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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와다 하루키의 한국전쟁 전사
와다 하루키 지음, 남상구 외 옮김 / 청아출판사 / 2023년 9월
평점 :
제1장. 1949년의 위기
1949년 1월 김일성과 박헌영은 건국 후 첫 소련 방문을 준비 중이었다. 두 사람은 군사동맹조약인 북소우호조약의 체결을 원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소련군 철수 후에 안보를 확보한다는 목적 외에 북한이 행동에 나설 경우 소련의 지원을 확보하려는 속셈도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소련 측은 군사적 상호원조조항을 담은 이 내용을 경계하며 조약 체결을 거부했다. 소련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는 것을 우려했다. 바로 이때 한반도에서는 남측이 38선을 넘어 북측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티코프 대사는 소련 정부가 북한 경비여단에 무기를 제공하기로 이미 결정했음에도, 소련군 연해군관구沿海軍管區는 누차에 걸친 재촉에도 보내지 않은 채 선박이 배정되면 2월 말에는 제공할 수 있다는 변명만 되풀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북한군 1개 사단과 1개 여단의 편성이 끝났는데도 소련이 약속한 무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며 몰로토프의 개입을 요청했다. 28-30)
2월 8일, 이승만이 케네스 로얄Kenneth C. Royall 미 육군 장관에게 맨 처음 꺼낸 말은 38선의 한국 경찰에게 라이플총을 지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구 일본군 병사였던 한국인이 15만~20만 명이나 되므로 마음만 먹으면 한국군을 6주 안에 10만 명까지 증강할 수 있으며, 북한 측은 사기 면에서 문제가 있으니 남이 공격하면 북한군 대부분이 남에 투항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승만은 “군대를 증강하고 장비와 무기를 공급해 단시일 내에 북한으로 북진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존 무초John J. Muccio 주한 미국 대사가 북한과 평화적으로 교섭할 기회가 있는 한 “그러한 행동을 취해서는 안 된다”라며 반대했다. 로얄 장관은 미 전투부대가 한국에 있는 이상 북진은 있을 수 없으므로 대통령의 발언은 미군의 즉각적인 전면 철수를 요구하는 것과 진배없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승만은 고문단을 늘려 주고 추가 무기 공급을 “합리적 양”으로 보증해 준다면 즉각 철수해도 말리지 않겠다고 맞받아쳤다. 31)
사태를 가장 걱정한 쪽은 모스크바였다.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극도의 불안감을 느낀 것 같다. 미군 철수 후 벌어질 사태에 대한 불안과 경계는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은 극동의 소련군 당국도 갖고 있었다. 2월 9일 돌연 태평양함대 공군 사령관 세르빈Serbin 소장이 평양에 도착해 소련군 참모본부의 지시에 따라 전투기 연대의 원산 복귀를 위한 교섭을 제의했다. 철수 전에 사용하던 기지는 조선인민군 제2사단이 사용 중이었다. 그곳을 비워 달라는 요구였다. 시티코프는 모스크바의 이러한 결정에 반대했다. 미군이 한창 철수 중인 시점에 소련군 부대가 북한으로 복귀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스탈린은 미군의 한국 철수에 확실하게 제동을 걸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을 통해 한국군의 북한 공격을 견제하려 했다고 짐작된다. 반면 시티코프가 반대한 배경에는 북한 지도부의 거센 반발이 존재했을 것이다. 김일성 등에게는 미군 철수야말로 지상 최대의 목표였고 그 역행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31-2)
1949년 6월 29일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를 완료했다. 이 시기 미 육군부는 국무부에 미군 철수와 북의 남침 가능성에 관한 문서를 제출했다. 육군부는 5월 30일 현재 한국군의 병력은 71,086명, 연안경비대 5,450명, 국가경찰 50,434명으로 총 126,970명이며, 북한군은 인민군 46,000명, 경찰 및 기타 56,350명으로 총 102,350명으로 추정했다. 문서는 다섯 가지 옵션을 검토한 다음, 위기가 발생한 경우 유엔의 제재 결의를 확보해 다른 가맹국과 함께 미군이 경찰 행동을 개시하는 옵션 C가 가장 무난하다고 제안했다.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미군이 출동하는 안이나, 트루먼 독트린을 한국에 확대 적용하는 안에 관해서는 “한국은 미국에 있어 전략적 가치가 희박한 지역으로, 한국에서 미군이 군사력을 행사하는 것은 세계정세의 잠재성과 미국이 현재 보유한 군사력에 비해 과중한 국제적 의무들을 안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현명하지 않으며 비현실적이다”라는 참모본부의 결론을 토대로 소극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50)
마침 8월 4일 옹진반도에서는 북한 인민군이 옹진읍 방향으로 38선을 돌파해 맹렬한 포격을 가해 한국군 2개 중대를 전멸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옹진 전투는 김일성 등의 강경한 태도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7월 말 조선인으로 구성된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이 북한에 들어와 조선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으로 재편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8월에는 제164사단도 들어와 인민군 제5사단(사단장 이덕산李德山, 본명 김창덕金昌德)으로 재편됐다. 그 결과 북의 병력은 단숨에 5개 사단으로 증강됐다. 전투 경험이 있는 2만 8천 명의 용사가 도착한 것이다. 정예부대를 얻어 기세가 오른 김일성과 박헌영은 8월 12~14일 무력 해방의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시티코프 대사가 “공격은 남이 북을 선제공격한 때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하자 김일성은 38선은 미군이 남아 있을 때만 의미가 있으며, 미군은 이미 떠났으니 38선이라는 장애물도 사라졌다고 반박했다. 51-3)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 정책 실현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얻지 못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앞을 내다보면서 공식 석상에서 꾸준히 ‘북진통일’을 언급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국가안전보장회의가 12월 23일에 제출된 <NSC 48/1> 문서를 승인했으며 29일에는 트루먼이 승인했다. 이 문서는 현재 아시아의 최대 위협을 소련으로 적시하고 소련의 팽창을 “봉쇄하고 가능한 선에서 축소”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아시아의 연안 도서 연쇄 라인the Asian off-shore island chain’ 유지, 일본·필리핀·오키나와의 확보를 주장했다. 특히 “일본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라며 일본이 소련 블록에 편입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했다.135 즉 한국과 타이완의 위상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소련 또한 중국 혁명은 지지했음에도, 그리고 미국의 일본 단독 점령에 도전하겠다고 결정하고서도 한반도에 대해서는 북한의 무력통일 염원을 1949년 연말까지는 계속 거부했다. 63-5)
제2장. 개전으로 향하는 북한
