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 - 관념 속 역사
데이비드 아미티지 지음, 김지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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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내전에 맞서기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다는 점은 내전이 인류가 벌이는 모든 종류의 분쟁 가운데 가장 파괴적이고 가장 파급력 있는 분쟁이라는 평판을 양산했다. 여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기원전 1세기 로마 내전이 한창일 때, 17세에서 46세 사이의 남성 시민 중 약 25퍼센트가 무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1700년 뒤인 1640년대에 벌어진 잉글랜드 내전의 인구 대비 사망자 비율은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의 사망자 비율보다 더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미국 내전 당시 발생한 사망자 수는 인구수에 비례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발생한 미국인 사상자 비율보다 훨씬 높았다. 미국 남부와 북부의 사망자 수를 합친 추정치는 약 75만 명이었는데, 이는 오늘날 미국 인구 중 약 750만 명이 사망한 것과 맞먹는다.23 이 정도 규모로 벌어진 대량 학살은 가족을 갈라놓고, 공동체를 산산조각내며, 국가를 변형시킨다. 또한 이후 다가올 세기에 대한 상상력에 상흔을 남길 것이다. 15-6)


하지만 내전의 특성이 소프트웨어 속 오류가 아니라 우리를 구성하는 불가피한 부분, 즉 인간이 되도록 해주는 구성 요소라고 가정할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렇게 가정하는 것은, 우리가 끝없이 내전을 겪으며 칸트가 약속한 영원한 평화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비관적 운명을 스스로 부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평화라는 필연적 약속을 부여받기보다 끝없는 내전을 운명적으로 선고받았다는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해 이 책에서는 내전의 도전에 맞설 수 있는 역사적 도구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 책 전반에 걸쳐 내전은 영원하지 않으며 설명 불가능한 것도 아님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역사적 이해와 맥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공화정 로마의 혼란스러운 기원에서부터 논쟁의 여지가 있는 현재, 그리고 이러한 당혹과 논란이 줄지 않을 미래에 이르기까지 모두 역사적 개념과 닿아 있다는 것이다. 16)


1부 로마로부터 이어져온 길


1장 내전 창안하기: 로마 전통


그리스인은 그들이 ‘폴레모스polemos’라고 불렀던 전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명히 이해하고 있었다(현대 다수 언어권에서 ‘격론을 벌이는’이라는 호전적인 의미를 내포한 ‘polemical’은 이 단어로부터 유래했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자신의 공동체 내에서 벌어지던 ‘전쟁’을 로마인이 생각하던 전쟁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부 분쟁을 바라보는 로마인과 그리스인이 개념적 차원에서 메워질 수 없는 큰 틈을 두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실제로 로마 작가들은 로마가 겪던 정치 분열의 기원을 “민주주의”와 같은 위험한 그리스 개념의 유입으로부터 찾곤 했다. 그리고 1세기에 그리스어로 글을 썼던 로마 역사가들은 자연스럽게 그리스 용어를 사용해 로마 내전을 묘사했다. 하지만 이러한 연속성이 있었음에도, 로마인은 자신이 무언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명칭을 필요로 했다. 바로 내전, 라틴어로 벨룸 키빌레bellum civile였다. 35)


로마인에게 전쟁은 전통적으로 상당히 구체적인 상황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전쟁은 정당한 사유로 인해 외부의 적과 싸우는 무력 분쟁armed conflict이었다. 이러한 전쟁과 ‘내전’의 극명한 차이는 내전에서 마주하는 적은 너무나 친밀해서 흡사 가족처럼 여겨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데 있었다. 상대편 사람들이 곧 동료 시민들cives이었던 것이다. 로마인들이 품고 있던 정당한 전쟁 개념에는 자기방어를 한다는 정당한 명분은 물론 합법적 적을 상대한다는 점이 내포되어 있어, 동료 시민들과의 전쟁은 명백히 이 개념에 배치되었다. 이렇게 생겨난 내전 개념에는 어떤 역설이 의도적으로 담겨 있었다. 내전은 실제로 적이 아닌 적에 맞서 싸우는, 전쟁이 될 수 없는 전쟁이었던 것이다. 로마 내전 기간에 이뤄진 선전 대결에서, 양측 모두는 각자 자신이 내세운 명분이 옳음을 대대적으로 알리며 지지를 구함과 동시에 정당한 이유에 따라 싸운다는 전통적인 정전론적 이해에 이 내전이 부합함을 주장했다. 35-6)


그리스인은 정치 영역에서 다른 무엇보다 조화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폴리스를 분열시키는 악惡을 그리스인은 스타시스stasis라 명명했다. 스타시스는 영어 단어 ‘static’의 어원으로, 기본적 의미 중 하나는 ‘움직임이 없는 상태’다. 다른 한편으로 이 단어는 ‘입장’ 혹은 ‘태도’를 뜻하기도 해, 정치적 분쟁에서 ‘한 입장에 서 있는’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폴리스의 통합을 방해하거나 공동의 목적을 거스르는, 적대적이며 분열을 초래하는 정치적 입장으로서의 스타시스는 내분 및 당파 갈등의 유사어이자, 추후 내전이라고 불릴 상황과 유사한 상황을 가리키는 단어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유사하다고 해서 실제로 동일한 상황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아테네인에게는 정치가 통치술, 즉 시민에게 명예를 부여하고 관직을 수여하는 방법인 한편, 사적 이익이 상충하지 않도록 조정하여 유혈 사태 없이 서로가 공적 이익을 추구하도록 하는 수단이었는데, 이를 통해 사실상 스타시스를 해결하고 그 상황을 대체했다. 39-40)


