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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을 길들이다 - 통계는 어떻게 우연을 과학으로 만들었는가?
이언 해킹 지음, 정혜경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옮긴이 서문
"우연이라는 것은 본디 인간에게 미지의 존재로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인류가 그러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여정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한편에는 인간 역시 자연과 마찬가지로 뉴턴주의적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인간이 지닌 존엄성이 침해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전자의 믿음은 합리적 사고와 물리과학의 발달을 통해 얻은 성과가 가져다준 자신감의 발로라면, 후자의 우려는 엄격한 인과적 법칙이 인간이 누려야 할 의지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의 소산이었다." "통계적 규칙성을 규명하려는 일련의 과정에서,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인간의 존엄함에 관한 위기감 중 어느 것도, 우연이 길들여지는 과정에서 홀로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감이 아니었다면 인간의 행동으로부터 통계적 법칙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없었을 것이고, 위기감이 아니었더라면 통계적 법칙과 결정론의 연결 고리를 파악하기 위한 시도 역시 약화되었을 것이다."(16)
1 우연을 길들인다는 것
"이성의 시대 내내, 우연은 우매한 자들의 미신으로 불렸다. 우연·미신·우매함·비이성 모두 매한가지였다. 소위 합리적 인간은 이런 것들을 외면함으로써 불변의 법칙을 도구 삼아 혼란을 가릴 수 있었다." "당시는 결정론에 대한 의구심을 지닌 이들이 많은 시기였다. 의지의 자유freedom of will가 끼어들 여지를 갈구하거나, 유기체나 생명의 작용에 있어 개별적 특징을 주장하는 이들이 바로 그런 예이다." "마침내 1900년 경에 이르러서는 우연의 법칙의 득세가 진정한 가능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궁극적인 비결정론indeterminism의 무대가 조성된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모순적이지만, 비결정론적인 여지가 커지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도 커진다. 물리과학에서는 이 점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양자물리학은 자연이 근본적으로 환원 불가능하게 확률적이라는 점을 당연하게 여긴다. 엄밀히 말해 이러한 발견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궤도에 개입하고 수정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을 무한하게 신장시켰다."(22-3)
"필자가 기술하고자 하는 면모들은 대단히 포괄적인 하나의 사건과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활자화된 숫자들의 쇄도avalanche of printed number이다. 국민국가들은 국민을 새롭게 분류하고, 집계하고, 표로 작성하였다." "숫자의 활자화는 표면적인 효과일 뿐이었다. 그 이면에는 새로운 분류 및 계량화 기술, 그리고 그러한 기술을 전개할 수 있는 권위와 연속성을 지닌 새로운 관료제의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 관료제는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사실들을 새로이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을 집계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알맞게 분류할 수 있는 범주가 만들어져야 했다. 사람들에 대한 데이터의 체계적인 수집은 우리가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방식은 물론 가까운 이웃을 설명하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러한 체계적인 수집은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선택하고, 무엇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심도 깊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24-5)
"확률은 4중의 성공, 즉, 형이상학적·인식론적·논리학적·윤리학적인 측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형이상학은 우주의 궁극적 상태에 관한 과학이다. 형이상학에서, 양자역할의 확률은 보편적인 데카르트의 인과율을 대체해 버렸다. 인식론은 지식과 신념에 대한 이론이다. 오늘날 우리가 증거를 활용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며, 실험을 설계하고, 신뢰성을 평가하는 일은 확률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논리학은 추론과 논증의 이론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순수 수학이 제시하는 공리에 대해서는 연역적 해법 또는 종종 반복적인 해법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매우 실용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통계적 추론의 논리를 때로는 엄밀하게, 때로는 약식으로 활용한다. 윤리학은 부분적으로는,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이다. 확률은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는 없지만, 관료들이 내리는 모든 합리적인 선택의 근거에는 확률이 자리하고 있다. 견해에 객관성을 덧칠함으로써, 의사결정은 계산으로 대체된다."(27-8)
2 숙명론의 시대
