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자폐는 어떻게 질병에서 축복이 되었나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 꿈꿀자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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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부 최초의 자폐아(1930~1960년대)


"도널드는 자기 세계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특이한 점 중에서 부모는 이 부분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아빠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도 품에 뛰어드는 법이 없었다. 엄마를 간절히 찾는 일도 거의 없었다." "이렇듯 주변 사람의 존재를 아예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가도 자기가 하던 일에 방해를 받으면 즉시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하던 일이라봐야 허공에 단어를 쓴다든지, 바닥에 주저앉아 끊임없이 냄비뚜껑을 돌리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집스럽게 지키려는 것이 무엇인지 점점 분명해졌다. 그것은 '동일함'이었다. 완전하고도 순수한 일상의 반복이었다. 물리적 환경이 아주 조금만 변해도 참지 못했다. 가구를 옮기면 화를 냈고, 밖에 나갈 때는 들어올 때 밟았던 곳을 하나도 빠짐없이 거꾸로 밟았으며, 장난감은 놀다 내버려둔 채로 고스란히 남아 있어야 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이전에 그것들이 어떤 상태였는지 (모조리) 기억해야 했다."(29)


"도널드를 진료한 의사들이 으레 사용한 용어는 〈결함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런 진단이 붙으면 부모는 의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내 알았다. 아이를 어딘가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당시 수용시설에 보내라는 조언은 그리 잔인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결함이 있다〉는 말이 특별히 차별적인 용어도 아니었다. 〈심장판막의 결함〉처럼 그저 정상적인 기능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을 지닌 임상용어일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1902년에 등장한 〈백치idiot〉, 〈치우imbecile〉, 〈노둔moron〉이란 용어도 〈정신연령〉이 3세 미만, 3~7세, 7~10세인 사람을 지칭하는 의학용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용어가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누군가를 조롱하고, 상처를 주고, 낙인을 찍기 위한 말로 변질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지체retarded〉라는 말도 한때 장애에 관한 용어 중 가장 중립적인 말로 〈발달이 늦다delayed〉는 의미를 고상하게 표현한 것이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모욕적인 단어를 파생시켰다."(41-3)


"인류학, 동물학, 유전학, 심리측정학 등 비교적 새로운 과학들의 결합에서 탄생한 우생학은 인류의 혈통에서 결점과 불순물을 씻어버릴 수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테디 루스벨트 대통령조차 친구인 뉴욕의 변호사 메디슨 그랜트가 쓴 우생학 선언서 〈위대한 혈통의 전승〉을 추켜세웠다. 책에서 그랜트는 집단 선택번식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서 〈허약하고, 결함투성이이며, 정신적 불구인〉 유전적 영향을 일소하고, 〈무가치〉하고 〈형편없는〉 수백만 시민을 제거하라고 권고했다. 루스벨트는 〈국민이 가장 절실히 깨달아야 할 사실〉을 잘 요약한 책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오스트리아 청년은 그랜트에게 팬레터를 보내 그의 책이 자신의 〈바이블〉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청년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그랜트는 자손을 이어갈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강제불임술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우생학에 어찌나 열광했던지 1920년대에 미국 17개 주에서 강제불임술을 법제화할 정도였다."(53-4)


"1974년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미시간 대학의 나탈리아 찰리스와 호러스 듀이는 (500년 전 러시아에서 〈신성한 바보〉로 간주되었던) 바질을 비롯해 비슷한 이야기로 전해지는 몇몇 사람의 행동을 그저 어리석거나 성스럽다고 볼 수 없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신성한 바보들 중 일부는 말을 못했지만 일부는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따라했으며, 수수께끼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권력자 앞에서 전혀 위축되지 않고 생각하는 바를 불쑥 내뱉기도 했다. 찰리스와 듀이는 그런 경향이야말로 러시아 민중이 그들을 사랑했던 이유라고 적었다. 아무도 권위에 맞서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문화였지만, 그들의 거침없는 행동에서 구약 속의 위대한 선지자들을 떠올렸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500년 전에 자폐증이란 진단명이 있었다면 민중은 이 바보들을 신성한 존재로 추앙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중의 경외심과 존경은 이들이 일부러 혹독하고 외로운 삶을 선택했다고 믿었기에 생겨났다."(79-80)


2부 비난 게임(1960~1980년대)


"숫자는 계속 늘어나는데도 자폐증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노력은 지속되지 못했다. 너무 드물어 과학자들이 주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탓도 있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정신의학자들이 자폐증의 원인이 분명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최종 판결은 이랬다. 〈자폐증은 엄마가 자녀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다.〉" "(자폐아 엄마들의) 소그룹 만남은 강렬한 고해성사의 장이었다. 아이가 태어나 처음 몇 주 또는 몇 개월, 기억조차 희미한 그때를 떠올리며 자폐증이 시작된 순간을 잡아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자폐증을 언제 처음 알아차렸는지 찾는 것이 아니었다. 미처 느끼지 못한 사이에 뭔가 잘못한 순간, 아기에게 심한 정신적 외상을 가해 스스로 지어낸 현실 속으로 영원히 숨게 만든 그 무언가를 어떻게든 찾아내야 했다. 아이들은 〈정상〉으로 태어났지만 그 뒤로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다름 아닌 엄마에 의해 엄청난 정신적 외상을 입었다는 것이 기본적인 가정이었다."(121-2)


"(의학도 심리학도 아닌 예술사 박사학위 소지자였던) 브루노 베텔하임은 1967년에 《텅 빈 요새》를 출간하면서 최고의 자폐증 전문가로 대접받았다." "그는 이 책에서 〈기계소년 조이〉의 사례를 든다. 조이는 어려서 부모에게 〈완전히 무시〉당한 결과 자신을 커다란 기계의 부품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 커다란 기계가 바로 세상이란 관념을 발달시켰다고 서술되어 있다. 조이는 사람과 접촉을 피하면서 주로 기계, 특히 선풍기에 관심을 보였다. 왜 선풍기일까? 베텔하임은 선풍기가 회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든 형태의 원은 자폐 어린이에게 특수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 의미는 끊임없이 회전하면서 절대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상호관계를 갈망한다.〉 베텔하임은 조이가 스스로 어떤 탁자 밑에 기어들어가 자신을 품은 알을 낳았다고 상상하던 날 〈악순환〉을 끊어버렸다고 했다. 상징적으로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옴으로써 다시 태어났고, 완치를 향해 나아갔다는 것이다."(136-7)


"루스와 남편은 완전한 베이비붐 세대이자 독실한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였다 그녀 자신이 여덟 명의 형제자매 중 맏이였을 뿐 아니라 일곱 아이의 엄마였다. 일곱을 똑같이 사랑하고, 똑같이 키웠지만 하나만 자폐증이었다. 저절로 대조군이 설정된 실험이었다. 6대 1이라고? 그 정도면 증거로 충분했다. 그것은 상식이었고, 상식이야말로 루스가 삶에 다가서는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냉장고 엄마라는 이론을 믿은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하면 끔찍했다. 그 이론은 너무 다양한 방식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쳤다." "무엇보다 그 이론은 어린이를 배제하고 엄마를 겨냥한 치료를 처방했기에 애초부터 실패할 것이 확실했다. 모든 것을 깨닫자 행동가의 본성이 꿈틀거렸다. 꽉 막힌 현실을 깨뜨려야 했다." "루스는 대중의 힘을 믿었다. 여성들이 힘을 합친다면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제 흔치 않은 장애를 지닌 아이들의 엄마라는 작은 세계에서부터 그런 집단을 조직할 참이었다."(167-8)


"뭔가 좋은 쪽으로 바뀌었다면 예외 없이 부모들이 나서 도울 방법이 없다고 변명하는 구태의연한 상태를 뒤집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문제란 편견의 벽에 맨손으로 맞선 루스 설리번과 올버니 엄마들, 고립된 상태에서 각지에 선구적인 조직을 만든 부모들은 주춧돌을 놓은 셈이었다." "냉장고 엄마 이론은 자폐가 엄마 때문이라고 비난함으로써 그들의 목소리는 들어볼 가치도 없다는 인식을 부추겼다. 열정과 조직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냉장고 엄마 이론에 맞서려면 무엇보다 대항이론이 필요했다.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자격과 신뢰성을 지닌 누군가가 그런 이론을 주장해주어야 했다." "1964년 그런 인물이 나타났다. 한때는 샌디에이고의 열쇠 수리공이었지만, 자신이 변화시킨 세계에서 그는 버나드 림랜드 박사로 알려졌다. 버니는 자폐증에 관해 한마디할 만한 학위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심리학이다. 또한 루스 설리번처럼 자폐증을 겪는 아들을 두었으며, 사람들을 조직하는 데 열정적이었다."(172-3)


"루스와 림랜드는 너무나 잘 맞았다. 둘은 즉시 서로를 하늘이 내려준 파트너로 생각했다. 설리번은 법을 만드는 사람들과 미디어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알았다. 림랜드는 수많은 연구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데 능숙했고, 의사나 과학자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자녀들에 대한 인식과 교육과 사회적 대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부모 네트워크를 넓히려고 노력해왔다. 1965년 늦여름,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설리번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고립된 가족들을 전국 규모의 단일한 집단으로 결집시켜야 해.〉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종이에 적어 가며 구상을 마친 후, 자신의 생각을 림랜드에게 적어 보냈다. 림랜드가 보낸 편지 역시 우송되는 중이었다. 편지에는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했으니 도와주기 바란다고 적혀 있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마침내 1965년 11월 14일 전미 자폐어린이협회가 탄생하게 되었다."(189)


3부 수용시설의 종말(1970~1990년대)


"예전에 자폐인들은 모두 어디에 있었을까? 20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시설에 수용되어 있었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자녀를 시설로 보낸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곳이 〈뱀구덩이snake pit〉가 아니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많은 시설에서 수용자를 극단적으로 방치하거나 대놓고 학대한다는 이야기가 거의 정기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때마다 격분과 개탄이 들끓었지만, 이내 잊혔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1949년 찰스 아멘트라우트는 헌팅턴 주립병원에 잠입하여 〈목재들이 썩어가는 방[들]〉과 〈어두침침한 복도[들]〉를 돌아다니며 본 것들을 보도했다." "그의 마음을 가장 불편하게 한 것은 어린이들의 비참한 처지였다. 하나같이 거의 벌거벗은 채 몸에 자신의 배설물을 잔뜩 묻히고 있었다. 장난감은 물론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아멘트라우트는 대소변 가리기 훈련이 안 되어 있음을 알고 기겁했다. 〈정신질환자들의 냄새〉라고 표현한 악취에 거의 압도당할 것 같았다."(225-8)


"1969년 겨울 PARC(펜실베이니아 지체아동협회)를 대표하는 두 명의 부모가 찾아왔을 때까지 톰 길훌은 그런 단체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들은 펜헐스트 주립학교의 소유주이자 운영자인 펜실베이니아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면 승산이 있겠느냐고 물었다." "PARC의 부모들은 〈인권〉 변호사를 원했다. 〈인권〉을 주장하고 싶었다. 헌법을 근거로 학교에서 인종분리 정책이 퇴조하고, 소수자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지기 시작한 때였다. 주 의회나 주지사 집무실에서는 승산이 없어도, 법정에서라면 약자들도 충분히 싸워볼 만하다는 정서가 생겨났다." "길훌은 아홉 쪽에 이르는 전투계획을 제시했다. 핵심 단어는 〈교육받을 권리〉였다. 길훌은 어린이들이 감금된 소위 주립학교가 사실은 전혀 학교가 아니라는 점을 중심으로 결론을 구성했다." "그리고 법정에서 길훌은 승리를 거두었다. PARC의 부모들을 대신해 쟁취한 승리였다. 이후 2개월간 그는 주 정부와 13개 교육청이 취해야 할 조치들을 문서화했다."(236-40)


"시설에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공세가 강화되면서 마지못해 장애 어린이의 교육 의무를 포괄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어떤 교육청도 그 의무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어린이에게 적용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전히 교육청들은 프로그램에 방해가 되고 다루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어린이들을 배제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다시 말해 자폐 어린이는 이제 시설에 수용될 가능성은 낮아졌지만, 아직 학교에 갈 권리는 없었다. 1972년 숀 레이핀은 네 살이 되었다. 이미 카운티에서 비용을 지불하는 예비 자폐 프로그램에 다니고 있었지만, 3년 뒤 일곱 살이 되면 더 이상 다닐 수 없었다. 어떻게든 캘리포니아주에서 자폐 어린이를 위한 기회의 물꼬를 터야만 했다. 레이핀 부부는 길훌의 자문을 받아 소송을 제기했다. 다른 지역 자폐 부모들도 동참했다. 그들은 미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법정 소송과 의회 로비를 벌였다. 요구는 하나같았다. 교육받을 권리 속에 〈자폐증〉이란 단어를 명시하라는 것이었다."(258-9)


# 1974년 9월 30일, 주지사 로널드 레이건이 임기 마지막 날에 법안에 서명함


"입소자들이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거대 수용시설들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도 그토록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미국의 시설 수용자 수는 1970년대를 기점으로 급락했다. 새로 입소하는 어린이와 젊은이들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크게 줄었기 때문이었다. 1965년에는 시설 수용자 중 48.9퍼센트가 21세 미만이었다. 이 연령군이 가장 많았던 때다. 1977년에 이르면 이들의 비중은 35.8퍼센트로 떨어지고, 1987년에는 12.7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런 추세는 어린이들에게 하루 종일 가 있을 곳을 제공한 덕분이다. 바로 학교였다 1975년 연방 장애아동교육법(1990년 장애인교육법으로 개칭)이 제정되면서 연방 보조금을 받는 모든 공립학교에 새로운 의무가 생겼다. 계속 보조금을 받으려면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가 있는 모든 어린이에게 평등한 교육 접근권을 제공해야 했다. 어떤 장애가 해당되는지는 목록에 명시되어 있었다. 1990년에는 자폐증도 그 목록에 등재되었다."(267-9)


4부 행동, 분석되다(1950~1990년대)


"1960년대에 자폐 어린이를 돕는다며 온갖 희한한 방법을 추구했던 연구자들이 끊임없이 주장했던 한 가지 분명한 진실이 있다. 사실상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다는 점이었다. (환각 효과가 정신질환의 주요 증상과 비슷하다는 데서 착안한) LSD 실험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 이런 변명은 1965년 이바 로바스라는 UCLA 심리학자가 건전지로 작동하는 소몰이용 작대기로 어린이들에게 전기충격을 가하기 시작했을 때 다시 등장했다. 그의 실험은 논쟁적이었던 만큼이나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로바스는 자해행동이 나타나는 순간 처벌을 가함으로써 행동을 조절할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실험 결과, 처벌은 어린이들의 자해행동을 억제하는 데 눈에 띄는 효과를 보였다." "로바스는 자신의 과학을 깊이 신뢰했다. 그에게 과학이란 인간심리학의 원칙이 관찰 가능하고, 확인 가능하고, 측정 가능하고, 몇 번이고 신뢰성있게 반복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동물에게 효과가 있는 것은 인간에게도 효과가 있었다."(282-92)


"강화와 처벌. 두 가지 요소 사이의 도덕적 균형은 20년간 로바스의 자폐 어린이 연구가 끊임없이 논란에 휩싸인 이유였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사용하면서 종종 잘못 이해되었던 '강화와 처벌'이란 용어는 사실 래트, 마우스, 비둘기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유래했으며, 임상 및 분석 목적으로 사용된 특정 방법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수십 년간 수많은 실험실에서 이런 유형의 심리학을 연구한 사람들은 어떻게 생물의 거의 모든 행동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되는지 밝히는 핵심적 원리를 발견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강화와 처벌 외에도 자극stimulus, 반응response, 행동형성shaping, 조작적 조건형성operant conditioning, 부정적 강화negative reinforcement, 소거extinction 등 이 분야의 어휘는 연구대상이 〈보상〉을 받거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주어진 환경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학습하는 과정을 기술한다. 이것이 바로 행동주의라는 과학이다."(294-5)


"워싱턴 대학의 몬트로스 울프와 토드 리슬리는 자해가 심한 자폐아 디키를 대상으로 〈행동분석〉 접근법을 시도했다. 그들은 디키의 분노발작을 없애기 위해 당시 발표된 자폐증과 무관한 두 건의 연구에 착안하여 가벼운 처벌과 〈소거〉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그들은 교사에게 아이들이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지나치게 운다든지, 혼자 논다든지, 심하게 몸을 긁는다든지 등)을 나타내면 완전히 무시하라고 했다. 선생님의 주목을 끌지 못하자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은 이내 〈소거〉과정을 거쳐 빠른 시일 내에 완전히 사라졌다. 반대로 사이좋게 노는 등 보다 적절한 행동으로 바뀌면 교사는 즉시 주목했다. 교사의 주목은 강화에 효과적이었다. 적절한 행동의 빈도가 급속히 늘어났던 것이다." "디카를 지켜본 연구팀은 이런 지식을 근거로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아이의 분노발작을 일으키는 동안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는 것은 행동을 더욱 강화하고, 심지어 더 자주 그런 행동을 유도한다는 것이었다."(300-1)


"1980년대 내내 소위 혐오 이슈는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 기꺼이 처벌을 사용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며 응용행동분석applied behavior analysis, ABA에 관한 가장 논쟁적인 주제가 되었다." "반대진영에서 보기에 사람들은 약간의 충격이 행동이 향상시킨다면 더 많은 충격을 가할수록 행동이 향상된다고 믿을지도 몰랐다. 처벌은 너무나 쉽게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어 한없이 사용하게 될 수 있다." "주류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반격이 시작되자 갈등은 진흙탕 싸움으로 변해갔다. 근치수술이나 항암화학요법 등 가혹하지만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는 의학적 치료들을 예를 들어 이들은 장기적 이익을 위해 엄격하게 통제된 최소한의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그들은 혐오치료 반대자들이 힘세고 다루기 힘든 성인이 쉴 새 없이 자신과 주변 사람에게 심각한 신체적 상해를 입히는, 진정한 중증 행동문제를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314-9)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자폐증에 대해 로바스가 내놓았던 해답, 그 나름의 방식에 의한 ABA는 이도 저도 아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캐서린 모리스라는 한 엄마가 쓴 《네 목소리를 들려줘》라는 책이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1991년, 캐서린 모리스는 그녀의 가족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혐오자극을 사용하지 않는) ABA를 통해 무엇을 성취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 이전에도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자폐증에 관한 서사를 완전히 바꾼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모리스의 책은 자폐공동체에 미친 영향이란 측면에서 독보적이었다." "그 이유는 책의 부제에서 잘 드러난다. 〈자폐를 이겨낸 한 가족의 승리〉. 승리란 결국 회복 이야기였다." "로바스는 그 책의 후기를 쓰기도 했다. 책 속에는 진정한 사랑 이야기로 포장되어 있지만, 모리스의 수기 덕분에 로바스의 ABA에는 진정 존경받을 만한 방법론이란 품위가 덧씌워졌다. 로바스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했던 요소였다."(352-63)


5부 런던에서 제기한 의문(1960~1990년대)


"영국과 미국 연구자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했지만 우선순위가 크게 달랐다. 미국인들은 자폐증의 치료, 심지어 완치를 추구했다. 상황을 일종의 응급상태로 받아들이고, 되도록 빨리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반면 호기심에 불타는 영국 연구자들은 치료보다 자폐증의 본질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자폐증의 모습을 보다 정확히 그려내고, 자폐인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했다. 또한 영국 연구자들은 항상 보다 큰 질문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었다. 〈자폐증은 인간 마음의 일반적인 작동방식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라는 물음이다. 영국식 접근법은 50년간 특별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벽에 부딪혔지만, 마침내 미국과 뚜렷이 다른 결과들을 내놓았다. 영국에서 훈련받은 소수의 실험심리학자와 학계에 몸담은 정신과 의사들이 내놓은 통찰들은 전세계에서 자폐증이란 현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영원히 바꿔버렸다."(388)


"1966년 우타 프리스는 여덟 단어로 된 목록을 죽 읽어준 후, 바로 어린이들에게 들었던 단어를 순서대로 말하게 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무작위적인 단어 목록을 제시했을 때 자폐 어린이는 비자폐 어린이와 똑같이 여덟 단어 대부분을 반복했으며, 사실 목록 마지막에 있는 몇 단어를 기억해내는 데는 더 좋은 성적을 보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의미가 통하는 목록을 제시했을 때는 비자폐 어린이들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반면 (그림카드를 이용하여) 순수하게 시각적 기억을 검사하는 실험에서 비자폐 어린이는 역시 시각적 단어에서 의미를 추정하여 좋은 성적을 냈다. 이는 자폐 어린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점수는 대조군의 점수와 사실상 같았다." "여기서 한 가지 강력한 가설이 제시되었다. 자폐 어린이가 비록 언어의 섬세한 구조와 그 안에 담긴 의미의 일부를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비언어적 수단을 통해 제공된 정보에서 의미를 추론하는 능력은 뛰어나다는 것이다."(409-10)