따라서 그리스인에게 스타시스는 실제 물리적 저항 행위가 아닌 당시의 어떤 심적 상태 정도의 의미로 남아 있었다. 스타시스가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전쟁으로 인해 스타시스가 나타날 수도 있었지만, 그 자체가 실제 전투를 수반하지는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스타시스는 실제 공격이나 전투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우리가 대치 국면이나 교착 상태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그리스인에게〕 스타시스는 ‘시민 간civil’의 문제도 아니었고, 필연적으로 ‘전쟁’ 발발로 이어지는 상황도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또한 스타시스 엠필로스stasis emphylos라는 용어를 썼는데, 이는 혈연과 친족으로 묶인 공동체 내에서 나타난 내분과 분열을 의미했다. 이때 필로스phylos는 가족 혹은 씨족을 뜻한다. ‘전쟁’(즉 폴레모스polemos)이라는 단어는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내분까지도 포함해 가장 위험한 불화를 가리킬 때에야 쓰였다. 40-1)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연이어 일어났던 로마 내전은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가 기원전 88년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로마에 진격했던 때부터 시작되었다. 술라가 일으킨 역쿠데타는 대규모의 유혈 참사 없이 끝났는데, 이는 양측 모두 도시 내에서 군인과 시민이 충돌하지 않도록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술라가 취한 조치가 잘 정리되었을지는 몰라도, 이는 확실히 로마의 성쇠에 전환점이 되었다. 즉시 나타난 영향이 재앙적이지는 않았다. 다만 술라가 (본래 한정된 기간에만 비상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부여받았지만, 그가 임의로 연장했던 직위인) 독재관으로서 향후 벌인 행위가 이뤄진 뒤에야, 그가 애초에 취했던 조치가 시민 간 폭력이 이뤄지는 순환 주기의 시작을 알린 일이었음이 명확해질 수 있었다. 그 주기는 제국을 이루며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황제에 오른 기원전 27년이 되어서야 끝을 맺을 수 있었다. 53)


# 술라의 대응

1. 첫 번째 분쟁에서 술라는 자신이 집정관의 권한으로 적으로부터 공화국을 지키고자 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곧 술피키우스, (이미 아프리카로 도망간) 마리우스, 그리고 협력했던 측근 열 명을 공공의 적hostes publici이자 따라서 범법자라고 공표했다. 이중 술피키우스만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았다.

2 재차 분쟁이 발생하자 기원전 83년 봄 술라는 진군을 개시했고 이듬해 그의 군대가 로마에 도착할 때쯤 적군(집정관 킨나와 장군 마리우스)은 모두 로마를 떠나 있었다. 로마를 장악한 술라는 살생부를 작성해 주요 반대파는 숙청하거나 재산을 몰수했고, 그 후손은 공직에 나서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술라에게는 그가 내전에 〔인간이 일으키는 현상으로서〕 인간적 형태를 부여했고 로마 세대에게 그 특징들을 규정해줬다는 점이 인정되어야 한다. 역사가 아피아노스Appian(약 95~약 165)가 제시한 견해는 내전이 정확히 어떠한 전쟁인지를 이해하는 후대의 관점을 형성토록 했다. 그가 힘주며 언급했듯,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가 함께 술라가 포룸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막아섰을 때, “정적 간에 투쟁이 일어났고 이는 로마에서 처음 벌어진, 시민 간 불화 정도로 가장될 수 없는, 트럼펫이 울리고 군기가 휘날리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전쟁이었다. (…) 이런 점에서 시민 분쟁이 초래하는 사건은 점차 경쟁과 쟁론에서 살인 행위로, 살인 행위에서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는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군대가 마치 적대적 세력을 대하듯 모국을 처음으로 공격했던 전쟁이었다.” 이는 내전이 단지 하나의 머릿속 개념이 아닌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으로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55)


내전의 눈에 띄는 표식은 트럼펫과 군기였고, 내전의 수단은 재래전이었으며, 내전의 목적은 공화국의 정치적 지배권 확보였다. 로마인은 내전을 구성하는 두 요소를 처음 제시했는데, 이 두 요소로 인해 이후 등장하는 내전 개념 간에 일종의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 형성되었다. 그중 하나는 내전이 단일 정치 공동체 경계 내에서 벌어진다는 개념이었다. 로마의 경우 이 공동체는 계속 확장해, 처음에는 로마 도시만을 포함하다가 점차 이탈리아반도, 반도를 넘어 지중해 분지까지 확대되었는데, 이는 로마 시민권 자체에 점차 더 많은 사람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전이 일어나는 범위에 따라 공동체 경계가 확장되는 일은 이후 세기에도 반복되었고, 우리 세대가 되어서는 그 정도가 정점에 다다라 ‘지구적 내전’이란 개념을 낳았다. 〔다른 한 요소는〕 바로 내전에서는 서로 대립하는 당사자가 적어도 둘은 있어야 하며, 이중 한쪽은 공동체를 관리할 정당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개념이었다. 56)


