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 - 오늘의 유럽을 낳은 최초의 영토 전쟁 1618~1648
C. V. 웨지우드 지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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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독일과 유럽: 1618년


"17세기의 전반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정부의 일상 업무는 짜임새가 없었고, 정치인들은 별다른 지원도 받지 못하고 활동했다. 단적으로 말해 효율성과 충성심은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대다수 정치인들은 자금과 정보의 항구적인 누수가 불가피하다는 전제에서 활동해야 했다. 당시 유럽의 외교 속도는 통신과 교통의 중요한 수단인 말이 달리는 속도와 같았다. 정치적 필연성이 자연의 무의미한 개입에 종속되어 있었던 셈이다. 강풍이 불거나 폭설이 내리기만 해도 국제적 위기가 완화되거나 가속될 수 있었다." "정보 전달이 여의치 않은 탓에 여론이 지배 세력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도시에서는 정보가 어느 정도 확산되고 초보적인 여론의 표출도 가능했으나, 정치적 정보를 흡수하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부유층과 지식인층뿐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힘도 없고 무지하고 무관심했다. 대체로 개별 정치인의 공적 행위와 사적 특성이 균형을 이루지 못했고, 왕조의 야심이 유럽의 외교관계를 지배했다."(30)


"서유럽 나라들은 대부분 귀족정치의 정부 형태를 취했고, 토지가 곧 권력인 사회였다. 그런데 토지 대신 화폐가 실질적인 힘으로 등장한 상황에서도 그런 체제가 온존되었다. 정치권력을 장악한 소수는 그 권력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부를 갖지 못한 반면, 상인계급은 재력은 갖추었으나 권력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양측의 대립은 점차 빈번해졌다." "이렇게 볼 때 중간계급이 정치적 발언권을 요구하게 된 근원적인 요인은 자유주의적 원칙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효율적인 정부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정부 아래서 편안하게 살기보다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정부 아래서 불편하게 사는 것을 더 좋아할 만큼 고결한 사람은 거의 없다. 보헤미아의 대의정부가 실패한 이유는 타도한 전제정치보다 행정에 크게 서툴렀기 때문이다.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가 무너진 이유도 신이 내린 왕권이 취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부가 무능했기 때문이다."(33-5)


"한편, 대립하는 종파들 간의 증오는 더욱 격화되었다. 자신이 사는 나라의 종교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늘 위험에 처했다." "종교개혁 초기에 가톨릭 지배자들은 약점을 가진 탓에 신교 신민들에게 상당한 양보를 해야 했다. 그래서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신교 국가 내의 가톨릭 공동체보다 가톨릭 국가 내의 신교 공동체가 더 많았다. 이탈리아와 에스파냐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가톨릭 국가들은 내부의 신교 공동체를 용인했다. 당연히 가톨릭 측은 점점 불만과 위기를 느꼈다. 반면에 신교 측은 자신들의 특권을 약간만 침해당해도 공식적으로 신교 정부를 통해 항의를 표출했다." "결국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교권을 재통합한다는 꿈을 버렸다. 가톨릭이 재통합에 실패한 것은 단일한 원인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두드러진 원인은 있다. 교회의 운명이 오스트리아왕실(합스부르크)과 긴밀하게 얽히면서 왕실의 영토 욕심이 가톨릭교회를 옹호했어야 할 세력들을 분열시켰던 것이다."(42-3)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지배자들은 서로 300년 동안이나 반목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에스파냐에게 당면한 문제는 네덜란드의 반란이었다. 네덜란드 북부의 신교 지역은 네덜란드 연방을 형성해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1527~1598)에게 반기를 들었다. 40년 간의 전쟁 끝에 1609년 그들은 다음 왕인 펠리페 3세(1578~1621)와 강화 조약을 맺고 독립과 향후 12년 동안의 휴전을 얻어냈다. 하지만 네덜란드 지역은 포기하기에 너무도 중요했으므로 에스파냐 정부는 휴전 기간을 평화의 서곡으로 여기지 않고 반란을 최종적으로 진압하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활용했다. 1621년 휴전이 끝나자 곧바로 유럽의 위기가 심화되었다. 모든 신교 군주들은 자유 공화국의 소멸을 막고 합스부르크 왕조와 가톨릭교회의 승리를 저지하기 위해 나섰다. 부르봉과 합스부르크의 숨겨진 적의, 에스파냐 왕의 임박한 네덜란드 공격, 이 두 요인이 1618년 유럽 정치인들의 행동을 지배했다."(45-6)


"에스파냐에서 폴란드까지, 프랑스에서 스웨덴령 핀란드의 동쪽 경계와 발트 해의 동결항(凍結港)들까지 유럽 정치의 주요 무대는 독일이었다. 독일 지역에는 독립 소국들의 방대한 집단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으로 뭉쳐 중부 유럽의 지리적·정치적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와 부르봉 왕조의 경쟁, 에스파냐 왕과 네덜란드의 경쟁, 가톨릭과 신교의 경쟁에서 독일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에스파냐 왕은 군대와 돈을 북이탈리아에서 네덜란드로 쉽게 수송하려면 라인 강이 필요했다. 프랑스 왕과 네덜란드도 에스파냐의 물자를 차단하기 위해 라인 강 주변의 동맹 세력이 필요했다. 또 스웨덴 왕과 덴마크 왕은 발트 해 연안에 동맹 세력을 구축해 서로 다투었고, 폴란드 왕이나 네덜란드와도 싸웠다. 교황은 독일에 합스부르크 황제에 반대하는 가톨릭 세력을 형성하고자 했으며, 사보이 공작은 황제로 선출되기 위한 공작을 꾸몄다."(53)


"황제와 신하들 간의 대립이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독일의 숙명이었다. 자유시들이 군주들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은 군주들이 황제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보다 한층 더 심했다. 자유시들은 '독일의 자유'라는 원칙에 동조했으나 군주들도 과연 진심으로 동조하는지는 회의적이었다. 특히 시민들은 과거에 상전으로 모셨던 지주 귀족들을 의심했다. 그래서 믿지 못할 집단과 행동을 같이해 뭔가를 얻어내려 애쓰느니 차라리 지금 이대로가 더 낫다고 여겼다. 그 반면 교회의 가톨릭 지배자들은 가톨릭 황제의 편을 들었다. 그들은 황제가 적대적이고 때로는 이단적인 군주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리라고 믿었다. 이렇게 지주, 시민, 성직자, 농민이 각자 계급의식을 고도로 발전시킨 탓에 공공의 이익보다 분파적 이해관계가 더 중시되었다. 또한 각 집단들이 따로 군사 조직을 거느리게 되면서 그렇잖아도 위험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63)


"붕괴하는 제국에 통합성을 부여한 것은 공통의 신앙이었다. 그러나 신교가 동맹관계에 있던 공국들을 흩어놓고, 야심찬 군주들이 그 틈을 타 황제에게 반기를 들자 수백 년간의 전통이 무너졌다." "서로 반목하는 가톨릭, 루터교, 칼뱅교에는 한 가지 공통적인 요소가 있었다. 군주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각각의 종교를 이용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자유를 요구하는 군주들이 절대주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너무 노골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지 않는 것을 황제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자유주의 운동과 상인과 농민의 격렬한 봉기는 아래로부터의 반란과 위로부터의 억압 사이에 끼인 이 불운한 지배자들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한편에서는 군주들과 황제의 다툼, 다른 한편에서는 군주들과 백성들의 다툼이 진행되면서 군주들은 한 손에는 자유의 횃불을 움켜쥐고, 다른 손에는 독재의 칼을 뽑아들었다."(67-9)


