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의 공포정 - 혁명의 특효약인가, 위약인가?
휴 고프 지음, 주명철 옮김 / 여문책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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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가와 공포정


# 프랑스 혁명을 대하는 기존 입장

1 우파 : 혁명은 폭력 그 자체였으며, 혁명이 품고 있던 공포정은 20세기 독재정의 본보기를 제공했다.

2 좌파 : 혁명은 공화국을 위협하는 적들에 맞서 전략적으로 공화국을 수호한, 현대 민주주의의 시작이다.


"수정주의 주장의 중심에는 18세기 프랑스의 정치문화와 제네바 출신의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이라는 두 가지 주제가 있다. 퓌레는 루이 14세가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한 이후 공개적 정치 토론을 의도적으로 탄압했다고 주장했다. 귀족과 부유한 부르주아 사회지도층은 독서회, 문학 아카데미, 프리메이슨 집회 같은 사적 모임에서 만나 정치 주제를 토론했다. 이처럼 흔치 않은 풍토에서 그들은 권력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정치를 추상적으로 토론했고, 이성만이 국가의 당면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행정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을 마치 기하학적 대상처럼 대하는 추상적 관념에 끌렸다. 그런 점에서 퓌레의 주장은 버크의 주장과 매우 가깝지만, 퓌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루소의 영향을 강조했다." "루소는 인민주권을 바탕으로 정부를 수립하고, 공동체의 '일반의지'가 모든 결정을 통제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시행한다면 원시사회의 덕성을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41)


"루소의 사상은 다른 방향에서도 혁명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정치로 직접민주주의를 옹호했지만, 국민의회는 정기적인 선거로 국회의원을 뽑는 의회민주주의 제도를 수립했다. 그 결과, 인민주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던 급진주의자들은 곧 루소의 사상을 이용해서 이 제도가 인민주권을 부인한다고 비판하고, 정치적 위기가 닥칠 때 실력행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해서 급진적 민주주의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힘을 합친 결과 이따금 민중 폭력 사건이 터졌고, 1793~94년의 공포정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루소가 사회적·도덕적 갱생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역시 불안의 원인이었다. 그것은 정치적 행동이 사람들의 품행을 하룻밤 사이에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고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나친 낙관론이 분명했다. 사회와 도덕을 완전히 갱생하지 못했을 때 급진주의자들은 실패의 원인이 음모 때문이라고 비난했으며, 음모와 싸워 이기려면 공포정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3)


"(1990년대에 등장한 후기 수정주의에 속하는) 이서 울럭과 파트리스 이고네는 공포정을 근대 사회민주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라고 묘사했고, 장 피에르 그로스는 공포정 시기에 지방으로 파견된 자코뱅파 의원, 이른바 '파견의원'의 활동을 연구해서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로스는 수정주의자들이 공포정 시기에 내란이 일어난 지방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공포정이 내포한 것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전 지역에서 4분의 3 이상이 내란을 겪지 않았고, 파견의원들은 대부분 법적 평등·교육 확산·사회정의 사상을 마음 깊이 받아들인 실용주의자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지지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반대자들을 위협하기 위해 격하게 말했지만 대개 수사법에 그쳤다. 그들은 현장에서 실제로 재산권을 존중했고, 누진세·학교 설립·식량 공급·복지 정책을 개혁의 목표로 삼았다. 다시 말해 자코뱅주의는 단두대를 생각나게 하지만, 건설적인 사회개혁에 대해서도 많은 얘깃거리를 제공했다."(45-6)


"공포정의 발단에 초점을 맞추어 수정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정주의자들은 1789년과 1790년 사이 혁명의 첫 해가 공포정의 기초를 확립한 결정적 시기였다고 주장했지만, 티모시 타케트는 국민의회가 이룩한 업적에 관한 연구에서, 혁명은 처음부터 과격했고 폭력 지향적이었다는 퓌레의 의견을 부인했다. 그 대신 그는 의원들이 처음에는 온건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귀족과 힘을 합쳐 나라를 개혁하려고 노력했지만 귀족이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급진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1789년의 사건들은 [퓌레가 주장했던 것만큼] 이념에 좌우되지 않았다. 실제로 타케트는 루소의 영향도 비교적 가벼웠다고 주장했다. 그보다는 우파도 좌파만큼 '급진적'이었고 타협을 몰랐기 때문에 정치적 과정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1789년의 군중 폭동에 대한 연구는 협상으로 해결책을 마련하는 시도가 실패했을 때 폭력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타케트의 방법론을 뒷받침했다."(46-7)


