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동의 탄생
데이비드 프롬킨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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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역사의 교차로에서


"18세기에 마침내 지구를 둘러싼 제국을 수립한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획득한 식민지 중에서도 전설로 가득찬 동방에 대해 가장 큰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의기양양함에는 뜻밖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었다.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프랑스를 몰아내고 인도를 손에 넣어 승리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좋았으나, 수송로와 병참선이 지나치게 멀어져 여러 곳에서 끊길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그러한 취약점을 재빨리 간파했다. 나중에 본인 스스로도 주장했듯이, 시리아에서 전설과 영광의 길을 따라 바빌론으로 들어간 뒤 거기서 내쳐 인도까지 쳐들어갈 계획으로 1798년 이집트 원정에 이어 시리아로 진군해 들어갔다. 이후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러시아 황제 파벨을 꼬드겨 러시아군도 같은 길로 내몰았다. 영국은 중동의 토착 정권들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유럽 국가들의 이런 팽창을 막으려고 했다. 중동을 지배할 의도는 없었으나 유럽의 경쟁국들이 그 지역을 지배하는 것 또한 결단코 막으려고 했다."(51)


"영국정부가 19세기 내내 유럽 국가들의 간섭, 전복, 침략에 맞서 쇠락한 이슬람 정권들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자 이윽고 러시아제국이 영국의 주적으로 떠올랐고, 이때부터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 계획을 막는 것은 영국 군부와 민관인 관리들의 집요한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거대한 게임the Great Game'은 1829년, 당시 영국 총리였던 웰링턴 공작이 아프가니스탄을 통한 러시아의 공격에 맞서 인도를 지킬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공식적으로 논의하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다 그 논의에서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접근을 막는 것이 최상이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이때부터 쇠락한 아시아의 이슬람 정권들을 영국령 인도와 이집트로 가는 통로 사이의 거대한 완충지대로 만드는 것이 영국의 전략이 되었다. 특히 이것은 파머스턴이 오랫동안 외무장관과 총리로 재직할 때 추진했던 관계로, 그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51-3)


"거대한 게임이 특히 격렬하게 진행되던 서아시아에서는 다르다넬스의 좁은 해협 위쪽,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동서 통로와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북서 통로에 자리하여 수백 년 동안 세계정치의 교차로가 되었던 고대 비잔티움, 곧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 콘스탄티노플이 적대 국가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는 한, 강력한 영국 함대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흑해로 들어가 러시아 해안선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러시아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점령하는 날에는, 영국 함대는 해협으로의 진입을 차단당하는 것은 물론, 러시아 함대가 지중해로 진출하여 영국의 생명선마저 위협할 수 있었다. 아시아 대륙 저편에서는 아프가니스탄에 접한 드높은 산맥이 전략적 요충지였다. 침략군이 영국령 인도 평원으로 쏟아져 내려올 수 있는 요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에서는 러시아가 그 고지대에 입지를 마련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영국의 정책 기조가 되었다."(53)


"오스만제국은 제1차 발칸전쟁(1912~1913)에서 발칸동맹(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세르비아)에 패해 유럽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제2차 발칸전쟁(1913)에서는 아시아 쪽 터키의 맞은편에 위치한 트라케(트라키아)를 용케 회복했다. 하지만 그 역시 제국의 붕괴가 계속되는 와중에 찾아든 잠깐의 휴지기에 불과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권을 잡고 술탄의 각료로 제국을 지배했던 콘스탄티노플의 청년튀르크당은, 제국의 영토가 치명적 위험에 처해 있고 유럽의 포식자들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시시각각 다가온다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래지 않아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 대륙마저 분할했고, 이제 그들이 눈길을 돌릴 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지표면의 4분의 1은 영국, 6분의 1은 러시아가 차지하여 대부분 지역은 이미 점령된 상태였고, 서반구도 먼로주의에 포함돼 미국의 보호를 받는 입장이어서, 유럽 국가들이 뚫고 들어갈 여지가 있는 지역은 중동뿐이었다."(77-8)


"CUP(통일진보위원회) 내의 다양한 분파는 강력한 유럽 국가를 동맹으로 확보하는 것이 터키 의제의 가장 절박한 사안이라는 데 뜻을 같이했다. 유럽권의 한 나라, 아니 열강의 하나─영국, 프랑스, 혹은 독일─만 동맹으로 얻으면, 오스만제국은 영토를 침탈당하는 일 없이 안전해지리라고 청년튀르크당은 판단했다. 러시아와 러시아보다는 힘이 다소 약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그리스, 불가리아가 오스만제국을 침략할 개연성이 가장 높은 나라들이었다." "1914년 5월과 7월 사이에는 오스만의 정세가 더욱 악화되어 CUP 지도자들이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다른 세 강대국에도 동맹의 개연성 여부를 은밀히 타진하는 상황이 되었다. 친프랑스파였던 해상장관 제말은 프랑스에 동맹을 제의했다가 거부당했다. 절망에 빠진 탈라트가 고심 끝에 러시아에까지 접근하는 무리수를 두었으나, 역시 퇴짜를 맞았다." "오스만제국은 열강의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못하는 외교적 고립 상태에 빠져들었다."(83-4)


"불간섭 정책을 옹호하던 오스만제국의 국방장관 엔베르 파샤는 1914년 8월 말에 벌어진 타넨베르크 전투와 같은 해 9월에 시작된 마수리아 호수 전투에서 독일군이 러시아군에 대승을 거두자, 오스만이 러시아 영토를 획득하려면 독일이 단독으로 승리를 거두기 전에 참전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러시아는 수십만 명의 병력이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사로잡힌 상황이어서, 엔베르처럼 충동적이지 않은 사람도 러시아의 패배가 임박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독일의 승리 열차는 이제 막 역을 떠나려 했으므로, 엔베르로서는 이번이 기차에 올라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더욱 조바심을 냈을 것이다. 9월 26일 엔베르는 결국 동료들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여 외국 배들(사실상 연합국 선박)의 접근을 가로막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고는 일주일 뒤 독일 대사 폰 반겐하임에게, 대재상이 더는 오스만의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통보했다."(114-5)


2부 하르툼의 키치너, 장래를 준비하다


"영국은 오스만제국과 전쟁이 발발하자 이집트와 키프로스 문제를 명확히 해둘 필요를 느꼈다." "카이로의 영국청(이집트 총독 키치너가 근무하는 곳)이 원한 것은, 이름뿐이나마 언젠가는 독립시켜주겠다는 언질이 포함된 보호령이었는데, 영국정부는 두 나라의 병합이라는 본래의 결정을 번복하고 카이로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영국 내각의 결정으로 키치너의 영국청은, 키치너와 그의 참모들이 훗날 아랍어권 전역으로 확대시킬 생각이었던 통치 형태의 원형을 수립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인도에서와 같은 직접통치 방식이 아닌 보호령이 그것이다. 키치너의 이집트에서는 허울뿐이나마 세습군주와 토착 각료들이 존재했다. 따라서 영국 고문관들의 조언으로 결정된 사안이라 해도 모든 법령은 그들 이름으로 공표되었고, 그것이 바로 키치너 사단이 바란 정부 형태였던 것이다. 로널드 스토스의 표현을 빌리면, 〈영국은 명령법에 반대하고, 가정법을 좋아하며, 기원祈願법도 마다하지 않았다.〉"(136-7)


"1914년 영국인들의 관심은 온통 오스만제국이 참전하면 수에즈운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에 모아졌다. 로널드 스토스도 예외는 아니어서 유럽의 국방부 관리들이 철도 시설을 중심으로 적국의 군사력을 분석하듯, 낙타에 초점을 맞추어 오스만의 군사력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실 낙타는 구실이었을 뿐, 스토스의 진짜 목적은 그 편지와 함께 1914년 9월 6일 클레이턴이 건네준, 낙타 이외의 또다른 문제들을 메카의 지도자와 논의해달라는 내용의 극비 비망록을 키치너에게 전달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 비망록에서 클레이턴이 제기한 문제들 중에는 영국에 호의적인 아라비아 지도자를 이슬람의 칼리프로 만들어 오스만 술탄을 대체할 개연성에 대한 것도 포함돼 있었다. 클레이턴은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슬람 성지의 수호자인 메카의 아미르가 칼리프의 명백한 후보자라고 말햇다. 그렇게 되면 성지순례의 면으로도 영국에 중요한 조력자가 생긴다는 것이 이유였다."(157-8)


"키치너는 외무장관 그레이의 승인을 받아 스토스에게 보낸 전문에서, 메카의 지배자에게 〈터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이 전쟁에서 아랍이 영국을 도와주면, 영국도 아라비아 내에서 일어나는 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아랍인들이 외국의 공격에 맞서 싸울 때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답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여기서 '아랍인'은 아라비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아라비아 반도가 술탄으로부터 해방되면 영국은 외세의 모든 침략으로부터 그곳 지배자들을 보호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사실 월권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키치너의 발언이었다. 그는 아라비아의 역할이 전시보다 전후에 더 중요할 것이라고 여긴 자신의 믿음을 반영하듯, 메카에 보내는 메시지를 폭탄선언으로 마감했다. 〈메카나 메디나의 칼리프는 진정한 아랍 종족이 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보우하사 지금 벌어지는 모든 악에서 벗어나 그 선은 달성될 것입니다.〉"(161-3)


"키치너의 측근들은 그들이 이슬람권에 대해 안다고 믿은 그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고 있었다. 이슬람권의 불화와 분열상의 정도를 가볍게 본 것이었다. 그 점에서 이슬람의 극단적 청교도 운동인 와하브파의 지도자 이븐 사우드에게 수니파인 메카 지배자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한 키치너의 계획은 현실적이지 못했다. 수십 개로 쪼개진 이슬람의 종파들이 그랬듯, 그 둘도 견원지간이었기 때문이다. 키치너와 그의 측근들은 메카의 지배자로 하여금 오판을 하게 만드는 오류도 범했다. 메카의 지배자는 그들이 보낸 전문을 보고 영국이 자신에게 거대한 왕국의 지배자를 제의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슬람의 새로운 칼리프가 뜻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메카의 지배자가 자신의 새로운 왕국의 경계지가 될 곳을 언급할 때 스토스가 소스라치게 놀란 것도 그래서였다. 키치너나 그나 아미르의 통치영역을 확대시켜줄 의도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164)


3부 중동의 진창에 빠진 영국


"1915년 초 (서부전선 병력 차출을 거부하던) 키치너는 돌연 마음을 바꿔 영국의 다르다넬스 공격을 제안했다. 러시아 최고사령부가 다르다넬스에 대한 양동 공격을 급히 요청해오자, 그 청에 응하지 않으면 러시아가 전쟁에서 발을 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조치였다. 그렇게 되면 독일이 모든 병력을 서부전선에 투여할 수 있게 되어 영국과 프랑스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가 견제 공격을 요청하고, 키치너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던 것은 사실 엔베르의 카프카스 고원 지대 공격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요청은 1951년 1월 러시아가 엔베르의 튀르크군에 신속한 승리를 거두기 전 영국에 전달되었다." "결과적으로 영국 지도자들은 있지도 않은 튀르크의 위협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해주겠다며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총력을 기울인 것이었다. 처칠, 키치너, 애스퀴스, 로이드 조지, 영국, 중동의 운명을 바꿔놓게 될 다르다넬스 작전(갈리폴리 전투)은 이렇게 시작되었다."(196-7)


"키치너와 처칠의 다르다넬스 작전이 막상 성공할 조짐이 보이자 원조를 요청했던 러시아 정부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작전 성공은 물론 기뻐할 일이었지만, 그렇게 되면 영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할 것이 뻔했고, 그러자 러시아인들 마음속에 지난 1세기 동안 거대한 게임을 벌이며 느꼈던 공포와 시기심이 되살아난 것이다. 러시아 정부가 우려한 것은, 영국이 일단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나면 내놓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1915년 3월 15일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사조노프가 니콜라이 2세 황제의 메시지가 담긴 비밀 통전通電을 런던과 파리에 각각 발송했다. 콘스탄티노플과 다르다넬스 해협, 그리고 해협에 인접한 지역을 러시아에 인도할 것을 연합국에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제국의 다른 영토와 그 밖의 지역에 갖고 있는 야망이 실현될 수 있도록 양국의 계획을 호의적으로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207)


"러시아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그레이가 콘스탄티노플 협정을 비밀에 부친 것은 그 내용이 공개될 경우 인도의 무슬림 여론에 미칠 파장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영국이 그때까지 남아 있던 최후의 무슬림 독립국, 따라서 중요성이 적지 않은 오스만제국을 파괴한 장본인으로 비춰지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그레이는 또, 오스만제국이 파괴되는 데 따른 이슬람교도들의 손실을 다른 곳에 무슬림 국가를 세우는 방식으로 벌충해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아라비아가 그 후보지로 가장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곳은 열강들도 탐내지 않았으므로 약속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도 훗날, 〈외국 군대가 아라비아 땅을 점령할 것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메마른 황무지여서 강대국이 목초지로 욕심 부릴 만한 곳도 아니었다〉고 썼다. 그때만 해도 아라비아에 엄청난 석유가 묻혀 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211-2)


"한편 사이크스가 외유에서 돌아와 내각에 던진 주요 메시지는, 그동안은 아랍이 전쟁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제는 연합국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따라서 메카의 샤리프 아미르 후세인과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절실한 사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각료들의 토의 끝에 결국 (카이로에 교섭권을 주어 후세인과 합의해야 한다는) 키치너의 안이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헨리 맥마흔이 런던이 부여해준 권한과 지시사항으로 메카와 교신을 재개한 것이 바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과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토록 오랫동안 그 의미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만든 맥마흔 서한이었다." "1915년 10월 24일 맥마흔이 사뭇 달라진 어조로 후세인에게 답변을 보낸 것도 그래서였다. 원하는 약속을 해주라는 키치너의 지시를 받고 특정 영토와 경계지역에 대한 논의를 하기로 마지못해 동의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확실한 언질을 주는 데 따르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헷갈리는 용어를 사용했다."(274-5)


"그가 그런 우려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1916년 초 윈덤 디즈가 상황 파악을 위해 작성한 자료에 아랍인이 세 부류로 갈라져 있던 것도 그 힌트가 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영국이 그 모든 아랍인들을 만족시키기는 불가능했다. 그중 첫 번째인 시리아인들만 해도 프랑스를 철천지원수처럼 여겨 그들 영토에는 프랑스가 발을 들이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주목표로 삼았고, 그것은 물론 프랑스의 요구와 상반되었다. 두 번째 아랍인인 후세인도 아랍왕국의 지배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디즈는 아랍인 대다수와 터키인 모두 그것에 반대한다고 썼다. 〈이 생각은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우리 대부분, 아랍인 다수, 모든 터키인들의 관점이다.〉 다른 아랍인들도 후세인을 지도자로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라는 것이 디즈의 생각이었다. 끝으로 이라크의 아랍인들이 있었다. 그들도 (디즈가 보기에는) 독립을 원했지만 인도정부가 그곳을 병합해 지배하려는 것이 문제였다."(277-8)


"그러나 클레이턴과 그의 동료들은 몰랐지만, (아랍 비밀결사 지도자인) 알 미스리, (영국 관리와 아랍 지도자 간의 매개 역할을 한) 알 파루키, 아미르 후세인도 영국에 위조화폐를 남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후세인에게는 군대가 없었고 비밀결사에도 부하들의 실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만 혹은 수십만 명의 아랍군을 결집할 수 있다고 장담한 그들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처음에는 아랍 봉기를 약속한 알 파루키도 11월 15일 마크 사이크스를 만났을 때는 태도를 바꿔, 연합국이 시리아 해안지대에 군대를 먼저 상륙시키지 않으면 아랍 봉기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세인도 영국이 먼저 공격해주기를 내심 기대하면서, 아랍 봉기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는 방식으로 행동에 나서기를 거부했다. 영국군이 시리아를 공격하지 않으면 아랍은 행동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사이크스는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영국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침략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결론을 내렸다."(281)


"1915년 11월 23일부터 프랑스와 영국은 후속 조치를 위한 협상을 벌였고, 갑론을박 끝에 서로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사이크스 쪽에서 보면 프랑스가 확대된 레바논을 지배하고 여타 시리아 지역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으니, 모술까지 이어지는 세력권을 프랑스에 부여하는 데 성공한 것이고, (프랑스 협상대표) 피코는 피코대로 그것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두 지방 바스라와 바그다드는 영국이 차지하기로 결정되었다. 걸림돌이 된 것은 팔레스타인이었다." "그리하여 두 항구도시 아크레(아코)와 하니파,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 철도로 연결되는 영토 지대는 영국이 차지하고, 팔레스타인의 여타 지역은 모종의 국제기구 통치를 받도록 하는 절충안이 마련되었다. 팔레스타인과, 프랑스나 영국이 직접 통치하지 않는 중동의 나머지 지역은 아랍국 혹은 독립의 허울은 쓰겠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와 영국의 세력권을 분할될 국가들이 연합을 만들기로 했다."(289)


# 사이크스-피코 예비 협정(1916년 1월 3일 체결)


4부 전복


"서방권은 지난 몇십 년 동안, 시간상의 문제일 뿐 쇠락한 오스만제국이 언제든 붕괴되거나 혹은 해체될 것이라는 관점을 지녔으므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벌이는 긴박한 전쟁의 과정에서 오스만제국은 와해될 것이고, 제국 내에서 일어난 분란이 그것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916년 중엽의 양상은 그와 다르게 나타났다." "오스만군에 속한 다수의 독일장교들이 명령이 잘 먹히지 않는 것에 좌절과 혐오감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양국 관계에 균열이 갈 만큼 그것이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독일은 전쟁이 승리하는 쪽으로만 힘을 행사했을 뿐, 오스만 정부의 독립이나 혹은 CUP 지도자들의 입지를 불안하게 만드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렇듯 독일은 연합국이나 동맹국의 그 어느 강대국보다 능란하게, 전후 아시아에 가진 영토적 야망을 전시 행동에 개입시키지 않는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고 그 덕에 후방을 교란시키는 기회도 가장 잘 이용할 수 있었다."(309-10)


"우연인지 필연인지 키치너가 바다에서 유명을 달리한 것과 때를 같이해 메카에서는 아미르 후세인의 봉기가 일어났다. 후세인이 청년튀르크당이 자신을 폐위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일으킨 것이었다. 하지만 카이로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것이 키치너 사단의 노력이 가져온 성과로 믿었다." "그러나 후세인이 바란 아랍 봉기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오스만군에 속한 아랍부대들 중 후세인 편으로 넘어온 부대는 하나도 없었다. 오스만제국을 변절하고 연합국 측으로 넘어온 정치인이나 군인도 없었다. 알 파루키가 후세인에게로 몰려들 것이라고 약속한 강력한 비밀 군사조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세인의 병력은 영국 돈에 매수된 수천 명의 부족민이 전부였다. 후세인에게는 정규군도 없었다. 헤자즈와 헤자즈 부족민들이 사는 인근 지역을 벗어나면, 후세인의 봉기를 지원해줄 곳 또한 없었다." "결국 후세인이 아랍 봉기를 선언한 지 1년 뒤에는 데이비드 호가스가 그것을 실패로 간주하는 상황이 되었다."(327-34)


5부 운명의 나락으로 떨어진 연합국


"행정부에 일어난 변화는 영국의 중동정책에도 우연치 않은 변화를 초래했다. 동방에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애스퀴스와 그레이가 내각에서 퇴출되고, 자신의 중동관을 내각에 강요했던 키치너도 죽고 없어진 뒤, 키치너와 모든 면에서 대립각을 세웠던 로이드 조지가 총리가 되었다. 로이드 조지는 처음부터 동방을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 변수로 보았다는 점에서 키치너와 달랐다." "중동에 관한 로이드 조지의 미래관은 많은 부분 기독교 백성을 학대했다는 이유로 오스만제국을 혐오한 그의 첫 정치적 스승이자 자유당 출신 총리였던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튀르크 정부를 증오하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반면에 그는 소아시아에 영토적 야망을 가진 그리스에는 호의를 보였고, 성지(팔레스타인) 시온주의자들의 열망도 지지했다. 다만 두 번째 경우는, 유대인의 조국이 세워지더라도 그것이 영국의 통치를 받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리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366-7)


"1917년 5월 전쟁에 혐오감을 느낀 프랑스군이 폭동을 일으켜, 프랑스에서는 정치인들이 그간 편안하게 느꼈던 마지막 전시내각마저 붕괴했다. 전통적 지도력이 신뢰를 잃은 탓이었다." "이때 유일하게 남은 총리 후보자였던 조르주 클레망소도 로이드 조지처럼 정치적 '고독자'였다." "클레망소는 그 무엇에 앞서 증오자였고, 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한 것이 또 독일이었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이 프랑스에 부과한 가혹한 강화조약을 비준하기 위해 열린 보르도 국민회의에서 끝까지 저항한 인물이 클레망소였던 것도 그 점을 말해준다. 그는 포기를 모르는 인물이었다. 독일에 맞서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힘을 모아야 하고, 그러므로 프랑스가 식민지 사업에 힘을 분산시킨 것은 실책이었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따라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프랑스에 병합시키려고 하는 프랑스 상·하원의원들에게는 그가 당연히 주적일 수밖에 없었다."(369-70)


6부 신세계와 약속의 땅


"로이드 조지는 1917년 5월 10일에 열린 하원 비밀회의에서 영국이 전쟁 중에 점령한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를 독일에 반환하지 않을 것이고,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도 터키가 보유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선언을 하여 그의 긴밀한 협력자마저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각료들 중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로이드 조지는 마크 사이크스가 약속한 전후 중동에서의 프랑스 권리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사이크스-피코 협정도 중시하지 않았다. 그가 중요하게 본 것은 물리적 소유뿐이었다.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그는 1917년 4월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에게 〈우리는 정복으로 그곳을 차지할 것이고, 이후에도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여, 프랑스도 종래에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임을 시사했다. 로이드 조지는 내각에서 유일하게 팔레스타인 획득을 시종일관 원한 인물이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조국을 조성하는 안도 지지했다."(412-3)


"로이드 조지는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이익에 매우 중요하다는 논지를 펼쳐) 정부의 주요 민간인 각료들이 시온주의를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전시내각의 레오 에이머리와 마크 사이크스는 전후에 독일이 오스만제국을 독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인도로 가는 길이 적국 수중에 떨어져 영국에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위험을 피하려면 튀르크와 독일을 격퇴하고 오스만제국의 남쪽 주변부를 차지하는 것이 첩경이었다. 내각이 개전 초부터 메소포타미아 병합을 염두에 둔 것도 그래서였다. 아라비아도 독립을 주장한 현지 지배자들과 협상을 벌여 보조금도 주고 지원도 약속하여 친영파로 만들어놓았다. 그리하여 그 지역에서 취약지로 남은 곳은 이제 팔레스타인뿐이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다리로서 이집트에서 인도로 이어지는 육로를 가로막는데다, 수에즈운하와도 가까워 운하는 물론이고 운하와 연결되는 해로도 함께 위협할 수 있는 요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425-6)


"전시내각의 또다른 인물인 옴즈비 고어가 팔레스타인 농업연구소에서 아론손이 거둔 성과에 감격한 것은, 그것이 시온주의 논점의 핵심을 건드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지 커즌이 의회에서 개진한 시온주의 문제도, 팔레스타인 정착을 원하는 수백만 유대인들을 부양하기에는 그곳의 땅이 지나치게 척박하다는 것이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아랍인 원주민들도 추가 정착민을 받을 여지는 없다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기존의 나라를 제거하지 않고는 두 번째 나라를 세울 공간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아론손의 발견으로 그 논점이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아론손의 연구대로라면 과학적 영농기술로 땅이 비옥해져 팔레스타인의 주민 60여만 명을 쫓아내지 않고도 수백만 명이 추가로 정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옴즈비 고어도 시온주의 유대인들이 중동의 아랍어권 및 여타 민족들을 도와 그 지역이 갱생되면, 사막이 다시금 번영을 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런던으로 돌아왔다."(429-30)


7부 중동 침략


"영국 지도자들은 중동 아랍어권 지역의 정복이 끝나갈 시점이 다가오자, 후세인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발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1914년을 시작으로 바그다드 및 다마스쿠스의 분리주의 지도자들과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기울였던 클레이턴의 노력도, 비무슬림 통치에 반대하는 현지인들이 저항에 막혀 좌초된 바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다마스쿠스가 영국군의 진군로에 포함돼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중동의 미래를 위해 연합국의 대의와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그곳 주민들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파이살이 연합국의 계획에 동의한 것도 그들에게는 무용지물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오스만 정부가 시리아에 즉각 자치를 허용함으로써 아랍 민족주의에 선수를 치려 했던 보고서들도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영국은 시리아 지방들에서 후세인보다 한층 좋은 평판을 얻을 조짐을 보인 다마스쿠스의 토착 아랍 지도부에 맞서, 후세인의 권리를 지켜줘야 하는 곤혹스런 입장에 빠질 수도 있었다."(503-4)


"마크 사이크스는 1918년 중반 7인위원회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영국의 의도를 담은 선언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사이크스의 외무부 상관들이 공식적으로 승인한 선언문으로도 새로운 돌파구는 열리지 않았다. 사이크스의 필치에서 나온 것들이 그렇듯 그 선언문도 사용된 단어만 달랐을 뿐 아라비아 반도 이외의 아랍권 모두, 이런저런 유럽세력권이나 통치권에 포함되도록 만든 영국의 전후 중동정책을 다시 말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이크스의 선언이 인정한 완전한 독립은 아라비아 반도에 국한돼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독립된 지역이거나 혹은 아랍인 스스로 독립을 쟁취한 지역들만 독립을 인정했다는 말이다." "1918년 11월 8일에는 마침내 중동에 토착정부들이 들어설 수 있도록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영국-프랑스 공동선언문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의 주장에 따라 아랍 '독립'이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506-7)


"외무부는 육군성으로 하여금 앨런비에게 새롭고 중요한 지시를 내리게 함으로써, 전부터 징후를 보여온 정치적 논제를 계속 진행시켰다. 앨런비가 점령한 시리아 영토를 점령된 적의 영토가 아닌 〈독립국 지위를 갖는 동맹의 영토〉로 취급하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외무부가 〈주요 지역들에 아랍 기를 게양하고 그것에 경례하는 것과 같은 특징적 혹은 형식적 행위를 함으로써 아랍의 토착 지배권을 인정하고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그간 수차례 논의되었던 지시를 내린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10월 1일 사이크스는 앨런비에게 군정 지역을 최소화하고, 프랑스의 역할도 그에 맞춰 축소시키라는 전문을 보냈다." "이렇듯 외무부는 앨런비에게 형식적으로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따르되 실제로는 다르게 행동할 것을 주문했고, 그 점에서 외무부의 조치는 더 많은 것을 원한 프랑스, 프랑스에는 아무것도 주고 싶어 하지 않은 파이살, 혹은 카이로 아랍부의 어느 곳도 만족시키지 못한 해법이었다."(512-3)


8부 승리의 떡고물


"영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정부가 독일의 입김 아래 있을 것으로만 알았지, 오스만정부와 독일정부의 틈이 어느 정도나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깜깜 무소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1918년에도 그들은 독일이 아시아 북부 지역 점령을 끝내고, 이제는 중부를 탈취하는 과정에 있으며, 아시아 남부의 영국 입지도 뒤흔들 채비를 했다고 믿었다. 그것이 전시에 팽배했던 관점, 다시 말해 독일이 세계제국을 건설할 야망을 갖고 있고, 그러므로 종전 뒤 아시아의 모든 지역은 독일의 거대한 노예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며, 아시아의 부와 천연자원 또한 독일 산업의 연료가 되어 종국에는 독일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관점과도 부합했다." "에이머리가 1917년 말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은 것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전쟁은 이제 문자 그대로 동방으로 향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국-독일 경계선을 결정짓기 위해 아시아의 남은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을 벌이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다.〉"(546)


"1918년 여름 전시내각 회의에서 영국군 참모총장은 유럽전의 승리가 1919년 여름에는 힘들고 1920년 여름에나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따라서 영국 내각도 적군이 그토록 신속히 아니 별안간 무너지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해, (적국들과의 휴전협정을 고려하거나 그 문안을 작성하는 등의) 준비를 전혀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고 실제로 며칠 뒤 영국정부의 현안이 되었다. 10월 1일에서 6일 사이에는 오스만제국 정부와 몇몇 튀르크 요인들이 강화를 타진해 오고, 10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에는 독일이 윌슨 대통령에게 강화를 요청하여 협상의 물꼬가 터진 것이다." "영국의 전시내각은, 영국이 지배하기를 바라는 중동 지역이 행여 영국군에 점령되기 전 전쟁이 끝날까봐 안절부절 속을 태웠다. 레오 에이머리가 종전이 되기 전에 사실상 중동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영국의 세력권에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스뫼츠와 참모총장을 닦달한 것도 그래서였다."(554-6)


"1919년 겨울 총리실은 영국 언론에 파이살의 아랍군이 앨런비 장군의 시리아 정복에 〈현저하게 기여했다〉는 것과, 그들이 〈앨런비의 군대에 앞서 시리아 내륙의 4대 도시(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알레포)에 입성했다〉는 취지의 기밀 비망록을 배포했다. 비망록에는 파이살군이 헤자즈의 외국군이 아닌 원주민군으로서 시리아 도시들에 입성했으며, 〈그러므로 시리아를 해방시키는 데 조력한 아랍군의 대부분은 그 지방 원주민들이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비망록의 취지는 아랍어권 시리아는 그들 스스로 봉기를 일으켜 해방되었고, 그러므로 (튀르크에 이어) 그곳을 다시 지배하려는 의도를 가진 서구 민주주의의 원리 또한 그곳과는 맞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로이드 조지는 실제로는 아랍인들이 기여한 부분이 〈지극히 미미〉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영국의 또 다른 주요 동맹인 파이살에게 불리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자, 파이살과 시리아의 대군이 그들 나라를 직접 해방시켰다고 주장한 것이다."(575-6)


9부 썰물은 빠지고


"1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영국제국의 힘은 절정에 달했다. 중동과 여타 지역에서 점령한 영토를 추가하여, 과거 그 어느 때 혹은 세계의 그 어느 제국보다 광대한 대제국이 된 것이다. 로이드 조지는 전쟁으로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고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희생이 큰 모험을 치르느라 지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시에 얻은 영토를 하나라도 더 부여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로이드 조지는 중동에 파견된 영국군만 해도 250만 명에 달하고 그중 25만 명이 죽거나 부상당한 반면, 갈리폴리 전투를 제외하면 프랑스군은 사상자가 거의 없었고 미군 또한 중동에는 발도 디밀지 않았다고 하면서, 영국은 중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평화회의에서도 그는 108만 4000명에 달하는 영국 및 제국 병력이 오스만 영토에 주둔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 자신의 주장을 펴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와 더불어 영국을 제외하면 점령군에 의미 있는 규모의 군대를 파견한 나라는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583-7)


"중동의 평화협상은 기본적으로 로이드 조지가 짠 각본에 따라 전개되었다. 이는 미국을 소비에트 러시아나 혹은 소생하여 재무장한 독일이 제기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영국을 보호해줄 세력으로 삼는 동시에, 이탈리아 및 프랑스와도 싸움을 붙여 어부지리를 챙기려는 두 가지 속셈을 가진 각본이었다. 하지만 이 전략은 1918~1919년에서 1919~1920년으로 협상시점이 넘어가면서 미국이 영국의 동맹도 아니고 어느 나라의 동맹도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엇박자가 나기 시작했다. 미국이 세계정세와 '헝클어진 동맹관계'로부터 발을 빼려고 했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동맹이 어려워지자 로이드 조지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모색하여 예전과 반대되는 길을 걸을 요량으로, 그간 중동에서 취했던 반프랑스 정책을 철회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영국-프랑스 동맹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을 입은 뒤였다. 결국 중동 평화협상은 출발도 어설프고 끝은 더욱 어설픈 것이 되고 말았다."(592-3)


"미국은 터키와 싸운 교전국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윌슨은 오스만과 관련된 협상에 참여했다. 그가 제안한 14개 조항이 오스만 문제의 타결에는 적용할 수 없었지만, 정치철학의 표현으로 간주되어 국제문제는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 로이드 조지도 그것을 알고 우드로 윌슨이 오스만제국의 아랍어권 지방들의 안건을 심의하려고 하자, 시리아의 독립을 위협하는 프랑스─윌슨의 14개 조항과 원칙에 반하는 위협이었다─로 그의 관심을 바꿔놓았다." "윌슨은 당연히 시리아인 스스로 정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지지했다." "아랍 대표로 평화회의에 참석한 파이살도 회의 참석자들에게, 그가 독립을 주장하는 아랍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은 배제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인의 주장에 대해 보이는 파이살의 이런 합리성은, 아랍인들의 독립 주장을 영국의 사주에 의한 속임수로 보고 그에 대해 강경노선을 고수한 프랑스의 클레망소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600-1)


10부 아시아를 덮친 폭풍우


"중동 지역에서 이윽고 분란이 시작되었다. 1918년에 시작된 독립의 요구가 1919년에 들어서는 소요로 발전해간 이집트를 시작으로, 표면상으로 이집트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인도 변경지에서도 1919년 전쟁이 발발했다. 아라비아의 영국 정책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와해되는 조짐을 보였다. 불행은 겹쳐 일어난다고 했던가, 당시 중동의 영국 당국에는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형국이었다. 트란스요르단만 해도 부족 간 투쟁으로 혼란이 초래되고, 서팔레스타인에서도 1920년 봄 유대인을 향한 아랍인들의 폭동이 일어나며, 1920년 여름에는 이라크에서 봉기의 불길이 타올랐으니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은 아마도 종전 뒤 (재정난으로 인해) 중동에 주둔한 영국군 병력이 충분하지 못해, 사방에서 도전해오는 적들의 기세를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629)


