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화 하는 일본 - 동아시아 ‘문명의 충돌’ 1천년사
요나하 준 지음, 최종길 옮김 / 페이퍼로드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제1장 끝나버린 역사─송나라와 고대 일본


"중국사회의 틀은 서력 960년에 탄생한 '송' 왕조에서 한 번의 커다란 대전환을 이루었고, 이 대전환 후의 틀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중국사를 어디선가 한 번 구분한다면, 당(중세)과 송(근세) 사이에서 가를 수 있다'고 하는 테제를 최초로 제창한 것이 전전에 활약한 동양사가 나이토 고난의 '송대 이후 근세설'입니다." "그러면 송나라의 어디가 그렇게 획기적이었던 것일까요. 나이토에 따르면 〈귀족제도를 전폐하고 황제 전제 정치를 시작한 것〉, 조금 바꿔서 말하면 〈경제와 사회를 철저하게 자유화하는 대신에 정치 질서는 일극 지배에 의해 유지하는 틀〉을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나라가 '안록산의 난'과 같은 지방 군벌의 반란으로 쇠퇴하고, 이후 5대 10국 같은 국가 분열상태 속에서 멸망한 이후 중국대륙에서는 '지속가능한 집권체제의 설계'를 지향했습니다. 그 결과 찾아낸 답이 송나라에서 시작되는 중국형 '근세(초기 근대)' 혹은 '중화문명'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31-2)


"송나라 시대의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황제만을 예외로 둔 채 신분제나 세습제가 철폐된 결과 이동의 자유·영업의 자유·직업선택의 자유가 널리 세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과거를 통해 관리 즉, 지배자 층으로 상승하는 문호도 개방됩니다. 남성이라면 사실상 거의 누구나 과거 시험을 칠 수 있었기 때문에 (남녀 간의 차별을 별도로 한다면) '자유'와 '기회의 평등'은 이때 이미 거의 달성되었다고도 할 수있습니다." "다만 자유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부여되는 것은 경제활동에 대한 자유뿐으로 정치적인 자유는 (과거를 칠 수 있는 권한을 제외하면) 극히 강하게 제한되었습니다. 귀족을 배제하고 황제가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이상 이에 대한 비판은 금지되었으며, 황제에 반대할 '자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자유경쟁에서 실패했을 때의 보험을 위하여 송나라 중국인들이 개발한 것이 '종족'이라고 불리는 부계 혈통의 네트워크입니다. 아버지의 선조가 동일하다면 누구나 서로 돕는 구조입니다."(35-6)


"남송 시대에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주자학은 개개인의 인생 교훈이나 관혼상제의 절차에 관한 의례규정의 모음집적인 성격이 강했던 『논어』를 비롯해 기존의 유교 경전에서 오컬트 성격의 점보기 취미 같은 것들을 일소해 버렸습니다. 나아가 두 번 다시 당나라 말기와 같이 중화세계를 분열시키지 않을 만큼의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지향하였습니다. 주자학은 체계적인 재독再讀을 통해 '무엇이 인류 전체가 지향해야만 하는 목표인가' '성인은 어떠한 존재이며 왜 이들의 행동이야말로 항상 정당한지'를 분명히 익힐 수 있도록 하나의 정치철학이자 도덕철학으로 기존의 유교를 재편찬한 것입니다. 이 주자학 사상이 과거시험의 공식 매뉴얼이 됨으로써 선발된 관료 및 그들을 선택한 황제는 단순히 자의적인 독재자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의 권력기반에 대한 정통성을 주자학에 둔 이상 황제나 관료도 여기에 어울리는 행동거지를 요구받게 되는 것이지요."(38-9)


"당나라를 모델로 645년의 타이카大化개신을 일으키고 중국을 모방하여 율령 도입을 꾀한 고대 일본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 300년 후에 송나라의 성립에 의해 사회의 전면적인 자유화와 황제로의 권력집중이라는 획기적인 대혁신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왜 이러한 것에서는 배우려고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힌트는 과거라는 시험제도에 있습니다. 과거는 전 국민에게서 지원자를 모집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지적·인적·사회문화적 인프라가 만들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관료의 세습을 폐지하고 지금부터는 시험의 상위합격자를 채용합니다〉라고 하더라도 '공부하지 않은 바보'가 '더 공부하지 않은 바보'를 누르고 상위에 합격할 뿐입니다. 그러면 국가는 파탄이 나고 맙니다. 과거의 전면적인 도입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풍부한 종이와 진보된 인쇄기술을 완비한 것은 당시에 출판 최선진국이었던 송나라 중국뿐이었습니다."(41-2)


