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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를 읽다 - 언어의 투사 맹자를 공부하는 법 ㅣ 유유 동양고전강의 6
양자오 지음, 김결 옮김 / 유유 / 2016년 6월
평점 :
서문
끊이지 않고 줄곧 이어진 문자 체계 때문에, 중국인은 조상이나 옛사람을 지극히 가깝게 여기고 친밀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역사학이 과거에 발생한 어떤 사건을 연구하는 독립적인 학문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역사와 현실 사이의 명확한 경계가 인식되지 않고 떼려야 뗄 수 없는 연속체처럼 여겨지는 것이죠. 우리는 삶의 현실에서 도움을 얻고자 역사를 공부합니다. 그런 까닭에, 중국에서는 나중에 생겨난 관념과 사고가 끊임없이 역사 서술에 영향을 끼치고 역사적 판단에 스며들었습니다. 한 가지 심각한 문제는 이 전통 속에서 사람들이 늘 현실적인 고려에 따라, 현실이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다시 써 왔다는 사실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다른 현실적 고려가 겹겹이 역사 위에 쌓여 왔지요. 고전을 원래의 태어난 역사 배경에 돌려놓고 그 시대의 보편 관점을 무시하지 않는 것은 이 시리즈의 중요한 전제입니다. ‘역사적 독법’을 위한 ‘조작적 정의’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7)
# 조작적 정의 : 사물 또는 현상을 객관적이고 경험적으로 기술하기 위한 정의
1 유가의 신념을 위해 싸우다
우리가 맹자를 읽는 방식은 맹자가 무엇을 말했는지 이해하고 나아가 암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맥락에서 봤을 때는 맹자가 어떻게 말했는지, 즉 그가 도리를 드러내는 태도와 형식이 맹자가 도대체 무엇을 말했는지와 똑같이 중요하다는 걸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맹자는 유가의 신념이 극히 불리했던 상황에 있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이 신념의 우수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을 계속 찾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군주들에게 더욱 환영받고 유행했던 다른 학설과 벌인 난투 속에서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맹자』의 뛰어난 점은 맹자가 제시한 생각이 아니라 여기에 있습니다. 맹자의 신념은 주로 공자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며, 공자가 신봉했던 주나라의 ‘왕관학’王官學의 전통으로부터 전승된 것으로, 신선하거나 자극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맹자의 웅변은 이 낡은 개념들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당시 다른 사람들이 내놓은 괴이한 논설에 비해 조금도 지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12-3)
『맹자』의 첫 번째 편인 「양혜왕」梁惠王을 여는 첫마디는 역사에 실제로 존재했던 양나라 군주 혜왕에게 주어집니다. 〈맹자가 양 혜왕을 만났다. 왕이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천 리를 마다하지 않고 오시니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孟子見梁惠王. 王曰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맹자가 대답하였다. “왕께서는 왜 하필이면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또한 인의가 있을 따름입니다.” 孟子對曰 “王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양 혜왕이 이 상황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에 맹자는 인과 의에 대해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왕께서 ‘어떻게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면 대부는 ‘어떻게 내 집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고, 선비와 백성은 ‘어떻게 내 몸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게 됩니다. 위아래가 모두 이로움만을 논한다면 나라는 위태로워집니다.” “王曰 ‘何以利吾國?’ 大夫曰 ‘何以利吾家?’ 士庶人曰 ‘何以利吾身?’ 上下交征利而國危矣.”〉14-5)
〈“만승의 나라에서 그 군주를 죽이는 자는 반드시 천승의 가문에서 나옵니다. 천승의 나라에서 그 군주를 죽이는 자는 반드시 백승의 가문에서 나옵니다. 만으로 천을 취하고 천으로 백을 취하니 많지 않은 양이 아닙니다.” “萬乘之國弒其君者, 必千乘之家. 千乘之國弒其君者, 必百乘之家. 萬取千焉, 千取百焉, 不爲不多矣.”〉 앞에서 “위아래가 모두 이로움만을 논한다면 나라는 위태로워진다”라고 한 맹자의 말은 여기에 이르러 더욱 직접적이고 절박해집니다. 사실상 ‘위아래가 이익만을 취하려고 하면 군주 당신이 위험해진다’라는 말이지요. 만약 군주 자신이 이런 살해와 약탈의 위험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으면 다음에 이어지는 충고를 마땅히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질면서 그 가족을 버리는 사람은 없고, 의로우면서 그 군주를 뒤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왕 역시 인의만을 말씀하셔야 하거늘, 어찌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未有仁而遺其親者也, 未有義而後其君者也. 王亦曰仁義而已矣, 何必曰利?”〉 15-6)
