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사
알베르 소불 지음, 최갑수 옮김 / 교양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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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부 구체제의 위기


"구체제를 구성하는 성직자와 귀족, 그리고 제3신분이라는, 각 '신분'의 기원은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기도 드리는 자와 싸우는 자, 그리고 이들 양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 노동하는 자 사이에 구분이 확립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직자 신분은 처음부터 교회법의 규제를 받는 특별한 조건에 놓여 있었다. 그 뒤에 속인들 가운데서 귀족이라는 집단이 형성되었다. 성직자도 귀족도 아닌 사람들은 '수고하는 자들(laboratores)'의 범주를 이루었고, 이로부터 제3신분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신분의 형성은 더뎠다. 처음에는 단지 부르주아, 다시 말해서 자치권을 인정하는 특허장을 지닌 도시의 자유민들만이 제3신분을 구성하였다. 농촌의 평민들은 1484년에 처음으로 제3신분의 대표자를 뽑는 선거에 참여함으로써 그 일원이 되었다. 세 신분은 점차 확고해져 군주제는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신분제는 축성을 받고 왕국의 기본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33-4)


"농업 인구가 국민의 대다수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농업 생산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는 나라에서 농민의 요구가 특별히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농민의 요구는 봉건적 부과조(賦課租, 일종의 토지세)의 문제와 토지의 문제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났다. 봉건적 부과조의 문제에서 농민의 견해는 일치했다. 진정서는 영주들과 특권계급에 맞서 농민들이 단결되어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간접세보다는 봉건적 부과조와 십일조가 수많은 불평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과중하고 굴욕적일 뿐만 아니라 그 기원을 알지 못하는 농민들에게 부당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십일조와(생산물 지대인) 샹파르는 생산물이 아닌 화폐로 납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농민들이 생각하기에, 그렇게 된다면 화폐의 구매력 저하로 부과조는 미미해질 것이었다. 이러한 여러 문제에서 부르주아지들은 농민들과 의견이 같았다. 그렇기에 제3신분의 단결은 강화될 수 있었다."(74-5)


"일단 봉건적 부과조가 폐지되자 1789년부터 농민층 내부에서 토지 문제를 둘러싸고 분열이 나타났다. 이미 대규모 경작자의 이익과, 토지를 약간밖에 지니지 못하거나 전혀 지니지 못한 농민 대중의 이익은 양립할 수 없었다. 전자가 진보한 농업 기술을 이용하여 시장을 염두에 두고 생산하려 한 반면에, 후자는 폐쇄 경제 혹은 준(準)폐쇄 경제로 만족하였다. 구체제가 시도했던 개혁(경작지의 인클로저, 곡물 유통의 자유 등)이나, 공동지와 경작의 문제를 두고 농민층은 분열하였다. 1789년 이후, 유산 농민층은 농촌의 대중이 자신들의 이익에 위험한 존재라는 점을 자각하였다." "이처럼 구체제 말기에 벌써 미래의 대립 관계가 농민층 내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단지 특권계급에 대한 반발과 증오로만 단결할 뿐이었다. 혁명이 일어나 봉건적 부과조, 십일조, 특권 따위가 폐지되자, 유산 농민층은 질서의 편에 가담해버렸다. 조르주 르페브르는 이를 〈부르주아지와 농촌 민주주의 사이의 타협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75-6)


"비록 부르주아지가 변화와 개혁을 원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혁명 관념을 품지 않았다. 제3신분 전체는 국왕에게 대단한 존경심, 거의 종교적 감정에 가까운 존경심을 품었다. 국왕은 국민적 이념을 구현하는 존재였으며, 누구도 군주제를 전복할 생각은 전혀 품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는 특권계급을 파괴하기보다는 거기에 융합되기를 바랐고, 특히 상층 부르주아지가 그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부르주아지가 라파예트에게 열광하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부르주아지는 또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사회 계서제를 유지하여 자신들보다 아래에 있는 계급과 분명하게 구별되기를 바랐다." "민중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경멸은 평민에 대한 귀족의 경멸과 다르지 않았다. 특권계급에 대항하여 민중계급의 지지를 호소하였던 부르주아지가, 혁명력 2년에 민중계급이 권력을 요구하였을 때 왜 분노와 공포를 느꼈는지는 바로 이러한 계급적 편견을 고려해보면 납득된다."(89)


"'고등법원'은 국왕의 이름으로 최종심을 행하는 최고 법원이었다. 고등법원은 옛 국왕의 궁정회의가 전문화하여 그것으로부터 갈라져 생겨난 것으로서, 17~18세기에는 등기권과 간주권에 기반을 두고 무제한적이고 보편적인 권한을 주장하였다." "관직 보유자가 사망했을 때 국왕은 그 관직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고의 조세 수입 형태로) 관직 매매제가 시행된 결과 관직이 세습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관직 매매제가 야기한 사회적·정치적 결과는 매우 중요하였다. 부르주아지와 특권계급 사이에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었다. 사법관들(고등법원 양반들)은 직책 덕분에 상속이 가능한 귀족 작위를 부여받은 법복 귀족의 일원이 되었다. 이들의 충원은 호선(互選)을 통해 이뤄져 국왕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다. 이처럼 사법 관직은 완전히 독립적이 되어 18세기에 오면 군주제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였다. 18세기 말에 고등법원의 배타성은 더욱 커졌고, 사법 관직은 폐쇄적이 되었다."(107-9)


# 등기권 : 국왕이 제정한 법률에 효력을 부여할 권리 / 간주권 : 국왕이 제정한 법률의 등기를 거부할 권리


"1788년 봄에 왕권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기본적으로 (정부가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만인의 과세 평등을 도입하려 하자, 이에 대해 저항한) 법복 귀족과 대검 귀족(기사 계급)의 결합이었다. 특권계급은 왕권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하여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대검 귀족과 법복 귀족은 힘을 합쳐 왕권에 복종하기를 거부하였으며 부르주아지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특권계급은 비록 입헌 체제와 기본적 자유의 보장을 요구하고 과세 동의권을 삼부회에 맡기고 선거로 구성되는 지방 삼부회에 지방 행정을 넘기라고 강경하게 주장하기는 했지만, 여러 다양한 기관에서 자신들의 정치적·사회적 우월성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특권계급이 절대 군주제에 대항하여 훌륭하게 투쟁을 전개하고 제3신분을 잘 이끌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주의의 폐허 위에서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확립하고 사회적 특권을 유지하겠다는 확고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129-30)


1부 국민, 국왕, 법: 부르주아 혁명과 민중 운동 1789~1792년


▶ 법률 혁명(1788년 말~1789년 6월)


"1788년 8월 8일에 국왕이 다음 해 5월 1일에 삼부회를 소집하기로 한 약속은 제3신분에게 커다란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이제까지 제3신분은 절대주의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특권계급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파리 고등법원이 삼부회는 〈1614년의 절차에 따라 정기적으로 소집되고 구성될 것〉이라고 결정하면서부터 특권계급과 부르주아지의 동맹은 깨졌다. 부르주아지는 이제 신민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이들의 진정서에 귀를 기울이기로 한 국왕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다." "제3신분 출신 인사들은 여론을 부추기는 데 이를 이용했다. 정치적 문서가 홍수를 이루었고, 암묵적인 합의 속에 언론의 자유가 확립되었다. 법률가, 사제, 특히 중간 부르주아지 출신 인사들이 써낸 소책자나 논설이 급증했다." "부르주아 출신 인사들의 이러한 일련의 선전 저술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특권을 폐지하려는 유산계급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을 뿐, 노동자, 농민, 소작인 계층의 운명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144-9)


"1789년 6월 23일 하루는 혁명의 진전에서 중요한 고비였다. 국왕의 무력 행사 경고에도 불구하고, 제3신분 대표들은 사태의 주도권을 계속 유지했다. 마침내 루이 16세는 친림회의 연설에서 삼부회의 과세 동의권을 받아들였고 개인의 자유와 언론·출판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동의했다. 그것은 곧 입헌적 정부의 여러 원칙을 승인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세 신분의 합류를 명령하면서 왕권은 새로운 양보의 길을 텄다. 이제 삼부회는 소멸했으며, 국왕의 권위는 국민의 대표들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삼부회를 개칭한) 국민의회는 붕괴된 구체제의 폐허 위에서 법률상의 절차를 거쳐 재건 작업에 착수할 생각이었다. 7월 7일, '헌법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7월 9일에 국민의회는 스스로가 '제헌국민의회'임을 선언했다.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법률혁명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국왕과 특권계급이 기정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했던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은 다시 제3신분을 굴복시키기 위해 무력 사용을 결심했다."(162)


▶ 민중 혁명(1789년 7월)


"제3신분 대표의 배가 문제와 머릿수 표결 문제─귀족과 성직자 두 신분의 대표를 합친 것과 동일한 수의 제3신분 대표를 선출하고, 신분별 투표가 아닌 머릿수 표결을 해야 한다는─에 대한 귀족의 반대는, 그들이 특권을 완강하게 고수하리라는 관념을 고착화했다. 그리하여 '특권계급의 음모'라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민중은 특권파가 공세를 취하기 전에 먼저 국민의 적을 공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경제적 위기가 대중의 결집을 부채질했다. 1788년은 특히 흉년이었다." "물자의 공급 부족과 높은 물가로 인한 폭동은 1789년 봄부터 발생하기 시작했고 수확 직전에 위기가 절정에 달해 7월에는 크게 늘어났다. 민중의 의식 속에서는 특권계급의 음모와 경제적 위기가 긴밀하게 결합하였다. 특권파가 제3신분을 굴복시키려고 곡물을 매점한다는 비난이 들끓었다. 민중은 자신들의 열망을 담고 있는 국민의회를 국왕이 무력으로 해산하려 한다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163-4)


"파리에 재무총감 네케르의 파면 소식이 알려진 것은 7월 12일 오후였다. 이 소식은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민중은 그것이 반동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금리 생활자와 금융업자들은 네케르의 파면을 곧 파산이 도래할 위험이라고 여겼다." "시위 군중의 주력은 튈르리 궁의 정원에서 랑베스크 공의 독일 근위대와 충돌했다. 이 소식이 신호가 되어 민중이 무기 상점을 약탈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7월 14일 군중은 전면 무장을 요구했다. 무기를 구할 요량으로 그들은 보훈병원에 침입해 3만 2천 정의 소총을 탈취한 뒤 바스티유로 향했다." "(바스티유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루이 16세는 시간을 벌기로 결심했다. 7월 15일, 국왕은 의회에 모습을 나타내 군대의 철수를 공표했다." "7월 14일은 새로운 계급을 권좌로 끌어올려놓은, 부르주아지의 진정한 승리인 동시에, 그 이상의 것, 즉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날의 사건은 모든 억압받는 인민들에게 무한한 희망을 열어주는 듯 보였다."(166-9)


▶ 제헌의회(1790년, 타협의 실패)


"1790년 내내 제헌의회는 커져 가는 위험 속에서 프랑스의 재건 작업을 추진했다. 특권계급은 경계심을 풀지 않았으며, 인민대중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조급해했다. 이러한 이중의 위협에 직면하여 제헌의회의 부르주아지는 입헌군주제라는 보호막 아래에서 주도권을 구축하였으며, 특권계급의 일부를 체제로 끌어들이려고까지 했다. 이렇게 하여 타협 체제가 들어섰다. 타협 정책은 1688년에 일어난 영국 명예혁명을 본떠, 종속된 민중계급의 기반 위에서 상층 부르주아지와 특권계급의 지배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중추를 이루는 부유한 명사들은 이를 받아들일 태세였다. 하지만 특권계급은 그렇지 않아서 그들의 저항을 분쇄하려면 인민대중에게 호소해야만 할 것이었다. (파국을 막으려면) 여전히 국왕을 설득하고 귀족을 납득시켜야 했다. 이러한 타협 정책의 주인공이 바로 라파예트였다. 허영심이 많고 고지식했던 그는 상반되는 것을 화해시키려고 시도했다."(189)


"절대 군주제로 복귀하거나 특권 체제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지킬 희망이 남아 있는 한, 귀족은 부르주아지의 승리에 반대했다.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승리하는 것은 곧 특권계급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귀족의 이러한 저항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부르주아지는 도시의 인민대중 및 농민층과 맺은 동맹에 의존해야만 했다. 이러한 저항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기 위해 부르주아지는 나중에 나폴레옹의 독재를 받아들일 것이었다. 봉건제가 완전히 파괴되고 특권 체제의 부활을 위한 모든 시도가 영원히 불가능해져서야 마침내 특권계급은 타협을 받아들여 7월왕정을 통해 대부르주아지와 함께 권력에 참여했다. 그러나 1790년의 특권계급은 그들 나름의 목표를 전혀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망명자들의 술책, 외국 조정의 음모, 반혁명의 개시에 희망을 걸 수 있었던 만큼 더욱 그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790년에 라파예트가 시도한 타협과 화해 정책은 오직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193-4)


▶ 제헌의회의 부르주아지와 프랑스의 재건(1789~1791년)


"제헌의회 의원들은 계몽사상의 아들로서 사회와 제도를 합리적으로 만들려고 했으며, 사회와 제도가 토대를 둔 원칙에 보편적 가치를 부여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민중 세력의 압력과 반혁명적인 기도에 직면한 부르주아지의 대변자로서, 스스로 엄숙하게 선언한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자신들이 속한 계급의 이익에 맞게 재건 과업을 왜곡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제헌의회의 부르주아지는 과업을 수행하는 데 토대로 삼았던 '원칙들'이 보편적 이성에 기반을 둔 것이라고 여겼다. 우리는 그 원칙들의 우렁찬 표현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발견한다. 그 서문에 따르면, 권리들에 대한 〈무지, 망각 또는 멸시가 공공의 불행과 정부의 부패를 초래한 유일한 원인들〉이다. 이제 〈단순하고 명백한 원리들에 근거한 시민들의 여러 요구들〉은 오직 〈헌법의 유지와 만인의 행복〉을 가져올 뿐이다. 이는 곧 계몽 시대의 정신에 잘 부합하는 이성의 전능함에 대한 낙관주의적 믿음이었다."(207-8)


"제헌의회 의원들은 보편적인 의미를 지닌 정식화라는 외피 아래 상황의 산물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국왕의 권위에 도전한 과거의 반란을 합법화하는 한편, 자신들이 세운 질서를 겨냥하는 민중의 모든 시도에 대비하고자 했다. 그 결과 '인권선언'은 수많은 모순을 안게 되었다. 제1조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선언했지만, 평등을 사회적 유용성에 종속시켰다. 제6조는 과세의 평등과 법 앞의 평등을 형식적으로 인정했을 뿐, 부에서 야기된 불평등에는 전혀 손대지 않았다. 제2조는 소유권을 인간의 소멸할 수 없는 자연권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의회는 엄청나게 많은 무산 대중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10조는 종교적 자유에 색다른 제한을 가했다. 이단종파의 경우 〈그들의 의사 표명은 법이 규정한 공공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허용되었다. 모든 시민은 자유롭게 말하고 쓰고 출판할 수 있다고 제11조는 확언한다. 그러나 특정한 경우에 법은 〈그러한 자유의 남용〉을 억압할 수 있었다."(211)


"1789년 11월 2일, 제헌의회는 교회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그런데 이 재산은 부동산이라서 '현금화'하는 일이 필요했다. 1789년 12월 19일 의회는 4억 리브르의 교회 재산을 매각하기로 하고, 이에 상당하는 양의 '아시냐'를 국유 재산을 담보로 삼아 지불을 보증하는 어음의 형태로 4억 리브르만큼의 아시냐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아시냐는 교회 재산으로 상환하는 연리 5퍼센트의 채권에 불과했다. 교회 재산을 매각함에 따라 국가의 부채가 감소되는 양만큼 아시냐의 폐기는 예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국고는 여전히 텅 비었고, 부채는 하루가 다르게 증가했다. 의회는 일련의 조치를 취해 국채인 아시냐를 더는 이자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무제한의 강제 유용 능력을 지닌 화폐로 변모시켰다."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시냐는 그 목적이 변질되면서, 예산 부족을 메우는 수단으로 변모했다. 결국 아시냐는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고, 정치적·사회적 행동의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239-40)


▶ 제헌의회와 국왕의 탈주(1791년)


"혁명 이념의 선전과 확산력은 처음부터 각국의 국왕들을 불안하게 했다. 혁명의 사건들과 1789년의 원칙들은 그 자체가 다른 나라의 인민들을 동요시키고 국왕들의 절대 권력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파급력을 지녔다." "더욱이 국외에서는 부르주아지나 귀족들 사이에 계몽사상이 번져 있어서 특히 독일과 영국이 혁명의 전염에 민감했다." "하지만 곧 유럽 곳곳에서 혁명에 대한 반동이 나타났다. 특권계급은 봉건제가 폐지된 뒤에, 성직자들은 교회 재산이 몰수된 뒤에 반혁명파가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소요에 겁을 집어먹었다. 망명자들은 구체제 계급들이 혁명 프랑스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백방으로 기를 썼다." "새로운 프랑스와 구체제의 유럽은 마치 봉건 특권계급과 자본주의 부르주아지가, 그리고 군주제적 전제주의와 자유주의 정부가 서로 대립하듯이 맞섰다. 망명자들과 루이 16세가 절대 권력과 사회적 우위를 회복하기 위해 외국에 호소하자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250-3)


"국왕의 탈주(1791년 6월 20일)는 왕권과 혁명적 국민 사이에 화해하기 어려운 대립이 있음을 드러내주었다. 탈주하기 전에 루이 16세가 작성하여 프랑스인들에게 발표한 성명은 그의 의도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는 부이에 군대의 영내에 도착한 후 네덜란드에 주둔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군대와 함께 파리로 되돌아와 의회와 클럽을 해산하고 절대 권력을 재확립할 생각이었다. 루이 16세가 계획한 모든 비밀 정책의 목표는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어들이는 데 있었다. 1789년 10월에 이미 루이 16세는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4세에게 비밀 첩자 퐁브륀 신부를 파견하였다. 또한 알자스에 영지를 가진 독일 제후들과 갈등이 악화되도록 갖은 애를 썼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루이 16세는 단순하고 나약하며 무분별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국민을 배반하면서까지 자신의 절대 권력을 재확립한다는 유일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기울일 만큼은 총명했다."(259)


"국왕의 탈주는 인민대중의 국민 의식이 강화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군주제가 외국과 결탁했다는 것을 드러내주어, 농촌 구석에까지 격렬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 사이에 외국의 침입에 대한 공포가 나타나자, 국경의 요새는 자발적인 방어 태세에 들어갔고 의회는 국민방위병 중에서 10만 명의 의용군을 선발했다. 1789년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사회적이며 국민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그런 와중에도 부르주아지는 냉정을 유지했다. 그들은 농민 전쟁을 두려워했고, 또 그것 못지않게 도시의 민중 운동도 싫어했기 때문이다. 의회는 왕권과 국왕의 거부권을 정지하여 프랑스를 사실상의 공화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의회는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의도적으로 차단했다. 의회는 '국왕 납치 사건'이라는 허구를 만들어냈다." "국왕의 반역과 특권계급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제헌의회의 부르주아지는 국민이 유산자의 국민으로 계속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그들에게 혁명은 끝난 것이었다."(259-61)


▶ 입법의회(전쟁과 왕위의 전복, 1791년 10월~1792년 8월)


"1791년의 헌법이 설정한 자유주의적 군주제의 실험은 1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민중의 압력과 국왕이 이끈 특권계급 반동의 틈바구니 속에서, 권좌의 부르주아지는 대내적인 어려움을 회피하고자 대외적인 어려움을 악화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는 국왕의 암묵적인 동조 아래 프랑스와 혁명을 전쟁의 와중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킨 자들의 계산은 빗나갔다. 전쟁은 혁명 운동에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동시에 왕위의 전복을 초래했고, 몇 달 뒤에는 권좌의 부르주아지까지 끌어내렸다. 무모하게 시작된 특권계급 그리고 유럽과의 충돌 때문에 혁명적 부르주아지는 민중에 호소해야 했고 결국 그들에게 양보해야만 했다. 이렇게 하여 국민의 사회적 토대가 확대되었다. 국민은 정말로 전쟁으로부터, 국민적인 동시에 혁명적인 성격을 띠는 전쟁으로부터 탄생했다. 이 전쟁은 특권계급에 대항하는 제3신분의 전쟁이자, 동맹으로 맺어진 구체제의 유럽에 대항하는 국민의 전쟁이었다."(265)


"언뜻 보기에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는 브리소파와 궁정의 결합으로 주전파(主戰派)가 형성되었다. 우선, 전쟁은 외국의 개입에서 유일한 구원의 길을 기대하며 항상 동일한 이중 정책을 추구한 궁정이 바라던 바였다. 1791년 12월 14일, 국왕은 트리어 선제후에게 만약 1792년 1월 15일까지 망명자들이 집결한 군대를 해산하지 않는다면 '프랑스의 적'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통고했다. 궁정은 그토록 간절히 바랐으나 여태껏 이루어지지 않은 외국의 개입이 이 사소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기를 바랐다. 트리어 선제후를 위협한 바로 그날, 루이 16세는 실제로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자신의 최후통첩이 거절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표명했다." "전쟁은 다른 이유에서 브리소파도 바라던 바였다. 대내적 측면에서, 브리소파는 전쟁을 통해 반역자들과 루이 16세의 정체를 폭로할 생각이었다. 가데는 1792년 1월 14일 입법의회의 연단에서 〈반역자들에게 미리 단두대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273-4)


"적과 협정을 체결하려는 가증스러운 왕권에 대항해 파리만이 아니라 전국이 궐기했다. 1792년 8월 10일의 봉기는 단지 파리 민중만이 아니라 연맹제 참가자들이 대표하는 전 프랑스 인민의 업적이었다." "왕권의 몰락과 더불어 푀양파, 말하자면 혁명의 발발에 이바지한 동시에 라파예트와 그의 뒤를 이어 삼두파의 지도를 받아 혁명을 제어하고 그 고삐를 늦추려고 한 자유주의 귀족과 상층 부르주아지도 역시 무너졌다. 궁정과 타협해 봉기를 저지하려고 노력했던 지롱드파는 자신들의 것이 아닌 그 승리로부터 큰 이득을 얻지 못했다. 반면에 로베스피에르와 장차 산악파라 불릴 사람들이 이끄는 수동 시민들, 즉 장인들과 소상점주들이 갑자기 정치 무대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퀼로트의 등장으로 부르주아지의 한 분파가 새로운 국민적 실체로부터 소외되었다. 그리하여 8월 10일의 제2차 혁명이 예고했던 민주적이며 민중적인 공화국에 대한 저항이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288-92)


2부 '자유의 전제': 혁명정부와 민중 운동 1792~1795년


▶ 입법의회의 종언(혁명의 약진과 국가 방위, 1792년 8~9월)


"입법의회는 국왕권의 행사를 정지시키고, 새 헌법을 기초할 국민공회를 보통 선거를 거쳐 선출하여 구성한다고 결정하면서 민중의 승리를 즉각 승인했다." "그러나 입법의회의 마지막 6주간(1792년 8월 10일~9월 20일)은 봉기 코뮌과 의회의 충돌로 점철되었다. 이는 혁명의 진전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띤다. 의회가 대변하는 합법적 권력에 맞서 8월 10일의 '봉기 코뮌'이라는 혁명적 권력이 등장하였다." "지롱드파는 봉기 코뮌의 권력 탈취와 독재를 고발하면서 격렬한 공세를 취했다." "두 권력 사이의 대립은 국민공회가 개원할 때까지 지속되었고, 그 뒤에는 지롱드파와 산악파 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8월 10일의 승리자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강요할 생각이었으며, 입법의회는 선거에 의해 중소부르주아지 출신 288명으로 구성된 봉기 코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층 부르주아지와 지롱드파가 지배하는 의회는, 봉기 코뮌이 제시하고 산악파가 이어받은 혁명적인 조치들에 근본적인 거부감을 느꼈다."(299-300)


