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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회랑 : 국가, 사회 그리고 자유의 운명
대런 애쓰모글루 외 지음, 장경덕 옮김 / 시공사 / 2020년 9월
평점 :
제1장 역사는 어떻게 끝나는가?
"지배는 단지 비인간적인 힘이나 폭력의 위협에서만 비롯되지는 않는다. 불평등한 권력 관계는 어떤 경우든 일종의 지배관계를 만들어낸다. 위협하거나 관습과 같은 다른 사회적 수단으로 강제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다."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로크의 개념을 가다듬어서 '자유'를 지배가 없는 상태로 정의한다." "자유는 단지 자신의 행동을 마음대로 선택한다는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런 선택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 혹은 조직이 당신을 협박하거나 뭔가를 강제할 힘을 갖고 있을 때, 혹은 당신을 복종시키려고 사회적 관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선택을 실행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실행 능력은 실제 강제력을 행사하거나 그렇게 하겠다고 위협하는 방식으로 분쟁이 해결될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굳어진 관습에 따라 강요된 불평등한 권력 관계로 분쟁이 해결될 때도 당신에게는 선택을 실행할 능력이 없다."(42-3)
"홉스는 폭력은 단지 그 위협만으로도 파괴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누군가가 어두워진 뒤 집에 머무르며 이동과 교류를 자제함으로써 실제 폭력을 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폭력의 위협은 유해하다는 말이다. 홉스에 따르면 전쟁 상태의 본질은 '실제 투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이 벌어질 수 있는 성향, 언제든 투쟁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성향에 있다.' 그러므로 전쟁 상태의 가능성은 사람들이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홉스는 또한 인간이 기본적인 편의와 경제적 기회를 원한다는 점을 알았다. 그는 '인간을 평화로 향하게 하는 정념은 죽음에 대한 공포, 편안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한 욕구, 그런 것들을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라고 썼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전쟁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당연히 무정부 상태에서 벗어날 방법을 모색하고, '자신에 대한 제약'을 부과해 '비참한 전쟁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날' 방법을 찾을 것이다."(46-7)
"전쟁 상태를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하다는 홉스의 주장은 옳다. 일단 국가가 형성되고, 폭력 수단을 독점하며 법을 집행하기 시작하면 온갖 살인이 줄어들 것이라는 그의 예상도 정확하다. 리바이어던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통제했다. 오늘날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에서 인구 10만 명당 살인 사망자는 한 명이 될까 말까다.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자유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하지만 홉스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측면도 많다. 첫째로 무국가 사회도 폭력을 통제하고 분쟁을 억누르는 데 상당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우리는 무국가 사회가 그다지 많은 자유를 실현하지 않는다는 점도 살펴볼 것이다. 둘째로 홉스는 국가가 실현할 자유에 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는 점이다. 확실히 홉스는, 그리고 국제사회도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에서 틀렸다. 힘이 곧 정의는 아니며, 권력은 확실히 자유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국가의 속박 아래에서의 삶 역시 끔찍하고 잔인하고 짧을 수 있다."(50)
"(무국가 사회에서) 규범은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떤 식의 행동을 피하고 억제할지, 언제 개인과 가족을 추방하고 다른 이들의 지원을 끊을지 결정했다. 규범은 또한 사람들이 결속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조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그들이 다른 공동체 그리고 같은 공동체 내에서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상대로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규범은 독재적 리바이어던의 후원 아래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리바이어던이 없을 때 규범은 사회가 전쟁을 피할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자유와 관련된 문제는 다양한 측면이 있다. 행동을 조정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정의에 대한 공유된 인식을 형성하도록 진화된 이들 규범이 동시에 일종의 우리cage도 만들어낸다. 사람들의 역량을 줄인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인 또 다른 지배를 강요하는 것이다. 오로지 규범에만 의존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더 단단하고 숨 막히는 제약일 수 있다."(62-3)
제2장 레드 퀸
"한편으로 국가를 통제하고 일반 시민을 지배하는 엘리트층의 힘을 제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역량을 확대하는 솔론의 (개혁) 방식은 고대 문명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다. 그것은 족쇄 찬 리바이어던의 본질이다. 리바이어던은 사회가 기꺼이 협력하려 할 때는 더 큰 역량을 갖추고 훨씬 더 강력해질 수 있지만, 협력이 이뤄지려면 사람들이 바다 괴물을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신뢰해야 한다. 솔론은 그 신뢰를 구축했다. 그러나 신뢰와 협력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유 그리고 궁극적으로 국가의 역량은 국가와 사회 사이의 힘의 균형에 달려 있다. 국가와 엘리트층이 지나치게 강력해지면 우리는 독재적 리바이어던을 부르게 된다. 그들이 뒤처지면 우리는 부재의 리바이어던과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둘이 함께 달리면서 어느 쪽도 우위를 차지하지 않는 국가와 사회가 필요하다. 이는 루이스 캐럴이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묘사한 레드 퀸Red Queen 효과와 다르지 않다."(95-6)
"아테네는 세계 최초의 족쇄 찬 리바이어던 중 하나를 만들었다." "국가는 사회를 지배할 수 없었지만 사회도 국가를 지배할 수 없었고, 어느 한쪽의 진보는 다른 쪽의 저항에 부딪히고 혁신을 자극했으며, 사회의 족쇄는 국가의 활동 범위와 역량을 새로운 영역으로 확대할 수 있게 해줬다. 이 과정에서 사회는 또한 국가가 민중의 통제 아래 남아 있으면서 역량을 더욱 깊이 발전시킬 수 있도록 협력했다. 이 모든 것에서 레드 퀸이 규범의 우리를 무너뜨리는 방식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리바이어던에 족쇄를 채우려면 사회는 협력하고, 집단을 조직하고, 정치에 계속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일은 사회의 내부가 볼모와 주인으로 갈라지고, 씨족, 부족, 혹은 친족집단들로 나뉘면 일어나기 힘들다. 솔론과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들은 이처럼 대립적인 정체성을 점진적으로 제거했고 더 광범위한 협력의 축을 만들기 위한 공간을 조성했다. 이는 우리가 족쇄 찬 리바이어던의 창조 과정에서 반복해서 확인하게 될 특성이다."(103)
"우선 국가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멈추고, 사회의 분쟁 해결을 돕고, 사람들을 지배로부터 보호하고,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려면 미국의 국가건설자들처럼 강력한 국가를 요구하는 일단의 개인이나 사회집단이 있어야 한다." "(미 건국 과정에서 그 역할을 맡은) 연방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국가건설 계획이 리바이어던에게 '의지를 일임'해야 할 사람들의 마음에 들도록 권리장전과, 자기들의 권력에 대한 다른 견제장치를 도입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이 모든 권리장전과 견제장치를 간절히 원한 건 아니었다. 사실 해밀턴은 이런 〈민주주의의 과잉〉을 헐뜯었으며, 대통령과 상원의원의 종신 재직을 제안하기도 했다." "족쇄 찬 리바이어던의 두 번째 축인 사회적 결집은 레드퀸 효과의 핵심이기 때문에 훨씬 더 중요하다. (정치 참여를 뜻하는) 사회적 결집은 엘리트층에 가하는 전반적인 압력을 포함한 제도화되지 않은 형태와 선거나 회의체를 통하는 제도화된 형태를 모두 취한다."(108-11)
"국가가 이름뿐인 부재의 리바이어던처럼 행동하는 대표적인 현대 국가가 레바논이다. 부재의 리바이어던은 사회가 국가를 믿지 못하고, 사회가 국가가 (인구 총조사 등으로 수집한 데이터에 기반한) 판독 능력을 악용할 것을 걱정할 때 생겨난다." "레바논은 1932년 단 한 차례 실시된 인구 총조사에서 나온 인구 비중─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51퍼센트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시아파와 수니파 그리고 드루즈파 무슬림으로 구성된다─에 따라 집단 간 권력을 배분했다." "이 협약은 결국 믿을 수 없을 만큼 허약한 국가를 낳았다. 부재하는 리바이어던 아래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나라에서 권력은 국가가 아니라 개별적인 지역사회에 있다. 이 국가는 보건이나 전력 같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지만, 지역사회는 제공한다. 국가는 폭력을 통제하거나 법을 집행하지도 않는다. 시아파 무슬림 단체인 헤즈볼라는 자체적으로 사설 군대를 보유하고 있고, 베카밸리의 여러 무장 세력들도 그렇다."(125)
