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 없음 - 격동의 세계를 이해하는 세 가지 프레임
헬렌 톰슨 지음, 김승진 옮김 / 윌북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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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거대한 교란


"지정학의 역사에서 핵심은 에너지다. 석유와 가스에 대해 말하자면, 미국은 1960년대 이래 어느 시기보다도 높은 에너지 자립 역량을 확보했고 금융 분야에서 가진 극단적인 강점이 이 권력을 한층 더 보완하고 있다. 되살아난 미국의 에너지 우위는 중동에서 지정학적 혼란을 일으키는 주요인이 되었다. 또한 이는 중국의 해외 석유 의존이 석유 시장에서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되게 했고, 러시아는 유럽의 가스 시장에서 심각한 경쟁 상대[미국]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미-러 경쟁 관계는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냉전 종식 이후에 생겨난 단층선들, 그리고 튀르키예를 둘러싸고 더 오래전부터 있었던 단층선들을 압박했다. 여기에 더해, 중국이 세계 최대 탄소 배출국인 동시에 재생에너지 발전 및 그에 필요한 금속 생산에서 막대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은, 녹색에너지가 화석연료에너지가 일으킨 지정학적 불안정과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또 하나의 지정학적 불안정의 원천이 되었음을 의미한다."(21-2)


"경제의 역사는 화폐와 금융,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에너지의 요동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 EU, 중국의 정책 대응은 세계 경제를 다시 한번 재구성했다. 모든 곳에서 막대하게 쌓인 부채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음을 기정사실로 못박았다. 연준은 부채 조달 비용이 지극히 낮은 신용 환경을 주도적으로 만들었고 다른 나라의 큰 은행들에 최종대부자 역할을 했다. 유로존 위기는 EU와 유로존 사이의 관계를 뒤흔들었고 영국의 EU 잔류 여부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뒤이은 유럽중앙은행의 역할 변화 시도는 유로존을 정치적 림보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었다. 2010년대의 10년이 지나면서 세계 경제에, 특히 유럽에 중국의 중요성이 커졌다. 하지만 중국은 미국 연준의 새로운 권력에 제약을 받으며, 하이테크 제조 분야에서 독보적인 초강대국이 되려는 시진핑의 목표에 대한 미국의 견제로도 제약을 받는다. 이렇듯 경합하는 다중의 압력하에서, 세계 경제는 더 첨예한 지정학적 갈등의 장이 되었다."(22-3)


"민주정치의 역사에서 유럽과 북미의 대의제 민주정은 사람들이 공동의 정치적 삶을 꾸려가기에 안정적이고 우월한 구조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모든 정부 형태가 그렇듯 대의제 민주정도 시간이 가면서 그것이 생겨났을 당시의 지정학적·경제적 조건이 달라지면 불균형 상태로 떨어질 수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대의제 민주정은 국가공동체주의[또는 민족주의]에 의존했는데, 국가공동체주의는 대의제 민주정의 작동에 꼭 필요하지만 불안정의 원천으로 작용할 소지도 그만큼 크다. 이러한 취약성은 대의제 민주정 정치체들이 생겨났을 때부터 존재했고, 종종 (1930년대 대공황 같은) 부채로 인한 경제 위기 때 등장했다. 1990년대부터 모든 곳에서 민주정 국가의 정치는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이 지금보다 늘도록 경제를 개혁하라는 대중의 민주적 요구에 점점 더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주정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금권귀족정plutocracy의 경향성이 커지는 데 취약해졌고 개혁은 더 어려워졌다."(23-4) 


| 1부 | 지정학

1장 석유 시대의 시작


"국내에 석유 매장고가 없는 유럽의 큰 국가들은 에너지 자립에 실패한 것이 유럽의 유라시아 지배가 종말을 고하는 데 결정적이었다고 여겼다. 석유의 시대는 유럽이 세계 패권국이 되거나 대륙을 아우르는 제국적 권력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터였다. 1970년대부터 미국은 독일이 러시아 석유와 가스에 의존하는 것을 마지못해 용인했다.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미국 국내에서도 충분한 공급량이 없고 중동에서 충분한 공급량을 확보할 수단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0년대에 미국과 러시아 모두에서 석유와 가스가 재부상하면서, 독일과 러시아의 연결은 우크라이나의 독립, NATO의 확대, 독일의 취약한 군사력 등과 연결되는 중대한 지정학적 단층선이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중국-이란의 관계는 이 이슈들의 영향을 한층 더 다루기 어렵게 만들었다. 2015년 이란 핵 합의에 참여한 NATO의 유럽 회원국 세 곳 모두가 이란에서 가스를 공급받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52)


"미국이 유럽의 에너지 의존도와 관련된 지정학에 오늘날과 같이 관여하게 된 기원은 2차 대전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서 찾을 수 있다. 20세기 중반인 이때 유라시아에서 미국이 지정학적 권력을 행사하는 데는 명심해야 할 커다란 경고등이 하나 있었다. 그전에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에서의 승리가 소련과의 군사적 동맹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나중에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긴 하지만, 그전까지는 유라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두 대륙 강국이 동맹을 맺고 유럽과 중동을 나눠먹으려 할 위험도 충분히 있을 법한 시나리오였다. 석유는 독일 시장을 러시아 자원과 연결함으로써 이러한 지정학적 논리를 한층 더 강화할 가능성이 있었다. 히틀러는 영토 정복과 제노사이드라는 불가능하고 끔찍한 비전 때문에 그 가능성을 깨뜨렸다. 하지만 전후 세계에서 독일과 소련 사이에 어떤 연합 관계라도 다시 생겨나는 것을 막으려면, 미국은 서독이 페르시아만의 석유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책임지고 보장해야 할 터였다."(52-4)


2장 석유를 보장할 수 없다


"전후 유라시아에 대한 미국의 구상에는 근본적인 단층선이 하나 지나가고 있었다. 미국이 중동을 냉전의 장소로 생각하긴 했지만, 트루먼부터 존슨까지 미국 대통령들은 미군을 중동에 주둔시키거나 페르시아만에 미 해군을 진지하게 개입시킬 생각이 없었다. 미국이 너무 많은 군사적 부담을 지는 것이 국내적으로 인기가 없을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영국이 중동에서 제국적 통치를 유지해줄 필요가 있었다. 냉전 초기 몇 년간 소련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한 미국의 대비책에는 이집트에 기지를 둔 영국군이 공습을 해주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 목적에서, 트루먼은 영국이 수에즈에 짓는 아부 수위르 공군기지 건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훗날 나세르가 소련 쪽으로 기울었을 때, 아이젠하워는 영국이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 튀르키예와 반소련 군사동맹을 맺도록 뒤에서 독려 했을 뿐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것을 우려해] 그 동맹(바그다드 협약)에 참여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65-6)


