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변혁 2 : 19세기의 역사풍경 한길그레이트북스 177
위르겐 오스터함멜 지음, 박종일 옮김 / 한길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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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도시 (유럽 모형과 세계적 특색)


"19세기 중엽부터 유럽 대륙의 모든 국가에서 잇따라 등장한 대도시는 기왕의 도시 역사와는 근본적으로 단절되었다. 18세기 말 프랑스의 경제학자들은 대도시는 '사회'가 결집되고 사회적 기준이 형성되는 곳이란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냈다. 대도시는 경제순환의 동력원으로서, 사회적 유동성의 증폭기로서 기능했다. 대도시에서 가치는 (농촌에서처럼) 오로지 생산을 통해서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도 증가했다. 상품의 신속한 회전이 부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근대적 대도시의 본질은 순환, 다시 말해 교통기술의 발전에 따라 끊임없이 속도가 빨라지는 도시 내부 또는 도시와 주변지역 사이의 사람, 가축, 교통수단, 상품의 이동이란 점을 점차 깨달아갔다. 비판적인 사람들은 대도시 생활의 빠른 속도에 대해 끝없이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냈지만 반대로 도시의 개혁자들은 근대도시의 핵심인 원활한 순환을 보장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구상했다."(765)


"도시의 급격한 양적 성장과 급속한 현대화가 같은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탈도시화'가 (더러 그런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위기와 정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18세기 공업화 시초 단계에서 대도시 인구의 외부유출 현상이 나타났다. 실제로 탈도시화는 1800년 이전 유럽의 여러 지역, 예컨대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남유럽 도시의 쇠락은 유럽 도시문화의 중심이 남쪽에서 북쪽과 대서양으로 옮겨가는 추세의 반영이었다. 1840년 무렵이 되어서야 남쪽 옛 도시의 쇠락이 멈추었다. 발칸은 하나의 예외였다. 경제발전 수준이 비슷한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발칸의 도시화 정도는 꽤 높았다. 이것은 19세기 특유한 발전 추세의 결과가 아니라 오스만제국의 도시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존중과 각 요새도시의 중요한 지위 때문이었다. 오스만제국의 통치가 끝난 후 많은 발칸 국가가 탈도시화의 과정을 경험했다."(787)


"동아시아에서 탈도시화는 다른 원인 때문에 일어났다. 대략 1750년 이후 상업이 번성하면서 각지의 도시가 빠르게 팽창했다. 19세기 초, 방콕의 인구는 태국 전체 인구의 1/10을 넘어섰다. 버마와 말레이시아 각 주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그러나 1850년대 쌀 경작이 확산되면서 새로운 '농촌화' 현상이 나타났고 농촌인구가 상대적으로 증가했다. 1815-90년에 자바에서는 주민 2,000명 이상인 도시에 사는 인구의 비중이 7퍼센트에서 3퍼센트로 떨어졌다. 이것은 현지의 경제가 수출 중심으로 전환되면서 생긴 직접적인 결과였다." "식민통치가 도시화를 촉진하는지, 방해하는지 또는 후퇴시키는지는 상황에 따라 달랐다." "영국은 인도를 정복해나가던 1765-1818년 현지에 원래 있던 도시체계를 보존하고 유지시켰다. 이런 방식은 식민 역사상 유일한 사례이다. 그러나 식민전쟁 중에 도시 내부, 또는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기간시설이 많이 파괴되었는데, 유명한 인도의 국도가 여기에 포함되었다."(788-9)


"미국의 도시화 과정에서 운하와 철도의 역할은 유럽의 경우보다 훨씬 컸다. 콜로라도주 덴버시는 수로로는 연결되지 않는 도시였지만 순전히 철도 덕분에 존재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철도산업 덕분에 고립된 개별 도시의 기초 위에서 종횡으로 연결된 도시체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식민지시대 초기에 형성된 대서양 연안의 정착지가 집결된 동북부지역에서 철도망이 확산되자 새로운 도시가 잇달아 생겨났다. 이로 인해 한층 더 종횡으로 확장된 도시체계가 나타났다. 미국 서부에서는 이러한 도시체계가 19세기 중엽에 갑자기 형성되었다. 그 첫 번째가 시카고였다. 이 도시의 인구는 불과 40년 만에 (1850년의) 3만 명에서 110만 명으로 폭증했다. 시카고와 중서부 지역의 기타 도시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변경이 서부로 확장되면서 하나씩 생겨난 도시는 유럽의 모형을 따르지 않고 주변지역이 농업지역으로 개발되기 전에 기반을 잡은 교역의 중심지로서 발전해나갔다."(791-2)


# 단일 기능의 도시 유형들 : 성지(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인도의 바라나시 등) 도시, 휴양지(벨기에의 스파Spa, 프랑스의 비쉬, 크리미아의 얄타 등) 도시, 광산(볼리비아의 포토시,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미국 콜로라도주의 애스펀Aspen 등) 도시


"19세기에 경제적 성공은 내부적으로는 통합되면서도 등급이 분명하고 외부적으로는 개방된 도시체계를 갖춘 나라에서 나타났다. 민족국가에서는 도시체계가 없어서는 안 되지만 도시는 제대로 작동하는 민족국가의 틀에 반드시 의존적이지는 않았다." "민족국가가 이미 형성된 지역에서는 국가가 점차 국가경제의 조직자로 진화해갔고, 도시의 산업화는 국가경제 안에서 역할의 중요도가 높아졌다. 중앙정부의 명령으로 성장 잠재력이 높은 도시가 세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중앙정부가 나선 조정(調整)은 법적·재정적 통일성을 높였고, 교환과 통신의 표준을 제시했다. 또한, 공공 목적의 도시 기반시설을 설계할 때 기준을 제시했으며 건설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도시체계의 형성과 건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민족국가시대'에도 개별 국가가 반드시 대도시보다 '강대'하지는 않았다. 대도시는 (국가자본을 포함한) 자본의 집적과 분배를 담당하고 동시에 '국가 간' 연결의 기반 역할을 했다."(795-6)


"1870년 무렵에 기차를 타고 유럽의 어느 도시에 도착한 사람이라면, 도시에 오기까지는 오늘날에도 통용되고 있는 기술을 이용했지만 일단 도시의 기차역 밖으로 나서는 순간 말이 끄는 운송수단에 의존해야 했다." "걸어 다녀야 하는 도시에서 일터와 집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 수는 없었다. 주거 밀도가 높은 빈민가가 형성된 이유가 이것이었고 빈민가를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가 또한 이것이었다. 저소득 인구도 감당할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을 찾아내는 일은 도시발전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었다. 공업화 시대 이전의 교통기술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공업시대'로 진입한 뒤에도 전통적 교통수단이 오랫동안 활용되었다. 마차는 도시교통에서 중요한 초기의 발명품이었다. 정해진 시각에 정해진 노선을 정해진 가격으로 운행하는 교통수단으로서의 마차는 미국인의 발명품이었고 1832년에 처음으로 뉴욕 거리에 나타났다. 그로부터 24년 후에 도시 여객마차가 파리의 거리에 등장했다."(878-9)


"마차와 마차철도는 사회공간의 분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차버스의 요금과 교통노선 주변의 지가 상승을 감당할 수 있는 중산계급은 일터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으로 집을 옮길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사회학에서 말하는 작업장 공동체가 해체되었다."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마차교통은 철도의 경쟁상대가 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도시 교통의 여러 문제가 마침내 해결된 것은 궤도전차가 도입된(1888년 미국) 뒤의 일이었다. 기술적인 면에서 보자면 전차는 전기적 에너지를 회전구동력으로 전환시킨 기계장치였다. 궤도전차의 등장은 도시의 시내 교통에 진정한 의미의 혁명을 가져왔다. 궤도전차의 속도는 마차철도보다 두 배나 빠르면서도 요금은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집 앞에서 전차를 타고 공장으로 출근하는 일이 현실이 되었다. 운임 하락의 파장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수십 년 전에 대서양을 건너는 우편 증기선의 운임이 떨어졌을 때와 거의 같았다."(880-3)


"단거리 대중교통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혁신은 지하철이었다. 지하철이 가장 먼저 건설된 곳은 런던이었다. 지하철은 철도기술과 하수도 공사를 통해 터득한 터널기술이 결합된 산물이었다." "1860년에 지하철 건설이 시작되었고, 3년 뒤에 첫 번째 지하철 노선─길이 6킬로미터의 '메트로폴리스 라인'(Metropolis Line), 세계적으로 지하철의 통칭인 '메트로'(Metro)가 여기서 나왔다─이 개통되었다. 지하철은 깊이 15-30미터의 지하에 건설되었는데 진정한 의미의 지하터널(tube) 방식은 아니었다. 지하 굴착기술이 성숙한 1890년에 이르러서야 터널방식의 지하철이 등장했다. 이때부터 지하철 역이 땅속 더 깊은 곳에 설치될 수 있었다. 같은 시기에 지하철의 동력도 전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지하철 노선망의 점진적 확대는 도시의 통합과 교외지역의 개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지하철 운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운영자의 입장에서도 지하철은 수지가 맞는 사업이었다."(885-6)


7장 프런티어 (공간의 정복, 유목생활에 대한 침입)


"19세기에 들어온 이후로 도시에 대칭되는 극단은 더는 '농촌'(토지에 의존하는 농민의 생활권)이 아니라 '프런티어'(자원개발 과정에서 이동하는 영역)이다. 프런티어는 공간적으로 끊임없이 외부를 향해 확산된다. 프런티어는 확장자가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 말하듯 그렇게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이동영역이 자기 쪽으로 접근하여 오는 모양을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프런티어는 침략자의 창끝이다." "도시와 프런티어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도시도 프런티어도 19세기 인구이동을 끌어당긴 거대한 자석이었다. 그곳은 꿈의 실현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한없는 기회를 제공했다. 도시와 프런티어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사회적 조건의 삼투성(渗透性)과 가소성(可塑性)이다. 가진 것이 재능뿐인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었다. 기회가 많다는 것은 동시에 위험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프런티어에서 카드의 패는 다시 뒤섞여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낸다."(945)


"프런티어의 식민화 과정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한 가지 기본적인 요소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토지침탈의 승자와 패자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비유럽 민족이 침입에 저항하여 일정 정도의 승리를 거둔 소수의 사례─예컨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Maoris)─가 있기는 하지만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볼 때 원시 생존방식에 대한 공격은 거의 모두 원주민의 패배로 마감되었다. 토착사회는 전통적인 생존의 기반을 상실했고 동시에 원래 자신의 소유였던 땅에 등장한 새로운 질서 가운데서 뿌리내릴 근거를 찾을 수도 없었다. 무자비한 박해와 처형을 피한 원주민일지라도 '문명화'와 개조 과정은 피해갈 수 없었다. '문명화'의 근본 내용은 토착문화에 대한 완벽한 멸시였다." "피해자인 소수민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1945년 이후의 외부세계의 점진적인 인정은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생활방식의 주변화란 기본적인 사실은 바꿀 수가 없었다."(948-9)


"프런티어에서 '국가'는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제국의 경계가 전형적인 프런티어이다. 제국이 확장을 멈추는 순간 프런티어도 더 이상 잠재적인 병합의 대상이 아니라 외부 위협을 막아내는 노출된 측면으로 바뀐다. 프런티어는 제국의 방어선 바깥에 있는 통제되지 않는 공간, 마지막 초소 넘어 저쪽의 게릴라와 비적(bandit)이 수시로 출몰하는 위협적인 공간이 된다." "프런티어에 대한 제국의 태도는 구조적으로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프런티어는 지속적으로 혼란스러우므로 제국의 입장에서는 피할 수 없는 위협이다. 정복을 완성한 후 제국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무기를 지니고 순종하지 않는 개척민은 (식민지를 포함하여) 근대국가가 추구하는 무력의 독점을 위협하는 존재이다. 식민지의 변경에 위치한 프런티어는 그러므로 '임시적인'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곳은 '아직' 제국에 병합되지 않았거나 '머지않아' 제국에서 이탈할 지역이다."(955-6)


"미국의 프런티어는 언뜻 보기에 토지를 끝없이 공급해줄 것 같았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에 비교적 평등한 분배와 보편적 번영이 (논리적으로) 가능한 유토피아─하층계급이 없는 위대한 사회─를 세울 수 있다는 환상을 가졌다." "이 지점에서 미국을 캐나다와 아르헨티나와 비교해보면 하나의 의미 있는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캐나다와 아르헨티나에서 프런티어의 토지는 처음에는 공공의 재산으로 인식되었다. 캐나다에서는 유동성이 높고 모험심이 강한 소농이 국가가 공급하는 토지를 흡수했고 그래서 투기는 초기단계에서부터 나타났다. 아르헨티나에서 토지는 대지주의 손에 떨어졌다. 대지주가 소작인에게 좋은 조건으로 토지를 임대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장기적으로는 프런티어의 균등주의 정신을 믿었던 사람들은 절망의 제물이 되었다."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원인의 하나는, 아르헨티나 정부는 수출주도형 성장정책을 추구했지만 캐나다는 균형 잡힌 사회질서를 중시한 차이였다."(960-1)


"전쟁과 폭력의 경계는 모호했다. 교전 쌍방의 살육행위와 방어수단이 없는 평민 거주구역에 대한 공격과 학살은 구분되지 않았다. 쌍방은 무장하고 있었고 폭력은 프런티어의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이것은 18세기 말에 벌어진 식민전쟁이 남긴 유산이었다. 다른 문명 사이의 폭력사용과 프런티어 사회의 유럽계 아메리카인의 일상생활 가운데 보편적으로 퍼져있던 폭력이 뒤엉켜 있었다. 생활 속의 분쟁을 권총이나 소총으로 해결하는 '거친 서부'의 개척민은 전 세계에서 최고의 무장을 갖춘 집단이었다. 내전시기에나 통하던 '총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평화시의 사회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폭력은 남성의 명예를 지키는 궁극적인 방식이었다. 미국 동부의 도시에서는 알지 못하는 이 방식은 충돌을 완화하기보다는 격화시켰다('비후퇴의 의무'). 서부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주먹을 휘두르고 때로는 목숨까지 거는 자살형 '용기'를 숭배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980-1)


# 비후퇴의 의무(No Duty to retreat) :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성(castle), 즉 보호구역이 있고 그곳에 침입해 자신을 위협하는 자에게는 무기를 사용해도 된다는 미국 형법의 원칙


"서부의 중요한 특징은 자경단주의(vigilantism)였다. 법의 권능이 미치지 못할 때 혁명적인 무력으로서 자경단이 등장하여 국가의 역할을 대신했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거칠게 해석된 자위권 사상과 인민주권(Popula sovereignty)의 원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리처드 브라운의 분석에 따르면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으로서 자경단은 정규적인 법체계에 비해 인력소모는 많아도 비용은 적게 드는 방식이다. 1865년에 내전이 끝난 뒤로 약 40년 동안 권총을 든 영웅들이 만들어낸 공포의 심각성과 보편성은 정점에 다다랐다. 브라운은 이런 상태를 일종의 소규모 '내전'이라고 표현했다. 200-300 명의 악명 높은 전문살인자들(여기에 더하여 이보다 지명도가 낮은 수많은 전문살인자들)이 대지주의 지시를 받고 소규모 목장주와 자경농민을 상대로 대지주의 이익을 관철시켰다. 이들은 정의감이 강하고 보통사람을 돕는 협객이 아니라 계급투쟁에서 상층부의 대리인이었다."(981)


"1874년 특허를 획득한 철조망이 대규모 생산을 통해 보급되자 '열린 서부'에서 개인의 토지소유권은 분명한 선으로 표시되었다. '황야'는 분할되고 식민화되었으며 '유랑하는 야만인'(이것은 당시의 표현이다)은 생존공간을 잃어버렸다. 단일한 측량방식이 미국영토 전체에 적용되었고 프런티어를 넘나드는 생존방식은 불가능해졌다. 전술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인디언은 최후의 패배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인디언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남은 인디언조차도 〈지금까지의 존재양식과 완전히 배치되는 다른 존재로 바뀌라는 끊임없는 압력에 포위당한 종족이 되었다.〉 19세기 80년대에 마지막 전투적인 인디언 부족이 무장해체를 당하고 국가의 피보호자 신세로 전락했다. 1871년 정부는 앞으로 인디언과는 어떤 협정도 체결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때부터 인디언국가는 더 이상 담판의 대상으로서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988)


"남아프리카와 북아메리카 프런티어의 발전사에는 놀라울 정도로 공통점이 많았다. 두 곳에서 유럽이민과 토착민 사이의 첫 번째 접촉은 모두 17세기에 발생했고, 두 나라에서 19세기 30년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미국에서는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등장하여 남부의 인디언을 축출하는 정책을 펼쳤고 남아프리카에서는 보어인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남아프리카의 독특한 점은 영국인이 희망봉을 점령한 뒤 백인집단이 분열했다는 것이다. 이후 남아프리카에서는 17세기 네덜란드 이민의 후예인 보어인 외에는 비교적 적은 숫자의 영국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영국인 공동체는 영국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남아프리카에서 중요한 결정권을 독점했다." "보어인은 두 개의 공화국을 세웠다(트란스발 공화국(1852)과 오렌지자유주(1854))." "그러므로 19세기의 남아프리카에는 미국정부의 연방 '인디언정책'과 상응하는 '흑인정책'을 수립할만한 통일된 국가가 없었다."(1000-2)


"북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남아프리카에서도 프런티어의 핵심집단은 자급자족의 방식으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무장한 개척민이었다. 그러나 북아메리카 프런티어에서는 수출수요를 겨냥한 대기업형 생산이 일찍부터 등장했다. 18세기에 담배와 면화 플랜테이션이─대부분이 프런티어 지역에 있었다─광역 무역망의 일부를 형성했다. 19세기를 통틀어 프런티어는 점진적으로 자본주의 발전과정의 현상으로 변해갔다.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은 내륙으로의 대이주 후에 이전보다 세계시장에서 더 멀어졌다. 보어인들이 세운 두 개의 공화국에서 국가기구의 기능은 온전하지 못했고 재정은 불안정했다. 교회를 제외하고는 '시민사회'를 통합할 시스템은 없었다. 그러나 보어인이 세운 두 공화국의 영토 안에서 19세기 60년대에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고 그로부터 20년 후에는 금광이 발견되자 자족형 농업과 병행해 (세계시장으로 연결된) 광업 프런티어가 형성되었다."(1002-3)


"남아프리카의 지배층은 특정한 구역을 흑인(프롤레타리아)의 집중주거지로 지정했다. 남아프리카의 흑인 거주구역은 북아메리카 인디언 보호구역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고향'(homelands)이란 명칭을 붙인 흑인 보호구역은 인디언 보호구역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뒤에 생겨났고(1951년 이후), 경제적인 기능을 상실한 인구집단을 격리시킬 목적에서 만든 야외감옥이라기보다는 흑인 노동력을 정치적으로 통제하고 경제 분야로 유도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흑인 보호구역은 두 가지 원칙 위에서 세워졌다. 하나는 보호구역 내의 모든 흑인 가정이 경작을 통해 자급자족하게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하여 물리적 재생산 비용이 최소 수준에 머물게 된) 남성 노동자를 신흥 경제영역으로 유입시킨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인디언 보호구역은 아직도 존재한다. 남아프리카의 '고향'은 지도 위에서 이미 사라졌고 다만 토지소유권의 분배에서는 아직도 흔적을 남기고 있다."(1004-5)


"미국이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는 달리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중앙집권적인 계층제 구조의 제국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정치체제였다. 제국은 크게 보아 두 가지 형식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기마 유목민이 통치하며 주변의 정주형 농업사회에 기생적인 초원 제국이다. 다른 하나는 자국 농민으로부터 직접 징세를 주요 재원으로 하는 제국이다. 두 유형 사이에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 예컨대, 오스만제국은 초기에는 구조적으로 몽고제국과 유사하게 군사지도자 사이에 맺어진 느슨한 연맹으로서 출발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두 번째 유형의 제국으로 변했다." "청제국은 1760년대까지 거침없이 성장하다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확장하는 러시아제국을 만나게 되었다." "18세기 말, 한때는 군사적으로 강성했던 유목민이 세운 오래된 나라들이 모두 대제국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이런 상태는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지속되다가 중앙아시아의 여러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끝이 났다."(1015-6)


"프런티어는 파멸의 장소이면서 새로운 사물이 탄생하는 장소다. 파괴와 건설은 흔시 변증법적으로 서로 얽혀 있다. 프런티어는 폭력적 무정부주의의 무대이면서 동시에 현대 정치와 사회의 요람이었다." "20세기초,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인구과잉에 따른 자원부족의 위험을 피할 충분한 '생존공간'이 확보되어야 하며 열등한 민족이 적절치 못하게 '경작하는' 토지를 빼앗는 것은 강대국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주장이 극우단체와 여론 주도층 내부에 자리 잡았다. 이런 생존공간 전략을 실행한 나라는 대부분 20세기 30년대에 일어선 신흥제국─이탈리아 파시스트정권은 리비아에서(에티오피아도 점령했지만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았다), 일본은 1931년 이후 만주에서, 나치 독일은 2차 대전 때 단명으로 끝난 동부제국(Drang nach Osten)에서─이었다. 이 세 가지 사례는 프런티어전쟁을 통해 민족의 세력을 증명하고, 토지약탈을 통해 민족의 존엄을 지키려는 사상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였다."(1033-4)


8장 제국과 민족국가 (제국의 지구력)


"국제정치의 핵심적인 문제는 전쟁과 평화─전쟁의 부재상태─이며, 전쟁을 피하는 것은 지고의 선이었다. 19세기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국제관계가 탄생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최근 미국과 소련 사이의 '양극' 핵 대치상황이 종결되면서 냉전과 양차 세계대전 이전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여러 가지 전쟁방식과 국제관계의 행태가 생겨났기 때문에 이런 분석은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국제관계의 어제와 오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1945년 이후로 국가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서 발동하는 전쟁은 더 이상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정치적 수단으로서의 침략전쟁은 더는 합법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 국제사회는 이미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다. 19세기와는 달리, 침략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더 이상 '현대성의 증명'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물론 일부 아시아 국가의 핵무기 보유의 상징적 의미는 다른 범주의 얘기다."(1098-9)


# 19세기에 이루어진 국제관계의 발전과 변화 양상

1. 국민개병제 확립 : 군대는 더 이상 통치자의 도구만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정치적 의지의 화신으로 인식되었다.

2. 국가이익 지상주의 : 통치자나 왕실이 아니라 추상적 관념인 '(민족)국가'의 이익이 국제정치에서 핵심이 되었다.

3. 기술발전 : 민족국가들은 기술 발전 덕분에 역사상 전례가 없는 전혀 새로운 파괴 능력을 확보되게 되었다.

4. 산업생산력 증대 : 민족국가들 사이에서 산업생산력의 격차가 확대되고 이는 군사기술상의 격차로 이어졌다.

5. 국가체제의 세계화 : 유럽 제국주의와 비유럽 강대국(미국 및 일본)의 부상은 세계적 국가체제를 정착시켰다.


"19세기의 세계지도를 살펴보면 제국이 더 많고 민족국가는 잘 보이지 않는다. 1900년 무렵에 제국의 시대가 머지않아 끝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3대 제국─오스만, 호엔촐레른, 합스부르크의 세 다민족국가─은 사분오열되었지만 그래도 제국의 시대는 계속되었다. 서유럽의 모든 식민제국은 물론이고 필리핀 한곳만 식민지로 갖고 있던 소형 식민제국 미국은 흔들림이 없었다. 종주국 자신의 발전상을 보자면 20세기 20, 30년대에 이들 제국은 경제와 정신면에서 최고점에 도달했다. 신생 소비에트정권은 불과 몇 년 사이에 러시아제국 말기에 정복했던 카프카스지역과 중앙아시아 방어선을 성공적으로 회수했다. 일본, 이탈리아, (단명했던) 나치독일은 옛 제국을 모방해 새로운 제국을 세웠다. 탈식민화의 물결이 일어난 뒤에야 (1956년의 수에즈운하 위기에서부터 1962년의 알제리전쟁 종결까지) 제국의 시대는 종말을 향해 다가갔다."(1123)


"19세기가 '민족국가의 시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두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는 19세기에 하나의 새로운 사유체계와 정치적 신화로서 민족주의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민족주의는 강령과 정책으로서 받들어졌고 민중의 정서를 자극해 동원하는 도구로서 작용했다. 민족주의는 시발점에서부터 강력한 반제국주의의 색채를 드러냈다. 나폴레옹시대에 프랑스의 '이민족통치'를 받은 경험이 독일의 민족주의를 자극했고 여러 곳에서─러시아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오스만제국, 아일랜드를 가릴 것 없이─새로운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저항운동의 목표가 예외 없이 민족국가 수립은 아니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서구에 맞서 생겨난 '반식민침략운동' 역시 독립된 민족국가 수립이 목표인 경우는 거의 없었다." "20세기에 진입한 후, 엘리트들이 민족해방이란 명분의 동원능력을 인식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이차적 저항'이 일어났다."(1123-4)


"19세기 유럽에서 제국의 세계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새로운 민족국가의 수는 손가락을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서 독립된 정치적 실체의 숫자는 역사에 전례가 없는 속도로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18세기 중엽, 아프리카, 무굴제국이 해체된 뒤의 인도, 자바섬, 말레이반도에서 각종 형태의 정치체제─왕국, 토후국, 술탄국, 부족연맹, 도시국가 등─는 그 정확한 숫자를 말하기가 불가능했다." "분명한 것은 1800년 무렵 여전히 수천 개를 헤아리던 정치적 실체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한 세기가 지난 뒤에는 프랑스, 영국, 포르투갈, 독일, 벨기에 등이 통치하는 40개 가까운 식민지로 정리되었다. 식민지 열강의 이른바 아프리카 '분할'은 아프리카의 시각으로 보자면 정반대였다. 그것은 분할이 아니라 통치지역의 강제적인 합병과 집중, 떠들썩한 정치 기반의 대청소였다. 당시 아프리카 전체에서 민족국가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1149-50)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는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안정된 민족국가 대 불안정한 제국'이란 관점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념의 뿌리는 민족은 자연스러우며 본원적이지만 제국은 인위적인 권력관계로서 민족이 이탈해야 할 대상이라고 하는 민족주의 사상이다. 고대의 중국과 서방 양쪽에서 제국의 흥망성쇠는 주기성을 갖고 있다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표면현상의 착각이었다." "19세기 유럽인은 승리자의 자세로, 멸시와 애석함의 감성으로 아시아 대륙 제국의 쇠락에 대해 예언을 쏟아냈다. 그들은 국제적인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아시아제국은 자신의 생존을 유지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예언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스만제국의 해체는 최종적으로 1차 대전 이후에야 발생했다." "중국에서는 1911년에 왕조제도가 붕괴했다. 그러나 40년 가까운 혼란을 경험한 뒤 중국공산당은 1949년에 제국의 재건을 성공적으로 실현했다."(1152-3)


"다른 제국과 비교할 때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는 식민지란 개념이 적용되기 어려웠다. 이 제국에는 심지어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처럼) 차별받는 '내부' 식민지도 없었다." "이 제국은 통일성이 결여된 다민족 제국, 역사적 연원이 다른 많은 지역으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그 가운데서 가장 독자성이 강한 지역과 민족은 헝가리였다. 1867년, 헝가리는 반(半)자치왕국의 지위를 인정하는 헌법체제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이중군주제' 제국에 합병되었다. 헝가리는 자신의 양원제 의회와 정부를 가졌다. 이중제국에서 헝가리의 지위는 영국제국 내에서 캐나다 자치령의 지위와 대체로 동일했다(캐나다 자치령도 1867년에 수립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내부통일은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제국은 문화를 통일시키고 동질감을 강화하기 위해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한 적이 없었고 수평방향의 사회통합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제국의 단결은 군주란 상징과 다민족 장교단을 통해 최고 계층에서만 유지되었다."(1180-1)


"비록 단명하기는 했지만 나폴레옹제국은 제국의 가장 전형적인 두 가지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폴레옹은 짧은 시간 안에 제국의 우수한 엘리트집단을 만들어냈다. 그는 이들을 각지로 파견했고 순환근무제를 통해 이들을 관리했다." "나폴레옹제국은 극도로 국가통제주의적인 정치체제였으며,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현대적 직능을 갖추었으나 신민에게는 제도화된 발언이나 정치참여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다른 제국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제국도 피정복 사회의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토착 지배자와 토착 엘리트와의 협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영국 모델에서는 허용된) 최저한도의 형식적인 대표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다음으로, 나폴레옹의 확장계획 전체가 강렬한 문화적 우월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우월감의 바탕에는 혁명시대 이후 세속화된 프랑스 사회가 계몽사상과 문명의 정점을 대변한다는 자신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1184-5)