"심리학에서 〈마음이론〉이란 용어는 다른 사람의 정신상태(생각, 꿈, 믿음)가 자신의 정신상태와 전혀 다른 독립적 실체임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론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름의 지각과 관점을 갖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처럼 자신의 의지가 없는 물체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한편 마음이론의 필연적인 결과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나중에 〈정신화〉라고 새롭게 명명된 이 과정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최선을 다해 타인의 생각을 추정하고, 그 추정을 근거로 끊임없이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배런-코언이 제1저자, 앨런 레슬리와 우타 프리스가 제2, 3저자로 참여하여 작성한, 〈자폐 어린이에게도 마음이론이 있을까?〉라는 제목을 붙인 논문에서 그들은 (거짓믿음시험의) 데이터가 밝혀냈다고 믿는 바를 과감히 선언했다. 〈우리의 결과는 단일 집단으로서 자폐 어린이들이 마음이론을 이용할 줄 모른다는 가설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422-7)


6부 진단을 재정의하다(1970~1990년대)


"로나 윙과 주디스 굴드는 자폐성향을 판별하는 기존의 진단 범주가 너무 좁게 설정되어 있었다고 보고, 자폐증의 가장 중요한 특성들을 아우르는 〈세 가지 핵심증상〉이란 개념틀을 제안했다. 우선 뭔가를 주고받는 사회적 기술의 장애를 들었다. 두 번째는 비음성언어를 포함한 언어적 소통 관련 장애였다. 세 번째는 윙이 〈사회적 상상력〉이라고 부른, 예컨대 가상놀이에 필요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세 가지 핵심증상이란 개념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융통성과 가변성이었다. 윙은 이 개념틀 내에서 자폐성향이 무한히 다양한 조합과 강도로 나타날 수 있으며, 때로는 〈정확히 정상과의 경계선상에 걸려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이런 개념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연속선continuum〉이란 단어를 사용했고, 저서에도 〈자폐성향의 연속선〉이란 장이 있었지만, 1988년에 이르면 똑같은 목적으로 〈스펙트럼spectrum〉이란 용어를 사용했다."(438-9)


7부 꿈과 한계(1980~1990년대)


"1961년생인 애니 맥도널드는 뇌성마비로 진단받았으며, 뇌가 심하게 손상되었다고 추정되었다. 걷지 못했고, 혼자서는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다. 로즈메리 크로슬리는 70년대 후반 애니가 하루종일 생활하던 수용시설의 보조원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소녀의 지능이 사실은 온전하며 활발하게 작동한다고 생각했다. 오래도록 크로슬리는 단어로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열심히 추구하며 애니의 생각과 접점을 찾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그녀는 스스로 개발한 방법을 이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고 발표했다. 나아가 그런 성공이 애니가 정신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으며, 할 말이 아주 많다는 자신의 직감을 입증해준다고 주장했다. 그간 말을 못한 것은 뇌성마비로 인해 물리적 발성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크로슬리는 발성을 통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었다. 그녀가 〈촉진적 의사소통facilitated communication〉이라고 명명한 이 방법은 FC라는 약자로 널리 알려졌다."(484)


"내면에 갇힌 아이. 자폐인의 가족들은 그 개념만 떠올리면 언제나 애가 탔다. 자녀를 〈해방〉시킬 수 있을 가능성을 떠올리는 순간, 그들의 마음은 희망으로 부풀었다.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기에 너무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해방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의 마음은 끝없는 죄책감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자폐증은 단단히 걸어잠근 방 같은 것이었다. 부모들은 끊임없이 열쇠를 찾아헤맸다. 〈내면에 갇힌 아이〉를 찾아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가족마다 독특하게 나타났다. 다운증후군처럼 다른 발달문제를 안고 있는 가족에게 사랑이란,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자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최대한 많은 기회를 주려고 노력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자폐 어린이의 부모 또한 자녀에 대한 사랑은 결코 덜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자녀를 구해야 한다는 강력한 충동을 느끼며 이를 위해 놀라운 치료를 찾아다니는 형태로 나타난다."(494-5)


"언어병리학자 하워드 쉐인은 FC의 검증 과정을 고안했다. 환자와 촉진자에게 동시에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촉진적 의사소통을 위해 나란히 앉지만, 그들 사이에 칸막이를 세워 상대가 어떤 그림을 보는지 알 수 없게 했다. 그리고 쉐인은 환자에게 그림 속에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 실험의 멋진 점은 촉진자와 환자에게 때로는 똑같은 그림을, 때로는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FC가 정말로 효과가 있다면 촉진자가 어떤 그림을 보는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촉진자가 보는 그림과 별개로, 환자는 매번 자신이 본 그림 속의 물체를 정확히 타자할 것이었다." "결과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촉진자와 환자가 다른 그림을 볼 때만 틀린 답이 나왔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틀린 답은 촉진자가 본 그림과 일치했다." "환자는 진정한 의사소통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의사소통 따위는 단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507-9)


8부 자폐증, 유명해지다(1980~1990년대)


"영화 〈레인 맨〉에서 더스틴 호프만은 단순히 서번트 연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온몸으로 자폐인을 그려냈으며, 그가 그려낸 자폐인의 초상은 실로 흠잡을 데 없었다. 처음 수용기관의 담장을 벗어나 밖으로 나온 뒤에도 레이먼드는 표정에 아무런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약간 재미있어 하는 듯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볼 뿐이다. 그의 여정을 정의하는 것은 언제나 동일함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는 끊임없이 이쑤시개와 K마트에서 산 속옷을 필요로 한다. 감각이 너무 예민해 시끄러운 소음을 몹시 고통스러워한다. 지나칠 정도로 순진하고,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걸음걸이는 뻣뻣하고 스포츠에 관한 온갖 통계 숫자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난생 처음 키스를 받아본 느낌이 어땠느냐고 물어도 단 한마디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축축했어.〉 몸에 손을 대면 벌컥 화를 내며, 초조할 때면 애벗과 코스텔로의 〈1루수가 누구야?〉에 나오는 유명한 대화를 끊임없이 반복한다."(576)


"표준적인 할리우드 영화라면 결국 레이먼드의 자폐증이 완치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세상의 모습을 충분히 본 후에 수용기관의 담장을 벗어나 영원히 그 밖에서 살겠다고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또는 일주일간의 모험과 우여곡절 끝에 형제가 매우 가까워져 같이 살아가는 것으로 막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인 맨〉의 결말은 뻔한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동생 찰리는 깊은 차원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훌륭한 삶을 살아갈 것 같다는 희망을 던지지만, 레이먼드의 성장은 분명치 않다."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레이먼드는 여전히 자폐인이다. 그것도 혼자 살아가지 못할 정도로 심한 자폐인이다. 그는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으로 돌아간다. 다만 24시간 내내 인간적으로 돌봐주는 값비싼 수용기관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자폐증에 관한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 결말은 자폐인과 부모들에게 큰 울림으로 남았다. 자폐란 항상, 언제까지나 존재하는 것이다."(576-7)


"하지만 보다 먼곳까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살아숨쉬는 자폐인 중에서 스타가 탄생해야 했다." "서른아홉 살이 되던 1986년 발간된 템플 그랜딘의 첫 번째 책은 획기적인 저작으로 평가받았다. 자폐증이란 경험이 책의 형태로, 그것도 실제 자폐증을 안고 살아가는 당사자에 의해 기술된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그랜딘은 대학에 진학했고, 애리조나주의 대학원에서 가축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하는 압박에 대해 소牛가 나타내는 반응을 연구했다. 오래도록 매혹되었던 주제였다. 그녀의 연구는 미국 전역에서 가축을 보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관행의 기틀을 마련했다." "1990년대에 영국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는 뇌의 신경연결이 비전형적인 사람들의 다양한 양상을 그린 저서에 그랜딘을 등장시켰다. 그는 그녀가 때때로 〈화성의 인류학자〉처럼 느껴진다고 한 말에 매혹되었다. 그 말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그녀에 관해 쓴 《뉴요커》 기고문과 나중에 발표된 저서의 제목으로 쓸 정도였다."(578-82)


"불운하게도 자폐증이 마침내 미국에서 진정 〈유명해진〉 것은 대중이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자폐증은 드물고도 매혹적인 현상에서 전국적으로 급속히 퍼지는 위협으로 돌변했다. 자녀를 키우는 사람은 물론 자녀를 가질 계획이 있는 사람조차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 된 것이다. 자폐증이 사회적 비상사태가 되었다는 급작스러운 인식 변화는 상식적인 관찰에 근거했다. 자폐 어린이가 옛날보다 훨씬 늘어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자폐증은 과거부터 존재했던 어떤 한계를 넘어 빠른 속도로 퍼지는 것 같았다." "자폐증 유행병epidemic이란 마음 불편한 망령은 내키지 않는 대중적 컨센서스에 의해 21세기를 규정하는 심리적 스트레스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세상이 결코 아이 키우기에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 것이다. 《어린이》라는 잡지는 이런 불안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자폐증에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장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585-8)


# 2000년대 자폐증 유병률의 상승 요인

1. 끊임없이 변경·확대되는 자폐증의 정의

2. 지역별, 집단별로 집계된 통계의 남용

3. 질병역학 분야의 발달로 유병률 상승


9부 〈유행병〉(1990~2010년대)


"소위 자폐증의 백신이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대혼란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의료행위로 인해 어린이에게 자폐증이 생길 수 있다는 대중적 공포였다. 오래도록 가라앉지 않을 이 공포는 정확히 1998년 2월 26일 아침 런던의 로얄 프리 병원에서 불붙었다." "앤드류 웨이크필드의 논문은 한두 해 사이에 진료한 열두 명의 어린이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어린이들이 자폐적 행동과 함께 심한 장의 염즘을 나타냈다고 주장했다. 아이들은 세 살에서 열 살 사이였는데, 추가적으로 검사한 결과 또 다른 특이소견을 발견했다고도 했다. 위장관에서 홍역 바이러스의 흔적을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이런 소견들을 근거로 웨이크필드 연구팀은 위장관 문제, 자폐증, 홍역 바이러스라는 세 가지 요인의 조합을 한 가지 단일한 증후군으로 볼 수 있다고 가정했다." "열두 명 중 열한 명의 어린이가 MMR 백신(홍역, 볼거리, 풍진 예방 백신)을 맞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위장관 문제와 자폐적 행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611-2)


"전 세계 바이러스학자, 소아과 의사, 공중보건 전문가 중에서 MMR 백신이야말로 응용과학의 빛나는 성과이자 실제로 어린이들의 목숨을 구하는 조치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MMR 백신이 등장한 뒤로 세 가지 질병은 사실상 대중의 기억에서 잊힐 정도였다. 웨이크필드가 이 백신 접종을 도덕적 문제로 다루고 싶다면 뒷받침할 만한 과학적 근거가 엄청나게 탄탄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호소력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지지층이 있었다. 영국에서 백신 회의론은 긴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이를 극구 지지하는 사람들은 19세기 후반부터 줄곧 공중보건당국과 불화를 빚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이들은 주변부로 밀려나 거의 힘을 쓰지 못했다. 영국의 대중이 백신 접종을 압도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철학적인 입장에서 백신을 적대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종류를 불문하고 국가가 침습적 행위를 강요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했다."(615-6)


"문제는 주류 의학계에서 신뢰할 만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확실성은 데이터를 필요로 하며, 데이터를 모으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때까지 웨이크필드 말고는 자폐증과 MMR이 관련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안전성에 관해 전문가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증거는 〈안전하지 않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부모들이 진정으로 묻고 싶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부모들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MMR이 위험하지 않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상황은 웨이크필드에게 더할 나위없는 기회였다. 또한 이로 인해 영국에서는 예방주사가 자폐증을 일으킬 수 있다는 대중적 악몽을 불러일으키기에 매우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웨이크필드조차 연관성을 입증하는 과학적 증거가 없음을 인정했지만 그 때문에 영국의 언론, 인간의 본성, 자폐증과 백신 사이의 관련성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적인 요소와 한데 묶였다. 바로 공포였다."(623)


"앤드류 웨이크필드의 연구는 언제나 허술한 구석이 많았다. 1998년 《랜싯》지에 발표됐을 때도 예리한 비판자라면 즉시 논리를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미국 CDC(질병통제예방센터)의 백신 연구자 로버츠 첸과 프랭크디스테파노가 쓴 논문은 일종의 선제공격이었다. 그들은 백신과 자폐증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무책임하며, 심지어 위험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MMR 백신의 안전성을 신뢰할 만한 근거가 차고도 넘친다는 것이었다." "웨이크필드의 연구에 반대되는 과학적 증거는 계속 쌓여 갔다. 1999년 6월 《랜싯》지는 브랜트 테일러라는 로얄 프리 병원 소속 연구자가 수행한 역학조사 결과를 게재했다. 그의 팀은 영국에 MMR 백신이 도입된 해를 포함하여 수십 년간 자폐증 진단을 받은 500명 가까운 어린이의 예방접종 기록을 조사했다. MMR 백신을 사용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자폐증이 급증했다면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656-7)


10부 현재


"1960년대부터 전문가들은 대부분의 자폐인이 지적으로도 장애 상태라는 데 확고한 의견일치를 보았다. 몇몇 연구 데이터를 근거로 한 결론이었다. 자폐인 중 70~80퍼센트가 〈평균 미만〉 수준의 지능을 나타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폐 스펙트럼이란 개념이 생기기 전, 정의 자체가 달랐던 시대의 연구들이었다. 2010년, 진실의 추는 반대 방향으로, 그것도 급격히 기울었다. 그해에 CDC는 자폐증으로 진단받은 사람의 거의 절반이 높은 수준의 지능을 나타낸다고 보고했다. 자폐 스펙트럼에 훨씬 많은 사람을 포함시킴으로써 나타난 〈인구학적 변동〉으로 인해 유병률이 상승한 동시에 사회적으로 깊은 수준의 변화들이 뒤따랐다. 소위 고기능 자폐인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가 제공해야 할 서비스의 종류가 확실히 달라지자 새로운 활동 영역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동과 함께 자폐증의 정치학을 영원히 바꿀 훨씬 급진적인 개념이 탄생했다. 바로 〈신경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철학이다."(712)


"1960년대 이후 40년간 자폐증 권리옹호운동은 자녀를 위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헌신한 부모들에 의해 이어졌다. 이 문제에 관한 목소리 또한 그들의 것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자녀들을 위해 말했다. 하지만 1993년 싱클레어의 주장 또한 대부분 옳았다. 부모 운동에 투영된 자폐증의 모습은 종종 슬픔으로 채색되었고, 자폐증이란 자녀의 삶에서 뭔가 잘못된 것이란 전제에서 출발했다. 아이들의 삶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그 헌신은 정반대 사실을 입증했다. 엄마 아빠들은 자녀들의 승리를 축하하면서 그들의 기이한 점 때문에 오히려 웃을 수 있었다." "짐 싱클레어를 비롯한 사람들이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이란 철학을 설파하면서 반박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이었다. 중심원리는 자폐증을 갖고 사는 것(자폐인으로 존재한다는 것) 역시 인간으로 존재하는 또 한 가지 방식이라는 것이다."(716-8)


"자폐 스펙트럼을 겪는 사람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사반세기 전 사회가 정신장애인 수용시설을 폐쇄했을 때 받아들인 가치였다. 하지만 중증 자폐 어린이가 어떤 면에서는 병자가 아니라는 신경다양성 운동의 주장은 2007년 당시 훨씬 급진적인 사고방식이었고, 귀 기울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점차 〈모든 자폐인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존재〉라는 주장은 성적 정체성의 폭넓은 차이를 인정하기 시작한 문화 속에서 훨씬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신경다양성이라는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종종 성소수자 권리옹호 캠페인과의 유사성을 지적하며 네이만과 자신이 자폐인임을 밝힌 지지자들을 〈개방적 자폐인〉이라고 불렀다. 그 말에는 네이만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은 속이 좁고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이 숨어 있었다. 네이만이 종종 논쟁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725-9)


# 아리 네이만 : 자폐증 자기권리옹호 네트워크Autistic Self-Advocacy Network, ASAN 설립자


"자폐증에 관해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이야기가 끝나려면 멀었다는 점일 것이다. 수수께끼는 여전히 복잡하다. 본질을 밝히려는 시도는 계속 새로운 의문을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전문가들이 설정한 경계선을 또 다시 움직일 수 있으며, 그래야 마땅하다." "자폐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준 경우는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 모든 것이 자폐증을 하나의 실체로 인식한 사회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실제로 〈자폐증〉이란 단어에 관련된 모든 갈등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논쟁을 밀고 나간 힘은 점차 사회를 변화시켰다. 자폐증을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다루고자 노력했던 모든 사회는 그 복잡하고 종잡을 수 없는 현상을 사회와 조화시키려는 과정을 통해 '어딘가 다른 개인'의 존엄성을 역사상 어느 때보다 크게 인정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자폐증을 겪는다는 것은 인류라는 옷감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주름일 뿐이며,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주름지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은 없다."(7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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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힘 2 - 지리는 어떻게 나라의 운명을, 세계의 분쟁을,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가 지리의 힘 2
팀 마샬 지음, 김미선 옮김 / 사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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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 오스트레일리아, 지리적 위치와 면적이 강점이자 약점이 된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곳 중 하나이며 앞으로도 그 지위를 유지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 땅에는 전 세계에 내다팔기 좋은 천연자원이 풍부하게 있다. 양모, 양, 육류, 밀, 그리고 와인 산업은 세계에서 선두를 유지하고 있으며, 우라늄은 전 세계 매장량의 4분의 1을 차지하며, 아연과 납은 세계 최대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 또 텅스텐과 금의 주요 생산국이며, 은과 석탄도 만만치 않은 매장량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오스트레일리아는 화석 연료가 촉발한 기후변화를 여실히 느끼고 있는 중이다. 2020년 1월 4일 시드니의 기온은 섭씨 48.9도라는 어마어마한 고온을 기록했다." "웬만한 주마다 광산이 있고 수만 명을 고용하고 있는 석탄(산업)은 이 나라가 확실한 에너지원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주요 에너지원으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에너지원에 대한 접근은 오스트레일리아에게는 중대한 사안이다. 이 나라의 위치와 지리를 감안할 때 이는 곧 안보 이슈와 직결되기 때문이다."(42-5)


"지리적 여건 덕분에, 오스트레일리아는 침공하기에 어려운 곳이다. 침공군의 대부분은 수륙양용 작전을 펼쳐야 하며 동쪽과 북쪽의 섬들 때문에 공격 가능한 범위도 좁다. 일단 상륙한다 해도 대륙 전체를 장악하기는 불가능할뿐더러 요충지들을 확보하려면 맹렬한 저항을 뚫어야 한다." "그러나 이 나라의 크기와 인구, 중위권 정도의 경제 규모를 감안하면 자국의 해안으로 접근하는 모든 세력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사실 그저 가장 가까운 바다를 순찰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대륙 해안선 길이만 해도 3만 5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데다 덤으로 2만 4천 킬로미터의 도서 지역 해안선까지 감시를 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나라가 봉쇄와 차단에 속수무책이 될 경우가 있다. 대부분의 수출입 상품들이 북쪽의 해협들을 통해 드나들고 있는데 혹시 분쟁이 벌어져 이들 해협이 봉쇄된다면 오스트레일리아는 순식간에 에너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말라카 해협, 순다 해협, 롬복 해협이 여기에 해당한다."(45-7)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관계는 영국과 맺었던 관계와 비슷한 양상을 띠어갔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군사력 일부를 제공하고 있고, 미 해군은 국제 해상 항로를 열어두게 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에 핵우산을 제공하고 있다." "미국은 다윈항에 주요 기지를 설치했다. 여기에는 2천 5백 명의 미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이 오스트레일리아를 수호할 의지가 충분하다는 신호를 주는 것 이상은 된다." "그런데 오스트레일리아에게는 딜레마가 생겼다. 중국이 부상하자 미국은 서태평양 지역에서 선택을 해야 할 입장이 되었다. 미국은 중국 정부가 자국의 뒷마당이라고 여기는 곳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밀어붙이는 것을 견제할 수도 있고, 그 지역에서 납득할 만한 세력 범위를 형성할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아예 소극적이 되어서 캘리포니아 쪽으로 길고 느리게 후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거기부터 중국 해안까지는 1만 1천 킬로미터의 바다가 가로막고 있다."(49-50)


"중국은 남중국해의 80퍼센트가 지리적, 역사적으로 자국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베트남, 필리핀, 타이완, 말레이시아, 브루나이까지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지도를 힐끗 보기만 해도 그 주장이 얼마나 억지인지 알 수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신속한 군사적 행보의 대부분은 이른바 지역 거부권의 범위를 확대하겠다는 중단기적 야심의 산물이다. 여기에는 적군이 지리적으로 정해진 반경 내로 들어오거나 머무는 것은 물론 아예 지나가게도 못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는 최근 몇 년간 눈부시게 증강한 화력을 앞세워 전쟁이 발발할 경우 중국은 미국 또는 다른 나라들을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밀어내고 일본부터 필리핀까지 내려가는 섬들이 일렬로 늘어선 제1열도선 밖을 타격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재 오스트레일리아는 중국이 궁극적으로 지역 거부권을 행사하는 지역을 더욱 확대해서 인도네시아 남부와 필리핀까지 포함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고 있다."(52-3)


