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굴레 - 헤이안 시대에서 아베 정권까지, 타인의 눈으로 안에서 통찰해낸 일본의 빛과 그늘
R. 태가트 머피 지음, 윤영수 외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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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서양에서는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잘해내야 한다고들 말한다. 일본에서는 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일이라도(그리고 모두들 그렇다는 사실을 안다) 잘해내야 한다. 이런 형식성은 대인관계에도 적용된다. 상대방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당신의 노력에 걸맞은 금전적인 보상을 할 의사가 눈곱만치도 없는 까다롭고 형편없는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지루한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절친한 벗이나 열정적인 동료 또는 매사에 열심인 거래처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마치 타인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최고의 동료를 가진 것처럼, 누가 되었건 지금 상대하는 고객의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행동하다보면, 애정이나 존경 그리고 주어진 일을 최대한으로 잘해내려는 의지 같은 감정들을 언젠가 실제로 내면화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주변은 내가 깊이 아끼는 사람들로 둘러싸이고, 또 그들이 나를 아껴주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25)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으면서 모순을 애써 부정하려는 이러한 태도에는 치명적인 정치적 차원의 문제가 있다. 그런 태도가 일본을 매력적이고 성공적으로 만드는 원천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일본 근대사의 비극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대중을 착취하기 좋은 이상적인 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매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성숙함이라 여기고, 어쩌면 가치 없는 목표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구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 마음가짐을 대중이 내면화하는 것만의 얘기가 아니다. 일본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이런 유동적 가치관의 영향이 사회 지도층 레벨로 가면, 권력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과 그 동기에 대해 스스로를 기만하는 이중적 사고를 하도록 만든다. 도쿄 전범재판에서 일본의 전범들은 원치 않은 재난에 마지못해 끌려들어간 수동적인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이것이 핵심인데,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26)


딱히 원인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이유로 이런저런 일이 발생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의식, 그 안에서 개인은 스스로의 본분을 다해가며 최선을 다해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는 의식은 여전히 만연해 있다. 일본인들이 이런 의식을 부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피해자 의식(히가이샤 이시키被害者意識)이다. 피해자 의식이 현실 세계에서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다음과 같은 예들이 있다. 가령 일본은 무시무시한 재정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한때 전 국민의 경제적 안정을 거의 달성토록 했던 사회적 규약을 내다 버렸다. 또 세금과 물가를 올려서 가계의 구매력을 망가뜨리고, 국민연금이 지켜야 할 약속을 파기하기도 했다. 과거 기업들이 직원들 삶의 질을 보장하던 세계는 안정과 미래라고는 없는 저소득 계약직의 세계로 대체되었다. 이런 정책을 추진하는 사람들은 회사의 자산을 망가뜨리고 직원들을 해고하는 월가의 은행가들처럼 자신들이 한 일을 생각하며 기분 좋아 낄낄거리지 않는다. 26)


대신 그들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들도 선택의 여지 없이 희생의 대열에 참여한다고 생각한다. 그 희생을 통해 본인들이 개인적인 이득을 챙기는 경우에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백만의 일본 국민이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쉬고는 “시카타가 나이仕方がない(할 수 없군)”라고 한마디 하고는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대안이 있다는 사실(강한 노조, 노동자를 대변하는 건강한 정당, 확실한 사회 안전망, 일본 산업의 부활을 위해 가계의 실질소득을 늘려서 내수를 진작시키는 각종 정책)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고려한다고 해도 성숙하지 못한 포퓰리즘으로 비난받는다. 어찌어찌해서 그런 대안에 시동을 건다고 하더라도, ‘일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공격받고는, 기득권 세력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묵살黙殺(모쿠사쓰)하도록 발전되어온 시스템에 의해 폄하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시스템의 일부를 이 책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26-7)


1부  굴레의 기원


1장 에도 시대 이전의 일본


일본 역사 대부분의 기간에 천황이 적극적인 실제 통치 행위를 하지 않고 정신적 지도자의 역할만 했다는 사실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랬기 때문에 중국이나 한국, 베트남에서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기존의 통치자가 쫓겨나고 새 정권의 통치자가 들어섰던 것과 달리, 일본의 천황은 그러한 운명을 겪지 않았다. 대신에 천황은 지배자에게 통치할 자격을 부여하는 정치적 정통성의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서 역할해왔다. 후지와라 가문은 대륙 문명의 물결이 일본에 처음 쏟아져 들어오던 6세기 초반, 강력한 호족 가문들과의 수십 년에 걸친 투쟁에서 승리하며 등장했다. 투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정부 기관을 장악하기 위해 다른 가문들을 밀어낸 후지와라의 선조들이 645년에 실시한 다이카 개신大化の改新이라는 이름의 개혁운동이었다(685년에 가문의 이름을 후지와라라고 변경했다). 다이카 개신은 중국의 발달된 관료주의 정치 제도를 대대적으로 들여오는 운동이었다. 37)


후지와라 가문은 794년 수자원이 풍부하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새로 정착했다. 이곳을 평안한 수도라는 뜻의 헤이안쿄平安京라고 불렀는데, 나중에는 글자 그대로 수도라는 뜻의 교토京都로 이름이 바뀌었다. ‘헤이안平安’이라고 불리는 몇 세기 동안 일본에서는 진정으로 독자적인 문명이 형성되었다. 물론 헤이안 시대 이전의 수 세기 동안에도 일본은 스스로를 하나의 국가로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라奈良 시대는 그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문화의 아류일 뿐이었으며, 불과 나라 시대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이라는 것은 부족이나 호족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헤이안은 정치적, 예술적, 사회적인 면에서 대륙의 모델로부터 갈라져 나와, 그동안 중국의 문화와 제도를 모방하고 흡수하던 것에서 발전해 독자적인 모델을 만들었다. 헤이안 시대의 황실 의례들과 헤이안 귀족의 상하 관계는 20세기까지도 정치적 정통성의 궁극적인 근거로 작용한다. 38-9)


헤이안 말기에 이미 확고한 계층으로 자리잡아 나중에 사무라이侍(‘귀인의 곁에서 섬기다’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말)라고 불리게 되는 무사들은, 실제로는 스스로의 권력과 영향력을 위해서였지만 표면상으로는 천황 승계 같은 문제를 구실로 국가를 점점 심각한 내전 상태로 내몰았다. 그 절정은 강력한 무사 가문인 다이라平 가문(음독으로 헤이케平家)과 미나모토源 가문(음독으로 겐지源氏) 사이의 ‘겐페이 전쟁源平合戰’이었다. 이 전쟁을 서술한 고전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이 서사시의 제목을 패배한 가문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가망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목숨 바쳐 지키고자 하는 대의를 향한 충성심과 순수함으로 싸우다 스러지는 고귀한 패자는 일본 문화에 식상하리만큼 자주 등장하는 전형 중 하나다.  한편 승자인 미나모토 가문의 지도자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머나먼 동쪽의 가마쿠라鎌倉를 자신의 근거지로 삼고서 막부幕府 제도를 만들어낸다. 44-6)


일본의 봉건제도는 천황에 의해 임명되던 지방 행정관을 대체하거나 보완하기 위해 가마쿠라 막부가 슈고守護라는 무사들을 파견했던 데서 시작했다. 슈고 다이묘라고도 불렸던 이들은 임기가 있던 예전 황실의 지방 행정관과 달리, 한곳에 머무르며 각 지방에 작은 왕국에 가까운 번을 세웠다. 번은 19세기 말에 폐지되고 새로운 지방 행정구역인 부현府縣이라는 단위로 경계가 새로 정해졌지만 번을 중심으로 했던 지역 개념은 일본인의 의식에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무로마치室町 시대가 계속되면서, 아시카가(무로마치 막부의 창건자) 쇼군의 힘은 점점 약해져 쇼군의 권력이 미치는 지역은 교토와 그 인근 지역 정도로 제한되었다. 특히 1467~1477년의 오닌의 난應仁の亂(겉으로는 쇼군의 승계 문제로 시작해서 교토를 거의 파멸에 몰아넣었던 내란) 이후로는 자신의 영토를 확대하거나 다른 다이묘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가진 다이묘들 간의 내전에 가까운 갈등이 거의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50-1)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두 개의 새로운 종교적 흐름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신앙에 기반한’ 종파라고 할 수 있다. 13세기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이른바 정토종과 비슷한 시기에 니치렌日蓮이라는 승려가 창시한 니치렌 불교(법화종法華宗)가 그것이다. 이 종파들은 신도 개인의 신앙심을 중시했다. 대륙과의 교역으로 인해 늘어나던 경제적 기회를 보고 교토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 몰려들던 상인과 하층 도시민들이 주된 신도였다. 두 번째 흐름이었던 젠(선불교)은 나라 헤이안 시대로부터 내려오던 불교의 곁에 뿌리 내렸다. 젠은 신앙심보다는 구원과 득도라는 개인적 성취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했다. 현상의 본질을 직감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가로막는 언어와 개념의 속박으로부터 정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명상과 정신 수양을 강조했다. 어려운 수행과 정신 수양을 강조하는 선불교는 무사·사무라이 계층에 즉각적으로 호소하는 바가 있었다. 실제로 선불교는 사무라이들의 종교에 다름 아니게 된다. 52-3)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대평원 남쪽 끝자락의 작은 어촌인 에도江戶를 성읍으로 정하고, 히데요시가 죽은 뒤 필연적으로 찾아왔던 권력 다툼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600년 역사적인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에서 경쟁 세력들을 대부분 섬멸하고는 자신과 아들이 차례로 쇼군의 자리에 올랐다. 1615년에는 당시 일본 최고의 요새였던 오사카大阪성을 포위하면서 마지막 남은 위협까지 제거한다. 이에야스는 천황이 더 이상 사무라이나 다이묘들에게 직위를 내리거나 승진시키는 것을 금하고 예식과 의전에만 전념하도록 하는,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는 조치를 취했다. 직위의 임명이나 승진은 이제 쇼군의 권한이 될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에도를 세계 최대의 도시로 변모시키고 그의 이름을 따서 도쿠가와 막부라는 정권을 세웠다. 이 정권은 이후 두 세기 반 동안 일본에 평화를 가져다주었고, 두꺼운 장막을 쳐서 바깥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켰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근대 국가로서의 일본을 부화시킨다. 57)


2장 근대 국가로서의 일본의 탄생


도쿠가와 쇼군들의 목표는 안정과 질서, 누구도 정권에 도전할 수 없도록 국가의 기초를 튼튼히 다지는 일이었다. 막부는 이웃 국가들로부터가 아니라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유럽 종교로부터의 격리를 원했다. 격리isolation보다는 은둔seclusion이 도쿠가와 시대 일본의 외교관계를 표현하는 더 정확한 단어일 것이다. 일본의 지도층이 기독교에 반감을 갖게 된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유럽의 종교 전쟁이었다. 16세기 말, 그때까지 포르투갈이 선점해서 재미를 보던 일본과의 교역에 개신교 네덜란드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일본인들은 이들을 통해 예수회와 도미니크회가 어떻게 이베리아반도식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아스테카와 잉카 제국이 어떻게 멸망했는지 그리고 가깝게는 말라카와 마카오와 필리핀이 어떻게 식민지화되었는지 듣게 되었다. 특히 윌 애덤스(일본명 미우라 안진三浦按針)는 바깥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예수회 선교사들과는 매우 다른 관점을 제공했다. 62-3)


