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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 ㅣ 논형 일본학 16
후지타 쇼조 지음, 김석근 옮김 / 논형 / 2009년 4월
평점 :
1 / 천황제란 무엇인가
"근대 일본의 지배체제 그 자체였던 천황제는, 종종 서유럽 데모크라시와 비교되곤 한다. 그러나 천황제는 기본적인 점에서 서유럽의 고전적 절대주의와 두 가지 대비를 통해 성립되었다. 첫째, 근세 유럽의 절대왕정이 교황-교회와의 격렬한 투쟁을 거쳐 종교적 '권위'로부터 왕의 정치적 '권력'이 분리 독립함으로써 성립되었으며, 따라서 거기에 독자적인 의미의 '정치'를 낳게 된 것과는 정반대로, 천황제는 종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권위를 이용함으로써만, 이른바 '권위적 권력'으로서만 성립할 수 있었다. 둘째, 최대의 봉건영주가 다른 대부분의 영주들을 압도하고 정복하여, 민족적 규모로 그 지배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왕권을 대내적으로 확립해간 고전적인 절대주의absolutism와는 달리, 일본의 천황제는 봉건적 권위인 천황이 자신과는 관련 없는 정치적 제 요소의 상황 변화에 따라, 권력의 주체로 전화轉化된 것이므로, 정치적 투쟁을 거쳐 도태된 본래의 절대주의 군주의 정치력을 끝내 갖출 수 없었다."(27)
2 / 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
"상징으로서의 '천황'은, 혹은 '신神'으로서의 종교적 윤리 영역으로 올라가서 가치의 절대적 실체로서 우뚝 초월했으며, 혹은 또 온정에 넘치는 최대·최고의 '가부장'으로서 인간생활의 정서 세계에 내재해서, 일상적인 친밀함을 가지고서 군림한다. 그러나 또한 그들 사이에서, '천황'은 정치적 주권자로서 만능의 '군권'을 의미하고 있었다. 따라서 앞의 두 가지 점에서는, '천황' 지배체제regime는 정치 외적인 영역을 기초로 한 '신국神國'이 되거나 혹은 '가족국가'가 되지만, 후자에서는 체제는 최고 권력자에 의해 통합되는 '정치국가' 그 자체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 같은 다양한 체제 관념이 동일화해감으로써, 적나라한 권력행사는, 한편으로는 신의 명령으로 절대화至大化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눈물의 꾸지람, 사랑의 채찍'으로 온정과 인자함의 소산으로 여겨져, 권력은 권력으로서의 자신의 존재이유를 주장하는 근대국가 이성을 잃어버리고, 거기서 권력의 무제약적인 확대擴大를 낳게 되었다."(36-7)
"천황제의 권력상황은, 국가의 구성 원리로 보자면 분명히 이질적인 두 원리의 대항·유착의 발전관계로 파악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는 국가를 정치권력의 장치Apparat 내지 특수한 정치적인 제도로서 구성하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국가를 공동체에 기초 지워진 일상적 생활공동체Lebensgemeinschaft 그 자체 내지는 그것과 동일화identify할 수 있는 것으로 구성하려는 원리다. 전자에서는 국내에서의 사회적 대립은 당연히 존재해야 할 것으로 전제되고 그 위에서 정치적 통합이 문제가 되지만, 후자에서는 국내 대립은 본래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메이지유신 이래의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체제 저변에 존재하는 촌락공동체Gemeinde의 질서원리가 국가에 제도화되면서, 권력국가와 공동체 국가라는, 천황제에 고유한 양극적인 이원적 구성이 자각적으로 성립했으며 거기서 천황제 지배의 역학관계dynamics를 결정하는 내부의 두 계기가 형성되었다."(39-40)
"'향당사회'의 '덕의德義'에서, 국내 정치사회에서의 이해대립의 조화를 구하는 원리와 조응하여, 대외정치의 천황제적 특수양식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일본 사회가 해외 국가들가 그 취지를 달리하여 일종의 특질을 갖는 것〉을 향당적 일본 사회의 도덕적 원소에서 찾는 한, 국제정치 상황에 대한 대응원리는 인간 일반의 윤리ethos와 특수국가 권력kratos의 내면적 갈등을 내포하는 근대적 국가 이성에 기초 지워진 것일 수는 없게 된다. 거꾸로 일본이 도덕을 독점함으로써 해외 국가들을 도덕 바깥의 국가들로 만들어, 국제관계는, 도덕국가=일본과 비非도덕세계의 교섭으로 파악되기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 이후 적극적으로 세계교화='천황의 교화皇化에 의한 팔굉일우'와, 소극적으로는 '교화 바깥化外의 국가'에 대한 말살이 천황제 일본의 세계관이 되어가는 논리적 핵核, kernel이 있었다. 