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한길그레이트북스 22
마루야마 마사오 지음, 김석근 옮김 / 한길사 / 1997년 3월
평점 :
품절


제1부 현대 일본정치의 정신상황


제1장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일본 국가주의가 '초'(超)라든가 '극단'(極端)과 같은 형용사를 앞에 달고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근대국가는 국민국가(nation state)로 불리고 있듯이, 내셔널리즘은 오히려 그 본질적 속성이었다. 그처럼 일반적으로 근대국가에 공통된 내셔널리즘과 '극단적인' 그것과는 어떻게 구별될 것인가. 사람들은 곧바로 제국주의 내지 군국주의적 경향을 들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이라면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초기의 절대주의 국가는 예외없이 노골적인 대외적 침략전쟁을 행하고 있으며, 이른바 19세기 말의 제국주의 시대를 기다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력적인 팽창 경향은 끊임없이 내셔널리즘의 내재적 충동을 이루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본의 국가주의는 단순히 그러한 동기가 '더' 강력하였고, 발현된 방식이 '더' 노골적이었다는 것 이상으로 대외팽창 내지 대내적 억압의 정신적 원동력에서 질적 차이를 찾아낼 수 있다는 점에 의해서 비로소 참된 울트라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47)


"유럽의 근대국가는 종교개혁에 뒤이어 16, 17세기에 벌어진 종교전쟁의 한가운데서 성장했다. 그리하여 형식과 내용, 외부와 내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라는 형태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고, 사상·신앙·도덕의 문제는 '사적인 일'로서 그 주관적 내면성이 보증되고, 공권력은 기술적인 성격을 지닌 법 체계 속에 흡수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메이지 이후 근대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그와 같은 국가주권의 기술적·중립적 성격을 표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의 국가주의는 내용적 가치의 '실체'라는 것에 어디까지나 자신의 지배근거를 두려고 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주권국가는 쇼오군과 기타의 다른 봉건적 권력의 다원적 지배가 천황을 향하여 일원화되고 집중화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정령(政令)의 귀일(歸一)'이라든지 '정형일도(政刑一途)'로 불리는 그같은 과정에서 권위는 권력과 일치하였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내면적 세계의 지배를 주장하는 교회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47-8)


"국가가 국체에서 진선미(眞善美)의 내용적 가치를 점유하는 곳에는, 학문도 예술도 그러한 가치적 실체에 의존하는 길 외에 달리 존립할 수 없다. 게다가 그런 의존은 결코 외부적 의존이 아니라 내면적인 그것이다. 국가를 위한 예술, 국가를 위한 학문이라는 주장의 의미는 단순히 예술이나 학문 나름의 국가적 실용성의 요청만은 아니다. 무엇이 국가를 위한 것인가 하는 내용적인 결정을 '천황 폐하와 천황 폐하의 정부에 대해서' 충성의 의무를 지니고 있는 관리가 내린다는 점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내면적으로 자유이며, 주관 속에 그 정재(定在, Dasein)를 가지고 있는 것은 법률 속에 들어와서는 안된다〉(헤겔)는 주관적 내면성의 존중과는 반대로, 국법이 절대가치인 국체로부터 흘러나오는 한, 자신의 타당성의 근거를 내용적 정당성에 기초지움으로써 어떠한 정신영역에도 자유자재로 침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일본에서는 사적인 것이 '단적으로' 사적인 것으로 승인된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50)


"이러한 입장은 또 윤리와 권력의 상호이입으로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주권이 윤리성과 실력성의 궁극적 원천이며 양자의 즉자적 통일인 곳에서는 윤리의 내면화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끊임없이 권력화로의 충동을 지니고 있다. 윤리는 개성의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곧바로 외적인 운동으로 다가오게 된다. 국민정신총동원과 같은 것이 거기서의 정신운동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이다." "더욱이 윤리가 권력화됨과 동시에 권력 역시 끊임없이 윤리적인 것에 의해서 중화되면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는 조심스러운 내면성도 없으며, 노골적인 권력성도 없다. 모두가 시끌시끌하지만, 동시에 모두가 소심해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토오죠오 히데키(1884~1948)는 일본적 정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권력의 이른바 왜소화는 정치적 권력에 머물지 않으며, 무릇 국가를 배경으로 한 모든 권력적 지배를 특징짓고 있다."(53-5)


제2장 일본파시즘의 사상과 운동


"일본의 파시즘 이데올로기에서 특히 강조되는 점은, 첫째로 가족주의적 경향입니다. 가족주의가 특히 국가 구성의 원리로서 높이 내세워지고 있다는 것, 일본의 국가구조의 근본적인 특질이 언제나 가족의 연장체로서, 즉 구체적으로는 가장(家長)으로서의 국민의 '총본가'(總本家)로서의 황실과 그 '적자'(赤子)에 의해 구성된 가족국가로 표상(表象)된다는 것, 게다가 그럴 경우 예를 들면 사회유기체설처럼 단순히 비유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실체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다는 것, 단순히 이데아로서 추상적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에 역사적 사실로서 일본국가가 고대의 혈족사회의 구성을 그대로 보존·유지하고 있다는 식으로 주장되고 있다는 것, 그것이 특히 일본 파시즘 운동의 이데올로기에서의 커다란 특질입니다. 이같이 가족국가라는 생각,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충효(忠孝) 일치의 사상은 일찍이 메이지 이후의 절대국가의 공권적 이데올로기였습니다."(78-9)


"다음으로 일본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특질로서 농본주의적 사상이 대단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본래 파시즘에 내재되어 있는 경향인 국가권력 강화와 중앙집권적인 국가권력에 의해 산업·문화·사상 등 모든 면에서 강력한 통제를 가하게 되는 그러한 것들이, 거꾸로 지방 농촌의 자치에 주안점을 두어 도시의 공업적 생산력의 신장을 억누르려는 움직임에 의해 저지당하는 결과가 되어버리는데 이것이 하나의 커다란 특색입니다." "일본자본주의의 발전이 시종일관 농업부문의 희생 하에 이루어졌으며, 또 국권과 결부된 특혜 자본을 추축으로 하여 신장되어왔기 때문에, 공업의 발전도 현저하게 파행적인 것으로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메이지 이후 그런 급격한 중앙의 발전에 뒤떨어진 지방적 이해를 대표한 사상이 끊임없이 위로부터의 근대화에 대한 반발로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전통이 파시즘 사상에도 흘러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80-4)


