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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암컷들 - 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
루시 쿡 지음, 조은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5월
평점 :
들어가며 다윈의 고정관념을 거스르는 암컷들
과거 성차별적 신화가 생물학에 도입되면서 동물의 암컷을 바라보는 방식이 크게 왜곡되었다. 실제 자연 세계에서 암컷의 형태와 역할은 대단히 폭넓은 스펙트럼의 해부구조와 행동을 아우른다. 물론 헌신적인 어머니상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에는 자기가 낳은 알을 버리는 암새도 있고, 바람난 아내를 둔 수컷들의 하렘에서 새끼를 키우는 물꿩도 있다. 정절을 지키는 암컷도 있지만 전체 종의 7퍼센트만 성적으로 일부일처이며, 많은 암컷이 여러 상대를 전전하며 섹스하는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하다. 동물 사회가 전적으로 수컷에 의해 지배되는 것도 아니다. 알파 암컷은 여러 분류군에서 진화했고, 자애로운 보노보에서 잔인무도한 여왕벌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암컷은 수컷들만큼이나 서로 살벌하게 경쟁한다. 지난 수십 년간 암컷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두고 혁명이 일어났다. 나는 세상의 다채로운 암컷과 암컷을 연구하는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 혁명을 소개할 것이다. 12-3)
1장 무정부 상태의 성: 암컷이란 무엇인가
암두더지의 생식샘은 난소고환ovotestis이라고 불린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내부 생식기관은 한쪽에 난소 조직, 다른 쪽에 정소 조직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난소 쪽은 번식기의 짧은 기간에만 팽창하여 난자를 생산한다. 그리고 생식이 완료되면 수축하고 그때부터 정소 조직이 확대되어 난소보다 더 커진다. 두더지 암놈의 정소 조직은 테스토스테론을 만드는 라이디히 세포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정자는 들어 있지 않다. 이 성 스테로이드 호르몬은 흔히 수컷과 연관된 호르몬으로, 근육을 키우고 공격성을 부추긴다. 둘 다 힘겨운 지하 생활에 요긴한 무기가 되어 두더지 암컷에게 땅을 파는 힘과 새끼와 지렁이 창고를 지킬 투지를 준다. 이른바 남성호르몬이 넘치다 보니 두더지 암컷은 수컷과 구분할 수 없는 생식기가 발달하게 되었다. ‘남근phallus’ 또는 ‘음경음핵penile clitoris’이라 불릴 정도로 음핵이 확대되고 번식기가 아닐 때는 아예 질이 막혀 있다. 두더지 암컷은 성을 구분하는 오래된 전제에 도전하는 존재다. 23-4)
아마존에서 거미원숭이 암컷을 처음 봤을 때 아랫도리에 매달린 부속물을 보고 나는 영락없이 수놈인 줄 알았다. 오히려 수놈 쪽은 제 물건을 안쪽 깊숙이 넣고 다니기 때문에 겉에서는 음경이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암컷은 보란 듯이 음핵을 덜렁거리고 다닌다. 생물학계에서는 ‘가짜 음경pseudo-penis’이라고 칭하는 해부 구조다. 이런 남성중심적인 용어는 특히 거미원숭이 암컷의 ‘가짜’ 남근이 수컷의 ‘진짜’ 남근보다 더 길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소 거슬린다. 점박이하이에나Crocuta crocuta 암컷의 20센티미터짜리 음핵은 모양과 위치가 수컷의 음경과 똑같을 뿐 아니라 발기하기까지 한다. 점박이하이에나 수컷과 암컷 모두 ‘인사 의례’ 중에 발기한 부분을 서로 보여주고 훑어본다. 하지만 점박이하이에나 암컷의 사내다운 특징 중 으뜸은 털 달린 한 쌍의 고환이다. 물론 이 음낭은 가짜다. 최근 과학자들은 점박이하이에나 암컷과 수컷이 너무 똑같이 생겨서 ‘음낭을 만져봐야만’ 암수를 구별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25-6)
점박이하이에나 암컷의 규칙 위반은 생식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이 암컷의 ‘남성화된’ 몸과 행동에도 감탄했다. 야생에서 암컷 점박이하이에나는 수컷보다 몸이 최대 10퍼센트 더 묵직하다. 일반적으로 포유류에서는 수컷의 크기가 더 크므로 아주 특이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포유류를 제외한 동물계의 나머지, 그러니까 대다수 동물에서 암수의 크기 차이는 대개 반대이다. 살찐 암컷일수록 알을 많이 낳기 때문에 대부분의 무척추동물과 많은 어류, 양서류, 파충류 종이 수컷보다 암컷이 크다. 점박이하이에나 암놈은 수놈보다 더 적극적이다. 지능이 뛰어나고 사회성이 높은 이 육식동물은 최대 80마리가 우두머리 암컷의 지배하에 모계 집단을 이루고 살아간다. 수용, 먹이, 성을 구걸하는 복종적인 낙오자가 수컷이며, 반대로 암컷은 모든 상황에서 지배적이고 거친 놀이와 강한 냄새 표시는 물론이고 영역 방어에도 관여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아닌 다른 성의 것이라 여겨지는 행동들이다. 26)
‘무엇이 동물의 암컷을 만드는가’라는 질문의 궁극적 해답이 한 쌍의 XX 염색체에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대부분은 이 특이한 한 쌍의 성염색체가 남성은 XY로, 여성은 XX로 성별을 정의한다고 배웠으니까. 실제로 Y 염색체에는 SRY(Sex-determining Region of the Y, Y 염색체의 성결정 지역)라는 아주 중요한 성결정 유전자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생식기관을 결정하는 일은 약 60개의 유전자가 오케스트라처럼 협업하는 과정이다. 성을 결정하는 이 유전자들은 성별에 따라 X 염색체나 Y 염색체에 딱딱 나뉘어 있기는커녕 모두 다 성염색체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이 유전자들은 게놈 전체에 되는대로 흩어져 있다. SRY 유전자 외에도 60개의 성결정 유전자로 이루어진 이 오케스트라는 기본적으로 남성과 여성에서 모두 단원의 구성이 동일하다. 이 유전자들은 난소도 만들 수 있고 정소도 만들 수 있지만, 실제로 어떤 생식샘을 형성할지는 유전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협상에 달렸다. 30-2)
포유류에서 보이는 성염색체의 혼돈은 자연계 전체에 존재하는 시스템의 다양성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다. 우선 모든 유전학적 성결정이 XY 시스템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새, 다수의 파충류, 나비가 아주 비슷한 성결정 유전자를 갖고 있지만 커다란 Z와 축소된 W라는 다른 성염색체 위에 있다. 더구나 이 시스템에서는 역전된 패턴이 표준이다. 즉, 암컷이 ZW이고 수컷이 ZZ이다. 이 대체 ZW 시스템에서 마스터 스위치 유전자는 포유류의 SRY처럼 아주 잘 보존된 경우도 있고, 근연 집단 내에서 변이가 존재하기도 한다. 일부 파충류, 어류, 양서류는 성의 분화가 마스터 유전자가 아닌 외부적 요인에 자극받는다. 거북의 예를 들어보자. 거북은 바다에서 무겁게 몸을 끌고 나와 열대 해변의 모래에 알을 파묻는다. 이때 섭씨 31도 이상에서 부화하는 알은 난소를 만드는 유전자를 활성화하고, 반면에 27.7도 이하에서는 정소를 만든다. 두 온도 사이에서는 수컷과 암컷이 섞여서 나온다. 35)