2 공포정의 서막? 1789년 혁명부터 1793년 공화국까지


"1789년의 빛을 바래게 만든 첫 번째 요인은 정치적 갈등이었다. 1789년부터 1791년까지 수행한 개혁이 급진적이었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은 화가 났다. 그들은 변화의 속도와 범위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 결과 [양원제 군주정주의자인] '모나르시앵monarchiens'과 [모든 개혁에 반대하는] '사악한 자들noirs'이 생겼다." "우파가 개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결과는 중대했다. 다수파 애국자들은 혁명의 반대자들과 의미 있는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반대를 반혁명의 증거로 해석하고 우파가 모든 변화를 차단하려고 음모를 꾸민다는 혐의를 씌웠다. 비판을 음모의 증거로 보는 경향은 18세기에는 드물지 않았다." "그래서 1789년과 1790년의 긴장이 높은 정치 풍토에서 '음모'는 혁명가와 반혁명가가 모두 애용하는 정치적 수사학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우파 집단이 왕을 파리 밖으로 빼돌리거나 정치적 혼란을 부추기려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에 음모론은 그럴듯하게 보였다."(56-8)


"불안을 조성한 두 번째 요소는 바로 왕의 태도였다. 1791년 6월 20~21일 밤에 거행된 '바렌 도주' 사건은 굴욕적인 실패로 끝났다." "도주 소식을 듣자마자 국민의회는 왕권을 정지시켰다. 그러나 대다수 의원은 자신들이 거의 2년 동안 매진했던 헌법을 유지하기 원했고, 입헌군주정이야말로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실현 가능한 제도라고 필사적으로 믿었다. 그들은 공화국이라는 대안을 혼란 수습용 처방으로 보았다." "1789년 이래 애국파 가운데 급진좌파의 소집단은 온건파 애국자들을 비판하고 있었다. 북부의 아라스 출신 변호사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급진좌파는 헌법이 민주주의를 충분히 실현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1789년 겨울에 우후죽순처럼 생긴 정치 클럽과 급진적 신문에서 비슷한 견해를 볼 수 있었다. 센 강 왼쪽 인쇄업자 구역에 있던 코르들리에 클럽이 가장 유명했다." "코르들리에 클럽은 노골적으로 공화주의를 지지하고, 군주정을 어떻게 할지 민주적 국민투표로 결정하자고 요구했다."(61-5)


"(루이 16세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1792년 8월 10일의 (상퀼로트) 봉기는 혁명이 일어난 이래 가장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었다. 그날 튈르리 궁 스위스 수비대 약 800명과 공격진 중 376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 후 6주는 '첫 공포정'으로 알려졌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이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더욱 격렬하게 정치 폭력을 자행했다." "8월말 파리 코뮌은 프로이센 군대가 파리로 향한 도로를 보호하는 마지막 요새인 롱위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반혁명 혐의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프로이센군이 베르됭 요새를 지나 진격한다는 소문이 9월 2일 파리에 퍼지고 그때까지 최고조에 달하던 긴장이 폭력으로 분출했다." "상퀼로트는 여러 패로 나뉘어 감옥에서 '혁명' 재판을 실시하고 즉격처분했다. 닷새 동안 1,100~1,300명의 수용자들이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감옥 마당에서 죽을 때까지 난도질이나 곤봉질을 당했다. 이것을 '9월 학살'이라 불렀다."(71-3)


"1789년 혁명을 돌이켜볼 때 아주 눈부신 면이 있었다 할지라도 분명히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지 못했고, 오히려 나라를 두쪽으로 갈라놓았다. 애국파가 밀어붙인 변화에 귀족 대다수, 적어도 가톨릭교도 절반과 왕이 저항했다. 왕의 바렌 도주는 애국파를 분열시키고 유럽과 치른 전쟁의 망령을 불러오면서 위기를 고조시켰다. 애국파는 좀더 차분한 정치적 분위기에서 온건한 왕정주의자를 혁명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어야 옳았겠지만 1791년 가을까지 화해를 추구하는 일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 대신 (브리소파를 중심으로 구성된) 지롱드파는 전쟁으로 유럽에 혁명을 일으키고 역적들을 쓸어버리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 뒤 공세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군사적 승리와 국내 반혁명 세력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말을 늘어놓아 정치적 온도를 끌어올렸지만, 그들이 장담했던 것과 달리 연전연패했을 때 자코뱅 급진파·상퀼로트와 견딜 수 없을 만큼 쓰라린 틈만 넓혔다."(81)