2장 내전 기억하기: 로마적 상상


이전까지 내전은 “개선식으로 이어질 수 없는 전쟁”이라고 루카누스가 언급했으며, 로마 논평자 대부분도 이에 동의했었다. 로마에서 이뤄지던 개선식은 외적外敵에 맞선 정당한 전쟁에서 거둔 승리에 보답하는 의미로 진행되었고 그 관례는 계속되었다. 승리를 거둔 군대의 병사들은 자신들을 이끈 장군을 임페라토르imperator라 칭했다. 그 뒤 장군은 원로원에게 각종 감사제를 열 수 있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 보통 적절한 때에 정식으로 개선식이 허가되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아프리카와 스페인에서 있었던 “실제로는 내전이었던”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올렸고, 이후에 카이사르는 갈리아, 이집트, 폰투스, 아프리카에서 (시민이든 외국인이든 관계없이) 적에게 거둔 승리는 물론 폼페이우스의 아들들과 싸워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식을 올렸다. 이는 내전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금기하던 사항을 명백히 위반하는 일이었다. 64-5)


# 폼페이우스는 북아프리카, 스페인, 갈리아에서 반란군을 진압한 것은 물론 기원전 82년 시칠리아에서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Gnaeus Papirius Carbo 군을, 기원전 77년에는 에트루리아Etruria에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Marcus Aemilius Lepidus 군을 진압했다.


옥타비아누스가 황제에 오르며 〔로마는〕 분쟁에서 벗어나, 평화가 깃들고 안정이 찾아온 ‘아우구스투스’ 시대라는 찬사를 듣는 일시적 휴지기에 들어섰다. 하지만 기원후 14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난 뒤 수십 년이 지나자 내전을 다루는 저작이 넘쳐났고, 이어 내전 자체도 되풀이되었다. 제국 군주제를 반대하던 이들은 향수에 젖어 과거를 회상하며, 부패가 엄습하기 전까지 공화정 시기를 공공선the res publica이 유지되던 시대였다고 여겼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전 세월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퇴색되어갔다. “노년층 중 대부분은 내전 기간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공화정을 겪어본 사람 중 누가 남아 있는가?”라며 역사가 타키투스는 『연대기』에서 아우구스투스 통치 말기까지 살아 있던 사람들에 대해 기술하며 애통해했다. 여기서 타키투스의 설명에 따르면, 전제專制는 다른 방식으로 내전이 지속되는 것이었다. 69)


살루스티우스는 로마의 운명에 대전환이 일어나게 만든 도덕적 결함을 지적했는데, 그 결함은 로마가 거둔 성과에 따른 예기치 않은 결과였다. 기원전 146년 로마의 적이었던 카르타고가 패배하면서 승리한 자의 옷 끝자락에 타락을 묻혔던 것이다. 살루스티우스는 그 이전에도 “시민과 시민이 싸웠”지만, 이는 오직 미덕에 따르는 명예를 구하기 위한 다툼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탐욕과 야심이 커지며 “운명은 잔혹해지기 시작했고 모든 것을 파괴했다.” 술라가 로마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시아에서 벌였던 군사 작전에서 취한 호화로운 전리품을 매개로 부대 병사들의 충성심을 매수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내전과 타락은 함께 진행되어 카틸리나가 술라의 뒤를 따라 “내전이 벌어지기를 열망하는” 타락한 병사들의 도움을 얻어 공화정을 전복시키고자 했던 때까지 로마의 도덕적 견고함을 차츰 약화시켰다. 76-7)


로마 대다수 역사가는 사회적 분쟁을 가져온 근원지가 다른 곳에 있었다고 보았다. 바로 (로마 정치를 ‘귀족주의자’와 ‘민주주의자’ 부류로 구분했던) 그라쿠스 형제, 즉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가 기원전 1세기에 추진했던 개혁을 지목했던 것이다. 키케로,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Velleius Paterculus, 아피아노스, 플로루스 모두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살해되었던 기원전 133년을 로마가 돌이킬 수 없게 갈라서게 된 첫 시기로 보았다. 이에 반해 바로Varro는 동생 가이우스가 죽은 기원전 121년을 갈등이 최고조되었던 때라고 주장하며, 가이우스야말로 “시민체에 머리가 두 개 달리도록 만들어, 시민 간 불화의 근원”을 야기했다고 말했다. 타키투스는 『역사』에서 민중 호민관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러한 내분은 “내전을 위한 시범 연습”과도 같았다고 적어두었다. 또한 키케로는 귀족optimi을 지지하던 측과 인민populares에 동조했던 측의 분열이 로마 공화국 내 배반과 불화의 씨를 심었다고 언급했다. 78)


내전에 빠지기 쉬운 로마의 모습을 단연코 가장 포괄적으로 다뤘던 서사는 기독교적 설명 방식으로 이뤄졌는데,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권위 있는 어조로 전했던 이야기다. 많은 저술 목적 중 하나는 도대체 왜 로마가 쇠퇴했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었다. 기독교에 반대하던 이들은 새로운 종교가 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만약 이교도 신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면, 로마는 침략자들과 싸워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독교 때문에 로마가 약해졌고 이에 고트족the Goths에게 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혐의를 반박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로마 제국은 도덕적으로 쇠락했고 분열로 이어지기 쉬운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만약 로마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된 시기가 예수가 태어났을 때보다 한참 전이었음을 아우구스티누스가 보여줄 수 있다면, 기독교는 로마가 쇠퇴하고 몰락하도록 한 원인이 될 수 없었다. 80-1)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교異敎 시절 로마는 “공동체 내부에서 이루어졌기에 더 극악무도했던 악행”이 연이어 펼쳐진 시기였다. 살루스티우스는 정확히 아우구스티누스가 필요로 하는 증거를 제시해주었는데, “역사서에서 살루스티우스는 부도덕함은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뒤 찾아온) 번영으로부터 발생했고, 이는 결국에는 내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라쿠스 형제 때부터 술라 시기까지 로마에서 있었던 폭동 선동은 “내전으로까지 이어졌는데”, 그 도시의 신들은 이를 막고자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신들은 종종 시민들끼리 서로 싸우도록 선동하고 그렇게 다툼을 벌여도 되는 구실을 주는 듯했다. 로마인들은 〔조화를 상징하는〕 콩코르디아Corcord 여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웠는데, 아우구스티누스가 비꼬듯 적어두길, “콩코르디아 여신은 로마인들을 버리고 떠났으며, 대신에 〔불화의 여신인〕 디스코르디아Discord가 무자비하게 이들을 내전으로까지 이끌었다”. 81)