"레바논에서 국가는 국민이 올바른 공학적 설계를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허약한 것이 아니다. 사실 상당히 현대적인 대학체제를 갖춘 이 나라 사람들은 중동 지역에서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편이다. 그들이 역량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공동체들이 미끄러운 비탈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국가가 허약하게 설계된 것이다. 의원들은 자기들이 일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는데, 의사당에 왜 나타나겠는가? 누가 선출될지 정말로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의원들은 선거를 늦추기로 의결할 수 있다." "누구도 의회에 권력을 주고 싶어 하지 않고, 사람들은 의회를 불신하며, 사회적 행동주의 또한 싫어한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도무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는 국가가 다른 이들에게 포착될까 두려워하며 판독 불능 상태로 남아있기를 바라며, 그 가능성을 확실히 제거하려고 리바이어던이 계속 졸고 있도록 한다."(129-30)
제3장 권력의지
"국가건설자가 되려는 이들이 어떤 '경쟁우위edge', 즉 앞길의 걸림돌을 넘을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뭔가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무함마드의 경쟁우위는 종교에서 나왔다. 그에게는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는 데 정당한 권위를 부여하고 추종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는 종교적 이념이 있었으며, 새로운 공동체를 창설하기 위해 그 영향력을 이용했다." "또 하나의 강력한 경쟁우위는 조직적인 요소로, 지도자가 더 강한 통솔력이나 군사력을 발휘하기 위해 새로운 연합이나 더 효과적인 조직을 형성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또 다른 가능성은 기술적인 경쟁우위다. 적들이 활용할 수 없는 총이라는 군사 기술에 크게 의존해 국가건설 계획을 실현한 하와이의 카메하메하 왕의 성공이 좋은 예다." "초기국가 형성의 마지막 특징은 (친족 공동체를 종교 공동체로 일신하려 했던) 무함마드의 부상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정치적 위계가 출현하면서 사회의 재조직화가 이뤄진다는 점이다."(156-7)
"무국가 사회는 경쟁우위를 가진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권력의지에 압도되고 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지도자들은 족쇄 찬 리바이어던을 창설하거나, 자유를 촉진하거나, 엘리트층과 시민들 간 권력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자신의 권력과 지배를 확대하려는 동기로 움직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테네의 솔론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는 부유한 가문과 엘리트층의 지나친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권력을 잡았고, 따라서 리바이어던에 채울 족쇄를 만드는 건 그의 임무였다. 다른 국가건설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솔론 시대의 아테네와 다른 사회들을 구분 짓는 훨씬 더 근본적인 차이는 아테네 사회가 이미 정치 권력의 배분과 분쟁 해결을 규제할 어떤 공식적인 제도를 개발했었다는 점이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그런 제도는 솔론과 그 뒤를 이은 클레이스테네스를 비롯한 다른 지도자들이 민중의 정치 참여를 늘리고 사회와 정치의 위계를 억제하는 기존의 규범을 강화하도록 토대를 제공했다."(178-9)
"티브족이나 메디나, 메카, 줄루족 혹은 카메카메하 시대의 하와이에는 그런 제도들이 전혀 없었다. 그 대신 이런 사회들은 족쇄 찬 리바이어던에게 불리한 방법을 썼다. 실력자가 되려는 자들이 권좌에 오르는 것을 막으려고 이 사회들이 이용한 방법은 분쟁을 규제하고 정치적 위계의 출현을 저지하는, 주술과 같은 규범이나 친족 기반 관계 혹은 카푸 체계의 복합적인 수단들이었다. 그러나 일단 권력의지가 규범들을 무력화해버리고 나면 새롭게 부상한 국가 권력에 효과적인 대항력으로 남아 있는 것들은 많지 않았다. 국가건설자들은 또한 자신들의 의제를 추구하기 위해 재빨리 규범들을 바꿔버렸다." "이런 상황은 국가와 사회가 둘 다 허약한 바닥 부근에 해당하며, 이때 일단 진행되기 시작한 국가건설 과정을 억제할 수 있는 사회의 규범과 제도가 없으면 회랑으로 진입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권력의지에 직면한 사회는 독재적 리바이어던으로 가는 것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179-80)
제4장 회랑 밖의 경제
"독재적 리바이어던은 안전과 예측 가능성, 질서를 만들어낼 터이므로 더 나은 경제적 유인을 낳으리라는 홉스의 생각 역시 부분적으로만 맞다." "(무함마드 사후에 등장한) 우마이야와 압바시야 왕조들은 제국의 지방을 다스리고, 세금을 걷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지역 엘리트층에 의존했다. 엘리트층의 지지를 받기 위해 그들은 '징세 도급tax farming' 제도를 도입해 일정한 금액을 받고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팔았다. 일단 다마스쿠스 정권이 준 징세권과 그다음에 권력을 잡은 압바시야 왕조의 바그다드 정권이 준 징세권을 갖게 되면 엘리트층은 지역사회에 어떤 세금이든 맘대로 부과할 백지수표를 쥐는 셈이었다. 이로 인해 징벌적으로 높은 세율의 과세와 엘리트층의 토지 축적이 함께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엘리트층은 그들이 부과한 세금을 낼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서 토지를 넘겨받았기 때문이다. 제국의 이런 정치체제는 결국 자멸을 불러왔고, 분열된 제국은 945년 마침내 붕괴했다."(193-7)
"무함마드가 메디나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재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집단의 인정을 받으면 지도자가 되며, 〈지도자의 지위는 그가 우두머리라는 뜻이고,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복종하지만 그가 자신의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권력을 갖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븐 할둔은 일단 그런 지도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곧바로 사회를 미끄러운 비탈로 끌고 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이해했다." "할둔의 표현에 따르면, 결국 아랍의 집단의식이 사라지고, 인종이 소멸하고, 아랍주의Arabism가 완전히 파괴되면서 칼리프 국가는 정체성을 잃었다. 정부 형태는 순전히 왕권으로 다스리는 단순한 형태였다." "여기서 할둔은 새로운 왕조의 창건이 지니는 경제적인 함의를 암시한다. 왕조의 초기에 집단의식의 힘과 '종교의 억제력'이 작동할 때는 경제적 번영의 잠재력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왕권'이 스스로 공고해지고 경제정책은 '백성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파괴적'인 것으로 바뀌었다."(197-9)
"(전쟁 상태나 규범의 우리를 탈피한) 독재적 리바이어던은 사회를 조직하고, 법체계를 구축하고, 직접 경제성장을 자극하기 위해 투자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독재적 성장'의 요체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정치적 권력을 손에 넣게 될수록 경제적 혜택의 독점은 더 심해지고 국가가 보호해야 할 재산권을 침해하려는 유혹은 더 커진다." "독재적 성장이 제한적인 수준에 그치리라고 보는 두 번째 이유 역시 근본적이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려면 안전한 재산권과 교역, 투자뿐만 아니라 혁신과 끊임없는 생산성 향상이 필요하며 후자가 더 중요하다. 이런 것들은 독재적 리바이어던이 매섭게 지켜보는 가운데서는 이루기가 훨씬 더 어렵다. 혁신에는 창조성이 필요하며, 창조성에는 개인들이 두려움 없이 행동하고, 실험하고, 설사 다른 이들이 좋아하지 않더라도 자기 뜻에 따라 스스로 진로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다. 이런 자유는 독재체제 아래서는 지속하기 어렵다."(206-7)
"무국가 상태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끝없는 투쟁이 벌어지고 형편없는 유인체계 탓에 '열심히 일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사회가 규범과 관습을 내세워 분쟁을 단속하고 폭력을 억제하면 경제는 규범의 우리에 갇히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제는 규범에 제약을 받으며, 가난을 넘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온통 뒤틀린 경제적 유인으로 가득 차 있다. 홉스는 독재체제가 이런 결과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독재적 성장은 본래 취약하고 제한적이다. 독재적 리바이어던은 사회에서 수입을 더 많이 짜내고, 값진 자원을 더 많이 독점하며, 제멋대로 행동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다. 또한 국가 권력은 독재자 자리를 노리는 도전을 피하거나 무력화하는 엄청나게 비효율적인 체제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더해 독재적 성장은 자유롭게 기능하며, 광범위한 기회와 경제활동의 유인을 만들어내고, 투자와 실험 그리고 혁신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지 않는다."(223-4)
제5장 선정의 알레고리
"코무네 자치정부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려면 공화주의적인 시에나가 9인위원회 시대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성인 남성 시민이 모두 참여하는 민회였다. 민회는 로렌체티의 시대에 위축된 상태였지만 여전히 시에나의 정치체제 내에 있었고, 새로운 행정장관인 포데스타가 취임할 때처럼 특별한 경우에 모였다. 14세기 중반에 민회의 역할은 종을 울려 소집했던 '타종 평의회'로 넘어갔다. 평의회는 남성 시민 300명으로 구성됐는데, 시에나의 테르초라는 행정구역 세 곳에서 각각 100명씩 1년 임기로 선출했다. 이 기구의 선거인들은 9인위원회의 콘술들과 포데스타, 재정관과 '조달관'으로 불리는 네 명의 주요 재정 담당 관리들을 포함한 국가 행정 관료, 국가가 임명한 재판관들이었다. 정부의 주요 기능은 포데스타와 9인위원회가 수행했고, 조직화한 특정 이해관계자들, 특히 유력 상인조합과 오래된 귀족 가문들을 대변하는 다른 소수의 집정관 집단들이 있었다."(230)