"지롱드파의 의사와 달리 왕을 몰아낸 사람들은 급진파와 상퀼로트였다. 그들과 지롱드파의 갈등은 9월 학살과 왕의 재판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 6개월 이상 더욱 확산되었다. 근본적으로 지롱드파는 민중의 급진주의와 폭력을 싫어하는 온건한 공화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않고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 더욱이 폭력과 타협해야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미처 그럴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반면 국민공회의 경쟁자인 몽타뉴파(산악파)는 폭력과 타협할 태세를 갖추었다. 1793년 봄, 프랑스는 공화국이 분명했지만 분열한 상태였고, 정치 토론을 한답시고 서로의 계략과 음모를 비난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대화를 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유럽과 전면전을 앞두고 여차하면 폭력이 난무할 만큼 날마다 급진화하는 파리를 만나야 하는 공화국이기도 했다. 분열한 공화국, 유럽과 벌인 전쟁, 음모의 소문, 민중 폭력의 두려움은 공포정을 불러올 치명적인 요소였다."(81-2)


3 1793년 3~9월, 공포정의 시작


"1793년 3~4월에 국민공회는 긴급조치를 내리면서 공포정을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상퀼로트와 손잡은 몽타뉴파는 지롱드파를 숙청한 뒤 국민공회를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지만, 공화국은 새로운 문제를 떠안았다. 남부의 몇 개 도시에서 숙청을 반대하고 사태를 원상복구하려고 이른바 '연방주의 반란'을 일으켰다. 몽타뉴파는 군사적 패배를 역전시키고 연방주의와 반혁명을 진압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파리의 급진파와 상퀼로트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상퀼로트 역시 군사적 승리와 내전 종식을 원하는 한편, 혁명으로 이룩할 사회적·정치적 모습도 분명히 그리고 있었다. 그들은 파리에 식량 공급을 확실히 보장하려면 국가가 경제를 통제해주고, 혁명의 적들에게 단두대를 더 많이 이용하고, 인민이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구민의회와 시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이 몽타뉴파와 맺은 동맹은 쉽게 깨질 터였다. 양측은 공화국을 구하고자 했지만 공화국의 의미를 달리 생각했다."(85-6)


"1793년 봄, 서부의 4개 도(방데·되세브르·멘에루아르·사르트)에서 장인과 농민이 징집에 저항하고 징병관들을 공격하면서 내란(일명 방데의 난)이 일어났다." "국민공회는 징집으로 불거진 소요에 대처하기 위해 '파견의원'이라는 이름으로 의원 82명에게 방대한 권한을 주어 각 도에서 징집을 감독하고 공공질서를 회복하도록 했다. 반혁명의 위협을 분쇄하기 위해 혁명법원을 3월 10일에 설치했다. 판사 다섯 명과 배심원 열두 명으로 법정을 열어 평결을 내리면 24시간 안에 실행해야 하고, 피고에게 항소권을 주지도 않았다. 국민공회는 방데에서 권위를 강화하려고 3월 19일에 무장반도를 대상으로 명령을 내렸다. 징집에 반대하고 폭동에 참가하는 자를 붙잡아 재판도 하지 않고 24시간 안에 처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틀 후에는 크고 작은 마을마다 감시위원회를 꾸려 외국인을 감시하라고 명령했다. 3월 28일에는 외국에서 국내로 돌아온 망명자들을 무법자로 취급해 재판을 거치지 않고 처형한다고 규정했다."(87-92)


"국민공회의 구국위원회는 전쟁을 수행하려고 한층 더 노력하는 한편 식량 공급에 힘쓰라는 상퀼로트의 요구에도 귀를 기울여야 했다. 상퀼로트의 요구는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시장이 아니라 보통 사람도 구입할 수 있는 '적정 가격'이어야 한다는 '도덕경제'의 원리를 따랐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식료품·연료 같은 생필품 가격을 통제해달라고 요구했다. 또 민간인으로 '혁명군'을 창설하고, 시골을 뒤져 가격을 올릴 속셈으로 시장에 내놓지 않고 곡식을 쌓아놓은 투기꾼을 찾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몽타뉴파와 구국위원회는 자유로운 시장경제 체제가 올바른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국가가 가격을 통제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으로 평시의 시장경제 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통제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다." "불운하게도 어떤 조치─암시장 개입, 사재기 처벌, 공공 곡식창고 설치 등─도 즉시 효력을 보지 못했고, 상퀼로트는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100-1)