"《도덕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임마누엘 칸트는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예외 없이 자연 법칙에 의해 결정되어야 함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당연시했다. 자연의 필연성과 인간의 책임감의 충돌로 인해 자유의지는 절박한 문제가 되어 갔다. 한 가지 해결책은 데카르트의 사상을 광범위하게 추종하는 것이었는데, 데카르트의 주장은 마음과 육체, 다른 말로 하면 사고의 실체와 공간에 실재하는 실체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공간적 실체에 벌어지는 모든 것은 어김없이 법칙을 따른다. 따라서 모든 공간적-시간적 현상은 필연적으로 결정론적이다. 이는 정신적인 측면에 관해서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여지를 남겨 놓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칸트의 서술은 이러한 생각을 정교화시킨 것이었다. 공간적, 그리고 정신적이라는 두 가지 실체는 인지가능knowable 영역과 불가지unknowable 영역이라는 두 가지 세계로 대체되었다. 자유로운 자아는 실체의 불가지 영역에 존재한다."(42)
"흄이 우연이라는 개념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인과론과 필연성에 대한 유명한 회의론자였던 그는 숙명론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현상계의 물체들의 움직임들은 필연적이며, 이들 물체들의 움직임 간의 상호 교류 ··· 그리고 물체 간의 끌어당김과 상호 결합들을 보면, 이들 물체들 사이에 상호 무관성 내지는 자유로움이 존재한다고 볼 만한 최소한의 근거조차 없음은 널리 인정된다. 모든 물체는 어느 정도는 절대적인 숙명과 그 운동 방향에 의해 결정된다. ··· 따라서 물질의 움직임은 필연적 움직임에 대한 실증적 예로 간주해야 한다.〉" "계속해서 흄은, 뉴턴이 공허한 추정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주장했다. 즉, '뉴턴은 자연이 지닌 미스터리를 둘러싼 베일을 일부 걷어낸 것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기계적 철학의 단점 역시 명백히 했으며, 따라서 그는 자연이 지닌 비밀들을 그전에도 언제나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남아 있을 불분명의 영역으로 복구시켰다'는 것이다."(45-6)
3 공적인 아마추어, 비밀스런 관료
"17세기 확률의 등장에 대한 증인으로서 라이프니츠는 프로이센 공공 통계의 철학적 대부였다. 그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는 다음과 같았다. 프로이센 국가의 성립이라는 과제가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에서, 국가의 힘에 대한 정확한 측정치는 바로 그 인구이기에, 새로 세워질 프로이센 국가는 자신의 힘을 파악하기 위하여 중앙정부에 통계 부서를 보유해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프로이센 국가의 건국은 통계국의 설립과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종류의 통계 문제에 왕성한 관심을 가졌으며 질병·사망·인구의 문제에 활발히 매진했다. 그는 56가지 부문에서 국가를 평가하는 방법을 제안했는데, 이 평가법의 항목에는 성별 및 사회적 신분에 따른 인구,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 남자의 수, 결혼적령기 여성의 수, 인구 밀도와 연령 분포, 유아 사망률, 기대 여명, 질병의 분포와 사망의 원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집계표 작성은 오늘날에는 일상화된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미래적인 것이었다."(55-6)
4 통계 전담 기관의 등장
"프로이센은 훗날 대세로 자리잡게 될, 그러나 당시에는 예외적이었던 존재를 출범시켰다. 통계국은 정부 내 여타 모든 부서에서 필요로 하는 숫자의 제공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804년에, 도나는 1809년에, 범용적인 통계국은 새로운 유형의 방향을 제시하는 새로운 종류의 일꾼으로 구성된 새로운 유형의 조직체라는 생각을 희미하게나마 가지고 있었다. 전통적이고 현실적인 장관들이었던 슈타인과 알텐슈타인이 선호했던 것은 엣 질서를 간결하게 가다듬은 버전이었다. 그들은 통계국은 재정부를 돕기 위한 기관이라고 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정부의 조직 체계는 유지되어야만 했으며, 모든 기관들을 위해 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부서란 적합하지 못한 것이었다. 국왕과 도나가 이겼다. 프로이센은 기초부터 다시 세워지고 있었고, 새로운 유형의 기관이 존재할 여지가 생겼다." "(점차 각국에 설립된) 통계국들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 즉 무수한 숫자를 통해 실체가 표현되는 유형의 인간을 탄생시켰다."(75, 82, 86)
5 이성의 감미로운 지배
"도덕과학science morale은 우리가 윤리학이라 부르는 고상한 그 무엇이 아니다. 도덕과학은 풍속moeurs·관습·사회에 대한 과학으로 이해하는 편이 맞다." "뉴턴은 천체역학과 유리역학rational mechanics을 제안했다. 프랑스인은 뉴턴의 주장들 중 일신론一神論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받아들였다. 로크의 사상 이론은 인간의 마음과 이성의 능력에 대해 연구했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수많은 주요 철학자들은 '관념론자'라는 표식, 즉 특정 이데올로기의 이론가나 지지자가 아니라 사상 그 자체에 대한 옹호자, 즉 로크주의자Locke-ites라는 딱지를 열렬히 환영했다. 도덕과학의 개념이 발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토대에서였으며, 태동 당시의 도덕과학은 개인과 사회에 대한 합리적 이론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콩도르세가 그려낸 도덕과학은 훗날 두 가지 다른 영역으로 발전한다. 하나는 역사로서의 도덕과학이며 다른 하나는 확률, 통계학, 결정이론, 비용편익분석, 합리적 선택이론, 응용경제학 등으로서의 도덕과학이다."(93-5)
"1776년에 튀르고는 젊은 뒤빌라르 같은 이들을 종합감사관실에 임명했다. 튀르고가 물러나자 뒤빌라르는 재정부로 자리를 옮겼다. 뒤빌라르는 혁명 8주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아남았다. 후에 그는 원로원으로 옮겼으며 1805년에는 내무부의 통계청으로 갔다. 1812년에 그는 다시 승진하여 종합편성국의 수장이 되었다." "콩도르세는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에서 살아남지 못했지만, 뒤빌라르는 살아남았다. 내무부에 몸담고 있는 동안, 뒤빌라르는 제너의 천연두 백신이라는 희대의 발견이 보험에 미칠 영향에 대해 최초로 심도 깊은 분석을 실시했다." "인구에 대한 뒤빌라르의 수학적 통계 논문은 사망률 법칙에 관해 체계적 분석을 수행하는 데 있어 단순한 연령뿐 아니라 성, 혼인 상태, 그리고 주소 및 직업과 같은 가변적 요인을 프랑스 최초로 활용한 시도였다. 그와 같은 질문은 조만간 숫자들의 쇄도를 불러일으킬 서기·통계가·계산가·출판인과 같은 새로운 계층을 탄생시켰다."(106-7)