"그런 가운데 프로이센군의 진격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9월 20일, 맹렬한 집중 포격 후에 프로이센군은 켈레르만이 장악하고 있던 발미 고지의 전면에서 정오 무렵 작전대로 공격을 개시했다. 프로이센 왕은 프랑스군이 허둥지둥 퇴각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상퀼로트들은 잘 버텼고 (프로이센군은) 더욱 치열하게 포격을 가했다." "전 유럽에서 정예로 유명한 군대의 포격 앞에서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았다. 프로이센의 보병 부대는 전진을 멈추었고, 브라운슈바이크는 감히 돌격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발미의 승리는 전략상의 승리라기보다는 군대의 사기가 거둔 승리였다. 상퀼로트의 군대가 유럽 최강의 군대를 버텨낸 것이다. 혁명은 자신의 힘을 세상에 드러냈다. 국민적이고 민중적인 새로운 군대가 수동적인 기율만을 훈련받은 직업 군대에 성공적으로 대항했던 것이다. 이제 대불동맹군에게 혁명 프랑스는 쉽게 물리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다."(309-10)


▶ 지롱드파의 국민공회(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파산, 1792년 9월~1793년 6월)


"1793년 1월 21일, 국왕의 처형은 프랑스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유럽을 경악하게 하였다. 국왕 처형식은 이날 오전 11시에 대규모 무력시위가 펼쳐지고 사람들이 크게 몰려든 가운데 혁명 광장(현재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국왕의 처형으로 왕권은 전통적이며 거의 종교적인 위신에 타격을 받았다. 루이 16세는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처형되었고, 이로써 신권 군주제는 종언을 고했다. 국민공회는 배수의 진을 친 셈이었다. 이 국왕 시해자들에 대하여 유럽은 무자비한 전쟁을 일으켰다. 혁명 프랑스와 구체제 유럽의 대립, 그리고 국왕을 구출하려고 온갖 시도를 다했던 지롱드파와 이에 맞선 산악파의 대립은 그 절정에 달했다." "지롱드파는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특권계급과 타협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처형됨에 따라 지롱드파가 이제까지 추구해 온 지연 정책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편, 국왕의 사형으로 산악파가 국민에게 제시한 유일한 해결책은 승리뿐이었다."(327-8)


"지롱드파는 전쟁을 선포했지만, 그것을 이끌 줄을 몰랐다. 그들은 국왕을 비난했지만, 국왕의 유죄 판결 앞에서 그만 뒷걸음쳤다. 그들은 군주제에 대항하여 민중의 지지를 호소했지만, 민중과 더불어 통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경제적 위기의 악화에 이바지했지만, 민중의 모든 요구를 거절했다. 이런 의미에서 (지롱드파를 무력으로 해산시킨) 5월 31일~6월 2일의 사건은 단순히 정치적으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혁명적 도약이자 국민적인 반응이며, 특권계급의 음모가 또다시 나타나는 것을 방어하고 처벌하려는 행동이었다. 특권계급의 반혁명이 지롱드파의 반대라는 외피를 쓰고 재차 공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상층 부르주아지가 제거되고 정치 무대에 상퀼로트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 사건에 사회적 의의를 부여해주기에 충분하다. 이런 점에서 조르주 르페브르는 이 사건을 가리켜 '1793년 5월 31일과 6월 2일의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360-1)


▶ 산악파의 국민공회(민중 운동과 공공 안전의 독재, 1793년 6월~12월)


"6월 2일의 사건 후 몇 주 동안에 산악파에게 제기된 고민거리는 지롱드파에게 유리해질 반동은 조장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민중 운동을 진정시키는 일이었다. 사실상 지롱드파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중립을 지킨 일부 부르주아지를 끌어들이기 위해 산악파는 유산자들과 온건파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 산악파는 반란위원회의 민중 투사들이 5월 31일에 제안한 정치적·사회적 강령, 즉 지롱드파 인사들을 체포할 것, '상소파'의 모든 인사들을 국민공회로부터 제명 처분할 것, 혐의자를 체포하고 파리에 생활필수품을 확보하는 책임을 질 유급 혁명군을 창설할 것, 양곡의 최고 가격제를 실시하고 모든 생활필수품에 공정 가격제를 도입할 것, 군대와 행정을 엄격히 단속해 부정을 바로잡을 것 등을 모두 실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산악파는 민중 운동을 좁은 테두리 속에 가두어 부르주아지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실현되기 어려운 이러한 평형상태는 결국 7월에 위기가 악화되어 무너지고 말았다."(364)


"민중 운동은 상퀼로트의 전(前)자본주의적인 정신을 특징으로 하며, 자본주의적인 농업의 발전에 맞서 악착같이 공동체적 관습을 고수하려 했던 농민의 정신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 사업의 발전에 꼭 필요한 자유를 지키려고, 소상점주와 장인들에게는 그렇게 소중했던 경제적 규제와 공정 가격제를 없애려는 상공업 부르주아지의 정신 상태에 상퀼로트는 뿌리 깊은 반감을 품었다." "9월 4일, 오랫동안 억눌려 온 민중의 흥분이 마침내 폭발했다. 아침부터 노동자들, 특히 긴축과 군수품 제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파리 코뮌에 빵을 요구하기 위해 그레브 광장으로 무리지어 모여들었다. 이 운동이 노동자들로부터 비롯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즉 그것은 상퀼로트 가운데서도 가장 무산자 계급화된 계층으로서 항상 가치가 떨어진 아시냐로 임금을 받아 생계유지에 큰 곤란을 겪었던 노동자층으로부터 비롯했다." "결국 국민공회와 공안위원회는 마지못해 공포 정치와 통제 경제의 길을 걸었다."(386-90)


▶ 승리와 혁명정부의 몰락(1793년 12월~1794년 7월)


"민중의 (과격한) 요구는 혁명의 통합성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고, 온건파의 주장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통제 경제와 모두를 복종시킬 수있는 공포 정치를 희생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상반되는 요구 사이에서 공안위원회는 어떻게 균형을 찾을 수 있을까? 혁명정부는 '온건주의'와 '과격론'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793년의 겨울이 끝나 갈 무렵, 갑자기 식량 위기가 더 악화됐다. 방토즈에 진보적인 반대파와 민중의 불만이 합쳐지자, 혁명정부는 부동주의(不動主義)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정부는 과격파를 숙청했다. 코르들리에 클럽의 지도자들을 제거한다는 것은 곧 민중 운동의 특정한 요구를 단죄한다는 뜻이었다. 이리하여 혁명정부는 자신들의 투쟁 대상이라고 주장했던 온건파에게 좌우되는 처지에 빠졌다. 한동안 혁명정부는 온갖 수단을 다 활용하여 온건파의 압력을 견디어냈다. 그러나 결국 혁명정부는 탄생할 때부터 지니고 있던 모순의 희생물이 되었다."(419)


"로베스피에르는 자신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엄격하여 동료들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과 거의 친교를 맺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기 때문에 속셈이 있는 사람, 또는 야심가로 오해를 받았다." "테르미도르 8일(1794년 7월 26일),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의 단상에서 반대파를 공격하고, 공포 정치가 과격하게 행해진 책임을 관용파로 가장한 잔혹한 공포 정치가들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고발한 의원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려고 해서 몰락을 자초했다. 비난받을 만한 소지가 있는 자들은 모두 위협받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날 저녁,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 클럽에서 박수갈채를 받고 양 위원회는 어찌할 바 몰라 동요하고 있을 즈음, 그의 반대파는 행동을 개시했다. 그날 밤, 오래전부터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을 획책해 온 의원들과 그들로부터 공포 정치의 종식을 보장받은 평원파의 음모가 진행되었다. 이 일시적인 공모에서 두려움이 연대의 유일한 근거였다."(477-9)


# 테르미도르 10일에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쿠통 그리고 그들의 지지자 19명이 재판 없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정치적 차원에서 산악파 부르주아지와 파리의 상퀼로트 사이에, 즉 혁명정부와 구(區)의 투사들 사이에는 일시적인 적대 관계 이상의 근본적인 모순이 존재했다. 전쟁은 권위주의 정부를 필요로 했고, 상퀼로트들은 이 점을 알았기에 스스로 그러한 정부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러나 전쟁과 그 전쟁이 요구하는 것은, 산악파와 상퀼로트들 모두가 희구했던 민주주의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 두 부류가 동일한 민주주의관을 지녔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상퀼로트가 실제로 행한 민주주의는 자연스럽게 직접 지배의 경향을 띠었다. 그런데 혁명정부는 그러한 관행이 전쟁 수행과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겼다." "상퀼로트들이 보여준 이러한 정치적 태도는 부르주아지가 구상하는 자유민주주의와는 어쩔 수 없이 대립했다. 상퀼로트는 특권계급을 분쇄할 수 있는 강력한 정부를 요구했다. 그래서 자신들의 권한을 축소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혁명정부를 용서할 수 없었다."(482-3)


▶ 테르미도르파의 국민공회(부르주아 반동과 민중 운동의 종언, 1794년 7월~1795년 5월)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자 혁명정부는 살아남지 못했고, 반동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혁명정부를 억압했던 민중 운동과 파리의 상퀼로트는 확실히 혁명력 2년 제르미날 이후 세력을 잃어갔고, 그때부터 공안위원회가 내세운 사회적·경제적 정책은 점차 민중적 성격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테르미도르 9일의 사건은 하나의 단절이 아니라 기존 경향의 가속화였다. 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부터 다음 해 봄까지 반동이 진전되었지만, 아직 확실하게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이 결정적인 시기에 부르주아 혁명과 민중 운동이, 즉 '신사들'과 상퀼로트가 정면으로 대치했다. 혁명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가르게 될 대규모 민중 봉기에서 한편은 두려움을, 다른 한편은 희망을 느꼈다. 1789년 이후, 파리의 민중은 무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혁명력 3년 프레리알의 패배는 파리 상퀼로트의 최후이자 민중 운동의 결정적 소멸을 의미했다. 혁명은 부르주아 노선을 되찾았다."(487-8)


"테르미도르파는 독립적인 소생산자로 이루어진 국가라는 민중의 이상을 거부했다. 그렇지만 평원파 인사들은 혁명에 확고하게 집착했기에, 공화국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혁명력 3년 브뤼메르 25일(1794년 11월 15일)에 평원파가 내세운 법규를 마련하여 망명자를 계속 처벌했다. 그들의 정책 목표는 모든 '1789년의 애국파 인사들'을 규합해 반혁명의 진행을 막고 체제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온건파의 공세는 혁명력 2년 체제와 특히 자코뱅파를 반대하는 우파의 모든 잡다한 세력, 즉 보수적인 부르주아, 왕당파, 입헌군주파 사이에 형성된 일종의 동맹 관계로 이어졌다.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구체제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의 강령은 공포 정치가들에게 복수하고 상퀼로트를 굴복시키며 정치적·사회적인 측면에서 민주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막자는 것처럼, 전적으로 부정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이들은 언론과 '귀공자행동대'라는 두 가지 수단을 중요하게 활용했다."(492-5)


"정치적·사회적 반동과 더불어 도덕적 반동도 나타났다. 혁명력 2년에 민중은 공화주의적 덕성을 천부적으로 소유한 존재로 간주되어 찬양을 받았으나, 이제는 멸시를 받게 되었다. 귀공자행동대의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인 쥘리앙은 《회상록》에서 민중은 〈사적인 덕성으로 맡은 바 본분을 다할 때는 의심의 여지 없이 매우 존경할 만하지만〉, 공직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민중의 〈소박함〉은 이제 상스러운 것이 되었다. 1794년 프레리알이 되자, '상퀼로트주의'는 체포할 충분한 사유가 되었다." "존대를 하지 않고 말을 놓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리하여 '시투아이앵(citoyen)', '시투아이앤(citoyenne, 여자 시민)'에 대신해서 '신사(monsieur)'와 '숙녀(madame)'라는 호칭이 다시 나타났다." "게다가 대중의 끔찍한 빈곤과 소수의 파렴치한 부유함의 대조는 반동의 사회적 속성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냈다. 겨울이 닥쳐오면서 기근이 악화되자 그러한 대조는 더욱 두드러졌고 분노가 고조되었다."(503-5)


3부 '유산자가 지배하는 나라' : 부르주아 공화국과 사회의 공고화 1795~1799년


▶ 테르미도르파의 국민공회의 종언(1795년의 여러 조약과 혁명력 3년의 헌법)


"메시도르 5일부터 프뤽티도르 5일까지(1795년 6월 23일~8월 22일) 두 달에 걸쳐, 부아시 당글라가 국민공회에 제출한 헌법 초안에 대하여 토론이 진행되었다." "온건한 공화주의자들과 입헌군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로도 독재로도 가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1789년의 원칙으로 되돌아가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 원칙은 이제 부르주아지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고 수정되었다.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지도력은 최소한 유복한 유산자라고 할 수 있는 '명사들'에게 귀속되어야 했다. 부아시 당글라는 메시도르 5일의 보고에서 이 점을 명백하게 밝혔다. 〈절대적 평등이란 허깨비에 불과합니다.〉" "테르미도르파는 특히 상퀼로트들의 권력 복귀와 특정 의회나 한 개인의 독재를 두려워했다. 그 결과 여러 예방 조치와 보장 수단이 헌법에 도입되었다. 이리하여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에서 항상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을 해결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강구하지 않은 채, 결국 권력은 무력하고 불안정해졌다."(551-5)


"테르미도르파는 한편으로 자신들의 인기가 형편없음을 알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입헌군주주의자들이 선거라는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품고 책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권력을 계속 장악할 작정이었다. 제헌위원회의 한 위원은 물었다. 〈과연 누구의 손에 헌법이라는 신성한 공탁물을 맡길 것입니까?〉 이에 대한 답변이 바로 혁명력 3년 프뤽티도르 5일(1795년 8월 22일)의 법령이었다. 이 법령은 선거인회가 새로운 의원의 3분의 2를 현직 국민공회 의원들 가운데서 선출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더욱이 13일(8월 30일)의 법령은 그러한 비율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에는 다시 선출된 국민공회 의원들이 직접 선출하는 호선(互選)의 방식으로 부족 인원을 메울 수 있음을 명기했다. 이는 곧 테르미도르파에게 유리한 것이었으며, 새로운 의회에서 종래의 산악파와 입헌군주파의 반대 세력을 동시에 제거함을 뜻하는 것이었다."(556-7)


"그러나 당시 프랑스는 내전과 대외 전쟁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상황이었다. 방데의 반란은 종식되지 않았고, 대불동맹도 여전했다. 테르미도르파는 혁명력 3년의 헌법을 통해 새 체제로 하여금 합병된 벨기에의 9개 도를 포함하여 '합헌적인 경계선'을 유지하고 보장한다고 선언하고, '자연 국경'의 개념에 의거하여 외교 정책의 방향을 규정하게 함으로써 총재정부가 취할 정책의 기본 노선을 결정하였다. 곧 1796년 봄에 전투가 재개될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수행하는 데서 신체제가 물려받은 것은, 가치가 절하된 아시냐와 조직이 무너진 군대였다. 혁명력 3년의 헌법을 실시하는 데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이 헌법은 특히 매년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특징을 지녔는데, 이는 대내외의 평화를 전제로 했다. 혁명력 2년 당시와 달리 민중에게 호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총재정부파'로 변신한 테르미도르파는 특권계급의 새로운 공세를 이겨내기 위해 헌정 질서를 위반하고 이윽고 군대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559-60)


▶ 제1차 총재정부(자유주의적 안정화의 실패, 1795년~1797년)


"(아시냐를 대체한 새로운 지폐) 토지환이 붕괴되고 정화 체제로 복귀한 이후 공화국의 재정 상황은 참으로 비참했다. 인플레이션에 뒤이어 디플레이션이 나타났다. 유통되는 정화의 양은 부족했고, 1796년에 작황이 좋았던 만큼 물가는 더욱 폭락했다. 그 결과 적어도 민중의 비참함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총재정부가 예산의 수지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지만 정치적인 저의를 품은 양원은 모든 효과적인 재정적 노력을 거부했다." "통제 경제를 포기한 후에 테르미도르파가 그랬듯이, 총재정부는 금융업자, 은행가, 조달 상인, 군수품 납품업자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 내에서는 칭호를 박탈당한 옛 자작인 바라스와 전직 주교인 탈레랑이 방탕한 사교계의 일원이었다. 그들 주위에는 사업가와 이른바 '금융 협잡꾼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체제에 편승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모리배로서, 자신들의 재산을 보장해주는 다른 체제가 있다면 그것을 위해 총재정부를 기꺼이 저버릴 것이었다."(584-6)


"한편 국민 총동원령 이후 병력이 더는 교체되지 않고 다른 나라를 정복하느라 군대가 프랑스로부터 멀어지자, 병사들은 점차 일반 국민으로부터 유리되어 갔다. 외국 땅에 주둔한 군대는 필연적으로 직업 군인화되어 갔고, 이제는 장군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국민에 대한 헌신은 서서히 지휘관에 대한 충성심과 모험심, 그리고 곧이어 약탈로 바뀌어 갔다. 혁명력 2년 당시에는 군대와 인민의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면, 그 이후에는 모든 것이 병사들로 하여금 자신 역시 시민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려는 듯 보였다." "애국주의는 공화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내용을 상실했고, 민족주의가 나타났다. 공민 정신과 혁명적 열정은 곧 외국인에 대한 경멸, 군사적 영광에 대한 애착, 민족적 자만심으로 바뀌어 갔다. 셰니에는 이윽고 〈항상 승리하는 '위대한 국민'〉을 찬양했다.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는 '위대한 국민(Grande Nation)'이라는 표현이 총재정부 말기부터 유행했다."(589-90)


"혁명력 5년 제르미날의 선거에서 왕당파가 승리를 거둔 이후 국내 정세와 여론의 냉담한 반응 때문에 총재정부는 장군들에게 좌우되었다. 체제의 성격상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민중에게 호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외 정책의 방향은 불가피하게 국내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대불동맹 측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레오벤의 휴전 이후 우디네에서 시작된 협상을 질질 끌었고, 영국 특사 제임스 해리스가 릴에서 재개한 프랑스와의 협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왕당파 우파가 우세를 점한다면,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더 유리한 협상 조건을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총재정부와 보나파르트의 유대 관계를 강화해주었다." "이렇게 보나파르트와 총재정부의 상호작용과 양보로 말미암아 프뤽티도르의 쿠데타와 캄포포르미오 조약은 긴밀하게 연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서 주요한 이득을 본 쪽은 바로 보나파르트였다."(598-9)


# 프뤽티도르 18일의 쿠데타(1797년 9월 4일) : 삼두파(바라스, 라레벨리에르, 뢰벨)와 사전 교감을 가진 보나파르트가 왕당파의 반역을 제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한 사건


# 캄포포르미오 조약(1797년 10월 18일) :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원정에서 승리한 뒤, 오스트리아와 맺은 평화조약.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를 얻고 롬바르디아를 포기하였으며, 프랑스는 이오니아 제도와 네덜란드를 획득하였다.


▶ 제2차 총재정부(부르주아 공화국의 종언, 1797년~1799년)


"프뤽티도르의 쿠데타 이후 실행된 비상 체제는 비록 '총재정부의 공포 정치'라고 불리기는 했지만, 사실상 혁명력 2년 공포 정치의 창백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테르미도르파 부르주아지에게는 공안위원회가 수립했던 것과 같은 경제적 독재는 의제가 될 수 없었으며, 총재정부에게는 혁명정부를 특징짓는 '강제력'이 여전히 부족했다." "총재정부의 기반은 여전히 협소했기 때문에 정치적 안정화는 불가능했지만 대륙의 평화가 계속되는 한, 체제는 그럭저럭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혁명력 3년 헌법의 자유주의적인 작동 원리가 또다시 타격을 입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제2차 총재정부의 구성과 전쟁의 재개로 최후의 위기가 가까워졌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국가 권위의 회복과 명사층 부르주아지의 사회적 우위가 양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쿠데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명사들은 군대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정치 권력을 상실하고 말았다."(608-7)


"브뤼메르 18일(1799년 11월 9일)의 쿠데타가 그렇게 쉽게 성공했던 이유는 그것이 지닌 사회적 성격에서 비롯한다. 새로운 사회의 지배적인 요소의 요구에 부합하지 못했더라면 쿠데타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테르미도르파는 보수적인 부르주아지의 사회적 우위와 정치적 권력을 확립했고, 총재정부는 그것을 보존해 왔다. 그러나 혁명력 7년에 들어서 자코뱅파의 압력이 유산자들의 특권을 위협하는 듯 보였다. 사회적 공포가 되살아났다. 이것이 바로 헌법 개정 세력을 묶어준 끈이었다. 혁명에서 비롯된 두 뷰류의 새로운 사회 범주는 특히 평온함과 사회적 안정을 열망했다." "지주 농민층과 사업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해주고 자신들의 권리를 언제까지나 보장해주며 경제를 혁신하려는 자신들의 노력을 강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 체제를 갈망했다. 그들은 곧 통령정부와 제1제정의 사회적 토대를 형성할 것이었다 바로 이들에게서 명사들의 핵심 세력이 배출되었다."(646-7)


결론부 혁명과 현대 프랑스


"프랑스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다. 조레스의 《프랑스혁명의 사회주의사》에 따르면, 영국혁명과 미국혁명이 〈좁은 의미에서 부르주아적이고 보수적인〉 데 비하여 프랑스혁명은 〈넓은 의미에서 부르주아적이고 민주적〉이었다. 프랑스혁명이 그러했던 것은 특권계급이 완강하게 버텼기 때문이었다. 이는 앵글로·색슨 식의 모든 정치적 타협을 불가능하게 했고,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마찬가지로 완강하게 구질서를 완전히 파괴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오직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서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공포 정치가 〈무시무시한 망치질〉을 했고, 프랑스혁명이 〈거대한 비질〉을 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한 사회·정치적 도구는 바로 도시와 농촌의 인민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은 중소부르주아지의 자코뱅 독재였다. 이 인민대중은 자유롭게 노동하고 교환하는 독립적인 농민층과 장인층으로 이루어진 사회 범주로서, 그들의 이상은 자립적인 소생산자들로 이루어진 민주주의였다."(726-7)


"혁명력 2년의 시도는 궁극적으로 실패했지만, 본보기로서 가치가 있다. '1793년'의 인사들, 특히 로베스피에르파는 원칙적으로 선언된 권리의 평등에 대한 요구와 경제적 자유의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모순을 극복하여, 사회민주주의적인 공화국의 틀 안에서 '향유의 평등'을 실현하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참으로 웅장하고 극적인 시도였다." "경제적 자유와 자본주의적 집중이 사회적 괴리를 심화하고 대립을 악화시켜, '향유의 평등'은 더욱 가능성 밖으로 밀려났다. 자신들의 상황에 고착되어 항상 개인의 노동에 입각한 소규모 소유제에 집착했던 소장인들과 소상점주들, 즉 '1793년' 당시 상퀼로트의 후예들은 유토피아와 폭동 상태를 오락가락했다. 동일한 모순, 동일한 무력감이 항상 사회민주주의의 시도를 괴롭혔다." "평등주의적 공화국은 여전히 기대의 영역에 머물렀다. 그것은 결코 도달할 수 없으면서 항상 집요하게 추구하는 '이카리아(Icarie)'였다."(7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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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제학 - 왜 경제적 인센티브는 선한 시민을 대체할 수 없는가
새뮤얼 보울스 지음, 최정규 외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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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호모 이코노미쿠스,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날 법학자들이나 경제학자들, 그리고 정책입안자들이 법을 설계하거나 정책을 수립하거나 사업체를 조직하려고 할 때, 사람들(시민이든 피고용인이든 사업 파트너이든 아니면 잠재적 범죄자이든)이 이기적이며 도덕에 무관심하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시민·피고용인·학생·채무자의 행위 모델로 삼는 것은 결코 신중한 방식이 아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패러다임에 따라 정책을 펴면 도덕적 무관심과 이기심이라는 가정을 점점 더 사실로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유인이 없을 때보다 유인이 있을 때 훨씬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곤 한다. 둘째, 벌금이나 보상 같은 물질적 인센티브가 때로는 잘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흄이 주장하는 대로 부정직한 사람의 탐욕을 이용할 수 있도록 아무리 정교하게 인센티브를 설계하더라도, 인센티브만으로는 좋은 거버넌스가 확립될 수 없다."(27-9)


