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 전쟁은 계급 전쟁이다
매튜 클라인.마이클 페티스 지음, 이은경 옮김 / 시그마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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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이 책의 논지는 국가 내 불평등이 증가하면 국가 사이의 무역 갈등이 고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낙관적인 주장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계가, 국가나 경제 블록들 사이의 제로섬 충돌을 견뎌낼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중국인과 독일인은 악이 아니며, 우리는 다른 나라를 희생해야만 번영할 수 있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지난 수십 년간의 문제들은 지정학적 갈등이나 양립할 수 없는 민족적 성격에 뿌리를 두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막대한 수입이 부자 또는 그들이 지배하는 기업으로 흘러들어감으로써 생겨난 것들이다. 어떤 곳에서든 일반 사람들은 구매력─재화나 용역을 살 수 있는 재력─을 빼앗기고 있으며, 맹목적인 애국주의자와 기회주의자들은 일반 사람들의 이익이 근본적으로 상충하고 있다고 믿게끔 그들을 속이고 있다. 국가 내 경제 계급 간의 전반적인 갈등을, 첨예한 이해관계를 다투고 있는 국가 간의 연속적인 갈등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6-7)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당시 부유한 유럽 국가들에서 극도로 불평등한 소득분배란,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모든 생산품을 소비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으며, 반면 부자들은 투자할 돈은 많았지만 국내에서는 마땅한 투자 기회를 찾기가 힘든 상황이었음을 의미했다. 현지 소비자들이 더 많은 상품을 살 수 없는 상황에서 공장을 더 짓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소득 분배가 덜 불평등하게 이루어졌더라면, 노동자들은 더 많은 소비력을 가지고 자신들이 생산한 모든 것을 살 여유가 있었을 것이고, 부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투자 수익을 창출하기가 더 수월하게 그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그 시대의 엘리트들은 덜 불평등한 소득 분배를 선택하기를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거부로 인해 혁명을 조장할 수 있을 정도로 실업률이 높아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해결책은 과잉 생산량을 해외의 전속시장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난폭한 정복은 극심한 불평등이 초래한 거시경제 왜곡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였다."(12-3)


# 전속시장 : 선택의 여지없이 특정 상품을 사지 않을 수 없는 소비자 계층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 비평가인 존 홉슨은 '국내에서 건전한 투자처를 찾을 수 없는 잉여 자본'이 흘러갈 배출구를 찾아야 한다고 제국주의를 설명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많은 잉여 자금을 금권정치의 손에 쥐어주는' 경제·정치 시스템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이러한 소득이 한 계층에게 집중됨으로써 '사용할 수 없을 정도의 과도한 소비력'을 부자들에게 안겨주었다. 이는 결국 '소비만으로도 자본이 활성되고 이윤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자멸로 가는 길이었다. 따라서 부자들은 '수익성 있는 투자와 투기를 할 새로운 지역'을 해외에서 찾아야 했다. 결국 이러한 탐색은 국내의 강력한 이익단체들을 부추겼고, '그들의 경제적 자원의 커다란 부분을 점차 현재의 정치적 영역 밖에다 두면서, 새로운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정치적 확장 정책을 펼치도록 촉진시켰다'. 희망적인 소식이 있다면, 불평등과 제국주의의 불량스러운 결합은 소득분배를 바꿈으로서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13-4)


1 애덤 스미스에서 팀 쿡까지 : 세계 무역의 변화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 당시의 사람들은 먼 거리에 걸쳐 원자재와 완제품을 서로 즐겁게 거래했지만 중간재나 서비스는 거래하지 않았다. 당시 이용할 수 있는 통신 기술은 서로 다른 지역에 걸쳐 다양한 생산 단계를 조정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은 위험했고 전쟁은 흔했다." "리카도는 '대부분의 자본가'들이 '외국에서 자신들의 부를 불리기에 더 유리하도록 고용을 하기보다는 자국 내에서 낮은 수익률에 만족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는 또한 '모든 사람이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떠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는 본성' 때문에 자본의 유출을 꺼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카도의 미묘한 자유무역 사례는 각국의 지속적인 수익률 차이에 달려 있었고, 이는 결국 투자자들이 해외로 돈을 옮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 성립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정은 기술이 향상되고, 통신비용이 붕괴되고, 세계 정치가 변하면서 무너졌다."(23-4)


"조지 워싱턴과 알렉산더 해밀턴은 경제적인 국정운영기술의 다른 비전을 제시했다. 그들에게 국내 제조능력의 발전은 국가 안보를 위한 필수과제였다. 그들은 미국이 새로운 정치적 독립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밀턴은 제조업이 국가 안보에 기여하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미국 정부가 다른 나라의 정부들이 자국의 제조업 수출업자들에게 주는 '사례와 보수'에 맞추어 미국의 제조업자들을 보호하지 않는 한, 미국인들은 유럽의 생산업자들과 대등하게 경쟁하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외국산 제품에 부과하는 세금을 인상하고, 그 돈을 미국 최우선 순위의 상품 생산업자들에게 '장려금'으로 지불하도록 권고했다. 동시에 구리, 유황, 실크 등 원자재를 수입하는 데 부과된 미국의 관세를 철폐해 미국 제조업체의 원가를 낮추고자 했다. 이런 식의 정부 개입은 미국제 상품을 유럽에서 수입하는 상품에 비해 싸게 만들 것이었다."(24-6)