"이탈리아의 여러 코무네는 중세 상업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코무네의 정부체제는 5세기 말 서로마제국 붕괴에 따른 침체를 겪은 후 교역과 경제활동이 되살아날 수 있도록 해주는 법과 경제 제도를 만들어냈다. 이탈리아는 이 번영의 혜택을 받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남쪽에는 비잔틴제국, 동쪽에는 새로운 무슬림 국가들이 있어서 동방의 향신료와 수많은 사치품이 공급됐다. 북쪽에는 잉글랜드와 플랑드르가 있었다. 잉글랜드는 최고급 양모를, 플랑드르는 가장 인기 있는 직물을 생산했다. 거대한 교역이 이뤄질 무대가 마련됐다. 양모와 사치스러운 옷감, 향신료가 주인공이었다. 노르만 왕들이 지배한 12세기 중반까지 남부 이탈리아와 스페인도 좋은 위치에 있었지만 자치정부를 갖지는 못했다. 그래서 어느 쪽도 자치적인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같은 방식으로 교역을 끌어오지 못했다. 이는 코무네가 어떻게 교역에 필요한 제도 발전을 촉진했는지와 관련이 있다."(242)
"누구든 혁신이나 가치 있는 투자를 위한 좋은 구상이 있다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기회는 사회 안에서 널리, 공평하게 배분돼야 한다. 우리가 코무네의 사회적 이동성에서 본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이 기회와 유인들은 또한 공정한 분쟁 해결과 법 집행체계로 뒷받침해야 한다. 프레스코화 '선정의 알레고리'에서 강조한 정의를 보라. 그러자면 다시 국가와 정치적 엘리트층이 법 집행에 간섭하면서 자기네에게 유리하게 몰아갈 만큼 충분히 강력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프레스코화의 밧줄을 보라. 여기에서 우리는 경제적 번영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족쇄 찬 리바이어던이 할 결정적인 역할을 볼 수 있다. 리바이어던에 족쇄를 채우지 않으면 어떻게 법이 국가와 정치적으로 힘 있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적용되도록 할 수 있겠는가? 때때로 '법의 지배'라고 부르는 것 역시 리바이어던의 발목에 채운 족쇄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들 족쇄는 헌법과 서약만이 아니라 사회가 쥐고 있는 밧줄이 있어야만 만들 수있다."(254-5)
"족쇄 찬 리바이어던은 단지 포용적 경제제도에 필요한 포용적 정치제도를 정점으로 끌어올린다고 실현되지 않는다. 족쇄 찬 리바이어던을 실현하는 것은 또한 레드 퀸 효과, 즉 사회가 국가 및 정치적 엘리트와 겨루고 그들을 제한하고 견제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그에 관한 논의는 사회가 조직화하고, 정치에 참여하고, 필요하면 국가와 엘리트에 반항하도록 돕는 규범들의 핵심적인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족쇄만이 아니다. 법을 집행하고, 분쟁을 해결하고,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며, 경제적 기회와 유인을 창출할 경제제도를 뒷받침하는 리바이어던의 능력 역시 중요하다. 따라서 국가를 통제하는 사회의 능력과 국가의 역량이 맞수를 이루는 한, 국가의 역량도 똑같이 중요하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경제적 유인을 약화시키는 여러 규범과 관습의 우리를 완화하면) 심지어 규범의 다른 측면이 리바이어던을 계속 견제하더라도 역량 있는 국가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256-7)
제6장 유럽의 가위
"유럽의 발흥을 이끌어낸 원동력은 1500년 전 중앙에 집중된 권력과 (여성은 제외한) 보통 사람의 힘 사이에 뜻밖의 균형이 이뤄진 일련의 독특한 역사적 사건들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이 균형이 유럽을 회랑 안으로 밀어 넣어 국가와 사회가 끊임없이 경쟁하도록 하는 레드 퀸 효과를 작동시켰다. 균형은 두 가지 요인이 어우러져 발생했다. 첫째는, 5세기 말에 의회와 합의에 따르는 의사결정의 규범을 중심에 두고 민주적으로 조직된 부족사회들이 유럽을 장악한 것이다. 둘째는, 로마제국과 기독교 교회로부터 흡수한 국가 기관들과 정치적 위계질서의 핵심 요소들을 물려받은 것이다. 로마의 국가와 교회는 5세기 말 서로마제국이 무너진 다음에도 계속해서 중앙집권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요소를 가위의 양날로 생각할 수 있다. 두 날을 쓸 수 있게 사북을 박으면 유럽의 가위는 족쇄 찬 리바이어던이 부상하면서 경제적 유인과 기회를 창출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267-8)
"유럽이 이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었던 연유에 대해 감을 잡기 위해 882년 프랑스 랭스의 대주교 힝크마르가 기록한 의회에 대한 묘사를 보자." "힝크마르는 샤를마뉴 시대의 인물로 당시 국가 통치 방식을 직접 목격한 아달하르두스를 인용해 그동안 이 왕국이 어떻게 통치돼왔는지 이야기하면서 (서프랑크 왕으로 즉위하는) 카를로만에게 왕국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쳤다. 그것은 놀랍게도 왕이 아무런 제약 없이 자기가 바라는 대로 실행하는 통치가 아니라 민중이 참여하는 의회에 바탕을 둔 통치였다." "그것은 게르만 부족 의회 정치의 요체였다. 샤를마뉴와 그 후의 카를로만은 이 의회들의 결정에 따라 행동하고, (남성)사회의 다양한 부문에 걸쳐 바람을 들으며, 중요한 결정에 대해 일정 수준의 총의를 확보해야 했다. 의회 참석자의 수는 분명 제한적이었지만, 샤를마뉴는 결정 사항을 더 낮은 수준의 회의에 전달할 사자들을 배치해 왕국 전체가 알도록 했다 이런 참여가 유럽의 가위를 구성하는 첫 번째 날이다."(268-71)
"(가위의 두 번째 날인) 로마의 관료조직은 요안네스가 기술한 것처럼 일련의 복잡한 '관습과 형식과 언어'에 따라 운영됐고, 구성원들은 군대에서 유래한 제복 형태의 '독특한 예복'을 입었다. 요안네스는 관료집단이 '보통 사람들'과는 분리된 정체성과 소속감을 지녔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가 설명한 것은 정교한 법체계 안에서 명료한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광범위한 관료조직이다. 물론 관료조직은 개인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정확히 규칙이 정한 대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요안네스 자신도 전적으로 실력을 바탕으로 일자리를 얻은 것이 아니라 조티쿠스의 도움을 받았다. 더욱이 고위직 가운데 다수가 엘리트층, 원로원 계급 사람들의 몫으로 정해져 있었고, 어느 정도 부패도 분명히 있었다. 이런 결함에도 로마인들은 정교한 구조와 지역 조직을 갖춘 관료제 국가를 수립했다. 이런 세속 기관은 프랑크족이 로마와 교류하게 된 시기에 이미 정치 제도와 통합돼 있던 교회의 위계 구조에 상응하는 것이었다."(276-8)
"마그나 카르타는 얼마나 독특한가? 답은 전혀 독특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그나 카르타가 제정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유럽 전역에 걸쳐 '환희의 입성'과 비슷한 문서를 찾아볼 수 있다. 1205년 아라곤의 왕 페드로 1세가 카탈루냐에 준 헌장, 1222년 헝가리의 언드라시 2세가 준 황금헌장, 1220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준 헌장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헌장들은 모두 같은 문제들에 초점을 맞췄으며, 특히 통치자는 세금을 물리려면 시민들과 협의하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보장했다. '대헌장'들 뿐만 아니라 의회도 유럽 전역에 걸쳐 생겨났다. 의회의 확산은 스페인에서 시작됐는데, 1188년 레온 의회가 생겼고 그 다음에 각자 따로 의회를 가진 아라곤과 카탈루냐, 발렌시아가 합쳐 만든 아라곤연합왕국으로 퍼져나갔다. 팔러먼트 같은 의회들은 이베리아의 나바라왕국과 포르투갈에서도 발전했다. 프랑스에서는 비록 전국적인 의회인 삼부회의 발전은 느렸지만, 각 지역의 신분제 의회들은 만개했다."(312-3)
"유럽의 가위를 이루는 두 날, 즉 로마제국의 국가기관들 그리고 게르만족의 참여적인 규범과 제도들이 뜻밖에 힘의 균형을 만들어낸 것 말고는 초기 유럽 역사에서 족쇄 찬 리바이어던의 부상을 예정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국가기관과 참여적인 제도 둘 중 어느 쪽도 그 자체로 족쇄 찬 리바이어던을 낳기에는 부족했다. 비잔티움처럼 첫 번째 날만 있을 때는 전형적인 독재적 리바이어던이 나타난다. 아이슬란드처럼 두 번째 날만 있으면 정치 발전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국가건설도 없다. 상황과 시대가 다르고, 결정적인 시점에 다른 우발적 사건들이 벌어지고, 가위의 두 날을 합치려고 시도했던 클로비스와 샤를마뉴보다 미숙한 다른 정치적 주역들이 있었다면 두 날을 합치더라도 실제 진행된 역사와 같은 방식으로 서로 균형을 이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로마제국이 무너진 후 혼란스러운 5~6세기가 지나는 동안 가위의 두 날은 불안정하나마 균형을 만들어냈고, 유럽은 좁은 회랑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337)
제7장 천명
"한나라 이후 중국 정부는 세 가지 기본 원리에 동의했다. 첫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황제의 군주적 지배 아래 백성들에게 조정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나 발언권을 주지 않아야 한다. 황제는 언제나 법 위에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재능 있는 사람들을 관리로 두고 그들이 국가를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상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황제가 바라는 대로 사회를 지배하는 데 필요했다. 이것은 유가 철학에 뿌리를 두었으며, 유가 사상은 '배움에 뛰어난 이는 공무에 헌신해야 한다'며 '덕이 있고 재능이 있는 이들을 고취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핵심 원리는 황제가 백성의 복리를 염려하고 도덕적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황제는 시민들의 경제적 번영을 촉진해야 하며, 후기 왕조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백성들 가운데 부를 쌓아야' 한다는 가르침도 포함된다. 이 세 가지 원리는 일종의 사회계약이 돼 국가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 조건들을 어기면 백성이 들고 일어날 수 있었다."(353)
