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58
에드먼드 버크 지음, 이태숙 옮김 / 한길사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옮긴이 해제


"보수주의는 인간·사회·역사에 대한 특정한 규정을 기반으로 인식론적 회의주의─인식론적 겸손이라고도 하며, 기존 제도를 옹호할 때나 변혁 주장을 논박할 때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강조하는 논지─와 역사적 공리주의─역사적으로 발전되어온 제도들을 현존하는 이익과 행복의 원천이라고 규정하는 논지─를 주요 논지로 삼는다. 이 논지들은 특정한 정치양식의 옹호로 이어진다. 즉 역사적으로 발전되어온 기존 제도들은 사람들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효능을 지니므로, 기존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타당한 정치양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기본적으로 현재 상황에 대한 정치양식─기존 상황에 대하여 어떤 태도가 타당한지─을 규정한 이데올로기다. 이 때문에 보수주의는 정치 목표에 주안을 두는 이데올로기들─사회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로 분류된다. 보수주의와 같은 기반에서 대립하는 이데올로기는 마찬가지로 정치양식의 하나인 급진주의다."(20-1)


"버크의 사상에서 본격적인 보수주의 논설은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비로소 피력되었다. 버크가 프랑스혁명에서 영국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을 감지하고 그에 대항하기 위하여 전개한 논설이 보수주의의 경전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보수주의가 심대한 체제 위협에 대항하는 상황적 이데올로기(situational ideology)라는 헌팅턴의 정의가 확인된다. 또한 버크가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비로소' 보수주의 논설을 제시했으므로, 보수주의를 규명할 때 버크의 전기 논설을 후기 논설과 혼합해서 자료로 삼아서는 안 된다. 버크는 프랑스혁명이 영국체제를 위협한다고 인식되자, 인간성과 역사와 신의 이름을 동원하여 그 체제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보수주의자로 '전환'했다. 그리하여 보수주의자들은 세련된 보수주의 논설을 갖게 되었다. 버크를 상당한 개혁주의자로 묘사하는 견해들은, 〈자유주의〉로 평가되기도 하는 버크의 초기 언설들에 부당하게 비중을 둔 데서 종종 연유한다."(24-5)


제1부 프랑스 사태와 일부 영국인의 경거망동


"나는 프랑스의 새 자유에 축하를 보내는 일을, 그들의 자유가 통치와 어떻게 결합되었는지, 자유가 공적 권력, 군대의 기율과 복종, 효율적이고 잘 배당된 조세 징수, 도덕과 종교, 재산의 안정성, 평화와 질서 그리고 정치적·사회적 관습들과 어떻게 결합되었는지 알게 될 때까지 미룰 것이다. 이 모두가 (각각의 방식으로)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이다." "우리는 곧 불평으로 변할지도 모를 축하를 하러 나서기 전에 그들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지켜보아야 한다. 이것이 각자 고립된 사사로운 개인의 경우에 분별력에 따르는 처사다. 그러나 자유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행동할 때 권력이 된다. 사려 깊은 국민은 태도를 천명하기 전에 권력이 어떻게 이용되는지 지켜볼 것이다. 특히 그들의 원칙, 기질 그리고 성향에 관해 겪어본 적이 없는 거의 새로운 사람들 손에 새로운 권력이 주어진 매우 어려운 경우에는, 그리고 표면적으로 가장 요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진정한 추진자가 아닐 수 있는 상황에서는 그러할 것이다."(46-7)


"프랑스 사태를 찬양하는 프라이스 박사는 영국인이 명예혁명의 원리에서 세 개의 근본적 권리─그는 그 권리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하나의 짧은 문장 속에 개괄된다고 본다─를 획득했다고 독단적으로 주장한다. ① 우리의 통치자를 선택할 권리, ② 부당 행위를 이유로 통치자를 추방할 권리, ③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울 권리. 이 새롭고 들어본 적이 없는 권리장전은, 비록 전체 인민의 이름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신사들과 그 일당에게만 속하는 것이다. 전체 영국민은 그것에 관여한 바 없다." "1688년의 혁명 원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권리선언'(Declaration of Right)이라고 불리는 법률에서다. 정열적이고 경험 없는 열성분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대한 법률가와 정치가가 작성한 매우 현명하고 분별 있고 사려 깊은 그 선언에는, 〈우리 자신의 '통치자'를 선택하고 부당 행위를 이유로 추방하고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울'〉 보편적 권리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또는 암시조차도 들어 있지 않다."(57-8)


"그리고 설사 우리가 명예혁명 전에 우리 왕을 선출할 권리를 지니고 있었더라도, 영국민은 당시에 자신과 후손을 위해 영원히 엄숙하게 부정하고 폐기했다. 이 신사들은 자신들의 휘그(Whig) 원리─명예혁명 전에 후일의 제임스 2세를 왕위계승에서 배제하려 한 일파를 반대파가 스코틀랜드 반란자 명칭인 휘그로 부른 데서 유래한다. 그 반대파도 아일랜드 도적을 가리키는 토리라고 불림으로써 휘그(의회 중심, 비국교도, 상업 중시)와 토리(국왕과 국교회 그리고 지주인 젠트리 중시)는 영국의 전통적 양대 당파 이름이 되었다─에 대해 자신들 좋을 대로 자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솜머스 경보다 더 나은 휘그로 받들어지고 싶은 생각이 없다. 명예혁명을 성사시킨 사람들보다 명예혁명의 원리를 더 잘 이해할 마음도 없다. 그리고 우리 법률과 가슴에 감동적인 문체로 그 영원한 법의 언어와 정신을 새겨 넣은 사람들조차 알지 못하는 신비한 뜻을 권리선언에서 읽을 마음도 없다."(63)


"우리가 형이상학적 궤변의 미로에 빠지지 않는다면, 확정된 규칙과 일시적 이탈을 둘 다 조화롭게 이용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변화할 수단을 갖지 않은 국가는 보존을 위한 수단도 없는 법이다. 국가가 그러한 수단이 없다면, 독실한 마음으로 보존하기를 원했던 헌정의 부분을 상실하는 위험에조차 빠질 수 있다. 보존과 교정이라는 두 원리는, 영국에 왕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인 왕정복고와 명예혁명이라는 위기의 두 시기에 강력하게 작동했다. 그 두 시기에 국민은 그들의 오랜 건축물에 존재하는 통합의 유대를 상실해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전체 구조를 해체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두 경우 모두에서 그들은, 손상되지 않은 부분들을 통해 옛 헌정체제의 결함 부분을 쇄신했다. 그들은 이 오래된 부분들을 그대로 유지해 쇄신된 부분이 잘 들어맞도록 했다. 그들은 옛 조직의 형태를 유지하며 옛날에 조직되었던 신분제의회로 행동했던 것이지, 유대가 풀린 인민이라는 유기체 분자들로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65)


"현재는 아무도 주장하지 않겠지만, (과거의) 광신도들은 〈왕은 신이 정한 세습과 불가침적 권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다〉라고 주장했다. 단지 자의적 권력을 옹호할 뿐인 이러한 옛 광신도들은, 세습에 따른 왕이 세계에서 유일한 합법적 통치자인 것처럼 독단적으로 주장했다. 이는 마치 민중의 자의적 권력에 대한 우리 시대 새 광신도들이 민중 선거가 권위의 유일한 합법적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바와 같다. 확실히 예전의 열광적 대권 옹호자들은 우둔하게도 그리고 아마도 불경스럽게도, 국왕제가 다른 어떤 통치체제보다도 더 신의 재가를 받았다고 상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세습에 따른 통치권이, 왕위에 누가 오르게 되든지 개개 인물 모두의 경우에 그리고 어떤 시민적·정치적 권리도 존재할 수 없는 모든 상황에서도, 절대로 파기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인은 법에 따른 왕위 세습 계승을, 오류가 아니라 옳은 것으로 간주한다. 불평거리가 아니라 혜택으로, 예속의 표지가 아니라 자유의 보장으로 여긴다."(71-2)


"혁신하는 정신은 일반적으로 이기적 성향과 편협한 시각의 산물이다. 자연의 양식을 따르는 헌정 방침에 의해, 우리는 우리 정부와 특권을, 재산과 생명을 향유하고 전달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받고 보유하고 전달한다. 정치제도, 재산 그리고 섭리가 부여한 재능이 동일한 경로와 순서에 따라 우리에게 전달되며, 우리에게서 전달되어 나간다. 우리의 정치체제는 세상의 질서와 일시적인 부분들로 이루어져 영원한 전체가 된 존재 양식과 그대로 상응하며 조화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존재 양식에는 인류를 거대하고 신비한 통합체로 엮어내는 위대한 지혜에 의해, 전체는 어느 한 시기도 노년이라거나 중년이라거나 연소한 상태에 있지 않다. 그것은 변함없는 항구성 속에서 영원한 쇠퇴, 몰락, 쇄신, 진전이라는 행로를 거치면서 움직인다. 국가운영에서 자연 양식을 견지함으로써 우리가 개선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결코 전적으로 새롭게 되지 않으며, 우리가 보유하는 경우에도 결코 전적으로 낡은 것이 되지 않는다."(82-3)


제2부 프랑스 혁명의 실상


"당신들은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것에 매우 근접한 헌법의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당신들은 질서 잡힌 사회로 구성된 적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로 선택해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했다. 당신네는 잘못 시작했다. 왜냐하면 당신들에게 속하는 모든 것을 멸시하면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자본 없이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만일 당신 나라의 바로 앞 세대가 별로 영광스럽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을 지나쳐버렸으면 될 것이다. 당신들의 주장을 더 이전의 조상들로부터 끌어오면 될 일이었다. 그러한 조상에 대한 경건한 애호 속에서, 당신의 상상력은 요즈음의 천박한 행동을 넘어서 그들에게서 덕과 지혜의 기준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은 닮고자 하는 모범과 더불어 향상되었을 것이다. 조상을 존경하면서 자신을 존경하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프랑스인을 어제 갓 태어난 사람들로 간주하거나 1789년 해방의 해까지는 미천하고 예속된 가련한 사람들로 여기도록 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85-6)


"국민의회는 자신들의 지식과 현명함 그리고 성실성을 조국에 바치기로 서약했던 고위 관리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법정의 자랑거리인 일류 변호사들도 아니었다. 대학의 고명한 교수들도 아니었다─그 대신에, (출중한 예외도 있지만) 그렇게 수가 많은 경우 으레 그럴 것이지만, 훨씬 많은 부분이 법률가 중에서 하급으로 무식하고 사무적이며 단지 보조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렇게 구성된 집단에 최고 권위가 부여되면 언제나, 자신들을 존중하도록 습관적으로 배우지 않은 사람들의 손에 최고 권위가 놓인 데에 수반되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그들은 위험에 처해질 평판을 애초부터 갖지 않았다. 자신들의 손에 권력이 쥐어진 것에 다른 누구보다도 스스로 더 놀랄 이들이, 절제하고 분별 있게 행동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갑자기 마치 마술을 부린 것처럼, 예속된 미천한 지위에서 빠져나온 이들이 자신들의 준비되지 않은 위대함에 도취되지 않으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95-6)


"단언컨대, 수평이 되게 맞추려는 자들은 절대로 평등을 이룰 수 없다. 모든 사회는 다양한 종류의 시민들로 이루어지는 법이어서, 그중 어떤 부류가 최상위에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평등화하려는 자들은 사물의 자연적 질서를 변화시키고 전복시킬 뿐이다. 구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땅 위에 두어야 할 것을, 그들은 공중에 세움으로써 사회라는 건축물에 무거운 부담을 준다. 그 공화국을 (파리 공화국이 그 한 예다) 구성하고 있는 재봉사 단체와 목수 단체들은, 찬탈 중에서 최악인 자연적 특권에 대한 찬탈을 통해 당신들이 그들에게 강요한 지위를 감당할 수 없다." "(누구에게도 명예로운 것이 못 되는) 비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억압당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개별적으로나 또는 집단적으로 통치하도록 허락된다면, 국가가 억압되게 된다. 당신들은 이 점에서 편견과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들은 실은 자연과 투쟁하는 것이다."(104-5)


"공공 사회가 협약(convention)의 소산이라면, 그 협약이 공공 사회의 법이 되어야만 한다. 그 협약이 공공 사회에서 형성된 모든 종류의 기본법을 한정하고 조절해야 한다. 모든 종류의 입법, 사법, 행정 권력은 그 피조물이다. 그러한 것들은 다른 상황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사회는 개인들의 열정이 억제될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집단과 단체에서도 인간의 성향이 빈번하게 좌절되고, 의지가 통제되고, 열정이 극복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오직 '그들 자신에서 나온 권력에 의해서' 실시될 수 있다. 그 기능을 행사할 때 제어하고 복종시키는 것이 임무인 사람들의 의사와 열정에 복속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억제가 그들의 권리에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와 억제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고 변경의 여지가 무한하기 때문에, 그를 어떤 추상적 규칙에 기반하여 정해놓을 수는 없다. 그러한 원리에 입각하여 자유와 억제를 논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119-20)


"한 국가를 구성하거나, 혁신하거나, 개혁하기 위한 학문은 그 밖의 다른 경험과학처럼 '선험적'으로 교육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 실천적 학문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짧은 경험이 아니다. 도덕적 요인의 진정한 결과는 반드시 즉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해로운 것이 더 나중 작용에서는 탁월할 수도 있다. 그 탁월성이 처음에 산출된 나쁜 결과에서 생길 수도 있다. 반대로, 아주 그럴듯한 계획이 매우 만족스럽게 시작되었다가도 종종 낭패스럽고 유감스런 결말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통치 지식은 그 자체로 매우 실천적이면서 그러한 실천적 목적을 지향하므로 (한 개인의 삶 전체보다 훨씬 더 풍부한) 경험(experience)을 요구한다. 따라서 여러 시대를 거쳐서 상당한 정도로 사회의 공통된 목적에 부응해온 건축물을 감히 쓰러뜨리려고 시도하는 경우나, 증명된 유용성을 간직한 모델과 모형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재건축하려고 시도하는 경우에는, 무한한 조심성이 요구된다."(121)


"저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국왕은 한 남자에 불과하다. 왕비는 한 여자에 불과하다. 국왕 시해, 존속 살인, 신성 모독은 미신적 허구일 뿐이다." "이 야만적인 철학의 사고방식은, 냉정한 가슴과 불명료한 이해력의 소산이며, 모든 아취와 고상함이 결여된 것만큼이나 확실한 지혜도 결핍되어 있다. 여기서 법은 그것이 유발하는 공포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아니면 법은, 각자가 사적인 궁리로 찾은 관심사에 따라서, 또는 자신의 사적 이익에서 보아 할애한 부분에 따라서만, 지지될 것이다. 그들의 아카데미의 덤불에서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 끝에 보이는 것은 교수대뿐이다. 국가 쪽에는 애정을 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 기계론적인 철학의 원리에 따르면, 우리 제도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해도 된다면, 인격 속에 결코 구현될 수 없으며, 그리하여 우리 내면에 사랑, 존경, 찬미 또는 애착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그러나 애정을 내쫓는 그러한 종류의 이성이 인격을 대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144)


"우리는 자칫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것들을 초래하고 아마도 지금까지 지탱하는 원인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예절, 우리의 문명 그리고 예절이나 문명과 연관된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이, 이 유럽 세계에서 오랫동안 두 가지 원리에 기초했다는 점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실은 두 가지가 결합된 결과였다. 이 두 가지는 신사의 정신과 종교의 정신이다." "어떤 나라에 무역과 공업은 없지만 귀족과 종교의 정신이 남아 있다면, 판단력이 전자의 자리를, 그것도 반드시 나쁘지는 않게 대신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래의 기본적 원리들 없이 국가가 얼마나 잘 지탱할 수 있을지를 시험해보려고 덤벼서 그 와중에 상업과 기술이 상실된다면, 그 국민은 상스럽고 우둔하고 난폭하며 동시에 가난하고 누추한 야만인이 될 것이다. 종교도 명예도 남자다운 자부심도 없이, 현재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이후에도 그럴 희망이 없게 된 나라는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146-7)


"이 계몽된 시대에 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교화되지 않은 감정의 소유자라고 대담하게 고백한다. 우리의 옛 편견(prejudices)을 모두 버리는 대신에 상당한 정도를 소중히 여기며, 부끄럼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편견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소중히 한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편견이 더 오래 지속된 것일수록, 더 일반적일수록, 우리는 더 소중히 여긴다고 고백한다." "우리나라의 사변적 인물 다수는 일반적 편견을 퇴출시키는 대신, 그 속에 가득한 잠재적 지혜를 발견하는 데에서 자신들의 현명함을 발휘한다." "이성을 지닌 편견은, 행동에 그 이성을 부여하는 동력을 보유하며, 행동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애정을 지닌다. 편견은 위급시에 쉽게 이용할 수 있다. 편견은 정신을 미리 지혜와 덕성의 꾸준한 길을 따르도록 하고, 결정의 순간에 사람들을 회의하고 당황하고 미결 상태에서 망설이도록 두지 않는다. 편견은 미덕을 습관으로 만들지, 서로 연결되지 않은 행위의 연속 상태로 버려두지 않는다."(158-9)


"우리는 인간이 그 성격상 종교적 동물임을 알고 있다. 무신론은 우리의 이성뿐 아니라 본능에도 배치되며, 결코 오랜 기간 지배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안다는 점에 자부심을 지닌다. 그러나 만일 난동 시기에, 그리고 프랑스에서 현재 맹렬하게 뒤끓고 있는 지옥의 증류 가마에서 나온 강한 술로 착란상태에 빠져서 기독교를 폐기하여 우리의 알몸을 드러낸다면, 투박하고 위험하며 저열한 미신이 그를 대신할 것이라고 (정신은 진공 상태를 참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므로) 염려하는 바다. 기독교는 이제까지 우리의 자부심이었고 위안이었으며, 우리에게 그리고 다른 많은 국민에게 문명의 일대 원천이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당신네가 했듯이 기존 제도에서 자연스런 인간적 존경 수단들을 제거하여 경멸 대상으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우리는 그 대신에 어떤 다른 것이 제시되기를 바란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164)


"이 혁명을 일으키고 유지하기 위해 채용된 모든 사기, 기만, 폭력, 약탈, 방화, 살인, 몰수, 강제유통지폐 그리고 모든 종류의 전제와 잔인함이 그 자연적 결과를 나타낼 때, 즉 모든 유덕하고 진지한 사람들의 도덕심에 충격을 주었을 때, 이 철학적 체계의 선동자들은 즉시 프랑스의 옛 왕정을 비난하는 데 목청을 높였다. 폐위된 권력을 충분히 불명예스럽게 만든 후, 그들은 새로운 악용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당연히 모두 구체제 당파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들의 조악하고 난폭한 자유 기획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예속의 옹호자로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필요성에 쫓겨서 이러한 천박하고 경멸스러운 기만을 행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한편에 그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 극악한 폭정이 있어서 그외에는 제3의 다른 선택이 없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누구도 그들의 행위와 기획에 대해서 타협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지껄이는 소리는 궤변이라는 이름도 붙일 가치가 없다."(208-9)


"사람들이 현존하는 법에 의해 일정한 생활양식을 영위하도록 조장되었고 또 합법적 직업에 종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방식이 보호될 때─그들이 모든 생각과 모든 습관을 그 방식에 적응시켰을 때─법률이 오랜 기간에 걸쳐 그 규칙에 충실함을 평판의 기반으로 삼고 그로부터의 일탈을 치욕의 기반 또는 형벌의 기반으로 삼았을 때─나는 입법부가 그러한 때에 자의적 법률에 의해 사람들의 정신과 감정에 갑작스러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확신한다. 그들의 상태나 상황에서 강제적으로 강등시킨다든지, 전에는 그들의 행복과 명예의 척도가 되었던 성격과 습관을 치욕과 오명으로써 낙인찍는 일은 부당하다고 확신한다. 만일 여기에 더하여 그들이 집에서 추방되고 재산이 모두 몰수된다면─무릇 혁명은 몰수하는 데 적절한 기회다─나는 사람의 감정과 양심, 편견, 그리고 재산을 가지고 행해지는 이 전제정치적 오락이 어떻게 극악한 폭정과 구별될 수 있을지 알 만큼 지혜롭지 못하다."(252-3)


"인간 정신의 왕성한 생산력에 따라 저절로 자라는 힘을 어떤 것이라도 파괴하는 행위는, 물질세계에서 물체의 분명한 활동 속성을 파괴하는 짓을 도덕세계에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질산소다에 함유된 기체의 팽창력이나 증기, 전기, 자기의 힘을 (만일 우리에게 파괴할 능력이 있다면) 없애려고 덤비는 것과 같다." "나는 어떤 자가 감히 자신의 나라를 백지(carte blanche)에 불과하다고 보고 자신이 좋을 대로 그 위에 갈겨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로 오만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열렬한 공상적 선의로 가득한 자라면, 자신의 사회가 자신이 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구성되기를 기원할지 모른다. 그러나 훌륭한 애국자이고 진정한 정치가라면, 자신의 국가에 현존하는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최선의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항상 생각할 것이다. 보수하려는 성향과 개선하는 능력이 같이 가는 것이 정치가에 대한 내 기준이다. 그외에 다른 것은 모두 그 생각에서 천박하고 실행에서 위험하다."(255-4)


