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굴레 - 헤이안 시대에서 아베 정권까지, 타인의 눈으로 안에서 통찰해낸 일본의 빛과 그늘
R. 태가트 머피 지음, 윤영수 외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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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서양에서는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잘해내야 한다고들 말한다. 일본에서는 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라도(그리고 모두들 그렇다는 사실을 안다) 잘해내야 한다. 이런 형식성은 대인관계에도 적용된다. 상대방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당신의 노력에 걸맞은 금전적인 보상을 할 의사가 눈곱만치도 없는 까다롭고 형편없는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지루한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절친한 벗이나 열정적인 동료 또는 매사에 열심인 거래처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마치 타인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최고의 동료를 가진 것처럼, 누가 되었건 지금 상대하는 고객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행동하다보면, 애정이나 존경 그리고 주어진 일을 최대한으로 잘해내려는 의지 같은 감정들을 언젠가 실제로 내면화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주변은 내가 깊이 아끼는 사람들로 둘러싸이고, 또 그들이 나를 아껴주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25)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으면서 모순을 애써 부정하려는 이러한 태도에는 치명적인 정치적 차원의 문제가 있다. 그런 태도가 일본을 매력적이고 성공적으로 만드는 원천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일본 근대사의 비극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대중을 착취하기 좋은 이상적인 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매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성숙함이라 여기고, 어쩌면 가치 없는 목표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구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 마음가짐을 대중이 내면화하는 것만의 얘기가 아니다. 일본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이런 유동적 가치관의 영향이 사회 지도층 레벨로 가면, 권력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과 그 동기에 대해 스스로를 기만하는 이중적 사고를 하도록 만든다. 도쿄 전범재판에서 일본의 전범들은 원치 않은 재난에 마지못해 끌려들어간 수동적인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이것이 핵심인데,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26)


딱히 원인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이유로 이런저런 일이 발생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의식, 그 안에서 개인은 스스로의 본분을 다해가며 최선을 다해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는 의식은 여전히 만연해 있다. 일본인들이 이런 의식을 부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피해자 의식(히가이샤 이시키被害者意識)이다. 피해자 의식이 현실 세계에서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다음과 같은 예들이 있다. 가령 일본은 무시무시한 재정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한때 전 국민의 경제적 안정을 거의 달성토록 했던 사회적 규약을 내다 버렸다. 또 세금과 물가를 올려서 가계의 구매력을 망가뜨리고, 국민연금이 지켜야 할 약속을 파기하기도 했다. 과거 기업들이 직원들 삶의 질을 보장하던 세계는 안정과 미래라고는 없는 저소득 계약직의 세계로 대체되었다. 이런 정책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회사의 자산을 망가뜨리고 직원들을 해고하는 월가의 은행가들처럼 자신들이 한 일을 생각하며 기분 좋아 낄낄거리지 않는다. 26)


대신 그들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들도 선택의 여지 없이 희생의 대열에 참여한다고 생각한다. 그 희생을 통해 본인들이 개인적인 이득을 챙기는 경우에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백만의 일본 국민이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쉬고는 “시카타가 나이仕方がない(할 수 없군)”라고 한마디 하고는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대안이 있다는 사실(강한 노조, 노동자를 대변하는 건강한 정당, 확실한 사회 안전망, 일본 산업의 부활을 위해 가계의 실질소득을 늘려서 내수를 진작시키는 각종 정책)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고려한다고 해도 성숙하지 못한 포퓰리즘으로 비난받는다. 어찌어찌해서 그런 대안에 시동을 건다고 하더라도, ‘일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공격받고는, 기득권 세력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묵살黙殺(모쿠사쓰)하도록 발전되어온 시스템에 의해 폄하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시스템의 일부를 이 책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26-7)


1부  굴레의 기원


1장 에도 시대 이전의 일본


일본 역사 대부분의 기간에 천황이 적극적인 실제 통치 행위를 하지 않고 정신적 지도자의 역할만 했다는 사실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랬기 때문에 중국이나 한국, 베트남에서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기존의 통치자가 쫓겨나고 새 정권의 통치자가 들어섰던 것과 달리, 일본의 천황은 그러한 운명을 겪지 않았다. 대신에 천황은 지배자에게 통치할 자격을 부여하는 정치적 정통성의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서 역할해왔다. 후지와라 가문은 대륙 문명의 물결이 일본에 처음 쏟아져 들어오던 6세기 초반, 강력한 호족 가문들과의 수십 년에 걸친 투쟁에서 승리하며 등장했다. 투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정부 기관을 장악하기 위해 다른 가문들을 밀어낸 후지와라의 선조들이 645년에 실시한 다이카 개신大化の改新이라는 이름의 개혁운동이었다(685년에 가문의 이름을 후지와라라고 변경했다). 다이카 개신은 중국의 발달된 관료주의 정치 제도를 대대적으로 들여오는 운동이었다. 37)


후지와라 가문은 794년 수자원이 풍부하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새로 정착했다. 이곳을 평안한 수도라는 뜻의 헤이안쿄平安京라고 불렀는데, 나중에는 글자 그대로 수도라는 뜻의 교토京都로 이름이 바뀌었다. ‘헤이안平安’이라고 불리는 몇 세기 동안 일본에서는 진정으로 독자적인 문명이 형성되었다. 물론 헤이안 시대 이전의 수 세기 동안에도 일본은 스스로를 하나의 국가로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라奈良 시대는 그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문화의 아류일 뿐이었으며, 불과 나라 시대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이라는 것은 부족이나 호족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헤이안은 정치적, 예술적, 사회적인 면에서 대륙의 모델로부터 갈라져 나와, 그동안 중국의 문화와 제도를 모방하고 흡수하던 것에서 발전해 독자적인 모델을 만들었다. 헤이안 시대의 황실 의례들과 헤이안 귀족의 상하 관계는 20세기까지도 정치적 정통성의 궁극적인 근거로 작용한다. 38-9)


헤이안 말기에 이미 확고한 계층으로 자리잡아 나중에 사무라이侍(‘귀인의 곁에서 섬기다’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말)라고 불리게 되는 무사들은, 실제로는 스스로의 권력과 영향력을 위해서였지만 표면상으로는 천황 승계 같은 문제를 구실로 국가를 점점 심각한 내전 상태로 내몰았다. 그 절정은 강력한 무사 가문인 다이라平 가문(음독으로 헤이케平家)과 미나모토源 가문(음독으로 겐지源氏) 사이의 ‘겐페이 전쟁源平合戰’이었다. 이 전쟁을 서술한 고전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이 서사시의 제목을 패배한 가문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가망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목숨 바쳐 지키고자 하는 대의를 향한 충성심과 순수함으로 싸우다 스러지는 고귀한 패자는 일본 문화에 식상하리만큼 자주 등장하는 전형 중 하나다.  한편 승자인 미나모토 가문의 지도자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머나먼 동쪽의 가마쿠라鎌倉를 자신의 근거지로 삼고서 막부幕府 제도를 만들어낸다. 44-6)


일본의 봉건제도는 천황에 의해 임명되던 지방 행정관을 대체하거나 보완하기 위해 가마쿠라 막부가 슈고守護라는 무사들을 파견했던 데서 시작했다. 슈고 다이묘라고도 불렸던 이들은 임기가 있던 예전 황실의 지방 행정관과 달리, 한곳에 머무르며 각 지방에 작은 왕국에 가까운 번을 세웠다. 번은 19세기 말에 폐지되고 새로운 지방 행정구역인 부현府縣이라는 단위로 경계가 새로 정해졌지만 번을 중심으로 했던 지역 개념은 일본인의 의식에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무로마치室町 시대가 계속되면서, 아시카가(무로마치 막부의 창건자) 쇼군의 힘은 점점 약해져 쇼군의 권력이 미치는 지역은 교토와 그 인근 지역 정도로 제한되었다. 특히 1467~1477년의 오닌의 난應仁の亂(겉으로는 쇼군의 승계 문제로 시작해서 교토를 거의 파멸에 몰아넣었던 내란) 이후로는 자신의 영토를 확대하거나 다른 다이묘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가진 다이묘들 간의 내전에 가까운 갈등이 거의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50-1)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두 개의 새로운 종교적 흐름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신앙에 기반한’ 종파라고 할 수 있다. 13세기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이른바 정토종과 비슷한 시기에 니치렌日蓮이라는 승려가 창시한 니치렌 불교(법화종法華宗)가 그것이다. 이 종파들은 신도 개인의 신앙심을 중시했다. 대륙과의 교역으로 인해 늘어나던 경제적 기회를 보고 교토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 몰려들던 상인과 하층 도시민들이 주된 신도였다. 두 번째 흐름이었던 젠(선불교)은 나라 헤이안 시대로부터 내려오던 불교의 곁에 뿌리 내렸다. 젠은 신앙심보다는 구원과 득도라는 개인적 성취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했다. 현상의 본질을 직감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가로막는 언어와 개념의 속박으로부터 정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명상과 정신 수양을 강조했다. 어려운 수행과 정신 수양을 강조하는 선불교는 무사·사무라이 계층에 즉각적으로 호소하는 바가 있었다. 실제로 선불교는 사무라이들의 종교에 다름 아니게 된다. 52-3)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대평원 남쪽 끝자락의 작은 어촌인 에도江戶를 성읍으로 정하고, 히데요시가 죽은 뒤 필연적으로 찾아왔던 권력 다툼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600년 역사적인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에서 경쟁 세력들을 대부분 섬멸하고는 자신과 아들이 차례로 쇼군의 자리에 올랐다. 1615년에는 당시 일본 최고의 요새였던 오사카大阪성을 포위하면서 마지막 남은 위협까지 제거한다. 이에야스는 천황이 더 이상 사무라이나 다이묘들에게 직위를 내리거나 승진시키는 것을 금하고 예식과 의전에만 전념하도록 하는,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는 조치를 취했다. 직위의 임명이나 승진은 이제 쇼군의 권한이 될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에도를 세계 최대의 도시로 변모시키고 그의 이름을 따서 도쿠가와 막부라는 정권을 세웠다. 이 정권은 이후 두 세기 반 동안 일본에 평화를 가져다주었고, 두꺼운 장막을 쳐서 바깥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켰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근대 국가로서의 일본을 부화시킨다. 57)


2장 근대 국가로서의 일본의 탄생


도쿠가와 쇼군들의 목표는 안정과 질서, 누구도 정권에 도전할 수 없도록 국가의 기초를 튼튼히 다지는 일이었다. 막부는 이웃 국가들로부터가 아니라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유럽 종교로부터의 격리를 원했다. 격리isolation보다는 은둔seclusion이 도쿠가와 시대 일본의 외교관계를 표현하는 더 정확한 단어일 것이다. 일본의 지도층이 기독교에 반감을 갖게 된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유럽의 종교 전쟁이었다. 16세기 말, 그때까지 포르투갈이 선점해서 재미를 보던 일본과의 교역에 개신교 네덜란드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일본인들은 이들을 통해 예수회와 도미니크회가 어떻게 이베리아반도식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아스테카와 잉카 제국이 어떻게 멸망했는지 그리고 가깝게는 말라카와 마카오와 필리핀이 어떻게 식민지화되었는지 듣게 되었다. 특히 윌 애덤스(일본명 미우라 안진三浦按針)는 바깥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예수회 선교사들과는 매우 다른 관점을 제공했다. 62-3)


도쿠가와 막부는 1615년 오사카성 함락 이후에 성립된 권력질서를 영원히 유지하고자 했다. 맨 아래 불가촉천민부터 맨 위 천황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복잡한 위계질서 안에 정해진 자신의 위치에서, 세세하게 부여된 직무와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막부가 성공적으로 만들어낸 이러한 공식적인 권력관계는 향후 265년 동안 거의 변치 않고 유지되었지만, 동시에 그 표면 아래에서 꾸준히 일어나던 변화를 가리는 가림막 역할도 했다. 유럽이 한편으로는 30년 전쟁부터 워털루 전쟁에 이르는 폭력의 세월을 거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를 대상으로 탐욕스런 제국주의 정벌을 벌이는 동안 일본은 줄곧 평화를 누렸던 것이다. 여기에는 군사적 약탈로부터의 평화뿐 아니라 폭력 범죄로부터의 평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농민들은 비록 번과 막부의 관리들로부터 극한까지 쥐어짜이며 가차 없이 착취당하기는 했어도, 군인들이 농작물을 빼앗아가거나 집을 불태울까봐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67)


현대 일본의 수많은 모순은, 에도 시대에 존재하던 공식적인 시스템의 구조와 실제 사회의 간극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20세기 말 일본은 역사상 가장 눈부신 경제적 성공을 거둔 나라인 동시에 꽉 막힌 이름 없는 관료주의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한 오사카 상인 집안들과 점점 경직화되던 사무라이 계급의 선례를 생각하면 그다지 혼란스러운 일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충성과 자기 부정을 광기의 수준으로까지 가져가면서(사무라이들의 자기희생 컬트,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의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 과로사할 때까지 일하는 현대의 샐러리맨), 또 한편으로는 기괴한 비디오 게임이나 헨타이變態(변태적 성욕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 망가, 괴상한 패션으로 대변되는 엉뚱하고 전위적인 예술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문화의 뿌리도 에도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모순들은 사회 전체에 막대한 스트레스이기도 했지만, 모든 장르의 예술가들에게 훌륭하고 풍부한 소재를 제공했다. 70)


외부 번 출신의 하급 사무라이들은 점점 사라져가는 사무라이로서의 특권, 부유한 상인들과 부패한 관리들의 사치스런 생활, 1830년대의 연이은 흉년이 불러온 극심한 빈곤으로 그들 자신 역시 궁핍한 상황에 놓인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도쿠가와의 몰락은 보통 페리 제독이 방문했던 1853년에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1838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해, 오시오 헤이하치로大鹽平八郞라는 이름의 오사카 사무라이가 다양한 계층의 군중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오사카의 대부분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규모의 폭동은 지난 2세기 동안 보지 못한 것이었다. 사람들을 경악시킨 것은 반란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이 아니라,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의 면면이었다. 사무라이 폭도들, 좌절한 농민들, 심지어 불가촉천민도 거기 있었다. 반란 자체도 경악스러웠지만 오시오가 이끌던 사람들의 구성을 보면 위계질서가 완전히 붕괴됐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76)


1868년 정권을 장악한 세력은 도쿠가와 막부가 생기기 오래전부터 있던 번 제도를 폐지했고, 번의 수도들이 지역에서 끼치던 막대한 영향력을 박탈하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다이묘의 재산을 몰수하고 신분의 구분을 정식으로 폐지했으며, 사무라이들의 연봉을 일시불로 정산함으로써 사무라이의 국가에 대한 청구권을 없애버렸다. 이들은 또 서양의 제도들을 현기증이 날 만큼 빠른 속도로 들여왔다. 1860년대의 사건은, 기성 지배 계층의 말단에 있던 세력(외부 번인 조슈, 사쓰마, 도사의 하층 사무라이들)이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켜, 일본 지배 계급의 집단적 독립과 자율 권한을 넘보는 실존적 위협에 맞서 행동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메이지 유신을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나 1917년의 러시아 혁명과 비교해보면 오히려 반혁명에 가깝다. 그것은 지배 계층 내부에서 벌어진, 나라의 운명을 건 절박한 권력 투쟁 정도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지도 모른다. 78)


많은 급진주의자는 여전히 존황양이尊皇攘夷(천황을 경배하고 야만인을 쫓아내자)의 깃발 아래 격렬히 변화를 요구했지만, 서양 군사력과의 직접 충돌은 일본으로 하여금 상황을 좀더 현실적으로 보도록 만들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은 젊은 사무라이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였다. 야만인과 ‘배신자들’에 대한 그의 혈기 넘치는 분노는 서양에 대한 호기심(그는 특히 만인의 정치적 평등을 얘기하는 미국의 사상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으로 바뀌었고, 일본의 문제는 두 명의 통치자(천황과 쇼군)와 두 개의 조정(교토 황실과 에도 막부)이 존재하는 통치 구조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외부로부터의 압도적인 위협에 마주친 일본의 첫 반응은 분노와 부정이었다. 분노와 부정만으로는 독립을 잃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것이 명확해지자, 일본은 방향을 급격히 바꾸었다. 미래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기존의 제도를 뒤엎고 외부세계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우려고 했다. 82-3)


막부는 외국과 타협도 하고 일관되지는 못했어도 개혁을 추진했지만(혹은 그랬기 때문에), 위협에 대처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그 정통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질서는 무너졌다.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춤을 추며 ‘에에자나이카ええじゃないか(좋지 아니한가)’라고 외치며 하늘에서 돈이라도 쏟아진 듯이 좋아했다. 상대적으로 피를 거의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과 변화에 대한 확실한 열망으로 인해, 일본의 새 집권 세력은 명목상의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주는’ 형식으로 기존의 법적인 절차에 따라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1000년이 넘도록 천황이 절대 권력을 실제로 누리지 못한 일본에서, 천황에게 권력을 ‘유신’했다는 행위는 일본의 새 정부에게 단박에 정통성을 부여했다. 천황이 직접 통치한다는 환상과, 그런 환상을 이용해 스스로의 목적을 달성하는 과두 집권층이 통치하는 정부라는 현실 사이의 간극은 반세기 후 일본 역사상 최악의 재난을 불러오게 된다. 83)


3장 메이지 유신에서 미군정기까지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농민층은 강제로 프롤레타리아화되어, 메이지 과두정치가들이 일본의 독립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고 믿었던 군사 산업 체제에 편입되었다. 메이지 지도자들은 과거 번이나 신분 계급에 따라 나뉘어 있던 농민들을 의도적으로 단일 국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에도 시대 농촌생활과 긴밀하게 엮여 있던 각 지방의 제도와 문화적 관습을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적·사상적 프레임워크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선 시기의 자유민권운동처럼 격렬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저항에 부딪힐 것이 뻔했다. 이런 프레임워크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이데올로기는 일본이 원래 조화로운 사회이고, 합의에 의해 움직이며, 정치경제적 결정은 신의 뜻, 곧 천황의 신성한 승인을 받아 이루어진다는 개념이었다. 여기에 따르면 정치경제적 결정에 대한 노골적인 반발은 ‘반일본적’일 뿐 아니라 곧 신성한 질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93)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 교육의 병영화와 의무화를 시행하면서, 국가는 불교사원이 가지고 있던 교육 통제권을 빼앗아와야 했다. 일본에도 신토와 같은 토착 종교가 있었다. 하지만 불교와 신토는 수없이 많은 분파가 있기는 했어도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실상 하나의 종교로 기능해왔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애국적 혹은 민족적 구분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사실상 신흥 종교였던 국가 신토의 건축물들은 중국과 한국의 영향이 최대한 배제된 일본 전통 건축의 순수하고 미니멀리즘적 재창조인 것처럼 보였지만(대표적으로 도쿄의 메이지 신궁을 들 수 있다), 거기서 행해진 의식은 통일된 전제국가에 꼭 필요한 애국심 같은 가치를 국민에게 고취시키는 근대적인 역할을 했다. 국가 신토는 국가에 대한 충성이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며, 국가가 영원한 진리의 체현이라는 사상을 주입하는 지극히 의도적인 정치적 산물이었다. 95-6)


일본이 유독 독특했던 것은 나라의 지배 구조에 대해 두 가지 다른 허구가 병존했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이어받은 허구는 천황제이고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허구는 입헌정치와 법치주의다. 이 중 후자는 부분적으로 자유민권운동이나 대의정치 요구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지만, 더 큰 동력은 일본에 대한 서양의 기대로부터 나왔다. 일본이 근대 국가로 인정받으려면 마땅히 의회와 법원이 있어야 했다. 근대 국가의 국민이라면 고기를 먹고 남녀 혼탕을 삼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의회와 정당과 법원을 가져야 한다고 서양에서 생각한다면 일본은 의회와 정당과 법원을 가져야 했다. 하지만 1868년에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천황에게 직접적인 통치권을 ‘되돌려준다’는 구호 아래 집권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불평등 조약을 강요했던 나라들이 일본이 완전한 근대 국가가 되었다고 믿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가면이라도 쓸 것이었지만, 천황의 의사결정권에까지 헌법적 제약을 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100)


이런 조치를 취했던 핵심 인물은 근대 일본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形有朋다. ‘군사 독재의 지배 구조를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한 야마가타 정책의 핵심은, 주요 관료의 임명에 대한 의회의 감시감독권을 철저히 없애는 것이었다. 야마가타는 이를 위해 특별히 ‘천황의 칙서’를 내리도록 조치했다. 관료의 인사권에 관한 주요 사항들을, 겉으로는 천황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는 자문기관(추밀원樞密院)의 업무 영역으로 지정하는 내용이었다. 소위 원로라 불리며 20세기까지 살아남은 메이지 지도자들은 적극적인 정책활동에서 물러나면서 추밀원 같은 자문기관으로 소속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되 결과에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역할을 맡으면서, 거대한 정치적 무책임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메이지 지도자들이 처음부터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바로 그 상황, 즉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101-2)


일본을 재앙으로 몰아넣은 범인(들)을 찾는 부질없는 작업을 하기보다는, 전쟁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간 일본 지배 체제의 연속성이 단 한 번도 끊어지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는 독일의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Reichstag Fire Decrees이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로마 진군 또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겨울 궁전 점령이나 중국의 1911년과 1949년의 혁명과 같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비슷한 사건은 1936년 2월 26일, 급진적인 젊은 육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몇 명의 기업 간부와 장관들을 암살한 일이다(암살당한 사람 중에는 재무장관 다카하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죄’는 군비 지출의 억제를 옹호한 것이었다). 메이지 지도자들이 죽고 나서 그 권력 구조에는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형식적인 절차는 있었으나 실질적인 방법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은 끝도 없이 계속되는 소모적이고 때로는 살인적인 권력 투쟁이었다. 104-5)


4장 경제 기적


미군정이 종료될 때 합의된 조건의 장기적 영향이 무엇이었던 간에, 그것은 1930년대의 재앙을 불러왔던 일본 지도층 내부의 지겹고도 끔찍한 갈등을 종식시켰다. 일본은 이제 그런 갈등을 촉발하던 근본적인 정치 사안에서 손을 떼야 했다. 논쟁이 허용된 유일한 이슈는 경제였다. 그리고 1940년대의 폐허에서 일본의 최우선 순위가 경제의 재건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미군정에 의해 전범으로 처형되었던 도조 히데키 등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쟁 기간에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은 브로커나 해결사로서 일본 정치의 무대 뒤편으로 돌아오거나, 아니면 전쟁 중 도조 내각의 군수 대신이었으나 1957년에서 1960년까지 총리를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처럼 경제 성장과 미일 ‘동맹’의 옹호자로 거듭났다. 이런 사람들은 전쟁 기간에는 한켠으로 밀려나 있던(혹은 목숨을 잃을까봐 조용히 지내던) 요시다와 같은 온건 보수주의자들과 함께 군정 종식 이후 시대의 실력자로 등장했다. 118)


‘아마에甘え’(어리광 혹은 응석)라는 단어는 자신보다 힘 있는 사람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척해서, 상대가 관대하게 굴 수 있도록 유도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혹의 기술은 일본이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했던 메이지 초기에 엄연한 일본 외교 정책의 일부가 되었다. 1945년 이후 독립은 빼앗기고 수십만의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자가 거리를 행진하자, 일본 지배층이 마주한 도전은 훨씬 커졌다. 하지만 운 좋게도 이들에게는 미국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일본에 있는 소수의 엘리트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 미국에서 교육받고 미국인들이 경계심을 풀도록 하는 법을 아는 사람들하고만 교류했다. 맥아더의 허영심과 자만심도 한몫했다. 맥아더는 일본 최고위층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고, 한 번도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직접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일본인들이 잘하는 종류의 굽신거리는 아부에 특히 취약한 사람이었다. 120)


전후 일본의 사정은 메이지 시대와는 사뭇 달라졌다. GHQ가 도입한 입헌민주주의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었다. 그리고 일본인의 상당수는 입헌민주주의가 표방했던 것처럼 주권이 확고히 국민에게 있는 민주주의를 원했다. 하지만 일본의 권력자들은 입헌민주주의를 도입함으로써 세상의 눈에 일본 정부가 정통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만족했을 뿐(미군정의 강요와 군정 종료 때 합의한 조건 때문에 입헌민주주의의 도입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정통성의 근거가 헌법과 민주주의에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일본은 천황이 정치적 권력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고유하고 신성한 땅이라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회귀한다. 정통성에 대한 이론적 바탕이 전쟁 전의 정치체제에서 변한 것이 없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재앙이 다시 생겨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입장 표명을 할 수가 없고, 하더라도 신빙성이 없을 수밖에 없다. 127)


