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향의 사상사적 연구 논형 일본학 8
후지타 쇼조 지음, 최종길 옮김 / 논형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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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쇼와 8년의 전향 상황(1933)


"전향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하나의 단어로써가 아니라 그 사상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등장한 것은 다이쇼大正 시대 말기, 프롤레타리아운동의 '방향 전환'이 논의되는 과정에서였다." "'후쿠모토주의'에서 전향은 완전히 주체적인 개념으로서 고안되었다. 상황 속에 파고들어 상황 자체를 목적의식적으로 바꿔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상황 속에 내재해 있는 '전화轉化의 법칙'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객관 세계의 법칙' 외에 상황과 변혁 주체와의 관계를 가능한 한 〈법칙적〉으로 정확히 파악하여, 그것에 의해 주체적인 원칙을 만들고 그 원칙에 의해 상황에 대처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른바 운동의 주체를 법칙화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운동의 법칙은 '객관세계'의 법칙과 대응해서 변증법의 정식에 적합해야만 한다. 무법칙의 운동에서 법칙적 운동을 향해 법칙적으로 전화하려는 능동적인 행동이 '전향'인 것이다. 따라서 후쿠모토는 전향을 자주 '자기지양止揚'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13-4)


"후쿠모토주의에서 비롯한 전향에 대한 사고방식은 국가권력 또는 일본의 지배체제에 의해 역이용되었다. 국가권력은 일본의 체제에 알맞은正堂 국민철학을 잊어버리고 실현 불가능한 〈완전히 가상이라고 불러야만 할······ 외국의 사상에 현혹된〉 자가 자기비판을 하고 다시금 체제에 의해 인정받은 국민사상의 소유자로 복귀하는 것을 '전향'이라고 부르면서, 현대 일본 사상사에 특수한 기초 범주의 하나로서 전향이 생겨난 것이다." "1933년(쇼와 8년)의 사노·나베야마의 전향이 이러한 전향 개념을 성립시킨 계기가 되었지만, 그때 양자의 성명문은 '일본 프롤레타리아 자각분자自覺分子의 의견'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전향이라는 것이 원래 어떠한 경우에도 주체적인 정신태도의 존재를 하나의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러한 정신태도를 현대 일본에 우선 발생시키고, 그것에 의해 현대 일본의 사상사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것은 분명히 생산성·비생산성의 전부를 포함한 공산주의였던 것이다."(15-7)


"공감sympathy이란 주체의 능동적인 움직임인데, 타인을 사랑하려는 의지로 타인의 감정을 감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이 설은 유럽에서 고안되었기에 유럽 시민의 '공감의 존재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의 '공감'구조는 실로 그것과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다야마 가타이가 간파한 것처럼 일본 사회에서 공감은 명확히 규칙화되지 않은 의식이지, 주체의 의지에 의해 매개된 감정의 움직임이 아니다. 희로애락을 함께 해야 할 때와 장소에서도 세상의 관습에 의해 공감은 사전에 정해진다. 게다가 규율로서의 관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운치 않은 무규율의 관습에 의한다." "천황제 파시즘이 잇달아 작은 전쟁을 일으키고 대외적 위기를 양성하면서, 공동체 국가관을 강화시켜 나가는 과정은 국가를 지배메커니즘이라 파악하는 국가기구적 사고방식을 점차 분해·흡수해 가는 과정이고, 동시에 감성의 개별성을 말살하여 일본적 공감을 확대 재생산하는 과정이었다. 전향은 여기서 발생한다."(32-3)


"더구나 도쿄대학 출신자 모두에게 오늘날까지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엘리트주의는 그들로 하여금 한순간도 국민적 지도자(반드시 국가적이지는 않다)의 지위에서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게 하였으며, 따라서 자신이 운동에서 지도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보다 단 한발 앞선 위치에서 보조를 맞추게 된 것이다. 그들이 항상 국민적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한 결코 일본적 공감에 대해 반항할 수 없다. 게다가 항상 국민적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한 눈앞의 잇속이 보이는 상황에서 물러나 있어야 했다. 이른바 일본의 큰 상황 속에 몰입하면서 작은 상황에서 초월에 그것을 조작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많은 경우 자신의 공감매몰성은 의식되지 않고 자신의 상황조작성만이 과도하게 의식된다. 따라서 근본적인 자기비판은 어떤 방향에서도 불가능하고 전향의 자각 역시 미약하다." "이러한 전향 노선의 결과 일본인의 진보관과 자유관이 크게 왜곡되어 근본적인 부분에서 전투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33-4)


"사노·나베야마는 일본 사회의 사상 구조의 전향을 전제로 하고 그것을 전위당의 입장에서 용인하고자 했다. 〈황실을 민족적 통일의 중심으로 느끼는 사회적 감정이 노동자 대중의 마음속에 있다. 우리는 이 실감實感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출한 그들은 여전히 〈과거와 동일하게 조금도 변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긍지를 가지고 죽음에 임하〉려 한 것이라고 스스로 선언했다. 아카마쓰와 아소는 일본 국내에서 자기 자신의 정치적 역할에 대한 자각을 상황에 따라서 바꾸고, 야스다 등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물리쳤으며, 고바야시형 중간 리더sub-leader는 자기 자신의 사상적 입장에 대한 자각을 전환시켜 일본적 공감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사노·나베야마는 그들의 전향 자체가 전위당前衛黨이 취해야만 하는 올바른 노선이라고 생각한 점에서 그들의 전향은 단순한 개인의 사상 전향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공산당이 공산당으로서 전향하려고 하는 노선이 제출된 것이다."(47)


"그러나 그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상적 도정道程 속에서 정당하게 검토되어야 할 문제는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사노·나베야마의 전향 과정에서 우리가 지적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하나는 인터내셔널한 운동 속에서 발생하는 대국주의의 역기능에 관한 것이다." "국제적 연대운동이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는 동안에는 각국 운동단체 간의 국제적 평등이 제법 잘 지켜지지만, 한 나라가 지배력을 장악하고 그 나라가 강대국이 되어 다른 종류의 지배체제에 대항하는 경우에는 그 새로운 권력은 세계 운동의 보루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한편 그로 인해 운동단체들 사이에서 많은 특권을 획득한다. 그 결과 각국 운동단체는 새로운 권력의 국가이성에 바탕하는 국제정치상의 다양한 술책조차 종종 술책으로서가 아니라 운동이념으로써 지지해야만 하는 상황에 봉착한다. 나베야마 등은 옥중에서 이 점을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이다."(48-50)


"이러한 관찰은 날카롭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서 사노·나베야마 성명서의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결코 단순한 길이 아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공산당이 운동에서 자주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코민테른에서 이탈해 〈일본의 조건에 입각한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노선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일본의 민족적 특수조건이란 〈어느 나라에도 없는 국체〉관이 강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대중들 속에서는 그렇다. 따라서 '군주타도론'에 열광하는 것은 소부르주아적인 자유주의 혹은 아나키즘의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 나베야마는 천황제 사회주의야 말로 대중 노선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그들은 서로 분열된 이중의 대중관을 가질 수가 없었다. 따라서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로 존재하는 한' 눈앞에 있는 대중의 '건전한 정치적 관심으로' 되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여기서 성명서의 〈우리는 대중이 본능적으로 보여준 민족의식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는 테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전쟁을 승인하는 것이 되었다."(50-2)


"그들은 실체적인 대중주의자였기에 소부르주아 배제주의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흐름 속에 보이는 하나의 특징은 '소부르주아 급진주의'라든가 '대중주의' 등을 작은 틈도 없이 딱 맞는 형태로 사회적 계층으로서의 소시민과 대중에 결합시켜버리는 경향이다. 사상은 개인의 신념과 판단 그리고 행동 태도가 뒤섞여진 것이기에, 그처럼 뚜렷하게 사회적 계층과 유착될 리는 없다. 사상 형성 상황으로서의 계급 관계가 커다란 영향력을 지님으로써 특정 계급에 공통되는 사상 경향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중첩되지 않고 어긋나는 부분도 상당히 많다는 점을 그들은 생각하지 못했다." "이처럼 '사상파악의 부동성浮動性을 이해하지 않으면 나쁜 의미에서의 이론 마키아벨리즘이 발생한다. 여러 가지 사상적 입장을 자의적으로 고정하여 하고 싶은 대로 절대가치를 부여하고 추방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노·나베야마는 '이론주의'에서 '대중본능 존중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이 이론 조작을 적용한다."(53-4)


"근대 일본에서 상황에 대해 일관적인 원리를 가진 사상 체계는 마르크스주의가 유일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운동단체의 패배는 동시에 원리 일반의 패배를 의미하기 쉽고, 여기서 발생하는 허무주의도 하나의 원리적 상실감을 모든 원리의 상실감으로 즉시 치환하는 것이었기에, 첫사랑에 실패했다고 연애 자체를 부인하는 것 같은 안이함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상황의 추이에 대한 저항성을 갖지 않고 질질 끌려 그만두는 성질을 갖는다." "따라서 주의에서 해방된 곳에서 발생하는 '자유주의'는 다양한 주의를 자유로이 조종하는 것에 의해 정치권력의 팽창 경향을 저지하면서 역으로 사회 내의 자유를 확대해가려는 유동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이념을 찾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계속해서 존재하는 천황제 이념을─이것은 동시에 비이념이기도 한 대용물이지만, 그만큼 한층 더─부정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것을 천황제적 허무·자유주의라고 부른다."(55-6)


2장 쇼와 15년의 전향 상황(1940)


"1933년 6월의 전향에서 사노 등은 공산주의자 개인으로서 대외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당을 대표하는 지도자 다시 말해 초인격적인 집단의 전체 인격성을 체현하는 자로서 당에 전향을 요구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의 전향과 당의 전향을 동일시하는 지도의 병리현상을 드러냈다. 이 병리는 개인적인 집단, 특히 공동체적 모임과 카리스마·교조에 이끌리는 집단에서는 병리로서가 아니라 극히 일반적인 보통의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조직을 비인격적인impersonal 것으로 파악하는 고전·근대적古典近代的인 사고의 바탕에는 지도는 특정한 지도자에게 속하는 기능이 아닌 우연히 특정한 지도자가 품고 있던 지도 방침·지도 강령·지도 정신이 완수되는 활동이다. 따라서 그것은 특정 인간에게 전체적으로 얽혀있지 않다는 점에서 객관적, 또는 추상적인 것이기도 하므로 위의 병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병리로서 자각된다."(96-7)


"절차의 실제적, 또는 사상적 의미를 자각하는 것이 다름 아닌 근대 조직 속에서 살아가는 에토스ethos다. 앞서 말한 조직의 근대적 유형도 구성원의 그러한 에토스를 전제조건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노 등은 그들 자신이 형성 확립하고자 노력했던 조직의 에토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그들 개인의 전향 자체는 그들의 자유지만, 전향의 방법과 전향 형태는 지금까지 그들이 서 있었던 공식적 입장에서 제약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 무자각적이었던 자들은 사노·나베야마만이 아니다. 그들의 전향을 '배신'이라 하여 격렬하게 비난했던 비전향 공산주의자들 또한 무자각했다고 본다. 만약 그들이 공산당의 '미덕'이 지도자 교체에서 객관적 원리를 고수하는 데 있다는 점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사노 등의 전향 자체를 공격하기보다는 오히려, 때로는 그 공격과 동시에 사노 등의 절차에 대한 오류를 보다 격렬하게 공격했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98-100)


"이리하여 공산당은 자신들의 자랑스러워해야 할 지도자 교체의 원리성에 대한 자각이 전全당을 통틀어서 없었던 것이 된다." "'규약'의 체계적 해석에 대한 논쟁이 어쩌면 한 번도 없었을 것이라 추정될 정도로 적다는 것은 그러한 절차 정신의 결여를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절차정신, 바꿔 말하면 규칙의 구체화 감각이 전향을 둘러싼 대립 속에서 서로 결여되어 있다고 하는 연관이 사노 등의 전향을 계기로 집단 전향의 형태를 취하게 한 하나의 중요한 이유였다. 물론 이 경우 사실상 집단 전향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사노·나베야마 자신의 전향 방식이 그 형태를 취하였고 그들이 그것을 원했을 뿐, 사실상 그들의 영향 하에서 괴멸적 타격을 받으면서도 공산당 집단이 비전향을 관철하게 된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이 전향의 경우가 그 이후 익찬 시대로의 진행시기에 사실상 광범하게 전개된 집단 전향의 사상사적 맹아로 보이는 것이다."(102-3)


"일본 전역에 걸쳐 사회의 각 영역을 망라한 집단 전향의 분출은 전향이 '시대적 요구'가 되었을 때, 일본 내에 있는 모든 요소가 방향 전환을 강요받았을 때, 따라서 전향이 '표어'가 되었을 때 일어났다. 그 '때'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고도국방과 총력전의 요구가 사회 만물의 활동 형태를 결정지어야 했을 때, 모든 입장은 목표를 부여받고 그 목표를 향해 전진轉進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렇게 해서 전향은 이전처럼 단순히 마르크스주의·반국체주의·혁명운동'에서의' 전향일 수만은 없게 되어, 총력전이 부여하는 목표'로의' 전향이 되었다." "'적극적'인 '보국報國' 행동이 요구되는 한 '무위'도 '제멋대로'도 '망상'도 허용되지 않는다. 방관주의, 자유주의, 관념적 태도에서 특정한 행동 그 자체로의 전향이 촉구됐던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여기서는 만인이 그들의 일상에서 항상 전향의 과제 앞에 서 있는 것이 된다."(106-7)


"따라서 전향이 시대의 '표어'가 되고 '국민적 보편윤리'화 되는 것이다. 독일의 총력전 국가에서의 '유대인'은 우리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에서는 '전향 전의 사람'이고, 그러한 까닭에 전향이라는 말은 일본 파시즘 국가체제를 기동시키고 재 기동시키는 주제어의 하나였다. 부단한 '반성'과 '실천'에 대한 분발이 그것을 지렛대로 삼아 발생하는 것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전향 행동은 부단하고 무한한 과정이 되어야 한다. '~에서의 전향'에서 '~로의 전향'으로 전향 개념 그 자체를 전향시킨 전향사에서의 전기는 1937년 12월 '인민전선파', '노농파' 400여 명의 검거와 일본 무산당 및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결사금지였다. 이들 '합법 좌익'은 공산주의로부터의 질적인 거리에 의해 존재허가증이 부여될 때까지는 한계선상이기는 했지만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역점은 비합법 좌익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국책國策에의 실질적인 접근거리에 놓이는 것이다."(107-8)


"국민 전체의 전향을 요구하는 시기에 맞춰 지배체제가 기대한 것은 이전의 사회주의 집단, 노동조합, 자유주의 정당 등이 그대로 산업보국운동에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집단의 해체를 거쳐 개인이 '완전 전향'한 뒤에 다시금 산업보국운동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집단 전향의 그늘에서 (이전부터 내려오는 정신을 간직한) 개인은 비전향인 채로 있을 수 있다. 물론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집단 전향에 찬성한 이상 완전한 비전향일 수는 없지만, 일본 집단에서는 구성원의 적극적 토론 속에서 전환방침이 생겨나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간부가 정한 방향을 말없이 인정하는 것은 적극적인 전향의 의미를 거의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일종의 위장 전향임에는 틀림없지만, 전향성명을 발표하는 것으로 스스로 자신을 위장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가장 쉬운 위장 전향인 것이다. 가만 있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위장할 수 있다. 부작위不作爲 위장 전향이 성립하는 셈이다."(130)


"위장 전향은 보통사람은 성공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부작위 위장 전향이 성립한다고 한다면,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다시 말해 주변 사회의 변화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실행할 것이다. 어떤 조건만 정비하면 일본 전체가 위장 전향을 할지도 모른다. 위장 전향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1937년 탄압의 결과로 산보운동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저절로 성공 가능한 위장 전향이 대량으로 출현한 것은 놀랄만한 악순환이 아닌가." "그리하여 갑작스럽게 전향성명을 내놓은 자들의 애매한 전향 정책을 수용함으로써 사회주의자의 완전 전향을 추진할 절호의 기회를 놓친 협조회·산보연맹 자신이 위험한 변환을 내포하는 황혼 정책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지탄받는다. 위장 전향에 대한 공포는 집단 전향을 통해서 점차 확대되어 간다. 그래서 파쇼집단 자신이 공격받게 되는 것이다. 익찬회는 공산주의의 소굴이라는 유명한 비난도 이 계열의 결말로 생겨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131-2)


"익찬 체제는 엉성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집단 전향의 합류체였던 탓에 그 이데올로기 상황은 굉장히 유동적이었다. 예를 들면 '일진월보日進月步를 의미하는' 단어로서의 '혁신'은 '정당정치 타파'의 '혁신' 및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혁신'과 서로 유동하는 애매한 상징이 되었다. 이처럼 유동적인 상황에 대한 개인의 대처방법은 무한에 가까운 다수로 존재한다. 공공연한 반천황주의자·반국가주의자, 공공연한 공산주의자로서 완전한 비전향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거의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죽음으로써 사는 삶의 방식을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지만, 그러한 전략적 상징을 제외한 행동양식의 전술적 차원에 대해서는 대단히 넓은 궁리와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유동적 상황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원래 다각적인 것이다." "따라서 익찬 시대는 아마도 근대 일본사 중에서 가장 많은 사상 형태가 은밀한 유형으로 내포되어 있는 시대의 하나가 아닐까."(140-1)


3장 쇼와 20, 27년의 전향 상황(1945, 1952)


"전후 전향에 대한 연구는 특수한 어려움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전후 전향이 일정한 상신서로 국가권력에 대해 서약한다는 전전의 전형적인 '옥중 전향'처럼, 누가 봐도 확실한 객관적 규격성을 가지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전후 '민주주의'는 전향까지도 '자유'롭게 하였는데 여기서의 '자유로운 전향'은 종종 전향자 자신에게조차 그 궤적을 확정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전향 자체의 객관적 규준을 잃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벌린은 자유의 개념을 '나'에 대한 무간섭을 욕망하는 소극적 자유 개념과 '내'가 '나' 자신의 지배자임을 욕망하는 적극적 자유 개념 두 가지로 나눈다." "일본 현대사에서 전제專制는 오로지 군국주의·천황제 파시즘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전제와 '강압'은 전부 군국주의나 천황제와의 관계 속에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자유라고 하면 사적이고 소비적인 자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소극적 자유 개념이 그 본래의 상대성에 대한 자각을 상실하고 실체화 되어버린 것이다."(165-7)


"이러한 상황에서의 전향 궤적은 그때마다의 의견을 어떤 형태로든 발표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사적 자유의 세계 속에 녹아들어가 불분명한 것이 된다. 그때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전후 전향은 여전히─제2의─현재진행형이다." "이리하여 전후 전향은 전전과 비교할 경우 상대적으로 '자유스런 전향'이라는 이유로─제3의 조건이지만─권력에 대한 '굴복'이기보다는 오히려 '막다른 상황의 타개'이기도 하고, '환멸'이나 '좌절', 혹은 '성장'이기도 하다." "아울러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전향'은 전향이라는 개념 그 자체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용' 위에서 이루어지고, 반대로 '자유로운 사용'을 촉진한다─이것이 제4의 조건이 되지만─. 그러므로 이전의 명확한 일의성一義性을 지닌 전향 개념을 염두에 둔 사람(하야시 겐타로 같은)은 전후의 전향을 따옴표가 붙은 '전향'으로 부른다. 거기에는 자신의 사상 이동은 전향이 아니라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168-9)


"전후에 전개된 전전 전향의 반성reflection은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보인다. 그 중 하나는 이전의 전향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다시 한 번 전향 이전의 입장으로 돌아가 사상의 단련을 꾀하고 이로써 새로운 시대를 비전향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1933년에 '옥중 전향'을 하면서 이미 그 직후부터 재기의 노력을 거듭하고 이후 전중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비전향의 반군국주의자를 고수한 모리야 후미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공산당원이면서 본의 아니게 적에게 굴복하여 자신의 인간성에 먹칠을 했습니다. 나는 이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자기를 재 단련하는 것에 자신의 노력을 한정하고 집중하려 했습니다.〉" "이것을 '자기' 개인의 내면적 훈련 규율이라 하여 만약 윤리를 엄밀한 의미에서의 내적 자율성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윤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모리야에게 계급주의자인 것과 윤리적 개인주의자인 것이 어떻게 해서 양립하고 있는 것일까."(172-4)


"계급의식은 마르크스의 이론적 규칙定則에 따라서 훈련하면 자신 속에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하여 자신 속에 만든 계급의식은 단순히 직업이나 국가의 차이를 초월하게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뿐이라면, 계급의식이 아닌 계급 자체가 완수할 것이다. 계급의식은 계급 자체를 넘어서는 힘을 가진다. 물론 이론적으로 사색하는 경우의 의식만을 프롤레타리아적이라 하고 행동과 생활 의식을 생태적 계급에 속하게 하는 식의 기만을 마르크스주의는 허용하지 않는다. 계급의식이 육체 전체를 관통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생태 그대로의 계급을 넘어서기에 이르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윤리학이 여기서 생겨나고 마르크스주의자의 자기 훈련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리하여 이론적 학습에 의한 새로운 계급의식의 획득과 획득한 의식의 육체화라는 이 관련이 마르크스주의의 한 측면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모리야 등은 마르크스주의 속에서 '개성의 발전-인간적 성장'의 길을 찾아냈을 것이다."(176)


"과잉된 자기단련 과정의 바닥에는 아마도 전향 경험의 반성이 당 중앙부의 비전향자에 대한 인간적 속죄 의식과 연결되어 있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또한 국가권력이라는 외적 상황의 힘에 굴복하여 '탈당'한 것을 두고 통렬히 반성하게 하면 할수록 결코 다시는 '탈당'하지 않겠다는 의욕이 생겨서 거기서 제명되거나 탈당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가능성이 포함된 길을 피해가는 행동방침이 생겨나는 것이리라. '전전형 탈당' 중에서 반공화反共化하지 않는 유형의 하나는 이러한 특징을 갖는다. 즉, '탈당' 경험이 역으로 당에 대한 동일화(심리적 결합)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 태도는 심리학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것 때문에 전후 일본 공산당이 '성숙한' 당원에게서 '간쟁'을 받을 기회를 잃고 있는 것고 간과할 수 없다. 그러한 상태가 일상화常態化되면 '간쟁'의 기회를 내부에 지니지 않는 것이 '단결'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179)


"지금 논한 제1의 입장에서의 '전향' 개념은 대단히 명석한 일의성을 가진다. 그것은 〈본의 아니게 적에게 굴복한〉 것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그 극복도 역시 영구의 일의적 과제가 된다." "그러나 모든 전향 경험자와 전향론자가 '전향' 개념의 이렇듯 명석한 일의적 의미를 계속 유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혹한 고전적 '전향 시대'가 막을 내림으로써 쥐어진 논의의 자유는 전향 경험의 다각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그뿐 아니라 사실로써도 이전의 전향에서 탄압에 대한 '굴복'과 함께 '자유로운' 전향까지도 동시에 병행한 전향 경험자도 있었다. 이러한 경험의 다의성은 당연히 전향론에서의 다각적인 해석 태도를 가져와, 동시에 '전향' 개념에 다의적(애매한) 의미를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 입장에서 비로소 제1의 입장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전향 상황의 어떤 의미가 파헤쳐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경우에 속하는 전후 최초의 전형적인 예로 가메이 가쓰이치로의 전향론 「죄의식」이 있다."(181-2)


"가메이의 전향 의식 속에는 '굴복=배신'과 결합되어 '회심回心'과 '복귀' 등이 복잡한 교향곡이 되어 울려 퍼지고 있다." "원래 자신은 '공산주의자'여서는 안 될 사람이었으나, 상황의 힘은 자신에게 '본연'의 천성을 자각시키지 않았고, 따라서 공산주의자다운 '정치적 자세pose'를 취하는 가운데 자신의 미적 반역 정신의 실현을 위한 길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가메이가 '감옥과 죽음 앞에서' 굴복했을 때 단순히 공산주의자로서 굴복한 것만은 아니다. 공산주의자로서 행동하고 있던 자신의 발밑에서 이미 자기 본래의 사상이 굴복당하고 있음을 동시에 발견한 것이다. 현재의 굴복이 과거의 굴복을 자각시켰다. 오늘 굴복당한 것이 어제까지는 굴복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굴복시킨 것은 '절대 확실한' 물리적 권력이고 그로 인해 굴복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어제까지 자신의 '정신'을 바쳤떤 이데올로기가 억압에 지나지 않았던 것임을 이해한 것이다. 여기서 이른바 '배신' 사관이 성립한다."(183)


"당연히 현세 초월적 '종교'의 세계가 이곳에 열린다. 모든 현세를 초월한 종교의 관점에 설 때 현세적인 모든 것은 완전히 동질적으로 보인다." "초월 종교의 세계에서 현세를 볼 때에는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평등한 죄성罪性을 띤다. 그러한 관련은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에서 종교의 일면에 지나지 않지만, 그 일면에 관심을 가질 때 현세 속의 '죄인'은 더할 나위 없는 구원을 얻는다. 자신의 죄는 인간 일반의 원죄와 연결된다. 그것이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구원의 토대로써의 시련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괴로워하는 개인에게 타인과의 공통성을 부여해 안정된 지속성을 갖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이러한 측면만 주목할 때에는 원래 현세 사회 속에서 자기에게만 속할 것 같은 성질의 죄까지도 원죄로 해소해버리는 개인으로서의 책임회피를 낳는다. 그렇게 된다면 원죄 관념을 갖는다는 것만으로 이미 구원되고 만다. 현세 속에서 살아가면서 구원되는 셈이다."(184-5)


"우리는 '전향 시대'의 다각적 반성이 가능하게 됨에 따라 주어진 전향 개념이 다의적으로 사용되는 상황에 서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전향 사실을 애매모호하게 하고 개인의 사상적 무책임을 낳는 경향을 가짐과 동시에 공산주의자의 국가권력에 대한 굴복·배신이라는 부동의 일의적 의미를 통과하는 경우보다 넓은 시야로 전향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후자의 이점을 살려서 봤을 때, 우선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2차 세계대전 후의 천황제 국가 및 그 '국민' 자체의 '전향'과, 국가 이데올로기를 직접 담당했던 '제도인'의 '전향'이다. 물리적·사회적 권력으로 전향을 강제한 당사자가 권력을 잃었을 때, 하나의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어떻게 행동했는가. 또한 새로운 승리자의 권력에 의해 강제되었을 때 지배되는 무권력자로서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것을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현대 일본에서의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사상적 실력을 비로소 평등한 조건하에서 비교할 수 있다."(208)


"8·15조서는 일본 제국의 최고 지배자가 항복의 결단을 내렸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제일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8·15의 '항복' 조서에 가장 긴요한 '항복'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사상 문제를 포함한다." "결단은 이해나 인식의 차원과는 다르다. 거기에는 다면성이 있을 수 없다.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굳이 스스로의 행동을 한정시키려는 것, 그것이 결단이다. 따라서 결단 자체는 명석한 것이다. 결단한 행동의 내용이 합리적으로 정당하므로 증명할 수 있다든가,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명석한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는 비합리적일 수 있고, 사실 '결단주의'는 종종 자기 행동의 '정당함'을 검증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비합리주의로서 출현했다." "전형적인 결단과 그 정신이란 그러한 것이다. 그렇다면 완곡한 심정 토로로 결단을 알리려고 한 8·15조서는 반대로 가장 결단답지 않은 결단이 될 것이다."(209-10)


"게다가 이 조서에서 빠진 것은 결단의 정신만이 아니다. '전시국면이 반드시 호전되는 것은 아니며' 등의 어법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에게 불리한 현실을 즉물적卽物的, sachlich으로 직시하여 그것을 지체하지 않고 표현하고자 하려는 정신이 없다. 막스 베버가 말한 것처럼 이 정신이야말로 인식에 객관성을 보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조서 속에는 현대 일본의 지배자에게 엿보이는 정신적 리얼리즘의 결여가 집중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리얼리즘에는 한편으로 아무런 목적 없이 현세적 이익의 기회만을 추구하는 무이념주의 유형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고한 자신의 이데올로기와 의욕을 보유하면서 그에 반하는 자신의 현실을 가차 없이 직시하는 내적 긴장으로 충만한 역동적인 유형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리얼리즘의 정신은 후자 속에서만 방법적 자각에 다다른다. 이런 생각으로 이 조서 내용을 살펴보면 과연 거기에는 초주관적 의욕이 전혀 없다."(210-1)


"힘에서의 패배가 곧바로 이념의 자발적 포기를 야기하는 일본적 전향의 전형은 좌익이 아닌 오히려 천황제의 최상층군에서야말로 고유한 것이었다." "'종전의 공로자'들이 그 노고와 공적을 제아무리 자랑하더라도 거기서 사상적 의미는 무엇 하나 생산되지 못했다. 그것은 오로지 사상과 외계外界의 동일화 구조 때문이었다." "좌익 마르크스주의자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힘에서 패한 결과로 '본의 아니게' 전향한 것이기 때문에 그 전향 과정에는 '독립의 이념'과 '힘에 의해 좌우되는 생명' 사이의 선택을 둘러싼 내적 긴장이 충만해 있었고, 전향 후에도 이 양자의 관련을 계속해서 사색한 경우가 많다. 천황제 상층부는 그러한 내적 긴장을 가지지 않은 까닭에 밋밋하게 선한 사람의 얼굴을 유지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그리고 끊임없이 전향한다. 따라서 전향을 스스로 문제시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문제시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러한 '일관성一系性'이기 때문에 '경사스러울' 뿐이다."(212-3)


"여기에는 (여전히 무기력했던) 전후 일본의 자유를 둘러싼 삼중의 역설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외국의 군사권력에 의한 '혁명적 독재'라는 역설이다. '진정한' 인민의 의지가 경험적 인민을 넘어서 지배의 지위를 점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적극적 자유 개념'이 일본 전후 사회에서 실현되었을 때, 그 담당자는 인민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외국의 국가 권력, 특히 그 속에 있는 물리적 강제력을 대표하는 군사 권력이었다. 두 번째 역설은 일본 정치지도자의 추수追隨적 주체성이라는 자주성의 특수 구조다. 즉, 정복자의 의향을 '선취'한다는 점에서 '자주적'인, 그러한 역설적 '자립'인 것이다. 제3의 역설은 국민의 소비적 향수享受의 자유(사적 자유) 경향이다. 이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향수하는 사물로서의 자유를 스스로 생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후 정치제도의 생산·재생산 조건에 대한 무관심을 낳는다. 따라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유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 자유주의가 될 가능성을 지닌다."(220-1)