"미신은 정신이 허약한 자들의 종교다. 따라서 약간의 이러저러한 사소한 형태와 또는 약간의 열정적인 형태로, 상호 혼합되어 있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명한 사람은 현명하기 때문에 '찬미자'가 되지 않으며 이러한 것들에 격렬하게 집착하지 않으며 또한 격렬하게 혐오하지도 않는다. 지혜는 오류에 대한 가장 엄격한 교정자가 아니다. 양자는 경쟁하는 오류이며, 서로 가차 없는 전쟁을 벌인다. 양자가 자신의 우세를 이용하는 데 매우 잔인하여, 상호 논쟁에서 무절제한 대중을 이편에 또는 다른 편에 끌어들이는 일이 있을 정도다. 신중함은 중립일 것이다. 그러나 본성상 그러한 열기를 만들어내게끔 되어 있지 않은 사안에 관해 맹목적 집착과 격렬한 반감이 대립하는 경우, 정열이 초래하는 과오와 과도함 가운데 무엇을 비난하고 무엇을 용인할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 아마도 현명한 인물은 건설하는 미신이 파괴하는 미신보다 더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256-7)


제3부 국민의회의 새 국가 건설 사업


"국민의회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했던 모든 일이나 계속하는 모든 일은, 가장 통상적인 기술에 속한다. 그들은 야심가 선조들이 그들에 앞서 했던 그대로 나아간다. 그들의 모든 책략, 기만 그리고 폭력의 자취를 추적해보면,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이 폭정과 찬탈의 정식 방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적은 결코 없다. 공공선과 관련된 모든 규칙에서는 그들의 정신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전체를 시험해보지 않은 사변의 처분대로 맡겨버렸다. 그들은 공중의 가장 소중한 이익을 산만한 이론에 맡겨버렸는데, 자신들의 개인적 이해관계에서는 그들 중 누구도 이론에 맡긴 바가 없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그들이 권력을 획득하고 확보하려는 욕망에 완전히 열성적이어서, 이미 다져놓은 길로 걸어가기 때문이다. 공공이익에 관해서는, 전부 우연에 내맡겨버렸다. 내가 우연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의 계획은 경험상 그 경향이 유익하다고 증명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267-8)


"나는 국민의회의 민중 지도자들 가운데는 상당한 재능의 소유자도 있다고 확신한다. 그들 몇몇은 연설과 저술에서 유창함을 보였다. 이러한 유창함은 풍부하고 연마된 재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유창함은 그에 비례하는 정도의 지혜를 동반하지 않고도 갖출 수 있다." "체제 그 자체를 시민의 번영과 안전을 확보하고 국가의 힘과 위엄을 증진하기 위해 구성된 하나의 국가 계획으로 보았을 때, 종합적이며 적절한 정신 작업이라거나, 심지어 통속적인 신중함이라도 나타내는 그 어떤 것은 단 하나의 예도 발견할 수 없었음을 나는 고백한다. 그들의 목적은 어디서나 곤란을 회피하고 빠져나가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난관은 엄격한 교사다. 그들이 탈피하기보다는 회피했던 난관이 그들의 길에 다시 나타난다. 곤란은 증가하고 무성하게 그들을 덮친다. 그들은 혼란된 세부 사항들의 미로에 부딪혀 방향을 잃고 끝없는 수고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그들의 일 전체가 위태롭고, 타락하고, 불안정하게 된다."(268-70)


"보존과 개혁을 동시에 하려는 것은 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오랜 제도의 유용한 부분들이 유지되며, 그 위에 덧붙여진 것이 보존된 것에 적합하게 되기 위해서는 활발한 정신, 꾸준하고 끈기 있는 주의력, 비교하고 결합하는 여러 능력 그리고 방편이 풍부한 이해력이 제공하는 자원들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러한 자질은 반대편 해악의 결합 세력과 계속 싸우면서 발휘되어야 한다. 또 모든 개선을 거부하는 완고함과 소유하는 것 모두에 대해 염증을 내고 혐오하는 경솔함과도 싸우면서 발휘되어야 한다." "이런 식의 진행은 의심할 여지 없이 속도가 느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걸려야 한다." "생명을 지니지 않은 물질을 처리하는 데에서조차 조심하고 주의하는 것이 지혜의 일부라고 한다면, 우리가 파괴하고 건설하는 것이 벽돌과 재목이 아니라 민감한 존재여서 그들의 상태와 상황 그리고 습관을 갑자기 변경하면 다수가 비참해질지 모르는 경우에, 조심과 주의는 진정 의무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271)


"고대의 공화국들을 조형한 입법자들은 자신들의 업무가 힘든 일이어서, 대학생 수준의 형이상학이나 소비세 담당관 수준의 수학과 산술 같은 도구로는 도저히 완수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들은 인간을 다루어야 했으며,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시민을 다루어야 했으며, 시민이 생활하는 환경 속에서 전달되는 습관에 대해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이 2차적 본성이 1차적 본성에 작용하여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인식했다." "반면 프랑스의 권력자들은 형이상학을 많이 가졌는데, 그것은 나쁜 형이상학이다. 기하학을 많이 가졌지만 그것은 나쁜 기하학이다. 비례산술을 많이 가졌지만 그것은 잘못된 비례산술이다." "그들이 사람들을 대규모로 재편하는 일에서, 도덕과 관련된 어떤 것이나 정치와  관련된 어떤 것을 참조한 바는 무엇이 되었든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인간의 관심사, 행위, 정열, 이익과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289-92)


"세심한 정확성을 지니고 인간의 도덕 상태와 경향에 따르던 몇몇 고대 공화국 입법자들의 유능한 성향과는 매우 달리 그들은 발견되는 모든 위계를 평준화하고 한꺼번에 분쇄해버렸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계급화는 만일 적절하게 이루어졌다면, 모든 정부 형태에서 유익한 것이다. 그것은 공화국에 실효성과 영속성을 부여하는 필요한 수단임과 동시에 전제의 과도함을 막는 강력한 장벽을 구성한다. 이런 것 없이 만일 현재의 공화국 기획이 실패한다면, 절제된 자유를 위한 모든 보장도 함께 실패하게 된다. 전제정치를 완화하는 모든 간접적 규제도 제거된다. 그리하여 만일 프랑스에서 현재의 왕조든 아니면 다른 왕조 아래서든, 왕국이 세력을 다시 전부 키우게 된다면, 아마도 그 왕국─만일 국왕의 현명하고 도덕적인 의도에 의해 초기에 자발적으로 진정되지 않는다면─은, 지상에 출현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완전한 자의적 권력이 될 것이다. 이것은 가장 절망적인 게임이다."(294-5)


"무릇 군대는 이제까지 원로원이나 민중적 권위 기관에 대해서는 매우 위태롭고 불확실하게만 복종했다는 점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군대는 2년 동안만 지속되는 의회에 대해서는 거의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장교들이 중재자들이 행사하는 지배를 완벽한 복종과 적당한 존경을 지니고 대한다면, 그들은 군인의 특징적 성향을 완전히 잃었음이 틀림없다." "한 권위는 취약하고, 모든 권위는 부침을 거듭하는 속에서, 장교들은 한동안 불온한 채로 파쟁에 휩싸여 있을 것이다. 마침내 병사의 호감을 얻는 기술을 이해하고, 지휘의 진정한 기백을 갖춘 어느 민중적 장군이 출현하여 모든 사람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킬 것이다. 군대는 그 개인에게 복종할 것이다. 이런 사태에서는 군대의 복종을 확보할 다른 길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벌어지게 되면, 군대를 실제로 지휘하는 그자가 당신들의 주인이 된다. 당신네 왕의 주인, 당신네 의회의 주인, 당신네 공화국 전체의 주인인 것이다."(340-1)


"(능력과 요구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는) 좋은 질서는 모든 좋은 것들의 기반이다. 획득할 수 있기 위해서는, 민중이 굴종적이지 않되 온순하고 순종적이어야 한다. 정부 고관들은 존경받아야 하며, 법률은 권위를 지녀야 한다. 민중의 마음속에서 자연적 복속 원리가 인위적으로 근절되어서는 안 된다. 민중은 자신들이 한몫 차지할 수 없는 재산을 존중해야만 한다. 그들은 노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이 대개 그렇듯이 성공이 노력에 비례하지 않음을 알게 되면, 위안은 영원한 정의가 행하는 최종 분배에서 얻어야 한다고 배워야 한다. 이 위안을 빼앗는 자는 그들의 근면성을 꺾으며, 모든 보존과 함께 모든 획득의 뿌리에 타격을 입힌다. 이러한 행위를 하는 인물은 가난하고 비참한 자들에 대한 잔인한 압제자이며, 무자비한 적이다. 동시에 그는 사악한 공상에 의해, 성공한 근면의 열매와 재산 축적을, 태만한 자들, 실망한 자들, 그리고 실패한 자들의 약탈에 노출시킨다."(373)


"나는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한 사소한 기교와 고안을 전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많은 중요한 사안을 실행할 수 있게 한다. 민중을 결합하게 한다. 노력하는 정신에 생기를 준다. 도덕적 자유의 엄격한 얼굴에 때때로 유쾌함을 퍼뜨린다. 모든 정치가들은 매력을 지니기 위해 희생해야 하며, 이성과 유순함을 결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행해지는 사업에서는, 이러한 모든 보조적 감정과 방책들이 별로 쓸모가 없다. 정부를 세우는 일에는 대단한 신중함이 필요치 않다. 권력의 자리를 안정시키고, 복종을 가르치면 일은 완수된 것이다. 자유를 부여하는 일은 더욱 쉽다. 지도할 필요가 없다. 고삐를 놓아버리는 일만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유로운 정부'를 형성하는 작업은, 즉 자유와 억제라는 이 반대 요소를 조정하여 하나의 일관된 작품 속에 가두는 일은 많은 사려, 깊은 성찰, 현명하고 강력하며 결합하는 정신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정신을 국민의회의 지도자들 속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375)


"나는 내 나라 사람들이 누구든 우리 이웃나라들에게 영국 헌정의 예를 추천하기 바란다. 나는 우리의 행복한 상태가 우리의 헌정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한 부분이 아니라 헌정 전체 덕분인 것이다. 변경하고 첨가한 것들과 더불어 몇 번에 걸친 검토와 개혁을 거치면서도 유지시킨 것에 크게 혜택받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것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키는데 진정 애국적이고 자유로우며 독립적인 정신을 발휘할 일들을 많이 발견할 것이다. 나는 변경을 배제하지 않겠다. 그러나 변경할 때에도 그것이 보존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나는 심대한 불만거리가 있을 때 비로소 치료책을 강구하게 될 것이다. 행동에 옮길 때, 나는 우리 선조들의 모범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수선을 할 때, 가능한 한 그 건물과 같은 방식으로 할 것이다. 현명한 조심성, 주도면밀함, 기질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인 소심함이 우리 선조들이 가장 결정적인 행동을 취할 때 지녔던 지도 원리들이었다."(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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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정치가는 어떻게 세상을 망치는가 - 조제프 푸셰 : 어느 기회주의자의 초상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강희영 옮김 / 바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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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어둠의 서막


"푸셰는 그의 생애 동안 그랬던 것처럼, 역사에서도 어디까지나 배후의 인물로 남아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얼굴을 내보이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속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거의 언제나 그는 사건의 내부에 있었고, 각 당파 안에서 익명의 껍질을 뒤집어쓴 채 마치 시계 내부의 기계장치처럼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활동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역사의 전면에서 재빨리 사라지는 그의 옆얼굴을 얼른 포착하려 해도 곧 포기해야 할 만큼 그는 자신을 숨기는 데 능숙했다. 설사 날쌔게 움직이는 푸셰의 옆얼굴을 붙잡았다 하더라도 처음 본 때와 그다음에 본 때가 일치하지 않았다. 이 얼마나 기묘한 일인가! 같은 피부와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인간이 1790년에는 수도원의 교사였고, 불과 2년 후인 1792년에는 교회의 겁탈자가 되었으며, 1793년에는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그로부터 5년 후에는 백만장자가, 그리고 10년 후에는 오트란토 공작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지 모른다."(8)


1 조제프 푸셰, 세상 밖으로 진출하다


"1770년경 프랑스에서 정신적으로는 이미 각성된 시민계급들은 조바심치며 바깥세상으로 나아갔지만 그들을 받아줄 수 있는 직장은 그다지 변변치 않았다." "제3계급에게 문이 열려 있는 곳은 교회뿐이었다. 아주 신분이 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정신의 왕국에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소년 조제프는 수도복을 입고 머리 한가운데를 삭발한 모습으로 다른 신부들과 함께 수도 생활을 했다. 외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오라토리오회 생활 10년 동안은 한 사람의 사제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더 높은 서품을 받지도 않았고, 어떠한 서원도 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빠져나갈 길을 열어놓고 변화의 가능성만은 남겨두고 있었다. 그가 후일 혁명, 총재정부, 통령정부, 제국, 왕국에 대해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그는 교회에 일시적으로, 그것도 잠시 동안만 있었을 뿐이다. 조제프 푸셰는 인간뿐만 아니라 신에게조차도 일생 동안 변함없는 충성을 서약하는 의무를 단 한번도 생각한 일이 없었다."(15-7)


"프랑스의 모든 근원을 뿌리째 뒤흔들게 될 대의원 집회에 나가기 위해 로베스피에르가 출발하자, 곧 아라스의 오라토리오회 수도자들도 '작은 혁명'을 일으켰다." "이 바람의 관측자는 사회적 폭풍이 프랑스로 몰려오고 있으며, 정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가야 할 곳은 오직 한 곳밖에 없었다 정치의 한가운데로! 그는 단숨에 수도복을 벗어던지고, 삭발했던 머리를 길게 기르고는 낭트의 용감한 시민들에게 정치 강연을 시작했다." "의회 선거가 공포되자마자 한때의 사제교사는 입후보자가 되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의원이 되려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푸셰는 선량한 유권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약속했다. 상업을 보호하고, 재산을 지키며, 법률을 존중하겠다고 서약했다. 낭트에서는 좌익보다는 우익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 강했기 때문에 그는 구제도에 대항하는 것보다는 질서를 문란케 하는 자들을 향해 격렬하게 욕하는 쪽을 선택했다."(21-3)


"이 영리한 남자는 어둠 속에 몸을 도사렸다 그는 권력가에게 접근하기는 했지만 모든 공공연한 권력, 눈에 보이는 모든 권력을 경원했다. 연단에서나 신문지상에서나 떠들썩하지 않게 위원회에 선출되기를 바랐다. 누구에게도 감시받는 일이 없고, 미움을 사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그늘 속에 숨어서 여러 사건을 통찰했다." "이렇게 흑막의 인물로 살아가는 것이 일생 동안 조제프 푸셰가 보였던 삶의 태도였다. 결코 표면상 권력의 소유자가 되지 않고 그러면서도 완전히 권력을 억제하고, 모든 끈을 끌고는 있지만 절대로 매사에 책임자가 되지 않는 것, 그것이다. 언제나 일인자의 배후에 숨어서 그를 방패로 삼으며 전면에 내세우다가 그 사람이 뛰어나가는 결정적인 순간에 거침없이 등을 돌리고 마는 것, 이것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역할이다. 정치 무대에서 아주 완전무결하게 간사한 이 사람은 스무 번 넘게 분장을 바꾸면서 공화당원으로서도, 국왕 밑에서도, 황제 밑에서도 많은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32-3)


"1793년 1월 16일, 예상을 뒤엎고 루이 16세의 '사형 집행'에 투표한 다음날, 푸셰는 선언문을 인쇄해서 발표했다. 그는 유권자들이 깊이 생각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먼저 덤벼들면서 거꾸로 그들을 공격하고 위협하려는 태도마저 취했다." "〈폭군의 여러 범죄행위는 명백하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분노로 가득 차 있다. 만일 그의 머리가 단칼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강도나 살인자가 모두 머리를 쳐들고 날뛰어도 별 수 없다. 그러면 가장 무서운 사회문란이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시대는 우리들 편이고, 지상의 모든 국왕에 반대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하루 전까지만 해도 확신에 찬 처형 반대의사 선언문을 호주머니 속에 준비하고 있던 이 남자는 처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치라고 성명을 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는 대중을 상대로 하는 정치적 순간에 모든 계산의 결정적인 분모는 대담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기적인 변절자의 계산은 옳았다."(41-2)


"이제 급진파 소속으로 지방에 파견의원으로 나간 푸셰는 그의 관할 지역인 루아르 강 남부의 낭트, 느베르, 물랭 등 여러 곳에서 미친 듯이 과격하게 행동하며 온건파에 맞서 호통을 치고 속사포 같은 포고로 그 지역을 뒤흔들었다. 부자와 겁쟁이, 얼간이, 잡종 패거리들을 난폭한 방법으로 위협하고, 부락에서 지원병을 강제로 끌어내어 연대를 조직해서 적과 싸우는 데 동원하기도 했다. 조직력과 재빠른 정세 파악에서 그는 매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철면피적인 언변에서는 단연코 모든 동료들을 능가했다." "리옹의 '훈령'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혁명정신에 따라 행동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공화국 법률을 지킨다면 공화국 국민에게는 어떠한 위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법률을 위반하거나 표면상이라도 그 목표를 넘어 이탈하는 자는 언제나 정당한 결말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한 자유는 더욱더 앞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46-8)


"그러나 조제프 푸셰는 격정의 탈을 쓰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언제나 변함없는 타산가이자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의회에 보고서를 보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국적인 상투어나 편지는 불환지폐와 함께 이미 오래전에 시세가 떨어졌으며, 사람들을 감탄시키기 위해서는 금속성 언어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징용한 군대가 국경을 향해서 진격하는 동안 교회에서 강탈한 물건에서 나온 모든 소득을 파리로 보냈다. 각종 상자 더미가 계속해서 의회로 운반되었다. 무엇보다도 공화국이 당장 현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지방에서 이러한 웅변적 포획물을 대의원들에게 보낸 것은 그가 최초이자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 새로운 유형의 활동력에 다른 의원들은 깜짝 놀랐고, 터질 듯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푸셰라는 이름은 이 시간부터 강철 같은 사람, 공화국에서 가장 두려움을 모르는 자, 가장 강력한 공화당원으로 불렸고, 또 그렇게 알려지게 되었다."(54)


2 리옹의 학살자


"혁명 지도자들은 피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도 피 흘리는 것을 강요당하게 된다. 그들은 정적을 몰아내고 규탄하기 위해 처형이라는 위협용 무기를 들이댔다. 살인이라는 용의 이는 한 번 살인을 이론적으로 시인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계속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가의 죄과는 피에 취한 것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말에 도취한 것이다. 그들은 다만 국민을 감격시키고 자신들의 급진주의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은어를 창조하여 끊임없이 배반자와 사형대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거칠고 자극적인 말에 도취된 민중이 얼이 빠져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착각한 〈과감한 조치〉를 요구하면, 지도자들은 배반자들을 단두대에 걸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에 반대할 용기도 없었을 뿐더러 단두대에 대한 자신들의 경고가 거짓이라고 책망 받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씻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68-9)


"조제프 푸셰 역시 리옹에서 왕당파 반동주의자들을 대상으로 무시무시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밤을 재현하면서, 스스로를 이렇게 변호했다. 〈재판소의 판결은 범인에게는 소름끼치는 무서움을 일으킬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동요하는 민중은 점차 진정되고 위로를 얻게 된다. 우리들이 죄인에게 단 한 번만이라도 은총의 영예를 배풀었다면 아마 민중들은 너무나도 부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단언하건대 우리들은 단 한 번의 은총도 허락한 일이 없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갑자기 푸셰가 태도를 바꾸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의회의 바람이 갑자기 변했다는 것을 그 특유의 민감한 감각으로 느꼈던 것이다. 얼마 전부터 그의 거친 사형집행의 나팔소리에 당연히 메아리쳐 돌아와야 할 반향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자코뱅당의 친구이자 무신론의 동지인 에베르, 쇼메트, 롱생 등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로베스피에르의 무정한 손이 모두의 입을 틀어막았던 것이다."(81-2)


"이미 다수당에 있지 않다는 오래 전부터의 불안감이 푸셰의 마음을 휘감았다. 테러리스트들은 물러났는데 더 이상 테러리스트가 될 필요가 있을까." "이전에 그는 팸플릿에서 교수대가 너무 느리게 움직인다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계속 작동은 하되 주저주저했다. 그 옛날 브로토 들판의 '국민축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미했다. 그 대신 푸셰는 갑자기 총구의 방향을 축제의 발기인과 명령의 집행관인 급진주의자들에게로 돌렸다." "그는 양쪽에 도박을 걸었다. 파리에서 지나치게 관대했다고 책임을 추궁하면, 그는 수천의 묘지와 파괴된 리옹의 건축물들을 가리킬 수 있었다. 또 자기를 학살자로 고발하면, 자신은 온건주의자이며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견책한 자코뱅 당원의 탄핵서를 끌고 와서 방패로 삼을 수 있었다. 그는 바람이 부는 대로 오른쪽 주머니에는 준엄하다는 증명서를, 왼쪽 주머니에는 온건주의자라는 증명서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82-3)


3 혁명과 반동: 로베스피에르와의 결전


"위대하고 순수한 이념이 1794년의 로베스피에르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던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더 적절하게 말하면, 그 이념은 살아 있지 않고 그의 마음속에 응고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이념이 그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헤어날 수도, 또 그 역시도 그 이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이것은 모든 독단적 정신의 운명이다. 이렇게 속을 터놓는 온정이나 매혹적인 인간성이 부족한 그의 행위에는 참다운 생산적인 힘이 없었다. 완고한 데에만 그의 강점이 있고, 냉엄한 데에만 그의 힘이 존재한다. 독재적인 것이 그에겐 생활의 뜻이고 형식이다. 이렇게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의 자아를 혁명과 일체화시키지 못하면 자아가 부서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남자는 어떠한 다른 의견을 허용할 수 없고, 누군가를 자기와 견주는 것을 용서치 못한다. 자기에게 반항하는 것은 더욱 견딜 수 없다. 자신의 견해를 거울처럼 반사하는 생쥐스트와 쿠통 같은 정신적인 노예에게만 참을 수 있을 뿐이다."(96)