맹자는 전통주의자가 아닙니다. 그가 양 혜왕에게 ‘인의’를 주장한 이유는 인의가 옳다거나, 인의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고대 성인들의 가르침이라거나, 요임금과 순임금이 인의를 받들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군주 또한 마땅히 인의를 받들어야 해서가 아닙니다. 사실 맹자는 이익을 중시하는 양 혜왕의 태도에 맞추어 양 혜왕이 원래 알고 있던 이익을 부정하고, 만약 진실로 이익을 원한다면 ‘인의’야말로 올바른 답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맹자는 ‘이익은 이익이 아니다’라는 식의 역설적 표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추론은 여전히 역설적입니다. 그의 웅변은 상대방의 생각이 ‘옳은 것 같지만 아니’似是而非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전개되지요. 『맹자』의 웅변을 관통하는 핵심은 그 시기의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군주가 뒤떨어지고 쓸모없다고 여긴 인륜이나 인의 등 주나라 문화의 전통 가치를 당시 환경에 가장 적합한 관념으로 표현한 데 있습니다. 17)
맹자는 양 혜왕에게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는’ 국정 운영 방식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경작하는 때를 어기지 않으면 곡식은 먹을 만큼 생깁니다. 연못 전부에 그물 치지 않는다면 어류는 먹을 만큼 있습니다. 때에 맞추어 벌목하면 목재는 사용할 만큼 있습니다. 곡식과 생선이 먹을 만큼 있고, 목재도 사용할 만큼 있다면 백성이 삶을 도모하고 죽음을 슬퍼하는 데 아무런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삶을 도모하고 죽음을 슬퍼하는 데 아무런 아쉬움이 없는 것이 왕도의 시작입니다.” “不違農時, 穀不可勝食也. 數罟不入洿池, 魚鼈不可勝食也. 斧斤以時入山林, 材木不可勝用也. 穀與魚鼈不可勝食, 材木不可勝用, 是使民養生喪死無憾也. 養生喪死無憾, 王道之始也.”〉 즉 군주의 첫 번째 책임은 백성의 생산 패턴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입니다. 맹자가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백성의 생산 활동의 ‘때’를 망친다는 말은 곧 군주가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전쟁이야말로 가장 큰 피해이자 파괴입니다. 22-3)
춘추 시대에 수많은 제후국이 동시에 존재하던 상황은 전국 시대에 들어와 대다수가 정리되어 몇 개의 대국만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때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기본 추세는 남아 있는 국가가 점점 적어지고 최후에는 단 하나의 국가만이 남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겨우 버티고 있는 몇몇 국가는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자신이 마지막 남은 하나의 나라이길 바랐고, 각 군주는 자기가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우뚝 솟은 최후의 왕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王’은 이러한 수많은 전쟁의 종식을 묘사하는 특수한 용어로서 천하를 통일하고 마침내 왕이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왕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떤 조건 아래서 ‘천하의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걸까요? 이것이 당시의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절박하기 이를 데 없는 정치 의제였습니다. 맹자가 제시한 ‘천하의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정상으로 돌아감입니다. 백성이 정상적인 방식으로 생산하고 정상적으로 살게 하는 것뿐입니다. 24)
마지막으로 맹자가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옛말에 ‘어진 사람은 적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왕께서는 이 말을 의심치 마십시오.” “故曰 ‘仁者無敵.’ 王請勿疑.”〉 전쟁의 관건은 무슨 무기를 사용하는지, 어디에서 전투를 치르는지에 있지 않습니다. 백성이 잘 지내느냐 잘 지내지 못하느냐에 달린 것이지요. 잘 지낸다면 그들은 자신이 일궈 놓은 생활을 귀중하게 여기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국가를 지키려 들 겁니다. 하지만 사지에 사는 듯 지낸다면, 그들은 현재의 상황이 바뀌기만을 한마음으로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仁者無敵”(인자무적)의 본래 뜻은 ‘어진 사람과 맞서 적이 되려는 사람은 없으므로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입니다. 맹자는 이 말을 웅변의 맥락에 따라 ‘어진 사람은 적수가 없으므로 어디에서든 항상 이긴다’라는 뜻으로 절묘하게 바꿔, 양 혜왕에게 마치 비현실적으로 멀리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이 답을 의심하지 말고, ‘인정’仁政의 엄청난 우세를 믿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0)
