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3 - 근대의 절정, 혁명의 시대를 산 사람들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3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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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적, 악당들의 반자본주의 유토피아


"근대 초기의 해적은 국가로부터 약탈허가증Letter of Marque을 받아 적국의 선박을 공격하는 민간업자들이었다. 공식 해군만으로는 광대한 바다를 통제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적선을 공격하는 임무를 민간업자에게 맡긴 것이다. 16세기부터 등장한 이런 부류의 해적을 특히 '사략선privateer 업자'라 부른다."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식민지와 교역 거점 들을 선점한 에스파냐·포르투갈과 그 뒤를 쫓는 잉글랜드·프랑스·네덜란드 사이에 무자비한 충돌이 발생했다. 특히 카리브해는 해적이 자주 출몰하는 위험 지역이었다. 아메리카의 은을 수송하는 '보물선'이 오가고, 플랜테이션의 발달로 큰 부를 쌓은 이 지역에 잉글랜드인, 네덜란드인 혹은 그 외의 다국적·다인종의 폭력 집단들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가했다. 이때의 해적 집단을 버커니어buccaneer라고 불렀다. 다음 단계로 가면 해적의 성격도 변질되어 세계의 바다를 오가며 아무 상선이나 무차별적인 약탈을 일삼는 무법자 해적으로 변모한다."(20-2)


"해적들은 기존 사회의 법 밖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엄격한 규율이 필요했다.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를 이루고 새로운 신념에 근거해서 살아갔다. 그들이 지키려 한 주요 가치는 '평등주의'였으며, 특이한 방식의 '민주주의'를 지켜나갔다. 바솔로뮤 로버츠의 해적 선원들이 작성한 해적 규약에 따르면 중요한 사안은 선장의 독단적 판단이 아니라 모든 승무원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었다. 경제적 관점에서 본다면, 해적들은 그들 나름대로 '도덕경제moral economy'를 좇았고 이를 '민주적'으로 실천했다. 수익은 정해진 규약에 따라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다. 분배 원칙은, 말하자면 그들이 합의한 노동가치설이다. 약탈한 물품을 나누는 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른 자는 무인도에 버리거나 사형에 처했다. 도둑이 도둑질하는 것을 용납지 않는다고나할까. 또한 그들 스스로 보상 제도도 마련했다. 신체 부위별로 상해에 따른 보상이 이루어졌고, 과부의 몫도 따로 정해져 있었다."(44-5)


2 표트르 대제, 새로운 러시아를 건설하다


"표트르는 국가 구조 전반을 개혁하고자 했다. 개혁의 모델은 이전에 방문했던 네덜란드와 영국이었다. 그가 보기에 이 두 나라는 신을 두려워하고 부지런히 실업에 힘쓰며, 특히 항해와 제조업으로 부를 축적하고, 도시 문명, 해외 개척, 기술 발전이 강점인 나라였다. 반면 표트르는 허세와 과시를 싫어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717년에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본 베르사유였다. 우선, 표트르는 정치 조직을 일신했다. 전국을 구베르니야로 불리는 주로 나누었는데, 그 수는 처음에 여덟 개였다가 열한 개로 늘었다. 그리고 표트르 자신이 해외 전쟁에 참여할 때 국정을 맡을 원로원을 창설했다. 원로원과 주 사이를 연결하는 조직이 콜레기야Collegia라는 기관이었다. 과거에는 형식상 차르가 전권을 행사했지만 정책 결정과 집행은 종교 의례를 연상시키는 정교한 궁정 의식에 묶여 있었다. 그런데 표트르의 과감한 국정 개혁으로 전문 관료제가 도입되었고, 러시아는 강력한 절대주의 국가로 발전해나갔다."(86)


"그동안 막강한 지위와 특권을 누려온 세습 귀족인 보야르 가문은 무너져갔다. 새 귀족은 '봉사 귀족'으로 변모했다. 국가에 대한 봉사가 귀족 신분의 기준이 된 것이다. 이제 귀족은 놀고먹는 게 아니라 약 16세부터 죽을 때까지 국가를 위해 복무해야 했다."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의 처지도 갈수록 어려워졌다. 특히 전쟁 상황에서 징병과 조세 부담의 몫은 고스란히 농민들에게 돌아갔다. 또 지주 귀족들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귀족이 자기 소유 농민을 가족 단위로 팔고 살 수 있도록 한 칙령도 반포되었다. 결과적으로, 농민들에 대한 귀족의 지배가 강화되고, 그 귀족들을 국가에 복속시켜나갔던 것이다. 또한 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종교 기관의 수도 감축했다. 표트르가 볼 때 수사는 '게으른 인간들'이었다. 그러니 그냥 놀지 말고 아픈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독려했다. 러시아 교회의 수장 자리인 총대주교직을 비워둔 채 새로운 관료조직인 페트르부르크 종교회의가 교회를 이끌도록 했다."(86-8)


3 마리 앙투아네트, 구체제의 마지막 왕비인가 최초의 근대적 왕비인가


"18세기 중반 유럽의 국제 정세는 급변했다. 수백 년간 적대관계였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동맹으로 변모하는 극적인 '외교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로서는 영국이, 오스트리아로서는 프로이센이 더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양국은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프랑스 왕태자와 오스트리아 황녀의 결혼을 추진했다. 프랑스 왕비의 후보자는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루이와 앙투아네트의 결혼은 차근차근 추진되었다. 1769년 앙투아네트 초상화가 프랑스 궁정으로 보내졌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와 왕실 의례 등을 미리 가르치기 위해 베르몽 신부를 파견했다. 예비신부를 만나보고 프랑스어와 독일어 모두 한심한 수준이라는 것을 확인했지만, 1년 동안 '집중 훈련'을 통해 프랑스어 실력은 많이 나아졌다. 베르몽은 그녀를 관찰한 비밀 보고서를 프랑스 궁정에 보냈는데, 핵심 내용은 간단명료했다. 〈마담 앙투안은 쾌활하며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99-102)


"결혼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정치적 결정이었다. (루이 16세 처형 이후) 그녀의 사형을 주장한 사람은 급진좌파 의원인 자크 에베르였다. 프랑스 함대가 적에게 패배하자 에베르는 혁명의 분위기를 확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나는 앙투아네트의 머리를 약속했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그녀의 죽음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더구나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던 강경파 의원 장 폴 마라가 코르데라는 여성에게 살해당한 이후 혁명의 분위기는 여성 혐오로 돌아섰다. 과거 잔인했던 여성 지배자의 악행들을 거론하며 이를 앙투아네트와 비교했다. 1793년 10월 14일 앙투아네트는 혁명재판소에 출두했다." "재판에서 전반적으로 얻어내려 한 것은 '카페 루이의 나약한 성격을 지배한 앙투아네트의 사악한 주도권'이라는 주장이었다. 무엇보다 외국 세력과 은밀히 내통하며 프랑스의 안정을 교란하려 했는지를 따졌다." "마침내 10월 16일 12시 15분, '인민의 면도날' 단두대에서 처형된 왕비의 머리가 군중에게 공개되었다."(131-3)


4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불꽃인가 어둠의 심연인가


"1792년 8월 10일, 파리의 각 구區 대표들이 시 청사에 모여 '봉기 코뮌'을 결성했다. 로베스피에르는 피크 구 의회에 참석해 코뮌의 대표로 지명되었다." "민중 세력이 본격적으로 권력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예전에(1791년 5월 10일) 로베스피에르는 언론의 자유는 무제한 허용해야 한다고 연설한 바 있지만, 왕당파 신문들은 폐간했다. 전시중이라 예외적으로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로베스피에르는 반혁명 범법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민중재판소 설치를 강행했다." "9월 2일, 베르됭 함락 소식이 전해졌다. 애국적 흥분 상태에 휩싸인 군중은 감옥으로 달려가 사제, 수녀, 귀족 혹은 반혁명과는 별 관련 없는 좀도둑, 창녀 등을 끌어내서 즉결 처형했다(9월학살). 물론 로베스피에르가 이 일을 지시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 그 같은 논조의 연설을 했고, 과격한 현상에 대해 유감을 표했을 뿐 전반적으로는 반대하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는 냉혹한 정치 지도자로 변모해갔다."(158-60)


"상퀼로트는 물 만난 고기처럼 힘을 행사했다. 1793년 9월, 상퀼로트는 다시 한 번 국민공회에 난입하여 의원들을 압박했다. 당시 국민공회 의장이었던 로베스피에르는 시위대의 의견을 청취했다. 시위대는 혁명재판소 재조직, 반혁명 혐의자 체포, 혁명군 창설, 혁명위원회 정화, 식량공급 안정 정책 시행 등을 요구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것을 받아들여 법제화하기로 했다. 폭력이 합법화된 것이다." "며칠 동안 공포정치 법령들이 제정되었다. 9월 17일, 반혁명 혐의자 단속에 관한 법이 가결되었다. 혁명 정부는 '혐의자'를 폭넓게 해석해 혁명에 반대하는 혐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체포할 수 있었다. 10월에는 〈프랑스 임시 정부는 평화가 도래할 때까지 혁명적〉이라 선언하고 공안위원회에 전시 비상조치권을 부여했다. 상퀼로트는 무장 민병대를 조직하여 지방으로 가서 군대와 도시민을 위한 보급품을 징발하고 반혁명분자들을 척결했다. 혁명은 끝 모르게 과격해졌다."(165-6)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에 대한 책임을 모두 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정부의 수뇌가 아니라 위원회의 일원일 뿐이었다.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한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 더 잔인하고 냉혹했다. 이들은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한 후 공포정치를 계속하려 했지만, 분위기가 급변했다. 사람들이 끔찍한 공포정치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테르미도르의 반동'(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 끝에 처형된 사건) 이후 의원들은 말을 바꾸었다.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지지자들만 테러리스트였다고 정리해버린 것이다. 그 결과 로베스피에르가 폭력의 아이콘이 되었고, 홀로 악당의 오명을 뒤집어썼다. 혁명은 이후 혼란의 단계로 접어든다. 왕당파가 백색테러를 자행하기도 했고, 급진적인 당파가 무장봉기를 통해 국가권력을 탈취하여 혁명 독재를 이루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혁명이 불러일으킨 힘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일거에 상황을 정리하고 주도권을 잡은 것은 군대였다."(175)


5 모차르트, 혁명을 예감한 천재 예술가


"평생 모차르트의 음악을 즐겨 들었던 아인슈타인은 이런 분석을 한 바 있다. 1784년 12월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19번(K.459)은 전적으로 청중의 취향에 맞춘 작품으로, 기교가 넘치고 허세가 가득한 곡이다. 그런데 두 달이 채 안 되어 모차르트는 그런 식으로 아부하는 곡이 싫다는 듯 전혀 다른 양식의 피아노 협주곡 20번(K.466)을 작곡했다. 당시에는 이 곡이 〈지나치게 앞서나갔고, 빈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요구를 했으며,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청중의 사랑이 자신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확실한 성공을 보장하는 작품들을 계속 작곡함으로써 사랑을 다시 얻으려 했다.〉 그래서 나온 곡들이 피아노 협주곡 22~23번(K.482, 488)이라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분석이다. 이처럼 모차르트는 '자신을 위한 창조'를 주장했다가 다시 물러서기를 반복했지만, 그것은 자기 예술 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해가는 하나의 과정이었다."(194-5)


"18세기, 세계는 변화하고 있었다. 억압과 굴종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으려는 계몽주의 흐름에 모차르트는 공감했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갈망했고 혁명을 예감했다. 그 배경에는 빈에서 만난 지식인들의 영향이 컸다. 예컨대 빈 대학교수 요제프 폰 존넨펠스는 사법개혁을 주도하고 고문 폐지 운동을 벌인 인물이다. 모차르트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공화국, 인권, 관용, 해방, 교육 등 여러 개념을 접했다. 그는 철학자는 아니지만 세상 변화의 큰 흐름을 감지하고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하려 했다. 그 내용은 다소 어설펐지만 예민한 감수성으로 예리하게 표현했다. 이런 점들은 오페라 작품들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첫 번째 문제작이 〈피가로의 결혼〉이다. 피에르 보마르세 원작의 희곡은 루소, 볼테르와 함께 프랑스 혁명을 예비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당대 유럽 사회의 봉건성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두 번째 문제작 〈돈 조반니〉에서 하인 레포렐로가 처음 하는 말은 〈더는 굴종의 삶을 살지 않겠다〉이다."(204-5)


6 볼리바르, 남아메리카의 해방자인가 독재자인가


"남아메리카는 다인종 사회로 심각한 인종 문제를 안고 있었다. 크리오요가 지배 엘리트층을 구성하고, 피지배 계층으로 혼혈인과 흑인 노예들이 있었다. 에스파냐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으려는 주 계층은 크리오요였으며, 혼혈인이나 흑인 노예들은 독립 문제의 당사자도 못 되었다. 식민 모국과 거래해야만 하는 강제 규정과 과도한 세금 등으로 피해를 보는 계층은 식민지 지배층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닌술라레스(본국에서 온 에스파냐인)' 장교들은 현지의 크리오요를 경멸하고 억압했다. 사실 페닌술라레스들 중에는 고위 관료와 성직자도 있었지만 모험가나 군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본국에서 빛을 보지 못하다가 남아메리카에 와서는 보상 심리로 거들먹거리곤 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독립운동의 주체는 식민지 엘리트 계층인 크리오요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볼리바르는 독립운동의 지평을 확대해갔고, 점차 거대한 피지배층이 움직이기 시작했다."(232-3)


"더 이상 인종 문제를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한 볼리바르는 1815~1816년 이후 혼혈인들을 충원하기 시작했다. 혼혈인들 역시 볼리바르 편에 서서 기회를 얻으려 했다. 더 나아가 흑인 노예들에게도 해방을 약속했는데, 다만 군에 입대하면 해방시켜준다는 조건을 달았다. 여기에 활로 무장한 인디언 병사들까지 합류하면서 다양한 인종의 병사들로 구성된 '해방군Ejercito libertador'을 조직했다. 하지만 그가 흑인 노예들에게 약속한 해방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예를 소유한 농장주들로서는 재산을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었으므로 이 조치에 거세게 반대했고, 흑인 노예들로서는 목숨을 걸면서까지 크리오요의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남아메리카에서의 노예 해방은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문제, 즉 지역 경제에서 노예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노예 노동이 중요한 지역일수록 노예제가 더 오래 지속되었다. 베네수엘라는 1854년에야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다."(233-4)


"1821년 벌어진 카라보보 전투는 남아메리카 해방의 마지막 문턱이었다. 애국파를 이끌고 전투에서 승리한 볼리바르는 정식으로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쟁취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과제는 자신이 제안한 정치 구상, 곧 '그란 콜롬비아'의 헌법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헌법은 이상적이지만은 않았다. 남아메리카 전역을 하나로 통합해 볼리바르가 종신 대통령을 맡고, 게다가 그 후임도 볼리바르가 지명할 수 있다는 내용이 문제였다." "물론 모든 것을 볼리바르 개인의 욕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좋게 해석하면 그는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거대한 꿈과 미래를 갖고 있었다. 민족의 자주성을 유지하면서 모두가 연합하여 더 큰 힘을 확립하자는 것이었다. 미국처럼 강력한 정치체를 만들어야 유럽 혹은 북아메리카 세력과 맞설 수 있고, 지방 카우디요들의 준동을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남아메리카의 실상은 이 같은 이상주의가 뿌리내리기에는 척박했다. 각 지방마다 원하는 바가 달랐기 때문이다."(241-2)