"1900년 무렵, 식민행동의 방식에 변화가 발생했다. 세기가 교체될 무렵 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정복은 기본적으로 완결되었다. 평화의 시기에 식민열강은 식민통치의 체계화, 비교적 폭력을 적게 사용하는 식민정책의 단계를 열어갔다. 목표는 하나, 프랑스의 식민 이론가가 말한 '가치안정화'(mise en valeur)였다.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제국에서, 특히 동아프리카에서 1905년 이후의 시기를 당시의 식민상 베른하르트 데른부르크의 이름을 따서 '데른부르크시대'라고 부른다." "같은 시기에 '가치안정화'가 가장 철저하게 시행되어서 다른 식민열강의 모방의 대상이 된 곳이 인도네시아였다." "모든 식민세계가 그렇듯이 인도네시아에서도 식민정부는 현지 민중의 교육과 훈련을 중시하지 않았고 1901년 이후의 개혁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력자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부족은─'부족'이란 유럽과 비교했을 때의 표현이다─어쩌면 유럽 식민주의의 최대의 죄악인지 모른다."(1196-8)


"대형 플랜테이션과 특허 회사의 활동 지역은 통상적으로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공간이었다. 이러한 일종의 '사적인 제국'에서는 엘베강 동쪽의 융커의 장원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의 법률은 간접적으로만 작용했다. 선교사들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심지어 법률로 보호받는 영지를 세울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었다. 특허회사가 아시아에서 철저하게 몰락한 뒤로(1858년에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마지막으로 해체되었다) 아시아에는 새로운 반(半)관영 식민 대리기구가 생겨났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남만주철도주식회사(남만철, SMR)였다. 남만철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에 만주의 남단(요동반도)과 러시아가 부설한 현지 철도의 남단을 부분 소유했다. 이 회사는 일본정부의 지원을 받는 식민권력이 되었다. 이 회사가 세운 유사 이래 경제적으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철도 식민지가 중국 동북의 경제 핵심지역이었으며 이곳은 또한 동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규모가 큰 중공업 기지이기도 했다."(1201)


"19세기에 영국제국은 영토의 면적이나 인구의 규모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가장 큰 제국이었다. 영국제국은 본질적으로 다른 제국과 달랐다. 영국은 제국형 민족국가라 할 수 있었다. 내부 상황을 보더라도 제국시대 이전부터 영국은 정치적으로 통일되고 확정된 영토를 가진 민족국가였다. 영국의 정치가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민족의 이익을 제국의 이익으로, 또는 제국의 이익을 민족─네 개의 다른 민족으로 구성된 연합체이기는 하지만─의 이익으로 정의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따라서 영국은 어느 정도는 민족주의가 없는 민족국가였다. 영국은 제국적 민족주의라는 역설로 가득하다." "19세기를 통틀어 영국과 나머지 세계의 관계는 문명의 전파자라는 강렬한 사명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전제적인 권력의 압박을 받으면서 미신에 휘둘리고 있는 비기독교 민중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 같은 관용적인 수사(修辭)는 언제나 수많은 지지자를 불러 모을 수 있었다."(1213-5)


"영국은 인도주의적 개입이란 이념의 출생지였다. 영국인─특히 존 스튜어트 밀─이 만들어낸 인권문제에 관한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논제로서 시의성을 잃지 않고 있다. 그 대표적이고 중요한 사례가 바로 노예무역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투쟁이었다. 1807년, 노예제 폐지파는 영국 의회에서 마침내 승리했다. 그 뒤 30년 동안 제3국의 노예운반선을 나포하여 실려 가는 노예를 석방하는 일이 영국 해군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런 포괄적 개입주의는 영국의 전략적 이익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일종의 부대효과에 지나지 않았다. 슘페터는 영국의 목적은 해상 패권의 쟁취가 아니라 〈해상의 교통경찰〉이 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영국이 세계를 향해 지니고 있던 태도의 이념적 핵심은 '문명화의 사명'(civilizing mission)이었다. '문명화의 사명'은 유아독존적 광기가 아니라 실질적인 수단을 통해 행동으로 옮겨졌다."(1215)


"영국제국이 로마제국·18세기 청제국과 다른 점은 문명 세계 전체(orbis terrarum)를 통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제외하면 영국은 어떤 대륙에도 대적할 자가 없는 독점적 제국을 형성하지 못했다. 언제 어디서든 영국은 기타 강대국의 도전과 경쟁을 마주해야 했다. 영국제국은 동질적인 영토적 집합이 아니라 중추형밀집점(中樞形密集点)과 통제하기 어려운 중간지대가 함께 어우러져 구성된 체제였다. 2차 대전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미국과 다른 점은 미국은 기술적으로 지구상의 어느 곳이든 폐허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19세기의 영국제국은 지구의 어느 곳이든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군사적 개입능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1849년, 영국의 일부 민중이 헝가리혁명을 돕기 위해 개입하라고 호소했으나 당시로서는 개입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영국은 어느 정도는 해상의 헌병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세계경찰'이 될 수 없었다."(1232)


9장 강대국체제, 전쟁, 국제주의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


"19세기 말에 상호 대립적인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하나는 모든 국제관계는 단일한 세계체제의 한 요소로 보아야 한다는 확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유럽 정치와 주변부를 개념적으로 분리해야 한다는 (전부터 내려오는) 주장이었다. 제국주의 열강은 세계 여러 장소─아프리카의 모든 지역, 중국,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심지어 1902-1903년 겨울에는 베네수엘라─에서 부딪쳐 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나 제국의 충돌은 모두 해결될 수 있었거나 그 영향이 충분히 억제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제국주의 열강이 불문율인 '놀이규칙'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 '놀이규칙'이란 어떤 제국주의 국가의 야심이 좌절되었을 때 그 국가가 다른 지역에서 '보상'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거나 용인하는 것이었다. 제국의 충돌과 대립은 유럽 각국 사이에 항구적인 불신감을 낳았지만 어떤 충돌도 유럽에 주는 영향이 직접적으로 전쟁을 촉발할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다."(1291)


"1차 대전이 폭발하기 전 수십 년 동안 유럽의 국제체제가 흔들린 것은 외부 영향 때문이 아니었다." "테오도르 쉬더는 1914년 이전 반세기 동안 다섯 강대국으로 구성된 유럽의 국제체제가 하나의 집합체로서 '세계의 패권'이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중요한 해외 이익의 균형은 모두가 예외 없이 쌍방의 협조하에 실현되었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집단행동은 오직 한 차례뿐이었다. 1900년 여름, 8국 연합군이 의화단에게 포위된 공사관 구역을 포위망을 뚫고 구조했다. 연합군 군대 가운데서 일본과 미국 군대가 주도 작용을 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참여는 이 제국의 역사에서 최초의 가장 야심찬 외교행동이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유럽의 제국주의는 개별 제국주의의 집합에 지나지 않았다. 5대 강국이 대륙을 초월한 강국이 아니라 유럽의 강국으로서 등장했을 때 유럽의 국제체제는 5대 강국 사이에서 작동했다. 이 체제는 '국제정치'의 기능을 갖고 있지 않았다."(1291-2)


"남아메리카에서 각국이 독립한 뒤에도 정치지도는 큰 변화가 없었다. 지역 전체에 별다른 특징이 없는 국가들이 분포되어 있었고 그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국가로서의 위상을 찾고 있었다. 어느 국가도 (포르투갈 배경을 갖고 있어서 다른 나라와는 구분되는 브라질을 포함하여) 남아메리카 대륙의 패권국가로 올라설 능력이 없었다." "열강과 이들 국가 중의 개별국가는 후견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것이 좀더 넓은 범위의 질서로 발전하여 패권적 지위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지나간 독립전쟁 시기에 지녔던, 미국의 모형을 본받아 남아메리카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연방을 만들겠다던 꿈을 기억하고 다시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라틴아메리카 세계에 진정한 강대국이 없었다는 것은 약점이라기보다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라틴아메리카 세계에는 (세기말에) 점차 강대해지고 있던 미국에 맞설 군사적 능력을 가진 나라가 없었다."(1298)


"중국제국은 수백 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를 만들고 이 질서를 정치적으로 효율적으로 운용해왔다. 이 세계질서는 근대 유럽이 다중심 국제체제와는 달리 고도로 발달한 단일중심체였다." "이 세계질서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구성원과 구성원 상호 간에 지켜야 할 명확한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질서는 광의의 국제체제였다. 그러나 이 체제는 전체 배치가 완전히 중국 조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유럽의 국제체제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개별 구성원은 주권과 평등한 관계를 제약 없이 누린다는 사상은 근본적으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등급의식은 중국인의 국가인식 속에 깊이 자리 잡아서 종주국-속국 관계를 관리하는 일에서 뿐만 아니라 각종 행동양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인, 인도인, 말라야인과 비교했을 때 중국인은 19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국제질서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1303-4)


"20세기 후반과 비교할 때 19세기에 강대국의 지위와 군사적 성취는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일본처럼 경제적 거인이 사실상 군사적 비중을 갖지 못하는 경우는 1900년 무렵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은 내전이 끝나고 경제가 빠르게 발전할 때에 외교적 위신이 크게 올라갔지만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야 강대국의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1895년의 전쟁에서 중국을 이기자 일본은 동아시아의 지역적 강국으로서 존중받았지만 1905년 러시아를 꺾은 뒤에야 강대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문화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던 독일은 1871년에 들어와 갑자기 강대국으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열거한 사례와는 반대로, 중국, 오스만제국, 스페인은 군사적 재난을 겪은 후 세계로부터 존경받던 강대국의 자격을 상실했다." "이렇게 세계를 선도하던 국가의 명단에 변화가 생긴 배후에는 조직된 폭력의 역사의 보편적 추세가 자리 잡고 있었다."(1307-8)


"19세기 유럽의 국제관계를 지배하는 이론 중의 하나는 일정한 규칙과 질서하의 세계평화란 관념에 뿌리를 둔 좀더 오랜 이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이기적 이성의 원칙에 뿌리를 둔 이론이었다. 1814-15년의 빈체제는 이 두 가지 논리를 교묘하게 결합하여, 국제체제 안에서 상호 합의된 충돌 억제절차를 통해 개별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19세기 유럽의 확장 과정에는 영국의 '보호국' 법제를 추종하는 경향이 있었다. 원래 보호국 제도란 한 국가가 종주국에게 외교관계의 후견인 역할을 요청하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 식민과정에서 보호국의 설치는 〈일종의 은폐된 형식의 병합〉이었다. 이런 법률형식이 환영받은 이유는 종주국으로서는 각종 경로를 통해 보호국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면서도 피점령국을 관리해야 하는 책임은 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3국(즉, 다른 하나의 종주국)이 보호국 관계의 수립에 대해 항의하지 않는다면 국제법상 장애는 아무것도 없었다."(1327, 1343)


"1815-70년이란 시기는 외교문제에 있어서는 좁은 범위의 귀족 엘리트 전문가 집단이 독점한 고전적인 권력 개입의 시기였다고 인정되고 있다. 그전에는 왕조의 이익이 '현실주의' 외교정책의 길목을 막고 있었고 외교의 전문직업화는 아직 걸음마 단계였다. 그 후에는 신문매체와 유권자의 정서가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나폴레옹 3세는 대중의 정서를 조작하는 위기를 조성하고 식민지(베트남)를 점령함으로써 국내의 사기를 높였다. 외교정책에 있어서 누구의 간섭과 비평도 허락하지 않았던 비스마르크도 때로는 대중동원이란 카드를 사용했다. 예컨대,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프로이센을 상대로 한 선전포고는 비스마르크에게 애국주의의 이름을 빌려 독일인을 단결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어디서나 민족주의와 언론매체가 개입하는 상황에서 대중의 정서적 반응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대중을 동원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어갔다."(1344-5)


10장 혁명 (필라델피아로부터 난징시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른 어떤 시기와 비교하더라도 19세기의 정치는 혁명적 정치였다. 19세기의 정치는 '오래된 권리'를 보호하지 않았으며, 미래를 바라보며 국부적인 이익(특수 '계층' 혹은 계층 연맹의 이익)을 민족 전체의 이익 또는 더 나아가 인류 전체의 이익으로 끌어올렸다 유럽에서 '혁명'은 정치사상의 핵심적인 이념이 되었으며 처음으로 '좌익'과 '우익'을 나누는 잣대가 되었다. '긴' 19세기 전체가 혁명의 시대였다." "미국이 태어난 1783년은 국가의 새로운 형태의 초석이 놓인 해였다. 이런 결과를 가져온 혁명의 물결은 일찍이 18세기 60년대에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본질을 말하자면 혁명의 시대는 바로 이때 막을 열었다. 그렇다면 19세기는 한 차례의 혁명이 시대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졌을까 아니면 여러 차례의 혁명이 발생한 시대였을까. 어느 쪽 해석도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역사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관점은 단수의 혁명을 선호하고 구조를 중시하는 관점은 복수의 혁명을 지지한다."(1389-90)


"미국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을 경험했거나 주도한 사람은 새로운 혁명의 독자성을 강조한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1776년과 1789년 필라델피아와 파리에서 발생한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식민지 13개 주가 영국 왕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프랑스에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국민제헌의회를 구성했다. 이렇게 역사는 전례가 없는 연동상태를 연출했다. 이전의 폭력적 변혁이 새로운 병에 오래된 술을 담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래서 결국 이전으로의 복귀였다고 한다면,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시대의 경계를 부수고 직선형 진보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혁명은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 지역적 사건이다. 더 나아가 1776년과 1789년의 혁명이 우연히 발생했기 때문에 혁명이념이 태어났다. 이후의 모든 혁명은 이러한 이념의 자양분을 흡수하며 자라났다. 달리 말해 혁명은 모두가 모방이었다."(1390-1)


"혁명에 대한 이러한 철학적 정의는 협소한 관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의 목적과 그 철학적 근거를 따지거나 역사철학에서 말하는 '대혁명'의 특수한 작용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관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건과 실제적인 결과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우리는 더 넓은 공간에서 더 많은 혁명을 만날 수 있다. 혁명은 특수한 영향을 미치는 집단적인 항의 사건이며 이전 정권의 집권자 그룹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정치제도의 변경이다. 사회과학자의 신중한 표현을 빌려서 정의한다면 혁명은 〈신엘리트가 성공적으로 구엘리트를 전복시키고(통상적으로 상당한 폭력과 대중 동원을 통해) 정권을 탈취한 후 사회구조와 함께 권위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사건이다. 이 정의는 역사철학의 시각에서 혁명을 논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속에 근대성의 열정은 보이지 않는다. 거의 모든 지역에서 어느 시기에나 이런 의미의 혁명은 있었다."(1391-2)


"역법 상의 19세기(1800-1900년)는 통상적인 혁명사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 세기에 북아메리카와 프랑스에서 혁명의 성과가 나타났지만 '대'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1800년 무렵 혁명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그 후에 일어난 모든 일은 영웅적인 시작의 모방이거나 무기력한 복습이었다. 또는 비극이 끝난 뒤의 광대극이거나 1789-94년에 진행되었던 위대한 봉기를 소란스러운 소규모로 흉내낸 것에 불과했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역사는 1917년 러사이에서 다시 한번 전례가 없는 극을 연출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19세기는 혁명의 시대라기보다는 반항의 세기였다. 19세기에 저항은 보편적으로 발생했으나 국가라는 정치무대에서 임계점을 넘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1849-1904년(즉, 1차 러시아혁명 기간)에는 유일한 예외인 1871년의 실패한 파리 코뮌을 제외하면 유럽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혁명적 상황'은 결국 '혁명적 행동'으로 전환되지 못했다."(1394)


"그러나 19세기에는 정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상황이 분명히 존재했다." "1868년의 메이지유신은 가장 급진적인 '위로부터'의 혁명적 실험이면서 혁명이란 명칭을 거부했다." "메이지유신은 대다수 유럽 정치평론가들의 시야 밖에서 일어났고, 그와 관련된 지식은 유럽인의 혁명과 개혁에 관한 이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일본의 엘리트들은 천황 직접통치의 외피를 걸친 정치체제 개혁을 합법화하기 위해 현실에서 현존 제도를 철저히 타파하려는 일련의 조처를 '유신' 또는 '회복'으로 위장했다." "이처럼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예방하거나 보편적인 원칙을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빠른 시간 안에 효율을 높이려는 혁신 방식이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은 미국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각자의 발원지에 미친 영향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역사적 배경은 불공정과 언론자유 결핍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부국강병'을 통해 전 지구적 경쟁에 참여하기 위해 성장 중인 국가의 목표였다."(1397)


"대략 1765-1830년 무렵에는 몇몇 지역에서 혁명적 사건들이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기를 혁명 밀집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그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건의 여파는 모든 대륙에 미쳤다. 이처럼 상호 영향을 미치는 혁명의 발원지는 미국과 유럽대륙에 있었다. 그래서 '혁명적인 대서양지역'이란 개념이 합당한 것이다. 혁명이 두 번째로 집중적으로 발생한 때는 1847-65년이었고 이 기간 중에 유럽혁명(1848-51년), 중국의 태평천국운동(1850-64년), 인도의 민족봉기(1857년), (특별한 사례로서) 미국의 내전(1861-65년)이 있었다." "세 번째 혁명의 물결─1905년 러시아, 1905년 이란, 1908년 터키, 1911년 중국─이 유라시아대륙을 휩쓴 때는 세기가 바뀐 뒤였다. 1917년 2월에 세계대전이란 특수한 형세에서 태어난 제2차 러시아혁명도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이 범주에 들어간다. 세기 중반과 비교할 때 이 시기 개별 사건 사이의 상호 영향은 좀더 커졌다."(1402-3)


"1804년 1월 1일, 독립을 선포한 아이티혁명은 자료도 부족한 데다 화제가 될 만한 극적인 사건도 알려진 게 없어서 오랫동안 혁명사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노예해방 주장을 제외한다면 아이티혁명에서 비롯된 보편적 호소력을 갖는 정치사상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프랑스령 카리브해 지역이 처음부터 전체 대서양 지역의 혁명담론인 자유란 주제를 공유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일부는 계속 노예를 소유했고, 1787년의 미국 헌법은 물론이고 그 후 헌법수정안에서도 노예제 문제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처음에는 인종차별 금지가, 이어서 노예해방의 강령이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완고한 착취제도의 피해자로서 흑인과 유색인종은 프랑스대혁명의 관념, 이상, 상징을 받아들였고 나아가 1794년의 선언이 밝힌 대로 '피부색을 나누지 않는' 새로운 세계에서 시민의 신분으로 자신의 위치를 찾았다."(1422-3)


"1778년 이후의 북아메리카 반란자들과는 달리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자유투사들은 외부로부터 직접적인 군사원조를 얻을 수 없었고 미국의 지지도 없었다. 아이티혁명 과정에 있었던 일시적인 외부 강대국의 직접적인 개입도 없었다. 대서양 해역 전체를 장악한 영국 해군이 보호막의 역할을 해주고는 있었지만 다른 혁명과는 달리 크레올인과 복원된 스페인 왕조 대표 사이의 결정적인 군사적 충돌에 제3자의 개입은 없었다. 그러나 가볍게 보아서 안 될 것은, 처음(즉, 1810년 무렵)에 프랑스가 스페인 식민지를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스페인 왕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기꺼이 나폴레옹의 백성이 되고자 했던 라틴아메리카인은 없었다. '개인적인' 지지가 중요한 군사요인으로 작용했다. 미국 해적은 정부의 묵인하에 스페인 함선을 공격했다. 영국 상인은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이것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장기적인 투자였다."(1430-1)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독립혁명이 끝나자 곧바로 1830-31년의 유럽혁명이 이어졌다. 혁명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과거를 돌아보면서 동시에 미래를 바라보았다.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독립혁명이 혁명시대의 종결로 분류된다고 한다면 1830-31년의 유럽혁명은 혁명시대의 한 부분으로 분류된다. 1830년 7월 말 파리에서 발생한 수공업자들의 폭동으로부터 촉발된 혁명적인 상황이 프랑스 전역, 네덜란드 남부(이 사건이 끝난 후 이 지역은 독립국 벨기에가 된다), 이탈리아, 폴란드, 독일연방의 일부 가맹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결과는 이렇다 할 만한 게 없었다. 유럽에서 상승세를 탄 왕정복고 세력은 1815년 이후 각처에서 약화되었으나 정치적으로 패배한 곳은 프랑스뿐이었다. 그런 프랑스에서조차도 정치적 활동공간을 넓힌 주요 사회세력은 '저명인사'라고 부를 수도 있고 '자유주의 부르주아'라고도 부를 수 있는 집단이었으며 이들이 7월혁명 이전 엘리트계층의 핵심을 형성했다."(1433-4)


"영국도 1830년의 유럽혁명운동에 참여했다. 1830년 여름, 국왕 조지 4세가 세상을 떠난 직후 프랑스로부터 7월혁명의 소식이 들려왔다. 1832년 7월, 극단적으로 대립을 겪으면서 의회는 일련의 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시기에 영국은 19세기 이래 가장 심각한 내정의 위기를 경험했다. 영국이 혁명 앞에서 가장 취약했던 시기는 1790년대나 1848년이 아니라 20년 넘게 지속된 전쟁이 종결된 뒤의 15년 동안이었다. 나폴레옹전쟁이 남긴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초기 공업화의 후유증이 현행 체제에 대한 불만을 극대화시켰다." "최종적으로 휘그당 출신의 찰스 그레이 수상이 웰링턴 공작의 도움을 받아 통과시킨 개혁 법안은 남성 투표권자의 범위를 조심스럽게 확대하고 신흥 공업도시의 의석수를 늘렸다. 그러나 법안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안이 통과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래로부터의 혁명보다 먼저 발생했던 것이다."(1440-1)


"경제사학자들이 공업화의 시대를 19세기까지 연장한 뒤로 혁명의 시대는 거대한 역설을 보았다. 에릭 홉스봄이 앞장서서 퍼뜨린 이중혁명─프랑스의 정치혁명, 영국의 산업혁명─이라는 놀라운 이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정치적 근대는 혁명시대의 위대한 문건들,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의 「독립선언」(1776), 미국의 「헌법」(1787),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 프랑스의 식민지 노예제 폐지법령(1794), 볼리바르의 앙고스투라─앙고스투라 회의는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독립전쟁 중에 시몬 볼리바르가 소집하여 1819년 2월 15일에 앙고스투라(현 베네수엘라의 시우다 볼리바르)에서 열린 회의다─연설(1819)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러한 문건들이 등장했을 때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아직 혁명적인 충격을 주고 있지도 않았다. 대서양혁명의 동력은 공업화에 따른 새로운 사회적 충돌이 아니았다. 대서양혁명이 '부르주아'적 특징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특징은 공업화와는 무관한 것이다."(1444)


"1900년 이후 유라시아에서 발생한 네 혁명의 목표는 서유럽에서는 존재한 적이 없는 구식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러시아와 아시아에는 법률로서 권력을 제한하는 전통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서유럽과 비교할 때 이 지역 국가에서 그런 전통의 발전은 매우 빈약했다. 귀족과 토지를 소유한 엘리트집단의 세력은 서유럽(또는 일본) 봉건제도처럼 통치자의 절대권력을 견제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던 적이 없었다. 이 지역 각 국가의 정치체제에서 군주의 지위는 루이 16세나 영국의 조지 3세보다 더 굳건했다. 본질적으로 이 지역 국가의 정치체제는 통치자가 신분대표회의나 의회의 의견을 고려할 필요 없이 최종적인 발언권을 갖는 전제체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통치자가 실제로 권력을 행사할 때 언제나 독단으로 전횡하지는 않았다. 다른 체제와 비교할 때 이런 체제에서 권력의 행사는 많은 부분이 왕좌에 앉은 인물의 개인적 품성과 소양에 따라 결정되었다."(1482)


# 유라시아의 네 혁명

1. 러시아 혁명(1904-07)

2. 헌정(憲政)혁명이라 불리는 이란혁명(1905-06)

3. 청년터키당이 주도한 오스만제국혁명(1908)

4. 중국의 신해혁명(1911)


"혁명가들이 현행 통치제도에 맞설 때 사용하는 무기─또한 각국 혁명가들의 공통자산─는 입헌주의 사상이었다." "네 혁명은 각자의 성문헌법을 만들어냈다. 서방의 표본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헌법을 만든 사람들은 본국 정치문화의 특성에 맞는 헌법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므로 입헌제는 결코 유럽에 대한 단순하고 기회주의적인 모방이 아니었다." "널리 찬양받는 표본은 1889년에 제정된 일본의 헌법이었다. 이 헌법은 외국의 경험을 참조하고 본국의 현상을 결합한 표본적인 헌법이었다. 일본은 한 국가가 흥기하는 과정에서 헌법이 국가통일의 정치적 상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헌법은 국가기구의 조직체계에 관한 계획일 뿐만 아니라 인민이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문화적 성취이기도 하다. 일본은 헌법 내용에서 유럽의 인민주권주의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일반적으로 말해 유럽과 흥기하는 아시아 국가의 새로운 헌법전통의 가장 큰 차이가 이것이었다."(1484-5)


"네 혁명의 발생은 모두 국제 환경과 관련이 있었다. 네 나라의 당시 정권은 한결같이 심각한 군사적 패배 또는 외교적 실패를 겪고 있었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참패했고, 중국은 1900년 의화단운동으로 8국 연합군의 침입을 맞고 있었고, 오스만제국은 발칸지역에서 다시 좌절을 겪고 있었고, 이란에서는 영국과 러시아가 이란 영토 안에서 각자 세력권을 넓히고 있었다. 이들 네 나라는 다 같이 외교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혁명가들은 개혁을 통해서, 더 나아가 현존 정치체제의 폐지를 통해서 경제적 빈곤을 탈피하고,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민중의 정치참여를 확대하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또한 혁명가들은 민족적 자신감을 회복하고, 열강과 일부 자본주의 국가의 무리한 요구를 물리치기 위해 강대한 국가를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러시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구상이었다. 러시아는 나머지 세 나라와 비교할 때 그 자신이 호전적인 제국이었던 것이다."(14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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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혁 1 : 19세기의 역사풍경 한길그레이트북스 176
위르겐 오스터함멜 지음, 박종일 옮김 / 한길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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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이 책은 한 시대의 초상화이다. 이 책은 세계사의 한 세기를 완벽하고도 백과전서식으로 다룬 것처럼 가장할 의도는 없으며, 상세한 자료를 갖춘 해설서로서 독자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이 책과 베일리의 저서(『현대세계의 탄생』)는 다른 저서들보다 앞서서 지역을 국가, 문화 또는 대륙으로 나누는 방식을 버렸다. 두 저작은 다 같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이것에 관한 설명을 위해 별도의 장을 두지 않고 저서 전편을 통해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두 저작은 다 같이 베일리가 그의 영문판 부제에서 언급한 '세계적 연결'(global connections)과 '세계적 비교'(global comparison)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없다고 가정한다. 두 가지는 서로 결합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나아가 모든 비교가 엄격한 역사적 방법론을 통해 증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연결과 비교를 적절히 통합할 수 있다면 때로는─반드시는 아니지만─현실과 동떨어진 비교보다 훨씬 더 많은 수확을 가져올 수 있다."(30-1)


제1부 근경近景


1장 기억과 자기관찰 (19세기의 영구화)


"오늘날, 리스본에서 모스크바에 이르기까지, 19세기에 지어진 오페라극장은 여전히 관중으로 넘쳐나고 그곳에서 상연되는 작품도 대부분이 19세기 작품이다. 19세기 중엽, 오페라는 세계 문화의 수도라고 불리는 파리에 '상륙'했다. 1830년 무렵 파리의 음악사는 바로 세계의 음악사였다. 파리 오페라극장은 수많은 경쟁자들이 몰려들어 음악가들의 '자석의 성'(Magnetstadt)이란 이름을 얻었다." "오페라는 바다 건너 식민지에까지 전해졌다. 프랑스문화의 우월성은 식민지에 세워진 당당한 오페라극장 건물을 통해 입증되었다. 가장 웅장한 건축은 1911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도 하노이에 세워진 오페라극장이었다." "오페라가 북아메리카에 뿌리내린 시기는 좀 더 빨랐다. 1859년, 뉴올리언스에서 프랑스 오페라하우스가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1883년에 완공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와서는 세계 정상급 오페라극장이 되었고 동시에 미국 상류사회의 자기과시 무대가 되었다."(76-7)