도쿠가와 막부는 1615년 오사카성 함락 이후에 성립된 권력질서를 영원히 유지하고자 했다. 맨 아래 불가촉천민부터 맨 위 천황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복잡한 위계질서 안에 정해진 자신의 위치에서, 세세하게 부여된 직무와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막부가 성공적으로 만들어낸 이러한 공식적인 권력관계는 향후 265년 동안 거의 변치 않고 유지되었지만, 동시에 그 표면 아래에서 꾸준히 일어나던 변화를 가리는 가림막 역할도 했다. 유럽이 한편으로는 30년 전쟁부터 워털루 전쟁에 이르는 폭력의 세월을 거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를 대상으로 탐욕스런 제국주의 정벌을 벌이는 동안 일본은 줄곧 평화를 누렸던 것이다. 여기에는 군사적 약탈로부터의 평화뿐 아니라 폭력 범죄로부터의 평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농민들은 비록 번과 막부의 관리들로부터 극한까지 쥐어짜이며 가차 없이 착취당하기는 했어도, 군인들이 농작물을 빼앗아가거나 집을 불태울까봐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67)


현대 일본의 수많은 모순은, 에도 시대에 존재하던 공식적인 시스템의 구조와 실제 사회의 간극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20세기 말 일본은 역사상 가장 눈부신 경제적 성공을 거둔 나라인 동시에 꽉 막힌 이름 없는 관료주의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한 오사카 상인 집안들과 점점 경직화되던 사무라이 계급의 선례를 생각하면 그다지 혼란스러운 일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충성과 자기 부정을 광기의 수준으로까지 가져가면서(사무라이들의 자기희생 컬트,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의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 과로사할 때까지 일하는 현대의 샐러리맨), 또 한편으로는 기괴한 비디오 게임이나 헨타이變態(변태적 성욕을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 망가, 괴상한 패션으로 대변되는 엉뚱하고 전위적인 예술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문화의 뿌리도 에도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모순들은 사회 전체에 막대한 스트레스이기도 했지만, 모든 장르의 예술가들에게 훌륭하고 풍부한 소재를 제공했다. 70)


외부 번 출신의 하급 사무라이들은 점점 사라져가는 사무라이로서의 특권, 부유한 상인들과 부패한 관리들의 사치스런 생활, 1830년대의 연이은 흉년이 불러온 극심한 빈곤으로 그들 자신 역시 궁핍한 상황에 놓인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도쿠가와의 몰락은 보통 페리 제독이 방문했던 1853년에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1838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해, 오시오 헤이하치로大鹽平八郞라는 이름의 오사카 사무라이가 다양한 계층의 군중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오사카의 대부분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규모의 폭동은 지난 2세기 동안 보지 못한 것이었다. 사람들을 경악시킨 것은 반란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이 아니라,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의 면면이었다. 사무라이 폭도들, 좌절한 농민들, 심지어 불가촉천민도 거기 있었다. 반란 자체도 경악스러웠지만 오시오가 이끌던 사람들의 구성을 보면 위계질서가 완전히 붕괴됐다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76)


1868년 정권을 장악한 세력은 도쿠가와 막부가 생기기 오래전부터 있던 번 제도를 폐지했고, 번의 수도들이 지역에서 끼치던 막대한 영향력을 박탈하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다이묘의 재산을 몰수하고 신분의 구분을 정식으로 폐지했으며, 사무라이들의 연봉을 일시불로 정산함으로써 사무라이의 국가에 대한 청구권을 없애버렸다. 이들은 또 서양의 제도들을 현기증이 날 만큼 빠른 속도로 들여왔다. 1860년대의 사건은, 기성 지배 계층의 말단에 있던 세력(외부 번인 조슈, 사쓰마, 도사의 하층 사무라이들)이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켜, 일본 지배 계급의 집단적 독립과 자율 권한을 넘보는 실존적 위협에 맞서 행동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메이지 유신을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나 1917년의 러시아 혁명과 비교해보면 오히려 반혁명에 가깝다. 그것은 지배 계층 내부에서 벌어진, 나라의 운명을 건 절박한 권력 투쟁 정도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당할지도 모른다. 78)


많은 급진주의자는 여전히 존황양이尊皇攘夷(천황을 경배하고 야만인을 쫓아내자)의 깃발 아래 격렬히 변화를 요구했지만, 서양 군사력과의 직접 충돌은 일본으로 하여금 상황을 좀더 현실적으로 보도록 만들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은 젊은 사무라이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였다. 야만인과 ‘배신자들’에 대한 그의 혈기 넘치는 분노는 서양에 대한 호기심(그는 특히 만인의 정치적 평등을 얘기하는 미국의 사상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으로 바뀌었고, 일본의 문제는 두 명의 통치자(천황과 쇼군)와 두 개의 조정(교토 황실과 에도 막부)이 존재하는 통치 구조에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외부로부터의 압도적인 위협에 마주친 일본의 첫 반응은 분노와 부정이었다. 분노와 부정만으로는 독립을 잃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것이 명확해지자, 일본은 방향을 급격히 바꾸었다. 미래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기존의 제도를 뒤엎고 외부세계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우려고 했다. 82-3)


막부는 외국과 타협도 하고 일관되지는 못했어도 개혁을 추진했지만(혹은 그랬기 때문에), 위협에 대처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그 정통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질서는 무너졌다.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춤을 추며 ‘에에자나이카ええじゃないか(좋지 아니한가)’라고 외치며 하늘에서 돈이라도 쏟아진 듯이 좋아했다. 상대적으로 피를 거의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과 변화에 대한 확실한 열망으로 인해, 일본의 새 집권 세력은 명목상의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주는’ 형식으로 기존의 법적인 절차에 따라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1000년이 넘도록 천황이 절대 권력을 실제로 누리지 못한 일본에서, 천황에게 권력을 ‘유신’했다는 행위는 일본의 새 정부에게 단박에 정통성을 부여했다. 천황이 직접 통치한다는 환상과, 그런 환상을 이용해 스스로의 목적을 달성하는 과두 집권층이 통치하는 정부라는 현실 사이의 간극은 반세기 후 일본 역사상 최악의 재난을 불러오게 된다. 83)


3장 메이지 유신에서 미군정기까지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농민층은 강제로 프롤레타리아화되어, 메이지 과두정치가들이 일본의 독립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고 믿었던 군사 산업 체제에 편입되었다. 메이지 지도자들은 과거 번이나 신분 계급에 따라 나뉘어 있던 농민들을 의도적으로 단일 국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에도 시대 농촌생활과 긴밀하게 엮여 있던 각 지방의 제도와 문화적 관습을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적·사상적 프레임워크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선 시기의 자유민권운동처럼 격렬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저항에 부딪힐 것이 뻔했다. 이런 프레임워크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이데올로기는 일본이 원래 조화로운 사회이고, 합의에 의해 움직이며, 정치경제적 결정은 신의 뜻, 곧 천황의 신성한 승인을 받아 이루어진다는 개념이었다. 여기에 따르면 정치경제적 결정에 대한 노골적인 반발은 ‘반일본적’일 뿐 아니라 곧 신성한 질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93)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 교육의 병영화와 의무화를 시행하면서, 국가는 불교사원이 가지고 있던 교육 통제권을 빼앗아와야 했다. 일본에도 신토와 같은 토착 종교가 있었다. 하지만 불교와 신토는 수없이 많은 분파가 있기는 했어도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실상 하나의 종교로 기능해왔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애국적 혹은 민족적 구분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사실상 신흥 종교였던 국가 신토의 건축물들은 중국과 한국의 영향이 최대한 배제된 일본 전통 건축의 순수하고 미니멀리즘적 재창조인 것처럼 보였지만(대표적으로 도쿄의 메이지 신궁을 들 수 있다), 거기서 행해진 의식은 통일된 전제국가에 꼭 필요한 애국심 같은 가치를 국민에게 고취시키는 근대적인 역할을 했다. 국가 신토는 국가에 대한 충성이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며, 국가가 영원한 진리의 체현이라는 사상을 주입하는 지극히 의도적인 정치적 산물이었다. 95-6)


일본이 유독 독특했던 것은 나라의 지배 구조에 대해 두 가지 다른 허구가 병존했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이어받은 허구는 천황제이고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허구는 입헌정치와 법치주의다. 이 중 후자는 부분적으로 자유민권운동이나 대의정치 요구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지만, 더 큰 동력은 일본에 대한 서양의 기대로부터 나왔다. 일본이 근대 국가로 인정받으려면 마땅히 의회와 법원이 있어야 했다. 근대 국가의 국민이라면 고기를 먹고 남녀 혼탕을 삼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의회와 정당과 법원을 가져야 한다고 서양에서 생각한다면 일본은 의회와 정당과 법원을 가져야 했다. 하지만 1868년에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천황에게 직접적인 통치권을 ‘되돌려준다’는 구호 아래 집권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불평등 조약을 강요했던 나라들이 일본이 완전한 근대 국가가 되었다고 믿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가면이라도 쓸 것이었지만, 천황의 의사결정권에까지 헌법적 제약을 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100)


이런 조치를 취했던 핵심 인물은 근대 일본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形有朋다. ‘군사 독재의 지배 구조를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한 야마가타 정책의 핵심은, 주요 관료의 임명에 대한 의회의 감시감독권을 철저히 없애는 것이었다. 야마가타는 이를 위해 특별히 ‘천황의 칙서’를 내리도록 조치했다. 관료의 인사권에 관한 주요 사항들을, 겉으로는 천황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는 자문기관(추밀원樞密院)의 업무 영역으로 지정하는 내용이었다. 소위 원로라 불리며 20세기까지 살아남은 메이지 지도자들은 적극적인 정책활동에서 물러나면서 추밀원 같은 자문기관으로 소속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되 결과에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역할을 맡으면서, 거대한 정치적 무책임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메이지 지도자들이 처음부터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바로 그 상황, 즉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101-2)


일본을 재앙으로 몰아넣은 범인(들)을 찾는 부질없는 작업을 하기보다는, 전쟁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간 일본 지배 체제의 연속성이 단 한 번도 끊어지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는 독일의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Reichstag Fire Decrees이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로마 진군 또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겨울 궁전 점령이나 중국의 1911년과 1949년의 혁명과 같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비슷한 사건은 1936년 2월 26일, 급진적인 젊은 육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몇 명의 기업 간부와 장관들을 암살한 일이다(암살당한 사람 중에는 재무장관 다카하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죄’는 군비 지출의 억제를 옹호한 것이었다). 메이지 지도자들이 죽고 나서 그 권력 구조에는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형식적인 절차는 있었으나 실질적인 방법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은 끝도 없이 계속되는 소모적이고 때로는 살인적인 권력 투쟁이었다. 104-5)


