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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고전에 맞서며 - 전통, 모험, 혁신의 그리스 로마 고전 읽기 ㅣ 메리 비어드 선집 3
메리 비어드 지음, 강혜정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11월
평점 :
서론_고전학에 미래가 있는가?
왜 우리는 이토록 끈질기게 고전학의 ‘현주소’를 검토하고, 고전학의 쇠퇴를 한탄하는 책을 사는 것일까요? 고전학과 관련된 그간의 역사를 보면 거의 모든 곳에서 한탄과 우려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전학이 지니는 가장 중요한 상징적인 특징 하나를 새삼 확실하게 떠올리게 됩니다. 임박한 상실의 느낌, 지금을 사는 우리와 머나먼 고대와의 유대가 두려울 정도로 약하다는 느낌, 문 앞의 야만이라는 공포, 소중한 그것을 보존하는 작업을 충분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과 자책 같은 것이지요. 말하자면 고전학의 쇠퇴에 관한 글들은 고전학에 관한 논평이 아니라, 내부 논쟁인 셈입니다. 부분적으로는 고전학이 늘 띠어왔던 상실감, 염원, 향수의 표현이지요. 이런 정서에도 물론 긍정적인 면은 있습니다. 상실이 임박했다는 느낌, 지금이 고전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직전 상태일지 모른다는 반복되는 두려움은 고전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활력과 예리함을 되살리는 매우 중요한 동인입니다. 20-2)
1부 고대 그리스
1. 유적의 건설자
고고학 초기에 발굴자이자 탐험가로 활약했던 에번스나 슐리만 같은 이들은 일반적으로 영웅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런 이미지 때문에 콧대를 꺾어놓을 목표물이 되기 쉽고, 이를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된다. 게다가 이게 전부가 아니다. 고고학의 재료 자체의 속성, 그리고 발굴자와 그들이 내놓는 자료 사이의 극단적일 만큼 밀접한 관계도 고고학계의 이런 분위기에 일조하고 있다. 전통적인 고고학 ‘발굴’이 고고학적 ‘파괴’의 완곡한 표현이라는 사실은 자명한 이치다. 고고학의 이런 특성은 우리가 고고학자의 정직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된다. 사건이 일어난 뒤에 대조하고 확인할 수가 없으며, 고고학자가 진행했던 절차를 되풀이할 수도 없다. 그런 작업에 필요한 재료 자체가 발굴 과정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슐리만이 자기 사생활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면, 자신이 발견한 유물과 발굴 결과에 대해서도 정직하지 못하다는 암시 혹은 방증이 되지 않을까? 말하자면 이런 심리다. 39)
2. 사포의 목소리
“비정상적이고 극단적인 관행에 빠진 어떤 여자가 (…) 운율의 조화, 상상력이 풍부한 묘사, 정돈된 사고라는 법칙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사물의 이치에 어긋난다.” 미국의 고고학자 데이비드 로빈슨이 1924년에 발표한 『사포, 고대와 현대 문학에 미친 그녀의 영향Sappho&Her Influence on Ancient and Modern Literature』에 나오는 문장이다(1960년대에 책의 재판이 나왔다). 위의 글로 보아 로빈슨에게는 사포 시의 ‘완벽함’이 그녀의 흠 잡을 데 없는 됨됨이를 보증하는 충분한 증거였다. 로빈슨은 (적어도 여성 작가들은) 훌륭한 도덕성이 겸비될 때만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졌다는 점에서 특이한 사람이리라. 그러나 달리 보면 로빈슨은 사포라는 그리스 시인을 그녀 자신의 글이 암시하는 바로부터, 특히 그녀가 다른 여성들과 육체적인 사랑을 즐겼다는 암시로부터 구출하려고 무던히도 노력해온, 그동안 줄기차게 이어진 학계 전통의 일부일 뿐이었다. 41)
사포의 시 「아프로디테 찬가」는 『일리아스』 5권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 중 영웅 디오메데스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아이기스 방패를 든 제우스의 따님, 불굴의 그대여,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디오메데스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된다.) 존 윙클러의 주장처럼 이런 모방 사실은 시에서 드러나는 사포의 ‘목소리’(혹은 ‘목소리들’)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의 무용담이라는 남성의 세계와 여성의 관심사인 사적 영역 사이의 거리에 주목하게 된다. 이런 모방은 시인이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고 재해석하여 차별화되는 여성의 언어를 이용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시인은 이런 모방을 통해 ‘전사들의 전쟁 경험 서술에 쓰이는 언어를 사랑에 빠진 여성들의 경험을 서술하는 언어로 바꿈으로써’ ‘영웅 위주의 기존 질서’ 전체를 효과적으로 뒤집는다. 말하자면 여기서 사포의 글은 지배적인 남성의 언어에 대한 전략적인 전복에 해당된다. 44-5)
3. 어느 투키디데스를 믿을 것인가?
투키디데스는 거의 해석이 불가능하다 싶을 만큼 난해한 그리스어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이하 『전쟁사』)를 기술했다. 여기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몇 가지 중요한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첫째, 투키디데스의 『전쟁사』에 대한 ‘훌륭한’ 번역, 다시 말해 유창하고 잘 읽히는 번역은 원본에 있는 그리스어의 언어적 특성을 제대로 살리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독자에게 실상을 오해하게 할 여지가 다분하다는 것이다. 번역이 ‘좋을수록’ 투키디데스가 썼던 난해한 원본의 분위기와는 멀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둘째, 투키디데스의 글에서 우리가 애용하는 ‘인용구’의 다수, 투키디데스의 독특한 역사관을 보여주기 위해 활용하는 근사한 ‘슬로건’들이 실은 원본의 문장과는 빈약하게만 관련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슬로건이 머리에 쏙쏙 들어올수록 투키디데스 자신의 산물이기보다는 번역가의 생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투키디데스는 기지 넘치는 발언이나 명언 따위는 쓰지 않았다. 47-8)
일례로, 고대 도시 케르키라에서 일어난 무자비한 내전이 그곳의 언어에 (이외의 많은 것에도) 미친 영향을 돌아보면서 투키디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어도 통상적인 의미가 바뀌고 새로이 주어진 의미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많은 연구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실은 그렇지 않다. 투키디데스는 케르키라 내전 상황에서 과거에 나쁘게 생각되었던 행동이 좋게 재해석되었다는 훨씬 단순한 요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혼블로어는 이 대목을 정확하면서도 원래 문체와 조화를 이루도록 이렇게 번역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행동을 평가하는 통상적인 언어 역시 새로운 것으로 바꾸었다. 자신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관점에 비추어.” 이어지는 투키디데스의 설명을 보면 구체적인 의미는 “무모한 비이성적” 행동들이 “자기 당파를 위한 용기와 충성심 있는” 행동으로 간주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석의 정확도야 어떻든 간에 해당 문장은 언어 자체의 변화보다는 도덕적 가치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50)
4. 알렉산드로스 대왕, 얼마나 위대한가?