당시 사람들은 인의가 과거의 정치 원칙이지, 여러 나라가 격렬하게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나온 규범이 아니기 때문에 부국강병이라는 현실의 요구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오히려 그 유창한 웅변으로 2천 년 뒤에 살고 있는 우리마저 이 이치에 내재된 열기를 느끼게 합니다. 맹자는 인의가 부국강병에 방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부국강병과 무관하지도 않으며, 반대로 부국강병을 지향하는 제일 좋은 방법, 심지어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인의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부국강병을 실현할 수도 없고 수많은 후유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어찌 논변을 좋아하겠는가?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일 뿐이다.” 予豈好辯哉, 予不得已.〉 그는 반드시 논변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갖가지 주장이 어지럽게 펼쳐지는 전국 시대의 환경에서, 한층 더 쉽게 이해되는 전통주의와 현실주의의 관점을 넘어, 군주의 귀를 사로잡을 기회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31-2)
2 왕업王業을 향한 큰길
맹자는 양나라를 떠난 후 제나라에 도착했고, 대화하는 상대도 제나라의 선왕宣王으로 바뀝니다. 〈제 선왕이 물었다. “제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의 일을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맹자가 대답하였다. “공자孔子의 제자 중 제 환공과 진 문공의 일을 말하는 이가 없어 후세에 전해진 바가 없고 신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부득이 말하자면, 그럼 왕에 대한 것은 어떻습니까?” 齊宣王問曰 “齊桓, 晉文之事, 可得聞乎?” 孟子對曰 “仲尼之徒, 無道桓文之事者, 是以後世無傳焉, 臣未之聞也. 無以, 則王乎?”〉 제 선왕은 분명하게 맹자에게 묻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제 환공을 본받아 이 시대에 제 환공과 진 문공 같은 패업을 다시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 매우 겸손해 보이는 맹자의 말에 담긴 의미는 이러합니다. ‘이보시오. 유가에서는 패업 따위는 논하지도 않습니다. 나와 이야기하려면 마땅히 좀 더 높은 목표와 기상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니오! 말하고자 한다면 나는 ‘왕 노릇’만을 논할 것이외다!’ 37)
〈(맹자가) 말하였다. “왕께 자신이 삼천 근은 들 수 있지만 깃털 하나는 들 수 없고, 짐승의 가는 털끝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눈이 밝지만 수레에 실린 장작은 볼 수 없다고 아뢰는 사람이 있다면, 왕께서는 그 말에 동의하시겠습니까?” 답하였다. “아니요.” 曰 “有復於王者曰 ‘吾力足以擧百鈞, 而不足以擧一羽. 明足以察秋毫之末, 而不見輿薪.’ 則王許之乎?” 曰 “否.”〉 〈“지금 왕의 은혜가 금수에는 이르면서도 공덕이 백성에게 다다르지 못함은 어찌 된 일입니까? 깃털 하나를 들어 올리지 못하는 것은 그 힘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레의 장작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 눈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보호받지 못하는 것은 은혜를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왕이 왕 노릇할 수 없다 함은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今恩足以及禽獸, 而功不至於百姓者, 獨何與? 然則一羽之不擧, 爲不用力焉. 輿薪之不見, 爲不用明焉. 百姓之不見保, 爲不用恩焉. 故王之不王, 不爲也, 非不能也.”〉 42)
송명대에 ‘리’理를 중심으로 하는 유학 이론에서는 맹자를 논할 때 특별히 ‘심학’心學을 내세웁니다. ‘마음’心은 『맹자』에서 확실히 자주 언급되는 단어이며, 핵심 관념입니다. 맹자가 말하는 마음이란, 지금 현재 우리가 말하는 ‘느낌’에 가까운 것으로 인간의 내적인 부분과 세상의 외적인 부분이 서로 맞닿은 지점입니다. 마음은 한편으로 외부의 자극을 받아 생겨난 느낌으로 내부와 외부의 연결을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느낌을 겉으로 표현함으로써 타인에게 전달하거나 옮겨 또 다른 층의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만듭니다. 인간은 마음을 전달하고 감응하며, 나아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를 넓히는 것’의 근본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모두 마음을 가지고 있어 인의를 가진 군왕을 알아보고 선택할 수 있으며, 인의를 가진 군왕을 지지하고 그에게 달려가 의지할 수 있습니다. 백성이 몰려와 의지하는 군주가 어떻게 ‘천하의 왕 노릇’을 하지 못하겠습니까? 44-5)
