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쎄 / 사계절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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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초원 내부의 역사는 최상의 초지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던 여러 투르크-몽골 집단들의 역사이자 가축을 방목시키기 위해 한 목지에서 다른 목지로 끊임없이 옮겨다닌 그들의 이동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이리저리 오가는 그들의 이동은 너무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이루어졌기 때문에 때로는 몇 세기가 지난 뒤에야 완결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동안 그들은 신체적 외형이나 생활방식조차 서서히 새로운 지역에 적응해갔다." "앗틸라의 훈족은 불가르인Bulgar(Bolgar)에 의해, 그리고 그들은 다시 아바르, 헝가리인, 하자르, 페체넥, 쿠만, 칭기스칸 무리에 의해 차례로 대체되었다. 이슬람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란과 아나톨리아를 정복한 투르크인들에게서 일어난 이슬람화와 이란화의 과정은 중원 제국의 정복자인 투르크·몽골·퉁구스계 정복자들에게서 일어났던 중국화의 과정과 완전히 짝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대륙 아시아는 민족들의 자궁(vagina gentium) 혹은 아시아의 게르마니아라고 할 수 있다."(26, 32)


1부 13세기까지의 유라시아 초원 세계


1. 초원의 초기 역사 - 스키타이와 훈 


"앗시리아 연대기와 함께 그리스 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750년과 700년 사이에 키메르인들은 투르키스탄과 서부 시베리아에서 온 스키타이로 인해서 남러시아 초원에서 쫓겨났다. 그리스인들에게 스키트Scyth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사람들은 앗시리아인이 아쉬쿠즈Ashkuz라고 부르고 페르시아인이나 인도인들은 사카Saka라고 부른 사람들이었다. 호칭에서 추측될 수 있는 것처럼 스키타이는 이란인 계통이었다. 그들은 현재의 러시아령 투르키스탄 초원에 있던 '이란인들의 원주지'에서 유목하고 있었고, 이란 고원의 남부에 거주하는 그들의 형제 민족인 메데스(메디아)와 페르시아에 깊은 영향을 주었던 앗시리아와 바빌론문명의 영향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었던 북방의 이란인들이었다. 스키타이는 메디아-페르시아Medo-Persia의 신앙을 진보적으로 변화시킨 역사적인 마즈다교Mazdaizm와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의 개혁에서도 역시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다."(42-3)


"이란계 유목민─스키타이와 사르마트─이 초원의 서부인 러시아 남부는 물론 투르가이와 서부 시베리아를 지배할 때, 동부는 투르크-몽골계 종족의 지배 하에 있었다. 이들 중에서도 지배적인 종족은 중국에 흉노로 알려진 사람들로서, 마스빼로는 현재 북경의 서부와 서북붕 성립되었던 '북융北戎'이 호胡의 하나였다고 추정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흉노가 통합되어 강력한 국가를 이룬 것은 기원전 3세기 후반이라고 한다. 선우單于라고 불리던 군주가 있었는데, 그 완전한 칭호는 중국어로 '탱리고도선우撑犁孤塗單于'로 전사되며 중국인들은 이를 '하늘(天)의 당당한 아들'이라고 번역했다. 아마도 투르크-몽골어의 어근에 따르면, 탱리는 투르크어 또는 몽골어의 탱그리tengri 즉 하늘(天 ; 神)의 전사에 해당된다. 선우 밑에는 좌우도기왕左右屠耆王 즉 좌우현왕左右賢王이 있었다. 한자로 음사된 도기屠耆는 '올바른, 충실한' 등의 의미를 갖는 투르크어 'doghri'와 연관되어 있다."(62-3)


"흉노는 기원전 3세기 말 역사무대에 가공할 만한 큰 세력으로 처음 등장하였는데, 이때는 바로 진나라(기원전 221-206)가 중국을 통일하였을 때다." "기원전 177-176년경 두만선우頭曼單于(기원전 약 210-209)의 아들이자 그의 계승자인 묵특冒頓(기원전 209-174)은 서부 감숙의 월지에 심각한 타격을 가해서 그를 정복했다고 의기양양해 했다. 그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노상(기원전 174-161)은 월지의 위협을 완전히 끝내고 그 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 그를 감숙에서 쫓아내 서쪽으로 이주하게 하였고, 결국 역사상 최초로 아시아 고원에서 기원한 민족이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월지月氏라는 이름─어쨌든 그러한 형태로─은 단지 중국어 전사를 통해서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동양학자들은 오랫동안 이를 토하리Tokhari와 동일시하려 했고, 기원전 2세기 투르키스탄에서 박트리아로 이주해옴으로써 그리스 사가들에게도 잘 알려진 이 종족은 그들에게는 인도-스키타이인으로 이해되었다."(71-3)


"중국의 사서는 박트리아의 월지가 기원후 1세기에 거대한 쿠샨 왕조(중국어로 귀상貴霜)을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 쿠샨은 기원전 128년경 박트리아를 분할했던 5개 씨족 중의 하나였다." "여기서 우리의 목적은 흉노의 첫번째 공격이 아시아의 이후 운명에 얼마나 거대한 충격을 가져왔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흉노는 감숙에서 월지를 쫓아냄으로써 멀리 인도와 서아시아까지도 느껴지는 반향의 연쇄를 시작하였다. 헬레니즘 세계는 아프가니스탄을 잃어버렸고 그 지역을 정복한 알렉산더의 자취는 완전히 일소되어버렸다. 파르티아의 이란은 한동안 동요되었고 감숙에서 쫓겨 나온 부족들은 카불과 인도 북서부에 예기치 않았던 제국을 건설하였다. 우리가 다룰 역사는 늘 이런 것이다. 초원의 한쪽 끝에서 발생한 작은 자극으로 인해 민족이동이 가능한 이 엄청나게 광대한 지역의 구석구석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련의 결과들이 초래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79-81)


"220년 후한 왕조가 내란으로 사라졌을 때, 북방 초원의 유목집단들은 이미 중국 군대에게 계속 패했기 때문에 너무나 견제당하고 약화되어서 상황을 이용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인도-유럽계의 타림 오아시스 역시 북중국의 패자 위魏(220-265)에게 조공을 계속하고 있었다." "거대한 흉노 제국이 붕괴되고 그를 대체한 선비 역시 중국 변경을 공격할 만큼의 충분한 힘은 갖고 있지 못했다. 4세기 거대한 야만인의 침공─5세기 유럽의 '민족 대이동'(Völkerwanderung)과 흡사한─이 시작된 것은 초원으로부터의 어떤 위협도 중국을 위협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던 바로 그때였다. 그러나 이런 침입은 유럽처럼 야만인이 사는 배후지역에서 일어난 소란에 의해 촉발되었거나 아니면 앗틸라와 같은 인물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단지 중국의 힘이 쇠퇴한 것에 기인하였는데, 이런 상태가 그때까지 중국 변경을 따라서 야영하며 존재하던 번병화된 야만인들을 진공속으로 빨아들였다."(107-8)


"하루가 멀다하고 왕국들이 연이어서 무너지고 있는 하루살이 부족들 옆에서 나머지를 흡수함으로써 북중국에 대한 지속적인 지배를 확립하는 데 성공한 한 부족─타브가치 또는 중국어로 탁발─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부르군드·비시고트·롬바르드 이후에 살아 남아 그들의 폐허 위에 카롤링거 제국을 세움으로써 로마의 과거와 게르만의 현재를 연결시킬 운명에 있었던 프랑크와 비슷하였다. 그들은 북중국의 다른 투르크-몽골계 국가들을 통일한 뒤 너무 한화漢化되어 부족이나 왕조 모두 중국인 대중 속으로 녹아들었다. 더욱이 불교를 위한 그들의 열의는 기독교에 대한 카롤링거와 메로빙거의 열정의 재판이었다. 마지막으로 프랑크 자신이 게르만의 침입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대항해 로마 전통의 보호자가 되려고 했던 것처럼, 탁발도 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초원 깊숙한 곳에서 미개인으로 남아 있었던 몽골계 부족들을 상대로 황하에서 '라인 강의 파수꾼'이 되었다."(113-4)