"시장경제가 올바르게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이런 정책들은 이기심을 부추길 뿐 아니라, 협력적이고 관대한 시민문화를 견고하게 유지해주는 사회적 수단을 훼손할 수 있으며, 시장이 작동하는 데 필수적인 사회규범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대출을 신청할 때 자기 자산과 부채 상황을 정직하게 적어내는 것, 약속을 잘 지키는 것, 누가 지켜보지 않아도 열심히 일하는 것 같은 일상적인 미덕도 이른바 몰아냄 효과crowding-out라 불리는 문화적 재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시장 같은 경제제도는 이런저런 규범이 부재하거나 위태로울 경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특히 오늘날 같은 지식기반 경제에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사회규범이라는 문화적 토대가 필요하다. 이런 규범 중 하나가 '악수는 말 그대로 악수handshake is indeed handshake'라는, 즉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는 확신이다. 누군가 이를 의심하는 순간, 그 불신 때문에 교환을 통한 상호 이득의 창출은 제한될 수 있다."(29-30)


"내가 모색하려는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대한 경험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가정을 대체하는 것이 우리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일반적인 가정과 달리 사람들은 의사결정을 할 때 먼 미래까지 고려하지 않으며 계산에 능하지도 않고 일관적이지도 않다. 나아가 사람들은 현상유지 편향을 보이며 미래의 서로 다른 시점에 놓인 대안들 간의 선택에서 일관성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편향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교육받은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경제학자들이 계산착오라 할 법한 행위를 지속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일어날 확률이 아무리 낮더라도 0보다 크면 그 사건을 확실히 일어나지 않을 사건과 전혀 다른 것으로 취급한다." "경제학자들은 선택 행위를 모든 인간 행위의 중심에 놓는데, 이제 경제학자들도 사람들이 그다지 선택에 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35-6)


2장 부정직한 자들을 전제로 한 법질서


"시민들에게 좋은 습관을 심어주는 것이 입법자의 임무라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으로부터, '악한 사람'을 가정하며 경제적 거버넌스와 법을 강조하는 시스템적 사고로 초점이 전환되는 긴 여정은 16세기 니콜로 마키아벨리에게서 시작한다. 〈공화국을 수립하고 법을 제정하려는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이 악하며,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결코 좋은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배고픔과 가난이 부지런한 사람을 만들며, 법이 좋은 사람을 만든다고들 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기적(〈부패한〉) 시민들로는 좋은 거버넌스가 형성될 수 없다고 본 점에서 대부분의 현대 경제학자들과 거리가 있고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가까웠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했다. 〈법이나 명령만으로는 부패가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억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좋은 관습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한 것처럼, 법이 준수되기 위해서는 좋은 관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45-7)


"마키아벨리는 정부가 해야 할 일차적 임무는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기질〉에 의해 동기 부여된 시민들이 마치 선한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보통의 성향과 욕구를 가진 시민은 도덕적 성향과 도덕적 욕구가 없더라도 〈그들의 행동이 법에 의해 관리된다면〉 잘 통치될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주장에 담긴 새로운 아이디어는 한 사회 거버넌스의 품격은 시민이 가진 품성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거버넌스는 사회가 좋은 시민들로 이뤄지느냐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제도가 시민들 간 상호작용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현대 자연과학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한 사회 거버넌스의 질은 정치체제의 창발적 속성, 즉 정치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시민들의 특성으로부터 직접 추론할 수 없는 전체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에게 좋은 정부란 질서 잡힌 사회의 창발적 속성이었다."(47-8)


"그로부터 2세기 뒤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버나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가 전달하고자 한 핵심 메시지는 바로 이런 사고의 급진적인 형태였다. 네덜란드 출신의 이 괴짜 런던 의사는 자신의 책에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미덕은 필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맨더빌의 벌집은 부도덕한 탐욕과 시샘 어린 경쟁 위에서 번성했고, 꿀벌들이 도덕적으로 변하자 붕괴의 무질서가 뒤따랐다. 절약의 미덕이 상품 수요를 줄여 경제적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맨더빌의 통찰은 케인스 경제학의 기초였던 절약의 역설을 예고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꿀벌의 우화》 1714년도 판 표지에는 이 저서가 〈인간의 약점들이 시민사회의 장점으로 전환될 수 있으며, 도덕적 덕성을 대신하도록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여러 담론〉을 포함한다고 쓰여 있다. 맨더빌은 결론부에 〈무리 중에서 가장 악한 놈마저도 공공선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고 적었다."(48-9)


"데이비드 흄은 저서 《에세이: 도덕, 정치 그리고 문학》(1742)에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했다. 〈어떤 형태의 정부 체계를 모색하더라도 (···) 사람들은 모두 부정직하며, 그들의 행동 목적은 오로지 사익의 추구에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 이익을 수단으로 삼아 사람들을 통치해야 하며, 이익을 수단으로 삼아 그칠 줄 모르는 탐욕과 야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공익을 위해 협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제러미 벤담 역시 〈의무duty와 이해interest의 결합 원리(의무를 다하는 것이 각자에게 이득이 되게 하라)〉를 공공정책의 입안 원리로 제시했다." "부정직한 사람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가 마키아벨리, 흄, 벤담 그리고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주된 관심사였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경제행위자들과 시민들이 실제로도 도덕에 무관심하다고 보았던 것은 아니다." "실제 이 고전적 저자들은 한편으로 정책이 이익을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윤리적이고 타인을 고려하는 동기에 대한 호소를 간과하지 않았다."(50-1)


"부정직한 사람을 전제로 한 법질서라는 주장이 호소력을 갖게 된 이유는 시민들이 실제로 부정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종교적 열광이나 권력 추구 같은 좀 더 해를 끼칠 수 있는 다른 '열정'에 비해, 이기심의 추구는 이롭거나 적어도 해는 끼치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둘째로 경험적 문제인데, 국민국가 규모로 운영되는 정부가 좋은 정부가 되는 데 기초를 제공하려면 덕성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일곱 가지 죄악 가운데 탐욕이 가장 큰 죄로 여겨졌기에, 이기심이 존중할 만한 동기로 인정받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기심이 좋은 거버넌스를 형성하는 기초로서 받아들일 만하게 여겨진 데에는 전쟁과 무질서가 드리운 그림자도 한몫했다. 레몽 아롱이 〈총력전의 세기〉라 부른 20세기를 포함해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는 그 어떤 시대보다도 유럽의 사망자 중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의 비중이 가장 높았던 때가 17세기였다."(52-4)


"더 이상 미덕을 좋은 정부의 필수 조건으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은 단순히 인간 동기에 대한 현실주의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타인'이 친인척이거나 이웃 또는 친구라면 그들의 처지에 대한 우리의 관심, 그리고 사회규범 위반에 대한 사회적 제재나 보복을 피하려는 욕구가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낯선 사람이 상호작용을 하는 환경에서는 윤리적이고 타인을 고려하는 동기가 좋은 정부의 기초로 불충분하다는 우려가 생겼고, 그 대응의 하나로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이 등장했다. 제약과 인센티브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시민적 덕성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키아벨리가 우려했던 것은 시민적 덕성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지, 시민적 덕성이 없다거나 그것이 부적절하다는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조차 어떠한 경제 혹은 사회 시스템도 시민적 덕성 없이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55)


"고전학파 경제학자들(그리고 이후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간과한 사실은 이기심을 이용하고자 설계한 인센티브 제도가 도덕적 행위를 비롯한 친사회적 행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아마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제학자가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첫 번째 원리는 인센티브와 도덕이 가산적이며 분리 가능하다는 가정이다. 두 요소가 가산적이며 분리 가능하면 두 요소 간에는 시너지 효과도, 역의 시너지 효과도 발생하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암묵적으로 분리 가능성을 가정함으로써 두 가지 중요한 가능성을 간과해왔다. 첫째로 이기심이 공익에 이바지하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면 시민적 덕성이 약해지거나 시민적 덕성이 주요한 동기로서 덜 부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특정 조건에서는 윤리적이고 타인을 고려하는 동기와 이기적 동기가 함께 번성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고, 그 결과 더 나은 사회적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58-62)


"(각 행위자 간의) 계약이 완전하다면 이기적 개인 간의 경쟁을 통해 도달한 균형은 '모든 것이 가격을 가지며' 그리고 '그 가격이 적절'하도록 보장한다. 따라서 경쟁시장은 파레토 효율적인 결과를 낳는다. 여기서 파레토 효율적인 상태란 누군가의 처지를 악화시키지 않고는 어느 누구의 처지도 개선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정리의 가정들, 특히 계약이 완전하다는 가정은 시장실패(조정되지 않은 교환이나 경제적 행위가 파레토 비효율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개입할 필요가 없는 이상적인 세계란 어떤 특징을 갖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세계에서는 좋은 거버넌스를 위해 굳이 도덕이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다시 말해 이 정리는 사람들의 선호와 상관없이 참이다." "이 정리의 가정이 성립하는 한에서, 경쟁적 교환은 거래가 자발적이며 결과가 효율적이기만 하다면 시민들이나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흔히 적용되는 규범적 기준이 필요없는 특별한 영역이 되었다."(65-7)


"교환을 통해 공급되는 재화나 서비스의 양과 질에 대한 정보는 매우 비대칭적이거나 입증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여기서 비대칭적이라 함은 거래되는 재화나 서비스의 양과 질이 교환의 두 당사자 모두에게 알려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입증 불가능하다 함은 양과 품질에 대한 정보가 두 당사자 모두에게 알려져 있더라도 그 정보를 법정에서 계약을 강제하기 위해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 경우 계약이 교환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시장실패는 환경적 파급효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장실패는 자본주의 경제에 필수적인 일상적 교환이 이루어지는 노동시장과 자본시장에서도 일어난다. 고용계약만으로는 피고용인이 열심히 일하도록 규정하고 강제할 수 없다. 대출 계약 역시 채무자가 무일푼이 된다면 계약 이행을 강제할 수 없다." "이처럼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 정리'의 전제가 되는 완전한 계약 가정을 위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71-3)


"케네스 애로는 '보이지 않는 손 정리'를 설명하는 논문에 이렇게 적었다. 〈어쩌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규범을 포함한 사회적 행위 규범은 시장실패를 보완하는 사회적 대응일지도 모른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계약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가격이 도덕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도덕이 가격의 역할을 대신해야 할 때가 있다. 애로가 주장한 핵심은 사회규범이나 도덕 규칙을 통해, 개인 행동이 타인에게 초래하는 편익이나 비용을 내부화하는 효과가 있다면 시장실패를 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경제를 구성하는 주요 시장, 즉 노동시장·신용시장·지식시장 등이 계약의 불완전함 속에서도 비교적 잘 작동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사회규범이나 타인을 고려하는 동기가 긍정적인 노동윤리, 자신이 추진하려는 프로젝트 내용을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는 의무감, 약속을 지키려는 책임감 등을 장려하기 때문이다. '도덕경제moral economy'라는 말은 결코 형용모순이 아니다."(75-6)


3장 도덕감정과 물질적 이해관계


"이타주의나 호혜성, 타인을 돕는 데서 얻는 내적 즐거움, 불평등 기피, 윤리적 헌신을 비롯해 자신의 부나 물질적 보수를 극대화하는 수준 이상으로 타인을 돕는 여러 동기를 가리켜 '사회적 선호'라 해보자. 사회적 선호는 단지 행위자가 다른 행위자의 보수에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적 선호를 이렇게 넓게 정의하는 이유는 타인의 보수나 후생에 무관심한데도, 그 밖의 다양한 도덕적 동기나 내재적 동기로부터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타인을 돕고 사회규범을 지키려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사회규범을 지키는 이유는 이를 위반했을 때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사회규범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노숙자를 돕는 것이 빈곤층의 처지 개선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자기만족warm glow〉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정직한 이유가 거짓말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직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89-90)


"나는 어떤 행동에 관련된 물질적 기대 비용과 기대 편익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적 개입을 가리켜 (경제적 또는 금전적이라고 명시하지 않고) '인센티브'라고 표현하고, 공공재에 기여하도록 만드는 근접 동기들을 시민의 '체험 가치experience values'라고 부르겠다." "인센티브가 체험가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인센티브의 총효과 즉 직접효과와 간접효과의 합은 인센티브 제공이 행동의 비용과 편익에 미치는 효과만을 고려할 때 기대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인센티브가 사회적 선호를 몰아냈다고crowding out 말한다. 다르게 말하면 인센티브와 사회적 선호는 서로 대체제라는 말이다. 즉 각 요소가 행동에 미치는 효과가 다른 요소의 수준이 증가함에 따라 감소한다는 것이다. 인센티브가 사회적 선호에 미치는 효과가 양(+)이라면, 이 경우에는 끌어들임 효과crowding in가 발생한다고 하며, 이때 사회적 선호와 인센티브는 서로 보완재가 되어 서로가 서로의 효과를 강화한다."(92-6)


"존 스튜어트 밀은 정치경제학을 〈단지 부를 소유하려는 존재〉로서의 개인에 대한 연구로 국한시킴으로써 정치경제학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다. 실제로 윤리적 동기나 타인을 고려하는 동기가 존재하지 않거나(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인센티브의 효과가 이런 동기의 효과에 단순히 더해지는 것이라면(밀은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밀이 이런 윤리적 동기나 타인을 고려하는 동기를 배제한 것은 놀랍기는 해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을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이 두 가지 가정 중 어느 하나도 정당화될 수 없다. 호혜성·관대함·신뢰 같은 동기는 보편적이지만, 인센티브가 명시적으로 제공되면 사라질 수도 있다. 복잡한 사고를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입법자, 즉 인센티브와 개인 선호의 상관관계를 고려하는 입법자는 몰아냄 효과의 성격(범주적인지 한계적인지, 강한지 약한지)과 이 몰아냄 현상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나타는지에 관한 정보를 통해 적절한 인센티브 수준을 결정하고자 노력한다."(131-2)


# 몰아냄 효과의 성격

1. 몰아냄의 범주적 효과categorical crowding out :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는 사실 자체가 체험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

2. 몰아냄의 한계적 효과marginal crowding out : 인센티브의 크기가 체험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


4장 정보로서의 인센티브


"대부분의 인센티브는 체험가치에 부정적인 효과를 끼친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시민이나 피고용인을 완전히 이기적인 사람으로 믿는 정책은 사람들을 정확히 그 믿음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만들곤 한다." "여기서 몰아냄 효과가 일어나는 두 가지 인과적 메커니즘을 구별해보자. 첫째, 인센티브는 선호에 영향을 미친다. 인센티브는 우리가 놓인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신호를 전해줌으로써, 그 상황에 적절한 행동이 무엇이며 우리가 가진 상이한 선호들 가운데 어떤 선호를 적용해야 하는지 알려준다(예컨대 〈쇼핑할 때는 이기적으로만 행동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가족관계에서는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 이를 가리켜 '선호가 상황 의존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인센티브의 존재와 성격 자체는 우리가 처한 상황의 일부가 된다. 둘째, 몰아냄 효과는 인센티브가 사람들이 생애에 걸쳐 자신의 선호를 습득해나가는 과정 자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나타난다. 이를 가리켜 '선호가 내생적'이라고 말한다."(143-5)


"인센티브는 목적을 갖는다. 때로는 인센티브를 통해 그 목적이 너무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에 인센티브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인센티브를 설계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내가 수행해야 할 작업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등을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인센티브는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다. 따라서 이런 경로를 통해 선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경제학자들에게도 익숙하다. 마크 레퍼 연구팀이 지적하듯, 인센티브는 '보상을 설계하는 사람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인센티브는 그가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사람인지 공정함을 추구하려는 사람인지), 그가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상대방을 열심히 일하려는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아닌지), 일의 성격이 어떤지(얼마나 힘들고 부담스러운 일인지) 등을 알려준다. 이렇게 드러난 정보는 그 일을 수행하려는 상대방의 동기에 영향을 줄 수 있다."(147-8)


"인센티브가 전달하는 '불쾌한 소식' 효과는 보통 주인(principal)과 대리인(agent)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주인은 보상이나 벌금 같은 인센티브를 통해 대리인으로 하여금 좀 더 주인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하고자 한다. 이것이 성공하려면 주인은 실행을 염두에 두고 있는 모든 가능한 인센티브 각각에 대해 대리인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알고 있어야 (혹은 추측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대리인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대리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가능한 방법 가운데 하나로 주인이 특정 인센티브를 선택할 때, 대리인은 주인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를 파악해낼 수있다." "인센티브가 주인이 악의적 의도를 갖고 있거나 대리인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불쾌한 소식을 전달해주는 신호로 기능할 때, 몰아냄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주인이 공정하거나 그가 대리인을 믿는다는 신호를 전달할 수단을 갖는 경우라면 그 효과는 반전될 수도 있다."(148-52)


"몰아냄 효과를 초래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를 살펴보자. 이번 이유는 경제학자들에게는 다소 덜 친숙한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어떤 행동이 적절한지 따질 때 맥락적 단서를 찾게 되는데, 인센티브가 그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인센티브가 가져오는 프레이밍 효과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한 가지 설명에 따르면, 시장 친화적 인센티브는 심리학자들이 '도덕적 거리두기'라고 하는 현상을 일으킨다. 도덕적 거리두기란 〈사람들이 자신들의 윤리적 스위치를 필요에 따라 켰다 껐다 할 수 있기 때문에〉 나타난다." "가령 사람들에게 개인적 행복에 대해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묻는다고 생각해보자. 하나는 〈당신이 무척 즐거웠던 경험을 몇 가지 알려주세요〉라고 묻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당신이 무척 즐거웠던 경험을 몇 가지 알려주세요. 단 당신이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당신의 답변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습니다〉라고 묻는 방식이다. 후자는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위반은 해도 좋다는 맥락적 단서를 던져준다."(152-4)


"자기 결정권 메커니즘은 인센티브의 영향을 받는 사람의 자율성에 대한 욕구 자체에 기인한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이 보상 없이도 행동 자체로부터 만족을 얻고 있을 때 인센티브의 도입이 행동을 '과잉 정당화'할 수 있으며, 인센티브가 부여됨에 따라 개인들은 스스로를 더 이상 자율적 존재로 여기지 않게 될 수 있다고 한다. 가령,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의 경우, 어른이 손을 뻗어 닿지 않는 물건을 집는 것을 도와줬다고 장난감을 상으로 주면, 상을 받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이후 어른을 덜 돕게 되더라는 이야기 말이다. 이 연구를 진행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보상이 주어지고 나면, 아이들은 예전에는 그 자체로 충분한 목적일 수 있었던 행동을 단지 더 가치 있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돕고자 하는 내재적 동기가 감소한다. 그리고 이제 보상 자체가 충분치 않다고 느끼면 도움주기를 그만둘지도 모른다."(163-5)


# 인센티브가 사회적 선호를 몰아내는 세 가지 이유

1. 불쾌한 소식 효과

2. 도덕적 거리두기 효과

3. 통제 기피 효과(자기 결정권에 기반한 내재적 동기 감소)


5장 자유주의 시민문화


"우리가 특정 선호를 갖게 되는 방식은 억양을 습득하는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다. 선호를 습득하는 과정은 우리 생애 초기에 일어나고, 그 과정은 대부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습득 과정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교류하는 방식에 크게 의존한다." "인센티브의 효과로 돌아가 보자면, 선호가 내생적으로 형성된다는 것과 상황 의존적인 특성을 갖는다는 것(프레이밍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자의 경우 인센티브의 효과가 장기적인 학습 과정에 영향을 주고, 그 결과는 수십 년 혹은 전 생애에 걸쳐 지속된다는 점이다. 이와 반대로 선호가 상황 의존적이라는 것은 새로운 상황에 놓이면(예컨대 인센티브가 철회됐을 때), 선호의 레퍼토리 중 무엇에 따라 행동할지도 함께 변한다는 뜻이다. 선호가 상황 의존적일 때, 인센티브는 일종의 신호 역할을 하는 반면, 선호가 내생적일 때, 인센티브는 장기적 효과를 초래하고 이렇게 학습된 선호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192-3)


"인센티브가 있을 때 왜 사람들은 관대한 행동(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데도 타인을 돕고자 하는 행동)을 자기 이익을 위한 행동으로 오해하게 될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인센티브로 인해 그 관대한 행동에 대한 대안적인 설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저 사람 돈 때문에 그렇게 한 거야.〉 나머지 하나는 인센티브가 때때로 개인들을 윤리적 프레임으로부터 보수 극대화 프레임으로 옮겨놓기 때문이다." "인센티브가 있을 경우 집단 내 관대한 행동이 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보편화된 행동 방식을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인센티브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면, 관대한 선호에 따라 행동하는 개인들의 빈도가 실제보다 낮게 감지될 것이다. 이런 경향이 새로운 행동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순응주의적 효과와 결합할 경우, 관대한 성향은 문화의 지속 및 진화가 일어나는 선택 과정에서 자기 이익 추구 성향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입을 것이다."(198)


"자유주의 국가는 기회주의와 불법행위를 완전히 뿌리 뽑기에 충분한 정보도, 이를 강제할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자유주의 국가는 개인들의 신체적 상해나 재산권 상실 그리고 여타 불행에서 오는 최악의 결과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할 능력이 있으며 또 실제로 그래왔다. 그리하여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썼듯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위협이 더 엄격히 통제된다〉는 사실에 기초한 〈문명화 과정〉이 가능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한 가지 결과는 〈매일의 일상이 변덕스러운 운에 따른 급작스런 변화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지고, 물리적 폭력은 군대 내로 국한된다〉는 것이다. 불행은 법을 통해서, 또 사람들이 재앙적 손실에 직면했을 때 출구전략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직업 등의 이동 가능성에 의해, 최근에 확립된 사회보험을 통해 완화된다." "이처럼 자유주의 사회가 위험을 줄여주는 측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거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229-30)


"잘 모르는 잠재적 파트너와 만나서 거래를 한다고 생각해보라. 이때 당신이 거래 파트너와 협력할 수 있으려면 신뢰가 얼마나 확고해야 할까? '상대를 신뢰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확신' 정도는 배반하는 사람을 상대로 당신이 협력했을 때 얼마나 피해가 큰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상대의 배반에 이용당했을 때 불운한 협력자로서 당신이 치러야 하는 비용이 매우 크다면, 당신은 상대가 신뢰할 만하다는 확신이 클 때에만 협력적으로 나설 것이다. 한편 순진하게 협력했다가 상대의 배반으로 치러야 하는 비용의 크기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면, 상대가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를 신뢰하고 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 법치 등 자유주의 국가가 갖는 여러 측면들은, 배반하는 사람을 잘못 믿고 협력했을 때 받게 될 불이익이 그렇게 크지 않도록 보완해준다." "물론 시장도 이러한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시장과 법치는 생면부지의 이방인들 사이에 신뢰가 진화하도록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는 데서 시너지 효과를 낸다."(231-2)


6장 입법자의 딜레마


"(존 스튜어트 밀의 조언을 탈피한) 경제이론들은 계약이 불완전할 때(모든 중요한 사항을 계약서에 명확히 규정할 수 없고 그 계약을 강제할 수 없을 때) 교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연구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미시경제학은 노동시장이나 금융시장의 작동을 설명하면서, 애로가 말했던 것처럼 계약이 경제주체로 하여금 자기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비용과 편익을 내부화하도록 강제하지 못할 때, 사회규범과 도덕적 코드로써 계약을 대신할 방식을 자세히 기술한다. 노동자들은 노동윤리가 있기 때문에, 노동시간에 페이스북으로 친구들과 노닥거리면 고용주가 그만한 비용을 부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려한다. 차입자들도 스스로 정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실패할 경우 대출금을 못 갚을 투자 프로젝트에 대해 그 위험성을 과소 보고하는 걸 자제할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가격이 이런 도덕의 역할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다."(241-2)


"계약이 불완전해서 시장실패가 발생하는 경우, 신뢰나 호혜성 같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규범이 이런 시장실패를 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경우 완전 계약에 가깝도록 이상적인 인센티브 체제를 만들려는 공공정책이나 법 관행, 예컨대 신뢰 게임에서 돈을 충분히 돌려주지 않을 때 벌금을 매긴다든지 하이파 어린이집에서처럼 부모가 지각할 때 벌금을 부과하는 조치는 이런 규범을 악화시킴으로써 시장실패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 그 결과 자원배분은 더 비효율적이게 된다." "신뢰와 호혜성 같은 규범은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어떤 메커니즘에서든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남는다. 부정직한 자들을 전제로 한 법질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해결 방안이 아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입법자는 차선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여기서는 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적절했을 정책적 개입이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그런 정책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268-9)


