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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추리소설 읽는 법 : 코넌 도일, 레이먼드 챈들러, 움베르토 에코, 미야베 미유키로 미스터리 입문 - 코넌 도일, 레이먼드 챈들러, 움베르토 에코, 미야베 미유키로 미스터리 입문
양자오 지음, 이경민 옮김 / 유유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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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글


장르소설과 순문학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장르소설은 단 한 권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무협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은 없고, 로맨스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도 없듯, 탐정추리소설을 단 한 권만 읽는 사람도 없다. 탐정추리소설의 재미는 각 소설 간의 호응과 간섭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탐정추리소설 읽기를 즐기는 사람은 최후의 답안, 그 합리적이고 유일한 해석에 흥미를 느끼고 집착한다. 그렇지 않은가? 탐정추리소설을 어느 정도 읽고 나면 더는 당장 손에 쥔 책을 읽기만 하지 않는다. 책 뒤에 자리한 장르문학의 미궁으로 들어가, 손에 쥔 책의 수수께끼를 푸는 동시에 미궁의 출구를 찾는 놀이를 하게 된다. 시체, 단서, 밀실, 명탐정, 알리바이 증명, 범죄 심리, 주고받는 대화 속 두뇌 대결, 나아가 궁극의 추리논리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은 과거의 저 소설(들)을 계승하거나 저 소설(들)에 도전하고, 이에 따라 독자가 이 소설을 이해하고 추측하는 데 도움을 주거나 훼방을 놓는다. 6-7)


오래도록 고민한 끝에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정해 책을 선정했다. 첫째, 탐정추리소설이 가진 ‘장르’ 특성으로 돌아가, 장르에서 선구적인 의미가 있는 작품을 골랐다. 바꿔 말하면, 이후에 수많은 모방작이 나온 작품이다. 이런 작품을 읽으면 탐정추리소설의 규칙이 이루어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이해할 수 있고, 독자는 추리소설의 세계로 들어오기 위한 기초를 재빨리 닦을 수 있다. 둘째, 내가 다시 읽고 싶은 작품을 찾았다. 분량은 많을수록 좋았는데, 그러면 다시 읽기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좀 더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작품 안팎의 텍스트에 일정 정도 복잡함이 있는 작품으로 선택했다. 내부 텍스트가 충분히 복잡해야 자세히 분석할 만하고, 겉으로 봐서는 한눈에 알 수 없는 깊거나 모호한 정보를 캐내는 맛이 있다. 외부로 연장된 복잡함은 한 시대, 한 사회의 특징과 연결 지을 수 있으며 다른 수많은 책, 다른 문화 현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9)


1 호기심의 시작


추리소설의 기원은 어째서 19세기일까? 이 시기의 유럽에서 범죄는 더 이상 개인의 일이 아닌 사회 현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sin’(죄악)에서 ‘guilt’(죄악감)로 옮겨 갔다. 교회의 지위가 추락하고, 기독교가 여러 방면에서 의심과 공격을 받으면서 ‘죄’는 더 이상 개인 양심의 문제이거나, 죽은 후 천국에 가거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게 되었다. ‘죄’는 ‘이 세상’에 있으며, 현실 세계에서 사회의 수단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인식이 바뀐 것이 19세기에 완성된 거대한 변화였다. 또한 19세기의 유럽에는 도시화가 폭넓게 일어났다. 누가 누군지 서로 잘 알고, 피차의 생활상을 훤히 아는 농촌에서는 범죄 행위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에 범죄 욕망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도시 이주 후 누구도 나를 모르고, 누구도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은 죄를 저지르고 처벌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14)


# 추리소설의 3대 요소 : 탐정, 미스터리(수수께끼), 추리


초기의 탐정추리소설은 범인을 찾고 범죄 과정,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한 수법을 설명하고 나면 사건을 해결한 것으로 쳤다. 그러나 어떤 작품은 ‘누가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왜 했는가’에도 대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동기를 조사하고 범죄 동기에서 범죄에 대한 정보, 나아가 범죄가 일어난 사회와 관련된 정보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범죄는 매일 일어나고 그중에는 기이하고 다채로운 사건이 넘쳐난다. 만약 매체의 요란한 기사만을 본다면 우리는 깊은 인상을 받을지언정 그 사건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사건은 우리와 다른 이상한 사람이 벌인 이상한 일일 뿐이라고 생각하리라. 그러나 추리소설은 독자가 범죄를 나와 상관없는 일로 여기도록 두지 않는다. 범죄 현상을 꿰뚫고, 범죄 행위를 해석하는 것은 보편적인 논리와 이치이며, 이는 우리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고 일상 행동을 관할하는 것과 똑같은 논리와 이치다. 19)


코넌 도일은 장장 몇십 년간 수십 가지 이야기 속에 허구의 인물 한 명을 묘사하면서, 강한 인내심과 의지로 홈스의 일관성을 지켰다. 홈스의 외모부터 성격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어떤 사건의 의뢰자나 용의자를 만나든 홈스의 생각, 태도, 반응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홈스는 겉으로 보면 논리만 보고 이치만 믿는 추리 기계 같다. 그는 감정이 일처리를 방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소설에서 왓슨은 자기가 기껏 머리를 굴려 답이라고 말한 내용을 홈스가 비웃자 의기소침해한다. 홈스는 왓슨이 한 추리의 빈틈을 지적하지 않고 그가 감정적으로 구는 부분을 질책한다. 그러나 코넌 도일은 소설에 홈스의 부드러운 내면이 무의식중에 드러나는 자잘한 일화를 여기저기에 수없이 장치해 둔다. 홈스를 묘사하는 내용을 스무 번, 서른 번, 쉰 번 읽고 나면 우리는 같이 사는 사람만큼 홈스에 대해 훤히 알게 된다. 홈스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다. 이것이 일관성이다. 26-7)


코넌 도일의 시대에 가장 일반적인 소설 서사는 전지적 시점이었다. 신처럼 모든 일을 다 아는 인물이 소설 속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전지적 시점에는 문제가 있다. 객관적인 묘사와 서술로는 독자가 서술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화자에게 이입하기 쉽지 않아서 공감하고 느낄 상대가 분명하지 않다. 일인칭 시점에도 한계가 있다. 그중 한 가지는 (홈스 같은) 극도로 특이한 인물에게는 감정 이입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코넌 도일은 세심하게도 전지적 시점과 일인칭 시점 사이, 객관과 주관 사이에 놓이는 신선한 서사 방법을 발명했다. 왓슨은 코넌 도일의 또 다른 돌파구이자 성과다. 코넌 도일은 추리소설뿐 아니라 소설의 역사에 독특한 서사 방식을 창조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인물을 골라 주인공 곁에서 이야기를 말하게 하는 것이다. 소설의 문장과 사건 기록은 모두 왓슨의 시점을 거친 것으로 주관적 판단과 강한 호불호가 뒤섞인 그의 정서가 독자에게 전달되어 독자의 마음에 스며든다. 28)


왓슨이 있기에, 홈스는 우리에게 그의 모험이 얼마나 놀랍고 위험했는지 얼마나 대단했는지 말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는 더 놀라고 더 위험하게 느끼고 더 대단하게 여기게 된다. 홈스가 있으면 왓슨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끝없이 대비가 일어난다. 왓슨이 스스로 보기에 뭔가 끝내주는 해결책을 생각해 냈거나 더 이상 합리적일 수 없는 아이디어를 떠올릴 때마다 그의 해결책은 달랑 두세 쪽이면 뒤집히고 아이디어는 오류임이 증명된다. 하지만 왓슨은 절대 광대 역할이 아니다. 코넌 도일도 일부러 왓슨에게 황당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떠맡기는 게 아니다. 아니 왓슨의 생각은 대체로 우리가 떠올릴 법한 생각이기도 하다. ‘셜록 홈스 시리즈’를 읽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왓슨의 입장에 선다. 그러다 이따금 왓슨보다 훨씬 빨리 사건의 단서를 파악했거나 홈스가 입을 열기 전에 왓슨의 추리가 어긋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왓슨과 홈스의 사이에 서게 되고, 그 순간 색다른 재미와 만족을 얻는다. 33)


우리가 ‘셜록 홈스 시리즈’를 한두 편이 아닌 전편을 모두 읽었을 때 사라지지 않을 즐거움 중 하나는 점점 분명해지는 ‘나의 친구 홈스’의 모습이다. 우리는 홈스를 알게 될수록 왓슨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에게 탄복하고, 이 사람을 좋아하고, ‘나의 친구’로 여기게 된다. 또 다른 즐거움도 있다. 홈스가 쓴 추리 수법은 기본적이고 일반적이다. 코넌 도일에게 추리의 기본 게임 규칙을 세울 자유가 있었던 덕분이다. 나중에 추리소설을 쓴 사람은 모두 코넌 도일이 세운 규칙을 지키는 한편 추리 수법에서 홈스를 뛰어넘을 아이디어를 궁리해야 했다. 따라서 이후의 추리소설에는 ‘셜록 홈스 시리즈’에서 보이는 어떤 단순함을 담기 어려웠다. 그 단순함이란 일반 과학 원칙과 경험 법칙에 의지하며, 지나친 기교를 부리거나 독자를 헷갈리게 하기 위해 연막탄을 피울 필요가 없고, 이야기의 흐름이 간결하며, 작가가 스스로 생각한 수수께끼에 의기양양함이 없고, 작가가 독자를 도발하거나 조롱할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37)


2 그리하여 그는 영웅이 된다


‘hard-boiled’는 보통 달걀을 익힐 때 쓰는 말로, 완숙 계란을 뜻한다. 달걀을 삶아도 삶은 달걀의 본질은 여전히 달걀이다. ‘하드보일드 맨’으로 번역되는 중국어 ‘硬漢’은 무척 억세고 강해서 사람을 때려 길바닥에 쓰러뜨릴 정도의 건장한 사나이를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hard-boiled’라는 단어를 보면, 특히 달걀을 생각해 보면 ‘하드보일드 맨’의 강함은 그런 강함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벽과 비교하면 ‘hard-boiled egg’는 여전히 약한 달걀일 뿐이다. 다른 점이라면 그렇게 약해 보이지 않는 척한다는 것이다. 날달걀과도 다르고 다른 알과도 다르다. ‘hard-boiled egg’는 벽에 부딪힌 순간 흰자위와 노른자위를 쏟아내 참담하게 패배한 불쌍한 모습을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벽에 대항할 수 있고 벽을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꽤 단단하다고 여겨 이따금 벽처럼 단단한 상대에도 대항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벽 앞에서 ‘hard-boiled egg’는 여차하면 강한 척하는 달걀로 돌아갈 뿐이다. 45-6)


‘하드보일드 맨’, 그중에서도 특히 ‘하드보일드 탐정’은 모두 ‘말수가 적다.’ 딱히 떠들 만한 것 없음. 헤밍웨이가 해밋과 챈들러에게 물려준 ‘하드보일드 맨’ 스타일이다. 우리는 이 딱히 떠들 만한 것이 없다는 태도를 보며 그가 뽐내지 않으려 하고 자랑하고 싶어 하지 않는 과거에 얼마나 요란하고 화려하며 웃고 울 만한 일이 있었는지 상상하고 추측하게 된다. 따라서 소설을 읽으면, 우리와 말로의 관계에는 챈들러가 드러낸 부분 외에 우리가 상상하여 참여한 부분이 존재한다. 이런 상상력을 갖추었거나 상상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부가 독자가 챈들러의 소설에 들어갈 수 있는지, 얼마나 깊이 들어갈 수 있는지를 가른다. 헤밍웨이에서 해밋에 이르면서 ‘하드보일드 맨’은 ‘하드보일드 탐정’이 되었지만, 우리는 그 사이의 아이러니를 기억해야 한다. ‘하드보일드 탐정’에게 가장 눈에 띄는 동시에 사람을 매혹하는 부분은 ‘하드보일드 맨’의 모습 뒤에 숨겨진 연약함이다. 55)


챈들러는 설령 소설에서라도 한 사람의 죽음이 기록될 만하고 대답을 구해야 할 일이라면, 그 죽음은 우리를 곤란하게 하고 고심하게 할 만한 문명의 의제에 닿아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이라 불리는 모든 것에는 구원의 성격이 있다. 만약 수준 높은 비극이라면 그것은 순수한 비극일 것이며, 연민과 풍자가 있을 수 있고, 거친 남자의 왁자한 웃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비열한 거리를 걸어야 하는 남자는 비열하지 않고 오염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 속의 탐정은 반드시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영웅이며, 모든 것이다. 그는 완전한 사람이어야 하며, 보통 사람인 동시에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 상상의 문학, 고상한 문학은 인간 세상에서 벗어난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쓸 수 있지만 만약 실제 거리, 실제 세상을 쓰려고 한다면 다른 전략을 써야 하고 다른 주인공을 써야 한다. 이 주인공은 평범하되 평범하지 않아야 하며, 진실한 동시에 이상적이어야 한다. 57)


헤밍웨이에서 해밋과 챈들러까지, 그들은 ‘영웅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고민했다. 챈들러는 특히 진지하게 탐색했다. ‘지금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영웅이란 무엇인가?’ 챈들러는 영웅을 그리고자 했다. 천상이 아닌 지상의 영웅,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이 아닌 로스앤젤레스 거리의 영웅, 구체적으로는 193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후반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던 영웅을 말이다. 그는 복잡하고 시끄러운 실재하는 환경에서 산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읽은 후 이 복잡하고 시끄럽고 실재하는 주변 환경에서 따뜻함, 안전한 느낌, 신뢰감을 갖게 된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느낀다. 아, 이런 사람이 있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구나. 이러한 설정에서 우리는 말로가 ‘슈퍼맨’이 아니며 ‘홈스’가 아니라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홈스를 베이커 거리에서 1930년대의 로스앤젤레스로 데려온다면 그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59)