2. 중세 초기 - 돌궐/위구르/거란 


"중국 측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의 후예인) 돌궐은 유연에 예속된 부족 중의 하나였는데, 그 부족은 공통의 언어를 갖는 민족집단 전체에게 그 이름을 부여하게 되었다. 뻴리오는 〈중국어의 돌궐은 몽골(유연)어로 Türk의 복수형인 Türküt를 나타내고 문자상으로 그것은 '강하다'는 의미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중국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들의 토템은 늑대였다. 6세기 초 돌궐은 알타이 지역에서 야금(대장장이 일)에 종사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순수한 중국 왕조 수隋가 3세기 이상의 분열을 재통일했던 바로 그때(589), 중앙아시아는 거대한 두 개의 투르크(돌궐) 제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즉 동돌궐 제국은 만주의 변경에서 만리장성과 하미 오아시스까지를 지배했고, 서돌궐 제국은 하미에서 아랄 해와 페르시아까지 뻗쳐 있었으며, 페르시아와는 옥서스와 메르브 강 사이 즉, 옥서스 강 남쪽을 따라가는 경계로 구분되었다. 힌두쿠시 산맥 북부의 모든 토하리스탄이 정치적으로 투르크의 판도 안에 들어왔다."(139-40, 146)


"중국 당조가 중앙아시아에서 모든 목적을 성취한 것처럼 보였을 때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유약한 군주 고종의 치세 후반기인 665-683년 사이 이 지역들에 대한 중국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665년부터 서돌궐의 두 집단(노실필과 돌육)은 중국에서 임명한 카간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회복하였다. 다음으로는 당시 야만인이나 크게 다를 바 없던 티베트인(토번吐蕃)들이 타림분지로 밀려들어와 안서사진(카라샤르·쿠차·호탄·카쉬가르)이라 불리는 지역을 중국으로부터 빼앗았다(670). 더 중요한 것은 630년 태종에 의해서 멸망한 동돌궐이 옛 카간 씨족의 후손인 쿠틀룩Qutlugh('행운'을 의미)의 지휘 하에 부흥한 것이다." "쿠틀룩을 계승한 사람은 동생 묵철默啜인데, 그가 바로 동돌궐에게 최고의 절정기를 가져온 카파간 카간(691–716)이었다." "카파간 카간 때 투르크는 다시 한 번 가공할 만한 통합을 이루었고 돌궐 대제국이 거의 완전하게 재건되었다."(169, 174, 177)


"한자로 차비시車鼻施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투르크인 왕 또는 타쉬켄트의 투둔(tudun)은 중국에 거듭 충성을 맹세했다(743, 747, 749). 그러나 750년 그때 쿠차의 절도사였던 고선지는 변경의 방어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투둔을 꾸짖었다. 고선지는 타쉬켄트에 도착하여 투둔의 목을 베었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런 고선지의 폭력적인 행동은 서역에서의 반발을 초래했다. 751년 7월 고선지는 투둔의 아들과 카를룩 투르크인 그리고 소그디아나에 있던 아랍 주둔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에게 탈라스 강가 즉 현재 아울리에 아타Aulie Ata(잠불) 근처에서 패배했다. 이 날 이후로 중앙아시아는 중국이 아니라 무슬림 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탈라스에서 중국이 당한 재난은 현종 말년에 일어난 내분과 혁명이 없었더라면 다시 복구되었을지도 모른다. 8년에 걸친 내전(755-763)의 희생물이 된 중국은 단 한 번의 패배로 중앙아시아의 제국을 상실해버렸다."(191-2)


"위구르는 이란 또는 '외곽 이란'으로부터 마니교를 들여오면서 역시 같은 지역으로부터 소그드문자도 차용했는데, 이 소그드문자는 시리아문자에서 기원한 것으로서 위구르인들은 그것을 변형시켜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었다. 9세기에는 이 문자가 고대 투르크(돌궐)의 오르콘문자를 대체했고, 그들은 이를 바탕으로 민족문학을 만들어냈다. 가장 초기의 투르크 문헌들은 이란어로 된 일부 마니교 경전과 산스크리트어·쿠차어·중국어로 된 많은 불경을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위구르는 다른 투르크-몽골계 민족들에 비해서 두드러지게 발전했고, 칭기스칸 시대에 이를 때까지 그들의 교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위구르는 문명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힘을 잃었던 게 분명하다. 840년 그들의 수도 카라발가순이 함락되고 카간이 살해되었으며 그들의 제국은 훨씬 더 야만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던 투르크인, 즉 예니세이 강 상류─미누신스크와 훕스굴Köbsgöl 사이─에 살던 키르키즈인들에게 정복되었다."(197-8)


"키탄Qitan 혹은 거란(契丹)은 405-406년부터 중국의 연대기에 기록되었는데, 당시 그들은 요하와 그 지류인 시라무렌 강 사이에 있는 요서 지방 즉, 현재의 열하에 살고 있었다." "거란은 10세기 초 야율耶律(씨족명) 아보기阿保機(926년 사망)라는 정력적인 수령의 지배를 받게 될 때에도 여전히 요하의 서북 유역과 그 지류인 시라무렌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속했던 야율씨가 칸의 권위를 세습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후일의 사가들에 따르면, 아보기는 부족민들에게 비록 피상적이긴 했지만 중국적인 방식을 도입하기 시작하였고, 947년에는 그의 계승자가 요遼라는 왕조명을 붙였다." "아보기는 926년에 동쪽으로 퉁구스-고구려계 왕국인 발해渤海를 멸망시켰는데(그는 이 원정 도중에 사망), 그들은 한반도의 북부(북위 40도 이북)와 요동 동부의 만주(하얼빈과 블라디보스톡에서 여순旅順 항구까지)를 지배하고 있었다. 만주 동북부의 우수리강 삼림지대의 퉁구스계 여진女眞도 거란에 복속하였다."(202-4)


3. 13세기 투르크인들과 이슬람 


"사만조의 이스마일 이븐 아흐마드Isma'il ibn Ahmad(892-907)는 893년 이래 동북방으로 탈라스의 투르크 지역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였다." "그가 고대 사산조의 군주들이 옥서스(아무다리아) 강 북안에 대해 예방적인 차원의 습격을 행하던 정책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 시르다리아(작사르테스)의 파수꾼─고대 이란의 군주들이 '라인 강의 파수꾼'이었던 것처럼─에게는 이제 우상숭배자이든 네스토리우스 교도이든 투르크 세계에 대한 페르시아 이슬람의 전쟁이라는 종교적인 구실이 덧붙여졌다. 이와 같은 상황은 변경지역의 투르크 유목집단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사만조가 그렇게 열심히 추구하던 이 같은 개종은 도리어 그 추진자들을 곤경에 빠뜨리게 하였다. 그 까닭은 그로 인해 투르크인들에게 무슬림 사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기 때문인데, 적지 않은 투르크 수령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개종의 유일한 목적이기도 하였다."(220-1)


