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3 - 근대의 절정, 혁명의 시대를 산 사람들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3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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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적, 악당들의 반자본주의 유토피아


"근대 초기의 해적은 국가로부터 약탈허가증Letter of Marque을 받아 적국의 선박을 공격하는 민간업자들이었다. 공식 해군만으로는 광대한 바다를 통제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적선을 공격하는 임무를 민간업자에게 맡긴 것이다. 16세기부터 등장한 이런 부류의 해적을 특히 '사략선privateer 업자'라 부른다." "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식민지와 교역 거점 들을 선점한 에스파냐·포르투갈과 그 뒤를 쫓는 잉글랜드·프랑스·네덜란드 사이에 무자비한 충돌이 발생했다. 특히 카리브해는 해적이 자주 출몰하는 위험 지역이었다. 아메리카의 은을 수송하는 '보물선'이 오가고, 플랜테이션의 발달로 큰 부를 쌓은 이 지역에 잉글랜드인, 네덜란드인 혹은 그 외의 다국적·다인종의 폭력 집단들이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가했다. 이때의 해적 집단을 버커니어buccaneer라고 불렀다. 다음 단계로 가면 해적의 성격도 변질되어 세계의 바다를 오가며 아무 상선이나 무차별적인 약탈을 일삼는 무법자 해적으로 변모한다."(20-2)


"해적들은 기존 사회의 법 밖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엄격한 규율이 필요했다.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를 이루고 새로운 신념에 근거해서 살아갔다. 그들이 지키려 한 주요 가치는 '평등주의'였으며, 특이한 방식의 '민주주의'를 지켜나갔다. 바솔로뮤 로버츠의 해적 선원들이 작성한 해적 규약에 따르면 중요한 사안은 선장의 독단적 판단이 아니라 모든 승무원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었다. 경제적 관점에서 본다면, 해적들은 그들 나름대로 '도덕경제moral economy'를 좇았고 이를 '민주적'으로 실천했다. 수익은 정해진 규약에 따라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다. 분배 원칙은, 말하자면 그들이 합의한 노동가치설이다. 약탈한 물품을 나누는 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른 자는 무인도에 버리거나 사형에 처했다. 도둑이 도둑질하는 것을 용납지 않는다고나할까. 또한 그들 스스로 보상 제도도 마련했다. 신체 부위별로 상해에 따른 보상이 이루어졌고, 과부의 몫도 따로 정해져 있었다."(44-5)


2 표트르 대제, 새로운 러시아를 건설하다


"표트르는 국가 구조 전반을 개혁하고자 했다. 개혁의 모델은 이전에 방문했던 네덜란드와 영국이었다. 그가 보기에 이 두 나라는 신을 두려워하고 부지런히 실업에 힘쓰며, 특히 항해와 제조업으로 부를 축적하고, 도시 문명, 해외 개척, 기술 발전이 강점인 나라였다. 반면 표트르는 허세와 과시를 싫어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717년에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본 베르사유였다. 우선, 표트르는 정치 조직을 일신했다. 전국을 구베르니야로 불리는 주로 나누었는데, 그 수는 처음에 여덟 개였다가 열한 개로 늘었다. 그리고 표트르 자신이 해외 전쟁에 참여할 때 국정을 맡을 원로원을 창설했다. 원로원과 주 사이를 연결하는 조직이 콜레기야Collegia라는 기관이었다. 과거에는 형식상 차르가 전권을 행사했지만 정책 결정과 집행은 종교 의례를 연상시키는 정교한 궁정 의식에 묶여 있었다. 그런데 표트르의 과감한 국정 개혁으로 전문 관료제가 도입되었고, 러시아는 강력한 절대주의 국가로 발전해나갔다."(86)


"그동안 막강한 지위와 특권을 누려온 세습 귀족인 보야르 가문은 무너져갔다. 새 귀족은 '봉사 귀족'으로 변모했다. 국가에 대한 봉사가 귀족 신분의 기준이 된 것이다. 이제 귀족은 놀고먹는 게 아니라 약 16세부터 죽을 때까지 국가를 위해 복무해야 했다."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의 처지도 갈수록 어려워졌다. 특히 전쟁 상황에서 징병과 조세 부담의 몫은 고스란히 농민들에게 돌아갔다. 또 지주 귀족들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귀족이 자기 소유 농민을 가족 단위로 팔고 살 수 있도록 한 칙령도 반포되었다. 결과적으로, 농민들에 대한 귀족의 지배가 강화되고, 그 귀족들을 국가에 복속시켜나갔던 것이다. 또한 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종교 기관의 수도 감축했다. 표트르가 볼 때 수사는 '게으른 인간들'이었다. 그러니 그냥 놀지 말고 아픈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독려했다. 러시아 교회의 수장 자리인 총대주교직을 비워둔 채 새로운 관료조직인 페트르부르크 종교회의가 교회를 이끌도록 했다."(86-8)


