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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 중세에서 근대의 별을 본 사람들 ㅣ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1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4월
평점 :
1장 잔 다르크, 성녀인가 마녀인가
"1430년 5월 23일, 콩피에뉴 전투에서 사로잡힌 잔 다르크는 매우 불리한 법정 싸움을 해야 했다. 잔다르크는 스스로 자신이 이단과 마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피고는 신의 은총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중세 신학에 어두운 우리야 언뜻 문제의 성격조차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실은 웬만한 신학자라도 쉽게 답할 수 없는 난제다. 만일 자신이 신의 은총 안에 있다고 답하면 종교적 오만의 죄에 걸려 이단 판정을 받는다. 신학적으로 누구도 자신의 영적 상태를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답하면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자백하는 것이 된다. 잔 다르크는 여기에 말려들지 않고 그야말로 멋진 신의 한 수를 보였다. 〈만일 내가 신의 은총 안에 있지 않다면 신께서 내게 은총을 내려 주소서. 만일 내가 신의 은총 안에 있다면 계속 그 상태로 남게 해 주소서.〉 이 대답을 듣고 재판정 전체가 〈지극히 놀랐다multum stupefacti〉라고 기록하고 있다."(44-6)
"잉글랜드는 샤를 7세가 이단으로 화형 당한 여자에게 이끌려 대관식을 치렀으니 정당성이 없다고 주장하며 1431년 12월 16일 10세의 헨리 6세를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 데리고 가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프랑스 쪽으로 기운 뒤였다. 1435년 아라스 조약에 따라 부르고뉴는 잉글랜드 대신 프랑스 왕실과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군은 1437년 파리, 1449년 루앙을 회복했고, 1453년 백년전쟁을 종결지었다." "백년전쟁이 끝난 뒤 잔 다르크의 복권 작업이 이루어졌다. 1456년 재심 재판을 하여 잔 다르크가 이단이라는 이전 판결을 뒤집었다. 첫 번째 재판이 정치적이었듯이 이번 재판도 당연히 정치적이었다. 마녀의 도움으로 프랑스 왕이 대관식을 치렀다고 할 수야 없지 않은가. 19세기에 이르러 민족주의가 불타오르면서 프랑스 교회가 잔 다르크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런 노력이 20세기에 결실을 거두어 1920년 5월 9일 교황 베네딕트 15세가 잔 다르크를 성인으로 축성했다."(50-1)
2장 부르고뉴 공작들, 유럽판 무협지
"백년전쟁 당시 3대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오가면서 변화무쌍한 정치와 외교를 벌였다. 책략의 대가인 선량공은 1435년에 잉글랜드에서 프랑스 왕실로 동맹을 바꿔 아라스 조약을 맺고 국왕에게 파리를 내주었다. 그는 샤를 7세를 프랑스 국왕으로 공식 인정하고 그 대신 샤를 7세는 (선량공 필리프의 아버지인) 용맹공 장의 암살자들을 처벌하기로 약속했다. 필리프는 프랑스 왕실과 다투기보다는 네덜란드 방면으로 영지를 확대하는 것이 더 긴급한 문제라고 판단했다. 백년전쟁은 프랑스에 유리하게 마무리되었다. 국왕이 정치력을 되찾고 군대를 정비하면서 그동안 내내 패배를 당했던 프랑스군이 도시를 하나하나 탈환해갔다.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서남부의 가스코뉴 지역을 상실한 후 이를 되찾기 위해 벌인 카스티용 전투(1453)가 사실상 백년전쟁의 마지막 전투였다. 잉글랜드는 이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대륙 내 영토를 소유하고 지배하겠다는 꿈을 사실상 접어야 했다."(75)
"왕이 되기를 욕망했던 4대 부르고뉴 공작 담대공 샤를의 문제는 자신의 영토들이 분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결정적인 과제는 로렌 지방을 차지하는 일이었다." "샤를은 1475년 한때 로렌 공작령의 수도인 낭시를 얻었지만 다음 해에 스위스로 진군했다가 스위스군에 연이어 패배했다. 우선 그랑송에서 패배하여 대포와 거대한 재산(그중에는 은으로 만든 욕조도 포함되어 있다)을 버리고 도주했다. 다시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뮈르텐(모라)을 공격했으나, 로렌의 기병과 스위스 보병에게 또 패배했다. 그해 10월에는 낭시를 다시 잃었다. 4대 선친부터 꿈꿔왔고 샤를 자신으로서도 필생의 과업인 영토 통합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낭시를 차지해야만 했기에 겨울 혹한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강행군하여 낭시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것이 마침내 파국을 몰고왔다. 1477년 1월 5일 낭시 전투에서 패배했고 그는 목숨을 잃었다. 독립왕국을 건설하려던 부르고뉴 가문의 4대에 걸친 야심은 이로써 종말을 고했다."(86-7)