"푸셰의 등골에는 공포가 스쳤다. 지형도 알지 못한 채 너무 깊이 파고들었으니 재빨리 후퇴하는 것이 좋다. 홀로 권력자를 상대로 싸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항복하는 것이 낫다. 푸셰는 후회하면서 곧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바로 그날 밤 로베스피에르의 집으로 가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용서를 구했다." "그 당시 푸셰가 로베스피에르에게 무엇을 말하고, 또 그의 '재판장'이 그에게 무엇을 대답했든 간에 이 두 사람의 대화는 결코 친절한 환대가 아니라 내리치는 듯한 무자비한 설교이며, 노골적으로 차가운 위협이자 일종의 결석재판의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격분에 떨면서 생토노레 거리의 계단을 내려온 그 남자, 굴욕을 당하고 거절당하고 위협당한 조제프 푸셰는 다만 자신의 목이 얼마간은 붙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이제 생사를 건 싸움이 시작되었다. 로베스피에르와 푸셰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결투가 시작된 것이다."(93-5)


"푸셰는 계획적으로 두더지처럼 지하에서 은밀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위원회를 방문하고, 의원들과 그 친지들을 찾아다니며 정중한 태도로 자신의 처지를 호소했다. 또 만나는 누구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자코뱅 당원들이었다. 그들과는 재치 있고 솔직한 말로 충분히 상통할 수 있었고, 리옹에서 이룬 성과도 어느 정도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분주히 돌아다니거나 산책하듯 배회하면서도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는 이 남자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며, 어떤 것을 계획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모든 사람들에게도 뜻밖이었지만, 특히 로베스피에게 그러했다. 9월 18일, 조제프 푸셰가 다수결로 자코뱅 클럽의 총재로 선출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소식을 들은 로베스피에르는 경련을 일으키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푸셰가 그렇게 대담한 일을 벌일 것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100)


"로베스피에르의 분노에 찬 연설은 명백하게 푸셰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말이었다. 이제 700명의 의원 중에서 푸셰는 가장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그가 당장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드디어 푸셰가 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그는 은밀하게, 그리고 차례로 의원들을 방문해서 로베스피에르가 준비하고 있다는 새로운 비밀징집 명부에 대해 넌지시 수군거렸다. 그리고 〈당신도 리스트에 들어 있습니다〉 혹은 〈다음 차례는 당신입니다〉라고 속삭였다. 급작스러운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하에서 퍼져나갔다. 고대 로마의 감찰관이었던 카토 같은 철저한 청렴결백 앞에서 완전히 깨끗한 양심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대의원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푸셰는 차례로 실을 풀어 새로운 그물코를 맺으며, 불신과 혐의의 이 거미줄 속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동분서주했다."(107-8)


"반동의 성공 이후, 예상과 달리 푸셰는 자코뱅당의 옛 좌석을 지켰다. 그는 정치적인 열정의 냉정함을 알고 있었다. 반동도 혁명과 똑같이 그 이빨을 뽑아버리지 않는 한 사람들을 마구 잡아먹으며 배를 채울 것이고, 최후의 자코뱅 당원이 법정에 끌려 나와서 공화국이 붕괴되기 전에는 반동의 복수심이 중단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기가 범한 살인죄로 인해 끊으려야 끊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는 혁명을 구할 수 있는 길이 단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시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다!" "당시 파리에서는 하층계급 출신의 프롤레타리아인 그라쿠스 바뵈프가 박해를 받고 있었다. 푸셰는 겉으로는 바뵈프와 제휴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은밀하게 민중을 자극하도록 바뵈프를 꼬드겼다. 그러나 바뵈프를 앞세운 푸셰의 대담한 반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알몸뚱이의 생명만을 부지했다. 그 후 3년 동안 프랑스에서 푸셰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126-8)


4 몰락과 부활: 장막 뒤의 권력자


"조제프 푸셰의 유배는 3년이나 계속되었고, 그가 추방되었던 절해고도의 이름은 빈곤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파견의원이었고 혁명의 향방을 좌우한 신분이었던 그가 권력의 최고단계에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진창과 수렁 속으로 몰락했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던 5인 회의인 총재정부에서 오래 전부터 바라스와 뜻을 달리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가장 올곧은 사람으로 알려진 카르노였다. 바라스는 이 두 사람을 없애면 자신이 모든 권력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쿠데타를 계획하고 음모를 꾸미는 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이리저리 날뛰면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한 법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암살자와 도살자가 필요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 철학이 없으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적임자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푸셰가 아닌가. 이렇게 유배는 입신출세의 학교가 되었다."(136-9)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던 푸셰는 공화주의적인 양심 따위는 밑바닥에서부터 털어버렸고, 금전욕에 대한 증오도 다락방 굴뚝 밑에 걸어놓은 채 아예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와는 정반대 성격을 가진 새로운 상대들과 관계를 맺어나갔다. 그는 총재정부의 대표 격인 바라스의 옆방에 밀정으로 드나들며 새로운 권력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무차별의 빵'을 구워서 민중들과 함께 나누려 했던 1793년의 급진 공산주의자는 새로운 공화국에서 은행가들의 친구가 되었고, 좋은 보수를 받는 대가로 그들의 여러 소망과 사업을 돌보아주었다." "성가신 감시자들을 모두 처치한 프뤽티도르(열매달, 프랑스 혁명력의 12월) 18일에 일어난 바라스의 쿠데타 때 오로지 푸셰만이 지하운동을 통해 그의 동업자를 도왔던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렇게 후원자 바라스가 새롭게 조직된 총재정부에서 독재군주가 되자 이제까지 남의 눈을 꺼리던 푸셰는 요란스럽게 덤벼들며 당당하게 보수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141-4)


"조제프 푸셰가 대신이라고! 파리는 포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모두 경악했다. 리옹의 학살자, 성체 모독자, 교회 약탈자, 무정부주의자, 바뵈프의 친구······." "그런데 이상하게도 며칠 후 혁명파, 반동파 모두에게 '이번 경무대신이 정말 조제프 푸셰라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대신이 된 자코뱅 당원은 더 이상 자코뱅당의 대신이 아니라는 미라보의 명언이 진리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그전에는 피에 젖어 있었던 입술이 지금은 속죄의 언어로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질서, 평온, 보안 같은 관용어가 예전 테러리스트였던 푸셰의 경무부 고시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었고, 무정부주의를 탄압하는 것이 그의 첫 번째 구호로 등장하였다. 언론의 자유는 제한되었고, 무제한의 선동 연설도 종말을 고하였다. 첫째도 둘째도 질서와 평온과 보안이다. '리옹의 학살자' 조제프 푸셰보다 더 보수적인 훈령을 내린 사람은 없었다."(146-7)


"그는 때로는 음모를 조장하고 때로는 음모를 방해했다. 때로는 교묘하게 선동하고 때로는 떠들썩하게 적발했다. 그와 동시에 음모에 가담한 자들에게 시기를 놓치지 말고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언제나 그는 이중, 삼중, 사중으로 안전장치를 해놓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기만하고 우롱하는 것이 점차 그의 정열이 되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정력과 시간을 많이 투입해야 했지만,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는 '노동자' 푸셰는 그런 것 따위는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정치의 비밀을 들여다보는 것을 허락하기보다는 차라리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사무실에 앉아서 모든 서류를 살펴보고, 보고사항을 하나씩 처리해나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모든 중대한 사항은 자기만의 밀실에 들어 앉아 문을 잠그고 혼자 조사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서서히, 어느 누구로부터 임명받지 않았음에도 프랑스 전역의 '고해신부'로서 모든 인간의 비밀을 수중에 넣게 되었다."(153-4)


"그는 권력을 은밀하게 누릴 줄 알았고, 그 권력을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는 나름의 비결도 알게 되었다. 강압적이었던 혁명 친위대가 총검을 빼들고 최고 권력자, 즉 파견의원의 집을 지키던 리옹 시대는 지나간 일이 되었다. 지금은 포부르 생제르맹의 귀부인들이 그의 객실로 몰려들고, 흔쾌히 면회가 '허락되는' 시절이다." "푸셰는 모두에게 똑같이 친절한 인상을 주는 인물로 변신했다. 내일 당장 어느 당파가 정권의 키를 잡을지 알지 못하는데, 자코뱅당이든, 왕당파든, 온건파든, 혹은 보나파르트든 간에 불쾌하게 대할 필요가 있겠는가? 옛날 사람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테러리스트는 이렇게 매혹적이고 융화적인 인물로 바뀌었다. 공개적인 연설과 정치적 성명을 통해 왕당파와 무정부주의자들을 가열차게 비판했지만, 뒤돌아서서는 은밀하게 그들에게 경고를 보내거나 매수하기도 했다. 그는 시끄럽게 법적 절차를 밟거나 잔인한 사형선고를 내리는 일은 피했고, 폭력 대신 폭력을 가할 듯한 제스처로 만족했다."(154-5)


"이런 가운데 조제프 푸셰는 총재정부의 운명이 멀지 않다는 것을 예감했다. 난세가 되면 사람들은 영웅을 갈구한다. 모든 사람의 눈에 칼과 두뇌, 두 가지 모두를 한 몸에 겸비한 유일한 남자는 보나파르트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1799년 10월 11일, 보나파르트는 독단적으로 이집트에서 돌아와서 프레쥐스에 상륙했다. 민중은 그를 개선장군으로 환영했다." "훗날 보나파르트가 세인트헬레나에서 술회한 바에 따르면, 두 시간 동안의 첫 대화에서 푸셰만큼 딱 들어맞고 일목요연하게 프랑스와 총재정부의 전체 사정을 설명해준 사람은 그 당시에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정직하게 털어놓는 일이 거의 없었던 푸셰가 왕위를 노리는 보나파르트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는 것은 그가 이미 모든 것을 이 사람의 자유에 맡기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사람의 역할은 정해졌다. 주인과 하인, 세계의 형성자와 시대의 위정자로서 그들의 공연은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었다."(157-62)


5 황제와 신하: 적대적 공존


"두 사람 사이에 친숙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푸셰가 나폴레옹에게 유쾌한 신하가 아닌 것처럼 나폴레옹도 푸셰에게는 유쾌한 주군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푸셰의 충성심을 단 한순간도 믿지 않았다." "수많은 문서에서도 드러나듯 나폴레옹은 부관과 고문관 앞에서도 푸셰를 가차 없이 꾸짖었다. 입에서 거품을 내뿜을 만큼 극도로 분노해서 리옹 사건이건 그의 테러리스트 시대의 일이건 모조리 끄집어내서 푸셰를 배반자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당신은 배반자야! 확 총살했어야 했어!〉라고 황제가 호통 칠 때도 그는 말투 하나 바꾸지 않고 〈폐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수백 번의 해직 예고는 물론이고, 추방과 파면 협박도 받았지만 황제는 내일이면 다시 자기를 불러들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는 태연히 방을 떠났다. 언제나 그가 옳았다. 분노하고 믿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그를 미워했지만 나폴레옹은 마지막 순간까지 푸셰를 완전히 내칠 수 없었다."(205-7)


"전쟁은 나폴레옹을 위대하게 만들었고, 그를 미천한 지위에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점점 더 전쟁을 원했고, 한층 더 강력한 적이 출현하기를 바랐다." "해가 거듭될수록 전국 각 도시의 성문에 붙은 장정들의 징집 명단에 따라 18세가 19세의 젊은이들이 집에서 끌려 나와 포르투갈 국경이나 러시아의 눈 덮인 황무지에서 아무런 명분 없이 죽어가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의지 때문에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반항심은 거센 불길처럼 일어났다. 이렇게 해서 언제나 자기 자신의 별만을 쳐다보는 황제와, 조국의 피폐한 상황과 국민들의 비참한 처지를 경험한 사람들 사이에 점차 격렬한 대립이 벌어졌다. 전제군주가 된 나폴레옹은 대개의 독재자들이 그러하듯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충고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황제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미친 듯이 굴러가고 있는 이 수레바퀴를 어떻게든 멈춰 서게 할 수 있을지 은밀하게 숙고하기 시작했다."(211-3)


"같은 족속이면서 차이가 있는 친구보다 더 격렬하게 서로를 미워하는 자는 없다. 탈레랑과 푸셰는 내적인 본능으로 상대를 혈육처럼 세밀하게 알게 됨으로써 상대편을 꺼리고 외면했다." "그들은 독설의 칼로 서로를 마구 찔러댔다. 두 사람이 서로 원한을 품고 증오하는 것이 나폴레옹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수백 명의 근면한 밀정이 감시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두 사람을 감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해 동안 파리 사람들은 두 호적수의 끈질긴 적대관계를 보며 즐거워했고, 옥좌 곁에서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어가며 연출되는 광경을 몰리에르의 희극을 보는 것처럼 흥미롭게 관찰했다. 두 신하는 끊임없이 서로를 비꼬았으며, 신랄한 기지로 서로 비방했다." "그런데 모두가 좀 더 재미있는 개와 원숭이 싸움을 기대할 즈음, 갑자기 두 배우는 서로 역할을 바꾸어 진지한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갖고 있던 주군에 대한 분노가 처음으로 둘의 경쟁의식보다 더 커졌던 것이다."(217-9)


6 권력투쟁: 황제에게 맞서다


"(황제의 뜻을 거스르고 독단적으로 영국과의 강화회담을 진행하던) 푸셰의 면직은 곧 세상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렇지만 여론은 그의 편이었다. 혁명으로 지위가 높아진 한 남자가 '단독'으로 '제정'에 홀연히 반항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억압의 사슬을 타파하고 자유의 공기를 맛본 프랑스 국민에게 제정이란 이미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표리부동한 이중인격자에 불과한 푸셰에게 그렇게 많은 동정이 쏠린 것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황제의 뜻을 거역한 것은 사실이지만, 영국과 강화를 맺으려 했던 푸셰의 노력이 처벌을 받을 만한 범죄였다고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다. 왕당파는 물론 공화주의자들과 자코뱅당, 외교 사절들마저도 이구동성으로 나폴레옹 휘하의 아량과 능력을 겸비한 대신의 실각은 평화사상의 명백한 퇴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황제의 질투가 한 남자의 사회적 명성을 보여주었다는 사실보다 당시 프랑스의 분위기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249-50)


7 생존을 위한 줄타기


"나폴레옹은 자신의 바람을 성취하였고, 권력은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황제의 사위이며, 로마 국왕의 아버지였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주들은 황송하게도 자신들의 크고 작은 왕관들을 거두어들이지 않은 나폴레옹의 자비로움에 감사해하며, 그 앞에서 강아지처럼 비굴하게 꼬리를 흔들고 알랑거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적인 영국도 나폴레옹의 위세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조제프 푸셰 같은, 능력은 뛰어나지만 신뢰할 수 없는 보좌진 정도는 미소를 지으면서 단념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군주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마음 편히 명상에 잠길 시간을 충분히 갖게 된 오트란토 공작(푸셰)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권력자인 나폴레옹과 힘으로 겨루려 했던 자신의 실책과 불손을 깨닫게 되었다." "푸셰에게는 황제에게 미움 받고 있다는 영예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푸셰는 이미 처리된 것이다. 황제에게 공공연히 반항한 이 남자에게 파리와 튀일리궁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269)


"나폴레옹이 푸셰에게 다시 한번 관직을 제안한 것은 결코 그를 좋아하거나 신뢰해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파탄이 날 대로 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관직을 제의한 것은 급작스럽게 찾아온 불안감 때문이었다. 황제는 처음으로 패배자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군대의 선봉에 서서 말을 탄 채 거드름을 피우며 환영 깃발에 둘러싸여 개선문을 통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기 위해서 털가죽을 턱 위까지 둘러 얼굴을 가리고 야음을 틈타 남몰래 들어온 것이다. 나폴레옹은 휘하의 가장 막강했던 정예부대 병사들이 러시아의 눈보라 속에서 동사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언제나 승리한다는 신화가 무너지자 가장 가까운 친구들부터 등을 돌리고 달아나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고개를 숙이면서 엎드려 절하던 주변 나라의 군주들은 대패한 황제 앞에서 체면을 차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무력으로 압박당하고 있던 한 세계가 그 가혹한 군주에 대항해서 일어났다."(272-3)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파리는 성문을 활짝 열었다. 적군이 프랑스를 점령했다. 나폴레옹은 폐위되고 루이 18세가 왕위에 올랐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영국 연합군이 파리를 향해서 진격하고 있는 동안 푸셰는 황제의 의도에 따라 국내 정치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 결국 새 정부는 탈레랑의 영도 하에 완전히 새롭게 조직되었다. 이전 정부에서 파문당했던 탈레랑은 필요한 때 그 자리에 있었고, 푸셰보다 더 민첩하게 수완을 발휘해서 간판을 바꿔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러시아 황제가 탈레랑의 집에 머물고 있는데다 루이 18세도 그를 선임하고 있었기에 탈레랑은 자신의 뜻대로 내각의 모든 자리를 채울 수 있었다. 그동안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일리리아와 이탈리아를 분주히 오갔던 오트란토 공작에게는 그 어떤 자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도 기다려주거나 걱정해주지 않았다. 푸셰는 인생의 어떤 한때처럼 다시 야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282-3)


8 백일천하: 푸셰, 권력의 정점에 서다


"1815년 3월 20일 아침, 엘바에서 귀환한 나폴레옹 황제의 백일천하의 첫날 아침이 밝았다. 수천 명의 환호성이 아직도 그의 핏속에서 일렁이고 있지만, 이미 냉정한 현실을 달관으로 체득한 나폴레옹은 승리 속에 숨어 있는 위험을 내다보고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권좌에 오르기보다는 오랫동안 그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토록 등을 보이고 싶지 않고 미워하는 푸셰지만, 지금처럼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인물은 푸셰밖에 없다는 것이 나폴레옹의 생각이었다." "오트란토 공작을 경무대신에 임명한다는 기사를 실은 관보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상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푸셰는 자신의 기대가 어긋났다는 사실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경무대신이라니!" "이제는 세계를 무대로 한 더 큰 도박만이 그를 자극할 수 있었다. 대륙의 여러 나라의 운명을 판돈으로 거는 도박이 아니면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299-301)


"푸셰는 지극히 불만스러웠지만 경무대신직을 받아들여야 했다. 다른 선택은 없었다. 이 야심만만하고 열정이 끓어오르는 도박사에게도 치명적인 결점이 하나 있었다. 도박판에서 내려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생을 건 이 거대한 도박판의 밖에 서 있을 수도, 게다가 단 한 시간이라도 방관자로 있을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푸셰의 말과 행동에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메피스토펠레스적인 그의 비범한 능력에 대해서만큼은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천재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평범함이다. 푸셰는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그에게 기만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나폴레옹은 자기를 진정으로 아는 자는 푸셰라고 생각했다. 목마른 자가 독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물에 손을 내미는 것처럼 나폴레옹은 충실하고도 무능한 사람보다는 차라리 교활하지만 믿을 수는 없는 남자를 원했던 것이다. 이처럼 10년 동안의 격렬한 적의가 인간과 인간을 결합시켰다는 사실이 어중간한 우정보다 더 신비스러울 때가 가끔 있다."(302-4)


"1815년의 나폴레옹은 이름만 남은 껍데기 황제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이 이름뿐인 권력의 옷을 입고 있는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 비해 그의 곁에 있던 푸셰는 힘이 있는, 말 그대로 숨은 권력자였다." "불꽃처럼 타올랐지만 결국에는 혼란의 바람에 흔들리는 믿을 수 없는 나폴레옹의 천재성보다는 푸셰의 냉정하고 타산적인 이성이 피로에 지쳐 평화를 갈망하는 세계 사람들에게 더 많은 확신과 안심을 주었던 것이다." "프랑스 황제가 보낸 밀사들이 가차 없이 체포되고 투옥되었던 그 삼엄한 국경이 오트란토 공작의 밀사에게는 마법의 열쇠라도 닿은 것처럼 쉽게 열리곤 했다. 웰링턴, 메테르니히, 탈레랑, 오를레앙, 러시아 황제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권력자들도 푸셰의 밀사를 정중하게 맞아들였다. 이제까지 사람들을 속이고 이용하기만 했던 이 남자는 단번에 세계를 무대로 한 도박판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도박꾼이 된 것이다. 그가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여도 사건은 의도한 대로 처리되었다."(308-9)


"그런데 푸셰가 다른 나라, 즉 적들과 공공연하게 내통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해, 주변국이 나폴레옹을 배제한 채 푸셰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게 아닌가. 이는 유럽 열강들은 프랑스에서 어떠한 정부 형태가 성립되든 동의할 수 있지만, 다만 한 가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정부만은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는 뜻이다." "자기에게 이처럼 대담하게 도전한 남자를 나폴레옹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물론 푸셰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 20년 전인 1793년으로 돌아가보자. 그때도 당시의 최고 권력자인 로베스피에르는 2주일 후에는 푸셰의 목이든 자기의 목이든 둘 중 하나는 떨어져 나가지 않을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도박사 기질을 지닌 오트란토 공작은 그때도 자신에 차 있었다. 나폴레옹의 화를 돋우지 말라고 충고하는 친구에게 푸셰는 로베스피에르 때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때 떨어져 나간 것은 그의 목이었소.〉"(320-3)