2장 보헤미아의 왕위: 1617~19년


"보헤미아 왕국은 크지 않았으나 그 왕권에는 슐레지엔과 라우지츠 공국, 모라비아 변경국의 군주권까지 달려 있었다." "가장 부유한 보헤미아가 다른 세 지역을 지배했다. 이곳에서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신앙의 독립, 민족의 통합, 정치적 자유를 추구하는 운동이 일찍부터 발달했다. 체코인은 언어에서 독일인과 구분되었고, 종교와 기질에서 슬라브인과 달랐다. 자립심이 강하고 수완이 좋은 그들은 예부터 이재에 밝기로 유명했으며, 노동의 가치를 찬양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비잔티움의 전도사들에게서 그리스도교를 배웠지만 예배 형식을 자신들에게 맞게 변형시켰다. 이후 가톨릭교회에 편입된 이후에도 그들은 예배를 볼 때 토착 언어를 사용하고, 자신들의 수호성인으로 그리스도교의 유명한 성인이 아니라 자신들의 왕이었던 바츨라프 1세(907~929)를 선택했다. 이처럼 보헤미아에서 왕의 지위와 권위는 다름 아닌 백성들의 애정에서 비롯되었다."(99)


"보헤미아의 위험은 정치와 종교가 지나치게 활발하고 여러 종교와 계층의 요구가 상충한다는 점이었다 국가의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도 있었고, 종교적 자유를 쟁취하려는 세력도 있었으며, 중앙정부가 의회를 장악해야 한다고 보는 세력도 있었다." "루터파, 양형영성체파, 칼뱅파, 가톨릭은 각각 서로의 불관용을 두려워했다. 사실상 보헤미아의 독립을 위해서는, 여러 세력들 간의 균형을 유지해주고 있긴 하나 예전만큼 인기가 없는 하나의 왕조, 즉 합스부르크 왕을 폐위시켜야만 했다. 어쨌든 이 불편한 중립은 점차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마티아스 황제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제국과 보헤미아에서 그의 후계자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이미 악명이 널리 알려진 슈타이어마르크의 페르디난트 대공이 될 공산이 컸다. 그렇게 되면 그는 슈타이어마르크에서 그랬던 것처럼 보헤미아의 신교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정부를 철저히 짓밟을 게 뻔했다."(103)


# 양형영성체주의(兩形領聖體主義, utraquism) : 평신도들은 성화된 빵만 먹고 사제들은 빵과 포도주를 먹는 가톨릭교회식 성만찬을 개혁하려 한 운동


# 1617년 6월 17일 페르디난트 선출 표결 통과


"8월 28일 암울한 예측이 빗발치는 가운데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 선출이 진행되었다." "마침내 새로 선출된 황제가 보장해야 할 신민들의 법적 권리들이 기록된 두툼한 문서가 페르디난트에게 건네졌다. 그는 신속하게 문서를 훑어본 뒤 마치 춤이라도 추려는 것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선서를 하러 앞으로 나갔다. 바깥에서는 새 황제가 관례에 따라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낼 때 환호를 보내기 위해 수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가 군중 앞에 나서기 직전에 프라하의 소식이 전해졌다. 군중 가운데 일부가 술렁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그 소식을 옮겼다.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에서 폐위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흥분에 휩싸여 소란스러워지는 가운데 군중들 위쪽의 큰 창들이 활짝 열렸다. 발코니에 페르디난트가 등장했다. 그는 보헤미아 왕위에서 쫓겨났으나,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선거와 선서까지 마친 독일 민족의 신성로마황제였다."(131-2)


"보헤미아의 왕과 황제가 새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에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곤혹스러워졌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그의 표는 페르디난트에게 갔는데, 거의 동시에 그는 페르디난트에게 강제로 왕관을 빼앗은 처지가 되어버렸다." "프리드리히는 명분상 반란 세력을 지지하는 것이 도덕적인지, 황제에게 의무를 다하는 것이 신성한 일이지 둘 다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한편에는 독일 군주로서의 그의 충성심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보헤미아인들에게 무분별하게 일고 있는 그의 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만약 그가 페르디난트를 버린다면 그는 황제와 싸우는 게 아니라 제국의 경계 바깥에 있는 지역의 폐위된 왕과 싸우는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보헤미아를 버린다면 그는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을 배신하게 되는 것이었다. 전자는 뻔한 정치적 핑계에 불과하고, 후자는 도덕적 배반이 된다. 1619년 9월 28일 그는 비밀리에 반란 세력에게 왕위를 받아들이겠다고 통지했다."(133-5)


3장 에스파냐의 경보, 독일의 경종: 1619~21년


"1620년 3월 페르디난트가 뮐하우젠에서 소집한 회의는 반대파의 힘과 단결을 보여주었다." "참석자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가톨릭동맹, 요한 게오르크 작센 선제후의 대표단이었다. 여기서 페르디난트는 오버작센 지구에 속한 세속화된 주교구의 신앙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루터파와 가톨릭의 지지를 모두 얻었다. 그 대가로 그들은 보헤미아가 제국의 일부분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프리드리히는 제국의 평화를 해쳤으므로 법에 의해 가혹한 징벌의 대상이 되었다. 4월 30일 프리드리히에게 6월 1일까지 보헤미아에서 물러나라는 황제의 명령이 반포되었다. 이 최후통첩을 거부하는 것은 곧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1620년 6월 1일부터 독일의 모든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공공의 평화를 의도적으로 파괴한 프리드리히를 반대해야 했다. 이제 황제는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보헤미아의 적법한 왕으로서 모든 무력을 동원해 반역자를 처단할 터였다."(144-5)


"프리드리히의 비극은 결말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일부 가톨릭 예언자들은 그가 겨울 한 철 동안만 왕위에 있을 것이라며 그를 '겨울왕'이라고 불렀다. 예언과 달리 그는 봄과 여름까지 버텼지만 매달 재앙의 새로운 전조가 나타났다. 1620년 초에 그는 새 왕국의 주요 지역을 방문했다. 브르노, 바우첸, 브로추아프에서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무리가 올로모츠의 교회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그 도시의 신민들 가운데 절반이 그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순진하고 선의를 가진 지배자가 그처럼 빠른 시간에 미움을 사게 된 경우도 드물다. 프리드리히는 새 신민들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대신들에게는 경멸을, 백성들에게는 증오를 샀다. 신하들 앞에서 소심해지는 성격과 익숙치 않은 보헤미아어, 자신이 수호하겠다고 서약한 체제의 특질로 인해 프리드리히는 평소만큼의 지성도 보여주지 못했다."(157-9)


"신교 군주들은 프리드리히를 희생시키는 것으로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또한 가톨릭 세력은 페르디난트를 지지하는 것으로 외국의 간섭을 방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유럽에는 프리드리히나 보헤미아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오스트리아 왕가를 두려워하거나 라인 유역을 탐내는 군주들은 많았다." "프랑스, 영국, 덴마크보다 당장 심각한 위험에 노출된 나라는 네덜란드 연방이었다." "그래서 네덜란드는 서둘러 덴마크 왕과 조약을 맺는 한편 만스펠트에게 서신을 보내 신교의 대의에 충성할 경우 후히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다. 1621년 4월 9일 에스파냐와의 휴전기간이 종료되었다. 그 닷새 뒤 보헤미아 왕과 왕비는 헤이그에 도착해 지배 군주에 걸맞은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4월 27일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라인 영토 탈환을 위해서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아들이는 조약에 서명했다. 이리하여 독일 비극의 제2막이 시작되었다."(179-81)