2부 근대 초기 교차로


3장 야만적인 내전: 17세기


1604년에 휘호 흐로티위스는 로마 법 사상을 기초로 하여 전쟁 자체는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전쟁은 절대 규범적인 용어가 될 수 없고, 단지 “무장한 적에 맞서 무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기술적인 용어일 뿐이다. 〔따라서 전쟁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어떤 속성을 띠는지에 따라 해당 전쟁이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가 결정된다. 너무나도 확고하게 흐로티위스는 사적 전쟁─국가의 의지에 따라 벌이는 공적 전쟁 이외의 모든 전쟁─을 벌이는 것에 반대했고 사적 전쟁을 치르며 “국가가 위험한 소요 사태나 혈전”에 휘말려 치르는 대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에 흐로티위스는 플루타르코스나 키케로가 남긴 지혜를 따를 것을 권했다. 심지어 찬탈자usurper를 경험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흐로티위스는 “내전을 벌이는 것은 비합법적 정부를 불가피하게 따르는 것보다 더 나쁘다…… 어떠한 상태에 있더라도 평화는 내전보다 낫다”고 말했다. 95-7)


홉스는 국가 간 전쟁 외 두 전쟁 형태를 구분했다. 하나는 내전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상태에 있는 개인들 간 경쟁이다. 내전은 정의상 코먼웰스civitas〔즉 국가〕가 세워진 이후에나 벌어질 수 있었다. 그 이전에 존재했던, “시민사회 밖 인간이 처한 조건(즉 누군가는 자연상태라고 칭할 조건)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파벌은 그 종류가 무엇이든 필시 그런 분열을 일으키는 근원일 수 있었다. 특히나 “파벌을 형성한 사람들이 화술이나 모의를 통해 취할 수 없는 것을 무력으로 쟁취하고자 할 때 내전이 발생한다.” 파벌은 곧 “코먼웰스 내 코먼웰스civitas in civitate”가 생긴 것과 같았다. 어떤 군주든 그가 통치하는 국가 내 파벌을 용인하는 것은 “성벽 안에 적을 들여놓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는 전쟁이었는데 여기서 시민들은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었다. 즉 로마인이 관용적으로 쓰던 용어를 따르자면, 진정한 내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99-100)


로크는 전쟁 상태를 “흥분하고 성급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차분하고 안정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생명에 위해를 가할 의도”가 존재하는 상태로 정의했다. 이것은 전쟁 상태를 타자가 지닌 정념 속에서 항구적인 불안을 느끼는 상태로 정의했던 홉스식 전쟁 상태와는 상당히 달랐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민사회에 들어간다. 일단 국가 공동체에 속하면 인간의 안전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각자가 지닌 정념이나 외부의 적이 아닌, 바로 통치자가 지니는 공권력의 불법적 사용이다. 이럴 경우 정당하게 저항할 수 있다. 그러한 통치는 “인민이 세우고 그 외의 누구도 세울 수 없는 권위를 파괴하며, 인민이 권위를 부여하지 않은 권력을 도입하여 실제로 전쟁 상태를 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한 통치자는 자신을 애초에 인민 평화의 보호자와 후견인으로 만들어준 바로 그 사람들을 전쟁 상태에 놓이도록 하기에 엄밀히 말해, 그리고 아주 악랄하다는 의미로 반란자Rebellantes가 된다.” 103-4)


로크는 내전을 흐로티위스가 ‘혼합’ 전쟁이라 칭했을 법한 전쟁으로 이해했는데, 다만 ‘공적 권위’를 지닌 측이 통치자가 아닌 인민이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내전은 양측 모두가 정당해질 수 없는 종류의 전쟁이었다. 이런 점에서 로크는 심지어 홉스보다 더 급진적이었으며, 도시civitas 내에서 무장한 동료 시민들끼리 벌이는 싸움을 내전으로 정의하던 로마식 전통마저 거부했다. 로크는 내전이 국가 공동체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도록 하며, 시민사회를 무너뜨리는 (그래서 시민의식civility 자체로부터 이탈한) 상황을 수반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정당한 권위가 다시 회복되기 전까지 지속된다고 보았다. 로크는 그러한 복고가 1688년에 이뤄졌다고 확신했는데, 이를 두고 “우리를 가톨릭과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나도록 인도해줄 오렌지 공公─명예혁명이라고 하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정치적 조치를 통해, 아내 메리Mary와 함께 왕위에 오른 인물─의 왕림”에 따른 결과라고 칭했다. 104-5)


18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유럽 내에서 새로운 서사가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서사도 여전히 잇따라 벌어진 정변政變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를 통해 마찬가지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있었지만, 이에 더해 이제는 그 미래가 어느 정도 이상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충분히 제시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관에서는 연속된 내전보다는 연이어 벌어진 혁명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뤘는데, 이 이야기는 뿌리 깊은 갈등이 아닌 근대적 해방을 논했다. 이 서사는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에서부터 시작해서 역사를 통해 전개되었다. 이러한 서사가 형성되면서 과거를 잊어버리도록 하는 행위가 동반되었다. 혁명이 포함된 새로운 범주가 의도적으로 고안되었는데, 이는 어느 정도는 내전 기억을 잠재우고 조금 더 건설적이고, 희망적이며, 진보적인 자세를 갖도록 하는 무언가로 대체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로마의 내전 개념은 조용히 떠나지 않을 것이었다. 혁명의 시대는 다시금 내전의 시대가 될 것이었다. 110)