1950년 1월 12일 딘 애치슨Dean G. Acheson 미 국무부 장관이 그 유명한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을 했다. 미국이 그은 ‘불후퇴 방위선’ 안에 알류샨 열도, 일본 본토, 오키나와, 필리핀을 포함시키고 한국은 타이완과 함께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커밍스는 애치슨의 연설에는 상대를 끌어들일 의도가 있었으나 북한 측은 이 연설을 ‘청신호’가 켜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명림은 커밍스의 북한 측 분석에 기본적으로 동의했고, 한국 측에서도 ‘불후퇴 방위선’ 밖에 놓였으니 항의하겠다는 판단이 없었다는 것을 논증했다. 그러나 김일성과 박헌영은 미군의 참전을 상정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북한이 행동에 나선들 미국의 참전은 없을 거라 판단했으며 기껏해야 미국이 일본군을 파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김일성 등은 애초에 이 연설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미국의 행동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스탈린은 애치슨의 연설이 미국의 불개입을 시사한 것으로 이해한 듯하다. 72)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쟁 준비를 위장하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6월 2일 김일성은 조국전선 아래에서 즉각적인 평화통일을 이룩하자고 촉구했다. 7일에는 조국전선이 평화통일 방안의 실현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1950년 8월에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자고 거듭 제의하면서 이를 협의하기 위해 남북 정당 단체의 대표자회의를 6월 중순에 해주나 개성에서 열자고 촉구했다. 나아가 6월 10일 평양방송은 한국에 붙잡혀 있는 남로당의 김삼룡金三龍과 이주하李舟河를 평양에 억류된 조만식曺晩植과 상호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6월 11일 조국전선의 사절 세 사람이 38선을 넘어 한국의 반정부당파와의 접촉을 시도하다가 체포됐다. 이날 한국 정부는 조국전선의 총선거 제안을 거절한다고 발표했다. 6월 12일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의 주최로 회의가 열려 김일성과 각 사단장, 사단 참모장, 포병사령관이 회합했다. 이날 사단장급에 개전 방침이 처음으로 설명됐다. 이 단계에서 실전 훈련이 시작됐다. 85-6)
사람들의 관심은 오랫동안 미국이 북한의 동태를 포착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방관했는지에 집중됐다. 알았지만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미군 철수 후 한국에 남은 정보 수집기관인 KLO는 북한의 군비 증강, 38선 부근의 변화를 포착하고 있었다. 5월 10일의 첩보원 보고를 토대로 작성된 <KLO 보고 518호>가 가장 포괄적이었다. 1949년 8월에 중국에서 2개 사단이 북한으로 들어왔으며, 같은 해 12월에 3개 사단이 추가로 들어와 인민군에 편입되어 현재 7개 사단으로 늘어났고 향후 13개 사단으로 증강될 듯하다는 내용이었다. 북한의 병력은 7개 사단이며 추가로 3개 사단이 준비된 것을 볼 때 첩보원의 정보는 규모 면에서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 극동군 총사령부 G-2는 한국 병력의 2배 수준이 아니면 북한이 침공할 리 없다고 평가했다. 기상 여건은 4, 5월이 적절하다고 지적했으나 1월 이후의 침공설을 열거한 것은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위험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90-1)
1950년에 들어 북한은 개전 준비에 온 힘을 쏟은 데 반해 한국은 일종의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새해 벽두부터 큰 문제로 부상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이 공격해 오면 북진통일의 기회가 생길 거라고 보았다. 또한 5월로 예정되어 있던 국회의원 선거를 연기할 생각이었다. 4월 들어 애치슨 미 국무부 장관은 3일에 이 대통령에게 각서를 보내 인플레이션 극복을 위한 근본적인 조치를 강구하지 않으면 경제 협력 원조 계획을 재검토하겠다고 압박했고 국회의원 선거 연기에 반대했다. 한미 간에 긴장이 고조됐다. 이때 이 대통령은 이범석 국무총리를 해임하고 후임으로 이윤영李允榮을 지명했으나 4월 6일 국회에서 4표 차로 부결되고 말았다. 이에 국방부 장관 신성모가 국무총리까지 임시 겸임하게 됐다. 이범석으로는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고 판단해 신성모를 총리 대행으로 앉혀 한미 관계의 개선을 꾀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못을 박은 이상 국회의원 선거를 연기할 수는 없었다. 93-4)
한편, 당시 한국군 수뇌의 행동은 기묘했다. 채병덕 신임 참모총장은 4월 22일 군 수뇌부 인사를 단행하고 백선엽을 제5사단장에서 제1사단장으로, 유승렬을 제1사단장에서 제3사단장으로, 이응준李應俊을 제5사단장으로, 김백일을 제3사단장에서 육군본부 참모부장으로 이동시켰다. 이 이동은 특별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5, 6월 위기설이 공공연히 나돌고, 5월 13일에는 채병덕 본인이 5월 30일에 북의 공격이 예상된다고 발표한 상황에서 곧바로 6월 10일 군 수뇌부 이동을 다시금 단행한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행동이다. 38선에 배치된 제8사단의 사단장은 이형근李亨根에서 이성가李成佳로, 제7사단의 사단장은 이준식李俊植에서 유재흥劉載興으로, 제6사단의 사단장은 신상철申尙澈에서 김종오金鍾五로 전원 교체됐다. 결과적으로 능력 있는 군인을 임명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신임 사단장의 입장에서는 부임 후 담당 지역을 한 차례 시찰하기도 전에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95-6)
제3장. 북한군의 공격
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오전 4시 40분 북한군은 38선상의 모든 지점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북한군의 공격 당시 한국군은 경계 태세를 푼 상태로 허를 찔렸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군은 기껏해야 옹진반도에 수도사단 제17연대(연대장 백인엽), 개성에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 동두천 방면에 제7사단(사단장 유재흥), 춘천 방면에 제6사단(사단장 김종오), 동해안에 제8사단 제10연대와 제21연대, 즉 3개 사단과 3개 연대, 총 12개 연대만이 38선 남쪽을 지키고 있었다. 나머지 3개 사단은 대전, 대구, 광주와 남부에 배치되어 있었다. 북한군 7개 사단, 21개 연대가 전격 공격을 감행했으니 병력은 한국의 2배에 달했던 셈이다. 더욱이 한국군에는 전차가 1대도 없었던 데 반해 북한군은 제105전차여단, 258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국군이 버티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26일 오후 1시 의정부가 함락되자 서울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 이 대통령은 27일 새벽 서울을 탈출했다. 98, 101-2)
6월 29일 저녁에 열린 워싱턴의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는 맥아더에게 38선 이북을 목표로 한 공군 작전 확대와 부산-진해에 한정된 미 지상군의 투입을 지시하는 명령을 결정했다. 다음 작전을 결정한 이는 29일 도쿄 하네다에서 수원으로 날아가 전황을 시찰하고 돌아온 맥아더였다. 맥아더는 “한국군에는 반격 능력이 전혀 없으며 추가로 돌파당한다는 중대한 위험에 처해 있다. 적의 진격이 계속된다면 공화국의 붕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라고 진단하고, 현재의 전선을 지키고 나아가 반격하기 위해서는 미 지상군의 투입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즉시 1개 연대 전투단을 투입하고 2개 사단으로 증강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제안이었다. 30일 아침에 열린 백악관 회의에서 대통령의 결단이 승인되어 맥아더에게 1개 연대 전투단과 지휘하의 지상군을 사용할 권한이 부여됐다. 북한에 대한 해상 봉쇄도 결정됐다. 이때 미군의 전면적인 출격이 결정된 것이다. 109)