"오스트레일리아는 미국, 영국, 뉴질랜드, 캐나다와 함께 1956년에 결성한, 지구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정보 수집망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의 열성적인 회원국이기도 하다. 또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미국 정보 수집 시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설 중 하나인 파인 갭Pine Gap 군사기지를 자국의 앨리스 스프링스 부근에 설치하도록 허락했다." "여기에 더해 오스트레일리아가 참여하고 있는 쿼드Quad는 동맹체라기보다는 미국, 인도,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 4개 나라의 해군이 태평양에서 협력하는 전략적 협의체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 대놓고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은 늘 해상 항로를 열어두고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데 힘을 합치자는 명분에 뜻을 함께 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베이징과 건설적인 대화를 이끌어가고 미국과는 방위를 비롯한 여러 연결고리를 유지하는 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지만, 어쨌거나 힘든 경기를 치러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58-61)


2 이란, 전 세계와 기싸움을 벌이며 신의 과업을 수행 중이다


"이 나라의 지형은 미래의 침략자와 정복자에게는 엄청난 장애물이다. 우선 호르무즈 해협을 따라 해안에서 시작되는 장장 1천 5백 킬로미터의 자그로스 산맥이 버티고 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만나는 이라크 접경지대의 샤트알아랍강 주변 지대는 상당 부분이 습지대로 천혜의 요새이다. 동쪽 국경에도 엘부르즈 산맥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세워져 있다. 내륙으로 들어서면 카비르 사막과 루트 사막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지리는 역으로 이란의 힘을 제약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페르시아 제국은 산악지대에서 내려와 주변으로 세력을 넓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역사의 대부분 동안 산악지대에 머물러 있었다." "산을 가로질러 오가며 교류하는 것이 쉽지 않은 탓에 인구가 밀집된 산악지대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문화를 발전시켜온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이란은 현대 국가로서 국민의 단결이나 화합정신을 발전시키는 데 한층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68-71)


"1966년 카이로에서 처형당한 과격파 이집트 지식인인 사이드 쿠틉(Sayyid Qutb)은 수니파 이슬람교도이긴 했지만 그가 쓴 글들은 이란의 시아파 혁명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중요한 저작인 『시금석들』은 파르시어로도 번역되었으며, 이슬람이야말로 무슬림 세게에서 벌어지는 온갖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라는 생각에 영향을 미쳤다. 쿠틉의 영향력은 군주제, 민족주의, 사회주의와 세속적 독재 체제 등이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실패한 아랍 국가들에서 훨씬 강하다. 하지만 호메이니가 〈이슬람은 정치적이다. 그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천명했던 것은 무슬림형제단의 쿠틉 추종자들이 10년 이상을 전파해온 바로 그 말이었다. 쿠틉은 십자군과 시온주의자(유대인 민족주의자)를 물리치기 위해 폭력적인 지하드를 신봉했다. 이란의 시아파 문화에서 순교 정신과 융합된 이 신념은 혁명기와 그 이후에 신앙심 깊은 대중을 사로잡은 광신주의의 핵심이 되었다."(86)


"최고지도자 호메이니는 1989년에 사망했고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경제 발전은 더딘데 이슬람 성직자들은 국민들 삶의 모든 영역에 이슬람 혁명 정신을 심겠다는 각오로 사회 전반에 철권 통치를 행사했다. 그렇게 하여 다음과 같은 정치 시스템이 고착됐다. 먼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려면 12명으로 구성된 헌법수호위원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그 위원회의 절반은 최고지도자가 지명한다. 국회에서 국민을 대표하는 정당들의 면면은 어떻게 해야 표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들 가운데는 투쟁하는성직자연합Militant Clerics Society과 이슬람혁명의지도자모임Society of Pathseekers of the Islamic Revolution도 포함돼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 보면 개혁주의자들과의연정Pervasive Coalition of Reformists이 제 길을 찾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국회가 법안을 통과시키려면 우선 헌법수호위원회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90-1)


"2020년에 들어서자 새로운 말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권력이동을 빗댄 〈왕관에서 터번으로〉에 비견되는 〈터번에서 부츠로〉라는 말이 흘러나온 것이다. 부츠는 바로 군, 특히 혁명수비대를 뜻한다. 이란의 국회는 전직 혁명수비대 출신들로 채워져 있고 대기업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최고경영자들은 혁명수비대에 탑승하면 계약이 따라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쨌거나 엘리트 군대는 유력한 장군들로만 이뤄진 게 아니라 그 자체로 거대한 기업이라 할 수 있다." "혁명수비대는 아예 자체 미디어 기업까지 소유하고 있다. 지난 수년간 모든 매체에서 다음의 세 가지 논조를 주로 반복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라고 하기 어렵다. 먼저 혁명수비대와 최고지도자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이며 이들을 거스르려는 자들은 몹시 나쁜 사람들이다. 또 경제적 및 정치적 실패 또는 안보 과잉은 개혁 정부의 잘못이다. 그리고 눈을 뜨고 있는 매 순간에도 외세는 위대한 이란을 파괴하려는 공작을 진행하고 있다는 주장이다."(107-8)


"이란 정권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양태 가운데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하는데도 그러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혁명적인 〈신정神政 국가〉(지배자를 신 또는 신의 대리인으로 간주하는 국가)일 거라는 점이다." "1979년의 이란 혁명을 경험한 세대는 시간과 인구 통계학적 변화가 그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여러 카드가 있다. 핵 이슈는 아직도 살아 있고 호르무즈 해협은 여전히 비좁다. 또한 정치와 테러리즘 영역에서 써먹을 다양한 대역 배우들을 그들이 부를 수 있는 지역에서 보유하고 있다. 안팎에서 조직화된 내부 전복 시도에 대응하기 위해 이란 정권은 훨씬 무시무시하고 무자비한 보안 기관도 운영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신의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볼 때 선뜻 타협하는 것은 죄악이며, 저항이야말로 신성한 행동이다. 종교를 내세운 이들 혁명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혁명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110-2)


3 사우디아라비아, 한 가문의 성이 나라 이름이 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운송과 통신 기술을 통해 20세기에 만들어진 국가다. 이 나라의 지리로만 보면 각 지역은 분명한 차이점이 있으며 그것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최근까지도 이 나라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많다. 어쨌거나 강이 없는 나라 중에서 이만큼 큰 나라도 없고 내륙은 두 개의 광활한 사막이 장악하고 있다. 네푸드라고 하는 북쪽은 보다 작고 좁은 사막의 통로를 통해 남쪽의 엠프티 쿼터(Empty Quarter, 〈공백의 지역〉이라고도 한다) 지역과 연결된다. 남부 끝인 이 지역을 공식적으로는 룹 알 할리라고 하는데 물론 그 지역에 사는 얼마 안 남은 유목민인 베두인족은 그저 모래라는 뜻인 알 람라라고 부른다. 이곳은 전 세계를 통틀어 모래로만 이루어진 가장 넓은 지역이다." "엠프티 쿼터 지역은 남쪽에서 오는 지상의 위협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켜주는 완충지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이웃한 남쪽 국가들과의 교역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이곳을 건너기란 남극을 가로지르는 것만큼이나 어렵기 때문이다."(118-9)


"1945년 2월, 이븐 사우드와 루스벨트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에 정박해 있던 미군 전함 위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미국에게 보장해 주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은 자신들의 국경 안에 머물 것이며 미국은 그런 사우디아라비아의 안전을 보장해 주기로 했다. 이븐 사우드에게는 꽤 많은 적들이 있었는데 특히 그 중에는 이라크와 요르단을 통치하고 있는 하심 가문이 있었다. 그가 이들을 메카와 메디나에서 쫓아낸 것은 불과 20년 전의 일이다. 만약 그들의 세력이 강했고 적절한 제안만 있었다면 그들은 헤자즈를 탈환해 보려 했을 것이고 그러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븐 사우드도 종말을 맞이했을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세계 최강국을 새로운 친구로 삼는 것이 적들과 강화를 맺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 된다. 특히 하심 가문의 뒤를 밀고 있는 영국 정부로서도 이제는 그들이 영토를 점유하는 것을 섣불리 지지하지 못할 터였다."(130-1)


"1965년에 개시된 텔레비전 방송은 이 나라를 종교적 극단주의로 내모는 단초가 되었다. 이 신문물이 사람들을 타락의 길로 이끌 거라는 두려움에 이슬람 교단의 보수주의자들은 1965년에 첫 방송을 앞두고 있는 텔레비전 방송국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텔레비전에서 코란을 읽어주는 방송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국왕의 조카 한 명은 아예 방송국 스튜디오에 대한 공격을 이끌다가 나중에 치안부대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들을 달래기 위해 파이살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세속주의 정권으로부터 도망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들어와서 제도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일찍이 사우디아라비아의 교단에는 외국인 혐오적인 성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파이살 국왕의 이 조치는 그 경향을 더욱 강화한 셈이었다. 21세기에 준동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많은 지하디스트(이슬람 성전주의자)들은 이때 들어온 극단적 원리주의 학자 세대에게서 배운 바가 컸다."(132-3)


"전략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향후 몇 년간은 미국에 밀착할 수밖에 없다. 페르시아만과 홍해는 비좁은 데다 하나같이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자국 해군력이 없다면 적대 세력은 인도양이나 수에즈 운하로 가는 이 나라의 수출로를 봉쇄할 것이다. 그런데 안보 면에서는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도 중국과의 경제적 끈은 더욱 단단해질 것 같다. 중국은 이곳에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팔았으며 지난 몇 년간 이 나라의 원유 수입을 급속도로 늘렸다. 또 사우디아라비아는 화웨이가 중동 지역에서 성사시킨 12건의 5G 계약 가운데 한 건에 서명했다. 미국과는 달리 중국은 자국과 거래하는 나라들의 인권 문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중동 정치 분석가인 미나 알 오라이비의 말이다. 〈국가 자본주의라는 중국 중국 모델에 대다수 아랍 지도자들은 매료됐습니다. 정치적 자유주의와 별개로 경제적 자유주의는 대다수 이 지역 정부들이 추구하는 것이어서 지난 20여 년간 중국은 성공한 모델로 칭송받고 있지요.〉"(157)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약칭 MBS)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사회 계약을 제시하고 있다. 국민들은 부패가 덜하고 보다 덜 관료적인 나라, 석유시대가 슬슬 종말을 고하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경제, 현대 세계의 대다수가 누리는 여가생활을 자유롭게 즐길 나라를 얻게 될 것이다. 대신 그들은 일을 해야 하며 그동안 받아왔던 보조금의 일부는 사라질 것이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 이슬람 교단의 보수적인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결정한 종교 생활을 자유롭게 영위할 수 있는 한에서는 이 같은 변화를 받아들이겠지만, 살아남기 위해 나라가 현대화된다면 자신들이 사회에 미치는 위력 또한 약화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와하비즘의 수출 역시 축소될 수 있다." "왕세자의 조부인 이븐 사우드는 국민들이 복종한다면 오일 머니는 그들에게 윤택한 삶을 제공할 것이라는 계약을 제시했다. 하지만 왕세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21세기형 모델에서는 오일 머니의 역할이 한층 축소될 것이다."(160)


4 영국, 지리에서 파생된 분리의 정서가 남아 있다


"영국을 에워싸고 있는 바다는 계속해서 이 나라의 문화와 국민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몇 세기 동안 영국은 바다 덕분에 유럽 본토의 과도한 정치적 혼란과 전쟁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이는 왜 이 섬나라가 유럽이라는 공동의 집에 대한 소속감이 덜한지 얼마간 설명해 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동안 발생한 대학살도 유럽 본토만큼 영국을 크게 뒤흔들지는 못했다. 계량화하는 게 쉽진 않지만 이러한 〈분리의 정서〉가 브렉시트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영국의 경제적, 군사적 힘이 급성장한 것은 1707년의 연합법(Acts of Union,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 합병할 것을 결의한 법)으로 단일 국가가 성립한 뒤부터였다." "그로부터 3세기가 흐른 현재, 브렉시트로 인해 이 나라는 위험에 빠졌다. 이제 영국은 프랑스의 침공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지만 스코틀랜드의 독립에 따른 경제적 및 군사적 여파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167-8)


"지리적으로 북쪽과 남쪽을 가르는 특징을 살펴보면, 산은 주로 섬의 서쪽 절반에 대부분 있다. 하지만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지대도 점점 더 높아진다. 스코틀랜드에서도 고지대의 대부분은 북서쪽에 치우쳐 있다. 사회 기반시설은 평지에 건설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에 이러한 분리는 발전의 측면에서 차이를 낳았다. 북동쪽에는 리즈, 셰필드, 뉴캐슬, 요크셔, 북서쪽에는 맨체스터, 리버풀 같은 산업혁명으로 유명해진 도시들이 포진해 있다. 상대적으로 온화한 날씨, 평평한 강, 농사에 적합한 토양, 수도와 가까운 것 등은 남부가 북부보다 더 발전한 이유가 된다. 땅덩어리의 절반 정도인 잉글랜드에 인구의 84퍼센트가 모여 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코틀랜드의 경우도 인구와 산업 대다수가 잉글랜드 국겨와 가까운 남부에 몰려 있다. 스코틀랜드의 인구를 전부 합쳐도 잉글랜드의 5천 6백만 명에 한참 못 미치는 550만 명에 불과하며 웨일스는 3백만, 북아일랜드는 2백만 명을 밑돈다."(171-2)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이 지불한 대가 중 일부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들의 제국이었다. 바야흐로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 했다. 영국은 우선 미국의 최고 우방이 됨으로써 제국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미국은 대영제국을 좋아한 적도 없었으며 함께 싸워야 할 냉전시기에도 그들이 별반 유용할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그 다음은 제국의 몫은 없지만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는 미국의 최고 우방으로 남는 방법이다. 이 또한 잘 풀리지 않았다." "딘 애치슨은 오히려 영국이 유럽 대륙에 전념할 때가 왔다고 조언했다. 이제 영국의 새로운 역할은 일종의 이종 혼합이었다. 한쪽 발은 미국 진영에, 다른 한쪽 발은 EU의 전신에 담는 것으로 이 역할은 40년 이상 지속된다. 훗날 EU에 관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도 영국은 미국과는 별개로 나토의 그 어느 회원국보다 월등히 앞선 국방력을 구축해갔다. 영국은 미국이 부를 때면 언제든 동등한 비중으로 국방력을 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188-9)


"영국은 워싱턴과의 기나긴 작별 인사를 늦추거나 어떻게든 되돌리려고 계속 시도할 것이다. 미국 내에서 구세계의 유산을 되새기는 영국계를 포함한 미국인들의 수는 해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미국의 지정학적 우선순위도 변하고 그 관심 또한 태평양 지역으로 모아지고 있는 가운데 양국을 묶고 있던 정서적 끈도 느슨해져 가고 있다. 이런 경향은 오바마 대통령 시절부터 그 징후가 보였다. 영국이 미국과의 관계를 지속시키고 싶다면 때로 경제적, 외교적 또는 군사적 측면이 될 수도 있을 초강대국의 대전략을 지지하는 역할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라크에서 봤듯이 이런 관게가 늘 최상의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체스 용어로 말하자면, 왕은 여전히 미국일 터이고 여왕은 체스판 주변에서 움직이는 미국의 대외정책이 될 것이다. 영국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기사가 될 수도 있지만, 자신들의 주요한 결정은 미국의 게임 전략에 어떻게 조응하느냐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194-5)


"(스코틀랜드의) 현대적 독립 시나리오는 브렉시트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2014년에 스코틀랜드는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시행했는데 55퍼센트가 영국에 남는 것을 지지했다. 단 영국이 EU에 남아 있다는 전제에서였다. 브렉시트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도 EU를 지지하는 표가 잉글랜드보다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나왔다.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스코틀랜드 독립에 대한 찬반이나 경제적 찬반 논쟁이 아니다. 스코틀랜드가 떠난다면 영국의 국제적 위상에 미치는 악영향은 영국이 EU를 떠나는 것에 비견되지 않을 정도로 커질 수 있다. 이 절교에 두 손 벌려 크게 환영할 나라는 아마 러시아일 것이다. 유럽의 2대 강국 중 하나인 영국의 군사력이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대놓고 반길 나라들은 거의 없을 것 같지만, 파리와 베를린 정부는 유럽연합군을 창설하려는 계획에 늘 훼방을 놓았던 영국의 경제력이 축소된다는 점에는 주목할 것 같다."(206)


5 그리스, 그 위치 때문에 고대부터 현재까지 열강들의 게임의 대상이 되다


"6천 개가 넘는 섬들을 품고 있는 그리스는 그 어느 곳도 바다에서 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지 않다. 발칸 반도의 남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나라는 북쪽으로는 알바니아, 북마케도니아, 불가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터키와 접하고 있다. 국경 길이는 총 1,180킬로미터에 이르지만 대부분의 국경은 해안선이 차지하고 있다. 그리스 본토는 에게해, 지중해, 이오니아해에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고대에는 이 바다들이 문명과 문명을 이어주었지만, 오늘날 이 바다들은 그리스가 유럽 못지않게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많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말해 주고 있다. 고대부터 그리스의 지리는 이 나라를 제약하기도, 열강들의 게임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기도 했다. 유럽의 남동쪽 귀퉁이에서 에게해를 맞대고 있는 이웃이자 숙적인 거구(터키)와 대결 태세를 취하고 있는 그리스는 이제는 EU, 러시아, 나토, 어수선한 중동, 그리고 난민들이 야기한 위기의 교차점에 서 있는 처지가 되었다."(213-5)


"그리스야말로 〈전략적 깊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응용하기에 딱 좋은 경우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이 말은 침략군과 이 나라의 산업 중심지대 같은 일종의 핵심 지역 간의 거리를 일컫는다. 이 거리가 멀면 멀수록 방어할 기회는 더 많아진다. 이와 관련해 가장 좋은 사례가 러시아일 것이다. 러시아의 경우 침략군이 중심부까지 도달하려면 기나긴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데, 방어하는 측은 극한 상황에서도 후퇴할 수 있는 상당히 방대한 전략적 깊이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도의 황폐한 지형─북부의 척박한 산악지대─은 그리스 사람들을 유능한 뱃사람으로 만들었다. 본토 안에서도 육상 무역은 쉽지 않았던 터라 (지금도 그렇지만) 상인들은 해안선을 따라다니면서 물건을 팔았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이 의미하는 바는 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지역 강대국으로 부상한 그리스는 바다 위 교역로를 반드시 지켜야 했으며 그 결과로 강력한 해군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정은 오늘날에도 변함없다."(216-7)


"금세기 들어 EU와의 관계는 EU 내에서 남동쪽 모퉁이를 차지하는 그리스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삐걱대었다. 그리스는 발칸 루트(그리스와 발칸 반도를 거쳐 서유럽으로 들어가는 길)를 통해 부자 나라들로 가려는 이주민과 난민 행렬에 대해 EU는 물론 다른 회원국들의 지원이 없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터키와 그리스 섬들 사이 에게해의 짧은 구간을 건너는 위험한 모험에 뛰어들고 있다. 일부 섬들은 터키 해안에서 육안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다." "이 사안은 그리스와 터키 간에 발생하는 큰 갈등의 원천이 됐다. 그리스는 터키 정부가 그리스에 불안정을 초래하려는 의도로 시간과 장소를 정해 이주민들과 난민이 통과할 수 있도록 국경을 열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 터키 정부의 공식 정책이라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터키 당국이 이주민과 난민의 이동을 EU 국가들에 영향을 주는 지렛대로 삼으려 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233-4)


"동부 지중해에서 대규모 가스전들이 발견되면서 가뜩이나 갈등의 소지가 많은 그리스와 터키 사이를 더욱 복잡하게 꼬이게 하고 있다. 가스전은 이집트, 이스라엘, 사이프러스, 그리스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러시아는 유럽에 가스를 공급하는 자신들의 독보적인 위치가 위협받게 될까 전전긍긍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터키의 움직임에는 자국을 위한 자원 확보 못지않게 그리스의 안정을 해치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다." "구제금융을 받는 그리스에게는 군사적으로 대응할 자금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키는 그 기간 동안 해군력을 증강했지만 나토의 두 회원국인 이들의 힘은 아직은 막상막하다. 그리스 해군은 잠수함 전력에서는 확실히 우세하지만 터키도 대잠수함전에 꽤 많은 투자를 해오고 있다. 게다가 터키는 가용 인력이 훨씬 많다. 그리스가 여전히 징병제를 폐지하지 않고 있는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여기에 있다."(240-2)


