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너와 나, 우리 둘만이 여인들의 의도를 알아내도록 하자꾸나.우리는 또 그들 중 누가 우리 두 사람을 마음속으로 존중하고두려워하는지, 누가 우리를 무시하고 너같이 고귀한 자를업신여기는지 하인들도 시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16권 304행) 오뒷세우스는 강산이 두 번 변한 후에야 비로소 집에 돌아왔다. 만물은 세월의 손길 아래 빛바랜 흔적을 보이지만, 정당성을 확보한 그에게 중요한 건 ‘무쇠처럼 단단하고 변치 않은’ 식솔들의 애정과 충심이다. 비시정권은 4년간 나치 치하에 있었다. 한반도는 31년간 서릿발 어린 겨울이었다. 오뒷세우스는 20년 세월을 한칼에 일렬로 늘어놓는다. 변치 않은 절개는 드높이는 것이 합당하다. 바닥에 던진 공처럼 금새 튀어오르는 변절은 처벌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양자간의 경계를 어디로 설정하는가이다. 죽음 앞에 서기 전까지 정해진 답이란 없다. 오뒷세우스가 자신을 명판관이라 자신하는 순간 피의 제전은 시작된다. 그런 시도는 인간을 목석으로 간주하고 톱날로 썰어낸다. 신화에서는 충신과 간신이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었다고 치부하면 그만이다. 악한 자들은 세월의 장단에 상관없이 등을 돌리고 계략을 꾸몄을 것이며, 선한 자들은 하데스로 내려가기까지 눈물로 밤을 지새웠으리라고 말이다. 3천년의 간극을 넘어선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종교적 맹신을 백안시하는 상식적인 일반인들이 내리는 판단은 믿을만한가? 현대 과학의 눈부신 성과는 우생학을 발전시켰다. 그것이 나치의 전유물이며 이제는 사라진 구세대의 유물인 양 폄하하지만 실제로 본성과 양육의 시소 가운데 본성에 더 큰 무게를 지우는 일이 지금도 허다하다. 환경은 무한대의 변수를 고려해야 하지만, 본성은 단 하나의 요인 ‘본래 그러하므로’라는 말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얼마나 쉽고 간편한가. 되풀이하여 생각해봐도 정답은 없다. 고대에는 신이 인간 내면의 빛깔을 명징하게 판별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먼저 현대 과학의 합리성이 신적 지혜를 대신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오류투성이 인간이 가야할 길은 다양한 사실을 모아 기준의 탑을 부단히 높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과정은 밝은 광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말을 감금하는 자가 바로 '열린 사회의 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