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유라시아 세계사 - 프랑스에서 고구려까지
크리스토퍼 벡위드 지음, 이강한.류형식 옮김 / 소와당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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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역사 자료들 속에 있는 중앙유라시아인들에 대한 선입관들은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모두 고대 그리스-로마의 관념, 즉 야만인(barbarian) 판타지에서 직접적으로 비롯된 생각들로, 거의 변화된 바가 없다. 중앙유라시아 스텝 지역 유목민들은 〈타고난 전사들〉이 아니었다. 이는 도시 지역 중앙유라시아인들이 〈타고난 상인〉이 아니었고, 농경 지역 중앙유라시아인들이 〈타고난 농민〉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유목민들이 건설했던 국가와 정주민들이 건설했던 국가는 모두 복합 사회(complex society)였다. 유목 국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 할지라도, 인구도 훨씬 많고 부유했던 주변 정주 국가에서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직업 군인들이 무척 많았다. 또한 유목민들은 가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평범한 유목민들은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주변 농업 지역 백성들보다 훨씬 더 한가했다. 농경 지역 백성들은 노예였거나 노예보다 조금 나은 대우를 받는 정도에 불과했다."(41-2)


프롤로그 ─ 영웅과 그의 친구들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의 초기 형식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사회정치적-종교적 이상형으로서의 영웅적 군주와 그의 코미타투스(comitatus, 친위부대)이다. 코미타투스는 목숨을 걸고 주군을 지키기로 맹세한 주군의 친구들로 구성된 전투 부대이다. 기본적인 코미타투스와 그들의 맹세는 스키타이 때부터 존재했다. 이는 목숨을 건 의형제들의 피의 맹세와 분명하게 구분하기가 어려운데, 이러한 맹세는 고대 스키타이 자료로부터 중세의 『몽골비사』에 이르기까지 확인할 수 있다." "코미타투스 전사들은 자유의지에 따라 맹세를 했고, 이렇게 함으로써 출신 부족이나 출신 나라와의 인연은 끊어졌다. 그들은 주군의 가족만큼, 어쩌면 가족보다 더 주군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들는 주군의 집에서 주군과 함께 살았으며, 맹세의 대가로 넉넉한 보상을 받았다. 코미타투스의 존재는 중앙유라시아 전역에서 매장지의 고고학적 발굴이나, 문화를 기술한 역사서들을 통해 확인된다."(65-7)


"코미타투스에게 주어진 보상은 상당한 것이었다. 금, 은, 보석, 비단, 도금된 철갑, 무기, 말, 여타 보물들이 주어졌는데, 여러 사료에 생생한 증언이 남아 있다. 코미타투스와 더불어 수많은 무기와 말들이 함께 매장되었다." "이러한 부장품들은 전쟁이나, 혹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조공을 통해 획득한 것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무역을 통해 축적된 것이었다. 무역이야말로 중앙유라시아 내부 경제를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었다." "중앙유라시아 유목민이 정주민에 대해 요구한 평화 조약에는 항상 이러저러한 무역권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약하자면, 실크로드는 중앙유라시아 문화와 동떨어진, 소란을 피우는 원인이 아니라, 근본적인 경제의 구성 요소였다. 더욱이 지역 내 근거리 무역과 국제 무역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문화 교류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목 경제와 오아시스 농업 경제, 중앙아시아 도시 경제는 모두 함께 실크로드의 구성 요소가 된다."(86-9)


CHAPTER 1 ─ 전차를 탄 전사들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Central Eurasian Culture Complex)는 거의 4,000여 년 동안 유라시아 지역 대부분을 지배했다. 이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는 역사언어학으로 포착할 수밖에 없다. 바로 원시 인도유럽어족(Proto-Indo-European)이 그들이다." "기원전 2000년경,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어떤 민족이 고향을 떠나 이동을 시작했다. 기원전 두번째 밀레니엄(2000~1001 BC)의 1,000여 년 간, 이들은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원래 살고 있었던 선주민들을 정복하거나, 혹은 그들과 뒤섞이면서 역사학적으로 확인 가능한 여러 갈래의 인도유럽어족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단지 개별 부족 단위였거나 혹은, 사실상 전사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원전 첫번째 밀레니엄(1000~1 BC)이 시작될 무렵에 이르러서는 인도유럽어족이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그렇지 않은 지역이라도 거의 다 인도유럽어족의 문화와 언어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93-4)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가장 오래된 전차는 중앙유라시아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바로 신타슈타(Sintashta) 유적지로 우랄-볼가 초원 지대 남쪽에 있으며, 기원전 2000년경의 유적이다. 역사학적 자료를 보면, 전쟁에서 전차가 실제 사용된 것으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사건은 기원전 17세기 중반의 일로, 하투실리 1세가 통치하던 히타이트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리야누(maryannu)는 미타니 지역의 고대 인도어족 전차 전사들이었는데, 그들은 전차용 말을 기르는 전문가들이었다. 같은 시기 미케네 그리스인은 히타이트와는 서쪽에서 이웃하고 있었다. 이들은 문자를 개발한 두번째 인도유럽어족이었다. 그들도 정복 전쟁에서 전차를 사용했다. 분명히 비슷한 시기에 인도 북서부를 침략했던 고대 인도어족도 마찬가지다. 알려진 최초의 전차 전사들이 모두 인도유럽어족이었던 것을 보면, 이들은 중앙유라시아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말 역시 중앙유라시아가 원산지다."(126-7)


"고고학적으로 알려진 완전한 형태의 전차는 중국 상나라 유적에서 나왔다. 그것은 상나라의 북서쪽으로부터 도입된 것으로 확인되며, 도입 시기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기원전 12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실제로는 그보다 좀 더 일찍 도입되었을 것인데, 왜냐하면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발굴 사례가 기원전 13세기를 가리키는 데다가 이미 상나라 방식으로 장식을 세세하게 갖춘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차가 상나라에 도입된 뒤 상나라의 문화가 덧입혀지는 기간이 더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상나라와 전쟁을 했던 이민족들도 전차를 사용했다. 전차를 끄는 말은 반드시 전차와 함께할 수밖에 없다. 가축화된 말은 성인 남성과 전차와 함께 상나라 왕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말과 전차 전사와 전차를 함께 매장하는 풍습은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의 전형적인 양상으로, 기원전 두번째 밀레니엄(2000~1001 BC) 말까지는 인도유럽어족만의 독특한 풍습이었을 것이다."(128-9)