"(나폴레옹을 퇴위시킨 후) 푸셰는 자신이 옳고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그 한 가지를 실행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의회에서는 나폴레옹의 아들을, 카르노 앞에서는 공화제를, 동맹군 앞에서는 오를레앙 공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은밀하게 그 이전의 국왕, 즉 루이 18세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조금씩, 그러나 능숙하게 방향을 돌림으로써 자기와 가장 가까운 동료들조차도 어디를 향해 가는지 그 방향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부패와 뇌물이라는 거대한 수렁의 늪을 지나서 왕당파 쪽으로 헤엄쳐 건너가고 있었다. 의회에서는 보나파르트파와 공화파를 넘나들면서 자신에게 위임된 정부를 부르봉가에 넘기기 위해 교섭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해결법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를 이전 국왕에게 넘겨주는 협약을 통해 외국 군대에 유린된 프랑스를 보호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339)


"푸셰는 루이 18세가 자신을 새로운 정부의 내각에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약속만 하면 언제든지 파리 성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의사를 명확히 했다." "파리의 어둠 속에서 근세사의 가장 파렴치한 거래가 전 자코뱅 당원과 전 국왕 사이에 비밀리에 성립되었다. 튀일리에서는 셰익스피어 작품에서나 나올 법한 환상적인 부조리극이 펼쳐졌다. 루이 16세의 후예이자 그 동생인 루이 18세가 푸셰를 맞는 생각지 못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푸셰가 누구인가. 그는 루이 16세를 시해한 자들과 공범이며, 왕정 이후 공화국에서 대신을 지냈으며, 무엇보다 일곱 번이나 서약을 어기고 배신한 자가 아닌가. 게다가 얼마 전에는 직접 체포명령을 내렸지만 담벼락을 타넘고 도망쳤던 자가 아닌가. 그래서 루이 18세는 〈그놈처럼 교활하고 약삭빠른 놈은 이 세상에 다시없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푸셰는 루이 18세에게 충성을 다짐하겠다는 여덟 번째 서약을 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345-6)


9 실각과 종언: 역사의 복수


"권력은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지만 지나치면 반발이 뒤따른다. 국왕이 파리에 무사히 입성하려면 푸셰를 경무대신에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한 귀족들이 적지 않았다. 실제로 국왕은 파리에 입성할 때 유혈 참사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얼마나 조바심을 냈던가. 그런데 지금은 바로 그 귀족들이 돌변해서 오트란토 공작에게는 눈곱만큼도 호의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태도를 취했다. 리옹에서 수백 명의 성직자와 귀족들을 학살하고, 루이 16세 처형에 가담한 푸셰만큼은 결코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오트란토 공작은 언젠가부터 국왕 주변의 귀족들이 자기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멸시하는 태도로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리옹 학살자에 대한 탄핵 문서가 갑자기 등장하고, 복고 프랑크당과 갑작스럽게 출현한 '애국단체'들이 집회를 열어서 〈백합기는 과거의 오점을 걷어내고 새롭게 순화되어야 한다〉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푸셰는 결사적으로 저항했다."(358)


"그러나 이 노회한 야심가도, 국가를 판돈으로 걸었던 대담한 도박꾼도, 더없이 교활한 인간도 배우지 못한 것이 있었다. 사실 그것은 아무도 배울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 유령과 싸우는 법이었다. 푸셰는 왕궁에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 같은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왕투아네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며, 일가 중에서 학살을 면했던 단 한 사람, 바로 앙굴렘 공작부인이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죽이는 데 가담한 공범자인 푸셰에게는 결코 손을 내밀지 않으리라 맹세했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공간에 머무르지도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대신과 귀족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푸셰를 멸시하고 증오감을 표출했다." "그녀가 변절자를 공개적으로 조롱하고 경멸하자 다른 사람들도 푸셰의 존재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마침내 왕족 모두가 루이 18세에게 이구동성으로 국왕의 주권이 확립된 지금 튀일리궁에서 푸셰를 내쫓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하기에 이르렀다."(360-2)


"다시 세상에 내던져진 푸셰에게 얇은 외투라도 걸쳐주기 위해서 지극히 형식적이긴 하지만 작은 직책이 주어졌다. 관보에는 오트란토 공작이 경무대신 직위에서 파면되었다는 사실은 제외하고, 드레스덴 궁전의 공사로 임명되었다는 소식만을 실었다." "의회에서는 아무도 오트란토 공작의 공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이름의 한 고관이, 새 국왕 루이 18세가 의기양양하게 환호 속에 파리로 귀환하게 했다는 사실은 모두 잊어버렸다. 그들 모두는 다만 일개 시민 푸셰, 1792년 국왕의 처형에 가담한 푸셰, 리옹의 학살자 푸셰만을 입에 올릴 뿐이었다. 마침내 32대 334라는 절대다수로 〈하느님으로부터 선출된 국왕에게 맞선〉 푸셰는 특사로서의 모든 은전을 박탈하고, 평생 동안 프랑스에서 추방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는 당연히 공사 직책에서도 파면당했다는 것을 뜻했다. 모든 직책과 권리를 박탈당한 푸셰는 일말의 동정도 없이 멸시와 조롱을 받으며 한발에 걷어 채여 차가운 거리로 쫓겨났다."(366-7)


"이렇게 오트란토 공작은 세상에서 잊혀졌다. 그 때문에 메테르니히가 1819년에 오트란토 공작에게 트리에스테 이주를 허락했을 때에도 몇 명의 오스트리아 경찰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를 주의해서 보는 사람이 없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 정도의 자비는 베풀어도 된다는 것을 메테르니히는 알고 있었다. 일하기 좋아하고 쉴 줄 몰랐던 푸셰에게 아무런 기약 없는 무위도식의 나날은 30년 동안의 격무보다 그를 더 지치게 했고 심신의 손상을 입혔던 것이다. 그의 폐는 나빠지기 시작했고, 험한 기후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메테르니히는 그에게 태양빛이 비추는 곳을 죽을 장소로 허락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트리에스테였다." "북해의 어느 항구에서 태어나 기이하고 숙명적인 생애를 살아온 푸셰는 1820년 12월 26일, 남해의 도시 트리에스테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12월 28일, 이곳저곳으로 불안하게 쫓겨 다니다가 결국 추방당했던 이 남자는 마침내 영원의 안식을 찾았다."(3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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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
김응종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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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혁명과 반혁명


1 인권선언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의 드라마이다. 1791년 헌법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793년 헌법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795년 헌법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와 의무선언〉 세 인권선언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개념은 자유, 평등, 소유권이다. 1789년 인권선언에서 '자유'는 '소유', '안전', '압제에 대한 저항'과 함께 자연권이라고 선언되었다. 평등은 권리의 평등으로 제한되었지만 소유권이 보장되고 권리가 평등한 상태에서 평등은 자유와 충돌하지 않았다. '소유권'은 〈신성하고 불가침적인 권리〉라고 재차 강조되었다. 1789년 인권선언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선언하여 구체제의 특권적인 신분사회에서는 벗어났으나 '자유'와 '소유권'으로 발생하는 경제적 불평등을 시정하려는 사회적 조치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인권선언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사회적 조치에 대한 많은 요구가 거부된 것은 1789년 인권선언이 부르주아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61)


"1793년 새로운 헌법은 파리 민중의 요구를 반영할 필요가 있었다. 〈공동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떠올랐으며 '평등'이 '자유'보다 우선적 지위를 차지했고 '소유'는 네 자연권 가운데 말석으로 밀려났다. 공적인 자유가 개인적인 자유보다 우선시되었고, 자유와 평등이 충돌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열월 정변' 이후 제정된) 1795년 헌법은 민중의 정치 참여와 독재자의 출현을 막는다는 목적 아래 제정되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와 의무선언〉이 되어 권리의 남용을 막고자 했으며, 자연권 개념이 삭제되어 〈자유, 평등, 안전, 소유〉는 사회적 권리로 강등되었다. '소유권'을 존중하는 것은 '의무'라고 규정함으로써 소유권을 강화했다. 1795년 헌법은 1791년 헌법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를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1795년에 혁명이 다시 부르주아 단계로 복귀하면서 혁명은 동력을 상실했다. 좌절한 혁명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나폴레옹의 독재였다."(62)


# 열월 정변 : 테르미도르 반동(reaction)을 가리킴


2 방데 전쟁의 폭력성


"방데 전쟁은 1793년 3월에 시작되어 1793년 12월 23일 사브내 전투로 끝났다. 역사적으로 논란이 된 것은 혁명정부의 가혹한 전후처리였다." "19세기 이래 프랑스혁명사를 지배해온 공화주의 역사가들과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방데 전쟁을 반혁명 전쟁으로 규정하고 방데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들은 방데 전쟁이 벌어진 시기의 공포정치는 외전과 내전의 시기에 국가와 혁명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받아들인 반면, 방데 전쟁의 폭력적인 전후처리에 대해서는 외면해왔다. 이들의 역사 서술에서 방데 전쟁이 차지하는 비중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균형을 잃었다. 이들과 달리 수정주의 역사가 프랑수아 퓌레는 공안을 이유로 폭력을 용서하는 것에 반대했다. 〈방데의 파괴와 동시에 진행된 방데인들의 대량살육은 공안이라는 이유로 사면될 수 없는 공포정치의 최대 집단학살이었다.〉 다만 퓌레는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는 시대착오적이고 부적절하다며 거부했다."(86-7)


"제노사이드 논쟁을 가열시킨 사람은 레날 세셰였다. 그는 방데 전쟁 이후 벌어진 전후처리는 공안위원회가 주도한 제노사이드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장클레망 마르탱은 공안위원회가 주도하지도 않았으며, 세셰의 주장은 역사적 비판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공격이라고 반박했다." "제노사이드를 〈집단의 전면적 혹은 부분적 학살〉이라고 정의할 경우, 방데 학살은 제노사이드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나 제노사이드의 범위를 이렇게 확대하면 사실상 모든 학살이 제노사이드에 속하게 되어 제노사이드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제노사이드는 '다른 종족의 전면적인 파괴를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학살'로 한정되어야 한다." "방데 학살이 제노사이드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논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폭력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프랑스혁명이 아무런 단절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구체제에서 자행되던 야만적인 폭력은 '자유-평등-형제애'를 외친 혁명가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던 것이다."(87-8)


3 리옹 반란


"파리에 대한 지방의 저항은 1792년 8월 10일 이후, 특히 9월 학살 이후 파리 민중이 국민공회를 무시하고 '주권'의 담지자임을 주장하고, 산악파 의원들이 이에 편승하면서 시작되었다. 보르도를 위시한 지방 대도시는 파리가 주권을 독점하는 데 반대했고, 프랑스 전체 국민의 대표인 국민공회가 주권의 담지자라고 주장했다. 연방주의 반란은 근본적으로는 주권의 소재를 놓고 벌인 투쟁이었다. 서부의 방데 전쟁이 지역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장기간 항전한 반면, 연방주의 반란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단명했다. 캉은 도주한 지롱드파 의원들이 주도했고 보르도는 지역 출신 지롱드파 의원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지롱드파의 반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마르세유, 리옹, 툴롱의 반란은 과격한 산악파에 대한 중산계급의 반란이라는 성격의 강했다. 계급전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특정 계급이 처벌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반란에 참여한 계급이 가장 가혹한 처벌 대상이었다."(115-6)


"연방주의 반란은 파리 정부를 크게 위협했다. 방데 전쟁과 대외전쟁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혁명은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 파리 민중의 사회적 요구도 과격했으며, 파리의 혁명군은 리옹의 전후처리에 동원되어 잔혹함을 과시했다. 콜로 데르부아와 푸셰는 리옹을 없애라는 혁명적 수사를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폴 핸슨은 다른 어떤 사건보다 연방주의 반란이 공포정치를 의사일정에 오르게 했다고 말한다. 공포정치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국가를 구하기 위해 취해진 불가피한 조치라는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공회가 방데 전쟁을 진압한 후 2만~4만 명의 양민을 학살한 행위나, 리옹에서 2천 명의 시민을 학살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것은, 팔머에 의하면, 〈무책임하고 통제불가능한 극단주의자들이 자행한 전제정치〉였다. 그것은 정상적인 국가의 처벌 수위를 넘어선 광적인 사회적 복수였다."(117-8)


4 슈앙 반혁명 운동의 여러 모습


"빅토르 위고의 《93년》은 엄밀히 말하면 서부의 반혁명 전쟁 가운데 슈앙 반혁명 전쟁을 다룬 책이다. 그는 두 반혁명 전쟁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성격의 저항으로 보고 있다. 슈앙 반혁명 전쟁을 제2의 방데 전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공화주의자 위고의 시선은 부정적이다. 그에게 서부의 반혁명 전쟁은 〈진리와 정의와 권리와 이성과 해방에 맞선, 당당하되 긴 무지의 저항〉, 중앙에 대한 지역의, 문명에 대한 야만의 저항이라는 오랜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저항,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이지만, 〈진보에 공헌한〉 저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고는, (공화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인) 고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고뇌한다. 〈도대체 인간을 변질시키는 것이 혁명의 목적이란 말인가? 가족을 파괴하고 인간성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혁명을 감행했단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1789년 혁명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지고의 실체들을 확인하기 위해서지 그것들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146-7)


5 가톨릭교회의 수난


"1789년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붕괴되고 공화국이 수립되자 오랜 기간 왕정과 공생해오던 가톨릭교회 역시 붕괴를 면하기 어려웠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과는 반대로, 프랑스혁명은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종교를 박해했다. 혁명은 선서 거부파는 물론이고 선서파도 박해했으며, 나아가 프로테스탄트교회, 유대교회 등 일체의 종교를 박해했다. 기존의 종교는 미신에 불과했고, 프랑스혁명이 계시이자 섭리이자 진정한 종교였다. 프랑스혁명이라는 종교는 '다른' 종교와 양립하기를 거부했다." "프랑스혁명은 종교를 종교 본연의 일에만 전념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세속화'라는 유산을 남겨주었다. 세속화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정치는 종교에 개입하지 않고 종교 역시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세속화는 이런 의미에서 종교가 정치라는 오염에서 벗어나 순수해진 것으로, 공포정치 시대에 극성을 부리던 파괴적인 탈그리스도교와 구분된다."(170-2)


6 '열월 정변'과 공포정치의 청산


"역사학에서 reaction이 반동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러시아혁명 이후다. 레닌이 죽은 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을 혁명을 '타락'시킨 새로운 열월파라고 비난했다. 프랑스혁명사의 자코뱅 해석에 의하면, 자코뱅과 산악파와 상퀼로트가 순수하고 강고한 혁명을 전개하던 혁명력 2년의 영웅적인 시기는 열월 9일에 파괴되었고 그 후 '반동'이 진행되었다. 반면, 수정 해석을 지지하는 역사가들은 〈열월의 반동〉 대신 〈열월 9일〉 혹은 〈열월파 국민공회〉 같은 용어를 선호하며, 열월 9일의 사건을 〈과거로의 회귀〉라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프랑수아 퓌레는 열월 9일을 혁명 자체의 끝이 아니라 민중적 형태의 혁명에 의해 감추어졌던 또 다른 형태의 혁명을 드러내준 사건으로 본다. 그의 유명한 표현에 따르면, 전쟁과 공포정치 때문에 궤도에서 이탈한 혁명을 본궤도로 복귀시킨 사건이었다. 박즈코가 열월의 사건을 혁명의 종식이 아니라 〈공포정치의 종식〉으로 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175-6)


"혁명력 2년 열월 9일,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파를 제거했다. 공포정치의 청산과 함께,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하는 데 앞장선 공포정치가들도 청산되었으며 민중운동도 쇠퇴했다. 전쟁, 내전, 공포정치에 지친 민중운동은 열월 9일 이전에 이미 동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열월파 국민공회는 통제경제를 폐지하고, 상퀼로트를 축출하는 등 민중운동을 억압했으나 민중의 저항은 약했다. 열월파 국민공회는 혁명력 3년 헌법을 제정하여 공포정치의 재림과 상퀼로트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해 온갖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혁명은 민중혁명에서 벗어나 부르주아 혁명으로 복귀했다. 열월파 국민공회 시기는 억울한 혐의자들을 석방하고, 지롱드파 의원을 복권시키고, 가톨릭교회에 대한 야만적인 박해를 중단하고, 방데인을 사면함으로써 내전을 완화시키고, 과격한 자코뱅 혁명가와 상퀼로트를 제거하는 등 사회를 안정시키고 혁명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노력한 시기였다. 한마디로 공포정치를 청산한 시기였다."(207)


2부 혁명가


7 라파예트─세 혁명의 영웅


"라파예트는 '혁명'과 '질서'의 조화를 잡으려고 노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동시대인들부터 현대인들에 이르기까지 양분된다. 라파예트에 대한 가장 유명한 평가는 그를 〈두 세계의 영웅〉이요 프랑스의 워싱턴으로 보는 것이다. 이 평가는 라파예트가 자유의 대의를 위해 헌신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1792년에 공화정이 수립된 후 혁명 프랑스를 탈출한 라파예트는 당시의 혁명가들로부터 혁명과 조국을 배신한 자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했다. 라파예트에 대한 또 다른 평가는 그의 성격과 능력에 대한 것이다." "19세기 공화주의 역사가인 미슐레를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가는 미라보와 나폴레옹의 평가를 수용하여 라파예트를 현실 정치와 사회적 갈등에 무지한 미성숙하고 무식하고 공상적이고 허영심 가득한 모험가로 보았다. 라파예트 전문가인 고트촉은 젊은 귀족 라파예트가 미국 혁명에 뛰어든 것은 화려하고 세련된 궁정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젊은이가 도피한 것으로 보았다."(239-40)


"역사가들과 달리 대중은 라파예트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2007년 라파예트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여 '두 세계의 영웅'을 팡테옹에 안치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라파예트가 자유의 대의에 헌신했음을 인정한다 해도, 혁명전쟁이 한창일 때 조국을 버린 사람이라는 사실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라파예트의 팡테옹 이장 시도는 무산되었다. '두 세계의 영웅'은 '자유'의 대의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연권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가 자연권 가운데 가장 소중하게 여긴 것은 자유였다. 그에게 '자유'는 종교와 마찬가지였다. 1790년 라파예트는 〈봉기는 인간의 권리들 가운데 가장 신성한 권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구체제의 폭정이건 자코뱅의 폭정이건 외국의 폭정이건 어디에서건 자유를 억압하는 폭정에 맞서 저항이라는 신성한 권리를 행사했다. 1793년 6월, 당시 감옥에 갇혀 있던 라파예트는 에냉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유를 〈나의 신성한 광기〉라고 소개했다."(241-2)


8 시에예스 신부─혁명의 시작과 끝


"시에예스에 따르면, 제3신분은 국가의 모든 생산을 담당하는 '모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단일 계급인가? 제3신분은 크게 부르주아와 비부르주아─도시 수공업자와 농민─로 구성된다. 여기에서 부르주아는 자본가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자본가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부르주아는 어원대로 도시bourg 거주민이라는 뜻이다. 중세 이래 구체제에서 부르주아는 시민권과 정치적인 권리를 가진 도시 거주민으로 '법적으로' 인정된 계급이었다. 부르주아의 18세기 의미는 도시에 거주하는 비귀족, 교양인, 부유한 토지 소유 계급이었다. 우리가 흔히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말할 때 그 부르주아의 의미는 자본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시민이라는 의미이다. 시에예스는 바로 이러한 부르주아 계급으로 태어났고 본인도 이런 의미로 그 단어를 사용했다. 시에예스가 혁명적 역할을 기대한 계급은 제3신분 모두가 아니라 제3신분 가운데 부르주아 계급이었다."(252-3)


"시에예스를 바라보는 역사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민중을 경멸하고 상황과 권력에 따라 변절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르주 르페브르는 시에예스를 주교가 되지 못해 귀족에 대해 반감을 가진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정치가라고 평했다. 로베스피에르가 말한 '두더지'라는 평도 유명하다. 그러나 시각을 바꾸어 부르주아 혁명의 관점에서 시에예스를 바라보면 다른 면이 보인다. 시에예스는 산악파와 상퀼로트가 지향한 직접민주주의에 반대했고, 그것의 토대가 된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적 덕에도 반대했다. 시에예스에게는 정치적 덕이 아니라 물질적 복지가 근대 유럽 국가의 목표였다. 시에예스는 혁명이 19세기와 20세기에 유럽과 유럽 이외의 지역에 전달한 대의제 관념을 가장 완벽하게 대변한 인물이었다. 시에예스는 루소와 달리 대의제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한다고 보았고, 이러한 사상은 뱅자맹 콩스탕 같은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269-70)


9 콩도르세─계몽사상가에서 혁명가로


"콩도르세는 계몽사상가들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이성주의자였다. 볼테르보다 과격한 반교권주의자였고 과격한 무신론자였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행복을 저해하는 장애물은 〈편견, 불관용, 미신〉이었다." "콩도르세는 보호무역주의자 네케르에 반대하여 튀르고의 중농주의를 지지했다. 그는 자유무역이야말로 인류의 진보에 필수라고 생각했다." "혁명 발발 후 콩도르세는 프랑스 전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도량형 단위를 통일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1791년 3월 26일 의회는 '미터'를 국가 도량형의 표준 단위로 결정했다. 콩도르세는 달랑베르의 뒤를 이어 《백과전서》의 편집에 적극 참여하여 수학 관련 논문 24편을 기고했다. 콩도르세를 통해서 수학과 통계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응용되는 근대적인 학문이 되었다." "콩도르세는 미국의 인권선언과 헌법이념을 지지했으며, 여성·프로테스탄트·유대인·흑인노예 같은 소수자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팸플릿들을 발표했다."(275-6)