"그리하여 자주적인 민주화운동이라면 어떤 자와도 '주의'를 초월하여 손을 잡으려고 했던 당초의 방침은 우선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권력의 공백에 의한 주체적 인간으로서는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 서 있었으면서도 자주적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지 못했다는 사정─이것에 대한 책임은 자유로운 인간을 무능력하게 만든 천황제 국가에 있음은 물론이지만─거기에 점령군이 국가권력의 군대인 채로 일본 민주화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어버렸다는 사정, 나아가 그에 더하여 일본 사회의 지도층이 가지는 권력에 대한 자주성이란 반대의 권력에 대한 자주적 추종, 그것들이 국제정세에 대한 저항력을 없애고 결국은 GHQ 자체까지도 단순한 반공, 반동으로 빠지게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점에서 전후 일본인의 동향은 둘로 나뉘게 되는데 반동화한 권력에 저항하여 그야말로 자주적인 민주화운동을 새롭게 이어나가는 것과, 권력의 경향과 함께 다시 크게 전향하는 쪽으로 양분된다."(229)


"국가와 사회는 별개라는 사고방식이 전통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국가'는 '국민'과도 항상 궤를 같이 한다. 국가기구의 붕괴는 국민 공동체의 붕괴이기도 했다. 이 패배한 국가에는 국민이 없다. 존재하는 것은 산하와 자연인뿐이다. 말하자면 자연적 자연과 자연적 인간만이 생활무대로 나왔다는 말이다." "그러나 천황의 신성성은 중세 이래 교토의 폐쇄 사회 속에서 소중하게 온존되어 온 것이다. 여기에는 '비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신앙이 붕괴해버리는 것과 같은 신앙으로서의 약점이 있다. 그런 까닭에 그 신앙을 타도하려는 강력한 반감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일본의 '국민사회' 일반은 천황 비판의 자유화 아래 적극적인 천황 신앙에서 이탈하여 소극적으로 천황제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옮겨갔다." "이런 태도는 명료한 전향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또한 비전향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저 지배자의 대응형식과 서로 닮은 부분적 전향이면서 동시에 부분적 비전향이다."(243-4)


"그 애처로운 비자주적 상황에서 피어오른 노력이 아직 충분하게 결실을 맺기도 전에 점령군은 '혁명적 독재'에서 '반혁명적 독재'로 180도 전향했다. 전후 혁명운동이 실은 협력운동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러한 자신의 약점을 자각하고 우선 자주화를 목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자만에 빠져 뭐가 뭔지도 모른 채 그저 인민공화국이 가까워 졌노라 굳게 믿고 전진하는 사이에 점령 권력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때 비로소 전후 민주화운동은 권력에 대항하여 자신의 발로 서서 자신의 손만으로 운동을 끌어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물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운동일 터이다. 그때, 다시 말해 자주적 운동이 필요하게 되자마자 운동전선은 즉시 분해와 내부 항쟁을 개시한 것이다. 그 집중적 표현이 일본 공산당의 50년 문제다. 집중적 표현이란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운동 전체 속에 같은 성격이 분산된 형태로 두드러지지 않은 채 애매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다."(263-4)


"이 커다란 혼란 속에서 사상의 주체화를 목표로 해서 노력하고, 점령군의 제국주의 권력과 일본의 국가권력에 대해 당내 '가산관료제'의 제약을 넘어선 인민적 사고를 어쨌든 획득한 자의 예로는 이노우에 미쓰하루가 있다." "〈신앙만을 위한 인간이 인간이 되지 마라. 신앙을 가진 노동자여야 하고, 신을 믿는 농부, 또는 상인, 또는 직공, 또는 뱃사람이어야 한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신앙을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마라. 세상을 위험하게 하고 불건전한 오늘날의 전도사라는 직업과 같은 것은 있어서는 안 되고, 신앙밖에 모르는 사람은 일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단편적인 사람이다. 나는 성서와 신앙 외에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 자를 크게 꺼린다〉. 그리스도교를 믿고 더욱이 전도하는 것을 생애의 업으로 삼았던 우치무라 간조는 이러한 말을 했다.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만을 위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노우에는 이를 알고 있었다."(26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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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 논형 일본학 16
후지타 쇼조 지음, 김석근 옮김 / 논형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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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천황제란 무엇인가


"근대 일본의 지배체제 그 자체였던 천황제는, 종종 서유럽 데모크라시와 비교되곤 한다. 그러나 천황제는 기본적인 점에서 서유럽의 고전적 절대주의와 두 가지 대비를 통해 성립되었다. 첫째, 근세 유럽의 절대왕정이 교황-교회와의 격렬한 투쟁을 거쳐 종교적 '권위'로부터 왕의 정치적 '권력'이 분리 독립함으로써 성립되었으며, 따라서 거기에 독자적인 의미의 '정치'를 낳게 된 것과는 정반대로, 천황제는 종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권위를 이용함으로써만, 이른바 '권위적 권력'으로서만 성립할 수 있었다. 둘째, 최대의 봉건영주가 다른 대부분의 영주들을 압도하고 정복하여, 민족적 규모로 그 지배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왕권을 대내적으로 확립해간 고전적인 절대주의absolutism와는 달리, 일본의 천황제는 봉건적 권위인 천황이 자신과는 관련 없는 정치적 제 요소의 상황 변화에 따라, 권력의 주체로 전화轉化된 것이므로, 정치적 투쟁을 거쳐 도태된 본래의 절대주의 군주의 정치력을 끝내 갖출 수 없었다."(27)


2 / 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


"상징으로서의 '천황'은, 혹은 '신神'으로서의 종교적 윤리 영역으로 올라가서 가치의 절대적 실체로서 우뚝 초월했으며, 혹은 또 온정에 넘치는 최대·최고의 '가부장'으로서 인간생활의 정서 세계에 내재해서, 일상적인 친밀함을 가지고서 군림한다. 그러나 또한 그들 사이에서, '천황'은 정치적 주권자로서 만능의 '군권'을 의미하고 있었다. 따라서 앞의 두 가지 점에서는, '천황' 지배체제regime는 정치 외적인 영역을 기초로 한 '신국神國'이 되거나 혹은 '가족국가'가 되지만, 후자에서는 체제는 최고 권력자에 의해 통합되는 '정치국가' 그 자체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 같은 다양한 체제 관념이 동일화해감으로써, 적나라한 권력행사는, 한편으로는 신의 명령으로 절대화至大化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눈물의 꾸지람, 사랑의 채찍'으로 온정과 인자함의 소산으로 여겨져, 권력은 권력으로서의 자신의 존재이유를 주장하는 근대국가 이성을 잃어버리고, 거기서 권력의 무제약적인 확대擴大를 낳게 되었다."(36-7)


"천황제의 권력상황은, 국가의 구성 원리로 보자면 분명히 이질적인 두 원리의 대항·유착의 발전관계로 파악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는 국가를 정치권력의 장치Apparat 내지 특수한 정치적인 제도로서 구성하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국가를 공동체에 기초 지워진 일상적 생활공동체Lebensgemeinschaft 그 자체 내지는 그것과 동일화identify할 수 있는 것으로 구성하려는 원리다. 전자에서는 국내에서의 사회적 대립은 당연히 존재해야 할 것으로 전제되고 그 위에서 정치적 통합이 문제가 되지만, 후자에서는 국내 대립은 본래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메이지유신 이래의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체제 저변에 존재하는 촌락공동체Gemeinde의 질서원리가 국가에 제도화되면서, 권력국가와 공동체 국가라는, 천황제에 고유한 양극적인 이원적 구성이 자각적으로 성립했으며 거기서 천황제 지배의 역학관계dynamics를 결정하는 내부의 두 계기가 형성되었다."(39-40)


"'향당사회'의 '덕의德義'에서, 국내 정치사회에서의 이해대립의 조화를 구하는 원리와 조응하여, 대외정치의 천황제적 특수양식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일본 사회가 해외 국가들가 그 취지를 달리하여 일종의 특질을 갖는 것〉을 향당적 일본 사회의 도덕적 원소에서 찾는 한, 국제정치 상황에 대한 대응원리는 인간 일반의 윤리ethos와 특수국가 권력kratos의 내면적 갈등을 내포하는 근대적 국가 이성에 기초 지워진 것일 수는 없게 된다. 거꾸로 일본이 도덕을 독점함으로써 해외 국가들을 도덕 바깥의 국가들로 만들어, 국제관계는, 도덕국가=일본과 비非도덕세계의 교섭으로 파악되기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 이후 적극적으로 세계교화='천황의 교화皇化에 의한 팔굉일우'와, 소극적으로는 '교화 바깥化外의 국가'에 대한 말살이 천황제 일본의 세계관이 되어가는 논리적 핵核, kernel이 있었다. 그래서 어떠한 대외적 폭력도 허용되어 권력의 방자는 국내를 넘어서 세계에 미치게 된다."(45-6)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완전한 공동체적 질서는, 전통적 일계성一系性과 가부장제적 일체성을 구성 원리로 하는 전근대적인 '이에家'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해체의 위기를 경험한 공동체의 재건에는, 언제나 '이에'를 모델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메이지 30년대 이후, 공동체 원리는 가족주의에 의해서만 기초지워지게 된다. 여기서는 공동체 국가도 '이에'가 기초 지워주며 공동체가 '이에'를 국가에 일의적一義的으로 매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정치운동이 '정욕에 사역당하는' 그런 상황에서는 정치집단이 사적인 심정에 의해서 결합하는 집단으로 변하기 때문에, 거기에 일본의 정당政黨이 도당徒黨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 있었다. 따라서 또, 국가의 공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치운동의 자유를 극소화하고, 오로지 국가 관료에 의해서 정치는 독점되어야 하는 것으로 된다. 정당정치가 일본에서 자라날 수 없었던 한편, 관료주의가 보편적으로 성립한 유래 역시 여기에 존재하고 있었다."(48)


"일반적으로 근대국가의 역사에서 권력의 초월화에 의해 일상사회에 대한 자기의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은 절대주의의 원리이며, 규범을 동질의 이성적 개인의 경험으로까지 원시화 함으로써 사회의 내면에서부터 국가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원리였지만, 일본 근대국가는 교육칙어에 의해서 도덕영역에 국가를 구축함으로써, 한편으로 천황에서 이성을 초월한 절대성을 형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기를 '향당적 사회'의 일상 도덕 속에 원시화 시킨다는 특이한 근대국가를 산출해냈다. 그리하여 칙어가 모든 이성적 주관으로부터 초월하는데서 그야말로 그 해석의 무한한 다양성이 가능하게 되어, 자의적인, 복잡하고 뒤얽힌 충돌도 가져다주게 된다." "그 관계야말로, '향당사회'가 '상량商量'의 대립을 '정의情義'에 의해 완화시키기 위해서 거꾸로 모든 이익대립을 '심정'적으로 절대화하게 된다고 언급했던 자기모순 연관을, 국가적 영역에서 거기에 맞게 표현한 것이었다."(60)


# 교육칙어敎育勅語 : 정의情義를 중시하는 향당사회의 도덕적 원소라는 공동체 원리와, '천자'의 절대화와 계층적·연쇄적 성격만을 강조한 유교적 사유를 결합하여, 이를 국가원리로 보편화한 것


"관료는 명령의 대변자인 절대주의 관료의 본래의 경향에서 벗어나, 피치자에 대해서는 도덕적 가치의 독점자='윗분'으로서 윤리적 폭군이 되고, 상급관료에 대해서는 신분적 하층='부하子分' 내지 '동생弟分'으로서 순진무구한 정신적 유아로 변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거기서는 하급 관료는 상급자에게 인간적으로 '헌신'해서 그 이익merit을 보증함으로써, 장래 비슷한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확보하고자 한다(중간층!). 그래서 관료기구의 수직적인 계층성이, 객관적 규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격적, 직접적으로 구성되면서, 기구 내부의 계통적 분파는 필연적으로 도당徒黨, clique이 되며, 그들 사이의 상하관계는, 절대적 윤리적 의사의 독점을 둘러싸고서 심각한 항쟁을 전개하게 된다. 그럴 경우, 천황이 의사의 표백表白을 스스로 행할 수 없는 무의사적 군덕자君德者에 머물러 있기 대문에, 그의 의사를 독점하는 것은, 해석의 독점으로서의 자의恣意의 관철 그 자체로 되므로, 항쟁은 조정불가능하게 절대화된다."(67-8)


"그리하여 절대주의 천황제의 체제regime 내부에서는 모든 체제의 행위자가 주관적 절대자가 되고, 그로 인해 거꾸로 객관적으로는 절대자를 소멸시키게 된다. 천황은 도덕적 가치의 실체이면서 1차적으로 절대 권력자가 아니기 때문에, 윤리적 의사의 구체적 명령을 행할 수 없는 상대적 절대자가 되며, 따라서 신민 일반은 모두 해석 조작에 의해서 자신의 자의를 절대화하며, 그것 또한 상대적 절대자가 된다. 여기서 절대자의 상대화는 상대적 절대자의 보편화다. 그래서 천황제 절대주의는 권력 절대주의를 관철하지 않음으로써, 자의와 절대적 행동양식을 체제의 구석구석까지 침투시키며, 따라서 너무나 역설적이게도 비할 데 없는 견고한 절대주의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방대한 비인격적 기구로서의 관료제의, 방대한 인격지배의 연쇄체계로의 매몰, 객관적 권한의 주관적 자의에의 동일화, '선의의 오직汚職'과 '성실한 전횡專橫', 그리하여 천황제 관료제는 근대적인 그것에서 완전히 일탈해간다."(68-9)


"세계정치 상황의 압력과 국내적 절대주의의 미성숙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급속한 근대국가의 형성이 이루어져야만 했던 사정은, 한편으로 시종 권력적 절대자의 등장을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절대주의로서의 다양한 특이성을 낳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① (정치기술자로서의) statesmen의 다원성, ② 권력집중의 대극對極으로서의 수평화와는 반대로, 수평화가 촉진되는 기능적 결과로서의 집중에 대한 기대(따라서 수평화는 공의公議 등용, 인재 흡수로 끝나서 의사화擬似化하게 된다), ③ 절대권력자의 성립에 매개되지 않는 기구지배 원리의 조숙, ④ 국가 관념에서의 (대내적 통치기술이 아닌) 대외공동태共同態의 계기의 불균형적인 고양이었다. 그리하여 이 같은 점들이 시급한 국가형성에 수반해서 진행되었으며, 봉건적 권력의 절대군주에 의한 국내적 수탈이 불철저한 그대로 남게 되면, 그만큼 봉건적 분파주의를 내면화 시키게 되어 도리어 결과적으로 모순을 확대재생산하게 되었다."(99)


3 / 천황제와 파시즘


"일본에서 향토鄕土는 국가의 향토이기도 했다. 향토를 떠난 개인도 없지만 향토를 떠난 국가도 없었다." "그와 같은 곳에서 거대화된 도시와 기계와 사회의 기구화라는 병폐에 대한 지각력知覺力과 반발은, 그 자체 병리적인 조숙한 발육을 이루게 된다." "일본에서 기계화는 '서구적 유물론화'이며, 국가의 심정에 반하는 것이다. 인간 일반과 '정신의 위기'의 자각(발레리P. Valery)이 아닌, 자연과 전통에 의해 생활하고 있는 '일촌일가'의 향토와 그 심정이 기계에 대한 반항의 담지자인 것이다. 역사의 역동성dynamics은 인간의 심층에 이르지 않으며, 그 때문에 도리어 안이하게 얼핏 보기에 일찍이 나타나게 된다. 향토주의는, 그래서 일본의 대외적 긴장이 증대되고, 자본주의 공황의 타격이 농촌에서 심각해짐과 더불어, 조국=향토의 적을 공격하면서 떠오르게 된다.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극단화ultra와 '국가개조國家改造'의 심정적 주장이, 사회생활의 획일적인 기구화, 도시의 무습속성無習俗性에 반발한다."(159-61)


"그러므로 행동의 전문가가 필요하다. '파괴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노우에 닛쇼 일파처럼, 〈우리는 파괴를 받아들여서 쓰러질 각오로 지내고 있으므로, 건설하는 생각까지 연구하자는 분위기가 없었다〉고 하여, '벌閥' 타도에 열광하는 우익 '급진 파시즘' 운동의 하나의 유형이 그것이었다. 그들 운동가들은 향토에 틀어박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것을 떠나서 '동분서주'한다. 그들은, 향토와 농민을 위해서 '천황친정'을 실현해야 하며, 비일상적인 세계에 활약하는 '지사志士'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또한 그들의 행동 그 자체는 무뢰한outlaws의 그것이지만, 정신 형식에서는 천황에 대한 철저한 충의자忠義者들이었다. 오히려 역설적이지만, 충의자라는 것에 의해서 무뢰한이 되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떠한 행동규범도 인정하지 않는 허무주의자nihilist가 아니라, 최고 가치에 대한 헌신으로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162)


"막연한 가치관에서 나온 '지극한 정'의 결과는, 정확한 가치판단을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다. 거기서는 가치판단의 분명한 척도 그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조국을 껴안기만 하면 그것으로 가치와 행동은 모순 없이 이어진다. 어떠한 행동도 지극한 정에서 나오는 한, 그 자신에게는 정당하다." "게다가 그것은 어버이와 자식의 온정溫情관계와 밀접하게 연속된다. 바로 '생물 자연의 욕구' 체계다. 천황제 정신의 실체는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욕망 자연주의 아래서는 어떠한 행동도 모두 당연한 것으로 담기게 된다. 일상생활의 합리화나 사회과학 연구도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같은 정신구조야말로 일본 파시즘의 '국가개조'를 단락없이 행하게 한 바탕이었다. 천황제 내부에 존재하는 근대국가로서의 합리적 기구화와 전근대적 공동태共同態로서의 전통적 심정의 가치화라는, 두 개의 경향이 낳게 되는 심각한 모순을, 다시금 매개하고 봉합하는 것은 그 같은 정신 이외에 다름 아니었다."(166-7)


"일본에서 파시즘은, 특정 사회계층(농촌 재지중간층)을 운동의 기초적인 힘으로 출발했으며, 농촌 향토의 조직화에 의해 체제편성의 단위를 만들고 그 원형하에 국가의 전체 조직화를 행하려고 한 데 대해서, 나치즘은 결코 특정한 사회계층을 운동의 기반으로 하지 않았다." "나치즘은 유동流動을 전제로 하며, 일본은 향토에의 정착을 전제로 한다. 저쪽은 인위적 수렴을 결말로 하며, 일본은 정착자의 확대를 목표로 한다. 그래서 저쪽은 유대인 배격을 통해서 독일인의 수렴을 가져오며, 세계 부정을 계획해서 체제의 재생산을 기도한다. 그리고 일본 파쇼화의 과정은, 향토에의 복귀의 확대로서 '전향轉向'을 가져오며, 천황제 국가로의 '귀화歸化'로서 '팔굉일우'의 전쟁을 행하는 것이었다. 이들 두 개의 과정은 병행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행되었다." "'전향'은 '추상이론에서 구체적 상황의 직접적 감각적 체험으로'라는 방향을 걸었다. '삶Leben으로'의 복귀였다. 그래서 그 과정은 '솔직'할 수 있었다."(180-2)


"객관적 인식이라는 외줄기 창의 비균형적 사상은, 바야흐로 구체적 체험이라는 외줄기 창의 비균형적 실감實感으로 전환하는데, 그 경우 많은 전향자들이 가족과 향토의 온정으로 순진하게 되돌아갔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학교의 성적도 좋고, 진지했던 자가 많았던〉 좌익운동가는, 지금은 그 '방향의 잘못'을 바로잡아서, 다시금 무라村에서는 모범 인물이 된다. 농촌의 '사표儀表'이며, '조직인'이다. 그것은 앞 절에서 향토파시즘이 요구하고 있던 '중견인물'에 다름 아니다. 농촌에 정착할 수 있었던 전향자는, 그렇게 해서, '혁신운동'의 조직자organizer가 된 자들이 많다." "순진한 향토로의 복귀는 순진한 문학으로의 복귀와 평행적이다. 농본주의와 문학 세계에서의 일본 낭만주의는 대응한다. 전자가 '혁신자'라면, 후자 역시 하나의 '유행에 대한 도전'이다." "다만 후자는, 어디까지나 미적 감각체험─그 자체가 추상세계 속에 있다─의 세계를 떠나지 않았을 뿐이다."(182-3)


"일본에서, 총력전 국가원리의 발현을 상징하는 것은 '인적 자원의 동원·배치'가 모든 국가정책을 형성하는 데 근본적인 발상의 축이 되었다는 점이다. 2차 대전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인적 자원'이라는 말이 전근대적인 천황제로부터 생겨난 것처럼 생각되지만, 오히려 정반대로 그 말의 등장은 일본에서 점차 근대 국가(사회가 아닌)의 원리가 완전히 관철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할 것도 없이 마키아벨리 이래의 근대정치의 원칙은, 슈미트의 말을 빌자면, 인간을 '인적 자원Menschenmaterial'으로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많은 사람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조직해서 통합하는 인간 처리의 기술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씩씩한 정치 관념은,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당초의 기도 다카요시와 이토 히로부미에게 존재한 이래 어떠한 지배자에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바야흐로 총력전이 요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그 원리의 관철에 다름 아니었다."(190)


"그래서 총력전 국가는, 태평양전쟁의 격화에 의해서, 내몰린 상황에 처해진 경우에,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현실화되기에 이르렀다. '전업과 폐업' '징용'은 '인적 자원'의 합리적 재편성의 구체적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원리는, 인간을 그 물리적 단위량에서 취급하므로, 말할 것도 없이 그 현실 단위는 노동력으로서의 '개인'이다. 그래서 그런 원리가 관철되는 곳, 일본의 향토는 완전히 산산히 분해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쟁이라는 지상명령至上命令이 그것을 강행시키려고 했다. 그것은 결코 흔쾌하게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지배자 자신의 '이에家'와 '향토'에 대한 신뢰는, 총력전의 논리를 논리적으로 관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이에家를 파괴하는' 부인 징용은 실현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만약 질서에 대한 내적인 자각에 의해 일본의 국가가 구성되어 있었다면, 합리적 재편성은 국민의 합리적 선택과 자발적 복종을 수반해서 그야말로 '원활'하게 영위되었을 것이다."(193)


"징용과 전업 및 폐업이 수동적으로 강행됨으로써, 총력전 체제는 비로소 성립했는데, 그것은 곧바로 일본사회의 전면적인 붕괴를 의미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직업Beruf 모럴의 발효지醱酵地로서의 '가업'은 그렇게 분산되었다. 이미 노동은 어떠한 내면적 사명감에 의해서도 떠받쳐지지 않았다. 다만 끌려서 가고, 명령에 따라서, 감시하에, 규정시간 만큼 규정대로 움직이게 된다. 생활의 기조는 사적인 충동이며, 행동의 틀은 물리적 기구이지 자주적 떠받침을 갖는 제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제도의 붕괴가 제도화되고 있었다. 여기서 징용공의 '비능률'과 '불량화' 문제가 발생했다. 징용공만이 아니었다. '동원된 학생들'에게도, 이어서 정착한 숙련노동자에게도, '직장'은 이미 자기의 직장이 아니었다." "총력전 국가는 획일적 강제 이외의 정치수단을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거꾸로 복잡한 현실 앞에서 완전히 파탄된다. 거기에 남은 것은 공허한 권력기구와 제도를 갖지 못한 '대중' 아닌가."(194-6)


4 / 천황제의 파시즘화와 그 논리구조


"총력전 국가가 요구하는 정치원리는 한 마디로 말하면 지배의 비인격화다. 다만 그 지배의 비인격화는 일견 모순된 두 개의 의미를 포함한다.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인간적인 연계에 의해 지배가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체제mechanism가 지배하는 것이다, 라는 지배관이 강한 형태로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보통의 구체적 인격을 훨씬 넘어서는 능력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비인격적인 강력한 지배인격을 요구했던 것이다." "논리는 추상적 보편적인 '무인격적 진리'이지만 정치는 영원히 인간에 의한 인간의 조직화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기계적인mechanical 합칙성合則性으로 사회관계를 규제하려 하더라도 거기에 인간적 결단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메커니즘이 인간을 조직화하는 운동을 시작하며, 그 출발점에 결단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커니즘이 전체 사회를 뒤덮게 되면 될수록, 바꾸어 말하면 거대해지면 질수록 결단의 의미도 거대해진다."(204-5)


"거기서는 당연히 거대한 인격의 존재가 요구된다. 게다가 전체적 메커니즘은 사회 각 영역에서 대·중·소의 메커니즘의 통체統體로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그것에 대응해서 결단 인격의 계층제hierarchy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경우 전체 메커니즘의 결단자는 소小메커니즘 결단자의 결단능력에 대해서 기하급수적으로 큰 결단 능력을 요구당하는 것이다. 디모크 식으로 말하면, 그는 보편자가 아니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거의 신神에 가까운 것이다. 정치지배를 기구화 한다는 근대화의 시도가 떠오르게 되자, 초월자와 경험적 인격과의 동일화가 요구된다는 역설이 정치의 논리인 것이다. 일본의 경우 일찍이 한 번도 초월자와 인격이 절단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역설은 역설로서 발현되지 못하고 전통적 지배원리의 존속과 병행해서 메커니즘 지배의 원리가 점차적으로 강해지게 된다는 식의 경로를 걷게 된다. 다만 그들 양자는 원만하게 공존하는 것은 아니다."(205)


"만주사변 이래 그 기운을 길러서 특히 2·26사건 이후 히로다 내각 때에 지배적으로 되었던 '고도 국방국가' 요구에서 '국민총동원'에 이르는 과정은, 소/중/대의 각종 천황에 의한 인격적personal 지배관계의 축적에 의해서 정치사회를 구성해가는 심정적 화합의 원리를 무너뜨리고, 군사적인 관점에서, 목적의식을 축으로 하는 계획성으로 사회관계를 규제하려는 것이었다. 고도 '국방'이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군사부문의 확충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근대 국방은 그 범위가 정치, 경제, 교육, 종교, 예술 등의 정신적 및 물질적 양 방면에서 모든 국민생활의 각 부문에 이르기까지 확장하는 것이며, 국방은 단순히 군비를 충실히 하고 무력전 준비를 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국민생활의 전 부문에 걸친 국방의 충실이란, 인간관계에서의 물질적 및 정신적인 모든 영역의 운행을 일정한 군사목적에 맞추어 정합적으로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을 의도하고 있었다."(207)


"이러한 '고도 국방국가' 이미지가 일본 국민의 '근대화'에 대한 여망을 짊어질 수 있었을까. 그런 이미지의 실체적 기초를 이루는 국가의 정책 다시 말해서 전쟁준비, 중국 침략정책 속에서 '근대'를 찾아냈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그 비밀의 절반은 확실히 일본의 메이지 이래의 숙명인 세계정세 추수주의追隨主義에 있으며, 그 무렵 세계 최고 형태였던 통제국가의 경향에 일찌감치 가까이 가려는 것이 가장 모던하다고 생각하는 정신적 풍토가, 고도 국방국가론에 강력한 매력을 안겨주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메이지 이래의 일본은 자신이 근대가 아니며 게다가 근대 세계의 일각에 자리 잡아 근대 국가들에 나란히 서려고 했으며, 또한 어느 정도 나란히 서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으로부터, 국가 그 자체의 감성 깊이 심리적인 근대주의를 지니고 있었다." "근대가 아닌 것이 사람들 앞에서는 '근대'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 차이을 메우려는 성급한 심리적 충동이 일본 국가의 근대주의일 뿐이었다."(208-9)


"근대국방국가 건설론의, 논論으로서의 진행은 현실정치 속에서 하나의 경향의 진행과 서로 수반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사유私有 공용共用(혹은 공영公營)의 원리'이다." "그 원리하에서는 국가는 사적인 것의 존재를 인용하고, 그 위에서 사적인 것을 공적인 관점에서 운영·조작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상적 입장은, 일본에서 기존의 그것으로는 거의 마르크스주의뿐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공과 사의 단순한 준별이 아니라, 양자의 그야말로 '분리' 위의 '결합'을 찾아내는 것이 일관되게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사고하는 경험을 거치지 않으면, 그런 원리를 생각해낼 수도 없을 것이며, 또 현실에 적용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고도 국방국가론의 중핵원리를 만든 것은 일본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방법이다, 라는 실로 근사한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일본 사상사의 거꾸로 선 성격을 그만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달리 없다."(214-6)


"여기까지 오게 되면, 이미 사유 공용의 원리인 인적인 담당자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분명한 이미지가 떠오르게 된다. 한 마디로 혁신관료라 불리는 그들은 거의 대부분 다이쇼시대 말기에 제국대학을 나온 수재들이었으며, 적어도 그 학생시대에 마르크스주의의 교양을 몸에 갖추고 있었다." "그들 중심 그룹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학생시대의 주변 상황에서 상당부분 자연스럽게 큰 의도적 노력 없이 머리에 들어온 것이었으며, 또한 그 정도였다. 머리에 들어와 정착한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사회를 파악하는 방식, 다시 말해서 전체 기구적인 파악 방식이며, 따라서 또 세계관을 존중하는 자세였다. 그것은 일본에서는 실로 참신한 사고방식이었다." "그에 따르면, 사회는 결국 구체적 인간에서 독립한 인간의 관계 그 자체이므로, 그 관계의 구조 즉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그것을 움직이는 것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다, 라는 사고방식이 '전기구적 파악주의全機構的把握主義'에서 나오게 된다."(218-9)


"고도 국방국가론은 그 논리의 세계에서는, 명석한 정의의 한정이라는 형태로, 결단의 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실현과정에서는, 현실의 결단자를 결여하고 있었다. 혁신관료는 자신이 만든 계획이면서도, 자신이 책임 있는 지도자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겸허하게도 지도자를 다른 데서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래의 지배자들은, 누구도 자신이 천황의 권한을 넘어서는 강력자가 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자 이상으로 겸허했다. 천황은 지금 우리가 밤낮으로 눈앞에서 검증하고 있듯이, 그렇게 강력한 지배자일 수 있는 자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각이나 그 안의 5상 회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천황에 가장 가까운 입장에 있는 자들 중에서 지혜로운 자에게, 강력함을 구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은 동시에 메이지 이래의 일본의 국가구조의 난점을 어떻게 해서든 호도하려는 괴로운 방책이기도 했다. 그것은 결국 강력자의 대용품에 다름 아니었다."(224-5)