6 질병의 양을 재다
"질병의 법칙에 대한 가장 저명한 저자는 잉글랜드-웨일즈 호적본서의 창립자였던 윌리엄 파William Farr였다." "파는 질병에 대한 그의 연구를 토대로 이 분야에 대한 권위를 확립하여, 1830년대의 공제조합들에 대한 논쟁에 기여하였다. 파는 질병통계에 대한 개별 분석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1837년경에는 자신이 편집했던 잡지 중 하나에서, 질병의 빈도와 더불어 '질병의 상대적인 기간과 위험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 방법론을 다룬 소논문을 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파는 병원 기록의 시대를 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질병분류학nosology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질병분류학에 따른 집계법이다. 파는 자신이 수행한 활동에 어울리는 새로운 단어를 고안해 내었으니, 바로 질병측정학nosometry이었다. 이는 질병분류학을 활용하여 '측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새로운 분류와 새로운 집계법은 서로 불가분임을 상기시켜 준다."(121-2)
7 과학의 곡창
"필자는 기본 상수들constants은 자연의 기본 법칙에서 고정된 값을 가지는 인수 역할을 지닌다는 관점에서 기술했다. 이는 배비지보다 최근의 개념이다. 배비지의 상수들은 수많은 '법칙들'을 서술하는 데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만약 투표자의 소득이 비슷한 법칙을 따른다면···'이라고 그가 쓴 데서 보듯, 배비지는 법칙이라는 단어를 단지 규칙·규칙성·획일성을 의미하는 데 사용했다. 법칙에 대한 배비지의 관념에서 우리는 그를 베이컨주의자, 실증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영역,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통계적 법칙에 대한 초기 개념의 모든 영역에서 법칙화를 수행했던 것은 바로 베이컨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수리적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본연의(그리고 미묘한) 주장에 대한 해석들 중 가장 단순화되고 가장 베이컨의 품격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작업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데이터가 많아질수록, 귀납적 결론을 더 많이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135-7)
8 자살은 일종의 정신이상이다
"에스퀴롤이 살았던 시기(19세기 초)는 그의 직업(의사)이 거침없이 부상하던 시기였다. 그는 자살을 감시·치료·통제·판단할 권리가 의사에게 있다는 의견을 비쳤다. 자살은 더 이상 아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같은 도덕주의자와 성직자들의 수중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에스퀴롤은 자살이 '임상의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는 매우 맹렬한 권리 주장이다. 에스퀴롤은 암묵적인 삼단논법을 펼치고 있었다. (1) 정신이상은 의사의 영역이다. (2) 자살은 일종의 정신이상이다. 그러므로 (3) 자살은 의사의 영역이다. 에스퀴롤에게 전제 (1)은 탄탄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자살이 일종의 정신이상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자살을 의학의 영역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이론은 여타의 정신이상이 대부분 그러하듯 자살자들은 '편집광들'이었다는 것이다. 에스퀴롤의 이론과 자살의 집계는 서로 협력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141-2)
9 입법철학의 경험적 근거
"1829년에 게리는 교육과 범죄에 대한 '비교 통계학'을 공동 연구로 수행한 바 있었는데, 그 결과에 대한 확장이 바로 그의 첫 주요 연구인 1832년의 도덕 통계 연구였다. 일반적으로 교육은 범죄를 예방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자연히, 노동계급의 퇴화와 무지가 바로 통계학자들이 범죄의 성향penchant au crime으로 부르던 것의 원천이라는 추정이 제기되었다. 게리는 이러한 가설을 반박하기 위해 오늘날 순위순서 통계량rank-order statistics이라 불리는 것을 내놓았다." "그 결과, 교육수준이 높은 지역일수록 범죄율도 높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러한 결론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는 오래된 용어인 '도덕과학'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수행했던 것은 도덕분석moral analysis이었다. 이는 사실과 가치를 구별하는 실증과학이었다. '사회에 관계된 계량화된 사실만을 진술함으로써 도덕분석은 입법철학과 경험적 근거를 형성한다.' 콩도르세가 꾸었던 사회수학의 꿈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164-6)
10 확실함도, 상세함도, 통제도, 가치도 없는 사실들
"당시에 통계치는 널려 있었지만 결정적인 통계적 추론은 거의 없었다. 통계는 과학이 아니라 수사학의 도구였다. 숫자에 대한 모든 열망에 대하여, 통계는 기대만큼 즉각적인 효과를 보여 주지는 못했다." "1828년 초, 시비알레는 결석 수술법에 대한 비교연구를 몽티용 상 측에 제출했다. 마치 배심원단 같았던 수학자들(심사위원들)은 거만하게도, 그와 같은 연구들이 '확실함이 없고, 상세한 설명도 없으며, 통제되지 않았으며, 가치가 없는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통계는 '무한의 다수'로 간주할 수 있는 부류의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으나 '의학의 경우는 이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실용의학에서 확률을 계산하기에는 사실이 너무 빈약한 것은, 보다 많은 데이터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이한 개인에 대해 많은 데이터를 얻어 보았자 다루고자 하는 환자의 특정 사례와는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학자들은 이러한 조심스런 관찰에 대해 오만할 정도로 무관심했다."(177-9)
11 어느 다수결 규칙을 따를 것인가?