2장 배우자 선택의 미스터리: 여성은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는가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제는 성선택을 자연선택의 하위 분류로 취급하긴 했어도 암컷과 짝지을 권리를 두고 수컷들이 대결한다는 발상을 받아들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다윈이 물의를 일으킨 부분은 여성이 성적으로 자율적일 뿐 아니라 남성의 진화를 좌지우지하는 결정권을 가졌다는 주장이었다. 이 대목이 대부분의 (남성) 생물학자들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다윈은 암컷이 짝을 고르는 기준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빅토리아 시대의 기득권층에게 다윈의 새 이론을 매질할 채찍을 주었다. 당시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예술과 음악을 논하는 것은 오로지 상류층의 특권이었으므로 하찮은 공작새는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이 미적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은 입 밖에 낼 가치도 없는 헛소리였다. 아름다움은 신이 내린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성적 기호가 진화의 중요한 원동력이라는 생각은 이단이나 다름없었다. 하여 다윈의 대담한 새 이론은 공개적으로 조롱과 무시를 받았다. 46-7)
“짝짓기 철의 절정에 산쑥들꿩 레크는 아수라장이에요.” 게일 패트리셀리가 연구실에서 설명했다. 교미의 대부분이 불과 3일에 걸쳐 일어나는데 이때 암컷들은 크게 스크럼을 짜고 가장 인기 있는 수컷에서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티격태격한다. 레크를 형성하는 종의 암컷은 대체로 새끼를 혼자 키운다. 그래서 암컷은 짝을 고를 때 수컷이 지닌 영역의 자원이나 잠재적 육아 기술 같은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수컷의 유전자만을 볼 뿐이다. 승리한 수컷 혼자서 무리의 암컷 대부분에게 유전자를 전달한다는 사실로 미루어, 기이한 장식과 구애 방식을 끌어내는 암컷의 배우자 선택은 그 영향력에 제한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패트리셀리는 훨씬 의미심장한 사실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딕과 같은 최고의 수새는 레크에서 가장 요란한 춤꾼일 뿐 아니라 암새가 주는 미묘한 신호에도 잘 반응했다. 인기를 얻으려면 출중한 춤 솜씨는 기본이고 상대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48-9)
모든 전략적 협상에는 인지력이 필요하다. 오스트레일리아 동부의 새틴정원사새Ptilonorhynchus violaceus 수컷은 상대적으로 뇌가 크고 수명이 길며 7년이라는 이례적으로 긴 사춘기를 보내는데, 그동안 암새를 흉내 내면서 지낸다. 어린 수새는 암새와 똑같이 깃털이 초록색이다. 패트리셀리는 수새가 복잡한 바람둥이 재주를 배우기 위해 이처럼 비정상적인 발달기 동안 암새의 옷을 입고 산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어린 수새는 바우어 제작을 연습할 뿐 아니라 동성의 어른들로부터 적극적으로 구애를 받는다. 수컷 새틴정원사새의 문제 해결 능력을 시험한 어느 2009년 연구는 인지 능력이 짝짓기 성공과 연관 있으며 암새는 가장 똑똑한 수새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발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윈 역시 성선택으로 사람의 인지력이 크게 진화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특히 예술, 도덕, 언어, 창의력처럼 ‘자기표현’이 강한 행위에서 영향력이 더 두드러진다. 52)
# 바우어bower : 정원사새가 구애하기 위해 짓는 공간
3장 조작된 암컷 신화: 바람둥이 암컷에 대한 불편한 발견
사회적 일부일처와 성적 일처일부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새들은 아주 충실하게 사회적 일부일처를 따른다. 심지어 어떤 종은 평생 한 배우자와 짝을 이루어 산다. 하지만 과연 성적으로도 그럴까? 그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이제는 암새의 90퍼센트가 일상적으로 다수의 수컷과 교미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수컷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종일수록 암컷이 외도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최근 버키드는 성적 이형이 큰 종일수록 부정을 크게 숨기고 있었다는 걸 알아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동부요정굴뚝새Malurus cyaneus가 가장 극단적인 사례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컷은 현란한 푸른색 계절깃을 뽐내며 갈색의 작고 수수한 암새에게 노란 꽃을 바치고 구애한다. 하지만 수컷의 야단스러운 구애는 서방질로 보답받는다. 새벽이면 그의 파트너는 몰래 빠져나와 이웃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다. 그러다 보니 둥지에서 사회적 배우자가 부지런히 돌보는 새끼 새의 4분의 3이 사실은 다른 수컷의 씨다. 62)
수전 스미스의 검은머리박새black-capped chickadee 장기 연구가 판도를 바꾸는 데 크게 일조했다. 총 14번의 번식기에 암컷의 정사 중 70퍼센트는 제 사회적 배우자보다 계급이 높은 수컷의 영역에서 해가 뜬 직후에 일어났다. ‘흔남’과 살고 있는 암새가 월등한 유전자를 얻기 위해 동네 ‘훈남’에게 몰래 접근하는 딱 그런 모양새였다. 성적으로 거리낌 없는 명금류 암컷은 행동생태학계를 뒤흔든 ‘일처다부제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동물의 왕국에서 암컷은 수컷에게 빼앗긴 성적 운명의 통제권과 알의 친자 결정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DNA 검사 기술로 도마뱀에서 뱀, 바닷가재까지 다른 암컷들의 정절이 속속 철회되었다. 일처다부의 경향은 모든 척추동물에서 발견되었고 무척추동물에서도 예외가 아닌 표준으로 선언되었다. 한편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는 진정한 성적 일부일처는 극히 드물어 지금까지 알려진 종의 7퍼센트 미만에서만 확인되었다. 64-5)