"1929년의 대공황은 1932년까지, 세계 경제의 단 11퍼센트를 차지하는 수준으로까지 국제 무역을 붕괴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국경을 오가는 상품과 서비스의 흐름은 전 세계 생산량의 15퍼센트를 밑돌았다. 기업 활동과 국경을 초월한 금융 붕괴의 즉각적인 영향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1930년 스무트 홀리 관세법과 미국이 촉발시킨 보호무역주의의 물결이었다. 수입품에 대한 미국의 징벌적인 세금이 세계적인 보복을 부추겼고, 그간 남아 있던 국제 경제체제마저 깨뜨리면서 경쟁적인 통화 평가절하, 관세 인상 그리고 반(反)세계화를 촉발시켰다. 미국은 19세기 말부터 과잉 생산을 흡수하기 위해 외국인 고객들에게 의존해왔고 당시 세계 역사상 가장 큰 무역수지 흑자를 냈다. 따라서 많은 수출시장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보호무역주의의 가장 큰 피해국 중 하나였다. 무역흑자가 큰 나라들은 생산하는 모든 것을 소비할 수 없기 때문에 국제 무역이 감소되는 것에 매우 취약하다."(35)


# Smoot-Hawley Tariff Act : 1930년 대공황 당시 미국이 마련한 보호관세법. 수입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골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직후, 44개국 대표들이 전후 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서 만났다. 목표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경제적 무정부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막자는 것이었는데, 이는 모두가 전쟁의 주요 원인이었다고 동의한 바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언급된 국제 무역의 부흥은 오늘날과는 매우 다른 맥락에서 일어나야 했다. 당시 운송비용은 여전히 매우 높았기 때문에 제조 공정을 광범위한 지역에 분산시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자본 역시 오늘날과 같이 어디든 이동시킬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사실, 브레튼우즈 협정의 두 주요 설계자인 해리 덱스터 화이트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국제무역이 부활하기를 모겐소만큼 열망했지만, 둘 중 누구도 거대한 자본의 이동성을 되찾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전쟁 전에 거대한 자본의 이동이 세계 무역을 왜곡시키고,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 엄청난 불균형을 초래했기 때문이다."(36-7)


#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성립


"전후의 정치적 제약─많은 탈식민지 국가들이 미국 모델을 따라 보호무역주의를 도입한─은 세계 무역을 느리게 회복시키는 원인의 일부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주요 걸림돌은 해운산업의 비효율성에 따른 높은 운송비였다. 비록 1950년대가 제트기, 로켓(추진)선, 수소폭탄의 시대였지만, 이 몇 년 동안 이곳저곳으로 물건을 옮기는 일은 19세기보다 더 느리고 더 비쌌다. 국제 무역은 총 경제 생산량에 비해, 20세기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100년 전보다 중요도가 절반 정도에 그쳤다. 게다가 현존하는 무역은 제조업이 아니라 기본 물품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세계는 우아한 아이디어, 즉 컨테이너의 상업화 덕분에 혁명을 맞이했다. 일단 사람들이 컨테이너를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되자, 장거리 운송은 이 평범한 금속 상자들 덕분에 간단하면서도 훨씬 더 싸게 획기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역량이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수준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세계 경제를 변화시켰다."(39-40)


"세계 제조업의 대부분은 미국, 독일, 중국(약 2007년까지는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3개국 간 제조 네트워크 중 하나에서 이루어진다. 이들 네트워크 내에서 중간에 들어가는 입력 물품의 거래는 모든 국제 무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반면, 완제품과 서비스의 국경 간 거래는 3분의 1에 불과하다(에너지와 금속 물품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이는 스미스와 리카도가 그렸던 세계나 심지어 1960년대의 세계와도 거리가 멀다. 이렇게 새로운 세계는 컨테이너화와 자유화 그리고 냉전의 종식이 가져온 결과다." "이러한 글로벌 가치사슬의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기존의 양국 교역 데이터는 더 이상 각국의 노동자와 기계가 창출하는 실제 가치를 측정하는 데 적합하지 않게 되었다. 독일 자동차는 동유럽 부품으로 제작되고 미국 트럭은 멕시코 부품으로 채워지는 것처럼, 중국(또는 오늘날 베트남)에서 조립되어 북미나 유럽으로 배송되는 여러 기구들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부품을 포함한 다양한 수입 부품으로 채워진다."(45-6)


"국제무역은 국가가 아니라 기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기업은 가능한 세금을 적게 지불하고자 하기 때문에 공식적인 무역 자료는 종종 실제의 무역 흐름을 왜곡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노동자로 가득 찬 공장이나 사무실 건물과 달리 특허와 기타 지적 재산은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몇 가지 양식만 적합하게 만족시키면 세계 어느 곳으로든 옮길 수 있다. 이 계획의 간단한 버전은 조세피난처에 자회사를 설립하고 그 자회사가 회사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특허권을 매각하는 것이다. 모회사는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자회사에서 정기 지급을 받으며, 종종 총 연구개발비(R&D) 몫으로 인용되며, 자회사는 그 회사가 세계에서 올리는 매출 중 큰 몫을 받는다. 거래를 정확하게 재정비하면 세금이 많은 곳에서 세금이 적은 곳으로 수익이 이전될 수 있다." "이러한 수익 이전은, 특히 기업들이 생산한 것의 가치를 점점 더 많은 무형자산으로 전환함에 따라 무역과 투자에 관한 공식 수치에도 이상한 영향을 끼쳤다."(48-51)