사실 알렉산드로스 연구는 고대 역사 전체로 보면 극히 짧은 시기를 다루고 있다(알렉산드로스가 정복 전쟁을 벌인 기간은 10여 년에 불과하다). 그 분야의 전문가들은 현존하는, 아주 생생하지만 신뢰성이 심히 의심되는 문헌 자료를 근거로 “실제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재구성하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전쟁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수백 년 뒤에 쓰인 것들이다. 따라서 데이비드슨은 사라진 자료가 반드시 신뢰성 있으리라 가정하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일부 기록은 위조된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또한 일부는 고대 세계 자체의 비평을 통해 확인되는 범위에서 판단하자면 아주 조악한 엉터리 기록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알렉산드로스의 자취’라고 알고 있는 역사적 구조물 자체가 극도로 엉성하고 빈약한 상황에서 현대 학자들은 이를 쥐어짜서 알렉산드로스를 둘러싼 각종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 하고 있다. 63-4)
그렇다면 알렉산드로스와 관련하여 대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그와 관련한 역사 서술에서 부족한 부분, 빠져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나는 평범한 사각지대를 제안하고 싶다. 바로 로마다. 로마 작가들은 단순히 알렉산드로스의 성격에 대해 논쟁만 한 것도 아니고, 그를 본보기로 여겨 칭송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알렉산드로스’를 거의 만들어냈다. 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는 명칭이 쓰인 입증 가능한 최초의 사례는 로마 시대 플라우투스의 희극에 나오는데 알렉산드로스 사후 150여 년이 지난 기원전 2세기 초반의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 단어는 아마도 로마인들 사이에 퍼진 신조어였을 것이다. 반면, 그리스에 있는, 알렉산드로스의 동시대인이나 직계 후손들이 그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 불렀음을 입증하는 확실한 자료는 전혀 없다. 어떤 의미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은 ‘위대한 폼페이우스Pompey the Great’와 마찬가지로 로마인의 창작물이다. 66-7)
5. 그리스인은 어떤 때에 웃었을까?
남을 놀리는 농담을 하는 사람이 역으로 그로 인한 희생자가 되기 쉽다는 것은 고대 ‘웃음학gelastics’의 확고한 법칙이었다. 라틴어 형용사 ‘ridiculus’는 우스꽝스러운 어떤 것(영어로 ridiculous)과 일부러 사람을 웃게 만드는 어떤 것 혹은 사람을 의미했다. 웃음은 항상 고대 군주와 폭군들이 애용하는 도구였고 그들에게 대적하는 좋은 무기이기도 했다. 당연히 훌륭한 군주는 농담을 받아넘기는 법을 알았다. 각종 우스갯소리와 농담 앞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보인 아량은 사후 400년 시기에도 찬양의 대상이었다. 반면 폭군들은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는 농담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기는 늘 아랫사람을 놀리면서도 그랬다. 고대 독재자의 결정적인 표시이자 권력자가 (요란하게) 미쳐간다는 확실한 신호는 웃음을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어떤 이들은 통제를 넘어 아예 금지하려고까지 했다(칼리굴라가 누이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애도하는 과정에서 웃음을 금지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69-70)
홀리웰은 고대 ‘웃음 문화’에서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고대 철학, 문화, 문학 이론 등에서 웃음이 차지하는 핵심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웃음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는 현대와 달리 고대 학계에서는 철학자와 이론가들이 웃음과 그 기능, 의미 등에 대해 저마다 견해를 갖는 것을 당연시했다. 기원전 5세기의 철학자이자 원자론자였던 데모크리토스는 항상 웃는 것으로 유명해서 ‘웃음의 철학자’라 불린 인물이다. 데모크리토스의 고향 사람들은 그가 세상 모든 것을 비웃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히포크라테스는 어느 순간, 철학적인 관점에서, 자기 환자가 (홀리웰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한의 중심에 있는 우주의 부조리”를 일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스가 최종적으로 취한 입장은 그것이 아니다. 데모크리토스는 현자賢者란 ‘비웃음을 면제받는’ 지위라고 보는데, 이유는 세계의 보편적인 부조리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데모크리토스는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이론은 비웃지 않는다. 74-5)
2부 초기 로마의 영웅과 악당들
6. 누가 레무스의 죽음을 원했나?
레무스와 로물루스 신화가 로마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시기는 (피터 와이즈먼이 『레무스: 어느 로마 신화』에서 주목한) 기록도 없이 흐릿한 기원전 3세기가 아니라 그와는 여러 면에서 사뭇 다른 시기, 기록도 훨씬 잘되어 있는 제국 초기다. 로물루스 이야기는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특히 당면한 사안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황제 칭호를 택하는 시점에서 로물루스라는 이름을 고려했으나 형제 살해 이미지 때문에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시인 호라티우스는 로마 내전을 로마를 건설한 쌍둥이의 불가피한 유산으로 기록했다. 역사가 타키투스 역시 100여 년 뒤에 네로가 어린 동생 브리타니쿠스를 살해한 것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기록하면서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옛말처럼 형제란 전통적인 적이로군” “왕궁은 하나인데 왕이 둘일 수는 없지” 등등. 달리 말해, 레무스와 로물루스 이야기는 로마 제국의 군주제 패러다임 및 그로 인한 왕실의 갈등과 직결되었다. 84-5)
7. 궁지에 몰린 한니발
정통적 관점에서 볼 때 리비우스는 고대 기준으로든 현대 기준으로든 아주 형편없는 역사가였다. 리비우스는 매우 기본적인 조사도 하지 않고 전해오는 과거 이야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역사가였다. 물론 고대에는 이런 모습이 굉장히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순 없다. 그렇지만 리비우스는 대다수의 고대 역사가보다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리비우스의 눈에 띄는 오역 중 하나는 전쟁이 끝난 뒤인 기원전 189년 로마의 그리스 암브라키아 포위 공격에 대한 서술에서 나온다. 로마와 암브라키아 양쪽 진영에서 판 여러 개의 땅굴 속에서 복잡한 싸움이 전개되던 중이었다. 이때 리비우스는 ‘문들이 막고 있는foribus positis’ 상황에서 진행되는 싸움에 대해 언급한다. 문들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가? 땅굴에서 문이라니 대체 어떤 용도란 말인가? 그러나 폴리비오스의 기록을 보면 사뭇 다른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폴리비오스는 문이 아니라 ‘방패’라고 말한다. 매우 기본적인 번역 오류를 범한 것이다. 91-2)
8. 도대체 언제까지……?