"19세기에 들어와서 이전의 어떤 세기보다도 기록물이 중요해졌다. 유럽에서 19세기는 국가가 모든 기록을 차지한 시대였다. 이런 목적으로 세워진 국가 기록보관소는 통치행위의 유적이 집중적으로 보관된 장소였다. 기록보관소와 함께 직업과 사회적 신분의 하나로서 기록 관리원과 전문적으로 문헌을 연구하는 공공기록 역사가가 등장했다." "기록보관소는 유럽인의 발멸품은 아니지만 19세기에 유럽만큼 문헌자료의 수집에 관심을 가졌던 다른 지역과 나라는 없었다. 중국에서는 문헌사료의 보존은 오랜 옛날부터 국가의 직무로 인식되어 왔으나 개인이 수장에 흥미를 보인 경우는 드물었다. 과거든 현재든 극소수의 비국가 단체만 자신의 기록보관소를 보유했다." "오스만제국의 통치자들은 국가의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헌기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서 일찍부터 많은 양의 문자자료가 생산·보존되어 왔고 이를 관리 연구하는 전문가집단이 양성되었다."(82-4)


# 기록보관소와 유사한 사례로 공공도서관, 공공(혹은 국가)박물관, 백과전서 편찬 등이 있다.


"19세기 신발명품의 하나가 세계박람회였다. 이것은 파노라마식 시각과 백과전서식 기록의 가장 역동적인 결합이었다. 세계박람회의 시발은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만국공업박람회(1851)였다." "이런 대형 박람회가 세계에 미친 영향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방면에서 나타났다. 하나는 박람회가 보여준 풍부한 상징성이다. 박람회는 세계평화와 사회의 조화를 추구하는 시대의 시작, 전 세계를 향하여 영국의 경제적·기술적 우월성을 확인시키는 기회, 야만과 혼란을 이긴 제국 질서의 개선곡 등으로 인식되었다. 다른 하나는 박람회에서 적용된 정확한 물품 분류법이다. 박람회는 전시품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강(綱, class), 유(類, division), 아류(亞類, subdivision) 등으로 분류했다." "이 분류법의 배후에는 시간의 종적계층화(縱的階層化)란 개념이 숨겨져 있었다. 이것은 모든 인류가 다 같이 높은 단계의 문명세계에 진입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박람회라는 기회를 이용해 펼치고자 하는 의도였다."(94-5)


"이 시기의 주요한 사상 유파─실증론, 역사론, 진화론─는 지식의 누적성과 비판성에 대해서는 일치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인식과 지식이 가진 공공적 의의에 대한 인식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지식은 교육의 기능을 가져야 함은 물론이고 실용적 가치도 가져야 한다. 새로운 형태의 매체가 등장하자 새로운 사물과 낡은 사물이 서로 융합될 수 있었다.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문화에서도 학문이 이와 유사한 방향으로 발전한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일부 문명에서는, 예컨대 일본과 중국에서는 교육계의 엘리트들이 유럽의 새로운 이념과 제도가 전파될 때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더 나아가 주도적으로 새로운 내용을 보태기도 했다." "19세기는 기억이 잘 보존된 시대였다. 지금도 19세기가 선명한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세기에 탄생한 수장과 전람의 제도와 기구는 그것들이 창설되던 당시에 설정된 여러 가지 목표와 제약을 넘어서 지금까지 여전히 번성하고 있다."(99)


"19세기가 남긴 또 하나의 중요한 유산은 19세기 사람들이 그 시대에 관해 남겨놓은 방대한 서술과 해석이다." "사람들이 사회 저층의 생활조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사회보도'와 '실증조사'라는 새로운 연구 분야가 등장했다. 보수적이거나 급진적이거나를 따질 것 없이 모든 학자가 부르주아지─대다수의 학자들 자신이 이 계급 출신이었다─를 비판의 확대경 아래에 놓았다." "사회를 정확하게 관찰하고 문학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파노라마식 관찰이다. 프랑스대혁명 전야에 세바스띠앙 메르시에가 내놓은 『파리화집』(파리의 도시생활을 묘사한 12폭의 화집)이 이런 관찰방식의 전범이 되었다. 메르시에는 철학적 방식으로 파리를 묘사하기를 거부했다. … 엥겔스는 1845년에 출판된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황』에서 〈대영제국 무산계급의 전통적인 환경〉을 묘사했다." "엥겔스가 저서에서 묘사한 개인과 그들의 생활상황은 실명과 함께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신뢰성과 생동감을 더해주었다."(101-3)


# 사회보도와 유사한 사례로 사실주의 소설, 여행문학 등이 있다.


"지리학─무수한 여행과 끝없는 측량을 동반한─의 시야는 세계를 보면서 뿌리는 지역에 내려야 하는 과학이다. 지리학의 한 분파인 경제지리학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산업화 과정의 부산물로서 생겨났고 식민 지리학은 서방의 약탈적인 영토 확장의 동반자로서 생겨났다. 훨씬 더 중요한 자기관찰 기관으로서 최근애 생겨난 것이 사회학이다. 사회학은 이론적 바탕을 갖춘 문제 제기를 통해 이왕의 사회보도를 초월하면서도 동시에 사회현상의 실증적 묘사와의 관련성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경제학의 영역에서는 애덤 스미스의 획기적인 저작 『국부론』(1776)이 나오기 전에 이런 관련성이 이미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추상적인 이론 모델을 수립하는 추세는 1817년 리카도의 저작에서 그 싹을 틔웠다. 진정한 의미에서 지배적 주류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주관적 효용을 표현하는 수학적 이론과 시장균형 이론이 오스트리아, 스위스, 영국에서 거의 동시에 제시된 1870년 이후에 나타났다."(115)


"19세기는 '현대' 통계학의 창립단계였다. 통계는 무작위적인 데이터의 집적이 아니라 주도면밀하게 데이터를 수집하고 수학적인 처리를 거친 결과이다. 국가는 꾸준히 통계업무를 늘려왔다. 복잡한 통계업무를 처리할 조직적인 역량을 정부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계는 사회가 지속적으로 시행하는 자기감독(self-monitoring)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방면에서 인간이 지나치게 멀리 나갔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일부 국가가 쌓은 통계지식은 학술과 행정 영역에서 실제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을 훨씬 초과했다. 통계학은 이때부터 정치적 수사가 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통계학자가 부득이한 상황에서 만들어낸 어떤 통계개념은 국가 관료의 손안에서 도구가 되었다. 기술적인 필요에서 만들어 냈던 사회통계의 범주─계급, 계층, 카스트, 인종─는 행정관서의 편의대로 사회의 모습을 빚어내는 권력이 되었고, 사실상 사회의 인식 자체를 규정짓는 권력이 되었다."(119, 126)


"19세기에 사실주의 소설, 통계학, 사회에 대한 실증적 연구보다 더 널리 퍼진 것이 신문이었다. 신문업이 뿌리를 내린 곳이면 그곳의 정치적 소통 환경에는 즉시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언론자유에 대한 요구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변혁을 추진하는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 "1789년의 '인권과 시민권 선언'은 〈사상과 관점의 자유로운 표현〉을 〈인류의 가장 귀한 권리의 하나〉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천이란 면에서 보자면 이 선언은 당시에는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 제2제국(1851-70년)에서 집권자들은 처음에는 신문·잡지와 서적 출판에 대한 통제의 강화와 탈정치적 개조를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60년대 이후 국가가 준의회제로 전환되면서 출판물에 대한 통제는 점차 완화되었다. 제3공화국에 들어와 파리코뮌 실패(1871) 후의 국가테러 수준의 억압정책이 폐지(1878)되고 나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공공 공간이 탄생했다."(127, 131-2)


"마지막으로, 19세기는 표면적 세계에서 발생한 현상을 기록하기 위해 광학과 화학 기술을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생생하고 진실한 영상기록이 세상에 나온 그 순간을 경계로 하여 전체 19세기는 둘로 나뉘어졌다. 1827년에 세상을 떠난 베토벤의 모습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1849년에 세상을 떠난 쇼팽의 수척한 모습을 사진을 통해 알고 있다. 슈베르트는 초상화로 후세에 모습을 남겼지만 로시니는 그보다 5년 연상인데도 더 오래 살았기 때문에 위대한 사진작가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찍은 초상 사진을 남겼다." "이 시기에 회화와 사진은 대부분의 경우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장에서 찍은 생생한 사진들, 즉 살아 있거나 죽어가는 군인들의 실제 모습은 영웅주의를 주제로 한 전쟁 회화가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표지였다. 1888년에 값싸고, 휴대하기 쉽고, 조작도 간편한 코닥(Kodak) 필름 사진기가 나와 인류의 시각 기록을 위한 새로운 수단을 제공했다."(147-9)


# 뤼미에르 형제와 기술자 쥘 카르팡티에는 움직이는 영상 '시네마토그라프'를 1895년에 처음 공개했다.


2장 시간 (19세기는 언제인가?)


"나의 19세기는 몇 년 몇 월에 시작되어 몇 년 몇 월에 끝나는 시간의 연속적 통일체가 아니다. 내가 흥미를 갖는 역사는 백 년 또는 그보다 긴 시간에 걸쳐서 〈이리하여······그 뒤로······〉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서사적 선형적 과정이 아니라 다양한 전환과 변화의 과정이다." "모든 역사적 변화의 시작과 종결은 여러 시점에서 발생한다. 그 시간적 연속성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변화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앞선 역사 발전단계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초기 근대'라고 하는 표현이 그 한 예다." "둘째, 19세기는 지금 이 시대의 '사전사'이다. 19세기에 시작된, 또는 19세기적 특징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역사적 변화가 1914년(또는 1900년)이 되자 일시에 멈춰버린 사례는 없다. 따라서 이 책에서 나는 의도적으로 규범을 무시하고 시선을 20세기로 향할 것이며 때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까지 시야에 포함시킬 것이다. 19세기는 기나긴 역사의 발자취와 융합된, 역사 '속의' 19세기다."(196-7)


"하나의 시대정신(Zeitgeist)이 한 시대의 삶의 모든 양상을 표현한다는 신비스러운 관념에 동의하지 않았을 때 역사적 시대구분은 '문화영역에서의 시간의 다양성'이란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정치사의 중대 사건과 경제사의 중요 전환은 시간적으로 겹치지 않는다. 예술사에서 하나의 예술사조가 시작하거나 끝나는 시점은 일반적으로 사회사에서 새로운 발전이 생겨났다고 생각되는 시점과 관련이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 정치적 대사건이 줄 수 있는 도움은 미미할 뿐이다. 20세기 이전에는 전체 인류사에 획을 긋는 연도는 없었다. 역사를 뒤돌아 보건대 세계사적 영향을 미친 프랑스대혁명도 그 시대에 미친 영향을 보면 중간 규모 유럽국가의 군주가 왕위에서 쫓겨나 단두대로 보내진 사건이었을 뿐 세계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혁명이) 외부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프랑스 내에 국한된 혁명적 강령과 정책이 아니라 그 강령이 군사적 확장을 통해 전파되는 과정이었다."(211-3)


"1차 대전이 폭발했을 때도 지구상의 많은 지역에서는 초기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1918년 전쟁이 끝났을 때 세계적인 위기가 찾아왔다. 더욱이 독감이 세계를 휩쓸자 형세는 완전히 바뀌었다. 겨우 몇 달 사이에 모든 대륙의 생산자와 판맨자가 뉴욕 주식시장의 폭락이 불러온 충격을 느꼈다. 처음에는 1937년 7월 중국과 일본에서, 다음으로는 1939년 9월 러시아 서쪽의 유럽지역에서(독일의 폴란드 침공),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1941년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고 일본이 미국을 습격했을 때야 2차 대전의 시작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라틴아메리카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에 미친 영향은 1차 대전 때의 정도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1945년 이전에는 세계'정치'사에서 전체 인류가 동시에 근거리에서 영향을 감지할 수 있는 특정한 날짜는 없었다. 1945년 이후가 되어서야 인류가 공유하는 세계사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213-4)


# 안장형 시기(Sattelzeit, 대략 1750년~1850년)의 특징

1. 유럽 정복국가의 등장으로 세계의 세력관계가 극적으로 변화

2. 서반구의 식민지 정착 사회에서 (캐나다를 제외하고) 정치적 독립운동이 결실을 맺음

3. 통합적인 사회적 연대의식과 시민적 평등이라는 새로운 이상 출현

4.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 대중 참여의 확대(여성, 인디언, 흑인노예는 여전히 배제)

5. 신분사회에서 계급사회로의 점진적인 전환

6. 산업혁명이 영국의 국경을 넘어 보편적인 성장흐름으로 변모

7. 1830년 경은 유럽의 철학과 예술사에서 중요한 전환점(1827년 베토벤, 1828년 슈베르트, 1831년 헤겔, 1832년 벤담 사망)


# 빅토리아시대와 세기말을 이어주는 전환기(19세기 80년대)의 특징

1. 광물에너지가 생물에너지를 추월하면서 전 지구적 환경사가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

2. 산업화의 지리적 범위가 끊임없이 확대되었고, 수많은 과학적 발명품이 등장

3. 자본주의 내부의 구조개편(특히, 해외시장 개척)으로 세계경제의 연계성 확대

4. 제국주의 확장의 새로운 국면 전개(간접적인 영향력 행사에서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로 전환)

5. 정치 체제는 제각각이지만 세계 여러 강국들의 정치 질서가 안정기로 진입

6. 유럽의 문화적 부흥 시기(반 고흐, 세잔의 회화, 말라르메의 시, 드뷔시의 음악, 니체의 철학 등)

7. 비서방 세계에서는 강한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적 자아의식의 등장


"많은 역사적 증거가 보여주듯이 노예제도의 종결은 해방된 노예의 입장에서 보자면 마치 새로운 시대가 갑자기 찾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생활 가운데서 '노예제도의 사망'은 길고도 험난하고 거듭되는 실망의 과정이었다. 프랑스대혁명에서부터 19세기 50년대 중국의 태평천국 운동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은 새로운 시간질서에 대한 열망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혁명의 주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전통과 결별한 새로운 역법의 수립이었다." "18세기 말기 이후 시기의 특징은 시간 기록의 합리화와 그것을 근대세계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이었다. 1792년의 프랑스, 1868년의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 1918년 2월의 러시아(볼셰비키 정권은 지체 없이 그레고리력을 도입했다)의 경우가 그랬다. 중국의 태평천국운동 사람들이 세우려고 했던 이상국가에서도 그런 시도가 있었다." "그들의 새로운 세계에서 시간은 간단하고, 투명하며, 속임이 없었다."(256)


3장 공간 (19세기는 어디인가?)


"19세기는 지리학이 과학으로 전환해가던 '첫 번째' 단계이자 지리발견의 '마지막' 시대였다. 유럽인의 발길이 닿은 적이 없는 곳, 지도 위에 아직도 채워지지 않은 공백으로 남아 있는 곳, 고도의 위험만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곳을 찾아가는 영웅적인 여행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지리발견의 마지막 시대─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긴' 19세기 개념과 기본적으로 중첩된다─는 쿡 선장이 첫 번째 세계일주 항해에 나선 1768년에 시작되었다. 이 항해에서 쿡 선장은 과학자 동료들과 함께 타히티,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했다. 그 후로 영국 해군은 탐험활동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상을 보여주다가 프랭클린 탐험대의 조난(1847년)을 만나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1911년 12월, 아문센이 남극점에 도착함으로써 지리발견의 찬란한 연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그 후로도 산악·사막·해양탐험 활동은 여전히 활발했지만 인류가 발견해주기를 기다리는 땅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294-5)


"19세기에는 지리학의 중요 개념의 정의도 아직 유동적이었다. '라틴아메리카'란 개념도 그 의미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명료하지 않고, 특히 '스페인령 라틴아메리카' 지역과 '포르투갈어 사용지역'을 구분하려는 사람에게는 골치 아픈 문제이다. '서인도제도' 혹은 카리브해 지역을 라틴아메리카에 포함시켜야 하는지를 두고 아직도 논란이 있다." "시몬 볼리바르 세대는 '남부아메리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라틴아메리카'란 명칭은 1861년에 범라틴주의(pan-Latinism)를 지지하던 프랑스의 생시몽주의자들이 만들어냈고 곧바로 정치가들이 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색채가 강해졌다." "그래도 '라틴아메리카'는 상대적으로 오래된 지역 개념이다. 지역 개념으로서 '동남아시아'는 1차 대전 기간에 일본에서 등장했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동남아시아인'에게는 문화적 동질감이 없었다. 이 지역 전체에 관한 첫 번째 역사서가 나온 것도 1955년 이후의 일이었다."(299-301)


"초기 근대사 지도에서 아시아대륙의 중간 부분은 경계가 모호하게 표시된 채 명칭도 '타타리'(Tartary)라고만 표기된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이곳을 '내륙아시아' 또는 '중앙아시아'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모호한 명칭은 아직도 개념적으로 안정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동방'(Orient)이란 아랍인, 터키인, 이란 무슬림이 거주하는 땅─오스만제국 치하의 발칸반도를 포함하여─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문화적인 개념이었다." "19세기 말이 되자 '근동'(Near East)이란 명칭이 외교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명칭이 가리키는 지역은 오스만제국과 한때는 오스만제국의 영토였으나 당시에는 실질적으로 그 통치를 벗어난 북아프리카(이집트와 알제리)였다." "'중동'은 미국 해군장교이자 군사학자인 알프레드 마한이 1902년에 만들어낸 개념이다. 중동이란 명칭에는 역사적·문화적 의미가 전혀 없었고 영국과 제정 러시아가 서로 차지하려고 힘을 겨루는 페르시아만 이북 지역을 가리켰다."(301-3)


"오래전부터 유럽은 세계에서 독보적으로 단일성과 함께 다양성을 유지해왔다는 자기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다양성은 어떻게 조직되어 있으며 그 요소들은 무엇인가? 헤르더가 제시했고 19세기 초에 성행했던 낭만주의 민족학의 '3원론'은 유럽을 '라틴─게르만─슬라브' 3대 지역으로 나누었다. 많은 사람이 이 학설을 추종했고 심지어 1차 대전에서는 선전 주제로 이용했다. 훗날 나치는 이런 관점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부활시켰다." "서유럽이란 개념은 (1차 대전 이전에는 형성되지 않았던) 영국과 프랑스의 연대를 전제로 한다. 외교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은 1904년 이후의 일이었다. 민주주의-입헌주의란 가치관의 각도에서 볼 때 두 나라 사이에 동질성이라고 할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영국의 정치엘리트 계층은 나폴레옹 3세의 '독재정권'을 늘 불신과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19세기에 관한 한 '서유럽'이란 곤혹스러운 지역개념이다."(339-41)


"19세기의 공간은 사실상 고도로 획일적이고 연속적이었고, 이는 정부가 개입한 결과였다. 미국의 토지법이든, 여러 나라(네덜란드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의 체계적인 토지측량과 소유권 등기든, 지금까지 강력한 통치를 경험한 적이 없는 지역에 대한 식민통치이든 국가는 공간을 철저하게 동질화하는 활동을 해왔다. 특히 1860년 이후 국가통치를 단순히 전략적 거점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지역 세력에 대한 상시적인 개입으로 보는 시대적 추세가 나타났다. 이런 추세는 근대 초기부터 시작된 점진적인 '영토주권화' 또는 '영토권 형성'의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유럽 특유의 현상은 아니었다." "영토권은 현대국가의 표지일 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군주정치의 한 형식이었다. 예컨대, 19세기의 이란에서 통치자의 업적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는 새로운 영토의 탈취이거나 최소한 기존 영토의 방어 여부였다. 이런 업적이 없는 군주는 왕위를 노리는 왕자들이 반역할 수 있는 좋은 표적이 되었다."(355-6)


제2부 전경全景


4장 정주와 이주 (유동성)


"19세기의 인구 재난은 세계의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이 경험한 재난은 분명히 적었다. 아일랜드는 19세기 유럽의 불운아였다. 이 나라는 유럽에서 유일하게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국가였다. 1780년 무렵 아일랜드는 인구 고속성장기에 진입했으나 1846-52년의 대기근으로 인구 상황은 철저하게 바뀌었다."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뒤 유럽 인구감소의 원인으로서 전쟁과 내란의 중요도는 18세기와 훗날 20세기 때보다 크게 떨어졌다." "1815년부터 크리미아전쟁─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발생한 군사충돌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의─이 발발한 1853년까지 유럽에는 어떤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1500년 이후 대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한 10차례의 강대국 간 전쟁 가운데서 1815-1914년에 발생한 전쟁은 하나도 없었다." "전 세계 인구에서 차지하는 유럽의 비중을 감안하면 18세기에 발생한 전쟁의 전사자 수는 19세기의 8배나 됐다."(417-8)


"해외이민은 이미 근대 초기의 유럽을 구분하는 중요한 표지였다. 중국과 일본의 통치자들이 자기 백성들이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고 있을 때 유럽인은 전 세계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인구대비 해외이민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영국의 이민 목적지는 주로 아메리카 신대륙이었고 네덜란드의 경우는 아시아였다.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한 나라는 스페인이었고, 러시아 이서(以西) 지역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던 프랑스는 이민배출국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19세기 사회사를 연구할 때는 반드시 그 직전 시대의 이민 활동의 결과를 중심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고대의 '민족 대이동'이 아니라 17세기와 18세기의 이민이 수많은 사회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라틴아메리카 사회는 세 가지 요소─약탈과 잇따른 바이러스의 침공으로부터 살아남은 원주민, 유럽 이민자, 아프리카로부터 노예로 끌려온 사람들─로부터 성장해 나온 젊은 사회였다."(426-9)


"19세기 이민사에서 대중의 주의를 끄는 제도는 정치적 반대자들은 곤궁, 고독, 극단적으로 열악한 기후조건에 노출시키는 징벌적 식민지이다. 시베리아는 1648년에 이미 제정러시아의 유배지가 되었고, 표트르 대제 통치 시기에도 전쟁포로를 격리시키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12월당(Dekabrists)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후부터 시베리아는 정치범의 중요한 유배지가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1848년과 1851년의 동란을 평정한 후 정치범들을 추방했다. 파리코뮌의 봉기를 진압한 후 프랑스 정부는 3,800명 이상의 반란가담자들을 19척의 배에 실어 (1853년부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로 보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유배지였다. 해양 패권을 두고 프랑스에게 밀릴 수 없다는 전략적 동기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 1780년대 중반 영국 감옥의 심각한 과밀현상 때문에 생긴 위기가 없었더라면 죄수들을 수만 리 떨어진 먼 섬으로 유배하자는 발상은 선택되지 않았을 것이다."(435-9)


"20세기와 비교할 때 19세기의 (정치적 망명 혹은) 난민은 (최소한 19세기 60년대 이전까지는) 익명의 집단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분명히 식별되는 부유하고 좋은 교육 배경을 가진 난민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1776년에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하자 캐나다와 카리브해 지역으로 도피한 약 6만 명 가량의 영국왕실에 충성하는 사람들, 1789년에 부르봉 왕조에 충성했던 망명자들, 1848-49년 유럽 각지의 혁명이 실패한 후 진압당한 피해자들이 있었다." "법률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대한 사건은 1839년의 '7월 혁명'이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서유럽, 특히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에서 정치적 망명─정치범의 송환금지─을 법으로 보호하는 제도가 생겨났다. 1848-49년 유럽의 혁명 시기에 대부분의 국가가 이 원칙을 받아들였다. 이 원칙에 따르면 국가재정으로 정치적 망명자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야 했고 그 때문에 정치적 망명자의 행동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441-2)


"정치적 이민과 영웅적인 망명이 19세기의 표지적 현상이라고 한다면, 집단적으로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삶을 도모하는 수많은 가난한 난민의 모습은 '전면전'(totaler Krieg)과 인종적 편견을 배경으로 하는 극단적 민족주의가 범람한 시대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정부 행위가 촉발한 국경을 넘는 난민의 물결은 19세기에도 없지는 않았다. 이 시기의 몇 차례 중대한 행동, 혹은 국가행동의 배후에는 잔혹한 현실이 숨겨진 경우가 많았다." "새로운, 그래서 서둘러 마련된 민족국가의 이념은 이민족을 융합하거나 배척하는 기준이 되었다. 대체적으로 각국의 이민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이었다. 유출되는 이민의 규모는 새로운 시민을 받아들이는 유입이민의 규모와 평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대다수 정부는 이민 문제에 있어서 지나치게 많은 유입이민을 경계했다. 다른 나라에 와 있는 통합주의 소수집단은 언젠가는 합병 주장을 지지하고 민족주의 외교정책의 유용한 도구로 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447, 452-3)


"노예무역이 폐지되면서 아프리카는 더 이상 대륙 간 이민체계의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게 되었다. 달리 말해 세기말의 유럽, 남아시아, 중국과는 달리 아프리카는 더 이상 장기적이며 정기적인(지리적 특성에 기인한) 노동력을 공급하지 않게 되었지만, 이 대륙으로의 식민 이민은 주목받아야 한다. 1차 대전이 폭발하기 직전, 구세계 유럽의 이민이 집중된 곳은 오래된 문명과 많은 인구를 가진 아시아의 식민지가 아니라 아프리카였다. 알제리의 76만 명의 유럽인(2/3가 프랑스인이었다)은 대영제국의 식민지를 제외하고는 가장 규모가 큰 식민지 정착민 집단이었고, 인도의 최대 17만 5,000명(온갖 부류를 다 포함해도)의 유럽인 집단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같은 시기에 남아프리카에는 약 130만 명의 백인 주민이 있었다." "모든 형태의 거주자를 다 합하여 대략 240만의 '백인' 또는 유럽 혈통이 아프리카에 살고 있었고 대부분이 1880년 이후에 도착한 사람들이었다."(473-4)


"19세기에 비유럽 국가 출신의 새로운 이민도 등장했다. 이런 이민의 '추동요인'(pull faktor)은 대영제국과 영국의 지배를 받는 지역에서 발생한 광범위한 (그러나 이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노동력 부족이었다. 그 경제적 동력은 제조업보다는 자본주의의 세 가지 신흥영역─플랜테이션, 기계화된 채광업, 철도산업─에서 나왔다. 양적인 면에서 가장 중요한 노동 수요처는 도구의 기계화와 작업의 조직화를 농업 원재료의 생산과 가공에 적용한 (농업과 산업혁명이 결합된 산물인) 플랜테이션이었다. 새로 노동시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예외 없이 유색인종이었다." "그들의 사생활에 제도적으로 개입하는 '주인'이나 사회적 낙인은 없었다. 그들의 고용 기간은 특정되어 있었고 그들의 자녀는 법률상으로 고용관계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도 이민자의 생각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노예들은 노예제 폐지를 전적으로 지지했지만 계약노동자들의 경우는 상황이 분명치 않았다."(483-5, 489)


5장 생활수준 (물질적 생존의 안전과 위험)


"1800년 무렵 세계인구의 기대수명은 30세에 지나지 않았고 아주 드문 특수 상황하에서 35세나 그보다 약간 더 올라갔다.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성년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취미생활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일과가 끝난 뒤의 '퇴근'이란 없었고 직업적 생애를 마감한 뒤의 '은퇴'란 것도 없었다. 가장 흔한 사망원인은 감염에 의한 질병이었다. 사망은 오늘날보다 '더 날쌔게' 찾아왔다." "이전의 어떤 시대에도 인류의 수명이 수직으로 상승하는 추세를 보인 적은 없었고 19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산업화 초기(대략 1780년-1850년)에 영국의 기대수명은 하락했을 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시대에 도달한 적이 있는 정점에도 미치지 못했다. 총체적으로 볼 때 영국 노동자의 물질생활 수준은 1780-1850년 기간에 개선되지 않았다. 이 시기가 지난 뒤 임금 증가의 속도가 분명하게 물가의 상승폭을 초과했고 예상 평군수명도 점차 올라가기 시작했다."(540-2)


"대략 1850년부터 각국 정부는 공중위생 체계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서유럽 각국은 질병의 전염원에 대한 전통적인 통제와 격리─예컨대, 예전부터 시행해오던 지중해와 흑해지역 항구의 검역소─에서 출발하여 질병의 온상이 되는 환경 자체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기초 시설투자로 나아갔다. 19세기에 들어와서야 유럽인들은 공중의료가 교회나 자선사업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정부 직무의 하나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1849년 영국의 의사 존 스노의 발견 덕분에 식수를 정화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스노는 콜레라의 전염 경로가 공기나 인체 접촉이 아니라 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공중 위생체계 수립을 위한 수자원 정책의 전제는 수자원의 공공재적 속성을 인정하고, 물에 관한 권리를 정의하여 사적 소유와 공적 소유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물의 소유와 사용(산업적 사용을 포함하여)에 관한 온전한 법체계를 갖추는 것은 복잡하고도 긴 과정이었다."(543-4)