4장 페르디난트 황제와 막시밀리안 선제후: 1621~25년


"자신의 불행한 나라에 대한 페르디난트의 판결은 곧바로 내려졌다. 보헤미아의 선출 군주제는 폐지되고, 왕권은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세습되었다. 신앙의 자유를 허가한 '황제의 칙서'는 프라하가 약탈될 때 빈으로 보내졌으나, 페르디난트가 직접 찢어버렸다는 과장된 소문도 돌았다." "칼뱅교와 양형영성체주의 이단들은 뿌리가 뽑혔으나, 루터파 교회는 작센 선제후와의 약속을 감안해 계속 용인되었다. 페르디난트는 세 가지 방침을 정했다. 반란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정치·경제적으로 파멸시키고, 민족적 특권을 폐지하고, 신교를 근절하는 것이었다. 리히텐슈타인은 불안한 마음에서 자비를 베풀거나 적어도 신중하게 조처해야 한다고 항의했으나 그의 의견을 무시되었다. 보헤미아에 대한 응징은 곧 새 정책의 출발점이었다. 이제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는 신앙 면에서 통일된 하나의 국가가 될 것이며, 가톨릭 유럽의 재건에 가장 중요한 토대인 빈에서 그 관리를 맡을 것이었다."(186-7)


"막시밀리안이 선제후가 되자, 페르디난트도 미처 대비하지 못한 거센 항의가 일었다. 에스파냐 대사는 축하의 말조차 건네지 않았고, 이사벨 대공비는 공개적으로 반대와 불만을 토로했다. 작센 선제후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도 새 동료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제 페르디난트는 자기 힘의 한계를 알았다. 그의 힘은 그의 군대가 통제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군대는 여전히 가톨릭동맹과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레겐스부르크의 신교 대표들은 불만의 표시로 더 이상 전쟁 비용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들은 저항에 나서기에는 힘이 달릴지 모르지만, 자신들의 자유를 공격하려는 세력에게 자금을 지원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선제후 직위의 양도로 추방령은 완료되었지만, 결국 입헌주의자들이 쫓겨난 프리드리히에게 동맹까지는 아니더라도 동조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가톨릭 군주들과 신교 군주들의 분열은 위험할 정도로 커졌다."(211-2)


"1623년 한 해 동안 독일의 자유와 신교의 대의를 옹호하는 세력들은 합스부르크 왕조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상황은 프리드리히의 정책을 계획한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에스파냐 왕녀와 웨일스 공(후에 영국 찰스 1세)의 결혼 협상을 추진하던 영국 왕 제임스 1세는 에스파냐 측에 신뢰감을 보여주기 위해 독일에 남은 프리드리히의 마지막 요새인 프랑켄탈에서 영국군을 철수시켜버렸다. 또한 동시에 그는 프리드리히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촉구하면서 프리드리히의 맏아들을 황제의 딸이나 막시밀리안의 조카딸과 약혼시키려 했다. 스웨덴 왕과 덴마크 왕은 같은 편에서 함께 싸우려 하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는 내부 혼란에 시달렸고, 오라녜 공은 네덜란드 국경을 방어하는 데 급급해 라인 영토를 되찾는 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 그 원대한 계획 중 실천된 것은 베틀렌 가보르의 헝가리 공격과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이 니더작센 지구로 진출한 것뿐이었다."(234)


"리슐리외는 합스부르크 왕조를 타도하기 위해 유럽에서 신교의 대의를 끌어안았지만, 사정은 무척 복잡했다. 그 자신은 비록 귀족들과 외교권에서 지배적인 종교에 대해 냉소적인 무관심으로 일관했어도 여전히 신앙심이 독실한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치게 비정통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면 군주제의 안정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리슐리외에게는 다행히도, 슈타트론 전투에서 패배했던 바로 그날 로마에서 바르베리니(1568~1644) 추기경이 교황 우르바누스 8세로 선출되었다." "우르바누스 8세는 진심으로 그리스도교권의 평화를 원하면서, 합스부르크 왕조를 유럽의 항구적인 위협 요소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유럽의 평화를 바랐으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합스부르크의 침략을 저지하는 세력을 거부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므로 프랑스 가톨릭 세력은 자신들이 낸 세금이 네덜란드와 독일의 이단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어도 발 뻗고 편히 잠잘 수 있었다."(245-6)


"바이에른을 제외한 리슐리외의 동맹자들은 공동의 적을 향해 한 발 더 다가섰다. 1624년 6월 10일 콩피에뉴에서 프랑스 정부와 네덜란드 정부는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숙명적 라이벌이자 적수들이 마침내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닷새 뒤 영국도 가담했다. 7월 9일에는 스웨덴 왕과 덴마크 왕이 합류했고, 11일에는 프랑스, 사보이, 베네치아가 발텔리나에서 공동 작전을 펼치기로 합의했다. 10월 23일에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었고, 11월 10일에는 프랑스 공주 헨리에타가 웨일스 공과 약혼했다." "전쟁은 독일 내에서 시작되었고, 독일 내에서 끝나게 되었다. 제국에 못지않게 정치가 복잡다단한 독일 각지의 공국에서 7년간 전쟁이 지속되자 이제 리슐리외도 통제할 수 없는 사태로 흘러갔다. 북독일의 주교구들만 해도 분쟁거리가 너무 많았다. 상황은 순식간에 리슐리외의 손아귀를 벗어났다."(250-1)


5장 발트 해를 향해: 1625~28년


"합스부르크 왕조는 적들이 프랑스의 도움을 받자 그에 대응해 자신들은 발렌슈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또 적들이 발텔리나를 점령하자 그들은 브레다를 빼앗았다. 이제 위험한 북부의 연합이 남았는데, 이에 대해서도 합스부르크는 계획이─북부 연합과 사이가 좋지 않아 고립될 것이 분명한 한자동맹을 끌어들인다는─있었다." "6월에 발렌슈타인의 임무는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약속한 대로 군대 모집을 끝내고서, 잘 무장된 병력을 거느리고 보헤미아 국경에 이르렀다." "새로운 제국군이 전장에 투입되고 브레다가 함락되자, 발텔리나의 프랑스군도 점점 버티기 어려워졌다. 리슐리외 정부는 그 고개를 무한정 점령하고 있을 만큼 자원이 풍족하지 못했고, 국내 사정도 불안정했다. 언제라도 궁정 음모나 지역 반란이 일어나면 균형이 무너질 태세였다. 게다가 북부에서는 이지 그가 추진한 대동맹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258-9)


"프랑스가 동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을 때 마지막 재앙이 닥쳤다. 리슐리외는 위기에 처한 이 방대한 동맹을 떠받치는 아틀라스였다. 하지만 1626년 봄 프랑스에서 위그노의 반란이 일어나 국내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는 발텔리나를 점령하고 있던 병력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오라녜 공은 작은 함대를 마련해 라로셸의 위그노 요새를 공략하려 했으나, 네덜란드 선원들은 동료 신교도를 공격하는 배에 타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처럼 때를 잘못 맞춘 네덜란드 선원들의 열정은 결국 독일 신교의 대의가 붕괴하는 데 일조했다. 1626년 3월 26일 리슐리외가 몬손 조약을 맺고 발텔리나에서 철수하자 그 고개는 다시 에스파냐에게 활짝 열렸다. 이제 신교의 대의와 독일의 자유를 옹호하는 세력은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만 남았다. 다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동맥이 트였다."(265-6)


"1625~26년 유럽에서는 합스부르크 왕조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가 가라앉았다. 또한 세습 영토에서는 그보다 더 중요하고 비극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가 가라앉았다. 제국의 채무를 갚기 위해 희생된 오버외스터라이히의 농민들은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치하에서 심한 착취를 당했다." "겨우내 농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시달렸으나, 1626년 봄이 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5월 17일 하이바흐에서 명령을 집행하러 보낸 제국군 병사들과 주민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막시밀리안이 파견한 총독 헤르베르스토르프가 사태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농민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1만 6천여 명의 농민들이 지역 정부가 있는 린츠로 갔다. 그들이 든 검은색 깃발에는 저승사자의 머리와 '어쩔 수 없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들은 반란에서 이기든 지든 반란 지도자들이 죽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결국 그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다."(272-3)


