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의 전쟁 1939-1945 - 편지와 일기에 담긴 2차대전, 전쟁범죄와 폭격, 그리고 내면
니콜라스 스타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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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독일에서 살던 유대인들에게 전쟁은 물론 홀로코스트로 경험되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사태를 정반대 방향에서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문제는 전쟁이었다. 그들은 따라서 제노사이드를 전쟁이 배경이 되어 벌어진 사건으로 이해했다. 똑같은 사건을 완전히 다르게 바라본 것이다. 그 두 가지 시각은 물론 유대인들과 독일인들 사이에 엄존하는 권력과 선택의 불평등이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 문제성이야말로 내가 이 책에서 2차대전 독일사를 서술하면서 채택한 접근 방법이다. 역사가들은 흔히 대량 학살의 작동에 초점을 맞추면서, 홀로코스트가 왜 그리고 어떻게 발생했는지 논의했다. 그와 달리 나는 독일인들이 학살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지식을 어떻게 자아에 통합했는지 논의하고자 한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제노사이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면서 그로부터 어떻게 영향받았는가? 달리 표현하자면, 전쟁은 제노사이드에 대한 그들의 지각을 어떻게 형성했는가?"(31)


"'이것이냐 저것이냐', '사느냐 죽느냐', '모든 것을 얻거나 잃거나', '승리 아니면 파멸'이란 마니교적 이분법의 은유는 독일인들의 수사학에서 역사적으로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1차대전 패배 이후 히틀러의 핵심 이념을 구성한 은유였고, 빌헬름 2세가 1914년 8월 6일에 '독일 인민에게 전하는 선언'을 발표한 이래 1차대전 선전의 관용어였다. 그러나 1930년대 히틀러 국가가 인기를 누린 것은 종말론적 관점 때문이 아니었다. 전쟁의 초반에도 마찬가지였다. 독일 사회가 종말론적 사고방식을 수용한 것이야말로 2차대전 후반기에 독일인들에게 발생한 결정적 변화였다! 독일의 운명이 패배 쪽으로 기울자, 극단적인 이분법이 평범한 상식으로 변했다. 연합군의 '테러 공격'은 사느냐 죽느냐의 위기의식을 낳았다."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위해 싸웠던 것은 그들 모두가 나치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독일인들이 끝까지 싸운 것은, 그들이 전쟁의 가혹함을 정면으로 겪었기에 그리고 전쟁이 생산해낸 종말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32)


"1939년 가을 서부에서 전투의 개시를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 일부는 생각했다. '지금 판을 정리하는 게 낫다. 그러면 또다시 전쟁을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다.' 독일의 학동들은 몇 세대 동안 프랑스가 '세습적인 적'이지만 본능적이고 감정적으로 진짜 문제는 러시아라고 배웠다. 1890년부터 심지어 야당 사민당조차 독일이 러시아의 공격을 받는다면 동방의 그 야만으로부터 나라를 방어할 것이라고 맹세했었다." "1914년 8월 러시아가 동프로이센을 침공하자, 러시아 전쟁은 끝까지 싸워서 다음 세대가 또다시 겪지 않아도 되도록 해야 한다고, 1914년에 독일인들을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914~1917년에 동부전선에서 싸웠던 퇴역군인들로부터 막 학교를 졸업한 젊은 병사를 거쳐 아직 집에 있는 십대 청소년들에 이르기까지, 독일인들은 2차 대전을 나치 체제와 동일시했던 것이 아니라 세대를 가로지르는 가족적 책임으로 간주했다. 그것이 그들의 애국주의의 가장 강력한 토대였다."(46-7)


제1부 방어전: 1939년 9월~1940년 봄


제1장 독일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전쟁 


"1914년 8월과 달리 1939년 9월 1일에는 애국 행진이나 대중 집회 같은 것이 없었다. 길거리는 무섭도록 조용했다. 예비군들은 집합 장소에 가서 신고를 했고 민간인들은 건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1차대전의 재앙이 반복될지 모른다는 공포는 역력했다." "추후 6년 동안 독일의 모든 달력과 일기장에 전쟁 개시일로 인쇄된 날짜는 영국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한 1939년 9월 3일이었다." "이레네와 에른스트는 특별한 정치적 의견을 나타내지 않았다. 클레퍼와 호젠펠트와 퇴퍼빈은 나치운동의 일부, 특히 반종교적인 부류를 역겨워했다. 그들은 모두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정당하다고 믿었다. 다른 독일인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영국과 프랑스와 전쟁을 해야 하는가? 그럴 가치가 있다고 느끼던 독일인은 소수였다. 고지 프랑켄 지방의 한 보고서 그해 여름의 여론을 간결하게 요약했다. '단치히와 회랑 문제를 해결할 방법에 대한 여론의 답은 여전히 똑같다. 독일에 편입? 예스. 전쟁을 통하여? 노.'"(60, 64-5)


"독일 언론은 1939년 8월 중순에 국경지대의 독일인 혈통들이 폴란드 내륙의 '강제수용소'로 대규모로 이송되었다고 보도했고, 개전 직후에는 전쟁이 독일인 혈통들에 대한 일련의 대량 학살을 촉발시켰으며, 희생자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이라고 보도했다. 독일 영화관의 〈주간뉴스〉는 독일인 혈통들이 학살당하는 시각 자료를 보여주었고, 체포된 폴란드 병사들과 '비정규 전투원들'은 독일인 혈통들을 절멸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범죄적으로 타락한 '하등인간'이라고 강조했다." "그리하여 1943년 봄에 괴벨스가─딱 한 번─소련의 더 큰 테러를 부각하기 위하여 독일 여론을 폴란드인들에 대한 동정심으로 몰고 가려 했을 때, 그는 1939년의 기억과 충돌하게 된다. 독일인 독자들은 폴란드인들에 의해 독일인 6만 명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적시하면서, 설혹 소련 비밀경찰NKVD이 살인자들이라고 해도 왜 우리가 폴란드인들을 동정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선전부는 여론의 동정심까지 조작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79-81)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는 독일인들에게 더이상 주제가 되지 못했다. 히틀러가 바르샤바에서 승리한 독일 군대를 치하하고 2주일이 지난 시점, 교회가 축하의 종을 울리고 1주일이 지난 1939년 10월 중순에 망명 사민당의 한 지하 요원은 '폴란드 전쟁에서의 〈승리〉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라고 보도했다. 독일인들에게 문제는 이제 평화였다. 폴란드를 둘러싼 갈등이 폴란드 해체로 해결된 만큼, 서구 열강과의 평화가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다시 솟았던 것이다. 10월 6일 히틀러가 제국의회에서 연설했다. CBS의 베를린 특파원 윌리엄 샤이러는 이렇게 적었다. 〈그가 1936년 라인란트 진군 이후 정복 때마다 제국의회 연단에서 했던 말과 똑같았다. 이번이 최소 다섯번째다. 그는 언제나처럼 똑같이 진지하게 말했지만, 만일 당신이 어느 독일인에게 바깥 세계는 이미 쓰라린 경험을 한 탓에 과거에 주었던 신뢰를 더이상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모든 독일인이 경악할 것이다.〉"(83-4)