"유라시아에서 인도유럽어족이 침략자로서 어떤 국경을 공격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누군가를 정복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모든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인도유럽어족도 누가 됐든 이웃한 종족과 전쟁을 했을 것이다. 불특정 민족들과 싸우는 중에, 여태까지 전쟁에서 사용된 적이 없었던 전차라는 신무기가 유라시아에서 등장하게 되었다. 전차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기계였고, 매우 정밀한 기계였다. 그래서 전차를 만들거나 사려면, 그리고 전차에 말과 전사를 훈련시키고 유지하려면 막대한 비용을 감수해야 했다. 전차에는 전문가가 필요했다. 두번째 물결에 속하는 인도유럽어족은 전차를 유지보수하고 실제 사용할 줄 알았던 최초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전차를 성공적으로 사용했던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전차는 고사하고 가축화된 말만 하더라도,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에게 얼마나 낯선 존재였는지 여러 텍스트에 자세하게 나온다."(134-5)


CHAPTER 2 ─ 로얄 스키타이 


"북부(혹은 동부) 이란어족인 스키타이는 잔인한 전사들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들의 최대 업적은 무역 시스템이었다. 헤로도토스를 비롯하여 고대 그리스의 여러 저술가들이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스키타이의 교역로는 그리스, 페르시아와 동방 지역들을 연결하였고, 이는 스키타이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이 무역에 관심을 가졌던 원동력은 그들만의 사회정치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였다 통치자 개인과 그의 코미타투스, 즉 때로 수천 명에 이르는, 맹세로 뭉친 친위대원들에게 공급할 물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중앙유라시아에서 번성했던 육로 기반 국제 교역은 스키타이와 소그드인, 흉노, 기타 여러 중앙유라시아 고대인들의 수요에 기반하고 있었다." "스키타이 파워가 한창일 때 고대 그리스어, 인도어, 중국어로 된 철학서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생산되었다는 점은 오랫동안 학자들의 관심을 끈 주제이며, 그 시기에 이미 이들 문화들 간의 사상적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141-2)


"스키타이 제국과 서부 스텝 지역의 교역망은 이후 중앙유라시아 지역에 등장한 보다 강력한 국가들의 기본 원형이 되었다. 중앙유라시아 지역에서 부와 권력이 성장하고, 여러 문화들과 점점 더 빈번한 접촉을 하게 되자, 여러 나라들이 그곳을 침략했다. 대체로 그들은 중앙유라시아 측에서 먼저 공격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쳤다. 알려진 바로 가장 오래된 침략자는 중국 지역의 주나라였다. 그들은 기원전 979년 귀신의 나라 귀방(鬼方)을 침략하여 두 번의 전쟁에서 모두 이겼다. 중국인들은 그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기회만 닿으면 반복해서 동부 스텝 지역을 침략했다. 다리우스 치하의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도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점령했고, 기원전 514년~기원전 512년경 스키타이를 침략했다. 알렉산드로스 치하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도 기원전 4세기 말에 중앙아시아 지역을 침략했다 이들 두 차례의 정복은 중앙아시아 문화에 예기치 못한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142-3)


"헤로도토스와 다른 모든 역사 자료는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 전체를 로얄 스키타이가 지배했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이들은 전사들로서 대부분의 재산을 통제했다. 그들은 〈스키타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용감한 부족이었고, 그들은 다른 모든 스키타이족을 노예로 생각했다.〉 헤로도토스는 그들 아래로 유목 스키타이가 있다고 했지만, 유목 스키타이는 아마도 로얄 스키타이에 종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축을 기르는 스키타이는 그리스인들이 보리스테네스라고 불렀던 이들이다. 농경 스키타이는 농부들로서, 그들은 〈자신이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다 팔기 위해서〉 농사를 지었다." "이론적으로 스키타이 사회는 네 개의 부족과 더불어 통치 부족으로 구분되었다. 이는 중앙유라시아 국가의 이상적인 조직 형태로서 몽골 제국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전통이다. 통치 부족은 다른 모든 부족을 〈노예〉로 간주했다. 이 또한 중앙유라시아에서 후대에까지 공통적으로 이어진 전통이다."(151-3)


CHAPTER 3 ─ 로마와 중국 사이 


"고대 중반기, 즉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는 로마 제국과 중국 한(漢) 제국의 발전이 가장 눈에 띈다. 이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부분적으로 도시도 발달한 문화였다." "서부 스텝 지역에서는 스키타이의 후예인 사르마트가 같은 이란어족인 알란(Alans)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중앙아시아 서부 지역에서는 토하리 연합세력이 이주해 와서 박트리아의 그리스계 나라들을 점령했다. 이를 근거로 쿠샨(Kushan) 제국이 성립했고, 중앙아시아로부터 인도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한편, 파르티아의 새로운 페르시아 제국은 서쪽으로 뻗어나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국경을 맞대었으며, 로마인들과 함께 근동 지역을 두고 힘을 겨루었다. 토하리의 숙적이었던 흉노는 동부 스텝 지역을 압도하다가 반으로 나뉘어져 남북으로 갈렸다. 뒤이어 남흉노가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북흉노를 격파했다. 이로 인해 무주공산이 된 동부 스텝 지역으로 몽골족 연맹체인 선비족이 들어와 흉노 대신 동부 스텝 지역을 차지하였다."(175)


"기원후 1세기에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쓴 『게르마니아』는 게르만족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전해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게르만족의 문화를 설명하면서 타키투스는 코미타투스에 대해 특별히 주목했고, 당시 존재했던 코미타투스의 본질적 요소를 모두 기술했다." "코미타투스는 프랑크 왕국 초기에도 등장했고, 스페인의 서고트 왕국에서는 8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는 또 몇 세기를 더 유지했다." "타키투스의 설명과 기타 고대 기록들은 아주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즉 고대 게르만족은 프랑크족을 포함해서 모두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알란족이나 다른 중앙아시아 이란어족들처럼 원시 인도유럽어족의 시대로부터 줄곧 이러한 전통을 유지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고대 게르마니아가 문화적으로는 중앙유라시아의 일부였으며, 게르만족이 그곳으로 이동해온 뒤 천여 년 이상 그와 같은 전통이 유지되었음을 의미한다."(177-9)