"튀르키예도 미국의 1950년대 유라시아 구상에 불편한 문제를 제기했고 이 문제 역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스탈린이 1946년에 다르다넬스해협의 공동 관할권을 요구하면서 튀르키예에 최후통첩으로 압박을 가하자 트루먼은 미 군함을 지중해로 들여보내고 공습을 승인했다. 명분이 무엇이든간에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에너지였다. 트루먼이 의회에 그리스와 튀르키예에 대한 자금 지원 승인을 요청한 바로 그날 미국의 4대 석유회사들이 아람코에 공동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냉전이 중동으로 확대되자 튀르키예가 NATO 회원국이 아니라는 사실이 서유럽에 초점을 두고 만들어진 안보동맹의 한계를 드러냈다. 1952년에 트루먼 행정부는 튀르키예와 그리스가 NATO에 들어오게 함으로써 이 모순을 해소했다. 하지만 이는 NATO에 첨예한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 몇몇 유럽 쪽 회원국이 서유럽 안보와 중동 안보 사이에 명확하게 선을 긋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66-7)


"미국이 중동에 군사적으로 들어와 있지 않다고 해서 중동에서 강압적 위력을 행사하지 않고자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따라서, 다른 나라들에 대해 은밀한 작전을 펴기 위해(또한 여차하면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도 있게) 트루먼이 세운 CIA가 중동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새 이란 총리 모함마드 모사데그가 1951년에 앵글로-이란 오일컴퍼니를 국유화하고 양허를 종료하자 영국은 페르시아만에서 이란의 석유 수출을 봉쇄했다. 트루먼은 중재를 시도했지만, 1953년에 취임한 아이젠하워는 영국의 설득으로 CIA가 영국 정보기관과 함께 모사데그 축출 작전을 펴게 했다. 단기적으로 이러한 개입은 이란의 석유 분야 재건을 돕기 위해 미국 회사들이 이란 국영회사가 꾸리는 새로운 컨소시엄에 들어가도록 미국 정부가 미국 기업들을 압박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장기적으로 미국의 개입은 미국-이란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고 중동이 미국에 더욱 큰 군사전략적 부담이 되게 했다."(67)


"처음부터 중동에 대한 새로운 접근에는 문제가 가득했다. 미국과 유럽의 거대 석유회사들이 중동 지역에 있다는 것 자체가 점점 더 정치적으로 맹렬한 갈등의 소지가 되었다. 수에즈 이후 10여 년 뒤, 미국이 표방한 서유럽의 석유 보장은 일관성이 없었고 부분적으로는 서유럽이 원한 바도 아니었다. 미국 대통령들은 중동에서 충분히 장기적으로 군사력을 사용할 수도, 서유럽 국가들이 소련 석유를 들여오는 것을 막기 위해 역외 제재를 가하거나 금융으로 위협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서유럽이 [소련 석유 대신] 페르시아만 석유를 수입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미국의 기대는 궁극적으로 영국이 중동에 주둔하는 데 달려 있었는데, 영국이 발을 빼기로 했을 때 미국은 이를 막지 못했다. 게다가 이라크가 1968년 이후 소련 쪽으로 기울면서 중동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졌다. 또 이제는 이란에 너무나 많이 의존하게 되었는데, 이란의 야망은 이라크가 소련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게 할 인센티브만 만들었을 뿐이었다."(76-8)


"데탕트[1970년대 동서간 긴장 완화]는 베트남 전쟁이 일으킨 문제에 대한 대응이었지만, 에너지와 관련된 이유도 있었다. 1970년대 말이면 미국의 에너지 권력은 사그라드는 반면 소련의 에너지 권력은 떠오르고 있었다. 미국의 원유 생산은 1970년에 정점을 치고 감소하고 있었다. 2018년까지 미국은 1970년 수준의 생산량에 다시 도달하지 못한다. 국내 수요 이상을 생산할 역량이 없었으므로 미국 생산자들은 이론상으로라도 서구에 석유의 최종공급자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아니, 미국 자체도 석유를 수입해야 했다. 따라서 미국은 NATO 회원국들이 석유를 페르시아만에서 공급받게 하는 데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었다. 장기적으로는 소련의 석유 수출보다 소련의 가스 수출이 지정학에 더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중 하나로, 소련의 가스 수출은 핵발전이 크게 제약될 세계에서 녹색 운동이 서독의 정치에 비중 있게 부상하던 시기에 소련-독일 간 우호 관계의 물적 기반이 될 경제적 토대를 제공했다."(80)


3장 유라시아, 재구성되다


"소련 붕괴는 독립 국가 우크라이나가 생겨나게 한 데 더해 흑해와 카스피해 일대 및 이 두 바다 사이에 있는 캅카스 지역에 1차 대전 이후 정착된 질서도 뒤흔들었다. 이 변화는 소련 말기에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격화되었다. 1990년대의 나머지 기간 동안 클린턴 행정부는 아제르바이잔의 석유를 운송하는 파이프라인이 러시아나 이란을 통과하지 않게 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쿠에서 조지아를 거쳐 튀르키예의 항구 도시 제이한으로 이어지는, 공사 비용이 많이 드는 파이프라인을 지원했다. 조지아에서는 많은 이들이 이를 NATO와 EU에 가입할 기회라고 보았고, 2003년 ‘장미 혁명’을 통해 친서구 정부가 들어섰다. 튀르키예로서는 새로 지어진, 그리고 새로 제안된 수송관이 필수 에너지원에 대해 〈수송의 요충지〉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되살아난 튀르키예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동유럽을 둘러싸고 NATO와 EU 사이에 발생한 긴장을 한층 더 악화시켰다."(102-3)


"1997년 러시아와 튀르키예 정부는 흑해 해저에 블루스트림 파이프라인을 짓기로 합의했다. 2003년에 개통된 블루스트림은 러시아가 튀르키예로 수출을 늘리고 유럽으로 가는 가스 일부를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통하지 않고 유럽 시장에 보낼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이 파이프라인은 유럽에 더 많은 분열의 씨를 뿌렸다. 튀르키예는 수입 석유와 가스에 매우 의존해왔고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 새로운 석유와 가스가 발견되면서, 카스피해와 중동을 남유럽 소비자와 연결하는 에너지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이러한 석유와 가스 수송 네트워크는 과거 오스만 제국에 속했던 곳들을 연결하게 될 터였다. 이제까지 튀르키예는 에너지가 풍부한 중동과 카스피해의 캅카스 모두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향후 30년간 유라시아의 이러한 에너지 지리학은 튀르키예가 NATO 회원국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협력하고자 하게 만들 동기 또한 상당히 많이 만들어내게 된다."(105-6)


