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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의 설계자들 - 1945년 스탈린과 트루먼, 그리고 일본의 항복 ㅣ 메디치 WEA 총서 8
하세가와 쓰요시 지음, 한승동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머리말 최후를 향한 경쟁
이 책은 태평양전쟁 종결 문제를 미국, 일본, 소련의 3국 관계라는 국제적인 관점에서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것은 서로 연관된 세 가지 서브플롯sub plot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대일對日전쟁을 수행하면서 전개된 스탈린과 트루먼 간의 복잡한 각축이다. 스탈린과 트루먼의 관계는 상호 불신감에 의해 좌우됐다. 양쪽 모두 상대가 얄타밀약을 파기하지 않을까 하는 지독한 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두 번째 서브플롯은 뒤엉킨 일본과 소련 간의 관계 검증이다. 종전에 이르기까지 몇 개월간, 일본 정부는 필사적으로 소련이 중립적 지위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고, 또 그 바탕 위에서 소련의 중재를 통한 전쟁종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소련은 일본 정부의 이런 접근을 이용해 몰래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세 번째 서브플롯은, 일본 정부 내의 화평파와 계전파 사이의 목숨을 건 각축이다. 두 파 간 싸움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국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17-8)
1장 암투의 서막: 3국 관계와 태평양전쟁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과 소련, 미국 세 나라는 기묘한 삼각구도를 이루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소련의 중립이 필요했다. 소련도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 전력을 다하려면 일본의 중립이 필요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과 소련의 관계는 역사가 조지 알렉산더 렌센George Alexander Lensen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기묘한 중립’이었다. 소련은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과 전쟁 상태에 있었고 일본은 소련의 동맹국이면서 독일의 적인 미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의 상선을 이용해 무기대여법에 근거한 무기와 전쟁물자를 태평양을 경유해 수송하고 있었다. 그 무기의 일부는 소련을 통해 중국으로 운반됐다. 일본을 공습한 미국의 많은 비행사가 소련 영토로 몸을 피했다. 일본과 소련 사이에 존재한 중립은 따라서 취약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양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하는 한도 내에서 준수됐으나 그 필요성이 사라지면 바로 파기될 운명이었다. 34-5)
1943년 10월은 태평양전쟁에서 미국과 소련의 협력이 전환점을 맞은 시점이다. 10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외무장관회의는 유럽의 제2전선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는데, 그 회의에서 소련이 처음으로 태평양전쟁에 참가하겠다는 뜻을 암시한 것은 아시아에서 진행되고 있던 전쟁의 귀추와 관련해서도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헐 국무장관은 스탈린이 “동맹국이 독일을 패배시킨 뒤 소련은 일본을 패배시키기 위해 대일 전쟁에 참가하겠다는 뜻을 명확하게, 아무 망설임도 없이” 약속했다며 희희낙락했다. 모스크바 외무장관회의가 끝나자 연합국은 상호협력을 다짐하는 4개국 모스크바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 제5절은 연합국이 서로 협력해서 회원국들과 함께 안전보장의 새로운 시스템이 구축될 때까지 필요에 따라 “회원국 국가들의 이름으로 공동행동을 한다”는 것을 명기했다. 이 조항은 1945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미소 사이에 중요한 쟁점이 된다. 39-40)
1941년 12월의 로좁스키 보고, 1944년 1월의 마이스키 보고, 1944년 7월의 말리크 보고에는 소련의 대일 정책에 관한 공통된 논리가 관철돼 있다. 그것은 안전보장상의 필요성에서 소련이 태평양으로의 출구를 확보하는 것이 제1의 목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남사할린의 반환과 쿠릴열도 점거가 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이들 보고서에서 소련의 영토 요구 원칙은 역사상의 정당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련의 안전보장상의 요청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스탈린 또한 소련의 영토 요구는 역사적 정당성이 아니라 안전보장상의 요청에 따라야 한다는 외교인민위원회 고관의 의견에 찬동했다. 하지만 그는 전쟁을 회피하는 게 유리하다는 의견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이 시의심 가득찬 독재자는 그 영토들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평화조약을 통한 연합국의 동의에 기대는 건 위험하며 무력으로 점거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42)
