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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땀 성왕의 피 - 중층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 ㅣ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논저) 603
김상준 지음 / 아카넷 / 2016년 9월
평점 :
책머리에: 동아시아 유교문명과 인류 보편적 가치
"'맹자의 땀'은 장례 풍습이 생기기 이전에 들판에 방치된 부모의 처참한 시신을 목격한 고대인이 땀을 흘리며 괴로워했다는 『맹자』의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성왕의 피'란 요순우탕 등 유교 성왕(聖王)의 행적을 기록한 『서경』의 감추어진 이면에서 발견한 핏자국, 왕권을 둘러싼 폭력을 말한다. 유자들은 이 '성왕의 피'를 한사코 지우려 했다. 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군주를 창조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맹자의 땀'은 유교의 윤리적 기원을, '성왕의 피'는 유교 비판성의 기원을 풀어주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한편에는 폭력의 독점자인 군주의 성스러움이, 다른 한편에는 폭력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완벽하게 도덕적인 이상적 군주의 성스러움이 날카롭게 대립한다. 이 책은 유교 교리의 핵심인 성왕(聖王)론의 논리 내부에서 그 대립을 추출해낸다. 여기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유교 종법(宗法)론의 내밀한 본질이 드러나고, 2000년 유교정치를 특징짓는 모럴폴리틱의 내적 작동 원리가 밝혀진다."(23-4)
제1부 중층근대와 유교
1장 중층근대성: 근대성 이론의 혁신
"기왕의 근대성 개념은 막스 베버에 의해 가장 압축적으로 제시되었다: 계산 가능하게 조직된 자유노동에 기초한 합리적 자본주의, 이를 가능하게 한 제도적 중추로서의 합리적 법과 행정체계(관료주의), 그리고 이와 선후를 이루면서 진행되는 과학, 문화, 예술, 종교, 경제, 정치 영역의 합리화(rationalization)와 분화(differentiation). 이는 그의 『종교사회학논총』의 유명한 「저자서문」에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한마디로 집약하면 전 사회의 합리화고, 그 기본축은 ①합리적 자본주의, ②합리적 법-행정 체계(법치국가), 그리고 ③합리적 사회분화다. 베버는 이 셋이 완전한 수준에서 일체가 되어 나타난 곳은 〈서구, 오직 서구에서만〉이라고 했다(상동 : 13). 그래서 베버의 근대성론은 서구근대성론이다. 보편사적 의미를 갖는 근대성은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서구에서 발전한 근대성이다. 하지만 베버의 정의는 역사적, 지리적으로 국지적일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근대성의 전면(全面)을 포괄하지 못한다."(52)
"재정립된 근대성 개념은 중층근대성론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것은 고전적 근대성 개념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자면 ①'합리화'만으로 국한될 수 없는 근대성의 다원적 에토스와 ②서구만이 아닌 비서구 근대의 역사적 경로의 다양성을 포괄해주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개념은 베버의 근대성 규정이 빠뜨린 사항들을 하나씩 추가해가는 방식으로는 결코 획득될 수 없다. 다양의 추가는 무한할 것이고, 무한정 늘어난 항목들은 개념화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게 만든다. 보편을 지향하는 개념화는, 반대의 방향, 즉 서구/비서구 근대의 다양한 경로를 포괄적으로 검토한 후, 그 다양의 공통 근거를 한 단계 높은 추상을 통해 포착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베버의 근대관은 그 속에서 하나의 하위 범주가 될 것이다." "그러한 대안적 정의로서의 근대성이란 〈성속聖俗의 통섭 전도顚倒, 즉 성이 속을 통섭했던 세계에서 속이 성을 통섭하는 세계로의 이행〉을 말한다."(55-6)
"'성속 통섭 전도'는 종교사회학에서 말하는 세속화 테제(secularization thesis)의 합리적 핵심을 보존하지만, 기존의 세속화 주류 테제와의 차이점은 성(聖) 차원의 존속을 명확히 한다는 점이다. 성속은 불가분의 상관관계에 있고 이 점은 우리가 인간인 이상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다만 그 통섭 질서가 변화했을 뿐이다. 속이 성을 통섭한다는 것의 철학적 핵심은 이성을 그 한계 속에서 고찰한다는 칸트의 언명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계 속에서 고찰한다는 칸트의 언명은 한계 너머를 버린다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한계의 고찰 속에서 이성의 역능이 고양된다는 적극적인 의미였다. 푸코는 칸트의 이러한 언명을 〈현재를 문제화하는 시각〉이라고 요약했다. 이는 현재의 질서, 또는 이미 알려진 것[旣知] 너머로 부단히 확장되는 비판성, 성찰성의 심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미지성(未知性)의 접면(接面)에서 발생하는 스파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적, 윤리적 고양의 근원이 되고 있다(김상준, 2009)."(57-8)
"우리가 보기에 초기근대의 최초의 표출 양상은 서유럽이 아니라 중국 송원 연간의 사회경제적, 정치문화적 전개 양상에서 풍부하게 발견된다. 그 특징은 절대주의적 통치권의 확립과 비판적 권위를 확보한 학인-관료 집단의 형성,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농촌 수공업의 성장, 수력 양수기, 수력 풀무, 대형 방저기 등의 기계 발명과 코크스 제련 등 철강 부문에서의 혁신 등에서 보이는 다양한 기술혁명과 초기 공업화, 도시, 교통, 화폐 및 금융, 상업 및 무역 영역의 인프라 발전이다. 그 기반은 송대에 이루어졌고 몽골제국은 그 성취를 흡수하여 당시로는 가공할 만한 수준의 전쟁, 행정, 건설, 교역 역량을 갖춘 세계체제를 구축했다." "송원 연간에 관찰되는 초기근대의 증좌들을 성속 통섭 전도라는 틀로 볼 수 있는 가장 매크로한 근거는 이 시기가 한-당으로 이어졌던 중국 고대 제국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었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근대주권의 초기 형태 역시 동아시아에서 선행하고 있었던 것이다."(45, 63-4)
"정주학(또는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은 이러한 정황 속에서 출현했다. 이-기의 명확한 준별이 새롭다. 한당 시기까지 중국적 사유에서 이 양자는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세계는 천(天, 유교), 진(眞, 불교), 도(道, 도교)의 신성함 속에 잠겨 있었다. 즉 성이 속을 통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정주학에서 세계는 기로 이루어지고 기에서 이(理)가 분리된다. 정주학에서 이는 내면화된 윤리 개념이다. 이제 이는 기의 바다 속에서 힘써 탐구하여 찾아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제 자연과 사회질서가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으로 표상되지 않고 그 속에서 작동되어야 할[所當然] 이의 원리가 발견되고 구성되어야 한다." "윤리학자로서 주희는 이가 현세의 사물과 현상에 '당위'로서 관철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현세의 질서는 늘 이로부터 이탈하고 폭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정주학에서 이의 궁극적 담지자는 현세의 힘을 대표하는 군주의 황통(皇統)이 아닌 윤리적 지향을 대표하는 학자의 도통(道統)에 있었다."(66)
2장 맹자의 땀: 인류 진화와 도덕적 몸의 탄생