"독재의 결정적인 특징은 사회가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단을 주지 않고 사회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진나라가 부상하면서 민중이 정부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줄 모든 요소를 없애버린 중국이 바로 그러했다. 참여를 위한 길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중국에서 사회가 리바이어던을 통제하고 만들어갈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분명 반란은 사회가 활용할 수 있는 대안으로, 황제들에게 커다란 불안감을 안겼다. 그러나 반란의 위협이 늘상 도사리는 건 아니었고 정치적 의사결정에 체계적인 영향을 미치지도 않았다. 중국 정부에 요구사항들을 분명히 밝히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자율적인 사회조직들은 어떨까?" "18세기 말과 19세기에 한커우漢口는 상인과 장인들의 활기로 북적이는 대도시였다." "그러나 겉모습에 속아서는 안 된다. 이 사회에는 자율성도, 지역적 연대도 거의 없었다." "각기 다른 상인집단들은 서로 협력하지 않았고 공공서비스와 조직에 투자하는 일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다."(368-70)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사업인 소금 사업은 국가가 독점했고 상인들의 세력과 부는 국가가 인가해준 결과였다." "그러므로 중국의 상황을 더 자세히 뜯어보면, 심지어 가장 자율적이고 적극적인 사회가 출현하리라고 예상되는 곳에서조차 국가에 복종하고 의존하는 완전히 다른 사회를 발견하게 된다. 의존적이든 아니든 간에 중국 사회는, 국가가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해 규범의 우리를 완화하고 사회적, 경제적 자유의 여지를 확대한 덕분에 그 과정에서 혜택을 봤다. 우리는 다른 곳의 국가건설 과정에서는 무함마드와 샤카의 경우처럼 국가건설자들이 자신들을 가로막는 숨막힐 듯한 규범들과 친족 관계에 바탕을 둔 연합을 무너뜨렸고, 그러면서 규범의 우리를 어느 정도 완화하는 모습을 봤다. 하지만 중국의 상황에서는 국가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친족집단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친족 관계들은 사실상 국가가 사회를 관리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장려하고 지원했다."(370-2)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한 후 상앙의 법가 사상과 공자의 도덕적 가르침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대체됐다. 과거와의 단절이다. 하지만 과거와의 연속성은 차이만큼이나 뚜렷했다. 하늘의 명령은 카를 마르크스의 명령으로 대체될 것이었다. 진나라 이후 중국이라는 국가의 결정적 특색은 사회에 대한 국가의 압도적인 지배력에 있었다. 그 점은 바뀌지 않았다." "독재의 본질이 제국 시대와 공산주의 시대의 연속성을 만들어냈다. 독재의 본질은 사회가 조직화하지 못하고 국가의 권력 구조 바깥에서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칠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공산당이 정치 참여의 유일한 매개가 되기를 바랐는데, 이는 사실상 국가와 정치 엘리트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시민들을 통제한다는 의미였다. 이 점은 문화혁명 당시 때때로 나왔던, 상향식 비판을 허용하라는 요구가 폭력적으로 진압되었을 때 고통스러울 만큼 분명해졌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사회를 위한 목소리는 없었다."(384-5)
"현대화가 자동으로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독재적인 노선에 따라 조직된 경제에서도 활기찬 혁신이 확실히 이뤄지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중국 공산당이 만들어낸 그 모형은 자유 없이도 혁신을 일궈낼 수 있을까?" "초기 소련의 성공에서 볼 수 있듯이, 독재적 성장이라고 해서 혁신과 기술적 진보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이 경우들에서 성공은 좁은 영역에서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well-posed problem를 풀고 정부의 수요에 대응함으로써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분야에서 미래 성장에 필수적인, 다양하고 지속적인 혁신은 기존의 문제들을 푸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들을 생각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자면 자율성과 실험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엄청난 양의 자원을 제공할 수 있고, 개인들에게 열심히 일하라고 명령할 수는 있지만, 그들에게 창의적인 사람이 되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회랑 밖에 있는 어떤 사회도 그 일을 해내지 못했다."(391-2)
제8장 파괴된 레드 퀸
"인도 국가와 사회의 진화에서 규범의 우리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테네와 유럽에서는 레드 퀸이 국가와 사회 양 측의 발전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규범의 우리를 완화하기 시작했지만, 그동안 인도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인도에서는 카스트제도가 강화되고 그 단단한 계급구조에 국가가 부차적인 존재로 밀려나면서 사회는 파편화됐고 내부적으로 대립했다. 사회는 하나로 통일된 실체였던 적이 없었고, 사회 내부의 갈등과 그에 따른 불평등이 이 나라 정치에서 주된 문제가 됐다." "사회는 조직화하거나 국가를 감시할 수 없었다 비록 이 반도에도 유럽처럼 민중이 정부에 참여한 오랜 역사가 있었다 해도 사회의 정체성을 바꿔나가는 레드 퀸의 역동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정치 참여가 카스트를 바탕으로 이뤄지고, 국가 자체가 카스트제도를 지지하고 카스트제도에 의해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카스트 기반의 정체성은 계속해서 재확인됐다. 이는 자유에 끔찍한 영향을 미쳤다."(403)
"카스트는 사회에 뿌리 깊은 위계 구조와 불평등을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정치의 본질을 왜곡했다. 사회는 파편화된 채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였고 국가기관을 감시하는 데 실패했으며, 국가가 역량을 더 확대하도록 추동하는 능력도 몹시 부족했다. 최상위층의 브라만 계급은 나머지 계급을 지배하느라 너무나 바빴고, 나머지 계급들은 사회의 위계 구조 속 자신의 위치에 얽매여 있었다. 모두가 규범의 틀에 너무 철저히 갇혀 있었다. 역사적으로 인도의 국가는 적어도 카스트제도를 실행하고 재확인하면서 언제나 규범의 우리를 강화하는 것을 의무로 여긴 것으로 보인다. 독립 후 인도에 민주주의가 찾아왔을 때 카스트제도가 정치적 경쟁의 전선을 규정하면서 민주적 경쟁의 활력을 약화시켰다." "사회는 기존의 위계 구조를 뛰어넘어 조직화하고 정치인들이 책임을 지도록 하며 국가가 민중에 봉사하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카스트의 분열로 불가능해졌다. 레드 퀸은 망가진 채로 남았다."(441)
제9장 세부적인 것들 안의 악마
"찰스 틸리는 17세기의 '군사혁명'으로 전쟁 위협이 증가한 것이 현대 국가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비록 스위스에서는 군사혁명이 앞서 국가건설이 이뤄졌지만, 이 나라는 틸리의 주장을 완벽하게 뒷받침하는 사례다. 스위스는 역사적으로 샤를마뉴의 카롤링거제국 동쪽 지역을 계승하는 국가인 신성로마제국에 속했다." "스위스 지역에 대한 신성로마제국의 통제가 불완전했으므로 스위스 정체를 구성하는 각 칸톤(canton, 자치 주)은 자체적인 의회제도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칸톤은 시골과 도시가 뒤섞여 있었는데 게르만족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제국이 약해지면서 다시 부상한 의회 정치의 큰 흐름을 받아들이게 됐다. 스위스연방은 1291년 우리Uri, 슈비츠 운터발덴 칸톤이 루체른 호수 위쪽의 뤼틀리 평원에서 분데스브리프(Bundesbrief, 연방헌장)에 선서하고 서명함으로써 출범했다. 헌장은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고, 특히 공공질서와 무법상태에 관심을 쏟았다."(448-9)
"스위스의 사례에서는 전쟁의 위협, 특히 신성로마제국 군주의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속적인 위협이 중요한 유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 요인이 없었다면 개별적으로 행동했을 칸톤과 도시들이 큰 연방으로 단결하고, 권력을 중앙에 집중하고, 국가 역량을 키웠다. 중앙집권화가 이뤄지기 전에 스위스 칸톤들은 분쟁을 해결하고 법을 집행하는 데 법률이나 국가 권력보다는 씨족 중심의 사회구조에 의존하며 아마도 회랑 밖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산은 또한 스위스 농민들이 자유롭고 사회가 이미 결집했다는 의미였다. 1291년에 시작된 중앙집권화는 사회가 국가의 권력 증대에 저항하고 균형을 맞출 만큼 강력해진 상황에서 이뤄졌다. 그래서 국가와 사회 모두 역량을 점차 확장하도록 앞장서 이끌어가면서 회랑 안으로 이행하도록 촉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위스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활기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했지만 그런 과정이 결코 예정돼 있지는 않았다."(452-3)
"164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새 선제후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48년간 통치했고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나아갈 새 길을 제시했으며, 그 과정에서 대선제후로 불리게 됐다. 프로이센이 겪은 30년전쟁의 경험을 통해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다고 확신하게 됐다." "(국가 역량의 확대를 추구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먼저 끊임없이 의회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게끔 영구적인 과세권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1653년 그는 협상으로 이른바 브란덴부르크 휴회 합의를 이끌어내 6년에 걸쳐 53만 탈러를 받아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쿠르마르크 의회가 아닌 그가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대신 그는 의회에서 하나의 원院을 구성하고 있던 귀족들에게 면세 지위를 주었다. '분할통치divided and rule'하는 영리한 전략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회의 서로 다른 원들을 성공적으로 분리하고, 의원들이 그에게 맞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않도록 확실히 차단했다."(454-5)