"사회적 불안정과 개혁의 나온 것이 1808년의 법전이었다. 이 법전 자체는 영속성 있게 지속되었지만, 배심원제는 프랑스 법제에서 가장 불안정한 요소 중 하나였다. 1808년 당시 유죄 선고는 단순 다수결에 의해 이루어졌고, 정치적 소용돌이가 있을 때마다 배심원제는 영향을 받았다." "라플라스는 1808년의 배심원제에는 결함이 있다고 주장했다. 배심원단이 7:5로 단순 다수결에 의해 유죄 선고를 내리는 경우에 오심의 가능성은 거의 3분의 1이라는 '놀라운' 수치이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증언이 옳을 확률이란 증인의 성향이라 할 수 있다. 증언이 옳을 확률은 증언된 사실의 본질과 무관하다." "따라서 라플라스는 단순 다수결을 통한 유죄 선고에 반대했다. 배심원 12명 만장일치에 의한 평결은 안전하나, 아마도 지나치게 안전한 듯하다. 라플라스는 1000분의 1 정도의 오심 확률을 목표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따라서 배심원 9명의 만장일치제가 적절하다고 제안했다."(188-91)
"푸아송이 배심원제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한 것은 1830년 혁명 이후였다." "라플라스에겐 사법 통계자료가 없었던 반면 푸아송에게는 있었다. 푸아송은 오심의 확률이 라플라스가 추정한 것만큼 크지는 않다고 추론했다. 7:5 다수결 평결의 오심 확률은 실증적으로는 라플라스가 8:4 다수결 평결의 오심 확률로 계산한 값과 거의 유사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만약 라플라스의 계산에 근거하여 8:4 다수결 평결에 만족한다면 7:5 다수결 평결에도 만족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국회가 1835년 8월 19일 배심원제를 단순 다수결제로 되돌린 것은 현명한 결정이었다는 증명을 그 해 말에 완료하였다. 1837년에 간행된 배심원제에 대한 그의 저작은 보수적 견해를 수학적으로 옹호한 것이었다. 푸아송의 수학이 지니는 과학적 엄밀성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정보와 통제의 구현 수단으로 의도된 것이었다. 그것은 수학적 연구인 동시에 정치적인 연구이기도 했다."(196)
12 대수의 법칙the law of large numbers
"프랑스에서는 '대수의 법칙'이라는 용어가 굳건히 정착하였으며, 세계에 대한 심오한 사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회의론자들의 조언과는 반대로, 통계적 법칙은 권위를 인정받았다. 충분히 많은 수의 사건의 경우에서는 규칙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제 이 법칙은 경험에 비추어 점검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사물이 따르도록 되어 있는 방식으로 인정받았다. 이는 대수의 법칙에 대한 수학적 논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대수의 법칙은 형이상학적인 진실이 되었다. 푸아송의 수학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어려웠지만, 그리고 실제 현상에서는 발견되는 불규칙성은 흔히 주장되던 것보다는 훨씬 컸지만, 대수의 법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맹신, 태만, 모호함, 숫자에 대한 혼미, 사회적 통제에 대한 환상, 공리주의자들이 선전 등의 요인에 힘입어, 대수의 법칙(푸아송의 정리 그 자체가 아니라 대량 현상의 안정성에 대한 명제)은 이후 한두 세대 동안은 선험적 진실로 가공되었다."(216)
13 표준적인 가슴둘레
"1830년대 초 일련의 저술에서 케틀레는 '평균인'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평균인'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한결 같은 목소리가 있다. 실제로 평균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균인의 존재에 대한 상식적인 반응은 이렇다." "'평균인'이란 편의상 사용되는 약칭일 뿐이다. 그러나 케틀레에게 이 표본적인 인간은 약칭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첫째, 이 개념은 한편으로는 우생학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 인종의 평균적인 특질을 보존하거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정책을 도입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둘째, (보다 학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평균 키를 추상적 개념, 즉 산술적 결과로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느 집단에 관해 '실재하는' 특징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일본인의 수명은 매년 증가해 1988년에 일본은 지구상의 최장수 국가에 해당할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일본인의 수명을 두고 일본인이 삶과 문화에 실재하는 특징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221-3)
"1844년, 케틀레는 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단계로 나아갔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물리적 양을 일정한 확률오차를 수반하면서 측정하는 법에 대한 이론을, 집단이 지닌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특질의 측정에 대한 이론으로 변모시켰다. 집단의 특질들 역시 물리적 양과 형식적으로 동일한 기법에 의해 계산될 수 있었기에, 집단의 특질들은 이제 실재적인 양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우연을 길들이는 데서 중대한 단계이다. 이전에는 거대한 규모의 질서에 대해서만 묘사하던 통계적 법칙은 자연과 사회의 기저에 내재된 진실과 원인을 다루는 법칙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즉, 집단의 신장 등의 분포가 한 개인이 지닌 값이 오차를 가지고 반복적으로 추정되었을 때 나타나는 분포와 같다면, 우리는 집단의 평균이 해당 집단의 특징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 집단에 관해서 만족스러운 정규분포 곡선이 나온다면 한 개인이 아니라 전체의 특징에 관한 하나의 진정한 값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223-5)
14 사회가 범죄를 예비하다
"1836년 경, 케틀레는 '도덕적 질서는 통계학의 영역에 들어오게 된다. ··· 이는 인간 본성의 완벽성을 믿는 이들에게는 낙담할 만한 사실일 것이다. 자유의지란 오로지 이론 속에서만 존재할 것처럼 보인다'고 적었다." "그러나 1926년에 시작된 양자역학의 두 번째 흐름은 미시세계의 근원적 법칙이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을 정도로 확률적임을 입증했다." "양자물리학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숙명론적이고 순수하게 결정론적인 법칙이 아니다." "1830년대와 1930년대의 감수성이 보여 주는 대조는 역설적이다. 1930년대에는, 자연 법칙이 확률적이라는 확신은 세상이 자유의 안전지대라는 점을 보여 주는 것으로 간주됐다. 동일한 확신이 1830년대에는 위와는 정반대로 해석되었다. 즉 만약 범죄와 자살을 관장하는 통계적 법칙이 존재한다면, 범죄인들의 범죄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1930년대에는 확률이 자유의지의 존재 여지를 제공해 주었지만, 1830년대에 확률은 자유의지를 완전하게 배제해버렸다."(237-8)