그래서 어떠한 대외적 폭력도 허용되어 권력의 방자는 국내를 넘어서 세계에 미치게 된다."(45-6)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완전한 공동체적 질서는, 전통적 일계성一系性과 가부장제적 일체성을 구성 원리로 하는 전근대적인 '이에家'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해체의 위기를 경험한 공동체의 재건에는, 언제나 '이에'를 모델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메이지 30년대 이후, 공동체 원리는 가족주의에 의해서만 기초지워지게 된다. 여기서는 공동체 국가도 '이에'가 기초 지워주며 공동체가 '이에'를 국가에 일의적一義的으로 매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정치운동이 '정욕에 사역당하는' 그런 상황에서는 정치집단이 사적인 심정에 의해서 결합하는 집단으로 변하기 때문에, 거기에 일본의 정당政黨이 도당徒黨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 있었다. 따라서 또, 국가의 공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치운동의 자유를 극소화하고, 오로지 국가 관료에 의해서 정치는 독점되어야 하는 것으로 된다. 정당정치가 일본에서 자라날 수 없었던 한편, 관료주의가 보편적으로 성립한 유래 역시 여기에 존재하고 있었다."(48)
"일반적으로 근대국가의 역사에서 권력의 초월화에 의해 일상사회에 대한 자기의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은 절대주의의 원리이며, 규범을 동질의 이성적 개인의 경험으로까지 원시화 함으로써 사회의 내면에서부터 국가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원리였지만, 일본 근대국가는 교육칙어에 의해서 도덕영역에 국가를 구축함으로써, 한편으로 천황에서 이성을 초월한 절대성을 형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기를 '향당적 사회'의 일상 도덕 속에 원시화 시킨다는 특이한 근대국가를 산출해냈다. 그리하여 칙어가 모든 이성적 주관으로부터 초월하는데서 그야말로 그 해석의 무한한 다양성이 가능하게 되어, 자의적인, 복잡하고 뒤얽힌 충돌도 가져다주게 된다." "그 관계야말로, '향당사회'가 '상량商量'의 대립을 '정의情義'에 의해 완화시키기 위해서 거꾸로 모든 이익대립을 '심정'적으로 절대화하게 된다고 언급했던 자기모순 연관을, 국가적 영역에서 거기에 맞게 표현한 것이었다."(60)
# 교육칙어敎育勅語 : 정의情義를 중시하는 향당사회의 도덕적 원소라는 공동체 원리와, '천자'의 절대화와 계층적·연쇄적 성격만을 강조한 유교적 사유를 결합하여, 이를 국가원리로 보편화한 것
"관료는 명령의 대변자인 절대주의 관료의 본래의 경향에서 벗어나, 피치자에 대해서는 도덕적 가치의 독점자='윗분'으로서 윤리적 폭군이 되고, 상급관료에 대해서는 신분적 하층='부하子分' 내지 '동생弟分'으로서 순진무구한 정신적 유아로 변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거기서는 하급 관료는 상급자에게 인간적으로 '헌신'해서 그 이익merit을 보증함으로써, 장래 비슷한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확보하고자 한다(중간층!). 그래서 관료기구의 수직적인 계층성이, 객관적 규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격적, 직접적으로 구성되면서, 기구 내부의 계통적 분파는 필연적으로 도당徒黨, clique이 되며, 그들 사이의 상하관계는, 절대적 윤리적 의사의 독점을 둘러싸고서 심각한 항쟁을 전개하게 된다. 그럴 경우, 천황이 의사의 표백表白을 스스로 행할 수 없는 무의사적 군덕자君德者에 머물러 있기 대문에, 그의 의사를 독점하는 것은, 해석의 독점으로서의 자의恣意의 관철 그 자체로 되므로, 항쟁은 조정불가능하게 절대화된다."(67-8)
"그리하여 절대주의 천황제의 체제regime 내부에서는 모든 체제의 행위자가 주관적 절대자가 되고, 그로 인해 거꾸로 객관적으로는 절대자를 소멸시키게 된다. 천황은 도덕적 가치의 실체이면서 1차적으로 절대 권력자가 아니기 때문에, 윤리적 의사의 구체적 명령을 행할 수 없는 상대적 절대자가 되며, 따라서 신민 일반은 모두 해석 조작에 의해서 자신의 자의를 절대화하며, 그것 또한 상대적 절대자가 된다. 여기서 절대자의 상대화는 상대적 절대자의 보편화다. 그래서 천황제 절대주의는 권력 절대주의를 관철하지 않음으로써, 자의와 절대적 행동양식을 체제의 구석구석까지 침투시키며, 따라서 너무나 역설적이게도 비할 데 없는 견고한 절대주의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방대한 비인격적 기구로서의 관료제의, 방대한 인격지배의 연쇄체계로의 매몰, 객관적 권한의 주관적 자의에의 동일화, '선의의 오직汚職'과 '성실한 전횡專橫', 그리하여 천황제 관료제는 근대적인 그것에서 완전히 일탈해간다."(68-9)