4장 혁명 시대에 벌어진 내전: 18세기


혁명과 내전이 서로 반대된다고 보는 관점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 독일의 위대한 정치 개념사가 라인하르트 코젤레크Reinhart Koselleck에 따르면, 혁명은 18세기를 거치며 “내전과는 대조되는 개념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18세기 초만 하더라도 두 표현은 “서로 교차하여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동시에 완전히 배타적이지도 않았다.” 16~17세기 동안 유럽 전역에 걸쳐 나타난 파괴적인 종교 분쟁과 연관되어 있던 내전은 계몽을 지지하던 이들이 앞으로 더 이상 벌어지지 않도록 기도하던, 바로 그 재앙의 부류였다. 그에 반해 혁명은 인간이 활동하는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던 유용한 변화를 이끄는 힘과 동일하게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18세기 말에,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한, 비교적 명확한 이원성duality이 나타났다. 코젤레크는 “여러 면에서 보아, 그때”가 되어서야 “‘내전’은 스스로 무의미한 순환을 반복한다는 의미를 얻게 되었고, 혁명은 이러한 순환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는 시도”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112-3)


18세기 유럽 사상가들은 내전을 적어도 세 유형으로 구분했다. 각 유형을 ‘왕위 계승successionist’ ‘정권 교체supersessionist’ ‘분리 독립secessionist’ 내전이라 칭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분리독립 내전은 18세기 후반에 나타난 상대적으로 새로운 실제 현상이었다. 이를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쓰인 말로 보자면, “한 민족이…… 다른 민족과 맺어온 정치적 결합을 해체”하고자 할 때, “이는 지구상 존재하는 여러 세력 사이에서 자연법과 신법이 부여한 별개의 평등한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18세기 후반 이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선례를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1580년대 에스파냐 왕가에 맞선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선례가 없었다. 북아메리카 내 존재하던 영국 식민지가 영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냈던 1776년 이후가 되어서야 이 내전 유형은 급증하기 시작했고 법적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미국인들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내전 관념을 제공했다. 115-6)


미국이 지닌 운명을 내세우는 경건한pious 서사에 비교적 덜 매료된 최근의 역사학자들은, 미국혁명을 내전으로 여겨야 할지 또한 재고해왔다. 영국 병력 상당수가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이후, 혁명은 전면전full-scale war 양태를 띠었는데, 장군들이 모습을 보이고, 트럼펫이 울렸으며, 군기軍旗가 휘날렸다. 혁명은 유례없이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는데, 바로 외국인으로 확인되는 적이 아닌 국내 동족에 맞서 싸웠기에 그러했다. 특히 뉴욕과 사우스캐롤라이나처럼 첨예하게 분열된 식민지에서 벌어지던 지역 분쟁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더구나 그 분쟁은 일족은 물론 더 폭넓은 주민층을 분열시켜, 이른바 (영제국에 맞선 저항을 지지하는 이들인) 애국파Patriots와 비록 다른 측면에서는 정치적 입장이 다르고 인종적으로 다양할지라도 적어도 본국 국왕에 충성을 지키는 충성파Loyalists로 나뉘게 했다. 한 역사학자는 미국혁명을 두고 “그렇다면 이 일은 혁명인 동시에 내전이었다”고 결론지었다. 123-4)


1776년 7월 독립선언서는 공식적으로 실제 벌어진 일들을 “진실된 세계”에 전하며 “이 연합 식민지는 자유롭고도 독립된 국가이며, 또한 권리에 의거하여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영제국과 맺은 모든 정치적 관계는 전면적으로 단절되었고, 또 마땅히 단절되어야만 함”을 입증해 보였다. 선언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바라보길, 영국은 이제 국제적 분쟁 한 측에 서 있던 당사자였고, 아메리카는 (두말할 나위 없이 복수 연합인) 미합중국으로 상대측에 놓여 있었다. 양자는 더 이상 동일한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는 부분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이로부터 양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동료 시민 혹은 앨저넌 시드니가 동일한 ‘시민 사회’라 칭한 사회 구성원도 아니었다. 아메리카 전쟁은 더는 페인이 1066년 이후부터 추정해서 매긴 아홉 번째 영국 내전이 아니었다. 독립선언서는 유럽 열강들에게 미합중국은 (실제로는 복수의 연합으로) 이제 상업을 개방하고 동맹을 맺을 수 있음을 알렸다. 130)


1789년 이전까지 혁명은 종종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자, 이미 정해져 있는 천체의 순환, 아니면 인간사에서 영구적으로 되풀이되는 일로 여겨졌었다. 잉글랜드 내전을 다룬 홉스가 쓴 대화편 『베헤모스』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1649년부터 1660년까지 영국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설명하며 이 관점을 전형적으로 내비쳤다. 그가 말하길, “나는 이 혁명에서 순환하는 움직임을 지켜봐왔는데, 바로 주권이 두 왕위 찬탈자인 아버지와 아들[올리버 크롬웰과 리처드 크롬웰Richard Cromwell]을 거쳐 작고한 왕[찰스 1세]으로부터 다시 그의 아들[찰스 2세]에게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결국 되돌아간다는 의미에서 혁명이었지, 사태를 전복시키는 의미에서의 혁명은 아니었다. 1789년 이후부터 복수로 제시되던 혁명들은 이제 단수로 혁명이 되었다. 이전까지 자연 발생적이고, 피할 수 없고, 인간의 통제 밖에 있는 사건이라 여겨지던 혁명이 이제는 도리어 자발적으로 계획하에, 반복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132)