제2장 대오의 균열을 막아라 


"괴벨스가 1933년 집권 직후 독일 라디오 방송국에 하달한 첫 번째 계고는 다음과 같다. '방송의 최고 규칙은 지루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모든 것 위에 놓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지루함을 방송하지 마십시오. 매일 저녁 요란한 행진곡을 방송하는 것이 민족 정부에게 봉사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1936년 3월 나치 제국방송지도자 하다모프스키는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의 프라임타임에 그동안 선호되던 '대작' 대신 만인을 겨냥한 가벼운 음악회, 버라이어티쇼, 댄스음악을 방송하도록 했다. 1939년 청취자 선호도 조사는 새로운 포맷이 모든 계층에게 환영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전문직과 지식인들조차 고전음악보다 대중음악을 선호했다. 1939년 10월 1일 방송국이 새로운 프라임타임 쇼 〈독일군을 위한 리퀘스트 콘서트〉를 선보였다. 쇼는 곧 정규 프로그램이 되었다. 신청 사연은 전쟁으로 떨어져야 했던 커플들에게 공적인 친밀성의 순간을 공유하도록 해주었다."(108-9)


"그해 말 예술이 예술을 모방했다. 최초의 블록버스터 전쟁영화 〈리퀘스트 콘서트〉가 제작된 것이다. 방송 진행자 하인츠 괴데케는 영화에서 자기 자신을 연기했다. 영황에서 그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만났다가 헤어진 연인이 재회하도록 도와주는 진행자 역할을 맡았다." "2천만 혹은 2,500만 명이 그 영화를 보았다. 그때까지 독일 영화 최대의 관람객이었다. 라디오 쇼는 그보다도 성공적이었다. 나라의 거의 절반이 방송을 들었다." "정보국은 방송이 '민족공동체를 수천 번이나 경험하도록 했다'며 열광했다. 그런 것이야말로 나치가 찾던 자석이었다. 모든 개인적 이기심이 강렬한 민족 감정 속에 녹아 없어지는 감정적 통일의 순간, 그러나 역설적으로 방송이든 영화든, 〈리퀘스트 콘서트〉는 친밀한 관계의 사적인 끝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사랑과 가족이라는 사적인 관계가 애국심의 중핵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나치는 인간의 감정 중에서 가장 강력하지만 가장 예측하기 힘든 감정인 사랑을 동원했던 것이다."(111-2)


제3장 극단의 조치들 


"군법 재판관들은 1939년 8월 16일 동원령과 함께 효력이 발생한 '전시특별형법'을 적용했다. 그 법은 '군대 사기 저해 행위'의 표준 형량을 사형으로 정했다. 법 해석자들은 특히 '종파 집단과 평화주의자들'을 겨냥했다. 그 법에는 복종의 의무가  '양심에 따를 의무'에 선행한다고 적시되어 있었다. 또한 법에는 모든 신병에게 요구된 지도자 히틀러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 맹세를 거부한 병사들에 대한 처벌이 포함되어 있었고, 군인으로서 의무 불이행이 '탈영'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판사들 일부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비전투 병과에서 군복무를 이행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 대부분은 거부했다. 또한 중간에라도 신앙을 포기하면 감옥형을 유예받을 수 있었다. 그런 경우에도 시민권 박탈은 취소되지 않아서, 병사들은 지뢰를 제거하는 등의 위험한 작업을 담당하는 처벌 부대에 배치되었다. 군복무 거부자의 자식은 탁아 기관에 넘겨졌고, 가족의 업체와 주택은 강매되었다."(116-7)


"민족적 개신교의 독일 구원론은 1918년의 '그the' 재앙을 극복하려던 반자유주의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문화의 한 판본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역사의 순환성에 입각하면서도, 실패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순환의 경로에 강력하게 개입해야 한다고 믿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핵심적인 정치적 이념─바이마르 민주주의, 자유주의, 평화주의, 사회주의, 유대인, 패전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에 대한 거부─은 변치 않았다. 1939년의 새로운 전쟁은 그들이 1918년에 대하여 생각했던 모든 것을 소환했다. 핵심은 독일의 구원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 즉 지난 전쟁에서 범했던 오류를 이번 전쟁에서는 피해야 한다는 일반화된 신념이 전쟁 초부터 독일 엘리트들이 치명적인 폭력을 가할 자세를 갖추었던 것을 설명해준다. 그것은 전쟁에서 가해진 가장 극단적인 폭력이 언제나 가장 과격한 혹은 가장 나치다운 기관의 행동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설명해준다."(123-4)


"전쟁이 독일 국내에서 촉발한 가장 과격하고 폭력적인 테러는 가장 외진 곳에서 비밀리에 발생했다. 요양원의 정신병 환자들이 전쟁 동안 학살된 것이다. 작전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와 마찬가지로 개전 즉시 시작되었다. 학살은 1945년 5월 전쟁의 끝날까지 이어져서, 총 21만, 6,400명이 살해되었다. 이는 나치가 살해한 〈독일〉 유대인보다도 많은 숫자다. 살인 행위의 주체는 폴란드에서 인종 정책을 주도한 힘러의 제국보안청과 같이 특수하게 나치적인 기관이 아니었다. 작전의 주체는 보건행정과 지방행정에 근무하는 평범한 의사들과 공무원들이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처형과 달리 장애인 학살은 공개되지 않았다. 작전에 참여한 핵심 인물들이 법적 뒷받침을 요구했지만 처음에는 수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불러와 브란트가 히틀러에게 '은혜로운 죽음Gnadentod'을 허용한다는 문장 한 개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는 그후 비밀 살인을 허용하는 문서에 다시는 자기 이름을 올리지 않는다."(130-2)


제2부 유럽의 주인: 1940년 5월~1941년 여름


제4장 진격 


"1940년 5월 10일 서부전선 전투가 시작된 이래 국내의 독일인들은 라디오를 끄지 않았다. 친위대 정보국은 교대근무를 일찍 마친 사람들도 밤 12시의 독일군 발표를 듣기 위해 기다린다고 보고했다. 독일군이 '도버해협까지 진격해서 적의 대군을 포위했다는 소식이 사람들의 긴장을 최고도로 끌어올렸고, 사람들은 그 흥분을 모든 곳에 전했다.' 프랑스가 곧 무너지고 영국 침공이 뒤따를 것이라는 추측이 만발했다. '이번에는 영국도 자기 땅에서 전쟁을 경험해야 한다'는 소망이 자주 표출되었다. 독일인들이 선전부가 내보내던 독일군 발표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친위대 정보국이 전황 발표를 외국 라디오 청취에 대한 완벽한 해독제로 간주할 정도였다. 괴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언론에 히틀러가 전체 작전을 개별적인 세부 행동까지 계획했다고 밝혔다. 문제는 딱 하나뿐이었다. 서부 독일의 여러 도시에 적군 공군기들의 폭격 경보가 계속 울렸고, 그것은 적에게 보복하라는 요구를 자극했다."(150-1)


