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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 - 유대인 역사학자의 통렬한 이스라엘 비판서
일란 파페 지음, 백선 옮김, 이희수 감수 / 틈새책방 / 2024년 7월
평점 :
서문
모든 분쟁의 중심에는 역사가 있다. 과거를 편견 없이 진실되게 이해하면 평화의 가능성과 마주하지만, 반대로 역사를 왜곡하거나 조작하면 재앙이 싹틀 뿐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허위 사실이 켜켜이 쌓인 탓에 우리는 그 갈등의 기원을 직시하기가 어렵다. 한편, 관련 사실이 지속적으로 조작되면 계속되는 유혈 사태와 폭력으로 다친 모든 피해자들에게 불리해진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분쟁의 땅이 어떻게 이스라엘 국가가 됐는지에 대한 시온주의적 역사 서술은 일련의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신화들은 분쟁의 땅에 대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도덕적 권리를 미묘하게 의심하게 만든다. 서방의 주류 미디어와 정치 엘리트들은 종종 이들 신화를 주어진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지난 60여 년 동안 이스라엘이 보여 준 행위를 정당화한다. 대개 암묵적으로 수용된 이러한 신화들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건국 이래 계속되는 갈등에 서방 정부가 의미 있는 개입을 꺼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19)
PART I. 잘못된 신화: 과거
1. 팔레스타인은 빈 땅이었다
오스만제국 시대에 팔레스타인은 전체적으로 지중해 동쪽의 다른 나라들과 다르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둘러싸여 고립돼 있기보다는, 광범위한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서 다른 문화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둘째로, 변화와 근대화에 열려 있던 팔레스타인은 시온주의 운동이 도래하기 훨씬 이전에 국가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자히르 알 우마르Daher al-Umar, 1690~1775 같은 강력한 지역 지도자의 지배 아래 하이파Haifa, 셰파므르Shefamr, 티베리아스Tiberias, 아크레Acre 등의 도시가 새로이 보수되고 활력을 되찾았다. 항구와 마을로 이어지는 해안 지역 네트워크는 유럽과 무역으로 연결되어 번성했으며, 내륙 평원은 인근 지역과 무역을 했다. 사막과는 정반대로, 팔레스타인은 번창한 빌라드 알샴Bilad al-Sham(북쪽 땅), 즉 당시 레반트Levant 지역이었다. 동시에 풍요로운 농업, 작은 마을들과 역사적인 도시들 덕분에 시온주의 도래할 즈음에는 인구가 50만 명에 달했다. 26)
중동 및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사회에도 19~20세기에 강력하게 정립된 ‘국가’라는 개념이 유입됐다. 중동에 민족주의 사상이 유입된 데에는 어느 정도 미국 선교사들의 역할이 있었다. 그들은 19세기 초, ‘선교’와 함께 ‘자결권’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전파하려는 열망을 갖고 이 지역에 발을 디뎠다. 당연하게도 주로 기독교도와 소수 집단들은 점유 영토shared territory, 언어, 역사,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세속적인 국가 정체성 개념을 반색하며 수용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민족주의에 동참한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교도 엘리트들 사이에서 열성적인 협력자를 찾았고, 그 결과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팔레스타인 전역에 이슬람교-기독교 단체가 급격히 증가했다. 아랍 세계에서 유대인들은 이렇게 서로 종교가 다른 활동가들 간의 동맹에 합류했다. 시온주의가 현지 유대인 공동체에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팔레스타인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27)
팔레스타인이라는 국가는 없었지만 팔레스타인의 문화적 위치는 매우 분명했다. 하나라는 소속감이 있었다. 20세기 초에 창간된 신문인 〈필라스틴Filastin〉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부르는 이름에서 따왔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자기만의 방언을 사용했고, 자기만의 관습과 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세계 지도에는 ‘팔레스타인’이라는 나라에 거주한다고 표기했다. 그리하여 1918년까지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제국 시대보다 더 통합돼 있었지만, 그 후 더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23년 팔레스타인의 지위에 대한 최종적인 국제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 영국 정부는 이 땅의 국경을 다시 협상했다. 그 결과 민족 운동이 투쟁할 수 있는 지리적 공간이 더욱 명확히 정의됐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더욱 분명한 소속감을 느끼게 됐다. 이제 팔레스타인이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누구에게 속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았을 뿐이다. 팔레스타인 원주민인가, 아니면 새로운 유대 정착민인가? 28-9)
2. 유대 민족에게는 땅이 없었다