키케로의 행적과 관련하여 어떤 것보다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사건 하나가 있다. 바로 집정관 시절인 기원전 63년, 소위 ‘카틸리나의 음모’를 진압한 일이다. 기원전 1세기 초에 가장 첨예했던 정치적 논쟁 하나는 (다른 정치체제에서도 종종 그랬듯이) 비상사태 선포의 본질에 집중되었다. 어떤 상황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하는가? 계엄령, 테러방지법, 혹은 (로마의 표현을 쓰자면) 원로원 최종 권고를 통해 당국은 정확히 어디까지 할 권한을 얻는가? 입헌 정부가 국민의 헌법상의 권리를 유보하는 것은 어디까지 적법한가? 카틸리나 음모 사건에서 재판 없는 죄수의 처형은 로마 시민의 기본권인 재판받을 권리를 무시한 것이었다. 원로원 회의에서 사상 유례없는 종신형을 주장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런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장기인 연설을 통해 열변을 토하고,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절차에 의존했음에도 불구하고, 키케로의 음모 가담자 처리는 이후 그의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97-8)
키케로의 카틸리나 음모 처리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의문은 재판 없는 죄수 처형 문제만이 아니다. 키케로는 소위 자수성가한 정치인이었다. 든든한 귀족 연줄 따위는 없었고, 어찌어찌해서 로마 엘리트 사회 최상층에 여전히 불안하고 미덥잖은 자리 하나를 차지했을 뿐이었다. 도시 건설자인 로물루스 시대부터 이어지는 탄탄한 연줄을 자랑하는 쟁쟁한 가문들 사이에서 말이다(가령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신화 속의 선조인 아이네이아스와 비너스 여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막강한 연줄을 자랑했다). 때문에 키케로는 집정관으로 있는 동안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해줄 무언가를 해야 했다. 세상이 떠들썩할 정도의 관심과 호평을 받을 만한 무언가를. 현재까지 상황으로 봐서는 카틸리나의 음모가 로마의 생존이 달린 비상사태라기보다는 ‘찻잔 속의 태풍’과 ‘키케로의 상상의 산물’ 사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카틸리나의 음모’는 냉전 시기 ‘빨갱이 딜레마’의 고전 시대 버전일 수도 있다. 99)
9. 로마의 미술품 도둑들
기원전 70년경 시칠리아 총독을 지낸 베레스의 예술작품 약탈에 관한 키케로의 신랄한 비판에는 꽤 복잡한 사회 현상과 함의들이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이 근본적으로 공공재 또는 종교적 도구에서 개인적 수집품이자 감상 대상이라는 개념으로의 변화다. 기원전 2세기 말부터 기원전 1세기 초는 이런 변화에서 특히 의미 있는 시점이었다. 로마인이 그리스 세계의 예술 전통과 전리품으로 지중해 동부에서 로마로 흘러들어오는 예술작품과 접촉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고유의’ 로마 문화 전통 내에서 그리스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호화 예술품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적법한가, 로마 엘리트가 ‘예술 애호가’로 행세하는 것은 어디까지 타당한가 등을 놓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런 점은 키케로의 베레스 공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문제가 되는 조각상과 골동품을 얻는 과정에서 저지른 범죄뿐만 아니라 탐욕 자체, 예술작품에 대한 욕망 역시 베레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107)
그러나 교양 있는 예술 애호가와 탐욕에 눈먼 강박적인 수집가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는 고대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술작품의 양도, 이전, 절도 사건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약탈자와 피해자라는 간단한 도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속사정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는 점이다. 문화적 약탈을 일종의 ‘강간’으로 보는 예전 개념이 여기서는 의외로 유용하다. 전혀 모르는 가해자가 어두운 골목에서 무력을 행사해 상대를 굴복시키는 식으로 성적 강간이 이뤄지는 경우는 아주 드물지 않은가. 문화재를 둘러싼 논쟁 역시 마찬가지다. 침략군이 총을 들이대고 귀한 예술품을 가져가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대부분의 강간은 일종의 데이트 강간이다. 따라서 원래 의도, 상대에 대한 이해(또는 오해), 상충하는 기억, 강제, 묵인, 동의 사이의 흐릿한 경계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그렇게 까다로운 것이다. 108-10)
10. 카이사르 암살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사건 몇 달 내에 무질서한 혼란 상태를 자기네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돌리고, 거의 망친 것이나 다름없는 암살을 폭군에 맞선 영웅적인 행위로 각색하는 데 성공했다. 협상을 통해 사면받고 로마를 떠난 브루투스는 기원전 43년 혹은 기원전 42년에 로마 시대에 주조된 가장 유명한 동전이 될 것을 발행했다. 동전에는 양쪽에 두 개의 단검이 새겨져 있고, 단검과 단검 사이 중앙에는 해방된 노예들이 자유의 표시로 쓰던 라틴어로 ‘필레우스Pileus’라고 하는 ‘자유의 모자cap of liberty’가 새겨져 있었다. 이를 통해 말하려는 메시지는 뻔하다. 단검이라는 폭력을 통해 로마 민중이 자유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그림 밑에는 ‘Ides of March’, 즉 ‘3월 15일’이라는 거사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중장기적으로 보면 암살은 정치적으로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로마에서 3월 15일은 현대 프랑스의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 발발일에 맞먹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날이 되었다. 113-4)
그러나 카이사르 암살 이후 상황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해석하고 풀이하는 과정에서 와이즈먼은 대중이 대체로 암살자들에게 거의 공감하지 않았다는 많은 증거를 찾아냈다. 무엇보다 와이즈먼은 로마의 정치를 소규모 귀족 집단이 신념이나 원칙 없이 권력 투쟁을 벌이는 ‘이데올로기의 공백 상태’로 보는 전통적인 관점을 거부한다. 초기 역사에서든 카이사르 살해로 이어진 무력이 지배하는 시대에든 로마가 민주주의 이념이 작용하지 못하는 세계였다는 견해에는 더더욱 반대한다. 요컨대, 와이즈먼의 목표는 로마의 정치생활에 대한 그간의 이해에 어느 정도 이데올로기를 되돌려놓는 것이며, 로마의 중요한 민주주의 전통을 다시 한번 논의의 표면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와이즈먼이 통찰과 상상의 경계, 즉 멈춰야 할 지점이 어디인가를 항상 현명하게 파악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가 열과 성을 다해 우리와 공유하려는 과거 로마의 비전은 중요하다. 114-5, 117)
3부 로마 제국: 황제, 황후, 적들
11. 황제를 찾아서
역사 시대를 통틀어 자유의 투사와 테러리스트가 제도권의 존경받는 정치 지도자로 변화한 사례는 많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변화는 유달리 극적이다. 옥타비아누스로서 그는 10여 년의 혹독한 내전 동안 어떻게든 싸워서 승리할 책략을 짜는 데만 골몰했다. 내전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지자들은 처음에는 ‘자유’라는 미명하에 카이사르를 암살했던 이들을 공격했고, 이어서 서로를 공격함으로써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후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과 거기서 연상되는 살인의 이미지를 없애버렸다. 로마 건국자의 이름을 따라 ‘로물루스’라고 할까도 고려했지만 이 역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연상시켰다. 로물루스가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형제간의 싸움은 거북하게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싸움을 상기시키는 할 터였다. 결국 그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택했는데 풀이하자면 ‘존엄한 자’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신조어였다. 123)