허디는 하누만랑구르원숭이Presbytis entellus 수컷 사이에서 영아 살해 행위에 대한 희한한 보고 내용을 조사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하누만랑구르원숭이는 긴 회색 팔과 잿빛 얼굴이 특징인 인도 아대륙 토종 원숭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허디의 관심을 끈 것은 암컷이었다. 허디가 처음으로 본 랑구르는 인도 라자스탄주의 타르 사막 근처에서 제 가족을 떠나 총각들 무리로 들어가 하룻밤을 간청하며 교태스럽게 걷는 한 암놈이었다. 허디는 도서관에 들어가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자신이 본 랑구르가 유일한 ‘음탕한’ 암컷 영장류는 아니었음을 발견했다. 사회성이 강한 많은 종들이 특히 배란기에는 색정증에 가까운 적극적인 성적 취향을 보였다. 야생에서 침팬지 암컷은 평생 다섯 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지만 수컷 수십 마리와 6,000번 이상의 교미를 한다. 배란기에 이 암컷은 무리의 모든 수컷을 유혹하고 하루에 30~50회 섹스를 한다. 그런 지나친 행동에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66-7)
인도에서 랑구르를 연구하며 허디는 외부에서 온 수컷들이 무리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젖을 떼지 않은 어린 새끼를 죽이는 일이 허다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영아 살해 행위가 성선택과 짝을 두고 벌어지는 수컷 간 경쟁의 유해한 부작용임을 깨달았다. 다른 수컷과 낳은 새끼가 젖을 뗀 후 다시 가임기가 될 때까지 2~3년이나 암컷을 기다리는 대신, 새로운 우두머리는 새끼를 살해하여 어미가 즉시 발정기에 들어서게 강제하고 곧바로 제 새끼를 임신하게 한다. 이런 관찰을 바탕으로 허디는 암컷이 영아 살해를 막기 위한 방책으로 무리에 침입한 수컷과 섹스를 하게 되었다는 이론을 세웠다. 이는 제 자식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하여 새끼의 목숨을 보전하는 효과가 있다. 오늘날 수컷의 영아 살해는 영장류 사촌 사이에서도 널리 퍼진 것으로 알려져, 51종의 영장류에서 의심되거나 실제로 목격되었다. 같은 패턴이 수사자에서도 보이는데 알파 수컷이 새로 무리를 장악하면서 새끼 사자를 죽인다. 69)
바람을 피우는 암컷은 월등한 유전자를 찾거나 자손의 생식능력을 증가시킬 유전적 기회와 면역계의 적합성을 높일 기회를 포함해 많은 면에서 유리하다. 본질적으로 암컷의 난교는 어미가 자신의 소중한 난자를 모두 한 바구니에 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더 건강한 자손으로 이어진다. 친부가 누군지 혼란을 주는 것이 단지 영아 살해를 막는 보험만은 아니다. 수컷들로 하여금 어린 새끼를 돌보고 보호하게 독려하는 장점도 있다. 허디는 전반적인 영장류에서 수컷이 자신의 새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새끼를 돌보게 조종당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런 명백한 사실은 수컷은 오로지 제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새끼만 돌보기 때문에 일부일처가 암컷에게 최고의 전략이라는 흔한 가설에 찬물을 끼얹었다. 허디는 바바리마카크와 개코원숭이 연구에서 성욕이 왕성한 암컷들이 성을 이용해 복잡한 친자 관계의 그물로 다수의 수컷을 끌어들인 사례가 보고되었다고 지적했다. 우리 조상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70)
4장 연인을 잡아먹는 50가지 방법 : 성적 동족 포식의 난제
유혹의 대상이 수컷을 아침 식사로 잡아먹는 사나운 포식자라면 짝을 찾는 행위는 곧 죽음과의 춤이 된다. 저녁 식사와 데이트를 한 번에 해결하는 암거미의 성향은 빅토리아 시대 남성 동물학자들에게 여러모로 모욕적이었다. 악랄하고 난잡하며 지배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원래의 소극적이고 수줍고 한 남자만 아는 틀에서 벗어난 여성이 나타난 것이다. 암거미는 또한 진화의 난제이기도 했다. 생물이 사는 이유가 제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라면 섹스도 하기 전에 파트너를 집어삼키는 행위는 진화적으로 적절치 못한 적응 아닌가. 그러나 성적 동족 포식은 전갈에서 나새류, 문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무척추동물과 함께 모든 종류의 거미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가장 유명한 동물이 아마 사마귀일 것이다. 암사마귀는 연인의 머리를 뜯어먹는 팜파탈이다. 수사마귀는 목이 잘린 채로 용맹하게 뒤로 물러선다. 그런 행동을 보고 수 세대의 동물학자들은 진화가 머리를, 즉 이성을 잃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79-80)
거미만큼 성적 충돌이 극심한 생물은 없다. 동족 포식은 배고픈 암거미의 치명적인 협박에 맞서 창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도록 수거미에게 극강의 선택압을 가했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부터 살펴보면, 많은 왕거미 수놈은 암거미가 지은 거미줄 가장자리에서 대기하며 연인이 점심―아마 사랑의 경쟁자 중 한 놈이겠지―을 다 먹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암거미가 식사를 마친 듯 보이면 그제야 슬슬 움직인다. 검은과부거미black widow spider 수컷은 실제로 암거미의 속사정을 거미줄의 성페로몬을 통해 알 수 있다. 암거미의 위장이 빈 듯하면 멀리 떨어져서 대기한다. 데이트 장소에 간식거리를 선물로 들고 오는 수컷도 있다. 거미판 고급 초콜릿 상자라고나 할까. 수거미가 더듬이다리로 일을 보는 동안 암거미의 입이 비어 있지 않게 하는 전략이다. 하지만 진화는 수거미가 암거미의 소화 상태를 감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성적 갈등은 많은 수컷에게 훨씬 더 교활한 묘책을 선사했다. 82-3)
육아거미Pisaurina mira는 섹스 중에 수거미가 가벼운 신체 결박을 시도한다. 수거미는 암거미의 집에 몰래 들어가 특수한 한 쌍의 긴 다리로 암거미를 붙잡아 제 거미줄로 사지를 묶는 동안 독니의 공격을 피한다. 다윈의나무껍질거미Caerostris darwini는 구강성교로 판돈을 올렸다. 수거미는 연인을 먼저 거미줄로 묶고 교미 전후와 교미 도중에 암거미의 생식기에 침을 묻힌다. 점선늑대거미Rabidosa punctulata 수놈에게는 스리섬threesome이 가장 안정한 성행위다. 교미 중인 커플을 우연히 마주친 총각이 제 운명을 시험하며 슬쩍 파티에 합류한다. 교미에 성공한 수컷을 이미 암거미가 먹어버린 상태라면 뒤늦게 침입한 수컷이 잡아먹힐 확률이 낮다. 말라바거미Nephilengys malabarensis는 교미 중에 위협을 느끼면 더듬이다리를 분질러버리고 탈출을 시도하는데, 이때 남은 다리는 몸이 없이도 알아서 계속 정자를 펌프질한다. 자발적으로 거세한 수컷은 더 이상 씨를 뿌릴 수 없다. 한 번의 기회에 올인한 셈이다. 83)