2 세계 금융의 성장


"국제 금융의 성장은 호황과 불황의 순환 속에서 일어났다. 매번 국제적인 대출 붐이 먼저 일어나고 똑같은 경제 현상이 동반되는 듯 보인다. 첫째, 일부 구조적 변화는 화폐의 정의와 액수를 크게 확장시켜 급속한 신용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1826~1837년과 1857~1873년에 규제 변화로 인해 은행 수가 공격적으로 늘어났다. 두 시기 모두 개발도상국에 대한 주요 대출 붐, 당시의 첨단 벤처기업과 기타 위험한 프로젝트의 거품이 특징이었다. 둘째로, 국내 시장의 자산 붐은 성공적인 투자자들이 점점 더 위험한 행동을 조장하면서, 대체로 더 큰 베팅을 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빌려서 생겨났다. 이러한 베팅이 성과를 거두면서 투자자들은 시장에 계속 투자하기를 원하게 되고 더 큰 이익을 얻는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건은 외국 증권을 유행시켜 종종 위험한 개발도상국으로 돈이 쏟아지게 했다." "이러한 붐은 대체로 갑작스럽게 확대된 대출이 훨씬 더 느닷없이 끝나면서 사그라든다."(63-4)


"19세기 초반의 영국을 보자.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영국은 급속한 경제 성장과 기술적 진보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1820년대의 호황을 촉발시킨 영국의 재정 상태는 근본적인 경제 전망에 대한 좋은 소식이 있던 시기에 변화가 일어났다. 말하자면 나폴레옹에 대항해 승리하고, 기차, 증기선, 가스등, 섬유 중심의 기술 혁신 붐 등이 좋은 소식이다. 기술 변화와 세계의 새로운 지역들이 갑작스럽게 열리는 상황이 맞물려 나타난 성장 기회에 투자자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수십 년 동안 전시의 불확실성과 어려움을 겪은 후에, 영국의 부유한 저축자들은 다시 한 번 수익성 있는 투자처를 찾기를 열망했다. 결국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에 투자하려 대출을 한 번 이상 받거나 지구 외딴 곳에서 가장 황당한 몇몇 프로젝트를 펼치는 등 광란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한 국제 대출 붐은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은 첫 번째 세계적인 신용 붐을 의미한다."(68-9)


"1873년의 위기는 5월 8일 주식 시장의 폭락과 함께 비엔나에서 시작되었다. 뉴욕에서는 이 소식이 이전의 호황기에 발행된 미국 철도 채권의 투자자들을 불안하게 했다. 마침내 9월 18일, 미국 최대의 민간 은행이자 미국 정부의 금융 대리인인 제이 쿡 회사는 보유한 북태평양 철도 채권 때문에 문을 닫아야만 했다. 제이 쿡의 폐점 소식은 뉴욕 증시를 깨기에 충분했다. 판매자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토지나 철도 채권 등을 사기 위해 자금을 빌렸던 투기꾼들은, 현금을 마련하고 빚을 갚기 위해 보유 주식을 싼값에 팔아야 했다. 그 직후, 전국의 은행들은 예금주들에게 지급을 중단했다. 뉴욕 증권거래소는 문을 닫은 채 그달 말까지 문을 열지 않았다. 미국은 당시, 그 후 대공황으로 불렸던 5년의 기간을 맞이했다." "전 세계 은행들은 붕괴되었고, 생존자들은 그들의 자산을 팔고 금을 사재기했다. 다시 한번 국제 신용 위축을 통해 국제 대출자들은 빚을 갚는 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없게 되었다."(82-3)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냉전의 시작, 자본 통제 도입, 마셜 플랜의 성공은 1970년대까지 다음 주요 대출 붐의 시작을 지연시켰다." "1970년대 유가 급등으로 세계 주요 은행에 석유 수출업자들의 달러 예금이 축적되면서 중남미, 소비에트권, 심지어 북한까지 대출 붐이 일었다. 초기 대출은 성공적이었고, 저개발국(LDC)들은 더 빠른 경제 성장 속도와 소비재 수입의 급증으로 신용 유입에 대응했다." "1825년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의 저개발국 대출 광품은 급작스럽고 의도적인 통화 위축 때문에 사라졌다. 이번에는 1970년대의 인플레이션을 종식시키기 위해 1980~1982년 연방준비제도가 고안한 것이다.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가 '예수 탄생 이후' 실질금리가 최고 수준이라고 말할 정도로 금리가 치솟았다. 그것은 원자재 수출 수입이 붕괴되는 동시에 부채 관리 비용을 치솟게 했다. 은행들의 신규 대출 자금이 막히자 1982년 8월 멕시코를 시작으로, 채권자들에게 채무 완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87-9)


"지난 20년 동안 재정적으로 가장 중요한 발전은 1999년 유로화의 출범이었다. 단번에 십여 개의 개별 통화가 단일 통화로 대체되었다. 대부분 자국 시장에만 국한되었던 유럽 은행들은, 갑자기 대륙 통화 동맹에 걸쳐 대출을 해줄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미국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유럽으로, 그리고 유럽 국가끼리 이어지는 돈의 흐름은 모두 2008년 이전의 다른 주요 국경을 넘는 금융 흐름보다 훨씬 더 컸다. 그 결과 진정으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금융 시스템이 형성되었다. 소위 민간 상표의 미국 모기지 채권을 발행하는 데 관여한 가장 큰 투자은행들 중 다수는 유럽계였다." "은행 규제의 구조적 변화는 시작 지점이 되는 시장에서 나머지 전 세계로 유입된 대출 붐으로 이어졌다. 유럽의 재정상황이 바뀌면 미국의 재정상황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쳤다. 2008년, 미국의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인해 주택담보증권 보유자들이 손실을 입게 되면서, 미국의 상황은 결국 유럽으로 되돌아갔다."(89-91)