전쟁은 연합국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스탈린은 참전을 미끼로 동맹국으로부터 얼마나 유리한 조건을 끌어낼 것인지를 궁리하고 있었으며, 미국의 대일 전쟁 작전이 마침내 확정돼가고 있던 그때 일본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도조의 실각은 종전을 모색하는 극비계획의 개시와 때를 같이했다. 8월 말에 요나이 미쓰마사 해군대신은 발병을 구실 삼아 해군성 교육국장 자리에 있던 심복 다카기 소키치 해군소장을 한직인 군령부 출사出仕 겸 해군대학교 연구부 부원으로 강등했다. 해당 조치의 진짜 노림수는 다카기에게 전쟁종결 극비계획을 세우도록 하는 데 있었다. 다카기는 육군성의 마쓰타니 세이松谷誠 대령, 기도 내대신의 비서인 마쓰다이라 야스마사松平康昌, 시게미쓰 외상의 비서관이던 가세 도시카즈加瀨俊一와 긴밀히 연락하면서 종전 공작 입안에 착수했다. 다카기 그룹은 종전으로 가는 유일한 방안은, 최종적으로는 천황의 칙령에 의한 종전 결단을 군과 정부에 강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44)
일본이 종전을 받아들이기 위한 구체적인 조건으로 다카기는 “황실의 안태安泰와 국체의 호지護持”를 가장 중대한 조건으로 들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카기가 ‘황실의 안태’와 ‘국체의 호지’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는 점이다. 황실의 안태가 국체의 호지와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종전 마지막 단계에서 큰 쟁점이 된다는 점을 여기서 유의해야 한다. 다른 조건으로는 민주주의의 실시와 군벌정치 청산, 내정불간섭, 국민의 경제적 생존 보장, 비점령, 전쟁범죄자의 자주적 처리, 동아시아 국가들의 독립 등을 들었다. 다카기는 민주주의의 도입이 국체에 저촉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카기 소키치는 아직 소수이고 또 정리된 주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전쟁종결을 바라는, 잠재적으로는 중요한 그룹을 대표했다. 다카기는 그 단계에서는 국체를 유지하는 최선의 길이 미국과의 교섭에 있다고 믿었다. 일본의 화평론자와 그루로 대표되는 미국의 일본 전문가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46)
얄타에서 3거두회담이 열리고 있던 1945년 2월 14일, 고노에는 천황을 배알하고 상주했다. 고노에는 상주문에서 느닷없이 처음부터 “패전은 유감이지만 아주 빠른 시일 안에 맞게 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아룁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패전은 우리 국체에 손실을 가져다줄 것인데, 영국, 미국의 여론은 아직 국체의 변혁까지 요구하진 않고 있습니다. ··· 따라서 패전 그 자체는 국체상 걱정하실 필요는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체호지 원칙보다 가장 걱정해야 할 일은 패전보다도 패전에 이어 일어날 수 있는 공산혁명입니다.” 고노에는 또 소련이 유럽에서 친소정권 수립을 꾀하고 있는데, 이런 기도가 아시아에서도 추진될 게 분명하며 “소련이 곧 일본의 재생(재건)에 간섭해올 위험이 크다”고 논하면서 좌익분자와 군부 내의 혁신운동이 결합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군을 숙청하고 화평 조건을 다진 뒤 영국, 미국과 교섭해서 전쟁종결을 추진하면서 국체 유지를 꾀한다는 게 고노에의 생각이었다. 53)
2장 새로운 과제: 종전을 향한 공방이 시작되다
1945년 4월 5일 모스크바에서는 몰로토프가 사토 대사에게 소련은 중립조약을 이행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통고했다. 소련 정부는 중립조약에 속박당하지 않고 일본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조약을 즉시 그 자리에서 파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제3조는 조약 기한이 끝나기 1년 전에 한쪽이 다른 쪽에 조약 파기 통고를 하더라도 조약은 만기가 될 때까지 유효하다고 명기돼 있었다. 게다가 조약 파기를 통고한다면 일본이 소련의 의도를 알게 돼 소련에 대해 선제공격을 가해올 위험마저 있었다. 따라서 소련 정부는 파기 통고를 하더라도 일본이 여전히 조약이 유효하다고 믿게 만들어야 했다. 사토 대사는 조약의 제3조 규정을 인용하면서 5년간의 유효기간이 만기가 될 때까지 조약은 유효하다고 응수했다. 대사의 역습에 몰로토프는 앞서 밝힌 입장을 “오해가 있었다”며 뒤집고는, 소련 정부도 제3조에 비춰 조약이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언명했다. 몰로토프는 잠시 ‘전략적 기만’ 방책을 구사했던 것이다. 63-4)
사토는 소련이 “중립조약을 폐기하고 곧바로 대일전에 가담하겠다는 결의를 갖고 있지 않는 한, 단순한 조약 파기는 하나의 ‘제스처’에 그칠 뿐” 미국과 영국은 그로부터 아무런 실질적인 이득도 보지 못하며, 유럽의 분쟁에서 소련이 자기주장을 밀어붙인다면 처음의 우호적 만족감이 실망으로 바뀌어 삼국 간에 마찰을 증대시킬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토는 몰로토프의 발언으로 보건대, 현 상황에서 소련이 대일 관계 단절, 또는 대일 선전포고까지 몰고 가는 일은 없을 것으로 예측했다. 사토 대사가 중립조약 파기 통고 뒤 바로 상신한 분석은 그 뒤 외무성 대소 정책의 골간을 짜는 토대가 됐다. 그것은 소련과 미국, 영국 사이에는 근본적인 이해의 대립이 있고, 그 대립은 소련이 대일 관계를 단절하고 선전포고를 하는 데까지 돌진하지 않는 한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따라서 극동에서도 소련과 미국, 영국 간의 이해 대립을 이용해서 소련의 중립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65-6)