"전후 영국이 중동에서 갖고 있던 입지에 최초로 도전장을 내민 곳은 수십 년 간 영국이 '임시' 보호령으로 통치했고, 그곳의 영국 통치자들이 처음부터 아랍어권 사람들은 다른 어느 국가보다 영국의 통치를 좋아한다고 믿었던 이집트였다. 하지만 문제는 영국이 이집트에 독립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되풀이한 점에 있었다. 따라서 이집트 정치인들이 그 약속을 믿고, 1차 세계대전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영국도 이제는 이집트에 독립의 일정을 제시할 때가 되었다고 여긴다고 해서 사리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술탄과 이집트의 지도부들이 원하는 것은 완전한 독립이었다. 하지만 수에즈 운하에 많이 의존했던 영국으로서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집트 지도부와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마저 실패하여 영국은 결국 현지 정치인들의 동의 없이 군대의 힘으로 지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631-6)


"아프가니스탄은 인도 평원으로 이어지는 고개들이 있는 영국의 또 다른 전략거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영국도 1세기 동안 여러 차례 유혈낭자한 전쟁을 치르며, 적대국(러시아)이 그 험준한 산악왕국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1907년 영국-러시아 협정 체결로, 아프가니스탄이 영국 보호령임을 인정받음으로써 그 문제도 일단락된 것으로 여겨졌다." "재차 발발한 제3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종결짓는 라왈핀디 조약이 조인된 것은 1919년 8월 8일 오전이었다. 영국이 적대적 외세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악왕국으로부터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보유했던 외교권을 철회하고, 아프가니스탄에 완전한 독립을 부여하는 내용의 조약이었다. 그런데 라왈핀디 조약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아프간 정부는 새롭게 얻은 자국의 독립을 볼셰비키 정부와 조약을 체결하는 데 사용했다. 이렇게 영국이 지난 십수년 간 아프간을 보호령으로 삼은 결과 얻은 것은 우호가 아닌 원한이었다."(637-40)


"아라비아에서는 영국의 두 주요 동맹인 헤자즈의 왕 후세인과 나지드의 왕 이브 사우드가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분쟁은 후세인의 지배권이 끝나고 이븐 사우드의 지배권이 시작되는 국경지대의 조그만 도시풍 오아시스들이었던 (알)쿠르마와 투라바에 집중되었다. 그곳들의 점유가 보기보다 중요했던 것은 너른 목초지와 더불어 부족들의 충성을 얻을 수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종교적 이유 때문이었다." "이븐 사우드는 선대로부터 18세기의 종교 지도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의 가르침을 물려받은 와하브주의 신봉자였다. 1745년에 맺은 양가의 동맹관계도 두 집안의 잦은 혼인으로 더욱 돈독해졌다. 문제는 이 와하브주의자들(와하브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와하비로 불렀다)이 그것에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는 광신도로 보일 만큼 엄격한 청교도적 이슬람을 표방했고, 예리한 감각을 지닌 이븐 사우드가 와하브의 그런 광신적 에너지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할 생각을 했다는 점에 있었다."(642-3)


"후세인이 자신의 권위가 침해당한다는 위기감을 느낀 것도 이런 청교도적 이슬람이 부근의 헤자즈 지방으로 스며들어왔기 때문이다. 정통 수니파였던 그에게 와하브주의는 교의적이고 정치적인 적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근절시키기 위해 쿠르마와 투라바로 되풀이해서 군대를 보냈으나 가는 족족 패하기만 했다." "1921년 말에 이르면, 전투병력만 15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흐완('종교상의 형제들'이라는 뜻)을 선발대로 내세운 이븐 사우드군은 아라비아를 완전히 정복할 기세였다. 1920년 9월 20일에는 《타임스》의 중동 전문 특파원마저, 카이로의 아랍부가 후세인을 이슬람 칼리프로 만들려고 한 정책은 실패작이었음이 드러났다는 기사를 썼다. 그는 이븐 사우드가 헤자즈를 점령할 것이라는 예측도 했다. 그의 말대로 이븐 사우드는 4년 뒤인 1924년 헤자즈를 점령하고 후세인을 망명길로 내몰았다." "영국은 이렇듯 중동제국의 서쪽과 동쪽뿐 아니라 남쪽 경계지에서도 더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644-5)


"한편 무드로스 휴전협정이 체결된 1919년 말엽 오스만제국에서 실시된 하원 총선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압도적 다수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새로 뽑힌 의원들은 하원이 소집되기도 전, 터키 내륙 깊숙이 위치하여 바다와 영국 함대의 대포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고, 서른여덟 살의 민족주의 지도자 무스타파 케말이 새로운 투쟁기지로 삼은 곳이기도 한 앙고라(지금의 터키 수도 앙카라)에 모여들어, 민족계약National Pact으로 알려진 케말주의적 정치원리가 담긴 선언문을 채택하여 열화와 같은 대중의 성원을 받았다." "1920년 1월 중순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하원이 소집되고 1920년 1월 28일에는 하원이 비밀회의를 열어 민족계약의 채택을 의결한 뒤 2월 17일 대중에 그 사실을 공표했다." "20세기의 정치적 논제가 유럽 주변 대륙들에 대한 유럽 지배의 종식에 있었다면, 오스만 의회의 독립선언이야말로 20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만했다."(646-7)


"앙고라에 수립된 케말의 터키정부가 처음 결정한 사항은 러시아로 사절단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나라 간에는 우호관계가 수립되었으나, 조약)1921년 3월 16일에 조인된 모스크바 조약)이 체결되기까지는 1년 여의 기간이 걸렸다." "당시 스탈린은 인종문제와 국가통제인민위원이었다. 그랬던 만큼 볼셰비키 이데올로기보다는 러시아의 국가 이익을 우선시했을테고, 그래서 케말이 (볼셰비키 운동에 적대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것과는 별개로) 영국에 손상을 줄 수 있다고 보고 그런 결정을 내렸다. 현실주의적 아니 냉소적 볼셰비키였던 그로서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케말을 지원할 만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전례 없이 많은 양의 소비에트 자금과 물자가 반볼셰비키 민족주의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터키 국경지대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외국의 정치운동에 제공한 최초의 중요한 군사원조였다."(649-50)


"시리아에서는 세 개의 주요 급진적 민족주의 단체가 활동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출신의 아랍계 오스만군 장교들로 구성되었던 만큼 당연히 메소포타미아 지방들의 미래를 관건으로 삼은 알 하드, 대다수가 팔레스타인 출신 아랍인들이어서 파이살이 시온주의자들에게 해준 약속을 철회하도록 압력 넣는 것에 전력투구한 반시온주의 조직인 아랍 클럽, 세 단체들 중 명성이 가장 높았던 알 파타트(청년 아랍협회)가 그들이었다." "시리아 의회는 1919년 중반 소집되기 무섭게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분명히 드러냈다. 지금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이 포함되는 대시리아 독립국을 요구한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는 방식, 혹은 프랑스의 요구에 맞서 미국, 영국, 시온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던 파이살의 계획과는 상충하는 요구사항이었다." "1920년 1월 말에는 호전적 민족주의자들이 시리아 의회를 장악한 채 (프랑스의 느슨한 위임통치를 인정한) 파이살-클라망소 협정을 부결시켰다."(658-60)


"그러나 시리아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의 입지와 파이살의 입지 모두 영국이 없으면 무너질 허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1920년 7월 26일에는 프랑스군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했고, 7월 28일에는 파이살이 망명을 떠났다." "프랑스는 시리아를 몇 개의 하부 지역으로 나누었다. 지금의 레바논이 된 대레바논도 그중 하나였다. 1920년 8월 1일 구로 장군이 선언한 대레바논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프랑스의 직접 통치지역으로 명시된 곳과도 대체로 일치했다. 그곳에는 옛 오스만제국의 한 지방이었던 레바논─프랑스의 후원을 받는 마론파 기독교도와 전통적으로 그들의 적이었던 드루즈파의 중심지─외에 해안가 도시들인 베이루트, 트리폴리, 시돈, 티레, 그리고 레바논 내륙의 상당 지역에 걸쳐 있던 알비카(베카) 골짜기도 포함되었다. 기독교도 근거지인 레바논에 생경한 지역들이 추가된 것이고, 그에 따라 다수의 수니파와 시아파 무슬림 인구도 그곳으로 유입되었다."(662-4)


"프랑스 정부는 시리아를 정복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하는 것과 더불어, 부근의 팔레스타인이 '시온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외교와 선전운동도 함께 펼쳤다." "하지만 1920년 프랑스가 영국의 이익에 직접적 위협을 가한 곳은 그곳들이 아닌, 장차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75퍼센트 정도를 접하게 될 요르단 강 동안의 인구가 적은 트란스요르단이었다. 부족적 삶과 구조로 보면 아라비아에 가깝고, 역사적으로는 많은 지역이 성서의 땅에 속해 있었으며, 과거 한때는 아라비아의 로마 속주에 속해 있기도 했던 복잡다단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8년 가을에는 앨런비 장군이 그곳을 점령한 뒤 파이살이 통치하는 무능한 다마스쿠스 정부에 일임해 두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곳은 방치돼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국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은 실책이었다. 프랑스가 다마스쿠스에서 파이살 세력을 몰아낸 뒤 파이살의 계승자를 자임하며 트란스요르단의 지배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666-8)


"1917~1918년 앨런비 장군의 점령에 이어 팔레스타인에는 군정이 수립되었다. 그와 더불어 평판 나쁘고 수행하기 힘든 짐을 떠맡은 것에 대한 영국정부의 고난도 함께 시작되었다. 벨푸어선언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의 조국을 창설하는 문제를 두고 이해 당사자들끼리 군정 기간 내내 실랑이를 벌인 탓이다." "클레이턴만 해도 시온주의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공동체를 전 세계 유대인들의 문화·정서적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확장하되, 유대인 국가가 아닌 다민족 국가로서의 영국 통치령으로 받아들였다. 팔레스타인의 다른 영국군 장교들은 심지어 그런 한정된 시온주의조차 인정하지 않고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아랍인들을 지지했다." "반면에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벨푸어선언이 영국정부의 확고한 정책이고 따라서 반드시 실행될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하며, 그렇게 하면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도 군말 없이 그 정책을 따를 것이고, 나아가 그것의 이점에도 눈뜨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672-3)


"로이드 조지는 바스라와 바그다드 그리고 모술에 대한 통치방법을 구상할 때, 그 세 곳이 단일 정치체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이라크(영국이 메소포타미아 지역들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한 아랍식 명칭)는 단일 정치체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분열되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쿠르디스탄('쿠르드족의 땅'이라는 뜻)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모술을 구태여 이라크에 포함시키려 한 것도, 그곳이 전략적으로 중요하고 유전을 보유하고 있을 개연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널드 윌슨은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갈등을 메소포타미아의 근본적 문제로 파악했다. 그에 따르면 200만 명에 달하는 메소포타미아의 시아파 무슬림이 소수파인 수니파 무슬림의 지배를 수용하지 않을 것은 뻔한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수니파 지배가 수반되지 않은 정부 형태 또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더구나 윌슨의 보고에 따르면 이라크 주민의 75퍼센트는 〈정부에 한 번도 복종해본 적이 없는〉 부족이었다."(679-80)


"페르시아의 스러져 가는 카자르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무력한 젊은 군주 아흐마드 샤는 목숨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형편인데다, 그렇지 않더라도 친영파 인물을 총리에 앉혀두는 조건으로 영국정부의 정례 보조금을 받는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커즌의 지휘 아래 테헤란의 영국 공사와 페르시아 총리 및 그의 두 동료 관리들 간에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협상에서 페르시아 대표들은 조인의 조건으로 영국에 13만 파운드를 요구하여 몰래 받아 챙긴 뒤 협정문에 서명하였다. 영국-페르시아 협정은 이런 협잡 끝에 1919년 8월 9일 조인되었다." "그러나 1921년 2월 21일 대령 레자 칸이 카자크 병력 3,000명을 이끌고 테헤란으로 진군, 권력을 탈취하고 스스로 육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지 고작 닷새밖에 안 된 2월 26일 테헤란의 신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우호조약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세 이슬람 국가들(터키,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반영 동맹국이 되었다."(689-96)


11부 러시아, 중동에 돌아오다


"소비에트가 페르시아 민족주의를 조장하고, 터키 민족주의를 후원하고, 이라크 봉기를 도와주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운동들 중 어느 것도 그들이 직접 고취하거나 지휘하지는 않았다. 중동 일대를 휩쓴 봉기가 볼셰비키 러시아가 연루된 광범위한 국제 음모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은 것은 영국의 망상이었다. 중동 사태는 일련의 어설픈 봉기들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중 많은 것들이 개별적 혹은 지역적 상황에 따라 자생적으로 발생했다. 따라서 그 운동들을 이용은 했을망정, 볼셰비키와 볼셰비키주의가 그 운동들에서 현저한 역할을 한 것은 없었다." "영국 관리들은 종전 뒤 중동에서 일어난 봉기들을 오래된 음모자들이 꾸민 사악한 음모로 규정했다. 영국 정보부는 볼셰비키와 국제 금융, 범아랍주의와 범튀르크주의, 이슬람과 러시아도 거대한 음모의 공범자들인 국제적 유대인 공동체들과 독일-프로이센이 이용한 재료로 보았다."(701-3)


"1919년 외무장관이 된 조지 커즌은 러시아와의 거대한 게임을 열렬히 옹호한 인물답게 러시아의 세력 팽창에 맞서 영국의 군사적 입지를 높여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러시아에서 독립한 남카프카스와 북부 페르시아에도 확고한 방어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보았다. 커즌과 외무부 사무차관 하딩은 중동의 어느 한 지역을 러시아에 빼앗기면 도미노효과로 나머지 지역도 잃게 될 것이고, 그러다 나중에는 인도마저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인도장관 에드윈 몬터규와 인도 부왕 쳄스퍼드 남작 3세는 볼셰비키 러시아의 위협이 군사적인 면보다는 정치적인 면에 치중될 것이고, 그러므로 러시아와의 경쟁도 이슬람권 아시아 일대의 민족주의 세력의 지지를 얻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영국은 중동의 민족주의 세력을 러시아로 돌아서게 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하면서, 그 상황에 영국군까지 주둔시키면 민족주의 세력은 영국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710-1)


12부 1922년의 타결


"1921년 2월 식민장관으로 취임했을 당시 처칠에게는 이미 적은 비용으로도 중동을 지배할 수 있는 광범위한 복안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난날 육군장관과 공군장관을 겸직했을 때도 그는 비행기와 장갑차로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여, 중동의 유지비를 줄이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 그가 쓴 글에) 방비가 잘된 공군 기지 몇 곳만 있으면 〈병력과 돈만 잡아먹는 기나긴 병참선 없이도〉 영국 공군은 〈보호령들을 충분히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록된 것도 그 점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처칠도 인정했듯이 외부의 침략에서 메소포타미아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의 '내적 안정 유지'를 유일한 목표로 삼은 전략이었다. 처칠이 중동에서의 영국 문제를 외부가 아닌 내부, 내적 분란에서 찾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시대에 뒤쳐진 제국주의적 관념을 내포하고 있던) 처칠의 전략은 토착민의 봉기 진압에 주안점을 두었던 만큼, 동의가 아닌 강압으로 아랍인을 통치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751-2)


# 카이로 회의의 네 가지 기본 안건(1921년 3월 21일)

1. 메소포타미아(이라크) 문제 : 파이살에게 왕위를 부여하며, 원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왕위를 제공한 것처럼 꾸민다.

2. 쿠르드족 지역 문제 : 이라크 편입 또는 쿠르디스탄 독립 안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여 현행 독립체 상태를 유지한다.

3. 트란스요르단 문제 : 파이살의 형 압둘라를 임시 총리로 임명하여 반프랑스 운동과 반시온주의 운동을 억제한다.

4. 이븐 사우드 문제 : 하심가 왕족(파이살, 압둘라)의 승승장구에 반발할 여지가 있으므로 연간 보조금을 인상해준다.


"파이살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위임통치령에 반대하고 이라크('뿌리가 튼튼한 나라'라는 뜻)의 정식 독립을 요구하여 영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라크와 영국의 관계를 국제연맹의 결정이 아닌, 양국 간의 조약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그에 대해 영국은 국제연맹의 승인 없이 이라크의 지위를 바꿀 법적 권한이 자신들에게는 없다고 맞섰다. 다만 위임통치령과 관련된 것이면 조약 협상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파이살은 위임통치령과 관련된 어떠한 문구도 조약에 포함시키기를 거부했다. 그런 식으로 협상은 런던에 분노와 좌절을 안겨주며 1년 넘게 지지부진 계속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라크와 이집트가 얻은 것은 제한된 자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국가의 지위는 갖게 되었다. 이라크와 이집트 모두 정치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했다. 영국에 의해 임명된 군주들도 그 점에서는 다를 바 없었다. 그들로서는 그것이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764-6)


"압둘라를 트란스요르단 지배자로 남겨둠으로써 파생되는 문제는 정작 다른 데 있었다. 처칠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것은, 그로 인해 영국이 사우드가와 하심가가 벌이는 아라비아의 극렬한 종교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국 식민성이 트란스요르단에 잠정적으로 취한 일련의 행정적 조치들로 그곳은 영속적인 정치적 실체로 굳어져 갔다. 아라비아 왕자가 외국 수행원들과 암만에 정착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이라는 복잡한 통치체제 속에 항구적 요소로 뿌리내린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본래 그곳의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분할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간 되풀이된 제안이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영토의 75퍼센트가 이미 그곳 사람도 아닌 아랍 왕조에 돌아가 버린 형국이었다. 훗날 입헌국가 요르단으로 독립하게 될 트란스요르단은 이렇게 팔레스타인에서 분리된 개별 정치체로 서서히 발전해갔다. 그리하여 지금은 요르단이 지난날 팔레스타인의 일부였다는 사실마저도 잊을 정도가 되었다."(772-3)


# 사우디아라비아 왕국과 요르단 하심 왕국의 대립


"1921년 아민 알 후세이니가 예루살렘의 대 무프티(최고의 법률적 권위자) 겸 팔레스타인 무슬림 지도자가 되었을 때 리치먼드는 그로 인해 시온주의가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타격을 받은 쪽은 오히려 아랍인들이었다. 대 무프티가 아랍인들을 피투성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감으로써, 시온주의에 가하려던 것보다 오히려 더 끔찍하고 파괴적인 피해를 그들에게 입힌 탓이었다. 아만 알 후세이니는 '모 아니면 도' 식의 모험가였다. 그러다 보니 아랍인-유대인 문제도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어느 한쪽이 쫓겨나거나 소멸되어야 끝장이 나는 극단으로 몰고 가 아랍 영토와 아랍인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렸다. 그런 극단적 행보를 이어가던 끝에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결국은 나치 독일에 가서 아돌프 히틀러와도 손을 잡았다. 그렇다고 그가 아랍권 팔레스타인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아민 알 후세이니와 지도자 자리를 놓고 겨룬 여러 명의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이다."(779-80)


"아랍 지도부와 시온주의 지도부는 벨푸어선언을 구체화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위임통치령 내용과 시온주의에 대한 영국의 공약이 대폭 축소된 영국정부의 백서도 거부한다는 전문을 런던 식민성에 보낸 아랍회의 집행위원회와 달리, 하임 바이츠만 박사는 일단 그것으로 유대인들 대다수가 팔레스타인에서 발전을 이루어 자치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기틀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영국정부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온주의 지도부는 시간이 가면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으로 처칠이 부여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아랍회의 집행위원회는 시간이 가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처칠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거부한 것이다. 1922년 7월 22일에는 국제연맹이, 영국이 요르단 강 서안에 (처칠이 고쳐 쓴) 벨푸어선언을 실행하도록 명시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을 최종 승인했다."(791-2)


"오스만제국의 아랍어권 지역은 튀르크의 지배를 더는 받지 않게 되었다. 동쪽에 메소포타미아에는 아라비아 왕자(파이살)가 지배하고 쿠르드족, 수니파 무슬림, 시아파 무슬림, 유대인 인구가 뒤섞인 신생국가 이라크가 세워졌다. 독립국의 외양은 갖췄으나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보호령이었다. 이라크에 접한 시리아와 크게 확대된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강 동안에는 앞으로 입헌국가 요르단으로 독립하게 될 신생 아랍국이 수립되고, 요르단 강 서안은 유대민족의 조국이 들어설 때까지 당분간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따라서 처칠이 원했던 오스만제국의 재건된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재편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식민장관 처칠이 설정했던 주요 목표들은 달성한 셈이었다. 그가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았던 비용절감을 관철시킨 것만 해도 그랬다. 경제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군사체계를 확립한 것도 처칠이 거둔 큰 성과였다."(795)


"중동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하나는 유럽 국가들이 재편을 맡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영국과 프랑스가 왕조, 국가, 정치시스템만 구축해 놓고 그것들이 지속될 수 있는 대책 마련에는 소홀한 탓이었다. 전시와 종전 뒤 영국과 연합국은 중동의 구질서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숴놓았다. 아랍어권 지역에서의 오스만 체제를 회복 불가능하게 파괴시킨 뒤 그 자리에 나라들을 세우고, 지배자들을 임명하며, 국경선을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국가시스템 비슷한 것을 도입했으나, 그것에 반발하는 현지인들의 저항까지 죄다 물리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중동 분규가 여타 지역의 분규와 비교하여 특별했던 것은, 1922년 초 영국과 프랑스가 합의한 내용에 따라 그 즉시 모습을 드러냈거나 혹은 종국에는 모습을 드러내게 될 나라들의 규모와 경계는 물론이고 그 나라들의 존립권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더욱 본질적인 문제가 내포돼 있다는 점이었다."(863-4)


"유럽의 정치 가설은 그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이론이 되었다. 그러나 최소한 그중 하나, 세속적 문민정부에 대한 현대적 믿음만은, 정치를 포함해 삶의 모든 양상을 지배하는 이슬람 율법을 1,000년 넘게 신봉해온 사람들이 사는 중동에서는 이질적 존재였다." "종교적 이유로든 그밖의 또 다른 이유로든, 1922년의 타결 혹은 그것의 토대가 된 근본적 가설에 맞서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중동 정치의 특징이 된 것도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이해가 부족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중동에는 합법성에 대한 인식─게임의 규칙이 없다는 것─이 없고,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믿음도 없으며, 경계지 내에서는 어느 곳이든 나라로 부르면 나라가 되고, 지배자를 칭하면 지배자가 되는 곳이었다. 그 점에서 연합국이 제아무리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오스만제국의 계승자들을 들어앉혔다고 주장한다 한들, 중동에는 아직 술탄의 진정한 계승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8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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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회랑 : 국가, 사회 그리고 자유의 운명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장경덕 옮김 / 시공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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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역사는 어떻게 끝나는가?


"지배는 단지 비인간적인 힘이나 폭력의 위협에서만 비롯되지는 않는다. 불평등한 권력 관계는 어떤 경우든 일종의 지배관계를 만들어낸다. 위협하거나 관습과 같은 다른 사회적 수단으로 강제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다."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로크의 개념을 가다듬어서 '자유'를 지배가 없는 상태로 정의한다." "자유는 단지 자신의 행동을 마음대로 선택한다는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런 선택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 혹은 조직이 당신을 협박하거나 뭔가를 강제할 힘을 갖고 있을 때, 혹은 당신을 복종시키려고 사회적 관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선택을 실행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실행 능력은 실제 강제력을 행사하거나 그렇게 하겠다고 위협하는 방식으로 분쟁이 해결될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굳어진 관습에 따라 강요된 불평등한 권력 관계로 분쟁이 해결될 때도 당신에게는 선택을 실행할 능력이 없다."(42-3)


"홉스는 폭력은 단지 그 위협만으로도 파괴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누군가가 어두워진 뒤 집에 머무르며 이동과 교류를 자제함으로써 실제 폭력을 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폭력의 위협은 유해하다는 말이다. 홉스에 따르면 전쟁 상태의 본질은 '실제 투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이 벌어질 수 있는 성향, 언제든 투쟁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성향에 있다.' 그러므로 전쟁 상태의 가능성은 사람들이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홉스는 또한 인간이 기본적인 편의와 경제적 기회를 원한다는 점을 알았다. 그는 '인간을 평화로 향하게 하는 정념은 죽음에 대한 공포, 편안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한 욕구, 그런 것들을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라고 썼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전쟁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당연히 무정부 상태에서 벗어날 방법을 모색하고, '자신에 대한 제약'을 부과해 '비참한 전쟁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날' 방법을 찾을 것이다."(46-7)


"전쟁 상태를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하다는 홉스의 주장은 옳다. 일단 국가가 형성되고, 폭력 수단을 독점하며 법을 집행하기 시작하면 온갖 살인이 줄어들 것이라는 그의 예상도 정확하다. 리바이어던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통제했다. 오늘날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에서 인구 10만 명당 살인 사망자는 한 명이 될까 말까다.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자유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하지만 홉스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측면도 많다. 첫째로 무국가 사회도 폭력을 통제하고 분쟁을 억누르는 데 상당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우리는 무국가 사회가 그다지 많은 자유를 실현하지 않는다는 점도 살펴볼 것이다. 둘째로 홉스는 국가가 실현할 자유에 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는 점이다. 확실히 홉스는, 그리고 국제사회도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에서 틀렸다. 힘이 곧 정의는 아니며, 권력은 확실히 자유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국가의 속박 아래에서의 삶 역시 끔찍하고 잔인하고 짧을 수 있다."(50)


"(무국가 사회에서) 규범은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떤 식의 행동을 피하고 억제할지, 언제 개인과 가족을 추방하고 다른 이들의 지원을 끊을지 결정했다. 규범은 또한 사람들이 결속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조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그들이 다른 공동체 그리고 같은 공동체 내에서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상대로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규범은 독재적 리바이어던의 후원 아래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리바이어던이 없을 때 규범은 사회가 전쟁을 피할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자유와 관련된 문제는 다양한 측면이 있다. 행동을 조정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정의에 대한 공유된 인식을 형성하도록 진화된 이들 규범이 동시에 일종의 우리cage도 만들어낸다. 사람들의 역량을 줄인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인 또 다른 지배를 강요하는 것이다. 오로지 규범에만 의존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더 단단하고 숨 막히는 제약일 수 있다."(62-3)


제2장 레드 퀸


"한편으로 국가를 통제하고 일반 시민을 지배하는 엘리트층의 힘을 제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역량을 확대하는 솔론의 (개혁) 방식은 고대 문명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다. 그것은 족쇄 찬 리바이어던의 본질이다. 리바이어던은 사회가 기꺼이 협력하려 할 때는 더 큰 역량을 갖추고 훨씬 더 강력해질 수 있지만, 협력이 이뤄지려면 사람들이 바다 괴물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신뢰해야 한다. 솔론은 그 신뢰를 구축했다. 그러나 신뢰와 협력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유 그리고 궁극적으로 국가의 역량은 국가와 사회 사이의 힘의 균형에 달려 있다. 국가와 엘리트층이 지나치게 강력해지면 우리는 독재적 리바이어던을 부르게 된다. 그들이 뒤처지면 우리는 부재의 리바이어던과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둘이 함께 달리면서 어느 쪽도 우위를 차지하지 않는 국가와 사회가 필요하다. 이는 루이스 캐럴이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묘사한 레드 퀸Red Queen 효과와 다르지 않다."(95-6)


"아테네는 세계 최초의 족쇄 찬 리바이어던 중 하나를 만들었다." "국가는 사회를 지배할 수 없었지만 사회도 국가를 지배할 수 없었고, 어느 한쪽의 진보는 다른 쪽의 저항에 부딪히고 혁신을 자극했으며, 사회의 족쇄는 국가의 활동 범위와 역량을 새로운 영역으로 확대할 수 있게 해줬다. 이 과정에서 사회는 또한 국가가 민중의 통제 아래 남아 있으면서 역량을 더욱 깊이 발전시킬 수 있도록 협력했다. 이 모든 것에서 레드 퀸이 규범의 우리를 무너뜨리는 방식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리바이어던에 족쇄를 채우려면 사회는 협력하고, 집단을 조직하고, 정치에 계속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일은 사회의 내부가 볼모와 주인으로 갈라지고, 씨족, 부족, 혹은 친족집단들로 나뉘면 일어나기 힘들다. 솔론과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들은 이처럼 대립적인 정체성을 점진적으로 제거했고 더 광범위한 협력의 축을 만들기 위한 공간을 조성했다. 이는 우리가 족쇄 찬 리바이어던의 창조 과정에서 반복해서 확인하게 될 특성이다."(103)


"우선 국가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멈추고, 사회의 분쟁 해결을 돕고, 사람들을 지배로부터 보호하고,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려면 미국의 국가건설자들처럼 강력한 국가를 요구하는 일단의 개인이나 사회집단이 있어야 한다." "(미 건국 과정에서 그 역할을 맡은) 연방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국가건설 계획이 리바이어던에게 '의지를 일임'해야 할 사람들의 마음에 들도록 권리장전과, 자기들의 권력에 대한 다른 견제장치를 도입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이 모든 권리장전과 견제장치를 간절히 원한 건 아니었다. 사실 해밀턴은 이런 〈민주주의의 과잉〉을 헐뜯었으며, 대통령과 상원의원의 종신 재직을 제안하기도 했다." "족쇄 찬 리바이어던의 두 번째 축인 사회적 결집은 레드퀸 효과의 핵심이기 때문에 훨씬 더 중요하다. (정치 참여를 뜻하는) 사회적 결집은 엘리트층에 가하는 전반적인 압력을 포함한 제도화되지 않은 형태와 선거나 회의체를 통하는 제도화된 형태를 모두 취한다."(108-11)


"국가가 이름뿐인 부재의 리바이어던처럼 행동하는 대표적인 현대 국가가 레바논이다. 부재의 리바이어던은 사회가 국가를 믿지 못하고, 사회가 국가가 (인구 총조사 등으로 수집한 데이터에 기반한) 판독 능력을 악용할 것을 걱정할 때 생겨난다." "레바논은 1932년 단 한 차례 실시된 인구 총조사에서 나온 인구 비중─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51퍼센트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시아파와 수니파 그리고 드루즈파 무슬림으로 구성된다─에 따라 집단 간 권력을 배분했다." "이 협약은 결국 믿을 수 없을 만큼 허약한 국가를 낳았다. 부재하는 리바이어던 아래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나라에서 권력은 국가가 아니라 개별적인 지역사회에 있다. 이 국가는 보건이나 전력 같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지만, 지역사회는 제공한다. 국가는 폭력을 통제하거나 법을 집행하지도 않는다. 시아파 무슬림 단체인 헤즈볼라는 자체적으로 사설 군대를 보유하고 있고, 베카밸리의 여러 무장 세력들도 그렇다."(125)


"레바논에서 국가는 국민이 올바른 공학적 설계를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허약한 것이 아니다. 사실 상당히 현대적인 대학체제를 갖춘 이 나라 사람들은 중동 지역에서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편이다. 그들이 역량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공동체들이 미끄러운 비탈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국가가 허약하게 설계된 것이다. 의원들은 자기들이 일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는데, 의사당에 왜 나타나겠는가? 누가 선출될지 정말로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의원들은 선거를 늦추기로 의결할 수 있다." "누구도 의회에 권력을 주고 싶어 하지 않고, 사람들은 의회를 불신하며, 사회적 행동주의 또한 싫어한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도무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는 국가가 다른 이들에게 포착될까 두려워하며 판독 불능 상태로 남아있기를 바라며, 그 가능성을 확실히 제거하려고 리바이어던이 계속 졸고 있도록 한다."(129-30)


제3장 권력의지


"국가건설자가 되려는 이들이 어떤 '경쟁우위edge', 즉 앞길의 걸림돌을 넘을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뭔가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무함마드의 경쟁우위는 종교에서 나왔다. 그에게는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는 데 정당한 권위를 부여하고 추종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는 종교적 이념이 있었으며, 새로운 공동체를 창설하기 위해 그 영향력을 이용했다." "또 하나의 강력한 경쟁우위는 조직적인 요소로, 지도자가 더 강한 통솔력이나 군사력을 발휘하기 위해 새로운 연합이나 더 효과적인 조직을 형성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또 다른 가능성은 기술적인 경쟁우위다. 적들이 활용할 수 없는 총이라는 군사 기술에 크게 의존해 국가건설 계획을 실현한 하와이의 카메하메하 왕의 성공이 좋은 예다." "초기국가 형성의 마지막 특징은 (친족 공동체를 종교 공동체로 일신하려 했던) 무함마드의  부상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정치적 위계가 출현하면서 사회의 재조직화가 이뤄진다는 점이다."(156-7)


"무국가 사회는 경쟁우위를 가진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권력의지에 압도되고 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지도자들은 족쇄 찬 리바이어던을 창설하거나, 자유를 촉진하거나, 엘리트층과 시민들 간 권력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자신의 권력과 지배를 확대하려는 동기로 움직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테네의 솔론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는 부유한 가문과 엘리트층의 지나친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권력을 잡았고, 따라서 리바이어던에 채울 족쇄를 만드는 건 그의 임무였다. 다른 국가건설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솔론 시대의 아테네와 다른 사회들을 구분 짓는 훨씬 더 근본적인 차이는 아테네 사회가 이미 정치 권력의 배분과 분쟁 해결을 규제할 어떤 공식적인 제도를 개발했었다는 점이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그런 제도는 솔론과 그 뒤를 이은 클레이스테네스를 비롯한 다른 지도자들이 민중의 정치 참여를 늘리고 사회와 정치의 위계를 억제하는 기존의 규범을 강화하도록 토대를 제공했다."(178-9)