"999년 경 동부 이란과 트란스옥시아나의 이란 영역은 이제 두 개의 무슬림 투르크 세력, 즉 트란스옥시아나를 차지한 카쉬가리아의 카라한조 칸들과 후라산을 점령한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나조 술탄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1040년 5월 22일 가즈나조는 메르브 근처의 단다나칸Dandanaqan 전투에서 또 다른 투르크 집단인 셀죽에게 패배해, 아프가니스탄과 인도로 물러났다. 그러자 셀죽의 칸 토그릴 벡Toghril Beg은 페르시아의 나머지 지역을 복속시키고, 1055년에는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압바스조의 칼리프로부터 동방과 서방의 군주 즉, 술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거대한 투르크 제국은 곧 그 영역을 아무다리아에서 지중해까지 확장하였고, 트란스옥시아나에 있는 카라한조의 군소 칸들의 독립을 감내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때 이후로 카라한조는 셀죽 술탄들의 속료로서 부하라와 사마르칸드를 지배하게 되었고, 트란스옥시아나는 셀죽 제국의 속방에 불과하게 되었다."(223, 227)


"이슬람으로 개종한 지 얼마 안되는 유목씨족들 가운데 가장 개화되지 않고 전통도 갖지 못했던 유목집단인 셀죽은 단번에 동부 이란의 패자가 되었다." "토그릴 벡은 아랍-페르시아 세계로 더욱 깊숙이 침투해 들어감에 따라 이 고대 문명국가들의 행정적 관념들을 더 잘 익히게 되었다. 그들이 그를 한 집단의 지도자에서 한 국가의 지도자로 바꿈으로써, 그는 동족의 다른 수령들에 대해 확고한 우위를 장악하고 정상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군주로 변신해갔다." "1058년 칼리프는 토그릴 벡에게 '동방과 서방의 왕'이라는 칭호를 주고 그를 현세의 대리인이라고 함으로써 이 같은 '기정 사실'을 공인하였다. 이렇게 해서 오구즈집단의 보잘 것 없던 수령은 자신의 집단과 씨족과 가족에 대해 기강을 확립하고 정규국가의 지도권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아랍 칼리프조의 공식적인 대표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그는 순니파 세계에서 칼리프조의 구원자이자 복구자라는 찬미까지 받게 되었다."(231-3)


"1040-1055년의 셀죽 정복은 그 나라의 문을 유목민들에게 열어준 것이었다. 범이슬람권의 술탄─아랍의 말릭(malik)이나 페르시아의 샤(shah)─이 된 셀죽 출신의 지도자들은 이제 그들의 전례에 충동되어 동일한 모험을 하려는 중앙아시아의 각종 투르크-몽골 씨족들에 대하여 문을 닫고 빗장을 치고 길을 막으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페르시아인이 된 셀죽인들은 투르크인으로 남아 있던 투르크인들에 대하여 페르시아를 방어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를 성취하려던 그들의 의지나 아무다리아 언덕에서의 '라인 강의 파수꾼'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호레즘·칭기스칸·티무르의 침공을 조달한 병참장교로서의 역할 밖에 하지 못한 셈이다. 그들이 사산조 페르시아 국가나, 아니면 9세기 압바스 제국이 만들어냈던 '신사산조 체제'(Neo-Sassanianism)의 강건한 틀을 회복시키는 데 실패한 원인은 지난날 투르크멘의 유산인 지배가문 내부의 고질적인 혼란에서 찾을 수 있다."(240)


"'우상숭배자'였고 중국화된 몽골의 세계에 머물던 카라 키타이[동투르키스탄에 건설된 새로운 거란 제국]와 달리 호레즘(오늘날의 히바)의 샤들은 무슬림 투르크 세계를 대표하였고, 1157년 셀죽의 산자르가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에는 특히 그러했다. 그의 죽음으로 이란 동부는 정권의 가장 중요한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1207년 호레즘의 무함마드는 부하라와 사마르칸드를 점령하고 카라 키타이 대신 자신의 종주권을 표방하였다. 이렇게 해서 호레즘 제국은 트란스옥시아나 전역을 포괄하게 되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몽골의 침략이 있던 시점에 호레즘 제국은 이제 막 창건되어 불과 몇 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칭기스칸 침공시에는 아직 국가로서의 골격이 갖추어지지 않은, 단지 그 맹아 또는 제국의 윤곽만이 존재했던 셈이다. 따라서 칭기스칸은 북중국의 금나라와 같은 진정한 국가와 부딪쳤을 때 호레즘 제국과의 전쟁 때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과업을 수행해야 했다."(251, 254-6)


4. 6~13세기의 러시아 초원 


"아바르[몽골계 민족 유연]의 쇠퇴 이후 유럽에서 투르크-몽골인의 주요한 역할은 당분간 불가르인들이 담당하였다. 투르크계에서 기원하고 훈족의 쿠트리구르와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이 민족은 7세기 2/4분기 동안에 코카서스의 서북방, 즉 쿠반 계곡과 아조프 해 사이의 지역에서 강력한 국가를 세웠다." "9세기 중반 차르 보리스Boris(852-889)의 개종과 점증하는 슬라브적 영향으로 말미암아 불가르인들은 기독교 유럽에 통합되어버렸다. 아바르의 옛 영토는 9세기 말에 마자르 즉, 헝가리인들에 의해 점거되었다." "헝가리의 왕 바이크Vaik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성 스테펜의 치세(997-1038) 동안에 헝가리는 새로운 소명을 띠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유럽의 공포였지만 이제는 아시아적 야만주의의 엄습을 막는 가장 확실한 수호자, 즉 '기독교권의 방패'가 된 것이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에서부터 17세기 오스만의 축출에까지 마자르 민족은 길고 영웅적이며 영광된 십자군의 생애를 살게 되었다. 265-6, 299)


"7세기 초에 러시아 초원의 서남부와 다게스탄은 하자르 제국의 흥기를 목도하게 되었다. 하자르는 탱그리를 숭배하며 카간과 타르칸tarqan들의 지배를 받는 투르크 민족이었다. 바르톨드는 그들을 서부 투르크, 더 정확하게 말해 서부 훈족 계통의 한 분파로 보았다." "비잔티움 궁정은 하자르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자르는 유럽에 있던 투르크인들 가운데 가장 문명화되었고, 이는 마치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 사이에서 위구르가 그러했던 것과 비슷하다. 비록 그들이 간혹 주장되듯이 정주적 혹은 농경적 생활방식을 채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잔티움과 아랍세계와의 접촉에 힘입어 교역이라든가 상대적으로 높은 문화와 관계를 가짐으로써 풍요하고 정돈된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9세기 들어 유대교를 믿는 이 문명화된 투르크인들은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동족 집단들에 의해 일소될 운명에 처했다. 결국 1030년 하자르는 정치적인 세력으로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269-70, 272)


"페체넥은 마르크와르트에 의하면 한때 서돌궐 연맹의 일부를 구성하다가 카를룩 투르크인들에 의해 시르다리아 하류와 아랄 해 방면으로 밀려난 투르크 계통의 부족이었다. 934년 그들은 헝가리인들의 비잔티움 제국령인 트라키아에 대한 공격에 동참하였고, 944년에는 이고르Igor 공의 비잔티움 공격에 참여하였다." "비잔티움은 아시아의 무슬림 투르크인들과 싸우기 위해 유럽에 있는 우상숭배 투르크인들로부터 용병을 모집했지만, 우상숭배 투르크인들의 동족관념이 황제에 대한 충성심보다 더 강할 때가 많았다는 사실에 비잔티움의 비극이 있었다. 1071년 말라즈기르트(만지케르트) 전투가 있기 직전, 페체넥 군사들이 황제 로마누스 디오게네스를 버리고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이제 비잔티움은 아시아와 유럽에서 모든 투르크인들과 맞서게 되었다. 즉 유럽에서는 우상숭배 투르크인들이, 아시아에서는 무슬림 투르크인들이 혈연적인 유대로 연합하여 제국에 대항한 것이다."(274-5)