"케틀러와 파는 모두 19세기 통계학이 지닌 박애주의적·공리주의적 측면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통계학의 중요한 측면이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운명을 향상시키려 했으며, 새로운 통제를 행사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범죄·질병·악덕·불안정을 다스리는 통계적 법칙을 발견하라. 그리고 그러한 법칙들이 적용되는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라. 반면에 게리는 실증주의자였다. 도덕 분석은 분명 입법가들의 결정에 활용될 수 있는 데이터를 얻어내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입법가에게 어떠한 제안을 제시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사실과 가치 사이의 구별은 불가침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케틀레는 최소한 그의 젊은 시절에는 개혁주의자였다. 연간 범죄율은 사회 질서의 '필연적 결과'이기에 입법가들은 이를 개선시키기 위해 변화를 도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파는 자신이 통계 사실을 총합하고 결합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권고를 내릴 의무 역시 지녔다고 생각했다."(243)
"아무리 박애주의적 열정으로 은폐되었다고 해도, 개혁의 진정한 기능은 확립된 질서를 보전하는 것이었다(라고 누군가는 주장할 것이다)." "부유층 역시 체제의 적용을 받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계적 법칙은 계층에 관한 것이다. 통계적 법칙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측정되고, 분석되고, 통치의 논거로 활용되어야 하는 피지배계층인 '그들'이었다. 여기서 계층이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실체이다. 필연적으로, 자신들을 위해서 변화를 필요로 하는 이들은 노동자 혹은 범죄자 또는 식민지 계층이다." "한 사회 내에 존재하는 계층 외에도 우리가 인종이라고 부르는 보다 큰 단위의 계층이 있다. 오늘날 인종이 내포하고 있는 제1의 함의는 피부색이다. 파가 연설에서 언급한 인종이란 전통으로 연결되어 있거나 관습의 공통성이 있는 국민, 종족, 심지어 가족 그룹을 의미했다. '인간은 자신의 인종을 변화시킬 힘을 가진다'고 그는 썼다. 이렇게 우생학이 시작되었다."(245-7)
15 사회에 대한 천문학적 시각
"독일 사상가들은 '규칙성'은 '법칙'이 아니며, 심지어 '규칙'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물론 통계적 규칙성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통계적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자연법칙은 실재하는 원인들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러한 원인들은 개별 사건들에 작용하며 필연적으로 효과를 생성해 내는 것들이다. 라플라스와 케틀레 같은 프랑스인들이 주장한 수많은 미미한 원인들은 통계적 분포를 이루기는 하지만 그러한 분포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분포를 일컬어 법칙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법칙뿐이었다. 따라서 칸트의 후계자들은 케틀레에 맞섰다. 서유럽에서는, 실증주의의 정신은 모든 법칙이 단순히 규칙성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규칙성을 뛰어넘는 원인에 대한 믿음은 형이상학의 시대가 낳은 부조리한 잔재였다. 따라서 통계적 법칙은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통계에 대한 '공산사회주의적' 접근과 부합하는 철학을 제공하였다."(257-8)
"엥겔은 '특정 집단에서 매년 거의 동일한 수의 사람들이 자살한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썼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원인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위 사실은 단순한 습관적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법칙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사실이 자연이나 사회의 법칙이 아니라면, 의지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이것이 엥겔의 해답이었다. 원인에 대한 규명 없이 우리는 무언가를 법칙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따라서 자살의 법칙을 이야기할 수 없는 일이다." "(교수이자 사회주의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강단사회주의자들은 개인들이 스스로를 통치하는 방식을 서로 협력하여 선택함으로써 국가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국가가 우선한다는 것이다. 국가 없이 개인이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개인들이 자신을 훌륭한 국민으로 도야할 수 있도록 국가 자체와 제도를 다듬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다. 엥겔이 지휘하던 프로이센의 통계국은 이러한 전일주의적 정치 철학으로 무장한 대변자가 되었다."(260-2)
16 사회에 대한 광물학적 시각
"발자크의 《인간희극》이 그러했듯이, 르 플레의 비전은 인간을 먼저 혼인 상태와 가족 관계에 따라, 그리고는 주거지, 무엇보다도 가계 생활비 규모에 따라 다양한 유형으로 분류하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르 플레의 저작은 프랑스의 부유계층이 아니라 유럽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또한 그 저작은 중편소설의 형태가 아니라 개별 가족의 지출 규모에 대한 계량적 연구의 형태로 추진되었다. 그것은 케틀레가 사용했던 것처럼 평균치에 대해 파고든 것이 아니라, 박물학자들이 암석 혹은 식물 견본을 패러다임으로 활용하듯이 대표적인 개인을 이용하여 인간 유형의 주요 특징을 보여 주었다. 르 플레는 우랄 산맥의 유목민과 셰필드의 칼장수, 스웨덴의 대장장이와 카스티야의 소작농들을, 그리고 모로코의 목수들과 (오늘날의) 시리아의 마을 거주민들을 묘사하였다." "사회를 이해하려면 단순한 현실의 구성원으로서의 평균인이 아니라 대표성을 띠는 개인에게 시선을 돌리라는 것이 르 플레의 주장이었다."(271-4)
17 우연, 가장 유서 깊은 고귀함