4장 경제 기적


미군정이 종료될 때 합의된 조건의 장기적 영향이 무엇이었던 간에, 그것은 1930년대의 재앙을 불러왔던 일본 지도층 내부의 지겹고도 끔찍한 갈등을 종식시켰다. 일본은 이제 그런 갈등을 촉발하던 근본적인 정치 사안에서 손을 떼야 했다. 논쟁이 허용된 유일한 이슈는 경제였다. 그리고 1940년대의 폐허에서 일본의 최우선 순위가 경제의 재건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미군정에 의해 전범으로 처형되었던 도조 히데키 등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쟁 기간에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은 브로커나 해결사로서 일본 정치의 무대 뒤편으로 돌아오거나, 아니면 전쟁 중 도조 내각의 군수 대신이었으나 1957년에서 1960년까지 총리를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처럼 경제 성장과 미일 ‘동맹’의 옹호자로 거듭났다. 이런 사람들은 전쟁 기간에는 한켠으로 밀려나 있던(혹은 목숨을 잃을까봐 조용히 지내던) 요시다와 같은 온건 보수주의자들과 함께 군정 종식 이후 시대의 실력자로 등장했다. 118)


‘아마에甘え’(어리광 혹은 응석)라는 단어는 자신보다 힘 있는 사람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척해서, 상대가 관대하게 굴 수 있도록 유도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혹의 기술은 일본이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했던 메이지 초기에 엄연한 일본 외교 정책의 일부가 되었다. 1945년 이후 독립은 빼앗기고 수십만의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자가 거리를 행진하자, 일본 지배층이 마주한 도전은 훨씬 커졌다. 하지만 운 좋게도 이들에게는 미국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일본에 있는 소수의 엘리트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 미국에서 교육받고 미국인들이 경계심을 풀도록 하는 법을 아는 사람들하고만 교류했다. 맥아더의 허영심과 자만심도 한몫했다. 맥아더는 일본 최고위층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고, 한 번도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직접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일본인들이 잘하는 종류의 굽신거리는 아부에 특히 취약한 사람이었다. 120)


전후 일본의 사정은 메이지 시대와는 사뭇 달라졌다. GHQ가 도입한 입헌민주주의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었다. 그리고 일본인의 상당수는 입헌민주주의가 표방했던 것처럼 주권이 확고히 국민에게 있는 민주주의를 원했다. 하지만 일본의 권력자들은 입헌민주주의를 도입함으로써 세상의 눈에 일본 정부가 정통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만족했을 뿐(미군정의 강요와 군정 종료 때 합의한 조건 때문에 입헌민주주의의 도입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정통성의 근거가 헌법과 민주주의에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일본은 천황이 정치적 권력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고유하고 신성한 땅이라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회귀한다. 정통성에 대한 이론적 바탕이 전쟁 전의 정치체제에서 변한 것이 없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과 같은 재앙이 다시 생겨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입장 표명을 할 수가 없고, 하더라도 신빙성이 없을 수밖에 없다. 127)


그럼에도 전후 일본에서 나라의 통치가 매끄럽게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미군정에 의해 살아남은 또 하나의 비민주적 제도가 정책에 대한 실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관료제다. 물리적 실력을 행사할 수단을 보유하고 있던 관료 조직들은 군정 초기에 해체되거나 제거되었다. 미국은 일본의 방위를 책임졌고, 1945년부터는 외교 관계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를 갖고 있다. 미군정이 일본 정부 부처를 재편한 후에도 살아남은 관료 조직들은 그래서 대부분의 역량을 경제 문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들은 경제 회복이 일본의 최우선 과제라는 데 거의 모든 사람이 뜻을 같이하던 시기에, 전쟁이나 사회 통제가 아닌 경제 회복의 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정치권의 지도와 개입 없이도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다 1970년대가 되면 일본의 경제 모델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이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작업을 수행할 만한 정통성을 가진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하고 만다. 128)


GHQ의 해체 정책에 의해 자이바쓰財閥는 경제 부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일종의 관료 기구처럼 변형되었다. 경제 부처 내 혁신 관료들의 직계 후임들은 전쟁이 끝나고 1940년대 중반 폐허가 된 경제를 물려받았지만, 그들이 누리는 권력은 오히려 전쟁 때보다 더 커져 있었다. 자이바쓰, 군대, 내무성과 같은 강력한 경쟁 기관들은 해체되었고, 도지 라인은 긴축경제를 이끌어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관료들에게 넘겼다. 도지는 당시 일본에서는 어떤 정권이었다고 해도 정치적 이유로 인해 불가능했을 정책들을 강제로 실행해버렸다. 긴축재정과 균형예산과 신뢰 가능한 고정환율이 그것이다. 평상시라면 이러한 정책의 조합은 대규모 빈곤과 심지어 혁명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미국은 군대에 보급하기 위해 무기를 제외한 모든 물자를 끝도 없이 발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납품을 받으면 달러로 대금을 지급했다. 일본인들은 이 전쟁 특수를 ‘하늘의 도우심’이라고 불렀다. 129)


자민당 내부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기간에 여러 개의 뚜렷한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이 파벌들은 이데올로기나 정책의 차별성에 따라 구성된 것이 아니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일련의 정치 보스라 불리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후견관계를 맺고, 파벌이 제공하는 정치적 특혜를 통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조직에 불과했다. 20세기 중반의 미국 민주당과 달리 자민당의 표밭은 도시의 중하위 노동자층이 아니라 농촌 지역이었다. 농촌 인구의 상당수가 도시로 이동하고 나서도 선거구 제도는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농촌에서의 한 표는 도시의 세 배에서 다섯 배 정도의 효과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교환을 통해 농촌 지역은 일본의 안정적인 정치적 지형을 보장하고, 그 대가로 정치사회학자 켄트 콜더가 말한 ‘보상’을 받았다. 그것은 일본의 전반적인 전후 경제 전략에서 소규모 농민과 지방 기업들은 별로 설 자리가 없다는 현실을 보상하기 위해 농촌에 보호주의 정책과 공공사업 예산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133-4)


1960년의 안보조약 개정은 실질적으로 일본이 미국의 영구적인 속국임을 문서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같은 해 규슈에 있는 미쓰이의 미이케三池 탄광에서 벌어진 대규모 파업은 분쇄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의 대기업들은 핵심 남자 직원들에게 평생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할 의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기업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분기 이익이나 주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최우선 목표가 되었다. 직원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거나 회사가 재정적으로 힘들 때라도, 제대로 된 회사라면 직원을 해고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금지되었다. 이렇게 경제적 안정의 보장이라는 좌파의 핵심적인 요구 사항이 충족되면서, 노동 투쟁은 점점 일종의 의례적인 절차로 변해갔다. 주요 산업별로 결정된 임금 인상 폭에는 언제나 전반적인 경제 사정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공장 노동자들은 일본 경제가 전체적으로 향상되면 그 일정 비율을 가져가도록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35-6)


좌파는 현실 정치에서 멀어져 학계로 들어갔고, 일본 사회당은 점점 형식적인 존재로 변해갔다. 일본 사회당은 집권 가능성이 없는 ‘제1야당’으로서 대부분 유권자의 실제 관심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융통성 없는 교조적 태도를 취했고, 그 결과 진정한 야당이 출현하는 것을 막으며 전후 시스템을 유지하는 실질적인 한 축을 담당했다. 1960년 10월, 교복을 입은 열일곱 살짜리 국수주의자 학생이 생방송 도중에 칼을 휘둘러 타협을 모르는 강경 좌파였던 사회당 지도자 아사누마 이네지로淺沼稻次郞를 살해해버렸다. 아사누마의 살인 사건은 사회당에 일부 동정심을 불러일으켰을지는 모르나, 또한 1930년대에 난무하던 폭력을 상기시켰다. 이 사건으로 지난 10년간 일본을 마비시킨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정치 갈등에 대한 사람들의 혐오가 폭발했다. 사회당의 온건파는 탈당해 중도주의 노선의 일본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사회당은 선거에서 다시는 보수 패권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이었다. 137)


역설적으로 사회주의자들보다 마르크스주의에 덜 교조적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은 주로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인 도시의 하위 중산계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 중 다수는 당시 최대 ‘신흥 종교’였던 창가학회創價學會에서 1964년 갈라져 나온 공명당公明黨을 더 지지했다. 이런 신흥 종교들은 니치렌 불교日蓮佛敎의 요소와 개신교의 적극적인 전도 방식을 결합하고 있었다. 이들의 주된 신도층은 당시 떠오르던 대기업 중심의 샐러리맨 문화에서 소외된 도시민들이었다. 신흥 종교는 이런 사람들에게 소속감을 주었고, 공명당은 이들이 최소한의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였다. 공명당은 자민당이 농민들에게 해주었던 역할을 도시의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에게 해주며(자민당이 훨씬 효율적이었지만), 사실상 모든 면에서 자민당의 동맹 정당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의 점점 줄어드는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충분히 ‘보상’해서, 잠재적 사회 불안의 근원을 제거했던 것이다. 138)


5장 고도성장의 제도적 기틀


일본 기업들 간의 모든 경쟁은 통제되었다. 신규 사업에서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지만(혼다와 야마하의 오토바이 사업 경쟁, 소니와 마쓰시타의 비디오카세트 녹화기 사업 경쟁 같은), 일본인들이 ‘과도 경쟁’이라 부르는 것들은 산업협회에서 나오는 비공식적인 지침을 통해 통제되었다. 실제로 카르텔이나 다름없던 이런 산업협회들은 일본의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또 하나의 핵심 제도다. 산업협회들이 일본에서 특히 중요했던 이유는, 기업들이 손실을 내는 사업에서 철수하도록 강요하는 시장 메커니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쟁에서 낙오된 회사들도 고용 안정성과 시장 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암묵적인 규칙을 만들었다. 산업협회는 가격과 공급망에 관한 비공식적인 합의를 조율하고 감시하는 데 있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합의에 이론적으로 법적 강제성은 없었으나 이를 거부하는 기업은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을 견뎌야 했기 때문에, 여기에 저항했던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145)


일본의 교육 시스템은 기업과 관료 기관 내부에서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 인사부서가 원하는 인재를 양산해냈다. 일본 학교의 교육에는 네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졸업생들이 발달된 산업 경제가 요구하는 수준의 언어 수리 능력을 갖추도록 할 것. 둘째, 고도로 관료화된 경제 조직에서 적절한 태도와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키울 것. 셋째, 일본 정계와 재계의 엘리트가 될 가능성이 있는 남자아이들을 미리 선별할 수 있도록 평가하는 역할을 할 것(그리고 그보다는 덜 중요하지만, 그들의 부인이 될 자격이 있는 여자아이들을 고르는 역할도). 마지막으로, 이들이 나중에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서로의 조직들을 긴밀히 협력하게 할 수 있도록 사회적 인맥의 기반을 만들어줄 것. 절도 있고 획일화된 외관에 대한 강조와 불편을 받아들이는 훈련은, 좀더 광범위한 교육학적 목표의 일부로서, 적어도 언어 수리 능력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졌다. 147-8)