"투르크어로 킵착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을 러시아는 폴로브치로, 비잔티움은 코마노이Komanoi로, 아랍 지리학자인 이드리시는 쿠마니Qumani(쿠만Cumans)로, 헝가리인들은 쿤Kun(코운Qoun)이라고 불렀다." "1054년 러시아 연대기들은 그들이 흑해 북방의 초원에 나타난 것과, 아울러 킵착이 앞으로 밀어낸 오구즈의 출현에 대해서 처음으로 기록하였다. 오구즈가 페체넥을 격파한 것, 그리고 오구즈가 발칸 원정과정에서 비잔티움과 불가르에 의해 격파된 것(1065년과 그 뒤) 등의 사건에 힘입어 킵착은 러시아 초원의 유일한 주인이 되었다." "킵착은 1222년 칭기스칸의 부장들이 침공할 때까지 러시아 초원의 패자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일부 킵착 수령들은 러시아의 영향 아래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또한 킵착은 후일 몽골 지배 하의 러시아에 자신들의 이름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는데, 그것은 그 지역에 건설된 칭기스칸 일족의 영역이 킵착 칸국으로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277-8)


2부 칭기스칸과 몽골 제국


5. 칭기스칸 


"제한적이고 역사적 의미의 몽골인들은 오늘날의 외몽골 동북 지방, 즉 오논 강과 케룰렌 강 사이에서 계절이동을 하고 있었다. 돌궐이 흥기하기 전에 투르크 민족들이 있는 것을 보았듯이, 칭기스칸과 함께 그 이름을 전집단에게 주게 될 몽골부족의 출현에 훨씬 앞서 몽골어를 사용한 것이 거의 확실한 민족들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몽골어를 사용하던 민족들 가운데 3세기의 선비, 5세기의 유연과 에프탈, 그리고 6세기에서 9세기까지의 유럽의 아바르를 꼽았다.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큰 역할을 했던 거란도 비록 퉁구스 언어들과의 접촉으로 현저하게 구개음화되기는 했지만 몽골어 방언을 사용하였다. 이들 여러 '원原몽골'(proto-Mongol) 민족들이 광대한 영역을 구축하긴 했어도 그 어느 것도 칭기스칸 국가의 몽골인들처럼 세계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12세기에 몽골인들은 수많은 '울루스ulus'로 나뉘었는데, 블라디미르초프에 의하면 울루스는 부족인 동시에 작은 나라를 뜻한다."(286-7)


"칭기스칸은 자신의 권력을 부족들에게 확인받기 위하여 최후의 항복을 받을 때까지, 또는 마지막 처형을 집행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1206년 봄 오논의 상류에서, 이미 복속한 모든 투르크-몽골 사람들 즉, 오늘날의 외몽골 지방에 있던 유목민들을 쿠릴타이에 소집하였다. 이때 그는 모든 몽골과 투르크 부족들에 의해 지고의 칸으로 선포되었고, 『몽골비사』는 그를 카간qaghan이라고 불렀다. 카간은 5세기 유연의 칭호로 그 뒤를 이은 몽골 지방의 모든 군주들, 즉 6세기의 돌궐과 8세기의 위구르 군주들이 채택한 칭호였다." "840년 위구르의 몰락 이후 초원의 제국에는 실질적인 계승자가 없었다. 칭기스칸은 자신을 '모전천막 안에 사는 모든 자들'의 지고의 칸이라고 선포하면서, 투르크인의 조상들(흉노), 몽골인의 조상들(유연과 에프탈), 그리고 다시 투르크인들(돌궐과 위구르)이 번갈아 소유하던 이 옛 제국이 이제 영구히 몽골인들에게 돌아왔음을 선언하였다."(319-20)


"유목민들은 대도시를 어떻게 처리한다거나 그것을 그들의 권력강화와 확대를 위하여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아무런 관념이 없었다. 그 결과 인문지리학도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초원 거주자들은 아무런 과도기적인 단계도 없이 도시문명을 가진 고대국가들을 소유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잔인함 때문이 아니라 난감함 때문에 더 불을 지르고 더 살육을 하게 된 것으로, 그들은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몽골 수령들, 아니 적어도 야삭yasaq─문자 그대로 칭기스칸 국가의 '규례' 또는 보통법전을 뜻하며 가혹한 형벌이 특징이다─을 충실히 준수하는 자들에게 약탈은 개인적 탐욕이 개입되지 않은 일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장군 시기 쿠투쿠는 금나라 창고의 아주 작은 부분조차 자기 몫으로 빼돌리지 않았다. 문명에 막대한 재난을 초래한 것은 바로 그 같은 당혹감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행위였다."(338)


"몽골인들은 분명히 중국에서보다는 비교적 수월하게 트란스옥시아나와 동부 이란의 요새화된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그 까닭은 순전히 그들이 이교도로서 또는 오늘날의 우리식 표현으로는 야만인으로서 일으킨 공포심이 여러 세기 동안 그들과 이웃으로 살아온 중국 영토 안에서보다는 무슬림들 사이에서 훨씬 컸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 지역에서 지방주민들을 더 많이 활용한 듯하다. 도시를 함락시키기 위하여 몽골인들은 주변 시골과 무방비상태의 도시에서 남자들을 징비하고 칼끝으로 위협해 해자와 성벽으로 몰아붙였다. 때때로 이 가련한 사람들은 열 명에 하나 꼴로 몽골 깃발을 들려 몽골인으로 위장되었고, 수비대는 평야를 뒤덮도록 배치된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들이 칭기스칸 국가의 거대한 군대에 위협받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계책으로 몽골인들의 작은 파견대도 항복을 강요할 수 있었으며, 그처럼 동원된 인간집단은 소용이 다한 뒤에는 살해되었다."(353-4)


"학살은 잊혀졌고 칭기스칸 국가의 기율과 위구르식 관제의 혼합물인 행정적 성취가 계속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문명에 혜택을 주게 되었다. 모든 투르크-몽골민족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하고 중국에서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철의 기율을 강요함으로써 칭기스칸은 끝없는 부족전쟁을 억누르고 대상들에게 그들이 일찍이 알지 못했던 안전을 제공하였다. 아불 가지는 〈칭기스칸의 치세 아래 이란과 투란(투르크인들의 땅)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은 누구도 누구한테서도 어떠한 폭행도 당하지 않은 채 황금 쟁반을 자기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을 만큼 평화를 누렸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야식은 전몽골과 투르키스탄에 '팍스 칭기스카나Pax Chinggis-Qana'를 확립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시대에는 분명 무서운 것이었으나 그의 후계자들의 시대에는 부드러워졌고, 14세기 위대한 여행가들과 같은 성취도 가능하게 한 것이다."(366-7)


6. 칭기스칸의 세 후계자들 


"칭기스칸의 네 아들은 그의 생전에 각자 울루스ulus(일정수의 부족)와 유르트yurt(그 부족들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목지)를 속령으로 받았다." "유목민들의 목영지인 투르크-몽골 초원만이 분배할 수 있는 자산이었다는 점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 북경과 사마르칸드 주변의 농경지는 제실帝室의 영토로 남겨졌다. 칭기스칸의 아들들은 정주민족의 나라들을 분할하여 각자의 소유로 한다거나, 각기 중국의 황제, 투르키스탄의 칸, 혹은 페르시아의 술탄이 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1260년 이후 그들의 후계자들이 했던 그러한 생각은 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에게는 초원의 분할이 칭기스칸 제국의 분할까지 뜻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형제들이 화목했던 체제 아래에서는 계속되었다. 더욱이 바르톨드가 지적한 대로 유목민의 법에 의하면 카간의 절대권력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그에게보다는 황실가문 전체에 속하는 것이었다."(368)