"6개월 전인 3월과 4월에 국민공회는 공포정 시기에 나라를 운영하게 될 구국위원회·파견의원·혁명법원 따위의 중요한 기관들을 설치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여름을 지나면서 사태가 악화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기관들은 더욱 나빠진 정치 상황에 적응하고 있었고, 공화국이 존속하려면 급진적 행동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군사적 패배와 전반적 붕괴의 두려움이 상황을 약화시킨 주요인이었음이 분명했다. 방데의 난, 연방주의 반란, 통제경제를 실시하라는 상퀼로트의 압력, 더욱 심화한 공포정이 상황을 악화시킨 주범이었다. 그러나 여름의 사건은 국민공회 의원들의 태도도 바꿔놓았다. 이제 의원들은 공화국이 비엔나에서 런던까지, 로마에서 방데까지 방대한 지역을 무대로 펼쳐진 음모 때문에 위협을 받는다는 사실과 그 음모를 무찌르는 길은 무자비한 힘을 끊임없이 휘둘러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힘은 공포정을 뜻했고, 그 후 네 달간 공포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104-5)


4 1793년 9~12월까지 파리와 지방의 공포정


"급진적 활동가들과 상퀼로트는 9월 대부분을 강하게 압박하는 데 보냈고, 10월에는 기독교를 전방위로 공격해 나라의 대부분 지방에서 교회 문을 닫게 만들었다. 구국위원회는 그들의 압력을 막아내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급진주의자들이 정치 일정을 완전히 쥐고 흔들지 못하게 막으면서 합헌적 정부를 보호했다. 구국위원회는 몇몇 문제에는 뒤로 물러났고 또 다른 문제에는 선제적으로 행동해서 분란을 막았다. 이미 구국위원회는 연방주의·방데의 난·전쟁에 맞설 힘을 강화해나갔다. 사실상 그들은 두 개 전선에서 공화국의 적, 동맹인 상퀼로트 세력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해가 끝날 즈음 그들이 성공하기 시작했고, 사태의 흐름은 공포정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연방주의자 반란은 실패했고, 방데의 난은 통제 상태에 들어갔으며, 제1차 대프랑스 동맹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화국은 안전했고 구국위원회는 전쟁 내각으로 발전해서 3개월 전까지만 해도 갖지 못했던 권위를 과시하게 되었다."(109-10)


"구국위원회의 전략이 성공하자 그 지위도 확고해짐에 따라 국민공회는 보상책으로 위원회의 힘을 강화해주었다. 10월 10일 국민공회는 〈평화 시기가 올 때까지 혁명정부〉 체제를 유지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1793년 헌법'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효력을 정지하는 한편, 구국위원회는 장관들과 중앙정부의 모든 부서를 감독하고 장군을 지명할 권한을 행사하며, 행정부서의 권한이 중첩되어 효율성이 떨어지는 폐단을 바로잡고 행정관을 임명하는 권한까지 장악했다. 그러고 나서 구국위원회는 행정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계획을 마련했다. 그 결과, '프리메르 14일 법'(1793년 12월 4일 법)이 나왔다. 그것은 이름과 달리 실질적으로 '긴급헌법'이었다. 이로써 도 행정권을 대부분 빼앗고, 디스트릭트와 시정부가 혁명법을 집행할 책임을 지게 했다. 또한 '긴급헌법'은 파견의원의 권한을 축소하고, 열흘마다 구국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하며, 오직 법에서 정한 임무만 수행하도록 했다."(127-8)


"9월 초부터 3개월 안에 공화국은 혼돈 상태에서 비교적 안전하고 안정된 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12월에만 3,000명 이상 처형하면서 혹독한 희생을 치르고 얻은 결과였다. 구국위원회와 파견의원들은 연방주의와 방데가 혁명을 뒤집어엎고 구체제로 돌아가려는 국제 음모의 일부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반도들도 특히 방데에서 야만적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들만이 일방적으로 과격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내란이 공포정을 고조시킨 이유를 일부나마 설명해준다면, 상퀼로트도 국민공회를 압박해서 혁명법원을 강화하고, 반혁명 혐의자의 범위를 확장하고, 통제경제 체제를 강행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공포정의 과정에 이바지했다. 1793년 가을에 대다수 의원은 온건한 유화정책이 더는 효과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국민공회도 공범이었다. 그들은 프랑스를 구체제로 되돌리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국제 음모에 맞설 합법적인 정치무기야말로 공포정이라고 생각했다."(128-30)