"〈먼 옛적[上世] 어버이[親]를 장례 지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그 어버이가 죽자 바로 들어 골짜기에 버렸다. 다른 날 그곳을 지나다 보니 여우와 이리가 뜯어먹고 파리와 모기가 빨아먹고 있었다. 이마에 진땀이 나고 흘겨는 보나 차마 바로 보지는 못했다. 땀이 난 것은 다른 사람[의 눈] 때문이 아니었다. 마음의 중심이 얼굴과 눈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돌아와 흙과 풀로 덮었다.(『맹자』 「등문공 上」)〉" "(이야기의 주인공은) 갑자기 내면에 발생한 이상한 그 감정 앞에 스스로 아주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죽은 어미?' '죽은 아비?' '어디에?' 이런 새로운 질문들이 아직은 초보적인 언어 형태로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불현듯 떠올랐을 것이다. 분명히 죽고 없는 부모가 '여기 이곳'에 느껴진다. 기억의 단순한 기계적 잔영이 아니다. 땀과 충격, 모종의 희미한 죄의식을 유발하는 특이한 무엇이 그(녀)를 흔들었다. 〈감관적·물리적 세계 밖의 또 다른 차원이 인간의 의식 안에 불쑥 출현한 것〉이다."(96-7)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몸의 변화'가 아니라 보편윤리, 세계종교라는 '특이한 사유 구조의 출현'이다. 물론 '맹자의 땀'도 '특이한 사유 구조의 출현'을 동반했다. 이 원형적 성(聖)의 영역이 비상하게 고양되어 고도화된 것, 그리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사고 유형이 마치 기적처럼 출현했던 것이 야스퍼스가 말하는 기축시대다. 기축시대에 탄생한 보편윤리, 세계종교의 공통적 핵심은 무엇인가? 그 바탕에는 맹자의 땀에서 시작된 종교성의 원형이 있다. 그 종교성은 감관세계, 물질세계를 상대화시켰다. 그런데 이 단계까지는 내가 아직 그대로 있다. 다만 내가 바라보는 눈앞의 세계와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상정함으로써 눈앞의 세계를 상대화시킨다. 반면 보편윤리, 세계종교는 '나'라는 생각 자체, 즉 자아를 상대화시킨다. 자아를 단번에 인류 전체, 우주 전체라고 하는 고도로 추상적인 개념과 등치시킨다. 자아를 인류 전체, 우주 전체 안에 녹여 무화(無化)시켜버리지만, 바로 이를 통해 초월적 자아로 부활한다."(103)
"그러나 성(聖)의 탄생이 보편윤리, 세계종교를 출현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聖)의 위기' 때문에 가능했다." "'성의 위기'란 두 측면을 갖는다. 하나는 위기적 상황, 다른 하나는 위기의식, 그 모두의 배경에는 고대 도시, 고대국가의 출현이 있다. 윤리종교의 창시자, 성인 개인 중심의 접근은 이러한 문화적 공통성에 대한 이해로 보완되어야 한다." "고대 과학, 고대 재정, 고대 행정, 고대 병참의 술과 학이 발전한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을 인류역사상 '최초의 세속화(the first secularization)라 불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보편윤리, 세계종교가 탄생했다. 여기서 근대적 사유는 매우 가깝다. 우리는 여전히 그 시대의 윤리적, 종교적, 철학적 문헌을 읽고 현재성을 느낀다. 기축시대의 보편윤리와 세계 종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근대다. 그래서 필자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속화'가 발생했던 그 시대를 원형근대기(proto-modern era), 그리고 그 시대의 에토스를 원형근대성(proto-modernity)이라 부른다."(107-8)
"성과 속이 분리되었다 함은 양자가 서열적 질서에 따라 재배치되었음을 말한다. 이 최초의 재배치에서 우월한 위치에 선 것은 단연 성(聖)의 영역이었다. '성의 위기'에 임하여 인간의 초월적 각성을 비상하게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성의 영역을 극점까지 끌어올림으로써 속의 영역과의 차별성을 분명히 했다고 해도 좋다. 그리하여 고양된 성의 질서가 불완전한 속의 질서를 섭리적으로 통괄, 또는 통치하는 관계가 형성된다. 성이 속을 통섭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성속 통섭 관계 즉 '통섭Ⅰ'이고, 이 통섭 관계가 원형근대의 핵심적 특징이다." "그러나 아직 '통섭Ⅰ'의 단계는 신화 시대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 특히 대중종교, 민간신앙 속에서 그렇다." "물적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합리적,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여러 물적 현상을 신성한 힘의 개입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물적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깊어질수록 성의 영역은 물적 세계로부터 퇴각한다."(112-4)
"'통섭Ⅱ'의 세계는 물질계, 속(俗)의 영역의 우월적 독립을 전제한다." "현상계의 즉물적 표면에 더 이상 성의 영역은 자리를 찾지 못한다. 스피노자의 신은 이 아포리아의 새로운 해결 방식이었다. 그는 자연 자체가 신이라 했지만, 즉물적 현상 자체를 신과 등치시켰던 것은 아니었다. 자연의 흐름 안에 깊이 숨은 궁극적 완전성, 즉 그가 이성이라 불렀던, 자연에 내재한 궁극적 섭리를 신과 등치시켰던 것이다." "주희의 현상계 역시 단연 기로 꽉 차 있는 세계다. 물적 세계의 압도성이 명확해질수록 이학(理學)은 물적 세계의 숨은 내면을 향해 더욱 깊어갈 수밖에 없다. 성의 영역이 물적 현상 내면 깊이 숨을수록 그 영역의 논리를 찾는 노력은 더욱 치열해지고, 그 결과 찾아진 성의 속성은 더욱 추상화되고 순수해진다. 역설적이지만 또한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리하여 이제 성의 영역은 '공간 밖의 공간', '시간 밖의 시간'에 그 거처를 찾아야 했다. 파스칼의 말대로 신은 숨었다. 그 결과 성속의 통섭 관계는 역전된다."(114-5)
3장 성왕의 피: 폭력과 성스러움, 유교적 안티노미
"〈유교는 종교와 사상, 정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 세 원이 중첩되는 지점의 중심에 유교의 성스러운 왕, 그리고 성스러운 왕의 행위의 표상인 예(禮)가 존재한다.〉 모든 심원한 교의의 중심에 안티노미가 존재하듯, 유교 교의의 중심, 즉 성왕과 예의 이념에도 역설이 존재한다." "안티노미란 필연적으로 없어야 하는 곳에 반드시 있는, 동시에 마찬가지로 명백한 존재 속에서 절대적인 부재가 도출되어야만 하는 상황을 말한다. 이는 병렬이 아니라, 병렬의 절대적인 불가능성, 절대적인 모순이다. 폭력과 성스러움이 그것이다. 폭력과 성스러움이 안티노미로 맞서는 지점이 바로 슈월츠가 말하는 종교적·윤리적 초월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폭력과 성스러움은 이제 애매한 또는 심원한(?) 양가성에 의해 병립하거나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배제, 대립, 투쟁한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구체적인 역사적 진행 과정 속에서 살피려 한다. 그 역사적 시례는 유교의 예론과 성왕론의 출현, 즉 유교적 안티노미의 출현의 역사다."(124-6)
"유교적 안티노미의 정화(精華)는 유교 경전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요임금이다. 〈임금님은 경건하시고 총명하시고 우아하시어 늘 평안하시었다. 지극히 공손하고 겸손하시어 그 빛이 사방에 이르고 그 높은 격이 하늘과 땅에 미치시었다. 큰 덕을 높이 밝히시어 아홉 족속으로 하여 서로 친하고 화목하게 하시니 백성이 평안하고 밝게 되어 만방이 서로 돕고 화해롭게 되었으며 어리석은 백성들이 모두 따랐다. (『서경』 제1장 제1절, 「요전(堯典)」)〉" "이처럼 한 점 폭력의 티끌조차 존재하지 않는 현세의 군주에 대한 묘사는 참으로 전례를 찾기 어렵다. 유대 민족의 신인 야훼 자신은 전쟁 신이다. 그는 분노하는 신이고 이교도에 대한 몰살을 명령하는 신이다. 고대 이집트, 바빌로니아,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인도의 신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인간의 희로애락을 초인적인 스케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신적(神的)일 뿐이다. 유교적 안티노미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 모아지고 있다."(127-8)