# 카우디요caudillo : 지방에 할거하는 무장 토호土豪 세력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과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스스로를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 생각하는 카우디요들이 사방에 넘쳐났다. 독립전쟁의 영웅인 산탄데르와 파에스도 서로 갈등을 빚었다. 지역주의가 득세하면서 그란 콜롬비아는 거의 붕괴 직전이었다. 산적한 사회 문제 역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828년 볼리바르는 이렇게 탄식했다. 〈우리 발밑에 거대한 화산이 있다. 도대체 누가 억압받는 아래층을 누를 수 있단 말인가. 노예들은 멍에를 벗어버리려 할 테고, 각각의 인종 집단도 자신들이 지배자가 되려 한다.〉" "산탄데르는 '파렴치한 베네수엘라인'들을 비난하며 끝내 독립을 선언했고, 누에바그라나다는 지금의 콜롬비아가 되었다. 상 페루 역시 페루로 돌아가려 했다. '그란 콜롬비아'라는 볼리바르의 야심 찬 구상은 산산조각 났고, 그 틈을 이용해 반대 세력이 치고 나왔다." "볼리바르는 탄식했다. 〈우리가 얻은 것은 독립뿐이다. 그것을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을 대가로 치렀다.〉"(247-8)


7 와트와 아크라이트, 산업혁명의 영웅들


"증기기관이 발전해온 역사를 보다 보면, 마치 이것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가장 중요한 동력원이 되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증기기관이 나오고 나서도 상당한 기간 동안 여전히 수력과 풍력이 동력원으로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고, 특히 물레방아가 증기기관보다 더 성능이 우수했다. 증기기관이 물레방아를 완전히 뛰어넘은 시점은 19세기 중반이다." "발명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확산과 전파다. 증기기관의 효율성이 개선되었다는 것은 연료로 사용하는 석탄의 양이 줄었음을 의미한다. 초기 증기기관이 주로 탄광에서 사용된 이유는 물을 끓여 증기를 만드는 데 엄청난 석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석탄이 많이 나는 영국에서만 유용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영국만큼 석탄 매장량이 풍부하지 않은 탓에 이 발명품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데 점차 증기기관이 개선되어 적은 양의 석탄으로도 충분한 동력을 얻게 되자 전 유럽으로, 더 나아가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268-9)


"면공업은 크게 두 과정으로 나뉜다. 면화에서 실을 잣는 것과 이 실로 천을 짜는 과정이다(실을 잣는 과정을 방적 혹은 정방이라 하고, 천을 짜는 과정을 직조 혹은 방직이라 한다)." "방적과 직조의 기계화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물론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실과 직물의 값이 떨어진다. 그리고 품질이 개선된다. 사실 18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영국에서 생산된 면직물은 여전히 인도산 면직물의 품질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기계화가 이루어지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같은 중량의 섬유로 실을 만들 때 여러 번 섬유를 꼬면 더 튼튼한 실을 만들 수 있다. 이처럼 실의 강도를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는 기계의 발명으로 가늘고 튼튼한 실을 생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직물의 품질도 좋아졌다. 뮬 방적기가 발명되면서 고급 직물의 직조가 가능해졌다." "18세기 후반 약 50년 동안 면공업은 가격을 기준으로 볼 때 1,000배나 성장했다. 영국의 면 수출업자들은 곧 세계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273, 289-90)


8 나폴레옹, 시대를 파괴하고 모순 속에 살다간 황제


"나폴레옹은 혁명으로 어수선해진 프랑스를 바로잡기 위해 평화와 질서를 주장했지만 통치 스타일은 독재였다. 의사결정을 하기 전에 전문가들을 불러서 의견을 청취했는데, 상대편이 지칠 때까지 묻고 또 물었다. 일단 결정을 내린 후에는 거침없이 집행했다. 그의 지시를 게을리하거나 실수하는 경우 불같이 화를 내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집무실에서 그는 마치 링 위의 권투선수처럼 장관들에게 소리치며 구석으로 몰아붙였다(비유가 아니라 실제 그렇게 했다). 하도 소리를 크게 질러서 비서들은 귀가 멀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또한 나폴레옹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경찰 조직을 강화하고, 많은 스파이를 동원해 국민을 감시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가톨릭 사제들이 강론에서 나폴레옹이 거둔 승리를 칭찬한다는 말을 듣자 그런 행위를 금지했다. '승리에 대해 거론하게 내버려두면 실패에 대해서도 거론할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307-8)


"독재는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선전과 여론몰이도 잘 해야 한다. 나폴레옹은 언론을 감시하고, 연극의 결말을 바꾸게 하는가 하면, 자신이 익명으로 기사를 쓰기도 했다. 체제를 미화하고 선전하기 위한 예술품도 대량으로 제작했다." "나폴레옹은 스스로를 메디치나 루이 14세처럼 예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지배자로 여겼다. 심지어 자신을 태양신 아폴론이나 이집트 신 혹은 신에게 보호받는 파라오 같은 상징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다비드, 제리코, 그로, 제라르 같은 화가들은 대작을 제작하는 데 나폴레옹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건축 부문에서 큰 성과를 냈다. 오스테를리츠 다리, 퐁데자르 다리, 예나교 등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을 건설하고, 파리 곳곳에 분수를 설치하고, 거리 장식들을 세련되게 개선했다. 그의 시대에 건축된 공간들은 장대한 균형미를 특징으로 한다. 콩코르드 광장이 대표적 예다. 오늘날 아름다운 파리의 명성은 나폴레옹의 공로가 매우 크다."(308-10)


"나폴레옹은 정말 군사의 천재였을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해왔고, 후대의 장군들도 그러한 나폴레옹을 흠모했다. 나폴레옹의 전술은 사실 단순했다. 가능한 한 최대의 전력을 집중해 적의 중심을 깨트려 저항 의지를 꺽어놓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영토 정복 같은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한 가지만 본다. 적의 몸통! 그것을 깨면 부차적인 문제는 저절로 정리된다.〉 이런 전술의 실상은 무엇일까? 엄청난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주 재앙에 가까운 희생을 치렀다. 예컨대 1813년 6~9월 에스파냐와 독일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군 15만 명이 사망했고,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도 7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피해에 버금간다. 그런데도 나폴레옹은 군사 천재로 칭송받고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들은 악당 취급을 받는다. 나폴레옹은 천재라기보다는 단지 다른 사람들의 희생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뿐이다."(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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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2 - 근대의 빛과 그림자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2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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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카트린 드 메디시스, 프랑스 흑역사의 주인공


"도그마에 집착하지 않았던 카트린은 신교도들에게 정치적 관용을 허락하는 내용의 생 제르맹 칙령을 반포했다(1562). '소위 새로운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여, 공개된 장소가 아닌 실내에서 예배를 보는 것은 허락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이 칙령을 공식화하려면 파리 고등법원에 등록해야 하는데, 이 기관을 가톨릭 세력이 장악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오히려 그런 사실을 접한 가톨릭 측의 공분을 샀다.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푸아시 콜로키움이 개최되고 몇 달 후 드디어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다. 가톨릭 측에 의한 신교도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기즈 가문의 지도자인 프랑수아 공의 군사가 샹파뉴의 바시라는 작은 도시를 지나가다가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던 수십 명의 신교도를 발견하고 살해한 것이다. 그전에 신교도들이 기즈 공을 비난했던 게 화근이었다. '바시 학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을 대개 첫 번째 종교전쟁으로 본다."(32-3)


# 1572년 8월 24일, 〈생 바르텔레미 학살〉 발생


"1589년 나바르의 앙리(앙리 4세)는 법률상으로 국왕이 되었지만 국민 대다수가 그를 완강히 거부한 탓에 파리 입성을 호시탐탐 노리며 근교를 배회했다." "그가 선택한 최후의 결정타는 자신의 개종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도인 데 반해 신교도 왕이라는 게 힘들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어쨌든 국왕은 승리를 거두고 일단 평화를 되찾았다. 이제 신교도들은 어찌 될 것인가? 이 문제를 수습한 것이 1598년 반포된 낭트 칙령이다. 이 칙령은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이되 신교도들은 예배의 자유를 누리며, 그들의 신변을 보장하기 위해 왕국 내 일부 신교도시들을 안전지대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신·구교 모두 이 칙령에 대해 불만이 컸지만, 그렇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앙리 4세는 카트린의 정책을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국왕이 된 후 선정을 펼쳐 프랑스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국왕이 된 앙리 4세도 결국 가톨릭 광신도에게 암살당했다."(53-4)


2장 침묵공 빌렘, 네덜란드 독립의 영웅


"정치적인 면에서 네덜란드는 아직 중세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노력은 얼마든지 찬성하지만 나라 전체를 방어하기 위해 협력한다는 개념은 없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넘어 전국 단위로 사고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바야흐로 근대국가로 발전해 나아가려던 이 시기에 진정 필요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고 지지하는 '전국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바로 빌렘이었다." "그가 설파한 것은 국왕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평화였다. 즉, '가톨릭' 강요에 저항해 '신교'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가톨릭만 강요하는 '편협성'에 저항해 '관용'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네덜란드 총독) 마르가레트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만일 평화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엄청난 사태가 일어날 거라고 경고했다. 불행하게도 상황은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펠리페 2세에게는 빌렘과 같은 사고의 유연성이 없었다. 신교에 대한 용인은 비겁한 짓이며, 이단은 확실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73-4)


"1581년 전국의회는 '철회령'을 공표했다. 그 내용은 각 주의 위원회가 주권을 가지며 주의 통치자는 주에서 부여한 권한만을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펠리페 2세에 대한 충성 서약을 철회하고 그것을 네덜란드 연맹에 대한 충성 서약으로 대체한다고 선언했다. 신민이 자기들까리 협의하여 국왕에게 '이제부터 당신은 우리의 지배자가 아니니 우리의 충성을 철회하노라'고 선언한다는 것은 역사상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 문건의 주요 내용들은 나중에 미국 독립선언의 본보기가 되었다." "한편 네덜란드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결정적인 순간에 민중 세력이 오라녀 가문을 열렬히 찾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파냐는 오라녀 공 빌렘을 배신자로 규정하고 그를 처치하기로 결정했다. 1584년에 발타자르 제라르라는 프랑슈-콩테 출신의 가톨릭 광신도가 빌렘을 암살했다. 빌렘은 세계 최초로 총으로 암살된 정치인이 되었으니, 말하자면 암살도 점차 근대화되고 있었다."(89-90)


3장 갈릴레오 갈릴레이, 우주의 실체를 파고든 불굴의 과학자


"1604년 10월 15일, 밤하늘에 새로운 별이 나타났다. 현대의 용어로 말하면 초신성이 발견된 것이다. 사실 1572년에도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가 같은 현상을 확인했었다. 이 현상은 고전적인 우주 모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체는 변하지 않는 완벽한 물질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어떤 변화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새로운 천체는 어디서 보더라도 시차視差, parallax(관측 위치에 따른 물체의 위치나 방향의 차이)가 없었다. 이 말은 곧 그 현상이 달과 같은 가까운 곳이 아니라 머나먼 우주에서 일어났다는 의미며,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제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의 낙하운동만이 아니라 우주의 현상에 대해서도 막연한 추론이 아닌 실제 관찰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광활하고 먼 우주 공간을 맨눈으로 본들 얼마나 관찰하겠는가. 바로 이때 등장한 결정적 도구가 망원경이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이용해 처음으로 우주의 속살을 들여다본 인간이 되었다."(104-5)


"갈릴레오는 1625~1630년에 걸쳐 쓴 《밀물과 썰물에 관한 대화》에서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만큼이나 그럴듯하다는 설명을 제시했다. 이로 인해 1633년에 열린 종교재판에서 이단 판정을 받은 그는 일곱 명의 재판관들 앞에 무릎을 꿇고 지동설이라는 이단의 주장을 편 것을 철회한다는 참회의 말을 했다." "갈릴레오는 종신형 판결을 받았으나 감옥 대신 그의 친구이자 시에나 대주교인 아스카니오 피콜로미니의 집에서 머물도록 허락해주었다. 대주교는 그에게 호의적이었으며, 가끔 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과의 만남을 주선해주었다. 1633년 12월 종교재판소는 갈릴레오에게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판시했다. 말하자면 가택연금으로 최종 결정난 것이다." "갈릴레오는 생의 마지막 시기까지 자신이 어느 누구보다 독실한 신자라고 주장했다.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과학과 종교는 표면적으로 모순되어 보이나 사실은 같은 진리의 두 측면이라는 게 그가 줄곧 견지한 태도였다."(126, 129)


4장 독일의 악마들, 마녀사냥 이야기


"악마론에 정통했던 프리드리히 푀르너는 역사 연구에 매진한 후 매우 특이한 결론을 내렸다. 사악한 마법을 옹호하고 또 마녀 색출을 방해하는 중요한 세력이 신교도라는 것이다. 루터파와 칼뱅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아 사방에서 악마의 추종자들이 날뛰고 있으며, 갈수록 그 위험이 더 커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마녀사냥을 가톨릭과 신교 간의 싸움이라는 프레임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바는 하나의 적을 깨부수면 곧 그보다 더 사악한 적이 등장하여 지금의 정점에 이른다는 것이다. 지금이 신과 악마 사이에 마지막 대결이 펼쳐지는 최후 단계다. 그러니 시 당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맡긴 사명에 따라 세상을 파괴하는 암흑의 세력들을 척결하는 데에 주저 없이 나서야 한다. 마녀는 말세에 인간 사회를 파괴하고 인류의 구원을 저해하는 악마의 편이며, 더 이상 우리 같은 부류의 인간이 아니다. 이같은 주장은 가공할 고문과 처형이 인류의 구원이라는 최고의 가치와 맞물려 정당화되었다."(155-6)


"마녀사냥이 종식된 결정적 계기는 사법개혁이었다. 마녀재판도 엄연히 사법재판의 한 종류다. 그러니 더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재판 제도가 자리 잡으면 마녀재판이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고문에 의한 자백을 비판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프리드리히 슈페는 고문을 비판하는 책 《범죄의 담보》를 익명으로 출판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런 힘의 흐름을 이어받아 결정적으로 마녀재판을 끝장낸 동력은 근대 국가의 발전에서 나왔다. 예컨대 파리 고등법원은 지방법원에서 마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의 항소심에서 형을 감면하거나 아예 무죄판결을 내렸다. 무지몽매하거나 광기에 찬 지방 권력자가 저급한 수준의 사법 제도를 악용해 극단적 힘을 행사하려 할 때, 이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은 전국 단위의 사법 제도를 운영하는 국가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훨씬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발전해가는 중앙의 사법 제도가 지방의 사법 제도를 통제하면서 마녀사냥의 광기도 수드러들었다."(165-7)