"전 세계의 공중위생 사업의 학문적 기반은 루이 파스퇴르의 미생물 이론이었다. 19세기 80년대에 그의 이론은 유럽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파스퇴르의 이론은 존 스노 등 실천가들의 관찰 작업에 과학적 기초를 제공해주었고 또한 위생 정책 수립이 정당정치의 정략에 이용되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초기의 공중위생 사업은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학문적 기초 때문에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미생물 이론이 등장하면서 청결이 최고의 준칙으로 공인되었다. 세균학의 산물인 '건강인'(homo hygienicus)란 개념은 이렇게 탄생했고 루이 파스퇴르와 로베르트 코흐의 지위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이론가로 상승했다. 질병은 이때부터 이전의 생태, 사회, 정치, 종교적 맥락과 결별했고 건강이 최고의 가치로 숭상되었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지역에서 위생 조건의 개선이 사망률을 낮추는 데 기여한 효과는 여전히 간편하고 저렴한 기술로 같은 효과를 기대했던 다른 지역보다 훨씬 컸다."(551)


"사망률이 떨어지게 된 두 번째 요인은 질병예방에 관한 새로운 인식의 등장이었다. '인구 과도기'가 그랬듯이 전염병학의 과도기도 시간의 차이를 두고 세계 각지에서 등장했다. 총체적으로 보아서 19세기에는 전염병이 발생하여 대규모 사망─인구통계학자들이 '사망률의 위기'라고 부르는─으로 이어질 확률은 크게 줄었다. 서북유럽에서 전염병의 발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첫 단계는 1600년 무렵에 시작하여 1670-1750년에 정점에 이르게 되는데, 페스트와 티푸스의 발병률이 현저히 떨어졌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성홍열, 디프테리아, 백일해에 감염되어 사망에 이르는 사례가 크게 줄었다. 대략 1850년 무렵에 시작되는 세 번째 단계에서는 폐결핵을 제외한 호흡기 질환의 심각성이 점차 낮아졌다. 마지막으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오늘날 유럽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망률의 구조─심혈관계 질환과 암이 사망의 주요 원인─가 점차 정착되었다."(555)


"19세기는 여러 면으로 의학발전사에서 구시대에 속하면서 동시에 구시대 종말의 시작이었다. 어느 사회나 고위험 집단이 존재했고 어느 나라나 첫 번째로 위험에 노출되는 집단은 군대였다. 뉴질랜드 정복 전쟁이 19세기에 일어난 전쟁 가운데서 전투나 사고로 사망한 병사가 질병으로 사망한 병사보다 더 많은 유일한 전쟁일 것이다. 이와 정반대의 극단이 1895년의 마다가스카르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대략 6,000명의 프랑스 병사가 말라리아로 죽었고 전사자는 20명 뿐이었다. 의학사의 새로운 시대는 유럽 밖에서 1904-05년의 러일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사전에 병사들에게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우수한 의료장비를 확보함으로써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전체 병력 손실의 1/4로 낮출 수 있었다. 군사적으로 낙후한 일본 군국주의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부족한 물질적 인적 자원을 아끼고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었다."(588-9)


"(공중위생의) 위대한 대표 인물들은 대부분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연구자가 아니라 사회개혁가와 의료 위생의 실천자였다. 여기서 말하는 실천이란 19세기 중엽에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시작했고 얼마 후 세계 기타 지역에서 최소한 국부적으로라도 영향을 미친 위생운동을 가리킨다.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논증되기 전부터 깨끗한 식수와 양호한 오수 배출 체계, 이와 더불어 조직적인 쓰레기 처리와 거리 청소 체계가 갖추어지면 도시의 생활이 더욱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이 보여주었다." "근본적으로 태도의 변화를 결정하는 것은 유럽에서 도입된 최신 과학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아니라 문화적 배경이었다. 도시의 보건위생 상황을 개선하겠다는 희망과 의지(또는 능력)를 갖고 있고, 그것을 위해 재정을 투입한 사회가 얻은 것은 더 긴 수명과 증강된 군대의 전투력 그리고 확대된 사회적 활력이었다. 전염병에 대응해본 경험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한 나라의 비중이 달라졌다."(590)


"기근은 간단하게 주기적 기근(장기적 식품부족)과 높은 사망률이 뒤따르는 돌발적 기근으로 나눌 수 있다. 기근의 위기는 19세기보다는 20세기의 특징이었다. 위대한 의학 발전의 세기, 기대수명이 두 배로 늘어난 20세기는 또한 역사상 기근이 가장 빈번하게 발생한 세기이기도 했다." "잊지말아야 할 것은 나폴레옹전쟁의 연대에 유럽의 많은 지역이 기근을 경험했다는 점이다." "당시 영국에서 실제로 굶어 죽은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민중에게 일상으로 익숙한 물건들─예컨대 밀가루나 보리 같은 식료품─이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비싸졌다." "어느 집이건 여인과 어린이의 희생이 더 컸던 것은 밖에 나가 돈을 벌어와야 하는 가장과 남성의 체력을 보전하기 위해 자신의 양식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1816-17년 이후 유럽 대륙에서는 생존 위기의 망령은 사라졌다. 역사적으로 기근이 자주 발생하던 지역, 예컨대 발칸반도에서 18세기 80년대 이후 기근은 드문 현상이 되었다."(601-3)


# 아일랜드 대기근(1845-49)은 완전한 식량부족의 직접적 결과였다는 점에서 예외적인 사례이다.


"아일랜드 대기근이 덮친 1846년, 미국의 농업이 역사상 기록적인 풍년을 맞은 가운데, 당시 영국 정부의 대응책은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다." "자유방임주의자들의 관점에서는 간섭은 토지 소유자의 이익과 자유무역을 손상시키는 행위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감자 경작을 위주로 하는 농업경제의 붕괴는 농업의 현대화와 구조조정을 위한 좋은 기회이며 그 결과 농업은 '자연적인 평형'을 실현할 것이란 주장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감자 경작의 위기는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 사회의 여러 가지 불공정을 바로 잡으려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영국 정부와 아일랜드 지주계급의 적대 관계도 정부의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영국 정부가 볼 때 아일랜드 지주계급의 금전적 탐욕과 농업 개조에 대한 무관심이 이때의 위기를 불러온 원인이었다. 영국 정부로서는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 나서야 할 이유가 없었다."(606)


"1891-92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기근이 주로 볼가강 유역에서 80만의 인명을 앗아갔다. 이때 러시아는 특별한 구호조처 없이 두 차례의 기근을 극복했다." "1891-92년의 대기근은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대기근은 차르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찾아온 '반동이' 시기를 종식시키고 러시아 사회를 혼란의 시대로 몰아넣었는데, 혼란은 결국 1905년의 혁명으로 귀결되었다. 총체적으로 볼 때 러시아 정부가 재난구조 활동에서 보여준 성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정치의 영역에서는 효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당시의 러시아 민중이 볼 때 기근이란 아일랜드, 인도, 중국 같은 '미개한' 식민지나 반(半)식민지 국가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명국가'에게 기근이란 일종의 수치였다. 1890-92년에 발생한 시대에 뒤떨어진 대기근은 러시아와 번영·발전하는 서방 국가 사이의 끊임없이 확대되고 있는 격차를 다시 한번 세상 사람들에게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607-8)


"19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에 발생한 인도의 대기근은, 우매한 인도인이 발전에 반대하는 저항심의 표현─당시에 적지 않은 유럽인이 이런 관점을 유지하고 있었다─이 아니라 근대화 초기의 부정적인 증상의 표출이었다. 철도와 운하는 원래는 구호물자를 실어나를 수 있는 편리한 기초시설이었지만 동시에 농촌지역에서 농산품 투기사업을 펼치기에 적절한 조건도 만들어냈다. 요컨대, 식량의 유입도 쉬워졌지만 식량의 유출 또한 쉬워졌다. 수확의 감소는 불가피하게 식량가격의 폭등으로 이어졌다. 매점매석과 투기는 전근대적 사회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때의 사태에서 드러난 새로운 면은, 모든 농촌의 전통적인 비축식량이 전국 또는 국제시장의 교역품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농산물 수확의 미세한 변동도 식량가격의 두 배로 높여놓을 수 있다. 그 결과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하는 농촌 주민이 최대의 피해자가 되었다."(613-4)


"미국의 부자들이 보유한 부의 규모는 세계사에서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등장하기 전에 어느 누구도 그처럼 방대한 물질적 부를 축적한 적이 없었다. 19세기 말, 미국의 부호들이 석유, 철도, 철강업에서 끌어모은 부는 유럽의 산업화 시기에 가장 부유했던 면방업계 거두들이 보유했던 자산 규모보다 몇 배나 많았다." "미국 최고 부자의 자산은 1860년에 2,500만 달러이던 것이 20년 뒤에는 1억 달러로 늘어났고 다시 그로부터 20년이 지나서는 10억 달러가 되었다. 1900년이 되자 미국 최고의 부자는 유럽 최고의 부자(영국의 귀족이었다)보다 20배나 많은 자산을 보유했다." "이제는 전통적인 금권정치가 등장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내부에서 분열했다. 부자들 사이에서 보수파 또는 우파 자유주의 정당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유럽이나 미국의 부자와 초부자가 모두 보수적 가치관의 열렬한 지지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자유주의자 부호'란 말은 모순된 개념이 되었다."(6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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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을 길들이다 - 통계는 어떻게 우연을 과학으로 만들었는가?
이언 해킹 지음, 정혜경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옮긴이 서문


"우연이라는 것은 본디 인간에게 미지의 존재로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인류가 그러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여정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한편에는 인간 역시 자연과 마찬가지로 뉴턴주의적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인간이 지닌 존엄성이 침해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전자의 믿음은 합리적 사고와 물리과학의 발달을 통해 얻은 성과가 가져다준 자신감의 발로라면, 후자의 우려는 엄격한 인과적 법칙이 인간이 누려야 할 의지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의 소산이었다." "통계적 규칙성을 규명하려는 일련의 과정에서,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인간의 존엄함에 관한 위기감 중 어느 것도, 우연이 길들여지는 과정에서 홀로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감이 아니었다면 인간의 행동으로부터 통계적 법칙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없었을 것이고, 위기감이 아니었더라면 통계적 법칙과 결정론의 연결 고리를 파악하기 위한 시도 역시 약화되었을 것이다."(16)


1 우연을 길들인다는 것


"이성의 시대 내내, 우연은 우매한 자들의 미신으로 불렸다. 우연·미신·우매함·비이성 모두 매한가지였다. 소위 합리적 인간은 이런 것들을 외면함으로써 불변의 법칙을 도구 삼아 혼란을 가릴 수 있었다." "당시는 결정론에 대한 의구심을 지닌 이들이 많은 시기였다. 의지의 자유freedom of will가 끼어들 여지를 갈구하거나, 유기체나 생명의 작용에 있어 개별적 특징을 주장하는 이들이 바로 그런 예이다." "마침내 1900년 경에 이르러서는 우연의 법칙의 득세가 진정한 가능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궁극적인 비결정론indeterminism의 무대가 조성된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모순적이지만, 비결정론적인 여지가 커지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도 커진다. 물리과학에서는 이 점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양자물리학은 자연이 근본적으로 환원 불가능하게 확률적이라는 점을 당연하게 여긴다. 엄밀히 말해 이러한 발견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궤도에 개입하고 수정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을 무한하게 신장시켰다."(22-3)


"필자가 기술하고자 하는 면모들은 대단히 포괄적인 하나의 사건과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활자화된 숫자들의 쇄도avalanche of printed number이다. 국민국가들은 국민을 새롭게 분류하고, 집계하고, 표로 작성하였다." "숫자의 활자화는 표면적인 효과일 뿐이었다. 그 이면에는 새로운 분류 및 계량화 기술, 그리고 그러한 기술을 전개할 수 있는 권위와 연속성을 지닌 새로운 관료제의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관료제는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사실들을 새로이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을 집계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알맞게 분류할 수 있는 범주가 만들어져야 했다. 사람들에 대한 데이터의 체계적인 수집은 우리가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방식은 물론 가까운 이웃을 설명하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체계적인 수집은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선택하고, 무엇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심도 깊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24-5)


"확률은 4중의 성공, 즉, 형이상학적·인식론적·논리학적·윤리학적인 측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형이상학은 우주의 궁극적 상태에 관한 과학이다. 형이상학에서, 양자역할의 확률은 보편적인 데카르트의 인과율을 대체해 버렸다. 인식론은 지식과 신념에 대한 이론이다. 오늘날 우리가 증거를 활용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며, 실험을 설계하고, 신뢰성을 평가하는 일은 확률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논리학은 추론과 논증의 이론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순수 수학이 제시하는 공리에 대해서는 연역적 해법 또는 종종 반복적인 해법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매우 실용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통계적 추론의 논리를 때로는 엄밀하게, 때로는 약식으로 활용한다. 윤리학은 부분적으로는,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이다. 확률은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는 없지만, 관료들이 내리는 모든 합리적인 선택의 근거에는 확률이 자리하고 있다. 견해에 객관성을 덧칠함으로써, 의사결정은 계산으로 대체된다."(27-8)


2 숙명론의 시대


"《도덕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임마누엘 칸트는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예외 없이 자연 법칙에 의해 결정되어야 함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당연시했다. 자연의 필연성과 인간의 책임감의 충돌로 인해 자유의지는 절박한 문제가 되어 갔다. 한 가지 해결책은 데카르트의 사상을 광범위하게 추종하는 것이었는데, 데카르트의 주장은 마음과 육체, 다른 말로 하면 사고의 실체와 공간에 실재하는 실체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공간적 실체에 벌어지는 모든 것은 어김없이 법칙을 따른다. 따라서 모든 공간적-시간적 현상은 필연적으로 결정론적이다. 이는 정신적인 측면에 관해서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여지를 남겨 놓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칸트의 서술은 이러한 생각을 정교화시킨 것이었다. 공간적, 그리고 정신적이라는 두 가지 실체는 인지가능knowable 영역과 불가지unknowable 영역이라는 두 가지 세계로 대체되었다. 자유로운 자아는 실체의 불가지 영역에 존재한다."(42)


"흄이 우연이라는 개념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인과론과 필연성에 대한 유명한 회의론자였던 그는 숙명론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현상계의 물체들의 움직임들은 필연적이며, 이들 물체들의 움직임 간의 상호 교류 ··· 그리고 물체 간의 끌어당김과 상호 결합들을 보면, 이들 물체들 사이에 상호 무관성 내지는 자유로움이 존재한다고 볼 만한 최소한의 근거조차 없음은 널리 인정된다. 모든 물체는 어느 정도는 절대적인 숙명과 그 운동 방향에 의해 결정된다. ··· 따라서 물질의 움직임은 필연적 움직임에 대한 실증적 예로 간주해야 한다.〉" "계속해서 흄은, 뉴턴이 공허한 추정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주장했다. 즉, '뉴턴은 자연이 지닌 미스터리를 둘러싼 베일을 일부 걷어낸 것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기계적 철학의 단점 역시 명백히 했으며, 따라서 그는 자연이 지닌 비밀들을 그전에도 언제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남아 있을 불분명의 영역으로 복구시켰다'는 것이다."(45-6)


3 공적인 아마추어, 비밀스런 관료


"17세기 확률의 등장에 대한 증인으로서 라이프니츠는 프로이센 공공 통계의 철학적 대부였다. 그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는 다음과 같았다. 프로이센 국가의 성립이라는 과제가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에서, 국가의 힘에 대한 정확한 측정치는 바로 그 인구이기에, 새로 세워질 프로이센 국가는 자신의 힘을 파악하기 위하여 중앙정부에 통계 부서를 보유해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프로이센 국가의 건국은 통계국의 설립과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종류의 통계 문제에 왕성한 관심을 가졌으며 질병·사망·인구의 문제에 활발히 매진했다. 그는 56가지 부문에서 국가를 평가하는 방법을 제안했는데, 이 평가법의 항목에는 성별 및 사회적 신분에 따른 인구,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 남자의 수, 결혼적령기 여성의 수, 인구 밀도와 연령 분포, 유아 사망률, 기대 여명, 질병의 분포와 사망의 원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집계표 작성은 오늘날에는 일상화된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미래적인 것이었다."(55-6)


4 통계 전담 기관의 등장


"프로이센은 훗날 대세로 자리잡게 될, 그러나 당시에는 예외적이었던 존재를 출범시켰다. 통계국은 정부 내 여타 모든 부서에서 필요로 하는 숫자의 제공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804년에, 도나는 1809년에, 범용적인 통계국은 새로운 유형의 방향을 제시하는 새로운 종류의 일꾼으로 구성된 새로운 유형의 조직체라는 생각을 희미하게나마 가지고 있었다. 전통적이고 현실적인 장관들이었던 슈타인과 알텐슈타인이 선호했던 것은 엣 질서를 간결하게 가다듬은 버전이었다. 그들은 통계국은 재정부를 돕기 위한 기관이라고 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정부의 조직 체계는 유지되어야만 했으며, 모든 기관들을 위해 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부서란 적합하지 못한 것이었다. 국왕과 도나가 이겼다. 프로이센은 기초부터 다시 세워지고 있었고, 새로운 유형의 기관이 존재할 여지가 생겼다." "(점차 각국에 설립된) 통계국들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 즉 무수한 숫자를 통해 실체가 표현되는 유형의 인간을 탄생시켰다."(75, 82, 86)


5 이성의 감미로운 지배


"도덕과학science morale은 우리가 윤리학이라 부르는 고상한 그 무엇이 아니다. 도덕과학은 풍속moeurs·관습·사회에 대한 과학으로 이해하는 편이 맞다." "뉴턴은 천체역학과 유리역학rational mechanics을 제안했다. 프랑스인은 뉴턴의 주장들 중 일신론一神論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받아들였다. 로크의 사상 이론은 인간의 마음과 이성의 능력에 대해 연구했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수많은 주요 철학자들은 '관념론자'라는 표식, 즉 특정 이데올로기의 이론가나 지지자가 아니라 사상 그 자체에 대한 옹호자, 즉 로크주의자Locke-ites라는 딱지를 열렬히 환영했다. 도덕과학의 개념이 발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토대에서였으며, 태동 당시의 도덕과학은 개인과 사회에 대한 합리적 이론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콩도르세가 그려낸 도덕과학은 훗날 두 가지 다른 영역으로 발전한다. 하나는 역사로서의 도덕과학이며 다른 하나는 확률, 통계학, 결정이론, 비용편익분석, 합리적 선택이론, 응용경제학 등으로서의 도덕과학이다."(93-5)


"1776년에 튀르고는 젊은 뒤빌라르 같은 이들을 종합감사관실에 임명했다. 튀르고가 물러나자 뒤빌라르는 재정부로 자리를 옮겼다. 뒤빌라르는 혁명 8주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후에 그는 원로원으로 옮겼으며 1805년에는 내무부의 통계청으로 갔다. 1812년에 그는 다시 승진하여 종합편성국의 수장이 되었다." "콩도르세는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에서 살아남지 못했지만, 뒤빌라르는 살아남았다. 내무부에 몸담고 있는 동안, 뒤빌라르는 제너의 천연두 백신이라는 희대의 발견이 보험에 미칠 영향에 대해 최초로 심도 깊은 분석을 실시했다." "인구에 대한 뒤빌라르의 수학적 통계 논문은 사망률 법칙에 관해 체계적 분석을 수행하는 데 있어 단순한 연령뿐 아니라 성, 혼인 상태, 그리고 주소 및 직업과 같은 가변적 요인을 프랑스 최초로 활용한 시도였다. 그와 같은 질문은 조만간 숫자들의 쇄도를 불러일으킬 서기·통계가·계산가·출판인과 같은 새로운 계층을 탄생시켰다."(106-7)


6 질병의 양을 재다


"질병의 법칙에 대한 가장 저명한 저자는 잉글랜드-웨일즈 호적본서의 창립자였던 윌리엄 파William Farr였다." "파는 질병에 대한 그의 연구를 토대로 이 분야에 대한 권위를 확립하여, 1830년대의 공제조합들에 대한 논쟁에 기여하였다. 파는 질병통계에 대한 개별 분석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1837년경에는 자신이 편집했던 잡지 중 하나에서, 질병의 빈도와 더불어 '질병의 상대적인 기간과 위험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 방법론을 다룬 소논문을 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파는 병원 기록의 시대를 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질병분류학nosology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질병분류학에 따른 집계법이다. 파는 자신이 수행한 활동에 어울리는 새로운 단어를 고안해 내었으니, 바로 질병측정학nosometry이었다. 이는 질병분류학을 활용하여 '측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새로운 분류와 새로운 집계법은 서로 불가분임을 상기시켜 준다."(121-2)


7 과학의 곡창


"필자는 기본 상수들constants은 자연의 기본 법칙에서 고정된 값을 가지는 인수 역할을 지닌다는 관점에서 기술했다. 이는 배비지보다 최근의 개념이다. 배비지의 상수들은 수많은 '법칙들'을 서술하는 데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만약 투표자의 소득이 비슷한 법칙을 따른다면···'이라고 그가 쓴 데서 보듯, 배비지는 법칙이라는 단어를 단지 규칙·규칙성·획일성을 의미하는 데 사용했다. 법칙에 대한 배비지의 관념에서 우리는 그를 베이컨주의자, 실증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영역,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통계적 법칙에 대한 초기 개념의 모든 영역에서 법칙화를 수행했던 것은 바로 베이컨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수리적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본연의(그리고 미묘한) 주장에 대한 해석들 중 가장 단순화되고 가장 베이컨의 품격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작업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데이터가 많아질수록, 귀납적 결론을 더 많이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135-7)


8 자살은 일종의 정신이상이다


"에스퀴롤이 살았던 시기(19세기 초)는 그의 직업(의사)이 거침없이 부상하던 시기였다. 그는 자살을 감시·치료·통제·판단할 권리가 의사에게 있다는 의견을 비쳤다. 자살은 더 이상 아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같은 도덕주의자와 성직자들의 수중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에스퀴롤은 자살이 '임상의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는 매우 맹렬한 권리 주장이다. 에스퀴롤은 암묵적인 삼단논법을 펼치고 있었다. (1) 정신이상은 의사의 영역이다. (2) 자살은 일종의 정신이상이다. 그러므로 (3) 자살은 의사의 영역이다. 에스퀴롤에게 전제 (1)은 탄탄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자살이 일종의 정신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자살을 의학의 영역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이론은 여타의 정신이상이 대부분 그러하듯 자살자들은 '편집광들'이었다는 것이다. 에스퀴롤의 이론과 자살의 집계는 서로 협력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141-2)


9 입법철학의 경험적 근거


"1829년에 게리는 교육과 범죄에 대한 '비교 통계학'을 공동 연구로 수행한 바 있었는데, 그 결과에 대한 확장이 바로 그의 첫 주요 연구인 1832년의 도덕 통계 연구였다. 일반적으로 교육은 범죄를 예방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자연히, 노동계급의 퇴화와 무지가 바로 통계학자들이 범죄의 성향penchant au crime으로 부르던 것의 원천이라는 추정이 제기되었다. 게리는 이러한 가설을 반박하기 위해 오늘날 순위순서 통계량rank-order statistics이라 불리는 것을 내놓았다." "그 결과, 교육수준이 높은 지역일수록 범죄율도 높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러한 결론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는 오래된 용어인 '도덕과학'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수행했던 것은 도덕분석moral analysis이었다. 이는 사실과 가치를 구별하는 실증과학이었다. '사회에 관계된 계량화된 사실만을 진술함으로써 도덕분석은 입법철학과 경험적 근거를 형성한다.' 콩도르세가 꾸었던 사회수학의 꿈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164-6)


10 확실함도, 상세함도, 통제도, 가치도 없는 사실들


"당시에 통계치는 널려 있었지만 결정적인 통계적 추론은 거의 없었다. 통계는 과학이 아니라 수사학의 도구였다. 숫자에 대한 모든 열망에 대하여, 통계는 기대만큼 즉각적인 효과를 보여 주지는 못했다." "1828년 초, 시비알레는 결석 수술법에 대한 비교연구를 몽티용 상 측에 제출했다. 마치 배심원단 같았던 수학자들(심사위원들)은 거만하게도, 그와 같은 연구들이 '확실함이 없고, 상세한 설명도 없으며, 통제되지 않았으며, 가치가 없는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통계는 '무한의 다수'로 간주할 수 있는 부류의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으나 '의학의 경우는 이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실용의학에서 확률을 계산하기에는 사실이 너무 빈약한 것은, 보다 많은 데이터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이한 개인에 대해 많은 데이터를 얻어 보았자 다루고자 하는 환자의 특정 사례와는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학자들은 이러한 조심스런 관찰에 대해 오만할 정도로 무관심했다."(177-9)


11 어느 다수결 규칙을 따를 것인가?