"유교에서는 요순과 삼대(三代)를 구분한다. 요순은 최선의 시대요, 삼대는 차선의 시대다. 삼대란 우임금이 세운 하(夏)나라, 탕임금이 세운 은(殷)나라, 무임금이 세운 주(周)나라, 세 왕조의 시대를 말한다. 물론 우-탕-무 임금 모두 성왕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일정한 성스러움의 서열이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결함이 있기에 차선의 시대라고 하는가. 탕왕과 무왕이 새 왕조를 개창하기 위해서는 앞선 왕조를 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마지막 왕을 시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문제는 유교이념에 커다란 도전과 긴장을 준다. 성왕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도입된 천명(天命)이라는 개념은 그래서 항상 이념적 문젯거리다. 우왕에게도 문제는 있다. 그는 요임금, 순임금과는 다르게 그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겼다. 사정(私情)의 혐의가 있다." "이제 안티노미는 내부에서 이념적으로 갈등하기 시작한다. 폭력의 정당화라고 하는 이념적 조작이, 안티노미의 분투가 시작된다."(132-3)
"유교는 초월적 내세가 존재하지 않고, 그렇다고 인도적-불교적 방식으로 인과응보의 윤회를 믿지도 않으며, 조로아스터적인 선악의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교에서 이러한 초월적 조정 논리 또는 조정 기관은 과연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유교는 이 문제를 두 가지 축으로 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성인 군주라는 이념의 창출이고, 둘째는 예의 강조다." "따라서 유교에서의 초월적 조정 기관은 이 세계 밖의 어떤 곳이 아니라 요순우탕이 살았던 바로 이 세계 내에 존재하며, 요순우탕의 그 완벽한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유교에서 예란 성왕들이 세상을 다스렸던 행위 양식을 말한다. 예란 우주의 질서 또는 도의 무늬의 결에 맞게[節文] 행위하는 것[履]을 말한다. 따라서 예란 이 불완전한 세계의 배경에서 항상 살아서 실현되고 있는 우주의 올바른 질서에 자신과 나라를 맞추어나가는 행위 양식이다. 이러한 현세 내에서의 간극이 바로 유교에서 초월적 긴장이 스파크를 일으키는 지점이다."(146-7)
"〈유교는 전통의 고삐를 잡기 위해서 전통을 이용했다.〉 과거의 군사적 친족 질서를 새로운 윤리적 의미 구조에 따라 재해석하고 재편했다. 이러한 새로운 윤리적 질서 안에서 군왕과 가부장은 더 이상 군사적 지도자, 자의적 절대자일 수 없다. 부자와 군신의 관계는 군사적 질서가 아닌 윤리적 질서에 의해 새롭게 규정되어야 한다. 전통 속에서 전통을 변환시켜야 한다. 〈전통의 이름으로 전통을 바꾸어야 한다.〉 이 노선은 현실에 아주 잘 들어맞았다. 역사 속에서 유교의 승리를 보장해준 원천이었다. '군사적 친족주의에서 윤리적 친족주의로'. 이 전환에서 본체는 남았지만 성격은 바뀌었다. 그 본체는 친족주의인데, 〈친족주의의 핵심은 벤자민 슈월츠가 고대 중국에서 정립된 '문명적 정향'이라고 강조했던 조상숭배〉다." "결국 유교의 승리에는 그만한 대가가 있었다. 조상 숭배를 윤리화해서 천하를 장악했지만, 바로 이 승리는 진관다오가 〈초안정구조〉라고 불렀던, 항구적 보수성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155-6)
"명목상 유교 국가의 주권은 절대적으로 군주 일인에 귀속된다. 그러나 유교 국가의 성스러운 군주는 폭력의 행사에서 철저히 배제됨으로써 비로소 군주일 수 있다. 주권의 자리는 텅 비어 있다. 스스로의 목숨을 군주 앞에 가장 무력한 모습으로 내던져 그 빈자리를 지키는 자가 유자다. 〈참된 유자는 자신의 피를 뿌려 성왕의 피를 지운다.〉 직간(直諫)하는 유자의 피를 손에 적신 왕이 성왕일 수 없다. 스스로의 피로 현실 군주를 권좌에서 지우고 그 자리에 한 점 폭력 없는 이념왕을 세우는 자, 바로 유자다. 그들 이념 속의 성왕은 오직 '시간 밖의 시간', '공간 밖의 공간'에만 존재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시공 속에서 가장 거룩한 '왕위 없는 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국가주권은 누군가를 절대적 희생자로 찍어 이를 법 밖의 예외로 설정할 수 있는 힘, 예외 권력이다. 그러나 유자는 스스로 호모 사케르를 자임함으로써 자신을 예외적 권력, 바로 국가주권의 숨은 주인으로 환골탈태한 특이한 호모 사케르다."(167-8)
제2부 유교세계의 작동 원리
4장 유교정치의 키워드: 모럴폴리틱
"유교 경전과 예법의 수호자라고 할 수 있는 유학자들이 정치의 주축이 되었던 유교에서는 윤리-도덕과 정치의 분리란 언어도단에 불과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두 개의 칼' 이론이 출현한다. 교황의 칼과 황제의 칼이 이것이다. 이 중 교황의 칼이 황제의 칼보다 우월하다. 유교사에서는 '두개의 통(統)' 이론이 등장한다. 하나는 성인의 계보[道統]이고 다른 하나는 군왕의 계보[王統]이다. 성인의 도통(道統)은 신성하고 순수하다. 반면 군주의 왕통(王統)은 항상 폭력에 오염될 위험 아래 있다. 도통은 왕통을 계도(啓導)하고 정화(淨化)하여야 한다. '교황의 칼'이나 '유자의 도통 정치'라는 말 자체가 모럴폴리틱 자신이 이미 권력이 되었음을 말한다. 정치권력의 궁극적 힘의 근거는 폭력이다. 따라서 모럴폴리틱의 승리의 순간, 그 정점에서 윤리-도덕은 자신의 반대물인 물리적 폭력에 의존하게 된다. 종교적 이단(異端) 규정과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은 동서 세계에서 극단적 폭력의 예고였다."(187-8)
"윤리도덕과 예법 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유교적 모럴폴리틱의 현실 표현은 다양하다. 먼저 경전 강론을 통해 군주와 세자에게 성인군주관을 학습시키는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이 있다." "제도화[臺諫]되어 있는 간쟁은 경연과 서연에 비해 보다 직접적인 형태의 모럴폴릭틱이지만 아직 종합적이지는 않다. 정치 행위는 적과 동지만이 아니라 연합 또는 중립화의 대상이 존재할 때 종합적인 것으로 된다. 유교정치에서 이러한 종합적인 정치 상황은 정국을 장악한 유학자층이 서로 다른 당파로 분립하여 서로 경쟁할 때 형성된다. 이 경우 대립하는 당파들과 군주 사이에는 복잡하고 끊임없이 유동하는 동맹, 중립화 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당파 투쟁 중에도 새로이 왕위를 계승한 군주의 정당성 문제를 놓고 격돌하였던 예송은 가장 종합적인 정치 행태이며 동시에 가장 높은 수준의 모럴폴리틱의 전형이었다. 예송에서는 여러 당파의 예론, 경학이 충돌할 뿐 아니라, 경연의 공간과 간쟁의 수단 역시 빈번히 동원된다."(199-201)
"주희의 『주자가례』는 종법 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이-주희 종법론의 특징은 엄격한 형식성, 의례성이다. 인정(人情)과 상황(狀況)에 따른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왕가라 하여 그런 원칙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엄격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야만 강력한 왕권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권의 자의적 행사를 제약하는 입헌주의적 구속은 유교세계에서 특별히 강했다." "종법 계승 원리의 핵심은 항렬과 생물학적 출생순에 의해 결정되는 종자에 의해 대종의 제사권이 이어져간다는 것이다. 종자가 없을 때는 입후(入後)로 대신한다. 일반 사가(私家)에서도 이 원리를 엄격히 지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왕가에서는 특히나 어렵다. 왕위 계승에는 흔히 심각한 정치투쟁이 따르기 때문이다. 왕자의 난이 벌어지고 골육상잔의 피가 뿌려지기도 한다." "권력의 생리가 강하게 작용하여 항상 유동적일 수밖에 없는 왕권 계승의 현실과 지극히 엄격하게 사전 결정된 종법원리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208-9)
5장 유교의 예는 어떻게 사회를 규율했는가?