공작거미 암컷에게 성적 동족 포식은 적응의 측면에서 완전히 일리 있는 행동이다. 약한 구혼자를 일찌감치 솎아내어 원치 않는 구애 행동으로 방해받지 않고 동시에 공짜로 끼니도 때우는 효과가 있다. 공작거미 암컷의 안목을 조사한 일라이어스는, 수거미가 진동에 노력을 덜 기울이거나 노래와 춤의 박자가 맞지 않거나 최악의 경우 ‘자신의’ 신호에 집중하지 않을 때 암거미가 공격적으로 돌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산쑥들꿩과 정원사새에서 보았듯이 공작거미의 구애 역시 양방향 소통 과정이다. 다만 암컷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은 수컷에게 더 가혹한 형벌이 내려지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배를 꿈틀거리는 공작거미 암컷은 짝짓기할 기분이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때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구혼자를 잡아먹을 가능성이 크다. 어미는 자식을 위해 최고의 유전자를 원하고 또 새끼를 보살피려면 자신도 크고 건강해야 한다. 구혼자들을 잡아먹을 능력이 되는데 먹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90)
5장 생식기 전쟁 : 사랑은 전쟁터이다
오리의 음경은 몸길이에 비해 척추동물에서 가장 긴 축에 속한다. 왜소한 몸길이보다 10센티미터나 더 길며 와인 오프너처럼 반시계 방향으로 꼬여 있고 기부는 작은 가시로 덮여 있다. 괴이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리의 음경은 수사슴의 뿔처럼 계절을 타는 기관이다. 대개는 10분의 1 크기로 줄어 있다가 번식 철에만 늘어나는데 어떤 종에서는 그 변화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이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총배설강 입구에 양말을 뒤집어놓듯이 조심스럽게 집어넣는다. 교미 준비가 되면 펌프질로 음경에 림프액을 주입하는데, 그러면 마치 파티 나팔처럼 3분의 1초 만에 시속 120킬로미터로 총배설강에서 펼쳐진다. 이런 사치품은 정자 경쟁의 결과물이라는 일반적인 견해가 있다. 대다수 오리 종에서는 성비가 수컷으로 기울어져 있으므로 암새는 고를 후보가 많으며 상대적으로 수오리 사이의 경쟁은 치열하다. 그 결과 오리의 정사는 지극히 로맨틱하거나 충격적으로 폭력적인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99-100)
교과서는 오리의 질이 단순한 일자 관에 불과하다고 가르쳤으나 암컷의 생식관은 수컷만큼이나 복잡했다. 길이도 길고 곳곳에 주머니가 숨어 있을 뿐 아니라 수컷의 음경과는 반대 방향의 나선을 이루고 있었다. 브레넌은 오리의 교미 중 3분의 1 이상이 강제로 진행되지만 원치 않은 교미에서 수정된 새끼는 2~5퍼센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브레넌은 수오리의 음경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 나선형 질과 중간에 막다른 골목이 있는 특이한 생식관이 진화한 것은 음경의 진로를 차단하여 자신이 싫어하는 수오리의 정자가 수정에 쓰이지 못하게 방해하기 위해서라는 예감이 들었다. 음경이 가장 긴 종은 실제로 암컷의 생식 배관도 좀 더 구불구불하고 장애물이 심하며 강제된 교미가 만연했다. 백조나 캐나다기러기처럼 일부일처에 텃세가 심한 종의 음경은 훨씬 수수했고 암컷의 질도 그에 상응하여 단순한 편이었다. 브레넌의 눈에는 수컷과 암컷의 생식기가 피차 적대적으로 공진화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101)
브레넌은 암오리가 실제로 자신의 알을 수정시킬 수오리를 선택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마음에 드는 상대의 음경이 난관으로 더 깊이 들어오게 통로를 허락하는 것이다. 비폭력적 상황에서 수오리는 교미 전에 춤을 춰서 암오리에게 구애한다. 마음이 동한 암컷은 수용의 자세를 취하여 물속에서 엎드린 채 꼬리를 들어 올린다. “암오리는 배설강 윙크를 해요. 나는 네 것이니 데려가라는 보편적인 신호죠.” 브레넌이 설명했다. 암오리가 알을 낳을 때는 난관으로 상당한 크기의 물체를 이동시킨다. 즉, 암컷에게 질의 내강을 확장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강제로 교미가 일어날 때는 암오리가 윙크를 하지 않고 질도 이렇게 정신없이 꼬여 있는 비수용 상태를 유지하지요.” 하지만 암컷이 받아들일 마음이 있을 때는 원치 않는 수컷 때와 달리 질의 내강을 활짝 열어 음경이 생식관을 따라 깊숙이 들어오게 한다. 누구와 짝짓기할지 결정할 수는 없어도 알의 친부를 결정할 수는 있다는 말이다. 102)
남성중심적인 관점에서 보면, 특히 정자 경쟁은 수컷들만의 스포츠로 취급되어 대개 올림픽 선수들처럼 정자가 겨루는 서사적인 ‘경주’로 묘사된다. 가장 강하고 빠른 수컷이 난자를 쟁취하며, 암컷은 이 대회에서 아무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제 몸속에서 100미터 단거리 대회가 열리는데 결과에 전혀 개입하지 못한 채 지켜만 보는 셈이다. 선구적인 저서 『암컷의 통제Female Control』(1996)에서 에버하드는 질이든 총배설강이든 저정낭이든 암컷의 생식기는 정자를 받기 위한 비활성 배관 이상이라는 사례를 제시했다. 암컷의 생식기는 능동적인 기관으로서 구조와 생리, 화학적 특성을 통해 정자를 보관, 분류, 거부할 수 있다. 매력 없는 구혼자의 정액은 갖다 버리고, 선택된 정자는 난자로 가는 직통 노선에 올려 적극적으로 이동 속도를 높이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로 같은 통로 속에서 헤매다 끝나게 할 수도 있다. 에버하드가 보기에 일단 씨뿌리기가 끝나면 그때부터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쪽은 암컷이다. 104)
6장 성모마리아는 없다 : 상상을 초월하는 어미들
동물의 암컷은 오랫동안 마치 다른 역할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어머니와 동일시되어왔다. 엄마가 된다는 것, 또는 모성은 감정적인 주제다. 양육과 희생의 동의어이며, 따라서 모든 여성은 ‘타고난’ 어머니이고, 자식에게 필요한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는 신비에 가까운 모성 본능으로 채워진 근원적인 존재라는 오해가 만연하다. 이런 발상의 가장 자명한 문제는 새끼를 돌보는 것이 전적으로 암컷의 책임이라고 가정하는 데 있다. 그러나 암컷이 임신과 수유의 책임에서 풀려나게 되면 아빠들이 자식에게 훨씬 더 헌신적으로 된다. 특히 조류에서는 부모가 함께 자식을 돌보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조류 커플의 90퍼센트가 그 일을 나눠 가진다. 진화의 단계를 거슬러가다 보면 아비의 돌봄이 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관례 수준이다. 물고기의 경우 전체 종의 3분의 2가 양육의 모든 책임을 아비 혼자서 지는 싱글대디이고, 어미는 알을 기여하는 것 이상은 하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113-4)
