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고전에 맞서며 - 전통, 모험, 혁신의 그리스 로마 고전 읽기 메리 비어드 선집 3
메리 비어드 지음, 강혜정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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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_고전학에 미래가 있는가?


왜 우리는 이토록 끈질기게 고전학의 ‘현주소’를 검토하고, 고전학의 쇠퇴를 한탄하는 책을 사는 것일까요? 고전학과 관련된 그간의 역사를 보면 거의 모든 곳에서 한탄과 우려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전학이 지니는 가장 중요한 상징적인 특징 하나를 새삼 확실하게 떠올리게 됩니다. 임박한 상실의 느낌, 지금을 사는 우리와 머나먼 고대와의 유대가 두려울 정도로 약하다는 느낌, 문 앞의 야만이라는 공포, 소중한 그것을 보존하는 작업을 충분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과 자책 같은 것이지요. 말하자면 고전학의 쇠퇴에 관한 글들은 고전학에 관한 논평이 아니라, 내부 논쟁인 셈입니다. 부분적으로는 고전학이 늘 띠어왔던 상실감, 염원, 향수의 표현이지요. 이런 정서에도 물론 긍정적인 면은 있습니다. 상실이 임박했다는 느낌, 지금이 고전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직전 상태일지 모른다는 반복되는 두려움은 고전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활력과 예리함을 되살리는 매우 중요한 동인입니다. 20-2)


1부 고대 그리스


1. 유적의 건설자


고고학 초기에 발굴자이자 탐험가로 활약했던 에번스나 슐리만 같은 이들은 일반적으로 영웅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런 이미지 때문에 콧대를 꺾어놓을 목표물이 되기 쉽고, 이를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된다. 게다가 이게 전부가 아니다. 고고학의 재료 자체의 속성, 그리고 발굴자와 그들이 내놓는 자료 사이의 극단적일 만큼 밀접한 관계도 고고학계의 이런 분위기에 일조하고 있다. 전통적인 고고학 ‘발굴’이 고고학적 ‘파괴’의 완곡한 표현이라는 사실은 자명한 이치다. 고고학의 이런 특성은 우리가 고고학자의 정직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된다. 사건이 일어난 뒤에 대조하고 확인할 수가 없으며, 고고학자가 진행했던 절차를 되풀이할 수도 없다. 그런 작업에 필요한 재료 자체가 발굴 과정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슐리만이 자기 사생활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면, 자신이 발견한 유물과 발굴 결과에 대해서도 정직하지 못하다는 암시 혹은 방증이 되지 않을까? 말하자면 이런 심리다. 39)


2. 사포의 목소리


“비정상적이고 극단적인 관행에 빠진 어떤 여자가 (…) 운율의 조화, 상상력이 풍부한 묘사, 정돈된 사고라는 법칙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사물의 이치에 어긋난다.” 미국의 고고학자 데이비드 로빈슨이 1924년에 발표한 『사포, 고대와 현대 문학에 미친 그녀의 영향Sappho&Her Influence on Ancient and Modern Literature』에 나오는 문장이다(1960년대에 책의 재판이 나왔다). 위의 글로 보아 로빈슨에게는 사포 시의 ‘완벽함’이 그녀의 흠 잡을 데 없는 됨됨이를 보증하는 충분한 증거였다. 로빈슨은 (적어도 여성 작가들은) 훌륭한 도덕성이 겸비될 때만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졌다는 점에서 특이한 사람이리라. 그러나 달리 보면 로빈슨은 사포라는 그리스 시인을 그녀 자신의 글이 암시하는 바로부터, 특히 그녀가 다른 여성들과 육체적인 사랑을 즐겼다는 암시로부터 구출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해온, 그동안 줄기차게 이어진 학계 전통의 일부일 뿐이었다. 41)


사포의 시 「아프로디테 찬가」는 『일리아스』 5권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 중 영웅 디오메데스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아이기스 방패를 든 제우스의 따님, 불굴의 그대여,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디오메데스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된다.) 존 윙클러의 주장처럼 이런 모방 사실은 시에서 드러나는 사포의 ‘목소리’(혹은 ‘목소리들’)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의 무용담이라는 남성의 세계와 여성의 관심사인 사적 영역 사이의 거리에 주목하게 된다. 이런 모방은 시인이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고 재해석하여 차별화되는 여성의 언어를 이용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시인은 이런 모방을 통해 ‘전사들의 전쟁 경험 서술에 쓰이는 언어를 사랑에 빠진 여성들의 경험을 서술하는 언어로 바꿈으로써’ ‘영웅 위주의 기존 질서’ 전체를 효과적으로 뒤집는다. 말하자면 여기서 사포의 글은 지배적인 남성의 언어에 대한 전략적인 전복에 해당된다. 44-5)


3. 어느 투키디데스를 믿을 것인가?


투키디데스는 거의 해석이 불가능하다 싶을 만큼 난해한 그리스어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이하 『전쟁사』)를 기술했다. 여기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몇 가지 중요한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첫째, 투키디데스의 『전쟁사』에 대한 ‘훌륭한’ 번역, 다시 말해 유창하고 잘 읽히는 번역은 원본에 있는 그리스어의 언어적 특성을 제대로 살리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독자에게 실상을 오해하게 할 여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번역이 ‘좋을수록’ 투키디데스가 썼던 난해한 원본의 분위기와는 멀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둘째, 투키디데스의 글에서 우리가 애용하는 ‘인용구’의 다수, 투키디데스의 독특한 역사관을 보여주기 위해 활용하는 근사한 ‘슬로건’들이 실은 원본의 문장과는 빈약하게만 관련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슬로건이 머리에 쏙쏙 들어올수록 투키디데스 자신의 산물이기보다는 번역가의 생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투키디데스는 기지 넘치는 발언이나 명언 따위는 쓰지 않았다. 47-8)


일례로, 고대 도시 케르키라에서 일어난 무자비한 내전이 그곳의 언어에 (이외의 많은 것에도) 미친 영향을 돌아보면서 투키디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어도 통상적인 의미가 바뀌고 새로이 주어진 의미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많은 연구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실은 그렇지 않다. 투키디데스는 케르키라 내전 상황에서 과거에 나쁘게 생각되었던 행동이 좋게 재해석되었다는 훨씬 단순한 요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혼블로어는 이 대목을 정확하면서도 원래 문체와 조화를 이루도록 이렇게 번역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행동을 평가하는 통상적인 언어 역시 새로운 것으로 바꾸었다.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관점에 비추어.” 이어지는 투키디데스의 설명을 보면 구체적인 의미는 “무모한 비이성적” 행동들이 “자기 당파를 위한 용기와 충성심 있는” 행동으로 간주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석의 정확도야 어떻든 간에 해당 문장은 언어 자체의 변화보다는 도덕적 가치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50)


4. 알렉산드로스 대왕, 얼마나 위대한가?


사실 알렉산드로스 연구는 고대 역사 전체로 보면 극히 짧은 시기를 다루고 있다(알렉산드로스가 정복 전쟁을 벌인 기간은 10여 년에 불과하다). 그 분야의 전문가들은 현존하는, 아주 생생하지만 신뢰성이 심히 의심되는 문헌 자료를 근거로 “실제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재구성하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전쟁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수백 년 뒤에 쓰인 것들이다. 따라서 데이비드슨은 사라진 자료가 반드시 신뢰성 있으리라 가정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일부 기록은 위조된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또한 일부는 고대 세계 자체의 비평을 통해 확인되는 범위에서 판단하자면 아주 조악한 엉터리 기록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알렉산드로스의 자취’라고 알고 있는 역사적 구조물 자체가 극도로 엉성하고 빈약한 상황에서 현대 학자들은 이를 쥐어짜서 알렉산드로스를 둘러싼 각종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 하고 있다. 63-4)


그렇다면 알렉산드로스와 관련하여 대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그와 관련한 역사 서술에서 부족한 부분, 빠져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나는 평범한 사각지대를 제안하고 싶다. 바로 로마다. 로마 작가들은 단순히 알렉산드로스의 성격에 대해 논쟁만 한 것도 아니고, 그를 본보기로 여겨 칭송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알렉산드로스’를 거의 만들어냈다. 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는 명칭이 쓰인 입증 가능한 최초의 사례는 로마 시대 플라우투스의 희극에 나오는데 알렉산드로스 사후 150여 년이 지난 기원전 2세기 초반의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 단어는 아마도 로마인들 사이에 퍼진 신조어였을 것이다. 반면, 그리스에 있는, 알렉산드로스의 동시대인이나 직계 후손들이 그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 불렀음을 입증하는 확실한 자료는 전혀 없다. 어떤 의미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은 ‘위대한 폼페이우스Pompey the Great’와 마찬가지로 로마인의 창작물이다. 66-7)


5. 그리스인은 어떤 때에 웃었을까?


남을 놀리는 농담을 하는 사람이 역으로 그로 인한 희생자가 되기 쉽다는 것은 고대 ‘웃음학gelastics’의 확고한 법칙이었다. 라틴어 형용사 ‘ridiculus’는 우스꽝스러운 어떤 것(영어로 ridiculous)과 일부러 사람을 웃게 만드는 어떤 것 혹은 사람을 의미했다. 웃음은 항상 고대 군주와 폭군들이 애용하는 도구였고 그들에게 대적하는 좋은 무기이기도 했다. 당연히 훌륭한 군주는 농담을 받아넘기는 법을 알았다. 각종 우스갯소리와 농담 앞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보인 아량은 사후 400년 시기에도 찬양의 대상이었다. 반면 폭군들은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는 농담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기는 늘 아랫사람을 놀리면서도 그랬다. 고대 독재자의 결정적인 표시이자 권력자가 (요란하게) 미쳐간다는 확실한 신호는 웃음을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어떤 이들은 통제를 넘어 아예 금지하려고까지 했다(칼리굴라가 누이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애도하는 과정에서 웃음을 금지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69-70)


홀리웰은 고대 ‘웃음 문화’에서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고대 철학, 문화, 문학 이론 등에서 웃음이 차지하는 핵심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웃음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는 현대와 달리 고대 학계에서는 철학자와 이론가들이 웃음과 그 기능, 의미 등에 대해 저마다 견해를 갖는 것을 당연시했다. 기원전 5세기의 철학자이자 원자론자였던 데모크리토스는 항상 웃는 것으로 유명해서 ‘웃음의 철학자’라 불린 인물이다. 데모크리토스의 고향 사람들은 그가 세상 모든 것을 비웃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히포크라테스는 어느 순간, 철학적인 관점에서, 자기 환자가 (홀리웰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한의 중심에 있는 우주의 부조리”를 일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스가 최종적으로 취한 입장은 그것이 아니다. 데모크리토스는 현자賢者란 ‘비웃음을 면제받는’ 지위라고 보는데, 이유는 세계의 보편적인 부조리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데모크리토스는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이론은 비웃지 않는다. 74-5)


2부 초기 로마의 영웅과 악당들


6. 누가 레무스의 죽음을 원했나?


레무스와 로물루스 신화가 로마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시기는 (피터 와이즈먼이 『레무스: 어느 로마 신화』에서 주목한) 기록도 없이 흐릿한 기원전 3세기가 아니라 그와는 여러 면에서 사뭇 다른 시기, 기록도 훨씬 잘되어 있는 제국 초기다. 로물루스 이야기는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특히 당면한 사안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황제 칭호를 택하는 시점에서 로물루스라는 이름을 고려했으나 형제 살해 이미지 때문에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시인 호라티우스는 로마 내전을 로마를 건설한 쌍둥이의 불가피한 유산으로 기록했다. 역사가 타키투스 역시 100여 년 뒤에 네로가 어린 동생 브리타니쿠스를 살해한 것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기록하면서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옛말처럼 형제란 전통적인 적이로군” “왕궁은 하나인데 왕이 둘일 수는 없지” 등등. 달리 말해, 레무스와 로물루스 이야기는 로마 제국의 군주제 패러다임 및 그로 인한 왕실의 갈등과 직결되었다. 84-5)


7. 궁지에 몰린 한니발


정통적 관점에서 볼 때 리비우스는 고대 기준으로든 현대 기준으로든 아주 형편없는 역사가였다. 리비우스는 매우 기본적인 조사도 하지 않고 전해오는 과거 이야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역사가였다. 물론 고대에는 이런 모습이 굉장히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순 없다. 그렇지만 리비우스는 대다수의 고대 역사가보다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리비우스의 눈에 띄는 오역 중 하나는 전쟁이 끝난 뒤인 기원전 189년 로마의 그리스 암브라키아 포위 공격에 대한 서술에서 나온다. 로마와 암브라키아 양쪽 진영에서 판 여러 개의 땅굴 속에서 복잡한 싸움이 전개되던 중이었다. 이때 리비우스는 ‘문들이 막고 있는foribus positis’ 상황에서 진행되는 싸움에 대해 언급한다. 문들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가? 땅굴에서 문이라니 대체 어떤 용도란 말인가? 그러나 폴리비오스의 기록을 보면 사뭇 다른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폴리비오스는 문이 아니라 ‘방패’라고 말한다. 매우 기본적인 번역 오류를 범한 것이다. 91-2)


8. 도대체 언제까지……?


키케로의 행적과 관련하여 어떤 것보다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사건 하나가 있다. 바로 집정관 시절인 기원전 63년, 소위 ‘카틸리나의 음모’를 진압한 일이다. 기원전 1세기 초에 가장 첨예했던 정치적 논쟁 하나는 (다른 정치체제에서도 종종 그랬듯이) 비상사태 선포의 본질에 집중되었다. 어떤 상황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하는가? 계엄령, 테러방지법, 혹은 (로마의 표현을 쓰자면) 원로원 최종 권고를 통해 당국은 정확히 어디까지 할 권한을 얻는가? 입헌 정부가 국민의 헌법상의 권리를 유보하는 것은 어디까지 적법한가? 카틸리나 음모 사건에서 재판 없는 죄수의 처형은 로마 시민의 기본권인 재판받을 권리를 무시한 것이었다. 원로원 회의에서 사상 유례없는 종신형을 주장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런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장기인 연설을 통해 열변을 토하고,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절차에 의존했음에도 불구하고, 키케로의 음모 가담자 처리는 이후 그의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97-8)


키케로의 카틸리나 음모 처리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의문은 재판 없는 죄수 처형 문제만이 아니다. 키케로는 소위 자수성가한 정치인이었다. 든든한 귀족 연줄 따위는 없었고, 어찌어찌해서 로마 엘리트 사회 최상층에 여전히 불안하고 미덥잖은 자리 하나를 차지했을 뿐이었다. 도시 건설자인 로물루스 시대부터 이어지는 탄탄한 연줄을 자랑하는 쟁쟁한 가문들 사이에서 말이다(가령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신화 속의 선조인 아이네이아스와 비너스 여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막강한 연줄을 자랑했다). 때문에 키케로는 집정관으로 있는 동안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해줄 무언가를 해야 했다. 세상이 떠들썩할 정도의 관심과 호평을 받을 만한 무언가를. 현재까지 상황으로 봐서는 카틸리나의 음모가 로마의 생존이 달린 비상사태라기보다는 ‘찻잔 속의 태풍’과 ‘키케로의 상상의 산물’ 사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카틸리나의 음모’는 냉전 시기 ‘빨갱이 딜레마’의 고전 시대 버전일 수도 있다. 99)


9. 로마의 미술품 도둑들


기원전 70년경 시칠리아 총독을 지낸 베레스의 예술작품 약탈에 관한 키케로의 신랄한 비판에는 꽤 복잡한 사회 현상과 함의들이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이 근본적으로 공공재 또는 종교적 도구에서 개인적 수집품이자 감상 대상이라는 개념으로의 변화다. 기원전 2세기 말부터 기원전 1세기 초는 이런 변화에서 특히 의미 있는 시점이었다. 로마인이 그리스 세계의 예술 전통과 전리품으로 지중해 동부에서 로마로 흘러들어오는 예술작품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고유의’ 로마 문화 전통 내에서 그리스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호화 예술품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적법한가, 로마 엘리트가 ‘예술 애호가’로 행세하는 것은 어디까지 타당한가 등을 놓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런 점은 키케로의 베레스 공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문제가 되는 조각상과 골동품을 얻는 과정에서 저지른 범죄뿐만 아니라 탐욕 자체, 예술작품에 대한 욕망 역시 베레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107)


그러나 교양 있는 예술 애호가와 탐욕에 눈먼 강박적인 수집가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는 고대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술작품의 양도, 이전, 절도 사건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약탈자와 피해자라는 간단한 도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속사정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는 점이다. 문화적 약탈을 일종의 ‘강간’으로 보는 예전 개념이 여기서는 의외로 유용하다. 전혀 모르는 가해자가 어두운 골목에서 무력을 행사해 상대를 굴복시키는 식으로 성적 강간이 이뤄지는 경우는 아주 드물지 않은가. 문화재를 둘러싼 논쟁 역시 마찬가지다. 침략군이 총을 들이대고 귀한 예술품을 가져가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대부분의 강간은 일종의 데이트 강간이다. 따라서 원래 의도, 상대에 대한 이해(또는 오해), 상충하는 기억, 강제, 묵인, 동의 사이의 흐릿한 경계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그렇게 까다로운 것이다. 108-10)


10. 카이사르 암살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사건 몇 달 내에 무질서한 혼란 상태를 자기네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돌리고, 거의 망친 것이나 다름없는 암살을 폭군에 맞선 영웅적인 행위로 각색하는 데 성공했다. 협상을 통해 사면받고 로마를 떠난 브루투스는 기원전 43년 혹은 기원전 42년에 로마 시대에 주조된 가장 유명한 동전이 될 것을 발행했다. 동전에는 양쪽에 두 개의 단검이 새겨져 있고, 단검과 단검 사이 중앙에는 해방된 노예들이 자유의 표시로 쓰던 라틴어로 ‘필레우스Pileus’라고 하는 ‘자유의 모자cap of liberty’가 새겨져 있었다. 이를 통해 말하려는 메시지는 뻔하다. 단검이라는 폭력을 통해 로마 민중이 자유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그림 밑에는 ‘Ides of March’, 즉 ‘3월 15일’이라는 거사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중장기적으로 보면 암살은 정치적으로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로마에서 3월 15일은 현대 프랑스의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 발발일에 맞먹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날이 되었다. 113-4)


그러나 카이사르 암살 이후 상황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해석하고 풀이하는 과정에서 와이즈먼은 대중이 대체로 암살자들에게 거의 공감하지 않았다는 많은 증거를 찾아냈다. 무엇보다 와이즈먼은 로마의 정치를 소규모 귀족 집단이 신념이나 원칙 없이 권력 투쟁을 벌이는 ‘이데올로기의 공백 상태’로 보는 전통적인 관점을 거부한다. 초기 역사에서든 카이사르 살해로 이어진 무력이 지배하는 시대에든 로마가 민주주의 이념이 작용하지 못하는 세계였다는 견해에는 더더욱 반대한다. 요컨대, 와이즈먼의 목표는 로마의 정치생활에 대한 그간의 이해에 어느 정도 이데올로기를 되돌려놓는 것이며, 로마의 중요한 민주주의 전통을 다시 한번 논의의 표면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와이즈먼이 통찰과 상상의 경계, 즉 멈춰야 할 지점이 어디인가를 항상 현명하게 파악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가 열과 성을 다해 우리와 공유하려는 과거 로마의 비전은 중요하다. 114-5, 117)


3부 로마 제국: 황제, 황후, 적들


11. 황제를 찾아서


역사 시대를 통틀어 자유의 투사와 테러리스트가 제도권의 존경받는 정치 지도자로 변화한 사례는 많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변화는 유달리 극적이다. 옥타비아누스로서 그는 10여 년의 혹독한 내전 동안 어떻게든 싸워서 승리할 책략을 짜는 데만 골몰했다. 내전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지자들은 처음에는 ‘자유’라는 미명하에 카이사르를 암살했던 이들을 공격했고, 이어서 서로를 공격함으로써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후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과 거기서 연상되는 살인의 이미지를 없애버렸다. 로마 건국자의 이름을 따라 ‘로물루스’라고 할까도 고려했지만 이 역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연상시켰다. 로물루스가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형제간의 싸움은 거북하게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싸움을 상기시키는 할 터였다. 결국 그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택했는데 풀이하자면 ‘존엄한 자’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신조어였다. 123)


로마 공화정 체제하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토론을 거치고 결과가 공개되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온갖 은밀한 거래와 막후 흥정 역시 이뤄졌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나라의 관리를 선출하는 선거든, 전쟁 결의든, 빈민에게 토지를 분배하자는 결정이든, 로마 역사의 진행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토론과 결정을 기록할 수 있었고 때로는 직접 목격할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이때까지만 해도 정치적 결정이 얼마든지 관찰 가능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지배와 함께 권력의 중심지는 결정적으로 공적 공간에서 사적 공간으로 바뀌었다. 물론 원로원을 포함한 과거의 많은 제도와 기구는 여전히 기능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착수한 정치체제 변화에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결정은 원로원 회의장이나 중앙 광장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 개인 저택에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중요한 정치활동이 이제는 역사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127-8)


12. 클레오파트라: 신화


많은 이가 알렉산드리아를 모든 것이 눈부시게 휘황찬란하고 사치스러우며, 균형이 맞지 않을 만큼 과장되어 있지만 그 자체로 멋진 도시로 상상하고 싶어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알렉산드리아에 관한 신화를 되도록 역사학적 진실에 비춰 평가하려는 작업이 어려운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알렉산드리아 지역 대부분이 수차례의 지진과 해일을 겪은 후 4세기경 해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다. 그렇다보니 클레오파트라의 알렉산드리아와 직접적으로는 아니라도 가장 관련 깊은 현존 기념물이라고 하면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 불리는 두 개의 오벨리스크를 꼽아야 하니 참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 오벨리스크는 현재 하나는 뉴욕 센트럴파크에, 다른 하나는 런던 템스 강변에 세워져 있다. 두 오벨리스크는 19세기 말 각각 뉴욕과 런던에 놓이는데, 흔히 그렇듯이 후한 인심, 골동품 수집 취미, 제국주의적 착취 등이 결합된 결과였다. 137-8)


그렇다면 클레오파트라 7세의 생애는 어떨까? 안타깝게도 그녀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도시 알렉산드리아 이야기보다 훨씬 더 ‘신화적’이고, 실제 여왕의 모습을 파악하기는 수중의 도시 유적 발굴보다 훨씬 더 난해하다. 클레오파트라의 실체 밝히기가 이처럼 어려운 이유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까지 이어지는 현대 드라마의 지나치게 창의적인 전통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 드라마 덕분에 대중의 머릿속에는 당나귀 젖으로 목욕하는 나른하고 퇴폐적인 여왕의 이미지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강하게 박혀 있다. 더구나 아우구스투스로서는 자신의 적이었던 클레오파트라를 나쁜 모습, 옳지 않은 악마 같은 모습으로 묘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황제 스스로가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로마와 이탈리아의 현실적인 전통과는 전적으로 배치되는 무절제한 생활과 사치에 탐닉하는 여왕, 위험한 매력을 풍기는 동방의 전제 군주라는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였다. 138-9)


13. 황제에게 시집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헌신적인 아내 리비아가 집에서 자기 옷을 손수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서기 1세기부터 20세기의 로버트 그레이브스, 그리고 이후까지 리비아는 로마 제국의 권력 구도와 정치에서 집에서 천을 짜고 재봉하는 부녀자의 이미지가 시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로 그려진다. 좋게 보는 경우, 리비아는 황제와 제국의 여러 이익집단 사이를 중재하는 핵심 인물로 나온다. (가령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는 황후와 남편 사이에 길게 이어지는, 아무래도 진짜라고는 믿기 어려운, 토론을 대화식으로 기록하는데, 대화에서 황후는 반역 혐의를 받는 남자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남편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나쁘게 보는 경우, 그녀는 연쇄독살범이자 아우구스투스 궁정의 막후 실력자로 자신의 야망에 장애가 되는 거라면 뭐든 파괴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파괴의 대상엔 마침내 남편까지 포함된다는 설정이다. 144)


1970년대에 BBC 드라마를 들여와 PSB에서 제작 지원한 미국 시리즈 「나, 클라우디우스」는 상류층을 타깃 삼아 공격적으로 기획한 주간 명작극장의 일부로 전파를 탔다. 방송사는 광고를 통해 “요즘 신문 헤드라인에 폭로되고 있는 미국 정부의 부정부패는 고대 로마의 부패 관행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우익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커지는 여성의 권력이 미국 사회가 쇠퇴하는 핵심 원인이라고 여겼던 모럴 머조러티Moral Majority라는 보수 단체 사람들에게 「나, 클라우디우스」에 나오는 황실 여성들의 행태는 이런 주장을 정당화할 역사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이 모든 것에서 리비아라는 인물이 지배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미국 버전에서 아우구스투스를 살해하는 리비아는 독살을 즐기며 어떻게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권모술수에 능한 위협적인 인물 정도가 아니다. 쿡의 해설을 통해 그녀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치적 토대를 파괴한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죄인이 되었다. 152)


14. 칼리굴라의 풍자?


빈털링이 쓴 『칼리굴라 전기』의 주안점은 로마 황실 정치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이는 어떤 의미에서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한 정치체제의 토대였던 가장과 위선이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민주공화정 이후에 1인 지배가 로마에서 성공적으로 작동하게 만들고, 과거 귀족 정치와 새로운 전제 군주제 사이에 ‘현실적인 협약’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아우구스투스는 모든 사람이 연기를 하고 있지 않았나 싶은 일종의 교묘한 사기극에 의존했다. 빈털링의 설명을 들어보자. “원로원 의원들은 이제는 없는 어느 정도의 권력을 여전히 갖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했던 반면, 황제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면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해야 했다.” 최근 다른 연구자들도 강조하듯이 로마 제국의 정치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고의로 말의 의미를 흐리고, 감추고, 왜곡하고, 뒤집는 소위) 이중 화법double speak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즉, 누구의 말도 그가 말한 내용 자체를 의미하지 않았다. 157)


전임 황제인 티베리우스는 그런 역할을 “결코 잘해내지 못했다”. 칼리굴라 역시 이런 이중 화법에 저항했지만 (빈털링에 따르면) 방식은 미묘하게 달랐다. 칼리굴라는 제정 치하에서 이미 기준이 되어버린 정치적인 의사소통의 모호성과 싸우려 했고, 진실하지 않은 아첨과 공허한 말은 물론 의미의 체계적인 변질에도 맞섰다. 그것이 황제가 병에서 회복되면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던 남자에게 칼리굴라가 맹세를 지키라고 했다는 이야기의 기저에 있는 메시지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런 공개적인 맹세의 의도는 자신의 깊은 충성심을 보이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고, 이로써 헌신에 대한 후한 보상을 받으려는 심리다. 로마 제정의 이중 화법에 대항한 칼리굴라의 싸움은 결국 파멸을 초래하는 처참한 결과를 가져온다. 애마에게 바친 경의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교훈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비판하려는 대상이었을지 모르는 광기의 사례로 간주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157-8)


15. 네로의 콜로세움?