"이라크 전쟁의 여파로 석유와 가스 수출의 재정 수입이 늘면서 푸틴은 러시아가 1990년대에 IMF에서 빌린 돈을 갚을 수 있었고, 이로써 미국이 부채를 통해 러시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역량이 사라졌다. 이라크 전쟁은 러시아-중국 간에 떠오르던 이 에너지 협력 관계를 한층 더 활성화했고 중국이 지정학 전략을 다시 짜도록 자극했다. 중국 지도자들에게 미국의 행동은 미래에 석유 공급이 불길하리라고 말해주는 확실한 전조로 보였다. 미국이 에너지 안보를 위해 군사력을 진지하게 사용할 의지가 있다는 사실은 중국도 자신의 해외 공급원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 역량을 강화해야 할 이유가 되는 듯했다. 2003년 11월 중국 주석 후진타오는 중국이 ‘믈라카 딜레마Malacca Dilemma’를 겪고 있다고 언급했다. 공동 수역에서 항행의 유지를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해상 강국인 미국이 믈라카 해협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오는 석유를 차단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중국의 취약성을 말한다."(110-1)


"오바마의 임기가 끝나가던 시기에 미·중 관계에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구조적 역학이 있었다. 한편에서 미국은 태평양에서 억지 전략을 펴는 쪽으로 나가고 있었고 중국은 유라시아의 상당 지역을 경제적 세력권에 넣어서 믈라카 딜레마를 해결하려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제 기후가 미·중이 협력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기후변화가 미·중 데탕트의 논리를 만들었다면, 그와 동시에 일대일로는 탄소집약적인 대규모 프로젝트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중국-러시아의 석유 관계에 가스까지 보탰다. 2016년 대선에서 〈중국에 맞서자〉 후보(트럼프)가 〈러시아에 맞서자〉 후보(힐러리 클린턴)보다 지정학 이슈를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의 협력이 즉각적으로 일으킨 정치적 문제를 반영한 면이 있었다. 관세 압박을 가해 미·중 교역 관계를 재구성한다는 내용 자체에 대한 비판은 거의 없었다. 또한 결정적으로, 테크놀로지 경쟁이 국가안보의 문제라고 보는 데서도 이견이 거의 없었다."(119-20)


"2014년 ISIS가 이라크와 시리아 영토 상당 부분을 점령하고 이라크 정부가 붕괴하면서, 오바마는 이라크와 시리아에 미군을 파병했다. 이 새로운 중동 전쟁은 미국이 유라시아에서 군사 행동을 하려는 의지가 별로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이번에도 미국의 국내 정치가 미국 대통령의 운신을 제약했다. 의회가 승인하지 않을 것을 우려해서 2014년에 오바마는 시리아 ‘공습’에 대해서는 의회에 동의안 제출을 시도하지 않았고 시리아 반군에 물류 지원을 강화하는 것에만 의회에 동의를 구했다. 또한 시리아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의 군사 행동을 약간의 항공 작전과 특수군 활동으로만 한정했으니 지상에서 벌어지는 실제 전투는 현지의 반군 세력을 찾아내 맡겨야 했고, 미국은 쿠르드인민방위군(이하 ‘YPG’)을 선택했다. 이 막다른 전술은 곧바로 튀르키예 정부와 해결 불가능한 갈등을 일으켰다. 튀르키예는 YPG를 테러 집단으로 규정하고 있었다."(126-7)


"이란 문제와 관련해서, 오바마는 이란의 핵 야심을 꺾기 위한 미국의 위력 과시가 관계 재설정의 조건이 되어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오바마가 미국의 에너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여지에는 한계가 있었다. 2015년의 핵 합의가 일시적으로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제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란이 중동에서 벌이는 지역적 활동에 대해서는 이 합의가 제재하는 바가 없었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단지 지연만 시킬 수 있을 뿐이고 이란이 시리아에서의 군사 행동도, 헤즈볼라와 하마스 지원도 계속할 수 있다는 현실은 미국 의회에 첨예한 동요를 일으켰다. 공화당이 다수인 상원이 조약을 비준할 리 만무했으므로 오바마는 입법부의 동의가 필요 없는 행정부 간의 협정으로 틀을 바꾸었고, 따라서 미래의 어떤 대통령이든 [역시 의회의 동의 없이] 그것을 다시 되돌릴 수 있게 되었다. 당내 경선에 나선 공화당의 주요 후보 모두가 반대했으므로, 이란 핵 합의는 민주당이 대선에서 지면 존속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128-9)


"미국이 석유 수입을 완전히 멈춘다 해도(가까운 시일 내에 일어나지도 않겠지만) 미국의 에너지 자립은 환상이다. 셰일오일을 처리할 미국 내 정제 시설 용량 때문에 셰일오일 생산량이 제약되기 때문이다. OPEC 플러스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유가가 너무 오르면 미국 소비자에게, 유가가 너무 내리면 미국 생산자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실제로, 중국이 미국 대신 세계 최대 석유 수입국이 된, 셰일이 구성한 에너지 세계는 역설적으로 카터 독트린의 군사전략적 논리를 강화한다. 중국이 페르시아만에 해군을 영구 주둔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중국 지도부는 이란을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국가로 취급한다. 미·중 간의 지정학적 경쟁 관계가 격화되고 있으므로 어떤 미국 대통령에게라도 중국이 그곳에서 지배적인 해군 주둔국이 되게 내버려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중국으로 가는 석유 수입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페르시아만에 미국이 계속 주둔한다면, 국내 정치에서 반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131-2)


| 2부 | 경제

4장 우리의 통화, 당신네 문제


"브레턴우즈 종말 이후의 통화 세계에서 유로달러 시장과 석유가 미국 금융 권력의 기초가 되었다. 유로달러 시스템은 달러의 국제적 위상을 국내적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유지하기가 더 쉬워지게 해주었다. 역외 달러 시장 덕분에 달러가 은행 거래와 신용 거래의 주요 통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73년 오일 쇼크는 유로달러 시장을 한층 더 활성화했다. 또한 아랍 산유국들이 버는 달러 수입이 다시 미국으로 흘러와 재유통되는 메커니즘도 생겨났다. 닉슨의 재무부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로 번 달러를 [미국이 아니라] 유럽 국가들에 빌려주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1974년에 사우디가 미 국채를 사주도록 합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보면, OPEC 국가의 국영 기업들이 중동에서 활동하던 미국과 유럽 기업들의 점유율을 가져가던 1970년대에, 미국의 중동 에너지 안보에서 사우디의 효용성이 높아진 것과 사우디가 미국이 석유를 달러로 수입할 수 있게 해준 것은 한 세트였다."(154-5)