로마 공화정 체제하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토론을 거치고 결과가 공개되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온갖 은밀한 거래와 막후 흥정 역시 이뤄졌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나라의 관리를 선출하는 선거든, 전쟁 결의든, 빈민에게 토지를 분배하자는 결정이든, 로마 역사의 진행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토론과 결정을 기록할 수 있었고 때로는 직접 목격할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이때까지만 해도 정치적 결정이 얼마든지 관찰 가능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지배와 함께 권력의 중심지는 결정적으로 공적 공간에서 사적 공간으로 바뀌었다. 물론 원로원을 포함한 과거의 많은 제도와 기구는 여전히 기능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착수한 정치체제 변화에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결정은 원로원 회의장이나 중앙 광장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 개인 저택에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중요한 정치활동이 이제는 역사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127-8)
12. 클레오파트라: 신화
많은 이가 알렉산드리아를 모든 것이 눈부시게 휘황찬란하고 사치스러우며, 균형이 맞지 않을 만큼 과장되어 있지만 그 자체로 멋진 도시로 상상하고 싶어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알렉산드리아에 관한 신화를 되도록 역사학적 진실에 비춰 평가하려는 작업이 어려운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알렉산드리아 지역 대부분이 수차례의 지진과 해일을 겪은 후 4세기경 해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다. 그렇다보니 클레오파트라의 알렉산드리아와 직접적으로는 아니라도 가장 관련 깊은 현존 기념물이라고 하면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 불리는 두 개의 오벨리스크를 꼽아야 하니 참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 오벨리스크는 현재 하나는 뉴욕 센트럴파크에, 다른 하나는 런던 템스 강변에 세워져 있다. 두 오벨리스크는 19세기 말 각각 뉴욕과 런던에 놓이는데, 흔히 그렇듯이 후한 인심, 골동품 수집 취미, 제국주의적 착취 등이 결합된 결과였다. 137-8)
그렇다면 클레오파트라 7세의 생애는 어떨까? 안타깝게도 그녀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도시 알렉산드리아 이야기보다 훨씬 더 ‘신화적’이고, 실제 여왕의 모습을 파악하기는 수중의 도시 유적 발굴보다 훨씬 더 난해하다. 클레오파트라의 실체 밝히기가 이처럼 어려운 이유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까지 이어지는 현대 드라마의 지나치게 창의적인 전통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 드라마 덕분에 대중의 머릿속에는 당나귀 젖으로 목욕하는 나른하고 퇴폐적인 여왕의 이미지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 강하게 박혀 있다. 더구나 아우구스투스로서는 자신의 적이었던 클레오파트라를 나쁜 모습, 옳지 않은 악마 같은 모습으로 묘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황제 스스로가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로마와 이탈리아의 현실적인 전통과는 전적으로 배치되는 무절제한 생활과 사치에 탐닉하는 여왕, 위험한 매력을 풍기는 동방의 전제 군주라는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였다. 138-9)
13. 황제에게 시집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헌신적인 아내 리비아가 집에서 자기 옷을 손수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서기 1세기부터 20세기의 로버트 그레이브스, 그리고 이후까지 리비아는 로마 제국의 권력 구도와 정치에서 집에서 천을 짜고 재봉하는 부녀자의 이미지가 시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로 그려진다. 좋게 보는 경우, 리비아는 황제와 제국의 여러 이익집단 사이를 중재하는 핵심 인물로 나온다. (가령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는 황후와 남편 사이에 길게 이어지는, 아무래도 진짜라고는 믿기 어려운, 토론을 대화식으로 기록하는데, 대화에서 황후는 반역 혐의를 받는 남자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남편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나쁘게 보는 경우, 그녀는 연쇄독살범이자 아우구스투스 궁정의 막후 실력자로 자신의 야망에 장애가 되는 거라면 뭐든 파괴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파괴의 대상엔 마침내 남편까지 포함된다는 설정이다. 144)
1970년대에 BBC 드라마를 들여와 PSB에서 제작 지원한 미국 시리즈 「나, 클라우디우스」는 상류층을 타깃 삼아 공격적으로 기획한 주간 명작극장의 일부로 전파를 탔다. 방송사는 광고를 통해 “요즘 신문 헤드라인에 폭로되고 있는 미국 정부의 부정부패는 고대 로마의 부패 관행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우익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커지는 여성의 권력이 미국 사회가 쇠퇴하는 핵심 원인이라고 여겼던 모럴 머조러티Moral Majority라는 보수 단체 사람들에게 「나, 클라우디우스」에 나오는 황실 여성들의 행태는 이런 주장을 정당화할 역사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이 모든 것에서 리비아라는 인물이 지배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미국 버전에서 아우구스투스를 살해하는 리비아는 독살을 즐기며 어떻게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권모술수에 능한 위협적인 인물 정도가 아니다. 쿡의 해설을 통해 그녀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치적 토대를 파괴한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죄인이 되었다. 152)
14. 칼리굴라의 풍자?
빈털링이 쓴 『칼리굴라 전기』의 주안점은 로마 황실 정치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이는 어떤 의미에서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한 정치체제의 토대였던 가장과 위선이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거의 500년 동안 지속된 민주공화정 이후에 1인 지배가 로마에서 성공적으로 작동하게 만들고, 과거 귀족 정치와 새로운 전제 군주제 사이에 ‘현실적인 협약’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아우구스투스는 모든 사람이 연기를 하고 있지 않았나 싶은 일종의 교묘한 사기극에 의존했다. 빈털링의 설명을 들어보자. “원로원 의원들은 이제는 없는 어느 정도의 권력을 여전히 갖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했던 반면, 황제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면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해야 했다.” 최근 다른 연구자들도 강조하듯이 로마 제국의 정치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고의로 말의 의미를 흐리고, 감추고, 왜곡하고, 뒤집는 소위) 이중 화법double speak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즉, 누구의 말도 그가 말한 내용 자체를 의미하지 않았다. 157)
전임 황제인 티베리우스는 그런 역할을 “결코 잘해내지 못했다”. 칼리굴라 역시 이런 이중 화법에 저항했지만 (빈털링에 따르면) 방식은 미묘하게 달랐다. 칼리굴라는 제정 치하에서 이미 기준이 되어버린 정치적인 의사소통의 모호성과 싸우려 했고, 진실하지 않은 아첨과 공허한 말은 물론 의미의 체계적인 변질에도 맞섰다. 그것이 황제가 병에서 회복되면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던 남자에게 칼리굴라가 맹세를 지키라고 했다는 이야기의 기저에 있는 메시지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런 공개적인 맹세의 의도는 자신의 깊은 충성심을 보이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고, 이로써 헌신에 대한 후한 보상을 받으려는 심리다. 로마 제정의 이중 화법에 대항한 칼리굴라의 싸움은 결국 파멸을 초래하는 처참한 결과를 가져온다. 애마에게 바친 경의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교훈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비판하려는 대상이었을지 모르는 광기의 사례로 간주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157-8)
15. 네로의 콜로세움?