그럼에도 전후 일본에서 나라의 통치가 매끄럽게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미군정에 의해 살아남은 또 하나의 비민주적 제도가 정책에 대한 실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관료제다. 물리적 실력을 행사할 수단을 보유하고 있던 관료 조직들은 군정 초기에 해체되거나 제거되었다. 미국은 일본의 방위를 책임졌고, 1945년부터는 외교 관계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를 갖고 있다. 미군정이 일본 정부 부처를 재편한 후에도 살아남은 관료 조직들은 그래서 대부분의 역량을 경제 문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들은 경제 회복이 일본의 최우선 과제라는 데 거의 모든 사람이 뜻을 같이하던 시기에, 전쟁이나 사회 통제가 아닌 경제 회복의 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정치권의 지도와 개입 없이도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다 1970년대가 되면 일본의 경제 모델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이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작업을 수행할 만한 정통성을 가진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하고 만다. 128)


GHQ의 해체 정책에 의해 자이바쓰財閥는 경제 부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일종의 관료 기구처럼 변형되었다. 경제 부처 내 혁신 관료들의 직계 후임들은 전쟁이 끝나고 1940년대 중반 폐허가 된 경제를 물려받았지만, 그들이 누리는 권력은 오히려 전쟁 때보다 더 커져 있었다. 자이바쓰, 군대, 내무성과 같은 강력한 경쟁 기관들은 해체되었고, 도지 라인은 긴축경제를 이끌어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관료들에게 넘겼다. 도지는 당시 일본에서는 어떤 정권이었다고 해도 정치적 이유로 인해 불가능했을 정책들을 강제로 실행해버렸다. 긴축재정과 균형예산과 신뢰 가능한 고정환율이 그것이다. 평상시라면 이러한 정책의 조합은 대규모 빈곤과 심지어 혁명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미국은 군대에 보급하기 위해 무기를 제외한 모든 물자를 끝도 없이 발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납품을 받으면 달러로 대금을 지급했다. 일본인들은 이 전쟁 특수를 ‘하늘의 도우심’이라고 불렀다. 129)


자민당 내부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기간에 여러 개의 뚜렷한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이 파벌들은 이데올로기나 정책의 차별성에 따라 구성된 것이 아니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일련의 정치 보스라 불리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후견관계를 맺고, 파벌이 제공하는 정치적 특혜를 통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조직에 불과했다. 20세기 중반의 미국 민주당과 달리 자민당의 표밭은 도시의 중하위 노동자층이 아니라 농촌 지역이었다. 농촌 인구의 상당수가 도시로 이동하고 나서도 선거구 제도는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농촌에서의 한 표는 도시의 세 배에서 다섯 배 정도의 효과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교환을 통해 농촌 지역은 일본의 안정적인 정치적 지형을 보장하고, 그 대가로 정치사회학자 켄트 콜더가 말한 ‘보상’을 받았다. 그것은 일본의 전반적인 전후 경제 전략에서 소규모 농민과 지방 기업들은 별로 설 자리가 없다는 현실을 보상하기 위해 농촌에 보호주의 정책과 공공사업 예산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133-4)


1960년의 안보조약 개정은 실질적으로 일본이 미국의 영구적인 속국임을 문서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같은 해 규슈에 있는 미쓰이의 미이케三池 탄광에서 벌어진 대규모 파업은 분쇄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의 대기업들은 핵심 남자 직원들에게 평생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할 의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기업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분기 이익이나 주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최우선 목표가 되었다. 직원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거나 회사가 재정적으로 힘들 때라도, 제대로 된 회사라면 직원을 해고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금지되었다. 이렇게 경제적 안정의 보장이라는 좌파의 핵심적인 요구 사항이 충족되면서, 노동 투쟁은 점점 일종의 의례적인 절차로 변해갔다. 주요 산업별로 결정된 임금 인상 폭에는 언제나 전반적인 경제 사정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공장 노동자들은 일본 경제가 전체적으로 향상되면 그 일정 비율을 가져가도록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35-6)


좌파는 현실 정치에서 멀어져 학계로 들어갔고, 일본 사회당은 점점 형식적인 존재로 변해갔다. 일본 사회당은 집권 가능성이 없는 ‘제1야당’으로서 대부분 유권자의 실제 관심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융통성 없는 교조적 태도를 취했고, 그 결과 진정한 야당이 출현하는 것을 막으며 전후 시스템을 유지하는 실질적인 한 축을 담당했다. 1960년 10월, 교복을 입은 열일곱 살짜리 국수주의자 학생이 생방송 도중에 칼을 휘둘러 타협을 모르는 강경 좌파였던 사회당 지도자 아사누마 이네지로淺沼稻次郞를 살해해버렸다. 아사누마의 살인 사건은 사회당에 일부 동정심을 불러일으켰을지는 모르나, 또한 1930년대에 난무하던 폭력을 상기시켰다. 이 사건으로 지난 10년간 일본을 마비시킨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정치 갈등에 대한 사람들의 혐오가 폭발했다. 사회당의 온건파는 탈당해 중도주의 노선의 일본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사회당은 선거에서 다시는 보수 패권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이었다. 137)


역설적으로 사회주의자들보다 마르크스주의에 덜 교조적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은 주로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인 도시의 하위 중산계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 중 다수는 당시 최대 ‘신흥 종교’였던 창가학회創價學會에서 1964년 갈라져 나온 공명당公明黨을 더 지지했다. 이런 신흥 종교들은 니치렌 불교日蓮佛敎의 요소와 개신교의 적극적인 전도 방식을 결합하고 있었다. 이들의 주된 신도층은 당시 떠오르던 대기업 중심의 샐러리맨 문화에서 소외된 도시민들이었다. 신흥 종교는 이런 사람들에게 소속감을 주었고, 공명당은 이들이 최소한의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였다. 공명당은 자민당이 농민들에게 해주었던 역할을 도시의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에게 해주며(자민당이 훨씬 효율적이었지만), 사실상 모든 면에서 자민당의 동맹 정당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의 점점 줄어드는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충분히 ‘보상’해서, 잠재적 사회 불안의 근원을 제거했던 것이다. 138)


5장 고도성장의 제도적 기틀


일본 기업들 간의 모든 경쟁은 통제되었다. 신규 사업에서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지만(혼다와 야마하의 오토바이 사업 경쟁, 소니와 마쓰시타의 비디오카세트 녹화기 사업 경쟁 같은), 일본인들이 ‘과도 경쟁’이라 부르는 것들은 산업협회에서 나오는 비공식적인 지침을 통해 통제되었다. 실제로 카르텔이나 다름없던 이런 산업협회들은 일본의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또 하나의 핵심 제도다. 산업협회들이 일본에서 특히 중요했던 이유는, 기업들이 손실을 내는 사업에서 철수하도록 강요하는 시장 메커니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쟁에서 낙오된 회사들도 고용 안정성과 시장 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암묵적인 규칙을 만들었다. 산업협회는 가격과 공급망에 관한 비공식적인 합의를 조율하고 감시하는 데 있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합의에 이론적으로 법적 강제성은 없었으나 이를 거부하는 기업은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을 견뎌야 했기 때문에, 여기에 저항했던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145)


일본의 교육 시스템은 기업과 관료 기관 내부에서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 인사부서가 원하는 인재를 양산해냈다. 일본 학교의 교육에는 네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졸업생들이 발달된 산업 경제가 요구하는 수준의 언어 수리 능력을 갖추도록 할 것. 둘째, 고도로 관료화된 경제 조직에서 적절한 태도와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키울 것. 셋째, 일본 정계와 재계의 엘리트가 될 가능성이 있는 남자아이들을 미리 선별할 수 있도록 평가하는 역할을 할 것(그리고 그보다는 덜 중요하지만, 그들의 부인이 될 자격이 있는 여자아이들을 고르는 역할도). 마지막으로, 이들이 나중에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서로의 조직들을 긴밀히 협력하게 할 수 있도록 사회적 인맥의 기반을 만들어줄 것. 절도 있고 획일화된 외관에 대한 강조와 불편을 받아들이는 훈련은, 좀더 광범위한 교육학적 목표의 일부로서, 적어도 언어 수리 능력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졌다. 147-8)


충분한 국내 저축 없이 어떻게 산업 발전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했던 대부분의 나라는 해외로부터 차관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일본은 결코 자국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외국의 통제 아래에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GHQ의 좌파 성향의 관리들도 애초에 일본 정부의 결심을 지지했다. 가난한 나라가 해외 투자를 받지 않고 성장하려면, 국내 저축의 마지막 한 푼까지 아껴서 활용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이케다 하야토와 같은 사람들의 천재성이 빛난다. 이들은 일본 금융만의 독특한 구조적 특성을 활용해 여신을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있도록 하는 통화 및 금융 정책을 고안했다. 이 여신이 수출 주도 대기업들에게 해외 시장을 꾸준히 공략할 수 있는 자금을 계속 조달해줄 것이었다. 이런 정책의 많은 부분은 전시의 자금 조달 방식을 고쳐 쓴 것이다. 즉, 가계의 저축을 금융기관에 맡기도록 강력하게 몰아가고, 금융기관에는 정부가 발행한 금융 상품(채권)을 사도록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151)


일본 은행들은 예금액과 대출액 사이에 발생하는 차액을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으로부터 직접 여신을 받아 메웠다. 중앙은행이 시중의 은행에 직접 새로운 여신을 공급해주는 것은 보통 긴급 상황에서만 쓰이는 정책이다. 그런 정책은 그리고 2008년 금융 위기 때 미 연방준비제도의 ‘양적 완화’를 둘러싼 소동에서 봤던 것처럼 갖은 논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러한 정책이 먹혔다. 자본 규제 때문에 자산을 해외로 이전하는 것이 불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위층들이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사회적 결속이 단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신이 유동자산에 의해 창출된 현금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리스크는 존재했다. 여신은 무에서 창출되어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자산을 위해 제공되었다. 그 여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자산이 궁극적으로 충분한 미래의 수익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이것만으로도 일본에서 왜 예측 가능성과 경쟁의 통제가 그토록 중요했는지 설명된다. 152-3)


'현실의 관리management of reality'란 여러 제도와 관행이 합쳐져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일본인들이 모순을 알아차리지 않기로 의도적이고 집단적으로 결정한 듯 보이는 데서 종종 드러난다. 일본의 조직에서는 누군가 눈에 띄게 무능해도 해고되지 않는다. 대신에 모두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 사람이 주의 대상인 것을 ‘안다’. 그 사람이 하던 모든 중요한 일은 반자동적으로 더블 체크되거나 다른 사람이 대신 한다. 하지만 그가 업무에 부적격하다는 공식적인 평가는 어디에도 없다. 일본의 통상 교섭 담당자들은 줄곧 일본의 낮은 관세율을 가리키며 일본 시장이 활짝 열려 있음을 강조하지만, 회사들은 수입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심지어 일본에서의 성공은 모순을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혹은 어떤 상황에서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행동하는 법을 파악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156-7)


그래서 다시 한번, 일본어에는 이런 것들을 처리하기 위한 수많은 단어가 존재한다. 우리는 다테마에建て前(모두가 립서비스로 말하는 꾸며진 현실)와 혼네本音(실제의 현실)의 차이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공기(구키空氣)를 읽지 못한다(요메나이讀めない)’고 말한다(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을 구키 요메나이의 알파벳 첫 글자를 따서 KY라고 부른다). 이런 사람들을 ‘리쿠쓰포이理屈っぽい’(이론적으로 따지는 사람)라고 흉보기도 하는데, 리쿠쓰포이는 일본에서 칭찬이 아니다. 소니와 교세라 같은 이단아들의 사례는 이런 규칙에서 벗어나는 예외일 뿐이었다. 이들은 해외 시장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고서야 일본의 경제 기득권에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세월이 지날수록, 이러한 예외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어갔다. 애플, 시스코,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구글, 페이스북처럼 IT 혁명의 조류를 타고 세계적으로 성장하는 일본 기업은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157)


6장 성장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


전후 일본이 세계 문화를 선도하는 데 공헌했던 작품들은 대부분 고도성장기가 시작되기 전에 나온 것이었다.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의 「도쿄 이야기東京物語」와 「이른 봄早春」,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의 「오하루의 일생西鶴一代女」이나 「산쇼다유山椒大夫」,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의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나 「천국과 지옥天國と地獄」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仮面の告白』(1949),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인간 실격人間失格』(1948),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雪國』(1948),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의 『열쇠鍵』(1956) 같은 소설에는 종전 직후 혼란했던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자기 파멸적인 성적 집착에 빠져드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대기업 샐러리맨들의 문화가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면서, 인간의 조건에 질문을 던지던 이런 예술적 탐구들은 점점 뒤로 밀려난다. 그 대신,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오락들이 사람들을 잠식해갔다. 165)


일본 사회에 샐러리맨 문화를 퍼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미국에서 수입해온 스포츠인 야구였다. 야구는 메이지 시대에 일본에 처음 소개되어, 나중에 도쿄대학으로 통합된 명문 학교에서 채택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스모나 유도, 검도와 같은 전통 스포츠가 일대일 개인 시합이었던 반면, 야구는 일본에서 행해진 최초의 팀 스포츠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가장 인기 있는 팀 스포츠다. 야구는 신기하게도 일본에 잘 맞았다. 농구나 축구처럼 흐름이 끊기지 않는 단순한 전략의(전술은 복잡할지라도) 팀 스포츠와 달리, 야구의 플레이는 멈췄다 이어졌다를 반복하고 매 순간 복합적인 의사결정을 요한다. 한 가지 합의에 이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시합이 펼쳐지고 있는 필드 안에서도, 그리고 필드 밖에서도 열띤 논의가 벌어질 여지를 제공한다. 야구 시합의 리듬은 일본 조직 생활의 리듬을 반영해서 체현하고 있다. 고도성장기에 인기를 끌던 일본 야구는 샐러리맨 문화를 가장 극적으로 상징하고 있었다. 166-7)


베이브 루스, 윌리 메이스, 샌디 코팩스, 조 디마지오와 같은 미 메이저리그의 개성 넘치는 야구 스타들과는 달리,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나 오 사다하루王貞治(우리나라에는 왕정치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옮긴이) 같은 고도성장기 일본의 야구 스타들은 전형적인 팀 플레이어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단 하나의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이었으며, 주어진 연봉을 받아들일 뿐 단 한 번도 협상하지 않았다. 일본 야구의 연습은 선수 개개인의 실력을 발전시키는 것보다는 전반적인 노력이나 인내를 강조했다. 그런 경향이 어찌나 심했던지, 코치들이 재능 있는 선수들을 필요 이상으로 밀어붙여 망가뜨린다는 비난을 들을 정도였다. 이는 끊임없는 노력과 단결된 팀워크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일본 기업 인사부서의 핵심 원칙을 그대로 반영한다. 일본 기업의 경쟁력은 비상한 팀워크와 사원들의 자기를 돌보지 않는 직업 윤리,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표현으로 바꾸자면 곤조根性 또는 ‘갓쓰ガッツ’에 있었다. 167-8)


일본의 여성들은 한 번도 누가 떠받들어주는 대접을 받지 못했다. 여성이 방에 들어온다고 일어서는 일본 남성은 없다. 누군가 일본 여성을 위해 의자를 빼주거나 문을 잡아준다면, 그것은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였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여성은 남성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제대로 교육받은 아내라면 항상 한발 뒤에서 남편을 따라간다. 여성이 하는 모든 행동과 모든 말은 같은 나이, 같은 출신, 같은 계급의 남성들보다 스스로가 낮은 위치에 있고 거기에 복종하고 있음을 드러낸다(일본어에는 여성만이 사용하는 동사 어미와 대명사들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버린다). 그 결과 일본 여성이 서양 여성에 비해 누리는 것이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여성이 비싼 장신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과 싸워야 할 필요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전후의 젊은 일본 여성들이 마음을 기댈 수 있었던 단 하나의 대상은 보통 자신과 같은 처지의 다른 여성들뿐이었다. 170-1)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일본이 점점 부유해지면서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라이프 스타일이 비혼 여성에게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싱글로 남아 있는 한 여성들에게는 좋은 옷을 사 입고, 해외여행을 가고, 친구들과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을 만큼의 가처분 소득이 있었다. 젊은 싱글 여성들이 일본의 패션과 예술과 식문화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가장 중요한 그룹이 되었다. 이것은 여성의 해방이라든지 페미니즘의 대두와는 달랐다. 이러한 변화에 놀라던 일본의 보수 세력은 특히 일본의 급락하는 출산율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으면서 경악했다. 새로운 여성들에게는 곧 ‘파라사이트 싱글Parasite singles(결혼도 하지 않고 부모 집에 기생해 산다는 의미―옮긴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많은 젊은 여성이 미디어의 불같은 반응을 보고 깨달은 것은 그런 행동이 나쁘다는 점이 아니라, 여성들도 결혼이 아닌 관계에서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이었다. 176-7)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를 금융 면에서 보자면 일본의 은행들에 외환이 쏟아져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늘어난 외환 보유고는 대부분 달러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 달러를 금으로 태환하지 않았다. 브레턴우즈 체제하에서 그렇게 할 권리가 있었음에도 일본은 외환을 그냥 쌓아두고 여러 기법을 사용해 달러 보유고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렇게 해서 경제학 교과서대로라면 발생했을 인플레이션이나 수출 가격 폭등을 방지할 수 있었다. 이것을 학계에서는 ‘불태화 정책sterilization’이라고 부른다(불태화不胎化는 외자 유출입이 국내 통화량 및 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상쇄하기 위해 취하는 정책―옮긴이). 엉뚱하게도 인플레이션은 미국에서 일어났다. 린든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정책과 베트남전으로 인해 ‘총과 버터guns and butter’ 양쪽에서 심각한 위기를 맞았고, 거대한 예산 지출로 인해 미국 경제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게 되었다. 180)


#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정책 : 가난과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취한 일련의 사회복지 및 기간산업 정책 / 총과 버터guns and butter : 정해진 자원을 외교국방과 국내 생활용품 생산 중 어디에 사용하느냐의 문제


밀턴 프리드먼 같은 경제학자는 변동환율을 실시하면 심각한 무역 불균형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무역과 투자의 수요 공급에 따라 환율이 자연히 오르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의 대미 무역 불균형은 변동환율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은 채 오히려 커져만 갔다. 새로 부임한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일본의 중앙은행이 몰래 개입해 환율을 변동하지 못하도록 한다며 이를 ‘관리 변동환율제dirty floating’라고 비난했다. 결국 일본은 국제사회의 압력에 굴복해 관리 변동환율제를 포기하고 엔의 가치는 다시 전후 최고 수준으로 올랐다. 1971년 1달러에 360엔 하던 것이 1978년에는 177엔이 되었다. 한편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된 폴 볼커는 미국 국내 수요가 붕괴되어 경기가 후퇴할 수준으로 금리를 극도로 인상해서 투자자들이 다시 달러 자산을 보유하도록 만들었다. 볼커의 고금리 정책에 일본의 기관 투자자들이 호응해준 데 크게 힘입어 달러에 대한 믿음은 회복되었다. 183)


폴 볼커가 금리를 큰 폭으로 올리고 일본이 달러 자산을 기꺼이 보유해줌으로써 1982년이 되면 미국 경제는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본 수출 산업의 마지막 황금시대가 열렸다. 미 재무성이 두 자릿수의 금리를 제공하면서 전 세계의 미국채 수요가 급등했다. 달러의 가치는 엔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주요 국가 통화 대비 크게 올랐다. 미국 경제가 부활하고 소비가 되살아나면서 미국인들은 일본 제품을 샀다. 일본에서는 점점 더 미국 회사들을 월급만 많이 받는 게으른 사람들이 조잡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아무도 캘리포니아의 쿠퍼티노 같은 곳에 본사를 둔 회사(애플)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비재 전자기기를 만드는 회사가 될 것이라고 꿈에서도, 심지어 악몽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반면에, 일본에 밀려 미국 산업이 파괴되고 있는 듯 보이던 당시의 상황에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압력은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184)


2부  오늘의 일본을 구속하고 있는 어제의 굴레


7장 경제와 금융


자산의 가치와 그 자산이 만들어내는 현금 흐름 사이에 연결이 끊어지는 현상. 그것이 바로 버블의 정의다. 여기서 현금 흐름은 집의 임대료나 기업의 수익을 말한다. ‘어떤 이유’로 인해 자산의 가치가 끊임없이 오를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이 믿는 한 버블은 계속 커진다. 버블이 커지는 한, 자산을 구매하기 위해 일으킨 대출을 갚기 위해서는 자산을 ‘더 어리석은 사람’에게 더 비싼 가격에 파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자산이 만들어내는 현금 흐름이 대출을 갚기에도 모자라는 것 정도야 무슨 대수인가? 금융 버블의 진행 과정과 그 영향에 관한 모델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금융 불안정성 가설)는 이런 ‘폰지 금융Ponzi financing’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버블이 커지고 있다는 확실한 징후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경우 광기의 첫 단추는, 민스키가 모든 버블의 시작이 항상 그렇다고 주장하듯 여신의 과도한 창출이었다. 190)


일본 버블의 시작은 1985년 엔/달러 환율의 재조정이었다. 그 뒤에 발생했던 일련의 전개 과정(투자 광기가 휘몰아치고, 버블이 붕괴하며 그 뒤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디플레이션)은 학자와 애널리스트들이 버블의 일반적인 진행 과정과 파급 효과를 설명하는 이론적인 틀을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이론은 상당 부분 경제학자 리처드 쿠(노무라 증권의 수석 경제연구원)에 의해 확립되었다. 1990년대 일본 경제를 면밀히 연구했던 그는, 거기서 얻은 교훈을 역사상 발생했던 다른 버블들에 대입해보았다. 그러고는 버블 붕괴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는 ‘대차대조표 불황balance sheet recession’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과도한 부채를 안고 있는 기업과 부실 채권을 떠안은 금융기관이 투자를 통한 성장을 추구하지 않고 부채 상환이나 부실 채권 정리에 집중해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없게 되면서 결국 경기 침체를 불러오는 현상―옮긴이). 191)


# 플라자 합의(1985) : G5(미국, 서독, 영국, 일본, 프랑스)는 각국 정부 개입에 의한 환율 조정, 즉 각국이 달러를 매각하여 시장에 풀고 자국통화를 매수하여 유통량을 줄임으로써 달러 약세와 자국통화 강세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사태를 일단락하는 데에 합의했다. 발표일 다음날에 달러화 환율은 1달러=235엔에서 약 20엔이 하락하였다. 1년 후에는 달러의 가치가 거의 반이나 떨어져 120엔 대에 거래가 이루어지는 상태까지 되었다.