"일본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세번째 특질로서는, 이른바 대아시아주의(大亞細亞主義)에 기초한 아시아 제 민족의 해방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 파시즘 속에는 자유민권운동 시대로부터의 과제인 아시아민족의 해방, 동아시아를 유럽의 압력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동향이 강하게 흘러들어가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거의 불가피하게 일본이 유럽 제국주의에 대신하여 아시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사상과 서로 얽혀버리게 된 것입니다(동아협동체론(東亞協同體論)에서 동아신질서론(東亞新秩序論)으로의 전개를 보라). 일본이 어쨌든 간에 동양에서 최초로 근대국가를 완성하고 '유럽의 동점(東漸)'을 막아낸 국가라는 역사적 지위로 인해, 일본의 대륙발전 이데올로기에는 시종일관 동아시아해방이라는 측면이 붙어다니고 있습니다. 물론 세월이 흐를수록 그런 측면은 제국주의 전쟁의 단순한 분식(粉飾)이라는 의미를 강화해가게 됩니다."(95-6)


"다음으로 일본의 파시즘 운동의 운동형태에 어떠한 특질이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생각나는 것은 일본의 파시즘이 군부 및 관료라는 '기존의 국가기구 내부'의 정치세력을 주요한 추진력으로 하여 진행되었다는 것, 이른바 민간의 우익세력은 그것 자체의 힘으로 신장되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2기에 이르러 군부 내지 관료세력과 연결되면서 비로소 일본정치의 유력한 인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탈리아의 파쇼나 독일의 나치스가 물론, 각기 그 국가의 군부의 지원은 받았지만 어쨌든 간에 국가기구의 '바깥으로부터', 주로 민간적인 힘의 동원에 의해서 국가기구를 점거했던 것과 현저하게 다릅니다." "일본의 파시즘 운동은 대중을 조직화하는 데 큰 열의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소수의 '지사'(志士) 운동으로 시종일관했습니다. 하나의 영웅주의, 즉 '지사' 의식이 그 운동의 대중화를 억제했던 것입니다."(96-7)


제3장 군국지배자의 정신형태


"히틀러는 1939년 8월 22일, 바로 폴란드 침공 결행을 앞두고 군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여기서 선전가들을 위해서 전쟁을 개시하는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그것이 지당한 논의인지 아닌지는 관계가 없다. 승자는 훗날 우리가 진실을 말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질문을 받지 않을 것이다. 전쟁을 개시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정의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요는 승리에 있는 것이다.〉 참으로 가차없는 단정이다. 이같은 단정적인 언사는 일본의 어떠한 군국주의자도 감히 입에 담지 못했다. '이기면 관군(官軍)'이라는 생각이 아무리 마음을 차지하고 있어도, 그것을 공공연하게 자신의 결단의 원칙으로 드러낼 수 있는 용기는 없었다. 도리어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은폐하고 도덕화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일본의 무력에 의한 다른 민족 억압은 언제나 황도(皇道)의 선포이며, 다른 민족에 대한 '자혜로운 행위'로 생각된다."(139-40)


"일본 지배층을 특징짓는 이같은 왜소함을 가장 노골적으로 세계에 보여준 것은 전범자들의 한결같은 전쟁책임 부정이었다. 키난 검찰관의 최종 논고를 보자. 〈전직 수상, 각료, 고위의 외교관, 선전관, 육군의 장군, 원수(元帥), 해군 제독 및 궁내대신들로 구성된 현재 25명의 피고 전원으로부터 우리는 하나의 공통된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곧 그들 중의 누구 한 사람도 이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14년이란 기간에 걸쳐서 숨쉴 틈도 없이 일어난 일련의 침략행위인 만주사변, 이어서 일어난 중국전쟁 및 태평양전쟁의 어느 경우에도 그런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맡고 있던 지위의 권위, 권력 및 책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또 그것 때문에 전 세계가 깜짝 놀랄 정도로 그들 침략전쟁을 계속하고 확대해온 정책에 동의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노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주장합니다.〉"(146-7)


"피고들의 자기변호가 지닌 두 가지 논리적 광맥 중 하나는 기정 사실에 대한 굴복이며, 다른 하나는 권한으로의 도피다." "기정 사실에 대한 굴복이란, 이미 현실이 형성되었다는 것이 그것을 결국에는 시인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피고들의 답변에 공통되고 있는 것은, 이미 결정된 정책에는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은 이미 시작된 전쟁은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논거이다." "만주사변 이래의 정치적 사건이나 국제협정에 거의 반대했던 취지를 말하고 있는 피고들이 구술서를 읽어보면, 실로 그러한 일련의 역사적 과정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천재지변 같은 느낌을 안겨준다." "여기서 '현실'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것 혹은 만들어져가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서, '만들어져버린 것', 아니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어디선가 일어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따라서 현실은 언제나 미래에의 주체적 형성으로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흘러온 맹목적인 필연성으로 파악된다."(150-3)


"토오쿄오 재판의 전범자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자신의 무책임을 주장하는 제2의 논거는 소추(訴追)되어 있는 사항이 관제상의 형식적 권한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고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되면 언제라도 법규에 규정되어 있는 엄밀한 직무권한에 따라서 행동하는 전문관리(Fachbeamte)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토오가 군무국의 역할에 대해 한 다음의 말은 실로 함축성으로 가득 차 있다. 〈육군대신은 각의에서 결정한 사항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적 사무기관이 필요합니다. 군무국은 바로 그런 정치적 사무를 담당하는 기관입니다. 군무국이 하는 것은, 그런 정치적 사무이지 정치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것이 무토오의 군무국장으로서의 바람직한 정치적 활약의 정당화 근거이다. 그의 일은 '정치적' 사무이기 때문에 정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정치적 '사무'이기 때문에 정치적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160-4)


제5장 일본에서의 내셔널리즘


"동양 국가들에서의 소박한 민족감정은 어디서나 우선적으로는 바깥으로부터 밀려오는 유럽 세력의 압력에 대한 반작용의 형태로 일어났다." "이 제1단계에서의 내셔널리즘을 근대적 내셔널리즘과 구별하여 '전기적'(前期的) 내셔널리즘이라 부른다면, 그 전형적인 표현이 곧 '양이'(攘夷) 사상이었다." "양이 사상의 특징은 살펴보면, 첫째로는 그것이 지배계급에 의해 그들의 신분적 특권유지 욕구와 떼놓을 수 없게 결부되어 나타났기 때문에 거기서는 국민적인 연대의식이라는 것이 희박하고, 오히려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서민의 소외, 아니 적대시를 수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거기서는 국제관계에서의 대등함이라는 의식이 없으며, 오히려 국내적인 계층적 지배의 눈으로 국제관계를 보기 때문에 이쪽이 상대방을 정복 내지 병탄(倂呑)하느냐, 아니면 상대방에 당하느냐, 문제는 처음부터 양자택일이다. 따라서 어제까지의 소극적 방어의식이 갑자기 내일은 무제한의 팽창주의로 변하게 된다."(201-2)