5장 루이 14세, 세상을 암울하게 만든 태양왕


"(마자랭 혹은 콜베르 같은) '재정가financier'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사적인 방식으로 조달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부르주아, 귀족, 성직자 등 지방 유지들에게서 거액을 모아 국가에 융통해주었다. 중앙정부로서는 세금을 거두는 게 워낙 힘든 상황에서 당장 거액을 확보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그 대신 재정가들은 국가로부터 세금을 거둘 권리를 부여받아 빌려준 돈보다 더 큰 액수의 돈을 거둠으로써 고수익을 얻었다. 국가재정 체계를 이용한 짭짤한 돈벌이였다. 행정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관료제가 정착된 듯했지만, 실제로는 사당私黨 혹은 파벌 싸움에 좌우되었다." "권력자는 자신의 부하들을 지켜주고 부하들은 권력자에게 충성을 바친다. 국사國事의 중요한 부분이 이런 사적 관계망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절대주의 국가 체제는 표면적으로는 국왕이 나라 전체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고 지방의 신민들이 철저히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호 협력과 균형을 특징으로 지녔다."(181)


"루이 14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1664년부터 일부 지방에서 귀족 조사 사업을 시작했고, 곧 이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자신이 진짜 귀족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귀족의 서열과 작위를 체계화했다. 왕실 직계가족이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그다음은 방계가족, 그다음은 공작 등의 순으로 서열화했다." "이렇게 해서 국왕과 귀족의 관계가 새로이 정립되었다. 국왕의 인증을 받아야 진짜 귀족이고, 국왕의 재정에 기꺼이 돈을 대면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으며, 국왕이 거주하는 궁정에 줄을 대면 고위직을 얻게 된다. 모두 국왕을 흠모하고 국왕의 은총을 갈구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태양왕을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되어갔다. 누구나 태양왕이 거처하는 베르사유궁으로 가서 한 자리 잡고 한 줄기 햇빛을 쬐고 싶어 했다. 그곳에서 국왕은 지상 최고의 권력자처럼 행세하고, 입궐을 허락받은 귀족은 그런 국왕을 마치 신처럼 떠받는 척했다. 베르사유궁은 절대주의를 표현하는 종합 예술 무대였다."(186-7)


"점차 통치에 자신감이 붙은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 17일,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 내용의 퐁텐블로 칙령을 공포했다. 남아 있던 신교 교회를 파괴하고, 신교 예배를 금지했다. 목사들에게는 15일 내에 국외로 떠나라고 명령했고, 이를 위반하면 갤리선에 태워 노를 젓게 했다. 목사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변호사 자격증을 주는 유인책도 썼다. 신교도들이 재산을 해외로 이전하는 것도 금지했다. 해외로 가되 재산은 남겨놓고 떠나라는 것이다. 이런 극심한 압박을 견디다 못해 랑그도크, 푸아투, 베아른 등지에서 신교도들이 가톨릭으로 집단 개종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85만 명 정도(당시 프랑스 인구 2,200만 명 중 3.8퍼센트)였던 신교도들 중 많은 수가 신교 국가로 이주했다. 특히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로 많이 갔고, 그다음으로는 스위스와 브란덴부르크 등지로 이주해갔다. 이것이 프랑스 경제를 결정적으로 망친 요인이라고 하면 지나친 속단이겠으나, 큰 피해를 입힌 것은 분명하다."(198-9)


6장 레오폴트 1세와 카를로스 2세,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 지도를 바꾸다


"1683년 오스만군은 베오그라드를 거쳐 빈을 침공했다. 남부 오스트리아는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가공할 대군이 밀려오는 것을 본 레오폴트 황제는 멀리 파사우로 몸을 피했다. 결과적으로 황제가 몸을 피한 건 잘한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 교황 인노첸시오 11세가 주도하여 주변 국가들이 참전을 결정했다. 폴란드의 소비에스키가 2만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왔고, 그 밖에 작센, 바이에른, 바덴 등도 참여했다. 훗날 신성동맹이라 불리는 연합군 전원이 말을 타고 돌진한 역사상 최대의 기병 공격으로 오스만군이 무너졌다." "결정적 패배를 겪은 후에도 오스만 제국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공격했다. 이 시기에 동유럽 지역은 유럽과 오스만 제국이 군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격렬하게 싸우는 격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이 몇 차례에 걸쳐 유럽에 패배한 걸 보면, 군사적으로 정점을 지나 쇠락기로 접어들었음이 분명하다. 이후 중동부 유럽은 점차 합스부르크의 세력하에 들어갔다."(229-32)


"1700년 11월 1일,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에스파냐에서 합스부르크 왕조가 끝나고 부르봉 왕조가 들어섰다. 이제 합스부르크 세력은 유럽 전체를 제국의 영토로 만들겠다는 중세적 꿈을 영원히 포기해야 했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유럽 지역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서쪽의 유럽 중심부로 확대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남동쪽으로 세를 키워갔다. 합스부르크가 헝가리와 슬라보니아를 차지하고, 베네치아는 달마티아와 펠로폰네소스를, 폴란드는 포돌리아를 회복했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얻은 땅이 합쳐지면서 신성로마제국의 규모는 두 배가 되었다. 합스부르크의 핵심 지역은 이제 서쪽의 콘스탄츠 호수에서 동쪽의 군사 변경 지역까지 거의 500킬로미터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엇보다 종교적 다양성이 커졌다. 루터파 작센인, 유대인, 칼뱅파 헝가리인, 정교 세르비아인과 루마니아인이 신성로마제국 안에 공존했고, 또 보스니아와 트라키아에 학살에서 살아남은 상당수의 무슬림이 남았다."(246) 


7장 베르니니, 영원의 도시 로마를 조각한 예술가


"1623년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 우르바노 8세로 즉위하여, 베르니니에게 교황청 예술 활동을 총괄하는 책무를 맡겼다. 베르니니는 1629년 성 베드로 성당 건축 총감독으로 임명되어 성당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종교개혁으로 신·구교 간 갈등이 극심하자, 가톨릭 측은 자체의 개혁('가톨릭 종교개혁' 혹은 예전 용어를 빌리면 '반동 종교개혁')을 통해 스스로 교리와 조직을 정비했고, 17세기에 이르면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한 상태였다. 바로크 미술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의미를 부여하여 '이단(신교)'이 패배하고 가톨릭이 승리했다고 선언하고 이를 장대하게 확인하는 예술이다. 여기에서 신교와 가톨릭 예배 장소의 본질적 차이가 드러난다. 신교의 경우 원칙적으로 기도와 설교의 공간이어서 별다른 장식 없이 단순하다. 반면에 가톨릭은 천상의 세계를 재현해보이려는 듯 지극히 화려한 장식을 자랑한다. 17세기 로마는 바로크 예술의 중심지였고, 그 선두에 베르니니가 있었다."(259-61)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북유럽을 호령했다. 그의 치세에 스웨덴은 유럽의 강국으로 우뚝 섰다. 그런데 크리스티나가 다섯 살 때 부왕이 전사하여 그녀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어서, 여장부 스타일인 크리스티나는 14세부터 각료회의에 참석하더니, 18세에 섭정을 끝내고 정식으로 즉위했다. 정치와 외교를 직접 관장하는 한편 외국의 학자, 예술가, 작가 들을 불러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중 한 명이 데카르트다. 그러던 그녀가 27세에 갑자기 양위를 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비밀이 하나 있으니 그녀가 비밀리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사실이다. 유럽 최강의 신교 국가 여왕이었던 크리스티나의 양위는 개인적인 결정이지만 로마에서는 이를 가톨릭 신앙의 승리로 해석했다."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로마에 온 크리스티나는 많은 예술가를 후원했다. 그중에는 스카를라티와 코렐리 같은 음악인들도 있지만, 이들보다 더 사랑은 받은 이는 베르니니였다."(277-9)


8장 존 로, 탐욕과 부패의 거품을 일으키다


"1715년 루이 14세가 사망했다. 루이 14세가 남긴 유산은 참담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다 보니 프랑스 재정은 문자 그대로 파산 상태였다. 프랑스 정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보자는 심경으로 존 로를 불러들였다." "그의 사업의 핵심 요소는 두 가지다. 첫째, 그가 늘 견지해온 생각대로 토지를 담보로 화폐를 발행하는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다. 금고 안에 보관한 귀금속의 가치만큼 화폐를 발행하면 너무 제한적이다. 화폐량을 늘리려면 다른 재원이 필요한데, 가장 적절한 것은 바로 토지다. 다만 예전 주장과 다른 점은 국내 토지가 아니라 해외 토지를 개발하여 담보로 삼자는 것이다. 그가 찾아낸 것은 앙투안 크로자라는 사람이 설립했다가 현재는 지지부진한 루이지애나 회사였다. 1717년 9월 5일, 존 로는 북미 지역의 토지 개발에 관한 특권과 캐나다 비버 가죽 거래의 특권을 가진 이 회사를 인수했다. 일명 '서양회사Compagnie d'Occident'라고 했는데 세간에서는 '미시시피 회사Mississippi Company'라고 불렀다."(297-9)


"두 번째는 국채를 주식으로 전환하여 회사의 자본금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존 로의 혁신적이면서 동시에 사기성 높은 아이디어가 빛나기 시작한다. 한 주에 500리브르인 주식 20만 주를 발행하여 1억 리브르의 자본금을 모으되, 투자자들은 현찰이 아니라 정부 채권으로만 이 주식을 구입할 수 있도록 규정했고, 회사는 투자자들에게 액면가의 4퍼센트 이익을 보장했다. 당시 국채는 액면가의 약 30퍼센트로 거래되고 있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액면가 100만 원이던 국채가 '똥값'이 되어 실제 시세는 30만 원밖에 안 되는데, 이것으로 새로 설립하는 회사 주식을 사면 100만 원 제값을 다 쳐주고, 게다가 매년 4만 원의 이익까지 보장한다! 사람들은 귀가 솔깃했다. 울화통 터지는 국채를 하루빨리 처분하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국채 소유자들이 대거 주식으로 갈아탔고, 그 결과 루이 15세 정부가 갚아야 할 부채의  20퍼센트가 정리되었다. 여기까지는 모든 일이 잘되었다."(299-300)


"존 로는 거침없이 사업 규모를 확대해갔다. (동인도와 서인도 지역 회사를 합병한) 소위 '인도회사'는 1719년 6월에 두 번째 주식 발행을 했다. 한 주당 500리브르의 주 5만 주를 10퍼센트 프리미엄을 붙여 모집했다. 이번에는 1차 모집 때와 달리 채권이 아니라 금이나 은행권으로만 투자할 수 있었고, 게다가 매우 특이한 투자 방식을 규정했다. 미시시피 회사 주식 100단위를 산 사람이 새 회사 25단위의 주식 매입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어머니' 회사의 4주를 가지면 '딸' 회사의 한 주를 살 수 있다. 욕심에 눈먼 투자자들은 기꺼이 '어머니'와 '딸'에 투자했다." "더구나 주식 매입 대금을 20개월에 걸쳐 분할하여 지불할 수 있도록 조치했기 때문에, 소액만 가지고 주식 매매에 뛰어든 사람도 많았다. 주가가 오르자 투자자들은 큰 수익을 올렸다." "프랑스뿐 아니라 스위스, 함부르크,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사람들도 투기에 뛰어들었다. 버블은 국제적인 성격을 띠어갔다."(305-6)


"마침내 버블이 터졌다. 주식을 팔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주식 가치와 화폐 가치가 동시에 급락했다. 1720년 7월에 왕립은행에서 은행권을 정화로 상환할 수 없게 되자, 파리에서 민중들이 들고일어났다. 비비엔 거리에 위치한 은행 앞에 1만 5,000명이 운집하여 시위를 벌이다가 10여 명이 압사하는 일도 있었다. 11월에 지폐 유통이 중단되었고, 투자자들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특히 단기 투기 수익을 노리고 '단타 매매'를 하느라 회사 명부에 이름이 등재되지 않은 사람들은 주식을 몰수당했다." "존 로 체제의 실패는 많은 투자자의 돈을 날린 단기간의 피해로 끝난 게 아니다. 프랑스인들은 주식이니 은행이니 하는 것에 공포감을 갖게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오랫동은 금융 제도의 발달을 지연시킴으로써 경제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쳤다. 은행과 주식 제도 없이 어떻게 경제가 발달할 수 있는가. 사회·경제 전체가 신용을 잃었으니 경제성장에 이보다 더 큰 악재는 없었다."(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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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 중세에서 근대의 별을 본 사람들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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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잔 다르크, 성녀인가 마녀인가


"1430년 5월 23일, 콩피에뉴 전투에서 사로잡힌 잔 다르크는 매우 불리한 법정 싸움을 해야 했다. 잔다르크는 스스로 자신이 이단과 마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피고는 신의 은총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중세 신학에 어두운 우리야 언뜻 문제의 성격조차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실은 웬만한 신학자라도 쉽게 답할 수 없는 난제다. 만일 자신이 신의 은총 안에 있다고 답하면 종교적 오만의 죄에 걸려 이단 판정을 받는다. 신학적으로 누구도 자신의 영적 상태를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답하면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자백하는 것이 된다. 잔 다르크는 여기에 말려들지 않고 그야말로 멋진 신의 한 수를 보였다. 〈만일 내가 신의 은총 안에 있지 않다면 신께서 내게 은총을 내려 주소서. 만일 내가 신의 은총 안에 있다면 계속 그 상태로 남게 해 주소서.〉 이 대답을 듣고 재판정 전체가 〈지극히 놀랐다multum stupefacti〉라고 기록하고 있다."(44-6)


"잉글랜드는 샤를 7세가 이단으로 화형 당한 여자에게 이끌려 대관식을 치렀으니 정당성이 없다고 주장하며 1431년 12월 16일 10세의 헨리 6세를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 데리고 가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프랑스 쪽으로 기운 뒤였다. 1435년 아라스 조약에 따라 부르고뉴는 잉글랜드 대신 프랑스 왕실과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군은 1437년 파리, 1449년 루앙을 회복했고, 1453년 백년전쟁을 종결지었다." "백년전쟁이 끝난 뒤 잔 다르크의 복권 작업이 이루어졌다. 1456년 재심 재판을 하여 잔 다르크가 이단이라는 이전 판결을 뒤집었다. 첫 번째 재판이 정치적이었듯이 이번 재판도 당연히 정치적이었다. 마녀의 도움으로 프랑스 왕이 대관식을 치렀다고 할 수야 없지 않은가. 19세기에 이르러 민족주의가 불타오르면서 프랑스 교회가 잔 다르크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런 노력이 20세기에 결실을 거두어 1920년 5월 9일 교황 베네딕트 15세가 잔 다르크를 성인으로 축성했다."(50-1)


