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사는 논쟁 중
김응종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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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혁명과 반혁명


1 인권선언


"프랑스혁명은 '자유'와 '평등'의 드라마이다. 1791년 헌법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793년 헌법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795년 헌법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와 의무선언〉 세 인권선언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개념은 자유, 평등, 소유권이다. 1789년 인권선언에서 '자유'는 '소유', '안전', '압제에 대한 저항'과 함께 자연권이라고 선언되었다. 평등은 권리의 평등으로 제한되었지만 소유권이 보장되고 권리가 평등한 상태에서 평등은 자유와 충돌하지 않았다. '소유권'은 〈신성하고 불가침적인 권리〉라고 재차 강조되었다. 1789년 인권선언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선언하여 구체제의 특권적인 신분사회에서는 벗어났으나 '자유'와 '소유권'으로 발생하는 경제적 불평등을 시정하려는 사회적 조치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인권선언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사회적 조치에 대한 많은 요구가 거부된 것은 1789년 인권선언이 부르주아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61)


"1793년 새로운 헌법은 파리 민중의 요구를 반영할 필요가 있었다. 〈공동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떠올랐으며 '평등'이 '자유'보다 우선적 지위를 차지했고 '소유'는 네 자연권 가운데 말석으로 밀려났다. 공적인 자유가 개인적인 자유보다 우선시되었고, 자유와 평등이 충돌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열월 정변' 이후 제정된) 1795년 헌법은 민중의 정치 참여와 독재자의 출현을 막는다는 목적 아래 제정되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와 의무선언〉이 되어 권리의 남용을 막고자 했으며, 자연권 개념이 삭제되어 〈자유, 평등, 안전, 소유〉는 사회적 권리로 강등되었다. '소유권'을 존중하는 것은 '의무'라고 규정함으로써 소유권을 강화했다. 1795년 헌법은 1791년 헌법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를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1795년에 혁명이 다시 부르주아 단계로 복귀하면서 혁명은 동력을 상실했다. 좌절한 혁명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나폴레옹의 독재였다."(62)


# 열월 정변 : 테르미도르 반동(reaction)을 가리킴


2 방데 전쟁의 폭력성


"방데 전쟁은 1793년 3월에 시작되어 1793년 12월 23일 사브내 전투로 끝났다. 역사적으로 논란이 된 것은 혁명정부의 가혹한 전후처리였다." "19세기 이래 프랑스혁명사를 지배해온 공화주의 역사가들과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방데 전쟁을 반혁명 전쟁으로 규정하고 방데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들은 방데 전쟁이 벌어진 시기의 공포정치는 외전과 내전의 시기에 국가와 혁명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받아들인 반면, 방데 전쟁의 폭력적인 전후처리에 대해서는 외면해왔다. 이들의 역사 서술에서 방데 전쟁이 차지하는 비중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균형을 잃었다. 이들과 달리 수정주의 역사가 프랑수아 퓌레는 공안을 이유로 폭력을 용서하는 것에 반대했다. 〈방데의 파괴와 동시에 진행된 방데인들의 대량살육은 공안이라는 이유로 사면될 수 없는 공포정치의 최대 집단학살이었다.〉 다만 퓌레는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는 시대착오적이고 부적절하다며 거부했다."(86-7)


"제노사이드 논쟁을 가열시킨 사람은 레날 세셰였다. 그는 방데 전쟁 이후 벌어진 전후처리는 공안위원회가 주도한 제노사이드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장클레망 마르탱은 공안위원회가 주도하지도 않았으며, 세셰의 주장은 역사적 비판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공격이라고 반박했다." "제노사이드를 〈집단의 전면적 혹은 부분적 학살〉이라고 정의할 경우, 방데 학살은 제노사이드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나 제노사이드의 범위를 이렇게 확대하면 사실상 모든 학살이 제노사이드에 속하게 되어 제노사이드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제노사이드는 '다른 종족의 전면적인 파괴를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학살'로 한정되어야 한다." "방데 학살이 제노사이드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논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폭력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프랑스혁명이 아무런 단절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구체제에서 자행되던 야만적인 폭력은 '자유-평등-형제애'를 외친 혁명가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던 것이다."(87-8)