3 저축, 투자, 불균형


"무역 불균형은 한 사회의 과잉 공급이 다른 사회의 부족을 보완하도록 용납한다. 그러나 무역 불균형이 사람들을 더 궁색하게 만드는 때도 있다. 수입이 단순히 부족을 해소하는 정도가 아니라 국내 생산을 압도하는 경우다. 특정 국가의 사람들은 너무 적은 돈을 쓰고 너무 많은 돈을 저축하고 있다. 이는 그들 국가의 가계들이 특히 검소하기 때문이라거나 정부가 이례적으로 신중하기 때문이 아니다. 매력적인 투자 기회가 부족한 것에 사업적인 대처를 매우 이성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나라들 내의 엘리트들이 부와 소득을 재화와 서비스에 더 많은 돈을 써야 하는 노동자나 연금 수급자들에게가 아닌, 추가수입을 사용해 추가 금융 자산을 축적하는 그런 부자들에게로 전가하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이는 나머지 국가들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한다. 즉, 추가 소비를 통해 과잉으로 공급된 양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세계적인 수요 부족으로 인한 침체를 견디는 수밖에 없다."(94-5)


"20세기 말, 결핍은 부유한 세상에서 더 이상 심각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물건을 만드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쉽고 저렴한 일이 되었다. 부족은 과잉이란 문제로 대체되었다. 오늘 더 많이 소비하는 것과 내일 더 많이 생산하는 것 사이의 오래된 균형은 사라졌다. 투자는 이제 오래된 자원 경쟁보다는 불충분한 소비로 인해 제약을 받고 있다. 현대의 상황은 풍부한 유휴 자원과 채워지지 않은 물질적 욕구의 비뚤어진 우연으로 정의된다. 생산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투입변수가 있다. 바로 노동력과 자본이다. 수십 년 동안 두 가지 요소가 모두 풍부했다. 부유한 세계의 실업률은 1970년대 이후 이전보다 체계적으로 높아져왔다. 1인당 근로시간을 줄인 시간제 일자리 고용이 늘고, 직장을 다니지 않는 근로연령층 비중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상황은 더욱 극단적으로 보인다. 해야 할 일이 많다면, 그 일을 대신할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의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106-7)


"생산적인 자본의 공급도 비슷한 상황이다. 1948년부터 1979년 말까지, 미국 제조업체들은 평균적으로 생산능력의 83퍼센트를 제품을 생산하는 데 사용했다. 1980년 초부터 1999년 말까지는 평균 80퍼센트였다. 2000년대 초반부터 생산능력 활용률은 1990년대 만들어진 초과 생산능력과 이후 국내 생산량 성장 제한의 결합으로 평균 75퍼센트에 그쳤다." "기업의 투자 행태도 그러하다. 대체로 사업 부문은 현금 유동성에서 창출하는 것보다 생산력을 확장하는 데 더 많이 지출해야 하며, 그 차이는 가계저축으로 충당한다." "현재 많은 나라의 사업 부문들은 그들이 현금 유동성에서 창출하는 것보다 덜 지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생기는 기업 흑자는 미국처럼 주주들에게 분배되거나 독일, 일본, 한국처럼 그 회사들이 보유하게 된다. 게다가 부유한 세계에서 가치 있는 투자를 할 기회는 과거에 비해 훨씬 적다. 남아 있는 기회들은 대부분 기반 시설과 주택으로, 과도한 자본비용보다는 정치적 제약에 방해를 받는다."(107-8)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버는 모든 것을 상품과 서비스에 소비하지만, 부자들은 그렇지 않다. 사람이 소비할 수 있는 양은 한계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여분의 돈을 주면, 머지않아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수입을 제공하는 무언가를 사는 데 쓰일 것이다. 그러나 부자에게 같은 여분의 돈을 주면, 아마도 추가 자산을 축적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세계적으로 불평등이 증가한다는 것은, 그러한 자산의 가치가 국민소득에서 점점 더 비중이 작아지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지출을 하는지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빚을 늘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축률이 높지 않아도 저축 과잉에 시달릴 수 있는 이유다. 저축률 자체는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가치 있는 투자 기회의 공급과 비례하는 소비되지 않은 생산량이다. 실제 자원이 즉각적인 욕구의 충족에 쓰이지 않고, 낭비적인 투자를 개발하기 위해 전용될 때 저축이 과도하다고 말할 수 있다."(112-3)


4 천안문에서 일대일로까지 : 중국의 흑자 이해하기


"세계 금융위기에 대처하는 가장 직접적인 대응은 외국인 지출 감소를 상쇄하기 위해 기반 시설과 주택 투자를 대대적으로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중국의 오랜 불균형을 일제히 내부로 이동시키면서 점차 확대되었다. 중국은 유례없는 중국 부채 급증이라는 희생으로 경상수지 흑자가 감소했음에도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비생산적인 투자는 비용을 충당하지 못했다. 빚을 내서 하는 투자를 통해 고속으로 성장하는 능력이 한계에 도달한 중국 정부는, 무역흑자와 금융 유출을 통해 경제 모델의 비용을 전 세계에 전가하려고 다시 한번 시도할 위험이 있다.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투자보다 가계 소비가 우선되도록 중국 경제를 재조정하는 것이다. 이는 구매력을 중국 노동자와 퇴직자에서 기업과 정부로 이전하는 기존의 모든 메커니즘을 뒤집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 정세에 알맞은 해답을 찾기가 막막한 가장 큰 문제는, 공산당이 정치적 독점을 잃지 않고도 이 제도를 개혁할 수 있느냐다."(142-3)


