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54
개리 거팅 지음, 전혜리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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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과 작업 


"레몽 루셀(1877~1933)은, 푸코가 파리 좌안의 조제 코르티 서점에서 우연히 처음으로 그의 작품을 발견했던 1950년대까지도 도외시되던 주변부 작가이자 '실험주의자'였다. 그는 문학 이론이나 문학 운동의 일환으로서가 아니라, 자기가 아주 중요한 작가라는 과대망상의 감각으로 글을 썼던 사람이다." "푸코는 무엇보다 루셀의 바로 그 주변부성에 매료되었다. 문학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채 '정신병자'로 분류되어버렸다는 사실 말이다. 그는 언제나 주류의 기준들에 따라 배제된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연민을 느꼈다. 처음에는 프랑스 지식인 특유의 부르주아지 혐오에 불과했을지 모를 이러한 태도는, 우리 사회를 정의하는 규범적 배제에 반대하는 강한 개인적 참여[앙가주망]로 발전하게 된다. (이를테면 그가 펼쳤던 감옥 개혁 운동처럼) 우발적 사회 운동도, 또 자신의 글들을 사회와 정치를 변화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도구상자'로 여기는 방식도 이러한 참여에서 비롯된 것이다."(19-22)


"그러나 루셀이 인간의 주체성을 배제한 것 역시 푸코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선 루셀의 저작들에서 공간적 객체성이 시간적 주체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배제를 암시한다. 그는 일반적으로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경험에 대한 내러티브가 아니라 사물이나 행동에 대한 정교한 기술(記述)을 제공한다. 그의 작품들은 다른 수준에서의 저자의 주체성의 표현도 아니다. 쓰인 말들은 루셀의 사유나 감정보다는 언어 자체의 비인격적 구조들로부터 흘러나온다. 형식적 법칙들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는 까닭이다." "언어 안에서 자기를 상실하는 것, 그리고 주체성의 절대적 한계와 소거로서의 죽음을 푸코는 명시적으로 연결한다." "루셀의 작업들에 대한 분석에서 분명한 건 푸코가 자기상실에 매료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 죽음을 통한 자기 상실에도, 그리고 루셀의 글쓰기와 같은 언어적 형식주의 안에서 나타나는 죽음의 거울을 통한 자기 상실에도 매료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22-4)


"『임상의학의 탄생』은 여러 면에서 『레몽 루셀』에서의 심미주의에 대한 과학적 대응물이다. 두 책의 두드러진 차이점 하나는, 일관된 박식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맹렬한 비판의 섬광과 같은 것이 『임상의학의 탄생』에는 있지만 『레몽 루셀』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가령 푸코는 〈'의사/환자 관계'라는 (···) 어렴풋이 에로틱해진 어휘〉를 조롱한다. 그에 따르면, 〈이 어휘는, 너무 많은 생각 없는 사람들에게, 결혼의 환상이 갖는 무기력한 힘들을 전달하려 애쓰다 지쳐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폭발은, 비록 자주 발생하지는 않지만, 푸코의 역사 연구가 갖는 특징이며, 그 연구가 갖는 궁극적으로는 정치적인 어젠다를 암시한다. 반면 『레몽 루셀』은 심미적 기쁨 그 자체에 완전히 도취되어, 루셀이 〈몇 번의 여름 동안 내 사랑이었던〉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을 구성하고 있는 푸코를 보여준다. 이러한 대비는, 푸코의 삶과 사유에서 심미적 관조와 정치적 행동주의 간의 근본적 긴장과 관련한 초기의 두드러진 사례다."(25-6)


2. 문학 


"푸코는 우리가 엄밀히 말해 '저자'가 아닌 '저자 기능'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저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텍스트와 그저 특정한 실제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다(이를테면 인과적으로 그 텍스트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텍스트와 관련해 사회적이고 문화적으로 정의된 특정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건조물이며, 문화와 시대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니체는 '누가 말하는가?'(누가, 어떤 역사적 입장에 서서, 어떤 특정한 이해관계를 갖고, 경청될 권한을 주장하는가?)를 늘 텍스트에 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적어도 문학에 관해서라면 말라르메가 이 질문에 답했다고 푸코는 말을 잇는다. '말 자체'가 말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이 글을 통해 말하는 것들 대부분은 그들이 가진 독특한 통찰력이나 능력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산물이다. 대부분의 텍스트에서 그저 언어가 말하고 있을 뿐이다."(31-4)