"여타 아시아 국가의 내셔널리즘이 구지배구조와 제국주의의 유착에 맞선 내셔널리즘과 사회 혁명의 내면적 결합이라면,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일찍부터 국민적 해방의 원리와는 결별하고, 거꾸로 그것을 국가적 통일이라는 이름 하에 억눌렀다." "자아의 감정적 투사로서의 일본제국의 팽창은 그대로 자아의 확대로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시민적 자유의 협애함과 경제생활의 궁핍함에서 비롯되는 실의(失意)는 국가의 대외적 발전 속에서 심리적 보상을 찾아냈다. 끊임없이 대외적 위기감을 고취시키면서 지배층은 역사상 보기드문 교묘한 국가 술수에 의해서 그런 국민감정의 동원에 성공했으며, 사회적 분열의 모든 조짐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조직적 동원을 통해 주입된 국가의식은 정치적 책임의 주체적인 담당자로서의 근대적 공민(公民, Citoyen) 대신에 모든 것을 '위쪽'에 맡겨서 선택의 방향을 오로지 권위의 결단에 기대는, 충실하지만 비열한 종복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204-9)


"일본은 메이지유신 후 동양의 '정신문명'과 서양의 '기술·물질문명'을 종합하고, 거기에 일본 고유의 '상무'(尙武)문화를 덧붙임으로써 실로 전형적인 전체적 사명감을 발전시켜 나갔다. '국체'는 그런 모든 가치의 통합체에 다름아니었다. 만약 부분적 사명감이라면 그것이 심리적인 좌절이나 좌초를 경험하더라도 또 다른 영역에서의 사명감으로 전환하여 다시 시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사명감은 전체적인 것이었던 만큼 그것의 붕괴가 가져다주는 정신적 진공상태는 컸다. 전쟁 이후 새 헌법의 제정과 더불어 '평화문화국가'라는 사명 관념이 새로운 모습을 갖추고 등장하여 다양한 '이론적인 뒷받침'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에 대한 견인력은 거의 갖지 못했으며, 또 패배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슬로건이라는 식의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은,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구일본제국의 사명감의 전체성을 무엇보다도 잘 설명해주고 있다."(211-2)


제6장 '현실'주의의 함정


"지식인 특유의 약점을 언급해보자면, 지식인은 어설픈 이론을 가지고 있는 만큼 흔히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현실'의 진전에 대해서도 어느 틈인가 그것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이치를 만들어내서 양심을 만족시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러한 사실에 대한 굴복이 '굴복으로' 의식되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은 괜찮습니다. 그런 한에서 자신의 입장과 이미 그러한 사실 사이의 '긴장관계'는 존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기가 약한 지식인은 바야흐로 그런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그런 갭을 '자기 쪽에서' 다가감으로써 메워가려고 합니다. 거기서 자신이 지닌 사상이나 학문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끝없는 자기기만의 힘에 의해서 그런 실질적인 굴복은 결코 굴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자신의 본래 입장이 '발전'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유연하게 어제의 자신과 이어지는 것입니다." "한 번은 비극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다시 지식인들이 그런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이미 어릿광대짓일 뿐입니다."(226)


"현실이란 본래 한편으로는 '주어진 것'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루 하루 만들어져가는 것'인데, 보통 '현실'이라고 할 때에는 오로지 앞의 계기만이 전면에 나서서 현실의 만들어가는(plastic) 측면은 무시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현실이란 이 나라(일본)에서는 단적으로 '이미 그러한 사실'과 같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의 눈앞에 있는 재군비 문제에서도 이렇게 선수를 치는 식의 위험한 생각이 일찌감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문제는 이미 현재의 예비대가 헌법 제9조의 '전력'(戰力)에 해당하는가 아닌가 하는 그런 '스콜라적' 논의의 단계가 아니라, 이루어지게 될 재군비에서 어떻게 해서 구(舊)제국군대의 재현을 방지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해서 문관우위제(civilian supremacy)의 원칙을 확립할 것인가에 있다는 것과 같은 주장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아직 반드시 지배적이지 않은 동향에 대해서 대폭적으로 진지(陣地)를 건네주는 결과밖에 가져다주지 않습니다."(218-27)


제7장 전전(戰前)에 있어서 일본의 우익운동


"국체가 그야말로 일본제국의 신념체계였다는 사실은 '우익단체'에 의한 그 이데올로기적 독점을 불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중적인 방식으로 그들이 정치운동에 중요한 제약을 부과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첫째로 국체는 단순한 천황 숭배의 관념이 아니라 일정한 통치구조로서의 측면도 지니고 있었다(이른바 天皇制)." "따라서 우익세력에 의한 국가개조의 주장은 일정한 단계에 이르게 되면 필연적으로 하나의 딜레마─위와 같은 국체의 측면을 어디까지나 존중함으로써 통치기구에 대한 정면으로부터의 도전을 단념하고 기껏해야 상층부를 '격려'하는 역할에 만족하든가 아니면 자주적인 대중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계속 유지해감으로써, '빨갱이'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타 잇키나 2·26사건의 청년 장교들의 비극은 그런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우익 운동이 걸은 길은 물론 전자 쪽이었다."(239)


"더구나 '우익단체'의 운동으로서의 급진성은 일본 국체의 또 하나의 전통적 측면에 의해 견제되었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구체적인 '적' 또는 '대랍자'를 전제로 하여 비로소 성립된다. 따라서 운동이 그런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지도될 때, 그것은 전체 상황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정'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일본의 '국체' 관념은 예로부터 모든 정치적 대립의 피안에 있는 '화'(和)의 공동체라는 신화적 표상과 강하게 결부되어왔다. 그것은 모든 대립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절대무한'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일본 국가는 대문자로 쓰여진(즉 확대된) 가족 혹은 부락공동체이며, 거꾸로 후자는 소문자로 쓰여진(즉 축소된) '국체'인 것이다." "그런 연유로 '신체제'라는 이름 하에 장단을 맞춰서 발족한 일본의 '전체주의'가 국내적인 편성에 관한 한, 기성 세력이나 집단을 거의 그대로 포함하는 '포용주의'로 끝나고 말았던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다."(239-40)