"종교적 가르침은 대개 신성(神聖)의 규정에 관한 부분과 행위의 규율에 관한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 양자는 뒤섞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 두 영역이 모든 윤리종교의 전통 내에서 분명히 구분되어왔다는 점이다. 전자는 신성에 관한 관념적 논의(베버에 따르면 '이념'에 해당하는 것)에 집중하는 반면, 후자는 해당 사회의 전통적 관습을 깊이 흡수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우리는 전통적 관습을 흡수한다는 후자의 이 특징이 우리가 말한 몸의 기억, 습관의 행위 코드를 윤리종교 교리가 흡수한 것으로 이해하며, 이러한 점이 이념적 이해(利害)가 작동하는 주요한 원리가 되었다고 본다. 유교에서도 이러한 구분은 분명히 확인된다. 정주학의 언어로는 도체(道體)론과 예론이라 구분할 수 있는 범주 구분이 유교의 경전들 내부에 오랫동안 존재해왔던 것이다. 유교의 예란 유교의 윤리적 명령을 전통적 제도와 행위 양식과 뗄 수 없이 결합시킨 몸의 기억을 통한 윤리적 행위 코드라고 정의할 수 있다."(246-7)
"베버에게 물질적 이해(또는 수단합리성)와 이념적 이해(또는 가치합리성)는 근본적으로 화해 불가능한 동기이다. 전자는 경제-정치 영역과, 후자는 종교-윤리 영역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념적 이해가 인간의 행위에 행사하는 힘은 카리스마가 가지는 윤리적 명령의 힘과 함께 그 카리스마적 명령이 제도화, 일상화되어 만들어진 전통과 습관의 힘이 합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념적 이해가 물질적 이해와 연관되는 까닭은 전통화된 제도는 이미 물질적 이해의 강력한 구현체가 되기 때문이다. 전통화된 종교적-윤리적 제도는 물질적 이해의 향수자이면서도 그 제도에의 복종을 요구하는 지시 근거, 힘의 동력은 항상 물질적 이해와의 긴장에서 찾는다. 유럽 중세교회의 면죄부 판매는 현세적, 물질적 이해 추구의 죄를 사(赦)해주기 위해 시작되었고, 조선에서 향약(鄕約)을 통한 신분 위계의 강화는 미풍과 윤리의 명분 아래 이루어졌다. 인간의 행위를 발진시키는 이념적 이해의 동력은 복합적이고 역설적이다."(256-9)
"유교 창건자들이 섬세한 도덕-윤리적 체로 세심하게 걸러낸 예는 이제 단순히 구복적 행위(履)와 제의일 뿐 아니라 동시에 이념[理]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새로운 윤리적 정언명령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고, 그 성격은 무조건적이며 반(反)경제적이다. 한갖 떠도는 세객(說客)이 열강의 군주들 앞에서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베버의 용어를 빌리자면, 〈행위의 결과에 대한 고려 없이 오직 윤리적 명령에 따라〉─서슴없이 그들을 비판하였던 맹자의 모습은 분명 구약에 나온 예언자들의 카리스마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념'은 역사의 철로 방향을 바꾸어놓을 수는 있어도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 위를 지속적으로 달릴 추동력까지 제공하지는 않는다. 이념이 현실의 힘으로 전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몸이 움직이게 해야 한다. 바로 행동[履]하도록 하는 것, 바로 예의 힘이 필요하다. 실로 유교의 윤리혁명은 인간의 몸을 움직이도록[履] 하는 예라는 제도를 통해서만 역사의 철로를 달리는 동력이 되었다."(261-2)
"유교 창건자들의 경전 편집 과정이 전통적 자료를 뜯어고치는 방법이 아니라 윤리적 기준에 따라 체로 걸러내는, 즉 전통적 재료를 윤리적 기준에 따라 선별 재건축하는 방법(述而不作)을 취했던 것처럼, 예 역시 똑같은 경로를 밟았다고 할 수 있다. 즉 조상신에 제사를 지내는 오랜 전통과 그 안에 담긴 기복적 동기를 윤리적 예를 건축하는 잴로 일단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다만 그 재료가 윤리적 목적에 부합하도록 그 의미를 재구성하였다. 공자는 〈조상의 제사를 올릴 때는 선조가 계신 듯이 하였고, 신에 제사를 드릴 때는 신이 계신 듯이〉(『논어』 「팔일(八佾)」하여 전통적 행위에 충실하였지만 동시에 〈괴이하고 폭력적이며 귀신에 관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로 상고적 제의의 원시적 폭력성과 샤먼적 요소에 대해 뚜렷한 선을 그었다. 그리하여 예란 단순히 기복적 성격을 넘어서서, 사적 욕망을 극복하고 유교 윤리성의 요체인 인(仁)으로 돌아간다는 윤리적 목적을 띠게 되었다."(262)
6장 유교 노블레스 오블리주: 여성적 절의와 도덕권력
"유자가 가진 것은 충신의 붉은 마음[丹心]과 의와 문(文)뿐이다. 〈죽음 앞에 지키고자 하는 것을 바꾸지 않는 것, 이 정신이 바로 유자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지조(志操)다.〉 이 지조의 정신에는 폭력에 대한 원천적 반항과 함께 무인의 결사적 투쟁 도덕이 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이미 말과 칼을 박탈당한 신분으로서 그들의 명예를 견지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이렇듯 반폭력의 정치사상과 결사적 저항 정신의 결합이었던 것이다." "유자 집단은 본래부터 무력 수단을 박탈당한 신분이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신분적 상황을 폭력 행사 자체에 대한 철저한 윤리적 반대의 교리를 세우면서 극복했다는 점에서 법가 등의 현실 정치파와는 크게 다르다." "유자란 법가 사상가들과는 다르게 현실 정치의 냉혹한 승자들을 위한 마키아벨리적인 전략전술 서비스 대신 그러한 패도 정치를 맹렬히 규탄하는 길을 택함으로써, 칼의 권력이 아닌 도덕의 권위, 즉 니체의 용어로는 사제 권력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었다."(280-2)
"주로 춘추전국시대의 여성에 관련된 일화를 편집해놓은 책인 『열녀전』의 한 대목을 보면, 남자인 구자(丘子)가 아닌 그의 부인이 유자의 도리인 명예로운 죽음을 설파하고 있다." "고대사에서 여성들의 처지란 강한 폭력을 가진 승리한 전사의 획득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힘의 논리 앞에 명예 의식을 가진 여성들이 맞서서 오직 맨몸으로 그 힘을 도덕적으로 이겨내고 복수할 수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이었던 것이고, 이러한 여성의 매운 절개를 두고 칭송하여 절의(節義)라 하였다. 폭력의 위협 앞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맹렬히 저항한다는 유자의 덕목과 명예로운 신분 의식을 가진 여성들의 절의란 완전히 동형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자들의 이념인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여성적 절의와 완전히 부합한다. 유자들의 정조(情操)와 명예로운 신분층 여성의 감성이 예사롭지 않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287-8)
"죽음에 대한 감연한 태도, 고결한 죽음의 명예는 신분적 특권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여기서 죽음이란 도덕적 위계의 정상에 이르려는, 도덕 전쟁의 승자가 되려는 필사적인 투쟁 수단이기도 하다. 민주적 평등 의식이 완전히 정착하기 이전의 사회에서 신분적 위계는 동시에 도덕적 위계이기도 했다. 신분적 위계란 또한 혈통적 위계다. 신분=혈통=도덕의 위계는 삼위일체를 이룬다. 이 삼위일체는 종교적 언어로 승화되면서 우주론, 도통론으로 확장된다. 유교사회의 경우, 유학자들의 도덕정치는 동시에 신분정치요 혈통정치였다. 이 삼위일체는 종법정치로 종합된다. 유교에서 종법적 질서는 폭력적 찬탈, 즉 정통성이 없는 정치적 폭력을 예방하는 이념 구조였고, 효와 충이 동형 구조로 결합하는 유교적 봉건성, 유교적 종교성의 핵심이었다. 『열녀전』 속의 숱한 절의녀들과 송시열을 한 줄로 묶는 공통성은 종법적 혈통, 종법적 국가, 종법적 신분 구조에 대한 신성한 믿음이었다."(292-3)
제3부 동아시아 초기근대의 전개 양상
7장 잊혀진 지구화: '긴 12세기'와 동아시아 초기근대혁명