핵심 역사학 기록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훨씬 더 호의적인 네로의 이미지를 엿볼 수 있다(그리고 거기서 문제의식이 생긴다). 고전학자 에드워드 챔플린은 『네로』에서 네로 황제의 사후 인기를 말해주는 좀 생경한 다른 사례들을 찾아내 종합하는 더없이 훌륭한 작업을 해낸다. 챔플린은 소아시아의 핵심 도시 트랄레스(현재 터키 서부 아이든)에 네로 사후 1세기 뒤에 세워진 실물보다 큰 대형 조각상, 네로의 얼굴이 들어간 동전으로 장식된 서기 2세기의 거울 등을 예로 든다. 이는 상식적으로 봐도 ‘괴물’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더 놀라운 것은 바빌로니아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네로가 유대교로 개종해 2세기의 위대한 랍비 메이어의 조상과 결혼했고 그 결과 메이어가 네로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도들 역시 때로는 네로를 적그리스도와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묘사한다. 6세기의 역사가 겸 작가였던 존 말랄라스는 예수 처형을 명한 유대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를 처형한 공을 네로에게 돌린다. 164)
그러나 챔플린의 『네로』는 물론이고 고대와 현대 관계없이 로마 황제를 다룬 전기식 연구가 어김없이 제기하는 더 큰 질문이 하나 있다. 어떤 개별 통치자가 로마 역사 전체의 발전에 얼마나 영향력을 지녔었는가? 황제의 전기작가들은 직업상, 황제가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지지한다. 바뀌는 통치자의 영향, 그들이 유발하는 공포와 아첨, 로마의 역사 서술 패턴에 대한 타키투스의 논평은 당연히 이런 접근법에 대한 지지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거의 완전 반대 입장을 지지하는 데도 같은 논평이 동원될 수 있다. 상황에 맞는 말을 내뱉고 필요할 때 적절한 찬사와 비난을 해주기만 하면 정권이 바뀌어도 개인의 일상은 평상시처럼 지속될 수 있다. 누가 왕좌에 있든 상관없이. 이전 황제에게 적극 협력한 엘리트였다 해도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 이전 정권을 비난하는 어느 정도의 기술만 연마하면 새로운 정권에서도 얼마든지 자리를 보전할 수 있으니 말이다. 167)
16. 브리타니아의 여왕
서기 60년(혹은 61년) 로마 점령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브리타니아 여왕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16세기 이탈리아 인문주의 학자이자 역사가, 수도사였던 폴리도루스 베르질리우스 이래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부디카가 일으킨 반란의 원인과 목적부터 영향, 그녀의 무덤 위치는 물론이고 전투가 일어난 핵심 장소 등을 거쳐 이름의 정확한 철자까지 부디카를 둘러싼 갖가지 의문에 대해 학계는 그야말로 다양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부디카와 관련된 온갖 이야기 중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디카[혹은 보아디케아] 자신이 철자는 고사하고 읽거나 쓰지도 못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처럼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민족주의 열정 때문이다. 세부 내용에서는 많은 차이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용맹한 여전사의 경이로운 모습을 상상하게 만드는, 꽤 그럴듯한 고대 기록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이런 논쟁에 일조했다(하나는 타키투스의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카시우스 디오의 기록이다). 168-9)
당시 브리타니아는 로마인과 브리타니아인이 뒤섞여 서로에게 의지하는 세계였고, 누가 정확히 어느 편인지를 확실히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물론 로마인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고, 토착민 중에도 나쁜 사람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독자가 어느 편이어야 하는가는 너무나 분명하다. 그렇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스콧은 독자가 로마 편을 드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다. (점령 세력으로서) 로마인은 토착민을 강간하고, 약탈하고, 착취한다. 그러나 샤머니즘을 믿는 브레아카의 괴상한 행동들도 만만찮다(필요할 때는 끔찍하게 폭력적인 행동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을 보며 만약 반란이 성공했다 해도 반란군 통치하의 브리타니아에서의 삶은 그리 즐겁지 않았으리라는 생각만 더욱 굳어질 뿐이었다. 제국주의 세력에 맞선 반란 세력이 겉으로는 뭔가 있어 보이고 근사해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제국주의의 폭군만큼이나 볼품없고 못마땅한 경우가 너무 많은데 부디카도 나한테는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다. 173-4)
17. 단역 황제들
나이 지긋한 에스파냐 총독 갈바는 네로가 죽기 전에 이미 황제로 추대되었다. 갈바는 68년 가을 어느 시점에 수도 로마에 도착했고, 69년 1월 중순 쿠데타로 살해되었다. 이로 인해 한때 갈바의 지지자였지만 처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오토에게 제위가 넘어갔다. 그러나 오토도 오래가지 못했다. 오토는 저지 게르마니아 총독인 비텔리우스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했다. 비텔리우스도 몇 달 뒤인 69년 가을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는 연합군에게 패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66년 말 유대 반란 진압을 진두지휘했던 장군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이 휘하 장병들의 요구로 마지못해 황제로 추대되었으며, 심각한 대학살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는 의무감에서 나섰다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때를 기다렸고 적절한 시점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로마로 진군해 들어왔다. 구국의 사명감에서든 계산된 야망에서든 로마에는 새 왕조가 탄생했다. 바로 플라비우스 왕조다. 175)
현대의 기록에서는 ‘내전’이라는 용어를 피하려는 듯 완곡어법으로 ‘네 황제의 시대The Year of the Four Emperors’라고 부르는 이 시기는 로마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다. 네로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다. 네로와 함께 죽은 것은 예술가만이 아니었다. 황위 주장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초대 황제와 혈통으로 연결되어야 있어야 한다는 기존 관념 자체가 죽었다. 사실 아우구스투스가 마련한 황위 계승 방식 자체가 그의 체제에 중대한 약점이었다. 이후 역사에서는 황제가 되는 방법(혹은 특정 제위 후보자가 다른 후보자보다 정당성을 갖게 되는 이유)이 전보다 훨씬 더 치열한 논쟁거리가 된다. 타키투스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서기 68~69년 각자의 군대를 이끌고 제위를 다퉜던 속주 총독들 사이의 충돌을 통해 “제국의 비밀 하나가” 누설되었다. “로마 외의 다른 어딘가에서 황제가 탄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비밀이었다. 175-6)
18. 하드리아누스와 티볼리 별장
티볼리 별장은 로마 시대에 지어진 최대 규모의 궁전으로, 도시 폼페이 면적의 두 배에 달하는 공간을 차지했다(거의 런던 하이드파크 크기만 했다). 티볼리 별장은 단일 건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였다. 대형 연회장, 여러 개의 목욕탕, 도서관, 극장, 식당, 주방, 집무실, 근사한 공원까지 갖추고 있었다. 지금은 유적지를 방문해도 원래 분위기를 거의 느낄 수 없다. 대부분은 아직 제대로 발굴되지 않은 데다 발굴된 유적마저 사실상 폐허 상태다. 그러나 18세기에 이곳에서는 믿기지 않을 만큼 화려한 과거를 말해주고도 남는 수백 점의 조각상이 발굴되었다. 이들 조각상은 소위 ‘그랜드투어 골동품 시장’에서 팔려나가 현재는 (영국박물관을 포함한) 서구의 여러 박물관을 장식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황제의 고급스러운 우아함과 폭군의 퇴폐적인 음란함을 나누는 선을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그어야 하는가다. 이는 티볼리 별장의 많은 ‘오락 시설’이 끈질기게 제기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185-6)