핵심 역사학 기록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훨씬 더 호의적인 네로의 이미지를 엿볼 수 있다(그리고 거기서 문제의식이 생긴다). 고전학자 에드워드 챔플린은 『네로』에서 네로 황제의 사후 인기를 말해주는 좀 생경한 다른 사례들을 찾아내 종합하는 더없이 훌륭한 작업을 해낸다. 챔플린은 소아시아의 핵심 도시 트랄레스(현재 터키 서부 아이든)에 네로 사후 1세기 뒤에 세워진 실물보다 큰 대형 조각상, 네로의 얼굴이 들어간 동전으로 장식된 서기 2세기의 거울 등을 예로 든다. 이는 상식적으로 봐도 ‘괴물’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더 놀라운 것은 바빌로니아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네로가 유대교로 개종해 2세기의 위대한 랍비 메이어의 조상과 결혼했고 그 결과 메이어가 네로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도들 역시 때로는 네로를 적그리스도와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묘사한다. 6세기의 역사가 겸 작가였던 존 말랄라스는 예수 처형을 명한 유대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를 처형한 공을 네로에게 돌린다. 164)


그러나 챔플린의 『네로』는 물론이고 고대와 현대 관계없이 로마 황제를 다룬 전기식 연구가 어김없이 제기하는 더 큰 질문이 하나 있다. 어떤 개별 통치자가 로마 역사 전체의 발전에 얼마나 영향력을 지녔었는가? 황제의 전기작가들은 직업상, 황제가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지지한다. 바뀌는 통치자의 영향, 그들이 유발하는 공포와 아첨, 로마의 역사 서술 패턴에 대한 타키투스의 논평은 당연히 이런 접근법에 대한 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거의 완전 반대 입장을 지지하는 데도 같은 논평이 동원될 수 있다. 상황에 맞는 말을 내뱉고 필요할 때 적절한 찬사와 비난을 해주기만 하면 정권이 바뀌어도 개인의 일상은 평상시처럼 지속될 수 있다. 누가 왕좌에 있든 상관없이. 이전 황제에게 적극 협력한 엘리트였다 해도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 이전 정권을 비난하는 어느 정도의 기술만 연마하면 새로운 정권에서도 얼마든지 자리를 보전할 수 있으니 말이다. 167)


16. 브리타니아의 여왕


서기 60년(혹은 61년) 로마 점령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브리타니아 여왕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16세기 이탈리아 인문주의 학자이자 역사가, 수도사였던 폴리도루스 베르질리우스 이래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부디카가 일으킨 반란의 원인과 목적부터 영향, 그녀의 무덤 위치는 물론이고 전투가 일어난 핵심 장소 등을 거쳐 이름의 정확한 철자까지 부디카를 둘러싼 갖가지 의문에 대해 학계는 그야말로 다양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부디카와 관련된 온갖 이야기 중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디카[혹은 보아디케아] 자신이 철자는 고사하고 읽거나 쓰지도 못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처럼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민족주의 열정 때문이다. 세부 내용에서는 많은 차이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용맹한 여전사의 경이로운 모습을 상상하게 만드는, 꽤 그럴듯한 고대 기록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이런 논쟁에 일조했다(하나는 타키투스의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카시우스 디오의 기록이다). 168-9)


당시 브리타니아는 로마인과 브리타니아인이 뒤섞여 서로에게 의지하는 세계였고, 누가 정확히 어느 편인지를 확실히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물론 로마인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고, 토착민 중에도 나쁜 사람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독자가 어느 편이어야 하는가는 너무나 분명하다. 그렇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스콧은 독자가 로마 편을 드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다. (점령 세력으로서) 로마인은 토착민을 강간하고, 약탈하고, 착취한다. 그러나 샤머니즘을 믿는 브레아카의 괴상한 행동들도 만만찮다(필요할 때는 끔찍하게 폭력적인 행동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을 보며 만약 반란이 성공했다 해도 반란군 통치하의 브리타니아에서의 삶은 그리 즐겁지 않았으리라는 생각만 더욱 굳어질 뿐이었다. 제국주의 세력에 맞선 반란 세력이 겉으로는 뭔가 있어 보이고 근사해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제국주의의 폭군만큼이나 볼품없고 못마땅한 경우가 너무 많은데 부디카도 나한테는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다. 173-4)


17. 단역 황제들


나이 지긋한 에스파냐 총독 갈바는 네로가 죽기 전에 이미 황제로 추대되었다. 갈바는 68년 가을 어느 시점에 수도 로마에 도착했고, 69년 1월 중순 쿠데타로 살해되었다. 이로 인해 한때 갈바의 지지자였지만 처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오토에게 제위가 넘어갔다. 그러나 오토도 오래가지 못했다. 오토는 저지 게르마니아 총독인 비텔리우스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했다. 비텔리우스도 몇 달 뒤인 69년 가을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는 연합군에게 패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66년 말 유대 반란 진압을 진두지휘했던 장군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이 휘하 장병들의 요구로 마지못해 황제로 추대되었으며, 심각한 대학살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는 의무감에서 나섰다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때를 기다렸고 적절한 시점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로마로 진군해 들어왔다. 구국의 사명감에서든 계산된 야망에서든 로마에는 새 왕조가 탄생했다. 바로 플라비우스 왕조다. 175)


현대의 기록에서는 ‘내전’이라는 용어를 피하려는 듯 완곡어법으로 ‘네 황제의 시대The Year of the Four Emperors’라고 부르는 이 시기는 로마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다. 네로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다. 네로와 함께 죽은 것은 예술가만이 아니었다. 황위 주장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초대 황제와 혈통으로 연결되어야 있어야 한다는 기존 관념 자체가 죽었다. 사실 아우구스투스가 마련한 황위 계승 방식 자체가 그의 체제에 중대한 약점이었다. 이후 역사에서는 황제가 되는 방법(혹은 특정 제위 후보자가 다른 후보자보다 정당성을 갖게 되는 이유)이 전보다 훨씬 더 치열한 논쟁거리가 된다. 타키투스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서기 68~69년 각자의 군대를 이끌고 제위를 다퉜던 속주 총독들 사이의 충돌을 통해 “제국의 비밀 하나가” 누설되었다. “로마 외의 다른 어딘가에서 황제가 탄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비밀이었다. 175-6)


18. 하드리아누스와 티볼리 별장


티볼리 별장은 로마 시대에 지어진 최대 규모의 궁전으로, 도시 폼페이 면적의 두 배에 달하는 공간을 차지했다(거의 런던 하이드파크 크기만 했다). 티볼리 별장은 단일 건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였다. 대형 연회장, 여러 개의 목욕탕, 도서관, 극장, 식당, 주방, 집무실, 근사한 공원까지 갖추고 있었다. 지금은 유적지를 방문해도 원래 분위기를 거의 느낄 수 없다. 대부분은 아직 제대로 발굴되지 않은 데다 발굴된 유적마저 사실상 폐허 상태다. 그러나 18세기에 이곳에서는 믿기지 않을 만큼 화려한 과거를 말해주고도 남는 수백 점의 조각상이 발굴되었다. 이들 조각상은 소위 ‘그랜드투어 골동품 시장’에서 팔려나가 현재는 (영국박물관을 포함한) 서구의 여러 박물관을 장식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황제의 고급스러운 우아함과 폭군의 퇴폐적인 음란함을 나누는 선을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그어야 하는가다. 이는 티볼리 별장의 많은 ‘오락 시설’이 끈질기게 제기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185-6)


그렇다면 왜 네로는 쿠데타로 제위를 빼앗기고 역사에서 악마로 묘사되었던 반면, 하드리아누스는 목적과 동기에 대한 골치 아픈 물음표 외에는 이렇다 할 비난이나 혹평 없이 자기 침대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었을까? 당연히 하드리아누스가 황제의 ‘이미지 메이킹’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네로보다 교묘하게 해낸 것도 한 가지 이유다. 네로의 황금궁전은 도시 로마의 중심지를 사유화했기 때문에 시민들의 원성을 샀다. 반면에 하드리아누스의 별장은 규모는 훨씬 더 컸지만 (충분히 신중을 기해서) 수도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로마 지배자는 그들이 실제 악마이거나 악마화되었기 때문에 타도 대상으로 몰려 제위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제위를 빼앗겼기 때문에 악마화되었다. 하드리아누스의 목숨을 노린 암살 시도도 여러 차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성공했다면 하드리아누스 역시 포악한 미치광이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187)


4부 밑에서 본 로마


19. 해방노예와 속물근성


현대 학자들은 로마 제빵사의 무덤(마르쿠스 베르길리우스 에우리사케스라는 남자의 무덤으로 기원전 1세기 중반쯤 사망했다)을 보면서 깊이 감명을 받는 한편 은근히 깔보는 속물근성을 보인다. 일반적인 추측은 주인공인 제빵사가 해방노예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숙한 주장들에 따르면 에우리사케스는 돈이 많았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감각 있는 편은 아니었다. 이런 논조는 로마 세계에서 해방노예가 의뢰한 예술품이 흔히 받는 평가다. 폼페이 유적지의 베티의 집이라는 곳에서 나온 훌륭한 벽화들이 만약 로마 황궁 벽에서 발견되었다면 걸작으로 불렸을 것이다(포도를 밟아 으깨고 천을 만들고 경주를 하는 등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유명한 큐피드 그림도 여기서 나왔다. 워낙 유명해서 그림엽서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베티 부부’는 해방노예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도 수도 로마에서 한참 떨어진 벽지에 사는 해방노예. 따라서 미술사가들은 이들 부부 집의 장식에 콧방귀를 뀌며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다. 195-6)


헨리크 모우리트센이 지적하듯이 현대 저작물에서 로마 노예를 대하는 태도에는 당혹스럽게도 상반되는 두 가지 흐름이 공존한다. 로마 노예를 인간의 옳지 않은 끔찍한 행동의 무고한 피해자로 여겨 전적으로 동정하고 공감하는 태도와 자유를 허락받은 (혹은 돈으로 샀던) 해방노예들을 완전 얕보고 폄하하는 태도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역사학자들이 (노예를 풀어주는 공식 절차인) ‘노예 해방manumission’이라는 로마의 관행을 공공연히 비난하면서 그 때문에 순수한 이탈리아 혈통이 (동방 출신도 종종 있었던) 해방노예의 타민족 혈통과 섞여 희석되었다고 개탄하는 일이 잦았지만 오늘날엔 어떤 역사가도 귀에 거슬리는 그런 불평을 늘어놓진 않는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에도 학자들은 “외국인의 로마 주민 침투”를 은밀히 암시하면서 해방노예를 (특히 부자가 된 해방노예를) “입신출세주의자”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주인이 “사소한” 이유로 해방시켜준 “자격 미달” 노예들에 대한 언급도 반복적으로 보인다. 196-7)


20. 점, 입 냄새, 스트레스


『아스트람프시쿠스의 신탁Sortes Astrampsychi』은 고대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 예측하기 힘든 일들에 대해 무작위적이지만 그럴듯한 답을 제공한다. 방법은 단순하나 나름 설득력 있는 점괘가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모호하고 아리송한 구석이 있는 그런 대답들이다. 제리 토너는 신탁서에 보이는 이런저런 위험에 노출된 데다 빚에 허덕이는 짧고 고단한 인생뿐만 아니라 기존 생각과 달리, 보이지 않는 것들도 지적한다. 로마 제국 하면 노상강도, 해적, 강도 등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생각하곤 하는데, (중독 관련 질문을 빼면) 폭력적인 범죄에 대한 우려를 암시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후원 제도’에 관한 내용도 없다. 현대 역사가들은 고대의 빈민들이 부유한 상류층 후원자에게 일자리부터 대출 혹은 식량까지 모든 것을 의존했다는 내용을 가지고 적잖은 저서와 논문을 집필해왔다. 어쩌면 이런 후원 제도 전체가 서민들의 삶에서는 로마 상류층 작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203-5)


토너가 더없이 성공한 지점은 혜택 받지 못한 이들의 실제 생활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엘리트 문화의 다른 측면도 보여주었다는 점이리라. 우리가 지금 (우리 계급질서에서 그들에게 맞는 위치가 그것이기 때문에) ‘하위 엘리트’ 또는 ‘비엘리트’ 문헌이라고 표기하는 이들 텍스트가 고대 세계에서 얼마만큼 ‘서민적’이었던 것인지 여전히 불분명하다. 사실 『아스트람프시쿠스의 신탁』을 보면 대상 고객에 노예 및 하층민과 함께 비교적 상류층에 속하는 이들도 포함되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힌트가 토너가 인정하는 것보다 많이 나온다. 로마는 (현대의 우리 문화처럼) 미적 선택에 의해 지위가 드러나고 구별되는 그런 문화가 아니었다(요즘은 특정 계층에서 특정 브랜드를 선호하는 식으로 취향과 계층이 연결되는데 로마에서는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확인 가능한 선에서 보면, 로마에서 문화적·미적 취향은 부와 지위에 상관없이 대체로 같다. 유일한 차이는 지불 여력이 있느냐다. 206-7)


21. 군대의 수도 로마 진입 금지


라틴어로 포메리움pomerium이라고 하는 신성한 경계 내부에 있는, 도시 로마 자체는 엄격하게 군대의 주둔이 금지되는 지역, 즉 비무장지대였다. 로마는 살아 있는 실제 병사들 대신 전쟁과 정복을 나타내는 이미지와 기념물로 가득했다. ‘로스트라rostra’라고 알려진 중앙 광장에 있는 연단은 포획한 적선敵船의 충각衝角, 즉 적을 무찌르기 위해 군함의 이물 아래쪽에 부리 모양으로 장착했던 장치를 단에 전시해놓은 데서 유래했다(라틴어 로스트라가 부리 또는 충각이라는 의미다). 개선장군의 저택 밖에는 승리를 떠올릴 영원한 기념물 역할을 하는 전리품과 노획한 적의 무기가 장식처럼 붙어 있었다. 황제의 조각상도 전투복을 입은 모습 혹은 적을 정복하는 동작으로 표현되곤 했다. 이처럼 다양한 전쟁 이미지의 기능은 빤하다. 대리석이나 청동에 새겨 군사력을 과시하는 것이 무장한 군대를 수도에 주둔시키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210-1)


수도 로마에 있는 전쟁 및 정복과 관련된 각종 이미지가 실제 군대를 대신해 군사력을 과시하는 기능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 이미지는 점점 멀어지는 전장과 수도 로마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원전 1세기가 되기 한참 전부터 대다수의 전투가 수도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만큼 로마의 영토 범위가 넓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개선식에서는 전리품은 물론이고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도 전시되었다. 트라야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둥에 새겨진 부조 역시 비슷한 기능을 했다. 수도 로마 주민들은 이들 부조를 보며 자신이 제국주의 팽창 활동의 일부가 된 듯이 느꼈다. 이들 전쟁 기념물은 로마의 장군 개인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로마 엘리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군사 분야에서 거둔 성공을 믿음직한 정치적 자산으로 변환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변환 수단이 바로 도시 내의 건물이나 그 외 눈에 보이는 전시물이었다. 211-2)


22. 로마 지배하의 브리타니아에서의 삶과 죽음


하드리아누스 방벽에 주둔하던 로마인의 생생한 목소리는 1970년대 이후 빈돌란다 요새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명한 문서들에서 나온다. 데이비드 매팅리의 『제국의 소유물: 로마 제국하의 브리타니아』가 이들 문서를 활용한 로마 지배하의 브리타니아 역사를 논한 최초의 글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는 빈돌란다 문서의 함의를 해당 지역 전반에 대한 해석과 통합시킨 최초의 역사학적인 결과물이다. 빈돌란다 문서 덕분에 군사 지역에 대한 매팅리의 관점은 대부분 선배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매팅리가 그리는 브리타니아 주둔 ‘군대’의 모습은 우리가 평소 그린 교전지역 군대에 대한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서기 2세기경 브리타니아 주둔 로마군의 수는 총 5만5000명쯤 되었다). 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가정 친화적’이었고, 기지 밖의 지역사회와도 사회적·가정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문서 외에 빈돌란다에서 발견된 유물에는 꽤 많은 아동용 신발이 포함되어 있다). 218-9)


고고학을 선호하는 많은 역사가가 그렇듯이 매팅리도 타키투스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같은 고대 로마인이 남긴 브리타니아에 대한 기록과 거리를 두는 데 엄청 신경 쓰고 그에 대한 설명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메팅리에 따르면, 당시 로마 엘리트들은 야만인과 야만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의존했고, 속주의 역사를 고찰할 때도 “자신들의 타고난 우월함과 다른 이들의 후진성을 확인시켜주는 내용”을 찾았다. 그러나 고대 문헌 자료를 마냥 비관적으로 보는 시각도 [맹신 못지않게] 핵심을 놓치게 된다. 매팅리는 [식민 지배를 통한] 문화 발전이라는 안이한 생각에 철저히 반대하면서 오히려 ‘로마 지배하의 브리타니아’는 군사 점령 기간이자 이방인의 지배 기간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매팅리에게 로마인은 극단적인 군국주의자 무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두 민족 모두 살인자요 강도들이었다. 그리고 방벽을 지키는 가련한 병사들은 [침략 전쟁의] 승리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였다. 221-3)


23. 사우스실즈의 아람어


마르쿠스 파비우스 쿠인틸리아누스는 (서기 1세기 말에 집필한) 『웅변술 교육Institutio Oratoria』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 정식 교육이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마 제국은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다언어 세계였다. 로마 제국의 언어적 다양성은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국한되지 않는다. 켈트어부터 이집트어, 아람어, 에트루리아어까지 다수의 언어, 알파벳, 음절문자, 문자 등으로 이뤄져 있었다. 또한 다른 언어 사용자들이 함께 일할 때 의사소통의 편의를 위해 언어와 언어를 혼합하여 만드는 각종 혼성어, 지역 방언, 사투리까지 합치면 숫자는 훨씬 더 늘어난다. 제국의 광대한 영토가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과 라틴어를 쓰는 서방으로) 언어적으로 깔끔하게 양분되며, 이를 양쪽 언어를 모두 구사하는 대다수 로마 엘리트가 연결하고 있었다는 전통적인 생각은 실제 언어 사용 현실과는 거의 맞지 않는다. 틀렸다고까진 못해도 오해의 소지가 꽤 있는 지나친 단순화다. 224-5)


5부 예술과 문화: 관광객과 학자들


24. 아이스킬로스밖에 없다?


그리스 비극은 인간의 문제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치열한 사안을 논의하는 데 더없이 효과적인 매체다. 최근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정의의 세력이 그리스 비극이 보유한 이런 힘을 활용하고 있다(무력에 맞서 평화를 주장하고, 여성 혐오에 맞서고, 억압에 맞서 성해방을 주장하는 이들 등등). 그러나 일부 가정은 꽤나 편향적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 비극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다른 데는 없는 독특한 힘을 지닌 것이 사실일까? 고대 비극은 답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이며, 서구 문화가 참혹한 전쟁이나 성적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데는 고대 그리스에 대한 열광도 한몫하고 있다는 주장은 어떤가? 무려 2000년도 더 전에 아테네에서 만들어진 틀을 벗어나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주장 말이다. 카메룬에서 「바카이」 공연 혹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안티고네」 공연은 식민 권력의 궁극적인 승리를 상징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들이 남긴 망할 연극은 계속해서 상연되고 있다.) 239-40)


근대 세계에서 고대 연극을 옳지 않은 정치적 대의에 이용한 사례도 인상적인 역사를 보유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히틀러 집권 당시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열린 1936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히틀러의 아리안 민족주의의 승리 이야기로 새롭게 해석된, 따라서 심히 왜곡된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Oresteia』가 상연되었다. 그런가 하면 무솔리니는 시칠리아 시라쿠사에서 장기간 열린 고대 연극 축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지지자이자 후원자였다. (히틀러 치하의 제3제국에서 반유대주의를 지지하는 무기로도, 반대하는 무기로도 『베니스의 상인』이 많이 공연된 것처럼) 전시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의 극작가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가 레지스탕스와 점령 세력 둘 다에 의해 무대에 올랐다. 아이스킬로스는 마틴 루서 킹의 죽음을 추도하는 데만 사용된 것이 아니다. 닉슨이 백악관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동안 닉슨 곁을 지켰던 헨리 키신저 역시 해당 문구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240-1)


25. 팔과 남자


세계 각지의 주요 미술관에 전시된 고전 시대 조각 상당수가 온전한 상태인데, 이는 미켈란젤로부터 19세기 덴마크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에 이르기까지 푸젤리의 동료와 선배들이 기울인 노력에 주로 기인한다. 16, 17세기에 로마에서 망가진 걸작이 발굴되면 당대 최고의 조각가들은 득달같이 현장으로 달려갔다. 고대 천재가 남긴 작품에 손을 대는 작업에 대해 처음에는 당연히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런 거리낌과 가책은 오래가지 않았다. 머잖아 예술가들은 새로 발굴된 작품에 (글자 그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주느라 분주해졌다. 완벽한 고대 석상에 어울리는 모습이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뻗은 손가락이나 위로 쳐든 팔, 코 등이 지금까지 부러지지 않고 남아 있는 고대 조각은 알고 보면 근대에 행한 이런 단장 작업의 수혜자라는 게 일반적인 규칙이며 예외는 거의 없다. 그 결과물 중 일부가 인기 고전 조각 작품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는 사실도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242)


1506년에 모습을 드러낸 「라오콘 군상」은 워낙 탄탄하게 받쳐주는 문헌상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조각상이 등장과 동시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이네이스』에 나오는 라오콘과 아들들의 죽음에 대한 설명, 그리고 대大플리니우스의 백과사전식 『박물지』에 나오는 조각상에 대한 묘사와 누가 봐도 분명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연관성에서 기인한 바가 컸다. 그렇지만 발견 당시 ‘라오콘 군상’은 온전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렇게 발견되는 고대 조각들이 흔히 그렇듯이 손가락, 발가락과 뱀의 여기저기가 소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 인물의 오른팔이 모두 소실된 상태였다. 복원을 앞두고 무엇보다 중심인물인 라오콘의 팔 복원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했다. 1530년대의 논쟁 참가자들은 위로 뻗은 모습이 옳다고 합의를 봤다. 따라서 이후 진행된 (다수의) 복원 결과물이 이런 기조를 따랐고, 아들들도 그에 맞춰 복원되었다. 그리하여 이것이 ‘라오콘 군상’의 표준 이미지가 되었다. 246-7)


26. 피스 헬멧을 반드시 챙기시오


1854년판 『그리스 여행 안내서』가 말하려는 메시지는 간단했다. 대략 이렇다. 그리스로 가는 배를 타면 오디세우스가 있는 과거로 돌아간 느낌을 받을 것이다(“고대인들의 항해 도구와 기술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그리스의 바다는 지금도 변덕스럽기 짝이 없다”). 시골 오두막에서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돼지치기 유마이오스로 봐도 무방할 그런 사람이 따뜻하게 손님을 대접한다. ‘환대’라는 미명 아래 우리는 걱정되고 두려울 만한 문화 차이를 찬미의 대상이자 동시에 살짝 얕봐도 좋은, 원시적인 (사실 호메로스 시대의) 미덕으로 해석한다. 반면 『그리스 여행 안내서』의 후속 판본들은 이런 초대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면서 독자들에게 주민이 집요하게 권하더라도 그리스 마을에서 무료로 묵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한다. 이런 주장의 주된 근거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역시 호메로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원칙이다. 251, 255)


27. 관광지로서의 폼페이


폼페이는 고고학 유적일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묻힌 매장지였다. 또한 폼페이는 비극적인 멸망과 자연 앞에서 한없이 취약한 인간의 처지를 필연적으로 떠올리게 함과 동시에 더없이 생생한 모습으로 발굴됨으로써 역설적으로 고대 세계에 ‘활기’를 불어넣는 존재이기도 했다. 발굴 유골을 보는 것은 폼페이 방문자들에게 언제나 우선순위였다. 그러던 중 1860년대에 주세페 피오렐리가 희생자 유해의 석고 모형을 뜨는 기법을 개발하면서 폼페이 방문의 비애감은 한층 더 깊어졌다. 죽은 사람의 살과 옷이 분해되면서 생긴 비어 있는 구멍에 석고를 부으면, 최후의 순간 그들의 신체적 특징과 일그러진 표정 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놀라운 형상들이 만들어졌다. 더없이 냉정한 방문자 또는 엄격하게 학구적인 태도를 취하는 방문자라 해도 유리 상자에 담긴 채 유적지에 전시되어 있는 몇몇 석고상 앞에서까지 냉정함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불편하게도 모두가 보란 듯이 전시되어 있는 그들의 단말마의 고통 앞에서. 260-1)


28. 황금가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된 ‘프레이저 개인’에 대한 숭배는 『황금가지』라는 책 자체에 대한 못지않은 열광과 궤를 같이한다. 대중이 『황금가지』에서 느끼는 가장 중요한 매력 중 하나는 탐험과 여행이라는 주제다. 프레이저 자신도 책의 서론에서 『황금가지』를 하나의 ‘항해voyage’로 표현했다. 이는 어떤 면에서 두려운 여행이기도 했다. ‘미개인’의 낯설고 폭력적인 관습도 두려울 뿐 아니라, 영국 역시 한때는 꽤 ‘비이성적인’ 사회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느끼는 불안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으로 인한 전율이 얼마나 강렬하든 간에 적어도 독자는 결국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온다(즉 출발점인 이탈리아에 이른다). 이는 책 제목 『황금가지』가 정확히 의미하는 바이기도 하다. 책 제목은 책의 목적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아이네이아스가 꺾었던 가지가 그랬던 것처럼 책은 독자들을 데리고 두려운 이방으로 낯선 항해를 떠나며, 그들을 안전하게 데리고 돌아온다는 의미다. 271-2)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전에 『황금가지』가 성공한 데에는 다른 요인들도 있었다.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3판은 백과사전식 지식의 정수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출간 즉시 권위를 부여받았다. 또한 400쪽에 달하는 색인 덕분에 세계 문화 전반을 쉽게 파악하게 하는 참고서 역할을 했다. 동시에 ‘대영제국’이 통치하는 지역 원주민들의 관습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다보니 당시의 현실 정치와도 연결되었다. 프레이저도 자기 책이 “미개 민족을 통치하는 임무를 맡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프레이저가 대영제국의 대의에 상징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황금가지』는 주인에게 복종하는 제국의 신민들을 대변했고, 방대한 학술 연구에서 원주민들이 편리한 증거로 뒷받침하도록 함으로써 영국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했다. 말하자면 이것은 학술 논문으로 깔끔하게 바뀐 정치적 지배의 다른 얼굴이었다. 273)


29. 철학이 고고학을 만나다


콜링우드가 ‘가위와 풀 방법론’이라 불렀던 역사학 연구 방법론에 대한 공격(독자적 연구 없이 여기저기 나와 있는 자료를 가위로 오려내 풀로 붙이는 식으로 편집하고 짜깁기하는 역사에 대한 반발), 역사란 항상 ‘정신사’라는 역사 옹호론 등을 담은, 가장 유명한 저서 『역사의 개념』은 1946년에 출판되었다. 지금 와서 보면 문제점은 책의 핵심 주장이 너무 무난해서 논란의 여지가 적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특성이 대중적인 성공에 일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주장이 애초에 결코 특별히 독창적이지도 않았으며, 누구도 반대하기 힘든 빤한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누가 콜링우드가 주장한 ‘문답’ 방식의 역사보다 일종의 짜깁기인 ‘가위와 풀’ 방법론이 좋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역사를 공부하는 부분적인 목적이 (잉글리스의 표현에 따르면) “지금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 외에 달리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 수 있을지”를 알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어느 누가 반대할 수 있겠는가? 277-9)


30. 누락하고 빠뜨린 것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고전 학자 중 한 명인 에두아르트 프랭켈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인물로 1935년부터 1953년까지 옥스퍼드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의 라틴어 교수로 재직했다. 프랭켈은 로마의 희극작가 티투스 플라우투스의 작품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해 플라우투스의 작품이 사라진 그리스 연극의 2차 모방작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명인의 삶을 되돌아보는 이야기에 어떤 것을 포함시키고 어떤 것을 배제할 것인가? 이런 인물들의 일생을 다룬 공인 버전 이야기의 이면에는 어떤 검열 원칙이 작동하고 있는가? 특히 공인 버전이 인명사전과 다른 참고서 등에 실릴 경우에는? 그리고 이런 검열 원칙은 얼마나 중요한가? 프랭켈은 전형적인 사례이자 가장 흥미로운 사례이다. 프랭켈의 삶을 다룬 권위 있는 영어 설명 중 어느 것도 여성 제자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는 나쁜 손버릇에 대해, 혹은 여성 제자의 개별 지도 시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282-3)


31. 아스테릭스와 로마인


베르생제토릭스(라틴어 발음은 베르킨게토릭스)는 현대 프랑스 문화에서 좌익과 우익 모두에게 국민 영웅이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르생제토릭스는 국민 영웅의 지위를 활용해 사뭇 다른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하나는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의 레지스탕스 전사”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에게 점령당한 뒤 (나치에 협력했던) 비시 정부와 국가 주석 페탱에게 패배했을 경우 고귀함을 지키는 방법, 고상하게 프랑스인이 되는 방법을 보여주는 상징으로서의 역할이었다. 패배한 반역자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품위를 가지고, 베르생제토릭스가 카이사르 발밑에 무릎을 꿇은 사건은 프랑스라는 나라의 역사에서 더없이 중요한 순간이자 동시에 하나의 신화가 되어 있었다. 사실 『아스테릭스Astérix』 시리즈 전체에서 아스테릭스를 베르생제토릭스와 똑 닮은 대역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카이사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갈리아 민족주의자라는 환상을 채워주는. 293-4)


# 베르생제토릭스. 기원전 50년대 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서 일어난 유명한 반란에서 갈리아인을 이끈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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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와다 하루키의 한국전쟁 전사
와다 하루키 지음, 남상구 외 옮김 / 청아출판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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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1949년의 위기


1949년 1월 김일성과 박헌영은 건국 후 첫 소련 방문을 준비 중이었다. 두 사람은 군사동맹조약인 북소우호조약의 체결을 원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소련군 철수 후에 안보를 확보한다는 목적 외에 북한이 행동에 나설 경우 소련의 지원을 확보하려는 속셈도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소련 측은 군사적 상호원조조항을 담은 이 내용을 경계하며 조약 체결을 거부했다. 소련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는 것을 우려했다. 바로 이때 한반도에서는 남측이 38선을 넘어 북측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티코프 대사는 소련 정부가 북한 경비여단에 무기를 제공하기로 이미 결정했음에도, 소련군 연해군관구沿海軍管區는 누차에 걸친 재촉에도 보내지 않은 채 선박이 배정되면 2월 말에는 제공할 수 있다는 변명만 되풀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북한군 1개 사단과 1개 여단의 편성이 끝났는데도 소련이 약속한 무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며 몰로토프의 개입을 요청했다. 28-30)


2월 8일, 이승만이 케네스 로얄Kenneth C. Royall 미 육군 장관에게 맨 처음 꺼낸 말은 38선의 한국 경찰에게 라이플총을 지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구 일본군 병사였던 한국인이 15만~20만 명이나 되므로 마음만 먹으면 한국군을 6주 안에 10만 명까지 증강할 수 있으며, 북한 측은 사기 면에서 문제가 있으니 남이 공격하면 북한군 대부분이 남에 투항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승만은 “군대를 증강하고 장비와 무기를 공급해 단시일 내에 북한으로 북진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존 무초John J. Muccio 주한 미국 대사가 북한과 평화적으로 교섭할 기회가 있는 한 “그러한 행동을 취해서는 안 된다”라며 반대했다. 로얄 장관은 미 전투부대가 한국에 있는 이상 북진은 있을 수 없으므로 대통령의 발언은 미군의 즉각적인 전면 철수를 요구하는 것과 진배없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승만은 고문단을 늘려 주고 추가 무기 공급을 “합리적 양”으로 보증해 준다면 즉각 철수해도 말리지 않겠다고 맞받아쳤다. 31)


사태를 가장 걱정한 쪽은 모스크바였다.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극도의 불안감을 느낀 것 같다. 미군 철수 후 벌어질 사태에 대한 불안과 경계는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은 극동의 소련군 당국도 갖고 있었다. 2월 9일 돌연 태평양함대 공군 사령관 세르빈Serbin 소장이 평양에 도착해 소련군 참모본부의 지시에 따라 전투기 연대의 원산 복귀를 위한 교섭을 제의했다. 철수 전에 사용하던 기지는 조선인민군 제2사단이 사용 중이었다. 그곳을 비워 달라는 요구였다. 시티코프는 모스크바의 이러한 결정에 반대했다. 미군이 한창 철수 중인 시점에 소련군 부대가 북한으로 복귀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스탈린은 미군의 한국 철수에 확실하게 제동을 걸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을 통해 한국군의 북한 공격을 견제하려 했다고 짐작된다. 반면 시티코프가 반대한 배경에는 북한 지도부의 거센 반발이 존재했을 것이다. 김일성 등에게는 미군 철수야말로 지상 최대의 목표였고 그 역행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31-2)


1949년 6월 29일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이 시기 미 육군부는 국무부에 미군 철수와 북의 남침 가능성에 관한 문서를 제출했다. 육군부는 5월 30일 현재 한국군의 병력은 71,086명, 연안경비대 5,450명, 국가경찰 50,434명으로 총 126,970명이며, 북한군은 인민군 46,000명, 경찰 및 기타 56,350명으로 총 102,350명으로 추정했다. 문서는 다섯 가지 옵션을 검토한 다음, 위기가 발생한 경우 유엔의 제재 결의를 확보해 다른 가맹국과 함께 미군이 경찰 행동을 개시하는 옵션 C가 가장 무난하다고 제안했다.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미군이 출동하는 안이나, 트루먼 독트린을 한국에 확대 적용하는 안에 관해서는 “한국은 미국에 있어 전략적 가치가 희박한 지역으로, 한국에서 미군이 군사력을 행사하는 것은 세계정세의 잠재성과 미국이 현재 보유한 군사력에 비해 과중한 국제적 의무들을 안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현명하지 않으며 비현실적이다”라는 참모본부의 결론을 토대로 소극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50)