충분한 국내 저축 없이 어떻게 산업 발전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했던 대부분의 나라는 해외로부터 차관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일본은 결코 자국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외국의 통제 아래에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GHQ의 좌파 성향의 관리들도 애초에 일본 정부의 결심을 지지했다. 가난한 나라가 해외 투자를 받지 않고 성장하려면, 국내 저축의 마지막 한 푼까지 아껴서 활용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이케다 하야토와 같은 사람들의 천재성이 빛난다. 이들은 일본 금융만의 독특한 구조적 특성을 활용해 여신을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있도록 하는 통화 및 금융 정책을 고안했다. 이 여신이 수출 주도 대기업들에게 해외 시장을 꾸준히 공략할 수 있는 자금을 계속 조달해줄 것이었다. 이런 정책의 많은 부분은 전시의 자금 조달 방식을 고쳐 쓴 것이다. 즉, 가계의 저축을 금융기관에 맡기도록 강력하게 몰아가고, 금융기관에는 정부가 발행한 금융 상품(채권)을 사도록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151)


일본 은행들은 예금액과 대출액 사이에 발생하는 차액을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으로부터 직접 여신을 받아 메웠다. 중앙은행이 시중의 은행에 직접 새로운 여신을 공급해주는 것은 보통 긴급 상황에서만 쓰이는 정책이다. 그런 정책은 그리고 2008년 금융 위기 때 미 연방준비제도의 ‘양적 완화’를 둘러싼 소동에서 봤던 것처럼 갖은 논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러한 정책이 먹혔다. 자본 규제 때문에 자산을 해외로 이전하는 것이 불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위층들이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사회적 결속이 단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신이 유동자산에 의해 창출된 현금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리스크는 존재했다. 여신은 무에서 창출되어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자산을 위해 제공되었다. 그 여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자산이 궁극적으로 충분한 미래의 수익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이것만으로도 일본에서 왜 예측 가능성과 경쟁의 통제가 그토록 중요했는지 설명된다. 152-3)


'현실의 관리management of reality'란 여러 제도와 관행이 합쳐져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일본인들이 모순을 알아차리지 않기로 의도적이고 집단적으로 결정한 듯 보이는 데서 종종 드러난다. 일본의 조직에서는 누군가 눈에 띄게 무능해도 해고되지 않는다. 대신에 모두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 사람이 주의 대상인 것을 ‘안다’. 그 사람이 하던 모든 중요한 일은 반자동적으로 더블 체크되거나 다른 사람이 대신 한다. 하지만 그가 업무에 부적격하다는 공식적인 평가는 어디에도 없다. 일본의 통상 교섭 담당자들은 줄곧 일본의 낮은 관세율을 가리키며 일본 시장이 활짝 열려 있음을 강조하지만, 회사들은 수입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심지어 일본에서의 성공은 모순을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혹은 어떤 상황에서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서 행동하는 법을 파악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156-7)


그래서 다시 한번, 일본어에는 이런 것들을 처리하기 위한 수많은 단어가 존재한다. 우리는 다테마에建て前(모두가 립서비스로 말하는 꾸며진 현실)와 혼네本音(실제의 현실)의 차이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공기(구키空氣)를 읽지 못한다(요메나이讀めない)’고 말한다(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을 구키 요메나이의 알파벳 첫 글자를 따서 KY라고 부른다). 이런 사람들을 ‘리쿠쓰포이理屈っぽい’(이론적으로 따지는 사람)라고 흉보기도 하는데, 리쿠쓰포이는 일본에서 칭찬이 아니다. 소니와 교세라 같은 이단아들의 사례는 이런 규칙에서 벗어나는 예외일 뿐이었다. 이들은 해외 시장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고서야 일본의 경제 기득권에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세월이 지날수록, 이러한 예외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어갔다. 애플, 시스코,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구글, 페이스북처럼 IT 혁명의 조류를 타고 세계적으로 성장하는 일본 기업은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157)


6장 성장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


전후 일본이 세계 문화를 선도하는 데 공헌했던 작품들은 대부분 고도성장기가 시작되기 전에 나온 것이었다.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의 「도쿄 이야기東京物語」와 「이른 봄早春」,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의 「오하루의 일생西鶴一代女」이나 「산쇼다유山椒大夫」,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의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나 「천국과 지옥天國と地獄」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仮面の告白』(1949),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인간 실격人間失格』(1948),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雪國』(1948),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의 『열쇠鍵』(1956) 같은 소설에는 종전 직후 혼란했던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자기 파멸적인 성적 집착에 빠져드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대기업 샐러리맨들의 문화가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면서, 인간의 조건에 질문을 던지던 이런 예술적 탐구들은 점점 뒤로 밀려난다. 그 대신,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오락들이 사람들을 잠식해갔다. 165)


일본 사회에 샐러리맨 문화를 퍼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미국에서 수입해온 스포츠인 야구였다. 야구는 메이지 시대에 일본에 처음 소개되어, 나중에 도쿄대학으로 통합된 명문 학교에서 채택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스모나 유도, 검도와 같은 전통 스포츠가 일대일 개인 시합이었던 반면, 야구는 일본에서 행해진 최초의 팀 스포츠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가장 인기 있는 팀 스포츠다. 야구는 신기하게도 일본에 잘 맞았다. 농구나 축구처럼 흐름이 끊기지 않는 단순한 전략의(전술은 복잡할지라도) 팀 스포츠와 달리, 야구의 플레이는 멈췄다 이어졌다를 반복하고 매 순간 복합적인 의사결정을 요한다. 한 가지 합의에 이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시합이 펼쳐지고 있는 필드 안에서도, 그리고 필드 밖에서도 열띤 논의가 벌어질 여지를 제공한다. 야구 시합의 리듬은 일본 조직 생활의 리듬을 반영해서 체현하고 있다. 고도성장기에 인기를 끌던 일본 야구는 샐러리맨 문화를 가장 극적으로 상징하고 있었다. 166-7)


베이브 루스, 윌리 메이스, 샌디 코팩스, 조 디마지오와 같은 미 메이저리그의 개성 넘치는 야구 스타들과는 달리,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나 오 사다하루王貞治(우리나라에는 왕정치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옮긴이) 같은 고도성장기 일본의 야구 스타들은 전형적인 팀 플레이어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단 하나의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이었으며, 주어진 연봉을 받아들일 뿐 단 한 번도 협상하지 않았다. 일본 야구의 연습은 선수 개개인의 실력을 발전시키는 것보다는 전반적인 노력이나 인내를 강조했다. 그런 경향이 어찌나 심했던지, 코치들이 재능 있는 선수들을 필요 이상으로 밀어붙여 망가뜨린다는 비난을 들을 정도였다. 이는 끊임없는 노력과 단결된 팀워크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일본 기업 인사부서의 핵심 원칙을 그대로 반영한다. 일본 기업의 경쟁력은 비상한 팀워크와 사원들의 자기를 돌보지 않는 직업 윤리,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표현으로 바꾸자면 곤조根性 또는 ‘갓쓰ガッツ’에 있었다. 167-8)


일본의 여성들은 한 번도 누가 떠받들어주는 대접을 받지 못했다. 여성이 방에 들어온다고 일어서는 일본 남성은 없다. 누군가 일본 여성을 위해 의자를 빼주거나 문을 잡아준다면, 그것은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였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여성은 남성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제대로 교육받은 아내라면 항상 한발 뒤에서 남편을 따라간다. 여성이 하는 모든 행동과 모든 말은 같은 나이, 같은 출신, 같은 계급의 남성들보다 스스로가 낮은 위치에 있고 거기에 복종하고 있음을 드러낸다(일본어에는 여성만이 사용하는 동사 어미와 대명사들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버린다). 그 결과 일본 여성이 서양 여성에 비해 누리는 것이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여성이 비싼 장신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과 싸워야 할 필요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전후의 젊은 일본 여성들이 마음을 기댈 수 있었던 단 하나의 대상은 보통 자신과 같은 처지의 다른 여성들뿐이었다. 170-1)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일본이 점점 부유해지면서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라이프 스타일이 비혼 여성에게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싱글로 남아 있는 한 여성들에게는 좋은 옷을 사 입고, 해외여행을 가고, 친구들과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을 만큼의 가처분 소득이 있었다. 젊은 싱글 여성들이 일본의 패션과 예술과 식문화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가장 중요한 그룹이 되었다. 이것은 여성의 해방이라든지 페미니즘의 대두와는 달랐다. 이러한 변화에 놀라던 일본의 보수 세력은 특히 일본의 급락하는 출산율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으면서 경악했다. 새로운 여성들에게는 곧 ‘파라사이트 싱글Parasite singles(결혼도 하지 않고 부모 집에 기생해 산다는 의미―옮긴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많은 젊은 여성이 미디어의 불같은 반응을 보고 깨달은 것은 그런 행동이 나쁘다는 점이 아니라, 여성들도 결혼이 아닌 관계에서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이었다. 176-7)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를 금융 면에서 보자면 일본의 은행들에 외환이 쏟아져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늘어난 외환 보유고는 대부분 달러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 달러를 금으로 태환하지 않았다. 브레턴우즈 체제하에서 그렇게 할 권리가 있었음에도 일본은 외환을 그냥 쌓아두고 여러 기법을 사용해 달러 보유고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렇게 해서 경제학 교과서대로라면 발생했을 인플레이션이나 수출 가격 폭등을 방지할 수 있었다. 이것을 학계에서는 ‘불태화 정책sterilization’이라고 부른다(불태화不胎化는 외자 유출입이 국내 통화량 및 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상쇄하기 위해 취하는 정책―옮긴이). 엉뚱하게도 인플레이션은 미국에서 일어났다. 린든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정책과 베트남전으로 인해 ‘총과 버터guns and butter’ 양쪽에서 심각한 위기를 맞았고, 거대한 예산 지출로 인해 미국 경제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게 되었다. 180)


#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정책 : 가난과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취한 일련의 사회복지 및 기간산업 정책 / 총과 버터guns and butter : 정해진 자원을 외교국방과 국내 생활용품 생산 중 어디에 사용하느냐의 문제


밀턴 프리드먼 같은 경제학자는 변동환율을 실시하면 심각한 무역 불균형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무역과 투자의 수요 공급에 따라 환율이 자연히 오르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의 대미 무역 불균형은 변동환율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은 채 오히려 커져만 갔다. 새로 부임한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일본의 중앙은행이 몰래 개입해 환율을 변동하지 못하도록 한다며 이를 ‘관리 변동환율제dirty floating’라고 비난했다. 결국 일본은 국제사회의 압력에 굴복해 관리 변동환율제를 포기하고 엔의 가치는 다시 전후 최고 수준으로 올랐다. 1971년 1달러에 360엔 하던 것이 1978년에는 177엔이 되었다. 한편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된 폴 볼커는 미국 국내 수요가 붕괴되어 경기가 후퇴할 수준으로 금리를 극도로 인상해서 투자자들이 다시 달러 자산을 보유하도록 만들었다. 볼커의 고금리 정책에 일본의 기관 투자자들이 호응해준 데 크게 힘입어 달러에 대한 믿음은 회복되었다. 183)