"그리스는 이 지역에서 미국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동맹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미국은 다음과 같은 대책을 세워두고 있다. 미군이 이 지역에 확실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이 점을 이용해서 터키가 믿을 만한 나토의 파트너로 다시 서도록 압박하고, 시리아 국경 가까이 있는 터키의 인시르리크 공군기지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다." "재정 붕괴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방비를 계속 지출해야만 하는 그리스는, 터키와 서구의 관계가 너무 악화돼 터키 정부가 나토를 떠나게 된다면, 동맹의 최남단을 담당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여기서 러시아는 양쪽을 왔다갔다하면서 게임을 펼치려고 애쓰고 있다. 때로는 터키랑 손을 잡다가도 그리스 지도자들하고도 친하게 지내는 식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것이 큰 모험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겠지만, 시리아에 있는 작은 기지를 보완하기 위해 지중해에서 쓸 만한 해군기지를 얻을 수 있다면 러시아의 전략적 야심에서 이보다 더 경사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246)


6 터키,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았지만 친구는 별로 없다


"터키에는 광대한 평야나 물자를 옮길 만한 길고 평탄한 강들은 없을지 모르지만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 비옥한 땅과 깨끗한 물이 있다. 그리고 호수나 다름없는 바다를 끼고 있어서 교역을 하기에도 수월하다. 이런 조건은 이스탄불이라는 핵심 도시가 해상에서 공격을 받더라도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 마르마라해를 중심으로 서쪽 끝단에는 다르다넬스 해협이 있는데 이곳을 통해 에게해로 진입할 수 있다. 반대로 동쪽 끝단에는 가장 좁은 곳의 폭이 1킬로미터도 채 되지 않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있다. 터키가 이 두 관문을 지배하는 것은 방어의 측면에서 엄청난 이점이 된다." "현대 터키는 국제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결정하면서 동과 서를 잇는 교차로에 또다시 서 있는 입장이다. 터키는 유럽으로 들어가려는 이주민과 난민 행렬이 통과하는 관문 중 하나로 그 문의 열쇠를 쥐고 있다. 이 문지기가 된다는 것은 권력을 쥔다는 뜻이기도 하다. 터키의 야심은 〈신오스만주의〉의 분명한 신호다."(252-4)


"오스만은 먼저 세력을 굳힌 다음에 확장해야 했다. 따라서 투르크인들은 우선 전리품으로 빼앗았던 길을 안전하게 지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아나톨리아의 넓은 내륙 지역을 평정했지만 사실상 전략적 깊이 말고는 얻은 것이 별로 없었다. 그 땅은 대부분이 메마르고 울퉁불퉁한 산지라서 작물을 재배할 만한 곳도 제한돼 있다. 또 남쪽 해안 상당 부분도 땅이 무른 데다 교역에 적합한 항구들조차 거의 없다. 게다가 비좁은 해안 평야는 작물을 재배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오스만 제국은 내륙 지역을 개발하고 거주지로 만드는 것에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 지역 내에서 불만이 터져나오면서 당시에도 지속적으로 진압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현재에도 자주 신경을 써야 할 불안정한 세력 기반으로 남아 있다. 오스만 제국은 대부분의 역사에서 아나톨리아의 반란 세력을 누르느라 애를 썼다. 현대의 터키가 물려받은 유산 중 쿠르드족의 봉기도 이 문제에서 비롯됐다."(256-7)


"1952년, 터키의 나토 가입은 일종의 정략결혼이었다. 나토의 입장에서는 냉전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터키를 가입시키면 가까운 미래에 터키가 도박을 걸거나 모스크바에 의지하는 것을 막는 동시에 동맹의 남쪽 측면을 든든하게 지킬 수 있을 터였다. 1952년에 그리스도 같은 이유로 나토 회원국이 되었다. 비록 서로 으르렁대는 사이지만 두 나라 모두 나토의 선택지와 화력을 증강시켰다." "그렇기에 1960년, 1971년, 그리고 1980년에 터키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발했을 때 나토 동맹국들은 애써 못 본 체했다." "그러나 터키가 EU에 초대받을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다. 일단 경제적으로 터키는 EU 가입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인권지수 또한 그 요구 조건에 한참 떨어진다. 게다가 EU 내에 수치화할 수는 없어도 인식 가능한 어느 정도의 편견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터키가 충분히 〈유럽답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터키는 새로운 지도자 아래에서 조금씩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265-7)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은 서구가 쇠락해 가는 상황에서 터키가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운명을 믿어 의심치 않는 신오스만주의자다. 현대 터키 역사에서 그가 창당한 정의개발당(AKP)의 집권은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나라는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를 기반으로 설립된 나라였다. 그런데 이제는 나토에 대해 미온적이며 이전의 오스만 제국 땅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것에 분노하는 이슬람 이념에 뿌리를 둔 정당이 이끌어가는 나라가 되었다." "터키 정부는 중동에 자국의 힘을 투사할 공간이 있을 거라 느꼈지만 늘 그렇듯 올라탈 말을 잘못 고른 것 같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의 정신적 지도자로 자처하고 있다. 또한 아랍에미리트와 함께 이 지역에 힘을 보여줄 만큼 막대한 부도 소유하고 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아랍의 맹주임을 자처하는 이집트도 신오스만주의자들이 영향력을 키우는 것을 마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269-72)


"다극화된 세계에서 터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를 무너뜨리는 수많은 배우들 가운데 주역으로 올라서고 있다. 이러한 변환의 시대에서 터키의 역할이 가장 두드러졌던 상징적인 순간이 2020년 7월 12일에 찾아왔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1934년 아타튀르크 대통령이 제정한 법을 뒤집고 하지아 소피아 박물관을 원래 용도인 이슬람 사원으로 되돌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것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에르도안은 오스만/터키 역사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네 개의 전투도 다시 끄집어냈다. 〈하지아 소피아의 부활은 바드르로부터 만지케르트까지, 니코폴리스부터 갈리폴리에 이르는 우리 역사의 좋은 시절에 대한 충만한 기억을 상징한다.〉 주사위는 던져졌는가? 나토 동맹국이자 가치 있고 믿을 만한 현대 민주국가로서의 터키는 지난 얘기인가? 거의 그렇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터키가 아무리 멀리가려 해도 늘 그 여정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 나라의 지리다."(285-90)


7 사헬, 테러와 폭력의 악순환에 시달리는 갈등의 한복판에 있다


"사헬Sahel이라는 단어는 해안 또는 해변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나왔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넓고 건조한 사하라 사막을 건너려던 초창기 여행자들이 이 지역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말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해안에서 모래바다를 건너 또 다른 해안, 즉 유럽으로 가려고 한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을 떠나고 싶어 한다." "대다수 유럽인은 이 지역과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이 문제들이 자신들의 나라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 유럽은 이미 이주민 문제로 씨름하고 있다. 유럽의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이주민과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 점점 고조되는 가운데 일부에서는 이른바 〈유럽 요새〉를 구축하자는 호소도 나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물결이 밀려들어 오고 있다. 하지만 양쪽 지역을 모두 안정화시키려면 북쪽이 아니라 지중해 남쪽을 봐야 한다."(294-5)


"수십 년 동안 지도에 표시돼 오던 서구 열강의 세력권은 주로 행정 구역처럼 관리되다가 나중에는 사실상의 국경선이 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탈식민지화를 거친 지역들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국가가 되었다. 1964년에 아프리카연합의 전신인 아프리카통일기구의 회원국 수장들은 지역의 안정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서구 열강이 임의대로 지도에 표시한 기존의 국경선을 고수하는 게 낫다는 데 마지못해 합의했다." "현상유지든 재협상이든 위험은 수반된다. 일례로 1960년대에 나이지리아 정권은 나라를 단결시키겠다는 의지가 지나치게 강한 나머지 이보족이 지배하던 석유 자원이 풍부한 비아프라 지역과 전쟁을 일으켰다. 이 시도는 성공을 거뒀지만 대신 1백만 명의 목숨을 대가로 치렀다." "국경을 지도 위에 표시할 때는 잘 지켜지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기후변화, 지하디스트, 지역 내 식민지 이전의 분열주의 등이 결합하여 〈갈등의 시대〉를 만들면서 이 지역은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303)


"폭력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따라다니는 주제들이 있다. 일단 가뭄으로 땅이 말라서 소나 양을 치기 어려워지면 유목민들은 새로운 도시나 시골을 찾아 들어온다. 여기서 그들은 〈외부인〉으로 취급받고 그 지역 농민들과 이해가 충돌하면서 여기저기서 폭력사태가 발생한다. 이러한 사태를 유발하는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가 기후변화다." "일례로 20세기 후반의 40년 동안 차드호수의 물이 90퍼센트나 줄면서 엄청난 물고기들과 일자리가 사라졌고, 이 호수의 물에 의지하고 살던 차드와 그 인근 나라 수백만 명의 수입도 줄어들었다. 유엔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이 지역 전체에서 3천만 명이 식량 불안 상황에, 1천만 명 가량이 기아의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아프리카는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인구 통계학적 변화가 진행되는 곳이다. 지금부터 2050년까지 이 대륙의 인구는 12억 명에서 24억 명으로 곱절이 늘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사헬이라고 다르지 않다."(321-4)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 알고 보면 천연자원 측면에서는 엄청난 부자다. 니제르에는 우라늄과 원유와 인산염이, 모리타니에는 철광석과 구리가, 차드에는 석유와 우라늄이, 부르키나파소와 말리에는 금광이 있다. 하지만 그 나라 모두에는 통치 구조와 부정부패, 불투명한 자금 운용, 산업의 경제적 모델에 대한 우려 또한 있다." "안정된 산업 국가라면 당연히 당국이 산업을 관리하고 보다 많은 수입이 정부의 재정에 편입될 것이다. 하지만 사헬 지역 나라들은 너무 많은 전선에서 감당키 어려운 문제들과 씨름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불법적인 산업을 통제할 수도 없을 뿐더러 부패한 관리들이 허술한 국경을 넘거나 공항 밖으로 막대한 양의 금을 빼내 밀수하는 데 조력하고 있는 양상이다. 정부는 국가에 도전만 하지 않는다면 지역 무장단체들이 광산을 장악하고, 비공식적인 경찰력이 되는 것을 아예 용인해 준다. 뇌물 수수죄, 고문에 의한 자백과 투옥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324-9)


"식민주의에 이은 탈식민지 경제와 정부 기관의 부패는 국내외 극단주의자들로 하여금 이 지역에 만연한 실정, 빈곤, 사회적 균열의 틈을 파고들게 했다." "지역적 차원에서 유럽 세력은 사헬 지역 사태로 그들의 국내 정치가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1백만 명에 이르는 난민과 이주민이 유럽으로 몰려왔던 2015년 이후에 유럽 나라들에서는 정치적 대립이 심화되었고 극단주의 성향의 정치 세력 목소리가 더욱 커지는 것이 목격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응이 무엇이든, 갈등을 격화시키는 기본적인 문제들과 씨름할 의사가 없는 측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분쟁에는 군사적 해결 방안이 없다〉라는 말은 대개는 상투적인 문구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헬에서는 이 말이 사실이다. 여기서는 이른바 미국의 두더지 잡기 개념이 적용된다. 만약 한 나라에서 어떤 반정부 단체를 누르면 또 다른 나라에서 튀어나온다. 비록 안정적인 나라라도 이웃 국경이 허술하면 언제든지 위협받을 수 있다."(332-5)


8 에티오피아, 그래도 지리는 에티오피아 편이다


"에티오피아의 지정학적 위치와 그 중요도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물이다. 이 나라의 강점이 담수라면, 해수는 이 나라의 약점이다. 에티오피아에는 12개의 커다란 호수가 있고 9개의 큰 강이 있다. 덕분에 이웃 나라들 대부분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보니 에티오피아는 그들에 대해 큰 정치적 영향력을 쥐고 있는 셈이다. 반면 이 나라에 부족한 것은 해안과, 직접적으로 해상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렇지만 담수 덕분에 중동에 대한 영향력과 홍해에 대한 접근성을 키워가면서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뿔 또한 내전, 국경 분쟁, 극단주의, 해적 등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갈등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지역 중 하나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은 군사 및 경제 전략 못지않게 교역에서 잠재적인 이익을 바라보는 터키, 중국, 걸프 국가들을 비롯한 미국의 관심까지 불러들이고 있다."(341-2)


"금세기에 수단, 남수단,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는 모두 내전을 겪었다. 케냐는 대규모 민족 분쟁과 더불어 소말리아에 근거지를 둔 알샤바브(소말리아 극단주의 테러 조직)가 자행하는 테러 공격에까지 시달리고 있다." "이웃 나라들이 경제 계획을 세우고 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데 있어 에티오피가 도울 수 있다면 지역 안정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강력한 국경과 국내의 안정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어느 것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역 강국이라고는 해도 에티오피아에 산적한 문제는 한둘이 아니다. 사실 에티오피아는 에너지와 식량을 자급자족할 만큼 잠재력이 높은 나라다. 농업은 에티오피아 GDP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가뭄에 시달리고, 삼림의 남벌, 과도한 방목, 군사 독재, 빈약한 인프라 등이 이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게다가 운항에 적합한 강이 바로강 하나뿐이라는 점도 국내 교역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344-6)


"에티오피아가 직면한 우선적인 과제는 내부 경계선을 평화롭게 유지하고 외부 국경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서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에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1993년 이후 들어선 모든 정권은 하나같이 동일한 지리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바로 〈해양으로의 접근〉이 힘들다는 것이다. 현대 에티오피아가 살아남고 번영을 이루려면 확실하고 믿을 만한 교역로를 확보해야 한다. 에티오피아 수출입 상품의 대부분이 이웃 나라의 영토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 수출과 수입의 대략 90퍼센트가 바다를 통해 이뤄지는데 화물 대부분이 지부티의 심해항을 통과한다." "이러한 취약성을 보강하기 위해 에티오피아는 지부티 항구의 지분을 매입했으며 소말리아 베르베라항의 지분 19퍼센트도 획득했고, 수단의 포트수단과 케냐의 라무항 지분도 확보하는 등 여러 방안을 강구해 오고 있다. 또 에리트레아의 항구로 가는 도로들도 다시 개통시키고 있다."(363-4)


"청나일강(Blue Nile)은 수단의 수도인 카르투에 도달해서 백나일강(White Nile)과 합쳐져 비로소 나일강이 되어 이집트로 흘러간다. 그랜드 에티오피아 르네상스 댐과 저수지는 수단과의 국경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시작된다." "이 프로젝트는 수년동안 에티오피아의 국민적 자부심의 원천이 되어 왔으며 그 나라 미래의 중심에 있다. 이 댐에서는 엄청난 양의 전력이 생산될 것인데 에티오피아는 그 여분을 수단에 공급할 예정이다." "그런데 이집트에게 그 댐의 건설은 사실상 생존이 걸린 문제다. 이는 곧 한 나라가 지리의 감옥에 갇히는 극명한 사례이기도 하다. 나일강은 이집트와 그 국민들에게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나일강이 없으면 이집트도 없다. 청나일강에서 시작된 나일강의 85퍼센트가 이집트로 흘러들어 오는데 에티오피아가 여기에 손을 대려는 것이다. 물론 그 흐름을 완전히 끊어 버리겠다는 것은 아니고, 단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갖겠다는 것이지만."(367-9)


"나일강 수계에 의존하고 있는 모든 나라에게 물은 국가 안보가 걸린 문제다. 우간다, 부룬디, 콩고, 이집트, 케냐,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 르완다, 남수단, 수단, 탄자니아는 하나같이 그들의 국경을 통과하는 강의 흐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만큼 불안한 나라도 없고, 에티오피아만큼 덜 불안한 나라도 없다." "에티오피아에게 그랜드 에티오피아 댐은 수세기 동안 지속된 빈곤과 부족 간 분쟁의 악순환을 끊게 할 특별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기술 발전은 에티오피아로 하여금 지리라는 감옥의 철창을 구부려서 열어젖히게 한다. 다른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이 나라도 비교적 짧은 강들에만 배를 띄울 수 있다. 이 나라의 강들은 고지대에서 너무도 급격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배를 띄울 수 없어 교역에 이용하기엔 한계가 있다. 물은 이제껏 에티오피아에게 일정 수준의 정치력을 가져다 주었지만 이제는 에너지 측면에서 권력이 되고 있다."(371-2)


9 스페인, 지리의 방해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스페인은 한마디로 거대한 요새다.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시작하는 좁은 해안 평야는 이내 거대한 산맥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중부 지역 전체는 높은 고지대와 깊은 골짜기들로 이뤄진 고원지대다." "16세기에 마드리드가 수도로 선택된 것은 스페인의 한복판에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도 이 나라의 산악지형과 면적(영국보다 2배나 큰!)은 늘 교역과 강력한 정치적 통치력을 행사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으며, 각 지역마다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적 및 언어적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게 한 요인이 되었다. 이런 상이함이 낳은 복잡다단함과 열정은 아직도 스페인의 국가國歌에 가사가 없다는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무슨 내용을 넣어야 할지 서로 동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들은 현대에 들어서도 최북단의 바스크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르는 테러를 수반한 분리 독립운동부터 동일한 목표를 갖고 있는 카탈루냐의 정치 운동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378-9)


"스페인이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시대에도 이 나라의 지리는 부의 창출과 정치적 통합을 방해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 산맥은 외부의 침입자에게는 장벽이 되지만 교역 측면에서는 원활한 흐름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 또한 산악지대에 가까이 붙어 있는 좁은 평야는 농업이 발전하는 데 공간적인 제약이 된다." "프랑스나 독일과는 달리, 스페인에는 넓은 평야지대를 따라 끊기지 않고 흐르는 큰 강이 없다." "스페인의 주요 다섯 개 강 중 네 개가 대서양으로 흐르고 에브로강만 지중해로 흘러든다. 대다수 강들은 (길이가 짧고 수량이 적은데다) 배를 띄우기 어려워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지름길로 이용하지 못하다 보니 물자를 실어 나르거나 전쟁 중 군대를 이동시키는 데도 별반 쓸모가 없다. 유일하게 운항이 가능한 내륙의 하천은 과달키비르강이다. 이것은 이 강이 지나는 세비야가 스페인에서 유일하게 해양을 운항하는 선박들이 오갈 수 있는 내륙 항구라는 얘기다."(382-3)


"스페인은 독립을 원하는 바스크와 카탈루냐를 가만히 앉아서 잃을 생각이 없다. 이런 입장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국가의 위신과 경제 문제도 있지만 때로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바로 지리적 문제다. 스페인 역사를 돌이켜보면 북쪽의 침략자들은 대개 피레네 산맥 양측에 좁게 펼쳐진 나지막한 땅을 통해 이 나라로 진입했다. 그곳이 바로 북서부의 바스크 땅과 북동부의 카탈루냐 땅이다. 북쪽에서 스페인이 펼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어는 이 통로를 봉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카탈루냐나 바스크가 분리 독립해 버린다면 스페인에게는 끔찍한 저주가 될 것이다. 이 두 지역이 스페인 중앙 정부에 적대 세력이 된다면 악몽이나 다름없다. 피레네 산맥을 관통하는 터널은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 스페인의 주요 지상 보급로로 연결되고, 카탈루냐와 바스크 두 지역은 바르셀로나와 빌바오를 포함한 스페인 주요 항구의 본거지가 되기도 한다."(414)


"분리 독립 세력과 기나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스페인의 최근 사례에 다른 나라들도 예의주시하며 주목하고 있다. 만약 독립한 카탈루냐가 EU로부터 배척당한다면 중국과 러시아가 필시 카탈루냐와 새로운 우호 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하러 나설 것이다. 러시아는 그리스에 발판을 마련하려고 20여 년 동안 공을 들여왔다. 그런데 지중해 서쪽에서도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스페인으로서는 구매력을 앞세워 바르셀로나 항구로 밀고 들어와 일대일로의 일환으로 투자와 교역을 제안하는 베이징 측의 이야기가 훨씬 솔깃할 수 있다. 중국은 EU의 경제적 영향력과 개별 무역 거래에 반대하는 규정에 따라 EU 권역에서는 거의 차단된 상태라 할 수 있는데, 만약 카탈루냐가 하나의 독립된 국가가 된다면 스페인은 카탈루냐의 EU 가입에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며 그러면 중국의 전략이 먹혀들 여지가 생길 수 있다."(415)


"(18세기 초반에 영국에게 빼앗긴) 지브롤터와 모로코 사이의 지역은 사람은 물론이고 마약 밀매의 교차로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분주한 항로가 된 이곳이 아프리카와 접한 EU 국경인 것을 알고 있는 수천 명의 이주민들과 난민들은 해마다 모로코와 스페인 사이의 담장을 넘으려는 시도를 한다. 그런데 리비아에서 이탈리아로 들어오는 사람보다 짧은 거리임에도 이 길을 통해 유럽으로 건너가는 사람이 훨씬 적다. 그 이유는 리비아는 실패한 국가이고 모로코 정부는 스페인과 협력하는 행정 기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과 모로코 모두 사헬이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고, 만약 사헬 지역 국가들이 분열될 경우 모로코도 불안해져서 세우타와 멜리야는 물론 스페인 본토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우려한다. 이런 이유로 스페인은 말리를 비롯한 여러 사헬 지역에서 정부군을 훈련시키는 일에 관여하고 있다."(419-20)