"18세기 잉글랜드의 뉴턴주의자들은 통계적 안정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계몽주의적 신을 언급한 바 있었으나, 그러나 이보다 오래되고 더 변덕스러운 신들, 즉 계몽주의자 흄이 아무 의미가 없는 단어라고 폄하했던 우연을 즐기는 신들이라는 희미한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러한 불씨는 낭만주의에 의해 다시 점화되었으며, 니체에 의해 더욱 거세졌다."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하늘은 '신성한 우연을 위한 무도장', '신성한 주사위와 도박자를 위한 신의 탁자'에 비견된다. 그렇다면 합리성은 어떻게 이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예상하듯이, 비이성적인 방식과 우연적인 사건에 의해서였다.' 19세기 말의 철학자였던 니체와 퍼스의 우연·창조·필연성에 대한 관념은 흥미로울 정도로 유사했다. 이 둘은 다른 이들이 질서정연하다고 여기는 이 세계가 우연의 산물이라고 믿었다. 둘 중 누구도 법칙의 존재가 우주의 우연적 특성을 조금이나마 약화시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292-3)
"니체의 사상들 중 하나에 대해 질 들뢰즈가 쓴 간결한 요약이 있다. '한 번 던져진 창조의 주사위는 '우연'의 긍정이고, 그것들이 떨어지면서 형성하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다. ··· 따라서 니체가 필연(운명)이라 부르는 것은 우연의 소멸이라기보다는 우연 자체의 조합이다.' 여기에는 모든 종류의 주사위 게임이 등장한다. 니체는 목적이라는 개념이 있을 때 비로소 우연이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목적과 이유에 대한 개념을 부분적으로는, 질서정연해 보이는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얻을 수 있다. 우주가 전적으로 우연의 문제임을 알고 있는 이는 목적이라는 허상에 구애받지 않는다." "니체는 우리가 우연에 관해 지금까지 접해 온 것들 중 가장 난해한 철학적 지혜를 터득하였다. 필연성과 우연은 서로 쌍둥이와 같아서, 어느 한쪽도 나머지 한쪽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동전의 앞면이 뒷면을 설명하는 이상으로는 필연성과 우연 어느 한쪽도 나머지 한쪽을 설명해 주지는 못 한다."(294)
18 카시러의 명제
"동적인 결정론, 즉 숙명론이 1872년에서야 진정으로 보편적인 명제가 되었다는 카시러의 말은 옳은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니다." "그렇다면 카시러 테제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첫째, '결정론'이라는 단어는 1850년대 말에서 1870년대 초의 시기에 인과적 필연성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결정론이 이러한 의미를 지칭하게 된 것은 특수한 관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프랑스의 베르나르와 독일의 뒤부아-레이몽은 생리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생기론을 거부했으며 모든 생명 과정은 화학반응과 전기(등등)의 작동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독자는 라플라스가 필연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외연의, 공간상의, 물질의 실체라는 범위에 한정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라메트리는 라플라스와는 달리 정신의 영역까지 이야기하였다!)." "새로운 스타일의 결정론은 라플라프보다도 교만했다. 이 새로운 결정론은 정신 활동이 일어나는 장소인 뇌를 지배하려는 의도를 지녔다."(306-8)
"1874년 에밀 부트루는 자연 법칙이 지니는 우연성에 대해, (즉, 결정론의 퇴색과 관련된) 주목할 만한 논문을 출간했다. 이 논문의 바탕을 이루는 교의는 창발주의emergentism와 계층적 구조a hierarchy of structures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층들을 보면, 가장 아래층은 원소의 원자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다음 층에는 분자의 구조가 있겠지만 부트루는 원자들에 적용되는 법칙들이 화합물에 적용되는 법칙들을 결정짓지는 않을 수 있다고 추측하였다. 이러한 화합물들이 따르는 법칙들은, 심지어 유기 화합물들을 지배하는 법칙들이라 하더라도 동식물 생명체의 법칙들을 결정짓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생명체의 법칙들이 이성적인 존재를 지배하는 심리적 법칙들을 결정하지는 않을 수 있다. 생명체의 법칙들과 심리적 법칙들은 사회의 법칙들을 결정하지는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을 이루는 계층의 각 단계에는 우연성이 존재하며, 하위에 위치한 간단한 구조가 보다 상위의 새로운 법칙을 결정하지는 않는다."(312-3)
# 창발주의 : 하위 계층의 요소에는 없는 특성이나 행동이, 이들이 합쳐진 상위 계층에서 창조적으로 돌연히 발현된다는 주장
"부트루의 가장 유명한 학생은 뒤르켐이었다. 뒤르켐의 《자살론》은 전체로서의 사회가 단순한 개인의 총합이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전체는 부분들보다 크다. '이러한 공리는 전체는 그것을 이루는 부분의 총합이 아니라는 르누비에의 주장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사회의 법칙은 우주의 힘 또는 전기의 힘과 유사한 면이 있으며, 개인의 심리 상태가 지니는 특징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원리들이 아니라 그보다 거대한 원리들로부터 나온다. 창발주의는 순수한 물리적 세계의 결정론적 토대와 사회 법칙들 사이에 충돌을 야기하지 않으면서 통계적 법칙을 흡수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젊은 시절(1885년)의 뒤르켐은 이미, 사회학은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과학이다. 자연에는 세 가지 세계가 있다. 물리적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 위에 사회학적 현상이 존재한다'는 부트루의 가르침에 찬동했다. 1897년에는, 자살의 안정성을 야기하는 집단적 힘을 일컬을 때도 '독자적'이라는 어구가 사용되었다."(315-6)
19 '정상 상태'의 탄생
"'병리성'은 질병이라는 개념만큼이나 오래된 듯하지만 1800년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질병은 신체 전체가 아닌 개별 기관의 속성이 되었고, 병리학은 병자가 아니라 건강하지 않은 기관을 연구하는 학문이 되었다." "병리학자들에게 정상이란 이러한 개념의 역으로부터 나왔다. 병적인 기관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경우, 이를 정상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는 병리성의 개념이 우선이고 정상은 병리성의 반대 개념으로서 부차적으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콩트가 브루새의 위대한' 원리'라고 칭했던 것이 이러한 관계를 뒤집어 놓았다. 병리성은 정상으로부터의 이탈로 정의된 것이다. 모든 변이는 정상 상태로부터의 변이라는 관점에서 특징지어졌다." "기준과 표준에 대한 아이디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지만, '정상적'이라는 단어가 현대와 같은 용도로 사용된 것은 의학적 맥락을 통해서였다. 중요한 것은 표준은 충족되거나 충족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는 점이었다."(328-30)