제2부 이데올로기의 정치학


제3장 파시즘의 제 문제


"파시스트가 사회민주주의자나 자유주의자의 존재에 대해 어디까지 '관용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물론 이데올로기적·원리적 문제가 아니라 혁명의 '한계 상황'의 문제이다. 사회민주주의나 자유주의가 '혁명의 온상'으로 판단되는 한에서 그것은 배제되거나 통제(Gleichschaltung)되며, 그것이 거꾸로 혁명의 방파제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한에서는 방임되거나 심지어 지지를 받기도 한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그런 사회민주주의자나 자유주의자의 존재 내지 활동이 허용되어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는, 그 국가의 지배권력이 '파쇼화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며, 문제는 어디까지나 그런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일정한 상황에서의 구체적인 행동양식에 있는 것이다. 생생한 현실 문제에 정치적으로 침묵하고 있는 자유주의자나 반공(反共)이 유일한 간판이 사회민주주의자까지 박해하는 것은 '권력의 경제'라는 측면에서 볼 때 무의미하기 때문이다."(300)


"물론 파시즘이 혁명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발현 형태를 취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자의적인 것이 아니며, 그 발생이나 진행의 템포나 형태에는 일정한 정치적 법칙성이 있다. 파시즘이 어떤 한 국가에서 노골적인 형태로 출현하는 것은 그 국가 또는 그 국가의 '세력범위'에서의 혁명적 상황의 긴박성이 어느 정도로까지 높아진 때이다. 혁명과 반혁명의 대항관계가 있어도, 그것이 구래의 지배체제의 안정성을 위협할 정도로 성숙해 있지 않으며 파시즘은 발생하지 않거나 발생하더라도 거의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 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넓은 의미'의 부르주아 반동이다. 다만 여기서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혁명적 상황이 체제의 안정성을 위협할 정도로 고도화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단순히 객관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의식의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파시즘의 발전은 혁명적 상황의 '긴박성'과 반드시 정확하게 대응하지 않는 것이다."(302-3)


"파시즘은 어떤 하나의 새로운 사회체제가 아니며 또 그것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적극적인' 목표나 일관된 정책이 없다. 거기에 있는 유일한 목표를 찾아보면 반혁명이라는 것뿐이다. 그들의 주장은 대부분 부정(否定)의 형태로밖에 표현되지 않는다." "추상적·이론적으로 말하면 반혁명의 '전체적인' 조직화 과정은 사회의 강제적인 시멘트화에 의해 모든 이질 분자들─가능하고 현실적인 현체제의 반대세력─이 일소될 때 완료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반대세력의 출현은 기저에 있는 혁명적 상황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므로, 사회혁명의 세계사적 진행 자체가 정지되지 않는 한, 그런 동질화가 완료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시즘은 영원히 '미완성'인 것이며, 그것은 그렇게 해서 '반혁명의 전체적인 조직화로 향하는 이른바 무한한 운동'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근대적 사회에서의 '능동적 니힐리즘'의 궁긍적인 숙명인 것이다."(316-7)


제4장 내셔널리즘·군국주의·파시즘


"내셔널리즘은 어떤 네이션(nation)의 통일·독립·발전을 지향하여 밀고나가는 이데올로기 및 운동이다. 따라서 내셔널리즘 개념의 다양성은 네이션이라는 범주의 다양성 내지 애매함과 서로 얽혀져 있다. 그러나 내셔널리즘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네이션의 '주체적' 계기라고도 불리고 있는 민족의식에 다름아니다. 내셔널리즘은 이렇게 민족의식이 일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 단순한 문화적 단계로부터 정치적인─따라서 '적'(敵)을 예상하는 의식과 행동으로까지 고양될 때 비로소 출현하게 된다. 내셔널리즘의 최초의 목표가 어디서나 네이션 내부의 '정치적' 통일(공통의 정부 수립) 및 타국에 대한 '정치적' 독립(국제사회에서의 주권의 획득)으로 표현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보편적 규범에 의해 결속된 '국제사회'는 먼저 유럽에서 성립했으며, 거기서부터 전세계로 퍼져나갔기 때문에 근대 내셔널리즘이 사상으로도 현실의 운동으로서도 19세기 유럽에 그 원형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323)


"내셔널리즘의 이데올로기는 거의 세 개의 계기로 구성되어 있다. ① 국민적 전통(tradition), ② 국민적 이익(interest), ③ 국민적 사명(mission)이 그것이다. 전통은 네이션을 과거와 이어주며, 이익은 그것을 현재에, 사명은 그것을 미래와 이어준다. 이 세 가지가 합성되어 국민적 개성 관념(national character)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내셔널리즘 운동은 다른 정치력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일반적으로 높고, 또한 대부분은 독립된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자유주의, 사회주의, 군국주의, 파시즘과 같은 이데올로기 내지 운동과 결합되어 나타난다. 그것도 국민적 통일과 독립이 아직 순전히 장래의 목표인 동안에는 내셔널리즘 운동은 비교적 그것 자체로서 정리된 형태를 가지며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일단 근대국가를 수립한 후의 내셔널리즘 운동이나 강대국의 권력정치의 와중에 휘말리게 된 지역의 내셔널리즘 운동에는 거의 언제나 다른 정치력이나 운동이 복잡하게 개입된다."(331-4)


"내셔널리즘이나 파시즘의 개념이 불명확성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현저한 운동 내지 정치체제로서 역사적으로 발현되고 있는 데 비하여, 군국주의의 경우는 한층 더 애매하고 '이즘'(ism)으로서의 특성이 희박하다." "시험적인(tentative) 의미에서 군국주의를 정의한다면, 그것은 〈한 국가나 한 사회에서 전쟁 또는 전쟁 준비를 위한 배려와 제도가 반영구적으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고,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국민생활의 다른 모든 영역을 군사적 가치에 종속시키는 그런 사상 내지 행동양식〉으로 규정할 수 있다." "군국주의적 특성은 사회의 각 층에 침투해 있는 특정한 사고양식으로 측정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와 같은 사회경제적 구성체가 아님은 물론 민주주의처럼 정치체제 전체를 감싸는 개념도 아니다. 즉 '주의'(主義)라기보다는 다양한 정치체제와 결합되어 존재해온 하나의 경향성으로서, 어떤 사회는 '보다' 많이 또는 '보다' 적게 군국주의적인 것이다."(334-5)