"도조 수상이 〈기요미즈淸水의 탑에서 뛰어내리는 기분으로〉 전쟁을 시작했던, 그 자살적인 심정은, 결단 능력이 없는 자가 최대의 결단자답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의 고뇌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 무렵의 군부 지도자가 전후가 된 후에도 자신의 전쟁책임을 통감하지 않는 것은, 주관적인 심정으로는 이해 가능한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체면상 결단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보여주지 않으면 수습되지 않는 장면이 된 이후에 개전開戰했을 뿐이다. 그야말로 〈우리도 역시 전쟁은 싫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본의 정신구조 안에 있는 '결단' 유형이 드러난다. 결단이란 체면을 동기로 하는 그야말로 자살행위, 그것에 다름 아니다. 합리적 추론을 거의 끝까지 밀고나간 결과, 당면한 상황하에서 불투명한 부분을 최소한으로까지 줄이고, 그 위에서 행동으로 나아가기 위해 행하는 능동적인 결단이 아니다. 따라서 다의적多義的인 현실에 다시금 압도되어 현실상황 앞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226-7)


5 / '료안'의 사회적 구조


# 료안 : 천황이 입는 상喪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 혹은 천자의, 부모의 상喪을 입는'服' 기간.


"쇼와 원년은 주지하듯이 일주일에 지나지 않는다. 일주일이 1년으로 계산되는 것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천황 개인의 사망으로 시간이 구분되며, 그 시간의 척도가 전 국민의 생활에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구분을 통용시키려면, 국가기구와 교육기관과 강제장치와 보도수단을 완전히 가동해서, 첫째로 세간의 표면적인 행동양식이라는 점에서 '료안' '천조踐祚(즉위)'를 의례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둘째로 '교훈'과 '선전宣傳'과 '의례적 행위가 가져다주는 내면에의 조건반사'에 의해서, 국민의식의 표층에 그 구분을 심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 일주간'의 신문을 보면, 큰 초호初號 활자로 '심장이 쇠약해지시다御心臟御衰弱', '맥이 불규칙해지시다御脈御結代'로 시작해서, 매일매일 '어御'자가 우르르 붙은 기묘한 일본어로, 천황의 병상과 죽음과 새 천황의 '훌륭한 모습御英姿', '뛰어난 능력御萬能', '타고난 재능御天才' 등이 공식적으로 보도되었다."(231-2)


"'료안'에 대해서는 '군대'에서의 '요배식', 각 학교(대학까지 포함해서)에서의 '추도식追悼式', '감옥'에서의 '사면免役' 등이 행해졌다. 아마도 거의 완전에 가까운 근신, 다시 말해서 일종의 사회적 행동의 정지가 행해질 수 있었던 것은, 궁내성宮內省즉, 천황 일가의 가정관家政官들과 군대 내부와 경찰서 내부와 감옥 내부뿐이었으리라. 바꾸어 말하면 먹는 것을 자발적이든 어쩔 수 없어서든, 아무튼 국가에 의해 보증되고 보통의 사회생활에서 격리된 세계에서, 천황 교체의 '의례儀禮'는 거의 완전하게 실행되었다. 그 속에는, 궁내성이나 경찰이나 군대의 지휘관들처럼, 그 의례의 실시에 '의해 먹고 사는 자들'과 죄수들처럼 그 실시를 '위해서 먹이고 있는 자들'이라는 양극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만, 어쨌든 천황제의 순수형태가 내정-경찰, 군대-감옥이라는 종적인 근간으로 수도파이프처럼, 일본 사회를 '천상天上'에서 '지하地下'까지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234)


# 요배식遙拜式 : 멀리서 연고가 있는 쪽을 향하여 절하는 의식


"내정-경찰-군대-감옥을 중심으로 하고, 거기에 관공서와 학교를 덧붙인 사회적 수용소를 제외하면, 일반 사회에서는 료안·천조에 수반되는 근신은 국가의 의례로서 의례적으로 행해졌지만, 사회생활을 완전히 규정하는 형태로 행해질 수는 없었다." "일례를 들면, 료안의 세계와 정계의 사회라는 양안兩岸을 건너뛰고 있는 것이 '연미복' 차림의 정치인들이었다. 그야말로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처럼 입고 있는 연미복은, 일단 공실로 옮아가면, 일변해서 '훌륭하게'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변해버린다. 연미복은 '번쩍번쩍한 모습'이 되어 춤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상복이 장례식 정면에서 애도의 상징이면서 그 뒷면에서는 서로 맵시를 다투는 멋진 복장이 되는 것은 잘 차려 입는 상류계급 사이에서는 아주 보편적인 것인지도 모르지만, 여기서는 '애도'에 아무런 인간적 실감도 수반하지 않는 국가의 의례 제도인 만큼 정면과 뒷면의 감각적 거리는 크며, 상복의 기능 전환은 그만큼 선명하다."(235-9)


"료안의 가운데 정치인들이 권력의 이해타산에 전념했다고 한다면, 부르주아 쪽은 금전의 이해타산에 열중하고 있었다. 부르주아 사회의 의욕의 동향을 (이성적인 것보다는)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주식시장'은 12월 27일에 이미 〈쇼와 벽두의 좋은 인기, 도쿄 시장 물이 오르다〉 〈희망에 가득차 앙등昻騰〉 〈활기를 띠다, 모든 주가 일제히 높다〉는 상태였다." "주지하듯이, 천황의 죽음은 동시에 새 천황의 즉위를 가져온다. 즉위식은 아직 행해지지 않았으므로 정식으로 축하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료안의 이면에는 언제나 천조와 개원이 있다. 자본주의의 번화가는, 그런 새 천황의 천조를 축하하며, 새 원호의 '새 시대'를 미리 축하해서 화려한 입회와 환성과 박수식을 드러냈다, 라고 한다. 료안의 취지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료안의 뒷면에 있는 천조와 개원을 축하할 뿐이다. 역시 도박사의 세계는 동전의 안과 밖을 가르는 기세 전환의 빠름을 갖는다. 일본 자본주의의 점술사는 이렇게 천황제의 미래를 축복한다."(240-2)


"국가의 활동적 부분을 담당했던 자들의 료안에 대한 태도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빠져나갈 구멍 찾기'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정치인들의 서술에서 '대기실', 주식시장 서술에서의 강림신화의 '빗댐' 등은 그런 방법의 은유暗喩였다. 그러나 당연한 것이지만 빠져나갈 구멍의 존재를 모른다면 빠져나갈 구멍 찾기란 불가능하다. 의례를 포함한 국가제도의 내부에 정통한 자에게만 그런 교활함이 허용된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거리의 소상인들은 연말·연시의 '한 몫 잡는' 시기를 앞두고서 그때 쓸 물품을 산지에서 그들로서는 대량으로 사들인다. 그 양의 여하는 계절마다 반복해온 경험으로 산정된다. 그런데 갑자기 회식이나 연회를 모두 금지하는 료안의 '근신조치'가 내려온다. 그들의 계획은 파산에 이르게 된다. 사회의 움직임 내에 깃든 변동'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외적인 사고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인간사회의 경험이 파산시킨 것이다."(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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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시대경험
후지따 쇼오조오 지음 / 창비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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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 오늘의 경험


"사물(혹은 사태)은 원래 사람 쪽의 자의적인 의도를 넘어선 독립적인 타자인데, 현대의 '선험주의'는 사물의 그러한 타자성을 아예 인정하지 않고 자신에게 나타나는 문제는 모두 사전에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물건이나 일에 대한 가공할 만한 전체주의!)이므로 그러한 의식의 틀 내에서는 사물과의 사이에 경이에 찬 그리고 고통을 수반하는 상호교섭이 일어날 여지가 없다. 그러한 여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미지의 통제 불가능한 것과의 만남 그 자체가 예측 능력의 부족을 나타내는 부끄러운 사태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만능 계측기'를 지향하는 태도에서는 경험의 기회 그 자체를 자진해서 거부하며 경험을 쌓는 것을 적극적으로 회피하고 그 대신 경험보다 뛰어난 것으로 간주된 완전합리적인 '상정(想定)'이나 '프로젝트' 제작으로만 몰려가는 경향이 생겨난다. 거기에는 설계된 '경험의 대용품' 쪽이 경험 그 자체보다도 더 비싸게 매겨지는 이상하고 불손한 가치관이 존재한다."(20)


"그러나 선험적인 '설계도'의 완벽한 합리적 체계성을 뽐내려 하면 할수록 그 '설계도'가 사물과의 접촉에 의해 부딪쳐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이 작용하게 된다. 여기서 다시 경험회피를 향한 동력을 획득한다. 그 능동적 회피의 귀결은 소속기관의 보육기화를 점차 '주체적'으로 촉진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사물의 위협을 받지 않고 '계측능력'이 높음을 계속해서 뽐내며 이를 통해 허위의 자기확인을 유지하고 그럼으로써 안정과 조그만 풍요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상태는 어떤 사회학자가 말한 '안락에의 자발적 예속' 바로 그것이다(R. 세네트).인류가 걸어온 갖가지 예속정신의 역사 속에서 노예주라든가 기타 인간적 대립자와의 관계를 통하지 않고, 경험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의 현재의 안락상황에 대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예속을 행하는 것은 미증유의 새로운 형태의 예종(隸從)이다. 그러한 상태는 사회적으로 혈색 좋게 죽어있는 상태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20-1)


"이에 반해, 자신을 초월한 절대적인 타자인 사물과 대면하여 고통을 수반하는 그것과의 교섭을 기피하지 않는 정신은 지배성이나 영략감(領略感) 및 침략성과는 반대되는 '자유'의 튼튼한 기초가 된다. 자유의 근본적인 성질은 자신이 시인하지 않는 사고방식의 존재를 수용하는 데 있겠지만, 자신을 원초적인 혼돈 속으로 되돌려놓는 절대적인 타자와의 상호교섭조차도 꺼려하지 않는 태도가 그같은 상대적 타자에 대한 자유로 귀결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유가 동요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그때 자유의 정신이 거기서 스스로를 확복하고 재생산하는 기지는 절대적 타자인 사물과의 상호교류의 장이다. 다시 말하면 양보할 수 없는 대항 상황에 처해 있을 경우에도 그 상황 자체를 경험할 필요가 있는 하나의 사태로 간주하는 안목을 버리지 않는다면 전면대립을 거쳤을 때 초래되기 쉬운 경직된 후유증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22-3)


"이처럼, 경험의 중시와 자유의 정신은 떼어내기 어려운 하나의 정신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경험을 해나가면서 생기는 것은 자유의 정신만이 아니다. 인간존재의 기본적 특질인 역사성의 인지 또한 거기서 생겨난다. 추상적인 자의가 사물과의 만남과 교류를 거치면서 의도대로 통하지 않게 될 때, 바로 그 의도와 결과의 차이에서 '역사의 간지(奸智)'가 구체성을 띠면서 발견된다. 이리하여 만사가 예측대로 움직이는 것이 정상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고장으로 간주하는 기계의 세계와 인간행위의 세계 사이의 질적인 차이가 여기서 비로소 충분히 의식된다. 기계나 기구로 화한 세계에는 자동적인 회전이 있을 뿐 역사는 없다. 거기서는 낡아지는 것은 있어도(다시 말해서 비능률화는 있어도), 의도와 결과의 차이라는 사극(史劇)을 통해서 끊임없이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내부로부터 가치를 재생해나가는 갱신(更新)의 경험은 있을 수 없다."(23)


▶ 나르씨시즘으로부터의 탈각


"현존하는 자아를 의문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방법서설』이 일찍이 논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학교'나 지배적 사회로부터 '내가 받아들인 것'들에 의해 내 속에 스며들어 있는 일체의 허위나 편견을 의심과 사고를 통해 '제거하고자' 하는 행위를 의미하였다. 그 결과, 아니 오히려 그러한 행위 자체로서 이미 그 자아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즉물적(卽物的)으로 식별하는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아를 의문의 도마 위에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아는 정신의 드라마의 핵심이며 거기서 발생하는 '사물에 입각한' 식별행위는 허위를 듬뿍 품은 현존세계로부터 허위를 하나하나 벗겨내고 사물의 자연스럽고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어 드디어는 '자연학'과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 과정은 돌다리를 두드려 건너듯 천천히 진행되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 진행이 완만했던 만큼 단번에 이루어지는 폭발적인 속단과는 달리 한층 더 근본적인 세계상의 전환을 가져왔던 것이다."(28-9)


"그러나 '대중적 규모에서의 자아의 시대'를 이루고 있는 오늘날의 '문명사회'에서 일반적인 자아에의 수렴은, 그와 같은, 세계의 재구성을 향한 정신의 드라마를 내포하지 않는다. 거기 있는 것은 의문의 대상으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있는 자아이며, '허위를 내포한 자아를 부정하는 자아'가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자아를 소중히 여겨 그대로 긍정하면서 가능하다면 어디까지나 그것을 연장시켜가려는 자아인 것이다. 허위에 가득 찬 자아를 무의 상태로 환원함으로써 '자연이성'의 자아를 확립해가는 대화적인 자아가 아니라 오로지 기존의 자아를 진위가 한데 얽혀 있는 그대로 소중히 보존할 수만 있다면 그 형태를 유지한 채로 조금이라도 더 확장시키기를 바라는 그런 자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어진 욕구의 충족을 일삼는 심리학적 자아이며 거기서 작용하는 '이성'이란 주로 충족 면의 손익을 산정하는 계산이다. 손익계산서가 오늘날의 '이성'이란 말인가!"(29)


▶ '안락'을 향한 전체주의


"오늘날의 사회는 불쾌감을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정면에서 대결하려 하지 않고, 불쾌감의 근원 그 자체를 추방하려 한 결과 불쾌감이 없는 상태로서의 '안락', 다시 말해서 어디까진 괄호 속에 든, 단지 일면적인 '안락'을 우선적인 가치로 추구하게 되었다. 그것은 불쾌감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서 생명체 내에서 불쾌감과 공존하고 있는 쾌락이나 평안과는 전혀 이질적인, 불쾌감의 결여태인 것이다." "이 능동적인 '안락에의 예속'은 ('안락' 상실에 대한) '초조한 불안'을  뗄 수 없이 내포한 채 오늘날의 특징적인 정신상태를 만들어냈다. '평안을 상실한 안락'이라는 미증유의 역설이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니힐리즘'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심연과 같은 포용력으로 타자를 참고 받아들이는 평정스런 허무정신과는 반대로 다른 모든 가치를 자신의 수하에 지배하면서 일종의 자연반응 '결여상태'를 끝없이 추구한다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종류의 '능동적 니힐리즘'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37-8)


"필요한 물건의 획득이나 과제 또는 목표의 달성 등을 위해서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길이 있는 것이고 그 길을 걷는 과정은 많든 적든 불쾌하거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과 같은 시련을 포함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어느 정도의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시련을 견디고 극복하여 그 과정을 벗어났을 때, 그때 획득한 그것은 단순한 물건에 그치지 않고 성취의 '기쁨'까지 수반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물건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에 충분한 어떤 관계를 지닌 것으로서 자각된다. 다시 말하면 상호교섭 상대로서 경험을 갖게 하는 물질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단지 한 가지 효용만을 위해 사용되는 경우의 물질은 평면적이고 단일한 모습과 단 한 가지 성질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데 불과하다." "그것과 상호교섭을 가질 여지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완성된 제품에 의해 영위되는 생활권이 경험을 낳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성격에 연유한다 하겠다."(38-9)


"모든 불쾌감의 근원을 무차별적으로 말살시켜버리려 하는 현대사회는 이렇게 하여 '안락에의 예속'을 낳고 안락 상실에 대한 불안을 낳고 분절된 찰나적 향수의 무한연쇄를 낳고 그리고 그 결과 '기쁨'이라는 감정의 전형적인 부분을 상실케 하였다. 그러한 인생 도정은 산과 골짜기를 잃어버린 평평한 시간의 경과일 뿐이다. 그 '기쁨'이 사물의 성취에 이르기까지의 우여곡절을 극복하는 데서 생기는 감정인 이상, 그것의 소멸은 단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극복과정이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일정한 '인내', 갖가지 '궁리', 그리고 우여곡절을 뛰어넘은 '지속' 등과 같은 몇가지 덕목이 한꺼번에 상실되는 것이다. 극복의 '기쁨'이 정신생활 속에서 중시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이와 같은 제반 덕성을 내포하는 종합적인 감정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쁨'의 소멸은 복합적 통합태로서의 정신, 다시 말해서 정신구조의 해체와 무산(霧散)을 가리키는 것이다."(40-1)


▶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 전체주의의 세 가지 형태

1. 전쟁 형태의 전체주의 : 전쟁의 종말 형식

2. 정치지배 형태의 전체주의 : 정치의 종말 형식

3. 생활양식에서의 전체주의 : 생활양식의 종말 형식


"칼 폴라니가 '의제상품'이라고 명명한 세 가지 요소, 즉 화폐와 토지 그리고 '생산'적으로 움직이는 인간(노동) 등 판매 목적을 위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들이 중심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는 상품세계가 오늘날의 '시장경제'다. 존재와 기능은 완전히 분리되고, 끊임없이 진행되는 매매에 의해 '대상의 분할' 또는 '성격의 소멸'에 그치지 않고 대상과 성격 자체까지 모두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지금의 달러가 한 시간 뒤에는 엔이 되어 있으며, 조금 전의 달러는 빵이 될 예정이었는데 지금의 엔은 파찡코 게임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소비물이 무수히 많고 소비자 또한 무수히 많을 경우 무엇이 무엇에 상당하는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거기에 유일하게 실재하는 현상은 끊임없는 변화와 무궁한 변동뿐이다. 이는 무한(endless) 그 자체이며 그 무한궤도를 조금이라도 움직여보려고 하는 것이 화폐의 매매, 노동력의 흡수·방출, 그리고 토지 매매였다."(73-4)


"특히 현대의 '시장 경제 사회'에서는 직접적인 화폐이익에 대한 일의적인 집착이 모든 것을 움직이고 있다. 부는 다른 무엇으로도 체현되지 않는다. 유동(유통)을 존재의 근본형식으로 하는(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역설인가!) 화폐(currency)에 모든 '부'가 직접적으로 집중된다. 유동 그 자체가 모든 가치물, 모든 부를 대표한다는 것은 전체주의의 특질 바로 그것 아닌가? 운동이 곧 기구이고 제도이며, 또 바로 불안정을 존재를 위한 불가결의 기초로 삼은 것이 다름아닌 1930년대(정치지배 형태의) 전체주의의 특질이었다. 이렇게 하여 전체주의의 특질을 추출해보면, 그것은 격렬하고 끊임없는 유통·유동이 모든 형태, 대상, 사물을 삼켜버리는 세계이며 그와 같은 특질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한 그 사회는, 외견적인 깃발이 무엇이든지간에 파국의 1930년대를 '창립기'로 하는, '창조적'인 고전적 전체주의와는 차원과 형식을 달리 하는 새로운 전체주의가 아닐까?"(74-5)


"일본의 전체주의화의 특징은, 한마디로 말하면 '장대하고 새로운 것은 좋은 것'이라는 태도로 사상 최신의 악까지도 선으로 생각해 추구·모방·가공하거나 '고능률화'함으로써 자기 사회 속에 전체주의를 구축했다는 점에 있다. 그 결과 일본 전체주의는 제3형태의 현대 전체주의에서 마침내 세계 최첨단이며 유력한 것, 즉 전형적인 것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전체란 여러 부분의 상호관계의 전국면을 가리키며 또 '상호관계의 전국면'을 하나의 물건이나 제도, 인물, 집단 등으로 대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부분에는 부분 나름의 불가침의 존재근거가 있고 상호성은 어디까지나 상호성으로서, 관계는 어디까지나 몇몇간의 관계로서, 단일화될 수 없는 채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의 '전국면'은 영구히 탐구과정 그 자체로서 남는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부분은 부분이다'라는 이 간단한 상식을 망각하는 데에 전체주의 시대의 최악의 질병이 잠복하고 있을 것이다."(77-80)


▶ 현대 일본의 정신


"개인으로서의 자기애라면 그것은 에고이즘이 되며 따라서 자각이 있지만 일본사회의 특징은 자신의 자기애를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헌신이라는 형태로 나타낸다. 따라서 본인의 자각 수준에서는 자신이 스스로를 희생하여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헌신의 대상이 국가일 때 국가주의가 생겨나고 회사일 때는 회사인간이 태어나며 그것이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나르씨시즘이며 자기비판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것은 착각된 자기애, 나르씨시즘의 집단적 변형태로서, 소속집단 없이 그 자기애를 사람들 앞에 내놓을 만큼의 윤리적 배짱은 없다. 정말 기묘한 상태다. 흔히 외국의 비평가가 일본인은 집단주의라고 말하는데, 일본인의 집단주의는 상호관계체로서의 집단, 다시 말해서 사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을 극도로 사랑하며, 이를 지나치게 사랑함으로써 자기애를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근본적인 자기기만이 있는 것이다."(82-3)


"일본사회는 압도적으로 동질성이 강해서 동질적인 것을 선호하고 이질적인 것을 싫어한다. 이 점이, 일본인이 이웃이나 소수인 또는 자연을 대수롭지 않게 파괴해버리는 근본적인 동기 중의 하나다. 이질적인 것, 타자를 싫어한다는 것은 자신 이외의 것을 알려고 하는 의욕이 결여되어 있음을 말한다." "일본에서 민주주의라고 하면 처음에는 다수결만이었다. 그후 점차 다수결만으로는 곤란하다는 사실을 일본의 정치학자들도 알게 되어 소수를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바뀌어왔다." "일본 국내에서 말하자면, 그 대표는 재일 한국·조선인이며, 그 다음으로는 일본의 역사적 책임이 걸린 것으로, 극소수가 되어버린 아이누 사람들이며 그 다음으로 외국인 노동자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을, 오늘날의 '풀뿌리 배타주의'는 바깥에 쫓아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밑으로 처박아넣는다. 최하층 노동의 장으로 밀어넣고 거기에 벽을 쌓으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풀뿌리 배타주의의 실상이다."(95-7)


2 / 천황제


▶ 천황제


# 천황제의 다의성(多意性)

1. 단순히 군주로서 천황이 존재한다는 의미

2. 근대 일본의 정치구조, 곧 레짐(regime)을 의미

3. 천황제 지배양식의 특징을 갖춘 특정한 사회적 현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경우


"천황제 성립의 특질을 살펴보면, 첫째, 근세 유럽의 절대왕제가 법왕·교회와의 격렬한 투쟁을 거쳐서 종교적 '권위'로부터 왕의 정치적 '권력'이 분리 독립함으로써 성립하였고 따라서 거기서 독자적인 의미에서의 '정치'가 생겨난 것과는 정반대로, 천황제는 종래 자기가 가지고 있던 권위를 이용함으로써 이른바 '권위적 권력'으로써만 성립할 수 있었다. 둘째, 최대의 봉건영주가 다른 많은 영주들을 압도·정복하여 민족적 규모로 그 지배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왕권을 대내적으로 확립한 고전적 절대왕제와 달리, 일본의 천황제는 봉건적 권위인 천황이 자신과 관계없는 정치적 제반 요소의 상황변화에 의해 권력주체로 전화당한 것이므로 정치적 투쟁을 거쳐 도야된 본래적인 절대주의 군주의 정치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천황이 고대에 권위와 권력을 한 몸에 가진 전제군주였다는 역사적 사정은 천황의 전신(轉身)을 가능하게 한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118-9)


"이후 천황제는 제반 정세에 변화에 극단적으로 순응하면서 지배형태의 분식을 거듭해왔다. 자유민권 바람이 불 때는 입헌군주의 외관(schein)을 입고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들어서고자 할 때는 법치국가의 외모를 갖추며 하부구조에 있어서도 반노농제 위에 세워진 자본주의를 최고도로까지 육성하였다. 천황제 파시즘도 이렇게 하여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또 동시에 정치적으로 무력한 '인간 천황'이기 때문에, '천황 친정(親政)'이라는 슬로건 자체가 실질과 내용 사이에 엄청난 괴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혁명운동을 제외한 모든 정치적 분쟁은 언제나 적대자에 대해서는 '반국체(反國體)'라는 욕설로, 자신에 대해서는 '천황 친정'이라는 미화를 통해 전개되어 지배기구를 관통하는 파벌성은 한층 강해진다. 본래 대외·대내적 위기에 대처할 필요성에서 성립된 절대주의적 집권이 거꾸로 권력작용의 능률적 집중을 방해하는 역설적인 기현상이 천황제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120)


▶ '쇼와'란 무엇인가


"'쇼와'가 '50년'이나 된 것은 '전후'의 처리 방법의 결과에 불과하다. 전후 처리는 해부되어야 할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하나의 사건인데 '쇼와 50년' 쪽은 그 자체 속에 아무런 활력도 포함하지 않은 타성으로서의 현실에 불과하다. 그것은 30년 전에 없어졌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정신사적 '부재'인 것이다. 그 정신사적 부재를 역사적 타성으로서 지속시키는 바탕이 된 전후 처리란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 해답은 천황제를 폐지할 수 없었다는 점, 또 하나는 현 천황을 퇴위시킬 수 없었다는 점 두 가지로 집약된다. '부재'의 존재이유는 이 둘 중의 어느 경우에도 '할 수 없었다'는 부정형의 사실 속에 있었다. 천황제 폐지라는 과제가 실현되었더라면 '쇼와'가 없어졌을 것임은 물론 '원호' 자체가 일본 달력에서 사라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퇴위라는 과제가 실현되었더라도 '원호'를 남길 것인지 없앨 것인지가 적어도 문제시되었을 것이고, 남겼다 하더라도, '원호'가 바뀌어 '쇼와'가 없어졌을 것임은 확실하다."(153)


"그런데 메이지 이후 천황제가 천황이라는 칭호는 그대로 둔 채 새로운 형태의 제도로 개조되고 이른바 '특수하게 근대화'되어 '1대(代) 1원호'화함으로써 사태에 대한 '원호 감각'은 천황제 지배자 속에서 먼저 없어졌다. 원호는 통치체제 상징의 하나라는 측면이 없어지고 현행 천황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신호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교통신호와 같은 존명(存命)신호가 온 일본 속에 오직 유일하게 하나 성립됨으로써 한 사람의 존명신호에 의해 전국민의 달력과 그리고 시간감각이 결정되게 되었던 것이다. '천황은 국민의 상징'이라는 명제가 '전후'에 남겨진 사회 사실적 전제는 이렇게 하여 형성되었던 것이다. 천황제의 일각을 이루어온 '원호'를 존명신호화함으로써 살아 있는 천황만이 '일본'이라는 '국호'와 동일시되게 되었던 것이다. 원호는 여기서는 현존 천황 개인의 '성(姓)'처럼 되어버렸다. 이리하여 새 천황 즉위 이외에, 독자적인 '개원'은 있을 수 없게 되어버렸던 것이다."(157-8)


"습관 그 자체는 사회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 핵심적 요소인데, 어떤 습관이 습관으로서 정착되는가는 그 사회의 정신구조를 결정하는 최대의 계기가 된다. 일본에서의 시간 척도로서의 '쇼와'는 원호이기는 하면서도 좋든 나쁘든 과거의 원호가 지니고 있던 사물에 대한 교감적 대응을 포기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무기적 신호로 화하면서 게다가 무기물이 지니는 건조한 물리성에 철저하지도 않고 마치 원호 감각의 '살아있는 전통' 속에 있기나 한 것 같은 겉모습을 가지고 '실증주의'적 시간척도가 지니는 각박함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은밀하고도 부단히 수행해내고 있다." "우리들은 '쇼와'에 관해서도 일상적으로는 나라의 습관에 따라도 조금도 지장이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매일 사용하고 있는 사이에 인습이 되고 인습이 사물을 자명한 것으로 만듦에 따라 어느덧 인습의 근본적인 성질을 성찰의 울타리 밖에 두고 잊어버리고 마는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한다."(164)


3 / 전후 논의의 전제


▶ 전후 논의의 전제


"전후 사고(思考)의 전제는 경험이었다. 어디까지나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와같이 경험을 한 당사자에게서조차 경험이 유리되어 하나의 '물질'로서 인간 밖에 존재하게 되었을 때 도리어 그것은 하나의 범주로서 자립하는 계기를 가지게 되는 법이다. 사물과 인간 간의 상호교섭으로서의 경험으로부터 인간의 요소도 사물의 요소도 모두 사라져버리고 교섭 결과만이 다른 '물질'이 되어 남았을 때 그 소외태에는 체취나 비린내가 제거되고 물적 소재로서의 성질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자의적으로 미화하는 것도 가능하고 폄하하는 것도 가능한 '허위의식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인식(과 이해의 상상력)이 자기 위신을 걸고 전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이런 때인 것이다. 경험이 소외태가 되어 '이용의 소재'가 되어 있을 때, 그때에 '태고의 화석'으로서의 소외태 가운데서 태고의 살아 있는 모습을 재형성하는 것이 인식에 부여된 영광스런 임무인 것이다."(169)


"전후 경험의 첫째는 국가(기구)의 몰락이 묘하게도 밝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그런데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전후의 밝음은 결코 단순한 밝음이 아니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비참과 결핍과 불안이, 일일이 서술할 필요도 없이 갖가지 형태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것이다. 집이 불타버린 참상 가운데서 어딘가 종잡을 수 없는 원시적인 텅 빈 자유가 느껴지는 것처럼 모든 면에서 비참함이 그 어떤 전향적인 확산을 내포하고, 결핍이 도리어 공상의 리얼리티를 촉진하며 불안정한 혼돈이 거꾸로 코스모스(질서)의 상상력을 안으로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후 경험의 제2의 핵심은 모든 것이 양의성(兩義性)의 부피를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었다. 하나의 요약만을 말한다면, 사실로서의 상황이 혼돈 그 자체일 때 거기서 발상(發想)되는 질서는 모두 유토피아로서의 성격을 지니며, 그 유토피아성이 밝음을 보증하고 있었던 것이다."(170-1)