2장 부르고뉴 공작들, 유럽판 무협지


"백년전쟁 당시 3대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오가면서 변화무쌍한 정치와 외교를 벌였다. 책략의 대가인 선량공은 1435년에 잉글랜드에서 프랑스 왕실로 동맹을 바꿔 아라스 조약을 맺고 국왕에게 파리를 내주었다. 그는 샤를 7세를 프랑스 국왕으로 공식 인정하고 그 대신 샤를 7세는 (선량공 필리프의 아버지인) 용맹공 장의 암살자들을 처벌하기로 약속했다. 필리프는 프랑스 왕실과 다투기보다는 네덜란드 방면으로 영지를 확대하는 것이 더 긴급한 문제라고 판단했다. 백년전쟁은 프랑스에 유리하게 마무리되었다. 국왕이 정치력을 되찾고 군대를 정비하면서 그동안 내내 패배를 당했던 프랑스군이 도시를 하나하나 탈환해갔다.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서남부의 가스코뉴 지역을 상실한 후 이를 되찾기 위해 벌인 카스티용 전투(1453)가 사실상 백년전쟁의 마지막 전투였다. 잉글랜드는 이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대륙 내 영토를 소유하고 지배하겠다는 꿈을 사실상 접어야 했다."(75)


"왕이 되기를 욕망했던 4대 부르고뉴 공작 담대공 샤를의 문제는 자신의 영토들이 분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결정적인 과제는 로렌 지방을 차지하는 일이었다." "샤를은 1475년 한때 로렌 공작령의 수도인 낭시를 얻었지만 다음 해에 스위스로 진군했다가 스위스군에 연이어 패배했다. 우선 그랑송에서 패배하여 대포와 거대한 재산(그중에는 은으로 만든 욕조도 포함되어 있다)을 버리고 도주했다. 다시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뮈르텐(모라)을 공격했으나, 로렌의 기병과 스위스 보병에게 또 패배했다. 그해 10월에는 낭시를 다시 잃었다. 4대 선친부터 꿈꿔왔고 샤를 자신으로서도 필생의 과업인 영토 통합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낭시를 차지해야만 했기에 겨울 혹한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강행군하여 낭시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것이 마침내 파국을 몰고왔다. 1477년 1월 5일 낭시 전투에서 패배했고 그는 목숨을 잃었다. 독립왕국을 건설하려던 부르고뉴 가문의 4대에 걸친 야심은 이로써 종말을 고했다."(86-7)


3장 카를 5세, 세계제국을 꿈꾸다


"카를은 친할아버지가 황제이니 합스부르크 왕실이 소유한 중동부 유럽의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게 되고, 친할머니는 부르고뉴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부르고뉴의 마리)여서 유럽 중심부의 알짜배기 땅들을 받게 된다. 외가 쪽으로는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가 외조부모이므로 카스티야와 아라곤, 그리고 광대한 아메리카 식민지를 물려받는다. 이 모든 유산이 한 인물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는 로마 제국을 넘어서는 세계 제국 건설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자면 우선 프랑스를 복속시켜야 한다. 물론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도 차지해야 한다. 내부적으로는 루터파 등 신교 세력을 억압하여 가톨릭 제국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그러고 나서 힘을 모아 기독교 신앙의 적인 오스만 제국을 누르고, 더 나아가서 아메리카와 필리핀의 식민지를 굳건히 한 뒤 나머지 세계를 마저 복속시켜야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꿈인가. 그리고 얼마나 허황된 계획인가."(99-100, 109)


"신은 카를 황제에게 행복한 결말을 약속하지는 않은 것 같다. 1550년 새 교황 율리우스 3세는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이탈리아 문제도 다시 혼란에 빠졌다. 독일에서는 루터파에 대한 호의가 늘어나던 반면에 카를의 아들 펠리페 2세에 대한 저항은 커져갔다. 프랑스의 앙리 2세가 로렌 쪽으로, 오스만 제국의 육군은 크로아티아 방면으로, 해군은 이탈리아 연안으로 공격해왔다. 카를 5세는 마지막 힘을 모아 메스를 공격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운명의 여신도 여자야. 늙은이는 좋아하지 않는다네.' 그는 이렇게 자조했다. 이제 그의 나날은 확실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종교적 타협안도, 신·구교 양측이 모두 반대해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어정쩡한 타협에 이르는 데 그쳤다. 각 지역 영주가 가톨릭이든 루터파든 하나를 정하면 그곳 신민들은 영주의 종교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가톨릭을 옹호하겠다는 황제의 평생의 종교정책 역시 최종적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127-8)


4장 헨리 8세, 근대 영국을 출범시킨 호색한


"치세 전반기의 헨리는 '르네상스 군주'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예술과 문예를 보호하고, 여러 악기 연주에 능했으며, 용맹한 기사를 자처하며 직접 전쟁에 참여했다." "헨리의 대외 정책은 유럽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대립이 근대 유럽의 국제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축인데, 이때 잉글랜드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이처럼 강대국 사이를 오가며 균형을 맞추는 것이 영국 정책의 큰 흐름이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는 그야말로 견원지간이었다. 헨리는 처음에는 카를 5세 편을 들었으나, 파비아 전투(1525)에서 프랑수아 1세가 포로가 되고 전세가 신성로마제국 쪽으로 기울어지자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 그 후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나자(1527) 이번에는 교황을 편들고 나섰다. 이 마지막 일은 균형외교 정책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신상 문제도 고려한 결과였다."(141-3, 148)


# 헨리 8세의 신상 문제 : 헨리는 1528년부터 아들을 낳지 못하는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재혼하려 했으나 교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자신이 직접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수장령首長令, 1534년)이 되어 성공회를 만든다.


"영국사에서 헨리 8세만큼 국왕 개인의 존재가 결정적 비중을 차지한 인물은 흔치 않을 것이다.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은 루이 14세보다도 헨리 8세에게 더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실제로 루이 14세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우선 국왕 자신이 엄청난 위엄을 과시했다. 국왕은 토머스 울지 추기경이나 토머스 크롬웰처럼 강력한 재상을 앞세우고 주요 인사들을 소집해 조언을 들었지만, 모든 중요한 결정은 최종적으로 자신이 내렸다. 결과적으로 헨리 8세의 노력 덕분에 잉글랜드는 침략과 종교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튜더 왕조 이전의 잉글랜드는 유럽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국으로서 기껏해야 양이나 쳐서 양모를 대륙에 파는 가난한 국가였다. 그런데 16세기 이후 잉글랜드는 일취월장하여 18~19세기가 되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는 중심국가로 떠오른다. 잉글랜드가 그 찬란한 발전의 도상에 오르게 한 선구자가 폭군이자 편집증 환자이자 호색한인 헨리 8세다."(166-9)


5장 콜럼버스, 에덴동산의 꿈으로 근대를 열다


"독학으로 세계관을 형성해 나간 콜럼버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이마고 문디Imago Mundi》('세계의 이미지' 또는 '세계의 상像')다. 《이마고 문디》에서 콜럼버스를 매료시킨 내용이 바로 〈지구가 굉장히 작다〉는 것, 그리고 〈육지와 바다의 비율이 6대 1〉이라는 것이다. 육지가 6이고 바다가 1이라면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놓인 바다가 매우 작을 테고, 이 바다를 건너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일이 될 터이다. 그는 마르코 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에서 읽은 내용으로 이 주장을 보충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 기록을 따라가보면 유럽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엄청난 거리를 여행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아시아 대륙이 아주 크다는 뜻이고, 바꿔 말하면 반대 방향에서 유럽을 출발해 아시아로 가는 항해 거리가 짧다는 의미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때 드디어 아시아에 왔다고 생각했던 것은 당연하다. 자기가 원래 아시아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지점에 도착했기 때문이다."(188-9)


"콜럼버스는 말년에 《예언서》를 쓰는 데 전념했는데, 이 자료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세계관이 가히 점성술적이라는 점이다." "콜럼버스에 따르면 인류 역사는 이제 마지막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조만간 마지막 황제가 나타나서 이 세상의 마지막 전투, 즉 이슬람과의 최종 전투를 준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군대를 키우기 위한 자금이 필요할 텐데 그것은 구약성서에서 언급된 솔로몬의 금광에서 얻게 될 것이다. 이 금광은 사람 눈에 띄지 않다가 마지막 시대가 되면 드디어 하느님이 선지자들에게 알려준다고 한다. 과연 하느님이 약속하신 금은 누가 발견하게 될까? 바로 콜럼버스 자신이다! 〈내가 하느님이 선택하신 도구〉라는 게 그가 내린 결론이다." "바로 자신이 못 배우고 미천하되 신의 선택으로 '영적 이해력'을 얻었으며(이에 대해 자신의 내부에 '불이 있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진리를 꿰뚫어 알게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202-4)


6장 코르테스와 말린체, 구대륙과 신대륙의 폭력적 만남


"말린체는 적에게 바쳐진 공물 같은 처지로 에스파냐인들을 처음 만났지만, 중립적인 통역 역할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자신이 알게 된 정보를 코르테스에게 전해준 것이 때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이 지역 내 부족들이 아스테카 제국과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다는 결정적인 사실을 알려주었다. 코르테스는 이를 이용해 여러 부족을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멕시코 지역에서는 수많은 부족이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다. 그중 세 부족이 동맹을 맺어 다른 부족들을 지배했다. 코르테스가 찾아왔던 당시에는 틀라코판·테츠코코·테노치티틀란 동맹이 가장 크고 강력했다. 피지배 부족들은 때로 끔찍한 살상과 가혹한 착취를 겪었다. 우리가 아스테카 제국이라 부르는 이 지역의 실상은 깊은 원한을 가진 피지배 부족들이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느슨한 동맹에 불과했다. 그 사이를 파고들어 여러 세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 코르테스가 성공을 거둔 핵심 요인이었다."(221-4)


"아메리카 문명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인신공희 관행에는 심오한 종교 철학이 있다. 이들의 우주관에 따르면 태양과 달이 돌고 계절이 바뀌는 따위의 모든 우주적인 일에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시간이 가면 에너지가 줄어들고 결국 우주는 종말을 맞는다. 우주의 파멸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자신의 에너지를 우주에 공급하는 것이다. 힘이 떨어진 태양과 대지는 기근과 갈증에 시달린다. 이 지역에 널리 퍼진 유명한 표현을 옮기면 〈신은 피에 목말라 있다.〉 그래서 사람의 심장을 꺼내 태양신께 바치고 대지에 피를 흘려주는 것이다." "아스테카 유적의 꽃 그림은 서정적인 아름다움의 표현이 아니라 우주를 살리기 위한 '꽃 같은 죽음'을 의미한다. 사람의 목숨을 바쳐 우주를 살린다는 의미는 표현이 조금씩 다르지만 아메리카 거의 전 지역에 퍼져 있었던 기본적인 종교 철학이었다." "이런 끔찍한 일들을 지켜본 말린체는 사람의 피를 요구하지 않는 에스파냐의 신이 더 진정한 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231-3)


7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천사와 악마를 품었던 천재


"다빈치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는 그의 노트가 있다. 그는 늘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중요한 정보다 싶으면 바로 적어두었다. 심오한 통찰의 조각들도 여기에 다 모아놓았다. 이 중 일부는 완성된 작품으로 발전했을 수 있으나, 대부분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니까 노트는 미완성 작품을 위한 임시 텍스트 모음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은 '미완성'을 창조적 천재성의 특징으로 파악했다. 언제 어떤 영감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각 분야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솟아나오니 그런 것들을 일단 붙잡아두어야 했다." "또 한 가지 이 천재의 작업이 가진 특징은 변화무쌍하고 불규칙하다는 점이다. 그림을 그릴 때에도 한 이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미친 듯 일하고는, 그 후 며칠 동안은 손을 놓고 명상을 하다가 다른 작업에 손을 대는 식이다. 천재는 꼭 의무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니 창의적 게으름을 누리며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한없이 느리게 일하는 것이다."(261-2)


"16세기 말에 조각가 레오니는 다빈치가 죽기 전에 멜치에게 남긴 수천 쪽에 달하는 노트를 '기술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으로 분류했다. 이로 인해 다빈치의 이미지가 많이 왜곡되었다. 예술사가는 그림에만 몰두하고 엔지니어는 그의 기술적 근대성만 보려 한다. 파노프스키의 말대로 르네상스의 특징은 지식의 벽 깨기였고, 다빈치는 그런 정신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아니었던가. 그는 천사와 악마를 두루 경험한 후 인간의 내면과 세계의 모순을 갈무리하여 지극히 높은 수준에서 관조하고 표현했다. 미슐레의 말대로 다빈치는 '파우스트의 이탈리아 형제'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는 피렌체의 공방에서 견습생으로 공부하며, 밀라노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며, 또 로마와 앙부아즈에서 궁정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계속 배워나갔다. 스스로 말하듯 '경험의 아들'이었다. 다시 말해 시대가 그를 불러낸 것이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경험이 가장 천재적으로 꽃핀 시대였다."(283)


8장 루터, 세상을 바꾼 불안한 영혼


"1514~1515년 사이 루터는 〈로마서 1:17〉에 나오는 내용(〈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을 깊이 생각하다가 '하느님의 의iustitia dei'라는 단어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의'란 하느님의 정의justification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후에 하느님의 법정에서 판결을 받을 텐데, 하느님이 보실 때 인간이 어찌 완전하겠는가. 분명 사악함 덩어리인 불완전한 죄인에게 하느님의 가공할 처벌이 따를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성경 구절을 홀연 다르게 해석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의 의는 벌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주는 선물 같은 것이다. 그 선물을 통해 우리는 즉시 의로움을 갖추게 되리라. 따지고 보면 우리말로 '용서'라고 번역하는 'pardon'은 원래 뜻이 '전부par 준다don'는 것이다. 절대 결핍의 존재인 인간에게 하느님이 생명과 은총을 채워주는 것이 'pardon'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오직 믿음으로써sola fide 가능하다. 하나님은 다만 우리의 믿음을 원할 뿐이다."(294-5)


"중세 말 가톨릭 교회가 십일조를 강요하고, 걸핏하면 종교재판을 통해 사람들을 억압해왔기 때문에 농민들은 가톨릭 교회를 두렵고 부담스러운 조직으로 여겼다. 루터가 교회의 부패를 비난하고 영적 자유라는 새로운 주장을 펼치면서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 세세한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한 일반인들로서는 단지 이전의 종교적 억압을 벗어던진 것으로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신자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그가 관심을 둔 대상은 어린이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루터파만 아니라 다른 신교 교파들과 종래 가톨릭 역시 주입식 교육이나 체벌 같은 강제수단을 이용해 '사회규율화'를 추진하게 된다. 결국은 종교와 권력이 서로를 강화하다가 국교國敎라는 이름으로 국가와 특정 종교가 결탁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극단화되면 그렇게 조직된 교파들끼리 피 튀기는 전쟁도 불사하리라. 그런 갈등의 씨앗이 16세기에 싹트고 있었다."(3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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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인 이야기 - 모험하고 싸우고 기도하고 조각하는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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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바이킹의 시대