"고트족은 타키투스의 시대에는 동부 게르만족이었다. 이들은 기원후 2세기와 3세기에 이르러 비스툴라 강 유역의 발트 해에서 남쪽과 동쪽으로 확장하여 흑해에까지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폰틱 스텝 서부 지역을 장악했다 그들은 조직화된 국가가 아닌 독립적인 연맹체였다. 나중에 에르마나릭(Ermanaric)이 고트족의 그로이퉁기(Greutungi) 연맹을 창설했는데, 이는 후대에 오스트로고트(Ostrogoths), 즉 '해가 뜨는 곳의 고트족' 혹은 '동고트족'으로 불렸다. 그들은 유서 깊은 국가 수립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즉 이웃 부족을 점령하고 복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의 나라는 기원후 370년에 이르러 강력한 왕국이 되었다. 아직 훈족이 공격해오기 전이었다." "서부 스텝 지역에서 사르마트족, 알란족, 고트족의 권력은 375년에 이르러 훈족에 의해서 막을 내렸다. 중앙유라시아인들 중 규모가 컸던 종족들, 대표적으로 고트족은 이후 동로마 제국 국경 근처로 옮겨와 피난처를 구했다."(181-2)


"기원전 50년경, 쿠줄라 카드피세스(Kujula Kadphises)라는 쿠샨 추장이 토하리스탄(Tokhâristân)을 구성하는 네 부족을 병합하여 쿠샨 제국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영토를 남쪽으로 인도까지 확장하여 인더스 강 입구에까지 이르렀고, 해상 무역로를 장악했다. 이는 인도와 로마 치하 이집트 항구를 직접 연결하는 항로였다. 이 무역로는 파르티아를 거치지 않았고, 따라서 파르티아에 세금을 낼 필요도 없었다. 쿠샨 왕조는 이 무역로를 획득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그들은 동쪽으로 확장하여 타림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쿠산(Küsän)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이는 나중에 토하리 왕국의 수도가 되는 쿠차(Kucha)식 명칭이었다. 카로스트 히(Kharoșț hî)라는 특징적인 문서가 그들의 통치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동쪽으로 크로라이나(루란)까지도 발견이 된다. 쿠샨인들은 불교가 파르티아, 중앙아시아, 중국으로 퍼져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186)


CHAPTER 4 ─ 훈족 아틸라의 시대 


"기원후 2세기 이후 고대 제국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라시아 북부의 민족들은 남쪽을 향해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오래도록 영향을 미칠 이 사건을 민족대이동(Völkerwanderung, 민족들의 거대한 방랑)이라고 한다. 이때 범(汎) 게르만족 그룹들은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로 들어가 서쪽 절반을 차지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민족들인 치오나이트족(Chionites), 에프탈족(Ephthalites) 등은 페르시아 제국령 중앙아시아로 들어갔다. 몽골족 위주의 여러 민족들은 과거 중원 제국의 영토로 들어가 북쪽 절반을 차지했다." "민족대이동은 서유럽 거의 모든 지역에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를 전파하였다. 결국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는 영국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북부 온대 지역 전체를 포괄하게 되었다." "이제 중앙유라시아와 주변 정주 지역 사이의 경계선은 없어졌다. 사람들은 시골에서 도시로, 혹은 그 반대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인종적, 정치적 구분도 없어졌다."(199-200)


"중앙유라시아에서는 평상시에도 이주가 흔히 있는 일이다. 대부분의 중앙유라시아 스텝 지역 사람들은 유목이나 반유목 목축업자들이다. 사실상 농사도 짓지만 농장은 해마다 장소가 바뀌고 곡식과 동물을 데리고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그곳 사람들은 어떤 땅에서 일년 중 어떤 시기에 누가 풀과 물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대개는 누군가의 목초지와 다른 사람의 것을 구별해주는 표식이 없다. 따라서 거대한 유동성은 정착경제가 아닌 중앙유라시아의 특성이 되었다. 나라는 민족으로 규정되며, 서로 간의 맹세로 맺어질 뿐이다." "중앙유라시아의 관점에서 보자면 국경이란 의미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승리한 부족이 특별히 성공을 거두게 되면, 새로운 나라는 급속하게 중앙유라시아 스텝 지역 전역으로 확장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주변 정주 제국의 성벽이나 요새에 맞닥뜨리게 된다. 중앙유라시아 역사에서 이러한 과정은 최소 세 차례 일어났다. 스키타이, 투르크, 몽골이 그러했다."(220-2)


"분명히 로마와 중국 경제의 쇠락이, 적어도 처음에는, 이주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이유가 되었다. 이들 제국의 국경 지역은 제국의 중심지보다 경제 문제의 여파가 훨씬 심각했다. 중심지에는 경제적인 부가 축적되어 있었고 상대적으로 더 풍요롭게 유지되고 있었다. 국경의 도시나 마을에서는 돈줄을 조이거나 경기가 움츠러들면, 이방인 출신 상인이나 이주노동자들로서는 점점 더 살기가 어려워졌을 것이다. 경제 문제는 중앙유라시아 튱치자들에게도 어려움을 초래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코미타투스나 동맹 세력에게 끊임없이 사치품이나 보물들을 제공해야 했다. 국경 시장이 붕괴되거나 혹은 전쟁으로 파괴되기라도 하면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황폐화되기 마련이었다." "동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보다 상대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안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큰 범위에서 작동했던 원칙(민족대이동의 경제적 이유)을 확인할 수 있다."(222-3)


"이전 역사가들은 〈야만인의 정복〉이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이라고 믿었다. 이는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의 관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사실은, 중앙유라시아 문화복합체의 게르만식 변종이 서유럽에 소개되었고, 그것이 당시 서유럽의 사회정치적 시스템을 압도했으며, 그것이 점차로 발전하여 현재 〈중세〉 문화로 알려진 것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봉건〉 시스템, 무역 도시의 특수한 지위, 전사 계급의 특권 등도 중세 문화에 포함된다. 고집스레 남아 있는 그리스 로마식 요소들(라틴어 위주의 서유럽 문자 언어 같은), 남부 지방에 남아 있는 몇몇 고대 유적들, 이런 걸로 고대 지중해의 화려했던 문화를 회복할 수는 없었다. 로마인들과 로마화된 사람들은 새로 등장한 게르만 왕조에서 살았다. 이들은 거의 초창기부터 뒤섞이기 시작했다. 로마화된 서유럽이 다시 중앙유라시아화된 것은 문화적 혁명이었다. 그것이 중세(Middle Age)라는 밋밋한 이름으로 알려졌던 것이다."(226)