"1980년대 후반부터 2010년 말 사이에 중국 가계가 소비하는 중국 GDP 비중은 15퍼센트 포인트 떨어졌다. 2018년 현재, 중국 가계는 여전히 중국 생산량의 40퍼센트 미만을 소비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 세계의 다른 주요 경제국들보다 낮은 비율이다. 소비를 억제하는 방법으로 가장 인정받지 못한 메커니즘 중 하나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금융억제였다. 중국에서는 관영은행 중 한 곳에 예금을 하는 것 외에 저축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다. 그러한 예금들의 금리는 특히 성장에 비해 엄청나게 낮은 수준으로 책정되었다." "다시 말해서 금융 시스템은 중국 국민에게서 거대 제조업체, 사회 기반 시설 개발업체, 부동산 개발업체, 지방·시 정부에게로 지속적인 대규모 이전을 초래했다. 이렇게 싼 자본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하는 프로젝트의 질에 대해 거의 걱정하지 않고 대규모 투자에 나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152)


"중국 지방·시 정부는 은행 시스템 내에서 신용창조 대부분을 통제하고 있고, 중국 은행들은 빚을 상환할 수 없는 프로젝트에 거의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공무원들이 목표를 달성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국영 은행들에게 우대받는 기업에 대출을 해주어 필요한 만큼 사회 기반 시설, 제조, 부동산에 투자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투자가 가치 있는지는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지출의 양이 중앙정부의 목표를 충족하기에 충분한, 보고한 대로 GDP를 발생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적어도 1990년대 중반까지는 사회 기반 시설과 제조능력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이 제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 중국은 투자 붐이 점점 더 비생산적으로 변하는 포화 단계에 이르렀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국 정부는 중국 제조업에 대한 외부 수요 붕괴에 대응해 국내 투자를 더욱 확대했다. 그러나 수익성 높은 투자 프로젝트가 적절하게 증가하지 않는다면, 국내 부채 부담만 급격히 증가시킬 뿐이었다."(155-7)


"중국이 이룬 진보는 과도한 부채와 과잉 투자라는 고질적인 문제 때문에 취약하다. 내부적으로 재조정을 하기 위해서는 신용 긴축이 필요하지만 이러한 보완적 개혁으로 가계 소득을 높이고 내수 활성화에 성공하기도 전에 투자가 위축되어, 결국 내수를 위축시키는 결과만 얻을 수도 있다. 먼저, 내수 감소에 맞추어 국내 생산이 감소할 수 있다. 실질 임금 삭감과 훨씬 더 높은 실업률의 조합을 통해 총소득은 감소할 것이다. 중국의 정치 체제는 그런 사회적 이탈에서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고, 설령 살아남을 수 있다 하더라도 정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알아내는 데 관심이 없다. 따라서 국내 생산이 내수보다 적게 감소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반드시 수출 대비 수입 감소를 통해 중국의 무역흑자가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중국 정부는 위안화를 평가절하하거나 조정 부담을 전 세계에 전가할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에 과잉 생산에 따른 세계적인 과잉 공급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167)


"마찬가지로, 중국 정부가 일대일로에 대해 약속하는 것은 영토나 군사기지를 얻기 위한 전략적 계획의 일부라기보다는, 내부 재조정과 관련된 절충을 관리하는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2008년 이전에 중국 정부는 미국인과 유럽인들에게 구매력과 상품을 수출함으로써 과잉 생산능력에 대처했다는 것을 상기하라. 중국은 미국과 유럽의 금융 자산을 수조 달러 축적하고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는 증가하는 부채에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국내 부채가 상승하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의 차용자들의 차입 능력이 한계에 도달하자, 그것은 지속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를 대체할 일대일로의 진정한 전망은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동유럽, 중남미에서 중국이 수출하는 공산품과 건설 서비스에 대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대일로 국가들이 다룰 수 있는 전체 시장은 북미나 유럽에 비해 훨씬 작다. 따라서 중국이 이를 이용해 전통적인 수출시장의 손실을 대신하는 것은 어렵다."(167-9)


"어떤 식으로든 중국이 경제를 재조정할 것이고, 모든 불균형은 결국 복원될 것이지만, 특정 계획은 몇 가지 경쟁적 제약 속에서 정치 시스템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중국 경제가 계속 둔화하는 가운데 베이징의 중앙정부는 중국의 다양한 엘리트 집단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기관들이 어떤 모습일지 누구나 짐작만 할 뿐이다. 소득이 엘리트들에게서 일반 가계로 옮겨간다면 가장 바람직한 결과가 될 것이다. 원론적으로는 이것이 바로, 중국의 부족한 내수를 세계의 다른 나라들로 강제로 떠넘길 필요성을 줄여주는 자산균형 재조정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모든 성장 기적에 필수적인 조정 기간은 언제나, 특히 겉으로 가장 명백하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예상을 항상 뒤엎었으며, 심지어 가장 심한 비관론자들이 두려워했던 것보다도 경제적으로 훨씬 더 어려운 시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가정해도 무방하다."(174)