폴 볼커가 금리를 큰 폭으로 올리고 일본이 달러 자산을 기꺼이 보유해줌으로써 1982년이 되면 미국 경제는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본 수출 산업의 마지막 황금시대가 열렸다. 미 재무성이 두 자릿수의 금리를 제공하면서 전 세계의 미국채 수요가 급등했다. 달러의 가치는 엔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주요 국가 통화 대비 크게 올랐다. 미국 경제가 부활하고 소비가 되살아나면서 미국인들은 일본 제품을 샀다. 일본에서는 점점 더 미국 회사들을 월급만 많이 받는 게으른 사람들이 조잡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아무도 캘리포니아의 쿠퍼티노 같은 곳에 본사를 둔 회사(애플)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비재 전자기기를 만드는 회사가 될 것이라고 꿈에서도, 심지어 악몽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반면에, 일본에 밀려 미국 산업이 파괴되고 있는 듯 보이던 당시의 상황에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압력은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184)


2부  오늘의 일본을 구속하고 있는 어제의 굴레


7장 경제와 금융


자산의 가치와 그 자산이 만들어내는 현금 흐름 사이에 연결이 끊어지는 현상. 그것이 바로 버블의 정의다. 여기서 현금 흐름은 집의 임대료나 기업의 수익을 말한다. ‘어떤 이유’로 인해 자산의 가치가 끊임없이 오를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이 믿는 한 버블은 계속 커진다. 버블이 커지는 한, 자산을 구매하기 위해 일으킨 대출을 갚기 위해서는 자산을 ‘더 어리석은 사람’에게 더 비싼 가격에 파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자산이 만들어내는 현금 흐름이 대출을 갚기에도 모자라는 것 정도야 무슨 대수인가? 금융 버블의 진행 과정과 그 영향에 관한 모델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금융 불안정성 가설)는 이런 ‘폰지 금융Ponzi financing’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버블이 커지고 있다는 확실한 징후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경우 광기의 첫 단추는, 민스키가 모든 버블의 시작이 항상 그렇다고 주장하듯 여신의 과도한 창출이었다. 190)


일본 버블의 시작은 1985년 엔/달러 환율의 재조정이었다. 그 뒤에 발생했던 일련의 전개 과정(투자 광기가 휘몰아치고, 버블이 붕괴하며 그 뒤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디플레이션)은 학자와 애널리스트들이 버블의 일반적인 진행 과정과 파급 효과를 설명하는 이론적인 틀을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이론은 상당 부분 경제학자 리처드 쿠(노무라 증권의 수석 경제연구원)에 의해 확립되었다. 1990년대 일본 경제를 면밀히 연구했던 그는, 거기서 얻은 교훈을 역사상 발생했던 다른 버블들에 대입해보았다. 그러고는 버블 붕괴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는 ‘대차대조표 불황balance sheet recession’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과도한 부채를 안고 있는 기업과 부실 채권을 떠안은 금융기관이 투자를 통한 성장을 추구하지 않고 부채 상환이나 부실 채권 정리에 집중해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없게 되면서 결국 경기 침체를 불러오는 현상―옮긴이). 191)


# 플라자 합의(1985) : G5(미국, 서독, 영국, 일본, 프랑스)는 각국 정부 개입에 의한 환율 조정, 즉 각국이 달러를 매각하여 시장에 풀고 자국통화를 매수하여 유통량을 줄임으로써 달러 약세와 자국통화 강세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사태를 일단락하는 데에 합의했다. 발표일 다음날에 달러화 환율은 1달러=235엔에서 약 20엔이 하락하였다. 1년 후에는 달러의 가치가 거의 반이나 떨어져 120엔 대에 거래가 이루어지는 상태까지 되었다.


리처드 쿠의 주장에 따르면 대차대조표 불황은 보통 과도한 투자 광기가 사그라들고 시장이 붕괴한 이후에 발생한다. 많은 회사가 투자 열풍 동안 신규 자산의 구입을 위해 대출을 일으켰다가 그 자산들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장부상으로 파산하거나 파산에 가까운 상태에 이른다. 회사의 총부채가 총자산보다 커지는 이런 상황을 회계사들은 파산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중 많은 회사가 여전히 사업을 영위하며 핵심 영업활동으로부터 충분한 현금 흐름을 창출해내고 있다. 채권자들은 아직 회사 문을 닫고 자산을 압류하기를 원치 않는다. 자산을 다 팔더라도 그 자산을 구입하느라 일으켰던 대출을 갚기에도 모자란 가격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회사들은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이익을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기보다는 부채를 갚는 데 사용할 것이다. 채권자인 은행도 그것만이 대출 금액을 회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회사들을 강제 청산하기보다는 그렇게 하도록 놔둔다. 191-2)


하지만 너무 많은 회사가 이런 상황에 처하면 시장의 수요가 바닥난다. 아무도 공장에 들여놓을 새 설비를 주문하지 않고, 아무도 새 직원을 채용하지 않는다. 다들 부채를 갚기에만 급급하다. 혹은 달리 표현하자면 대차대조표를 바로잡기에만 급급하다. 대차대조표 불황은 전형적인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다. 개별 회사들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것 때문에 전반적인 경제 회복의 가능성이 파탄에 빠진다. 보통의 경기 침체에서 주로 사용하는 양적 완화 정책은 대차대조표 불황에는 먹히지 않는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아무리 낮추고 통화 공급량을 늘린다고 해도, 성장이 침체된 상황에서는 기존 대출을 더 낮은 이자의 신규 대출로 갈아타는 것 빼고는 회사들이 더 이상 대출을 통한 투자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방대한 유동성은 그렇게 정체되어 시중에 돌지 않고 쌓여만 간다. 리처드 쿠의 이론이 맞는다면 일본의 경험은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로서의 역할을 한다. 192)


이에 대해 일본의 정치가와 관료들이 생각해낸 해결책은 세 가지였다. 첫째, 일본이 미국과의 공조를 통해(독일, 영국, 프랑스가 참여해 지원사격을 하기로 동의했다) 달러의 가치를 낮추고 엔의 가치를 높이도록 한다. 둘째, 미국과 각종 무역 협정을 맺어 눈에 띄는 갈등 요소를 제거하고, 일본 기업들의 생산 시설을 미국으로 옮기도록 장려한다. 그렇게 하면 일본의 대미 무역흑자 때문에 미국 내에서 사라지던 일자리의 숫자를 줄일 수 있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금융 당국은 일본 경제의 주 동력을 수출 이외의 분야로 옮기기 위한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새 동력의 가장 그럴듯한 후보로 떠오른 것은 투자였다. 일본 기업이 해외의 최신 공장들에 지속적으로 투자하면 세계 각지에 거점을 가진 다국적 기업이 되고, 이 기업들의 본사의 집결지로서 일본의 위상을 공고히 해줄뿐더러, 수출을 대신해 공장과 설비 투자를 경제의 새로운 동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195)


투자 붐을 일으키는 손쉬운 방법은 저금리로 여신을 제공하는 것이다. 1985년 9월 미국과 엔화를 평가절상하기로 하는 합의가 이루어지자, 일본의 금융 당국은 저금리 정책을 펼칠 의지와 여건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기업들은 보통 공장이나 설비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주식이나 채권시장에서 조달하지 않고 은행으로부터 단기 대출을 받아 무한히 갱신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일본 기업의 자금 담당자에게 상환할 필요 없는 돈을 공짜로 주면서 새로운 설비를 지으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공짜’ 돈이라는 개념은 주가가 끝없이 오른다는 전제하에 성립되었다). 이런 ‘공짜’ 돈이 넘쳐나면서, 기업들은 화려한 사옥과 최첨단 공장들을 지었다. 그러는 사이에 땅을 조금이라도 소유하고 있던 수백만의 사람은 땅값이 오르자 갑자기 부자가 되었고, 벼락부자들이 늘 그러하듯 돈을 물 쓰듯 쓰고 다녔다. 이런 변화를 지켜보던 수백만의 다른 사람도 가격이 치솟고 있는 자산들을 빚을 내 사기 시작했다. 196-7)


일본 관료들이 저지른 실수의 원인은 그들의 자신감에 있었다. 버블을 키울 때도 당국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버블을 꺼뜨릴 때도 폭락이 아닌 ‘연착륙’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허황된 믿음은 아니었다. 일본 당국은 경제를 공황에 빠뜨리지 않게 할 만큼 강력한 제어 수단들을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버블이 터지고 나서 일본이 겪었던 수준의 자산 가치 폭락이 발생하면 거의 항상 뒤따르게 마련인 은행업계의 전반적인 위기도 막을 능력이 있었다. 일본에서도 결국 폭락은 발생했지만 슬로모션으로 발생해서, 금융 시스템의 완전한 붕괴와 수백만 명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슬로모션이라고는 해도 폭락은 폭락이었다. 일본 정부를 아마도 가장 당황케 했던 것은 선진 기술과 제조업에서 거의 달성한 듯 보였던 일본의 절대 우위, 자부해 마지않던 그 절대 우위가 알고 보니 크게 과장되어 있었거나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깨달음이었다. 199)


일본은 금융기관이 가진 문제의 심각성을 뒤늦게야 깨닫고, 실패한 금융기관들을 너무 오랫동안 산소호흡기로 연명시킨 것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을 받기는 한다. 하지만 이들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에 성공했으니, 그것은 바로 금융기관에서 돈을 빠져나가게 만드는 대규모 패닉을 방지해서, 경제에 여신을 공급하는 메커니즘을 지속시킨 것이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던 금융 붕괴의 와중에(슬로모션으로 일어나기는 했지만), 일본 금융기관에 예금을 맡긴 단 한 명의 예금주도 돈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은행에 계속 돈을 맡겨두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사람들이 돈을 충분히 맡긴 채로 놔둔 덕택에 은행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일본의 금융 시스템은 그렇게 벼랑 끝에서 살아났다. 전 세계를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었던 금융 전반의 붕괴를 모면해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고, 일본 경제를 1980년대 초의 상태로 되돌릴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200-1)


8장 비즈니스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정사원들을 해고할 수도 없었고 해고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희망퇴직’에 의존할 뿐이었다. 기존의 정사원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단합해, 새로 정사원을 채용하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에 비정규직을 뽑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프리타フリーター’라고 알려진 비정규직들을(자유를 뜻하는 영어의 프리free와 노동자를 뜻하는 독일어 아르바이터arbeiter를 합쳐 만든 말로, 일본에서는 보통 학생들의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뜻한다) 기차가 떠났는데도 플랫폼에 남아 있거나 남겨진 사람처럼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기차를 타지 못한 것이 본인 잘못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인社會人(샤카이진)이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일본에서 사회인이라고 하면 사회의 어엿한 일원으로서 직장과 가정에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성인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의 많은 회사가 봉착한 또 하나의 문제, 바로 세계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221-3)


일본의 비즈니스는 세계화의 한 가지 중대한 측면에서 뒤처져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주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지위에 외국인을 앉힐 수 있는 포용력이다. 문제는 사회생활을 조금이라도 해본 일본의 성인이라면 모두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일본식 협업 방식과 일처리 방식을 외국인들이 잘 모른다는 점이다. 세계화에 매우 적극적인 일본인이나 일본의 조직도 가이진外人과 가까이 붙어서 일상적으로 일하는 것은 힘들어한다. 일본 기업의 충실한 병사는 절대로 자신이 속한 회사나 상사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을 하지 않으며, 일본의 엘리트 지배층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보호하기 위해 똘똘 뭉친다. 이러한 불문의 행동 규범을 외국인이 이해할 것이라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 혹은 어떻게 이해했다고 해도 그것을 내면화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일본과는 매우 다른 문화적 가치, 즉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원칙을 강조하는 문화적 가치를 교육받고 자란 외국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226, 230)


