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2 - 근대의 빛과 그림자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2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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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카트린 드 메디시스, 프랑스 흑역사의 주인공


"도그마에 집착하지 않았던 카트린은 신교도들에게 정치적 관용을 허락하는 내용의 생 제르맹 칙령을 반포했다(1562). '소위 새로운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여, 공개된 장소가 아닌 실내에서 예배를 보는 것은 허락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이 칙령을 공식화하려면 파리 고등법원에 등록해야 하는데, 이 기관을 가톨릭 세력이 장악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오히려 그런 사실을 접한 가톨릭 측의 공분을 샀다.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푸아시 콜로키움이 개최되고 몇 달 후 드디어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다. 가톨릭 측에 의한 신교도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기즈 가문의 지도자인 프랑수아 공의 군사가 샹파뉴의 바시라는 작은 도시를 지나가다가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던 수십 명의 신교도를 발견하고 살해한 것이다. 그전에 신교도들이 기즈 공을 비난했던 게 화근이었다. '바시 학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을 대개 첫 번째 종교전쟁으로 본다."(32-3)


# 1572년 8월 24일, 〈생 바르텔레미 학살〉 발생


"1589년 나바르의 앙리(앙리 4세)는 법률상으로 국왕이 되었지만 국민 대다수가 그를 완강히 거부한 탓에 파리 입성을 호시탐탐 노리며 근교를 배회했다." "그가 선택한 최후의 결정타는 자신의 개종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도인 데 반해 신교도 왕이라는 게 힘들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어쨌든 국왕은 승리를 거두고 일단 평화를 되찾았다. 이제 신교도들은 어찌 될 것인가? 이 문제를 수습한 것이 1598년 반포된 낭트 칙령이다. 이 칙령은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이되 신교도들은 예배의 자유를 누리며, 그들의 신변을 보장하기 위해 왕국 내 일부 신교도시들을 안전지대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신·구교 모두 이 칙령에 대해 불만이 컸지만, 그렇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앙리 4세는 카트린의 정책을 구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국왕이 된 후 선정을 펼쳐 프랑스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국왕이 된 앙리 4세도 결국 가톨릭 광신도에게 암살당했다."(53-4)


2장 침묵공 빌렘, 네덜란드 독립의 영웅


"정치적인 면에서 네덜란드는 아직 중세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노력은 얼마든지 찬성하지만 나라 전체를 방어하기 위해 협력한다는 개념은 없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넘어 전국 단위로 사고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바야흐로 근대국가로 발전해 나아가려던 이 시기에 진정 필요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고 지지하는 '전국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바로 빌렘이었다." "그가 설파한 것은 국왕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평화였다. 즉, '가톨릭' 강요에 저항해 '신교'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가톨릭만 강요하는 '편협성'에 저항해 '관용'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네덜란드 총독) 마르가레트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만일 평화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엄청난 사태가 일어날 거라고 경고했다. 불행하게도 상황은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펠리페 2세에게는 빌렘과 같은 사고의 유연성이 없었다. 신교에 대한 용인은 비겁한 짓이며, 이단은 확실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73-4)


"1581년 전국의회는 '철회령'을 공표했다. 그 내용은 각 주의 위원회가 주권을 가지며 주의 통치자는 주에서 부여한 권한만을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펠리페 2세에 대한 충성 서약을 철회하고 그것을 네덜란드 연맹에 대한 충성 서약으로 대체한다고 선언했다. 신민이 자기들까리 협의하여 국왕에게 '이제부터 당신은 우리의 지배자가 아니니 우리의 충성을 철회하노라'고 선언한다는 것은 역사상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 문건의 주요 내용들은 나중에 미국 독립선언의 본보기가 되었다." "한편 네덜란드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결정적인 순간에 민중 세력이 오라녀 가문을 열렬히 찾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파냐는 오라녀 공 빌렘을 배신자로 규정하고 그를 처치하기로 결정했다. 1584년에 발타자르 제라르라는 프랑슈-콩테 출신의 가톨릭 광신도가 빌렘을 암살했다. 빌렘은 세계 최초로 총으로 암살된 정치인이 되었으니, 말하자면 암살도 점차 근대화되고 있었다."(89-90)