"티브족이나 메디나, 메카, 줄루족 혹은 카메카메하 시대의 하와이에는 그런 제도들이 전혀 없었다. 그 대신 이런 사회들은 족쇄 찬 리바이어던에게 불리한 방법을 썼다. 실력자가 되려는 자들이 권좌에 오르는 것을 막으려고 이 사회들이 이용한 방법은 분쟁을 규제하고 정치적 위계의 출현을 저지하는, 주술과 같은 규범이나 친족 기반 관계 혹은 카푸 체계의 복합적인 수단들이었다. 그러나 일단 권력의지가 규범들을 무력화해버리고 나면 새롭게 부상한 국가 권력에 효과적인 대항력으로 남아 있는 것들은 많지 않았다. 국가건설자들은 또한 자신들의 의제를 추구하기 위해 재빨리 규범들을 바꿔버렸다." "이런 상황은 국가와 사회가 둘 다 허약한 바닥 부근에 해당하며, 이때 일단 진행되기 시작한 국가건설 과정을 억제할 수 있는 사회의 규범과 제도가 없으면 회랑으로 진입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권력의지에 직면한 사회는 독재적 리바이어던으로 가는 것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179-80)


제4장 회랑 밖의 경제


"독재적 리바이어던은 안전과 예측 가능성, 질서를 만들어낼 터이므로 더 나은 경제적 유인을 낳으리라는 홉스의 생각 역시 부분적으로만 맞다." "(무함마드 사후에 등장한) 우마이야와 압바시야 왕조들은 제국의 지방을 다스리고, 세금을 걷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지역 엘리트층에 의존했다. 엘리트층의 지지를 받기 위해 그들은 '징세 도급tax farming' 제도를 도입해 일정한 금액을 받고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팔았다. 일단 다마스쿠스 정권이 준 징세권과 그다음에 권력을 잡은 압바시야 왕조의 바그다드 정권이 준 징세권을 갖게 되면 엘리트층은 지역사회에 어떤 세금이든 맘대로 부과할 백지수표를 쥐는 셈이었다. 이로 인해 징벌적으로 높은 세율의 과세와 엘리트층의 토지 축적이 함께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엘리트층은 그들이 부과한 세금을 낼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서 토지를 넘겨받았기 때문이다. 제국의 이런 정치체제는 결국 자멸을 불러왔고, 분열된 제국은 945년 마침내 붕괴했다."(193-7)


"무함마드가 메디나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재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집단의 인정을 받으면 지도자가 되며, 〈지도자의 지위는 그가 우두머리라는 뜻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복종하지만 그가 자신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권력을 갖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븐 할둔은 일단 그런 지도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곧바로 사회를 미끄러운 비탈로 끌고 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이해했다." "할둔의 표현에 따르면, 결국 아랍의 집단의식이 사라지고, 인종이 소멸하고, 아랍주의Arabism가 완전히 파괴되면서 칼리프 국가는 정체성을 잃었다. 정부 형태는 순전히 왕권으로 다스리는 단순한 형태였다." "여기서 할둔은 새로운 왕조의 창건이 지니는 경제적인 함의를 암시한다. 왕조의 초기에 집단의식의 힘과 '종교의 억제력'이 작동할 때는 경제적 번영의 잠재력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왕권'이 스스로 공고해지고 경제정책은 '백성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파괴적'인 것으로 바뀌었다."(197-9)


"(전쟁 상태나 규범의 우리를 탈피한) 독재적 리바이어던은 사회를 조직하고, 법체계를 구축하고, 직접 경제성장을 자극하기 위해 투자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독재적 성장'의 요체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정치적 권력을 손에 넣게 될수록 경제적 혜택의 독점은 더 심해지고 국가가 보호해야 할 재산권을 침해하려는 유혹은 더 커진다." "독재적 성장이 제한적인 수준에 그치리라고 보는 두 번째 이유 역시 근본적이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려면 안전한 재산권과 교역, 투자뿐만 아니라 혁신과 끊임없는 생산성 향상이 필요하며 후자가 더 중요하다. 이런 것들은 독재적 리바이어던이 매섭게 지켜보는 가운데서는 이루기가 훨씬 더 어렵다. 혁신에는 창조성이 필요하며, 창조성에는 개인들이 두려움 없이 행동하고, 실험하고, 설사 다른 이들이 좋아하지 않더라도 자기 뜻에 따라 스스로 진로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다. 이런 자유는 독재체제 아래서는 지속하기 어렵다."(206-7)


"무국가 상태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끝없는 투쟁이 벌어지고 형편없는 유인체계 탓에 '열심히 일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사회가 규범과 관습을 내세워 분쟁을 단속하고 폭력을 억제하면 경제는 규범의 우리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제는 규범에 제약을 받으며, 가난을 넘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온통 뒤틀린 경제적 유인으로 가득 차 있다. 홉스는 독재체제가 이런 결과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재적 성장은 본래 취약하고 제한적이다. 독재적 리바이어던은 사회에서 수입을 더 많이 짜내고, 값진 자원을 더 많이 독점하며, 제멋대로 행동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다. 또한 국가 권력은 독재자 자리를 노리는 도전을 피하거나 무력화하는 엄청나게 비효율적인 체제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더해 독재적 성장은 자유롭게 기능하며, 광범위한 기회와 경제활동의 유인을 만들어내고, 투자와 실험 그리고 혁신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지 않는다."(223-4)


제5장 선정의 알레고리


"코무네 자치정부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려면 공화주의적인 시에나가 9인위원회 시대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성인 남성 시민이 모두 참여하는 민회였다. 민회는 로렌체티의 시대에 위축된 상태였지만 여전히 시에나의 정치체제 내에 있었고, 새로운 행정장관인 포데스타가 취임할 때처럼 특별한 경우에 모였다. 14세기 중반에 민회의 역할은 종을 울려 소집했던 '타종 평의회'로 넘어갔다. 평의회는 남성 시민 300명으로 구성됐는데, 시에나의 테르초라는 행정구역 세 곳에서 각각 100명씩 1년 임기로 선출했다. 이 기구의 선거인들은 9인위원회의 콘술들과 포데스타, 재정관과 '조달관'으로 불리는 네 명의 주요 재정 담당 관리들을 포함한 국가 행정 관료, 국가가 임명한 재판관들이었다. 정부의 주요 기능은 포데스타와 9인위원회가 수행했고, 조직화한 특정 이해관계자들, 특히 유력 상인조합과 오래된 귀족 가문들을 대변하는 다른 소수의 집정관 집단들이 있었다."(230)


"이탈리아의 여러 코무네는 중세 상업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코무네의 정부체제는 5세기 말 서로마제국 붕괴에 따른 침체를 겪은 후 교역과 경제활동이 되살아날 수 있도록 해주는 법과 경제 제도를 만들어냈다. 이탈리아는 이 번영의 혜택을 받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남쪽에는 비잔틴제국, 동쪽에는 새로운 무슬림 국가들이 있어서 동방의 향신료와 수많은 사치품이 공급됐다. 북쪽에는 잉글랜드와 플랑드르가 있었다. 잉글랜드는 최고급 양모를, 플랑드르는 가장 인기 있는 직물을 생산했다. 거대한 교역이 이뤄질 무대가 마련됐다. 양모와 사치스러운 옷감, 향신료가 주인공이었다. 노르만 왕들이 지배한 12세기 중반까지 남부 이탈리아와 스페인도 좋은 위치에 있었지만 자치정부를 갖지는 못했다. 그래서 어느 쪽도 자치적인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같은 방식으로 교역을 끌어오지 못했다. 이는 코무네가 어떻게 교역에 필요한 제도 발전을 촉진했는지와 관련이 있다."(242)


"누구든 혁신이나 가치 있는 투자를 위한 좋은 구상이 있다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기회는 사회 안에서 널리, 공평하게 배분돼야 한다. 우리가 코무네의 사회적 이동성에서 본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이 기회와 유인들은 또한 공정한 분쟁 해결과 법 집행체계로 뒷받침해야 한다. 프레스코화 '선정의 알레고리'에서 강조한 정의를 보라. 그러자면 다시 국가와 정치적 엘리트층이 법 집행에 간섭하면서 자기네에게 유리하게 몰아갈 만큼 충분히 강력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프레스코화의 밧줄을 보라. 여기에서 우리는 경제적 번영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족쇄 찬 리바이어던이 할 결정적인 역할을 볼 수 있다. 리바이어던에 족쇄를 채우지 않으면 어떻게 법이 국가와 정치적으로 힘 있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적용되도록 할 수 있겠는가? 때때로 '법의 지배'라고 부르는 것 역시 리바이어던의 발목에 채운 족쇄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들 족쇄는 헌법과 서약만이 아니라 사회가 쥐고 있는 밧줄이 있어야만 만들 수있다."(254-5)


"족쇄 찬 리바이어던은 단지 포용적 경제제도에 필요한 포용적 정치제도를 정점으로 끌어올린다고 실현되지 않는다. 족쇄 찬 리바이어던을 실현하는 것은 또한 레드 퀸 효과, 즉 사회가 국가 및 정치적 엘리트와 겨루고 그들을 제한하고 견제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그에 관한 논의는 사회가 조직화하고, 정치에 참여하고, 필요하면 국가와 엘리트에 반항하도록 돕는 규범들의 핵심적인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족쇄만이 아니다. 법을 집행하고, 분쟁을 해결하고,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며, 경제적 기회와 유인을 창출할 경제제도를 뒷받침하는 리바이어던의 능력 역시 중요하다. 따라서 국가를 통제하는 사회의 능력과 국가의 역량이 맞수를 이루는 한, 국가의 역량도 똑같이 중요하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경제적 유인을 약화시키는 여러 규범과 관습의 우리를 완화하면) 심지어 규범의 다른 측면이 리바이어던을 계속 견제하더라도 역량 있는 국가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256-7)


제6장 유럽의 가위


"유럽의 발흥을 이끌어낸 원동력은 1500년 전 중앙에 집중된 권력과 (여성은 제외한) 보통 사람의 힘 사이에 뜻밖의 균형이 이뤄진 일련의 독특한 역사적 사건들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이 균형이 유럽을 회랑 안으로 밀어 넣어 국가와 사회가 끊임없이 경쟁하도록 하는 레드 퀸 효과를 작동시켰다. 균형은 두 가지 요인이 어우러져 발생했다. 첫째는, 5세기 말에 의회와 합의에 따르는 의사결정의 규범을 중심에 두고 민주적으로 조직된 부족사회들이 유럽을 장악한 것이다. 둘째는, 로마제국과 기독교 교회로부터 흡수한 국가 기관들과 정치적 위계질서의 핵심 요소들을 물려받은 것이다. 로마의 국가와 교회는 5세기 말 서로마제국이 무너진 다음에도 계속해서 중앙집권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요소를 가위의 양날로 생각할 수 있다. 두 날을 쓸 수 있게 사북을 박으면 유럽의 가위는 족쇄 찬 리바이어던이 부상하면서 경제적 유인과 기회를 창출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267-8)


"유럽이 이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었던 연유에 대해 감을 잡기 위해 882년 프랑스 랭스의 대주교 힝크마르가 기록한 의회에 대한 묘사를 보자." "힝크마르는 샤를마뉴 시대의 인물로 당시 국가 통치 방식을 직접 목격한 아달하르두스를 인용해 그동안 이 왕국이 어떻게 통치돼왔는지 이야기하면서 (서프랑크 왕으로 즉위하는) 카를로만에게 왕국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쳤다. 그것은 놀랍게도 왕이 아무런 제약 없이 자기가 바라는 대로 실행하는 통치가 아니라 민중이 참여하는 의회에 바탕을 둔 통치였다." "그것은 게르만 부족 의회 정치의 요체였다. 샤를마뉴와 그 후의 카를로만은 이 의회들의 결정에 따라 행동하고, (남성)사회의 다양한 부문에 걸쳐 바람을 들으며, 중요한 결정에 대해 일정 수준의 총의를 확보해야 했다. 의회 참석자의 수는 분명 제한적이었지만, 샤를마뉴는 결정 사항을 더 낮은 수준의 회의에 전달할 사자들을 배치해 왕국 전체가 알도록 했다 이런 참여가 유럽의 가위를 구성하는 첫 번째 날이다."(268-71)


"(가위의 두 번째 날인) 로마의 관료조직은 요안네스가 기술한 것처럼 일련의 복잡한 '관습과 형식과 언어'에 따라 운영됐고, 구성원들은 군대에서 유래한 제복 형태의 '독특한 예복'을 입었다. 요안네스는 관료집단이 '보통 사람들'과는 분리된 정체성과 소속감을 지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가 설명한 것은 정교한 법체계 안에서 명료한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광범위한 관료조직이다. 물론 관료조직은 개인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정확히 규칙이 정한 대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요안네스 자신도 전적으로 실력을 바탕으로 일자리를 얻은 것이 아니라 조티쿠스의 도움을 받았다. 더욱이 고위직 가운데 다수가 엘리트층, 원로원 계급 사람들의 몫으로 정해져 있었고, 어느 정도 부패도 분명히 있었다. 이런 결함에도 로마인들은 정교한 구조와 지역 조직을 갖춘 관료제 국가를 수립했다. 이런 세속 기관은 프랑크족이 로마와 교류하게 된 시기에 이미 정치 제도와 통합돼 있던 교회의 위계 구조에 상응하는 것이었다."(276-8)


"마그나 카르타는 얼마나 독특한가? 답은 전혀 독특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그나 카르타가 제정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럽 전역에 걸쳐 '환희의 입성'과 비슷한 문서를 찾아볼 수 있다. 1205년 아라곤의 왕 페드로 1세가 카탈루냐에 준 헌장, 1222년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가 준 황금헌장, 1220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준 헌장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헌장들은 모두 같은 문제들에 초점을 맞췄으며, 특히 통치자는 세금을 물리려면 시민들과 협의하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보장했다. '대헌장'들 뿐만 아니라 의회도 유럽 전역에 걸쳐 생겨났다. 의회의 확산은 스페인에서 시작됐는데, 1188년 레온 의회가 생겼고 그 다음에 각자 따로 의회를 가진 아라곤과 카탈루냐, 발렌시아가 합쳐 만든 아라곤연합왕국으로 퍼져나갔다. 팔러먼트 같은 의회들은 이베리아의 나바라왕국과 포르투갈에서도 발전했다. 프랑스에서는 비록 전국적인 의회인 삼부회의 발전은 느렸지만, 각 지역의 신분제 의회들은 만개했다."(312-3)


"유럽의 가위를 이루는 두 날, 즉 로마제국의 국가기관들 그리고 게르만족의 참여적인 규범과 제도들이 뜻밖에 힘의 균형을 만들어낸 것 말고는 초기 유럽 역사에서 족쇄 찬 리바이어던의 부상을 예정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국가기관과 참여적인 제도 둘 중 어느 쪽도 그 자체로 족쇄 찬 리바이어던을 낳기에는 부족했다. 비잔티움처럼 첫 번째 날만 있을 때는 전형적인 독재적 리바이어던이 나타난다. 아이슬란드처럼 두 번째 날만 있으면 정치 발전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국가건설도 없다. 상황과 시대가 다르고, 결정적인 시점에 다른 우발적 사건들이 벌어지고, 가위의 두 날을 합치려고 시도했던 클로비스와 샤를마뉴보다 미숙한 다른 정치적 주역들이 있었다면 두 날을 합치더라도 실제 진행된 역사와 같은 방식으로 서로 균형을 이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로마제국이 무너진 후 혼란스러운 5~6세기가 지나는 동안 가위의 두 날은 불안정하나마 균형을 만들어냈고, 유럽은 좁은 회랑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337)


제7장 천명


"한나라 이후 중국 정부는 세 가지 기본 원리에 동의했다. 첫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황제의 군주적 지배 아래 백성들에게 조정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나 발언권을 주지 않아야 한다. 황제는 언제나 법 위에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재능 있는 사람들을 관리로 두고 그들이 국가를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상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황제가 바라는 대로 사회를 지배하는 데 필요했다. 이것은 유가 철학에 뿌리를 두었으며, 유가 사상은 '배움에 뛰어난 이는 공무에 헌신해야 한다'며 '덕이 있고 재능이 있는 이들을 고취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핵심 원리는 황제가 백성의 복리를 염려하고 도덕적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황제는 시민들의 경제적 번영을 촉진해야 하며, 후기 왕조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백성들 가운데 부를 쌓아야' 한다는 가르침도 포함된다. 이 세 가지 원리는 일종의 사회계약이 돼 국가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 조건들을 어기면 백성이 들고 일어날 수 있었다."(353)


"독재의 결정적인 특징은 사회가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단을 주지 않고 사회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진나라가 부상하면서 민중이 정부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줄 모든 요소를 없애버린 중국이 바로 그러했다. 참여를 위한 길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중국에서 사회가 리바이어던을 통제하고 만들어갈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분명 반란은 사회가 활용할 수 있는 대안으로, 황제들에게 커다란 불안감을 안겼다. 그러나 반란의 위협이 늘상 도사리는 건 아니었고 정치적 의사결정에 체계적인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 중국 정부에 요구사항들을 분명히 밝히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자율적인 사회조직들은 어떨까?" "18세기 말과 19세기에 한커우漢口는 상인과 장인들의 활기로 북적이는 대도시였다." "그러나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 된다. 이 사회에는 자율성도, 지역적 연대도 거의 없었다." "각기 다른 상인집단들은 서로 협력하지 않았고 공공서비스와 조직에 투자하는 일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다."(368-70)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사업인 소금 사업은 국가가 독점했고 상인들의 세력과 부는 국가가 인가해준 결과였다." "그러므로 중국의 상황을 더 자세히 뜯어보면, 심지어 가장 자율적이고 적극적인 사회가 출현하리라고 예상되는 곳에서조차 국가에 복종하고 의존하는 완전히 다른 사회를 발견하게 된다. 의존적이든 아니든 간에 중국 사회는, 국가가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해 규범의 우리를 완화하고 사회적, 경제적 자유의 여지를 확대한 덕분에 그 과정에서 혜택을 봤다. 우리는 다른 곳의 국가건설 과정에서는 무함마드와 샤카의 경우처럼 국가건설자들이 자신들을 가로막는 숨막힐 듯한 규범들과 친족 관계에 바탕을 둔 연합을 무너뜨렸고, 그러면서 규범의 우리를 어느 정도 완화하는 모습을 봤다. 하지만 중국의 상황에서는 국가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친족집단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친족 관계들은 사실상 국가가 사회를 관리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장려하고 지원했다."(370-2)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한 후 상앙의 법가 사상과 공자의 도덕적 가르침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대체됐다. 과거와의 단절이다. 하지만 과거와의 연속성은 차이만큼이나 뚜렷했다. 하늘의 명령은 카를 마르크스의 명령으로 대체될 것이었다. 진나라 이후 중국이라는 국가의 결정적 특색은 사회에 대한 국가의 압도적인 지배력에 있었다. 그 점은 바뀌지 않았다." "독재의 본질이 제국 시대와 공산주의 시대의 연속성을 만들어냈다. 독재의 본질은 사회가 조직화하지 못하고 국가의 권력 구조 바깥에서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칠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공산당이 정치 참여의 유일한 매개가 되기를 바랐는데, 이는 사실상 국가와 정치 엘리트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시민들을 통제한다는 의미였다. 이 점은 문화혁명 당시 때때로 나왔던, 상향식 비판을 허용하라는 요구가 폭력적으로 진압되었을 때 고통스러울 만큼 분명해졌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사회를 위한 목소리는 없었다."(384-5)


"현대화가 자동으로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독재적인 노선에 따라 조직된 경제에서도 활기찬 혁신이 확실히 이뤄지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중국 공산당이 만들어낸 그 모형은 자유 없이도 혁신을 일궈낼 수 있을까?" "초기 소련의 성공에서 볼 수 있듯이, 독재적 성장이라고 해서 혁신과 기술적 진보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이 경우들에서 성공은 좁은 영역에서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well-posed problem를 풀고 정부의 수요에 대응함으로써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분야에서 미래 성장에 필수적인, 다양하고 지속적인 혁신은 기존의 문제들을 푸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들을 생각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자면 자율성과 실험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엄청난 양의 자원을 제공할 수 있고, 개인들에게 열심히 일하라고 명령할 수는 있지만, 그들에게 창의적인 사람이 되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회랑 밖에 있는 어떤 사회도 그 일을 해내지 못했다."(391-2)


제8장 파괴된 레드 퀸


"인도 국가와 사회의 진화에서 규범의 우리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테네와 유럽에서는 레드 퀸이 국가와 사회 양 측의 발전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규범의 우리를 완화하기 시작했지만, 그동안 인도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인도에서는 카스트제도가 강화되고 그 단단한 계급구조에 국가가 부차적인 존재로 밀려나면서 사회는 파편화됐고 내부적으로 대립했다. 사회는 하나로 통일된 실체였던 적이 없었고, 사회 내부의 갈등과 그에 따른 불평등이 이 나라 정치에서 주된 문제가 됐다." "사회는 조직화하거나 국가를 감시할 수 없었다 비록 이 반도에도 유럽처럼 민중이 정부에 참여한 오랜 역사가 있었다 해도 사회의 정체성을 바꿔나가는 레드 퀸의 역동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정치 참여가 카스트를 바탕으로 이뤄지고, 국가 자체가 카스트제도를 지지하고 카스트제도에 의해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카스트 기반의 정체성은 계속해서 재확인됐다. 이는 자유에 끔찍한 영향을 미쳤다."(403)


"카스트는 사회에 뿌리 깊은 위계 구조와 불평등을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정치의 본질을 왜곡했다. 사회는 파편화된 채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였고 국가기관을 감시하는 데 실패했으며, 국가가 역량을 더 확대하도록 추동하는 능력도 몹시 부족했다. 최상위층의 브라만 계급은 나머지 계급을 지배하느라 너무나 바빴고, 나머지 계급들은 사회의 위계 구조 속 자신의 위치에 얽매여 있었다. 모두가 규범의 틀에 너무 철저히 갇혀 있었다. 역사적으로 인도의 국가는 적어도 카스트제도를 실행하고 재확인하면서 언제나 규범의 우리를 강화하는 것을 의무로 여긴 것으로 보인다. 독립 후 인도에 민주주의가 찾아왔을 때 카스트제도가 정치적 경쟁의 전선을 규정하면서 민주적 경쟁의 활력을 약화시켰다." "사회는 기존의 위계 구조를 뛰어넘어 조직화하고 정치인들이 책임을 지도록 하며 국가가 민중에 봉사하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카스트의 분열로 불가능해졌다. 레드 퀸은 망가진 채로 남았다."(441)


제9장 세부적인 것들 안의 악마


"찰스 틸리는 17세기의 '군사혁명'으로 전쟁 위협이 증가한 것이 현대 국가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비록 스위스에서는 군사혁명이 앞서 국가건설이 이뤄졌지만, 이 나라는 틸리의 주장을 완벽하게 뒷받침하는 사례다. 스위스는 역사적으로 샤를마뉴의 카롤링거제국 동쪽 지역을 계승하는 국가인 신성로마제국에 속했다." "스위스 지역에 대한 신성로마제국의 통제가 불완전했으므로 스위스 정체를 구성하는 각 칸톤(canton, 자치 주)은 자체적인 의회제도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칸톤은 시골과 도시가 뒤섞여 있었는데 게르만족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제국이 약해지면서 다시 부상한 의회 정치의 큰 흐름을 받아들이게 됐다. 스위스연방은 1291년 우리Uri, 슈비츠 운터발덴 칸톤이 루체른 호수 위쪽의 뤼틀리 평원에서 분데스브리프(Bundesbrief, 연방헌장)에 선서하고 서명함으로써 출범했다. 헌장은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고, 특히 공공질서와 무법상태에 관심을 쏟았다."(448-9)


"스위스의 사례에서는 전쟁의 위협, 특히 신성로마제국 군주의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속적인 위협이 중요한 유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요인이 없었다면 개별적으로 행동했을 칸톤과 도시들이 큰 연방으로 단결하고, 권력을 중앙에 집중하고, 국가 역량을 키웠다. 중앙집권화가 이뤄지기 전에 스위스 칸톤들은 분쟁을 해결하고 법을 집행하는 데 법률이나 국가 권력보다는 씨족 중심의 사회구조에 의존하며 아마도 회랑 밖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산은 또한 스위스 농민들이 자유롭고 사회가 이미 결집했다는 의미였다. 1291년에 시작된 중앙집권화는 사회가 국가의 권력 증대에 저항하고 균형을 맞출 만큼 강력해진 상황에서 이뤄졌다. 그래서 국가와 사회 모두 역량을 점차 확장하도록 앞장서 이끌어가면서 회랑 안으로 이행하도록 촉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위스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활기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했지만 그런 과정이 결코 예정돼 있지는 않았다."(452-3)


"164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새 선제후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48년간 통치했고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나아갈 새 길을 제시했으며, 그 과정에서 대선제후로 불리게 됐다. 프로이센이 겪은 30년전쟁의 경험을 통해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됐다." "(국가 역량의 확대를 추구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먼저 끊임없이 의회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게끔 영구적인 과세권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1653년 그는 협상으로 이른바 브란덴부르크 휴회 합의를 이끌어내 6년에 걸쳐 53만 탈러를 받아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쿠르마르크 의회가 아닌 그가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대신 그는 의회에서 하나의 원院을 구성하고 있던 귀족들에게 면세 지위를 주었다. '분할통치divided and rule'하는 영리한 전략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회의 서로 다른 원들을 성공적으로 분리하고, 의원들이 그에게 맞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않도록 확실히 차단했다."(454-5)


"1740년부터 프로이센을 통치한 프리드리히 대제는 공격적인 영토 확장 전략을 폈다. 프로이센에서 전쟁은 국가를 만들었고 그 국가는 독재로 악명 높은 국가였다. 그 국가의 통치자들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다. 대선제후는 〈신의 가호로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나는 결단코 전제군주처럼 통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그에 동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잘 운영되는 정부는 재정과 정책, 군사 모든 분야를 결합해 국가를 강하게 하고 그 힘을 확장한다는,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 확립된 체계를 가져야 한다. 그런 체계는 오로지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다.〉 16세기에 프로이센은 강려한 의회가 군주제를 제약하는 가운데 신성로마제국의 다른 여러 지역처럼 회랑 안에 있었다. 전쟁은 국가 권력을 확대함으로써 이 나라를 회랑 밖으로 밀어냈는데, 이는 스위스에서 전쟁이 초래한 결과와는 아주 달랐다. 프로이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독재적인 길을 따라 빠르게 나아갔다."(457)


"러시아의 '체제 전환'은 왜 그토록 극적으로 실패했을까?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러시아가 회랑 밖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소련이 붕괴한 후 국가기관들은 재건됐지만, 보안조직들을 개혁하려는 시도는 별로 없었다. 실제로 정치인들은 체첸에서처럼 보안조직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문제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국가가 더는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막고 옐친이 행사했던 것과 같은 고도의 재량권을 제한할 수 있는 민중의 결집이 없고, 독립적인 민간 이익집단조차 없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민영화와 경제개혁 자체만으로는 족쇄 찬 리바이어던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광범위하고 정당한 자산 분배를 이룰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푸틴은 러시아가 1990년대에 성취했던 것을 거꾸로 돌리면서 새로운 독재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푸틴의 리더십 아래 활기를 되찾은 KGB가 너무나 쉽게 경제와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줬다."(476-7)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는 비슷한 역사와 지리 조건, 문화적 유산을 갖고 있었고, 19세기에 똑같은 경제적 기회를 맞이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분기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이론이 시사하는 바를 보여준다." "코스타리카와 비교할 때 과테말라는 무력에 의한 강제노동의 역사가 더 길고 토착민 인구가 상당히 많았으며, 과테말라 왕국의 독재적 국가제도를 물려받았다. 그래서 19세기말 커피 시장의 활황으로 생긴 국가건설의 유인은 이 나라에서 강력한 독재적 리바이어던을 만들어냈다. 스페인제국이 붕괴하면서 코스타리카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기관이 아예 없는 가운데 네 도시가 통제권을 가지려 경쟁했다. 코스타리카는 커피 덕분에 붕괴를 피하고 회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레드 퀸 효과는 공공서비스와 토지에 대한 재산권 강화로 뒷받침 된 소규모 자작농 기반의 커피 경제가 부상하는 과정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났다. 이런 과정은 몇십 년 후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주의와 사회적 기반을 형성했다."(495-6)


"핵심 행위자들은 새롭고 지속성 있는 연합을 형성하거나, 새로운 요구와 불만, 서사를 분명히 표현하거나, 아니면 기술적, 조직적 혹은 이념적 혁신을 제안함으로써 사회의 진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 사이에 눈에 띄는 구조적 차이점들이 있었지만, 코스타리카가 진로를 선택할 때는 1830년대와 1840년대의 브라울리오 카리요 같은 개인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 코스타리카를 중앙아메리카연방공화국에서 분리하리고 한 그의 결정은 이 나라가 이 지협地峽 내 이웃 나라들과 다른 길로 갈라져 나갈 수 있도록 했다. 더 효과적인 국가기관들을 설립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소규모 자작농 기반의 커피 경제가 발전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군대를 소규모로 유지하기로 한 그의 결정 덕분에 코스타리카 정치에서 군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미약했고 결국 1948년에 군대가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카리요가 다른 결정을 했다면 코스타리카는 오늘날 과테말라와 더 비슷해졌을 것이다."(498-9)


제10장 퍼거슨은 무엇이 잘못됐나?