일본의 화평파가 겁을 내면서 전쟁종결 가능성을 찾고 있을 때, 무조건 항복은 재검토돼야 한다는 의견이 트루먼 정권의 최고지도자들 사이에서 제기됐다. 그 선두에 선 이는 포레스털 해군장관이었다. 5월 8일, 예순한 살 생일날 트루먼은 독일 항복 보고를 받았다.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어 독일에 대한 전승을 축하하는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 마지막 부분에 극동에서의 전쟁에 관한 언급이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무조건 항복’에 “육해군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이다. 둘째는 ‘무조건 항복’은 일본 민족의 섬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 위정자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천황제에 대해 트루먼 성명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일본 위정자들은 예민하게도 그 차이에 주목하긴 했지만, 트루먼 성명에 대해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 성명에서는 국체와 천황의 지위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88-90)
그루는 무조건 항복을 수정하자는 캠페인을 집요하게 벌였다. 5월 28일, 그루는 일본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면서 “전쟁 목적에 맞는 근본적인 원칙은 아무것도 희생해선 안 된다는 것”이며, 특히 “일본의 전쟁 수단을 파괴하고, 일본이 다시 이런 수단을 생산할 능력을 파괴한다”는 미국의 목적이 관철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은 최후의 한 사람마저 없어질 때까지 싸움을 계속할 광신적인 민족이다. 따라서 “우리의 원칙과 목적을 어떤 형태로도 희생하지 말고, 일본이 무조건 항복 조건을 받아들여 쉽게 항복하도록 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고 그는 탄원했다. 그루는 천황제의 유지가 아니라 일본인이 선택하는 정치체제를 허용하라고 주장했다. 그는 히로히토를 포함한 천황은 800년에 걸쳐 실제로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며 지금의 천황은 물론 미국에 대해 선전을 포고했으니 책임을 면할 수 없지만, 군의 지배자가 제거된다면 황위를 유지하는 제도는 평화적 일본을 건설하기 위한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100)
스탈린에겐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이 보였다. 무서운 속도로 대일본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사이에 미국한테서는 얄타조약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게다가 미국과 소련이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다는 공통의 방침을 확인하고, 쌍방이 예정돼 있는 3거두회담에서 일본에 대한 공동의 최후통첩에 대해 합의한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스탈린에게는 단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전쟁이 소련이 참가할 때까지 계속될 것인가 하는 우려였다. 스탈린은 나아가 일본이 소련의 참전 전에 항복해버릴지도 모른다며 걱정했다. 미국에 무조건 항복 요구를 관철하도록 장려한 것도 소련이 대일 전쟁 준비를 완료할 때까지 일본이 전쟁을 계속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 동시에 일본이 소련의 참전을 막을 수 있다고 믿도록 일본을 속이려 했다. 스탈린은 일본 쪽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104)
3장 결정의 시간: 전쟁의 길과 평화의 길
6월 초부터 7월 중순까지 1개월 반은 이른바 결정의 시기였다. 도쿄에서는 오키나와의 패전 뒤 화평파가 마침내 소련을 통해 전쟁을 종결할 구체적인 조치를 취했다. 모스크바에서는 국가보안위원회(KGB)와 정치국이 일본과 전쟁을 벌인다는 결정을 내렸다. 워싱턴에서는 태평양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여러 기관이 각기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잠정위원회는 일본에 대해 원폭을 투하하기로 결정했고, 대통령은 일본 본토상륙 작전을 승인했으며, 국무부와 육군부, 해군부 대표자로 구성된 합동위원회는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 원안을 작성했다. 6월 6일, 스팀슨은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최초의 원폭이 일본에 투하될 때까지 소련에는 어떤 정보도 주지 말 것, 그 뒤에는 소련 쪽의 정치적 양보를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이 정보를 주어야 한다고 트루먼에게 조언했다. 트루먼은 자신도 완전히 같은 생각이라면서, 특히 “이것은 폴란드,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만주 문제의 해결에 적합하다”고 대답했다. 109-10)
일본의 화평파가 소련의 알선에 의한 종전 공작을 비밀리에 모색하기로 결정하고 있을 무렵, 트루먼 정권 내부의 유력한 정책결정자들은 일본 내부의 온건파가 조기 종전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무조건 항복 요구를 어떻게든 수정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6월 16일, 그루는 대통령에게 보낸 각서에서 “천황의 지위 보장과 천황 히로히토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게 하겠다는 것, 그것이 일본이 양보할 수 없는 조건일 것”이라고 설명하고, 이런 조건을 명확하게 해서 무조건 항복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 한 일본이 전쟁을 끝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루먼이 무조건 항복 내용을 명확히 밝히자는 권고를 꺼리면서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았던 이유는 대통령 자신에게 진주만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미국의 희생을 최소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요청도 고려해야만 했다. 이 두 가지 요청 사이에서 트루먼은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119-20)