제2장 승리하지 못한 '중국화' 세력─원·명·청나라와 중세 일본


"몽골제국이란 전 세계적인 시장통합의 기초를 놓은 세계화의 원점으로서, 송나라 중국에서 만들어진, 현대 '탈냉전' 세계의 축소판과도 같은 사회를 한반도에서 동유럽에까지 확장한 제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구元寇란 이 몽골제국 주도의 자유무역 경제권에 일본도 들어오라는 요구를 '가마쿠라 남자'들이 거부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말 그대로 '하지 않아도 좋았을' 전쟁입니다." "더구나 일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있는 지역입니다. 상대의 요구에 응하기만 했으면 나라가 망하는 일은 애초부터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난, 국난이라고 소란을 떨면서 민중은 말할 것도 없고 천황까지 속여 외국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배외주의를 선동하고, 평화의 여지는 없는 듯이 위장하여 국민을 전쟁으로 몰고간 무능한 군벌 정부가 바로 이전에 다이라 씨 정권을 멸망시켜 글로벌화의 길을 막아버린 가마쿠라 막부입니다."(55-6)


"몽골제국이 쇠퇴한 것은 은이 부족해지면서 화폐에 의존한 결과 경제가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입니다. 지금처럼 누구라도 불환지폐(단지 종잇조각)에 익숙해져 있으면 은이 부족해도 별일이 없지만, 일반인이 은과의 태환兌換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인 경우에 지폐를 은으로 교환할 수 없다는 것은 제국의 정통성을 뒤흔들어버리고 남을 것입니다. 인류가 금 본위제를 폐지(금과 교환할 수 없는 지폐라도 납득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된 것)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이며, 마지막 태환지폐였던 달러와 금의 교환이 정지된 것은 1971년의 닉슨쇼크 때니까 몽골제국은 늦었던 것이 아니라 너무 앞섰기 때문에 멸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몽골인을 북방으로 쫓아내고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은에 의존한 경제정책이야말로 망국의 원흉이라고 판단하여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반 글로벌화' 정책─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갑제里甲制─을 취합니다."(62-3)


# 이갑제 : 부역 의무가 있는 110호戶로 1리里를 편성하고 그중 부유한 10호씩을 10갑甲으로 분할하여, 조세 징수나 관청에서 필요한 잡품, 잡비, 역무를 제공하도록 한 제도. 뒤에 일조편법一條鞭法으로 개정되었다.


"명나라 시대의 중국인은 은만 가지고 가면 뭐라도 팔아주었습니다. 이렇게 서쪽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동쪽으로 일본까지 전 세계의 은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듯이 중국으로 일방적으로 유입되는 1500년대 후반의 현상을 '은의 대행진'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그 후의 세계를 변화시켰다고 하는 것이 현재의 글로벌 히스토리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일본에서 전국시대로 불리는 16세기는 실은 '전 세계적인 전국난세戰國亂世였습니다. 그리고 이 대혼란을 어떻게 수습했는지가 각각의 지역 장래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세계 속의 어떠한 지역이라도 1600년 경에 만들어진 사회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해라〉라고 모든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예외는 북미나 호주와 같은 이민국가 뿐입니다). 즉 일본이라면 에도시대, 중국에서는 명나라를 대신한 청나라, 유럽에서는 종교전쟁을 수습한 이른바 '베스트팔렌 체제', 곧 근대주권국가 체제입니다."(65-6)


제3장 우리들이 좋아하는 에도─전국시대가 만든 도쿠가와 일본(17세기)


"〈중국사를 한 곳에서 구분한다면, 당(중세)과 송(근세) 사이에서 나눈다〉고 논한 나이토 고난은 역시 다이쇼시대에 〈일본사를 한 곳에서 구분한다면 오닌의 난 전후에서 나눈다〉고 말했습니다. 이른바 중국사가 '송대 이후 근세설'이라면 일본사는 '전국시대 이후 근세설'이 됩니다. 저는 나이토의 이 두 가지 근세설이 무로마치시대까지의 일본 중세는 '얼마간의 중국화 정책의 수립을 통해서 일본에서도 송나라와 동일한 중국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었던 시대'로, 전국시대 이후의 일본 근세는 '중국적인 사회와는 180도 정반대인 일본 독자적인 근세사회의 틀이 정착된 시대'로 보자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국시대의 실상을 살펴보면 꿈에 넘치는 천하통일의 비전 같은 건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매년 텐포의 대기근 같은 상태였기 때문에 굶어죽기 직전의 난민들이 피투성이의 약탈 전투를 하고 있었던것입니다."(75-6)