"사회적 불안정과 개혁의 나온 것이 1808년의 법전이었다. 이 법전 자체는 영속성 있게 지속되었지만, 배심원제는 프랑스 법제에서 가장 불안정한 요소 중 하나였다. 1808년 당시 유죄 선고는 단순 다수결에 의해 이루어졌고, 정치적 소용돌이가 있을 때마다 배심원제는 영향을 받았다." "라플라스는 1808년의 배심원제에는 결함이 있다고 주장했다. 배심원단이 7:5로 단순 다수결에 의해 유죄 선고를 내리는 경우에 오심의 가능성은 거의 3분의 1이라는 '놀라운' 수치이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증언이 옳을 확률이란 증인의 성향이라 할 수 있다. 증언이 옳을 확률은 증언된 사실의 본질과 무관하다." "따라서 라플라스는 단순 다수결을 통한 유죄 선고에 반대했다. 배심원 12명 만장일치에 의한 평결은 안전하나, 아마도 지나치게 안전한 듯하다. 라플라스는 1000분의 1 정도의 오심 확률을 목표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따라서 배심원 9명의 만장일치제가 적절하다고 제안했다."(188-91)


"푸아송이 배심원제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한 것은 1830년 혁명 이후였다." "라플라스에겐 사법 통계자료가 없었던 반면 푸아송에게는 있었다. 푸아송은 오심의 확률이 라플라스가 추정한 것만큼 크지는 않다고 추론했다. 7:5 다수결 평결의 오심 확률은 실증적으로는 라플라스가 8:4 다수결 평결의 오심 확률로 계산한 값과 거의 유사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만약 라플라스의 계산에 근거하여 8:4 다수결 평결에 만족한다면 7:5 다수결 평결에도 만족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국회가 1835년 8월 19일 배심원제를 단순 다수결제로 되돌린 것은 현명한 결정이었다는 증명을 그 해 말에 완료하였다. 1837년에 간행된 배심원제에 대한 그의 저작은 보수적 견해를 수학적으로 옹호한 것이었다. 푸아송의 수학이 지니는 과학적 엄밀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정보와 통제의 구현 수단으로 의도된 것이었다. 그것은 수학적 연구인 동시에 정치적인 연구이기도 했다."(196)


12 대수의 법칙the law of large numbers


"프랑스에서는 '대수의 법칙'이라는 용어가 굳건히 정착하였으며, 세계에 대한 심오한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회의론자들의 조언과는 반대로, 통계적 법칙은 권위를 인정받았다. 충분히 많은 수의 사건의 경우에서는 규칙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제 이 법칙은 경험에 비추어 점검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사물이 따르도록 되어 있는 방식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대수의 법칙에 대한 수학적 논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대수의 법칙은 형이상학적인 진실이 되었다. 푸아송의 수학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어려웠지만, 그리고 실제 현상에서는 발견되는 불규칙성은 흔히 주장되던 것보다는 훨씬 컸지만, 대수의 법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맹신, 태만, 모호함, 숫자에 대한 혼미, 사회적 통제에 대한 환상, 공리주의자들이 선전 등의 요인에 힘입어, 대수의 법칙(푸아송의 정리 그 자체가 아니라 대량 현상의 안정성에 대한 명제)은 이후 한두 세대 동안은 선험적 진실로 가공되었다."(216)


13 표준적인 가슴둘레


"1830년대 초 일련의 저술에서 케틀레는 '평균인'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평균인'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한결 같은 목소리가 있다. 실제로 평균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균인의 존재에 대한 상식적인 반응은 이렇다." "'평균인'이란 편의상 사용되는 약칭일 뿐이다. 그러나 케틀레에게 이 표본적인 인간은 약칭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첫째, 이 개념은 한편으로는 우생학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 인종의 평균적인 특질을 보존하거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정책을 도입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둘째, (보다 학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평균 키를 추상적 개념, 즉 산술적 결과로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느 집단에 관해 '실재하는' 특징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일본인의 수명은 매년 증가해 1988년에 일본은 지구상의 최장수 국가에 해당할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일본인의 수명을 두고 일본인이 삶과 문화에 실재하는 특징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221-3)


"1844년, 케틀레는 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단계로 나아갔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물리적 양을 일정한 확률오차를 수반하면서 측정하는 법에 대한 이론을, 집단이 지닌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특질의 측정에 대한 이론으로 변모시켰다. 집단의 특질들 역시 물리적 양과 형식적으로 동일한 기법에 의해 계산될 수 있었기에, 집단의 특질들은 이제 실재적인 양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우연을 길들이는 데서 중대한 단계이다. 이전에는 거대한 규모의 질서에 대해서만 묘사하던 통계적 법칙은 자연과 사회의 기저에 내재된 진실과 원인을 다루는 법칙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즉, 집단의 신장 등의 분포가 한 개인이 지닌 값이 오차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추정되었을 때 나타나는 분포와 같다면, 우리는 집단의 평균이 해당 집단의 특징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 집단에 관해서 만족스러운 정규분포 곡선이 나온다면 한 개인이 아니라 전체의 특징에 관한 하나의 진정한 값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223-5)


14 사회가 범죄를 예비하다


"1836년 경, 케틀레는 '도덕적 질서는 통계학의 영역에 들어오게 된다. ··· 이는 인간 본성의 완벽성을 믿는 이들에게는 낙담할 만한 사실일 것이다. 자유의지란 오로지 이론 속에서만 존재할 것처럼 보인다'고 적었다." "그러나 1926년에 시작된 양자역학의 두 번째 흐름은 미시세계의 근원적 법칙이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을 정도로 확률적임을 입증했다." "양자물리학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숙명론적이고 순수하게 결정론적인 법칙이 아니다." "1830년대와 1930년대의 감수성이 보여 주는 대조는 역설적이다. 1930년대에는, 자연 법칙이 확률적이라는 확신은 세상이 자유의 안전지대라는 점을 보여 주는 것으로 간주됐다. 동일한 확신이 1830년대에는 위와는 정반대로 해석되었다. 즉 만약 범죄와 자살을 관장하는 통계적 법칙이 존재한다면, 범죄인들의 범죄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1930년대에는 확률이 자유의지의 존재 여지를 제공해 주었지만, 1830년대에 확률은 자유의지를 완전하게 배제해버렸다."(237-8)


"케틀러와 파는 모두 19세기 통계학이 지닌 박애주의적·공리주의적 측면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통계학의 중요한 측면이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운명을 향상시키려 했으며, 새로운 통제를 행사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범죄·질병·악덕·불안정을 다스리는 통계적 법칙을 발견하라. 그리고 그러한 법칙들이 적용되는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라. 반면에 게리는 실증주의자였다. 도덕 분석은 분명 입법가들의 결정에 활용될 수 있는 데이터를 얻어내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입법가에게 어떠한 제안을 제시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사실과 가치 사이의 구별은 불가침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케틀레는 최소한 그의 젊은 시절에는 개혁주의자였다. 연간 범죄율은 사회 질서의 '필연적 결과'이기에 입법가들은 이를 개선시키기 위해 변화를 도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파는 자신이 통계 사실을 총합하고 결합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권고를 내릴 의무 역시 지녔다고 생각했다."(243)


"아무리 박애주의적 열정으로 은폐되었다고 해도, 개혁의 진정한 기능은 확립된 질서를 보전하는 것이었다(라고 누군가는 주장할 것이다)." "부유층 역시 체제의 적용을 받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계적 법칙은 계층에 관한 것이다. 통계적 법칙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측정되고, 분석되고, 통치의 논거로 활용되어야 하는 피지배계층인 '그들'이었다. 여기서 계층이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실체이다. 필연적으로, 자신들을 위해서 변화를 필요로 하는 이들은 노동자 혹은 범죄자 또는 식민지 계층이다." "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계층 외에도 우리가 인종이라고 부르는 보다 큰 단위의 계층이 있다. 오늘날 인종이 내포하고 있는 제1의 함의는 피부색이다. 파가 연설에서 언급한 인종이란 전통으로 연결되어 있거나 관습의 공통성이 있는 국민, 종족, 심지어 가족 그룹을 의미했다. '인간은 자신의 인종을 변화시킬 힘을 가진다'고 그는 썼다. 이렇게 우생학이 시작되었다."(245-7)


15 사회에 대한 천문학적 시각


"독일 사상가들은 '규칙성'은 '법칙'이 아니며, 심지어 '규칙'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물론 통계적 규칙성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통계적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자연법칙은 실재하는 원인들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러한 원인들은 개별 사건들에 작용하며 필연적으로 효과를 생성해 내는 것들이다. 라플라스와 케틀레 같은 프랑스인들이 주장한 수많은 미미한 원인들은 통계적 분포를 이루기는 하지만 그러한 분포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분포를 일컬어 법칙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법칙뿐이었다. 따라서 칸트의 후계자들은 케틀레에 맞섰다. 서유럽에서는, 실증주의의 정신은 모든 법칙이 단순히 규칙성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규칙성을 뛰어넘는 원인에 대한 믿음은 형이상학의 시대가 낳은 부조리한 잔재였다. 따라서 통계적 법칙은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통계에 대한 '공산사회주의적' 접근과 부합하는 철학을 제공하였다."(257-8)


"엥겔은 '특정 집단에서 매년 거의 동일한 수의 사람들이 자살한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썼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원인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위 사실은 단순한 습관적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법칙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사실이 자연이나 사회의 법칙이 아니라면, 의지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이것이 엥겔의 해답이었다. 원인에 대한 규명 없이 우리는 무언가를 법칙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따라서 자살의 법칙을 이야기할 수 없는 일이다." "(교수이자 사회주의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강단사회주의자들은 개인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방식을 서로 협력하여 선택함으로써 국가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국가가 우선한다는 것이다. 국가 없이 개인이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개인들이 자신을 훌륭한 국민으로 도야할 수 있도록 국가 자체와 제도를 다듬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다. 엥겔이 지휘하던 프로이센의 통계국은 이러한 전일주의적 정치 철학으로 무장한 대변자가 되었다."(260-2)


16 사회에 대한 광물학적 시각


"발자크의 《인간희극》이 그러했듯이, 르 플레의 비전은 인간을 먼저 혼인 상태와 가족 관계에 따라, 그리고는 주거지, 무엇보다도 가계 생활비 규모에 따라 다양한 유형으로 분류하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르 플레의 저작은 프랑스의 부유계층이 아니라 유럽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또한 그 저작은 중편소설의 형태가 아니라 개별 가족의 지출 규모에 대한 계량적 연구의 형태로 추진되었다. 그것은 케틀레가 사용했던 것처럼 평균치에 대해 파고든 것이 아니라, 박물학자들이 암석 혹은 식물 견본을 패러다임으로 활용하듯이 대표적인 개인을 이용하여 인간 유형의 주요 특징을 보여 주었다. 르 플레는 우랄 산맥의 유목민과 셰필드의 칼장수, 스웨덴의 대장장이와 카스티야의 소작농들을, 그리고 모로코의 목수들과 (오늘날의) 시리아의 마을 거주민들을 묘사하였다." "사회를 이해하려면 단순한 현실의 구성원으로서의 평균인이 아니라 대표성을 띠는 개인에게 시선을 돌리라는 것이 르 플레의 주장이었다."(271-4)


17 우연, 가장 유서 깊은 고귀함


"18세기 잉글랜드의 뉴턴주의자들은 통계적 안정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계몽주의적 신을 언급한 바 있었으나, 그러나 이보다 오래되고 더 변덕스러운 신들, 즉 계몽주의자 흄이 아무 의미가 없는 단어라고 폄하했던 우연을 즐기는 신들이라는 희미한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러한 불씨는 낭만주의에 의해 다시 점화되었으며, 니체에 의해 더욱 거세졌다."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하늘은 '신성한 우연을 위한 무도장', '신성한 주사위와 도박자를 위한 신의 탁자'에 비견된다. 그렇다면 합리성은 어떻게 이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예상하듯이, 비이성적인 방식과 우연적인 사건에 의해서였다.' 19세기 말의 철학자였던 니체와 퍼스의 우연·창조·필연성에 대한 관념은 흥미로울 정도로 유사했다. 이 둘은 다른 이들이 질서정연하다고 여기는 이 세계가 우연의 산물이라고 믿었다. 둘 중 누구도 법칙의 존재가 우주의 우연적 특성을 조금이나마 약화시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292-3)


"니체의 사상들 중 하나에 대해 질 들뢰즈가 쓴 간결한 요약이 있다. '한 번 던져진 창조의 주사위는 '우연'의 긍정이고, 그것들이 떨어지면서 형성하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다. ··· 따라서 니체가 필연(운명)이라 부르는 것은 우연의 소멸이라기보다는 우연 자체의 조합이다.' 여기에는 모든 종류의 주사위 게임이 등장한다. 니체는 목적이라는 개념이 있을 때 비로소 우연이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목적과 이유에 대한 개념을 부분적으로는, 질서정연해 보이는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얻을 수 있다. 우주가 전적으로 우연의 문제임을 알고 있는 이는 목적이라는 허상에 구애받지 않는다." "니체는 우리가 우연에 관해 지금까지 접해 온 것들 중 가장 난해한 철학적 지혜를 터득하였다. 필연성과 우연은 서로 쌍둥이와 같아서, 어느 한쪽도 나머지 한쪽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동전의 앞면이 뒷면을 설명하는 이상으로는 필연성과 우연 어느 한쪽도 나머지 한쪽을 설명해 주지는 못 한다."(294)


18 카시러의 명제


"동적인 결정론, 즉 숙명론이 1872년에서야 진정으로 보편적인 명제가 되었다는 카시러의 말은 옳은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니다." "그렇다면 카시러 테제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첫째, '결정론'이라는 단어는 1850년대 말에서 1870년대 초의 시기에 인과적 필연성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결정론이 이러한 의미를 지칭하게 된 것은 특수한 관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프랑스의 베르나르와 독일의 뒤부아-레이몽은 생리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생기론을 거부했으며 모든 생명 과정은 화학반응과 전기(등등)의 작동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독자는 라플라스가 필연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외연의, 공간상의, 물질의 실체라는 범위에 한정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라메트리는 라플라스와는 달리 정신의 영역까지 이야기하였다!)." "새로운 스타일의 결정론은 라플라프보다도 교만했다. 이 새로운 결정론은 정신 활동이 일어나는 장소인 뇌를 지배하려는 의도를 지녔다."(306-8)


"1874년 에밀 부트루는 자연 법칙이 지니는 우연성에 대해, (즉, 결정론의 퇴색과 관련된) 주목할 만한 논문을 출간했다. 이 논문의 바탕을 이루는 교의는 창발주의emergentism와 계층적 구조a hierarchy of structures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층들을 보면, 가장 아래층은 원소의 원자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다음 층에는 분자의 구조가 있겠지만 부트루는 원자들에 적용되는 법칙들이 화합물에 적용되는 법칙들을 결정짓지는 않을 수 있다고 추측하였다. 이러한 화합물들이 따르는 법칙들은, 심지어 유기 화합물들을 지배하는 법칙들이라 하더라도 동식물 생명체의 법칙들을 결정짓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생명체의 법칙들이 이성적인 존재를 지배하는 심리적 법칙들을 결정하지는 않을 수 있다. 생명체의 법칙들과 심리적 법칙들은 사회의 법칙들을 결정하지는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을 이루는 계층의 각 단계에는 우연성이 존재하며, 하위에 위치한 간단한 구조가 보다 상위의 새로운 법칙을 결정하지는 않는다."(312-3)


# 창발주의 : 하위 계층의 요소에는 없는 특성이나 행동이, 이들이 합쳐진 상위 계층에서 창조적으로 돌연히 발현된다는 주장


"부트루의 가장 유명한 학생은 뒤르켐이었다. 뒤르켐의 《자살론》은 전체로서의 사회가 단순한 개인의 총합이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전체는 부분들보다 크다. '이러한 공리는 전체는 그것을 이루는 부분의 총합이 아니라는 르누비에의 주장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사회의 법칙은 우주의 힘 또는 전기의 힘과 유사한 면이 있으며, 개인의 심리 상태가 지니는 특징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원리들이 아니라 그보다 거대한 원리들로부터 나온다. 창발주의는 순수한 물리적 세계의 결정론적 토대와 사회 법칙들 사이에 충돌을 야기하지 않으면서 통계적 법칙을 흡수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젊은 시절(1885년)의 뒤르켐은 이미, 사회학은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과학이다. 자연에는 세 가지 세계가 있다. 물리적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 위에 사회학적 현상이 존재한다'는 부트루의 가르침에 찬동했다. 1897년에는, 자살의 안정성을 야기하는 집단적 힘을 일컬을 때도 '독자적'이라는 어구가 사용되었다."(315-6)


19 '정상 상태'의 탄생


"'병리성'은 질병이라는 개념만큼이나 오래된 듯하지만 1800년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질병은 신체 전체가 아닌 개별 기관의 속성이 되었고, 병리학은 병자가 아니라 건강하지 않은 기관을 연구하는 학문이 되었다." "병리학자들에게 정상이란 이러한 개념의 역으로부터 나왔다. 병적인 기관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경우, 이를 정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는 병리성의 개념이 우선이고 정상은 병리성의 반대 개념으로서 부차적으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콩트가 브루새의 위대한' 원리'라고 칭했던 것이 이러한 관계를 뒤집어 놓았다. 병리성은 정상으로부터의 이탈로 정의된 것이다. 모든 변이는 정상 상태로부터의 변이라는 관점에서 특징지어졌다." "기준과 표준에 대한 아이디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지만, '정상적'이라는 단어가 현대와 같은 용도로 사용된 것은 의학적 맥락을 통해서였다. 중요한 것은 표준은 충족되거나 충족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는 점이었다."(328-30)


"콩트가 정상성의 개념을 (사회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영역에 도입하였을 때, 그는 또 다른 변형을 초래했다. 정상은 더 이상 일상적인 건강 상태를 의미하지 않았다. 정상이란 것은 우리가 노력하여 달성하고 에너지를 바쳐야 할 정화된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다. 요컨대 진보와 정상 상태는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진보란 다름 아니라 질서의 발굴이다. 즉, 진보는 정상 상태에 대한 분석이다'라는 것이다." "'실증주의 학파는 지난 3세기에 걸친 혁명적 투쟁 기간 동안, 지식과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계층과 구성원들의 진정한 정상 상태를 가능한 한 최대로 달성하기 위해 준비를 다져 왔다'고 콩트는 말했다. 따라서 콩트는 정상이라는 아이디어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대치 상황을 표현했던 인물,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러한 대치 상황을 이끌어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현존하는 평균으로서의 정상과 우리가 진보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완벽함의 표상으로서의 정상 사이의 대치 상황 말이다."(335-6)


20 우주의 힘만큼이나 실재하는


"골턴과 뒤르켐은 각자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졌으며 정상과 비정상을 새로운 법칙의 실재와 긴밀하게 결부시켜 생각했다. 물론 뒤르켐의 창발주의 철학은 골턴에게는 이질적이었으며, 정상과 관련하여 각자가 핵심으로 생각하고 집착했던 관점은 결코 서로 동일하지 않았다. 실재적이고 완전한 법칙으로 골턴이 취급했던, 집단에 관한 정규분포는 뒤르켐이 집단에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우주의' 힘을 다스리는 법칙과는 다른 종류의 법칙이다." "정상의 반대는 무엇인가? 당연히, 비정상성이다. 그러나 골턴에게 정상의 특징은 정규곡선을 통해 묘사된다. 비정상은 평균으로부터 강하게 벗어난 것이다. 뒤르켐에게는, 비정상은 병적인 것으로 불렸다. 결국 비정상은 병든 것이다." "매우 간략화시켜 말하자면, 뒤르켐은 도덕적인 것과 정상적인 것을 동일시하였다. 골턴에게는 정상은 좋은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이었다. 어떤 극단적 존재들은 병적인 것이 아니라 우수한 것이었다."(354-5)


21 통계적 법칙의 자율성


"케틀레로부터 골턴은 오차곡선을 이용해 평균에서 편차를 생각하는 방식을 배웠다. 케틀레가 중심 집중 경향, 평균에 대해 생각하던 대목에서 골턴은 항상 예외에 몰두했으며 분포의 꼬리와 분산을 생각했던 것이다." "골턴은 평범함으로의 복귀는 정규곡선이 가져오는 수학적 귀결이라고 보았다. 즉, 어떤 집단이 정규분포를 따르고 있다면 다음 세대 역시 이전과 대체로 동일한 평균과 분산을 지닌 정규분포를 따를 것이되, 다만 나중 세대에서 비범한 형질에 해당하는 멤버들은 대체로 이전 세대에서 비범한 형질에 해당했던 멤버들의 후손은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다." "골턴은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골턴은 (1) 현상을 설명하는 동시에, (2) '독립적인 사소한 원인들'을 배제시키는 일석이조를 거두었다. 그는 수많은 형질들이 보여 주는 정규분포를 자율성을 지닌 통계적 법칙으로 간주했다. 통계적 법칙은 이제 성숙한 세계로 접어들었다. 골턴은 우연이 길들여졌다고 보았다."(364-8)


"《과학 문법》을 저술한 피어슨은 골턴 이전의 모든 이들이 상관관계의 분석을 빠트렸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마음 속에 자리한 두 가지 다른 문제를 숙고하던 골턴은 상관관계의 개념에 도달했다. A는 B를 일으키는 유일한 원인이 아니지만, B를 낳는 데 기여한다. 그 수가 많건 적건 간에 B에 작용하는 다른 원인들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일부에 대해서는 우리가 모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모를 수도 있다. ··· 부분상관관계에 대한 이러한 측정은,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한 오래된 인과관계를 대체할 뿐 아니라 우주에 대한 우리의 시야에도 깊은 영향을 미칠 상관관계라는 광대한 부류를 낳은 기원이었다. 자연과학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인과관계의 개념은 산산조각으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 그 이후로 우주에 대한 철학적 관점은, 우주는 서로 완벽한 상관관계, 즉 절대적인 인과성에는 도달할 수 없는 변량들이 서로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는 시스템이라는 견해를 지니게 되었다.〉"(372-3)


22 프로이센 통계학의 한 장면


"1851년 노이만은 피르호의 의학지에 〈1846년 통계국 보고서로 본 프로이센 국가의 의학 통계〉라는 연구 한 편을 출간했다. 서두는 놀라운 명제로 시작했다. 굵은 활자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공중보건의 관리는 국가의 의무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지니고 인간이라는 종의 일원으로서 동등한 자격을 지닌다는 정신에 입각하고 있다. 국가의 유일한 목적은 그 구성원들의 복지인데, 왜냐하면 국가는 동등한 자격을 지닌 인간들로 구성된 유기적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정치과학의 진정한 취지와 목적은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본성의 법칙에 의거하여 인간의 정상적인 발전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대중의 번영을 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새로운 윤리적 세계관'을 낳는다. 노이만은 계속해서, 훌륭한 보건은 개개인의 완전한 발전에 필수적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전제로부터, 국가는 시민을 위한 의료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의학은 사회과학이다.'"(378)


"노이만의 《유대인의 대량 입국이라는 신화》는 1880년에 제2판이 나왔다." "당시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은 독일 동쪽으로부터 엄청난 수의 유대인들이 입국하고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한층 증폭되었다. 선동적인 소책자들은 갈리시아와 같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북부지역과 러시아에서 유대인들이 엄청나게 입국하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그들은 슐레지엔, 포젠, 그리고 동프로이센 등의 동부 지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입국이 독일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독일인의 특징은 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소책자들은 악의적인 익명의 저자가 쓴 것이었지만, 이들 중 어느 한 시리즈는 베를린 최고의 역사가이자 신랄한 학자 겸 정치가인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가 쓴 것이었다. 노이만은 이러한 (반유대주의에 기초한) 아우성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최소한의 '사실', 즉 독일로의 유대인 대량 입국에 대한 '통계적 공리'를 검증하는 데 전념하였다."(382-3)


"뵈크의 베를린 통계국이 반유대주의의 유행에 대해 보인 반응은 엥겔의 프로이센 통계국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뵈크의 1880년 연감에는 유대인의 입국에 관해 신문이 늘어놓는 무지한 불평불만을 조롱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이 연감은 '통계에 대한 부적절하고 부도덕한 악용이 반유대주의 동요를 관통하고 있다'고 썼다. 노이만은 그의 책 제3판에서 뵈크의 '양식 있음'에 대한 감사를 표시했다. 엥겔은 《프로이센 왕립 통계국지》에 무기명으로 발표한 비평에서 뵈크의 베를린 통계국이 발행한 연감과 새로 설립된 제국 통계국에서 발행한 연감을 논했다. 이 비평은 제국 연감의 객관성이 모두에게 모범적인 사례라고 평가하였다. 뵈크의 연감은 일간지의 보도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저널리스트들은 현재의 사건을 다루지만, 통계국은 후대뿐 아니라 행정가, 입법가, 상인들을 위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장차 통계학자들은 정치와는 무관하게 활동하도록 하자는 것이 위 비평의 주장이었다."(390)


23 우연이 지배하는 우주


"퍼스는 결정론을 부인했고, 세상이 결정론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에 의혹을 품었다. 그는 배비지의 자연 상수가 지닌 진정한 값을 확증하려고 애쓰는 집단에서 일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상수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상수라는 것들이 지닌 숫자는 우리가 점차적인 과정을 통해 정착시켜 가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귀납적 학습과 추론을 단순히 통계적 안정성의 관점에서 설명하였다. 기술적으로는 그는 실험 설계에서 임의화randominzation의 방법을 의식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즉, 그는 보다 예리한 질문을 제기하고 보다 유용한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생성된 우연이 지니는, 법칙과도 같은 특징을 활용하였다." "그는 확률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빈도주의적frequentist인 접근법을 가지고 있었으나, 또한 증거가 지닌 주관적 중요성(log odds)의 측정법을 개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환원 불가능하게 확률적인 우주를 상상했다."(395)


"주목할 만한 것은 확률에 대한 퍼스의 개념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논증의 건실함과 연계했던 방식이었다. 그 아이디어는 1866년 10월 31일 보스턴 강연에서 이미 선을 보였다. '증거로부터 가능성이 나오는 것은 언제나, 거짓보다는 진리를 더 자주 낳는 과정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거짓보다는 진리를 더 자주 낳는 것으로 알려진 모든 과정은 가능성을 낳는다.' '거짓보다는 진리를 자주 가져옴'. 이것이 바로 귀납 및 연역 논리에 대한 퍼스의 이해를 구성하는 핵심이다. '논리는 논증을 검증하는 데 필요한 과학이다.' 이는 개개의 논증을 검증하기보다는 논증의 속genus을 숙고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논증의 전제가 사실이면 그 결론은 언제나 참이 되는 속의 경우, 그 논증은 '논증적'demonstrative이다. 논증의 전제가 사실이며 그 결론은 대체로 참이 되는 속의 경우, 그 논증은 단지 '개연적'probable일 뿐이다. 양자의 경우 모두, 타당한 논증은 '진리 생성적 성격the truth-producing virtue'을 지닌다."(412-3)


# 논증의 속genus : 비슷한 논증의 집합


# 3가지 종류의 추론

1. 연역법 : 전제가 참이면 결론은 반드시 참이다.

2. 귀납법 : 사실 A가 무수히 반복적으로 관찰될 경우 가설 B가 사실로 도출된다.

3. 상정논법(abduction, 가설) : 전제가 참이라도 결론이 반드시 참이라고 할 수 없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하게 해주는 패턴이다.

※ 최선의 설명에로의 추론

 1-1. 특이한 사실 A가 관찰되었다.

 2-1. 만약 가설 B가 참일 경우, 사실 A는 이상하지 않다.

 3-1. 따라서 B가 참이라고 '상정'할 만한 이유가 있다.


"퍼스는 사람들이 어떠한 견해에 대해 합의에 이르게 된다면 그 견해가 바로 진리라고 가르쳤다. 일찍이 유명론적인 관점에서 그는 진리란 우리가 믿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썼다. 나중에는, '만약 진리가 만족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현재의' 어떠한 만족에도 진리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근원적이며 회피할 수 없는 쟁점에 대한 검증을 거친 이후에도 최종적으로 '발견될' 만족에만 진리가 있다고 할 것이다'라고 썼다. 이는 유명론에서 실재론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통상적인 모습이며, 확률은 일련의 사건에서 해당 사건의 상대빈도라는 관점으로부터 확률은 '지향성'이라는 관점으로 전환이 이루어진 것과 상응한다." "〈공동체가 어떠한 질문에 대한 불변의 결론을 합의로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을 확신할 수는 없다. (···) 기껏해야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특정한 문제에 심혈을 기울인다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결론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 정도이다.〉"(419-20)


"우연이 길들여졌다고 하면, 이성에게 위안이 되는 것인가? 형이상학적 우연은 더 이상 비밀스런 환희를 위협하거나 제공하지는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통계적 법칙, 즉 물질의 가장 미세한 입자 위에 자그맣게 새겨진 평균의 법칙에 의해 안전해진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퍼스는 첫째, 둘째, 그리고 셋째라는 식의 서술을 즐겼다. '첫째는 우연이고, 그다음은 법칙이며, 어떤 기질을 가질 경향은 셋째이다.' 이것은 우연이 통계적 법칙에 의해 소멸된다거나, 연속적인 주사위 던지기를 통해서 우리가 흄이 주장한 습관이라는 저 마음 편한 개념을 다시 상정해 볼 수 있는 세계가 만들어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첫째였던 것은 시간이 지나도 첫째이다. 우리가 우주의 별자리를 보는 경우처럼 무한의 상황에서 주사위가 던져지는 상황이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경우처럼 전적으로 개별적인 특수성의 환경에서 주사위가 던져지는 상황이든, 우연은 감각의 모든 경로에 쏟아져 내린다."(426-7)


# 흄의 습관 : 흄이 귀납법과 인과관계의 필연성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음을 주장하면서 인간이 인과관계를 확립하는 메커니즘으로 제시한 것이다. 즉, 흄은 '원인'으로부터 '결과'에의 '이행'移行이 일어나는 것은 '습관'에 의해서 확립되는 것으로, 여기에 객관적 필연성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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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H2O인가? - 증거, 실재론, 다원주의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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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최신 과학은, 물은 단순히 H2O라는 견해를 더는 지지하지 않는다. 물은 중수소를 비롯한 드문 동위원소들을 포함하고 있을뿐더러, 물의 익숙한 화학적 물리적 속성들은 다양한 이온들의 존재와, 인접한 물분자들 간의 끊임없는 결합 및 재결합에 본질적으로 의존한다. 단일분자의 화학식 H2O는 이 같은 물 분자들의 상호작용을 은폐한다. 만약에 우리 앞에 H2O 분자들이 단순히 쌓인 무더기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물로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물론 '물은 H2O다'라는 견해는 물의 구조에 관한 진리의 중요한 요소 하나를 담고 있으며 더 나아가 탐구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 견해를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로 간주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오히려 그 견해는 계속 전진하는 과학의 서사시에서 하나의 중요한 휴식 지점이었을 따름이다. 이 예에서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즉, 과학자들이 이미 수정한 단순소박한 과학적 진리에 교조주의적으로 매달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없다."(23-4)


1장 물과 화학혁명


1.1 요절한 플로지스톤


"프리스틀리(1733~1804)는 새로운 공기들을 가장 많이 발견하고 생산한 인물이었다. 그의 연구 이후, 평범한 공기는 최소한 두 가지 성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리고 다양한 화학반응에 의해 다양한 유형의 공기가 생산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로 정착했다." "프리스틀리는 '탈脫플로지스톤 공기dephlogisticated air'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는 평범한 공기에 섞여 있는 '플로지스톤'을 제거하고 남은 공기를 가리키기 위하여 그 문구를 사용했다. 플로지스톤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가연성의 요소였다. 여기에서 '요소'란 영어로 'principle'인데, 현대적 어법에서 'principle'은 '원리'를 뜻하지만, 이 경우에는 다른 물질들과 결합하여 자신의 고유한 속성들을 그 물질들에 부여하는 어떤 근본적인 물질을 뜻했다. 플로지스톤은 가연성 물질들에 가연성을 전달해주는 요소였다. 가연성 물질은 플로지스톤을 풍부하게 보유한 물질이었고, 그런 물질은 연소할 때 플로지스톤을 방출했다."(39-42)