"전후의 혼돈이 낳은 유토피아는 그럼 어떤 규준에 따라 조형된 것일까?" "전후의 경험을 사고를 통해 조형할 때 거의 대부분의 영향을 미친 것은 '또하나의 전전'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또하나의 전전'이 잇따라 모습을 나타내고 하나씩 하나씩 발견되어가는 과정이 전후사(戰後史)였던 것이다. 과거에 대한 발견이 현재를 모양짓고 미래의 존재형식을 구상하게 한다는 동적인 시간감각의 존재와 작용이 거기에 있었다. 거기서 과거는 단순히 기존에 주어진 것이 아니다. 새삼스럽게 발견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영위이며, 내일에도 또한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미래이기도 하였다. '또하나의'라는 말의 의미가 거기에 있으며 복합적인 시간의식과 '미래를 포함한 역사의식'이 거기서 약동하고 있었다. 이 시간의 양의성과 가역(可逆)관계가 전후 경험의 또하나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두말할 나위 없이 그와 같은 시간감각은 오늘날의 일상생활 속에는 이미 없다."(172)


4 / '논단'에서의 지적 퇴폐


▶ 일본의 두 가지 회의


"이 나라에서는 결정을 만들어가는 '살아 있는 회의'는 사실은 '방과후'에 이루어지고 공식 '회의'는 그와 같은 '기능을 하는 회의'를 만들기 위한 조건으로서 설정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 실정적인 의회제도는 그 자체로서는 실효성을 갖지 못하지만 그러나 제도 속에 내포되어 있는 비제도적인 회의에 실효성을 부여할 기회로서만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기(機=chance)이지 법이 아니며, 불교철학 속에서 교의(敎義)화되어 있는 것처럼 오히려 법에 대립하는 것이다." "더욱이 법의 지배에 대한 원리적인 반대물에 해당하는 명령의 지배도 아님은, 위에서 말한  '쉬는 시간의 의논'에 의해 결정이 이루어지고, 그 결정이 사전에 양해되며 따라서 결정은 명령자의 책임하에 이루어지는 '결단'도 아니고 각자가 유보조건을 가진 채 이루어지는 타협도 아니면서 그것이 처음으로 '공식화'되는 순간에는 이미 전체의 것이 되어있거나 최소한 당파 전체의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212)


"이 '휴식시간의 의논'이야말로 일본사회를 규정하는 것이며 그것은 본래의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일본어'에 의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거기서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영력(靈力)이 배어 있다'는 철학이 그대로 운영원리가 되어 있어서 '의논'은 말 그대로 '의논'일 뿐 문자나 그밖의 객관적 기호로 공적으로 표현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물론 속기를 하게 하지도 않으며 의사록 같은 것을 남겨서도 안된다. 의사록이 없는 것은 귀찮아서나 태만해서가 아니라 '의논'이기 때문이다. 문서로 남기면 그것은 '의논'이 아니라 공식적인 지상(誌上) 토론이 되어 버린다. 무릇 영력이 내재하는 말이란 무형식으로 번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의논'은 소리이니 형상화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의논'으로 실질적인 결정이 이루어진다면 정식 회의는 단순히 그것을 확인·공표하는 의식이 된다. 물론 이러한 구조는 의회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다. 대립하는 의견과 입장을 객관적인 경로에 올린다는 이념이 전무하기 때문이다."(212-3)


▶ 현대에서의 '이성'의 회복


"이데올로기가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진다는 것은 이데올로기 이전에 사람이 사람으로서 서 있는 지점이 존재함을 예상케 한다. 그러한 지점이 없이는 애당초 자주적 선택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란 그 지점을 규범적으로 확보하는 운동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이데올로기와 제도관이 자유로운 경쟁하에 놓이는 것이 사실상 보장되며, 또 자유로운 경쟁하에 놓여야 한다는 규범의식이 사회적으로 정착되었을 때에는 이에 대한 권력의 개입이 엄격히 차단된다. 설사 그 권력이 '관리'라는 이름 아래 전개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재량'의 형태를 띠고 발동되는 경우라도 이 규범의식이 확고할 때에는 개입이 성공할 수 없다." "민주주의가 이데올로기의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려 하는 것은 그리함으로써 좀더 나은 자기규제 체계를 권력에 부과하기 위해서다. 즉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갖는 권력에 대한 충동 제어 기능을 항구적으로 진화시켜나가기 위해서인 것이다."(223-4)


"그럼 '인권'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당사자 우위의 원칙이다. 그것은 일본에서는 때때로 '사권'(프라이버시)과 동일시되지만 양자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프라이버시는 자유주의와 관용의 원리이며 인권은 민주주의의 원리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부단한 조화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상호모순되는 지점에 도달하곤 한다. 그 경우 어느 쪽을 선택하기로 결정하든지 간에 내적 갈등의식과 부단한 통합에의 의욕을 잃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양자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한쪽이 완전히 없어져버린 상황에서는 다른 한쪽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인'의 자유로운 판단이 허용되지 않을 때 어떻게 그 개인이 그 당사자로서의 보편적 권리와 책임을 자주적으로 파악할 수 있겠는가. 반대로 인권의 규범의식이 없는 데서 사인의 자유는 '국가'의 틀을 넘기 어렵고 거의가 국가에 의해 '주어진 생활'의 자유로운 향수(생활의 생산이 아니라 소비)에 머물게 될 것이다."(234)


▶ '논단'에서의 지적 퇴폐


"현대 일본에는 기묘한 '전문가'가 있다. 그는 언제 어느 때라도 모든 문제에 대해 즉각 '해설'을 곁들인 '의견'을 발표한다. 마치 하나님과 같은 존재다. 어쩌면 하나님 이상 가는 존재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무리 이쪽에서 요구해도 때로는 대답을 '보류'하여 발표하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묘한 '전문가'인 '유식자'는 어떤 경우에는 '대학교수'의 이름으로 나타나기도 하도 어떤 경우에는 '평론가'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문학자'의 명함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등장하기도 한다." "우리의 기묘한 '전문가'는 일편단심 궁리의 결과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연구도 아니고 보고도 아니고 비평도 아니고 예술도 아닌, 그 어떤 종류의 '리뷰'를 되풀이함으로써 이 세상의 표층(表層)에 떠오르고 또 그 떠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그 '리뷰'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리뷰'에서는 절대로 자진해서 발을 빼는 일이 없다."(243-5)


"이러한 기묘한 '전문가'는 지금 일본사회의 좁은 표층에 넘쳐흐르는데, 그는 '논단'이라는 가공의 단을 마치 실재하는 것인 양 좇고, 현실에 대해서는 하등의 긴장감도 없는 말만 산더미처럼 모으고, 서로 손을 맞잡으며, 얼마 안되는 숫자의 세력이라도 나타나면 진심을 다하는 태도를 취하며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그런 주제에 사회주의 국가의 관료주의나 개인숭배라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또 일본 민주주의자들의 저항에 대해서는 코웃음을 친다. '숫자'만 갖추면 머리를 숙이는 그들에게 어찌 그런 자격이 있겠는가? 사실에 대한 긴장을 결여한 '낱말의 집합'을, 어떤 사람은 '그러니까 그건 없는 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현실에 대해 아무런 적극적인 (방법적) 기능조차 가지지 않으므로 그것은 비(非)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이 '유식자'는 그의 언론이 비존재라고 하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위에 떠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245-6)


5 / 신품문화


▶ 신품문화


"'이성 없는 합리화'는 인간의 이성이 조직규약이라는 형태의 실체가 되어 사회활동 전영역을 관료제화할 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필수품이 제품이라는 형태의 합리적 물체가 되고 모든 생활영역까지도 콘크리트화가 완료된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 이성이 인간 속에 있을 때에만 유지되는 이성 고유의 제반 특징은 소실된다. 다시 말하면 '아직 형태를 취하지 않은' 풍부함(그것을 원초적 추상성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지 될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그것은 탄력적 복원력과 조형적 변형력의 양극에 걸친 확산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의 폭넓음으로 확보된 보편성, 비합리적 감정에 대해서도 통찰을 통해 그것과 양립하며 더 나아가 결합까지도 할 수 있는 관대함 등의 고유한 특징이 지금은 이성 자체로부터 박탈당해 이성은 하나의 고체적인 형태로 특수화되고 그와 같은 콘크리트화를 통해 '물적 장치'와 제품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것은 이성의 폐문이며 감금이다."(293)


"경험이란 물질(혹은 사태)과 인간 간의 상호 교섭이므로 상대인 물질의 재질이나 형태, 장소적 환경 등의 여하에 따라 이쪽에서 사전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제멋대로인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면 인간은 이를 재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서 그럴 경우에는 물질로부터의 저항이나 물질에의 접근에 있어서의 우회 등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즉 '매개'를 반드시 경과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은 고안과 설계와 주형(鑄型)에 따라 일방적으로 제작하는 과정과는 전혀 다르다. 일방적 제작은 그 직선성(直線性)에서 관료제와 닮았고 군사적 처치와 통한다. 이에 대해, 경험의 결정(結晶)은 사물과의 교섭의 개별적인 형태에 따라 생겨나는 일회적 고유성을 어딘가에 내포하고 있다. 그것이 상호성의 흔적이며 사회적인 것의 씨앗이다. 무수한 복제 부품을 무수한 직선의 복합적 배선으로 합성하는 오늘날의 신품에는 그러한 상호교섭의 흔적이 없다."(295)


6 / 그 자세


▶ 이론인의 형성


"전향이라는 말이 사상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나타난 것은 1920년대 중반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방향전환'이 논의되는 과정에서였다. 이때는 전향이라는 말이 입장을 바꾸어서 지배권력의 동향에 굴복한다든가 입장을 변경하여 동조하게 된다든가 하는 의미로 쓰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이때의 전향은 전적으로 주체적인 개념이다. 즉, '객관세계의 법칙' 외에 상황과 변혁주체 간의 관계를 가능한 한 정확히 법칙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주체적인 원칙을 만들고 그 원칙을 가지고 상황을 변화시켜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운동 자체를 법칙화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운동법칙은 '객관세계'의 법칙과 대응하여 변증법의 정식에 맞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노력을 실행할 때 전향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무법칙적 운동으로부터 법칙적 운동으로 법칙적으로 전화하려고 하는 능동적인 행동이다."(305-6)


"후쿠모토 카즈오(1894~1983, 일본공산주의운동의 이론적 지도자)가 '전향'이라는 기호로써 '역사의 보편법칙'에서의 변증법적 '전화(轉化)'의 원리에 능동적 주체가 자신을 적극적으로 적합화시켜가는 행동을 표현했을 때 '후쿠모토주의'라는 말은 하나의 범주로 성립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후쿠모토주의에서 형성된 전향의 사고방식이 국가권력 또는 일본의 지배체제에 의해 거꾸로 이용되어, 일본의 체제에서 정통적인 국민철학을 잊어버리고 실현불가능한 〈순 공상이라고나 해야 할···외국 사상에 현혹된〉(1928년 6월 27일 공산당 검거에 관해 하라 原 법무상이 행한 담화) 자가 자기비판을 하고 다시 체제에서 인정받는 국민사상의 소유자로 복귀하는 것을 '전향'이라고 부르게 되었을 때, 현대 일본사상사에 특수한 기초범주의 하나로서 전향이 생겨났다. 그것은 주체적으로 '비국민적 행동'(1928년 하라 법무상의 말)을 그만두고 천황제 일본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따르게 된 것을 의미한다."(306-7)


▶ 맑스주의의 대차대조표


"악을 받아들이면서도 꼭 나쁘지만은 않은 사람, 다시 말해서 무관심의 공모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적은 최악의 경우에도 너를 죽일 뿐이다. 친구는 최악의 경우에도 너를 배신할 뿐이다. 무관심이 밑받침하고 있는 것에 말려들면 학살과 배신이 횡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적 불행의 해결은 노력, 그것도 모두가 함께하는 사회적 행동으로서의 노력이라고밖에는 말로 정의가 안된다. 그러나 해결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경향이 맑스주의 역사 속에서 강해져갔습니다. 일종의 변질이지요. 사회주의의 비정통적인 산물로서 전체주의(totalitarianism)적인 것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일종의 돌연변이임에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부모를 전혀 안 닮았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깊이 잘 들여다보면 닮았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이것이 시작되었는가는 큰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럼 처음에는 다 좋았던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맑스 자신도 어떤 과정 속에 있는 것이므로 말입니다."(365)


"칼 뢰비트는 『근세철학의 세계개념』이라는 책의 첫머리에서 '애초에 예수가 나타나서 그가 모든 가치를 독점하는 순간에 이 세계는 무가치한 단순한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데카르트적인 태도는 그 순간에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므로 데카르트가 등장하는 것이 늦은 것뿐이다'라고 말합니다. 매우 과감한 말이기는 하지만 경청할 만한 의견입니다. 가치의 독점자가 나타나면 그 이외의 것은 단순한 물체로 화합니다. 다시 말해서 조작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철학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옮겨서 생각하면 이는 단순히 경제체제에 있어서의 중앙집권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독점의 문제입니다. 발레리의 말처럼, 데카르트의 최대 공적은 자신을 의문의 존재로 간주하고 스스로를 도마 위에 올려놓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중심적) 절대주의로 가서 그것이 정치체제가 되면 독재가 생겨날 수 있으니까요. 자기를 내쳐 도마 위에 올린 것은 획기적인 일입니다."(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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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한길그레이트북스 22
마루야마 마사오 지음, 김석근 옮김 / 한길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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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현대 일본정치의 정신상황


제1장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일본 국가주의가 '초'(超)라든가 '극단'(極端)과 같은 형용사를 앞에 달고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근대국가는 국민국가(nation state)로 불리고 있듯이, 내셔널리즘은 오히려 그 본질적 속성이었다. 그처럼 일반적으로 근대국가에 공통된 내셔널리즘과 '극단적인' 그것과는 어떻게 구별될 것인가. 사람들은 곧바로 제국주의 내지 군국주의적 경향을 들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이라면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초기의 절대주의 국가는 예외없이 노골적인 대외적 침략전쟁을 행하고 있으며, 이른바 19세기 말의 제국주의 시대를 기다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력적인 팽창 경향은 끊임없이 내셔널리즘의 내재적 충동을 이루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본의 국가주의는 단순히 그러한 동기가 '더' 강력하였고, 발현된 방식이 '더' 노골적이었다는 것 이상으로 대외팽창 내지 대내적 억압의 정신적 원동력에서 질적 차이를 찾아낼 수 있다는 점에 의해서 비로소 참된 울트라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47)


"유럽의 근대국가는 종교개혁에 뒤이어 16, 17세기에 벌어진 종교전쟁의 한가운데서 성장했다. 그리하여 형식과 내용, 외부와 내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라는 형태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고, 사상·신앙·도덕의 문제는 '사적인 일'로서 그 주관적 내면성이 보증되고, 공권력은 기술적인 성격을 지닌 법 체계 속에 흡수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메이지 이후 근대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그와 같은 국가주권의 기술적·중립적 성격을 표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의 국가주의는 내용적 가치의 '실체'라는 것에 어디까지나 자신의 지배근거를 두려고 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주권국가는 쇼오군과 기타의 다른 봉건적 권력의 다원적 지배가 천황을 향하여 일원화되고 집중화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정령(政令)의 귀일(歸一)'이라든지 '정형일도(政刑一途)'로 불리는 그같은 과정에서 권위는 권력과 일치하였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내면적 세계의 지배를 주장하는 교회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47-8)


"국가가 국체에서 진선미(眞善美)의 내용적 가치를 점유하는 곳에는, 학문도 예술도 그러한 가치적 실체에 의존하는 길 외에 달리 존립할 수 없다. 게다가 그런 의존은 결코 외부적 의존이 아니라 내면적인 그것이다. 국가를 위한 예술, 국가를 위한 학문이라는 주장의 의미는 단순히 예술이나 학문 나름의 국가적 실용성의 요청만은 아니다. 무엇이 국가를 위한 것인가 하는 내용적인 결정을 '천황 폐하와 천황 폐하의 정부에 대해서' 충성의 의무를 지니고 있는 관리가 내린다는 점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내면적으로 자유이며, 주관 속에 그 정재(定在, Dasein)를 가지고 있는 것은 법률 속에 들어와서는 안된다〉(헤겔)는 주관적 내면성의 존중과는 반대로, 국법이 절대가치인 국체로부터 흘러나오는 한, 자신의 타당성의 근거를 내용적 정당성에 기초지움으로써 어떠한 정신영역에도 자유자재로 침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일본에서는 사적인 것이 '단적으로' 사적인 것으로 승인된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50)


"이러한 입장은 또 윤리와 권력의 상호이입으로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주권이 윤리성과 실력성의 궁극적 원천이며 양자의 즉자적 통일인 곳에서는 윤리의 내면화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끊임없이 권력화로의 충동을 지니고 있다. 윤리는 개성의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곧바로 외적인 운동으로 다가오게 된다. 국민정신총동원과 같은 것이 거기서의 정신운동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이다." "더욱이 윤리가 권력화됨과 동시에 권력 역시 끊임없이 윤리적인 것에 의해서 중화되면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는 조심스러운 내면성도 없으며, 노골적인 권력성도 없다. 모두가 시끌시끌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소심해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토오죠오 히데키(1884~1948)는 일본적 정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권력의 이른바 왜소화는 정치적 권력에 머물지 않으며, 무릇 국가를 배경으로 한 모든 권력적 지배를 특징짓고 있다."(53-5)


제2장 일본파시즘의 사상과 운동


"일본의 파시즘 이데올로기에서 특히 강조되는 점은, 첫째로 가족주의적 경향입니다. 가족주의가 특히 국가 구성의 원리로서 높이 내세워지고 있다는 것, 일본의 국가구조의 근본적인 특질이 언제나 가족의 연장체로서, 즉 구체적으로는 가장(家長)으로서의 국민의 '총본가'(總本家)로서의 황실과 그 '적자'(赤子)에 의해 구성된 가족국가로 표상(表象)된다는 것, 게다가 그럴 경우 예를 들면 사회유기체설처럼 단순히 비유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실체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다는 것, 단순히 이데아로서 추상적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에 역사적 사실로서 일본국가가 고대의 혈족사회의 구성을 그대로 보존·유지하고 있다는 식으로 주장되고 있다는 것, 그것이 특히 일본 파시즘 운동의 이데올로기에서의 커다란 특질입니다. 이같이 가족국가라는 생각,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충효(忠孝) 일치의 사상은 일찍이 메이지 이후의 절대국가의 공권적 이데올로기였습니다."(78-9)


"다음으로 일본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특질로서 농본주의적 사상이 대단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본래 파시즘에 내재되어 있는 경향인 국가권력 강화와 중앙집권적인 국가권력에 의해 산업·문화·사상 등 모든 면에서 강력한 통제를 가하게 되는 그러한 것들이, 거꾸로 지방 농촌의 자치에 주안점을 두어 도시의 공업적 생산력의 신장을 억누르려는 움직임에 의해 저지당하는 결과가 되어버리는데 이것이 하나의 커다란 특색입니다." "일본자본주의의 발전이 시종일관 농업부문의 희생 하에 이루어졌으며, 또 국권과 결부된 특혜 자본을 추축으로 하여 신장되어왔기 때문에, 공업의 발전도 현저하게 파행적인 것으로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메이지 이후 그런 급격한 중앙의 발전에 뒤떨어진 지방적 이해를 대표한 사상이 끊임없이 위로부터의 근대화에 대한 반발로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전통이 파시즘 사상에도 흘러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80-4)


"일본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세번째 특질로서는, 이른바 대아시아주의(大亞細亞主義)에 기초한 아시아 제 민족의 해방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 파시즘 속에는 자유민권운동 시대로부터의 과제인 아시아민족의 해방, 동아시아를 유럽의 압력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동향이 강하게 흘러들어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거의 불가피하게 일본이 유럽 제국주의에 대신하여 아시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사상과 서로 얽혀버리게 된 것입니다(동아협동체론(東亞協同體論)에서 동아신질서론(東亞新秩序論)으로의 전개를 보라). 일본이 어쨌든 간에 동양에서 최초로 근대국가를 완성하고 '유럽의 동점(東漸)'을 막아낸 국가라는 역사적 지위로 인해, 일본의 대륙발전 이데올로기에는 시종일관 동아시아해방이라는 측면이 붙어다니고 있습니다. 물론 세월이 흐를수록 그런 측면은 제국주의 전쟁의 단순한 분식(粉飾)이라는 의미를 강화해가게 됩니다."(95-6)


"다음으로 일본의 파시즘 운동의 운동형태에 어떠한 특질이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생각나는 것은 일본의 파시즘이 군부 및 관료라는 '기존의 국가기구 내부'의 정치세력을 주요한 추진력으로 하여 진행되었다는 것, 이른바 민간의 우익세력은 그것 자체의 힘으로 신장되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2기에 이르러 군부 내지 관료세력과 연결되면서 비로소 일본정치의 유력한 인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탈리아의 파쇼나 독일의 나치스가 물론, 각기 그 국가의 군부의 지원은 받았지만 어쨌든 간에 국가기구의 '바깥으로부터', 주로 민간적인 힘의 동원에 의해서 국가기구를 점거했던 것과 현저하게 다릅니다." "일본의 파시즘 운동은 대중을 조직화하는 데 큰 열의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소수의 '지사'(志士) 운동으로 시종일관했습니다. 하나의 영웅주의, 즉 '지사' 의식이 그 운동의 대중화를 억제했던 것입니다."(96-7)


제3장 군국지배자의 정신형태


"히틀러는 1939년 8월 22일, 바로 폴란드 침공 결행을 앞두고 군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여기서 선전가들을 위해서 전쟁을 개시하는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그것이 지당한 논의인지 아닌지는 관계가 없다. 승자는 훗날 우리가 진실을 말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질문을 받지 않을 것이다. 전쟁을 개시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정의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요는 승리에 있는 것이다.〉 참으로 가차없는 단정이다. 이같은 단정적인 언사는 일본의 어떠한 군국주의자도 감히 입에 담지 못했다. '이기면 관군(官軍)'이라는 생각이 아무리 마음을 차지하고 있어도, 그것을 공공연하게 자신의 결단의 원칙으로 드러낼 수 있는 용기는 없었다. 도리어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은폐하고 도덕화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일본의 무력에 의한 다른 민족 억압은 언제나 황도(皇道)의 선포이며, 다른 민족에 대한 '자혜로운 행위'로 생각된다."(139-40)


"일본 지배층을 특징짓는 이같은 왜소함을 가장 노골적으로 세계에 보여준 것은 전범자들의 한결같은 전쟁책임 부정이었다. 키난 검찰관의 최종 논고를 보자. 〈전직 수상, 각료, 고위의 외교관, 선전관, 육군의 장군, 원수(元帥), 해군 제독 및 궁내대신들로 구성된 현재 25명의 피고 전원으로부터 우리는 하나의 공통된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곧 그들 중의 누구 한 사람도 이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14년이란 기간에 걸쳐서 숨쉴 틈도 없이 일어난 일련의 침략행위인 만주사변, 이어서 일어난 중국전쟁 및 태평양전쟁의 어느 경우에도 그런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맡고 있던 지위의 권위, 권력 및 책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또 그것 때문에 전 세계가 깜짝 놀랄 정도로 그들 침략전쟁을 계속하고 확대해온 정책에 동의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노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주장합니다.〉"(146-7)


"피고들의 자기변호가 지닌 두 가지 논리적 광맥 중 하나는 기정 사실에 대한 굴복이며, 다른 하나는 권한으로의 도피다." "기정 사실에 대한 굴복이란, 이미 현실이 형성되었다는 것이 그것을 결국에는 시인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피고들의 답변에 공통되고 있는 것은, 이미 결정된 정책에는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은 이미 시작된 전쟁은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논거이다." "만주사변 이래의 정치적 사건이나 국제협정에 거의 반대했던 취지를 말하고 있는 피고들이 구술서를 읽어보면, 실로 그러한 일련의 역사적 과정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천재지변 같은 느낌을 안겨준다." "여기서 '현실'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것 혹은 만들어져가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서, '만들어져버린 것', 아니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어디선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따라서 현실은 언제나 미래에의 주체적 형성으로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흘러온 맹목적인 필연성으로 파악된다."(150-3)


"토오쿄오 재판의 전범자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자신의 무책임을 주장하는 제2의 논거는 소추(訴追)되어 있는 사항이 관제상의 형식적 권한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고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되면 언제라도 법규에 규정되어 있는 엄밀한 직무권한에 따라서 행동하는 전문관리(Fachbeamte)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토오가 군무국의 역할에 대해 한 다음의 말은 실로 함축성으로 가득 차 있다. 〈육군대신은 각의에서 결정한 사항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적 사무기관이 필요합니다. 군무국은 바로 그런 정치적 사무를 담당하는 기관입니다. 군무국이 하는 것은, 그런 정치적 사무이지 정치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것이 무토오의 군무국장으로서의 바람직한 정치적 활약의 정당화 근거이다. 그의 일은 '정치적' 사무이기 때문에 정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정치적 '사무'이기 때문에 정치적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160-4)


제5장 일본에서의 내셔널리즘


"동양 국가들에서의 소박한 민족감정은 어디서나 우선적으로는 바깥으로부터 밀려오는 유럽 세력의 압력에 대한 반작용의 형태로 일어났다." "이 제1단계에서의 내셔널리즘을 근대적 내셔널리즘과 구별하여 '전기적'(前期的) 내셔널리즘이라 부른다면, 그 전형적인 표현이 곧 '양이'(攘夷) 사상이었다." "양이 사상의 특징은 살펴보면, 첫째로는 그것이 지배계급에 의해 그들의 신분적 특권유지 욕구와 떼놓을 수 없게 결부되어 나타났기 때문에 거기서는 국민적인 연대의식이라는 것이 희박하고, 오히려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서민의 소외, 아니 적대시를 수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거기서는 국제관계에서의 대등함이라는 의식이 없으며, 오히려 국내적인 계층적 지배의 눈으로 국제관계를 보기 때문에 이쪽이 상대방을 정복 내지 병탄(倂呑)하느냐, 아니면 상대방에 당하느냐, 문제는 처음부터 양자택일이다. 따라서 어제까지의 소극적 방어의식이 갑자기 내일은 무제한의 팽창주의로 변하게 된다."(201-2)


"여타 아시아 국가의 내셔널리즘이 구지배구조와 제국주의의 유착에 맞선 내셔널리즘과 사회 혁명의 내면적 결합이라면,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일찍부터 국민적 해방의 원리와는 결별하고, 거꾸로 그것을 국가적 통일이라는 이름 하에 억눌렀다." "자아의 감정적 투사로서의 일본제국의 팽창은 그대로 자아의 확대로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시민적 자유의 협애함과 경제생활의 궁핍함에서 비롯되는 실의(失意)는 국가의 대외적 발전 속에서 심리적 보상을 찾아냈다. 끊임없이 대외적 위기감을 고취시키면서 지배층은 역사상 보기드문 교묘한 국가 술수에 의해서 그런 국민감정의 동원에 성공했으며, 사회적 분열의 모든 조짐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조직적 동원을 통해 주입된 국가의식은 정치적 책임의 주체적인 담당자로서의 근대적 공민(公民, Citoyen) 대신에 모든 것을 '위쪽'에 맡겨서 선택의 방향을 오로지 권위의 결단에 기대는, 충실하지만 비열한 종복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204-9)


"일본은 메이지유신 후 동양의 '정신문명'과 서양의 '기술·물질문명'을 종합하고, 거기에 일본 고유의 '상무'(尙武)문화를 덧붙임으로써 실로 전형적인 전체적 사명감을 발전시켜 나갔다. '국체'는 그런 모든 가치의 통합체에 다름아니었다. 만약 부분적 사명감이라면 그것이 심리적인 좌절이나 좌초를 경험하더라도 또 다른 영역에서의 사명감으로 전환하여 다시 시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사명감은 전체적인 것이었던 만큼 그것의 붕괴가 가져다주는 정신적 진공상태는 컸다. 전쟁 이후 새 헌법의 제정과 더불어 '평화문화국가'라는 사명 관념이 새로운 모습을 갖추고 등장하여 다양한 '이론적인 뒷받침'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에 대한 견인력은 거의 갖지 못했으며, 또 패배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슬로건이라는 식의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은,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구일본제국의 사명감의 전체성을 무엇보다도 잘 설명해주고 있다."(211-2)


제6장 '현실'주의의 함정


"지식인 특유의 약점을 언급해보자면, 지식인은 어설픈 이론을 가지고 있는 만큼 흔히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현실'의 진전에 대해서도 어느 틈인가 그것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이치를 만들어내서 양심을 만족시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러한 사실에 대한 굴복이 '굴복으로' 의식되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은 괜찮습니다. 그런 한에서 자신의 입장과 이미 그러한 사실 사이의 '긴장관계'는 존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기가 약한 지식인은 바야흐로 그런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그런 갭을 '자기 쪽에서' 다가감으로써 메워가려고 합니다. 거기서 자신이 지닌 사상이나 학문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끝없는 자기기만의 힘에 의해서 그런 실질적인 굴복은 결코 굴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자신의 본래 입장이 '발전'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유연하게 어제의 자신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한 번은 비극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다시 지식인들이 그런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이미 어릿광대짓일 뿐입니다."(226)


"현실이란 본래 한편으로는 '주어진 것'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루 하루 만들어져가는 것'인데, 보통 '현실'이라고 할 때에는 오로지 앞의 계기만이 전면에 나서서 현실의 만들어가는(plastic) 측면은 무시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현실이란 이 나라(일본)에서는 단적으로 '이미 그러한 사실'과 같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의 눈앞에 있는 재군비 문제에서도 이렇게 선수를 치는 식의 위험한 생각이 일찌감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문제는 이미 현재의 예비대가 헌법 제9조의 '전력'(戰力)에 해당하는가 아닌가 하는 그런 '스콜라적' 논의의 단계가 아니라, 이루어지게 될 재군비에서 어떻게 해서 구(舊)제국군대의 재현을 방지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해서 문관우위제(civilian supremacy)의 원칙을 확립할 것인가에 있다는 것과 같은 주장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아직 반드시 지배적이지 않은 동향에 대해서 대폭적으로 진지(陣地)를 건네주는 결과밖에 가져다주지 않습니다."(218-27)