# 오닌의 난 : 1467년부터 1477년까지 계속된 내란으로 막부나 수호다이묘守護大名가 급속히 쇠퇴하고 전국시대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시대 다이묘의 사명이란 실제로는 인접한 곳과의 식량 획득 전투에서 자기 지역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도로 정비와 역전驛傳 제도의 관리를 통해 신속한 정보전달과 물자운송에 노력하여 긴급한 시기에 피난민을 성곽 내로 수용하고 지역 주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점이 만사를 '시장에 맡겨두라'고 하며 민정 기능을 포기한 중국식 근세국가와 다른 커다란 차이점입니다. 이것을 농민의 입장에서 볼까요. 중세까지는 비상시에 자신이 칼을 들고 무사로 변신하여 '자력구제'로 자기 생명을 지켜야 했다면, 근세 이후는 자신의 안전을 '윗분에게 맡기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권력자가 자신의 존재 이유는 질서의 안정에 있다고 자각하고 (중국과 동일하게) 무엇이든 민간의 '자기책임'에 맡겨 버리는 중세사회의 관행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이 시기부터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근세로서의 일본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76-7)


"이네(벼稻)와 이에(집家)의 선순환─곡물 수확량과 필요 노동력의 증가─이야말로 전국시대의 구렁에서 도쿠가와 일본이 기적적인 부활을 이루어낸 이유입니다." "배타적으로 점유할 수 있는 직업이나 토지가 있고, 경작을 세습할 수 있는 것도 인정되었기 때문에, 욕심내지 않고 이것만이라도 우직하게 유지하고 있으면 자손대대로 대충은 먹고 살 수 있는 가직家職이나 가산家産이 귀족이나 무사뿐만 아니라 농민들에게까지 부여되었다는 것이 됩니다. 오늘날의 일본어에서 말하는 '이제 겨우 나도 한 나라 한 성의 주인'이라는 식입니다. 조금 학문적으로 말하면 '중세의 직職의 체계'가 근세의 '역役의 체계'로 계승된 것이지요." "나아가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유통·서비스업 종사자에 대해서도 이 이에와 직역의 관계가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근세중국에서라면 받아들이기 힘든 영업 자유에 대한 제한임과 동시에 국가 규제를 통한 업계 단체나 중소기업의 보호정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86-7)


"그런데 이 '이에/집안이라는 규제'는 지배계급이었던 무사까지 구속시키고 맙니다. 다이묘마다 영지가 기본적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자자손손에 걸쳐 '선조 대대의 윗분'과 '선조 대대의 영민領民'이 지역에서 계속 얼굴을 맞대는 관계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영주(경영자)도 영민(노동자)도 뭐, 서로 같은 땅(회사)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만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일본에서도 중세시대의 반란에는 중국의 민중반란이나 유럽의 농민전쟁과 같은 과격한 무장투쟁의 예가 많지만 에도시대에는 모두 목소리를 죽이고 맙니다. 미즈타니 미츠히로가 마치 '춘투春鬪'와 같다고 평한 미온적인 농민봉기만이 관민의 교섭창구가 되었을 뿐이지요. 요구사항은 다소의 임금인상(연공 감면)뿐으로 정치적 요구는 하지 않습니다. 수상 퇴진과 같은 과격한 요구를 내건 정치파업이 빈발하여 경제가 마비된 전후 유럽이 부러워했던, 이른바 일본적 노사관계의 원점입니다."(88-9)


제4장 이런 근세는 싫어─자멸하는 도쿠가와 일본(18-19세기)


"일본의 '이에'란 것은 부계 혈연에 집착하지 않는 체계로 자식을 낳지 못하면 양자를 들이는 편법도 있기 때문에 인구를 줄이는 데 적합합니다. 원래 대대로 정해진 가산을 상속하여 먹고 사는 세습제 사회에서 자식을 너무 많이 낳으면 집안이 파멸하기 때문에 자발적인 산아제한 관행이 보급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생산수단과 생산력(즉 세습된 토지)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가족이 너무 많이 불어나면 아사할 뿐이므로 에도 중기 이후의 농가에서는 기본적으로 '집안을 이을 사람' 이외의 남자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정말로 무능하지 않다면 장남이 뒤를 잇기 때문에 차남 이하는 신부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 책임이 아니라 이에 제도의 숙명인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더라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차남 이하는 '그럼 처음부터 낳지 마라'고 생각했겠지만 당시는 유아 사망률이 극히 높았기 때문에 몇 명 정도는 낳아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97-8)