리처드 쿠의 주장에 따르면 대차대조표 불황은 보통 과도한 투자 광기가 사그라들고 시장이 붕괴한 이후에 발생한다. 많은 회사가 투자 열풍 동안 신규 자산의 구입을 위해 대출을 일으켰다가 그 자산들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장부상으로 파산하거나 파산에 가까운 상태에 이른다. 회사의 총부채가 총자산보다 커지는 이런 상황을 회계사들은 파산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중 많은 회사가 여전히 사업을 영위하며 핵심 영업활동으로부터 충분한 현금 흐름을 창출해내고 있다. 채권자들은 아직 회사 문을 닫고 자산을 압류하기를 원치 않는다. 자산을 다 팔더라도 그 자산을 구입하느라 일으켰던 대출을 갚기에도 모자란 가격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회사들은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이익을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기보다는 부채를 갚는 데 사용할 것이다. 채권자인 은행도 그것만이 대출 금액을 회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회사들을 강제 청산하기보다는 그렇게 하도록 놔둔다. 191-2)


하지만 너무 많은 회사가 이런 상황에 처하면 시장의 수요가 바닥난다. 아무도 공장에 들여놓을 새 설비를 주문하지 않고, 아무도 새 직원을 채용하지 않는다. 다들 부채를 갚기에만 급급하다. 혹은 달리 표현하자면 대차대조표를 바로잡기에만 급급하다. 대차대조표 불황은 전형적인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다. 개별 회사들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것 때문에 전반적인 경제 회복의 가능성이 파탄에 빠진다. 보통의 경기 침체에서 주로 사용하는 양적 완화 정책은 대차대조표 불황에는 먹히지 않는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아무리 낮추고 통화 공급량을 늘린다고 해도, 성장이 침체된 상황에서는 기존 대출을 더 낮은 이자의 신규 대출로 갈아타는 것 빼고는 회사들이 더 이상 대출을 통한 투자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방대한 유동성은 그렇게 정체되어 시중에 돌지 않고 쌓여만 간다. 리처드 쿠의 이론이 맞는다면 일본의 경험은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로서의 역할을 한다. 192)


이에 대해 일본의 정치가와 관료들이 생각해낸 해결책은 세 가지였다. 첫째, 일본이 미국과의 공조를 통해(독일, 영국, 프랑스가 참여해 지원사격을 하기로 동의했다) 달러의 가치를 낮추고 엔의 가치를 높이도록 한다. 둘째, 미국과 각종 무역 협정을 맺어 눈에 띄는 갈등 요소를 제거하고, 일본 기업들의 생산 시설을 미국으로 옮기도록 장려한다. 그렇게 하면 일본의 대미 무역흑자 때문에 미국 내에서 사라지던 일자리의 숫자를 줄일 수 있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금융 당국은 일본 경제의 주 동력을 수출 이외의 분야로 옮기기 위한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새 동력의 가장 그럴듯한 후보로 떠오른 것은 투자였다. 일본 기업이 해외의 최신 공장들에 지속적으로 투자하면 세계 각지에 거점을 가진 다국적 기업이 되고, 이 기업들의 본사의 집결지로서 일본의 위상을 공고히 해줄뿐더러, 수출을 대신해 공장과 설비 투자를 경제의 새로운 동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195)


투자 붐을 일으키는 손쉬운 방법은 저금리로 여신을 제공하는 것이다. 1985년 9월 미국과 엔화를 평가절상하기로 하는 합의가 이루어지자, 일본의 금융 당국은 저금리 정책을 펼칠 의지와 여건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기업들은 보통 공장이나 설비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주식이나 채권시장에서 조달하지 않고 은행으로부터 단기 대출을 받아 무한히 갱신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일본 기업의 자금 담당자에게 상환할 필요 없는 돈을 공짜로 주면서 새로운 설비를 지으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공짜’ 돈이라는 개념은 주가가 끝없이 오른다는 전제하에 성립되었다). 이런 ‘공짜’ 돈이 넘쳐나면서, 기업들은 화려한 사옥과 최첨단 공장들을 지었다. 그러는 사이에 땅을 조금이라도 소유하고 있던 수백만의 사람은 땅값이 오르자 갑자기 부자가 되었고, 벼락부자들이 늘 그러하듯 돈을 물 쓰듯 쓰고 다녔다. 이런 변화를 지켜보던 수백만의 다른 사람도 가격이 치솟고 있는 자산들을 빚을 내 사기 시작했다. 196-7)


일본 관료들이 저지른 실수의 원인은 그들의 자신감에 있었다. 버블을 키울 때도 당국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버블을 꺼뜨릴 때도 폭락이 아닌 ‘연착륙’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허황된 믿음은 아니었다. 일본 당국은 경제를 공황에 빠뜨리지 않게 할 만큼 강력한 제어 수단들을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버블이 터지고 나서 일본이 겪었던 수준의 자산 가치 폭락이 발생하면 거의 항상 뒤따르게 마련인 은행업계의 전반적인 위기도 막을 능력이 있었다. 일본에서도 결국 폭락은 발생했지만 슬로모션으로 발생해서, 금융 시스템의 완전한 붕괴와 수백만 명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슬로모션이라고는 해도 폭락은 폭락이었다. 일본 정부를 아마도 가장 당황케 했던 것은 선진 기술과 제조업에서 거의 달성한 듯 보였던 일본의 절대 우위, 자부해 마지않던 그 절대 우위가 알고 보니 크게 과장되어 있었거나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깨달음이었다. 199)


일본은 금융기관이 가진 문제의 심각성을 뒤늦게야 깨닫고, 실패한 금융기관들을 너무 오랫동안 산소호흡기로 연명시킨 것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을 받기는 한다. 하지만 이들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에 성공했으니, 그것은 바로 금융기관에서 돈을 빠져나가게 만드는 대규모 패닉을 방지해서, 경제에 여신을 공급하는 메커니즘을 지속시킨 것이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던 금융 붕괴의 와중에(슬로모션으로 일어나기는 했지만), 일본 금융기관에 예금을 맡긴 단 한 명의 예금주도 돈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은행에 계속 돈을 맡겨두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사람들이 돈을 충분히 맡긴 채로 놔둔 덕택에 은행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일본의 금융 시스템은 그렇게 벼랑 끝에서 살아났다. 전 세계를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었던 금융 전반의 붕괴를 모면해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고, 일본 경제를 1980년대 초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200-1)


8장 비즈니스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정사원들을 해고할 수도 없었고 해고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희망퇴직’에 의존할 뿐이었다. 기존의 정사원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단합해, 새로 정사원을 채용하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에 비정규직을 뽑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프리타フリーター’라고 알려진 비정규직들을(자유를 뜻하는 영어의 프리free와 노동자를 뜻하는 독일어 아르바이터arbeiter를 합쳐 만든 말로, 일본에서는 보통 학생들의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뜻한다) 기차가 떠났는데도 플랫폼에 남아 있거나 남겨진 사람처럼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기차를 타지 못한 것이 본인 잘못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인社會人(샤카이진)이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일본에서 사회인이라고 하면 사회의 어엿한 일원으로서 직장과 가정에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성인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의 많은 회사가 봉착한 또 하나의 문제, 바로 세계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221-3)


일본의 비즈니스는 세계화의 한 가지 중대한 측면에서 뒤처져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주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지위에 외국인을 앉힐 수 있는 포용력이다. 문제는 사회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본 일본의 성인이라면 모두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일본식 협업 방식과 일처리 방식을 외국인들이 잘 모른다는 점이다. 세계화에 매우 적극적인 일본인이나 일본의 조직도 가이진外人과 가까이 붙어서 일상적으로 일하는 것은 힘들어한다. 일본 기업의 충실한 병사는 절대로 자신이 속한 회사나 상사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을 하지 않으며, 일본의 엘리트 지배층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보호하기 위해 똘똘 뭉친다. 이러한 불문의 행동 규범을 외국인이 이해할 것이라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 혹은 어떻게 이해했다고 해도 그것을 내면화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일본과는 매우 다른 문화적 가치, 즉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원칙을 강조하는 문화적 가치를 교육받고 자란 외국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226, 230)


일본 기업들이 외국인에게 진정한 의사결정 권한을 주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일본 재계에 충성의 행동 규범(점잖게 표현하자면) 또는 유착(비판적으로 보자면)이 만연하다는 확연한 증거다. 이 행동 규범에 뒤따르는 경제적인 비용은 우수한 외국인 경영진을 채용하기 힘들다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심각하면서 충성·유착의 행동 규범과 직결되어 있는 훨씬 더 큰 문제가 있으니, 바로 일본이 실패를 인정하고 거기에 대처해나가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충성의 행동 규범은 상사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면 당신이 자결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 규범은 반대 방향으로도 작용한다. CEO가 회사 문제에 대해 ‘책임지고’ 사임한다든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납품 업체가 있는데도 회사가 기존 업체로부터 계속 납품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이 그 사례들이다. 충성·유착 규범은 개인과 조직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의 결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230-1)


일본의 경영자들은 세계화의 어려움, 실패(매몰 비용을 포기하는 것)에 대처하는 적절한 경제적·정치적 메커니즘의 부재가 일본의 비즈니스와 경제에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해 아마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지금 해외에서 수많은 유명 일본 기업이 시장지배력과 명성을 잃어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일본은 꽉 막힌 관료주의와 기업 내의 허례허식으로 인해 의사결정 속도가 여전히 거북이걸음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것을 일본의 경영자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이론적으로는 네마와시根回し(가령, 회의 준비를 위한 회의를 하기 위한 회의)나 품의稟議(10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에게 결제를 받아 의사결정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 이 중 누구라도 의사결정을 지연하거나 멈출 수 있다) 절차를 대폭 간소화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할 때에는 그들 자신이 자라온 그 시스템 안에 갇혀버리고 만다. 232)


9장 사회문화적 변화


일본만의 독특한 창의성의 기원을 흔히 모순과 모호함을 참고 견디는 능력에서 찾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사람들에게 모순을 참지 말라고 말했다. 일본의 철학 사상에는 그런 명제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사회적·경제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서양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수준의 모순을 관리하면서 공생하는 능력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물론 일본인도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서로 다르고 또 상호 모순적인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어릴 적부터 현실을 관리하도록 훈련받은 덕분에 심리적인 충격에 대응할 수 있다. 예술 또한 같은 역할을 한다. 일본 사회에 넘쳐나는 모순은 장르를 불문하고 오랫동안 일본 예술가들에게 마르지 않는 소재를 제공해왔다.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해야 할까, 예술은 (술과 더불어) 모순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삶에 따라다니는 긴장을 풀어주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242)


그것은 전후 일본 문화의 상징이었던 샐러리맨을 어떻게 묘사하는가를 보면 잘 드러난다. 일본의 공식적인 문화가 샐러리맨의 출세에 필요한 덕목들을 찬양하고 있었던 반면, 방대한 망가(만화)를 포함해 좀더 불온한 문화 장르에서는 샐러리맨을 나약하고, 무책임하며, (절대 이룰 수 없는) 섹스와 돈에만 관심 있는 존재로 묘사했다. 샐러리맨들은 회사와 일을 위해 자기희생을 불사할 정도의 열정을 보여야 했을 뿐 아니라, 이것이 핵심인데, 거기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그 열정을 스스로 믿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샐러리맨은 스스로가 자기 목숨을 바쳐도 좋을 대의(회사)를 위해 싸우는 군인이라고 믿어야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결국 자신은 얼굴 없는 거대한 산업 기계 안에서 혹사당하는, 교체 가능한 톱니바퀴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자각도 함께 안고 살아야 했다. 그런 자각과 함께 사는 삶을 도와주었던 것이 망가였고, 또한 1970년대 중반 메가 히트곡인 「오요게! 다이야키쿤泳げ! 鯛燒君」 같은 노래였다. 242)


# 오요게! 다이야키쿤泳げ! 鯛燒君 : 원래 어린이를 대상으로 만들어졌던 이 곡은 대중적 간식인 붕어빵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다이야키鯛燒는 붕어빵이라는 뜻이고, 군君은 상さん보다 좀더 친근하게 소년과 젊은 남자들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이다). 붕어빵의 반죽이 물고기 모양처럼 생긴 똑같은 여러 개의 틀에 부어지고 이 붕어빵 중 하나가 물에 나가 자유롭게 헤엄치는 부질없는 꿈을 꾼다(오요게泳げ는 ‘헤엄쳐’라는 뜻이다).


일본의 조직들은 전략적 실수를 인정하고 발생한 문제를 직시하는 데 유난히 서툴다. ‘개인’은 비난받을 수 있고 심지어 희생되기도 한다. 조직에서 명목상의 리더인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스캔들에 휘말린 뒤 형식적인 사죄를 하고 사퇴하는 풍경은 매우 익숙하다. 이는 상당수가 쇼에 불과할 뿐이지만(그런 리더들은 뒤에서 따로 보상을 받고 잠잠해지면 되돌아온다), 실제로 수많은 일본의 개인은 실수나 혹은 더 큰 문제에 대해서도 기꺼이 책임지려는 훌륭한 태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조직’으로 넘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본에서 실수를 인정할 줄 모르고 강제적인 상황에 몰리기 전까지는 급격한 변화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앞 장에서 다뤘던 비즈니스의 사례들에만 국한된 생리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 황군이 보여준 행위에서 시작해, 어떠한 공공사업 프로젝트라도 한번 공식적으로 인가되면 철회가 거의 불가능해지는 현대 일본의 경향까지 모든 곳에서 드러난다. 264)


조직에서 실수를 인정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일본에서 제도적 협약이라는 것을 둘러싼 신성함에 가까운 아우라에 그 뿌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1945년 패전과 더불어 천황은 본인이 신적인 존재가 아닌 인간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전후에 만들어진 헌법은 일본에 법치주의 및 주권재민과 같은 개념들을 주입했다. 이로 인해 그 전까지 일본 권력의 핵심 제도들이 뿜어내던 신성한 아우라는 훼손되었지만, 그 아우라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약 40년 전 원자력 발전 프로그램을 추진하기로 했던 정책적 결정이 그 좋은 사례다. 원자력 발전소는 중앙집권화된 대규모 조직이 아니면 운영할 수 없고, 그 조직은 필연적으로 기술적·재정적·정치적 권력을 축적하게 된다. 원자력 발전소의 이런 특징은 권력의 축적을 조직의 생리로 하는 일본 관료들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원자력 발전은 지도층의 오랜 꿈, 즉 변덕스러운 외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꿈을 실현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65)


일본 최대의 공공재 회사인 도쿄전력은 그렇게 통상산업성 및 건설성의 엘리트 관료들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와 같은 강력한 정치가들과, 선거구에 짭짤한 건설 계약을 끊임없이 유치해올 수 있다는 데 홀린 지역 자민당 지도자들의 지지와 보호를 등에 업고, 지구상에서 가장 지진의 위험에 취약한 나라에 수십 곳의 원전을 짓기로 하는 치명적인 결정을 내리기에 이른다. 연구 기관들과 학계의 ‘저명한 전문가’들이 이론적 뒷받침을 만들어주었고, 일본의 기성 언론은 숙련되고 성실한 엔지니어들 손에서 원자력은 일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이익을 안겨줄 100퍼센트 안전한 테크놀로지가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연일 떠들어댔다(요미우리 언론 제국에서 특히 이런 메시지를 열심히 쏟아냈다). 일단 그렇게 결정되고 나자 다시는 이를 철회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까지 들어간 막대한 매몰 비용 때문이기도 했고, 더 정확하게는 그러한 규모의 결정을 되돌릴 만한 제도적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265-6)


일본의 모든 지도자를, 원자력을 무리하게 들여놓은 사람들과 같은 선상에 놓고 비난하는 것은 공평치 못한 일이다. 3·11 지진 당시에는 민주당이 집권 여당이었다. 총리였던 간 나오토를 비롯한 민주당의 많은 지도자는 1995년 고베 대지진 때 집권당이 사태에 대응하던 방식에 분노해 민주당을 창당했다. 당시 집권당이던 자민당은 지진이 고베의 대부분을 쑥대밭으로 만든 뒤, 고베 시민을 위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의무를 방기했다. 적어도 3·11 사태 초기에 당시 관방장관이었던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가 일일 브리핑에서 보여준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인 태도는, 변명과 얼버무림으로 일관했던 1995년 고베 대지진 당시 지도자들의 태도와 좋은 대조가 되었다. 부서 간 협조가 엉망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대부분은 민주당이 과거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문제였다. 원래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것도 부서 간 협조를 구조적으로 개선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으나, 언론은 이런 사실을 편리하게도 무시했다. 267)


간 나오토 총리는 3·11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책임을 일부 지고 희생양이 되어 그로부터 반년쯤 뒤 실각한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알려진 바와 같다. 일본에 원전을 들여오는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고, 지난 20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하던 경제를 지휘했고, 중국과의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미국이 주도한 그 모든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정책에 비위를 맞추기 급급했던 세력이 2012년 말 다시 정권을 잡고 말았다. 그냥 정권을 다시 잡은 게 아니라, 해외 언론의 표현에 따르면 “화려하게 복귀했다”. 압도적인 격차로 선거에서 이기고 정권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걸맞은 지도자를 갖는다는 오래되고도 사라지지 않는 거짓말이 있다. 일본 국민의 온갖 미덕과 높은 양식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이 말은 과연 사실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하지만 이 대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 정치를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268)


10장 정치


자민당은 실제로 총선에서 50퍼센트의 득표를 한 경우가 매우 드물었지만 그 후 50년 동안 일본 의회를 절대적으로 장악했다(‘1955년 체제’). 그 첫 번째 요소는 입법 절차가 시작되는 중의원에서 농촌 선거구의 의석수가 농촌의 인구 비중에 비해 훨씬 더 많았다는 점이다. 이런 도농 간 의석수의 불균형은 사람들이 점점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함에 따라 더 심화되었다. 두 번째 요소는 당시의 중선거구제에서는 각 선거구에서 복수의 중의원 의원들을 선출했다는 점이다. 각 선거구에서 한 명의 의원만 선출하는 일반적인 선거구 제도와 달리, 일본에서는 한 명의 유권자가 한 표만 행사함에도 불구하고 한 선거구에서 득표순으로 많으면 다섯 명까지 중의원을 당선시킬 수 있었다(미국의 주들도 두 명의 상원의원을 뽑지만, 한 선거에서 두 명을 동시에 뽑지는 않는다). 따라서 당선을 유지하기 위해 경쟁 후보보다 반드시 더 많은 표를 얻을 필요는 없었다. 오직 당선권에 머무르기만 하면 되었다. 276)


이러한 결탁으로부터 일본 정당 정치의 대표적인 세 가지 특징이 탄생했다. 첫째는 대다수의 의원이 각각 특정한 부처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족族의원’이라는 그룹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가장 강력한 족의원 그룹은 각종 인프라 사업을 관장하는 건설성建設省을 둘러싼 족의원들이었다. 또 다른 주요한 족의원 그룹들은 농림성農林省, 운수성運輸省, 우정성郵政省에 몰려 있었다. 둘째는 1955년 체제로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자민당의 악명 높은 파벌주의다. 이 파벌들은 특정 사안에 대한 정치적 견해라든지 이데올로기의 차이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배경이나 계급이 무엇이든 간에 일본의 우파들을 집결시켰던 것은 이상주의적인 좌파들과 미군정의 개혁에 대한 증오였다. 미군정의 개혁이 학교 시스템을 민주화해서 일본 어린이들의 애국심을 파괴했다는 것이 그들의 견해였다. 일본 교직원조합(일본의 전교조)이 전후 시대를 통틀어 줄곧 우파가 분노를 표출하는 가장 큰 대상이었던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276-7)


1955년 체제는 애초의 목적대로 자민당의 의회에 대한 장악력을 공고히 했지만, 이로 인해 형성된 일본 정당 정치의 세 번째 특징은 아이러니하게도 군소 정당들에게 운신의 공간을 허용해주었다. 자민당은 농촌 선거구들에서 독점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했으나, 복수 당선자 시스템 덕택에 군소 정당들도 도시의 자영업자나 가족경영형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직원들로부터 표를 받아 약간의 의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표들은 원래 모두 사회당이나 공산당으로 갔을 것이었다. 이런 군소 정당 중에 가장 덩치가 컸던 것은, ‘신흥 종교’ 가운데 가장 크고 성공적이었던 창가학회의 정치 조직인 공명당公明黨이었다. 공명당은 좌파 지지자들 사이의 표를 분산시켰을 뿐 아니라, 공명당이 없었다면 목소리를 대변할 채널이 없었던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역할을 했다. 비록 작은 목소리였지만, 이런 역할은 좌파를 철저히 배제하던 일본의 정치체제가 포용력을 가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심는 데 아주 중요했다. 279)


다나카 가쿠에이의 천재적인 점은 1955년 체제를 전복시킨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장악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니가타에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지역 후원회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 그에게 충성하는 국회의원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들은 다나카 군단이라 불렸다. 다나카의 수완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1960년대 말 세계정세의 덕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나카는 ‘닉슨 쇼크(금태환 중지, 일본으로부터의 수입품에 대한 추가 관세, 일본에 알리지 않고 미중 간에 진행했던 국교 회복)’로 인해 미일 관계에 닥친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해결책을 만들어 제시했다. 당시 통상산업성 장관이던 다나카는 미국의 압력으로부터 일본 산업을 지키는 수호자이자, 막후에서 미국의 통상 외교관과 일본 섬유 기업들 사이의 중재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그의 중재를 통해 일본은 대미 수출이 너무 늘어나지 않도록 ‘자발적으로’ 규제를 하고, 미국은 관세를 내려주는 식으로 서로 체면을 세워주며 한 발씩 양보했다. 284-5)


전후 모든 스캔들을 통틀어서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을 록히드 스캔들은 사건의 발단이 해외였다는 점에서 기존 스캔들과 달랐다. 미국과 일본에서 이루어진 조사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사실들을 접하는 것은 일본의 기성 권력층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빅토리아 시대의 기품 있는 귀부인이 남편의 방탕한 성생활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적나라하게 논해야 하는 상황과도 같았다. 남편에게 정부情婦가 있고 유곽에도 출입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누군가 자꾸만 억지로 들먹이지만 않으면 그런 사실은 손쉽게 모른 척할 수 있는 것이다. 록히드 사건으로 인해 일본 정치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도 외면하지 못할 정도로 만천하에 공개되었을 뿐 아니라, CIA가 자민당에 비밀 정치 자금을 대주던 일과 자민당 창당에 관여했던 과거 또한 모조리 드러날 위기에 처했다(미국의 포드 정권은 실제로 스캔들이 새어나올 때부터 미일 간 안보관계가 타격을 입지 않을까 긴장하고 있었다). 288-9)


매체들은 다나카를 언급할 때 모든 존칭을 빼버림으로써,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방법으로 그를 모욕했다. 체포되어 거액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기 전까지 3주간 구속되어 있는 동안 다나카는 일반 범죄자와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석방되고 나서도 그는 7년 동안 매주 법정의 공개 재판에 출석해서 수많은 검사에게 모욕적인 추궁을 받아야 했다. 다나카는 1983년 1월 유죄판결을 받는다. 그가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상소 절차가 모두 끝나기 전에 뇌경색으로 몸이 크게 쇠약해져 결국 사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번째 형사 기소를 당하고부터 줄곧 유죄판결의 가능성에 시달리면서, 그가 총리직을 되찾을 가능성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총리뿐 아니라 지역구의 평의원 자리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공직으로도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일본에서 가장 높은 권력자의 위치에서 군림했다. 그 권력이 어찌나 절대적이었던지 사람들은 그를 ‘야미쇼군闇將軍(어둠의 쇼군)’이라고 불렀다. 290)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는 나카소네 시절 재무성 대신으로서 1985년의 플라자 합의의 협상을 이끌어서 초超엔저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이다. 그가 나카소네의 뒤를 이어 1987년 총리가 된다. 그의 멘토였으며 그가 배신했던 다나카처럼, 다케시타도 스캔들로 인해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사임한 뒤에도 다년간 계속해서 일본 정치를 컨트롤했다. 하지만 그가 일본 정치를 혼자 컨트롤했던 것은 아니다. 다나카와는 달리 다케시타에게는 동등한 권력을 누리는 정치 거물 가네마루 신金丸信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가네마루는(비록 자신이 총리 자리에까지 오르지 못했지만), 애초 다케시타를 총리 자리에 앉혔고, 다케시타가 사임한 뒤에는 다케시타의 도움을 받아 그다음 세 명의 총리를 임명했다. 그 또한 종국에는 스캔들로 끌어내려져, 구속되고 유죄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 그는 그 누구보다 다나카의 적자에 더 가까운 정치인으로서 야미쇼군의 역할을 해나간다. 293)


『일본개조계획日本改造計劃』이라는 책에서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는 일본이 ‘보통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통이라고 한 것은 일본이 ‘보통’ 정치, ‘보통’ 외교 정책, 정치의 명확한 통제하에 있는 ‘보통’ 군대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오자와는 두 가지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돈을 뿌리는 능력이 아닌 명확한 정책 비전을 제시하는 능력으로 경쟁하는 진정한 양당제도 시스템과 (2)정치에 의한 관료사회의 통제가 그것이다. 오자와는 자민당 지도부를 향해 정당 간의 진정한 정치적 경쟁 체제를 만들기 위해 선거 정치의 규칙을 개혁하자는 요구 사항을 발표했다. 예상했던 바였으나 오자와가 제시한 데드라인인 1993년 6월이 되도록 자민당이 답을 내놓지 않자, 그는 자신의 파벌을 데리고 자민당을 탈당해 신생당新生黨을 결성했다. 총선 결과 오자와는 호소카와가 만들었던 신생 정당인 일본신당日本新黨과 연립정부를 설립할 수 있었다. 자민당의 독주가 마침내 깨진 것이다. 298-9)


한편, 하시모토 류타로의 리더십하에 자민당에 잔류해 있던 군단의 멤버들은, 그들을 배신했던 오자와에게 반격을 가해 그의 연립 정권을 와해시킬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총리직을 미끼로 일본 사회당을 연립 정권으로부터 탈퇴시키는 것이었다. 애초 자민당이 결성되었던 목적은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잡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당은 주장만 무성할 뿐 실질적 정치력이 전혀 없는 당으로 서서히 전락하고 말았다. 사회당은 자민당을 상대로 정치적 구호를 외치고 도덕적 우위를 과시했다. 하지만 진정한 내각을 구성할 수 있는 아무런 현실적인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야당의 위치만 차지하고 있던 사회당은, 기실 진짜 야당의 출현을 방지함으로써 기존의 권력 구조를 지탱하도록 해주는 유용한 한 축에 불과할 뿐이었다. 자민당은 총리의 자리를 줄 수도 있다는 약속을 사회당 앞에 흔들어댔고, 사회당은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에 정신이 팔린 감시견처럼 꼬리를 흔들며 따라갔다. 302-3)


야당에 의한 집권이라는 첫 실험은 그렇게 끝났다. 사회당은 1949년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총리를 배출했다. 그가 바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다. 무라야마가 총리 재임 기간에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30년대와 1940년대 제국주의 일본이 저질렀던 일들에 대해 정부를 대변해 공식 사죄했다. 자민당 내부의 일부 세력이 아직까지도 철회하려 애쓰고 있는 그 사죄 말이다. 그러나 실제의 통치 체제는 과거처럼 각 정부 부처와 자민당 의원 사이에 권력이 조각조각 분산되어 있는 형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1996년 1월 하시모토가 연립정부의 수반으로 총리에 취임했다. 그는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는 틈을 타 의회를 해산하고 10월 총선을 치렀다. 결과는 자민당의 승리였다. 이 총선으로 사회당은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덥석 물었던 고깃덩어리에 알고 보니 독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독이란 바로 사회당의 위선에 유권자들이 철저히 등을 돌리고 말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303)