"바이킹은 크게 덴마크계·노르웨이계·스웨덴계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루스(어원은 '노 젓는 사람들') 혹은 바랑고이(어원은 '선서를 한 동료')라고도 불린 스웨덴계 바이킹들은 발트해를 건너 동쪽과 남쪽으로 팽창해 나가면서 광대한 지역에 영향을 끼쳤다. 그 첫 번째 중요한 현상이 러시아 국가─키예프Kiev(키이우Kyiv)나 노브고로드Novgorod와 같은─의 형성이다." "아마도 슬라브족의 이교 신앙 중심지이자 교역 중심지였던 곳에 바이킹들이 합류해 들어오면서 그들의 충격 아래 정치·군사적 변화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스타라야라도가, 프스코프, 키예프 등 여러 곳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권력 중심지들이 형성되었다가 후대에 키예프 공 이고리Igor의 주도 아래 통합되고, 비잔티움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수용했다. 이처럼 국왕 체제가 만들어지고, 교회가 통치 철학과 행정 인력을 제공하는 방식의 발전이 이루어진 데에는 동부와 북부 유럽 각지에 인력, 아이디어, 문화 등을 전파한 바이킹의 영향이 컸다."(27-8)


"바이킹의 여행은 비잔티움에서 멈추지 않았다. 일부 모험심 강한 사람들은 볼가강을 타고 불가르(오늘날의 카잔)로 직행했다. 불가르에서 더 나아가면 하자르Khazar라는 유목민의 땅이 나오는데, 이곳의 수도에 해당하는 이틸Itil에서 배를 타고 카스피해를 건널 수 있다. 연구자들은 바이킹이 낙타를 이용하여 바그다드까지 가거나 혹은 비단길을 따라 인도와 중국 방향으로 갔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바이킹은 실로 엄청난 거리를 여행했다. 우리는 통상 바다를 통해 남쪽이나 서쪽으로 멀리 항해해 간 바이킹의 활동에 주목하지만, 남동쪽으로 이렇게 멀리까지 갔으리라고는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바이킹에 대한 묘사를 보면 분명 '야만족' 냄새가 물씬 나지만, 사실 그 시대에는 대부분 지역의 문화 수준이 고만고만하게 야만성을 뿜어내고 있었다. 오히려 바이킹의 활동 결과 많은 지역에서 국가가 형성되고 기독교를 수용하고 문화적 발전이 가능했으니, 말하자면 바이킹이 문명화의 선두에 섰던 셈이다."(30-1)


"서유럽에서 본격적인 바이킹의 시대가 열린 해를 대개는 793년으로 본다. 이 해에 잉글랜드 북동쪽의 '성스러운 섬' 린디스판에 바이킹 무리가 들이닥쳐 약탈을 자행했다." "885~887년에는 배 700척에 나눠 탄 바이킹 무리가 파리까지 들어와 2년 동안 포위 공격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프랑스 국왕으로서는 바다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외적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역량이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바이킹 집단에게 땅을 주어 신하로 만들고 이들이 다른 바이킹의 침략을 막도록 하자는 계책을 내놓았다." "(그렇게 911년, 생클레르쉬르엡트 조약의 결과로 탄생한) 노르망디는 더 이상 사나운 바이킹 전사의 땅이 아니라 세련된 프랑스 문화에 물든 귀족의 영토가 되었다. 이렇게 변신한 노르망디 귀족들은 조만간 잉글랜드로 쳐들어가 새 왕조(노르만왕조)를 개창하고, 멀리 지중해에 진출하여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지배하며 십자군운동을 주도하는 등 유럽 각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45-9)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국왕 해럴드를 살해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노르만 왕조의 강력하고 안정적인 왕권은 오히려 민중의 자유를 신장하고 의회 제도가 발전하는 기틀이 되었다. 사실 윌리엄과 신흥 지배층의 무력이 강하다 해도 소수의 충성스러운 신하만으로 전국을 완전히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만 명의 기사로 어떻게 그 많은 국민을 적으로 돌려 강압적으로 통치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지방의 전통적 자유를 인정해 주고 유력자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게 낫다. 초기의 잔혹한 정복과 지배 체제 구축 과정이 일단락되자 자신감을 찾은 국왕은 관대한 통치를 펼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왕은 귀족 중에서 관리를 선임했는데, 귀족들은 그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 민중들과 손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귀족과 민중이 결합하여 의회 제도를 통해 한편으로 국왕의 국정 운영에 협조하고, 다른 한편으로 국왕의 자의적 통치를 견제했다."(65)


# 노르망디 공작 기욤은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이 되었으며, '정복왕William the Conqueror(재위 1066~1987)'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2장 십자가와 왕관


"에스파냐의 중세사는 대개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으로 정리하곤 한다. 8세기 초 무슬림이 북아프리카에서 지브롤터해협을 넘어 에스파냐 땅에 들어와서는 단기간에 이베리아반도 거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북쪽 변두리 산악 지역에서만 작은 기독교 공국들이 간신히 존립을 유지했다. 이후 기독교 세력이 힘을 모아 오랜 기간에 걸쳐 이슬람 세력을 조금씩 밀어내면서 국토를 회복해 갔다. 그 과정에서 무슬림과 싸우는 정치 단위들이 형성되었다. 동쪽의 카탈루냐공국, 피레네산맥 서쪽의 바스크공국(후일 나바라왕국으로 성장했다가 프랑스에 합병된다), 나바라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한 아라곤, 북서쪽의 아스투리아스가 점차 확장하여 레온과 합쳐지며 형성된 카스티야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이들 사이의 이합집산 끝에 최종적으로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정리되고, 이 두 나라가 합쳐져 오늘날의 에스페나갸 만들어지는 한편, 남서쪽에서 독자적 단위를 이룬 포르투갈이 먼저 별개 국가로 발전했다."(92-3)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예루살렘의 예수 성묘聖廟를 되찾자며 십자군운동을 제창하면서 유럽 전역에 성전聖戰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바깥에서만 싸울 게 아니라 유럽 안에 있는 신앙의 적부터 타파해야 한다는 이념이 불타올라서 이베리아반도는 팔레스타인과 같은 전쟁터로 변모했다. 경건한 신앙이 기독교 에스파냐를 새로이 일깨웠다.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알려진) 유럽 내 가장 중요한 순례지 중 하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는 12세기부터 대대적으로 전 유럽의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다. 재정복운동은 사실상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3세기 후반이면 알람브라 궁전으로 유명한 에스파냐 최남단의 그라나다만 빼고 거의 전역이 기독교 영토가 되었다. 잔존한 이슬람 세력을 최종적으로 축출한 때는 1492년이다. 1492년은 재정복 운동이 완수되어 무슬림을 유럽대륙에서 완전히 몰아냈고, 그 여파로 유대인도 축출했으며, 동시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해다."(94-7)


"1077년 1월, 독일 왕이자 장차 황제가 될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Canossa의 성에 찾아왔다. 그는 자신에게 파문 선고를 내린 교황 그레고리우스 4세에게 용서를 빌었고, 결국 교황은 파문을 거두어들였다." "장래 황제가 될 하인리히가 맨발로 눈밭에 서서 용서를 구할 때는 교황에게 패배한 듯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가 교황을 축출할 때는 황제가 최종 승리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교황과 황제 중 누가 더 우위인가 하는 문제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장기간의 소모적인 투쟁 끝에 양측이 타협을 모색한 것이 1122년 보름스 협약이다. 협약은 추기경과 수도원장은 교회에 의해서만 자유롭게 선출된다고 천명했으니 이 점은 황제가 양보한 것이다. 황제는 선거에 출석할 수 있으며 만일 다툼이 있으면 황제가 개입할 권리를 가진다고 했으니 이는 교황이 양보한 것이다. 하지만 하늘 아래 누가 최고의 권한을 쥐는가 하는 문제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큰 쟁점으로 남는다."(109, 114-5)


"십자군운동에는 고향에서 기회를 얻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 잃을 것 없는 사람들이 군사 모험을 통해 한밑천 잡으려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것이 기존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최근 실증연구 결과는 정반대 사실을 말해준다. 십자군 전사들은 잃을 것이 아주 많은 부자들이었다." "기사 집안 출신이면서 클뤼니 수도원을 거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누구보다도 수도원의 이상과 기사 이데올로기 간의 갈등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이었다. 기사들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갈망이 크지만, 현실적으로는 전사라는 지위 때문에 흔히 죄의 길로 들어선다. 이때 우르바누스 2세가 불안과 죄책감에 빠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이 세상을 등지지 않아도 될뿐더러, 칼을 내려놓는 게 아니라 오히려 칼을 휘둘러 하느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성묘를 앗아간 무슬림들을 축출하는 신의 전사milites Dei, 그리스도의 전사milites Christi가 되면 가능하다. 십자군운동은 개념적으로 전투 이전에 순례 행위였다."(131-3)


3장 권력, 사랑, 믿음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왕국들은 1,0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군주의 영적이고 종교적인 성격을 유지해 왔다. 특히 대관식은 군주의 신성성을 확보해 주는 중요한 행사다." "국왕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신령한 존재라는 의식은 멀리 켈트족 전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켈트족 왕은 용과 괴물이 상징하는 혼돈의 힘과 싸워 이기고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존재다. 켈트 신화에서 왕은 세상의 중심인 신성한 나무에 자리 잡고 우주의 조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며, 치유와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성격을 띠는 유럽의 군주를 '기적을 행하는 왕'이라 부른다. 기독교화가 진척되면서 이런 내용은 새로운 종교에 맞추어 변형되었다. 왕은 이제 신과 동격의 존재는 아니며 그보다는 신과 소통하는 일종의 사제와 같은 성격을 띤다. 이런 의미에서 국왕은 백성이 선출한 게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선택된 존재임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대관식에서 왕관을 쓰는 요소보다 신의 축복을 더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171-3)


"생드니 성당의 개축 사업을 주도한 사람은 쉬제르Suger 수도원장이다. 1136년 재건축이 시작되어 1144년 마침내 새로운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국왕 루이 7세와 왕비 알리에노르를 비롯하여 이 웅대한 성당을 둘러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교회를 그토록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 시대 최고의 신학자로서 금욕의 수도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정색을 하고 비판을 가했다. 수도자와 신자는 이 세상 너머 영원한 구원의 길을 보아야지 현세의 아름다움에 한 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베르나르와 쉬제르는 대척점에 서 있다. 두 사람의 대립은 단지 믿음의 자세나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기본 질서가 어떻게 짜여야 마땅한가 하는 정치적·신학적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쉬제르가 수도원장이 된 1122년은 보름스 협약이 체결된 해이다. 보름스 협약은 이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어정쩡한 타협에 그쳤다."(193-5)


"생드니 성당 재건축은 이 문제에 대한 프랑스 왕실의 답변이다. 생드니 성당을 최대한 웅장하고 아름답게 짓는 것은 단순히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차원이 아니다. 이곳은 천상의 예루살렘을 보여주는 지상의 모형이다. 벽면의 사파이어와 루비가 영롱하게 반짝이고, 드넓은 공간에 밝은 빛이 가득 넘치는 성당은 천국의 예시다. 이곳에 들어온 신자들은 지상에 있는 동안 천국을 부분적으로 느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이 중간 경유지에 왕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수호성인인 드니의 품 안에 역대 국왕들이 함께 누워 있다. 하늘나라와 지상세계의 중개자인 성인이 국왕과 함께 모든 백성을 인도한다. 세속 권력과 무관하게 오직 교회가 독자적으로 영적 인도를 해야 한다는 베르나르의 견해에 맞서 쉬제르는 '제2의 그리스도'인 국왕이 신성한 힘을 받아 백성을 인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쉬제르는 고딕 성당 속에서 왕권과 교회의 새로운 동맹을 추구한 것이다."(195-6)


"노트르담Notre-Dame(성모, 영어로는 Our Lady) 대성당은 단지 파리를 위한 성당이 아니라 프랑스 국민 성당이다. 프랑스 역사의 중요 사건들이 이 성당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루이 13세(재위 1610~1643)는 결혼 후 20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자, 만일 후계자 아들을 주신다면 프랑스를 마리아에게 바치겠다는 서원을 했다. 마침내 장래에 루이 14세가 될 아들을 얻자 '신이 주신 아이'라는 의미로 '디외도네'라 불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노트르담 대성당 중앙 제단의 성모상 오른쪽에는 왕관을 바치는 루이 13세의 상, 반대쪽에는 손을 심장에 얹어 신심을 표하는 루이 14세의 상을 세웠다. 1909년 잔 다르크를 시성諡聖했으며, 파리가 해방된 1944년 8월 26일에는 시민들이 모여 테데움Te deum(신을 찬미하는 성가)을 연주했고, 1970년에는 드골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동시에 예수의 가시관이 노트르담으로 옮겨온 19세기 이후부터는 중요한 순례 장소로 떠올랐다."(203)


4장 중세의 마음


"지난 시대에 사회 전체를 뒤흔든 위기는 대개 전쟁·기근·질병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실 그 세 가지는 내적으로 얽혀 있다. 전쟁은 농사의 기반을 파괴하여 기근을 낳고, 군대가 이동하여 전염병을 퍼뜨린다. 다른 한편 기근은 정치적 불안을 초래해 전쟁의 원인이 되는 동시에 사람들의 신체를 허약하게 만들어 병을 더 확산시키기 십상이다. 유럽 역사상 최대의 위기가 발생한 14세기 상황이 전형적이다. 이때는 백년전쟁(1337~1453), 대기근, 페스트가 함께 찾아왔다. 더욱이 선腺페스트가 병독성이 훨씬 더 강한 폐肺페스트로 변이를 일으켜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이런 현상들 이면에 구조적인 농업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오늘날과 달리 전통 시대 농업은 지속적인 생산성 증가가 불가능했다. 인구는 늘어나는데 식량 생산이 지탱해주지 못하는 한계 상황에 이르면, 참혹한 대량 아사 사태를 피할 수 없다. 이 모든 일들이 한번에 터진 14세기에 유럽은 자칫 문명의 붕괴를 걱정할 정도로 큰 위기를 맞았다."(233-4)


"사회적 위기는 또한 정신적 위기를 동반한다. 이런 시대에 빈발하는 대표적 현상 중 하나가 종말론이다." "재앙의 시대에는 이런 교리를 기묘하고도 과격하게 해석하여 사회에 불을 지르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대개는 기성 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망상에 가까운 교리에 집착하는 수도사 출신 인사들이기 십상이다. 기근에 빠진 농민이나 도시 빈민이 자신이 불행한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분출시키는 격렬한 욕구가, 모든 것을 일시에 해결해 주리라는 환상적 메시지와 만나면 때로 걷잡을 수 없는 폭력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예언자이자 하느님의 전사임을 자처하는 이 카리스마적인 인물은 순결하게 재생될 새로운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하찮은 질서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은 이미 세속의 도덕을 초월했으며,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타락 이전의 순결한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오히려 성관계를 통해 처녀성을 회복시켜 준다는 야릇한 '아담 숭배' 의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234-5)