"결국 많은 농가의 차남 이하들은 도시로 나가게 되는데, 하야미 아키라에 따르면, 오오가키번 니시조 마을에서 에도시대 최후의 100년 동안 도시로 일하러 나간 남녀 394명(이들 중 계속 일하고 있던 65명을 제외한 329명) 가운데 봉공奉公이 종료된 이후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표기는 '사망'으로 126명입니다." "즉, 18세기 전국 인구의 정체는 농촌지역의 인구증가분을 도시지역의 높은 사망률 및 저출생률이 상쇄시킨 것으로 이것을 하야미씨는 '도시의 개미지옥' 효과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집안'마다 가직을 훌륭히 수행한 노인에게는 스웨덴 이상으로 안락하게 하자. 역으로 젊은 주제에 올바른 직업에 종사하지 않은 놈들에게는 미국 이상으로 엄격하게 하자. 이놈들은 자기책임인 만큼 세금으로 원조해서는 안 된다. 과로사할 때까지 철저하게 저임금으로 혹사시키자─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에도시대부터 지금까지 이것이 일본인이 생각하는 '복지사회'입니다."(99-101)


"근세 일본의 신분제는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먼 옛날에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선택한 신분제'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송나라가 신분제도를 폐지해버린 지점에서 (유럽처럼 완전 시골과는 다른) 동아시아는 신분제를 유지하기에는 그 나름대로의 조치가 필요한 사회가 된 것입니다. 신분이 아래인 자에게도 최소한의 장점이 있는 체제가 아니면 노골적인 형태로 신분제도를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회학 분야에서는 '정치적인 권력자가 경제적으로도 자산가이며 문화적으로도 우월자'인 사회를 '지위의 일관성이 높은 사회'라고 합니다." "이것의 전형적인 형태가 근세의 중국입니다. 과거 합격자는 권력도 부도 위신도 모두 독점합니다." "반면 근세일본은 신분제 사회이면서 실은 '신분이 상위인 자가 모든 것을 독점하고 아래인 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사회'(지위의 일관성이 높은)가 아니라 '신분이 상위인 자가 명예를 가지고 아래인 자는 실리를 챙기는 사회'(지위의 일관성이 낮은)였습니다."(104-5)


"이처럼 '어떤 분야에서는 승자인 사람들이 다른 분야에서는 패자가 되는' 도쿠가와 사회의(지위의 일관성이 낮은) 신분제도의 존재형식을 '혼자서 독점하지 않고, 자기 주제를 아는 삶의 방식을 모두가 인식함으로써 상위자도 하위자도 서로 위로하고 안쓰러워하는 일본적 정서가 자라난, 양보하는 미덕이 넘치는 공생사회'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대개의 에도시대 마니아란 대체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한편으로 동일한 사태를 완전히 반대로 '아무도 자기 충족을 할 수 없으며, 항상 뭔가를 타인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불쾌감을 가지고 우울하게 살아간 질퍽하고 음습한 사회'였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을 취할지는 개인의 취미라고 할까 가치관이기 때문에 제가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분명한 것은 후자처럼 느끼는 사람이 점차로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메이지유신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107-8)


제5장 개국은 했지만─'중국화'하는 메이지 일본


"메이지유신이 '2단계 혁명'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의 핵심은 앞장에서 논한 '지위의 일관성의 낮음'이 가져온 '누구나가 불만인 사회'입니다. 막부의 실세 중 하나이자 후쿠야마 번주였던 아베 마사히로는 페리 내항에 즈음하여 지금은 유력 다이묘의 협조를 받지 않으면 국난을 타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여러 다이묘에게 의견을 타진합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석고로는 유력 다이묘지만 정치적으로는 실권이 없었던 번주들, 예를 들면 미토의 도쿠가와 나리아키나 사츠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 등은 쌓인 불만을 풀어야 한다며 정치에 참견하기 시작합니다(제1단계). 물론 이 시점에서는 막부 자체의 폐지 등은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번주보다 몇 배나 울분이 쌓인, 번주 밑에서 불합리할 정도로 낮은 신분과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던 하급 무사층들이 사츠마와 죠슈 등에서 번정을 탈취하고 보다 급진적인 혁신으로 돌진해버린 것입니다(제2단계)."(122)