CHAPTER 5 ─ 튀르크 제국 


"6세기 중반, 동부 스텝 지역에서 튀르크(Türk)가 유라시아 지역의 다양한 문명들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였다.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은 급속도로 상업·문화적 중심지로 성장했다." "초기 중세 시대의 국가들은 중앙유라시아를 점령하거나 혹은 적어도 인접한 국경 근처만이라도 빼앗고자 했다. 초기 중세(약 AD 620~840)의 문화적 번영은 이처럼 끊임없는 지역별 전쟁과 함께 나타났다. 새롭게 펼쳐진 전쟁 양상은 마침내 주요 제국들이 국경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는 그들에 대응하는 제국 규모의 연합체가 탄생했다. 계속되는 전쟁은 점차 심해져서 마침내 8세기 중반 중앙아시아에서 튀르기스(Türgiš)와 파미르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에서는 중앙유라시아인들이 졌고 아랍-당 제국 연합이 승리했다. 뒤이어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제가 후퇴하였다. 이는 당시 세계 경제가 이미 연결되어 있었고, 모두가 중앙유라시아의 번영, 즉 실크로드의 번영에 기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229-30)


"유라시아 전체의 초기 중세 역사 자료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그러나 흔히 간과되는 사실 중의 하나는, 중앙유라시아, 특히 중앙아시아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과도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어 자료, 고대 티베트어 자료, 아랍어 자료들에는 모두 중앙아시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넘쳐난다. 심지어 이들보다 편협한 그리스어나 라틴어 자료들에서조차 그들의 왕국에 대한 중앙유라시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주목을 끌었던 이유를, 요즘 역사학자들은 당시 유목민 전사들의 침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명백하게 그렇지 않다. 사료에는 실제로 그런 언급이 없다. 그 이유는 오히려 번성했던 실크로드의 경제 때문이었고, 유라시아를 가로질러 공유했던 정치적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거의 끊임없이 이어졌던 전쟁은 바로 그 이데올로기 탓이었다. 저항하거나 복속을 거부한데 따른 처벌은 곧 전쟁이었다. 초기 중세 유라시아를 통틀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267-8) 


"각각의 나라는 자신의 황제만이 유일하게 〈하늘 아래 모든 곳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미 굴복하고 순종했던 사람들이건, 아직 복속되지 않고 반항하는 〈노예들〉이건 막론하고, 모든 이들은 그의 신하가 되어야 했다." "이상적인 중앙유라시아 정치 구조는, 〈칸과 네 명의 지역 군주 시스템〉으로 적절하게 명명된 적이 있는데, 그 분명한 사례는 부여 왕국과 고구려 왕국─부여는 중심부와 4개 하위부로, 고구려는 중앙과 5개 하위부로 나뉘었다─에서 보인다. 비잔틴 제국의 사절로 튀르크 제국을 다녀간 마니아크(Maniakh)는, 튀르크 제국에 네 개의 〈군사 정권〉과 더불어 하나의 통치자가 있고, 그는 아르실라스(Aršilas) 부족에 속한다고 전했다. 티베트 제국의 굉장히 이론적인 4개의 뿔 시스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당나라도 서쪽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세 방향에도 도호부를 설치했다. 거란 제국과 후대의 몽골 제국 및 그 후예들도 마찬가지였다."(268-9)


"모든 초기 중세 제국들은 사방으로 팽창하고자 했다. 다른 시대 다른 곳의 제국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직 초기 중세에만, 역사상 최초로, 거대 제국들이 서로 직접 맞닥뜨렸고, 그들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각각의 제국은 서로 얼굴을 맞대었고, 각각은 사실 동등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제국을 통제하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으로서 외교 규약이 발달하였다. 외국에 파견된 사절단은 그 나라에서는 통치자에게 복종하는 태도를 취해야 했다. 그 지역에서는 사신들의 복종을 마치 다른 지역 제국이 자신들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기록하였다. 사신단이 돌아갈 때는 대개는 방문지의 사신단을 동행했는데, 이들 또한 자신이 방문하는 제국의 황제에게는 비슷하게 복종의 표시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크로드의 경제는 번성했고, 최소한 8세기 중반까지는 강력하게 성장했다. 유라시아 세계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특히 경제적으로 전례 없이 가깝게 연결되었다."(270-1)


CHAPTER 6 ─ 실크로드, 혁명, 붕괴 


"8세기 중반의 이른바 13년 시대에는, 유라시아의 모든 제국들이 굵직한 반란이나 혁명 혹은 왕조 교체로 곤란을 겪었다. 742년에 동부 스텝 지역의 튀르크 제국이 무너지면서 혼란은 시작되었다. 그곳에는 소그드인의 영향을 받은 위구르 제국이 들어섰다. 같은 시기에 비잔틴 제국에서도 중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곧이어 아랍 제국에서도 아바스 혁명(Abbasid Revolution)이 일어났다. 혁명 주도 세력은 중앙아시아의 무역 도시 메르브 상인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프랑크 왕국에서도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가 혁명을 일으켰다. 755년에는 티베트 제국에서도 중대한 반란이 있었다. 같은 해 연말 즈음, 중국 지역에서도 안록산(安祿山)이 이끄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안록산은 당나라 군대의 장군이었는데, 출신이 투르크-소그드계였다. 뒤이어 섬세하게 계획된 문화적 중심의 건설을 통해 평화가 다시 회복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중심의 건설은 보다 젊은 제국 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275)


"다음 세기에 가장 의미심장한 발전으로 먼저 유라시아 전역에 국민문학이 전파되었다. 그리고 세계의 상업, 문화, 학문 중심지로서 서부 중앙아시아는 한 단계 더 도약하게 되었다. 서양에서는 무역로가 북쪽으로 이동했다. 즉 칼리프 제국과 유럽의 무역 루트는 중앙아시아에서 볼가 강을 거쳐 올드 라도가(Old Ladoga)와 발트 해에 이르는 북방 루트로 옮겨갔다. 이로 인해 북유럽 경제는 크게 성장하였다. 한편 동야에서는 중국 지역과 중앙아시아의 무역 루트가 북쪽으로 이동해 위구르의 영토를 통과하게 되었다. 아랍 제국의 수도는 알 마문(al-Ma'mûn)의 치하에서 십여 년 동안 중앙아시아의 도시 메르브에 있었다. 마침내 칼리프가 바그다드로 옮겨갔을 때, 칼리프는 수많은 중앙아시아 사람들과 중앙아시아 문화를 함께 가지고 갔다. 이는 아랍 제국에 빛나는 지적 학문적, 융합을 가져다주었다. 이 시대의 성과들은 후대에 스페인의 이슬람 세력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고, 유럽 과학 혁명의 기초가 되었다."(276)