5 1793년 12월~1794년 4월, 파벌 타파


"공화력 2년 프리메르 14일(1793년 12월 4일)의 '프리메르 법'을 적용하는 데 여러 달이 걸렸다. 12월 중순에는 파리의 상황마저 통제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구국위원회의 권위를 위협하고 공포정의 미래에 전반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논쟁이 불붙었기 때문이다. 관용파Indulgents로 부르는 온건파 집단이 이제 공포정을 완화하고 정상적인 헌정질서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주장하면서 논쟁이 벌어졌다. 이 주장에 발끈한 급진파, 이른바 에베르파는 오히려 공포정을 강화해 반혁명의 뿌리를 영구히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파가 지난 여름부터 시작한 갈등의 바람은 12월에 표면으로 올라왔고, 1794년 봄까지 사납게 휘몰아쳤다. 결국 구국위원회는 두 집단을 체포하고 처형해서 사태를 수습했다. 이로써 논쟁은 끝났지만 혁명기에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적 인물이었던 에베르와 당통이 함께 제거되었다. 게다가 공포정의 무기가 내란과 외적이 아니라 정치비평가와 자코뱅파 동료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135-6)


"구국위원회의 위원 열한 명은 모두 비교적 중산층 출신이지만 정치적 성향은 달랐다.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는 민주주의자였지만 루소의 영향을 받아 정치를 도덕적으로 고찰하고 공포정을 실시해서 프랑스를 애국심과 시민의 덕을 바탕으로 한 이상주의적 민주국가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카르노·생탕드레·바레르·랭데 같은 의원들은 실용주의자로서 공포정을 주로 전쟁에 승리하고 반혁명을 물리치는 길로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전반적인 성공 비결은 궁극적으로 공화국의 모양새를 갖추는 일보다 공화국을 어떻게든 존속시키려고 함께 헌신했다는 데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이 함께 일하던 거의 열두 달 동안 일부는 지방에서, 다른 이들은 튈르리 궁의 구국위원회 사무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군사작전을 세우고 정책을 결정하고 법안을 기초하는 일이 제일 중요했다. 날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회의를 열고, 자코뱅 클럽과 국민공회에 정기적으로 들르면서 혹독한 일과를 수행했다."(140-1)


"로베스피에르는 공화국이 시민의 덕 관념 위에 서지만, 덕이 전쟁 중의 공화국을 지켜주지는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덕을 뒷받침하려면 공포를 이용해야 했다. 공포는 그 자체만으로는 위험하지만, 덕과 결합하면 공화국과 시민들의 이익을 증진시킬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공포정은 자코뱅주의의 반대자들만이 아니라 지지자들도 집어삼키기 시작했고, 에베르와 당통이 모두 정치적 거물이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아주 불길했다. 그 정도 지위를 가진 사람을 공적인 저항도 받지 않고 쓸어버릴 수 있는데 누가 안전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그들의 죽음은 공포정이 새 단계로 들어갔음을 뜻한다. 이제부터 두 통치위원회를 거스르는 정치토론은 위험을 감수하게 되었다. 공포정을 끝내자는 관용파 운동은 오히려 반대 결과를 가져와 혁명정부가 모든 비판을 반혁명 음모로 고발할 수 있는 명분을 주었다. 혁명정부는 공포정을 구체제에서 볼 수 없을 만큼 무한히 폭압적인 정치무기로 마음껏 개발했다."(156-61)


6 1794년 4~7월의 대공포정


"프레리알 22일(1794년 6월 10일)에 쿠통은 구국위원회를 대표해서 법안을 발의했다. 그것은 그와 로베스피에르가 기초한 안이었다. 그는 그 목적이 기존의 법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데 있다고 의원들을 안심시켰지만, 사실상 그보다 훨씬 멀리 나간 안이었다. 콜로는 법원이 수많은 역적을 무죄로 판결하고 무고한 애국자를 많이 벌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혁명이 〈자유에 대항하는 폭군을 물리치고, 덕에 대항하는 범죄와 싸우는 전쟁〉이기 때문에 이러한 잘못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혁명이 존속해야 한다면 덕이 승리해야 하고, 그래서 공화국을 무너뜨리려는 음모를 꾸민 자들을 혁명법원의 과업을 급히 성취함으로써 분쇄해야 했다. 쿠통은 이렇게 말했다. 〈조국의 적을 벌하는 일을 늦춘다면 앞으로 그들의 정체를 밝히는 일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 [프레리알 법의] 중요한 조항은 바로 그 일을 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이제 죄에 대한 벌은 오직 사형뿐이었다."(171-2)