"1970년대의 경제를 ‘하나의 이데올로기[신자유주의]가 부상해서’라고만 설명한다면 그 10년간 위기의 기저에서 정치인이나 중앙은행장의 성향과 상관없이 구조적으로 펼쳐지던 물적 요인의 중요성을 절하하는 것이다. 특히 에너지는 1970년대에 국가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논쟁에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유럽과 미국 모두에서 정치인들이 자본 이동 규제를 없애려는 강한 동기가 있었던 이유는 치러야 할 석유 수입 대금이 늘어서 달러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주창자로 꼽히는 프리드먼도 에너지 문제에 집착했고 연방정부의 유가 통제와 사실상의 석유 배급이 에너지 부족의 전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인플레란 늘 화폐적 현상이고 에너지 충격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그의 학문적 논지는, 정치적 의미로 보자면 석유의 공급 부족을 없애려면 유가가 올라야 한다는 믿음의 쌍둥이 논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156-7)


"1971년 초 무렵이면 도이체마르크는 달러 대비 막대한 절상 압력을 받고 있었다. 독일 기업들이 국내의 일반 금리보다 금리가 낮은 유로달러 시장에서 달러를 굉장히 많이 빌린 뒤에 그것을 도이체마르크로 되팔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2년에 EC는 스네이크 체제Snake in the Tunnel라는 공동 환율 제도를 채택했다[브레턴우즈 체제 붕괴 이후 유럽 역내의 통화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체결된 환율 시스템. 유럽 역내 통화 사이에서의 환율은 2.25퍼센트의 변동 폭 내에서 움직이도록 하고, 역외 통화에 대해서는 변동환율을 허용했다]. 이 체제는 역내 통화들의 환율이 브레턴우즈에서보다 좁은 변동 폭에서 움직이도록 되어 있었고, 이들 사이의 변동 폭은 달러에 대한 개별 통화의 변동폭보다 낮았다. 하지만 스네이크 체제는 EC 국가들의 통화를 서로에 대해 안정시키려면 통화가 취약한 국가들이 국내 정치적으로 도저히 고려할 수 없는 정책을 그 국가들에 강제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158-60)


"단기적으로 달러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만, 중기적으로 달러가 유럽 국가들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려면 독일과 프랑스가 계속해서 〈두 개의 다른 통화 지역〉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슈미트는 환율조정장치Exchange Rate Mechanism(이하 ‘ERM’)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통화제도European Monetary System(이하 ‘EMS’)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리고 다소 까다로운 상대이긴 했지만 프랑스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함께 이 일을 추진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새로운 유럽 고정환율 시스템에서 모든 당사국은 인위적으로 만든 새 화폐 단위인 유럽통화단위European Currency Unit(이하 ‘ECU’)[EC의 통화 단위. 1979년에 도입되었고 1999년 1월 1일 유로화로 대체되었다]에 자국 화폐를 고정함으로써 유럽통화제도가 수반하는 통화들 사이의 권력 위계를 가리려 했다. 금융 역사학자 찰스 킨들버거는 ECU를 “독일 마르크화에 프랑스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묘사했다."(161)


5장 ‘메이드 인 차이나’는 달러가 필요하다


"2000~2007년, 연평균 성장률이 최고 14퍼센트에 달하기도 했던 중국의 경이로운 경제 성장은 세계 경제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중국 정부는 달러 대비 인민폐 환율을 수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면서 수출 주도 전략을 폈다. 중국이 2001년에 WTO에 들어오게 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 2000년에 미국이 중국과 영구적인 무역 정상화를 하기로 하면서 여기에 더욱 속도가 붙었다. 이 새로운 무역 세계에서 중국의 수출품은 주로 제조품이었다. 따라서 미국과 상당수 유럽 국가들이 막대한 대對중국 무역 적자를 보게 되었다. 미국의 대對중국 상품수지 적자는 1999~2008년 사이에 거의 네 배가 되었다. 중국 제조품 수출의 급증은 북미와 서유럽의 노동시장에, 특히 미국 노동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충격의 규모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중국의 수출이 집중된 분야에서 상당히 충격이 컸으며 자국내 공급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182-3)


"표면상으로 보면 워싱턴에서의 정치적 대치는 후버 행정부 때부터 레이건 행정부 때까지 의회에 존재했던 보호주의적 압력의 재탕 같았다. 하지만 몇몇 미국 기업은 초국적 생산과 중국의 커다란 공급망으로부터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었다. 미국의 테크 분야와 전자제품 제조 분야는 제품을 중국에서 조립하는 데서 막대한 이득을 보았고 월마트 등 값싼 중국제 수입품을 판매하는 거대 할인 유통매장도 그랬다. 2004년부터는 애플의 거의 모든 제품이 해외에서 제조되었고 대부분은 중국에서였다. 이렇게 이득이 선택적으로 존재했다는 점은 〈중국에 맞서자〉는 레토릭에 대한 공감을 감소시켰다. 아이팟을 중국에서 제조하는 것이 미국의 무역 적자를 심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제품의 부가가치 대부분은 여전히 미국이 얻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미국의 정치에서 계급 갈등을 촉발했다. 이득을 얻는 쪽은 주주들이거나 높은 보수를 받는 경영자들이었고 손해를 보는 쪽은 공장 노동자들이었다."(184-5)


"어떤 이들은 21세기 초 미국의 통화 이득과 중국의 무역 이득을 보면서 앞으로 꽤 한동안 금리가 내내 낮게 유지될, 사실상 새로운 국제 통화 질서가 만들어졌다고 여겼다. 이 질서가 브레턴우즈의 반쯤 부활한 버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과 모리츠 슐리크는 이 경제 세계를 〈차이메리카Chimerica〉라고 불렀다. 하지만 실제로는 단기적인 불안정성이 상당히 존재했고, 곧 이 불안정성은 세계 경제 전체로 파급 효과를 일으키게 된다. 무엇보다, 석유는 중국의 경제 성장이 무해하기만 한 신용 환경을 창출하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만들었다. 사실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석유 수요와 점점 심해지는 공급 부족이 통화 부문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통화 부문에서의 파장은 연준이 유가 상승이 추동하는 인플레를 우려해 통화를 조이기 시작한 2004년 6월에 처음 드러났다. 연준의 고위 정책결정가들에게 고유가의 귀환은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191-2)