(정복 전쟁을 통해 '크게 바라는 것'所大欲을 이루고자 하는) 제 선왕의 생각이 터무니없고 불가능함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맹자는 그에게 올바른 방법은 무엇인지 곧바로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역시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 왕께서 인정仁政을 베푸신다면 천하의 선비는 모두 왕의 조정에 서기를 원하고 농부는 모두 왕의 땅을 경작하길 원하고 상인은 모두 왕의 도시에 재물을 두길 원하고 나그네는 모두 왕의 길을 출입하길 원하며, 천하에 자신의 군주를 괴로워하는 모든 이가 왕에게로 달려와 호소하길 원할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누가 이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蓋亦反其本矣. 今王發政施仁, 使天下仕者皆欲立於王之朝, 耕者皆欲耕於王之野, 商賈皆欲藏於王之市, 行旅皆欲出於王之塗, 天下之欲疾其君者, 皆欲赴愬於王. 其若是, 孰能禦之?”〉 핵심은 ‘근본으로 돌아감’에 있습니다. 무력과 전쟁은 말단임을 확실히 이해하고 무엇이 근본인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인정仁政을 베푸는 것’, 이것이 근본이지요. 48)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 편에서, 맹자는 세자였던 등 문공을 만났을 때, 그에게 ‘인성의 선함’의 이치를 설명하고, 그 화제 내내 요임금과 순임금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선정’善政은 ‘인성의 선함’과 연관되어 나온 것입니다. 맹자는 “인성의 선함을 논”하며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을 믿었는데, 이는 그의 이론상 논리적으로 필요합니다. 선정을 펼쳐 선량한 사회를 만든다면 무엇에 근거해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선’善에 대해 가진 판단과 그 ‘선’에 대한 바람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사물에 똑같이 아름답다는 감정을 느끼고 똑같이 아름다운 기대를 가지는 것, 이것이 ‘인성의 선함’에 대한 증거입니다. 선善을 누리고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람은 가장 보편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공통점을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공공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개개인의 마음속에 깃든 선에 대한 인정과 바람과 기대를 실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호응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지 압니다. 52, 54-5)
문제에 부딪혔을 때, 병을 마주하였을 때, ‘병세가 이렇게 심각한데 내가 뭘 어쩌겠어?’와 같은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맹자는 극력 반대합니다. 위중한 병세는 이따금 그 병을 계속 앓게 하는 핑계가 되지요. 『맹자』 「이루 상」에 있는 단락입니다. 〈“스스로 해치는 자와는 말할 수 없고 스스로 저버린 자와는 일할 수 없다. 예와 의가 아닌 것을 일러 스스로 해쳤다고 한다. 내 자신이 인에 머무르고 의로 말미암지 못하는 것을 일러 스스로 저버렸다고 한다.” “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 言非禮義, 謂之自暴也. 吾身不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 이 부분이 바로 성어 ‘자포자기’自暴自棄의 유래입니다. 맹자에게 “스스로 해친다”라는 말은 예와 의를 믿지 않고 반대하는 것이며, “스스로 저버리다”라는 말은 인과 의의 원칙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며 일을 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의지도 없을뿐더러 그렇기 때문에 건강한 생활로 돌아갈 기회조차 없어집니다. 55-6)
3 어둠 속의 횃불
맹자는 전국 시대의 사상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병폐를 예리하게 지적해 냅니다. ‘백가’百家라고 불린 전국 시대의 사상은 각자 다른 주장을 내세웠지만, 대부분 ‘하나만을 고집해’ 도드라진 하나의 원칙을 문제 해결의 만병통치약으로 삼았습니다. 첫째, 당시의 형세가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전쟁과 살육이 대단히 큰 고통을 불러왔습니다. 민심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원했지만, 복잡한 분석을 들을 인내심은 없었습니다. 둘째, 제각기 다른 사상 간의 경쟁이 격렬해지면서 각 학파의 사상가는 군주와 백성의 주의를 끌고자 자연스럽게 핵심을 과장하고 효과를 강조하는 책략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허행은 농사의 중요성을, 양주는 자기 보호의 중요성을, 묵자는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부풀렸지요.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만들어진 사회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70-1)
『맹자』 「진심 상」의 첫 번째 구절입니다. 〈맹자가 말하였다.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본성을 안다.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 그 마음을 보존하고 그 본성을 길러 이로써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 일찍 죽는 것과 오래 사는 것은 둘이 아니니 몸을 닦은 후에 기다리고 그로써 명을 세운다.” 孟子曰 “盡其心者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殀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 이 짧은 단락에는 맹자 사상의 몇 가지 핵심적인 개념이 집중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즉 “마음”心, “본성”性, “하늘”天, “명”命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건, 어떤 직업과 지위를 가졌건, 어떤 능력이 있건, 어떤 인격의 소유자이건 간에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맞닥뜨림, 그것이 ‘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명’을 대하는 기본 태도는 “그 바름을 순종하여 받아들이는” 자세여야 합니다. 