"송대 이전의 중국은 여전히 고대적(한대까지), 중세적(남북조 및 당까지) 귀족체제였다. 송대에 새로운 신분 상황이 전개된 핵심적인 이유는 귀족 지배 체제의 경제적 근거인 장원 체제가 해체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당 왕조 때까지 중국의 농민들은 유서 깊은 귀족들의 장원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러한 귀족-장원 체제는 위진남북조의 대변동 이래 지속적으로 타격을 받아왔다. 특히 유목 민족이 중원에 내려와 왕조를 세우고 지배 세력이 되었던 것이 전통적인 귀족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 왕조의 붕괴와 그를 이은 5대10국의 상황은 이러한 전통적 귀족세력의 몰락에 최후의 결정타를 가했다. 그 결과 송대에는 전통적 귀족 장원 체제가 무너지고 그를 대신한 지주-전호 체제가 성립했다. 이후 대다수 중국 농민의 기본적인 신분-계급 상황은 귀족 농장의 예속농민이 아니라 일정한 소유권-경작권을 보유한 다수의 소농-소작농의 상태였다."(309-10)
"전통적 귀족체제가 해체되면서 왕권을 분점할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래서 중국사에서는 송대 이후에 '절대주의적 황권'이 수립되었다고 말한다." "절대주의라고 하여 왕권에 대한 견제와 비판이 소멸하였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견제와 비판은 보다 견실한 원리원칙 위에 더욱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귀족 권력 분점 체제에서의 견제와 비판이란 체계적인 교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전통적으로 규정되고 분배된 주권 지분의 계보와 계서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절대적 황권이 수립된 체제 속에서의 비판이란 그러한 절대적 황권이 행사되어야 할 정당한 방식이 무엇이어야 되겠는가를 논하는 훨씬 체계적이고 철학적인 교의에 의거한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한 교의가 바로 정주학, 넓게는 송학(宋學)이었고, 그러한 역할을 담당할 새로운 주체가 조정과 재야의 사대부층이었다. 그래서 송대에 이르면 사대부라는 말는 문화적·학술적 능력을 입증한 관료이자 향촌의 주도 계층을 뜻하게 되었다."(311-2)
"한·중·일 공히 지배적인 주류 입장이었던 기왕의 해석에 따르면, 주자학은 유럽 중세 아퀴나스 신학에 비견되는 신(聖 또는 理) 중심의 억압적 도덕학이고 중세적 신분 질서를 옹호하는 보수적 관학이었다. 그러나 정주학은 오히려 기(氣), 즉 속(俗) 우선의 교의였다. 따라서 정주학이 최초로 정립한 이기론(理氣論)은 '통섭Ⅰ'이 아니라 '통섭Ⅱ'와 그 원리가 같다. 우선 현상, 물질, 자연이라는 기의 질서[俗]를 자명한 사실로 전제한다. 이는 그 편재하는 기의 세계의 내부에 숨어 있다. 반면 '통섭Ⅰ'에서는 성스러운 질서가 현상, 물질, 자연, 인간의 전면(全面)을 속속들이 압도한다. 아퀴나스의 세계가 그렇다. 신의 섭리가 모든 사물 운행에 선명하고 압도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송대 이전의 '천즉도(天卽道)'의 세계관에서 도는 모든 자연사물과 인간사를 주재하면서 자명하게 드러나 있다. 반면 정주학에서 자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은 기일 뿐이다. 이는 격물치지-성의정심 전력하여 찾아야 할, 안으로 숨은 원리가 되었다."(322)
"물론 관학이 되기 이전까지 탄압의 대상이었던 정주학이 후일 관학이 되었다는 역설이 있다. 그리고 송대 이후 중국이 특이한 비신분 사회였다 하더라도 주-노, 군-신, 귀-천의 신분적 구분의 관습과 제도는 존속했던 것이고, 관학으로 된 주자학이 이러한 현실 신분 관행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에 대한 반발과 비판이 주자학 내부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왔음을 아울러 보아야 한다. 그들 교의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압도적으로 강한 현세 권력에 맞서 목숨을 건 비판을 피해가지 않았던 순교적 전통,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하면서 과거(科擧)를 위한 공부에 곤혹스러움과 거부감을 느꼈던 흐름, 그리고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다[개인위성(皆人爲聖) 또는 개민위성(皆民爲聖)]는 모토를 가지고 교의를 대중 속으로 확산시키려 했던 흐름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측면을 송대 정주학 이후의 유학에서 전면적으로 발현되는 특징이다."(323)
8장 유교사회 영구정체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 비판
"중층근대성론의 시대구분의 양대 축은 성속통섭 전환(통섭Ⅱ)과 성속통섭정립(통섭Ⅰ)이다. 그러니까 중층근대성론의 기본적인 시대구분은 둘이다. '통섭Ⅱ'의 시대는 현재와 이어져 있고, 현재가 그 일부인 '역사적 근대'이고, 통섭Ⅰ의 시대는 '역사적 근대 이전'이다. 그러나 이 두 시대가 전혀 별개는 아니다. 둘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통섭Ⅰ'의 정립과 함께 '원형 근대성'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나 공맹, 성서나 바그바드기타, 금강경 등 '통섭Ⅰ'의 핵심을 담은 텍스트들은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이 접했을 때도 모종의 강렬한 현재성을 가지고 다가온다. 이 텍스트들 속에서 모종의 '현재성'을 느낀다 함은 그 역시 현 시대와 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형 '근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속의 통섭 관계가 오늘날의 그것과는 뒤집어져 있기 때문에 시대감각의 차이를 느낀다. 따라서 이 현대성을 '원형(proto)' 근대성이라 부르고, 그 원형 근대의 시대를 근대가 아닌 근대 이전으로 분류한다."(361-2)
"그런데 '통섭Ⅰ'과 '통섭Ⅱ'의 정립 사이에 유라시아 차원에서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통섭Ⅰ'의 원리가 구축(構築)했던 고대 세계가 크게 변형되었다. 로마와 한(漢) 제국의 붕괴, 이슬람의 흥기에 따른 고대 중동, 아프리카, 페르시아 세계의 해체와 재편이 그것이다. 이 현상은 '통섭Ⅰ'의 고대 질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주변부에 위치해 있었던 중앙아시아 스텝 유목민과 아랍 중동의 원거리 상업 부족이 크게 강성해지면서 세력권을 주변 여러 문명권으로 확대해간 대이동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유럽 중세와 중국의 남북조, 수당, 5호10국 시대, 그리고 이슬람의 흥기와 확장의 시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시대의 원리는 '통섭Ⅰ'의 연장에 있고, 이 점에서 세계윤리종교로서의 이슬람은 정확히 '통섭Ⅰ'의 원리를 새롭게 구현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고대적 체제가 해체 재구성되고 유라시아 전반에 분권적 현상이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통섭Ⅰ'과 '통섭Ⅱ'를 잇는 중간적 시기로서의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362)
"중층근대성론의 고대-중세-근대(초기근대-본격근대)의 시대구분은 유럽근대의 자기인식을 위해 정립했던 기존의 고대-중세-근대 구분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유럽근대의 자기인식으로서의 근대'란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으로의 복귀라는 인식이었다. 이 관점에서 근대는 오직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만 기원하였고, 이를 계승한 서유럽에서만 완성되었으며 완성된 이후 비서구로 확대되어나간 것이 된다. 반면 중층근대성론의 근대는 '통섭Ⅰ'의 원리의 '뒤집힘'을 말하지, '통섭Ⅰ'의 원리로의 '복귀'를 말하지 않는다. 또한 '통섭Ⅰ'이든 '통섭Ⅱ'든 유라시아 문명, 더 나아가 인류사 전체에 해당하는 현상으로 본다. 다시 말해, '통섭Ⅰ'의 정립이든 '통섭Ⅱ'로의 전환이든, 고대-중세-근대의 시대구분이든, 일국사적 또는 지역사적 맥락이 아니라 지구사적 문명 교호의 맥락에서 본다. 따라서 중층근대성론의 시대구분만으로도 아시아 사회가 변화 발전 없이 정체(停滯)해 있었다는 편견은 충분히 기각할 수 있다고 본다."(362-3)
# 새로운 사회구성체 유형
1. 교환양식의 유형 요소 : 호혜의무형, 분권국가형, 집권국가형, 상품시장형, 중심형, 주변형, 반주변형
2. 생산양식의 유형 요소 : 공동체적, 노예적, 예농적, 소농적, 임노동적 유형
※ 1과 2에서 추출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특정 사회구성체를 형성한다.