"유럽은 비틀거리고 있었다. 바이에른 공작이 선제후에 오른 것도 정치인들에게 충격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지도적인 군주였고, 반강제로라도 선제후들의 재가를 얻어냈다. 그에 비해 발렌슈타인은 보헤미아 왕의 신하인 보헤미아 귀족보다도 지위가 더 낮은 소지주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뷔르템베르크와 헤센의 지배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립 군주의 지위에 오르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발렌슈타인이 메클렌부르크 공작이 된 지 17일이 지났을 때, 마인츠 선제후는 페르디난트에게 동료 선제후들의 이름으로 된 성명서를 전달했다. 발렌슈타인에게 계속해서 제국군의 지휘를 맡기되, 그를 군주로 선출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누가 마인츠 선제후의 옆구리를 찔렀는지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페르디난트와 그의 장군이 승리의 행진을 거듭하는 동안,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은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까지는 되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287-90)


6장 교착: 1628~30년


"발렌슈타인의 힘이 커지자 페르디난트는 토지반환령(Edict of Restitution)을 적절히 집행하면 합스부르크 권력에 이익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겼다. 1628년 후반 페르디난트는 대내 정책에서 그 구상을 앞세웠다." "페르디난트는 전체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즉, 전체적으로는 독일 전역이 대상이고, 구체적으로는 마그데부르크 주교구에 해당하는 계획이었다. 우선 그는 1555년 이후 신교 측에 부당하게 편입된 모든 교회령을 원래대로 복원하려 했다. 제국의회에서 이 조치를 가결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황제의 칙령으로 집행할 작정이었다. 여기에는 신교도 축출과 아울러 황제의 통치권을 시험한다는 이중의 목적이 있었다. 페르디난트가 신민들에게 강요한 변화는 혁명에 가까웠다. 독일 북부와 중부 전역의 경계선들을 모조리 바꾸는 엄청난 변화였다. 세속 재산으로 부를 얻은 군주들이 한순간에 하급 귀족으로 전락할 수 있었다."(303-5)


"1629년 3월 6일 페르디난트는 무방비 상태의 독일에 토지반환령을 반포했다. 대단히 가혹한 명령이었다. 우선 칼뱅파의 합법성이 부인되었고, 다음으로 교회 토지에 대한 신교도의 매입 권리가 부인되었다. 교회의 토지는 양도가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합법적으로 매매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래 교회가 소유했던 토지를 정당하게 취득한 사람이라 해도 피해를 입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교회 토지와 관련된 이전의 법적 판결이 일체 부인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황제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독단적으로 법과 법적 판결을 바꾼 것이었다. 행정관들은 혹시 누군가가 제국의회의 재가를 얻지 않은 칙령이라고 불평한다면 그 사람에게 제국의 절대주의 정책을 설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페르디난트는 영리하게도 칙령을 집행하는 데 발렌슈타인의 군대를 이용했다. 가톨릭동맹이 막강한 지원자를 공격함으로써 참된 신앙의 대의를 침해하려 할 리는 없지 않은가?"(308-9)


"1630년 여름에는 독일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0년 간의 전쟁으로 제국의 절반 이상이 군대의 점령이나 통과로 그 후유증이 심각했다. 소가 병들고, 사람도 동물도 모두 굶주리고,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1625년부터 1628년까지 4년 연속 흉년이 들어 독일의 재난은 더욱 심각해졌다. 전염병은 굶주린 사람들을 대량으로 희생시키고, 난민 수용소를 덮쳤다. 원래는 근면했던 사람들이 빈곤과 기근으로 희망과 수치심을 잃고, 구걸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점잖았던 시민들도 서슴없이 이웃집에 가서 동냥을 했다. 그러나 동정심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가난 때문에 자선도 바닥을 드러냈다. 추방된 목사들은 전국을 떠돌며 자신을 받아주려는 사람이 아니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맸다. 오버팔츠의 가톨릭 사제들은 추방되었던 사람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당시 굶주리는 선임자들을 구제해 달라고 정부에 탄원했다."(322)


"1630년 8월, 페르디난트는 가톨릭 선제후들을 진정시킨다는 정치적 이유를 들어 발렌슈타인을 해임했다. 그러나 토지반환령은 신앙을 이유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제국 내에서 페르디난트의 정책은 무너졌다. 레겐스부르크 회의는 독일을 통합하기는커녕 분열시켰고, 막시밀리안과 가톨릭동맹은 다시 페르디난트의 정책을 지배하게 되었다. 작센과 브란덴부르크의 두 신교 선제후는 동료들로부터 떨어져나가 새로 반대파를 형성했다." "페르디난트도, 막시밀리안도 실패했다. 요한 게오르크는 국내 문제를 다룰 만큼 강력한 국내 기구를 형성하려 애쓰고 있었다. 레겐스부르크 회의는 30년 전쟁 중 독일 시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의 끝이자 외국 시기의 시작에 해당한다. 스웨덴 왕이 포메른에 상륙했다. 독일 백성들은 또다시 그들이 시작하지도 않았고 중단시킬 수도 없는 전쟁의 공포에 휩싸였다. 12년 간의 재앙을 끝내는데 실패한 회의는 앞으로 18년간 재앙이 더 계속되리라는 신호탄이었다."(333-4)


7장 스웨덴 왕: 1630~32년


"이후 2년간 독일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면 한 가지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구스타프의 진짜 적은 페르디난트가 아니라 개방 정책을 취한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였다." "페르디난트는 단지 구스타프의 목표일 따름이었다. 구스타프도 자신의 신앙에 투철했으나 스웨덴의 영토를 확장하고 발트 해를 확보하기 위해 싸웠다. 구스타프의 적은 가톨릭이 아니라 독일의 연대를 지지하는 모든 세력이었다. 그리고 그 지도자는 요한 게오르크였다. 이 상황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었다. 우선 페르디난트와 구스타프가 표면에 내세운 가톨릭과 신교의 갈등이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은 사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반 유럽인들은 그것을 궁극적이고 유일한 문제로 여겼다. 두 번째로, 파리, 마드리드, 빈의 공식 정책을 지배하는 합스부르크와 부르봉의 정치적 경쟁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상황에 묻혀버린 독일인과 스웨덴 침략자의 직접적인 다툼이 있었다."(350-1)


"요한 게오르크는 독일을 구하기 위해 최선의 조치를 취했다. 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신교와 정치 체제의 옹호자로 내세우고, 자신은 막후에서 신교의 다수 여론을 장악했다. 드디어 칼뱅파와 루터파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스웨덴 왕의 동맹자인 메클렌부르크의 두 공작과 헤센 방백도 라이프니츠 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외국의 간섭 없이 사태를 타결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제 구스타프의 확실한 동맹자는 마그데부르크, 포메른 공작, 보헤미아의 프리드리히만 남았다. 요한 게오르크는 강력해진 자신의 지위를 한껏 이용했다. 황제를 겁주어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낼 수 있다면 스웨덴 왕도 싸움 없이 굴복시킬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다가오는 위험을 알았든 몰랐든, 페르디난트에게는 단 한 가지 답밖에 없었다. 그는 정치가가 아니라 성전(聖戰)의 지도자였다. (그가 보기에) 만에 하나 토지반환령을 포기할 수 있으면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353-5)