"즉, 메이지유신이란 '신체제의 건설'이라기보다 '구체제의 자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구체제인 일본 근세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면 원래 중세 단계까지는 다양한 면에서 진척되고 있던 '중국화'의 싹을 뿌리채 뽑아서 일본이 송나라 이후의 근세중국과 동일한 사회로 변화하는 흐름을 억제하고 있던 '반反중국화 체제'입니다. 그것을 스스로 내부에서 거부해버렸기 때문에 당연히 메이지 초기의 일본사회는 남북조 이후 오랜만에 '중국화' 일변도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면 첫째, 유교도덕(교육칙어)에 의존한 전제왕권(천황)의 출현, 둘째, 과거제도(1894년부터 시작되는 고등문관임용시험)와 경쟁사회의 도입, 셋째, 세습귀족(무사)들의 특권과 봉록(급여)을 없애는 '질록처분'(1876)을 통한 대량감원과 관료제의 군현화(폐번치현), 넷째, 규제완화(신분제 폐지와 토지매매의 공적인 해제 등)를 통한 시장의 자유화 추진을 들 수 있습니다."(124-8)


"일본에게 있어 '근대화'나 '메이지유신'은 즉 '중국화'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왜 중국이나 한국은 중국화에 실패했는데 일본만이 중국화에 성공한 것인가?〉 등의 질문은 글자 그대로 난센스입니다." "언젠가는 실행해야 할 '중국화'의 시대를 1000년 가까이 지연시킨 일본인은 '서양화'를 위해 사회체계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와 역사의 필연인 '중국화'의 시기를 맞출 수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중국(이나 한국)은 그 옛날에 '중국화'를 끝냈기 때문에 19세기가 되어도 왜 지금 '서양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중국인이나 한국인은 일찍이 '중국화'를 달성한만큼 '서양화의 시점을 놓쳐버리는 모양새가 되었다'는 것이, 동양·서양의 문제와는 또 별개로 한·중·일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정말로 평등한 역사인식입니다. '서양화'란 게 내용적으로 대부분 '중국화'와 겹치니까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서양화'를 필요로 하는 필연성이 그만큼 낮았을 겁니다."(129-31)


"고지마 쓰요시는 막말 이후 일본 근대를 지탱한 사람들을 움직인 에토스로서 '양명학'을 꼽습니다. 이때의 양명학은 엄밀히 말해 개별 구체적인 유교의 학파나 사상 내용이라기보다 대략적으로 이야기해서 '동기 승인all right 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 에토스의 문제, 다시 말해 '기분으로서의 양명학'입니다. 동기 승인이란 물론 '결과 승인'의 반대말로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가 아니라 '시작이 좋으면 결말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정서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결과가 아니라 동기 중심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타협하지 않고 어디까지라도 돌파하겠다는 경향이 강하기 마련입니다. 함께 뜻을 세웠다가 도중에 쓰러진 동지와 서로 일체감을 느끼는 심정적 연대도 상당히 강력했기 때문에 이들이 추도시설을 세우면 '그들이 행한 것은 모두 정의, 이에 반대한 놈들은 모두 악'이 되어 버립니다. 바로 이것이 고지마 씨가 말하는 '야스쿠니 사관'입니다."(150-2)


"물론 언제까지나 펑크록 가수(동기 중심의 행동파)에게 정권운영을 맡겨두면 국가가 파탄나 버리기 때문에 점차로 이와쿠라 토모미, 오쿠보 토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합리주의적 마키아벨리주의자가 중심이 되어, 승산이 없는 과격한 정책 주창자들을 정부에서 추방 혹은 숙청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내몰린 이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사이코 다카모리가 순교자로 추앙받고 동정받았던 걸 보면 이러한 순정주의적이고 비타협적인 정치문화의 에토스가 메이지 정부의 외부와 민간 여론에 강력하게 남아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견 독재적인 전제정부보다도 재야의 민주화 세력들이 거의 항상 외교문제에 관해서는 강경파로 '정의가 우리나라 편에 있는 이상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절대로 타협하지 말라'는 형태로 정부의 '유약柔弱외교'를 비판하는 구조가 메이지 시기에 정착한 이후 '저 전쟁'까지 지속됩니다."(152-3)