10 우주, 또 다른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가 될 수도 있다


"미국, 일본, 아랍에미리트, 이탈리아, 영국, 캐나다, 룩셈부르크, 오스트레일리아는 2020년 10월 아르테미스 협정에 서명한 첫 번째 우주 탐사국이었다. 달 탐사와 자원의 추출을 관장하는 이 협정에 서명한 국가들은 협정의 효력이 지속되는 한에서 2024년까지 달에 최초로 여성을 착륙시키거나 13번째 인간을 착륙시키는 활동 등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그것은 2028년까지 채굴을 위해 달에 기지를 설치하려는 인류가 딛는 거대한 발걸음으로 계획된 것이다." "많은 국가들이 이미 다국적 위성통신 기구인 인말새트(Inmarsat, 국제해사위성기구)와 인텔샛(Intelsat, 국제통신위성기구)을 설립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에 참여한 나라들은 기후변화와 관련한 정보를 나누고 오염이 심한 지역을 찾는 일에도 협력한다. 실제로 남극 지역의 오존층에 구멍이 뚫린 것을 발견하고 확인한 것도 이 위성기술 덕분이었다. 이것은 인류가 최고 수준으로 합동 작업을 펼칠 때 상시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다."(427-33)


"1967년에 만들어진 우주조약(Outer Space Treaty, 달 및 천체를 포함한 외기권 개발과 사용을 규제하는 국제 조약)은 다시 쓰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조약은 우주 공간의 이용을 통제하는 대다수 규범들의 근간이 되어 왔다. 이 조약에서는 〈우주 공간은 주권 주장, 그 사용이나 점령 또는 다른 수단에 의한 것일지라도 한 국가가 전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아르테미스 협정은 우주 개발 과정에서 유발되는 법적, 정치적, 군사적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다. 아르테미스 협정에 관해 러시아와 중국이 특히 우려하고 있는 조항은 달에서 한 나라가 작업하고 있는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서명국들이 안전지대를 건설할 수 있도록 허용한 부분이다. 각 나라는 해가 되는 개입을 방지하기 위해 그 지대를 존중하도록 권고받는다. 이는 곧 러시아 우주선이 그 지대에 착륙하는 것은 물론 일본이나 미국 기지 곁에 무언가를 차리는 것, 또 새로 도착한 나라들의 활동 시나리오 자체를 차단한다는 얘기다."(436-7)


"강대국들이 상업적,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우주 공간을 점할 것이라는 가정을 내세운 입장이 이른바 〈우주 정치학〉이다." "군사 우주 전략가들은 이 이슈 한복판에 있는 지형을 4개의 범주로 구분하려 한다. 먼저 지구를 뜻하는 테라Terra가 있다. 지구와 그에 가까운 영공, 비행체가 연료를 재공급받지 않고 지구 주위의 퀘도로 들어갈 수 있는 한계까지를 말한다. 그 위에 지구우주Earth Space가 있다. 이 공간은 최저 지구궤도에서 지구 자전과 궤를 같이하는 지구정지궤도까지를 지칭한다. 그 위로 달의 궤도를 말하는 달우주Lunar Space가 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태양계로 들어간다. 태양계 내의 모든 것은 달퀘도 너머에 있다. 향후 몇십 년 내에 미래의 우주 탐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지구우주, 특히 저궤도다. 통신위성과 군사 분야로 확대돼 가고 있는 우리의 위성들이 자리 잡은 곳도 여기다. 이 벨트를 통제하는 나라들이야말로 지구 표면 전체에서 거대한 군사적 이점을 얻어갈 것이다."(439-41)


"이제 인공위성은 더 이상 전화나 TV 방송을 중계하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위성은 일상생활뿐 아니라 현대전에서도 필수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위성을 떨어뜨리거나 방해하면 자동차의 GPS 시스템이 먹통이 되고 신용카드가 작동되지 않을 수 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려고 텔레비전을 켜도 깜깜한 화면만 나온다. 며칠 지나면 슈퍼마켓의 배달 시스템까지 혼란에 빠지게 된다. GPS가 없다면 선박과 비행기들이 제 길을 찾는 데 고생하는 것은 차치하고 최악의 시나리오는 전력망이 다운되는 것이다. 일기예보를 듣는 것 같은 일은 아예 포기하는 게 좋다. 군사적인 차원에서 모든 선진국은 정보와 감시 활동을 위성에 의지하고 있다. 어떤 나라의 군사 위성이 타격을 입는다면 그 나라의 최고사령부는 그 즉시 그것을 지상 공격의 전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핵공격 조기 경보 시스템도 망가질 수 있어서 차라리 먼저 공격을 감행하자는 결정을 촉발시킬 수 있다."(447)


"땅과 바다의 위대한 발견들은 대부분 비슷한 결말을 맞았다. 경쟁, 힘겨루기, 승자가 규칙을 정하고 선을 긋는 것 말이다. 이 장면을 우주로 옮긴다면, 이제껏 우리가 아는 지식으로는 현재는 쫓겨날 소유주가 없고 위험을 부담하면서 모험을 감행하고 투자하는 측은 이익을 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펼칠 수는 있겠지만 이제는 지구에서의 모든 분쟁과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 대한 책임을 폭넓게 받아들여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바로 기후변화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우주는 그 무한대 속으로 우리 인간의 정신이 뻗어나갈 기회를 주고 있다. 인간은 늘 위를 바라보았고 깜깜한 밤하늘의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면서 꿈을 꾸어왔다. 실제로 우리는 높은 곳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높이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서로 힘을 합친다면 훨씬 빨리 도달할 수 있다. 우주에는 한계가 없으니까."(4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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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화 하는 일본 - 동아시아 ‘문명의 충돌’ 1천년사
요나하 준 지음, 최종길 옮김 / 페이퍼로드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제1장 끝나버린 역사─송나라와 고대 일본


"중국사회의 틀은 서력 960년에 탄생한 '송' 왕조에서 한 번의 커다란 대전환을 이루었고, 이 대전환 후의 틀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중국사를 어디선가 한 번 구분한다면, 당(중세)과 송(근세) 사이에서 가를 수 있다'고 하는 테제를 최초로 제창한 것이 전전에 활약한 동양사가 나이토 고난의 '송대 이후 근세설'입니다." "그러면 송나라의 어디가 그렇게 획기적이었던 것일까요. 나이토에 따르면 〈귀족제도를 전폐하고 황제 전제 정치를 시작한 것〉, 조금 바꿔서 말하면 〈경제와 사회를 철저하게 자유화하는 대신에 정치 질서는 일극 지배에 의해 유지하는 틀〉을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나라가 '안록산의 난'과 같은 지방 군벌의 반란으로 쇠퇴하고, 이후 5대 10국 같은 국가 분열상태 속에서 멸망한 이후 중국대륙에서는 '지속가능한 집권체제의 설계'를 지향했습니다. 그 결과 찾아낸 답이 송나라에서 시작되는 중국형 '근세(초기 근대)' 혹은 '중화문명'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31-2)


"송나라 시대의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황제만을 예외로 둔 채 신분제나 세습제가 철폐된 결과 이동의 자유·영업의 자유·직업선택의 자유가 널리 세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과거를 통해 관리 즉, 지배자 층으로 상승하는 문호도 개방됩니다. 남성이라면 사실상 거의 누구나 과거 시험을 칠 수 있었기 때문에 (남녀 간의 차별을 별도로 한다면) '자유'와 '기회의 평등'은 이때 이미 거의 달성되었다고도 할 수있습니다." "다만 자유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부여되는 것은 경제활동에 대한 자유뿐으로 정치적인 자유는 (과거를 칠 수 있는 권한을 제외하면) 극히 강하게 제한되었습니다. 귀족을 배제하고 황제가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이상 이에 대한 비판은 금지되었으며, 황제에 반대할 '자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자유경쟁에서 실패했을 때의 보험을 위하여 송나라 중국인들이 개발한 것이 '종족'이라고 불리는 부계 혈통의 네트워크입니다. 아버지의 선조가 동일하다면 누구나 서로 돕는 구조입니다."(35-6)


"남송 시대에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주자학은 개개인의 인생 교훈이나 관혼상제의 절차에 관한 의례규정의 모음집적인 성격이 강했던 『논어』를 비롯해 기존의 유교 경전에서 오컬트 성격의 점보기 취미 같은 것들을 일소해 버렸습니다. 나아가 두 번 다시 당나라 말기와 같이 중화세계를 분열시키지 않을 만큼의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지향하였습니다. 주자학은 체계적인 재독再讀을 통해 '무엇이 인류 전체가 지향해야만 하는 목표인가' '성인은 어떠한 존재이며 왜 이들의 행동이야말로 항상 정당한지'를 분명히 익힐 수 있도록 하나의 정치철학이자 도덕철학으로 기존의 유교를 재편찬한 것입니다. 이 주자학 사상이 과거시험의 공식 매뉴얼이 됨으로써 선발된 관료 및 그들을 선택한 황제는 단순히 자의적인 독재자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권력기반에 대한 정통성을 주자학에 둔 이상 황제나 관료도 여기에 어울리는 행동거지를 요구받게 되는 것이지요."(38-9)


"당나라를 모델로 645년의 타이카大化개신을 일으키고 중국을 모방하여 율령 도입을 꾀한 고대 일본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 300년 후에 송나라의 성립에 의해 사회의 전면적인 자유화와 황제로의 권력집중이라는 획기적인 대혁신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왜 이러한 것에서는 배우려고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힌트는 과거라는 시험제도에 있습니다. 과거는 전 국민에게서 지원자를 모집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지적·인적·사회문화적 인프라가 만들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관료의 세습을 폐지하고 지금부터는 시험의 상위합격자를 채용합니다〉라고 하더라도 '공부하지 않은 바보'가 '더 공부하지 않은 바보'를 누르고 상위에 합격할 뿐입니다. 그러면 국가는 파탄이 나고 맙니다. 과거의 전면적인 도입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풍부한 종이와 진보된 인쇄기술을 완비한 것은 당시에 출판 최선진국이었던 송나라 중국뿐이었습니다."(41-2)


제2장 승리하지 못한 '중국화' 세력─원·명·청나라와 중세 일본


"몽골제국이란 전 세계적인 시장통합의 기초를 놓은 세계화의 원점으로서, 송나라 중국에서 만들어진, 현대 '탈냉전' 세계의 축소판과도 같은 사회를 한반도에서 동유럽에까지 확장한 제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구元寇란 이 몽골제국 주도의 자유무역 경제권에 일본도 들어오라는 요구를 '가마쿠라 남자'들이 거부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말 그대로 '하지 않아도 좋았을' 전쟁입니다." "더구나 일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있는 지역입니다. 상대의 요구에 응하기만 했으면 나라가 망하는 일은 애초부터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난, 국난이라고 소란을 떨면서 민중은 말할 것도 없고 천황까지 속여 외국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배외주의를 선동하고, 평화의 여지는 없는 듯이 위장하여 국민을 전쟁으로 몰고간 무능한 군벌 정부가 바로 이전에 다이라 씨 정권을 멸망시켜 글로벌화의 길을 막아버린 가마쿠라 막부입니다."(55-6)


"몽골제국이 쇠퇴한 것은 은이 부족해지면서 화폐에 의존한 결과 경제가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입니다. 지금처럼 누구라도 불환지폐(단지 종잇조각)에 익숙해져 있으면 은이 부족해도 별일이 없지만, 일반인이 은과의 태환兌換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인 경우에 지폐를 은으로 교환할 수 없다는 것은 제국의 정통성을 뒤흔들어버리고 남을 것입니다. 인류가 금 본위제를 폐지(금과 교환할 수 없는 지폐라도 납득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된 것)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이며, 마지막 태환지폐였던 달러와 금의 교환이 정지된 것은 1971년의 닉슨쇼크 때니까 몽골제국은 늦었던 것이 아니라 너무 앞섰기 때문에 멸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몽골인을 북방으로 쫓아내고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은에 의존한 경제정책이야말로 망국의 원흉이라고 판단하여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반 글로벌화' 정책─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갑제里甲制─을 취합니다."(62-3)


# 이갑제 : 부역 의무가 있는 110호戶로 1리里를 편성하고 그중 부유한 10호씩을 10갑甲으로 분할하여, 조세 징수나 관청에서 필요한 잡품, 잡비, 역무를 제공하도록 한 제도. 뒤에 일조편법一條鞭法으로 개정되었다.


"명나라 시대의 중국인은 은만 가지고 가면 뭐라도 팔아주었습니다. 이렇게 서쪽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동쪽으로 일본까지 전 세계의 은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듯이 중국으로 일방적으로 유입되는 1500년대 후반의 현상을 '은의 대행진'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그 후의 세계를 변화시켰다고 하는 것이 현재의 글로벌 히스토리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일본에서 전국시대로 불리는 16세기는 실은 '전 세계적인 전국난세戰國亂世였습니다. 그리고 이 대혼란을 어떻게 수습했는지가 각각의 지역 장래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세계 속의 어떠한 지역이라도 1600년 경에 만들어진 사회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해라〉라고 모든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예외는 북미나 호주와 같은 이민국가 뿐입니다). 즉 일본이라면 에도시대, 중국에서는 명나라를 대신한 청나라, 유럽에서는 종교전쟁을 수습한 이른바 '베스트팔렌 체제', 곧 근대주권국가 체제입니다."(65-6)


제3장 우리들이 좋아하는 에도─전국시대가 만든 도쿠가와 일본(17세기)


"〈중국사를 한 곳에서 구분한다면, 당(중세)과 송(근세) 사이에서 나눈다〉고 논한 나이토 고난은 역시 다이쇼시대에 〈일본사를 한 곳에서 구분한다면 오닌의 난 전후에서 나눈다〉고 말했습니다. 이른바 중국사가 '송대 이후 근세설'이라면 일본사는 '전국시대 이후 근세설'이 됩니다. 저는 나이토의 이 두 가지 근세설이 무로마치시대까지의 일본 중세는 '얼마간의 중국화 정책의 수립을 통해서 일본에서도 송나라와 동일한 중국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었던 시대'로, 전국시대 이후의 일본 근세는 '중국적인 사회와는 180도 정반대인 일본 독자적인 근세사회의 틀이 정착된 시대'로 보자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국시대의 실상을 살펴보면 꿈에 넘치는 천하통일의 비전 같은 건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매년 텐포의 대기근 같은 상태였기 때문에 굶어죽기 직전의 난민들이 피투성이의 약탈 전투를 하고 있었던것입니다."(75-6)


# 오닌의 난 : 1467년부터 1477년까지 계속된 내란으로 막부나 수호다이묘守護大名가 급속히 쇠퇴하고 전국시대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시대 다이묘의 사명이란 실제로는 인접한 곳과의 식량 획득 전투에서 자기 지역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도로 정비와 역전驛傳 제도의 관리를 통해 신속한 정보전달과 물자운송에 노력하여 긴급한 시기에 피난민을 성곽 내로 수용하고 지역 주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점이 만사를 '시장에 맡겨두라'고 하며 민정 기능을 포기한 중국식 근세국가와 다른 커다란 차이점입니다. 이것을 농민의 입장에서 볼까요. 중세까지는 비상시에 자신이 칼을 들고 무사로 변신하여 '자력구제'로 자기 생명을 지켜야 했다면, 근세 이후는 자신의 안전을 '윗분에게 맡기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권력자가 자신의 존재 이유는 질서의 안정에 있다고 자각하고 (중국과 동일하게) 무엇이든 민간의 '자기책임'에 맡겨 버리는 중세사회의 관행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이 시기부터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근세로서의 일본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76-7)


"이네(벼稻)와 이에(집家)의 선순환─곡물 수확량과 필요 노동력의 증가─이야말로 전국시대의 구렁에서 도쿠가와 일본이 기적적인 부활을 이루어낸 이유입니다." "배타적으로 점유할 수 있는 직업이나 토지가 있고, 경작을 세습할 수 있는 것도 인정되었기 때문에, 욕심내지 않고 이것만이라도 우직하게 유지하고 있으면 자손대대로 대충은 먹고 살 수 있는 가직家職이나 가산家産이 귀족이나 무사뿐만 아니라 농민들에게까지 부여되었다는 것이 됩니다. 오늘날의 일본어에서 말하는 '이제 겨우 나도 한 나라 한 성의 주인'이라는 식입니다. 조금 학문적으로 말하면 '중세의 직職의 체계'가 근세의 '역役의 체계'로 계승된 것이지요." "나아가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유통·서비스업 종사자에 대해서도 이 이에와 직역의 관계가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근세중국에서라면 받아들이기 힘든 영업 자유에 대한 제한임과 동시에 국가 규제를 통한 업계 단체나 중소기업의 보호정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86-7)


"그런데 이 '이에/집안이라는 규제'는 지배계급이었던 무사까지 구속시키고 맙니다. 다이묘마다 영지가 기본적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자자손손에 걸쳐 '선조 대대의 윗분'과 '선조 대대의 영민領民'이 지역에서 계속 얼굴을 맞대는 관계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영주(경영자)도 영민(노동자)도 뭐, 서로 같은 땅(회사)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만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일본에서도 중세시대의 반란에는 중국의 민중반란이나 유럽의 농민전쟁과 같은 과격한 무장투쟁의 예가 많지만 에도시대에는 모두 목소리를 죽이고 맙니다. 미즈타니 미츠히로가 마치 '춘투春鬪'와 같다고 평한 미온적인 농민봉기만이 관민의 교섭창구가 되었을 뿐이지요. 요구사항은 다소의 임금인상(연공 감면)뿐으로 정치적 요구는 하지 않습니다. 수상 퇴진과 같은 과격한 요구를 내건 정치파업이 빈발하여 경제가 마비된 전후 유럽이 부러워했던, 이른바 일본적 노사관계의 원점입니다."(88-9)


제4장 이런 근세는 싫어─자멸하는 도쿠가와 일본(18-19세기)


"일본의 '이에'란 것은 부계 혈연에 집착하지 않는 체계로 자식을 낳지 못하면 양자를 들이는 편법도 있기 때문에 인구를 줄이는 데 적합합니다. 원래 대대로 정해진 가산을 상속하여 먹고 사는 세습제 사회에서 자식을 너무 많이 낳으면 집안이 파멸하기 때문에 자발적인 산아제한 관행이 보급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생산수단과 생산력(즉 세습된 토지)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가족이 너무 많이 불어나면 아사할 뿐이므로 에도 중기 이후의 농가에서는 기본적으로 '집안을 이을 사람' 이외의 남자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정말로 무능하지 않다면 장남이 뒤를 잇기 때문에 차남 이하는 신부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 책임이 아니라 이에 제도의 숙명인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더라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차남 이하는 '그럼 처음부터 낳지 마라'고 생각했겠지만 당시는 유아 사망률이 극히 높았기 때문에 몇 명 정도는 낳아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97-8)


"결국 많은 농가의 차남 이하들은 도시로 나가게 되는데, 하야미 아키라에 따르면, 오오가키번 니시조 마을에서 에도시대 최후의 100년 동안 도시로 일하러 나간 남녀 394명(이들 중 계속 일하고 있던 65명을 제외한 329명) 가운데 봉공奉公이 종료된 이후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표기는 '사망'으로 126명입니다." "즉, 18세기 전국 인구의 정체는 농촌지역의 인구증가분을 도시지역의 높은 사망률 및 저출생률이 상쇄시킨 것으로 이것을 하야미씨는 '도시의 개미지옥' 효과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집안'마다 가직을 훌륭히 수행한 노인에게는 스웨덴 이상으로 안락하게 하자. 역으로 젊은 주제에 올바른 직업에 종사하지 않은 놈들에게는 미국 이상으로 엄격하게 하자. 이놈들은 자기책임인 만큼 세금으로 원조해서는 안 된다. 과로사할 때까지 철저하게 저임금으로 혹사시키자─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에도시대부터 지금까지 이것이 일본인이 생각하는 '복지사회'입니다."(99-101)


"근세 일본의 신분제는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먼 옛날에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선택한 신분제'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송나라가 신분제도를 폐지해버린 지점에서 (유럽처럼 완전 시골과는 다른) 동아시아는 신분제를 유지하기에는 그 나름대로의 조치가 필요한 사회가 된 것입니다. 신분이 아래인 자에게도 최소한의 장점이 있는 체제가 아니면 노골적인 형태로 신분제도를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회학 분야에서는 '정치적인 권력자가 경제적으로도 자산가이며 문화적으로도 우월자'인 사회를 '지위의 일관성이 높은 사회'라고 합니다." "이것의 전형적인 형태가 근세의 중국입니다. 과거 합격자는 권력도 부도 위신도 모두 독점합니다." "반면 근세일본은 신분제 사회이면서 실은 '신분이 상위인 자가 모든 것을 독점하고 아래인 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사회'(지위의 일관성이 높은)가 아니라 '신분이 상위인 자가 명예를 가지고 아래인 자는 실리를 챙기는 사회'(지위의 일관성이 낮은)였습니다."(104-5)