"세계 종교 조직에 대해 공식적인 지원이 이루어지자, 문헌 자료가 확산되고 문헌에 기반한 문화가 발전되었다. 이는 전근대 세계의 대부분 민족들에게도 문자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왕국이든 제국이든,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필요하다면 어떤 언어로든 읽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새로운 문자 문화는 대부분의 경우 하나 혹은 여러 세계 종교가 그 민족에게 전파되면서 시작되었다. 세계 종교는 모두 문자 텍스트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먼저 성스러운 경전을 읽을 수 있어야 했고, 텍스트를 복제하여 그 민족의 영토 안에 확산시키는 과정이 있었다. 언어가 완전히 다르다면, 해당 지역 언어로 텍스트를 번역해야 했다." "이러한 전파 행위의 중요성은 끝이 없었다. 복제된 텍스트나 번역된 텍스트는 하나의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하나의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해졌다. 이는 고중세뿐만 아니라 근대 이전까지 유라시아 문명 전체적으로 지성이 만개하는 기초가 되었다."(297-300)


CHAPTER 7 ─ 바이킹과 키타이 


"중세 초기 세계 질서가 무너진 뒤, 새로운 나라들이 출현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전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았다. 유일한 예외라면 비잔틴 제국이었다." "초기 중세와 달리, 이 시대의 고급 문화는 시작부터 매우 종교적이었다. 수도원 제도가 모든 유라시아 주요 지역에서 급격하게 번성했고, 문자 문화를 더욱 심도 있게 전파하였다." "이슬람 세계의 문화적 번영은 아랍 제국이 무너진 그 다음 시대가 상승기였다. 그 무대는 특히 중앙아시아였다. 실제로 고전 이슬람 문명의 위대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중앙아시아 출신이거나 그 후예였다." "서부 스텝 지역과 동부 스텝 지역의 나라들은 다 같이 지리적으로 유목 지역과 비유목 지역 사이의 경계에 걸쳐 있어서, 갈수록 스텝 지역에 농업의 영향이 증대되었다. 바이킹-슬라브족의 루스 카간국은 유럽의 농업-도시 문화를 서부 스텝 지역으로 확장시켰다. 중국도 중앙유라시아인들이 세운 왕조들의 후원에 힘입어 농업-도시 전통을 동부 스텝 지역으로 확산시켰다."(313-4)


"바이킹은 전사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들은 1차적으로 상인들이었다. 바이킹이 남쪽의 보다 문명화된 나라들로 내려온 것은 무역을 하기 위해서였다." "9세기 초, 바이킹은 러시아의 강을 타고 근동 지역 이슬람 세력과의 무역에 깊숙이 개입했다. 류리크(Ryurik)가 이끄는 세 명의 추장들은 862년 노브고로드(Novgorod) 지역에서 루스 카간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882년경, 류리크의 후계자 올렉(Oleg)은 키에프(Kiev)를 정복했고, 루스 카간국을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거대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루스는 정교회를 국교로 하는 비잔틴 국가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슬라브화된 불가리아 왕국과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도 루스와 국경을 마주했다. 비잔틴 황제들은 이미 페르가나인들과 카자르인을 코미타투스로 보유하고 있었지만, 바이킹도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바이킹을 용병으로 고용했고, 이렇게 해서 유명한 바랑기아 가드(Varangian Guard)가 구성되었다."(317-8)


"당시 이슬람 세계는 과학과 수학, 철학과 형이상학에 최고점에 이르렀다. 이들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학자들, 알 파르가니(al-Farghânî. 전성기 833~861, 페르가나 출신), 알 파라비(al-Fârâbî, 사망 950, 파랍[우트라르] 출신), 이븐 시나(Ibn Sînâ, 980~1037, 부하라 근처 아프사나 출신), 알 비루니(al-Birûnî, 973~약 1050, 호레즈미아 카트 출신), 알 가잘리(al-Ghazâlî, 1058~1111, 후라산 투스 출신) 등 많은 이들이 중앙아시아 출신이었다."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도시들은 모두 유라시아의 빛나는 상업적 지적 중심지였지만, 종교적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반지성적인 반작용도 발전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강력하게 뒷받침한 이는 중앙아시아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알 가잘리(al-Ghazâlî)였다. 한동안 바그다드의 니자미야에서 교수를 역임한 그는 궁극적으로 철학 그 자체를 거부했으며, 수피즘의 보수주의적 양상을 선호했다. 그와 다른 보수주의자들은 도그마를 벗어나는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려 했다."(334-6)


"중국 지역의 상당 부분이 송나라로 통합되었지만, 북부 지역, 동부 스텝 지역과 겹치거나 혹은 그와 연결되는 지역, 중앙아시아 등지는 독립국으로 남아있거나 비중국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다른 왕국을 압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다소간의 우열에도 불구하고 평등을 전제로 국제 관계를 관리하는 방법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송나라는 중앙아시아나 스텝 지역과 직접 접촉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유라시아의 나머지 대부분 지역과도 접촉이 없었다." "마침내 중국의 해상 무역이 유라시아의 반대 방향으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다만 대부분의 변화들은 중국 정치가 미치는 영토를 벗어나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변화들은 중국 정치가 미치는 영토를 벗어나 이루어졌다. 따라서 남방으로 남중국해 연안과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해안 지역을 연결하는 무역로를 개척했을 때, 중국 문화를 전파한 세력은 중국의 엘리트가 아니라 독립적인 마인드의 상인들이었다."(340-1)