제6장 우리의 에도는 푸르렀다─'재에도화'하는 쇼와 일본


"19세기 후반부터 세계적인 노동운동의 고양 속에서(실은 대정봉환에 의해 도쿠가와 막부가 종언을 맞이한 1867년은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1권을 간행한 해입니다) 여러 선진국은 그 대응에 고심하여 결국 어떠한 해결책을 취했느냐에 따라서 그 나라의 정치체제가 정해지게 되는데 일본의 경우는 여기서 '재에도시대화'라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가령 마치 각 기업을 '번'에 비유한 것처럼 회사별 조합의 도입이 그 일례인데, 공장위원회의 정비가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전후부터 주로 사무직 노동자층에서 인생 설계life course의 고정화, 회사의 '촌락사회화'가 현저해집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사무직 노동자를 시작으로 점차 육체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종신고용·연공임금 체계가 정비되었습니다." "종신고용·연공임금제란 에도시대 내내 선조 대대의 경작지를 구실로 하여 (외부로 이주하면 상속할 수 없는 형태) 농민 '집안'을 거주지역에 묶어두었던 촌락사회의 근대판입니다."(161-2)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시장에서 국제무역의 비율이 현저히 낮아지고, 각 주권국가의 정부마다 국내시장과 경제정책 전반에 개입하는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점에서 해외무역을 엄격히 규제하고 국내에서도 신분규제로 칭칭 얽어맨 채 집안마다 영업통제를 행했던 에도시대와 유사한 상황이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세계공황의 발생에 동반하여 1930년대에 진행된 블록경제화는 그 극점입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여 '케인스의 세기'라고 불린 20세기 전반기는 정확하게 '에도시대화의 세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에서 다카하시 고레기요 대장성 대신이 취한 적극재정은 (일본에서) 케인스 정책의 선구라고 불리며, 실제로도 일본은 비교적 빨리 세계공황에서 벗어났습니다. 이것은 일본인에게 익숙한 에도시대적인 행동양식이 기대하지도 않게 세계의 흐름과 우연히 일치했기 때문에 발생한 요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166-9)


"즉, 이런 것입니다. '중국화'한 자유경쟁과 자기책임의 메이지 사회에서 힘들어진 일본인이 '지금 생각해보면 에도시대는 나쁘지 않았어. 에도시대 그리워. 에도시대 너무 좋아. 조금 부자유스러워도 좋으니 안정된 저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라고 징징대자마자 세계질서가 완전히 에도시대와 같은 상태로 되어 버렸기 때문에, 메이지 이후에 달성된 '진보'까지 포함하여 질질 에도시대로 되돌아가 버린 것이 마침내 '저 전쟁'에 도달한 '어두운 쇼와'의 실상입니다. 예를 들면, 의회정치란 일본에서는 에도시대의 전통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재에도시대화'하면 당연히 그 기능은 대폭적으로 저하됩니다(동일하게 에도시대적으로 변한 세계 각국에서도 의회정치의 전통이 약한 독일, 이탈리아, 소련=러시아 등은 좌우 어느 쪽이든 전체주의의 일당 지배체제로 바뀌었으며, 역으로 의회주의를 자국 전통의 중심에 둔 영미 양국은 어떻게든 정치적 자유주의를 유지했습니다)."(170)


"경제학자 노구치 유키오는 쇼와 일본의 총력전체제 하에서 1940년 전후에 정착한 국가주도의 재정운영과 기업통치의 존재형태를 '40년 체제'로 이름붙이고 그 특징은 집단마다 '담장으로 나누어진 사회주의'에 있었다고 합니다. 재향군인들이 중심이 되어 농촌지역을 통괄하고, 도시지역의 노동자도 회사마다 공장마다의 산업보국회에 묶여 분할되고, 각각의 내부에서 운명공동체 의식을 강화하여 생산에 박차를 가하는 체제! 우리는 이것을 묘사하는 데 더 편리한 용어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에도시대에서 유래한 '봉건제'와 '근면혁명'입니다. 노구치 논의의 요점은 이 40년 체제는 전쟁동원에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후 부흥에서도 이른바 '호송선단 방식'(회사가 망하지 않게 국가가 돌봐주는 방식)이나 '일본적 경영'으로 계승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전후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회주의 국가'로 불린 이유도 역시 에도시대에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겠죠."(175-6)


제7장 근세의 충돌─중국에 패한 제국 일본


"긴 쇄국 동안에도 전국시대 이래의 행동양식을 계속해서 이어오고 있던 일본인이 '개국'을 맞이한 결과 근세 초부터 사상 유전자가 동결 보존되어 온 듯한 발상 그대로 유라시아 대륙으로 퍼져나가 이미 '중국화'하고 있던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에까지 '재에도시대화'를 확대시키려고 했던 것이 절대로 빠트릴 수 없는 역사적 사태의 본질입니다." "사실 이것은 반드시 일본 제국주의에 한정된 것만이 아닙니다. 경제학자 슘페터도 구미 열강의 식민지 획득 경쟁은 '격세유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하였습니다. 원래 영토의 확대가 국익에 직결되는 것은 주요 산업이 농업인 경우에 한해서만 분명한 것으로 상공업 중심의 근대사회에 있어 식민지 경영이 흑자를 낼지 적자를 낼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여러 나라가 시대착오적인 식민지 획득에 광분한 것은 로마제국처럼 구시대의 행동양식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슘페터는 보고 있습니다."(184-5)


# 격세유전 : 두 세대 이상의 유전이 진행되어 어떤 형질이 변형되거나 사라지게 된 이후 몇 세대를 걸러서 사라지거나 변형된 표현형질이 유기체에서 다시 나타나는 현상. 즉, 조상에 존재했던 유전형질이지만 이후의 세대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자식세대에서 되살아난 형질을 의미한다.