한편, 천황은 어전회의에서 채택된 ‘기본대강’의 결론(본토 결전)과 시시각각 악화되는 전쟁 판세 사이의 모순에 고통스러워했다. 6월 9일 오전, 천황은 만주를 시찰하고 돌아온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의 상주上奏를 받았다. 우메즈의 보고는 만주, 중국에 있는 병력이 여덟 개 사단밖에 안 되고 탄약 보유량은 대회전 1회분 정도밖에 없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천황은 내지(본토)의 부대는 관동군보다 훨씬 더 열악하기 때문에 싸울 수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고 있었다. 같은 날, 기도는 “명예 있는 강화講和”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시안’을 천황에게 설명했다. 천황은 이를 승인하고 즉각 착수하라고 명했다. 6월 12일 국내의 군관구, 부대, 병기창 등을 시찰하고 귀경한 하세가와 기요시 해군대장은 조악한 무기, 무기 부족, 병사들의 훈련 부족을 기탄없이 지적했다. 하세가와 보고는 마침내 천황에게 본토결전을 단념하게 만든 최초의 사인이 됐다. 천황은 ‘일격화평론’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123)
6월 22일, 최고위 여섯 명은 천황을 배알하기 위해 황거로 갔다. 전례 없는 일이었지만 그 어전회의는 의제가 사전에 제시돼 있지 않았다. 천황은 앞선 어전회의의 결정에 따라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시국 수습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했다. 우메즈, 하세가와의 보고를 들은 천황이 화평으로 기울었음을 시사하는 발언이었다.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천황이 직접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소련의 알선을 통해 전쟁종결을 꾀한다는 안이 최고위 여섯 명의 승인을 얻은 뒤 천황은 그 결정을 신속하게 실행에 옮기라고 얘기하고 어소로 들어갔다. 6월 8일에는 전쟁을 끝까지 계속하기로 결정해놓고 6월 22일에는 소련을 중개자로 세워 전쟁종결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화평파는 이제 일본이 종전을 향한 결정적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해석했다. 요나이는 다카기에게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앞으로 2·26사건과 같은 군의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127-8)
일본은 소련의 중개를 통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가세 도시카즈에 따르면, 소련에 대한 접근은 미국, 영국과 교섭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미국, 영국과의 직접 교섭은 군부의 반대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으므로 우회로가 필요했다. 전후의 회고록에서 가세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 또는 그에 가까운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기도가 소련을 통해서 좀 더 “명예로운 평화”를 얻어내려 한 것은 애초에 없는 것을 달라고 생떼를 쓴 거나 같다고 했다. 사토는 가세와는 달리 소련과의 교섭으로는 어떤 긍정적인 결과도 얻어낼 게 없다면서 모스크바에 접근하는 것 자체에 반대했다. 그래도 사토와 가세는 나았다. 도고, 기도, 그리고 천황 자신은 모스크바의 알선을 통해 일본은 무조건 항복 이외의 더 나은 조건, 특히 천황제를 어떻게든 잔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기도 시안의 핵심이기도 했다. 실로 모스크바의 알선은 일본의 위정자들에게 가혹한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게 해준 아편이었다. 132-3)
6월 하순은 소련에도 결정적인 시기였다. 6월 26일과 27일 이틀간 소련공산당 정치국, 정부, 군의 합동회의가 열려 만주의 일본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8월에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참모본부는 3개 전선이 동시에 만주 중부를 겨냥해서 침공하는 작전을 제안했고, 이 작전이 채택됐다. 대일 참전은 이미 스탈린과 스탈린 주변의 소수 지도자들만이 아는 비밀이 아니라 소련 정부, 공산당, 군의 정식 방침으로 승인받았던 것이다. 그 회의에서 군사행동의 작전 범위가 토의됐다. 소련 군사작전의 최대 목적은 얄타밀약에서 약속받은 영토, 즉 만주, 남사할린, 쿠릴열도를 점거하는 데 있었다. 나아가 북부 조선의 점거는 일본군의 도주로를 봉쇄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간주됐다.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렙스키 원수는 국가방위인민위원회 부위원 바실레프 소장이라는 가짜 이름으로 7월 5일에 (러시아 남동부) 치타에 도착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극동의 거대한 전쟁 기계가 작동하려 하고 있었다. 138-9)
4장 전쟁의 분기점: 포츠담에 모인 세 정상
7월 17일의 스탈린-트루먼 회담 내용을 보면 트루먼에게 소련의 참전은 전쟁을 종결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는 아니었고, 오히려 일종의 보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트루먼이 스탈린의 제안을 다이너마이트로 보고, 이에 대해 자신도 다이너마이트를 갖고 있다고 얘기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트루먼은 스탈린을 맹우盟友로서 대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항복이라는 목표에 누가 먼저 도달하는지를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소련이 일본을 8월 중반에 공격할 의도를 트루먼이 환영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스탈린은 도쿄와 모스크바 사이에는 어떤 거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미국과 중국을 앞질러 일본과 소련이 뒷거래를 할 가능성을 부정했다. 이는 트루먼과 번스가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바이기도 하다. 외교 요소가 배제됨으로써 문제는 간단해졌다. 8월 15일이라는, 스탈린이 얘기한 공격 일시는 미국의 정책결정자에게 하나의 확실한 시간을 제시한 셈이 됐다. 164)