"라봐지에는 프리스틀리의 실험들과 관찰들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다. 연소는 녹슮(프리스틀리는 금속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하면, 금속은 자신의 핵심 속성들을 잃고 '금속회calx'로 변환된다고 생각했다)과 마찬가지로 산소와의 결합이었다. 프로스틀리가 탈플로지스톤화를 본 곳에서 라봐지에는 산화를 보았다. 라봐지에가 비춘 빛을 보고 난 화학자들은 다시는 플로지스톤을 돌아보지 않았다. 심지어 과학혁명에서 패배한 진영이 단순히 틀렸다고 말하기를 거부한 것으로 유명한 토머스 쿤조차도 프리스틀리에게는 놀랄 만큼 냉담했다. 물론 라봐지에 화학에 대한 프리스틀리의 저항이 〈비논리적이거나 비과학적〉이었다는 점은 부정했지만, 쿤은 프리스틀리가 그토록 오래 저항한 것은 무리한 짓이었다고 생각했다.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이 속한 전문가 집단 전체가 견해를 바꾼 후에도 계속 저항하는 사람은 그 저항으로 인해 과학자이기를 그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44-5)


"다원주의적 기획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1)과학자들이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을 거부함으로써 상실한 지식이 혹시 있었을까?(한낱 이론보다 더 많은 것이 결부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론' 대신에 '시스템'이라는 표현을 쓸 것이다.) 바꿔 말하면,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은 했고 산소주의 시스템은 할 수 없었던 좋은 것이 있었을까? 과학혁명은 전형적으로 그런 지식의 상실을 동반한다고 쿤은 생각했다. 그를 기리는 뜻에서, 이를 '쿤 상실Kuhn loss'이라고 부른다. (2)플로지스톤 시스템이 존속했다면 발전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 이론의 때 이른 죽음 때문에 발전이 지체되거나 가로막힌 지식이 혹시 있었을까? (3)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과 산소주의 시스템이 둘 다 있었을 때, 두 시스템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 이로운 결과들이 있었을까? (4)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이 존속했다면, 산소주의 시스템과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 사이에서 이로운 상호작용이 계속되었을까?"(59)


1.2 플로지스톤이 살아남았어야 하는 이유


"(양 진영의 '인식적 가치들의 어긋남'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순성'과 '완전성'의 대립이었다. 산소주의자들, 특히 라봐지에 본인은 단순성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 특히 우아함이라고 할 만한 유형의 단순성이 중시되었다. 플로지스톤주의자들, 특히 프리스틀리는 완전성을 더 중요하게 여겼고 주어진 문제 영역에 속한 모든 관찰된 현상들과 그것들의 모든 관찰된 측면들을 설명하기를 원했다. 라봐지에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적 견해에 멋지게 들어맞는 모범적인 사례들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더 지저분한 사례들은 제쳐놓기를 좋아했다. 반면에 프리스틀리와 몇몇 플로지스톤주의자 동료들은 자신들이 산출하고 관찰한 모든 주요 현상들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설령 더 난해한 사례들에서는 설명들이 어색해지더라도 말이다. 단순성이나 완전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각 진영이 알아채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로 경쟁하는 그 가치들을 강조하는 정도, 혹은 그것들에 집착하는 정도에서 명확한 차이가 있었다."(80-1)


"단순성과 완전성 외에 더 광범위한 유형의 인식적 가치들도 역할을 했다. 일종의 인식적 보수주의는 많은 플로지스톤주의자들이 옹호한 가치들 중 하나였다. 반면에 산소주의자들은 개혁 혹은 참신함 그 자체에 매력을 느꼈다. 〈이 견해들 중 어느 쪽이 가장 참된지를 실험으로 판정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플로지스톤 원리가 모든 현상들을 적어도 라봐지에 씨의 원리에 못지않게 잘 설명하므로, 나는 플로지스톤 원리를 고수해왔다.〉 확실히 여기에서 나타나는 캐븐디시의 기질은 라봐지에가 1773년에 자신의 연구들은 〈물리학과 화학에서 혁명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라고 선언하면서 드러낸 젊은 열정과 의미심장한 대비를 이룬다." "그렇지만 프리스틀리는 〈자유로운 토론은 항상 진리를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플로지스톤을 옹호하는 많은 논증들의 동기는 보수주의가 아니라 '다원주의', 라봐지에주의의 교조주의에 맞선 다원주의였다."(86-7)


"양 진영은 모두 통일성에 가치를 두었으며, 각 진영은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유형의 통일성을 자신을 옹호하는 강력한 증거로 거론했다. 이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수렴이 존재했다. 양 시스템 모두 연소, 녹슮, 호흡을 유사한 방식으로 통일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무엇이 어떻게 통일되는가, 하는 것에는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유사하지만 더욱 두드러진 양상은, 양 진영 모두가 '체계성'systematicity을 중대한 가치로 여기면서 서로 상대 진영은 체계성 없이 자의적이고 무계획적이라며 비난했다는 점이다. 플로지스톤주의 진영에서 라봐지에주의자들에 대하여 제기한 비난은, '유사한 결과에 유사한 원인을 배정한다'는 규칙을 그들이 충실히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봐지에도 할 말이 있었다. 그는 다양한 플로지스톤주의자들이 다양한 새 현상들 때문에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애쓰면서 이론에 도입한 수많은 복잡한 대책들과 상호모순적 변화들을 노골적으로 업신여겼다."(92-3)


"산소주의 시스템과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은 제각각 화학물질의 근본적 존재론에 관한 중요한 형이상학적 교설을 포함하고 있었다. 전자는 합성주의compositionism의, 후자는 요소주의principlism의 특수한 구현 사례였다." "합성주의 시스템-유형의 근본적인 인식활동 하나는 화학물질을 원소로서, 혹은 원소들로 이루어진 화합물로서 기술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 더 실험적인 활동들이 있었다. 즉, 화합물을 원소들로 분해하기, 그리고 그 원소들로부터 그 화합물을 재합성하기가 있었다. 분해와 재합성 둘 다 할 수 있을 경우, 그것은 해당 물질의 조성에 관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최고의 증명으로 간주되었다. 이 실천들은 성분들이 화학반응 내내 보존되는 안정적 단위들이라는 전제를 필요로 했다. 또한 그 전제는 화학반응을 각각 특유하고 안정적인, 설령 합성 상태에서는 그것들의 속성이 표출되지 않더라도 내내 동일성을 유지하는 블록들의 재배열도 설명하는 활동을 떠받쳤다."(113-4)


"18세기에 합성주의 화학의 주요 경쟁자는 요소주의였다. 요소주의는 '요소' 개념, 곧 특정 속성들을 다른 물질들에 주는 근본물질의 개념을 중심으로 형성된 하나의 시스템-유형이다. 요소주의에서 핵심적인 인식활동들은 관찰 가능한 속성들에 따라 물질들을 분류하기, 요소들을 지목함으로써 물질의 속성들을 설명하기, 요소들을 추가함(혹은 빼냄)으로써 물질들을 변환하기였다. 합성주의와 마찬가지로 요소주의 시스템-유형도 많은 형태로 구현되었는데, 그것들 모두는 위의 세 가지 핵심 활동들을 공유했다. 그리고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요소주의 존재론은 요소들과 요소들에 의해 변환되는 기타 물질들 사이의 비대칭성을 전제했다는 점이다. 요소들은 능동적이었고, 기타 물질들은 수동적이었다. 요소주의에는 과거의 잔향殘響들이 남아 있다. 이를테면 바탕에 깔린 원소들이 요소들의 영향으로 달라진다는 과거의 형이상학, 심지어 물질이 형상을 부여받는다는 과거의 형이상학이 남아 있다."(115)


"요소주의와 합성주의 사이의 생산적 갈등은 화학에서 건강한 다원주의가 유지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합성주의가 더 순수한 형태로 발전하고 라봐지에로부터 돌튼과 그 이후까지 당당히 행진하며 점점 더 지배력을 강화함에 따라, 화학의 주춧돌을 다음과 같은 삭막한 선택의 문제로 간주하게 만드는 유혹도 커졌다. '단순소박한 원자론에 동의하라. 아니면, 화학적 물질에 관한 어떤 존재론적 논의도 포기하라.' 이것은 몇몇 논평자들이 19세기에 있었던 원자론과 실증주의의 대립을 서술하기 위하여 뽑아낸 문구다. 만약에 화학자들이 기본적인 합성주의를 유지하면서도 플로지스톤주의-요소주의의 성취들을 더 잘 알았다면, '원소'를 보는 더 유연한 관점과 '무게 없는 물질'에 대한 더 섬세한 해석을 발전시켜 전기와 열역학을 화학 안에 더 쉽게 편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플로지스톤주의 시스템이 존속했다면 얻어졌을 혜택 하나는 그 시스템이 미해결 문제들을 일깨우는 구실을 했으리라는 것이다."(139-40)


1.3 선택, 합리성, 대안


"합리성의 의미에 관한 보편적 합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나는 여기에서 몇 마디 말로 그런 합의를 제조하는 것을 꿈꾸지 않는다. 하지만 유익한 논점 몇 개를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 그 논점들은 보편적 승인을 받아야 마땅하다. 첫째, 합리성은 진리에 관한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합리성은 그때그때의 지식 혹은 믿음을 감안하면서 판단이나 결정을 내리는 좋은 방법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가장 합리적인 판단들은 (궁극의 진리 따위가 있다면) 궁극의 진리를 한참 벗어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채택해야 하는 근거들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합리적 사고 혹은 논의는, 아무튼 의식적 숙고가 존재하는 한에서는, 해당 공동체 내부에서 합의된 모종의 규칙 혹은 방법을 따른다. 셋째, 중요한 것은 합리성의 최소 조건이다. 최소한의 조건을 말하면, 합리적 행위는 행위자가 밝힌 목표를 성취하거나 적어도 행위자가 특정 목표에 기여하는 행위로서 의도한 것이어야 한다."(141-2)


"충분히 납득할 만하게도 많은 역사학자들은 반사실적 사고思考를 경계하고, 그런 사고는 실제 증거에 기초하지 않으므로 타당성이 없으며 명확히 정해진 목적에 기여하지 않으므로 무의미하다고 염려한다. 반사실적인 것들은 소설가에게는 흥미로운 영역일지 몰라도 역사학자들이 진지하게 다뤄야 할 주제는 아니라고 그들은 말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세 가지 구체적인 이유 때문에 반사실적 역사를 연구한다." "첫째 이유는 인과론적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나는 반사실적 추론이 역사에 대한 인과론적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제프리 호손의 주장에 동의한다. 〈X가 Y를 일으켰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만약에 X가 없었다면, Y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취지의(대게는 이런 확정적 진술보다 더 약한 형태의) 반사실적 진술을 하는 셈이다. 이것은 인과관계를 다루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상식이다." "한낱 상관성을 넘어선 인과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모종의 반사실적 진술들도 수용할 용의가 있어야만 한다."(164-5)


"반사실적 추론의 둘째 목적은 우리의 상상력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가 아는 바와 우리가 가능성의 한계라고 생각하는 바에 의해 제한되는 경향이 있다. 적당량의 반사실적 추론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사고를 개방시켜주는 이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강조되지 않은 반사실적 역사의 또 다른 목적이 있다. 궁극적으로 나는 실제 역사가 선택하지 않은 경로들을 단지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보는 것'에 관심이 있다." "과거에 실제로 선택되지 않은 가능한 발전 경로를 살려내야 할지, 또 어떻게 살려낼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으려면, 우선 그 경로가 선택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반사실적 역사는 더 능동적인 단계를 위한 예비 작업, 타당성 조사, 심지어 행동 계획으로 기능한다. 반사실적 추론은 선택되지 않은 경로들을 상상으로 따라가면서 어떤 길이 뚫어볼 가치가 있을 만큼 유망한지 판단하는 정찰 작업으로 구실할 수 있다."(167-9)


2장 전기분해: 혼란의 더미와 양극의 당김


2.1 전기분해와 그 불만


"물의 전기분해 실험이 라봐지에의 새로운 화학이 수용되는 것에 중요하게 기여했다고들 하지만, 산소와 수소가 혼합된 채로 산출되었기 때문에 이 실험은 깔끔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 혼합 기체에 다시 스파크를 가하여 물로 변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소량의 혼합 기체를 쉽게 성분들로 분리하여 수소와 산소의 존재를 다른 방법으로 입증할 수는 없었다. 반면에 니컬슨-칼라일 실험에서는 수소와 산소가 깔끔하게 분리된 채로 산출되었다." "그러나 니컬슨-칼라일 전기분해의 그 깔끔함은 또한 심층적인 문제 하나를 들춰냈다. 전기의 작용으로 물 분자 각각이 산소 입자와 수소 입자로 분해되는 것이라면, 왜 그 두 기체가 같은 장소에서 나오지 않고 거시적인 거리만큼(거뜬히 1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두 위치에서 나올까? 또 왜 산소는 전지의 양극과 연결된 전선에서 나오고 수소는 음극과 연결된 전선에서 나올까? 거리 문제는 분해된 물질들의 조성에 관한 전기분해의 함의들을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 듯 했다."(180-1, 188)


"19세기 초반의 전기화학을 돌이켜보면, 이 분야에서 미시적 이론의 구성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과제였다. 전기분해는 시대를 너무 많이 앞서간 실험 기술이었다. 우선, 전기분해의 메커니즘에 관한 신뢰할 만한 가설을 세우려면, 물을 이룬다고 추정된 원자적 입자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에 관한 명확한 아이디어들이 필요했다. 어떻게 전기가 원자들을 떼어놓는가에 관한 이론을 구성하려면, 무엇이 원자들을 함께 묶어놓는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필요가 있었다." "또 다른 문제는, 전기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심지어 전기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지배적인 견해는 전기가 플로지스톤이나 칼로릭, 자기magnetism와 마찬가지로 무게 없는(또는 '미묘한subtle') 유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전기 유체가 존재하며 그것의 상대적 과잉과 결핍이 양전하와 음전하로 나타난다고 믿는 사람들과 양전기 유체와 음전기 유체가 따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에 의견의 불일치가 있었다."(202-3)


2.2 굴하지 않은 전기화학


"19세기 후반, 전기분해에 관한 새로운 존재론이 등장했다. 그 존재론은 거리 문제 자체의 바탕에 깔린 중요한 전제 하나를 부정했다. 〈만일 전기분해에서 일어나는 일이 전기의 작용으로 물 분자 각각이 분해되는 것이라면...〉이라는 전제를 말이다. 새로운 존재론의 핵심은 자유이온으로의 해리였다. 즉, 일부 물분자들은 외적인 전기를 가하기 전에도 이미 전하를 띤 이온들로 분해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이온들이 액체 전체에 퍼져 있다가 자기가 보유한 전하에 맞게 전극들에서 선택된다." "물-화합물 전기화학은 자신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그 출발점을 수정하고 개선했다. 초기 전기화학(또는 초기 원자론)의 많은 부분이 물이 HO라는 전제에 기초하여 발전했다. 그러나 원자론 화학이 성숙하고 전기화학이 자유 해리의 개념을 받아들이자,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물의 화학식은 H2O로, 물의 이온 조성은 H+와 OH-로 바뀌었다. 물은 여전히 화합물이었지만, 처음에 상상된 단순한 수소-산소 화합물이 아니었다."(233-7)


# 물-화합물 전기화학 : 물은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라는 주장. 이에 맞서 물이 다른 원소와 결합(합성)될 수 있는 하나의 원소라는 주장이 있었다.


"19세기 전기화학이 명확한 패러다임을 보유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할 듯하다. 중요하게 명심해야 할 점은 당시의 이론적 상황은 완전한 카오스가 아니라 '조율된 다양화'라는 것이다. 물-화합물 전기화학의 확증은 주로 실험 영역에서 이루어졌지만, 실험에 대한 몇몇 근본적인 이론적 해석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것도 그 확증에 기여했다." "19세기 전기 화학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전-과학pre-science도 아니고 정상과학 기간들 사이의 혁명적 격동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수의 시스템들이 공존하는 지속적 다원성이다. 다양한 시스템의 창조자들과 옹호자들은 출판된 글과 사적인 관계를 통해 서로 잘 소통했다. 시스템들과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대체로 생산적이었다. 현대 철학과 다르지 않게, 19세기 전기화학은 견해의 불일치, 논쟁, 토론을 기반으로 번창하는 분야였다. 지속적으로 견해가 어긋나는 학자들의 공동체를 충분히 허용할 수 있는 개념적 관습적 공통 기반이 존재했다."(246-7)


2.3 전해질 용액 속 깊숙이


"나는 특히 과학철학자들 사이에서 흔하지만 일부 과학사학자들과 과학사회학자들도 공유한 암묵적 전제 하나를 반박하고자 한다. 그 전제는 더 다원주의적이었던 과학의 단계들에 계속 집중하는 것보다 합의의 형성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조지프 슈왑의 생각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쿤의 정상과학/탈정상과학 구분과 슈왑의 안정적/유동적 탐구 구분은 매우 유사하지만, 과학의 발전이 계속되면 점점 더 많은 연구가 유동적 탐구에 할애된다는 것이 슈왑의 견해였다. 쿤이 말한 탈정상과학과 슈왑이 말한 유동적 탐구는 다원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띤다. 그러므로 과학의 본성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런 과학 단계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심지어 쿤이 말한 정상과학에서도 연구의 최전선은 슈왑이 말한 유동성을 어느 정도 띠어야 한다. 모든 과학 분야의 근본적 논쟁이 깔끔한 종결에 이르는 때가 언젠가 도래하리라는 생각은 그럴싸하지 않은 생각이다."(263-4)


"뿐만 아니라, 다원주의적 과학 단계가 혼란스럽고 불확실하며 따라서 더 통일된 단계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이 과연 옳은지도 불명확하다. 찬란한 통일과 합의의 순간은, 기초적인 수준의 통찰을 위해서는 필수적이지만 구체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그리 유용하지 않은 깨달음의 순간epiphany moment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그 순간은 '과도한' 단순화와 '과도한' 확신의 순간이며, 그 다음에 과학자들은 대개 더 현실적이고 노련한 마음가짐으로 되돌아가 다시 난점들, 예외들, 문제들, 흠집들, 숨어 있는 개념적 불합리들, 역설들, 실패한 예측들, 수수께끼 같은 새로운 현상들을 다룬다. 분자유전학이 성숙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왓슨과 크릭의 '중심 교리'를, 곧 정보가 DNA에서 RNA를 거쳐 단백질로 흘러간다는 과도하게 단순화된 생각을 벗어난 덕분이었다. 만약에 코페르니쿠스적 천문학이 코페르니쿠스 자신의 등속원 운동에 대한 황홀한 애착에 머물렀다면, 그 천문학은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다."(264-5)


3장 HO일까, H2O일까?: 원자의 개수를 세는 법을 터득하기까지


3.1 볼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셀까?


"당시에는(심지어 지금도) 개별 원자들을 직접 관찰할 길이 없었다. 분자 속 원자들을 개별적으로 관찰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 원자들의 개수를 셀 수 있을까?" "물의 전기분해 직후, 원자론이 등장했다. 통상적인 견해에 따르면, 화학적 원자론은 잉글랜드 북부의 과묵한 교사 존 돌튼(1766~1844)의 작품이다." "돌튼의 주요 업적은 익숙하고 오래된(심지어 고대에도 있었던) 원자 개념을 18세기 합성주의 화학과 융합하여 19세기 원자화학으로 이어지는 필수 연결고리를 창조한 것이었다. 그는 다양한 화학물질들이 서로 결합할 때 따르는 비율의 놀라운 규칙성을, 화학결합이란 명확히 정해진 무게를 지닌 원자들의 결집이라고 전제함으로써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비록 많은 화학자들은 돌튼의 원자를 곧이곧대로 믿기를 꺼렸지만, 기본 물질들(원소들)을 이루는 모종의 원자적 단위들의 결집과 재결집을 통해 화학반응을 개념화하는 것은 머지않아 통상적인 실천으로 자리잡았다."(292-4)


"자신이 말하는 원자들을 직접 관찰하기는 불가능함을 인정한 돌튼은 물 분자가 단순하다고 추측했기 때문에 HO에 도달했다. 그가 아는 한에서,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화합물은 물 하나뿐이었다. 그렇다면 물의 조성이 최고로 단순한 조성, 곧 수소 원자 하나와 산소 원자 하나의 조합이 아니라고 그가 추측할 이유가 과연 있겠는가? 물론 물 분자가 수소 원자 24개와 산소 원자 37개로 이루어졌다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 왜 그렇게 추측해야 할까?" "실제로 돌튼은 동일한 원소의 원자들이 서로를 밀쳐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상이한 원소들의 원자들과 달리) 화학적 친화성에 의해 서로에게 끌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화학적 친화성이 있다면, 원자들 각각이 보유한 칼로릭의 척력과 화학적 친화성이 균형을 이뤄 원자들이 서로를 밀쳐내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만일 한 분자를 이룬 유사한 원자들의 개수가 더 많다면, 그 분자는 덜 안정적일 것이었다. 따라서 물은 HO여야 했다."(298-9)


"조제프루이 게이뤼삭과 돌튼은 둘 다 기체가 열에 기체가 열에 반응하여 보이는 행동을 연구하여 처음으로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 후에 관심을 화학결합으로 돌린 게이뤼삭은 계속해서 기체에 초점을 맞췄고 무게가 아니라 '부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끝에, 기체들이 서로 화학적으로 반응할 때는 (압력과 온도가 동일한 경우) 아주 단순한 부피 비율로 반응한다는 놀라운 일반적 규칙성을 발견했다. 예컨대 부피 2의 이산화탄소는 부피 1의 산소와 결합하여 부피 2의 탄산이 되었다. 부피 1의 질소는 부피 3의 수소와 결합하여 부피 2의 암모니아가 되었다. 물도 다시 등장한다. 일찍이 캐븐디시는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물을 형성할 때의 부피 비율이 2:1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물은 H2O라는 것이 뻔히 드러난 것이 아닐까? 그렇다. 하지만 그 그림의 암묵적 전제를 받아들일 때만, 즉 동일한 부피의 모든 기체는 동일한 개수의 입자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때만 그러하다."(307-8)


3.2 원자화학에서 다양성과 수렴


# 당대에 제기된 원자화학 시스템들

1. 무게 유일 시스템(돌튼)

2. 전기화학적 이원주의 시스템(베르셀리우스)

3. 물리적 부피-무게 시스템(아보가드로)

4. 치환-유형 시스템(샤를 게르하르트)

5. 기하학적-구조적 시스템(월라스턴)


"이런 질문이 떠오를 만하다. 원자화학 이야기가 다원주의의 작동을 멋지게 보여주는 사례라 하더라도, 최소한 우리는, 이제 더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화학식 H2O와 같은 영원한 성취들이 '일부'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안을 고찰해야 한다. 첫째는 정합성이다. 우리가 특정 시스템들 안에서 연구하고 있다면, H2O에 대한 불신은 당연히 우리의 실천 시스템 안에서 모종의 비정합성incoherence을 야기할 것이다. 1860년대 이후에 HO를 고수하면서 유기 구조 화학을 실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역사의 먼지가 가라앉은 지금,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물은 H2O가 아니라고 보는 화학 시스템을 상상할 수 있으려면, 화학의 진화 계보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과학에서 절대적으로 영원하며 변경 불가능한 성취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는 특정한 성취가 앞으로도 확고할 경계를 긋고 그 확고함이 존속하는 한에서 그것을 누릴 수 있다."(401)


"고찰해야 할 또 다른 사안은 성공이다. 무게 유일 시스템이나 구식 이원주의 시스템 및 실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물을 HO로 보는 화학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물을 HO로 보는 다른 원자화학 시스템들도 있을 수 있으며, 심지어 원자를 상정하지 않는 화학 시스템들도 실제로 있었다. 우리가 H2O를 배타적이며 영구적으로 선호하려면, 그 대안적인 시스템들 가운데 어느 것도 성공적이지 않았으며 앞으로 성공적일 가망도 없다고 확신할 필요가 있다. 그 확신이 옳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 확신을 품기에 충분할 만큼의 지식이나 경험을 보유하지 못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성공을 증가시키리라고 스스로 진지하게 믿는 바를 실천하면서 최선의 결과를 바랄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전망이 암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얘기니까 말이다. 그러나 보장의 포기는 우리가 보장 없이 성취해온 바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401-3)


3.3 복잡한 화학에서 미묘한 철학으로


"여기에서 나는 작업주의operationalism와 표준적인 경험주의를 구별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경험주의는 관찰 가능한observable 것을 지식의 토대로 삼는 데 집중한다. 반면에 작업주의의 초점은 '실행 가능한'doable 것을 지식의 토대로 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관찰 가능성은 인간의 감각 기관들이 감각을 향상시키는 장치의 도움을 받거나 받지 않으면서 지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관한 개념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19세기에는 원자와 분자를 이런 의미에서 관찰 가능하게 만들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원자와 분자는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었다. 화학자들은 원자와 관련된 다양한 속성들을 측정하는 방법을 알아냄으로써 원자를 작업화하는 법을 터득했다. 측정은 수동적 관찰이 아니다. 왜냐하면 측정은 잘 정의된 특정 작업들의 계획적 수행에 의존하니까 말이다." "중요한 점은 비록 원자 자체는 관찰 불가능한 상태로 머물러 있더라도, 원자화학은 이런 식으로 번창할 수 있다는 것이다."(406-8)


"19세기의 원자화학자들은 원자를 실재론-비실재론 스펙트럼상의 어느 한 위치에 놓기 어렵다는 철학적 태도를 취했다. 무게 유일 시스템에서는 어떤 불명확한 무게의 보유자로서 원자가 실재한다는 믿음과 인정은 있었지만 그 외의 의미에서 원자가 실재한다는 믿음은 딱히 없었다. 심지어 물리적 부피-무게 시스템도 원자의 물리적 속성들로서 무게와 부피를 인정할 따름이었다. 전기화학적 이원주의 시스템에서는 실재론적 믿음이 조금 더 깊었다. 이 시스템은 전하를 띠었으며 경계가 명확한 입자로서의 원자들과 그것들이 서로에게 발휘하는 힘들을 상상했다. 치환-유형 시스템은 원래 무게 유일 시스템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원자의 실재성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다만, 이 시스템은 기radicals에 화학적 단위로서의 실재성을 부여했다. 기하학적-구조적 시스템은 원자들 사이의 위상수학적 공간적 관계의 실재성을 믿고 인정했지만, 이 관계는 분자들의 실재적인 3차원 모양을 완전히 결정하지 않았다."(418)


"나는 원자 개념의 작업화를 원자화학자들이 이뤄낸 성공의 열쇠로 지목해왔다. 19세기 화학자들의 다수는 원자의 존재에 관한 비생산적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구체적인 실험적 이론적 연구에서 원자 개념을 활용 가능하게 만다는 다양한 길들을 추구했다." "일반적으로 퍼스에게서 유래했다고 여겨지는 신념, 곧 탐구의 길들이 결국엔 진리로 수렴할 것이라는 신념을 나는 배척한다. 오히려 나는 '결국'은 끝내 도래하지 않고 탐구는 영영 종결되지 않음을 강조한다. 진정으로 실용주의적인 인식론은 궁극적 수렴을 증명하려 안간힘을 쓰거나 진리의 의미를 성공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에 집중하는 대신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알고 사는가를 고려한다." "19세기 전반기 원자화학자들의 공동체에는 (실용주의의 한 요소인) 오류가능주의 정신이 명백히 깃들어 있었다. 이러한 오류가능주의는 내가 서술한 원자화학 시스템 다섯 개의 번창과 동시에 나타난 굳센 다원주의를 뒷받침했다."(422-3)


4장 능동적 실재주의와 H2O의 실재설


4.1 물은 실재적으로 H2O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뒤엠 문제를 넘어서는 유일한 길은 뒤엠의 통찰을 받아들이고 심화하는 것이다. 그 통찰에 덧붙여, 믿음은─삶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도─행위와 뗄 수 없게 얽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가설의 검증에만 보조 전제들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채택하는 임의의 검증 방법은 오로지 그 방법과 정합하는 다른 인정된 '실천들' 혹은 인식활동들의 맥락 안에서만 타당하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가설을 검증하는 활동은 오직 실천 시스템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고, 이론의 입증은 오직 실천 시스템의 성공의 일부로서만 이루어진다. 사용 가능한 가설이나 이론은 어느 것이든지 실천 시스템 안에 내장된embedded 채로 등장한다. 이론은 실천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데, 실천 시스템의 성공과 별개로 이론의 옳음을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 따라서 어떻게 이론들이 선택되는가만 물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실천 시스템들이 선택되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433-4)


# 뒤엠 논제Duhem thesis : 〈한 실험의 결과를 공표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 실험을 보증하는 이론들의 집단 전체를 신뢰하는 것에 기초한 행위다.〉 그러므로 실험은 〈고립된 가설을 결코 반박할 수 없고 이론적 집단 전체만 반박할 수 있다〉