"중세인들의 생각에 세계는 악마와 혼령으로 가득한 곳이며, 사람들은 흔히 이런 존재들과 만나곤 한다." "특기할 점은 죽은 혼령 이야기가 대체로 12세기 이후 급증한다는 것이다. 이는 '연옥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 지옥에 갈 정도의 대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천국으로 직행할 정도로 완벽한 삶을 산 것도 아닌 사람들(쉽게 말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은 후 영혼이 연옥으로 가서 불로써 단련 받아 죄를 지운 후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연옥의 교리다. 프랑스 역사가 자크 르 고프는 연옥의 교리가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서 12세기에 완전한 교리로 '탄생'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대부분 사람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연옥을 거쳐 천국으로 가는 길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연옥은 희망의 장소다." "그런데 이승에 남은 지인들이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드려주면 연옥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극심한 고통을 겪는 혼령이 산 사람에게 나타나서 기도와 미사를 부탁하는 이유다."(241-4)


"고통스러운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확인하는 제도를 신명재판이라 한다. 영어로는 'ordeal'이라 하는데 독일어 'Urteil(판결)'과 어원이 같다. 신명재판이 많이 이루어진 곳은 라인강과 루아르강 사이 지역, 다시 말해서 카롤링거왕조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니, 이교 시대 게르만족의 제도가 기독교의 외피를 두르고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신명재판에는 여러 방식이 있으며, 나름대로 정해진 절차가 있다. 원래 달군 쇠를 잡는 방식은 그 상태로 몇 걸음을 걷든지 찬송가를 한 곡 부르게 한 뒤, 붕대로 손을 싸맸다가 사흘 후에 풀어서 상처의 정도를 확인하는 것이다. 상처가 심하면 유죄, 그렇지 않으면 무죄다. 펄펄 끓는 물이 가득 찬 솥에 손을 집어넣어 동전을 집어내도록 하는 재판도 비슷하다. 피고의 손발을 묶은 다음 강이나 못에 던져 넣는 방식도 있다. 이때 피고가 물속으로 가라앉으면 무죄, 둥둥 뜨면 유죄다. 축성을 한 물은 성질이 순수해서 깨끗한 사람이 들어오면 품고 더러운 죄인이 들어오면 뱉으려 하기 때문이다."(252)


"그렇지만 능히 짐작할 수 있듯이 신명재판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 유·무죄의 기준이 너무 모호하다. 많은 경우 명확한 기준보다는 모여든 군중들의 함성에 따라 판결이 나곤 한다." "점차 신명재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신학자들은 하느님에게 기적을 강요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요구한다고 하느님이 꼭 기적을 보여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만일 실제로 기적이 일어났다면 악마의 농간이 아니라고 누가 보장한다 말인가. 이런 이유로 12세기 파리의 신학자 피에르 르 샹트르는 신명재판이 '악마적'인 행위라고 주장했다. 법학자들 역시 이런 재판은 합리성이 결여되었다고 비판했다. 무고한 사람이 살인자로 몰릴 수도 있고, 죄지은 사람이 풀려날 수도 있다. 이런 배경에서 1215년 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사제들의 신명재판 참여를 금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명재판은 근대적 사법 체제가 자리 잡기까지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255-6)


5장 근대를 향한 여정


"잉글랜드 왕권 쟁탈전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은 랭커스터 가문 출신 국왕 헨리 6세(재위 1422~1461, 1470~1471)다. 백년전쟁이 끝난 1453년, 헨리 6세의 정신병이 크게 악화해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국왕의 조카뻘 되는 요크 공작이 국왕을 보호하는 척하다가 자신이 왕위를 탐하면서 랭커스터 가문(붉은 장미)와 요크 가문(흰 장미) 간 전쟁이 시작되었다." "요크 가문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요크 공작 자신도 사망했기에 그의 아들이 에드워드 4세(재위 1461~1470, 1471~1483)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 10년 후 제정신을 찾은 헨리 6세가 왕권을 되찾기 위해 도전해 왔으나 다시 패배하여 런던탑에 갇혔다가 사망했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죽었을 때 그가 남긴 두 아들은 열두 살과 아홉 살 어린아이였다. 이 중 장남이 에드워드 5세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상태에서 두 달 후 런던탑에 갇혔다가 동생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왕위는 선왕의 동생 리처드가 차지했다."(283-5)


"그가 대관식을 치르고 리처드 3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오른 이후, 곧 국왕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사방에서 리처드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 주도자 버킹엄 공은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헨리 튜더에게 귀국하여 왕위를 물려받으라고 제안했다. 튜더 가문의 헨리는 혈통상으로 랭커스터 왕실에 제일 가까운 인물이다. 일찍이 프랑스에 피신해 있던 그는 무명의 존재였고 전투 경험도 없었으나, 프랑스의 지지를 받는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프랑스 전사들을 앞세우고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에 상륙한 헨리는 보스워스 벌판에서 리처드 3세의 군과 최후 결전을 벌였다. 귀족들의 지지를 잃은 리처드는 마지막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전사했다(영국사에서 마지막으로 전사한 국왕이다)." "승리를 거둔 튜더는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원수 가문 간의 갈등을 봉합하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새 왕조를 열었다. 이것이 영국사에서 통상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튜더왕조의 시작이다."(285-7)


"차르 이반 4세(재위 1533~1584)의 별칭은 뇌제雷帝, Ivan the Terrible다. 벼락 치듯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위엄으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지배자라는 뜻이다." "사실 그의 통치 전반기는 광기에 찬 폭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명하고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관료제를 정비하고 서구 국가들의 신분의회에 해당하는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한 데다가 군대 조직도 훌륭하게 재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화된 행정력과 군사력을 이용하여 카잔과 아스트라한 등 몽골 세력의 마지막 보루들을 점령하여 볼가강의 접근로를 확보했다. 이는 유라시아대륙 전체 역사에서 실로 중요한 의미를 띤다. 아시아 내륙의 유목민족이 밀고 들어오는 도상의 핵심 지점들을 장악하여 그들을 통제하고, 더 나아가서 러시아가 오히려 유목민족 지역 심층부로 세력을 확대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이제 이 나라는 모스크바공국이 아니라 러시아라고 불리면 주변 지역들을 정복하면서 본격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311-2)


"그러나 통치 후반기에 이반은 광기 어린 잔혹한 전제군주로 바뀌어 갔다. 사랑하던 황후 아나스타샤의 죽음, 그리고 자신이 위중한 병에 걸려 죽음 직전까지 갔을 때 신하들이 보인 불충의 자세 등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것 같다. 많은 측근들이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했다. 차르는 갈수록 종잡을 수 없는 행테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강력한 기구가 '오프리치니키'라는 러시아 최초의 비밀경찰 조직이다." "이반의 희생자 중에는 친아들도 포함되어 있다. 임신한 며느리의 옷이 단정하지 않다고 꾸짖고 있는데 아들이 끼어들자 쇠몽둥이로 쳐서 죽였다. 제일 든든한 후계자를 스스로 없애버린 것이다. 1584년 이반은 54세에 갑자기 사망했다. 그 역시 독살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병약하거나 천치 상태인 아들들이 차르 지위를 물려받았으나 오래 못 가 류리크왕조는 단절되고, 1613년 로마노프왕조가 들어섰다. 로마노프시대는 20세기 러시아혁명 시기까지 300년 넘게 지속된다."(312-7)


"피렌체는 여러 장점이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밀, 올리브, 포도주를 제공하는 풍요로운 주변 농촌을 들 수 있다." "상업과 공업, 은행업은 더 중요한 요소다. 직물업을 통해 점차 큰돈을 벌고, 전 유럽의 대상인과 군주 및 귀족 들을 대상으로 금융 거래를 하여 큰 부를 쌓아갔다." "스피니, 프레스코발디 같은 1세대 가문에 이어 바르디, 페루치 같은 2세대 가문들이 성장하고, 이들이 쇠락하면 다시 메디치, 스트로치 같은 3세대 가문들이 융성했다. 이 도시귀족 가문들이 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화·예술적으로 피렌체를 빛낸 주역들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가 브로델은 피렌체 시민의 새로운 정체성을 두고 이 시대 사람들의 사고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의식, 곧 절약이나 시간의 가치를 강조하는 근대 부르주아 문화 요소가 생성되었다고 보았다. 모든 것을 신에게 의탁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힘과 능력virtu이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고가 발전한 것이다. 르네상스 예술은 이런 복합적인 분위기에서 꽃피었다."(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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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 상징사
미셸 파스투로 지음, 주나미 옮김 / 오롯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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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중세의 상징


"상징에 관한 고유한 연구에도 몇몇 뛰어난 업적들은 존재하지만 대부분 신학이나 철학과 관련된 매우 사변적인 차원에 제한되어 있거나, 표장과 표장체계의 세계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렇지만 중세에 표장embleme과 상징symbole은 서로의 경계가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달랐다. 표장은 명칭, 가문의 문장, 도상학적 징표처럼 개인이나 집단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기호였으나, 상징은 육체적인 인격이 아니라, 추상적인 실체·이념·관념·개념 등을 나타내는 기호였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기호·형상·사물은 표장이자 상징으로서의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프랑스 국왕의 상징물regalia이던 [상아 손잡이가 달린 지팡이인] 정의의 손main de justice 같은 것이다. (다른 군주들은 결코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프랑스 왕의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그를 다른 군주들과 구별해주는 표장의 성격을 지닌 소지품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프랑스 군주제에 관한 어떤 특정한 관념을 나타내던 상징적 사물이기도 했다."(13-4)


# 중세의 상징 체계

1. 어원론 : '기호의 자의성'은 중세 문화와는 관련이 없다. 가령, 호두나무의 라틴어 이름인 '눅스nux'는 '해를 끼치다'라는 뜻을 가진 '노케레nocere'와 관련 있다고 생각되었고, 사과나무의 라틴어 이름인 '말루스malus'는 '악malum'이라는 단어를 연상시켰다.

2. 유추 : 두 개의 낱말이나 관념, 사물 사이의 유사성 또는 조응관계(통상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사이)에 기초해 나타났다. 가령, 우리가 차가운 색이라고 여기는 파란색은 중세에는 공기의 색이고, 공기는 따뜻하고 건조한 것이었기 때문에 따뜻한 색으로 여겨졌다.

3. 차이 : 어떤 목록이나 집합 안에서 한 대상이 다른 것들과 미세한 차이를 보일 때 거기에 가치와 의미가 부여된다. 가령, 뿔은 불안을 유발하는 악마적 표상이지만, 모세는 (오역에서 비롯한) 뿔 덕분에 칭송받는 존재이자, 뿔이 있는 것들 가운데 으뜸인 존재가 되었다.

4. 부분과 전체 : 소우주-대우주 관계처럼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존재의 모상이었고, 부분은 전체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가령, 성유물에서 뼛조각 하나, 이빨 하나는 성인의 전신에, 왕관과 인장은 군주를, 흙덩이 하나, 짚단 하나는 신하에게 하사하는 봉토 전체를 나타냈다.


"중세의 모든 상징체계에서 여러 요소들이 맺고 있는 관계의 전체는 개개의 요소들의 고립된 의미의 총체보다 언제나 더 풍부한 의미를 품고 있다. 예컨대 사자의 상징체계는 글에서도, 도상에서도, 기념비 위에서도 고립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독수리·용·레오파르두스 등과의 관계에서 비교해 보아야 더 풍부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중세의 상징은 이런저런 낱낱의 의미보다 작용방식에 따라 특징이 정해진다고도 할 수 있다. 색을 예로 들면, 빨간색은 열정이나 죄악을 의미하기보다는 (선이든 악이든) 격렬히 작용하는 색이다. 그리고 녹색은 단절과, 재생 이후의 혼란의 원인이 되는 색, 파란색은 고요함과 안정을 가져오는 색, 노란색은 흥분과 위반을 일으키는 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용방식을 의미작용의 규칙보다 우선시하면 역사가는 상징의 양면성을 유지할 수 있다. 모호함 그 자체인 양면성은 상징의 가장 깊은 본성의 일부를 이루며, 상징이 잘 기능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26)


"중세 상징체계의 핵심은 기독교 세계가 시작된 뒤 5~6세기의 기간 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무에서ex nihilo' 몇몇 신학자의 상상으로 생겨나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의 여러 가치체계와 감수성의 양식 등이 뒤섞여 이루어진 결과였다. 이 분야에서 중세 서양은 3개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하나는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성서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로마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야만' 세계, 곧 켈트·게르만·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해 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서양 중세는 1천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여기에 독자적인 층들을 덧쌓았다. 사실 중세 상징체계에서 완전한 배제는 결코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모든 것이 여러 층으로 겹겹이 쌓였고, 그것들이 몇 세기를 거치며 서로 뒤섞였다. 그래서 원형에 기초하고 보편적인 진실에 속하는 상징체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 세계의 모든 것은 문화와 관련을 맺고 있다."(27)


1부 동물과 식물


1 동물재판


"동물재판은 13세기 이후 서양의 다양한 지역들에서 목격된다. 세속사회나 교회의 재판소로 끌려 나온 온갖 동물재판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남자나 여자, 아이를 죽이거나 심한 상처를 입힌 돼지, 소, 말, 당나귀, 개와 같은 개별 동물과 관련된 재판이다. 이것은 형사재판으로, 교회 권력이 개입하지 않았다. 둘째는 집단으로 다루어지는 동물을 대상으로 한 재판이다. 어떤 지방을 황폐하게 만들거나 주민을 위협한 (멧돼지·늑대 같은) 대형 포유류나 (설치류, 벌레, '해충'처럼) 더 빈번히 발생해 농작물을 해치는 작은 동물들과 같은 경우이다. 이것은 재해인데, 전자는 세속권력이 조직한 사냥몰이꾼이 몰아냈고, 후자는 교회가 개입했다. 교회는 악마를 쫓는 의식에 호소했고, 신의 저주를 내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나아가 교회로부터 추방하고, 파문을 선고했다." "마지막은 수간이라는 큰 죄악과 관련된 동물을 상대로 한 재판이 있는데, 대개 소송서류가 죄인과 함께 소멸되어 연구하기 어렵다."(44)


"동물은 언제나 어떤 점에서 본보기의 원천이 되었다. 사법의 영역에서 동물을 재판소로 보내고, 심판하고, 단죄하거나 무죄로 풀어주는 것은 재판이라는 의례가 지닌 본보기로서의 성격을 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보마누아르의 생각처럼 '길을 잃고 헤매는 정의'가 결코 아니었다. 그러기능커녕 오히려 '바람직한 정의'의 작용을 위해 꼭 필요한 행위였다. 어떤 것도 '바람직한 정의'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고, 동물도 예외는 아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법의 주체인 것이다." "동물을 대상으로 제기된 소송들은 실질적으로 의례화된 일종의 교훈예화였다. 거기에서는 바람직한 정의의 완벽한 실천이 심문 절차에 힘입어서, 나아가 모든 의례적 요소에 맞추어 매우 사소한 부분까지 철저히 연출되었다. 더구나 다른 사례에서는 증인이 매수되거나 피고가 죄를 부인하거나 하는 일이 자주 벌어졌지만, 이 재판에서는 정의가 그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이 오롯이 본보기가 되었던 것이다."(52-3)