"사실 2007~2008년 붕괴는 여러 개의, 다중 붕괴였다. 첫 번째 붕괴는 미국의 주택 시장 붕괴였다. 두 번째 붕괴는 미국에서는 2007년 4분기에, 유로존과 영국에서는 2008년 2분기에 시작된 경제 불황이었다. 이 불황은 유가 충격, 그리고 이에 대한 중앙은행들의 정책 대응으로 일어났다. 세 번째 붕괴는 2007년 8월 9일에 레포 시장에서 시작된 은행 붕괴였다. 은행 간 거래 시장에서 모든 은행의 자금 조달 비용이 급등했다. 연준은 통화 정책 대신 유럽중앙은행, 영란은행, 스위스 중앙은행에 달러 스와프를 제공하는 쪽으로 정책 수단을 변경했다. 그 중앙은행들을 통해 달러가 유로달러 신용 시장의 유럽 은행들에 들어가도록 한 것이다. 연준이 달러 자금 조달 시장을 안정시키려 하는 동안, 은행 위기는 석유가 일으킨 불황과 결합했다. 북아메리카, 유럽, 몇몇 아시아 국가에서 산출과 고용이 더 떨어졌다. 세계 전역에서 소비 수요가 너무 떨어져서 국제 교역이 빠르게 위축되었고 중국의 수출 분야가 타격을 입었다."(194-8)


6장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2007~2008년의 금융 붕괴 당시가 제대로 기능하는 신용 환경이었다면 연준이 매우 완화적인 통화 정책을 폈을 때 신용 시장이 되살아나고 실물 경제가 다시 성장 경로에 올라갔어야 한다. 하지만 유로달러 시장 때문에 금융 시스템의 작동 방식이 매우 꼬여 있었다. 금리 인하만으로는 은행들의 자금 조달 시장을 안정시키는 데 충분하지 않았으므로, 연준은 유로달러 시장에서 최종대부자 역할을 해야 했다. 연준의 조치는 주요 유럽 은행들의 파산을 막았지만, 동시에 지정학적 함의가 있는 금융·통화 위계를 만들었다. 2008년 이후의 통화 세계에서 연준은 어떤 나라의 은행이 빌리는 달러를 연준이 지원할 것인지를 정할 수 있었다. 총계적 수준에서 국제 신용 환경은 위축되었다. 그런데 이 위축은 주로 유럽에서, 특히 영국의 은행들에서 일어난 것이었고, 중국을 비롯한 신흥시장에서는 국경을 넘는 신용 흐름이 증가했다. 그 결과 2008년 이후 중국 경제는 달러 신용 환경에 훨씬 더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205-6)


"양적완화는 체계적으로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중 일부는 자산 가격 인플레와 관련이 있었다. 연준의 조치는 채권수익률을 끌어내리면서 불가피하게 자산 가격을 밀어올렸다. 이는 은행들의 대차대조표가 건전해 보이게 했고 따라서 은행들은 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있었으며, 그러는 동안 은행들이 빌리는 돈에 대해 금리는 계속 제로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연준의 정책은 자산 가격 상승과 값싼 신용을 동시에 일으키면서, 기업들이 빌린 돈을 생산적인 역량에 투자하기보다 자사주를 매입하는 데 쓰고자 할 유인을 강화했다. 또한 자사주 매입의 급증은 미국의 많은 거대 기업들이 고위험 금융 행동에 나서도록 부추기기도 했다. 따라서 팬데믹이 강타했을 때 기업들의 현금 보유는 매우 낮은 상태였다. 더 일반적인 면에서, 상승하는 자산 가격은 당연하게도 이미 자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유리했다. 그런데 나이 든 사람들이 자산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많으므로, 양적완화는 세대 간 부의 불평등을 증가시켰다."(207)


"유로존의 통화 취약국들은 더 심각한 구조적 동학에 처했다. 우선 스프레드를 관리하려면 금융 시장에서 자국의 신뢰도를 방어해야 하는데, 국채 시장에서 압력을 줄여줄 목적으로 통화 정책을 펼 수 있는 중앙은행이 없었다[유로존에서 개별 국가의 중앙은행은 통화 정책을 유럽중앙은행에 이관했고 유럽중앙은행은 개별 국가의 통화 방어를 위한 통화 정책을 펼 수 없다]. 이에 더해,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유럽중앙은행이 회원국 부채를 직접 매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서 유럽중앙은행은 어떤 나라의 국채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부채 보증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국가 안에서도 유럽 차원에서도 최종대부자 역할을 해줄 곳이 없는 상태에서, 국가 간 자금 조달 비용의 차이인 스프레드는 사라질 수 없었다. 자본 시장에서 거부당한 나라들(2010~2011년에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이 자본 시장에서 돈을 빌릴 수 없었다)은 이제 구제금융이 필요했는데, 마스트리흐트 조약은 구제금융도 금지하고 있었다."(211-2)


"2008년 금융 붕괴 이후 중국 지도부는 중국이 〈달러의 덫〉에 빠졌다고 판단했다. 대규모의 달러를 보유하고 무역을 거의 전적으로 달러로 결제하고 있는데, 미국이 언제라도 달러를 평가절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중국이 부채를 조달해 대규모 부양책을 편 후에, 중국의 은행 시스템이 GDP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그 은행 시스템과 중국 기업들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국제 달러 신용 환경에 깊이 통합되었다. 2014년이면 중국의 총 대외 부채는 (아마도 축소되었을 공식 발표에 따르더라도) 2008년보다 450퍼센트 이상 높았고 상당 부분이 달러 표시 부채였다. 이런 상황에서 2015년 여름에 연준이 금리를 인상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자 막대한 자본 이탈을 겪은 중국 당국은 국내의 금융 안정성이냐 국제 시장에서의 인민폐의 지위냐 중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중국 당국은 전자를 선택했고 자본 통제를 강화했다. 이렇게 누적된 금융 위험은 중국의 성장을 심각하게 제약했다."(232-3)