챈들러는 말로가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기를 바랐을 뿐이다. 말로에게는 좋은 사람이 보통 갖고 있는 기질이 있다. 그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 일부러 남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갖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가 가진 원칙의 마지노선은 상황이 다르다고 바뀌지 않는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다채롭고 기이한 환경에서 사는 평범하게 좋은 사람이지만, 그 다채롭고 기이하며 비상식적인 환경에서 그저 평범하게 좋은 사람으로 계속 사는 데에는 영웅 같은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 “좋은 사람이 되려면 먼저 영웅이 되어야 한다.” 사립 탐정인 말로는 사건이 얼마나 위험하든 조사가 얼마나 어렵든 사건에 얼마나 많은 이익이 걸려 있든 언제나 고객에게 하루에 이십오 달러를 지급하라고, 추가로 필요한 금액은 결산 때 보고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하는 동안 그의 손에서 얼마가 나가든 일당 이십오 달러만 받는다. 사건을 맡기로 하면, 그는 나중에 어떤 변수가 나타나도 포기하지 않는다. 64)


챈들러는 또한 그의 이전에 형성된 탐정소설의 클리셰를 거부한다. 즉 소설의 끝부분에서 탐정이 여기에서 무엇을 보고 연이어 무엇을 찾아냈는지, 저기에서 무엇을 조사했는지, 마지막으로 결국 누가 어떤 수법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어떤 방법으로 감췄는지 같은 사건의 추리 과정을 경찰이나 피해자에게, 범인에게, 그리고 실제로는 덜 똑똑한 독자에게 자세하게 설명하기를 거부한다. 챈들러는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는 말로가 만나는 일들을 독자가 따라가다 마지막에 스스로 단서를 이어 추리 과정을 풀길 기대한다. 단순한 세부 사항은 독자에게 넘겨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정하도록 해도 된다. 전체 줄거리란 결국 일련의 범죄를 일으킨 은혜와 원한과 애정과 복수이고, 이 부분은 말로가 분명하게 밝힌다. 사실상 인간관계와 동기에 대한 통찰에 기대어서야 말로는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고, 말로와 그 배후에 있는 챈들러라 할지라도 반드시 범죄 과정의 모든 부분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었다. 71-2)


3 탐정추리의 곤경을 돌파하다


『장미의 이름』 이전의 에코는 서구 학계와 문화계에 약간 이름 있는 기호학자이자 중세사가였다. 현대 기호학은 기독교 신학의 성상학聖像學, iconography에서 연원한 부분이 있다. 기독교 문화에는 수많은 성상聖像, icons이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것이 십자가 위의 예수와 성모상이라는 사실은 우리도 안다. 그러나 유럽의 오래된 도시의 옛 교회를 한 바퀴 돌다 보면 다양한 그림과 장식 문양, 각종 형태의 기물이 깊은 인상을 주어 절로 발을 멈추게 한다. 이 모두가 넓은 의미의 ‘성상’이며, 각각 대표하는 의미가 있다. 바꿔 말하면 모두 의미를 지닌 기호다. ‘성상학’은 성상에 담긴 상징 의미, 역사와 변화, 상징과 상징 사이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에코는 이런 학문 기초를 가지고 자신의 탐정추리소설을 14세기인 1320년대로 설정했다. 이 시기는 기독교회 역사상 ‘대분열’의 재난이 일어났던 시기다.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 교황이 나타나 서로 싸우는 기괴한 상황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대였다. 91)


소설은 우리에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 윌리엄이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 속한 수도원에 간다고 말한다. 이 설정은 소설의 시작부터 충돌과 긴장이라는 조건을 만들어 낸다. 성 베네딕토 수도회는 ‘클뤼니 개혁’ 이후 수도원 규율을 명확히 세운 조직이다. 수도원에서 지내는 수사의 생활, 예컨대 몇 시에 일어나 몇 시에 성서를 읽고, 몇 시에 노동을 하고, 묵상을 하는지에 대한 상세하고도 엄격한 규정이 있다. 그리하여 성 베네딕토 수도회는 유럽 각지에 방대한 수도원 체계를 형성했다.성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성 프란치스코를 계승하며, 이 수도회의 가장 중요한 정신은 세속의 모든 재산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평생 베풀며 전도했고 일생의 거의 대부분 동안 회색 수도복 한 벌 외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으며, 그가 보인 생활상의 모범이 당시 기독교회를 놀라게 하면서 성인의 자리에 올랐다.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는 윌리엄처럼 사방을 떠도는 생활을 했다. 93-4)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사 한 명이 웅장한 건물, 수도원 소유의 장원莊園, 안정된 식량 공급과 전속 공인, 하인이 있는 대규모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에 갔다. 수도원장은 윌리엄에게 재부의 정당성을 역설하며 윌리엄이 속한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신념에 은근히 도전하고, 그들이 세속의 아름다운 사물을 거부하는 태도를 물으며, 그들이 인식하고 경험하는 신의 가장 정밀하고 신묘한 뜻과 권위를 교란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수도원이 보유한 재산 가운데 가장 특별하고 진귀하며 유명한 것이 책, 커다란 장서관에 보관된 신화와도 같은 풍부한 장서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 책들을 소장함으로써 스스로 기독교의 지식과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긴다. 반면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윌리엄은 14세기의 진보적 인물이다. 그는 윌리엄 오컴, 로저 베이컨 등을 통해 새로 발전하는 논리 사고를 읽고 받아들이며, 여기에 세상을 합리적으로 바라보는 남다른 방식이 있다고 생각한다. 94)


수도원의 도서관은 악령이 지키는 듯 금지된 곳이다. 왜 이런 도서관이 있는 걸까? 도서관이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윌리엄의 믿음과 반대된다. 그들은 책 속에 이 세계에 대한 모든 진리가 숨어 있다고 믿는다. 사람은 책을 통해 신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은 책에서 말하는 것은 믿지만 사람에게 책의 지식과 진리를 평가할 능력과 자격이 있음은 믿지 않는다. 그들은 책에서 말하는 것, 책에 기록된 것이 스스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현실의 현상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믿는다. 한쪽에는 지식이 세계에 대한 조사, 연구, 탐색, 귀납에서 온다고 보는 윌리엄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도서관으로 대표되는 수도원 정신이 있다. 그들은 지식이 신에게서 오고, 책 속에 보존되어 있다고 본다. 뒤집어 보면, 잘못된 지식이나 잘못된 방식으로 지식을 받아들이면 인간의 영혼은 타락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식이 반드시 엄중하게 관리되어야 하고 쉽게 개방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95)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쓸 무렵 기호학은 서구 학계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기호학과 밀접하게 호응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도 나타났다. 기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중요한 연결점은 기표와 기의의 경계를 새롭게 정의하여, 기표와 기의를 우연하고 인위적이며 사회적으로 약속된 관계로 환원하는 데 있다. 우리가 ‘개’라고 말하는 동물과 ‘개’라는 이름 사이에는 본질적이고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다른 사회에서는 ‘개’라는 동물에 다른 이름을 붙이며, 우리도 ‘개’를 다른 이름으로 바꿔 부를 수 있다. 우리의 생활은 기표와 기의 사이에서 비롯된 수많은 오해로 가득하다. 우리는 기표를 기의로 오해하고 이름을 본질이라고 여긴다.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이런 오해를 운용하고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 형식과 내용을 나누고 우리에게 형식에 속지 말라고 알려 주다가도 어떨 때는 우리가 어떻게 형식이 오도한 함정으로 빠지는지 작정하고 비웃기도 한다. 98)


『장미의 이름』의 「서문」을 쓴 작가는 현대인(우리는 당연히 저자 에코라고 추측한다)의 말투로 어떻게 1968년에 오래된 수고手稿를 찾았는지 말한다. 그러나 당시 그의 연인이 원고를 가져가 버렸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통로를 통해 원고의 내용을 손에 넣는다. 이 「서문」은 대단히 꼼꼼하게 쓰여서 진짜처럼 느껴지며, 이어지는 14세기 이야기와 현재의 작가가 멀리 떨어져 있다는 ‘틀’을 잡아 주는 작용을 한다. 「서문」은 우리가 읽을 글이 소설가의 손끝에서 나온 허구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전해졌으나 이제야 겨우 빛을 본 옛 수고라고 믿도록 한다. 그러나 「서문」에서 엄격한 학술 규칙에 맞춰 인용한 옛 문헌은 모두 에코가 지어낸 가짜다. 수고 역시 에코가 지은 이야기이고, 수고에서 옮겨 적은 척한 윌리엄의 사건 수사 과정 또한 당연히 에코의 창작이다. 빈 것은 채우고 찬 것은 비워, 우리가 기호에 대해 당연히 연상하는 것을 부수고 뒤집기.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 사고다. 98)


4 추리소설 그 이상을 보여 주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 사회파 추리의 개조開祖이자 오늘날까지 추격당해 본 적이 없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제2차 세계대전 전 일본 탐정소설의 추리 수법을 가져와 전쟁 후의 사회소설에 도입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제2차 세계대전 전에 태어나고 자라 전쟁의 광기와 잔혹을 겪었고, 전쟁이 가지고 온 파괴와 빈곤을 견뎌 냈다. 그는 날카롭게 전쟁 전후의 변화를 체득했다. 전쟁 전의 일본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저 부평초처럼 떠돌며 지낼 뿐 어떤 발전이 없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새롭게 일어나는 사회에서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전쟁 후 일본의 혼란과 모색 사이에서 일어난 사람으로 그것을 깊이 관찰하고 느꼈으며, 사회파 추리소설을 창조해 시대가 그에게 준 것에 구체적으로 보답했다. 그는 추리를 미끼로 삼아 이후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엄숙한 사회 메시지를 전하고, 독자에게 ‘정의’란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고 사고하도록 요청하고 심지어 강요했다. 115)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에서 범죄 동기는 범죄 사실과 똑같이 중요하며, 심지어 범죄 사실보다 더 중요하기도 하다. 추리에는 추측과 조사가 필요하고, 그에 따라 범죄 사건의 경과뿐 아니라 범인이 누구고 어떤 수법으로 피해자를 살해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조사에서 도망치는지, 더욱 중요하게는 범인의 동기가 무엇인지 추론해 내야 한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올곧게 사건의 동기를 밝히는 길로 나아가며 그렇게 하고 나서야 사건을 종결짓는다. 그리하여 그의 손에서 발전한 특수한 서사 방식이 이후 사회파 추리소설에 전면적으로 계승되는데, 그 방식은 바로 사건 해결의 열쇠를 종종 범인의 동기에 숨겨 두는 것이다. 누구도 그것이 범인과 피해자의 일일 뿐이라고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함께 보내고 살아온 시대 속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그의 소설로 일본인이 고개를 돌리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압도적으로 몰아붙였다. 진정으로 ‘압도적’인 힘이었다. 117)


미야베 미유키가 수십 권의 작품을 출간하기는 했어도 ‘국민 작가’로서의 정도를 보려면 『모방범』이 가장 훌륭하고 표준이 될 수 있겠다. 원서 단행본 기준 1,400여 쪽 그리고 주요 등장인물 43명. 『모방범』을 읽고 토론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숫자다. 1,400여 쪽에 이르고, 43명의 인물이 움직이는 소설은 분명 한 가지 사건과 해결 과정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소설 속의 놀라운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 ‘거품 경제 이후’ 일본 사회의 면모를 설명하고 묘사하고자 했다. 『모방범』은 전통 일본 사회에는 없었던 ‘거품 경제 이후’에야 나타난 새로운 현상, 전혀 다른 정신 상태에 대해 말한다. ‘거품 경제 이후’의 일본 사회는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젊은이에게 어떤 준비도 시키지 못했다. 이 정신 상태의 출현은 거품 경제의 붕괴, 그러니까 오래 지속되리라 예측했던 번영의 급작스러운 정체 및 쇠락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나아가 ‘거품 경제 이후’ 일본 사회의 방향을 상당한 수준에서 주재했다. 122)


소설 『모방범』에서는 전지적 관점이 자주 쓰인다. 주요 등장인물 43명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소설에 43명의 인물이 나온다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43명의 등장인물 가운데 보조인물이 없다는 사실이다. 독자는 43명의 등장인물의 주관적인 시야로 거의 들어가다시피 하며, 소설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는지, 무엇에 분노하는지, 또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고 분노하는지 보여 준다. 미야베 미유키는 독자가 편하고 쉽게 얻은 수수께끼 풀이의 성취를 이후의 무거움으로 뒤집는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독자의 부담은 커진다. 미야베 미유키가 마쓰모토 세이초와 닮은 부분이다. 두 작가는 독서를 마친 독자가 산뜻한 기분을 느끼도록 하는 글을 쓰지 않았다. 독자는 자신이 명탐정만큼 똑똑하다고 자축할 수 없고, 법망이 성글지만 촘촘하다는 단순한 믿음을 강화할 수 없다. 소설에는 결국 끝이 있으나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우리는 끝없이 근심한다. 이 사건이 해결될까? 끝과 해결은 다른 문제다. 132)


그토록 많은 주요 인물이 병존한다는 말은 이 소설에 일반적인 의미의 ‘주인공’이 없다는 뜻과 같다. 『모방범』의 놀라운 특색은 이 작품이 주인공 없는 소설, 특히 추리하는 주인공이 없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추리소설에는 ‘추리로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이 주인공을 맡는다. 초기에는 홈스처럼 우리보다 백배는 똑똑한 사람이 주인공을 맡았다. 나중에는 말로처럼 우리보다 백배는 운이 없고 백배는 고통스러운 사람이 주인공을 맡았다. 또는 달리 선택의 여지없이 사건 조사와 추리가 자신의 일인 형사, 검사 혹은 검시관이 주인공을 맡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누군가는 사건을 조사하고, 사건을 조사하는 사람은 어찌 되었든 적당한 때에 나타나 우리에게 사건의 진상과 추리 과정을 알려 준다. 『모방범』에는 이런 주인공이 없다. 억지로라도 주인공을 찾자면, 범인이 탐정의 자리를 대신해 소설에서 가장 주인공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한다. 135)


미야베 미유키는 일부러 독자가 아미카와 고이치의 어린 시절을 이해하도록 두지 않았다. 어떤 악은 일정 정도에 이르고, 일정 정도를 넘어서면 이런 방식으로 해석될 수 없다. 해석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도덕적으로 해석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해석하지 않음은 하나의 가치 태도다. 악에는 반드시 인과관계가 있지만 어떤 행위의 한계선은 해석과 합리화가 섞이는 것을 절대 거부하도록 한다. 우리가 해석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단 해석을 하면 이 사건 나름의 논리가 가진 의미를 따라갈 수밖에 없고, 악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인 경악과 혐오와 비난 또한 감소하게 된다. 아미카와 고이치가 지나온 삶의 역정을 자세히 기술하지 않고, 그가 어떻게 한 개인에서 악인으로 변했는지 쓰지 않은 것은 미야베 미유키가 쓰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악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을 유지하고자 했고, 악이 가져온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다른 무엇에 섞이고 바래는 일 없이 똑똑하게 기억되기를 바랐다. 1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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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시경을 읽다 - 고대 중국 문인의 공통핵심교양이 된 3천 년의 민가 유유 고전강의 16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유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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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천 년의 민가