"1241년 12월 11일 대칸 우구데이(칭기스칸의 셋째 아들)가 죽었다. 그가 죽음으로써 일어난 계승 문제로 인해 몽골인들은 헝가리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앗틸라 이래 서방이 직면한 최대의 위험에서 서구를 구하였다는 데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242년 봄 바투는 불가리아를 경유하여 흑해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고, 거기서부터 왈라치아와 몰다비아를 지나 1242~1243년 겨울 볼가 강 하류에 있는 자신의 거영지에 도착하였다. 1236-1242년 몽골전쟁의 결과, 볼가 강 서쪽 조치의 영지는 상당히 확대되었다. 칭기스칸의 유언에 그의 울루스는 몽골의 말 발굽에 밟힌 이르티쉬 서쪽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게 되어 있었고, 이제 그들의 말 발굽은 이르티쉬부터 드녜스트르와 심지어 다뉴브 하구에까지 이르는 땅 위에 자국을 남겼다. 이 거대한 영역은 바투가 1236-1242년 전쟁에서 명목상이나마 지휘자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더욱 합법적으로 그의 것이 되었다."(387-8)


"(대칸으로 선출된) 구육은 칭기스칸 일족의 다른 지파들이 독립하려는 경향을 보이자 이를 근절시키려는 결심에서 장손인 조치가의 군주 바투와 충돌하였다. 1248년 초 그들의 관계는 매우 긴장되어 양측 모두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세습영지인 이밀을 방문한다는 구실로 카라코룸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구육이 주색에 지나치게 탐닉한 나머지 요절하기 전까지는 충돌이 불가피해 보였다. 중국 사료에는 구육의 죽음이 1248년 3월 27일에서 4월 24일 기사 안에 들어 있다. 그는 그때 겨우 마흔세 살이었다. 아마 이 죽음이 유럽을 절박한 위험에서 구하였을 것이다. 구육은 킵착의 칸(바투)을 패배시키는 것뿐 아니라, 플라노 카르피니도 증언하였듯이 기독교 왕국을 복속시키려는 꿈도 갖고 있었다. 하여튼 그는 주의를 특히 서방으로 돌린 듯하다. 그러나 톨루이(칭기스칸의 넷째 아들) 가문 왕자들의 즉위(처음에 뭉케, 그리고 누구보다도 쿠빌라이)로 인해 몽골의 주된 노력은 극동으로 향하게 되었다."(393-4)


"뭉케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후계자 쿠빌라이처럼) 자신의 종족적 특성을 포기하지 않고 통치구조를 강화하고 몽골 제국을 위대하고 질서 정연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의 치세 초기에 (문자 그대로 그를 황제로 만든) 바투에 대한 그의 의무는 바르톨드가 지적했듯이 일종의 권력의 분할─명목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실질적인 면에서─로 귀착되었으며, 그렇게 해서 바투는 발하쉬 서쪽에서 실질적으로 독립적이 되었다. 그러나 바투의 죽음(늦어도 1255)으로 뭉케는 다시 한 번 몽골 세계의 유일하고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다. 울루스나 칭기스칸 국가 속령의 여러 수령들은 조세를 면제받고 중앙 권려기관과 국고를 공유할 권한이 있다고 여겨왔지만, 뭉케는 이러한 관행을 금지시켰다. 만일 그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이 그의 정책을 지속하였다면 몽골 제국은 극동·투르키스탄·페르시아·러시아의 칸국들로 분열되지 않고 비교적 통합된 나라로 남았으리라는 것은 명백하다."(398-9)


7. 쿠빌라이와 중국의 몽골 왕조 


"몽골인의 관점에서 보면 쿠빌라이는 원칙상(설사 실제로는 아니었더라도) 칭기스칸 제국의 도덕적 통합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그는 최고의 칸 칭기스칸과 뭉케가 지녔던 권위의 계승자로서 독립적인 여러 칸국들이 된 칭기스칸 일족의 속방들에 대하여 계속 복종을 요구하였다. 우구데이(카이두)가와 차가다이가에 순종을 강요하기 위하여, 쿠빌라이는 몽골리아에서 전쟁을 수행하며 일생을 보냈다. 아우 훌레구가 통치하는 페르시아는 그에게 제국의 한 성일 뿐이었다. 페르시아의 칸 훌레구(1256-1265), 아바카Abaqa(1265-1281), 그리고 아르군Arghun(1284-1291)은 그의 눈에 '일 칸il qan' 즉 종속된 칸들, 그가 임명하고 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고위직 총독일 뿐이었다." "쿠빌라이는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칭기스칸의 상속자인 반면, 중국에서는 19개 왕조의 충성스러운 계승자이기를 추구하였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그의 통치는 한 세기에 걸친 전쟁의 상처를 붕대로 감쌌다."(426-7)


"쿠빌라이는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교통문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도로를 보수하고 길을 따라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를 심었으며 정규역참에 대상들의 숙소를 지었다. 20만 마리 이상의 말이 다양한 역참에 분배되었고, 제국의 우편업무에 이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북경의 식량 공급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국 중부에서 수도로 쌀을 가져올 대운하를 보수하고 완성시켰다. 기근과 싸우기 위하여 개봉의 송조에서 왕안석王安石이 완성시킨 바 있는 국가통제를 부활시켰다. 풍년에는 남는 곡식을 국가가 사서 공공 곡식창고에 저장하고, 기근이 닥치거나 값이 오르면 곡식창고를 열어 곡식을 무상으로 분배하였다. 공적부조도 조직되었다. 1260년의 칙명은 지방 수령들에게 늙은 학자, 고아, 그리고 병자와 약자들을 구제하고 도움을 베풀 것을 명령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중국행정의 전통에 더하여 쿠빌라이의 심성에 불교가 매우 강력하게 영향을 끼친 결과임이 거의 확실하다."(427-8)


8. 차가다이가 치하의 투르키스탄 


"차가다이(칭기스칸의 둘째 아들) 칸국은 옛 구르 칸들의 카라 키타이 왕국과 일치하였다. 그리고 이는 카라 키타이처럼 몽골 지배 하의 투르크 지방 즉, 몽골령 투르키스탄이었다. 그러나 차가다이의 통치자들은 카라 키타이의 구르 칸들, 그리고 그보다 앞선 7세기 서돌궐의 칸들처럼, 서구식 또는 중국이나 페르시아식으로 어떻게 정규국가를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를 위한 역사적 배경이 없었다." "차가다이의 아들들은 카쉬가르나 호탄 같은 타림의 오아시스에 결코 정착하지 않았으니, 그곳은 닫힌 정원이었고 그들의 가축과 기병에게 너무 좁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타직인들이나 부하라와 사마르칸드의 다소 이란화된 투르크인들 사이에 정착하지도 않았는데, 그러한 혼잡한 도시의 무슬림 광신주의와 폭도들의 불온은 그들의 유목민적 천성과 전혀 맞지 않았던 듯하다. 마지막 15세기까지 차가다이조는 계속해서 초원의 사람들로 남아 있었다."(466-7)


"중국이나 아랄-카스피 해 초원과 페르시아 쪽으로의 진출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쿠빌라이, 조치, 그리고 훌레구 가가 굳게 지키고 있었다), 차가다이조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인도를 목표로 삼았다. 이란의 저 반대편 끝, 아제르바이잔에 조정을 둔 페르시아의 군주들은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차가다이조는 이를 틈타 바닥샨, 카불, 가즈니로 밀고 들어갔다. 서부 아프가니스탄에는 케르트가의 아프간-구르 왕조의 강력하고 적응력이 뛰어난 토착정권이 들어서 있었다. 그 왕조는 페르시아 칸의 종주권 아래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곳에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던 차가다이조는 동부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였고, 여기서 서북 인도로 이익이 남는 습격을 하였다. 이 시기에 술탄 알라 웃 딘 할지'Ala ad-Din Khilji(1295-1315)가 통치하던 델리의 제국은 차가다이가의 모든 공격을 분쇄한 실로 강력한 군사왕국이었다."(481)