"독일 방송기자와 카메라맨들은 벨기에와 프랑스 전쟁 뉴스영화를 연속해서 제작했다. 독일 관객들은 영상에서 본 프랑스군의 서아프리카 병사들에게서 호러와 역겨움을 느꼈다.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이 저런 짐승들을 우리에게 풀어놓다니 악마가 그들을 데려가리!' '저들은 문명화된 민족의 수치다. 영국과 프랑스를 영원히 타락시킨 것이 바로 저것이다!' 전형적인 외침들이었다. 라이헨베르크의 여자들은 '유색' 얼굴을 보고 무서움에 마비되는 듯했다고, 스크린에 독일군 병사들이 다시 나타났을 때야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독일군은 흑인 병사들에 대한 보복작전과 병행해서 프랑스군이 1923년에 독일 라인란트를 점령했을 때 식민지 흑인 부대가 독일 여성들을 얼마나 성적으로 착취했는지 끊임없이 상기시켰고, 독일군의 폭력을 그 기억에 대한 보상인 듯이 선전했다. 독일군이 2차대전에서 비교적 '깨끗하게' 행동했던 서부전선에서도 그들의 인종주의적 폭력만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153, 158-9)


"독일 학생들은 1920년대 내내 프랑스를 '세습적인 적'으로 간주하라고 배웠다. 그런데 이제 독일이 그 적을 신화 속의 괴물처럼 제압한 것이다." "관객들은 뉴스 영상 속에서 히틀러가 나라 전체의 우레 같은 박수와 '하일 히틀러' 인사로 환영받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히틀러가 장군들과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서 경외의 침묵 속에 마음을 가라앉혔고, 히틀러가 전선 근처에서 차를 타고 포로들 무리를 지나가는 장면에서는 그의 안전을 걱정했으며, 히틀러가 차 안으로 들어가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독일인들은 영국이 아직 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었고 또 물자 부족과 '거물들'의 착복을─잠깐─잊었다. 그들의 희열은 '그the 지도자'에게 꽂혔다. 이제 그들은 새로 찍은 히틀러의 사진을 얻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그의 어록에 대하여 애지중지 토론했다. 1930년대 초 나치 돌격대와 공산주의자들 간의 가투가 그렇게나 자주 벌어지던 터프한 노동계급 구역들도 마침내 항복했다."(159-60)


"(독일인들이 보기에) 세계제국 영국은 나치가 독일을 그렇게 되도록 만들기 원하는 나라였다. '인류'를 방어하고 있다는 영국의 주장을 '위선'과 '거짓'으로 역공하는 작업은 나치의 기이한 반제국주의를 낳았다. 장대한 서사 영화 〈옴 크뤼거〉는 보어전쟁을 아프리카인의 시각에서 이야기한다. 영화는 독일이 런던을 비롯한 영국 항구들을 여전히 공습하던 1941년 4월에 개봉되어 최고의 박스오피스를 기록한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영화는 보어인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수용했던 강제수용소에서 절정에 달한다. 쫓기던 한 남자가 수용소 가시철망 너머의 아내와 대화하자, 난폭한 수용소장─윈스턴 처칠과 똑 닮은 소장─이 그 남자를 체포하여 수용소의 모든 여자들과 아이들 앞에서 목매달아 죽인다. 여자들과 아이들의 아우성이 높아지자 소장은 군부대를 동원하여 발포한다. 그것은 나치 독일이 보여준 유일한 수용소 학살 장면이었다. 독일 관객들은 보어인 희생자들에게 공감했다."(181)


제5장 승자와 패자 


"'집'과 '전선'을 오가던 편지는 진통제였다. 남편과 아내는 자신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쓰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 핵심이었다. 편지의 역할은 모든 것이 온전하다는 것, 아무것도 변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성교는 포르노 음화와 비슷하게 생생하게 그려졌다. 따라서 공간적 분리는 불안과 질투를 일으켰다. 남자든 여자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성적 억제의 문화에 젖어서 성교에 관하여 쓰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성적 부정不貞에 대한 공포만큼은 적나라하게 표출했다." "사실 매춘은 정복자 독일 병사가 유럽을 가로지른 모든 곳에 함께 있었다. 독일 야전사령부는 병사들이 '타락한' 프랑스 여성으로부터 성병이 감염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독일군 병사들이 하녀, 청소부, 세탁부, 웨이트리스, 바 여종업원, 미용사, 집 여주인, 목욕탕 여종업원, 속기사, 점원, 여타의 아는 여성들과 성적 모험을 벌이고 그래서 프랑스 당국이 이를 억제하려 하면, 독일군 당국은 불쾌하게 반응했다."(188-9)


"나치 독일은 소비재가 현저히 부족했다. 국내총생산의 20%가 군수에 할당되었고, 그 비율은 곧 1/3로 증가했다. 국내 수요의 억제는 높은 저축률로 이어졌고, 국민들의 예금은 정부의 규제적 관리에 의하여 조용히 전쟁 준비로 돌려졌다. 나치 정부는 그 덕분에 1차대전의 특징이었던, 국민들에게 전쟁채권의 구입을 호소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독일 소비자 입장에서 1940년은 마법처럼 노다지를 줍던 해였다. 독일의 마르크화가 독일군이 점령한 모든 나라에서 고의로 절상되었다. 자연스럽게 독일군 병사들에게 물건값이 내려갔다. 그래서 독일 가족이 국내에서 살 수 없던 물건들을 주둔지에서 마음껏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1940년 10월 헤르만 괴링이 독일군 병사, 그리하여 독일 소비자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가 '모피, 보석, 카펫, 비단, 사치품' 구입에 대한 제한 조치를 해제한 것이다. 괴링은 승리한 점령군 부대의 병사들은 해당 지역의 민간인들과 똑같은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선언했다."(195-6)


"바르텔란트는 식민 사업, 즉 '재-게르만화'의 모델 지역이었다. 모두 61만 9천 명의 폴란드인이 한스 프랑크가 지배하는 '총독령 폴란드'로 '재이주'되었다. 독일인들이 이주해오도록 공간을 비워놓기 위해서였다. 그 폴란드인들 중에서 약 43만 5천 명이 바르텔란트 출신이었다." "바르텔란트에서 스물여덟 살의 리젤로테에게 깊은 인상을 준 사람들은 제국노동봉사단 의무의 일환으로 이주민들을 돕기 위해서 독일에서 온 소녀들과 여대생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소녀들은 폴란드인 농장에서 폴란드인들을 어렵게 끌어내고 짐을 싸도록 하는 일을 도왔다. 노동봉사대 소속의 열여덟 살 소녀들은 번번히 친위대 남성들 옆에 그들과 동수同數로 배치되어 이주 작전에 투입되었다. 일부는 기차역에서 독일인 이주민을 환영했고, 다른 일부는 친위대원들이 폴란드인들을 끌어내는 것을 보조했으며, 폴란드 여성들을 감시하여 그들이 새로 들어올 독일인들을 위하여 자기 집을 말끔하게 청소하고 떠나게 했다."(201-3)


제3부 1812년의 그림자: 1941년 여름~1942년 3월


제6장 독일의 십자군 전쟁 


"1941년 6월 23일 월요일 친위대 정보국은 전국 어디서나 독일인들이 소련전에 대하여 보인 첫 반응은 '완전한 경악'이었다고 기록했다. 스탈린과의 전쟁이 바로 그 시점에 발발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두 나라 간에 새로운 합의가 이루어졌고, 조만간 스탈린이 베를린을 방문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새로운 현실에 놀랄 만큼 빠르게 적응했다. 전쟁이 선언된 첫날 오후와 저녁의 많은 보고서들은 '사람들이 정부가 러시아의 '배반 행위'에 대하여 군사력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대응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강조했다. 일부는 동부에서의 전쟁이 영국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미국의 개입을 불러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특히 여자들은 독일인 병사들의 목숨을 걱정했고, 독일 전쟁포로들이 소련의 '아시아적 방법들'로 고통받을 것을 강조했다."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전쟁은 삼가는 투로 지지했던 많은 가톨릭 주교들은, 소련 침공을 '신을 모르는 볼셰비즘'에 대한 '십자군 전쟁'으로 축성했다."(241-3)