암컷은 자신의 생식적 운명을 잔인하게 통제한다. 야생에서 임신 중인 겔라다개코원숭이는 새로운 수컷이 집단을 장악할 때면 유산한다. 무리에 유입된 수컷은 거의 언제나 제 씨가 아닌 새끼를 죽인다. 그러므로 임신을 종결하는 것은 영아 살해라는 피할 수 없는 결말에 괜한 힘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어미의 보험이나 마찬가지다. 약 반세기 전에 생쥐에서 이 현상을 처음 발견한 힐다 브루스Hilda Bruce의 이름을 따서 ‘브루스 효과’라고 부르는 이 특별한 유산은 그 이후로 사자에서 랑구르까지 다양한 야생 포유류에서 기록되었다. 모성애의 목표는 무작정 새끼를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번식할 때까지 오래 살아남는 자손의 수를 최대로 늘리는 곳에 자신의 제한된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다. 이 일에 진정한 이타적 헌신은 없다. 오히려 철저히 이기적이다. ‘좋은 엄마’는 본능적으로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할 때와 포기할 때를 알고 있으며 그건 심지어 새끼가 태어난 후에도 그러하다. 124)
오스트레일리아 오지의 황량한 땅에 사는 캥거루 암컷은 그 지역의 변덕스러운 환경 속에서 기발한 분산 투자법을 발달시켰다. 동시에 세 단계의 자식을 저글링 하는 생식 조립라인이다. 첫째는 아직 젖먹이지만 독립이 가까운 상태라 거의 주머니 밖에 나와 어미 옆에서 뛰어다니는 새끼이고, 둘째는 주머니 속 젖꼭지에 들러붙어 있는 분홍색 젤리빈 같은 새끼이며, 셋째는 수정은 되었으나 자궁에 가사 상태로 멈춰 있는 배반포 상태의 휴면 중인 세포 덩어리다. 포식자에게 쫓길 때면 어미는 주머니에서 더 큰 캥거루를 꺼내어 몸을 가볍게 하고 도망간다. 어미를 쫓아가지 못하면 홀로 남은 새끼는 젖을 먹지 못하고 어미의 보호도 받지 못해 죽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가슴 미어지는 일이지만 캥거루에게는 고통 없는 의식적 결정이 필요하다. 자연선택은 이미 어미에게 기능적인 차선책을 제공했다. 젖먹이가 사라지면 배아 상태로 대기 중이던 새끼가 휴면에서 깨어나 잃어버린 새끼를 빠르게 대체한다. 124-5)
엄마는 어미로서 행동하게 하는 갈라닌과 옥시토신 뉴런을 둘 다 갖고 있다. 그러나 이 포옹 호르몬은 새끼 돌보기 스위치의 찾기 힘든 방아쇠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보완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뒬락은 출산이나 수유와 관련된 호르몬의 홍수와는 무관하고 또한 옥시토신만으로 작동하지 않는 다른 장기적인 애착 단계가 있다고 믿는다. 이 두 번째 단계는 엄마, 아빠, 다른 먼 친척, 심지어 양부모와의 관계에서 높은 수준의 애착을 끌어낼 수 있다. 근연 관계가 아닌 새끼를 돌보는 일은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애초에 공동 양육이 진화한 종도 있다. 이는 ‘이중 업무’, 소위 투잡을 뛰어야 하는 동물의 어미에게 엄청난 이점이다. 남의 새끼를 돌보고 부양하는 것은 얼핏 진화의 논리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협동 번식은 다양한 분류군에서 여러 차례 진화했다. 1만 종의 조류 중 약 9퍼센트와 전체의 3퍼센트에 달하는 포유류 어미들이 알로마더allomother, 즉 ‘다른 엄마’들로부터 절실한 도움을 받는다. 131-2)
7장 계집 대 계집 : 암컷의 싸움
3월에 짧은 우기가 지나면 토피영양 암컷은 짝을 찾아 레크로 크게 무리 지어 이동한다. 레크는 앞서 산쑥들꿩 이야기에서 등장한 수컷들의 짝짓기 경기장이다. 암컷은 1년 중 단 하루만 발정하기 때문에 번식기는 치열하다. 이처럼 짧은 생식 기간 때문에 24시간짜리 광란의 성적 활동이 일어난다. 브로 예르겐센이 계산해보니 보통 한 암놈이 평균 네 마리 수컷과 짝짓기를 했고, 개중에는 이 제한된 시간에 무려 12마리의 파트너와 짝짓기하는 암놈도 있었다. 최고의 수놈은 중심에 자리 잡고 레크를 장악한다. 암놈들이 싸우는 것도 모두 이 매력적인 수컷 때문이다. 브로 예르겐센은 소위 잘나가는 수컷 토피영양이 다윈의 예측과 달리 아무하고나 짝짓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소중한 정자를 보전하기 위해 수컷도 전통적으로 암컷이 취하는 까다로운 태도를 취한다. 되도록 많은 개체와 짝짓기한다는 목적은 변함없지만 정자 경쟁에서 자신의 기회를 최대로 높일 암컷을 의도적으로 찾아 선택하는 것이다. 137-8)
사회적 종에서 서열은 먹이, 주거지, 최고 품질의 정자처럼 번식에 필요한 자원에 접근하는 열쇠다. 그래서 우두머리 암캐가 되는 것은 확실한 이득이다. 수컷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통해 패권을 잡고 관심을 한 몸에 받지만, 집단생활을 하는 암컷은 수컷의 서열과는 무관하게 자체적인 위계질서를 이루고 생활한다. 슈옐데루프 에베는 무리 내 암탉들이 일상적인 다툼을 하는 가운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최고의 위치에 오른 암탉은―에베가 ‘폭군’이라고 부른―상대적 지위를 망각하고 감히 자신보다 먼저 먹으려는 낮은 서열의 닭을 쪼아대어 수시로 제 위치를 상기시켰다. 알파 암컷의 자리로 향하는 사다리 끝에 올랐을 때 받을 상은 상당한 번식 상의 이점이며 싸울 가치가 충분하다. 수컷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는 피비린내가 나고 워낙 요란하기 때문에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하지만 암컷의 권력 다툼은 결코 덜 파괴적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대단히 은밀하게 일어난다. 142-3)
높은 지위의 노랑개코원숭이 암컷은 먹이원에 대한 최초의 몫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과 새끼들을 위한 고차원적 갈취 행위 등 모든 것을 다 누린다. 지위가 낮은 어미와 그 자식은 위의 것들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생식능력에도 영향을 미쳐 서열이 낮은 암컷은 지속적인 테러의 결과로 더 늦게 번식하고 배란의 빈도가 낮으며 자발적으로 유산할 수 있다. 다른 암컷의 생식력에 가하는 이런 비열한 행위는 중대한 결과를 불러오며 수컷 사이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인 개싸움보다 훨씬 타격이 크다. 유전적 유산이라는 가장 아픈 곳을 때리기 때문이다. 번식하지 못하는 것만큼 무서운 벌은 없다. 24시간 주먹이 날아다니지 않는다 하여 영장류 암컷이 수컷보다 경쟁심이 부족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이들은 더 교활하고 더 치졸하게 싸운다. 영장류 암컷은 ‘서열 차이나 무시의 신호에 집착한다’라고 묘사되어 왔다. 수컷들만큼 요란하게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143-4)