9. 몽골 치하의 페르시아와 홀레구가 


"이란과 무간초원의 쿠라 강 하류와 아라스 강 하류에서 숙영하던 서부 몽골군은 여전히 전권을 장악한 장군들의 지휘 아래 있었다. 처음에는 잘랄 웃 딘의 왕국을 파괴한 초르마간(1231-1241,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다음에는 소아시아의 셀죽인들을 정복한 바이주(1242-1256)가 그들이었다. 서쪽의 속신들, 즉 그루지아의 왕공들, 소아시아의 셀죽 술탄들,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들, 그리고 모술의 아타벡들은 변경의 군사정부에 직접 종속되어 있기는 했지만 초기에는 그런 대로 라틴세계와 어느 정도 교섭이 있었다." "대체로 몽골의 종주권은 이 서남 국경지대에서는 산발적으로만 표현되었다. 초르마간과 바이주는 종속국가들을 강력히 통제하면서도 카라코룸 조정과 지속적으로 협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정은 거리 때문에 몇 달씩 계속 연기되었으며 종속국 왕자들은 칭기스칸 일족 분쟁의 모든 위험 속에서 자기들의 주장을 탄원하기 위해 사신들처럼 그곳으로 가야 하였다."(493, 497)


"몽골인들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지 20년이 지나지 않아, 정규적인 정치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그곳의 임시적이고 이중적인 통치체제(이란과 무간에서의 순수 군사통치와 후라산과 이라키 아잠에서의 재정행정)를 종결지으려고 생각하였다. 1251년 쿠릴타이에서 대칸 뭉케는 아우 훌레구에게 이란 총독직을 주었다. 훌레구에게는 페르시아에 여전히 존속하던 두 가지 신성한 권력, 즉 마잔다란의 이스마일리Isma'ili 이맘들의 영지와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프조를 진압하는 임무도 주어졌다. 그에게 부과된 또 다른 임무는 시리아 정복이었다." "몽골군의 바그다드 내습은 1257년 11월에 시작되었다. 몽골군의 거센 공격으로 포위된 주민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수비대의 병사들은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몽골인들이 중대별로 나누어 마지막 사람까지 죽였다. 1258년 2월 10일, 칼리프가 몸소 훌레구에게 항복하러 왔다. 몽골인들은 도시의 대부분, 특히 대모스크를 불태웠으며 압바스조의 무덤을 파괴하였다."(501, 504-5)


"훌레구는 시리아의 무슬림 지역을 복속시키려는 시도에서 실패하였는데, 그것은 사촌인 킵착의 칸 베르케의 위협으로 인하여 매우 불리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부 러시아의 초원을 다스리던 칭기스칸 가문의 이 손위 지파는 아마 훌레구가 기독교에 호의를 가진 것보다 훨씬 더 이슬람을 아꼈을 것이며, 따라서 훌레구의 승리는 그를 경악케 하였다." "그러한 감정으로 베르케는 몽골 정복의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기독교도들의 보호자였던 자기 사촌 즉, 페르시아의 칸에 대항하기 위하여 명목상으로는 몽골인들의 적일지라도 무슬림 신앙의 보호자들인 맘룩조와의 합세를 망설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명백하였던 킵착 칸들의 적의와 그 뒤 차가다이 칸들의 적의는 곧 페르시아 칸국에 대한 포위로 귀결되었고, 페르시아 칸국은 코카서스와 아무다리아로부터의 지속적인 측면공격으로 마비되어 시리아 방면으로의 팽창이 저지되었다. 칭기스칸 일족 사이의 이 내전은 몽골 정복에 종지부를 찍었다."(517-8)


10. 킵착 칸국 


"칭기스칸은 자기보다 6개월 앞선 1227년 2월경에 죽은 아들 조치에게 이르티쉬 서쪽의 평원을 주었는데, 이는 세미팔라틴스크, 악몰린스크, 투르가이, 우랄스크, 아다지, 그리고 호레즘 본토(히바)였다. 조치의 둘째 아들 바투는 거기에다가 1236-1240년에 있었던 전쟁에서 승리해 러시아 공국들에 대한 종주권과 더불어 옛 킵착과 불가르 영토 전역을 추가하였다. 또한 바투 칸국은 고대 스키타이가 지배하였던 유럽 지역 전역도 포함되었다." "바투의 형제들 가운데 오르다Orda는 가문의 최연장자이기는 했지만, 큰 역할이 없었던 탓에 오늘날의 카자흐스탄에 속령을 받았다. 바투의 칸국은 역사상 킵착 칸국 또는 금장 칸국(알툰 오르두Altun Ordu)으로, 오르다의 것은 백장 칸국(차간 오르두Chaghan Ordu 또는 아크 오르두Aq Ordu)으로 알려지게 된다. 바투의 또다른 형제 샤이반은 오르다의 북쪽을 몫으로 받았는데, 훗날 샤이반조는 그들의 영역을 서부 시베리아로 확장하였음에 틀림없다."(552-4)


"킵찬 칸국의 역사는 다른 칭기스칸계 칸국들의 역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국에서 쿠빌라이와 그의 후손들은 중국인들이 되었고, 이란에서는 가잔·울제이투·아부 사이드로 대표되는 훌레구의 후손들이 페르시아의 술탄이 되었다. 반면에 남부 러시아의 칸들인 그들의 사촌은 슬라브·비잔티움 문화에 정복되고 러시아인이 되기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그 지리적인 명명이 암시하듯이 '킵착의 칸들', 즉 그 이름 그대로 투르크 유목민들의 계승자로 남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과거도 없고 과거의 것에 대한 기억도 없으며 러시아 초원에 아무 역사도 남겨놓지 않은 '쿠만' 투르크인들, 즉 폴로브츠이의 단순한 계승자에 불과하였다. 킵착 칸들의 이슬람화는 상황을 아무것도 바꾸어놓지 못하였다. 그들의 이슬람화는 오히려 그들이 이란·이집트의 고대문명을 정말로 공유하지 못한 채, 마침내 서구 세계로부터 그들을 갈라내 (훗날의 오스만인들처럼) 유럽 땅에 천막을 친 결코 동화되지 않을 외국인들로 만들었다."(557)


"1377-1378년에 톡타미쉬는 티무르의 도움으로 백장 칸국의 칸이 되었다. 톡타미쉬는 예기치 않은 반전을 통하여 킵착 칸국의 세력을 완전히 복구하였다. 금장 칸국과 백장 칸국의 통일, 모스크바 국가의 절멸은 그를 새로운 바투, 새로운 베르케로 만들었다. 그의 부흥은 칭기스칸 일족이 중국에서 쫓겨나고 페르시아에서 제거되고, 투르키스탄에서 절멸된 지금 더 큰 충격력이 있었다. 그 유명한 가문에서 톡타미쉬는 홀로 굳건히 섰다. 그는 몽골의 위대함의 복구자로서 당연히 조상 칭기스칸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요청되고 있음을 느꼈으며, 그가 트란스옥시아나와 페르시아의 재정복에 나선 것은 틀림없이 이것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 20년 전이었다면 그는 당시 두 지역을 휩쓸던 무정부상태 속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몇 해 뒤에 트란스옥시아나와 페르시아는 일류 지도자, 실로 톡타미쉬를 도와 통일을 일으킨 바로 그 사람, 티무르의 소유로 돌아갈 운명이었다."(572-3)