"이처럼 '어떤 분야에서는 승자인 사람들이 다른 분야에서는 패자가 되는' 도쿠가와 사회의(지위의 일관성이 낮은) 신분제도의 존재형식을 '혼자서 독점하지 않고, 자기 주제를 아는 삶의 방식을 모두가 인식함으로써 상위자도 하위자도 서로 위로하고 안쓰러워하는 일본적 정서가 자라난, 양보하는 미덕이 넘치는 공생사회'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대개의 에도시대 마니아란 대체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한편으로 동일한 사태를 완전히 반대로 '아무도 자기 충족을 할 수 없으며, 항상 뭔가를 타인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불쾌감을 가지고 우울하게 살아간 질퍽하고 음습한 사회'였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을 취할지는 개인의 취미라고 할까 가치관이기 때문에 제가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분명한 것은 후자처럼 느끼는 사람이 점차로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메이지유신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107-8)


제5장 개국은 했지만─'중국화'하는 메이지 일본


"메이지유신이 '2단계 혁명'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의 핵심은 앞장에서 논한 '지위의 일관성의 낮음'이 가져온 '누구나가 불만인 사회'입니다. 막부의 실세 중 하나이자 후쿠야마 번주였던 아베 마사히로는 페리 내항에 즈음하여 지금은 유력 다이묘의 협조를 받지 않으면 국난을 타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여러 다이묘에게 의견을 타진합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석고로는 유력 다이묘지만 정치적으로는 실권이 없었던 번주들, 예를 들면 미토의 도쿠가와 나리아키나 사츠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 등은 쌓인 불만을 풀어야 한다며 정치에 참견하기 시작합니다(제1단계). 물론 이 시점에서는 막부 자체의 폐지 등은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번주보다 몇 배나 울분이 쌓인, 번주 밑에서 불합리할 정도로 낮은 신분과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던 하급 무사층들이 사츠마와 죠슈 등에서 번정을 탈취하고 보다 급진적인 혁신으로 돌진해버린 것입니다(제2단계)."(122)


"즉, 메이지유신이란 '신체제의 건설'이라기보다 '구체제의 자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구체제인 일본 근세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면 원래 중세 단계까지는 다양한 면에서 진척되고 있던 '중국화'의 싹을 뿌리채 뽑아서 일본이 송나라 이후의 근세중국과 동일한 사회로 변화하는 흐름을 억제하고 있던 '반反중국화 체제'입니다. 그것을 스스로 내부에서 거부해버렸기 때문에 당연히 메이지 초기의 일본사회는 남북조 이후 오랜만에 '중국화' 일변도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면 첫째, 유교도덕(교육칙어)에 의존한 전제왕권(천황)의 출현, 둘째, 과거제도(1894년부터 시작되는 고등문관임용시험)와 경쟁사회의 도입, 셋째, 세습귀족(무사)들의 특권과 봉록(급여)을 없애는 '질록처분'(1876)을 통한 대량감원과 관료제의 군현화(폐번치현), 넷째, 규제완화(신분제 폐지와 토지매매의 공적인 해제 등)를 통한 시장의 자유화 추진을 들 수 있습니다."(124-8)


"일본에게 있어 '근대화'나 '메이지유신'은 즉 '중국화'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왜 중국이나 한국은 중국화에 실패했는데 일본만이 중국화에 성공한 것인가?〉 등의 질문은 글자 그대로 난센스입니다." "언젠가는 실행해야 할 '중국화'의 시대를 1000년 가까이 지연시킨 일본인은 '서양화'를 위해 사회체계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와 역사의 필연인 '중국화'의 시기를 맞출 수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중국(이나 한국)은 그 옛날에 '중국화'를 끝냈기 때문에 19세기가 되어도 왜 지금 '서양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중국인이나 한국인은 일찍이 '중국화'를 달성한만큼 '서양화의 시점을 놓쳐버리는 모양새가 되었다'는 것이, 동양·서양의 문제와는 또 별개로 한·중·일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정말로 평등한 역사인식입니다. '서양화'란 게 내용적으로 대부분 '중국화'와 겹치니까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서양화'를 필요로 하는 필연성이 그만큼 낮았을 겁니다."(129-31)


"고지마 쓰요시는 막말 이후 일본 근대를 지탱한 사람들을 움직인 에토스로서 '양명학'을 꼽습니다. 이때의 양명학은 엄밀히 말해 개별 구체적인 유교의 학파나 사상 내용이라기보다 대략적으로 이야기해서 '동기 승인all right 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에토스의 문제, 다시 말해 '기분으로서의 양명학'입니다. 동기 승인이란 물론 '결과 승인'의 반대말로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가 아니라 '시작이 좋으면 결말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정서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결과가 아니라 동기 중심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타협하지 않고 어디까지라도 돌파하겠다는 경향이 강하기 마련입니다. 함께 뜻을 세웠다가 도중에 쓰러진 동지와 서로 일체감을 느끼는 심정적 연대도 상당히 강력했기 때문에 이들이 추도시설을 세우면 '그들이 행한 것은 모두 정의, 이에 반대한 놈들은 모두 악'이 되어 버립니다. 바로 이것이 고지마 씨가 말하는 '야스쿠니 사관'입니다."(150-2)


"물론 언제까지나 펑크록 가수(동기 중심의 행동파)에게 정권운영을 맡겨두면 국가가 파탄나 버리기 때문에 점차로 이와쿠라 토모미, 오쿠보 토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합리주의적 마키아벨리주의자가 중심이 되어, 승산이 없는 과격한 정책 주창자들을 정부에서 추방 혹은 숙청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내몰린 이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사이코 다카모리가 순교자로 추앙받고 동정받았던 걸 보면 이러한 순정주의적이고 비타협적인 정치문화의 에토스가 메이지 정부의 외부와 민간 여론에 강력하게 남아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견 독재적인 전제정부보다도 재야의 민주화 세력들이 거의 항상 외교문제에 관해서는 강경파로 '정의가 우리나라 편에 있는 이상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절대로 타협하지 말라'는 형태로 정부의 '유약柔弱외교'를 비판하는 구조가 메이지 시기에 정착한 이후 '저 전쟁'까지 지속됩니다."(152-3)


제6장 우리의 에도는 푸르렀다─'재에도화'하는 쇼와 일본


"19세기 후반부터 세계적인 노동운동의 고양 속에서(실은 대정봉환에 의해 도쿠가와 막부가 종언을 맞이한 1867년은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1권을 간행한 해입니다) 여러 선진국은 그 대응에 고심하여 결국 어떠한 해결책을 취했느냐에 따라서 그 나라의 정치체제가 정해지게 되는데 일본의 경우는 여기서 '재에도시대화'라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가령 마치 각 기업을 '번'에 비유한 것처럼 회사별 조합의 도입이 그 일례인데, 공장위원회의 정비가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전후부터 주로 사무직 노동자층에서 인생 설계life course의 고정화, 회사의 '촌락사회화'가 현저해집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사무직 노동자를 시작으로 점차 육체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종신고용·연공임금 체계가 정비되었습니다." "종신고용·연공임금제란 에도시대 내내 선조 대대의 경작지를 구실로 하여 (외부로 이주하면 상속할 수 없는 형태) 농민 '집안'을 거주지역에 묶어두었던 촌락사회의 근대판입니다."(161-2)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시장에서 국제무역의 비율이 현저히 낮아지고, 각 주권국가의 정부마다 국내시장과 경제정책 전반에 개입하는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점에서 해외무역을 엄격히 규제하고 국내에서도 신분규제로 칭칭 얽어맨 채 집안마다 영업통제를 행했던 에도시대와 유사한 상황이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세계공황의 발생에 동반하여 1930년대에 진행된 블록경제화는 그 극점입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여 '케인스의 세기'라고 불린 20세기 전반기는 정확하게 '에도시대화의 세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에서 다카하시 고레기요 대장성 대신이 취한 적극재정은 (일본에서) 케인스 정책의 선구라고 불리며, 실제로도 일본은 비교적 빨리 세계공황에서 벗어났습니다. 이것은 일본인에게 익숙한 에도시대적인 행동양식이 기대하지도 않게 세계의 흐름과 우연히 일치했기 때문에 발생한 요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166-9)


"즉, 이런 것입니다. '중국화'한 자유경쟁과 자기책임의 메이지 사회에서 힘들어진 일본인이 '지금 생각해보면 에도시대는 나쁘지 않았어. 에도시대 그리워. 에도시대 너무 좋아. 조금 부자유스러워도 좋으니 안정된 저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라고 징징대자마자 세계질서가 완전히 에도시대와 같은 상태로 되어 버렸기 때문에, 메이지 이후에 달성된 '진보'까지 포함하여 질질 에도시대로 되돌아가 버린 것이 마침내 '저 전쟁'에 도달한 '어두운 쇼와'의 실상입니다. 예를 들면, 의회정치란 일본에서는 에도시대의 전통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재에도시대화'하면 당연히 그 기능은 대폭적으로 저하됩니다(동일하게 에도시대적으로 변한 세계 각국에서도 의회정치의 전통이 약한 독일, 이탈리아, 소련=러시아 등은 좌우 어느 쪽이든 전체주의의 일당 지배체제로 바뀌었으며, 역으로 의회주의를 자국 전통의 중심에 둔 영미 양국은 어떻게든 정치적 자유주의를 유지했습니다)."(170)


"경제학자 노구치 유키오는 쇼와 일본의 총력전체제 하에서 1940년 전후에 정착한 국가주도의 재정운영과 기업통치의 존재형태를 '40년 체제'로 이름붙이고 그 특징은 집단마다 '담장으로 나누어진 사회주의'에 있었다고 합니다. 재향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농촌지역을 통괄하고, 도시지역의 노동자도 회사마다 공장마다의 산업보국회에 묶여 분할되고, 각각의 내부에서 운명공동체 의식을 강화하여 생산에 박차를 가하는 체제! 우리는 이것을 묘사하는 데 더 편리한 용어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에도시대에서 유래한 '봉건제'와 '근면혁명'입니다. 노구치 논의의 요점은 이 40년 체제는 전쟁동원에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 부흥에서도 이른바 '호송선단 방식'(회사가 망하지 않게 국가가 돌봐주는 방식)이나 '일본적 경영'으로 계승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전후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회주의 국가'로 불린 이유도 역시 에도시대에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겠죠."(175-6)


제7장 근세의 충돌─중국에 패한 제국 일본


"긴 쇄국 동안에도 전국시대 이래의 행동양식을 계속해서 이어오고 있던 일본인이 '개국'을 맞이한 결과 근세 초부터 사상 유전자가 동결 보존되어 온 듯한 발상 그대로 유라시아 대륙으로 퍼져나가 이미 '중국화'하고 있던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에까지 '재에도시대화'를 확대시키려고 했던 것이 절대로 빠트릴 수 없는 역사적 사태의 본질입니다." "사실 이것은 반드시 일본 제국주의에 한정된 것만이 아닙니다. 경제학자 슘페터도 구미 열강의 식민지 획득 경쟁은 '격세유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하였습니다. 원래 영토의 확대가 국익에 직결되는 것은 주요 산업이 농업인 경우에 한해서만 분명한 것으로 상공업 중심의 근대사회에 있어 식민지 경영이 흑자를 낼지 적자를 낼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여러 나라가 시대착오적인 식민지 획득에 광분한 것은 로마제국처럼 구시대의 행동양식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슘페터는 보고 있습니다."(184-5)


# 격세유전 : 두 세대 이상의 유전이 진행되어 어떤 형질이 변형되거나 사라지게 된 이후 몇 세대를 걸러서 사라지거나 변형된 표현형질이 유기체에서 다시 나타나는 현상. 즉, 조상에 존재했던 유전형질이지만 이후의 세대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자식세대에서 되살아난 형질을 의미한다.


"에도시대처럼 촌락단위로 끊어서 사람들을 동원할 수 없는 중국사회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더 나아가 외부에서 침입해 들어온 새로운 권력이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정확히 청나라의 만주족이 행한 것처럼 중화의 전통이 되어 버린 세계보편적인 도덕의 체현자로서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장제스도 마오쩌둥도 정말로 중화의 전통인 글로벌한 정전론正戰論으로 일본의 에도시대형 군사동원을 능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능가했습니다. 마침내 미국이 일본에게 대륙에서의 철병을 권고하고 경제제재를 발동하자 궁지에 몰린 일본은 대영 대미 개전을 선택합니다. 이렇게 '저 전쟁'이란 일본과 중국의 두 근세 사회가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자웅을 가린 싸움이었으며, 일본은 미국에게 패하기 전에 이미 중국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미국과 싸우지 않으면 중국과 전쟁을 계속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이미 패한 게 아니겠습니까."(194-5)


제8장 너무 오래 지속된 에도시대─영광과 좌절의 전후 일본


"전후에는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일본자유당이 시장경제 지향의 강한 보수 정당으로 가장 우익이었으며,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일본사회당과 한가운데서 문화적으로는 보수지만 경제적으로는 재분배를 중요시한 민주당이 중도정당으로 존재하는 3대 정당제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바꿔버린 것이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입니다. 즉 '헌법 9조를 개정하고 재군비를 행하여 자유주의 진영의 일부를 담당'하든가 '헌법 9조를 유지하여 비무장 중립정책을 취할(혹은 사회주의 진영과 연대할)' 것인가가 여러 정당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3당의 균형이 급격하게 변하여 결국 개헌·재군비 찬성파의 자유·민주 2당이 보수합동이라는 형태로 자민당을 결성(1955)하여 거의 항구적으로 과반수를 장악할 수 있는 의석수를 확보한 반면, 이전에 주요 3당 가운데 사회당만 호헌·재군비 반대로 독립하고 정권에서 멀어져 만년 야당의 길을 갑니다."(205-7)


"그런데 전후 역사상 가장 중대한 의미를 가진 조문은 9조라기보다는 오히려 96조로 〈헌법 개정은 중·참 양원에서 각각 2/3 이상의 의원이 찬성하지 않으면 발의할 수 없다〉라는 조문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9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1/3 의석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호헌을 지상명제로 하는 한 3당제가 무너지고 (의석비가 2:1로 고정된) '1과 1/2정당제'로 바뀌어도 사회당은 어떤 곤란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설픈 욕심을 버리고 정권(과반수)을 노리지 않게 된 만큼 헌법만 지킬 수 있다면 좋아, 라고 정해 버리면 만만세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동일한 것을 자민당 쪽에도 말할 수 있는데 개헌만 포기한다면 항상 과반수를 사회당이 양보해주는 것이니만큼 이처럼 편안한 여당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보수합동이 이루어진 1955년 이후에 호헌 이념을 사회당과 그 외의 야당이 차지하고, 정권의 실익을 자민당이 가지는 절묘한 분할 상태로서의 '55년 체제'가 성립합니다."(208)


"하버드대학의 퍼거슨 교수는 오늘날 세계의 기점은 1989년의 냉전 종언이 아니라 10년 전인 1979년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해에 영국에서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가 수상에 취임하고 사회복지비를 삭감하여 국영기업을 계속해서 민영화하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시장주도의 경제운영에 착수하였으며, 2년 후에는 미국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뒤를 잇습니다." "그러나 국가에 의한 보호를 철폐하고 시장경제에 맡기는 전환은 실은 1년 전인 1978년에 이미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정책으로 중국에서 실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해인 79년에 덩샤오핑은 미국을 시찰하고 더욱 더 '경제만은 자유화시킨다'는 방침을 채택합니다. 즉, 서구의 표준적인 연구서에 적혀 있듯이 신자유주의는 미·영·중 3국에서 동시에 시작된 것으로, 앵글로 색슨 방식이 세계가 배워야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한다면, 이른바 여기서 중국이 일본을 추월한 것입니다."(221)


"한편 오일쇼크가 서구 여러 나라에 케인스 정책의 재검토를 강제한 것에 비하여 일본의 '새로운 촌락'이었던 기업사회는 이것을 자기 식으로 극복합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종신고용제에서 불황이더라도 해고할 수 없는 것을 염두에 두고 원래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밖에 고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기가 악화되어도 그렇게 해고하지 않다도 되었으며, 실업자가 그다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보장도 파탄나지 않고 복지국가를 지속할 수 있던 것입니다. 이것만 들어보면 훌륭한 이야기이지만 역으로 말하면 호경기가 되어도 추가인원을 고용하지 않고 불황기와 동일한 인원수 그대로 각자가 죽을 힘을 다해 일해서 대응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결국, 부분부분을 보면 각각 견고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비효율적으로 이상한 결과가 되어 버린 봉건제 근성이 실은 '중국화'의 잘 나가는 소비시장주의와 나란히 거품경제의 진범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226-8)


제9장 '긴 에도시대'의 종언─혼란과 방황의 헤이세이 일본


"일본의 '전후'만큼 벌써 끝났다든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든가 논의가 분분한 시대도 따로 없겠지만, 역시 냉전의 종결, 거품경제의 붕괴, 자민당의 일당 지배(55년 체제)의 종언 등이 계속된 1990년 전후로 하나의 분기점을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뭔가 끝난 것은 분명하지만 무엇이 시작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는 시대─'중국화'와 '재에도시대화'의 부론이 도처에서 변덕스럽게 찢어지고 갈라지면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혼돈이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 90년대 이후의 일본입니다." "바꿔 말하면, 일본을 '중국화'시켜서 자유경쟁 중심의 사회로 하고 싶은지, '재에도시대화'를 유지하여 다소 정체되더라도 안정된 사회를 만들고 싶은지 정치가 자신이 잘 생각하지 않은 채로 '유신 지사' 기분의 동기우선주의로 행동하며, 유권자 역시 잘 알지 못한 채로 농민봉기 근성의 '아무려면 어때'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수상이나 당명은 바뀌어도 일본사회는 전혀 변하지 않고 정치 불신만이 쌓여가는 것입니다."(232-8)


제10장 이제야말로 '중국화'하는 일본─미래의 시나리오


"국가에 있어 사활적으로 중요한 요소 두 가지가 아직도 에도시대가 끝나지 않은 사회에 정나미가 떨어지고, 더 이상 '봉건제'란 틀 속에 갇히기는 싫다며 일본에서 도망가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자본으로 고임금에 해고하기 어려운 일본인 노동자를 피해 생산거점을 해외로 옮기는 기업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알고 계시는 바입니다. 그리고 의외로 놓치고 있는 또 하나가 바로 여성으로, '남편과 이혼하면 먹고 살 수 없도록' 집안 단위로 남성 우위의 복지제도를 강하게 실시해온 결과 전업주부화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다면 결혼은 하지 않아도 좋다는 당연한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당연히 미혼율은 올라가고 출생률은 바닥입니다. 자본이 국내 기업이란 바구니에서, 여성이 집안이라는 상자에서 솔선하여 뛰쳐나가는 상황에서 '봉건제'를 지속할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봉건제나 재에도시대화의 힘으로도 그 흐름을 저지할 수 없게 된 일본사회의 '중국화'는 필연이 될 듯합니다."(263)


"한편 근세중국적인 사고방식의 곤란 또한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른바 중화주의·자존주의의 결함으로 세계 최고이자 유일을 자랑하는 이상, 즉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을 제시하고 자멸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응책은 '하여튼 너무 높은 이상이기 때문에 적당히 상대하고 현실을 서두르지 않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현실의 황제가 주자학 도덕의 체현자로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인격자라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있을 리 없죠. 그래도 이상으로 제시해두고 어떤 때는 국정을 바로잡는 도구로, 어떤 때는 국가적 자긍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또한 어쨌든 세계에 통용되는 가르침이니까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에게 '빼앗겨서 몫이 줄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정당함이 그들까지도 감화시켰다는 식으로 우리가 가진 보편성의 증거라고 생각하여 더욱 더 전 세계에 널리 퍼질 듯이 호언장담을 연마합니다. 이것이 중국화하는 세계를 유유히 살아가는 방법이지 않을까요."(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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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헌법을 읽다 - 우리의 헌법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유유 서양고전강의 6
양자오 지음, 박다짐 옮김 / 유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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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 연합에서 연방으로


"1776년 7월 4일, 13개 주는 명확하고 강경하게 자신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지위를 주장했고, 역시 각각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입장을 지닌 채 독립선언서(전체 제목은 'The unanimous Declaration of the thirteen united States of America)에 조인했다. 그렇기에 문서에 '만장일치', 즉 13개의 정치적 조직이 전원 동의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만약 이 13개 주가 이미 하나로 결합해 새로운 국가를 설립했다면 '만장일치'는 필요하지 않았으리라." "1777년, 독립선언서에 연서한 13개 주는 연합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체결해 13개 주의 공동 행동 강령을 제정했다. 연합규약의 제정은 당시의 현실조건에 쫓겼다고 할 수 있었다. 영국왕 조지 3세는 독립선언서에 대응해 한 발 물러나기는커녕 강경하게 영국군 2만 명을 북미로 파견해 무력으로 반역자를 진압하는 쪽을 택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맞아 13개 주는 더욱 힘을 합쳐 눈앞의 무장 충돌을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30-4)