"에도시대처럼 촌락단위로 끊어서 사람들을 동원할 수 없는 중국사회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더 나아가 외부에서 침입해 들어온 새로운 권력이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정확히 청나라의 만주족이 행한 것처럼 중화의 전통이 되어 버린 세계보편적인 도덕의 체현자로서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장제스도 마오쩌둥도 정말로 중화의 전통인 글로벌한 정전론正戰論으로 일본의 에도시대형 군사동원을 능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능가했습니다. 마침내 미국이 일본에게 대륙에서의 철병을 권고하고 경제제재를 발동하자 궁지에 몰린 일본은 대영 대미 개전을 선택합니다. 이렇게 '저 전쟁'이란 일본과 중국의 두 근세 사회가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자웅을 가린 싸움이었으며, 일본은 미국에게 패하기 전에 이미 중국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미국과 싸우지 않으면 중국과 전쟁을 계속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이미 패한 게 아니겠습니까."(194-5)


제8장 너무 오래 지속된 에도시대─영광과 좌절의 전후 일본


"전후에는 요시다 시게루가 이끄는 일본자유당이 시장경제 지향의 강한 보수 정당으로 가장 우익이었으며,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일본사회당과 한가운데서 문화적으로는 보수지만 경제적으로는 재분배를 중요시한 민주당이 중도정당으로 존재하는 3대 정당제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바꿔버린 것이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입니다. 즉 '헌법 9조를 개정하고 재군비를 행하여 자유주의 진영의 일부를 담당'하든가 '헌법 9조를 유지하여 비무장 중립정책을 취할(혹은 사회주의 진영과 연대할)' 것인가가 여러 정당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3당의 균형이 급격하게 변하여 결국 개헌·재군비 찬성파의 자유·민주 2당이 보수합동이라는 형태로 자민당을 결성(1955)하여 거의 항구적으로 과반수를 장악할 수 있는 의석수를 확보한 반면, 이전에 주요 3당 가운데 사회당만 호헌·재군비 반대로 독립하고 정권에서 멀어져 만년 야당의 길을 갑니다."(205-7)


"그런데 전후 역사상 가장 중대한 의미를 가진 조문은 9조라기보다는 오히려 96조로 〈헌법 개정은 중·참 양원에서 각각 2/3 이상의 의원이 찬성하지 않으면 발의할 수 없다〉라는 조문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9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1/3 의석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호헌을 지상명제로 하는 한 3당제가 무너지고 (의석비가 2:1로 고정된) '1과 1/2정당제'로 바뀌어도 사회당은 어떤 곤란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설픈 욕심을 버리고 정권(과반수)을 노리지 않게 된 만큼 헌법만 지킬 수 있다면 좋아, 라고 정해 버리면 만만세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동일한 것을 자민당 쪽에도 말할 수 있는데 개헌만 포기한다면 항상 과반수를 사회당이 양보해주는 것이니만큼 이처럼 편안한 여당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보수합동이 이루어진 1955년 이후에 호헌 이념을 사회당과 그 외의 야당이 차지하고, 정권의 실익을 자민당이 가지는 절묘한 분할 상태로서의 '55년 체제'가 성립합니다."(208)


"하버드대학의 퍼거슨 교수는 오늘날 세계의 기점은 1989년의 냉전 종언이 아니라 10년 전인 1979년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해에 영국에서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가 수상에 취임하고 사회복지비를 삭감하여 국영기업을 계속해서 민영화하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시장주도의 경제운영에 착수하였으며, 2년 후에는 미국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뒤를 잇습니다." "그러나 국가에 의한 보호를 철폐하고 시장경제에 맡기는 전환은 실은 1년 전인 1978년에 이미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정책으로 중국에서 실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해인 79년에 덩샤오핑은 미국을 시찰하고 더욱 더 '경제만은 자유화시킨다'는 방침을 채택합니다. 즉, 서구의 표준적인 연구서에 적혀 있듯이 신자유주의는 미·영·중 3국에서 동시에 시작된 것으로, 앵글로 색슨 방식이 세계가 배워야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한다면, 이른바 여기서 중국이 일본을 추월한 것입니다."(221)