"한 표준적(낭만적) 구상에서는 저자가 개인의 유일무이한 통찰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의 구조에 맞서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의 가정은 저자가 언어 이전의 개인적 비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 즉 한낱 관습적 표현으로 기울어지는 언어의 경향에 대항하여 작동해야 하는 것의 표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고전적' 구상에서는 저자가 전통적 비전을 구현하는 또 다른 작품을 만들기 위해 표준적 구조들을 받아들이고 활용한다고 본다. 고전적 관점과 낭만적 관점 모두 글쓰기는 개인들이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문제라고 본다. 그 두 관점의 차이는 단지 그 표현된 것이 저자 자신의 사적 비전인지 아니면 저자가 전통으로부터 차용한 것인지와 관련된다. 하지만 푸코는 특히 저자가 언어와 관계 맺는 또 다른 방식에 흥미를 갖는다.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어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그런 방식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자기를 표현하는 자로서의 저자 개념의 죽음이다."(34-5)


"푸코가 니체와 아르토 그리고 레몽 루셀 같은 '미친' 작가의 작품들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푸코는 이런 경우에조차 작가의 성취가 결코 문자 그대로의 광인의 성취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는 '광기'가 '작품의 부재'임을 상기시킨다." "'미친' 작가들의 특권과 그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그들이 제정신인 세계의 경계에 서 있다고 하는, 그들의 한계적 위치에서 기인한다." "푸코가 아방가르드 문학에 매료되는 것은 극단적 (한계-) 경험 속에서 일상적 삶을 넘어서는 진실과 성취를 추구하는 그의 경향의 한 측면이다." "사인(私人)으로서의 푸코에게 이 강렬함에의 유혹은 여전히 중요했지만, 1960년대, 그러니까 문학에 대한 에세이들 대부분을 썼던 이 시기가 지나고 나자, 한계-경험과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열쇠라는 확신이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대신 그는 인간 해방을 가져오는 데 필요한 것에 대한 훨씬 더 정치적인 구상 쪽으로 옮겨간다."(42-4)


3. 정치 


"드레퓌스 사건이나 프랑스 대혁명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특히 2차 대전 이후 프랑스 지식인의 삶에는 강력한 정치적 색조가 있었다. 난해한 철학 논문이나 사회학 논문들이 비난받거나 찬사를 받는 이유는 거기서 감지할 수 있는 입장, 즉 당시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그들의 입장 때문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특히 사르트르의 주장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글쓰기는 참여적(engagée)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참여 문학은 글쓰기와 역사적 상황의 피할 수 없는 관계 맺음을 인식하는 글쓰기이며, 그 글의 독자들이 그러한 상황에 내재된 인간 해방의 잠재력을 의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끔 하기 위해 분투하는 글쓰기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그런 글쓰기는 프로파간다가 아니다. 그런 글쓰기는 특정 이데올로기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논쟁에 내재되어 있는 영원한 가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자기 세대의 다른 모든 지식인들처럼 푸코도 사르트르의 그늘 아래 성장했다."(48-9)


"사르트르보다 스물한 살 아래인 푸코가 전쟁을 경험했던 때는 혼란스러운 청소년 시절이었다. 전후 프랑스의 정치적 불안정과 모호함 속에서 자라난 그는 사르트르의 윤리적·정치적 절대성에 회의적이었다. 그가 〈보편 지식인〉, 자유정신, 〈보편적인 것의 대변자〉, 〈진실과 정의의 주인 자격으로 말하기〉라고 부르게 되는 것의 허세를 문제삼을 때 그는 분명 사르트르를 염두에 두고 있다. 푸코에 따르면, 이것은 한때 틀림없이 가치 있는 소명이었지만 오늘날 보편적인 도덕 체계는 더 이상 사회적·정치적 문제에 대한 효과적 답변을 제공하지 못한다. 우리에겐 해당 문제들에 구체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의 상세한 답변이 필요하다. 푸코는 이것이 〈특수 지식인〉, 그러니까 교수, 엔지니어, 의사, 또는 자문 위원의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특수 지식인은 〈국가에 봉사하든 반대하든, 자기가 마음먹기에 따라 생명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할 수도 있는 힘을 가진〉 자, 말하자면 사르트르가 아니라 오펜하이머다."(50-2)