그런 와중에도 호소카와 정권이 실현한 선거제도 개혁은 1955년 체제의 핵심적인 부분을 약화시켰다. 1955년 체제의 선거제도는 유권자 1인이 1표를 행사하여 한 선거구에서 여러 명의 후보를 당선시키는 중선거구제였다. 이렇게 하면 금권선거가 된다. 새로운 선거제도하에서는, 한 유권자가 중의원 선거에서 한 장이 아닌 두 장의 투표용지를 받는다. 그중 첫 장에는 한 명의 후보를 골라 투표한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 한 명만이 그 선거구를 대표하는 유일한 중의원이 된다. 300명의 중의원이 이렇게 선출된다. 하지만 중의원 의석수는 480석이다. 두 번째 용지에는 유권자들이 후보가 아닌 정당 이름을 골라 투표한다. 선거제도 개혁은 일본 전역을 11개의 비례대표 선거구로 나눠 도합 180명의 의원을 선출하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선거제도 개혁도 자민당의 독주를 막지 못했다. 경제가 회복의 전망을 보이는 데 힘입어, 하시모토가 이끄는 자민당이 1996년 10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것이다. 304)


고이즈미는 현대의 미디어를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법을 완벽하게 파악한 일본의 첫 정치인이었다. 미디어를 잘 활용해 국가수반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미국의 레이건이나 영국의 토니 블레어처럼, 고이즈미도 보수적인(반동적이기까지도 한) 어젠다를 친근하고, 개혁가적이며, TV 화면에 잘 받는 이미지로 포장해서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일본 우파의 사상적 틀이 종전 이후 수십 년 동안 후견주의clientelism(유권자와 정치인의 이익을 둘러싼 유착관계로 이루어지는 정치―옮긴이)와 강력한 국가 집단주의였던 것에서,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반동적 국가주의로 변화해가는 흐름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이즈미의 신자유주의에 관한 발언과 시대의 흐름에 합류하는 듯한 모양새는, 진짜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제스처라기보다는, 일본 정치를 다나카가 패권을 쥐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시도였다. 즉, 고이즈미는 잘 훈련된 전문가 엘리트 관료들이 온전히 다스리는 나라로의 회귀를 지향했던 것이다. 307)


고이즈미는 중국과 남북한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참배를 다니기 시작했다. 세계는 일본이 왜 1930년대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독일처럼 반성하지 못하는가 의아해한다. 하지만 많은 일본인에게 있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정신적인 자살이나 마찬가지다. 1930년대의 전쟁과 그로 인한 여파를 겪고도 독일에서와는 달리 일본인들의 조국과 역사를 사랑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그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일본인들은 여전히 일본의 문화적 유산을 복잡한 심경 없이 즐기고 자랑스러워한다. 고이즈미와 아베 신조를 포함해 수많은 일본의 우익 정치인은 현대 일본의 병이 사회경제적 문제의 껍데기를 썼을 뿐 사실은 정신적 위기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리더십만이 국민이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이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311)


2006년 고이즈미는 후계자로 점찍어두었던 아베가 자민당 총재가 되도록 힘을 썼고, 그 결과 아베는 자동적으로 총리 자리에까지 오른다. 1950년대 보수파 관료의 후손 입장에서, 보수 패권의 부활이 완성되었다고 믿기에 이보다 더 확실한 신호는 없었다. 그러나 아베가 총리로 등극하면서 우파들은 선을 넘고 말았다. 고이즈미의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오히려 고이즈미 시절의 가장 중요한 교훈을 잊고 만 것이다. 우파의 패권 장악이라는 늑대는 개혁이라는 양의 탈을 쓰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 말이다. 아베는 총리로 취임하자마자, 고이즈미 때에도 가벼운 립서비스에만 그쳤을 뿐인 일련의 어젠다를 현실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전후 헌법의 개정, 사과를 모르는 강한 군대, 일본 주권 체제에서 황실의 중심적 위치 인정, 1930년대 일본의 행위가 서양 제국주의 및 동아시아에 무력을 통해 강요된 해외 사상(사회주의, 자유주의)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었다는 견해의 보급이 그것이다. 313)


2008년 미국에서 80년 만의 최악의 금융 위기가 발생하면서 일본 경제 또한 곤두박질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민당이 금융 위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현실과 동떨어진 당이라는 이미지는 더 강해지고 말았다. 오자와가 이끄는 민주당은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을 압살했다. 이에 대응해서 자민당이 한 일이라곤, 1950년대 정치 지도자의 후손 중에서 또 한 명을 찾아내 침몰하는 배의 선장으로 세운 것이 고작이었다. 그가 바로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협상했던 요시다 시게루의 손자인 아소 다로麻生太郞다. 오자와의 꿈이 드디어 현실로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활발한 선거와 정책 비전의 경쟁으로 돌아가는 진정한 정치의 시대가 손에 잡힐 듯했다. 그러나 오자와의 꿈을 철저히 무산시키고자 하는 세력은 일본 국내에 있는 무수한 정적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미국의 국방성, 국무성, 심지어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 공간인 웨스트윙에까지 퍼져 있었다. 315-6)


11장 일본과 세계


2010년 4월 11일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가 국제 핵 안보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는 (민주국가의 표본 같은) 한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하도록 하는 자유롭고 공정하며 투명한 선거를 통해 총리가 되었다. 하토야마가 총리가 된 것은 미국 방문 7개월 전 그의 정당(민주당)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오바마 대통령과 짧은 의례적 독대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는 의도적인 홀대였고, 이런 홀대는 처음이 아니었다. 하토야마가 푸대접을 받은 이유는 명확했다. 일본 정부가 최근에 미국과 서명했던 조약이 있는데, 이를 재협상하겠다는 공약으로 일부 지지를 얻어 선거에서 승리해 취임한 총리이기 때문이었다. 그 조약은 동아시아 최대의 미군 기지 중 하나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토야마를 친구가 아닌 적으로 대접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신新일본통New Japan Hand’이라 부르기로 하자. 320-1)


이 신일본통 지망생들이 자민당 핵심 의원 사무실에서의 인턴십이나 일본의 각종 대학 및 재단에서 넉넉한 자금 지원을 받고 일본의 정책 결정자들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다음과 같은 논지의 주장을 일관되게 내세울 필요가 있다: 일본과 미국 사이의 군사동맹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동맹은 중국의 부상과 골칫거리 북한의 핵무장 야욕을 둘러싼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역이건 금융이건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가 되었건, 그 어떤 이슈도 안보동맹이라는 절대 가치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안보동맹은 그동안 잘 작동해왔으나, 한 가지 개선되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일본의 자위대가 일본 자국의 국방을 수행하고 미군의 군사력 행사를 돕는 데 좀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신일본통들은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이라는 단어를 매우 좋아한다). 322)


하토야마의 후임으로 총리에 오른 간 나오토의 내각 멤버들 중 상당수는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經塾 출신이었다. 파나소닉의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가 설립한 이 학교는 정치 지망생들을 위한 엘리트 교육기관이었다. 마쓰시타 정경숙과 그 졸업생들은 2008년 금융 위기 이전에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트렌드의 일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정치와 정부 운영을 둘러싼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류 기업을 경영할 만한 사람들에게 나라의 경영을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각국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기업의 이사회 같은 데 잘 어울릴 사람들이었다. 혹은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매년 모여드는 부류의 사람들과 동등한 신분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만한 이들이었다. 무수한 ‘개혁가’ 정치인들이 거쳐가는 동안 스스로의 특권과 영역을 침범받지 않고 유지해낸 수백 명의 눈치 빠른 관료를 길들이는 법을 몰랐던 것 또한 말할 나위 없다. 343-4)


아베와 그의 주변 세력은 지난번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아니, 고이즈미가 총리로서 상대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잊고 있었던 교훈을 되살렸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 교훈이란 바로 추진하고자 하는 일이 아무리 수구적이라 할지라도 개혁적인 것처럼 포장해서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정부가 국민의 경제에 대한 불안과 욕망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다른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이즈미의 수석 비서관이었던 이지마 이사오飯島勳는 아베에게 ‘아름다운 일본’과 같은 애매한 주제에 대해 떠들 것이 아니라(이것이 아베가 2006년 발행했던 선거 정책집의 제목이었다), 경제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그가 구상하고 있는 대담한 계획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입헌 정부를 파괴하고 전전의 권위적인 ‘가족국가’를 재건하려는 우익의 계획은 자민당이 의회에서 헌법을 마음대로 개정할 수 있을 만큼의 의원수를 확보할 때까지는 잘 숨겨두어야 했다. 358)


미국에서는 역사적으로 연방준비위원회가 채권시장을 이용해 시장에 통화량을 공급해왔다. ‘공개 시장 조작open market operations’이라 불리는 이러한 방법은, 연준위가 새로 발행한 통화를 지급해 투자자들로부터 미국 국채를 사들이는 식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채권이 민간 투자자가 아닌 예금기관(은행)의 수중에 있는 일본에서는 이런 방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 일본중앙은행이 공개 시장 조작을 통해 시중 은행들로부터 채권을 사들이면, 시중 은행은 그 돈을 기업에 융자해주기보다는 국채를 더 사들여서 결국은 은행의 대차대조표만 더 부풀리게 된다. 일본중앙은행의 신임 총재가 된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는 일본중앙은행이 정부로부터 국채를 직접 구매하게 함으로써 이 문제를 우회해버렸다. 이런 식으로 통화량을 늘리는 행위는 원래 일본을 포함해 대부분의 나라에서 불법이다. 정부로 하여금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적자재정을 운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360)


구로다의 정책에 폴 크루그먼이나 애덤 포즌과 같은 서양의 리버럴한 케인스학파 경제학자들은 환호했다. 마침내 여기, 모든 선진국이 씨름하고 있는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할 대담한 정책을 펼치는 중앙은행 총재가 나타났다는 반응이었다. 버냉키 역시 줄곧 비정통파적 정책을 실험해보고 싶어했으나, 오바마 정부는 적대적인 의회 환경에서 불충분한 재정 부양 정책을 딱 한 번 통과시켰던 것을 제외하고는 버냉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연방준비위원회는 미국 경제 성장의 엔진을 재가동시켜야 하는 부담을 정부의 도움 없이 홀로 짊어져야 했다. 이와 달리 아베는 선거 때부터 경제를 살리기 위해 ‘세 개의 화살’이 필요하다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통화정책, 재정 부양, 광범위한 규제 완화 및 구조 개혁이 그것이다. 구로다가 중앙은행에서 통화를 계속 공급해주었기 때문에 아베는 재정 부양이라는 명목하에 바라마키(선심성 예산 뿌려대기)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360)


아베와 그 주변 사람들은 단순히 1970년대 초반 다나카가 일본의 선거 정치 시스템을 장악했던 시절 이전의 세계, 다름 아닌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가 창조하여 다나카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까지 직접 관리하던 그 세계로 돌아가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일본의 우익에게 있어 1950년대의 체제는 일본의 패전과 좌익 세력의 창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한 긴급 조치이자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그 체제는 외교 정책을 미국에 종속시켰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었고, 종신고용과 어용노조, 샐러리맨 문화와 같은 장치들을 고안해 대중에 대한 좌익의 호소력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아베와 그 주변에게 이런 체제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시절이 오면 내다 버려야 할 것들에 불과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승리는 이들이 원했던 만큼의 압승이 아니었다. 자민당은 스스로의 표만으로 전후 헌법을 뜯어고칠 수 있는 숫자인 참의원 3분의 2 의석은 얻지 못했다. 363-4)


일본인 거의 모두는 일본을 아시아와 별개의 나라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일본 사람들이 아시아アジア라고 말하면 그것은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를 뜻한다. 서양에서 온 사람들은 일본의 지인이 자기는 아시아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놀라곤 한다. 리버럴하고 상식적인 일본인들조차 서양인이 일본을 중국이나 한국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기라도 하면 일본이 그 나라들과 얼마나 다른지 즉각 지적하려든다. 그러나 일본의 미래를 생각하면 일본이 다시 아시아의 일원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을 것이다. 경제 협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 협력은 이미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보다는 일본과 그 운명이 아시아 지역의 운명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지난 500년간 서양이 우위를 차지하던 세계가 서서히 끝나가고 역사의 추가 다시 동아시아로 기울고 있다는 예측이 거의 확실히 현실화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376)


일본이 이웃 국가들로부터 아시아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은 과거사 문제와 직결된다. 일본의 옹호자들은 다른 나라들도 과거에 큰 잘못을 저질렀고 사과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즉각 지적한다. 일본이 어떤 사과의 말과 행동을 해도 주변국들은 절대 만족하지 않고 과거사를 채찍 삼아 일본을 계속 때리려들 것이라고도 얘기한다. 이 또한 맞는 말이지만, 여기서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일본이 1930년대에 일어났던 일을 직면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이나 중국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을 위해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일본이, 일본의 독립성을 파괴하며 해외에서 일본이라는 단어를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광기의 대명사로 만든 사람들의 손에 장악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말이다. 아베가 하는 것처럼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진실을 순수하고 고결한 나라에 대한 이야기로 묻어버리려는 시도는, 앞으로도 일본이 비슷한 일을 다시 벌일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더 그럴듯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3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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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읽다 - 전쟁의 시대에서 끌어낸 생존의 지혜 유유 동양고전강의 4
양자오 지음, 정병윤 옮김 / 유유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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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자와 장자는 다르다


노자와 장자는 둘 다 ‘도’道를 근본으로 삼아, 모든 현상과 변화의 이면에는 일체의 자연을 움직이는 법칙이 있다고 믿었고, ‘도’가 그 법칙의 주재자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도’의 존재를 명확히 이해하고 ‘도’의 규율을 탐색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었지요. 그들의 공통점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장자는 ‘도’를 명료하게 깨우치면 우리가 지키려는 여러 가치의 실제를 여실히 바라볼 수 있으며, 그러한 가치들이 사실은 편협한 자기중심적 시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 모든 동물이 다 ‘썩은 쥐[권력]’를 원하는 것은 아니며, ‘도’를 명료하게 이해하면 그러한 외부 기준 속에 자신을 함몰시키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노자가 ‘도’를 이해하는 목적은 이 ‘도’를 처세와 권력에 운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도’를 이해하는 사람은 ‘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권력을 사용하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13)


『장자』 「천하」天下에서는 전국 시대의 여러 학자를 논하면서 장자와 노자를 별개로 다룹니다. 〈그의 행위는 흐릿해서 자취가 없고 사물을 따라 변화해서 일정함이 없으니, 이는 죽은 것인가, 살아 있는 것인가? 천지와 함께하는 것인가, 신명과 함께 가는 것인가? 아득한데 어디로 가는 것이고, 총망한데 어디로 향하는 것인가? 만물이 일제히 나열돼 있지만 귀속시킬 방도가 없다. 이것도 옛날의 도술 가운데 있는 학설이다. 장주莊周(장자)는 이 주장을 듣고 못내 기뻐했다. 芴漠無形, 變化無常, 死與生與, 天地並與, 神明往與. 芒乎何之, 忽乎何適, 萬物畢羅, 莫足以歸. 古之道術有在於是者, 莊周聞其風而悅之.〉 장자의 학설은 대답보다 물음 자체가 더 중요하며, 일부 근원적인 물음은 대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일단 대답이 되면 그 대답은 본래 ‘무형’無形인 것을 억지로 ‘유형’有形화하는 것이 되고, 본래 ‘무상’無常인 것을 ‘유상’有常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되는 까닭이지요. 13-4)


노자는 이와 좀 다릅니다. 『장자』 「천하」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근본을 정수로 여기고 형체 있는 사물을 조잡한 것으로 여기며, 사물의 축적을 흡족하게 여기지 않고 담담히 홀로 신명神明과 더불어 거했다. 以本爲精, 以物爲粗, 以有積爲不足, 澹然獨與神明居.〉 이 말은 근본 도리는 깊고 미묘한 것이고, 만물의 실체는 이러한 근본 도리가 조잡하게 겉으로 드러난 것일 따름임을 주장합니다(따라서 사물 자체에 집착하지 말고 근본 도리에 따라 행동하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근본’의 법칙이라는 것이 매우 역설적입니다. 겉보기에 부유하면 부유할수록 내실은 더 가난해지며, 가장 강인하고 가장 성공한 사람은 다름 아닌 누구보다도 유약하고 겸손하여 아무런 힘도 고집하는 바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어떤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빔’이라고 합니다. 비어 있어야 만물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14-5)


전국 시대 말기, 장자의 제자들에게 장자와 노자는 같은 유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漢나라가 들어선 후, 한나라는 진秦나라의 잘못을 거울삼아 진나라와 상반되는 통치 철학을 채택하였고, 그 결과 ‘황로’黄老가 존숭되었습니다. 당시의 ‘도가’道家는 정치와 통치에서 ‘무위’無爲를 중시하며 백성과 함께 휴식한다는 사상에 중점을 두었고, ‘도가’의 대표 인물은 황제와 노자로 장자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황로’는 정치권력상의 원칙이었기에 일반 개인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권력을 장악한 자가 어떻게 “행함이 없으면서 행하지 않음이 없게”無爲而無不爲 하여 피지배층에게 자신을 낮추면서도 더욱더 큰 권력을 운용하고, 권력을 확실하게 쥐고,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더욱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낼 것인가를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한나라 전체에 걸쳐 유행했던 것은 이러한 ‘황로 도가’였으며, ‘황로 도가’는 (정치가 혼란에 빠지는) 한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노장老莊 도가’로 바뀌었습니다. 15)


2 남방의 은자 문화


『사기』에 기록된 노자의 가계에서 가장 믿을 만한 것은 당연히 사마천의 시대와 가장 가까운 교서왕의 태부 이해일 것이고, 이해는 이이(노자)의 8대손이니 그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이의 연대는 기원전 3세기 무렵, 즉 전국 시대 중후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노자』 본문에서 얻은 증거와도 딱 들어맞습니다. 역사학자 첸무錢穆 선생은 노자의 생존 연대에 관한 글을 네 편 썼는데, 여기서 그는 『노자』의 문장에 나온 전국 시대의 사물 이름과 어휘를 구체적으로 예로 들어가며 『노자』가 춘추 시대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부정했습니다. 그리고 이치를 직접적으로 피력하는 『노자』의 서술 방식은 『논어』와는 크게 다르고 웅변적인 논조의 『맹자』나 『장자』와도 다르며, 차라리 『순자』나 『한비자』에 더 가깝습니다. 이러한 안팎의 증거를 총괄해 보면, 첫째, 『노자』의 저자는 전국 시대의 인물이고, 둘째, 『노자』의 제작 시기는 『장자』「내편」内篇보다 늦은 전국 시대 후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22)


고대 중국 남방에는 공자의 시대에 이미 주나라의 가치관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은자 문화’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공자는 철두철미하게 봉건 제도에서 비롯된 종법宗法 문화의 산물입니다. 종법 제도의 핵심 지역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공자였기에, 그는 봉건 제도의 질서가 파괴되고 무너질 때 그 흐름을 막을 수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기존의 봉건 예법을 회복하고 유지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남방, 특히 초나라는 지리적으로 변방에 있어 봉건 제도의 토대가 중원처럼 그렇게 확고하지 않았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서주西周가 세워지기 전에 이곳 남방에 이미 고유의 독특한 문화 전통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남방에서는 노魯나라의 공자와 같이 봉건 제도의 종법에 호감을 갖는다거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종법 질서만큼은 지켜 나가야 한다는 열정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은자들은 난세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여 상처받지 않고 될 수 있는 한 평온하고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하고자 지혜를 모았습니다. 22-3)


이들 남방의 ‘은자’ 혹은 ‘지자’智者는 전부터 내려오던 ‘왕관학’王官學(지배 이데올로기)의 추종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예기』禮記, 『악경』樂經, 『춘추』春秋가 변경할 수도 없고 내던질 수도 없는 진리의 토대라고 생각했던 공자와 달랐습니다. 그들은 서주 ‘왕관학’의 경전에 따라 말하지 않았기에 어떠한 저작도 남기지 않았고, 그저 그들과 주류 가치관 사이의 충돌을 확실히 보여 주는 기록만을 단편적으로 남겼습니다. 이들 배후의 ‘은자 문화’는 ‘도가’의 먼 원류입니다. 그들은 동주東周의 핵심 지역에서 ‘왕관학’이 ‘제자학’諸子學으로 한창 변화하는 과정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이 변화 과정의 주인공은 공자를 비롯한 ‘유가’입니다. 유가는 자신들의 사상이 어떻게 전파되고 퍼졌는지 비교적 상세하고도 명확한 기록을 남겼지만, 변방에서 일어나고 ‘은자 문화’를 배경으로 한 도가는 그러한 기록을 남기지 않아 그들의 명확한 역사 배경과 변화의 맥락을 찾을 수 없습니다. 23)


3 도를 아는 것과 도를 행하는 것


진秦나라 이전의 모든 저서 가운데 『노자』는 가장 권위적인 문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표현 방식이 직접적이고 명확하여 논의의 여지가 없습니다. 『논어』와 비교하면, 묻고 답하는 대화는 없이 오직 답안만 제시되어 있을 뿐이지요. 또한 『노자』에는 그 이야기를 하게 되는 정황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는 『노자』가 정황의 영향을 받지 않는 보편적인 기준을 제시함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맹자』나 『장자』와 달리 『노자』에는 ‘논쟁’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입장, 다른 견해를 지닌 인물의 등장도 없고, 그러한 인물과의 열띤 의견 공방 같은 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노자』에는 변론은 없고 설교만 있습니다. 이러한 글쓰기의 배후에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본인에게 맡긴다는 태도가 깔려 있지요. ‘나는 그대들에게 이러한 이치를 내놓으니 이를 믿고 믿지 않고는 그대들에게 달려 있을 뿐’이라는 식입니다. 이러한 글쓰기는 진秦나라 이전의 글에서는 매우 보기 드뭅니다. 25)


『노자』의 또 다른 특색은 내용이 지극히 간단하다는 점입니다. 흔히 『노자』를 가리키는 ‘『노자』 5천 언言’ 또는 ‘『도덕경』 5천 언’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전체가 약 5천 자에 불과합니다. 글자 수로만 따지면 『장자』의 비교적 긴 장章 하나와 비슷한 분량입니다. 글자 수가 이렇게 적은 탓에 『노자』는 독자에게 문구가 압축적이고 정보가 농축되어 있다는 인상을 갖게 합니다. 그리하여 『노자』의 해설서들은 가능한 한 그 글의 뜻을 확장하여, 백 마디로 『노자』의 한 마디를 설명해야 옳다고 여겨 왔습니다. 이는 『노자』를 일종의 ‘요약문’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노자』는 정말로 그렇게 복잡하고 풍부한 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혹시 『노자』에는 많은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이라는 후세 사람들의 지레짐작으로 『노자』 본래의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의미가 덧붙여진 것은 아닐까요? 『노자』는 처음부터 곁가지가 무성한 거목巨木의 축소판이 아니라 그저 한 그루의 바싹 마른 등나무는 아닐까요? 25)


사실 『노자』가 말하는 핵심 도리는 매우 직접적이고 간단합니다. 『노자』에서 알리고자 하는 첫 번째 내용은 만물에 앞서는 ‘도’道의 존재입니다. 『노자』에서 말하는 ‘도’는 모든 사물을 관할하고 통솔하는 주재자입니다. ‘도’가 이처럼 만물을 관할 통솔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개별 원리로부터 도출된 것도 아니고 무엇에 의해 지배당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두 번째 내용은 ‘도’에 대한 이해입니다. 여기에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 자세가 꼭 필요한데, 특히 분별이 생기기 전의 모습으로 물러서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분별이란 항상 상대적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긺長은 짧음이 있음으로 해서 생기고, 높음은 낮음이 있음으로 해서 생기며, 선은 악이 있음으로 해서 생깁니다. 분별에 맞닥뜨리면 우리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그러한 분별이 생기기 전의 ‘혼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노자는 주장합니다. 일체의 이러한 분별이 생기기 전의 ‘대혼돈’, 그것이 바로 ‘도’입니다. 26)


『장자』는 내편内篇과 외편外篇부터 잡편雜篇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우리에게 ‘혼돈’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계를 보여 주며, 이는 보통 사람들이 ‘분별’을 통해 바라본 세계와는 크게 다릅니다. 『장자』는 이 혼돈의 세계를 묘사함으로써 독자에게 세속의 시각을 버리고 ‘혼돈’으로 들어가 보라고 권합니다. 『노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혼돈’의 시각을 갖게 된 후 그것으로 속세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지도합니다. 그러므로 『노자』에서 말하고자 하는 세 번째 내용은 어떻게 하면 ‘도’에 따라 적확하고도 효과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노자』의 이 내용은 ‘주’主, 즉 군왕, 또는 지배층을 상대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권력을 쥔 사람에게 어떻게 권력을 운용할지, 그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더욱 큰 권력을 누릴지, 차지한 권력을 어떻게 하면 잃지 않을지를 가르쳐 줍니다. 『노자』 5천 자는 기본적으로 이 세 가지 내용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26-7)