"1740년부터 프로이센을 통치한 프리드리히 대제는 공격적인 영토 확장 전략을 폈다. 프로이센에서 전쟁은 국가를 만들었고 그 국가는 독재로 악명 높은 국가였다. 그 국가의 통치자들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다. 대선제후는 〈신의 가호로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나는 결단코 전제군주처럼 통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그에 동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잘 운영되는 정부는 재정과 정책, 군사 모든 분야를 결합해 국가를 강하게 하고 그 힘을 확장한다는,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 확립된 체계를 가져야 한다. 그런 체계는 오로지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다.〉 16세기에 프로이센은 강려한 의회가 군주제를 제약하는 가운데 신성로마제국의 다른 여러 지역처럼 회랑 안에 있었다. 전쟁은 국가 권력을 확대함으로써 이 나라를 회랑 밖으로 밀어냈는데, 이는 스위스에서 전쟁이 초래한 결과와는 아주 달랐다. 프로이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독재적인 길을 따라 빠르게 나아갔다."(457)
"러시아의 '체제 전환'은 왜 그토록 극적으로 실패했을까?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러시아가 회랑 밖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소련이 붕괴한 후 국가기관들은 재건됐지만, 보안조직들을 개혁하려는 시도는 별로 없었다. 실제로 정치인들은 체첸에서처럼 보안조직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문제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국가가 더는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막고 옐친이 행사했던 것과 같은 고도의 재량권을 제한할 수 있는 민중의 결집이 없고, 독립적인 민간 이익집단조차 없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민영화와 경제개혁 자체만으로는 족쇄 찬 리바이어던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광범위하고 정당한 자산 분배를 이룰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푸틴은 러시아가 1990년대에 성취했던 것을 거꾸로 돌리면서 새로운 독재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푸틴의 리더십 아래 활기를 되찾은 KGB가 너무나 쉽게 경제와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줬다."(476-7)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는 비슷한 역사와 지리 조건, 문화적 유산을 갖고 있었고, 19세기에 똑같은 경제적 기회를 맞이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분기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이론이 시사하는 바를 보여준다." "코스타리카와 비교할 때 과테말라는 무력에 의한 강제노동의 역사가 더 길고 토착민 인구가 상당히 많았으며, 과테말라 왕국의 독재적 국가제도를 물려받았다. 그래서 19세기말 커피 시장의 활황으로 생긴 국가건설의 유인은 이 나라에서 강력한 독재적 리바이어던을 만들어냈다. 스페인제국이 붕괴하면서 코스타리카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기관이 아예 없는 가운데 네 도시가 통제권을 가지려 경쟁했다. 코스타리카는 커피 덕분에 붕괴를 피하고 회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레드 퀸 효과는 공공서비스와 토지에 대한 재산권 강화로 뒷받침 된 소규모 자작농 기반의 커피 경제가 부상하는 과정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났다. 이런 과정은 몇십 년 후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주의와 사회적 기반을 형성했다."(495-6)
"핵심 행위자들은 새롭고 지속성 있는 연합을 형성하거나, 새로운 요구와 불만, 서사를 분명히 표현하거나, 아니면 기술적, 조직적 혹은 이념적 혁신을 제안함으로써 사회의 진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 사이에 눈에 띄는 구조적 차이점들이 있었지만, 코스타리카가 진로를 선택할 때는 1830년대와 1840년대의 브라울리오 카리요 같은 개인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 코스타리카를 중앙아메리카연방공화국에서 분리하리고 한 그의 결정은 이 나라가 이 지협地峽 내 이웃 나라들과 다른 길로 갈라져 나갈 수 있도록 했다. 더 효과적인 국가기관들을 설립하기로 한 그의 결정은 소규모 자작농 기반의 커피 경제가 발전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군대를 소규모로 유지하기로 한 그의 결정 덕분에 코스타리카 정치에서 군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미약했고 결국 1948년에 군대가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카리요가 다른 결정을 했다면 코스타리카는 오늘날 과테말라와 더 비슷해졌을 것이다."(498-9)
제10장 퍼거슨은 무엇이 잘못됐나?
"연방주의자들은 강력한 대통령이 통제를 벗어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어떤 집단 또는 '당파'에 포획될 수 있다는 점을 걱정했다. 그래서 그 모든 견제와 균형 장치를 두고, 행정부와 입법부 권력을 분립시켰다. 그들은 또한 민중의 정치 참여가 지나치게 많아질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주 의회가 상원 의원들을 선출하고,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도입했다. 연방주의자들은 '주의 권리' 및 연방을 구성하는 주의 자치권을 보존하려는 이들에게 양보해야 했다." "이런 제도 설계는 미국을 회랑 안으로 밀어 넣는 작용을 했지만, 일종의 '파우스트의 거래'였다. 제도 설계를 통해 중요하게 보호한 것 중에는 남부의 노예 소유자들이 자신들의 노예를 착취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도 포함됐는데, 그것은 국가의 손을 묶었을 뿐만 아니라 그 손을 더럽혔다." "퍼거슨에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벌금을 물거나, 감옥에 가거나, 심지어 살해 당하는 이들이 가난한 흑인 시민들이었다는 사실은 이런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505-6)
"미국의 리바이어던이 택한 경로는 역설적으로 또 하나의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뜻밖에도 일부 핵심적인 분야에서 국가 활동에 대한 효과적인 감시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문제다. 미국에서 국가는 연방주의자들의 타협과 민관협력 모형에 따라 부여된 구속복에 갇혀 있다. 그래서 냉전과 최근의 국제적인 테러가 초래한, 갈수록 복잡해지는 안보상의 도전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회의 감시를 별로 받지 않는 쪽에서 이러한 역량을 개발했다. 그에 따라 숱한 제약을 받고 여전히 설립 당시의 취약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안보와 군사 분야에서 족쇄를 차지 않은 채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리바이어던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국가안보국NSA이 사회는 물론 정부의 다른 기관으로부터 어떤 견제도 받지 않은 채 미국 시민들을 표적으로 한 방대한 감시와 자료수집 활동을 벌였다고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했을 미국 리바이어던의 무서운 '얼굴'에 드러났다."(508)
"그렇다면 퍼거슨 경찰은 어떻게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으면서 주민들이 지닌 헌법상 권리를 침해할 수 있었을까? 권리장전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타협으로 만들어진 권리장전은 각 주가 아니라 연방정부에만 적용됐다. 각 주는 '경찰권'을 확보할 수 있으며 엄청난 재량권을 가졌다. 권리장전의 실제 문구는 이것을 명백히 규정하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양해됐다." "1865년 남북전쟁 패배는 권리장전에 대한 이런 관점에 종말을 고했어야 했다. 실제로 1868년에 통과된 수정헌법 제14조는 이런 조문을 담았다. 〈어떤 주도 미국 시민의 특권과 면책권을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하거나 시행할 수 없고, 정당한 법적 절차에 따르지 않고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생명, 자유 또는 재산을 박탈할 수 없으며, 관할권 내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법률의 펑등한 보호를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조항이 각 주의 경찰권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거듭 판결했다."(510-1)
"이 모든 것은 1877년 이후 남부의 복원시대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수정헌법 제14조는 노예제도를 끝내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경제적 기회와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 개혁을 통해 남부의 재건을 이루려는 취지가 담긴 세 가지 수정조항 중 하나였다. 하지만 1877년 러더퍼드 헤이스 대통령은 '파우스트의 거래'에 전념해 북군을 철수하고 재건을 끝내기로 남부의 정치인들과 타협함으로써 선거인단 다수를 확보했다. 일단 북군이 떠나자 남부는 '복원'됐고, 재건을 밀어붙이던 힘은 갑자기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특히 악명 높았던 건 인종 분리를 강화한 '짐 크로법'들이었다. 1890년 남부 주들은 인두세와 문해력 시험을 통해 흑인들의 선거권을 빼앗으려고 자신들의 헌법을 개정했다. 경찰권을 그 조치의 핵심에 있었다. 북부는 짐 크로법을 용인하며 남부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기로 합의했다. 권리장전이 주 의회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해석'은 이 거래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512)
제11장 종이 리바이어던