5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슈바르츠 눌 : 독일의 흑자 이해하기


"1989년 11월의 베를린 장벽 붕괴로 상징되는 독일의 재통일은 많은 동·서 독일인들에게 대단히 충격적인 기간이었다. 특히 직업을 갖고 있는 독일인들 사이에서 빈곤과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대부분의 다른 독일인들의 임금이 전면적으로 삭감되었음에도 상위권에 있는 노동자들의 소득은 급속하게 증가했다. 국민 소득은 노동자에게서 자본 소유자로 이전되었다. 고소득자를 위한 감세, 유의미한 상속세의 부재, 약화된 사회적 혜택 등이 모두 그러한 충격에 힘을 더했다. 이러한 결합된 효과는 버는 것보다 훨씬 더 적게 소비하는 독립체들(부유한 가계들과 그들의 사업체들)로 독일의 구매력을 이동시켰다. 중국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따라갔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놀랄 만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계급 전쟁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부자들이 승리를 거두었다. 따라서 독일도 중국처럼 생산하는 모든 것을 흡수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어디에서든 소비되어야 하는 잉여가 발생했다."(176)


"2008년 이전에 독일의 초과 저축은 유럽의 다른 지역의 차용자들에게 돌아갔는데, 대부분 독일 은행에서 다른 은행들로 융자해주는 형태였다. 유럽의 무역 파트너들에게 잉여 저축을 수출함으로써 부유한 독일인들은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 등지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합리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금액보다 더 많은 돈을 빌리도록 강요한 셈이 되었다. 이는 부실자산으로 수천억 유로를 잃은 채권자들과 현대 유럽 역사상 유례없는 수준의 실업률을 겪은 채무자들에게 모두 끔찍한 결과를 안겨주었다. 독일의 순 재정 유출이 2008년 이후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정책적 선택이 국내 소비의 약세를 강화했기 때문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채무 제한 또는 채무 제동장치가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공공차입에 대한 광적인 반대와 이로 인해 증가하는 재정 건실성이다. 동시에 독일 정부는 자국의 경제 모델을 이웃 국가들에게 열정적으로 강요해서 독일의 엄청난 흑자를 훨씬 더 규모가 큰 유럽의 흑자로 확대시켰다."(176-7)


"동유럽 해방이 양산한 1억 명의 신규 고객은 독일 기업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그들의 자유는 또한 독일 가까이에 현재 수천만 명의 저가 노동자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독일어도 유창했다. 독일의 전형적인 제조업 노동자는 2000년 슬로바키아 제조업 노동자의 약 9배를 벌었다. 엄청난 인건비 차이는 노동생산성의 차이보다 훨씬 더 컸다. 독일 기업들은 일자리와 생산을 중유럽과 동유럽으로 옮기며 대응했다." "이렇듯 재배치가 가능했기 때문에 독일 고용주들은 국내 임금을 강력하게 억제할 수 있었다. 만약 독일 노조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나선다면, 기업들은 동쪽으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으로 일자리와 공장을 이전해버릴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가라앉은 후, 구서독 제조업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1991년에서 2000년 사이에 단 5퍼센트 증가하는 데 그쳤다. 독일이나 국제적인 논객들이 이 나라를 '유럽의 병자'라고 지칭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188-90)


"이전의 경기 침체에서 독일 정부는 금리를 낮추고 세금을 인하하며 공공 지출을 늘림으로써 기업 투자와 가계 지출의 붕괴를 상쇄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는 유로 지역에 속한 자격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1999년 1월 1일에 공식적으로 시작된 공통 통화는 회원국들이 단일한 통화 정책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새로운 유럽중앙은행은 특정한 개별 국가에게 최선이 아닌, 유로 지역을 하나의 전체로 보아 이치에 맞는 기준으로 금리를 책정해야 했다. 독일은 통화블록의 가장 큰 단일 회원국이었지만, 독일의 부진은 그 밖의 다른 곳, 특히 스페인의 호황과는 가장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동시에 마스트리히트 조약(1992년)과 뒤이은 안정과 성장에 관한 협약(1997년)에서 합의된 예산 제한은 정부가 지출을 늘리기 위해 차용할 수 있는 예산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부는 통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 1990년대 초에 발행했던 부채의 높은 이자율 때문에 더욱 제약을 받았다."(194-5)


"독일의 무역과 경상수지 흑자는 이처럼 긴 내수침체기에 그 기원이 있다. 수출 경쟁력은 독일의 흑자와 거의 관계가 없었다. 2004년에 세계 수출에서 독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8년과 같았고, 2000년대 들어 유럽 내 무역에서 독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1퍼센트 포인트도 상승하지 못했다. 체코, 네덜란드, 폴란드는 경제 규모가 훨씬 작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비교할 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 시기 독일 수출의 실질가치는 독일이 경상수지 적자를 보였던 때보다 훨씬 더 느리게 성장했다." "무역흑자는 독일이 수입하는 상품의 증가율이 훨씬 더 둔화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인들은 물가와 유가 상승에도 불구하고 2004년에 수입 상품과 서비스에 2000년보다 더 적은 유로를 썼다. 흑자와 금융 순 유출이 필연적인 결과였다. 2000년대 초반의 흑자는 독일이 회복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이는 사회복지 예산을 억제하고 부자들에게 소득을 재분배하는 정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195-6)