3장 카를 5세, 세계제국을 꿈꾸다
"카를은 친할아버지가 황제이니 합스부르크 왕실이 소유한 중동부 유럽의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게 되고, 친할머니는 부르고뉴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부르고뉴의 마리)여서 유럽 중심부의 알짜배기 땅들을 받게 된다. 외가 쪽으로는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가 외조부모이므로 카스티야와 아라곤, 그리고 광대한 아메리카 식민지를 물려받는다. 이 모든 유산이 한 인물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는 로마 제국을 넘어서는 세계 제국 건설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자면 우선 프랑스를 복속시켜야 한다. 물론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도 차지해야 한다. 내부적으로는 루터파 등 신교 세력을 억압하여 가톨릭 제국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그러고 나서 힘을 모아 기독교 신앙의 적인 오스만 제국을 누르고, 더 나아가서 아메리카와 필리핀의 식민지를 굳건히 한 뒤 나머지 세계를 마저 복속시켜야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꿈인가. 그리고 얼마나 허황된 계획인가."(99-100, 109)
"신은 카를 황제에게 행복한 결말을 약속하지는 않은 것 같다. 1550년 새 교황 율리우스 3세는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이탈리아 문제도 다시 혼란에 빠졌다. 독일에서는 루터파에 대한 호의가 늘어나던 반면에 카를의 아들 펠리페 2세에 대한 저항은 커져갔다. 프랑스의 앙리 2세가 로렌 쪽으로, 오스만 제국의 육군은 크로아티아 방면으로, 해군은 이탈리아 연안으로 공격해왔다. 카를 5세는 마지막 힘을 모아 메스를 공격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운명의 여신도 여자야. 늙은이는 좋아하지 않는다네.' 그는 이렇게 자조했다. 이제 그의 나날은 확실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종교적 타협안도, 신·구교 양측이 모두 반대해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어정쩡한 타협에 이르는 데 그쳤다. 각 지역 영주가 가톨릭이든 루터파든 하나를 정하면 그곳 신민들은 영주의 종교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가톨릭을 옹호하겠다는 황제의 평생의 종교정책 역시 최종적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127-8)
4장 헨리 8세, 근대 영국을 출범시킨 호색한
"치세 전반기의 헨리는 '르네상스 군주'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예술과 문예를 보호하고, 여러 악기 연주에 능했으며, 용맹한 기사를 자처하며 직접 전쟁에 참여했다." "헨리의 대외 정책은 유럽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대립이 근대 유럽의 국제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축인데, 이때 잉글랜드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이처럼 강대국 사이를 오가며 균형을 맞추는 것이 영국 정책의 큰 흐름이었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는 그야말로 견원지간이었다. 헨리는 처음에는 카를 5세 편을 들었으나, 파비아 전투(1525)에서 프랑수아 1세가 포로가 되고 전세가 신성로마제국 쪽으로 기울어지자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 그 후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나자(1527) 이번에는 교황을 편들고 나섰다. 이 마지막 일은 균형외교 정책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신상 문제도 고려한 결과였다."(141-3, 148)
# 헨리 8세의 신상 문제 : 헨리는 1528년부터 아들을 낳지 못하는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재혼하려 했으나 교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자신이 직접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수장령首長令, 1534년)이 되어 성공회를 만든다.