"연방주의자들은 강력한 대통령이 통제를 벗어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어떤 집단 또는 '당파'에 포획될 수 있다는 점을 걱정했다. 그래서 그 모든 견제와 균형 장치를 두고, 행정부와 입법부 권력을 분립시켰다. 그들은 또한 민중의 정치 참여가 지나치게 많아질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주 의회가 상원 의원들을 선출하고,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도입했다. 연방주의자들은 '주의 권리' 및 연방을 구성하는 주의 자치권을 보존하려는 이들에게 양보해야 했다." "이런 제도 설계는 미국을 회랑 안으로 밀어 넣는 작용을 했지만, 일종의 '파우스트의 거래'였다. 제도 설계를 통해 중요하게 보호한 것 중에는 남부의 노예 소유자들이 자신들의 노예를 착취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도 포함됐는데, 그것은 국가의 손을 묶었을 뿐만 아니라 그 손을 더럽혔다." "퍼거슨에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벌금을 물거나, 감옥에 가거나, 심지어 살해 당하는 이들이 가난한 흑인 시민들이었다는 사실은 이런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505-6)


"미국의 리바이어던이 택한 경로는 역설적으로 또 하나의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뜻밖에도 일부 핵심적인 분야에서 국가 활동에 대한 효과적인 감시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문제다. 미국에서 국가는 연방주의자들의 타협과 민관협력 모형에 따라 부여된 구속복에 갇혀 있다. 그래서 냉전과 최근의 국제적인 테러가 초래한, 갈수록 복잡해지는 안보상의 도전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회의 감시를 별로 받지 않는 쪽에서 이러한 역량을 개발했다. 그에 따라 숱한 제약을 받고 여전히 설립 당시의 취약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안보와 군사 분야에서 족쇄를 차지 않은 채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리바이어던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국가안보국NSA이 사회는 물론 정부의 다른 기관으로부터 어떤 견제도 받지 않은 채 미국 시민들을 표적으로 한 방대한 감시와 자료수집 활동을 벌였다고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했을 미국 리바이어던의 무서운 '얼굴'에 드러났다."(508)


"그렇다면 퍼거슨 경찰은 어떻게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으면서 주민들이 지닌 헌법상 권리를 침해할 수 있었을까? 권리장전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타협으로 만들어진 권리장전은 각 주가 아니라 연방정부에만 적용됐다. 각 주는 '경찰권'을 확보할 수 있으며 엄청난 재량권을 가졌다. 권리장전의 실제 문구는 이것을 명백히 규정하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양해됐다." "1865년 남북전쟁 패배는 권리장전에 대한 이런 관점에 종말을 고했어야 했다. 실제로 1868년에 통과된 수정헌법 제14조는 이런 조문을 담았다. 〈어떤 주도 미국 시민의 특권과 면책권을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하거나 시행할 수 없고, 정당한 법적 절차에 따르지 않고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할 수 없으며, 관할권 내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법률의 펑등한 보호를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조항이 각 주의 경찰권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거듭 판결했다."(510-1)


"이 모든 것은 1877년 이후 남부의 복원시대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수정헌법 제14조는 노예제도를 끝내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경제적 기회와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 개혁을 통해 남부의 재건을 이루려는 취지가 담긴 세 가지 수정조항 중 하나였다. 하지만 1877년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은 '파우스트의 거래'에 전념해 북군을 철수하고 재건을 끝내기로 남부의 정치인들과 타협함으로써 선거인단 다수를 확보했다. 일단 북군이 떠나자 남부는 '복원'됐고, 재건을 밀어붙이던 힘은 갑자기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특히 악명 높았던 건 인종 분리를 강화한 '짐 크로법'들이었다. 1890년 남부 주들은 인두세와 문해력 시험을 통해 흑인들의 선거권을 빼앗으려고 자신들의 헌법을 개정했다. 경찰권을 그 조치의 핵심에 있었다. 북부는 짐 크로법을 용인하며 남부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기로 합의했다. 권리장전이 주 의회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해석'은 이 거래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512)


제11장 종이 리바이어던


"아르헨티나의 국가는 부재하지 않는다. 국가는 정교한 법령과 대규모 군대, (관료들이 자신의 업무에 관심이 없는 듯하지만) 관료조직이 실재하며, 특히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어느 정도 기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독재적 리바이어던도 아니다. 그러나 확실히 우리가 만나본 아르헨티나의 관료들은 사회에 무책임하고 감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이는 독재적 국가의 특징이다), 사람들에게 아주 쉽게 무자비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사실 이 국가는 사회의 취약성과 분열을 바탕으로 세워지고 뒷받침된다는 점에서 인도의 국가와 공통점이 많다. 이 국가는 사회에 책임을 지지 않고 견제받지 않는 독재적 리바이어던의 본질적인 특성과 부재의 리바이어던이 지닌 취약성을 함께 드러낸다. 국가는 분쟁을 해결하거나, 법을 집행하거나,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 국가는 억압적이지만 강력하지는 않다. 이 국가는 그 자체로도 약하며, 사회도 약화시킨다."(557-8)


"종이 리바이어던의 힘은 공허하고, 대부분 영역에서 통일성이 없고 조직화하지 못하며, 이 나라가 통치해야만 하는 변방에서는 대개 완전히 부재한다." "종이 리바이어던이 유지되는 첫 번째 이유는, 권력의지를 추구하기 위해 정치 지도자와 엘리트층이 감수해야 할 위험이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국가건설자들이 사회의 어떤 달갑지 않은 반발도 진압할 수 있고 경쟁자들에 맞서 계속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 한, 국가에 맞서는 사회의 역량은 문제를 초래한다. 우리는 국가건설에 따르는 이와 같은 인지된 위험을 '결집 효과mobilization effect'라고 부를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이 역량을 키우려 하는 과정에서 반대자들이 결집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어떤 사회가 정치적 불평등을 크게 줄일 수 있을 만큼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미끄러운 비탈을 두려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로 사회의 제약을 받지 않는 정치적 엘리트가 국가의 역량 강화로 초래될 반발과 경쟁을 걱정할 수 있다."(563-4)


"종이 리바이어던이 상당히 많이 있고 그들이 무기력한 상태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때로 역량이 부족한 국가가 부도덕한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강력한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우선 정치적 통제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노골적으로 억압한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명령을 따르도록 설득하는 일에 훨씬 더 가깝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설득을 할 때 순종에 대해 보상해줄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매우 유용하다. 이때 친구와 지지자들, 혹은 지지자로 돌아서게 하고 싶은 이들에게 관료조직의 직위를 나눠주는 방법은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막스 베버가 구상한 방식대로 관료조직에서 실력주의를 바탕으로 한 채용과 승진 체계를 제도화하면서 국가건설을 시작한다고 상상해보라. 더 이상의 뇨키(gnocchi, 유령 공무원)는 없고, 더는 이 직위들을 보상으로 활용할 기회가 없다는 의미다. 이런 이유로 실력주의와 국가 역량 구축을 포기하도록 하는 강력한 정치 논리가 작동하게 된다."(565)


"국가 자산을 약탈하기 위한 법규의 자의적인 이용에서 이득을 보는 능력은 종이 리바이어던에서 국가의 무능과 분열을 부추겼다. 종이 리바이어던이 국가 역량을 쌓는 데 실패한 것은 시민들에게는 양날의 칼이다. 능력이 떨어지는 국가는 시민들을 억압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이런 것이 얼마간 자유의 토대가 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일반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종이 리바이어던의 시민들은 자유를 누리기보다는 다른 두 세계의 가장 나쁜 면을 함께 겪을 것이다. 종이 리바이어던의 국가는 여전히 상당히 독재적이어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거의 듣지 않고 시민들에게 감응하지 않으며, 그래서 그들을 억압하거나 살해하는 데 딱히 주저하지 않는다. 동시에 시민들은 분쟁의 해결자이자 법의 집행자, 공공서비스 제공자로서 국가의 기능을 기대할 수 없다. 종이 리바이어던은 자유를 창출하거나 자유에 적대적인 규범을 완화하려 하지 않는다. 종이 리바이어던은 흔히 규범의 우리를 완화하기보다는 되레 강화한다."(566)


"시몬 볼리바르는 왜 라틴 아메리카를 통치하려는 시도가 '바다에서 쟁기질하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남미 사회가 정치적 위계 구조와 불평등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식민지 사회는 백인인 스페인 사람이 맨 위에 있고 토착민과 여러 지역의 흑인 노예들이 밑바닥에 있는 제도화된 계급구조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스페인인 엘리트는 크레올레로 불리는 남미의 토착민이 됐고, 다른 인종 간 결혼 및 출산이 이뤄지면서 누가 누구보다 우위에 있는 가리는 정교한 카스트(스페인어로 카스타casta)제도가 만들어졌다." "법과 조세는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다르게 적용돼, 충분히 힘이 센 사람에게는 법이 전혀 적용되지 않았으므로 카스타가 중요했다. 법 앞의 평등이라고는 전혀 없어서 대다수 남미 사람들 눈으로 볼 때 법 자체가 부당하게 보였고, 그들은 식민지 시대의 '복종하지만 준수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격언을 채택했다."(581)


"종이 리바이어던은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여러 곳에서 서식한다. 이들 중 몇몇 국가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두 유럽 식민지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종이 리바이어던이 하나같이 유럽 식민지였던 이유는 유럽의 식민국가들이 식민지들을 통치하고 조종한 방식이 종이 리바이어던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런 국가를 불러일으킨 식민지화의 유물은 무엇일까? 첫째, 식민국가들은 식민지에 국가기관들을 도입했지만, 사회가 그것들을 전혀 통제할 수 없도록 했다(특히 식민국가들은 아프리카인들이 국가나 관료조직을 통제하는 데 아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식민국가들은 모든 일을 적은 비용으로 널리 전파할 수 있는 '간접 지배' 방식으로 하려 했다. 아프리카의 추장들 같은 지방의 유력자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인해 실력주의적 관료조직이나 사법부가 출현할 수 없었다."(595)


"우연히 주어진 국가기관들과 간접적인 지배 방식의 유산은 국가와 사회를 모두 더 약화시키는 세 번째 요인을 불러왔다. 바로 식민지에서 벗어난 국가들의 자의적인 특성이다. 은크루마에게 국가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가나가 하나의 국가로서 통일성이 없다는 데 있었다. 이 나라에는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언어가 없었다. 공통의 역사, 공통의 종교나 정체성, 합법적인 사회계약도 없었다." "요컨대 종이 리바이어던은 식민 제국들이 취약한 국가와 취약한 사회를 남겨두고 떠난 지역 그리고 그 둘이 서로를 영속화할 가능성이 큰 지역에서 형성됐다. 종이 리바이어던의 토대를 완성하는 마지막 요인은 국가들이 모여서 형성된 국제체제다." "국제체제는 이런 실패한 국가들에게도 국제적인 정당성을 부여했다. 일단 권력자가 국제사회에서 정중한 대접을 받고 국내에서 하고 싶은 약탈을 대부분 다 할 수 있으면, 실제로 권력이 공허하다는 사실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596-7)


제12장 와하브의 자식들


# 주요 용어들

1. 울라마ulama :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슬람 사회의 법학자와 신학자의 총칭

2. 파트와fatwa : 울라마가 이슬람 경전을 당시의 문제나 논의와 관련지어 특별히 해석하고 상세히 설명하는 판결

3. 카디qadi : 이슬람의 율법 샤리아에 따라 사건을 해결하는 재판관

4. 자카트zakat : 쿠란에 의무로 명시된 종교적 세금

5. 이크완Ikhwan : 형제들이라는 뜻으로 알-와하브의 후손이자 알-셰이크가의 일원인 리야드의 카디가 시작한 종교 단체

6. 와하비즘Wahhabism : 18세기 중엽 아라비아반도에 나타난 이슬람 복고주의 운동으로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이념의 기초가 됐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야기는 규범의 우리가 강화되는 실례를 보여준다. 사회 규범들은 사람들의 관습과 믿음, 관행에 기초하고 있으며, 종교와 종교적 관행에 뿌리를 내렸다. 메디나와 더 넓은 지역에서 중앙에 집중된 권위를 확립하려는 무함마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사회에서도 규범이 종교에 깊이 뿌리 내렸다. 한발리 법학파의 노력, 와하비즘 그리고 전통을 강조하고 혁신에 반대하는 그들의 성향에 힘입어 이 규범들은 스스로 강력한 재생산을 거듭했다. 그다음에 와하브파의 열정을 군사적 확장에 이용한 이븐 사우드의 거래가 이뤄졌고, 그와 후계자들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주류 와하브파의 규범과 규제를 받아들였다. 왕국을 얻기 위해 치르는 작은 대가였다. 하지만 이븐 사우드와 압드 알-아지즈의 손안에 들어간 와하브파의 사상과 규제는 알-디리야의 오아시스 훨씬 넘어서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독자재가 되려는 중동의 다른 지도자들도 같은 구상과 전략을 활용하기 시작했다."(617)


"중동에서 이런 전략이 인기를 끈 것은 세 가지 연관된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이슬람의 제도적 구조다. 이슬람, 특히 수니파 이슬람에서는 교회의 위계 구조가 없고, 개인과 신 사이에 개입하는 사제들이 없다. 이 종교에서 학식이 깊은 울라마는 사람들에게 경전의 해석에 관한 지침을 주고 파트와를 발표할 수 있다." "이는 사우드 정권이 울라마 집단을 접수해 자신들을 지지하는 파트와를 제공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줬다." "두 번째 요인은 쿠란은 합법적인 문서가 아니며, 통치자에게 어느 정도 권력을 부여할지는 해석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 요인은 전제적인 이슬람제국들의 통치 기간에 발전하고 정착된, 국가와 사회에 관한 홉스식의 관점이다. 10세기의 저명한 철학자 알-가잘리는 이렇게 밝혔다. 〈술탄의 전제가 100년 동안 이어지더라도 그 피해는 피지배자가 다른 이들에게 휘두른 1년간의 폭정보다 덜하다.〉 따라서 전쟁 상태는 독재보다 훨씬 나쁘다."(617-9)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규범의 우리 때문에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이들은 여성이다." "가까운 친척이 아닌 남성은 여성에게 손을 대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며, 필수적인 의료행위는 고사하고 공손히 악수하는 것조차 금지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은 불가촉천민이다. 복장 규정, 불가촉 조항, 여성들을 남성의 통제하에 두는 거미줄 같은 규제들은 쿠란의 특별한 해석에서 나왔다. 쿠란의 제4장 제34절은 '남성은 여성들의 보호자이자 부양자인데, 신께서 한쪽에 다른 쪽보다 (힘을) 더 많이 주셨기 때문이며, 그들이 자신의 재산으로 여성들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들은 어린이들처럼 남성들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되며, 이런 해석은 622년에 공식화한 무함마드의 메디나헌장 41번째 조항에서 여성을 언급한 것과 일치한다고 여겨졌다. 이 조항은' 여성은 오로지 그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보호받을 것’이라고 밝혔다."(622)


"중동에서는 독재자를 비판하는 담론을 발전시키기가 대단히 어려운데, 이는 독재자가 종교를 대표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독재자를 비판하면 곧 이슬람을 비판하는 것이 된다. 그에 따라 독재자의 종교적 신앙심이 그다지 깊지 않고 자신이 종교적 신념에 더 헌신한다고 지적하는 방식으로 비판을 전개하는 경향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빈 라덴이 바로 그렇다. 그의 파트와는 이어서 '현 정권이 이슬람의 샤리아법을 정지하고 그것을 제정법으로 대체하고, 헌신적인 학자와 올바른 젊은이들과 유혈 대결을 시작하는 것'을 지적했다. 사우드가는 울라마 대다수를 포획했을지 모르지만, 빈 라덴 같은 '헌신적인 학자들'도 남아 있었다. 실제로 사우드가는 빈 라덴을 포섭하려 했지만, 그는 넘어가지 않았다. 빈 라덴은 사회 운동과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의제를 만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서방과 미국에 대한 그의 증오뿐만 아니라 사우드가와 '현 정권의 억압적이고 부당한 행동과 조치들'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배어 있었다."(633-4)


제13장 통제할 수 없는 레드 퀸


"바이마르공화국은 애초에 출범할 때부터 선출된 대의원들의 절반이나 되는 이들이 공화국의 제도에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무력화됐다. 좌파 가운데 어림잡아 5분의 1은 러시아식 혁명을 선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바이마르 민주주의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였고 심지어 이 나라를 '파시스트' 국가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우파에서는 대의원들의 약 30퍼센트가 그들과 연합한 대다수 전통적 엘리트와 같이 1914년 이전 보수주의자들이 지배했던 기존 체제로 돌아가 왕정을 복구하기를 원했으며, 일부는 나치와 마찬가지로 공화국제도의 정당성을 전면적으로 부인했다. 이런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1930년 선거 후 나치가 처음으로 상당한 의석을 차지했을 때 의회가 보여준 풍경일 것이다. 갈색 셔츠 제복을 입은 107명이 나치당원이 의사 진행을 방해하기 위해 77명의 공산당원과 결탁했다." "우파와 좌파는 모두 자신들을 선출한 제도를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643-4)


"집단들의 비타협적인 자세와 비례대표제에 바탕을 둔 선거체제는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원인이 됐다. 1928년에 이르자 작센농민당과 독일농민당을 포함해 열다섯 개의 서로 다른 정당들이 의회에 진출했다. 다른 스물여섯 개 당이 내세운 후보들은 선출되지 못했지만, 주요 정당들의 표를 갉아먹는 효과를 냈다. 어떤 단일 정당도 바이마르 시대 선거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으므로 모든 정부가 연합정부였다." "그에 따른 좌절과 정체 때문에 정부가 일을 성사시키려면 점점 더 대통령의 특권에 의존해야 했다. 바이마르헌법 제48조에 따라 대통령에게 부여된 광범위한 긴급조치권들 덕분에 대통령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기가 쉬워졌다. 이 권한들은 원칙적으로 의회 표결로 뒤집을 수 있었지만,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할 수 있었으므로 헌법 제48조를 원하는 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서로 다른 사안에 136차례나 그 권한을 발동했다."(644-5)


"독일의 엘리트와 장교들, 관료들은 왜 바이마르의 실험을 그토록 반대했을까? 바이마르 민주주의 실험의 반대자들은 대부분 프로이센의 토지를 보유한 귀족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같은 부류였다. 토지 소유자들은 흔히 사회의 역량을 키우고 민주주의를 시작하는 것을 (타협의 여지 없이 상대를 파괴해야 하는) 제로섬 관계의 관점에서 봤다." "프로이센 지주들의 태도와 이로 인해 회랑 안의 삶이 겪는 구조적인 어려움이 이례적이지는 않았을지라도, 프로이센의 지주 엘리트층은 사회적 결집에 저항하는 연합을 더 잘 형성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우선 최고위 장교와 판사, 관료 중 다수가 지주 엘리트층에서 나왔고 엘리트의 관점을 공유했다. 프로이센의 엘리트는 19세기 후반 사회의 변화가 진행 중일 때도 상대적으로 통일성을 보였고 정치적으로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엘리트는 자신들이 독일 정치를 통제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시간을 비스마르크의 시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652-4)


"아옌데는 헌법적 수단을 통해 칠레가 사회주의로 옮겨갈 수 있다고 믿었을지 몰라도 자신의 연합에 참여하는 많은 이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고, 아옌데가 그들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노동자 집단들은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농장과 공장을 점거했고, 정부는 그 점거를 승인하기 위해 개입했다. 토지개혁과 국유화는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엘 메르쿠리오〉지는 1972년 한 사설에서 '공화국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도 인민연합의 정당들도 ··· 법을 위반한 노동자와 농민, 학생 집단들에 대해 억압적인 조치들을 취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 집단들은 이 점을 알고 이용했다. 그들의 행동은, 각종 정치제도가 인민연합의 반대 진영에서 만든 것들이며, 그러므로 인민연합이 총력을 다해 뿌리 뽑으려는 기존 질서를 방어하기 위해 설계됐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더 정당화됐다. 여기서도 우리가 고대 그리스나 미국에서 목격한 것과 아주 다른 제로섬 레드 퀸 효과를 볼 수 있다."(667-8)


"기독민주당 진영이 정부와 잠정적인 타협에 이르렀을 때는 그 정당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경고하는 보수적 당파에 의해 타협이 파기됐다. 곳곳에서 폭력이 터져 나왔다. 드브레가 아옌데에게 반대 진영의 폭력에 어떻게 맞설 것이냐고 묻자 아옌데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먼저 무력으로 폭력을 억제할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반동적인 폭력에 대해서는 혁명적인 폭력으로 응답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들이 게임의 규칙을 깨트릴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아옌데가 상대편이 게임의 규칙을 깨리라고 본 것은 옳았지만, 그에 맞서 혁명적인 폭력으로 대응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크게 빗나갔다." "1960년대 칠레에서 일어난 사회의 결집과 강화의 과정은 국가의 강화와 짝이 맞았지만, 그런 과정은 1970년 이후 더 급진적인 요구로 이어졌을 뿐이다. 이 급진적 요구는 토지와 사업이 대거 몰수될까 봐 걱정하는 칠레 엘리트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엘리트의 반동으로 칠레는 회랑 밖으로 밀려났다."(668-9)


"레드 퀸의 동학이 갈수록 엘리트층에 유리해지면 민중은 엘리트가 지배하는 체제보다 자신들의 이익에 더 우호적일 것으로 기대하면서 책임성이 없는 독재자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쪽을 택할 수 있다. 이는 희망적 바람에 불과하지만, 지금껏 사회는 엘리트와의 투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그들의 족쇄 찬 리바이어던을 파괴하는 쪽을 계속 선택해왔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 점을 잘 요약했다. 〈인민은 귀족의 지배나 억압을 받고 싶어 하지 않지만, 귀족은 인민을 지배하고 억압하려고 합니다. 이 두 상반되는 욕구로 여러 도시에서 군주정이나 공화정 혹은 무정부라는 세 가지 결과 중 하나가 나타납니다. ··· 귀족들이 인민들을 물리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자신들 가운데 누군가를 지지하기 시작하고 그의 보호 아래 있으려는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를 군주로 내세웁니다. 일반 인민들 역시 귀족들에 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한 사람을 지지해 그의 권위에 의지해 보호받으려 합니다.〉"(680-1)


제14장 회랑 안으로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체제가 무너지고 남아프리카는 평화적인 방식을 통해 민주주의로 이행하면서 회랑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변화는 ANC(아프리카민족회의)와 흑인 중산층, 백인 산업가들의 새로운 연합을 기반으로 했다. 농업과 광업의 엘리트 집단은 흑인의 임금을 낮게 유지하는 정치·경제 제도의 주된 수혜자였다. 백인 노동자들 역시 큰 혜택을 봤는데, 흑인 차별과 피폐한 흑인 교육체계 같은 당시의 여건 덕분에 백인들은 숙련직과 반숙련직에서 자신들과의 경쟁이 사실상 금지된 흑인들에 비해 임금을 5.5배에서 11배까지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가들에게 아파르트헤이트체제는 그다지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흑인 차별로 백인 농장주와 광산 소유자, 노동자들은 혜택을 봤지만, 그로 인해 가장 비천한 비숙련직 외에는 어떤 자리에도 아주 싼 흑인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었던 산업가들은 인건비 증가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므로 산업가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연합의 약한 고리였다."(697-8)


"1886년 트란스발에서 금이 발견된 후, 흑인들의 강제노동은 남아프리카의 농업과 광업 부문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해졌다. 값싼 흑인 노동력에 접근해 강압적으로 고용하고 싶어 하는 백인 농장주와 광산 소유자들의 바람은 흑인들의 참정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그들의 땅을 몰수하며 억압적인 아파르트헤이트체제를 구축하는 제도적 변화를 수용하도록 부추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상황은 상당히 달랐다. 1990년대 남아프리카는 금과 다이아몬드 생산이 여전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는 해도 제조업 위주의 경제구조로 바뀌었다. 산업가들은 대부분 흑인 취업 금지를 끝내는 것을 선호했고, 특히 강력한 흑인 지도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대의제가 강화된 민주주의체제 아래 자신들의 자산을 보호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아파르트헤이트체제에 대한 국제 제제 역시 기업계가 지나치게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제도를 폐지하는 데 동참하도록 하는 추가적인 유인을 제공했다."(730)


"터키 역시 군부와 관료집단이 지배하는 독재적 리바이어던에서 출발했다." "1923년, 훗날 아타튀르크로 명명된 무스타파 케말 휘하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면서 터키공화국이 수립됐다. 터키공화국이 택한 길은 추가적인 개혁과 국가건설에 열려 있었지만, 항상 군과 관료가 이끄는 독재적인 형태였다(기업 소유주와 다른 이들은 이 연합의 주변 요소였다). 터키어 약자 CHP로 알려진 아타튀르크의 공화인민당은 경제와 사회를 현대화했지만, 그 지도자들과 협력자들이 견제받지 않는 권력과 경제적인 부를 쌓게 해줬다." "처음에 아타튀르크가 일당체제로 제도화한 CHP의 권력 독점은 그 후 몇십 년 새 무너졌지만, 불균형적으로 강력한 군부와 관료집단의 권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군부가 장악력이 느슨해지거나 사회가 결집하고 있다고 느낄 때는 쿠데타를 통해 개입했다. 군과 민간 정부는 흔히 세속주의적이었지만 사회 통제를 위해 서슴지 않고 종교를 이용했으며 종교집단들과 연합했다 그만두기를 반복했다."(709-11)


"터키는 독재적인 국가 통제의 어느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옮겨 갔다. 2007년 이후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AKP)은 이 나라 권력의 여러 지렛대를 완전히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계기는 터키의 보안대, 관료조직, 사법부 그리고 교육체계에 뿌리를 내린 무슬림 성직자 펫홀라흐 귈렌의 비밀조직과 AKP 지도부의 동맹이었다." "2016년 7월 비밀리에 귈렌과 동맹을 맺은 군 장교들이 계획한 것으로 보이는 쿠데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에르도안과 그 협력자들은 계엄을 선포하고 보안대와 사법부, 관료조직의 귈렌 조직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에르도안은 나아가 견제장치가 거의 없는 대통령 중심제를 도입했다. 이는 2017년 계엄령 아래 헌법 개정에 반대 운동을 할 수 있는 주류 언론이 없는 가운데 치른 국민투표에서 가까스로 통과됐다. 터키는 여전히 기자들을 가장 많이 감옥에 가둔 나라이며, 의회의 쿠르드족 지지 정당의 공동대표들을 포함한 몇몇 선출된 정치인들까지 가둬놓고 있다."(714-5)


제15장 리바이어던과 살아가기


"하이에크는 독재적 리바이어던이 출현하는 것을 막는 길은 사회가 국가의 권력과 지배에 맞서 효과적으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하이에크의 빈틈없는 분석은 한 가지 활력, 즉 레드 퀸 효과를 빠트렸다. 사회가 국가 역량 확대에 맞서 할 수 있는 선택은 국가를 완전히 억제하는 길만 있는 게 아니다. 사회는 그 대신에 자신의 역량과 국가에 대한 자신의 견제장치를 확대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새로운 도전을 맞았을 때 회랑 안에 머무르는 일은 자동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하이에크는 자유에 대한 더 기본적인 도전, 즉 새로운 유형의 '노예 상태'로 이끄는 행정국가의 힘이 확대되는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레드 퀸 효과는 또한 제로섬 게임이 되지 않는 한 확장하는 국가에 대한 견제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새로운 능력과 제도적 장치를 개발하면서 사회가 회랑 안에 머물도록 도와주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751-2)


"어쩌면 하이에크의 가장 번득이는 통찰은 국가와 시장의 균형이 단지 경제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일 것이다. 그것은 정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국가가 사회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역량을 키우면서도 여전히 족쇄를 차고 있도록 보장하느냐다. 그러자면 사회가 국가와 엘리트집단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역량을 강화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 국가 개입이 유익한지 판단하려면 그 개입에 따른 경제적인 상충관계만이 아니라 그에 따른 정치적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이는 단지 국가의 역량에 관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누가 그 역량을 통제하고 감시하며 그 역량이 어떻게 쓰이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웨덴과 다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진정한 제도적 혁신은 더 개입주의적이고 재분배를 중시하는 국가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기업계와 노동자 대다수가 포함된 연합의 후원 아래 그런 일을 했고, 그 연합이 국가에 단단히 족쇄를 채우도록 한 것이다."(761-2)


"경제의 세계화와 자동화, 금융의 성장, 거대 기업의 부상이라는 경제적 추세들은 적어도 세 가지 이유에서 미국을 비롯한 몇몇 선진국들이 긴급하게 대응해야 할 도전이 되고 있다. 첫째, 그 추세들은 불평등에 영향을 준다. 둘째, 경제적 효율성에 문제가 있다. 지난 20년 동안 세계화가 극적으로 진전되고 새로운기술이 놀랄 만큼 발전했지만 소득과 생산성 향상은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세계화와 급속한 자동화는 여러 혜택을 줬지만, 이는 생산성과 경제적 번영에 훨씬 더 많이 공헌했을 다른 기술 발전을 희생시킨 대가였는지도 모른다." "세번째 도전은 기관들에 대한 신뢰에 관한 것이다. 족쇄 찬 리바이어던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와 사회 간 힘의 균형뿐만이 아니다. 기관들에 대한 사회의 신뢰도 필요하다."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각종 기관에 대한 신뢰를 잃은 부문들은, 정치체제를 흔들려는, 그리고 회랑 안의 삶을 받쳐줄 국가와 사회 간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려는 운동의 주된 목표가 된다."(774-5)


"레드 퀸은 회랑이 좁을수록 통제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미국과 다른 여러 서방 국가들은 더 나은 처지다. 그들은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바탕으로 경제를 다각화하고, 노동 강요는 아주 제한적인 역할만 하고,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반대하는 지배적인 집단들이 없고, 중단 없는 민주주의 정치가 더 넓은 회랑을 만들어낸 최근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랑의 폭도, 회랑 안의 안정도 당연하다고 여길 수는 없다. 회랑의 폭은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기관들에 의해 확대된다. 이 기관들이 사람들의 신뢰를 잃으면 회랑은 좁아지고 사회가 분쟁을 다루는 능력은 줄어든다. 그리고 레드 퀸이 고집스럽게 제로섬 게임으로 치달으면 회랑이 넓어도 레드 퀸은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스웨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명백하다. 족쇄 찬 리바이어던과 새로운 정책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타협을 끌어내고 광범위한 연합을 구축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776-8)


"구체적인 정책의 개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사회의 결집력을 전반적으로 재고하는 것이다. 토크빌을 크게 매혹시킨 19세기 미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정부 바깥에서 단체를 조직하고 형성하려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미국 사회는 이를 통해 특정한 사회적 문제들을 풀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의사결정에 대한 대중의 압력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최근 이런 유형의 단체들이 쇠퇴하고 있다는 점이 많이 부각됐다. 쇠퇴의 범위와 정확한 원인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고 이 조직들이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국가와 강력한 엘리트층을 계속 견제할 수 있는 유형의 연합들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이 일은 경제적 엘리트집단의 영향력에 맞서는 노동자 조직들이 지난 몇십 년 동안 훨씬 약해졌기 때문에 더욱 중요해졌다. 이런 조직이 쇠퇴함에 따라 산업 노동자들과 다른 시민들 모두를 위한 새로운 정치 참여 수단이 될 대안적인 형태의 조직들이 더욱 필요해졌다."(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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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승리의 발자취 - 기독교는 어떻게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되었는가?
로드니 스타크 지음, 허성식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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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1부 성탄 전야


"수많은 신들을 섬기긴 했지만 로마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회는 신앙의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았다. 신들에게 각자의 신전이 있었지만, 그 모두가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으면서 세세하게 통제되던 단일한 국가 체제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교 신전이 맡은 주된 소임은 국가와 그 지배 귀족이 신들의 가호를 받고 있음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신전에 갈 뿐이었고, 그곳에 소속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이 어느 특정한 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자신을 그 신을 믿는 신자로 규정하지는 않았다─자신을 제우스(Zeus)를 믿는 신자 내지 유피테르(Jupiter)를 믿는 신자로 자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한 사람이 자신의 취향과 필요에 따라 여러 신전과 다양한 신들을 후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회중으로 조직된 종교생활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통된 종교적 구심점과 소속감을 가지고 정기적으로 모이는 회합이라는 뜻에서 회중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22-3)


"로마에는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는 국교가 없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한데, 로마의 사제집단을 살펴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로마의 전통적인 신전들조차 전문적인 전임 사제를 두지 않았다." "로마의 사제는 사제 노릇이 그의 주된 역할이 아닌, 다시 말해 아마추어였기 때문에, 〈로마의 신전은 권력이나 영향력 내지 부가 모이는 독자적 중심이 될 수 없었다.···신전에 배속된 사제들이 없었기 때문에 신전은 사제들에게 권력의 기반을 제공하지 않았다.〉" "로마의 이교 신앙은 별도의 재정적 후원이 필요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나면, 신들의 수와 성격과 특화된 역할에 있어 다른 신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까닭은 로마의 신들이란 거의 모두 그리스에서 온 것이었고, 그리스의 신들 역시 이집트에서, 그리고 이집트의 신들은 수메르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신들이 이동하면서 그냥 이름만 갈아치웠던 것이다." "이렇게 제국의 동부와 이집트에서 유입된 새로운 종교들이 이른바 '동양 종교들'(Oriental faiths)이었다."(27-9)


# 로마에서 동양 종교들이 성공한 이유 (퀴몽+스타크)

1. 동양 종교는 종교적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감각에 호소하는 측면이 한층 더 강하다. (감각)

2. 로마의 전통 신들이 도시와 국가의 신들이었다면, 동양 종교의 신은 개인의 신이다. (양심-속죄, 용서와 결부된)

3. 로마의 전통 종교는 '경전'이 없었지만, 동양 종교는 성문화된 경전을 제공한다. (지성)

4. 동양 종교는 여성에게 적극적인 종교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젠더)

5. 동양 종교는 평신도들을 신도단, 즉 활동적인 신도 공동체 안으로 모여들게 한다. (조직화)


"로마의 신들은 그저 고객과 축제만 있었을 뿐, 신도나 정기적 예배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양 종교는 〈새로운 공동체 의식과···훨씬 더 강력한 형태의 소속감을 제공했다.〉" "동양 종교는 분명한 종교적 정체성을 채택했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긴밀하게 결속된 매우 활동적인 종교 공동체, 즉 고객이 아닌 신도단을 필요로 했다.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동양 종교의 신자들도 자신이 속한 종교 집단을 사회생활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종교적 헌신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헌신의 자세를 통해 훨씬 더 큰 보상을 얻었는데, 그것은 동료 신자들이 그들의 헌신에 대해 보답으로 베풀어주는 것이었다. 종교 집단이 최고 수준의 헌신과 충성을 이끌어내는 것은 바로 신자들을 따로 모아서 친밀한 상호 교제를 가능케 하는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 이들 간에 끈끈한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로마의 통치자들과 쓰라린 갈등을 초래하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38-9)


"유일신교와 접촉한 여러 이교 집단은 그들이 섬기던 신들 중 하나를 다신교의 제한된 틀 안에서 가능한 대로 유일신교와 유사하게 변형하려고 했다. 이러한 방향으로 가장 광범위한 노력을 기울인 것이 바로 이시스교였다." "그러나 아무리 이시스를 〈유일하게 참되고 살아 있는 신〉으로 부른다고 해도, 이시스교가 이교주의에 속한 태생적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시스를 최고의 신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가능했지만 유일한 신으로 인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시스의 아들인 호로스를 포함하여 여러 신들로 구성된 만신전(pantheon)의 존재를 이교주의의 맥락에서 부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명백한 유사성을 지닌 유대교에 비하면, 이시스 신화는 온통 저세상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럴 베일리(1871-1957)의 말마따나 〈한편에는 비역사적이고 단지 이야기 속 꼭두각시에 불과한 전설적 인물들이 있었다. 반면에 유대교에는 참으로 역사적인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51-3)


"이전에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종교들은 어쩔 수 없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나태하고, 현세적인 성격이 되기 때문에, 그 반대 세력은 대부분 이보다 강렬한 신앙을 추구하는 집단 곧 〈소종파〉(높은 헌신도를 지닌 종교단체를 지칭하는 명칭)로부터 나오게 된다. 독점적 종교가 처음에는 강렬한 신앙에 헌신된 이들에 의해 창설되었을지라도, 점차 주변의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독점적 종교가 점점 태만해지는 한 가지 이유를 들자면, 그것은 종교적 강렬함이 결코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물 흐르듯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종파를 이끌던 교인 자녀 중 대다수가 그 부모들보다 긴장감이 덜한 신앙을 선호하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러한 과정은 오랫동안 〈종파의 변화〉(the transformation of sects), 즉 성공적인 종파들이 보다 온건한 종교 집단으로 변모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지칭되었다.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나 경제와 같은 현세적 활동에 관여하면서 그 변화의 속도가 빨라진다."(62-3)