제7장 전전(戰前)에 있어서 일본의 우익운동


"국체가 그야말로 일본제국의 신념체계였다는 사실은 '우익단체'에 의한 그 이데올로기적 독점을 불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중적인 방식으로 그들이 정치운동에 중요한 제약을 부과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첫째로 국체는 단순한 천황 숭배의 관념이 아니라 일정한 통치구조로서의 측면도 지니고 있었다(이른바 天皇制)." "따라서 우익세력에 의한 국가개조의 주장은 일정한 단계에 이르게 되면 필연적으로 하나의 딜레마─위와 같은 국체의 측면을 어디까지나 존중함으로써 통치기구에 대한 정면으로부터의 도전을 단념하고 기껏해야 상층부를 '격려'하는 역할에 만족하든가 아니면 자주적인 대중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계속 유지해감으로써, '빨갱이'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타 잇키나 2·26사건의 청년 장교들의 비극은 그런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우익 운동이 걸은 길은 물론 전자 쪽이었다."(239)


"더구나 '우익단체'의 운동으로서의 급진성은 일본 국체의 또 하나의 전통적 측면에 의해 견제되었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구체적인 '적' 또는 '대랍자'를 전제로 하여 비로소 성립된다. 따라서 운동이 그런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도될 때, 그것은 전체 상황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정'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일본의 '국체' 관념은 예로부터 모든 정치적 대립의 피안에 있는 '화'(和)의 공동체라는 신화적 표상과 강하게 결부되어왔다. 그것은 모든 대립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절대무한'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일본 국가는 대문자로 쓰여진(즉 확대된) 가족 혹은 부락공동체이며, 거꾸로 후자는 소문자로 쓰여진(즉 축소된) '국체'인 것이다." "그런 연유로 '신체제'라는 이름 하에 장단을 맞춰서 발족한 일본의 '전체주의'가 국내적인 편성에 관한 한, 기성 세력이나 집단을 거의 그대로 포함하는 '포용주의'로 끝나고 말았던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다."(239-40)


제2부 이데올로기의 정치학


제3장 파시즘의 제 문제


"파시스트가 사회민주주의자나 자유주의자의 존재에 대해 어디까지 '관용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물론 이데올로기적·원리적 문제가 아니라 혁명의 '한계 상황'의 문제이다. 사회민주주의나 자유주의가 '혁명의 온상'으로 판단되는 한에서 그것은 배제되거나 통제(Gleichschaltung)되며, 그것이 거꾸로 혁명의 방파제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한에서는 방임되거나 심지어 지지를 받기도 한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그런 사회민주주의자나 자유주의자의 존재 내지 활동이 허용되어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는, 그 국가의 지배권력이 '파쇼화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며, 문제는 어디까지나 그런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일정한 상황에서의 구체적인 행동양식에 있는 것이다. 생생한 현실 문제에 정치적으로 침묵하고 있는 자유주의자나 반공(反共)이 유일한 간판이 사회민주주의자까지 박해하는 것은 '권력의 경제'라는 측면에서 볼 때 무의미하기 때문이다."(300)


"물론 파시즘이 혁명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발현 형태를 취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자의적인 것이 아니며, 그 발생이나 진행의 템포나 형태에는 일정한 정치적 법칙성이 있다. 파시즘이 어떤 한 국가에서 노골적인 형태로 출현하는 것은 그 국가 또는 그 국가의 '세력범위'에서의 혁명적 상황의 긴박성이 어느 정도로까지 높아진 때이다. 혁명과 반혁명의 대항관계가 있어도, 그것이 구래의 지배체제의 안정성을 위협할 정도로 성숙해 있지 않으며 파시즘은 발생하지 않거나 발생하더라도 거의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 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넓은 의미'의 부르주아 반동이다. 다만 여기서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혁명적 상황이 체제의 안정성을 위협할 정도로 고도화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단순히 객관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의식의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파시즘의 발전은 혁명적 상황의 '긴박성'과 반드시 정확하게 대응하지 않는 것이다."(302-3)


"파시즘은 어떤 하나의 새로운 사회체제가 아니며 또 그것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적극적인' 목표나 일관된 정책이 없다. 거기에 있는 유일한 목표를 찾아보면 반혁명이라는 것뿐이다. 그들의 주장은 대부분 부정(否定)의 형태로밖에 표현되지 않는다." "추상적·이론적으로 말하면 반혁명의 '전체적인' 조직화 과정은 사회의 강제적인 시멘트화에 의해 모든 이질 분자들─가능하고 현실적인 현체제의 반대세력─이 일소될 때 완료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반대세력의 출현은 기저에 있는 혁명적 상황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므로, 사회혁명의 세계사적 진행 자체가 정지되지 않는 한, 그런 동질화가 완료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시즘은 영원히 '미완성'인 것이며, 그것은 그렇게 해서 '반혁명의 전체적인 조직화로 향하는 이른바 무한한 운동'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근대적 사회에서의 '능동적 니힐리즘'의 궁긍적인 숙명인 것이다."(316-7)


제4장 내셔널리즘·군국주의·파시즘


"내셔널리즘은 어떤 네이션(nation)의 통일·독립·발전을 지향하여 밀고나가는 이데올로기 및 운동이다. 따라서 내셔널리즘 개념의 다양성은 네이션이라는 범주의 다양성 내지 애매함과 서로 얽혀져 있다. 그러나 내셔널리즘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네이션의 '주체적' 계기라고도 불리고 있는 민족의식에 다름아니다. 내셔널리즘은 이렇게 민족의식이 일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 단순한 문화적 단계로부터 정치적인─따라서 '적'(敵)을 예상하는 의식과 행동으로까지 고양될 때 비로소 출현하게 된다. 내셔널리즘의 최초의 목표가 어디서나 네이션 내부의 '정치적' 통일(공통의 정부 수립) 및 타국에 대한 '정치적' 독립(국제사회에서의 주권의 획득)으로 표현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보편적 규범에 의해 결속된 '국제사회'는 먼저 유럽에서 성립했으며, 거기서부터 전세계로 퍼져나갔기 때문에 근대 내셔널리즘이 사상으로도 현실의 운동으로서도 19세기 유럽에 그 원형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323)


"내셔널리즘의 이데올로기는 거의 세 개의 계기로 구성되어 있다. ① 국민적 전통(tradition), ② 국민적 이익(interest), ③ 국민적 사명(mission)이 그것이다. 전통은 네이션을 과거와 이어주며, 이익은 그것을 현재에, 사명은 그것을 미래와 이어준다. 이 세 가지가 합성되어 국민적 개성 관념(national character)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내셔널리즘 운동은 다른 정치력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일반적으로 높고, 또한 대부분은 독립된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자유주의, 사회주의, 군국주의, 파시즘과 같은 이데올로기 내지 운동과 결합되어 나타난다. 그것도 국민적 통일과 독립이 아직 순전히 장래의 목표인 동안에는 내셔널리즘 운동은 비교적 그것 자체로서 정리된 형태를 가지며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일단 근대국가를 수립한 후의 내셔널리즘 운동이나 강대국의 권력정치의 와중에 휘말리게 된 지역의 내셔널리즘 운동에는 거의 언제나 다른 정치력이나 운동이 복잡하게 개입된다."(331-4)


"내셔널리즘이나 파시즘의 개념이 불명확성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현저한 운동 내지 정치체제로서 역사적으로 발현되고 있는 데 비하여, 군국주의의 경우는 한층 더 애매하고 '이즘'(ism)으로서의 특성이 희박하다." "시험적인(tentative) 의미에서 군국주의를 정의한다면, 그것은 〈한 국가나 한 사회에서 전쟁 또는 전쟁 준비를 위한 배려와 제도가 반영구적으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국민생활의 다른 모든 영역을 군사적 가치에 종속시키는 그런 사상 내지 행동양식〉으로 규정할 수 있다." "군국주의적 특성은 사회의 각 층에 침투해 있는 특정한 사고양식으로 측정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사회경제적 구성체가 아님은 물론 민주주의처럼 정치체제 전체를 감싸는 개념도 아니다. 즉 '주의'(主義)라기보다는 다양한 정치체제와 결합되어 존재해온 하나의 경향성으로서, 어떤 사회는 '보다' 많이 또는 '보다' 적게 군국주의적인 것이다."(334-5)


"군국주의는 수단으로서의 군사력과 군대정신 그 자체가 목적화된다는 데에 그 현저한 특성이 있다. 그런 수단의 자기목적화는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본질적인 모순을 가져다주었다. 몰트케는 일찍이 〈전쟁이야말로 신의 세계의 질서를 가진 거대한 횃불이다. ······ 전쟁이 없었더라면 세계는 물질주의에 빠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모든 군국주의에 공통된 이런 '정신주의'는 거기에 내재하는 모순에 의해 그야말로 그 반사물(反射物)로 전환되는 숙명을 지닌다. 즉 군인정신의 고양은 군의 규격성, 획일성의 요청에 직면하여 가장 몰정신적이고 비개성적인 '인원수'로 환원되고, 희화화된 형태에서는 일본의 '황군'(皇軍)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계급장·견장·각반의 착용방식이나 담요의 정돈 등에 대한 아주 하찮은 '형식주의'로 발현된다. 나아가서는 군국주의가 선전하는 국가적·국민적 특수성은 군사력이 우월성의 규준이 됨으로써, 완전히 질적인 규정을 잃어버리고 병력량의 차이로 귀착된다."(339-40)


"파시즘의 제1목표는 혁명의 전위조직의 파괴이며, 그것은 직접적인 테러나 국가권력에 의한 탄압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혁명세력의 억압은 다소라도 모든 지배계급이 실행해온 것이며, 파시즘의 특질은 단순히 그런 탄압의 양적인 규모의 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의 질적인 특이함'에 있다. 파시즘은 혁명세력의 직접적 억압에 머물지 않고서, 혁명세력이 성장하는 모든 사회적 노선이나 채널 자체를 폐쇄시키려 한다. 그 때문에 파시즘은 소극적으로는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그런 민중의 크고 작은 모든 자주적 집단의 형성을 위협과 폭력으로 방해함과 동시에, 적극적으로는 매스 미디어를 대규모로 구사하여 파시즘이 '정통'으로 삼고 있는 이데올로기나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대중을 획일화하는 것이다. 파쇼화 과정이란 요컨대 그런 이질적인 것의 배제를 통한 강제적 시멘트화(나치의 이른바 획일화(Gleichschaltung))의 과정에 다름아니다."(346)


"파시즘의 강제적 동질화와 시멘트화의 기능은 언제나 테러와 폭력에 의한 협박을 수반하며, 스파이·밀고제도·충성심사 등 직접·간접의 모든 방법에 의한 '공포의 독재'로 나타나지만, 동시에 파시즘은 현대의 가장 발달된 테크놀러지와 매스 미디어를 최대한으로 구사하며, 선전·교육·대집회로 〈대중의 사상과 감정을 계통적으로 변화시켜라〉(히틀러)라는 이른바 내면으로부터의 획일화를 밀고 나간다는 점에 큰 특색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중의 불만을 한편으로는 특정한 속죄양(공산주의자·유태인·흑인·가상적국)에 집중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만을 스포츠·영화·오락·집단여행 등에 의해 무산시킨다." "파시즘에 대한 저항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폭력과 잔학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강제적 시멘트화를 그야말로 비이성적인 격정을 동원하여 민주적인 외형 하에서 수행하고, '합의에 의한 지배'라는 근대적 원리를 어느 틈인가 '획일성에 의한 지배'로 슬쩍 대체한 점에 있는 것이다."(348-9)


제3부 '정치적인 것'과 그 한계


제1장 과학으로서의 정치학


"정치학은 정치의 과학으로서, 구체적인 정치적 현실에 의해서 매개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그것이 무언가 구체적인 정치세력에 직접 결부되어 정치적 투쟁의 수단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현대에서의 정치투쟁은 주지하듯이 사상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국제적인 전쟁에서도 국내 정당간의 투쟁에서도 이데올로기적 무장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럴 경우 학자들의 정치이론이 서로 경쟁하는 어느 당파의 무기로 동원되고 이용되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경향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같은 이용가치를 전혀 가지지 못한 그런 이론은, 실질적으로 공허한, 이론으로서도 가치가 낮은 것이라고 할 수조차 있다. 그러나 학자가 현실의 정치적 사상(事象)이나 현존하는 다양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고찰의 소재로 삼을 경우에도, 그를 내면적으로 이끄는 것은 언제나 '진리가치'가 아니면 안된다. 정치가가 이론의 가치를 통상 그 대중동원의 효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말이다."(402)


"이처럼 정치학을 특정 정당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예속으로부터 지켜내는 것만이라면 문제는 비교적 간단하겠지만, 정치적 사상(事象)을 인식함에 있어서 언제나 모든 주관적인 가치판단의 개입을 배제한다는 것은 말하기보다 실천이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가 원래 인간의 격정이나 본능을 깊은 곳으로부터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정치적 현실을 인식할 때에는 자기의 비합리적인 호의에 뿌리를 둔 억지견해가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끼여들어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정치인의 사유에서는 오히려 그런 가치지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인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정치적 사유의 특질, 정치에서 이론과 실천이라는 문제에 어쩔 수 없이 직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실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을 과학으로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런 어려움(aporia)을 피할 수 없다."(403)


"정치학자는 자신의 학문에서 이같은 인식과 대상의 상호규정 관계의 존재를 먼저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정치적 사유의 존재구속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정치적 세계에서는 배우가 아닌 관객은 있을 수 없다. 여기서는 '엄정중립' 역시 하나의 정치적 입장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학자가 정치적 현실에 대해서 어떤 이론을 구성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실천에 다름아니다. 이같은 의미에서의 실천을 통해서 학자도 역시 정치적 현실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 이런 불가피한 사실에 눈을 감는 것은 자기기만일 뿐만 아니라 유해하기조차 하다. 그런 태도는 흔히 '이기면 충신'이라는 식의 기회주의를 '객관적' 태도라는 이름으로 마구 퍼뜨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모든 세계관적인 정치적 투쟁에 대해서는 단순한 방관자로 자처하는 자는 그것만으로 이미 정치의 과학자로서 자격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406-7)


제2장 인간과 정치


"정치의 본질적인 계기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통제를 조직화하는 것이다. 통제든 조직화든 어느 것이나 인간을 현실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며, 인간이 외부적으로 실현시킨 행위를 매개로 하여 비로소 정치가 성립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는 어떻든 간에 인간 존재의 메커니즘을 전체적으로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정치의 작동은 이성이건, 정서건, 욕망이건 인간성의 어떠한 영역이건 간에 필요에 따라 동원하게 된다. 요컨대 현실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정치에서는 작동의 고유한 통로가 없다. 종교도, 학문도, 경제도, 그것이 정치 대상을 움직이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언제나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사용한다." "정치가 무언가 불결한 것과 본래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정치가 인간을 현실적으로 움직이게 해서 어떤 결과를 확보하려 하기 때문이다. 실은 정치가 더러운 것이라기보다 현실의 인간 그 자체가 공교롭게도 천사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다."(411-3)


"이때 정치가 전제로 하는 성악(性惡)이라는 의미를 보다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악이라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정확한 표현이 아니며, 카를 슈미트도 말하고 있듯이, 인간이 '문제가 있는'(problematisch)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에 다름아니다. 효과적으로 인간을 지배하고 조직화한다는 것, 그것을 어디까지나 외부적 결과로서 확보해가는 것에 정치의 생명이 있다고 한다면, 정치는 일단 그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인간을 '취급주의' 품목으로 여기고 거기에 접근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악이라는 것은 이런 취급주의의 꼬리표이다. 만약 인간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악한'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오히려 간단하고 본래의 정치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선한 쪽으로도 악한 쪽으로도 바뀌며 상황에 따라서 천사가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기도 하는 데에 기술(art)로서의 정치가 발생할 수 있는 지반이 있는 것이다."(415)


"어떠한 정치권력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정치권력인 한 인간의 양심의 자유로운 판단을 짓밟고 가치의 다원성을 평준화시키고, 게다가 강제적인 편성을 들이댈 위험성으로부터 완전히 면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권력이 구사하는 기술적 수단이 크면 클수록 그것이 인격적 통일성을 해체해서 그것을 단순히 메커니즘의 기능화로 만들어버릴 위험성 역시 커진다. 권력에 대한 낙관주의는 인간에 대한 그것보다도 몇 배나 위험하다." "따라서 오늘날은 내면성에 의거하는 입장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적 조직화에 대항하여 자주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또 자신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패러독스에 직면해 있다. 그때 정치적인 것의 전형적인 틀에 어느 정도까지는 어떻게든 내 몸을 끼워넣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런 연옥을 두려워하여 모든 정치적 동향으로부터 무차별적으로 도망가려고 하면, 도리어 최악의 정치적 지배를 자신의 머리 위에 불러오는 결과가 될 것이다."(424-5)


제4장 권력과 도덕


"원시사회에서 정치단체의 기원은 대체로, 한편으로는 사제자적 권력,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적 권력 양자가 합류하는 곳에서 성립되었던 것으로, 정치권력이라는 것은 이미 그 단초에 에토스(ethos)와 파토스(pathos)의 통일이라는 성격을 운명적으로 타고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통치영역이 광대해지고 권력의 하부 행정기구가 법적으로 정비될수록, (권력과 도덕의 직접적인 통일이라는) 이데일로기와 실재의 거리는 커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권력과 도덕의 원시적인 통일에 현실적으로 쐐기를 박게 된 커다란 계기는 어디에서도 정치권력에서의 '법체계의 형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법 역시 습속으로부터 생겨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법인 한, 그것은 역시 최소한도로 목적의식적인 산물인 데(관습법도 역시 관습과는 다르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해서, 도덕은 어디까지나 인위적인 형성이 아니라는 데에 그 규범력의 기초가 있기 때문이다."(451-2)


"그러나 권력과 도덕의 직접적 통일의 현실적 해체는, 반드시 곧바로 양자의 원리적인 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동방제국과 같은 강력한 군주의 단독지배 대신에 민주정을 고전적으로 완성시킨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지하듯이 그리스 시민에게 자유라는 것은 폴리스에의 참여를 의미하며, 그것이 모든 것이었다. 그의 생명과 신체는 모두 폴리스에 속하고 있으며, 도덕의 체계는 폴리스에 대한 충성으로 통일되며, 신앙은 폴리스의 종교에 대한 신앙이며, 교육은 폴리스의 공민에 대한 교육에 다름아니었다. 소크라테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야말로 그 비극이 확증해주고 있듯이 '합법성'과 '정당성'은 아직 완전히 분열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그리스인들에게도 개인도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폴리스의 덕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그리스의 정치적 통일 자체가 붕괴하고 사람들이 현세로부터의 이탈 때문에 그런 덕을 추구하게 된 시대였다."(453-4)


"중세 카톨리시즘은 정치권력의 도덕적 제약에 관해서 후세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사상을 발전시켰다. 말할 것도 없이 자연법 사상이 그것이다. 스토아에서 출발하는 자연법 사상이 어떻게 중세 세계에 수용되었고, 어떻게 체계화되었으며, 또 어떠한 기능을 했는가 하는 것은 법사상사의 서술에 맡겨야 하겠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교권(敎權)─교권 역시 하나의 권력이었다─의 속권(俗權)에 대한 우월과 통제를 합리화하는 역할을 했으며, 전체로서 중세적 정치체계의 이데올로기적 지주가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그것은 법적·정치적 질서에 대한 복종이 결코 무제한의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그것에 대한 저항이야말로 윤리적 의무라는 명제(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경우의 결정을 개인적 판단이 아니라 공적인 권위에 맡겼던 것이지만)를 포함시킴으로써 근세의 혁명권 내지 저항권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455-6)


"근세 초기에는 왕권신수설 같은 것이 절대군주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이론으로 이용되었지만, 그것은 과도적인 현상이었으며, 게다가 신권설(神權說) 그 자체도 점차로 내적인 변질을 겪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왕은 신성하기 때문에 최고권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거꾸로 최고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성한 것으로 되었다. 루이 14세가 '짐은 곧 국가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동시에 그가 '신의 아들'도 아니며 '조국의 아버지'(Pater Patriae)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국가권력은 종교적·도덕적·습속적 제약─한마디로 말하면 정치외적 제약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고유한 존재근거와 행동원리를 자각했다. 그것이 곧 근세에서의 국가이성(國家理性)의 이데올로기였다. 종교개혁이 교권의 세속적 지배에 저항하여 기독교적 신앙의 피안성(彼岸性)과 내면성을 강조한 당시의 결과는 세속권력의 공공연한 자기주장으로 나타났던 것이다."(457)


"절대적인 국가주권과 빼앗을 수 없는 개인의 기본적인 인권, 이 두 가지의 대립적 통일은 무릇 근대국가의 숙명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국가이성의 사상과 근세 자연법 사상의 상극으로 나타나게 된다." "(자연법 사상이 우위를 차지한) 영국과 미국에서는 국가권력은 국내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결코 무제한이 아니라 그것이 일정한 법적 제한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그 법의 구속력은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윤리적·종교적 가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그런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으로 되었다. 이에 비해 (국가이성 사상이 성숙한) 독일에서는 국가는 최고의 가치이며, 그 존립의 필요를 위해서는 국제법이나 개인도덕적 규준도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사상이 헤겔로부터 비스마르크, 트라이치케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흔히 독일이 악명높은 군국주의적·권력국가적 전통의 사상적 반영으로 지적되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459)


제5장 지배와 복종


"교사-학생관계와 주인-노예관계를 비교할 때, 가장 현저한 대척점은 바로 '이익지향의 동일성'과 '대립성'이다. 교사는 학생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교사에게는 학생이 모든 정신적 수준에서 자신에 가까이오고, 마침내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 교육의 이상이다. 교사의 제재는 그런 방향을 추구하는 한에서만, 교사의 제재일 수 있다. 주인과 노예는 그야말로 모든 점에서 반대 관계에 서게 된다. 주인은 본래 가능한 만큼 노예를 사역시키려고 하고, 노예는 본래 가능한 한 그 사역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한다. 주인은 노예와 공동의 목표를 가지지 않으며, 공동의 운명에 서지 않는다." "현실의 사회적 종속관계는 이런 양극 사이의 광대한 영역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이 두번째 유형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지배관계로서의 성격을 짙게 지니게 되며, 첫번째 유형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지배관계와 대립되는 의미에서의' (정신적) 권위관계라는 양상을 띠게 된다."(469-70)


"노예의 주인에 대한 복종에서는, 복종의 자발성이 제로 혹은 제로에 가까운 정도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는 본래 복종행위(Unterwerfungsakt)가 있다기보다도 복종이라는 사실상태(Unterworfenheit)가 있는 데 그칠 뿐이다." "정치적 사회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그와 같은 긴장관계밖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피지배자를 억압하기 위해서 지배자가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권력기구는 쓸데없이 거대하기만 할 뿐 아니라 대내관계와 더불어 모든 정치적 사회의 존재근거인 대외적 방어라는 면에서 현저한 취약성과 위험성을 배태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모든 통치관계는 한편으로는 권력·부·명예·지식·기술 등의 가치를 다양한 정도와 양식으로 피지배자들에게 분배해줌으로써 본래의 지배관계를 중화시키도록 하는 물적 기구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를 피지배자의 심정 속에 내면화함으로써 복종의 자발성을 불러일으키려는 정신적인 장치도 발전시켜온 것이다."(472-3)


"오늘날에는 피지배자는 헌법에 명기된 제도적 보장에 의해서 지배자의 권력에 참여하며, 그 '의견'은 수치로 측정되어 정부의 교체를 가능하게 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투표라는 '객관적' 형태로) 민의(民意)가 흘러나오는 명확한 도랑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거꾸로 지배자에 의한 민의의 조종도 용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피지배자가 사회적 가치에 대한 참여와 정치적 복종의 자발성을 자각적으로 조직화해 나가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확실히 문자 그대로 민중의 정치적·사회적·시민적 권리의 획득과 그 주체적 의식의 향상의 역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그런 물적·정신적 장치가 수행하는 이데올로기적 역할, 즉 현실의 정치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지배관계를 정련하고, 추상화하고, 그 실태를 피지배자의 눈으로부터 가린다는 역할을 지배자가 점점 분명하게 의식하고, 그런 목적의식에 기초하여 대규모로 그 장치를 구사하게 된 역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474-5)


"특히 현대에서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즐겨 쓰는 것은 집합개념으로서의 '인민'에게 지배의 주체를 이양함으로써 소수의 다수에 대한 지배라는 모든 지배에 공통된 본질을 은폐시키는 방식이다. 지배의 '비인격화'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그것은 '법의 지배'라는 것이다." "물론 그 이념이 수행한 역사적 역할은 크고, 오늘에도 그것이 상실되지 않았지만 그 이념은 현실적으로 법을 해석·적용하는 것이 언제나 인간이며 추상적인 법규범으로부터 자동적으로 일정한 구체적 판결이 나올 리도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간과했으며, 국가권력의 현실의 행사가 지배관계를 기초로, 그것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방위한다는 지상목표에 의해서 제약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및 법의 중립적 성격을 참칭(僭稱)함으로써 흔히 반동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여기에 국민공동체 이념이나 이른바 국가법인설과 같은 것도, 역시 지배의 비인격화 카테고리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476-7)


제6장 정치권력의 제 문제


"권력을 인간 또는 인간집단이 '소유'하는 것(사물)으로 보는 입장, 즉 구체적인 권력행사의 제 양태 배후에 이른바 일정불변의 권력 그 자체라는 실체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실체개념으로서의 권력이라 부른다면, 그것에 대해서 권력을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인간(혹은 집단)의 상호작용 관계에서 파악하는 사고방식을 관계 개념 혹은 함수 개념으로서의 권력이라 부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체제가 고정적이고 계급적이거나 혹은 사회적 유동성(mobility)을 결여한 국가 내지 시대에는 실체적인 권력개념이 지배적이고, 또 이데올로기로서는 (정치권력의 전제성專制性이나 폭력성을 강조하는) 실체적인 권력개념이 지배적이었다. 반면 정치권력에 의한 사회적 가치의 독점성이 상대적으로 낮고, 커뮤니케이션의 제 형태가 발전해 있으며, 사회집단의 자발적 형성과 그들 사이(또 국가와 제 사화집단 사이)의 복잡한 상호견제 작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그런 국가 내지 시대에는 관계적·함수적 권력 개념이 발흥하게 된다."(481-2)


"실체적 권력 개념의 강점은, 인간의 행동양식이 사회화됨으로써 단순한 개인적인 상호작용 관계로부터 분리되어 일정한 객관적 형태로까지 연결되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조직화된 권력의 징표는 ① 권력 행사의 양태 및 피행사자의 행동양식의 범위를 다소라도 명시적으로 규정하는 법칙(rule)의 존재, ② 권력의 다양한 기능을 분담하는 기관(organ) 내지 장치(apparatus)의 정비 등을 들 수 있는데, 그런 법칙(법)이나 장치라는 것은 장기화될수록 그리고 규모가 커질수록 물신화(物神化)하는 경향을 띠게 되므로, 그런 의미에서도 권력은 '실체'로서의 성격을 짙게 지니게 된다." "그들 기구가 아무리 민주화되어도 거기서의 권력관계는 개별적인 상호작용 관계로부터 추상되고 응고화되는 끊임없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측면을 무시한 관계 개념은 그만큼 허위의식으로 전환되며, (현실을 은폐한다는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482-3)


"권력을 인격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는 이점의 하나는, 널리 인간관계가 권력관계로 '이행'하는 다이내믹스를 분명하게 해줄 수 있다는 점이다." "라스웰(H. Lasswell)은 가치 종류의 조합을 통해서 권력 형태를 상세하게 분류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가 권력의 기저가치(base value)와 권력 자체의 가치를 구별하고 있는 것은, 강대한 노동조합이 스스로 '부'(富)를 소유하지 않고서 부에 대한(특히 배분에 대한) 권력을 가지며, 스폰서나 연출자가 스스로 명성을 지니지 않고서도 타인의 명성을 통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 등 어느 것이나 현대의 복잡다기한 사회적 권력상황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정부 권력(governmental power)의 행사에 대한 이른바 입헌제 제한의 강화가 곧바로 인간의 자유 일반의 확대를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도리어 '부'에 기초한 권력관계를 표면화하는 결과가 된 것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487-9)


"가치의 획득이나 증대는 집단협력에 의하는 쪽이 개인적으로 하는 것보다 일반적으로 유효하다. 그래서 가치를 둘러싼 분쟁은 그 가치가 희소하며,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가 강할수록 강한 집단응집력을 갖는다. 그런데 권력 자체도 역시 가치이며, 게다가 그것은 타인(집단)의 제 가치의 박탈을 포함하는 인간관계의 통제이므로, 권력은 다른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는 기반(base)으로서도 유효도(有效度)가 높다. 그래서 관계자들 간에 중대한 가치를 둘러싼 분쟁은 집단 상호간에서도, 그리고 집단 내부에서도 그만큼 빨리 권력관계로 이행하기 쉬운 것이다. 또한 그로부터 권력적 통제에 의한 인간관계의 조직화는 끊임없이 규모를 확대하고 권력관계의 피라미드를 점차로 자체 내에 포섭해나가려는 내재적 경향을 띠고 있다. 홉스는 〈꼭 알맞은 권력에 인간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보다 많은 권력을 얻지 않으면 현재 가지고 있는 권력도 확보할 수 없다〉는 말로 권력 특유의 다이내미즘을 예리하게 통찰했다."(489-90)