3 마리 앙투아네트, 구체제의 마지막 왕비인가 최초의 근대적 왕비인가


"18세기 중반 유럽의 국제 정세는 급변했다. 수백 년간 적대관계였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동맹으로 변모하는 극적인 '외교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로서는 영국이, 오스트리아로서는 프로이센이 더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양국은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프랑스 왕태자와 오스트리아 황녀의 결혼을 추진했다. 프랑스 왕비의 후보자는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루이와 앙투아네트의 결혼은 차근차근 추진되었다. 1769년 앙투아네트 초상화가 프랑스 궁정으로 보내졌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와 왕실 의례 등을 미리 가르치기 위해 베르몽 신부를 파견했다. 예비신부를 만나보고 프랑스어와 독일어 모두 한심한 수준이라는 것을 확인했지만, 1년 동안 '집중 훈련'을 통해 프랑스어 실력은 많이 나아졌다. 베르몽은 그녀를 관찰한 비밀 보고서를 프랑스 궁정에 보냈는데, 핵심 내용은 간단명료했다. 〈마담 앙투안은 쾌활하며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99-102)


"결혼과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정치적 결정이었다. (루이 16세 처형 이후) 그녀의 사형을 주장한 사람은 급진좌파 의원인 자크 에베르였다. 프랑스 함대가 적에게 패배하자 에베르는 혁명의 분위기를 확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나는 앙투아네트의 머리를 약속했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그녀의 죽음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더구나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던 강경파 의원 장 폴 마라가 코르데라는 여성에게 살해당한 이후 혁명의 분위기는 여성 혐오로 돌아섰다. 과거 잔인했던 여성 지배자의 악행들을 거론하며 이를 앙투아네트와 비교했다. 1793년 10월 14일 앙투아네트는 혁명재판소에 출두했다." "재판에서 전반적으로 얻어내려 한 것은 '카페 루이의 나약한 성격을 지배한 앙투아네트의 사악한 주도권'이라는 주장이었다. 무엇보다 외국 세력과 은밀히 내통하며 프랑스의 안정을 교란하려 했는지를 따졌다." "마침내 10월 16일 12시 15분, '인민의 면도날' 단두대에서 처형된 왕비의 머리가 군중에게 공개되었다."(131-3)


4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불꽃인가 어둠의 심연인가


"1792년 8월 10일, 파리의 각 구區 대표들이 시 청사에 모여 '봉기 코뮌'을 결성했다. 로베스피에르는 피크 구 의회에 참석해 코뮌의 대표로 지명되었다." "민중 세력이 본격적으로 권력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예전에(1791년 5월 10일) 로베스피에르는 언론의 자유는 무제한 허용해야 한다고 연설한 바 있지만, 왕당파 신문들은 폐간했다. 전시중이라 예외적으로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로베스피에르는 반혁명 범법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민중재판소 설치를 강행했다." "9월 2일, 베르됭 함락 소식이 전해졌다. 애국적 흥분 상태에 휩싸인 군중은 감옥으로 달려가 사제, 수녀, 귀족 혹은 반혁명과는 별 관련 없는 좀도둑, 창녀 등을 끌어내서 즉결 처형했다(9월학살). 물론 로베스피에르가 이 일을 지시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 그 같은 논조의 연설을 했고, 과격한 현상에 대해 유감을 표했을 뿐 전반적으로는 반대하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는 냉혹한 정치 지도자로 변모해갔다."(158-60)