"로티는 푸코의 정치적 분석이 〈그 어떤 '우리'에도 호소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로티는 푸코가 그 어떤 합의로부터도 출발하지 않음으로써 담론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혼동하고, 자유 사회의 규범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자기 창조의 일부로서만 적절한 가치, 이를테면 강렬한 한계-경험의 추구 등에 대한 공개적 지지를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푸코는 이란 혁명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는 바람에 많은 이들을 당혹시킨 적이 있다. 하지만 푸코는 봉기라는 근본적 행동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그러한 봉기를 통해서만 '주체성(위대한 사람의 주체성이 아닌 누군가의 주체성이)이 역사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푸코가 그런 판단 자체를, 정치적이거나 다른 윤리적 틀의 이론적 범주를 적용한 결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소여로 간주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결국 상황을 직접 경험한 이들의 판단 외에는 그 어떤 권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59, 62-5)


4. 고고학 


"푸코는, 어떤 주어진 영역에서 어떤 주어진 시기에 사람들이 사유할 수 있는 방식에는 상당한 제약이 따른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이를테면 천체가 원을 그리지 않는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다거나 땅을 이루는 물질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수 세기 동안이나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일련의 제약이다." "따라서 '관념사'─여기서는 과학자들, 철학자들 등의 마음속에서 의식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의미한다─보다는, 그들의 사유의 맥락을 형성하는 기저 구조가 더 중요하다. 이를테면 우리는 흄이나 다윈에게 관심을 갖기보다는 흄이나 다윈을 가능케 한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이것이 푸코의 유명한 '주체의 주변화'의 핵심이다. 그가 개인의 의식이 실재함을 부정한다거나, 혹은 더 나아가서 개인의 의식이 최고의 윤리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푸코는, 개인은 자신이 의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한정하고 또 제한하는 개념적 환경 안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69-70)


"'주체-중심적' 설명은 역사를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내러티브로 본다. 이야기나 내러티브는 한 사람 혹은 그보다 많은 사람들의 경험의 관점에서 말해지기 때문에 의식의 연속성과 목표 지향성을 가정한다. 그래서 역사는 인간의 관심사에 의해 통합되고 인간에게 의미 있는 결론에 이르는 플롯과 더불어 하나의 소설이 된다. 이런 내러티브는 피상적으로는 타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런 내러티브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역사가 연속성과 목적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릇된 가정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그 역사를 체험하는 의식들의 경험과 기획이 주도한다는 그릇된 가정 말이다. 고고학은 우리가 우리 삶에서 읽어내는 연속성과 방향이 거짓임을 보여주는 의식 외부의 요인들을 도입한다. 푸코의 역사는 텍스트를 기록물(document)이 아니라 기념물(monument)로서 다룬다. 고고학적 은유로 말하면, 푸코의 관심은 연구된 특정 대상(텍스트)이 아니라 이 대상이 발굴된 그 현장의 전체 구성에 있다."(71-3)


"다른 한편 푸코는 마르크스주의나 다른 형태의 사적 유물론의 방식으로 경제적 힘이나 사회적 힘과 같은 외적 힘을 통해 관념들을 설명하는 기획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의 기획은 오히려 인간 사유의 의식적 내용에다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인간 사유를 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에 그 자체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잠재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잠재력은 우리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발견되는 필연성에 도전하는 대안적 사고 방식을 제시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광기를 '정신질환'으로 여기는 것을 대체할 만한 다른 합리적 대안은 없다고 믿지만, 푸코의 고고학에 따르면, 현대 과학 세계의 '아버지들'인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같은 사람들도 불과 200년 전에는 광기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유했었다." "이러한 개념이 윤리적이고 정치적으로 논쟁을 유발하는 실천들에 기반해 있는 것이라면, 고고학은 분명 언어적 추상화에 대한 중립적 기술(記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74, 81-2)