"콩트가 정상성의 개념을 (사회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영역에 도입하였을 때, 그는 또 다른 변형을 초래했다. 정상은 더 이상 일상적인 건강 상태를 의미하지 않았다. 정상이란 것은 우리가 노력하여 달성하고 에너지를 바쳐야 할 정화된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다. 요컨대 진보와 정상 상태는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진보란 다름 아니라 질서의 발굴이다. 즉, 진보는 정상 상태에 대한 분석이다'라는 것이다." "'실증주의 학파는 지난 3세기에 걸친 혁명적 투쟁 기간 동안, 지식과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계층과 구성원들의 진정한 정상 상태를 가능한 한 최대로 달성하기 위해 준비를 다져 왔다'고 콩트는 말했다. 따라서 콩트는 정상이라는 아이디어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대치 상황을 표현했던 인물,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러한 대치 상황을 이끌어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현존하는 평균으로서의 정상과 우리가 진보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완벽함의 표상으로서의 정상 사이의 대치 상황 말이다."(335-6)
20 우주의 힘만큼이나 실재하는
"골턴과 뒤르켐은 각자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졌으며 정상과 비정상을 새로운 법칙의 실재와 긴밀하게 결부시켜 생각했다. 물론 뒤르켐의 창발주의 철학은 골턴에게는 이질적이었으며, 정상과 관련하여 각자가 핵심으로 생각하고 집착했던 관점은 결코 서로 동일하지 않았다. 실재적이고 완전한 법칙으로 골턴이 취급했던, 집단에 관한 정규분포는 뒤르켐이 집단에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우주의' 힘을 다스리는 법칙과는 다른 종류의 법칙이다." "정상의 반대는 무엇인가? 당연히, 비정상성이다. 그러나 골턴에게 정상의 특징은 정규곡선을 통해 묘사된다. 비정상은 평균으로부터 강하게 벗어난 것이다. 뒤르켐에게는, 비정상은 병적인 것으로 불렸다. 결국 비정상은 병든 것이다." "매우 간략화시켜 말하자면, 뒤르켐은 도덕적인 것과 정상적인 것을 동일시하였다. 골턴에게는 정상은 좋은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이었다. 어떤 극단적 존재들은 병적인 것이 아니라 우수한 것이었다."(354-5)
21 통계적 법칙의 자율성
"케틀레로부터 골턴은 오차곡선을 이용해 평균에서 편차를 생각하는 방식을 배웠다. 케틀레가 중심 집중 경향, 평균에 대해 생각하던 대목에서 골턴은 항상 예외에 몰두했으며 분포의 꼬리와 분산을 생각했던 것이다." "골턴은 평범함으로의 복귀는 정규곡선이 가져오는 수학적 귀결이라고 보았다. 즉, 어떤 집단이 정규분포를 따르고 있다면 다음 세대 역시 이전과 대체로 동일한 평균과 분산을 지닌 정규분포를 따를 것이되, 다만 나중 세대에서 비범한 형질에 해당하는 멤버들은 대체로 이전 세대에서 비범한 형질에 해당했던 멤버들의 후손은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다." "골턴은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골턴은 (1) 현상을 설명하는 동시에, (2) '독립적인 사소한 원인들'을 배제시키는 일석이조를 거두었다. 그는 수많은 형질들이 보여 주는 정규분포를 자율성을 지닌 통계적 법칙으로 간주했다. 통계적 법칙은 이제 성숙한 세계로 접어들었다. 골턴은 우연이 길들여졌다고 보았다."(364-8)
"《과학 문법》을 저술한 피어슨은 골턴 이전의 모든 이들이 상관관계의 분석을 빠트렸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마음 속에 자리한 두 가지 다른 문제를 숙고하던 골턴은 상관관계의 개념에 도달했다. A는 B를 일으키는 유일한 원인이 아니지만, B를 낳는 데 기여한다. 그 수가 많건 적건 간에 B에 작용하는 다른 원인들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일부에 대해서는 우리가 모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모를 수도 있다. ··· 부분상관관계에 대한 이러한 측정은,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한 오래된 인과관계를 대체할 뿐 아니라 우주에 대한 우리의 시야에도 깊은 영향을 미칠 상관관계라는 광대한 부류를 낳은 기원이었다. 자연과학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인과관계의 개념은 산산조각으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 그 이후로 우주에 대한 철학적 관점은, 우주는 서로 완벽한 상관관계, 즉 절대적인 인과성에는 도달할 수 없는 변량들이 서로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는 시스템이라는 견해를 지니게 되었다.〉"(372-3)
22 프로이센 통계학의 한 장면
"1851년 노이만은 피르호의 의학지에 〈1846년 통계국 보고서로 본 프로이센 국가의 의학 통계〉라는 연구 한 편을 출간했다. 서두는 놀라운 명제로 시작했다. 굵은 활자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공중보건의 관리는 국가의 의무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지니고 인간이라는 종의 일원으로서 동등한 자격을 지닌다는 정신에 입각하고 있다. 국가의 유일한 목적은 그 구성원들의 복지인데, 왜냐하면 국가는 동등한 자격을 지닌 인간들로 구성된 유기적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정치과학의 진정한 취지와 목적은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본성의 법칙에 의거하여 인간의 정상적인 발전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대중의 번영을 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새로운 윤리적 세계관'을 낳는다. 노이만은 계속해서, 훌륭한 보건은 개개인의 완전한 발전에 필수적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전제로부터, 국가는 시민을 위한 의료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의학은 사회과학이다.'"(378)
"노이만의 《유대인의 대량 입국이라는 신화》는 1880년에 제2판이 나왔다." "당시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은 독일 동쪽으로부터 엄청난 수의 유대인들이 입국하고 있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한층 증폭되었다. 선동적인 소책자들은 갈리시아와 같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북부지역과 러시아에서 유대인들이 엄청나게 입국하고 있다고 떠들어댔다. 그들은 슐레지엔, 포젠, 그리고 동프로이센 등의 동부 지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입국이 독일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독일인의 특징은 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소책자들은 악의적인 익명의 저자가 쓴 것이었지만, 이들 중 어느 한 시리즈는 베를린 최고의 역사가이자 신랄한 학자 겸 정치가인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가 쓴 것이었다. 노이만은 이러한 (반유대주의에 기초한) 아우성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최소한의 '사실', 즉 독일로의 유대인 대량 입국에 대한 '통계적 공리'를 검증하는 데 전념하였다."(382-3)