미어캣은 3~15마리가 씨족사회를 이루고 번식의 80퍼센트를 우두머리 암컷 한 마리가 독점한다. 알파 암컷의 친척, 후손, 몇몇 떠돌이 수컷으로 이루어진 무리의 나머지는 영역 방어와 보초, 땅굴 관리, 아기 돌보기는 물론이고 심지어 우두머리의 새끼에게 젖까지 먹인다. 이런 식의 분업은 과학적으로 ‘협동 번식’이라고 알려졌으나 내게는 아주 완곡한 표현으로 들린다. 미어캣의 동지애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협조가 아닌 노골적인 압력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미어캣 사회는 임신하는 즉시 다른 암컷의 새끼를 죽이고 잡아먹는 근친관계 암컷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자비한 번식 경쟁에 기반을 둔다. 하여 이 자리는 무슨 수를 쓰든 차지할 가치가 있다. 절대권력을 물려받는 순간 미어캣 암놈은 몸집이 커지고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올라가고 다른 암컷에 대한 적대감이 사정없이 상승한다. 특히 나이와 몸집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즉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를 유난히 적대적으로 대할 것이다. 대부분 자기 자매다. 144-5)
8장 영장류 정치학 : 자매애의 힘
버빗원숭이 암컷은 자신이 태어난 집단에 머물면서 친척들과 평생 강한 유대를 형성한다. 반면에 수컷은 출생 집단에서 나와 혈연관계가 아닌 집단에 합류한다. 이런 시스템이 암컷에게 엄청난 권력을 부여한다. 피를 나눈 암컷들의 모계 집단은 안정적인 중심을 형성하고 협력하여 수컷의 지배에 대항한다. 암컷들은 특정 수컷이 무리에 합류하지 못하게 막거나 쫓아내며 그 과정에서 수컷에게 상처를 가하거나 죽이는 일까지 있다. 암컷은 종종 집단의 브레인 역할을 한다. 생계를 유지하고 안전하게 잘 수 있는 최고의 장소를 물색하는 데 필수적인 지식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포유류 암컷은 대개 수컷보다 오래 살기 때문에 전문성이 더욱 강화된다. 그런 지혜가 암컷에게 무리를 이끌 권위를 준다.38 일례로 꼬리감는원숭이에서 먹이를 찾거나 무리가 이동할 때 리더십을 더 자주 발휘하는 것은 알파 수컷이 아닌 작은 암컷들이다. 이런 현상은 지배와 리더십을 동일시하는 오랜 가정에 도전한다. 168-9)
침팬지는 부계 중심에 호전적이지만 보노보는 모계 중심에 평화롭다. 보노보는 몸집이 좀 더 작고 호리호리하고 털이 적을 뿐 실제로 사촌인 침팬지와 아주 유사하게 생겼다. 침팬지처럼 암컷의 몸집은 수컷의 약 3분의 2 정도이고 출생 집단에서 나와 이주한다. 그러나 보노보 암컷의 사회생활은 침팬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뒤를 봐줄 사람 하나 없는 외로운 디아스포라로 성인의 삶을 사는 대신 보노보 암컷은 낯선 집단에 합류해서도 피를 나누지 않은 암컷들과 동맹을 형성한다. 이처럼 인위적으로 구성된 자매 관계의 힘으로 보노보 암컷은 자신들보다 큰 수컷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의 동맹은 싸움이나 신체적 겁박에 의해 형성되거나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연합을 유지하는 가장 큰 요인은 과학자들이 ‘G-G 문지르기’라고 묘사한 행위로 서로 생식기를 비비는 행동이다. 한마디로 보노보 암컷은 상호적인 프로타주의 예술을 완성함으로써 가부장제를 전복할 힘을 얻은 것이다. 171)
# 프로타주 : 옷을 입은 채 몸을 남의 몸, 물건에 문질러 성적 쾌감을 얻는 행위
“애초에 침팬지나 개코원숭이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고 보노보를 제일 먼저 알았다고 상상해봅시다.” 프란스 드 발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럼 보노보 사회에 기초하여 초기 호미니드는 여성 중심의 사회였고, 그 사회에서는 성이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고 전쟁은 드물거나 없었을 거라고, 그렇게 믿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인류 과거에 대한 가장 적절한 재구성은 침팬지와 보노보의 특징을 섞은 형태일 것이다. 그것이 침팬지에 더 가까웠는지 보노보에 더 가까웠는지는 영원한 논쟁거리가 될 수 있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게 아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에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미래는 다르다. 보노보 사회가 영감을 준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보노보 이야기는 우리에게 남성이 공격적으로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행위와 능력은 환경적, 사회적 요인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178)
9장 범고래 여족장과 완경 : 고래가 품은 진화의 비밀
인간을 제외하고 범고래는 지구상에서 가장 넓게 분포한 포식동물이다. 고도로 전문화된 사냥 기술로 이 범지구적 킬러들은 북극에서 남극까지 특정한 먹이를 활용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 해안의 범고래는 땅을 파서 가오리를 잡아먹는 선수이고, 아르헨티나에서는 파도를 타고 해변까지 올라와 바다사자 새끼를 낚아챈다. 알래스카 범고래 집단은 매해 5월이면 유니맥 패스Unimak Pass를 따라 모여서 매복했다가 어린 귀신고래를 습격한다. 남극에서는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큰 파도를 일으켜 부빙에 안전하게 피신 중인 물범을 입속으로 쓸어 넣는다. 이처럼 먹이로 특화된 범고래 종족을 생태학자들은 생태종이라고 부른다. 동일한 종이지만 특정 지리 구역에 분리되어 살면서 서로 교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고유의 방언을 ‘말한다’고 하고, 각 종족의 사냥 기술이 세대를 거쳐 전수되어 인간의 문화에 버금간다고 알려졌다. 이런 범고래 무리에 앞장서서 헤엄치는 것은 폐경 이후의 범고래 암컷이다. 184)