"콩도르세의 계몽사상과 혁명사상은 그의 유작인 《인류의 진보에 대한 역사적 개요》에 종합되어 있다. 혁명이 폭력과 아나키의 위협을 받고 자신의 앞날에는 기요틴이 기다리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계몽사상가로서 인류의 진보는 계속될 거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간직했다." "'진보'가 콩도르세의 독창적인 개념은 아니다. 보댕, 파스탈, 데카르트 같은 프랑스 근대 철학자들은 인류의 역사가 진보한다고 생각했으며, 18세기의 사상가 가운데 카스텔뢰,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볼네도 진보를 지지했다. 특히 콩도르세의 정치적 멘토인 튀고르는 1750년 소르본대학에서 《인간정신의 연속적인 진보에 대한 철학적 개요》를 발표한 바 있다. 콩도르세는 섭리의 개념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완전히 세속적인 차원에서 '진보'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진보론에서 진보했다." "콩도르세 사후인 1795년에 출판된 《개요》는 계몽철학의 유언이었고 포스트 테르미도르의 참고서가 되었다."(297-301)


10 당통─구국의 영웅인가 부패한 기회주의자인가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동지이자 친구였다. 그들은 서로를 높이 평가하면서 혁명을 이끌어왔다. 그들은 〈혁명의 두 기둥〉, 〈자유의 두 기둥〉으로 불렸다. 19세기에 공화주의 전통은 당통을 복권시켰다. 미슐레는 1792년 여름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한 당통을 혁명의 화신이라고 평가했고, 당통의 죽음과 함께 공화국이 죽었다고 보았다. 에드가 키네는 당통의 〈대담함〉 연설에서 민중의 함성을 들었다. 그 무렵, 실증주의자인 콩트는 당통을 실증주의의 예언자로 묘사했다. 프랑스 계몽주의에는 볼테르의 부정적 합리주의, 루소의 종교성, 디드로의 원原실증주의라는 세 가지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혁명기에 각각 〈지롱드파의 회의주의, 로베스피에르의 신정정치, 당통의 갱생적 해방〉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갱생적 해방이란 그리스도교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제3공화국의 공화주의자들은 혁명의 공화주의적 화신이면서도 공포정치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을 찾았는데 당통이 그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333)


"로베스피에르는 '청렴지사'였다는 점에서 당통의 부패는 더욱 비교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당통은 부패했을까? 거의 모든 역사가는 당통이 돈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프랑수아 퓌레는 마티에가 입증한 자료들이 당통의 부패를 확인해준다고 인정했지만, 역사는 〈도덕의 학교가 아니다〉라며 당통이 혁명의 대의를 위해 기여한 바를 간과하지 않았다." "국가가 혁명과 전쟁이라는 위기에 빠져 있을 때 혁명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도덕'이나 '이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당통은 혁명을 이상주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거나 '덕의 공화국'을 건설한다거나 하는 천년왕국적인 관념을 가지지 않았다. 그에게 혁명은 인간의 조건을 현실적으로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현실에 발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적을 박멸하기보다 화합하려 했고,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려 했으며, 전쟁보다 평화를 원했다."(334-6)


11 로베스피에르─혁명의 수사학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을 루소와 동일시했다. 그가 쓴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장 자크 루소의 영혼에게 바치는 헌사〉는 정치적 유언같은 분위기를 띠고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헌신하겠다고 다짐하는데, 그가 꿈꾼 새로운 사회는 '덕'이 지배하는 사회이고, 그 '덕'은 〈신과 같은 분〉으로 추앙하는 루소가 제시한 것이다. 〈헌사〉에서 유독 《고백》만 강조한 것은 '박해받는' 루소의 이미지를 자기의 이미지에 투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로베스피에르는 루소가 동시대의 계몽사상가들로부터 박해받았듯이 자신도 동시대의 혁명가들로부터 박해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박해의식은 혁명이 심화될수록 그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혁명기의 일반적인 정신병리가 그렇듯이 로베스피에르는 의심, 불안에 시달렸으며 그럴수록 집요하게 음모를 고발했다. 그에게 비우호적인 매체들은 그를 〈정신병자〉, 〈광인〉이라고 부르는 등 그의 심리 상태를 의심하기도 했다."(341)


"로베스피에르가 요구하는 (정치적) '덕'은 국가의 법을 따르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바로 이 덕으로부터 공포가 나온다. 사적인 이익을 앞세우는 사람은 반혁명적이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된다. 평화시라면 이런 사람들은 정상적인 법 절차에 따라 재판받고 처벌받을 것이지만 혁명시에는 이러한 절차를 따를 수 없다. 〈신속하고 준엄하며 단호한 정의〉가 필요하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정부는 폭정에 대한 자유의 전제專制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자유의 전제〉라는 모호하고 모순적인 말은 자칫 로베스피에를 아나키스트 같은 자유주의자로 오해하게 할 수 있으나, 그가 말한 자유는 혁명기의 자유였고, 개인적인 자유나 시민적인 자유가 아니라 공적인 자유, 국가의 자유였다. 따라서 자유의 전제는 국가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반反자유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혁명가 로베스피에르에게 공포정치, 자유의 전제, 덕의 공화국은 동일한 수사였다."(363)


12 마라와 코르데─혁명의 두 순교자


"마라는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는 타인의 재산, 자유, 생명을 침해할 권리가 있다.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억압하고 노예화하고 학살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마라는 의회의 혁명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라는 《민중의 친구》를 간행하면서 철저하게 민중의 입장을 대변했다." '1793년 4월 5일 자코뱅 클럽 의장으로 선출된 후 마라는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지롱드파에 맞서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반혁명이 국민공회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봉기합시다. 예, 봉기합시다! 혁명의 모든 적과 혐의자들을 체포합시다. 우리가 절멸당하지 않으려면 모든 음모자를 가차 없이 절멸시킵시다. 뒤무리에가 왕정을 회복하기 위해 파리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지롱드파 의원 29명이 축출된 이후에도) 마라는 욕조에 들어가서도 쉬지 않고 국민공회에 보복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의원들은 마라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마라의 생물학적 생명은 물론 정치적 생명도 사실상 끝났던 것이다."(381-4)


"(마라를 살해한) 코르데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구국의 영웅이자 통합의 영웅으로 인식되었다. 코르데는 귀족이면서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에 공화파와 왕당파로 분열된 나라를 통합하는 인물로 기념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그리스도교 이름 Marie Anne Charlotte Corday은 쉽게 그녀를 공화국의 수호여신 '마리안'으로 변모시켰다. 코르데는 원했던 대로 마라를 죽였고 희망했던 대로 천사로, 잔다르크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가 기대했던 마라의 죽음과 함께 자유가 찾아왔는가? 마라는 이미 정치적 생명이 끝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다. 마라의 경쟁자들은 내심 마라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코르데는 본의 아니게 그들을 도와준 셈이 되었다. 코르데는 마라를 영웅으로, 자유의 순교자로 만들었고, 그의 숭배에 불을 붙인 것이다." "마라를 '민중의 친구'로, 코르데를 반혁명적인 왕당파로만 보는 것은 복잡한 역사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다."(411-2)


3부 혁명사


13 버크와 페인의 엇갈린 예언


"국민의회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며 〈인간의 자연적이고 양도 불가능하고 신성한 권리들〉을 선언했지만, 버크는 이러한 추상적인 계몽주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버크에게 자연법과 자연권은 형이상학적으로는 진리이지만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허위다. 국민의회 의원들이나 파리 민중같이 무지하고 천박한 사람들이 말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지혜가 없고 미덕이 없는 자유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있을 수 있는 모든 해악 중 최대의 것이다. 그것은 감독이나 규제가 없는 상태의 어리석음, 죄악, 광기이기 때문이다.〉" "버크는 10월 6일 사건에서 공화주의를 예감하며, 광신적인 혁명가들과 무지한 민중이 지배하는 '민주정'은 한 사람의 군주가 지배하는 전제정보다 훨씬 잔혹할 것임을 예견한다. 버크는 또한 프랑스혁명이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중의 자의적인 전제정으로 전락한 다음 최종적으로는 민중적 장군의 지배로 끝맺을 것임을 예언한다."(425-7)


# 10월 6일 사건 : 파리 민중이 왕과 왕비를 튈르리 궁에 감금한 사건


"페인은 시종일관 공화주의라는 시각으로 프랑스혁명을 바라본다. 페인이 생각하기에 정부 형태는 민주정, 귀족정, 군주정, 대의정의 네 종류가 있다. 공화정은 군주정을 제외한 다른 세 형태의 정부와 결합할 수 있는데 대의정과 가장 잘 어울린다." "페인은 미국 독립혁명을 이어받은 프랑스혁명이 유럽혁명 나아가 세계혁명의 기폭제가 되기를 기대했다. 그는 유럽의 모든 나라가 불법적인 전제군주에서 해방되어 공화국을 수립하면 전쟁이 사라질 것이라고 낙관했으며 '유럽의회'의 구성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혁명은 전쟁과 공포정치로 탈선했다. 혁명이 전쟁과 민중 개입을 유발해 공포정치로 탈선할 것이라는 혁명의 메커니즘을 내다보지 못한 페인에게 그것은 탈선이었다. 페인은 프랑스에서도 미국 독립혁명과 같은 공화주의 혁명이 성공하여 번영을 이룰 것으로 생각했으나 전통적인 왕국 프랑스와 신생국 미국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페인의 이상주의는 고상했으나 비현실적이었다."(442-3)


14 미슐레의 공화주의 프랑스혁명사


"미슐레가 시도한 공화주의 프랑스혁명사의 주인공은 (부르주아가 아니라) 민중이다. 민중이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민중은 언제나 선하고 언제나 옳다는 그의 민중관은 다분히 낭만적인 인식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9월 학살의 민중은 7월 14일의 민중이나 8월 10일의 민중과는 다른 민중이었다는 미슐레의 변론은 역사적이지 못하다. 민중은 처음부터 폭력적이었다. 루소를 비롯한 계몽사상가들이나 브리소를 비롯한 혁명가들은 민중을 덜 계몽된 존재로 파악했고, 그리하여 프랑스에서 공화정을 수립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인식했다." "미슐레는 혁명이 본궤도를 달리던 시기를 민중 혹은 민중과 엘리트가 함께 혁명을 주도하던 시기로 보는데, 바로 1789년 7월 14일부터 1792년 8월 10일까지이다. 민중이 혁명 전선에서 물러나고 엘리트 혁명가들이 혁명을 주도하면서 혁명은 궤도에서 이탈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한 공포정치 시기가 바로 그 시기이다. 미슐레는 이 두 시기를 대조적으로 바라본다."(464-5)


"미슐레는 〈의심〉, 〈질투〉, 〈고발〉, 〈무고〉, 〈비방〉, 〈독선〉, 〈위선〉 등과 같은 용어로 로베스피에르의 행동을 분석하며, 로베스피에르를 〈대고발자〉, 〈이단 재판관〉이라고 규정한다. 미슐레는 로베스피에르가 〈청렴지사〉라는 세간의 평가를 거부하지는 않으나, 이러한 도덕주의를 무기 삼아 〈내적인 숙정〉을 외치는 사람보다는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적과 타협하고 필요하면 매수하는 당통을 위대한 정치가로 보았다." "미슐레는 루이 16세의 처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당시 국민은 국왕 처형을 원하지 않았는데도 산악파는 다수파인 지롱드파에 대한 정치공세 차원에서 국왕 처형을 주장했고, 그 결과 왕을 순교자로 만들어 왕국을 신성하게 만들고 교회를 부활시킴으로써 공화정에 타격을 입혔다는 것이다. 루이 16세는 유죄였으나 〈당시로서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고, 처형은 국가 이익을 해쳤다는 것이 공화주의 혁명사가가 〈당시의 모든 역사가에 맞서서〉 국왕 처형을 비판한 이유이다."(463-4)


15 한나 아렌트와 프랑스혁명


"아렌트가 보기에, 프랑스혁명은 미국혁명과 마찬가지로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혁명의 길에 들어섰으나, 빈자들이 혁명에 개입하면서 '정의'가 '법'을 위협했고 역사적으로 누적된 고질적인 사회문제가 사회혁명을 일으켜 최종적으로 '자유의 전제', '덕의 공포', '공포정치'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은 공화국 체제의 수립이라는 정치혁명을 넘어 사회혁명으로 이어졌다는 이유로 진정한 혁명의 지위를 누려온 반면, 미국혁명은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독립에 그쳤을 뿐 혁명으로 진화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아렌트는 이러한 인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아렌트는 불평등, 빈민 등과 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한 혁명이 진정한 혁명이라는 통념을 거부하고 공화국의 수립을 진정한 혁명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미국혁명이 진정한 혁명이다. 프랑스혁명은 혁명의 모델이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러시아혁명이 프랑스혁명을 모델로 삼음으로써 그 역시 재앙으로 끝나고 말았다."(485-6)


16 알베르 소불의 마르크스주의 프랑스혁명사


"소불이 마르크스주의에 충실한 역사가라는 사실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소불이 근대의 농민을 중세의 농노처럼 묘사한 것, 귀족의 특권을 과장한 것, 부르주아 혁명의 성과에 대해 지나치게 인색한 것, 민중혁명의 폭력성에 대해 둔감한 것 등은 바로 이념적 편향성에서 나온 것이다." "소불이 외면한 것, 그것은 부르주아 혁명의 성과이고, '자유, 평등, 형제애'에 가려진 폭력이며, 롤랑 부인이 절규한 자유의 이름으로 자행된 〈범죄〉이다. 소불이 1791년 헌법을 부르주아 헌법이라고 폄하하고 1793년 산악파 헌법을 〈정치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적인 특징들을 확정지은 헌법〉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편파적이다. 1793년 헌법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졸속 제정되었고, 콩도르세 헌법안보다 민주주의가 후퇴한 헌법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 헌법은 헌법으로 시행하기에 적절하지 못했고 산악파 혁명가들에게는 의회 선거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시행이 유보되었다가 폐기되었다."(505-6)


"소불은 마라의 죽음을 애도하고, 로베스피에르를 〈어떤 상황에서도 통찰력 있고 단호하게 민중의 권리를 옹호했다〉라고 평가했다." "소불은 로베스피에르가 부르주아로서 노출한 모순과 한계를 그가 유물론자가 아니라 유심론자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러한 설명은 자신이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임을 노출하는 또 다른 편견이다." "소불은 마르크스주의 도식에 의거하여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규정하며, 부르주아 혁명에서 민중혁명으로 이행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주목한다. 그는 '자유의 전제'에서 희망을 본다. 그는 민중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혁명사를 해석하며 평가한다. 민중사가에 의하면 전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왕의 전제는 나쁘지만 민중의 전제는 그렇지 않다. 왕의 폭력은 나쁘지만 민중의 폭력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클로드 마조리크의 말대로 소불의 《프랑스혁명사》가 '고전'인 것은 맞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고전이다."(506-7)


17 프랑수아 퓌레의 수정주의 프랑스혁명사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개념으로 바라보면, 부르주아 혁명의 발발은 필연적이기 때문에 그만큼 구체제는 봉건적 생산양식의 모순이 축적된 위기의 시기여야 한다. 대부분의 프랑스혁명사 개설서가, 특히 마르크스주의 프랑스혁명사가 한결같이 '구체제의 위기'로 시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중세가 끝나고 300~400년이 지났음에도 혁명 전 프랑스 농촌은 여전히 가혹한 봉건적 부과조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여기에다가 혁명 전에 나타난 '귀족의 반동'은 구체제의 위기를 심화시켰다는 것이니, 봉건제를 타파하는 부르주아 혁명은 필연성과 정당성을 획득한다." "퓌레는 '상황론'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지만, 혁명 초부터 〈혁명은 전쟁이었고 평화는 반혁명이었다〉며 전쟁에 혁명에 내재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공포정치 역시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생겨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혁명에서 생겨난 필연적인 현상이라는 (퓌레의) 관점은 혁명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며, 반혁명파의 혁명관이기도 하다."(518-21)


"퓌레는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뿌리를 자코뱅주의에서 찾는다. 퓌레가 보기에, 러시아혁명은 자코뱅의 이데올로기를 이어받았다. 퓌레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란 혁명의식을 떠받치는 두 개의 신념체계를 가리킨다. 하나는 모든 개인적·도덕적·지적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환원하여 정치적인 해결 대상으로 보는 신념체계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행동과 지식과 도덕 사이에는 완전한 합치가 존재한다는 신념체계이다. 정치가 진실과 허위의, 그리고 선과 악의 영역이 될 때, 그리고 선한 것을 악한 것으로부터 가려내는 것이 정치라고 할 때 역사의 세계는 완전히 새로운 동력을 지니게 된다. 마르크스가 적절히 말했듯이, 혁명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환상'을 구현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혁명은 사회경제적 적대감의 산물이 아니라 정치적 환상의 산물이다. 프랑스혁명사가로서 퓌레는 환상에 의해 과거를 바라보지 말 것과 환상에서 깨어날 것을 강조하고 있다."(525-7)


18 장클레망 마르탱의 프랑스혁명 구하기


"장클레망 마르탱이 자신의 저서 《폭력과 혁명》에서 자코뱅 프랑스혁명사 해석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 첫 번째 전략은 폭력의 '평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폭력은 프랑스혁명에서만 자행된 것이 아니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동시대의 대서양 연안 국가들에서 일어난 혁명에서도 자행되었다. 여기에서 장클레망 마르탱은 프랑스혁명은 다른 혁명들보다 더 폭력적이었음을 인정한다." "프랑스혁명의 폭력성이 극심했던 것은 그것이 구체제의 폭력과 연속이면서 동시에 '혁명'이라는 '새로운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폭력이었다〉는 수정 해석의 공세에 맞서 자코뱅 혁명사가들이 취한 전략은 '비교'라는 방법을 동원하여 혁명의 폭력성을 당연시하는 것이었다. 혁명만 폭력을 자행한 것이 아니라 반혁명도 폭력을 자행했으며, 프랑스혁명만이 아니라 다른 혁명에서도, 구체제에서도 폭력이 자행되었는데 왜 프랑스혁명만 비난하느냐는 것이다."(534-8)


"그러나 '공포정치' 특히 1794년 봄 이후 자행된 '대공포정치'는 국가폭력이라는 점에서 혁명이 책임질 사안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가장 중대한 과제와 맞닥뜨린) 장클레망 마르탱의 전략은 '공포terreur'는 인정하되 '공포정치Terreur'는 부정하는 것이었다. 방데 전쟁에서 학살은 있었어도 제노사이드는 없었듯이, 공포는 있었어도 정부 차원의 체계적이고 법적인 공포, 즉 '공포정치'는 없었다는 것이다." "장클레망 마르탱은 로베스피에르의 권력 집중을 두려워한 과격 공포정치가들이 목월의 법을 악용하여 죽음을 양산함으로써 로베스피에르를 독재자, 공포정치가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열월 정변'을 일으켜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한 후 〈공포정치〉라는 말을 '만들어내어' 모든 책임을 로베스피에르에게 전가했다고 말한다. 공포정치가 실제로 의사일정에 오른 것은 1793년 9월 5일이 아니라 '열월 정변' 이후이며, 명실상부한 공포정치가 자행된 것도 이때라는 것이다."(543-8)


4부 맺음말


"프랑스혁명은 미국 독립혁명과 달리 정치혁명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혁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컸다. 오랜 절대군주정 체제를 지나면서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그만큼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에 대한 반혁명의 반발은 혁명 못지않게 커서 내전으로 충돌하기 십상이었다. 계몽사상과 미국 독립혁명의 영향을 받은 혁명가들은 이상주의로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도 대외전쟁을 도발할 필요을 느꼈고, 유럽의 강국인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과 체제 변화는 주변의 왕정 국가들에게 위협적이었다. 따라서 프랑스혁명은 대외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전쟁은 비상 체제를 요구했는데, 그것이 바로 공포정치였다. 공포정치를 낳은 것은 직접적으로는 전쟁이지만 근원적으로는 혁명이었다. 혁명은 구체제를 타도하고 신체제를 건설하여 역사의 진보에 이바지하는 측면이 있지만 공포정치와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큰 위험한 실험이다."(576)


"프랑스혁명이 공포정치로 이탈한 것은 프랑스가 충분히 계몽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혁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계몽사상가들은 프랑스 민중이 충분히 계몽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며 이 점에서는 루소도 마찬가지였다. 혁명 전부터 공화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라파예트나 브리소 같은 혁명가들도 당시의 프랑스에 공화정을 수립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입헌군주정의 수립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민중이 계몽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혁명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을 프랑스혁명은 잔인하게 보여주었다. 혁명, 그것은 순수, 선함, 독선, 위선, 오만, 광기가 용솟음치는 거대한 소용돌이이며, 잔혹한 격전장이다. 혁명은 전쟁이고 폭력이다. 프랑스혁명의 실상은 프랑스혁명을 〈자유, 평등, 박애〉의 모범적인 시민혁명으로 동경하고, 혁명을 이상적인 사회 변혁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울린다."(5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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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공포정 - 혁명의 특효약인가, 위약인가?
휴 고프 지음, 주명철 옮김 / 여문책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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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가와 공포정


# 프랑스 혁명을 대하는 기존 입장

1 우파 : 혁명은 폭력 그 자체였으며, 혁명이 품고 있던 공포정은 20세기 독재정의 본보기를 제공했다.

2 좌파 : 혁명은 공화국을 위협하는 적들에 맞서 전략적으로 공화국을 수호한, 현대 민주주의의 시작이다.