3 리옹 반란


"파리에 대한 지방의 저항은 1792년 8월 10일 이후, 특히 9월 학살 이후 파리 민중이 국민공회를 무시하고 '주권'의 담지자임을 주장하고, 산악파 의원들이 이에 편승하면서 시작되었다. 보르도를 위시한 지방 대도시는 파리가 주권을 독점하는 데 반대했고, 프랑스 전체 국민의 대표인 국민공회가 주권의 담지자라고 주장했다. 연방주의 반란은 근본적으로는 주권의 소재를 놓고 벌인 투쟁이었다. 서부의 방데 전쟁이 지역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장기간 항전한 반면, 연방주의 반란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단명했다. 캉은 도주한 지롱드파 의원들이 주도했고 보르도는 지역 출신 지롱드파 의원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지롱드파의 반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마르세유, 리옹, 툴롱의 반란은 과격한 산악파에 대한 중산계급의 반란이라는 성격의 강했다. 계급전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특정 계급이 처벌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반란에 참여한 계급이 가장 가혹한 처벌 대상이었다."(115-6)


"연방주의 반란은 파리 정부를 크게 위협했다. 방데 전쟁과 대외전쟁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혁명은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 파리 민중의 사회적 요구도 과격했으며, 파리의 혁명군은 리옹의 전후처리에 동원되어 잔혹함을 과시했다. 콜로 데르부아와 푸셰는 리옹을 없애라는 혁명적 수사를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폴 핸슨은 다른 어떤 사건보다 연방주의 반란이 공포정치를 의사일정에 오르게 했다고 말한다. 공포정치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국가를 구하기 위해 취해진 불가피한 조치라는 측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공회가 방데 전쟁을 진압한 후 2만~4만 명의 양민을 학살한 행위나, 리옹에서 2천 명의 시민을 학살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것은, 팔머에 의하면, 〈무책임하고 통제불가능한 극단주의자들이 자행한 전제정치〉였다. 그것은 정상적인 국가의 처벌 수위를 넘어선 광적인 사회적 복수였다."(117-8)


4 슈앙 반혁명 운동의 여러 모습


"빅토르 위고의 《93년》은 엄밀히 말하면 서부의 반혁명 전쟁 가운데 슈앙 반혁명 전쟁을 다룬 책이다. 그는 두 반혁명 전쟁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성격의 저항으로 보고 있다. 슈앙 반혁명 전쟁을 제2의 방데 전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공화주의자 위고의 시선은 부정적이다. 그에게 서부의 반혁명 전쟁은 〈진리와 정의와 권리와 이성과 해방에 맞선, 당당하되 긴 무지의 저항〉, 중앙에 대한 지역의, 문명에 대한 야만의 저항이라는 오랜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저항,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이지만, 〈진보에 공헌한〉 저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고는, (공화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인) 고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고뇌한다. 〈도대체 인간을 변질시키는 것이 혁명의 목적이란 말인가? 가족을 파괴하고 인간성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혁명을 감행했단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1789년 혁명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지고의 실체들을 확인하기 위해서지 그것들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146-7)


5 가톨릭교회의 수난


"1789년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붕괴되고 공화국이 수립되자 오랜 기간 왕정과 공생해오던 가톨릭교회 역시 붕괴를 면하기 어려웠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과는 반대로, 프랑스혁명은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종교를 박해했다. 혁명은 선서 거부파는 물론이고 선서파도 박해했으며, 나아가 프로테스탄트교회, 유대교회 등 일체의 종교를 박해했다. 기존의 종교는 미신에 불과했고, 프랑스혁명이 계시이자 섭리이자 진정한 종교였다. 프랑스혁명이라는 종교는 '다른' 종교와 양립하기를 거부했다." "프랑스혁명은 종교를 종교 본연의 일에만 전념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세속화'라는 유산을 남겨주었다. 세속화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정치는 종교에 개입하지 않고 종교 역시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세속화는 이런 의미에서 종교가 정치라는 오염에서 벗어나 순수해진 것으로, 공포정치 시대에 극성을 부리던 파괴적인 탈그리스도교와 구분된다."(170-2)