제7장 현대에서의 태도결정


"우리는 단순히 공식적인 제도에 입각한 형태만이 아니라, 모든 직장이나 모임에서, 명확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또 누가 하고 있는가 하는 주체도 분명하지 않은 형태로 사방팔방으로 끊임없이 사상조사나 충성심사를 받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조용히 지켜본다는 것, 즉 부작위라는 것도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집단 혹은 지역사회에서 무릇 사회적으로 시끄러운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런 사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의견의 표명이라든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그런 곳에서는, 그런 적극적인 태도표명을 하는 것이, 특히 첨예하게, 정치적인 개입(commitment)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거꾸로 또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떤 방향에서 행동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고 있는 그런 지역 혹은 집단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지배적인 가운데에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 움직이지 않는 것, 그것 자체가 이번에는 첨예하게 어떤 하나의 정치적인 커미트먼트로서 두드러지게 됩니다."(505-7)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이들 문제에 대해서 좋건 싫건 간에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것에 의해 좋건 싫건 간에 일정한 동향에 개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무한한 과정입니다. 얼핏 보기에 지극히 간단한 사안처럼 보이는 사회사상(事象)이나 정치문제를 보더라도, 그 모든 구성요소를 끄집어내어 사면팔방으로 조명하고 분석하며, 나아가 그 동태의 모든 가능성을 다 궁구한다는 것은 거의 영원(永遠)의 과제가 됩니다. 그것만 생각해보아도 아무리 완벽하게 보이는 이론이나 학설이라 하더라도, 그것 자체 완결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문적인 분석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결적이지 않은 것에 학문의 진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가설과 검증의 무한한 되풀이의 과정이기 때문에, 의심한다는 것, 자신의 사고방식, 자신의 학설, 자신의 이론에 대한 부단한 회의(懷疑)의 정신이라는 것이, 학문에는 불가결합니다."(508-9)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그런 무한한 인식과정을 어느 시점에서 문자 그대로 단절하는 것입니다. 단절함으로써만이 결단이, 따라서 행동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결단하고 선택한 결과 그 자체는 다시 인식과정 속에 되돌아가고, 그리하여 한층 더 인식이 풍부해지는 것입니다만, 결단의 그 시점시점에서는, 보다 완전한 보다 풍부한 인식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는 영원히 모순 혹은 배반이 있습니다. 인식이라는 것은 가능한 한 다면적이지 않으면 안됩니다만, 결단은 이른바 그것을 일면적으로 잘라서 취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예를 들면 정치적 쟁점이 되고 있는 그런 문제에 대한 결단은, 단순히 불완전한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일면적일 뿐만 아니라, 가치판단으로서 일방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식의 차원에서 한편으로 최소한의 논리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쪽으로 가담하지 않는다면, 결단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509)


"괴테는 〈행동하는 사람은 언제나 비양심적이다〉하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라는 것은, 우리의 수없이 많은 행동의 그물망이라고 합니다만, 행동의 조합으로 성립되어 있습니다. 사회가 그리하여 우리의 관련된 행동으로 성립되는 한에서, 우리의 행동 혹은 비행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즉 사회에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순수하게 '관찰한다'는 입장, 괴테가 말하는 의미에서 완전히 양심적인 입장이라는 것은, 완전히 무책임한 입장이라는 것으로 됩니다. 따라서 그런 점에서도 신만이, 완전히 무책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식한다는 것과 결단한다는 것의 모순 속에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이 아닌 인간의 숙명입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그런 숙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결과의 책임을 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숙명을 자각할 필요성은 관련된 행동이 비정상으로 복잡하게 된 현대에 점점 더 통절한 것으로 되고 있습니다."(509-10)


제8장 현대에서의 인간과 정치


"일반적으로 경계로부터 발하는 말과 행동은 중심부로부터는 '무책임한 비판'으로 간주되고, 완전히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거꾸로 안쪽에 공감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기 쉽다." "무릇 벽의 안쪽에 머무는 한, 어떠한 변경에서도 그 활동은, 어떤 의미에서 안쪽의 규칙이나 제 관계에 개입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바깥으로부터의 이데올로기적 비판이 설령 아무리 들어맞는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바깥으로부터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안쪽에 사는 사람들의 실감으로부터 유리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 이미지를 바꾸는 힘이 결여되어 있다." "지식인의 어려운, 그러나 영광스러운 현대적인 과제는 그런 딜레마를 회피하지 않고, 완전히 개입하는 것과 전혀 '무책임'한 것의 틈새에 서면서, 안을 통해서 안을 넘어서는 전망을 추구하는 그런 곳에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지성의 기능이란 요컨대 타자를 어디까지나 타자로서 생각하면서도, 그 타자를 '다른 곳에서' 이해하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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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와 애국 -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공공성
오구마 에이지 지음, 조성은 옮김 / 돌베개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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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오늘날 사람들은 종종 〈전후, 일본은 풍요로워졌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 전후란 어느 시대를 가리킬까? 전쟁의 피해 때문에 크게 하락했던 일본의 1인당 국민 총생산은 패전 후 10년이 지난 1955년에 전쟁 전 수준을 회복했다. 따라서 1954년까지를 전후라고 생각한다면, 〈전후, 일본은 가난해졌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또한 현대에는 〈전후 정치의 기본이었던 55년 체제〉와 같은 표현도 쓰인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55년 체제는 1955년에 성립되었다. 그리고 1956년 『경제 백서』經濟白書에는, 당시 유행어가 된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즉 1955년에 전후가 끝났다는 것이 당시의 인식이었다. 그 전후가 끝났을 때, 55년 체제와 고도 경제성장으로 상징되는 또 하나의 전후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는 잠정적으로 앞의 전후를 '제1의 전후', 뒤의 전후를 '제2의 전후'라고 부르겠다. 당연히 〈전후, 일본은 풍요로워졌다〉라고 말할 때의 전후는 '제2의 전후'를 가리킨다."(19-20)


"제1의 전후와 제2의 전후에는, 똑같은 말도 울림이 달랐다. 즉 국가나 민족이라는 말의 울림도 두 시기에 다르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제1의 전후는 질서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현실은 바뀔 수 있다〉라는 말이 현실감 있게 울린 시대였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서 질서의 한 형태인 국가라는 말은 어떻게 울렸을까? 그것이 인간을 짓누르기 위해 주어진 체제가 아니라 변혁이 가능한 현실의 일부로서 이야기된 국면이, 부분적으로나마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애국이라는 말은 어떻게 울렸을까? 그리고 그것은 진부하게 취급되기 이전의 민주라는 말과 어떤 관계였을까? 오늘날에는 〈전후 민주주의는 애국심을 부정했다〉라고 종종 평가되는데, 민주와 애국의 관계는 정말로 그러했을까? 내셔널리즘에 관한 전후의 언설을 검증하는 것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것은 당연히 국가와 개인의 관계, 혹은 공과 사의 관계에 대한 전후의 언설을 재검증해 가는 작업이기도 하다."(21-2)


1부


1 윤리의 초토화─전쟁과 사회 상황


"미일 개전 때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전쟁을 찬미했다. 이는 절반의 사실에 불과하다. 그들이 직면한 현실은 공표된 문면과는 약간 달랐다. 지식인이나 작가들은 전쟁에 협력하는 작품을 쓰거나, 아니면 창작을 단념하고 군수 관련 공장에서 일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처했다. 무엇보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수감의 공포, 고문과 옥사의 공포였다. 탄압의 공포는 지식인들 사이에 고립감과 의심증을 낳았다. 시대에 편승해서 마지막까지 이익을 얻은 극히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많은 지식인들에게 전쟁은 실로 악몽이었다. 그것은 표면에서 숭고한 이념에 대한 찬미가 이루어지고, 뒷면에서는 공포와 보신, 의심증과 배반, 환멸과 허위를 하나로 뭉쳐 놓은 것이었다. 타자에 대한 신뢰와 자기 자신의 긍지가 뿌리째 뽑힌 그 체험은, 굴욕감과 자기혐오 없이는 좀처럼 회상할 수 없는, 서로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않은 상처로 봉인되었다. 그러나 이런 회한의 기억이 전후사상의 중요한 저류가 된다."(58-66)


"1943년 10월부터 문과계 대학생의 징병 유예가 없어지고, 이른바 학도 출진이 이루어졌다. 전쟁 후기에 입영은 죽음과 거의 같은 뜻이었다." "이런 가운데, 정부에 대한 비판적 심정은 정부가 그들에게 가르친 애국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즉 정부가 주창해 온 애국과는 다른 종류의 진정한 애국[전쟁 반대]이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 제도의 레이테Leyte섬에서 사망한 한 학도병은 〈과연 누가 진정한 애국자였는지는 역사가 결정해 줄 것입니다〉라고 썼고, 중국 대륙에서 전사한 학도병도 〈내 충절의 방법은 아마도 현재 군 수뇌부의 근본 방침과 어긋난다〉라고 말한다." "학도병들의 경험은 지식인 전쟁 체험의 한 축소판이었다. 그것은 대중에 대한 모순적인 감정을 품게 만든 굴욕의 경험이면서, 사상과 사회과학을 일본 사회의 변혁에 도움이 되게끔 만들 필요성을 통감케 한 경험이었다. 이런 경험은 전시기에 형성된 '진정한 애국'이라는 표현과 함께, 전후사상에 크게 반영된다."(66, 73-4)


"가치관의 붕괴나 윤리의 저하는 8월 15일에 급격히 찾아온 것이 아니라, 전시 중부터 진행된 사태였다. 정부가 내세운 이념이 허구로 가득했다는 점은, 이미 많은 인간들이 느끼고 있었다. 말하자면 패전은 최후의 일격에 불과했다." "많은 죽음과 추악함에 직면하고 기아와 빈곤으로 추락했던 사람들에게, 전쟁 지지에 대한 회한은 컸다." "허위와 보신, 무책임과 퇴폐, 면종복배의 이면에 만연했던 이기주의, 그곳에는 물리적인 패배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붕괴가 있었다." "허위와 무책임을 낳고, 대량의 죽음과 파괴를 가져온 황국 일본과 신민의 관계, 이것을 대신할 공과 사의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져야 할까. 무너진 '국민 사이의 인간다운 연대'는, 어떤 새 원리로 다시 구상할 것인가.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일본을 창출하는 것이다.〉 전사한 학도병이 유고에 남긴 이 말은, 패전을 맞닥뜨린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된 마음이었다. 전후라고 불리는 시대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77, 81-3)


2 총력전과 민주주의─마루야마 마사오, 오쓰카 히사오


"일본에서는 프랑스나 한국 등과 달리, 패전 후에 해외 망명자들이 귀국해서 정권을 세우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후의 위정자와 지식인 대부분은 전쟁 전과 전시부터 활동해 온 사람들로, 사고의 전환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전후사상의 모색은 새로운 언어 체계를 외국에서 수입하기 이전에, 전시기의 언어 체계를 바꾸어 읽으며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시작했다. 여기서 전후 민주주의의 기반이 된 것은 총력전의 사상이었다." "예를 들어 훗날 수상이 되는 아시다 히토시는 전쟁 종결의 원인과 책임을 추궁하는 의견서에서 〈근대 총력전에서 우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에 책임을 느끼게 해야 한다. 국민들이 당면한 전쟁을 군부 및 정부의 전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근대전에서는 우선 이 점만으로도 패배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며, 통제 철폐와 언론 자유화를 주장하고 있다. 즉 아시다는 총력전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민주화를 주장했다."(87-8)


"패전 직후에 다수 등장한 이런 논조는, 모두 국민의 저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전쟁이 끝났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패전이라는 충격에 직면한 사람들이 취했던 일종의 심리적 방어 기제였다. 민주화에 대한 지향은 이런 내셔널리즘과 표리일체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내셔널리즘은, 전쟁으로 붕괴된 국민의 도의道義를 재건한다는 주장과도 연결되었다. 히가시쿠니나 이시와라, 고야마 등은 모두 전시 중의 암시장 경제나 관료의 무책임을 들어 전쟁에 패한 원인은 도의의 퇴폐에 있다고 주장하며, '1억 총참회를 하는 것이 우리나라 재건의 첫걸음'이라고 외친다. 이 1억 총참회라는 말은, 히가시쿠니 수상[쇼와 천황의 조카]이 1945년 8월 28일에 가진 기자 회견에서 발언한 뒤로 유명해졌다. 연합국과 아시아 국가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사죄한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패전의 굴욕감을 표현하기 위해, 패배 원인을 도의의 퇴폐에서 찾는 가운데 나온 말이었다."(89-90)


"1943년 10월, 29세의 마루야마 마사오는 게이오대의 『미타 신문』이 주최한 후쿠자와 유키치 특집에 「후쿠자와에서의 질서와 인간」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여기서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에 대한 당시의 분열된 평가에 대해 언급한다. 한 가지 평가는 후쿠자와를 서양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개인주의자로 보고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를 아시아 진출을 주장한 국가주의자로 찬미하는 것이었다." "마루야마는 개인과 국가를 대립시키는 개인주의적 국가관이 아니라, 주체적인 책임 의식을 가진 인간이 능동적으로 국가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 즉 '개인주의자라는 점에서 실로 국가주의자'가 되는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마루야마의 주장은 아시다의 〈근대 총력전에서 우위를 획득하려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에 책임을 느끼게 해야 한다〉라는 말과 거의 같은 취지이기도 했다. 즉 마루야마의 사상은 특이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게 공유되었던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95-7)


"마루야마는 1946년 5월에 발표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에서 일본 사회에는 자유로운 주체적 의식을 지닌 개인이 확립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내발적內發的인 책임 의식이 없다고 보았다. 거기서는 권력자조차도 책임 의식을 결여한 '폐하의 하복' 혹은 하료下僚의 로봇일 수밖에 없다는 '무책임의 체계'가 지배한다. 그와 동시에 상위자가 가한 억압을 하위자에게 발산한다는 '억압 이양'이 사방에서 발생한다. 그것을 국제 관계에 투영한 것이, 구미 제국주의의 압박을 아시아 침략으로 해소하려 한 행위였다. 게다가 이런 일본 사회에는 근대적인 사私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公의 명확한 경계도 없다. 거기서 발생하는 것은 공의 이름에 따른 사생활에의 개입이며 공의 이름을 빌린 사적 이해의 추구다. 또한 근대적인 정교분리도 이루어지지 않아서 최고 권력자인 천황이 동시에 윤리의 정점이 되며, 이런 '천황으로부터의 거리'가 정치적 지위인 동시에 윤리의 평가 기준이 되었다고 마루야마는 보았다."(108-9)


"이런 마루야마의 역할을 경제학의 언어로 행한 사람이 오쓰카 히사오였다. 오쓰카는 1944년 7월 「최고도 '자발성'의 발양」이라는 논고를 발표하여, 생산력 확충을 위해서는 노동자가 〈'자발성'과 '목적 합리성'〉을 내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자발성의 중시는 필연적으로 근대적 개인의 재평가까지 이어졌다. 근대적 개인의 재평가는 '근대의 초극론'과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이기적인 활동에 바탕을 둔 자유방임 경제를 계획적인 통제 경제로 넘어서야만 생산이 확충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런 의견에 대항해서 근대적 개인을 재평가하기 위해, 오쓰카는 그것이 질서 없는 이기주의가 아님을 밝혀야 했다. 즉 오쓰카는 마루야마와 같은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마루야마가 개인주의와 멸사봉공의 대립을 극복한 국민주의를 구상했듯, 오쓰카는 이기적 영리심과 멸사봉공의 대립을 넘어선 경제 윤리를 추구했다."(114-6)


"마루야마와 오쓰카가 근대라는 말로 설명한 것은, 서양 근대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것은 비참한 전쟁 체험의 반동으로서 꿈꾸게 된 이상적인 인간상을, 서양 사상의 언어로 빌려서 표현하려는 시도였다. 개個의 확립과 사회적 연대를 겸비하고 권위에 대항하여 자신의 신념을 지켜 내는 정신을, 그들은 주체성이라 이름 붙였다. 그런 주체성을 갖춘 인간상을 마루야마는 근대적 국민, 오쓰카는 근대적 인간 유형이라고 불렀다. 즉 주체성이란 전쟁과 패전의 굴욕으로부터 다시 일어서기 위해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말이었다.  그 주체성은 국내에서는 권위에 항거하는 '자아의 확립'으로, 국제 관계에서는 미소美蘇에 대한 자주독립이나 중립을 주창하는 내셔널리즘으로 각각 표현되었다. 마루야마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일신 독립하여 일국 독립한다〉라는 말을 사랑한 것은 그런 심정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마루야마와 오쓰카의 사상은 공통의 전쟁 체험을 가진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125-6)


3 충성과 반역─패전 직후의 천황제


"패전 직후의 일본이 '절대 왕정 단계'라는 역사 인식을 토대로 공산당이 주장한 것은, 우선 천황제를 타도하는 시민 혁명을 목적으로 삼고, 그 후에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간다는 '2단계 혁명론'이었다. 이런 역사관의 상식은 왕정을 타도한 프랑스 혁명으로 신분과 지역을 초월한 근대 국민 국가가 성립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천황제가 남아 있는 한 일본은 국민 국가가 아니며, 우선 국민 국가의 형성을 목표로 천황제를 타도해야 했다. 거기서는 봉건제의 잔재인 천황제와 근대적인 국민 혹은 민족이 대립하는 존재였다. 마루야마가 천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초국가주의와 근대적인 국민주의를 대비시킨 것에도, 이런 역사관이 깔려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국민이란 천황제에 지배당하는 신민臣民과 구별된, 자유롭고 평등한 근대적 인간이었다. 이노우에 기요시의 표현에 따르면 내셔널리즘과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국가인가, 천황의 국가인가〉라는 선택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156)


"이런 바른 애국심의 역사적 사례로 이따금 거론된 것이, 마루야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메이지의 자유 민권 운동이었다. 1946년 『역사가는 천황제를 어떻게 보는가』에서 이노우에는 자유 민권 운동의 활동가를 애국자들이라고 부르며 상찬했다." "패전 직후에는 이런 논조가 광범위하게 공유되었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예를 들면 오다카 구니오는 〈일본인은 충군이기는 했지만 서양인에 비해서 특별히 애국적이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경제학자 오코우치 가즈오도 근대 유럽에서는 〈애국 운동은 항상 항상 서민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 낡은 특권에 대립해서 새로운 질서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운동으로 등장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논조를 따라, 오다카 구니오도 구래舊來의 일본에서는 〈종적 일선을 거슬러 올라가 '위의 한 분'에게 충절을 다하는 것만이 문제이며, 횡적으로 제휴하고 횡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조국을 위해 동포를 위해 헌신하는 일은 제2, 제3의 문제였다〉라고 말한다."(157-8)


"천황제와 대치된 것이 주체성이며, 연대와 단결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마루야마나 가토 슈이치가 근대적인 주체성의 확립을 부르짖으면서도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라던가 〈부끄러움을 알아라〉라는, 다소 고풍스러운 말을 빈번히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런 논조는 동시대의 다른 논자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민법학자 가이노 미치타카는 1948년 5월의 논고에서 천황제를 〈무책임을 긍정하는 제도〉, 〈'국민'을 만들지 않는다〉라고 비판하면서 보수파를 향해 〈신헌법의 공포 앞에 할복이라도 해서······ 천황에 대해 '사죄'를 해야만 했을 터이다〉라고 말한다. 천황제를 폐지하라는 근대적 지향과 〈할복하라〉라는 무사도풍의 비난은 논리적으로는 모순될 터였다." "당시의 천황제란 단순히 군주가 존재하는 정치 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굴욕적인 기억과 결합된 말이었다. 그런 천황제와 대치되는 주체성은, 한편으로는 근대적인 언어로 이야기되면서도, 동시에 무사도적인 언어로 표현되기도 했다."(167)


"천황제가 인간을 억압한다는 인식과 천황 개인에 대한 경애가 교차하는 데서 하나의 주장이 생겨났다. 쇼와 천황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천황제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천황제로부터 천황의 해방'이다. 전후의 신헌법하에서, 천황에게는 참정권도 없고, 신앙이나 언론 출판의 자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공산당에 들어가는 변」을 쓴 모리타 소헤이는 〈천황을 기요틴에 내거는 사태에 이른다 해도, 나는 공산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단호히 거기에 서명하지 않을 것을 여기 명언해 둔다. 이것은 내가 천황제의 폐지와 천황 일가를 어디까지나 개별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이 주장한 것은 사람들에게 굴욕을 강제했던 사회적, 심리적인 시스템으로서의 천황제의 폐지였으며, 꼭 천황 개인의 처단은 아니었다. 거기서 주장된 것이 새로운 내셔널리즘과 윤리의 재건이며, 민족 도덕의 확립이었다. 그리고 민족 도덕의 확립을 위해서는 천황이 어떤 형태로든 전쟁 책임을 밝힐 것이 요구되었다."(168-72)


4 헌법 애국주의─제9조와 내셔널리즘


"대부분의 전후 지식인들은 패전으로 황폐해진 일본을 재건하기 위해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패전 직후에 우선 내세워진 것이 문화 국가나 평화 국가라는 표어였다." "이런 평화나 도의道義의 주장은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 패배한 일본에 남겨진 마지막 국가 정체성의 기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원자 폭탄으로 상징되는 구미의 군사력에 대한 대항 의식과도 결합되어 있었다." "육군 중장 이시와라 간지도 그런 논리에 따라 비무장 평화주의를 주장하며 〈몸에 쇠붙이 하나 갖추지 않으면서 세계 평화와 인도를 위해 그 태도를 규탄하고 반성을 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평화주의의 논조가 1945년 8월 시점부터 존재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민주화의 목소리가 점령군의 지령 이전에, 총력전 시기의 언어 사용의 연장선상에서 출현한 것과 마찬가지로, 평화주의의 목소리는 도의 국가라는 슬로건의 연장으로서 출현했다. 헌법 제9조는 이런 토양 위에 등장한 것이다."(192-4)


"당초 점령군의 제안에 놀랐던 보수적인 정치가들이 헌법을 용인하게 된 큰 이유는 상징 천황을 인정한 제1조의 존재였다. 이 조항으로 말미암아 천황제 폐지의 위험이 없어졌다." "동시에 이 헌법은 패전으로 위기에 직면한 보수 정치가들이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GHQ의 '공직추방령'에 내몰린 보수정치가들로서는 과감한 개혁안을 제시하는 길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실제로 신헌법 초안의 공표는 보수 정권의 위기를 구해 주는 꼴이 되었다. 3월 6일의 초안 요강 발표 이후로 이 초안을 지지하는 사회당과 천황제 타도를 외치며 초안에 반대하는 공산당이 대립한다. 그리고 정부는 초안 요강을 공표한 지 4일 뒤, 4월에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고시했다. 개혁의 기운을 선수 친 보수 정당은 지지를 모았고, 특히 요시다 시게루를 중심으로 한 자유당이 이 선거에서 약진하여 정권을 획득했다. 신헌법은 단순히 미국의 압력으로 밀어붙여졌다기보다는, 보수 정치가들의 생존책으로 수용되었다."(199-200)


"1946년 시점에서 헌법의 태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점령군과 대결할 각오를 요구하는 행위였기에, 결국 의회에서의 헌법 심의는 압도적인 다수로 가결되었다. 그리고 제9조에는 국제 평화를 주창한 제1항과 전력 포기를 주창한 제2항 사이에,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라는 문구를 넣는 수정이 가해졌다. 이 수정은 이후의 재군비에서 국제 평화라는 목적을 해하지 않는다면 전력 보유가 가능하다는 헌법 해석을 낳는다. 패전 직후의 헌법 논의에서 흥미로운 점은, 난바라 시게루를 비롯해 이후 호헌 세력이 되는 사람들이 신헌법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후에 개헌 세력이 되는 보수 정치가들은 헌법을 상찬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난바라가 헌법을 비판한 것은, 헌법의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안이하게 헌법을 개정하는 정치 자세에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점령군이 두려워서 헌법을 상찬했던 보수 정치가들도 미국이 방침을 전환한 1950년대 이후로 헌법 비판을 시작했다."(212)


5 좌익의 '민족', 보수의 '개인'─공산당·보수계 지식인


"1950년대 중반까지 공산당의 권위는 신과 같았다. 어떻게 해서 그런 상황이 생겼을까. 첫 번째 이유는 고도 경제 성장 이전의 일본에 존재한 압도적인 빈부격차다. 도시와 농촌, 상층과 하층 간 격차는 컸으며 패전 후의 거리에는 고아와 전쟁 피해자가 넘쳐 났다. 이런 현실 앞에 공산당의 존재가 빛나보였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일본에서 전쟁에 반대한 유일한 정당이 공산당이었던 점이다. 전전의 비공산당계 무산 정당 및 노동 운동은 모두 전쟁에 협력한 과거가 있었다. 전후가 되어 비공산당계의 사회주의자들이 합동해서 일본사회당을 결성했지만, 전쟁 협력의 오점을 지니지 않은 점에서 공산당의 정신적 우위는 명백했다. 세 번째이자 가장 큰 이유는 지식인들의 회한이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패전 후의 지식인들을 〈회한 공동체〉라고 불렀는데, 이때의 회한이란,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결과의 문제보다도, 전시기 그들의 처신에 대한, 말하자면 윤리적인 문제였다."(220)


"패전 후의 논단에서 우익 국수주의자는 세력을 실추했다. 그 대신에 올드 리버럴리스트라고 통칭된 지식인들이 보수 논단을 형성했다." "그들에게는 사상적 상이함을 넘어선 일종의 공통성이 있었다. 하나는 그들 중 다수가 패전 시에 50대 이상으로, 다이쇼기에 청년 시대를 보낸 세대였던 점이며, 또 하나는 그들이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천황을 경애하는 문화인이면서 자유주의를 흠모했다는 점이었다." "전전의 지식인은 거의가 도시 거주의 중산층 이상에 속하여, 경제적으로도 교양으로도 일반 민중과 동떨어져 있었다. 1948년 조사에서 신문 정도의 읽고 쓰기가 완전히 가능한 자는 4.4퍼센트에 지나지 않았고, 군대에서 처음으로 하층민과 접촉한 학도병들은 대중에게 경악과 경멸의 감정을 품었다." "그런데 이런 격차를 축소시키는 단초가 된 사건이 전시 및 패전 후의 인플레이션이었다. 공습 때문에 도시 중산층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금융 상품이나 예금의 가치가 급락하면서 도시 중산층의 몰락을 초래했다."(236-7)


"이렇게 과거의 자유주의자들로 구성된 1950년대의 보수 논조는 평화주의를 공론空論, 미숙, 유치 등이라 비판하고 현실, 상식, 전통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많았다 나아가 고이즈미 신조나 다나카 미치타로 등은 재군비에 찬성하고 국방의 의무를 공공심公共心의 일환으로 상찬했다. 이런 주장은 그 후의 보수 논조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1950년대의 보수 논조는 고도성장 이후의 그것과 비교할 경우에 특징이 몇 가지 있었다. 그 하나는 전후의 민주화나 노동 운동 등을 군부 독재와 동일시하는 경향이었다." "특히 경제학자였던 고이즈미는 마르크스주의와 총력전 체제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이것이 자유주의 경제를 해쳤다고 주장했다." "또한 1950년대의 올드 리버럴리스트들은 개인의 자유를 열심히 강조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논조의 배경 역시 그들의 전쟁 체험이었댜.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개인의 자유란 빨갱이와 군부에 대항해 자기의 자유를 지킨다는 의미와 같았기 때문이다."(246-8)


"그렇다면 그들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공공심은 어떻게 공존했을까? 그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 잡지 『고코로』의 좌담회에 등장하는 다케야마 미치오의 발언이다. 이 좌담회에는 〈인간이라는 것은 각자의 천분에 따라 각각의 역할을 맡는다〉라는 발언도 나왔는데, 이런 일종의 신분제적인 사고방식이 그들이 주장하는 개인의 자유와 공공심의 양립을 지탱했다. 즉 대중이 근로를 통해 사회에 공헌하듯, 〈문화를 맡은 자〉인 자신들은 자유롭게 문화를 즐김으로써 일반 민중이 할 수 없는 형태로 사회에 공헌한다. 이런 질서는 전통적이고 자연스러우며 그 질서에 정치가 개입하면 전체주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평화라는 말도, 이들에게는 약간 독특한 의미로 쓰였다. 고이즈미 신조는 재군비와 미일 안보 조약에 찬성을 표하면서 〈민족 간에 평화가 바람직한 것과 마찬가지로 계급 간에도 평화가 바람직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천황이야말로 이런 평화, 즉 그들이 안정적인 지위를 누렸던 전쟁 전 시대의 상징이었다."(249)


6 민족과 시민─정치와 문학 논쟁


"1946년 후반부터 1947년 초에 걸쳐 〈혁명이 멀지 않았다〉라는 기운 속에서, 공산당은 1947년 2월 1일 자로 총파업을 기획했다. 그러나 이 2·1 파업은 점령군의 명령으로 중지되었고, 공산당은 전후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았다." "그 후 노동 운동에서 공산당의 장악력이 저하되면서 좌절한 학생들과 젊은 노동자들은 내성內省의 시기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런 젊은 활동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긴다이분가쿠』를 비롯한 주체성론이었다." "오쓰카 히사오는 근대적 인간 유형의 확립이 선행되지 않는 한 제도적인 사회 개혁을 이루더라도 효과는 적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에 대해서 공산당계의 논자들은 인간의 의지는 경제적인 하부 구조로 규정되며 사회의 변혁 없이 의식의 변혁 같은 것은 일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공산당 측에서 보면 사회 변혁의 계획을 동반하지 않는 주체성의 주장 같은 것은 난센스에 지나지 않았으며, 청년층의 지지를 얻는 데 있어서 잠재적인 라이벌 사상과 다름없었다."(283)


"그러나 마루야마나 오쓰카가 말한 주체성은 공과 사 양 쪽 모두가 파괴된 전쟁 중의 반전反戰으로서 꿈꾸게 된, 권위로부터의 자립과 타자와의 연대를 겸비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우메모토 가쓰미 등이 주장한 주체성은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는 역사의 필연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필연성 속에 해소되지 않는 자기를 표현했다. 후자는 개인을 넘어선 전쟁이라는 역사의 필연성을 인정하면서도 자기의 죽음을 납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품었던 심정이다. 즉 패전 후의 주체성이란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체계적인 이론으로 회수되기 곤란한 심정을 표현한 말이었다. 사람들은 전쟁과 패전이라는 거대한 사회 변동에 농락당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납득시킬 설명을 찾아서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역사의 필연성을 믿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이론적인 설명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자기의 잔여물 중 일부가 다른 종류의 말을 찾는 원동력이 되었을 때, 그것이 주체성이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다."(287)


"당시에는 전시 중의 자기 자신에 회한을 갖지 않는 문학가는 거의 없었다. 전쟁을 투철하게 반대한 자도, 전쟁을 찬미한 글을 실천해서 옥쇄한 문학가도 극히 소수였다. 대부분의 문학가는 보신이나 편승으로 전쟁에 협력하고 자기의 내면을 배반했다는 회한을 품고 있었다. 논쟁 상대의 과거를 직접적으로 폭로하는 것은 꺼려졌지만, 전쟁이 가져온 상호 불신과 자기혐오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영화 〈라쇼몽〉에서 자기에게 형편이 좋은 허위 증언을 늘어 놓는 군상을 그린 것도 이런 시대 상황 아래서였다." "그러나 이런 회한으로부터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무장을 생각했을 때, 당시로서는 마르크스주의의 학습과 공산당 참가 이외의 방법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그리고 고바야시나 후쿠다가 정치로부터 나를 지킨다는 논리로 전쟁 책임 문제를 회피했다면, 많은 공산당원들은 정치의 권위로 나에 대한 비판을 지움으로써, 역시 전쟁 체험을 은폐했다."(298-9)