CHAPTER 8 ─ 칭기스칸과 몽골의 정복 


"14세기는 흑사병, 기근, 홍수 및 기타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재앙으로 괴로웠던 시대였다. 세계의 대부분 지역은 너무나 큰 고통 속에 있었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고 왕조가 무너지는 일이 만연했다고 해서 놀랄 것도 없다. 자연재해에 맞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몽골 왕국들, 즉 이란 지역의 일칸국과 중국 지역의 원나라는 모두 무너졌다. 아마도 다른 시기였다면 그렇게 빨리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1368년 최후의 대칸이자 원나라의 황제이기도 했던 토곤 테무르(Toghon Temür, 재위 1333~1368)는 상당수 황실 인원들과 함께 말을 타고 몽골 지역으로 탈출했다. 그는 1370년 사망할 때까지 동부 스텝 지역에서 쇠락하는 대칸국을 통치했다. 중부 및 서부 스텝 지역에서 골든 호르데[킵차크 칸국]는 아주 잘 살아남아서 이후로도 2세기를 유지하였다. 이와 반대로 일칸국은, 마지막 일칸 아부 사이드(Abû Sa'îd)가 1335년에 죽자 부족과 분파주의자들의 폭력으로 갈가리 찢어지고 말았다."(365-6)


"중앙아시아에서 차가타이 칸국은 아주 일찍 분열되어 몇 개의 파벌들이 전쟁을 일으켰고, 항구적인 불안정 상태로 고통을 받았다. 타르마시린(Tarmashirin, 재위 1318~1326) 칸이 죽은 뒤 차가타이 호르데는 동과 서 둘로 갈라졌다. 서부는 트란스옥시아나를 중심으로 했는데, 차가타이의 명칭을 획득했다. 반면 동부는 유목민 비중이 훨씬 더 많았는데, 무굴리스탄(Moghulistan) 몽골리아로 알려졌다." "중앙아시아에서 칭기스칸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이 통치자의 정당성을 확인해주는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차가타이계가 중앙아시아에서 확고한 통치자로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에, 카라우나스족의 왕 카자간(Kazaghan, 재위 1346/1347~1357/1358)이 1346년/1347년 차가타이 칸국 최후의 칸 카잔(Kazan)을 살해한 뒤, 직계 라인은 끊어지고 말았다. 카자 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차가타이 칸국의 이름을 계속 내세우고 꼭두각시 칸을 세우기도 했지만, 사실상 자신의 이름으로 통치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366-7)


"전체적으로 보자면 티무르의 정복 전쟁은 유럽이나 페르시아, 중국의 왕조 설립자들이 했던 일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티무르의 군대는 원거리에서 번개처럼 기습하는 기마대도 아니었고, 물론 거대한 해군을 보유한 것도 아니었다. 티무르에게도 기마병이 있었고 효과적으로 써먹기도 했다. 그러나 군대의 절대다수는 보병이었다. 그리고 티무르가 노린 것은 모두 예외 없이 도시였다. 티무르는 적들이 굴복하는 것에 만족했다. 특히 자발적으로 복종하면 티무르는 거의 언제나 통치자를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세금만 제대로 내고 반란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티무르가 통치하던 때는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이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문화 및 정치적으로 유라시아의 중심이 되었던 시기였다. 티무르는 분열 계승된 과거 몽골 제국의 영토를 다시 정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제국에 안정적인 제국의 정부 조직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고, 티무르의 자식들도 티무르의 계획을 물려받지 않았다."(372-3)


"몽골은 최초로 거대 규모의 국제 무역과 세금 시스템인 오르탁(ortag)을 만들었다. 오르탁은 기본적으로 상인 연합 혹은 카르텔이었다. 주로 무슬림들이 이를 수행했는데, 그들은 카라반이나 어떤 기업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통치자들에게는 세금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정부에서 보조금을 주기도 했기 때문에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수익이 높았다. 오르탁에 대한 정책은 보다 쉽게 참여하거나 자유방임일 때도 있었고(우구데이 치하에서), 엄격하게 통제가 될 때도 있었다(뭉케의 치하에서). 제국 전체가 상업에 열려 있었고, 상인과 기술자들에게 전례가 없을 정도의 안전을 보장했기 때문에, 유라시아 대륙의 사방에서 기업가들이 출현했다." "몽골인들은 〈무신론자〉였다. 때문에 조직화된 종교라면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몽골인들과 맞닥뜨렸을 때 그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러나 몽골인들은 선교사들이 전파하는 어떤 종교나 종파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중에 티베트 불교만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374-5)


CHAPTER 9 ─ 유럽의 바다로 달려간 중앙유라시아 사람들 


"전근대 유라시아 대륙의 거대 제국들이 수립된 것은 르네상스 후기의 정복 전쟁을 통해서였다. 이는 티무르의 정복 전쟁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티무르 제국은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자체적인 발전을 방해하거나 늦추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1405년에 티무르가 사망한 뒤,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은 곧바로 자신의 제국 영토를 수복했고, 오래도록 추진해왔던 팽창 정책을 다시 개시하여,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잔여 세력들을 소탕하였다." "유라시아의 다른 제국들은 티무르가 사망한 뒤 1세기가 지나서야 자리 잡기 시작했다. 투르크멘이 페르시아에 사파비 왕조를 설립한 때는 1501년이었고, 바부르(Babur)와 중앙아시아 투르크인들이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지역에 무굴(무갈) 제국을 세운 때도 그 무렵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거대한 전 세계적 차원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즉 유럽인들이 유라시아 대륙의 해안을 장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장악해나가는 것이었다."(383-4)


"유럽인들은 바다를 장악하고 연안 지역과 그 주변에 근거지를 마련한 뒤, 점차 절대 권력자들과 직접 교섭을 시도했다. 그러나 거대 제국들은 해상 무역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결국 국제 무역에 참여하려면 유럽인들은 무역로와 항구 도시를 안정시켜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그 지역의 정치 권력을 장악해야 했다. 이는 중앙유라시아의 경제가 번성했던 시대, 실크로드가 존재했던 시대에 중앙유라시아인들이 지난 2천여 년 동안 수도 없이 반복해 왔던 일과 마찬가지였다. 결과적으로 유럽의 군대는 아시아의 지방 통치자들을 제압했고,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했으며, 아시아에서 유럽인들의 정치 권력을 강화해 갔다." "유럽인들의 주요한 목적은, 처음에는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평화롭고 수익률이 좋은 무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정치적 상황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이것도 또한 중앙유라시아인들이 해당 지역의 정치 권력과의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행했던 바와 똑같다."(402-3)