"로베르트는 전쟁을 증오했다. 그가 마리아에게 보낸 편지에는 동료들이 민간에 불을 지른 것과 포로들을 학살한 것이 적혀 있지 않다. 그는 일기에는 그 일들을 적어놓았다." "그러나 전쟁을 혐오하면 할수록 이번에는 정말 끝장을 보아야 한다는 확신이 굳어졌다. 그는 두 살배기 아들이 러시아에서 싸우는 세번째 세대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라이니가 내가 지금 있는 이곳에 와야 하는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면 안 돼!' 로베르트는 마리아에게 썼다." "그는 '온 세상의 모든 사랑을 품고 있는 그들의 초월적인 사랑'이 자신을 보호한다고 마리아를 안심시켰다. 그 끔찍한 전쟁 행위는 로베르트 R과 같은 남자들을 불안케 하는 동시에 전쟁에 대한 헌신을 강화했다. 이번에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 병사들과 가족들은 자신을 나치 정권이 아니라 전쟁과 동일시했다. 세대를 넘어서는 책임과 동일시했다. 그것이 그들이 갖고 있던 애국주의의 가장 강력한 토대였다."(265-6)


"독일군의 키이우 봉쇄는 독일 농업식량부 차관 헤르베르트 바케가 소련전의 일부로 1940년 12월에 고안해놓은 '기아 계획'의 일부였다. 바케는 우크라이나 남부의 비옥한 '흑토'에서 생산된 엄청난 곡물을 독일로 보내기 위하여 우크라이나의 북부와 도시들을 모두 아사시킬 작정이었다. 그 계획은 소련 침공이 시작되기 7주일 전인 1941년 5월 2일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계획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그 나라에서 반출하면 수천만 명이 아사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1941년 8월 30일 러시아혁명의 요람이요 소련의 제2도시인 레닌그라드로 가는 마지막 철로가 므라에서 끊겼다." "제18군 병참부가 상부에게 레닌그라드가 항복하면 군대의 식량을 그 도시를 먹이는 데 사용해도 되는지 가이드라인을 요청했다. 독일군 병참사령관 에두아르드 바그너가 단호하게 안 된다고 답했다. '조국에서 출발하는 모든 차량의 식량은 그만큼 조국의 식량을 줄인 것입니다. 러시아인들은 굶어죽는 것이 낫습니다.'"(272-4)


제7장 첫 패배 


"겨울철 후퇴는 동부전선 독일군을 공통의 문화에 묶었다. 바로 대량 학살의 문화였다." "히틀러가 1941년 12월 21일 독일군에게 '초토화' 작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내리기 전에 이미 초토화는 후퇴하는 독일군의 공통된 행동이었다." "독일군은 생사의 위기를 맞이하여 극단적 폭력의 영구화로 대응했다. 병사가 독일제국 어느 지역에서 충원되었든, 그들이 몸담았던 민간 환경이 나치즘에 적대적이었든 우호적이었든, 차이가 없었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고르게 섞인 루르 노동계급 출신의 제253보병사단은 농촌 출신들이 징집된, 좀더 나치화된 사단들과 똑같은 변화 과정을 겪었다. 후퇴는 분노와 공포를 뒤섞고 또 강화했다. 자신의 차량과 총과 중장비들이 파괴되고 그토록 어렵게 점령했던 영토를 포기해야 하는 것에 대한 분노, 겨울에 훨씬 유연하게 대응하는 소련군의 능력에 대한 충격, 후퇴할 안전한 전선을 보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공포가 그들의 폭력 원칙을 강화했다."(303-5)


"안톤 브란트후버의 가족들이 그의 탈영을 지지하지 않은 것은 2차대전에 독일군 병사들의 탈영이 대량으로 발생하지 않은 것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2차대전에 동맹국 군대에서 탈영이 대량으로 발생한 예들, 1943년의 이탈리아 병사들, 독일에 병합된 폴란드와 룩셈부르크와 알자스에서 징집된 병사들, 그리고 1943~1944년 보스니아 무장 친위대 병사들의 탈영은 모두 그곳의 시민사회가 탈영한 병사들을 흡수하고 숨겨주고, 그래서 군 당국을 상대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든 곳들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심장부에서는 전쟁의 마지막 몇 주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탈영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나치 테러 기구가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기관들이 비교적 고립된 개인들을 타깃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충성심과 애국심은 나치 정권이 부과하던 외적인 요구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일 시민사회의 모든 층위에서 반복되고, 부모와 아내와 연인의 강력한 1차적 호소에서 되풀이된 격률이었다."(313)


"전선과 고향집의 엄청난 생활 격차는 가족 간의 감정적 결속을 해치지 않았다. 정반대로 집은 그 모든 특권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문제들과 씨름하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집은 전선의 삶을 견뎌내도록 해주었다. 헬무트의 어머니는 하녀 없이 겨우내 집안일을 꾸려야 했을 때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럴 때는 러시아에 있는 너를 생각하고, 인간이 해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한단다. 나는 이 멋지고 따뜻한 집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는 거잖니.' 그녀의 조카 라인하르트가 얇은 얾은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빠졌을 때, 그녀는 전선의 아들과 동료들은 '물에 잠기고도 불을 쬘 수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헬무트가 2층 부엌에 만들어놓은 화학 실험실이 라인하르트와 그의 어린 아들 루돌프에 의해 엉망이 된 사고에 대하여 쓴 편지는 그 어떤 애국주의 선전보다도 고향과 집에 대한 헬무트의 감정적 결속을 굳게 해주었다. 헬무트 파울루스는 그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는 병사였다."(320)


제4부 교착상태: 1942년 초~1943년 3월


제8장 비밀의 공유 


"유대인에 대한 조치들 중에서 최초의 가장 극적인 조치는 1941년 9월 1일의 명령, 즉 다섯 살 이상의 모든 유대인에게 겉옷 왼쪽 가슴에 노란색 '다윗의 별'을 부착하도록 한 명령이었다." "유대인의 별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인 혈통들이 미국에서 하켄크로이츠 배지를 달아야 한다는 루머는 두 나라가 전쟁에 돌입하기 전에 나타났다." "독일인들이 미국의 독일인 혈통들은 겉옷에 하켄크로이츠를 달도록 강요되었다고 상상하기 시작하자, 독일에서 유대인들에게 가해진 조치들이 그리 독특하게 보이지 않았다. 독일인들의 생각으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는 진작부터 진행되어온 것이기도 했다." "1941년 가을 독일인들은 (워싱턴과 런던의 유력한 권력자들인) 유대인들이 어떻게 독일에 대한 보복을 지휘하고 있는지 상상하고 있었다. 그 보복이란 것이 아직 실행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상상하고 있었다. 다윗의 별이 도입되고 3개월 만에 독일은 미국과 공식 전쟁에 돌입한다."(339-42)