5. 계보학 


"단순히 역사적 방법론의 차원에서 보자면 니체와 푸코의 계보학은 상당히 다르지만 푸코는 근본적인 측면 하나에서만큼은 철저하게 니체적이다. 푸코 역시 비판적 의도를 가지고 계보학을 사용한다. 니체는 계보학을 사용해 우리가 가장 우러르는 제도들과 실천들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들이었음을 보여주었다. 푸코의 계보학 역시 한 사회의 제도들과 실천들의 진짜 기원을 보여줌으로써 그 사회의 자기이해와 관련된 공인된 의미들과 평가들을 해체한다. 〈역사의 시작들은 하찮다. 비둘기의 걸음처럼 겸허하고 소박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가소롭고 아이러니하다는 의미에서, 그래서 모든 자만심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어떤 것의 계보를 제공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가치 있고 영속하는 것을 낳는 우연, 미세한 일탈, 혹은 반대로 완전한 역전, 즉 오류, 허위 감정, 잘못된 계산을 식별하는 것이다.〉 이 인용문들은 니체에 대한 푸코의 설명이자 푸코 스스로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92-3)


"푸코의 계보학이 명백히 니체를 떠올리게 만드는 또 다른 중요한 영역이 있다. 바로 지식과 권력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생각의 변화가 생각 자체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라는 푸코의 기본적인 통찰, 즉 생각들이 바뀔 때 그 원인은 개인의 행동을 통제하는 사회적 힘들이라는 통찰을 발전시킨 것이다. 특히 지식에 대한 푸코의 고고학적 관점을 고려할 때, 권력은 우리 지식의 기저에 놓인 근본적인 고고학적 틀(에피스테메 또는 담론 형성)을 변형시킨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는 모호하고 논쟁적인 개념을 순수하고 객관적인 지식을 표현한다고 주장하는 사유 체계(이를테면 플라톤 철학, 그리스도교 신학)의 원천으로 제시했었다." "푸코는 이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심 없는[객관적인] 증거와 논증의 힘에만 근거한다고 자부하는 과학, 종교, 그리고 여타의 인식들이 갖는 권위 뒤에 도사리고 있는 힘을 찾아내는 니체의 테크닉에 분명 감명받았고, 그 테크닉을 채택했다."(95-7)


"푸코는 권력이 지식을 제약하거나 제거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생산하는 긍정적[실정적]인 인식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권력이 지식을 생산할 수 있다는 푸코의 생각이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한 의심은 객관적이고 상대화되지 않는 진실에 푸코가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비판일 때도 있고 칭찬일 때도 있는 끈질긴 주장의 기초가 된다. 만약 내가 믿는 모든 것이 내 사회의 권력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면, 내 신념이 그 사회의 기준과 무관할 경우, 어떻게 그것이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까? 비평가들은 푸코의 입장이 자기논박적이라고 말한다. 모든 신념이, 그 신념들이 기원한 권력 체계에 대해서만 유효하다면 푸코의 상대주의적 주장 자체는 기껏해야 제한된 타당성만을 가질 뿐이다. 푸코가 종속되어 있는 동일한 권력 체제에 우리도 종속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의 입장을 받아들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와 무관하다."(96-9)


6. 복면 철학자 


"철학에 대한 근대적 구상을 정의하는 칸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푸코는 철학적 기획의 일반적 비판의 방향을 공유하는 정도의 철학자다. 그러나 그는 칸트나 대부분의 다른 근대 철학자들의 관심을 공유하지 않는다. 요컨대 생각, 경험, 행동의 필요조건들의 한계를 정하는 철학적 진리의 독특한 영역을 찾는 데 관심이 없는 것이다." "푸코가 현상학적 분석이나 언어학적 분석이 진정으로 필수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 기획은 그러한 진실을 향하기보다는 필연성으로 위장한 우연성을 향한다. 또한 그가 사용하는 고고학과 계보학이라는 방법은 선험적인 철학적 분석의 방법이 아니라 역사적 조사의 방법이다.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푸코는 자신의 비판 기획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나 그 기획을 수행하는 방법론의 차원에서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다만 포괄적으로 비판에 참여한다는 측면에서만 철학자다."(111-2)