"역사에는 물질적 중요성과 무관하게 도덕적 영향을 미친 사건들도 있게 마련인데, (구스타프가 틸리의 가톨릭 군대를 물리친) 브라이텐펠트 전투가 바로 그런 사례였다. 당시에나 이후에나 유럽의 신교도들은 구스타프가 그날 펠리페 2세 시절 이후 유럽을 괴롭혀오던 가톨릭-합스부르크 독재를 끝내고 해방을 가져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은 구스타프가 독일 땅을 밟기 전에 교황과 리슐리외의 적대가 이미 오스트리아 왕가의 종교 정책을 크게 약화시켰다. 브라이텐펠트의 전장에서 그는 합스부르크 나무의 뿌리가 아니라 가지를 친 것에 불과했다. 불과 일주일 전에 젤란트 연안에서 군대 병력을 싣고 온 에스파냐 함대가 상륙할 준비를 하던 중 네덜란드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사건은 라이프치히 전투에 가려 세간의 이목을 끌지 못했지만 오스트리아 왕가에 준 타격은 더 켰다. 왕가의 미래는 무엇보다도 에스파냐의 부활에 달려 있었는데, 네덜란드에서의 패배는 그 부활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376-7)


"고립무원의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에게 다시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황제와 황제의 오만한 아들 페르디난트 대공은 그에게 어떤 조건이든 동의하겠다면서 어서 군대를 이끌고 오라고 애걸했다. 마침내 발렌슈타인은 확고한 실권을 쥐고 당당히 복귀했다." "그가 복귀했다고 해서 즉각 스웨덴 왕의 움직임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발렌슈타인은 일단 보헤미아에서 작센군을 내몰아야 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가톨릭 측이 상황에 대한 절대적 통제권을 장악한 그는 늘 그랬듯이 요한 게오르크를 매수해야 스웨덴 왕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작센군을 공격하는 대신 정중하게 동맹을 제의함으로써 그들이 평화롭게 국경 너머로 철군하도록 유도했다. 물론 이로 인해 요한 게오르크와 스웨덴 왕이 결별하지는 않았으나, 발렌슈타인의 의도는 절반쯤 달성되었다. 구스타프는 작센군에 의지해 보헤미아를 장악했으므로 작센군이 철수하자 자연히 동맹관계를 의심하게 되었다."(392-4)


"구스타프는 발렌슈타인에게 강화의 조건을 제시했지만 그 조건은 제국군이 전장에 있는 상황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페르디난트가 가장 취약했던 시기인 1631~32년 겨울에도 강화를 맺는 데 실패했다. 구스타프처럼 타고난 정복자는 아무리 평화를 희구하더라도 항상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를 만들어내게 마련이다." "독일로 행군하는 동안 스웨덴 왕은 이른바 미래 건설 계획(Norma Futurarum Actionum)을 마련했다. 이것은 제국을 전면적으로 재편하려는 구상으로, 이론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승리한 뒤에도 실현이 불가능했다. 그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가 결코 의지할 수 없는 한 가지 요소, 즉 독일 지배자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는 그들의 진정한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정책의 변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타협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으나, 그는 타협 없이 독일의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411-2)


# 11월 16일,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프 아돌프 사망


"뤼첸 전투가 끝나고 며칠 뒤 비텔스바흐의 프리드리히는 더 이상 팔츠 선제후도, 보헤미아 왕도 아닌 신분으로 라인의 바하라흐에 갔다." "거기서 전염병에 걸린 프리드리히는 11월 29일 숨을 거두었다.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때처럼 그는 방랑자였고, 부랑자였다." "이리하여 신교 대의의 가장 성공적인 옹호자와 가장 크게 실패한 옹호자가 2주일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실 1619년에는 비록 인물은 없었어도 신교 대의의 형편은 더 나았다. 적어도 독일인들은 선택의 자유를 갖고 있었다. 구스타프는 황제를 격파하고, 요한 게오르크를 핍박해 싸우게 하고, 리슐리외의 정책을 역이용했으나 시계추를 되돌려놓지는 못했다. 기회는 1619년에 사라진 뒤 두 번 다시 오지 않았다. 구스타프는 독일 신교도들의 꺾이고 마비된 의지를 뒤바꾸지 못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물리쳤으나 아무것도 건설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갈가리 조각난 독일 정치를 남겨둔 채 전장을 떠났다."(412-3)


8장 뤼첸에서 뇌르틀링겐까지, 그리고 그 이후: 1632~35년


"1634년 9월, 스웨덴의 야전사령관 호른과 작센-바이마르의 베른하르트가 지휘하는 신교 부대는 헝가리 왕 페르디난트와 에스파냐의 추기경 왕자 페르디난트가 지휘하는 가톨릭 부대와 뇌르틀링겐에서 맞붙었다. 종교적 측면에서 뇌르틀링겐 전투는 가톨릭 세력에게 브라이텐펠트 전투의 참패를 복구해준 압승이었다. 군사적 측면에서는 스웨덴 군대의 명성에 치명타를 가하고, 에스파냐 군대에 큰 명예를 안겼다. 그러나 정치적 측면에서는 리슐리외에게 신교의 대의를 지휘할 권리를 주었으며, 독일 비극의 종막을 올렸다. 이제 부르봉과 합스부르크는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뇌르틀링겐 승리는 꺼져가는 촛불이 마지막 불꽃을 피워올린 데 불과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에스파냐군과 제국군은 다시 분열되었다. 추기경 왕자는 피콜로미니가 지휘하는 독일 지원군을 거느리고 라인으로 향했고, 헝가리 왕은 프랑켄과 뷔르템베르크를 거쳐 서쪽으로 이동했다."(469-70)


"1634~35년 겨울은 부르봉과 합스부르크의 노골적인 분쟁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보낸 휴지기였다.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제국의 평화가 가능해 보인 마지막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손을 잡아끌면서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켜 타결을 얻어냈다. 그러나 평화를 안착시키기 위한 협상이 틀어지면서 새로운 전쟁 동맹이 탄생한다. 한편으로 프라하 강화, 다른 한편으로 에스파냐에 대한 프랑스의 선전포고로 이어진 그 협상은 새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지난 17년 동안 암암리에 변화해온 분쟁의 배경은 이제 변태를 완료했다. 연로한 황제, 작센과 브란덴부르크와 바이에른의 선제후들, 스웨덴 총리, 리슐리외는 여전히 기존의 노선을 고수했지만, 그들 주위에 새 시대의 병사들과 정치인들이 생겨났다. 전쟁 속에서 성장한 그들은 낯선 종교적 이념을 경계하며 냉소하고 경멸하는 데 익숙한 자신들의 입장을 선배들에게 내보였다."(473)


"과거에 종교가 차지했던 정신적 확신의 빈틈을 메우려면 새로운 정서적 충동을 찾아내야 했다. 이 무렵 민족주의 정서가 성장해 그 틈을 메웠다. 절대주의와 대의제는 종교의 지지를 잃은 대신 민족주의의 지지를 얻었다. 바로 그것이 후반에 접어든 전쟁에서 중대한 요소였다. 신교도와 가톨릭교도라는 말은 점차 쓰이지 않게 되었고, 그 대신 독일인, 프랑스인, 스웨덴인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와 적들의 싸움은 서서히 두 종교의 싸움에서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각 민족과 국가들 간의 싸움으로 바뀌었다. 옳고 그름의 새로운 기준이 정치계에 생겨났다. 교황이 합스부르크 성전에 반대하고 나섰을 때, 그리고 가톨릭의 프랑스가 위대한 추기경의 영도 아래 신교 스웨덴에 자금을 지원했을 때, 기존의 낡은 도덕은 무너졌다. 어느새 십자가가 국기로 바뀌었고, 빌라호라에서 외치던 '성모 마리아'라는 함성은 뇌르틀링겐에서 '에스파냐 만세'로 바뀌었다."(474-5)