6 '열월 정변'과 공포정치의 청산


"역사학에서 reaction이 반동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러시아혁명 이후다. 레닌이 죽은 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을 혁명을 '타락'시킨 새로운 열월파라고 비난했다. 프랑스혁명사의 자코뱅 해석에 의하면, 자코뱅과 산악파와 상퀼로트가 순수하고 강고한 혁명을 전개하던 혁명력 2년의 영웅적인 시기는 열월 9일에 파괴되었고 그 후 '반동'이 진행되었다. 반면, 수정 해석을 지지하는 역사가들은 〈열월의 반동〉 대신 〈열월 9일〉 혹은 〈열월파 국민공회〉 같은 용어를 선호하며, 열월 9일의 사건을 〈과거로의 회귀〉라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프랑수아 퓌레는 열월 9일을 혁명 자체의 끝이 아니라 민중적 형태의 혁명에 의해 감추어졌던 또 다른 형태의 혁명을 드러내준 사건으로 본다. 그의 유명한 표현에 따르면, 전쟁과 공포정치 때문에 궤도에서 이탈한 혁명을 본궤도로 복귀시킨 사건이었다. 박즈코가 열월의 사건을 혁명의 종식이 아니라 〈공포정치의 종식〉으로 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175-6)


"혁명력 2년 열월 9일,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파를 제거했다. 공포정치의 청산과 함께,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하는 데 앞장선 공포정치가들도 청산되었으며 민중운동도 쇠퇴했다. 전쟁, 내전, 공포정치에 지친 민중운동은 열월 9일 이전에 이미 동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열월파 국민공회는 통제경제를 폐지하고, 상퀼로트를 축출하는 등 민중운동을 억압했으나 민중의 저항은 약했다. 열월파 국민공회는 혁명력 3년 헌법을 제정하여 공포정치의 재림과 상퀼로트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해 온갖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혁명은 민중혁명에서 벗어나 부르주아 혁명으로 복귀했다. 열월파 국민공회 시기는 억울한 혐의자들을 석방하고, 지롱드파 의원을 복권시키고, 가톨릭교회에 대한 야만적인 박해를 중단하고, 방데인을 사면함으로써 내전을 완화시키고, 과격한 자코뱅 혁명가와 상퀼로트를 제거하는 등 사회를 안정시키고 혁명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노력한 시기였다. 한마디로 공포정치를 청산한 시기였다."(207)


2부 혁명가


7 라파예트─세 혁명의 영웅


"라파예트는 '혁명'과 '질서'의 조화를 잡으려고 노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동시대인들부터 현대인들에 이르기까지 양분된다. 라파예트에 대한 가장 유명한 평가는 그를 〈두 세계의 영웅〉이요 프랑스의 워싱턴으로 보는 것이다. 이 평가는 라파예트가 자유의 대의를 위해 헌신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1792년에 공화정이 수립된 후 혁명 프랑스를 탈출한 라파예트는 당시의 혁명가들로부터 혁명과 조국을 배신한 자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했다. 라파예트에 대한 또 다른 평가는 그의 성격과 능력에 대한 것이다." "19세기 공화주의 역사가인 미슐레를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가는 미라보와 나폴레옹의 평가를 수용하여 라파예트를 현실 정치와 사회적 갈등에 무지한 미성숙하고 무식하고 공상적이고 허영심 가득한 모험가로 보았다. 라파예트 전문가인 고트촉은 젊은 귀족 라파예트가 미국 혁명에 뛰어든 것은 화려하고 세련된 궁정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젊은이가 도피한 것으로 보았다."(239-40)