7. 광기 


"푸코는 중세와 르네상스의 광기에 대한 피상적이지만 결정적인 탐색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그는 광기가 완전히 인간적인 현상으로 여겨졌다고 주장한다. 광기는 이성에 반대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인간 존재의 대안적 방식이었지, 인간 존재의 단순한 거부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광기는 (경멸받거나 혐오스럽더라도) 이성에 대한 의미 있는 이의 제기였다. 광기는 (에라스뮈스의 『우신 예찬』에서처럼) 이성과의 아이러니한 대화에 참여할 수도 있고, (보스의 회화나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처럼) 이성이 이용할 수 없는 인간 경험과 통찰력의 영역을 주장할 수도 있다. 어쨌든 요점은 과거에 광기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우리[서구] 문화의 이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광기에 대한 이런 풍부한 이해는 17세기 중반, 프랑스가 고전주의 시대라 부르는 시기가 시작되면서 끝났다. 중세와 르네상스의 관점과 대조적으로, 고전주의 시대는 광기를 이성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았다."(129-30)


"이러한 개념적 배제와 상관적인 신체적 배제도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미치광이들을 격리하는 여러 기관들에 그들을 감금했을 때 미치광이들에게 가해지는 효과로서 말이다. 이 신체적 배제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은 1656년 프랑스의 '대감호' 때였다." "미치광이에 대한 개념적이고 신체적인 배제는 도덕적 비난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광기라는] 도덕적 잘못은 인간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공동체의 근본 규범들 중 하나를 위반한다고 하는, 그런 일반적 유형의 잘못이 아니다. 광기는 오히려 순수한 (비인간적) 동물성의 삶을 위해 인류와 인간 공동체 전체를 깡그리 거부하는 급진적 선택에 해당된다. 고전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미치광이의 동물성은 그들이 여러 정념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표현되며, 정념의 지배는 그들을 망상으로 이끌고 그 망상 속에서 그들은 비현실을 현실로 착각하게 된다. 정념에 의한 망상은 그러므로 이성의 빛을 차단하는 근본적 맹목을 초래한다."(131-2)


"푸코는 우리를 해방했다고 여겨졌던 이성 그 자체가 우리를 지배하는 주요 도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수사학이 지닌 격렬한 풍자는 이성의 허세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며, 푸코가 광기를 영웅화하는 것은 이성의 체계에 대한 대안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이 대안은 광인들이 겪었던, 그리고 미친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언급되는 탈이성적이고 위반적인 경험이다." "그러나 성공적인 행위가 필요로 하는 특정한 프로그램은 광기의 구조화되지 않은 폭발 안에 기초할 수 없다. 혁명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작위적인 섬광이 아니라 세심하게 통제되는 해체 작업이다. 푸코는 이 탈이성적 경험에의 매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지만 그는 결국 그것이 계몽 이성의 의미 있는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광인의 〈목소리〉에 대한 낭만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현재 우리의 이성이 배치되어 있는 방식에 완전히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포괄적으로 상기시켜주는 것으로서만 그렇다."(136-9)


8. 중범죄와 처벌 


"『감시와 처벌』이 전작인 『광기의 역사』와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은 감옥 모델이 근대 사회 전반에 전이되었다는 생각이다. 그 결과 『감시와 처벌』은 『광기의 역사』와는 달리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우리'(정상 사회)로 정의하기 위해 맞세우는 특수한 '타자'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사회 자체가 지배받는 타자들의 다중으로서 나타난다. 중범죄자들, 학생들, 공장 노동자들, 군인들, 구매자들 등을 포함해서 말이다. 우리 각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근대 권력의 지배하에 놓인 자들이다. 따라서 권력의 단일한 중심은 존재하지 않으며, 특권을 누리는 '우리'─이것과의 대조 속에서 소외된 '그들'이 정의된다─따위도 없다. 권력은 사회 전체에 다수의 미시적 중심들로 분산되어 있다. 권력이 다수의 미시적 중심들로 분산되어 있으므로, 발전의 배면에 있다고 상정되는 목적론도 없고, 지배계급이나 세계사적 과정도 없다. 근대 권력은 조직화되지 않은 수많은 사소한 원인들이 계보의 방식으로 만들어낸 우연한 결과일 뿐이다."(153-4)