# 고소득자 및 법인세 감세, 유의미한 상속세의 부재, 복지혜택 축소(실업급여 기간 축소, 정년 연장 등)


"하르츠 4법이 가장 직접적으로 미친 영향은, 특히 직업이 있는 독일인들의 빈곤율을 꾸준하게 상승시켰다는 점이다. 데이터가 시작된 2005년에는 독일 노동자의 5퍼센트만이 빈곤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2015년까지 그 비율은 두 배인 10퍼센트로 올랐다. 이는 저임금 시간제 일자리로의 전환에 따른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독일 고용의 순수한 증가 폭은 모두 자영업자와 시간제 노동자들이 차지했다. 정규직 고용은 10년 동안 꾸준히 감소했고 1995년보다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 독일 전체 일자리의 거의 30퍼센트는 시간제 일자리로 1990년대 초반의 두 배 수준이다. 그러한 추가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면 조기 퇴직했을 것이다. 1990년대에 55세에서 64세 사이의 독일인 중 40퍼센트 미만이 직업이 있었다. 그 비율은 2003년 이후 꾸준히 증가해 현재 70퍼센트를 상회하고 있다. 그렇게 고용은 증가했지만 복지는 증가하지 않았다."(203)


"수입 급증과 낭비적인 투자의 폭주로 인해 스페인, 그리스, 아일랜드 같은 위기 국가들은 흑자 국가 특히 독일에서 불가피하게 금융을 유입해야 했다. 소비 붐은 문화적인 특성, 날씨,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차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값싸게 많은 돈이 들어오면 어디에서나 똑같은 반응을 한다. 부동산 가치 폭등과 주가 상승은 사람들에게 더 부유해졌다고 느끼게 했고 현재 소득에서 더 많은 돈을 쓰도록 부추겼다." "여기에는 독일의 과소 소비와 과소 투자가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요소였다." "독일에서는 2008년 위기가 주변국에서 대출받은 사람들이 방탕했기 때문이라고 의견이 모아졌다. 독일 대부업체들의 무모함은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았고, 궁극적으로 과도하게 저축을 하게 하고 부득이하게 다른 곳에서 예금을 인출하게 만든 독일 경제의 구조적 불평등은 고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흐릿한 시각은 자연스럽게 독일 기득권층이 이웃국가들에게 독일처럼 되라고 권고하도록 만들었다."(216-8)


"2010년 5월 독일을 필두로 한 유럽인들은 '재정통합'으로 유로 위기 해소를 약속했고, 안정성장 협약이 이를 '준수'하도록 보장하기에 부족했다고 결론 내렸다. 2012년까지 전체 유로 지역이 경제 통화 동맹의 안정, 조정, 통치에 관한 조약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그 조약은 사실상 독일의 채무 제한을 유럽의 나머지 나라에 부과한 것이다. 이제 블록 전체의 정부들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균형 잡힌 예산이나 흑자를 운용해야 한다. 그들은 '공채 발행 계획'에 대해 나머지 유럽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제제를 받는다." "이제 유로 지역의 총부채는 GDP 대비 7퍼센트 포인트 감소했으며 2010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강제적으로 독일의 이웃 나라들은 성공모델이라고 할 만한 것을 모방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다른 나라들에게는 불행하게도, 독일의 병리학적 요소들도 받아들여야만 했다. 즉, 침체된 소비, 정부 긴축, 고용 불안, 과소 투자, 그리고 증가하는 불평등 등을 말이다."(224-5)


6 예외적인 미국 : 과도한 부담과 지속적인 적자


"미국은 세계 최고의 안전자산을 발행하는 나라다. 미국의 국가 부채는 많고 거래하기 쉬우며 채무불이행 위험이 없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볼 때, 달러는 다른 통화로 싸게 전환할 수 있고, 세계의 필수품이나 상품을 제조하는 생산자들이 항상 안전한 지불수단으로 여긴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미국은 세계의 과잉 저축을 처리할 수 있는 훌륭한 저장소가 되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이러한 초과 저축은 주로 미국으로 유입되었는데 외국 정부나 관련 기업들이 미국 정부가 발행하거나 보증하는 금융자산을 매입하면서다. 그들은 내수를 희생해 이러한 보유고를 늘렸다. 이는 금융 자산을 매입하는 국가의 소비자들에게서 수출 산업의 소유주들에게로 부를 이전하는 것이다. 그들은 높은 수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수익률이 낮더라도 위험을 피하기 위해 구매한다. 이러한 비경제적 자본 회전은 2001년 후반과 2014년 후반 사이의 미국 전체 경상수지 적자 규모만큼이나 컸다."(232-3)