"그러한 종교 기관이 경쟁적 충동을 억누를 만한 강제력을 결여하고 있을 경우, 그 종교는 곧바로 긴장도 높은 신앙을 원하는 이들이 출범시킨 소종파 운동에 의해 포위당하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 포로기를 거쳐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에서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었다. 유배지에서 귀환한 유대 지도자들이 내세운 유대교는 철저한 율법 준수와 다신교에 대한 절대적 불관용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정통주의에 대한 지도 권한이 예루살렘에 집중되었고 전문화된 세습 제사장 계층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이에 따라 성전도 재건되었다. 성전을 유지하고 세습 제사장직을 후원하기 위해 전체 유대인을 대상으로 십일조가 부과되었다. 어쩌면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은 성전이 재정 기관으로 부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성전이 국가의 금고, 심지어 투자 은행 같은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환전상들을 유치하기도 했다. 여기서 투자 은행이란 자본의 예치 장소를 말한다."(63)


"이것은 두 집단이 결합된 형태로서, 한편에는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으며 성전을 관장하는 부유하고 상대적으로 현세적인 제사장 계층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종교적 순응을 강요하길 꺼려했던 〈외부인들〉인 정치적 지배자들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다양한 범위의 유대교 종교 집단들(탈무드에서는 24개의 종파를 언급한다)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종파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그들의 이름 정도인데, 그마저도 없는 경우가 있다. 논쟁에 휩싸인 유대교 종교 집단들 중에는 뭔가를 기록으로 남기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알려진 것은 대부분 외부인들이 작성한 것이며, 이것들은 대부분 상당히 비우호적인 면모를 띠고 있다. 가장 중요한 자료는 1세기의 유대인 모험가이자 역사가였던 요세푸스(약 37-100)였는데, 그는 자기가 적어도 유대교의 세 주요 집단, 곧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와 에세네파에 가담해서 활동했었다고 말한다."(64-5)


"메시아라는 말은 아람어 〈마쉬아흐〉(mashiah)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기름 부음 받은 주님〉(그리스어로 christos)이라는 뜻이다. 수 세기 동안─특히 강력한 적들로부터 괴롭힘 당하던 시기에─유대인의 사고 속에 변함없이 자리 잡고 있던 주제는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충만한 영광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세상을 다스리는 지복의〉 시대를 시작하신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점을 넘어서면, 제이콥 뉴스너의 말마따나 유대교는 〈메시아에 대한 깔끔한 교리를 제시하지 못했다.〉 실제로 쿰란 문서를 기록했던 유대인들은 심지어 두 명의 메시아, 곧 〈기름 부음 받은 제사장과 기름 부은 받은 왕〉의 출현을 예견하기도 했다. 따라서 유대교의 메시아 대망은 〈혼란스럽고, 복잡하며, 심지어 모순되기까지 한 관념들의 거대한 덩어리〉였다고 하겠다." "메시아의 강림은 종종 종말 곧 〈죽은 의인들의 부활 및 악을 행한 자들에 대한 심판〉과 연결되곤 했다."(70-1)


제2부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


"일반 교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운동의 활력은 〈공동 식사를 핵심으로 삼아〉 가정집에서 함께 모이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필시 〈최후의 만찬〉을 상기시키는 측면을 지니고 있었으며,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이 그 거룩한 공동체 생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 단체의 사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복음서의 전승을 구성하는 문서자료를 최초로 수집하는 일이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 점이 바로 복음서들이 때때로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을 나타내는 이유를 밝혀준다. 맨 처음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예수운동이 처한 전투적 상황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던 이들이었다." "유대인들의 박해가 일어났을 당시에 그리스도인의 수효가 극히 적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로마인들이 가한 박해보다 이 박해가 기독교 신앙의 존속에 더 큰 위협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97-9)


"바울은 혼자 여행하는 법이 없었다. 소수의 조력자들만을 대동하고 여행하는 법도 없었다. 도리어 많을 때는 40명이나 되는 신자들을 수행단으로 삼아 동행하였다. 이 정도 규모면 초기 〈회중〉을 구성하기에 충분했으므로, 이를 통해 믿음직한 예배 분위기를 유지하고 새 신자를 맞이하여 이들과 더불어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했다. 바울의 수행원 가운데는 틀림없이 필경사(scribes)가 있었을 것이다. 책을 제작하기 위해 손으로 받아쓰고, 한 번에 하나씩 옮겨 적는 방식을 사용했던 당시에는 필경사를 대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리는 바울의 필경사 중에 한 사람을 알고 있다. 그가 로마서의 말미에서 자신이 누구인지─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Tertius, 롬 16:22)─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헬무트 쾨스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따라서 바울의 선교사역은 외로운 선교사 한 사람이 벌인 소박한 활동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도리어 치밀하게 준비된 대규모의 조직적 활동이었다.〉"(105-6)


"이교 세계에서는 기독교의 신화적 요소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그리스도 이야기는 고대 영웅 설화의 모든 요소, 곧 어떻게 한 인간이 신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의 완결판이었다." "더욱이 그리스도 이야기가 지닌 〈이교적 요소〉는 그리스-로마의 이교 신앙과 기독교 간의 문화적 연속성을 극대화시켰다. 이교도 출신의 개종자들은 자기들에게 친숙한 신들과 기적들에 대한 개념들 가운데 많은 것들을 그대로 가져갈 수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훨씬 더 강한 수준의 헌신과 더 포괄적인 도덕성 및 훨씬 더 강력한 구원의 메시지를 수용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다신교로 퇴행하는 경향을 찾아보기 힘든 것은 바로 예수가 신성을 너무나도 완벽하게 인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론 그 때문에 기독교는 유대교와 되돌릴 수 없이 갈라진 사이가 되고 말았다."(129-31)


"고대 도시에 만연한 불결함과 고통과 질병 및 익명성의 한복판에서 기독교는 긍휼을 베풀고 안전을 보장하는 섬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교 세계에서, 특히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긍휼을 〈성격적 결함〉으로, 동정을 〈병적 감정〉으로 간주했다. 긍휼이란 무상의 도움이나 구호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정의에 위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지의 설명에 따르면, 그리스 철학자들은 〈긍휼은 이성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반드시 〈충동을 제어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과 〈받을 자격도 없는 자가 긍휼을 간청할 때〉 철저히 〈외면할〉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저지는 계속해서 〈동정은 현자들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성격적 결함이므로 아직 미성숙한 자들에게만 용납 가능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도덕적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가 보여준 참으로 혁명적인 원리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자비가 자기 가족뿐 아니라 신앙의 경계를 넘어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뻗어나간다는 점이다."(170-1)


"그리스도인 작가들은 여성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혁명적이라는 점을 오랫동안 강조해왔다. 예수에게 있어 남녀는 평등했다는 말이다. 많은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성차별적이지 않은 예수의 말이나 행동이 성차별이 만연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실제 젠더 관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무시해버리곤 한다. 그러나 최근에 밝혀진 객관적 증거에 따르면, 의심할 여지 없이 초기 기독교 여성이 이교도 여성이나 유대인 여성에 비해 남성과의 관계에 있어 훨씬 더 평등한 권리를 누렸음이 분명하다. 로마시의 지하에 위치한 지하묘지 중 기독교 구역에 있는 3,733기의 묘실에 대한 연구는 그리스도인 여성에 대한 추모 비문이 그리스도인 남성에 대한 추모 비문과 그 길이에서 차이가 거의 없음을 밝혀냈다. 이렇듯 〈추모 비문에서 남녀 간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유독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특징이었고, 이 점은 그들을 도시의 비그리스도인들로부터 구별해주었다.〉"(186-7)


제3부 기독교화된 유럽의 성장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우선적으로 도움을 청한 한 가지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을 정도로 기독교가 필시 로마시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다수의 시민이 신봉하는 신앙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가 비약적 성장 곡선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확대됨에 따라 수천 명이 개종하게 된 상황을 모르고 지나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요인은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오래전부터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로마에 입성한 콘스탄티누스를 군중들이 〈진심이 담긴 환호소리와 함께〉 맞이한 것은 그가 단지 승리자로서 입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주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콘스탄티누스가 예전이 관례대로 유피테르 신전에 올라가 이교의 신들에게 제사 드리기를 거부하자, 로마시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은 틀림없이 흥분을 가라앉히기 힘들었을 것이다."(250-1)


"콘스탄티누스가 교회에 기여한 주요 업적은 성직자들을 부와 권력과 신분이 보장된 고위층으로 끌어올린 것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삼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실제로 한 것은 기독교를 황제의 총애를 받는 수혜자로 만들어 제국의 재화를 거의 무제한적으로 누리도록 한 것이었다.〉 법률상의 특권과 권력이 성직자들에게 아낌없이 하사되었다. 주교가 주관하는 교회 법정이 공식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성직자들은 세금을 비롯한 공적 의무를 면제받았다. 아울러 주교들은 〈이제 가장 부유한 원로원 의원들과 동급의 고위층이 되었으며···이에 따라 그들은 국가를 위한 재판관과 지사와 정무관의 역할을 맡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 결과 귀족 가문 출신의 사람들이 사제가 되기 위해 쇄도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로 인해 교회는 한층 더 세속적으로 변질되면서 이전의 활력을 상실한 기관으로 전락하게 되었다."(255-6)


"콘스탄티누스는 이교주의를 불법화하지 않았고,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도 용인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가 이교 신전을 용인한 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그가 계속해서 이교도들을 집정관이나 지사를 비롯한 최고 고위직에 임명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이교도 철학자들이 그의 궁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태양신을 묘사한 그림이 그가 주조한 동전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실로 〈콘스탄티누스가 가장 신랄한 언사를 내뱉은〉 대상은 이교도가 아니라 도나투스파와 아리우스파 같은 이단들 및 발렌티누스파 마르키온파 같은 영지주의 분파들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기번 이래로 주요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을 신실성이 결여된 정치적 꼼수로 격하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역사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을 진정성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의 치세 동안 이교적 요소를 존치시킨 것을 종교적 화합을 추구하는 그의 의중이 반영된 사례로 인용한다."(261-2)


"통념적인 역사관과는 달리 이교주의는 즉시 소멸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것은 아주 서서히 종적을 감추었다." "초기 무슬림 군대가 639년 하란(Haran)을 공격할 당시 그 도시에서는 아직도 이교도가 그리스도인보다 우세했기 때문에, 아랍인들과 협상하기 위해서 파견된 대표단은 모두 이교도였다. 사실 10세기 말까지도 그리스를 포함하여 그보다 더 동쪽에 위치한 지역에서는 다수의 이교도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고, 이교의 신들에게 바쳐진 신전도 나름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당한 시기 동안 로마의 몇몇 주요 도시를 포함하여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유행하던 종교적 관점과 관행은 이교주의와 기독교가 습합된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끝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교주의가 유럽에서 결코 완전히 소멸한 적이 없으며 기독교에 동화된 형태로 존속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이교의 축제들이 매우 얄팍한 기독교적 외피를 입고 계속되었으며, 이교의 신들도 그런 식으로 많이 살아남았다."(270-1)


"배교자 율리아누스는 교회에 대한 국가지원을 중단하고 이교의 신전에 보조금을 지급했다. 그는 제국의 고위 관직을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교도들로 교체하였다. 그가 시행한 조치 가운데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고전을 가르치는 것을 불법화한 것이다. 이 법령에 따르면 상류층 부모가 자식을 이교도에게 보내어 배우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고전 교육(paideia)의 커리큘럼 안에 무의식적으로 녹아들어 있는 언어 및 표정과 더불어 무수히 코드화된 기호체계를 습득할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자녀들이 이러한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고대 로마의 엘리트 문화 속에서 경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비교적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율리아누스가 가한 가장 심한 상처〉는 끔찍한 박해의 시대가 또다시 전개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안겨준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원주의를 반대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리아누스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276-7)


"이교도의 영향과 세력의 쇠퇴는 매우 서서히 나타났는데,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에 작용한 주요 요인은 다름 아닌 기회주의(opportunism)다. 율리아누스의 짧은 치세를 제외하고 나면, 콘스탄티누스 때부터 황제의 제위는 줄곧 기독교의 수중에 있었고 이후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비록 내로라하는 이교도가 계속해서 정무직에 임명되고는 했지만 이들의 전망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게다가 교회 내에 권력과 재력이 보장된 자리가 늘어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거기에 접근할 수 없었다. 성공을 추구하는 개인과 가문이 날이 갈수록 더 많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저 브라운의 말마따나 〈기독교를 통해 권력층에 접근할 수 있다는 확신이 고조된 것은 반이교주의 법령이나 신전의 폐쇄보다 다신교의 종언을 앞당기는 데 훨씬 더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심지어 적잖은 이교 철학자들도 이교주의를 이탈하였고, 그 가운데는 기독교의 지도급 주교가 된 이들도 있었다."(284-5)


제4부 중세의 흐름


"역설적이게도 서구문명이 발흥하는 데 가장 유익을 준 요인이 바로 로마의 멸망이었다." "로마는 자유민들조차 대부분 최소한의 생존수준에서 연명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에게 보다 나은 생활수준을 성취할 만한 잠재력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약탈적 지배층이 '잉여' 산물을 다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의 붕괴 덕분에 〈그 동안 세금을 갈취당했던 수백만의 인구가 그들을 마비상태로 몰아가던 억압에서 놓여남에 따라〉 새로운 기술이 다수 출현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자리 잡으면서 보통 사람들은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으며, 수세기 동안 감소하던 인구가 마침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생산계급의 고혈을 짜내어 지배집단의 엄청난 낭비를 충당하거나, 황제의 자존심을 위해 거대 기념물을 축조하거나 숱한 식민지를 통제하기 위해 막대한 군대를 지원하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에 '암흑시대'로의 '몰락'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348-9)


# 중세의 발전

1. 기술 분야 : 물방앗간과 풍차 보급, 삼포제 경작 시행, 굴뚝과 안경의 발명 등

2. 자본주의 : 이윤, 재산권, 신용, 대출 같은 자본주의적 측면들에 대한 논의들

3. 도덕 분야 : 노예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노예제도에 반대함

4. 음악 분야 : 둘 이상의 곡조를 동시에 내어 화음을 만드는 다성음악의 출현

5. 미술 분야 : 로마네스크와 고딕 건축, 색유리 장식, 회화에 유성 안료 사용 등

6. 문학 분야 : 토착어를 쓴 단테와 초서 및 중세 무훈기를 남긴 무명의 작가들

7. 교육 분야 : 고등 학문을 다루는 대학의 등장으로 ‘새로운’ 지식을 추구함

8. 과학 분야 : 수백 년 동안 축적되어온 점진적 진보가 16세기 과학혁명 도출


"중세는 흔히 '신앙의 시대' 내지 '믿음의 시대'라고 기술되곤 하지만, 실제 중세 유럽의 대중은 의외로 회의적이었을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기독교에 대한 헌신을 결여하고 있었다." "중세기의 신앙생활에 대한 통계보고는 극히 적지만, 여러 시대와 장소에서 전해지는 신빙성 있는 보도는 의외로 많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보도의 내용 가운데 놀랍도록 일치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 대부분이 거의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지역주민들은 종종 교회건물 자체를 멋대로 이용했다. 1367년에 요크 대주교였던 존 토레스비는 교회 안에서 시장을 여는 행위, 특히 일요일에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다." "주교들마다 〈기도하는 집을 도둑의 굴혈로 만드는 자들을 질책했지만 허사였다.〉" "중세 유럽인들의 이러한 태도나 저조한 교회출석을 감안할 때, 이들 대부분이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했던 것도 그다지 놀랍지 않다."(370-6)


"중세기에 기독교에 대한 낮은 헌신도를 나타낸 것은 일반 대중만이 아니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하급 성직자도 마찬가지였다." "730년에 가경자 비드(the Venerable Bede)는 장차 주교가 될 에그버트에게, 영국의 사제들과 수도사들 가운데 라틴어를 아는 이가 거의 없으므로 〈나는 수차례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영어로 번역해서 제공했다〉고 말했다. 1222년에 옥스퍼드 회의는 교구 성직자들을 〈귀 먹은 개들〉이라고 묘사했으며, 1287년에 대주교였던 페첨은 〈사제들의 무식함으로 인해 사람들이 시궁창에서 뒹굴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성직자들이 평신도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은 단지 무식하다는 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 역시 비슷하게 방종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몬 더피의 보고에 따르면, 〈성직자들 사이에도 축첩이 만연한 탓에 무일푼의 성직자라도 집안 가득히 자녀들을 거느리고, 일요일마다 허접한 방식으로 전례(liturgy)를 집전하는 꼴이···유럽 전역에서 다반사였다.〉"(379-81)


"15세기가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로마 가톨릭의 고위성직자를 포함하여 유럽의 모든 식자층 가운데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었다. 구체(sphere)라는 용어는 13세기 초에 나온 중세 때 가장 인기 있던 천문학 교과서의 제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콜럼버스가 반대에 직면했던 것은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 때문이 아니라, 지구의 둘레와 관련해서 그가 매우 잘못된 주장을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콜럼버스는 카나리아 제도에서 일본까지의 거리가 약 4,500킬로미터라고 추산했는데 실제로는 약 22,400킬로미터에 달한다. 사람들은 지구의 둘레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콜럼버스의 항해 계획에 대해 반대한 것은 콜럼버스와 그의 선원들이 전부 해상에서 죽게 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정말 놀랍게도 콜럼버스의 항해일지와 그의 아들이 남긴 『콜럼버스 제독 이야기』를 포함하여 당시의 기록 어디서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콜럼버스가 증명해야 했다는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400-1)


"'암흑시대'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혁명'이란 것도 없었다." "존 로크는 스콜라학자들을 사소한 일에 골몰하면서 자신의 무지를 덮기 위한 방편으로 쓸데없는 용어를 만들어내는 위대한 〈조폐국장〉과 같은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다른 이들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천사가 바늘 꼭대기에서 춤출 수 있는지와 같은 터무니없는 주제를 논한다고 조롱했다. 결국 〈스콜라적〉이란 어휘는 대부분의 사전에서 〈진부하고 교조적〉이라는 말로 정의되는 형용사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16, 17세기의 위대한 과학적 성과는 경건함으로 명망이 높은 일군의 학자들이 내놓은 것이었다." "'과학혁명'의 서막을 연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생각을 난데없이 떠올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스콜라학파에 속한 교수들로부터 지동설에 기초한 태양계 모델을 가능케 하는 기초 개념들을 배웠다. 코페르니쿠스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이어져온 발견과 혁신의 긴 경로가 지향하던 그다음 단계로 나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405-6)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태양계의 중심에 두고 지구를 행성 가운데 하나로 보고서 태양 주위를 돌게 하였다. 그의 업적에 특별히 빛을 더해준 것은 그가 그것을 수학을 통해 표현한 것과 자신의 체계를 기하학을 통해 풀어냈다는 것이다. 이로써 해당되는 천체가 미래에 오게 될 위치를 계산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부활절과 하지 및 동지 등의 날짜를 확정하는 데 매우 긴요했다. 하지만 이러한 계산 결과가 기원후 2세기부터 전해져온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토대를 둔 계산 결과보다 더 정확한 것도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계 내의 궤도들이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체계를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 코페르니쿠스는 천체들의 궤도 안에는 회로(loops)가 있어서 천체들의 움직임을 지연시킨다는 가설을 세워야만 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독일의 개신교도였던 요하네스 케플러가 나타나서 코페르니쿠스의 원형 궤도를 타원형 궤도로 대체했다."(408-9)


"과학은 16세기 불현듯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수 세기 전에 스콜라학자들이 품었던 경험주의에서 비롯되었고, 이들이 혁신을 위한 체계적 노력을 경주함에 따라 새롭게 설립된 대학에서 그 자양분을 얻었다." "과학이 오로지 유럽에서만 발흥했던 까닭은 중세 유럽인들만이 과학을 연구 가능한 바람직한 대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세적 기풍(medievalism)이 과학운동의 형성에 미친 최대의 기여에는 확고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비밀, 즉 인간이 밝힐 수 있는 하나의 비밀이 있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확신이 어떻게 유럽인의 마음에 그렇게 생생하게 뿌리내리게 된 것일까?···그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합리성에 대한 중세의 고집스러운 믿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 하나님은 여호와가 지닌 인격적 활기와 그리스 철학자가 말하는 합리성을 겸하여 지닌 존재로 이해되었다.···따라서 자연에 대한 탐구는 합리성을 통한 신앙의 논증으로 귀결될 뿐이다.〉"(415-6)


"갈릴레이가 로마의 이단심문소에 소환되어 지구가 움직인다고, 즉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고 하는 이단적 가르침으로 인해 고발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는 투옥된 적도, 고문을 당한 적도 없다. 그는 가택연금에 처해졌고, 그러던 중 향년 78세로 사망하였다." "갈릴레이 사건은 역사적 맥락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북유럽에는 종교개혁의 도전이 여전했고, 30년 전쟁이 한창이었으며,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이 최고조에 달했었다. 가톨릭교회가 성경에 충실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개신교의 고발에 대해 부분적으로 대응하는 가운데 신학의 수용 범위는 축소되고 있었다." "초기 과학자들은 과학적 결론을 가설적 내지 수학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거기에 직접적인 신학적 함의가 없다고 주장하는 보다 신중한 전략을 채택했었다. 교황이 갈릴레이에게 요구한 것도 〈자연과학을 통해 결정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422-3)


제5부 분열된 기독교 세계


"수 세기 동안 교회는 대중적인 개혁가들의 활력을 새로운 수도회 창설로 유도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위험한 대결을 비껴가게 해주었다." "성 프란치스코(1181-1226)가 이단으로 기소되지 않은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는 결코 성직자로 서품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대중 앞에서 청빈과 겸손의 덕에 대해 설교하였고, 이는 특별히 성직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1209년, 그는 열한 명의 제자를 데리고 로마로 가서 교황을 알현하여 새로운 수도회의 설립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은 매우 아슬아슬한 간발의 차로 허락되었다." "도미니코(1170-1221)는 1214년 툴루즈에서 탁발수도회를 설립했는데, (공의회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교황 호노리오 3세는 1216년에 그 수도회를 인가하였다. 이들 역시 창시자의 이름을 따 도미니코회라고 불리게 되었다. 프란치스코회와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교회개혁을 위한 대중적 설교를 사명으로 출범하여 교황을 지지하는 대중적인 설교로 전환되었다."(447-8)


"최초의 거대한 이단운동인 카타리파(Cathars)는 10세기 불가리아에서 발생한 보고밀(Bogomil) 운동에 그 기원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 기원이 어디였든 간에, 카타리파는 〈가톨릭교회를 대놓고 사탄의 교회라고 부르면서 교회에 대해 직접적이고 저돌적인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들이 서유럽에서 신속하게 추종세력을 얻게 된 것은 교회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불만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카타리파의 신학은 초기 영지주의의 신학과 매우 유사했다. 두 신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선한 신이고, 다른 하나는 악한 신이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물질세계가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끔찍하고 사악하기에, 선한 신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음을 증명해준다. 따라서 카타리파는 세계가 악한 신(타락한 천사)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이 악한 신은 다름 아닌 구약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쳤다. 그리스도는 선한 신이 보낸 천사였으며, 그의 메시지는 이 세상의 악을 거부하고 선한 신과 인격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었다."(451)


"카타리파가 일부러 교회 밖에서 출발했다고 한다면, 발도파(Waldensians)는 처음부터 교회개혁에 전념했던 수도원 운동의 초기 형태로 시작했다. 이 집단은 피에르 발도 내지 발데스라고 불리는 리용의 부유한 상인에 의해 창시되었다. 1176년 발도는 자기가 의뢰한 신약성경의 프랑스어 번역을 읽고 난 후 복음서가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는지 깨닫게 되었고, 곧이어 자신의 재산을 모두 희사한 후에 사도적 가난(apostolic poverty)을 주제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즉시 그의 주변에는 추종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리용의 빈자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179년 발도파의 대표들이 로마로 가서 교황의 공식 승인을 요청한 것은 상당한 염려를 불러일으켰다." "교황은 그들의 생활방식은 축복했지만 그들이 설교하는 것은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설교를 중단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1184년 교황 루치오 3세는 이들을 이단으로 단죄하였다."(454-5)


"루터를 파문한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는 자신을 인문주의자이자 지성인으로 내세웠지만, 실상 그는 가장 악명 높은 〈게으름뱅이였으며···교회의 필요가 아닌 화려한 볼거리와 도박에 돈을 탕진한 희대의 탕아였다.〉 돈에 대한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그는 면죄부 판매를 위한 공격적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루터를 격분케 하고 많은 군주들을 루터 편으로 돌아서게 한 요인이었다. 영주들 편에서는 면죄부 판매에 대해 굳이 신학적 반대 가은 것이 있을 필요도 없었다. 면죄부 판매로 인해 막대한 양의 부가 그들의 백성들로부터 로마로 유출되는 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했다. 게다가 교회는 단연코 유럽에서 최고의 부자이자 최대의 지주였다." "교회는 소유 재산에 대해 일체의 지방세를 납부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더군다나 교회는 엄청난 양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대부분의 유럽에서 소작농으로부터 국왕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십일조를 부과함으로써 축적한 것이다."(468-9)


"이 시기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확고한 발판을 마련하게 된 루터의 종교개혁 및 기타 개신교 종교개혁에는 엄청난 역설이 존재한다. 이 '개혁들'은 지속되지 못하였다. 개혁의 각 주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속화된 종교적 독점이 주는 여러 가지 폐해를 노출했던 반면에, 그들이 반기를 들었던 가톨릭교회는 극적인 과정을 거쳐 개혁을 위한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는 개신교의 도전으로 인해 경건형 교회가 (권력형 교회를 제치고) 권력에 복귀하게 된 것에 기인하며, 이 교회는 그 후로 다시는 위축되지 않았다. 반종교개혁이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진 가톨릭의 종교개혁은 트리엔트 공의회(1551-1552, 1562-1563)를 통해 출범하였다. 성직매매가 근절되었고, 사제에 대한 독신이 강력히 시행되었다. 각국의 언어로 된 공인판 성경이 저렴하게 보급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소명감이 확실하고 박식한) 사제 후보자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 체제가 확립된 것이라고 하겠다."(479-80)


제6부 신세계와 기독교의 성장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주에서 나타난 매우 낮은 수준의 종교적 참여도는 초기 정착민들이 유럽에 만연하던 현상을 그대로 가지고 왔음을 시사한다. 식민주의자들 가운데 미국에서 시온을 건설하려는 뜻을 품고 있던 종파에 속한 신자는 거의 없었다." " 그러나 유럽에서 기독교가 누리던 신앙의 게으른 독점은 미합중국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독립전쟁이 끝난 후 (식민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던) 국교회 체제는 지속되지 못했다. 1776년에 이미 다종파적 상황이 실질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여러 개신교 교파들이 새롭게 등장함에 따라 급격히 확대되었다. 이러한 교파들은 대부분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이들 교파들은 모두 동등한 조건하에 설립되었으므로 정부의 편파적 지원 같은 것이 없었고, 교인들을 확보하기 위해 교회들 간에 극심한 경쟁이 유발되었다. 미국인들을 신앙을 위해 동원하게 된 것은 〈기적〉이었다. 그 결과 1850년이 되면 미국인의 삼분의 일이 지역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513-6)


"종교 간의 경쟁이 '값싼' 종교를 선호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은 가격을 가치로 오인한 것이다. 소비시장의 작동방식을 살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대개 최저가의 제품을 서둘러 구매하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돈에 견주어 최대의 가치를 제공하는 상품을 선택함으로써 효용을 극대화하려 한다. 종교의 경우, 사람들은 최소한의 것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정당한 희생에 대해 종교적으로 최고의 보상을 제공하는 신뢰성 있는 종교로 몰려간다." "미국에서 번창하는 초교파교회들은 요구하는 것이 매우 많은 교회들이다." "요구하는 것이 많은 종교 집단은 요구하는 것이 적은 종교보다 구성원들의 마음을 더 많이 끌고 그들을 교회에 붙잡아두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한 종교 집단은 새로운 교인들을 충원한다. 다시 말해서 그 교인들은 너무나 헌신된 나머지 다른 이들을 교회 울타리 안으로 데려오려고 애쓴다. 요구하는 것이 덜한 종교의 교인들은 이러한 일을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520-5)


"다종파적 상황이 모든 종교를 약화시킨다는 주장이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널리 받아들여졌던 것처럼, 다종파적 상황이 종교적 갈등을 유발하여 심한 경우 전쟁이나 박해로까지 이어지기 마련이라는 생각도 당연시되어왔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유혈사태가 야기된 것은 바로 단일 종교 체제에 맞서는 도전자들을 진압해온 정책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애덤 스미스는 종교적 갈등은 한 사회 안에 너무 많은 종교 집단이 경쟁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적은 종교 집단[의 독점]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상호경쟁적인 종교들이 존재하는 곳에는 '종교적 시민의식'의 규범이 발달하여 '다종파간의 균형'이 생겨나게 된다. 종교적 시민의식의 규범은 공적인 표현과 행동이 상호 존중의 원리에 따라 통제될 때 생겨난다. 다종파 간의 균형은 일단의 경쟁 집단들 간에 권력이 고르게 분산되어 갈등이 어느 편에도 이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생겨난다."(528-30)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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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전 - 문학의 프로이트, 슈니츨러의 삶을 통해 본 부르주아 계급의 전기 서해역사책방 14
피터 게이 지음, 고유경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제1부 부르주아지의 토대


1 부르주아지(들)


"19세기 부르주아지를 정의하기가 더욱 까다로운 이유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는 정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부르주아 중 상당수는 부와 위신, 명성, 사회적 상승에 대한 크나큰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았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유능한, 운좋은, 또는 매우 파렴치한 사람들의 사회적 상향이동이 활발히 일어났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존 록펠러나 앤드루 카네기에 필적하겠다는 희망을 품을 만한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거대한 부를 축적한 이 두 사람의 신분상승은 전설로 남아 사람들의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모험심 강한 부르주아 중 몇몇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도 급속하게 출세했다. 평범한 지방 공증인의 아들인 외젠 슈나이데르와 아돌프 슈나이데르 형제는 한 세대 만에 프랑스의 철강왕으로 등극했다. 카네기 역시 스코틀랜드에서 가난한 가족과 함께 미국에 도착하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 중 하나가 된 전설적인 인물이다."(30)


"사회·경제적 성공담을 양산하는 역사적 계기는 특히 미국에서 지속적이고 매혹적으로 작용했다. 전설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이 거대한 나라는 신속한 성공이라는 백일몽을 꿈꾸는 많은 유럽 사람들로 하여금 대륙을 떠나게 만들었다." "19세기 중반 이래 빅토리아 시대에 범람했던 성공문학, 즉 언제나 해피엔드로 귀결되는 현대판 동화들은 각국 출판업자들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 허레이쇼 앨저의 인기 소설들은 주로 무일푼 고아의 신분상승을 소재로 삼고 있는데, 그는 이런 기적적인 성공담을 100편 넘게 남겼다. 그의 책들은 작가의 창조력에 바치는 찬사와도 같다. 앨저와 그 아류 작가들은 개방된 사회를 묘사하는 대신에 사람들을 감격시켰던 백일몽, 즉 단숨에 재산을 축적하고 그것은 어떠한 장애물로도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미국에서 성공과 실패의 양극단 사이에는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했다. 신분상승의 사다리에는 부러진 가로대가 많았던 것이다."(31-2)


"오스트리아 부르주아지가 정치적 자유의 확대에 소극적이면서도 그 이득을 탐하는 일군의 무기력한 종복 역할에 만족할 때, 다른 나라에서는 정치적 열정을 품은 부르주아들이 정책결정자들의 회의장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19세기 초부터 유럽 각국의 정치 형태는 헌법 없이 통치하는 군주국으로부터 의회와 협상하는 군주국, 대통령제를 표방하는 공화국으로부터 폭력으로 헌법이 흔들리는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은 잠정적으로 라인 강 동쪽에서 중간계급의 정치의식을 확실히 고취시켰는데, 북부 프랑스와 도버해협 저편에서는 이미 그러한 의식을 갖추고 있었다. 혁명과 나폴레옹의 시대가 풀어놓은 중간계급의 열망이라는 마귀를 다시 병 속에 가두려고 누구보다도 애썼던 메테르니히는 1820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 〈오만불손이라는 도덕적 타락〉에 빠진 사람들은 〈주로 사회의 중간계급〉이라고 말했다."(50)


"자의식보다는 공포심에서 나온 프롤레타리아를 향한 격렬한 거부감은 중간층에게 현실 상황 못지않게 의식이야말로─비록 내적인 차이나 극복하기 힘든 지속적인 긴장이 있었더라도─공동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음을 시사한다. 이 정체성은 대체로 부정적인 요소에 의존하고 있는 듯하다." "보통 부르주아의 특징은 대체로 중간계급의 일원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말에 대한 금지라고들 한다. 그러나 만일 부르주아의 모토가 자기부정이라면, 이는 그들의 열정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길들여졌기─프로이트의 표현으로는 〈다듬어졌기〉─때문이다. 거친 농민이나 노동자, 혹은 방종한 귀족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에 따르자면 근대 부르주아지는 그 원시적인 충동을 다른 어떤 계급보다도 철저하게, 그리고 특히 19세기에는 가엾게도 노상 억눌렀던 계급이다. 하지만 다듬어졌다는 것이 부정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부르주아의 쾌락은 자제를 통해 통제, 완화, 조정되었다."(52-3)