"영국사에서 헨리 8세만큼 국왕 개인의 존재가 결정적 비중을 차지한 인물은 흔치 않을 것이다.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은 루이 14세보다도 헨리 8세에게 더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실제로 루이 14세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우선 국왕 자신이 엄청난 위엄을 과시했다. 국왕은 토머스 울지 추기경이나 토머스 크롬웰처럼 강력한 재상을 앞세우고 주요 인사들을 소집해 조언을 들었지만, 모든 중요한 결정은 최종적으로 자신이 내렸다. 결과적으로 헨리 8세의 노력 덕분에 잉글랜드는 침략과 종교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튜더 왕조 이전의 잉글랜드는 유럽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국으로서 기껏해야 양이나 쳐서 양모를 대륙에 파는 가난한 국가였다. 그런데 16세기 이후 잉글랜드는 일취월장하여 18~19세기가 되면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는 중심국가로 떠오른다. 잉글랜드가 그 찬란한 발전의 도상에 오르게 한 선구자가 폭군이자 편집증 환자이자 호색한인 헨리 8세다."(166-9)
5장 콜럼버스, 에덴동산의 꿈으로 근대를 열다
"독학으로 세계관을 형성해 나간 콜럼버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이마고 문디Imago Mundi》('세계의 이미지' 또는 '세계의 상像')다. 《이마고 문디》에서 콜럼버스를 매료시킨 내용이 바로 〈지구가 굉장히 작다〉는 것, 그리고 〈육지와 바다의 비율이 6대 1〉이라는 것이다. 육지가 6이고 바다가 1이라면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놓인 바다가 매우 작을 테고, 이 바다를 건너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일이 될 터이다. 그는 마르코 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에서 읽은 내용으로 이 주장을 보충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 기록을 따라가보면 유럽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엄청난 거리를 여행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아시아 대륙이 아주 크다는 뜻이고, 바꿔 말하면 반대 방향에서 유럽을 출발해 아시아로 가는 항해 거리가 짧다는 의미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 때 드디어 아시아에 왔다고 생각했던 것은 당연하다. 자기가 원래 아시아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지점에 도착했기 때문이다."(188-9)
"콜럼버스는 말년에 《예언서》를 쓰는 데 전념했는데, 이 자료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세계관이 가히 점성술적이라는 점이다." "콜럼버스에 따르면 인류 역사는 이제 마지막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조만간 마지막 황제가 나타나서 이 세상의 마지막 전투, 즉 이슬람과의 최종 전투를 준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군대를 키우기 위한 자금이 필요할 텐데 그것은 구약성서에서 언급된 솔로몬의 금광에서 얻게 될 것이다. 이 금광은 사람 눈에 띄지 않다가 마지막 시대가 되면 드디어 하느님이 선지자들에게 알려준다고 한다. 과연 하느님이 약속하신 금은 누가 발견하게 될까? 바로 콜럼버스 자신이다! 〈내가 하느님이 선택하신 도구〉라는 게 그가 내린 결론이다." "바로 자신이 못 배우고 미천하되 신의 선택으로 '영적 이해력'을 얻었으며(이에 대해 자신의 내부에 '불이 있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진리를 꿰뚫어 알게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202-4)
6장 코르테스와 말린체, 구대륙과 신대륙의 폭력적 만남
"말린체는 적에게 바쳐진 공물 같은 처지로 에스파냐인들을 처음 만났지만, 중립적인 통역 역할에 그치지 않고 훨씬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자신이 알게 된 정보를 코르테스에게 전해준 것이 때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이 지역 내 부족들이 아스테카 제국과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다는 결정적인 사실을 알려주었다. 코르테스는 이를 이용해 여러 부족을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멕시코 지역에서는 수많은 부족이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다. 그중 세 부족이 동맹을 맺어 다른 부족들을 지배했다. 코르테스가 찾아왔던 당시에는 틀라코판·테츠코코·테노치티틀란 동맹이 가장 크고 강력했다. 피지배 부족들은 때로 끔찍한 살상과 가혹한 착취를 겪었다. 우리가 아스테카 제국이라 부르는 이 지역의 실상은 깊은 원한을 가진 피지배 부족들이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느슨한 동맹에 불과했다. 그 사이를 파고들어 여러 세력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 코르테스가 성공을 거둔 핵심 요인이었다."(221-4)
"아메리카 문명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인신공희 관행에는 심오한 종교 철학이 있다. 이들의 우주관에 따르면 태양과 달이 돌고 계절이 바뀌는 따위의 모든 우주적인 일에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시간이 가면 에너지가 줄어들고 결국 우주는 종말을 맞는다. 우주의 파멸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자신의 에너지를 우주에 공급하는 것이다. 힘이 떨어진 태양과 대지는 기근과 갈증에 시달린다. 이 지역에 널리 퍼진 유명한 표현을 옮기면 〈신은 피에 목말라 있다.〉 그래서 사람의 심장을 꺼내 태양신께 바치고 대지에 피를 흘려주는 것이다." "아스테카 유적의 꽃 그림은 서정적인 아름다움의 표현이 아니라 우주를 살리기 위한 '꽃 같은 죽음'을 의미한다. 사람의 목숨을 바쳐 우주를 살린다는 의미는 표현이 조금씩 다르지만 아메리카 거의 전 지역에 퍼져 있었던 기본적인 종교 철학이었다." "이런 끔찍한 일들을 지켜본 말린체는 사람의 피를 요구하지 않는 에스파냐의 신이 더 진정한 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231-3)