"아르헨티나의 국가는 부재하지 않는다. 국가는 정교한 법령과 대규모 군대, (관료들이 자신의 업무에 관심이 없는 듯하지만) 관료조직이 실재하며, 특히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어느 정도 기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독재적 리바이어던도 아니다. 그러나 확실히 우리가 만나본 아르헨티나의 관료들은 사회에 무책임하고 감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이는 독재적 국가의 특징이다), 사람들에게 아주 쉽게 무자비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사실 이 국가는 사회의 취약성과 분열을 바탕으로 세워지고 뒷받침된다는 점에서 인도의 국가와 공통점이 많다. 이 국가는 사회에 책임을 지지 않고 견제받지 않는 독재적 리바이어던의 본질적인 특성과 부재의 리바이어던이 지닌 취약성을 함께 드러낸다. 국가는 분쟁을 해결하거나, 법을 집행하거나,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 국가는 억압적이지만 강력하지는 않다. 이 국가는 그 자체로도 약하며, 사회도 약화시킨다."(557-8)
"종이 리바이어던의 힘은 공허하고, 대부분 영역에서 통일성이 없고 조직화하지 못하며, 이 나라가 통치해야만 하는 변방에서는 대개 완전히 부재한다." "종이 리바이어던이 유지되는 첫 번째 이유는, 권력의지를 추구하기 위해 정치 지도자와 엘리트층이 감수해야 할 위험이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국가건설자들이 사회의 어떤 달갑지 않은 반발도 진압할 수 있고 경쟁자들에 맞서 계속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 한, 국가에 맞서는 사회의 역량은 문제를 초래한다. 우리는 국가건설에 따르는 이와 같은 인지된 위험을 '결집 효과mobilization effect'라고 부를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이 역량을 키우려 하는 과정에서 반대자들이 결집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어떤 사회가 정치적 불평등을 크게 줄일 수 있을 만큼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미끄러운 비탈을 두려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로 사회의 제약을 받지 않는 정치적 엘리트가 국가의 역량 강화로 초래될 반발과 경쟁을 걱정할 수 있다."(563-4)
"종이 리바이어던이 상당히 많이 있고 그들이 무기력한 상태에서 깨어나려 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때로 역량이 부족한 국가가 부도덕한 지도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강력한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우선 정치적 통제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노골적으로 억압한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명령을 따르도록 설득하는 일에 훨씬 더 가깝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설득을 할 때 순종에 대해 보상해줄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매우 유용하다. 이때 친구와 지지자들, 혹은 지지자로 돌아서게 하고 싶은 이들에게 관료조직의 직위를 나눠주는 방법은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막스 베버가 구상한 방식대로 관료조직에서 실력주의를 바탕으로 한 채용과 승진 체계를 제도화하면서 국가건설을 시작한다고 상상해보라. 더 이상의 뇨키(gnocchi, 유령 공무원)는 없고, 더는 이 직위들을 보상으로 활용할 기회가 없다는 의미다. 이런 이유로 실력주의와 국가 역량 구축을 포기하도록 하는 강력한 정치 논리가 작동하게 된다."(565)
"국가 자산을 약탈하기 위한 법규의 자의적인 이용에서 이득을 보는 능력은 종이 리바이어던에서 국가의 무능과 분열을 부추겼다. 종이 리바이어던이 국가 역량을 쌓는 데 실패한 것은 시민들에게는 양날의 칼이다. 능력이 떨어지는 국가는 시민들을 억압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이런 것이 얼마간 자유의 토대가 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일반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종이 리바이어던의 시민들은 자유를 누리기보다는 다른 두 세계의 가장 나쁜 면을 함께 겪을 것이다. 종이 리바이어던의 국가는 여전히 상당히 독재적이어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거의 듣지 않고 시민들에게 감응하지 않으며, 그래서 그들을 억압하거나 살해하는 데 딱히 주저하지 않는다. 동시에 시민들은 분쟁의 해결자이자 법의 집행자, 공공서비스 제공자로서 국가의 기능을 기대할 수 없다. 종이 리바이어던은 자유를 창출하거나 자유에 적대적인 규범을 완화하려 하지 않는다. 종이 리바이어던은 흔히 규범의 우리를 완화하기보다는 되레 강화한다."(566)
"시몬 볼리바르는 왜 라틴 아메리카를 통치하려는 시도가 '바다에서 쟁기질하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남미 사회가 정치적 위계 구조와 불평등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식민지 사회는 백인인 스페인 사람이 맨 위에 있고 토착민과 여러 지역의 흑인 노예들이 밑바닥에 있는 제도화된 계급구조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스페인인 엘리트는 크레올레로 불리는 남미의 토착민이 됐고, 다른 인종 간 결혼 및 출산이 이뤄지면서 누가 누구보다 우위에 있는 가리는 정교한 카스트(스페인어로 카스타casta)제도가 만들어졌다." "법과 조세는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다르게 적용돼, 충분히 힘이 센 사람에게는 법이 전혀 적용되지 않았으므로 카스타가 중요했다. 법 앞의 평등이라고는 전혀 없어서 대다수 남미 사람들 눈으로 볼 때 법 자체가 부당하게 보였고, 그들은 식민지 시대의 '복종하지만 준수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격언을 채택했다."(581)
"종이 리바이어던은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여러 곳에서 서식한다. 이들 중 몇몇 국가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두 유럽 식민지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종이 리바이어던이 하나같이 유럽 식민지였던 이유는 유럽의 식민국가들이 식민지들을 통치하고 조종한 방식이 종이 리바이어던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런 국가를 불러일으킨 식민지화의 유물은 무엇일까? 첫째, 식민국가들은 식민지에 국가기관들을 도입했지만, 사회가 그것들을 전혀 통제할 수 없도록 했다(특히 식민국가들은 아프리카인들이 국가나 관료조직을 통제하는 데 아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식민국가들은 모든 일을 적은 비용으로 널리 전파할 수 있는 '간접 지배' 방식으로 하려 했다. 아프리카의 추장들 같은 지방의 유력자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인해 실력주의적 관료조직이나 사법부가 출현할 수 없었다."(595)
"우연히 주어진 국가기관들과 간접적인 지배 방식의 유산은 국가와 사회를 모두 더 약화시키는 세 번째 요인을 불러왔다. 바로 식민지에서 벗어난 국가들의 자의적인 특성이다. 은크루마에게 국가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가나가 하나의 국가로서 통일성이 없다는 데 있었다. 이 나라에는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언어가 없었다. 공통의 역사, 공통의 종교나 정체성, 합법적인 사회계약도 없었다." "요컨대 종이 리바이어던은 식민 제국들이 취약한 국가와 취약한 사회를 남겨두고 떠난 지역 그리고 그 둘이 서로를 영속화할 가능성이 큰 지역에서 형성됐다. 종이 리바이어던의 토대를 완성하는 마지막 요인은 국가들이 모여서 형성된 국제체제다." "국제체제는 이런 실패한 국가들에게도 국제적인 정당성을 부여했다. 일단 권력자가 국제사회에서 정중한 대접을 받고 국내에서 하고 싶은 약탈을 대부분 다 할 수 있으면, 실제로 권력이 공허하다는 사실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596-7)
제12장 와하브의 자식들
# 주요 용어들
1. 울라마ulama :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이슬람 사회의 법학자와 신학자의 총칭
2. 파트와fatwa : 울라마가 이슬람 경전을 당시의 문제나 논의와 관련지어 특별히 해석하고 상세히 설명하는 판결
3. 카디qadi : 이슬람의 율법 샤리아에 따라 사건을 해결하는 재판관
4. 자카트zakat : 쿠란에 의무로 명시된 종교적 세금
5. 이크완Ikhwan : 형제들이라는 뜻으로 알-와하브의 후손이자 알-셰이크가의 일원인 리야드의 카디가 시작한 종교 단체
6. 와하비즘Wahhabism : 18세기 중엽 아라비아반도에 나타난 이슬람 복고주의 운동으로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이념의 기초가 됐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야기는 규범의 우리가 강화되는 실례를 보여준다. 사회 규범들은 사람들의 관습과 믿음, 관행에 기초하고 있으며, 종교와 종교적 관행에 뿌리를 내렸다. 메디나와 더 넓은 지역에서 중앙에 집중된 권위를 확립하려는 무함마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사회에서도 규범이 종교에 깊이 뿌리 내렸다. 한발리 법학파의 노력, 와하비즘 그리고 전통을 강조하고 혁신에 반대하는 그들의 성향에 힘입어 이 규범들은 스스로 강력한 재생산을 거듭했다. 그다음에 와하브파의 열정을 군사적 확장에 이용한 이븐 사우드의 거래가 이뤄졌고, 그와 후계자들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주류 와하브파의 규범과 규제를 받아들였다. 왕국을 얻기 위해 치르는 작은 대가였다. 하지만 이븐 사우드와 압드 알-아지즈의 손안에 들어간 와하브파의 사상과 규제는 알-디리야의 오아시스 훨씬 넘어서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독자재가 되려는 중동의 다른 지도자들도 같은 구상과 전략을 활용하기 시작했다."(617)