일본 전 국토는 점차 한국전쟁의 기지로 변모해 갔다. 해상보안청, 국철, 선박, 지자체, 일본적십자사의 간호부 등이 후방 지원에 동원됐다. 그러나 이는 자발적인 정책이 아니라 의무로 강요된 것이었고 점령군의 명령에 복종한 것에 불과했다. 그 결과 일본이 한국전쟁에 실질적으로 참전하면서도 일본 정부는 끝까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일본 국민은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독특한 구조가 만들어졌다. 7월 18일 맥아더는 거듭 서한을 보내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의 무기한 정지 처분을 내렸다. 7월 24일 GHQ 민정국Government Section의 잭 네이피어Jack P. Napier 공직심사과장이 신문·방송사의 경영자들을 모아 놓고 ‘레드 퍼지red purge’ 방침을 내비쳤다. 그에 따라 7월 28일 중앙의 8개 신문사에서 공산당원과 그 동조자로 지목된 직원 총 336명이 해고됐고, 8월 말까지 전국 50개사에서 704명이 해고됐다. 그 후 추방은 일반 민간기업과 관청으로 확대되어 연말까지 약 1만 3천 명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117)
한국전쟁 개전 소식에 가장 순수하게 기뻐한 것은 타이완의 중화민국 정부였다. 1950년 5월 타이완 주재 미국 대사 로버트 스트롱Robert C. Strong은 6~7월에 중공이 타이완을 침공할 거라고 보고했다. 국무부 역시 사태의 타개를 바라며 이달 전해진 반反장제스 쿠데타 계획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장제스 정권이 더 나은 정권으로 교체된다면 미국이 지원할 명분도 생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미국인이 고른 후보자는 후스胡適와 쑨리런孫立人이었는데 모두 주인공 역할을 거절했다. 러스크가 후스에게 마지막으로 설득을 시도한 것은 6월 23일이었다. 6월 26일 장제스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격려의 전보를 보냈고, 27일에는 천청陳誠 행정원장이 담화를 발표해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리고 같은 날 워싱턴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제7함대의 타이완해협 파견 성명을 발표하자 타이완 정부는 뛸 듯이 기뻐했다. 기대를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17-8)
그런데 미군이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은 계속해서 진격했다. 한국 정부는 남쪽으로 더 밀려났고 인민군은 거침없이 진격했다. 7월 26일 진주를 지키기 위해 하동고개로 향하던 미 제29연대 1개 대대가 인민군의 매복 공격으로 궤멸당했다. 이때 수행했던 전 한국군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이 전사했다. 당연히 인민군 측에도 희생은 있었다. 7월 초순에 전우를 대신해 12사단장으로 임명된 최춘국崔春國이 7월 30일 지뢰를 밟아 전사했다. 이어서 강건 총참모장이 대전 점령 직후에 금강 기슭에서 지뢰를 건드려 전사했다. 중요한 것은 7월 20일까지 미 공군이 북한 공군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는 점이다. 개전 당시 북한 공군은 보유한 전투기 132대를 이용해 서울을 공습했으나 미 공군의 반격으로 다수의 북한 전투기가 지상에서 파괴됐다. 이로써 미 공군은 이 전쟁의 제공권을 장악했고 이후 단 한 번도 빼앗기지 않았다. 이는 점차 전쟁의 추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123)
8월 15일 임시 수도 대구에서 광복절 행사를 거행한 한국 정부는 17일 이곳에서 철수해 부산으로 도망쳤다. 한국군과 미군은 낙동강 동쪽으로 후퇴해 대구까지 아우르는 최종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곳에 미군 제25사단, 제24사단, 제1기병사단과 본국에서 도착한 제2사단, 그리고 한국군 제1, 제6, 제8, 수도, 제3사단이 진을 쳤다. 이곳에서 한미군은 한 달간 대치전을 버텨 냈다. 그사이 공군의 공격은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대치 중이던 북한군을 향한 융단 폭격이 펼쳐졌다. 한미군은 그간 병력을 증강하고 무기를 현대화했다. 병력 총수는 8월 14만 1,808명에서 9월 1일에는 미군 8만 6,655명, 한국군 9만 1,696명, 영국군 1,578명으로 총 17만 9,929명으로 늘었다. 커밍스는 이 무렵 미군의 전차 대수는 북한군이 보유한 대수의 5배에 달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인민군이 한미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뚫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8월 말 공산 측에서는 문자 그대로 비관적인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128)
보급로가 거의 다 파괴되고 미 공군의 끊임없는 공격에 노출되어 있던 북의 인민군은 승리를 위해 서둘러야 했다. 하루를 잃는 것은 패배로 가는 지름길과 다름없었다. 이에 인민군은 김일성의 명령 아래 최후의 총공격을 시작했다. 제1군단은 8월 31일부터, 제2군단은 9월 2일부터 낙동강 방어선 돌파를 위한 결전에 나선 것이다. 맹공을 당한 미군 제2, 제25사단은 공군에 폭격 지원을 요청했다. 9월 1일 제5공군의 전투폭격기가 두 사단이 지키는 전선을 따라 167차례 출격하여 공대지空對地 공격을 실시했다. 9월 2일에도 B-29 폭격기 25대가 김천, 거창, 진주를 폭격했고 두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300차례나 출격했다. 그 결과 두 사단은 끝까지 버텨 냈다. 이즈음 미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선박 260척, 병력 7만 명이 투입된 인천 상륙 작전은 9월 15일에 개시됐다. 새벽에 제1진이 월미도에 상륙했고 저녁이 될 때를 기려 만조 무렵에 제2진이 다른 해안에 상륙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134-5)
9월 27일 한미군은 서울을 탈환했다. 9월 29일 맥아더와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환도식이 거행됐다. 식이 끝난 후 이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한국군이 적을 추격하여 38선을 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맥아더는 북한에 항복 권고를 했으니 이틀 정도 기다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다음 날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즉시 북진하라고 명령했다. 인천에 상륙한 미군이 진격하면서 북한과의 교신과 보급이 끊긴 인민군은 완전히 붕괴해 퇴각했다. 남쪽에 있던 조선인민군 중 통솔력이 약한 부대는 괴멸됐고 방호산의 제6사단 같은 단련된 부대는 조직을 지키면서 태백산맥을 따라 북쪽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10월 21일의 당 정치위원회 결정으로 군대 안에 노동당 조직을 설치하기로 정한 것은 만주파 군대라는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인민군에 대해 당의 통제를 일원적으로 확립하는 단초가 됐다. 이는 인민군의 재건, 재편 과정에서 큰 의미를 갖게 된다. 138, 142, 144)
제4장. 한미군의 북진과 중국군 참전
10월 1일 맥아더는 본국 정부와 상의한 후 방송을 통해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그리고 전쟁 포로들과 민간인 억류자들을 즉각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10월 2일 맥아더는 유엔군 전 부대에 일반명령을 내렸다. “6월 27일의 유엔 안보리 결의 조항에 따르면 우리가 군사 작전을 전개하는 곳은 군사적 필요와 한반도의 국제적 경계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따라서 소위 38선은 우리 군의 군사적 운용 측면에서 고려할 요소가 아니다. 적을 완전히 패배시키기 위해 귀하의 부대는 그 경계를 …… 언제든지 넘어도 좋다. 적이 10월 1일의 나의 메시지에서 정한 항복 조건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우리 군은 적군이 한반도의 어느 곳에 있든지 찾아내 괴멸시킬 것이다.” 이로써 한국군의 북진은 추인됐다. 맥아더는 미 제10군단에 서울 지역에서 방향을 틀어 부산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해로를 이용해 원산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한국군 제1군단은 홀로 맹렬히 진격해 원산으로 향했다. 148)