"군국주의는 수단으로서의 군사력과 군대정신 그 자체가 목적화된다는 데에 그 현저한 특성이 있다. 그런 수단의 자기목적화는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본질적인 모순을 가져다주었다. 몰트케는 일찍이 〈전쟁이야말로 신의 세계의 질서를 가진 거대한 횃불이다. ······ 전쟁이 없었더라면 세계는 물질주의에 빠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모든 군국주의에 공통된 이런 '정신주의'는 거기에 내재하는 모순에 의해 그야말로 그 반사물(反射物)로 전환되는 숙명을 지닌다. 즉 군인정신의 고양은 군의 규격성, 획일성의 요청에 직면하여 가장 몰정신적이고 비개성적인 '인원수'로 환원되고, 희화화된 형태에서는 일본의 '황군'(皇軍)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계급장·견장·각반의 착용방식이나 담요의 정돈 등에 대한 아주 하찮은 '형식주의'로 발현된다. 나아가서는 군국주의가 선전하는 국가적·국민적 특수성은 군사력이 우월성의 규준이 됨으로써, 완전히 질적인 규정을 잃어버리고 병력량의 차이로 귀착된다."(339-40)


"파시즘의 제1목표는 혁명의 전위조직의 파괴이며, 그것은 직접적인 테러나 국가권력에 의한 탄압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혁명세력의 억압은 다소라도 모든 지배계급이 실행해온 것이며, 파시즘의 특질은 단순히 그런 탄압의 양적인 규모의 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의 질적인 특이함'에 있다. 파시즘은 혁명세력의 직접적 억압에 머물지 않고서, 혁명세력이 성장하는 모든 사회적 노선이나 채널 자체를 폐쇄시키려 한다. 그 때문에 파시즘은 소극적으로는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그런 민중의 크고 작은 모든 자주적 집단의 형성을 위협과 폭력으로 방해함과 동시에, 적극적으로는 매스 미디어를 대규모로 구사하여 파시즘이 '정통'으로 삼고 있는 이데올로기나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대중을 획일화하는 것이다. 파쇼화 과정이란 요컨대 그런 이질적인 것의 배제를 통한 강제적 시멘트화(나치의 이른바 획일화(Gleichschaltung))의 과정에 다름아니다."(346)


"파시즘의 강제적 동질화와 시멘트화의 기능은 언제나 테러와 폭력에 의한 협박을 수반하며, 스파이·밀고제도·충성심사 등 직접·간접의 모든 방법에 의한 '공포의 독재'로 나타나지만, 동시에 파시즘은 현대의 가장 발달된 테크놀러지와 매스 미디어를 최대한으로 구사하며, 선전·교육·대집회로 〈대중의 사상과 감정을 계통적으로 변화시켜라〉(히틀러)라는 이른바 내면으로부터의 획일화를 밀고 나간다는 점에 큰 특색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중의 불만을 한편으로는 특정한 속죄양(공산주의자·유태인·흑인·가상적국)에 집중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만을 스포츠·영화·오락·집단여행 등에 의해 무산시킨다." "파시즘에 대한 저항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폭력과 잔학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강제적 시멘트화를 그야말로 비이성적인 격정을 동원하여 민주적인 외형 하에서 수행하고, '합의에 의한 지배'라는 근대적 원리를 어느 틈인가 '획일성에 의한 지배'로 슬쩍 대체한 점에 있는 것이다."(348-9)


제3부 '정치적인 것'과 그 한계


제1장 과학으로서의 정치학


"정치학은 정치의 과학으로서, 구체적인 정치적 현실에 의해서 매개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그것이 무언가 구체적인 정치세력에 직접 결부되어 정치적 투쟁의 수단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현대에서의 정치투쟁은 주지하듯이 사상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국제적인 전쟁에서도 국내 정당간의 투쟁에서도 이데올로기적 무장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럴 경우 학자들의 정치이론이 서로 경쟁하는 어느 당파의 무기로 동원되고 이용되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경향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같은 이용가치를 전혀 가지지 못한 그런 이론은, 실질적으로 공허한, 이론으로서도 가치가 낮은 것이라고 할 수조차 있다. 그러나 학자가 현실의 정치적 사상(事象)이나 현존하는 다양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고찰의 소재로 삼을 경우에도, 그를 내면적으로 이끄는 것은 언제나 '진리가치'가 아니면 안된다. 정치가가 이론의 가치를 통상 그 대중동원의 효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말이다."(402)


"이처럼 정치학을 특정 정당세력에 대한 직접적인 예속으로부터 지켜내는 것만이라면 문제는 비교적 간단하겠지만, 정치적 사상(事象)을 인식함에 있어서 언제나 모든 주관적인 가치판단의 개입을 배제한다는 것은 말하기보다 실천이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가 원래 인간의 격정이나 본능을 깊은 곳으로부터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정치적 현실을 인식할 때에는 자기의 비합리적인 호의에 뿌리를 둔 억지견해가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끼여들어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정치인의 사유에서는 오히려 그런 가치지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인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정치적 사유의 특질, 정치에서 이론과 실천이라는 문제에 어쩔 수 없이 직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실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을 과학으로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런 어려움(aporia)을 피할 수 없다."(403)


"정치학자는 자신의 학문에서 이같은 인식과 대상의 상호규정 관계의 존재를 먼저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정치적 사유의 존재구속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정치적 세계에서는 배우가 아닌 관객은 있을 수 없다. 여기서는 '엄정중립' 역시 하나의 정치적 입장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학자가 정치적 현실에 대해서 어떤 이론을 구성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실천에 다름아니다. 이같은 의미에서의 실천을 통해서 학자도 역시 정치적 현실에 주체적으로 참여한다. 이런 불가피한 사실에 눈을 감는 것은 자기기만일 뿐만 아니라 유해하기조차 하다. 그런 태도는 흔히 '이기면 충신'이라는 식의 기회주의를 '객관적' 태도라는 이름으로 마구 퍼뜨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모든 세계관적인 정치적 투쟁에 대해서는 단순한 방관자로 자처하는 자는 그것만으로 이미 정치의 과학자로서 자격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406-7)


제2장 인간과 정치


"정치의 본질적인 계기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통제를 조직화하는 것이다. 통제든 조직화든 어느 것이나 인간을 현실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며, 인간이 외부적으로 실현시킨 행위를 매개로 하여 비로소 정치가 성립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는 어떻든 간에 인간 존재의 메커니즘을 전체적으로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정치의 작동은 이성이건, 정서건, 욕망이건 인간성의 어떠한 영역이건 간에 필요에 따라 동원하게 된다. 요컨대 현실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정치에서는 작동의 고유한 통로가 없다. 종교도, 학문도, 경제도, 그것이 정치 대상을 움직이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언제나 자기 목적을 위해서 사용한다." "정치가 무언가 불결한 것과 본래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정치가 인간을 현실적으로 움직이게 해서 어떤 결과를 확보하려 하기 때문이다. 실은 정치가 더러운 것이라기보다 현실의 인간 그 자체가 공교롭게도 천사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다."(411-3)