16세기 이후 종교 개혁에 따른 신학적·종교적 격변이 일어나면서, 특히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천년 왕국의 끝과 유대인의 개종 및 이들의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 사이에 명확한 연관성이 만들어졌다. 《만들어진 유대인》의 저자 슐로모 산드Shlomo Sand는 근대사의 특정한 시점에 기독교 세계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유대인은 언젠가 성지로 돌아가야 하는 ‘민족’이라는 생각을 지지했음을 보여 준다. 시온주의를 형성하는 사상과 이보다 더 오래 지속된 반유대주의 사이에는 분명한 연관성이 있다. 이렇듯 겉보기에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믿음이 실제 식민지화 프로그램과 강탈 계획으로 전환될 징조가 1820년대 초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이미 나타났다.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기독교 사회로 편입시키려는 전략적 계획에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을 그 핵심에 두는 강력한 신학적, 제국주의적 운동이 등장한 것이다. 19세기에 이러한 정서는 영국에서 더욱 퍼졌고 제국의 공식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30-1)
시온주의 사상은 1860년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싹텄고, 계몽주의와 1848년의 ‘국민 국가들의 봄’, 이후에는 사회주의에서 영감을 받았다. 1870년대 말과 1880년대 초 러시아에서 특히 악랄했던 유대인 박해 물결과 서유럽의 반유대 민족주의의 부상에 대응한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의 비전을 통해 시온주의는 지적, 문화적 활동에서 정치적인 프로젝트로 변화했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을 이용해 ‘성지聖地’에 더 깊이 관여하고자 했던 영국의 전략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충동은 시온주의의 새로운 문화적, 지적 비전과 일치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팔레스타인의 식민지화는 귀환과 구원의 행위로 여겨졌다. 이 두 충동이 일치했기에 반유대주의와 천년 왕국 사상 간에 강력한 동맹이 만들어졌고, 팔레스타인 원주민을 희생시켜 유대인을 유럽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실제 정착 프로젝트가 이행됐다. 1917년 11월 2일 밸푸어 선언이 선포되면서 이 동맹은 대중에게 알려졌다. 35-7)
수많은 민족 운동이 시작될 때 그랬듯이, 사람들은 스스로를 창조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창세기〉의 서술이 대량 학살, 종족 청소, 억압과 같은 정치적 계획으로 이어진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특히 19세기 시온주의의 주장에서 중요한 점은 그 주장의 역사적 정확성이 아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유대인이 로마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의 진짜 후손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점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전 세계의 모든 유대인을 대표하고, 그들을 위해 모든 일을 하며, 그들을 대신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명확한 연관성이 다른 유대인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미국에서도 도전을 받고 있다. 시온주의는 원래 유대인들 사이에서 소수 의견이었다.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속한 국민이고 따라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이들은 영국 관리들과 군사력에 의존해야 했다. 유대인과 세계 대부분은 유대인이 땅 없는 민족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던 것 같다. 38-9)
3. 시온주의와 유대교는 같다
유대인의 삶에서 《성경》의 역할은 유대주의와 시온주의 사이의 또 다른 분명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시온주의 이전 유대 세계에서는 《성경》을 정치적이거나 민족적이기까지 한 의미를 담은 단일 텍스트로 가르치지 않았다. 유럽이나 아랍 세계의 다양한 유대 교육 기관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요 랍비들은 《성경》에 담긴 정치사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유대인의 주권 사상을 영적 학습에서 아주 사소한 주제로 취급했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전통적인 《성경》 해석에 근본적으로 도전했다. 예컨대, ‘시온의 연인들’은 《성경》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태어나 가나안Canaanite 정권의 지배하에서 고통받은 유대인 국가의 이야기로 읽었다. 이들은 나중에 가나안에 의해 이집트(애굽)로 추방됐다가 다시 돌아와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그 땅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국가와 조국보다는 유일신을 발견한 집단으로 본다. 46)