"시진핑 본인의 말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는 중국 경제를 지정학적으로 다시 계산하고자 했다. 시진핑은 기존의 미국 수출 시장 위주에서 유라시아로의 전환을 한층 더 강화했다. 이러한 지리적 전환은 대對유럽 교역과 투자를 늘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중국의 유라시아로의 전환은 유럽을 분열을 촉진했다. 중국의 유라시아로의 전환, 그리고 2016년 이후 자본 통제 강화로 인한 중국의 유럽 투자 축소 모두가 유럽을 경제적으로 분열시켰다. 두 요인 모두 EU와 유로존 둘 다에서 독일의 경제적 위치가 다른 나라들과 다르다는 점을 한층 더 강화했다. 그러는 동안, ‘차이메리카’의 경제적 공생 관계가 미-중 간의 지정학적 라이벌 관계로 바뀌고 홍콩이 관문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이 줄면서 유럽의 경제적 분절은 첨예한 지정학적 측면을 갖게 되었다. 중국이 러시아와 더불어 EU에서 NATO를 둘러싼 분열의 원천이 되었고 영국이 EU로부터 멀어지는 데 명시적인 지정학적 이유를 만들어낸 것이다."(236, 240-1)


| 3부 | 민주정치

7장 민주정에서의 ‘시간’


"역사에 민족공동체/국가공동체 의식이 제공하는 정치적 자원 없이 대의제 민주정이 존재한 사례는 없었다. 개념적으로, 대의제 민주정에서 민족공동체/국가공동체는 ‘국민’으로서 기능한다. 누가 그 국민이어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해 역사적으로 사용되어온 답은 ‘민족적 정체성을 공유한 사람들nation’이었다. 대의제 민주정에는 패자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이 필요하다. 정부 형태 중 대의제 민주정만이 모든 성인 시민에게 통치자가 누가 되어야 할지를 물은 다음에 그 시민의 일부만 그들이 선택한 대표자를 갖게 한다[나머지 시민들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대표자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권력이 교체될 수 있으려면 선거에서 진 사람들이 폭력이나 분리 독립으로 가지 않고 선거 결과에 승복할 수 있게 할 암묵적인 정당화 기제가 필요하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 정치적 문제에 역사적으로 해법을 제공해온 것이 민족공동체/국가공동체 의식nationhood이었다."(253-4)


"국민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하는 정치 형태에서 실제로 국가공동체 의식을 일구는 일이 현실적으로 막대하게 어렵다는 사실은 민주정 정치체에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부담이었다. 민족적 공동체 의식을 가진 사람들로서의 ‘국민the people’이라는 용어는 필수 불가결했고, 즉각적으로 활용이 가능했으며, 또한 사라지기 쉬웠다. ‘국민’으로서의 민족공동체 개념이 ‘패자의 동의’를 가능케 해주는 통합의 동인이 되리라 여겨진 곳에서, 이 화법은 동일한 민주정 국가의 권위에 귀속되는 모든 사람은 동일한 정치적 권리를 갖는다는 점을 부인하는 데도 그만큼이나 쉽게 사용될 수 있었다. 민족/국민이 아닌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람이나 (실제로야 어떻든 간에) 다른 종류의 충성심을 가졌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배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족/국가nation라는 단어의 의미를 현재 확립되어 있는 국가의 시민들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재정의하려는 세력에 표를 던지려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259)


"정치에서 시간이 ‘불안정화의 차원dimension of instability’이라는 점(역사학자 존 포콕이 한 말이다)은 한때 정치 사상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개념이었다. 유럽에서는 시간에 따른 부패라는 개념 틀로 정부 형태를 이해하려는 접근이 일찍이 폴리비오스부터 시작해 마키아벨리에서 학술적 정점에 올랐다. 폴리비오스는 각각의 정부 형태가 그 자신의 과잉에 의해 파괴된다고 보았다. 그는 이 사이클을 막고 중간 상태(‘균형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 가지의 긍정적인 정부 형태인 왕정, 귀족정, 민주정 사이에 균형을 맞추어 서로가 서로에 대해 길항력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증가하는 외부적 권력과 물질적 번영은 어떤 구조적 균형이 성립되었더라도 그것에 위협 요인이 된다고 경고했다. 폴리비오스가 말한 귀족적 과잉과 민주적 과잉의 축적이라는 개념은 정치체가 시간이 가면서 불안정해지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260-2)


"대의제 민주정이 가지고 있는 귀족정의 요소는 종종 수사적으로 가려지지만, 일반적으로는 귀족정의 요소가 더 지배적이다. 대의제 민주정은 대표를 위임하는 다수의 사람들과 훨씬 소수인 대표자들 사이를 구분하며, 권위 있는 의사결정 권한을 행정부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시킨다. 대통령제에서 이들 중 일부는 선출되지 않고 지명된다. 또한 국민 다수의 표를 얻은 선출직 대표자들이 내리는 정치적 의사결정은 일반적으로 헌법에 의해 제약된다. 모종의 사법적 심사 제도가 있는 민주정 정치체에서, 때로는 헌법 재판소가 선출된 의원들이 만든 법을 철회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사법적·헌법적 실행은 소수자를 보호하는데[다수의 의견으로 정해진 결정도 철회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호받는 소수자에는 부자들도 포함된다(재산권을 통해 보호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자에게 높은 세금을 물리고 노동자에게 가는 몫을 늘리는 데 필요한 조건을 만든 것은 보편참정권에 기반한 선거가 아니라 전쟁이었다."(264-5)


8장 민주정 과세 국가의 흥망


"전체적으로 보면, 2차 대전 이후의 지정학적·경제적 세계는 1차 대전 이후의 세계보다 민주정 국가들의 미래에 더 유리한 면이 있었다. 구조적으로, 브레턴우즈 체제는 전후 서구 국가들에서 경제적 공동체주의를 촉진함으로써 이 국가들에 필요한 지원을 제공했다. 루스벨트 행정부가 다른 나라들에 자본 이동을 통제할 권한을 주고 단기 신용에 접근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은 전후 서유럽 민주정 국가들에 중대한 이점이 되었다. 금융을 국가 단위에서 통제할 수 있게 된 전후 민주정 국가들은 통화 정책에서 [국제 금융의 영향력에 대해] 자율성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자본 이탈 위험이 줄면서, 전후 서유럽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을 국가가 그들에게 공식적·비공식적으로 경제적 권리를 보장하는 시민으로서 이야기했고, 그러한 경제적 권리가 현실에서 가장 잘 실현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두고 서로 경쟁했다. 따라서 정부와 당국자들은 경제를 국가 단위로, 즉 국가 단위의 성장 회계와 성장률을 통해 이해했다."(287-8)