"슈바벤의 농촌 마을로부터 한때 좌파적이었던 함부르크에 이르기까지, 독일인들은 이송 유대인들이 남긴 재산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로비했고 경매에도 참여했다. 1941년부터 1945년 사이에 함부르크에서만 유대인 가구와 가사도구 최소 3만 점이 경매장의 망치 소리와 함께 판매되었다. 가구 한 점당 응찰자가 족히 10명은 됐다. 함부르크 베델 구의 독일인 노동계급 부녀자들은 커피, 보석류, 고가구, 카펫을 사들였고, 그 일부를 되팔기도 했다. 게슈타포가 유대인 재산을 판매하여 도이체방크 계좌에 입금한 액수는 1943년 초까지 720만 마르크에 달했다. 독일 여성들이 구입한 모피 코트에는 원소유자의 이름표가 달려 있었다. 같은 지역 출신이었기에 원소유자가 누구인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언론은 경매를 공고하면서 판매대에 오른 물건이 유대인의 물건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남긴 주택은 지역 나치 기관원 혹은 아직은 소수였던 폭격 맞은 독일인 가족들에게 보상으로 주어졌다."(346-7)


"1941년 가을 괴벨스가 '민족동지들'에게 유대인의 낙인과 이송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도록 만들고자 할 때, 그는 그 문제가 공적인 이슈로 전환되면 미디어가 토론과 반대의 공간을 창출하게 된다는 점을 인식했다. 괴벨스의 해법은 반유대인 캠페인의 톤을 낮추는 것이었다." "토론보다는 풍문과 암시를 통하여 인민이 학살을 묵인하도록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마저 침묵하자,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 어떤 명시적이고 공적인 도덕적 추론이 봉쇄되었다." "유대인의 경우에는 임박한 죽음이 전쟁의 나머지 모든 측면에 대한 이해를 규정했다. 독일인들의 경우에는 전쟁이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응을 규정했다. 저널리스트 파울하인츠 반첸은 유대인들에 대한 태도가 경화된 것을 1941~1942년 겨울 동부전선을 집어삼킨 위기 탓으로 돌렸다. 그들을 분리한 것은 사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관점이었고, 그 관점은 권력의 막대한 비대칭성─그리고 공감의 비대칭성을 특징으로 했다."(367-9)


제9장 유럽의 약탈 


"1941~1942년 가을에 바케가 구상한 정복지 약탈 계획은 독일 민간인들을 결핍에서 구해내지 못했다. 1942년 4월 6일 배급량이 심하게, 그것도 모든 범주에서 삭감되었다. 나치 지도부는 1916~1917년의 '순무의 겨울'과 1918년 '등에 칼을 맞은 것'을 직선으로 결합했기에, 식량 부족은 그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위기였다." "농민들이 그들의 생산 할당량을 충족시키고 또 암시장에서 거래할 잉여를 충분히 생산했다는 사실은, 농업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농민들의 인센티브를 강화해야 한다는 친위대 정보국의 주장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농업식품부는 그 전략을 거부했다. 그들은 고정된 가격과 할당 쿼터를 1차대전에 난무했던 인플레이션과 도시의 기근을 피할 수 있는 보장책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경찰과 법원은 농촌에 광범하게 나타난 온건한 암시장을 용인하면서 작은 불법 경제를 묵인했고, 그렇게 용인된 불법 경제가 공식 할당량을 충족시키는 한 그것은 증산을 자극하는 인센티브가 되었다."(399, 407)


"한 경제사가는 나치 독일이 강제수용소 재소자들 중에서 노동에 투입할 노동자들을 지속적으로 '선별'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기아 배급만 제공한 것을 두고 그 원리를 '스톡이 아닌 플로우'로 정리했다. 노동력을 저장하지 않고 일정 기간 투입한 뒤 버리는 양상을 개념화한 것이다. 1942년에 시작된 배급 위기에서 그 원리가 전쟁포로와 외국인 '자원' 노동자를 가리지 않고 동유럽 출신의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었다. 사망자가 엄청나게 발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노동자를 보다 경제적인 방식으로 선별하고 노동력 소모를 합리화하는 방법이 고안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고지 슐레지엔 석탄그룹 의장 귄터 팔켄한은 자신이 소유한 프슈치나광산의 '동유럽' 노동자들에게 '수행 능력에 따른 배급' 체계를 도입했다. 기준에 못 미치는 노동자의 음식을 빼앗아 기준을 초과한 노동자에게 먹였던 것이다. 사회적 다윈주의의 그 식인 판본이 슐레지엔 광산 지대 전체로 확산되었고, 점차 독일 군수산업의 표준이 되어갔다."(421-2)


제10장 전사자에게 쓰는 편지 


"소련군의 포위망이 좁혀지면서 스탈린그라드 소식은 독일에 갈수록 적게 전해졌다. 예컨대 1943년 1월 10일에 독일군은 단지 '지역적인 기습 공격들'만 보도했다. 그러다가 나흘 뒤에 갑자기 '스탈린그라드 지역에서 벌어진 영웅적인 치열한 전투'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괴벨스는 제6군이 소련군과 대결함으로써 코카서스의 독일 군부대들을 보호했다면서, 그들의 영웅주의와 희생을 찬양했다. 보도의 색깔이 바뀐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괴벨스는 패배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히틀러를 설득하여 '영웅적 서사'를 준비했던 것이다. 1943년 1월 30일 나치 집권 1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기념 연설에서 괴링은 제6군 병사들을 독일사 속의 영웅들, 전설 속의 니벨룽겐과 동고트족으로 시작하여 1914년에 랑게마르크에서 싸웠던 대학생 자원병들, 그리고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페르시아의 '인간떼'에 맞선 스파르타의 300 전사들과 연결시켰다. 괴링의 연설은 (계승된 전통인) 영웅적 죽음 숭배의 절정이었다."(467-8)


"그러나 괴벨스와 괴링이 조심스럽게 제작해낸 '영웅 서사'는 전례 없는 파탄을 초래했다. 독일인들은 그 막대한 패배를 받아들일 감정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뉘른베르크처럼 많은 자식이 스탈린그라드에 가 있던 도시들은 거의 발작했다. 사람들은 히틀러가 1942년 11월 8일의 연설에서 스탈린그라드가 사실상 정복되었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던 것을 기억했다. 독일 전역에서 사람들이 극심한 충격과 슬픔과 분노를 터뜨렸다." "다만 사람들은 아직도 그 패배의 전략적 의미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 독일인들에게는 제6군 전체가 망실된 그 패배가 하찮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일부에게는 전쟁이 이제 결정적으로 독일에 불리한 전쟁으로 전환된 것으로 보였다. 괴벨스는 김나지움 교육을 받은 이상주의적인 청소년들에게 호소력을 지닌 언어가 국민 전체에게는 생생한 신화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탈린그라드는 나치 정권이 신화화한 최초의 패배요 마지막 패배였다."(471-2)