"프레리알 법은 공포정의 역사에서 전환점이었다. 그때까지 수감자의 50퍼센트 정도가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 법이 효력을 발휘한 뒤 무죄는 20퍼센트로 떨어졌고, 유죄가 급증하자 처형도 급증했다." "'푸르네', 또는 '한 묶음'[또는 한 배腹]이라는 방식으로, 변론의 기회도 주지 않고 단일한 죄목으로 수십 명씩 한꺼번에 단두대로 보냈기 때문에 많은 수를 처형할 수 있었다." "프레리알 법은 지난해 12월 프리메르 법이 나온 뒤 진행하던 중앙집권 과정의 일부라는 설명이 아마도 가장 설득력 있을 것이다. 과단성 있는 파견의원들이 공포정을 혼란 상태로 만들지 못하게 하고, 각 도 법원이 지방민을 가볍게 처벌하지 못하게 하려고 구국위원회는 모든 정치재판을 파리로 집중시킨 뒤에는 처형 속도를 높여 수형자의 수를 통제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하는 길 외에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프레리알 법이 그 일을 했고, 그 법의 잔혹성은 거의 모든 수형자가 유죄라는 구국위원회의 신념을 반영했다."(173-8)


"구국위원회는 공포정을 강화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전쟁이 끝난 뒤 덕의 공화국을 맞이할 사회개혁을 설계했다. 핵심 요소는 탈기독교 운동으로 생긴 공간을 채울 새로운 종교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최고존재 신앙과 영혼의 불멸성이 마련해줄 수 있는 도덕률이 사회에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치적인가? 영적인가? 최고존재 숭배는 필시 두 가지 요소를 함께 가졌을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와 동료들이 어떤 형태로든 종교적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이롭다는 사실을 잘 알았음에도, 새 종교의 가치가 자코뱅파 이상, 전쟁이 끝나면 창조하고자 했던 사회적 이상향에 아주 가깝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최고존재와 단두대는 봄부터 공포정의 핵심이 된 재생과 근절의 두 요소를 함께 지닌 계획의 한 부분이자 조각이었다. 두 가지 모두 반대의 마지막 흔적까지 뿌리 뽑고 군사적 승리와 프랑스 국민의 도덕적 재생을 성취해서 혁명을 '완수'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178-83)


7 새 공화국의 새 시민 만들기


"자코뱅파의 기본 가치는 평등이었다. 그들은 법 앞의 평등과 기회의 평등을 강조했다." "법적 평등은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하 「인권선언」)에 등장했고 그 후의 모든 혁명기 법으로 표현되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해졌지만, 1791년의 헌법에서 매년 최소한 [사흘치 임금에 해당하는] 세금을 납부하는 25세 이상 남성에게만 선거권을 주었기 때문에 누구나 똑같이 정치적 권리를 누리지는 못했다(1792년 8월 남성 전체 보통선거로 개정). 일정액의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는 남성은 '수동시민'이었고, 이들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혁명 초기에 남녀평등권 사상을 지지하는 정치가와 활동가들의 수는 아주 적었다. 극작가 올랭프 드 구즈는 1790년 가을 「인권선언」을 [「남성의 권리선언」으로] 풍자해서 남녀의 동등한 지위를 요구하는 「여성의 권리선언」을 발간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고, 훗날 공포정 시기에 지롱드파에 공감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189-93)


"구국위원회의 사회개혁을 방해하는 온갖 장애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돈이 부족했다는 점이고, 특히 교육 분야에서도 돈이 절실히 필요했다. [1789년의 「인권선언」보다] 한층 더 발전한 1793년 헌법의 「인권선언」은 교욱권을 '보편적으로 필요한 권리'로 규정했다. 〈사회는 모든 힘을 쏟아 공중의 이성을 증진하고 모든 시민이 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 이처럼 혁명의 이상에 어울리는 시민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길을 교육에서 찾았다." "1789년의 혁명은 전반적인 문화활동을 질식시키는 구체제 검열제도를 폐지하면서 시작했으며, 출판의 자유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로베스피에르보다 더 크게 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공포정 시기에 그는 모든 상황이 바뀌었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위험하며 체제를 뒤집어엎는 것이라고 보았다." "구국위원회와 국민공회는 신문기자·인쇄업자들을 투옥하고 처형하는 한편, 신문사와 저술가들에게 돈을 주고 찬양 글을 쓰게 했다."(205-9)