마침 8월 4일 옹진반도에서는 북한 인민군이 옹진읍 방향으로 38선을 돌파해 맹렬한 포격을 가해 한국군 2개 중대를 전멸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옹진 전투는 김일성 등의 강경한 태도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7월 말 조선인으로 구성된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이 북한에 들어와 조선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으로 재편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8월에는 제164사단도 들어와 인민군 제5사단(사단장 이덕산李德山, 본명 김창덕金昌德)으로 재편됐다. 그 결과 북의 병력은 단숨에 5개 사단으로 증강됐다. 전투 경험이 있는 2만 8천 명의 용사가 도착한 것이다. 정예부대를 얻어 기세가 오른 김일성과 박헌영은 8월 12~14일 무력 해방의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시티코프 대사가 “공격은 남이 북을 선제공격한 때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하자 김일성은 38선은 미군이 남아 있을 때만 의미가 있으며, 미군은 이미 떠났으니 38선이라는 장애물도 사라졌다고 반박했다. 51-3)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 정책 실현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얻지 못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앞을 내다보면서 공식 석상에서 꾸준히 ‘북진통일’을 언급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국가안전보장회의가 12월 23일에 제출된 <NSC 48/1> 문서를 승인했으며 29일에는 트루먼이 승인했다. 이 문서는 현재 아시아의 최대 위협을 소련으로 적시하고 소련의 팽창을 “봉쇄하고 가능한 선에서 축소”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아시아의 연안 도서 연쇄 라인the Asian off-shore island chain’ 유지, 일본·필리핀·오키나와의 확보를 주장했다. 특히 “일본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라며 일본이 소련 블록에 편입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135 즉 한국과 타이완의 위상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소련 또한 중국 혁명은 지지했음에도, 그리고 미국의 일본 단독 점령에 도전하겠다고 결정하고서도 한반도에 대해서는 북한의 무력통일 염원을 1949년 연말까지는 계속 거부했다. 63-5)


제2장. 개전으로 향하는 북한


1950년 1월 12일 딘 애치슨Dean G. Acheson 미 국무부 장관이 그 유명한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을 했다. 미국이 그은 ‘불후퇴 방위선’ 안에 알류샨 열도, 일본 본토, 오키나와, 필리핀을 포함시키고 한국은 타이완과 함께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커밍스는 애치슨의 연설에는 상대를 끌어들일 의도가 있었으나 북한 측은 이 연설을 ‘청신호’가 켜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명림은 커밍스의 북한 측 분석에 기본적으로 동의했고, 한국 측에서도 ‘불후퇴 방위선’ 밖에 놓였으니 항의하겠다는 판단이 없었다는 것을 논증했다. 그러나 김일성과 박헌영은 미군의 참전을 상정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북한이 행동에 나선들 미국의 참전은 없을 거라 판단했으며 기껏해야 미국이 일본군을 파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김일성 등은 애초에 이 연설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미국의 행동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스탈린은 애치슨의 연설이 미국의 불개입을 시사한 것으로 이해한 듯하다. 72)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쟁 준비를 위장하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6월 2일 김일성은 조국전선 아래에서 즉각적인 평화통일을 이룩하자고 촉구했다. 7일에는 조국전선이 평화통일 방안의 실현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1950년 8월에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자고 거듭 제의하면서 이를 협의하기 위해 남북 정당 단체의 대표자회의를 6월 중순에 해주나 개성에서 열자고 촉구했다. 나아가 6월 10일 평양방송은 한국에 붙잡혀 있는 남로당의 김삼룡金三龍과 이주하李舟河를 평양에 억류된 조만식曺晩植과 상호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6월 11일 조국전선의 사절 세 사람이 38선을 넘어 한국의 반정부당파와의 접촉을 시도하다가 체포됐다. 이날 한국 정부는 조국전선의 총선거 제안을 거절한다고 발표했다. 6월 12일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의 주최로 회의가 열려 김일성과 각 사단장, 사단 참모장, 포병사령관이 회합했다. 이날 사단장급에 개전 방침이 처음으로 설명됐다. 이 단계에서 실전 훈련이 시작됐다. 85-6)


사람들의 관심은 오랫동안 미국이 북한의 동태를 포착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방관했는지에 집중됐다. 알았지만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미군 철수 후 한국에 남은 정보 수집기관인 KLO는 북한의 군비 증강, 38선 부근의 변화를 포착하고 있었다. 5월 10일의 첩보원 보고를 토대로 작성된 <KLO 보고 518호>가 가장 포괄적이었다. 1949년 8월에 중국에서 2개 사단이 북한으로 들어왔으며, 같은 해 12월에 3개 사단이 추가로 들어와 인민군에 편입되어 현재 7개 사단으로 늘어났고 향후 13개 사단으로 증강될 듯하다는 내용이었다. 북한의 병력은 7개 사단이며 추가로 3개 사단이 준비된 것을 볼 때 첩보원의 정보는 규모 면에서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 극동군 총사령부 G-2는 한국 병력의 2배 수준이 아니면 북한이 침공할 리 없다고 평가했다. 기상 여건은 4, 5월이 적절하다고 지적했으나 1월 이후의 침공설을 열거한 것은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위험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90-1)


1950년에 들어 북한은 개전 준비에 온 힘을 쏟은 데 반해 한국은 일종의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새해 벽두부터 큰 문제로 부상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이 공격해 오면 북진통일의 기회가 생길 거라고 보았다. 또한 5월로 예정되어 있던 국회의원 선거를 연기할 생각이었다. 4월 들어 애치슨 미 국무부 장관은 3일에 이 대통령에게 각서를 보내 인플레이션 극복을 위한 근본적인 조치를 강구하지 않으면 경제 협력 원조 계획을 재검토하겠다고 압박했고 국회의원 선거 연기에 반대했다. 한미 간에 긴장이 고조됐다. 이때 이 대통령은 이범석 국무총리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이윤영李允榮을 지명했으나 4월 6일 국회에서 4표 차로 부결되고 말았다. 이에 국방부 장관 신성모가 국무총리까지 임시 겸임하게 됐다. 이범석으로는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고 판단해 신성모를 총리 대행으로 앉혀 한미 관계의 개선을 꾀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못을 박은 이상 국회의원 선거를 연기할 수는 없었다. 93-4)


한편, 당시 한국군 수뇌의 행동은 기묘했다. 채병덕 신임 참모총장은 4월 22일 군 수뇌부 인사를 단행하고 백선엽을 제5사단장에서 제1사단장으로, 유승렬을 제1사단장에서 제3사단장으로, 이응준李應俊을 제5사단장으로, 김백일을 제3사단장에서 육군본부 참모부장으로 이동시켰다. 이 이동은 특별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5, 6월 위기설이 공공연히 나돌고, 5월 13일에는 채병덕 본인이 5월 30일에 북의 공격이 예상된다고 발표한 상황에서 곧바로 6월 10일 군 수뇌부 이동을 다시금 단행한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행동이다. 38선에 배치된 제8사단의 사단장은 이형근李亨根에서 이성가李成佳로, 제7사단의 사단장은 이준식李俊植에서 유재흥劉載興으로, 제6사단의 사단장은 신상철申尙澈에서 김종오金鍾五로 전원 교체됐다. 결과적으로 능력 있는 군인을 임명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신임 사단장의 입장에서는 부임 후 담당 지역을 한 차례 시찰하기도 전에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95-6)


제3장. 북한군의 공격


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오전 4시 40분 북한군은 38선상의 모든 지점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북한군의 공격 당시 한국군은 경계 태세를 푼 상태로 허를 찔렸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군은 기껏해야 옹진반도에 수도사단 제17연대(연대장 백인엽), 개성에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동두천 방면에 제7사단(사단장 유재흥), 춘천 방면에 제6사단(사단장 김종오), 동해안에 제8사단 제10연대와 제21연대, 즉 3개 사단과 3개 연대, 총 12개 연대만이 38선 남쪽을 지키고 있었다. 나머지 3개 사단은 대전, 대구, 광주와 남부에 배치되어 있었다. 북한군 7개 사단, 21개 연대가 전격 공격을 감행했으니 병력은 한국의 2배에 달했던 셈이다. 더욱이 한국군에는 전차가 1대도 없었던 데 반해 북한군은 제105전차여단, 258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국군이 버티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26일 오후 1시 의정부가 함락되자 서울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 이 대통령은 27일 새벽 서울을 탈출했다. 98, 101-2)


6월 29일 저녁에 열린 워싱턴의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는 맥아더에게 38선 이북을 목표로 한 공군 작전 확대와 부산-진해에 한정된 미 지상군의 투입을 지시하는 명령을 결정했다. 다음 작전을 결정한 이는 29일 도쿄 하네다에서 수원으로 날아가 전황을 시찰하고 돌아온 맥아더였다. 맥아더는 “한국군에는 반격 능력이 전혀 없으며 추가로 돌파당한다는 중대한 위험에 처해 있다. 적의 진격이 계속된다면 공화국의 붕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라고 진단하고, 현재의 전선을 지키고 나아가 반격하기 위해서는 미 지상군의 투입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즉시 1개 연대 전투단을 투입하고 2개 사단으로 증강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제안이었다. 30일 아침에 열린 백악관 회의에서 대통령의 결단이 승인되어 맥아더에게 1개 연대 전투단과 지휘하의 지상군을 사용할 권한이 부여됐다. 북한에 대한 해상 봉쇄도 결정됐다. 이때 미군의 전면적인 출격이 결정된 것이다. 109)


일본 전 국토는 점차 한국전쟁의 기지로 변모해 갔다. 해상보안청, 국철, 선박, 지자체, 일본적십자사의 간호부 등이 후방 지원에 동원됐다. 그러나 이는 자발적인 정책이 아니라 의무로 강요된 것이었고 점령군의 명령에 복종한 것에 불과했다. 그 결과 일본이 한국전쟁에 실질적으로 참전하면서도 일본 정부는 끝까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일본 국민은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독특한 구조가 만들어졌다. 7월 18일 맥아더는 거듭 서한을 보내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의 무기한 정지 처분을 내렸다. 7월 24일 GHQ 민정국Government Section의 잭 네이피어Jack P. Napier 공직심사과장이 신문·방송사의 경영자들을 모아 놓고 ‘레드 퍼지red purge’ 방침을 내비쳤다. 그에 따라 7월 28일 중앙의 8개 신문사에서 공산당원과 그 동조자로 지목된 직원 총 336명이 해고됐고, 8월 말까지 전국 50개사에서 704명이 해고됐다. 그 후 추방은 일반 민간기업과 관청으로 확대되어 연말까지 약 1만 3천 명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117)


한국전쟁 개전 소식에 가장 순수하게 기뻐한 것은 타이완의 중화민국 정부였다. 1950년 5월 타이완 주재 미국 대사 로버트 스트롱Robert C. Strong은 6~7월에 중공이 타이완을 침공할 거라고 보고했다. 국무부 역시 사태의 타개를 바라며 이달 전해진 반反장제스 쿠데타 계획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장제스 정권이 더 나은 정권으로 교체된다면 미국이 지원할 명분도 생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미국인이 고른 후보자는 후스胡適와 쑨리런孫立人이었는데 모두 주인공 역할을 거절했다. 러스크가 후스에게 마지막으로 설득을 시도한 것은 6월 23일이었다. 6월 26일 장제스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격려의 전보를 보냈고, 27일에는 천청陳誠 행정원장이 담화를 발표해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리고 같은 날 워싱턴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제7함대의 타이완해협 파견 성명을 발표하자 타이완 정부는 뛸 듯이 기뻐했다. 기대를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17-8)


그런데 미군이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은 계속해서 진격했다. 한국 정부는 남쪽으로 더 밀려났고 인민군은 거침없이 진격했다. 7월 26일 진주를 지키기 위해 하동고개로 향하던 미 제29연대 1개 대대가 인민군의 매복 공격으로 궤멸당했다. 이때 수행했던 전 한국군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이 전사했다. 당연히 인민군 측에도 희생은 있었다. 7월 초순에 전우를 대신해 12사단장으로 임명된 최춘국崔春國이 7월 30일 지뢰를 밟아 전사했다. 이어서 강건 총참모장이 대전 점령 직후에 금강 기슭에서 지뢰를 건드려 전사했다. 중요한 것은 7월 20일까지 미 공군이 북한 공군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는 점이다. 개전 당시 북한 공군은 보유한 전투기 132대를 이용해 서울을 공습했으나 미 공군의 반격으로 다수의 북한 전투기가 지상에서 파괴됐다. 이로써 미 공군은 이 전쟁의 제공권을 장악했고 이후 단 한 번도 빼앗기지 않았다. 이는 점차 전쟁의 추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123)


8월 15일 임시 수도 대구에서 광복절 행사를 거행한 한국 정부는 17일 이곳에서 철수해 부산으로 도망쳤다. 한국군과 미군은 낙동강 동쪽으로 후퇴해 대구까지 아우르는 최종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곳에 미군 제25사단, 제24사단, 제1기병사단과 본국에서 도착한 제2사단, 그리고 한국군 제1, 제6, 제8, 수도, 제3사단이 진을 쳤다. 이곳에서 한미군은 한 달간 대치전을 버텨 냈다. 그사이 공군의 공격은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대치 중이던 북한군을 향한 융단 폭격이 펼쳐졌다. 한미군은 그간 병력을 증강하고 무기를 현대화했다. 병력 총수는 8월 14만 1,808명에서 9월 1일에는 미군 8만 6,655명, 한국군 9만 1,696명, 영국군 1,578명으로 총 17만 9,929명으로 늘었다. 커밍스는 이 무렵 미군의 전차 대수는 북한군이 보유한 대수의 5배에 달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인민군이 한미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뚫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8월 말 공산 측에서는 문자 그대로 비관적인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128)


보급로가 거의 다 파괴되고 미 공군의 끊임없는 공격에 노출되어 있던 북의 인민군은 승리를 위해 서둘러야 했다. 하루를 잃는 것은 패배로 가는 지름길과 다름없었다. 이에 인민군은 김일성의 명령 아래 최후의 총공격을 시작했다. 제1군단은 8월 31일부터, 제2군단은 9월 2일부터 낙동강 방어선 돌파를 위한 결전에 나선 것이다. 맹공을 당한 미군 제2, 제25사단은 공군에 폭격 지원을 요청했다. 9월 1일 제5공군의 전투폭격기가 두 사단이 지키는 전선을 따라 167차례 출격하여 공대지空對地 공격을 실시했다. 9월 2일에도 B-29 폭격기 25대가 김천, 거창, 진주를 폭격했고 두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300차례나 출격했다. 그 결과 두 사단은 끝까지 버텨 냈다. 이즈음 미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선박 260척, 병력 7만 명이 투입된 인천 상륙 작전은 9월 15일에 개시됐다. 새벽에 제1진이 월미도에 상륙했고 저녁이 될 때를 기려 만조 무렵에 제2진이 다른 해안에 상륙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134-5)


9월 27일 한미군은 서울을 탈환했다. 9월 29일 맥아더와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환도식이 거행됐다. 식이 끝난 후 이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한국군이 적을 추격하여 38선을 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맥아더는 북한에 항복 권고를 했으니 이틀 정도 기다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다음 날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즉시 북진하라고 명령했다. 인천에 상륙한 미군이 진격하면서 북한과의 교신과 보급이 끊긴 인민군은 완전히 붕괴해 퇴각했다. 남쪽에 있던 조선인민군 중 통솔력이 약한 부대는 괴멸됐고 방호산의 제6사단 같은 단련된 부대는 조직을 지키면서 태백산맥을 따라 북쪽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10월 21일의 당 정치위원회 결정으로 군대 안에 노동당 조직을 설치하기로 정한 것은 만주파 군대라는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인민군에 대해 당의 통제를 일원적으로 확립하는 단초가 됐다. 이는 인민군의 재건, 재편 과정에서 큰 의미를 갖게 된다. 138, 142, 144)


제4장. 한미군의 북진과 중국군 참전


10월 1일 맥아더는 본국 정부와 상의한 후 방송을 통해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그리고 전쟁 포로들과 민간인 억류자들을 즉각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10월 2일 맥아더는 유엔군 전 부대에 일반명령을 내렸다. “6월 27일의 유엔 안보리 결의 조항에 따르면 우리가 군사 작전을 전개하는 곳은 군사적 필요와 한반도의 국제적 경계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따라서 소위 38선은 우리 군의 군사적 운용 측면에서 고려할 요소가 아니다. 적을 완전히 패배시키기 위해 귀하의 부대는 그 경계를 …… 언제든지 넘어도 좋다. 적이 10월 1일의 나의 메시지에서 정한 항복 조건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우리 군은 적군이 한반도의 어느 곳에 있든지 찾아내 괴멸시킬 것이다.” 이로써 한국군의 북진은 추인됐다. 맥아더는 미 제10군단에 서울 지역에서 방향을 틀어 부산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해로를 이용해 원산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한국군 제1군단은 홀로 맹렬히 진격해 원산으로 향했다. 148)


10월 2일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한 날, 중공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한국전쟁 참전 문제를 논의했다. 마오쩌둥이 중국 참전의 반대급부로 소련으로부터 얻어 내려 한 것은 미국의 중국 본토 공격 방어전에 소련이 참전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소련은 애당초 중소우호동맹조약에 따라 공군을 파견할 의무가 있었으나, 그렇게 했다가는 미소 세계전쟁으로 비화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스탈린은 그러한 사태를 무조건 피하고 싶었다. 미국이 전쟁을 확대하여 중국을 공격한다면 소련은 조약상의 의무에 따라 중국을 위해 참전할 것이며, 중소가 힘을 합친다면 미국에 승리할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이는 스탈린의 진심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스탈린에게는 미국과 싸울 생각이 없었으며 한국전쟁이 중국 본토로 확대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소련도 함께 싸우겠다는 표현은 중국의 참전을 독려하기 위한 공수표였다. 10월 7일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의견에 동의해 파병 결정을 내렸다고 스탈린에게 알렸다. 150-1, 154)


중국인민지원군은 10월 25일 평안북도 운산 방면에서 한국군 제1사단과 맞닥뜨리면서 첫 번째 전투가 시작됐다. 펑더화이는 서둘러 진형을 구축하고 11월 1일 전투 명령을 내렸다. 예상치 못한 중공군 대군의 공격으로 한미군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서부에서는 덕천, 개천, 안주 부근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이 제1차 전역[戰役, 전쟁 상황에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실시하는 일련의 연관된 대규모 군사 작전 - 역자 주]은 11월 4일에 종결됐다. 이때 마오쩌둥은 지원군 병력을 추가 증강했다. 제9병단의 제20군, 26군, 27군의 3개 군 12개 사단이 파견되어 11월 7일부터 19일까지 지안, 린장臨江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총병력은 30개 사단, 약 38만 명을 헤아렸다. 제9병단에는 장진호長津湖 방면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매복 공격을 전개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11월 25, 26일 지원군은 역으로 먼저 제2차 전역을 개시했다. 한미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패주하기 시작했다. 166-7)


12월 5일 미군은 평양을 포기했다. 우선 제8군이 대동강 남쪽 기슭으로 이동했다. “시내 곳곳에서 12월 5일 오전 7시 30분까지 불을 질렀다. 이때 후위경비부대가 대동강의 마지막 다리를 파괴하고 강 하구 지역에서 마지막 파괴 작전을 시작했다.” 진남포에서는 이미 12월 2일부터 철수가 시작되어 전차상륙함, 일본의 상선, 미 해군의 병력 화물 수송선, 한국의 범선 100여 척이 부상자, 죄수, 평양에서 반출할 화물, 약 3만 명의 피란민을 싣고 철수했다. 운반이 여의치 않은 물자와 항만시설은 파괴했다.117 그 후 부대는 38선을 향해 퇴각했다. 동부에서는 제10군단이 12월 8일 자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흥남에서 철수했다. 군인 10만 5천 명, 차량 1만 8천 대, 화물 35만 톤, 피란민 8만 6천 명을 수송했다. 남은 폭약, 폭탄, 가솔린은 흥남 시가와 항만시설 파괴에 사용됐다. 미군에게 평양과 흥남은 적의 도시에 불과했고 적에게는 무엇 하나 건네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69)


12월 22일 펑더화이는 제3차 전역 명령을 내렸다. 제42, 66군을 좌종대左縱隊로 춘천 서북쪽에 집결시키고 제38, 39, 40, 50군을 우종대右縱隊로 서울 방향으로 전진시켰다. 인민군 제5, 2군단에는 동해안 쪽을 맡겼다. 공격 구역 안에 절대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집중시킨 뒤 31일에 공격을 개시했다. 미군 측은 워커 제8군 사령관이 12월 22일 지프와 트럭의 충돌 사고로 사망한 이후 매슈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가 후임으로 임명되어 지휘를 맡았다. 리지웨이는 1951년 1월 1일 서울 철수를 명령했다. 1월 4일 한강의 마지막 다리가 폭파됐다. 이날 서울은 또다시 점령당했다. 이번 점령자는 북중 연합군이었다. 서울 점령 후 북위 37도선 지점까지 진출한 시점에서 1월 7일 펑더화이는 진격 중지를 명령했다. 이렇게 제3차 전역이 끝났다. 펑더화이가 다시금 진격을 멈춘 까닭은 미군 측이 남하를 유도하여 인천 상륙 작전의 재현을 획책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78)


요시다 총리는 12월 16일 국회가 자연 휴회에 들어가기에 앞서 열린 비밀의원총회에서 민주당 총재 아시다의 거국일치 내각 제안은 “일본의 현 사태에 부합하지 않는 언동”이라면서 한국전쟁이 별로 위험하지 않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세간에는 한반도 문제가 중대한 국면에 들어섰고 제3차 세계대전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는 듯하나 전쟁이 그리 쉽게 일어날 리가 없다. 사태는 우려할 수준은 아니다. 중공이 최후에 승리를 거둘 일도, 조선동란이 영원히 이어질 일도 없을 것이다. 적절한 지점에서 타결될 것이다.” 요시다는 28일 기자단과 만난 자리에서도 “큰일 났다며 난리 법석을 피우다가 대동아전쟁이 일어났다”라고 비꼬면서 위기의식을 부채질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헌법의 정신을 지킬 생각이며 경솔하게 재군비 문제를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요시다의 구상은 미국에 의한 안전보장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길은 그야말로 미일안보조약을 향해 열려 있었다. 180-1)


북중군의 제4차 전역은 2월 11일에 시작됐다. 이날 동부 전선에서 북중군은 횡성을 목표로 반격에 나섰다. 한국군 제8사단은 괴멸됐고 북중군은 횡성을 점령한 후 원주를 향해 전진했다. 양군 간의 격돌은 16일까지 이어졌다. 한미군은 원주를 사수했다. 원주를 코앞에 두고 북중군은 기동방어전 태세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월 20일 한미군의 반격 작전인 ‘킬러 작전Operation Killer’이 시작됐다. 북중군은 퇴각했다. 2월 20일 베이징으로 귀환한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을 설득했다. 마오쩌둥도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3월 초순 동부 전선에서 전개된 유엔군의 ‘킬러 작전’이 종료됐고, 북중군은 횡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3월 7일 서부 전선에서 유엔군의 ‘리퍼 작전Operation Ripper’이 시작되어 북중군은 결국 서울을 포기해야 했다. 3월 말 북중군은 거의 모든 전선에서 38선 이북으로 쫓겨 올라갔다. 더는 만회하지 못한 상태로 4월 21일 제4차 전역은 종료됐다. 이렇게 미중 전쟁의 승패는 무승부로 끝났다. 188-9)


제5장. 정전회담을 하면서 하는 전쟁


유엔군의 반격으로 서울을 회복하고 38선에 근접했을 때, 미국 정부는 또다시 정전회담을 촉구하는 대통령 성명을 준비했다. 1951년 4월 5일 공화당 하원의원 조셉 마틴Joseph W. Martin이 의회 연설에서 맥아더로부터 받은 3월 20일 자 편지를 읽었다. 그 편지에서 맥아더는 “이곳 아시아는 공산주의 음모가들이 세계 정복을 목표로 하는 승부를 위해 선택한 곳이라는 사실”, “만약 우리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와의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유럽의 멸망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일부 사람들”을 비난했다. 맥아더가 공공연하게 정부를 비판하자 트루먼은 4월 11일 맥아더 해임을 발표했다. 미국의 방침은 아시아에서의 대립을 ‘제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며, 미국은 정전을 하고 재침략 방지 대책을 세워 평화를 달성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맥아더의 후임에는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임명됐다. 미국은 정전협상을 위한 계기를 필사적으로 찾았다. 이따금 평화를 제안한 소련에 기대를 걸었다. 191)


마오쩌둥이 ‘최후의 전역’이라고 부르며 한반도에서 미군을 몰아내려 했던 제5차 전역은 맥아더 해임 하루 뒤인 4월 22일에 시작됐다. 미 공군은 서부 전선에서 38선을 다시 돌파해 임진강을 건너는 북중군을 상대로 23일 새벽부터 1,100차례 출격해 공격했다. 조선인민군 제1군단, 중국인민지원군 제19병단의 64군, 65군, 63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으면서도 서울 북쪽에 있는 북악산까지 전진했다. 그 동쪽에서는 제3병단, 제9병단의 8개 군이 38선을 돌파하여 서울 방면으로 압력을 가했다. 잠시 대치한 끝에 5월 16일 동부 전선 소양강 남쪽 지구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제3병단, 제9병단, 조선인민군 제3, 제5, 제2군단이 공격에 나섰다. 5일간의 밤낮 연속 공격으로 전선을 남쪽으로 상당히 밀어 내렸지만, 거기서 모든 힘을 다 썼다. 5월 19, 20일에는 야간에 출동한 B-29가 공격을 위해 집결한 북중군을 유도탄으로 폭격하여 공격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5월 21일 펑더화이는 전역을 수습하라고 명령했다. 192)


5월 17일 미국 상원에서 한국전쟁 정전 결의가 채택됐고, 5월 19일 《프라우다》는 이를 보도했다. 미국 국무부는 미국 정책에 대한 비판자로 알려져 있던 케넌에게 미국의 메시지를 소련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겼다. 케넌은 5월 31일 비밀리에 소련의 유엔 대표 말리크와 만나 미국의 정전에 대한 의지를 전달했다. 모스크바는 이 사실을 베이징에는 알리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전쟁은 지금부터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소섬멸전 단계로, 곧 대섬멸전 단계로 나아갈 거라고 했다. 패배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주장으로도 보인다. 중요한 것은 미군을 북한으로 끌어들여 거기서 작게나마 확실하게 무너뜨리자는 제안이다. 이에 스탈린은 즉각 반응했다. 5월 29일 그는 마오쩌둥의 계획이 “나에게는 위험해 보인다. 그런 계획은 한두 번은 성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미군은 아주 쉽게 그런 계획을 간파할 것이다”라고 했다. 스탈린은 언제나 마오쩌둥의 의견에 찬성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외적으로 전면 반대했다. 199-200)


가오강과 김일성은 두 사람은 6월 13일 스탈린과 회담했다. 회담에 동행한 통역 스저는 김일성과 가오강의 답변이 혼란스러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전투 중단, 정전, 강화(화해), 휴전, 평화조약” 등의 단어를 혼란스럽게 사용하자 스탈린이 어구의 의미를 설명하고 “당신들의 의도, 소망, 요구는 도대체 무엇이냐”라고 했다. “중국과 북한 측은 우리의 희망은 정전”이라고 대답했다. 스탈린이 정리하기를, “정전은 상당히 긴 기간의 군사행동 중단이지만, 양측은 여전히 교전 상태에 있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언제든지 다시 싸울 수 있으므로 이는 평화의 국면이 아니다”라고 했다. 김일성과 가오강은 그러한 의미의 정전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이다. 스탈린은 두 사람을 상대로 정전협상을 개시해야 할 필요성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북한과 중국의 합의를 이끌어 낸 뒤, 말리크 유엔 소련 대사는 6월 23일 미국 방송에 출연해 한반도에서의 정전협상 가능성을 시사했다. 202-4)


한반도의 정전회담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됐지만, 미국과 중국 양측이 자신들의 입장을 고집한 결과, 회담은 좌초됐다. 8월 22일 중국·북한 측은 협상 중단을 선언하고 회의장을 떠났다. 한편, 7월 28일 이승만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한국인은 분할선이 계속되는 것을 우리 국민에 대한 죽음의 명령서로 간주하고” 있다며 군사분계선 합의에 반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정전회담 중단은 그야말로 원하던 일이었다. 이승만의 통일론은 박헌영과 김일성의 통일론이기도 했다. 박헌영은 1951년 2월까지만 해도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겸임했으나, 이후 소련계 김재욱金宰旭과 교체됐다. 그는 대남 공작 재건에 집념을 불태우고 있었다. 정전회담을 하면서도 전쟁을 계속하고 남부 해방을 위한 공작을 계속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따라서 그가 이승만의 주장을 들었다면 공감했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북한이 이승만의 반反정전회담 캠페인을 비난하지 않는 것에 초조해했다. 210-3)


정전회담이 시작된 뒤에도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1951년 7월 26일부터 미군 제2사단은 5일간 동부 전선의 조선인민군 제2군단을 공격했다. 강원도 인제에서 북쪽으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미군이 ‘펀치볼Punch Bowl’이라고 이름 붙인 오래된 분화구가 있다. 그 주위의 깎아지른 능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이 계속됐다. 미군이 1179고지라 부른 최대의 능선인 대우산大愚山을 미군이 점령했다. 중국군이 지키고 있던 서쪽 능선은 ‘피의 능선Bloody Ridge’이라고 불렸다. 더욱 격렬한 공방전이 계속된 곳은 중부의 ‘철의 삼각지대’라고 불린 금화, 철원, 평강을 잇는 지대였다. 8월 18일부터는 미군 3개 사단이 인민군 3개 군단을 상대로 하계夏季 공세를 시작했다. 정전회담이 중단된 후인 9월 1일부터는 다시 공세가 시작돼 9월 18일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은 진지와 진지 사이에 폭 0.8~1미터, 깊이 1미터, 지표까지 2~3미터의 터널을 만들고 완강하게 응전했다. 221)