"모든 관찰자가 보기에 적당히 안정적인 현상들의 영역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영역을 개념적으로 또 물리적으로materially 세분하고 정리하는 방법들은 많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 그 자체는 깔끔하게 세분되어 분류 상자들에 담긴 채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는 그 상자들을 스스로 발명해야 하고, 거기에는 우리가 고안하는 어떤 상자 시스템에도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는 것들이 있을 개연성이 높다. 분류를 위한 최선의 일반 원리는 중요한 차이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지만, 몇몇 맥락들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들이 다른 맥락들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대다수의 화학적 상황에서 우리는 주어진 원소의 모든 동위원소들을 아무 거리낌없이 똑같은 원소로 취급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다른 상황들에서는 동위원소의 다양성이 온갖 차이를 만들어내는데도 말이다(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부터 원자폭탄까지 온갖 것들이 작동하게 한다)."(447)


"일단 지금 가장 중요하게 언급해둘 것은 나의 진리 개념에 내재하는 다원주의다. 나의 진리 개념은 본래적으로 성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개념에는 다원주의가 내재한다. 현실의 삶에서 무릇 성공은 제한적, 상대적, 잠정적 성공이다. 설령 한 실천 시스템 안에서 한 명제의 진리성이 전적으로 정확하고 확실하더라도, 그 진리성에 대한 우리의 긍정은 그 시스템 자체에 대한 우리의 수용이 확정적인 만큼만 확정적이어야 하며, 그 수용은 다시금 그 시스템이 계속 성공적인 때만 보장된다. 성공은 역동적인 기준이며, 상대적 성공의 판정은 배제하기 게임이 아니라 용인하기 게임이다. 잠정적 성공은 '머무르기에 충분할 만큼 좋음'에 달려 있다. 래리 라우단이 강조했듯이, 중요한 것은 추구pursuit이지, 수용acceptance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특정 시스템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다른 모든 시스템들이 단절되어야 한다거나 아무도 다른 시스템을 선택하면 안 된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450-1)


4.2 능동적 과학적 실재주의active scientific realism


"내가 '표준적 (과학적) 실재론'이라고 부르는 과학적 이론들은 (적어도 근사적이거나 부분적인) 진리를 보유했다는 믿음이다." "반면, 내가 말하는 과학적 실재주의는 우리가 실재와의 접촉을 추구하되 우리의 배움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권고하는 '능동적' 교설이지, 우리가 우주에 관한 객관적 진리를 어떻게 얻을 수 있거나 얻어왔는지에 관한 탁상공론식 서술이 아니다." "표준적 실재론의 표어가 진리라면, 능동적 실재주의의 표어는 '진보'다. 몇몇 극단적인 반실재론들과 달리 능동적 실재주의의 관점에서는, 관찰 불가능한 것들에 관한 이론이 우리를 실재에 관한 더 많은 발견들로 이끄는 발견적heuristic 힘을 지녔다는 점을 무시하지 않는다." "실증주의나 기타 반실재론이 실재가 어떠하고 어떤 유형의 이론들이 허용 가능한지에 관한 불필요하고 제약적인 표준-실재론적 전제들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데 사용된다면, 실증주의를 비롯한 반실재론은 능동적 실재주의에 도움이 될 수 있다."(468-70)


"포퍼-쿤 논쟁은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바를 교훈적으로 보여준다. 각각의 새 이론은 앞선 이론보다 더 많은 경험적 내용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할 때 포퍼는 능동적 실재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일원주의적 색채를 상당히 띤, 연속성에 대한 부당한 요구를 덧붙였다. 〈새 이론은 아무리 혁명적이더라도 항상 앞선 이론의 성공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쿤은 포퍼 풍의 연속성 요구가 지닌 한계를 꽤 명확하게 알아챘기에, 서로 다른 패러다임들 사이의 비정합성과 한 패러다임에서 다음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이 일어날  때 발생할 수 있고 실제로 발생하는 지식의 상실을 지적했다. 그러나 쿤의 과학관조차도 일원주의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 분야에서 지배적 패러다임이 독점권을 누리는 것을 정상과학의 전제조건으로 간주했다. 이런 패러다임-일원주의에서, 또 패러다임 이행기의 '쿤 상실'에 대한 그의 무관심에서 쿤은 능동적 실재주의의 요구에 부응하는 데 실패했다."(471-2)


4.3 표준적 실재론의 파리 병에서 빠져나가기


# Truth의 다섯 가지 의미

(Truth1) 본인이 생각하거나 느끼는 바와 정확히 대응하게 진술한다는 의미의 truth(진리) 개념. 이 의미의 truth는 대응에 관한 것이지만 단지 내가 말하는 바와 내가 생각하는 바 사이의 대응에 관한 것일 뿐이다.

(Truth2) 정의에 따라 truth인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우리가 정의를 내리고 사용하고 들이댐으로써 구성하고 판정하고 주장하는 truth(진리)다. 〈미터원기의 길이가 1미터라는 것은 당연히 진리true다.〉

(Truth3) 일부 truth는, 우리가 그것을 주어진 바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전제조건으로 삼아 활동할 때, 전제-채택presumption에 의해 진리true로 된다. 그 전제-채택이 의식적이고 명시적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 truth를 '공리axiom' 또는 '공준postulate'이라고 부른다. 〈빛의 속력은 관찰자나 광원의 운동과 상관없이 동일하다.〉

(Truth4) 논리학의 맥락 안에서 명제들은, 당사자의 작업이 속한 논리 시스템의 공리들에 따라서, 다른 진리true인 명제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으면 진리true다. 〈명제 P가 진리면, P의 대우contrapositive도 진리다.〉

(Truth5) 한 실천 시스템 안에서 한 명제가 그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 옳음correctness 검사를 '상황의존적으로'contingently 통과하면, 우리는 그 명제를 진리true로 인정한다.


"능동적 실재주의를 떠받치는 핵심적인 진리 개념은 진리5(Truth5)다. 능동적 실재주의는 이 진리5를 끊임없이, 또한 겸허하게 탐색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나머지 진리1부터 진리4까지 각각도 탐구에 필수적인 다양한 인식활동들과 연결되어 있다. 즉, 경험의 보고, 개념의 정의, 탐구를 가능케 하는 전제의 채택, 논리적 도출과 연결되어 있다. 요컨대 진리의 다섯가지 의미는 제각각 다르지만, 그 모든 의미들은 효과적인 탐구에서 서로 조화롭게 연결된 활동들에서 유래한다. 각각의 시스템 안에서 진리5를 탐색하는 활동은 바라건대 실재에 관한 앎을 산출할 것이다. 서로 다른 시스템들 안에서 입증된 진리5들 사이의 관계는 다양할 수 있다. 그런 진리5들은 서로 일관될 수도 있고 비정합적일 수도 있다. 혹은 서로 관련이 없다시피 할 수도 있다. 능동적 실재주의는 각 시스템에서의 진리5 탐색을 옹호하며, 또한 진리5의 탐색을 효과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시스템들의 육성을 옹호한다."(513-4)


"경험적인 사안들(진리5의 후보로 머물러 있는 명제들)을 다룰 때의 관건은 어떻게 우리가 확실성에 도달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도 잘해나갈 것인가다. 오늘날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확실성보다 확률을 더 많이 거론하곤 하는데, 이는 건강한 경향일 수 있다. 그러나 특히 몇몇 베이즈주의 전통들에서는, 확률을 진리와 확실성 모두의 대리물로 취급하면서 우리의 탐구가 계속되면 확률이 상승하여 1에 접근함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려는 충동이 있다. 이 기획에서 확률의 개념은 제 '쓰임새'를 잃고 '근사적 진리'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공허한 역할만 하게 된다. 이것은 온당치 않다. 확률의 진짜 쓰임새는, 바로 확률값이 1이나 0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확률이 우리의 행위를 이끌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우리가 애써야 할 것은 계획 수립을 위하여 '안정적인' 확률값들에 도달하는 것이지, 확률값들이 0이나 1에 접근하리라는 헛된 희망을 떠받치는 것이 아니다."(516)


"'물'의 외연은 〈H2O 분자들로 이루어진 모든 전체들〉이라는 퍼트넘(1975b)의 생각은, 40년 전에 나왔으며 당시에도 이미 시대에 뒤처진 생각이었다." "헨드리(2008년)는 현재 화학에서 통용되는 물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한다. 〈거시적인 물 집단body은 다양한 분자들로 이루어진 복잡하고 역동적인 뭉치congeries이며, 그 안에서는 개별 분자들의 해리, 이온들의 재결합, 소중합체들oligomers의 형성, 성장, 해리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H2O 분자들 사이에서 그런 복잡하고 역동적인 상호작용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물은 우리로 하여금 물을 물로 인정하게 만드는 속성들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큐리얼의 도발적인 말마따나 〈얼마나 순수하거나 작은지와 상관없이, 어떤 상태나 환경에 있는지와 상관없이, 어떤 분량의 물도 물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우리는 H2O 분자들이 모여 이룬 임의의 더미를 물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면 최신 과학을 위반하게 된다."(525-6)


5장 과학에서의 다원주의: 행동을 촉구함


5.1 과학이 다원주의적일 수 있을까?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겸허함'이다. 프리스틀리는 인식적 겸허함에 대해서 특히 교훈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개념은 역동적이었다. 〈모든 각각의 발견은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많은 것들을 우리의 시야 안에 가져다놓는다.〉 그는 대단히 멋진 이미지를 떠올렸다. 〈빛의 원이 커질수록, 그 원을 둘러싼 어둠의 경계도 더 커진다.〉 지식이 늘어나면, 무지도 늘어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자각하는 무지의 범위도 늘어난다. 프리스틀리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더 많은 빛을 얻을수록, 우리는 더 많이 감사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만족스러운 관조의 범위를 확장하니까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빛의 경계는 더욱더 확장될 것이며, 신의 본성과 창조물들의 무한함을 근거로 삼아서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탐구가 끝없이 진보하리라고 우리 자신에게 약속해도 된다. 이것은 참으로 숭고하고 영광스러운 전망이다.〉"(532-3)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상대주의는 판단과 결심의 포기를 적어도 어느 정도 동반하는 반면, 다원주의는 더없이 분명하게 그런 포기를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숙한 다원주의적 태도를 지닌 사람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것과 생산적으로 관계 맺는다. 이런 태도를 갖춘 인물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상대주의자의 캐리커처, 곧 '아무것이나'라고 말하는 사람과 전혀 딴판이다." "상대주의가 단지 존재'하는' 모든 대안들 각각을 동등하게 취급할 것만을 주장한다면, 다수의 대안들이 존재해야 한다는 요구는 없는 것이다. 모두가 실제로 무언가에 동의하고 아무도 대안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상대주의는 그 상황에 강하게 반발할 길이 없다." "〈'다원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다원성'의 요구다.〉 다원주의에서 관건은 실제로 다수의 시스템들이 공존할 때 얻어지는 혜택이다. 따라서 나의 다원주의 구호는 '어떤 것이든지 좋다Anything goes'가 아니라 '많은 것들이 좋다Many things go'이다."(544-5)


"과학을 모범으로 삼아 사회를 조형하려 한 근대주의적 프로젝트인 과학주의scientism는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거꾸로 우리가 좋은 사회적 정치적 시스템으로 여기는 것을 모범으로 삼아 과학을 조형하는 시도를 해볼수도 있지 않을까?" "과학의 장점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지저분한 정치의 세계로부터 겸허하게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 세계에서 사람들은 실패한 정치 시스템들도 인해 무수한 개인들이 겪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통해 여러 세기에 걸쳐 소중한 교훈들을 얻었다. 현재의 다원주의적 자유민주주의 형태들이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또한 그 형태들이 우리를 훨씬 더 나쁜 과도함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원주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투박하다. 즉, 일당독재를 피하고 적어도 양당 시스템을 두라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전체주의보다 여러모로 덜 효율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효율성이 사악한 목적에 종사하면 악몽을 빚어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539, 551)


5.2 다원성의 혜택과 그 혜택을 얻는 방법


"유일무이한 진리를 탐색할 때 봉착하는 가장 명백한 난관은 우리가 그런 진리를 획득했는지 여부, 심지어 그런 진리에 접근하고 있는지 여부를 결코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과학적 진보의 역사는 오늘 가장 선호되는 경로가 내일은 가장 유망한 경로가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뉴튼 역학의 공식들은 속도가 낮은 상황에서 성립하는 특수상대성이론의 한계 사례로서 살아남았지만, 이 생존은 그 새 이론에서 절대공간 및 절대시간 개념의 설득력이 보존되는 데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뉴튼 역학의 전반적 성공은 그 뒤를 이어 유일무이한 진리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이 전혀 다른 탐구 방향에 놓여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는 보증서가 아니었다. 극복할 수 없는 예측 불가능성 앞에서 합리적인 행위자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 어떤 탐구 노선이 결국 우리의 목표점에 도달할지 모른다는 점을 감안하여 우리는 다수의 노선들을 열어두어야 한다."(565-6)


"다원성은 앎을 풍부하게 한다. 심지어 한 시스템이 우리의 목표들에 꽤 적합하게 종사할 수 있을 때도, 다른 시스템들 역시 똑같은 목표들에 새로운 방식들로 종사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인식적 풍요는 우리를 기쁘게 해야 마땅하다. 우리의 목표가 진리이고 우리가 진리를 획득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더 다원적인 풍요를 요구할 수 있다. 우리가 우주에 관한 진리인 이론을 보유하더라도, 과학이 종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또 다른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을 시도할 수 있다! 동일한 주제에 관한 두 개의 진리는 서로 정확히 등가여야equivalent 한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논리학이 요구하는 바는 진리인 이론 두 개가 정면으로 모순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나에게 양자역학의 하이젠베르크 버전, 슈뢰딩거 버전, 파인만 버전 '그리고' 봄 버전을 달라. 물리 세계를 음미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 그렇게 많으면, 자연을 향한 창들이 더 많아지고, 자연에 대한 이해가 더 풍부해진다."(577-9)


5.3 다원주의의 실천에 관한 추가 언급


"'물은 H2O다'처럼 결정적인 과학적 상식이 당면 주제였다는 사실은 비판적 의식이 절박하게 필요하다는 느낌을 일으켰다. 나는 우리 모두가 물은 '단순히' H2O가 아님을 의식하는 것과 과학자들이 그 믿음에 도달한 미묘하고 정교한 이유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나는 과학사학자와 과학철학자의 비판적 의식을 여러 방식으로 방해하는 다음과 같은 통념들 각각에 반대한다. (1)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옳은 결정을 내리며, 우리는 주로 과학자들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좋은 길을 모색해야 한다. (2)과학적 이론 선택에서 확실성과 합리성의 결여는 어떤 경우에든지 겉모습에 불과하며, 우리는 간과된 요인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 겉모습을 떨쳐내야 한다. (3)우리는 현재 과학의 판결에 따라 과거 과학의 인식적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 (4) 혹은 과거 과학의 인식적 가치를 아예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5)무엇보다도 우리는 내려진 과학적 결정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모색해야 한다."(623)


"다원주의적 태도의 실험은 다원주의자에(혹은 적어도 일원주의를 향한 성향이 강하지 않은 사람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한세기 정도에 걸친 과학 연구의 많은 부분은 일원주의 실험이었다! 우리는 일원주의에 대한 경험을 충분히 얻었으며 일원주의를 가지고 우리가 어떤 성과들을 얻었는지 안다. 우리에게 심각하게 결핍된 것은 그에 맞먹을 만한 다원주의 실험 데이터다. 다원주의는 최근의 과학에서 큰 규모로 시도된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계속될 일원주의적 과학과 나란히, 다량의 다원주의적 과학을 시작하는 것이다. 생물학의 몇몇 영역들과 비교적 새로운 일부 과학 분야들에서는 이미 다량의 다원주의가 실천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좋은 일이지만, 우리가 일원주의에서 얻은 것에 못지않게 충분한 경험을 다원주의에서 얻으려면 다원주의적 실천이 훨씬 더 많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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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만든 음악가들
로르 도트리슈 지음, 이세진 옮김 / 프란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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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모든 음악가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역사에 참여한다. 그들은 권력에 매혹을 느끼기도 하고 대립각을 세우기도 한다. 어떤 창작자는 음침한 정권의 대변인이 되기도 한다." "그들과 시대의 관계를 고찰하면서 우리는 온갖 것을 발견한다. 오페라, 교향곡, 칸타타, 피아노 소나타······ 이 위엄 넘치는 작품들은 세계를 향해 열린 창이다. 이 작품들은 군중을 전율시켰다. 이 작품들이 그들을 살게 했으며, 나아가 그들의 나라와 화해하게 했다. 작곡가들의 의도도 대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대중에게 다가가는 음악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들은 몇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선율, 현의 속삭임, 매혹적인 리듬으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음을 알았다. 때때로 시대에 떠밀려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스타일의 전격적인 변화는 음악가가 작품에 혁명적이거나 정복자적인 어조를 부여하고자 할 때 더욱 두드러졌다. 그들은 정통적이지 않은 형식과 화성을 구사함으로써 음악사를 급작스럽게 변화시켰다."(13-4)


1 장바티스트 륄리


"1653년 2월 23일, 루이 14세의 프롱드의 난─프랑스의 귀족들이 루이 14세의 중앙집권에 반발하여 일으킨 내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진압을 축하하는 「밤의 발레」 공연에서 륄리도 단역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아마 목동도 되었다가 병사도 되었다가 절름발이 분장도 했다가 하는 일개 실루엣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몸소 춤을 추는 왕과 한 무대에 오를 기회였다. 젊은 군주는 춤을 무척 좋아하여 매일 몇 시간이나 춤에 몰두했다. 륄리는 여기에 전부를 걸었다. 그는 왕에게 금빛 햇살로 짠 듯 화려한 의상을 입은 아폴론의 모습으로 무대에 서라고 권했다. 당시 열네 살이었던 루이 14세는 이 공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전진하며 중신들에게 위엄을 떨쳤다. 젊은 왕은 이렇듯 예술을 통하여 궁정에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 절대왕정의 광휘를 유럽 다른 국가들에게까지 과시했다. 바야흐로 태양왕이 탄생하고 있었고, 륄리는 출세의 첫 번째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21)


"왕은 그를 신뢰했고 륄리는 그 대가로 자신의 온 생애를 바쳤다. 륄리는 왕의 치세를 드높일 생각밖에 없었다. 륄리는 무엇보다 태양왕을 무대에 올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왕이 발레 「병든 사랑」(LWV 8) 전체의 작곡을 맡겼을 때 륄리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주어진 기한이 매우 짧았는데도 1657년 1월 17일 루브르궁에서의 공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왕은 첫 장면부터 륄리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등장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무대에 오를 터였다. 이제 막 작곡가로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지만 륄리의 음악에는 이미 마법적인 데가 있었다. 단순한 반음계 혹은 조성의 맛깔나는 변화만으로도 왕이라는 존재가 강력하고 눈부시게 부상하는 듯했다. 1653년부터 1661년까지 이 젊은 이탈리아인의 발레 음악은 프랑스 음악을 착착 장악해갔다. 아직 새로운 음악 형식을 만들어내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륄리는 이미 프랑스 군주정을 음악으로 가장 잘 구현하는 음악가였다."(22)


"베르사유성은 군주의 영광을 드높이는 도구로 쓰였다. 1664년 봄, 왕은 성대한 연회에 올릴 혁신적인 공연물, 연극과 음악이 한데 어우러지는 작품을 륄리와 몰리에르의 합작물로 만들 것을 명했다." "소극과 풍속희극은 이 새로운 유형의 연회에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륄리와 몰리에르는 영역을 바꾸었다. 그래서 「엘리드 공주」(LWV 22/5-22)의 스토리는 기마 수렵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놀라운 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모두에게 선보인 이 코메디발레의 장면들 중간중간에는 음악과 춤이 교차한다. 음악과 말이 처음으로 공존하게 된 것이다. 륄리는 자신의 작곡 방식을 바꾸어 몰리에르의 운문을 따라갔다. 텍스트에는 운문과 산문이 섞여 있었고, 악구는 보다 유연해져 가사에 착 붙었다. 륄리는 아리아를 배우의 연기에 통합시켰다. 그러나 그가 고안한 가장 중요한 장치는 레치타티보, 즉 인물이 낭독을 하듯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대목이다. 그때까지는 그러한 음악이 없었다. 프랑스 오페라의 첫 소산이었다."(26-7)


"1685년 1월 륄리는 치명적인 불명예를 입는다. 루이 14세에게 륄리가 왕의 시동 중 하나인 열세 살짜리 소년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고발 편지가 날아든 것이다." "궁정에는 륄리가 자신들과 같은 신분임을 절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귀족이 많았다. 그들은 여전히 냉소적으로 그를 바티스트라고 불렀다. 그들에게 륄리는 언제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상대, 일개 하인이자 장인匠人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일을 이용해 그를 가장 강하게 공격한 이들은 다름 아닌 성직자들이었다." "1686년 2월, 그는 자신의 마지막 서정 비극 「아르미드」(LWV 71)를 왕에게 들려주고자 했다. 하지만 베르사유의 루이 14세는 그 작품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일부 발췌 부분이 궁정 왕세자비 처소의 부속실에서 비공개로 연주되었으나 왕은 그때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 걸작, 륄리의 가장 빼어난 작품을 왕은 영영 보지 않을 것이었다." "그 자신은 아직 알지 못했으나, 륄리는 이제 두 번 다시 왕 앞에 나서지 못할 운명이었다."(34-5)


2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튀링겐주 아이제나흐의 교회, 거기서 바흐는 루터를 만났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세기의 간격이 있었지만 둘 다 그 교회의 성가대 소년이었다. 루터가 교황에게 파문당한 뒤 설교를 했던 교회가 바로 그곳이었고, 바흐 또한 그 교회에서 평생의 악기가 될 오르간과 사랑에 빠졌다. 둘 다 어릴 적 그 교회에 딸린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바흐가 일곱 살 나이로 입학했을 때부터 교회학교에는 루터의 그림자가 떠돌고 있었다. 교육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음악, 그중에서도 가창이었다." "루터는 음악이 성경 말씀을 풍부하게 표현해준다고 보았다. 음악은 복음서의 말씀을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게 한다고. 바로 그 점이 바흐가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는 데 확신을 더해주었다. … 1707년 4월, 스물두 살의 청년 바흐는 초기 교회 칸타타 중 하나, 즉 루터의 일곱 절 코랄을 바탕으로 작곡한 칸타타를 발표했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포로가 되어도〉(BWV 4)였다. 노랫말은 종교개혁의 가장 오래된 코랄중 하나에서 따왔다."(41-3)


# 칸타타 : 바로크 시대에 발전한 성악곡의 한 형식. 독창, 중창, 합창과 기악 반주로 이루어진다.


"그는 악보 첫머리에 〈S. D. G〉라는 세 글자를 적어 넣음으로써 신성한 영광의 표지 아래 자신의 작품을 둘 것이었다. 〈오직 하느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 "하지만 바흐가 루터를 맹목적으로 좇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형식을 다양화했다. 어떤 때는 칸타타를 호른과 트럼펫으로 화려하게 시작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현을 잔잔하게 깔아 보다 명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성경 말씀을 부각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인의 영혼과 그리스도의 대화, 혹은 양과 목자의 대화를 상상하기도 했다." "메시지는 가사뿐만 아니라 악기의 정묘한 사용으로도 전달된다.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구현하는 이미지처럼 악기 자체가 전례력의 한 장면을 그려내기도 한다. 트럼펫은 부활을 예고하고, 오보에는 크리스마스의 목가적인 면을 환기하며, 첼로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순간들을 장중하게 반주한다. 바흐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장면에서 반음계를 쓰고, 주의 숨이 끊어짐을 표현할 때는 빠른 트릴을 구사했다."(48-50)


"1730년에는 마침내 장엄미사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B단주 미사」(BWV 232)가 바로 그 작품이다. 이 작품을 그는, 죽기 직전에야 완성할 터였다." "생애 말년에 이르러 음악적 유언을 남기면서, 바흐는 루터파 교회와 가톨릭교회를 초월하는 보편 교회에 기준을 두기라도 한 것 같다." "바흐는 현기증 나는 솜씨로 다양한 음악적 양식을 이 미사곡에 통합해냈다." "바흐가 지상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낸 1750년, 세상의 풍조가 그를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이미 얼마 전부터 갈랑 양식이 유럽을 휩쓸던 참이었다. 복잡하고 과장된 표현이 많다는 평을 듣는 바흐의 음악보다는 귀에 착착 감기는 아름다운 선율 위주의 작품이 인기를 얻고 있었다. 바흐의 음악은 계속 연주되었고 그의 제자들 또한 라이프치히에서 스승의 이름을 이어나갔지만, 세상은 경건주의 운동과 계몽주의 사상에 경도되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유럽은 음악적 혁명의 한복판에 있었다. 이제 6년 후에는 모차르트가 태어날 것이다."(52-3)


# 장엄미사 : 가톨릭의 대미사를 위한 곡


# 갈랑 양식 : 바로크 시대의 중후한 폴리포니(다성음악)에 반발하여 경쾌하고 우아한 호모포니를 중심으로 하는 음악 양식


3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모차르트에게 프리메이슨은 사랑과 빛이 도처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교 사상이었다. 몇 년 전부터 모차르트는 가톨릭 교리의 관행에 냉담했다. 결코 충족되지 못한 커다란 열망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마침내 자신의 길을 찾은 것이다. 그는 신에게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고, 자신은 당연히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미사에 참석했으며 사순절도 지켰다. 그렇지만 프리메이슨 지회에서 그는 종교적 관용과 박애라는 신세계를 발견했다. 무엇보다 그는 프리메이슨 단원으로서 귀족들과 대등해졌다. 대단한 영주들 앞에서도 전처럼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평민이 아니었다." "1785년 3월에 프리메이슨을 위한 첫 작품 〈직인의 여행 노래〉(K. 468)를 만들면서 그는 얼마나 기뻤을까! 노래는 과장 없이 경쾌하기만 하다. 단 한 연으로 이루어진 이 가곡에서 테너는 이렇게 노래한다. 〈이제 새로운 앎의 단계에 다가가는 그대, 그대의 오솔길을 굳건히 걸어가시오. 그것이 지혜의 길임을 아시오.〉"(59-61)


"사실 빈은 모차르트에게 이미 싫증을 낸 터였다. 대중은 건반의 비르투오소 모차르트를 사랑했지만 그의 오페라는 지나치게 복잡하다며 불평했다. 새로운 화음이 그들의 귀에 생경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차르트 오페라의 독창적인 사상에 당혹감을 느껴서? 어쩌면 둘 다였는지도 모른다. 1786년에 모차르트는 환멸에 빠졌다. 자신이 바라는 바를 빈의 청중에게 당최 전달할 수가 없었다. 모차르트를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하는 프라하와는 사정이 딴판이었다. 프라하의 거리에서는 지나가는 행인들도 그의 오페라 몇 소절을 휘파람으로 흥얼거리곤 했다. 하지만 빈에서도 프리메이슨 지회만큼은 그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그곳에서 그는 존경받았다. 능력을 인정받았다. 모차르트는 다른 바람이 없었다. 자신에게 타고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자기가 다른 음악가들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이라도 주의 깊게 들어주기만 한다면 그는 그 사람을 위해 몇 시간이고 연주할 수 있었다."(63)


"1791년 초 무렵, 빈에서 프리메이슨은 1780년대 중반에 그랬던 것처럼 빛나는 엘리트 집단이 아니었다. 요제프 2세는 죽고 1790년 2월 레오폴트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참이었다. 그 전까지 프리메이슨은 비교적 평온하게 지내왔지만 프랑스대혁명의 성난 외침에 겁을 먹은 새 황제는 그들의 세력이 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프리메이슨의 자유를 존중했던 전임 황제의 태도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고자 했다." "1791년 봄 프리메이슨 출신이자 빈의 한 극장장 에마누엘 시카네더가 모차르트에게 프리메이슨에서 영감을 받은 오페라, 이 비밀결사의 영광을 기리는 작품을 함께 만들어보자고 했다. 이 작품이 다름 아닌 「마술피리」(K. 620)다. 형제들이 위협받고 있었으니,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이 인류의 진정한 행복을 권한다는 사실을 이해시켜야 할 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모차르트는 전혀 피곤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아홉 달 뒤에 세상을 떠날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69-71)