근래에 이 서사에 학문적이고 세속적인 주요 증거를 제공한 것은 소위 성서고고학이다(이는 그 자체가 모순적인 개념인데, 《성경》은 다양한 시기에 여러 민족이 쓴 위대한 문학 작품이지 역사서라고는 보기 어렵다). 이 서사에 따르면, 서기 70년 이후 시온주의자들이 돌아올 때까지 그 땅은 거의 비어 있었다. 그러나 주요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미 거주자가 있는 팔레스타인을 식민지화하려면 정착, 강탈, 심지어 종족 청소까지 체계적인 정책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팔레스타인 강탈을 신성한 기독교 계획의 이행으로 묘사했고, 이는 시온주의를 뒷받침하는 전 세계 기독교인의 지지를 모으는 데 귀중한 수단이 됐다. 식민지 원주민들이 빠르게 알아차렸듯이, 정착민들이 들고 온 것이 《성경》이건, 마르크스의 저서이건, 유럽 계몽주의 소책자이건 관계없이 궁극적으로 그들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었다. 48)
시온주의 운동이 요구한 공간은 박해받는 유대인을 구출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결정됐다기보다, 가급적 소수의 주민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최대한 많이 차지하겠다는 의지로 정해졌다. 신중하고 세속적인 유대인 학자들은 ‘과학적’이고자 노력하면서, 고대의 흐릿한 약속을 현재의 사실로 바꾸었다. 이 작업은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지역 유대인 공동체의 주요 역사학자인 벤지온 디나부르크(디누르)Ben-Zion Dinaburg(Dinur)에 의해 이미 시작됐고, 1948년 건국 후 집중적으로 계속됐다. 18세기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이 19세기 말 정통 유대인들처럼 유대 국가 개념을 거부했다는 역사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와서 이 사실은 외면됐다. 역사적으로는 《성경》과 유럽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일, 1948년 전쟁을 하나로 묶어 가르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념적으로는 이 세 가지 항목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오늘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정당화하는 요소로 주입된다. 53-5)
4. 시온주의는 식민주의가 아니다
정착 식민주의를 연구하는 주요 학자 중 하나인 패트릭 울프Patrick Wolfe는 ‘제거 논리’가 정착 식민주의 프로젝트를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정착민들이 원주민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도덕적 정당성과 실질적 수단을 개발했다는 뜻이다. 나는 여기에 또다른 논리가 침투해 있었다고 덧붙이고 싶다. 바로 인간성 말살의 논리다. 유럽에서는 박해의 희생자였던 유대인들로서는, 자신들이 당한 것과 동일하거나 그보다 더 악랄한 일들을 자행하기 전에 먼저 원주민 국가나 사회의 인간성을 박탈해야 했다. 누군가가 팔레스타인이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었고, 땅 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스스로를 방어할 논거 자체를 빼앗기게 된다. 팔레스타인인이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하는 모든 노력은 정당한 소유자에 대한 근거 없는 폭력 행위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시온주의를 식민주의로 논의하는 일과, 팔레스타인인을 식민지 원주민으로 논의하는 문제를 분리하기는 어렵다. 56-7)
19세기 말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에 도착했을 때 팔레스타인 공동체 내에서는 여전히 두 가지 욕구가 존재하고 있었다. 많은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아랍연합공화국United Arab Republic을 꿈꾸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대시리아Greater Syria 개념에 매료되어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에 팔레스타인을 편입시키고자 했다. 범아랍주의자이건, 자기 지역만을 사랑하는 애국자이건, 대시리아의 일부가 되기를 바라건, 유대 국가에 포함되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은 모든 팔레스타인인이 똑같았다.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정착민 공동체에 자그마한 영토 일부라도 넘겨주는 정치적 해결책에 반대했다. 1920년대 말 영국과의 협상에서 그들이 분명히 선언했듯이, 이미 도착한 정착민들과는 기꺼이 공유하겠지만 그 이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집단적 목소리는 1919년부터 10년간 매년 개최된 팔레스타인민족회의Palestinian National Conference 집행부에서 구체화됐다. 58-9)
1928년,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나중에 만들어질 정부에서 유대 정착민이 팔레스타인인과 동등한 대표권을 갖도록 하는 데 동의했다. 시온주의 지도부는 팔레스타인인이 거부할 것으로 판단하고는 이를 지지했지만, 사실 공동 대표권은 시온주의가 추구하는 지향점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인이 동등한 대표권 제안을 수락하자, 시온주의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는 1929년 폭동으로 이어졌다. 헤브론에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나고, 팔레스타인 공동체에서는 훨씬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여기에 유대민족기금이 부재지주와 지역 유지의 토지를 매입하면서 팔레스타인 소작인들에게서 땅을 몰수하자 소작인들은 도시 빈민가로 쫓겨났다. 그런 빈민가 중 하나인 하이파 북동쪽에서 1930년대 초에 망명한 시리아 종교 지도자 이즈 앗딘 알카삼Izz ad-Din al-Qassam이 이슬람 성전聖戰 추종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후 하마스가 그의 이름을 딴 무장 조직으로 유산을 계승했다. 59-60)