"아버지를 대신해 국가수반으로서의 지위를 급속히 다져가던 헝가리의 페르디난트가 새로운 상황을 통제하려면 한 가지 선택이 반드시 필요했다. 즉, 그는 자신이 독일 군주인지 오스트리아 군주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그의 선택은 오스트리아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기질에서나 성질에서나 남방계에 속했다. 아버지 페르디난트 2세는 북방 진출로 스웨덴 왕의 반발을 받았고, 자기 손으로 엘베 강에서 에스파냐에 이르는 발렌슈타인의 제국을 희생시켰다. 독일 통합의 주요한 수단이었던 종교는 오래전 그의 세계가 젊었을 때 슈타이어마르크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으나 그의 수중에서 붕괴했다. 그가 평생을 걸고 이룩한 성과는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 슐레지엔,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카르니올라, 티롤 등의 국가들을 통합해 후대에 등장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기반을 놓은 것이었다."(475-6)


"1635년 5월 21일 프랑스 정부의 의무에 따라 프랑스의 사자는 브뤼셀의 광장에서 신앙이 독실한 프랑스 왕 루이 13세가 가톨릭 군주 에스파냐의 펠리페 4세에게 선전포고를 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9일 뒤 빈에서는 프라하 강화 협상의 조건이 공표되었다. 어떤 군주든 조약에 동참하고 싶으면 할 수 있었다. 조약의 조건은 독일에 평화를 안착시킨다는 점에서 작센 측에 크게 유리했고, 제국에도 어느 정도 유리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라인 강 좌안에서 스웨덴의 동맹으로 나서서 에스파냐에 선전포고를 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프라하 강화에 조인한 국가들은 스웨덴군을 독일에서 몰아내야 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도 상대해야 했다. 그런데 프랑스와 충돌할 경우에는 에스파냐 왕과 뜻을 같이해야 했다. 결국 프라하 강화는 전쟁 동맹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고, 동맹에 동참한 국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오스트리아 왕가의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독일 비극의 종막이 올랐다."(485)


9장 라인 쟁탈전: 1635~39년


"독일에서 황제의 입지는 어느 때보다 튼튼해졌다. 그의 군대와 동맹자들의 군대는 라인 강 우안, 뷔르템베르크, 슈바벤, 프랑켄을 거의 다 점령했다. 이 새 정복지들이 군대를 부양하는 부담을 떠맡게 되자 오스트리아 영토는 한숨 돌렸다. 요한 게오르크는 페르디난트의 하위 동맹자가 되었고,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은 항의를 해봤으나 이내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프라하 강화에 서명하기를 거부한다면 리슐리외에게 합류하는 것 이외에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헝가리 왕은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아버지를 우두머리로 하는 연합을 조직하고, 소수의 칼뱅파를 고립시켰다. 칼뱅파는 평화를 교란하고, 외국과 동맹을 맺는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독일 바깥에서도 황제의 입지는 매우 튼튼했다. 스웨덴 정부의 적대를 받는 대신 그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과 우호를 맺었다. 말하자면 (스웨덴 총리인) 옥센셰르나의 등 뒤에서 갑자기 지뢰를 폭파시킬 수 있게 된 셈이었다."(489-90)


"에스파냐의 모든 가문에게 유럽의 상황은 우호적이었다. 영국 정부는 에스파냐하고만 우호를 유지하면서 유럽에서 중립 정책을 추구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추기경 왕자가 자신의 기지와 매력으로 플랑드르의 평화를 실현해, 60년 전 돈 후안(1547~1578, 16세기 후반 네덜란드 총독을 지낸 에스파냐의 군사령관)의 위업을 재현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왕가는 이런 이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전쟁의 부활이 예고되고 있었다. 펠리페 4세와 올리바레스가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의 동맹 세력에게 자율적으로 그들의 능력을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었다면 만사가 잘 굴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일을 일일이 지시했고, 황제에게 자금 지원을 대가로 복종을 강요했다." "추기경 왕자는 에스파냐 왕의 휘하에 속한 총독의 신분이었으므로 항의할 수도 없었다." "재앙이 펠리페 4세의 정부를 덮쳤을 때 왕은 자금을 외부에 공급할 여력이 없어졌고, 에스파냐는 오스트리아를 파멸의 길로 끌고 갔다."(491-2)


"추기경의 외교와 정치적 야심은 프랑스의 군사력과 비례하지 않았다. 이 점을 잘 알았던 그는 가급적 전면전을 회피했다. 어쩔 수 없을 경우 그는 푀키에르를 독일로 보내 병력을 충원했다. 프랑스에서 모집한 병력은 신뢰하기 어렵고, 훈련도 형편없고, 걸핏하면 탈영하는 데다 주로 신교도라는 게 그의 우려 섞인 불평이었다. 한편 귀족들은 또다른 어려움을 야기했다. 군대는 여전히 봉건적 질서에 묶여 있었으므로 전쟁을 치를수록 자기 영토에서 병력을 충원한 젊은 귀족의 권력이 증대했다. 계급으로서의 귀족, 특히 젊은 귀족들은 리슐리외에게 치명적인 세력이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군주제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태동하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했다. 게다가 그들은 군인으로서도 명령에 잘 복종하지 않았다. 한 젊은 귀족은 자기 부대의 나쁜 상태가 왕에게 보고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상급 지휘관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런 군대로 합스부르크와 에스파냐군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497)


"베른하르트의 군대를 손아귀에 넣은 리슐리외는 발렌슈타인을 고용했을 때의 페르디난트 황제와 비슷했다. 전적으로 신뢰할 수도 없고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도 아니지만, 용병 장군은 확실히 자신의 미래를 해치는 짓은 하지 않을 테고 자신에게 보수를 주는 정부의 성공을 위해 일할 터였다. 유일한 큰 위험은 리슐리외가 계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였다. 리슐리외의 행정부는 다른 측면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재정적으로는 취약했다. 세수입을 관리하는 수완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프랑스의 재정을 좀먹는 특권과 관습의 뿌리가 너무 깊었다." "프랑스의 주요 세원은 다루기 까다로운 계층인 빈농들이었다. 농민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의 근간이었다. 이들은 검소하게 살면서 고된 일을 하고 완고한 성격을 갖고 있어 억압에 쉽게 반발했다. 그래서 이미 1630년에 디종, 1631년에 프로방스, 1632년에 리옹에서 세금으로 인한 폭동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501)


"1636년 12월 22일, 프라하 강화의 확산과 공인을 위해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선제후단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헝가리 왕이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군주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가급적 독일인을 군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제국 내에 군대가 무제한으로 주둔하는 일을 금하고, 왕이 사적으로 중시하는 오스트리아 법이 제국에까지 적용되지 않도록 하고, 헌법을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대관식의 선서는 늙은 황제가 17년 전 서명했던 것보다 더 엄격하지도, 더 인상적이지도 않았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페르디난트 2세의 입헌주의 정책이 계승되었다. 그는 합스부르크 영토를 탈환하고, 강화하고, 이단을 제거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얻었고, 다수의 독일 군주들을 자신의 전쟁에 동참시켰으며, 이들의 계승을 공고히 다졌다. 입헌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1636년의 레겐스부르크 회의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힘이 독일에서 정점에 달한 순간이었다."(504-5)


10장 에스파냐의 몰락: 1639~43년


"펠리페 2세 시절에도 이따금씩 제기되던 공공의 불만은 펠리페 3세의 치세에 시끄러운 소음으로 커졌고, 펠리페 4세의 치하에는 우레와 같이 터져나왔다. 게다가 통화를 서툴게 관리한 탓에 일부 지역에서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물물교환이 부활했다. 1640년대 초반 에스파냐로 오는 모든 물자의 3/4은 네덜란드 선박들이 운송을 담당했다. 그런데 통상과 방어를 담당한 이 함대가 크게 축소된 탓에 불법 거래는 근절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에스파냐의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1639년 함선 77척으로 구성된 에스파냐의 대함대가 네덜란드의 용감한 제독 트롬프(1598~1653)에게 밀려나 영국의 중립 해역으로 대피했다. 거기서 함대는 해상법과 영국 정부의 무기력한 항의를 모두 무시한 채 불리한 상황에서 공격에 나섰으나, 결국 70척이 침몰하거나 나포되었다. 이 참패는 에스파냐 해군력에 결정타였다. 1631년의 패배 이후 비틀거리던 거인은 이때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529)


