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優勝 열패劣敗의 신화 - 사회진화론과 한국 민족주의 담론의 역사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 시대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다. 비교 불가능한 힘의 우위를 두 눈으로 목도한 약자에게 '힘'의 논리는 절대적 명령이었다. 그 내면화는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 예속의 결과였다.

1장
제국주의가 드리우는 거대한 침탈의 장막을 벗어날 수 없었던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이 비극의 시나리오에서 최대한의 희망적 요소를 찾아내는 데 골몰하였다. 그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량치차오(양계초)는 서구의 폭압적 야욕을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은 그에 걸맞는 힘을 기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힘' 숭배 사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서구 강대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무력 지향 사상이었다.

2장
이제 강자가 모든 권력을 얻고 약자는 그의 나약함과 무능함 탓에 모든 걸 빼앗겨야 하는 상황마저도 인위적으로 강제된 제도가 아니라 천륜과 도덕을 대체하는 우주적 진리이자 질서로 받아들여졌다. 근대과학으로 뒷받침된 사회진화론은 더 이상 이상주의자들이 폄하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기에 약소국의 지식인들은 자발적 내면화를 통해 기꺼이 그 질서에 순응했으며 자신들이 발견한 '선민'의 위치에 만족해했다.

3장
따라서 식민지 시절, 일제의 강권에 복종하는 것이 자연적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 이광수나 최남선의 사상적 파탄은 태생부터 비극적 결말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만해 한용운이나 단재 신채호처럼 종교적 비폭력 사상과 무정부적 평등 사상에 힘입어 우승열패의 신화를 거부한 이들도 있었지만 체제에 순응하는 자도 저항하는 자도 규격화된 '힘'의 논리를 민중의 뇌리에 새기는 일에는 한마음이었다.

단선적 역사발전론은 필연적으로 비교우위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진화란 진보progress가 아니라 적응adopt의 산물이다. 자연은 말없이 선택할 따름이지만 제 이익에 취한 인간은 거기에 신성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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