5. 1948년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고향을 떠났다
1948년 전쟁에 대한 잘못된 가설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자발적으로 떠났다는 생각만이 아니다. 그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는 세 가지 가설이 더 있다. 첫 번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1947년 11월 유엔이 결의한 분리안을 거부했기 때문에 본인들에게 일어난 일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시온주의 운동의 식민주의적 성격을 무시하는 주장이다. 분명한 것은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종족 청소가, 팔레스타인인과 아무런 협의없이 만들어진 유엔의 평화안을 거부한 데 대한 ‘처벌’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이다. 1948년에 관한 가설은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아랍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이 평화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팔레스타인인과 아랍 세계가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전자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인은 전혀 군사력이 없었으며, 아랍 국가들도 상대적으로 적은 군대만 파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67-8)
이스라엘 국가가 분쟁 이후에 평화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세 번째 신화는 어떨까. 자료가 보여 주는 사실은 정반대다. 사실 이스라엘 지도부는 영국 위임 통치 이후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관한 협상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거나, 추방됐거나 도망쳤던 사람들의 귀환을 검토하지 않는 등 비협조적이었다. 아랍 정부와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비교적 합리적인 유엔의 새 평화 계획에 기꺼이 참여하려고 했던 반면, 이스라엘 지도부는 1948년 9월 유엔이 파견한 평화 중재자 베르나도테Bernadotte 백작을 유대인 테러리스트들이 암살했을 때 모른 척했다. 이스라엘 지도부는 또한 베르나도테 백작을 대신하여 협상을 시작한 유엔 팔레스타인조정기구PCC가 채택한 새로운 평화안도 모두 거부했다. 역사가 아비 쉬라임Avi Shlaim이 《철의 장벽The Iron Wall》에서 보여 주었듯이, 팔레스타인인들이 기회만 있으면 평화를 거부했다는 신화와는 반대로, 지속적으로 평화 제안을 거부한 쪽은 이스라엘이었다. 68)
정치적 함의는 이렇다.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발생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잘못이며, 이스라엘에게 책임이 있다. 법적 함의는 이러하다. 비인간적인 범죄에 비록 법적 소멸 시효가 있다고 해도, 그토록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전히 아무도 법의 심판을 받지 않은 범죄라는 점이다. 도덕적 함의는 유대 국가가 죄악에서 탄생했고(물론 많은 국가가 그렇다), 그 죄, 범죄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 나쁜 점은 이스라엘의 특정 집단이 이를 인정했지만, 동시에 과거를 돌이켜 볼 때나 미래의 팔레스타인인 정책을 펼칠 때는 자신들의 범죄를 완전히 정당화한다는 사실이다. 그 범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저질러지고 있다. 이스라엘 정치 엘리트들은 이 모든 의미를 완전히 무시했다. 대신 1948년 사건에서 매우 다른 교훈을 얻었다. 국가가 인구의 절반을 추방하고, 마을을 파괴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한 교훈으로 인해 1948년 직후와 그 이후에도 다른 수단을 통한 종족 청소가 계속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74)
6. 1967년 6월 전쟁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전쟁이었다
1967년 전쟁을 재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1948년 전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스라엘의 정치, 군사 엘리트들은 1948년 전쟁을 날려버린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전쟁은 이스라엘이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체를 차지할 수 있었고, 그래야 했던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지 않았던 단 하나의 이유는 이웃 요르단과의 합의 때문이었다. 둘의 결탁은 영국의 위임 통치 기간이 끝나갈 무렵에 이뤄졌고, 합의에 따라 요르단군은 1948년 전쟁에서 아랍 전체 군사 작전에 제한적으로만 참여했다. 그 대가로 요르단은 팔레스타인의 일부 지역을 합병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 서안이 되는 지역이었다. 다비드 벤구리온은 요르단이 서안을 차지하도록 한 결정을 ‘베키야 레도로트bechiya ledorot’라고 불렀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미래 세대가 한탄할 결정’이라는 뜻이다. 보다 은유적으로 번역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실수’라고 할 수 있겠다. 78)