"이러한 분석은 반동적 결론을 제시한다. 의미 있는 혁명, 즉 진정한 해방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 요컨대 미시적인 중심들로 이루어진 근대적 권력망의 유일한 대안은 전체주의적 지배라는 결론 말이다. 하지만 그의 결론은 반동적 절망이라기보다는, 혁명적 해방은 전지구적 변혁을 필요로 한다는 가정의 부정일 것이다. 푸코에게 정치는─혁명적 정치조차도─늘 지역적(local)이다. 그러나 지역성(locality) 자체는 종종 반동의 피난처다. 그래서 푸코는 1970년대부터 광인을 근본 타자로 보는 낭만적 사유 대신 주변부 개념을 제시한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은 광인들과는 달리, 우리의 가치에 의미 있게 이의를 제시할 수 있는 가치들을 갖고 있으며, 우리 사회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 충족될 수 있는 욕구들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관심사는 효과적인 정치적 행위를 위한 프로그램의 중심이 될 수 있다. 그러한 프로그램들은 유토피아적이고 전 지구적인 야망 없이도 진정으로 혁명적일 수 있다."(155-7)


"마지막 어려움은 이것이다. 왜 우리의 정치적 실천이 이렇게나 주변부 집단에 집중되어야 할까? 예를 들어 주류 가치들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심화하거나 그 가치들을 다른 사회들로까지 확장하려는 신보수주의 정치는 왜 안 된단 말인가? 이것은 푸코처럼 자기비판과 타자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정치적 의제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가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안됐지만 존 롤스 같은 다른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푸코에게는 이 물음에 답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그저 끊임없는 자기 변형에 대한 개인적 전념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부 집단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어떤 정체성에 갇혀 있는 것에 대한 그의 혐오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푸코에게 정치적인 것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다. 그의 혐오를 공유하지 않는 자들에게, 그는─유사한 맥락에서 사용한 적 있는 말들로─이렇게 답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같은 행성에서 오지 않았다.〉"(158-9)


9. 근대의 성 


"『성의 역사』 시리즈의 서문에 해당하는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 마지막 장에서 푸코는 성 현상 자체를 넘어서서 생명관리권력이라는 개념을 전개하는 것으로 보인다. 생명관리권력은 살아 있는 존재들로서의 우리, 즉 성적 기준들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정상성의 기준에 종속된 존재로서의 우리를 향하는 모든 형태의 근대 권력을 아우른다. 생명관리권력은 두 수준에서 작동하는 〈생명을 관리하는 작업〉과 관련된다. 그 첫 번째 수준인 개인의 수준에는 〈인간 신체의 해부-정치〉가 있고, 두 번째 수준인 사회 집단들의 수준에는 〈인구의 생명관리정치〉가 있다." "첫 번째 수준, 이를테면 근대 의학에서의 비만 개념은 소외된 사회 계층으로서의 〈뚱뚱한 사람들〉에 해당하며, 질병에 대한 근대적 약물 치료 기술은 제약 산업의 자본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두 번째 수준은 국가 전체의 인구에 초점을 맞추는 근대적 관점과 관련된다. 근대에는 국가 전체의 인구를 보호·감독·개선되어야 할 자원으로 보는 것이다."(171-2)


"더 중요한 것은 푸코가 〈주체의 역사〉라고 부르게 되는 것을 향하는, 또 다른 방향의 확장일 것이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때로 규율적 통제의 대상들이 어떻게 규범들을 스스로 내면화하고 자기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게 되는지 언급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분야의 '대상들'로서만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지식을 스스로 철저히 검토하고 스스로 형성하는 '주체들'로서도 통제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관점은 푸코로 하여금 성 해방이라는 근대적 이상에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나는 자기 성찰을 통해 나의 깊은 성적 본성을 발견하고 다양한 심리적 저항과 신경증들을 극복함으로써 그 깊은 성적 본성을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있는가? 아니면 새로운 일련의 규범들에 맞춰 내 삶을 재구성하고 있을 뿐일까?" "우리의 성 현상에 우리가 끝없이 집착하는 것의 아이러니는, 푸코에 따르면, 그러한 집착이 해방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173-5)