혁명 상연을 위한 근대 각본이 1789년에 작성된 이후, 이 극은 전 세계에 걸친 무대에서 자주 재연되어왔다. 이후에 일어난 혁명들에서 초기 각본은 혁명이 내세우는 목적에 맞게 각색되었고, 매 상연마다 새로운 특성이 추가되었다. 이처럼 영향력 있는 평가를 받는 상황에서, 어떤 혁명이든 그 중심에는 내전이 자리한다고 찾아 나서는 행동은 노골적으로 반혁명적이라 비칠 수 있었다. 혁명에 반대하던 이들은 보통 혁명이 내세우는 정당성을 부정하고자 시도해왔는데, 이를 위해 기존 사회 및 경제 질서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어떤 시도에든 수반되는 폭력과 파괴를 강조했다. 어떠한 변환이 이뤄진다 하더라고 결코 그 희생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내전에 그와 같은 역행을 가져온다는 함축이 이제 부여된 상황에서, 혁명에 내전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일은 자유를 안겨주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것이라는 혁명에 내재한 잠재성을 약화시키는 행위로 보일 수 있었다. 133-4)


“지구적 내전의 전문 혁명가” 역할을 맡았던 레닌은 억압당하는 이들은 폭력적 수단을 통해서만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주장을 이어나갔다. 유럽 밖에 거주하는 민족들에게 전쟁은 제국주의에 맞서 민족 해방을 가져오는 도구였다. 이와 다른 주장은 단지 유럽식 국수주의European chauvinism에 불과했다. 사회주의는 전쟁을 없애지 않는다. 사회주의가 가져올 승리는 즉각적으로 이뤄지거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었다. 자본주의에서 탄생한 천자만태千姿萬態의 악惡을 완파하기 위해서는 많은 타격이 가해져야 했다. 또한 사회주의 혁명 자체가 전쟁과 결별할 수 없는 한, 혁명은 내전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게 되었다. “계급투쟁을 받아들이는 이는 내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내전은 모든 계급 사회에서 나타나는 자연적 현상이며, 어떤 조건하에서 불가피한 상황으로, 계급투쟁이 계속되고, 발전하며, 격화되면서 나타나는 일이다. 이는 벌어졌던 모든 위대한 혁명에서 그동안 확인된 바다.” 141)


3부 현재까지의 경로


5장 내전 문명화하기: 19세기


1863년 11월 19일 전몰자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행한 연설에서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이 미국 내에서 벌어졌던 분쟁을 ‘중대한 내전a great civil war’이라 표명하기로 했던 결정은, 1863년 당시에도 논쟁의 여지가 있었다. 그렇게 선언한다는 것은 곧 남부 연합이 벌였던 행동을 두고 북부 연방이 취했던 해석을 사실상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는 곧 남북 양측 전투원들이 동일한 정치 공동체를 이뤘던 구성원이었고, 여전히 그러하다는 점을 확증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정치 공동체는 바로 미합중국이었다. 또한 〔중대한 내전이라는〕 이름표는 당시 분쟁에서 무엇이 논쟁점이었는지 확연히 드러내주었다. 국민이 통합을 이루고 있는지, 헌법은 신성불가침한지는 물론 일방적인 분리 독립이 비합법적인지 등이 논쟁 대상이었다. 1865년 이후 어느 시기든 당시 분쟁을 ‘내전’이라 칭하게 된 것은 그러한 해석과 북부 연방이 지켜내고 옹호하고자 했던 원칙이 승리했음을 의미하는 결과였다. 147)


북부 연방과 링컨이 내세운 논리에 따르면, 연합이 내세운 분리 독립은 ‘반란’ 행위이며, 이를 진압하고자 벌였던 분쟁은 ‘내전’이었다. 그렇지만 링컨 자신은 분쟁 기간에 ‘내전’보다 ‘반란’이라는 용어를 거의 여섯 배나 많이 사용했다. 19세기는 전 지구적 연결망이 점차 강화되던 시기로, ‘내’전이라는 말에 담긴 고대적 경계성이 그 실질적 의미를 잃어가던 때였다. 게티즈버그 연설이 있기 1년 반 전에, 프랑스 소설가 빅토르 위고(1802~1885)는 그의 걸작인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1862)에서 범세계화된 세상에서 내전이 어떠한 변화된 영향력을 미칠지 고뇌하는 주인공을 등장시켰다. 소설 속 인물 마리우스 퐁메르시의 사색은 위고 자신이 내전과 다른 분쟁 사이 모호해진 경계를 지켜보며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링컨으로부터 빌려온 핵심적 구절인) “인류로 구성된 전체를 포괄하는 대가족”이라는 폭넓어진 무대에서, 내전과 외전을 나누는 그 어떤 구분도 급격히 그 의미를 잃게 되었다. 148-50)