결정적으로 정전회담의 교착상태를 초래한 것은 포로 문제였다. 미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한 후 북한군이 패주할 때 대량의 투항자가 나왔다. 그 수는 1950년 10월까지 10만 4천 명에 달했다. 중국군 포로는 1951년 4월부터 6월까지 전개된 제5차 전역에서 대거 발생했다. 1만 5천 명이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50~70%는 옛 국민당군의 장병이었다고 한다. 이들을 도운 것이 타이완에서 보낸 수용소 요원들이었다. 미국 측 자료에 따르면 이들 요원은 미군 민간정보교육국Civil Intelligence and Education, CIE 프로그램에 따라 포로들에게 반공 민주 선전을 했다. 이 요원들은 종종 반공파 포로와 제휴하여 1951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타이완으로 송환해 달라는 청원서에 서명하도록 포로들을 설득하거나 물리적인 압력을 행사했다. 제네바협약 118조의 규정에 포로는 신속히 송환해야 한다고 되어 있지만, 이 상식적인 견해가 항복한 후 협력자가 된 포로를 공산 측에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는 트루먼의 뜻에 밀렸다. 227-8)


제6장. 3년째의 전쟁


휴전회담이 포로 문제로 교착된 상황에서 1952년 5월 세 번째 유엔군 사령관으로 마크 클라크Mark W. Clark가 취임했다. 그의 취임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의 반란으로 수용소 사령관 프랜시스 도드Francis T. Dodd 준장이 반란자의 인질이 된 사건이 계기가 됐다. 포로 문제에 대한 타협 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신임 사령관은 북한에 대한 폭격을 강화하여 사태를 해결하려 했다. 먼저 5월 13일 극동공군 사령관 오토 웨이랜드Otto P. Weyland는 클라크에게 평양 폭격의 허가를 요구했고, 이 공습 작전에 ‘압력 펌프 작전Operation Pressure Pump’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6월 16일 클라크가 이를 승인하자, 6월 23일 미 공군과 해군항공대는 수풍발전소[水豊發電所, 평안북도 삭주군 수풍면에 있는 북한 최대의 수력발전소 - 역자 주], 부전강赴戰江 제3, 제4발전소와 장진강長津江 제3, 제4발전소 등을 폭격했다. 공격당한 수력발전소 13곳 가운데 11곳은 완전히 파괴됐다. 북한은 전력의 90%를 상실했다. 239)


7월 4일에는 안둥에서 동북쪽으로 5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북한 군사대학을 폭격했고, 8일에는 강계와 구누리 사이의 철교, 그리고 장진강 제1, 제2발전소를 폭격했다. 7월 11일에는 평양 폭격이 이루어졌다. 제7함대 항공모함의 함재기, 제5공군기, 한국 공군기가 주간에 3차례 공격하고, 밤이 되면 요코타와 가데나에서 B-29 54대가 출격해 폭격했다. 1,254회 출격은 한국전쟁에서 최대의 공습이었다. 2만 3천 갤런의 네이팜탄이 투하됐다. 미국의 폭격은 북한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수풍댐이 공격받은 후에도 7월 4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에서 “상대방이 조선 정전협상에서 전환을 꾀하려고 기도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약간의 징후가 나타났지만, 그럼에도 적이 협상을 연기할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고 평정심을 보였다. 반면 김일성은 7월 16일 스탈린에게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전보를 보냈지만, 여기에는 김일성에게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고통이라는 인식이 드러나 있다. 240-3)


7월 23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전부터 의혹을 가지고 있던 이종찬 참모총장을 해임하고 백선엽 제2군단장을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이종찬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7월 28일 비상계엄령이 해제됐다. 군법회의는 공산주의 음모에 관련된 국회의원 7명의 기소를 취하했다. 사형이 선언됐던 서민호 의원은 재심 결과 8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완화 조치를 한 후, 8월 5일 정·부통령 선거를 시행한다고 공시했다. 8월 5일 선거에서 이승만은 유효 투표 703만 표 가운데 523만 표를 획득하여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말할 것도 없이 선거 관여는 있었지만, 이 결과는 그의 권력 기반이 결정적으로 강화됐음을 보여 줬다. 게다가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로는 이범석이 지명됐는데, 이승만은 선거에 관여해 무소속의 함태영咸台永을 당선시켰다. 이범석을 내친 것이다. 선거 후에는 이범석의 족청(옛 조선민족청년단)계를 자유당에서 배제시키고 자유당을 철저하게 이승만 당으로 만들어 나갔다. 250)


2년 넘게 스탈린은 크렘린에서 마오쩌둥, 김일성과 함께 한국전쟁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아시아에서의 혁명적 투기는 실패로 끝났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결정에 근거한 행위로, 그의 실패이고 그의 패배였다. 스탈린은 낙담하지 않고 빨리 마무리하고 전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실패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배신을 근거로 해서만 설명할 수 있었다. 필자는 스탈린이 이 시기 어느 시점에 김일성과 방학세에게 박헌영에 대한 의혹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가설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할 새로운 자료는 없다. 그러나 1952년 9월 저우언라이에게 내린 스탈린의 ‘지시’가 필자의 추측에 힘을 실어 준다.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비교해 본 직후에 저우언라이에게 잠입한 스파이를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당과 정부에 영국과 미국의 앞잡이가 침투해 있다면, 북한의 당과 정부에도 미국의 앞잡이가 침투해 있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263)


1953년 새해가 되자 제5차 전원회의 결정의 실천, 종파주의분자의 적발, 비판 캠페인이 요구됐다. 박정애가 《노동신문》 1월 5일 호에 게재한 <김일성 동지가 제기한 당의 조직적, 사상적 강화를 위한 투쟁은 각 당 기관, 당 단체, 당 지도간부, 당원의 전투적 강령>이라는 글이 그 시작이었다. 소련에서의 유대인 의사단 사건 적발이 북한에서는 1월 18일에 보도됐다. 《노동신문》 1월 26일 호는 사설에서 수령의 요구에 부응하자며 더욱 나사를 조였다. 사회안전상 방학세는 2월 5일 《노동신문》에 <반反간첩 투쟁을 전 인민적 운동으로 추진하자>라는 글을 발표하고, 반종파주의 투쟁을 반간첩 투쟁과 연계하자는 방향을 제시했다. (박헌영과 친분이 있는) 리승엽, 조일명, 임화, 박승원, 이강국, 이원조, 맹종호 등은 해방 전에 일본 관헌에 체포돼 전향한 과거가 있었다. 그랬기에 미군의 스파이가 됐을 것이라고 추궁했다. 소련계 사회안전부 예심처장 주광무朱光武가 진두지휘하여 이들을 고문하고 원하는 진술을 받아냈다. 265-6)


한편 스탈린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평화 공존”을 말하면서 “조선전쟁을 끝내는 문제에 대해 아이젠하워와 협력하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이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게재됐다. 그리고 26일 소련 국내에도, 중국에도 이 메시지가 보도됐다. 스탈린은 분명하게 한국전쟁을 끝내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미국의 새 대통령에게 보냈으며, 이를 러시아인과 중국인 모두 알게 된 것이다. 알려진 바로는 한반도와 관련한 스탈린의 마지막 조치는 김일성이 요청한 차관 상환 연기에 관한 것이었다. 1951년 11월 14일 ‘소련-북한협정’에 따라 북한에 제공된 물자 구매를 위한 차관의 변제는 1952년부터 북한이 물자를 인도하는 것으로 실행돼야 한다고 정해져 있었는데, 김일성이 라주바예프 대사에게 군사행동 종료 후로 미뤄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스탈린은 연기를 인정했다. 그런 취지를 담은 각료회의 명령안이 수상 스탈린의 이름으로 기안됐다. 스탈린은 군사행동의 종료가 멀지 않았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268-70)


제7장. 정전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었다. 그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으로 정전협상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통설은 잘못된 것이다. 스탈린 자신이 이미 전쟁을 끝내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중국에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 북한에서는 3월 3일 당 전체에 스탈린의 위독한 상황에 대한 통보가 있었다. 스탈린의 죽음은 김일성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3월 9일 추도식이 열렸다. 김두봉, 박창옥, 부수상 홍명희, 민족보위상 최용건이 추도사를 했다. 박헌영도 참석했는데, 추도식이 끝난 직후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김일성은 전쟁을 끝낼 체제를 완성했다. 중국에서 스탈린 장례식에 참석한 것은 저우언라이였다. 스탈린의 후계자들은 노골적으로 정전을 서두르라고 저우언라이를 압박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소련 측이 포로 문제에 대한 방침의 전환을 요구했다면, 저우언라이가 이를 수용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272)


3월 26일 귀국한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에게 모스크바에서 협의한 내용을 보고했다. 《저우언라이 연보周恩來年譜》에는 이때 “중국 정부가 취해야 할 방침과 행동을 확정했다”라고 되어 있다. 마오쩌둥이 마침내 포로 문제에 대해 양보하기로 결단한 것이다. 3월 28일 중국 주도로 작성된 클라크 제안에 대한 회답을 김일성과 펑더화이의 이름으로 보냈다. 부상병 포로 교환에 동의한다, 이 문제의 합리적 해결은 포로 문제 전체의 순리적 해결과 한반도 정전 달성을 이끌어 내야 한다, 판문점에서의 회담을 즉시 재개하자는 내용이었다. 소련의 특사 쿠즈네초프와 수행원 페도렌코가 평양에 도착한 것은 3월 29일이었다. 특사는 김일성에게 소련 정부의 서한을 전달했다. “우리의 설명을 듣고 김일성은 크게 흥분했다. 그는 좋은 소식을 알게 되어 매우 기쁘다며 문서를 꼼꼼히 검토하고 나서 회담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김일성이 흥분한 것은 이로써 바라던 즉각적인 정전이 가까워졌다는 기쁨 때문일 것이다. 273-4)


정전회담 재개를 가로막은 마지막 장애물이 제거된 후 클로즈업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저항이었다. 직접 선거로 재선된 대통령의 저항은 전에 없이 강고한 것이었다. 정전협상이 실질적으로 진전되기 시작한 4월,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 반대 움직임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4월 8일 양유찬 주미 한국 대사는 덜레스 장관에게 이 대통령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전 조건 5가지를 제시했다. 그것은 (1) 한반도의 재통일, (2) 중공군의 철수, (3) 북한군의 무장해제, (4) 제3국이 북한에 무기를 제공하는 것의 금지, (5) 대한민국의 주권 존중 및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그 목소리의 존중이었다. 이는 정전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이승만의 우려에는 근거가 있었다. 미국은 정전 반대, 전쟁 속행 주장을 처음부터 논외로 여겼고, 한미 간 안전보장조약 체결도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일본-류큐-필리핀을 방위선으로 하는 전략을 유지한 국방부가 반대하고 있었다. 276-7)


5월 13일 미국 대표는 판문점에서 공산 측이 제안한 8개 항목 가운데 많은 부분을 “협상의 기초로” 받아들이면서 귀환하지 않은 북한 포로를 정전협정 발효일에 즉시 석방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중국과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중국과 북한은 이날부터 제1차 하계 반격 전역을 개시했고, 14일에는 곧바로 미국의 즉각적인 석방안을 거절했다. 5월 25일 정전회담에서 해리슨 수석대표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그 내용은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스웨덴, 스위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인도 등 5개국으로 구성된 송환위원회에 인도한다, 송환위원회의 병력은 인도군만으로 하며 인도가 위원장을 맡고, 그사이에 양측 대표가 포로와 접촉하여 송환 희망을 확인한다, 90일이 지나면 면접은 끝내고 120일 후 석방한다는 것이었다. 6월 4일 공산 측은 5월 25일의 미국 측 제안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회답했다. 드디어 정전의 시기가 다가왔다. 이제 정전은 확정적이었다. 279, 281)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6월 6일 보낸 편지에서 한반도 통일을 위한 투쟁을 전쟁이 아니라 정치적 수단으로 추구할 때가 됐다면서, 정전 후 한국의 안전보장을 위해 경제 원조와 병력 증강에 협력하겠다고 제안했다. 더불어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승만은 이에 대해, 6월 9일 제8군 사령관 테일러에게 4가지 요구사항의 요점을 전달했다. (1) 정치 토의의 합리적인 기한은 60일이 바람직하다, (2) 미국과의 상호안보조약, (3)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확대 편성, (4) 인도 및 공산국 대표의 입국 거부였다. 이승만은 6월 17일 아이젠하워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그것[상호방위조약]이 정전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 효력은 거의 제로가 될 것”이라며 정전 움직임에 강력히 항의했다. 이는 다음 날 이승만 대통령이 저지른 무모한 행위의 동기에 대한 사전 설명이었다. 6월 17일 심야부터 18일 아침까지 부산, 마산 등 4곳의 포로수용소에서 북한인 포로 2만 5천 명이 일방적으로 석방된 것이다. 282-3)


그동안 북한에서는 박헌영파, 옛 남로당 관계자 체포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었다. 체포된 주중 대사 권오직을 대신해 베이징에는 대리대사로 만주파 서철徐哲이 파견됐다.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6월 만주파 김일이 중앙위원회 서기로 임명됐다. 체포된 남로당계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미군의 스파이였고 반反김일성 쿠데타를 획책했다는 사건의 줄거리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3년 7월 2일 소련계 일인자 허가이가 자살했다. 허가이는 당무에서는 제외된 채 부수상직만 맡고 있었는데, 그에 대해 새로운 비판이 제기됐다. 아마 허가이에게도 체포된 박헌영 그룹 멤버들의 자백 조서가 전해졌을 것이다. 허가이는 분명히 아직 그 사건에 말려들지는 않았었지만, 앞으로 사건이 어떻게 확대될지 모른다고 느꼈을 것이다. 더욱이 소련에서 온 소련계가 그에 대한 비판에 동조하는 것을 보고 그는 자신이 소련의 신임을 잃었다고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허가이는 소련으로 돌아갈 길이 막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90)


스탈린 사후 말렌코프에 이어 지위가 상승한 부수상, 내무상 베리야는 4월 4일 크렘린 의사단 사건은 꾸며낸 것이라고 발표하도록 했다. 무고한 자에게 죄를 인정하게 한 것은 고문에 의한 것임이 시사됐다. 이틀 뒤 《프라우다》 논설은 국가보안상 이그나티예프S. D. Ignat’ev를 비판하면서 직접 수사 책임자인 미하일 류민Mikhail D. Ryumin 전 차관의 체포 사실을 밝혔다. 베리야의 ‘개혁파식’ 활동이 흐루쇼프와 말렌코프에게 강한 의혹을 불러일으킨 결과, 이들은 6월 26일 베리야 제거에 나섰고 7월 10일 베리야 체포가 발표됐다. 베리야는 미국과 영국의 스파이로 지목됐다. 이 발표는 전형적인 스탈린 방식이었기 때문에 4월의 새로운 바람과의 정합성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공산당의 이인자인 베리야가 미국과 영국의 스파이라고 발표된 것은 박헌영파나 이토 리쓰를 미국과 일본의 앞잡이라고 낙인을 찍으려는 사람들에게는 활용하기 좋은 재료였다. 290-1)


7월 24일 정전회담에서 현시점의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하여 정전하기로 합의됐다. 이날 이승만은 덜레스에게 서한을 보내 정전이 임박한 이 시기에 “우리 정부의 태도를 결정하기 전에” 확실히 해 놓고 싶다며, 정치회담이 90일 이내에 실패하면 중국군을 몰아낼 군사행동에 미국은 동참해 줄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군사행동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해 줄 것인지를 물었다. 깜짝 놀란 덜레스는 마지막 설득을 시도했다. 결국 이승만은 집요하게 자기주장을 한 결과, 미국이 앞으로 한국의 안전보장을 약속하게 하는 데 완전히 성공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20분 판문점에서 해리슨과 남일이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둘 다 말이 없었다. 남일은 서명한 후 해리슨과 악수하지 않은 채 시계를 보고 그대로 떠났다. 조인에 따라 12시간 후 정전이 이뤄지게 됐다. 정전 명령은 남쪽에서는 클라크의 이름으로, 북쪽에서는 김일성과 펑더화이의 이름으로 내려졌다. 292)


정전 이후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리승엽 등 북한의 남로당계 인사들에 대한 재판이다. 8월 3일부터 시작된 재판은 신속히 진행돼 8월 6일에 벌써 판결이 나왔다. 리승엽, 조일명, 임화, 박승원, 이강국, 배철, 백형복白亨福, 조용복趙鏞福, 맹종호, 설정식薛貞植 등 10명에게 사형, 윤순달, 이원조에게 각각 징역 15년과 12년이 선고됐다. “반당·반국가 파괴분자”로 단죄를 받고 당에서 제명된 사람은 주영하, 장시우, 박헌영, 김오성(金午星, 전 문화선전성 부상), 안기성安基成, 김광수(金光洙, 경공업성 부상), 김응빈(전 금강정치학원 원장), 권오직 등 8명이다. 그 밖에 남로당계 중앙위원 구재수具在洙, 이천진李天鎭, 조복례趙福礼, 이주상李周祥 등 4명이 해임됐다. 15명의 중앙상임위원회 위원이 선정됐고 김일성, 김두봉, 박정애, 박창옥, 김일 등 5명으로 중앙정치위원회가 구성됐다. 김일성이 위원장이 됐고 박정애, 박창옥, 김일이 부위원장이 됐다. 김일성은 정부, 군, 당을 완전히 장악했다. 297-8)


정전협정에 따르면, 군사분계선에서 남북으로 2킬로미터의 비무장지대DMZ를 설치하고 이곳을 군사정전위원회가 관리하기로 했다. 정전협정은 제4조에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해 양측 군 사령관은 양측 관계 각국 정부에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발효된 후 3개월 이내에 각각 임명된 대표에 의해 더 높은 수준의 양측 정치회의를 개최하고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 군대를 철수하는 문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 제반 문제를 협상을 통해 해결할 것”을 규정했다. 또한 제5조의 62항에서는 “이 정전협정의 조항은 상호 수용할 수 있는 수정과 추가 또는 양측 간의 정치적 수준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적절한 협정 규정에 따라 명확히 정지될 때까지는 계속해서 효력을 갖는다”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정치회의에서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적절한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이 체결되지 않는 한 정전 체제가 계속되는 것이었다. 301)


제8장. 한국전쟁 후 동북아시아


북한도, 남한도 통일을 위해 전쟁을 했으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거의 원래의 분할선인 38선 부근에서 전쟁이 중단됐다. 군사분계선은 서부에서는 38선 아래로 내려가 개성 지구, 옹진반도 등이 북측에 포함됐다. 동부에서는 38선 위로 올라가 철원군의 남쪽 반, 양구군, 인제군, 고성군 등이 남측에 들어갔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은 거의 같다고 해도 좋다. 전쟁이 남긴 것은 파괴의 상처는 한반도 전역을 뒤덮었지만, 미국에게 공중 폭격을 당한 북한의 피해는 더 엄청났다. 평양은 모든 것이 파괴되어 전쟁 전의 기억을 더듬을 만한 단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폐허에서 되살아난 도시는 과거로부터 완전히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사망자 수는 정확히는 모른다. 남북 합해서 300만~40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1931년 만주 침략부터 1945년 패전까지 발생한 일본의 사망자 수 300만 명을 넘는 수치다. 1949년 6월 1일 남북의 총인구가 2,865만 명이었으니, 사망자는 10%가 넘는다. 304)


정통성을 다투는 두 국가의 분열과 대립은 더욱 격렬해졌다. 통일을 위한 전쟁이 실패한 결과, 통일은 한없이 멀어진 것으로 보였다. 미국은 한미상호안보조약을 맺고 한국의 안보를 책임지겠다고 밝혔다. 미군은 한국에 주둔했고, 미군 사령관은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한국군의 지휘권도 가졌다. 거기에는 18개 사단 63만 명의 병력을 가진 한국군의 북진을 억제하려는 의도도 작용했다. 북한은 많은 인구를 잃었고 국토는 완전히 파괴됐기에 재건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지금까지의 사회와 문화 전통이 파괴됐고 사회주의화를 기조로 한 개혁이 철저히 진행됐다. 중국인민지원군도 북한에 머물렀으나 1958년 3차례에 걸쳐 25만 명이 완전히 철수했다. 북한은 1961년 중국과 상호 방위 협력을 약속하는 북중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다. 소련도, 중국도 또다시 북한이 남진하는 것을 인정할 생각이 없었고 북한은 남진할 능력이 없었다. 북한의 병력은 이후 오랫동안 한국군을 훨씬 밑돌았다. 305)


피에르파올리는 한국전쟁이 미국 국가와 사회에 미친 영향을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학자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대외 정책에서 한국전쟁의 충격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대평가되지 않는다. …… 한국전쟁 이전에는 IMF, 마셜 플랜Marshall Plan, GATT, NATO조차 소련에 대한 군사적 봉쇄보다 경제적, 정치적 봉쇄를 중시했다. 북한의 침입 쇼크와 미국의 한반도 개입 결단은 봉쇄의 군사화로 이어졌고,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는 에피소드 식이라도 지속적인 군사화를 가져왔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와 베트남 사태에 결정적으로 개입하게 됐다.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에 대한 군사적 개입도 시작됐다. 1949년 4월 미국은 캐나다, 유럽의 10개국과 함께 북대서양조약에 조인하고 NATO를 만들고 있었다. 서독의 재군비를 촉구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피에르파올리는 한국전쟁이 불러온 공포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던 서독의 재군비, NATO 가입이 가능해졌다고 지적했다. 305-6)


한국전쟁은 말 그대로 스탈린의 전쟁이었다. 스탈린은 크렘린 안에서 한국전쟁 총감독을 맡았다. 그의 지휘하에 소련은 북한군과 중국군에게 대금 지불은 일정 기간 뒤로 미룬 채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는 후방 기지, 병기 생산 공장이 됐다. 게다가 소련 공군은 한반도 상공에서 직접 미국 공군과 전쟁을 했다. 하늘의 전쟁은 전무후무한 미소의 전쟁이었다. 또한 소련은 유럽에서 강해지고 있는 NATO에 맞서 동유럽 국가에 대한 군사 원조, 무기 제공, 소련군 배치에도 새로운 노력을 기울였다. 소련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을 통해 완전히 적을 의식하고, 감지하고, 결정적인 전쟁을 예감하고, 그야말로 완전히 무장한 군사 국가로 변모했다. 다만 이 전쟁은 스탈린의 전쟁, 그 자신의 반미 전쟁이었다. 정권 구성원들, 심지어 국민도 거기서 소외됐다. 이는 스탈린이 정권 구성원 대부분과 대립하고 국민과도 거리를 두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전 전날 밤 스탈린이 사망하자 후계자들은 평화 공존 정책으로 전환했다. 307-9)


미국과 중국의 전쟁은 양국의 “군사, 정치, 경제, 외교의 전면적인 힘겨루기”였는데, 무승부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막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에는 희생이 큰 전쟁이었지만, 미국과 대등하게 싸운 혁명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완전한 위상을 확립했다. 그리고 미군과 싸운 중국인민지원군은 “현대전 단련”을 받아 현대전을 치를 수 있는 정규군으로 성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전쟁에서 많은 것을 얻은 예외적인 승리자였다고 할 수 있다. 내부적으로 중국은 한국전쟁 때의 총력전 경험을 바탕으로 1953년부터 1957년까지 제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농업 협동화 등 소련형 사회주의 변혁을 추진해 국가사회주의 토대를 마련했다.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미국이 타이완해협에 군사적으로 개입한 결과, 중국은 타이완을 무력으로 해방시키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관심이 집중된 사이에 티베트에 군대를 파병했고, 1951년 9월에는 힘을 사용해 티베트를 자치구로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309)


패전 후 일본 국민의 반전, 반군 감정은 강했고 헌법 9조 규정과는 친화적이었다. 그러나 비무장 일본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연합국의 중심인 미국이 중국과 옛 식민지 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인 사태는 헌법 9조의 현실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시다 총리는 국민 정서를 중시해 전쟁 협력을 주체적으로는 하지 않고, 미 점령군의 명령에는 무제한으로 따른다는 방침에 따라 전 국토를 미군 기지로 제공했다. 그리고 일본은 경무장만 하고, 미일안전보장조약을 맺어 미군에 기지를 제공한 대가로 안전보장을 확보한다는 새로운 평화 국가의 길을 선택했다. 혁신 세력은 국민의 심정을 대변해 헌법 9조를 옹호하고 적극적인 전쟁 협력과 재군비에는 반대했다. 그리고 소련과 중국이 빠진 강화 및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반대했다. 요시다 정부와 혁신적 반대파의 독특한 결합으로 자위 재군비 노선은 배제되고 헌법 9조, 경무장, 미일안보조약이라는 삼위일체 체제가 확립됐다.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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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의 설계자들 - 1945년 스탈린과 트루먼, 그리고 일본의 항복 메디치 WEA 총서 8
하세가와 쓰요시 지음, 한승동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머리말 최후를 향한 경쟁


이 책은 태평양전쟁 종결 문제를 미국, 일본, 소련의 3국 관계라는 국제적인 관점에서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것은 서로 연관된 세 가지 서브플롯sub plot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대일對日전쟁을 수행하면서 전개된 스탈린과 트루먼 간의 복잡한 각축이다. 스탈린과 트루먼의 관계는 상호 불신감에 의해 좌우됐다. 양쪽 모두 상대가 얄타밀약을 파기하지 않을까 하는 지독한 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두 번째 서브플롯은 뒤엉킨 일본과 소련 간의 관계 검증이다. 종전에 이르기까지 몇 개월간, 일본 정부는 필사적으로 소련이 중립적 지위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고, 또 그 바탕 위에서 소련의 중재를 통한 전쟁종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소련은 일본 정부의 이런 접근을 이용해 몰래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세 번째 서브플롯은, 일본 정부 내의 화평파와 계전파 사이의 목숨을 건 각축이다. 두 파 간 싸움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국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17-8)


1장 암투의 서막: 3국 관계와 태평양전쟁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소련, 미국 세 나라는 기묘한 삼각구도를 이루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소련의 중립이 필요했다. 소련도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 전력을 다하려면 일본의 중립이 필요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소련의 관계는 역사가 조지 알렉산더 렌센George Alexander Lensen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기묘한 중립’이었다. 소련은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과 전쟁 상태에 있었고 일본은 소련의 동맹국이면서 독일의 적인 미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의 상선을 이용해 무기대여법에 근거한 무기와 전쟁물자를 태평양을 경유해 수송하고 있었다. 그 무기의 일부는 소련을 통해 중국으로 운반됐다. 일본을 공습한 미국의 많은 비행사가 소련 영토로 몸을 피했다. 일본과 소련 사이에 존재한 중립은 따라서 취약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양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하는 한도 내에서 준수됐으나 그 필요성이 사라지면 바로 파기될 운명이었다. 34-5)


1943년 10월은 태평양전쟁에서 미국과 소련의 협력이 전환점을 맞은 시점이다. 10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외무장관회의는 유럽의 제2전선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는데, 그 회의에서 소련이 처음으로 태평양전쟁에 참가하겠다는 뜻을 암시한 것은 아시아에서 진행되고 있던 전쟁의 귀추와 관련해서도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헐 국무장관은 스탈린이 “동맹국이 독일을 패배시킨 뒤 소련은 일본을 패배시키기 위해 대일 전쟁에 참가하겠다는 뜻을 명확하게, 아무 망설임도 없이” 약속했다며 희희낙락했다. 모스크바 외무장관회의가 끝나자 연합국은 상호협력을 다짐하는 4개국 모스크바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 제5절은 연합국이 서로 협력해서 회원국들과 함께 안전보장의 새로운 시스템이 구축될 때까지 필요에 따라 “회원국 국가들의 이름으로 공동행동을 한다”는 것을 명기했다. 이 조항은 1945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미소 사이에 중요한 쟁점이 된다. 39-40)


1941년 12월의 로좁스키 보고, 1944년 1월의 마이스키 보고, 1944년 7월의 말리크 보고에는 소련의 대일 정책에 관한 공통된 논리가 관철돼 있다. 그것은 안전보장상의 필요성에서 소련이 태평양으로의 출구를 확보하는 것이 제1의 목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남사할린의 반환과 쿠릴열도 점거가 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이들 보고서에서 소련의 영토 요구 원칙은 역사상의 정당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련의 안전보장상의 요청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스탈린 또한 소련의 영토 요구는 역사적 정당성이 아니라 안전보장상의 요청에 따라야 한다는 외교인민위원회 고관의 의견에 찬동했다. 하지만 그는 전쟁을 회피하는 게 유리하다는 의견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이 시의심 가득찬 독재자는 그 영토들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평화조약을 통한 연합국의 동의에 기대는 건 위험하며 무력으로 점거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42)


전쟁은 연합국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스탈린은 참전을 미끼로 동맹국으로부터 얼마나 유리한 조건을 끌어낼 것인지를 궁리하고 있었으며, 미국의 대일 전쟁 작전이 마침내 확정돼가고 있던 그때 일본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도조의 실각은 종전을 모색하는 극비계획의 개시와 때를 같이했다. 8월 말에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은 발병을 구실 삼아 해군성 교육국장 자리에 있던 심복 다카기 소키치 해군소장을 한직인 군령부 출사出仕 겸 해군대학교 연구부 부원으로 강등했다. 해당 조치의 진짜 노림수는 다카기에게 전쟁종결 극비계획을 세우도록 하는 데 있었다. 다카기는 육군성의 마쓰타니 세이松谷誠 대령, 기도 내대신의 비서인 마쓰다이라 야스마사松平康昌, 시게미쓰 외상의 비서관이던 가세 도시카즈加瀨俊一와 긴밀히 연락하면서 종전 공작 입안에 착수했다. 다카기 그룹은 종전으로 가는 유일한 방안은, 최종적으로는 천황의 칙령에 의한 종전 결단을 군과 정부에 강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44)


일본이 종전을 받아들이기 위한 구체적인 조건으로 다카기는 “황실의 안태安泰와 국체의 호지護持”를 가장 중대한 조건으로 들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카기가 ‘황실의 안태’와 ‘국체의 호지’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는 점이다. 황실의 안태가 국체의 호지와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종전 마지막 단계에서 큰 쟁점이 된다는 점을 여기서 유의해야 한다. 다른 조건으로는 민주주의의 실시와 군벌정치 청산, 내정불간섭, 국민의 경제적 생존 보장, 비점령, 전쟁범죄자의 자주적 처리, 동아시아 국가들의 독립 등을 들었다. 다카기는 민주주의의 도입이 국체에 저촉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카기 소키치는 아직 소수이고 또 정리된 주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전쟁종결을 바라는, 잠재적으로는 중요한 그룹을 대표했다. 다카기는 그 단계에서는 국체를 유지하는 최선의 길이 미국과의 교섭에 있다고 믿었다. 일본의 화평론자와 그루로 대표되는 미국의 일본 전문가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46)


