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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 상권 - 역사적 예수, 복음서의 예수 그리고 하나님 나라 ㅣ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1
제임스 던 지음, 차정식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0년 6월
평점 :
※ 3~6장 중심 요약
그리스 고전들을 재발견한 르네상스인들은 당시의 세계가 중세 후기의 세계와 매우 다르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았고, 그 고전들을 원어로 읽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 줄 방안을 모색했다. 역사 인식의 각성과도 같은 이러한 관심과 전개는 그리스도교 기원사에 대한 근대 학문 연구의 주요 원리와 방법을 낳았는데, "그 첫째가 역사언어학으로, 이는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저술 당시 그 단어와 문장이 사용된 방식을 참조하여 문헌의 원어에 비추어 면밀하게 분별하는 것이다. 둘째는 본문비평으로, 상이한 사본에서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교의 전승과 편집에 의해 변개된 것을 포착하고 바로잡아 최선을 다해 원래의 문헌을 재구성하는 기술이다."(57-8)
종교개혁가들은 "서구 교회가 예수의 사도들과 교부들 당시의 교회에서 변해왔다고 믿었는데, 그 변화는 단순히 역사의 전개 과정 차원에서 비롯된 변화가 아니라 신약성서, 사도들, 교부들이 제시한 정당성을 한참 벗어난 변화"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16세기 서구 교회의 내부 논쟁에서 공유된 두 가지 인식은 "첫째, 교회의 전통이나 가시적인 형식과 실천은 때로 교정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 과거는 남용되는 현재에 대한 적절한 비평의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60) 종교개혁가들은 "성서에는 스스로 해석하는(sui ipsius interpres) 힘이 있다"고 강조했고, 이를 바탕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도전했다.(62)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비판하는 르네상스의 관심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지점은, 교회와 관련하여 예수가 진정 무엇을 의도하였는가라는 결론을 제기하는 부분이다."(64) 이는 도그마로부터의 탈주를 낳았고, 예수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핵심교리를 다시 확신하려는 노력이 배가되었다. "계몽주의(대략 1650-1780년)와 함께, 신앙과 역사의 긴장도 점점 양극화되었다."(65) 이때는 '역사적 예수 탐구'가 시작된 시기이며, "새로 등장한 자연과학이 제공한 패러다임을 따라 과거를 탐구"하는 '과학적 탐구 모델'이 발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과학적 탐구 모델은 "이후 150년간 '역사적 예수 탐구'를 지배한 도구가 된 역사비평 방법으로 조율되었다."(67-8)
※ 과학적 역사비평 방법
1. 실증주의 : 역사(과거)에는 그 역사학(학문 분야)이 자연과학과 유사하게 취급되도록 할 만한 객관성이 있다.
2. 역사주의 : 역사가는 스스로 역사적 사실을 다루면서 불편부당하고 객관적이며, 따라서 편견이 담긴 가치 판단을 피할 수 있다.
3. 계몽주의 : (하느님이 주신) 인간 이성은 참된 사실과 거짓 사실을 분별하는 과학적인 척도이다.
4. 뉴턴의 가설 : 세계는 인과관계의 '닫힌 체계'로서 불변의 법칙을 따르는 복잡한 기계와 유사하며, 따라서 모든 사건은 예측 가능하고 원인의 결과는 관찰 가능하며, 신의 개입 여지는 없다.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주의 안에서 시도된 이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반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슐라이어마허를 통해 신학에 들어온 낭만주의의 영향은 "경건주의의 대체물로 찾아왔다."(78) 그는 예수를 ‘종교적 인격체’로 보았고, 이후 헤르만은 "예수에 대한 종교에서 돌이켜 예수의 종교로!", 곧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교제를 위한 기초로서 ‘예수의 내면적 삶’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갔다.(80) 하르낙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하나님의 아버지 됨,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 그리고 사랑의 중요성"으로 요약했다. "하르낙에 의하면 '예수에 대한 진정한 신앙은 교리적 정통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가 행한 대로 행하는 차원의 문제'였다."(82)
19세기 후반의 자유주의적 정서는 '역사적 예수' 탐구에 종말론을 다시 도입했다. 바이스가 보기에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적 수단으로 실현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월적 개입의 행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나라였다. 그것은, 윤리적으로 순수한 사회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질서를 끝장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종말론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제자들의 사회에서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였다."(91-2) 그리고 이는 "예수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탐구가 결국 신앙을 설명해야 한다는 정신 번쩍 나게 하는 깨달음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 예수'에 관한 모든 탐구와 해석은 '막다른 골목'에 불과했다.(96-7)
1차 세계대전이 펼쳐낸 파괴적인 현실은 '역사적 예수' 탐구의 주요 방법론을 폐기하기에 이른다. "선포된 말씀을 강조한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와 엄격한 '결단주의'에 입각한 불트만의 실존주의"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추가 탐구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99-100) 자유주의 개신교에 조종弔鐘을 울린 칼 바르트는 "우리 눈이 분별할 수 있는 한, 역사 안에는 신앙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언명하였다.(125) 불트만은 초기 공동체의 메시지인 예수의 가르침 전통이 지속적으로 보존되어 왔으며, 현재의 삶에 양식을 부여한다는 '삶의 자리'(Sitz-im-Leben) 개념을 천명하였다.