"공포정이 18개월 이내에 끝났기 때문에, 그것이 프랑스 사회와 사람들의 태도를 얼마나 바꿔놓았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단기적으로 그것은 분명히 실패했다. 공포정이 1794년 늦여름에 끝났을 때 공포정의 사회정책은 대부분 뒤집히거나 페기되었기 때문이다. 빈자가 토지를 살 수 있게 배려한 법도 포기했고, 장소 이름은 옛날식으로 되돌아갔으며, 국가 차원의 초등 의무교육도 붕괴했다. 1794년 12월에 가격과 임금의 최고가격제를 폐지하고, 자유시장경제는 도시 빈민에게 비참한 결과를 안겨주었다. 최고존재 숭배도 사라지고, 자코뱅 클럽의 연계망도 강제로 페쇄했다. 테르미도르 반동파는 공포정뿐만 아니라 자코뱅주의의 사회적 이상을 전반적으로 적대시했고, 1789년에 떠오른 재산권과 자립주의에 의존하게 되었다." "19세기 왕정복고 시절로 넘어가면서 혁명은 과거의 일이 되었고, 프랑스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공포정의 야망은 19세기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게 넘어갔다."(222-3)


8 1794~1795년, 테르미도르 반동과 공포정의 끝


"수많은 상퀼로트가 공포정 시기의 정치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에베르와 코르들리에파의 처형에 깜짝 놀랐다. 그들은 구국위원회의 권위를 존중했기 때문에 위원회가 에베르에게 씌운 혐의를 믿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에베르와 코르들리에 클럽의 급진파는 거의 1년 전부터 공포정과 가격통제를 요구하는 상퀼로트를 지지했다. 그래서 상퀼로트는 그들을 우상으로 보았는데, 그들이 반역죄로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러웠고 두려웠다." "상퀼로트의 공포정 지지가 쇠퇴한 것처럼 국민공회 지지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모든 의원은 군사적 패배를 피하고 내란을 진압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공포정을 지지했지만, 이제 그들은 두 가지 목표를 모두 성취했다. 그들 가운데 다수가 투옥당하거나 처형당한 사람들의 친구였고, 그 자신의 생존 문제를 걱정하는 처지였다. 그들도 역시 분개했다." "아무도 구국위원회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했지만, 은밀한 장소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논의했다."(231-3)


"[구국·안보] 두 위원회가 언쟁을 시작했을 때 기회가 왔다. 4월에 구국위원회가 공안국을 설치했을 때부터 은근한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치안업무는 안보위원회가 맡았는데, 이제 안보위원들은 사전 협의도 없이 자기네 권위를 훼손했다고 분개했다. 프레리알 22일(6월 10일) 법이 마찰을 더욱 심화했다. 로베스피에르와 쿠통이 안보위원회와 상의하지 않고 국민공회에서 발의했기 때문이다." "종교가 틈을 더 벌려놓았다. 안보위원회 위원 몇 명은 무신론자였고 최고존재 숭배를 역겹게 생각했으며, 심지어 로베스피에르가 슬그머니 기독교를 되살리려 한다고 생각했다." "두 위원회의 차이는 구국위원회 내부의 갈등으로 더욱 심화했다. 카르노는 지난 봄에 군사공격 계획을 세울 때 생쥐스트가 간섭한 것을 두고 분노했다. 콜로 데르부아는 리옹에 파견되어 조제프 푸셰와 함께 일했는데, 로베스피에르가 푸셰를 극단주의 혐의로 소환했기 때문에 분개했다. 수많은 긴장관계에 로베스피에르가 끼어 있었다."(233-5)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7월 29일 국민공회에서 구국위원회의 바레르는 혁명정부가 위기를 딛고 전보다 더욱 강해졌다고 주장했다. 안보위원회도 분명히 예전처럼 자기 임무를 계속 수행할 의지를 가지고 로베스피에르 지지자들의 체포영장을 무더기로 발행[하고 모두 106명을 처형]했다. 그러나 양대 위원회는 상황을 아주 오판했고, 국민공회가 정치적 권위를 되찾게 되면서 공포정은 몇 주 안에 [쓰나미가] 덮치듯이 무너졌다. 7월 29일 국민공회는 모든 위원회 위원을 4분의 1씩 매달 새로 뽑으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구국위원회와 안보위원회가 권력을 유지하는 기반이던 구성원의 지속성을 무너뜨렸다. 구국위원회는 로베스피에르·생쥐스트·쿠농이 남긴 세 자리를 온건파로 채웠고, 8월 말 즈음에는 옛 위원이 단 세 명만 남았다." "공포정이 붕괴하면서 후폭풍이 불어닥쳤다. 수십 가지 정치 책자와 신문이 나와 공포정을 고발하고 부역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했다."(239-40)