3장 갈릴레오 갈릴레이, 우주의 실체를 파고든 불굴의 과학자


"1604년 10월 15일, 밤하늘에 새로운 별이 나타났다. 현대의 용어로 말하면 초신성이 발견된 것이다. 사실 1572년에도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가 같은 현상을 확인했었다. 이 현상은 고전적인 우주 모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체는 변하지 않는 완벽한 물질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어떤 변화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새로운 천체는 어디서 보더라도 시차視差, parallax(관측 위치에 따른 물체의 위치나 방향의 차이)가 없었다. 이 말은 곧 그 현상이 달과 같은 가까운 곳이 아니라 머나먼 우주에서 일어났다는 의미며,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제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의 낙하운동만이 아니라 우주의 현상에 대해서도 막연한 추론이 아닌 실제 관찰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광활하고 먼 우주 공간을 맨눈으로 본들 얼마나 관찰하겠는가. 바로 이때 등장한 결정적 도구가 망원경이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이용해 처음으로 우주의 속살을 들여다본 인간이 되었다."(104-5)


"갈릴레오는 1625~1630년에 걸쳐 쓴 《밀물과 썰물에 관한 대화》에서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만큼이나 그럴듯하다는 설명을 제시했다. 이로 인해 1633년에 열린 종교재판에서 이단 판정을 받은 그는 일곱 명의 재판관들 앞에 무릎을 꿇고 지동설이라는 이단의 주장을 편 것을 철회한다는 참회의 말을 했다." "갈릴레오는 종신형 판결을 받았으나 감옥 대신 그의 친구이자 시에나 대주교인 아스카니오 피콜로미니의 집에서 머물도록 허락해주었다. 대주교는 그에게 호의적이었으며, 가끔 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과의 만남을 주선해주었다. 1633년 12월 종교재판소는 갈릴레오에게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판시했다. 말하자면 가택연금으로 최종 결정난 것이다." "갈릴레오는 생의 마지막 시기까지 자신이 어느 누구보다 독실한 신자라고 주장했다.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과학과 종교는 표면적으로 모순되어 보이나 사실은 같은 진리의 두 측면이라는 게 그가 줄곧 견지한 태도였다."(126, 129)


4장 독일의 악마들, 마녀사냥 이야기


"악마론에 정통했던 프리드리히 푀르너는 역사 연구에 매진한 후 매우 특이한 결론을 내렸다. 사악한 마법을 옹호하고 또 마녀 색출을 방해하는 중요한 세력이 신교도라는 것이다. 루터파와 칼뱅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아 사방에서 악마의 추종자들이 날뛰고 있으며, 갈수록 그 위험이 더 커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마녀사냥을 가톨릭과 신교 간의 싸움이라는 프레임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바는 하나의 적을 깨부수면 곧 그보다 더 사악한 적이 등장하여 지금의 정점에 이른다는 것이다. 지금이 신과 악마 사이에 마지막 대결이 펼쳐지는 최후 단계다. 그러니 시 당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맡긴 사명에 따라 세상을 파괴하는 암흑의 세력들을 척결하는 데에 주저 없이 나서야 한다. 마녀는 말세에 인간 사회를 파괴하고 인류의 구원을 저해하는 악마의 편이며, 더 이상 우리 같은 부류의 인간이 아니다. 이같은 주장은 가공할 고문과 처형이 인류의 구원이라는 최고의 가치와 맞물려 정당화되었다."(155-6)


"마녀사냥이 종식된 결정적 계기는 사법개혁이었다. 마녀재판도 엄연히 사법재판의 한 종류다. 그러니 더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재판 제도가 자리 잡으면 마녀재판이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고문에 의한 자백을 비판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프리드리히 슈페는 고문을 비판하는 책 《범죄의 담보》를 익명으로 출판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런 힘의 흐름을 이어받아 결정적으로 마녀재판을 끝장낸 동력은 근대 국가의 발전에서 나왔다. 예컨대 파리 고등법원은 지방법원에서 마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의 항소심에서 형을 감면하거나 아예 무죄판결을 내렸다. 무지몽매하거나 광기에 찬 지방 권력자가 저급한 수준의 사법 제도를 악용해 극단적 힘을 행사하려 할 때, 이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은 전국 단위의 사법 제도를 운영하는 국가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훨씬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발전해가는 중앙의 사법 제도가 지방의 사법 제도를 통제하면서 마녀사냥의 광기도 수드러들었다."(165-7)