9장 동아시아 유교소농체제
"토지의 한계생산성이 지극히 높은 수도작(水稻作, 물 대는 논에서의 벼농사) 농업이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주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송대의 강남 개발 이후이다." "토지의 한계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한정된 토지의 토질 개량을 위한 부단하고 집중적인 노동 투여가 요구된다(시비, 객토 등). 물대기, 피뽑기, 김매기, 때에 따라 틈새 농지에 윤작하기 등도 매우 집약적이고 세심하게 계획된 노력을 투여해야 한다. 요즘 말로 하면 다임무 수행(multi-tasking) 농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도작 농업에서는 대체로 거의 모든 작업이 개별 가족 단위의 집약적 노동 투여에 의해 이루어졌다. 물론 농업시대의 소농생산은 가뭄이나 수해, 또는 국가의 과도 착취에 의한 생존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여기에 대응하는 마을 공동체 단위의 상호 협력과 부조(扶助)의 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렇듯 가족 노동이 사회적 생산의 안정적 거점이 되었다는 점이 동아시아 '소농사회' 성립의 가장 중요한 물질적 근거였다."(378-9)
"1979년 중국은 집단농장-기계화-대규모 경영을 핵심으로 하는 농업정책의 기조를 농민 각호에 자작 경작지를 허용해주는 방향으로 크게 전환하였다. 주지하듯 농업생산은 크게 신장되었고, 여기에 향진기업(농촌공업)이 결합하였다. 그 결과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소농생산과 농촌공업의 결합이라는 이 기본 틀은 중국사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오래된 모델이라는 사실이다. 이 모델이 안정된 틀을 갖추어 역사에 최초로 부각되었던 곳 역시 중국 남송의 강남 지역이었다. 당시 강남 농민들은 벼농사 소농경작(2모작, 3모작)을 하면서 동시에 베짜기, 양잠, 유채·사탕수수 재배 등의 다양한 부업을 통해 상업적 수공업망에 연계되었다. 도시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도자기, 비단, 면직, 차 생산 단위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소농+초기공업의 결합망은 국내외의 광범한 교역망 안에 포섭되어 있었다. 이러한 양상은 16세기경부터 조선과 일본에서도 유사하게 진행되었다."(382)
"동아시아 수도작 지역의 소농은 유럽의 인클로저와 같이 강력한 외압에 의해 급격하게 대규모로 농토에서 내몰린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중국에서는 이미 송대부터 자립적 소농이 형성되었고, 명청시대를 거치면서 농토에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안정적으로 정착했다. 조선과 일본에서 이와 유사한 과정은 16세기 이래 19세기까지 진행되었다. 이러한 '안정적 소농생산체제'가 동아시아 소농체제론의 요점이다. 소농을 농토에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려 하는 정책은 선진(先秦) 시대부터 뚜렷이 관찰되는 동아시아 문명의 공통 특징이다. 소농에게 부칠 땅을 주어 생산을 계속하도록 하는 것을 유교는 '항산(恒産)'이라 불렀고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이를 기본 정책 방향으로 유지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유교소농체제'를 '소농항산(恒産)체제'라 부르기로 한다. '소농항산체제'는 19세기 후반 이래 급격한 사회변동 속에서도 동아시아 지역에 의연히 존재해오는 특징이다."9383-4)
"사대부층은 수도작 농법을 선진적으로 전파하고 농지 확장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생산주도층이기도 했다. 이들은 생산성이 높은 이모작 농법을 권장하고 황무지 및 산간 농지 개발과 강변 및 해안 농지 간척을 주도했다. 이모작 농법은 적시에 물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으면 한 해 농사를 몽땅 망쳐버릴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저수지와 관개시설이 매우 잘 정비되어야 한다. 당시에 이러한 고도의 토목공사를 위해서는 잘 정비된 관료 기구와 민간 유력자의 총합된 힘이 동원되어야 했다. 일면 관료요, 일면 지방 유력자인 사대부의 이중적 존재 양식은 이러한 관과 민의 힘의 총합이라는 요청에 잘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결국 '유교경제' 또는 '유교적 소농체제'라고 하였을 때의 '유교'란 정주학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유교경제를 수도작 소농경제로 국한하여 말하는 것이 된다. 바로 이 '동아시아 수도작 소농경제'='유교경제'가 20세기 후반 이후 동아시아 경제 도약의 역사적 근거를 이루고 있다."(388-9)
제4부 조선 후기 유교 근대의 다이내미즘
10장 1659년 기해예송의 전말과 유교 국민국가의 태동
# 기해예송 : 1659년 5월 4일, 효종이 돌연 서거하자 효종의 의붓어머니이자 인조의 둘째 왕비인 자의대비 조씨가 장례에 입을 상복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 송시열은 1년 기년복을, 윤휴는 참최 3년복을 주장했고, 치열한 논쟁 끝에 최종적으로 송시열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유교에서는 매년 사자(死者)의 기일에 사자와 다시 만나는 기제(忌祭)의 중요성이 매우 크다. 조선 유자들이 크게 중시했던 『주자가례』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사당(詞堂) 항목은 사자와 남은 자손이 일상생활에서 항상 접촉하고 만나게 되어 있음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아울러 유교에서는 상례조차도 다른 종교의 그것에 비해 남은 친족들과의 사회학적 연결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압축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것이 유교 종법에서 말하는 오복지친의 개념이다. 오복지친이란 사자의 상례에 사자를 위해 입는 참최, 자최, 대공, 소공, 사마의 다섯 가지 상복을 입어야 하는 가까운 친척으로서, 그 구분은 사자와 조상자(弔喪者)와의 친족적 관련 정도에 따라 이루어진다. 결국 사자는 상례를 통해 그의 친족들과 그가 남긴 자손들의 친족적 계보와 서열을 엄밀하게 재확인하는 것이며, 이러한 의례를 통해 사자와 그의 친족, 자손들은 윤리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으로 다시 묶이게 되는 것이다."(413-4)
"1666년 3월 23일, 유세철 등 영남 유생 1000여 명이 서명한 장문의 상소가 올라왔다. 기해년 복제 논의에서 송시열의 설을 격렬히 탄핵하는 내용이었다. 주로 허목의 설에 윤선도와 윤휴의 의론을 섞은 것이었다. 당시 남인 예론의 결정판이라 하겠다. 당시 조선 사회는 향촌 단위까지 유교 네트워크가 잘 발달되어 있었는데 영남 유림은 남인 세력이 강했다." "17세기 말엽 조선에서 형성된 유교적 공론 네트워크는 정보 회전의 폭과 속도에서 당시 유럽에 비해 결코 못하지 않았다. 예송논쟁 과정에서 조선의 유교정치는 전국화(nationalize)되었고, 근대적 수준의 유교적 공론장이 탄생했다. 12~13세기 송대에 처음 출현했던 초기근대 유교 공론장의 수준을 크게 뛰어넘는 것이었다. 17세기에 이런 수준의 전국정치(national politics), 담론정치(discourse politics)가 행해지고 있던 나라가 조선 말고 또 있었을까? 문화 상황이 달라 동렬 비교는 곤란하지만, 격렬한 혁명과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영국 정도가 아니었을까."9438-9)
"근대적 의미의 조선형 민족의식의 시작은 호란 이후의 소중화(小中華) 의식이었다. 그 이전 왜란의 영향도 있었다. 그 결과 중국과도 일본과도 다르다는 민족 단위의 독립 차별 의식이 분명했다. 이 소중화 의식은 일부 척화파 사대부만의 관념적 사치가 아니었다. 민간에 널리 파고 들어간 대중의식이었다. 기해예송을 계기로 유교적 담론이 대중화, 세속화된 형태로 향촌으로, 그리고 양인, 노비층으로까지 퍼져나갔다. 그 결과 반상(班常) 신분제도의 선명한 구분선이 모호해지고 흔들린다. 13장에서 말하는 '유교적 평등화 과정'이다. 그렇듯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에게까지 대중화, 세속화한 유교가 '대중유교'다(제14장)." "그렇다면 이 시기 조선에는 국민국가(nation state)가 분명히 태동하고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개념 일반과 종차(differentia)를 감안하면 조선형 국민국가, 또는 유교적 국민국가 되겠다. 그 출발점을 굳이 명시해본다면, 조선에 본격적인 전국정치가 출현했던 기해예송 연간이었다."(443)
11장 유교군주와 근대주권: 윤휴, 정약용, 정조
"기해예송 당시 백호 윤후의 입장은 우암 송시열, 미수 허목과 판이하게 달랐다. 왕위에 오른 자가 적장자냐 아니냐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왕위에 오른 자는 그의 친족적 서열과 무관하게 전왕의 대통을 잇는 적장자가 된다. 따라서 왕이 죽었을 때는 가장 높은 상복이자 적장자에 대한 상복인 참최 3년복을 마땅히 입어야 한다. 이것이 백호의 주장이었다. 허목이나 송시열에게 '친족례=가례'와 '왕례=방국(邦國)례'의 원칙은 서로 다를 수 없었던 반면 윤휴는 마치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칼로 쳐 끊어버린 것처럼 이 둘을 날카롭게 끊어버린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서인(우암) 대 남인(미수·백호), 즉 1년설과 3년설이 대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면 윤휴의 시각과 송시열, 허목의 시각이 대립하고 있다. 〈우암 대 미수의 대립선은 정통적인 종법논리 안에서의 다툼일 뿐〉이다. 반면 〈백호 대 우암·미수의 대립선은 종법논리와 종법을 넘어서는 초종법논리 사이의 대립〉이다."(466-7)