『시경』에 수록된 글은 노래의 특성이 아주 강합니다. 『시경』은 중국 문자가 가장 일찍 소리와 결합된 예이지만, 말이 아니라 노래와 결합되었습니다. 노래의 언어는 일상생활의 언어보다 단순하고 규칙적이며 반복이 많습니다. 게다가 명확한 소리의 패턴이 존재하지요. 장편서사시를 기록할 수 없는 복잡한 문자라 해도 네 글자가 한 구를 이루며 같은 구가 계속 반복되는 짧은 노래 정도는 받아쓸 방법이 있었습니다. 『시경』을 읽어 보면 중국의 문자 체계가 어떻게 언어에 접근하려 시도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시도가 일정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면 그 문자 체계가 어떻게 중국에서 가장 높고 유일한 주류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기 어려울 겁니다. 당시 사람들은 제한적으로나마 소리를 기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도상기호와 소리 사이의 몇 가지 규칙을 수립했습니다. 다소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문자와 언어가 이런 방식으로 연결되었습니다. 16)


『시경』은 노래이자 가사입니다. 오늘날 유행가의 가사에는 요즘 사람들의 삶과 보편적인 가치관이 딱히 정확하고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역시 『시경』을 통해 주나라 사람의 삶과 생각을 정확하고 풍부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시경』에 비교적 효과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은 주나라 사람이 노래를 부른 상황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노래를 불렀고, 어떤 정서와 내용을 담아 표현했을까요? 또 그들에게 노래에 담기에 적당한 사건과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시경』을 읽으면서 처음부터 전통의 늪에 빠지면 안 됩니다. 『시경』 「대서」大序와 『모시』毛詩 또는 주자朱子의 『시집전』詩集傳의 해석을 보면, 『시경』의 모든 시가 ‘미언대의’微言大義의 성격을 갖고 있어 저마다 역사적 암시와 도덕적 훈계를 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우리가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시경』의 작품에 불필요한 거리감과 혐오감을 갖도록 만듭니다. 18)


# 미언대의微言大義 : 간단하지만 심오한 말로 큰 뜻을 암시하는 방식


시, 서書, 역易, 예禮, 악樂, 춘추春秋는 서주西周 당시 귀족 교육의 핵심 커리큘럼이었습니다. 『서』書는 고대사로서 주나라 건립 과정에 있었던 중대한 사건과 그 사건들에 대한 선현의 검토와 교훈을 기록한 것입니다. 주나라는 자신들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들의 눈에는 너무나 강대해 보였던 대읍상大邑商, 즉 상나라를 격파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았으며, 이긴 과정과 이유 그리고 상나라 사람이 미신을 믿고 음주에 탐닉했다는 비판과 ‘천명天命이 무상함’을 경계하는 우환 의식 등을 『서』에 수록했습니다. 『서』에 대응하는 것이 『춘추』였습니다. 『춘추』는 당대의 역사이자 국별國別 역사였습니다. 여기에서 국國은 노魯·진晋·송宋 같은 봉국封國을 가리킵니다. 각 봉국의 역사가 수록되었는데, 연도를 크게 춘과 추로 나누어 상반기와 하반기에 각기 일어난 큰 사건을 기록하는 무척 단순한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춘추’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19)


『예』는 행위 규범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봉건 질서에 필요한 규칙과 의식을 모아 놓은 총화였지요. ‘예’는 맨 처음에는 문자와 경서의 형식으로 존재하지 않고 실제적인 훈련으로 전해졌을 겁니다. 그래서 공자 시대에는 아직 ‘예의 시연’에 대한 견해가 보편적으로 존재했지요. 『역』은 당시 귀족 교육에서 철학 교육에 해당했습니다. 주나라 사람은 줄곧 ‘천’天의 문제를 사유했습니다. ‘천’은 인간이 좌우할 수도 도모할 수도 없는 초월적 힘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삶에서 ‘인’人은 일부였고 나머지 더 큰 부분이 ‘천’이었습니다. 우연적이고 예상할 수 없는 것이 ‘천’이었으며, 되돌릴 수 없는 운명도 ‘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좌우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변수와 힘을 어떻게 이해하고 거기에 대응해야 하는지가 철학 교육의 포인트 중 하나였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시’와 ‘악’입니다. ‘시’와 ‘악’이 과연 하나였는지 둘이었는지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습니다. 고대 음악은 구체적인 형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20)


『시경』 내용의 유래에 관해서는 전통적으로 채시采詩, 즉 시의 채집에 관한 설이 있었습니다. 서주의 ‘봉건’이 성립된 과정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탕으로 채시의 의미를 설명해 보기로 하지요. 봉건은 어떤 종친이나 공신을 지정해 특정한 땅과 한 무리의 백성을 하사하는 것, 즉 봉封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고서 그에게 자기 백성을 데리고 봉지封地에 가게 했습니다. 그 땅이 바로 그와 그 후손이 대대손손 소유하는 봉국封國이 되었습니다. 봉국은 아마도 멀고 낯선 땅이었을 겁니다. 효과적으로 그 땅을 소유하기 위해 처음에는 군사력에 의지해야 했겠지요. 하지만 계속 군사력에 의지하거나 군사력에만 의지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봉건영주는 반드시 그 땅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이해해야만 했습니다. 그 땅의 민정民情을 잘 살피고 파악해 그들과 잘 지낼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지요. 채시는 그 땅의 민가를 채집하여 그 민가를 통해 사람들의 삶에 접근하는 합리적인 수단이었습니다. 20-1)


전통적인 『시경』 해석에는 여섯 개의 키워드가 있습니다. 바로 ‘풍아송’風雅頌과 ‘부비흥’賦比興입니다. 풍아송은 『시경』에 실린 시의 세 가지 서로 다른 장르이며, 부비흥은 『시경』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수법입니다. 풍아송은 시의 유래와 기능과 관련 있는, 주나라 시대에 존재했던 분류법으로 『시경』의 작품 자체의 차이에서 내적으로 증명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부비흥은 훗날 『시경』에 덧붙여진 설명이라 『시경』 자체와의 관련성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부’는 어떤 일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고, ‘비’는 어떤 사물로 다른 사물이나 일을 비유하는 겁니다. ‘흥’은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언급하고 이어서 어떤 일이나 또 다른 사물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양자 사이에 명확한 비유 관계가 없고 또 한눈에 알아챌 만한 관련성도 없습니다. 그 시구를 읊고 노래할 때 시인의 마음속에는 부비흥에 관한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개념을 적용해 작품의 형식을 제한했으니 정말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22-3)


시경』에는 ‘풍아송’이라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장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중 가장 많고 내용도 가장 풍부한 장르가 ‘풍’입니다. ‘풍’은 민간 가요에 속합니다. 다시 말해 앞에서 얘기한 채시와 관계가 가장 밀접하지요. ‘풍’은 ‘국풍’國風이라고도 불립니다. 그 가요들이 불린 봉국에 따라 배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풍’에 속하는 시는 모두 160수로, 『시경』에 실린 전체 305수 가운데 절반이 넘습니다. 국풍 15편 외의 장르에는 먼저 ‘대아’大雅와 ‘소아’小雅가 있는데, 이것도 노래이긴 하지만 귀족 사이에서 손님을 초대해 연회를 열 때 불리던 노래입니다. ‘대’와 ‘소’는 자리가 얼마나 공식적인가에 따라 나누는 명칭입니다. 세 번째 장르는 ‘송’입니다. ‘송’은 확실히 구술 내용을 문인들이 정리한 집단의 역사 혹은 집단적 정신교육 자료입니다. 그 성격은 말하기 좋고 기억하기 좋게 만든 『상서』의 구어판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은 ‘송’을 낭랑하게 부르면서 거기에 담긴 과거의 역사적 교훈을 쉽게 흡수하고 내면화했을 겁니다. 25)


2 귀족의 기본 교재


귀족 신분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시경』을 읽고 『시경』의 시구를 줄줄 암송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구들은 그들이 서로 소통하는 일종의 코드화된 언어가 되어, 직접적으로 말하기 불편하거나 부적합한 의미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기능했습니다. 더욱이 봉건제도에는 엄격한 상하 질서가 있어서 계층 간 존비尊卑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시경』의 시구로 이뤄진 코드화된 언어가 매우 중요하고 또 유용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춘추시대 이후 갈수록 복잡해진 국가 간의 관계에서 코드화된 언어는 자연히 외교에까지 이용되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전국시대만큼 그렇게 노골적인 ‘힘’과 ‘이익’의 추구가 부각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예법이 일반 귀족의 행위를 고도로 구속하는 힘으로 작용했지요. 그래서 외교 현장에서 힘이 약한 나라가 봉건 예법을 교묘하게 이용해 강국의 침탈을 막을 수도 있었습니다. 37)


외교적 절충에 관여한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귀족 교육의 수혜자였습니다. 그래서 『시경』의 갖가지 내용을 이용할 수 있었고, 예의를 지키면서 암암리에 힘을 겨루고 관계를 맺었습니다. 가끔씩 『상서』와 『역경』을 끌어와 인용하기도 했지만 범위와 빈도 면에서 『시경』에는 한참 못 미쳤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행해진 ‘단장취의’(시의 일부를 완전히 다른 문맥에 끼워 넣어 이용한 것)는 후대 사람들이 『시경』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시경』의 시를 인용한 문헌 속의 수많은 기록은 훗날 중국의 ‘주석 전통’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단장취의’가 낳은 의미들이 마치 그 시구의 본래 해석인 것처럼 간주되었습니다. 특히 시구가 정치 외교 분야에 옮겨져 쓰인 경우에는 각 시가 마치 정치적 도덕적 함의가 있는 것처럼 해석되었지요. 결국 이로 인해 『시경』 「대서」의 ‘미언대의’라는 논리가 나와 독자에게 ‘대의’의 안경을 씌우는 바람에 시의 본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습니다. 37-9)


이런 입장에서 『시경』에 어떤 제재의 시가 실려 있는지 점검해 보면, 전통적인 해석과 정반대로 대다수의 시가 군주와는 무관합니다. 특히 국풍에 수록된 시와 소아의 일부는 전부 그렇습니다. 『시경』의 요체는 서민의 관심을 표현한 시입니다. 그들은 무엇에 관심이 있었을까요? 결혼과 가정, 그리고 이 두 가지와 관계된 의식儀式과 감정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시경』을 읽으면 오히려 전통적인 독법보다 더 쉽게 시대적 간극을 뛰어넘어 주나라의 인간과 사회를 더 깊이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시 서민 사이에도 봉건 질서의 토대가 깊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가정과 결혼과 인륜이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아주 중요한 관심사였음을 알게 됩니다. 가정이 으뜸이고 온 세상이 가정에서 확장된 거대한 질서 체계라는 것이 서주의 모든 계층 사람들이 공히 갖고 있던 신념이었습니다. 이것은 갑골문에 나타난 상나라 사람의 관념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40)


전통 독법에서 흔히 홀시되고, 심지어 일부러 무시하는 사실은 『시경』에 여성의 목소리가 가득하다는 겁니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관습적으로 여성의 목소리와 가정, 감정에 관한 사연을 비유나 환유로 간주하고, 남성 작가가 정치적 교훈을 주기 위해 위장한 채 표현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시에 많은 여성의 목소리와 감정이 반영되는 현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성중심주의의 하부에서 계속 이어졌습니다. 훗날 중국의 시사詩詞에는 여성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특이한 전통이 줄곧 존재했습니다. 가장 유명하고 눈에 띄는 것이 규원시閨怨詩와 대부분의 사詞입니다. 작가가 남자여도 당연하다는 듯이 여성 화자를 내세워 여성의 섬세하고 구슬픈 감정을 토로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사가 본래 여성 가인歌人의 노래 가사였다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중국의 전통에서 부정되었지만 사라지지 않은, 오랫동안 은밀히 존재해 온 시의 오랜 장르적 특성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결과이기도 합니다. 40-2)


# 규원시閨怨詩 : 남편이나 연인을 잃고 홀로 남은 여인의 한을 노래한 시


3 서민 생활의 단편들


▷ 「곡풍」谷風


첫 구는 역시 자연현상입니다. 〈골짜기에 간간이 바람 불더니, 날 흐리고 비 내려요. 習習谷風, 以陰以雨.〉 그다음에는 바로 시적 화자의 토로가 이어집니다. 〈애써 한마음으로 살았는데, 화를 내면 안 되지요. 黽勉同心, 不宜有怒.〉 아마도 부부 간의 불화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순무를 뽑고 무를 뽑을 때, 뿌리만 뽑을 수 있나요? 采葑采菲, 無以下體?〉 ‘葑’(봉)은 순무, ‘菲’(비)는 무입니다. 모두 뿌리식물로 수확할 때는 반드시 땅 위의 잎을 당겨야 뽑을 수 있습니다. 이 시구의 표면적 의미는 순무와 무를 뽑을 때 잎과 뿌리를 같이 뽑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 가를 수 없는데, 왜 마음을 함께하지 않고 늘 화를 내느냐는 것이지요.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습니다. 〈약속을 어기면 안 돼요, 죽을 때까지 함께하자 했잖아요. 德音莫違, 及爾同死.〉 ‘德音’(덕음)은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한 존칭입니다. 죽을 때까지 함께 살자고 해 놓고서 이제 마음이 변해 그 말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50-1)