"세계정치 상황의 압력과 국내적 절대주의의 미성숙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급속한 근대국가의 형성이 이루어져야만 했던 사정은, 한편으로 시종 권력적 절대자의 등장을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절대주의로서의 다양한 특이성을 낳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① (정치기술자로서의) statesmen의 다원성, ② 권력집중의 대극對極으로서의 수평화와는 반대로, 수평화가 촉진되는 기능적 결과로서의 집중에 대한 기대(따라서 수평화는 공의公議 등용, 인재 흡수로 끝나서 의사화擬似化하게 된다), ③ 절대권력자의 성립에 매개되지 않는 기구지배 원리의 조숙, ④ 국가 관념에서의 (대내적 통치기술이 아닌) 대외공동태共同態의 계기의 불균형적인 고양이었다. 그리하여 이 같은 점들이 시급한 국가형성에 수반해서 진행되었으며, 봉건적 권력의 절대군주에 의한 국내적 수탈이 불철저한 그대로 남게 되면, 그만큼 봉건적 분파주의를 내면화 시키게 되어 도리어 결과적으로 모순을 확대재생산하게 되었다."(99)
3 / 천황제와 파시즘
"일본에서 향토鄕土는 국가의 향토이기도 했다. 향토를 떠난 개인도 없지만 향토를 떠난 국가도 없었다." "그와 같은 곳에서 거대화된 도시와 기계와 사회의 기구화라는 병폐에 대한 지각력知覺力과 반발은, 그 자체 병리적인 조숙한 발육을 이루게 된다." "일본에서 기계화는 '서구적 유물론화'이며, 국가의 심정에 반하는 것이다. 인간 일반과 '정신의 위기'의 자각(발레리P. Valery)이 아닌, 자연과 전통에 의해 생활하고 있는 '일촌일가'의 향토와 그 심정이 기계에 대한 반항의 담지자인 것이다. 역사의 역동성dynamics은 인간의 심층에 이르지 않으며, 그 때문에 도리어 안이하게 얼핏 보기에 일찍이 나타나게 된다. 향토주의는, 그래서 일본의 대외적 긴장이 증대되고, 자본주의 공황의 타격이 농촌에서 심각해짐과 더불어, 조국=향토의 적을 공격하면서 떠오르게 된다.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극단화ultra와 '국가개조國家改造'의 심정적 주장이, 사회생활의 획일적인 기구화, 도시의 무습속성無習俗性에 반발한다."(159-61)
"그러므로 행동의 전문가가 필요하다. '파괴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노우에 닛쇼 일파처럼, 〈우리는 파괴를 받아들여서 쓰러질 각오로 지내고 있으므로, 건설하는 생각까지 연구하자는 분위기가 없었다〉고 하여, '벌閥' 타도에 열광하는 우익 '급진 파시즘' 운동의 하나의 유형이 그것이었다. 그들 운동가들은 향토에 틀어박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것을 떠나서 '동분서주'한다. 그들은, 향토와 농민을 위해서 '천황친정'을 실현해야 하며, 비일상적인 세계에 활약하는 '지사志士'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또한 그들의 행동 그 자체는 무뢰한outlaws의 그것이지만, 정신 형식에서는 천황에 대한 철저한 충의자忠義者들이었다. 오히려 역설적이지만, 충의자라는 것에 의해서 무뢰한이 되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떠한 행동규범도 인정하지 않는 허무주의자nihilist가 아니라, 최고 가치에 대한 헌신으로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162)
"막연한 가치관에서 나온 '지극한 정'의 결과는, 정확한 가치판단을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다. 거기서는 가치판단의 분명한 척도 그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조국을 껴안기만 하면 그것으로 가치와 행동은 모순 없이 이어진다. 어떠한 행동도 지극한 정에서 나오는 한, 그 자신에게는 정당하다." "게다가 그것은 어버이와 자식의 온정溫情관계와 밀접하게 연속된다. 바로 '생물 자연의 욕구' 체계다. 천황제 정신의 실체는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욕망 자연주의 아래서는 어떠한 행동도 모두 당연한 것으로 담기게 된다. 일상생활의 합리화나 사회과학 연구도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같은 정신구조야말로 일본 파시즘의 '국가개조'를 단락없이 행하게 한 바탕이었다. 천황제 내부에 존재하는 근대국가로서의 합리적 기구화와 전근대적 공동태共同態로서의 전통적 심정의 가치화라는, 두 개의 경향이 낳게 되는 심각한 모순을, 다시금 매개하고 봉합하는 것은 그 같은 정신 이외에 다름 아니었다."(166-7)