노자는 제3장에서 세상을 통치하는 데 도리를 어떻게 운용할지 이야기합니다. 〈현인을 받들지 않아야 백성을 다투지 않게 할 수 있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히 여기지 않아야 백성이 훔치지 않게 할 수 있으며, 욕심이 날 만한 것을 내보이지 않아야 백성의 마음을 어지럽지 않게 할 수 있다. 不尚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묵가는 봉건 제도의 귀천貴賤 구분을 없애고 오직 사람의 능력과 덕행만을 보아, 능력 있고 덕행이 높으면 그를 중용하여 높은 관직과 권력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노자는 ‘현인 숭상’이 높은 관직과 권력 쟁취로 사람을 내몰아 결과적으로 분쟁만 일으킨다고 보고 있습니다. “욕심이 날 만한 것을 내보이지 않는다”라는 문장에서 ‘내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은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통치술 측면에서 봤을 때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물건을 보여 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마음의 평정을 지킬 수 있고 기존의 질서도 유지될 수 있습니다. 31)


〈이러한 까닭에 성인의 다스림은 마음은 비우게 하나 배는 채우게 하며, 뜻은 약하게 하나 뼈는 강하게 한다. 항상 백성을 무지무욕無知無欲하게 하면, 지혜롭다는 자들은 감히 일을 벌이지 못하고 행할 바가 없게 되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強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敢爲也, 爲無爲, 則無不治.〉 노자의 ‘성인’에는 지극히 높은 ‘도’의 지혜를 지니고 있다는 뜻 외에도, 이 ‘도’의 지혜로 백성을 통치하여 최대의 효과를 얻는다는 뜻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성인’은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까요? 사람들의 배는 든든히 채워 주고 마음은 텅 비게 하며, 육체는 건강하게 하되 의지는 약하게 합니다. 사람들이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아 현재에 늘 만족해한다면, 설령 지식인이 몇 있다 해도 어떠한 행동도 섣불리 할 수도 없고 할 방법도 없을 것이며, 또한 어떤 행위를 한다 해도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 없이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겠지요. 32)


4 커다란 도에는 사사로움이 없다


제3장에서 ‘성인의 다스림’이라는 현실적인 측면을 이야기한 다음, 노자는 제4장에서 다시 ‘도’라는 추상적인 내용으로 돌아갑니다. 〈도는 비어 있으나 쓸 수 있으며 채워도 가득 차지 않는다. 도는 심원하여 만물의 근원인 것 같다. 道沖而用之或不盈, 淵兮似萬物之宗.〉 여기서 “비어 있다”라는 말은 가운데가 텅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구절을 풀이해 보면, 도는 가운데가 비어 있는 그릇과 같지만 보통의 그릇과는 달리 그 안에 물건을 아무리 담아도 가득 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처럼 말이지요. 도는 만물을 수용할 수 있어 마치 만물이 모두 ‘도’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물처럼 움직임 없는 고요한 상태, 더 나아가 도대체 ‘유’인지 ‘무’인지를 판별할 수 없이 극도로 적요한 상태가 ‘도’에 가깝다고 노자는 말합니다. ‘도’는 만물이 생성되기 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도’보다 앞서 존재할 수 없고 ‘도’를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34-5)


‘도’의 작용은 제5장에서도 이어집니다. 〈천지는 어질지 않아 모든 것을 풀로 만든 강아지처럼 다룬다. 성인은 어질지 않아 백성을 풀로 만든 강아지처럼 다룬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도’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 어떤 사물을 특별히 아끼는 바 없이 만물을 ‘일시동인’一視同仁합니다. 장자와 노자가 말하는 ‘인’仁과 ‘애’愛에는 모두 ‘편애’偏愛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인’은 위에서 아래로의 편애를 뜻하고, ‘애’는 평등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편애를 뜻하지요. 그러니 ‘도’가 만물을 ‘일시동인’한다는 말은 ‘불인’不仁, 즉 어떤 편애도 없이 만물을 똑같이 대한다는 뜻입니다. 햇빛이 대지를 골고루 똑같이 비춰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난이 닥칠 때도 ‘도’는 무언가를 특별히 사랑하는 일이 없기에 모든 만물이 예외 없이 자연의 희생물이 됩니다. ‘성인’은 ‘도’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는 자연이 만물을 대하는 방식을 모방하여 자신이 통치하는 백성을 아무런 편애 없이 똑같이 대합니다. 35-6)


제13장입니다. 〈큰 걱정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과 같이 하란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나에게 큰 걱정이 있는 까닭은 내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몸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에게 무슨 걱정이 생길 수 있겠는가? 何謂貴大患若身?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아주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대합니다. 자신이 이해관계에 있을 때는 특히 더 그렇지요. 삶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에게 자아와 사리사욕이 있고, 신체의 감각 기관이 각종 자극을 받는 까닭에 정신적으로 평정심과 평상심을 유지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자기중심적이거나 자아확장의 생각을 갖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가능한 한 자아를 제거하고 자신의 몸에 대한 배려와 관심과 우려를 내던져야 합니다. 자아와 자기 몸을 버릴 수만 있다면, ‘걱정거리’는 사라지고 이해득실을 염려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며 근심과 공포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44)


노자는 ‘상’常을 중시합니다. 이는 오래도록 변치 않는 안온하고 균형 잡힌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몸을 천하만큼이나 귀하게 여긴다면 천하를 줄 수 있고,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이나 아낀다면 천하를 맡길 수 있다. 故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 노자는 (장자처럼) 인간은 장자가 상상한 것처럼 육신과 형체를 벗어던지고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며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어떤 신비로운 공간에서 살 수 있는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란 육신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몸을 천하만큼이나 소중히 여길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노자는 말합니다. 자신의 욕망과 좋고 싫음의 감정에서 개인적인 성분을 모조리 없애 천하 사람들과 하나가 되면 ‘자기 몸’은 곧 ‘천하 몸’이 됩니다. 그리되면 ‘자기 몸’은 더 이상 개인의 욕망과 좋고 싫음을 실현하는 곳이 아니라, 천하의 보편적인 욕망과 천하의 보편적인 좋고 싫음을 반영하고 맡기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44)


5 고난과 난세 속에서 탄생한 철학


제31장에서 노자는 전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직접적이고도 강렬하게 표현합니다. 〈군자는 일상에서는 왼쪽을 귀하게 여기나, 병기를 쓸 때는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 병기는 상서롭지 않은 기물이기 때문에 군자가 쓸 기물이 아니다. 부득이 이것을 쓸 때에는 담백한 마음으로 쓰는 것이 최선이다. 君子居則貴左, 用兵則貴右. 兵者不祥之器, 非君子之器, 不得已而用之, 恬淡爲上.〉 군자는 평상시 생활할 때는 왼쪽을 존귀하게 여기지만, 병기를 들고 싸워야 할 경우에는 오른쪽을 존귀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군자와 병기가 서로 대립되는 위치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주나라 예절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과 관련된 것은 왼쪽이 오른쪽보다 높고 중요하며, 상례喪禮와 제례祭禮 같은 죽은 사람과 관련된 것은 오른쪽이 왼쪽보다 높고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는 삶과 죽음의 영역을 구분하는 주나라 사람들의 원칙이었습니다. 전쟁이 ‘삶’이 아닌 ‘죽음’에 속하는 것임을 노자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49)


〈승리해도 불미스럽게 여겨야 하니, 그것을 찬미하는 자는 바로 사람 죽이는 것을 즐기는 자이다. 사람 죽이는 것을 즐기는 자는 천하에서 뜻을 얻지 못할 것이다. 勝而不美, 而美之者, 是樂殺人. 夫樂殺人者, 則不可以得志於天下矣.〉 이 점에서 노자의 견해는 맹자와 일치합니다. 『맹자』 「양혜왕」梁惠王에서 맹자는 양梁나라 양왕襄王에게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통일할 수 있다”不嗜殺人者能一之라고 했습니다. 맹자는 각국이 모두 적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살인을 좋아하지 않고, 살인을 낙으로 여기지 않고, 전쟁의 승리를 불미스럽게 여기는 사람이라야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노자와 맹자의 이러한 견해는 전국 시대 중후기 사람들의 보편적인 심정을 반영한 것입니다. 당시 중국은 너무도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고, 그로 인해 백성의 생활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전쟁을 혐오하고 평화를 갈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50)


이 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노자』의 사상과 주장이 어떠한 배경에서 나왔는지 명확히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노자』의 핵심 개념인 ‘무위’는 전국 시대의 빈번한 전쟁에 대한 저항 의식에서 생긴 것입니다. 『노자』에서는 한 나라의 군주는 ‘무위’無爲를 행해야 하고 ‘무위’를 행할 수 있어야 ‘무불위’無不爲(행하지 못하는 바가 없음)하게 됨을 거듭 강조하는데, 이는 바로 ‘유위’有爲(인위적이고 작위적인 행위)에 급급한 당시의 군주들이 더 넓은 영토, 더 많은 재물을 차지하고자 무수한 백성을 전쟁터로 몰아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듭되는 전쟁에 지친 백성들은 쉬고 싶었습니다. 『노자』는 사람들의 이러한 심정을 인생철학과 처세법으로 전환해 ‘무위자연’을 주장했습니다. 그리하여 자연 상태를 회복하고 법의 사용을 줄이면, 오히려 더 많은 권력을 차지하고 권력 기반을 더욱 탄탄히 다질 수 있으며 차지한 권력을 더욱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역설逆說을 편 것입니다. 51)


사실 『노자』는 비일상적이고 극단적인 상황에 맞서는 일련의 지혜입니다. 그 시대 권력자들의 욕망은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었고, 그에 대항할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한 백성은 권력자의 이러한 욕망 충족을 위해 끊임없이 강제 동원되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시대 흐름에 『노자』는 교묘히 브레이크를 걸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군주에게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어떻게 군주가 될 수 있는지를 실제 군주보다 더 잘 이해했고, 그 입장에서 노자는 그 군주들의 권력 사용 방식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노자는 “올바른 말은 반대처럼 들린다”正言若反는 역설의 수법을 사용하여 군주에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말고, 더 이상 야심을 확대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뒤로 물러서고 자기주장을 줄여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이러한 말투, 이러한 권위적인 태도가 아니고서는 욕망이 급팽창하는 전국 시대에 어느 군주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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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를 읽다 - 언어의 투사 맹자를 공부하는 법 유유 동양고전강의 6
양자오 지음, 김결 옮김 / 유유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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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끊이지 않고 줄곧 이어진 문자 체계 때문에, 중국인은 조상이나 옛사람을 지극히 가깝게 여기고 친밀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역사학이 과거에 발생한 어떤 사건을 연구하는 독립적인 학문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역사와 현실 사이의 명확한 경계가 인식되지 않고 떼려야 뗄 수 없는 연속체처럼 여겨지는 것이죠. 우리는 삶의 현실에서 도움을 얻고자 역사를 공부합니다. 그런 까닭에, 중국에서는 나중에 생겨난 관념과 사고가 끊임없이 역사 서술에 영향을 끼치고 역사적 판단에 스며들었습니다. 한 가지 심각한 문제는 이 전통 속에서 사람들이 늘 현실적인 고려에 따라, 현실이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다시 써 왔다는 사실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다른 현실적 고려가 겹겹이 역사 위에 쌓여 왔지요. 고전을 원래의 태어난 역사 배경에 돌려놓고 그 시대의 보편 관점을 무시하지 않는 것은 이 시리즈의 중요한 전제입니다. ‘역사적 독법’을 위한 ‘조작적 정의’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7)


# 조작적 정의 : 사물 또는 현상을 객관적이고 경험적으로 기술하기 위한 정의


1 유가의 신념을 위해 싸우다


우리가 맹자를 읽는 방식은 맹자가 무엇을 말했는지 이해하고 나아가 암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맥락에서 봤을 때는 맹자가 어떻게 말했는지, 즉 그가 도리를 드러내는 태도와 형식이 맹자가 도대체 무엇을 말했는지와 똑같이 중요하다는 걸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맹자는 유가의 신념이 극히 불리했던 상황에 있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이 신념의 우수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을 계속 찾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군주들에게 더욱 환영받고 유행했던 다른 학설과 벌인 난투 속에서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맹자』의 뛰어난 점은 맹자가 제시한 생각이 아니라 여기에 있습니다. 맹자의 신념은 주로 공자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며, 공자가 신봉했던 주나라의 ‘왕관학’王官學의 전통으로부터 전승된 것으로, 신선하거나 자극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맹자의 웅변은 이 낡은 개념들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당시 다른 사람들이 내놓은 괴이한 논설에 비해 조금도 지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12-3)


『맹자』의 첫 번째 편인 「양혜왕」梁惠王을 여는 첫마디는 역사에 실제로 존재했던 양나라 군주 혜왕에게 주어집니다. 〈맹자가 양 혜왕을 만났다. 왕이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천 리를 마다하지 않고 오시니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孟子見梁惠王. 王曰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맹자가 대답하였다. “왕께서는 왜 하필이면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또한 인의가 있을 따름입니다.” 孟子對曰 “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양 혜왕이 이 상황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에 맹자는 인과 의에 대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왕께서 ‘어떻게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면 대부는 ‘어떻게 내 집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고, 선비와 백성은 ‘어떻게 내 몸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게 됩니다. 위아래가 모두 이로움만을 논한다면 나라는 위태로워집니다.” “王曰 ‘何以利吾國?’ 大夫曰 ‘何以利吾家?’ 士庶人曰 ‘何以利吾身?’ 上下交征利而國危矣.”〉14-5)


〈“만승의 나라에서 그 군주를 죽이는 자는 반드시 천승의 가문에서 나옵니다. 천승의 나라에서 그 군주를 죽이는 자는 반드시 백승의 가문에서 나옵니다. 만으로 천을 취하고 천으로 백을 취하니 많지 않은 양이 아닙니다.” “萬乘之國弒其君者, 必千乘之家. 千乘之國弒其君者, 必百乘之家. 萬取千焉, 千取百焉, 不爲不多矣.”〉 앞에서 “위아래가 모두 이로움만을 논한다면 나라는 위태로워진다”라고 한 맹자의 말은 여기에 이르러 더욱 직접적이고 절박해집니다. 사실상 ‘위아래가 이익만을 취하려고 하면 군주 당신이 위험해진다’라는 말이지요. 만약 군주 자신이 이런 살해와 약탈의 위험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으면 다음에 이어지는 충고를 마땅히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질면서 그 가족을 버리는 사람은 없고, 의로우면서 그 군주를 뒤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왕 역시 인의만을 말씀하셔야 하거늘, 어찌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未有仁而遺其親者也, 未有義而後其君者也. 王亦曰仁義而已矣, 何必曰利?”〉 15-6)


맹자는 전통주의자가 아닙니다. 그가 양 혜왕에게 ‘인의’를 주장한 이유는 인의가 옳다거나, 인의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고대 성인들의 가르침이라거나, 요임금과 순임금이 인의를 받들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군주 또한 마땅히 인의를 받들어야 해서가 아닙니다. 사실 맹자는 이익을 중시하는 양 혜왕의 태도에 맞추어 양 혜왕이 원래 알고 있던 이익을 부정하고, 만약 진실로 이익을 원한다면 ‘인의’야말로 올바른 답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맹자는 ‘이익은 이익이 아니다’라는 식의 역설적 표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추론은 여전히 역설적입니다. 그의 웅변은 상대방의 생각이 ‘옳은 것 같지만 아니’似是而非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전개되지요. 『맹자』의 웅변을 관통하는 핵심은 그 시기의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군주가 뒤떨어지고 쓸모없다고 여긴 인륜이나 인의 등 주나라 문화의 전통 가치를 당시 환경에 가장 적합한 관념으로 표현한 데 있습니다. 17)


맹자는 양 혜왕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는’ 국정 운영 방식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경작하는 때를 어기지 않으면 곡식은 먹을 만큼 생깁니다. 연못 전부에 그물 치지 않는다면 어류는 먹을 만큼 있습니다. 때에 맞추어 벌목하면 목재는 사용할 만큼 있습니다. 곡식과 생선이 먹을 만큼 있고, 목재도 사용할 만큼 있다면 백성이 삶을 도모하고 죽음을 슬퍼하는 데 아무런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삶을 도모하고 죽음을 슬퍼하는 데 아무런 아쉬움이 없는 것이 왕도의 시작입니다.” “不違農時, 穀不可勝食也. 數罟不入洿池, 魚鼈不可勝食也. 斧斤以時入山林, 材木不可勝用也. 穀與魚鼈不可勝食, 材木不可勝用, 是使民養生喪死無憾也. 養生喪死無憾, 王道之始也.”〉 즉 군주의 첫 번째 책임은 백성의 생산 패턴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입니다. 맹자가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백성의 생산 활동의 ‘때’를 망친다는 말은 곧 군주가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전쟁이야말로 가장 큰 피해이자 파괴입니다. 22-3)


춘추 시대에 수많은 제후국이 동시에 존재하던 상황은 전국 시대에 들어와 대다수가 정리되어 몇 개의 대국만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때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기본 추세는 남아 있는 국가가 점점 적어지고 최후에는 단 하나의 국가만이 남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겨우 버티고 있는 몇몇 국가는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자신이 마지막 남은 하나의 나라이길 바랐고, 각 군주는 자기가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우뚝 솟은 최후의 왕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王’은 이러한 수많은 전쟁의 종식을 묘사하는 특수한 용어로서 천하를 통일하고 마침내 왕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왕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떤 조건 아래서 ‘천하의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걸까요? 이것이 당시의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절박하기 이를 데 없는 정치 의제였습니다. 맹자가 제시한 ‘천하의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정상으로 돌아감입니다. 백성이 정상적인 방식으로 생산하고 정상적으로 살게 하는 것뿐입니다. 24)


마지막으로 맹자가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옛말에 ‘어진 사람은 적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왕께서는 이 말을 의심치 마십시오.” “故曰 ‘仁者無敵.’ 王請勿疑.”〉 전쟁의 관건은 무슨 무기를 사용하는지, 어디에서 전투를 치르는지에 있지 않습니다. 백성이 잘 지내느냐 잘 지내지 못하느냐에 달린 것이지요. 잘 지낸다면 그들은 자신이 일궈 놓은 생활을 귀중하게 여기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국가를 지키려 들 겁니다. 하지만 사지에 사는 듯 지낸다면, 그들은 현재의 상황이 바뀌기만을 한마음으로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仁者無敵”(인자무적)의 본래 뜻은 ‘어진 사람과 맞서 적이 되려는 사람은 없으므로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입니다. 맹자는 이 말을 웅변의 맥락에 따라 ‘어진 사람은 적수가 없으므로 어디에서든 항상 이긴다’라는 뜻으로 절묘하게 바꿔, 양 혜왕에게 마치 비현실적으로 멀리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이 답을 의심하지 말고, ‘인정’仁政의 엄청난 우세를 믿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0)


당시 사람들은 인의가 과거의 정치 원칙이지, 여러 나라가 격렬하게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나온 규범이 아니기 때문에 부국강병이라는 현실의 요구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오히려 그 유창한 웅변으로 2천 년 뒤에 살고 있는 우리마저 이 이치에 내재된 열기를 느끼게 합니다. 맹자는 인의가 부국강병에 방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부국강병과 무관하지도 않으며, 반대로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제일 좋은 방법, 심지어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인의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부국강병을 실현할 수도 없고 수많은 후유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어찌 논변을 좋아하겠는가?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일 뿐이다.” 予豈好辯哉, 予不得已.〉 그는 반드시 논변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갖가지 주장이 어지럽게 펼쳐지는 전국 시대의 환경에서, 한층 더 쉽게 이해되는 전통주의와 현실주의의 관점을 넘어, 군주의 귀를 사로잡을 기회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31-2)


2 왕업王業을 향한 큰길


맹자는 양나라를 떠난 후 제나라에 도착했고, 대화하는 상대도 제나라의 선왕宣王으로 바뀝니다. 〈제 선왕이 물었다. “제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의 일을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맹자가 대답하였다. “공자孔子의 제자 중 제 환공과 진 문공의 일을 말하는 이가 없어 후세에 전해진 바가 없고 신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부득이 말하자면, 그럼 왕에 대한 것은 어떻습니까?” 齊宣王問曰 “齊桓, 晉文之事, 可得聞乎?” 孟子對曰 “仲尼之徒, 無道桓文之事者, 是以後世無傳焉, 臣未之聞也. 無以, 則王乎?”〉 제 선왕은 분명하게 맹자에게 묻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제 환공을 본받아 이 시대에 제 환공과 진 문공 같은 패업을 다시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 매우 겸손해 보이는 맹자의 말에 담긴 의미는 이러합니다. ‘이보시오. 유가에서는 패업 따위는 논하지도 않습니다. 나와 이야기하려면 마땅히 좀 더 높은 목표와 기상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니오! 말하고자 한다면 나는 ‘왕 노릇’만을 논할 것이외다!’ 37)


〈(맹자가) 말하였다. “왕께 자신이 삼천 근은 들 수 있지만 깃털 하나는 들 수 없고, 짐승의 가는 털끝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눈이 밝지만 수레에 실린 장작은 볼 수 없다고 아뢰는 사람이 있다면, 왕께서는 그 말에 동의하시겠습니까?” 답하였다. “아니요.” 曰 “有復於王者曰 ‘吾力足以擧百鈞, 而不足以擧一羽. 明足以察秋毫之末, 而不見輿薪.’ 則王許之乎?” 曰 “否.”〉 〈“지금 왕의 은혜가 금수에는 이르면서도 공덕이 백성에게 다다르지 못함은 어찌 된 일입니까? 깃털 하나를 들어 올리지 못하는 것은 그 힘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레의 장작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 눈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보호받지 못하는 것은 은혜를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왕이 왕 노릇할 수 없다 함은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今恩足以及禽獸, 而功不至於百姓者, 獨何與? 然則一羽之不擧, 爲不用力焉. 輿薪之不見, 爲不用明焉. 百姓之不見保, 爲不用恩焉. 故王之不王, 不爲也, 非不能也.”〉 42)


송명대에 ‘리’理를 중심으로 하는 유학 이론에서는 맹자를 논할 때 특별히 ‘심학’心學을 내세웁니다. ‘마음’心은 『맹자』에서 확실히 자주 언급되는 단어이며, 핵심 관념입니다. 맹자가 말하는 마음이란, 지금 현재 우리가 말하는 ‘느낌’에 가까운 것으로 인간의 내적인 부분과 세상의 외적인 부분이 서로 맞닿은 지점입니다. 마음은 한편으로 외부의 자극을 받아 생겨난 느낌으로 내부와 외부의 연결을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느낌을 겉으로 표현함으로써 타인에게 전달하거나 옮겨 또 다른 층의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만듭니다. 인간은 마음을 전달하고 감응하며, 나아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를 넓히는 것’의 근본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모두 마음을 가지고 있어 인의를 가진 군왕을 알아보고 선택할 수 있으며, 인의를 가진 군왕을 지지하고 그에게 달려가 의지할 수 있습니다. 백성이 몰려와 의지하는 군주가 어떻게 ‘천하의 왕 노릇’을 하지 못하겠습니까? 44-5)


(정복 전쟁을 통해 '크게 바라는 것'所大欲을 이루고자 하는) 제 선왕의 생각이 터무니없고 불가능함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맹자는 그에게 올바른 방법은 무엇인지 곧바로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역시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 왕께서 인정仁政을 베푸신다면 천하의 선비는 모두 왕의 조정에 서기를 원하고 농부는 모두 왕의 땅을 경작하길 원하고 상인은 모두 왕의 도시에 재물을 두길 원하고 나그네는 모두 왕의 길을 출입하길 원하며, 천하에 자신의 군주를 괴로워하는 모든 이가 왕에게로 달려와 호소하길 원할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누가 이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蓋亦反其本矣. 今王發政施仁, 使天下仕者皆欲立於王之朝, 耕者皆欲耕於王之野, 商賈皆欲藏於王之市, 行旅皆欲出於王之塗, 天下之欲疾其君者, 皆欲赴愬於王. 其若是, 孰能禦之?”〉 핵심은 ‘근본으로 돌아감’에 있습니다. 무력과 전쟁은 말단임을 확실히 이해하고 무엇이 근본인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인정仁政을 베푸는 것’, 이것이 근본이지요. 48)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 편에서, 맹자는 세자였던 등 문공을 만났을 때, 그에게 ‘인성의 선함’의 이치를 설명하고, 그 화제 내내 요임금과 순임금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선정’善政은 ‘인성의 선함’과 연관되어 나온 것입니다. 맹자는 “인성의 선함을 논”하며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을 믿었는데, 이는 그의 이론상 논리적으로 필요합니다. 선정을 펼쳐 선량한 사회를 만든다면 무엇에 근거해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선’善에 대해 가진 판단과 그 ‘선’에 대한 바람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사물에 똑같이 아름답다는 감정을 느끼고 똑같이 아름다운 기대를 가지는 것, 이것이 ‘인성의 선함’에 대한 증거입니다. 선善을 누리고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람은 가장 보편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공통점을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공공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개개인의 마음속에 깃든 선에 대한 인정과 바람과 기대를 실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호응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지 압니다. 52, 54-5)