"에스파냐에서 자금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제국군은 급료의 지불과 보급 체계가 유지될 수 없었다. 게다가 갈라스나 레오폴트 대공이나 조직적 수완은 빵점이었다. 그들의 한 부하는 〈달리 돈이 없기 때문에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라고 썼다. 양측에서 모두 중앙통제가 느슨해졌고, 지휘관들은 부대를 거느리고 식량을 구하러 멀리까지 나갔다. 식량을 찾는 데 남다른 후각을 가진 지휘관은 발렌슈타인처럼 간주되어 막강한 권위를 누렸다. 병사들이 이 부대에서 저 부대로 탈영하는 것은 그렇잖아도 늘 파악하기가 어려웠는데, 이제는 아예 어느 부대의 전리품과 식량 보급이 좋다 싶으면 부대장이 누구인지 따지지도 않고 제멋대로 부대를 옮겼다." "누더기 차림의 무리들이 아무런 대의명분도, 특정한 전략도 없이 먹을 것을 찾고 위험한 싸움은 피하겠다는 일념으로 독일 전역을 헤매고 다녔다. 식량을 눈앞에 두었을 때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싸웠다."(536)


"전쟁의 시대에 태어난 프리드리히 빌헬름─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의 아들─은 전쟁 특유의 기회주의와 부도덕을 비롯해 오로지 실용성만 부각되는 풍조를 잘 이용했다. 그는 자기 왕조의 물질적 이득이나 어쩌면 신민들에게까지도 득이 되는 일을 위해서라면 위험과 고통을 무릅썼다. 그것이 그에게는 정의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대의를 위해서는 한 푼도 내놓지 않았다. 훗날 그는 독일인을 위해 독일의 수로를 확보해야 한다는 유명한 선언을 발표했으나, 그의 목적은 자신을 위한 하나의 특별한 물길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더 나중에 그는 프랑스가 지원하는 자금을 짐짓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척하면서도 비밀리에 받았다. 그는 포메른을 마그데부르크와 교환하고, 나중에 술책을 부려 되찾았다. 그의 대내 정책은 엄격하고 유익하고 강력했으나 인기가 없었다. 그의 대외 정책은 아버지가 물려준 누더기 같은 영토에서 프로이센을 만들어냈는데,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중요한 인물이다."(540)


"1642년 무렵에는 프랑스군도 많이 변했다. 리슐리외는 돈을 절약하고 지휘관, 특히 귀족의 권력을 억제하기 위해 병력의 규모보다 기술적인 측면에 더 집중했다. 왕의 지원을 얻어 그는 규율을 더 엄격하게 집행하고, 욕살 같은 사소한 죄에도 엄벌을 가하기로 했다. 또한 종군자의 수, 특히 부대를 따라다니는 여자들의 수를 줄이려 했지만 항상 성공하지는 못했다. 나아가 그는 권력이 아니라 재능에 의한 승진의 길을 닦음으로써 농민, 기술자, 상점 주인, 곤궁한 귀족의 아들도 야심과 지성을 가졌다면 충분히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리하여 10년에 걸친 노력 끝에 병사들은 고도로 훈련된 기계 같은 군인이 되었고, 특히 포위전의 기술과 인내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래서 적의 편에서 넘어온 탈영병이나 포로가 섞여도 군대의 기강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덕분에 과거에 스웨덴군이 그랬던 것처럼 강렬한 민족의식이 발달했다."(557)


"1643년 5월, 국경 요새 로크루아에서 앙갱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멜로가 지휘하는 에스파냐군이 맞붙었다. 로크루아 전투는 에스파냐군의 재앙으로 끝났다. 1만 8천 명의 보병 가운데 7천 명이 사로잡히고 8천 명이 전사했는데, 그 대부분이 에스파냐 병사들이었다. 대포 24문을 포함해 무수한 무기와 군대 장비가 앙갱 공작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전승을 거둔 그는 로크루아에 개선했다." "그것은 에스파냐군의 최후였다. 기병대는 살아남았으나 규율과 사기가 무너진 데다, 에스파냐군의 강점인 보병대가 없으면 무용지물이었다. 로크루아에서 에스파냐군은 뇌르틀링겐에서 스웨덴군이 그랬던 것처럼 명성을 크게 잃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 명성과 목숨을 바꿔야 했다. 고참병들은 죽었고, 전통은 사라졌으며, 새 세대를 육성할 지휘관은 남아 있지 않았다. 로크루아 앞의 전장에 오늘날에도 서 있는 소박한 회색 비석은 에스파냐군의 묘비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웅장했던 에스파냐 왕국 자체의 묘비이기도 하다."(564)


11장 평화를 향해: 1643~48년


"1644년 12월 4일, 베스트팔렌에서 강화 회의가 개막되었다. 황제(페르디난트 3세)가 회의를 재가한 지 18개월이나 지난 때였고, 함부르크 대표단이 처음 정했던 회의 날짜보다 32개월이나 늦은 시기였다. 그러나 회의가 지속된 3년 10개월 동안에도 독일에서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제국 내에서는 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통합적으로 드러내지도 못했고, 그것을 표출할 만한 통로도 없었다. 군주들이나 목소리를 낼 만한 힘을 가진 세력들은 일반적인 의미의 평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실제 행동에 들어가면 그들은 언제나 사적인 이득을 챙기기 위해 전쟁을 좀 더 지속하려 했다. 베스트팔렌 회의가 거의 끝날 때까지도 상황은 내내 그랬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헤센-카셀 방백, 팔츠 선제후 등 10여 명은 뭔가를 피하거나 얻기 위해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보헤미아 신교 망명자들처럼 힘이 없는 집단도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전에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비준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나섰다."(580)


"또 다른 문제는 회의 기간 내내 적대 행위가 지속된 것이었다. 전쟁이 완전히 중지되었다면 협상이 훨씬 더 빨리 타결될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의 외교관들은 전쟁의 향방에 따라 결정을 내리려 했다. 전장에서 좀 더 이득을 얻지 않을까 싶어 계속 현안을 뒤로 미루었다. 특히 프랑스는 다른 나라들보다 자원이 풍부하고, 경제·사회적 압박이 비교적 적었던 탓에 결론을 무한정 연기하는 경우가 잦았다. 원하는 것을 잃느니 차라리 결정을 영원히 내리지 않겠다는 자세를 자랑처럼 내보이는 것이 프랑스 대사들의 주요 전술 가운데 하나였다. 수석대사인 롱그빌은 숙소 주변에 채마밭을 가꾸고 아내까지 불러들였는데, 뮌스터에 얼마든지 머물 수 있다는 시위였다. 이에 발맞춰 마자랭─1642년 12월 4일, 리슐리외가 사망한 뒤 그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한 추기경─은 군 지휘관들에게 전장에서 무력으로 압박을 가하라고 지시했다."(582-3)


"알자스와 포메른을 둘러싼 협상에서 각국 지배자들은 제국의 영토와 수천 명의 신민들이 얽혀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기보다 마치 자신의 사유재산을 처분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스웨덴으로 넘어간 포메른에 비하면 알자스 주민들의 형편은 그래도 좀 더 나았다. 사실 이곳에는 묘한 모순이 있었다. 황제는 양도된 영토를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고 싶었으나 프랑스 왕은 그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언뜻 보면 페르디난트가 냉정한 태도를 보이고, 프랑스가 관대한 제스처를 취한 듯하지만 실은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물론 경계선의 변화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프랑스가 알자스를 제국의 명패 아래 보유한다면 프랑스 왕은 제국의회에 대표를 보내 독일 사태에 계속 간섭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결국 그 복잡한 문제는 타협이 이루어졌으나, 어느 작가는 그것을 '영원한 분쟁의 불씨'라고 불렀다. 어쨌든 황제는 알자스에 관한 자신의 권리를 프랑스 왕에게 양도했다."(599-600)