"인센티브는 사회가 잘 작동하는 데 필수적이다.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도덕에 무관심하다면, 인센티브 하나만 가지고서 경제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만들 수는 없다. 따라서 윤리와 여타 사회적 선호는 필수적이다. 인센티브는 적어도 '해는 끼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디자인되지 않는 한, '더 나은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공공정책은 개인들의 선호가 어떤지, 인센티브가 그 선호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명확히 규정된 사적 재산권, 경쟁, 유연성과 이동성 등의 조건은 계약이 완전할 때 시장이 잘 작동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들이다. 계약이 완전하지 않을 때에는 이런 조건들을 갖추려는 시도가 상호 이득이 되는 교환을 가능케 하는 사회규범을 손상시킬 수 있다. 반대로 이런 사회규범을 장려하는 경제적·사회적 제도는 시장의 기능을 저해한다. 왜냐하면 그런 제도들은 그 경제와 보이지 않는 손의 이상적 경제 사이의 간극을 넓힐 것이기 때문이다."(282-4)


7장 아리스토텔레스적 입법자가 해야 할 일


"사람들은 거래하고,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저축하고, 투자하고, 투표하며 어떤 정책을 옹호할 때 '어떤 것을 얻으려'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의 행동 동기는 획득 동기에 맞춰져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체성 동기에 맞춰져 있기도 하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세금을 통한 소득재분배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런 프로그램이 중산층에게는 직접적인 혜택을 주지는 않지만 일종의 보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득재분배 정책을 이런 식으로 프레이밍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기적이어서 재분배에 반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정은 그 행동에 결부된 정체성의 측면을 무시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미국 등 여러 나라들에서 사람들이 소득재분배 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윤리적인 이유에서다. 그런 견해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런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믿음에 기반한다."(294-5)


"이로부터 입법자는 정치적 수사와 정책적 옹호에 관한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이기심에 호소하면 사람들이 특정 정책을 지지하게 만드는 데에 사회적 선호를 이용할 수 없다.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서 최저임금 인상 지지 서명을 받는 자원봉사자들은 임금 인상이 지역경제를 부흥시키리라는 주장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들은 주민들에게 현재 최저임금이 얼마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임을 알게 됐다. 최저임금 수준을 알려주자 사람들은 설마 하는 표정과 함께 분노했고, 그러고 나서 진심 어린 서명이 이어졌다. 두 번째 교훈은 덜 명료하다. 이기심에 호소하면 유권자들은 〈그래서 내가 얻는 게 뭐냐?〉 하는 질문을 던지기 마련이고, 유권자들이 윤리적·사회적 고려를 덜 하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 따라서 이기심에 호소하는 방식은 시민들의 사회적 선호를 활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적 선호를 경기장 밖에 세워두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295-6)


"인센티브는 장기적으로 사회적 선호 체계의 진화를 저해할 수 있다. 사회적 선호에 토대를 둔 도덕감정은 좋은 정부의 필수적인 기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입법자는 사회적 선호를 저해하는 인센티브 사용을 뿌리 뽑으려 할 때, 모든 사람이 그 시도를 지지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인센티브를 도입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선호와 인센티브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나, 인센티브가 때로는 경제적 상호 교류에서 발생하는 공동 이익을 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왜 인센티브가 파이를 줄이는데도 현실에서는 인센티브가 사용될까? 파이의 크기라는 은유 자체에 그 해답이 있다. 인센티브를 사용하는 사람과 파이 전체의 크기가 아니라 자기 조각의 크기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인센티브가 돈을 빌려주거나 고용을 하는 등의 경제적 교류와 관계된 전체 잉여의 크기를 줄인다고 하더라도, 인센티브를 도입하는 사람의 조각은 더 커질 수 있다."(310-2)


"입법자가 직면한 또 다른 문제는 사회에는 이기심뿐만 아니라 여러 유형이 사회적 선호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된 선호를 가진 개인들이 혼재한다는 점이다." "입법자는 이기적인 개인들이 공익에 이바지하도록 유도하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는 정반대 상황에 직면한다." "우리는 이타주의자들이 공공재에 많이 기여하는 동시에 무임승차자들에게 벌을 내리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공공재에 기여하는 관습을 유지하는 데 처벌이 역할을 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이타주의자들은 무임승차자를 처벌하는 그룹의 다른 구성원들의 희생에 무임승차한 셈이다." "사람들이 다양한 비율로 이타적이면서 동시에 호혜적일 때, 이들의 이타성이 높아지면 공공재에 대한 평균적인 기여도가 오히려 하락한다. 호혜적인 선호를 가진 사람이 보다 이타적이게 되면 무임승차자를 처벌하려는 의지가 감소하고, 이타성의 이런 간접효과가 공공재 기여를 늘리는 이타성의 직접효과를 상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314-6)


"좋은 사람을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광범위하게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선이라는 개념에 무관심한 사회가 성공적으로 유지되었다는 역사적·민속지학적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사회적 선호의 어두운 측면을 염두에 둔다면, 입법자가 직면한 도전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떤 사회적 선호를 가지고 사회적으로 가치 있거나 적어도 해롭지 않은 목표를 위해 활용한다는 것은, 이기심을 가지고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관대함이나 공정성, 그 밖의 시민적 덕성 같은 긍정적 사회적 선호들은 공공정책이나 법안에 의해 강화될 수도 있고 또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정책 당국자들에게는 다루기 어려운 자원일 수 있다. 따라서 부정직한 자들에 대한 흄의 격언을 다음과 같이 확장할 필요가 있다. 좋은 정책과 법질서는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이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공적인 동기를 유발·배양·강화함으로써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목표를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3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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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전쟁은 계급 전쟁이다
매튜 클라인.마이클 페티스 지음, 이은경 옮김 / 시그마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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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이 책의 논지는 국가 내 불평등이 증가하면 국가 사이의 무역 갈등이 고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낙관적인 주장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가, 국가나 경제 블록들 사이의 제로섬 충돌을 견뎌낼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중국인과 독일인은 악이 아니며, 우리는 다른 나라를 희생해야만 번영할 수 있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지난 수십 년간의 문제들은 지정학적 갈등이나 양립할 수 없는 민족적 성격에 뿌리를 두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막대한 수입이 부자 또는 그들이 지배하는 기업으로 흘러들어감으로써 생겨난 것들이다. 어떤 곳에서든 일반 사람들은 구매력─재화나 용역을 살 수 있는 재력─을 빼앗기고 있으며, 맹목적인 애국주의자와 기회주의자들은 일반 사람들의 이익이 근본적으로 상충하고 있다고 믿게끔 그들을 속이고 있다. 국가 내 경제 계급 간의 전반적인 갈등을, 첨예한 이해관계를 다투고 있는 국가 간의 연속적인 갈등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6-7)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당시 부유한 유럽 국가들에서 극도로 불평등한 소득분배란,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모든 생산품을 소비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으며, 반면 부자들은 투자할 돈은 많았지만 국내에서는 마땅한 투자 기회를 찾기가 힘든 상황이었음을 의미했다. 현지 소비자들이 더 많은 상품을 살 수 없는 상황에서 공장을 더 짓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소득 분배가 덜 불평등하게 이루어졌더라면, 노동자들은 더 많은 소비력을 가지고 자신들이 생산한 모든 것을 살 여유가 있었을 것이고, 부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투자 수익을 창출하기가 더 수월하게 그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 시대의 엘리트들은 덜 불평등한 소득 분배를 선택하기를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거부로 인해 혁명을 조장할 수 있을 정도로 실업률이 높아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해결책은 과잉 생산량을 해외의 전속시장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난폭한 정복은 극심한 불평등이 초래한 거시경제 왜곡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였다."(12-3)


# 전속시장 : 선택의 여지없이 특정 상품을 사지 않을 수 없는 소비자 계층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 비평가인 존 홉슨은 '국내에서 건전한 투자처를 찾을 수 없는 잉여 자본'이 흘러갈 배출구를 찾아야 한다고 제국주의를 설명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많은 잉여 자금을 금권정치의 손에 쥐어주는' 경제·정치 시스템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이러한 소득이 한 계층에게 집중됨으로써 '사용할 수 없을 정도의 과도한 소비력'을 부자들에게 안겨주었다. 이는 결국 '소비만으로도 자본이 활성되고 이윤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자멸로 가는 길이었다. 따라서 부자들은 '수익성 있는 투자와 투기를 할 새로운 지역'을 해외에서 찾아야 했다. 결국 이러한 탐색은 국내의 강력한 이익단체들을 부추겼고, '그들의 경제적 자원의 커다란 부분을 점차 현재의 정치적 영역 밖에다 두면서, 새로운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정치적 확장 정책을 펼치도록 촉진시켰다'. 희망적인 소식이 있다면, 불평등과 제국주의의 불량스러운 결합은 소득분배를 바꿈으로서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13-4)


1 애덤 스미스에서 팀 쿡까지 : 세계 무역의 변화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 당시의 사람들은 먼 거리에 걸쳐 원자재와 완제품을 서로 즐겁게 거래했지만 중간재나 서비스는 거래하지 않았다. 당시 이용할 수 있는 통신 기술은 서로 다른 지역에 걸쳐 다양한 생산 단계를 조정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은 위험했고 전쟁은 흔했다." "리카도는 '대부분의 자본가'들이 '외국에서 자신들의 부를 불리기에 더 유리하도록 고용을 하기보다는 자국 내에서 낮은 수익률에 만족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는 또한 '모든 사람이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는 본성' 때문에 자본의 유출을 꺼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카도의 미묘한 자유무역 사례는 각국의 지속적인 수익률 차이에 달려 있었고, 이는 결국 투자자들이 해외로 돈을 옮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 성립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정은 기술이 향상되고, 통신비용이 붕괴되고, 세계 정치가 변하면서 무너졌다."(23-4)


"조지 워싱턴과 알렉산더 해밀턴은 경제적인 국정운영기술의 다른 비전을 제시했다. 그들에게 국내 제조능력의 발전은 국가 안보를 위한 필수과제였다. 그들은 미국이 새로운 정치적 독립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밀턴은 제조업이 국가 안보에 기여하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미국 정부가 다른 나라의 정부들이 자국의 제조업 수출업자들에게 주는 '사례와 보수'에 맞추어 미국의 제조업자들을 보호하지 않는 한, 미국인들은 유럽의 생산업자들과 대등하게 경쟁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외국산 제품에 부과하는 세금을 인상하고, 그 돈을 미국 최우선 순위의 상품 생산업자들에게 '장려금'으로 지불하도록 권고했다. 동시에 구리, 유황, 실크 등 원자재를 수입하는 데 부과된 미국의 관세를 철폐해 미국 제조업체의 원가를 낮추고자 했다. 이런 식의 정부 개입은 미국제 상품을 유럽에서 수입하는 상품에 비해 싸게 만들 것이었다."(24-6)


"1929년의 대공황은 1932년까지, 세계 경제의 단 11퍼센트를 차지하는 수준으로까지 국제 무역을 붕괴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국경을 오가는 상품과 서비스의 흐름은 전 세계 생산량의 15퍼센트를 밑돌았다. 기업 활동과 국경을 초월한 금융 붕괴의 즉각적인 영향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1930년 스무트 홀리 관세법과 미국이 촉발시킨 보호무역주의의 물결이었다. 수입품에 대한 미국의 징벌적인 세금이 세계적인 보복을 부추겼고, 그간 남아 있던 국제 경제체제마저 깨뜨리면서 경쟁적인 통화 평가절하, 관세 인상 그리고 반(反)세계화를 촉발시켰다. 미국은 19세기 말부터 과잉 생산을 흡수하기 위해 외국인 고객들에게 의존해왔고 당시 세계 역사상 가장 큰 무역수지 흑자를 냈다. 따라서 많은 수출시장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보호무역주의의 가장 큰 피해국 중 하나였다. 무역흑자가 큰 나라들은 생산하는 모든 것을 소비할 수 없기 때문에 국제 무역이 감소되는 것에 매우 취약하다."(35)


# Smoot-Hawley Tariff Act : 1930년 대공황 당시 미국이 마련한 보호관세법. 수입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골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직후, 44개국 대표들이 전후 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서 만났다. 목표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경제적 무정부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막자는 것이었는데, 이는 모두가 전쟁의 주요 원인이었다고 동의한 바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언급된 국제 무역의 부흥은 오늘날과는 매우 다른 맥락에서 일어나야 했다. 당시 운송비용은 여전히 매우 높았기 때문에 제조 공정을 광범위한 지역에 분산시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자본 역시 오늘날과 같이 어디든 이동시킬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사실, 브레튼우즈 협정의 두 주요 설계자인 해리 덱스터 화이트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국제무역이 부활하기를 모겐소만큼 열망했지만, 둘 중 누구도 거대한 자본의 이동성을 되찾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전쟁 전에 거대한 자본의 이동이 세계 무역을 왜곡시키고,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 엄청난 불균형을 초래했기 때문이다."(36-7)


#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성립


"전후의 정치적 제약─많은 탈식민지 국가들이 미국 모델을 따라 보호무역주의를 도입한─은 세계 무역을 느리게 회복시키는 원인의 일부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주요 걸림돌은 해운산업의 비효율성에 따른 높은 운송비였다. 비록 1950년대가 제트기, 로켓(추진)선, 수소폭탄의 시대였지만, 이 몇 년 동안 이곳저곳으로 물건을 옮기는 일은 19세기보다 더 느리고 더 비쌌다. 국제 무역은 총 경제 생산량에 비해, 20세기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100년 전보다 중요도가 절반 정도에 그쳤다. 게다가 현존하는 무역은 제조업이 아니라 기본 물품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세계는 우아한 아이디어, 즉 컨테이너의 상업화 덕분에 혁명을 맞이했다. 일단 사람들이 컨테이너를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되자, 장거리 운송은 이 평범한 금속 상자들 덕분에 간단하면서도 훨씬 더 싸게 획기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역량이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수준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세계 경제를 변화시켰다."(39-40)


"세계 제조업의 대부분은 미국, 독일, 중국(약 2007년까지는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3개국 간 제조 네트워크 중 하나에서 이루어진다. 이들 네트워크 내에서 중간에 들어가는 입력 물품의 거래는 모든 국제 무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반면, 완제품과 서비스의 국경 간 거래는 3분의 1에 불과하다(에너지와 금속 물품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이는 스미스와 리카도가 그렸던 세계나 심지어 1960년대의 세계와도 거리가 멀다. 이렇게 새로운 세계는 컨테이너화와 자유화 그리고 냉전의 종식이 가져온 결과다." "이러한 글로벌 가치사슬의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기존의 양국 교역 데이터는 더 이상 각국의 노동자와 기계가 창출하는 실제 가치를 측정하는 데 적합하지 않게 되었다. 독일 자동차는 동유럽 부품으로 제작되고 미국 트럭은 멕시코 부품으로 채워지는 것처럼, 중국(또는 오늘날 베트남)에서 조립되어 북미나 유럽으로 배송되는 여러 기구들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부품을 포함한 다양한 수입 부품으로 채워진다."(45-6)


"국제무역은 국가가 아니라 기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기업은 가능한 세금을 적게 지불하고자 하기 때문에 공식적인 무역 자료는 종종 실제의 무역 흐름을 왜곡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노동자로 가득 찬 공장이나 사무실 건물과 달리 특허와 기타 지적 재산은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몇 가지 양식만 적합하게 만족시키면 세계 어느 곳으로든 옮길 수 있다. 이 계획의 간단한 버전은 조세피난처에 자회사를 설립하고 그 자회사가 회사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특허권을 매각하는 것이다. 모회사는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자회사에서 정기 지급을 받으며, 종종 총 연구개발비(R&D) 몫으로 인용되며, 자회사는 그 회사가 세계에서 올리는 매출 중 큰 몫을 받는다. 거래를 정확하게 재정비하면 세금이 많은 곳에서 세금이 적은 곳으로 수익이 이전될 수 있다." "이러한 수익 이전은, 특히 기업들이 생산한 것의 가치를 점점 더 많은 무형자산으로 전환함에 따라 무역과 투자에 관한 공식 수치에도 이상한 영향을 끼쳤다."(48-51)


2 세계 금융의 성장


"국제 금융의 성장은 호황과 불황의 순환 속에서 일어났다. 매번 국제적인 대출 붐이 먼저 일어나고 똑같은 경제 현상이 동반되는 듯 보인다. 첫째, 일부 구조적 변화는 화폐의 정의와 액수를 크게 확장시켜 급속한 신용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1826~1837년과 1857~1873년에 규제 변화로 인해 은행 수가 공격적으로 늘어났다. 두 시기 모두 개발도상국에 대한 주요 대출 붐, 당시의 첨단 벤처기업과 기타 위험한 프로젝트의 거품이 특징이었다. 둘째로, 국내 시장의 자산 붐은 성공적인 투자자들이 점점 더 위험한 행동을 조장하면서, 대체로 더 큰 베팅을 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빌려서 생겨났다. 이러한 베팅이 성과를 거두면서 투자자들은 시장에 계속 투자하기를 원하게 되고 더 큰 이익을 얻는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건은 외국 증권을 유행시켜 종종 위험한 개발도상국으로 돈이 쏟아지게 했다." "이러한 붐은 대체로 갑작스럽게 확대된 대출이 훨씬 더 느닷없이 끝나면서 사그라든다."(63-4)


"19세기 초반의 영국을 보자.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영국은 급속한 경제 성장과 기술적 진보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1820년대의 호황을 촉발시킨 영국의 재정 상태는 근본적인 경제 전망에 대한 좋은 소식이 있던 시기에 변화가 일어났다. 말하자면 나폴레옹에 대항해 승리하고, 기차, 증기선, 가스등, 섬유 중심의 기술 혁신 붐 등이 좋은 소식이다. 기술 변화와 세계의 새로운 지역들이 갑작스럽게 열리는 상황이 맞물려 나타난 성장 기회에 투자자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수십 년 동안 전시의 불확실성과 어려움을 겪은 후에, 영국의 부유한 저축자들은 다시 한 번 수익성 있는 투자처를 찾기를 열망했다. 결국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에 투자하려 대출을 한 번 이상 받거나 지구 외딴 곳에서 가장 황당한 몇몇 프로젝트를 펼치는 등 광란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한 국제 대출 붐은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은 첫 번째 세계적인 신용 붐을 의미한다."(68-9)


"1873년의 위기는 5월 8일 주식 시장의 폭락과 함께 비엔나에서 시작되었다. 뉴욕에서는 이 소식이 이전의 호황기에 발행된 미국 철도 채권의 투자자들을 불안하게 했다. 마침내 9월 18일, 미국 최대의 민간 은행이자 미국 정부의 금융 대리인인 제이 쿡 회사는 보유한 북태평양 철도 채권 때문에 문을 닫아야만 했다. 제이 쿡의 폐점 소식은 뉴욕 증시를 깨기에 충분했다. 판매자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토지나 철도 채권 등을 사기 위해 자금을 빌렸던 투기꾼들은, 현금을 마련하고 빚을 갚기 위해 보유 주식을 싼값에 팔아야 했다. 그 직후, 전국의 은행들은 예금주들에게 지급을 중단했다. 뉴욕 증권거래소는 문을 닫은 채 그달 말까지 문을 열지 않았다. 미국은 당시, 그 후 대공황으로 불렸던 5년의 기간을 맞이했다." "전 세계 은행들은 붕괴되었고, 생존자들은 그들의 자산을 팔고 금을 사재기했다. 다시 한번 국제 신용 위축을 통해 국제 대출자들은 빚을 갚는 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없게 되었다."(82-3)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냉전의 시작, 자본 통제 도입, 마셜 플랜의 성공은 1970년대까지 다음 주요 대출 붐의 시작을 지연시켰다." "1970년대 유가 급등으로 세계 주요 은행에 석유 수출업자들의 달러 예금이 축적되면서 중남미, 소비에트권, 심지어 북한까지 대출 붐이 일었다. 초기 대출은 성공적이었고, 저개발국(LDC)들은 더 빠른 경제 성장 속도와 소비재 수입의 급증으로 신용 유입에 대응했다." "1825년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의 저개발국 대출 광품은 급작스럽고 의도적인 통화 위축 때문에 사라졌다. 이번에는 1970년대의 인플레이션을 종식시키기 위해 1980~1982년 연방준비제도가 고안한 것이다.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가 '예수 탄생 이후' 실질금리가 최고 수준이라고 말할 정도로 금리가 치솟았다. 그것은 원자재 수출 수입이 붕괴되는 동시에 부채 관리 비용을 치솟게 했다. 은행들의 신규 대출 자금이 막히자 1982년 8월 멕시코를 시작으로, 채권자들에게 채무 완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87-9)


"지난 20년 동안 재정적으로 가장 중요한 발전은 1999년 유로화의 출범이었다. 단번에 십여 개의 개별 통화가 단일 통화로 대체되었다. 대부분 자국 시장에만 국한되었던 유럽 은행들은, 갑자기 대륙 통화 동맹에 걸쳐 대출을 해줄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미국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유럽으로, 그리고 유럽 국가끼리 이어지는 돈의 흐름은 모두 2008년 이전의 다른 주요 국경을 넘는 금융 흐름보다 훨씬 더 컸다. 그 결과 진정으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금융 시스템이 형성되었다. 소위 민간 상표의 미국 모기지 채권을 발행하는 데 관여한 가장 큰 투자은행들 중 다수는 유럽계였다." "은행 규제의 구조적 변화는 시작 지점이 되는 시장에서 나머지 전 세계로 유입된 대출 붐으로 이어졌다. 유럽의 재정상황이 바뀌면 미국의 재정상황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쳤다. 2008년, 미국의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인해 주택담보증권 보유자들이 손실을 입게 되면서, 미국의 상황은 결국 유럽으로 되돌아갔다."(89-91)


3 저축, 투자, 불균형


"무역 불균형은 한 사회의 과잉 공급이 다른 사회의 부족을 보완하도록 용납한다. 그러나 무역 불균형이 사람들을 더 궁색하게 만드는 때도 있다. 수입이 단순히 부족을 해소하는 정도가 아니라 국내 생산을 압도하는 경우다. 특정 국가의 사람들은 너무 적은 돈을 쓰고 너무 많은 돈을 저축하고 있다. 이는 그들 국가의 가계들이 특히 검소하기 때문이라거나 정부가 이례적으로 신중하기 때문이 아니다. 매력적인 투자 기회가 부족한 것에 사업적인 대처를 매우 이성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나라들 내의 엘리트들이 부와 소득을 재화와 서비스에 더 많은 돈을 써야 하는 노동자나 연금 수급자들에게가 아닌, 추가수입을 사용해 추가 금융 자산을 축적하는 그런 부자들에게로 전가하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이는 나머지 국가들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한다. 즉, 추가 소비를 통해 과잉으로 공급된 양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세계적인 수요 부족으로 인한 침체를 견디는 수밖에 없다."(94-5)


"20세기 말, 결핍은 부유한 세상에서 더 이상 심각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물건을 만드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쉽고 저렴한 일이 되었다. 부족은 과잉이란 문제로 대체되었다. 오늘 더 많이 소비하는 것과 내일 더 많이 생산하는 것 사이의 오래된 균형은 사라졌다. 투자는 이제 오래된 자원 경쟁보다는 불충분한 소비로 인해 제약을 받고 있다. 현대의 상황은 풍부한 유휴 자원과 채워지지 않은 물질적 욕구의 비뚤어진 우연으로 정의된다. 생산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투입변수가 있다. 바로 노동력과 자본이다. 수십 년 동안 두 가지 요소가 모두 풍부했다. 부유한 세계의 실업률은 1970년대 이후 이전보다 체계적으로 높아져왔다. 1인당 근로시간을 줄인 시간제 일자리 고용이 늘고, 직장을 다니지 않는 근로연령층 비중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상황은 더욱 극단적으로 보인다. 해야 할 일이 많다면, 그 일을 대신할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의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106-7)