2 사자의 대관식


"상징의 차원에서 사자는 애매모호한 동물이었다. 사자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었으나 나쁠 때가 더 많았다.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교활하고 무례한 사자는 악의 세력, 이스라엘의 적, 폭군과 사악한 왕들이 구현된 것이었다. 「시편」과 예언서들은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신의 보호를 간절히 빌며 달아나야 하는 위험한 동물로 사자를 나타냈다. 「시편」의 작가(다윗)는 〈사자의 입에서 저를 구해주소서〉라고 간청했고, 중세 초의 수많은 작가들도 되풀이해서 그렇게 기도했다." "그렇지만 그만큼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성서에는 좋은 사자도 있었다. 공익을 위해 자신의 힘을 쓰는 사자의 으르렁거림은 신의 말을 나타냈고, 가장 용감한 동물인 사자는 유대 부족, 가장 강력한 이스라엘을 상징했다. 이런 점에서 사자는 다윗과 그 자손들, 심지어 그리스도와도 연관되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부족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62)


"사자가 이렇게 그리스도적인 성격을 뚜렷하게 나타내며 수많은 영역에서 지위가 높아지자, 신학자와 예술가들에게는 까다로운 질문 하나가 던져졌다. 이 동물이 지닌 부정적인 요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동물지 작가들, 표장·상징 제작자들의 해결책은 나쁜 사자를 완전히 다른 동물로 만들었다. 그들은 나쁜 사자에게 독립된 이름과 특성을 부여해 그리스도적인 사자와 혼동되지 않게 했고, 사자는 동물의 왕이 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배설구' 노릇을 한 동물은 레오파르두스Leopardus였다. 그 동물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표범이 아니라, 상상의 표범이다. 레오파르두스는 (갈기를 제외하고는) 사자의 겉모습과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타고난 본성이 사악하다고 여겨졌다. 12세기 이후 문학작품들과 초기 문장들에서 레오파르두스는 자주 타락한 사자, 반쪽짜리 사자, 사자의 적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이 사자의 적이라는 역할로부터 레오파르두스는 때때로 용의 사촌이나 동맹자가 되기도 했다."(65-6)


3 멧돼지 사냥


"교회와 성직자가 동물의 무리 안에서 멧돼지에게 할당한 위치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 멧돼지의 상징성은 일찍부터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로마의 사냥꾼·켈트의 드루이드·게르만 전사들이 그토록 예찬하던 이 동물을 불순하고 끔찍한 것, 선의 적, 신에 맞서는 죄인의 이미지로 바꿔놓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의 포도밭을 황폐하게 만든 멧돼지를 묘사한 「시편」의 구절에 관한 주해서를 남겼고, 이것이 멧돼지를 악마의 피조물로 본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13세기가 되면 멧돼지는 추악하고, 거품을 뿜어대고, 악취를 풍기고,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등의 털은 곤두서고, 억센 털은 줄무늬를 이루고, 〈입 안에는 뿔을〉 지니고 있다. 모든 점에서 그 동물은 악마의 화신이었다." "중세 말에 일곱 가지 덕목과 대립하는 7대 죄악의 체계가 작동하자, 멧돼지는 그 죄악들 가운데 6개나 속성으로 지니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오만·색욕·분노·탐식·질투·태만의 죄악이었다. 오직 인색만이 멧돼지와 연결되지 않았다."(84-6)


"앙리 드 페리에르는 이 악마 같은 동물을 그리스도적인 동물과 대립시켰다. 사슴이었다. 사슴이 지닌 열 가지 특성은 멧돼지의 그것과 마주서서 짝을 이루고, 10개로 갈라진 뿔은 십계에 대응했다. 〈이 뿔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세 가지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라고 준 율법의 십계를 나타낸다. 세 가지 적은 육신과 악마, 세속이다.〉" "교부들과 라틴 동물지는 (해마다 새로 자라나는 사슴의 뿔에 기초해서?) 사슴을 다산과 부활의 상징이자 세례의 이미지, '악'의 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목마른 사슴이 샘물을 찾듯이 의로운 사람의 영혼이 주를 찾는다는 「시편」의 구절에 끊임없이 해석을 덧붙였다. 교부와 신학자는 사슴을 순수하고 덕이 있는 동물, 선량한 기독교인의 이미지, 새끼 양과 유니콘과 같은 그리스도의 표상이나 대체물로 삼았다. 또한 (라틴어에서 '종'을 뜻하는) '세르부스servus'와 ('사슴'을 뜻하는) '케르부스cervus'의 유사성에 기초한 언어유희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슴은 '구세주servator'였던 것이다."(87-8)


4 나무의 힘


"중세문화에서 나무와 돌의 대립은 나무와 금속의 대립만큼 격렬하지는 않았다. 나무와 돌의 관계는 가치 있는 물질과 가치 있었던 물질 사이의 대립이었다. 그러나 나무와 금속의 관계는 순수한 물질과 악마적인 물질 사이의 대립이었다. 나무는 성스러운 십자가의 이상적인 이미지로 거룩해진 순수한 물질이었지만, 금속은 불안을 가져오고, 도리에 어긋나며, 거의 악마적이기도 한 물질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사람들의 감수성에서 금속은 (하찮은 것이든 귀한 것이든) 언제나 얼마간 지옥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지의 배에서 꺼내져 (나무의 커다란 적인) 불로 처리되었다. 곧 어둠과 지하세계의 산물이었고, 어느 정도는 마법과도 관련된 변질과 조작의 결과였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대장장이는 분명히 능력이 있고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지만, 금속과 불을 다루는 일종의 마법사이기도 했다. 반대로 목수는 고귀하고 순수한 재료를 가공했기 때문에, 소박하지만 존경을 받는 장인이었다."(94)


"13세기가 지나갈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될 변동의 징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기 1천년 이후 이루어진 개간과 기술의 진보, 상업의 확대로 유럽의 숲은 크게 파괴되었고, 상대적인 결핍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런데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중세 말에는 이러한 경제발전의 둔화와 몇몇 기술적 측면에서의 가치하락이 상징적 측면에서도 상대적인 하락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나무는 더는 유일한 최고의 재료가 아니게 되었으며, 직물이 점차 그 지위를 뚜렷하게 위협해왔다. 실제로 직물 산업은 12세기와 15세기 사이의 시기에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서양 경제의 진짜 원동력이 되었다." "옷은 그것을 입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어떤 지위나 계급에 있는지, 어떤 친족집단·직능단체·법적 집단에 속해 있는지를 나타냈다. 이렇게 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적인 상징체계와, 그와 짝을 이루는 상상에서 직물은 다른 재료들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96-7)


5 왕의 꽃


"중세 초기에 백합꽃 문양은 줄곧 왕가의 표상이라는 의미를 지니면서, 그와 함께 주로 그리스도와 연관된 강한 종교적 차원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구약성서 「아가」에 나오는 〈나는 들판의 꽃, 골짜기의 백합〉(2:1)이라는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13세기까지 백합이나 백합꽃 문양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기 1천년 이후 성모 신앙이 확산되자, 그리스도와 관련된 이 소재도 점차 마리아의 상징과 결합해갔다. 그 뒤 「아가」의 〈가시나무 사이의 백합처럼, 소녀들 사이에 있는 나의 연인〉(2:2)이라는 구절과도 연결되었고, 성서와 교부들의 주해서 안의 수많은 구절들에서도 백합은 순수함과 순결함의 상징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봉건시대 이후에 성모 마리아는 원죄에서 벗어나 잉태를 했다고 여겨졌다. 아직 이것은 '무염시태'의 교리로까지 틀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 교리는 19세기가 되어서야 결정적으로 인정되었다."(114)


"필리프 2세(재위 1180~1223) 이후로 프랑스 국왕은 방패와 깃발, 의복에 백합꽃 문양을 붙일 때에 하나나 셋이 아니라 꽃을 흩뿌린 문양을 선택했는데, 꽃의 숫자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이러한 특이성은 표장성과 상징성을 동시에 이룬다. 먼저 똑같이 백합꽃 문양으로 장식된 다른 문장들로부터 왕의 문장을 구별한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표장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배치는 여기에 강력한 상징적 차원의 의미도 더한다. 곧 뭔가가 총총하게 박힌 그 구조는 별들이 빛나는 하늘이자 우주의 이미지이다. 다시금 이 문장의 기원과, 하늘의 왕과 지상의 대리인인 프랑스 국왕의 특권적인 유대 관계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1300년대로 접어든 뒤에는 흩뿌려진 백합꽃 문양과, 대개의 경우 3개로 숫자가 줄어든 백합꽃 문양 사이에 꽤 뚜렷한 구별이 생겨났다. 흩뿌려진 백합꽃 문양은 국왕 자신이나 그의 가족에 소유되었으나, 3개의 백합꽃 문양은 위임된 왕권이나 정부, 나아가 행정권을 나타내기도 했다."(119-21)


2부 색과 표장


6 중세의 색


"중세의 색은 색 나름이었다. 대체로 거의 모든 것에 (왕실에서는 먹을거리나 개, 말, 독수리 같은 동물의 털이나 깃털 등에도) 색이 입혀졌지만, 모든 색이 똑같은 차원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뚜렷하고, 빛이 나며, 채도가 높고, 확실한 색들이 '완전한 색'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색들은 빛을 내뿜는 생명과 기쁨의 원천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색은 대상에 밀착해서 시간의 경과와 세계, 햇빛에도 바래지 않았는데,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만, 특정한 종류의 전례나 축제, 의식과 관련된 때에만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장소를 대표하는 것은 교회였다." "여기에 교회 의례에서 사용하는 물품이나 의복, 전례서, 다양한 축제에서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대부분 직물로 된) 장식과 같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색이 더해졌다. 13세기 이후에는 미사 자체가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행사처럼 되었고, 전례의식에서 색이 맡는 역할은 더욱 커졌다."(145-6)


"문장은 12세기에 출현했지만, 1200~1220년대부터 실질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는 일찍부터 장인과 농민의 문장이 존재했듯이) 모든 사회계층과 범주로 확산되었고, 문장에 관한 규칙들도 고정되어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규칙 체계의 한가운데서 색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이때 색은 (흰색·노란색·빨간색·파란색·검은색·녹색의) 여섯 가지로 제한되었다." "중세 말에 문장이 확산되면서 모든 공간과 모든 상황에서 이러한 색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문장은 마을에서도 일상적인 풍경의 일부를 이루었다. 모든 교구의 교회들이 13세기 중반 이후에는 사실상 문장의 '박물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본적인' 여섯 가지 색은 다른 것들보다 자주 나타난 특정한 배색을 눈에 익숙하게 만들고, 거꾸로 (빨간색과 검은색, 녹색과 파란색, 파란색과 검은색을 나란히 놓는 것처럼) 문장체계에서 금지하고 있는 배색을 꺼리거나 드물게 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146-7)


7 흑백 세계의 탄생


"중세 신학에서 빛은 감각의 세계에서 눈에 보이면서도 비물질적인 유일한 영역이었다. 빛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가시화된 것으로, 말 그대로 신적인 것의 발현이었다. 그래서 이런 물음들이 던져졌다. 색은 물질적인 것인가? 비물질적인 것인가? 이 문제는 가톨릭 교회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색이 빛의 한 부분이라면,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신적인 성질을 지니게 된다. 신은 빛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상에서 색이 차지하는 공간을 넓히는 일은 어둠이 차지한 공간을 줄이는 것, 곧 신의 영역인 빛의 범위를 넓히는 일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색은 빛에 대한 추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인다. 하지만 반대로 색이 물질적인 실체로 단순한 포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신성의 발현이 아니게 된다. 오히려 천지창조의 위업에 인간이 쓸데없이 덧붙인 인위적인 것일 뿐이다. 색은 죄를 지닌 인간이 신과 화해하는 길로 '옮겨가는 것'을 방해하는 해로운 것이 된다."(154)


"클레르보의 수도원장 성 베르나르에게 색은 빛이기 이전에 물질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색조가 아니라, 오히려 밀도·농도·깊이가 문제였다. 색은 지나치게 풍부하고 불순한 것이었다. 곧 고위성직자들의 말에 흔히 등장하며 사실상 전부라고도 할 수 있던, 헛된 사치와 '허영vanitas'이었다. 아울러 색은 농밀한 것·불투명한 것과 관계가 깊었다." "그에게 '색'이라는 말은 좀처럼 '빛'이나 '광채'라는 관념과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혼탁한', '빽빽한', '꽉 막힌' 등이 어휘들로 꾸며지는데, 그 어휘들은 모두 혼란·포화·어둠이라는 관념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색에서 빛이 아니라 빛이 빛이 없음을, 밝음이 아니라 어둠을 보고 있었다. 색은 밝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둡게 한다. 그것은 어둠의 영역을 넓혀 숨통을 조여온다. 색은 악마적인 것이다. 아름다운 것·빛나는 것·신적인 것은 모두 다 어둠을 벗어나 그 바깥에 있다. 그러므로 색으로부터, 특히 다색多色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야 한다."(157)


# 그렇지만 중세 가톨릭 세계에서 성 베르나르의 태도, 더 일반적으로 (예배당 내부의 빛을 제한했던) 시토파의 태도는 소수였다.


"16세기 초는 인쇄본과 판화의 이미지, 곧 '흑백'의 문화와 상상이 지배적으로 되어가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때 태어난 프로테스탄트는 (예배·옷·예술·주거·'업무' 등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전면적으로 검은색·회색·흰색을 중심으로 구성된 색의 체계를 권장하고 확립했다." "츠빙글리에게 예배의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진지한 분위기를 흩트리는 것이었다. 루터와 멜란히톤에게 교회는 인간의 모든 허영을 없애는 장소여야 했다. 카를슈타트에게 교회는 〈유대교 회당처럼 순수해야〉 했다. 칼뱅에게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장식은 신의 말씀이었다. 곧 이들 모두에게 교회는 신자를 거룩함으로 이끌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간소하고 조화로우며 어지럽지 않은 곳, 겉모습의 순수함이 영혼의 순수함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로마 교회가 연출하던 전례의 색은 머물 곳을 잃었고, 교회 내부에서 색은 어떤 전례적 역할도 맡지 않게 되었다."(181, 186)


"성 베르나르와 칼뱅의 말은 비슷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예술에서 나타난 색 혐오는 전혀 혁신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동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서양의 색에 관한 감수성의 변화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맡았다. 흑백의 세계와 본연의 색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는 데 기여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색 애호라는 로마의 반작용을 낳아 바로크와 예수회 예술의 탄생에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실제로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은 교회를 지상에 실현된 천상의 이미지이자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보는 교리를 바탕으로 성전 내부의 온갖 화려함을 정당화했다. 신의 거처에 지나친 아름다움 따위는 없었다. 종교개혁은 대리석·금·값비싼 직물과 보석·스테인드글라스·조각상·프레스코화·종교화·반짝이는 도장과 채색과 같은 모든 것들을 교회와 예배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바로크 예술과 함께 교회는 다시 색의 전당이 되었다. 로마네스크 시대에 클뤼니파의 전례와 미학이 그랬듯이 말이다."(190-1)