일본 기업들이 외국인에게 진정한 의사결정 권한을 주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일본 재계에 충성의 행동 규범(점잖게 표현하자면) 또는 유착(비판적으로 보자면)이 만연하다는 확연한 증거다. 이 행동 규범에 뒤따르는 경제적인 비용은 우수한 외국인 경영진을 채용하기 힘들다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심각하면서 충성·유착의 행동 규범과 직결되어 있는 훨씬 더 큰 문제가 있으니, 바로 일본이 실패를 인정하고 거기에 대처해나가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충성의 행동 규범은 상사나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면 당신이 자결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 규범은 반대 방향으로도 작용한다. CEO가 회사 문제에 대해 ‘책임지고’ 사임한다든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납품 업체가 있는데도 회사가 기존 업체로부터 계속 납품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이 그 사례들이다. 충성·유착 규범은 개인과 조직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의 결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230-1)


일본의 경영자들은 세계화의 어려움, 실패(매몰 비용을 포기하는 것)에 대처하는 적절한 경제적·정치적 메커니즘의 부재가 일본의 비즈니스와 경제에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해 아마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지금 해외에서 수많은 유명 일본 기업이 시장지배력과 명성을 잃어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일본은 꽉 막힌 관료주의와 기업 내의 허례허식으로 인해 의사결정 속도가 여전히 거북이걸음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것을 일본의 경영자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이론적으로는 네마와시根回し(가령, 회의 준비를 위한 회의를 하기 위한 회의)나 품의稟議(10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에게 결제를 받아 의사결정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 이 중 누구라도 의사결정을 지연하거나 멈출 수 있다) 절차를 대폭 간소화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할 때에는 그들 자신이 자라온 그 시스템 안에 갇혀버리고 만다. 232)


9장 사회문화적 변화


일본만의 독특한 창의성의 기원을 흔히 모순과 모호함을 참고 견디는 능력에서 찾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사람들에게 모순을 참지 말라고 말했다. 일본의 철학 사상에는 그런 명제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사회적·경제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서양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수준의 모순을 관리하면서 공생하는 능력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물론 일본인도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서로 다르고 또 상호 모순적인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어릴 적부터 현실을 관리하도록 훈련받은 덕분에 심리적인 충격에 대응할 수 있다. 예술 또한 같은 역할을 한다. 일본 사회에 넘쳐나는 모순은 장르를 불문하고 오랫동안 일본 예술가들에게 마르지 않는 소재를 제공해왔다.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해야 할까, 예술은 (술과 더불어) 모순과 함께 살아야 하는 삶에 따라다니는 긴장을 풀어주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242)


그것은 전후 일본 문화의 상징이었던 샐러리맨을 어떻게 묘사하는가를 보면 잘 드러난다. 일본의 공식적인 문화가 샐러리맨의 출세에 필요한 덕목들을 찬양하고 있었던 반면, 방대한 망가(만화)를 포함해 좀더 불온한 문화 장르에서는 샐러리맨을 나약하고, 무책임하며, (절대 이룰 수 없는) 섹스와 돈에만 관심 있는 존재로 묘사했다. 샐러리맨들은 회사와 일을 위해 자기희생을 불사할 정도의 열정을 보여야 했을 뿐 아니라, 이것이 핵심인데, 거기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그 열정을 스스로 믿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샐러리맨은 스스로가 자기 목숨을 바쳐도 좋을 대의(회사)를 위해 싸우는 군인이라고 믿어야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결국 자신은 얼굴 없는 거대한 산업 기계 안에서 혹사당하는, 교체 가능한 톱니바퀴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자각도 함께 안고 살아야 했다. 그런 자각과 함께 사는 삶을 도와주었던 것이 망가였고, 또한 1970년대 중반 메가 히트곡인 「오요게! 다이야키쿤泳げ! 鯛燒君」 같은 노래였다. 242)


# 오요게! 다이야키쿤泳げ! 鯛燒君 : 원래 어린이를 대상으로 만들어졌던 이 곡은 대중적 간식인 붕어빵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다이야키鯛燒는 붕어빵이라는 뜻이고, 군君은 상さん보다 좀더 친근하게 소년과 젊은 남자들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이다). 붕어빵의 반죽이 물고기 모양처럼 생긴 똑같은 여러 개의 틀에 부어지고 이 붕어빵 중 하나가 물에 나가 자유롭게 헤엄치는 부질없는 꿈을 꾼다(오요게泳げ는 ‘헤엄쳐’라는 뜻이다).


일본의 조직들은 전략적 실수를 인정하고 발생한 문제를 직시하는 데 유난히 서툴다. ‘개인’은 비난받을 수 있고 심지어 희생되기도 한다. 조직에서 명목상의 리더인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스캔들에 휘말린 뒤 형식적인 사죄를 하고 사퇴하는 풍경은 매우 익숙하다. 이는 상당수가 쇼에 불과할 뿐이지만(그런 리더들은 뒤에서 따로 보상을 받고 잠잠해지면 되돌아온다), 실제로 수많은 일본의 개인은 실수나 혹은 더 큰 문제에 대해서도 기꺼이 책임지려는 훌륭한 태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조직’으로 넘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본에서 실수를 인정할 줄 모르고 강제적인 상황에 몰리기 전까지는 급격한 변화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앞 장에서 다뤘던 비즈니스의 사례들에만 국한된 생리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 황군이 보여준 행위에서 시작해, 어떠한 공공사업 프로젝트라도 한번 공식적으로 인가되면 철회가 거의 불가능해지는 현대 일본의 경향까지 모든 곳에서 드러난다. 264)


조직에서 실수를 인정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일본에서 제도적 협약이라는 것을 둘러싼 신성함에 가까운 아우라에 그 뿌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1945년 패전과 더불어 천황은 본인이 신적인 존재가 아닌 인간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전후에 만들어진 헌법은 일본에 법치주의 및 주권재민과 같은 개념들을 주입했다. 이로 인해 그 전까지 일본 권력의 핵심 제도들이 뿜어내던 신성한 아우라는 훼손되었지만, 그 아우라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약 40년 전 원자력 발전 프로그램을 추진하기로 했던 정책적 결정이 그 좋은 사례다. 원자력 발전소는 중앙집권화된 대규모 조직이 아니면 운영할 수 없고, 그 조직은 필연적으로 기술적·재정적·정치적 권력을 축적하게 된다. 원자력 발전소의 이런 특징은 권력의 축적을 조직의 생리로 하는 일본 관료들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원자력 발전은 지도층의 오랜 꿈, 즉 변덕스러운 외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꿈을 실현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65)


일본 최대의 공공재 회사인 도쿄전력은 그렇게 통상산업성 및 건설성의 엘리트 관료들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와 같은 강력한 정치가들과, 선거구에 짭짤한 건설 계약을 끊임없이 유치해올 수 있다는 데 홀린 지역 자민당 지도자들의 지지와 보호를 등에 업고, 지구상에서 가장 지진의 위험에 취약한 나라에 수십 곳의 원전을 짓기로 하는 치명적인 결정을 내리기에 이른다. 연구 기관들과 학계의 ‘저명한 전문가’들이 이론적 뒷받침을 만들어주었고, 일본의 기성 언론은 숙련되고 성실한 엔지니어들 손에서 원자력은 일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이익을 안겨줄 100퍼센트 안전한 테크놀로지가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연일 떠들어댔다(요미우리 언론 제국에서 특히 이런 메시지를 열심히 쏟아냈다). 일단 그렇게 결정되고 나자 다시는 이를 철회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까지 들어간 막대한 매몰 비용 때문이기도 했고, 더 정확하게는 그러한 규모의 결정을 되돌릴 만한 제도적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265-6)


일본의 모든 지도자를, 원자력을 무리하게 들여놓은 사람들과 같은 선상에 놓고 비난하는 것은 공평치 못한 일이다. 3·11 지진 당시에는 민주당이 집권 여당이었다. 총리였던 간 나오토를 비롯한 민주당의 많은 지도자는 1995년 고베 대지진 때 집권당이 사태에 대응하던 방식에 분노해 민주당을 창당했다. 당시 집권당이던 자민당은 지진이 고베의 대부분을 쑥대밭으로 만든 뒤, 고베 시민을 위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의무를 방기했다. 적어도 3·11 사태 초기에 당시 관방장관이었던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가 일일 브리핑에서 보여준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인 태도는, 변명과 얼버무림으로 일관했던 1995년 고베 대지진 당시 지도자들의 태도와 좋은 대조가 되었다. 부서 간 협조가 엉망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대부분은 민주당이 과거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문제였다. 원래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것도 부서 간 협조를 구조적으로 개선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으나, 언론은 이런 사실을 편리하게도 무시했다. 267)


간 나오토 총리는 3·11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책임을 일부 지고 희생양이 되어 그로부터 반년쯤 뒤 실각한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알려진 바와 같다. 일본에 원전을 들여오는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고, 지난 20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하던 경제를 지휘했고, 중국과의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었으며, 미국이 주도한 그 모든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정책에 비위를 맞추기 급급했던 세력이 2012년 말 다시 정권을 잡고 말았다. 그냥 정권을 다시 잡은 게 아니라, 해외 언론의 표현에 따르면 “화려하게 복귀했다”. 압도적인 격차로 선거에서 이기고 정권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걸맞은 지도자를 갖는다는 오래되고도 사라지지 않는 거짓말이 있다. 일본 국민의 온갖 미덕과 높은 양식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이 말은 과연 사실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하지만 이 대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 정치를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268)


10장 정치


자민당은 실제로 총선에서 50퍼센트의 득표를 한 경우가 매우 드물었지만 그 후 50년 동안 일본 의회를 절대적으로 장악했다(‘1955년 체제’). 그 첫 번째 요소는 입법 절차가 시작되는 중의원에서 농촌 선거구의 의석수가 농촌의 인구 비중에 비해 훨씬 더 많았다는 점이다. 이런 도농 간 의석수의 불균형은 사람들이 점점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함에 따라 더 심화되었다. 두 번째 요소는 당시의 중선거구제에서는 각 선거구에서 복수의 중의원 의원들을 선출했다는 점이다. 각 선거구에서 한 명의 의원만 선출하는 일반적인 선거구 제도와 달리, 일본에서는 한 명의 유권자가 한 표만 행사함에도 불구하고 한 선거구에서 득표순으로 많으면 다섯 명까지 중의원을 당선시킬 수 있었다(미국의 주들도 두 명의 상원의원을 뽑지만, 한 선거에서 두 명을 동시에 뽑지는 않는다). 따라서 당선을 유지하기 위해 경쟁 후보보다 반드시 더 많은 표를 얻을 필요는 없었다. 오직 당선권에 머무르기만 하면 되었다. 276)