"전후 유럽의 민주정 국가들은 1920년대보다 재정 위기에 처할 위험이 적었다. 1945년 이후로 정부들은 부자들에게 상당한 과세를 하는 것도 포함해 전쟁 시기에 도입된 고율 과세 체계를 평화 시기의 복지 제도에 활용할 수 있었다. 이 복지 제도는 이후 몇 년이 아니라 몇십 년간 이어지게 된다. 국가가 자본 이동을 통제할 수 있어서 부자들의 조세 회피와 포탈이 어려워진 것이 여기에 일조했다. 또한 정부들은 과거의 부채를 상환하느라 고전할 필요가 없었다. 마셜플랜을 통해 미국의 자금이 공식적으로 주입되고 이어서 부채 저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서구 민주정 국가들이 부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데는 이들이 이 시기에 새로운 부채를 그다지 많이 쌓지 않았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 자금을 대기 위해 자본 시장에서 돈을 빌리는 쪽으로 돌아서기 전까지, 전후의 정부들은 대체로 균형 재정을 유지했고 지출은 자국의 시민과 기업으로부터 걷는 세금으로 충당했다."(291-2)


"미국에서 인종적·민족적 다양성이 더 높아진 민주정, 모든 시민의 투표권이 연방정부에 의해 보호되는 민주정으로의 전환이 일어난 시기는 베트남 전쟁에서 징집 군인들이 싸우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종적으로 통합된 군대를 위한 징집제가 새로이 정치적 국가공동체주의를 재생하는 데 기반이 되기는커녕, 되레 인종적·계급적 갈등을 일으켰다. 상당수의 부유한 백인 남성은 [대학생 징집 유예 등으로] 교육 기회를 이용해 징병을 유예했다. 대조적으로 흑인은 인구 비례 수준 이상으로 많이 징집되었고, 인구 비례 수준 이상으로 많이 사망하고 부상을 입었으며, 전쟁 초기에는 더욱 그랬다. 징집은 베트남 전쟁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징집을 끝내는 것이 정치적으로 필요했을지는 몰라도, 이제 국가공동체 의식을 되살릴 수 있는, 역사적으로 효과가 입증된 선택지는 미국에 별로 남지 않게 되었다. 뉴딜 버전 국가 공동체주의의 토대였던 경제 여건도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298)


"1970년대 이후 더 국제화되고 금융화된 경제의 여러 영향이 함께 작용하면서 경제적 국가공동체주의를 끝장냈다. ‘경제적 운명을 공유하는 국가 단위의 정치체라는 것이 존재하며 그 경제적 운명에 대해 국가 정부가 책임을 진다’는 개념이 그것을 지탱해주는 외부 환경이 사라지면서 무너진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이익은 너무나 맹렬하고 명백하게 분열되었다. 여러 유럽 국가에서 전국 단위의 단협을 가능하게 했던 국가조합주의는 붕괴했고, 개방적인 자본 흐름과 점점 더 국제화되는 생산 환경에서 그것의 복원은 불가능했다. 예측 가능하게도 부채가 경제적 국가공동체주의의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부들이 국제 자본 시장에서 돈을 빌려 지출을 충당하는 쪽으로 돌아가자 저축자이자 납세자인 시민들을 통해 국가의 자금을 조달하고 채권자-채무자간 갈등이 일으키는 위험을 제어하던 기제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런 다음에 재정 적자를 유지하는 이자 부담은 세금으로 시민들에게 떨어졌다."(312-3)


9장 개혁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쉽게 고칠 수 없는 조약에 의해 만들어진 통화연맹은 EU 회원국들의 국내 정치에 막대한 부담을 가져왔다. 불안정을 일으키는 요인 중 어떤 것은 맨처음부터 존재했다. 통화연맹 구성이 본질적으로 독일이 제시한 조건대로 이루어졌으므로 회원국 전체에서 지지를 얻기에 정치적 합의가 매우 부족했다. 국가 정치에서의 선거와 EU 조약이 정한 법적 원칙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일반적인 이슈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프랑스에서는 국민투표가 유로존에 일어날 수 없는 변화를 요구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유로존이 부채가 국내 정치의 장에서 논의와 경합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는 방어막이 되었다. 프랑스에서 2012년에 올랑드가 EU 조약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내걸고 선거에 나와 당선되었지만 실제로는 조약을 거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듯이, 2010년 선거에서 [EU 조약이 정한 단일시장 규칙에 맞서서] 이민자 제한 목표치를 공약으로 내걸고 승리한 캐머런도 실제로 공약을 실행할 수 있는 입장이 전혀 아니었다."(353-4)


"2008년 이후의 통화 환경, 그리고 구성 조약을 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유럽중앙은행을 변화시켜야 할 필요성은 독일 정치에 유로존 이슈를 다시 불러옴으로써 기본적인 분열의 동학에 교란 요인을 더 보탰다. 여기에 더해 2015년의 국경 위기는 EU와 유로존에서 독일이 갖는 영향력을 둘러싸고 생겨났던 정치적 문제들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들었다. 영국에서는 다국가 연합으로서의 UK의 불안정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유로존의 각기 상이한 측면들에 대해 분출한 대중민주적 불만이 억눌러져야 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이것이 대연정 정치로의 움직임을 추동했다. 프랑스에서는 유로존 및 EU 조약이 주요 양당을 너무나 약화시켰기 때문에 대연정이 선택지에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거리의 시위 정치가 성장했고 때로는 국가가 억압으로 이에 대응했다. 카탈루냐 문제가 대연정의 전조가 되었던 스페인에서는 프랑스에서보다도 더 가혹하게 국가의 억압적인 대응이 벌어졌다."(354)


"미국에서는 민주정치적 과정이 과두 귀족들의 돈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제약되었다. 핵심 질문은 〈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무엇이 동일하게 남아 있어야 하느냐’가 아니라 ‘선거 결과가 합당하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가 되었다. 경제적 국가공동체주의가 되살아나 더 많은 시민을 포괄하거나 시민권 문제를 해소해주기는 어려워진 상황에서, 냉전이 종식되고 인구 구성이 바뀌면서 ‘패자의 동의’가 잘 작동하도록 국가공동체주의를 일구어야 할 필요성은 오히려 증폭되었다. 공화당은 냉전 시기에 외교 이슈에서 가졌던 이점이 없어졌고 민주당은 남부에서 강하게 가지고 있던 입지가 1964년 이후로 계속 약화되었기 때문에, 두 정당 모두 유권자 과반을 잡는 데 고전했다. 이에 더해 1960년대 이래 대법원의 결정을 둘러싼 맹렬한 싸움은 매번의 대선을 일정 정도 앞으로 대법원의 정치적 방향이 무엇이 될 것인가의 싸움이 되게 했고, 이는 대법원의 역할이 합의된 헌법을 고수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훼손했다."(355-8)