"일본에서 파시즘은, 특정 사회계층(농촌 재지중간층)을 운동의 기초적인 힘으로 출발했으며, 농촌 향토의 조직화에 의해 체제편성의 단위를 만들고 그 원형하에 국가의 전체 조직화를 행하려고 한 데 대해서, 나치즘은 결코 특정한 사회계층을 운동의 기반으로 하지 않았다." "나치즘은 유동流動을 전제로 하며, 일본은 향토에의 정착을 전제로 한다. 저쪽은 인위적 수렴을 결말로 하며, 일본은 정착자의 확대를 목표로 한다. 그래서 저쪽은 유대인 배격을 통해서 독일인의 수렴을 가져오며, 세계 부정을 계획해서 체제의 재생산을 기도한다. 그리고 일본 파쇼화의 과정은, 향토에의 복귀의 확대로서 '전향轉向'을 가져오며, 천황제 국가로의 '귀화歸化'로서 '팔굉일우'의 전쟁을 행하는 것이었다. 이들 두 개의 과정은 병행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행되었다." "'전향'은 '추상이론에서 구체적 상황의 직접적 감각적 체험으로'라는 방향을 걸었다. '삶Leben으로'의 복귀였다. 그래서 그 과정은 '솔직'할 수 있었다."(180-2)
"객관적 인식이라는 외줄기 창의 비균형적 사상은, 바야흐로 구체적 체험이라는 외줄기 창의 비균형적 실감實感으로 전환하는데, 그 경우 많은 전향자들이 가족과 향토의 온정으로 순진하게 되돌아갔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학교의 성적도 좋고, 진지했던 자가 많았던〉 좌익운동가는, 지금은 그 '방향의 잘못'을 바로잡아서, 다시금 무라村에서는 모범 인물이 된다. 농촌의 '사표儀表'이며, '조직인'이다. 그것은 앞 절에서 향토파시즘이 요구하고 있던 '중견인물'에 다름 아니다. 농촌에 정착할 수 있었던 전향자는, 그렇게 해서, '혁신운동'의 조직자organizer가 된 자들이 많다." "순진한 향토로의 복귀는 순진한 문학으로의 복귀와 평행적이다. 농본주의와 문학 세계에서의 일본 낭만주의는 대응한다. 전자가 '혁신자'라면, 후자 역시 하나의 '유행에 대한 도전'이다." "다만 후자는, 어디까지나 미적 감각체험─그 자체가 추상세계 속에 있다─의 세계를 떠나지 않았을 뿐이다."(182-3)
"일본에서, 총력전 국가원리의 발현을 상징하는 것은 '인적 자원의 동원·배치'가 모든 국가정책을 형성하는 데 근본적인 발상의 축이 되었다는 점이다. 2차 대전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인적 자원'이라는 말이 전근대적인 천황제로부터 생겨난 것처럼 생각되지만, 오히려 정반대로 그 말의 등장은 일본에서 점차 근대 국가(사회가 아닌)의 원리가 완전히 관철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할 것도 없이 마키아벨리 이래의 근대정치의 원칙은, 슈미트의 말을 빌자면, 인간을 '인적 자원Menschenmaterial'으로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많은 사람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조직해서 통합하는 인간 처리의 기술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씩씩한 정치 관념은,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당초의 기도 다카요시와 이토 히로부미에게 존재한 이래 어떠한 지배자에서도 끊어지지 않았다. 바야흐로 총력전이 요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그 원리의 관철에 다름 아니었다."(190)
"그래서 총력전 국가는, 태평양전쟁의 격화에 의해서, 내몰린 상황에 처해진 경우에,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현실화되기에 이르렀다. '전업과 폐업' '징용'은 '인적 자원'의 합리적 재편성의 구체적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원리는, 인간을 그 물리적 단위량에서 취급하므로, 말할 것도 없이 그 현실 단위는 노동력으로서의 '개인'이다. 그래서 그런 원리가 관철되는 곳, 일본의 향토는 완전히 산산히 분해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쟁이라는 지상명령至上命令이 그것을 강행시키려고 했다. 그것은 결코 흔쾌하게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지배자 자신의 '이에家'와 '향토'에 대한 신뢰는, 총력전의 논리를 논리적으로 관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이에家를 파괴하는' 부인 징용은 실현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만약 질서에 대한 내적인 자각에 의해 일본의 국가가 구성되어 있었다면, 합리적 재편성은 국민의 합리적 선택과 자발적 복종을 수반해서 그야말로 '원활'하게 영위되었을 것이다."(193)