10월 2일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한 날, 중공 정치국 확대회의에서는 한국전쟁 참전 문제를 논의했다. 마오쩌둥이 중국 참전의 반대급부로 소련으로부터 얻어 내려 한 것은 미국의 중국 본토 공격 방어전에 소련이 참전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소련은 애당초 중소우호동맹조약에 따라 공군을 파견할 의무가 있었으나, 그렇게 했다가는 미소 세계전쟁으로 비화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스탈린은 그러한 사태를 무조건 피하고 싶었다. 미국이 전쟁을 확대하여 중국을 공격한다면 소련은 조약상의 의무에 따라 중국을 위해 참전할 것이며, 중소가 힘을 합친다면 미국에 승리할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이는 스탈린의 진심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스탈린에게는 미국과 싸울 생각이 없었으며 한국전쟁이 중국 본토로 확대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소련도 함께 싸우겠다는 표현은 중국의 참전을 독려하기 위한 공수표였다. 10월 7일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의견에 동의해 파병 결정을 내렸다고 스탈린에게 알렸다. 150-1, 154)
중국인민지원군은 10월 25일 평안북도 운산 방면에서 한국군 제1사단과 맞닥뜨리면서 첫 번째 전투가 시작됐다. 펑더화이는 서둘러 진형을 구축하고 11월 1일 전투 명령을 내렸다. 예상치 못한 중공군 대군의 공격으로 한미군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서부에서는 덕천, 개천, 안주 부근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이 제1차 전역[戰役, 전쟁 상황에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실시하는 일련의 연관된 대규모 군사 작전 - 역자 주]은 11월 4일에 종결됐다. 이때 마오쩌둥은 지원군 병력을 추가 증강했다. 제9병단의 제20군, 26군, 27군의 3개 군 12개 사단이 파견되어 11월 7일부터 19일까지 지안, 린장臨江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총병력은 30개 사단, 약 38만 명을 헤아렸다. 제9병단에는 장진호長津湖 방면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매복 공격을 전개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11월 25, 26일 지원군은 역으로 먼저 제2차 전역을 개시했다. 한미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패주하기 시작했다. 166-7)
12월 5일 미군은 평양을 포기했다. 우선 제8군이 대동강 남쪽 기슭으로 이동했다. “시내 곳곳에서 12월 5일 오전 7시 30분까지 불을 질렀다. 이때 후위경비부대가 대동강의 마지막 다리를 파괴하고 강 하구 지역에서 마지막 파괴 작전을 시작했다.” 진남포에서는 이미 12월 2일부터 철수가 시작되어 전차상륙함, 일본의 상선, 미 해군의 병력 화물 수송선, 한국의 범선 100여 척이 부상자, 죄수, 평양에서 반출할 화물, 약 3만 명의 피란민을 싣고 철수했다. 운반이 여의치 않은 물자와 항만시설은 파괴했다.117 그 후 부대는 38선을 향해 퇴각했다. 동부에서는 제10군단이 12월 8일 자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흥남에서 철수했다. 군인 10만 5천 명, 차량 1만 8천 대, 화물 35만 톤, 피란민 8만 6천 명을 수송했다. 남은 폭약, 폭탄, 가솔린은 흥남 시가와 항만시설 파괴에 사용됐다. 미군에게 평양과 흥남은 적의 도시에 불과했고 적에게는 무엇 하나 건네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69)
12월 22일 펑더화이는 제3차 전역 명령을 내렸다. 제42, 66군을 좌종대左縱隊로 춘천 서북쪽에 집결시키고 제38, 39, 40, 50군을 우종대右縱隊로 서울 방향으로 전진시켰다. 인민군 제5, 2군단에는 동해안 쪽을 맡겼다. 공격 구역 안에 절대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집중시킨 뒤 31일에 공격을 개시했다. 미군 측은 워커 제8군 사령관이 12월 22일 지프와 트럭의 충돌 사고로 사망한 이후 매슈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가 후임으로 임명되어 지휘를 맡았다. 리지웨이는 1951년 1월 1일 서울 철수를 명령했다. 1월 4일 한강의 마지막 다리가 폭파됐다. 이날 서울은 또다시 점령당했다. 이번 점령자는 북중 연합군이었다. 서울 점령 후 북위 37도선 지점까지 진출한 시점에서 1월 7일 펑더화이는 진격 중지를 명령했다. 이렇게 제3차 전역이 끝났다. 펑더화이가 다시금 진격을 멈춘 까닭은 미군 측이 남하를 유도하여 인천 상륙 작전의 재현을 획책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78)
요시다 총리는 12월 16일 국회가 자연 휴회에 들어가기에 앞서 열린 비밀의원총회에서 민주당 총재 아시다의 거국일치 내각 제안은 “일본의 현 사태에 부합하지 않는 언동”이라면서 한국전쟁이 별로 위험하지 않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세간에는 한반도 문제가 중대한 국면에 들어섰고 제3차 세계대전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는 듯하나 전쟁이 그리 쉽게 일어날 리가 없다. 사태는 우려할 수준은 아니다. 중공이 최후에 승리를 거둘 일도, 조선동란이 영원히 이어질 일도 없을 것이다. 적절한 지점에서 타결될 것이다.” 요시다는 28일 기자단과 만난 자리에서도 “큰일 났다며 난리 법석을 피우다가 대동아전쟁이 일어났다”라고 비꼬면서 위기의식을 부채질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헌법의 정신을 지킬 생각이며 경솔하게 재군비 문제를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요시다의 구상은 미국에 의한 안전보장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길은 그야말로 미일안보조약을 향해 열려 있었다. 180-1)
북중군의 제4차 전역은 2월 11일에 시작됐다. 이날 동부 전선에서 북중군은 횡성을 목표로 반격에 나섰다. 한국군 제8사단은 괴멸됐고 북중군은 횡성을 점령한 후 원주를 향해 전진했다. 양군 간의 격돌은 16일까지 이어졌다. 한미군은 원주를 사수했다. 원주를 코앞에 두고 북중군은 기동방어전 태세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월 20일 한미군의 반격 작전인 ‘킬러 작전Operation Killer’이 시작됐다. 북중군은 퇴각했다. 2월 20일 베이징으로 귀환한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을 설득했다. 마오쩌둥도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3월 초순 동부 전선에서 전개된 유엔군의 ‘킬러 작전’이 종료됐고, 북중군은 횡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3월 7일 서부 전선에서 유엔군의 ‘리퍼 작전Operation Ripper’이 시작되어 북중군은 결국 서울을 포기해야 했다. 3월 말 북중군은 거의 모든 전선에서 38선 이북으로 쫓겨 올라갔다. 더는 만회하지 못한 상태로 4월 21일 제4차 전역은 종료됐다. 이렇게 미중 전쟁의 승패는 무승부로 끝났다. 188-9)
제5장. 정전회담을 하면서 하는 전쟁
유엔군의 반격으로 서울을 회복하고 38선에 근접했을 때, 미국 정부는 또다시 정전회담을 촉구하는 대통령 성명을 준비했다. 1951년 4월 5일 공화당 하원의원 조셉 마틴Joseph W. Martin이 의회 연설에서 맥아더로부터 받은 3월 20일 자 편지를 읽었다. 그 편지에서 맥아더는 “이곳 아시아는 공산주의 음모가들이 세계 정복을 목표로 하는 승부를 위해 선택한 곳이라는 사실”, “만약 우리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와의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유럽의 멸망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일부 사람들”을 비난했다. 맥아더가 공공연하게 정부를 비판하자 트루먼은 4월 11일 맥아더 해임을 발표했다. 미국의 방침은 아시아에서의 대립을 ‘제3차 세계대전’으로 발전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며, 미국은 정전을 하고 재침략 방지 대책을 세워 평화를 달성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맥아더의 후임에는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임명됐다. 미국은 정전협상을 위한 계기를 필사적으로 찾았다. 이따금 평화를 제안한 소련에 기대를 걸었다. 191)