"모차르트는 건강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이따금씩 몸이 안 좋긴 해도 대체로 건강한 편이었다. 그는 극심한 불안을 억압하기 위해 무절제한 생활에 빠지거나 미친 듯 일에 매달렸다. 그렇게 8월에 의뢰받은 「레퀴엠」(K. 626)을 작곡하기 시작했다가 잠시 작업을 멈추었다. 다른 데서 더 흥미로운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바로 프리메이슨 칸타타였다. 모차르트는 자기 지회의 새로운 회합 장소 개막식을 위해 생애 마지막 칸타타를 작곡했다. 그가 '우정의 찬가'라 불렀던 「작은 프리메이슨 칸타타」(K. 623)이다. 「레퀴엠」은 결국 미완으로 남았으므로 이 칸타타가 그의 마지막 완성작이다. 당시의 극심한 피로를 반영하듯, 그의 편지 속 글씨는 오른쪽으로 심하게 기울어 있다. 하지만 악보만큼은 여전히 명쾌하며, 모든 음표는 완벽한 통제하에 놓여 있다." "육체의 피로와 빚더미에도 불구하고 더욱 박애적인 내일의 희망과 기쁨을 노래하는 이 놀라운 작곡가를 보라! 그러나 그의 살날은 20일밖에 남지 않았다."(74-6)


4 프랑수아 조제프 고세크


"1789년 겨울, 쉰여섯 살의 고세크는 구체제의 유명 인사로서 25년 넘게 귀족들을 위해 일을 해주고 경제적 안락을 누려온 터였다." "온 나라가 혁명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감지했을 때, 고세크는 자신의 이력이 위태롭다는 생각에 겁을 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청년처럼 민활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그는 1789년의 사건들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고세크는 왕을 존중하면서도 헌법이 제정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혁명사상을 받아들였지만, 그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음악가로 일하는 동안 한 번도 권력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한 적이 없는 그였다. 이 위험천만한 일에 홀로 뛰어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수완 좋은 사람답게, 민중이 틀림없이 그에게 보내올 신호를 기다리는 편을 택했다." "바스티유 점령 며칠 뒤 고세크는 당시 목숨을 잃은 시민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시의적절한 음악을 만들기에 그보다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고세크는 주저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81-3)


"1795년 1월 21일, 국민공회는 루이 16세 처형 2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고세크가 이끄는 연주자들의 공연도 마련되었다. 튈르리궁의 공연 장소에서 고세크의 오케스트라는 근엄하면서도 사색적인 음악을 연주했다. 군사적이라기보다는 서정성이 느껴지는 음악이었다. 국민공회 의원들은 기가 막혀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 구슬픈 소리는 뭐지? 이런 탄식으로 1월 21일을 기념한다고? 누군가는 역사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들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한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세크를 불렀다. 〈이 음악은 도대체 뭐요? 루이 16세, 그 독재자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건가?〉 고세크는 당황해서 최선을 다해 변명했다. 〈저는 단지 독재자에게 해방된 행복이 섬세한 영혼들에 불러일으키는 감흥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연주자들은 의혹을 남기지 않기 위해 곧바로 공화국의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몇몇 의원은 나중에 귀를 틀어막기에 이르렀다."(95)


"보나파르트의 등장으로 혁명 음악의 시대는 끝났다." "보나파르트가 공화국의 수장이 되었을 때 고세크는 다른 소수의 작곡가들과 함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국가원수가 자신의 첫 정치적 승리들을 음악으로 옮긴 자에게 공식적으로 감사를 표한 셈이었다. 그것이 고세크 인생의 마지막 훈장이었다. 동료 작곡가 에티엔 메윌이나 앙드레 그레트리가 그랬듯 고세크 역시 점차 총애를 잃는다.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1814년에는 그 자신도 더 이상 기대하는 것이 없었다. 아흔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 고세크는 두 친구와 함께 참으로 길고 다사다난했던 인생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것은 혁명의 아름다운 날들, 상드마르스의 여러 의식에서 그의 찬가들이 거둬들인 성공이었다. 인민을 음악에 입문시킨 순간들을 고세크는 즐겨 회상했다. 아닌 게 아니라, 프랑스 민중이 처음으로 역사적 기념식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고세크의 공로다."(96-7)


5 루트비히 판 베토벤


"베토벤은 보나파르트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떠받치는 사람이라 믿었으며 그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세 번째 교향곡에는 보나파르트의 이름이 내걸릴 것이었다. 베토벤은 자신이 만들어온 모든 작품을 능가하는 걸작을 내놓고 싶었다. 그토록 신봉하는 혁명을 음으로 옮기고 싶었다." "바로 그때, 1805년 5월, 파리에서 보나파르트가 머지않아 황제의 자리에 오를 뜻을 밝혔다. 베토벤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보나파르트 장군은 이제 나폴레옹 1세가 될 터였다. 베토벤은 보나파르트의 이름이 적힌 악보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베토벤이 그토록 찬양했던 혁명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혁명은 전쟁 중에 와해되었다. 그가 교향곡에 붙이려 했던 제목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그 작품에 「영웅」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어느 위대한 인간을 기억하며〉라는 설명을 달았다. 이제 그는 전에 없던 소리와 리듬의 조합을 만들기 위한 연구를 이어감으로써 음악의 혁명을 이루어낼 것이었다."(104-8)


"1808년 12월, 도시에서 가장 지체 높은 이들이 빈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날의 관람권 한 장 가격이 노동자의 일주일 치 급료를 뛰어넘었다. 이날 베토벤은 네 시간에 걸쳐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고 피아노를 연주했다. 「교향곡 5번」과 「교향곡 6번」(Op. 68)을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선보였고, 건반 앞에 앉아서 「피아노 협주곡 4번」(Op. 58)을 연주했다. 그다음에는 즉흥연주를 했다. 그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대중 앞에서 직접 연주하는 모습은 그 후로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각 상실이 그를 덮칠 터였다." "베토벤은 관객을 휘어잡고 싶었고, 자신을 향한 그들의 지지를 느끼고 싶었다. 그의 시도는 성공했다. 연주회가 끝난 뒤 루돌프 대공, 킨스키 공작, 로브코비츠 공작이 합의하여 베토벤에게 연간 4000플로린을 지급하기로 했으니 말이다. 빈에 계속 남는다는 조건을 준수하는 한, 베토벤은 언제든 자기가 원할 때 자기가 만들고 싶은 곡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110-1)


"하지만 외부적인 요소가 그를 후려쳤다. 1809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다시금 전쟁에 돌입했다. 황실 가족은 빈을 떠나야 했고, 나폴레옹이 강제한 조약으로 인해 베토벤의 후원자들은 파산에 이르렀다. 더는 후원자들에게 한 푼도 얻어낼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이 1812년 러시아의 설원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았다. 이 중대한 역전의 첫걸음을 베토벤은 놓치지 않고 음악으로 옮겼다. 1813년 6월 12일, 바스크 지방의 비토리아 인근에서 웰링턴이 프랑스군을 격멸하자 나폴레옹 황제와 적대 관계에 있던 모든 이들, 특히 그곳으로부터 1600킬로미터 떨어진 빈에 있던 베토벤은 기뻐 날뛰었다. 그는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로 작정하고 때맞춰 〈웰링턴의 승전〉(Op. 91)을 만들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당대의 사건들을 환기하는 음악으로 한정된 숭배자와 음악 애호가 무리를 벗어나 더 많은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111-4)


"그러나 축제는 오래가지 않았다. 전쟁이 옛일이 되자 애국적 색채가 짙은 작품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베토벤의 영웅시대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의 교향곡과 협주곡은 예전처럼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빈 사람들은 로시니의 경쾌한 음악, 카리스마 넘치는 테너가 이탈리아어로 부르는 기교적인 아리아를 훨씬 더 좋아했다. 베토벤의 주요한 후원자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이제 베토벤은 자신의 예술에 사로잡혀 낮이고 밤이고 일에만 몰두했다. 최고의 대작 「교향곡 9번」(Op. 125)이 완성되기까지는 1년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다." "베토벤은 이 교향곡을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입문의 여정처럼 작동시킨다. 이는 흡사 건축가의 작업과도 같다. 그는 가장 적합한 소리를 찾고 이런저런 시도를 싸하가며 오선보를 수없이 수정했다. 〈아니, 이건 우리의 절망을 상기시키는군.〉 그러다 마침내 환희를 노래하기에 알맞은 선율을 찾고서 이렇게 쓴다. 〈아, 찾았다 / 아름다운 기쁨.〉"(115-8)


6 엑토르 베를리오즈


"베를리오즈에게 1830년 7월혁명은 사상의 혁명이기도 했다. 프랑스가 절대왕정을 무너뜨리던 시기에 그는 음악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80대 노인 음악가들의 케케묵은 이론을 일거에 몰아내고 싶었다. 19세기의 뭇 음악가에게 영향을 주게 될 「환상교향곡」(H. 48)이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다. 아이디어는 순식간에, 마치 벼락처럼 일어났다. 베를리오즈는 비이성적인 것, 과한 것, 극단적인 것을 좋아했다. 그에겐 숨 가쁘게 질주하는 상상력이 있었다. 상상력이 그의 존재 전체를 뒤덮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상상의 힘을 믿는다. 이성은 크나큰 신비를 해명할 수 없으며 상상이야말로 인간의 신비를 더 잘 통찰할 수 있으리라고 베를리오즈는 생각했다." "베토벤이 그랬듯 베를리오즈 역시 자기가 만드는 교향곡의 각 악장에 제목을 붙였다. 아니, 그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베를리오즈는 각 악장에 아주 상세하게 작성한 프로그램을 곁들였다. 역사상 최초의 표제 교향곡이었다."(131-2)


"베를리오즈는 마흔도 안 되어 국가의 의사 결정권자들에게 대단한 후의를 입게 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열정적이고 몽상적인 낭만파 예술가였다." "1840년은 7월혁명 10주년이었다. 이 기념일에 인색하게 굴고 싶어 하는 이는 없었다. 루이필리프는 10년 전에 누렸던 인기를 되찾고자 했다. 당시 민중이 품었던 소망은 오래전에 사라지고 집단적 환멸만 남아 있었다. 왕은 이제 바스티유 감옥이 있던 자리에 60미터 높이의 기둥과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고, 영광의 사흘 당시 목숨을 잃은 500여 명의 유해를 그곳으로 옮겨 올 계획이었다. 이러한 대규모 이벤트가 음악 없이 성사될 수는 없었다. 규모에 걸맞은 대곡, 기념식이 열리는 야외에서 성대하게 올릴 작품이 필요했다." "그는 진작부터 장송 교향곡을 기획 중이었고, 악보는 겨우 두 달 만에 완성되었다. 베를리오즈적 전통에서 하나의 기념비로 남게 될 이 작품의 제목은 「장송과 승리의 대고향곡」(H. 80)이었다."(136-7)


7 주세페 베르디


"1842년 3월 9일, 베르디는 밀라노 스칼라 극장 무대에서 최초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탈리아 대중은 「나부코」(IGV 19)에 열광했다. 그들이 보기에 이 오페라는 그들의 처지를 우의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이탈리아는 벌써 30년 가까이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자유를 갈망하는 히브리 노예들이 저 매혹적인 〈날아가라, 상념이여〉를 한목소리로 부를 때 극장 전체가 열광에 빠졌다. 청중은 그 합창의 마법적인 힘과 트럼펫의 폭발적인 소리에 홀려버렸다. 당시만 해도 무기를 들고 일어나 오스트리아 주둔군을 몰아낼 생각을 하는 이탈리아인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밀라노의 애국 투사들은 이미 국토 해방을 꿈꾸고 있었고, 그들에게 이 애달프고 매혹적인 노래는 금세 집합 신호가 되었다." "베르디의 음악은 민중의 가슴을 정통으로 울렸다. 강력한 조국애가 그의 오페라에서 뿜어져 나왔다. 베르디는 더욱더 민중의 취향을 고려하여 오페라에 서사시적인 기개를 불어넣기 시작했다."(144-5)


# 나부코 왕 :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 이탈리아어로는 나부코도노소르


"민중은 그의 몇몇 오페라 아리아에 베르디 자신으로서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열정적인 의미를 한마음으로 부여했다. 비결은 그의 언어에 있었다. 베르디는 보잘것없는 시골 농부도 이해할 수 있는, 모두가 알아듣는 소박한 언어를 구사했다. 의미로 충만하다 할 수는 없을지언정, 그의 말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바그너가 전설을 말한다면 베르디는 인간의 드라마를 말한다. 그는 사람들의 연약함, 감정의 힘, 미묘한 정서를 강조했다. 그의 이야기는 인간에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났다. 가장 비천한 이야기도 베르디를 통하면 위풍당당해졌다. 바로 그러한 점에 대중은 전율했다." "1850년대 초반에는 애국적인 오페라가 더 이상 인기를 끌지 못했다. 베르디는 이 시기에 일명 '대중적 3부작', 즉 「리골레토」(IGV 25)와 「일 트로바토레」(IGV 31), 「라 트라비아타」(IGV 30)로 이력의 정점을 찍었다." "베르디의 작품에서 이야기를 하고, 감동을 주고, 꿈을 꾸게 만드는 주역은 다름 아닌 사람의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였다."(149-50)


8 클로드 드뷔시


"전쟁 발발과 함께 프랑스로 밀려드는 애국의 파도가 드뷔시를 사로잡았다. 드뷔시는 생각했다. 승리를 거두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의 영웅적 행위는 음악을 통해 이루어질 터였다. 그는 전쟁에서 무엇을 들었는가? 귀에 거슬리는 전선의 소음, 병사들의 고통, 대포 소리. 그러나 그 소리를 곧장 음악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그런 건 그의 음악적 양식과 맞지 않았다. 드뷔시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1914년 11월, 작품 의뢰를 받은 그는 완성된 곡에 〈영웅의 자장가〉(L. 132)라는 제목을 붙여 벨기에 왕과 그의 용맹한 병사들에게 헌정했다. 전쟁 초 벨기에의 용감한 저항이 프랑스로 진격하는 독일군의 속도를 늦춘 터였다." "친구들을 앗아간 전쟁의 와중에 드뷔시는 마치 잃어버린 낙원을 되살리려는 양 프랑스 전통으로의 회귀를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한때 비유럽 음악에 대한 개방의 상징이었던 그가, 이제는 너무 많은 영향에 휘둘려 엇나가는 프랑스 음악의 명예를 되찾으려 하고 있었다."(169-70)


"드뷔시는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애국적인 대작을 쓰고 싶었다. 백성을 해방하기 위해 화형대에 오른 잔 다르크를 그 작품의 주제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병이 그의 발목을 잡을 터였다. 비록 당분간은 몸이 버텨줄지라도. 1916년의 추운 겨울 저녁, 그는 파리의 한 살롱에서 열리는 자선 파티에 참석했다. 그의 아내 에마가 속한 '전쟁 포로의 옷' 사업단을 위한 자리였다. 때때로 그가 호소하는 무시무시한 피로는 피아노 앞에 앉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그날 저녁 그가 연주한 작품은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갓 완성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백과 흑으로」(L. 134)를 들고 온 것이다. 흑백의 대조보다는 벨라스케스의 회색을 생각하면서 썼다는 작품이다." "드뷔시는 독일을 상징하기 위해 루터의 코랄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선율을 살짝 비틀어 단편적으로 삽입했다. 이 작품의 현대성이 그날 저녁 휘황찬란한 살롱에서 음악에 귀 기울이는 이들 모두를 휘어잡았다."(174-6)


9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음악의 근본적인 개혁을 꿈꾸었다. 그 접근 방식 또한 야심만만했다. 모두 독일 음악가들의 권리와 직결된 행보였다. 그는 저작권 규정을 개정해 창작자의 권리 보호 기간을 30년에서 50년으로 늘리고자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자신이 히틀러의 신임을 얻어야만 했다. 그에게 이는 일종의 습관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음악가로서 이력을 쌓는 내내 늘 권력자들과 가까워지려 애썼다. 일단 새로운 선전부 장관 괴벨스 박사를 거쳐야 했다. 슈트라우스는 1933년 7월에 괴벨스를 만났다." "그의 제안은 직접적이었다. 독일 음악가들에게서 유대인의 영향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 설립된 기관인 제3제국 음악원의 총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주저 없이 수락했다." "슈트라우스는 흡족했다. 괴벨스의 지지를 확신한 슈트라우스는 그에게 〈작은 시내〉(Op. 88-1)라는 노래를 헌정하고 국가사회주의 조직에서 음악에 중요한 위치를 부여해준 히틀러와 괴벨스에게 감사를 표했다."(182-4)


"괴벨스는 슈트라우스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한 그가 독일의 위엄을 높이기에 유용한 도구라는 사실을 알았다. 1936년 8월 1일,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무수히 휘날리는 새 경기장에 히틀러가 모습을 드러냈다. 12만 개의 팔이 일제히 나치식 경례를 붙였다. 군중은 한목소리로 우렁차게 〈하일 히틀러!〉를 외쳤다. 올림픽은 독일의 위대함을 만방에 과시할 이상적인 기회였다. 베를린 올림픽 포스터에는 인간 같기도 하고 신 같기도 한 금빛 형체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이 행사의 음악을 담당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정장에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경기장 중앙의 나무 연단에 올라가 오른손에 지휘봉을 들고 오케스트라와 10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합창단의 제창을 이끌었다. 〈올림픽 찬가〉가 연주되는 4분 동안, 슈트라우스는 박력 있고 불규칙하면서도 장중한 음악으로 나치 체제를 드높였다. 몰개성적인 수많은 목소리가 그들의 유일한 지도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군중 속을 파고들었다."(190-1)


"1945년 2월, 괴테와 수많은 음악인의 그림자가 엘베 강변에 어려 있는 도시 드레스덴이 처음으로 폭격을 당했다. 불길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재가 된 시체들만 남았다." "다음 날부터 슈트라우스는 레퀴엠 형식의 서정적이고 비탄 어린 작품 〈변신〉(Op. 142)을 쓰기 시작했다." "〈변신〉은 아마도 슈트라우스의 가장 영적인 작품일 것이다. 이 작품은 마음을 자극하는 만큼 두려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뉘른베르크의 유대인 차별법,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가 존재했건만 그동안 슈트라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터였다. 전쟁 희생자들에 대해 일언반구 없었고 수용소와 대학살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그랬던 그가 이 감동적인 작품을 통해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물론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슈트라우스는 1945년 4월 12일 이 악보를 완성했다. 그로부터 2주 뒤, 히틀러가 총부리를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자살은 제3제국의 최후를 뜻했다."(200-1)


10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대大숙청의 공포에 시달리던 1937년 4월,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남게 될 「교향곡 5번」(Op. 47)의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 작품에 체제순응적인 부제를 달았다.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답변'. 초연 날 저녁, 연주회장은 꽉 찼다. 박수갈채가 30분 넘게 이어졌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의 비위를 맞추고자 자신의 음악에 보다 전통적인 표현 방식을 부여해 웅장한 D장조의 군악풍 주제로 작품을 마무리했다. 작곡가는 그동안 비판을 사던 형식주의도 제거하여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스타일을 한결 단순화했다. 그 관습적 언어라는 껍데기 아래서, 극도로 주지주의적인 태도 이면에서, 일부 청중은 모종의 메시지를 감지해낼 터였다. 스탈린의 무시무시한 대숙청이 세상을 온통 마비시키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살기로 작정한 한 남자의 메시지였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공포를 악보에 옮기면서도 그가 가진 최고의 것을 드러내는 거장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213-4)


"1941년 6월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해 왔고, 독일군에게 포위당한 도시는 세상과 단절된 게토나 다름없었다. 러시아인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건만 스탈린은 쇼스타코비치에게 낙관적인 음악을 요구했다. 「교향곡 7번」(Op. 60)은 대단한 호평을 얻었고 서양 사회, 특히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의용소방대 헬멧을 쓴 쇼스타코비치의 사진이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정권의 상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작품의 행간에 메시지를 흘렸다. 그의 작품에는 은밀한 암시와 인용이 숨어 있다. 3악장에서 바이올린은 영원히 울음을 그치려 하지 않는 듯하다. 바로 앞 2악장에도 기쁨은 공포와 뒤엉켜 있다. 마치 이 미친 세상에서 공격당하지 않으려면 항상 희희낙락해야 한다며 억지 웃음을 짓는 것처럼. 검열, 그리고 자신을 눈여겨보는 스탈린을 의식하면서도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에서만큼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몸부림쳤다. 그 무엇도 자기 예술을 포기하는 것보다 끔찍하지는 않았다."(214-5)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이 온 나라를 흔들어놓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새로운 전망이 열리기를, 스탈린 치세의 무거운 압박에서 비로소 해방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명백했다." "1970년대 초의 쇼스타코비치는 회한에 찌들어 기진맥진한 사내였다. 살아오면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떠올려보았지만 모두 죽은 사람들, 그야말로 시체들의 산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악보에 지시어를 쓰면서 종종 '모렌도morendo'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모렌도, '죽어가듯이'라는 이 단어는 마치 작곡가 자신의 삶의 반향 같다. 그는 비겁하게 살았다는 생각에 자주 사로잡혔다. 여섯 번의 스탈린상과 세 번의 레닌상을 수상한 경력마저 자책의 이유가 되었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그는 괴로워하며 서서히 죽어갔다. 쇼스타코비치는 1975년 예순아홉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은 장례식을 성대하게 마련했다. 쇼스타코비치를 그토록 오래 박해했던 자들이 상석을 차지했다."(223-5)


11 기데온 클레인


"1941년 12월, 기데온 클레인은 프라하에서 출발한 세 번째 호송대에 이끌려 체코의 작은 마을 테레진에 있는 게토로 끌려갔다." "수용자들은 대부분 게토 정비 사업에 동원되었다. 가건물이나 화장터를 지어야 했고, 나치 친위대의 농지도 건사해야 했다. 그러나 이곳에 가스실은 없었다. 테레진은 잠시 머물다 가는 수용소였다." "나치 지도부는 처음에는 모든 예술 활동을 금지했지만 3주쯤 지나서부터는 방침을 바꾸었다. 음악을 허용하면 수용자들의 반항심이 잦아들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문화생활을 조금 누리게 해주면 훨씬 편해질 터였다. 게다가 테레진이 꽤 지낼 만한 게토라는 생각도 신빙성을 얻을 것이므로 수용소장 자이틀은 그들의 연주나 노래를 막지 않았다. 그는 수용자들이 아직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머지않아 이곳을 떠나 아우슈비츠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테레진에서 음악은 일종의 배경 장식이자 눈속임이었다. 나치는 수용소 내 문화생활을 장려하는 '여가 관리' 원칙까지 받아들였다."(229-33)


"적십자단이 다녀가고 나치 선전 영화 촬영이 있은 후로 아우슈비츠나 그 외 동부의 학살 수용소를 향해 떠나는 호송대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1944년 10월 초, 게토에는 이제 1만 1000여 명밖에 남지 않았고 개중에 노동이라도 할 수 있는 인원은 고작 4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간도 클레인의 열의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그의 「현악 3중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악보는 음표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고통과 음악의 순수성이 빚어내는 대비가 악절마다 깊이 스며 있는 듯하다." "이 3중주는 게토 안에서 연주되지 못할 것이었다. 1944년 10월 16일, 그의 마지막 실내악 작품이 완성된 지 아흐레 만에 클레인은 949번 표지를 단 채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붉은 군대가 코앞까지 다가온 1945년 1월 27일, 나치유격대가 현장에 와 남아 있던 포로들을 몰살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기데온 클레인도 있었다. 그는 수용소 해방을 며칠 앞두고 죽었다. 겨우 스물다섯 살이었다."(241-2)


12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1958년 6월의 그 저녁, 테오도라키스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야니스 리초스의 시 「묘비명」을 다시 읽었다. 시인이 1936년 살로니카 담배 공장 노동자 파업 진압으로 사망한 아들의 피투성이 시신을 들여다보는 어느 어머니의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그 심정을 옮겨낸 작품이었다. 시를 읽던 중, 미키스 테오도라키스는 문득 속에서 음악이 샘처럼 치솟는 것을 느꼈다. 황급히 수첩을 꺼내 오선을 긋고 떠오르는 대로 음표를 받아 적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쉬지도 않고 곡을 썼다. 그날 저녁에 쓴 곡만 여덟 편이었다! 프랑스 시에 곡을 붙일 때는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는데, 사랑하는 모국어에서 영감을 받은 선율과 악절은 숨 쉬듯 저절로 나왔다." "테오도라키스는 그리스 음악의 전통들을 한데 아울러 모든 그리스인이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어휘로 노랫말을 다듬었다. 그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가지, 조국 그리스와 음악을 하나로 아울렀다. 이 노래가 그리스인들의 희망을 다시 태어나게 했다."(248-9)


"1967년 4월의 어느 밤, 전화가 왔다. 여성 동지가 전차들이 국회의사당을 둘러싸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이 이끄는 군사정권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헌법을 폐지한 것이다. 암울한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테오도라키스는 생각했다. 내가 잡힌다면, 내가 죽어야만 한다면, 작품이 뒷일을 맡아주리라. 그의 음악은 그보다 힘이 셌다. 군사정권은 민중이 그의 음악에서 어떤 힘을 얻는지, 그의 노랫말이 자유를 열망하는 이들을 어떻게 하나로 연결하고 격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대령들에게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은 특별히 취급할 만한 독보적인 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특별령을 내렸다. 〈군령 13호. 공산주의자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음악과 노래에 대하여 재생과 연주를 금한다. 이 작곡가는 현재 해체된 공산주의 조직 람브라키스 민주청년단의 지도자였으며 그의 음악은 공산주의를 보좌한다.〉 어찌 보면 압제자들은 이 자유의 작곡가에게 가장 아름다운 경의를 표한 셈이다."(254-6)


13 존 애덤스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지 14년 후에 존 애덤스는 꼬박 2년을 「중국에 간 닉슨」에 할애하면서 자신이 이 오페라에 담고 싶은 소리를 찾았다. 색소폰 네 대와 타악기들이 포진한 오케스트라 구성은 1930년대의 스윙 악단과 비슷했다. 어릴 적 할아버지의 댄스홀에 왔던 듀크 엘링턴 악단을 본 뒤로 재즈와 대중음악의 피가 줄곧 그의 몸속에 흐르던 터였다. 심지어 그 전설적인 재즈 연주자가 피아노를 칠 때 존 애덤스는 바로 옆에서 이를 지켜보지 않았던가. 그는 금관악기의 박력에 압도되었다. 듀크 엘링턴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의 환희와 서정성,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주는 특별한 방식에 그는 단단히 사로잡혔다. 애덤스의 신전에는 모차르트, 바그너, 시벨리우스뿐 아니라 마일스 데이비스, 비틀스, 지미 헨드릭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길잡이로서 이 작곡가의 삶에 함께했다. 존 애덤스는 클래식 음악 지식과 대중문화의 영향력을 교차시키며 자신의 작업을 이어갔다."(273-4)


"오페라에 아직 미래가 있다면 이 장르 역시 우리의 삶을 말해야 한다고 애덤스는 생각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맞닿아 있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테러리즘에 대해서 말해야 했다. 하지만 정치가 개입되면 문제가 커지기 마련이다. 1990년에 그는 「클링호퍼의 죽음」을 만들었는데, 이는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킨 실제 사건을 다룬 작품이었다. 5년 전, 어느 팔레스타인 유격대가 유람선 아킬레 라우로호를 납치하는 일이 벌어졌다. 테러리스트들은 이집트 난바다에서 승객들을 볼모로 잡고 레온 클링호퍼라는 유대계 미국인인 하지 마비환자를 처형한 뒤 그의 시신을 휠체어와 함께 바다에 유기했다. 오페라 대본의 일부는 선장, 스위스인 할머니, 그 외 승객들의 증언으로 구성되었다. 망명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합창과 홀로코스트를 모면한 유대인들의 합창이 오페라를 여는데, 이 두 합창의 대결로 아킬레 라우로호 인질극 사건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라는 더 넓은 집단적 비극의 맥락 안에 놓인다."(275-6)


"〈영혼의 환생에 대하여〉는 9.11 테러의 공포에서 영감을 얻은 곡이지만 인상파의 작품이 그렇듯 내면에 집중한다. 고통의 아픔과 깊이가 여간하지 않아 그로서는 그 이상을 말할 수 없었다. 압도적인 현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려 해봐야 소용없었다. 다만 애덤스는 서정성을 지나치게 쏟아내는 것만은 반드시 피할 작정이었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증폭시키는 음악을 만드는 것은 악취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2년 3월, 테러 이후 반년이 지난 시점에 그는 미국을 횡단해 뉴욕으로, 그 테러의 현장으로 갔다. 현장 주변 거리의 벽마다 사고 직후 절망에 빠진 가족들이 희생자를 찾기 위해 남겨놓고 간 낙서들로 가득했다. 시간이 꽤 흘러 흐릿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희생자의 사진과 이름, 신체적 특징, 전화번호 그리고 가슴 아픈 메모들을 볼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가 만든 곡은 '추모의 장'이었다. 존 애덤스는 프로그램에 작품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각자가 홀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하고만 함께하는 작품.〉"(2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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