"연합규약에는 대통령이 없다. 13개 주에서 각각 파견한 대표로 구성된 'Congress'가 있을 뿐이다. 'Congress'의 본래 뜻은 '대표회의'에 지나지 않는다. 연합규약에서는 '연합'의 최고 권력 기구를 13개 주의 '대표회의'로 정하고 있다." "북미 식민지와 영국 사이의 군사 충돌은 1776년부터 1783년까지 계속되었다. 1783년 영국은 마침내 한 발 물러나 정전 평화 조약을 내밀었다. 평화 조약은 연합의 최고 권력 기구인 연합대표회의에 도착해 체결을 기다렸으나 이런 역사적 대사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회의를 성사시킬 대표들을 모으지 못했다. 몹시 공을 들여서야 각 주의 대표가 모였고 그제서야 평화 조약도 발효될 수 있었다. 그러나 버지니아주는 끝까지 영국과 연합 사이의 평화 조약에 참여하지 않았고, 단독으로 영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남북전쟁 당시 '아메리카 남부맹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결성한 남부의 선택은 명백히 연방보다 먼저 역사에 존재했던 조직인 연합을 근거로 한다."(35-8)


"느슨하게 조직된 '연합'과 '연합대표회의' 그리고 그 지침이 되는 '연합규약'은 13개 주가 함께 영국에 맞서도록 했지만, 13개 주 사이의 분쟁은 조금도 해결하지 못했다." "작은 주는 아무리 작아도 연합규약의 테두리 안에서 큰 주와 동등한 권리를 지녔다. 큰 주는 자연히 이러한 구조에 불만을 품었다. 큰 주의 불만을 모를 리 없는 작은 주에서는 이 동등한 구조를 바꿔 규모에 따라 세력을 확대하려는 큰 주의 시도를 막고자 연합규약 개정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1787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회의는 훗날 역사에 '제헌 회의'로 기록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바로 이 회의에서 미국 헌법이 제정되었지만, 회의가 준비되고 개최되던 역사의 순간에는 누구도 이 회의가 그 중대한 '제헌 회의'가 될 줄 몰랐다. 회의 결정 당시에는 연합규약을 검토하자는 제시조차 없었다. 다수의 회의 참가자는 자신이 '각 주 사이의 상업 및 무역 관계'를 토론하고 협상하러 왔다고 믿었다."(40-1)


"필라델피아 회의에 비교적 큰 기대를 걸었던 이들은 극소수였는데, 그 몇 안 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제임스 매디슨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다. 매디슨은 필라델피아 회의 전에 미리 버지니아주의 모든 대표를 소집해 사전 회의를 열었고, 그 회의에서 미국이라는 국가를 새롭게 조직하자는 건의서의 초고를 작성했다. 이 문서는 훗날의 역사에서 '버지니아 플랜'Virginia Plan이라고 불린다." "회의 6일째 되는 날, 메디슨은 버지니아 플랜을 제출했고, 온 회장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성공적인 기습이었다. 거의 모든 대표가 버지니아 플랜에 격렬한 의견을 표출했다. 물론 그중 대다수가 반대 의견이었다. 하지만 찬성이든 반대든 이러한 의견들은 하나의 효과를 낳았다. 그 이후로 회의는 버지니아 플랜을 떼어 놓고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버지니아 플랜은 미국 헌법의 기본 골격이 되었으며 연합규약 검토에서 하나의 새로운 조직에 대한 탐색으로 회의의 방향을 이끌었다."(51-2)


2 '우리'를 '미국 인민'으로 정의하다


"미국 헌법에는 '전문'前文이 없다. 간결하고 짤막한 '서언'序言이 한 구절 있을 뿐이다. 영어 원문에서는 이를 'Preamble'이라고 부른다. 〈We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in Order to form a more perfect Union, establish Justice, insure domestic Tranquility, provide for the common defence, promote the general Welfare, and secure the Blessings of Liberty to ourselves and our Posterity, do ordain and establish this Constitution for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우리들 합중국 인민은 더욱 완전한 연맹을 형성하고, 정의를 확립하고, 국내의 안녕을 보장하고, 공동의 방위를 도모하고, 국민의 복지를 증진하고, 우리와 우리 후손이 누릴 자유의 축복을 확보할 목적으로, 미합중국을 위하여 이 헌법을 제정하고 확립한다.〉 이 대목 첫 구절은 비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문장의 주어이자 헌법의 주체는 바로 이들이다. 〈We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우리들 합중국 인민〉."(59-60)


"미합중국 헌법은 '미합중국 인민'이 제정하고 확립하였다. 이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선고였다. 인류 역사상 그때껏 인민이 스스로 제정하고 확립한 헌법은 나온 적이 없었다." "몽테스키외와 루소가 말한 '민주'는 역사성을 띤 개념이다. 이 개념은 고대 그리스와 제국이 되기 전의 로마 공화제에서 왔다. 몽테스키외가 정리한 역사 사실을 보면 평등한 권리를 갖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관할하게 하는 민주 법규는 현군이 발명하고 제정해서 인민에게 하사하는 것이다. 아테네에는 솔론이, 스파르타에는 킬론이 있었다." "루소는 '정부가 인민을 창조한다'고 믿었다. 먼저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민주 법규를 만들고 정부가 민주 법규를 실시한다면, 인민은 이러한 구조 안에서 서서히 민주 시민으로 변해 간다는 것이다. 코르시카의 요청으로 헌장 초안을 만든 루소는 인민이 주체가 되어 제정한 민주 규율을 상상할 수도, 이에 동의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61-2)


"각 주마다 정해진 제헌회의 양식이 없었던 덕에 헌법 인가 회의가 열리는 2~3년간 모든 주가 미국 헌법을 둘러싼 열정적이고 시끌벅적한 토론에 몰두했다." "신문과 잡지에 각양각색의 정치 의견이나 헌법에 대한 주장이 게재되었다. 다수의 사람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정치 의견을 발언했다. 이 시기의 집단 정치사상의 대약진을 입증하는 문헌이 하나 남아 있다. 85편의 글로 이루어진 『연방주의자 논고』The Federalist Papers다. 『연방주의자 논고』는 세 명의 저자 매디슨, 해밀턴, 존 제이의 손에서 탄생했다. 이 3인은 'Publius'라는 하나의 필명으로 글을 썼다. 'Publius'는 '평민'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그들이 '평민'을 대표해서 발언한다는 의미다. 85편의 글에 담긴 공통 의도는 각 주의 사람들이 헌법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국가, 새로운 연방을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세 저자는 연방 제도의 가장 열성적인 옹호자였고, 나아가 연방 제도를 가장 명석하고 깊이 있게 설명할 수 있는 해석자였다."(74-5)


"루소는 저작에서 헌법이란 '주권을 규범화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했다. 루소의 정치 이론은 주권재민의 실현이 인민의 입법권에 달려 있다고 본다. 과거에는 군주 혹은 소수자의 의견에 따라 어떤 정부를 세울지, 정부와 인민 사이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결정됐다. 새로운 주권재민의 국가에서는 정부 조직 그리고 정부와 인민의 관계가 군주나 소수자의 주관적인 의사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의 입장에서 세워진 근본법의 규제를 받는다. 이때 비로소 인민의 주권이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신분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오직 이 규범에 따라 권리를 지니고, 또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이 주권재민을 검증하는 가장 주요한 척도다. 18세기, 루소의 사상과 학설은 북미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루소식 헌법은 북미 식민지에서 제정한 자치 조항에 가장 먼저 채택되었고, 이 조항이 면면히 이어져 독립 후 각 주의 주 헌법으로 바뀌었다."(82-3)


"연방주의자는 연맹과 결합이 좋은 것이라 여기며 더욱 완전한 연맹을 추구했다. 반면 주권주의자는 다시 얻기 힘들 독립과 자유를 몹시 아꼈다. 이들은 연맹과 결합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 채 안전과 번영을 염두에 둔 최소한의 연합을 원했다. 상반된 가치관이었다. 어느 한쪽도 상대를 설득하거나 압도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탄생한 헌법이 중앙 집권과 지방 분권 사이에서 주저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예증이 있다. 연방은 자신의 헌법을 보유하게 되었고 우리 인민들로부터 주권主權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 헌법이 각 주의 주 헌법을 파기할 수는 없었다. 그저 제6조에 주 헌법이 연방 헌법에 저축될 경우, 해당 부분은 무효가 된다고 규정할 뿐이었다. 루소와 상통하는 정치 이론에서 바라보면, 미국은 위계가 나뉜 두 개의 주권, 즉 이중 주권을 지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와 연방이 모두 주권을 지니고, 주권의 형식을 규범화하는 헌법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88-9)


3 가장 좋은 시스템, 삼권분립


"지금 우리는 삼권분립을 민주의 주요 요건으로 여기며, 삼권분립을 보면 곧 민주를 떠올린다. 그러나 몽테스키외와 루소의 시대로 되돌아가 보면, 그들은 민주가 가장 좋은 정치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 제도를 논의할 때면 그들은 각기 다른 제도의 유익과 폐단, 득과 실을 분석했고, 나아가 어떤 사회에 어떤 제도가 적합한지 내놓았다. 귀족제가 군주제보다 좋을 것이 없었고, 군주제라고 민주제보다 못하다고 볼 수 없었다. 관건은 귀족제, 군주제, 민주제 가운데서 가장 좋은 한 가지를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현실 조건을 헤아려 저마다의 국가와 사회에 맞는 제도를 들이는 것이다." "루소가 생각한 가장 좋은 조합에는 여러 제도의 요소가 포함되었다 이는 민주제를 입법권의 원칙으로, 군주제를 행정권의 원칙으로, 귀족제를 사법권의 원칙으로 한다. 이러한 생각은 필라델피아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이 두루 잘 알고 있는, 심지어는 신봉하는 바였다."(96-8)


"상원은 주를 기초로 조직된다. 이는 이해하기도 실행하기도 쉽다. 하지만 하원은? 존 애덤스가 내놓은 대표의 조건 한 가지가 훗날 연방 하원의 구성과 운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인민이 뽑은 대표로 구성되는 연방 하원은 미국의 축소판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방 하원의 구성 요소는 가능한 한 미국을 구성하는 사람을 그대로 본떠야 했다." "이는 헌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형성된 중요한 민주 이념이다. 민주제와 귀족제는 이런 점에서 긴장 관계, 심지어 대립 관계에 놓여 있다. 하원은 인민을 대표하여 가장 핵심적인 주권인 입법권을 행사한다. 따라서 하원을 구성하는 의원은 반드시 인민 총체에 가장 근접한 이여야 한다. 하원은 '엄선'이 아닌 '표본' 개념이어야 한다. 100만 명 가운데 가장 뛰어난 100명을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1만 명에 1명씩 무작위로 뽑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민을 대표해 주권을 행사하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소수 엘리트여서는 안 된다."(116-8)


"연방 상원은 전체 의원을 3개의 조로 나누어 2년마다 3분의 1을 새로 뽑는다. 대표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자신의 입장과 자신이 대변해야 하는 주의 입장을 혼동하기 쉽기 때문에 분할 개선 방법을 마련한 것이다." "6년이라는 임기가 긴 만큼 상원은 대표일 수 없었고 대표여서도 안 되었다. 우리가 가진 개념으로는 모든 의회 의원이 '만의의 대표'이지만, 미국 헌법에서 구상된 바는 달랐다. 상원의 역할은 자문이나 고문에 가까웠다. 그들은 각 주에서 파견된 이로, 한편으로는 연방 정부가 정무를 잘 처리하도록 힘을 보탰고, 한편으로는 하원이 적절한 법률을 제정하도록 도왔다. 하원은 미국 사회를 대표하는 이들이므로 사회의 순박함과 우둔을 지니기 마련이며, 사회의 선善을 지니듯 사회의 악惡 역시 품기 마련이었다. 상원은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서 하원의 우둔과 악이 국가의 이익을 훼손하거나, 특히 상원 자신이 속한 각 주의 이익을 훼손하는 것을 방지했다."(120-1)


4 권리장전이 있기에, 헌법은 지지할 만한 것


"필라델피아 회의에서는 새로운 연방에 군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를 실현하고 헌법에 써 넣으려면 먼저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연방 군대가 각 주를 억압하는 데에 쓰이지 않으리라는 점을 어떻게 보증할 것인가? 육군과 해군을 구별해서 해군에는 장기적으로 경비를 조달하고, 육군의 경비 조달 유효기간을 최장 2년으로 제한한 것이 이를 보장하는 조치 중 하나이다. 각 주를 통제하는 데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 연방 육군은 반드시 엄격한 관리를 받아야 했다. 또 한 가지 조치는 각 주의 민병 무력을 유지한 것이다." "연방과 각 주 사이의 무력 균형을 맞추려는 뜻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크나큰 영향력을 지니는 헌법 제2조 수정 조항에 아직 남아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통제가 잘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요하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소지하는 인민의 권리가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 조항이 오늘날 미국을 전 세계에서 총기를 소지한 개인이 가장 많은 나라로 만들었다."(140-2)


"미국 헌법 수정 조항 제1조부터 제10조까지를 말하는 권리장전에는 특수한 역사 배경과 의의가 있다. 1789년, 미합중국의 제1대 의회가 가동되고 처음 한 일이 권리장전에 대해 토론하고, 3분의 2라는 압도적인 표수로 이를 통과시킨 것이었다. 10개의 수정 조항이 하나로 묶여 권리장전이라고 불리게 된 까닭은 여기에 인민의 권리 보장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 수정 조항은 의회의 권력을 제한하고 축소한다." "주 헌법은 '권리장전'으로 첫머리를 시작했다. 인민이 어떤 절대적 불가침의 권리를 지니는지를 또렷하게 적고, 뒤이어 정부 조직에 관한 나머지 규정이 나온다. 반면 미국 헌법에는 짤막한 서언이 한 단락 있을 뿐, '권리장전'이 없었다. 이는 무척이나 허전하게 보였고, 사람들은 도무지 안심할 수 없었다." "모두에게 새로운 제헌 의회를 열 필요가 없음을 납득시키는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제1대 의회에서 가능한 한 빨리 권리장전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146-50)


"의회 입법에 대한 또 하나의 명확한 제한은 소급 적용법과 사권 박탈법 통과 금지 조항으로, 이 역시 영국에서 이미 형성된 기본 법률 관념을 글로 나타낸 것이다. 영국의 법률에는 두 가지 기본 규범이 있다. 첫 번째는 비밀 입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법률은 사람들이 언제든 찾아볼 수 있도록 공개된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두 번째는 지나간 일에 소급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오늘 통과된 법률은 오늘 이후부터 발효될 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오늘 이전에 있었던 행위를 규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의회가 법적으로 성립되는 근거가 인민 주권에 있기 때문에 의회의 주인은 이치상 인민이다. 따라서 의회는 인민 주권을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없다. 인민의 정치 권리를 박탈하는 사권 박탈법은 의회가 인민 주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으므로, 이 수단을 의회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 특별히 제거한 것이다."(155-6)


"미국 헌법에는 연방이 성립되면 주와 주 사이의 무역 및 재무 관련 충돌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기약이 담겨 있다. 주와 주 사이의 수출입 세금은 의회에서 제정하고, 주와 주 사이의 재무 거래에는 연방이 주조한 화폐만 사용할 수 있다. 각 주의 의회도 다른 주에 대한 계약 의무 이행을 더는 일방적으로 거부하지 못한다. 동시에 연방의 성립으로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는 비로소 어떻게 미국과 경제 무역 교류를 터 나갈지 알게 될 것이며, 각 주의 불합리한 관세 규정으로 미국에 수출입 제한 보복을 가하는 일도 없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비교적 견실한 조직인 연방을 믿고, 기꺼이 건국 초기의 미국이 필요로 하는 방대한 자금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미국 헌법의 이런 기약은 연방의 성립에 동의하고 연방에 합류했을 때 어떤 실질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를 각 주에 분명하게 알려 주었고, 훗날 각 주의 헌법 심의 회의에 큰 영향을 발휘했다."(159-60)


5 헌법이 공직자의 종교다


"미국 헌법 제2조 제1절 첫머리의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행정권은 미합중국 대통령에 속한다.〉" "당시 북미는 아직 독립전쟁 후의 불안정한 상태였다. 필라델피아 회의의 대표들은 13개 주가 혼란을 면하고 안정을 찾으려면 수시로 작동 가능한 정부가 필요하며, 13개 주 안팎의 정세 변화에 언제든 대응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기존의 연합은 제대로 된 해결 방안이 되지 못했다. 연합에는 지속적이고 고정된 행정 역량이 없었다. 북미의 정세는 정해진 시간에만 회의를 여는 정치 시스템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 헌법은 대통령에게 큰 권력을 부여한다. 대통령이 군사, 행정, 검찰에 대한 권한을 가지며, 의회가 휴회하는 동안 현존 법률을 위배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의회에는 회기가 있지만 대통령은 언제나 재위 중이라는 사실을 고려해, 헌법이 대통령에게 '임시 입법권'을 부여한 것이다."(163-5)


"13개 주의 식민모국이었던 영국은 국왕이 취임할 때 반드시 〈의회가 동의한 법령에 의거해〉 정치를 시행할 것을 선서하고 다짐한다. 이에 반해 미국 헌법에서 정한 대통령 선서문은 대통령에게 '의회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미국 대통령 선서문에는 〈최선을 다하여 합중국 헌법을 보전하고 보호하고 수호할 것을 엄숙히 선서(또는 확약)한다〉라고 되어 있다. 대통령 권력의 궁극적 원천은 하느님도 아니고 의회도 아니며 인민 주권을 대표하는 헌법이다. 물론 대통령은 의회에서 제정한 법률을 위배할 수 없다. 대통령의 권력은 어디까지나 의회가 제정한 법률을 집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째, 대통령은 의회가 휴회할 때 '임시 입법권'을 가진다. 둘째, 의회가 내미는 법률을 대통령이 무조건 받아들이고 절대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은 부결권을 가지고 있으며, 독립적으로 헌법에 의거해 판단했을 때 위법인 법률은 집행을 거부할 수 있다."(166)


"1787년은 모두에게 〈연례 선거가 끝나는 곳에서 폭정이 시작된다〉라는 구호에 대한 기억이 생생할 때였다. 그런 시점에서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삼자는 주장을 제기하는 일은 고도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이는 연방 대통령에게 군주처럼 폭정을 할 권력을 주겠다고 공공연하게 표명하는 것이 아닌가? 각 주가 헌법 초안을 심의할 때,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한다는 이 대목이 반대자에게 가장 강하고 설득력 있는 언질을 제공해 주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필라델피아 회의 대표들이 연방 행정 수장을 'President'라고 칭한 전략의 효과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Governor'가 아닌 상대적으로 권력이 작고 지위가 낮은 'President'를 선택함으로써 각 주 인민의 경계와 적의를 누그러뜨렸다. 또한 'President'라는 칭호는 사람들에게 당시 미국 전역에서 가장 저명한 'President'였던 사람을 떠올리게 했다. 바로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의장을 맡은 조지 워싱턴이다."(174-5)


"우리는 종종 헌법이 인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제하는 문건이라고 오인하는데, 그렇지 않다. 적어도 미국 헌법의 정신과 절차에 한해서는 단적으로 말할 수 있다." "미국 헌법은 인민이 제정한 것이다. 루소의 이론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저마다 본디부터 침범하거나 박탈할 수 없는 '주권'을 지닌다. 그러나 개인이 개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공적인 일을 해결해 줄 정부를 세우기 위해 인민이 결집하여 일부 권리를 정부에 양도하기로 동의한다. 헌법은 인민이 주권을 양도해 정부를 조직하는 일종의 계약이다. 계약 발의의 주체는 인민이다. 중요한 점은 본래 인민에게 속하던 권리를 정부에 부여해, 정부가 행사하는 공권력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건의 목적은 정부가 본래 그들의 것이 아니었던, 인민의 동의하에 양도된 권리를 오용 및 남용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요구하는 것으로, 일종의 차용증과 같다. 인민의 의무는 헌법이 간여할 바가 아니다."(193-6)


6 대통령제를 시행하려면 준법 사회가 필요하다


"'executive Power'와 번역어인 '행정권'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예컨대 오늘날의 기업 조직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직위 중에 'CEO'Chief Executive Officer가 있다. 'CEO'는 경영을 '집행'하는 사람이지 '행정'을 맡은 사람이 아니다. 즉 '행정권'보다는 '집행권'이 미국 헌법에서 말하는 'executive Power'에 더 가깝다. 또한 회사의 소유자는 이사회이며 'CEO'는 경영 및 관리를 책임진다. 그렇다면 'CEO'는 누구의 뜻을 집행하는가? 이와 같은 조직의 논리대로라면 당연히 이사회의 뜻을 집행한다. 마찬가지로 대통령은 입법권이 부여하는 임무를 집행한다. 대통령 손에 있는 권력은 '집행권'이다. 미국 헌법 제1조에서는 먼저 입법권에 대해 말하고 그다음에 행정권을 말한다. 입법권을 모두 규범화해야 행정권을 안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입법권이 인민 주권을 구현하고 인민의 뜻을 대표한다면, 행정권 혹은 집행권은 인민 주권의 뜻을 집행하는 데에 쓰인다."(211)