제5부 독일에 도착한 전쟁: 1943년 3월~1944년 여름


제11장 폭격과 복수 


"1943년 당시 독일인들을 지배한 것은 나치 지도부에 대한 격렬한 적대감이 아니었다. 그해 봄에 도르트문트와 에센을 순방했을 때 괴벨스는 군수 노동자들에게 영국군 공습에 '복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강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강당이 떠나가도록 박수쳤다. 그들이 표출한 것은 나치에게 적대감이라기보다는 공습의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는 소망이었다. 사람들은 낙관적인 순간에는 영국에게 이자를 더해서 복수하는 것을 상상했고, 비관적인 순간에는 폭탄이 어디든 다른 곳에 떨어지기를 소원했다. 스위스 영사에 따르면, 1943년 3월 초 베를린이 최대의 폭격을 당하자 쾰른 사람들은 그 소식에서 '안도감과 심지어 기쁨'을 느꼈다." "1943년 6월 5일 괴벨스는 베를린 스포츠궁전 연설에서 영국인들에게 가혹한 복수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언론이 가공할 만한 신무기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고, 괴벨스의 약속은 전쟁의 나머지 기간 내내 독일인들의 희망을 조율하는 핵심축이 되었다. '복수의 시간은 올 것이다!'"(495-6)


"그러나 물리적 쇼크에 이어 심리적 쇼크가 닥치자 비타협적인 전투 언어를 수용하려는 사람이 크게 감소했다. 스위스 영사 프란츠-루돌프 폰 바이스는 전반적인 분위기를 '깊은 무기력, 일반화된 무관심, 평화에 대한 소망'으로 정리했다." "라인과 루르의 도시민들은 아직도 괴벨스가 약속했던 처절한 복수에 대하여 말은 했지만 1943년 5월과 6월에 가졌던 희망과 기대는 더이상 없었다. 적어도 쾰른시 주민들은 복수가 그들을 구해줄 것이라고 더는 믿지 않았다. 도르트문트, 보훔, 하겐 같은 도시의 주민들의 공포는 정점에 달했다. 그들 역시 복수가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거의 믿지 않았다." "가톨릭 주교들이 사람들의 복수 강박을 밀어낼 수 없던 것과 똑같이, 독일인들의 공포와 무기력을 집단적인 저항 의지로 변모시키려던 나치당의 노력도 헛수고였다." "영국과 독일 중에서 누가 먼저 민간인을 폭격했느냐는 1940년의 논란은 이미 과거였다. 긴급한 문제는 독일이 폭격에 대항할 힘이 있느냐의 여부였다."(504-6)


"사람들은 누누이 폭격을 1938년 11월의 포그롬과 연결했다. 동유럽 유대인의 대량 학살에 관한 루머로 흠뻑 젖어 있던 사회로서는 이상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포그롬은 많은 사람이 직접 목격하고 독일 전역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유대인에 대한 마지막 공격이었다. 이제 일부 장소에 그 포그롬과 폭격의 직접적인 결합이 가시화되기도 했다. 그때까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독일의 책임과 죄악을 인정하는 모습이 1943년 늦여름과 가을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 양상은 폭격을 맞지 않은 지역으로도 확산되었다." "재앙과도 같은 공중전의 패배가 독일이 복수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한 달 전 희망을 '유대인의 복수'에 대한 공포로 전환시킨 것이다. 독일 전체에서 그렇게 유대인의 복수에 대하여 말하면서 독일인들은 그때까지 절반쯤 숨겨져 있던 어떤 것을 무심결에 드러냈다. 유대인의 절멸에 대한 나치의 추상적인 언어가 글자 그대로 실행되었다는 것을 독일인 대중도 알고 있었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527-8)


제12장 버티기 


"피란민을 '보내는 지역'과 '받는 지역' 사이에 '유기적인 연대'가 부족했던 것은 나치의 '민족공동체' 이상과 어긋나는 문제만이 아니었다. 전쟁중에 제기된 대부분의 사회적 항의는 당국을 직접 겨냥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체로 당국이 개입하여 그들이 보기에 부당하게 처신하고 있는 다른 범주의 '민족동지들'을 제자리에 놓아주기를 원했다." "독일인들은 진정, 불평, 밀고를 통하여 당국을 내부의 갈등 안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국가가 '공정한' 해법을 부과하기를 기대했다. 그들의 그러한 행동 패턴이 나치의 '민족공동체' 주장에 일정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사실이다. 민족공동체 이념이 개인적인 주장을 펼칠 틀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나치 선전의 웅장한 주장은 공허하게 울리고 있었지만, 가족적 결속, 교회 회중, 전문인 네트워크, 우정은 여전히 작동했다. 공동주택, 교외, 촌락에 기초한 커뮤니티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의존할 수 있는 직접적인 일상의 커뮤니티를 더욱 의식했다."(565-6)


"1944년 봄이 되자 함부르크 폭격 이후의 쇼크와 패닉은 사라졌다. 폭격과 유대인 정책의 상호적 가속화를 역전시키고자 하는 소망, 유대인 학살을 없었던 일로 만들면 폭격은 멈추리라는 소망도 사라졌다. 폭격이 12달 동안 지속되자, 공습은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사실이 되었고 폭격의 '유대적인' 성격은 공식이 되었다." "히페리온의 '운명의 노래'를 듣거나 윙거를 읽는 것은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해주었고 몽상 속으로 물러나게 해주었다. 그곳에서 독자들은─잠시─내려놓고 자신만의 내적인 도덕적 힘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그렇듯 전쟁의 현실을 서정적인 추상과 문학 정전의 베일 뒤에 숨기는 것은 '비정치적인 독일인들'이 나치 글쟁이들의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를 재주조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독일인들이 전쟁으로 인하여 직접적인 도덕적·정치적 선택들과 대면하도록 할 가능성도 봉쇄했다. 그들은 그 선택과 대면하는 대신 문화유산을 헤집으면서 그 부담을 감당하고자 했다."(580-2)


제13장 빌린 시간 


"독일군은 후퇴하면서 모든 것을 불태웠다. 귀중한 시간과 폭탄을 파괴 작업에 아낌없이 투입했다. 후퇴하는 독일군을 방어하는 임무에 투입된 빌리 레제는 '죄의식으로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1942~1943년의 파괴 작업을 훨씬 능가하는 초토화 작전에 몸서리를 쳤다. 레제는 촌락과 도시가 '불과 연기의 폐허 사막'으로 무인지대로 바뀌는 것을 볼 때마다 술을 퍼마셨다. 그러나 동시에 레제는 썼다. 한밤중에 불타는 마을들의 선線이 '신비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나의 오랜 취향은 역설, 그래서 나는 전쟁을 미학적 문제라고 칭했다.' 병사들은 마을에서는 식량을 약탈하고 독일인 상점에서는 그곳에 반입된 새로운 군복과 술과 담배를 빼앗았다. 그들은 후퇴 작전을 먹고 마시는 광란의 잔치로 만들었다. 병사들은 '전쟁과 평화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연설'을 하고, 멜랑콜리에 젖어 향수를 말하고, 연애를 걱정했다. 레제와 병사들은 우마차 트럭을 타고 고멜을 향하여 서쪽으로 가는 동안 트럭에서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584)