"상퀼로트는 물 만난 고기처럼 힘을 행사했다. 1793년 9월, 상퀼로트는 다시 한 번 국민공회에 난입하여 의원들을 압박했다. 당시 국민공회 의장이었던 로베스피에르는 시위대의 의견을 청취했다. 시위대는 혁명재판소 재조직, 반혁명 혐의자 체포, 혁명군 창설, 혁명위원회 정화, 식량공급 안정 정책 시행 등을 요구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것을 받아들여 법제화하기로 했다. 폭력이 합법화된 것이다." "며칠 동안 공포정치 법령들이 제정되었다. 9월 17일, 반혁명 혐의자 단속에 관한 법이 가결되었다. 혁명 정부는 '혐의자'를 폭넓게 해석해 혁명에 반대하는 혐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체포할 수 있었다. 10월에는 〈프랑스 임시 정부는 평화가 도래할 때까지 혁명적〉이라 선언하고 공안위원회에 전시 비상조치권을 부여했다. 상퀼로트는 무장 민병대를 조직하여 지방으로 가서 군대와 도시민을 위한 보급품을 징발하고 반혁명분자들을 척결했다. 혁명은 끝 모르게 과격해졌다."(165-6)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에 대한 책임을 모두 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정부의 수뇌가 아니라 위원회의 일원일 뿐이었다.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한 사람들이 어떤 면에서 더 잔인하고 냉혹했다. 이들은 로베스피에르를 처형한 후 공포정치를 계속하려 했지만, 분위기가 급변했다. 사람들이 끔찍한 공포정치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테르미도르의 반동'(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 끝에 처형된 사건) 이후 의원들은 말을 바꾸었다.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지지자들만 테러리스트였다고 정리해버린 것이다. 그 결과 로베스피에르가 폭력의 아이콘이 되었고, 홀로 악당의 오명을 뒤집어썼다. 혁명은 이후 혼란의 단계로 접어든다. 왕당파가 백색테러를 자행하기도 했고, 급진적인 당파가 무장봉기를 통해 국가권력을 탈취하여 혁명 독재를 이루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혁명이 불러일으킨 힘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일거에 상황을 정리하고 주도권을 잡은 것은 군대였다."(175)


5 모차르트, 혁명을 예감한 천재 예술가


"평생 모차르트의 음악을 즐겨 들었던 아인슈타인은 이런 분석을 한 바 있다. 1784년 12월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19번(K.459)은 전적으로 청중의 취향에 맞춘 작품으로, 기교가 넘치고 허세가 가득한 곡이다. 그런데 두 달이 채 안 되어 모차르트는 그런 식으로 아부하는 곡이 싫다는 듯 전혀 다른 양식의 피아노 협주곡 20번(K.466)을 작곡했다. 당시에는 이 곡이 〈지나치게 앞서나갔고, 빈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요구를 했으며,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청중의 사랑이 자신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확실한 성공을 보장하는 작품들을 계속 작곡함으로써 사랑을 다시 얻으려 했다.〉 그래서 나온 곡들이 피아노 협주곡 22~23번(K.482, 488)이라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분석이다. 이처럼 모차르트는 '자신을 위한 창조'를 주장했다가 다시 물러서기를 반복했지만, 그것은 자기 예술 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해가는 하나의 과정이었다."(194-5)


"18세기, 세계는 변화하고 있었다. 억압과 굴종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으려는 계몽주의 흐름에 모차르트는 공감했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갈망했고 혁명을 예감했다. 그 배경에는 빈에서 만난 지식인들의 영향이 컸다. 예컨대 빈 대학교수 요제프 폰 존넨펠스는 사법개혁을 주도하고 고문 폐지 운동을 벌인 인물이다. 모차르트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공화국, 인권, 관용, 해방, 교육 등 여러 개념을 접했다. 그는 철학자는 아니지만 세상 변화의 큰 흐름을 감지하고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하려 했다. 그 내용은 다소 어설펐지만 예민한 감수성으로 예리하게 표현했다. 이런 점들은 오페라 작품들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첫 번째 문제작이 〈피가로의 결혼〉이다. 피에르 보마르세 원작의 희곡은 루소, 볼테르와 함께 프랑스 혁명을 예비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당대 유럽 사회의 봉건성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두 번째 문제작 〈돈 조반니〉에서 하인 레포렐로가 처음 하는 말은 〈더는 굴종의 삶을 살지 않겠다〉이다."(204-5)


6 볼리바르, 남아메리카의 해방자인가 독재자인가


"남아메리카는 다인종 사회로 심각한 인종 문제를 안고 있었다. 크리오요가 지배 엘리트층을 구성하고, 피지배 계층으로 혼혈인과 흑인 노예들이 있었다. 에스파냐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으려는 주 계층은 크리오요였으며, 혼혈인이나 흑인 노예들은 독립 문제의 당사자도 못 되었다. 식민 모국과 거래해야만 하는 강제 규정과 과도한 세금 등으로 피해를 보는 계층은 식민지 지배층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닌술라레스(본국에서 온 에스파냐인)' 장교들은 현지의 크리오요를 경멸하고 억압했다. 사실 페닌술라레스들 중에는 고위 관료와 성직자도 있었지만 모험가나 군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이들은 본국에서 빛을 보지 못하다가 남아메리카에 와서는 보상 심리로 거들먹거리곤 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독립운동의 주체는 식민지 엘리트 계층인 크리오요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볼리바르는 독립운동의 지평을 확대해갔고, 점차 거대한 피지배층이 움직이기 시작했다."(232-3)