"미국 정부가 너무 많이 소비하고 세금을 너무 적게 부과하기 때문에, 경상수지 적자에 대한 책임은 미국인에게 있다는 광범위하고 초당적인 합의가 있다. 미국 정책에 대해 비난할 것은 많지만, 이러한 비평은 잘못되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노동자들이 은퇴하면서 1990년대 초반부터 가계의 저축률이 꾸준히 낮아졌다. 지난 10년 동안 일본의 개인 저축률은 근본적으로 '0'이었다. 동시에 일본 정부는 1990년대 초반 이래로, 대규모의 지속적인 예산 적자를 GDP의 평균 6퍼센트 정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지속적으로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있다." "미국의 경상수지 역시 정부가 더 엄격한 재정 정책으로 소비를 억제하려 했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정부의 다양한 계층이 결합된 예산 균형이 민간 부문의 행태를 거의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이 겪은 거의 모든 상황은 경상수지가 재정적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239-41)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1920년대의 불균형이 반복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케인스의 제안은 모든 무역금융이 단일한 '국제 청산 은행'을 통해 자체적인 결제 단위인 '방코르(bancor)'를 사용해서 결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각국이 방코르 계정을 개설하고, 수출을 해서 방코르를 벌고 누적된 방코르 잔액을 사용해 수입 대금을 지불하는 것이다. 국가들은 일정 금액까지 당좌대월(마이너스 통장)을 운용할 수 있지만 한도를 초과하게 되면 국내 환율을 내려야 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제안은 방코르를 너무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에게 방코르를 적게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만큼 심하게 불이익을 주었다. 당좌대월의 한도는 실질적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했으므로, 초과 방코르 잔액은 몰수되어 준비 기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흑자 국가들은 방코르 대비 환율을 높여야 할 것이다. 방코르 제안의 목표는 균형 잡힌 무역을 촉진하고 협력적인 환율 조정을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251)


"미국은 이 계획을 거부했다. 미국 협상가들은 전 세계가 고정된 환율 체계에서 국제 무역과 금융의 통화로 달러를 사용하기를 원했다." "미국이 제안한 시스템은 세계의 나머지 중앙은행들이 미국 정부의 채무를 준비자산(Reserve Assets)으로 보유하도록 장려했다. 이것은 금본위제를 달러본위제로 대체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금본위제와 마찬가지로 중앙은행들은 지폐의 가치와 준비자산 사이의 연결고리를 관리해야 했다. 동시에 중앙은행들은 위기 상황에서 민간 은행에 긴급 대출을 해줄 수 있어야 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경우 준비자산이 미국 달러였기 때문에 이 점은 쉬웠다. 환율 걱정 없이 필요한 만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또한 미국 정부가 외국 정부보다 국내 지출을 부풀리는 데 훨씬 더 많은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머지 국가에서 국제 우선순위와 국내 우선순위 사이의 이러한 긴장은, 필요할 때 끌어다 쓸 수 있는 달러표시 자산을 축적해두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251-3)


"외국의 중앙은행들과 보유고 관리자들은 1998년 초부터 2008년 중반 사이에 달러표시 자산을 사들이는 데 약 4조 1000억 달러를 썼다. 그들은 미국 경제를 왜곡하고 금융위기의 씨앗을 뿌렸다. 보유고 관리자들은 미국에게 두 가지 연계된 문제를 안겨주었다. 첫째, 달러 자산에 대한 추가 수요는 추가 공급과 일치해야 했다. 즉, 미국인들은 안전한 금융 채무에서 4조 달러 이상을 창출해야 했다. 둘째, (외국) 정부는 국내 생산 대비 내수를 억제함으로써 달러 보유량을 축적했다. 그것은 전 세계적인 과잉, 특히 공산품의 과잉을 악화시켰다. 세계적인 불황을 막기 위해 누군가는 과잉 생산을 흡수해야 했다. 미국 달러화의 우위는 미국인들이 나머지 다른 국가들에서 (창출해 낸) 과잉 자본과 과잉 생산품의 대부분을 흡수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과는 주택 부채 버블과 해외로 내쫓긴 제조업 기반이었다. 달러화의 국제적 지위는 미국에게 '지나친 특권'보다는 '지나친 부담'을 준 셈이었다."(267)


결론


"세계 부자들이 세계 노동자와 퇴직자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혜택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미국 금융인들의 이익이 중국과 독일 산업인들의 이익에 보탬이 되었기 때문이다. 두 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의 이익을 보완해주었다. 현재의 흑자 국가들은 자신들의 과잉 생산을 흡수해 줄 식민지가 필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적자 국가들의 은행가들이 기꺼이 협력하기 때문이다. 이는 심화된 세계화와 증가하는 불평등이 서로를 강화시켜온 비뚤어진 결과다. 전 세계의 기업들은 국제 경쟁을 저임금, 환경과 안전에 대한 규제 약화, 세금 특혜 제도, 퇴보적 이전을 추진하기 위한 구실로 삼고 있다. 평범한 가계를 쥐어짜는 것이 생산성 향상이나 사회 기반 시설 투자 또는 보건과 교육 개선보다 훨씬 쉬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지속 가능한 방식이 아니다. 임금 하락은 세계 경제의 총 지출을 감소시키는 소비 둔화를 가져오고, 궁극적으로 자기 제한적이고 자기 패배적인 부채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295-6)


"무역 전쟁은 종종 국가 간 갈등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는 주로 은행가들과 금융 자산의 소유자들, 또는 은행가들과 일반 가계들 사이의 갈등이다. 즉, 매우 부유한 자들과 그 외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불평등의 증가는 풍부한 공산품, 실직, 부채 증가를 초래했다. 그것은 글로벌 통합이 성취해야 하는 것을 경제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왜곡해놓은 것이다.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의 모든 국민들이 이러한 상황으로 고통받고 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세계 경제에서 비슷한 역할을 하는 미국과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9세기 후반 유럽의 제국 식민지를 닮았다. 그 당시 식민지 국민들은 불필요한 부채를 떠안는 대가로 유럽의 과잉 생산을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에는 폭력 대신에 현대 정권은 시장을 개방시키기 위한 영어권 국가들의 정치적 약속에 의존한다. 이것은 선택이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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