7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천사와 악마를 품었던 천재
"다빈치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는 그의 노트가 있다. 그는 늘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중요한 정보다 싶으면 바로 적어두었다. 심오한 통찰의 조각들도 여기에 다 모아놓았다. 이 중 일부는 완성된 작품으로 발전했을 수 있으나, 대부분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니까 노트는 미완성 작품을 위한 임시 텍스트 모음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은 '미완성'을 창조적 천재성의 특징으로 파악했다. 언제 어떤 영감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각 분야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솟아나오니 그런 것들을 일단 붙잡아두어야 했다." "또 한 가지 이 천재의 작업이 가진 특징은 변화무쌍하고 불규칙하다는 점이다. 그림을 그릴 때에도 한 이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미친 듯 일하고는, 그 후 며칠 동안은 손을 놓고 명상을 하다가 다른 작업에 손을 대는 식이다. 천재는 꼭 의무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니 창의적 게으름을 누리며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한없이 느리게 일하는 것이다."(261-2)
"16세기 말에 조각가 레오니는 다빈치가 죽기 전에 멜치에게 남긴 수천 쪽에 달하는 노트를 '기술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으로 분류했다. 이로 인해 다빈치의 이미지가 많이 왜곡되었다. 예술사가는 그림에만 몰두하고 엔지니어는 그의 기술적 근대성만 보려 한다. 파노프스키의 말대로 르네상스의 특징은 지식의 벽 깨기였고, 다빈치는 그런 정신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아니었던가. 그는 천사와 악마를 두루 경험한 후 인간의 내면과 세계의 모순을 갈무리하여 지극히 높은 수준에서 관조하고 표현했다. 미슐레의 말대로 다빈치는 '파우스트의 이탈리아 형제'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는 피렌체의 공방에서 견습생으로 공부하며, 밀라노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며, 또 로마와 앙부아즈에서 궁정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계속 배워나갔다. 스스로 말하듯 '경험의 아들'이었다. 다시 말해 시대가 그를 불러낸 것이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경험이 가장 천재적으로 꽃핀 시대였다."(283)
8장 루터, 세상을 바꾼 불안한 영혼
"1514~1515년 사이 루터는 〈로마서 1:17〉에 나오는 내용(〈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을 깊이 생각하다가 '하느님의 의iustitia dei'라는 단어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의'란 하느님의 정의justification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후에 하느님의 법정에서 판결을 받을 텐데, 하느님이 보실 때 인간이 어찌 완전하겠는가. 분명 사악함 덩어리인 불완전한 죄인에게 하느님의 가공할 처벌이 따를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성경 구절을 홀연 다르게 해석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의 의는 벌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주는 선물 같은 것이다. 그 선물을 통해 우리는 즉시 의로움을 갖추게 되리라. 따지고 보면 우리말로 '용서'라고 번역하는 'pardon'은 원래 뜻이 '전부par 준다don'는 것이다. 절대 결핍의 존재인 인간에게 하느님이 생명과 은총을 채워주는 것이 'pardon'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오직 믿음으로써sola fide 가능하다. 하나님은 다만 우리의 믿음을 원할 뿐이다."(294-5)
"중세 말 가톨릭 교회가 십일조를 강요하고, 걸핏하면 종교재판을 통해 사람들을 억압해왔기 때문에 농민들은 가톨릭 교회를 두렵고 부담스러운 조직으로 여겼다. 루터가 교회의 부패를 비난하고 영적 자유라는 새로운 주장을 펼치면서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 세세한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한 일반인들로서는 단지 이전의 종교적 억압을 벗어던진 것으로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신자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그가 관심을 둔 대상은 어린이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루터파만 아니라 다른 신교 교파들과 종래 가톨릭 역시 주입식 교육이나 체벌 같은 강제수단을 이용해 '사회규율화'를 추진하게 된다. 결국은 종교와 권력이 서로를 강화하다가 국교國敎라는 이름으로 국가와 특정 종교가 결탁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극단화되면 그렇게 조직된 교파들끼리 피 튀기는 전쟁도 불사하리라. 그런 갈등의 씨앗이 16세기에 싹트고 있었다."(3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