"이때 정치가 전제로 하는 성악(性惡)이라는 의미를 보다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성악이라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정확한 표현이 아니며, 카를 슈미트도 말하고 있듯이, 인간이 '문제가 있는'(problematisch)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에 다름아니다. 효과적으로 인간을 지배하고 조직화한다는 것, 그것을 어디까지나 외부적 결과로서 확보해가는 것에 정치의 생명이 있다고 한다면, 정치는 일단 그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인간을 '취급주의' 품목으로 여기고 거기에 접근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성악이라는 것은 이런 취급주의의 꼬리표이다. 만약 인간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악한'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오히려 간단하고 본래의 정치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선한 쪽으로도 악한 쪽으로도 바뀌며 상황에 따라서 천사가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기도 하는 데에 기술(art)로서의 정치가 발생할 수 있는 지반이 있는 것이다."(415)


"어떠한 정치권력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정치권력인 한 인간의 양심의 자유로운 판단을 짓밟고 가치의 다원성을 평준화시키고, 게다가 강제적인 편성을 들이댈 위험성으로부터 완전히 면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권력이 구사하는 기술적 수단이 크면 클수록 그것이 인격적 통일성을 해체해서 그것을 단순히 메커니즘의 기능화로 만들어버릴 위험성 역시 커진다. 권력에 대한 낙관주의는 인간에 대한 그것보다도 몇 배나 위험하다." "따라서 오늘날은 내면성에 의거하는 입장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적 조직화에 대항하여 자주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또 자신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패러독스에 직면해 있다. 그때 정치적인 것의 전형적인 틀에 어느 정도까지는 어떻게든 내 몸을 끼워넣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런 연옥을 두려워하여 모든 정치적 동향으로부터 무차별적으로 도망가려고 하면, 도리어 최악의 정치적 지배를 자신의 머리 위에 불러오는 결과가 될 것이다."(424-5)


제4장 권력과 도덕


"원시사회에서 정치단체의 기원은 대체로, 한편으로는 사제자적 권력,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적 권력 양자가 합류하는 곳에서 성립되었던 것으로, 정치권력이라는 것은 이미 그 단초에 에토스(ethos)와 파토스(pathos)의 통일이라는 성격을 운명적으로 타고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통치영역이 광대해지고 권력의 하부 행정기구가 법적으로 정비될수록, (권력과 도덕의 직접적인 통일이라는) 이데일로기와 실재의 거리는 커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권력과 도덕의 원시적인 통일에 현실적으로 쐐기를 박게 된 커다란 계기는 어디에서도 정치권력에서의 '법체계의 형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법 역시 습속으로부터 생겨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법인 한, 그것은 역시 최소한도로 목적의식적인 산물인 데(관습법도 역시 관습과는 다르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해서, 도덕은 어디까지나 인위적인 형성이 아니라는 데에 그 규범력의 기초가 있기 때문이다."(451-2)


"그러나 권력과 도덕의 직접적 통일의 현실적 해체는, 반드시 곧바로 양자의 원리적인 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동방제국과 같은 강력한 군주의 단독지배 대신에 민주정을 고전적으로 완성시킨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지하듯이 그리스 시민에게 자유라는 것은 폴리스에의 참여를 의미하며, 그것이 모든 것이었다. 그의 생명과 신체는 모두 폴리스에 속하고 있으며, 도덕의 체계는 폴리스에 대한 충성으로 통일되며, 신앙은 폴리스의 종교에 대한 신앙이며, 교육은 폴리스의 공민에 대한 교육에 다름아니었다. 소크라테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야말로 그 비극이 확증해주고 있듯이 '합법성'과 '정당성'은 아직 완전히 분열을 모르고 있었다." "물론 그리스인들에게도 개인도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폴리스의 덕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그리스의 정치적 통일 자체가 붕괴하고 사람들이 현세로부터의 이탈 때문에 그런 덕을 추구하게 된 시대였다."(453-4)


"중세 카톨리시즘은 정치권력의 도덕적 제약에 관해서 후세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사상을 발전시켰다. 말할 것도 없이 자연법 사상이 그것이다. 스토아에서 출발하는 자연법 사상이 어떻게 중세 세계에 수용되었고, 어떻게 체계화되었으며, 또 어떠한 기능을 했는가 하는 것은 법사상사의 서술에 맡겨야 하겠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교권(敎權)─교권 역시 하나의 권력이었다─의 속권(俗權)에 대한 우월과 통제를 합리화하는 역할을 했으며, 전체로서 중세적 정치체계의 이데올로기적 지주가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그것은 법적·정치적 질서에 대한 복종이 결코 무제한의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그것에 대한 저항이야말로 윤리적 의무라는 명제(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경우의 결정을 개인적 판단이 아니라 공적인 권위에 맡겼던 것이지만)를 포함시킴으로써 근세의 혁명권 내지 저항권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455-6)


"근세 초기에는 왕권신수설 같은 것이 절대군주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이론으로 이용되었지만, 그것은 과도적인 현상이었으며, 게다가 신권설(神權說) 그 자체도 점차로 내적인 변질을 겪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왕은 신성하기 때문에 최고권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거꾸로 최고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성한 것으로 되었다. 루이 14세가 '짐은 곧 국가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동시에 그가 '신의 아들'도 아니며 '조국의 아버지'(Pater Patriae)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국가권력은 종교적·도덕적·습속적 제약─한마디로 말하면 정치외적 제약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고유한 존재근거와 행동원리를 자각했다. 그것이 곧 근세에서의 국가이성(國家理性)의 이데올로기였다. 종교개혁이 교권의 세속적 지배에 저항하여 기독교적 신앙의 피안성(彼岸性)과 내면성을 강조한 당시의 결과는 세속권력의 공공연한 자기주장으로 나타났던 것이다."(457)


"절대적인 국가주권과 빼앗을 수 없는 개인의 기본적인 인권, 이 두 가지의 대립적 통일은 무릇 근대국가의 숙명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국가이성의 사상과 근세 자연법 사상의 상극으로 나타나게 된다." "(자연법 사상이 우위를 차지한) 영국과 미국에서는 국가권력은 국내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결코 무제한이 아니라 그것이 일정한 법적 제한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그 법의 구속력은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윤리적·종교적 가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그런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으로 되었다. 이에 비해 (국가이성 사상이 성숙한) 독일에서는 국가는 최고의 가치이며, 그 존립의 필요를 위해서는 국제법이나 개인도덕적 규준도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사상이 헤겔로부터 비스마르크, 트라이치케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흔히 독일이 악명높은 군국주의적·권력국가적 전통의 사상적 반영으로 지적되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459)