만일 소련이 전쟁을 개시하기 전에 일본을 항복시킬 필요가 있다면 공격은 그 전에 이뤄져야 한다. 유일한 불확정적 요소는 원폭이었다. 트루먼에겐 원폭을 대소 외교의 무기로 사용할 의도는 없었다는 역사가의 주장이 있지만, 거꾸로 소련 요소가 트루먼의 원폭투하 결정과 무관했다고 논하기는 지극히 곤란하다. 소련의 전쟁 개시 일시를 알았던 트루먼은 소련이 전쟁에 참가하기 전인 8월 초에 원폭을 투하하는 것이 지상명령이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스탈린은 트루먼과의 첫 회담에서 소련 참전 계획을 털어놨을까? 가장 개연성이 큰 답은, 스탈린이 너무 서두르고 있었다는 해석이다. 스탈린은 미국, 영국으로부터 전쟁에 참가해달라는 권유를 받아내야만 했다. 스탈린은 얄타에서 루스벨트가 그랬던 것처럼 포츠담에 온 트루먼도 소련의 참전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행동했다. 그는 트루먼이 소련의 참전을 되도록 막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164-5)
원폭은 일본에 대해 8월 첫 주에 실전에 사용될 것이었다. 트루먼은 소련이 8월 중순에 전쟁을 개시할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으므로 원폭은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투하해야 한다. 하지만 트루먼은 원폭을 투하하기 전에 일본에 대해 최후통첩을 ‘발사’해야만 했다. 그 시기는 7월 25일부터 8월 1일까지의 짧은 시간이었다. 트루먼이 “빠르게 진행된 일정에 몹시 기뻐했다”는 것도 그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 배경에는 타이밍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며, 모든 것이 트루먼과 번스가 작성한 시간표대로 움직였다. 일본이 포츠담선언이라는 형태로 발표된 최후통첩을 거부했기 때문에 트루먼이 어쩔 수 없이 원폭투하를 결정했다는 설이 있다. 이는 전후에 트루먼과 스팀슨 자신들이 주장해서 미국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이지만 역사적 사실에 반하는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원폭투하 결정은 포츠담선언이 발표되기 이전에 이뤄졌으며, 오히려 포츠담선언이 원폭투하를 정당화하기 위해 발표됐다. 180-1)
7월 24일, 트루먼은 포츠담선언의 최종적인 원문을 승인하면서 이를 헐리 대사에게 전보로 보내 일각도 지체하지 말고 장제스의 서명을 받도록 훈령을 내렸다. 처칠은 25일 런던을 출발하기 전에 이미 트루먼에게 승인하겠다고 했다. 26일 저녁 트루먼은 장제스의 승인을 받았다. 오후 7시에 “모든 일본 군대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으나 천황의 운명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포츠담선언 사본이 기자단에 전달됐다. 포츠담선언이 발표될 때까지 소련은 이를 까맣게 몰랐다. 일본 정부는 포츠담선언에 스탈린의 서명이 없다는 사실에 맨 먼저 주목했다. 그 때문에 일본 정부는 포츠담선언을 수락해서 항복하기보다 소련의 중개를 통해 전쟁을 종결하겠다는 종래의 정책을 지속했다. 스탈린이 필사적으로 공동선언에 참가하려던 시도는 비참한 실패로 끝났으나, 그 실패가 오히려 일본이 한층 더 소련의 알선을 믿고 의지하는 정책을 계속하게 만든, 굴러온 호박과 같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189-91)
7월 2일에 시작돼 포츠담회담 직전까지 계속 이어졌음에도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포츠담회담 뒤에 재개된 중소 교섭은 미소 양국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7월 23일 트루먼은 헐리 대사를 통해 장제스에게 “얄타밀약의 이행”을 권고했다. 7월 28일에는 중국이 얄타밀약에서 결정된 조항에서 벗어나는 조약을 체결하려는 데에 대해 경고했다. 트루먼과 번스의 중국 정부에 대한 집요한 압력은 얼핏 보기엔 두 사람이 얄타밀약에 집착했다는 쪽으로 해석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얄타밀약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이에 저항하려는 중국 정부에 억지로 합의하도록 강요한 배후에는 트루먼과 번스의 숨겨진 동기가 있었다. 트루먼과 번스는 중국 정부가 완강하게 얄타조약의 중국 관련 조항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중소의 의견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해 트루먼과 번스는 중소 교섭을 재개하게 해서 시간을 벌면서 원폭이 투하될 때까지 소련의 참전을 늦추는 책략을 꾸몄던 것이다. 204-6)
5장 원자폭탄과 소련의 참전
8월 7일의 <프라우다>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에 대해 아무것도 보도하지 않았다. 8월 8일에 비로소 4면 마지막 단에 트루먼의 성명을 논평을 붙여서 소개했다. <프라우다>의 침묵은 소련의 지도자가 원폭투하 소식에 충격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미국의 원폭투하는 소련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됐다. 먼저 그것은 소련의 참전 이전에 소련을 빼놓고 일본을 항복케 하려는 의도라고 스탈린은 해석했다. 다음에 그것은 원폭이라는 무서운 채찍을 손에 들고 소련을 외교정책으로 굴복시키려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원폭투하 뉴스를 들은 스탈린은 곧 행동을 개시했다. 먼저 스탈린은 바실렙스키에게 공격 개시 일시를 48시간 앞당겨 8월 9일 0시(자바이칼 시간, 모스크바 시간으로는 8월 8일 오후 6시)로 설정하라고 명령했다. 스탈린은 또 7일 오후 10시에 중국 대표단과의 교섭을 시작할 것이라고 통고했다. 중국 대표단은 도착 뒤 첫 회담까지 겨우 몇 시간의 여유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서두르고 있었다. 225-6)