마오쩌둥이 ‘최후의 전역’이라고 부르며 한반도에서 미군을 몰아내려 했던 제5차 전역은 맥아더 해임 하루 뒤인 4월 22일에 시작됐다. 미 공군은 서부 전선에서 38선을 다시 돌파해 임진강을 건너는 북중군을 상대로 23일 새벽부터 1,100차례 출격해 공격했다. 조선인민군 제1군단, 중국인민지원군 제19병단의 64군, 65군, 63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으면서도 서울 북쪽에 있는 북악산까지 전진했다. 그 동쪽에서는 제3병단, 제9병단의 8개 군이 38선을 돌파하여 서울 방면으로 압력을 가했다. 잠시 대치한 끝에 5월 16일 동부 전선 소양강 남쪽 지구에서 중국인민지원군 제3병단, 제9병단, 조선인민군 제3, 제5, 제2군단이 공격에 나섰다. 5일간의 밤낮 연속 공격으로 전선을 남쪽으로 상당히 밀어 내렸지만, 거기서 모든 힘을 다 썼다. 5월 19, 20일에는 야간에 출동한 B-29가 공격을 위해 집결한 북중군을 유도탄으로 폭격하여 공격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5월 21일 펑더화이는 전역을 수습하라고 명령했다. 192)
5월 17일 미국 상원에서 한국전쟁 정전 결의가 채택됐고, 5월 19일 《프라우다》는 이를 보도했다. 미국 국무부는 미국 정책에 대한 비판자로 알려져 있던 케넌에게 미국의 메시지를 소련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겼다. 케넌은 5월 31일 비밀리에 소련의 유엔 대표 말리크와 만나 미국의 정전에 대한 의지를 전달했다. 모스크바는 이 사실을 베이징에는 알리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전쟁은 지금부터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소섬멸전 단계로, 곧 대섬멸전 단계로 나아갈 거라고 했다. 패배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주장으로도 보인다. 중요한 것은 미군을 북한으로 끌어들여 거기서 작게나마 확실하게 무너뜨리자는 제안이다. 이에 스탈린은 즉각 반응했다. 5월 29일 그는 마오쩌둥의 계획이 “나에게는 위험해 보인다. 그런 계획은 한두 번은 성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미군은 아주 쉽게 그런 계획을 간파할 것이다”라고 했다. 스탈린은 언제나 마오쩌둥의 의견에 찬성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외적으로 전면 반대했다. 199-200)
가오강과 김일성은 두 사람은 6월 13일 스탈린과 회담했다. 회담에 동행한 통역 스저는 김일성과 가오강의 답변이 혼란스러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전투 중단, 정전, 강화(화해), 휴전, 평화조약” 등의 단어를 혼란스럽게 사용하자 스탈린이 어구의 의미를 설명하고 “당신들의 의도, 소망, 요구는 도대체 무엇이냐”라고 했다. “중국과 북한 측은 우리의 희망은 정전”이라고 대답했다. 스탈린이 정리하기를, “정전은 상당히 긴 기간의 군사행동 중단이지만, 양측은 여전히 교전 상태에 있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언제든지 다시 싸울 수 있으므로 이는 평화의 국면이 아니다”라고 했다. 김일성과 가오강은 그러한 의미의 정전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한 것이다. 스탈린은 두 사람을 상대로 정전협상을 개시해야 할 필요성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북한과 중국의 합의를 이끌어 낸 뒤, 말리크 유엔 소련 대사는 6월 23일 미국 방송에 출연해 한반도에서의 정전협상 가능성을 시사했다. 202-4)
한반도의 정전회담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됐지만, 미국과 중국 양측이 자신들의 입장을 고집한 결과, 회담은 좌초됐다. 8월 22일 중국·북한 측은 협상 중단을 선언하고 회의장을 떠났다. 한편, 7월 28일 이승만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한국인은 분할선이 계속되는 것을 우리 국민에 대한 죽음의 명령서로 간주하고” 있다며 군사분계선 합의에 반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정전회담 중단은 그야말로 원하던 일이었다. 이승만의 통일론은 박헌영과 김일성의 통일론이기도 했다. 박헌영은 1951년 2월까지만 해도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겸임했으나, 이후 소련계 김재욱金宰旭과 교체됐다. 그는 대남 공작 재건에 집념을 불태우고 있었다. 정전회담을 하면서도 전쟁을 계속하고 남부 해방을 위한 공작을 계속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따라서 그가 이승만의 주장을 들었다면 공감했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북한이 이승만의 반反정전회담 캠페인을 비난하지 않는 것에 초조해했다. 210-3)
정전회담이 시작된 뒤에도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1951년 7월 26일부터 미군 제2사단은 5일간 동부 전선의 조선인민군 제2군단을 공격했다. 강원도 인제에서 북쪽으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미군이 ‘펀치볼Punch Bowl’이라고 이름 붙인 오래된 분화구가 있다. 그 주위의 깎아지른 능선을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이 계속됐다. 미군이 1179고지라 부른 최대의 능선인 대우산大愚山을 미군이 점령했다. 중국군이 지키고 있던 서쪽 능선은 ‘피의 능선Bloody Ridge’이라고 불렸다. 더욱 격렬한 공방전이 계속된 곳은 중부의 ‘철의 삼각지대’라고 불린 금화, 철원, 평강을 잇는 지대였다. 8월 18일부터는 미군 3개 사단이 인민군 3개 군단을 상대로 하계夏季 공세를 시작했다. 정전회담이 중단된 후인 9월 1일부터는 다시 공세가 시작돼 9월 18일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은 진지와 진지 사이에 폭 0.8~1미터, 깊이 1미터, 지표까지 2~3미터의 터널을 만들고 완강하게 응전했다. 221)
결정적으로 정전회담의 교착상태를 초래한 것은 포로 문제였다. 미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한 후 북한군이 패주할 때 대량의 투항자가 나왔다. 그 수는 1950년 10월까지 10만 4천 명에 달했다. 중국군 포로는 1951년 4월부터 6월까지 전개된 제5차 전역에서 대거 발생했다. 1만 5천 명이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50~70%는 옛 국민당군의 장병이었다고 한다. 이들을 도운 것이 타이완에서 보낸 수용소 요원들이었다. 미국 측 자료에 따르면 이들 요원은 미군 민간정보교육국Civil Intelligence and Education, CIE 프로그램에 따라 포로들에게 반공 민주 선전을 했다. 이 요원들은 종종 반공파 포로와 제휴하여 1951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타이완으로 송환해 달라는 청원서에 서명하도록 포로들을 설득하거나 물리적인 압력을 행사했다. 제네바협약 118조의 규정에 포로는 신속히 송환해야 한다고 되어 있지만, 이 상식적인 견해가 항복한 후 협력자가 된 포로를 공산 측에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는 트루먼의 뜻에 밀렸다. 227-8)
제6장. 3년째의 전쟁
휴전회담이 포로 문제로 교착된 상황에서 1952년 5월 세 번째 유엔군 사령관으로 마크 클라크Mark W. Clark가 취임했다. 그의 취임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의 반란으로 수용소 사령관 프랜시스 도드Francis T. Dodd 준장이 반란자의 인질이 된 사건이 계기가 됐다. 포로 문제에 대한 타협 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신임 사령관은 북한에 대한 폭격을 강화하여 사태를 해결하려 했다. 먼저 5월 13일 극동공군 사령관 오토 웨이랜드Otto P. Weyland는 클라크에게 평양 폭격의 허가를 요구했고, 이 공습 작전에 ‘압력 펌프 작전Operation Pressure Pump’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6월 16일 클라크가 이를 승인하자, 6월 23일 미 공군과 해군항공대는 수풍발전소[水豊發電所, 평안북도 삭주군 수풍면에 있는 북한 최대의 수력발전소 - 역자 주], 부전강赴戰江 제3, 제4발전소와 장진강長津江 제3, 제4발전소 등을 폭격했다. 공격당한 수력발전소 13곳 가운데 11곳은 완전히 파괴됐다. 북한은 전력의 90%를 상실했다. 239)