"생산적인 자본의 공급도 비슷한 상황이다. 1948년부터 1979년 말까지, 미국 제조업체들은 평균적으로 생산능력의 83퍼센트를 제품을 생산하는 데 사용했다. 1980년 초부터 1999년 말까지는 평균 80퍼센트였다. 2000년대 초반부터 생산능력 활용률은 1990년대 만들어진 초과 생산능력과 이후 국내 생산량 성장 제한의 결합으로 평균 75퍼센트에 그쳤다." "기업의 투자 행태도 그러하다. 대체로 사업 부문은 현금 유동성에서 창출하는 것보다 생산력을 확장하는 데 더 많이 지출해야 하며, 그 차이는 가계저축으로 충당한다." "현재 많은 나라의 사업 부문들은 그들이 현금 유동성에서 창출하는 것보다 덜 지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생기는 기업 흑자는 미국처럼 주주들에게 분배되거나 독일, 일본, 한국처럼 그 회사들이 보유하게 된다. 게다가 부유한 세계에서 가치 있는 투자를 할 기회는 과거에 비해 훨씬 적다. 남아 있는 기회들은 대부분 기반 시설과 주택으로, 과도한 자본비용보다는 정치적 제약에 방해를 받는다."(107-8)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버는 모든 것을 상품과 서비스에 소비하지만, 부자들은 그렇지 않다. 사람이 소비할 수 있는 양은 한계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여분의 돈을 주면, 머지않아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수입을 제공하는 무언가를 사는 데 쓰일 것이다. 그러나 부자에게 같은 여분의 돈을 주면, 아마도 추가 자산을 축적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세계적으로 불평등이 증가한다는 것은, 그러한 자산의 가치가 국민소득에서 점점 더 비중이 작아지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지출을 하는지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빚을 늘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축률이 높지 않아도 저축 과잉에 시달릴 수 있는 이유다. 저축률 자체는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가치 있는 투자 기회의 공급과 비례하는 소비되지 않은 생산량이다. 실제 자원이 즉각적인 욕구의 충족에 쓰이지 않고, 낭비적인 투자를 개발하기 위해 전용될 때 저축이 과도하다고 말할 수 있다."(112-3)


4 천안문에서 일대일로까지 : 중국의 흑자 이해하기


"세계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가장 직접적인 대응은 외국인 지출 감소를 상쇄하기 위해 기반 시설과 주택 투자를 대대적으로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중국의 오랜 불균형을 일제히 내부로 이동시키면서 점차 확대되었다. 중국은 유례없는 중국 부채 급증이라는 희생으로 경상수지 흑자가 감소했음에도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비생산적인 투자는 비용을 충당하지 못했다. 빚을 내서 하는 투자를 통해 고속으로 성장하는 능력이 한계에 도달한 중국 정부는, 무역흑자와 금융 유출을 통해 경제 모델의 비용을 전 세계에 전가하려고 다시 한번 시도할 위험이 있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투자보다 가계 소비가 우선되도록 중국 경제를 재조정하는 것이다. 이는 구매력을 중국 노동자와 퇴직자에서 기업과 정부로 이전하는 기존의 모든 메커니즘을 뒤집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 정세에 알맞은 해답을 찾기가 막막한 가장 큰 문제는, 공산당이 정치적 독점을 잃지 않고도 이 제도를 개혁할 수 있느냐다."(142-3)


"1980년대 후반부터 2010년 말 사이에 중국 가계가 소비하는 중국 GDP 비중은 15퍼센트 포인트 떨어졌다. 2018년 현재, 중국 가계는 여전히 중국 생산량의 40퍼센트 미만을 소비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세계의 다른 주요 경제국들보다 낮은 비율이다. 소비를 억제하는 방법으로 가장 인정받지 못한 메커니즘 중 하나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금융억제였다. 중국에서는 관영은행 중 한 곳에 예금을 하는 것 외에 저축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다. 그러한 예금들의 금리는 특히 성장에 비해 엄청나게 낮은 수준으로 책정되었다." "다시 말해서 금융 시스템은 중국 국민에게서 거대 제조업체, 사회 기반 시설 개발업체, 부동산 개발업체, 지방·시 정부에게로 지속적인 대규모 이전을 초래했다. 이렇게 싼 자본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하는 프로젝트의 질에 대해 거의 걱정하지 않고 대규모 투자에 나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152)


"중국 지방·시 정부는 은행 시스템 내에서 신용창조 대부분을 통제하고 있고, 중국 은행들은 빚을 상환할 수 없는 프로젝트에 거의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공무원들이 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국영 은행들에게 우대받는 기업에 대출을 해주어 필요한 만큼 사회 기반 시설, 제조, 부동산에 투자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투자가 가치 있는지는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지출의 양이 중앙정부의 목표를 충족하기에 충분한, 보고한 대로 GDP를 발생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적어도 1990년대 중반까지는 사회 기반 시설과 제조능력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이 제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 중국은 투자 붐이 점점 더 비생산적으로 변하는 포화 단계에 이르렀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국 정부는 중국 제조업에 대한 외부 수요 붕괴에 대응해 국내 투자를 더욱 확대했다. 그러나 수익성 높은 투자 프로젝트가 적절하게 증가하지 않는다면, 국내 부채 부담만 급격히 증가시킬 뿐이었다."(155-7)


"중국이 이룬 진보는 과도한 부채와 과잉 투자라는 고질적인 문제 때문에 취약하다. 내부적으로 재조정을 하기 위해서는 신용 긴축이 필요하지만 이러한 보완적 개혁으로 가계 소득을 높이고 내수 활성화에 성공하기도 전에 투자가 위축되어, 결국 내수를 위축시키는 결과만 얻을 수도 있다. 먼저, 내수 감소에 맞추어 국내 생산이 감소할 수 있다. 실질 임금 삭감과 훨씬 더 높은 실업률의 조합을 통해 총소득은 감소할 것이다. 중국의 정치 체제는 그런 사회적 이탈에서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고, 설령 살아남을 수 있다 하더라도 정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알아내는 데 관심이 없다. 따라서 국내 생산이 내수보다 적게 감소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반드시 수출 대비 수입 감소를 통해 중국의 무역흑자가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중국 정부는 위안화를 평가절하하거나 조정 부담을 전 세계에 전가할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에 과잉 생산에 따른 세계적인 과잉 공급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167)


"마찬가지로, 중국 정부가 일대일로에 대해 약속하는 것은 영토나 군사기지를 얻기 위한 전략적 계획의 일부라기보다는, 내부 재조정과 관련된 절충을 관리하는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2008년 이전에 중국 정부는 미국인과 유럽인들에게 구매력과 상품을 수출함으로써 과잉 생산능력에 대처했다는 것을 상기하라. 중국은 미국과 유럽의 금융 자산을 수조 달러 축적하고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는 증가하는 부채에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국내 부채가 상승하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의 차용자들의 차입 능력이 한계에 도달하자, 그것은 지속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를 대체할 일대일로의 진정한 전망은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동유럽, 중남미에서 중국이 수출하는 공산품과 건설 서비스에 대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대일로 국가들이 다룰 수 있는 전체 시장은 북미나 유럽에 비해 훨씬 작다. 따라서 중국이 이를 이용해 전통적인 수출시장의 손실을 대신하는 것은 어렵다."(167-9)


"어떤 식으로든 중국이 경제를 재조정할 것이고, 모든 불균형은 결국 복원될 것이지만, 특정 계획은 몇 가지 경쟁적 제약 속에서 정치 시스템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중국 경제가 계속 둔화하는 가운데 베이징의 중앙정부는 중국의 다양한 엘리트 집단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기관들이 어떤 모습일지 누구나 짐작만 할 뿐이다. 소득이 엘리트들에게서 일반 가계로 옮겨간다면 가장 바람직한 결과가 될 것이다. 원론적으로는 이것이 바로, 중국의 부족한 내수를 세계의 다른 나라들로 강제로 떠넘길 필요성을 줄여주는 자산균형 재조정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모든 성장 기적에 필수적인 조정 기간은 언제나, 특히 겉으로 가장 명백하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예상을 항상 뒤엎었으며, 심지어 가장 심한 비관론자들이 두려워했던 것보다도 경제적으로 훨씬 더 어려운 시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가정해도 무방하다."(174)


5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슈바르츠 눌 : 독일의 흑자 이해하기


"1989년 11월의 베를린 장벽 붕괴로 상징되는 독일의 재통일은 많은 동·서 독일인들에게 대단히 충격적인 기간이었다. 특히 직업을 갖고 있는 독일인들 사이에서 빈곤과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대부분의 다른 독일인들의 임금이 전면적으로 삭감되었음에도 상위권에 있는 노동자들의 소득은 급속하게 증가했다. 국민 소득은 노동자에게서 자본 소유자로 이전되었다. 고소득자를 위한 감세, 유의미한 상속세의 부재, 약화된 사회적 혜택 등이 모두 그러한 충격에 힘을 더했다. 이러한 결합된 효과는 버는 것보다 훨씬 더 적게 소비하는 독립체들(부유한 가계들과 그들의 사업체들)로 독일의 구매력을 이동시켰다.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따라갔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놀랄 만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계급 전쟁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부자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따라서 독일도 중국처럼 생산하는 모든 것을 흡수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어디에서든 소비되어야 하는 잉여가 발생했다."(176)


"2008년 이전에 독일의 초과 저축은 유럽의 다른 지역의 차용자들에게 돌아갔는데, 대부분 독일 은행에서 다른 은행들로 융자해주는 형태였다. 유럽의 무역 파트너들에게 잉여 저축을 수출함으로써 부유한 독일인들은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 등지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합리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금액보다 더 많은 돈을 빌리도록 강요한 셈이 되었다. 이는 부실자산으로 수천억 유로를 잃은 채권자들과 현대 유럽 역사상 유례없는 수준의 실업률을 겪은 채무자들에게 모두 끔찍한 결과를 안겨주었다. 독일의 순 재정 유출이 2008년 이후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정책적 선택이 국내 소비의 약세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채무 제한 또는 채무 제동장치가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공공차입에 대한 광적인 반대와 이로 인해 증가하는 재정 건실성이다. 동시에 독일 정부는 자국의 경제 모델을 이웃 국가들에게 열정적으로 강요해서 독일의 엄청난 흑자를 훨씬 더 규모가 큰 유럽의 흑자로 확대시켰다."(176-7)


"동유럽 해방이 양산한 1억 명의 신규 고객은 독일 기업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그들의 자유는 또한 독일 가까이에 현재 수천만 명의 저가 노동자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독일어도 유창했다. 독일의 전형적인 제조업 노동자는 2000년 슬로바키아 제조업 노동자의 약 9배를 벌었다. 엄청난 인건비 차이는 노동생산성의 차이보다 훨씬 더 컸다. 독일 기업들은 일자리와 생산을 중유럽과 동유럽으로 옮기며 대응했다." "이렇듯 재배치가 가능했기 때문에 독일 고용주들은 국내 임금을 강력하게 억제할 수 있었다. 만약 독일 노조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나선다면, 기업들은 동쪽으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으로 일자리와 공장을 이전해버릴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가라앉은 후, 구서독 제조업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1991년에서 2000년 사이에 단 5퍼센트 증가하는 데 그쳤다. 독일이나 국제적인 논객들이 이 나라를 '유럽의 병자'라고 지칭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188-90)


"이전의 경기 침체에서 독일 정부는 금리를 낮추고 세금을 인하하며 공공 지출을 늘림으로써 기업 투자와 가계 지출의 붕괴를 상쇄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는 유로 지역에 속한 자격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1999년 1월 1일에 공식적으로 시작된 공통 통화는 회원국들이 단일한 통화 정책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새로운 유럽중앙은행은 특정한 개별 국가에게 최선이 아닌, 유로 지역을 하나의 전체로 보아 이치에 맞는 기준으로 금리를 책정해야 했다. 독일은 통화블록의 가장 큰 단일 회원국이었지만, 독일의 부진은 그 밖의 다른 곳, 특히 스페인의 호황과는 가장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동시에 마스트리히트 조약(1992년)과 뒤이은 안정과 성장에 관한 협약(1997년)에서 합의된 예산 제한은 정부가 지출을 늘리기 위해 차용할 수 있는 예산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부는 통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 1990년대 초에 발행했던 부채의 높은 이자율 때문에 더욱 제약을 받았다."(194-5)


"독일의 무역과 경상수지 흑자는 이처럼 긴 내수침체기에 그 기원이 있다. 수출 경쟁력은 독일의 흑자와 거의 관계가 없었다. 2004년에 세계 수출에서 독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8년과 같았고, 2000년대 들어 유럽 내 무역에서 독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1퍼센트 포인트도 상승하지 못했다. 체코, 네덜란드, 폴란드는 경제 규모가 훨씬 작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비교할 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 시기 독일 수출의 실질가치는 독일이 경상수지 적자를 보였던 때보다 훨씬 더 느리게 성장했다." "무역흑자는 독일이 수입하는 상품의 증가율이 훨씬 더 둔화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인들은 물가와 유가 상승에도 불구하고 2004년에 수입 상품과 서비스에 2000년보다 더 적은 유로를 썼다. 흑자와 금융 순 유출이 필연적인 결과였다. 2000년대 초반의 흑자는 독일이 회복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이는 사회복지 예산을 억제하고 부자들에게 소득을 재분배하는 정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195-6)


# 고소득자 및 법인세 감세, 유의미한 상속세의 부재, 복지혜택 축소(실업급여 기간 축소, 정년 연장 등)


"하르츠 4법이 가장 직접적으로 미친 영향은, 특히 직업이 있는 독일인들의 빈곤율을 꾸준하게 상승시켰다는 점이다. 데이터가 시작된 2005년에는 독일 노동자의 5퍼센트만이 빈곤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2015년까지 그 비율은 두 배인 10퍼센트로 올랐다. 이는 저임금 시간제 일자리로의 전환에 따른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독일 고용의 순수한 증가 폭은 모두 자영업자와 시간제 노동자들이 차지했다. 정규직 고용은 10년 동안 꾸준히 감소했고 1995년보다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 독일 전체 일자리의 거의 30퍼센트는 시간제 일자리로 1990년대 초반의 두 배 수준이다. 그러한 추가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면 조기 퇴직했을 것이다. 1990년대에 55세에서 64세 사이의 독일인 중 40퍼센트 미만이 직업이 있었다. 그 비율은 2003년 이후 꾸준히 증가해 현재 70퍼센트를 상회하고 있다. 그렇게 고용은 증가했지만 복지는 증가하지 않았다."(203)


"수입 급증과 낭비적인 투자의 폭주로 인해 스페인, 그리스, 아일랜드 같은 위기 국가들은 흑자 국가 특히 독일에서 불가피하게 금융을 유입해야 했다. 소비 붐은 문화적인 특성, 날씨,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차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값싸게 많은 돈이 들어오면 어디에서나 똑같은 반응을 한다. 부동산 가치 폭등과 주가 상승은 사람들에게 더 부유해졌다고 느끼게 했고 현재 소득에서 더 많은 돈을 쓰도록 부추겼다." "여기에는 독일의 과소 소비와 과소 투자가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요소였다." "독일에서는 2008년 위기가 주변국에서 대출받은 사람들이 방탕했기 때문이라고 의견이 모아졌다. 독일 대부업체들의 무모함은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았고, 궁극적으로 과도하게 저축을 하게 하고 부득이하게 다른 곳에서 예금을 인출하게 만든 독일 경제의 구조적 불평등은 고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흐릿한 시각은 자연스럽게 독일 기득권층이 이웃국가들에게 독일처럼 되라고 권고하도록 만들었다."(216-8)


"2010년 5월 독일을 필두로 한 유럽인들은 '재정통합'으로 유로 위기 해소를 약속했고, 안정성장 협약이 이를 '준수'하도록 보장하기에 부족했다고 결론 내렸다. 2012년까지 전체 유로 지역이 경제 통화 동맹의 안정, 조정, 통치에 관한 조약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그 조약은 사실상 독일의 채무 제한을 유럽의 나머지 나라에 부과한 것이다. 이제 블록 전체의 정부들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균형 잡힌 예산이나 흑자를 운용해야 한다. 그들은 '공채 발행 계획'에 대해 나머지 유럽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제제를 받는다." "이제 유로 지역의 총부채는 GDP 대비 7퍼센트 포인트 감소했으며 2010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강제적으로 독일의 이웃 나라들은 성공모델이라고 할 만한 것을 모방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다른 나라들에게는 불행하게도, 독일의 병리학적 요소들도 받아들여야만 했다. 즉, 침체된 소비, 정부 긴축, 고용 불안, 과소 투자, 그리고 증가하는 불평등 등을 말이다."(224-5)


6 예외적인 미국 : 과도한 부담과 지속적인 적자


"미국은 세계 최고의 안전자산을 발행하는 나라다. 미국의 국가 부채는 많고 거래하기 쉬우며 채무불이행 위험이 없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볼 때, 달러는 다른 통화로 싸게 전환할 수 있고, 세계의 필수품이나 상품을 제조하는 생산자들이 항상 안전한 지불수단으로 여긴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미국은 세계의 과잉 저축을 처리할 수 있는 훌륭한 저장소가 되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이러한 초과 저축은 주로 미국으로 유입되었는데 외국 정부나 관련 기업들이 미국 정부가 발행하거나 보증하는 금융자산을 매입하면서다. 그들은 내수를 희생해 이러한 보유고를 늘렸다. 이는 금융 자산을 매입하는 국가의 소비자들에게서 수출 산업의 소유주들에게로 부를 이전하는 것이다. 그들은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수익률이 낮더라도 위험을 피하기 위해 구매한다. 이러한 비경제적 자본 회전은 2001년 후반과 2014년 후반 사이의 미국 전체 경상수지 적자 규모만큼이나 컸다."(232-3)


"미국 정부가 너무 많이 소비하고 세금을 너무 적게 부과하기 때문에, 경상수지 적자에 대한 책임은 미국인에게 있다는 광범위하고 초당적인 합의가 있다. 미국 정책에 대해 비난할 것은 많지만, 이러한 비평은 잘못되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노동자들이 은퇴하면서 1990년대 초반부터 가계의 저축률이 꾸준히 낮아졌다. 지난 10년 동안 일본의 개인 저축률은 근본적으로 '0'이었다. 동시에 일본 정부는 1990년대 초반 이래로, 대규모의 지속적인 예산 적자를 GDP의 평균 6퍼센트 정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지속적으로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있다." "미국의 경상수지 역시 정부가 더 엄격한 재정 정책으로 소비를 억제하려 했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정부의 다양한 계층이 결합된 예산 균형이 민간 부문의 행태를 거의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이 겪은 거의 모든 상황은 경상수지가 재정적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239-41)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1920년대의 불균형이 반복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케인스의 제안은 모든 무역금융이 단일한 '국제 청산 은행'을 통해 자체적인 결제 단위인 '방코르(bancor)'를 사용해서 결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각국이 방코르 계정을 개설하고, 수출을 해서 방코르를 벌고 누적된 방코르 잔액을 사용해 수입 대금을 지불하는 것이다. 국가들은 일정 금액까지 당좌대월(마이너스 통장)을 운용할 수 있지만 한도를 초과하게 되면 국내 환율을 내려야 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제안은 방코르를 너무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에게 방코르를 적게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만큼 심하게 불이익을 주었다. 당좌대월의 한도는 실질적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했으므로, 초과 방코르 잔액은 몰수되어 준비 기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흑자 국가들은 방코르 대비 환율을 높여야 할 것이다. 방코르 제안의 목표는 균형 잡힌 무역을 촉진하고 협력적인 환율 조정을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251)


"미국은 이 계획을 거부했다. 미국 협상가들은 전 세계가 고정된 환율 체계에서 국제 무역과 금융의 통화로 달러를 사용하기를 원했다." "미국이 제안한 시스템은 세계의 나머지 중앙은행들이 미국 정부의 채무를 준비자산(Reserve Assets)으로 보유하도록 장려했다. 이것은 금본위제를 달러본위제로 대체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금본위제와 마찬가지로 중앙은행들은 지폐의 가치와 준비자산 사이의 연결고리를 관리해야 했다. 동시에 중앙은행들은 위기 상황에서 민간 은행에 긴급 대출을 해줄 수 있어야 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경우 준비자산이 미국 달러였기 때문에 이 점은 쉬웠다. 환율 걱정 없이 필요한 만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또한 미국 정부가 외국 정부보다 국내 지출을 부풀리는 데 훨씬 더 많은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머지 국가에서 국제 우선순위와 국내 우선순위 사이의 이러한 긴장은, 필요할 때 끌어다 쓸 수 있는 달러표시 자산을 축적해두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251-3)


"외국의 중앙은행들과 보유고 관리자들은 1998년 초부터 2008년 중반 사이에 달러표시 자산을 사들이는 데 약 4조 1000억 달러를 썼다. 그들은 미국 경제를 왜곡하고 금융위기의 씨앗을 뿌렸다. 보유고 관리자들은 미국에게 두 가지 연계된 문제를 안겨주었다. 첫째, 달러 자산에 대한 추가 수요는 추가 공급과 일치해야 했다. 즉, 미국인들은 안전한 금융 채무에서 4조 달러 이상을 창출해야 했다. 둘째, (외국) 정부는 국내 생산 대비 내수를 억제함으로써 달러 보유량을 축적했다. 그것은 전 세계적인 과잉, 특히 공산품의 과잉을 악화시켰다. 세계적인 불황을 막기 위해 누군가는 과잉 생산을 흡수해야 했다. 미국 달러화의 우위는 미국인들이 나머지 다른 국가들에서 (창출해 낸) 과잉 자본과 과잉 생산품의 대부분을 흡수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과는 주택 부채 버블과 해외로 내쫓긴 제조업 기반이었다. 달러화의 국제적 지위는 미국에게 '지나친 특권'보다는 '지나친 부담'을 준 셈이었다."(267)


결론


"세계 부자들이 세계 노동자와 퇴직자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혜택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미국 금융인들의 이익이 중국과 독일 산업인들의 이익에 보탬이 되었기 때문이다. 두 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의 이익을 보완해주었다. 현재의 흑자 국가들은 자신들의 과잉 생산을 흡수해 줄 식민지가 필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적자 국가들의 은행가들이 기꺼이 협력하기 때문이다. 이는 심화된 세계화와 증가하는 불평등이 서로를 강화시켜온 비뚤어진 결과다. 전 세계의 기업들은 국제 경쟁을 저임금, 환경과 안전에 대한 규제 약화, 세금 특혜 제도, 퇴보적 이전을 추진하기 위한 구실로 삼고 있다. 평범한 가계를 쥐어짜는 것이 생산성 향상이나 사회 기반 시설 투자 또는 보건과 교육 개선보다 훨씬 쉬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지속 가능한 방식이 아니다. 임금 하락은 세계 경제의 총 지출을 감소시키는 소비 둔화를 가져오고, 궁극적으로 자기 제한적이고 자기 패배적인 부채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295-6)


"무역 전쟁은 종종 국가 간 갈등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는 주로 은행가들과 금융 자산의 소유자들, 또는 은행가들과 일반 가계들 사이의 갈등이다. 즉, 매우 부유한 자들과 그 외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불평등의 증가는 풍부한 공산품, 실직, 부채 증가를 초래했다. 그것은 글로벌 통합이 성취해야 하는 것을 경제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왜곡해놓은 것이다.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의 모든 국민들이 이러한 상황으로 고통받고 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세계 경제에서 비슷한 역할을 하는 미국과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9세기 후반 유럽의 제국 식민지를 닮았다. 그 당시 식민지 국민들은 불필요한 부채를 떠안는 대가로 유럽의 과잉 생산을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에는 폭력 대신에 현대 정권은 시장을 개방시키기 위한 영어권 국가들의 정치적 약속에 의존한다. 이것은 선택이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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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가족 - 가족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
권헌익 지음, 정소영 옮김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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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냉전의 종식으로 한국전쟁의 실체를 또다른 시각과 차원에서 바라보는 일이 가능해졌다. 내전이자 국제적 분쟁이라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한국전쟁의 성격 외에 탈식민의 한반도에서 또다른 종류의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의 연구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캐나다 역사학자인 스티븐 리에 따르면 1950년대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은 주요하게는 사회를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이 '마을의 전쟁'이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시기를 〈난데없이 하늘이 무너져 내렸던 때〉라거나 〈천륜도 인륜도 없었던 때〉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표현은 폭력적 수단을 동원한 배타적 정치주권의 정치, 즉 내전의 성격을 띤 한국전쟁이 야기한 사회적 혼란의 강도와 극단적인 인간조건을 말해준다. 천륜에 대한 언급은 도덕성의 위기를 보여준다. 현대 내전이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근본적 인식을 얼마나 철저히 유린할 수 있는지, 그리고 서로 어울려 사는 일상적 삶의 규범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를 말이다."(18-9)