이러한 결탁으로부터 일본 정당 정치의 대표적인 세 가지 특징이 탄생했다. 첫째는 대다수의 의원이 각각 특정한 부처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족族의원’이라는 그룹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가장 강력한 족의원 그룹은 각종 인프라 사업을 관장하는 건설성建設省을 둘러싼 족의원들이었다. 또 다른 주요한 족의원 그룹들은 농림성農林省, 운수성運輸省, 우정성郵政省에 몰려 있었다. 둘째는 1955년 체제로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자민당의 악명 높은 파벌주의다. 이 파벌들은 특정 사안에 대한 정치적 견해라든지 이데올로기의 차이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배경이나 계급이 무엇이든 간에 일본의 우파들을 집결시켰던 것은 이상주의적인 좌파들과 미군정의 개혁에 대한 증오였다. 미군정의 개혁이 학교 시스템을 민주화해서 일본 어린이들의 애국심을 파괴했다는 것이 그들의 견해였다. 일본 교직원조합(일본의 전교조)이 전후 시대를 통틀어 줄곧 우파가 분노를 표출하는 가장 큰 대상이었던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276-7)


1955년 체제는 애초의 목적대로 자민당의 의회에 대한 장악력을 공고히 했지만, 이로 인해 형성된 일본 정당 정치의 세 번째 특징은 아이러니하게도 군소 정당들에게 운신의 공간을 허용해주었다. 자민당은 농촌 선거구들에서 독점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했으나, 복수 당선자 시스템 덕택에 군소 정당들도 도시의 자영업자나 가족경영형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직원들로부터 표를 받아 약간의 의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표들은 원래 모두 사회당이나 공산당으로 갔을 것이었다. 이런 군소 정당 중에 가장 덩치가 컸던 것은, ‘신흥 종교’ 가운데 가장 크고 성공적이었던 창가학회의 정치 조직인 공명당公明黨이었다. 공명당은 좌파 지지자들 사이의 표를 분산시켰을 뿐 아니라, 공명당이 없었다면 목소리를 대변할 채널이 없었던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역할을 했다. 비록 작은 목소리였지만, 이런 역할은 좌파를 철저히 배제하던 일본의 정치체제가 포용력을 가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심는 데 아주 중요했다. 279)


다나카 가쿠에이의 천재적인 점은 1955년 체제를 전복시킨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장악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니가타에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지역 후원회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 그에게 충성하는 국회의원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들은 다나카 군단이라 불렸다. 다나카의 수완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1960년대 말 세계정세의 덕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나카는 ‘닉슨 쇼크(금태환 중지, 일본으로부터의 수입품에 대한 추가 관세, 일본에 알리지 않고 미중 간에 진행했던 국교 회복)’로 인해 미일 관계에 닥친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해결책을 만들어 제시했다. 당시 통상산업성 장관이던 다나카는 미국의 압력으로부터 일본 산업을 지키는 수호자이자, 막후에서 미국의 통상 외교관과 일본 섬유 기업들 사이의 중재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그의 중재를 통해 일본은 대미 수출이 너무 늘어나지 않도록 ‘자발적으로’ 규제를 하고, 미국은 관세를 내려주는 식으로 서로 체면을 세워주며 한 발씩 양보했다. 284-5)


전후 모든 스캔들을 통틀어서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을 록히드 스캔들은 사건의 발단이 해외였다는 점에서 기존 스캔들과 달랐다. 미국과 일본에서 이루어진 조사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사실들을 접하는 것은 일본의 기성 권력층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빅토리아 시대의 기품 있는 귀부인이 남편의 방탕한 성생활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적나라하게 논해야 하는 상황과도 같았다. 남편에게 정부情婦가 있고 유곽에도 출입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누군가 자꾸만 억지로 들먹이지만 않으면 그런 사실은 손쉽게 모른 척할 수 있는 것이다. 록히드 사건으로 인해 일본 정치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도 외면하지 못할 정도로 만천하에 공개되었을 뿐 아니라, CIA가 자민당에 비밀 정치 자금을 대주던 일과 자민당 창당에 관여했던 과거 또한 모조리 드러날 위기에 처했다(미국의 포드 정권은 실제로 스캔들이 새어나올 때부터 미일 간 안보관계가 타격을 입지 않을까 긴장하고 있었다). 288-9)


매체들은 다나카를 언급할 때 모든 존칭을 빼버림으로써,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방법으로 그를 모욕했다. 체포되어 거액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기 전까지 3주간 구속되어 있는 동안 다나카는 일반 범죄자와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석방되고 나서도 그는 7년 동안 매주 법정의 공개 재판에 출석해서 수많은 검사에게 모욕적인 추궁을 받아야 했다. 다나카는 1983년 1월 유죄판결을 받는다. 그가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상소 절차가 모두 끝나기 전에 뇌경색으로 몸이 크게 쇠약해져 결국 사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번째 형사 기소를 당하고부터 줄곧 유죄판결의 가능성에 시달리면서, 그가 총리직을 되찾을 가능성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총리뿐 아니라 지역구의 평의원 자리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공직으로도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일본에서 가장 높은 권력자의 위치에서 군림했다. 그 권력이 어찌나 절대적이었던지 사람들은 그를 ‘야미쇼군闇將軍(어둠의 쇼군)’이라고 불렀다. 290)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는 나카소네 시절 재무성 대신으로서 1985년의 플라자 합의의 협상을 이끌어서 초超엔저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이다. 그가 나카소네의 뒤를 이어 1987년 총리가 된다. 그의 멘토였으며 그가 배신했던 다나카처럼, 다케시타도 스캔들로 인해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사임한 뒤에도 다년간 계속해서 일본 정치를 컨트롤했다. 하지만 그가 일본 정치를 혼자 컨트롤했던 것은 아니다. 다나카와는 달리 다케시타에게는 동등한 권력을 누리는 정치 거물 가네마루 신金丸信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가네마루는(비록 자신이 총리 자리에까지 오르지 못했지만), 애초 다케시타를 총리 자리에 앉혔고, 다케시타가 사임한 뒤에는 다케시타의 도움을 받아 그다음 세 명의 총리를 임명했다. 그 또한 종국에는 스캔들로 끌어내려져, 구속되고 유죄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까지 그는 그 누구보다 다나카의 적자에 더 가까운 정치인으로서 야미쇼군의 역할을 해나간다. 293)


『일본개조계획日本改造計劃』이라는 책에서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는 일본이 ‘보통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통이라고 한 것은 일본이 ‘보통’ 정치, ‘보통’ 외교 정책, 정치의 명확한 통제하에 있는 ‘보통’ 군대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오자와는 두 가지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돈을 뿌리는 능력이 아닌 명확한 정책 비전을 제시하는 능력으로 경쟁하는 진정한 양당제도 시스템과 (2)정치에 의한 관료사회의 통제가 그것이다. 오자와는 자민당 지도부를 향해 정당 간의 진정한 정치적 경쟁 체제를 만들기 위해 선거 정치의 규칙을 개혁하자는 요구 사항을 발표했다. 예상했던 바였으나 오자와가 제시한 데드라인인 1993년 6월이 되도록 자민당이 답을 내놓지 않자, 그는 자신의 파벌을 데리고 자민당을 탈당해 신생당新生黨을 결성했다. 총선 결과 오자와는 호소카와가 만들었던 신생 정당인 일본신당日本新黨과 연립정부를 설립할 수 있었다. 자민당의 독주가 마침내 깨진 것이다. 298-9)


한편, 하시모토 류타로의 리더십하에 자민당에 잔류해 있던 군단의 멤버들은, 그들을 배신했던 오자와에게 반격을 가해 그의 연립 정권을 와해시킬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총리직을 미끼로 일본 사회당을 연립 정권으로부터 탈퇴시키는 것이었다. 애초 자민당이 결성되었던 목적은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잡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당은 주장만 무성할 뿐 실질적 정치력이 전혀 없는 당으로 서서히 전락하고 말았다. 사회당은 자민당을 상대로 정치적 구호를 외치고 도덕적 우위를 과시했다. 하지만 진정한 내각을 구성할 수 있는 아무런 현실적인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야당의 위치만 차지하고 있던 사회당은, 기실 진짜 야당의 출현을 방지함으로써 기존의 권력 구조를 지탱하도록 해주는 유용한 한 축에 불과할 뿐이었다. 자민당은 총리의 자리를 줄 수도 있다는 약속을 사회당 앞에 흔들어댔고, 사회당은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에 정신이 팔린 감시견처럼 꼬리를 흔들며 따라갔다. 302-3)


야당에 의한 집권이라는 첫 실험은 그렇게 끝났다. 사회당은 1949년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총리를 배출했다. 그가 바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다. 무라야마가 총리 재임 기간에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30년대와 1940년대 제국주의 일본이 저질렀던 일들에 대해 정부를 대변해 공식 사죄했다. 자민당 내부의 일부 세력이 아직까지도 철회하려 애쓰고 있는 그 사죄 말이다. 그러나 실제의 통치 체제는 과거처럼 각 정부 부처와 자민당 의원 사이에 권력이 조각조각 분산되어 있는 형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1996년 1월 하시모토가 연립정부의 수반으로 총리에 취임했다. 그는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는 틈을 타 의회를 해산하고 10월 총선을 치렀다. 결과는 자민당의 승리였다. 이 총선으로 사회당은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덥석 물었던 고깃덩어리에 알고 보니 독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독이란 바로 사회당의 위선에 유권자들이 철저히 등을 돌리고 말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303)


그런 와중에도 호소카와 정권이 실현한 선거제도 개혁은 1955년 체제의 핵심적인 부분을 약화시켰다. 1955년 체제의 선거제도는 유권자 1인이 1표를 행사하여 한 선거구에서 여러 명의 후보를 당선시키는 중선거구제였다. 이렇게 하면 금권선거가 된다. 새로운 선거제도하에서는, 한 유권자가 중의원 선거에서 한 장이 아닌 두 장의 투표용지를 받는다. 그중 첫 장에는 한 명의 후보를 골라 투표한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 한 명만이 그 선거구를 대표하는 유일한 중의원이 된다. 300명의 중의원이 이렇게 선출된다. 하지만 중의원 의석수는 480석이다. 두 번째 용지에는 유권자들이 후보가 아닌 정당 이름을 골라 투표한다. 선거제도 개혁은 일본 전역을 11개의 비례대표 선거구로 나눠 도합 180명의 의원을 선출하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선거제도 개혁도 자민당의 독주를 막지 못했다. 경제가 회복의 전망을 보이는 데 힘입어, 하시모토가 이끄는 자민당이 1996년 10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것이다. 304)


고이즈미는 현대의 미디어를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법을 완벽하게 파악한 일본의 첫 정치인이었다. 미디어를 잘 활용해 국가수반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미국의 레이건이나 영국의 토니 블레어처럼, 고이즈미도 보수적인(반동적이기까지도 한) 어젠다를 친근하고, 개혁가적이며, TV 화면에 잘 받는 이미지로 포장해서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일본 우파의 사상적 틀이 종전 이후 수십 년 동안 후견주의clientelism(유권자와 정치인의 이익을 둘러싼 유착관계로 이루어지는 정치―옮긴이)와 강력한 국가 집단주의였던 것에서,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반동적 국가주의로 변화해가는 흐름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이즈미의 신자유주의에 관한 발언과 시대의 흐름에 합류하는 듯한 모양새는, 진짜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제스처라기보다는, 일본 정치를 다나카가 패권을 쥐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시도였다. 즉, 고이즈미는 잘 훈련된 전문가 엘리트 관료들이 온전히 다스리는 나라로의 회귀를 지향했던 것이다. 307)