문제에 부딪혔을 때, 병을 마주하였을 때, ‘병세가 이렇게 심각한데 내가 뭘 어쩌겠어?’와 같은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맹자는 극력 반대합니다. 위중한 병세는 이따금 그 병을 계속 앓게 하는 핑계가 되지요. 『맹자』 「이루 상」에 있는 단락입니다. 〈“스스로 해치는 자와는 말할 수 없고 스스로 저버린 자와는 일할 수 없다. 예와 의가 아닌 것을 일러 스스로 해쳤다고 한다. 내 자신이 인에 머무르고 의로 말미암지 못하는 것을 일러 스스로 저버렸다고 한다.” “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 言非禮義, 謂之自暴也. 吾身不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 이 부분이 바로 성어 ‘자포자기’自暴自棄의 유래입니다. 맹자에게 “스스로 해친다”라는 말은 예와 의를 믿지 않고 반대하는 것이며, “스스로 저버리다”라는 말은 인과 의의 원칙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며 일을 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의지도 없을뿐더러 그렇기 때문에 건강한 생활로 돌아갈 기회조차 없어집니다. 55-6)


3 어둠 속의 횃불


맹자는 전국 시대의 사상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병폐를 예리하게 지적해 냅니다. ‘백가’百家라고 불린 전국 시대의 사상은 각자 다른 주장을 내세웠지만, 대부분 ‘하나만을 고집해’ 도드라진 하나의 원칙을 문제 해결의 만병통치약으로 삼았습니다. 첫째, 당시의 형세가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전쟁과 살육이 대단히 큰 고통을 불러왔습니다. 민심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원했지만, 복잡한 분석을 들을 인내심은 없었습니다. 둘째, 제각기 다른 사상 간의 경쟁이 격렬해지면서 각 학파의 사상가는 군주와 백성의 주의를 끌고자 자연스럽게 핵심을 과장하고 효과를 강조하는 책략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허행은 농사의 중요성을, 양주는 자기 보호의 중요성을, 묵자는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부풀렸지요.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만들어진 사회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70-1)


『맹자』 「진심 상」의 첫 번째 구절입니다. 〈맹자가 말하였다.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본성을 안다.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 그 마음을 보존하고 그 본성을 길러 이로써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 일찍 죽는 것과 오래 사는 것은 둘이 아니니 몸을 닦은 후에 기다리고 그로써 명을 세운다.” 孟子曰 “盡其心者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殀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 이 짧은 단락에는 맹자 사상의 몇 가지 핵심적인 개념이 집중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즉 “마음”心, “본성”性, “하늘”天, “명”命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건, 어떤 직업과 지위를 가졌건, 어떤 능력이 있건, 어떤 인격의 소유자이건 간에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맞닥뜨림, 그것이 ‘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명’을 대하는 기본 태도는 “그 바름을 순종하여 받아들이는” 자세여야 합니다. 비록 나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지혜를 사용하고 조심히 행동하여 될 수 있는 한 불행한 부딪힘을 피해 보는 것이지요. 75-6)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는 맹자가 ‘본성’과 ‘명’을 구분 짓는 단락이 있습니다. 〈맹자가 말하였다. “맛에서 입, 색에서 눈, 소리에서 귀, 냄새에서 코, 편안에서 사지는 본성이나, 명이 있어 군자는 그것을 본성이라 하지 않는다.” 孟子曰 “口之於味也, 目之於色也, 耳之於聲也, 鼻之於臭也, 四肢之於安佚也, 性也, 有命焉, 君子不謂性也.”〉 이렇게 무엇을 먹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어떠한 편안을 느끼는 가장 낮은 단계의 오감은 외부 조건에 의지합니다. 자기가 장악하고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비록 내 몸에 감각 기관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저절로 갖춰진 것이고 있어야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절반뿐입니다. 받아들이는 쪽이 나 자신이며, 자극하는 쪽은 나 자신이 아닌 ‘명’이 결정합니다. 우연하고, 주관적으로 배치되지 않은 부딪힘 말입니다. 그리하여 맹자는 “명이 있어 군자는 그것을 본성이라 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76-7)


〈“부자 사이의 인仁, 군신 사이의 의義, 주객 사이의 예禮, 현명한 자의 지혜, 천도天道의 성인聖人은 명이나, 본성이 있어 군자는 그것을 명이라 하지 않는다.” “仁之於父子也, 義之於君臣也, 禮之於賓主也, 智之於賢者也, 聖人之於天道也, 命也, 有性焉, 君子不謂命也.”〉 앞과는 반대되는 구절입니다. 이를 대조해 보면 맹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관의 즐김은 외부 자극과 현실의 조건에 제약을 받습니다. 이렇게 구하지만 꼭 구해서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은 ‘명’의 성분이 ‘본성’보다 더 높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시간과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고, 또 낭비해서도 안 됩니다. 인, 의, 예, 지는 비록 우리가 반드시 실현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내재적으로 외부 조건에 통제되지 않는 기본 요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스러운 도리로, 자연스러운 힘이 인간을 인, 의, 예, 지를 실현하는 바른 방향으로 끌어당깁니다. 그러므로 외부 조건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내재된 ‘본성’에 따라 노력하면 됩니다. 77-8)


〈맹자가 말하였다. “만물이 모두 내게 갖추어져 있다. 자신을 되돌아보아 성실히 한다면 기쁨이 이보다 큰 것은 없다. 힘써서 서恕를 행하면, 인仁을 구하는 데 이보다 더 가까운 것은 없다.” 孟子曰 “萬物皆備於我矣. 反身而誠, 樂莫大焉. 强恕而行, 求仁莫近焉.”〉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라는 말은 모든 사물과 상황의 원칙과 도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애초부터 나에게 이미 주어져 있으니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가장 큰 즐거움은 본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아 마음이 편함’心安理得이기도 합니다. 즉 나의 행동과 나의 내부에서 직관적으로 일어나는 당위 판단이 하나로 일치하여, 머뭇거림이나 꺼림칙함, 불안이 없는 상태는 당연히 즐겁겠지요. 이 방법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보자면, “힘써서 서恕를 행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자각을 가지고 노력하여 타인과의 공감대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78-9)


‘마음을 다함’을 통해서 ‘본성’을 이해했다면, 이와 동시에 ‘하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은 우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고, 또 어떤 것은 나중에 들어온 외부의 자극과 영향입니다. 원래 있었던 것과 외부에서 들어와 원래 있었던 것과 섞이고 원래 있었던 것을 가려 버린 것을 명확하게 분별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보존하고 그 본성을 길러 이로써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 일찍 죽음과 오래 삶은 둘이 아니니 몸을 닦은 후에 기다리고 그로써 명을 세운다.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殀了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 내부의 진실한 감정과 성정을 잘 지키고 기르는 것이 ‘하늘’에 호응하고 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가는 생각할 필요도, 염두에 둘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그 마음을 보존하고 그 본성을 기르는” 방식으로 계속 수양하는 것이 ‘명’을 대하는 가장 올바르고 발전적인 태도입니다.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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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 관념 속 역사
데이비드 아미티지 지음, 김지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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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내전에 맞서기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다는 점은 내전이 인류가 벌이는 모든 종류의 분쟁 가운데 가장 파괴적이고 가장 파급력 있는 분쟁이라는 평판을 양산했다. 여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기원전 1세기 로마 내전이 한창일 때, 17세에서 46세 사이의 남성 시민 중 약 25퍼센트가 무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1700년 뒤인 1640년대에 벌어진 잉글랜드 내전의 인구 대비 사망자 비율은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의 사망자 비율보다 더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미국 내전 당시 발생한 사망자 수는 인구수에 비례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발생한 미국인 사상자 비율보다 훨씬 높았다. 미국 남부와 북부의 사망자 수를 합친 추정치는 약 75만 명이었는데, 이는 오늘날 미국 인구 중 약 750만 명이 사망한 것과 맞먹는다.23 이 정도 규모로 벌어진 대량 학살은 가족을 갈라놓고, 공동체를 산산조각내며, 국가를 변형시킨다. 또한 이후 다가올 세기에 대한 상상력에 상흔을 남길 것이다. 15-6)


하지만 내전의 특성이 소프트웨어 속 오류가 아니라 우리를 구성하는 불가피한 부분, 즉 인간이 되도록 해주는 구성 요소라고 가정할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렇게 가정하는 것은, 우리가 끝없이 내전을 겪으며 칸트가 약속한 영원한 평화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비관적 운명을 스스로 부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평화라는 필연적 약속을 부여받기보다 끝없는 내전을 운명적으로 선고받았다는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해 이 책에서는 내전의 도전에 맞설 수 있는 역사적 도구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 책 전반에 걸쳐 내전은 영원하지 않으며 설명 불가능한 것도 아님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역사적 이해와 맥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공화정 로마의 혼란스러운 기원에서부터 논쟁의 여지가 있는 현재, 그리고 이러한 당혹과 논란이 줄지 않을 미래에 이르기까지 모두 역사적 개념과 닿아 있다는 것이다. 16)


1부 로마로부터 이어져온 길


1장 내전 창안하기: 로마 전통


그리스인은 그들이 ‘폴레모스polemos’라고 불렀던 전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명히 이해하고 있었다(현대 다수 언어권에서 ‘격론을 벌이는’이라는 호전적인 의미를 내포한 ‘polemical’은 이 단어로부터 유래했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자신의 공동체 내에서 벌어지던 ‘전쟁’을 로마인이 생각하던 전쟁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부 분쟁을 바라보는 로마인과 그리스인이 개념적 차원에서 메워질 수 없는 큰 틈을 두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실제로 로마 작가들은 로마가 겪던 정치 분열의 기원을 “민주주의”와 같은 위험한 그리스 개념의 유입으로부터 찾곤 했다. 그리고 1세기에 그리스어로 글을 썼던 로마 역사가들은 자연스럽게 그리스 용어를 사용해 로마 내전을 묘사했다. 하지만 이러한 연속성이 있었음에도, 로마인은 자신이 무언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명칭을 필요로 했다. 바로 내전, 라틴어로 벨룸 키빌레bellum civile였다. 35)


로마인에게 전쟁은 전통적으로 상당히 구체적인 상황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전쟁은 정당한 사유로 인해 외부의 적과 싸우는 무력 분쟁armed conflict이었다. 이러한 전쟁과 ‘내전’의 극명한 차이는 내전에서 마주하는 적은 너무나 친밀해서 흡사 가족처럼 여겨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데 있었다. 상대편 사람들이 곧 동료 시민들cives이었던 것이다. 로마인들이 품고 있던 정당한 전쟁 개념에는 자기방어를 한다는 정당한 명분은 물론 합법적 적을 상대한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어, 동료 시민들과의 전쟁은 명백히 이 개념에 배치되었다. 이렇게 생겨난 내전 개념에는 어떤 역설이 의도적으로 담겨 있었다. 내전은 실제로 적이 아닌 적에 맞서 싸우는, 전쟁이 될 수 없는 전쟁이었던 것이다. 로마 내전 기간에 이뤄진 선전 대결에서, 양측 모두는 각자 자신이 내세운 명분이 옳음을 대대적으로 알리며 지지를 구함과 동시에 정당한 이유에 따라 싸운다는 전통적인 정전론적 이해에 이 내전이 부합함을 주장했다. 35-6)


그리스인은 정치 영역에서 다른 무엇보다 조화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폴리스를 분열시키는 악惡을 그리스인은 스타시스stasis라 명명했다. 스타시스는 영어 단어 ‘static’의 어원으로, 기본적 의미 중 하나는 ‘움직임이 없는 상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단어는 ‘입장’ 혹은 ‘태도’를 뜻하기도 해, 정치적 분쟁에서 ‘한 입장에 서 있는’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폴리스의 통합을 방해하거나 공동의 목적을 거스르는, 적대적이며 분열을 초래하는 정치적 입장으로서의 스타시스는 내분 및 당파 갈등의 유사어이자, 추후 내전이라고 불릴 상황과 유사한 상황을 가리키는 단어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유사하다고 해서 실제로 동일한 상황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아테네인에게는 정치가 통치술, 즉 시민에게 명예를 부여하고 관직을 수여하는 방법인 한편, 사적 이익이 상충하지 않도록 조정하여 유혈 사태 없이 서로가 공적 이익을 추구하도록 하는 수단이었는데, 이를 통해 사실상 스타시스를 해결하고 그 상황을 대체했다. 39-40)


따라서 그리스인에게 스타시스는 실제 물리적 저항 행위가 아닌 당시의 어떤 심적 상태 정도의 의미로 남아 있었다. 스타시스가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전쟁으로 인해 스타시스가 나타날 수도 있었지만, 그 자체가 실제 전투를 수반하지는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스타시스는 실제 공격이나 전투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우리가 대치 국면이나 교착 상태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그리스인에게〕 스타시스는 ‘시민 간civil’의 문제도 아니었고, 필연적으로 ‘전쟁’ 발발로 이어지는 상황도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또한 스타시스 엠필로스stasis emphylos라는 용어를 썼는데, 이는 혈연과 친족으로 묶인 공동체 내에서 나타난 내분과 분열을 의미했다. 이때 필로스phylos는 가족 혹은 씨족을 뜻한다. ‘전쟁’(즉 폴레모스polemos)이라는 단어는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내분까지도 포함해 가장 위험한 불화를 가리킬 때에야 쓰였다. 40-1)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연이어 일어났던 로마 내전은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가 기원전 88년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로마에 진격했던 때부터 시작되었다. 술라가 일으킨 역쿠데타는 대규모의 유혈 참사 없이 끝났는데, 이는 양측 모두 도시 내에서 군인과 시민이 충돌하지 않도록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술라가 취한 조치가 잘 정리되었을지는 몰라도, 이는 확실히 로마의 성쇠에 전환점이 되었다. 즉시 나타난 영향이 재앙적이지는 않았다. 다만 술라가 (본래 한정된 기간에만 비상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부여받았지만, 그가 임의로 연장했던 직위인) 독재관으로서 향후 벌인 행위가 이뤄진 뒤에야, 그가 애초에 취했던 조치가 시민 간 폭력이 이뤄지는 순환 주기의 시작을 알린 일이었음이 명확해질 수 있었다. 그 주기는 제국을 이루며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황제에 오른 기원전 27년이 되어서야 끝을 맺을 수 있었다. 53)


# 술라의 대응

1. 첫 번째 분쟁에서 술라는 자신이 집정관의 권한으로 적으로부터 공화국을 지키고자 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곧 술피키우스, (이미 아프리카로 도망간) 마리우스, 그리고 협력했던 측근 열 명을 공공의 적hostes publici이자 따라서 범법자라고 공표했다. 이중 술피키우스만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았다.

2 재차 분쟁이 발생하자 기원전 83년 봄 술라는 진군을 개시했고 이듬해 그의 군대가 로마에 도착할 때쯤 적군(집정관 킨나와 장군 마리우스)은 모두 로마를 떠나 있었다. 로마를 장악한 술라는 살생부를 작성해 주요 반대파는 숙청하거나 재산을 몰수했고, 그 후손은 공직에 나서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술라에게는 그가 내전에 〔인간이 일으키는 현상으로서〕 인간적 형태를 부여했고 로마 세대에게 그 특징들을 규정해줬다는 점이 인정되어야 한다. 역사가 아피아노스Appian(약 95~약 165)가 제시한 견해는 내전이 정확히 어떠한 전쟁인지를 이해하는 후대의 관점을 형성토록 했다. 그가 힘주며 언급했듯,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가 함께 술라가 포룸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막아섰을 때, “정적 간에 투쟁이 일어났고 이는 로마에서 처음 벌어진, 시민 간 불화 정도로 가장될 수 없는, 트럼펫이 울리고 군기가 휘날리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전쟁이었다. (…) 이런 점에서 시민 분쟁이 초래하는 사건은 점차 경쟁과 쟁론에서 살인 행위로, 살인 행위에서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는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군대가 마치 적대적 세력을 대하듯 모국을 처음으로 공격했던 전쟁이었다.” 이는 내전이 단지 하나의 머릿속 개념이 아닌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으로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55)


내전의 눈에 띄는 표식은 트럼펫과 군기였고, 내전의 수단은 재래전이었으며, 내전의 목적은 공화국의 정치적 지배권 확보였다. 로마인은 내전을 구성하는 두 요소를 처음 제시했는데, 이 두 요소로 인해 이후 등장하는 내전 개념 간에 일종의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 형성되었다. 그중 하나는 내전이 단일 정치 공동체 경계 내에서 벌어진다는 개념이었다. 로마의 경우 이 공동체는 계속 확장해, 처음에는 로마 도시만을 포함하다가 점차 이탈리아반도, 반도를 넘어 지중해 분지까지 확대되었는데, 이는 로마 시민권 자체에 점차 더 많은 사람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전이 일어나는 범위에 따라 공동체 경계가 확장되는 일은 이후 세기에도 반복되었고, 우리 세대가 되어서는 그 정도가 정점에 다다라 ‘지구적 내전’이란 개념을 낳았다. 〔다른 한 요소는〕 바로 내전에서는 서로 대립하는 당사자가 적어도 둘은 있어야 하며, 이중 한쪽은 공동체를 관리할 정당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개념이었다. 56)


2장 내전 기억하기: 로마적 상상


이전까지 내전은 “개선식으로 이어질 수 없는 전쟁”이라고 루카누스가 언급했으며, 로마 논평자 대부분도 이에 동의했었다. 로마에서 이뤄지던 개선식은 외적外敵에 맞선 정당한 전쟁에서 거둔 승리에 보답하는 의미로 진행되었고 그 관례는 계속되었다. 승리를 거둔 군대의 병사들은 자신들을 이끈 장군을 임페라토르imperator라 칭했다. 그 뒤 장군은 원로원에게 각종 감사제를 열 수 있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 보통 적절한 때에 정식으로 개선식이 허가되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아프리카와 스페인에서 있었던 “실제로는 내전이었던”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올렸고, 이후에 카이사르는 갈리아, 이집트, 폰투스, 아프리카에서 (시민이든 외국인이든 관계없이) 적에게 거둔 승리는 물론 폼페이우스의 아들들과 싸워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식을 올렸다. 이는 내전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금기하던 사항을 명백히 위반하는 일이었다. 64-5)


# 폼페이우스는 북아프리카, 스페인, 갈리아에서 반란군을 진압한 것은 물론 기원전 82년 시칠리아에서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Gnaeus Papirius Carbo 군을, 기원전 77년에는 에트루리아Etruria에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Marcus Aemilius Lepidus 군을 진압했다.


옥타비아누스가 황제에 오르며 〔로마는〕 분쟁에서 벗어나, 평화가 깃들고 안정이 찾아온 ‘아우구스투스’ 시대라는 찬사를 듣는 일시적 휴지기에 들어섰다. 하지만 기원후 14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난 뒤 수십 년이 지나자 내전을 다루는 저작이 넘쳐났고, 이어 내전 자체도 되풀이되었다. 제국 군주제를 반대하던 이들은 향수에 젖어 과거를 회상하며, 부패가 엄습하기 전까지 공화정 시기를 공공선the res publica이 유지되던 시대였다고 여겼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전 세월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퇴색되어갔다. “노년층 중 대부분은 내전 기간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공화정을 겪어본 사람 중 누가 남아 있는가?”라며 역사가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아우구스투스 통치 말기까지 살아 있던 사람들에 대해 기술하며 애통해했다. 여기서 타키투스의 설명에 따르면, 전제專制는 다른 방식으로 내전이 지속되는 것이었다. 69)


살루스티우스는 로마의 운명에 대전환이 일어나게 만든 도덕적 결함을 지적했는데, 그 결함은 로마가 거둔 성과에 따른 예기치 않은 결과였다. 기원전 146년 로마의 적이었던 카르타고가 패배하면서 승리한 자의 옷 끝자락에 타락을 묻혔던 것이다. 살루스티우스는 그 이전에도 “시민과 시민이 싸웠”지만, 이는 오직 미덕에 따르는 명예를 구하기 위한 다툼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탐욕과 야심이 커지며 “운명은 잔혹해지기 시작했고 모든 것을 파괴했다.” 술라가 로마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시아에서 벌였던 군사 작전에서 취한 호화로운 전리품을 매개로 부대 병사들의 충성심을 매수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내전과 타락은 함께 진행되어 카틸리나가 술라의 뒤를 따라 “내전이 벌어지기를 열망하는” 타락한 병사들의 도움을 얻어 공화정을 전복시키고자 했던 때까지 로마의 도덕적 견고함을 차츰 약화시켰다. 76-7)


로마 대다수 역사가는 사회적 분쟁을 가져온 근원지가 다른 곳에 있었다고 보았다. 바로 (로마 정치를 ‘귀족주의자’와 ‘민주주의자’ 부류로 구분했던) 그라쿠스 형제, 즉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가 기원전 1세기에 추진했던 개혁을 지목했던 것이다. 키케로,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Velleius Paterculus, 아피아노스, 플로루스 모두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살해되었던 기원전 133년을 로마가 돌이킬 수 없게 갈라서게 된 첫 시기로 보았다. 이에 반해 바로Varro는 동생 가이우스가 죽은 기원전 121년을 갈등이 최고조되었던 때라고 주장하며, 가이우스야말로 “시민체에 머리가 두 개 달리도록 만들어, 시민 간 불화의 근원”을 야기했다고 말했다. 타키투스는 『역사』에서 민중 호민관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러한 내분은 “내전을 위한 시범 연습”과도 같았다고 적어두었다. 또한 키케로는 귀족optimi을 지지하던 측과 인민populares에 동조했던 측의 분열이 로마 공화국 내 배반과 불화의 씨를 심었다고 언급했다. 78)


내전에 빠지기 쉬운 로마의 모습을 단연코 가장 포괄적으로 다뤘던 서사는 기독교적 설명 방식으로 이뤄졌는데,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권위 있는 어조로 전했던 이야기다. 많은 저술 목적 중 하나는 도대체 왜 로마가 쇠퇴했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었다. 기독교에 반대하던 이들은 새로운 종교가 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만약 이교도 신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면, 로마는 침략자들과 싸워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독교 때문에 로마가 약해졌고 이에 고트족the Goths에게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혐의를 반박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로마 제국은 도덕적으로 쇠락했고 분열로 이어지기 쉬운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만약 로마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된 시기가 예수가 태어났을 때보다 한참 전이었음을 아우구스티누스가 보여줄 수 있다면, 기독교는 로마가 쇠퇴하고 몰락하도록 한 원인이 될 수 없었다. 80-1)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교異敎 시절 로마는 “공동체 내부에서 이루어졌기에 더 극악무도했던 악행”이 연이어 펼쳐진 시기였다. 살루스티우스는 정확히 아우구스티누스가 필요로 하는 증거를 제시해주었는데, “역사서에서 살루스티우스는 부도덕함은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뒤 찾아온) 번영으로부터 발생했고, 이는 결국에는 내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라쿠스 형제 때부터 술라 시기까지 로마에서 있었던 폭동 선동은 “내전으로까지 이어졌는데”, 그 도시의 신들은 이를 막고자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신들은 종종 시민들끼리 서로 싸우도록 선동하고 그렇게 다툼을 벌여도 되는 구실을 주는 듯했다. 로마인들은 〔조화를 상징하는〕 콩코르디아Corcord 여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웠는데, 아우구스티누스가 비꼬듯 적어두길, “콩코르디아 여신은 로마인들을 버리고 떠났으며, 대신에 〔불화의 여신인〕 디스코르디아Discord가 무자비하게 이들을 내전으로까지 이끌었다”. 81)


2부 근대 초기 교차로


3장 야만적인 내전: 17세기


1604년에 휘호 흐로티위스는 로마 법 사상을 기초로 하여 전쟁 자체는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전쟁은 절대 규범적인 용어가 될 수 없고, 단지 “무장한 적에 맞서 무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기술적인 용어일 뿐이다. 〔따라서 전쟁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어떤 속성을 띠는지에 따라 해당 전쟁이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가 결정된다. 너무나도 확고하게 흐로티위스는 사적 전쟁─국가의 의지에 따라 벌이는 공적 전쟁 이외의 모든 전쟁─을 벌이는 것에 반대했고 사적 전쟁을 치르며 “국가가 위험한 소요 사태나 혈전”에 휘말려 치르는 대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에 흐로티위스는 플루타르코스나 키케로가 남긴 지혜를 따를 것을 권했다. 심지어 찬탈자usurper를 경험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흐로티위스는 “내전을 벌이는 것은 비합법적 정부를 불가피하게 따르는 것보다 더 나쁘다…… 어떠한 상태에 있더라도 평화는 내전보다 낫다”고 말했다. 95-7)


홉스는 국가 간 전쟁 외 두 전쟁 형태를 구분했다. 하나는 내전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상태에 있는 개인들 간 경쟁이다. 내전은 정의상 코먼웰스civitas〔즉 국가〕가 세워진 이후에나 벌어질 수 있었다. 그 이전에 존재했던, “시민사회 밖 인간이 처한 조건(즉 누군가는 자연상태라고 칭할 조건)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파벌은 그 종류가 무엇이든 필시 그런 분열을 일으키는 근원일 수 있었다. 특히나 “파벌을 형성한 사람들이 화술이나 모의를 통해 취할 수 없는 것을 무력으로 쟁취하고자 할 때 내전이 발생한다.” 파벌은 곧 “코먼웰스 내 코먼웰스civitas in civitate”가 생긴 것과 같았다. 어떤 군주든 그가 통치하는 국가 내 파벌을 용인하는 것은 “성벽 안에 적을 들여놓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는 전쟁이었는데 여기서 시민들은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었다. 즉 로마인이 관용적으로 쓰던 용어를 따르자면, 진정한 내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99-100)