"존존(尊尊)과 친친(親親)이란 예론의 전문용어인데, 쉽게 말하면 존존이란 정치적 상하 관계를 말하고 친친이란 혈연적 유대 관계를 말한다.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존존이란 공적 윤리에, 친친은 사적 윤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교 종법제에서는 이 둘이 분리하기 어렵게 뒤섞인다. 종법제란 원래 제후가(諸候家), 즉 왕가의 친족법으로서 왕권승계에서 장자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원리다. 따라서 부자 관계란 군신의 존존 관계이면서 동시에 부자의 친진 관계일 수밖에 없다." "이 친친 존존의 원리를 기해예송에 적용하면, 우암·미수 양인은 친친 존존이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고 본 점에서는 같다. 반면 백호는 이 둘을 떼어버렸다." "백호 견해의 강점은 이렇듯 거친 파열에 있다. 존존과 친친의 원리 사이의 불화를 교묘하게 봉합하려 하지 않고 거칠게 터트려버린 채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이다. 백호 의론의 적극적인 의미는 정치윤리와 친족윤리 간의 분리를 위한 개념적 물꼬를 튼 데 있다."(467-9)
"존존과 친친 원리의 분열, 왕례와 가례의 분열이 시사해주고 있는 핵심적인 의미는 국가주권에서 공적인 성격이 부각되고 사적인 측면이 퇴조한다는 데 있다." "백호와 다산처럼 군주복제를 '위천왕참'의 원리에 귀속시키면 적장(嫡長)을 따지는 가례 원칙이 끼어 들어올 틈이 없어진다. 이로써 군주의 주권은 그의 적통성(嫡統性)과 장서(長庶) 문제, 즉 친족적 구속력으로부터 해방된다. 군주의 주권에서 사적, 친족적 성격이 탈색되어감에 따라 공적, 정치적 성격은 강화된다. 이로써 군주의 주권은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된다. 종법이나 기타 다양한 관습으로 왕권을 규제했던 유가의 이데올로그들은 그들의 교육에 순치된 군주를 '무위지치(無爲之治)의 성군'이라 불렀다. 그러나 종법과 관습으로부터 군주를 해방시키려는 다산은 역대의 진정한 성군은 모두 힘써 일하여 미래를 개척한 '유위지치(有爲之治)'의 군주들이었다고 주장했다. 다산과 백호가 그린 군주는 바로 그러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군주였다."(474-5)
# 위천왕참爲天王斬 : 왕을 위한 상복은 모든 이에게 최고의 상복인 참최 3년복 뿐이라는 『주례』의 한 구절
"이렇듯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군주의 배면에 백호와 다산이 동시에 강조하였던 〈세상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주재(主宰)하는 인격신적 상제(上帝)〉라는 후광을 띄워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백호와 다산은 군주의 주권은 결코 나누어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분명히 왕좌의 일인에게로 . 모주권이 집중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인에로의 사유화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 '일인'이란 친족적, 전통적, 정치적인 입지, 서열, 채권·채무 관계와 무관한 개인이다. 즉 현세적 관계망들과는 무관한, 그것들을 초월한, 추상적인 개인이다. 이러한 초월적 지위는 군주의 사적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공적 권능과 정의를 위해서 군주에게 부여된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 시각에서 보면 이러한 군주의 초월적 지위가 사적인 것이었겠지만, 절대군주론자, 일반 인민의 시각에서 보면 사적인 것을 배제한 순수히 공적인 것으로 된다. 근대적 의미의 공개념이 여기서 모습을 드러낸다."(475-8)
"정조의 안정된 치세는 숙종, 영조와 같은 군주가 궂은 일을 치워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숙종의 환국정치와 영조의 탕평정치는 송시열류의 왕권 견제 세력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 숙종기 거듭된 숙청과 재숙청의 순환 속에서 많은 기개 높은 유자들이 목숨을 잃었고, 정치판에서 영원히 배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하였기 때문인지 정조에게는 현종이 송시열에게 품었고 숙종이 윤휴에게 품었던 바와 같은, 사림의 영수들에 대한 두려움에 가까운 존경의 마음이 애초부터 별로 없었던 듯하다. 정조 자신의 높은 학문 수준도 이를 부추겼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이들 사림과 당파의 영수들을 지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다소 깔보면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정조는 스스로 군주스승(君師)을 자부하고 군주도통(君主道統)설을 주창했다. 〈군주 자신이 모든 유자의 스승이고, 공맹정주의 도통을 군주인 자신이 계승했다는 것〉이다. 송시열이 들었다면 기함하여 뒤로 넘어질 일이다."(486-7)
"숙종, 영조를 거치면서 기해예송 때 현종을 두렵게 하고 또 분노케 하였던 조정의 이중권력, 대간(臺諫)의 견제권력은 사실상 무력화되어 있었다. 정조 대에 이르면 윤휴가 일찍이 주창했고 후일 정약용이 지지했던 대간폐지론은 이미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아울러 재야를 지배하던 유림세력, 그리고 이 세력의 공론의 대표자로 존중받던 '산림(山林)'의 권위도 현저히 추락했다. 그 결과 조정은 군주 일인의 의지에 조종되었고, 지방도 국왕이 직접 챙기는 직할관리 대상이 되었다. 유교국가의 '상층유교(high confucianism)' 세계가 이렇듯 현저하게 변모해가는 동안, 사회의 밑바닥에는 '대중유교(mass confucianism)'의 새로운 파고가 높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영·정조가 만들어낸 이러한 만천명월형 중앙집중 정치 시스템의 열매는 조정의 몇몇 척족 집안의 손아귀로 넘어가고 말았다." "정조 밑에서 정치를 배운 순조의 장인이자 시파의 영수인 김조순과 그 가문 일족이 이제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491-2)
12장 〈온 나라가 양반 되기〉: 조선후기 유교적 평등화 메커니즘
"평등을 철학적 차원에서 보면 평등 지향성과 신분 지향성은 분명 모순이다. 칸트가 말하는 평등은 도덕적 자율성(moral autonomy)이 내면화된, 그리하여 사회적 층위가 인격적·도덕적 층위로 침하되지 않는 자유로운 시민으로서의 평등이다. 따라서 평등 의식의 수준이 높을수록 사회적 차등 의식은 약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평등을 사회학적 차원에서 보면 이 둘이 꼭 모순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례 관계가 될 수도 있다. 평등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신분 경쟁도 치열하다는 말이다. 내가 뛰고 있지만 내 옆의 그가 더 빨리 뛰면 나는 뒤떨어진다. 그러니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 평등 의식과 차등 의식은 여기서 비례적 상승 관계에 있다. 평등 지향과 신분 지향이 동시에 강한 사회는 한국만이 아니다. 다만 한국에서 특이하게 그 상승 관계가 강한 것뿐이다." "봉건적 신분은 세습되어 미리 고정되어 있으므로 오히려 신분 경쟁이 지극히 약하다. 봉건적 신분이 해체될수록 신분 경쟁이 강해진다."(495-6)
"16~19세기는 동서를 막론하고 '시장=상업경제'가 활성화되고, 그 결과 경제력을 갖춘 신흥 세력이 부상했던 시대다. 19세기 전반의 프랑스인으로 대귀족 출신 정치가이자 지식인이었던 토크빌은 17~18세기의 프랑스와 19세기 미국의 사회상을 비교 분석하면서, 이들 시대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을 〈사회적 조건의 일반적 평등(general equality of social conditions)〉 경향이라 하였다. 그 결과 〈상층과 중간층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서로 비슷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동아시아도 상황은 비슷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시장=상업경제'가 강화되어 상업농-도시상인층의 사회적 지위는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장시가 크게 증가하고 화폐경제가 확대되었던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종의 평등화 현상이 발생했는데, 이는 초기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사회에서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상층 신분 인구 비율이 60~70퍼센트에 이르는, '온 나라가 양반 되기'는 오직 조선 유교사회 특유의 평등화 현상이었다."(501)
# 유교적 평등화의 3단계 과정
1. 16세기에 주류 이념으로 정착된 성리학적 예론은 17세기에 예송 논쟁을 통해 강력한 정치투쟁의 수단으로 벼려진다. 예를 통한 정치투쟁이 전국화했고, 예론에 내재한 평등적 예관(禮觀)에 향촌 사족에게 전파된다.
2. 18세기에 들어서면 향촌 사회에 신양반층이라 할 수 있는 '신향(新鄕)'이 대거 출현한다. 구향과 신향 사이의 신분 투쟁을 향전(鄕戰)이라고 하는데, 이 향전을 통해 양반층이 인구학적으로 확장되는 계기를 이룬다.