〈느릿느릿 길을 걷는 것은 가고 싶지 않아서이지요. 行道遲遲, 中心有違.〉 이 부분은 첫 번째 구절의 첫 시구와 호응합니다. 그녀는 길을 가다 바람과 비를 만난 겁니다. ‘違’(위)는 부수가 ‘쉬엄쉬엄 갈 착’辵으로, 본래는 길을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背’는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서 가는 것이고, ‘違’는 정해진 길을 벗어나 가는 겁니다. 그녀가 천천히 걷는 것은 그 길을 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길로 다른 곳에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지요. 〈멀리는 고사하고 가까이라도, 문밖까지라도 나를 바래다주지. 不遠伊邇, 薄送我畿.〉 ‘伊’(이)와 ‘薄’(박)은 모두 뜻이 없는 어사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원치 않는 길을 떠나기 직전의 상황을 원망하는 어조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떠나는 자신을 멀리까지 바래다주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문밖까지는 배웅해 줬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이지요. 다시 말해 그녀가 집을 떠날 때 그녀의 남편은 문밖까지도 나와 보지 않을 만큼 무정했던 겁니다. 51)


〈누가 씀바귀를 쓰다 하나요, 달기가 냉이 같은데. 즐거운 당신들의 신혼은 형제와도 같겠지요. 誰謂荼苦, 其甘如薺. 宴爾新昏, 如兄如弟.〉 누가 씀바귀를 쓰다고 하던가요? 지금 내 심정과 비교하면 차라리 냉이처럼 달콤한데 말입니다. 앞의 두 구는 이렇게 그녀의 쓰라린 마음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뒤의 두 구는 형제가 같이 지내듯 자연스럽고 친밀한 신혼의 기쁨을 거론합니다. 그녀는 눈앞에서 다른 사람들의 즐거운 신혼을 보았고, 그래서 못 견디게 마음이 괴로워진 겁니다. 〈경수가 위수 때문에 흐려 보여도 맑은 물가가 없지 않은데 신혼의 기쁨을 누리면서 나는 아껴 주지 않네. 涇以渭濁, 湜湜其沚. 宴以新昏, 不我屑以.〉 ‘경위분명’涇渭分明은 경수와 위수라는 두 강이 합쳐질 때 경수는 탁하고 위수는 맑아 기이한 경관이 연출되는 것을 말합니다. 맑은 위수와 비교해 경수가 탁해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경수에도 맑은 물가가 있는데, 신혼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그녀를 눈엣가시로만 보고 내쫓았다고 말합니다. 52)


이제 우리는 신혼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바로 그녀의 남편임을 깨닫습니다. 남편이 새 아내를 얻어 그녀를 집에서 쫓아낸 것이지요. 쫓겨난 그녀는 머뭇머뭇 길을 나섰는데, 남편은 심지어 문밖까지도 배웅해 주지 않았습니다.경수와 위수의 두 구로 인해 비유적 의미가 더해졌습니다. 남편의 새 여자와 비교하면 그녀는 몹시 늙고 추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젊고 예쁜 시절이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시의 정서는 줄곧 애처로웠지만 갑자기 다르게 바뀝니다. 〈내 어살에 가지 말고, 내 통발을 열지 마오. 毋逝我梁, 毋發我笱.〉 이것은 명령투입니다. 고기를 잡으려고 그녀가 만들어 놓은 어살에 가지 말고 또 그녀가 놓은 통발도 열지 말라는군요. 괘씸한 남편의 새 여자를 향해 자기 물건과 물고기에는 손도 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이런 분노는 금세 사라지고 슬픔과 괴로움이라는 무기력한 감정이 되돌아옵니다. 〈자신도 못 돌보면서, 떠난 뒤의 일은 뭐 하러 걱정하는지. 我躬不閱, 遑恤我後.〉 52-3)


이어서 새로운 화제가 등장합니다. 〈깊은 물 건널 때는 뗏목이나 배를 타고 얕은 물 건널 때는 자맥질하고 헤엄쳤지요. 就其深矣, 方之舟之. 就其淺矣, 泳之游之.〉 이 네 구는 사실의 기록일 수도 있고 비유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사실의 기록이라면 그녀가 강변에 살던 시절의 회고에 해당합니다. 강을 건널 때, 물이 깊은 곳에서는 뗏목이나 조각배를 타고 얕은 곳에서는 헤엄을 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유로 읽으면 어떤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임기응변으로 방법을 생각해 냈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것은 그녀가 그동안 집안일을 돌볼 때 발휘했던 솜씨입니다. 그래서 이런 내용이 이어집니다. 〈집에 무엇이 있고 없는지 살펴 애써 갖추려 했고 이웃이 상을 당하면 있는 힘껏 도왔어요. 何有何亡, 黽勉求之. 凡民有喪, 匍匐救之.〉 그녀는 집안일을 살뜰히 보살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이 상을 당했을 때도 서둘러 달려가 힘을 보태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53)


〈당신은 내게 감사하기는커녕 거꾸로 원수로 여기고 내 미덕을 무시하고 안 팔리는 물건 취급을 했지요. 不我能慉, 反以我爲讎. 旣阻我德, 賈用不售.〉 ‘慉’(휵)은 ‘마음 심’心에 ‘축’畜 자를 덧붙인 글자로 감사를 마음에 새긴다는 뜻입니다. 화자는 남편이 자신의 좋은 점에 감사하는 대신, 오히려 자기를 원수로 보고 마치 장사꾼인 양 팔지 못할 물건 취급을 했다고 말합니다. 〈옛날에는 두렵고 가난하여 당신과 어려움을 함께했는데 사정이 좋아지니 나를 독약처럼 대했지요. 昔育恐育鞫, 及爾顚覆. 旣生旣育, 比予于毒.〉 첫 구의 ‘育’(육)은 어사입니다. 옛날에 그녀는 남편과 함께 두렵고 가난한 세월을 보내며 온갖 고생을 겪었습니다. 세 번째 구의 ‘生’(생)과 ‘育’은 아이를 낳고 기른 것일 수도 있지만, 앞뒤에 아이에 대한 언급이 없고 떠나는 그녀의 심정에도 아이에 대한 걱정과 아쉬움이 없는 것으로 봐서 단지 가세가 점차 좋아진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러자 남편은 그녀를 독약처럼 적대시했습니다. 53-4)


〈내가 맛있는 채소를 저장한 것은 겨울을 나기 위해서였지요. 我有旨蓄, 亦以御冬.〉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것은, 그녀가 남편이 겨울을 잘 나도록 채소까지 말려 잘 저장해 두었다는 겁니다. 〈즐거운 당신들의 신혼을 누리려 나를 이용해 가난을 면했군요. 宴爾新昏, 以我御窮.〉 그녀는 그토록 노력해 가세를 호전시켰지만, 남편은 그것을 이용해 새 여자를 들여 자기 욕심만 채웠습니다. 볼수록 점입가경이로군요. 〈매섭게 화를 내며 내게 힘든 일만 시켰는데 옛날을 잊었나요, 내가 처음 시집왔던 때를. 有洸有潰, 旣詒我肆. 不念昔者, 伊予來墍.〉 남편은 걸핏하면 그녀에게 화를 내고 일부러 힘든 일만 하게 했습니다. 마지막에 그녀는 자기가 시집오자마자 치렀던 ‘기’墍라는 풍속을 떠올립니다. 그것은 아직 시집의 모든 것이 낯선 신부를 3일 혹은 30일간 집안일에서 빼 주고 적응기를 갖게 하는 풍속입니다. 그녀는 슬픔이 사무쳐 말하지요. “당신은 내가 처음 시집와서 ‘기’를 치르던 나날을 잊었나요?”라고 말입니다. 54-5)


이 작품은 이혼에 관한 이야기시로, 막 집을 떠나온 이혼녀의 처지와 심정을 묘사했습니다. 이런 제재는 어김없이 우리에게 동한東漢 시대의 장편 악부시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시 역시 이혼한 부인의 이야기를 다루었지요. 그런데 「곡풍」의 이야기는 「공작동남비」에 비해 간략하기는 하지만 더 극적인 전환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는 사람은 모두 틀림없이 “내 어살에 가지 말고, 내 통발을 열지 마오. 자신도 못 돌보면서, 떠난 뒤의 일은 뭐 하러 걱정하는지”에서 깊은 인상을 받을 겁니다. 갑자기 매서운 분노의 말투로 남편을 빼앗아 간 여자를 상상 속에서 꾸짖습니다. 하지만 말을 마치자마자 자기 말이 얼마나 황당하고 무력한지 깨닫고 현실로 돌아와 “나는 집에서 쫓겨난 신세인데 어살은 뭐고 통발은 또 뭐람?”이라고 울적하게 혼잣말을 하지요. 이런 감정의 전환은 변심한 남자를 탓하는 다른 말보다 훨씬 더 그녀의 슬픔에 공감하게 만듭니다. 대단히 섬세한 문학적 수법입니다. 55)


▷ 「정녀」靜女


「곡풍」이 결혼의 파경을 노래했다면 「정녀」는 사랑의 시작을 노래했습니다. 역시 남녀 관계를 그린 작품입니다.〈예쁜 아가씨 아름다워라, 성 모퉁이에서 나를 기다리네. 靜女其姝, 俟我於城隅.〉 ‘靜女’(정녀)의 ‘靜’은 여기에서는 조용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쁘다는 뜻입니다. ‘姝’(주)도 아름다움을 형용하는 글자입니다. 이 두 글자가 교차하면서 아가씨의 빼어난 미모를 강조하고 있지요. 예쁜 아가씨가 ‘나’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성 모퉁이에서 은밀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서두는 흥분되어 가슴 뛰는 젊은 남자의 심정을 드러냅니다. 그는 서둘러 달려갑니다. 〈어두워 보이지 않아, 머리 긁적이며 배회했네. 愛而不見, 搔首踟躕.〉 여기에서 ‘愛’(애)는 어둡고 흐릿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뜻의 ‘曖’(애)와 통합니다. 남자는 벅찬 기대를 품고 성벽 가장자리의 은밀한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어둑어둑한 그곳을 아무리 찾아봐도 아가씨는 보이지 않았지요.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합니다. 61)


〈예쁜 아가씨 아름다워라, 내게 붉은 대통을 선물해 주었네. 붉은 대통 근사하기도 해라, 네가 아름다워 기쁘구나. 靜女其孌, 貽我彤管. 彤管有煒, 說懌女美.〉 ‘孌’(연)은 ‘姝’처럼 아름다움을 형용하는 글자입니다. 남자가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아가씨가 나타나는데, 그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녀는 남자에게 붉은 대통을 선물로 주었지요. 그 선물을 받고 남자가 칭찬하길, “붉은 대통이 너무 아름답네. 네 아름다움이 정말 마음에 드는구나!”라고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붉은 대통에 관해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당연히 아가씨를 찬미하는 겁니다. 〈들판에서 삘기를 가져다주었는데, 정말 예쁘고 특이하네. 네가 예뻐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이가 선물해 줘서 그렇다네. 自牧歸荑, 洵美且異. 匪女之為美, 美人之貽.〉‘歸’(귀)는 가져왔다는 뜻입니다. 이 아가씨는 아마도 성을 나와 산보를 하는 틈을 타 몰래 연인을 만나 붉은 대통을 선물하고, 그러는 김에 막 딴 삘기도 가져다준 것 같습니다. 61-2)


# 삘기 : 띠의 어린 꽃이삭.


이것은 감정이 이입된 결과입니다. 그 아가씨를 본래 좋아하는 데다, 방금 전 그녀를 못 찾아 당황하다 갑자기 그녀가 나타나자 뛸 듯이 기쁜 감정이 사물에 투사된 것이지요. 아무리 평범하고 단순한 물건이라도 이때 그에게는 특별한 광채를 띤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그것은 사랑과 행복의 광채였겠지요. 이 시는 세밀한 인과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만약 아가씨가 기다리는 줄 몰랐다면 남자는 그렇게 서둘러 달려가 그녀를 찾아 헤매지는 않았을 겁니다. 또 잠시 그녀를 찾아 헤매지 않았다면 그녀가 나타났을 때 그렇게 뛸 듯이 기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어서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면 그렇게 과장해서 그녀의 선물을 칭찬하지도 않았겠지요. 먼저 그녀가 특별히 준비해 온 선물을 칭찬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그녀가 오다가 딴, 별로 귀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삘기도 칭찬합니다. 중요한 것은 삘기가 아니라 아름다운 아가씨의 마음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짧지만 교묘한, 훌륭한 시입니다.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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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묵자를 읽다 - 생활 밀착형 서민 철학자를 이해하는 법 유유 동양고전강의 7
양자오 지음, 류방승 옮김 / 유유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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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류에 휩쓸리지 않은 독창적인 사상가


『사기』에서 “묵적墨翟은 송宋의 대부大夫”라고 말했지만 동주 시기의 문헌 어디에서도 묵적이 귀족 신분의 대부라는 증거를 찾을 수 없고, 송나라 사람인지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춘추 시대에 이미 국적과 신분이 계속 바뀌는 평민이 등장했습니다. 경대부는 봉지封地와 관직이 있어 국적이 명확했습니다. 그러나 공자와 그의 제자들만 봐도 이 나라의 출신이면서 저 나라에서 관직을 지낸 예가 있지요. 귀족 신분이 아닌 평민은 세상이 어지러운 시기에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자유롭게 옮겨 다녔습니다. 그들에게는 신분의 제약이 크지 않았고 원래의 국적을 유지하거나 고집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사료에서 묵자의 출신을 확인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가 귀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귀족 신분 없이 난리 속에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이를 통해 위로 올라가 각국의 통치 계급을 찾아갑니다. 그는 노, 송, 제, 초, 위衛 등 여러 나라를 갔지만 어떤 나라가 그의 고국이라고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16)


서주西周가 흥성했던 시기를 숭상한 공자는 주나라 문화에 함축된 정신을 발굴하는 데 힘썼고, 그러한 인문 가치를 회복해 난세를 구하고 싶어 했습니다. 반면 봉건 귀족 계급에 단 한 번도 속해 본 적이 없었던 묵자는 봉건 질서 바깥의 시선으로 봉건 질서에 내재한 결점이 바로 난리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봉건 질서는 혈연관계의 멀고 가까움에 따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결정되는 ‘친친’親親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집니다. 묵자는 이 점을 겨냥해 그와 철저하게 반대되는 ‘겸애’를 들고 나왔습니다. 묵자의 겸애는 모든 사람이 남을 자신처럼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가족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죠. 또 봉건 질서는 상례喪禮와 장례葬禮를 통해 대를 잇는 계승 관계를 강화했는데, 묵자는 ‘절장’節葬을 주장하여 상례와 장례에 대한 중시를 부수고자 했습니다. 봉건 질서는 음악과 주연酒宴으로 상호 간의 관계를 강화했는데, 이에 묵자는 음악이 사치이자 낭비라는 관점의 ‘비악’非樂을 주장했습니다. 17)