전 지구적으로 발생했던 폭력은 19세기와 20세기 내내 지속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문제를 낳았다. 바로 내전을 문명화civilize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그 어떤 것도 내전을 통해 받은 정신적 충격을 완화시킬 수는 없었다. 정치 공동체는 찢어져 나갔고, 가족 내에서 반목이 벌어졌고, 친족 관계는 파괴되었고, 내전이 재발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으며, 승리한 쪽과 패배한 쪽 모두 수치심을 느꼈다. 17세기 이후 유럽 열강과 아메리카에 거주하는 유럽의 후손들은 분쟁 중 벌어지는 행위를 통제하여, 분쟁이 법에 의한 지배 아래 놓일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비유럽인을 대하는 방식은 상당히 다른 사안이 되었다. 즉, 내전의 법제화를 위한 노력이 가져온 유해한 부작용으로 인도적으로 다뤄질 사람과 그렇지 않을 이들 간 격차가 생긴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시민성civility과 비시민성incivility, 즉 문명 영역과 그 영역 밖에 있는 야만을 구분 짓는 경계에 부합했다. 151-2)


6장 내전으로 점철된 세계들: 20세기


1949년 10월 제네바에서는 계속 확대되던 전쟁 폐해 개선을 주목적으로 하여 인도주의 회의가 열렸다. 가장 시급한 안건은 전형적인 국제전에서 전투원으로 인정된 이들에게 보장한 보호를 ‘국제전 성격을 띠지 않은 분쟁에 따른 피해자들’까지 그 범위를 확대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일부 사절은 국제법을 국내 분쟁에 갑자기 적용하면 국가 주권이 침해된다고 여겼다(이와 정확히 동일한 이유로 1864년에 합의된 초기 제네바협약이 내전까지 확대 적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절들은 “국가가 지닌 권리는 모든 인도주의적 고려 사항보다 우선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는데, 그 근거로 “내전이 국제전보다 훨씬 더 잔혹하게 벌어진다는 점”을 내세웠다. 이러한 논의 결과 제네바협약 일반조항 제3조(1949)가 도출되었고, 이 조항은 당시 정확한 용어로 “국제전 성격을 띠지 않는 무력 분쟁”(이후 줄여 “비非국제적 무력 분쟁”, 아니면 약어로 “NIAC”)에 최종적으로 적용되었다. 175-6)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수십 년간 ‘비非국제적’ 분쟁의 빈도가 높아지자, 협약 적용 방식이 좀더 명확해져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 냉전 체제 아래 대리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제국이 붕괴하며 남긴 잔해 속에서, 내부 분쟁에 개입하는 일은 점점 흔해져, 당시 유럽에서 모습을 드러내던 긴 평화라는 영광은 퇴색되어갔다. 그 결과, 1975년, 독일의 한 도시인 비스바덴에서 열린 국제법 학회에서, ‘내전 비개입 원칙The Principle of Non-intervention in Civil Wars’이라는 제목의 문서 초안이 작성되었다. 비스바덴 의정서는 만약 어느 한 측이 외세의 참전을 요청해 다른 한 측도 똑같이 참전을 요청한다면, 분쟁 상황은 쉽사리 국제 분쟁으로 확전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 외부 당사자들은 개입하지 않도록 권고받았다. 또한 비개입이 이뤄져야 하는 조건들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국제법학회는 “내전”을 “한 국가 영토 내에서 발생하여 국제적 성격을 띠지 않는 모든 무력 분쟁”이라고 간략히 정의 내리고자 했다. 178)


결정적으로 비스바덴 의정서는 무엇이 내전이 아닌지 명시하는 범위를 정했다. “국지적 소동 혹은 폭동” “국제 분계선에 따라 분리된 정치적 독립체들 간 무력 분쟁” 그리고 “탈식민지화로 인해 발생한 분쟁” 모두는 내전 영역 바깥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논의 결과 일련의 추가의정서가 도출되었고, 이 중에는 제2차 추가의정서(1977)도 있었다. 이에 따라 만약 분쟁이 “국제적”, 즉 두 독립된 주권 공동체 사이에 벌어지는 분쟁이라고 여겨진다면, 제네바협약이 온전히 적용된다. 분쟁이 “비국제적”이라면, 해당 분쟁은 일반조항 제3조와 제2차 추가의정서에 따라 다뤄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 폭력 사태가 (아마도 폭동 혹은 내란에 해당되어) 이 두 종류 모두에 해당되지 않는 분쟁이라고 여겨진다면, 해당 사태는 국내 사법 관할 영역하에 놓여 치안 활동 대상이 된다. 이러한 경우 분쟁이 ‘국제적 성격을 띠는지 그렇지 않은지’ 혹은 쉽게 말한다면 ‘내전’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에 많은 것이 걸려 있다. 178-9)


하지만 사태는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2011년과 2012년에 시리아에서 벌어진 사건을 보자. 시리아의 일반인들은 2011년과 2012년 전반기 내내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과 벌이는 다툼을 내전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시리아 밖에 있는 이해 당사국들은 그 사태에 좀더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여겼다. 아사드 정권으로서는 당연히 반란으로만 여겼다. 반대파는 자신들이 저항을 벌였다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러시아나 미국과 같은 열강은 개입이냐 비개입이냐를 두고 언쟁을 벌이면서 서로 머릿속에 내전 선포에 따른 위협을 각인시켰다. 2012년 7월, 분쟁에 돌입한 지 일 년이 넘었고, 이미 약 1만7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뒤에서야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시리아에서 벌어지던 사태가 실제 “국제적 성격을 띠지 않는 무력 분쟁”이라 확인했다. 이러한 결정이 이뤄지고 난 후에야 분쟁 당사자들은 제네바협약 내 관련 규정에 따라 보호받을 수 있었다. 181)