"〈다만 상원 의원이나 하원 의원 및 합중국 정부에서 위임직 혹은 유급직을 맡고 있는 자는 선거인으로 지정될 수 없다.〉 헌법에는 대통령의 임기 제한이 있지만 연임 횟수에 대한 제한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종종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는 후보 가운데 연임을 위해 출마한 현임 대통령이 있을 수 있다. 상원 의원과 하원 의원은 당연히 현임 대통령을 잘 알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현임 대통령이 지나치게 우세를 점하게 된다. 선거인단과의 인간적인 관계에 있어 다른 도전자는 애초에 경쟁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만일 현임 대통령이 상원 의원과 하원 의원이 장차 그의 연임 여부를 결정할 선거인단임을 안다면, 이는 정치를 시행하는 데에 반드시 왜곡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미국 헌법이 제정되던 당시에는 현실 여건상 '간접 선거'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으나, 대통령 선거가 소수 사람의 손안에 장악되거나 이익 교환이 결정의 고려 요소가 되는 것을 저지한다는 내용이 조문에 분명하게 드러난다."(213-4)


"선거인단 제도에 상식적으로 엉망으로 보이는 점이 많다고 할지라도 이 제도는 헌법적 근거를 가진다." "우선, 선거인단 제도는 간접 선거가 아니다. 갖가지 규정들이 선거인단으로 하여금 각 주의 유권자 투표 결과에 맞게 표를 행사하도록 강제하다시피 한다." "선거인단 제도는 형태를 달리한 직접 선거다. 직접 선거의 '형태를 달리'한 것은 주권州權을 위해서였다. 단순한 직접 선거를 채택하면, 미국 연방 대통령은 모든 미국인이 선출한 대통령이 된다. 그는 주의 구분을 넘어서서 인민에게 직접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각 주의 입장을 고려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입법권에는 명백하게 각 주를 대표하는 상원이 있다. 대통령이 각 주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유권자가 어느 주에 속하든 상관없이 직접 선거의 득표수에만 관심을 기울여도 된다면, 상원도 폐지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미국은 더 이상 연방이라고 할 수 없다."(217-8)


"이어서 미국 헌법은 미국 대통령이 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하는 조건을 규정한다. 〈출생에 의한 합중국 시민이거나 이 헌법이 시행될 때 이미 합중국 시민인 자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자격을 가진다. 연령이 만 35세가 되지 않은 자, 합중국 내에 거주한 지 만 14년이 되지 않은 자는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없다.〉" "이 또한 미국 헌법의 파격적인 진보 정신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에는 일정한 재산이나 토지가 없으면 주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능력 있는 가난뱅이는 자신이 속한 주에서 기본적인 투표권조차 갖지 못하지만, 합중국의 대통령은 될 수 있다. 합중국의 모든 행정권, 즉 집행권을 주관하는 이는 집에 재산이 많고 배경이 든든한 세도가여야 할 필요가 없다. 미국에서 태어났고, 만 35세가 되었다면 대통령이 될 자격을 갖춘 것이다. 다른 조건은 필요하지 않다." "이는 정치 분야에서 분발하고자 하는 후생들의 열정을 북돋았고, 그 영향으로 머지않아 링컨 같은 '가난한 대통령'이 탄생했다."(226-31)


"미국 헌법 제2조 제1절 6항의 내용이다. 〈대통령이 면직되거나, 사망 혹은 사임하거나, 그 권한과 직무를 수행할 능력을 상실한 경우, 대통령의 직권은 부통령이 수행한다. 의회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모두 면직되거나, 사망 혹은 사임하거나, 직무 수행 능력을 상실한 경우 어떤 사람이 대통령 직무를 대항할지 법률로 규정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그 사람은 대통령의 능력이 회복되거나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다.〉" "대통령 신분은 선거에서 당선되기만 하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신분은 고정불변의 자격이 아니라 대통령의 능력과 연방, 헌법, 인민에 대한 복무에 따르는 것이다. 대통령제는 군주제와 확연하게 다르다. 군주가 즉위하면 신분은 그와 하나가 된다. 그가 곧 국왕인 것이다. 대통령은 즉위한 후에도 권력과 직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능력을 갖췄다는 것을 거듭 증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민과 의회는 그에게서 대통령직을 박탈할 수 있다."(237-8)


7 입법과 행정, 두 권력의 긴장 관계


"미국 헌법 제2조 제2절이다. 〈대통령은 상원의 권고와 동의를 얻어 조약을 체결할 권한을 가진다. 다만 출석한 상원 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미국 대통령은 외교 문제를 처리할 때 주로 상원, 즉 각 주의 대표들에게 보고한다.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려면 대통령은 먼저 상원에 의견을 자문해야 하며, 조약을 체결한 후에는 조약 내용을 상원으로 보내 찬성을 얻어야 한다. 이 내용은 연합규약에서 계승한 것이다. 연합이 결성되기 전에는 물론 연합이 결성된 후에도 각 주는 독립과 자주의 원칙에 기반해 다른 국가와 조약을 체결했다. 연합규약은 각 주의 외교 활동을 통합하고자 했으나 각 주의 독립과 자주를 우선시해야 했다. 따라서 연합이 대외 조약을 체결할 때는 13개 주 가운데 반드시 9개 주의 찬성을 얻도록 규정했다. 한 주 한 주에 부결권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3개 주 가운데 9개 주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는 규정이 '상원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라는 비율의 근거다."(263-4)


"임기가 있는 직위는 의회의 동의를 얻으면 주어진 임기 동안 직위를 보장 받는다. 대통령이 지명했지만 의회에서 동의한 이상 규정된 임기 내에는 대통령이 그를 면직하거나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지명할 수 없다. 이렇듯 임기 제도가 있는 기관을 '독립 기관'이라고 부른다. 대통령 행정권의 주관적인 뜻 바깥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다." "연방준비제도FED나 연방통신위원회FCC 같은 독립 기관들은 인사에 대한 대통령 행정권의 직접적인 간여로부터 '독립'해 있다. 대통령의 정치적인 헤아림에서 상대적으로 독립해 있는 만큼 자신의 전문분야에 맞게 직권을 행사할 수 있다." "소수 독립기관의 수장을 제외하면 나머지 행정 부문의 수장은 임기가 없다. 이들에 대해서는 의회의 동의권이 제한된다. 의회는 최소한의 기준을 세워 임기 없는 수장이 대통령의 도우미 자격을 갖추었는지 심사할 수 있을 뿐이다. 대통령은 의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 사람도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바꿀 수 있다."(270-1)


"미국 헌법은 미국 헌법을 참고하고 모방하고 약간의 수정을 했다는 수많은 다른 국가의 헌법보다 훨씬 완전하고 뛰어나다. 미국 헌법에서는 삼권에 선후 순서가 있다고 명시한다. 입법권은 가장 앞에 놓이는 1순위 권력이다. 행정권은 입법권의 뒤에 놓인다. 어떻게 행정을 펼치고, 어떻게 행정 기구를 조직할지를 입법권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입법권에서 법률을 제정해야 행정권에서 이를 집행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입법권은 행정권 앞에 있고 행정권 위에 있다." "행정권과 입법권의 관계는 미국 헌법의 구조에서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입법권은 놀이의 규칙을 정한다. 행정권은 놀이의 규칙에서 벗어나 농간을 부릴 수 없다. 하지만 이 놀이 규칙 안에서라면, 행정권은 재량껏 집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입법권은 행정 처리에 간여할 수 없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면, 놀이 규칙을 검토하고 개정한다."(275-6)


"누구든지 위법 행위를 저질렀다면 사법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 대통령, 부통령 및 모든 공직자 역시 그러하다. 예외는 없으며, 신분과도 무관하다. 하지만 헌법은 공직자에게 인민으로서 지켜야 할 법률 책임 외에 한 가지 책임을 더 얹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탄핵'이 그 정치적 책임을 심판하는 제도다. 정치적 책임을 확인해야 하는 안건이 발생했을 때 미국 의회는 '탄핵 법정'으로 변한다. 이곳에서 대통령, 부통령 혹은 어떤 공직자가 정치적으로 명백히 부당한 행위를 했는지 여부를 결정한다. 만일 부당 행위가 인정되면, 이 사람은 즉시 사퇴함으로써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의회가 탄핵 법정으로 변하면, 하원은 임시 검찰관이 되고 상원은 임시 배심원이 된다. 탄핵의 대상이 대통령일 경우에는 정식 상원 원장, 즉 부통령은 재판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만약 대통령이 탄핵으로 사퇴하게 되면 부통령은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287-8)


8 헌법 해석으로 사법권이 부상하다


"삼권 분립에서 사법권은 제3위로, 입법권과 행정권 다음이다. 이는 연방 정부의 성립 순서에 따라 정해졌다. 삼권 이전에 인민 주권이 있다. 미국 헌법의 서언으로 대표되는 인민 주권이 헌법을 제정하고 통과시켜 헌법이 성립하게 되면, 먼저 의회를 설립해야 한다. 제1대 의회가 열려야 제2조 제1절 규정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고, 그제야 행정권을 의탁할 곳이 생긴다. 또한 의회가 조직법을 제정해야 행정 부문이 조직법에 의해 형성될 수 있다. 의회가 각종 법률을 세우고, 행정권이 맡은 바대로 법률 규범을 집행하여 시스템이 운용되기 시작하면 그제야 법률의 시비와 가부를 관할하는 사법권의 능력을 펼칠 터전이 마련된다. 이 밖에도 법원의 조직 역시 의회에서 법적 근거를 마련해 주어야 운용이 가능해지고, 법관은 대통령의 지명과 상원의 심사 및 동의를 거쳐서 부임한다. 입법권과 행정권이 정상적으로 운용되지 않으면 실질적으로 사법을 관리할 법관도 없다."(297-8)


"미국 헌법에서 사법권은 다른 두 권력에 비해 확연히 지위가 낮다. 대통령은 행정권에 속하는 관료를 지명할 수 있으며, 의회가 이에 심사권 및 동의권을 행사한다. 사법 기관에는 대통령처럼 사법권을 대표할 수 있는 최고 직위가 없다. 사법 체계의 인사를 지명하는 권한은 사법권 내에 포함되지 않고 행정권을 주관하는 대통령에게 돌아간다. 이런 점에서 사법권은 행정권만 못하다. 하지만 훗날 설립된 최고 법원은 한 가지 특별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바로 '헌법 해석'이다. 연방 최고 법원은 사실상 '헌법 재판소'로 헌법의 뜻에 대한 질문을 품은 상소 안건만 수리한다. 'supreme'이라는 단어는 대문자로 쓰인 뒤부터 특정한 뜻을 갖게 되었다. 모든 법률의 근원인 헌법을 처리하기 때문에 '최고'인 것이다." "(서로 상이한 헌법 해석에 대해 최종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최고 권력을 갖게 되면서, 최고 법원은 미국 정치에서 헌법이 부여한 적 없는 강대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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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은 어떻게 정통에 맞서왔는가 - 주술제의적 정통성 비판
후지타 쇼조 지음, 윤인로 옮김 / 삼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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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가장 추상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철학'상의 논쟁이, 가장 현세적이고 매우 '특수주의'적인 정치적 항쟁과 상호 이행하여 서로의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된다는, 이 패러독시컬한 동적인 상태는, 생각해보면 반드시 부조리한 현상인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일정한 관련이 존재하고 있다. 첫째, '사상'은 스스로를 올바른 사상이라고 믿으면 믿을수록 그것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도'하려는 '사도使徙'를 낳는다. 그 '사도'의 '전도'는 당연히 기존에 있어왔던 관습이나 다른 종류의 '사회의 신념체계' 사이에 얼마간의 모순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하여 '사상'은 사회적 레벨의 존재가 되고 동시에 사회적 다툼의 원인이 된다." "둘째, 정치적 통합자는 물리적인 지배만으로는 오래도록 정치적 통합을 재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일정한 사회적 신념체계에 의거하고 그것에 의해 '정당한 정치지배'로 '승인'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베버가 말하는 '지배의 정당성 근거'가 모든 정치적 지배·지도·통합에서 필요해지는 것이다."(29)


제1장 이단의 유형들


# 이단이 출현하는 사회의 문화적 유형

1. 주술로부터의 해방(Entzauberung) : 초월적 종교에서 주술적 요소를 걷어내고 합리적인 제도를 형성하려는 사회(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논쟁)

2. 주술 (그 자체의) 합리화 : 합리화된 주술 제의로서 사회 통합을 수행하려는 자연적 사회(일본의 천황제)

3. (신이 아닌 이 세상) 질서의 합리주의 : 정치사회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는 사회(중국의 유교)


"아리우스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하여, '아들'은 아들인 이상 '태어난 것'이고 '태어난 것'인 한에서 그 존재에는 '시작점'이 있고, 그 존재에 '시작'이 있는 것은 논리적 필연으로 '비非존재'였던 때가 있었음을 뜻하며 따라서 그것은 '영원'한 신과 같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논리가 한번 신도들의 '심리적' 레벨에서 작용하기 시작할 때면 '신의 아들' 예수를 다만 역사적 존재로 함몰시켜버리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 경우에 예수는 고작 거대한 정신사적 변혁을 이룩하는 역사적 지도자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만다. '대大정치가'이고 교회 전체의 통일성에 마음을 쓰고 있던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그런 논리에 반대해 '아버지와 아들'의 일체성을 확보하려고 분투했다. 그 결과 겨우 한 글자 차이로 '삼위일체'의 교의가 확립되었다고 말해진다. 'homoousios(동일성)'와 'homoiousios(유사성)의 차이가 그 문제의 한 글자를 확보하려고 분투했다."(38-9)


"왜 그러한 '고안'으로 이 정도의 아슬아슬한 칼부림을 하기까지 '삼위일체설'은 보호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혹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통일성이 그 3자 사이의 어딘가에서 한치라도 깨지게 된다면, (1) 교회는 아버지인 신과의 연속성을 잃고 이 세상 속 인간 예수를 교조로 하는 오직 세속적인 집단이 되어버리거나, (2) 신도 중 누군가가 함부로 '신' 혹은 '신과 예수'에 자기를 동일화하는 것을 허가하게 되거나, (3) 교회에 깃든 '영靈'이 '성령'이라는 보증을 잃게 됨으로써 각 지역을 배회하는 숱한 주술적 정령들과의 구별 원리를 구할 수 없게 되어 결국 토착적이고 특수적인 각종의 주술제의적 신앙이 교회로 흘러들어가 '악령'이 거꾸로 교회를 지배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한 세 가지 예의 귀결은 교회의 해체와 다를 바 없다. 또한 교회가 혹여 해체되지는 않더라도 현세로부터의 초월이라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이 그리스도교회 자체로부터 사라지게 될 것이다."(41-3)


"'수육성受肉性'을 상실한 교회가 '이 세상'의 권력정치적 상황에서 자기를 유지하려면 그 스스로도 또한 군사력에 기대는 정치집단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일본 고대의 진호국가불교鎭護國家佛敎에서 '절'은 그렇게 해서 '승병'을 가졌고 일대 권력집단이 되어버렸다." "그보다 '삼위일체'의 해체가 훨씬 성가신 것은 교회의 내부 제도 그 자체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육受肉'에 의해서만 현세에 존재하는 것인 까닭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육肉' 그 자체로 될 위험을 내부에 지니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칫 '수육' 속의 '육성肉性'을 거부하려는 순수 '정신주의'를 낳음으로써 현세를 조직화하는 제도임을 그만두려는 경향을 갖는 것이다. 말하자면 '육화'의 위험[신성을 완전히 잃을 위험]과 '육에 있어 육에 작용하는 것을 그만둘' 위험[세속성을 완전히 거부할 위험]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사회 속의 정통·이단 문제란 '수육성'이 가진 내적 갈등의 전개와 다름없다."(43-4)


# 수육성受肉性 :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신, 인간의 몸을 받아 입은 신, 성육신의 신이 세속으로 내려옴을 뜻한다.


"그리하여 종교적 공의회의 개최는 말하자면 '필연'이었다. 아타나시우스·아리우스 논쟁은 정신적 체계의 내적위기를 극복하여 그 정신체계를 동시에 적극적(실정적實定的)인 '이 세상' 제도로 확립하기 위해 요구된 논쟁이었다. '승리'를 얻은 사상체계가 '승리자'의 거스를 수 없는 인간적 타락으로부터 본래의 자기 면모를 지켜나갈 수 있도록 자기에게 부과한 규율의 체계를 찾아내려 했던 논쟁이 4세기의 교의 논쟁이었던 것이다. '도그마'란 본래 그러한 목적을 위해 형성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삼위일체'란 단지 광신적인 망상가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비합리적' 교설이 아니라 '주술제의로부터의 해방'을 감행하고 '물신숭배'를 타파했던 초월적 보편종교가 자기를 포지티브한[실정적인] 형태로 사회적으로 정착시키고('수육受肉') 복고적 반동과 인간의 자연적 타락으로부터 자신의 정신적 존재를 지켜나가기 위해 불가결했던 교의였다. '삼위일체'가 교회 제도에서 사활의 문제였던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48-9)


제2장 일본 사회에서의 이단의 '원형'


"일본 사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사회'와 같이 제1형에 속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신'을 향한 신앙을 '올바로' 지키기 위한 교의적 규범에 입각하여 사회가 구성된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질서의 합리주의 체제'와 같이 사회질서를 지키기 위해 교의적인 규범을 필요로 했던 것은 일본사회 전체의 규모에서는 도쿠가와 시대뿐이었다. 오히려 혈통 '원리'(?)를 체현하고 있는 천황제의 면면한 존속에서 상징되고 있는 것처럼 일본 사회 전체를 덮어씌우고 있는 의식 형태로는 압도적으로 제2형태의 자연적 사회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확실히 이 사회에도 '신'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고 지금도 '신사神社'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신에 만인·만물이 귀의하는 것으로서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인上代人은 그 신앙하는 신들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신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천황의 신성성神聖性을 드러내기 위해서만 그 근원으로서의 신들을, 따라서 '신대사神代史'를 이야기했던 것이다.〉"(71-2)


"천황의 '신성성'은 개인적 실재로서의 절대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혈통적 '배후에' 신들이 있음으로부터 도출되고 있는 것에지나지 않는다. 곧 천황은 신들의 '후예'인 것에 의해서만 '신성화'되지만 정작 그 신들은 천황의 '신성화'를 위한 배경=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적 '신들'의 상대성과 그 수단성이라는 특징은, 파고들어 추적해보면 결국 신들의 '부정성不定性[한정되지 않음]'과 나아가 '아득한 저쪽으로의 신의 증발[disappear]'이라는 특질에까지 도달한다. 그리고 그 '신'의 존재의 증발 과정이 명확해지면서 거꾸로 주술적 제의의 구체적인 존재성이 점점 더 현실화해가는 것이다. 제祭의 대상은 사라져 없어지고 제를 지내는 일과 그 일을 행하는 구체적 인격만이 분명한 윤곽으로 드러난다. '영靈'이 한정 없는 것이 되어감으로써 영매 행위와 영매자만이 강한 존재성을 띠어간다. 신들과 '신대사'가 천황과 천황 제의의 단순한 배경적 수단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72-3)


"이와 같이 천황제의 주술적 제의 아래서는 상대가 부정不定으로 막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 상대에 대한 관계의 방식을 원리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제의의 존재방식의 '옳고 그름'이 체계적으로 문제시 되는 일이 없다. 이 경우에 '취해야 할 태도'로서 일반성을 가지고 언명할 수 있는 가르침은 단 하나이다. 그것은 '삿된 마음이 아니라 곧은 마음을 가지고 제의·점술에 접하라'는 주관적 심정의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것이라면 상대가 무엇이든 막론하고 타당한 가르침이다. 심정의 곧음만을 가르치는 교설은 객관적인 양식의 옳고 그름에 대한 사색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전자는 태도의 자연스러움만을 요구하고 후자는 무엇보다도 '진리에' 합치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문제 삼는다. 이리하여 천황제의 의식구조에서는 신 곁에 보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예배하는 자의 자연적 심정 곁에 보편적 상태가 요구된다. 전통적 '청명심淸明心'의 교설은 그에 따른 결과이다."(80-1)


"따라서 매우 역설적이지만 정치사회의 통합에서 제의 이상의 규칙 체계가 필요해지자마자, 그것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 세계적 사상의 여러 체계가 아주 간단히 수용된다. '치국평천하'의 가르침인 유교는 물론 불교와 같은 현세 부정적인 세계종교조차 그런 관점에서는 수용이 허락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국체國體[고쿠다이]의 무한포옹성'과 세계적 사상체계들의 '잡거성雜居性'(마루야마 마사오, 『일본의 사상』)이 여기 일본 사회의 특징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수용된 사상체계가 한번 제사공동체로서의 국민적 통일을 때려 부술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자마자 그것은 즉각 '가이쿄外敎[외래적 종교·가르침]', '아다시카미他神[다른 신]'으로 이단시된다." "이리하여 고전적인 천황제의 의식형태 아래서 일어날 수 있는 이단이란 주술제의적 통합체계의 중심을 점하고 있는 '공적 주술제의'의 권위성을 위협하는 것, 곧 구체적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공적 주술제의'의 권위를 폄하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해진다."(82-4)


# 불교, 소라이학(유학), 기리시탄(가톨릭),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모두 위의 조건하에서 이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제3장 근대 일본에서의 이단의 여러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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