"더 이상 인종 문제를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한 볼리바르는 1815~1816년 이후 혼혈인들을 충원하기 시작했다. 혼혈인들 역시 볼리바르 편에 서서 기회를 얻으려 했다. 더 나아가 흑인 노예들에게도 해방을 약속했는데, 다만 군에 입대하면 해방시켜준다는 조건을 달았다. 여기에 활로 무장한 인디언 병사들까지 합류하면서 다양한 인종의 병사들로 구성된 '해방군Ejercito libertador'을 조직했다. 하지만 그가 흑인 노예들에게 약속한 해방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예를 소유한 농장주들로서는 재산을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었으므로 이 조치에 거세게 반대했고, 흑인 노예들로서는 목숨을 걸면서까지 크리오요의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남아메리카에서의 노예 해방은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문제, 즉 지역 경제에서 노예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노예 노동이 중요한 지역일수록 노예제가 더 오래 지속되었다. 베네수엘라는 1854년에야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다."(233-4)


"1821년 벌어진 카라보보 전투는 남아메리카 해방의 마지막 문턱이었다. 애국파를 이끌고 전투에서 승리한 볼리바르는 정식으로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쟁취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과제는 자신이 제안한 정치 구상, 곧 '그란 콜롬비아'의 헌법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헌법은 이상적이지만은 않았다. 남아메리카 전역을 하나로 통합해 볼리바르가 종신 대통령을 맡고, 게다가 그 후임도 볼리바르가 지명할 수 있다는 내용이 문제였다." "물론 모든 것을 볼리바르 개인의 욕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좋게 해석하면 그는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거대한 꿈과 미래를 갖고 있었다. 민족의 자주성을 유지하면서 모두가 연합하여 더 큰 힘을 확립하자는 것이었다. 미국처럼 강력한 정치체를 만들어야 유럽 혹은 북아메리카 세력과 맞설 수 있고, 지방 카우디요들의 준동을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남아메리카의 실상은 이 같은 이상주의가 뿌리내리기에는 척박했다. 각 지방마다 원하는 바가 달랐기 때문이다."(241-2)


# 카우디요caudillo : 지방에 할거하는 무장 토호土豪 세력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과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스스로를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 생각하는 카우디요들이 사방에 넘쳐났다. 독립전쟁의 영웅인 산탄데르와 파에스도 서로 갈등을 빚었다. 지역주의가 득세하면서 그란 콜롬비아는 거의 붕괴 직전이었다. 산적한 사회 문제 역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828년 볼리바르는 이렇게 탄식했다. 〈우리 발밑에 거대한 화산이 있다. 도대체 누가 억압받는 아래층을 누를 수 있단 말인가. 노예들은 멍에를 벗어버리려 할 테고, 각각의 인종 집단도 자신들이 지배자가 되려 한다.〉" "산탄데르는 '파렴치한 베네수엘라인'들을 비난하며 끝내 독립을 선언했고, 누에바그라나다는 지금의 콜롬비아가 되었다. 상 페루 역시 페루로 돌아가려 했다. '그란 콜롬비아'라는 볼리바르의 야심 찬 구상은 산산조각 났고, 그 틈을 이용해 반대 세력이 치고 나왔다." "볼리바르는 탄식했다. 〈우리가 얻은 것은 독립뿐이다. 그것을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을 대가로 치렀다.〉"(247-8)


7 와트와 아크라이트, 산업혁명의 영웅들


"증기기관이 발전해온 역사를 보다 보면, 마치 이것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가장 중요한 동력원이 되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증기기관이 나오고 나서도 상당한 기간 동안 여전히 수력과 풍력이 동력원으로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고, 특히 물레방아가 증기기관보다 더 성능이 우수했다. 증기기관이 물레방아를 완전히 뛰어넘은 시점은 19세기 중반이다." "발명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확산과 전파다. 증기기관의 효율성이 개선되었다는 것은 연료로 사용하는 석탄의 양이 줄었음을 의미한다. 초기 증기기관이 주로 탄광에서 사용된 이유는 물을 끓여 증기를 만드는 데 엄청난 석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석탄이 많이 나는 영국에서만 유용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영국만큼 석탄 매장량이 풍부하지 않은 탓에 이 발명품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데 점차 증기기관이 개선되어 적은 양의 석탄으로도 충분한 동력을 얻게 되자 전 유럽으로, 더 나아가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268-9)