8월 7일의 스탈린-쑹쯔원 교섭은 스탈린의 대일 접근에서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외몽고, 뤼순, 다롄에서의 특별한 권익을 스탈린이 집요하게 주장한 이유는 일본이 전쟁 뒤 다시 일어나 소련에 위협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대가는 당연히 소련에 주어져야 하는 것인데, 다만 얄타조약에서 정한 중국과의 조약 체결이라는 선결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그 대가를 희생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스탈린은 소련이 만주에 진격하더라도 미국과 중국은 그 행동을 얄타조약에 대한 위반이라고 항의하진 않을 것이라고 최종적으로 판단했다. 미국과 중국은 소련의 만주 공격을 탓하다가는 소련이 국민당 정부를 중국 유일의 정통 정부로 지지하는 자세를 바꿔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따라서 소련이 만주 깊숙이 공격해 들어간다 하더라도 미국도, 중국도 이를 탓하지 못하고 결국 소련의 군사행동을 승인할 것이라 생각한 스탈린의 판단은 정확했다. 228)
8월 9일 이른 아침, 외무성의 수뇌 4인(도고, 마쓰모토, 안도, 시부사와)은 아자부 히로오에 있는 도고의 사택에 모였다. 외무성 수뇌는 즉각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전쟁을 종결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데에 동의했다. 그리고 포츠담선언 수락에 대해서는 황실의 안태라는 단 하나의 조건만을 내걸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천황에 대한 연합국의 반감을 고려해서 이 조건을 조건으로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포츠담선언 수락은 황실의 지위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이해 아래”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기로 했다. 도고가 포츠담선언 수락으로 전쟁을 종결하려고 여러 방면으로 사전 조정을 하고 있을 때, 천황도 종전의 때가 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날 일본 지도자들의 행동을 보면 소련 참전이 화평파에 미친 영향은 원폭의 영향보다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이 참전하고 나서 비로소 화평파 지도자들은 포츠담선언 수락을 기초로 해서 전쟁을 종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236-8)
8월 9일 오전 11시 2분(일본 시간)에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황거 내 어문고에서 오후 4시 35분부터 5시 20분까지 진행된 기도와 천황의 회담은 일본이 항복 쪽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과정에서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진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천황이 오후 3시가 지날 때까지는 포츠담선언 수락에 네 가지 조건을 붙이는 쪽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이 회담 뒤에 한 가지 조건으로 의견을 바꾼 사실은 분명하다. 증거는 없으나 기도가 세 가지 조건을 철회하고 한 가지 조건만으로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자고 제안한 것에 대해 천황이 저항 의향을 표시했을 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 또 천황이 실제로 정책을 결정하는 ‘성단’에 의한 종전 방식에 주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천황은 시게미쓰와 기도가 주장하는 논리에 동의했다. 아마도 그 방식이야말로 국체를 호지할 유일한 수단임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249)
# 네 가지 조건 : 천황제, 무장해제, 전쟁범죄자, 보장점령(휴전이나 항복 조건의 이행을 강제하기 위해 상대국의 영토 일부 혹은 전부를 점령하는 것. 포츠담선언 7항에 일본 영토의 보장점령에 관한 조항이 있다.)
어전회의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곧바로 회의를 최고전쟁지도회의로 바꿔 열고 천황의 성단을 승인하는 결의를 했다. 천황은 자신의 의사를 정부가 받아들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10일 오전 3시에 각의가 다시 열렸고, 천황의 성단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때 아나미는 스즈키와 요나이에게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그 조건이란, 만일 연합국이 천황의 국가통치 대권을 인정하는 조건을 거부한다면 그들도 전쟁 계속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 조건이 국체의 호지와 밀접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스즈키와 요나이는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들 자신이 광의의 국체 정의를 인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메즈는 오전 3시에 참모본부로 돌아가 가와베에게 어전회의 결과를 알려주었다. 천황의 군에 대한 공격은 우메즈와 가와베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천황이 군을 버린 것이다. 전날의 의기충천한 기술과는 대조적으로 이날의 가와베는 일기에 “오호, 만사휴의”라고 썼다. 258)