"수정주의 주장의 중심에는 18세기 프랑스의 정치문화와 제네바 출신의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이라는 두 가지 주제가 있다. 퓌레는 루이 14세가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한 이후 공개적 정치 토론을 의도적으로 탄압했다고 주장했다. 귀족과 부유한 부르주아 사회지도층은 독서회, 문학 아카데미, 프리메이슨 집회 같은 사적 모임에서 만나 정치 주제를 토론했다. 이처럼 흔치 않은 풍토에서 그들은 권력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정치를 추상적으로 토론했고, 이성만이 국가의 당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행정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을 마치 기하학적 대상처럼 대하는 추상적 관념에 끌렸다. 그런 점에서 퓌레의 주장은 버크의 주장과 매우 가깝지만, 퓌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루소의 영향을 강조했다." "루소는 인민주권을 바탕으로 정부를 수립하고, 공동체의 '일반의지'가 모든 결정을 통제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시행한다면 원시사회의 덕성을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41)


"루소의 사상은 다른 방향에서도 혁명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정치로 직접민주주의를 옹호했지만, 국민의회는 정기적인 선거로 국회의원을 뽑는 의회민주주의 제도를 수립했다. 그 결과, 인민주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던 급진주의자들은 곧 루소의 사상을 이용해서 이 제도가 인민주권을 부인한다고 비판하고, 정치적 위기가 닥칠 때 실력행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서 급진적 민주주의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힘을 합친 결과 이따금 민중 폭력 사건이 터졌고, 1793~94년의 공포정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루소가 사회적·도덕적 갱생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역시 불안의 원인이었다. 그것은 정치적 행동이 사람들의 품행을 하룻밤 사이에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고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나친 낙관론이 분명했다. 사회와 도덕을 완전히 갱생하지 못했을 때 급진주의자들은 실패의 원인이 음모 때문이라고 비난했으며, 음모와 싸워 이기려면 공포정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3)


"(1990년대에 등장한 후기 수정주의에 속하는) 이서 울럭과 파트리스 이고네는 공포정을 근대 사회민주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라고 묘사했고, 장 피에르 그로스는 공포정 시기에 지방으로 파견된 자코뱅파 의원, 이른바 '파견의원'의 활동을 연구해서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로스는 수정주의자들이 공포정 시기에 내란이 일어난 지방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공포정이 내포한 것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전 지역에서 4분의 3 이상이 내란을 겪지 않았고, 파견의원들은 대부분 법적 평등·교육 확산·사회정의 사상을 마음 깊이 받아들인 실용주의자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지지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반대자들을 위협하기 위해 격하게 말했지만 대개 수사법에 그쳤다. 그들은 현장에서 실제로 재산권을 존중했고, 누진세·학교 설립·식량 공급·복지 정책을 개혁의 목표로 삼았다. 다시 말해 자코뱅주의는 단두대를 생각나게 하지만, 건설적인 사회개혁에 대해서도 많은 얘깃거리를 제공했다."(45-6)


"공포정의 발단에 초점을 맞추어 수정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정주의자들은 1789년과 1790년 사이 혁명의 첫 해가 공포정의 기초를 확립한 결정적 시기였다고 주장했지만, 티모시 타케트는 국민의회가 이룩한 업적에 관한 연구에서, 혁명은 처음부터 과격했고 폭력 지향적이었다는 퓌레의 의견을 부인했다. 그 대신 그는 의원들이 처음에는 온건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귀족과 힘을 합쳐 나라를 개혁하려고 노력했지만 귀족이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급진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1789년의 사건들은 [퓌레가 주장했던 것만큼] 이념에 좌우되지 않았다. 실제로 타케트는 루소의 영향도 비교적 가벼웠다고 주장했다. 그보다는 우파도 좌파만큼 '급진적'이었고 타협을 몰랐기 때문에 정치적 과정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1789년의 군중 폭동에 대한 연구는 협상으로 해결책을 마련하는 시도가 실패했을 때 폭력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타케트의 방법론을 뒷받침했다."(46-7)


2 공포정의 서막? 1789년 혁명부터 1793년 공화국까지


"1789년의 빛을 바래게 만든 첫 번째 요인은 정치적 갈등이었다. 1789년부터 1791년까지 수행한 개혁이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은 화가 났다. 그들은 변화의 속도와 범위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 결과 [양원제 군주정주의자인] '모나르시앵monarchiens'과 [모든 개혁에 반대하는] '사악한 자들noirs'이 생겼다." "우파가 개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결과는 중대했다. 다수파 애국자들은 혁명의 반대자들과 의미 있는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반대를 반혁명의 증거로 해석하고 우파가 모든 변화를 차단하려고 음모를 꾸민다는 혐의를 씌웠다. 비판을 음모의 증거로 보는 경향은 18세기에는 드물지 않았다." "그래서 1789년과 1790년의 긴장이 높은 정치 풍토에서 '음모'는 혁명가와 반혁명가가 모두 애용하는 정치적 수사학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우파 집단이 왕을 파리 밖으로 빼돌리거나 정치적 혼란을 부추기려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에 음모론은 그럴듯하게 보였다."(56-8)


"불안을 조성한 두 번째 요소는 바로 왕의 태도였다. 1791년 6월 20~21일 밤에 거행된 '바렌 도주' 사건은 굴욕적인 실패로 끝났다." "도주 소식을 듣자마자 국민의회는 왕권을 정지시켰다. 그러나 대다수 의원은 자신들이 거의 2년 동안 매진했던 헌법을 유지하기 원했고, 입헌군주정이야말로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실현 가능한 제도라고 필사적으로 믿었다. 그들은 공화국이라는 대안을 혼란 수습용 처방으로 보았다." "1789년 이래 애국파 가운데 급진좌파의 소집단은 온건파 애국자들을 비판하고 있었다. 북부의 아라스 출신 변호사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급진좌파는 헌법이 민주주의를 충분히 실현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1789년 겨울에 우후죽순처럼 생긴 정치 클럽과 급진적 신문에서 비슷한 견해를 볼 수 있었다. 센 강 왼쪽 인쇄업자 구역에 있던 코르들리에 클럽이 가장 유명했다." "코르들리에 클럽은 노골적으로 공화주의를 지지하고, 군주정을 어떻게 할지 민주적 국민투표로 결정하자고 요구했다."(61-5)


"(루이 16세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1792년 8월 10일의 (상퀼로트) 봉기는 혁명이 일어난 이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었다. 그날 튈르리 궁 스위스 수비대 약 800명과 공격진 중 376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 후 6주는 '첫 공포정'으로 알려졌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이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더욱 격렬하게 정치 폭력을 자행했다." "8월말 파리 코뮌은 프로이센 군대가 파리로 향한 도로를 보호하는 마지막 요새인 롱위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반혁명 혐의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프로이센군이 베르됭 요새를 지나 진격한다는 소문이 9월 2일 파리에 퍼지고 그때까지 최고조에 달하던 긴장이 폭력으로 분출했다." "상퀼로트는 여러 패로 나뉘어 감옥에서 '혁명' 재판을 실시하고 즉격처분했다. 닷새 동안 1,100~1,300명의 수용자들이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감옥 마당에서 죽을 때까지 난도질이나 곤봉질을 당했다. 이것을 '9월 학살'이라 불렀다."(71-3)


"1789년 혁명을 돌이켜볼 때 아주 눈부신 면이 있었다 할지라도 분명히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지 못했고, 오히려 나라를 두쪽으로 갈라놓았다. 애국파가 밀어붙인 변화에 귀족 대다수, 적어도 가톨릭교도 절반과 왕이 저항했다. 왕의 바렌 도주는 애국파를 분열시키고 유럽과 치른 전쟁의 망령을 불러오면서 위기를 고조시켰다. 애국파는 좀더 차분한 정치적 분위기에서 온건한 왕정주의자를 혁명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어야 옳았겠지만 1791년 가을까지 화해를 추구하는 일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 대신 (브리소파를 중심으로 구성된) 지롱드파는 전쟁으로 유럽에 혁명을 일으키고 역적들을 쓸어버리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 뒤 공세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군사적 승리와 국내 반혁명 세력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말을 늘어놓아 정치적 온도를 끌어올렸지만, 그들이 장담했던 것과 달리 연전연패했을 때 자코뱅 급진파·상퀼로트와 견딜 수 없을 만큼 쓰라린 틈만 넓혔다."(81)


"지롱드파의 의사와 달리 왕을 몰아낸 사람들은 급진파와 상퀼로트였다. 그들과 지롱드파의 갈등은 9월 학살과 왕의 재판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 6개월 이상 더욱 확산되었다. 근본적으로 지롱드파는 민중의 급진주의와 폭력을 싫어하는 온건한 공화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않고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 더욱이 폭력과 타협해야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미처 그럴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반면 국민공회의 경쟁자인 몽타뉴파(산악파)는 폭력과 타협할 태세를 갖추었다. 1793년 봄, 프랑스는 공화국이 분명했지만 분열한 상태였고, 정치 토론을 한답시고 서로의 계략과 음모를 비난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대화를 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유럽과 전면전을 앞두고 여차하면 폭력이 난무할 만큼 날마다 급진화하는 파리를 만나야 하는 공화국이기도 했다. 분열한 공화국, 유럽과 벌인 전쟁, 음모의 소문, 민중 폭력의 두려움은 공포정을 불러올 치명적인 요소였다."(81-2)


3 1793년 3~9월, 공포정의 시작


"1793년 3~4월에 국민공회는 긴급조치를 내리면서 공포정을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상퀼로트와 손잡은 몽타뉴파는 지롱드파를 숙청한 뒤 국민공회를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지만, 공화국은 새로운 문제를 떠안았다. 남부의 몇 개 도시에서 숙청을 반대하고 사태를 원상복구하려고 이른바 '연방주의 반란'을 일으켰다. 몽타뉴파는 군사적 패배를 역전시키고 연방주의와 반혁명을 진압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파리의 급진파와 상퀼로트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상퀼로트 역시 군사적 승리와 내전 종식을 원하는 한편, 혁명으로 이룩할 사회적·정치적 모습도 분명히 그리고 있었다. 그들은 파리에 식량 공급을 확실히 보장하려면 국가가 경제를 통제해주고, 혁명의 적들에게 단두대를 더 많이 이용하고, 인민이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구민의회와 시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이 몽타뉴파와 맺은 동맹은 쉽게 깨질 터였다. 양측은 공화국을 구하고자 했지만 공화국의 의미를 달리 생각했다."(85-6)


"1793년 봄, 서부의 4개 도(방데·되세브르·멘에루아르·사르트)에서 장인과 농민이 징집에 저항하고 징병관들을 공격하면서 내란(일명 방데의 난)이 일어났다." "국민공회는 징집으로 불거진 소요에 대처하기 위해 '파견의원'이라는 이름으로 의원 82명에게 방대한 권한을 주어 각 도에서 징집을 감독하고 공공질서를 회복하도록 했다. 반혁명의 위협을 분쇄하기 위해 혁명법원을 3월 10일에 설치했다. 판사 다섯 명과 배심원 열두 명으로 법정을 열어 평결을 내리면 24시간 안에 실행해야 하고, 피고에게 항소권을 주지도 않았다. 국민공회는 방데에서 권위를 강화하려고 3월 19일에 무장반도를 대상으로 명령을 내렸다. 징집에 반대하고 폭동에 참가하는 자를 붙잡아 재판도 하지 않고 24시간 안에 처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틀 후에는 크고 작은 마을마다 감시위원회를 꾸려 외국인을 감시하라고 명령했다. 3월 28일에는 외국에서 국내로 돌아온 망명자들을 무법자로 취급해 재판을 거치지 않고 처형한다고 규정했다."(87-92)


"국민공회의 구국위원회는 전쟁을 수행하려고 한층 더 노력하는 한편 식량 공급에 힘쓰라는 상퀼로트의 요구에도 귀를 기울여야 했다. 상퀼로트의 요구는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시장이 아니라 보통 사람도 구입할 수 있는 '적정 가격'이어야 한다는 '도덕경제'의 원리를 따랐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식료품·연료 같은 생필품 가격을 통제해달라고 요구했다. 또 민간인으로 '혁명군'을 창설하고, 시골을 뒤져 가격을 올릴 속셈으로 시장에 내놓지 않고 곡식을 쌓아놓은 투기꾼을 찾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몽타뉴파와 구국위원회는 자유로운 시장경제 체제가 올바른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국가가 가격을 통제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으로 평시의 시장경제 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통제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다." "불운하게도 어떤 조치─암시장 개입, 사재기 처벌, 공공 곡식창고 설치 등─도 즉시 효력을 보지 못했고, 상퀼로트는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100-1)


"6개월 전인 3월과 4월에 국민공회는 공포정 시기에 나라를 운영하게 될 구국위원회·파견의원·혁명법원 따위의 중요한 기관들을 설치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여름을 지나면서 사태가 악화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기관들은 더욱 나빠진 정치 상황에 적응하고 있었고, 공화국이 존속하려면 급진적 행동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군사적 패배와 전반적 붕괴의 두려움이 상황을 약화시킨 주요인이었음이 분명했다. 방데의 난, 연방주의 반란, 통제경제를 실시하라는 상퀼로트의 압력, 더욱 심화한 공포정이 상황을 악화시킨 주범이었다. 그러나 여름의 사건은 국민공회 의원들의 태도도 바꿔놓았다. 이제 의원들은 공화국이 비엔나에서 런던까지, 로마에서 방데까지 방대한 지역을 무대로 펼쳐진 음모 때문에 위협을 받는다는 사실과 그 음모를 무찌르는 길은 무자비한 힘을 끊임없이 휘둘러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힘은 공포정을 뜻했고, 그 후 네 달간 공포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104-5)


4 1793년 9~12월까지 파리와 지방의 공포정


"급진적 활동가들과 상퀼로트는 9월 대부분을 강하게 압박하는 데 보냈고, 10월에는 기독교를 전방위로 공격해 나라의 대부분 지방에서 교회 문을 닫게 만들었다. 구국위원회는 그들의 압력을 막아내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급진주의자들이 정치 일정을 완전히 쥐고 흔들지 못하게 막으면서 합헌적 정부를 보호했다. 구국위원회는 몇몇 문제에는 뒤로 물러났고 또 다른 문제에는 선제적으로 행동해서 분란을 막았다. 이미 구국위원회는 연방주의·방데의 난·전쟁에 맞설 힘을 강화해나갔다. 사실상 그들은 두 개 전선에서 공화국의 적, 동맹인 상퀼로트 세력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해가 끝날 즈음 그들이 성공하기 시작했고, 사태의 흐름은 공포정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연방주의자 반란은 실패했고, 방데의 난은 통제 상태에 들어갔으며, 제1차 대프랑스 동맹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화국은 안전했고 구국위원회는 전쟁 내각으로 발전해서 3개월 전까지만 해도 갖지 못했던 권위를 과시하게 되었다."(109-10)


"구국위원회의 전략이 성공하자 그 지위도 확고해짐에 따라 국민공회는 보상책으로 위원회의 힘을 강화해주었다. 10월 10일 국민공회는 〈평화 시기가 올 때까지 혁명정부〉 체제를 유지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1793년 헌법'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효력을 정지하는 한편, 구국위원회는 장관들과 중앙정부의 모든 부서를 감독하고 장군을 지명할 권한을 행사하며, 행정부서의 권한이 중첩되어 효율성이 떨어지는 폐단을 바로잡고 행정관을 임명하는 권한까지 장악했다. 그러고 나서 구국위원회는 행정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계획을 마련했다. 그 결과, '프리메르 14일 법'(1793년 12월 4일 법)이 나왔다. 그것은 이름과 달리 실질적으로 '긴급헌법'이었다. 이로써 도 행정권을 대부분 빼앗고, 디스트릭트와 시정부가 혁명법을 집행할 책임을 지게 했다. 또한 '긴급헌법'은 파견의원의 권한을 축소하고, 열흘마다 구국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하며, 오직 법에서 정한 임무만 수행하도록 했다."(127-8)


"9월 초부터 3개월 안에 공화국은 혼돈 상태에서 비교적 안전하고 안정된 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12월에만 3,000명 이상 처형하면서 혹독한 희생을 치르고 얻은 결과였다. 구국위원회와 파견의원들은 연방주의와 방데가 혁명을 뒤집어엎고 구체제로 돌아가려는 국제 음모의 일부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반도들도 특히 방데에서 야만적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들만이 일방적으로 과격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내란이 공포정을 고조시킨 이유를 일부나마 설명해준다면, 상퀼로트도 국민공회를 압박해서 혁명법원을 강화하고, 반혁명 혐의자의 범위를 확장하고, 통제경제 체제를 강행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공포정의 과정에 이바지했다. 1793년 가을에 대다수 의원은 온건한 유화정책이 더는 효과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국민공회도 공범이었다. 그들은 프랑스를 구체제로 되돌리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국제 음모에 맞설 합법적인 정치무기야말로 공포정이라고 생각했다."(128-30)


5 1793년 12월~1794년 4월, 파벌 타파


"공화력 2년 프리메르 14일(1793년 12월 4일)의 '프리메르 법'을 적용하는 데 여러 달이 걸렸다. 12월 중순에는 파리의 상황마저 통제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구국위원회의 권위를 위협하고 공포정의 미래에 전반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논쟁이 불붙었기 때문이다. 관용파Indulgents로 부르는 온건파 집단이 이제 공포정을 완화하고 정상적인 헌정질서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주장하면서 논쟁이 벌어졌다. 이 주장에 발끈한 급진파, 이른바 에베르파는 오히려 공포정을 강화해 반혁명의 뿌리를 영구히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파가 지난 여름부터 시작한 갈등의 바람은 12월에 표면으로 올라왔고, 1794년 봄까지 사납게 휘몰아쳤다. 결국 구국위원회는 두 집단을 체포하고 처형해서 사태를 수습했다. 이로써 논쟁은 끝났지만 혁명기에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적 인물이었던 에베르와 당통이 함께 제거되었다. 게다가 공포정의 무기가 내란과 외적이 아니라 정치비평가와 자코뱅파 동료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135-6)


"구국위원회의 위원 열한 명은 모두 비교적 중산층 출신이지만 정치적 성향은 달랐다.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는 민주주의자였지만 루소의 영향을 받아 정치를 도덕적으로 고찰하고 공포정을 실시해서 프랑스를 애국심과 시민의 덕을 바탕으로 한 이상주의적 민주국가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카르노·생탕드레·바레르·랭데 같은 의원들은 실용주의자로서 공포정을 주로 전쟁에 승리하고 반혁명을 물리치는 길로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전반적인 성공 비결은 궁극적으로 공화국의 모양새를 갖추는 일보다 공화국을 어떻게든 존속시키려고 함께 헌신했다는 데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이 함께 일하던 거의 열두 달 동안 일부는 지방에서, 다른 이들은 튈르리 궁의 구국위원회 사무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군사작전을 세우고 정책을 결정하고 법안을 기초하는 일이 제일 중요했다. 날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회의를 열고, 자코뱅 클럽과 국민공회에 정기적으로 들르면서 혹독한 일과를 수행했다."(140-1)


"로베스피에르는 공화국이 시민의 덕 관념 위에 서지만, 덕이 전쟁 중의 공화국을 지켜주지는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덕을 뒷받침하려면 공포를 이용해야 했다. 공포는 그 자체만으로는 위험하지만, 덕과 결합하면 공화국과 시민들의 이익을 증진시킬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공포정은 자코뱅주의의 반대자들만이 아니라 지지자들도 집어삼키기 시작했고, 에베르와 당통이 모두 정치적 거물이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아주 불길했다. 그 정도 지위를 가진 사람을 공적인 저항도 받지 않고 쓸어버릴 수 있는데 누가 안전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그들의 죽음은 공포정이 새 단계로 들어갔음을 뜻한다. 이제부터 두 통치위원회를 거스르는 정치토론은 위험을 감수하게 되었다. 공포정을 끝내자는 관용파 운동은 오히려 반대 결과를 가져와 혁명정부가 모든 비판을 반혁명 음모로 고발할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 혁명정부는 공포정을 구체제에서 볼 수 없을 만큼 무한히 폭압적인 정치무기로 마음껏 개발했다."(156-61)


6 1794년 4~7월의 대공포정


"프레리알 22일(1794년 6월 10일)에 쿠통은 구국위원회를 대표해서 법안을 발의했다. 그것은 그와 로베스피에르가 기초한 안이었다. 그는 그 목적이 기존의 법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데 있다고 의원들을 안심시켰지만, 사실상 그보다 훨씬 멀리 나간 안이었다. 콜로는 법원이 수많은 역적을 무죄로 판결하고 무고한 애국자를 많이 벌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혁명이 〈자유에 대항하는 폭군을 물리치고, 덕에 대항하는 범죄와 싸우는 전쟁〉이기 때문에 이러한 잘못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혁명이 존속해야 한다면 덕이 승리해야 하고, 그래서 공화국을 무너뜨리려는 음모를 꾸민 자들을 혁명법원의 과업을 급히 성취함으로써 분쇄해야 했다. 쿠통은 이렇게 말했다. 〈조국의 적을 벌하는 일을 늦춘다면 앞으로 그들의 정체를 밝히는 일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 [프레리알 법의] 중요한 조항은 바로 그 일을 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이제 죄에 대한 벌은 오직 사형뿐이었다."(171-2)


"프레리알 법은 공포정의 역사에서 전환점이었다. 그때까지 수감자의 50퍼센트 정도가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 법이 효력을 발휘한 뒤 무죄는 20퍼센트로 떨어졌고, 유죄가 급증하자 처형도 급증했다." "'푸르네', 또는 '한 묶음'[또는 한 배腹]이라는 방식으로, 변론의 기회도 주지 않고 단일한 죄목으로 수십 명씩 한꺼번에 단두대로 보냈기 때문에 많은 수를 처형할 수 있었다." "프레리알 법은 지난해 12월 프리메르 법이 나온 뒤 진행하던 중앙집권 과정의 일부라는 설명이 아마도 가장 설득력 있을 것이다. 과단성 있는 파견의원들이 공포정을 혼란 상태로 만들지 못하게 하고, 각 도 법원이 지방민을 가볍게 처벌하지 못하게 하려고 구국위원회는 모든 정치재판을 파리로 집중시킨 뒤에는 처형 속도를 높여 수형자의 수를 통제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하는 길 외에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프레리알 법이 그 일을 했고, 그 법의 잔혹성은 거의 모든 수형자가 유죄라는 구국위원회의 신념을 반영했다."(173-8)