"면공업은 크게 두 과정으로 나뉜다. 면화에서 실을 잣는 것과 이 실로 천을 짜는 과정이다(실을 잣는 과정을 방적 혹은 정방이라 하고, 천을 짜는 과정을 직조 혹은 방직이라 한다)." "방적과 직조의 기계화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물론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실과 직물의 값이 떨어진다. 그리고 품질이 개선된다. 사실 18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영국에서 생산된 면직물은 여전히 인도산 면직물의 품질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기계화가 이루어지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같은 중량의 섬유로 실을 만들 때 여러 번 섬유를 꼬면 더 튼튼한 실을 만들 수 있다. 이처럼 실의 강도를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는 기계의 발명으로 가늘고 튼튼한 실을 생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직물의 품질도 좋아졌다. 뮬 방적기가 발명되면서 고급 직물의 직조가 가능해졌다." "18세기 후반 약 50년 동안 면공업은 가격을 기준으로 볼 때 1,000배나 성장했다. 영국의 면 수출업자들은 곧 세계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273, 289-90)


8 나폴레옹, 시대를 파괴하고 모순 속에 살다간 황제


"나폴레옹은 혁명으로 어수선해진 프랑스를 바로잡기 위해 평화와 질서를 주장했지만 통치 스타일은 독재였다. 의사결정을 하기 전에 전문가들을 불러서 의견을 청취했는데, 상대편이 지칠 때까지 묻고 또 물었다. 일단 결정을 내린 후에는 거침없이 집행했다. 그의 지시를 게을리하거나 실수하는 경우 불같이 화를 내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집무실에서 그는 마치 링 위의 권투선수처럼 장관들에게 소리치며 구석으로 몰아붙였다(비유가 아니라 실제 그렇게 했다). 하도 소리를 크게 질러서 비서들은 귀가 멀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또한 나폴레옹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경찰 조직을 강화하고, 많은 스파이를 동원해 국민을 감시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가톨릭 사제들이 강론에서 나폴레옹이 거둔 승리를 칭찬한다는 말을 듣자 그런 행위를 금지했다. '승리에 대해 거론하게 내버려두면 실패에 대해서도 거론할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307-8)


"독재는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선전과 여론몰이도 잘 해야 한다. 나폴레옹은 언론을 감시하고, 연극의 결말을 바꾸게 하는가 하면, 자신이 익명으로 기사를 쓰기도 했다. 체제를 미화하고 선전하기 위한 예술품도 대량으로 제작했다." "나폴레옹은 스스로를 메디치나 루이 14세처럼 예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지배자로 여겼다. 심지어 자신을 태양신 아폴론이나 이집트 신 혹은 신에게 보호받는 파라오 같은 상징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다비드, 제리코, 그로, 제라르 같은 화가들은 대작을 제작하는 데 나폴레옹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건축 부문에서 큰 성과를 냈다. 오스테를리츠 다리, 퐁데자르 다리, 예나교 등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을 건설하고, 파리 곳곳에 분수를 설치하고, 거리 장식들을 세련되게 개선했다. 그의 시대에 건축된 공간들은 장대한 균형미를 특징으로 한다. 콩코르드 광장이 대표적 예다. 오늘날 아름다운 파리의 명성은 나폴레옹의 공로가 매우 크다."(308-10)


"나폴레옹은 정말 군사의 천재였을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해왔고, 후대의 장군들도 그러한 나폴레옹을 흠모했다. 나폴레옹의 전술은 사실 단순했다. 가능한 한 최대의 전력을 집중해 적의 중심을 깨트려 저항 의지를 꺽어놓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영토 정복 같은 문제는 쉽게 해결되었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한 가지만 본다. 적의 몸통! 그것을 깨면 부차적인 문제는 저절로 정리된다.〉 이런 전술의 실상은 무엇일까? 엄청난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주 재앙에 가까운 희생을 치렀다. 예컨대 1813년 6~9월 에스파냐와 독일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군 15만 명이 사망했고,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도 7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피해에 버금간다. 그런데도 나폴레옹은 군사 천재로 칭송받고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들은 악당 취급을 받는다. 나폴레옹은 천재라기보다는 단지 다른 사람들의 희생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뿐이다."(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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