"징용과 전업 및 폐업이 수동적으로 강행됨으로써, 총력전 체제는 비로소 성립했는데, 그것은 곧바로 일본사회의 전면적인 붕괴를 의미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직업Beruf 모럴의 발효지醱酵地로서의 '가업'은 그렇게 분산되었다. 이미 노동은 어떠한 내면적 사명감에 의해서도 떠받쳐지지 않았다. 다만 끌려서 가고, 명령에 따라서, 감시하에, 규정시간 만큼 규정대로 움직이게 된다. 생활의 기조는 사적인 충동이며, 행동의 틀은 물리적 기구이지 자주적 떠받침을 갖는 제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제도의 붕괴가 제도화되고 있었다. 여기서 징용공의 '비능률'과 '불량화' 문제가 발생했다. 징용공만이 아니었다. '동원된 학생들'에게도, 이어서 정착한 숙련노동자에게도, '직장'은 이미 자기의 직장이 아니었다." "총력전 국가는 획일적 강제 이외의 정치수단을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거꾸로 복잡한 현실 앞에서 완전히 파탄된다. 거기에 남은 것은 공허한 권력기구와 제도를 갖지 못한 '대중' 아닌가."(194-6)
4 / 천황제의 파시즘화와 그 논리구조
"총력전 국가가 요구하는 정치원리는 한 마디로 말하면 지배의 비인격화다. 다만 그 지배의 비인격화는 일견 모순된 두 개의 의미를 포함한다.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인간적인 연계에 의해 지배가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체제mechanism가 지배하는 것이다, 라는 지배관이 강한 형태로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보통의 구체적 인격을 훨씬 넘어서는 능력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비인격적인 강력한 지배인격을 요구했던 것이다." "논리는 추상적 보편적인 '무인격적 진리'이지만 정치는 영원히 인간에 의한 인간의 조직화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기계적인mechanical 합칙성合則性으로 사회관계를 규제하려 하더라도 거기에 인간적 결단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메커니즘이 인간을 조직화하는 운동을 시작하며, 그 출발점에 결단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커니즘이 전체 사회를 뒤덮게 되면 될수록, 바꾸어 말하면 거대해지면 질수록 결단의 의미도 거대해진다."(204-5)
"거기서는 당연히 거대한 인격의 존재가 요구된다. 게다가 전체적 메커니즘은 사회 각 영역에서 대·중·소의 메커니즘의 통체統體로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그것에 대응해서 결단 인격의 계층제hierarchy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경우 전체 메커니즘의 결단자는 소小메커니즘 결단자의 결단능력에 대해서 기하급수적으로 큰 결단 능력을 요구당하는 것이다. 디모크 식으로 말하면, 그는 보편자가 아니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거의 신神에 가까운 것이다. 정치지배를 기구화 한다는 근대화의 시도가 떠오르게 되자, 초월자와 경험적 인격과의 동일화가 요구된다는 역설이 정치의 논리인 것이다. 일본의 경우 일찍이 한 번도 초월자와 인격이 절단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역설은 역설로서 발현되지 못하고 전통적 지배원리의 존속과 병행해서 메커니즘 지배의 원리가 점차적으로 강해지게 된다는 식의 경로를 걷게 된다. 다만 그들 양자는 원만하게 공존하는 것은 아니다."(205)