"모든 세력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은 단연 종교 문제였다. 가톨릭 측은 교회가 1627년에 소유했던 모든 토지를 요구했고, 신교 측은 1618년의 상황으로 돌아가자고 요구했다." "한편, 토지반환령은 영구히 보류되었고, 군주가 자신의 종교를 바꿀 권리와 백성들이 자신의 뜻대로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승인되었다." "화해의 뜻으로 페르디난트 3세는 회의 초기에 칼뱅파를 제국 내의 셋째 종교로 승인했다. 하지만 만사가 우호적으로 타결되는 듯 싶었을 때 그는 돌연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열정을 드러냈다. 신교 측은 충격을 받았고, 가톨릭 측은 격분했고, 아직 불안정한 합의는 위험에 처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영토 내에서 신교도에 대한 관용을 단호히 거부하고, 교황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또한 그는 1624년을 종교 화해의 해로 삼자는 제안도 거부하고, 자신의 외교로 프라하 강화에서 만들어냈던 1627년의 기준도 강력히 부정했다."(602-3)


"프라하 시민들이 곤경에 처해 있는 동안 페르디난트는 종교적 신념과 아버지의 유산, 왕조의 의무에 사로잡혀 강화 조약에 서명을 거부했다. 외관상으로는 종교적 타협이 장애물이었으나 여기에는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그의 에스파냐 친척들이 네덜란드와 강화를 맺고 간신히 프랑스를 동등한 자격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실망을 주겠는가?" "그러나 바이에른은 추스마르스하우젠에서 패배하고, 프라하는 포위되고, 레오폴트는 랑스에서 꺾였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종교적 화해를 받아들이고 강화 조약에 서명했다. 뮌스터의 대표들은 3분이면 서명할 강화 조약을 황제처럼 3년이나 끌지는 않았다. 결국 1648년 10월 24일 토요일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그러고도 9일 동안 더 싸운 뒤에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프라하에 전해졌다. 그곳에서도 곧 축포를 하늘로 쏘아올리고, 테데움 성가를 부르고, 교회 종을 울려 전쟁이 끝났음을 알렸다."(612-3)


12장 평화 이후


"비로소 30년 만에 독일 땅에 평화가 깃들었다. 그러나 베스트팔렌에서 몇 가지 문제의 타결에 실패한 것 때문에 협상 전체가 위험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가톨릭 측도, 신교 측도 자신들의 몫을 타협적으로 결정한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러한 타결 결과를 실행하기 위한 조치도 없었다. 억지로 실행하려 하면 전쟁이 재개될 게 뻔했다. 교황 대사는 타결 내용 전체가 교회의 이익에 반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또다른 불씨를 피워올렸다. 에스파냐 정부는 황제가 비열하게 자신들을 버렸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약탈자인 로렌의 샤를은 조약에서 완전히 배제된 탓에 독일 땅 하머슈타인에서 요새를 철거하지 않았다. 에스파냐는 프랑켄탈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만토바 공작은 프랑스 정부가 자신의 영토 일부를 자신의 의견도 묻지 않고 마음대로 양도했다고 항의했다. 강화 조약이 체결된 지 5년 반이 지난 1654년 5월이 되어서야 마지막 적대적인 주둔군이 독일에서 철수했다."(619)


"사회 질서의 붕괴, 행정과 종교의 지속적인 변화로 중앙행정이 느슨해진 결과, 일부 지역에서 농민의 지위가 약간 상승했지만 그다지 현저한 변화는 아니었으며, 그 변화를 유발한 상황보다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작센에서는 평화가 도래하자마자 귀족들이 정부의 농민 지원에 불만 섞이 야유를 퍼부었다. 옛날에는 농노가 토지를 떠날 수 없었으나 전란의 혼돈 속에서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해 장사를 배웠다. 그 결과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노동자의 자식들이 자라서 가내공업으로 가계 소득을 증대시켰다. 전쟁이 내내 지속되었다면 지주 귀족들은 이런 현상을 당혹스런 심정으로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겠지만, 평화가 오자 모든 게 달라졌다. 작센의 지주 귀족들은 그들에게서 돈을 빌린 선제후를 압박해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집에서 가내공업도 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반포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전쟁이 낳은 한 가지 발전이 사실상 소멸해버렸다."(629)


"상업을 담당한 중간층은 전쟁으로 오랜 기간 쇠퇴를 겪어 힘이 크게 위축되었다. 미래의 부르주아지는 독립적 상인층이 아니라 종속적 관리층이었으며, 자유롭고 실험적인 계급이 아니라 기생적이고 보수적인 계급에서 생겨났다. 정부에 종속되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배자의 이익과 동일시한 시민들은 귀족과 농민 간의 완충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게 되었다. 소도시의 비중과 문화는 살아남았으나 이제는 군주의 호의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였다. 군주는 되살아나는 도시생활에까지 보호 권역을 확대하고, 성벽 도시를 전략적 거점으로 이용해 자신의 영토를 방어했다. 자연스럽고 생기 넘치던 도시 공동체의 예술이 시들고, 그 대신 절제되고 점잖은 지방정부의 문화가 발달했다. 그것은 사람들의 실생활이나 독일인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거리가 먼 모방적인 수준 높은 문화였지만, 좋게 보면 소도시 차원에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국제적이고 세련되고 상징적인 문화이기도 했다."(631-2)


"전쟁의 정치적 결과로 제국의 국경이 달라졌다.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독립은 기존 상황을 추인한 데 불과했다. 그러나 알자스와 서(西)포메른은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제국의 영토였으나 실은 외국 열강의 수중에 있었다. 특히 알자스의 양도는 영구화되었다. 독일로서는 4대 강 어귀를 모두 외국에게 내준 셈이었다. 라인 삼각주는 에스파냐와 네덜란드가 차지했고, 엘베 강, 오데르 강, 비스와 강은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가 각각 관할했다. 엘베 강과 비스와 강의 상황은 1618년으로 되돌아간 것이지만, 네덜란드가 라인 강의 출구를 사실상 소유하고 오데르 강을 스웨덴이 장악한 것은 독일의 상업과 자존심을 크게 위축시켰다." "전쟁이 끝나자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은 군주밖에 남지 않았다.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는 행정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자치보다는 전제정치가 현실적으로 더 효과적이었고, 선거제보다는 관료제가 더 적절했다."(633-4)


"정치적 변화의 범위를 제국으로 한정해보면, 교회와 국가 간의 균형은 이미 1618년에 이동하는 중이었으며, 피를 흘리지 않고도 충분히 진행될 수 있었다. 칼뱅파는 공식 승인되지는 않았으나 전쟁 전보다 교도 수가 더 늘었다. 독일의 절대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은 처음부터 특권층의 저항을 받았다. 1618년 무렵 군주들의 분리주의적 전제정치는 황제와 귀족에게 확실히 승리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결국 제국은 지리적으로도 축소되었다. 페르디난트 3세는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오스트리아' 안에 몸을 웅크렸다. 그는 뮌스터에서 오스트리아와 인근 지역의 왕-황제로서 참여했고, 이후에도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강화가 체결된 것과 군주들이 각자 외국과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함으로써 제국은 사실상 하나의 국가와 같은 위상으로 전락했다. 제국의 잔해에서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작센, 그리고 나중에 프로이센이 되는 브란덴부르크가 성장해 나왔다."(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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