"구국위원회는 공포정을 강화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전쟁이 끝난 뒤 덕의 공화국을 맞이할 사회개혁을 설계했다. 핵심 요소는 탈기독교 운동으로 생긴 공간을 채울 새로운 종교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최고존재 신앙과 영혼의 불멸성이 마련해줄 수 있는 도덕률이 사회에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인가? 영적인가? 최고존재 숭배는 필시 두 가지 요소를 함께 가졌을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와 동료들이 어떤 형태로든 종교적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이롭다는 사실을 잘 알았음에도, 새 종교의 가치가 자코뱅파 이상, 전쟁이 끝나면 창조하고자 했던 사회적 이상향에 아주 가깝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최고존재와 단두대는 봄부터 공포정의 핵심이 된 재생과 근절의 두 요소를 함께 지닌 계획의 한 부분이자 조각이었다. 두 가지 모두 반대의 마지막 흔적까지 뿌리 뽑고 군사적 승리와 프랑스 국민의 도덕적 재생을 성취해서 혁명을 '완수'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178-83)


7 새 공화국의 새 시민 만들기


"자코뱅파의 기본 가치는 평등이었다. 그들은 법 앞의 평등과 기회의 평등을 강조했다." "법적 평등은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하 「인권선언」)에 등장했고 그 후의 모든 혁명기 법으로 표현되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해졌지만, 1791년의 헌법에서 매년 최소한 [사흘치 임금에 해당하는] 세금을 납부하는 25세 이상 남성에게만 선거권을 주었기 때문에 누구나 똑같이 정치적 권리를 누리지는 못했다(1792년 8월 남성 전체 보통선거로 개정). 일정액의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는 남성은 '수동시민'이었고, 이들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혁명 초기에 남녀평등권 사상을 지지하는 정치가와 활동가들의 수는 아주 적었다. 극작가 올랭프 드 구즈는 1790년 가을 「인권선언」을 [「남성의 권리선언」으로] 풍자해서 남녀의 동등한 지위를 요구하는 「여성의 권리선언」을 발간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고, 훗날 공포정 시기에 지롱드파에 공감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189-93)


"구국위원회의 사회개혁을 방해하는 온갖 장애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돈이 부족했다는 점이고, 특히 교육 분야에서도 돈이 절실히 필요했다. [1789년의 「인권선언」보다] 한층 더 발전한 1793년 헌법의 「인권선언」은 교욱권을 '보편적으로 필요한 권리'로 규정했다. 〈사회는 모든 힘을 쏟아 공중의 이성을 증진하고 모든 시민이 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 이처럼 혁명의 이상에 어울리는 시민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길을 교육에서 찾았다." "1789년의 혁명은 전반적인 문화활동을 질식시키는 구체제 검열제도를 폐지하면서 시작했으며, 출판의 자유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로베스피에르보다 더 크게 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공포정 시기에 그는 모든 상황이 바뀌었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위험하며 체제를 뒤집어엎는 것이라고 보았다." "구국위원회와 국민공회는 신문기자·인쇄업자들을 투옥하고 처형하는 한편, 신문사와 저술가들에게 돈을 주고 찬양 글을 쓰게 했다."(205-9)


"공포정이 18개월 이내에 끝났기 때문에, 그것이 프랑스 사회와 사람들의 태도를 얼마나 바꿔놓았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단기적으로 그것은 분명히 실패했다. 공포정이 1794년 늦여름에 끝났을 때 공포정의 사회정책은 대부분 뒤집히거나 페기되었기 때문이다. 빈자가 토지를 살 수 있게 배려한 법도 포기했고, 장소 이름은 옛날식으로 되돌아갔으며, 국가 차원의 초등 의무교육도 붕괴했다. 1794년 12월에 가격과 임금의 최고가격제를 폐지하고, 자유시장경제는 도시 빈민에게 비참한 결과를 안겨주었다. 최고존재 숭배도 사라지고, 자코뱅 클럽의 연계망도 강제로 페쇄했다. 테르미도르 반동파는 공포정뿐만 아니라 자코뱅주의의 사회적 이상을 전반적으로 적대시했고, 1789년에 떠오른 재산권과 자립주의에 의존하게 되었다." "19세기 왕정복고 시절로 넘어가면서 혁명은 과거의 일이 되었고, 프랑스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공포정의 야망은 19세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게 넘어갔다."(222-3)


8 1794~1795년, 테르미도르 반동과 공포정의 끝


"수많은 상퀼로트가 공포정 시기의 정치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에베르와 코르들리에파의 처형에 깜짝 놀랐다. 그들은 구국위원회의 권위를 존중했기 때문에 위원회가 에베르에게 씌운 혐의를 믿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에베르와 코르들리에 클럽의 급진파는 거의 1년 전부터 공포정과 가격통제를 요구하는 상퀼로트를 지지했다. 그래서 상퀼로트는 그들을 우상으로 보았는데, 그들이 반역죄로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러웠고 두려웠다." "상퀼로트의 공포정 지지가 쇠퇴한 것처럼 국민공회 지지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모든 의원은 군사적 패배를 피하고 내란을 진압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공포정을 지지했지만, 이제 그들은 두 가지 목표를 모두 성취했다. 그들 가운데 다수가 투옥당하거나 처형당한 사람들의 친구였고, 그 자신의 생존 문제를 걱정하는 처지였다. 그들도 역시 분개했다." "아무도 구국위원회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했지만, 은밀한 장소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논의했다."(231-3)


"[구국·안보] 두 위원회가 언쟁을 시작했을 때 기회가 왔다. 4월에 구국위원회가 공안국을 설치했을 때부터 은근한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치안업무는 안보위원회가 맡았는데, 이제 안보위원들은 사전 협의도 없이 자기네 권위를 훼손했다고 분개했다. 프레리알 22일(6월 10일) 법이 마찰을 더욱 심화했다. 로베스피에르와 쿠통이 안보위원회와 상의하지 않고 국민공회에서 발의했기 때문이다." "종교가 틈을 더 벌려놓았다. 안보위원회 위원 몇 명은 무신론자였고 최고존재 숭배를 역겹게 생각했으며, 심지어 로베스피에르가 슬그머니 기독교를 되살리려 한다고 생각했다." "두 위원회의 차이는 구국위원회 내부의 갈등으로 더욱 심화했다. 카르노는 지난 봄에 군사공격 계획을 세울 때 생쥐스트가 간섭한 것을 두고 분노했다. 콜로 데르부아는 리옹에 파견되어 조제프 푸셰와 함께 일했는데, 로베스피에르가 푸셰를 극단주의 혐의로 소환했기 때문에 분개했다. 수많은 긴장관계에 로베스피에르가 끼어 있었다."(233-5)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7월 29일 국민공회에서 구국위원회의 바레르는 혁명정부가 위기를 딛고 전보다 더욱 강해졌다고 주장했다. 안보위원회도 분명히 예전처럼 자기 임무를 계속 수행할 의지를 가지고 로베스피에르 지지자들의 체포영장을 무더기로 발행[하고 모두 106명을 처형]했다. 그러나 양대 위원회는 상황을 아주 오판했고, 국민공회가 정치적 권위를 되찾게 되면서 공포정은 몇 주 안에 [쓰나미가] 덮치듯이 무너졌다. 7월 29일 국민공회는 모든 위원회 위원을 4분의 1씩 매달 새로 뽑으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구국위원회와 안보위원회가 권력을 유지하는 기반이던 구성원의 지속성을 무너뜨렸다. 구국위원회는 로베스피에르·생쥐스트·쿠농이 남긴 세 자리를 온건파로 채웠고, 8월 말 즈음에는 옛 위원이 단 세 명만 남았다." "공포정이 붕괴하면서 후폭풍이 불어닥쳤다. 수십 가지 정치 책자와 신문이 나와 공포정을 고발하고 부역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했다."(239-40)


"정치적 반동과 개인적 복수가 이내 지방으로 퍼지면서 '백색 공포'라는 이름을 얻었다. 백색은 부르봉 가문의 색깔이었다. 1793~1794년의 공포정에 동조한 사람은 누구나 공격을 받았다. 1793년 여름 연방주의자 반란이 일어났을 때 자코뱅파가 아주 잔인하게 탄압했던 곳에서 독한 복수의 바람이 불었다." "파리의 상퀼로트도 지방 자코뱅파와 비슷한 처지였다. 이미 1794년 봄 구국위원회는 그들의 정치적 권력을 박탈했고,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나사를 더욱 조였다. 구민회의를 열흘마다 두 번에서 한 번으로 줄이고, 반혁명 혐의자를 체포하는 혁명위원회 권한을 박탈했으며, 그 결과 중류 계급이 구민회의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궁핍에 시달리던 상퀼로트는 급진파의 주도로 1795년 4월 1일과 5월 20일에 두 차례 봉기했다." "봉기는 진압되었고, 1,200명 이상의 상퀼로트가 붙잡혔다. 수천 명이 무장해제를 당했고, 차후 1830년까지 파리에서 그 정도 규모의 민중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241-3)


결론


"공포정 시기에 압도적인 다수의 희생자는 전쟁과 반혁명 지역에서 나왔고, 국민공회의 권위에 반대하다가 죽었다. 그들의 혐의를 분석해보면 93퍼센트 이상이 망명·선동·반역·음모·왕정주의 때문에 죽었다. 단지 1.5퍼센트만이 투기나 최고가격제를 무시한 '경제' 범죄로 죽었다." "그러나 공포정을 탄압과 중앙집권으로만 볼 수 없다. 인민주권 이론에 바탕을 둔 정치적·사회적 민주주의를 이루고, 재산권의 근본 원칙에 도전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하려는 자코뱅파의 행동강령도 공포정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전쟁과 내전의 제약이 많았기 때문에 토지를 나누고, 세속적 기본교육 체제를 수립하며, 새로운 종교를 창조하고, 사회복지를 실천하려는 계획은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자코뱅파가 전후에 건설하려는 세계에 대한 순수한 목적을 반영했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상퀼로트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저 냉소적인 정치적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250-2)


"공포정 시기 사망자 수에서 정치적 영향으로 눈을 돌리면, 군사적 패배에서 공화국을 구했다는 사실이 가장 명백하다. 방데 반란이 성공했다면, 연방주의 군대가 파리까지 진격했다면, 제1차 동맹이 중대한 성공을 거두었다면, 공화국은 아마 붕괴했을 것이며, [절대군주정이든 입헌군주정이든] 어떤 형태로든 군주정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경우를 종합해볼 때, 공포정은 완강한 성격 때문에 반대파를 만들고, 그 반대를 이용해서 더 많은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스스로 강화하는 힘을 가진 사건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정 시기 정치가들이 저항과 반란의 정확한 정보를 얻기 어렵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주장이다. 2세기가 지난 오늘날 분명해졌다고 당시에도 항상 분명했다고 볼 수 없으며, 수많은 문제를 음모로 해석하는 습관은 공포정의 수단을 보복하는 데 동원한 것이 정당하다는 그릇된 확신을 심어주었다. 공포를 가한 사람들은 그 자신도 종종 공포를 느꼈다."(253-4)


"1789년까지 지방은 줄곧 독자성과 개성을 많이 유지했다. 혁명이 일어나 초기에 국가통합이라는 이해관계 속에서 지방의 독자성과 개성을 쓸어버렸고, 공포정은 1793년 12월 프리메르 법으로 새로운 지도 위에 중앙집권 국가를 강요했다. 나중에 총재정부가 그 법을 폐지했지만 여전히 행정의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했고, 나폴레옹은 도지사 제도를 창설해 프랑스인의 정치생활에 그 체제를 확고히 심어놓았다. 그러나 오늘날 프랑스 정치평론가들이 여전히 보나파르트보다 자코뱅파가 중앙집권 국가 전통의 원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혁명이 프랑스에 200년간 정치적 불안을 가져온 출발점이라면, 공포정은 행정의 중앙집권화를 거쳐 앞으로 정치가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면서도 국가의 존립을 위험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는 전통을 남겨주었다. 그것을 공포정의 업적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로베스피에르와 동료들이 그것을 가치 있는 일로 인식했는지 아닌지는 별개 문제다."(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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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혁명 - 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 베스트 셀러 역사도서관 1
로버트 단턴 지음, 주명철 옮김 / 알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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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18세기 프랑스 독자의 눈으로 볼 때 불법 문학은 실질적으로 근대문학 전체와 다를 바 없었다. 당시는 루이 14세의 절대주의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국가기관이 인쇄물을 통제하려고 노력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것을 뿌리 뽑는 책임을 맡은 관리였던 말제르브는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참으로 그는 그 일을 하려 들지 않았다." "1750년까지 서적감독관들은 합법적인 출판물을 아주 미묘한 차이에 따라 여러 범주로 구분했다. 그들은 합법성의 영역을 특허, 묵인, 단순 허가, 경찰 허가, 단순 관용의 범주로 넓혔다. 이렇게 해서 합법성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단계를 몇 차례 넘어 비합법성과 맞닿게 되었다. 한편 자유사상의 문학이 앙시앵 레짐의 정통 가치 체계의 밑동을 자르면서 자라났다. 체제수호자들은 탄압을 강화하면서 맞섰다. 이들이 탄압한 책들은 법의 울타리 밖 먼 바깥에 있는 책, 말하자면 순수하게 비합법적인 책이었다. 내가 연구하고자 제안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책이다."(36-7)


1부 금지된 문학과 문학시장


"앙시앵 레짐의 말기는 일부 역사가가 상상하는 세상과 달랐다. 그것은 즐겁고 관대한 자유방임식의 세상이 아니었으며, 게다가 바스티유도 별 셋짜리 호텔이 아니었다. 비록 바스티유는 혁명 전 선전가들이 생각해낸 것처럼 고문을 자행하던 곳으로 혼동되어서는 안 되지만, 문학과 관련해서 그곳에 들어간 수많은 사람의 삶을 망쳐놓았다. 그러나 문학을 창작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문학을 존재하게 만든 전문인이라 할 출판인과 서적상이 저자보다 더 많이 들어갔다. 이러한 사람들은 일상의 사업에서 날마다 합법과 불법을 구별해야 했다." "금서를 구분하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언어의 문제로 보인다. 경찰은 바스티유에 수감된 랭스의 서적상 위베르 카쟁을 심문하면서 그의 편지에 종종 나타나는 '철학적 상품'이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설명해달라고 요구했다. 모든 종류의 금서와 의심스러운 문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체포된 카쟁은 그 말이 '업계에서 금지된 것을 표현하기 위한 관습상의 표현'이라고 규정했다."(49-50)


"18세기 프랑스 인쇄물의 세계는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계몽주의'라든가 '혁명'이라든가 하는 범주로 분류하기 어렵다. 그러나 1789년 이전에 독서 대중에게 문학을 전달하던 개인들은 자신들이 취급하던 책에서 진짜 위험한 요소를 구별하기 위해 아주 쓸 만한 범주를 고안해냈다." "우리는 《사회계약론》을 정치이론으로, 그리고 《동 부그르 이야기》를 음란서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18세기의 책세상 사람들은 두 가지 책을 한데 묶어 '철학책'으로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자료를 그들 방식대로 본다면, 음란서적과 철학 사이에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구분은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1789년의 정신을 구현한 미라보가 10년 전에는 가장 저급한 외설서와 가장 대담한 정치논문을 썼다는 사실은 더이상 그다지 어리둥절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자유와 난봉은 함께 연관된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우리는 은밀한 도서목록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들이 모두 닮았음을 볼 수 있다."(69-70)


"앙시앙 레짐의 마지막 30년 동안 평범한 독자들은 처음으로 무신론을 책의 형태로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책들은 권두화frontispiece·표제지title page·머리말·부록·주 같은 인습적 예절의 표시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정통 신학은 대체로 들고 읽기 어려운 2절판의 큰 책으로 여전히 외풍이 센 독서실의 선반에 쇠사슬로 묶어놓는 경우가 있었지만, 무신론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닐 수 있도록 작은 판본에 실려 사사로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정통 교리의 냄새를 풍기도록 편집했지만('철학'으로 알려진 형태를 즐겨 채택했지만), 판본의 크기 때문에 마치 이성의 영역에 호소할 목적을 띤 것처럼 보였다. 독자는 이성의 영역에서 고요한 양심에 비추어 찬반의 태도를 심사숙고할 수 있었다. 계몽사상가들의 전집이나 인기 있는 작품을 편찬한 책들도 대부분 '호화로운 인쇄'를 피했다." "자유사상은 공짜가 아니었지만, 1770년경 중류계급은 물론 장인과 소매상의 상위층 사람들이 구매할 수 있는 범위 속에 들어왔다."(133-5)


"논문들이 정통 교리에 전면적인 공격을 일선에서 퍼붓고 있는 동안, 그보다 규모가 작고 덜 진지한 작품들은 교회와 국가가 존중하던 것이면 무엇이건 저격했다." "'순수 포르노그래피'는 시대착오인 동시에 모순 어법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책에 나오는 수도사와 수녀는 성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주요 목적에 따라다니는 인물처럼 보인다." "이러한 범주의 전체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엿보기 취미voyeurism였다. 난봉꾼의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열쇠구멍을 통해서, 또는 장막이나 나무 뒤에서 서로 관찰했다. 그리고 독자는 그들의 어깨 너머로 그 인물들의 행위를 지켜보았다. 삽화는 종종 화자가 은밀히 지켜보는 앞에서 결합하는 짝들을 보여주었다." "삽화와 본문은 상승작용을 하여, 모든 몸짓에 연극적인 기운을 불어 넣으면서 거울 속의 거울 같은 효과를 증대시켰다. '철학책'에 나오는 성은 철학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135-7)


"랭게의 《바스티유 회고록》과 미라보의 《봉인장과 국립감옥에 대하여》는 모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국가가 재판 절차도 없이 감옥에 처넣은 저자가 직접 쓴 논평으로서 쌍벽을 이뤘다." "독자는 역겨운 음식, 가학적인 옥사장, 벌레가 우글거리는 깔개, 지하감방을 둘러보면서, 거기 아무 죄도 없이 갇힌 희생자가 모든 인간세상과 단절되고 합법적인 재판을 받을 권리마저 빼앗긴 채 절망에 빠져 신음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독자에게 전율과 감동을 두 배로 느끼게 만들 수 있을 만큼 진실한 어조로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재현했다. 그들은 제 손으로 가면을 뜯어버리고, 장막을 젖히고, 허울을 찢어버리고, 왕의 비밀조직을 폭로했다. 그래서 그들도 또한 엿보기 취미를 다뤘지만,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들은 경찰국가의 국내 공작을 까발렸고, 그렇게 하는 가운데 프랑스는 지하감옥, 쇠사슬, 봉인장(구속명령서)으로 다스리는 나라라는 신화를 널리 퍼뜨렸다."(140-1)


"똑같은 주제가 정치적 비방문(libelles, 사사로운 중상비방보다는 정치적인 비방의 뜻을 지니고 있다)이라는 하위범주에 나타났다. 그러나 중상비방문 작가들은 다른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전제주의의 희생자들에 대해 통속극 같은 논평을 하는 대신, 전제주의의 고위직 봉사자, 그리고 권력자에 대해 공작을 하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비밀을 파헤쳤다." "그들은 자신들이 적시적소에 나타날 수 있는 정확한 능력을 가졌거나, 보이지 않는 제3의 화자로서전지전능함을 지닌 것 마냥 장막 뒤나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면서 엿들을 수 있는 대화도 실었다. 그러므로 중상비방문도 엿보기 취미를 이용했다." "중상비방문 작가들은 그러한 환상을 부추기기 위해 차분하게 머리말을 썼다. 그들은 남들이 진실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역사가'나 회고록의 '편집인' 행세를 했다. 그들은 증거의 규칙을 가장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고 약속했다. 그 결과는 당대의 역사와 전기로 위장한 저널리즘의 일종으로 나타났다."(142-3)


"그러나 우리는 '철학책'에 담긴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전갈message을 앙시앵 레짐을 뒤집어엎으려는 의도의 증거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1789년을 되돌아보면서, 군주정이 인쇄된 말의 힘에 의해 마구 두드려 맞아 불구가 되었다고 쉽게 상상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금서는 그 체제의 뿌리를 흔들어 정통성을 허물어갔을지 몰라도, 그것을 쓰러뜨릴 목적에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금서는 단지 문학시장의 불법적 부분에 대한 수요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흥밋거리였을 뿐만 아니라 정보에 대한 수요, 사생활만이 아니라 당대의 역사에 대한 호기심, 추상적인 사상의 금지된 열매만이 아니라 새 소식에 대한 굶주림이었다. 그 체제는 이러한 주제를 모두 법률의 바깥에 놓으면서 그것을 취급하는 방식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자제력마저 몰아냈다. 철학을 포르노그래피와 같은 구석으로 몰아내면서, 그 체제는 형이상학에서 정치학까지 모든 전선에서 두루 공격을 받았다."(149)