"또 다른 부정적 요소가 19세기 부르주아로 하여금 공동의 정체성을 갖게 했다. 그들은 대소를 막론하고 모든 도시에서 확실히 소수 집단이었다." "부르주아는 의복, 음식, 억양, 취향 등 온갖 방식을 동원해서 자신들을 '열등한' 사람들과 구별하고, 주변 대중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켰다." "그러나 이 격동의 시대에─프랑스 대혁명에서 제1차 대전의 발발에 이르는 19세기에는 무수한 바리케이드전이 벌어졌다─대다수 하층계급의 존재는 불길한 징조였다. 그 때문에 부르주아는 사회 불안이 아니었다면 시도하지 않았을, 귀족이나 선동가와의 편의상의 협력 같은 방어조치를 취했다. 바로 이 순간 부르주아는 질서당의 주역이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기억이 서서히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적어도 반세기 이상 대부분의 부르주아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것은 몇몇 사람들에게는 용기를 주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면서, 다양한 색깔의 부르주아를 단합시키는 심성을 만들어냈던 것이다."(53-5)


"이 시대의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그 적들, 즉 점차 증가하는 일군의 난폭한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예술가들에 의해 정의되었다. 이들 중간계급의 적이야말로 부르주아 내부의 다양성을 근거 없이 간과하게 만든 무책임한 일반화를 야기한 장본인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악역을 맡아서 부르주아의 미덕에는 입을 다문 채 온갖 악덕만을 지적했다. 화가, 소설가, 극작가, 문화평론가, 급진 정치가, 진보적 언론인, 그리고 중간계급의 모반에 격분한 귀족들은 19세기 부르주아지가 위선적이고 물질을 숭배하며 저속하고 관대함이나 애정 따위는 결여한 존재라고 떠들어댔다. 이 부르주아지의 적들은 기회만 있으면 또 다른 경멸어린 부르주아상을 만들어냈다. 즉, 욕심 많고 파렴치하며 권력에 굶주리고 무정하며 자신을 성장하게 한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존재로서의 모습이다. 이들의 시각대로라면 너그러운 토머스 칼라일이 산업의 지도자로 찬미했던 금융가들과 공장주들은 강도 귀족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55)


2 "홈, 스위트 홈”의 그림자


"19세기 중간계급 가정에서 진행된 오이디푸스 갈등극은 부르주아의 재산 증대, 산아제한의 확산, 그리고 노동 영역에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뚜렷해진 남녀의 분리, 요컨대 저 유명한 근대 가족의 승리를 반영한다. 근대 가족은 그 부드러운 측면과 권위적인 측면 모두에서 삶의 연습무대였다. 그것은 의식적·무의식적 요구들을 만족시키기도 했지만, 마찬가지로 중요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기도 했다. 19세기 부르주아지가 조상들보다 자녀들을 더 많이 사랑했던 것은 아니지만, 새롭고 안정된 삶 덕분에 자녀들에게 좀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과 돈이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정 숭배는 자녀들과 보내는 시간을 늘렸으며 그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핵가족의 등장과 마찬가지로 가정에 대한 애착 역시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빅토리아 시대에는 그 강도가 높아졌으며 그 의미 또한 전에 없이 이상화되었다. 부르주아 문화는 남성에게 가족을 물질적 성공을 추구하는 주된 동기로 여기도록 가르쳤다."(69-73)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부분에서 반(反)권위적인 부르주아 가정은 진보하지 못했다. 부르주아 가정은 평등을 부여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정은 아내에게는 피난처인 동시에 감옥일 수 있었다." "여성의 우위는 감성 영역, 즉 심미적 감수성, 여성적 갈망, 어머니의 지혜, 본능적으로 나타난 사회적 미덕 등에 국한되었다. 남녀의 역할분리는 편리하게도 여성을 투표할 권리,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 독립적으로 은행계좌를 개설할 권리, 이혼절차의 평등, 그리고 그 밖에 남성의 영역으로 알려진 다른 권리로부터 배제시켰다. 19세기 말 남편이나 애인 살해로 법정에 선 프랑스 여성들이 통상 무죄 방면되었다는 사실은 페미니스트들을 위로하지 못했다. 이러한 방면의 이유는 대개 피고의 타고난 비합리성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이 특정 부분에 있어 본래 무능하다는 사고방식은 흔히 신성불가침의 전통으로 생각되는 미신적인 확신에 근거하고 있었으며 많은 남성들을 만족시켰다."(77-8)


"부르주아 가족의 삶을 변화시킨 빅토리아 시대의 조용한 혁명 중에서도 낭만적 사랑, 혹은 그렇게 간주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듯하다. 대중소설, 감상적 그림, 시와 노래를 통해 대중화된 낭만적 사랑은 재산보다는 사랑으로 인생의 동반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낳았다." "세기말에 이르러 여성들은 점차 일자리를 얻고 대학에서 의학을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서 공부했으며 그 법적 지위도 개선되었다. 그리하여 연애결혼을 하려는 노력은 예외라기보다는 법칙이 되었다. 그것은 쉬운 싸움이 아니었으며, 제1차 대전 이전에는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내지도 못했다. 조화로운 연애결혼은 성적으로도 서로 어울린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그것은 성적 만족이 애착이나 영원한 성실만큼이나 진정한 사랑을 정의하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에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영위하는 부르주아지는 이러한 긴장을 가정생활과 침대, 육아실, 부엌에서 해소할 수 있었다."(89-92)


제2부 욕망 그리고 방어


3 에로스


"동성애에 대한 점잖은 사람들의 태도는 주로 고상한 척 회피하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헝가리 의사 카롤리 마리아 벵커트가 1869년 이 교묘한 용어를 만들어낸 후로는 더 이상 비밀스런 주제가 아니었다. 세기말인 1895년 오스카 와일드의 센세이셔널한 재판이 진행된 뒤에 이 주제는 점차 널리 알려졌고 많은 이들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비록 '도착증'이라든지 '역(逆)성감' 같은 무화과 잎으로 점잖게 감춰지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말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은 동성애를 신의 계명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이러한 성적 행동에 모종의 순수함을 부여하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그리스 식 사랑에 비유하곤 했다. 플라톤을 읽은, 즉 고전교육을 받은 교양 있는 부르주아에게 고대 아테네 문화의 권위는 결코 퇴색하지 않았다. 나이 든 남성이 미소년을 사랑하는 관행은 특정 상황에서는 사회적으로 용납되기도 했을 만큼 결코 은밀한 행동이 아니었다."(101-2)


"슈니츨러와 '귀여운 아가씨'들의 관계를 보면 그가 소년기의 갈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으며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명확하게 찾아내지 못했다는 의혹이 생긴다." "슈니츨러는 계속해서 '귀여운 아가씨'들과 정의 상 이미 누군가에게서 '순결'을 잃은 유부녀들 사이에서 숫처녀를 찾아 헤맸다." "절대적인 성적 순결에 대한 슈니츨러의 갈망은 이따금 찾아오는 불안이 아니라 중증 질환이었다." "슈니츨러가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자신의 직·간접적인 여성비하가 전통적인 이중 도덕을 가진 대다수 부르주아 계급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이런 뻔뻔한 일면과 달리 슈니츨러는 불쾌한 남성 주인공들을 창조하여 자신의 너무나도 진부한 남성 이데올로기를 풍자할 만큼 복잡 미묘한 인물이었다. 그의 주인공들은 뻔뻔한 이기주의자이자 동침한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하면서도 결혼할 생각이라고는 없는 도시 남성, 요컨대 그 자신이었다."(105-9)


"19세기 페미니스트들의 격렬한 저항과 그들의 유례없는 승리는 남성이 여성의 행동을 지배한다는 전통적인 도덕관에 대해 점증하는 불만의 표시였다." "가장 원칙론적인 페미니스트들은 대개 중간계급 출신의 이상주의적인 여성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보헤미안들이나 부르주아를 증오하는 급진주의자들보다는 오히려 같은 계급의 소수 남성들로부터 충성스런 지지를 받았다. 이들 모두는 사회적 지위를 불문하고 지배적인 문화적 행동방식에 도전했다. 여기에는 에로스가 여성의 삶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포함되었다." "그것은 처절한 투쟁이 되었다. 왜냐하면 성모마리아의 이야기를 동화로 여기는 부르주아에게 처녀성 숭배는 종교적 도그마와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 독실한 프로테스탄트와 유대인들은 이런 도그마를 강화시켰으며 그것을 위반하는 사람들을 처벌했다. 그것은 중간 계급에게는 사회적 지위와도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였다."(113-4)


"빅토리아 인을 경멸하는 역사가들은 당시의 부르주아 남편들이 결혼생활에서의 성적 좌절을 보상받기 위해 정기적으로 매춘업소나 합창단원들에게 의지하거나 정부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비방을 한 세기 이상 반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 시대 중간계급의 생활을 특징짓는 풍부한 가능성을 왜곡하는, 악의적이며 근거 없는 또 하나의 전설이었다." "오히려 가장 널리 사용된 치료법은 부부간의 더 잦은, 그리고 보다 나은 성관계였다." "점잖은 부르주아를 만드는 도덕적 훈련은 타고난 야만적 욕구를 사랑의 만족감으로 문명화시키는 작업을 포함해야 했다. 당시 대부분의 교육자들에게 절제와 금욕은 동의어나 유의어가 아닌 반의어였다. 빅토리아 인은 정신분석학자들이 '승화'라고 불렀던 것을 굳게 믿었다. 말하자면 성욕을 예술적·지적·수공업적 활동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부르주아는 훗날의 비판자들이 주장했던 것보다 더 자주 부부의 침대에 금욕보다는 절제라는 단어를 적용시켰다."(118-9)


4 공격성을 위한 변명


"인간이 강한 공격 충동을 타고났다는 것을 의심하는 빅토리아 인은 드물었다. 그러한 논의에 무언가 모호한 부분이 있었다 해도, 1859년에 찰스 다윈이 획기적인 『종의 기원』을 발표한 후로는 사라졌다. 이제는 고전이 된 이 책의 논점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에게 공격욕은 생래적이라는 것이다. 다윈의 무신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살아남는다는 것은 야성적인 생존투쟁의 결과이며, 이런 투쟁은 인간적인 계획에서 벗어남에 따라 더욱 끔찍해진다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기독교의 계명은 심각한 경쟁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악덕기업가들은 이 새로운 섭리를 환영했는데, 그것은 다윈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인 사회진화론자들이 정치와 산업, 외교와 사회정책에 나타난 냉혹함을 정당화시키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좀 더 온건한 다윈 추종자들은 완전히 반대로 해석했다. 조직화된 사회가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경고로 본 것이다."(139-40)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에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가하는 데  따르는 쾌감은 점차 사라지고는 있었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동정심 어린 반론이 여러 부모와 교사, 그리고 작가들 가운데 상당한 지지자들을 확보했다." "빅토리아 시대에 가정 폭력이 그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면,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폭력에 대해서도 동일한 진단이 가능하다. 국왕의 총애를 잃은 정치가들의 운명은 특히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16~17세기에는 그들 대부분이 단두대로 보내졌다. 18세기에 그들은 자신의 지방 영지로 '추방'되어 정치판에서는 무력하고 무능한 방관자가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면 그들은 근대적 발명품의 이득을 누렸으나, 공직을 떠나서도 생명과 재산을 유지할 수 있는 공인된 야당을 결성했다. 심지어 그들은 계속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남았으며 향후에는 관직에 복귀하리라는 실현가능한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150-2)


"1871년 늦은 봄 파리 코뮌에 가해진 프랑스 군대의 보복 행위는 정부의 가혹한 억압에 담겨 있는 공적 복수의 사악함을 잘 보여준다." "코뮌의 운명은 프랑스의 쓰라린 군사적 패배 이후 더욱 잔혹해진 왕당파의 복수심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많은 부르주아로부터 환영받은 계급투쟁이기도 했다. 코뮌 이후 프랑스 작가들이 펼친 부르주아 변호론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시인이자 평론가, 소설가인 테오필 고티에는 코뮌 지지자들을 〈야수〉, 〈고릴라〉라고 불렀다. 플로베르의 친구이자 자유주의적 시사평론가이며, 선구적 사진작가이자 파리의 역사를 쓰기도 했던 막심 뒤 캉은 그들을 일러 정치라고는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애에 빠진 야심가들이며 권력에 도취된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극작가 에르네스트 페도도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이제 야만도 미개함도 아니라 단지 수성(獸性) 그 자체〉라고 선언했다. 야만적인 〈문명의 구세주〉에 반대하는 의견이라고는 한마디도 찾을 수 없었다."(154-5)


"그러나 미국 독립선언으로 폭발한 진보적 열정은 반세기 동안의 헛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은 수십 년간 지속된 정치적 반동에도 불구하고 잊혀지지 않았다. 빅토리아 시대의 노예제 폐지운동과 사회입법의 역사는 자유주의자들의 반격이 말과 행동으로 인도주의적 개혁을 고무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19세기 중반의 부르주아 다수는 10시간 노동제, 아동노동 금지, 문맹 퇴치, 그리고─용감한 소수는─여성참정권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거나 적어도 거기에 동의했다." "노예폐지론자들조차도 마음속으로는 흑인들을 형제로 간주하지 않았지만 흑인과의 연대 캠페인을 계속했다. 그러나 자신의 인종, 국가, 종교가 진화의 나무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이 편리한 확신은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긴요한 경제적·영토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을 때, 인종 간의 위계에 대한 사악한 가르침은 많은 예민한 양심을 무디게 만들었던 것이다."(157)


"슈니츨러가 생각하기에 인종주의적 주장을 낳은 열광과 정치적 기회주의가 혼합되어 발생한 반유대주의적 사건들은 근대 대중정치가 〈대중이 가장 저열한 본능〉에 호소함으로써 얼마나 심각하게 타락할 수 있는가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정치가들은 종교를 불문하여 실제 경제 악화나 정부의 추문에 책임이 있는 개인에게 화살을 겨누는 것보다 유대인들을 원흉으로 선택함으로써 경제적 동요와 정치적 부정행위가 결합된 복잡한 망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더 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슈니츨러는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고찰은 공격성을 위한 변명이 어떻게 적용하는가를 보여주는 날카로운 진단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적이 필요했으며, 공격자들은 적의 죄상을 크게 왜곡하거나 심지어 날조하기까지 했다. 한 세기 전 윌리엄 블레이크는 일반화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또한 누군가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바보들을 동원하는 수단이기도 했다."(164)


5 불안의 이유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이 겪었던 신경과민증에 누구보다도 심하게 시달렸다. 그러나 그에게 좋은 동반자들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는 다른 시대의 부르주아보다 더 많이 불안해했다는 징후가 보이기 때문이다. 불안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겠지만, 불안을 근대의 질병으로 진단하고 그것에 전문용어, 즉 신경쇠약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던 사람들이 빅토리아 인이었다는 사실은 꽤나 그럴 듯하다." "19세기인은 불안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비합리적일 수도 혹은 현실적일 수도 있었고, 내면의 스트레스 혹은 객관적인 경고 신호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완벽한 대담성이라는 빅토리아 시대 남성성의 이상은 현실의 삶을 위해서는 빈약한 준비임이 분명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한 것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상황이든, 이념이나 소망이든 말이다."(177-8)


"신경증의 원인으로 제일 먼저 의심받은 것은 산업 시대의 개막과 밀접하게 연관된 전문화였다. 비판자들의 추론에 따르면, 다양한 인간 활동 대신에 나타난 무서운 고독이야말로 공장제가 그들이 장악한 노동자들에게 가한 직접적 결과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가난한 노동자들이 그 주된 희생자로 여겨졌다. 근대적 노동 분업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던 1776년 애덤 스미스는 걸작 『국부론』에서 그 야누스적 성격을 명료하게 분석했다.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이 새롭고 효율적인 방법은 동시에 노동자들의 정신과 영혼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단조로운 임무를 날마다, 해마다 수행하는 것은 공장노동자들에게서 인간으로서의 존립에 바탕이 되는 잠재력을 발전시키는 능력을 빼앗을 수 있다. 그들은 사실상 인간 이하의 존재로 떨어지고, 풀려날 전망이라고는 없는 냉혹한 메커니즘의 노예로 강등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 역시 암울한 시대의 희생자에 포함되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184)


"19세기 사회학자들은 이런 치명적인 결함을 설명하기 위해 난해한 개념들을 동원했다. 헤겔이 처음 받아들였고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비판의 무기로 사용한 '소외' 개념은 쉴러에게 '파편화'라는 용어가 수행했던 기능을 떠맡았다. 마르크스가 언급했듯이 빅토리아 시대의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일하든 책상 앞에서 일하든 자신의 동료와 노동,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이방인이 될 운명이었다. 전체성은 영원히 그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을 것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하에서 부르주아는 물론 다른 계급도 마찬가지로 탈도덕화─그 말의 모든 의미에서─된다고 주장했다. 또 1900년 무렵 에밀 뒤르켕은 '아노미'라는 신학 용어를 세속화시켰다. 이는 당시 만연했던 개인주의의 위험한 측면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이와 같은 자기중심주의가 서구 사회를 건전한 공동체로 구성하는 데 필요한 견고한 집단적 결속을 이완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학적·역사적 평가는 막연한 사회적 불안에 확실한 토대를 제공했다."(185)


"유독 19세기에 신경증 현상이 증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의사들이 전에 없이 여성 환자들에게 주의를 기울였으므로 예전보다 신경쇠약증이 더 많이 사람들의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의료화라고 불리는 시대현상을 반영하는데, 이는 불편한 기분과 이상한 행동의 원인을 신의 징벌이나 악마에 사로잡힌 결과로 보기보다는 정신적 상태로 돌리려는 경향을 뜻했다." "19세기 부르주아의 삶에 내재한 강력한 불안을 증언하는 상세한 기록들은 어쩌면 초보적이고도 진부하게 들리는 근본적 동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변화'였다. 역사가는 과거가 연속성과 변화 사이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변화는 개인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간에 연속성의 토대 위에서 그 흔적을 드러낸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 대다수는 확실히 연속성을 지배적인 현실로 경험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불안이라고는 없었다."(192)


제3부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


6 신의 죽음 그리고 부활


"세속화의 진전에 대한 반교권주의자들의 희망은 자연의 민주화 과정으로 연결되었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세기 전환기 무렵 니체의 명성이 심지어 그의 책에 대해서는 그저 몇몇 인용구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었을 즈음, 용감하게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1908년 토머스 하디는 신의 장례식에 대한 장중한 시를 썼다. 그러나 이런 부음은 다소 성급한 것이었다. 다윈의 시대는 동시에 교황 피우스 9세의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누군가는 적자생존을 이야기했던 반면 다른 경건한 누군가는 성모마리아가 현현했다는 장소를 순례했으니, 양자는 다소 거북스럽지만 공존했다. 종교에 대한 공공연한 선언들, 예컨대 교회 학교, 교회 건축, 정치적 행동, 교의와 의식을 둘러싼 논쟁은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적 지형에서 가장 시끄러운 말썽을 일으켰고, 작은 다툼에서 큰 전쟁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형태의 분쟁을 낳았다."(218-9)


"따라서 당시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던 빅토리아 시대가 세속화되고 있었다는 명제는 역사가들의 신중한 검토를 요한다." "이성적이고 정직한 많은 빅토리아 인은 오랫동안 신앙과 불신앙에 대해 똑같이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근거들 사이에서 방황하며 자신을 고문했다. 허먼 멜빌도 그중 하나였다. 1857년 가을 그는 친구인 너대니얼 호손의 집에 며칠간 머물렀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산책하고 시가를 피웠으며 영혼의 불멸성을 포함한 난해한 주제들을 토론했다. 〈멜빌은 확실한 신념을 가질 때까지는 결코 지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를 알고 지낸 뒤에, 아니 그 훨씬 전부터, 그가 얼마나 이 황량한 지대, 우리가 앉아 있는 모래언덕처럼 단조롭고 음산한 곳에서 흔들리며 방랑을 계속하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그는 신앙을 가지지도 못하고, 속편하게 부정하지도 못한다. 그는 둘 중의 하나라도 감행하기에는 너무나 정직하고 용감하다〉고 호손은 일기에 적고 있다."(224-5)


"19세기 초에 '각성'을 깨뜨리는 작업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관점에 따르면 볼테르, 흄, 기번, 디드로, 그리고 나머지 불경한 무리를 포함한 계몽주의자들은 탈도덕적 자연과학, 이교적인 미덕의 개념, 종교적 관용에 대한 무책임한 요구, 교회와 성인, 신의 역사를 교활하게 모독하는 선전을 통해 시를 삶의 밖으로 밀어낸 사람들이었다. 낭만주의에 따르면 계몽주의의 신봉자들은 종교를 가장 사악한 부정행위로 취급했으며 세상의 모든 악덕에 대한 책임이 종교에 있다고 여겼다. 그 무서운 결과는 바로 최근의 역사적 사건에 나타났으니, 무신론적인 프랑스 대혁명의 발생과 진정한 신앙이 사회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비참하게 밀려난 사실이 그것이었다." "독일 낭만주의자들에 따르면 시에 대한 계몽주의자들의 공격은 운율의 즐거움에 대한 단순한 공격보다 훨씬 더 지독한 것이었다. 그것은 삶을 무미건조하게 만들면서 종교가 삶에 주는 진실과 위안, 기적적인 은총을 빼앗는 것이었다."(227)


"기독교의 패배가 언제나 무신론자들에게 이익을 준 것은 아니었다. 바그너가 불러일으킨 북유럽 예찬 같은 독특한 신앙은 몇몇 시끄러운 지지자들을 갖고 있었다." "신지학의 창시자인 블라바츠키 부인은 과학과 종교와 철학의 종합에 불과한 자신의 '은밀한 교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독재적으로, 전지적으로, 그리고 설득력 있게 선전했다." "메리 베이커 에디가 창시한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명칭 자체가 간결한 자기표현이자 뛰어난 운동구호로서, 과학적 세계관을 지향하는 시대 조류에 현명하게 발맞춘 것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대안들은 심령론이라는 개념으로 뭉뚱그릴 수 있는데, 그것은 고대에 기원을 두고 새로이 나타난 신앙체계 중에서도 가장 널리 전파된 것들이었다. 많은 빅토리아 인은 교회의 가르침을 더 이상 충실하게 따를 수 없으며 논리적·역사적·도덕적인 이유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이 차갑고 비인간적이라고 깔보았던 자연과학의 도그마로 대체할 준비 역시 되어 있지 않았다."(232-3)


"당시 농촌 사회와 종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유일한 존재는 농민들과 접촉했던 프로테스탄트 및 가톨릭 성직자들이었다. 그들은 농민들의 도덕을 감독했으며 그들을 전도하여 신앙심을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그들의 보고는 단편적이었지만, 19세기 농민들이 경건한 신앙인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교회에 출석하거나 유서 깊은 의식에 참여하는 일이 결코 신실한 신앙심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로마 가톨릭 지역에서 흔해 행해진 성지순례나 축제행렬은 성직자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걱정시켰다. 그것들은 음주가무, 그리고 여기에 수반되는 온갖 일들과 더불어 점점 세속화되어 종종 부도덕한 오락이 되었다. 성직자들이 이런 볼썽사나운 행동에 당황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세속적인 표현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단정하기란 쉽지 않다. 신앙심과 탐욕은 종종 한 사람 내부에 공존하며 대체로 분리하기 어려웠다. 이는 어느 정도 취향의 문제였다."(245)


7 의심스러운 노동의 복음


"부르주아 십계명 중 하나인 노동의 복음이라는 이 경건한 표현은 지극히 적절하다. 왜냐하면 중간계급 이론가들에게 노동의 이상은 단지 꾸준한 근면함 이상의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노동은 하나의 윤리적 명령으로서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가 가치를 두었던 것들을 많이 내포했으며, 선량한 시민이라면 지켜야 한다고 느꼈던 원칙이었다. 그것은 기업가, 고객, 경쟁자들과의 정직한 거래, 자기수양, 가족에 대한 전적인 헌신, 의무에 대한 경각심에 관한 것이다. 노동은 영혼을 정화하는 존재였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신앙심이 돈독한 빅토리아 인조차 감히 복음을 수정하려 하지 않았다. 성경에 따르면 노동은 신이 불복종이라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아담과 이브, 그 후손들에게 내린 엄벌이었다. 반면 19세기 부르주아 이론가들에 따르면, 노동은 죄를 예방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노동하는 것은─물론 이것은 부르주아에게는 은유적 표현일 뿐이었다─기도만큼이나 효과적이리라 여겼다."(254)


"근대 부르주아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노동의 미덕에 대한 찬양은 돈벌이에 대한─확실히 저속한 이상이었다─장려를 내포한다. 그러나 굳이 변명하자면, 이러한 이상을 택한 사람들이 돈벌이 자체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자주 인용되는 프랑수아 기조의 말, 즉 그가 수상으로 재직할 당시 하원에서 〈부자가 되라〉고 말한 것을 프랑스 인들에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권고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의 다음 말은 〈노동하고 검약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 그는 의원들에게 노동과 절약을 통해 부를 추구하라고 권고하면서, 또 다른 부르주아의 이상을 호소했다. 그것은 자제(self-control)였다.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지를 가장 열렬히 증오한 사람들 중 일부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심지어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사명에 헌신하고 거기에 오랜 시간을 할애하는 부르주아의 노동 윤리에 얽매여 있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258)


"노동의 복음은 단연코, 그리고 거의 전적으로, 부르주아의 이상이었다. 대체로 귀족들은 그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으며 가난한 노동자들은 그것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았다. 〈거의〉와 〈대체로〉라는 제한적 표현은 단순한 일반화를 막는 데 필요한 장치다." "이 혁신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노동의 복음이 만장일치로 지적받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짧은 시간에 부를 획득한 유럽의 벼락부자들은 종종 부끄럼 없이, 심지어 간절하게, 자신의 돈을 점잖은 또는 고귀한 신분으로 전환시키려고 획책했다. 그들은 최고의 나태함, 즉 최상의 신분만이 노동의 얼룩을 씻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생애의 대부분을 근면한 노동으로 보낸 그들은 이제 무역, 산업, 금융업의 세계로 도피하여 자신 또는 적어도 자녀들이 여가나 값비싼 예술품의 수집을 중시하는 사회로 진입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19세기의 거부들이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낭비〉를 통해 부를 입증하려 했다고 말했다."(262-3)


"중간계급 여성에게 적합한 노동의 장소는 가정이었다. 이들에게 가정 관리는 식량을 구입하고 하인들을 감독하며, 가정 예산 내에서 검소하게 살림하고 자녀양육에서 주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아내들은 보통 남편보다 자녀들과 훨씬 많은 시간을 보냈다. 또 그들은 당대인들이 고통스런 향연이라고 부르곤 했던 만찬석상에서 안주인으로서 최대한 좋은 인상을 주도록 우아하게 행동해야 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남편들 중에는 어느 정도 아내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가정 관리가 큰 노력을 요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사람들도 있었다. 전기화·기계화되었지만 하인이 없는 우리 시대의 가정과 비교할 때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들이 해내야 했던 집안일은 당대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엄청난 것이었다." "더러움은 빅토리아 시대의 주부들이 온갖 육체노동을 감수하고라도 사정없이 싸워야 했던 강적이었다." "병원균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자 주부는 의사의 보조자로 임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265-6)


"19세기 초부터 선량한 사람들은 노동계급의 상황을 접하게 될 때마다 노동에 대한 이상화를 고심하게 되었다. 노동이라는 존중받는 행위모델이 단지 소수에게만 도덕적 자극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모델은 단지 새로운 습관과 압력을 강화시켰을 뿐이었다.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이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도록 엄중한 노동규율을 강요했다." "1870년대에 이런 상황에 대해 듣고 있었던 독일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 문제에 대해 조사할 필요를 느꼈다. 기업가 측에서 나온 미심쩍은 이야기들이나 이기적인 제안들을 제외하면 정보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죄책감과 온정주의적 생색, 교조주의적 이론화의 분위기 속에서, 터무니없는 합리화와 노동 기계화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변명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비단 경제적 효용성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즐거움을 찬미했다."(276-8)


8 예술적 취향


"회화와 조각, 시와 연극, 소설과 음악, 건축을 비롯한 예술의 전 분야에서 격정적이고 투쟁적인 성향이 나타났다. 새로운 것에 열광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더니즘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는데, 최신 피카소 예술을 흡수하지 못했던 슈니츨러의 무능력도 그중 하나다. 19세기 후반에 진부한 그림에 염증을 느낀 회화수집가들은 바르비종파의 풍경화는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인상파 형식은 너무나 평범하고 심지어 조잡하다며 거부했다. 또 인상파의 신봉자들은 후기 인상파의 그림을 원시적이고 혼란스럽다고 평가했다. 반 고흐에 열광한 사람들은 칸딘스키의 추상화를 순진한 대중에 대한 사기로 격하시켰을 수도 있다. 슈니츨러가 쇤베르크의 음악을 그 자신과 같은 진지한 음악 애호가들에 대한 기만으로 여긴 것처럼 말이다. 전위예술가와 그 지지자들은 혐오스런 부르주아지가 분수를 지키도록 통일전선을 형성했다. 그들은 부르주아지 같은 속물들을 공격하는 것과는 별도로, 자신들의 개성을 열렬히 고집했다."(292-3)


"역사가들은 이러한 관계의 복잡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빅토리아 인의 미적 취향의 발전을 인습적인 예술의 소비자들과 반역적인 모더니스트들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으로 편리하게 요약했다. 마치 예술을 만들어내는 긴장이 고급문화의 중심을 겨냥한 노골적인 공격이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빅토리아 시대 문화 전쟁의 전선은 명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시대에 등장한 회화와 음악의 새로운 양식에 대한 논쟁은 대부분 셋 혹은 더 많은 무리들 사이의 혼란스럽고 지리멸렬한 다툼이 되었다. 점잖은 사람들의 사회에 합류되기를 원했던 진보적 예술가들, 즉 은밀한 부르주아도 있었다. 회화 분야에서 모더니즘의 위대한 선구자인 에두아르 마네는 오로지 레종 도뇌르 훈장만을 갈구했다. 독일에서 인상파 범주에 속했던 가장 유명한 화가 막스 리버만은 1890년대 이후 베를린 분리파 운동을 주도했는데, 그는 지극히 규범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정통 상층 부르주아였다."(293-4)


"결국 빅토리아 시대의 문화적 화폭을 온갖 악의적인 논쟁으로 덧칠한 것은, 무엇보다도 예술시장에 긴장과 동요를 야기한 심미적 취향의 급격한 증가였다. 간단히 말하면, 안주를 추구하는 부르주아와 대담한 모험가들 사이의 경계선에는 구멍이 많았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무수한 중간계급 회화수집가들이 존재했다. 이들 마이케나스(아우구스투스 시대 로마의 정치가로서 예술의 후원자를 일컫는 보통명사 '메세나'가 되었다)의 현대 후손들은 대부분 부유한 남성과 소수의 부유한 여성들이었지만, 그들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세잔의 그림을 최초로 수집한 사람들은 유복한 것과는 거리가 있는, 나름대로는 인습으로부터 자유로운 부르주아였다. 대(大) 탕기로 알려진 파리 미술계의 선량한 중개인 쥘리앵 프랑수아 탕기는 경제적으로 여력이 없는데도 수년간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화가들을 후원했으며 빌려준 돈 대신에 그림을 받았다. 그는 세잔의 그림을 화랑에 전시한 최초의 인물이었다."(294)


"19세기 부르주아는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오페라, 음악회, 연극, 공공 전시회와 사설 전시회를 찾았다. 그들은 이런 장소를 휴식을 취하거나 연애하는 곳으로, 또는 사업상의 모임을 갖는 곳으로 여겼다. 장래의 화가들은 낮에 미술관에서 걸작을 모사하며 보냈다. 젊은 연주자들은 거장의 연주를 들으러 몰려들었다. 정신적 즐거움보다는 육체적 쾌락에 열중했던 사람들은 오페라하우스 2층 발코니 그늘에서 창부들을 찾았다." "18세기에 데이비드 흄이 말했던 것처럼, 취향은 만들어지는 것이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지속적인 반복학습을 통해 조잡하고 성급하며 어리석은 견해들, 이를테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가 안다는 식의 주장을 세련되기 다듬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학습은 상당한 시간투자가 전제되어야 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생계를 유지하거나 가게를 관리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즉 여가를 필요로 했다. 요컨대 고급문화를 습득하는 데 있어 돈은 곧 시간이었다."(304)


9 자기만의 방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은 일반적으로 공적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농촌에서든 도시에서든 사람들의 접촉은 본질적으로 매우 직접적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플리머스 식민지(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도착한 영국의 청교도들이 매사추세츠 주에 처음 세운 정착지)의 가족들은 작은 방이 하나, 기껏해야 두 개 정도 있는 집에서 부모와 아이들이 뒤엉켜 살았다." "대다수 사람들이 문맹이었기 때문에 편지는 공문서나 마찬가지였으며, 수줍음 따위는 이웃의 무자비한 호기심 앞에 설 자리가 없었다. 이단자들이나 간통을 저지른 사람들을 당국에 고발하는 것은 사실상 시민의 의무였다. 말하자면 공동체는 개개인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겼던 것이다. 간통자의 가슴에 달린 주홍 글씨 'A'는 예외적이며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한 집단의 가장 내밀한 행위에 대해 알고 판단을 내릴 사회의 권리를 기록한 것이었다. 이런 시대에 사생활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333-4)


"사생활을 이상화하는 것과 그 이상을 현실로 전환시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주거와 같이 가장 일상적인 문제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19세기에 중간계급이 더욱 부유해지자 많은 부르주아는 더 넓은 공간으로 이사할 수 있게 되었다. 돈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을 가능케 했다. 집은 외부 세계로부터 가족을,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 서로를 분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벽과 커튼, 휘장, 단단한 현관문, 교묘하게 심어진 관목과 담장은 이웃을 포함한 외부인에게 접근을 막는 상징이자 경고였다. 그것은 말 그대로 거주자의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었으니, 그것은 많은 부르주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타인의 참견으로부터의 자유였다." "요컨대 사생활이란 세부적인 것들에까지 세심한 주의를 요했다." "가정 내의 사생활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요구사항은 물론 자기만의 방이었는데, 이는 빈민들에게는 절대 불가능했다. 이러한 차이는 19세기 부르주아지를 노동계급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350-1)