10. 고대의 성 


"'문제화(problematization)'는 푸코 후기 사유의 핵심 개념이다. 문제화는 개인이 자신의 실존과 맞닥뜨리게 되는 근본적인 문제들과 선택들을 정식화한다. 내 실존이 특정한 방식으로 문제화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 없이 내가 들어가 있는 사회적 권력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화가 주어지면 그 문제화가 제기하는 문제에 내 방식대로, 더 정확하게는, 내 역사적 맥락 안에서 자기로서의 내가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푸코가 이 문제화라는 용어를 도입한 고대의 맥락에서 문제화된 것은 여성이나 노예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된' 집단의 삶이 아니라 자유로운 그리스 남성들의 삶이다. 사회적 소외는 사회가 개인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제약에 해당한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것에 대항하는 혁명적 운동들에 참여할 수 있(고 성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권력과의 투쟁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184)


"그리스도인들에게 성 윤리 규범에 복종한다는 것은 절대적 배제의 문제였다. 이상적인 독신 생활에서는 물론이고, 덜 영웅적인 경우에는 일부일처제 결혼이라는 엄격하게 한정된 영역으로의 제한이다. 반면 고대인들에게 성 윤리 규범에 복종한다는 것은 쾌락의 적절한 사용(크레시스chresis)의 문제였다. 본질적으로 악한 특정 행위들을 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범위의 성적 활동에 참여하더라도 적절하게 절제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고대인들은 자기제어(엥크라테이아enkrateia)에 도달하려고 노력했다." "결국, 고대에 윤리적 삶의 목표는 절제(sophrosyne)였다. 절제는 (자신의 정념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자유와 (타자들에 대한 지배의 자유라는) 적극적 자유를 모두 포함하는 자유의 한 형태로 이해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추구하는 인간적으로 의미 있는 유일한 자유는 욕망으로부터의 소극적 자유였고, 그 이상의 자유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의지에 완전히 굴복할 뿐이었다."(189-90)


"푸코 스스로 주장하듯이, 그가 마지막으로 출판한 책(『자기배려』) 이전의 작업은 모두 진실에 관한 것이었지만, 전통 철학자들이 보여주었던 진실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과는 반대로 푸코는 진실을 시험했다. 그의 고고학은 진실과 종종 관련되어 있는 역사적 틀이 초월적이라고 상정되지만 실은 얼마나 우연적인지를 보여주었고, 그의 계보학은 진실이라는 것이 권력과 지배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다고 상정되지만 실은 얼마나 권력 및 지배와 얽혀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제 그는 이론적 지식의 본체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서의 진실을 끌어안는 방법을 모색한다. 그 방법은 인식론이 아니라 진실의 윤리다." "고대인들에 대한 그의 연구는, 두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예술에 비유할 수 있는 개인적 자기창조의 산물로서의 진실이 그 첫 번째이고, 사회적 덕목으로서의 진실 말하기가 그 두 번째다. 여기,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는 푸코의 삶과 작품을 정의하는 이분법을 다시 한 번 발견한다. 미학인가? 정치인가?"(194-6)


11. 푸코 이후의 푸코 


"자유주의 통치들을 분석할 때 푸코는 두 가지 핵심 개념들을 사용했다. 그중 하나인 인구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에 그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인 통치성은 정치적 이론화의 전문 용어에 잘 어울리게 만들어진 다음절(多音節)의 추상적 개념이다. 물론 현존했던 모든 정치 단위에는 통치자가 통제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의 인구가 있다. 푸코가 말하는 인구는 정치적 범주일 뿐 아니라 인식론적 범주이기도 하다. 인구는 인구를 통치하는 도구들인 정교한 통계적 방법론을 기반으로 하는 의학적, 경제적, 사회적 지식들의 근대적 조직체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통치성은 〈인구를 주요 타깃으로 삼는 이러한 권력의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 절차, 분석, 반성, 계산과 전술의 총체〉다." "그는 근대 통치성의 기원들이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통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교회의 사목적 돌봄에서 나온다고 본다. 그보다 나중의 기원들은 통치성의 정치적 합리성을 강조한다."(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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