한쪽 팔레스타인 집단(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소수 민족)을 통치하던 군정 통치 기구가 다른 팔레스타인 집단(서안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을 통치하러 옮겨갈 기회가 1967년에 찾아 왔다. 1966년 말 이스라엘의 시리아 공격이 임박했다고 굳게 믿고 있던 소련이 나세르에게 벼랑 끝 전술을 부추겼을 때였다. 그러나 전쟁에 돌입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당시 이스라엘 지도부 내부에 전쟁 도발을 막을 힘이 없었다는 점이다. 내부에서 어떤 형태로든 마찰이 있었으면 강경파의 갈등 유발을 지연시켜, 국제 사회가 평화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주도하는 외교적 노력이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던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이 이웃 아랍 국가 모두를 공격했다. 이스라엘 내각은 평화 중재자들에게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6월 11일까지 이스라엘은 골란 고원, 서안, 가자 지구, 시나이반도를 모두 장악하고 작은 제국이 됐다. 82-4)
이 역사적 분기점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종전 직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가 요구한 1967년에 점령한 모든 영토에서 철수하라는 강력한 국제적 압력에 이스라엘 정부가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고대 성서 유적지가 있는 서안의 점령이, 특히 1948년 이전에도 시온주의의 목표였으며, 이제야 전체적으로 시온주의 프로젝트의 논리에 들어맞는다고 말하고 싶다. 이 논리는 가능한 한 적은 수의 팔레스타인인만 남기고 가능한 한 많은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려는 바람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들이 내린 첫 번째 결정은 이스라엘은 서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결정은 서안과 가자 지구의 주민들을 이스라엘 국가의 시민으로 편입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시민권 부여를 거부하고 다른 한편으로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 정책이 서안과 가자 지구 주민들을 기본적인 시민권과 인권이 없는 삶으로 내몰게 됨을 이스라엘 정부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85-6)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의 실제 의도가 무엇인지 판단하는 또 다른 방법은 이 정책들을 팔레스타인인 피해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점령 이후 새 통치자는 서안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매우 불가능하고 불확실한 상황에 가두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난민도 아니고, 시민도 아니었다. 시민권 없는 거주민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시민권과 인권이 없고 스스로의 미래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는 거대한 감옥에 갇힌 수감자이고, 여러 면에서 여전히 그렇다. 세계가 이런 상황을 용인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이 상황이 일시적이며, 적절한 팔레스타인 측 평화 협상 상대가 나타날 때까지만 지속될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 협상 파트너를 지금까지도 찾지 못한 건 놀랄 일도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이 시점에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팔레스타인인을 삼대째 감금하고 있으면서, 이 거대 감옥은 임시적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오면 바뀔 거라고 설명한다. 88)
PART II. 잘못된 신화: 현재
7.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유일한 민주 국가다
민주주의를 판별하는 기준은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소수자를 얼마나 포용하는가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진정한 민주주의에 훨씬 못 미친다. 이스라엘은 국민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기본권이나 시민권을 일체 부정한다. 그 사례가 있다. 이스라엘은 새로운 영토를 얻은 다음에 여러 법안을 통과시켰다. 시민권에 관한 법, 토지 소유권에 관한 법,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귀환법이 그것이다. 귀환법은 세계 어디에서 태어났더라도 모든 유대인에게 자동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내용이다. 특히 이 법은 노골적으로 비민주적이다. 1948년 유엔 총회 결의안 194를 통해 국제적으로 인정된 팔레스타인인의 귀환권을 전면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시민은 직계 가족이나 1948년에 추방된 이들과 함께할 수 없다.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부정하고, 동시에 그 땅과 관련이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권리를 부여하는 일은 비민주적 관행의 전형이다. 92-3)