비록 나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지혜를 사용하고 조심히 행동하여 될 수 있는 한 불행한 부딪힘을 피해 보는 것이지요. 75-6)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는 맹자가 ‘본성’과 ‘명’을 구분 짓는 단락이 있습니다. 〈맹자가 말하였다. “맛에서 입, 색에서 눈, 소리에서 귀, 냄새에서 코, 편안에서 사지는 본성이나, 명이 있어 군자는 그것을 본성이라 하지 않는다.” 孟子曰 “口之於味也, 目之於色也, 耳之於聲也, 鼻之於臭也, 四肢之於安佚也, 性也, 有命焉, 君子不謂性也.”〉 이렇게 무엇을 먹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어떠한 편안을 느끼는 가장 낮은 단계의 오감은 외부 조건에 의지합니다. 자기가 장악하고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비록 내 몸에 감각 기관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저절로 갖춰진 것이고 있어야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절반뿐입니다. 받아들이는 쪽이 나 자신이며, 자극하는 쪽은 나 자신이 아닌 ‘명’이 결정합니다. 우연하고, 주관적으로 배치되지 않은 부딪힘 말입니다. 그리하여 맹자는 “명이 있어 군자는 그것을 본성이라 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76-7)
〈“부자 사이의 인仁, 군신 사이의 의義, 주객 사이의 예禮, 현명한 자의 지혜, 천도天道의 성인聖人은 명이나, 본성이 있어 군자는 그것을 명이라 하지 않는다.” “仁之於父子也, 義之於君臣也, 禮之於賓主也, 智之於賢者也, 聖人之於天道也, 命也, 有性焉, 君子不謂命也.”〉 앞과는 반대되는 구절입니다. 이를 대조해 보면 맹자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관의 즐김은 외부 자극과 현실의 조건에 제약을 받습니다. 이렇게 구하지만 꼭 구해서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은 ‘명’의 성분이 ‘본성’보다 더 높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시간과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고, 또 낭비해서도 안 됩니다. 인, 의, 예, 지는 비록 우리가 반드시 실현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내재적으로 외부 조건에 통제되지 않는 기본 요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스러운 도리로, 자연스러운 힘이 인간을 인, 의, 예, 지를 실현하는 바른 방향으로 끌어당깁니다. 그러므로 외부 조건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내재된 ‘본성’에 따라 노력하면 됩니다. 77-8)
〈맹자가 말하였다. “만물이 모두 내게 갖추어져 있다. 자신을 되돌아보아 성실히 한다면 기쁨이 이보다 큰 것은 없다. 힘써서 서恕를 행하면, 인仁을 구하는 데 이보다 더 가까운 것은 없다.” 孟子曰 “萬物皆備於我矣. 反身而誠, 樂莫大焉. 强恕而行, 求仁莫近焉.”〉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라는 말은 모든 사물과 상황의 원칙과 도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애초부터 나에게 이미 주어져 있으니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가장 큰 즐거움은 본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아 마음이 편함’心安理得이기도 합니다. 즉 나의 행동과 나의 내부에서 직관적으로 일어나는 당위 판단이 하나로 일치하여, 머뭇거림이나 꺼림칙함, 불안이 없는 상태는 당연히 즐겁겠지요. 이 방법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보자면, “힘써서 서恕를 행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자각을 가지고 노력하여 타인과의 공감대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78-9)
‘마음을 다함’을 통해서 ‘본성’을 이해했다면, 이와 동시에 ‘하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은 우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고, 또 어떤 것은 나중에 들어온 외부의 자극과 영향입니다. 원래 있었던 것과 외부에서 들어와 원래 있었던 것과 섞이고 원래 있었던 것을 가려 버린 것을 명확하게 분별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보존하고 그 본성을 길러 이로써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 일찍 죽음과 오래 삶은 둘이 아니니 몸을 닦은 후에 기다리고 그로써 명을 세운다.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殀了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 내부의 진실한 감정과 성정을 잘 지키고 기르는 것이 ‘하늘’에 호응하고 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가는 생각할 필요도, 염두에 둘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그 마음을 보존하고 그 본성을 기르는” 방식으로 계속 수양하는 것이 ‘명’을 대하는 가장 올바르고 발전적인 태도입니다.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