제5장 지배와 복종


"교사-학생관계와 주인-노예관계를 비교할 때, 가장 현저한 대척점은 바로 '이익지향의 동일성'과 '대립성'이다. 교사는 학생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교사에게는 학생이 모든 정신적 수준에서 자신에 가까이오고, 마침내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 교육의 이상이다. 교사의 제재는 그런 방향을 추구하는 한에서만, 교사의 제재일 수 있다. 주인과 노예는 그야말로 모든 점에서 반대 관계에 서게 된다. 주인은 본래 가능한 만큼 노예를 사역시키려고 하고, 노예는 본래 가능한 한 그 사역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한다. 주인은 노예와 공동의 목표를 가지지 않으며, 공동의 운명에 서지 않는다." "현실의 사회적 종속관계는 이런 양극 사이의 광대한 영역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이 두번째 유형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지배관계로서의 성격을 짙게 지니게 되며, 첫번째 유형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지배관계와 대립되는 의미에서의' (정신적) 권위관계라는 양상을 띠게 된다."(469-70)


"노예의 주인에 대한 복종에서는, 복종의 자발성이 제로 혹은 제로에 가까운 정도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는 본래 복종행위(Unterwerfungsakt)가 있다기보다도 복종이라는 사실상태(Unterworfenheit)가 있는 데 그칠 뿐이다." "정치적 사회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그와 같은 긴장관계밖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피지배자를 억압하기 위해서 지배자가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권력기구는 쓸데없이 거대하기만 할 뿐 아니라 대내관계와 더불어 모든 정치적 사회의 존재근거인 대외적 방어라는 면에서 현저한 취약성과 위험성을 배태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모든 통치관계는 한편으로는 권력·부·명예·지식·기술 등의 가치를 다양한 정도와 양식으로 피지배자들에게 분배해줌으로써 본래의 지배관계를 중화시키도록 하는 물적 기구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를 피지배자의 심정 속에 내면화함으로써 복종의 자발성을 불러일으키려는 정신적인 장치도 발전시켜온 것이다."(472-3)


"오늘날에는 피지배자는 헌법에 명기된 제도적 보장에 의해서 지배자의 권력에 참여하며, 그 '의견'은 수치로 측정되어 정부의 교체를 가능하게 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투표라는 '객관적' 형태로) 민의(民意)가 흘러나오는 명확한 도랑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거꾸로 지배자에 의한 민의의 조종도 용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피지배자가 사회적 가치에 대한 참여와 정치적 복종의 자발성을 자각적으로 조직화해 나가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확실히 문자 그대로 민중의 정치적·사회적·시민적 권리의 획득과 그 주체적 의식의 향상의 역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그런 물적·정신적 장치가 수행하는 이데올로기적 역할, 즉 현실의 정치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지배관계를 정련하고, 추상화하고, 그 실태를 피지배자의 눈으로부터 가린다는 역할을 지배자가 점점 분명하게 의식하고, 그런 목적의식에 기초하여 대규모로 그 장치를 구사하게 된 역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474-5)


"특히 현대에서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즐겨 쓰는 것은 집합개념으로서의 '인민'에게 지배의 주체를 이양함으로써 소수의 다수에 대한 지배라는 모든 지배에 공통된 본질을 은폐시키는 방식이다. 지배의 '비인격화'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그것은 '법의 지배'라는 것이다." "물론 그 이념이 수행한 역사적 역할은 크고, 오늘에도 그것이 상실되지 않았지만 그 이념은 현실적으로 법을 해석·적용하는 것이 언제나 인간이며 추상적인 법규범으로부터 자동적으로 일정한 구체적 판결이 나올 리도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간과했으며, 국가권력의 현실의 행사가 지배관계를 기초로, 그것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방위한다는 지상목표에 의해서 제약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및 법의 중립적 성격을 참칭(僭稱)함으로써 흔히 반동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여기에 국민공동체 이념이나 이른바 국가법인설과 같은 것도, 역시 지배의 비인격화 카테고리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476-7)


제6장 정치권력의 제 문제


"권력을 인간 또는 인간집단이 '소유'하는 것(사물)으로 보는 입장, 즉 구체적인 권력행사의 제 양태 배후에 이른바 일정불변의 권력 그 자체라는 실체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실체개념으로서의 권력이라 부른다면, 그것에 대해서 권력을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인간(혹은 집단)의 상호작용 관계에서 파악하는 사고방식을 관계 개념 혹은 함수 개념으로서의 권력이라 부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체제가 고정적이고 계급적이거나 혹은 사회적 유동성(mobility)을 결여한 국가 내지 시대에는 실체적인 권력개념이 지배적이고, 또 이데올로기로서는 (정치권력의 전제성專制性이나 폭력성을 강조하는) 실체적인 권력개념이 지배적이었다. 반면 정치권력에 의한 사회적 가치의 독점성이 상대적으로 낮고, 커뮤니케이션의 제 형태가 발전해 있으며, 사회집단의 자발적 형성과 그들 사이(또 국가와 제 사화집단 사이)의 복잡한 상호견제 작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그런 국가 내지 시대에는 관계적·함수적 권력 개념이 발흥하게 된다."(481-2)


"실체적 권력 개념의 강점은, 인간의 행동양식이 사회화됨으로써 단순한 개인적인 상호작용 관계로부터 분리되어 일정한 객관적 형태로까지 연결되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조직화된 권력의 징표는 ① 권력 행사의 양태 및 피행사자의 행동양식의 범위를 다소라도 명시적으로 규정하는 법칙(rule)의 존재, ② 권력의 다양한 기능을 분담하는 기관(organ) 내지 장치(apparatus)의 정비 등을 들 수 있는데, 그런 법칙(법)이나 장치라는 것은 장기화될수록 그리고 규모가 커질수록 물신화(物神化)하는 경향을 띠게 되므로, 그런 의미에서도 권력은 '실체'로서의 성격을 짙게 지니게 된다." "그들 기구가 아무리 민주화되어도 거기서의 권력관계는 개별적인 상호작용 관계로부터 추상되고 응고화되는 끊임없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측면을 무시한 관계 개념은 그만큼 허위의식으로 전환되며, (현실을 은폐한다는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482-3)