『묵자』의 「경 상」經上, 「경 하」經下, 「경설 상」經說上, 「경설 하」經說下, 「대취」大取, 「소취」小取 여섯 편을 통상 ‘묵변’墨辯이라고 부릅니다. 시간대로 보면, ‘묵변’이 만들어진 시기는 비교적 늦어 묵자의 시대보다 뒤였으리라 짐작합니다. 내용으로 보면, ‘묵변’은 논리학과 윤리학을 다룬 편들로, 어떻게 추리하고 논변해야 가장 효과가 있을지 탐색하고 논합니다. 따라서 ‘묵변’을 보면, 묵자 자신이 의식적으로 논변에 흥미를 가졌기에 후대의 묵가에서 이렇게 주장을 담아 엮어 냈다고 믿을 이유가 됩니다. 묵자와 묵가는 처음으로 ‘변’을 연구해, ‘변’의 논리와 원칙을 귀납하고 정리하고자 했고, 그 방법론은 훗날 독립해 나와 ‘명가’를 이루었습니다. 더 시간이 지나 ‘같음과 다름을 밝히고, 이름과 실제를 살피는’ 방법은 다시 법가法家에서 그대로 가져다 ‘법’의 규범을 정리하는 데에 이용했습니다. 이는 복잡하고 다채로운 중국 고대사상사에서 중요한 흐름 중 하나입니다. 25-6)


『논어』에서 공자는 각종 사건과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 선과 악, 좋고 나쁨 같은 도덕적 판단을 직접 드러냅니다. 이것이 ‘논’論입니다. ‘논’의 핵심은 평가와 판단으로, 공자는 자신의 평가와 판단으로 결론을 냅니다. 하지만 추론 과정이나 배경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논어』를 읽을 때 최대한 추론 과정과 배경을 새롭게 구성해 봅니다. ‘논’의 단점은 결론이 유용되기 쉽다는 것, 즉 원래의 추론 과정 및 배경과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원래 의도를 바꾸거나 심지어 왜곡하기가 몹시 쉽다는 것입니다. 전국 시대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말과 표현 방식의 주류가 ‘논’에서 ‘변’辯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입니다. ‘변’은 다원화 및 상호 간에 충돌하는 의견과 입장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사람들이 대화할 때의 공통 인식이 점점 얄팍해진 데서 비롯됩니다. 전에는 서로 어떤 일과 가치관에 대해 필연적이고 공통된 관점이 있었기에 그 부분의 설명을 생략하고 자신이 얻은 지혜와 결론만 내놓으면 됐지만 이제는 불가능해진 겁니다. 26)


2 진실로 실천하기 쉬운 겸애


난세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던 시대에 사람의 상상력은 무한히 확대되고, 수많은 사람이 각기 다른 답안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바로잡고 미래를 계획하려는 이런 시도는 공통된 질문과 도전에 부딪힙니다. ‘일리 있는 말이긴 한데, 그게 가능할까? 실현할 방법이 있어?’ 현실에 초점을 맞춰 나온 질문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이치로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자연스럽고 유력한 답을 여기서 묵자가 제시합니다. ‘가능해. 역사에 구체적인 사례가 있으니 부정할 수 없지.’ 이런 영향을 받는 사람은 대체로 새로운 주장을 제기하려는 사람이었고, 그들은 모두 기이한 압박을 느껴 한사코 역사 속에서 사례를 찾아 자신의 주장이 실행 가능하다는 근거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역사 토론이 당연히 활발해졌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모든 주장에 다 역사의 실례가 있을까요? 개혁 추구의 이상을 가진 사람들은 수백 년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사례를 찾았을까요? 34-5)


한 가지 방법은 아주 먼 옛날의 역사에서 찾는 것이고, 또 다른 방법은 역사 사례를 지어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쉽게 하나로 융화되었습니다. 주나라 이전의 고대 역사는 본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어렵기에, 지어낸 얘기를 역사 속에 끼워 넣는다고 한다면 보통 오래된 이야기일수록 안도감과 신뢰감을 얻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중국 역사는 전국 시대에 전에 없이 팽창했고, 고대사는 훨씬 오래된 시대로 확장됐습니다. 후대의 엄격한 금석학金石學이나 고증학考證學, 나아가 현대의 고고학이 발달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오직 전국 시대에 전해진 자료에 근거해 고대사를 기록하고 이해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 고대사는 당연하게도 과장된 색채가 강해졌죠. 묵자가 두루 서로 사랑하고 모두 서로 이롭게 하는 것이 실천 가능함을 증명하기 위해 든 첫 번째 사례는 하나라 우임금입니다. 우임금이 고생을 자처한 이유는 이기심이 아니라 백성을 행복하게 해 주고 남을 자신처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35-6)


〈노인이 편안하게 생을 마치고, 장성한 사람은 쓰일 곳이 있으며, 아이는 자랄 곳이 있고, 홀아비와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 불구자는 모두 보살펴 주는 곳이 있다. 使老有所終, 壯有所用, 幼有所長, 鰥寡孤獨廢疾者, 皆有所養.〉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있는 이 단락은 후에 ‘대동’大同으로 불립니다. ‘대동’의 핵심은 친족의 경계를 허물어 친족이 없거나 친족을 잃은 사람도 사회에서 편안하게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는 봉건 질서의 주요 내용을 확장하고 수정한 것으로, 묵가의 ‘겸애’에서 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겸애 중」 전편을 관통하는 핵심 논리는 ‘윗사람이 모범을 보이면 아랫사람이 본을 받는다’는 ‘상행하효’上行下效로, 묵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거나 할 수 없다는 한계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군주가 선호하고 앞장서서 제창하면 나머지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를 따라오게 돼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소박하고 단순하면서도 전파력이 강한 신념입니다. 36-8)


3 주나라 문화에 도전하다


묵자의 핵심 사상으로 ‘겸애’와 함께 ‘비공’非攻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죽이면 불의라 이르고 반드시 한 사람 죽인 죄를 묻는다. 만일 이렇게 말해 나간다면, 열 사람을 죽일 경우 불의가 열 배가 돼 반드시 열 사람 죽인 죄를 받아야 하고, 백 사람을 죽일 경우 불의가 백 배가 돼 반드시 백 사람 죽인 죄를 받아야 한다. 이에 대해 천하의 군자가 모두 알고서 비난하며 ‘불의’라고 말한다. 지금 크게 남의 나라를 공격하는 불의에 이르러서는 비난할 줄 모르고 오히려 칭송하며 ‘의’라고 말한다. 실로 그 불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을 적어서 후세에 남긴 것이다. 만약 그 불의를 알았다면 어찌 불의를 적어서 후세에 남겼겠는가? 殺一人, 謂之不義, 必有一死罪矣. 若以此說往, 殺十人十重不義, 必有十死罪矣. 殺百人百重不義, 必有百死罪矣. 當此, 天下之君子皆知而非之, 謂之不義. 今至大爲不義攻國, 則弗知非, 從而譽之, 謂之義. 情不知其不義也, 故書其言以遺後世. 若知其不義也, 夫奚說書其不義以遺後世哉?〉 49)


「비악」과 「절용」에서 묵자는 예악을, 특히 음악을 불필요한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의복의 기능은 겨울에 추위를 막고 여름에 더위를 막는 것입니다. 주거의 기능은 겨울에 찬바람과 추위를 피하고 여름에 더위와 비를 피하며 도둑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무기의 기능은 외적과 도적을 저지하고 물리치는 것이며, 교통수단의 기능은 각기 다른 지형에서 사람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것입니다. 이런 기본 기능으로 보자면 이것들을 어떻게 제작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판단이 섭니다. 「절용 상」에는 “加輕以利”(가경이리)가 두 번 나옵니다. ‘加輕’(가경)은 사실 덜라는 뜻입니다. 묵자는 기능과 무관한 장식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기능, 즉 ‘쓸모’用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절용’節用을 ‘재물을 절약하라’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묵자의 진의는 ‘용’用에 드러나 있고 모든 것은 ‘용’으로 귀결되기에, ‘쓸모없는 것’無用을 덜어서 ‘쓸모 있는 것’用을 배로 늘린다는 뜻으로 ‘절약하다’節가 되는 것입니다. 52-3)


묵자의 또 다른 핵심 사상으로 ‘명귀’와 ‘천지’가 있습니다. ‘명귀’는 귀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이고, ‘천지’는 의지를 가진 인격천人格天이 존재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논지는 인본을 중시하는 주나라 문화와 완전히 상반됩니다. 하지만 이 주장들은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가 교차하는 시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묵자의 개인 색채가 강한 ‘명귀’와 ‘천지’, 운명론을 부정하는 ‘비명’은 후대 묵가조차 외면해 버렸으니까요. 이 밖에 묵자는 ‘상현’을 주장했습니다. 친족을 주로 등용하는 당시 봉건 관습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는 묵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당시 빠르게 형성된 공통된 인식이었습니다. 봉건 질서를 보존하고 주나라 초기의 이상적인 사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던 공자도 일단의 능력 있는 제자를 양성해 친족 관계가 아닌 제후나 대부에게 임용하도록 추천했습니다. 이런 시대 변화와 치열하고 잔혹한 경쟁 앞에서 누구나 인재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에 ‘상현’에는 반대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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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부패한 중국은 왜 성장하는가 - 부패의 역설이 완성한 중국의 도금 시대
위엔위엔 앙 지음, 양영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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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부패는 무조건 나쁘다는 착각


일반 통념에 의하면 부패는 경제 성장을 저해한다. 국가 간 회귀 분석은 부패와 빈곤 사이에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개발 기구나 많은 학계에서는 부패를 근절하는 것이야말로 경제 발전의 선결 조건이라고 한다. 최근 몇 년간 부패는 대중의 불만을 더욱 고조시켰고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볼 수 있듯이 권위주의 체제를 전복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중국은 부패의 역설을 보여 준다. 세계은행에 의하면 1978년 개방 이래 중국은 “역사적으로 가장 빠르고 지속적으로 경제 규모를 확대해 왔다.” 광범위한 부패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경제 성장은 왜 빠르게,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었을까? 이 책은 중국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예외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중국과 가장 유사한 것은 19세기 말의 미국이다. 이 시기의 미국은 맹렬한 성장과 눈에 띄는 불평등, 그리고 재력가들과 결탁한 부패 정치인들로 특징지어진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1978년 이후 중국의 ‘도금 시대’가 건설되는 과정이다. 12-3)


# 부패의 두 가지 분류

1. 교환(뇌물) 대 절도(갈취)로 분류한 부패

2. 엘리트(인허가료) 대 비엘리트(급행료)와 관련된 부패


# 부패의 네가지 유형

1. 바늘도둑은 절도, 공공 자원의 잘못된 사용 또는 일선 관료의 갈취를 의미한다.

2. 소도둑은 공공 재원을 통제하는 정치 엘리트가 공공 재원을 횡령하거나 유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3. 급행료는 업계 종사자나 시민들이 장애물을 우회하거나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관료에게 주는 뇌물이다.

4. 인허가료는 높은 수준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비즈니스 행위자가 막강한 권한을 가진 고위 관료에게 시간 단축에 그치지 않고 배타적이고 수익성이 높은 특권을 받기 위해 주는 뇌물을 의미한다.


중국에서 두드러진 부패 유형은 바늘도둑과 소도둑이 아니라 인허가료 부패다. 왜 중국에서는 명백한 도둑질보다 인허가료가 부패의 중요한 유형이 되었는가? 시장 개방 이후 중국의 정치 시스템은 엘리트와 비엘리트 모두 자신들의 관할 구역에서 창조된 부를 향유하는 이익 공유의 논리를 따랐다. 전체 중국 관료주의는 발전 독려에 대해 인센티브가 있었다. 정치 엘리트는 경력이나 금전적 차원 등 모든 측면에서 발전을 적극적으로 촉진하려는 인센티브가 있다. 지방 리더에게 보다 더 확실한 인센티브는 금전적 인센티브다. 지방 경제가 번영하면 할수록 지방 리더의 수익은 더 많아진다. 하위 공무원들 사이에서 이익 공유는 수당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들의 공식적 월급은 한없이 낮은 수준이지만 보너스, 선물, 무료 식사, 보조금 등 다양한 부가 혜택들을 통해 보충된다. 부가 혜택은 수익을 발생시키는 인센티브로도 작용하고 관료들이 바늘도둑 같은 작은 규모의 부패에 의존하는 것을 막는 기능도 한다. 21-2)


왜 중국에서는 이익 공유가 자리를 잡았으나 다른 가난한 나라들에서는 그렇지 못했을까? 나는 덩샤오핑의 역사적인 결정, 공산당의 일당 독재를 유지함과 동시에 공산당 관료들에게 자본주의적 성장의 이익을 나누어 준 시장 개방을 주목한다. 지대rents, 租같은 중국의 부패는 그들의 노력과 참여를 보상해 준다. 이것은 소련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소련의 급격한 정치, 경제적 변화(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는 당원들이 전체적으로 당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맨슈어 올슨Mancur Olson의 유명한 강도질 비유를 한다면, 이익 공유제는 중국 관료를 ‘정주형 강도stationary bandits’로 만들었다. 따라서 중국 관료는 전체적인 후생을 높이려고 했는데 이로부터 일정 비율의 이익을 안정적으로 떼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부패가 공산당 관료에게 열정적으로 시장 개혁을 도입할 유인을 제공한 것이다. 이는 단순하게 강도질하고 도망가는 것을 반복하는 ‘떠돌이 강도roving bandits’와는 다르다. 22-3)