"뵈크의 베를린 통계국이 반유대주의의 유행에 대해 보인 반응은 엥겔의 프로이센 통계국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뵈크의 1880년 연감에는 유대인의 입국에 관해 신문이 늘어놓는 무지한 불평불만을 조롱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이 연감은 '통계에 대한 부적절하고 부도덕한 악용이 반유대주의 동요를 관통하고 있다'고 썼다. 노이만은 그의 책 제3판에서 뵈크의 '양식 있음'에 대한 감사를 표시했다. 엥겔은 《프로이센 왕립 통계국지》에 무기명으로 발표한 비평에서 뵈크의 베를린 통계국이 발행한 연감과 새로 설립된 제국 통계국에서 발행한 연감을 논했다. 이 비평은 제국 연감의 객관성이 모두에게 모범적인 사례라고 평가하였다. 뵈크의 연감은 일간지의 보도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저널리스트들은 현재의 사건을 다루지만, 통계국은 후대뿐 아니라 행정가, 입법가, 상인들을 위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장차 통계학자들은 정치와는 무관하게 활동하도록 하자는 것이 위 비평의 주장이었다."(390)
23 우연이 지배하는 우주
"퍼스는 결정론을 부인했고, 세상이 결정론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에 의혹을 품었다. 그는 배비지의 자연 상수가 지닌 진정한 값을 확증하려고 애쓰는 집단에서 일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상수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상수라는 것들이 지닌 숫자는 우리가 점차적인 과정을 통해 정착시켜 가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귀납적 학습과 추론을 단순히 통계적 안정성의 관점에서 설명하였다. 기술적으로는 그는 실험 설계에서 임의화randominzation의 방법을 의식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즉, 그는 보다 예리한 질문을 제기하고 보다 유용한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생성된 우연이 지니는, 법칙과도 같은 특징을 활용하였다." "그는 확률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빈도주의적frequentist인 접근법을 가지고 있었으나, 또한 증거가 지닌 주관적 중요성(log odds)의 측정법을 개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환원 불가능하게 확률적인 우주를 상상했다."(395)
"주목할 만한 것은 확률에 대한 퍼스의 개념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논증의 건실함과 연계했던 방식이었다. 그 아이디어는 1866년 10월 31일 보스턴 강연에서 이미 선을 보였다. '증거로부터 가능성이 나오는 것은 언제나, 거짓보다는 진리를 더 자주 낳는 과정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거짓보다는 진리를 더 자주 낳는 것으로 알려진 모든 과정은 가능성을 낳는다.' '거짓보다는 진리를 자주 가져옴'. 이것이 바로 귀납 및 연역 논리에 대한 퍼스의 이해를 구성하는 핵심이다. '논리는 논증을 검증하는 데 필요한 과학이다.' 이는 개개의 논증을 검증하기보다는 논증의 속genus을 숙고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논증의 전제가 사실이면 그 결론은 언제나 참이 되는 속의 경우, 그 논증은 '논증적'demonstrative이다. 논증의 전제가 사실이며 그 결론은 대체로 참이 되는 속의 경우, 그 논증은 단지 '개연적'probable일 뿐이다. 양자의 경우 모두, 타당한 논증은 '진리 생성적 성격the truth-producing virtue'을 지닌다."(412-3)
# 논증의 속genus : 비슷한 논증의 집합
# 3가지 종류의 추론
1. 연역법 : 전제가 참이면 결론은 반드시 참이다.
2. 귀납법 : 사실 A가 무수히 반복적으로 관찰될 경우 가설 B가 사실로 도출된다.
3. 상정논법(abduction, 가설) : 전제가 참이라도 결론이 반드시 참이라고 할 수 없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하게 해주는 패턴이다.
※ 최선의 설명에로의 추론
1-1. 특이한 사실 A가 관찰되었다.
2-1. 만약 가설 B가 참일 경우, 사실 A는 이상하지 않다.
3-1. 따라서 B가 참이라고 '상정'할 만한 이유가 있다.
"퍼스는 사람들이 어떠한 견해에 대해 합의에 이르게 된다면 그 견해가 바로 진리라고 가르쳤다. 일찍이 유명론적인 관점에서 그는 진리란 우리가 믿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썼다. 나중에는, '만약 진리가 만족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현재의' 어떠한 만족에도 진리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근원적이며 회피할 수 없는 쟁점에 대한 검증을 거친 이후에도 최종적으로 '발견될' 만족에만 진리가 있다고 할 것이다'라고 썼다. 이는 유명론에서 실재론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통상적인 모습이며, 확률은 일련의 사건에서 해당 사건의 상대빈도라는 관점으로부터 확률은 '지향성'이라는 관점으로 전환이 이루어진 것과 상응한다." "〈공동체가 어떠한 질문에 대한 불변의 결론을 합의로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을 확신할 수는 없다. (···) 기껏해야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특정한 문제에 심혈을 기울인다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결론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 정도이다.〉"(419-20)
"우연이 길들여졌다고 하면, 이성에게 위안이 되는 것인가? 형이상학적 우연은 더 이상 비밀스런 환희를 위협하거나 제공하지는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통계적 법칙, 즉 물질의 가장 미세한 입자 위에 자그맣게 새겨진 평균의 법칙에 의해 안전해진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퍼스는 첫째, 둘째, 그리고 셋째라는 식의 서술을 즐겼다. '첫째는 우연이고, 그다음은 법칙이며, 어떤 기질을 가질 경향은 셋째이다.' 이것은 우연이 통계적 법칙에 의해 소멸된다거나, 연속적인 주사위 던지기를 통해서 우리가 흄이 주장한 습관이라는 저 마음 편한 개념을 다시 상정해 볼 수 있는 세계가 만들어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첫째였던 것은 시간이 지나도 첫째이다. 우리가 우주의 별자리를 보는 경우처럼 무한의 상황에서 주사위가 던져지는 상황이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경우처럼 전적으로 개별적인 특수성의 환경에서 주사위가 던져지는 상황이든, 우연은 감각의 모든 경로에 쏟아져 내린다."(426-7)
# 흄의 습관 : 흄이 귀납법과 인과관계의 필연성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음을 주장하면서 인간이 인과관계를 확립하는 메커니즘으로 제시한 것이다. 즉, 흄은 '원인'으로부터 '결과'에의 '이행'移行이 일어나는 것은 '습관'에 의해서 확립되는 것으로, 여기에 객관적 필연성은 없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