7월 4일에는 안둥에서 동북쪽으로 5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북한 군사대학을 폭격했고, 8일에는 강계와 구누리 사이의 철교, 그리고 장진강 제1, 제2발전소를 폭격했다. 7월 11일에는 평양 폭격이 이루어졌다. 제7함대 항공모함의 함재기, 제5공군기, 한국 공군기가 주간에 3차례 공격하고, 밤이 되면 요코타와 가데나에서 B-29 54대가 출격해 폭격했다. 1,254회 출격은 한국전쟁에서 최대의 공습이었다. 2만 3천 갤런의 네이팜탄이 투하됐다. 미국의 폭격은 북한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수풍댐이 공격받은 후에도 7월 4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에서 “상대방이 조선 정전협상에서 전환을 꾀하려고 기도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약간의 징후가 나타났지만, 그럼에도 적이 협상을 연기할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고 평정심을 보였다. 반면 김일성은 7월 16일 스탈린에게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전보를 보냈지만, 여기에는 김일성에게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고통이라는 인식이 드러나 있다. 240-3)
7월 23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전부터 의혹을 가지고 있던 이종찬 참모총장을 해임하고 백선엽 제2군단장을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이종찬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7월 28일 비상계엄령이 해제됐다. 군법회의는 공산주의 음모에 관련된 국회의원 7명의 기소를 취하했다. 사형이 선언됐던 서민호 의원은 재심 결과 8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완화 조치를 한 후, 8월 5일 정·부통령 선거를 시행한다고 공시했다. 8월 5일 선거에서 이승만은 유효 투표 703만 표 가운데 523만 표를 획득하여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말할 것도 없이 선거 관여는 있었지만, 이 결과는 그의 권력 기반이 결정적으로 강화됐음을 보여 줬다. 게다가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로는 이범석이 지명됐는데, 이승만은 선거에 관여해 무소속의 함태영咸台永을 당선시켰다. 이범석을 내친 것이다. 선거 후에는 이범석의 족청(옛 조선민족청년단)계를 자유당에서 배제시키고 자유당을 철저하게 이승만 당으로 만들어 나갔다. 250)
2년 넘게 스탈린은 크렘린에서 마오쩌둥, 김일성과 함께 한국전쟁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아시아에서의 혁명적 투기는 실패로 끝났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결정에 근거한 행위로, 그의 실패이고 그의 패배였다. 스탈린은 낙담하지 않고 빨리 마무리하고 전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실패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배신을 근거로 해서만 설명할 수 있었다. 필자는 스탈린이 이 시기 어느 시점에 김일성과 방학세에게 박헌영에 대한 의혹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가설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할 새로운 자료는 없다. 그러나 1952년 9월 저우언라이에게 내린 스탈린의 ‘지시’가 필자의 추측에 힘을 실어 준다.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비교해 본 직후에 저우언라이에게 잠입한 스파이를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당과 정부에 영국과 미국의 앞잡이가 침투해 있다면, 북한의 당과 정부에도 미국의 앞잡이가 침투해 있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263)
1953년 새해가 되자 제5차 전원회의 결정의 실천, 종파주의분자의 적발, 비판 캠페인이 요구됐다. 박정애가 《노동신문》 1월 5일 호에 게재한 <김일성 동지가 제기한 당의 조직적, 사상적 강화를 위한 투쟁은 각 당 기관, 당 단체, 당 지도간부, 당원의 전투적 강령>이라는 글이 그 시작이었다. 소련에서의 유대인 의사단 사건 적발이 북한에서는 1월 18일에 보도됐다. 《노동신문》 1월 26일 호는 사설에서 수령의 요구에 부응하자며 더욱 나사를 조였다. 사회안전상 방학세는 2월 5일 《노동신문》에 <반反간첩 투쟁을 전 인민적 운동으로 추진하자>라는 글을 발표하고, 반종파주의 투쟁을 반간첩 투쟁과 연계하자는 방향을 제시했다. (박헌영과 친분이 있는) 리승엽, 조일명, 임화, 박승원, 이강국, 이원조, 맹종호 등은 해방 전에 일본 관헌에 체포돼 전향한 과거가 있었다. 그랬기에 미군의 스파이가 됐을 것이라고 추궁했다. 소련계 사회안전부 예심처장 주광무朱光武가 진두지휘하여 이들을 고문하고 원하는 진술을 받아냈다. 265-6)
한편 스탈린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평화 공존”을 말하면서 “조선전쟁을 끝내는 문제에 대해 아이젠하워와 협력하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이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게재됐다. 그리고 26일 소련 국내에도, 중국에도 이 메시지가 보도됐다. 스탈린은 분명하게 한국전쟁을 끝내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를 미국의 새 대통령에게 보냈으며, 이를 러시아인과 중국인 모두 알게 된 것이다. 알려진 바로는 한반도와 관련한 스탈린의 마지막 조치는 김일성이 요청한 차관 상환 연기에 관한 것이었다. 1951년 11월 14일 ‘소련-북한협정’에 따라 북한에 제공된 물자 구매를 위한 차관의 변제는 1952년부터 북한이 물자를 인도하는 것으로 실행돼야 한다고 정해져 있었는데, 김일성이 라주바예프 대사에게 군사행동 종료 후로 미뤄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스탈린은 연기를 인정했다. 그런 취지를 담은 각료회의 명령안이 수상 스탈린의 이름으로 기안됐다. 스탈린은 군사행동의 종료가 멀지 않았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268-70)
제7장. 정전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었다. 그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으로 정전협상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통설은 잘못된 것이다. 스탈린 자신이 이미 전쟁을 끝내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중국에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다. 북한에서는 3월 3일 당 전체에 스탈린의 위독한 상황에 대한 통보가 있었다. 스탈린의 죽음은 김일성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3월 9일 추도식이 열렸다. 김두봉, 박창옥, 부수상 홍명희, 민족보위상 최용건이 추도사를 했다. 박헌영도 참석했는데, 추도식이 끝난 직후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김일성은 전쟁을 끝낼 체제를 완성했다. 중국에서 스탈린 장례식에 참석한 것은 저우언라이였다. 스탈린의 후계자들은 노골적으로 정전을 서두르라고 저우언라이를 압박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소련 측이 포로 문제에 대한 방침의 전환을 요구했다면, 저우언라이가 이를 수용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272)
3월 26일 귀국한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에게 모스크바에서 협의한 내용을 보고했다. 《저우언라이 연보周恩來年譜》에는 이때 “중국 정부가 취해야 할 방침과 행동을 확정했다”라고 되어 있다. 마오쩌둥이 마침내 포로 문제에 대해 양보하기로 결단한 것이다. 3월 28일 중국 주도로 작성된 클라크 제안에 대한 회답을 김일성과 펑더화이의 이름으로 보냈다. 부상병 포로 교환에 동의한다, 이 문제의 합리적 해결은 포로 문제 전체의 순리적 해결과 한반도 정전 달성을 이끌어 내야 한다, 판문점에서의 회담을 즉시 재개하자는 내용이었다. 소련의 특사 쿠즈네초프와 수행원 페도렌코가 평양에 도착한 것은 3월 29일이었다. 특사는 김일성에게 소련 정부의 서한을 전달했다. “우리의 설명을 듣고 김일성은 크게 흥분했다. 그는 좋은 소식을 알게 되어 매우 기쁘다며 문서를 꼼꼼히 검토하고 나서 회담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김일성이 흥분한 것은 이로써 바라던 즉각적인 정전이 가까워졌다는 기쁨 때문일 것이다. 273-4)