"패자의 동의가 취약하다는 사실의 기저에는 미국의 국가공동체주의 그리고 그 공동체주의와 연방제라는 형태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놓여 있다. 미국의 역사적 기억에 대한 이슈들, 특히 미국 공화정의 건국에 대한 기억의 이슈는 해체적인 정치적 열정에 불을 붙인다. 남부연맹의 역사를 집합적인 미국의 역사적 경험에 포함하는 것은 남북 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합의의 일부였다. 하지만 이전의 노예가 이제는 시민이 된 국가에서, 이것은 미국 국가공동체주의의 언어를 크게 제약했다. 아직 미국은 미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할 수 있는 ‘미국인’ 개념을 뒷받침하는 과거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에 더해 인구 변화로 반다수주의적 원칙에 기초한 상원의 구조가 정치의 결과에 더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충돌 양상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이러한 정치적 조건에서, 선거 자체가 민주정의 위기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헌법 자체가 점점 더 민주정치적 쟁투의 대상이 되고 있다."(370-1)


나가는 글: 앞으로 올 더 많은 일들


"팬데믹은 새로운 변화를 불러온 촉매이자 이전 교란의 연속선이었다. 21세기의 첫 20년간 형성된 문제들은 모든 면에서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녹색에너지 투자를 가속화하려는 지정학적 동기는 미·중 경쟁의 강도를 높일 것이다. 가장 명백하게는, 미국이 중국 제조업 공급망에 대한 의존도를 깨는 데 성공할수록 중국의 맞대응이 더 촉발될 것이다. 중국이 이를 보상하기 위해 국내 시장을 확대하면 세계 경제에는 미·중 간의 지정학적 경쟁 관계가 스며들지 않은 영역이 거의 남지 않게 될 것이고 그 안에 묶여 있는 모든 나라는 해양 수송을 경제 안보의 문제로 여기게 될 것이다. 유라시아에서는 중국이 대륙을 가로지르는 육상 벨트의 일부로 추구하는 철도 경로가 한층 더 정치적인 싸움의 대상이 될 것이다. 기후와 관련해서는, 새로운 세계에서 석탄을 태울 수 있는 역량이 중국의 암묵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대기 오염 문제만으로도 석탄에서 멀어져야 할 국내적 인센티브가 상당하긴 하지만 말이다."(392-4)


"녹색에너지가 만들 지정학적 동학은 석유와 가스가 만들어온 오랜 지정학적 동학과 공존할 것이다. 중국이 계속해서 중동 석유에 의존할 것이고 중국이 추진하는 유라시아 벨트의 파키스탄 부분이 ‘믈라카 딜레마’에 대해 부분적인 안전망밖에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중국은 에너지와 관련해 미국의 군사적·금융적 권력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여전히 있다. 또한 중국의 중동 에너지 의존은 미국이 페르시아만에서 철수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옛 에너지 현실의 지정학적 영향은 2021년에 (중국이 이란의 석유와 가스 분야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것을 포함해) 중국과 이란이 25년간의 경제 파트너십을 맺기로 하면서 더 없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과거에 중동을 둘러싼 유럽의 제국주의적 경쟁에서 영국이 승리하는 데 이란이 핵심이었듯이, 석유와 가스에서 벗어나려 하면서도 석유와 가스에 계속해서 의존하고 있는 나라들이 직면하는 어려움 속에서 이란은 앞으로도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394-5)


"석유 생산을 둘러싼 지정학적·금융적 조건에서 나온 역기능적 동학은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공급과 관련해서 셰일오일은 늘 중기적인 해법밖에 되지 못했다. 석유 분야에 막대한 투자가 쏟아져 들어와 고비용의 생산을 가능케 하는 것이 되풀이될 수 없다면, 향후 수십 년 동안 세계 경제는 2000년대에 그랬듯이 중동과 러시아에서 오는 비싼 석유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고유가가 돌아오면 투자 인센티브가 생겨야 하지만, 이는 화석연료 투자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가 높지 않을 때만 성립하는 이야기다. 고유가는 생산 투자 인센티브는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경제 성장을 심각하게 제약할 것이고 다시 한번 소비 수요를 위축시킬 것이며 이라크를 포함해 석유 생산 국가들을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다. ‘OPEC 플러스’에 대한 의존이 재활성화할 옛 문제들은, 이들 OPEC 플러스 국가들이 석유 확보 각축전이 새로이 불러올 막대한 중장기적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과 나란히 다시 불거질 것이다."(396-7)


"국내 정치 면에서 보면, 에너지 소비는 불가피하게 옛 갈등을 강화하는 새로운 분배적 갈등을 맹렬히 일으킬 것이다. 부분적으로 이는 녹색에너지 전환과 전기화에 어떻게 인센티브를 충분히 부여하고 여기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 것인지와 관련이 있다. 일례로 프랑스에서 유류세 인상에 저항하며 일어난 노란 조끼 시위는 ‘패자의 동의’ 문제가 선거에서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 문제는 에너지의 미래 모습이 실질적으로 어떠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개인 교통수단이 정치적 갈등의 장소가 될 것이다. 개인의 에너지 소비에 대한 분배적 함의가 명백해질수록 탄소 중립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의 문제는 (얼마나 많은 탄소를 “제거elimination[실질적으로 탄소를 없애는 것]”해야 하는 것인가뿐 아니라 “상쇄offset[자기 배출량을 다른 활동으로 보상하는 것]”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도 포함해서) 정부가 감축목표치를 발표하는 수준을 넘어 선거 경쟁의 장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398-9)


"에너지 시간의 근본 문제는 이동하지 않았다. 민주정 국가들이 에너지와 관련해 겪어온 난관에서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으로 달라진 게 있다면, 많은 이들이 에너지 이슈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론적으로는, 에너지 이슈에 대해 대중의 인식이 높아지면 2050년까지 에너지 전환을 실현한다는 유럽의 원래 공식이 토대를 두고 있는 기술관료적 논리가 느슨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너지에 대한 인식이 높아질 때 현실에서 더 있을 법한 결과는, 기후변화에 직면해 모든 사람이 공유하게 된 이해관계와 개인 교통수단의 전기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될 불평등 사이의, 그리고 높은 화석연료 가격이 늘 유발하기 마련인 불평등 사이의 깊은 간극이 드러나면서 서구 민주정 국가들이 귀족적 과잉의 덫에 더 깊이 빠지는 것이다. 21세기의 첫 20년 동안 에너지가 정치적 격동과 무질서의 ‘기저에 있는’ 요인이었다면, 앞으로의 세계에서 에너지는 정치적 격동과 무질서를 ‘주되게 실어나르는’ 핵심 매개가 될 것이다."(4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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