"만주사변 이래 그 기운을 길러서 특히 2·26사건 이후 히로다 내각 때에 지배적으로 되었던 '고도 국방국가' 요구에서 '국민총동원'에 이르는 과정은, 소/중/대의 각종 천황에 의한 인격적personal 지배관계의 축적에 의해서 정치사회를 구성해가는 심정적 화합의 원리를 무너뜨리고, 군사적인 관점에서, 목적의식을 축으로 하는 계획성으로 사회관계를 규제하려는 것이었다. 고도 '국방'이라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군사부문의 확충을 의미할 뿐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근대 국방은 그 범위가 정치, 경제, 교육, 종교, 예술 등의 정신적 및 물질적 양 방면에서 모든 국민생활의 각 부문에 이르기까지 확장하는 것이며, 국방은 단순히 군비를 충실히 하고 무력전 준비를 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국민생활의 전 부문에 걸친 국방의 충실이란, 인간관계에서의 물질적 및 정신적인 모든 영역의 운행을 일정한 군사목적에 맞추어 정합적으로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을 의도하고 있었다."(207)
"이러한 '고도 국방국가' 이미지가 일본 국민의 '근대화'에 대한 여망을 짊어질 수 있었을까. 그런 이미지의 실체적 기초를 이루는 국가의 정책 다시 말해서 전쟁준비, 중국 침략정책 속에서 '근대'를 찾아냈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그 비밀의 절반은 확실히 일본의 메이지 이래의 숙명인 세계정세 추수주의追隨主義에 있으며, 그 무렵 세계 최고 형태였던 통제국가의 경향에 일찌감치 가까이 가려는 것이 가장 모던하다고 생각하는 정신적 풍토가, 고도 국방국가론에 강력한 매력을 안겨주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메이지 이래의 일본은 자신이 근대가 아니며 게다가 근대 세계의 일각에 자리 잡아 근대 국가들에 나란히 서려고 했으며, 또한 어느 정도 나란히 서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으로부터, 국가 그 자체의 감성 깊이 심리적인 근대주의를 지니고 있었다." "근대가 아닌 것이 사람들 앞에서는 '근대'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 차이을 메우려는 성급한 심리적 충동이 일본 국가의 근대주의일 뿐이었다."(208-9)
"근대국방국가 건설론의, 논論으로서의 진행은 현실정치 속에서 하나의 경향의 진행과 서로 수반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사유私有 공용共用(혹은 공영公營)의 원리'이다." "그 원리하에서는 국가는 사적인 것의 존재를 인용하고, 그 위에서 사적인 것을 공적인 관점에서 운영·조작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사상적 입장은, 일본에서 기존의 그것으로는 거의 마르크스주의뿐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공과 사의 단순한 준별이 아니라, 양자의 그야말로 '분리' 위의 '결합'을 찾아내는 것이 일관되게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마르크스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사고하는 경험을 거치지 않으면, 그런 원리를 생각해낼 수도 없을 것이며, 또 현실에 적용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고도 국방국가론의 중핵원리를 만든 것은 일본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방법이다, 라는 실로 근사한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일본 사상사의 거꾸로 선 성격을 그만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달리 없다."(214-6)
"여기까지 오게 되면, 이미 사유 공용의 원리인 인적인 담당자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분명한 이미지가 떠오르게 된다. 한 마디로 혁신관료라 불리는 그들은 거의 대부분 다이쇼시대 말기에 제국대학을 나온 수재들이었으며, 적어도 그 학생시대에 마르크스주의의 교양을 몸에 갖추고 있었다." "그들 중심 그룹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학생시대의 주변 상황에서 상당부분 자연스럽게 큰 의도적 노력 없이 머리에 들어온 것이었으며, 또한 그 정도였다. 머리에 들어와 정착한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사회를 파악하는 방식, 다시 말해서 전체 기구적인 파악 방식이며, 따라서 또 세계관을 존중하는 자세였다. 그것은 일본에서는 실로 참신한 사고방식이었다." "그에 따르면, 사회는 결국 구체적 인간에서 독립한 인간의 관계 그 자체이므로, 그 관계의 구조 즉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그것을 움직이는 것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다, 라는 사고방식이 '전기구적 파악주의全機構的把握主義'에서 나오게 된다."(218-9)