얄타에서 3거두회담이 열리고 있던 1945년 2월 14일, 고노에는 천황을 배알하고 상주했다. 고노에는 상주문에서 느닷없이 처음부터 “패전은 유감이지만 아주 빠른 시일 안에 맞게 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아룁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패전은 우리 국체에 손실을 가져다줄 것인데, 영국, 미국의 여론은 아직 국체의 변혁까지 요구하진 않고 있습니다. ··· 따라서 패전 그 자체는 국체상 걱정하실 필요는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체호지 원칙보다 가장 걱정해야 할 일은 패전보다도 패전에 이어 일어날 수 있는 공산혁명입니다.” 고노에는 또 소련이 유럽에서 친소정권 수립을 꾀하고 있는데, 이런 기도가 아시아에서도 추진될 게 분명하며 “소련이 곧 일본의 재생(재건)에 간섭해올 위험이 크다”고 논하면서 좌익분자와 군부 내의 혁신운동이 결합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군을 숙청하고 화평 조건을 다진 뒤 영국, 미국과 교섭해서 전쟁종결을 추진하면서 국체 유지를 꾀한다는 게 고노에의 생각이었다. 53)


2장 새로운 과제: 종전을 향한 공방이 시작되다


1945년 4월 5일 모스크바에서는 몰로토프가 사토 대사에게 소련은 중립조약을 이행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통고했다. 소련 정부는 중립조약에 속박당하지 않고 일본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조약을 즉시 그 자리에서 파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제3조는 조약 기한이 끝나기 1년 전에 한쪽이 다른 쪽에 조약 파기 통고를 하더라도 조약은 만기가 될 때까지 유효하다고 명기돼 있었다. 게다가 조약 파기를 통고한다면 일본이 소련의 의도를 알게 돼 소련에 대해 선제공격을 가해올 위험마저 있었다. 따라서 소련 정부는 파기 통고를 하더라도 일본이 여전히 조약이 유효하다고 믿게 만들어야 했다. 사토 대사는 조약의 제3조 규정을 인용하면서 5년간의 유효기간이 만기가 될 때까지 조약은 유효하다고 응수했다. 대사의 역습에 몰로토프는  앞서 밝힌 입장을 “오해가 있었다”며 뒤집고는, 소련 정부도 제3조에 비춰 조약이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언명했다. 몰로토프는 잠시 ‘전략적 기만’ 방책을 구사했던 것이다. 63-4)


사토는 소련이 “중립조약을 폐기하고 곧바로 대일전에 가담하겠다는 결의를 갖고 있지 않는 한, 단순한 조약 파기는 하나의 ‘제스처’에 그칠 뿐” 미국과 영국은 그로부터 아무런 실질적인 이득도 보지 못하며, 유럽의 분쟁에서 소련이 자기주장을 밀어붙인다면 처음의 우호적 만족감이 실망으로 바뀌어 삼국 간에 마찰을 증대시킬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토는 몰로토프의 발언으로 보건대, 현 상황에서 소련이 대일 관계 단절, 또는 대일 선전포고까지 몰고 가는 일은 없을 것으로 예측했다. 사토 대사가 중립조약 파기 통고 뒤 바로 상신한 분석은 그 뒤 외무성 대소 정책의 골간을 짜는 토대가 됐다. 그것은 소련과 미국, 영국 사이에는 근본적인 이해의 대립이 있고, 그 대립은 소련이 대일 관계를 단절하고 선전포고를 하는 데까지 돌진하지 않는 한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따라서 극동에서도 소련과 미국, 영국 간의 이해 대립을 이용해서 소련의 중립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65-6)


일본의 화평파가 겁을 내면서 전쟁종결 가능성을 찾고 있을 때, 무조건 항복은 재검토돼야 한다는 의견이 트루먼 정권의 최고지도자들 사이에서 제기됐다. 그 선두에 선 이는 포레스털 해군장관이었다. 5월 8일, 예순한 살 생일날 트루먼은 독일 항복 보고를 받았다.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어 독일에 대한 전승을 축하하는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 마지막 부분에 극동에서의 전쟁에 관한 언급이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무조건 항복’에 “육해군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이다. 둘째는 ‘무조건 항복’은 일본 민족의 섬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 위정자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천황제에 대해 트루먼 성명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일본 위정자들은 예민하게도 그 차이에 주목하긴 했지만, 트루먼 성명에 대해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성명에서는 국체와 천황의 지위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88-90)


그루는 무조건 항복을 수정하자는 캠페인을 집요하게 벌였다. 5월 28일, 그루는 일본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면서 “전쟁 목적에 맞는 근본적인 원칙은 아무것도 희생해선 안 된다는 것”이며, 특히 “일본의 전쟁 수단을 파괴하고, 일본이 다시 이런 수단을 생산할 능력을 파괴한다”는 미국의 목적이 관철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은 최후의 한 사람마저 없어질 때까지 싸움을 계속할 광신적인 민족이다. 따라서 “우리의 원칙과 목적을 어떤 형태로도 희생하지 말고, 일본이 무조건 항복 조건을 받아들여 쉽게 항복하도록 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고 그는 탄원했다. 그루는 천황제의 유지가 아니라 일본인이 선택하는 정치체제를 허용하라고 주장했다. 그는 히로히토를 포함한 천황은 800년에 걸쳐 실제로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며 지금의 천황은 물론 미국에 대해 선전을 포고했으니 책임을 면할 수 없지만, 군의 지배자가 제거된다면 황위를 유지하는 제도는 평화적 일본을 건설하기 위한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100)


스탈린에겐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이 보였다. 무서운 속도로 대일본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사이에 미국한테서는 얄타조약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게다가 미국과 소련이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다는 공통의 방침을 확인하고, 쌍방이 예정돼 있는 3거두회담에서 일본에 대한 공동의 최후통첩에 대해 합의한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스탈린에게는 단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전쟁이 소련이 참가할 때까지 계속될 것인가 하는 우려였다. 스탈린은 나아가 일본이 소련의 참전 전에 항복해버릴지도 모른다며 걱정했다. 미국에 무조건 항복 요구를 관철하도록 장려한 것도 소련이 대일 전쟁 준비를 완료할 때까지 일본이 전쟁을 계속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동시에 일본이 소련의 참전을 막을 수 있다고 믿도록 일본을 속이려 했다. 스탈린은 일본 쪽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104)


3장 결정의 시간: 전쟁의 길과 평화의 길


6월 초부터 7월 중순까지 1개월 반은 이른바 결정의 시기였다. 도쿄에서는 오키나와의 패전 뒤 화평파가 마침내 소련을 통해 전쟁을 종결할 구체적인 조치를 취했다. 모스크바에서는 국가보안위원회(KGB)와 정치국이 일본과 전쟁을 벌인다는 결정을 내렸다. 워싱턴에서는 태평양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여러 기관이 각기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잠정위원회는 일본에 대해 원폭을 투하하기로 결정했고, 대통령은 일본 본토상륙 작전을 승인했으며, 국무부와 육군부, 해군부 대표자로 구성된 합동위원회는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 원안을 작성했다. 6월 6일, 스팀슨은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최초의 원폭이 일본에 투하될 때까지 소련에는 어떤 정보도 주지 말 것, 그 뒤에는 소련 쪽의 정치적 양보를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이 정보를 주어야 한다고 트루먼에게 조언했다. 트루먼은 자신도 완전히 같은 생각이라면서, 특히 “이것은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만주 문제의 해결에 적합하다”고 대답했다. 109-10)


일본의 화평파가 소련의 알선에 의한 종전 공작을 비밀리에 모색하기로 결정하고 있을 무렵, 트루먼 정권 내부의 유력한 정책결정자들은 일본 내부의 온건파가 조기 종전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무조건 항복 요구를 어떻게든 수정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6월 16일, 그루는 대통령에게 보낸 각서에서 “천황의 지위 보장과 천황 히로히토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게 하겠다는 것, 그것이 일본이 양보할 수 없는 조건일 것”이라고 설명하고, 이런 조건을 명확하게 해서 무조건 항복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 한 일본이 전쟁을 끝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루먼이 무조건 항복 내용을 명확히 밝히자는 권고를 꺼리면서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았던 이유는 대통령 자신에게 진주만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미국의 희생을 최소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요청도 고려해야만 했다. 이 두 가지 요청 사이에서 트루먼은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119-20)


한편, 천황은 어전회의에서 채택된 ‘기본대강’의 결론(본토 결전)과 시시각각 악화되는 전쟁 판세 사이의 모순에 고통스러워했다. 6월 9일 오전, 천황은 만주를 시찰하고 돌아온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의 상주上奏를 받았다. 우메즈의 보고는 만주, 중국에 있는 병력이 여덟 개 사단밖에 안 되고 탄약 보유량은 대회전 1회분 정도밖에 없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천황은 내지(본토)의 부대는 관동군보다 훨씬 더 열악하기 때문에 싸울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같은 날, 기도는 “명예 있는 강화講和”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시안’을 천황에게 설명했다. 천황은 이를 승인하고 즉각 착수하라고 명했다. 6월 12일 국내의 군관구, 부대, 병기창 등을 시찰하고 귀경한 하세가와 기요시 해군대장은 조악한 무기, 무기 부족, 병사들의 훈련 부족을 기탄없이 지적했다. 하세가와 보고는 마침내 천황에게 본토결전을 단념하게 만든 최초의 사인이 됐다. 천황은 ‘일격화평론’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123)


6월 22일, 최고위 여섯 명은 천황을 배알하기 위해 황거로 갔다. 전례 없는 일이었지만 그 어전회의는 의제가 사전에 제시돼 있지 않았다. 천황은 앞선 어전회의의 결정에 따라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시국 수습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했다. 우메즈, 하세가와의 보고를 들은 천황이 화평으로 기울었음을 시사하는 발언이었다.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천황이 직접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소련의 알선을 통해 전쟁종결을 꾀한다는 안이 최고위 여섯 명의 승인을 얻은 뒤 천황은 그 결정을 신속하게 실행에 옮기라고 얘기하고 어소로 들어갔다. 6월 8일에는 전쟁을 끝까지 계속하기로 결정해놓고 6월 22일에는 소련을 중개자로 세워 전쟁종결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화평파는 이제 일본이 종전을 향한 결정적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해석했다. 요나이는 다카기에게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앞으로 2·26사건과 같은 군의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127-8)


일본은 소련의 중개를 통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가세 도시카즈에 따르면, 소련에 대한 접근은 미국, 영국과 교섭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미국, 영국과의 직접 교섭은 군부의 반대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으므로 우회로가 필요했다. 전후의 회고록에서 가세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 또는 그에 가까운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기도가 소련을 통해서 좀 더 “명예로운 평화”를 얻어내려 한 것은 애초에 없는 것을 달라고 생떼를 쓴 거나 같다고 했다. 사토는 가세와는 달리 소련과의 교섭으로는 어떤 긍정적인 결과도 얻어낼 게 없다면서 모스크바에 접근하는 것 자체에 반대했다. 그래도 사토와 가세는 나았다. 도고, 기도, 그리고 천황 자신은 모스크바의 알선을 통해 일본은 무조건 항복 이외의 더 나은 조건, 특히 천황제를 어떻게든 잔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기도 시안의 핵심이기도 했다. 실로 모스크바의 알선은 일본의 위정자들에게 가혹한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게 해준 아편이었다. 132-3)


6월 하순은 소련에도 결정적인 시기였다. 6월 26일과 27일 이틀간 소련공산당 정치국, 정부, 군의 합동회의가 열려 만주의 일본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8월에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참모본부는 3개 전선이 동시에 만주 중부를 겨냥해서 침공하는 작전을 제안했고, 이 작전이 채택됐다. 대일 참전은 이미 스탈린과 스탈린 주변의 소수 지도자들만이 아는 비밀이 아니라 소련 정부, 공산당, 군의 정식 방침으로 승인받았던 것이다. 그 회의에서 군사행동의 작전 범위가 토의됐다. 소련 군사작전의 최대 목적은 얄타밀약에서 약속받은 영토, 즉 만주, 남사할린, 쿠릴열도를 점거하는 데 있었다. 나아가 북부 조선의 점거는 일본군의 도주로를 봉쇄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간주됐다.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렙스키 원수는 국가방위인민위원회 부위원 바실레프 소장이라는 가짜 이름으로 7월 5일에 (러시아 남동부) 치타에 도착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극동의 거대한 전쟁 기계가 작동하려 하고 있었다. 138-9)


4장 전쟁의 분기점: 포츠담에 모인 세 정상


7월 17일의 스탈린-트루먼 회담 내용을 보면 트루먼에게 소련의 참전은 전쟁을 종결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는 아니었고, 오히려 일종의 보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트루먼이 스탈린의 제안을 다이너마이트로 보고, 이에 대해 자신도 다이너마이트를 갖고 있다고 얘기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트루먼은 스탈린을 맹우盟友로서 대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항복이라는 목표에 누가 먼저 도달하는지를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소련이 일본을 8월 중반에 공격할 의도를 트루먼이 환영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스탈린은 도쿄와 모스크바 사이에는 어떤 거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미국과 중국을 앞질러 일본과 소련이 뒷거래를 할 가능성을 부정했다. 이는 트루먼과 번스가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바이기도 하다. 외교 요소가 배제됨으로써 문제는 간단해졌다. 8월 15일이라는, 스탈린이 얘기한 공격 일시는 미국의 정책결정자에게 하나의 확실한 시간을 제시한 셈이 됐다. 164)


만일 소련이 전쟁을 개시하기 전에 일본을 항복시킬 필요가 있다면 공격은 그 전에 이뤄져야 한다. 유일한 불확정적 요소는 원폭이었다. 트루먼에겐 원폭을 대소 외교의 무기로 사용할 의도는 없었다는 역사가의 주장이 있지만, 거꾸로 소련 요소가 트루먼의 원폭투하 결정과 무관했다고 논하기는 지극히 곤란하다. 소련의 전쟁 개시 일시를 알았던 트루먼은 소련이 전쟁에 참가하기 전인 8월 초에 원폭을 투하하는 것이 지상명령이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스탈린은 트루먼과의 첫 회담에서 소련 참전 계획을 털어놨을까? 가장 개연성이 큰 답은, 스탈린이 너무 서두르고 있었다는 해석이다. 스탈린은 미국, 영국으로부터 전쟁에 참가해달라는 권유를 받아내야만 했다. 스탈린은 얄타에서 루스벨트가 그랬던 것처럼 포츠담에 온 트루먼도 소련의 참전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행동했다. 그는 트루먼이 소련의 참전을 되도록 막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164-5)


원폭은 일본에 대해 8월 첫 주에 실전에 사용될 것이었다. 트루먼은 소련이 8월 중순에 전쟁을 개시할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으므로 원폭은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투하해야 한다. 하지만 트루먼은 원폭을 투하하기 전에 일본에 대해 최후통첩을 ‘발사’해야만 했다. 그 시기는 7월 25일부터 8월 1일까지의 짧은 시간이었다. 트루먼이 “빠르게 진행된 일정에 몹시 기뻐했다”는 것도 그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 배경에는 타이밍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며, 모든 것이 트루먼과 번스가 작성한 시간표대로 움직였다. 일본이 포츠담선언이라는 형태로 발표된 최후통첩을 거부했기 때문에 트루먼이 어쩔 수 없이 원폭투하를 결정했다는 설이 있다. 이는 전후에 트루먼과 스팀슨 자신들이 주장해서 미국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이지만 역사적 사실에 반하는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원폭투하 결정은 포츠담선언이 발표되기 이전에 이뤄졌으며, 오히려 포츠담선언이 원폭투하를 정당화하기 위해 발표됐다. 180-1)


7월 24일, 트루먼은 포츠담선언의 최종적인 원문을 승인하면서 이를 헐리 대사에게 전보로 보내 일각도 지체하지 말고 장제스의 서명을 받도록 훈령을 내렸다. 처칠은 25일 런던을 출발하기 전에 이미 트루먼에게 승인하겠다고 했다. 26일 저녁 트루먼은 장제스의 승인을 받았다. 오후 7시에 “모든 일본 군대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으나 천황의 운명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포츠담선언 사본이 기자단에 전달됐다. 포츠담선언이 발표될 때까지 소련은 이를 까맣게 몰랐다. 일본 정부는 포츠담선언에 스탈린의 서명이 없다는 사실에 맨 먼저 주목했다. 그 때문에 일본 정부는 포츠담선언을 수락해서 항복하기보다 소련의 중개를 통해 전쟁을 종결하겠다는 종래의 정책을 지속했다. 스탈린이 필사적으로 공동선언에 참가하려던 시도는 비참한 실패로 끝났으나, 그 실패가 오히려 일본이 한층 더 소련의 알선을 믿고 의지하는 정책을 계속하게 만든, 굴러온 호박과 같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189-91)


7월 2일에 시작돼 포츠담회담 직전까지 계속 이어졌음에도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포츠담회담 뒤에 재개된 중소 교섭은 미소 양국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7월 23일 트루먼은 헐리 대사를 통해 장제스에게 “얄타밀약의 이행”을 권고했다. 7월 28일에는 중국이 얄타밀약에서 결정된 조항에서 벗어나는 조약을 체결하려는 데에 대해 경고했다. 트루먼과 번스의 중국 정부에 대한 집요한 압력은 얼핏 보기엔 두 사람이 얄타밀약에 집착했다는 쪽으로 해석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얄타밀약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이에 저항하려는 중국 정부에 억지로 합의하도록 강요한 배후에는 트루먼과 번스의 숨겨진 동기가 있었다. 트루먼과 번스는 중국 정부가 완강하게 얄타조약의 중국 관련 조항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중소의 의견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해 트루먼과 번스는 중소 교섭을 재개하게 해서 시간을 벌면서 원폭이 투하될 때까지 소련의 참전을 늦추는 책략을 꾸몄던 것이다. 204-6)


5장 원자폭탄과 소련의 참전


8월 7일의 <프라우다>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에 대해 아무것도 보도하지 않았다. 8월 8일에 비로소 4면 마지막 단에 트루먼의 성명을 논평을 붙여서 소개했다. <프라우다>의 침묵은 소련의 지도자가 원폭투하 소식에 충격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미국의 원폭투하는 소련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됐다. 먼저 그것은 소련의 참전 이전에 소련을 빼놓고 일본을 항복케 하려는 의도라고 스탈린은 해석했다. 다음에 그것은 원폭이라는 무서운 채찍을 손에 들고 소련을 외교정책으로 굴복시키려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원폭투하 뉴스를 들은 스탈린은 곧 행동을 개시했다. 먼저 스탈린은 바실렙스키에게 공격 개시 일시를 48시간 앞당겨 8월 9일 0시(자바이칼 시간, 모스크바 시간으로는 8월 8일 오후 6시)로 설정하라고 명령했다. 스탈린은 또 7일 오후 10시에 중국 대표단과의 교섭을 시작할 것이라고 통고했다. 중국 대표단은 도착 뒤 첫 회담까지 겨우 몇 시간의 여유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서두르고 있었다. 225-6)


8월 7일의 스탈린-쑹쯔원 교섭은 스탈린의 대일 접근에서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외몽고, 뤼순, 다롄에서의 특별한 권익을 스탈린이 집요하게 주장한 이유는 일본이 전쟁 뒤 다시 일어나 소련에 위협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대가는 당연히 소련에 주어져야 하는 것인데, 다만 얄타조약에서 정한 중국과의 조약 체결이라는 선결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그 대가를 희생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스탈린은 소련이 만주에 진격하더라도 미국과 중국은 그 행동을 얄타조약에 대한 위반이라고 항의하진 않을 것이라고 최종적으로 판단했다. 미국과 중국은 소련의 만주 공격을 탓하다가는 소련이 국민당 정부를 중국 유일의 정통 정부로 지지하는 자세를 바꿔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소련이 만주 깊숙이 공격해 들어간다 하더라도 미국도, 중국도 이를 탓하지 못하고 결국 소련의 군사행동을 승인할 것이라 생각한 스탈린의 판단은 정확했다. 228)


8월 9일 이른 아침, 외무성의 수뇌 4인(도고, 마쓰모토, 안도, 시부사와)은 아자부 히로오에 있는 도고의 사택에 모였다. 외무성 수뇌는 즉각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전쟁을 종결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데에 동의했다. 그리고 포츠담선언 수락에 대해서는 황실의 안태라는 단 하나의 조건만을 내걸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천황에 대한 연합국의 반감을 고려해서 이 조건을 조건으로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포츠담선언 수락은 황실의 지위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이해 아래”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기로 했다. 도고가 포츠담선언 수락으로 전쟁을 종결하려고 여러 방면으로 사전 조정을 하고 있을 때, 천황도 종전의 때가 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날 일본 지도자들의 행동을 보면 소련 참전이 화평파에 미친 영향은 원폭의 영향보다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이 참전하고 나서 비로소 화평파 지도자들은 포츠담선언 수락을 기초로 해서 전쟁을 종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236-8)


8월 9일 오전 11시 2분(일본 시간)에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황거 내 어문고에서 오후 4시 35분부터 5시 20분까지 진행된 기도와 천황의 회담은 일본이 항복 쪽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과정에서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진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천황이 오후 3시가 지날 때까지는 포츠담선언 수락에 네 가지 조건을 붙이는 쪽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이 회담 뒤에 한 가지 조건으로 의견을 바꾼 사실은 분명하다. 증거는 없으나 기도가 세 가지 조건을 철회하고 한 가지 조건만으로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자고 제안한 것에 대해 천황이 저항 의향을 표시했을 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 또 천황이 실제로 정책을 결정하는 ‘성단’에 의한 종전 방식에 주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천황은 시게미쓰와 기도가 주장하는 논리에 동의했다. 아마도 그 방식이야말로 국체를 호지할 유일한 수단임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249)


# 네 가지 조건 : 천황제, 무장해제, 전쟁범죄자, 보장점령(휴전이나 항복 조건의 이행을 강제하기 위해 상대국의 영토 일부 혹은 전부를 점령하는 것. 포츠담선언 7항에 일본 영토의 보장점령에 관한 조항이 있다.)


어전회의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곧바로 회의를 최고전쟁지도회의로 바꿔 열고 천황의 성단을 승인하는 결의를 했다. 천황은 자신의 의사를 정부가 받아들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10일 오전 3시에 각의가 다시 열렸고, 천황의 성단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때 아나미는 스즈키와 요나이에게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그 조건이란, 만일 연합국이 천황의 국가통치 대권을 인정하는 조건을 거부한다면 그들도 전쟁 계속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 조건이 국체의 호지와 밀접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스즈키와 요나이는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들 자신이 광의의 국체 정의를 인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메즈는 오전 3시에 참모본부로 돌아가 가와베에게 어전회의 결과를 알려주었다. 천황의 군에 대한 공격은 우메즈와 가와베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천황이 군을 버린 것이다. 전날의 의기충천한 기술과는 대조적으로 이날의 가와베는 일기에 “오호, 만사휴의”라고 썼다. 258)


# 만사휴의萬事休矣, 모든 일이 끝났다는 뜻으로 가망 없는 절망을 가리키는 표현.


6장 일본의 무조건 항복 수락


8월 10일 오전 7시 30분, 미국의 단파방송은 <도메이 통신>으로부터 모스 부호를 수신했다. 이는 일본 정부의 정식 회답은 아니었지만 트루먼이 원폭투하일로부터 애타게 기다리던 정보였다. 번스는 벤저민 코언, 두먼, 밸런타인과 함께 일본 정부에 보낼 회답 초안을 작성했다. 밸런타인과 두먼은 항복문서에 천황의 서명이 필요하다는 원안에 반대했으나 번스는 그 반대의견을 거부했다. 대통령은 일본의 조건부 회답에 대해 그것은 천황이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교묘한 속임수라면서 어떤 양보도 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번스 회답의 주요한 내용은 1항과 4항에 담겨 있었다. 1항은 “항복한 때로부터 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 권한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에 종속된다”고 돼 있었고, 4항은 “궁극적인 일본의 국가체제는 일본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한 의사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라고 돼 있었다. 번스 회답은 천황의 지위 유지를 배제하지 않았으나 천황과 황실의 운명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263, 266-7)


미소의 일본 점령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소련에 보낸 번스 회답은 “항복한 때로부터 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 권한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에게 종속된다”고 규정했다. “연합국 최고사령관”이라는 명칭은 잘 선택된 표현이었다. 포레스털에 따르면, “대통령과 국무장관은 미국이 이 특별한 과제를 자기 손에 쥐고, 독일에서 우리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공동책임이라는 형태를 명확하게 피하기 위해 ‘최고사령부’가 아니라 ‘최고사령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소련 정부는 연합국 최고사령관에 복수의 사령관을 임명하자고 제안하면서, 미국 정부의 의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해리먼은 곧바로 그 제안은 “완전히 논외의 문제”라며 일축했다. 이후 페트로프는 스탈린이 몰로토프의 제안에 들어 있던 “합의한다”는 표현을 “협의한다”로 바꾸고 싶다고 전했다. 해리먼은 이 수정안도 단호하게 거부했다. 소련 정부는 물러섰다. 번스 회답은 영국, 중국, 소련의 승인을 받았다. 273-4)


두 번째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국내 사정과 세계 현상을 생각하면 더 이상 전쟁을 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체에 대해서 번스 회답은 “악의를 가지고 쓴 것이 아니라 요는 국민 전체의 신념과 각오의 문제이니만큼 이쯤에서 저쪽의 회답을 수락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천황은 삼국간섭 때 메이지 천황의 고충을 떠올리는 듯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장래의 회복을 기대하려 한다”고 했으며, 또 그 결정이 그때까지 전장에서 전사하고 내지에서도 전상을 당하고, 전재를 당한 국민, 특히 육해군 장병들을 동요시킬지 모른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스스로 마이크 앞에 서서 국민에게 호소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참례했던 참석자들은 모두 울었다. 스즈키가 일어나 성단을 내려달라며 번거롭게 한 것을 사죄하고 천황의 퇴석을 권했다. 훌쩍이고 또 통곡하는 가운데 천황은 자리를 물러났다. 종전의 성단이 내려졌다. 8월 14일 정오였다. 288-9)


8월 15일 오전 7시 21분에 일본방송협회의 아나운서가 천황이 12시에 직접 국민에게 성명을 낭독할 것이라고 전했다. 황후궁 사무소에 감춰져 있던 녹음반은 11시 전에 방송국에 도착했다. 정오에 내지의 국민과 외지의 일본인 및 군대가 라디오 앞에 모여들었다. 기미가요가 연주된 뒤 천황의 육성이 종전조서를 낭독했다. 워싱턴 시간으로 8월 14일 오후 3시에 번스는 도쿄에서 베를린으로 보낸 일본 정부의 포츠담선언 수락 전보의 암호해독문을 받았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4시 5분에 번스는 베른에서 걸려온 전화를 통해 일본 정부의 정식 회답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번스는 곧 베빈, 해리먼, 헐리에게 연락해서 7시에, 4개국 수도에서 동시에 일본 항복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자고 제안했다. 6시에 워싱턴의 소련대사관에서도 소련 정부가 일본의 항복을 알리는 정식 회답을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천황의 포츠담선언 수락은 스탈린이 일본에 대해 새로운 공격을 개시하는 단초가 됐다. 297-9)


7장 8월의 폭풍: 일본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바실렙스키는 8월 14일 천황 성명은 단지 무조건 항복의 일반적 선언이며, 일본군에게 군사행동을 중지하라고 한 명령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일본군에 대한 공격작전을 계속하라”고 명했다. 소련의 군사행동은 미국 정부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소련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으로 확인된 만주와 남사할린에 대해서는 이미 체념하고 있었으나, 다롄과 조선 남부, 쿠릴, 북중국 등의 전략적인 지역에 대한 귀속은 여전히 중요한 관심사였다. 미국 정부의 과제는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가장 중대한 목표를 이들 전략적 지역에 대한 소련의 팽창과 균형을 취하면서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천황이 8월 15일 종전조서를 라디오로 방송했다고는 하나 일본군이 항복하려면 대본영이 휴전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 그러나 휴전 명령은 8월 17일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그 이틀간의 지연이 소련군에게는 얄타에서 약속받은 영토를 물리적 지배하에 둔다는 극동에서의 군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절호의 구실을 제공했다. 303)


얄타조약은 소련의 참전 대가로 쿠릴이 소련에 ‘인도된다’고 규정했으나, 그 쿠릴에 대한 엄밀한 정의는 내려져 있지 않았다. 포츠담회담 당시 공동군사회의에서 소련 참모본부와 미국의 통합참모본부는 쿠릴열도가 북단의 4개 섬을 제외하고 미국의 군사행동 범위라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소련은 오호츠크해를 공동 군사행동 범위로 인정받음으로써 쿠릴에 관여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스탈린은 쿠릴 작전을 수행할 때 미국이 어떻게 반응할지 살피면서 동시에 되도록 신속하게 점거해야 하는 미묘한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일본의 제5방면군이 쿠릴의 북쪽 끝 섬들의 방위가 홋카이도와 혼슈의 방위를 위해 불가결한 것으로 봤듯이, 소련의 지도자도 이들 섬을 점거하는 것이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출입구를 확보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항복 직전의 일본 상황을 보고 틀림없이 즉시 쿠릴 작전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308-9)


# 쿠릴열도에 대한 소련군의 점령작전은 9월 2일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뒤에도 5일까지 이어졌다. 그리하여 미군이 한반도에 처음 상륙한 9월 8일, 소련은 미국과 합의한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38도선 이북의 한반도 북부를 비롯한 모든 점령 예정지에 대한 작전을 이미 완료한 뒤였다.