고이즈미는 중국과 남북한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참배를 다니기 시작했다. 세계는 일본이 왜 1930년대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독일처럼 반성하지 못하는가 의아해한다. 하지만 많은 일본인에게 있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정신적인 자살이나 마찬가지다. 1930년대의 전쟁과 그로 인한 여파를 겪고도 독일에서와는 달리 일본인들의 조국과 역사를 사랑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그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일본인들은 여전히 일본의 문화적 유산을 복잡한 심경 없이 즐기고 자랑스러워한다. 고이즈미와 아베 신조를 포함해 수많은 일본의 우익 정치인은 현대 일본의 병이 사회경제적 문제의 껍데기를 썼을 뿐 사실은 정신적 위기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리더십만이 국민이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이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311)


2006년 고이즈미는 후계자로 점찍어두었던 아베가 자민당 총재가 되도록 힘을 썼고, 그 결과 아베는 자동적으로 총리 자리에까지 오른다. 1950년대 보수파 관료의 후손 입장에서, 보수 패권의 부활이 완성되었다고 믿기에 이보다 더 확실한 신호는 없었다. 그러나 아베가 총리로 등극하면서 우파들은 선을 넘고 말았다. 고이즈미의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오히려 고이즈미 시절의 가장 중요한 교훈을 잊고 만 것이다. 우파의 패권 장악이라는 늑대는 개혁이라는 양의 탈을 쓰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 말이다. 아베는 총리로 취임하자마자, 고이즈미 때에도 가벼운 립서비스에만 그쳤을 뿐인 일련의 어젠다를 현실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전후 헌법의 개정, 사과를 모르는 강한 군대, 일본 주권 체제에서 황실의 중심적 위치 인정, 1930년대 일본의 행위가 서양 제국주의 및 동아시아에 무력을 통해 강요된 해외 사상(사회주의, 자유주의)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었다는 견해의 보급이 그것이다. 313)


2008년 미국에서 80년 만의 최악의 금융 위기가 발생하면서 일본 경제 또한 곤두박질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민당이 금융 위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현실과 동떨어진 당이라는 이미지는 더 강해지고 말았다. 오자와가 이끄는 민주당은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을 압살했다. 이에 대응해서 자민당이 한 일이라곤, 1950년대 정치 지도자의 후손 중에서 또 한 명을 찾아내 침몰하는 배의 선장으로 세운 것이 고작이었다. 그가 바로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협상했던 요시다 시게루의 손자인 아소 다로麻生太郞다. 오자와의 꿈이 드디어 현실로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활발한 선거와 정책 비전의 경쟁으로 돌아가는 진정한 정치의 시대가 손에 잡힐 듯했다. 그러나 오자와의 꿈을 철저히 무산시키고자 하는 세력은 일본 국내에 있는 무수한 정적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미국의 국방성, 국무성, 심지어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 공간인 웨스트윙에까지 퍼져 있었다. 315-6)


11장 일본과 세계


2010년 4월 11일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가 국제 핵 안보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는 (민주국가의 표본 같은) 한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하도록 하는 자유롭고 공정하며 투명한 선거를 통해 총리가 되었다. 하토야마가 총리가 된 것은 미국 방문 7개월 전 그의 정당(민주당)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오바마 대통령과 짧은 의례적 독대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이는 의도적인 홀대였고, 이런 홀대는 처음이 아니었다. 하토야마가 푸대접을 받은 이유는 명확했다. 일본 정부가 최근에 미국과 서명했던 조약이 있는데, 이를 재협상하겠다는 공약으로 일부 지지를 얻어 선거에서 승리해 취임한 총리이기 때문이었다. 그 조약은 동아시아 최대의 미군 기지 중 하나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토야마를 친구가 아닌 적으로 대접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신新일본통New Japan Hand’이라 부르기로 하자. 320-1)


이 신일본통 지망생들이 자민당 핵심 의원 사무실에서의 인턴십이나 일본의 각종 대학 및 재단에서 넉넉한 자금 지원을 받고 일본의 정책 결정자들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다음과 같은 논지의 주장을 일관되게 내세울 필요가 있다: 일본과 미국 사이의 군사동맹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동맹은 중국의 부상과 골칫거리 북한의 핵무장 야욕을 둘러싼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역이건 금융이건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가 되었건, 그 어떤 이슈도 안보동맹이라는 절대 가치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안보동맹은 그동안 잘 작동해왔으나, 한 가지 개선되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일본의 자위대가 일본 자국의 국방을 수행하고 미군의 군사력 행사를 돕는 데 좀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신일본통들은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이라는 단어를 매우 좋아한다). 322)


하토야마의 후임으로 총리에 오른 간 나오토의 내각 멤버들 중 상당수는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經塾 출신이었다. 파나소닉의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가 설립한 이 학교는 정치 지망생들을 위한 엘리트 교육기관이었다. 마쓰시타 정경숙과 그 졸업생들은 2008년 금융 위기 이전에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트렌드의 일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정치와 정부 운영을 둘러싼 고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류 기업을 경영할 만한 사람들에게 나라의 경영을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각국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기업의 이사회 같은 데 잘 어울릴 사람들이었다. 혹은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 매년 모여드는 부류의 사람들과 동등한 신분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만한 이들이었다. 무수한 ‘개혁가’ 정치인들이 거쳐가는 동안 스스로의 특권과 영역을 침범받지 않고 유지해낸 수백 명의 눈치 빠른 관료를 길들이는 법을 몰랐던 것 또한 말할 나위 없다. 343-4)


아베와 그의 주변 세력은 지난번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아니, 고이즈미가 총리로서 상대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잊고 있었던 교훈을 되살렸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 교훈이란 바로 추진하고자 하는 일이 아무리 수구적이라 할지라도 개혁적인 것처럼 포장해서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정부가 국민의 경제에 대한 불안과 욕망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다른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이즈미의 수석 비서관이었던 이지마 이사오飯島勳는 아베에게 ‘아름다운 일본’과 같은 애매한 주제에 대해 떠들 것이 아니라(이것이 아베가 2006년 발행했던 선거 정책집의 제목이었다), 경제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그가 구상하고 있는 대담한 계획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입헌 정부를 파괴하고 전전의 권위적인 ‘가족국가’를 재건하려는 우익의 계획은 자민당이 의회에서 헌법을 마음대로 개정할 수 있을 만큼의 의원수를 확보할 때까지는 잘 숨겨두어야 했다. 358)


미국에서는 역사적으로 연방준비위원회가 채권시장을 이용해 시장에 통화량을 공급해왔다. ‘공개 시장 조작open market operations’이라 불리는 이러한 방법은, 연준위가 새로 발행한 통화를 지급해 투자자들로부터 미국 국채를 사들이는 식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채권이 민간 투자자가 아닌 예금기관(은행)의 수중에 있는 일본에서는 이런 방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 일본중앙은행이 공개 시장 조작을 통해 시중 은행들로부터 채권을 사들이면, 시중 은행은 그 돈을 기업에 융자해주기보다는 국채를 더 사들여서 결국은 은행의 대차대조표만 더 부풀리게 된다. 일본중앙은행의 신임 총재가 된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는 일본중앙은행이 정부로부터 국채를 직접 구매하게 함으로써 이 문제를 우회해버렸다. 이런 식으로 통화량을 늘리는 행위는 원래 일본을 포함해 대부분의 나라에서 불법이다. 정부로 하여금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적자재정을 운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360)


구로다의 정책에 폴 크루그먼이나 애덤 포즌과 같은 서양의 리버럴한 케인스학파 경제학자들은 환호했다. 마침내 여기, 모든 선진국이 씨름하고 있는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할 대담한 정책을 펼치는 중앙은행 총재가 나타났다는 반응이었다. 버냉키 역시 줄곧 비정통파적 정책을 실험해보고 싶어했으나, 오바마 정부는 적대적인 의회 환경에서 불충분한 재정 부양 정책을 딱 한 번 통과시켰던 것을 제외하고는 버냉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연방준비위원회는 미국 경제 성장의 엔진을 재가동시켜야 하는 부담을 정부의 도움 없이 홀로 짊어져야 했다. 이와 달리 아베는 선거 때부터 경제를 살리기 위해 ‘세 개의 화살’이 필요하다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통화정책, 재정 부양, 광범위한 규제 완화 및 구조 개혁이 그것이다. 구로다가 중앙은행에서 통화를 계속 공급해주었기 때문에 아베는 재정 부양이라는 명목하에 바라마키(선심성 예산 뿌려대기)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360)


아베와 그 주변 사람들은 단순히 1970년대 초반 다나카가 일본의 선거 정치 시스템을 장악했던 시절 이전의 세계, 다름 아닌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가 창조하여 다나카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까지 직접 관리하던 그 세계로 돌아가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일본의 우익에게 있어 1950년대의 체제는 일본의 패전과 좌익 세력의 창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한 긴급 조치이자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그 체제는 외교 정책을 미국에 종속시켰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었고, 종신고용과 어용노조, 샐러리맨 문화와 같은 장치들을 고안해 대중에 대한 좌익의 호소력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아베와 그 주변에게 이런 체제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시절이 오면 내다 버려야 할 것들에 불과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승리는 이들이 원했던 만큼의 압승이 아니었다. 자민당은 스스로의 표만으로 전후 헌법을 뜯어고칠 수 있는 숫자인 참의원 3분의 2 의석은 얻지 못했다. 363-4)


일본인 거의 모두는 일본을 아시아와 별개의 나라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일본 사람들이 아시아アジア라고 말하면 그것은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를 뜻한다. 서양에서 온 사람들은 일본의 지인이 자기는 아시아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놀라곤 한다. 리버럴하고 상식적인 일본인들조차 서양인이 일본을 중국이나 한국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기라도 하면 일본이 그 나라들과 얼마나 다른지 즉각 지적하려든다. 그러나 일본의 미래를 생각하면 일본이 다시 아시아의 일원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을 것이다. 경제 협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 협력은 이미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보다는 일본과 그 운명이 아시아 지역의 운명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지난 500년간 서양이 우위를 차지하던 세계가 서서히 끝나가고 역사의 추가 다시 동아시아로 기울고 있다는 예측이 거의 확실히 현실화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376)


일본이 이웃 국가들로부터 아시아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은 과거사 문제와 직결된다. 일본의 옹호자들은 다른 나라들도 과거에 큰 잘못을 저질렀고 사과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즉각 지적한다. 일본이 어떤 사과의 말과 행동을 해도 주변국들은 절대 만족하지 않고 과거사를 채찍 삼아 일본을 계속 때리려들 것이라고도 얘기한다. 이 또한 맞는 말이지만, 여기서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일본이 1930년대에 일어났던 일을 직면해야 하는 이유는 한국이나 중국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을 위해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일본이, 일본의 독립성을 파괴하며 해외에서 일본이라는 단어를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광기의 대명사로 만든 사람들의 손에 장악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말이다. 아베가 하는 것처럼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진실을 순수하고 고결한 나라에 대한 이야기로 묻어버리려는 시도는, 앞으로도 일본이 비슷한 일을 다시 벌일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더 그럴듯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3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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