"헤겔의 체계 안에서는 국가의 도덕적 요구와 가족의 윤리적 요구가 둘 다 배제적이다. 국가는 무가치하거나 신뢰할 수 없는 자를 배제하고, 가족은 자체의 본성에 따라 자신과 관련이 없는 자의 기억에는 무관심하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이 두 유형의 배제 사이에서 포용의 강력한 도덕적 실천이 일어난다. 상호 부정과 조직된 상호 간 폭력이라는 두 갈래 길로 몰아감으로써 포위된 하나의 공동체를 완전히 뒤집어놓는 내전이라는 배경이 주어지면 특히 그렇다. 가족의 애도와 기억 행위는 그 윤리적 지향에 충실하기 위해 친구 대 적이라는 지배적 대립구도를 넘어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가 정치공동체의 외적 존재로 여기는 정체성에도 관심을 돌려야 한다. 가족은 더 넓은 시민사회적 행위로 발전해나가지 않고서는 이런 도덕적 목표를 현실적으로 추구할 수 없고, 이 시민적 행위가 보편화되면 국가의 배제적 정치학이 지닌 기존 척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24-5)


1장 코리아의 학살


"한국전쟁에서는 비인격적 폭력과 사적 폭력이 모두 만연했다. 각 지역의 현실 속에서 두 폭력은 너무나 서로 얽혀 있어서 때로 집단기억 내에서 구분이 안 되기도 한다. 최근에 접할 수 있게 된 많은 증언을 보면 공동체 차원의 사적 폭력과 비인격적 정치폭력을 따로 떼어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사적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여전히 같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 폭력의 세부사항을 알아내기도 힘들다. 그런데 비인격적 폭력과는 좀 다르게 사적 폭력의 세부사항이 공동체에서 특히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환경일수록 한편으로 이웃들과 먹을 것도 나누고 아이들도 함께 보았던 전쟁 이전의 먼 기억과, 다른 한편으로 도움이 절박하게 필요했을 때 이웃들이 등을 돌렸던 아직도 생생한 기억 사이의 급격한 단절 때문에 주민들이 괴로워한다. 그 이웃이 혹 친척이기도 해서 제삿날에 모이거나 하면 그런 배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48)


# 비인격적 폭력 : 국가나 다른 정치조직의 권력이 자행한 폭력 // 사적 폭력 : 지역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난 폭력


"1950년 6월 28일에 공포된 대통령령에 따라 국가안보와 관련된 범죄에는 사법절차가 유예되었다. 긴급명령은 적에게 물질적 원조를 하거나 적의 군대와 적 당국에 정보를 제공하거나 자발적 협력을 하는 행위라고 그 범죄를 특정했다. 그런데 이 대통령령이 의회의 승인을 받아 1950년 7월 8일에 공식적인 계엄령으로 선언되기도 전에 이미 경찰과 헌병은 잠재적 부역자라는 혐의로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하고 합당한 재판절차도 없이 처형했다." "이 불운한 수감자와 소위 사상 전향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전쟁 이전에 남한의 예외상태 정치에서 생존한 사람들이었다." "1950년 6월에 공포된 비상계엄은 형식상으로는 이 계엄령과 예전의 다른 비상조치를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실제 반역행위라기보다는 부역 추정자(〈반역이 의심되는 자〉)를 겨냥함으로써 주로 선제적 폭력을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전쟁 이전의 다른 계엄령과 뚜렷이 구별된다."(51-2)


"한국전쟁 동안 민간인에 대한 테러행위는 가해자가 누구인가라는 점에서 유동적이었고 그 성격도 예방적 폭력과 징벌적 폭력 사이를 계속 왔다갔다 했다. 전선이 한반도 남쪽 끝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북쪽의 북중 국경 근처까지 올라가며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조직된 테러행위가 새로이 민간인을 덮쳤다. 양 진영 모두가 그것을 해방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역공동체의 시각에서 보면 그 해방은 전혀 경사로운 일이 아니었고 오히려 극도로 위태로운 상황을 만들어냈다." "전세가 역전되고 또 역전되면서 양쪽의 폭력적 권력에 노출된 양민들은 이념적으로는 대립되지만 제로섬 논리를 억지로 강제한다는 점에서는 구조적으로 동일한 두 세력 사이에서 생존의 공간을 찾을 수 없는 형편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공간을 찾아야만 했다. 양쪽이 공히 상대편을 불법적 권력이자 '반민족 세력'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그 권력을 받아들이거나 존재를 인정하기만 해도 민족공동체를 배반하는 범법행위가 되었다."(63-4)


2장 불온한 공동체


"한국의 전쟁세대라면 〈빨갱이 집안〉이라는 말이 아주 익숙할 것이다. 집안의 가까운 사람 중에 한때 체제 전복적 공산주의자였거나 공산주의 동조자였던 사람, 북한으로의 망명자가 있는 사람에게 〈빨갱이 집안〉은 즉결처분이나 대량학살의 기억, 남은 가족들에게 들씌워진 사회적 오명과 시민권의 제약 등을 환기시키는 무서운 표현이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비규범적인 지위가 그들에게 강요되는 이유는 그들이 규정된 정치질서와 법질서에 반하는 어떤 일을 해서가 아니라, 주어진 가족관계의 차원에서 어떤 특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친족관계란 단지 도덕적·물질적 차원에서 의지할 수 있는 우호와 상호부조의 영역이 아니다. 그들에게 친족의 영역은 오히려 현대사의 진행과 함께 그 중요성이 더해져서, 바깥세상에 만연한 정치적 적대관계가 미시적 형태로 현실화되는 장이면서 또한 사회적 낙인과 존재적 짐의 근원이 되었다."(95-6)


"개별 가족은 자신들에게 강요된 이러한 위태로운 삶의 조건을 여러 임기응변으로 대처했고, 때로는 혈연과 지연을 동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가족이 가까운 친족집단 내에서도 차별과 고립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해야 했다. 설사 가까운 친척이라도 잠재적으로 위험한 정치적 요소와 연루되는 걸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차별은 때로 친밀한 가족집단 내에서도 존재했고, 한 세대의 곤경이 다음 세대의 삶과 전망에 영향을 미치면서 그들의 비규범적 정치지위는 가계 내의 심각한 문젯거리가 되었다. 따라서 전후 한국의 비국민 가족에게 친족이라는 전통적 세계와 현대 시민적 삶의 세계는 너무 얽혀 있어서 그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분리할 수가 없었다." "이는 전후 한국에서 특히 그러했는데 이런 특정한 조건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정치적 시민사회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공동체 관계로부터 생겨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96-7)


"한 개인이 정치권력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규정된 사람과의 친족관계로 인해 공적 세계에서 정당한 구성원으로 인정되지 못할 때, 그 개인에게 민주적 삶이 가능하려면 그 친족관계의 규범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맥락에서 불온한 공동체라는 개념이 사회에 미치는 장악력이 사라지려면 그 개념이 현대 정치적 삶에 설 자리가 없음을 사회가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정치적 사회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과거에는 모두 정치적으로 혼재된 관계망을 공유했다는 인식에 이르러야 한다. 다시 말해 총체적 내전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는 어떤 공동체도 순수한 정치적·이념적 계보를 주장할 수 없다는 인식 말이다. 극단적인 냉전의 이념에서 벗어나 진정한 민주사회로 나아가려면 공동체마다 근대 개인주의 사회의 이상을 추구하는 식으로 그 편협한 영역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을 넘어서 각자의 역사적 계보를 보다 진실하게 사고하는 일이 긴요하다."(100)


3장 분쟁 중의 평화


"'월북자 가족'이란 전후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위험한 낙인이었다. 그 범주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가족 사이에 모종의 연결이 있고, 그것이 친족관계에 본질적으로 내포되어 있다고 가정한다. 친족 간 우호라는 순수한 개념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주 정치적인 개념이고 또한 극도로 정치화된 것이다. 육친애에는 어떤 진정성이 있고 이 진정성은 정치적 현실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가정되지만, 동시에 그 의미가 왜곡되어 이념적으로 순수하고 일률적으로 통제되는 사회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 전유된다. 이런 맥락에서 친족 간 우호는 서로 관련이 있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한편으로는 현대 정치권력이 아무리 집요하더라도 그 지배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 어떤 인간관계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점을 나타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공동체적 영역이 현대 정치에서 상대적 자율성을 누린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정치적 개입과 통제의 중요한 표적이 되는 것이다."(126)


"반공주의 정치 체제의 이상적 시민은 국가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에 물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치적 존재의 우선적인 원칙으로 삼는 개인이다. 이 이상적 개인에게는 정치적 원칙이 친족의 우애보다 중요하고 필요할 때는 그 우애를 버려야 할 수도 있다. 적을 이롭게 할 수도 있는 불온한 육친애는 끊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원칙이 유효성이 있으려면 훈육해야 할 대상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해야 하고, 따라서 이 정치체의 시민이 정치적으로 물든 친족영역과의 유대관계를 완전히 끊어내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한마디로 이 정치체의 이상적 시민은 공동체적 유대에서 자유롭다고 가정되는 근대적인 의미의 개별주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중적 의미의 공동체적 존재로서, 전통적 친족공동체와 국민국가사회라는 근대 공동체 양쪽과 관련되며 전자를 후자의 이미지로 만들고 유지하는 일에 전념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126-7)


4장 연좌제


"연좌제라는 유사법제도에서 특히 놀라운 점은 이 정치관행의 규율권력이 친족조직 자체에 맞서 작동하면서도 그 내부에서 작동할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국가가 사회를 통제하는 데 효과적인 훈육기술인 것이다. 하지만 이 현대 규율기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개채화되고 자율적인 주체보다는 관계적이고 상호구성적인 인격체가 필요조건이 된다. 곧 기존의 사회학과 인류학 문헌에서 일컫는 근대적 개인이라는 철학적 개념과 구별하여, '도덕적 인격'(moral person)으로 일컫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정치제도이자 형벌제도인 연좌제의 저변에 깔린 사고방식은 근대 사회사상의 전통에서 생소하지 않다. 제도가 규율의 대상으로 삼는 존재가 개별화되지 않고, 주변의 친밀한 도덕적 관계망에서 개념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선물 같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를 마주하는 자아는 철학적 의미의 주권적인 단독자가 아니라 사회관계에 근거한 관계적 주체가 된다."(137-8)


"하지만 사회학에서 많이 언급되는 도덕적 인격이라는 개념과 연좌체 체제에 포위된 도덕적 주체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들이 있다. 원래 근대 입헌주의는 집단책임제와 같은 관행을 형법의 영역에서 추방하는 데 그 토대를 두고 있는데, 냉전시대의 한국의 연좌제는 근대 법치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근대법의 환경에서 국가의 권력이 도덕적이고 관계적인 인격을 전용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연좌책임의 정치는 개인의 책임 원칙을 시금석으로 하는 근대법의 환경에서 그것을 무시한 채 만개했다. 국가가 훈육하는 대상이 (형식면에서) 개인이고 (실제로는) 도덕적 인격이라면, 이 질서에 도전하는 행위 역시 정치적 영역이나 인간관계적 영역 중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이중적 성격을 지닐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는 관계적 주체가 그 존재 그대로 자율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투쟁은 그 자체가 개인의 자유와 이에 근거한 법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과 동일한 것일 수 있다."(138-9)


"푸코의 후기 저작에 나오는 다루기 쉬운 개인, 또는 근대 생명정치(biopolitics) 질서 속의 인간존재는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생명을 좌우하는 국가의 생명정치적 권력의 벡터에 무력하게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무지한 한에서만 자신의 자율성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환영적인 자율주체이다. 이 환영적인 인간주체성이 어떤 역사적·사회적 조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었는지가 푸코의 주요 관심사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 서구의 의학과 생명공학을 연구하는 인류학자를 비롯하여 많은 사회과학 연구자들이 근대 생명정치와 근대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의 길잡이로 푸코의 이론을 많이 원용한다. 하지만 푸코가 근대 개인주체는 근대 권력의 기술적 체계가 수월하게 다루는 존재라는 점에서 근대 개인 주체의 신성함을 비판할 때, 그 비판이 전근대와 근대의 규율체계 사이에 결정적인 단절이 있었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158-9)


"푸코의 논지를 따르면 우리는 근대 사회체계 내에서 개인이 되는 법을 배운다고 말할 수 없다. 반대로 근대 규율체계 내에서 의미 있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환영으로든 혹은 실재로든 먼저 개인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생겨나는 존재는 (자유와 자율성 같은 고유하고 양도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고전적인 개인개념과 상당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에게 근대의 형벌과 규율체계는 공동체적 관계망에서 해방된 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아직 관계적 세계 안의 삶을 국가권력의 벡터 공간에 갇힌 삶으로 대체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는 자율적인 인간주체라는 개념을 역사적 구성물이자 사회적 허구로 보고 이런 환영적 개념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즉. 푸코의 이론은 근대로의 이행기에 유럽 형벌체계에 급격한 단절─영혼의 통제에서 신체의 통제로, 사람-공동체의 결합에서 개인-국가의 결합으로─이 있었다는 생각에 기초한다."(158-61)


"전후 한국의 반공주의 정치는 전지구적 '격리'의 최전선에 있었고, 역시 사회적·정치적 관계에 대해 전염병식 견해를 전개했다. 이런 식의 정치는 냉전의 은유적 색 구분(빨강과 빨강이 아닌 색)을 말 그대로 실체적 존재로 밀고 나갔다." "이런 환경에서 반공정치는 이념적으로 순수하고 도덕적으로 규율 잡힌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정치적 통일체 내부에서 〈이질적 존재의 위협〉에 대응하려고 했다. 이 정치적 과정에서 내부의 적이면서 이질적 이념의 전염병 보균자에게 부여된 구체적 형태는 개인이 아니었다. 규율과 처벌의 대상은 홀로 존재하는 개인의 몸이 아니라 그 개인을 도덕적 인격으로 만드는 촘촘한 관계망이었다. 처벌이 관계 자체와 관계 속의 몸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애초에 피의자의 몸은 홀로 될 수가 없었다. 따라서 피의자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염된 관계적 몸에서 자신을 떼어내던가, 아니면 관계적 몸 전체를 결백하게 만들어야 했다."(164)


5장 도덕과 이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유럽의 정치적 근대성을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유럽에 의미 있는 유산으로 이해하는) 〈지방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식민주의를 제도적 질서와 문화영역이라는 개념적으로 다른 두 영역으로 분리하고, 제도적 질서로서의 식민주의가 종식된 후에도 문화로서의 식민주의가 지속된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탈식민 문화 개념은 2차대전의 종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적 시기를, 과거 식민지 세계가 1950~60년대에 걸쳐 형식적·제도적 통제에서 벗어난 후 이어서 식민주의의 문화적·정신적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던 연속적인 투쟁으로 그려내는 경향이 있다. 그 시기에 전지구적 권력구도가 식민주의 구조에서 냉전의 구조로 전환되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고, 그 결과 탈식민 세계의 국가건설 과정에 첨예한 문제가 초래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탈식민 과정에서 경험된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화와 그로 인해 공동체적 삶이 당면한 위기에 무관심하다."(178-9)


"최근의 근대 민족주의 연구는 근대사회가 장소 기반의 '기계적' 연대에서 관계망 중심이 '유기적인' 연대감으로 일방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근대사에서 이 두 유형의 사회성 중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서로를 강화하며 뒤얽혀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탈식민 냉전기를 내전의 형식으로 경험한 사회에서는 가족과 민족의 상징적 유사성이 긍정적인 융합이라기보다는 분열과 왜곡이라는 부정적 조건으로, 또한 미래에 극복해야 할 조건으로 이해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두드러진다. 이런 맥락에서는 '자연적'(natural) 또는 전정치적(prepolitical) 형제애를 별개의 토착적 단일체로 상상하고 그다음에 서구 정치사상에 나타나는 정치적 우애와 대비시키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정치현실과 떨어져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이상화된 토착적 친족이라는 이미지는 탈식민 내전의 위기 속에서 분투하는 친족의 운명에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176-9)


"냉전기의 광범위한 정치적 문화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이 국제입양의 정치이다. 크리스티나 클라인은 20세기 초국가적 이동의 역사가 냉전의 지정학과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주장하면서 그 관련성이 애초에는 특정한 친족의 관행을 통해 인종적·문화적 차이를 초월하는 형태를 띠었다고 논의한다. 클라인은 20세기 중반의 정책문서와 중산층 대상 대중교육 자료를 중심으로 1950년대에 어려움에 처한 아시아 지역에서 아이를 입양하는 일이 주목할 만한 지정학적 실천이 된 과정을 추적한다. 미국이 전지구적 공산주의 봉쇄정책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내세우는 중에 자유세계 내 미국의 주도권에 실질적으로 긍정적인 특성이 결핍되었다는 우려가 있었다. 반공주의란 기본적으로 반작용이지 그 자체로 진정한 이념은 아니고, 아시아 대중들에게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나 온정주의적 자본주의란 서구 식민지 지배와 결부되어 이해되었으므로 호소력이 없었다."(182)


"그런 연유로 1950년대 주요 교육매체에는 친족의 확장이 아시아의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주요 전략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미국 가정에 콜카타와 뭄바이의 집 없는 아이들, 일본의 버려진 〈지아이(GI) 아기들〉 그리고 한국의 전쟁고아들을 입양하라는 권유가 쏟아졌고 〈우리에게는 세계의 굶주린 아이들이 원자폭탄보다 더 위험하다〉라는 생각을 전파했다. 자애로운 미국이 온정주의로 돌봐주지 않는다면 억압받는 이 아이들이 〈공산주의자의 손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클라인은 위의 변화를 〈냉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명하는데, 이는 미국이 탈식민 세계에서 그들의 〈자애로운 패권〉을 형성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이질적인 문화와 조우하면서 그 이질적 세계가 국제공산주의에 맞선 전지구적 이념투쟁의 전선에 참여하도록 새로운 정치─서구에서 유일하게 인종 평등 사상을 옹호하는 미국이라는─를 발명해내는 일이었다고 본다."(183)


"전후 한국에서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재현은 친족의 우호(amity of kinship)와 정치영역의 적대감 사이의 모순을 핵심 구성요소로 삼았다. 때론 양극화된 바깥세상의 정치현실에 심하게 흔들리기는 해도 친족의 우호가 그것을 견뎌내고 결국 규범적 주체성을 회복하면서 그 자체가 자율적 영역임을 대표했다. 하지만 때론 이 영역이 바로 내전의 포악한 역사가 가장 첨예하게 구현되면서 인간관계의 규범적 구조를 산산조각내는 바로 그 현장으로 제시되었다." "여기서 형제애라는 개념은 서구 철학 전통에서 정의하는 근대 정치적 우애라는 이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동시에 서구의 정치적 우애에 대한 비판으로 제시되는 소위 자연적이고 천부적인 형제애 개념과도 다르다. 극단의 이념을 수반한 총체적 국민동원의 현대 내전의 경험은 가족과 친족의 영역을 완전히 뒤집어엎어서 천부적 형제애 자체를 고통스럽도록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201-2)


"피가 이념보다 진할까? 그에 대한 답은 애초에 혈연의 영역과 이념의 영역을 분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럴 가능성을 상상하려면 혈연의 영역을 따로 떼어낼 수 있어야 하고, 거기에 현대 이념의 힘에서 독립된 그 자체의 고유한 규범적 삶을 부여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서 친족의 영역은 현대 정치의 힘과 따로 떨어질 수 있는 독립체가 아니라 바로 그 힘에 의해 이미 난도질된 세계였다. 한국전쟁 서사에서 나타나는, 원초적이고 전(前)정치적인 가족공동체의 이미지는 압도적인 국가주권의 정치의 세계로부터 얼마간 거리를 둘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공동체와 국가 사이에 놓인 어떤 화해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한국전쟁사의 친족이 긴 냉전시기 내내, 1950년 내전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요동치는 역사의 현장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했던, 깊은 상처를 입은 존재라는 사실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204-5)


6장 소리 없는 혁명


"전후 공동체들이 전쟁이 초래한 위기에 대처하여 실행했던 가족문화로는 미혼으로 사망한 젊은 남녀의 영혼을 맺어주는 사후 혼례식, 신랑의 집안 내에서 입양한 아이가 두 사람의 제사를 주관하는 사후 입양, 시신이 없는 무덤을 조성하고 돌보는 헛묘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대중적인 수단으로는 무엇보다 굿을 들 수 있다. 굿이 가족단위로 이루어질 경우, 망자의 넋두리는 죽음의 순간과 그 끔찍한 상황을 울면서 설명하고 부당한 죽음에 대한 분노를 쏟아낸다. 망자의 혼이 그렇게 탄식하다가 지치기도 하고 조금 진정이 되면 굿판의 주변과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내 속 끓는 이야기 들어주어서 고맙수다〉 인사치레를 하고, 그러면서 건강이나 경제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한다. 망자의 혼이 살아 있는 자들의 일에 관심을 돌리면, 드디어 망자가 자신을 옥죄던 슬픔에서 벗어났다는, 한국에서 자주 쓰는 표현으로는 〈한을 풀었다〉는 표시로 받아들여진다."(223-4)


"하지만 한이란 완전히 풀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다음번에 굿을 할 때도 〈영계울림〉(혼령의 울음)은 반복되는데,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울음의 강도가 조금씩 누그러지기는 한다. 망자가 넋두리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하는 이 굿의 공간도 대개 그것을 주최하는 사람과 친족관계인 망자의 혼을 청배하는 장소라는 점에서 일종의 조상에 대한 제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굿판에 나타나는 조상은 제사에 찾아오는 조상과는 다르다. 그 범위에서 굿의 조상은 제사의 조상보다 광범위하다." "과거에 굿이 (부계의 계보만을 의미 있는 친족질서로 간주하는) 유교적 도덕질서의 지배적인 이념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면, 20세기 후반에도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지배적인 이념인 국가 반공주의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제주 4·3사건의 증언집인) 『이제사 말햄수다』에도 해당되는 것으로, 무속의 독특한 구조적 조건이 여기서 역사 증언의 길닦이 역할을 한다."(224-5)


"제주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회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에게 1990년대 초는 상전벽해의 시기였다. 그 이전에 유족회의 공식명칭은 '제주 4·3사건 민간인 반공희생자 유족회'였고, 무장대에 희생된 공무원이나 민보단원 등의 특정한 범주의 희생자와 관련된 유족이 주로 참여했다. 현재 추정하기로는 이 범주의 희생자는 전체 민간인 희생자의 20퍼센트 정도라고 알려진다. 나머지 대다수는 군과 경찰, 청년단에 의해 희생된 주민들이었다. 1990년대 들어 다수를 이루는 범주의 희생자 유족들이 점점 많이 참여하면서 유족회 내에서 다수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 유족회 활동을 오랫동안 한 어느 분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소리 없는 혁명〉이었고, 유족대표들이 오래도록, 때로는 열띤 토론과 협상을 벌여온 결과였다." "유족회가 모든 차원에서 벌어진 잔학행위의 모든 피해자를 대변한다는 단호한 입장을 견지한 덕에 그러한 갈등으로 인해 조직이 해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228-9)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면서 주민들의 추모행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 변화는 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관찰되었는데, 이 두 영역의 변화가 긴밀히 상호작용하며 변화를 이끌어갔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조상의례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제주의 많은 지역사회에서 예전에 정치적으로 비규범적인 존재였던 조상들이 공동체의 행사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소위 '정상적인' 조상들과 함께 추모의 공간을 공유하게 되었다." "1990년대말 이전에는 우익과 좌익이 자행한 폭력의 희생자를 모두 아우르는 추모행사를 한다는 발상은 대부분 지역에서 생소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 지역 여론은 그런 생각을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발상은 반공의 정치사를 떨쳐버리는 측면뿐만 아니라 주민들 사이에서 지역 공동체의 온전함과 자긍심을 회복하는 데에도 큰 의미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자들의 기억을 함께 불러오는 일은 살아 있는 자들을 화해시키고자 하는 시도였다."(230-3)