CHAPTER 10 ─ 길이 닫히다 


"19세기에 이르러, 유라시아의 상업, 부, 권력은 (유럽인들이 주도하는) 이른바 연안 무역 시스템으로 완전히 옮겨졌다. 심지어 러시아 제국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러시아 제국이 중앙유라시아 여러 지역들을 정복하기는 했지만, 그 수도는 발트 해 연안에 있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는 태평양 연안의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였다. 러시아는 오래도록 이 도시를 거쳐 바다로 나아갔다. 러시아와 달리, 유라시아의 오래된 나라들은 재빨리 변신을 도모하지 못했고, 결국 차례차례 무너져 갔다. 인도의 무굴 제국은 대영제국에 합병되었다. 페르시아의 카자르 왕국은 아프간 지배 시절을 거쳐 사파비 왕조로 교체되었지만, 러시아와 대영제국 관할 지역으로 나라가 쪼개졌다. 중국의 청나라도 유럽의 각 세력권으로 나뉘어졌다. 유라시아의 경제는 대륙 기반 실크로드 시스템 위주에서, 유라시아 연안을 잇는 해양 기반 시스템으로, 즉 연안 무역 시스템으로 바뀌게 되었다."(425-6)


"1757년, 청나라는 마지막 남은 독립 스텝 민족인 서부 몽골 세력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초원 제국 준가르가 무너짐으로써 중앙유라시아 실크로드 경제에 찬바람이 불었지만, 그 자체로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결정타를 날린 것은 러시아와 청나라의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은 1689년에 네르친스크 조약을, 1727년에는키악ㅌ나(Kiakhta)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들은 국제 무역에 대한 엄격하고 배타적인 통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국경은 닫혔고, 국제 무역은 엄격한 제한을 받았으며,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중앙유라시아 정치 조직들은 모조리 제거되었다. 이로써 중앙유라시아의 경제는 파탄을 맞았다. 실크로드 경제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관련되었던 사람들도 이렇게 해서 대개 할 일을 잃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결과로 중앙유라시아에는(특히 그 중심지인 중앙아시아에는) 극심한 가난이 찾아왔다. 기술적인 면에서나 기타 모든 문화적인 면에서도 급속히 암흑 속으로 후퇴했다."(438-40)


"유라시아 어느 곳에서나 전통적인 국가들은 땅을 지배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중세 초기 유라시아 전역에는 한 가지 개념밖에 없었다. 즉 아랍어로 마디나(madîna), 페르시아어로 샤흐리스탄(shahristân), 고대 티베트어로 카르(mkhar), 중국어로 청(城, chéng), 고대 고구려어로 구루(kuru)와 같은 것이었다. 이 단어들이 지칭하는 것은 실제로 한 가지였다. 즉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그것이다. 각각의 도시를 요새화함으로써 통제를 극대화하고, 적에게 빼앗기거나 적과 내통하는 것을 방지하며, 각각의 도시를 확고하게 유지하여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독립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서는, 도시들이 그 나라 영토의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하는 것이 가장 좋다. 어떤 나라의 국경 지역이란 곧 중앙 정치 권력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을 의미한다. 그래서 언제나 상인들은 무역이 자유로운 국경 지역에 관심이 많았고, 그곳에서는 정치 권력의 간섭이나 세금을 가능한 적게 받을 수 있었다."(458-9)


"실크로드를 따라 형성된 거대 도시들에서 주목할 만한 정치 현실이 있었다. 고대와 늦어도 중세 초기부터 그들은 기본적으로 도시 국가였다는 사실이다. 어떤 왕국도 도시 하나 이상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업 도시들은 중앙유라시아의 중앙 정치와는 연결되지도 않고 별 비중도 없이 그들만의 방식 그 자체로 남아 있었다. 이는 연안 무역로 주변의 도시들과 같은 처지였다." "대륙 횡단 무역은 스텝 지역 유목민들, 즉 스키타이나 흉노에 의해 중앙유라시아 최초로 거대 제국이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직접 무역으로 변화되었고, 유목민들은 이를 통해 괄목할 만한 부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중앙유라시아 스텝 유목민과 도시의 번영은 내부 경제의 번영과 분리될 수 없었다. 이들의 역사가 단절되고 그 결과 경제가 위축되었던 원인은 명백하다. 즉 주도권을 장악한 초원 제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텝 지역 사람들의 뒷받침과 보호가 없을 때면 어김없이 실크로드도 움츠러들었다."(461-3)


CHAPTER 11 ─ 중심을 잃어버린 유라시아 


"중앙유라시아의 투르크권에서는 1880년경 카잔과 타타르스탄을 중심으로 자디디즘(Jadidism)이라는 계몽운동이 일어나서 이슬람권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다. 동투르키스탄 지식인들은 근대 서양식 학교와 교육과정, 저널과 근대식 대중매체를 도입했고, 이와 함께 근대 민족주의 사상도 들여왔다. 중앙아시아에서 혁명이 번져나가자 자디디스트 중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에 초기부터 가담했던 사람도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간접적 영향으로 1921년 몽골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1930년대에 동투르키스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소비에트는 이를 진압하고, 중국 군벌을 내세워 우룸치(Ürümchi)에 정권을 수립했다. 그 뒤 카슈가르에서 제1차 동투르키스탄 공화국(1933. 11~1934. 2)이 수립되지만 금새 진압되었다. 동투르키스탄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티베트는, 중국 군벌이 한두 차례 동부지방을 공격하기는 했지만, 약 반 세기 동안 완전한 자유를 누렸다."(488-9)


"1942년 말 일부 칼미크(Kalmyk)인들은 스탈린의 압제로부터 공화국을 해방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고 독일에 협력하기도 했다. 소비에트가 돌아왔을 때, 칼미크 자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무너졌다(1943. 12. 27). 칼미크는 배신자로 찍혔고, 칼미크 몽골족 전체가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 사할린 섬 등지의 〈특별 정착촌〉(원래는 강제 수용소로 건설되었던 곳이다)으로 추방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가 독일로부터 크림 반도를 되찾은 직후, 1944년 5월 17일~18일, 그곳의 타타르족은 모두 화물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보내졌다. 도중에 약 2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비에트 정부는 크림 반도 타타르족의 역사와 문화, 언어 등 그들의 정체성 모두를 지워버리고자 했다. 동투르키스탄에서는 두번째로 공화국이 탄생했다. 사회주의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 1945년 여름 동투르키스탄 북부 지역에서 수립되었다. 티베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중립국으로 남아 있었다."(498-9)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은 극단적인 모더니스트였다. 그들은 유럽과 미국의 영향이면 무엇이든지 거부했지만, 근대의 〈과학적인〉 공산주의만큼은 받아들였다." "몽골과 중국의 공산 혁명가들은 1949년 이전에 이미 몽골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1949년 12월 3일, 모택동은 몽골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은 1949년 말까지는 유지되었다. 그 해 중국 공산군이 그곳으로 진군해 공화국을 점령했다. 그리고 이 지역을 다시 신강 식민지로 병합했다. 티베트인들은 갈수록 힘을 키워가는 중국에 대해 민감해졌다." "1950년~1951년, 중국이 막대한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티베트를 침공했다. 중국은 병력과 무기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던 티베트에게 항복을 강요했다." "중국은 주변 나라들을 새로운 공산주의 제국에 편입시킨 뒤 명목상 〈자치주〉라 이름을 붙였다. 이는 소비에트 연방의 시스템을 표면적으로 모방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명백한 중국화 노선을 채택하였다."(501-2)