그렇다면 왜 네로는 쿠데타로 제위를 빼앗기고 역사에서 악마로 묘사되었던 반면, 하드리아누스는 목적과 동기에 대한 골치 아픈 물음표 외에는 이렇다 할 비난이나 혹평 없이 자기 침대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었을까? 당연히 하드리아누스가 황제의 ‘이미지 메이킹’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네로보다 교묘하게 해낸 것도 한 가지 이유다. 네로의 황금궁전은 도시 로마의 중심지를 사유화했기 때문에 시민들의 원성을 샀다. 반면에 하드리아누스의 별장은 규모는 훨씬 더 컸지만 (충분히 신중을 기해서) 수도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로마 지배자는 그들이 실제 악마이거나 악마화되었기 때문에 타도 대상으로 몰려 제위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제위를 빼앗겼기 때문에 악마화되었다. 하드리아누스의 목숨을 노린 암살 시도도 여러 차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성공했다면 하드리아누스 역시 포악한 미치광이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187)
4부 밑에서 본 로마
19. 해방노예와 속물근성
현대 학자들은 로마 제빵사의 무덤(마르쿠스 베르길리우스 에우리사케스라는 남자의 무덤으로 기원전 1세기 중반쯤 사망했다)을 보면서 깊이 감명을 받는 한편 은근히 깔보는 속물근성을 보인다. 일반적인 추측은 주인공인 제빵사가 해방노예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숙한 주장들에 따르면 에우리사케스는 돈이 많았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감각 있는 편은 아니었다. 이런 논조는 로마 세계에서 해방노예가 의뢰한 예술품이 흔히 받는 평가다. 폼페이 유적지의 베티의 집이라는 곳에서 나온 훌륭한 벽화들이 만약 로마 황궁 벽에서 발견되었다면 걸작으로 불렸을 것이다(포도를 밟아 으깨고 천을 만들고 경주를 하는 등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유명한 큐피드 그림도 여기서 나왔다. 워낙 유명해서 그림엽서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베티 부부’는 해방노예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도 수도 로마에서 한참 떨어진 벽지에 사는 해방노예. 따라서 미술사가들은 이들 부부 집의 장식에 콧방귀를 뀌며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다. 195-6)
헨리크 모우리트센이 지적하듯이 현대 저작물에서 로마 노예를 대하는 태도에는 당혹스럽게도 상반되는 두 가지 흐름이 공존한다. 로마 노예를 인간의 옳지 않은 끔찍한 행동의 무고한 피해자로 여겨 전적으로 동정하고 공감하는 태도와 자유를 허락받은 (혹은 돈으로 샀던) 해방노예들을 완전 얕보고 폄하하는 태도다. 20세기 초반만 해도 역사학자들이 (노예를 풀어주는 공식 절차인) ‘노예 해방manumission’이라는 로마의 관행을 공공연히 비난하면서 그 때문에 순수한 이탈리아 혈통이 (동방 출신도 종종 있었던) 해방노예의 타민족 혈통과 섞여 희석되었다고 개탄하는 일이 잦았지만 오늘날엔 어떤 역사가도 귀에 거슬리는 그런 불평을 늘어놓진 않는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에도 학자들은 “외국인의 로마 주민 침투”를 은밀히 암시하면서 해방노예를 (특히 부자가 된 해방노예를) “입신출세주의자”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주인이 “사소한” 이유로 해방시켜준 “자격 미달” 노예들에 대한 언급도 반복적으로 보인다. 196-7)
20. 점, 입 냄새, 스트레스
『아스트람프시쿠스의 신탁Sortes Astrampsychi』은 고대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 예측하기 힘든 일들에 대해 무작위적이지만 그럴듯한 답을 제공한다. 방법은 단순하나 나름 설득력 있는 점괘가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모호하고 아리송한 구석이 있는 그런 대답들이다. 제리 토너는 신탁서에 보이는 이런저런 위험에 노출된 데다 빚에 허덕이는 짧고 고단한 인생뿐만 아니라 기존 생각과 달리, 보이지 않는 것들도 지적한다. 로마 제국 하면 노상강도, 해적, 강도 등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생각하곤 하는데, (중독 관련 질문을 빼면) 폭력적인 범죄에 대한 우려를 암시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후원 제도’에 관한 내용도 없다. 현대 역사가들은 고대의 빈민들이 부유한 상류층 후원자에게 일자리부터 대출 혹은 식량까지 모든 것을 의존했다는 내용을 가지고 적잖은 저서와 논문을 집필해왔다. 어쩌면 이런 후원 제도 전체가 서민들의 삶에서는 로마 상류층 작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203-5)
토너가 더없이 성공한 지점은 혜택 받지 못한 이들의 실제 생활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엘리트 문화의 다른 측면도 보여주었다는 점이리라. 우리가 지금 (우리 계급질서에서 그들에게 맞는 위치가 그것이기 때문에) ‘하위 엘리트’ 또는 ‘비엘리트’ 문헌이라고 표기하는 이들 텍스트가 고대 세계에서 얼마만큼 ‘서민적’이었던 것인지 여전히 불분명하다. 사실 『아스트람프시쿠스의 신탁』을 보면 대상 고객에 노예 및 하층민과 함께 비교적 상류층에 속하는 이들도 포함되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힌트가 토너가 인정하는 것보다 많이 나온다. 로마는 (현대의 우리 문화처럼) 미적 선택에 의해 지위가 드러나고 구별되는 그런 문화가 아니었다(요즘은 특정 계층에서 특정 브랜드를 선호하는 식으로 취향과 계층이 연결되는데 로마에서는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확인 가능한 선에서 보면, 로마에서 문화적·미적 취향은 부와 지위에 상관없이 대체로 같다. 유일한 차이는 지불 여력이 있느냐다. 206-7)
21. 군대의 수도 로마 진입 금지
라틴어로 포메리움pomerium이라고 하는 신성한 경계 내부에 있는, 도시 로마 자체는 엄격하게 군대의 주둔이 금지되는 지역, 즉 비무장지대였다. 로마는 살아 있는 실제 병사들 대신 전쟁과 정복을 나타내는 이미지와 기념물로 가득했다. ‘로스트라rostra’라고 알려진 중앙 광장에 있는 연단은 포획한 적선敵船의 충각衝角, 즉 적을 무찌르기 위해 군함의 이물 아래쪽에 부리 모양으로 장착했던 장치를 단에 전시해놓은 데서 유래했다(라틴어 로스트라가 부리 또는 충각이라는 의미다). 개선장군의 저택 밖에는 승리를 떠올릴 영원한 기념물 역할을 하는 전리품과 노획한 적의 무기가 장식처럼 붙어 있었다. 황제의 조각상도 전투복을 입은 모습 혹은 적을 정복하는 동작으로 표현되곤 했다. 이처럼 다양한 전쟁 이미지의 기능은 빤하다. 대리석이나 청동에 새겨 군사력을 과시하는 것이 무장한 군대를 수도에 주둔시키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210-1)
수도 로마에 있는 전쟁 및 정복과 관련된 각종 이미지가 실제 군대를 대신해 군사력을 과시하는 기능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 이미지는 점점 멀어지는 전장과 수도 로마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원전 1세기가 되기 한참 전부터 대다수의 전투가 수도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만큼 로마의 영토 범위가 넓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개선식에서는 전리품은 물론이고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도 전시되었다. 트라야누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둥에 새겨진 부조 역시 비슷한 기능을 했다. 수도 로마 주민들은 이들 부조를 보며 자신이 제국주의 팽창 활동의 일부가 된 듯이 느꼈다. 이들 전쟁 기념물은 로마의 장군 개인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로마 엘리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군사 분야에서 거둔 성공을 믿음직한 정치적 자산으로 변환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변환 수단이 바로 도시 내의 건물이나 그 외 눈에 보이는 전시물이었다. 211-2)
22. 로마 지배하의 브리타니아에서의 삶과 죽음