"중동에서 이런 전략이 인기를 끈 것은 세 가지 연관된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이슬람의 제도적 구조다. 이슬람, 특히 수니파 이슬람에서는 교회의 위계 구조가 없고, 개인과 신 사이에 개입하는 사제들이 없다. 이 종교에서 학식이 깊은 울라마는 사람들에게 경전의 해석에 관한 지침을 주고 파트와를 발표할 수 있다." "이는 사우드 정권이 울라마 집단을 접수해 자신들을 지지하는 파트와를 제공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줬다." "두 번째 요인은 쿠란은 합법적인 문서가 아니며, 통치자에게 어느 정도 권력을 부여할지는 해석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 요인은 전제적인 이슬람제국들의 통치 기간에 발전하고 정착된, 국가와 사회에 관한 홉스식의 관점이다. 10세기의 저명한 철학자 알-가잘리는 이렇게 밝혔다. 〈술탄의 전제가 100년 동안 이어지더라도 그 피해는 피지배자가 다른 이들에게 휘두른 1년간의 폭정보다 덜하다.〉 따라서 전쟁 상태는 독재보다 훨씬 나쁘다."(617-9)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규범의 우리 때문에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이들은 여성이다." "가까운 친척이 아닌 남성은 여성에게 손을 대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며, 필수적인 의료행위는 고사하고 공손히 악수하는 것조차 금지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은 불가촉천민이다. 복장 규정, 불가촉 조항, 여성들을 남성의 통제하에 두는 거미줄 같은 규제들은 쿠란의 특별한 해석에서 나왔다. 쿠란의 제4장 제34절은 '남성은 여성들의 보호자이자 부양자인데, 신께서 한쪽에 다른 쪽보다 (힘을) 더 많이 주셨기 때문이며, 그들이 자신의 재산으로 여성들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들은 어린이들처럼 남성들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되며, 이런 해석은 622년에 공식화한 무함마드의 메디나헌장 41번째 조항에서 여성을 언급한 것과 일치한다고 여겨졌다. 이 조항은' 여성은 오로지 그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보호받을 것’이라고 밝혔다."(622)
"중동에서는 독재자를 비판하는 담론을 발전시키기가 대단히 어려운데, 이는 독재자가 종교를 대표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독재자를 비판하면 곧 이슬람을 비판하는 것이 된다. 그에 따라 독재자의 종교적 신앙심이 그다지 깊지 않고 자신이 종교적 신념에 더 헌신한다고 지적하는 방식으로 비판을 전개하는 경향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빈 라덴이 바로 그렇다. 그의 파트와는 이어서 '현 정권이 이슬람의 샤리아법을 정지하고 그것을 제정법으로 대체하고, 헌신적인 학자와 올바른 젊은이들과 유혈 대결을 시작하는 것'을 지적했다. 사우드가는 울라마 대다수를 포획했을지 모르지만, 빈 라덴 같은 '헌신적인 학자들'도 남아 있었다. 실제로 사우드가는 빈 라덴을 포섭하려 했지만, 그는 넘어가지 않았다. 빈 라덴은 사회 운동과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의제를 만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서방과 미국에 대한 그의 증오뿐만 아니라 사우드가와 '현 정권의 억압적이고 부당한 행동과 조치들'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배어 있었다."(633-4)
제13장 통제할 수 없는 레드 퀸
"바이마르공화국은 애초에 출범할 때부터 선출된 대의원들의 절반이나 되는 이들이 공화국의 제도에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무력화됐다. 좌파 가운데 어림잡아 5분의 1은 러시아식 혁명을 선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바이마르 민주주의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였고 심지어 이 나라를 '파시스트' 국가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우파에서는 대의원들의 약 30퍼센트가 그들과 연합한 대다수 전통적 엘리트와 같이 1914년 이전 보수주의자들이 지배했던 기존 체제로 돌아가 왕정을 복구하기를 원했으며, 일부는 나치와 마찬가지로 공화국제도의 정당성을 전면적으로 부인했다. 이런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1930년 선거 후 나치가 처음으로 상당한 의석을 차지했을 때 의회가 보여준 풍경일 것이다. 갈색 셔츠 제복을 입은 107명이 나치당원이 의사 진행을 방해하기 위해 77명의 공산당원과 결탁했다." "우파와 좌파는 모두 자신들을 선출한 제도를 전혀 존중하지 않았다."(643-4)
"집단들의 비타협적인 자세와 비례대표제에 바탕을 둔 선거체제는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원인이 됐다. 1928년에 이르자 작센농민당과 독일농민당을 포함해 열다섯 개의 서로 다른 정당들이 의회에 진출했다. 다른 스물여섯 개 당이 내세운 후보들은 선출되지 못했지만, 주요 정당들의 표를 갉아먹는 효과를 냈다. 어떤 단일 정당도 바이마르 시대 선거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으므로 모든 정부가 연합정부였다." "그에 따른 좌절과 정체 때문에 정부가 일을 성사시키려면 점점 더 대통령의 특권에 의존해야 했다. 바이마르헌법 제48조에 따라 대통령에게 부여된 광범위한 긴급조치권들 덕분에 대통령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기가 쉬워졌다. 이 권한들은 원칙적으로 의회 표결로 뒤집을 수 있었지만,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할 수 있었으므로 헌법 제48조를 원하는 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서로 다른 사안에 136차례나 그 권한을 발동했다."(644-5)
"독일의 엘리트와 장교들, 관료들은 왜 바이마르의 실험을 그토록 반대했을까? 바이마르 민주주의 실험의 반대자들은 대부분 프로이센의 토지를 보유한 귀족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같은 부류였다. 토지 소유자들은 흔히 사회의 역량을 키우고 민주주의를 시작하는 것을 (타협의 여지 없이 상대를 파괴해야 하는) 제로섬 관계의 관점에서 봤다." "프로이센 지주들의 태도와 이로 인해 회랑 안의 삶이 겪는 구조적인 어려움이 이례적이지는 않았을지라도, 프로이센의 지주 엘리트층은 사회적 결집에 저항하는 연합을 더 잘 형성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우선 최고위 장교와 판사, 관료 중 다수가 지주 엘리트층에서 나왔고 엘리트의 관점을 공유했다. 프로이센의 엘리트는 19세기 후반 사회의 변화가 진행 중일 때도 상대적으로 통일성을 보였고 정치적으로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엘리트는 자신들이 독일 정치를 통제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시간을 비스마르크의 시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652-4)
"아옌데는 헌법적 수단을 통해 칠레가 사회주의로 옮겨갈 수 있다고 믿었을지 몰라도 자신의 연합에 참여하는 많은 이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고, 아옌데가 그들을 통제할 수는 없었다. 노동자 집단들은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농장과 공장을 점거했고, 정부는 그 점거를 승인하기 위해 개입했다. 토지개혁과 국유화는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엘 메르쿠리오〉지는 1972년 한 사설에서 '공화국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도 인민연합의 정당들도 ··· 법을 위반한 노동자와 농민, 학생 집단들에 대해 억압적인 조치들을 취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 집단들은 이 점을 알고 이용했다. 그들의 행동은, 각종 정치제도가 인민연합의 반대 진영에서 만든 것들이며, 그러므로 인민연합이 총력을 다해 뿌리 뽑으려는 기존 질서를 방어하기 위해 설계됐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더 정당화됐다. 여기서도 우리가 고대 그리스나 미국에서 목격한 것과 아주 다른 제로섬 레드 퀸 효과를 볼 수 있다."(667-8)
"기독민주당 진영이 정부와 잠정적인 타협에 이르렀을 때는 그 정당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경고하는 보수적 당파에 의해 타협이 파기됐다. 곳곳에서 폭력이 터져 나왔다. 드브레가 아옌데에게 반대 진영의 폭력에 어떻게 맞설 것이냐고 묻자 아옌데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먼저 무력으로 폭력을 억제할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반동적인 폭력에 대해서는 혁명적인 폭력으로 응답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들이 게임의 규칙을 깨트릴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아옌데가 상대편이 게임의 규칙을 깨리라고 본 것은 옳았지만, 그에 맞서 혁명적인 폭력으로 대응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크게 빗나갔다." "1960년대 칠레에서 일어난 사회의 결집과 강화의 과정은 국가의 강화와 짝이 맞았지만, 그런 과정은 1970년 이후 더 급진적인 요구로 이어졌을 뿐이다. 이 급진적 요구는 토지와 사업이 대거 몰수될까 봐 걱정하는 칠레 엘리트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엘리트의 반동으로 칠레는 회랑 밖으로 밀려났다."(668-9)
"레드 퀸의 동학이 갈수록 엘리트층에 유리해지면 민중은 엘리트가 지배하는 체제보다 자신들의 이익에 더 우호적일 것으로 기대하면서 책임성이 없는 독재자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쪽을 택할 수 있다. 이는 희망적 바람에 불과하지만, 지금껏 사회는 엘리트와의 투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그들의 족쇄 찬 리바이어던을 파괴하는 쪽을 계속 선택해왔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 점을 잘 요약했다. 〈인민은 귀족의 지배나 억압을 받고 싶어 하지 않지만, 귀족은 인민을 지배하고 억압하려고 합니다. 이 두 상반되는 욕구로 여러 도시에서 군주정이나 공화정 혹은 무정부라는 세 가지 결과 중 하나가 나타납니다. ··· 귀족들이 인민들을 물리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자신들 가운데 누군가를 지지하기 시작하고 그의 보호 아래 있으려는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를 군주로 내세웁니다. 일반 인민들 역시 귀족들에 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한 사람을 지지해 그의 권위에 의지해 보호받으려 합니다.〉"(680-1)
제14장 회랑 안으로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체제가 무너지고 남아프리카는 평화적인 방식을 통해 민주주의로 이행하면서 회랑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변화는 ANC(아프리카민족회의)와 흑인 중산층, 백인 산업가들의 새로운 연합을 기반으로 했다. 농업과 광업의 엘리트 집단은 흑인의 임금을 낮게 유지하는 정치·경제 제도의 주된 수혜자였다. 백인 노동자들 역시 큰 혜택을 봤는데, 흑인 차별과 피폐한 흑인 교육체계 같은 당시의 여건 덕분에 백인들은 숙련직과 반숙련직에서 자신들과의 경쟁이 사실상 금지된 흑인들에 비해 임금을 5.5배에서 11배까지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가들에게 아파르트헤이트체제는 그다지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흑인 차별로 백인 농장주와 광산 소유자, 노동자들은 혜택을 봤지만, 그로 인해 가장 비천한 비숙련직 외에는 어떤 자리에도 아주 싼 흑인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었던 산업가들은 인건비 증가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므로 산업가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연합의 약한 고리였다."(697-8)