"사생활의 가치는 충분히 분명했지만, 그것은 모종의 전제조건을 필요로 했다. 어느 정도의 재산 없이는 사생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사생활은 다양한 감정을 포괄했다. 사실 사춘기 청소년에게 사생활의 의미란 분명했다. 그들에게 그것은 청소년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주장이며, 성인과 동등하게 취급받고자 하는 갈망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사춘기란 온갖 다양한 감정과 신념, 즉 반항심, 염세주의, 수치감, 독립적 삶에 대한 열망을 포괄하는 그 무엇이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인정해주려는 의지는 의심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정하는 것이었으며, 독자적인 사상과 이상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는 능력을 전제하고 있었다. 요컨대 그것은 관용을 요구했다." "검열이나 사법기관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19세기 자유주의자 가운데 가장 용감한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싸웠던 반면, 좀 더 소심하거나 현실적인 사람들은 그 폐지를 요구하지 않고 당국의 족쇄를 느슨하게 하는 데 만족했다."(356-7)


"개성은 전통이나 인습은 물론 종교나 도덕에도 얽매이지 않는 〈르네상스 인〉이라고 불리게 될 존재의 전제조건이었다. 14~15세기에 극도로 발전한 개성이 체사레 보르지아 같은 비도덕적인 괴물로 타락한 것처럼, 19세기에도 개성에 대한 대담한 주장은 심각한 위험을 수반했다. 엄격한 가족과 캐묻기 좋아하는 이웃의 감시를 피해 시골이나 소도시에서 도시로 옮겨온 젊은이들은, 자신이 그렇게도 갈구했던 독립이 종종 원치 않는 익명성, 즉 친구들과 이해심 깊은 공동체의 부재로 전락한 것을 알게 되었다. 집단의 둥지를 떠난 데 대해서 그것은 너무 무거운 대가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 외로운 영혼들은 소외되기 위해 답답한 시골을 벗어났던 것이다. 외로움에 시달리고 방향성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사생활이라는 번지르르한 구호는 역설적인 느낌을 가져왔다. 당대의 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19세기 도시생활의 경향을 특징짓기 위해 〈고립〉, 〈아노미〉, 〈분열〉 같은 기술적인 용어를 만들어냈다."(359)


"사생활의 확대를 비롯하여 19세기 부르주아의 삶을 특징짓는 예기치 못한 놀라운 혁신은 자아에 대한 전반적인 매혹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이에 대한 열중은 세계의 구성요소들을 발견하려 노력했던 선조들과는 달리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아테네의 위대한 등에 소크라테스로 소급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몽테뉴, 파스칼, 루소에 이르는 냉혹한 내면 세계 탐구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빅토리아 인의 자아에 대한 관심에는 길고 명예로운 전통이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플라톤으로부터 출발하는 정치이론가들은 인간본성론에 기대어 자신들의 사고체계를 수립했다. 토머스 홉스는 걸작 『리바이어던』에서 모든 통치의 열쇠가 되는 성찰을 제시했다. 〈국가 전체를 통치하는 자는 특수한 개인이 아니라 인류를 이해해야 한다.〉 19세기에 '자아'라는 수수께끼에 몰두하는 자기분석이 가능해졌던 것은 사람들이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361)


후주


"빅토리아 세계에 대한 정치적·도덕적 비판은 플로베르나 졸라처럼 부르주아의 속물적 문화를 비판했던 사람들이 멈추었던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그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내가 부르주아 혐오자라고 지칭했던 화가들과 소설가들은 부르주아 문화 전체에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던 반면, 대부분의 자본주의 비판자들은 목표들을 훨씬 정확하게 선택했다."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인 업톤 싱클레어는 시카고의 정육업에 관한 끔찍한 소설 『정글』에서 큰 통에 짓눌러 소시지가 된 노동자를 묘사함으로써 식품의약규제법(1906)이라는 개혁법안의 제정에 기여했다. 그러나 소위 추문폭로자들 대부분은 급진주의자가 아니었다. 『맥클루어』지의 가장 능력 있는 기고자들 중 하나였던 레이 스태너드 베이커는 이를 단순명료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우리 세계를 증오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추문을 폭로'했다. 우리는 절망적이지도, 냉소적이지도, 증오에 차 있지도 않다.〉"(366-8)


"19세기의 위대한 정치·경제·사회 혁명에서 부르주아들이 행한 주도적인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부르주아지는 프랑스 대혁명과 더불어 폭발적으로 시작된 구체제의 매장이라는 과업을 완수하는 방향으로 행동했다." "수십 년 만에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변한 빅토리아 사회의 경제 각 부문, 즉 광산, 산업, 금융, 보험 국내교역 및 국제무역에서 진취적인 부르주아의 몫은 당연히 정치에서보다 더 많았으며, 격렬한 갈등을 겪은 후에는 더욱 늘어났다. 이것은 사마리아인과 스크루지를 비교하거나, 착취자보다는 박애주의자를 찾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에너지, 곧 신세계를 창조하는 발명가와 엔지니어와 금융가들이 에너지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서정적이면서도 조롱조로 〈부르주아지는 역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자본가들 중 박애주의자는 거의 없었지만, 그들 중 다수는 자신이 의도한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이룩했다."(368-9)


"사회를 향한 관대한 태도가 가치 있는 평가를 얻지 못했다고 해도, 그것이 중간계급 내부에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공정한 연구자들에게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부르주아의 시회적 자유주의란 단지 이기심을 덮은 가면에 불과하다는 부당한 비난에 가려져 있었다. 새로운 예술과 문학을 수용한 중간계급의 태도에 대해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빅토리아 시대의 부르주아 상당수가 그것을 향유하고 진흥시켰다는 사실은 전문가들에게만 제대로 알려져 있다. 자기 시대의 회화를 수집하고 박물관을 후원한 사람들은 고상한 취향을 지닌 백만장자들만이 아니었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최초로 구매한 사람들은 부르주아 중간층이었으며, 교향곡 연주회에 충실하게 참석한 사람들은 하급 사무직 종사자들과 그 아내들이었다. 우리는 모든 속물이 부르주아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부르주아가 속물은 아니었다는 사실 또한 알 필요가 있다."(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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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 - 오늘의 유럽을 낳은 최초의 영토 전쟁 1618~1648
C. V. 웨지우드 지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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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독일과 유럽: 1618년


"17세기의 전반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정부의 일상 업무는 짜임새가 없었고, 정치인들은 별다른 지원도 받지 못하고 활동했다. 단적으로 말해 효율성과 충성심은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대다수 정치인들은 자금과 정보의 항구적인 누수가 불가피하다는 전제에서 활동해야 했다. 당시 유럽의 외교 속도는 통신과 교통의 중요한 수단인 말이 달리는 속도와 같았다. 정치적 필연성이 자연의 무의미한 개입에 종속되어 있었던 셈이다. 강풍이 불거나 폭설이 내리기만 해도 국제적 위기가 완화되거나 가속될 수 있었다." "정보 전달이 여의치 않은 탓에 여론이 지배 세력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도시에서는 정보가 어느 정도 확산되고 초보적인 여론의 표출도 가능했으나, 정치적 정보를 흡수하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부유층과 지식인층뿐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힘도 없고 무지하고 무관심했다. 대체로 개별 정치인의 공적 행위와 사적 특성이 균형을 이루지 못했고, 왕조의 야심이 유럽의 외교관계를 지배했다."(30)


"서유럽 나라들은 대부분 귀족정치의 정부 형태를 취했고, 토지가 곧 권력인 사회였다. 그런데 토지 대신 화폐가 실질적인 힘으로 등장한 상황에서도 그런 체제가 온존되었다. 정치권력을 장악한 소수는 그 권력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부를 갖지 못한 반면, 상인계급은 재력은 갖추었으나 권력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양측의 대립은 점차 빈번해졌다." "이렇게 볼 때 중간계급이 정치적 발언권을 요구하게 된 근원적인 요인은 자유주의적 원칙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효율적인 정부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정부 아래서 편안하게 살기보다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정부 아래서 불편하게 사는 것을 더 좋아할 만큼 고결한 사람은 거의 없다. 보헤미아의 대의정부가 실패한 이유는 타도한 전제정치보다 행정에 크게 서툴렀기 때문이다.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가 무너진 이유도 신이 내린 왕권이 취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부가 무능했기 때문이다."(33-5)


"한편, 대립하는 종파들 간의 증오는 더욱 격화되었다. 자신이 사는 나라의 종교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늘 위험에 처했다." "종교개혁 초기에 가톨릭 지배자들은 약점을 가진 탓에 신교 신민들에게 상당한 양보를 해야 했다. 그래서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신교 국가 내의 가톨릭 공동체보다 가톨릭 국가 내의 신교 공동체가 더 많았다. 이탈리아와 에스파냐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가톨릭 국가들은 내부의 신교 공동체를 용인했다. 당연히 가톨릭 측은 점점 불만과 위기를 느꼈다. 반면에 신교 측은 자신들의 특권을 약간만 침해당해도 공식적으로 신교 정부를 통해 항의를 표출했다." "결국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교권을 재통합한다는 꿈을 버렸다. 가톨릭이 재통합에 실패한 것은 단일한 원인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두드러진 원인은 있다. 교회의 운명이 오스트리아왕실(합스부르크)과 긴밀하게 얽히면서 왕실의 영토 욕심이 가톨릭교회를 옹호했어야 할 세력들을 분열시켰던 것이다."(42-3)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지배자들은 서로 300년 동안이나 반목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에스파냐에게 당면한 문제는 네덜란드의 반란이었다. 네덜란드 북부의 신교 지역은 네덜란드 연방을 형성해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1527~1598)에게 반기를 들었다. 40년 간의 전쟁 끝에 1609년 그들은 다음 왕인 펠리페 3세(1578~1621)와 강화 조약을 맺고 독립과 향후 12년 동안의 휴전을 얻어냈다. 하지만 네덜란드 지역은 포기하기에 너무도 중요했으므로 에스파냐 정부는 휴전 기간을 평화의 서곡으로 여기지 않고 반란을 최종적으로 진압하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활용했다. 1621년 휴전이 끝나자 곧바로 유럽의 위기가 심화되었다. 모든 신교 군주들은 자유 공화국의 소멸을 막고 합스부르크 왕조와 가톨릭교회의 승리를 저지하기 위해 나섰다. 부르봉과 합스부르크의 숨겨진 적의, 에스파냐 왕의 임박한 네덜란드 공격, 이 두 요인이 1618년 유럽 정치인들의 행동을 지배했다."(45-6)


"에스파냐에서 폴란드까지, 프랑스에서 스웨덴령 핀란드의 동쪽 경계와 발트 해의 동결항(凍結港)들까지 유럽 정치의 주요 무대는 독일이었다. 독일 지역에는 독립 소국들의 방대한 집단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으로 뭉쳐 중부 유럽의 지리적·정치적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와 부르봉 왕조의 경쟁, 에스파냐 왕과 네덜란드의 경쟁, 가톨릭과 신교의 경쟁에서 독일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에스파냐 왕은 군대와 돈을 북이탈리아에서 네덜란드로 쉽게 수송하려면 라인 강이 필요했다. 프랑스 왕과 네덜란드도 에스파냐의 물자를 차단하기 위해 라인 강 주변의 동맹 세력이 필요했다. 또 스웨덴 왕과 덴마크 왕은 발트 해 연안에 동맹 세력을 구축해 서로 다투었고, 폴란드 왕이나 네덜란드와도 싸웠다. 교황은 독일에 합스부르크 황제에 반대하는 가톨릭 세력을 형성하고자 했으며, 사보이 공작은 황제로 선출되기 위한 공작을 꾸몄다."(53)


"황제와 신하들 간의 대립이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독일의 숙명이었다. 자유시들이 군주들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은 군주들이 황제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보다 한층 더 심했다. 자유시들은 '독일의 자유'라는 원칙에 동조했으나 군주들도 과연 진심으로 동조하는지는 회의적이었다. 특히 시민들은 과거에 상전으로 모셨던 지주 귀족들을 의심했다. 그래서 믿지 못할 집단과 행동을 같이해 뭔가를 얻어내려 애쓰느니 차라리 지금 이대로가 더 낫다고 여겼다. 그 반면 교회의 가톨릭 지배자들은 가톨릭 황제의 편을 들었다. 그들은 황제가 적대적이고 때로는 이단적인 군주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리라고 믿었다. 이렇게 지주, 시민, 성직자, 농민이 각자 계급의식을 고도로 발전시킨 탓에 공공의 이익보다 분파적 이해관계가 더 중시되었다. 또한 각 집단들이 따로 군사 조직을 거느리게 되면서 그렇잖아도 위험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63)


"붕괴하는 제국에 통합성을 부여한 것은 공통의 신앙이었다. 그러나 신교가 동맹관계에 있던 공국들을 흩어놓고, 야심찬 군주들이 그 틈을 타 황제에게 반기를 들자 수백 년간의 전통이 무너졌다." "서로 반목하는 가톨릭, 루터교, 칼뱅교에는 한 가지 공통적인 요소가 있었다. 군주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각각의 종교를 이용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자유를 요구하는 군주들이 절대주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너무 노골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지 않는 것을 황제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자유주의 운동과 상인과 농민의 격렬한 봉기는 아래로부터의 반란과 위로부터의 억압 사이에 끼인 이 불운한 지배자들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한편에서는 군주들과 황제의 다툼, 다른 한편에서는 군주들과 백성들의 다툼이 진행되면서 군주들은 한 손에는 자유의 횃불을 움켜쥐고, 다른 손에는 독재의 칼을 뽑아들었다."(67-9)


2장 보헤미아의 왕위: 1617~19년


"보헤미아 왕국은 크지 않았으나 그 왕권에는 슐레지엔과 라우지츠 공국, 모라비아 변경국의 군주권까지 달려 있었다." "가장 부유한 보헤미아가 다른 세 지역을 지배했다. 이곳에서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신앙의 독립, 민족의 통합, 정치적 자유를 추구하는 운동이 일찍부터 발달했다. 체코인은 언어에서 독일인과 구분되었고, 종교와 기질에서 슬라브인과 달랐다. 자립심이 강하고 수완이 좋은 그들은 예부터 이재에 밝기로 유명했으며, 노동의 가치를 찬양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비잔티움의 전도사들에게서 그리스도교를 배웠지만 예배 형식을 자신들에게 맞게 변형시켰다. 이후 가톨릭교회에 편입된 이후에도 그들은 예배를 볼 때 토착 언어를 사용하고, 자신들의 수호성인으로 그리스도교의 유명한 성인이 아니라 자신들의 왕이었던 바츨라프 1세(907~929)를 선택했다. 이처럼 보헤미아에서 왕의 지위와 권위는 다름 아닌 백성들의 애정에서 비롯되었다."(99)


"보헤미아의 위험은 정치와 종교가 지나치게 활발하고 여러 종교와 계층의 요구가 상충한다는 점이었다 국가의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도 있었고, 종교적 자유를 쟁취하려는 세력도 있었으며, 중앙정부가 의회를 장악해야 한다고 보는 세력도 있었다." "루터파, 양형영성체파, 칼뱅파, 가톨릭은 각각 서로의 불관용을 두려워했다. 사실상 보헤미아의 독립을 위해서는, 여러 세력들 간의 균형을 유지해주고 있긴 하나 예전만큼 인기가 없는 하나의 왕조, 즉 합스부르크 왕을 폐위시켜야만 했다. 어쨌든 이 불편한 중립은 점차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마티아스 황제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제국과 보헤미아에서 그의 후계자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이미 악명이 널리 알려진 슈타이어마르크의 페르디난트 대공이 될 공산이 컸다. 그렇게 되면 그는 슈타이어마르크에서 그랬던 것처럼 보헤미아의 신교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정부를 철저히 짓밟을 게 뻔했다."(103)


# 양형영성체주의(兩形領聖體主義, utraquism) : 평신도들은 성화된 빵만 먹고 사제들은 빵과 포도주를 먹는 가톨릭교회식 성만찬을 개혁하려 한 운동


# 1617년 6월 17일 페르디난트 선출 표결 통과


"8월 28일 암울한 예측이 빗발치는 가운데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 선출이 진행되었다." "마침내 새로 선출된 황제가 보장해야 할 신민들의 법적 권리들이 기록된 두툼한 문서가 페르디난트에게 건네졌다. 그는 신속하게 문서를 훑어본 뒤 마치 춤이라도 추려는 것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선서를 하러 앞으로 나갔다. 바깥에서는 새 황제가 관례에 따라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낼 때 환호를 보내기 위해 수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가 군중 앞에 나서기 직전에 프라하의 소식이 전해졌다. 군중 가운데 일부가 술렁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그 소식을 옮겼다.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에서 폐위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흥분에 휩싸여 소란스러워지는 가운데 군중들 위쪽의 큰 창들이 활짝 열렸다. 발코니에 페르디난트가 등장했다. 그는 보헤미아 왕위에서 쫓겨났으나,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선거와 선서까지 마친 독일 민족의 신성로마황제였다."(131-2)


"보헤미아의 왕과 황제가 새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에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곤혹스러워졌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그의 표는 페르디난트에게 갔는데, 거의 동시에 그는 페르디난트에게 강제로 왕관을 빼앗은 처지가 되어버렸다." "프리드리히는 명분상 반란 세력을 지지하는 것이 도덕적인지, 황제에게 의무를 다하는 것이 신성한 일이지 둘 다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한편에는 독일 군주로서의 그의 충성심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보헤미아인들에게 무분별하게 일고 있는 그의 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만약 그가 페르디난트를 버린다면 그는 황제와 싸우는 게 아니라 제국의 경계 바깥에 있는 지역의 폐위된 왕과 싸우는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보헤미아를 버린다면 그는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을 배신하게 되는 것이었다. 전자는 뻔한 정치적 핑계에 불과하고, 후자는 도덕적 배반이 된다. 1619년 9월 28일 그는 비밀리에 반란 세력에게 왕위를 받아들이겠다고 통지했다."(133-5)


3장 에스파냐의 경보, 독일의 경종: 1619~21년


"1620년 3월 페르디난트가 뮐하우젠에서 소집한 회의는 반대파의 힘과 단결을 보여주었다." "참석자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가톨릭동맹, 요한 게오르크 작센 선제후의 대표단이었다. 여기서 페르디난트는 오버작센 지구에 속한 세속화된 주교구의 신앙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루터파와 가톨릭의 지지를 모두 얻었다. 그 대가로 그들은 보헤미아가 제국의 일부분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프리드리히는 제국의 평화를 해쳤으므로 법에 의해 가혹한 징벌의 대상이 되었다. 4월 30일 프리드리히에게 6월 1일까지 보헤미아에서 물러나라는 황제의 명령이 반포되었다. 이 최후통첩을 거부하는 것은 곧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1620년 6월 1일부터 독일의 모든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공공의 평화를 의도적으로 파괴한 프리드리히를 반대해야 했다. 이제 황제는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보헤미아의 적법한 왕으로서 모든 무력을 동원해 반역자를 처단할 터였다."(144-5)


"프리드리히의 비극은 결말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일부 가톨릭 예언자들은 그가 겨울 한 철 동안만 왕위에 있을 것이라며 그를 '겨울왕'이라고 불렀다. 예언과 달리 그는 봄과 여름까지 버텼지만 매달 재앙의 새로운 전조가 나타났다. 1620년 초에 그는 새 왕국의 주요 지역을 방문했다. 브르노, 바우첸, 브로추아프에서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무리가 올로모츠의 교회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그 도시의 신민들 가운데 절반이 그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순진하고 선의를 가진 지배자가 그처럼 빠른 시간에 미움을 사게 된 경우도 드물다. 프리드리히는 새 신민들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대신들에게는 경멸을, 백성들에게는 증오를 샀다. 신하들 앞에서 소심해지는 성격과 익숙치 않은 보헤미아어, 자신이 수호하겠다고 서약한 체제의 특질로 인해 프리드리히는 평소만큼의 지성도 보여주지 못했다."(157-9)


"신교 군주들은 프리드리히를 희생시키는 것으로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또한 가톨릭 세력은 페르디난트를 지지하는 것으로 외국의 간섭을 방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유럽에는 프리드리히나 보헤미아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오스트리아 왕가를 두려워하거나 라인 유역을 탐내는 군주들은 많았다." "프랑스, 영국, 덴마크보다 당장 심각한 위험에 노출된 나라는 네덜란드 연방이었다." "그래서 네덜란드는 서둘러 덴마크 왕과 조약을 맺는 한편 만스펠트에게 서신을 보내 신교의 대의에 충성할 경우 후히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다. 1621년 4월 9일 에스파냐와의 휴전기간이 종료되었다. 그 닷새 뒤 보헤미아 왕과 왕비는 헤이그에 도착해 지배 군주에 걸맞은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4월 27일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라인 영토 탈환을 위해서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아들이는 조약에 서명했다. 이리하여 독일 비극의 제2막이 시작되었다."(179-81)


4장 페르디난트 황제와 막시밀리안 선제후: 1621~25년


"자신의 불행한 나라에 대한 페르디난트의 판결은 곧바로 내려졌다. 보헤미아의 선출 군주제는 폐지되고, 왕권은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세습되었다. 신앙의 자유를 허가한 '황제의 칙서'는 프라하가 약탈될 때 빈으로 보내졌으나, 페르디난트가 직접 찢어버렸다는 과장된 소문도 돌았다." "칼뱅교와 양형영성체주의 이단들은 뿌리가 뽑혔으나, 루터파 교회는 작센 선제후와의 약속을 감안해 계속 용인되었다. 페르디난트는 세 가지 방침을 정했다. 반란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정치·경제적으로 파멸시키고, 민족적 특권을 폐지하고, 신교를 근절하는 것이었다. 리히텐슈타인은 불안한 마음에서 자비를 베풀거나 적어도 신중하게 조처해야 한다고 항의했으나 그의 의견을 무시되었다. 보헤미아에 대한 응징은 곧 새 정책의 출발점이었다. 이제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는 신앙 면에서 통일된 하나의 국가가 될 것이며, 가톨릭 유럽의 재건에 가장 중요한 토대인 빈에서 그 관리를 맡을 것이었다."(186-7)


"막시밀리안이 선제후가 되자, 페르디난트도 미처 대비하지 못한 거센 항의가 일었다. 에스파냐 대사는 축하의 말조차 건네지 않았고, 이사벨 대공비는 공개적으로 반대와 불만을 토로했다. 작센 선제후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도 새 동료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제 페르디난트는 자기 힘의 한계를 알았다. 그의 힘은 그의 군대가 통제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군대는 여전히 가톨릭동맹과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레겐스부르크의 신교 대표들은 불만의 표시로 더 이상 전쟁 비용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들은 저항에 나서기에는 힘이 달릴지 모르지만, 자신들의 자유를 공격하려는 세력에게 자금을 지원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선제후 직위의 양도로 추방령은 완료되었지만, 결국 입헌주의자들이 쫓겨난 프리드리히에게 동맹까지는 아니더라도 동조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가톨릭 군주들과 신교 군주들의 분열은 위험할 정도로 커졌다."(211-2)


"1623년 한 해 동안 독일의 자유와 신교의 대의를 옹호하는 세력들은 합스부르크 왕조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상황은 프리드리히의 정책을 계획한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에스파냐 왕녀와 웨일스 공(후에 영국 찰스 1세)의 결혼 협상을 추진하던 영국 왕 제임스 1세는 에스파냐 측에 신뢰감을 보여주기 위해 독일에 남은 프리드리히의 마지막 요새인 프랑켄탈에서 영국군을 철수시켜버렸다. 또한 동시에 그는 프리드리히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촉구하면서 프리드리히의 맏아들을 황제의 딸이나 막시밀리안의 조카딸과 약혼시키려 했다. 스웨덴 왕과 덴마크 왕은 같은 편에서 함께 싸우려 하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는 내부 혼란에 시달렸고, 오라녜 공은 네덜란드 국경을 방어하는 데 급급해 라인 영토를 되찾는 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 그 원대한 계획 중 실천된 것은 베틀렌 가보르의 헝가리 공격과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이 니더작센 지구로 진출한 것뿐이었다."(234)


"리슐리외는 합스부르크 왕조를 타도하기 위해 유럽에서 신교의 대의를 끌어안았지만, 사정은 무척 복잡했다. 그 자신은 비록 귀족들과 외교권에서 지배적인 종교에 대해 냉소적인 무관심으로 일관했어도 여전히 신앙심이 독실한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치게 비정통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면 군주제의 안정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리슐리외에게는 다행히도, 슈타트론 전투에서 패배했던 바로 그날 로마에서 바르베리니(1568~1644) 추기경이 교황 우르바누스 8세로 선출되었다." "우르바누스 8세는 진심으로 그리스도교권의 평화를 원하면서, 합스부르크 왕조를 유럽의 항구적인 위협 요소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유럽의 평화를 바랐으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합스부르크의 침략을 저지하는 세력을 거부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므로 프랑스 가톨릭 세력은 자신들이 낸 세금이 네덜란드와 독일의 이단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어도 발 뻗고 편히 잠잘 수 있었다."(245-6)


"바이에른을 제외한 리슐리외의 동맹자들은 공동의 적을 향해 한 발 더 다가섰다. 1624년 6월 10일 콩피에뉴에서 프랑스 정부와 네덜란드 정부는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숙명적 라이벌이자 적수들이 마침내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닷새 뒤 영국도 가담했다. 7월 9일에는 스웨덴 왕과 덴마크 왕이 합류했고, 11일에는 프랑스, 사보이, 베네치아가 발텔리나에서 공동 작전을 펼치기로 합의했다. 10월 23일에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었고, 11월 10일에는 프랑스 공주 헨리에타가 웨일스 공과 약혼했다." "전쟁은 독일 내에서 시작되었고, 독일 내에서 끝나게 되었다. 제국에 못지않게 정치가 복잡다단한 독일 각지의 공국에서 7년간 전쟁이 지속되자 이제 리슐리외도 통제할 수 없는 사태로 흘러갔다. 북독일의 주교구들만 해도 분쟁거리가 너무 많았다. 상황은 순식간에 리슐리외의 손아귀를 벗어났다."(250-1)


5장 발트 해를 향해: 1625~28년


"합스부르크 왕조는 적들이 프랑스의 도움을 받자 그에 대응해 자신들은 발렌슈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또 적들이 발텔리나를 점령하자 그들은 브레다를 빼앗았다. 이제 위험한 북부의 연합이 남았는데, 이에 대해서도 합스부르크는 계획이─북부 연합과 사이가 좋지 않아 고립될 것이 분명한 한자동맹을 끌어들인다는─있었다." "6월에 발렌슈타인의 임무는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약속한 대로 군대 모집을 끝내고서, 잘 무장된 병력을 거느리고 보헤미아 국경에 이르렀다." "새로운 제국군이 전장에 투입되고 브레다가 함락되자, 발텔리나의 프랑스군도 점점 버티기 어려워졌다. 리슐리외 정부는 그 고개를 무한정 점령하고 있을 만큼 자원이 풍족하지 못했고, 국내 사정도 불안정했다. 언제라도 궁정 음모나 지역 반란이 일어나면 균형이 무너질 태세였다. 게다가 북부에서는 이지 그가 추진한 대동맹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258-9)


"프랑스가 동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을 때 마지막 재앙이 닥쳤다. 리슐리외는 위기에 처한 이 방대한 동맹을 떠받치는 아틀라스였다. 하지만 1626년 봄 프랑스에서 위그노의 반란이 일어나 국내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는 발텔리나를 점령하고 있던 병력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오라녜 공은 작은 함대를 마련해 라로셸의 위그노 요새를 공략하려 했으나, 네덜란드 선원들은 동료 신교도를 공격하는 배에 타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처럼 때를 잘못 맞춘 네덜란드 선원들의 열정은 결국 독일 신교의 대의가 붕괴하는 데 일조했다. 1626년 3월 26일 리슐리외가 몬손 조약을 맺고 발텔리나에서 철수하자 그 고개는 다시 에스파냐에게 활짝 열렸다. 이제 신교의 대의와 독일의 자유를 옹호하는 세력은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만 남았다. 다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동맥이 트였다."(265-6)


"1625~26년 유럽에서는 합스부르크 왕조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가 가라앉았다. 또한 세습 영토에서는 그보다 더 중요하고 비극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가 가라앉았다. 제국의 채무를 갚기 위해 희생된 오버외스터라이히의 농민들은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치하에서 심한 착취를 당했다." "겨우내 농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시달렸으나, 1626년 봄이 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5월 17일 하이바흐에서 명령을 집행하러 보낸 제국군 병사들과 주민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막시밀리안이 파견한 총독 헤르베르스토르프가 사태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농민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1만 6천여 명의 농민들이 지역 정부가 있는 린츠로 갔다. 그들이 든 검은색 깃발에는 저승사자의 머리와 '어쩔 수 없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들은 반란에서 이기든 지든 반란 지도자들이 죽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결국 그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다."(272-3)


"유럽은 비틀거리고 있었다. 바이에른 공작이 선제후에 오른 것도 정치인들에게 충격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지도적인 군주였고, 반강제로라도 선제후들의 재가를 얻어냈다. 그에 비해 발렌슈타인은 보헤미아 왕의 신하인 보헤미아 귀족보다도 지위가 더 낮은 소지주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뷔르템베르크와 헤센의 지배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립 군주의 지위에 오르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발렌슈타인이 메클렌부르크 공작이 된 지 17일이 지났을 때, 마인츠 선제후는 페르디난트에게 동료 선제후들의 이름으로 된 성명서를 전달했다. 발렌슈타인에게 계속해서 제국군의 지휘를 맡기되, 그를 군주로 선출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누가 마인츠 선제후의 옆구리를 찔렀는지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페르디난트와 그의 장군이 승리의 행진을 거듭하는 동안,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은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까지는 되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287-90)


6장 교착: 1628~30년


"발렌슈타인의 힘이 커지자 페르디난트는 토지반환령(Edict of Restitution)을 적절히 집행하면 합스부르크 권력에 이익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겼다. 1628년 후반 페르디난트는 대내 정책에서 그 구상을 앞세웠다." "페르디난트는 전체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즉, 전체적으로는 독일 전역이 대상이고, 구체적으로는 마그데부르크 주교구에 해당하는 계획이었다. 우선 그는 1555년 이후 신교 측에 부당하게 편입된 모든 교회령을 원래대로 복원하려 했다. 제국의회에서 이 조치를 가결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황제의 칙령으로 집행할 작정이었다. 여기에는 신교도 축출과 아울러 황제의 통치권을 시험한다는 이중의 목적이 있었다. 페르디난트가 신민들에게 강요한 변화는 혁명에 가까웠다. 독일 북부와 중부 전역의 경계선들을 모조리 바꾸는 엄청난 변화였다. 세속 재산으로 부를 얻은 군주들이 한순간에 하급 귀족으로 전락할 수 있었다."(303-5)


"1629년 3월 6일 페르디난트는 무방비 상태의 독일에 토지반환령을 반포했다. 대단히 가혹한 명령이었다. 우선 칼뱅파의 합법성이 부인되었고, 다음으로 교회 토지에 대한 신교도의 매입 권리가 부인되었다. 교회의 토지는 양도가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합법적으로 매매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래 교회가 소유했던 토지를 정당하게 취득한 사람이라 해도 피해를 입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교회 토지와 관련된 이전의 법적 판결이 일체 부인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황제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독단적으로 법과 법적 판결을 바꾼 것이었다. 행정관들은 혹시 누군가가 제국의회의 재가를 얻지 않은 칙령이라고 불평한다면 그 사람에게 제국의 절대주의 정책을 설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페르디난트는 영리하게도 칙령을 집행하는 데 발렌슈타인의 군대를 이용했다. 가톨릭동맹이 막강한 지원자를 공격함으로써 참된 신앙의 대의를 침해하려 할 리는 없지 않은가?"(308-9)


"1630년 여름에는 독일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0년 간의 전쟁으로 제국의 절반 이상이 군대의 점령이나 통과로 그 후유증이 심각했다. 소가 병들고, 사람도 동물도 모두 굶주리고,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1625년부터 1628년까지 4년 연속 흉년이 들어 독일의 재난은 더욱 심각해졌다. 전염병은 굶주린 사람들을 대량으로 희생시키고, 난민 수용소를 덮쳤다. 원래는 근면했던 사람들이 빈곤과 기근으로 희망과 수치심을 잃고, 구걸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점잖았던 시민들도 서슴없이 이웃집에 가서 동냥을 했다. 그러나 동정심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가난 때문에 자선도 바닥을 드러냈다. 추방된 목사들은 전국을 떠돌며 자신을 받아주려는 사람이 아니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맸다. 오버팔츠의 가톨릭 사제들은 추방되었던 사람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당시 굶주리는 선임자들을 구제해 달라고 정부에 탄원했다."(322)