2부 주요 작품


▶ 철학적 포르노그래피


"16세기 초기의 아레티노는 성교를 찬미하고 육욕의 언어를 인쇄함으로써 오비디우스를 능가했다. 그의 《화려한 소네트》와 《논리적 사고》는 표준을 세우고 주제를 확립했다. 16가지 고전적인 '체위', 외설적인 말을 자극적으로 사용하기, 본문과 그림의 상호작용, 여성이 이야기하게 하고 대화체 사용하기, 논다니집과 수녀원을 돌면서 엿보기, 이야기 선을 구성하기 위해 질탕한 난교 파티를 줄줄이 엮어내는 방식으로 아레티노는 포르노그래피의 아버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18세기는 그 나름의 아레티노를 만들어냈다. 18세기의 베스트셀러 가운데 하나인 《현대의 아레티노》나 그 밖의 작품에서는 아레티노를 기리고 있다. 18세기의 아레티노는 2세기 전에 살다 간 선배처럼 비방과 외설스러움을 조화시켰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했다." "이 범주의 문학은 1780년대 미라노의 포르노그래피성 작품이 나오면서 다시 한 번 기운을 회복했다. 그리고 18세기는 사드 후작과 함께 끝났다."(155-7)


"18세기 말 《계몽사상가 테레즈》는 아직까지 포르노그래피라는 딱지가 붙지는 않았지만, 앙시앵 레짐 시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품위의 경계 밖으로 성애를 멀리 가져간 문학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우뚝 섰다. 당시 사람들은 테레즈가 성애와는 다른 것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테레즈는 계몽주의를 상징했던 것이다. 테레즈는 계몽사상가philosophe였다. 그의 칭호는 계몽주의 시대 초기에 나온 주요 작품에서도 메아리치고 있었다." "이것은 특별한 시점이었다. 《계몽사상가 테레즈》가 발간된 1748년은 성욕을 자극하는 문학이 한꺼번에 분출하는 시대에 속하는 동시에 지적 지형도가 바뀌는 시대에 속하기도 했다. 사실 두 방향의 폭발을 일으킨 원동력을 하나였다. 그것은 자유로운 사고와 자유로운 삶을 결합한 자유사상libertinism이었다. 이 사상은 성적 규범만이 아니라 종교적 교리에도 도전했다. 디드로 같은 자유로운 사상가들은 양쪽 전선에서 싸웠다."(160-1)


"테레즈의 성 이야기는 교양소설Bildungsroman, 다시 말해서 교육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쾌락의 교육인 만큼, 철학 하기와 쾌락 찾기는 결국 철학적 향락주의로 집중될 때까지 이야기 속을 함께 달린다. 이 철학을 면밀히 연구하면 수많은 원전─데카르트, 말브랑슈, 스피노자, 홉스, 그리고 18세기 초반에 원고 상태로 나돌던 자유주의 문학 전반─에서 나온 요소가 뒤섞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강력한 영향은 아마 루크레티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테레즈와 그의 선생들은 계속해서 현실을 물질의 작은 조각으로 축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이 감각에 작용하여 의지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그들은 인간이란 자기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쾌락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라고 묘사한다." "기계의 은유는 17세기의 기계론적 철학의 유산으로서 후대의 자유사상가들에게 알맞은 세계관을 구축하는 방법을 제공했다."(172-7)


"《계몽사상가 테레즈》는 철학으로서 기독교를 공격하고 사회정책으로서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공유하는 논점을 끌어들였다. 볼테르와 마찬가지로 원장신부 T.도 반기독교적 진리가 소수정예 집단에만 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속된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듣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한꺼번에 도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달려든다면 그 누구의 재산이나 신체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종교는 거짓인 동시에, 모든 종교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들은 역설로 포장되어 나온다. 원장신부 T.는 비밀로 봉인해 마담 C.에게 전해주지만, 누구나 돈 주고 살 수 있는 책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고상하지 않은 독자들도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귀가 있는 사람은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서가 세계에 던진 전언의 후렴을 주워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였다."(185-7)


"《계몽사상가 테레즈》는 일종의 사고실험이었다. 그것은 결혼제도와 어머니의 지위를 상상의 차원에서 가늠하고, 향락주의적 계산에 종속시켰으며, 부족한 제도임을 알았다. 역사가들이 과거의 제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가늠할 때, 그들은 좀처럼 공상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인은 종종 수수께끼 놀이를 했다. 그들은 물었다. 무신론자의 사회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바람기 있는 여성이 사회는? 《계몽사상가 테레즈》는 그들에게 자유로이 사랑하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여성 계몽사상가라는 단일한 공상 속에 두 가지 위험을 한데 묶어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것은 문학적 상상력이 이룩한 빼어난 공훈이었다. 그것은 독자를 법의 밖으로 끌어가 유동적인 지대에 놓아주었다. 그리하여 독자는 거기에서 다른 사회질서를 생각하면서 놀 수 있었다. 몽테스키외와 루소는 각각 《페르시아인의 편지》와 《사회계약론》에서 같은 일을 했다."(191-2)


▶ 이상향의 공상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가 쓴 《2440년》은 겉으로 보기에 완전히 다른 세계를 묘사한다. 그것은 메르시에가 먼 미래에 자리매김한 공상이다." "미래 공상과 립 밴 윙클 효과에 익숙한 오늘날의 독자는 이 작품을 날렵하지 못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18세기 독자는 몹시 매혹적인 작품으로 보았다. 그들은 결코 공상과학소설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래의 이상향도 꿈꾸지 못했다. 플라톤, 토머스 모어, 프랜시스 베이컨,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이상향 건설가들은 공간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현실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여행이나 엉뚱한 조난사고로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사회를 상상했다. 그러한 세계는 도달할 수 없는 곳처럼 보였다. 그러나 메르시에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그것을 이미 시작된 역사적 과정의 결과로 제시하고, 파리에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2440년》은 독자가 미래의 진지한 안내서로 읽어주기를 요구했다."(197-8)


"우리는 미래를 상상할 때 과학기술의 경이로운 것들로 채울 것이다. 그러나 메르시에의 미래에는 광선총도, 우주 기계도, 시간을 왜곡하는 텔레비전도, 어떤 형태로든 이 은하계에서 저 은하계로 오고 가는 장치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이상향은 도덕적 차원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수사법은 도덕적 분노를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이처럼 그는 다른 소설가들이 독자에게 강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으로 즐겨 쓰던 장치를 대부분 이용하지 않았다. 《2440년》은 단지 독자를 미래의 파리로 데려가기 때문에, 그의 정서가 개입할 수 있는 줄거리나 오늘날에는 생각할 수 없을 책략을 사용하고 있다. 이국적인 묘사로써 독자의 눈길을 끈 다음 각주를 활용하여 교화하는 방법이다. 《2440년》에는 종종 텍스트 자체를 압도할 정도로 방대한 주를 달아놓았다. 독자는 각쪽의 위에 있는 본문과 아래의 주를 오가면서 읽어야 한다. 텍스트는 2440년에, 주는 18세기에 각각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202-3)


"각주는 메르시에가 꿈꾸는 미래의 주요 경향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실 메르시에는 단지 자기가 사는 시대의 프랑스에서 모든 폐단을 몰아낸 상태만을 상상했던 것이다." "메르시에의 이상향에 루소주의가 반영되고 있기는 해도 여전히 앙시앵 레짐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의 꿈은 계속 모순 속을 헤맨다. 그는 가난과 귀족을 없애는가 하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부유한 귀족을 묘사하기도 한다. 궁정이 사라졌다가, 다른 곳에서는 왕 주위에 아첨꾼들이 몰려 있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작품의 첫머리에서 왕은 오직 상징적인 권력만 행사한다. 그러나 끝부분에서 왕은 사회 전체를 위해 법률을 제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메르시에는 일관성 없는 내용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공상에 이끌려다닌다." "메르시에의 작품은 급진적인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군주제를 옹호하는 감정으로 고동치고 있다. 그것은 물론 루이 14세풍의 변종이 아니라,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군주제이다."(204-8)


"메르시에의 상상은 앙시앵 레짐 시대의 정신자세의 범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당시의 정신자세는, 고등법원의 반란과 내란이라는 관념은 수용할 수 있어도 체제 자체의 변화를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메르시에는 특히 종교와 정부라는 두 가지 민감한 영역에서 사회정치적 질서의 근본원리에 도전했다. 그는 단순히 가톨릭 교회의 가장 눈에 띄는 제도─수도원, 십일조, 고위성직, 교황제─를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교회의 정신적 정통성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2440년의 이신론적 사제는 이신론 자체나 적어도 볼테르의 형식적인 이신론을 넘어서는 종교적 감정에 호소한다." "루소와 마찬가지로 메르시에도 정치와 종교를 뗄 수 없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시민의 축제는 하느님과 조국에게 시민이 더욱 헌신하도록 만들어준다." "학교와 성전은 젊은 남성의 교육을 완성해준다. 따라서 그들이 어른이 될 때, 개인적인 욕망이 일반의지와 조화를 이룬다. 메르시에는 루소의 생각을 정확히 따르고 있다."(211-2)


▶ 정치적 욕설


"중상비방문 작가들은 거리낌없이 아무 책에서나 자료를 가져다 이용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어디서 처음 나왔는지, 누가 처음 썼는지 출처를 밝히기 어려울 정도다. 표절이라는 오늘날의 개념은 손으로 쓴 새 소식이 담긴 쪽지를 소매 안에 넣고 다니다가 카페에서 서로 교환하고, 신문에 옮겨넣고, 다시 책에 끼워넣던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고정된 내용이나 심지어 저자에 대해 말하는 것도 시대착오라 할 수 있다. 중상비방은 집단행위였으며, 중상비방문은 소문·추문·농담·노래·만화·포스터처럼 근대의 파리 시내를 휩쓸고 다니던 것들 사이에 끼어서 떠다니는 인쇄물에 속했기 때문이다. 오직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말과 그림만이 책 속에 낄 수 있었고, 오직 소수의 책만이 도서관에 보존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적의 지하판매망에서 가장 널리 유통되던 수많은 작품을 포함한다. 《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는 혁명 직전에 가장 잘 팔리던 베스트셀러로서 이러한 문학의 모든 작품을 앞질렀다."(222-3)


"18세기 프랑스의 정치사를 뒤돌아보는 역사가들은 대개 1769~1774년의 기간을 1787년 혁명이 시작되기 전의 가장 큰 정치적 위기로 본다. 그들은 이 위기를 다양하게 해석하지만, 위기의 구성요소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슈아죌 공작이 지배하던 정부는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먼저 외교 문제를 보면, 프랑스는 7년전쟁(1756~1763)으로 모욕을 받은 결과 세력균형체제에서 차지하던 지위에 심한 타격을 받았다. 영국이 제국을 해외로 널리 확장하는 데 비해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와 아무런 효과도 없는 동맹관계를 맺은 채 거기에 구속받고 있었다. 슈아죌의 외교적 업적으로 간주되는 부르봉 왕가협정 때문에 프랑스는 에스파냐가 영국에 대항해 포클랜드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데 말려들었지만,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을 다시 한 번 치를 능력은 없었다. 더욱이 동맹국인 폴란드를 다른 동유럽 열강들이 분할하려 드는 것을 보면서도 그 나라를 지켜주기 위한 조치를 취할 능력도 없었다."(234-5)


"외교 문제에서 프랑스가 보여준 약점은 국내의 재정 문제를 정돈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것이 정부가 안고 있는 두 번째 큰 문제였다. 취약한 징세 기반─모든 종류의 면세특권과 불평등 때문이다─과 낡은 징세제도 때문에 국가를 무력하게 만드는 적자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국가는 수입을 늘릴 수 없었다. 고등법원이 세금을 신설하려는 왕령은 등기부에 등록하지 않으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등법원의 소요사태가 불안정을 낳는 세 번째 원인이었다." "물론 우리는 당시 프랑스인이 1769~1774년의 대위기를 얼마나 느끼고 있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사건들에 대해 당대인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화》의 화자는 베르사유와 파리 사이를 흘러다니던 정치적 험담거리를 모아, 그 자료를 체로 치고 온갖 '일화'를 한데 짜맞추어 루이 15세 말년의 전체 역사를 구축했다."(235-7)


"우리의 저자는 새 소식을 요구하는 독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글을 썼다. 그는 종종 '대중'과 '새 소식' 같은 낱말을 정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사용했다. 대중을 말할 때 그는 두 종류의 청중을 넌지시 구별했다. 왕국에 흩어져 있는 '소박한 시민들'의 일반 독서 대중과 그들보다 더 세련된 파리의 대중, 그는 자기 책을 일차적으로 사교계의 생활에 대해 잘 모르는 전자를 대상으로 썼다. 그래서 그는 도시의 이야기에 양념 노릇을 하는 요소─말장난, 농담, 숨은 뜻 따위─를 해석하고 설명해주면서 그들의 통역 노릇을 했다. 그가 파리의 대중에 대해서 말할 때, 그는 공원과 카페에 옹기종기 모여 그날의 소식을 토론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었다. 이 사람들은 궁정과 대조되는 도시에 속했다. 궁정la cour과 도시la ville는 각자 나름대로 정보의 유통경로를 발달시켰다. 그러나 두 체계는 서로 교차했으며, 둘은 함께 왕국에 유통되는 모든 소식을 실제로 생산해냈다."(245)


"내 생각에 《일화》는 단순히 일화를 전하는 작품이 아니라 혁명적인 작품이었다. 그러나 '혁명적'이라고 해서 프랑스혁명 같은 것을 기대했거나 조장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 작품은 부르봉 군주정의 정통성을 바로 그 기초부터 공격했다는 뜻이다. 왕들의 성생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선동적이라 할 수 없다. 프랑수아 1세, 앙리 4세, 루이 14세의 애첩들은 마치 전쟁의 승리처럼 정복이라는 관점에서 축하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뒤바리는 창녀였다. 그래서 그는 왕의 위업을 보여주는 대신 중상비방문에서 왕의 무능력의 상징으로 제시되었으며, 한층 더 나쁘게는 왕좌의 품위를 하락시키는 상징이 되었다." "만일 우리가 왕의 몸이 18세기 다수의 프랑스인에게는 여전히 신성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면, 이러한 해석은 엉뚱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파리인들이 거리에서 루이 15세의 성불구에 대한 노래를 불렀을 때, 그들은 왕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종교적 뿌리에 타격을 가했던 것이다."(255-8)


3부 책이 혁명을 일으키는가?


"20세기 초 다니엘 모르네의 손에서 비롯한 지성사의 하향식 전파라는 관념은 앙시앵 레짐의 문화생활을 놀랍도록 풍부하게 그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프랑스혁명의 지적 기원》(1933)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날학파 역사가들이 내놓은 대부분의 연구의 청사진 구실을 했다. 그러나 모르네는 이 자료를 좁은 틀 속에 넣고 짰다. 모든 것이 똑같은 유형 속에 들어가, 계몽주의에서 혁명으로 넘어가는 일직선 운동을 보여주었다. 결국 모르네의 주장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1789년에서 시작해 볼테르와 18세기 초 자유사상가들의 머릿 속에 있는 출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결과에서 원인을 추론해냈다. 모르네는 문화적 매개자와 사회적 기관들을 강조했지만, 모르네 식의 지성사는 궁극적으로 공격받을 형식으로 환원될 수 있었다. 결국 계몽주의는 위대한 사람의 위대한 책으로 추진되었고, 혁명은 계몽주의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리하여 혁명은 '볼테르의 잘못, 루소의 잘못'으로 남아 있다."(266-7)


"그러나 책의 전파가 여론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여론은 정치적 행동을 어떻게 굴절시키는지 이해하는 문제가 남는다. 키스 베이커와 모나 오주프는 계몽사상가들의 작품에 표현된 여론에 대한 관념을 다룬 논문에서 사물 그 자체보다는 관념을 연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전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확실히 역사가들은 철학자들보다는 사물 그 자체에 잘 접근하지 못한다. 사건들은 의미에 싸여서 온다. 그래서 우리는 행동을 해석과 분류할 수 없고, 역사를 순수한 사건으로 발가벗길 수 없다. 그렇다고 사건이 전적으로 철학적 담론을 통해서만 추론할 수 있다거나, 보통사람이 생활 속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철학자에게 의존해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의미를 만드는 일은 책뿐만 아니라 길거리 수준에서도 일어난다. 여론은 시장과 선술집에서도 형성된다. 대중이 사건의 의미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철학자들의 작품을 넘어서 질문을 확장시키고 일상생활의 의사소통 얼개까지 들어가야 한다."(277)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떻게 사물의 의미를 파악하는가? 내 생각에,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통찰력을 끌어내 환경에 투영하는 방식은 아니다. 차라리 틀 속에 인식을 맞추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틀을 문화에서 얻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그대로의 현실은 사회적 구축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계는 조직된 채로 온다. 그것은 여러 범주로 나뉘고, 관습에 따라 형성되며, 사람들이 공유하는 정서로 물드는 것이다. 어떤 것이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우리는 우리의 문화로부터 물려받은 인식체계 안에 그것을 맞춘다. 그리고 종종 그것을 말로 옮긴다. 그래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의미를 왜곡하는지에 상관없이, 의미도 언어처럼 사회적이다. 우리는 의미를 만들면서 사회적 활동에 깊이 개입한다. 특히 우리가 글을 읽을 때 그렇다." "그래서 독서는 두 가지 요소─의사소통의 매체인 책의 성격, 그리고 독자가 내면화하고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일반적인 기호체계─에 따라 결정된다."(285-6)


"말하자면 아무리 개념을 명확하게 한다 해도 경험적 연구의 부족을 메울 수 없으며, 독서의 역사 연구는 적절한 증거가 부족하여 난관에 부딪힌다." "의사소통의 순환에서 수용의 측면에 관한 어려움을 비켜가기 위해 우리는 여론의 문제와 직접 부딪칠 수 있었다." "18세기 프랑스의 일반 대중은 정치화하기 이전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많은 권력 갈등이 궁정의 테두리 밖에서 일어났으며, 참여하는 관찰자로서 대중은 점점 정치화했다. 이러한 종류의 정치는 소송의 형태─청원·저항·낙서·노래·인쇄물·이야기─를 띠었고, 대부분의 재담, 악담, 공공연한 소문은 집단 폭력(민중 소요)으로 나타났다." "결론적으로 18세기의 파리는 거대한 의사소통의 그물이었다. 그것은 모든 이웃을 한 울타리로 엮고, 당시 파리인이 '공공연한 소음'(선동적 소문)이라고 부르던 것, 또는 오늘날 우리가 정치적 담론이라고 알고 있는 것으로 언제나 윙윙거리는 그물이었다."(287-9)


"어떤 특별 주제가 험담이나 인쇄물 가운데 어디에 먼저 나타났는지 묻는 것은 별 소용이 없다. 주제는 모두 다른 지점에서 생기고 다른 방향으로 여행하면서 여러 매체와 사회환경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질문은 전갈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증폭과 동화에 관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이 사회에 반향을 일으키고 대중에게 의미 있는 것이 되었던 방법에 관한 질문이었다. 금서는 이 과정에 어떻게 이바지했는가? 재담과 민요는 사라지고 잊혀지기 쉬운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책은 이러한 주제를 인쇄물로 고정시켰다. 그리하여 그것을 보존해서 널리 퍼뜨리고 그 효과를 늘려준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책이 폭넓은 설득력을 가진 이야기 속에 그것을 담아냈다는 사실이다. 카페에서 주고받은 일화나 혼잣말도 인쇄물로 탈바꿈하면 실제로 그 의미가 달라졌다. 책은 사소하게 보이는 요소를 섞어서 규모가 큰 서사구조 속에 집어넣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290-1)


"1787년경 독서 대중은 모든 종류의 불법 서적에 물들어 있었다. 이러한 서적은 앙시앵 레짐의 정통 가치를 모든 방면에서 공격했다. 그러나 정치적 중상비방문은 특별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1787~1788년의 사건들을 특별한 방식에 맞춰놓았다. 위기가 닥치자 사람들은 갈라서서 자기 편을 찾았다. 그들은 견문이 넓은 사람들, 말하자면 여론을 구성하던 '대중'의 편에 섰다." "1787~1788년에 나온 소책자들은 문제를 수백 개 조각으로 쪼개는 대신 단순화시켰다. 모든 소책자는 그 상황을 정부에 대한 찬성이냐 반대냐, 고등법원에 대한 찬성이냐 반대냐 가운데 선택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로 제시했다. 그것들은 편가르기를 선동했다. 그것들은 여론을 두 개 극으로 나누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여론을 표현하기도 했다. 여론의 형성과 소책자 작가의 흥분은 원인과 결과로 동시에 작용하면서 서로를 강화시켜주었다. 절대다수의 소책자 문학은 당면 문제를 단일한 주제, 곧 (대신들의) 전제정으로 축소했다."(364-5)


"이렇게 해서 하나의 문학 장르가 르네상스 궁정에서 주고받던 불분명한 입씨름에서 출발해 베스트셀러 책의 완전한 전집으로 성장했다. 그것은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수사학적 기술을 이야기의 집합체, 정치적 민담에 동화시키고, 단일한 윤리를 가진 중심 주제를 조직해갔다. 그것은 군주정이 전제정으로 타락했다는 주제였다. 이 문학은 국사를 진지하게 논할 공간을 마련하는 대신 토론을 닫아버렸고, 견해를 양극화시켰으며, 정부를 고립시켰다. 그것은 급진적인 단순화의 원리 위에서 작동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흑이냐 백이냐, 그들이냐 우리냐 편가르기를 해야 하고, 당면 문제를 절대적인 것으로 봐야 하는 위기의 시대에는 효과적인 방책이었다. 루이 16세가 백성의 안녕 이외에는 바랄 것이 없었다는 사실은 1787년과 1788년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 체제는 계속 비난받고 있었다. 그것은 여론을 통제하기 위한 오랜 투쟁의 마지막 판에서 졌다. 그것은 정통성을 잃어버렸다."(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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