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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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너와 나, 우리 둘만이 여인들의 의도를 알아내도록 하자꾸나.
우리는 또 그들 중 누가 우리 두 사람을 마음속으로 존중하고
두려워하는지, 누가 우리를 무시하고 너같이 고귀한 자를
업신여기는지 하인들도 시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16권 304행)

오뒷세우스는 강산이 두 번 변한 후에야 비로소 집에 돌아왔다. 만물은 세월의 손길 아래 빛바랜 흔적을 보이지만, 정당성을 확보한 그에게 중요한 건 ‘무쇠처럼 단단하고 변치 않은’ 식솔들의 애정과 충심이다. 비시정권은 4년간 나치 치하에 있었다. 한반도는 31년간 서릿발 어린 겨울이었다. 오뒷세우스는 20년 세월을 한칼에 일렬로 늘어놓는다.

변치 않은 절개는 드높이는 것이 합당하다. 바닥에 던진 공처럼 금새 튀어오르는 변절은 처벌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양자간의 경계를 어디로 설정하는가이다. 죽음 앞에 서기 전까지 정해진 답이란 없다. 오뒷세우스가 자신을 명판관이라 자신하는 순간 피의 제전은 시작된다. 그런 시도는 인간을 목석으로 간주하고 톱날로 썰어낸다.

신화에서는 충신과 간신이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었다고 치부하면 그만이다. 악한 자들은 세월의 장단에 상관없이 등을 돌리고 계략을 꾸몄을 것이며, 선한 자들은 하데스로 내려가기까지 눈물로 밤을 지새웠으리라고 말이다. 3천년의 간극을 넘어선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종교적 맹신을 백안시하는 상식적인 일반인들이 내리는 판단은 믿을만한가?

현대 과학의 눈부신 성과는 우생학을 발전시켰다. 그것이 나치의 전유물이며 이제는 사라진 구세대의 유물인 양 폄하하지만 실제로 본성과 양육의 시소 가운데 본성에 더 큰 무게를 지우는 일이 지금도 허다하다. 환경은 무한대의 변수를 고려해야 하지만, 본성은 단 하나의 요인 ‘본래 그러하므로’라는 말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얼마나 쉽고 간편한가.

되풀이하여 생각해봐도 정답은 없다. 고대에는 신이 인간 내면의 빛깔을 명징하게 판별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먼저 현대 과학의 합리성이 신적 지혜를 대신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오류투성이 인간이 가야할 길은 다양한 사실을 모아 기준의 탑을 부단히 높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과정은 밝은 광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말을 감금하는 자가 바로 '열린 사회의 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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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優勝 열패劣敗의 신화 - 사회진화론과 한국 민족주의 담론의 역사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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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 시대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다. 비교 불가능한 힘의 우위를 두 눈으로 목도한 약자에게 '힘'의 논리는 절대적 명령이었다. 그 내면화는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 예속의 결과였다.

1장
제국주의가 드리우는 거대한 침탈의 장막을 벗어날 수 없었던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이 비극의 시나리오에서 최대한의 희망적 요소를 찾아내는 데 골몰하였다. 그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량치차오(양계초)는 서구의 폭압적 야욕을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은 그에 걸맞는 힘을 기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힘' 숭배 사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서구 강대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무력 지향 사상이었다.

2장
이제 강자가 모든 권력을 얻고 약자는 그의 나약함과 무능함 탓에 모든 걸 빼앗겨야 하는 상황마저도 인위적으로 강제된 제도가 아니라 천륜과 도덕을 대체하는 우주적 진리이자 질서로 받아들여졌다. 근대과학으로 뒷받침된 사회진화론은 더 이상 이상주의자들이 폄하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기에 약소국의 지식인들은 자발적 내면화를 통해 기꺼이 그 질서에 순응했으며 자신들이 발견한 '선민'의 위치에 만족해했다.

3장
따라서 식민지 시절, 일제의 강권에 복종하는 것이 자연적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 이광수나 최남선의 사상적 파탄은 태생부터 비극적 결말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만해 한용운이나 단재 신채호처럼 종교적 비폭력 사상과 무정부적 평등 사상에 힘입어 우승열패의 신화를 거부한 이들도 있었지만 체제에 순응하는 자도 저항하는 자도 규격화된 '힘'의 논리를 민중의 뇌리에 새기는 일에는 한마음이었다.

단선적 역사발전론은 필연적으로 비교우위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진화란 진보progress가 아니라 적응adopt의 산물이다. 자연은 말없이 선택할 따름이지만 제 이익에 취한 인간은 거기에 신성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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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9
너대니얼 호손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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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는 다른 여성들이 감히 밟을 수 없는 곳으로 찾아가도 좋다는 통행권과 같았다. 치욕, 절망, 고독! 이런 것들이 그녀에게는 스승이었다. 비록 준엄하고 무모한 스승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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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범우사상신서 19
콜린 윌슨 지음 / 범우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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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해석보다는 공감을 바라며, 설명보다는 이해를 구한다. 선명한 햇빛 아래 서기보다는 안개 속에 파묻혀 너와 나의 구별을 무화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시와 소설이 추구하는 묘사는 반동이다. 그것은 불투명성을 확장할 뿐이다. 가장 천한 것으로부터 가장 고귀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해석을 포용한다.

우열을 지우고 기준을 무너뜨리니, 문학의 자리는 자주 비었으나 결코 폐쇄되지 않는 도피처이다.

그러나 문화를 생각해보라. 'ㄱ'이 떨어져 나가면서 딱딱하게 굳었던 얼음이 풀린다.

흡사 꽉 묶여있던 자루의 밑이 터진 듯하다. 내용물이 쏟아져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이것은 일견 많은 혼돈을 유발한 것 같지만, 이전에 누구도 분명히 볼 수 없도록-비록 느끼고, 기억하고, 추론할 수는 있었지만- 감추어져 있던 조각들이 외부로 노출되는 '사건'이다. 햇빛 아래 드러나는 '사건'이다.

이 많은 조각을, 모양을 구상하고 배열하고 흩어버리고 재창조하는 과정은 아마도 끝나지 않는 여정이겠지만 숨김이 없다.

이제 저 엄청난 더미를 향한 시지프스의 도전은 질서를 갈구하면서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문학의 존재이유이며-자루를 만들어내는- 또한 문학만으로 세상을, 그리고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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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 시대 - 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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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 시대'란 무수한 폭력으로 집단을 유지, 발전시켜 나가던 고래의 관습을 타개하기 위해 기원전 400년을 전후로 시작된, 영적인 진리에 대한 갈망의 시기를 가리킨다.

그 흐름의 중심에 있는 선구자들이 바로 소크라테스와 공자, 붓다와 사제 P(이 사랑의 가르침을 완성한 이가 바로 예수)와 같은 현자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제각각의 조건 아래에서 조금씩 다른 사유 과정을 거쳤지만 한가지 공통된 황금률에 도달했으니 그것이 바로 '자신을 귀하게 여기듯이 타인을 대하라'는 명제이다.

이 사랑의 공동체를 완성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그치지 않는 이성의 물음을 강조했고, 공자는 고대의 이상적인 주공의 예를 되살려 다듬었다.

붓다는 스스로 깨달음의 반열에 올라 중생에게 길을 열어주었으며, 예수는 메시아라는 원천적인 징표 아래 고달픈 백성의 마음을 그러모았다.

많은 시간이 흘러 종교의 교리가 우상화되고 서로가 절대적 우위성을 주장하게 된 지금, '축의 시대'가 지향한 사랑의 가치는 잊혀져가고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말씀'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이리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마태복음 5: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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