여기에 팔레스타인 민족의 권리를 더욱 부정하는 행위가 하나 더 추가됐다.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군 복무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들에 대한 거의 모든 차별을 정당화한다. 국방부의 전제는 이랬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군 복무를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은 잠재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내부의 적이다. 이 논리의 문제점은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가 벌인 모든 주요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들의 예상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5열을 형성하지도 않았고, 정권에 맞서 반기를 들지도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팔레스타인인들은 해결해야 할 ‘인구통계학적’ 문제로 여겨진다. 토지 문제를 살펴봐도 민주주의 국가라는 주장이 의심스럽다. 오늘날 이스라엘 토지의 90퍼센트 이상은 유대민족기금의 소유다. 토지 소유자는 비유대인과 거래할 수 없으며, 이 때문에 유대인 정착지는 새롭게 건설되는 반면, 팔레스타인 정착지는 거의 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93-4)
이런 비난에 대해 이스라엘의 외교계와 학계는 이들 조치가 모두 일시적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어디에서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더 나은’ 행동을 보이면 바뀔 조치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정책 입안자들은 유대 국가가 유지되는 한 이 땅의 점령 상태를 계속 유지할 작정이다. 이스라엘 정치 체제는 이 점령 상태를 ‘현재 상태’로 간주하며, 언제나 현상 유지가 어떠한 변화보다 낫다고 본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계몽적 점령enlightened occupation’을 주장한다. 여기서 신화는, 이스라엘이 선한 의도로 자비롭게 점령하려고 했지만 팔레스타인인의 폭력 때문에 점점 더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1967년 이스라엘 정부는 서안과 가자 지구가 당연히 ‘에레츠 이스라엘Eretz Israel’, 즉 ‘이스라엘 땅’의 일부라고 여겼고, 이런 입장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 내 우파와 좌파 정당들이 의견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이 목표의 타당성이 아니라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에 대해서다. 95)
8. 오슬로 신화
오슬로 신화의 첫 번째는 그것이 진정한 평화를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야세르 아라파트가 2차 인티파다를 선동해 의도적으로 오슬로 협정 이행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1993년 협정에서 팔레스타인이 한 약속을 아라파트가 지키지 않았다는 주장에는 꺼림칙한 점이 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이행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팔레스타인 당국은 점령지 내에서 이스라엘의 보안 하청 업체 역할을 하면서 저항 활동이 없게 해야 했다. 바라크는 비무장 팔레스타인 국가를 요구했고, 수도는 예루살렘 근처의 아부 디스Abu Dis에 두라고 했다. 그러고는 서안 중에서 요르단 계곡, 대형 유대인 정착촌 구역, 대예루살렘의 일부 지역은 제외하도록 했다. 그렇게 세워지는 국가는 독립적인 경제 및 외교 정책을 가지지 못하고, 국내 특정 영역에서만 자치권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이 합의의 공식화는 이후 팔레스타인이 더 이상의 요구, 예를 들면 1948년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101)
영토 분할안은 오슬로에서 초기 논의를 이끈 핵심 논리였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결코 분할을 요구한 적이 없다. 영토 분할은 언제나 시온주의자,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힘이 커짐에 따라 이스라엘이 요구하는 영토 비율도 늘어났다. 따라서 분할안이 점차 세계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다른 방식의 공격 전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측이 협상 조건으로 이 상황을 차악으로 받아들인 것은 단지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 파타는 영토 분할을 완전한 해방으로 가기 위한 필요 수단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자체를 최종 합의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사실 극단적인 압박이 있지 않고서야 원주민 집단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자기 땅을 정착민 집단과 나눌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슬로 협상이 공정하고 평등한 평화 추구의 과정이 아니라 패배하고 식민지화된 민족이 타협에 동의하는 과정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102-3)