하드리아누스 방벽에 주둔하던 로마인의 생생한 목소리는 1970년대 이후 빈돌란다 요새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명한 문서들에서 나온다. 데이비드 매팅리의 『제국의 소유물: 로마 제국하의 브리타니아』가 이들 문서를 활용한 로마 지배하의 브리타니아 역사를 논한 최초의 글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는 빈돌란다 문서의 함의를 해당 지역 전반에 대한 해석과 통합시킨 최초의 역사학적인 결과물이다. 빈돌란다 문서 덕분에 군사 지역에 대한 매팅리의 관점은 대부분 선배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매팅리가 그리는 브리타니아 주둔 ‘군대’의 모습은 우리가 평소 그린 교전지역 군대에 대한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서기 2세기경 브리타니아 주둔 로마군의 수는 총 5만5000명쯤 되었다). 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가정 친화적’이었고, 기지 밖의 지역사회와도 사회적·가정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문서 외에 빈돌란다에서 발견된 유물에는 꽤 많은 아동용 신발이 포함되어 있다). 218-9)
고고학을 선호하는 많은 역사가가 그렇듯이 매팅리도 타키투스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같은 고대 로마인이 남긴 브리타니아에 대한 기록과 거리를 두는 데 엄청 신경 쓰고 그에 대한 설명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메팅리에 따르면, 당시 로마 엘리트들은 야만인과 야만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의존했고, 속주의 역사를 고찰할 때도 “자신들의 타고난 우월함과 다른 이들의 후진성을 확인시켜주는 내용”을 찾았다. 그러나 고대 문헌 자료를 마냥 비관적으로 보는 시각도 [맹신 못지않게] 핵심을 놓치게 된다. 매팅리는 [식민 지배를 통한] 문화 발전이라는 안이한 생각에 철저히 반대하면서 오히려 ‘로마 지배하의 브리타니아’는 군사 점령 기간이자 이방인의 지배 기간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매팅리에게 로마인은 극단적인 군국주의자 무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두 민족 모두 살인자요 강도들이었다. 그리고 방벽을 지키는 가련한 병사들은 [침략 전쟁의] 승리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였다. 221-3)
23. 사우스실즈의 아람어
마르쿠스 파비우스 쿠인틸리아누스는 (서기 1세기 말에 집필한) 『웅변술 교육Institutio Oratoria』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 정식 교육이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마 제국은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다언어 세계였다. 로마 제국의 언어적 다양성은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국한되지 않는다. 켈트어부터 이집트어, 아람어, 에트루리아어까지 다수의 언어, 알파벳, 음절문자, 문자 등으로 이뤄져 있었다. 또한 다른 언어 사용자들이 함께 일할 때 의사소통의 편의를 위해 언어와 언어를 혼합하여 만드는 각종 혼성어, 지역 방언, 사투리까지 합치면 숫자는 훨씬 더 늘어난다. 제국의 광대한 영토가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과 라틴어를 쓰는 서방으로) 언어적으로 깔끔하게 양분되며, 이를 양쪽 언어를 모두 구사하는 대다수 로마 엘리트가 연결하고 있었다는 전통적인 생각은 실제 언어 사용 현실과는 거의 맞지 않는다. 틀렸다고까진 못해도 오해의 소지가 꽤 있는 지나친 단순화다. 224-5)
5부 예술과 문화: 관광객과 학자들
24. 아이스킬로스밖에 없다?
그리스 비극은 인간의 문제 가운데 가장 복잡하고 치열한 사안을 논의하는 데 더없이 효과적인 매체다. 최근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정의의 세력이 그리스 비극이 보유한 이런 힘을 활용하고 있다(무력에 맞서 평화를 주장하고, 여성 혐오에 맞서고, 억압에 맞서 성해방을 주장하는 이들 등등). 그러나 일부 가정은 꽤나 편향적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 비극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다른 데는 없는 독특한 힘을 지닌 것이 사실일까? 고대 비극은 답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이며, 서구 문화가 참혹한 전쟁이나 성적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데는 고대 그리스에 대한 열광도 한몫하고 있다는 주장은 어떤가? 무려 2000년도 더 전에 아테네에서 만들어진 틀을 벗어나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주장 말이다. 카메룬에서 「바카이」 공연 혹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안티고네」 공연은 식민 권력의 궁극적인 승리를 상징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들이 남긴 망할 연극은 계속해서 상연되고 있다.) 239-40)
근대 세계에서 고대 연극을 옳지 않은 정치적 대의에 이용한 사례도 인상적인 역사를 보유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히틀러 집권 당시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열린 1936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히틀러의 아리안 민족주의의 승리 이야기로 새롭게 해석된, 따라서 심히 왜곡된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Oresteia』가 상연되었다. 그런가 하면 무솔리니는 시칠리아 시라쿠사에서 장기간 열린 고대 연극 축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지지자이자 후원자였다. (히틀러 치하의 제3제국에서 반유대주의를 지지하는 무기로도, 반대하는 무기로도 『베니스의 상인』이 많이 공연된 것처럼) 전시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의 극작가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가 레지스탕스와 점령 세력 둘 다에 의해 무대에 올랐다. 아이스킬로스는 마틴 루서 킹의 죽음을 추도하는 데만 사용된 것이 아니다. 닉슨이 백악관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동안 닉슨 곁을 지켰던 헨리 키신저 역시 해당 문구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240-1)
25. 팔과 남자
세계 각지의 주요 미술관에 전시된 고전 시대 조각 상당수가 온전한 상태인데, 이는 미켈란젤로부터 19세기 덴마크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에 이르기까지 푸젤리의 동료와 선배들이 기울인 노력에 주로 기인한다. 16, 17세기에 로마에서 망가진 걸작이 발굴되면 당대 최고의 조각가들은 득달같이 현장으로 달려갔다. 고대 천재가 남긴 작품에 손을 대는 작업에 대해 처음에는 당연히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런 거리낌과 가책은 오래가지 않았다. 머잖아 예술가들은 새로 발굴된 작품에 (글자 그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주느라 분주해졌다. 완벽한 고대 석상에 어울리는 모습이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뻗은 손가락이나 위로 쳐든 팔, 코 등이 지금까지 부러지지 않고 남아 있는 고대 조각은 알고 보면 근대에 행한 이런 단장 작업의 수혜자라는 게 일반적인 규칙이며 예외는 거의 없다. 그 결과물 중 일부가 인기 고전 조각 작품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는 사실도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242)
1506년에 모습을 드러낸 「라오콘 군상」은 워낙 탄탄하게 받쳐주는 문헌상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조각상이 등장과 동시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이네이스』에 나오는 라오콘과 아들들의 죽음에 대한 설명, 그리고 대大플리니우스의 백과사전식 『박물지』에 나오는 조각상에 대한 묘사와 누가 봐도 분명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연관성에서 기인한 바가 컸다. 그렇지만 발견 당시 ‘라오콘 군상’은 온전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렇게 발견되는 고대 조각들이 흔히 그렇듯이 손가락, 발가락과 뱀의 여기저기가 소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 인물의 오른팔이 모두 소실된 상태였다. 복원을 앞두고 무엇보다 중심인물인 라오콘의 팔 복원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했다. 1530년대의 논쟁 참가자들은 위로 뻗은 모습이 옳다고 합의를 봤다. 따라서 이후 진행된 (다수의) 복원 결과물이 이런 기조를 따랐고, 아들들도 그에 맞춰 복원되었다. 그리하여 이것이 ‘라오콘 군상’의 표준 이미지가 되었다. 246-7)
26. 피스 헬멧을 반드시 챙기시오