스탈린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은 단 한 사람이며, 그가 맥아더라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했으나 소련이 점거한 영토에서 맥아더의 권위를 인정할 의사는 갖고 있지 않았다. 8월 15일, 맥아더는 모스크바의 딘을 통해 소련 참모본부에 점령지역에서 “일본군에 대한 공격적 행동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훈령’을 보냈다. 맥아더의 도를 넘은 명령은 즉각 안토노프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안토노프는 16일 딘에게 답했다. 〈극동의 일본군에 대해 소련군이 군사행동을 계속할지 중지할지는 소련군 총사령관만이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다.〉 헐은 안토노프가 회답에서 미소 간의 오해를 지적한 부분을 인정했다. 통합참모본부는 소련과 분쟁이 일어나는 걸 바라지 않았다. 마셜은 맥아더와 딘 두 사람에게 맥아더의 첫 훈령을 발송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으며 그것은 훈령이 아니라 단지 정보로서 보낸 것이라는 결정을 전달했다. 이 건에서만큼은 소련이 짖어대자 미국이 뒤로 물러났던 것이다. 314)


그러나 미국 지도자들은 쿠릴보다 만주와 조선에서 소련의 군사행동 쪽을 걱정하고 있었다. 8월 10일부터 11일에 걸친 회의 결과 본스틸과 딘 러스크 소령에게 조선에서 미소 군사행동 범위를 결정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매클로이는 두 사람에게 미군이 도달 가능한 범위 내에서 “될 수 있는 한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벽에 걸려 있던 작은 극동 지도를 보면서 본스틸은 미군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보다는 좀 더 북쪽이지만, 북위 38도선이 서울을 남쪽에 두고 대체로 조선을 양분한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경계선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8월 15일, 트루먼은 애틀리, 스탈린, 장제스에게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해, 또한 지방에서의 군사충돌을 피하기 위해 아시아 대륙 해안지역에 해군과 공군을 사용하겠다”고 통고했다. 그 통고는 일반명령 1호에서 규정된 경계선을 넘어 중국, 만주,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 대륙의 해안선에서 군사행동을 취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316)


미국 정부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소련의 만주 점령으로 소련군과 중국공산당 세력이 협력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해리먼은 스탈린이 “옌안(延安, 중국공산당)과 몽골 인민공화국을 몰래 부추겨서 장제스와 미국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그 토대 위에서 “소련이 점령한 만주와 조선에 우호적인 독립국을 수립”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미국의 우려와 달리 스탈린은 중국의 국내문제에 간섭할 의도가 없었다. 스탈린은 국민당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정통정부로 인정했다. 8월 18일에 스탈린이 만주의 소련군 사령관에게 명한 것은, 장제스가 임명한 중국 관헌이 국민당의 국기를 내거는 것을 인정하고, 국민당의 질서 회복 노력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명령은 소련군이 확보한 모든 식량, 연료, 무기, 자동차, 기타 재산은 소련군에 속한다는 지시도 담고 있었다. 스탈린 입장에서 보면, 중국은 아직 사회주의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지 않았고, 따라서 가능한 한 착취해야 할 대상이었다. 325-6)


맺음말 가지 않은 길


전후 일본에서 쇼와昭和 천황은 일본 국가와 일본 국민을 구한 구세주로 여겨져왔다. 일본의 종전에 천황이 수행한 역할은 확실히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종결지어 일본 국가를 구하고 국민을 구하는 것이 천황의 뜻이었다는 주장은 천황제를 구하기 위해 천황의 자기희생 정신을 강조한, 기도를 비롯한 이들의 의식적인 증언이었다. 고노에도 그랬고 황실 가운데서도, 또는 그루처럼 천황제 유지를 옹호한 미국의 일본 전문가 사이에서도 쇼와 천황은 ‘쇼와’가 의미하는 계몽적인 평화와는 거리가 멀며, 동란으로 가득 찬 쇼와의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전쟁종결 뒤에 퇴위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아나미의 자결이 일본제국 육군의 죽음을 의미한 것처럼 쇼와 천황의 퇴위는 쇼와 시대와의 단호한 결별에 보탬이 됐을 것이다. 쇼와 천황이 퇴위하지 않고 그 지위에 머문 것은 일본의 전쟁책임을 모호하게 만들고 일본이 과거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방해한 커다란 요인이 됐다. 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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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전쟁 1939-1945 - 편지와 일기에 담긴 2차대전, 전쟁범죄와 폭격, 그리고 내면
니콜라스 스타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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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독일에서 살던 유대인들에게 전쟁은 물론 홀로코스트로 경험되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사태를 정반대 방향에서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문제는 전쟁이었다. 그들은 따라서 제노사이드를 전쟁이 배경이 되어 벌어진 사건으로 이해했다. 똑같은 사건을 완전히 다르게 바라본 것이다. 그 두 가지 시각은 물론 유대인들과 독일인들 사이에 엄존하는 권력과 선택의 불평등이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 문제성이야말로 내가 이 책에서 2차대전 독일사를 서술하면서 채택한 접근 방법이다. 역사가들은 흔히 대량 학살의 작동에 초점을 맞추면서, 홀로코스트가 왜 그리고 어떻게 발생했는지 논의했다. 그와 달리 나는 독일인들이 학살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지식을 어떻게 자아에 통합했는지 논의하고자 한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제노사이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면서 그로부터 어떻게 영향받았는가? 달리 표현하자면, 전쟁은 제노사이드에 대한 그들의 지각을 어떻게 형성했는가?"(31)


"'이것이냐 저것이냐', '사느냐 죽느냐', '모든 것을 얻거나 잃거나', '승리 아니면 파멸'이란 마니교적 이분법의 은유는 독일인들의 수사학에서 역사적으로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1차대전 패배 이후 히틀러의 핵심 이념을 구성한 은유였고, 빌헬름 2세가 1914년 8월 6일에 '독일 인민에게 전하는 선언'을 발표한 이래 1차대전 선전의 관용어였다. 그러나 1930년대 히틀러 국가가 인기를 누린 것은 종말론적 관점 때문이 아니었다. 전쟁의 초반에도 마찬가지였다. 독일 사회가 종말론적 사고방식을 수용한 것이야말로 2차대전 후반기에 독일인들에게 발생한 결정적 변화였다! 독일의 운명이 패배 쪽으로 기울자, 극단적인 이분법이 평범한 상식으로 변했다. 연합군의 '테러 공격'은 사느냐 죽느냐의 위기의식을 낳았다."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위해 싸웠던 것은 그들 모두가 나치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독일인들이 끝까지 싸운 것은, 그들이 전쟁의 가혹함을 정면으로 겪었기에 그리고 전쟁이 생산해낸 종말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32)


"1939년 가을 서부에서 전투의 개시를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 일부는 생각했다. '지금 판을 정리하는 게 낫다. 그러면 또다시 전쟁을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다.' 독일의 학동들은 몇 세대 동안 프랑스가 '세습적인 적'이지만 본능적이고 감정적으로 진짜 문제는 러시아라고 배웠다. 1890년부터 심지어 야당 사민당조차 독일이 러시아의 공격을 받는다면 동방의 그 야만으로부터 나라를 방어할 것이라고 맹세했었다." "1914년 8월 러시아가 동프로이센을 침공하자, 러시아 전쟁은 끝까지 싸워서 다음 세대가 또다시 겪지 않아도 되도록 해야 한다고, 1914년에 독일인들을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914~1917년에 동부전선에서 싸웠던 퇴역군인들로부터 막 학교를 졸업한 젊은 병사를 거쳐 아직 집에 있는 십대 청소년들에 이르기까지, 독일인들은 2차 대전을 나치 체제와 동일시했던 것이 아니라 세대를 가로지르는 가족적 책임으로 간주했다. 그것이 그들의 애국주의의 가장 강력한 토대였다."(46-7)


제1부 방어전: 1939년 9월~1940년 봄


제1장 독일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전쟁 


"1914년 8월과 달리 1939년 9월 1일에는 애국 행진이나 대중 집회 같은 것이 없었다. 길거리는 무섭도록 조용했다. 예비군들은 집합 장소에 가서 신고를 했고 민간인들은 건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1차대전의 재앙이 반복될지 모른다는 공포는 역력했다." "추후 6년 동안 독일의 모든 달력과 일기장에 전쟁 개시일로 인쇄된 날짜는 영국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한 1939년 9월 3일이었다." "이레네와 에른스트는 특별한 정치적 의견을 나타내지 않았다. 클레퍼와 호젠펠트와 퇴퍼빈은 나치운동의 일부, 특히 반종교적인 부류를 역겨워했다. 그들은 모두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정당하다고 믿었다. 다른 독일인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영국과 프랑스와 전쟁을 해야 하는가? 그럴 가치가 있다고 느끼던 독일인은 소수였다. 고지 프랑켄 지방의 한 보고서 그해 여름의 여론을 간결하게 요약했다. '단치히와 회랑 문제를 해결할 방법에 대한 여론의 답은 여전히 똑같다. 독일에 편입? 예스. 전쟁을 통하여? 노.'"(60, 64-5)


"독일 언론은 1939년 8월 중순에 국경지대의 독일인 혈통들이 폴란드 내륙의 '강제수용소'로 대규모로 이송되었다고 보도했고, 개전 직후에는 전쟁이 독일인 혈통들에 대한 일련의 대량 학살을 촉발시켰으며, 희생자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이라고 보도했다. 독일 영화관의 〈주간뉴스〉는 독일인 혈통들이 학살당하는 시각 자료를 보여주었고, 체포된 폴란드 병사들과 '비정규 전투원들'은 독일인 혈통들을 절멸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범죄적으로 타락한 '하등인간'이라고 강조했다." "그리하여 1943년 봄에 괴벨스가─딱 한 번─소련의 더 큰 테러를 부각하기 위하여 독일 여론을 폴란드인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몰고 가려 했을 때, 그는 1939년의 기억과 충돌하게 된다. 독일인 독자들은 폴란드인들에 의해 독일인 6만 명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적시하면서, 설혹 소련 비밀경찰NKVD이 살인자들이라고 해도 왜 우리가 폴란드인들을 동정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선전부는 여론의 동정심까지 조작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79-81)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는 독일인들에게 더이상 주제가 되지 못했다. 히틀러가 바르샤바에서 승리한 독일 군대를 치하하고 2주일이 지난 시점, 교회가 축하의 종을 울리고 1주일이 지난 1939년 10월 중순에 망명 사민당의 한 지하 요원은 '폴란드 전쟁에서의 〈승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라고 보도했다. 독일인들에게 문제는 이제 평화였다. 폴란드를 둘러싼 갈등이 폴란드 해체로 해결된 만큼, 서구 열강과의 평화가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다시 솟았던 것이다. 10월 6일 히틀러가 제국의회에서 연설했다. CBS의 베를린 특파원 윌리엄 샤이러는 이렇게 적었다. 〈그가 1936년 라인란트 진군 이후 정복 때마다 제국의회 연단에서 했던 말과 똑같았다. 이번이 최소 다섯번째다. 그는 언제나처럼 똑같이 진지하게 말했지만, 만일 당신이 어느 독일인에게 바깥 세계는 이미 쓰라린 경험을 한 탓에 과거에 주었던 신뢰를 더이상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모든 독일인이 경악할 것이다.〉"(83-4)


제2장 대오의 균열을 막아라 


"괴벨스가 1933년 집권 직후 독일 라디오 방송국에 하달한 첫 번째 계고는 다음과 같다. '방송의 최고 규칙은 지루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모든 것 위에 놓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지루함을 방송하지 마십시오. 매일 저녁 요란한 행진곡을 방송하는 것이 민족 정부에게 봉사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1936년 3월 나치 제국방송지도자 하다모프스키는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의 프라임타임에 그동안 선호되던 '대작' 대신 만인을 겨냥한 가벼운 음악회, 버라이어티쇼, 댄스음악을 방송하도록 했다. 1939년 청취자 선호도 조사는 새로운 포맷이 모든 계층에게 환영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전문직과 지식인들조차 고전음악보다 대중음악을 선호했다. 1939년 10월 1일 방송국이 새로운 프라임타임 쇼 〈독일군을 위한 리퀘스트 콘서트〉를 선보였다. 쇼는 곧 정규 프로그램이 되었다. 신청 사연은 전쟁으로 떨어져야 했던 커플들에게 공적인 친밀성의 순간을 공유하도록 해주었다."(108-9)


"그해 말 예술이 예술을 모방했다. 최초의 블록버스터 전쟁영화 〈리퀘스트 콘서트〉가 제작된 것이다. 방송 진행자 하인츠 괴데케는 영화에서 자기 자신을 연기했다. 영황에서 그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만났다가 헤어진 연인이 재회하도록 도와주는 진행자 역할을 맡았다." "2천만 혹은 2,500만 명이 그 영화를 보았다. 그때까지 독일 영화 최대의 관람객이었다. 라디오 쇼는 그보다도 성공적이었다. 나라의 거의 절반이 방송을 들었다." "정보국은 방송이 '민족공동체를 수천 번이나 경험하도록 했다'며 열광했다. 그런 것이야말로 나치가 찾던 자석이었다. 모든 개인적 이기심이 강렬한 민족 감정 속에 녹아 없어지는 감정적 통일의 순간, 그러나 역설적으로 방송이든 영화든, 〈리퀘스트 콘서트〉는 친밀한 관계의 사적인 끝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사랑과 가족이라는 사적인 관계가 애국심의 중핵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나치는 인간의 감정 중에서 가장 강력하지만 가장 예측하기 힘든 감정인 사랑을 동원했던 것이다."(111-2)


제3장 극단의 조치들 


"군법 재판관들은 1939년 8월 16일 동원령과 함께 효력이 발생한 '전시특별형법'을 적용했다. 그 법은 '군대 사기 저해 행위'의 표준 형량을 사형으로 정했다. 법 해석자들은 특히 '종파 집단과 평화주의자들'을 겨냥했다. 그 법에는 복종의 의무가  '양심에 따를 의무'에 선행한다고 적시되어 있었다. 또한 법에는 모든 신병에게 요구된 지도자 히틀러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 맹세를 거부한 병사들에 대한 처벌이 포함되어 있었고, 군인으로서 의무 불이행이 '탈영'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판사들 일부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비전투 병과에서 군복무를 이행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 대부분은 거부했다. 또한 중간에라도 신앙을 포기하면 감옥형을 유예받을 수 있었다. 그런 경우에도 시민권 박탈은 취소되지 않아서, 병사들은 지뢰를 제거하는 등의 위험한 작업을 담당하는 처벌 부대에 배치되었다. 군복무 거부자의 자식은 탁아 기관에 넘겨졌고, 가족의 업체와 주택은 강매되었다."(116-7)


"민족적 개신교의 독일 구원론은 1918년의 '그the' 재앙을 극복하려던 반자유주의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문화의 한 판본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역사의 순환성에 입각하면서도, 실패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순환의 경로에 강력하게 개입해야 한다고 믿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핵심적인 정치적 이념─바이마르 민주주의, 자유주의, 평화주의, 사회주의, 유대인, 패전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에 대한 거부─은 변치 않았다. 1939년의 새로운 전쟁은 그들이 1918년에 대하여 생각했던 모든 것을 소환했다. 핵심은 독일의 구원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 즉 지난 전쟁에서 범했던 오류를 이번 전쟁에서는 피해야 한다는 일반화된 신념이 전쟁 초부터 독일 엘리트들이 치명적인 폭력을 가할 자세를 갖추었던 것을 설명해준다. 그것은 전쟁에서 가해진 가장 극단적인 폭력이 언제나 가장 과격한 혹은 가장 나치다운 기관의 행동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설명해준다."(123-4)


"전쟁이 독일 국내에서 촉발한 가장 과격하고 폭력적인 테러는 가장 외진 곳에서 비밀리에 발생했다. 요양원의 정신병 환자들이 전쟁 동안 학살된 것이다. 작전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와 마찬가지로 개전 즉시 시작되었다. 학살은 1945년 5월 전쟁의 끝날까지 이어져서, 총 21만, 6,400명이 살해되었다. 이는 나치가 살해한 〈독일〉 유대인보다도 많은 숫자다. 살인 행위의 주체는 폴란드에서 인종 정책을 주도한 힘러의 제국보안청과 같이 특수하게 나치적인 기관이 아니었다. 작전의 주체는 보건행정과 지방행정에 근무하는 평범한 의사들과 공무원들이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처형과 달리 장애인 학살은 공개되지 않았다. 작전에 참여한 핵심 인물들이 법적 뒷받침을 요구했지만 처음에는 수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불러와 브란트가 히틀러에게 '은혜로운 죽음Gnadentod'을 허용한다는 문장 한 개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는 그후 비밀 살인을 허용하는 문서에 다시는 자기 이름을 올리지 않는다."(130-2)


제2부 유럽의 주인: 1940년 5월~1941년 여름


제4장 진격 


"1940년 5월 10일 서부전선 전투가 시작된 이래 국내의 독일인들은 라디오를 끄지 않았다. 친위대 정보국은 교대근무를 일찍 마친 사람들도 밤 12시의 독일군 발표를 듣기 위해 기다린다고 보고했다. 독일군이 '도버해협까지 진격해서 적의 대군을 포위했다는 소식이 사람들의 긴장을 최고도로 끌어올렸고, 사람들은 그 흥분을 모든 곳에 전했다.' 프랑스가 곧 무너지고 영국 침공이 뒤따를 것이라는 추측이 만발했다. '이번에는 영국도 자기 땅에서 전쟁을 경험해야 한다'는 소망이 자주 표출되었다. 독일인들이 선전부가 내보내던 독일군 발표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친위대 정보국이 전황 발표를 외국 라디오 청취에 대한 완벽한 해독제로 간주할 정도였다. 괴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언론에 히틀러가 전체 작전을 개별적인 세부 행동까지 계획했다고 밝혔다. 문제는 딱 하나뿐이었다. 서부 독일의 여러 도시에 적군 공군기들의 폭격 경보가 계속 울렸고, 그것은 적에게 보복하라는 요구를 자극했다."(150-1)


"독일 방송기자와 카메라맨들은 벨기에와 프랑스 전쟁 뉴스영화를 연속해서 제작했다. 독일 관객들은 영상에서 본 프랑스군의 서아프리카 병사들에게서 호러와 역겨움을 느꼈다.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이 저런 짐승들을 우리에게 풀어놓다니 악마가 그들을 데려가리!' '저들은 문명화된 민족의 수치다. 영국과 프랑스를 영원히 타락시킨 것이 바로 저것이다!' 전형적인 외침들이었다. 라이헨베르크의 여자들은 '유색' 얼굴을 보고 무서움에 마비되는 듯했다고, 스크린에 독일군 병사들이 다시 나타났을 때야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독일군은 흑인 병사들에 대한 보복작전과 병행해서 프랑스군이 1923년에 독일 라인란트를 점령했을 때 식민지 흑인 부대가 독일 여성들을 얼마나 성적으로 착취했는지 끊임없이 상기시켰고, 독일군의 폭력을 그 기억에 대한 보상인 듯이 선전했다. 독일군이 2차대전에서 비교적 '깨끗하게' 행동했던 서부전선에서도 그들의 인종주의적 폭력만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153, 158-9)


"독일 학생들은 1920년대 내내 프랑스를 '세습적인 적'으로 간주하라고 배웠다. 그런데 이제 독일이 그 적을 신화 속의 괴물처럼 제압한 것이다." "관객들은 뉴스 영상 속에서 히틀러가 나라 전체의 우레 같은 박수와 '하일 히틀러' 인사로 환영받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히틀러가 장군들과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서 경외의 침묵 속에 마음을 가라앉혔고, 히틀러가 전선 근처에서 차를 타고 포로들 무리를 지나가는 장면에서는 그의 안전을 걱정했으며, 히틀러가 차 안으로 들어가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독일인들은 영국이 아직 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었고 또 물자 부족과 '거물들'의 착복을─잠깐─잊었다. 그들의 희열은 '그the 지도자'에게 꽂혔다. 이제 그들은 새로 찍은 히틀러의 사진을 얻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그의 어록에 대하여 애지중지 토론했다. 1930년대 초 나치 돌격대와 공산주의자들 간의 가투가 그렇게나 자주 벌어지던 터프한 노동계급 구역들도 마침내 항복했다."(159-60)


"(독일인들이 보기에) 세계제국 영국은 나치가 독일을 그렇게 되도록 만들기 원하는 나라였다. '인류'를 방어하고 있다는 영국의 주장을 '위선'과 '거짓'으로 역공하는 작업은 나치의 기이한 반제국주의를 낳았다. 장대한 서사 영화 〈옴 크뤼거〉는 보어전쟁을 아프리카인의 시각에서 이야기한다. 영화는 독일이 런던을 비롯한 영국 항구들을 여전히 공습하던 1941년 4월에 개봉되어 최고의 박스오피스를 기록한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영화는 보어인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수용했던 강제수용소에서 절정에 달한다. 쫓기던 한 남자가 수용소 가시철망 너머의 아내와 대화하자, 난폭한 수용소장─윈스턴 처칠과 똑 닮은 소장─이 그 남자를 체포하여 수용소의 모든 여자들과 아이들 앞에서 목매달아 죽인다. 여자들과 아이들의 아우성이 높아지자 소장은 군부대를 동원하여 발포한다. 그것은 나치 독일이 보여준 유일한 수용소 학살 장면이었다. 독일 관객들은 보어인 희생자들에게 공감했다."(181)


제5장 승자와 패자 


"'집'과 '전선'을 오가던 편지는 진통제였다. 남편과 아내는 자신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쓰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 핵심이었다. 편지의 역할은 모든 것이 온전하다는 것, 아무것도 변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성교는 포르노 음화와 비슷하게 생생하게 그려졌다. 따라서 공간적 분리는 불안과 질투를 일으켰다. 남자든 여자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성적 억제의 문화에 젖어서 성교에 관하여 쓰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성적 부정不貞에 대한 공포만큼은 적나라하게 표출했다." "사실 매춘은 정복자 독일 병사가 유럽을 가로지른 모든 곳에 함께 있었다. 독일 야전사령부는 병사들이 '타락한' 프랑스 여성으로부터 성병이 감염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독일군 병사들이 하녀, 청소부, 세탁부, 웨이트리스, 바 여종업원, 미용사, 집 여주인, 목욕탕 여종업원, 속기사, 점원, 여타의 아는 여성들과 성적 모험을 벌이고 그래서 프랑스 당국이 이를 억제하려 하면, 독일군 당국은 불쾌하게 반응했다."(188-9)


"나치 독일은 소비재가 현저히 부족했다. 국내총생산의 20%가 군수에 할당되었고, 그 비율은 곧 1/3로 증가했다. 국내 수요의 억제는 높은 저축률로 이어졌고, 국민들의 예금은 정부의 규제적 관리에 의하여 조용히 전쟁 준비로 돌려졌다. 나치 정부는 그 덕분에 1차대전의 특징이었던, 국민들에게 전쟁채권의 구입을 호소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독일 소비자 입장에서 1940년은 마법처럼 노다지를 줍던 해였다. 독일의 마르크화가 독일군이 점령한 모든 나라에서 고의로 절상되었다. 자연스럽게 독일군 병사들에게 물건값이 내려갔다. 그래서 독일 가족이 국내에서 살 수 없던 물건들을 주둔지에서 마음껏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1940년 10월 헤르만 괴링이 독일군 병사, 그리하여 독일 소비자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가 '모피, 보석, 카펫, 비단, 사치품' 구입에 대한 제한 조치를 해제한 것이다. 괴링은 승리한 점령군 부대의 병사들은 해당 지역의 민간인들과 똑같은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선언했다."(195-6)


"바르텔란트는 식민 사업, 즉 '재-게르만화'의 모델 지역이었다. 모두 61만 9천 명의 폴란드인이 한스 프랑크가 지배하는 '총독령 폴란드'로 '재이주'되었다. 독일인들이 이주해오도록 공간을 비워놓기 위해서였다. 그 폴란드인들 중에서 약 43만 5천 명이 바르텔란트 출신이었다." "바르텔란트에서 스물여덟 살의 리젤로테에게 깊은 인상을 준 사람들은 제국노동봉사단 의무의 일환으로 이주민들을 돕기 위해서 독일에서 온 소녀들과 여대생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소녀들은 폴란드인 농장에서 폴란드인들을 어렵게 끌어내고 짐을 싸도록 하는 일을 도왔다. 노동봉사대 소속의 열여덟 살 소녀들은 번번히 친위대 남성들 옆에 그들과 동수同數로 배치되어 이주 작전에 투입되었다. 일부는 기차역에서 독일인 이주민을 환영했고, 다른 일부는 친위대원들이 폴란드인들을 끌어내는 것을 보조했으며, 폴란드 여성들을 감시하여 그들이 새로 들어올 독일인들을 위하여 자기 집을 말끔하게 청소하고 떠나게 했다."(201-3)


제3부 1812년의 그림자: 1941년 여름~1942년 3월


제6장 독일의 십자군 전쟁 


"1941년 6월 23일 월요일 친위대 정보국은 전국 어디서나 독일인들이 소련전에 대하여 보인 첫 반응은 '완전한 경악'이었다고 기록했다. 스탈린과의 전쟁이 바로 그 시점에 발발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두 나라 간에 새로운 합의가 이루어졌고, 조만간 스탈린이 베를린을 방문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새로운 현실에 놀랄 만큼 빠르게 적응했다. 전쟁이 선언된 첫날 오후와 저녁의 많은 보고서들은 '사람들이 정부가 러시아의 '배반 행위'에 대하여 군사력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대응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강조했다. 일부는 동부에서의 전쟁이 영국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미국의 개입을 불러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특히 여자들은 독일인 병사들의 목숨을 걱정했고, 독일 전쟁포로들이 소련의 '아시아적 방법들'로 고통받을 것을 강조했다."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전쟁은 삼가는 투로 지지했던 많은 가톨릭 주교들은, 소련 침공을 '신을 모르는 볼셰비즘'에 대한 '십자군 전쟁'으로 축성했다."(241-3)


"로베르트는 전쟁을 증오했다. 그가 마리아에게 보낸 편지에는 동료들이 민간에 불을 지른 것과 포로들을 학살한 것이 적혀 있지 않다. 그는 일기에는 그 일들을 적어놓았다." "그러나 전쟁을 혐오하면 할수록 이번에는 정말 끝장을 보아야 한다는 확신이 굳어졌다. 그는 두 살배기 아들이 러시아에서 싸우는 세번째 세대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라이니가 내가 지금 있는 이곳에 와야 하는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면 안 돼!' 로베르트는 마리아에게 썼다." "그는 '온 세상의 모든 사랑을 품고 있는 그들의 초월적인 사랑'이 자신을 보호한다고 마리아를 안심시켰다. 그 끔찍한 전쟁 행위는 로베르트 R과 같은 남자들을 불안케 하는 동시에 전쟁에 대한 헌신을 강화했다. 이번에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 병사들과 가족들은 자신을 나치 정권이 아니라 전쟁과 동일시했다. 세대를 넘어서는 책임과 동일시했다. 그것이 그들이 갖고 있던 애국주의의 가장 강력한 토대였다."(265-6)


"독일군의 키이우 봉쇄는 독일 농업식량부 차관 헤르베르트 바케가 소련전의 일부로 1940년 12월에 고안해놓은 '기아 계획'의 일부였다. 바케는 우크라이나 남부의 비옥한 '흑토'에서 생산된 엄청난 곡물을 독일로 보내기 위하여 우크라이나의 북부와 도시들을 모두 아사시킬 작정이었다. 그 계획은 소련 침공이 시작되기 7주일 전인 1941년 5월 2일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계획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그 나라에서 반출하면 수천만 명이 아사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1941년 8월 30일 러시아혁명의 요람이요 소련의 제2도시인 레닌그라드로 가는 마지막 철로가 므라에서 끊겼다." "제18군 병참부가 상부에게 레닌그라드가 항복하면 군대의 식량을 그 도시를 먹이는 데 사용해도 되는지 가이드라인을 요청했다. 독일군 병참사령관 에두아르드 바그너가 단호하게 안 된다고 답했다. '조국에서 출발하는 모든 차량의 식량은 그만큼 조국의 식량을 줄인 것입니다. 러시아인들은 굶어죽는 것이 낫습니다.'"(272-4)


제7장 첫 패배 


"겨울철 후퇴는 동부전선 독일군을 공통의 문화에 묶었다. 바로 대량 학살의 문화였다." "히틀러가 1941년 12월 21일 독일군에게 '초토화' 작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내리기 전에 이미 초토화는 후퇴하는 독일군의 공통된 행동이었다." "독일군은 생사의 위기를 맞이하여 극단적 폭력의 영구화로 대응했다. 병사가 독일제국 어느 지역에서 충원되었든, 그들이 몸담았던 민간 환경이 나치즘에 적대적이었든 우호적이었든, 차이가 없었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고르게 섞인 루르 노동계급 출신의 제253보병사단은 농촌 출신들이 징집된, 좀더 나치화된 사단들과 똑같은 변화 과정을 겪었다. 후퇴는 분노와 공포를 뒤섞고 또 강화했다. 자신의 차량과 총과 중장비들이 파괴되고 그토록 어렵게 점령했던 영토를 포기해야 하는 것에 대한 분노, 겨울에 훨씬 유연하게 대응하는 소련군의 능력에 대한 충격, 후퇴할 안전한 전선을 보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공포가 그들의 폭력 원칙을 강화했다."(303-5)


"안톤 브란트후버의 가족들이 그의 탈영을 지지하지 않은 것은 2차대전에 독일군 병사들의 탈영이 대량으로 발생하지 않은 것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2차대전에 동맹국 군대에서 탈영이 대량으로 발생한 예들, 1943년의 이탈리아 병사들,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와 룩셈부르크와 알자스에서 징집된 병사들, 그리고 1943~1944년 보스니아 무장 친위대 병사들의 탈영은 모두 그곳의 시민사회가 탈영한 병사들을 흡수하고 숨겨주고, 그래서 군 당국을 상대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든 곳들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심장부에서는 전쟁의 마지막 몇 주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탈영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나치 테러 기구가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기관들이 비교적 고립된 개인들을 타깃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충성심과 애국심은 나치 정권이 부과하던 외적인 요구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일 시민사회의 모든 층위에서 반복되고, 부모와 아내와 연인의 강력한 1차적 호소에서 되풀이된 격률이었다."(313)


"전선과 고향집의 엄청난 생활 격차는 가족 간의 감정적 결속을 해치지 않았다. 정반대로 집은 그 모든 특권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문제들과 씨름하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집은 전선의 삶을 견뎌내도록 해주었다. 헬무트의 어머니는 하녀 없이 겨우내 집안일을 꾸려야 했을 때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럴 때는 러시아에 있는 너를 생각하고, 인간이 해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한단다. 나는 이 멋지고 따뜻한 집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는 거잖니.' 그녀의 조카 라인하르트가 얇은 얾은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빠졌을 때, 그녀는 전선의 아들과 동료들은 '물에 잠기고도 불을 쬘 수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헬무트가 2층 부엌에 만들어놓은 화학 실험실이 라인하르트와 그의 어린 아들 루돌프에 의해 엉망이 된 사고에 대하여 쓴 편지는 그 어떤 애국주의 선전보다도 고향과 집에 대한 헬무트의 감정적 결속을 굳게 해주었다. 헬무트 파울루스는 그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는 병사였다."(320)