"당시의 공산당 주변에서 민족은 인민과 거의 동의어였고 근대적인 개인의 확립과도 모순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어찌되었든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비판하면서 민족을 내세우는 논조는 전시를 떠올리게 했다. 이런 '민족'에 대항하여 아라 마사히토는 '시민'을 내세웠다." "여기서 유의할 점이 하나 있는데, 당시에는 일반 명사로서 시민을 사용하는 것이, 다소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지식인의 기본 교양이었던 헤겔 사상이나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근대 시민 사회란 자본주의 사회이며 시민은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서양 문화의 향유가 도시 중간층의 특권이었던 당시에 세계 시민은 자본가의 대명사이며 민족은 민중의 동의어라는 언설이 성립했던 것이다." "결국 정치와 문학의 분열을 넘어서고자 한 시도에서 만들어진 민족과 시민의 대립이라는 도식은, 전후의 언설 구조가 변천하는 과정을 보여준 하나의 지표가 되어 갔다."(300-2, 309)


2부


7 가난과 단일 민족─1950년대의 내셔널리즘


"1950년대 전반까지의 일본 사회에서는 (사회 전체가 빈곤에 시달리는 가운데) 지식인과 노동자, 도시와 농촌 사이에 압도적인 문화적 격차가 존재했고, 화제를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말하자면 당시의 일본은 지역과 계층으로 사람들이 분단되어, 균질한 '일본인' 같은 생각이 거의 통용되지 않는 세계였다." "농촌 인구가 많았던 당시에 '시민'이라는 말은 도시 부르주아층의 대명사였다. 그런 반면 '민중'이나 '대중'은 지식인이나 도시 중산층을 포함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 언어 상황 속에서 도시 중산층과 농민을 모두 포함하는 집단을 표현하는 말은 '민족'이나 '국민'이 되기 쉬웠다. 또한 1950년대의 좌파 지식인들은 단일 불가분한 일본 민족, 단일한 민족 국가라는 말을 이따금 사용했다. 단일 불가분이라는 말은 프랑스 혁명 정권의 표어였던 '하나이며 불가분한 공화국'의 번역에서 파생한 것으로, 신분 및 지역의 분단을 극복하고 국민이 성립한 상태를 지향하는 말이었다."(316-20)


"원래 아시아 국가들의 내셔널리스트들은 당시의 일본 지식인과 유사한 문제를 다루었다. 그것은 서양 근대의 교양을 익힌 도시부의 지식인들과 농민으로 대표되는 일반 민중의 격차였다. 그런 까닭에 아시아 국가들의 내셔널리스트들은 이 격차를 식민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해소하고 하나의 국민으로서 연대를 만들어 낼 것을 주장했다. 특히 중국공산당이 도시 지식인들에게 중국 재래의 문화를 다시 보게 하고, 지방의 민중 속으로 들어가도록 설파한 점은, 일본에서도 지식인들의 주목을 모았다." "이렇게 해서 1950년대 전반에는 진보계 지식인이 서양 지향을 자기 비판하고 일본인으로의 회귀를 표명하는 것이 하나의 조류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계몽 활동을 대신하여 민중 지향의 다양한 활동이 모색되었다. 그 하나는 대중문화의 연구였고, 그것과 병행해서 민화나 민요가 급속히 재평가되고 민속학이 주목을 모았다. (민중에게 작문을 지도하는) 생활 기록 운동의 대두 역시 같은 움직임으로 들 수 있다."(331-3)


"1955년 7월, 공산당은 그때까지의 무장 투쟁 노선을 극좌모험주의라며 포기했다. 패전 후 공산당이 누린 정신적 권위의 원천은 옥중 비전향과 절대 무류無謬의 신화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많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전향을 거듭했던 전시에, 공산당만이 주체성을 유지했다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코민포름의 비판에 동요하고, 몇 번이고 방침을 전환하는 공산당의 모습은 그런 신화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당 전체는 코민포름에 종속되었으면서 하부 당원에게는 절대적인 권위로 군림하는 자세 역시, 천황제와 유사한 권위주의라는 인상을 주었다." "요시모토는 1958년의 「전향론」에서 옥중 비전향의 공산당 간부도 일본의 현실을 무시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묵수한 데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후쿠다 쓰네아리가 1947년에 유사한 의견을 말했을 때는 그를 지지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1958년 요시모토의 주장은 공산당에게 실망한 지식인과 학생, 그리고 신좌익(통칭 분트에서 유래한)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353-5)


"1955년에는 공산당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정계 개편이 진행되었다. 공산당이 육전협에서 무장 투쟁 노선을 포기한 것을 전후해, 재군비의 시비를 둘러싸고 분열했던 좌파사회당과 유파사회당이 합체해 일본사회당이 결성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보수 정당 측도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동해 자유민주당을 결성한다. 이른바 '55년 체제'라고 불리는 정당 지도가 이때 완성되었다. 그리고 1956년 『경제 백서』에는 이후 유행어가 된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전후'의 끝이며, 또 하나의 '전후'의 시작이었다. 이제 고도성장과 55년 체제로 상징되는 안정과 번영의 전후가 시작되려 했다. '전후 민주주의'라는 말도 이 시기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패전 직후의 민주주의는 구질서를 타파하기 위해 내걸린 변혁의 상징이었다. 그런 격동의 전후는 끝나고, 민주주의가 55년 체제로 형해화된 의회 정치의 관용구가 되어 가던 때에, 전후 민주주의라는 말이 태어났다."(356-7)


8 국민의 역사학 운동─이시모다 쇼, 이노우에 기요시, 아미노 요시히코 외


"전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가 계몽 활동 이외에 힘을 쏟은 실천 활동은 교과서 비판이었다. 1946년 10월에 마지막 국민학교 초등과(소학교)용 국정 국사 교과서가 된 『나라의 발걸음』이 발행되었다. 세계사의 견지 및 인민의 역사도 다룬 이 교과서는 교육 민주화의 상징으로 선전되었지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여기에 천황 숭배 교육의 잔재가 보인다든가 전쟁 책임에 대한 추궁이 없다든가 하는 점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교과서 비판은 실증주의에 입각해 정치적 편향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치적인 실증주의를 비판하는 형태였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지금까지 역사 교육이 정책에 따라서 악용되었기 때문에, 이번의 역사 교과서가 정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문학에서는 정치적 중립을 가장한 예술 지상주의가 비판되었는데, 역사학에서는 실증주의가 그것에 해당했다. 실증주의는 최종적으로는 제국주의 측에 가담하는 부르주아 사상이라고 여겨졌다."(383)


"이시모다 쇼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정치에 참가해서 자기의 연구를 발전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는 「촌락의 역사·공장의 역사」에서 민중 스스로가 창조한 역사를 소개하면서 〈강단 역사학의 좁음, 미천함은 이런 역사가 전국에서 나타나게 될 때 유감없이 폭로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물론 글을 쓰지 못하는 노동자가 역사를 쓰기란 〈실제로는 곤란한 작업일 것〉이다. 거기서 〈역사의 전문가가 그 일을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때 역사학자의 역할은 〈높은 곳에서 민중에게 요청하지 않고, 겸손하게 함께 작업을 하는 그런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전문가도 인민으로부터 자기 학문의 좁음을 깨달으며, 함께 공부하고 성장해 갈 수 있을 것이었다. 이시모다에게 이런 과정에 참가하는 것은 윤리감이나 책임의식으로 감내해야 할 고행이 아니라 일종의 쾌락이었다." "이런 역사학의 창조는 후에 국민적 역사학이라 불리며, 역사학의 혁명이라는 구호와 결합해서 많은 학생들을 매료시킨다."(390-1)


"그러나 국민적 역사학 운동은 1953년경부터 차츰 막다른 길에 부딪혔다. 운동을 담당했던 학생들은 진지하기는 했지만 너무나 미숙했다. 우선 드러난 문제는 학생들 중에 민족이나 민중의 권위를 빌려서 타자를 공격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었다. '역사학의 혁명'을 내세운 그들은 자기들의 뜻에 맞지 않는 학자나 교수들을 반혁명적, 근대주의 등이라 비난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공산당의 당내 투쟁이 상황을 악화시켰다. 소감파와 국제파가 상호 비방을 확대하며 사문과 린치가 횡행하던 상황 속에서, 국민적 역사학 운동에의 찬반은 이윽고 정치적 입장의 시험지가 되었다." "공산당의 정치 방침에 따라, 서클이나 농촌 조사를 단순한 당세 확장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차례로 현저해졌다. 이시모다는 후에 〈서클을 단순히 새로운 형태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사상, 혹은 서클의 수나 그 회원의 증감만이 보고되고, 무슨 내용을 이야기했는가가 조금도 토의되지 않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회상한다."(419-21)


"1951년 이시모다는 지식인의 대중 멸시를 비판하여 〈지식인에게 대중은 료쿄쿠와 통속 소설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속악俗惡을 의미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혁명 민화나 혁명 로쿄쿠를 민족 문화라 칭했던 점에서는 국민적 역사학 운동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즉 '민중 속으로'라는 이념 그 자체가 현실 민중에 대한 무지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실제로 현실 민중의 반응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역설적이게도 국민적 역사학 운동에 비판적이었던 이노우에 기요시 쪽이 석탄암을 깨는 일용직 노동자의 아들이었으며, 돌을 쪼개고 짚을 엮으며 대학까지 다닌 사람이었다. 이노우에는 국민적 역사학 운동이 끝난 뒤에 〈도련님 아가씨들이 농촌에 들어가서 인민의 빈곤에 놀라고, 봉건제의 뿌리 깊음에 깜짝 놀라, 크게 감격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도 좋은 공부가 되리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정수라며 우쭐거리는 데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라고 말한다."(423)


9 전후 교육과 민족─교육학자·일교조


"교육 개혁에서도 점령군의 대응은 빨랐다. 1945년 12월까지 군국주의적인 교원을 추방하는 심사 기관의 설치, 공교육과 신토神道의 분리, 수신·일본사·지리 교육의 일시 정지 등을 명령했다." "1947년 3월 극동위원회가 교육에서 칙어 사용을 금지한 한편, 같은 달에 「교육 기본법」이 제정된다." "점령군의 지령으로 개혁이 진행되고 교원 자격 심사와 추방도 실시되었지만, 일본 측이 행한 심사는 느슨했으며, 추방된 자는 전 교원의 0.5퍼센트, 대학 교원 중에서는 0.3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교육 칙어」에 대해서도 극동위원회가 금지한 지 1년이 넘게 지난 1948년 6월이 되어서야 국회에서 무효 결의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서 패전 후의 교육계에는, 변경된 제도와 변치 않는 교육자라는 모순된 상황이 생겼다. 그 결과는 어제까지 귀축미영과 천황 숭배를 설파하던 교사가 돌연히 미국과 민주주의를 찬미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학생들의 불신을 샀고, 전후 민주주의는 기만이라는 인상을 심었다."(431-2)


"사회 전체의 변혁이 없으면 개인의 행복도 없다는 논조는 고도성장 이전의 일본에서는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 변혁의 시점이 빠진 채로 개인의 중시를 주장하는 「교육 기본법」은 봉건제를 타파한다는 의미에서는 한걸음 나아갔다고 해도, 부유한 자의 승리를 정당화하는 자유주의 사상에 불과했다." "나아가 비판은 사회 과목으로도 향했다. 역사와 지리를 폐지하고 설립된 사회 과목은 일본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박탈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역사·지리 교육의 부활이 주장되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야가와를 비롯한 공산당계 논자들은 소련과 중국을 모델로 삼아 개인주의와 근대주의를 비판했다. 그에 비해 가쓰다나 우에하라는 프랑스나 독일을 모델로 삼아 근대적 개인들이 뒷받침하는 내셔널리즘을 주창했다. 그런 차이는 있지만 애국심 교육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미국적인 전후 교육을 비판하는 경향은, 당시의 진보계 교육학자들에게 공통되었다고 할수 있다."(440-4)


"이렇게 전전과의 연속성이 발생한 배경에는 교육계에서 공직 추방이 거의 실행되지 않았다는 사정이 있었다. 전후의 많은 교원들은 전전부터 교육에 종사했거나, 혹은 전전의 교육으로 인격을 형성한 인간들이었다. 성전 완수가 민주주의로 바뀌어도, 애국심과 민족이 강조되는 사태가 바뀌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연속성은 당시의 역사학자들에게도 존재한 경향이었다. 그러나 교육학 분야에는 전쟁에 협력했던 자가 역사학보다 많았으며, 전시와 전후 간에 말 사용의 연속성이 보다 현저했다. 예를 들어 야가와 도쿠미쓰는 전시에 대일본청소년단의 교양부장을 맡아 1942년에는 〈일본 민족이 오늘날 세계에 신질서를 건설하는 것은, 세계를 진짜 세계답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1952년에 〈오늘날 우리의 대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평화 확보와 민족 독립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리라. 그것은 우리 일본 민족의 위대한 사업이다〉라고 말했다."(460-3)


"1950년대 교육학자들에게는, 전쟁 전의 교육에 존재했던 국가 목표에 향수를 품고 그 대안을 찾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행동 양식의 연속성 속에 있는 한, 새로운 교육 이념을 모색하더라도 만족할 만한 결과가 얻어질 리 없었다. 그들이 어떤 이념을 찾아냈다고 해도, 그 행위가 국가 목표의 대용품을 찾는다는 의식에 기반을 두는 한, 그것이 대용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가 잠재적으로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패전 후의 교육론을 구속한 것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각인된 행동양식이었다. 황국 일본에서 주권 재민의 나라로 말이 바뀌어도, 공통어를 보급하고, 교사의 지도성을 부르짖고, 반미를 주창하고, 민족과 전통을 상찬하고, 국가 목표를 추구한다는 행동 양식이 실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사상적인 대립과는 대조적으로, 보수파와 상통하는 부분이 생긴 것도 그런 이유였다." "여기서 생긴 불신감은 전후에 교육 받은 아동들이 성인이 된 1960년대에 전후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의 배경을 이룬다."(474-5)


10 피로 물든 민족주의의 기억─다케우치 요시미


"다케우치 요시미는 「중국의 근대와 일본의 근대」라는 논고에서, 중국과 일본의 차이는 〈궁극적으로는 고유의 문화를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差〉이다. 즉 〈중국의 문명은 만들어 낸 것이며, 일본처럼 남에게서 빌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제도든 사상이든, 유럽 문명이 낳은 결과만을 빌려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혁을 실현하는 길은 내부로부터의 자기 개조를 관철하는 것 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이런 근대 일본에서는 자유주의가 길이 막히면 전체주의, 전체주의가 패배하면 민주주의로, 위기 때마다 외국에서 사상을 수입해 올 것이 기대된다. 요약하자면 〈과거에 주어진, 지금도 주어진, 장래에도 주어질 것이라는, 주어지는 환경 속에서 형성되어 온 심리 경향이 뿌리내렸다〉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진정한 절망이나 자기 혁신에 이르지 못하고 〈영구히 실패함으로써 영구히 성공한다. 무한한 반복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보인 듯 생각된다〉라고 다케우치는 말한다."(510-1)


"다케우치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종종 주체성이나 현실, 혹은 정치 등을, 어딘가로 찾으러 가면 주어지는 완성품처럼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주어져야 할 '주체성'을 밖으로 찾으러 나가는〉 것이나 〈현실이라는 실체적인 것이 있어서 무한히 그것과 가까워지는 것〉이 시도된다. 이렇게 해서 자기를 찾으러 밖으로 나간다는 행위, 외부에서 구원을 찾는 기대가 노예의 상태를 고정시킨다." "이렇게 외부에서 문화를 이입해서 위기를 회피하는 것은 물론, 전통을 묵수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것도 자기 보전이며 자기를 잃는 데 불과하다. 서양의 모방과 그 반동에 불과한 국수주의의 사이에서 흔들려 왔던 근대 일본은 〈자기라는 것을 거부하고 동시에 자기 이외의 것을 거부한다〉라고 다케우치는 말한다. 반면 루쉰은 과거의 자기에 머무르는 것도 외부의 힘에 기대서 자기를 포기하는 것도 거부하고 저항한다. 그 양쪽에 대한 거부는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동시에 노예의 주인이기도 거부〉하는 것이다."(512-3)


"다케우치의 사상은 실은 동시대의 사상과 연속되어 있다. 메이지부터 일본의 근대화를 다시 생각한다는 접근도, 주체성이라는 문제에 집착한 것도, 봉건제를 비판하고 국민적 기반의 성립을 지향한 것도, 거의 마루야마와 공통되었다." "그러나 마루야마가 근대를 기준으로 일본 사회를 비판한 데 비해서, 다케우치는 긍정해야 할 근대와 부정해야 할 근대를 나누어 일본의 근대화와 봉건제 쌍방을 비판했다. 다케우치가 일관되게 비판한 것은, 외부의 권위로부터 주어지는 우등생이나 열등생이라는 위치 짓기에 자기가 스스로 말려드는 노예근성이었다. 그런 노예근성을 일종의 자기 보전과 자기 동일성의 희구라고 간주하면, 그것에 근대라는 명칭을 주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권위에의 예종을 봉건적이라고 간주하고 (서양 문화를 재빨리 이입한) 우등생과 (그러지 못한) 열등생의 분단 상태를 봉건사회의 길드와 같다고 논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 까닭에 다케우치에게는 근대 비판과 근대 지향이 모순되지 않았다."(522)


"다케우치는 「근대주의와 민족의 문제」라는 논고에서 〈근대주의란 바꾸어 말하면 민족을 사고의 통로에 포함하지 않는, 혹은 배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케우치가 이 논고에서 '피투성이 민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자기의 내부에 있는 암흑이며, 구체적으로는 전쟁 책임 문제였다." "대일본 제국이 외부의 힘으로 쓰러져도, 자기 안에 야만인 심리가 잠들어 있음을 깨달은 다케우치에게 〈악몽은 잊힐지도 모르지만 피는 씻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는 전후의 지식인들이 피투성이 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민주화나 근대화라는 〈관념과 말의 권위에 기대어〉, 〈자기만은 빠져나간 것〉처럼 구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케우치는 이 논고에서 내셔널리즘과의 대결을 주장하며 〈더러움을 자기 손으로 씻지 않으면 안 된다〉, 〈오로지 용기로써 용기를 가지고 현실의 밑바닥을 뚫고 가라〉,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비겁하다〉 등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525-7)


11 자주독립과 비무장 중립─강화 문제에서 55년 체제까지


"1950년 6월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로 출동한 주일 미군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GHQ는 일본 정부에게 경찰예비대를 설립하도록 지시했다. 이것과 병행하여 미국은 미군의 점령을 종료하고 일본을 독립시켜서 반공 동맹국으로 육성하는 방침을 택했다." "그러나 미국은 점령 종료 후에도 극동의 출격 기지로서 일본을 확보하기를 원했다. 그 결과로 미군의 일본 주둔을 인정하는 미일 안전 보장 조약과 쌍을 이루는 형태로 1951년 9월에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미군 주둔에 반발한 소련과 중국, 인도 등은 이 강화 회의에 불참했다. 이 강화 회의를 앞두고, 미국 주도의 강화 조약과 미일 안보 조약을 긍정하는 '단독 강화론', 그리고 소련과 중국을 포함한 강화를 주장하는 '전면 강화론'이 대립했다. 이 전면 강화론을 주창한 것으로 잘 알려진 지식인 집단이 바로 '평화문제담화회'이며, 그런 논의 속에서 헌법 제9조도 주목받게 된다."(541)


"요시노 겐자부로는 1948년부터 평화문제담화회를 조직해 공산당으로부터 한발 떨어진 지점에서 평화 운동을 개시했다. 이 평화문제담화회는 1948년 7월에 유네스코에서 발표한 유럽의 사회 과학자 8인이 낸 평화 성명에 자극받아, 일본의 사회 과학자로서 평화 성명을 내고자 요시노가 조작했다." "그러나 (전쟁이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발생한다고 본) 공산당계 논자들은 냉담한 반응이었다. 유네스코의 헌장에는 〈전쟁은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성명은 인간성을 중시하고 사회 과학을 '인간의 학學'이라고 규정했다. 요시노는 여기에서 기존의 사회주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간의 이항 대립적인 도식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인간이 이루어 가는 평화로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말하자면 유네스코의 성명은 오쓰카 히사오에게 베버가, 마루야마에게는 근대 국민 국가의 이념이 그랬듯이, 전쟁 체험에서 태어난 심정을 표현할 때의 자극 매체가 되었다."(562-3)


"〈미국의 행동을 심판할 척도가 우리 손 안에 있다〉라는 논리는 당초부터 평화문제담화회에 존재했다. 1948년 12월의 토의에서 의장 아베 요시시게는 〈극동 재판은 평화와 문명의 이름으로써 일본 국민을 재판한 것입니다〉, 〈연합국이 평화와 문명의 이름을 가지고 우리를 재판한 이상, 반드시 우리를 향해 평화와 문명을 보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연히 그런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한다. 아베의 이 주장은 1949년 1월의 성명에도 담긴다." "요시노 겐자부로는 당시를 회상하며 〈극동 재판에서 일본 국민을 그처럼 재판했던 상대가, 지금 다시 전쟁을 하려는 것이며, 거기에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에 대한 불만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평화를 요구하는 것은 일본의 구질서와 현재의 동서 대립에 대한 양면적인 비판이 된다〉라고 말한다. 비무장 중립론과 호헌론은 미소라는 양 대국에 대한 자주독립의 의지 표시이자, 미국을 추종하며 부활을 꾀하는 일본의 구질서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569-70)


"전후 배상은 본래 평화의 문제와 불가분일 터였다. 그러나 패전 후의 궁핍한 경제 상태 속에서는 평화를 향한 바람이 우선시되고 배상 문제는 경시되기 쉬웠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에 가해진 가혹한 배상이 나치스가 대두하는 온상이 되었다는 역사도 존재했기에, 배상 청구가 억제된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전쟁 책임은 오로지 일본의 위정자가 일본 국민에게 끼친 피해를 묻는 것, 혹은 지식인의 처신 방법이나 주체성의 문제였다. 이처럼 전면 강화론자들 역시 솔직한 애국심에 의거했던 만큼, 대다수 '일본인'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결여하기 일쑤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발효로 자이니치 조선인 및 타이완인들의 일본 국적이 박탈되었지만, 그 문제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오키나와의 분리에 대해서는 지식인층에서 오키나와 주민에 대한 동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았지만, 일본 정부나 사회당은 오로지 영토 확보라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584-5)


"추방이 해제된 보수 정치가들이 대량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1953~1956년은 정치 제도가 전전으로 회귀할 위험이 가장 강했던 시기다. 개헌 준비뿐만 아니라 1954년에는 보안대가 자위대로 승격했고, 1956년에는 교육위원회의 공선제가 폐지되었다. 그 밖에 (남성 호주제 중심의) 가족 제도를 부활시키는 민법 개정이 계획되었고, 전후 개혁으로 해체된 내무성을 부활시키는 내정성內政省 설치 법안 등이 의회에 제출되었다." "이른바 '55년 체제'가 성립하면서 사회당의 좌파와 우파, 그리고 공산당 등은 양쪽 모두 1955년을 경계로 자기 당의 사회 구상을 보류함으로써 국민적인 호헌 운동에 참가했다. 이를 통해서 전전 체제로의 회귀를 저지했다는 의의는 분명히 컸다. 그러나 그 대가로 각자가 본래 지향했던 사회 구상을 서로 대결시켜 가는 역동성은 사라졌다. 그런 가운데 호헌, 평화, 민주주의라는 말이 보수 세력의 공세로부터 전후 개혁의 성과를 〈지킨다〉는 방위적인 슬로건이 뒤어 갔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592-4)


12 60년 안보 투쟁─전후의 분기점


"1951년 안보 조약에는 미국의 일본 방위 의무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미국에게 일본을 방위할 의무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안보 조약을 개정하는 지름길은, 일본이 헌법을 개정해서 재군비와 해외 파병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적어도 어떤 방법으로든 미국의 국제 전략에 공헌하지 않고서는 안보 조약을 보다 대등한 관계로 가져가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보수 정권의 생각이었다." "기시가 안보 조약 개정을 둘러싸고 미일 교섭을 추진했던 1958년은 내정에서도 충돌이 많은 해였다. 일교조 억압, 경관의 권한 대폭 확대 등을 둘러싼 일련의 충돌은 기시가 종래부터 개헌론자였던 점과 어우러져서, 안보 조약 개정과 전전 체제의 부활은 한 몸이라는 인상을 확대시켰다. 이제 안보 조약 개정은 단순한 외교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전후 일본의 거시적인 디자인을 둘러싼 대립이 되고 있었다. 그 대립은 1960년에 들어가서 큰 불을 뿜는다."(604-6)


"기시는 관료적인 권위주의, 미국에 대한 종속, 전쟁 책임의 망각, 그리고 비열함이라는, 전후사상이 혐오해 온 모든 것을 갖추었다. 쓰루미는 〈기시 수상만큼 멋지게, 쇼와 시대 일본의 지배자를 대표하는 자는 없다. 이보다 훌륭한 하나의 상징은 생각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일본에서 현재 벌어지는 일은 실질적으로는 패배 전에 일본을 지배했던 국가와 패배 후에 태어난 국가라는, 두 국가의 싸움이다〉라고 주장했다. 5월 19일의 안보 조약 강행 채결을 경계로 문제는 안보에 대한 찬반으로부터 '전전 일본'과 '전후 일본'이라는 '두 국가의 싸움'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기시에 대한 항의만큼 전후 일본에 대한 애국심을 공공연히 표명할 기회는 없었다." "그때 사람들은 전쟁의 기억을 상기하면서, 전후에 계속 품어 왔던 심정이 기시 노부스케라는 상징으로 응축되는 것을 느꼈다. 시미즈가 말했듯이 〈오랫동안 말로 표현되지 못했던 낡은 경험과 감정〉이 이제는 〈표현의 기회〉를 획득하려 했다."(615-7)


"안보 투쟁은 '시민'이라는 말이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정착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시민'이라는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움직임이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있었지만, 시민을 프티 부르주아와 동의어로 보는 공산당 주변의 인식은 뿌리가 깊었고, 이 말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보 투쟁 속에서 공산당의 권위가 실추되고 노동자나 농민에 의존했던 기존 조직으로부터 독립된 운동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표현하는 말로서 시민이 사용되어 갔다." "이런 시민은 내셔널리즘과 모순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후쿠다 간이치는 시민 정신을 상찬하면서 〈일본 국민이 처음으로 국민으로서의 책임에 나섰다〉, 〈실로 국민 국가 일본의 원리적 탄생을 예고한다〉라고 말했다. 역시 젊은 정치학자였던 사카모토 요시카즈는 좀 더 직접적으로 〈안보에 대한 도전이라는 형태로, 일본 역사에서 데모크라시와 내셔널리즘이 처음 손을 잡았다〉라고 주장했다."(630-2)


"5월 19일의 강행 채결에서 30일이 경과하면 참의원의 심의를 거치지 않아도 안보 조약은 자연 승인되었다. 그 기일인 6월 19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간바 미치코가 사망한 6월 15일, 아이젠하워의 도쿄 방문이 중지된 16일, 그리고 「폭력을 물리치고 의회주의를 지켜라」라는 신문의 공동 성명이 나온 17일, 국회는 연일 거대한 데모대로 포위되었지만, 기시 수상은 여전히 강경한 자세를 유지했다." "운동 측에는 결정적인 한 수가 없었고, 사회당과 공산당을 비롯한 혁신 정당은 구체적인 방침을 표명하지 못했다." "6월 18일, 데모대는 밤새워 국회를 포위했지만 마침내 시간은 0시를 맞이하고 안보 조약은 자연 승인되었다." "다음날인 20일에 참의원의 자민당은 야당의 허를 찌르고 안보특별위원회와 본회의를 단독으로 열어, 안보 관계 법안을 일거에 통과시켰다. 22일에는 미국 상원이 신안보 조약을 승인하고, 23일에 가서 기시 수상은 외상 공저公邸에서 비준서를 교환한 뒤, 내각 총사직을 공표했다."(654-5)


"이런 결과에 대해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시미즈 이쿠타로는 안보 자연 승인의 밤, 패배감에 무너져 울었다. 대조적으로 마루야마 마사오는 투쟁 속에서 실현된 질서 의식과 연대감의 압도적인 인상에 비하면 〈'자연 승인'의 순간 같은 것은 나의 뇌리 속에 하잘 것 없는 장소밖에 차지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승패의 평가가 어찌되었든 간에 안보의 자연 승인과 기시 수상의 퇴진 이후, 데모의 물결은 급격히 시들어 갔다. 애초에 5월 19일 이후 운동의 성황은, 안보 그 자체에 대한 반대보다도 기시에 대한 반감과 전학련으로 대표되는 소박한 정의감으로 뒷받침되었다. 기시가 퇴진하고 안보가 자연 승인되면서 소박한 정의감에서 보면 패배가 명확해진 이상, 운동의 퇴조는 피할 수 없었다." "기시를 대신해서 수상이 된 이케다 하야토는 취임 직후에 「소득 배증 계획」을 발표했고, 본격적으로 고도 경제 성장의 막이 오르려 했다. 그리고 전후 일본의 민주와 애국을 둘러싼 언설도 변동의 시대로 들어간다."(655-7)


3부


13 대중 사회와 내셔널리즘─1960년대와 전공투


"고도 경제 성장의 진전, 1963년 OECD 가입, 1964년 도쿄올림픽 등의 현상과 병행해 발생한 것이 체계적인 사상을 갖추지 않은 무자각적 내셔널리즘의 확산이다." "정치학자 마쓰시타 게이이치에 따르면, 생산력과 대중 매체의 발전으로 인해 서방 선진국에서는 문화와 생활 양식의 균질화가 진행 중이며, 계급 사회에서 대중 사회로 이행되었다. 거기에서는 계급 대립을 전제로 한 사회주의 혁명이 성립되지 않으며, 정치에 무관심한 대중이 주류를 차지한다. 그리고 과거에 마르크스가 〈조국을 갖지 않는다〉라고 말한 프롤레타리아트도 〈사회의 '소시민화'〉와 〈대중 민주주의〉로 〈자본주의 국가의 '국민'으로 전화〉하여 대중 내셔널리즘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중에 '단일 민족'이라는 말의 용법도 변화했다. 이 말은 1950년대에는 형성되어야 할 목표로서 좌파가 주창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로는 고대 이래의 기성사실을 가리키는 말로 보수 측이 주창하게 된다."(665-8)