# 만사휴의萬事休矣, 모든 일이 끝났다는 뜻으로 가망 없는 절망을 가리키는 표현.
6장 일본의 무조건 항복 수락
8월 10일 오전 7시 30분, 미국의 단파방송은 <도메이 통신>으로부터 모스 부호를 수신했다. 이는 일본 정부의 정식 회답은 아니었지만 트루먼이 원폭투하일로부터 애타게 기다리던 정보였다. 번스는 벤저민 코언, 두먼, 밸런타인과 함께 일본 정부에 보낼 회답 초안을 작성했다. 밸런타인과 두먼은 항복문서에 천황의 서명이 필요하다는 원안에 반대했으나 번스는 그 반대의견을 거부했다. 대통령은 일본의 조건부 회답에 대해 그것은 천황이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교묘한 속임수라면서 어떤 양보도 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번스 회답의 주요한 내용은 1항과 4항에 담겨 있었다. 1항은 “항복한 때로부터 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 권한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에 종속된다”고 돼 있었고, 4항은 “궁극적인 일본의 국가체제는 일본 국민이 자유롭게 표명한 의사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라고 돼 있었다. 번스 회답은 천황의 지위 유지를 배제하지 않았으나 천황과 황실의 운명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263, 266-7)
미소의 일본 점령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소련에 보낸 번스 회답은 “항복한 때로부터 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 권한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에게 종속된다”고 규정했다. “연합국 최고사령관”이라는 명칭은 잘 선택된 표현이었다. 포레스털에 따르면, “대통령과 국무장관은 미국이 이 특별한 과제를 자기 손에 쥐고, 독일에서 우리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공동책임이라는 형태를 명확하게 피하기 위해 ‘최고사령부’가 아니라 ‘최고사령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소련 정부는 연합국 최고사령관에 복수의 사령관을 임명하자고 제안하면서, 미국 정부의 의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해리먼은 곧바로 그 제안은 “완전히 논외의 문제”라며 일축했다. 이후 페트로프는 스탈린이 몰로토프의 제안에 들어 있던 “합의한다”는 표현을 “협의한다”로 바꾸고 싶다고 전했다. 해리먼은 이 수정안도 단호하게 거부했다. 소련 정부는 물러섰다. 번스 회답은 영국, 중국, 소련의 승인을 받았다. 273-4)
두 번째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국내 사정과 세계 현상을 생각하면 더 이상 전쟁을 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체에 대해서 번스 회답은 “악의를 가지고 쓴 것이 아니라 요는 국민 전체의 신념과 각오의 문제이니만큼 이쯤에서 저쪽의 회답을 수락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천황은 삼국간섭 때 메이지 천황의 고충을 떠올리는 듯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장래의 회복을 기대하려 한다”고 했으며, 또 그 결정이 그때까지 전장에서 전사하고 내지에서도 전상을 당하고, 전재를 당한 국민, 특히 육해군 장병들을 동요시킬지 모른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스스로 마이크 앞에 서서 국민에게 호소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참례했던 참석자들은 모두 울었다. 스즈키가 일어나 성단을 내려달라며 번거롭게 한 것을 사죄하고 천황의 퇴석을 권했다. 훌쩍이고 또 통곡하는 가운데 천황은 자리를 물러났다. 종전의 성단이 내려졌다. 8월 14일 정오였다. 288-9)
8월 15일 오전 7시 21분에 일본방송협회의 아나운서가 천황이 12시에 직접 국민에게 성명을 낭독할 것이라고 전했다. 황후궁 사무소에 감춰져 있던 녹음반은 11시 전에 방송국에 도착했다. 정오에 내지의 국민과 외지의 일본인 및 군대가 라디오 앞에 모여들었다. 기미가요가 연주된 뒤 천황의 육성이 종전조서를 낭독했다. 워싱턴 시간으로 8월 14일 오후 3시에 번스는 도쿄에서 베를린으로 보낸 일본 정부의 포츠담선언 수락 전보의 암호해독문을 받았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4시 5분에 번스는 베른에서 걸려온 전화를 통해 일본 정부의 정식 회답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번스는 곧 베빈, 해리먼, 헐리에게 연락해서 7시에, 4개국 수도에서 동시에 일본 항복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자고 제안했다. 6시에 워싱턴의 소련대사관에서도 소련 정부가 일본의 항복을 알리는 정식 회답을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천황의 포츠담선언 수락은 스탈린이 일본에 대해 새로운 공격을 개시하는 단초가 됐다. 297-9)
7장 8월의 폭풍: 일본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바실렙스키는 8월 14일 천황 성명은 단지 무조건 항복의 일반적 선언이며, 일본군에게 군사행동을 중지하라고 한 명령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일본군에 대한 공격작전을 계속하라”고 명했다. 소련의 군사행동은 미국 정부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소련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으로 확인된 만주와 남사할린에 대해서는 이미 체념하고 있었으나, 다롄과 조선 남부, 쿠릴, 북중국 등의 전략적인 지역에 대한 귀속은 여전히 중요한 관심사였다. 미국 정부의 과제는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다는 가장 중대한 목표를 이들 전략적 지역에 대한 소련의 팽창과 균형을 취하면서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천황이 8월 15일 종전조서를 라디오로 방송했다고는 하나 일본군이 항복하려면 대본영이 휴전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 그러나 휴전 명령은 8월 17일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그 이틀간의 지연이 소련군에게는 얄타에서 약속받은 영토를 물리적 지배하에 둔다는 극동에서의 군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절호의 구실을 제공했다. 303)
얄타조약은 소련의 참전 대가로 쿠릴이 소련에 ‘인도된다’고 규정했으나, 그 쿠릴에 대한 엄밀한 정의는 내려져 있지 않았다. 포츠담회담 당시 공동군사회의에서 소련 참모본부와 미국의 통합참모본부는 쿠릴열도가 북단의 4개 섬을 제외하고 미국의 군사행동 범위라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소련은 오호츠크해를 공동 군사행동 범위로 인정받음으로써 쿠릴에 관여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스탈린은 쿠릴 작전을 수행할 때 미국이 어떻게 반응할지 살피면서 동시에 되도록 신속하게 점거해야 하는 미묘한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일본의 제5방면군이 쿠릴의 북쪽 끝 섬들의 방위가 홋카이도와 혼슈의 방위를 위해 불가결한 것으로 봤듯이, 소련의 지도자도 이들 섬을 점거하는 것이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출입구를 확보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항복 직전의 일본 상황을 보고 틀림없이 즉시 쿠릴 작전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308-9)
# 쿠릴열도에 대한 소련군의 점령작전은 9월 2일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뒤에도 5일까지 이어졌다. 그리하여 미군이 한반도에 처음 상륙한 9월 8일, 소련은 미국과 합의한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38도선 이북의 한반도 북부를 비롯한 모든 점령 예정지에 대한 작전을 이미 완료한 뒤였다.