또한 중국에서는 약탈적 부패를 감시하는 기능이 선거를 통한 것이 아니라 지역 간 경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프로젝트나 투자자들을 유치하려는 극심한 경쟁에 직면한 지방 리더들은 하위 공무원들에게 ‘약탈하는 손’으로 작용하는 것을 자제했다.(경제학에는 여러 유형의 손이 등장한다. 정부의 역할을 규정할 때 크게 도움의 손helping hands과 약탈의 손grabbing hands으로 구분한다.) 그런 노력들은 어떤 경우에는 종교적 열정 수준까지 승화된다. 후베이의 사례를 보면 “투자자는 하느님이다. 투자자를 데려오는 사람은 영웅이다. 관료들은 공복이다. 기업의 이익을 침해하는 자들은 죄인이다”라는 구호가 등장했을 정도였다. 이게 전부는 아니다. 계약 체결은 강력한 성장 촉진제였다. 리더들은 ‘우대 정책’을 제공하려고 애썼다. 리더들은 경쟁에서 앞서 나가기 위해 자기 지방의 위치와 그 전략적 중요성, 상업적 이점, 브랜드 등을 통해 경쟁력을 보여 주어야 했고 발전 전략을 개선해야 했다. 23-4)


2장 독이 되는 부패 약이 되는 부패


나는 중국과 러시아를 비교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공산주의 이후의 사회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오랫동안 ‘경제적 자유화가 왜 중국에는 활기찬 자본주의적 성장을 불러왔으나 소비에트공화국에는 몰락을, 러시아에는 경기 침체를 가져왔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어 왔다. 중국과 러시아 모두 체제가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하는 시기에 폭발적인 부패의 성장을 경험했다. 왜 두 나라의 경제적 결과는 이토록 다른가? 대중적으로 설득력 있는 하나의 설명은, 러시아의 부패가 중국의 것보다 ‘더 파괴적’이었다는 것이다. 소도둑, 급행료, 바늘도둑 같은 유형의 부패는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고 공공 재산을 낭비하게 만든다. UCI 부패 지수 방식으로 수집된 증거들은 다음 사실을 보여 준다. 러시아는 급격한 정치적 자유화로 인해 모든 형태의 부패가 봉인 해제된 반면 중국은 성장을 저해하는 부패를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했음을 말이다. 중국에서는 경찰관들과 하위 공무원에 대한 규율이 좀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41, 43)


중국과 인도를 비교하면 급행료(행정적 장벽 또는 지연을 넘기 위한 뇌물)와 인허가료(프로젝트에 특별한 접근을 위한 뇌물)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인도에서는 장애물을 넘어서기 위해 뇌물을 제공하고 중국에서는 수익성이 좋은 사업 계약을 따내기 위해 뇌물을 제공한다. 인도의 뇌물이 윤활유라면 중국의 뇌물은 슬러지에 가깝다. 발전 지향적인 중국 전제 정치에서 권력은 개별적 지도자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 손쉽게 규제를 해제하거나 문호를 개방할 수 있는 권력을 지녔다. 반면에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근거한 인도의 분절적인 민주주의 정치 체제는 많은 당국자들에게 결정을 막을 권한을 부여하지만 계약을 확대하거나 요구 사항을 일방적으로 승인할 수 있는 권한은 주지 못한다. 한 마디로 인허가료는 중국이라는 자본주의 기계에 연료를 공급했고, 사업 계약을 위해 인허가료를 지불한 자본가를 부자로 만들었으며, 빠른 성장을 이룩한 공산당 간부에게 두둑한 보상을 주었다. 44-6)


미국과 중국 두 나라는 무언가 공통점이 있다. 부패의 지배적인 유형이 바로 인허가료라는 점이다. 확실히 해 두기 위해 중국은 4가지 부패 영역 모두에서 그 정도가 미국보다 심하다. 그렇지만 인허가료만 보면 그 차이가 적다. 중국은 확실히 뇌물의 통로가 되는 광범위한 네트워크 형성 분야에서 지배적이다. 그러나 회전문 인사와 로비를 통한 규제 포획을 보면 미국이 더 크다. 이는 미국 자본주의, 민주주의에서 인허가료가 제도화된 것을 의미한다. 이미 몇몇 미국 학자들은 이 점을 지적했다. 레시그는 미국 의회를 예로 들며 “우리는 제도 내의 그 어떤 구성원도 부패하지 않았지만 제도 자체가 부패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요약하자면 미국에서는 인허가료가 기본적으로 제도화된 것이다. 중국의 인허가료는 여전히 개인적인 관계, 뇌물, 불법적인 행위와 얽히고설켰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국의 인허가료는 낙후된 인허가료라고 표현할 수 있다. 47-8)


3장 중국의 부패는 어떻게 진화했는가


나는 중국 부패의 현 상태를 불러온 요인으로 2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1993년 중국 지도부의 중앙 집중적 계획에서 ‘사회주의 시장 경제’로 이행하는 기념비적 결정이다. ‘사회주의 시장 경제’는 국가가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시장 경제를 말한다. 공산당 간부들은 민간사업과 새로운 산업에 대해 적극적인 옹호자가 되었으며 동시에 여전히 핵심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 이 권한은 그들에게 거대한 개발도상국 시장에서 상당한 권력을 부여했으며, 민간 자본가들은 공산당 간부들의 환심을 사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둘째, 중앙 정부가 1998년부터 시작한, 광범위한 행정 개혁을 통한 개혁이 있다. 이러한 개혁은 국가의 공공 금융 감시 능력을 제고했고 거래를 수반하지 않는 뇌물을 억제했다. 중국의 정실 자본주의 발호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두 번째 과정은 대체로 간과되었다. 즉, 부패는 중국이 명령 경제에서 시장 경제로 전환하는 데 있어서 추동자이자 산물이었다. 55-6)


1993년 이후 정립된 사회주의 시장 경제란 무엇인가? 서구의 관찰자들은 이 구호를 의례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라는 단어는 ‘시장 경제’를 이룩하려는 목표를 위한 수식어이다. 사회주의 시장 경제 건설은 중앙 계획 경제를 시장 구조로 대체하고 경제 부문에서 국유화 부분을 극적으로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베이징은 국가가 정한 생산 할당량과 가격 통제를 1993년 이후 폐기 처분했다. “정통 계획 시스템은 거의 소리 없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채 사라졌다”고 배리 노튼Barry Naughton은 이야기한다. 이것은 국유 기업의 규모 축소와 1990년대 개혁의 거대한 물결을 동반했으며 “조대방소抓大放小(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아준다. 대형 국유 기업은 집중적으로, 소형 국유 기업은 느슨하게 관리해서 활성화한다는 의미)”로 알려졌다. 1980년대에 유행한 국가와 민간 기업의 혼합체인 향진 기업과 집체 기업 역시 일제히 사유화의 길을 걸었다. 59-60)


1993년 이후의 개혁이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감소시키지는 않았다. 개혁은 역할을 바꾸었을 뿐이다. 1980년대 동안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계획과 명령이었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얼마의 가격에 생산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1993년 중앙 계획이 해체되고 당-국가 공무원은 새로운 역할을 떠맡았다. 새로운 산업 육성, 투자 촉진, 시장에서 자금 융통, 도시 계획, 파괴와 건설 등을 정말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수행해야 했다. 월더에 의하면 이러한 역할은 공산당 간부들에게 “소련에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았던” 새로운 권력의 원천을 제공했다. 따라서 중앙에 의해 진행된 개혁들이 국가의 역량을 증대시키고 교환 없는 형태의 부패를 억제했어도, 새로운 형태의 부패가 번창했다. 새로운 형태의 부패는 정치적 내부자들의 국가 자산 갈취, 밀수꾼과 폭력배와의 결탁, 정부 직책 판매, 그리고 무엇보다 광범위한 뇌물의 네트워크 형성 등을 포함한다. 62)


지방 정부는 비록 토지를 매각할 수는 없지만 일정 기간 동안 토지를 사용할 권리를 ‘토지출양금土地出让金’이라는 명목으로 팔고 전액 지방 정부의 금고에 귀속시켰다. 토지와 관련된 수입 증가는 전국적으로 1999년 510억 위안에서 2012년 3조 2000억 위안으로 추정된다. 이런 배경은 부동산 시장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수익성이 나도록 만들었다. 거대한 신흥 시장, 경제에서 확장적인 정부의 역할, 수조 위안에 달하는 불법 자금을 배경으로 권세가를 형성하는 개인들 간의 광대한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정치인들은 그들 사이, 가족과 민간 기업가들 사이에 상호 의존하는 밀접한 관계를 만들었다. 월더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그 결과는 ‘초-후견주의super-clientelism’였다. 이는 과거 수십 년간 상상할 수 없었던 ‘훨씬 더 강력하고, 부유하고, 수단이 좋은 당 엘리트’의 출현으로 귀결됐으며, 권력과 부의 그물이 최상층부에서 최하층부 수준까지 내려오는 위계적 질서를 만들어 냈다. 63, 65)


4장 중국식 관료주의가 이익을 공유하는 방법


중국의 중앙 정부는 국가 비전과 광범위한 정책을 내놓지만 지방 정부는 경제적, 사회적 발전 계획에서 엄청난 정도의 자치를 행사한다. 엘리트 관원은 중국의 독재적인 위계 구조에서 분명 강력한 인물들이지만 행정부의 나머지 99퍼센트 집단은 통치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며 일선에서 정책을 집행한다. 게다가 개혁 시기의 일반 경찰관, 사무원, 검사원 그리고 학교 선생들은 단순한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잠재적인 사업가 소질을 가진 직원들이었다. 경제가 도약하는 초기에 지방 정부는 공무원들의 사적인 네트워크를 통해서 투자자를 모집했다. 일선 관료는 ‘약탈하는 손’이 되든지 또는 ‘도움의 손’이 되든지 다 될 수 있다. 그들은 자의적으로 수수료나 벌금을 부과하거나 과도한 검사로 기업을 괴롭혀 기업가들의 성장을 저해할 수도 있다. 또는 기업가들을 서로 연결하거나, 각종 편의와 맞춤식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회의를 조직하는 등으로 경제를 부양할 수 있었다. 86)


중국의 공공 피고용인들은 ‘쌍궤雙軌(두 가지 노선이나 방법)’ 방식으로 보상을 받았다. 다양한 수당, 특혜와 결합한 공식적 급여가 바로 그것이다. 중국에서 수당과 특혜는 2가지 소득 원천에 연동되었다. 그 2가지는 지방 정부의 세수, 개별 공무원이 징수하는 수수료와 벌금이다. 가상의 간부(간부는 공산주의 용어로 관료를 의미한다) 리Li씨를 생각해 보자. 리 씨는 ‘옥玉’이라는 이름의 현县에서 건설부 직원으로 일한다. 리 씨는 국가적으로 표준적인 공식 급여를 받는다. 여기에 그는 옥현의 예산으로부터 수당을 받는다. 이 수당은 옥현이 거둔 세금과 유보된 이익에서 지급된다. 세 번째 수당이 또 있다. 그것은 리 씨가 속한 부서인 건설부가 수수료, 벌금, 사용료, 보조 서비스로 받은 이익 중 일부인 것이다. 세금이 아닌 소득으로 지급하는 것이므로 각 부서들은 부서원의 혜택(연장 근로, 집단 여행, 무료 식사, 선물 카드 등)을 책임진다. 중국의 개혁 시기에는 이러한 이익 공유 관행이 전체 공공 행정 기관에서 벌어졌다. 89)


중국의 일선 관료들이 비즈니스에서 ‘도움’과 ‘약탈’ 모두를 통해서 수입을 얻는 행위는 집단 행동 문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왜 이 관료들은 약탈(수수료, 벌금, 개별 부서의 수입)만 하면 되는데 굳이 전체 지역에 혜택을 주는 비즈니스 친화적인 노력도 하는가?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지역 리더들이 부하 직원들의 비즈니스 이익 침해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리더들의 경력과 축재가 지역의 번영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도적으로 통제할 유인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보다 흥미롭고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 자발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일선 관료들이 장기 이익을 위해서 약탈적 행위를 스스로 억제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최빈국들에서는 경제 발전의 성과가 관료 집단의 노력과 괴리되어 있고 근시안적이다. 중국이 특이한 것은 일선 관료들조차 개인적인 금전적 이해가 경제 발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따라서 당장의 갈취를 억제함으로써 장기적인 이익을 누릴 줄 안다는 것이다. 90-1)


당근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적절한 채찍과 결합되었을 때만 그러하다. 국가 전체와 개별 지방 수준에서 통제와 처벌의 기제가 필요하다. 1998년 주룽지 총리는 현대적 공공 행정을 만들기 위해 전면적인 절차상 개혁을 진행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1년 재정부가 주도하고 중용한 국고단일계좌Treasury Single Account, TSA 제도이다. 이 개혁은 처음에는 중앙 정부 수준에서 시작되었고 하위 지방 정부로 확대되었다. 국고 시스템은 전체 공공 부문의 계좌를 관리하며 공금의 예금과 지출을 감시한다. 이전에는 공공 기관의 계좌는 행정 조직, 지역, 부서에 따라 매우 분산된 상태였다. 2001년 이전에는 개별적 공공 기관이 그들의 재량으로 ‘임시 계좌’를 만들어 운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재정부 개혁은 임시 계좌를 불법화했고 현존하는 모든 계좌를 병합해 추적이 쉽도록 만들었다. 최근에는 광범위하게 확산된 디지털 결제가 관료 체제의 재정적 투명성을 더욱 높였다. 102-3)


5장 부패와 경제 성장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


분명히 부패 유형에서 인허가료가 지배적일 때 그것은 어떤 민간 회사를 부유하게 만들고 주식 시장 상장도 가능하게 하며 《포브스》 선정 억만장자 반열에 오르게 할 수 있다. 건설과 투자를 고취시키며 이것들은 GDP 성장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인허가료는 자본주의의 스테로이드처럼 작용한다. 이것은 성장을 자극하지만 자원의 잘못된 배분에 의한 왜곡과 체계적인 위험을 키우고 불평등을 악화시킨다. 인허가료라는 연료를 공급받은 자본주의는 사회 내, 그리고 기업 내의 불평등(정치적 연줄의 유무에 따라)을 악화시킨다. 정실 관계자들은 그들의 경쟁자보다 정부 계약을 쉽게 따내고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 인허가료는 경제 개혁을 가로막고 자원 배분을 왜곡하는 강력한 기득권을 만들어 낸다. 인허가료는 성장을 촉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런 위험과 왜곡이 전체 중국 시민에 영향을 주지만 그 효과는 계산하기가 불가능하다. 133-6)