오슬로 평화 프로세스가 실패한 것은 단순히 분할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 아니다. 원래 협정에는 5년의 이행 기간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팔레스타인을 가장 괴롭히는 세 가지 문제, 즉 예루살렘, 난민, 유대인 정착촌 문제를 협상한다는 이스라엘의 약속이 있었다. 이 이행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보안 하청 업체로서 이스라엘과 그 군대, 정착민과 시민에 대한 게릴라전이나 테러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오슬로 DOP에서 약속한 바와는 달리, 5년, 즉 첫 단계가 끝났을 때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더 중요한 문제들을 논의해야 할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되지 않았다. 네타냐후 정부는 팔레스타인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두 번째 단계를 시작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 과정이 중단된 주 원인은 1995년 11월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이 암살됐기 때문이다. 평화 프로세스는 1999년 에후드 바라크가 이끄는 노동당이 집권할 때까지 매우 느리게 진전됐다. 103-4)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을 의제에서 제외한 것은 오슬로 협정이 평화 프로세스와 관련이 없는 두 번째 이유다. 분할 원칙이 ‘팔레스타인’을 서안과 가자 지구로 축소시켰다면, 난민 문제와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소수 민족 문제를 배제하면서 인구학적으로 ‘팔레스타인 국민’이 팔레스타인 국가 인구의 절반 미만으로 축소됐다. 2000년 1월 바라크 정부는 미국 협상자들의 승인을 얻어 협상의 범위를 설명하는 문서를 제시했다. 최종 ‘협상’은 본질적으로 팔레스타인인이 이 문서를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동 노력이었는데, 여기에는 팔레스타인인의 귀환권을 절대적이고 명확하게 거부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논의가 열려 있던 부분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관리하는 영토로 귀환이 가능한 난민 수였다. 하지만 관련자들 모두 이 밀집 지역에 더 이상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으며, 이에 반해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의 나머지 지역에 난민을 귀환시킬 공간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04-6)
이것이 오슬로 협정에 관한 두 번째 신화로 이어진다. 아라파트의 완고함 때문에 2000년 캠프 데이비드 정상 회담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미 국무부 관리들의 증언에 따르면, 바라크는 유대인 식민지 정책이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일상적인 학대에 관련된 이스라엘의 정책을 바꾸기를 거부했다. 그는 아라파트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어려운 입장을 취했다. 현실에서 즉각적인 변화를 약속할 수 없다면 바라크가 최종 합의안으로 무엇을 제안하든 별 의미가 없었다. 예상대로 아라파트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돌아온 직후, 제2차 인티파다를 부추겼다는 이유로 이스라엘과 그 동맹국들에게 전쟁광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여기서 신화는 제2차 인티파다를 야세르 아라파트가 지원한, 심지어 계획적인 테러 공격이라는 것이다. 진실은 이렇다. 제2차 인티파다는 오슬로의 배신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 대규모 시위였고, 아리엘 샤론의 도발적인 행동이 더해져 악화됐다는 사실이다. 106-8)
9. 가자 신화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서 하마스가 인기 있었던 이유가 오슬로 협정의 성공이나 실패 때문만은 아니다. 이스라엘 점령하에서 살아가는 일상적 괴로움을 해결할 방법을 세속적 현대성을 통해 찾지 못했기 때문에 하마스가 (점령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많은 이슬람교도의 마음을 사로잡게 됐다. 아랍 세계의 다른 정치적 이슬람 단체와 마찬가지로, 세속 운동이 고용, 복지, 경제적 안정성을 제공하는 데 실패하자 많은 사람들이 다시 종교로 돌아갔다. 종교는 위안을 줄 뿐만 아니라 자선과 연대의 네트워크도 제공했다. 제2차 인티파다 중에 이스라엘이 도입한 새로운 탄압 방식―특히 장벽 건설, 바리케이드, 표적 암살―탓에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대한 지지는 더욱 약화되고 하마스의 인기와 명성이 높아졌다. 그러므로 역대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인에게 다른 선택지를 주지 않고, 점령에 저항할 준비가 된 유일한 집단에 투표하도록 몰아갔다고 결론을 내려야 합당할 것이다. 114)
이스라엘 정부의 공식 서사에서 하마스는 가자 지구에서 철수한, 평화를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악랄한 행위를 저지르는 테러 조직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평화를 위해 철수했는가? 대답은 전혀 ‘아니오’이다. 오슬로 협정 이전에는 가자 지구 내 유대 정착민의 존재가 복잡한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자, 유대 정착민은 이스라엘의 자산이 아닌 부채가 됐다. 샤론은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이 철수하고 하마스가 부상하면, 이스라엘 시민이 다칠 염려 없이 하마스에게 보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리쿠드당의 좌파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눈에 샤론의 움직임은 평화의 제스처이자 정착민을 상대로 용감하게 대치하는 것이었다. 샤론은 좌파와 중도 우파의 영웅이 됐다. 그때부터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의 반응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이스라엘 정책 비판은 평화를 논의할 분별 있고 믿을 만한 팔레스타인 파트너가 없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118-22)