"1630년 8월, 페르디난트는 가톨릭 선제후들을 진정시킨다는 정치적 이유를 들어 발렌슈타인을 해임했다. 그러나 토지반환령은 신앙을 이유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제국 내에서 페르디난트의 정책은 무너졌다. 레겐스부르크 회의는 독일을 통합하기는커녕 분열시켰고, 막시밀리안과 가톨릭동맹은 다시 페르디난트의 정책을 지배하게 되었다. 작센과 브란덴부르크의 두 신교 선제후는 동료들로부터 떨어져나가 새로 반대파를 형성했다." "페르디난트도, 막시밀리안도 실패했다. 요한 게오르크는 국내 문제를 다룰 만큼 강력한 국내 기구를 형성하려 애쓰고 있었다. 레겐스부르크 회의는 30년 전쟁 중 독일 시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의 끝이자 외국 시기의 시작에 해당한다. 스웨덴 왕이 포메른에 상륙했다. 독일 백성들은 또다시 그들이 시작하지도 않았고 중단시킬 수도 없는 전쟁의 공포에 휩싸였다. 12년 간의 재앙을 끝내는데 실패한 회의는 앞으로 18년간 재앙이 더 계속되리라는 신호탄이었다."(333-4)


7장 스웨덴 왕: 1630~32년


"이후 2년간 독일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면 한 가지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구스타프의 진짜 적은 페르디난트가 아니라 개방 정책을 취한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였다." "페르디난트는 단지 구스타프의 목표일 따름이었다. 구스타프도 자신의 신앙에 투철했으나 스웨덴의 영토를 확장하고 발트 해를 확보하기 위해 싸웠다. 구스타프의 적은 가톨릭이 아니라 독일의 연대를 지지하는 모든 세력이었다. 그리고 그 지도자는 요한 게오르크였다. 이 상황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었다. 우선 페르디난트와 구스타프가 표면에 내세운 가톨릭과 신교의 갈등이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은 사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반 유럽인들은 그것을 궁극적이고 유일한 문제로 여겼다. 두 번째로, 파리, 마드리드, 빈의 공식 정책을 지배하는 합스부르크와 부르봉의 정치적 경쟁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상황에 묻혀버린 독일인과 스웨덴 침략자의 직접적인 다툼이 있었다."(350-1)


"요한 게오르크는 독일을 구하기 위해 최선의 조치를 취했다. 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신교와 정치 체제의 옹호자로 내세우고, 자신은 막후에서 신교의 다수 여론을 장악했다. 드디어 칼뱅파와 루터파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스웨덴 왕의 동맹자인 메클렌부르크의 두 공작과 헤센 방백도 라이프니츠 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외국의 간섭 없이 사태를 타결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제 구스타프의 확실한 동맹자는 마그데부르크, 포메른 공작, 보헤미아의 프리드리히만 남았다. 요한 게오르크는 강력해진 자신의 지위를 한껏 이용했다. 황제를 겁주어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낼 수 있다면 스웨덴 왕도 싸움 없이 굴복시킬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다가오는 위험을 알았든 몰랐든, 페르디난트에게는 단 한 가지 답밖에 없었다. 그는 정치가가 아니라 성전(聖戰)의 지도자였다. (그가 보기에) 만에 하나 토지반환령을 포기할 수 있으면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353-5)


"역사에는 물질적 중요성과 무관하게 도덕적 영향을 미친 사건들도 있게 마련인데, (구스타프가 틸리의 가톨릭 군대를 물리친) 브라이텐펠트 전투가 바로 그런 사례였다. 당시에나 이후에나 유럽의 신교도들은 구스타프가 그날 펠리페 2세 시절 이후 유럽을 괴롭혀오던 가톨릭-합스부르크 독재를 끝내고 해방을 가져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은 구스타프가 독일 땅을 밟기 전에 교황과 리슐리외의 적대가 이미 오스트리아 왕가의 종교 정책을 크게 약화시켰다. 브라이텐펠트의 전장에서 그는 합스부르크 나무의 뿌리가 아니라 가지를 친 것에 불과했다. 불과 일주일 전에 젤란트 연안에서 군대 병력을 싣고 온 에스파냐 함대가 상륙할 준비를 하던 중 네덜란드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사건은 라이프치히 전투에 가려 세간의 이목을 끌지 못했지만 오스트리아 왕가에 준 타격은 더 켰다. 왕가의 미래는 무엇보다도 에스파냐의 부활에 달려 있었는데, 네덜란드에서의 패배는 그 부활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376-7)


"고립무원의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에게 다시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황제와 황제의 오만한 아들 페르디난트 대공은 그에게 어떤 조건이든 동의하겠다면서 어서 군대를 이끌고 오라고 애걸했다. 마침내 발렌슈타인은 확고한 실권을 쥐고 당당히 복귀했다." "그가 복귀했다고 해서 즉각 스웨덴 왕의 움직임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발렌슈타인은 일단 보헤미아에서 작센군을 내몰아야 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가톨릭 측이 상황에 대한 절대적 통제권을 장악한 그는 늘 그랬듯이 요한 게오르크를 매수해야 스웨덴 왕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작센군을 공격하는 대신 정중하게 동맹을 제의함으로써 그들이 평화롭게 국경 너머로 철군하도록 유도했다. 물론 이로 인해 요한 게오르크와 스웨덴 왕이 결별하지는 않았으나, 발렌슈타인의 의도는 절반쯤 달성되었다. 구스타프는 작센군에 의지해 보헤미아를 장악했으므로 작센군이 철수하자 자연히 동맹관계를 의심하게 되었다."(392-4)


"구스타프는 발렌슈타인에게 강화의 조건을 제시했지만 그 조건은 제국군이 전장에 있는 상황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페르디난트가 가장 취약했던 시기인 1631~32년 겨울에도 강화를 맺는 데 실패했다. 구스타프처럼 타고난 정복자는 아무리 평화를 희구하더라도 항상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를 만들어내게 마련이다." "독일로 행군하는 동안 스웨덴 왕은 이른바 미래 건설 계획(Norma Futurarum Actionum)을 마련했다. 이것은 제국을 전면적으로 재편하려는 구상으로, 이론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승리한 뒤에도 실현이 불가능했다. 그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가 결코 의지할 수 없는 한 가지 요소, 즉 독일 지배자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는 그들의 진정한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정책의 변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타협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으나, 그는 타협 없이 독일의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411-2)


# 11월 16일,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프 아돌프 사망


"뤼첸 전투가 끝나고 며칠 뒤 비텔스바흐의 프리드리히는 더 이상 팔츠 선제후도, 보헤미아 왕도 아닌 신분으로 라인의 바하라흐에 갔다." "거기서 전염병에 걸린 프리드리히는 11월 29일 숨을 거두었다.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때처럼 그는 방랑자였고, 부랑자였다." "이리하여 신교 대의의 가장 성공적인 옹호자와 가장 크게 실패한 옹호자가 2주일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실 1619년에는 비록 인물은 없었어도 신교 대의의 형편은 더 나았다. 적어도 독일인들은 선택의 자유를 갖고 있었다. 구스타프는 황제를 격파하고, 요한 게오르크를 핍박해 싸우게 하고, 리슐리외의 정책을 역이용했으나 시계추를 되돌려놓지는 못했다. 기회는 1619년에 사라진 뒤 두 번 다시 오지 않았다. 구스타프는 독일 신교도들의 꺾이고 마비된 의지를 뒤바꾸지 못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물리쳤으나 아무것도 건설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갈가리 조각난 독일 정치를 남겨둔 채 전장을 떠났다."(412-3)


8장 뤼첸에서 뇌르틀링겐까지, 그리고 그 이후: 1632~35년


"1634년 9월, 스웨덴의 야전사령관 호른과 작센-바이마르의 베른하르트가 지휘하는 신교 부대는 헝가리 왕 페르디난트와 에스파냐의 추기경 왕자 페르디난트가 지휘하는 가톨릭 부대와 뇌르틀링겐에서 맞붙었다. 종교적 측면에서 뇌르틀링겐 전투는 가톨릭 세력에게 브라이텐펠트 전투의 참패를 복구해준 압승이었다. 군사적 측면에서는 스웨덴 군대의 명성에 치명타를 가하고, 에스파냐 군대에 큰 명예를 안겼다. 그러나 정치적 측면에서는 리슐리외에게 신교의 대의를 지휘할 권리를 주었으며, 독일 비극의 종막을 올렸다. 이제 부르봉과 합스부르크는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뇌르틀링겐 승리는 꺼져가는 촛불이 마지막 불꽃을 피워올린 데 불과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에스파냐군과 제국군은 다시 분열되었다. 추기경 왕자는 피콜로미니가 지휘하는 독일 지원군을 거느리고 라인으로 향했고, 헝가리 왕은 프랑켄과 뷔르템베르크를 거쳐 서쪽으로 이동했다."(469-70)


"1634~35년 겨울은 부르봉과 합스부르크의 노골적인 분쟁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보낸 휴지기였다.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제국의 평화가 가능해 보인 마지막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손을 잡아끌면서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켜 타결을 얻어냈다. 그러나 평화를 안착시키기 위한 협상이 틀어지면서 새로운 전쟁 동맹이 탄생한다. 한편으로 프라하 강화, 다른 한편으로 에스파냐에 대한 프랑스의 선전포고로 이어진 그 협상은 새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지난 17년 동안 암암리에 변화해온 분쟁의 배경은 이제 변태를 완료했다. 연로한 황제, 작센과 브란덴부르크와 바이에른의 선제후들, 스웨덴 총리, 리슐리외는 여전히 기존의 노선을 고수했지만, 그들 주위에 새 시대의 병사들과 정치인들이 생겨났다. 전쟁 속에서 성장한 그들은 낯선 종교적 이념을 경계하며 냉소하고 경멸하는 데 익숙한 자신들의 입장을 선배들에게 내보였다."(473)


"과거에 종교가 차지했던 정신적 확신의 빈틈을 메우려면 새로운 정서적 충동을 찾아내야 했다. 이 무렵 민족주의 정서가 성장해 그 틈을 메웠다. 절대주의와 대의제는 종교의 지지를 잃은 대신 민족주의의 지지를 얻었다. 바로 그것이 후반에 접어든 전쟁에서 중대한 요소였다. 신교도와 가톨릭교도라는 말은 점차 쓰이지 않게 되었고, 그 대신 독일인, 프랑스인, 스웨덴인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와 적들의 싸움은 서서히 두 종교의 싸움에서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각 민족과 국가들 간의 싸움으로 바뀌었다. 옳고 그름의 새로운 기준이 정치계에 생겨났다. 교황이 합스부르크 성전에 반대하고 나섰을 때, 그리고 가톨릭의 프랑스가 위대한 추기경의 영도 아래 신교 스웨덴에 자금을 지원했을 때, 기존의 낡은 도덕은 무너졌다. 어느새 십자가가 국기로 바뀌었고, 빌라호라에서 외치던 '성모 마리아'라는 함성은 뇌르틀링겐에서 '에스파냐 만세'로 바뀌었다."(474-5)


"아버지를 대신해 국가수반으로서의 지위를 급속히 다져가던 헝가리의 페르디난트가 새로운 상황을 통제하려면 한 가지 선택이 반드시 필요했다. 즉, 그는 자신이 독일 군주인지 오스트리아 군주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그의 선택은 오스트리아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기질에서나 성질에서나 남방계에 속했다. 아버지 페르디난트 2세는 북방 진출로 스웨덴 왕의 반발을 받았고, 자기 손으로 엘베 강에서 에스파냐에 이르는 발렌슈타인의 제국을 희생시켰다. 독일 통합의 주요한 수단이었던 종교는 오래전 그의 세계가 젊었을 때 슈타이어마르크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으나 그의 수중에서 붕괴했다. 그가 평생을 걸고 이룩한 성과는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 슐레지엔,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카르니올라, 티롤 등의 국가들을 통합해 후대에 등장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기반을 놓은 것이었다."(475-6)


"1635년 5월 21일 프랑스 정부의 의무에 따라 프랑스의 사자는 브뤼셀의 광장에서 신앙이 독실한 프랑스 왕 루이 13세가 가톨릭 군주 에스파냐의 펠리페 4세에게 선전포고를 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9일 뒤 빈에서는 프라하 강화 협상의 조건이 공표되었다. 어떤 군주든 조약에 동참하고 싶으면 할 수 있었다. 조약의 조건은 독일에 평화를 안착시킨다는 점에서 작센 측에 크게 유리했고, 제국에도 어느 정도 유리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라인 강 좌안에서 스웨덴의 동맹으로 나서서 에스파냐에 선전포고를 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프라하 강화에 조인한 국가들은 스웨덴군을 독일에서 몰아내야 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도 상대해야 했다. 그런데 프랑스와 충돌할 경우에는 에스파냐 왕과 뜻을 같이해야 했다. 결국 프라하 강화는 전쟁 동맹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고, 동맹에 동참한 국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오스트리아 왕가의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독일 비극의 종막이 올랐다."(485)


9장 라인 쟁탈전: 1635~39년


"독일에서 황제의 입지는 어느 때보다 튼튼해졌다. 그의 군대와 동맹자들의 군대는 라인 강 우안, 뷔르템베르크, 슈바벤, 프랑켄을 거의 다 점령했다. 이 새 정복지들이 군대를 부양하는 부담을 떠맡게 되자 오스트리아 영토는 한숨 돌렸다. 요한 게오르크는 페르디난트의 하위 동맹자가 되었고,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은 항의를 해봤으나 이내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프라하 강화에 서명하기를 거부한다면 리슐리외에게 합류하는 것 이외에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헝가리 왕은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아버지를 우두머리로 하는 연합을 조직하고, 소수의 칼뱅파를 고립시켰다. 칼뱅파는 평화를 교란하고, 외국과 동맹을 맺는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독일 바깥에서도 황제의 입지는 매우 튼튼했다. 스웨덴 정부의 적대를 받는 대신 그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과 우호를 맺었다. 말하자면 (스웨덴 총리인) 옥센셰르나의 등 뒤에서 갑자기 지뢰를 폭파시킬 수 있게 된 셈이었다."(489-90)


"에스파냐의 모든 가문에게 유럽의 상황은 우호적이었다. 영국 정부는 에스파냐하고만 우호를 유지하면서 유럽에서 중립 정책을 추구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추기경 왕자가 자신의 기지와 매력으로 플랑드르의 평화를 실현해, 60년 전 돈 후안(1547~1578, 16세기 후반 네덜란드 총독을 지낸 에스파냐의 군사령관)의 위업을 재현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왕가는 이런 이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전쟁의 부활이 예고되고 있었다. 펠리페 4세와 올리바레스가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의 동맹 세력에게 자율적으로 그들의 능력을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었다면 만사가 잘 굴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일을 일일이 지시했고, 황제에게 자금 지원을 대가로 복종을 강요했다." "추기경 왕자는 에스파냐 왕의 휘하에 속한 총독의 신분이었으므로 항의할 수도 없었다." "재앙이 펠리페 4세의 정부를 덮쳤을 때 왕은 자금을 외부에 공급할 여력이 없어졌고, 에스파냐는 오스트리아를 파멸의 길로 끌고 갔다."(491-2)


"추기경의 외교와 정치적 야심은 프랑스의 군사력과 비례하지 않았다. 이 점을 잘 알았던 그는 가급적 전면전을 회피했다. 어쩔 수 없을 경우 그는 푀키에르를 독일로 보내 병력을 충원했다. 프랑스에서 모집한 병력은 신뢰하기 어렵고, 훈련도 형편없고, 걸핏하면 탈영하는 데다 주로 신교도라는 게 그의 우려 섞인 불평이었다. 한편 귀족들은 또다른 어려움을 야기했다. 군대는 여전히 봉건적 질서에 묶여 있었으므로 전쟁을 치를수록 자기 영토에서 병력을 충원한 젊은 귀족의 권력이 증대했다. 계급으로서의 귀족, 특히 젊은 귀족들은 리슐리외에게 치명적인 세력이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군주제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태동하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했다. 게다가 그들은 군인으로서도 명령에 잘 복종하지 않았다. 한 젊은 귀족은 자기 부대의 나쁜 상태가 왕에게 보고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상급 지휘관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런 군대로 합스부르크와 에스파냐군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497)


"베른하르트의 군대를 손아귀에 넣은 리슐리외는 발렌슈타인을 고용했을 때의 페르디난트 황제와 비슷했다. 전적으로 신뢰할 수도 없고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도 아니지만, 용병 장군은 확실히 자신의 미래를 해치는 짓은 하지 않을 테고 자신에게 보수를 주는 정부의 성공을 위해 일할 터였다. 유일한 큰 위험은 리슐리외가 계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였다. 리슐리외의 행정부는 다른 측면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재정적으로는 취약했다. 세수입을 관리하는 수완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프랑스의 재정을 좀먹는 특권과 관습의 뿌리가 너무 깊었다." "프랑스의 주요 세원은 다루기 까다로운 계층인 빈농들이었다. 농민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의 근간이었다. 이들은 검소하게 살면서 고된 일을 하고 완고한 성격을 갖고 있어 억압에 쉽게 반발했다. 그래서 이미 1630년에 디종, 1631년에 프로방스, 1632년에 리옹에서 세금으로 인한 폭동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501)


"1636년 12월 22일, 프라하 강화의 확산과 공인을 위해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선제후단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헝가리 왕이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군주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가급적 독일인을 군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제국 내에 군대가 무제한으로 주둔하는 일을 금하고, 왕이 사적으로 중시하는 오스트리아 법이 제국에까지 적용되지 않도록 하고, 헌법을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대관식의 선서는 늙은 황제가 17년 전 서명했던 것보다 더 엄격하지도, 더 인상적이지도 않았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페르디난트 2세의 입헌주의 정책이 계승되었다. 그는 합스부르크 영토를 탈환하고, 강화하고, 이단을 제거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얻었고, 다수의 독일 군주들을 자신의 전쟁에 동참시켰으며, 이들의 계승을 공고히 다졌다. 입헌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1636년의 레겐스부르크 회의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힘이 독일에서 정점에 달한 순간이었다."(504-5)


10장 에스파냐의 몰락: 1639~43년


"펠리페 2세 시절에도 이따금씩 제기되던 공공의 불만은 펠리페 3세의 치세에 시끄러운 소음으로 커졌고, 펠리페 4세의 치하에는 우레와 같이 터져나왔다. 게다가 통화를 서툴게 관리한 탓에 일부 지역에서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물물교환이 부활했다. 1640년대 초반 에스파냐로 오는 모든 물자의 3/4은 네덜란드 선박들이 운송을 담당했다. 그런데 통상과 방어를 담당한 이 함대가 크게 축소된 탓에 불법 거래는 근절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에스파냐의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1639년 함선 77척으로 구성된 에스파냐의 대함대가 네덜란드의 용감한 제독 트롬프(1598~1653)에게 밀려나 영국의 중립 해역으로 대피했다. 거기서 함대는 해상법과 영국 정부의 무기력한 항의를 모두 무시한 채 불리한 상황에서 공격에 나섰으나, 결국 70척이 침몰하거나 나포되었다. 이 참패는 에스파냐 해군력에 결정타였다. 1631년의 패배 이후 비틀거리던 거인은 이때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529)


"에스파냐에서 자금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제국군은 급료의 지불과 보급 체계가 유지될 수 없었다. 게다가 갈라스나 레오폴트 대공이나 조직적 수완은 빵점이었다. 그들의 한 부하는 〈달리 돈이 없기 때문에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라고 썼다. 양측에서 모두 중앙통제가 느슨해졌고, 지휘관들은 부대를 거느리고 식량을 구하러 멀리까지 나갔다. 식량을 찾는 데 남다른 후각을 가진 지휘관은 발렌슈타인처럼 간주되어 막강한 권위를 누렸다. 병사들이 이 부대에서 저 부대로 탈영하는 것은 그렇잖아도 늘 파악하기가 어려웠는데, 이제는 아예 어느 부대의 전리품과 식량 보급이 좋다 싶으면 부대장이 누구인지 따지지도 않고 제멋대로 부대를 옮겼다." "누더기 차림의 무리들이 아무런 대의명분도, 특정한 전략도 없이 먹을 것을 찾고 위험한 싸움은 피하겠다는 일념으로 독일 전역을 헤매고 다녔다. 식량을 눈앞에 두었을 때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싸웠다."(536)


"전쟁의 시대에 태어난 프리드리히 빌헬름─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의 아들─은 전쟁 특유의 기회주의와 부도덕을 비롯해 오로지 실용성만 부각되는 풍조를 잘 이용했다. 그는 자기 왕조의 물질적 이득이나 어쩌면 신민들에게까지도 득이 되는 일을 위해서라면 위험과 고통을 무릅썼다. 그것이 그에게는 정의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대의를 위해서는 한 푼도 내놓지 않았다. 훗날 그는 독일인을 위해 독일의 수로를 확보해야 한다는 유명한 선언을 발표했으나, 그의 목적은 자신을 위한 하나의 특별한 물길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더 나중에 그는 프랑스가 지원하는 자금을 짐짓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척하면서도 비밀리에 받았다. 그는 포메른을 마그데부르크와 교환하고, 나중에 술책을 부려 되찾았다. 그의 대내 정책은 엄격하고 유익하고 강력했으나 인기가 없었다. 그의 대외 정책은 아버지가 물려준 누더기 같은 영토에서 프로이센을 만들어냈는데,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중요한 인물이다."(540)


"1642년 무렵에는 프랑스군도 많이 변했다. 리슐리외는 돈을 절약하고 지휘관, 특히 귀족의 권력을 억제하기 위해 병력의 규모보다 기술적인 측면에 더 집중했다. 왕의 지원을 얻어 그는 규율을 더 엄격하게 집행하고, 욕살 같은 사소한 죄에도 엄벌을 가하기로 했다. 또한 종군자의 수, 특히 부대를 따라다니는 여자들의 수를 줄이려 했지만 항상 성공하지는 못했다. 나아가 그는 권력이 아니라 재능에 의한 승진의 길을 닦음으로써 농민, 기술자, 상점 주인, 곤궁한 귀족의 아들도 야심과 지성을 가졌다면 충분히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리하여 10년에 걸친 노력 끝에 병사들은 고도로 훈련된 기계 같은 군인이 되었고, 특히 포위전의 기술과 인내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래서 적의 편에서 넘어온 탈영병이나 포로가 섞여도 군대의 기강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덕분에 과거에 스웨덴군이 그랬던 것처럼 강렬한 민족의식이 발달했다."(557)


"1643년 5월, 국경 요새 로크루아에서 앙갱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멜로가 지휘하는 에스파냐군이 맞붙었다. 로크루아 전투는 에스파냐군의 재앙으로 끝났다. 1만 8천 명의 보병 가운데 7천 명이 사로잡히고 8천 명이 전사했는데, 그 대부분이 에스파냐 병사들이었다. 대포 24문을 포함해 무수한 무기와 군대 장비가 앙갱 공작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전승을 거둔 그는 로크루아에 개선했다." "그것은 에스파냐군의 최후였다. 기병대는 살아남았으나 규율과 사기가 무너진 데다, 에스파냐군의 강점인 보병대가 없으면 무용지물이었다. 로크루아에서 에스파냐군은 뇌르틀링겐에서 스웨덴군이 그랬던 것처럼 명성을 크게 잃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 명성과 목숨을 바꿔야 했다. 고참병들은 죽었고, 전통은 사라졌으며, 새 세대를 육성할 지휘관은 남아 있지 않았다. 로크루아 앞의 전장에 오늘날에도 서 있는 소박한 회색 비석은 에스파냐군의 묘비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웅장했던 에스파냐 왕국 자체의 묘비이기도 하다."(564)


11장 평화를 향해: 1643~48년


"1644년 12월 4일, 베스트팔렌에서 강화 회의가 개막되었다. 황제(페르디난트 3세)가 회의를 재가한 지 18개월이나 지난 때였고, 함부르크 대표단이 처음 정했던 회의 날짜보다 32개월이나 늦은 시기였다. 그러나 회의가 지속된 3년 10개월 동안에도 독일에서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제국 내에서는 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통합적으로 드러내지도 못했고, 그것을 표출할 만한 통로도 없었다. 군주들이나 목소리를 낼 만한 힘을 가진 세력들은 일반적인 의미의 평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실제 행동에 들어가면 그들은 언제나 사적인 이득을 챙기기 위해 전쟁을 좀 더 지속하려 했다. 베스트팔렌 회의가 거의 끝날 때까지도 상황은 내내 그랬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헤센-카셀 방백, 팔츠 선제후 등 10여 명은 뭔가를 피하거나 얻기 위해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보헤미아 신교 망명자들처럼 힘이 없는 집단도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전에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비준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나섰다."(580)


"또 다른 문제는 회의 기간 내내 적대 행위가 지속된 것이었다. 전쟁이 완전히 중지되었다면 협상이 훨씬 더 빨리 타결될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의 외교관들은 전쟁의 향방에 따라 결정을 내리려 했다. 전장에서 좀 더 이득을 얻지 않을까 싶어 계속 현안을 뒤로 미루었다. 특히 프랑스는 다른 나라들보다 자원이 풍부하고, 경제·사회적 압박이 비교적 적었던 탓에 결론을 무한정 연기하는 경우가 잦았다. 원하는 것을 잃느니 차라리 결정을 영원히 내리지 않겠다는 자세를 자랑처럼 내보이는 것이 프랑스 대사들의 주요 전술 가운데 하나였다. 수석대사인 롱그빌은 숙소 주변에 채마밭을 가꾸고 아내까지 불러들였는데, 뮌스터에 얼마든지 머물 수 있다는 시위였다. 이에 발맞춰 마자랭─1642년 12월 4일, 리슐리외가 사망한 뒤 그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한 추기경─은 군 지휘관들에게 전장에서 무력으로 압박을 가하라고 지시했다."(582-3)


"알자스와 포메른을 둘러싼 협상에서 각국 지배자들은 제국의 영토와 수천 명의 신민들이 얽혀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기보다 마치 자신의 사유재산을 처분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스웨덴으로 넘어간 포메른에 비하면 알자스 주민들의 형편은 그래도 좀 더 나았다. 사실 이곳에는 묘한 모순이 있었다. 황제는 양도된 영토를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고 싶었으나 프랑스 왕은 그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언뜻 보면 페르디난트가 냉정한 태도를 보이고, 프랑스가 관대한 제스처를 취한 듯하지만 실은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물론 경계선의 변화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프랑스가 알자스를 제국의 명패 아래 보유한다면 프랑스 왕은 제국의회에 대표를 보내 독일 사태에 계속 간섭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결국 그 복잡한 문제는 타협이 이루어졌으나, 어느 작가는 그것을 '영원한 분쟁의 불씨'라고 불렀다. 어쨌든 황제는 알자스에 관한 자신의 권리를 프랑스 왕에게 양도했다."(599-600)


"모든 세력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은 단연 종교 문제였다. 가톨릭 측은 교회가 1627년에 소유했던 모든 토지를 요구했고, 신교 측은 1618년의 상황으로 돌아가자고 요구했다." "한편, 토지반환령은 영구히 보류되었고, 군주가 자신의 종교를 바꿀 권리와 백성들이 자신의 뜻대로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승인되었다." "화해의 뜻으로 페르디난트 3세는 회의 초기에 칼뱅파를 제국 내의 셋째 종교로 승인했다. 하지만 만사가 우호적으로 타결되는 듯 싶었을 때 그는 돌연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열정을 드러냈다. 신교 측은 충격을 받았고, 가톨릭 측은 격분했고, 아직 불안정한 합의는 위험에 처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영토 내에서 신교도에 대한 관용을 단호히 거부하고, 교황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또한 그는 1624년을 종교 화해의 해로 삼자는 제안도 거부하고, 자신의 외교로 프라하 강화에서 만들어냈던 1627년의 기준도 강력히 부정했다."(602-3)


"프라하 시민들이 곤경에 처해 있는 동안 페르디난트는 종교적 신념과 아버지의 유산, 왕조의 의무에 사로잡혀 강화 조약에 서명을 거부했다. 외관상으로는 종교적 타협이 장애물이었으나 여기에는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그의 에스파냐 친척들이 네덜란드와 강화를 맺고 간신히 프랑스를 동등한 자격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실망을 주겠는가?" "그러나 바이에른은 추스마르스하우젠에서 패배하고, 프라하는 포위되고, 레오폴트는 랑스에서 꺾였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종교적 화해를 받아들이고 강화 조약에 서명했다. 뮌스터의 대표들은 3분이면 서명할 강화 조약을 황제처럼 3년이나 끌지는 않았다. 결국 1648년 10월 24일 토요일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그러고도 9일 동안 더 싸운 뒤에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프라하에 전해졌다. 그곳에서도 곧 축포를 하늘로 쏘아올리고, 테데움 성가를 부르고, 교회 종을 울려 전쟁이 끝났음을 알렸다."(612-3)


12장 평화 이후


"비로소 30년 만에 독일 땅에 평화가 깃들었다. 그러나 베스트팔렌에서 몇 가지 문제의 타결에 실패한 것 때문에 협상 전체가 위험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가톨릭 측도, 신교 측도 자신들의 몫을 타협적으로 결정한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러한 타결 결과를 실행하기 위한 조치도 없었다. 억지로 실행하려 하면 전쟁이 재개될 게 뻔했다. 교황 대사는 타결 내용 전체가 교회의 이익에 반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또다른 불씨를 피워올렸다. 에스파냐 정부는 황제가 비열하게 자신들을 버렸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약탈자인 로렌의 샤를은 조약에서 완전히 배제된 탓에 독일 땅 하머슈타인에서 요새를 철거하지 않았다. 에스파냐는 프랑켄탈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만토바 공작은 프랑스 정부가 자신의 영토 일부를 자신의 의견도 묻지 않고 마음대로 양도했다고 항의했다. 강화 조약이 체결된 지 5년 반이 지난 1654년 5월이 되어서야 마지막 적대적인 주둔군이 독일에서 철수했다."(619)


"사회 질서의 붕괴, 행정과 종교의 지속적인 변화로 중앙행정이 느슨해진 결과, 일부 지역에서 농민의 지위가 약간 상승했지만 그다지 현저한 변화는 아니었으며, 그 변화를 유발한 상황보다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작센에서는 평화가 도래하자마자 귀족들이 정부의 농민 지원에 불만 섞이 야유를 퍼부었다. 옛날에는 농노가 토지를 떠날 수 없었으나 전란의 혼돈 속에서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해 장사를 배웠다. 그 결과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노동자의 자식들이 자라서 가내공업으로 가계 소득을 증대시켰다. 전쟁이 내내 지속되었다면 지주 귀족들은 이런 현상을 당혹스런 심정으로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겠지만, 평화가 오자 모든 게 달라졌다. 작센의 지주 귀족들은 그들에게서 돈을 빌린 선제후를 압박해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집에서 가내공업도 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반포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전쟁이 낳은 한 가지 발전이 사실상 소멸해버렸다."(629)


"상업을 담당한 중간층은 전쟁으로 오랜 기간 쇠퇴를 겪어 힘이 크게 위축되었다. 미래의 부르주아지는 독립적 상인층이 아니라 종속적 관리층이었으며, 자유롭고 실험적인 계급이 아니라 기생적이고 보수적인 계급에서 생겨났다. 정부에 종속되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배자의 이익과 동일시한 시민들은 귀족과 농민 간의 완충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게 되었다. 소도시의 비중과 문화는 살아남았으나 이제는 군주의 호의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였다. 군주는 되살아나는 도시생활에까지 보호 권역을 확대하고, 성벽 도시를 전략적 거점으로 이용해 자신의 영토를 방어했다. 자연스럽고 생기 넘치던 도시 공동체의 예술이 시들고, 그 대신 절제되고 점잖은 지방정부의 문화가 발달했다. 그것은 사람들의 실생활이나 독일인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거리가 먼 모방적인 수준 높은 문화였지만, 좋게 보면 소도시 차원에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국제적이고 세련되고 상징적인 문화이기도 했다."(631-2)


"전쟁의 정치적 결과로 제국의 국경이 달라졌다.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독립은 기존 상황을 추인한 데 불과했다. 그러나 알자스와 서(西)포메른은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제국의 영토였으나 실은 외국 열강의 수중에 있었다. 특히 알자스의 양도는 영구화되었다. 독일로서는 4대 강 어귀를 모두 외국에게 내준 셈이었다. 라인 삼각주는 에스파냐와 네덜란드가 차지했고, 엘베 강, 오데르 강, 비스와 강은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가 각각 관할했다. 엘베 강과 비스와 강의 상황은 1618년으로 되돌아간 것이지만, 네덜란드가 라인 강의 출구를 사실상 소유하고 오데르 강을 스웨덴이 장악한 것은 독일의 상업과 자존심을 크게 위축시켰다." "전쟁이 끝나자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은 군주밖에 남지 않았다.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는 행정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자치보다는 전제정치가 현실적으로 더 효과적이었고, 선거제보다는 관료제가 더 적절했다."(633-4)


"정치적 변화의 범위를 제국으로 한정해보면, 교회와 국가 간의 균형은 이미 1618년에 이동하는 중이었으며, 피를 흘리지 않고도 충분히 진행될 수 있었다. 칼뱅파는 공식 승인되지는 않았으나 전쟁 전보다 교도 수가 더 늘었다. 독일의 절대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은 처음부터 특권층의 저항을 받았다. 1618년 무렵 군주들의 분리주의적 전제정치는 황제와 귀족에게 확실히 승리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결국 제국은 지리적으로도 축소되었다. 페르디난트 3세는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오스트리아' 안에 몸을 웅크렸다. 그는 뮌스터에서 오스트리아와 인근 지역의 왕-황제로서 참여했고, 이후에도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강화가 체결된 것과 군주들이 각자 외국과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함으로써 제국은 사실상 하나의 국가와 같은 위상으로 전락했다. 제국의 잔해에서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작센, 그리고 나중에 프로이센이 되는 브란덴부르크가 성장해 나왔다."(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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