스탈린은 연합국 최고사령관은 단 한 사람이며, 그가 맥아더라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했으나 소련이 점거한 영토에서 맥아더의 권위를 인정할 의사는 갖고 있지 않았다. 8월 15일, 맥아더는 모스크바의 딘을 통해 소련 참모본부에 점령지역에서 “일본군에 대한 공격적 행동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훈령’을 보냈다. 맥아더의 도를 넘은 명령은 즉각 안토노프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안토노프는 16일 딘에게 답했다. 〈극동의 일본군에 대해 소련군이 군사행동을 계속할지 중지할지는 소련군 총사령관만이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다.〉 헐은 안토노프가 회답에서 미소 간의 오해를 지적한 부분을 인정했다. 통합참모본부는 소련과 분쟁이 일어나는 걸 바라지 않았다. 마셜은 맥아더와 딘 두 사람에게 맥아더의 첫 훈령을 발송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으며 그것은 훈령이 아니라 단지 정보로서 보낸 것이라는 결정을 전달했다. 이 건에서만큼은 소련이 짖어대자 미국이 뒤로 물러났던 것이다. 314)
그러나 미국 지도자들은 쿠릴보다 만주와 조선에서 소련의 군사행동 쪽을 걱정하고 있었다. 8월 10일부터 11일에 걸친 회의 결과 본스틸과 딘 러스크 소령에게 조선에서 미소 군사행동 범위를 결정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매클로이는 두 사람에게 미군이 도달 가능한 범위 내에서 “될 수 있는 한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벽에 걸려 있던 작은 극동 지도를 보면서 본스틸은 미군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보다는 좀 더 북쪽이지만, 북위 38도선이 서울을 남쪽에 두고 대체로 조선을 양분한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경계선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8월 15일, 트루먼은 애틀리, 스탈린, 장제스에게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해, 또한 지방에서의 군사충돌을 피하기 위해 아시아 대륙 해안지역에 해군과 공군을 사용하겠다”고 통고했다. 그 통고는 일반명령 1호에서 규정된 경계선을 넘어 중국, 만주,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 대륙의 해안선에서 군사행동을 취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316)
미국 정부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소련의 만주 점령으로 소련군과 중국공산당 세력이 협력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해리먼은 스탈린이 “옌안(延安, 중국공산당)과 몽골 인민공화국을 몰래 부추겨서 장제스와 미국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그 토대 위에서 “소련이 점령한 만주와 조선에 우호적인 독립국을 수립”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미국의 우려와 달리 스탈린은 중국의 국내문제에 간섭할 의도가 없었다. 스탈린은 국민당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정통정부로 인정했다. 8월 18일에 스탈린이 만주의 소련군 사령관에게 명한 것은, 장제스가 임명한 중국 관헌이 국민당의 국기를 내거는 것을 인정하고, 국민당의 질서 회복 노력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명령은 소련군이 확보한 모든 식량, 연료, 무기, 자동차, 기타 재산은 소련군에 속한다는 지시도 담고 있었다. 스탈린 입장에서 보면, 중국은 아직 사회주의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지 않았고, 따라서 가능한 한 착취해야 할 대상이었다. 325-6)
맺음말 가지 않은 길
전후 일본에서 쇼와昭和 천황은 일본 국가와 일본 국민을 구한 구세주로 여겨져왔다. 일본의 종전에 천황이 수행한 역할은 확실히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종결지어 일본 국가를 구하고 국민을 구하는 것이 천황의 뜻이었다는 주장은 천황제를 구하기 위해 천황의 자기희생 정신을 강조한, 기도를 비롯한 이들의 의식적인 증언이었다. 고노에도 그랬고 황실 가운데서도, 또는 그루처럼 천황제 유지를 옹호한 미국의 일본 전문가 사이에서도 쇼와 천황은 ‘쇼와’가 의미하는 계몽적인 평화와는 거리가 멀며, 동란으로 가득 찬 쇼와의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전쟁종결 뒤에 퇴위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아나미의 자결이 일본제국 육군의 죽음을 의미한 것처럼 쇼와 천황의 퇴위는 쇼와 시대와의 단호한 결별에 보탬이 됐을 것이다. 쇼와 천황이 퇴위하지 않고 그 지위에 머문 것은 일본의 전쟁책임을 모호하게 만들고 일본이 과거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방해한 커다란 요인이 됐다. 3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