샤론도, 그를 따르는 어느 누구도 가자 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략을 명확히 제시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인의 눈에 가자 지구는 서안과는 매우 다른 지정학적 실체다. 가자 지구에는 이스라엘이 탐내는 땅도 없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추방해서 보낼 요르단 같은 배후지도 없다. 종족 청소도 여기서는 효과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가자 지구 공격 작전은 모든 영역에서 악화되고 있다. 첫째, ‘민간인’과 ‘비민간인’ 표적 사이의 구분이 사라졌다. 분별없는 살인으로 인구 전체가 작전의 주요 표적이 됐다. 둘째, 이스라엘 군대가 보유한 모든 살상 무기를 확대하여 사용했다. 셋째, 사상자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마지막으로, 작전이 점차 전략으로 구체화됐다. 이스라엘이 향후 가자 지구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 즉 바로 계산된 대량 학살 정책을 드러낸 것이었다. 하지만 가자 지구 주민들은 계속해서 저항했다. 이스라엘은 더 많은 대량 학살 작전으로 응수했지만, 지금도 그 지역을 차지하지 못했다. 127-8)
PART III. 잘못된 신화: 미래
10. ‘두 국가 해법’이 유일한 길이다
‘두 국가 해법’은 동그라미를 네모로 만들려는 이스라엘의 발명품이다. 서안에 사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서안을 이스라엘의 통치하에 둘 방법으로 찾아낸 것이다. 그래서 서안 일부를 자치 지역, 준準 국가로 만든다는 제안이 나왔다. 그 대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귀환이나, 이스라엘 내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평등한 권리, 예루살렘의 운명, 고향에서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희망 모두를 포기해야 한다. ‘두 국가 해법’은 유대 국가가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즉, 유대인은 다른 곳이 아닌 팔레스타인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 개념은 반유대주의의 핵심에 가깝다. 간접적으로 말하자면, ‘두 국가 해법’은 이스라엘과 유대교가 같다는 가정에 기반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유대교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라 고집하고, 그것이 세계 각국에서 거부당하면 이스라엘뿐 아니라 유대교를 향한 비판이라고 주장한다. 134)
‘두 국가 해법’은 가끔 영안실에서 시체를 꺼내어 잘 차려입히고 살아 있는 존재처럼 내세우는 것과 같다. 생명이 남아 있지 않다고 다시 한 번 입증되면 영안실로 돌아가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을 역사적 실체의 10분의 1로 축소하여 그것을 평화의 지도로 내세웠던 지도 제작법은 영원히 사라지기 바란다. 대체 지도는 준비할 필요가 없다. 갈등의 지형은 자유주의적 시온주의 정치인, 언론인, 학자의 담론에서는 끊임없이 변해 왔지만, 실제로는 1967년 이후 전혀 변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은 항상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의 땅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운명의 변화를 결정한 것은 지형이 아니라 인구 변동이었다. 19세기 말에 이 지역에 도래한 정착 운동으로 인해 지금은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절반의 사람들을 인종 차별 이데올로기와 인종 격리 정책으로 통제하고 있다. 평화는 인구통계학적 변화의 문제도, 지도를 다시 그리는 문제도 아니다. 이런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제거하는 일이다. 135-6)
맺음말: 21세기의 ‘정착 식민지 국가’ 이스라엘
이스라엘, 그리고 그 이전에 시온주의 운동이 누렸던 예외주의는 아랍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 침해에 대한 서구의 비판을 조롱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팔레스타인 인권 침해에 대해 논의하려면, 시온주의 같은 정착 식민주의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를 이해해야 한다. 유대 정착민은 이제 이 땅의 유기적이고 필수적인 일부가 됐다. 그들은 제거할 수도 없고, 제거되지도 않을 것이다. 유대 정착민도 이 지역 미래의 일부가 돼야 하지만, 그렇다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억압과 강탈을 기반으로 해서는 안 된다. 팔레스타인은 비어 있지 않았고, 유대 민족에게는 조국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구원”받은 게 아니라 식민지화됐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948년에 자발적으로 떠난 게 아니라 강탈당했다. 심지어 유엔 헌장에서도 식민지화된 민족은 해방을 위해 군대까지 동원해 싸울 권리가 있고, 그 투쟁의 성공적인 결말은 모든 주민을 포함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건립에 있다. 13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