정전회담 재개를 가로막은 마지막 장애물이 제거된 후 클로즈업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저항이었다. 직접 선거로 재선된 대통령의 저항은 전에 없이 강고한 것이었다. 정전협상이 실질적으로 진전되기 시작한 4월,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 반대 움직임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4월 8일 양유찬 주미 한국 대사는 덜레스 장관에게 이 대통령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전 조건 5가지를 제시했다. 그것은 (1) 한반도의 재통일, (2) 중공군의 철수, (3) 북한군의 무장해제, (4) 제3국이 북한에 무기를 제공하는 것의 금지, (5) 대한민국의 주권 존중 및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그 목소리의 존중이었다. 이는 정전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이승만의 우려에는 근거가 있었다. 미국은 정전 반대, 전쟁 속행 주장을 처음부터 논외로 여겼고, 한미 간 안전보장조약 체결도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일본-류큐-필리핀을 방위선으로 하는 전략을 유지한 국방부가 반대하고 있었다. 276-7)
5월 13일 미국 대표는 판문점에서 공산 측이 제안한 8개 항목 가운데 많은 부분을 “협상의 기초로” 받아들이면서 귀환하지 않은 북한 포로를 정전협정 발효일에 즉시 석방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중국과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중국과 북한은 이날부터 제1차 하계 반격 전역을 개시했고, 14일에는 곧바로 미국의 즉각적인 석방안을 거절했다. 5월 25일 정전회담에서 해리슨 수석대표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그 내용은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스웨덴, 스위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인도 등 5개국으로 구성된 송환위원회에 인도한다, 송환위원회의 병력은 인도군만으로 하며 인도가 위원장을 맡고, 그사이에 양측 대표가 포로와 접촉하여 송환 희망을 확인한다, 90일이 지나면 면접은 끝내고 120일 후 석방한다는 것이었다. 6월 4일 공산 측은 5월 25일의 미국 측 제안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회답했다. 드디어 정전의 시기가 다가왔다. 이제 정전은 확정적이었다. 279, 281)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6월 6일 보낸 편지에서 한반도 통일을 위한 투쟁을 전쟁이 아니라 정치적 수단으로 추구할 때가 됐다면서, 정전 후 한국의 안전보장을 위해 경제 원조와 병력 증강에 협력하겠다고 제안했다. 더불어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승만은 이에 대해, 6월 9일 제8군 사령관 테일러에게 4가지 요구사항의 요점을 전달했다. (1) 정치 토의의 합리적인 기한은 60일이 바람직하다, (2) 미국과의 상호안보조약, (3)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확대 편성, (4) 인도 및 공산국 대표의 입국 거부였다. 이승만은 6월 17일 아이젠하워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그것[상호방위조약]이 정전과 연결되어 있다면 그 효력은 거의 제로가 될 것”이라며 정전 움직임에 강력히 항의했다. 이는 다음 날 이승만 대통령이 저지른 무모한 행위의 동기에 대한 사전 설명이었다. 6월 17일 심야부터 18일 아침까지 부산, 마산 등 4곳의 포로수용소에서 북한인 포로 2만 5천 명이 일방적으로 석방된 것이다. 282-3)
그동안 북한에서는 박헌영파, 옛 남로당 관계자 체포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었다. 체포된 주중 대사 권오직을 대신해 베이징에는 대리대사로 만주파 서철徐哲이 파견됐다.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6월 만주파 김일이 중앙위원회 서기로 임명됐다. 체포된 남로당계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미군의 스파이였고 반反김일성 쿠데타를 획책했다는 사건의 줄거리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3년 7월 2일 소련계 일인자 허가이가 자살했다. 허가이는 당무에서는 제외된 채 부수상직만 맡고 있었는데, 그에 대해 새로운 비판이 제기됐다. 아마 허가이에게도 체포된 박헌영 그룹 멤버들의 자백 조서가 전해졌을 것이다. 허가이는 분명히 아직 그 사건에 말려들지는 않았었지만, 앞으로 사건이 어떻게 확대될지 모른다고 느꼈을 것이다. 더욱이 소련에서 온 소련계가 그에 대한 비판에 동조하는 것을 보고 그는 자신이 소련의 신임을 잃었다고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허가이는 소련으로 돌아갈 길이 막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90)
스탈린 사후 말렌코프에 이어 지위가 상승한 부수상, 내무상 베리야는 4월 4일 크렘린 의사단 사건은 꾸며낸 것이라고 발표하도록 했다. 무고한 자에게 죄를 인정하게 한 것은 고문에 의한 것임이 시사됐다. 이틀 뒤 《프라우다》 논설은 국가보안상 이그나티예프S. D. Ignat’ev를 비판하면서 직접 수사 책임자인 미하일 류민Mikhail D. Ryumin 전 차관의 체포 사실을 밝혔다. 베리야의 ‘개혁파식’ 활동이 흐루쇼프와 말렌코프에게 강한 의혹을 불러일으킨 결과, 이들은 6월 26일 베리야 제거에 나섰고 7월 10일 베리야 체포가 발표됐다. 베리야는 미국과 영국의 스파이로 지목됐다. 이 발표는 전형적인 스탈린 방식이었기 때문에 4월의 새로운 바람과의 정합성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공산당의 이인자인 베리야가 미국과 영국의 스파이라고 발표된 것은 박헌영파나 이토 리쓰를 미국과 일본의 앞잡이라고 낙인을 찍으려는 사람들에게는 활용하기 좋은 재료였다. 290-1)
7월 24일 정전회담에서 현시점의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하여 정전하기로 합의됐다. 이날 이승만은 덜레스에게 서한을 보내 정전이 임박한 이 시기에 “우리 정부의 태도를 결정하기 전에” 확실히 해 놓고 싶다며, 정치회담이 90일 이내에 실패하면 중국군을 몰아낼 군사행동에 미국은 동참해 줄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군사행동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해 줄 것인지를 물었다. 깜짝 놀란 덜레스는 마지막 설득을 시도했다. 결국 이승만은 집요하게 자기주장을 한 결과, 미국이 앞으로 한국의 안전보장을 약속하게 하는 데 완전히 성공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20분 판문점에서 해리슨과 남일이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둘 다 말이 없었다. 남일은 서명한 후 해리슨과 악수하지 않은 채 시계를 보고 그대로 떠났다. 조인에 따라 12시간 후 정전이 이뤄지게 됐다. 정전 명령은 남쪽에서는 클라크의 이름으로, 북쪽에서는 김일성과 펑더화이의 이름으로 내려졌다. 292)
정전 이후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리승엽 등 북한의 남로당계 인사들에 대한 재판이다. 8월 3일부터 시작된 재판은 신속히 진행돼 8월 6일에 벌써 판결이 나왔다. 리승엽, 조일명, 임화, 박승원, 이강국, 배철, 백형복白亨福, 조용복趙鏞福, 맹종호, 설정식薛貞植 등 10명에게 사형, 윤순달, 이원조에게 각각 징역 15년과 12년이 선고됐다. “반당·반국가 파괴분자”로 단죄를 받고 당에서 제명된 사람은 주영하, 장시우, 박헌영, 김오성(金午星, 전 문화선전성 부상), 안기성安基成, 김광수(金光洙, 경공업성 부상), 김응빈(전 금강정치학원 원장), 권오직 등 8명이다. 그 밖에 남로당계 중앙위원 구재수具在洙, 이천진李天鎭, 조복례趙福礼, 이주상李周祥 등 4명이 해임됐다. 15명의 중앙상임위원회 위원이 선정됐고 김일성, 김두봉, 박정애, 박창옥, 김일 등 5명으로 중앙정치위원회가 구성됐다. 김일성이 위원장이 됐고 박정애, 박창옥, 김일이 부위원장이 됐다. 김일성은 정부, 군, 당을 완전히 장악했다. 297-8)