"권력을 인격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는 이점의 하나는, 널리 인간관계가 권력관계로 '이행'하는 다이내믹스를 분명하게 해줄 수 있다는 점이다." "라스웰(H. Lasswell)은 가치 종류의 조합을 통해서 권력 형태를 상세하게 분류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가 권력의 기저가치(base value)와 권력 자체의 가치를 구별하고 있는 것은, 강대한 노동조합이 스스로 '부'(富)를 소유하지 않고서 부에 대한(특히 배분에 대한) 권력을 가지며, 스폰서나 연출자가 스스로 명성을 지니지 않고서도 타인의 명성을 통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 등 어느 것이나 현대의 복잡다기한 사회적 권력상황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정부 권력(governmental power)의 행사에 대한 이른바 입헌제 제한의 강화가 곧바로 인간의 자유 일반의 확대를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도리어 '부'에 기초한 권력관계를 표면화하는 결과가 된 것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487-9)


"가치의 획득이나 증대는 집단협력에 의하는 쪽이 개인적으로 하는 것보다 일반적으로 유효하다. 그래서 가치를 둘러싼 분쟁은 그 가치가 희소하며,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가 강할수록 강한 집단응집력을 갖는다. 그런데 권력 자체도 역시 가치이며, 게다가 그것은 타인(집단)의 제 가치의 박탈을 포함하는 인간관계의 통제이므로, 권력은 다른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는 기반(base)으로서도 유효도(有效度)가 높다. 그래서 관계자들 간에 중대한 가치를 둘러싼 분쟁은 집단 상호간에서도, 그리고 집단 내부에서도 그만큼 빨리 권력관계로 이행하기 쉬운 것이다. 또한 그로부터 권력적 통제에 의한 인간관계의 조직화는 끊임없이 규모를 확대하고 권력관계의 피라미드를 점차로 자체 내에 포섭해나가려는 내재적 경향을 띠고 있다. 홉스는 〈꼭 알맞은 권력에 인간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보다 많은 권력을 얻지 않으면 현재 가지고 있는 권력도 확보할 수 없다〉는 말로 권력 특유의 다이내미즘을 예리하게 통찰했다."(489-90)


제7장 현대에서의 태도결정


"우리는 단순히 공식적인 제도에 입각한 형태만이 아니라, 모든 직장이나 모임에서, 명확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또 누가 하고 있는가 하는 주체도 분명하지 않은 형태로 사방팔방으로 끊임없이 사상조사나 충성심사를 받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조용히 지켜본다는 것, 즉 부작위라는 것도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집단 혹은 지역사회에서 무릇 사회적으로 시끄러운 문제가 되고 있는 그런 사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의견의 표명이라든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그런 곳에서는, 그런 적극적인 태도표명을 하는 것이, 특히 첨예하게, 정치적인 개입(commitment)으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거꾸로 또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떤 방향에서 행동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고 있는 그런 지역 혹은 집단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지배적인 가운데에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 움직이지 않는 것, 그것 자체가 이번에는 첨예하게 어떤 하나의 정치적인 커미트먼트로서 두드러지게 됩니다."(505-7)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이들 문제에 대해서 좋건 싫건 간에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것에 의해 좋건 싫건 간에 일정한 동향에 개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무한한 과정입니다. 얼핏 보기에 지극히 간단한 사안처럼 보이는 사회사상(事象)이나 정치문제를 보더라도, 그 모든 구성요소를 끄집어내어 사면팔방으로 조명하고 분석하며, 나아가 그 동태의 모든 가능성을 다 궁구한다는 것은 거의 영원(永遠)의 과제가 됩니다. 그것만 생각해보아도 아무리 완벽하게 보이는 이론이나 학설이라 하더라도, 그것 자체 완결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문적인 분석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결적이지 않은 것에 학문의 진보라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가설과 검증의 무한한 되풀이의 과정이기 때문에, 의심한다는 것, 자신의 사고방식, 자신의 학설, 자신의 이론에 대한 부단한 회의(懷疑)의 정신이라는 것이, 학문에는 불가결합니다."(508-9)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그런 무한한 인식과정을 어느 시점에서 문자 그대로 단절하는 것입니다. 단절함으로써만이 결단이, 따라서 행동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결단하고 선택한 결과 그 자체는 다시 인식과정 속에 되돌아가고, 그리하여 한층 더 인식이 풍부해지는 것입니다만, 결단의 그 시점시점에서는, 보다 완전한 보다 풍부한 인식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는 영원히 모순 혹은 배반이 있습니다. 인식이라는 것은 가능한 한 다면적이지 않으면 안됩니다만, 결단은 이른바 그것을 일면적으로 잘라서 취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예를 들면 정치적 쟁점이 되고 있는 그런 문제에 대한 결단은, 단순히 불완전한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일면적일 뿐만 아니라, 가치판단으로서 일방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식의 차원에서 한편으로 최소한의 논리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쪽으로 가담하지 않는다면, 결단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509)


"괴테는 〈행동하는 사람은 언제나 비양심적이다〉하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라는 것은, 우리의 수없이 많은 행동의 그물망이라고 합니다만, 행동의 조합으로 성립되어 있습니다. 사회가 그리하여 우리의 관련된 행동으로 성립되는 한에서, 우리의 행동 혹은 비행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즉 사회에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순수하게 '관찰한다'는 입장, 괴테가 말하는 의미에서 완전히 양심적인 입장이라는 것은, 완전히 무책임한 입장이라는 것으로 됩니다. 따라서 그런 점에서도 신만이, 완전히 무책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식한다는 것과 결단한다는 것의 모순 속에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이 아닌 인간의 숙명입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그런 숙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결과의 책임을 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숙명을 자각할 필요성은 관련된 행동이 비정상으로 복잡하게 된 현대에 점점 더 통절한 것으로 되고 있습니다."(509-10)


제8장 현대에서의 인간과 정치


"일반적으로 경계로부터 발하는 말과 행동은 중심부로부터는 '무책임한 비판'으로 간주되고, 완전히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거꾸로 안쪽에 공감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기 쉽다." "무릇 벽의 안쪽에 머무는 한, 어떠한 변경에서도 그 활동은, 어떤 의미에서 안쪽의 규칙이나 제 관계에 개입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바깥으로부터의 이데올로기적 비판이 설령 아무리 들어맞는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바깥으로부터의 목소리이기 때문에 안쪽에 사는 사람들의 실감으로부터 유리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 이미지를 바꾸는 힘이 결여되어 있다." "지식인의 어려운, 그러나 영광스러운 현대적인 과제는 그런 딜레마를 회피하지 않고, 완전히 개입하는 것과 전혀 '무책임'한 것의 틈새에 서면서, 안을 통해서 안을 넘어서는 전망을 추구하는 그런 곳에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지성의 기능이란 요컨대 타자를 어디까지나 타자로서 생각하면서도, 그 타자를 '다른 곳에서' 이해하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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