"정치적 반동과 개인적 복수가 이내 지방으로 퍼지면서 '백색 공포'라는 이름을 얻었다. 백색은 부르봉 가문의 색깔이었다. 1793~1794년의 공포정에 동조한 사람은 누구나 공격을 받았다. 1793년 여름 연방주의자 반란이 일어났을 때 자코뱅파가 아주 잔인하게 탄압했던 곳에서 독한 복수의 바람이 불었다." "파리의 상퀼로트도 지방 자코뱅파와 비슷한 처지였다. 이미 1794년 봄 구국위원회는 그들의 정치적 권력을 박탈했고,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나사를 더욱 조였다. 구민회의를 열흘마다 두 번에서 한 번으로 줄이고, 반혁명 혐의자를 체포하는 혁명위원회 권한을 박탈했으며, 그 결과 중류 계급이 구민회의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궁핍에 시달리던 상퀼로트는 급진파의 주도로 1795년 4월 1일과 5월 20일에 두 차례 봉기했다." "봉기는 진압되었고, 1,200명 이상의 상퀼로트가 붙잡혔다. 수천 명이 무장해제를 당했고, 차후 1830년까지 파리에서 그 정도 규모의 민중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241-3)


결론


"공포정 시기에 압도적인 다수의 희생자는 전쟁과 반혁명 지역에서 나왔고, 국민공회의 권위에 반대하다가 죽었다. 그들의 혐의를 분석해보면 93퍼센트 이상이 망명·선동·반역·음모·왕정주의 때문에 죽었다. 단지 1.5퍼센트만이 투기나 최고가격제를 무시한 '경제' 범죄로 죽었다." "그러나 공포정을 탄압과 중앙집권으로만 볼 수 없다. 인민주권 이론에 바탕을 둔 정치적·사회적 민주주의를 이루고, 재산권의 근본 원칙에 도전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하려는 자코뱅파의 행동강령도 공포정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전쟁과 내전의 제약이 많았기 때문에 토지를 나누고, 세속적 기본교육 체제를 수립하며, 새로운 종교를 창조하고, 사회복지를 실천하려는 계획은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자코뱅파가 전후에 건설하려는 세계에 대한 순수한 목적을 반영했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상퀼로트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저 냉소적인 정치적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250-2)


"공포정 시기 사망자 수에서 정치적 영향으로 눈을 돌리면, 군사적 패배에서 공화국을 구했다는 사실이 가장 명백하다. 방데 반란이 성공했다면, 연방주의 군대가 파리까지 진격했다면, 제1차 동맹이 중대한 성공을 거두었다면, 공화국은 아마 붕괴했을 것이며, [절대군주정이든 입헌군주정이든] 어떤 형태로든 군주정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경우를 종합해볼 때, 공포정은 완강한 성격 때문에 반대파를 만들고, 그 반대를 이용해서 더 많은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스스로 강화하는 힘을 가진 사건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정 시기 정치가들이 저항과 반란의 정확한 정보를 얻기 어렵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주장이다. 2세기가 지난 오늘날 분명해졌다고 당시에도 항상 분명했다고 볼 수 없으며, 수많은 문제를 음모로 해석하는 습관은 공포정의 수단을 보복하는 데 동원한 것이 정당하다는 그릇된 확신을 심어주었다. 공포를 가한 사람들은 그 자신도 종종 공포를 느꼈다."(253-4)


"1789년까지 지방은 줄곧 독자성과 개성을 많이 유지했다. 혁명이 일어나 초기에 국가통합이라는 이해관계 속에서 지방의 독자성과 개성을 쓸어버렸고, 공포정은 1793년 12월 프리메르 법으로 새로운 지도 위에 중앙집권 국가를 강요했다. 나중에 총재정부가 그 법을 폐지했지만 여전히 행정의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했고, 나폴레옹은 도지사 제도를 창설해 프랑스인의 정치생활에 그 체제를 확고히 심어놓았다. 그러나 오늘날 프랑스 정치평론가들이 여전히 보나파르트보다 자코뱅파가 중앙집권 국가 전통의 원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혁명이 프랑스에 200년간 정치적 불안을 가져온 출발점이라면, 공포정은 행정의 중앙집권화를 거쳐 앞으로 정치가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면서도 국가의 존립을 위험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는 전통을 남겨주었다. 그것을 공포정의 업적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로베스피에르와 동료들이 그것을 가치 있는 일로 인식했는지 아닌지는 별개 문제다."(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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