CHAPTER 12 ─ 다시 태어나는 중앙유라시아 


"중앙유라시아에서 힘의 열세와 빈곤, 쇠퇴, 외국 의존은 계속되었다. 페르시아어권인 남부 중앙아시아(아프가니스탄)와 서남아시아(이란과 쿠르디스탄)뿐만 아니라 근동과 파키스탄도 주로 종교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독재정치의 치하에 놓여 있었다. 전체 지역의 힘의 열세로 인해 인접한 서부 중앙아시아(과거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의 정치 경제 상황 또한 힘을 얻지 못했다. 러시아 지배 하에 남아 있던 중앙유라시아 나라들은 여전히 독립을 얻지 못했다. 카프카스 북쪽의 칼미크, 투빈(Tuvin), 알타이, 사카, 에벤키, 체첸 등이 그러했다. 러시아 경제가 회복되면서, 새로운 대중추수적 독재가 발전하게 되었다. 이는 또다시 내외의 비판 세력을 위협하였다. 같은 시기 중국은 여전히 동투르키스탄, 내몽골, 티베트 지역에 군사적 점령 상태를 지속하였고, 무차별적인 테러와 폭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시대 중앙유라시아 경제가 전반적으로 회복되지 못한 데에는 러시아와 중국 양측의 직접적인 책임이 크다."(536)


"소비에트 연방이 막을 내리면서, 카프카스의 나라들, 조지아(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대부분의 소비에트 중앙유라시아 국가들도 독립을 이루었다. 폰틱 스텝 지역 서부의 우크라이나는 완전히 독립했지만, 폰틱 스텝의 동부 지역부터 남쪽으로 흑해의 아조프 해에 이르는 지역, 카프카스 북부 스텝 지역에서 남쪽으로 아스트라한(Astrakhan)의 카스피 해에 이르는 지역은 러시아에 남았다. 이 지역들 중 일부는 대체로 러시아에 동화되었지만, 다른 많은 지역들, 특히 카프카스 북부 스텝 지역, 즉 볼가 강 하류 및 카프카스 산맥 사이 북부 카프카스 스텝 지역의 몽골-칼미크어권 공화국을 포함하는 지역은 문화적으로 러시아에 동화되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에서 수많은 러시아 인구를 포함하고 있는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도 모두 독립했다. 이들 나라들은 가까스로 경제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이고, 대체로 탐욕스런 정치인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542-3)


에필로그 ─ 야만인들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공격적이고, 무자비하고 잔인하며, 대개 폭력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한두 번 받은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오해가 〈야만인〉이라는 관념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또한 역사적인 관점에서 봐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국, 페르시아, 그리스-로마 제국 혹은 왕국은 모두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설립되었다. 길고 피비린내나는 배반과 음모의 막장드라마를 거쳐야 했다. 제국의 기초가 서고 나면,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나타난다. 거의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유명한, 혹은 가장 유명하지 못한 사례는 바로 로마인이다. 그들은 노예를 잔인하게 대하거나, 너무나도 악독한 방식으로 대중적인 흥미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였다고 해서 비난 받은 것이 아니라, 로마인들이 죽인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도 있었다는 점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순전히 잔인성과 가차없는 공격성만 놓고 보자면,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당시 로마나 페르시아, 중국인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566-8)


"스키타이와 스텝 지역 민족들에 대한 오해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퍼져 있는 이른바 〈가난한 유목민(needy nomad)〉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중앙유라시아 스텝 지역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그들 스스로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해서 농업 생산품, 옷감, 기타 주변 정주민들이 만들어낸 물건에 의존했고, 그것을 탐냈다는 것이다.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이 무역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동물과 이웃 제국의 〈선진적인〉 상품을 거래해서 필요한 것, 혹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힘으로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 침략을 자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이론에 대한 니콜라 디 코스모의 비판은 아주 정확했다. 그는 문헌 자료나 고고학적 발굴 자료 모두 이러한 이론과는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직접 농사를 지었고, 그들이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상품을 제공하는 민족들과는 평화롭게 무역을 하고 세금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확실하게 밝혀졌다."(570)


"유목민들이 정말로 강력하고 호전적인 야만인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만약 평화를 사랑하는 정주민들과 단지 교역만을 언했다면, 왜 정주민들이 만리장성을 쌓고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요새를 건설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고대 중국 사료가 흉노를 설명하는 것을 보면, 나중에 훈족을 설명하는 그리스의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주변 정주 지역의 일부 사람들(특히 국경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농업국가에 사는 것보다 유목민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살기가 훨씬 쉽고도 자유롭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중앙유라시아인들에게 백성과 권력과 부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유일한 길은 성벽을 건설해서 국경 도시 무역을 제한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필요한대로 스텝 지역 민족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물리치고 국경에서 멀리 쫓아내야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정복한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고, 정복지 백성들이 이방인에 동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578, 582-4)


"일반적으로 우리는 중앙유라시아인들의 역사나 그들의 관심사에 대해서, 혹은 그들이 옳거나 그른 행위를 결정했던 정황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점들을 충분히 알고 보면,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중앙유라시아 국가들이나 주변 정주 제국의 국가들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앙유라시아의 민족들이 선천적으로 강했고, 혹은 특별히 폭력적이거나 전쟁에 특히 능숙했다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혹은 인류학적으로 근거가 없다.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도시인도 있었고 시골 사람도 있었고, 강한 사람도 있었고 약한 사람도 있었고, 악독한 놈도 있었고 신사적인 사람도 있었고, 술꾼도 있었고 술을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착한 사람도 있었고 악한 사람도 있었다. 지구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들도 정확히 똑같이 그 사이에 있을 따름이었다."(609,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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