5장 루이 14세, 세상을 암울하게 만든 태양왕


"(마자랭 혹은 콜베르 같은) '재정가financier'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사적인 방식으로 조달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부르주아, 귀족, 성직자 등 지방 유지들에게서 거액을 모아 국가에 융통해주었다. 중앙정부로서는 세금을 거두는 게 워낙 힘든 상황에서 당장 거액을 확보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그 대신 재정가들은 국가로부터 세금을 거둘 권리를 부여받아 빌려준 돈보다 더 큰 액수의 돈을 거둠으로써 고수익을 얻었다. 국가재정 체계를 이용한 짭짤한 돈벌이였다. 행정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관료제가 정착된 듯했지만, 실제로는 사당私黨 혹은 파벌 싸움에 좌우되었다." "권력자는 자신의 부하들을 지켜주고 부하들은 권력자에게 충성을 바친다. 국사國事의 중요한 부분이 이런 사적 관계망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절대주의 국가 체제는 표면적으로는 국왕이 나라 전체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고 지방의 신민들이 철저히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호 협력과 균형을 특징으로 지녔다."(181)


"루이 14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1664년부터 일부 지방에서 귀족 조사 사업을 시작했고, 곧 이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자신이 진짜 귀족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귀족의 서열과 작위를 체계화했다. 왕실 직계가족이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그다음은 방계가족, 그다음은 공작 등의 순으로 서열화했다." "이렇게 해서 국왕과 귀족의 관계가 새로이 정립되었다. 국왕의 인증을 받아야 진짜 귀족이고, 국왕의 재정에 기꺼이 돈을 대면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으며, 국왕이 거주하는 궁정에 줄을 대면 고위직을 얻게 된다. 모두 국왕을 흠모하고 국왕의 은총을 갈구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태양왕을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되어갔다. 누구나 태양왕이 거처하는 베르사유궁으로 가서 한 자리 잡고 한 줄기 햇빛을 쬐고 싶어 했다. 그곳에서 국왕은 지상 최고의 권력자처럼 행세하고, 입궐을 허락받은 귀족은 그런 국왕을 마치 신처럼 떠받는 척했다. 베르사유궁은 절대주의를 표현하는 종합 예술 무대였다."(186-7)


"점차 통치에 자신감이 붙은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 17일,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 내용의 퐁텐블로 칙령을 공포했다. 남아 있던 신교 교회를 파괴하고, 신교 예배를 금지했다. 목사들에게는 15일 내에 국외로 떠나라고 명령했고, 이를 위반하면 갤리선에 태워 노를 젓게 했다. 목사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변호사 자격증을 주는 유인책도 썼다. 신교도들이 재산을 해외로 이전하는 것도 금지했다. 해외로 가되 재산은 남겨놓고 떠나라는 것이다. 이런 극심한 압박을 견디다 못해 랑그도크, 푸아투, 베아른 등지에서 신교도들이 가톨릭으로 집단 개종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85만 명 정도(당시 프랑스 인구 2,200만 명 중 3.8퍼센트)였던 신교도들 중 많은 수가 신교 국가로 이주했다. 특히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로 많이 갔고, 그다음으로는 스위스와 브란덴부르크 등지로 이주해갔다. 이것이 프랑스 경제를 결정적으로 망친 요인이라고 하면 지나친 속단이겠으나, 큰 피해를 입힌 것은 분명하다."(198-9)


6장 레오폴트 1세와 카를로스 2세,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 지도를 바꾸다


"1683년 오스만군은 베오그라드를 거쳐 빈을 침공했다. 남부 오스트리아는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가공할 대군이 밀려오는 것을 본 레오폴트 황제는 멀리 파사우로 몸을 피했다. 결과적으로 황제가 몸을 피한 건 잘한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 교황 인노첸시오 11세가 주도하여 주변 국가들이 참전을 결정했다. 폴란드의 소비에스키가 2만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왔고, 그 밖에 작센, 바이에른, 바덴 등도 참여했다. 훗날 신성동맹이라 불리는 연합군 전원이 말을 타고 돌진한 역사상 최대의 기병 공격으로 오스만군이 무너졌다." "결정적 패배를 겪은 후에도 오스만 제국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공격했다. 이 시기에 동유럽 지역은 유럽과 오스만 제국이 군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격렬하게 싸우는 격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이 몇 차례에 걸쳐 유럽에 패배한 걸 보면, 군사적으로 정점을 지나 쇠락기로 접어들었음이 분명하다. 이후 중동부 유럽은 점차 합스부르크의 세력하에 들어갔다."(229-32)