3. 향전의 본격화에 뒤이어 노비의 속량, 탈주가 가속화, 대규모화하면서 노비 수는 급감한다. 이들 탈주 노비들은 타향으로 흘러 들어가 양인 행세를 하고 한 발 더 나아가 양반 행세를 하면서 향전의 한 축을 이룬다.
"노비 출신의 사람들이 지배 신분으로 환골탈태를 모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 양반의 신분은 상당 부분 사회적인 인정(recognition)에 근거했던 것이니만큼, 이들 나름의 각고의 노력을 통해 실제로 사회적 인정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온 나라가 양반 되기'가 단지 상층 신분에 대한 무비판적인 선망만으로 전개되었던 것은 아니다. 신분 상승의 압력이 거세어갈수록, 이 경주에 '신분 제한 없이' 모든 사람들이 뛰어들게 될수록, 신분 체제 자체에 대한 냉소, 회의, 부정 역시 점차 그리고 급격하게 확대되어갔다. '유교적 평등화' 과정에는 양적인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양반으로 비슷해진다는 '신분적 평등화'뿐 아니라 신분제 자체에 대한 부정이 확산되어가는 '반(反)신분적 평등화' 역시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무차별적 평등화에 대한 냉소가 내면의 평등화나 질적 평등화로 승화되어가는 것은 더 긴 시간을 요하는 역사적 숙제로 남았다."(532-3)
13장 동학(東學): 대중유교와 인민주권
"'유교적 평등화 과정'은 유교 국가의 몰락 과정이면서 동시에 유교 대중 전파의 전례 없는 성공 과정이기도 했다. 양반이 면세 특권을 독점하고 있었기에 양민과 노비의 부세와 요역 그리고 신공(身貢)에 의존하고 있었던 조선은 양인과 노비 신분의 인구 감소에 따라 쇠멸해갈 수밖에 없었지만, 동시에 위신 있는 유교적 풍속과 관행은 양민과 노비층 안으로 깊고 넓게 확산되어갔기 때문이다. 유교적 풍속과 관행을 철저히 익히고 흉내내는 길이야말로 신분 상승의 요로였다. 그래서 이미 많은 조선 후기 신분사 연구자들이 밝힌 바 있는 양반 신분(유학, 향임, 생원 등)의 급증 현상은, 동시에 유교의 급격한 대중화 과정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즉 조선 후기 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대중유교(大衆儒敎, mass confucianism)란 느슨하게 열린 양반 신분의 말단을 차지하고 있는 다양한 신분층과 이 층 바로 밑에서 이 층과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밀접한 영향을 받고 있었던 양인과 노비층이 맹렬하게 흡수했던, 대중화된 유교다."(554-5)
"최제우가 바라보는 당대는 도덕군자가 지벌과 가세로 결정되는 세상, 어진 사람은 궁박하며, 몹쓸 사람이 부귀를 누리는 사회다." "이로써 정주학적 질서가 현실의 신분 질서에 부여한 도덕적 권위, 신성함의 위광이 부서진다. 그 반대물인 부도덕과 타락의 대상이 된다. 한편으로는 유교적 신성함이 부정되고 회의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숨어버린 신성을 찾는 구도(求道)의 열정이 뜨거워진다. 이 회의와 열정을 천재적으로 통합한 것이 최제우고 그의 동학이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유교의 대중화 현상 자체가 유교의 정통적 신념들 간의 불구대천의 투쟁을 역사적 전제로 한다. 그 투쟁의 격렬함을 통해 지배 질서에 남긴 성스러운 자국들을 스스로 지워간다." "이 회의와 냉소의 확산과 병렬하여, 지배 체제의 외곽에서 발생한 두 가지 흐름의 열정이 있었다. 하나는 위로부터의 다른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전자는 유교적 원리주의 즉 위정척사 운동이고, 후자는 유교적 대중주의, 즉 동학운동이다."(558-9)
"현실의 지배 질서의 표면에서 철저히 부서진 신성함의 거소는 어디가 되어야 할 것인가. 지벌 가세 없고 문필 없는,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 깊은 속이다. 현세의 성공과 평판, 즉 현세가 그리고 있는 지벌과 가세라는 외양의 결은 더 이상 신성한 뜻의 표출이 아니다. 여기서 신성한 뜻은 현실 질서의 이면으로 퇴각한다. 〈신성함이 숨는다. 노심초사 전전긍긍 힘써 찾고 모셔야 할 아지 못할 손님과 같은 존재로(시천주). 인간의 심사 깊은 곳으로. 그곳에 신성한 하늘이 있다(인내천)〉. 최제우의 인내천-시천주 사상은 유교에 내재한 평등사상을 더욱 근본화시킨 것이다. 사람 안에 신성함이 내재한다는 사상은 원시유교에서부터 존재했던 발상이며, 정주학에서 특히 강조되었던 사상이기도 하다. 하늘의 신성한 뜻이 내린 사람 또는 받은 사람이 유교에서 말하는 성인(聖人)이다." "명나라 왕양명의 제자들은 〈온 거리가 성인으로 가득하다〉 하였다. 이는 최제우의 〈민 누구나 요순(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과 아주 가깝다."(559)
"백호와 다산의 정치신학적 국체관은 유럽근대 초입의 절대주의 사상의 근거가 되었던 '정치신학(政治神學)'과 흡사하다. 그러나 백호와 다산의 정치신학적 국체관은 근대적 주권론의 시각에서 보면 아직 미완성이다. 신성한 군주만 있을 뿐, 신성한 인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신성한 인민이 등장하면서 정치신학은 점차 근대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로 전환해간다. 〈국가주권(the sovereign, sovereignty)의 신성한 몸체의 주체가 군주에서 인민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동학은 바로 그 '신성한 인민'을 창조했던 것이 아닐까?" "동학군의 정치관은 최소한 백호-다산이 꿈꾸었고 정조가 어느 정도 실행해 보였던 능동적인 유교정치를 의미하고, 여기에는 이미 근대적 정치로 향하는 동인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봉기한 동학군 자신이 새로운 정치적 힘, 능동적 정치의 몸체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초기근대의 절대주의적 정치신학을 넘어 근대적 인민주권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565-7)
14장 결론: 21세기 문명의 흐름과 유교의 재발견
"중층근대성론은 근대성의 중층 구성을 말했다. 여기서 '중층'은 비동시적인 것들의 '병존'과는 크게 다르다. 먼저 중층근대성론은 근대성의 세 층위, 즉 원형근대성, 식민-피식민근대성, 그리고 지구근대성, 그 어느 것도 비동시적이라고, 서로 다른 시간이라고 하지 않는다. 모두가 동시에 존재하는 하나다. 서로 삼투되고 절합(切合, articulate)된 하나의 전체로만 이 시점의 근대성, 근대가 존재하고 진행하고 있다." "유교적 자산은 이미 오늘 이 공간 안에 도착하여 중층근대의 전체 구성 안으로 들어와 있다. 그래서 근대를 넘어서야 한다고 하든, 또는 근대가 더욱 심화되어야 한다고 하든, 그것은 중층근대 속에 녹아 있는 유교적 자산을 동시에 딛고 넘어설 때 비로소 가능하다. 우리 현실에서 유교만 잘라내서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단순히 시공의 직관, 과학의 상식에 위배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 배경에는 더 깊은 '윤리적 문제'가 있다. 그것은 시간에 대한 차별 문제다."(574-5)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의 차이란 관측자의 위치나 운동 속도에 따른 상대적 차이일 뿐이다. 그 차이는 인간사에서 부단히 상쇄되는 극미량의 차이일 뿐이다." "인류문명사에는 늘 상대적인 주도 세력이 있어왔다. 이 주도 세력은 늘 바뀌어왔고, 주도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 간의 차이는 그다지 현격하지 않았다. 그 차이가 두드러지게, 폭발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다. 유럽의 독주, 세계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운동 속도에 따른 시간의 상대적인 차이를 절대 시간의 차이라도 되는 것처럼 왜곡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서로 다른 시간에 살 뿐 아니라, 서로 질적으로 다른 창조물로 생각했다. 나는 축복받은 인간, 문명인이고, 저들은 저주받은 야만인, 비인간이라 보았다. 문명인과 야만인이 사는 공간은 천국과 지옥처럼 질적으로 다르다. 시간 역시 꼭 같다. 그러나 하늘은 수많은 타인을 지옥에 떠밀어놓고 홀로 승천하는 천사를 결코 반기지 않으신다."(578)
에필로그: 동아시아의 여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