1854년판 『그리스 여행 안내서』가 말하려는 메시지는 간단했다. 대략 이렇다. 그리스로 가는 배를 타면 오디세우스가 있는 과거로 돌아간 느낌을 받을 것이다(“고대인들의 항해 도구와 기술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그리스의 바다는 지금도 변덕스럽기 짝이 없다”). 시골 오두막에서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돼지치기 유마이오스로 봐도 무방할 그런 사람이 따뜻하게 손님을 대접한다. ‘환대’라는 미명 아래 우리는 걱정되고 두려울 만한 문화 차이를 찬미의 대상이자 동시에 살짝 얕봐도 좋은, 원시적인 (사실 호메로스 시대의) 미덕으로 해석한다. 반면 『그리스 여행 안내서』의 후속 판본들은 이런 초대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면서 독자들에게 주민이 집요하게 권하더라도 그리스 마을에서 무료로 묵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한다. 이런 주장의 주된 근거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역시 호메로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원칙이다. 251, 255)
27. 관광지로서의 폼페이
폼페이는 고고학 유적일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묻힌 매장지였다. 또한 폼페이는 비극적인 멸망과 자연 앞에서 한없이 취약한 인간의 처지를 필연적으로 떠올리게 함과 동시에 더없이 생생한 모습으로 발굴됨으로써 역설적으로 고대 세계에 ‘활기’를 불어넣는 존재이기도 했다. 발굴 유골을 보는 것은 폼페이 방문자들에게 언제나 우선순위였다. 그러던 중 1860년대에 주세페 피오렐리가 희생자 유해의 석고 모형을 뜨는 기법을 개발하면서 폼페이 방문의 비애감은 한층 더 깊어졌다. 죽은 사람의 살과 옷이 분해되면서 생긴 비어 있는 구멍에 석고를 부으면, 최후의 순간 그들의 신체적 특징과 일그러진 표정 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놀라운 형상들이 만들어졌다. 더없이 냉정한 방문자 또는 엄격하게 학구적인 태도를 취하는 방문자라 해도 유리 상자에 담긴 채 유적지에 전시되어 있는 몇몇 석고상 앞에서까지 냉정함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불편하게도 모두가 보란 듯이 전시되어 있는 그들의 단말마의 고통 앞에서. 260-1)
28. 황금가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된 ‘프레이저 개인’에 대한 숭배는 『황금가지』라는 책 자체에 대한 못지않은 열광과 궤를 같이한다. 대중이 『황금가지』에서 느끼는 가장 중요한 매력 중 하나는 탐험과 여행이라는 주제다. 프레이저 자신도 책의 서론에서 『황금가지』를 하나의 ‘항해voyage’로 표현했다. 이는 어떤 면에서 두려운 여행이기도 했다. ‘미개인’의 낯설고 폭력적인 관습도 두려울 뿐 아니라, 영국 역시 한때는 꽤 ‘비이성적인’ 사회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느끼는 불안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으로 인한 전율이 얼마나 강렬하든 간에 적어도 독자는 결국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온다(즉 출발점인 이탈리아에 이른다). 이는 책 제목 『황금가지』가 정확히 의미하는 바이기도 하다. 책 제목은 책의 목적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아이네이아스가 꺾었던 가지가 그랬던 것처럼 책은 독자들을 데리고 두려운 이방으로 낯선 항해를 떠나며, 그들을 안전하게 데리고 돌아온다는 의미다. 271-2)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전에 『황금가지』가 성공한 데에는 다른 요인들도 있었다.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3판은 백과사전식 지식의 정수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출간 즉시 권위를 부여받았다. 또한 400쪽에 달하는 색인 덕분에 세계 문화 전반을 쉽게 파악하게 하는 참고서 역할을 했다. 동시에 ‘대영제국’이 통치하는 지역 원주민들의 관습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다보니 당시의 현실 정치와도 연결되었다. 프레이저도 자기 책이 “미개 민족을 통치하는 임무를 맡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프레이저가 대영제국의 대의에 상징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황금가지』는 주인에게 복종하는 제국의 신민들을 대변했고, 방대한 학술 연구에서 원주민들이 편리한 증거로 뒷받침하도록 함으로써 영국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했다. 말하자면 이것은 학술 논문으로 깔끔하게 바뀐 정치적 지배의 다른 얼굴이었다. 273)
29. 철학이 고고학을 만나다
콜링우드가 ‘가위와 풀 방법론’이라 불렀던 역사학 연구 방법론에 대한 공격(독자적 연구 없이 여기저기 나와 있는 자료를 가위로 오려내 풀로 붙이는 식으로 편집하고 짜깁기하는 역사에 대한 반발), 역사란 항상 ‘정신사’라는 역사 옹호론 등을 담은, 가장 유명한 저서 『역사의 개념』은 1946년에 출판되었다. 지금 와서 보면 문제점은 책의 핵심 주장이 너무 무난해서 논란의 여지가 적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특성이 대중적인 성공에 일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주장이 애초에 결코 특별히 독창적이지도 않았으며, 누구도 반대하기 힘든 빤한 방식으로 설명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누가 콜링우드가 주장한 ‘문답’ 방식의 역사보다 일종의 짜깁기인 ‘가위와 풀’ 방법론이 좋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역사를 공부하는 부분적인 목적이 (잉글리스의 표현에 따르면) “지금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 외에 달리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 수 있을지”를 알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어느 누가 반대할 수 있겠는가? 277-9)
30. 누락하고 빠뜨린 것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고전 학자 중 한 명인 에두아르트 프랭켈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인물로 1935년부터 1953년까지 옥스퍼드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의 라틴어 교수로 재직했다. 프랭켈은 로마의 희극작가 티투스 플라우투스의 작품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해 플라우투스의 작품이 사라진 그리스 연극의 2차 모방작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명인의 삶을 되돌아보는 이야기에 어떤 것을 포함시키고 어떤 것을 배제할 것인가? 이런 인물들의 일생을 다룬 공인 버전 이야기의 이면에는 어떤 검열 원칙이 작동하고 있는가? 특히 공인 버전이 인명사전과 다른 참고서 등에 실릴 경우에는? 그리고 이런 검열 원칙은 얼마나 중요한가? 프랭켈은 전형적인 사례이자 가장 흥미로운 사례이다. 프랭켈의 삶을 다룬 권위 있는 영어 설명 중 어느 것도 여성 제자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는 나쁜 손버릇에 대해, 혹은 여성 제자의 개별 지도 시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282-3)
31. 아스테릭스와 로마인
베르생제토릭스(라틴어 발음은 베르킨게토릭스)는 현대 프랑스 문화에서 좌익과 우익 모두에게 국민 영웅이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르생제토릭스는 국민 영웅의 지위를 활용해 사뭇 다른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하나는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의 레지스탕스 전사”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에게 점령당한 뒤 (나치에 협력했던) 비시 정부와 국가 주석 페탱에게 패배했을 경우 고귀함을 지키는 방법, 고상하게 프랑스인이 되는 방법을 보여주는 상징으로서의 역할이었다. 패배한 반역자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품위를 가지고, 베르생제토릭스가 카이사르 발밑에 무릎을 꿇은 사건은 프랑스라는 나라의 역사에서 더없이 중요한 순간이자 동시에 하나의 신화가 되어 있었다. 사실 『아스테릭스Astérix』 시리즈 전체에서 아스테릭스를 베르생제토릭스와 똑 닮은 대역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카이사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갈리아 민족주의자라는 환상을 채워주는. 293-4)
# 베르생제토릭스. 기원전 50년대 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서 일어난 유명한 반란에서 갈리아인을 이끈 지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