결론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는 우애의 개념에 현재 사회과학 학계가 새롭게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급변하는 정치적 우애의 지평이 있다. 서로 아무 관련 없는 개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우애에 기초한 연대와 동지적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다시금 공적 담론과 학계에서 두드러진 주제가 된 것이다. 정치이론에서 우애를 민주주의 정치질서의 핵심적 규범으로 내세우면서 공적인 공공선의 덕목과 호혜의 실천으로 규정되는 우애가 서로를 타인으로 여기는 개개의 시민들을 묶어주는 끈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인간주체가 내재적으로 자기 본위의 이기적인 존재라고 가정하는 공리주의 철학 전통이 옹호하는 사회질서를 비판하기 위해 우애의 이론을 개진하기도 한다. 다른 편에서는 우애라는 개념으로 현대사의 유산, 특히 민족주의 시대의 유산을 재조명하는 데 더 관심을 보인다."(254)


"국제관계 이론에서 우정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 것은 홉스 식의 힘겨루기 시각을 벗어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우애의 정치를 둘러싼 이러한 논의는 예전처럼 친구와 적이 확실하지 않은 냉전 이후 세계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다른 중요한 특성도 있지만 냉전은 전지구적으로 친구 대 적의 구도를 지녔다는 점에서, 예를 들면 식민주의 같은 근대사의 다른 주요 정치형태와 구별된다. 전지구적으로 영토에 기초한 정치체와 민족들 사이에 분할된 양편에서 전례 없이 광범위한 초국가적 연대를 장려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편으로는 적개심 정치의 보편화, 다른 한편으로는 우애의 정치의 전지구화로 세계가 양분되었는데, 이런 조건을 두고 코젤렉은, '세계내전'이라고 칭했다. 현재 우애의 정치와 우애의 도덕에 쏟아지는 관심은 탈냉전시대에 이제는 실제의 적이건 상상의 적이건 공동의 적이라는 존재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정치적 우애의 지평을 그려나가야 할 절박한 필요를 반영한다."(255-6)


"친족은 전근대 집단사회의 도덕적·정치적 질서에서 핵심이었는데, 개인의 삶과 대인관계의 중요한 측면을 이루는 우애는 근대 개인사회의 친밀한 인간관계를 표현하는 주요한 요소이다. 곧 전통사회에서 친족이 차지했던 자리에 그 대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전통적 공동체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면서 친족의 타당성도 감소하고, 친족의 기능이 쇠퇴하면서 생겨난 그러한 빈자리를 우애가 메운다는 것이 근대 사회사상사의 지배적인 생각이다. 비록 이러한 지배적 가정이 근대사에서 실제로 친족관계가 이해되고 실행되는 방식과는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족관계의 후퇴는 여전히 근대의 정치, 사회와 관련된 이념의 핵심적 구성요소다. 이렇게 보면 근대정치의 합리성은 단지 우애의 정치가 아니라 친족에 대항한, 친족을 배제하는 정치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애에 대한 비판적 사고는 근대 공적 세계의 구성적 공간에서 추방된 친족에 대해 재고할 것을 필요로 한다."(256-7)


"인간의 친족이라는 환경이 정치적 사회의 공적 구조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자리를 지니지 못하는 사적 영역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근대 정치에서 지속되어 온 신화이다. 이 신화는 심지어 친족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가야만 근대사회와 정치의 지평이 드러난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산 자들에게 자유로움은 정치적 두려움 없이 고인을 추모하고 애도할 수 있는 권리의 회복을 의미한다. 죽은 자와 실종된 이에게는 자신이 속해 있다는 이유로 친족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걱정 없이 친족세계에 귀속될 수 있는 권리이다. 코리아에서의 학살 이후 친족의 정치적 삶은 산 자가 죽은 자를 친근한 존재로 기억할 수 있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다시 찾기 위한 길고 지난한 싸움이었다. 뒤르켐이 정의한 '영혼의 권리'란 죽은 이에게는 친족의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권리의 회복이고, 살아 있는 이에게는 정치적 사회 내에 시민권의 회복과 동일한 의미이다. 여기서 친족의 평화는 평화로운 사회의 이상과 동일하다."(2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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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의 유령들 - 2016 경암학술상 인문사회부문 선정도서
권헌익 지음, 홍석준 외 옮김 / 산지니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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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동유럽과 중유럽 지식인들이 개인적 경험을 소설적 서사로 표현하는 데 힘을 실어줌으로써 진리를 주장하는 공식역사에 저항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개인의 기억은 공식역사에 대항하는 투쟁이라는 논쟁적인 진술을 통해 이러한 정향을 구체화했다. 하지만 유령이라는 요소는 익숙한 테마가 아니다. 오늘날 다양한 학자들이 당대의 변화하는 시대정신을 도출하려는 시도에서 과거의 유령에 호소하는 경우가 흔하긴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유령', '마르크스의 유령', '공산주의의 유령', '스탈린의 망령', '냉전의 유령' 등은 주로 역사적인 은유이다." "이들 역사의 유령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전쟁의 유령(ma chien tranh)과 같지 않다. 최근 이스트반 레브는 탈공산주의의 〈선사(先史)〉에 관한 논의에서 유령이라는 관념을 도입한다. 비록 나는 전쟁의 유령을 레브와 유사한 시각에서 역사적 불의의 산 증거로 접근하지만, 이들 유령은 단순한 역사적 관념과는 완전히 다르다."(14-5)


"베트남의 유령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정체성을 가진 실체로서, 비록 과거에 속하지만 비유적인 방식이 아니라 경험적인 방식으로 현재에도 지속된다고 믿어지는 존재이다.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 과정에서 베트남의 유령 이야기는 탈사회주의적 서사와 양극적 질서에 관한 보다 광범위한 역사적 기술에서 독특한 장르의 관념과 가치를 구성한다. 베트남 유령의 생명력은 단순히 문학적인 현상일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장들에서 볼 수 있듯이 절박한 사회적 이슈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 현상은 베트남 사회 전역에 걸쳐 발견되는 유령 관련 이야기의 명백한 대중성과 베트남인들의 일상에서 점증하고 있는 비극적 전몰자에 대한 기억의 의례적 표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유령은 베트남에서 현저하게 대중적인 문화적 형태이자 역사적 성찰과 자기표현을 위한 강력하고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령은 관례적인 사회학의 전통을 초월하는 사회적 연구의 정당한 영역을 구성한다."(16)


"이 책의 과제는 『학살, 그 이후』에서 다룬 친족의 의례적 기억에 관한 연구를 전몰자라는 중요한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대학살로 인해 가족에 기반한 전통적인 기념 관행이 위기에 직면했는데, 부분적으로 이것은 친족적 연고가 없는 시신들이 마구 뒤섞여버렸기 때문이다. 최근의 베트남 전쟁은 전통적인 마을을 뒤엎어 공동체적 삶의 안정적 공간을 흉폭하고 혼란스러운 전장으로 바꾸어놓았다. 하지만 전쟁은 또한 민간인과 군인들이 여러 지역을 가로질러 대규모로 이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일반화된 인간의 이탈(human displacement)이라는 배경하에서, 남부 및 중부 베트남의 공동체들은 수많은 전쟁사망자의 개별 무덤과 마을 주민들의 집단 묘지를 유지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만큼이나 많은 수의 무명 외지인(응오아이, ngoai) 유해의 무덤도 지켜왔다. 이탈된 죽음의 이러한 물질적 조건은 베트남인들이 인지하는 비통한 전쟁 유령의 생명력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22)


1 전쟁의 유령


"냉전사에서 베트남 전쟁(1965~1975)이 그 전에 일어난 한국 전쟁(1950~1953)과 비교되는 것과 유사하게, 베트남인들은 베트남과 미국 간의 갈등을 이전의 '프랑스 전쟁'과 구분하기 위해 미국 전쟁(1960~1975)이라 부른다."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 베트남에서 발생한 죽음은 주로 군인의 죽음이다. 이는 이 집단기억의 핵심적인 물질적 상징인 버지니아의 알링턴 베트남전 참전용사 기념관을 통해 입증된다. 베트남의 공식적인 기념방식에 따르면 미국 전쟁에서의 죽음 또한 주로 군인의 죽음이다. 이는 베트남 전역의 여느 농촌 마을이나 읍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수많은 묘지와 기념비를 통해 물질화된다. 하지만 실제로 베트남인들에게 베트남-미국 전쟁에서의 죽음은 남녀노소, 군인, 민간인, 당원, 비당원, 공산주의자 혹은 반공산주의자를 가리지 않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의 죽음이다. 이러한 상황은 전장의 전선이 지독하게 불분명했던 베트남 남부와 중부 지역에서 특히 심했다."(38-41)


"베트남에서 유령의 존재는 문화적인 상징이라기보다 '자연적인' 현상으로 인식된다. 유령은 전형적으로 '길 잃은 영혼' 혹은 '떠도는 영혼'으로 번역되는 다양한 이름(마ma, 혼hon, 혼마hon ma, 봉마bong ma, 린혼linh hon, 오안혼oan hon, 박린bach linh)으로 불리지만, 민간의 의례용어에서는 꼬박(co bac)으로 불린다. 꼬박은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뜻하는 용어인데, 이는 의례적 맥락에서 개별 가정이나 마을 사원 내에서 숭배되는 조상과 신위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옹 바(ong ba,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대조적이다. 이들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죽었지만, 망자의 세계, 즉 엄(am)에 정착한다는 의미에서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살아 있진 않지만 여전히 산 자의 세계를 떠나지 않은 존재이다." "유령은 일종의 존재론적 난민으로서 에르네스트 블로흐가 말하는 다스 운하임리히(das unheimlich), 즉 집으로부터 뿌리 뽑힌 자의 지위에 가까운데, 이들에게 집은 자신의 기억이 머무는 장소일 수 있다."(44-5)


"베트남에서 유령은 아주 공적이기도 하다. 그들과의 사적인 조우 대부분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기념활동으로 발전한다. 유령이 출현한 장소에 막대 모양의 향을 피우는 행위는 즉시 그 장소를 애도의 장으로 변환시키기 때문에 이미 명백히 공적인 행위이다. 유령 출현 이야기와 그 역사적 배경 또한 지역 사회에 신속하게 확산되어 공적인 형태의 지식으로 전환된다. 사전 지식이 없는 외부인이 아니라면 누구도 부주의하게 그 장소를 걸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주민들은 그 장소를 지날 때마다 향과 재를 보고 매번 그 특별한 유령 출현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리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이야기가 잊히고 관련 장소가 평범한 도랑으로 되돌아갈 때까지 몇 개월 혹은 몇 년 동안 지속된다. 이와 같이 유령의 존재를 인정하는 활동은 분향에서 음식과 돈의 봉헌, 혹은 때로 의례전문가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지는 본격적인 진혼 의식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46)


"혼과 유령에 관한 베트남인들의 담론에는 비판적인 역사적 의미가 풍부하게 담겨 있고, 이 담론이 널리 확산되는 이유는 정확히 그것을 통해 당대의 삶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도덕적·정치적 쟁점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쟁유령 현상은 역사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된 인간의 조건을 반영하고, 때로 헤겔의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 즉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정신으로 묘사되는 것과 긴밀한 친화성을 가진다. 가령, (남베트남군 군인으로 작전 중 사망한) 공산당 간부의 형이 유령으로 출현한 것은 친족영역 내에서 그의 기억의 부재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외세라는 공동의 적에 저항해서 싸운 통일된 '인민의 전쟁'이라는 공식적 패러다임 내에서 은닉되고 설명되지 않는 내전-냉전의 유산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주로 가족의 문제이지만 또한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비무장 민간인의 엄청난 희생과 그들의 기억에 대한 권력구조의 무관심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와도 연결된다."(48-9)


"베트남인들의 개념체계에 따르면, 유령은 망자의 세계에서 이방인 혹은 외부자를 뜻하는 응으어이 응오아이(nguoi ngoai)이다. 그것은 '나쁜 죽음', 즉 베트남인들이 〈객사〉(쩻 드엉, chet duong)라고 부르는 고통스럽고 폭력적인 죽음에서 비롯된다. 이승의 이방인이 정착할 장소를 찾지 못하고 이 마을 저 마을로 옮겨 다니는 것처럼, 유령은 강제된 이동으로 인해 기억을 정박할 장소 없이 이승과 저승의 변두리에서 고통스럽게 떠돌아야만 하는 존재로 상상된다. 이승에서 이방인이 동질적인 배경의 결여라는 특징을 통해 정주민과 구별되는 것처럼, 유령들 또한 다양한 역사적 삶의 배경을 가진 개인들로 이루어진 혼성의 집단을 구성한다. 유령의 삶은 이러한 이동성과 다양성이라는 특질로 인해 조상의 삶과 구별된다. 조상의 '좋은 죽음', 즉 비폭력적이고 의례적으로 승인되는 〈집에서의 죽음〉(쩻 냐, chet nha)에 대한 기억은 계보적·공간적 질서에 따라 사회적 체계에 항구적으로 정착된다."(52-3)


2 대규모 발굴


"베트남에서 1990년대는 모든 면에서 가공할 변화의 시대였다. 외부 세계의 시각에서 볼 때 베트남은 이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연이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가난하고 고립된 나라에서 정치적으로 안정적이고 경제적으로 활력이 넘치는 나라로 변모했다. 베트남은 1980년대에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저생산성이라는 심각한 경제위기에 빠져 있었다. 일부 관찰자들은 그 이유를 여러 요인들 중에서도 특히 관료사회주의의 중앙집중식 계획경제에 대한 인민들의 일상적 저항에서 찾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베트남의 정치지도자들은 1980년대 후반 규제적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전반적인 경제개혁 프로그램(도이 머이, doi moi)을 도입했다. 경제 이데올로기의 변화는 종교적 숭배를 포함하는 다양한 공동체활동과 결사활동에 대한 정치적 관용의 확대를 수반했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 베트남 사회에서 발생한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전국적 차원의 종교와 의례의 부활〉이었다."(72-3)


"마크 브래들리는 베트남 혁명을 냉전기에 완전히 독립적인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탈식민지적 비전의 일반적인 추구로 정의한다. 따라서 최근 베트남의 사회적 전환은, 과거의 역사적 투쟁이 단순히 어떤 특수한 정치경제적 질서의 실현에 관한 것이 아니었듯, 단순히 하나의 경제 형태에서 다른 경제 형태로의 변화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경제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와 관련된 경제적 도덕성에 관한 질문에 초점을 맞추는 최근의 탈사회주의 논쟁은 러시아, 동유럽, 중부유럽의 맥락에서는 의의를 가진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의를 진지한 재고 없이 20세기 후반의 정치사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희생시킨 사회세력의 폭력적인 양극화를 뜻하는, (유럽의 일부를 포함하는)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단순히 확장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이 주장은 정치적 양극성의 파괴적인 측면과 그것이 당대의 삶에 미치는 지속적인 영향을 고려하지 않는, 마찬가지로 유럽중심적인 탈사회주의 정의에도 적용된다."(77-8)


"일군의 학자들은 산 자와 망자 간의 호혜적 관계라는 관념이 베트남의 문화적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 베트남에서 의례활동이 부활하는 현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종교적 부흥을 한편으로 시장에 토대를 둔 경제적 실천의 강화,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민간의 종교활동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완화를 연관시키는 상이한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테일러는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최근의 주술 열기는 고대적인 것의 부활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경제대안의 포기가 수반하는 예측 불가능하고 부정적인 사회관계를 드러내는 탈사회주의적 현재의 징후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방향의 연구는 경제 내에서 상품관계의 부상을 종교에서 주술적 관념의 퇴화와 동일시하는 막스 베버의 관점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주술적 관념을 사회진화의 낮은 단계에 있는 고대적 혹은 전통적 사회형태와 동일시하는 과거의 인류학적 전통에 대한 자기비판이기도 하다."(96)


3 작전 중 실종


"무명용사 무덤은 현대 현대 민족주의 물질문화의 중요한 초점 중 하나이다. 이 무덤은 흔히 아무도 매장되어 있지 않은 빈 무덤인데, 제이 윈터에 따르면 누구의 무덤도 아닌 빈 무덤이 모든 전쟁 사망자들을 위한 무덤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이 그 이면의 사고방식이다." "과거에는 이러한 추상적인 군인의 매장이 전쟁의 종식을 표식하기 위해 이루어졌고, 사람들이 희생의 성스러운 목적을 기억하고 대규모 죽음의 비극적 현실을 망각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그 후에는 무명용사의 순수한 정신을 통해 국가를 축복했다. 냉전시대에는 군사적 갈등의 종식이 정치적 대치의 종식을 의미하지 않았고, 추가적인 지정학적 목적을 위해 죽은 군인들이 동원되었다. 이 새로운 시대에 가치 있는 무명용사는 더 이상 무덤에 묻힌 환유적(換喩的) 신체가 아니라, 본국으로 송환되어 매장되지 않은 수많은 실제적인 신체들이었는데 이 시신들은 연장된 이데올로기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부분적으로 기여했다."(105-7)


"베트남에서도 사망한 영웅의 실종된 신체(nhung nguio mat tich)를 되찾는 일이 1975년 사이공 함락 이후 군 당국과 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전후 베트남의 국가체계는 기념활동의 통제를 크게 강조했고, 미국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의 죽음을 프랑스 전쟁의 영웅들, 그리고 고대적 전승의 전설적 영웅들과 하나로 연결하는 영웅적 저항전쟁의 계보를 선전했다. 베트남의 모든 지방 행정단위에는 공동체의 공적 공간 중앙에 전몰자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이 장소의 중심에 위치한 고딕풍의 기념비에는 〈우리 조상들의 땅이 당신들의 훈공을 기억합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패트리샤 펠리에 따르면, 이러한 국가적 기억의 구성은 기념의 초점을 전통적인 사회단위인 가족과 촌락에서 국가로 바꾸었다." "따라서 전쟁영웅과 혁명지도자에 대한 기억이 가내 공간의 조상위패를 대체하고, 공동체 사원은 해체되어 인민회관에 자리를 내주었다."(110-2)


"〈작전 중 실종자(MIA)〉 탐색활동은 보통 가족들을 현지답사에 참여시켰는데, 그 이유는 실종된 유해가 친족의 시체가 접근하는 데 반응해서 어떤 결정적인 표식이나 신호(저우 히에우, dau hieu)를 보낼 것이라는 추정 때문이다. 찌엔 쌤 마는 MIA 프로그램의 초기 단계에서 다른 대부분의 비공식적 베트남 영매들과 마찬가지로 실종자 가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정서적으로 힘들고 육체적으로 소모도가 높은 탐색과 재매장의 긴 과정을 밟았다." "대부분의 베트남 영매들은 이러한 힘겨운 송환과 재화합의 과정에 활동적으로 참여하고, 그것이 초래하는 긴장과 트라우마를 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이 탐색 후 재매장 작업에서 수행하는 사제 역할은 탐색-발견 활동에 주술적으로 참여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가족들이 울부짖을 때 영매는 개인적인 통한(痛恨) 대신 커뮤니케이션을 장려했다. 요령 있는 영매는 결정적인 상황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웃길 수 있다."(121-2)


"한편 꽝남 성 당국은 관례에서 다소 벗어난 유해탐색 활동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대민관계에서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공식적인 탐색활동을 자신들의 실종된 친지들에게까지 확대해달라는 시민들의 탄원이 빗발쳤다. 대중들의 요구는 강력했고 이는 결국 당국으로 하여금 유해탐색 프로그램을 재고하도록 만들었다. 베트남 국가 관료기구는 합리적 정신과 무신론적 도덕성을 공무원들에게 엄격하게 강조했기 때문에 관료들 사이에서 다소 혼탁한 논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이 전쟁 영웅의 유해를 되찾는 영예로운 동기와 부분적으로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만약 공산당 당국이 그 탄원을 무시하면 다소 자기모순적인 상황이 초래될 판국이었다. 결국 땀끼 시 당국은 과감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당국은 시민들이 실종된 친지 문제를 찾기 위해 종교적 영매에게 의뢰할 수 있도록 허용해달라고 정부에 공식적으로 청원할 수 있는 신청서를 발행했다."(125)


"1990년대 베트남과 미국의 화해 과정에서 미 행정부는 부분적으로 이전 적성국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MIA 문제에 가시적인 진척이 있기를 조급하게 기대하고 있었다. 베트남 정부는 정부대로 경제제재를 종식시키는 데 명운을 걸고 있었고, 발견된 미국인 유해의 수가 가시적으로 증가하기를 미국 정부만큼이나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유해탐색의 효율성을 높이는 일은 한편으로 국제관계를 촉진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개혁이 수반하는 불확실성에 직면해서 당의 도덕적 기반을 강화한다는 국내적 목적을 위해 필요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찌엔은 1995년 인도차이나에 파견된 미국 MIA 탐색대와 접촉하게 되었고, 이듬해에는 라오스 국경 지역에서 세 명의 실종 미군 비엣 끽(biet kich), 즉 베트남어로 특수부대 요원을 찾기 위한 탐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찌엔은 베트남-미국 합작 MIA 탐색활동의 성공을 위해 수호신에게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127)


4 유령 다리


"남베트남군과 미군의 통제하에 있던 남부와 중부 베트남의 도시 지역에는 또(to) 혹은 또 바 응으어이(to ba nguoi, 삼인조)라 불렸던 전시 베트콩 혁명소조가 있었다. 이 소조는 전형적으로 혁명과업에 충성하는 비밀 시민활동가를 지칭하는 꺼 소 깍망(co so cach mang), 즉 〈혁명의 토대(infrastructure of revolution)〉 남녀 3~5명으로 조직되었다. 각 소조는 보통 전체 서클의 규모와 범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오늘날의 전문용어로 네트워크의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보다 광범위한 서클에 연결되어 있었다." "간부와 공작원 사이의 관계는 위계적이기도 했고 수평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도덕적으로는 공작원과 상급자 모두 서로를 같은 목적을 공유한 파트너, 즉 동찌(dong chi)라 부르고 또 그렇게 인식하면서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소조 조직은 개별 조직의 실질적인 자율성을 상실하지 않고도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149-50)


"호랑이 사원 공동체는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도시 근교 공동체의 전형이다. 이 지역은 반식민주의 베트민 레지스탕스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대규모 전쟁 묘지로 이어지는 길 끝자락에 은닉해 있는 사원은 서쪽으로 하위 중산층 주택들을 마주하고 있다. 이들 주택은 북쪽으로는 오래된 교도소와, 서쪽으로는 군부대와 맞닿아 있다." "이제 더 이상 죄수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웃들의 구술사에서 여러 번 드러나듯이 일부 주민들은 아직도 사형수들의 유령이 자기 집 뒤뜰이나 부엌으로 기어들어 올까 두려워한다. 그 지역의 토착적 지식체계에 따르면 살아가면서 죄수의 유령과 조우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그 유령은 긴 머리카락에 가슴을 풀어헤치고는 사람들을 유혹해서 죽음으로 이끄는 여자 물귀신으로 악명 높은 마우 마(Mau Ma)처럼 훼손된 몸과 늘어진 혀를 가지고 있다. 이웃의 젊은 여자 세 명이 이 공포스러운 환영을 경험했고, 그들 중 한 명은 끝내 그 충격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153-4)


"이 마을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부역자〉와 〈애국자〉가 뒤섞여 있는 곳이다. 사람들의 회상에 따르면, 이웃이나 친구가 누군가를 배신했다는 소문은 읍내 전체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고, 이는 다시 은밀함과 상호불신을 강화했다. 역설적이게도 전쟁 지도부의 이와 같은 분열 통치전략은 민간인들 사이에 비밀 혁명지원 네트워크가 확장되는 데 기여했다. 민간 활동가들의 정치적·도덕적 동기 이면에는, 전쟁 상황에서 깍 망(cach mang, 혁명적) 네트워크가 유일하게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사회조직이라는 강력한 인식이 존재했다. 물질적·정신적으로 심각하게 고립되어 있었던 수많은 절망적 베트남인들, 특히 여성들은 인간적 연대의식을 회복하려는 혁명조직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꺼 소 활동가였던 한 여성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남편은 없어도 살 수 있었다. 친척이 없어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웃이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이웃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156)