"1944년 봄은 비교적 조용했다. 1년여 만에 처음으로 폭격이 전쟁과 관련된 대화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폭격의 자리는 적의 침공에 대한 예측이 차지했다. 독일인들의 기대는 높았다. 공격의 시간과 장소는 연합군이 정하겠지만, 그들은 결국 바다로 밀려날 것이요, 그러면 연합군이 1944년에 또 한번의 유럽 침공을 감핼할 수는 없으리라. 연합군의 침공은 오히려 독일이 전쟁의 주도권을 다시 확보하여 형세를 역전시킬 가장 확실한 기회가 될 것이다. 연합군이 유럽 대륙으로 '유인'되기만 하면, 영국군과 미군은 1940년에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패배했던 똑같은 장소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독일 도시의 폭격에 대한 적절한 응답일 것이다. 1944년의 가장 큰 불안은 연합군이 미끼를 물지 않고 장기적인 소모전을 지속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영불해협에서 벌어질 다가오는 대결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의 이면은 무제한 지속되는 공중 공격을 버텨낼 능력에 대한 불편한 비관이었던 것이다."(585)


제6부 완전한 패배: 1944년 여름~1945년 5월


제14장 참호가 된 나라 


"베를린-첼렌도르프에 사는 페터 스퇼텐의 아버지는 '발키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자신이 받은 충격을 아들에게 간결하게 표현했다. '어떻게 그들은 그렇게 전선을 위태롭게 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일기에 자신의 생각을 보다 길게 적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이미 패배했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구해낼 수 있는 것, 구해낼 수 있는 듯 보이는 것을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그런 일은 ······ 오직 내전과 지적 분열로 이어질 수 있을 뿐이고 등에 칼을 맞았다는 또하나의 전설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뉘른베르크로부터 올라온 친위대 정보국 보고서에 따르면 나치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오직 지도자만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으며, 그의 죽음은 카오스와 내전을 일으킬 뿐'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쾨닉스베르크와 베를린의 길거리와 상점에서 여자들은 히틀러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하나님, 지도자를 살려주시어 감사합니다'가 전형적인 안도의 표현이었다."(627-8)


"졸링겐 고등학교 교사 출신의 퇴퍼빈은 유대인 학살을 혐오했지만, 다른 많은 보수적 개신교들과 마찬가지로 (서유럽 민주주의를 부패시킨) '세계 유대인'을 독일의 적에 포함시켰다. 더욱이 퇴퍼빈은 많은 고위 독일군 사령관들과 한 가지 근본적인 신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모든 1차대전 퇴역군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1918년의 혁명적 해체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1944년 10월에 독일군의 최전선이 다시 안정되자, 그는 일기에 자랑스럽게 적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봉기의 기미는 아직 멀다!' 퇴퍼빈은 전쟁 내내 히틀러의 지도력에 의심을 표출했지만 1944년 11월 초 그는 자인했다. '히틀러가 인민이 기도하던 신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지면 분명해질수록 나는 그를 지지해야 한다고 느낀다.' 독일의 대의에 대한 인민의 충성을 우려할수록 그는 오히려 히틀러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히틀러가 메시아적 구세주가 아닐 수는 있다 그러나 다른 누가 독일을 구할 것인가."(635)


"히틀러에 대한 독일인 개개인의 믿음은 1930년대는 물론 1940년대에도 그의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를 공유하느냐, 혹은 전쟁은 위대한 민족의 정신적 필연성이라는 그의 전쟁관을 공유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았다. 정반대로 나치즘이 가장 성공적이고 인민적일 때는 평화와 번영과 손쉬운 승리를 약속할 때였다. 독일인들로 하여금 '승리 아니면 절멸'이라는 히틀러의 종말론적 관점을 공유하도록 만들었던 것은 1943년의 폭격과 1944년의 패배였다. 독일인들이 자신이 민족을 방어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던 1944년 가을에 동료들에 대한 밀고가 정점에 달했고, 나치당에 입당하려는 한바탕 소동도 작게나마 일어났다. 비록 나치당 지도자들이 과거보다 더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들이 조국전선의 방어에 실패한 것에 자극받은 일반인들이 스스로 주도권을 발휘했다. 자신을 나치로 간주하지 않던 그 많은 사람들에게 나치 윤리의 도덕적 폭력성을 주입한 것은 나치 정권의 성공이 아닌 실패였다."(641)


제15장 붕괴 


"1944년 가을에 다시 한번 고조되었던 독일인들의 민족적 연대는 연합군의 공격력 앞에서 산산조각났다. 나라의 붕괴는 '지역적' 충성심을 강화했다. 그것은 보다 큰 '공동체적 운명'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빼앗아갔다." "연합군이 지역별로 독일에 입성한 것이 가족과 향토Heimat를 나라Reich와 국민Volk보다 상위에 놓는 것을 완성했다." "자기희생과 민족적 연대의 구호가 최종적으로 소진되었다. 독일 민족국가는 독일에 진입한 4대 강국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전쟁 마지막 기간의 자기 해체에 의해서도 파괴되었다. 물론 패전은 독일의 민족주의를 파괴하지 않았다. 배타적인 증오심은 그리 쉽게 삭제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의 긍정적 의미, 민족적 대의에 사회적인 노력을 동원하고 자기희생을 촉발하는 능력은 소멸되었다. 루르의 노동자들이 1943년에 폭탄이 자기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떨어지기를 바랐던 것처럼, 1945년 1월에 전쟁이 독일 안으로 들어오자 모두가 각자 알아서 전쟁을 피하려 했다."(667-8)


"국제 여론, 특히 영국과 미국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던 독일 선전부의 시도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아이젠하워 사령부에서 열린 언론 브리핑에서 저널리스트들은 드레스덴이 '테러 폭격'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단어는 영국과 미국이 공적으로 한사코 거부하던 용어였다─처칠은 사석에서는 그 단어를 사용했다. 영국 언론은 그 말실수를 보도하지 말라는 당국의 요구에 따랐다. 그러나 미국의 AP통신이 보도했고, 그 보도는 '광역 폭격'의 윤리성 논쟁을 촉발했다. 1945년 3월 6일에는 노동당 의원 리터드 스콕스가 자신이 개별적으로 확보한 드레스덴 정보를 하원 질의에서 늘어놓았다. 그렇게 하여 독일 선전부의 선전이 공식 기록에 올랐다. 1945년 3월 28일 처칠이 공공의 압력에 굴복하여 독일 도시에 대한 폭격을 중단시켰다. 폭격 외에는 영국이 독일에 대항할 효과적인 무기가 전무하던 과거에는 영국 폭격사령부의 영웅주의가 찬사를 받았다. 이제 지배적인 것은 윤리적 선을 넘었다는 불편한 감정이었다."(689-90)


제16장 종말 


"방어할 것이 적어질수록 명령은 가혹해졌다. 카이텔, 보어만, 힘러는 군대, 당직자, 친위대에게 모든 구역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항복하자는 모든 제안을 거부했다. 힘러는 자국민에게는 집단적 보복을 가하지 않는다는 과거의 원칙을 버렸다. 그는 친위대에게 '백기를 걸어놓은 집'의 모든 남자를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서부에서는 독일군이 마인강과 도나우강으로 철수함에 따라, 도시와 마을의 운명이 각 지역의 사정에 따라 결정되었다. 운명은 군사령관, 나치당 지도자, 여타의 공무원들, 때로는 지역민들이 누구냐에 따라 달랐다. 뷔르템베르크의 슈배비쉬 그뮌트에서는 미군이 1945년 4월 20일에 진입하기 직전에 나치당 지도자와 군사령관이 남자 두 명을 처형했다. 인근 슈투트가르트에서는 명사들이 뷔르템베르크 나치 지구당위원장을 우회하여 시장을 설득하였고, 그에 따라 슈투트가르트 시장이 독일군 부대와 비밀협상을 벌인 끝에 도시를 미군에게 평화적으로 넘겨주었다."(734-5)