"1700년 11월 1일,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에스파냐에서 합스부르크 왕조가 끝나고 부르봉 왕조가 들어섰다. 이제 합스부르크 세력은 유럽 전체를 제국의 영토로 만들겠다는 중세적 꿈을 영원히 포기해야 했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유럽 지역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서쪽의 유럽 중심부로 확대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남동쪽으로 세를 키워갔다. 합스부르크가 헝가리와 슬라보니아를 차지하고, 베네치아는 달마티아와 펠로폰네소스를, 폴란드는 포돌리아를 회복했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얻은 땅이 합쳐지면서 신성로마제국의 규모는 두 배가 되었다. 합스부르크의 핵심 지역은 이제 서쪽의 콘스탄츠 호수에서 동쪽의 군사 변경 지역까지 거의 500킬로미터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엇보다 종교적 다양성이 커졌다. 루터파 작센인, 유대인, 칼뱅파 헝가리인, 정교 세르비아인과 루마니아인이 신성로마제국 안에 공존했고, 또 보스니아와 트라키아에 학살에서 살아남은 상당수의 무슬림이 남았다."(246) 


7장 베르니니, 영원의 도시 로마를 조각한 예술가


"1623년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 우르바노 8세로 즉위하여, 베르니니에게 교황청 예술 활동을 총괄하는 책무를 맡겼다. 베르니니는 1629년 성 베드로 성당 건축 총감독으로 임명되어 성당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종교개혁으로 신·구교 간 갈등이 극심하자, 가톨릭 측은 자체의 개혁('가톨릭 종교개혁' 혹은 예전 용어를 빌리면 '반동 종교개혁')을 통해 스스로 교리와 조직을 정비했고, 17세기에 이르면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한 상태였다. 바로크 미술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의미를 부여하여 '이단(신교)'이 패배하고 가톨릭이 승리했다고 선언하고 이를 장대하게 확인하는 예술이다. 여기에서 신교와 가톨릭 예배 장소의 본질적 차이가 드러난다. 신교의 경우 원칙적으로 기도와 설교의 공간이어서 별다른 장식 없이 단순하다. 반면에 가톨릭은 천상의 세계를 재현해보이려는 듯 지극히 화려한 장식을 자랑한다. 17세기 로마는 바로크 예술의 중심지였고, 그 선두에 베르니니가 있었다."(259-61)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북유럽을 호령했다. 그의 치세에 스웨덴은 유럽의 강국으로 우뚝 섰다. 그런데 크리스티나가 다섯 살 때 부왕이 전사하여 그녀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어서, 여장부 스타일인 크리스티나는 14세부터 각료회의에 참석하더니, 18세에 섭정을 끝내고 정식으로 즉위했다. 정치와 외교를 직접 관장하는 한편 외국의 학자, 예술가, 작가 들을 불러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중 한 명이 데카르트다. 그러던 그녀가 27세에 갑자기 양위를 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비밀이 하나 있으니 그녀가 비밀리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사실이다. 유럽 최강의 신교 국가 여왕이었던 크리스티나의 양위는 개인적인 결정이지만 로마에서는 이를 가톨릭 신앙의 승리로 해석했다."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로마에 온 크리스티나는 많은 예술가를 후원했다. 그중에는 스카를라티와 코렐리 같은 음악인들도 있지만, 이들보다 더 사랑은 받은 이는 베르니니였다."(277-9)