페이는 이런 시스템을 “자본가가 정치인으로부터 값어치 있는 지대를 획득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런 과정은 “중국 공산당의 몰락”으로 연결된다. 나는 페이가 본 정실 자본주의 문제점에 완벽히 동의한다. 그러한 문제점에는 “소수가 부를 축재하는 것과 높은 수준의 불평등성”이 있다. 그러나 그의 묘사는 동전의 다른 한 면을 간과한다. 부패 관료가 종종 유능하고 개발을 촉진한다는 사실을 놓치는 것이다. 보시라이(충칭)와 지젠예(난징)의 사례로부터 우리는 가장 유능한 리더들이 성장을 촉진하는 전략을, 단지 불도저식으로 정책을 밀어붙이고 텅 빈 ‘유령 도시’만을 건설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대신에 보시라이와 지젠예 모두 그들의 지역을 전략적으로 배치했고 브랜드화했다. 이들과 결탁한 부유한 정실들은 정치 엘리트들의 개인적인 부와 사치스러운 소비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할 뿐 아니라, 정치 엘리트들이 개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그래서 정치적 성과를 내도록 도와준다. 136-7)


6장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과 중국의 미래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은 이전의 운동과 5가지 주목할 점에서 달랐다. 첫째, 매우 장기적이며 현재도 진행 중이다. 오히려 이번 운동은 ‘캠페인이 아니며 중국의 뉴 노멀’이 되었다. 둘째, 엄청난 수의 관료가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2012~2017년 사이에 규율 당국은 대중으로부터 총 1200만 건의 제보와 보고를 받았으며, 270만 개의 단서를 토대로 150만 건을 조사했고 150만 명을 처벌했다. 셋째, 시진핑은 지위가 높든 낮든(그의 유명한 표현에 의하면 ‘호랑이와 파리’) 부패한 관료를 숙청할 것을 맹세했다. 숙청 대상에는 몇몇 ‘초거대 호랑이’가 포함되었다. 넷째, 반부패 운동은 당과 국가 기관을 넘어서 군부, 국유 기업, 금융 조직, 그리고 최근에는 국가 미디어와 대학교까지 확대되었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중요 사항은 최근의 반부패 운동은 여러 관료를 체포하는 것 외에 관료 체제의 규범을 똑바로 하는 데에도 목표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시진핑은 모순적인 정책 수단(지속적인 캠페인)을 발명한 것이다. 143-5)


반부패 운동이 중국의 경제 성장을 저해할 것인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단기적 효과와 장기적 효과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 단기적으로 기회주의적 자본가가 더 이상 법을 우회하거나 특권을 얻기 위해 후견인에 의존하지 않으면, 그들은 비즈니스 활동을 줄일 것이다. 따라서 낮은 성장으로 귀결된다. 대단히 엄격한 조사는 정부 관료를 불안하게 하고 위험 회피적으로 만든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새로운 계획을 승인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복지부동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예를 들어 2015년에 지방 관료들은 국가발전개혁위원회NDRC의 승인에도 불구하고 450억 위안 규모의 투자 프로젝트를 질질 끌었던 적이 있다. 끝으로, 관료들에 대한 엄중 단속 과정에 연루될 것을 두려워한 기업들은 해외로 도피하게 된다. 2014년에 4250억 달러 규모의 자본 도피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당이 정실주의를 뿌리 뽑겠다고 결심한 이상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조정 과정이다. 160)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은 아직 기대한 장기적 편익을 거두고 있지는 않다. 또는 2가지 이유로 더 나쁜 미래 전망이 있을 수 있다. 첫째, 그의 운동은 부패한 관료를 잡아내는 것을 넘어 정치적 통제를 더 강화하는 수단으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시진핑은 관료들이 당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충성을 다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 시진핑은 관료 체제를 속박함과 동시에 사회적, 정치적 자유를 옥죄었다. 시진핑은 권력을 잡자마자 당-국가와 사회 두 영역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최고 지도자가 그의 부하 직원들에게 과감함과 규율을 잘 지킬 것 모두를 촉구한 것인데 이는 비현실적인 요구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문제(복지부동의 자세) 출현의 이유다. 복지부동은 ‘란정懒政’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공무원의 게으름을 의미한다. 시진핑 시대는 모든 상명하복 해법(엄중한 단속)이 새로운 문제를 낳고(복지부동), 체제는 이 문제를 더욱 상명하복적인 해법(복지부동을 처벌)으로 풀려고 한다는 역설을 가져온다. 160-2)


7장 중국과 미국의 도금 시대로 살펴본 부패의 역설


도금 사회는 정실 자본주의의 시기다. 또한 이 시기는 비상한 성장과 변화의 시기였다. 수백만의 미국인이 농촌에서 공장으로 이주했고, 수많은 이의 삶의 수준이 올라갔으며, 새로운 산업이 발흥했다. 자본 시장은 확대되었고, 철도는 장거리 상업을 가능하게 했으며 J. P. 모건이나 존 D. 록펠러 같은 초거대 거물들이 등장했다. 이 시기의 만연한 부패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영국을 따라잡아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오늘날 중국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미국의 도금 시대와 비슷한 것을 경험하고 있다. 덩샤오핑 시기 개혁주의자들은 섬세한 정치적 단결을 했고 마오의 파괴적인 통치의 폐허에서 중국을 재건했다. 이것은 미국이 내전으로 인한 대대적인 파괴 후에 국가를 재건한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의 시장 개혁은 미국이 19세기에 경험한 것처럼 심한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8억 5000만 명의 빈곤층을 구제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지배적인 유형의 부패는 인허가료(자본가가 권력자들로부터 특권을 구입)다. 166)


21세기로 넘어오면서 금권 정치는 점차 복잡해지는 금융 시스템으로 전이되었고, 이 금융 시스템은 레버리지에 의해 뒤틀리고 전문적인 세부 사항에 의해 복잡해져 이제는 그 누구도 이해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공산당 지배하에 있는 중국의 인허가료는 언젠가 워싱턴의 K-스트리트(미국의 로비집단)처럼 제도적이고 합법적인 스타일로 바뀔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도적 부패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공식적인 대의제 정치의 타락이다. 미국 헌법 수정 제1조는 ‘정부에 억울한 사연을 청원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를 신성하게 받든다. 레시그의 말에 의하면 이 권리는 정치적 기구가 ‘체계적으로 잘못된 영향력에 굴복할 때’ 변질된다. 당의 지도부와 시진핑 개인을 향한 권력 집중화는 중국 엘리트의 부패를 고도의 개인적이면서도 쌍방 관계 문제로 만들었다. 6장에서 보았듯이 그의 반부패 운동하에서 후견인은 중국 정치인의 흥망을 결정하는 데 성과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75-6)


서구 사회의 발흥은 결코 좋은 제도와 ‘혁신적 문화’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패, 착취, 불평등과 함께해 왔다. 서구 역사에 대해 나쁜 점까지 모두 살피려는 솔직한 평가는 개발도상국에서의 경제적, 정치적 현대화의 과정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부패는 부유하거나 현대적인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반드시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보다 부패는 비인격적인 교환과 복잡한 것을 향해 진화한다. 중국은 비슷한 구조적 변화의 과정을 매우 짧고 압축적인 시간 내에 겪었으며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책은 부패가 경제 성장에 ‘좋다’ 또는 ‘나쁘다’라는 과도한 단순화를 반대한다. 모든 부패가 나쁜 것은 맞지만 그 피해는 부패 유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부패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할 때 우리는 연간 GDP 성장 너머의 것을 봐야 하며 부패가 가져오는 간접적이고 왜곡된 결과를 조사해야 한다. 부패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할 때 우리는 연간 GDP 성장 너머의 것을 봐야 한다. 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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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제국의 충돌 - ‘차이메리카’에서 ‘신냉전’으로
훙호펑 지음, 하남석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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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서론: 지구적 갈등의 정치사회학


두 개별 국가 간의 경쟁에 초점을 맞추거나 미국과 중국이 글로벌 통치 기구의 규범과 질서를 어떻게 형성하고 재구성하는지에 집중하는 연구들은 국가가 권력, 세계 지배 혹은 글로벌 거버넌스를 추구하는 자율적 행위자라고 가정한다. 이러한 가설은 ‘국가의 복귀Bringing the State Back In’ 학파가 국가 자율성이라는 베버주의적 개념을 복원한 이후로 통용되었다. 베버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자율성을 가진 외교 정책 엘리트들의 국익에 대한 정의와 엘리트 네트워크 속에서 내생적으로 발전된 정책 지향성은 국제정치를 분석하는 토대를 이룬다. 외교 정책 엘리트는 군사 및 정보 분야 외교 관료, 싱크탱크의 학자들, 외교 정책에 관심을 갖는 선출직 관료로 구성된다. 이는 국제무대에서의 국가 행위가 ‘위신 감정’과 세계에서의 ‘권력 지위’ 추구에 의해 추동된다는 베버의 가정에 따른 것이다. 이 관점은 국가의 외교 정책을 초국적 기업의 경제적 요구의 단순한 반영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대한 대응이다. 12)


국가주의적 관점과 경제학적 관점을 넘어, 국가 간 경쟁과 기업 조직 간의 경쟁 혹은 초국적 연결을 세계질서와 갈등의 형성에 있어 상호작용하는 두 개의 자율적 영역으로 보는 더 섬세한 국제정치 이론들이 있다. 이러한 이론들의 통찰에 기반해 나는 국가 간 지정학적 경쟁과 기업 사이의 자본 간 관계를 연결시켜 1990년대와 2000년대 미국과 중국의 공생관계 및 2010년대 그 공생관계가 경쟁으로 변화한 원인들을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지구정치경제의 거시적인 구조 변화를 배경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의 기업 및 국가 간의 중간 수준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두 경제 대국을 합칠 때 GDP에서는 세계 전체의 거의 40퍼센트, 국방비에서는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미중 관계의 변화는 세계 정치에서 가장 중대한 변화이며, 21세기 미래의 세계질서 혹은 혼돈을 결정짓는다. 이 책은 변화하는 미중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시도이자 지구적인 정치 권력의 지형이 어디로 향할지에 대한 예측이다. 12-3)


2장 공생


미국 시장은 1980년대 내내 중국의 초기 수출 부문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중국 경제를 수출 주도 성장으로 전환시키려는 베이징 당국의 시도가 성공하려면 미국 시장이 낮은 관세로 중국산 제품 수출에 개방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중국 경제가 수출 주도 성장으로 가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을 그 당시 1979년 미국과 중국의 공식 수교 이후 시행되어왔던 중국 제품에 대한 미국 시장의 개방은 제동이 걸려 있는 상황이었다. 1993년 빌 클린턴이 10년 만에 민주당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 탈냉전 시기 새 정부의 외교 정책 엘리트들은 자유무역에 우호적이지 않은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중국에 우호적이지 않은 인권 옹호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중국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중국의 인권 개선과 연결시키려 했다. 이와 관련해 클린턴 정부가 시도한 특정 정책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국제무역 체제 속에서 최혜국MFN 지위와 중국의 인권 향상 문제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19-20)


중국의 MFN 지위 갱신과 인권 문제를 연계시키는 클린턴의 입장은 1989년 톈안먼 사건 진압 이후 외교 기관의 인권 이상주의자들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입장은 무엇보다 민주당의 대선 승리에 필수적인 지지자들이었던 노동조합의 경제적 우려에 대한 대응이었다. 미국의 노조들은 중국의 무노조, 저임금 노동과 경쟁이 심화되는 것을 우려해왔다. 따라서 중국의 MFN 지위와 인권 조건을 연계시키겠다는 공약은 미국과 중국 간 무역 자유화에 대한 보호주의적 반대 입장을 살짝 감추고 있는 것이었다. 중국의 MFN 지위의 연례적인 무조건 갱신이 종료되면서 중국의 비즈니스 환경과 관련된 미국 기업들의 불확실성은 크게 늘어났다. 연례 검토의 실제 결과와 상관없이 MFN 지위를 인권 조건과 연계시키는 것은 미중 무역의 성장과 미국 기업 공급망의 중국 내 확장에 효과적으로 제동을 걸었다. 수출 주도형 성장으로 전환하려는 중국의 시도는 큰 걸림돌에 부딪혔다. 21)


1994년 초반, 노동조합과 기업의 이익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이 1993년에 설정된 인권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MFN 지위 갱신에 대해 심의했다. 이와 동시에 백악관에 신설된 국가경제위원회NEC의 힘이 커지면서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월가의 목소리가 상당히 커졌다. 월가의 베테랑 은행가이자 골드만삭스의 공동 회장인 로버트 루빈이 국가경제위원회 초대 의장이었다.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무역 정책을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외교 정책 엘리트들 대신 대중국 무역을 확대하려는 연합 세력을 구축한 기업의 목소리가 강력해졌다. 결국 기업과 월가의 힘이 우세했다. 1994년 5월 26일 클린턴은 중국의 MFN 지위를 갱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사후 정당화로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과의 자유무역이 중국의 민간 기업과 중산층에 힘을 실어줄 수 있고, 이는 결국 정치적 자유화의 추진으로 이어진다는 ‘건설적 관여’ 이론을 내세웠다. 26-7, 32)


중국과의 무역에서 인권 문제를 분리하는 데 찬성하는 많은 기업을 효과적인 연합으로 이끈 가장 중요한 하나의 힘은 중국 국가 그 자체였다. 중국 국가는 이러한 기업들을 대리 로비스트로 적극적으로 모집하고 조정했다. 『런민일보』에 따르면 중국을 방문하기 위해 초청된 미국 기업 대표단 수는 1993년과 1994년에 정점을 찍었다. 이 방문 여행에서 다수의 미국 기업 임원들은 중국 정부와 대규모 주문 및 계약을 포함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중국 당국은 이러한 거래를 이 미국 손님들이 1994년 중국의 MFN 지위 갱신을 위해 로비해달라는 것과 명시적으로 연결시키곤 했다. 이런 사례를 살펴보면 기존에 중국에 진출하지 않고 미중 무역과 직접적인 관련이 거의 없던 미국 기업들이 왜 공격적으로 로비에 나섰는지를 알 수 있다. 인권 연계 조치 해제를 위한 로비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던 기업 중에는 중국 정부가 제공하는 개별 우대 정책의 혜택을 받는 곳이 많았다. 28-9)