제4부 교착상태: 1942년 초~1943년 3월


제8장 비밀의 공유 


"유대인에 대한 조치들 중에서 최초의 가장 극적인 조치는 1941년 9월 1일의 명령, 즉 다섯 살 이상의 모든 유대인에게 겉옷 왼쪽 가슴에 노란색 '다윗의 별'을 부착하도록 한 명령이었다." "유대인의 별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인 혈통들이 미국에서 하켄크로이츠 배지를 달아야 한다는 루머는 두 나라가 전쟁에 돌입하기 전에 나타났다." "독일인들이 미국의 독일인 혈통들은 겉옷에 하켄크로이츠를 달도록 강요되었다고 상상하기 시작하자, 독일에서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조치들이 그리 독특하게 보이지 않았다. 독일인들의 생각으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는 진작부터 진행되어온 것이기도 했다." "1941년 가을 독일인들은 (워싱턴과 런던의 유력한 권력자들인) 유대인들이 어떻게 독일에 대한 보복을 지휘하고 있는지 상상하고 있었다. 그 보복이란 것이 아직 실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상상하고 있었다. 다윗의 별이 도입되고 3개월 만에 독일은 미국과 공식 전쟁에 돌입한다."(339-42)


"슈바벤의 농촌 마을로부터 한때 좌파적이었던 함부르크에 이르기까지, 독일인들은 이송 유대인들이 남긴 재산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로비했고 경매에도 참여했다. 1941년부터 1945년 사이에 함부르크에서만 유대인 가구와 가사도구 최소 3만 점이 경매장의 망치 소리와 함께 판매되었다. 가구 한 점당 응찰자가 족히 10명은 됐다. 함부르크 베델 구의 독일인 노동계급 부녀자들은 커피, 보석류, 고가구, 카펫을 사들였고, 그 일부를 되팔기도 했다. 게슈타포가 유대인 재산을 판매하여 도이체방크 계좌에 입금한 액수는 1943년 초까지 720만 마르크에 달했다. 독일 여성들이 구입한 모피 코트에는 원소유자의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같은 지역 출신이었기에 원소유자가 누구인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언론은 경매를 공고하면서 판매대에 오른 물건이 유대인의 물건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남긴 주택은 지역 나치 기관원 혹은 아직은 소수였던 폭격 맞은 독일인 가족들에게 보상으로 주어졌다."(346-7)


"1941년 가을 괴벨스가 '민족동지들'에게 유대인의 낙인과 이송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도록 만들고자 할 때, 그는 그 문제가 공적인 이슈로 전환되면 미디어가 토론과 반대의 공간을 창출하게 된다는 점을 인식했다. 괴벨스의 해법은 반유대인 캠페인의 톤을 낮추는 것이었다." "토론보다는 풍문과 암시를 통하여 인민이 학살을 묵인하도록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마저 침묵하자,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 어떤 명시적이고 공적인 도덕적 추론이 봉쇄되었다." "유대인의 경우에는 임박한 죽음이 전쟁의 나머지 모든 측면에 대한 이해를 규정했다. 독일인들의 경우에는 전쟁이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응을 규정했다. 저널리스트 파울하인츠 반첸은 유대인들에 대한 태도가 경화된 것을 1941~1942년 겨울 동부전선을 집어삼킨 위기 탓으로 돌렸다. 그들을 분리한 것은 사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관점이었고, 그 관점은 권력의 막대한 비대칭성─그리고 공감의 비대칭성을 특징으로 했다."(367-9)


제9장 유럽의 약탈 


"1941~1942년 가을에 바케가 구상한 정복지 약탈 계획은 독일 민간인들을 결핍에서 구해내지 못했다. 1942년 4월 6일 배급량이 심하게, 그것도 모든 범주에서 삭감되었다. 나치 지도부는 1916~1917년의 '순무의 겨울'과 1918년 '등에 칼을 맞은 것'을 직선으로 결합했기에, 식량 부족은 그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위기였다." "농민들이 그들의 생산 할당량을 충족시키고 또 암시장에서 거래할 잉여를 충분히 생산했다는 사실은, 농업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농민들의 인센티브를 강화해야 한다는 친위대 정보국의 주장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농업식품부는 그 전략을 거부했다. 그들은 고정된 가격과 할당 쿼터를 1차대전에 난무했던 인플레이션과 도시의 기근을 피할 수 있는 보장책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경찰과 법원은 농촌에 광범하게 나타난 온건한 암시장을 용인하면서 작은 불법 경제를 묵인했고, 그렇게 용인된 불법 경제가 공식 할당량을 충족시키는 한 그것은 증산을 자극하는 인센티브가 되었다."(399, 407)


"한 경제사가는 나치 독일이 강제수용소 재소자들 중에서 노동에 투입할 노동자들을 지속적으로 '선별'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기아 배급만 제공한 것을 두고 그 원리를 '스톡이 아닌 플로우'로 정리했다. 노동력을 저장하지 않고 일정 기간 투입한 뒤 버리는 양상을 개념화한 것이다. 1942년에 시작된 배급 위기에서 그 원리가 전쟁포로와 외국인 '자원' 노동자를 가리지 않고 동유럽 출신의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었다. 사망자가 엄청나게 발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노동자를 보다 경제적인 방식으로 선별하고 노동력 소모를 합리화하는 방법이 고안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고지 슐레지엔 석탄그룹 의장 귄터 팔켄한은 자신이 소유한 프슈치나광산의 '동유럽' 노동자들에게 '수행 능력에 따른 배급' 체계를 도입했다. 기준에 못 미치는 노동자의 음식을 빼앗아 기준을 초과한 노동자에게 먹였던 것이다. 사회적 다윈주의의 그 식인 판본이 슐레지엔 광산 지대 전체로 확산되었고, 점차 독일 군수산업의 표준이 되어갔다."(421-2)


제10장 전사자에게 쓰는 편지 


"소련군의 포위망이 좁혀지면서 스탈린그라드 소식은 독일에 갈수록 적게 전해졌다. 예컨대 1943년 1월 10일에 독일군은 단지 '지역적인 기습 공격들'만 보도했다. 그러다가 나흘 뒤에 갑자기 '스탈린그라드 지역에서 벌어진 영웅적인 치열한 전투'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괴벨스는 제6군이 소련군과 대결함으로써 코카서스의 독일 군부대들을 보호했다면서, 그들의 영웅주의와 희생을 찬양했다. 보도의 색깔이 바뀐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괴벨스는 패배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히틀러를 설득하여 '영웅적 서사'를 준비했던 것이다. 1943년 1월 30일 나치 집권 1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기념 연설에서 괴링은 제6군 병사들을 독일사 속의 영웅들, 전설 속의 니벨룽겐과 동고트족으로 시작하여 1914년에 랑게마르크에서 싸웠던 대학생 자원병들, 그리고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페르시아의 '인간떼'에 맞선 스파르타의 300 전사들과 연결시켰다. 괴링의 연설은 (계승된 전통인) 영웅적 죽음 숭배의 절정이었다."(467-8)


"그러나 괴벨스와 괴링이 조심스럽게 제작해낸 '영웅 서사'는 전례 없는 파탄을 초래했다. 독일인들은 그 막대한 패배를 받아들일 감정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뉘른베르크처럼 많은 자식이 스탈린그라드에 가 있던 도시들은 거의 발작했다. 사람들은 히틀러가 1942년 11월 8일의 연설에서 스탈린그라드가 사실상 정복되었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던 것을 기억했다. 독일 전역에서 사람들이 극심한 충격과 슬픔과 분노를 터뜨렸다." "다만 사람들은 아직도 그 패배의 전략적 의미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 독일인들에게는 제6군 전체가 망실된 그 패배가 하찮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일부에게는 전쟁이 이제 결정적으로 독일에 불리한 전쟁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였다. 괴벨스는 김나지움 교육을 받은 이상주의적인 청소년들에게 호소력을 지닌 언어가 국민 전체에게는 생생한 신화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탈린그라드는 나치 정권이 신화화한 최초의 패배요 마지막 패배였다."(471-2)


제5부 독일에 도착한 전쟁: 1943년 3월~1944년 여름


제11장 폭격과 복수 


"1943년 당시 독일인들을 지배한 것은 나치 지도부에 대한 격렬한 적대감이 아니었다. 그해 봄에 도르트문트와 에센을 순방했을 때 괴벨스는 군수 노동자들에게 영국군 공습에 '복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강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강당이 떠나가도록 박수쳤다. 그들이 표출한 것은 나치에게 적대감이라기보다는 공습의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는 소망이었다. 사람들은 낙관적인 순간에는 영국에게 이자를 더해서 복수하는 것을 상상했고, 비관적인 순간에는 폭탄이 어디든 다른 곳에 떨어지기를 소원했다. 스위스 영사에 따르면, 1943년 3월 초 베를린이 최대의 폭격을 당하자 쾰른 사람들은 그 소식에서 '안도감과 심지어 기쁨'을 느꼈다." "1943년 6월 5일 괴벨스는 베를린 스포츠궁전 연설에서 영국인들에게 가혹한 복수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언론이 가공할 만한 신무기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고, 괴벨스의 약속은 전쟁의 나머지 기간 내내 독일인들의 희망을 조율하는 핵심축이 되었다. '복수의 시간은 올 것이다!'"(495-6)


"그러나 물리적 쇼크에 이어 심리적 쇼크가 닥치자 비타협적인 전투 언어를 수용하려는 사람이 크게 감소했다. 스위스 영사 프란츠-루돌프 폰 바이스는 전반적인 분위기를 '깊은 무기력, 일반화된 무관심, 평화에 대한 소망'으로 정리했다." "라인과 루르의 도시민들은 아직도 괴벨스가 약속했던 처절한 복수에 대하여 말은 했지만 1943년 5월과 6월에 가졌던 희망과 기대는 더이상 없었다. 적어도 쾰른시 주민들은 복수가 그들을 구해줄 것이라고 더는 믿지 않았다. 도르트문트, 보훔, 하겐 같은 도시의 주민들의 공포는 정점에 달했다. 그들 역시 복수가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거의 믿지 않았다." "가톨릭 주교들이 사람들의 복수 강박을 밀어낼 수 없던 것과 똑같이, 독일인들의 공포와 무기력을 집단적인 저항 의지로 변모시키려던 나치당의 노력도 헛수고였다." "영국과 독일 중에서 누가 먼저 민간인을 폭격했느냐는 1940년의 논란은 이미 과거였다. 긴급한 문제는 독일이 폭격에 대항할 힘이 있느냐의 여부였다."(504-6)


"사람들은 누누이 폭격을 1938년 11월의 포그롬과 연결했다. 동유럽 유대인의 대량 학살에 관한 루머로 흠뻑 젖어 있던 사회로서는 이상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포그롬은 많은 사람이 직접 목격하고 독일 전역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유대인에 대한 마지막 공격이었다. 이제 일부 장소에 그 포그롬과 폭격의 직접적인 결합이 가시화되기도 했다. 그때까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독일의 책임과 죄악을 인정하는 모습이 1943년 늦여름과 가을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 양상은 폭격을 맞지 않은 지역으로도 확산되었다." "재앙과도 같은 공중전의 패배가 독일이 복수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한 달 전 희망을 '유대인의 복수'에 대한 공포로 전환시킨 것이다. 독일 전체에서 그렇게 유대인의 복수에 대하여 말하면서 독일인들은 그때까지 절반쯤 숨겨져 있던 어떤 것을 무심결에 드러냈다. 유대인의 절멸에 대한 나치의 추상적인 언어가 글자 그대로 실행되었다는 것을 독일인 대중도 알고 있었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527-8)


제12장 버티기 


"피란민을 '보내는 지역'과 '받는 지역' 사이에 '유기적인 연대'가 부족했던 것은 나치의 '민족공동체' 이상과 어긋나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전쟁중에 제기된 대부분의 사회적 항의는 당국을 직접 겨냥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체로 당국이 개입하여 그들이 보기에 부당하게 처신하고 있는 다른 범주의 '민족동지들'을 제자리에 놓아주기를 원했다." "독일인들은 진정, 불평, 밀고를 통하여 당국을 내부의 갈등 안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국가가 '공정한' 해법을 부과하기를 기대했다. 그들의 그러한 행동 패턴이 나치의 '민족공동체' 주장에 일정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사실이다. 민족공동체 이념이 개인적인 주장을 펼칠 틀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나치 선전의 웅장한 주장은 공허하게 울리고 있었지만, 가족적 결속, 교회 회중, 전문인 네트워크, 우정은 여전히 작동했다. 공동주택, 교외, 촌락에 기초한 커뮤니티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의존할 수 있는 직접적인 일상의 커뮤니티를 더욱 의식했다."(565-6)


"1944년 봄이 되자 함부르크 폭격 이후의 쇼크와 패닉은 사라졌다. 폭격과 유대인 정책의 상호적 가속화를 역전시키고자 하는 소망, 유대인 학살을 없었던 일로 만들면 폭격은 멈추리라는 소망도 사라졌다. 폭격이 12달 동안 지속되자, 공습은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사실이 되었고 폭격의 '유대적인' 성격은 공식이 되었다." "히페리온의 '운명의 노래'를 듣거나 윙거를 읽는 것은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해주었고 몽상 속으로 물러나게 해주었다. 그곳에서 독자들은─잠시─내려놓고 자신만의 내적인 도덕적 힘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그렇듯 전쟁의 현실을 서정적인 추상과 문학 정전의 베일 뒤에 숨기는 것은 '비정치적인 독일인들'이 나치 글쟁이들의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를 재주조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독일인들이 전쟁으로 인하여 직접적인 도덕적·정치적 선택들과 대면하도록 할 가능성도 봉쇄했다. 그들은 그 선택과 대면하는 대신 문화유산을 헤집으면서 그 부담을 감당하고자 했다."(580-2)


제13장 빌린 시간 


"독일군은 후퇴하면서 모든 것을 불태웠다. 귀중한 시간과 폭탄을 파괴 작업에 아낌없이 투입했다. 후퇴하는 독일군을 방어하는 임무에 투입된 빌리 레제는 '죄의식으로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1942~1943년의 파괴 작업을 훨씬 능가하는 초토화 작전에 몸서리를 쳤다. 레제는 촌락과 도시가 '불과 연기의 폐허 사막'으로 무인지대로 바뀌는 것을 볼 때마다 술을 퍼마셨다. 그러나 동시에 레제는 썼다. 한밤중에 불타는 마을들의 선線이 '신비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나의 오랜 취향은 역설, 그래서 나는 전쟁을 미학적 문제라고 칭했다.' 병사들은 마을에서는 식량을 약탈하고 독일인 상점에서는 그곳에 반입된 새로운 군복과 술과 담배를 빼앗았다. 그들은 후퇴 작전을 먹고 마시는 광란의 잔치로 만들었다. 병사들은 '전쟁과 평화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연설'을 하고, 멜랑콜리에 젖어 향수를 말하고, 연애를 걱정했다. 레제와 병사들은 우마차 트럭을 타고 고멜을 향하여 서쪽으로 가는 동안 트럭에서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584)


"1944년 봄은 비교적 조용했다. 1년여 만에 처음으로 폭격이 전쟁과 관련된 대화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폭격의 자리는 적의 침공에 대한 예측이 차지했다. 독일인들의 기대는 높았다. 공격의 시간과 장소는 연합군이 정하겠지만, 그들은 결국 바다로 밀려날 것이요, 그러면 연합군이 1944년에 또 한번의 유럽 침공을 감핼할 수는 없으리라. 연합군의 침공은 오히려 독일이 전쟁의 주도권을 다시 확보하여 형세를 역전시킬 가장 확실한 기회가 될 것이다. 연합군이 유럽 대륙으로 '유인'되기만 하면, 영국군과 미군은 1940년에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패배했던 똑같은 장소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독일 도시의 폭격에 대한 적절한 응답일 것이다. 1944년의 가장 큰 불안은 연합군이 미끼를 물지 않고 장기적인 소모전을 지속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영불해협에서 벌어질 다가오는 대결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의 이면은 무제한 지속되는 공중 공격을 버텨낼 능력에 대한 불편한 비관이었던 것이다."(585)


제6부 완전한 패배: 1944년 여름~1945년 5월


제14장 참호가 된 나라 


"베를린-첼렌도르프에 사는 페터 스퇼텐의 아버지는 '발키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자신이 받은 충격을 아들에게 간결하게 표현했다. '어떻게 그들은 그렇게 전선을 위태롭게 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일기에 자신의 생각을 보다 길게 적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이미 패배했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구해낼 수 있는 것, 구해낼 수 있는 듯 보이는 것을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그런 일은 ······ 오직 내전과 지적 분열로 이어질 수 있을 뿐이고 등에 칼을 맞았다는 또하나의 전설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뉘른베르크로부터 올라온 친위대 정보국 보고서에 따르면 나치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오직 지도자만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으며, 그의 죽음은 카오스와 내전을 일으킬 뿐'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쾨닉스베르크와 베를린의 길거리와 상점에서 여자들은 히틀러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하나님, 지도자를 살려주시어 감사합니다'가 전형적인 안도의 표현이었다."(627-8)


"졸링겐 고등학교 교사 출신의 퇴퍼빈은 유대인 학살을 혐오했지만, 다른 많은 보수적 개신교들과 마찬가지로 (서유럽 민주주의를 부패시킨) '세계 유대인'을 독일의 적에 포함시켰다. 더욱이 퇴퍼빈은 많은 고위 독일군 사령관들과 한 가지 근본적인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모든 1차대전 퇴역군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1918년의 혁명적 해체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1944년 10월에 독일군의 최전선이 다시 안정되자, 그는 일기에 자랑스럽게 적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봉기의 기미는 아직 멀다!' 퇴퍼빈은 전쟁 내내 히틀러의 지도력에 의심을 표출했지만 1944년 11월 초 그는 자인했다. '히틀러가 인민이 기도하던 신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지면 분명해질수록 나는 그를 지지해야 한다고 느낀다.' 독일의 대의에 대한 인민의 충성을 우려할수록 그는 오히려 히틀러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히틀러가 메시아적 구세주가 아닐 수는 있다 그러나 다른 누가 독일을 구할 것인가."(635)


"히틀러에 대한 독일인 개개인의 믿음은 1930년대는 물론 1940년대에도 그의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를 공유하느냐, 혹은 전쟁은 위대한 민족의 정신적 필연성이라는 그의 전쟁관을 공유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았다. 정반대로 나치즘이 가장 성공적이고 인민적일 때는 평화와 번영과 손쉬운 승리를 약속할 때였다. 독일인들로 하여금 '승리 아니면 절멸'이라는 히틀러의 종말론적 관점을 공유하도록 만들었던 것은 1943년의 폭격과 1944년의 패배였다. 독일인들이 자신이 민족을 방어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던 1944년 가을에 동료들에 대한 밀고가 정점에 달했고, 나치당에 입당하려는 한바탕 소동도 작게나마 일어났다. 비록 나치당 지도자들이 과거보다 더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들이 조국전선의 방어에 실패한 것에 자극받은 일반인들이 스스로 주도권을 발휘했다. 자신을 나치로 간주하지 않던 그 많은 사람들에게 나치 윤리의 도덕적 폭력성을 주입한 것은 나치 정권의 성공이 아닌 실패였다."(641)


제15장 붕괴 


"1944년 가을에 다시 한번 고조되었던 독일인들의 민족적 연대는 연합군의 공격력 앞에서 산산조각났다. 나라의 붕괴는 '지역적' 충성심을 강화했다. 그것은 보다 큰 '공동체적 운명'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빼앗아갔다." "연합군이 지역별로 독일에 입성한 것이 가족과 향토Heimat를 나라Reich와 국민Volk보다 상위에 놓는 것을 완성했다." "자기희생과 민족적 연대의 구호가 최종적으로 소진되었다. 독일 민족국가는 독일에 진입한 4대 강국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전쟁 마지막 기간의 자기 해체에 의해서도 파괴되었다. 물론 패전은 독일의 민족주의를 파괴하지 않았다. 배타적인 증오심은 그리 쉽게 삭제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의 긍정적 의미, 민족적 대의에 사회적인 노력을 동원하고 자기희생을 촉발하는 능력은 소멸되었다. 루르의 노동자들이 1943년에 폭탄이 자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떨어지기를 바랐던 것처럼, 1945년 1월에 전쟁이 독일 안으로 들어오자 모두가 각자 알아서 전쟁을 피하려 했다."(667-8)


"국제 여론, 특히 영국과 미국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던 독일 선전부의 시도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아이젠하워 사령부에서 열린 언론 브리핑에서 저널리스트들은 드레스덴이 '테러 폭격'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단어는 영국과 미국이 공적으로 한사코 거부하던 용어였다─처칠은 사석에서는 그 단어를 사용했다. 영국 언론은 그 말실수를 보도하지 말라는 당국의 요구에 따랐다. 그러나 미국의 AP통신이 보도했고, 그 보도는 '광역 폭격'의 윤리성 논쟁을 촉발했다. 1945년 3월 6일에는 노동당 의원 리터드 스콕스가 자신이 개별적으로 확보한 드레스덴 정보를 하원 질의에서 늘어놓았다. 그렇게 하여 독일 선전부의 선전이 공식 기록에 올랐다. 1945년 3월 28일 처칠이 공공의 압력에 굴복하여 독일 도시에 대한 폭격을 중단시켰다. 폭격 외에는 영국이 독일에 대항할 효과적인 무기가 전무하던 과거에는 영국 폭격사령부의 영웅주의가 찬사를 받았다. 이제 지배적인 것은 윤리적 선을 넘었다는 불편한 감정이었다."(689-90)


제16장 종말 


"방어할 것이 적어질수록 명령은 가혹해졌다. 카이텔, 보어만, 힘러는 군대, 당직자, 친위대에게 모든 구역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항복하자는 모든 제안을 거부했다. 힘러는 자국민에게는 집단적 보복을 가하지 않는다는 과거의 원칙을 버렸다. 그는 친위대에게 '백기를 걸어놓은 집'의 모든 남자를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서부에서는 독일군이 마인강과 도나우강으로 철수함에 따라, 도시와 마을의 운명이 각 지역의 사정에 따라 결정되었다. 운명은 군사령관, 나치당 지도자, 여타의 공무원들, 때로는 지역민들이 누구냐에 따라 달랐다. 뷔르템베르크의 슈배비쉬 그뮌트에서는 미군이 1945년 4월 20일에 진입하기 직전에 나치당 지도자와 군사령관이 남자 두 명을 처형했다. 인근 슈투트가르트에서는 명사들이 뷔르템베르크 나치 지구당위원장을 우회하여 시장을 설득하였고, 그에 따라 슈투트가르트 시장이 독일군 부대와 비밀협상을 벌인 끝에 도시를 미군에게 평화적으로 넘겨주었다."(734-5)


"5월 18일 클렘퍼러 부부는 빅토르의 유대인의 별과 유대인 신분증, 그리고 그가 박해받은 유명 교수라는 지역 미군 당국의 보증서를 지니고 운터베른바흐를 떠났다. 그들은 지나가는 차를 얻어타고 뮌헨 교외까지 갔다. 뮌헨의 모든 것이 6주일 전보다 혼란스러웠다. 토요일 오후 천둥 치는 회색 하늘을 배경으로 도시의 흰색 파편들이 마치 최후심판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잠잘 곳과 음식을 찾으며 걸었고, 새로운 국경을 넘어서 소련 점령지구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들은 드레스덴 외곽의 집과 빅토르의 교수직을 되찾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을 뚫고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빅토르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민주주의를 희미하게 의식하면서, 해방이 패전과 얼마나 비슷하게 느껴지는지 쓰라리게 성찰했다. '신기한 내면의 갈등. 나는 제3제국의 행동대원들에 대한 신의 복수가 기쁘다. ······ 그러나 승자와 복수자들이 자기들이 지옥처럼 파괴해놓은 도시를 휘젓고 다니는 모습이 끔찍하다.'"(751-2)


에필로그: 심연을 건너서 


"친위대 정보국은 1945년 3월 말에 작성한 마지막 보고서에서 패배주의가 어느 정도 확산되었는지 점검했다. 정보국이 발견한 것은 나치가 늘 두려워하던 혁명적 경향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긋나버린 신뢰에 대한 깊은 실망, 비탄과 낙담과 원한과 분노의 감정, 특히 전쟁에서 희생과 노동 외에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들의 울분'이었다. 독일인들의 첫번째 반응은 반역이기보다 자기연민이었다. 사람들이 자주 입에 올리던 경구는 '우리는 이런 재앙에 끌려들어갈 그런 사람이 아니다'였다. 그러한 정서는 반反나치라기보다 자기정당화다.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전쟁의 과정에 대한 모든 책임에서 자신을 면제시켰고', '전쟁과 정치에 대하여 책임질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죄'의 문제는 최악의 재앙을 이끈 자들에게 전가되었다. 괴벨스가 〈제국〉의 논설들에서 전쟁의 모든 위기에도 불구하고 나치 지도부를 믿어달라고 요구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민족의 패배에 대한 책임이 어디 있는지는 명확했다."(754)


"1945년에 들어서조차 독일인들은 그들의 죄를 전혀 다른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하나는 패전의 책임에 관한 것, 즉 독일의 '재앙'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독일의 '민족공동체' 내부의 자기연민의 말들로서, 바로 친위대 정보국이 전쟁 마지막 몇 주일 동안 탐지해낸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독일의 전쟁범죄에 대한 도덕적 결산의 문제로서, 그것은 승리한 연합군이 자신들에게 강요하리라고 예상했던 것이었다." "점령 당국이 추진한 '재교육'에 어떤 입장을 취했건 무관하게, 제3제국의 후계 국가인 서독, 동독, 오스트리아가 1949년에 창설되었을 때 그 모든 나라에서 독일이 희생자였다는 감정이 독일에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을 압도했다. 죽음, 실향, 추방, 기아는 많은 독일 민간인들로 하여금 패전과 점령 몇 년을 전쟁 자체보다 훨씬 나빴던 것으로 바라보게 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고통의 감내를 정당화하거나 보상해달라고 호소할 위대한 민족적 대의가 없었다."(757-8)


"1950년 10월 26일 서독 의회가 소련 내 독일군 전쟁포로 기념일 행사를 진행했다. 연방총리 콘라트 아데나워가 질문했다. '역사에서 수백만 명이 그토록 차갑고 무정하게 고통과 불행을 선고받은 적이 있습니까?' 그가 말한 것은 유대인 학살이 아니라 소련에 수감되어 있던 독일군 전쟁포로였다." "서독 당국은 소련군 모델 수용소를 만들어놓고 특별 여행을 조직했다. 독일인들은 철도망과 감시탑을 둘러보고 수용소 마당과 영안실을 관람했다. 수용소 마당에서 왼쪽 오른쪽으로 나뉜 사람들은 독일인 남녀였고, 임시 영안실에 쌓인 것은 독일인 시체였으며, 시체가 구덩이에 무더기로 묻히기 전에 뽑힌 금니는 독일인의 금니였다. 서독 정부가 1950년대에 전쟁포로들의 고통과 독일인 추방민의 수난사를 모아서 수십 권짜리 책으로 발간하고 유포하는 동안, 독일인들 대부분은 유대인 제노사이드에 대해 침묵했고, 유대인들이 겪는 고통의 세부 사항은 어느덧 독일인들 고통 이야기 속의 세부 사항으로 뒤바뀌어 있었다."(768-70)


"교회는 나치당과 나치 대중조직이 금지된 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향력을 누렸다. 1946년 3월 처칠의 '철의 장막' 연설 뒤 2주일 내에 서부 지역의 가톨릭 주교들이 연합군의 탈나치화 작업 및 점령정책의 근간을 서슴지 않고 공격했다. 프링스 추기경은 '집단적인 죄를 인민 전체게 부과하고 인민을 그 기준에 따라 대우하는 것은 신의 권리를 찬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울 알트하우스 역시 지도적인 개신교 신학자로서 '죄'의 문제를 논한 짧은 논설을 발표했다." "그는 전쟁범죄와 그 결과들이 인간 본성의 표출에 불과하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내 민족 어딘가에서, 그렇다, 인류의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악은 인간의 영혼, 모든 시대 모든 곳의 영혼과 똑같은 인간 영혼 속의 똑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특정한 행위들을 추상적이고 보편적이고 무시간적인 죄의식 속으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그 행위들의 악을 재판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신뿐이라는 결론에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771-4)


"동부 독일이 '집단 범죄'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은 서부 독일보다 훨씬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당국은 동독인들에게 1947년부터 전사자추모일에 '히틀러 도당'에 의해 착취되고 전장으로 보내진 '파시즘의 희생자들'을 기리도록 했다. 그 영웅적인 '반파쇼 레지스탕스'에서 태어난 것이 사회주의 독일이라는 것이었다. 비록 평화로운 재건이라는 공산주의자들의 목표가 감상적이고 또 가능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언어는 희생, 재탄생, 낙관주의, 집단적 노력 등 과장된 개념들로 구축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나라의 목표가 나치 '민족공동체' 수사와 비슷한 울림을 주었다." "오스트리아는 국민들을 더욱 빠르게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전환시켰다. 1945년 4월 27일을 독일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날로 선언했다. 1938년 3월 독일에 병합된 오스트리아가 민족사회주의 침략의 '첫번째 희생자'였다는 것이다. 1955년에는 연합국들이 비동맹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을 주권국으로 승인했고, 그로써 오스트리아 신화는 봉인되었다."(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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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법률가들 - 법은 어떻게 독재를 옹호하는가
헤린더 파우어-스투더 지음, 박경선 옮김 / 진실의힘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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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서론


"나치의 법이론은 형식주의와 실증주의를 배격하고 '공동체의 통합', '명예', '인종적 동질성', '인종적 평등' 같은 실체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법의 실질적 개념을 선호했다. 개인의 권리는 군주와 신민의 적대적 관계에서 비롯된 잔재로 취급되며 저만치 밀려났다. 신뢰에 기초한 지도자Führer와 민족공동체의 단단한 결속관계와 무관하다는 이유였다. '독일적인 것'과 '독일법'이 나치 법이론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빌헬름 코블리츠는 나치당의 1920년도 강령 제19항이 이미 로마법을 독일 공동체법Gemeinrecht으로 대체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상기시킨다. 로마법은 〈유물론적 세계질서에 복무〉해 왔지만 독일의 공동체법은 일상을 규제받는 당사자들인 민족동지Volksgenossen의 도덕감정이나 정의감과 궤를 같이한다는 것이다. 코블리츠는 이런 방식으로 법과 도덕 간의 대립이 해소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익은 사익보다 앞선다〉라는 원칙에 따라 법은 개인의 이익을 보호하는 대신 공동체를 육성해야 했다."(20-1)