"5월 18일 클렘퍼러 부부는 빅토르의 유대인의 별과 유대인 신분증, 그리고 그가 박해받은 유명 교수라는 지역 미군 당국의 보증서를 지니고 운터베른바흐를 떠났다. 그들은 지나가는 차를 얻어타고 뮌헨 교외까지 갔다. 뮌헨의 모든 것이 6주일 전보다 혼란스러웠다. 토요일 오후 천둥 치는 회색 하늘을 배경으로 도시의 흰색 파편들이 마치 최후심판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잠잘 곳과 음식을 찾으며 걸었고, 새로운 국경을 넘어서 소련 점령지구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들은 드레스덴 외곽의 집과 빅토르의 교수직을 되찾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을 뚫고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빅토르는 자신에게 남아 있는 민주주의를 희미하게 의식하면서, 해방이 패전과 얼마나 비슷하게 느껴지는지 쓰라리게 성찰했다. '신기한 내면의 갈등. 나는 제3제국의 행동대원들에 대한 신의 복수가 기쁘다. ······ 그러나 승자와 복수자들이 자기들이 지옥처럼 파괴해놓은 도시를 휘젓고 다니는 모습이 끔찍하다.'"(751-2)


에필로그: 심연을 건너서 


"친위대 정보국은 1945년 3월 말에 작성한 마지막 보고서에서 패배주의가 어느 정도 확산되었는지 점검했다. 정보국이 발견한 것은 나치가 늘 두려워하던 혁명적 경향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긋나버린 신뢰에 대한 깊은 실망, 비탄과 낙담과 원한과 분노의 감정, 특히 전쟁에서 희생과 노동 외에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들의 울분'이었다. 독일인들의 첫번째 반응은 반역이기보다 자기연민이었다. 사람들이 자주 입에 올리던 경구는 '우리는 이런 재앙에 끌려들어갈 그런 사람이 아니다'였다. 그러한 정서는 반反나치라기보다 자기정당화다.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전쟁의 과정에 대한 모든 책임에서 자신을 면제시켰고', '전쟁과 정치에 대하여 책임질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죄'의 문제는 최악의 재앙을 이끈 자들에게 전가되었다. 괴벨스가 〈제국〉의 논설들에서 전쟁의 모든 위기에도 불구하고 나치 지도부를 믿어달라고 요구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민족의 패배에 대한 책임이 어디 있는지는 명확했다."(754)


"1945년에 들어서조차 독일인들은 그들의 죄를 전혀 다른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하나는 패전의 책임에 관한 것, 즉 독일의 '재앙'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독일의 '민족공동체' 내부의 자기연민의 말들로서, 바로 친위대 정보국이 전쟁 마지막 몇 주일 동안 탐지해낸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독일의 전쟁범죄에 대한 도덕적 결산의 문제로서, 그것은 승리한 연합군이 자신들에게 강요하리라고 예상했던 것이었다." "점령 당국이 추진한 '재교육'에 어떤 입장을 취했건 무관하게, 제3제국의 후계 국가인 서독, 동독, 오스트리아가 1949년에 창설되었을 때 그 모든 나라에서 독일이 희생자였다는 감정이 독일에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을 압도했다. 죽음, 실향, 추방, 기아는 많은 독일 민간인들로 하여금 패전과 점령 몇 년을 전쟁 자체보다 훨씬 나빴던 것으로 바라보게 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고통의 감내를 정당화하거나 보상해달라고 호소할 위대한 민족적 대의가 없었다."(757-8)


"1950년 10월 26일 서독 의회가 소련 내 독일군 전쟁포로 기념일 행사를 진행했다. 연방총리 콘라트 아데나워가 질문했다. '역사에서 수백만 명이 그토록 차갑고 무정하게 고통과 불행을 선고받은 적이 있습니까?' 그가 말한 것은 유대인 학살이 아니라 소련에 수감되어 있던 독일군 전쟁포로였다." "서독 당국은 소련군 모델 수용소를 만들어놓고 특별 여행을 조직했다. 독일인들은 철도망과 감시탑을 둘러보고 수용소 마당과 영안실을 관람했다. 수용소 마당에서 왼쪽 오른쪽으로 나뉜 사람들은 독일인 남녀였고, 임시 영안실에 쌓인 것은 독일인 시체였으며, 시체가 구덩이에 무더기로 묻히기 전에 뽑힌 금니는 독일인의 금니였다. 서독 정부가 1950년대에 전쟁포로들의 고통과 독일인 추방민의 수난사를 모아서 수십 권짜리 책으로 발간하고 유포하는 동안, 독일인들 대부분은 유대인 제노사이드에 대해 침묵했고, 유대인들이 겪는 고통의 세부 사항은 어느덧 독일인들 고통 이야기 속의 세부 사항으로 뒤바뀌어 있었다."(768-70)


"교회는 나치당과 나치 대중조직이 금지된 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향력을 누렸다. 1946년 3월 처칠의 '철의 장막' 연설 뒤 2주일 내에 서부 지역의 가톨릭 주교들이 연합군의 탈나치화 작업 및 점령정책의 근간을 서슴지 않고 공격했다. 프링스 추기경은 '집단적인 죄를 인민 전체게 부과하고 인민을 그 기준에 따라 대우하는 것은 신의 권리를 찬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울 알트하우스 역시 지도적인 개신교 신학자로서 '죄'의 문제를 논한 짧은 논설을 발표했다." "그는 전쟁범죄와 그 결과들이 인간 본성의 표출에 불과하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내 민족 어딘가에서, 그렇다, 인류의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악은 인간의 영혼, 모든 시대 모든 곳의 영혼과 똑같은 인간 영혼 속의 똑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특정한 행위들을 추상적이고 보편적이고 무시간적인 죄의식 속으로 사라지게 함으로써 그 행위들의 악을 재판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신뿐이라는 결론에 쉽게 도착할 수 있었다."(771-4)


"동부 독일이 '집단 범죄'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은 서부 독일보다 훨씬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당국은 동독인들에게 1947년부터 전사자추모일에 '히틀러 도당'에 의해 착취되고 전장으로 보내진 '파시즘의 희생자들'을 기리도록 했다. 그 영웅적인 '반파쇼 레지스탕스'에서 태어난 것이 사회주의 독일이라는 것이었다. 비록 평화로운 재건이라는 공산주의자들의 목표가 감상적이고 또 가능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언어는 희생, 재탄생, 낙관주의, 집단적 노력 등 과장된 개념들로 구축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나라의 목표가 나치 '민족공동체' 수사와 비슷한 울림을 주었다." "오스트리아는 국민들을 더욱 빠르게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전환시켰다. 1945년 4월 27일을 독일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날로 선언했다. 1938년 3월 독일에 병합된 오스트리아가 민족사회주의 침략의 '첫번째 희생자'였다는 것이다. 1955년에는 연합국들이 비동맹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을 주권국으로 승인했고, 그로써 오스트리아 신화는 봉인되었다."(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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