로크는 전쟁 상태를 “흥분하고 성급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차분하고 안정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생명에 위해를 가할 의도”가 존재하는 상태로 정의했다. 이것은 전쟁 상태를 타자가 지닌 정념 속에서 항구적인 불안을 느끼는 상태로 정의했던 홉스식 전쟁 상태와는 상당히 달랐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민사회에 들어간다. 일단 국가 공동체에 속하면 인간의 안전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각자가 지닌 정념이나 외부의 적이 아닌, 바로 통치자가 지니는 공권력의 불법적 사용이다. 이럴 경우 정당하게 저항할 수 있다. 그러한 통치는 “인민이 세우고 그 외의 누구도 세울 수 없는 권위를 파괴하며, 인민이 권위를 부여하지 않은 권력을 도입하여 실제로 전쟁 상태를 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한 통치자는 자신을 애초에 인민 평화의 보호자와 후견인으로 만들어준 바로 그 사람들을 전쟁 상태에 놓이도록 하기에 엄밀히 말해, 그리고 아주 악랄하다는 의미로 반란자Rebellantes가 된다.” 103-4)


로크는 내전을 흐로티위스가 ‘혼합’ 전쟁이라 칭했을 법한 전쟁으로 이해했는데, 다만 ‘공적 권위’를 지닌 측이 통치자가 아닌 인민이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내전은 양측 모두가 정당해질 수 없는 종류의 전쟁이었다. 이런 점에서 로크는 심지어 홉스보다 더 급진적이었으며, 도시civitas 내에서 무장한 동료 시민들끼리 벌이는 싸움을 내전으로 정의하던 로마식 전통마저 거부했다. 로크는 내전이 국가 공동체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도록 하며, 시민사회를 무너뜨리는 (그래서 시민의식civility 자체로부터 이탈한) 상황을 수반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정당한 권위가 다시 회복되기 전까지 지속된다고 보았다. 로크는 그러한 복고가 1688년에 이뤄졌다고 확신했는데, 이를 두고 “우리를 가톨릭과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나도록 인도해줄 오렌지 공公─명예혁명이라고 하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정치적 조치를 통해, 아내 메리Mary와 함께 왕위에 오른 인물─의 왕림”에 따른 결과라고 칭했다. 104-5)


18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유럽 내에서 새로운 서사가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서사도 여전히 잇따라 벌어진 정변政變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를 통해 마찬가지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있었지만, 이에 더해 이제는 그 미래가 어느 정도 이상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충분히 제시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관에서는 연속된 내전보다는 연이어 벌어진 혁명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뤘는데, 이 이야기는 뿌리 깊은 갈등이 아닌 근대적 해방을 논했다. 이 서사는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에서부터 시작해서 역사를 통해 전개되었다. 이러한 서사가 형성되면서 과거를 잊어버리도록 하는 행위가 동반되었다. 혁명이 포함된 새로운 범주가 의도적으로 고안되었는데, 이는 어느 정도는 내전 기억을 잠재우고 조금 더 건설적이고, 희망적이며, 진보적인 자세를 갖도록 하는 무언가로 대체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로마의 내전 개념은 조용히 떠나지 않을 것이었다. 혁명의 시대는 다시금 내전의 시대가 될 것이었다. 110)


4장 혁명 시대에 벌어진 내전: 18세기


혁명과 내전이 서로 반대된다고 보는 관점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 독일의 위대한 정치 개념사가 라인하르트 코젤레크Reinhart Koselleck에 따르면, 혁명은 18세기를 거치며 “내전과는 대조되는 개념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18세기 초만 하더라도 두 표현은 “서로 교차하여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동시에 완전히 배타적이지도 않았다.” 16~17세기 동안 유럽 전역에 걸쳐 나타난 파괴적인 종교 분쟁과 연관되어 있던 내전은 계몽을 지지하던 이들이 앞으로 더 이상 벌어지지 않도록 기도하던, 바로 그 재앙의 부류였다. 그에 반해 혁명은 인간이 활동하는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던 유용한 변화를 이끄는 힘과 동일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18세기 말에,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한, 비교적 명확한 이원성duality이 나타났다. 코젤레크는 “여러 면에서 보아, 그때”가 되어서야 “‘내전’은 스스로 무의미한 순환을 반복한다는 의미를 얻게 되었고, 혁명은 이러한 순환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는 시도”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112-3)


18세기 유럽 사상가들은 내전을 적어도 세 유형으로 구분했다. 각 유형을 ‘왕위 계승successionist’ ‘정권 교체supersessionist’ ‘분리 독립secessionist’ 내전이라 칭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분리독립 내전은 18세기 후반에 나타난 상대적으로 새로운 실제 현상이었다. 이를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쓰인 말로 보자면, “한 민족이…… 다른 민족과 맺어온 정치적 결합을 해체”하고자 할 때, “이는 지구상 존재하는 여러 세력 사이에서 자연법과 신법이 부여한 별개의 평등한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18세기 후반 이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선례를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1580년대 에스파냐 왕가에 맞선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선례가 없었다. 북아메리카 내 존재하던 영국 식민지가 영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냈던 1776년 이후가 되어서야 이 내전 유형은 급증하기 시작했고 법적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미국인들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내전 관념을 제공했다. 115-6)


미국이 지닌 운명을 내세우는 경건한pious 서사에 비교적 덜 매료된 최근의 역사학자들은, 미국혁명을 내전으로 여겨야 할지 또한 재고해왔다. 영국 병력 상당수가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이후, 혁명은 전면전full-scale war 양태를 띠었는데, 장군들이 모습을 보이고, 트럼펫이 울렸으며, 군기軍旗가 휘날렸다. 혁명은 유례없이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는데, 바로 외국인으로 확인되는 적이 아닌 국내 동족에 맞서 싸웠기에 그러했다. 특히 뉴욕과 사우스캐롤라이나처럼 첨예하게 분열된 식민지에서 벌어지던 지역 분쟁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더구나 그 분쟁은 일족은 물론 더 폭넓은 주민층을 분열시켜, 이른바 (영제국에 맞선 저항을 지지하는 이들인) 애국파Patriots와 비록 다른 측면에서는 정치적 입장이 다르고 인종적으로 다양할지라도 적어도 본국 국왕에 충성을 지키는 충성파Loyalists로 나뉘게 했다. 한 역사학자는 미국혁명을 두고 “그렇다면 이 일은 혁명인 동시에 내전이었다”고 결론지었다. 123-4)


1776년 7월 독립선언서는 공식적으로 실제 벌어진 일들을 “진실된 세계”에 전하며 “이 연합 식민지는 자유롭고도 독립된 국가이며, 또한 권리에 의거하여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영제국과 맺은 모든 정치적 관계는 전면적으로 단절되었고, 또 마땅히 단절되어야만 함”을 입증해 보였다. 선언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라보길, 영국은 이제 국제적 분쟁 한 측에 서 있던 당사자였고, 아메리카는 (두말할 나위 없이 복수 연합인) 미합중국으로 상대측에 놓여 있었다. 양자는 더 이상 동일한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부분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이로부터 양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동료 시민 혹은 앨저넌 시드니가 동일한 ‘시민 사회’라 칭한 사회 구성원도 아니었다. 아메리카 전쟁은 더는 페인이 1066년 이후부터 추정해서 매긴 아홉 번째 영국 내전이 아니었다. 독립선언서는 유럽 열강들에게 미합중국은 (실제로는 복수의 연합으로) 이제 상업을 개방하고 동맹을 맺을 수 있음을 알렸다. 130)


1789년 이전까지 혁명은 종종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자, 이미 정해져 있는 천체의 순환, 아니면 인간사에서 영구적으로 되풀이되는 일로 여겨졌었다. 잉글랜드 내전을 다룬 홉스가 쓴 대화편 『베헤모스』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1649년부터 1660년까지 영국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설명하며 이 관점을 전형적으로 내비쳤다. 그가 말하길, “나는 이 혁명에서 순환하는 움직임을 지켜봐왔는데, 바로 주권이 두 왕위 찬탈자인 아버지와 아들[올리버 크롬웰과 리처드 크롬웰Richard Cromwell]을 거쳐 작고한 왕[찰스 1세]으로부터 다시 그의 아들[찰스 2세]에게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결국 되돌아간다는 의미에서 혁명이었지, 사태를 전복시키는 의미에서의 혁명은 아니었다. 1789년 이후부터 복수로 제시되던 혁명들은 이제 단수로 혁명이 되었다. 이전까지 자연 발생적이고, 피할 수 없고, 인간의 통제 밖에 있는 사건이라 여겨지던 혁명이 이제는 도리어 자발적으로 계획하에, 반복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132)


혁명 상연을 위한 근대 각본이 1789년에 작성된 이후, 이 극은 전 세계에 걸친 무대에서 자주 재연되어왔다. 이후에 일어난 혁명들에서 초기 각본은 혁명이 내세우는 목적에 맞게 각색되었고, 매 상연마다 새로운 특성이 추가되었다. 이처럼 영향력 있는 평가를 받는 상황에서, 어떤 혁명이든 그 중심에는 내전이 자리한다고 찾아 나서는 행동은 노골적으로 반혁명적이라 비칠 수 있었다. 혁명에 반대하던 이들은 보통 혁명이 내세우는 정당성을 부정하고자 시도해왔는데, 이를 위해 기존 사회 및 경제 질서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어떤 시도에든 수반되는 폭력과 파괴를 강조했다. 어떠한 변환이 이뤄진다 하더라고 결코 그 희생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내전에 그와 같은 역행을 가져온다는 함축이 이제 부여된 상황에서, 혁명에 내전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일은 자유를 안겨주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것이라는 혁명에 내재한 잠재성을 약화시키는 행위로 보일 수 있었다. 133-4)


“지구적 내전의 전문 혁명가” 역할을 맡았던 레닌은 억압당하는 이들은 폭력적 수단을 통해서만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주장을 이어나갔다. 유럽 밖에 거주하는 민족들에게 전쟁은 제국주의에 맞서 민족 해방을 가져오는 도구였다. 이와 다른 주장은 단지 유럽식 국수주의European chauvinism에 불과했다. 사회주의는 전쟁을 없애지 않는다. 사회주의가 가져올 승리는 즉각적으로 이뤄지거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었다. 자본주의에서 탄생한 천자만태千姿萬態의 악惡을 완파하기 위해서는 많은 타격이 가해져야 했다. 또한 사회주의 혁명 자체가 전쟁과 결별할 수 없는 한, 혁명은 내전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게 되었다. “계급투쟁을 받아들이는 이는 내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내전은 모든 계급 사회에서 나타나는 자연적 현상이며, 어떤 조건하에서 불가피한 상황으로, 계급투쟁이 계속되고, 발전하며, 격화되면서 나타나는 일이다. 이는 벌어졌던 모든 위대한 혁명에서 그동안 확인된 바다.” 141)


3부 현재까지의 경로


5장 내전 문명화하기: 19세기


1863년 11월 19일 전몰자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행한 연설에서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이 미국 내에서 벌어졌던 분쟁을 ‘중대한 내전a great civil war’이라 표명하기로 했던 결정은, 1863년 당시에도 논쟁의 여지가 있었다. 그렇게 선언한다는 것은 곧 남부 연합이 벌였던 행동을 두고 북부 연방이 취했던 해석을 사실상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는 곧 남북 양측 전투원들이 동일한 정치 공동체를 이뤘던 구성원이었고, 여전히 그러하다는 점을 확증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정치 공동체는 바로 미합중국이었다. 또한 〔중대한 내전이라는〕 이름표는 당시 분쟁에서 무엇이 논쟁점이었는지 확연히 드러내주었다. 국민이 통합을 이루고 있는지, 헌법은 신성불가침한지는 물론 일방적인 분리 독립이 비합법적인지 등이 논쟁 대상이었다. 1865년 이후 어느 시기든 당시 분쟁을 ‘내전’이라 칭하게 된 것은 그러한 해석과 북부 연방이 지켜내고 옹호하고자 했던 원칙이 승리했음을 의미하는 결과였다. 147)


북부 연방과 링컨이 내세운 논리에 따르면, 연합이 내세운 분리 독립은 ‘반란’ 행위이며, 이를 진압하고자 벌였던 분쟁은 ‘내전’이었다. 그렇지만 링컨 자신은 분쟁 기간에 ‘내전’보다 ‘반란’이라는 용어를 거의 여섯 배나 많이 사용했다. 19세기는 전 지구적 연결망이 점차 강화되던 시기로, ‘내’전이라는 말에 담긴 고대적 경계성이 그 실질적 의미를 잃어가던 때였다. 게티즈버그 연설이 있기 1년 반 전에, 프랑스 소설가 빅토르 위고(1802~1885)는 그의 걸작인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1862)에서 범세계화된 세상에서 내전이 어떠한 변화된 영향력을 미칠지 고뇌하는 주인공을 등장시켰다. 소설 속 인물 마리우스 퐁메르시의 사색은 위고 자신이 내전과 다른 분쟁 사이 모호해진 경계를 지켜보며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링컨으로부터 빌려온 핵심적 구절인) “인류로 구성된 전체를 포괄하는 대가족”이라는 폭넓어진 무대에서, 내전과 외전을 나누는 그 어떤 구분도 급격히 그 의미를 잃게 되었다. 148-50)


전 지구적으로 발생했던 폭력은 19세기와 20세기 내내 지속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문제를 낳았다. 바로 내전을 문명화civilize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그 어떤 것도 내전을 통해 받은 정신적 충격을 완화시킬 수는 없었다. 정치 공동체는 찢어져 나갔고, 가족 내에서 반목이 벌어졌고, 친족 관계는 파괴되었고, 내전이 재발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으며, 승리한 쪽과 패배한 쪽 모두 수치심을 느꼈다. 17세기 이후 유럽 열강과 아메리카에 거주하는 유럽의 후손들은 분쟁 중 벌어지는 행위를 통제하여, 분쟁이 법에 의한 지배 아래 놓일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비유럽인을 대하는 방식은 상당히 다른 사안이 되었다. 즉, 내전의 법제화를 위한 노력이 가져온 유해한 부작용으로 인도적으로 다뤄질 사람과 그렇지 않을 이들 간 격차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시민성civility과 비시민성incivility, 즉 문명 영역과 그 영역 밖에 있는 야만을 구분 짓는 경계에 부합했다. 151-2)


6장 내전으로 점철된 세계들: 20세기


1949년 10월 제네바에서는 계속 확대되던 전쟁 폐해 개선을 주목적으로 하여 인도주의 회의가 열렸다. 가장 시급한 안건은 전형적인 국제전에서 전투원으로 인정된 이들에게 보장한 보호를 ‘국제전 성격을 띠지 않은 분쟁에 따른 피해자들’까지 그 범위를 확대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일부 사절은 국제법을 국내 분쟁에 갑자기 적용하면 국가 주권이 침해된다고 여겼다(이와 정확히 동일한 이유로 1864년에 합의된 초기 제네바협약이 내전까지 확대 적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절들은 “국가가 지닌 권리는 모든 인도주의적 고려 사항보다 우선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는데, 그 근거로 “내전이 국제전보다 훨씬 더 잔혹하게 벌어진다는 점”을 내세웠다. 이러한 논의 결과 제네바협약 일반조항 제3조(1949)가 도출되었고, 이 조항은 당시 정확한 용어로 “국제전 성격을 띠지 않는 무력 분쟁”(이후 줄여 “비非국제적 무력 분쟁”, 아니면 약어로 “NIAC”)에 최종적으로 적용되었다. 175-6)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수십 년간 ‘비非국제적’ 분쟁의 빈도가 높아지자, 협약 적용 방식이 좀더 명확해져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 냉전 체제 아래 대리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제국이 붕괴하며 남긴 잔해 속에서, 내부 분쟁에 개입하는 일은 점점 흔해져, 당시 유럽에서 모습을 드러내던 긴 평화라는 영광은 퇴색되어갔다. 그 결과, 1975년, 독일의 한 도시인 비스바덴에서 열린 국제법 학회에서, ‘내전 비개입 원칙The Principle of Non-intervention in Civil Wars’이라는 제목의 문서 초안이 작성되었다. 비스바덴 의정서는 만약 어느 한 측이 외세의 참전을 요청해 다른 한 측도 똑같이 참전을 요청한다면, 분쟁 상황은 쉽사리 국제 분쟁으로 확전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 외부 당사자들은 개입하지 않도록 권고받았다. 또한 비개입이 이뤄져야 하는 조건들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국제법학회는 “내전”을 “한 국가 영토 내에서 발생하여 국제적 성격을 띠지 않는 모든 무력 분쟁”이라고 간략히 정의 내리고자 했다. 178)


결정적으로 비스바덴 의정서는 무엇이 내전이 아닌지 명시하는 범위를 정했다. “국지적 소동 혹은 폭동” “국제 분계선에 따라 분리된 정치적 독립체들 간 무력 분쟁” 그리고 “탈식민지화로 인해 발생한 분쟁” 모두는 내전 영역 바깥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논의 결과 일련의 추가의정서가 도출되었고, 이 중에는 제2차 추가의정서(1977)도 있었다. 이에 따라 만약 분쟁이 “국제적”, 즉 두 독립된 주권 공동체 사이에 벌어지는 분쟁이라고 여겨진다면, 제네바협약이 온전히 적용된다. 분쟁이 “비국제적”이라면, 해당 분쟁은 일반조항 제3조와 제2차 추가의정서에 따라 다뤄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 폭력 사태가 (아마도 폭동 혹은 내란에 해당되어) 이 두 종류 모두에 해당되지 않는 분쟁이라고 여겨진다면, 해당 사태는 국내 사법 관할 영역하에 놓여 치안 활동 대상이 된다. 이러한 경우 분쟁이 ‘국제적 성격을 띠는지 그렇지 않은지’ 혹은 쉽게 말한다면 ‘내전’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에 많은 것이 걸려 있다. 178-9)


하지만 사태는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2011년과 2012년에 시리아에서 벌어진 사건을 보자. 시리아의 일반인들은 2011년과 2012년 전반기 내내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과 벌이는 다툼을 내전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시리아 밖에 있는 이해 당사국들은 그 사태에 좀더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여겼다. 아사드 정권으로서는 당연히 반란으로만 여겼다. 반대파는 자신들이 저항을 벌였다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러시아나 미국과 같은 열강은 개입이냐 비개입이냐를 두고 언쟁을 벌이면서 서로 머릿속에 내전 선포에 따른 위협을 각인시켰다. 2012년 7월, 분쟁에 돌입한 지 일 년이 넘었고, 이미 약 1만7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뒤에서야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시리아에서 벌어지던 사태가 실제 “국제적 성격을 띠지 않는 무력 분쟁”이라 확인했다. 이러한 결정이 이뤄지고 난 후에야 분쟁 당사자들은 제네바협약 내 관련 규정에 따라 보호받을 수 있었다. 181)


근래 들어서서 ‘지구적 내전’이라는 용어는 알카에다al-Qaeda 신봉자들처럼 국경을 초월해서 활동하는 테러리스트들과 미국이나 영국처럼 확립된 국가 행위자가 벌이는 투쟁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 용례의 사용에 찬동했던 몇몇 이에 의해 9·11 테러 이후 형성된 이러한 용법은 대내적 투쟁이 전 지구로 확산되는, 특히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뉜 분열된 이슬람 세계에서 벌어지던 투쟁이 세계적인 규모로 확전되어온 현상을 가리킨다. 테러리즘을 칭하는 좀더 넓은 의미의 비유로서 ‘지구적 내전’은 또한 다음 상황을 지시하는 데 쓰였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벌어지는 전투에 부가되던 어떠한 제한 요소도 없이 대치하는 당사자들이 벌이던 통제되지 않는 투쟁, 어떠한 교전 규칙도 없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던 자연상태로의 회귀, ‘내부’ 분쟁과 ‘대외’ 분쟁, 달리 말해 국가 내부에서 벌어지는 분쟁과 국가 간 벌어지는 분쟁을 구분 짓는 경계가 완전히 흐릿해진 특수한 분쟁 형태를 함축했다. 199-200)


‘지구적’ 내전 관념은 추가적으로 보편적 인류 개념을 동반했는데, 이는 서로 적대하는 동료 시민들이 살고 있는 세계 도시 혹은 코스모폴리스cosmopolis와 같은 광범위한 단일 공동체 내에서 벌어지는 분쟁이 포착됨에 따라 그러한 동행이 허용되었다. 지구적 내전이라는 언어는 , 본래 로마인이 지녔던 내전 관념에 강도가 더해진 것처럼 보인다. 세계시민주의에서 내세웠던 공감이 확대되고 지평이 확장됨에 따라 본래 로마식 내전 관념이 포괄하는 대상이 좀더 넓어지고 첨예화되었다. 그렇지만 지구적 내전이라는 용어가 포괄하는 내부적 복합성, 20세기 초부터 해당 용어가 지녀온 이념적 부담감, 그리고 몇몇 이에 의해 암시되는 반이슬람적 함축으로 인해 이 용어는 ‘내전’이라는 용어 자체가 그렇듯 본질적으로 논쟁적인 개념이라 여겨진다. 이런 점으로 보아 최근에 ‘지구적 내전’을 두고 벌어진 논의는 애초에 이를 야기했던 내전의 경합적 개념이 심화되거나 도리어 한정限定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200-1)


결론: 말들의 내전


내전은 공포 및 파괴와 연관된 수많은 심상과 연상을 자아내기 때문에, 내전이란 용어를 사용함에 따라 나타날 어떠한 좋음도 떠올리기 어렵다. 이런 의미야말로 그 용어의 핵심을 관통하는데, ‘내전’이라는 말이 역설, 심지어 모순어법oxymoron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전쟁에 있어 어떤 점이 ‘시민적civil’일 수 있을까? ‘시민적’이라는 형용사는 반대로 무해하고 온건한 인간 활동 유형을 수식한다. 예를 들어 시민 사회, 시민 불복종, 나아가 대(시)민 업무를 들 수 있다. 이 단어와 어원적으로 그리고 언어학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류 단어로는 ‘예의 바름civility’과 ‘문명civilization’이 있다. 전쟁은 사람들로 하여금 평화롭게 어울리거나 이들이 지닌 기운을 비폭력적인 방향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게다가 전쟁에 유혈이 낭자하고 죽음이 수반될 때 공손함이나 고상함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기 어렵다. 분명 전쟁이 몰고 오는 어두움은 시민적이라고 불리는 대상이 발산하는 그 어떠한 밝음도 완전히 덮어버린다. 203-4)


‘내전’이라는 용어를 적용할지는 당사자가 통치자인지 반란군인지, 승자인지 패자인지, 기존에 확립된 정부인지 이해관계가 있는 제3자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현대 내전을 연구하는 대표적인 한 학자가 말했듯, “어떤 분쟁을 내전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이 분쟁에 상징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정치적 무게를 더하는 일인데, 내전이라는 용어 자체가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그것을 부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전이라는 용어의 사용 여부 자체가 분쟁의 일부를 이룬다.” 명칭을 두고 벌이는 싸움은 해당 분쟁이 중단된 뒤에도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저항운동 레지스탕스Italian Resistance와 파시즘 정부 사이 벌어졌던 투쟁을 묘사할 때 ‘내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데, 내전이라 칭한다면 양 당사자가 동등한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04-5)


범주를 선택하는 행위는 정치적 결과뿐 아니라 도덕적 결과를 초래한다. 대체로 자기 운명의 향방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수만 명의 사람에게는 이것이 죽고 사는 문제일 수 있다. 목격하고 있는 상황이 확실히 내전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는 건 전쟁에 짓밟힌 나라의 국민뿐만 아니라 국경 밖에 있는 이들에게도 정치적, 군사적, 법적, 경제적 차원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익히 들어왔듯 국제사회가 그와 같은 분쟁이 벌어졌다고 인정하게 되는 동기는 분쟁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일 수 있다. 내전은 종종 나와는 관계없는 남의 나라 일로 치부되며, 따라서 외부인들은 물러서 있어야 하는 일이 된다. 이와 반대로 내전이라는 이름표는 국가가 붕괴되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위기가 찾아오자, 개입을 승인하기 위해 붙여질 수 있다. 이렇게 동기와 대응 모두에서 나타나는 극단성 또한 내전 개념이 지닌 역설적인 본질 중 일부를 이룬다.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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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기후적응 시대가 온다 - 종말로 치닫는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김기범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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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지구는 인류가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기후위기 대응은 지구가 아닌 인류 자신을 위한 행동이자 우리를 살리기 위한 행동일 뿐 지구를 위한 것도, 지구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인류의 기후위기 대응에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첫째, 더 이상의 온도 상승을 막기 위한 전 세계적인 공조 체제를 마련하고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획기적인 변화를 추진하는 것. 둘째, 이미 온도가 올라간 상황에서 근미래에 닥쳐올 기후재난에 대비하기 위한 ‘적응 정책’을 펼치는 것. 이 책은 2015년 파리 기후변화협약을 포함해 인류가 지금껏 노력을 기울여온 첫 번째 방향의 대응이 성공적이었는지 살펴본 뒤, 현재 세계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두 번째 방향의 대응책을 점검한다. 폭염, 해수면 상승, 전염병 발발 등 지금껏 우리가 마주해온 각종 기후재난의 형태를 실감 나게 소개하면서도, 우리가 왜 이러한 일들을 겪게 되었는지 역사적으로 검토하고, 그동안 다른 책에서는 크게 조명받지 못했던 기후적응 정책의 실태를 우리의 현실에 맞게 풀어내고자 한다. 14-5)