"고도 경제 성장과 병행하여 생긴 현상이 하나 더 있었다. 전쟁 체험의 풍화이다." "전쟁 체험의 부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의 등장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의 기억이 차츰 형해화하면서 동시에 미화의 대상이 된 점이었다." "전쟁을 미화하는 전기물이 용전감투勇戰敢鬪나 순수무잡純粹無雜을 강조한 반면, 전쟁의 비극을 전하고자 하는 전쟁 체험물은 비극과 노고를 정서적으로 이야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양쪽은 정치적 입장은 반대였지만, 전쟁을 감상적으로 이야기한다는 점과 전후사상의 가장 큰 계기였던 굴욕과 회환의 상처에 닿는 부분이 적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1956년 히다카 로쿠로가 말한 바에 따르면 전쟁을 모르는 세대뿐만 아니라 전쟁 체험 세대에서도 〈전쟁이 이미 각자의 체험과 실감을 넘어선 추상물이 되기 시작〉했다." "체험자들에게만 통하는 폐쇄적인 표현은 점차 정형화되어, 회한을 감상으로 은폐하는 미사여구가 되어 버리기 쉬웠다."(671-4)


"그리고 고도성장이 진행되면서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 대두했다. 이런 비판은 평화로운 시대밖에 알지 못하고, 그런 상황에 권태를 느끼게 된 전후 세대의 공감을 불렀다. 전학련 주류파의 젊은이들과 친교가 있던 시미즈 이쿠타로는 1961년에 공산당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일정한 연령 이상의 인텔리는 전전 및 전시 중의 어두운 기억이 살아 있기 때문에, 평화와 민주주의가 전후의 양대 가치라는 점만으로도 제법 만족할 수 있지만, 젊은 녀석들은 매우 다르다. 전후에 소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양대 가치가 당연한 것, 평범한 것, 심지어는 지루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평화와 민주주의의 기만을 지적하는 젊은이들 중 많은 수가 1955년 이전에 다양한 헌법관과 평화관이 존재했다는 점을 몰랐다." "어쨌든 이 시기부터 패전 후에 존재했던 다양한 사상 조류와 개혁을 일괄해서 '전후 민주주의'라 총칭하는 방법이 급속하게 일반화되었다."(676-8)


"전후의 학제 개혁과 고도성장은 대학생의 급격한 대중화를 초래했다. 그에 더해 1960년대 중반부터 패전 후 베이비 붐 세대의 대학 진학이 이루어지면서, 진학률의 급상승과 더불어 수험 경쟁의 격화와 대학 설비의 부족이 일어났다. 그 결과로 출현한 것이 대학 입학 이전에는 입시 학원과 진학 학원의 증가이며, 대학 입학 후에는 대강당에서 마이크로 이루어지는 강의였다. 수험 전쟁, 메머드 대학, 매스 프로mass production(대량 생산) 교육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된 것도 이 시기였다." "수험 전쟁을 뚫고 도달한 대학에 열악한 설비와 대량 생산화된 교육 내용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런 학생들에게 기대에 대한 큰 배신이었다. 또한 1960년을 경계로 대학 졸업자의 완전 취업 상태가 성립했지만, 대학 졸업생의 급격한 증가 때문에 취직 가능한 직업은 평범한 것으로 변했다." "이런 사태는 큰 꿈을 안고 대학에 진학한 젊은이들이 자신의 미래가 제한되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688-9)


"이런 배경 속에서 1960년대 후반에는 각지의 대학에서 분쟁이 이어졌다. 마침내 1968년에는 니혼대학과 도쿄대학에서 학생의 대학 점거가 일어나, 전 학교의 학생을 규합한 전학공투회의全學共鬪會議가 결성되어 '전공투'라고 약칭되었다. 1965년 한일 회담 반대 투쟁 이래로 학생운동은 일시적으로 정체되었는데, 1967~1968년 이후에는 한 번에 불타올랐다. 이 전공투의 대학 점거는 이윽고 전국 각지의 대학에 파급되어, 전공투 운동이라고 총칭되었다. 이 전공투 운동은 많은 경우에 혁명이나 소외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언어를 쓰며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배경이 된 것은 학생의 대량화와 기존 대학 조직 간의 불일치이며, 아키야마 등이 말하는 〈엘리트적 의식과 존재 사이의 결정적 결락〉이며, 대형화되는 대학과 사회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진실을 되찾고 싶다는 욕구〉였다. 이런 배경이 없었다면 전공투 운동이 일부 활동가의 범위를 넘어서 그토록 퍼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690-1)


"전공투 운동에 참가한 세대는 전쟁과 기아를 경험하지 않았다. 당시의 신좌익계 활동가 중 한 명은 〈데모에 가게 된 것은, 아무 고생도 하지 않고 자라나 세상 물정 모르고 도움도 안 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무엇이든지 하고 싶다는 '성실한' 기분과, 시대의 분위기에 빠르게 감응하며 유행을 좇는 패거리의 '비일상'에 대한 동경이 동거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라고 회상한다. 때문에 당시의 전공투계 학생들의 수기에는 매스mass, 일상, 질서 등에 대한 반역을 이야기하거나, 〈자기 부정〉, 〈일상의 부정〉, 〈예속의 평화보다 자유의 투쟁을!〉 등이라 호소하는 것이 많다. 도쿄대 전공투의 어느 학생은 〈전공투는 어떤 대학을 만들고 싶은 것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들은 싸움 그 자체를 바란다〉라고 답했다. 이런 전공투계의 학생들이 싫어한 말은, 민주주의, 평화, 근대 시민사회, 근대 합리주의, 협상 등이었다. 그들에게 그것들은 기존 사회를 지탱하는 논리이며 혁명을 말리는 개량주의였다."(693-4)


14 '공적인 것'의 해체─요시모토 다카아키


"1955년경부터 널리 사용된 전중파戰中派라는 말은, 훗날에는 전쟁 체험을 겪은 세대 전부를 총칭하게 되었지만, 당초에는 패전 시에 10대 후반에서 20대 전반의 청춘기였던 세대를 가리켰다. 보다 나이가 많은(패전 시에 30세 전후) 마루야마 마사오와 다케우치 요시미의 세대를 전전파戰前派, 보다 소년이었던(패전 시에 10세 전후) 에토 준과 오에 겐자부로 등의 세대를 전후파戰後派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 전중파는 전시 중에 가장 중심적인 동원 대상이 되었고, 가장 사상자가 많았을 뿐 아니라, 중등·고등 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도 갖지 못했다. 또 그들의 유년기는 황국 교육이 격화된 시기였고, 게다가 극도의 언론 탄압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나 자유주의를 접할 수도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전쟁 상태에 놓여 있었던 그들에게는,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사상을 가진 인간이 있다는 것도, 전쟁 이외의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719-20)


"이런 까닭에 전중파 지식인들은 전쟁이야말로 정상이고 평화 쪽이 이상이라는 감각을 종종 이야기했다. 1956년 좌담회에서 무라카미 효에는 〈전쟁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감정으로 자라났다〉라고 말했고, 작가 미시마 유키오도 〈지금 쪽이 정상이 아닌abnormal 듯한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다〉, 〈끊임없이 '진짜가 아니다'라는 의식이 있다〉라고 응한다. 전후사상을 의제擬制라고 비파한 요시모토는 이런 세대에 속했다." "교양과 지식량에서 윗세대에 뒤지는 그들이 기댈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의 가혹한 부분을 경험했다는 자부심이었다." "또한 이 세대의 최대 무기가 된 것은, 전쟁에 비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했던 연장자들의 책임을 추궁하고, 그들을 비겁하다고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중파의 다수는 윗세대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면서도 자신의 전쟁 책임은 느끼지 않았다." "본래 전쟁에 비판적인 사상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전쟁에 항의할 용기가 없었다는 종류의 회한을 공유하지 않았다."(721-5)


"전중파 지식인들에게는 동세대 중에서도 특이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 가운데 전선에서 전투를 경험한 자가 적다는 사실이다. 사토 다다오는 소년 비행병으로, 시라토리 구니오는 해군경리학교생으로, 모두 군 부속 학교의 생도로 일본 내에서 패전을 맞이했다 무라카미 효에와 무라카이 이치로, 우메하라 다케시 등은 청년 장교 혹은 학도병이었지만, 전선에서 근무한 경험은 없으며 역시 일본에서 패전을 맞이했다. 그리고 전중파 지식인의 대표 격으로 여겨지는 미시마 유키오와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태평양 전쟁 중에 20세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병역을 경험하지 않았다." "또한 동세대 속에서도 순진한 전쟁관을 패전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 경험 없는 학생들이 중심이었다. 요시모토와 미시마처럼 징병 체험이 없는 자는 군대 내부의 부정과 린치, 전장에서의 학살 행위 등을 목격하는 일도 더더욱 없었고, 정부의 슬로건이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챌 기회도 없었다."(729-30)


"요시모토를 비롯한 많은 전중파 지식인들의 패전 묘사에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숭고한 이념에 불타 완전히 죽음을 믿었던 상태에서, 너무나 돌연하게 8월 15일을 맞이해서 국가에 대한 가치관이 격변했다는 것이 그 전형이다." "1955년경부터 전중파 지식인들이 이런 특권적인 패전관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그 이야기 방식은 전쟁을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전후 민주주의의 위선을 공격했던 신좌익계의 젊은이들은 이런 전중파의 이야기를 환영했다. 이런 이야기가 민중의 전쟁 체험이었다면 진보적 지식인이 반전의식을 품었다는 것은 기만이며, 그들은 침략 전쟁에 협력한 과거를 은폐했거나 혹은 민중과 동떨어진 특권적인 엘리트에 지나지 않았음이 입증되기 때문이었다. 거기서는 전중파 세대의 향수와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의 비판의식이 전후 비판이라는 형태로 공범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729-33)


"1960년 안보 이전의 요시모토는 목숨을 걸고 싸워서 사상과 행동의 뒤틀림을 해소하고, 이 세상에서 피안으로 간 사자인 대중으로부터 그런 반질서를 찾았다. 그러나 1960년 이후의 요시모토는 같은 대중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전사자가 아니라 모든 '공'적 질서를 무화하는 '사'생활에서 찾아 갔다. 물론 그 사적인 존재는 마루야마가 주창한 바와 같은 근대적 책임 주체로서의 개인이나 시민은 아니었다." "요시모토가 주창하는 대중은 〈실로 국가 자체를 넘어 버린다〉. 그 대중이란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감성의 질서와 무관한 존재이며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사적인 존재였다. 1963년의 평론 「묘사와 거울」에서 요시모토는 기존의 정치를 해체하는 것으로서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의 힘〉을 상찬한다. 그는 〈생산의 고도화가 촉진된 대중 사회의 힘〉이야말로 〈스탈린주의의 해체를 촉진〉했으며, 이것은 〈긍정적으로 다루어야 할 상징〉이라고 말한다."(774)


"요시모토의 저작은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았다. 그것은 고도성장 속에서 권위와 죄책감의 제약을 뿌리치고 자기 좋은 길을 걷는 것을 정당화해 줄 사상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자기 좋을 길을 걷는다는 그 바람은, 혹은 전공투 운동을 비롯해 권위에 반항하는 형태로, 혹은 죄책감을 벗어나 사생활에 몰두하는 형태로 각각 표현되었다. 요시모토의 사상은 그런 움직임을 촉진하는 촉매로 기능했다. 어떤 의미에서 요시모토 사상의 매력은 다양한 모순을 혼연히 포함한 점에 있다. 거기서는 철저 투쟁을 말하면서 사생활에 몰두하는 것이 궁극의 반질서로 여겨졌다. 〈대중의 원상原像을 투입하자〉라면서,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초월에 도달하는 것이 지향해야 할 〈자립〉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그런 혼돈 속에서 그때그때 자기의 바람에 응답해 주는 말을, 시를 읽듯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바람에 지지를 받으며 민주주의 신화를 비판한 요시모토는, 그 자신이 신화가 되어갔다."(784-5)


15 시취屍臭에 대한 동경─에토 준


"에토 준은 만주 사변 이듬해인 1932년에 태어났다. 소국민小國民 세대 등으로도 불리는 이 세대는 패전 시에 10세 전후에서 10대 초반이었다. 패전 시에 31세였던 마루야마 등의 전전파는 물론, 패전 시에 20세였던 요시모토 등의 전후파보다도, 더욱더 빈틈없이 전쟁과 황국 교육에 물들어서 자라난 것이 이 소국민 세대였다." "그러나 패전은 금세 찾아왔다. 전쟁에 헌신하는 것 이외의 가치관을 알지 못했던 소년 소녀들에게, 그것은 세계의 붕괴를 의미했다. 자기를 질타했던 교사가 변모하여 미국과 민주주의를 찬미하기 시작한 충격도 컸다." "때문에 이 소국민 세대는 전쟁으로 상처를 입었지만 전쟁 체험의 가혹함을 이야기한다는 판에 오르면, 자기들이 연장자보다 뒤처진 지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를 품고 있었다. 게다가 전쟁 체험에 집착하는 전중파에 대한 반발이 더해져서 자기들은 전쟁의 상처와는 무관한 전후파라고 강조하는 경향이 보였다."(789-95)


"전쟁의 상흔은 그들보다 윗세대인 전전파와 전중파의 경우, 회한이나 굴욕과 같은 사회적인 기억으로 새겨졌다. 그러나 패전 시에 10세 전후로, 자기의 체험을 위치 지을 사회적인 언어를 충분히 갖추지 못했던 소년 소녀들은 보다 추상적인, 표현되지 않는 억압감으로서 전쟁의 압력과 죽음의 공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소국민 세대의 소년들은, 태어날 때부터 병사로서 죽을 것을 교육받았다. 그것은 동경과 동시에 공포이기도 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겉으로 드러내고 공언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자신의 내심으로 인정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그런 탓에 그들은 죽음의 공포를 무의식 중에 억압했다. 그리고 그들의 2차 성징기가 전쟁과 겹친 까닭도 있어서, 억압된 죽음의 공포는 종종 성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각인되는 형태가 되었다." "이런 죽음과 성의 이미지 결합은 체계적인 언어를 갖지 못했던 소국민 세대의 내부에서, 신화처럼 혼돈된 기호의 난무로 기억되었다."(802-3)


"패전 직후의 에토는 다자이 오사무에 심취했다. 사양족斜陽族이라는 유행어까지 낳은 다자이의 문학은 전쟁으로 절망과 몰락을 강요당한 청년층에게 인기를 모았다. 에토는 〈우리 집이 급속히 무너졌을 때, 다자이 오사무를 숙독했던 흔적은, 아마도 평생 사라질 것 같지 않다〉라고 회상한다." "또한 에토는 〈나는 그 무렵 다자이 오사무를 통해 일본 낭만파를 바라보며, 혹은 일본 낭만파만을 바라보았다〉고 말했다." "에토가 다자이에서 찾아낸 것은 일본 낭만파를 상징하는 죽음의 향기였다. 에토에게 그것은 그가 태어났고 자란 전쟁 시대에 가득 찼던 향기이며 잃어버린 유년 시절을 함께한 친어머니와 할머니들의 향기였다. 다자이로 상징되는 달콤한 시취는 유년 시절에 각인된 '물컹거리는 추악한 것'으로부터 떠도는 향기이며, 에토에게는 공포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취의 유혹을 거부하고 전후의 현실 생활에 맞서는 것이, 그에게는 〈어른이 된다〉라는 의미였다."(811-2)


"원래 에토는 이 세대의 젊은 지식인들이 으레 그랬듯이, 마루야마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천황제나 전중파 지식인, 그리고 안보 투쟁의 지도자 등을 비판할 때 마루야마의 〈무책임의 체계〉라는 말을 상용했다. 정치는 결과 책임의 문제이며, 동기의 순수함을 관계가 없다는 전학련 평가도 마루야마의 영향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런 마루야마가 자기가 기대했던 것 같은 견해를 보이지 않은 점에 에토는 분노를 보였다. 에토가 보기에 마루야마가 8월 15일(패전의 날)을 기준점으로 현상의 일본을 비판하면서 공적 관심의 재건을 호소한 것은, 관념에 기대서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려는 자기 절대화였다. 에토에 따르면 〈'전후'에 정의의 실현을 본다는 사고방식〉은 〈전쟁에 어떤 도덕적 가치를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란 힘과 힘의 충돌에 불과하고, 전후 개혁도 미군에게 필요한 점령 정책에 불과했다. 평화 또한 신성한 가치 같은 것이 아니고 싸움을 회피하는 일상적 노력이라는 산문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834-5)


"전후사상에서 에토의 특징은, 구세대의 올드 리버럴리스트와는 달리 자기의 아이덴티티 문제에서 보수사상을 세워 간 점에 있었다. 올드 리버럴리스트들은 전쟁 전 중산 계층의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 자기를 형성했고, 거기에서 길러진 가치관과 생활 감각을 기초로 하여 전후의 사회 변동을 비판했다. 그러나 에토는 올드 리버럴리스트들과 출신 계층은 겹치지만 소년기에 몰락을 경험했기 때문에 안정적인 아이덴티티를 형성할 수 없었다. 전후 사회에 허구감을 품는 것이나 죽음과 국가에 대해 양가적 태도를 가진 것은 그 세대의 문학가들에게 적지 않은 현상이다. 그러나 에토의 특징은, 생모의 죽음이 전쟁의 개시와 겹쳤고 아버지와의 갈등이 패전과 겹쳤다는 우연에서, 이런 양가성과 거부감이 '집'의 문제와 혼연일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에토는 패전의 아픔을 잊기 위해 전후 사회의 현실을 거부하고, 국가라는 백일몽을 쌓아 올리며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희구해 갔다."(856-7)


16 죽은 자의 월경─쓰루미 슌스케, 오다 마코토


"전쟁 전 지식인의 기본 교양은 헤겔이나 마르크스 등의 독일 철학이었고, 교토학파 등은 그것을 바탕으로 한 난해한 철학 용어로 전쟁을 미화했다. 그러나 쓰루미 슌스케는 미국에서 익힌 논리 실증주의와 프래그머티즘, 기호론 등을 무기로 이런 부적 같은 언어의 비합리성을 철저히 비판했다." "쓰루미는 패전 후 철학의 역할로 비판, 지침指針, 동정同情의 세 가지를 든다. 이 가운데 비판과 지침은, 전시 중에 횡행한 비논리적인 기호 사용법을 비판하고 장래를 향한 합리적 지침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쓰루미 사상의 특징은 그가 철학의 세 번째 역할로 든 동정에 있다. 쓰루미가 여기서 말하는 동정은 타자에게 연민을 쏟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동정은, 타자가 자기와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 위에서, 타자와 공감하고 연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즉 사람들의 근저에 있는 〈만인에게 공통되게 존재하는 부분의 인자들〉을 찾아냄으로써 공감과 연대의 기반을 포착하는 일이 철학의 임무라는 것이다."(878-80)


"동시에 미국에서 언어 심리학을 배운 바 있는 쓰루미는 일상적인 기본 언어에는 민족어의 다양성을 초월하여 인류 공통의 룰이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쓰루미의 보편 지향이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그의 대중 지향만이 아니라 내셔널리즘과도 대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서양에서 배운 보편사상(이라고 칭하는 것)을 내세워서 대중을 계몽하려는 지식인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그 사상을 벗겨 내고 내려가면 지식인들 역시 대중과 같은 일상어를 사용하며, 〈조상 이래의 민족문화로 만들어진 자신〉을 찾아낸다. 그것은 지식인과 대중이 계층 대립을 넘어 결합하는 '민족'의 장소다. 그러나 그 민족문화를 또한 벗겨 내고 내려가면 〈민족정신 밑바닥의 그 어떤 이름도 없는 부분〉이 얼굴을 내민다. 이렇게 해서 〈민족주의를 통한 인터내셔널리즘의 길〉이 열린다. 이런 근저에 있는 이름조차도 없는 부분을, 쓰루미는 〈민족주의와 무정부주의가 함께 태어나는 장소〉라고 부른다."(882-4)


"이런 근저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인 대중은 일본의 대중이면서 동시에 마이너리티를 배제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는 1959년 좌담회에서 〈일본 사회의 밑바닥을 꿰뚫고 나가면, 거기에 국제적인 시점이 열려 온다〉라고 말하며, 일본 사회의 '밑'에 존재하는 조선인, 부라쿠민, 창부들 등의 존재를 든다." "나아가 쓰루미의 경우에 이런 틀을 넘어선 근저의 지점은, 일종의 종교 감각과 이어졌다." "원래 영어에서 말하는 영매medium는 인간의 마음을 매개하는 '미디어'와 같은 말이며, 쓰루미는 전후 일본의 대중문화 연구와 미디어 연구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또한 동정이라고 번역되는 sympathy는 정신 감응telepathy과 마찬가지로, 언어logos로는 표현 불가능한 심정pathos이 인간 개체 간의 경계를 넘어 공진synchronize을 일으키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 까닭에 sympathy는 배려, 연민 등과 함께 공감이나 교감 작용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쓰루미가 말하는 동정의 뉘앙스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885-7)


"오다 마코토가 받은 '치명적인 상처'란 1945년 8월 14일의 오사카 공습이었다." "전후에 오다는 소련 참전과 8월 9일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이후, 그 다음 날인 8월 10일에 일본 정부가 이미 포츠담 선언 수락을 고한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8월 14일에 오사카가 공습을 받은 것은, 일본 정부가 국체호지라는 조건을 명시적으로 담고자 하는 데에 집착해서 포츠담 선언 수락의 정식 표명을 주저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8월 14일 공습은 전혀 무의미한 살육이었다. 거기에는 기껏해야 항복 조건과 체면에 집착하며 망설이던 일본 정부와 거기에 압력을 가한 미국 정부 사이의 알력이 존재한 데 불과했다. 그들의 죽음은 '아시아 해방을 위해 순국한 영웅'이라는 우파의 사상으로도, '평화의 주춧돌이 된 비극'이라는 좌파의 사상으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다. 오다는 후에 〈거기서 죽은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죽었는가. 어린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의 '전후'는 시작되었다〉라고 말한다."(905-7)


"오다는 자기의 전쟁 체험으로부터 〈하나의 원리를 키워갔다〉라고 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모든 순간에 위대한 것은 아니다, 바른 것은 아니다, 성실한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며, 그러나 동시에 〈어떤 인간이라도 어느 때에는 위대할 수 있다, 올바를 수 있다, 성실할 수 있다, 아름다울 수 있다〉라는 원리였다. 이것은 아라 마사히토가 패전 후에 『긴다이분가쿠』에 발표한 논고인 「제2의 청춘」의 말미에 쓰인 〈진부하고 찬연한, 범속凡俗과 닮았으면서도 영웅적인, 추악으로 가득 찬, 그러면서도 한없이 화려한〉이라는 인간관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다가 오사카 공습에서 체험한 '뭐든지'를 표현한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 모든 의미 부여와 낭만주의를 거부하는 인간상을, 오다는 '보통'의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그 보통이란 이상한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확산되어서 종잡을 길이 없는 뭐든지를 표현한 말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쓰루미 슌스케의 대중과도 겹쳐졌다."(923)


"1960년대에 전공투 운동과 함께 주목을 모은 것이 베헤렌이다. 베헤렌은 고정된 조직 형태를 취하지 않고 시민의 자유 참가라는 운동 방식을 내세워서 이후의 시민운동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베헤렌은 그 표면적인 무이론無理論적인 모습의 이면에서, 프래그머티스트 철학자(쓰루미 슌스케)와 고대 그리스를 공부한 작가(오다 마코토)가 창설 역을 맡은, 철학적인 요소가 짙은 운동이었다. 거기서 이루어진 것은 개인이 어떻게 타자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국가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자기를 묻는 질문이었다. 오다 마코토는 1992년에 출판된 『'베헤렌', 회고록이 아닌 회고』에서 〈문제는 자기 자신이었다〉라고 말한다. 나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될 수 있을까, 그 우리의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어떤 성격일 수 있을까가 그 문제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되묻는 과정에서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공적인 것의 바람직한 모습을 모색하는 한 궤적을 남겼다."(863, 951)


결론


"전후사상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은 그것이 전쟁 체험이라는 국민적인 경험에 의거했다는 것이다. 전쟁 체험은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을 심어놓았다. 거기서부터 기존의 언어와 사상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많은 전후 지식인들의 경우, 전쟁 체험을 직접 이야기하는 일은 적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상처였을 뿐만 아니라, 언어로 용이하게 표현할 수 없는 체험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체험을 직접 이야기하는 대산 많은 사상을 만들어 냈다. 동시에 미군의 점령이라는 식민지 상황과 미국 문화의 급격한 침투, 그리고 도시와 농촌의 거대한 격차 등은 현대 제3세계의 지식인들이 직면한 상황과 유사하기도 했다. 서양 근대에서 모델을 찾는 데 대한 양가적인 태도와, 지식인이 민중을 어디까지 대변할 수 있느냐는 문제도, 1950년대의 일본에서는 절실한 과제였다."(955-60)


"그러나 이런 전후사상의 강점은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다. 우선 전후사상은 전쟁 체험이 만들어 낸 국민 공동체의식에 의거했기 때문에, 종종 오키나와나 조선 등이 시야에 들어 있지 않았다. 시야에 들어 있는 경우에도 오히려 일본 민족주의의 강화 요인이 되는 방향으로 작용한 사례가 많았다. 이들은 전쟁 체험에 따른 국민 공동체 의식이 풍화되고, 대중 내셔널리즘이 이것을 대신한 1960년대 후반 이후에야 주목받게 된다. 또한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전후사상이 너무나도 남성적이었던 점도 부정할 수 없다. 무사도, 남자다움, 부끄러움을 알라, 팡팡 문화 등의 말이 빈출하는 것은, 좋든 나쁘든 전후사상의 한 특징이다." "전후 사상의 최대 약점은, 말로 이야기할 수 없는 전쟁 체험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전쟁 체험이 없는 세대와 공유할 수 있는 말을 만들지 못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전후사상은 근대나 주체성이라는 말의 배경이 된 전쟁의 기억을 공유하지 않은 세대에 대해서는 설득력을 잃어 갔다."(960-2)


"또한 동시에 전후사상의 붕괴 감각은, 질서가 안정된 고도성장기 이후에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갔다. 1955년을 경계로 혼란과 개혁의 시대였던 '제1의 전후'가 끝나고 안정과 성장의 시대인 '제2의 전후'가 시작되는 가운데, 이른바 55년 체제의 이름하에 보수와 혁신이라는 세력 도식이 고정화되었을 때, 전후사상의 최전성기는 이미 끝나 있었다. 그리고 전후 태생의 좌파에게 전후 민주주의란 보수와 혁신의 형해화한 대립 도식 중 일부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과거 마루야마 마사오 등은 세계와 미래의 불안정함을 전제로 국가의 건설에 참가하는 국민주의를 주창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종종 전후 태생의 세대에게 기존 질서의 수중으로 들어간 '건설적'인 사상으로만 보이게 되었다. 또한 전쟁 체험 세대의 전쟁 기억도, 1960년대부터 급속히 풍화되어 갔다. 언어가 되지 않는 심정을 대신해서 나타난 것은, 굴욕의 상처를 은폐하고, 감상적인 이야기로 무해화된 전쟁 체험담이었다."(962)


"일본이 고도성장을 이룬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갖가지 설이 있지만, 냉전기 국제 조건의 호혜를 받았다는 것이 그중 하나다. 일본을 아시아에서의 중핵적인 반공 공업국으로 육성한다는 미국의 전략이 미국 및 동남아시아 시장을 일본에 가져 왔고,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특수를 주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제 냉전기에 차지했던 특권적인 국제적 위치를 잃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이 민주화를 이루었고, 냉전 후의 중국이 옛 서방 국가들과 활발히 경제 교류를 하게 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아시아 유일의 공업화된 자유 민주주의 국가였던 시대는 끝났다." "이런 국내적·국제적인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아시아에 대한 전쟁 책임 논의와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비롯한 우파의 대두가 일어난 사실이, 제3의 전후에서 일본 내셔널리즘의 정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의들의 공통점은 전후에 대한 되묻기다."(979-80)


"일반적으로 전후 지식인은 권력 기구로서의 국가는 비판했지만 내셔널리즘에는 오히려 긍정적이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국가라는 단위와는 별개의 내셔널리즘을 이야기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국가에 맞서는 시민이라는 표현도, 당초는 일종의 내셔널리즘으로서 나타난 것이며, 국가에 맞서는 내셔널리즘이었다. 물론 마루야마의 표현을 역전시키자면 〈그것도 내셔널리즘이라 불러야 할지는 각자의 자유〉지만, 어떤 형태로든 공동성과 공공성을 상정하는 한, 넓은 의미의 동포애를 전부 부정할 수 있을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물론 필자는 내셔널리즘이라 불리는 현상의 부정적인 면을 알고 있으므로, 그 말의 복권을 주창할 의지는 없다. 또한 본래의 내셔널리즘을 가정하고 그것으로부터 현재의 내셔널리즘을 일탈 등으로 비판할 생각도 없다. 단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내셔널리즘이 바꾸어 읽기로 변용되는 것은 꼭 특이하거나 신기한 현상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이다."(992-5)


"자기가 자기라는 사실을 감촉하면서, 타자와 공동共同하는 '이름이 없는' 상태를, 전후 지식인들은 혹은 민족이라고 혹은 국민이라고 불렀다. 그것을 내셔널리즘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무의미하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은, 전후사상이 '민주'와 '애국'이라는 내셔널리즘의 말로써 표현하고자 시도해 온 이름 없는 것을, 말의 표면적인 상이점을 구별해서 받아들이고, 그것에 현대와 어울리는 형태를 부여하는 바꾸어 읽기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달성될 때, 전후의 구속을 진정으로 넘어설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을 통독한 독자는 이미 그것을 위한 준비 작업을 마쳤다고 할 수 있다. 그때 그 이름 없는 것에 결과적으로 부여되는 것, 그 가령의 명칭이 무엇이 될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도 내셔널리즘이라 불려야 할지는 각자의 자유에 맡기자.〉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는 이 이름 없는 것을 과거에서 찾고, 현재에서도 찾고, 또한 미래에서도 찾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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