중국의 MFN 지위와 인권 문제 연계 조치를 해제시킨 것은 미중 무역 자유화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클린턴이 중국의 MFN 지위를 무조건 승인해 기존 정책을 번복함으로써 2000년에 행정부가 중국에 항구적 정상무역관계PNTR 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1998년 ‘최혜국 대우MFN, Most Favored Nation’라는 용어는 ‘정상무역관계NTR, Normal Trade Relation’로 대체되었다). 이로 인해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에 있어 마지막 주요 걸림돌이 사라졌다. 2000년에 미국과 중국 간의 항구적 정상무역관계 논쟁이 의회에서 벌어졌을 때, 수년 동안 이어진 미중 무역 자유화로 인해 기업 부문에서는 이미 중국과의 무역 속에서 자생적인 기득권자들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자발적으로 무역 자유화를 위한 추가 로비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생겨난 미국과 중국의 경제 공생 및 미국의 기업 이익은 여전히 중국을 주요 지정학적 경쟁자로 전망하는 워싱턴의 외교 군사 기관의 경향을 제어하는 역할을 했다. 32)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 이르러 냉전 이후의 세계질서는 소련의 붕괴로 만들어진 진공 상태 속에서 (예를 들어 코소보 전쟁과 같이) 여러 지역에서 빈번하게 지정학적 위기가 발생하고 있었고, (1994년 멕시코의 페소화 위기에서 1997~19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에 이르기까지) 규제받지 않는 세계 자유시장의 금융위기들에 직면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는 모두 미국에 계속 늘어나는 재정 부담을 안겨줬고 이러한 개입들로 인해 미국은 점점 더 비용이 많이 드는 지구 제국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차이메리카Chimerica' 체제 속에서 중국의 저가 제품 수출과 미국 국채에 대한 투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미국 제국 건설의 중요한 경제적, 재정적 토대가 되었다. 2000년대 미국이 중앙아시아와 중동에 전념하던 시기에도 중국은 북핵 위기 등 아시아 지역의 지정학적 위기를 억제하는 데 미국을 도왔다. 차이메리카의 전성기에 중국은 미국의 지구 제국에 없어서는 안 될 조력자가 되었다. 33)


3장 자본 간 경쟁


1990년대 중국의 자유시장 개혁은 자본 축적의 법칙이 현재 대부분의 경제활동을 추동한다는 면에서 중국을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 체제는 미국이 구상했던 자본주의로 수렴되지 않았다. 중국이 세계 시장에 편입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국가는 국유 기업SOE의 형태로 경제 전반을 통제하고 있다. 중국의 국유 부문은 중국 공산당의 여러 파벌의 봉건 영지가 되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중국 호황의 시기에 정치 엘리트 가문들은 서로 국유 부문을 분할해 가지고 있었고, 이는 이들 간의 세력균형을 만들어내 당-국가의 ‘집단지도 체제’를 안정화시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기에 중국의 수출 주도형 호황이 주춤하자 중국 정부는 부채 기반의 고정 자산 투자로 공격적인 경기부양책을 실행해 그에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더 이상 그 거품을 따라잡지 못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중국의 미상환 부채는 GDP의 330퍼센트 이상으로 올라갔다. 35-7)


부채로 이뤄진 경기 회복의 결과로 만들어진 과다한 생산 능력과 불필요한 인프라 시설은 수익성이 없었다. 경기 침체와 더불어 외환보유고의 확대 없이 지방 정부의 부채 형태로 이뤄진 유동성 급증은 자본 이탈 압력을 발생시켰다. 그 결과 2015~2016년에 주식시장 붕괴와 인민폐의 급격한 평가절하가 일어났으며, 2016년에 자본 통제를 강화하고 나서야 경제가 안정되었다. 은행 시스템은 경기 둔화를 막기 위해 여러 차례 신규 대출을 투입했다. 이처럼 규모가 더 큰 반복적인 대출이 급증하면서 부채는 더 늘어났다. 성장 둔화와 부채 악화로 인해 당-국가 엘리트들은 민간 부문과 외국 기업에 대한 압박의 속도를 높였으며, 고속 성장의 종식으로 당-국가의 정당성이 위협받자 당-국가 엘리트들 간의 갈등도 깊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2012년 당-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된 시진핑은 ‘집단지도 체제’라는 협치의 방식에서 전제적 통치 방식으로 전환하며 의사결정 권한의 집중을 위한 일련의 시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39)


시진핑 체제에서 중국의 국가주의적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미국의 외교 정책 엘리트들의 중국관은 더 완고해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미국의 최종적인 쇠퇴가 왔다고 베이징 당국이 판단하면서 중국은 광범위한 지정학적 문제에서 더 대담하게 대립적인 입장을 채택했다. 미국이 중동의 전쟁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한 2010년대에 워싱턴 당국은 오바마의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에 따라 지정학적 경쟁자로서 중국을 견제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중국 경제의 국가주의적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중국에서 미국 기업의 이익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중국 진출에 앞다퉈 나섰던 기업들은 대부분 엄청난 이득을 거뒀지만, 약속했던 것과는 달리 제한적인 시장 접근 및 기술 이전에 대한 압력 등은 이후 많은 미국 기업이 중국에서 맞닥뜨려야 할 일의 전조였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의 대중국 정책을 더 대립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40-1)


2001년 중국의 WTO 가입 이후, 미국 경제에 미친 ‘차이나 쇼크’는 즉각적이면서도 거대했다. 1999년과 2001년 사이에 중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이 밀려들어오면서 미국에서 200만 개 이상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 이 충격으로 인해 2000년대에 반중 무역연합은 활기를 되찾았다. 새로운 반중 무역연합의 목적은 의회와 백악관이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해 중국 수입품의 유입을 막기 위한 교정 조치를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연합의 중추는 노동조합이었다. 그리고 중국으로의 해외 진출 역량은 좀 떨어지고 중국산 수입품으로 인해 자국 시장이 잠식당하고 있는 미국 제조업체들이 이 연합의 또 다른 만만찮은 세력이었다. 이들이 실패한─트럼프 행정부 시절인 2019년 8월에서 2020년 1월까지의 잠깐 동안을 제외하고는─이유 중 하나는 중국으로 제조 부문을 아웃소싱해 낮은 중국 환율 덕에 이득을 보고 있는 미국 기업들로 구성된 대항 로비 연합이 이들의 로비 노력을 상쇄시켰기 때문이다. 50-1)


환율 조작을 둘러싼 로비활동은 미국 기업들 간의 분열을 보여주지만, 중국의 시장 접근 및 지식재산권과 관련된 로비활동은 다양한 부문의 미국 기업들 사이에 의견 일치가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시장 접근, 지식재산권, 심지어 환율 조작 문제는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미국 및 기타 외국 기업에 대한 베이징 당국의 일반적인 적대감이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10년 1월 19개 로비 단체가 백악관에 서한을 보내 “미국의 기업과 지식재산권을 희생시켜 자국의 기업을 발전시키려는 정책을 만들어내는 중국의 체계적인 노력”에 대해 “미국 회사들에 즉각적인 위험을 초래한다”고 불만을 표하며, 미국이 중국에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중국에 반대하는 기업 반란’이 부상한 것은 오바마 행정부가 중국을 제외하고 미국과 대부분의 아시아 태평양 국가를 포함하는 자유무역 지대를 설립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추진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53-4)


미국 기업들이 중국의 이익을 위한 로비활동에 대한 열의가 줄어들면서, 2010년 이후 매파적 입장의 지정학적 주장이 정책 결정 과정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일단 국가 안보에 치중하는 매파들이 견제받지 않고 정책 결정을 주도하게 되자, 워싱턴 당국은 특정 미국 기업의 이익에 피해를 주는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중국과의 지정학적 경쟁이라는 당위를 내세워 정책을 채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 중 하나는 중국의 군사 및 안보 기구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중국의 민영 첨단 기술 대기업인 화웨이에 대한 미국의 정책 변화다. 화웨이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은 전적으로 국가 안보만을 고려한 것이었다. 화웨이의 글로벌 확장에 장비, 부품, 기술을 판매한 많은 미국 첨단 기업의 이해관계가 훼손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책이 진전돼 확고히 시행될 수 있다는 점은 미중 관계의 구조적 조건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56-7)


4장 세력권


2000년대에 세계적으로 상품 수요가 폭발하는 가운데, 중국은 다른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많은 대출을 통해 해당 국가의 원자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에너지와 원자재 수출국에 많은 대출이 이뤄졌으며, 명시된 양의 상품으로 상환받았다. 이러한 유형의 대출로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2007년에서 2014년에 걸쳐 중국이 베네수엘라에 63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고 원유로 돌려받은 것이다. 2010년 이후에는 인프라 시설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는 쪽으로 더 많은 대출이 이뤄져 인프라 건설에서 중국의 과잉생산 능력을 수출하는 길을 열었다. 이 자본 수출의 대부분은 2013년부터 일대일로一帶一路 이니셔티브라는 명목으로 이뤄졌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중국의 자본 수출 공세는 과잉생산 능력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국 기업들에게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줬다. 예를 들어 많은 제철소나 건설기계 제조업이 과잉생산과 과도한 부채로 흔들리고 있었는데, 이 해외 수출은 그 기업들에게 생명줄이 되어줬다. 61-2)


중국의 다른 개발도상국으로의 자본 수출은 중국 국내 정치경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중국의 진출이 미친 영향은 다양하다. 중국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상품 수출을 위한 새롭고 확대되는 시장 및 자본의 원천으로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많은 개발도상국에게 종속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독립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많은 정부는 원자재 수출에 대한 의존을 줄여나가며 산업화를 달성하는 것을 장기간의 우선적인 목표로 삼았다. 개발도상국은 (국내 산업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외국 제품의 수입을 억제하는) 수입 대체 산업화 혹은 (세계 시장에서의 판매를 위해 자국의 공산품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판촉하는) 수출 지향적 산업화를 통해 이를 달성하려 했다. 중국의 부상은 많은 개발도상국의 그런 노력을 가로막았다. 원자재 수출국의 수익 증가는 채굴 산업과 농업 기업의 확장으로 이어졌고, 이 국가들의 경제에서 원자재 수출 비중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발전 정책은 무력화되었다. 64)


중국 차관으로 인한 무역적자 외에도 부채 주도 인프라 건설 호황의 지속 가능성은 또 다른 우려 사항이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중국의 인프라 건설 관련 대출은 2009~2010년 중국 국유 은행들이 지방 정부와 국유 기업에 고정 자산 투자를 밀어붙일 수 있도록 자금 지원을 하기 위해 대출의 수문을 열었던 국내 경기부양책의 외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투자의 대부분은 산업 부문의 과잉생산 능력을 야기했고 수익성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출은 지속 가능하지 않았으며, 지방 정부와 국유 기업 사이에 부채의 시한폭탄이 되었다. 중국 정부가 대출 상환 연기, 탕감, 재정 투입 등을 통해 채무불이행 위기에 처한 국유 부문 채무자들을 구제함으로써 국내의 부채 위기는 방지할 수 있었지만, 이 해결책은 개발도상국의 해외 채무자들에게는 실행 불가능한 것이었다. 채무불이행 리스크를 고려해 다수의 중국 해외 차관에는 담보물에 대한 조건이 포함되어 있어서 채무불이행 시 중국이 전략 시설을 장악할 수 있었다. 66)


중국의 경제적 부상과 냉전의 종식으로 인해 중국은 아시아의 현 정부들과 함께 근대 이전의 중국 중심 질서를 닮은 새로운 중국 중심 질서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아시아 지역에서 부국이든 빈국이든 모두 점점 더 중국 중심의 생산 네트워크로 통합되고 중국의 투자와 대출에 의존하게 되면서 중국이 경제 관계를 축소하겠다는 위협을 외교 무기로 사용하고 있음을 목도하는 중이다. 그러나 중국의 자본 수출 성장세는 2016년부터 크게 감소했다. 광범위한 세력권을 보유한 주요 자본 수출국이 되려는 중국의 야심찬 시도를 가로막는 걸림돌은 금융적인 것만큼이나 지정학적인 것이기도 하다. (인도, 네팔, 스리랑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의 투자와 차관을 받는 개발도상국들은 항상 미국과 다른 강대국들에게도 의지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중국의 영향력 확장을 가로막았다. 중국이 이 난관을 극복하려면 세계 금융 및 지정학적 질서에서 미국의 지배력을 극복해야만 한다. 68, 70)


5장 결론: 돌아온 제국 간 경쟁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정의한) 자본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베버주의적 관점에서 정의한) 국가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는 미중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모두 중요하다. 미국과 중국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이 결합되면서 두 나라 사이의 자본 간 경쟁으로 이어졌다. 이 자본 간 경쟁은 중국을 지정학적 상대로 상정하려는 워싱턴 당국의 경향을 촉발시켰으며, 차이메리카 체제를 무너뜨리고 아시아와 그 외 지역에서 미중 경쟁관계를 야기했다. 이러한 미중 경쟁의 격화는 레닌이 이전에 논의했던 20세기 초 영국과 독일 간의 갈등과 유사하다. 주목할 점은 영향력을 가진 중국의 관방 학자 다수가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의 외교 정책 어젠다를 불과 한 세기 전 독일의 입장과 공개적으로 비교했다는 것이다. 21세기가 다른 점은 이제 미국과 중국, 그리고 두 나라의 동맹국들이 전쟁을 통한 보복이 아니라 영향력을 위해 경쟁할 수 있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글로벌 통치 기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79-81)


더욱이 일찍이 홉슨이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국내 노동계급의 더 높은 소득과 그에 따른 구매력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면 해외의 이익을 찾아 자본을 수출해야 하며, 이 자본 수출은 국내 경제에서의 과잉생산 능력을 흡수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국내 재분배에서 진전을 보이면 자본을 수출할 필요가 줄어들고, 따라서 자신들의 세력권을 개척하고 다른 강대국과 충돌할 이유도 줄어든다. 중국의 맥락에서 중국이 가계소득과 가계소비를 부양해 경제의 균형을 재조정하려는 베이징 당국의 시도가 성공하게 되면, 중국 정치경제의 과잉생산 능력, 수익성 위기, 부채 문제는 완화될 것이다. 자본 간 제로섬 경쟁을 심화하는 대신 재분배를 통해 이윤을 회복하는 것은 국가 간 갈등으로 악화하는 것을 억제할 수 있다. 미국에서 재분배 개혁을 할 것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추구를 통해 자본을 수출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해법이다.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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