남부 상주군은 태평양 연어, 그중에서도 왕연어라고도 알려진 치누크연어를 가장 선호하며, 범고래 성체 한 마리가 건강하게 생활하려면 하루에 20~30마리씩 먹어야 한다. 미국-캐나다 서부 국경에 걸친 살리시해는 전통적으로 고래들이 이 크고 지방이 많은 생선으로 잔치를 벌이는 먹이터다. 많은 연어가 이곳으로 몰려와서 미국 북서부 지방의 하천 지류를 따라 올라가며 알을 낳는다. 이런 일시적인 연어 서식지는 해와 철마다, 또 조류에 따라 계속 변하기 때문에 연어 무리를 뒤쫓는 사냥꾼은 현명하고 약삭빨라야 한다. 범고래는 연어를 쫓아 강 쪽으로 올라가야 할지 신선한 재고를 찾아 심해 연어 식당을 배회할지 결정한다. 이 복합적 인지 활동이 과거보다 훨씬 난해해졌는데, 연어가 산란지로 가는 길을 거대한 콘크리트 수력발전 댐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수년의 경험이 있는 노련한 범고래들만 연어를 찾을 장소를 안다. 바로 나이가 가장 많은 여족장들이다. 184)
코끼리 우두머리 암컷은 가족 집단의 수장이며, 사자를 한 수 앞서는 지혜가 있고, 다른 암놈들과 정치적으로 연합하며 가뭄에는 오래된 수원을 기억한다. 이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거인은 범고래(그리고 실제로 인간)와 공통점이 많다. 수명이 길고 뇌가 크며 의사소통 기술이 복잡하고 유동적인 사회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나이가 많은 대장 암컷은 친구와 적을 구분할 뿐 아니라 수사자와 암사자의 포효도 가려낼 수 있다. 이는 생존에 필수적인 재주인데 암수의 소리는 거의 비슷하지만 위협도는 천지 차이이기 때문이다. 사자는 주로 암컷이 사냥에 나서긴 하지만, 새끼 코끼리를 낚아챌 수 있는 것은 몸집이 50퍼센트 정도 더 큰 수컷만 가능하다. 나이 많은 여족장의 월등한 식별력은 식구를 안전하게 지키고 긴장을 낮추면서 이들이 우선순위에 집중하게 한다. 먹는 일 말이다. 매콤의 연구는 연륜 있는 암코끼리의 빠른 판단과 자신감 넘치는 리더십은 자손의 증가로 이어져 할머니 가설을 뒷받침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85)
할머니 가설이 작용하려면 말년에 생식에 들어가는 비용이 아주 많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범고래든 그 어떤 동물이든 번식을 멈출 이유가 없다. 새끼를 낳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러나 범고래의 경우 아들과 딸의 차이가 꽤 크다. 열다섯 살이 된 젊은 암컷 범고래가 번식을 시작할 때 이들이 새끼에게 줄 양질의 젖을 생산하려면 연어를 40퍼센트나 더 먹어야 한다. 그러므로 ‘딸’이 성숙기에 도달하면 무리 전체가 영양학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 이처럼 나이 들어 엄마가 되는 것에 대한 부담스러운 사회적 비용이 진화적 자극이 되어 범고래 암컷으로 하여금 중년이 되면 번식을 중단하고 대신 아들과 손자에게 투자하며 딸과 손녀와의 경쟁을 거두게 한다. 그런 동기가 코끼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데, 다른 사회적 포유류처럼 아들이 출생 집단을 떠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끼리 암컷 우두머리들에게 가장 무난한 선택은 죽을 때까지 번식하는 것이다. 186-7)
10장 수컷 없는 삶 : 자매들끼리 알아서 해결하고 있다
레이산알바트로스는 태평양 하와이 섬들을 좋아하여 매년 11월이면 6개월의 고독한 삶을 접고 한데 모여 짝짓기하고 새끼를 한 마리씩 낳아서 기른다. 고작 한 마리냐 싶겠지만 그조차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알바트로스 새끼는 유난히 자라는 속도가 느려서 둥지를 떠나 스스로 하늘에 몸을 띄우기까지 6개월이나 걸린다. 그때까지 부모는 한 팀이 되어 한 마리가 둥지에 남아 시끄럽고 바라는 것 많은 투자 대상을 보호하는 동안 다른 한 마리는 그 입에 넣어줄 오징어를 찾아 출정을 떠난다. 이런 팀워크는 대단히 높은 수준의 신뢰와 이해와 헌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알바트로스가 장기간 인내력을 발휘하여 이룩한 또 다른 특별한 위업의 상징이 된 것도 그런 이유다. 알바트로스는 그 드물다는 일부일처성 새이다. 전형적인 알바트로스는 60~70년을 살면서 평생 매년 똑같은 짝을 만나 둥지를 튼다.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헌신적인 저 커플의 3분의 1이 인간의 언어로 말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다. 196)
카에나 포인트의 알바트로스 군집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집단이다. 이 군집은 레이산섬과 미드웨이 환초 같은 하와이 무인도에서 100만 마리 이상이 번식하는 크고 혼잡한 군집에서 나온 자손들이 형성했다. 모험을 감행한 자들은 젊은 암컷 알바트로스들로, 자기가 태어난 곳을 떠나 새로운 목초지에서 독립했다. 젊은 수컷은 고향에 머물며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번식을 시작할 가능성이 더 컸다. 그 바람에 카에나 포인트나 근처 카우아이 같은 지역의 신생 군집에는 암컷이 짝으로 삼을 수컷이 부족했다. 혼자서 새끼를 키우는 것이 알바트로스 사전에는 없는 일이므로, 이 혁신적인 암컷들은 기존 암수 커플의 수컷에게 정자를 기증받은 다음 개척 정신이 뛰어난 다른 암컷과 짝을 짓고 새끼를 키워내는 어려운 과제에 동반하게 된 것이다. 일부는 한두 해 정도 암컷과 짝을 지었다가 다시 수컷을 찾아간다. 일부 암컷은 평생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러 해 동안 수컷으로 갈아타지 않고 지속적인 동성애 관계를 유지한다. 198-9)
진딧물은 4,000종이나 되며 작물에서 생명을 빨아먹고 질병을 퍼트리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되었다. 또한 이들은 복제의 세계에서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여름이 시작하면서 암컷 한 마리가 50~100마리의 딸을 낳는다. 한데 이 딸들은 이미 발생 중인 배아를 임신한 상태다. 작고 통통한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새끼가 새끼를 임신한 상태로 포개진 덕분에 약충이 성숙하는 시기가 열흘로 단축되고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예를 들어 양배추가루진딧물Brevicoryne brassicae 같은 몇몇 종은 한 철에 41세대를 생산한다. 그래서 한 암컷이 여름의 시작과 함께 깐 알은 무당벌레 입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이론적으로 수천억의 자손을 생산한다. 가을이 되어 수가 많이 불어나면 그때부터 암컷은 수컷 진딧물과 교미하여 유성생식을 시도한 후 다음해에 닥칠 난관에 대처할 유전적 다양성을 갖춘 알을 낳는다. 가히 정원사의 최강 숙적이 탄생하는 난공불락의 시스템이다. 언제나 승리는 진딧물의 것이다. 205)