20세기 초 종교사학파는 "그리스도교를 1세기 그리스-로마 세계에 등장한 많은 종교 운동 가운데 하나로 이해"(101)하면서, '그리스도교의 헬레니즘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타이센은 예수 전통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견유학파의 유랑 철학자에 빗대어 조명"하였고, 호슬리는 예수의 탈정치화에 맹렬히 반대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상의 끝으로서 ‘우주적 파국’을 뜻하는 옛적의 묵시적 종말론보다 사회의 회복과 사회적 삶의 갱신을 표상하는 '정치적 은유와 상징'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4-5) 크로산은 "급진적 평등주의를 요청하고 '브로커 없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소작농이자 유대적 견유철인'으로서의 예수를 결론으로 제시한다."(112-3)
'역사적 예수' 탐구에 엄격한 역사적 방법론을 적용하지 않고 "신앙의 영역('이성이라는 필연적 진리')을 따로 상정"(122)해야 한다는 줄기찬 의문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류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가 재개되어야 할 것인지의 질문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시 제기한 사람들은 불트만의 학생들이었다." 케제만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를 너무 날카롭게 분리시켜 비연속성의 차원"으로 넘어가면, 역사적 예수를 "신화 속으로 해체해버릴 위험, 곧 가현설(docetism)의 위험"이 있다고 말했고, "공관복음서의 체제와 형태 자체가 (이미) 예수의 생애사를 신앙의 구성 요건"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지적했다.(132-4)
"20세기 후반기의 예수 생애 연구에서 가장 희망적인 진척은 예수를 무엇보다 유대인으로 봐야 한다는 인식과 그 결과에 대한 보다 명확하고 공고한 파악이었다. 이러한 흐름을 ‘역사적 예수의 제3의 탐구’로 구분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초상을 구축하려는 어떤 시도도 예수가 1세기 환경에서 살았던 1세기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확신이었다."(141) 여기에 더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저자에서 독자로, 텍스트 배후의 독서에서 그 전면의 독서로, 창문으로서의 텍스트에서 거울로서의 텍스트 이해"로 복음서 연구의 축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제 의미는 "단순히 텍스트 ‘안에’ 존재하지 않고 독서의 행위 가운데 독자에 의해 창조된다."(152)
우리는 "자료에서 사실이 발견되기까지 해석과 해석자가 연루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역사에서 문제가 되는 사실, 역사를 앞으로 움직이는 사실은 결코 의미가 제거된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단순히 일시적인 것 이상의 사실은 늘 의미 있는 것으로 경험되는, 그것의 의미/의의 내에서의 사실이다."(169) 가다머의 ‘영향사’(Wirkungsgeschichte) 개념에 따르면,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시간적 거리는 외려 '이해를 가능케 하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조건'이며, 그 사이에 끼어드는 전통은 우리의 일부이다." 해석자의 의식은 "어느 정도 텍스트의 산물이다." 텍스트는 해석자의 의식을 '만들어내서'(effected), '효과적'(effectual)으로 올바른 질문을 찾도록 이끌어준다.(187-8)
"역사적 객관성이라는 계몽주의적 이상은 역사적 예수 탐구에 가짜 목표를 투사했다. 왜냐하면 그 초창기부터 탐구자들은 복음서 텍스트 배후에, 또 그것이 담아낸 전통들의 배후에 어떤 ‘역사적 예수’가 있다고 가정해왔기 때문이다." 되돌아 보면, ‘역사적 예수’는 "공관복음의 자료를 사용하여 19세기와 20세기에 구성해놓은 결과이지, 그때 당시로 되돌아간 예수와 우리가 복음서 전통 속의 예수상을 비판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역사 속의 인물은 아니다."(191-2) 공관복음은 예수의 제자들이 행한 일과 기억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고, 그 "과거를 다시 현존하게 함으로써(Vergegenwartigung), 과거와 현재의 지평을 융합하는 ‘기억함’의 과정인 것이다."(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