"호랑이 사원의 존재는 그 공동체의 회복력에 기여했다. 부역자 가족에 속하든 애국자 가족에 속하든, 거의 모든 주민들은 그들이 전쟁 동안 그렇게 했던 것처럼 사원의 유지와 의례일정에 참여했다. 사원의 활동, 특히 매년 음력 1월에 열리는 개원식에 대한 주민들의 공헌은 지연이나 혈연이 거의 없는 사람들을 공동체로 만들어내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사지절단 랍 같은 사람들도 공동체의 결속력에 기여했다. 그는 혁명 네트워크에 속해서 전쟁을 치렀다. 그는 또한 국가의 편에서 그 정반대의 전쟁을 치렀다. 그의 양극화된 정체성은 하나의 상실된 전체로 융합한다. 그는 애국자 가족의 명시적인 자부심에 공감하면서 부역자 가족의 보이지 않는 낙인에 대해서도 배려해준다. 랍과 같은 사람은 흔히 그 자부심이나 낙인 이면에 말해지지 않은 불확실성의 역사가 숨겨져 있고, 전쟁 중 생애사가 매우 분명한 궤적을 그리고 있는 보통 사람은 아주 드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164-5)


"사지가 절단된 자는 두 개의 모순적인 현실, 즉 살아 있는 사지의 역사적 현실과 그 부재의 주어진 현실을 동시에 받아들인다. 이 두 종류의 〈사지〉는 절단된 몸의 생생한 현실 속에서 동일한 시공간을 점유한다. 따라서 부재하는 사지는 과거로 회귀하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의 살아 있는 체화된 기억이 됨으로써 유사현존(quasi-present)한다. 이 인간 신체의 현상학을 확장하면, 사회적 신체의 절단된 부분이 두 개의 모순적인 현실, 즉 살아 있는 전체의 역사적 현실과 상실된 부분의 주어진 현실을 동시에 유지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호랑이 사원 공동체에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고 온전하게 살아남은 가족이 단 하나도 없다." "만약 (다양한 수준의 사지절단 상처를 입은) 가족이라는 관념을 확대 친족 혹은 친구와 이웃을 포함하는 수준으로 확대한다면, 그 상실과 상처는 점점 더 정치적으로 분류하기 어렵게 된다. 정치적 정체성은 그 정체성을 보유한 자의 범위를 어떻게 정하는가에 따라 변화한다."(166-7)


5 객사


"베트남 전쟁은 엄청나게 많은 수의 농촌 인구를 생계의 토대와 도덕적 애착의 장소로부터 이탈시켰다. 미국 전쟁의 기획자들은 농촌 주민들에게 도시 슬럼이나 전략촌으로의 강제이주에 저항하도록 부추겼고, 〈조상들의 땅에서 한 자, 한 치도 떠나지 말라〉고 선전했다. 이러한 전면전의 현실에서 객지에서의 죽음은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흔하게 발생하는 일이었고, 따라서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수많은 무명 사망자들의 얕은 무덤을 발견하는 것 또한 흔한 일이었다. 이러한 이탈된 사후의 삶이라는 상황, 즉 한 장소에서는 실종되고 다른 장소에서는 신원불명 혹은 무명으로 남아 있는 상태는 베트남인들이 〈객사(chet duong, 길거리에서의 죽음)〉라는 개념으로 지칭하는 상황이다. 이 개념은 〈집에서의 죽음〉 혹은 〈가정에서의 죽음(chet nha)〉이라는 정반대의 개념과 공존하고, 이들 두 개념이 함께 베트남의 가내 기념의례를 통해 표현되는 집 중심적인 도덕적 세계관을 구성하고 있다."(179-80)


"아서 울프가 종교적 믿음에 관해 질문을 했을 때 대만의 한 촌락인들은 조상과 유령을 분명하게 구분했다. 그는 〈(의례적 의무의) 연속체 한쪽 끝에 있는 죽음은 진정한 조상이고, 다른쪽 끝에 있는 죽음의 거의 유령이다〉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울프는 또한 마을 주민들의 일상생활에서 죽음에 관한 이 두 가지 개념적으로 상반되는 범주가 상호변환이 가능한 상태임에 주목했다. 그는 후자의 예로 유령 조우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마을 들판에서 유령을 본 한 남자가 그 유령이 들 건너편 마을에 사는 가족의 한 조상 혼령이라고 믿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유령을 본 다음 날이 이 조상의 기일이었고, 그래서 그 유령은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사례 및 여타 관련 사건에 근거해서, 울프는 유령의 변화하는 정체성에 관해 〈한 사람의 조상은 다른 사람의 유령이다〉라는 널리 인용되는 주장을 한다. 즉, 망자의 사회적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는 상황이 아니라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186)


"울프의 발견을 원용해보면, 유령들은 (의례적으로 조상의 혼령과 통합되어 있는) 사회적 삶의 질서에 대해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추방 상태에 있는 현실적 존재의 거울이 된다. 이탈 상태의 삶은 정주 상태의 삶과 다른 방식으로 유령과 관계 맺고, 유령과 인간 사이의 거리 또한 이탈의 역사가 깊어짐에 따라 좁아질 수 있다. 이러한 논지로부터 최근 베트남에서 관찰되는 유령과의 사회적 친밀성에 고유한 역사적 배경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 도출된다. 베트남인들이 망자의 이탈된 혼령과 맺는 친밀한 관계는 그들이 대규모 이탈의 역사와 맺고 있는 친숙한 관계의 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담론 현상으로서의 유령이 조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인들의 자아정체성을 구성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유령의 생생한 존재가 단지 〈조상들의 사회〉와 상징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사회적 자아의 반정립이라기보다 역사적 자아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면, 그들과의 의례적 상호작용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188)


"베트남의 대중적인 노래와 시는 고향에 대한 사랑을 찬미하고 집을 떠난 삶을 한탄하는 내용으로 넘쳐난다. 이들 노래 중 일부는 향수를 시적으로 표현하는 데 바 매 꾸에(ba me que), 즉 〈고향의 어머니〉를 핵심 상징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대중 동원이 지속되는 장에서, 바 매 꾸에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또 다른 모성이 전쟁의 심리학을 구성했다. 대리모성(surrogate motherhood)은 이 시기 하나의 광범위한 현상이었다. 미국전쟁 당시 하노이의 전쟁계획은 대중적인 지지에 광범위하게 의존했는데, 이는 다시 〈인민의 자식〉 혹은 〈전투원의 어머니〉라는 전략의 성공에 달려 있었다." "군인들이 전투에 나갈 때면 어머니 활동가들은 입양한 자식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했다. 이러한 그들의 기도는 흔히 미국 편인 〈저쪽 편〉에 복무하는 자식들뿐만 아니라 혁명의 편인 〈이쪽 편〉을 위해 싸우는 자식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 어머니들 중에는 싸움의 양측 모두에 친자식이 있는 이들이 많았다."(188-97)


"과거에는 적이었던 이들 사이의 의사친족적 유대는 전쟁 전 기간에 걸쳐 실제 혈연관계만큼이나 강하게 유지되었다. (비밀 혁명 네트워크에서 활동한) 꺼 소 어머니들에게, 젊은 병사들의 성공적인 탈주는 먼 타지에 있는 친자식들이 살아서 고향에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강화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머니 활동가들이 노심초사하며 수행한 여러 정치활동 중에서도 특히 입양과 탈영 조직을 가장 헌신적이고 정성스럽게 운영했던 이유를 이해할 만하다. 이 여성들에게 이러한 활동의 의미는 단지 적의 사기와 도덕성을 약화시키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입양 군인들에 대한 사랑이 미지의 전장에서 싸우는 친자식들이 미지의 어머니들에 의해 어떻게든 사랑받고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믿음도 강화했다. 원격적 호혜행위에 관한 이러한 믿음이 헛된 희망으로 판명되는 경우가 매우 흔했지만, 어떠한 정치적 폭력과 감시도 이러한 희망을 전적으로 파괴시킬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다."(199)


"유령은 사람들이 친숙하고 이상화된 집을 조상들을 위한 기억의 장소와 동일시할 때는 그에 대해 외부자가 된다. 이 맥락에서 조상들을 위한 기억은 그 장소를 계보적 통일성을 위한 배타적인 집으로 전용한다. 반면 사람들이 거주 장소(dwelling place)의 지평에서 단지 일부에 불과한 '계보적으로 제도화된 집'에서 벗어나 보다 광범위한 지평으로 나아갈 때 유령은 내부자가 된다. 유령은 전자에서는 기이한 것(das unheimlich)를 구성하고, 후자에서는 집(Heim)의 혼령을 구성한다. 돈 람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만약 (양방향의 의례적 실천으로 표현되는) 베트남의 혼령숭배 의례가 하나의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체계를 구성한다면, 나는 한편으로 폐쇄적이고 계보적으로 조성된 토착적 장소와 다른 한편으로 속박되지 않고 근본적으로 비계보적인 대안적 장소 및 보다 광범위하고 생성적인 의미의 고향-장소의 평행적 공존이 이러한 민주적인 종교성의 핵심을 구성한다고 주장하고 싶다."(210)


# 베트남의 혼령숭배 의례 : 가내 영역에서는 친족들이 함께 조상의 제단을 향해 절을 한 후, 개별적으로 외부의 제단으로 걸어나가 유령들을 위해 동일한 행위를 반복한다.


6 유령의 변환


"유령 소금은 베트남인들의 역사적 상상력 속에 이미 구축되어 있는 관념이다. 그들의 가장 오래된 역사적 속담 중 하나가 바로 소금 섭취와 연관되어 있다. 사람들은 하나의 사건을 익숙한 역사적 플롯 속에서 조급하게 설명하려고 할 때, 〈조상이 소금을 너무 많이 먹어서 자손들이 목마르다〉고 말한다. 이 플롯에서 진정한 인간의 욕망은 고립된 개인의 욕망이 아니다. 욕망을 느끼는 것은 개인이지만, 욕망의 근원은 영혼의 유령 소금과 마찬가지로 다른 누군가에게 있을 수 있다. 바로 이 다른 누군가의 존재가 물을 짜게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기억하려는 욕망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발생하고, 기억하는 자아와 기억되는 타자 사이에 공유되는 무엇일 수 있다." "자아의 불완전한 자율성과 타자의 불완전한 수동성은 모든 형태의 기념의식과 사회적 교환에 내재할 것이다. 유령 소금의 경험은 기억하기의 간주관적(間主觀的, intersubjective)인 속성을 신체적으로 명확하게 만든다."(218-9)


"베트남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혼(hon)이라는 영적인 영혼과 비어(via)라는 물질적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죽은 자들의 갈증은 물질적 영혼이 느끼는 물질적인 현상이다." "내가 이해한 베트남인들의 대중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사후에 영적인 영혼은 반드시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체성의 특성을 가진다. 마찬가지로 망자의 물질적 영혼은 개별적으로 특수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특성을 가진다. 따라서 의례기간 동안 생리 중인 여성의 참여로 인해 초래된 불경에 화를 내는 것으로 알려진 껌레의 고래사원 수호정령은 자신의 분노를 불경을 저지른 외부 방문자가 아니라 무고한 어촌 가족을 익사시키는 형태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고래의 영적 영혼은 살아 있는 우리가 물질적 영혼을 통해 느끼듯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공동체적이고 물질적으로 생각한다. 한 어촌 공동체의 고래신위에게 물질적 토대는 바로 그 공동체이다."(219-21)


"〈객사〉라는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은 영혼들을 내세의 감옥에 가두어버리고, 산 자들 측에서 그들의 비참한 존재에 대해 기억하지 않으면 이들 역사의 수감자 측에서는 불만의 강도와 양이 증가한다. 이러한 개념적인 도식에서, 산 자들은 행동하지 않음을 통해 망자들이 불만 증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살아 있는 세대가 비극적 죽음의 발생에 반드시 책임이 없을 수도 있지만(〈우연한 사고〉일 수 있다), 그들이 그 죽음을 점점 더 불만스러운 죽음으로 만들기는 쉽다. 이러한 기억 이론에서 트라우마는 망자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인 상처인 것이다. 산 자들이 타자의 육체적 고통에 대해 이러한 윤리적 책임감을 의식하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실질적인 행동에 착수할 때 불만족이라는 축적의 경제는 기억이라는 분배의 도덕성에 굴복하게 된다. 망자들의 불만스러운 기억은 오직 산 자들에 의해 인정되고 공유될 때에만 그 트라우마적 효과를 상실하게 된다."(261)


"베트남인들은 유령의 변환을 자이 오안(giai oan), 즉 〈불만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이는 〈감옥을 열다〉 혹은 〈감옥을 파괴하다〉라는 뜻의 자이 응욱(giai nguc)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 이 관념은 비극적인 죽음의 역사가 망자의 영혼을 죽음의 치명적 드라마에 옭아매고 그것을 죽은 장소에 가두어서 저승에서의 삶에 부정적인 조건을 생성한다는 것이다. 죽음으로의 비극적 혹은 폭력적 이행은 사후에 감금의 상황으로 변화하며, 그 장소에 더 많은 새로운 운명적 수감자를 초래한다." "따라서 불만스러운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쌍방향의 과정이다. 그것은 감옥 개방을 위한 주문 낭송, 그리고 여타 관련된 의례적 행위같이 공감하는 외부자의 개입을 반드시 수반할 뿐만 아니라, 운명의 수감자 스스로가 해방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 또한 필요로 한다. 유령 출현은 이러한 자유를 향한 의지가 존재함을 증거하고, 통상 이를 토대로 외부자의 의례적 개입이 이루어진다."(260-2)


7 유령을 위한 돈


"죽음과 부는 다른 많은 문화적 전통에서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의 전통에서도 익숙한 조합이다. 베트남 전통 사회에서 부유함을 과시하는 주된 방법 중 하나가 죽음(혹은 결혼)과 관련된 의례를 통해서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죽음과 관련해서 부를 과시하는 수단은 세 가지, 즉 조상 사당, 가족묘지, 장례식이다. 고인을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은 부의 상징만이 아니었다. 고인의 호사스러움은 가족의 부 그 자체이기도 했다. 클리퍼드 기어츠에 따르면, 의례의 화려함은 〈사회질서의 단순한 반영일 뿐만 아니라 전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부유하고 성공했다면 반드시 일반대중이 눈에 그렇게 보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부유함은 대중적으로 인정되는 형태로 과시되어 이웃과 친구들이 그의 부를 보고 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실제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호사스러운 매장의례와 매장시설은 조상을 부유하게 만들고, 이것이 부유한 자의 위신에 중요한 조건으로 간주된다."(277-9)


"호우 칭-랑에 따르면, 호화로운 죽음이라는 개념은 삶을 은행 대출의 한 유형으로 간주하는 고대적인 관념과 연관되어 있다. 오래된 중국의 믿음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출생은 〈저세상의 금고(the Treasury of the Other World)〉 혹은 〈지옥은행(The Bank of Hell)〉의 대출 승인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삶은 은행의 대출기록에 상징적으로 대응해서 전개된다. 이론적으로 한 개인은 삶의 조건이 소박할수록, 그리고 세속적 쾌락에 탐닉하지 않을수록 자신의 대출을 더 오랫동안 누릴 수 있다. 만약 그 사람이 대출금을 다 써버리고 사망하면 반드시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데, 이 부담은 통상 현재 도산 상태인 대출자의 자손에게 돌아간다. 그는 실질적이든 상징적이든 재화의 형태로 바치는 사후의 제물과 망자에게 돈을 바치는 연관된 관습이 고대 중국에서 거의 법적으로 의무적인 채무상환(호우에 따르면 〈사법적인 돈)〉 행위였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279)


"경제개혁 이후 베트남의 경제학은 대중적인 수준에서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가지 정치경제학의 혼합이다. 축적과 투자의 이론은 산 자의 세계에 적용된다. 절약은 내가 만난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에게 1차적이고 근본적인 삶의 기술이자 국가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요소였고, 베트남의 국가체제 또한 자본의 축적에 몰두했다." "다른 한편, 망자와 관련된 경제적 영역에서는 자제의 미덕을 보기 힘들었다. 큰 돈은 죽음의 순간부터 흘러들어오기 시작한다." "진짜 재화를 망자와 함께 묻는 봉건 왕실의 매장 관습과 달리, 오늘날의 장례 산업은 그것이 재현하는 부의 아주 일부만 지불해도 되는 장례 제물 창고를 운영한다. 이 산업은 옛 공예인 길드의 한 병형으로 시장개혁 이후 번창해왔다. 이러한 망자를 위한 가상 경제에서는 현실 경제에서 어려운 일이지만 가난한 자가 부자 행세를 할 수 있고,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간의 차이도 현실의 삶에서보다 훨씬 덜 분명해진다."(281-2)


"1990년대에는 의례용 달러(베트남 발음으로 〈돌라Do La〉) 지전이 가내생활에서 익숙한 물건으로 자리잡았다. 이 특별한 봉헌 화폐의 기원에 관한 토착적 설명방식은 다양했다. 필자의 정보제공자 중 한 명은 일반적 교환 이론과 흡사한 설명을 제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부유해지면서, 말하자면 덜 가난해지면서, 빈곤과 폭력 외에는 경험해본 적이 없는 망자들과 자신의 부를 나누어 갖기를 소망한다. 미국 돈인가 베트남 돈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망자들이 우리 돈을 받을 수 있든 없든,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 이면에 있는 것, 즉 우리의 동기와 좋은 기분,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전쟁기간 동안 당 간부였던 이 남성에게 돈의 이면에 숨겨진 것은 나눔과 분배의 욕구이다. 혁명의 역사를 이렇게 우아하게 묘사하는 사람에게 이 공유의 욕구는 코코넛 나무가 코코넛을 생산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인간성의 본질이다."(286-7)


"돌라 지전은 1990년대 말까지 베트남인들의 기념의례 경관에서 완전히 익숙한 대상으로 자리매김했다." "돌라 지전의 번성을 신, 조상, 유령이라는 위계적 관념에 불확실성이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의례적 화려함을 (전시에 관한 정치학이 아니라) 전시(展示)의 정치학으로 해석하는 것, 그리고 상징적 권력이라는 연관된 개념을 돌이켜 보도록 하자. 나는 전통적인 질서 내에서 베트남의 의례용 화폐가 옹 바(신과 조상) 대 꼬박(유령)의 도덕적인 상징적 위계를 확정하는 수단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전에는 돈이 위계적이고 동심원적인 질서를 지배했던 것처럼, 이제는 돈이 이 질서를 교란하는 수단으로 보인다. 돌라 의례용 화폐는 위계적으로 제도화된 가치의 영역들을 포괄하고, 이전에는 분리되어 있던 이들 영역을 하나의 단일한 개념적 통일체로 통합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의례용 지전의 달러화가 함축하는 의미 하나가 명백해진다. 즉 달러화는 의례용 지전을 화폐화한다."(304-5)


"전통적인 의례용 화폐의 운동을 한정했던 눈에 띄지 않는 (전환불가능하고 내생적인) 가치의 영역들이 이제는 돌라의 초(超)영역적 순환에 취약한 상태에 처해 있다. 돌라는 내세의 재정경제를 단순화하고 다중심적 체계를 확장된 단일 영역으로 통합시켜왔다. 한편으로 기성의 신, 혹은 계보적으로 연결된 조상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연고 없이 길거리에서 떠도는 주변적인 유령 사이의 차이는 불타는 돌라 화폐의 힘과 인기에 비례해서 점점 더 주변화되어가고 있다. 달러화는 이러한 범주들 사이의 전통적인 위계를 붕괴시키고 엄(am, 저승) 세계 내 그들의 정치적 관계를 민주화하는 데 기여한다. 이 화폐는 주변적인 유령들과 의례조직의 중앙에 위치하는 의례적으로 수용된 조상 및 기성 신위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이들 주변적인 유령은 거리에서 많은 돈을 벌고, 그들이 번 돈은 초자연적인 세계에서 다른 보다 지위가 높은 사회 계급과 권력경쟁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전환 가능한 통화이다."(305-6)


결론


"죽음의 재현에 존재하는 이중의 종교적 상징주의에 관한 고전적인 논문에서, 로버트 허츠는 어떻게 사회가 오른손과 왼손 그리고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같이 명백하게 동일한 상징에 기초해서 개념적인 도덕적 위서체계를 구성하는지를 탐구했다. 그는 왜 유럽의 언어를 위시한 여러 언어들에서 오른편이 힘, 능란함, 신뢰, 법과 순수성─여기에는 허츠가 인용하는 민족지 자료에서 의례적·은유적으로 오른손과 연결되는 〈좋은 죽음〉이 포함된다─등 긍정적인 가치들을 재현하는 반면, 왼쪽은 이에 반대되는 모든 가치와 불길한 의미들─이는 그 〈불안하고 악의적인 영혼〉에 대해 사회가 배제의 태도를 견지한다고 여겨지는 〈나쁜 죽음〉을 포함한다─을 상징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졌다. 허츠는 왼손과 오른손의 상징적 대조를 생정치적(bio-political) 현상, 즉 사회가 〈도덕적 세계의 가치 대립과 폭력적인 대조〉를 각인하는 인간 신체의 조건으로 개념화하였다."(316-7)


"허츠는 좌와 우의 반정립이 보완적인 양극성임과 동시에 비대칭적인 관계라고 보았는데, 전자는 이중적 인간(homo duplex)의 자연적인 조건이고 후자는 집합적이고 위계적인 규범을 개인의 몸에 부과함으로써 비롯된다. 더욱이 그는 상징적 양극성이 원시 사회 혹은 평등주의 사회에서는 〈역전될 수 있는 이원성〉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이들 사회가 산 자의 삶과 관련해서 고정된 도덕적 위계를 가정하지 않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망자의 삶에 관해서도 그러한 개념이 부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징적 역전성(reversibility)의 이러한 측면은 왜 평등주의 사회에서의 죽음의례(혹은 그것의 부재)가 위계적인 사회의 관찰에 입각해 있는 도덕적 위계와 상징적 정복의 이론에 충격적일 정도로 부합하지 않아 보이는가를 설명한다." "허츠는 사회적 진보에서 양능적 인간 신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양능적 인간 신체는 우파와 좌파라는 도덕적인 상징적 위계로부터 자유로운 민주적인 사회적 신체를 표상한다."(317-8)


"(냉전을 단순한 전쟁 억제가 아니라 폭력적인 이데올로기 대립으로서 경험한) 베트남의 수많은 개인과 가족들은 친족 관계가 있는 전몰자를 기억해야 하는 가족의 의무와 혁명국가에 대항해서 싸웠던 사람들을 기억하지 말아야 하는 정치적 의무 사이에서 고뇌해왔다. 오늘날 이들 가족은 지금까지 〈저편(ben kia, 미국 편)〉으로 오명화된 조상의 기억을 위해 적절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고심하고 있고, 따라서 이 기억을 가족과 공동체의 의례공간 내에 있는 〈이편(bent ta, 혁명의 편)〉의 죽음에 대한 기억과 함께 명시적으로 공존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혁명전쟁의 반대편에서 죽은 형제의 혼령을 가내 의례로 초대하는 행위는 도덕적임과 동시에 정치적인 실천이다. 그것은 그 행위가 국가의 기억의 정치학에 내재하는 죽음의 거대한 도덕적 위계에 반작용하는 한에서, 그리고 아렌트가 〈정치적 고향을 가질 권리〉로 묘사한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이다."(321)


"보다 넓은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대규모 죽음의 역사에 대한 고려 없이 좌우의 역사를 생각할 수 없다. 좌와 우는 민족해방과 민족자결이라는 이상을 향해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양자 모두 반식민적 민족주의의 일부였다. 이어진 양극 시대에 이와 같은 민족주의는 민족적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 상대편을 정치적 통일체로부터 절멸시키는 것을 의미하게 된 내적 분쟁과 전쟁의 이데올로기로 변환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좌와 우의 정치적 역사는 인간적 삶의 역사 및 그것에 의해 분열된 사회제도로부터 분리해서 고려할 수 없으며, 냉전 이후의 〈새로운 친족〉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역사 속에서 사망한 유해의 기억으로부터 분리해서 고려할 수 없다." "1990년대 초 이래 베트남에서 발생한 일들은 이러한 화해의 희망적인 궤적을 따라 이루어졌고, 망자를 기억하고 달랠 수 있는 권리의 강화는 좌우를 초월한 이와 같은 중요한 사회적 진보에 중심적인 요소였다."(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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