3부 최후의 유목제국들


11. 티무르 


"쿠빌라이의 휘하에 있던 투르크인들은 동아시아 전체를 정복의 무대로 삼았고, 킵착 칸국 아래의 투르크인들은 비엔나 성문까지 치달았으며, 훌레구 휘하의 투르크인들도 이집트의 강가에 다다랐다. 오직 차가다이의 영지인 투르키스탄의 '중원왕국'에 있던 투르크·몽골인들만이 칭기스칸 일족의 세 울루스에 둘러싸여 때가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서쪽으로 트란스옥시아나를 두르고 있던 페르시아 국가가 사라졌고, 킵찬 칸국이 지배하던 서북방도 쇠퇴하였다. 고비사막 방향으로도 '모굴리스탄'이 폐허화되면서 길이 열렸고, 델리의 술탄국도 일시적으로 붕괴되어 과거 차가다이 칸국 때처럼 인더스 강을 방어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오랫동안 강요되었던 휴식을 보상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티무르의 서사시─계속된 배반과 살육을 그렇게 불러도 무방하다면─는 비록 종족으로는 투르크였지만, 그리고 비록 늦기는 했어도 몽골의 서사시의 일부였던 것이다."(590)


"동부 이란 원정에서 티무르는 유목과 조직적인 파괴체제를 통해 '사막화'(Saharifying) 과정의 적극적인 매체로 기능하였다. (몽골인들로 인해) 이미 취약해진 광대한 경작지를 파괴하고 그 땅을 초원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그들은 토지의 죽음을 가져온 무의식적인 공범자가 된 것이다." "서부 이란 원정에서 이븐 아랍샤가 전하는 끔찍한 장면들은 1221년 발흐·헤라트·가즈니에서 일어난 학살과 과련하여 칭기스칸 시대의 역사가들이 기록한 것보다 더 심하였다. 초기의 몽골인들은 단순한 야만인들이었지만, 티무르는 문화적 세례를 받은 투르크인이었고, 페르시아 시인의 열렬한 애독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란문명의 꽃을 파괴해버렸으며, 독실한 무슬림이었지만 무슬림 세계의 중요한 도시들을 겁락했던 것이다." "킵착 원정에서도 티무르는 금장 칸국의 심장부를 파괴하는 것으로만 만족했을 뿐, 자신의 정복을 확고히 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톡타미쉬는 권좌를 다시 회복하였다."(604, 607-8, 619-20)


"인도 원정에서 티무르는 통상 해왔던 대로 델리의 인도-무슬림 제국을 기초부터 흔들어놓고 그 나라를 완전한 무정부상태에 빠뜨렸으며, 모든 것을 파괴하고 아무런 질서도 세우지 않은 채 떠나버렸다. 브라만교와 싸우기 위해서 왔다고 선언한 그가 정작 타격을 가한 것은 인도의 이슬람이었다." "1401년 맘룩조와의 대결에서 시리아를 폐허로 만든 티무르는 그곳에 여하한 종류의 통치체제를 세우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빠져나왔고, 그곳은 즉시 맘룩에 의해 다시 점거되었다." "오스만이 앙카라에서 겪은 갑작스러운 재난─1403년 술탄 바야지드의 패배와 사망─은 비잔티움 제국에게 반세기 동안의 숨돌릴 틈을 주었다(1402-1453). 티무르의 금장 칸국에 대한 승리로 모스크바 국가가 혜택을 입었듯이, 티무르의 서아시아 정복의 가장 큰 수혜자는 비잔티움이었다. 발칸 기독교권의 이 같은 행운은 오스만을 눌러버린 티무르가 그의 재기를 막기 위해 여러 아미르국들을 복원함으로써 더욱 커졌다."(627-8, 631, 636)


12. 러시아의 몽골인 


"킵착 칸국은 세 개의 '소칸국'들, 즉 크리미아·카잔·아스트라한 칸국으로 나뉘었다. 카잔이 러시아의 공격을 가장 먼저 받았다. 모스크바 국가의 짜르였던 '공포왕' 이반 4세(1533-1584)는 1552년 6월 강력한 포병을 이끌고 와서 도시를 포위하였다. 10월 2일, 칸국의 영토는 러시아에 편입되어버렸다." "1554년 공포왕 이반은 아스트라한으로 3만 명의 군대를 보내 당시 집권가문의 일원(즉 퀴췩 무함마드의 후손)이었던 데르비쉬Dervish라는 인물을 조공을 바치는 칸으로 세웠다. 1556년 봄 러시아의 군대가 다시 나타나 데르비쉬를 쫓아내고 아스트라한을 합병하였다. 칭기스칸 일족의 최후 칸국인 크리미아의 기레이 왕조는 오스만의 종주권을 받아들여 200년 이상을 더 버틸 수 있었다." "그러다가 에카테리나 2세가 포템킨Potemkin이 지휘하는 7만 명의 군대를 크리미아로 보내 합병하였다(1783). 이렇게 해서 프랑스혁명 전야에 유럽에 있던 칭기스칸 일족의 마지막 세력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662-4)


13. 샤이바니조 


"페르시아, 중국, 트란스옥시아나, 남러시아에 있던 칭기스칸 일족들이 쇠퇴하고 소멸해감에 따라 이 집안의 다른 지파들, 즉 북방의 초원에 남겨져 잊혀졌던 사람들이 그들을 대신하고 역사상의 제국들 중에 자신의 몫을 주장하며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샤이바니조이다. 14세기 중반경 샤이반 일족에 복속하던 유목민들은 외즈벡Özbeg─혹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불리듯 우즈벡Uzbeg─이라는 명칭을 취하였는데, 그 이름으로 역사에 알려지게 되었다." "서투르키스탄, 트란스옥시아나, 페르가나, 후라산의 주인이 된 무함마드 샤이바니는 우즈벡 제국을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는 지난 4세기 반 동안(1055-1502) 수많은 투르크 및 몽골 군주들에게 복속했다가 이제 막 독립을 회복한 페르시아와 충돌하였다. 백양부의 투르크멘 유목민들을 넘어뜨리고 권좌에 오른 민족왕조 사파비(1502-1736)는 이제 우즈벡으로부터 후라산을 빼앗아옴으로써 이란의 재통합을 완성시키려고 하였다."(665-6, 671)


"사파비와 우즈벡은 사실상 모든 면에서 서로 반대였다. 하나는 열렬한 시어파였고 이란인이었지만, 다른 쪽은 확고한 순니파로서 몽골·투르크족이었다. 순니파의 영웅이자 칭기스칸의 후손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하고자 했던 샤이바니는 사파비조의 샤 이스마일Isma'il에게 '이단적인' 시어파를 버리고 복속하라고 명령하였으며, 만약 그러지 않을 경우 우즈벡은 〈검으로써 그를 개종시키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1510년 12월 2일 벌어진 전투의 승리자는 샤 이스마일이었다. 이 승리는 동방에 상당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란 독립의 회복자가 투르크·몽골세력의 부흥자를 죽였다는 사실─즉 위대한 사산조 제왕들의 후손이 칭기스칸의 자손을 패배시키고 죽였다는 사실─은 이제 시대가 변했고 오랜 세기에 걸친 침입을 끈질기게 참아왔던 정주민이 유목민과 대등한 위치에 서기 시작했으며 농경지가 초원보다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671-2)