정전협정에 따르면, 군사분계선에서 남북으로 2킬로미터의 비무장지대DMZ를 설치하고 이곳을 군사정전위원회가 관리하기로 했다. 정전협정은 제4조에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기 위해 양측 군 사령관은 양측 관계 각국 정부에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발효된 후 3개월 이내에 각각 임명된 대표에 의해 더 높은 수준의 양측 정치회의를 개최하고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 군대를 철수하는 문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 제반 문제를 협상을 통해 해결할 것”을 규정했다. 또한 제5조의 62항에서는 “이 정전협정의 조항은 상호 수용할 수 있는 수정과 추가 또는 양측 간의 정치적 수준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적절한 협정 규정에 따라 명확히 정지될 때까지는 계속해서 효력을 갖는다”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정치회의에서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적절한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이 체결되지 않는 한 정전 체제가 계속되는 것이었다. 301)
제8장. 한국전쟁 후 동북아시아
북한도, 남한도 통일을 위해 전쟁을 했으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거의 원래의 분할선인 38선 부근에서 전쟁이 중단됐다. 군사분계선은 서부에서는 38선 아래로 내려가 개성 지구, 옹진반도 등이 북측에 포함됐다. 동부에서는 38선 위로 올라가 철원군의 남쪽 반, 양구군, 인제군, 고성군 등이 남측에 들어갔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은 거의 같다고 해도 좋다. 전쟁이 남긴 것은 파괴의 상처는 한반도 전역을 뒤덮었지만, 미국에게 공중 폭격을 당한 북한의 피해는 더 엄청났다. 평양은 모든 것이 파괴되어 전쟁 전의 기억을 더듬을 만한 단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폐허에서 되살아난 도시는 과거로부터 완전히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사망자 수는 정확히는 모른다. 남북 합해서 300만~40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1931년 만주 침략부터 1945년 패전까지 발생한 일본의 사망자 수 300만 명을 넘는 수치다. 1949년 6월 1일 남북의 총인구가 2,865만 명이었으니, 사망자는 10%가 넘는다. 304)
정통성을 다투는 두 국가의 분열과 대립은 더욱 격렬해졌다. 통일을 위한 전쟁이 실패한 결과, 통일은 한없이 멀어진 것으로 보였다. 미국은 한미상호안보조약을 맺고 한국의 안보를 책임지겠다고 밝혔다. 미군은 한국에 주둔했고, 미군 사령관은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한국군의 지휘권도 가졌다. 거기에는 18개 사단 63만 명의 병력을 가진 한국군의 북진을 억제하려는 의도도 작용했다. 북한은 많은 인구를 잃었고 국토는 완전히 파괴됐기에 재건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지금까지의 사회와 문화 전통이 파괴됐고 사회주의화를 기조로 한 개혁이 철저히 진행됐다. 중국인민지원군도 북한에 머물렀으나 1958년 3차례에 걸쳐 25만 명이 완전히 철수했다. 북한은 1961년 중국과 상호 방위 협력을 약속하는 북중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다. 소련도, 중국도 또다시 북한이 남진하는 것을 인정할 생각이 없었고 북한은 남진할 능력이 없었다. 북한의 병력은 이후 오랫동안 한국군을 훨씬 밑돌았다. 305)
피에르파올리는 한국전쟁이 미국 국가와 사회에 미친 영향을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학자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대외 정책에서 한국전쟁의 충격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대평가되지 않는다. …… 한국전쟁 이전에는 IMF, 마셜 플랜Marshall Plan, GATT, NATO조차 소련에 대한 군사적 봉쇄보다 경제적, 정치적 봉쇄를 중시했다. 북한의 침입 쇼크와 미국의 한반도 개입 결단은 봉쇄의 군사화로 이어졌고, 미국의 대외 정책에서는 에피소드 식이라도 지속적인 군사화를 가져왔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와 베트남 사태에 결정적으로 개입하게 됐다.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에 대한 군사적 개입도 시작됐다. 1949년 4월 미국은 캐나다, 유럽의 10개국과 함께 북대서양조약에 조인하고 NATO를 만들고 있었다. 서독의 재군비를 촉구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피에르파올리는 한국전쟁이 불러온 공포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던 서독의 재군비, NATO 가입이 가능해졌다고 지적했다. 305-6)
한국전쟁은 말 그대로 스탈린의 전쟁이었다. 스탈린은 크렘린 안에서 한국전쟁 총감독을 맡았다. 그의 지휘하에 소련은 북한군과 중국군에게 대금 지불은 일정 기간 뒤로 미룬 채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는 후방 기지, 병기 생산 공장이 됐다. 게다가 소련 공군은 한반도 상공에서 직접 미국 공군과 전쟁을 했다. 하늘의 전쟁은 전무후무한 미소의 전쟁이었다. 또한 소련은 유럽에서 강해지고 있는 NATO에 맞서 동유럽 국가에 대한 군사 원조, 무기 제공, 소련군 배치에도 새로운 노력을 기울였다. 소련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을 통해 완전히 적을 의식하고, 감지하고, 결정적인 전쟁을 예감하고, 그야말로 완전히 무장한 군사 국가로 변모했다. 다만 이 전쟁은 스탈린의 전쟁, 그 자신의 반미 전쟁이었다. 정권 구성원들, 심지어 국민도 거기서 소외됐다. 이는 스탈린이 정권 구성원 대부분과 대립하고 국민과도 거리를 두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전 전날 밤 스탈린이 사망하자 후계자들은 평화 공존 정책으로 전환했다. 307-9)
미국과 중국의 전쟁은 양국의 “군사, 정치, 경제, 외교의 전면적인 힘겨루기”였는데, 무승부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막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에는 희생이 큰 전쟁이었지만, 미국과 대등하게 싸운 혁명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완전한 위상을 확립했다. 그리고 미군과 싸운 중국인민지원군은 “현대전 단련”을 받아 현대전을 치를 수 있는 정규군으로 성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전쟁에서 많은 것을 얻은 예외적인 승리자였다고 할 수 있다. 내부적으로 중국은 한국전쟁 때의 총력전 경험을 바탕으로 1953년부터 1957년까지 제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농업 협동화 등 소련형 사회주의 변혁을 추진해 국가사회주의 토대를 마련했다.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미국이 타이완해협에 군사적으로 개입한 결과, 중국은 타이완을 무력으로 해방시키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관심이 집중된 사이에 티베트에 군대를 파병했고, 1951년 9월에는 힘을 사용해 티베트를 자치구로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309)
패전 후 일본 국민의 반전, 반군 감정은 강했고 헌법 9조 규정과는 친화적이었다. 그러나 비무장 일본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연합국의 중심인 미국이 중국과 옛 식민지 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인 사태는 헌법 9조의 현실적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시다 총리는 국민 정서를 중시해 전쟁 협력을 주체적으로는 하지 않고, 미 점령군의 명령에는 무제한으로 따른다는 방침에 따라 전 국토를 미군 기지로 제공했다. 그리고 일본은 경무장만 하고, 미일안전보장조약을 맺어 미군에 기지를 제공한 대가로 안전보장을 확보한다는 새로운 평화 국가의 길을 선택했다. 혁신 세력은 국민의 심정을 대변해 헌법 9조를 옹호하고 적극적인 전쟁 협력과 재군비에는 반대했다. 그리고 소련과 중국이 빠진 강화 및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반대했다. 요시다 정부와 혁신적 반대파의 독특한 결합으로 자위 재군비 노선은 배제되고 헌법 9조, 경무장, 미일안보조약이라는 삼위일체 체제가 확립됐다. 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