하지만 이것도 윤형동물의 질형목 생물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순결에 대한 이들의 헌신은 동물의 왕국에서 필적할 자가 없다. 편형동물의 친척인 이 미세한 생물은 무려 8,000만 년이나 섹스의 냄새도 맡지 못했다. 질형목 생물의 450개 종이 모두 암컷이다. 질형목 생물이 진화적으로 장수한 비결은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꾸준한 조사와 맹렬한 숙고의 영역이었다. 그 비법 중 하나는 식사 중에 다른 생명체로부터 유전자를 ‘훔치는’ 데 있는 것 같다. 어떤 과학자들은 질형목 생물이 저녁거리에서 DNA를 추출한 다음, ‘수평적 유전자 이동horizontal gene transfer’이라는 과정을 통해 자기 게놈을 단장한다고 생각한다. 모두 합치면 질형목은 500종 이상의 종에서 외래 DNA를 갖다 붙인 프랑켄슈타인 콜라주 기법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화를 통해서인지 아닌지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처럼 훔쳐온 유전자들은 성이 없는 상황에서 질형목에 필요한 유전적 다양성을 준다. 206)
11장 이분법을 넘어서 : 무지갯빛 진화
따개비는 안착한 환경이나 사회적 상황에 따라 성 체제를 수정하는 능력 덕분에 번식 스펙트럼의 폭이 대단히 넓다. 예를 들어 왜웅矮雄, 즉 난쟁이 수컷은 암컷 위에 내려앉았는지 아닌지에 따라 난소가 발달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 그러므로 확실히 수컷으로 분류하기가 뭣하다. ‘수컷의 기능을 강조하는’ 현대 과학이 이 모호한 성을 ‘잠재적 자웅동체potential hermaphrodite’로 기술하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어떤 경우에는 자웅동체, 암컷, 왜웅 사이의 경계가 너무 흐릿해서 이들의 성적 표현은 명확한 구분이 있다기보다 연속체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따개비에서 보인 한 번식 시스템에서 다른 번식 시스템으로의 빠른 진화는 자연에서 성과 그 표현의 놀라운 유동성을 드러낸다. 오늘날 따개비, 그리고 그와 비슷한 생명체는 진화의 최전선에 서서 우리에게 성이란 이원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현상으로서 진화의 변덕에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모호한 경계를 지닌다고 가르친다. 216)
러프가든은 『변이의 축제』에서 연어에서 참새까지 3~5개의 젠더 형태로 존재한다고 보이는 많은 종을 인용했다.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성에 속해 있지만 별개의 외형과 성적 행동을 보이는 동물을 말한다. 무지개양놀래기Thalassoma bifasciatum를 예로 들어보자. 화려한 색깔의 이 자웅동체 물고기를 두고 러프가든은 세 가지 젠더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한 젠더는 수컷으로 태어나 평생 수컷으로 살고, 한 젠더는 암컷으로 태어나 평생 암컷으로 산다. 하지만 세 번째는 암컷으로 태어나 살다가 나중에 수컷으로 변한다. 이처럼 성이 전환된 수컷은 처음부터 수컷이었던 놈들보다 몸집이 훨씬 크다. 환경에 따라 선호되는 무지개양놀래기 수컷의 젠더가 다르다. 해초로 덮인 환경에서는 몸집이 큰 성전환 수컷이 암컷을 지키느라 애를 먹는 반면, 성전환하지 않은 작은 수컷은 더 활발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산호초의 맑은 물속에서는 성전환 수컷이 제 영역과 암컷을 더 잘 지킨다. 따라서 진화는 그 둘의 혼합을 선호한다. 218)
이색적인 앵무고기에서처럼 변화가 영구적이라 일단 성을 바꾸면 죽을 때까지 그 성으로 살아가는 종이 있다. 반면 평생 유동적으로 양쪽 성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사는 물고기도 있다. 산호초 바위 틈바구니에 사는 고비goby처럼 잡아먹힐까 두려워 밖으로 모험하지 않는 물고기에게는 아주 편리한 재주다. 다른 산호 고비를 만나면 상대의 성이 무엇이건 간에 거기에 맞춰 생식샘을 바꿀 수 있으므로 언제나 번식할 수 있다. 어떤 물고기는 성을 뒤집는 빈도가 가히 수준급이다. 초크배스Serranus tortugarum는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형광 파란색의 카리브해 물고기로 하루에 최대 20번이나 성을 바꾼다고 알려졌다. 성을 바꾸는 습성은 장기 파트너와 함께 조정하는 행동으로, 정자 생산보다 에너지가 많이 드는 산란을 번갈아 하여 상호 공정한 번식 투자를 유지하려는 목적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들은 각각 자기가 생산하는 만큼 알을 수정시킨다. 물고기조차 상대와의 관계에서 주는 만큼 받는다는 예시다. 220)
성을 바꾸는 물고기 대부분이 자성선숙이다. 암컷으로 태어나 나중에 수컷이 된다는 뜻이다. 소수지만 그 반대인 웅성선숙의 예도 있다. 흰동가리들이 바로 수컷으로 시작하는 소수에 속한다. 아주 초현실적인 광경이었다. 2배색의 이 작은 물고기는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의 주인공으로 발탁된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말할 것도 것이 이 영화는 흰동가리의 실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술적 자유를 발휘했다. 이 일부일처성 산호 서식자는 암수가 함께 말미잘 안에 집을 짓는다. 말미잘의 쏘는 촉수가 흰동가리 커플과 알을 보호한다. 암수의 관계에서 보스는 호전적인 암컷이다. 수컷이 알을 돌보는 동안 영역을 사수하는 일은 암컷의 몫이다. 흰동가리는 최대 30년이라는 긴 수명을 살면서 한 말미잘 안에서 종종 어린 수컷들과 함께 산다. 그러다가 암컷이 예를 들어 꼬치고기에 잡아먹혀 사라지고 나면 미스터 흰동가리가 암컷으로 변신하여 우두머리가 되고 어린 수컷 중 하나가 성숙하여 그 짝이 된다. 220-1)
나오며 편견 없는 자연계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이 출간되고 4년 후, 미국의 목사이자 독학한 과학자 안토이넷 브라운 블랙웰Antoinette Brown Blackwell은 『자연계에서의 성The Sexes Throughout Nature』을 출간하고, 다윈은 ‘남성 계통에서 진화한 것들을 과도하게 중시함으로써’ 진화를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했다. 블랙웰은 유기체가 복잡하고 발전할수록 성별 간 노동의 분할이 더 크다고 제안했다. 수컷에서 진화한 모든 특수한 형질에 대해 암컷 역시 그에 상응하는 것을 진화시켰다. 그 순수한 결과는 ‘암수의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등식에서의 유기적 평형’이다. 블랙웰의 외침은 외롭지 않았다. 독학으로 공부한 소수의 여성 지식인들은 다윈의 연구를 읽은 후 종의 암컷이 소외되고 잘못 이해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 초기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는 과학적 가부장제에 의해 묵살되었다. 세라 블래퍼 허디가 비꼬듯이 말한 것처럼 주류 진화생물학에서 이 페미니스트 선조의 영향은 한 구절로 요약될 수 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2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