"고도 국방국가론은 그 논리의 세계에서는, 명석한 정의의 한정이라는 형태로, 결단의 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실현과정에서는, 현실의 결단자를 결여하고 있었다. 혁신관료는 자신이 만든 계획이면서도, 자신이 책임 있는 지도자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겸허하게도 지도자를 다른 데서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래의 지배자들은, 누구도 자신이 천황의 권한을 넘어서는 강력자가 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자 이상으로 겸허했다. 천황은 지금 우리가 밤낮으로 눈앞에서 검증하고 있듯이, 그렇게 강력한 지배자일 수 있는 자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각이나 그 안의 5상 회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천황에 가장 가까운 입장에 있는 자들 중에서 지혜로운 자에게, 강력함을 구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은 동시에 메이지 이래의 일본의 국가구조의 난점을 어떻게 해서든 호도하려는 괴로운 방책이기도 했다. 그것은 결국 강력자의 대용품에 다름 아니었다."(224-5)
"도조 수상이 〈기요미즈淸水의 탑에서 뛰어내리는 기분으로〉 전쟁을 시작했던, 그 자살적인 심정은, 결단 능력이 없는 자가 최대의 결단자답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의 고뇌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 무렵의 군부 지도자가 전후가 된 후에도 자신의 전쟁책임을 통감하지 않는 것은, 주관적인 심정으로는 이해 가능한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체면상 결단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보여주지 않으면 수습되지 않는 장면이 된 이후에 개전開戰했을 뿐이다. 그야말로 〈우리도 역시 전쟁은 싫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본의 정신구조 안에 있는 '결단' 유형이 드러난다. 결단이란 체면을 동기로 하는 그야말로 자살행위, 그것에 다름 아니다. 합리적 추론을 거의 끝까지 밀고나간 결과, 당면한 상황하에서 불투명한 부분을 최소한으로까지 줄이고, 그 위에서 행동으로 나아가기 위해 행하는 능동적인 결단이 아니다. 따라서 다의적多義的인 현실에 다시금 압도되어 현실상황 앞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226-7)
5 / '료안'의 사회적 구조
# 료안 : 천황이 입는 상喪 중에서 가장 무거운 것 혹은 천자의, 부모의 상喪을 입는'服' 기간.
"쇼와 원년은 주지하듯이 일주일에 지나지 않는다. 일주일이 1년으로 계산되는 것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천황 개인의 사망으로 시간이 구분되며, 그 시간의 척도가 전 국민의 생활에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구분을 통용시키려면, 국가기구와 교육기관과 강제장치와 보도수단을 완전히 가동해서, 첫째로 세간의 표면적인 행동양식이라는 점에서 '료안' '천조踐祚(즉위)'를 의례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둘째로 '교훈'과 '선전宣傳'과 '의례적 행위가 가져다주는 내면에의 조건반사'에 의해서, 국민의식의 표층에 그 구분을 심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 일주간'의 신문을 보면, 큰 초호初號 활자로 '심장이 쇠약해지시다御心臟御衰弱', '맥이 불규칙해지시다御脈御結代'로 시작해서, 매일매일 '어御'자가 우르르 붙은 기묘한 일본어로, 천황의 병상과 죽음과 새 천황의 '훌륭한 모습御英姿', '뛰어난 능력御萬能', '타고난 재능御天才' 등이 공식적으로 보도되었다."(231-2)