"1886년 트란스발에서 금이 발견된 후, 흑인들의 강제노동은 남아프리카의 농업과 광업 부문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해졌다. 값싼 흑인 노동력에 접근해 강압적으로 고용하고 싶어 하는 백인 농장주와 광산 소유자들의 바람은 흑인들의 참정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그들의 땅을 몰수하며 억압적인 아파르트헤이트체제를 구축하는 제도적 변화를 수용하도록 부추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상황은 상당히 달랐다. 1990년대 남아프리카는 금과 다이아몬드 생산이 여전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는 해도 제조업 위주의 경제구조로 바뀌었다. 산업가들은 대부분 흑인 취업 금지를 끝내는 것을 선호했고, 특히 강력한 흑인 지도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대의제가 강화된 민주주의체제 아래 자신들의 자산을 보호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아파르트헤이트체제에 대한 국제 제제 역시 기업계가 지나치게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제도를 폐지하는 데 동참하도록 하는 추가적인 유인을 제공했다."(730)
"터키 역시 군부와 관료집단이 지배하는 독재적 리바이어던에서 출발했다." "1923년, 훗날 아타튀르크로 명명된 무스타파 케말 휘하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면서 터키공화국이 수립됐다. 터키공화국이 택한 길은 추가적인 개혁과 국가건설에 열려 있었지만, 항상 군과 관료가 이끄는 독재적인 형태였다(기업 소유주와 다른 이들은 이 연합의 주변 요소였다). 터키어 약자 CHP로 알려진 아타튀르크의 공화인민당은 경제와 사회를 현대화했지만, 그 지도자들과 협력자들이 견제받지 않는 권력과 경제적인 부를 쌓게 해줬다." "처음에 아타튀르크가 일당체제로 제도화한 CHP의 권력 독점은 그 후 몇십 년 새 무너졌지만, 불균형적으로 강력한 군부와 관료집단의 권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군부가 장악력이 느슨해지거나 사회가 결집하고 있다고 느낄 때는 쿠데타를 통해 개입했다. 군과 민간 정부는 흔히 세속주의적이었지만 사회 통제를 위해 서슴지 않고 종교를 이용했으며 종교집단들과 연합했다 그만두기를 반복했다."(709-11)
"터키는 독재적인 국가 통제의 어느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옮겨 갔다. 2007년 이후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AKP)은 이 나라 권력의 여러 지렛대를 완전히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계기는 터키의 보안대, 관료조직, 사법부 그리고 교육체계에 뿌리를 내린 무슬림 성직자 펫홀라흐 귈렌의 비밀조직과 AKP 지도부의 동맹이었다." "2016년 7월 비밀리에 귈렌과 동맹을 맺은 군 장교들이 계획한 것으로 보이는 쿠데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에르도안과 그 협력자들은 계엄을 선포하고 보안대와 사법부, 관료조직의 귈렌 조직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에르도안은 나아가 견제장치가 거의 없는 대통령 중심제를 도입했다. 이는 2017년 계엄령 아래 헌법 개정에 반대 운동을 할 수 있는 주류 언론이 없는 가운데 치른 국민투표에서 가까스로 통과됐다. 터키는 여전히 기자들을 가장 많이 감옥에 가둔 나라이며, 의회의 쿠르드족 지지 정당의 공동대표들을 포함한 몇몇 선출된 정치인들까지 가둬놓고 있다."(714-5)
제15장 리바이어던과 살아가기
"하이에크는 독재적 리바이어던이 출현하는 것을 막는 길은 사회가 국가의 권력과 지배에 맞서 효과적으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하이에크의 빈틈없는 분석은 한 가지 활력, 즉 레드 퀸 효과를 빠트렸다. 사회가 국가 역량 확대에 맞서 할 수 있는 선택은 국가를 완전히 억제하는 길만 있는 게 아니다. 사회는 그 대신에 자신의 역량과 국가에 대한 자신의 견제장치를 확대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새로운 도전을 맞았을 때 회랑 안에 머무르는 일은 자동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하이에크는 자유에 대한 더 기본적인 도전, 즉 새로운 유형의 '노예 상태'로 이끄는 행정국가의 힘이 확대되는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레드 퀸 효과는 또한 제로섬 게임이 되지 않는 한 확장하는 국가에 대한 견제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새로운 능력과 제도적 장치를 개발하면서 사회가 회랑 안에 머물도록 도와주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751-2)
"어쩌면 하이에크의 가장 번득이는 통찰은 국가와 시장의 균형이 단지 경제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일 것이다. 그것은 정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국가가 사회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역량을 키우면서도 여전히 족쇄를 차고 있도록 보장하느냐다. 그러자면 사회가 국가와 엘리트집단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역량을 강화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 국가 개입이 유익한지 판단하려면 그 개입에 따른 경제적인 상충관계만이 아니라 그에 따른 정치적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이는 단지 국가의 역량에 관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누가 그 역량을 통제하고 감시하며 그 역량이 어떻게 쓰이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스웨덴과 다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진정한 제도적 혁신은 더 개입주의적이고 재분배를 중시하는 국가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기업계와 노동자 대다수가 포함된 연합의 후원 아래 그런 일을 했고, 그 연합이 국가에 단단히 족쇄를 채우도록 한 것이다."(761-2)
"경제의 세계화와 자동화, 금융의 성장, 거대 기업의 부상이라는 경제적 추세들은 적어도 세 가지 이유에서 미국을 비롯한 몇몇 선진국들이 긴급하게 대응해야 할 도전이 되고 있다. 첫째, 그 추세들은 불평등에 영향을 준다. 둘째, 경제적 효율성에 문제가 있다. 지난 20년 동안 세계화가 극적으로 진전되고 새로운기술이 놀랄 만큼 발전했지만 소득과 생산성 향상은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세계화와 급속한 자동화는 여러 혜택을 줬지만, 이는 생산성과 경제적 번영에 훨씬 더 많이 공헌했을 다른 기술 발전을 희생시킨 대가였는지도 모른다." "세번째 도전은 기관들에 대한 신뢰에 관한 것이다. 족쇄 찬 리바이어던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와 사회 간 힘의 균형뿐만이 아니다. 기관들에 대한 사회의 신뢰도 필요하다."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각종 기관에 대한 신뢰를 잃은 부문들은, 정치체제를 흔들려는, 그리고 회랑 안의 삶을 받쳐줄 국가와 사회 간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려는 운동의 주된 목표가 된다."(774-5)
"레드 퀸은 회랑이 좁을수록 통제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미국과 다른 여러 서방 국가들은 더 나은 처지다. 그들은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바탕으로 경제를 다각화하고, 노동 강요는 아주 제한적인 역할만 하고,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반대하는 지배적인 집단들이 없고, 중단 없는 민주주의 정치가 더 넓은 회랑을 만들어낸 최근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랑의 폭도, 회랑 안의 안정도 당연하다고 여길 수는 없다. 회랑의 폭은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기관들에 의해 확대된다. 이 기관들이 사람들의 신뢰를 잃으면 회랑은 좁아지고 사회가 분쟁을 다루는 능력은 줄어든다. 그리고 레드 퀸이 고집스럽게 제로섬 게임으로 치달으면 회랑이 넓어도 레드 퀸은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스웨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명백하다. 족쇄 찬 리바이어던과 새로운 정책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타협을 끌어내고 광범위한 연합을 구축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776-8)
"구체적인 정책의 개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사회의 결집력을 전반적으로 재고하는 것이다. 토크빌을 크게 매혹시킨 19세기 미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정부 바깥에서 단체를 조직하고 형성하려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미국 사회는 이를 통해 특정한 사회적 문제들을 풀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의사결정에 대한 대중의 압력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최근 이런 유형의 단체들이 쇠퇴하고 있다는 점이 많이 부각됐다. 쇠퇴의 범위와 정확한 원인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고 이 조직들이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국가와 강력한 엘리트층을 계속 견제할 수 있는 유형의 연합들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이 일은 경제적 엘리트집단의 영향력에 맞서는 노동자 조직들이 지난 몇십 년 동안 훨씬 약해졌기 때문에 더욱 중요해졌다. 이런 조직이 쇠퇴함에 따라 산업 노동자들과 다른 시민들 모두를 위한 새로운 정치 참여 수단이 될 대안적인 형태의 조직들이 더욱 필요해졌다."(7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