근래 들어서서 ‘지구적 내전’이라는 용어는 알카에다al-Qaeda 신봉자들처럼 국경을 초월해서 활동하는 테러리스트들과 미국이나 영국처럼 확립된 국가 행위자가 벌이는 투쟁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 용례의 사용에 찬동했던 몇몇 이에 의해 9·11 테러 이후 형성된 이러한 용법은 대내적 투쟁이 전 지구로 확산되는, 특히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뉜 분열된 이슬람 세계에서 벌어지던 투쟁이 세계적인 규모로 확전되어온 현상을 가리킨다. 테러리즘을 칭하는 좀더 넓은 의미의 비유로서 ‘지구적 내전’은 또한 다음 상황을 지시하는 데 쓰였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벌어지는 전투에 부가되던 어떠한 제한 요소도 없이 대치하는 당사자들이 벌이던 통제되지 않는 투쟁, 어떠한 교전 규칙도 없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던 자연상태로의 회귀, ‘내부’ 분쟁과 ‘대외’ 분쟁, 달리 말해 국가 내부에서 벌어지는 분쟁과 국가 간 벌어지는 분쟁을 구분 짓는 경계가 완전히 흐릿해진 특수한 분쟁 형태를 함축했다. 199-200)


‘지구적’ 내전 관념은 추가적으로 보편적 인류 개념을 동반했는데, 이는 서로 적대하는 동료 시민들이 살고 있는 세계 도시 혹은 코스모폴리스cosmopolis와 같은 광범위한 단일 공동체 내에서 벌어지는 분쟁이 포착됨에 따라 그러한 동행이 허용되었다. 지구적 내전이라는 언어는 , 본래 로마인이 지녔던 내전 관념에 강도가 더해진 것처럼 보인다. 세계시민주의에서 내세웠던 공감이 확대되고 지평이 확장됨에 따라 본래 로마식 내전 관념이 포괄하는 대상이 좀더 넓어지고 첨예화되었다. 그렇지만 지구적 내전이라는 용어가 포괄하는 내부적 복합성, 20세기 초부터 해당 용어가 지녀온 이념적 부담감, 그리고 몇몇 이에 의해 암시되는 반이슬람적 함축으로 인해 이 용어는 ‘내전’이라는 용어 자체가 그렇듯 본질적으로 논쟁적인 개념이라 여겨진다. 이런 점으로 보아 최근에 ‘지구적 내전’을 두고 벌어진 논의는 애초에 이를 야기했던 내전의 경합적 개념이 심화되거나 도리어 한정限定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200-1)


결론: 말들의 내전


내전은 공포 및 파괴와 연관된 수많은 심상과 연상을 자아내기 때문에, 내전이란 용어를 사용함에 따라 나타날 어떠한 좋음도 떠올리기 어렵다. 이런 의미야말로 그 용어의 핵심을 관통하는데, ‘내전’이라는 말이 역설, 심지어 모순어법oxymoron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전쟁에 있어 어떤 점이 ‘시민적civil’일 수 있을까? ‘시민적’이라는 형용사는 반대로 무해하고 온건한 인간 활동 유형을 수식한다. 예를 들어 시민 사회, 시민 불복종, 나아가 대(시)민 업무를 들 수 있다. 이 단어와 어원적으로 그리고 언어학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류 단어로는 ‘예의 바름civility’과 ‘문명civilization’이 있다. 전쟁은 사람들로 하여금 평화롭게 어울리거나 이들이 지닌 기운을 비폭력적인 방향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게다가 전쟁에 유혈이 낭자하고 죽음이 수반될 때 공손함이나 고상함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기 어렵다. 분명 전쟁이 몰고 오는 어두움은 시민적이라고 불리는 대상이 발산하는 그 어떠한 밝음도 완전히 덮어버린다. 203-4)


‘내전’이라는 용어를 적용할지는 당사자가 통치자인지 반란군인지, 승자인지 패자인지, 기존에 확립된 정부인지 이해관계가 있는 제3자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현대 내전을 연구하는 대표적인 한 학자가 말했듯, “어떤 분쟁을 내전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이 분쟁에 상징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정치적 무게를 더하는 일인데, 내전이라는 용어 자체가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그것을 부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전이라는 용어의 사용 여부 자체가 분쟁의 일부를 이룬다.” 명칭을 두고 벌이는 싸움은 해당 분쟁이 중단된 뒤에도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저항운동 레지스탕스Italian Resistance와 파시즘 정부 사이 벌어졌던 투쟁을 묘사할 때 ‘내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데, 내전이라 칭한다면 양 당사자가 동등한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04-5)


범주를 선택하는 행위는 정치적 결과뿐 아니라 도덕적 결과를 초래한다. 대체로 자기 운명의 향방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수만 명의 사람에게는 이것이 죽고 사는 문제일 수 있다. 목격하고 있는 상황이 확실히 내전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는 건 전쟁에 짓밟힌 나라의 국민뿐만 아니라 국경 밖에 있는 이들에게도 정치적, 군사적, 법적, 경제적 차원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익히 들어왔듯 국제사회가 그와 같은 분쟁이 벌어졌다고 인정하게 되는 동기는 분쟁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일 수 있다. 내전은 종종 나와는 관계없는 남의 나라 일로 치부되며, 따라서 외부인들은 물러서 있어야 하는 일이 된다. 이와 반대로 내전이라는 이름표는 국가가 붕괴되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위기가 찾아오자, 개입을 승인하기 위해 붙여질 수 있다. 이렇게 동기와 대응 모두에서 나타나는 극단성 또한 내전 개념이 지닌 역설적인 본질 중 일부를 이룬다.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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