"'료안'에 대해서는 '군대'에서의 '요배식', 각 학교(대학까지 포함해서)에서의 '추도식追悼式', '감옥'에서의 '사면免役' 등이 행해졌다. 아마도 거의 완전에 가까운 근신, 다시 말해서 일종의 사회적 행동의 정지가 행해질 수 있었던 것은, 궁내성宮內省즉, 천황 일가의 가정관家政官들과 군대 내부와 경찰서 내부와 감옥 내부뿐이었으리라. 바꾸어 말하면 먹는 것을 자발적이든 어쩔 수 없어서든, 아무튼 국가에 의해 보증되고 보통의 사회생활에서 격리된 세계에서, 천황 교체의 '의례儀禮'는 거의 완전하게 실행되었다. 그 속에는, 궁내성이나 경찰이나 군대의 지휘관들처럼, 그 의례의 실시에 '의해 먹고 사는 자들'과 죄수들처럼 그 실시를 '위해서 먹이고 있는 자들'이라는 양극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만, 어쨌든 천황제의 순수형태가 내정-경찰, 군대-감옥이라는 종적인 근간으로 수도파이프처럼, 일본 사회를 '천상天上'에서 '지하地下'까지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234)
# 요배식遙拜式 : 멀리서 연고가 있는 쪽을 향하여 절하는 의식
"내정-경찰-군대-감옥을 중심으로 하고, 거기에 관공서와 학교를 덧붙인 사회적 수용소를 제외하면, 일반 사회에서는 료안·천조에 수반되는 근신은 국가의 의례로서 의례적으로 행해졌지만, 사회생활을 완전히 규정하는 형태로 행해질 수는 없었다." "일례를 들면, 료안의 세계와 정계의 사회라는 양안兩岸을 건너뛰고 있는 것이 '연미복' 차림의 정치인들이었다. 그야말로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처럼 입고 있는 연미복은, 일단 공실로 옮아가면, 일변해서 '훌륭하게'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변해버린다. 연미복은 '번쩍번쩍한 모습'이 되어 춤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상복이 장례식 정면에서 애도의 상징이면서 그 뒷면에서는 서로 맵시를 다투는 멋진 복장이 되는 것은 잘 차려 입는 상류계급 사이에서는 아주 보편적인 것인지도 모르지만, 여기서는 '애도'에 아무런 인간적 실감도 수반하지 않는 국가의 의례 제도인 만큼 정면과 뒷면의 감각적 거리는 크며, 상복의 기능 전환은 그만큼 선명하다."(235-9)
"료안의 가운데 정치인들이 권력의 이해타산에 전념했다고 한다면, 부르주아 쪽은 금전의 이해타산에 열중하고 있었다. 부르주아 사회의 의욕의 동향을 (이성적인 것보다는)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주식시장'은 12월 27일에 이미 〈쇼와 벽두의 좋은 인기, 도쿄 시장 물이 오르다〉 〈희망에 가득차 앙등昻騰〉 〈활기를 띠다, 모든 주가 일제히 높다〉는 상태였다." "주지하듯이, 천황의 죽음은 동시에 새 천황의 즉위를 가져온다. 즉위식은 아직 행해지지 않았으므로 정식으로 축하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료안의 이면에는 언제나 천조와 개원이 있다. 자본주의의 번화가는, 그런 새 천황의 천조를 축하하며, 새 원호의 '새 시대'를 미리 축하해서 화려한 입회와 환성과 박수식을 드러냈다, 라고 한다. 료안의 취지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료안의 뒷면에 있는 천조와 개원을 축하할 뿐이다. 역시 도박사의 세계는 동전의 안과 밖을 가르는 기세 전환의 빠름을 갖는다. 일본 자본주의의 점술사는 이렇게 천황제의 미래를 축복한다."(240-2)
"국가의 활동적 부분을 담당했던 자들의 료안에 대한 태도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빠져나갈 구멍 찾기'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정치인들의 서술에서 '대기실', 주식시장 서술에서의 강림신화의 '빗댐' 등은 그런 방법의 은유暗喩였다. 그러나 당연한 것이지만 빠져나갈 구멍의 존재를 모른다면 빠져나갈 구멍 찾기란 불가능하다. 의례를 포함한 국가제도의 내부에 정통한 자에게만 그런 교활함이 허용된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거리의 소상인들은 연말·연시의 '한 몫 잡는' 시기를 앞두고서 그때 쓸 물품을 산지에서 그들로서는 대량으로 사들인다. 그 양의 여하는 계절마다 반복해온 경험으로 산정된다. 그런데 갑자기 회식이나 연회를 모두 금지하는 료안의 '근신조치'가 내려온다. 그들의 계획은 파산에 이르게 된다. 사회의 움직임 내에 깃든 변동'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외적인 사고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인간사회의 경험이 파산시킨 것이다."(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