르기에 반대했다." 그렇기에 "예수는 '죄인들' 자체보다 경멸적으로 '죄인들'을 정죄한 자들을 더욱 비판"했으며, 가난한 자들의 입지를 긍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편협한 규정과 도덕 관념으로 '죄인들'로 간주된 자들의 입지 또한 긍정"하고자 했다.(80)
율법을 가르칠 때 예수가 차별화한 지점은 "모든 구절들을 똑같이 구속력이 있다거나 외관상 모순되는 것들을 조화시킬 수 있다고 추정하기보다 한 구절을 다른 구절과 대립적으로 설정한 것이었다."(117) 가령,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거나 병을 고치는 이야기에서 논쟁으로 삼은 문제는 "안식일이 지켜져야 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예수는 "안식일을 언약에 대한 충성의 지표로 다루는 데 관심"이 없었으며,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제아무리 신성한 것이 있더라도 선을 행하거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어느 경우에도 잘못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124-5)
기름 부음은 전통적으로 '왕, 제사장, 예언자'라는 세 가지의 역할과 연관되어 있다. 왕적 메시아는 "모든 자를 위해 정의를 집행하는 강력한 통치자"이며, "악을 뿌리 뽑고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멸망시키는 호전성"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186) 비록 예수가 메시아를 참칭하고 성전을 파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지만, 예수는 메시아라는 호칭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는 결코 한 번도 자신에 대해 '메시아'라는 직함을 사용하거나 다른 자들이 그에게 적용한 것을 솔직하게 환영한 것으로 회고되지 않기 때문이다(막 14.62은 유일한 예외이다)."(228)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막 14.62)
흥미로운 대목은 예언자로서의 예수이다. "종말론적 기대의 견지에서 예언자의 역할은 거의 왕적 메시아의 그것만큼 현저하였고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의 희망보다 더 넓게 확산되어 있었다."(231) 예수 자신이 "이사야 예언을 자신의 선교를 위해 교훈적이고 영감적이라고 보았으리라는 것은 매우 개연성이 높다."(241) 예수는 "열두 제자들의 선택,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 것, 치유와 축귀 활동, 예루살렘 입성, 성전에서의 상징적 행동, 그리고 마지막 만찬 등", 예언자들의 방식대로 행동했으며, 따라서 우리는 "가난한 자와 죄인의 명분을 옹호함에 있어 예수가 자신의 선교를 고전적 예언자의 우선권에 따라 자의식적으로 구상했을 가능성을 주목해야 한다."(242-3)
*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거부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거부하는 것이라. (눅 10.16)
더욱이, 예수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아버지'로 호칭한다. 즉, 예수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그 나름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감각적 이해를 표현"(310)하며, "예수의 자기 이해에 결정적이었을 뿐더러 심지어 핵심적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아울러 그러한 아들 됨 의식은 종말론적 내재성과 긴박성 가운데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직접적 권위의 원천이었음에 틀림없다." 예수 전통이 시사하는 바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기도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제자들을 같은 '아들 됨' 의식으로 유도했으며, 아울러 예수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도 아버지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터하여 살도록 격려했다"는 사실이다.(318-9)
* 나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 11.3/눅 7.23)
공관복음의 개요를 살펴보기만 해도 "모든 복음서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으로 다양한 가르침을 베풀고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하는 것에 이어 예수의 체포, 심문, 처형이 이어지는 형태로 된 그 마지막 기간에 대한 공통된 틀로 짜여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특징의 가장 명백한 설명은 그 틀이 전통화 과정 내에 일찌감치 고정되었고 복음서로 기록되는 전환기를 통틀어 그 상태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는 그 참여자들의 기억에 뿌리내려 그들에 의해 그 틀 속에 자리 잡은 전통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그의 고난에 대한 기억은 곧바로 그리스도교 영성에 강력한 요인이 되었다."(374-5)
예수의 십자가형과 죽음에 대한 전통은 "처음부터 성서적 암시를 부각시키고 전반적으로 영적인 교화의 성격을 부여하고자 형성된 흔적이 역력하다. 그것이 시작부터 예수의 죽음이 기억된 방식이었다."(392) 한 가지 주목할 지점은, 예수 전통이 "예수의 처형에 바리새인이 연루된 어떤 기억도 보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대제사장들(archiereis)은 꾸준히 부각된다. 수난 서사와 관련되는 한, 유대인 쪽에서 예수의 체포와 정죄라는 드라마를 펼치는 주연 배우들은 대제사장들이었다. 이는 나아가 예수의 체포와 정죄 배후에 작용한 결정적인 요인들이 토라가 아니라 성전과 대제사장의 권위에 대한 쟁점들이었음을 분명히 암시한다."(397-8)
"정결 체제는 지배 계층의 이데올로기"였으며, 성전은 이러한 관심들의 중심에 놓여있기에, "예수가 정결 의식을 무시한다는 보고들"은 종교 권세자들의 심기를 거스르기 충분한 대목이었다.(401-2) 따라서 우리는 예수가 "그의 가장 강력한 적대자들의 손아귀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과 다름없는" 예루살렘 여정을 거행한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복음서 저자들은 부활 사건이 가져온 본격적인 안목에 비추어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전체의 순서가 예정되어 있었다는 확신을 가졌다. 누가는 특히 하나님이 미리 정한 '계획', 곧 발생한 것의 신적인 필연을 강조하며 불길한 말로 예루살렘 여정의 이야기를 시작한다."(403-4)
부활에 관해 "바울이 공명하는 초기의 고백적 공식문구 하나는 로마서 1.3-4이다." 여기에는 '죽은 자의 부활'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예수의 부활을 최종적 부활"과 동일한 지평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파악한다.(503) 바울은 그리스도 부활의 의의를 '첫 열매'로 묘사하는데, 이 이미지는 "죽은 자의 추수로서의 부활에 해당된다." 그러한 은유는 "예수의 부활을 마지막 부활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것이며, 예수 사후 "그리스도교의 첫 설교가 예수의 메시지를 반복하여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에 대한 선포"임을 보여준다. 즉, "예수의 복음에서 예수에 대한 복음으로, 선포자 예수에서 선포의 대상 예수로 방향 전환"이 있었던 것이다.(511-2)
*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 1.3-4)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예수 전통을 통하여 여전히 예수를 청종하고 만난다. 예수는 그 속에서 말하고 토론하고 식탁 교제를 나누며 치유한다. 예수 전통이 강대상이나 무대, 거룩한 공간이나 이웃이 앉아 있는 방에서 읽히는 것을 듣는 가운데 우리는 최초의 제자 및 교회 집단들과 더불어 앉는다. 그들이 예수에 대한 기억을 나누었을 때, 예수의 제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키워갔을 때, 증언과 논쟁을 위해 스스로 준비했을 때, 그 예전을 거행하고 그 가운데서 삶과 예배를 위한 참신한 교훈을 배웠을 때, 바로 그 시절의 그들과 우리는 함께 앉는 것이다. 그 전통을 통해 누구든지 그리스도교가 발원한 예수, 기억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5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