14. 최후의 차가다이인들 


"16세기 차가다이계 마지막 칸들의 제국을 마치 쇠퇴하는 나라로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유누스 칸이나 하이다르 미르자와 같이 고도의 교양을 갖춘 사람들의 존재는 도리어 그 반대였음을 입증한다. 중국인들이 그 민족적 특징과 성격을 압살시키고, 어떻게 해서든지 외부와의 관계를 차단하려고 했던 이 지방은 그 당시에는 이란·투르크 이슬람으로부터 불어오는 각종 문화적인 훈기를 받아 새로워지고 생기가 넘쳤다. 유누스 칸의 일생이 이를 입증한다. 시라즈의 학자에게서 공부를 배웠던 유누스 칸은 후일 쿠차와 투르판을 지배했다." "율두즈와 위구리스탄에 사는 부족들의 뿌리깊은 유목주의가 차가다이계 마지막 후예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차가다이가문의 지배가 남긴 최후의 결실은 카쉬가리아뿐만 아니라 쿠차나 카라샤르나 투르판과 같은 옛 위구르인들의 지방을 사마르칸드와 헤라트의 페르시아 혹은 이란화된 투르크문명과 연결시킨 것이었다."(691-2)


15. 몽골리아의 마지막 제국 - 15~18세기


"오이라트는 칭기스칸 제국 시대에 바이칼 호 서부 연안에 살던 강력한 삼림 몽골인들이었다. 오이라트의 수령 마흐무드는 명의 영락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었는데, 그것은 쿠빌라이 가문이나 동부 몽골의 다른 수령들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조정의 지원을 구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세력이 충분히 강화되고 몽골리아의 모든 부족과 왕족들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강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이 오이라트의 수령은 명조 통치자와의 관계를 서슴지 않고 단절하였다." "얼마 전까지도 중국식 생활의 편안함으로 인하여 약화되고 느슨해졌던 이 유목민들은 원래의 초원으로 돌아감으로써 옛날의 강인함을 되찾았다. 더구나 이들은 오이라트, 즉 삼림지역에서 나온 서부 몽골의 부족들이었다. 그들은 오르콘이나 케룰렌 지역의 유목민들에 비해 칭기스칸 가문의 정복의 과실을 상대적으로 적게 맛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천성적인 활력을 더 유지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699-701)


"오이라트 혹은 서몽골의 쇠퇴가 동몽골의 칭기스칸 일족에게 즉각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동몽골은 종족 내부의 치열한 싸움으로 서로를 죽이고 있었다." "이 몽골 국가들의 가장 큰 약점은 가족의 유산을 분배하는 관습에 있었다. 다얀의 제국은 비록 외국에 대한 정복전을 거의 수행하지 않았고 팽창의 범위가 몽골리아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칭기스칸 제국과 유사했다. 건국자가 사망한 뒤 여러 수령들, 즉 모든 형제와 사촌들은 차하르의 수령을 배출하는 분파의 지도자에 대해 최고의 권위를 인정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일종의 봉건적 가족국가와 같은 것이었다. 이 같은 분할은 칭기스칸 후예들의 역사에서 볼 수 있었던 어떠한 예보다도 더 철저한 분열을 초래하였다. 봉건적인 연대도 느슨해졌고 이와 동시에 최고의 칸이 배출되던 일파에 대해 마땅히 표시해야 했던 명목상의 복속도 약해졌다. 이렇게 동몽골은 다얀 칸이 등장하기 전의 혼란스런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706, 709-10, 712)


"원조가 붕괴한 직후, 즉 명조 초기에 후일 만주로 불리게 된 여진족은 숭가리 강과 동해 사이에 거주하면서 어느 정도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11세기 그들의 선조들처럼 그들은 문화의 본류에서 단절되어 수렵과 어로로써 생계를 유지하던 삼림의 씨족집단이었다. 1599년 누르하치Nurhachi라는 강력한 수령이 7개의 여진 '아이만ayman', 즉 부족들을 하나의 왕국으로 재통합하고 1606년 역사적인 만주인의 국가를 건설하였다." "누르하치는 명조가 만력제萬曆帝의 치세(1573-1620)에 퇴락의 상태에 빠져들어갔음을 깨닫고 1626년 스스로 황체를 칭하였다. 1621-1622년 그는 심양(묵덴Mukden이라고도 불림)이라는 변방 거점을 장악하고 1625년에는 그곳을 수도로 삼았다. 1622년 그는 요양을 점령하고 1624년에는 흥안령 동부와 숭가리 강의 만곡부 서쪽에서 유목하던 호르친부 몽골인의 복속을 받아냈다. 그가 사망할 때(1626년 9월 30일) 만주는 군사적 조직이 훌륭하게 갖춰진 왕국이 되어 있었다."(716)


"누르하치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홍타이지Qongtayiji(1626-1643)는 부친의 과업을 이어나갔다. 만주인들이 내적인 단결을 강화하는 동안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결속을 파괴하고 있었다." "오르도스와 투메트는 자기 종족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차하르의 칸에게 복속하느니 만주의 군주인 홍타이지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하였다. 만주인들은 차하르의 칸인 릭단을 공격하여 그를 티베트로 쫓아버리고, 그는 그곳에서 1634년에 사망하였다. 이렇게 되자 차하르도 홍타이지에게 복속하게 되었다." "1643년 오르도스는 6개의 기旗(qoshun)로 재편성되었고, 그 각각은 칭기스칸 가문의 지농 군 빌릭투 메르겐의 후손들인 왕공(jasaq)의 지휘 하에 두어졌다. 이렇게 해서 내몽골 전체가만주 제국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후 차하르, 투메트, 오르도스의 칸들은 신종臣從의 연대와 봉건적인 동맹서약을 통해 만주 왕조와 결합했고 이는 1912년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지속되었다."(716-7)


"한편 준가르의 갈단(1676-1697)은 중앙아시아 정복에 나서 칭기스칸의 서사시를 다시 시작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모든 몽골인들에게 극동의 제국을 만주인들, 즉 일찍이 칭기스칸에게 굴복했던 여진족의 풋내기 자손들로부터 탈취하자고 부추겼다." "강희제는 이 신흥 몽골 제국이 중국의 바로 코 앞에서 흥기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갈단으로서는 제수이트 선교사들이 강희제를 위해 제작한 대포를 상대하기가 벅찼고, 이 새로운 칭기스칸은 당황하여 할하 지방에서 철수하였다(1690년 말)." "1695년 전쟁이 재개되었지만, 청은 다시 한 번 대포와 소총의 도움을 받아 갈단을 격파하였다." "만주 왕조가 이 승리로 얻은 가장 큰 이익은 할하에 대한 영구적인 지배권의 확보였다. 강희제가 준가르의 장악으로부터 구해준 네 명의 할하 칸들은 그를 거부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외적인 행동이 지극히 만주적이었으며 유목민의 심리를 잘 이해하고 있던 강희제는 동몽골인들의 조직에 간섭하지 않으려고 조심하였다."(731-3)


"준가르 영역의 파괴는 몽골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몽골은 한때 그 절정에 이르렀고, 칭기스칸은 칸으로 선출된 뒤 20년 만에 초원세계를 통일하고 중국과 이란에서 작전을 시작하였다(1206-1227). 또 다른 50년 동안 이란과 중국의 나머지 지역이 정복되어, 산맥이라는 천연장애로 인해 그 자체가 단절되어 있던 대륙인 인도를 제외한다면 몽골 제국은 아시아 대륙의 제국이 되었다. 이 강역은 형성된 직후 신속하게 무너졌다. 1360년이 되면서 몽골은 중국과 이란을 상실하였고 트란스옥시아나도 사실상 잃어버려, 아시아에서는 몽골리아와 모굴리스탄─후일 중국령 투르키스탄의 북부를 형성─만을 보유했을 뿐이다." "1759년 건륭제가 마침내 준가르 칸들의 확고한 보호령이었던 카쉬가리아를 정복하고 일리와 병합한 사건은 반초班超의 시대 이래 1800년 동안 중국의 아시아 정책이 추구해온 목표, 즉 유목민에 대한 정주민의 보복, 초원에 대한 농경의 보복을 완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744-5, 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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