8장 존 로, 탐욕과 부패의 거품을 일으키다


"1715년 루이 14세가 사망했다. 루이 14세가 남긴 유산은 참담했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다 보니 프랑스 재정은 문자 그대로 파산 상태였다. 프랑스 정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보자는 심경으로 존 로를 불러들였다." "그의 사업의 핵심 요소는 두 가지다. 첫째, 그가 늘 견지해온 생각대로 토지를 담보로 화폐를 발행하는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다. 금고 안에 보관한 귀금속의 가치만큼 화폐를 발행하면 너무 제한적이다. 화폐량을 늘리려면 다른 재원이 필요한데, 가장 적절한 것은 바로 토지다. 다만 예전 주장과 다른 점은 국내 토지가 아니라 해외 토지를 개발하여 담보로 삼자는 것이다. 그가 찾아낸 것은 앙투안 크로자라는 사람이 설립했다가 현재는 지지부진한 루이지애나 회사였다. 1717년 9월 5일, 존 로는 북미 지역의 토지 개발에 관한 특권과 캐나다 비버 가죽 거래의 특권을 가진 이 회사를 인수했다. 일명 '서양회사Compagnie d'Occident'라고 했는데 세간에서는 '미시시피 회사Mississippi Company'라고 불렀다."(297-9)


"두 번째는 국채를 주식으로 전환하여 회사의 자본금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존 로의 혁신적이면서 동시에 사기성 높은 아이디어가 빛나기 시작한다. 한 주에 500리브르인 주식 20만 주를 발행하여 1억 리브르의 자본금을 모으되, 투자자들은 현찰이 아니라 정부 채권으로만 이 주식을 구입할 수 있도록 규정했고, 회사는 투자자들에게 액면가의 4퍼센트 이익을 보장했다. 당시 국채는 액면가의 약 30퍼센트로 거래되고 있었다. 정리하면 이렇다. 액면가 100만 원이던 국채가 '똥값'이 되어 실제 시세는 30만 원밖에 안 되는데, 이것으로 새로 설립하는 회사 주식을 사면 100만 원 제값을 다 쳐주고, 게다가 매년 4만 원의 이익까지 보장한다! 사람들은 귀가 솔깃했다. 울화통 터지는 국채를 하루빨리 처분하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국채 소유자들이 대거 주식으로 갈아탔고, 그 결과 루이 15세 정부가 갚아야 할 부채의  20퍼센트가 정리되었다. 여기까지는 모든 일이 잘되었다."(299-300)


"존 로는 거침없이 사업 규모를 확대해갔다. (동인도와 서인도 지역 회사를 합병한) 소위 '인도회사'는 1719년 6월에 두 번째 주식 발행을 했다. 한 주당 500리브르의 주 5만 주를 10퍼센트 프리미엄을 붙여 모집했다. 이번에는 1차 모집 때와 달리 채권이 아니라 금이나 은행권으로만 투자할 수 있었고, 게다가 매우 특이한 투자 방식을 규정했다. 미시시피 회사 주식 100단위를 산 사람이 새 회사 25단위의 주식 매입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어머니' 회사의 4주를 가지면 '딸' 회사의 한 주를 살 수 있다. 욕심에 눈먼 투자자들은 기꺼이 '어머니'와 '딸'에 투자했다." "더구나 주식 매입 대금을 20개월에 걸쳐 분할하여 지불할 수 있도록 조치했기 때문에, 소액만 가지고 주식 매매에 뛰어든 사람도 많았다. 주가가 오르자 투자자들은 큰 수익을 올렸다." "프랑스뿐 아니라 스위스, 함부르크,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사람들도 투기에 뛰어들었다. 버블은 국제적인 성격을 띠어갔다."(305-6)


"마침내 버블이 터졌다. 주식을 팔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주식 가치와 화폐 가치가 동시에 급락했다. 1720년 7월에 왕립은행에서 은행권을 정화로 상환할 수 없게 되자, 파리에서 민중들이 들고일어났다. 비비엔 거리에 위치한 은행 앞에 1만 5,000명이 운집하여 시위를 벌이다가 10여 명이 압사하는 일도 있었다. 11월에 지폐 유통이 중단되었고, 투자자들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특히 단기 투기 수익을 노리고 '단타 매매'를 하느라 회사 명부에 이름이 등재되지 않은 사람들은 주식을 몰수당했다." "존 로 체제의 실패는 많은 투자자의 돈을 날린 단기간의 피해로 끝난 게 아니다. 프랑스인들은 주식이니 은행이니 하는 것에 공포감을 갖게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오랫동은 금융 제도의 발달을 지연시킴으로써 경제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쳤다. 은행과 주식 제도 없이 어떻게 경제가 발달할 수 있는가. 사회·경제 전체가 신용을 잃었으니 경제성장에 이보다 더 큰 악재는 없었다."(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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