"히틀러의 생각들, 즉 『나의 투쟁』과 여러 연설에서 길게 늘어놓았던 장광설을 규범적 언어로 옮기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치 법이론가들은 필요한 규범적 틀을 제공하기 위해 열심이었다. 법률가들은 고전적인 정치철학을 근거 삼아, 총통의 포괄적 권위는 그가 집단적 의지를 개인 인격으로 체화한 것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루소의 『사회계약론』 속 주권(일반의지)의 토대를 그대로 되풀이했다. 물론 이들은 루소의 의도가 민주정 형태는 아니라 해도 공화정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을 〈너무 개인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이를 규범적으로 좀 더 넓게 해석하려 했다. 헌법학자 에른스트 루돌프 후버는 〈총통은 (존재질서Seinsordnung에 실질적 토대를 둔) '인민Volk'의 객관적 의지를 지닌 자〉로서 〈자기 내면에 민족주의적völkisch 집단의지를 형성함으로써 제각각인 모든 소망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고 인민의 전체성을 구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25-6)


"민족사회주의가 모든 시민의 삶을 통제하려는 것은 계몽철학적 기본원리와 충돌했다. 이는 민족사회주의 법사상가들이 칸트의 정치철학 및 법철학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을 설명해 준다. 결국, 칸트가 법과 윤리를 구분한 것은 법적 권위를 시민의 윤리적 태도로까지 확장하는 민족사회주의 국가와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나치 법률가들이 칸트의 정치철학에 기댈 수는 없는데도 특정 개념들─선의지, 무조건적인 의무, 정언명령 등─만 맥락에서 벗어난 채로 끌어다 쓰면서 윤리에 관한 고찰을 도구로 이용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윤리적 의무는 행복이나 효용성 극대화 같은 목적과 별개로 유효하다는 칸트의 주장도 당연히 잘못 해석되고 말았다. 민족사회주의 수사rhetoric는 윤리적 의무가 그 자체로um ihrer selbst willen 유효하다는 칸트의 사상을, 당사자의 동의나 정당한 이유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복종해야만 하는 의무로 간단히 바꿔버렸다."(28-9)


2장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제3제국으로


"'독재조항Diktatur-Artikel'이라고도 불리는 바이마르헌법 제48조 제1항은 대통령이 필요 시 특정 주가 헌법적으로나 법적으로 제국에 부여된 임무를 이행하도록 군대를 배치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제2항에서는 공공질서와 안전이 훼손되거나 위험에 처할 경우 제국 대통령이 이를 회복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치를 규정했다. 대통령은 군사력 지원을 요청할 권리 외에도 기본적인 시민의 권리와 자유의 보호를 보장하는 헌법 조항들을 폐지할 권한이 있다." "이토록 광범위한 집행권한을 부여하는 법조항이 어떻게 의회민주주의 헌법에 파고들었을까? 첫째,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음을 감안할 때, 헌법 초안 작성자들의 당초 목적은 파괴적일 수 있는 극우파와 급진좌파의 영향력에 맞서 공화국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둘째, 헌법위원회의 구성원 중 일부는 제국 의회가 정부에 대립각을 세우며 필요한 개혁을 방해할 것을 우려했다. 특히 막스 베버는 대통령을 의회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세우자고 역설했다."(47-8)


"당시 기본적인 논리는 이랬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은 '민의'에 의해 승인과 지지를 받았다. 반면, 정부 내각은 정당들을 대표하여 전략적으로 정치적 협상을 벌인 결과물이기 때문에 대통령만큼 정당성을 강력하게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정치적 타협에 의존했던 반면 제국의 대통령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은 입장이었다. 따라서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통합과 안정의 상징이었으나, 정부는 갈등으로 점철된 의회의 힘겨루기를 고스란히 이어받고 반영하는 존재였다. 바이마르공화국의 두 주요 정치기관의 규범적 토대에 대한 이런 견해는 보수우파 진영에서 두드러졌다. 대통령에 대한 헌법의 광범위한 권력 보장에다 위계적 국가에 대한 독일 내의 폭넓은 지지까지 결합하여 권위주의가 부상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눈에 띄는 점은 민족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 필수적이었던 일부 주요 조치들이 정당한 헌법적 규범에 근거했다는 사실이다."(49)


"1919년 4월부터 6월까지 석 달 동안 에베르트 제국 대통령은 작센 및 독일 북부에서 공산주의 쿠데타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무려 일곱 차례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에베르트는 제48조를 대대적으로 활용한 데 이어 입법권을 의회에서 내각으로 이양하는 「수권법Enabling Acts」으로 정치와 경제를 안정시키려 했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총 8개의 「수권법」이 통과되었다. 처음에 제48조 제2항은 정치적 불안과 격변을 억제하기 위한 법적 근거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23년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는 사이 '입법독재'나 다름없는 대통령의 입법활동이 의회입법을 대체하자 대통령과 의회 사이에서 권력의 추가 대통령 쪽으로 기울어버리는 상황이 됐다. 1925년은 바이마르공화국 제1기가 종말을 고한 해였다. 그해 2월 에베르트가 사망했고, 뒤이어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성향이자 반反공화주의 입장으로 유명한 육군 원수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사민당 후보를 제쳤다."(49-50)


"1932년 7월 20일, 프란츠 폰 파펜 제국 총리는 오토 브라운 총리가 이끌던 프로이센 내각을 해체하고 프로이센을 연방 전권위원 치하로 복속시켰다. 파펜이 보인 과감한 행보의 법적 근거는 제국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승인한 긴급명령이었다." "파펜의 조치에 대해 프로이센주 정부는 법치를 따르는 동시에, 통상적으로 제국과 개별 주 사이에 분쟁 조율을 담당하던 라이프치히 법원(국사재판소)에 해당 문제를 가져가는 것으로 대응했다." "1932년 10월 25일, 국사재판소는 '프로이센 대對 제국' 구도에서 프로이센 정부는 제국에 대한 의무를 위반한 바 없으나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는 실패했다고(즉 제48조 제1항이 아니라 제2항을 위반한 것이라고) 판결했다. 이 같은 판결은 프로이센 정부의 권한을 제국에 이양하는 것도, 프로이센 총리 및 각료들을 파펜이 해임한 것도 법적으로 유효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도 프로이센 경찰력을 장악하려는 조치는 제48조 제2항에 부합한다고 판결했다."(52-4)


"국사재판소의 결정은 당시 대표적인 법이론가인 카를 슈미트와 한스 켈젠의 논쟁으로도 이어졌다. 슈미트는 국사재판소의 법적 절차에서 제국 측 변호를 맡아 프로이센주를 상대로 한 제국의 조치를 옹호했다." "슈미트가 추론한 핵심은 헌법은 대통령에게 긴급명령을 실행할 권리를 부여하며, 이 경우 대통령은 그저 자신의 헌법적 권력을 사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배경 안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정말로 대통령의 결정을 정당화할 만했느냐는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다시 말해, 이 경우 힌덴부르크가 제48조를 동원한 것이 과연 헌법에서 제48조를 적용할 수 있다고 규정한 상황에 해당했는가이다. 슈미트는 대통령은 긴급조치에 대한 헌법적 권한을 지닐 뿐 아니라 헌법의 수호자 역할도 담당하므로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정치적 재량에 달린,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결정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같은 의문을 무마하려 했다."(54-6)


"슈미트의 주장에 반대한 켈젠은 제국 대 프로이센의 문제를 민주주의적 「바이마르헌법」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켈젠이 보기에 대통령은 헌법의 범위 안에서 움직여야 하며, 여기에는 헌법의 기본적인 규범 원칙을 존중하는 것도 포함된다. 따라서 그는 제국의 대통령이 헌법의 수호자로서 특수한 지위를 누린다는 슈미트의 가정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힌덴부르크의 명령을 평가할 결정적 기준은 '제48조를 발동하기 위한 헌법적 요건이 충족되었는가'라고 생각했다. 켈젠이 비판한 지점은 크게 세 가지였다. 제국 대통령의 명령은 위헌적이었고, 국사재판소인 라이프치히 법원의 판결에 일관성이 없었으며, 법원 판결의 결함은 상당 부분 제도적 실패─바이마르 내 헌법재판소의 부재─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켈젠은 헌법 사법권(관할권)의 열성적인 옹호자였다. 그는 삼권분립이 명확히 이루어진,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국가에는 헌법재판소가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았다."(59-61)


3장 총통국가


"나치 법이론가들은 히틀러의 정치적 쿠데타를 '합법적 혁명'으로 규정하여 혁명적 동력과 법적 정합성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려 했다. 이들은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여러 차례 있었던 긴급명령에 의한 통치와의 연속성을 지적하며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것은 적법하다고 주장했다." "나치 정권은 「바이마르헌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거나 제국의 대통령을 축출하지는 않았지만, 「수권법」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법을 제정하고 권력을 장악할 형식을 갖춘 것만은 분명했다. 카를 슈미트는 〈오늘날의 국가를 구속할 수 있는 어떤 토대도, 한계도, 그 어떤 중요한 해석도 폐위된 옛시대로부터 나올 수 없다〉라고 인정했다." "('헌법적 의미의 혁명'을 언급했던) 울리히 쇼이너는 합법적 혁명은 세 가지를 포함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인민운동Volksbewegung, 전통적 법질서와의 단절, 국가구조를 근본적으로 재건하는 새로운 정치원칙이었다. 쇼이너는 〈진정한 혁명〉인 나치의 장악이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한다고 주장했다."(73-5)


"민족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요소는 인민공동체, 또는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였다. 메시지는 단순했다. 민족 구성원들은 오직 공동체적 질서 안에서만 적절한 사회적 지위와 윤리적 삶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쇼이너는 민족사회주의 법질서가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보다 〈국가의 필수재, 명예, 국민 건강, 관습, 전통〉을 수호하는 데 역점을 둔다고 봤다. 국가에 맞선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의무가 지상 최고의 가치였다. 소위 지도자 원칙Führerprinzip─나치 독일의 조직 원리로 〈지도자의 말씀이 모든 성문법에 우선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외에도, 민족공동체 원칙Volksgemeinschaftsprinzip이 법의 원천 즉 법원Rechtsquelle, 法原이 되었다." "민족공동체라는 개념이 모호한 채로 남아 있는 한, 이는 온갖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그 위에 투사하기 좋은 배경이 되었다. 민족사회주의의 인종 독트린은 신화적 공동체의 가장 암울한 이데올로기를 나타낸 것이었다."(77, 81)


"카를 슈미트는 1932년 작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전체국가total state'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냈다. 그는 전체국가는 19세기 자유주의 '중립국neutral state'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통해 모든 사회 영역을 아우르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므로 전체국가는 전 국가적 통제로부터 특정 영역들(슈미트는 경제를 비롯하여 종교, 문화, 교육을 언급했다)은 제외해 주는 중립성이라는 자유주의 원칙을 폐기했다. 무엇보다도 국가에 대한 적절한 개념은 정치적인 것이 전제되었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즉, 모든 정치적 행동의 근원─은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도덕의 바탕이 '선과 악'의 개념이고 경제의 토대는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의 범주이듯, '친구'와 '적'은 정치 영역의 구성요소였다. 슈미트는 이런 기본 개념들은 〈구체적인 실존주의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국가의 전체적 통일성을 상대화하지 않고 정치 영역의 내적 역동을 표현한 개념이었다."(82-3)


"법 이론가 오토 쾰로이터는 전체국가total state와 전체주의 국가totalitarian state 사이의 경계가 유동적이어서, 전체국가의 권한도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할 것이라고 보았다. 쾰로이터는 민족사회주의 정치체계를 권위주의 국가의 형태로 이해하고자 했다." "쾰로이터가 말한 권위주의 국가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신의 이익과 자유를 우선시할 수 없는 〈공동체 윤리〉에 뿌리를 두었다. 반면에, 권위주의 국가는 정부가 국민의 요구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을 위해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쾰로이터가 보기에 민족사회주의 국가는 이러한 기준을 충족했다. 정치적 힘이 공동체의 이익에 봉사하므로 총통의 권력은 단순한 지배와 폭정 수준을 초월했다. 그는 전체국가와 대조적으로 〈권위주의 국가의 본질은 국민의 신뢰를 받은 국가권력의 존재에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진정한 리더십의 증표는 총통의 의지가 곧 국민의 의지의 자연스러운 표현이 된다는 것〉이라고도 덧붙였다."(86-7)


"민족공동체 원칙은 지도자 원칙에 이은 두 번째 법의 원천이었다. 지도자 원칙이 공동체 원칙보다 우선하는지 아니면 동등한지라는 난제에 봉착하면, 나치 법률가들은 총통에게는 무엇이 인민에게 최선이고 어떻게 하면 독일의 연속성과 번영을 보장할지 정확히 알아내는 인식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 문제를 회피했다. 즉 총통은 인민의 의지에 대한 직접적인 발현이며, 더 나아가 인민의 의지와 동일체라는 주장이었다." "총통의 절대적 권위를 이런 방식으로 옹호한 것은 나치 국가에 통제 메커니즘이 부재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직접적인 결과였다. '민족'의 질서에 대한 온전한 통찰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 정치적 리더십은 스스로 좋고 옳다고 판단한 것을 명령하게 됐다. 총통의 명령과 지시는 마음 깊은 곳의 충성심과 윤리적 헌신으로 복종해야 하는 법규나 마찬가지였다. 나치 이데올로기는 법적 의무와 윤리적 의무를 뒤섞어 버렸다. 이 왜곡된 규범 속에서 윤리, 법, 정치가 한데 맞물렸다."(102-3)


4장 민족사회주의 형법


"나치 체제에서 형법은 민족공동체의 순수성과 정권이 가진 불가침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범죄자들'을 겨냥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 법사상가들(저명한 대학교수 및 법무부 소속의 고위공직자 등) 사이에서는 바이마르공화국의 자유주의적 형법을 민족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목적에 부합하는 체계로 어떻게 대체할 것인지에 대해 격론이 벌어졌다. 다시 말해, 이들은 법률뿐 아니라 민족공동체에 대한 충성 의무를 위반한 경우까지도 처벌할 수 있도록 형법을 수정할 방법을 찾았다. 1930년대 중반부터 법학자들 사이에서도 '의도' 중심의will-based 형법이 민족사회주의 세계관에 가장 잘 부합하리라는 견해가 우세했다. 그런 법에서는 범죄자의 범행이라는 실제 결과보다는 범죄 의도가 책임과 죄책을 판단하는 데 결정적이다. 따라서 앞으로 형법은 행위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범죄자의 신념과 태도에도 초점을 맞춰야 했다."(106)


"그럼에도 정권은 법률가들의 정치적 굴종에 보답하지 않았다. 1939년 12월 중순 히틀러는 법무부가 새롭게 마련한 형법 초안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고, 이로써 6년에 걸친 대대적인 형법 정비작업은 무산되었다. 히틀러가 법적 규제에 대해 미적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1939년 9월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자신의 권력 행사를 제한하는 어떤 규범적 규제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경향은 더 강해졌다. 명확히 구체화된 법적 규범과 법령을 인정한다면 나치 정권이 형사 사법권을 장악하는 데 제동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윤리적 규범과 법적 규범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나치 국가의 강압적 권력은 더 확대되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 개인의 양심에 규제를 맡겼던 윤리적 의무는 이제 법적 의무가 되었고, 민족공동체에 대한 윤리적 의무를 위반한 것은 법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같은 윤리적 의무와 법적 의무의 통합은 윤리적 품위와 진실성, 범죄성 사이의 경계를 흐려놓았다."(108-9)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형법은 시민들이 특정 행위가 불러오는 부정적 결과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처벌은 법에서 잘못되었다고 명확히 정의한 행위에 대한 대응이다. 처벌은 나쁜 것이지만,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복수는 물론이고 보복과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보복과 복수는 증오와 분노의 감정에 매여있으므로, 신뢰할 만한 형사 사법권의 안정적인 지침이 되기 어렵다. 그러나 나치 법이론가들에 따르면 보복은 형법의 핵심이었다. 나치 국가의 대표적인 형법학자인 에드문트 메츠거는 처벌의 본질과 목적을 구분했다. 처벌의 본질은 정당한 보복 대응이라고 규정하면서도, 그 목적은 민족공동체를 보호하고 방어하는 것이라고 했다. 메츠거는 보복 또한 예방적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보복은 형을 선고받은 개인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고, 사회 전체에 대해서는 교육적 영향을 준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치 국가의 형법 정책은 민족공동체 내에서 증오와 복수의 정서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114-7)


"법의 도덕화는 충실, 충성, 명예 같은 특성이 형법 속에 스며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몇몇 나치 법이론가들은 명예처벌Ehrenstrafe을 재도입하는 데 찬성했다. 킬대학 형법학 교수인 게오르크 담은 이 같은 명예처벌은 형법을 〈범죄에 맞서 싸울 합리적 기법〉으로 보는 관점과 〈법의 영역에 개인 차원을 초월한 존엄까지 포함하여 민족의 삶이라는 전체 맥락 속에 통합하는〉 관점으로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적 원칙에 따르면 〈법은 단지 시민의 외적 공존을 규제할 수 있기 때문에 외부로 나타나는 법적 행동에만 관심을 둔다. 범죄자의 신념Gesinnungen은 상관하지 않는다. 국가는 권리를 박탈할 수 있지만 명예를 박탈할 수는 없으며 내적 신념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과 윤리, 형법과 민족에 대한 인식Volksanschauung이 함께 자라는〉 법 체계 속에서는 명예처벌을 없앨 수 없다. 실제 각 공동체는 구성원의 충성과 명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120-1)


"나치 법이론가들은 자유주의적 형법의 주요 원칙, 즉 어떤 행위를 처벌하려면 범행 발생 시점에 처벌 가능하다고 법적으로 공표된 경우에 한한다는 원칙을 거부했다. 사법권한의 자의적 행사에 맞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 없으면 범죄도 없고, 처벌도 없다nullum crimen, nulla poena sine lege'는 이 죄형법정주의 원칙을 나치 법학자들은 〈범죄자의 대헌장Magna Carta〉이라고 비난했다. 법률상의 허점이나 법안의 불안전함을 근거로 범죄자에게 처벌을 피할 여지를 준다는 것이었다. 법학자 카를 셰퍼는 자유주의적 준칙이 판사의 자유 재량에 족쇄가 되어 판사를 한낱 〈분류 기계Subsumtionsmaschine〉로 전락시킨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나치 법학자들은 '법 없으면 범죄도 없고, 처벌도 없다'를 '처벌 없는 범죄는 없다nullum crimen sine poena'로 대체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식으로 각 범죄마다 법으로 규정된 범행이 성립하는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처벌과 속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123)


5장 인종주의적 입법


"민족사회주의에 동조한 법이론가들은 놀라울 정도로 나치의 인종 독트린을 수용했다. 수많은 법률 해설자료에서 '인종'을 〈전형적인 신체적 특색과 정신적 특징에 의해 여타 인간 집단과 구분되는 인간들의 집단〉으로 규정한 귄터의 정의를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이런 차이가 동질성Artgleichleit과 이질성Artfremdheit 간의 경계를 결정했으며, 이는 결국 법적 권리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됐다." "쾰로이터는 국가의 토대와 통치에 대한 자신의 구상이 가져올 극단적인 결과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리더십은 동질적 인간 십단을 상호보완적으로 조직하고 적의 세력을 저지하며 때에 따라서는 말살할 수도 있는 힘이다. 즉, 모든 리더십은 내적 질서를 생성하고 자체적인 힘을 사용해 방해 세력을 퇴치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이 법률가들은 인종적-생물학적 요인을 범죄와 직접 연관 짓기도 했다. 범죄 예방은 독일 공동체에 대한 인종적 보호를 수반했다."(163-5)


"나치 법률가들은 사실is과 당위ought의 이분법을 단순한 법실증주의의 구성 개념에 불과하다고 맹비난하면서 그 문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법실증주의는 민족적 법사상의 기본 전제들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논지는 분명했다. 주어진 민족의 생활질서, 즉 존재의 법칙에서 출발하는 민족중심적 법학에서 경험과 규범의 영역이 융합되어 사실/당위의 차이는 소멸되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인 것과 규범적인 것의 이 같은 통일은 법이론가들이 인종 개념을 활용할 때 재량권을 부여했다. 나치 사상가들은 '사실'과 '당위'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은 채 경험적 차원에서 규범적 차원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도움이 되면 두 차원을 쉽게 뒤섞어버렸다. 이들 사고방식의 내적 논리에 따르면, '자연과학적' 전제로부터 규범적 결론과 의무적 명제를 도출하는 것은 전적으로 허용되는 것이었다. 이런 전략은 이후 통과된 인종주의 법에 사이비과학적 근거를 부여했다."(167-8)


"론 L. 풀러는 『법의 도덕성』에서 법의 8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즉, 법체계는 (임시 방편의 결정이 아닌) 일반 규칙들로 구성되어야 하고, 이 규칙은 일반에 공개되어야 하며,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너무 자주 바뀌지 않아야) 하고, 모순되지 않아야 하며, 따를 수 있어야 하고, 소급 적용되어서는 안 되며, 공표된 규칙과 실제 집행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그 영향을 직접 받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법적 규범의 공표와 투명성은, 풀러가 생각한 법질서로서의 자격을 갖춘 규칙 체계의 핵심 요건이었다. 제3제국의 인종 정책이 전개되고 급진화된 과정, 특히 공표된 법에서 비밀스런 산업 수준의 대량학살 계획으로 전환한 것은 풀러가 제시한 조건이 적절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불가능성이 가져온 결과는 주목할만하다. 모든 규정을 공개해야 한다는 그 간단한 요건이 나치 정권이 최악의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190-1)


6장 경찰법


"제3제국 초기에 경찰권력은 1933년 2월 28일 자 「제국의회 화재 법령」에서 비상시에 허용한 특별조치를 기반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차츰 경찰의 주요 기능을 총통국가를 건설하고 수호하는 일로 규정하면서 결국 행정집행 권한을 광범위하게 해석하는 데─실정법으로 규제할 수 없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나치 경찰법 전문가였던 발터 하멜은 경찰은 〈모두가 민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민족의 가치Volkswerte를 유지하고 창출하는 역할을 준수하는지 확인〉할 임무를 띤 〈공동체의 수호자〉로서 기능해야 한다고 보았다." "경찰을 국가권력의 비이성적이고 정의하기 힘든 측면과 결부하는 이런 수사rhetoric는 힘러가 경찰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만드는 것을 뒷받침했다. 게다가 나치 법률가들은, 포괄적인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정확히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준비가 되어있는 국가를 지지하면서도 경찰이 더 이상 그런 권리 침해를 막지 않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다."(202-4)


"3차 「게슈타포법」의 초안 작성자이자 게슈타포의 법률 자문이었던 베르너 베스트는 〈인종주의적 총통국가에서 정치경찰의 사상과 정신〉을 정의하면서 경찰의 임무를 인종 위생과 연결하기도 했다. 〈[정치경찰은] 각 질병의 증상을 시의적절하게 인식하고 파기의 원인균이 내부의 부식에 의해 생겨났는지, 아니면 외부로부터 의도적으로 독이 주입된 것인지 확인하여 적절치 못한 것은 뭐든 제거함[으로써] [···] 독일 정치체의 위생을 신중하게 감독하는 기관이다.〉 베스트의 저술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에 현혹된 나치 친위대 법률가의 토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경찰법에 관한 당대의 공식적인 주요 해설이었다. 실제로, 1940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독일경찰』은 개인주의적-인도주의적 국가(개인들 간의 합의 의지 개념 고안)와 민족국가를 구분했고, 이는 경찰의 지침서가 됐다. 그가 보기에 경찰은 〈분열과 파괴에 맞서 민족적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질서 및 안보 서비스〉에 해당했다."(206-7)


"나치 국가에는 성문화된 경찰법이 없었다. 고정된 법체계 안에서 경찰권력의 범위를 규정했다면 독재정권의 정치적 야욕을 제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치 법률가가 초안을 작성한 유일한 법이었던 「게슈타포법」에는 행정 관료체계로부터 정치경찰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이들을 강화하려는 계산만이 담겨있었다. 나치의 법 관련 저술들은 전통적 규범의 경계를 넘어서는 행위에 대한 이론적인 자양분이 되었다." "그럼에도 행정 관료체계가 없어지지는 않았다. 총통의 의지라는, 사실상 개인화된 이 형태가 국가 행정보다 우선했지만, 행정부는 나치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한 전통적인 법적 안정성이라는 중요한 연속성을 제공했다." "베스트는 경찰이 나치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전통적인 형태의 합법성을 초월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당성 유지를 위해 관료국가Beamtenstaat와 최소한의 유대관계는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할 만큼 나치 국가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214, 217-8)


7장 나치 친위대의 사법관할권


"1939년 10월 17일,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불과 몇 주 만에 나치 친위대와 경찰사법권은 무장친위대원, 친위대 특무대원, 참전 경찰부대원의 범죄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게 되었다. 보통 군사법원은 나치 친위대원의 정치적 사고방식과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아서 그들을 재판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힘러가 나치 친위대 내부에 특별 사법체계를 만든 것은 단지 무장친위대원들과 나치 친위대 특무대원들을 국방군의 군사법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법을 나치 친위대 사법체계의 수중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제3제국 권력구조 안에서 나치 친위대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계산도 있었다." "역사학자 제임스 바인가르트너의 표현에 따르면 나치 친위대 판사는 〈전통적인 판사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처신해야 했다. 법조문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며, 이상적으로는 법조문보다도 (나치 친위대 정신에 부합하는) 원칙을 우선시하는 정치적 투사이자 교육자여야 했다.〉"(224-6)


"나치 형법이론의 변화─의도 중심의 형법, 범죄자 유형론 승인, 유추 허용 등─는 모두 나치 친위대 사법체계에 뚜렷이 영향을 미쳤다. 나치 친위대 판사들은 법과 도덕의 통일과 함께 나치 친위대 정신에 따라 사건을 판결했다." "나치 친위대 판사 노르베르트 폴이 보기에 피고인이 판사에게 주는 인상은 공정한 판결을 내리는 데 중대한 요소였다. 그는 심지어 〈법령보다도 피고인의 인격이 정의 구현을 좌우한다〉라고 주장하며 법령보다 인격을 우선시할 정도였다." "거기서 한층 더 나아간 폴은 개별 범죄자 유형의 구체적인 특색((주취자, 상습절도범, 살인범 등)에 초점을 맞춘 범죄학적 접근과 달리, 규범적 접근은 소속 집단의 일반적 특징에 비추어 범죄자를 평가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이는 형을 선고할 때 다양한 인종적, 민족적 편견이 작동하도록 문을 활짝 연 셈이 되었다. 폴이 범죄자 유형론을 너무 광범위하게 인정하는 바람에 일부 나치 법률가들조차 이를 법률 지침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229-31)


"나치 친위대 사법권의 도덕률처럼 이데올로기적으로 기이하게 변형된 도덕률의 문제는 그 개념들이 굉장히 익숙해 보인다는 점이다. 이 도덕률을 구성하는 각종 원칙과 덕목─정직, 품위, 신뢰성, 청렴, 충성, 충실─은 사회적·법적 배경으로부터 추출된 것으로, 도덕에 대해 왜곡되지 않은 우리의 이해에 속한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치 체제는 옳고 그름, 선과 악의 기준을 재해석했다. 실제로 품위, 명예, 강직함, 충성, 출실 같이 수용 가능한 개념을 법치사회의 전통적 도덕에 의해 금지된 것으로 재정의하는 등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개념을 왜곡했다. 그렇게 도덕 질서를 변형시킨 나치 국가, 특히 나치 친위대는 윤리적 의무가 무제한적 전쟁,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 살인과도 혼동되는 규범 세계를 창조했다. 이 같은 새로운 규범 세계는 완전한 무도덕주의나 무한한 범죄의 세계가 아니라, 범죄행위와 살인이 윤리적 의무와 요건에 부합하는 것과 같은 전복된 질서였다."(244-5)


8장 민족사회주의가 추진한 법의 도덕화


"제3제국은 시민들을 완전히 통제하려는 전체주의 국가였다. 정치적 권위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사회적 삶의 모든 측면을 규제하려는 포괄적 가치체계다. 그러므로 전체주의 국가는 모든 사회영역에 스며들어 말 그대로 시민의 '좋은 삶'을 정의함으로써 개인의 자율을 제한한다. 나치의 규범적 포부는 존 롤스가 말한 완전히 포괄적인 도덕적·정치적 독트린, 즉 〈상세하게 설명된 하나의 체계 안에 모든 가치와 덕목을 포함하는〉 규범적 질서였다. 그러므로 〈완전히 포괄적인 독트린〉은 절대진리에 대한 근본주의적 주장, 즉 무엇이 참이고 선한지에 대한 국가의 관점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비합리적이다." "법규범과 윤리규범의 차이를 없애면서 나치 국가의 권한은 외적 자유의 영역뿐 아니라 내적 자유의 영역─즉, 개인의 윤리적 가치, 신념, 태도의 영역─에까지 미쳤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출입을 (마땅히) 금지하던 규범적 영토를 이제 국가가 침범한 것이다."(253-5)


"나치 법률가들의 법에 대한 관점은 얼핏 자연법 이론과 일치하는 듯 보인다. 자연법을 지지하는 쪽은 법과 도덕의 긴밀한 연결을 적극 옹호하면서, 정의와 도덕은 법에 필수적이라고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자연법 이론가들은 법을 한낱 전체주의 정권의 수단으로 전락시킬 개념을 전파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들이 법과 도덕의 긴밀한 연결을 강조한 것은 법의 이데올로기적 악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 같이 우리는 도덕과 법의 경계를 지우거나 그 거리를 좁히려는 모든 시도를 전면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는다 해도 회의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시도는 행위자의 자유를 보장하려면 두 규범 영역의 분리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과 법이 규제하는 영역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들은 각기 다른 규범적 원칙을 따른다. 단순히 법과 도덕의 일치만을 추구하는 것은 나치의 법체계에서 발견된 종류의 왜곡을 바로잡는 데에는 적절하지 않다."(275)


"그렇다면 나치 이론가들이 법과 도덕의 통합을 지지하고 민족사회주의가 법을 도덕화한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일까? 한가지 답변은 나치 이론가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된 도덕 개념을 지니고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 외에 딱히 심오한 결론이 없다는 것이다." "나치 체제는 도덕적 원칙, 규칙, 덕목에 대해 자체적으로 해석했다. 특히 그런 왜곡된 도덕은 나치 친위대 등 이데올로기 중심의 나치 조직에 파고들었다. 하인리히 힘러는 '정직과 진실함, '용감, 충성, 용기'라는 덕목과, '재산의 신성함', '남자다운 규율이라는 규칙'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해되고 실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선전했다." "나치 법체계가 도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한 것을 보면 도덕은 법치의 구성 조건을 규정하는 근원으로 기능할 때 법체계를 평가하기 위한 중요한 매개변수로서의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법치의 요건을 준수하는지의 여부가 온전한 법질서인지를 규정한다."(2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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