1부 지금 우리는 어떤 상황인가


국제 연구 단체인 세계 탄소 프로젝트Global Carbon Project가 2023년 12월 5일 발표한 <2023년 세계 탄소 예산 보고서>에는 2023년 화석 연료 사용으로 배출된 온실가스가 2022년을 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화석 연료 사용으로 인한 세계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2022년보다 1.1% 증가했고, 인간 활동으로 인한 총 온실가스 배출량은 409억t으로 분석됐다. 기상청이 2023년 6월에 발간한 <2022 지구 대기 감시 보고서>에 의하면 충남 태안군 안면도 기후변화감시소의 이산화탄소 배경농도는 425.0ppm을 기록했다. 2021년보다 1.9ppm 늘어난 수치다. 미국해양대기청NOAA이 측정한 2022년 전 지구 평균 이산화탄소 배경농도도 417.06ppm으로 2021년 대비 2.13ppm 증가하며 역대 최고 농도를 기록했다. 불과 10~20년 전의 지구 이산화탄소 농도가 400ppm을 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얼마나 빠르게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 중인지 짐작할 수 있다. 20-1)


최근 공개되는 시나리오들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예상보다 더욱 암울한 예측을 내놓고 있다. 2023년 12월 초 두바이에서 열린 제28차 UN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 비영리 기후단체 클라이밋 센트럴Climate Central이 공개한 전 세계 도시의 수몰 이미지가 그 사례다. 이 단체는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예측 결과와 지역별 고도 등을 종합해 지구 지표면 평균온도(이하 지구 평균온도) 상승폭에 따라 달라지는 각 도시의 모습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했다. 클라이밋 센트럴은 인류가 탄소 배출량을 급격히 줄여 전 지구 평균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이내로 제한했을 때 각 도시의 모습은 지금과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전 지구 평균온도 상승폭이 3도에 달했을 때 상승한 해수면은 많은 도시를 집어삼킬 것으로 예상했다. 안타깝게도 3도 상승폭은 이번 세기말 인류가 맞이할 수 있는 미래 가운데 비교적 밝은 미래, 장밋빛 전망에 속하는 편이다. 23)


<호주 보고서>는 특히 ‘찜통지구 Hothouse Earth’에 진입하는 문턱이 사실 2도보다 낮은 수치일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대해 중점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찜통지구란 인류가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더라도 지구가 스스로 온실가스를 배출해 기후변화를 증폭시키는 상태를 의미한다. 특히 ‘찜통지구’ 시나리오가 현실화된 상황에서도 인류의 온실가스 배출은 중단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구는 인류가 예측했던 온난화 수준 이상의 상태를 향해 변화한다. 지구 지표면의 30% 이상에서는 극심한 건조지대화 현상이 발생한다. 남아프리카, 지중해 남부, 서아시아, 중동, 호주 내륙, 미국 남서부 전역 등에서는 극심한 사막화가 일어난다. 2도 상승폭의 온난화로도 10억 명 이상이 집을 잃고 떠돌게 되고, 인류 문명은 종말에 이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10억 명이 기후난민이 된다는 것은 인류 사회의 상당 부분이 현재와 같은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26-8)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내놓는 기후변화의 증거에는 어떤 내용이 포함돼 있을까? 가장 직접적인 증거는 생물종의 급격한 감소다. 인위적 요인으로 인해 수많은 동식물들이 멸종의 길을 걷고 있으며,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2024년 2월 12일 UN환경계획UNEP 산하 이동성야생동물보호협약(CMS)은 제14차 당사국총회를 열고 <이동성 야생동물의 세계 현황>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이동성 야생동물 중 44%가량의 개체 수가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동성 야생동물이란 철새나 고래처럼 나라와 나라, 대륙과 대륙을 오가는, 이동 범위가 넓은 동물을 말한다. 보고서에는 이 협약에 등록된 1,189종 중 260종(22%)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또 520종(44%)은 개체 수가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분류군별로 가장 심각한 상태에 처한 것은 어류였다. 이동성 어류의 약 97%가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동성 파충류의 멸종위기 비율도 70%에 달한다. 49-50)


2부 지구와 인간의 병적 증상


전문가들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량 저감이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텍사스A&M대학 연구진은 2020년 5월 한민족과학기술자네트워크KOSEN의 《KOSEN리포트》 에 기고한 <코로나19와 기후변화> 보고서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온실가스 배출량이 급증하는 ‘리바운드rebound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했고, 이 예측은 실현되고 있다. 코로나19를 핑계로 인간 활동만을 중지함으로써 자연의 회복을 도모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뿐더러 지극히 무책임한 일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멸종위기를 맞은 동식물들을 방치하는 것은 인류가 저지른 원죄에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일일 수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생태계와 우리 인류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향에 있어 자연의 회복력을 과신하는 태도를 지양해야 하는 이유다. 인간이 스스로 온실가스를 감축하고, 자연 훼손을 줄이는 활동을 지속하지 않으면서 자연 스스로 회복되기만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78-9)


과학자들은 인간의 무분별한 야생동물 이용이 앞으로도 더 큰 위험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바이러스의 저수지’라는 별명을 얻은 박쥐의 서식지 파괴와 교란이 인간 자신을 위협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버클리캠퍼스(UC버클리) 연구진은 2020년 국제학술지인 《이라이프eLife》 에 박쥐가 바이러스를 지니고도 생존할 수 있는 메커니즘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 결과에는 인간의 박쥐 서식지 파괴와 교란이 박쥐에게 더 큰 스트레스를 주고, 이는 다른 동물들을 감염시킬 수 있는 분비물이나 배설물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추정도 포함돼 있다. 즉 인간이 동굴을 훼손하는 등의 교란 행위를 하면서 박쥐가 위협을 받게 되면 인간도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기존의 인수공통감염병 역시 인간이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훼손하고, 해당 동물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전파된 사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아직까지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88-9)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미세플라스틱을 ‘크기가 100nm(나노미터, 머리카락 굵기의 500분의 1 정도) 이상, 5mm 미만인 플라스틱’으로 정의한다. 1차 미세플라스틱은 의도적으로 만든 미세플라스틱이다. 치약, 세안제, 화장품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알갱이가 대표적이다. 2차 미세플라스틱은 플라스틱 제품과 파편이 풍화·마모되며 생긴 것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미세플라스틱 대부분은 2차 미세플라스틱이다. 자연 환경에 있는 2차 미세플라스틱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형태는 미세섬유다. 해양 심층수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미세플라스틱 쓰레기 역시 미세섬유다. 북극의 한대수역 심해에서 채취한 시료에서도 미세플라스틱의 대부분(약 95%)은 미세섬유였다. 비닐을 뜯거나 플라스틱 병의 뚜껑을 여는 매우 사소한 행동에서도 미세플라스틱이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인류 모두는 미세플라스틱으로 오염시키는 문제에 있어 서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셈이다. 103-6)


미세플라스틱의 생태계 영향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미세플라스틱 입자 자체가 미치는 물리적 영향이다. 대표적으로 미세플라스틱 섭취로 인한 영양 감소, 내부 장기 손상, 염증 반응 등이 있다. 체내에 들어온 미세플라스틱은 소화기 내부에 상처를 입히고, 소화 작용을 약화시켜 질병 발생률과 사망률을 높일 우려가 있다. 플라스틱 입자가 작을수록 더 위험하다. 입자가 작을수록 생체조직의 장벽을 통과해 혈관이나 모세혈관에 침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미세플라스틱의 화학적 영향이다. 미세플라스틱에 포함된 첨가제가 침출되면서 생물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플라스틱에 포함된 첨가제 중 비스페놀A, 프탈레이트 등은 대표적인 내분비계교란물질(환경호르몬)이다. 비스페놀A는 갑상선호르몬의 작용을 방해하고, 생식 독성과 발달장애 및 심혈관계질환을 유발하며 유방암과 전립선암의 원인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프탈레이트는 생식계 발달장애, 기형 등 다양한 인체 질환을 유발한다. 107)


현재 북극권에서는 세계 평균에 비해 적어도 2배 이상 빠른 속도로 기후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해빙, 즉 바다의 얼음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로, 해빙이 줄어든 만큼 늘어난 바다의 면적은 약 260만km2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태양광을 반사하는 얼음과 눈이 감소하면서 자연스럽게 북극권의 물과 토지가 흡수하는 태양에너지는 증가하고, 이에 따라 기온이 상승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를 ‘얼음-알베도 피드백ice-albedo feedback’이라고 부른다. 알베도는 지표면에서 반사되는 태양에너지의 비율을 의미한다. 그런데 북극권에서 일어나는 변화 가운데 영구동토永久凍土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점은 간과되고 있다. 북극권 해빙이 녹고 주변 지역을 덮은 눈이 사라지면서 태양열을 흡수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것뿐 아니라, 광대한 넓이의 영구동토가 사라지면서 온실가스 중 하나인 메탄이 대기 중으로 방출되며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114-5)


3부 피할 수 없다면 적응하라


우리가 살아가는 한반도 역시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맞은 곳이고, 적응의 필요성 또한 높아지고 있다.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이 발표한 ‘주요 작물의 재배 한계선’을 살펴보면, 1980년대 대구에서 재배된 사과는 21세기 들어 경기 포천이나 강원 북부에서도 재배된다. 같은 기간 동안 녹차는 전남 보성에서 강원 고성으로, 무화과는 전남 영암에서 충북 충주로, 복숭아는 경북 청도에서 경기 파주로 재배지가 북상했다. 해수면 온도가 가파르게 오르면서 따뜻한 바다에 살던 난류성 어류가 북상함에 따라 바다 생태계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난류성 어류인 전갱이는 월동지인 동중국해로 가지 않고 겨울에도 남해 연안에 머문다. 난류를 따라 남해에서 잡히던 멸치는 울릉도 근해에서 어획되고, 일본 혼슈 이남에 살던 다랑어는 울산 앞바다에서도 꾸준히 잡히게 됐다. 반대로 과거 서민들의 찌개거리였던 한류성 어류 명태는 1990년대 이후 남한 수역에서 ‘씨가 말라버린’ 어종이 되었다. 123-5)


유럽에서는 여름철 낮 최고기온이 35도에 이르는 이상고온을 ‘열파heat wave’라고 부른다. 영국의 비정부기구 영파운데이션Young Foundation의 보고서 <열파: 노인 복지에 있어 2003년 프랑스 열파의 영향>은 “노동인구가 휴가를 떠나고 사람이 없는 곳처럼 변한 마을에서 휴가를 갈 경제적 수단이 없는 이들, 특히 갈 곳이나 의지할 곳이 없는 노인들”을 폭염의 최대 피해자로 언급했다. 기후적응을 한답시고 무턱대고 에어컨을 사용하면 온실가스가 쏟아져 나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무더위쉼터’와 같은 사례는 도시의 각 가정이나 매장에서 에어컨을 사용하는 것과는 다른, 사회복지 시스템의 차원에서 농어촌 지역이나 빈민·노인 등 사회적 약자층에 집중된 정책임을 감안해야 한다. 즉 인구가 밀집된 도시 공간에서는 에어컨 사용을 적극적으로 줄이면서 폭염의 직격탄을 맞는 농어촌 지역의 노인들에게는 에어컨 사용을 권장하는 것이 보다 균형 잡힌 기후적응 정책의 방향일 것이다. 136-8)


기후변화로 인해 전 지구의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고, 그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당장 몰려오는 바닷물을 막을 방법은 제방밖에 없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상승하는 해수면이 언젠가는 제방의 높이를 넘어설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제방은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자연의 변화에 무리하게 맞서는 대신, 바닷물이 그대로 육지를 잠식하도록 내버려두는 역발상을 시도하기도 한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보존된 갯벌로 유명한 덴마크에서의 ‘바닷물 침수 실험’이 바로 그것이다. 연구진은 바닷물이 자연스럽게 해안 지역을 바꾸도록 두는 경우 제방을 쌓고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생물다양성이나 자연자원 측면에서 가치를 높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물에 잠긴 토양은 기후변화의 주원인인 탄소를 저장하는 기능도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현재도 해당 지역은 계속해서 자연적인 석호로 변해가고 있으며 더 많은 생물종이 나타나고 있다. 133-4)


물론 이 연구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인간이 거주하기 힘든 환경으로 바뀔 위험이 높은 태평양이나 인도양의 섬나라들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 있다. 일명 ‘도서국가(모든 영토가 섬으로만 구성된 국가)’로 불리는 곳들은 UN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도 선진국에게 강도 높은 기후변화 대응 정책을 요구하는 그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해수면 상승이 빨라지고 있다는 암울한 전망을 계속해서 내놓고 있다. 태평양과 인도양의 저지대 산호초섬에 인간이 살 수 없게 되는 시점이 60~70년 뒤인 21세기 말이 아닌 20~30년 뒤인 21세기 중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 하와이대학 마노아캠퍼스 등 공동 연구진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어드밴스》 에 2018년 4월 25일 게재한 논문에서 태평양 등 저지대 산호초섬 전체가 바닷물에 잠기지 않더라도 민물인 지하수에 바닷물이 섞여 들어가면 인간의 식수원이 사라질 것이라 내다봤다. 136)


뉴욕 맨해튼의 대규모 전시장 재비츠 컨벤션센터(이하 재비츠센터) 옥상에는 7ac(2만 8,328m2)에 달하는 옥상농장이 조성돼 있었다. 옥상농장에서 재배한 농작물은 재비츠센터 직원들이 이용하는 구내식당의 식재료로 활용되고 있고, 주변 주민들에게 판매되기도 한다. 재비츠센터는 한국으로 치면 코엑스나 킨텍스 같은 전시장 역할을 하는 건물로, 뉴욕 34~40번가 허드슨강 인근 6개 블록을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이런 거대한 건물의 옥상이 농장과 태양열발전시설로 탈바꿈한 때는 2014년이다. 옥상농장을 만든 결과 재비츠센터는 여름철엔 5~6도 정도 시원해졌고, 겨울철에도 5~6도 정도 따뜻해졌다. 그만큼의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음은 물론이다. 또 옥상농장은 막대한 양의 빗물을 저장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농장의 토양과 빗물탱크 등에 저장되는 빗물의 양은 연간 700만gal(2,649만 7,882L)에 달한다. 옥상농장이 많은 양의 물이 우수관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146)


4부 이미 닥쳐온 파국 앞에서


기온이 높고 습도는 낮은 경우나 습도가 높고 기온은 낮은 경우에 비해 고온다습한 기후에서 인간의 생존률은 크게 낮아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미국 MIT 연구진은 2018년 7월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 에 빠르면 2070년쯤 중국 북부 화베이평원 지역의 습구온도가 인간이 생존하기 힘든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게재했다. 연구진은 인류가 현재 추세대로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경우를 뜻하는 ‘RCP 8.5 시나리오’를 적용할 경우 화베이평원의 평균 습구온도가 빠르면 2070년쯤 32.6도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칭타오, 상하이, 항저우 등의 습구온도는 35도까지 오를 수 있다고도 추측했다. 습구온도 35도는 건강한 사람도 야외에서 6시간 이상 버티기 힘든 수준이다. 미국 럿거스대학 연구진은 기후변화가 계속 진행된다면 2100년쯤에는 약 12억 2,000만 명이 33도 이상의 ‘습구흑구온도WBGT 지수’에 노출될 것이라는 논문을 2020년 3월 학술지 《환경연구회보》 에 게재했다. 157)


# ‘습구온도’란 온도계를 증류수에 적신 수건으로 감싼 상태에서 측정하는 것, 일반적으로 말하는 ‘기온’은 건구온도로 마른 상태의 온도계로 측정한다.


습구흑구온도 지수는 온열질환을 유발하는 4가지 환경 요소인 기온, 습도, 복사열, 기류를 반영한 수치다. 습구흑구온도가 33도가 넘으면 건강한 사람도 온열질환 때문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연구진은 40개의 기후 시뮬레이션을 분석해 온난화된 지구에서 고온다습한 환경이 얼마나 증가할지 추정했다. 연구진의 추산에 따르면 지구 지표면 평균온도가 1.5도 상승할 경우 건강에 악영향을 받는 인구는 약 5억 800만 명, 2도 상승할 경우는 7억 8,900만 명, 3도 상승할 때는 12억 2,000만 명에 달했다. 2020년 습구흑구온도가 33도 이상까지 올라가는 환경에서 거주하는 세계 인구는 약 2억 7,500만 명이다. 고온다습한 날씨는 인간의 신체뿐 아니라 정신에도 타격을 입힐 가능성이 있다. 특히 폭염은 자살률을 증가시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연구진은 2018년 7월 《네이처》 자매지인 《네이처 클라이밋체인지》 에 폭염이 자살률을 증가시킨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57-8)


한국이 전 세계적으로 ‘기후악당’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 것은 2016년의 일이다. 2016년, 모로코에서의 당사국총회(COP22) 개막을 하루 앞두고 국제연구기관인 기후행동추적은 한국을 사우디아라비아, 호주, 뉴질랜드와 함께 ‘기후악당Climate Villain’ 국가라고 지목했다. 여기서 기후악당 국가는 기후변화 대응에 무책임하고 게으른 국가를 의미한다. 한국의 기후변화 대응 노력은 ‘기후변화대응지수 CCPI’에서도 최하위권으로 평가받은 바 있다. 기후변화대응지수는 온실가스 배출, 재생에너지, 에너지 소비, 기후정책 등 4가지 부문으로 나눠 평가하고, 점수를 합산해 국가별 종합점수를 매긴다. 한국의 순위는 2016년에는 조사 대상 58개국 가운데 54위, 2020년에는 61개국 가운데 58위, 2021년에는 60위, 2022년에는 57위라는 매우 낮은 순위를 차지했다. 가장 최근 평가인 2023년에는 전체 평가 대상 67개국 중 64위로 순위가 4단계 하락했을 뿐더러 한국보다 순위가 낮은 나라는 산유국뿐이었다. 160-1)


지금의 몽골을 상징하는 드넓은 초원과 사막은 사실 과거에는 겨울철마다 많은 눈으로 뒤덮이고, 끝도 없는 설경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보통 10월 말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12월에는 초원과 사막 대부분에 눈이 쌓였다. 이 눈은 황사의 발생을 막아주고, 녹은 뒤에는 유목민과 가축의 소중한 식수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기후변화로 평균보다 적은 양의 눈이 내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데, 특히 고비사막이 있는 몽골 남부 지역은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눈이 쌓이지 않거나 1.0~5.0cm 정도의 적은 양만 쌓였다. 이렇게 눈이 내리지 않는 따뜻한 겨울은 다수의 몽골 유목민을 환경난민으로 만들고 있다. 눈이 내리지 않으면 가축에게 먹일 풀과 물이 부족해지기 때문에 소, 양, 말 등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잦아진다. 가축이 전 재산인 유목민들은 살 길을 찾아 도시로 갈 수밖에 없다. 전 재산을 잃은 수십만 명의 유목민이 수도 울란바토르 주변에 모여 일종의 빈민가인 게르촌을 형성해 살아가고 있다. 166-7)


몽골이 겪고 있는 기후변화는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가장 먼저 주목할 부분은 모래폭풍이다. 몽골에 거대한 모래폭풍이 일어나면 높은 확률로 황사가 한반도를 덮치게 된다. 황사는 발원지인 몽골에서 고온건조한 날씨가 이어지고, 눈 덮인 면적이 작을 때 발생한다. 여기에 저기압이라는 조건까지 갖춰지면 모래먼지가 상승기류를 타고 3~5km 상공으로 올라간 후 북서풍을 타고 한반도로 날아오게 된다. 황사 자체는 모래먼지일 뿐이지만 황사가 이동할 때 중국 북부의 공업지대를 지나면서 중금속과 미세먼지 등 오염물질을 머금게 되면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국립환경과학원 자료를 보면 2009~2011년 한국에 온 28차례의 황사 중 13차례(46.4%)는 중국 공업지대를 지나온 것으로 나타났다. 오염물질이 포함되지 않은 상태의 황사는 삼국시대의 기록에서도 확인될 만큼 오래된 자연현상이다. 황사가 불어올 때는 흔히 ‘PM10(지름 10㎛ 이하)’이라고 부르는 미세먼지 농도가 크게 상승하게 된다. 168)


에필로그: 아직 희망은 있다


오존은 산소 원자 3개로 이뤄진 기체다. 지상 20~25km 상공의 성층권에 형성돼 있는 오존층은 태양으로부터 오는 자외선을 차단해 생태계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반면 지표에서 오존은 건강에 해를 끼치는 물질이 된다). 오존층이 감소하고, 지표에 도달하는 자외선이 늘어나면 피부암, 백내장 등의 발병률이 높아진다. 미국 환경보호청의 연구 결과 오존이 1% 감소하면 백내장 환자가 최대 0.6%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존층 파괴의 원인 물질로는 1985년 당시 냉장고와 에어컨, 헤어스프레이 등에 널리 사용되던 냉매인 염화불화탄소(프레온)CFC가 지목됐다. 자외선과 염화불화탄소가 만나 발생하는 광화학 반응으로 염화불화탄소가 분해되면서 염소 원자가 생기고, 이 염소 원자가 오존 분자를 분해시키면서 오존층이 파괴되는 것이다. 염소 원자 하나는 오존과 반응한 뒤 원상태로 돌아와 다른 오존 분자들을 산소 원자로 분해시킨다. 염소 원자 1개는 오존 분자 10만 개를 파괴한다. 183)


충격을 받은 국제사회는 발 빠르게 움직여 2년 뒤인 1987년 ‘몬트리올 의정서’를 채택해 염화불화탄소 생산을 금지하기에 이른다. ‘몬트리올 의정서’ 체결을 통한 오존층 회복 노력은 국제사회가 전 지구적인 환경 재앙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몬트리올 의정서’에는 세계 197개국이 가입했으며 한국은 1992년 2월 가입했다. 이처럼 전례 없는 국제사회 전체의 환경 보존을 위한, 실은 인류 생존을 위한 노력 덕분에 극지방의 오존구멍은 점진적으로 회복되고 있다. 세계기상기구 WMO는 2018년 11월 남극과 북극의 오존구멍이 2060년쯤에는 완전히 복원될 것이라는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오존구멍이 2000년대 들어 회복되고 있으며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약 40년 뒤에는 완전히 회복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북반구와 중위도의 오존구멍은 이보다 빠른 2050년쯤이면 완전히 복원될 것으로 예상했다. 183-4)


오존층 회복에 대해 밝은 전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학계에서는 염화불화탄소 외에도 오존층을 파괴하는 것으로 알려진 물질의 배출량이 빠르게 증가하고 염화불화탄소의 불법 배출도 늘어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2018년 6월에는 국제사회가 꾸준히 저감 노력을 기울여온 염화불화탄소의 대기 중 농도가 크게 늘어나는 일도 발생했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중국 산둥성 싱푸 지역의 공장들에서 염화불화탄소를 사용 및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세계기상기구 역시 2018년 11월 오존층 회복 전망을 내놓으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염화불화탄소 가운데 삼염화불화탄소CFC11의 불법적인 배출량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MIT 연구진은 클로로포름에 대한 연구 결과가 인류의 오존층 회복을 향한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경고라고 강조했다. 오존층 회복을 늦출 수 있는 클로로포름 같은 물질들에 대한 새로운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85-6)


오존층 파괴로 인류 일부와 생태계가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인류 전체의 노력으로 오존층이 회복되긴 했지만, 염화불화탄소와 클로로포름이 여전히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는 현실은 기후위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지구 전체에서 시기가 빠르든 늦든, 기후위기는 이전에 없었던 재난을 일으킬 것이고, 또 일으키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현재 인류의 기후위기 대응은 —‘완화’와 ‘적응’을 모두 포함해서 —너무 느리고, 부족해 보인다. 인류 전체를 위협할 재난이 더 자주 일어나고, 더 큰 피해를 입힐 때 인류는 결국 전시 동원 체제에 준하는 ‘기후위기 동원 체제’를 가동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장밋빛 전망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라도 대책이 시행됐을 때, 인류 전체의 노력은 오존층 회복 사례에서 본 바와 같이 예상보다 더 빠른 성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수십 년 후를 향한 이 작은 외침이, 조용한 경고가 오늘의 인류와 미래 세대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란다.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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