"한편 오일쇼크가 서구 여러 나라에 케인스 정책의 재검토를 강제한 것에 비하여 일본의 '새로운 촌락'이었던 기업사회는 이것을 자기 식으로 극복합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종신고용제에서 불황이더라도 해고할 수 없는 것을 염두에 두고 원래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밖에 고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기가 악화되어도 그렇게 해고하지 않다도 되었으며, 실업자가 그다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보장도 파탄나지 않고 복지국가를 지속할 수 있던 것입니다. 이것만 들어보면 훌륭한 이야기이지만 역으로 말하면 호경기가 되어도 추가인원을 고용하지 않고 불황기와 동일한 인원수 그대로 각자가 죽을 힘을 다해 일해서 대응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결국, 부분부분을 보면 각각 견고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비효율적으로 이상한 결과가 되어 버린 봉건제 근성이 실은 '중국화'의 잘 나가는 소비시장주의와 나란히 거품경제의 진범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226-8)


제9장 '긴 에도시대'의 종언─혼란과 방황의 헤이세이 일본


"일본의 '전후'만큼 벌써 끝났다든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든가 논의가 분분한 시대도 따로 없겠지만, 역시 냉전의 종결, 거품경제의 붕괴, 자민당의 일당 지배(55년 체제)의 종언 등이 계속된 1990년 전후로 하나의 분기점을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뭔가 끝난 것은 분명하지만 무엇이 시작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는 시대─'중국화'와 '재에도시대화'의 부론이 도처에서 변덕스럽게 찢어지고 갈라지면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혼돈이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 90년대 이후의 일본입니다." "바꿔 말하면, 일본을 '중국화'시켜서 자유경쟁 중심의 사회로 하고 싶은지, '재에도시대화'를 유지하여 다소 정체되더라도 안정된 사회를 만들고 싶은지 정치가 자신이 잘 생각하지 않은 채로 '유신 지사' 기분의 동기우선주의로 행동하며, 유권자 역시 잘 알지 못한 채로 농민봉기 근성의 '아무려면 어때'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수상이나 당명은 바뀌어도 일본사회는 전혀 변하지 않고 정치 불신만이 쌓여가는 것입니다."(232-8)


제10장 이제야말로 '중국화'하는 일본─미래의 시나리오


"국가에 있어 사활적으로 중요한 요소 두 가지가 아직도 에도시대가 끝나지 않은 사회에 정나미가 떨어지고, 더 이상 '봉건제'란 틀 속에 갇히기는 싫다며 일본에서 도망가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자본으로 고임금에 해고하기 어려운 일본인 노동자를 피해 생산거점을 해외로 옮기는 기업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알고 계시는 바입니다. 그리고 의외로 놓치고 있는 또 하나가 바로 여성으로, '남편과 이혼하면 먹고 살 수 없도록' 집안 단위로 남성 우위의 복지제도를 강하게 실시해온 결과 전업주부화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다면 결혼은 하지 않아도 좋다는 당연한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당연히 미혼율은 올라가고 출생률은 바닥입니다. 자본이 국내 기업이란 바구니에서, 여성이 집안이라는 상자에서 솔선하여 뛰쳐나가는 상황에서 '봉건제'를 지속할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봉건제나 재에도시대화의 힘으로도 그 흐름을 저지할 수 없게 된 일본사회의 '중국화'는 필연이 될 듯합니다."(263)


"한편 근세중국적인 사고방식의 곤란 또한 분명합니다. 그것은 이른바 중화주의·자존주의의 결함으로 세계 최고이자 유일을 자랑하는 이상, 즉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을 제시하고 자멸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응책은 '하여튼 너무 높은 이상이기 때문에 적당히 상대하고 현실을 서두르지 않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현실의 황제가 주자학 도덕의 체현자로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인격자라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있을 리 없죠. 그래도 이상으로 제시해두고 어떤 때는 국정을 바로잡는 도구로, 어떤 때는 국가적 자긍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또한 어쨌든 세계에 통용되는 가르침이니까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에게 '빼앗겨서 몫이 줄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정당함이 그들까지도 감화시켰다는 식으로 우리가 가진 보편성의 증거라고 생각하여 더욱 더 전 세계에 널리 퍼질 듯이 호언장담을 연마합니다. 이것이 중국화하는 세계를 유유히 살아가는 방법이지 않을까요."(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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