8 중세의 염색업자


"'혼합'에 대한 혐오의 영향은 일상생활이나 물질문화에서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상징의 영역에서도 매우 많이 나타났다. 덧붙이고, 헝클고, 융합하고, 뒤섞는 것은 흔히 악마와 같은 일로 여겨졌다. 창조주가 부여한 사물의 본성과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염색업자·대장장이·약제사·연금술사처럼) 그런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의심을 받았다. 그들은 물질에 일종의 속임수를 쓰는 것처럼 여겨졌고, 그들 자신도 어떤 작업을 하는 것에는 망설임을 품고 있었다. 예컨대 염색업자의 경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색을 섞어서 제3의 색을 만들려고 선뜻 달려들지 않았다. 가령, 녹색 색상은 파란색과 노란색을 섞어서 얻지 않고, 자연물의 녹색 색소와 염료에서 얻거나, 파란색이나 회색 염료를 혼합하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 처리해서 얻었다." "파란색과 빨간색을 섞어서, 다시 말해 대청과 꼭두서니 염료를 혼합해서 보라색을 얻는 일도 좀처럼 없었다."(201-2)


"염색의 가격이나 가치 체계는 적어도 색 만큼이나 농도·선명도에도 기초해 있었다. 곧 아름다운 색, 귀하고 값진 색은 진하고 선명하고 빛나는 색이었으며, 직물의 섬유에 깊게 배어들어 햇빛·세탁·세월에서 오는 탈색을 견디는 색이었다." "이는 우리의 지각이나 근대적인 관념과 충돌한다. 중세의 염색업자와 그들의 고객에게 진한 색은 똑같은 색상의 흐리고 덜 짙은 색보다 다른 색상의 진한 색과 더 가깝게 지각되었다. 예컨대 모직물의 진하고 밝은 파란색과 더 가까운 것은 흐리고 광택이 없는, '색바랜' 파란색이 아니라, 똑같이 진하고 밝은 빨간색이었다. 이러한 진한 색, 짙은 색, (또렷하고 내구성이 강한) 바래지 않는 색에 대한 추구는 염색업자를 위해 마련된 모든 처방집들에도 나타난다. 이 경우에도 핵심적인 조작은 매염이었다. 직물과 염료들마다 서로 다른 착색제가 필요했다. 그리고 작업장마다 고유한 관습과 처방이 있었는데, 기술은 펜과 양피지보다는 입과 귀를 거쳐 더 많이 전해졌다."(204)


9 붉은 털의 남자


"모든 배신자들처럼 유다도 붉은 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중세 전통에서 붉은 머리카락이나 수염으로 관습적으로 구별되던 카인, 델릴라, 사울, 가늘롱, 모드레드와 같은 이들 말이다. 실제로 오래전부터 서양에서 배신은 자신의 색들을, 아니 정확히 말해서 자신의 색을 가지고 있었다. 빨간색과 노란색 사이에 위치한 그 색은 두 색 모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 두 색을 합쳐 부정적인 상징성을 단순히 두 배가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늘렸다. 이 악한 빨간색과 악한 노란색의 혼합은 우리에게 친숙한 오렌지색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오렌지색은 중세의 감수성에서는 그 색조와 빛깔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오렌지색보다 어둡고 채도가 높은 이 색은 악마·여우·위선·거짓·배신의 색인 적갈색이었다. 중세의 적갈색은 언제나 빨간색이 노란색보다 짙었고, 이 빨간색은 진빨강처럼 빛나지 않았다. 그래서 윤기가 없는 침울한 색조를 띠어, 빛 없이 타오르는 지옥의 불꽃을 연상시켰다."(225-6)


# 사라센과 결탁해 롤랑을 죽음에 이르게 한 가늘롱, 아서왕을 배신한 모드레드


"그러나 유다가 빨갛지만은 않았다. 그는 노랗기도 했다. 12세기 말 이후의 도상들에서는 노란색이 점차 유다의 옷에 자주 할당되는 색으로 등장했다. 그의 '붉은 털'에는 (악한 피와 악한 불을 뜻하는) 피와 지옥의 빨간색만이 아니라, 배신과 거짓말의 노란색도 동시에 담겨 있었다." "수많은 문학·백과전서 문헌들에서 그 색은 일찍부터 거짓과 거짓말의 색이었다. 나아가 점차 유대인의 색이자 유대교 회당의 색이 되었다. 1220~1250년대 이후 기독교 도상은 유대인을 나타내는 데 이 색을 거듭 사용했다. 이제 유대인은 노란색 옷을 입거나, 일부가 노란색으로 된 복장으로 표현되었다. 모자가 가장 많았고, 긴 겉옷·망토·허리띠·소매·장갑·신발이 노란색인 경우도 있었다. 이런 관습은 점차 도상과 상상에서 현실로 옮겨갔다. 랑그도크·카스티야·이탈리아 북부·라인강 유역 등의 지방에 있는 여러 도시들에서 유대인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복장 규제를 강제하면서 식별의 기호로 이 색을 즐겨 사용했다."(234-5)


10 문장의 탄생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중반 사이) 서양의 전사들은 (턱까지 치켜 입는) 사슬갑옷의 두건과 (얼굴을 덮어 가리는) 투구의 콧대 때문에 서로의 얼굴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투가 한창일 때 적군과 아군을 식별할 수 있는 기호로 1080~1120년 무렵부터 (이 부사가 중요한데) '점차' 방패의 넓은 평면에 기하학적인 도형이나 동물·꽃 등을 그려넣는 관습이 생겨났다." "원시적인 문장체계는 개인·가문·봉건적 관계라는, 기존의 3중의 표장체계를 (사회적·기술적으로) 단일한 체계로 결합시킨 산물로 등장했다. 새로 탄생된 체계는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에 교회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문장을 기술하는 데 쓰인 언어가 처음부터 (라틴어가 아니라) 속어였다는 사실은 이를 반영한다. 그 체계는 군사적 차원을 뛰어넘어, 12세기를 거치면서 모든 개인과 사회집단들에 더 큰 파급력을 끼치면 제기된 문제, 곧 정체성의 탐구와 확립이라는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었고, 이것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다."(243, 248-9)


"1180~1200년대 이후 하나의 혈족 안에서는 단지 한 인물, 곧 본가의 장자만이 '완전한' 문장, 요컨대 덧붙여진 요소가 없는 가문의 문장을 지녔다. 다른 자식들과 그 밖의 다른 모든 이들은 그와 같은 권리를 지니지 못했다. 그들은 문장에 변형을 더해서 자신이 '문장의 우두머리'가 아님을, 곧 본가의 장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야 했다. 이러한 변형을 '분가 표지Brisure'라고 한다. 여성에게는 이것이 적용되지 않았다. 미혼인 여성은 아버지와 같은 문장을 지녔고, 기혼인 여성은 대체로 남편의 문장과 아버지의 문장을 조합한 문장을 사용했다." "문장은 세습되었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친족관계에 있는 것 같지 않은 두 가문이 몹시 비슷한 형태의 문장 때문에 같은 조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문장체계는 계보학을 도와서 인물을 식별하거나, 인명을 재발견하거나, 혈통을 확인하거나, 친족관계를 재구성하거나, 동명이인을 구별하는 데 기여했다."(259-60)


"방패는 문장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고, 그것이야말로 '엄격한 의미에서stricto sensu' 문장을 나타낸다." "방패 바깥의 장식들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중요한 것은 투구꼭대기장식cimier, 곧 투구와 헬멧 위에 표현된 문양이었다. 이것은 개인의 욕구만이 아니라, '씨족' 형태의 친족관계도 나타냈다." "투구꼭대기장식은 적어도 처음에는 (방패 문장과 달리) 인물의 정체성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격을 변화시켜 그 인물에 새로운 힘을 부여했으며, 그를 좁은 가문의 틀에서 끌어내서 더 넓은 친족관계의 연결망 안에 자리하게 했다. 곧 그것은 일종의 가면이자 토템이었다." "이러한 '씨족적인' 투구꼭대기장식에 가장 집착한 것은 당연히 적장자의 가문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다시 말해 가장 낮은 지위의 분가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귀족 가계에서 가문의 투구꼭대기장식에 가장 집착하고, 개인의 투구꼭대기장식을 가장 사용하지 않은 것은 대부분 지위가 낮은 자들이었다."(268-9, 275)


11 문장에서 깃발로


"(프랑스·영국의 경우처럼) 국가의 탄생이 국민의 탄생보다 앞선 곳도 있고, (스위스·독일·이탈리아의 경우처럼) 순서가 반대인 곳도 있다. 국가가 국민에 앞서 탄생한 경우에 (갈리아의 수탉·아일랜드의 클로버·바스크의 십자가 등과 같은) 오랜 민족적 상징은 결코 공식적인 국가의 형상으로 바뀌지 않았다. 그 대신 옛 왕조의 표장이 군주제의 표장을 거쳐서 국민적 상징의 역할을 맡았다. 국민이 국가에 앞서 탄생한 나라들에서는 오래된 문장의 형식이나 색이 왕조와 결합했다. 아울러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연방 조직자의 역할을 맡으면서 곧 국민적 상징이 되었다." "바이에른의 사례를 보면, 1918년 이후 바이에른 왕국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비텔스바흐 왕조의 혈통도 뿔뿔이 흩어지고 갈라져서 더는 바이에른을 통치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바이에른 주와 주민은 그대로이다. 아울러 오래된 '은색과 청색의 빗금무늬 방추형 문양'은 그들에게 여전히 연방 결성의 표장이자 주권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285-7)


"모든 기호, 표장, 색과 마찬가지로 깃발도 결코 홀로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깃발들과의 관계와 비교를 통해서만 비로소 생명을 지니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리스 국기는 1821~1823년 오스만튀르크에 맞서 국민적 반란이 일어났을 때 처음 등장했으며, 혁명기를 거쳐 독립을 달성한 1833년에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처음의 구성은 '청색 바탕에 은색 십자가'였으나, 뒷날 두 차례에 걸쳐 바뀌어 오늘날의 '파란색 바탕에 1개의 흰색 십자가와 4개의 가로띠무늬' 형태가 되었다." "그리스 깃발의 최초 구성은 (빨간색 바탕에 흰색 초승달과 별 모양인) 오스만튀르크 깃발에 대한 대응전략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이슬람의 초승달에 대응하고, 오스만튀르크와 이슬람 세계에서는 낮게 평가되던 파란색은 빨간색에 대응한다. 이렇게 소수자의 깃발은 홀로는 의미를 지니지 않지만, 다른 어떤 것에 맞서는 대립물로 기능하면서 저항을 공공연히 선언하는 역동적인 상징이 된다."(296-8)


3부 놀이와 영향


12 체스의 전래


"인도에서 오래전에 출현한 체스의 다른 형태에서는 대체로 (움직이는 말을 선택하는 것이나 판 위에서 나아가는 칸수와 같은) 체스말의 진행방법을 주사위로 결정했다. 이런 방법은 놀이가 이슬람 세계로 확산되었을 때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서양에 전해졌을 때에는 부활하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었다. 교회에게 라틴어로 '알레아alea'라고 하는 '운에 맡기는 놀이'는 꺼려야 할 것이었고, 뜻밖의 행운에 의지하는 노름은 모두 악마적인 것이었다. 주사위는 특히 나쁜 것이었다. 다른 놀이보다 내기를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성·오두막집·술집·수도원 등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든 돈·옷·말·집 등을 가지고 있는 온갖 것들을 걸고 내기를 했다. 주사위는 위험한 놀이이기도 했다. 주사위통이 사용되기는 했으나, 문학작품에도 가끔 언급되듯이 특수하게 조작한 주사위를 이용한 속임수가 자주 행해졌기 때문이다. 요컨대 체스를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주사위였다."(314-5)


"그러나 중세에 교회와 수도원의 수장고에 체스말이 있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교회의 태도는 놀랍다. 한쪽에서는 체스를 즐기는 관습을 단죄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거의 성유물을 숭배하듯이 체스말을 대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체스라는 놀이는 악마적인 것으로 여겨졌지만, 그것에 사용되는 체스말은 중요하게 보관되거나 때로는 숭배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단죄가 그다지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놀이를 즐기는 관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꾸준히 사회 전체로 퍼져갔다. 둘째로, 13세기에 이르러 놀이 자체가 일반적으로 재평가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그 뒤 놀이들은 대대적으로 궁정풍 기사도 교육의 일부를 이루게 되었다. 끝으로, 무엇보다도 체스에 대해 교회가 적의를 품은 중요한 이유이던 주사위의 사용, 곧 우연에 의지하는 성격이 점차 사라졌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다." "주사위 사용을 포기하면서 체스는 점차 명예로운 지위를 확보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숙고가 우연을 대신했다."(313-5)


13 아서왕 놀이


"13세기 중반 아서왕 전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이름이 수많은 지역들에서, 그리고 귀족층뿐만 아니라 농민층에서도 받아들여졌다." "중세말(14~15세기)에 아서왕과 관련된 인명을 (일시적인 별명을 제외하고) 실제의 세례명으로 하는 관습은 가장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던 두 사회계층과 관련이 있었다. 하나는 얼마간 몰락해가던 소귀족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지위가 높아지던 부유한 도시상인 계층이었다. 소귀족에게 그러한 관습은 백년전쟁에서 크게 훼손된 기사로서의 위신을 조금이라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아울러 인명이라는 '겉모습'으로 경제적·정치적 쇠퇴를 메우려는 수단이기도 했다. 거꾸로 부르주아에게는, 아니면 적어도 도시 귀족에게는 (정략결혼, 자금 대부, 왕에게의 봉사 등 귀족사회로 참여하기 위해 행한 다른 거들과 마찬가지로) 문학적 가치체계에 기초해 귀족문화와 귀족계급으로 들어가기 위한 사회적 전략이었다."(343, 347-8)


14 라퐁텐의 동물지


"라퐁텐이 그려낸 동물들은, 그가 말하는 것처럼 시골의 한가한 무료함 속에서 만난 동물들이 결코 아니었다. 대다수가 이미 고대와 중세의 우화작가들이나 동방의 이야기 작가들, 『여우이야기』나 이솝우화, 동물을 소재로 한 시의 세계와 같은 온갖 전통들에 등장했던 동물들이었다." "동물의 왕인 사자는 오만하고 위엄이 있었고, 여우는 교활하고 종잡을 수 없었다. 늑대는 언제나 굶주려 있고 잔혹했으며, 당나귀는 어리석고 게을렀다. 토끼는 유쾌하고 느긋했으며, 까마귀는 시끄럽고 욕심이 많았다. 동물들은 모든 우화에서 그런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지식인 계층의 문화와 민중문화에서 이러한 동물의 성질은 점차 틀에 박힌 형태로 굳어졌다. 그리고 뛰어난 동물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장학은 언제나 형태보다 구조를 우선하며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진 불변의 뼈대 주위에 일종의 유연성을 만들어냈다. 동물들이 그 뒤 어떻게 쓰이든 결코 자신의 성질을 잃지 않을 그런 유연성이었다."(355-6)


15 애수의 검은 태양


16 아이반호의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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