"역사가들과 달리 대중은 라파예트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2007년 라파예트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여 '두 세계의 영웅'을 팡테옹에 안치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라파예트가 자유의 대의에 헌신했음을 인정한다 해도, 혁명전쟁이 한창일 때 조국을 버린 사람이라는 사실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라파예트의 팡테옹 이장 시도는 무산되었다. '두 세계의 영웅'은 '자유'의 대의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연권의 존재를 인정했다. 그가 자연권 가운데 가장 소중하게 여긴 것은 자유였다. 그에게 '자유'는 종교와 마찬가지였다. 1790년 라파예트는 〈봉기는 인간의 권리들 가운데 가장 신성한 권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구체제의 폭정이건 자코뱅의 폭정이건 외국의 폭정이건 어디에서건 자유를 억압하는 폭정에 맞서 저항이라는 신성한 권리를 행사했다. 1793년 6월, 당시 감옥에 갇혀 있던 라파예트는 에냉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유를 〈나의 신성한 광기〉라고 소개했다."(241-2)


8 시에예스 신부─혁명의 시작과 끝


"시에예스에 따르면, 제3신분은 국가의 모든 생산을 담당하는 '모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단일 계급인가? 제3신분은 크게 부르주아와 비부르주아─도시 수공업자와 농민─로 구성된다. 여기에서 부르주아는 자본가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자본가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부르주아는 어원대로 도시bourg 거주민이라는 뜻이다. 중세 이래 구체제에서 부르주아는 시민권과 정치적인 권리를 가진 도시 거주민으로 '법적으로' 인정된 계급이었다. 부르주아의 18세기 의미는 도시에 거주하는 비귀족, 교양인, 부유한 토지 소유 계급이었다. 우리가 흔히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말할 때 그 부르주아의 의미는 자본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시민이라는 의미이다. 시에예스는 바로 이러한 부르주아 계급으로 태어났고 본인도 이런 의미로 그 단어를 사용했다. 시에예스가 혁명적 역할을 기대한 계급은 제3신분 모두가 아니라 제3신분 가운데 부르주아 계급이었다."(252-3)


"시에예스를 바라보는 역사가들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민중을 경멸하고 상황과 권력에 따라 변절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르주 르페브르는 시에예스를 주교가 되지 못해 귀족에 대해 반감을 가진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정치가라고 평했다. 로베스피에르가 말한 '두더지'라는 평도 유명하다. 그러나 시각을 바꾸어 부르주아 혁명의 관점에서 시에예스를 바라보면 다른 면이 보인다. 시에예스는 산악파와 상퀼로트가 지향한 직접민주주의에 반대했고, 그것의 토대가 된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적 덕에도 반대했다. 시에예스에게는 정치적 덕이 아니라 물질적 복지가 근대 유럽 국가의 목표였다. 시에예스는 혁명이 19세기와 20세기에 유럽과 유럽 이외의 지역에 전달한 대의제 관념을 가장 완벽하게 대변한 인물이었다. 시에예스는 루소와 달리 대의제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한다고 보았고, 이러한 사상은 뱅자맹 콩스탕 같은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269-70)


9 콩도르세─계몽사상가에서 혁명가로


"콩도르세는 계몽사상가들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이성주의자였다. 볼테르보다 과격한 반교권주의자였고 과격한 무신론자였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행복을 저해하는 장애물은 〈편견, 불관용, 미신〉이었다." "콩도르세는 보호무역주의자 네케르에 반대하여 튀르고의 중농주의를 지지했다. 그는 자유무역이야말로 인류의 진보에 필수라고 생각했다." "혁명 발발 후 콩도르세는 프랑스 전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도량형 단위를 통일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1791년 3월 26일 의회는 '미터'를 국가 도량형의 표준 단위로 결정했다. 콩도르세는 달랑베르의 뒤를 이어 《백과전서》의 편집에 적극 참여하여 수학 관련 논문 24편을 기고했다. 콩도르세를 통해서 수학과 통계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응용되는 근대적인 학문이 되었다." "콩도르세는 미국의 인권선언과 헌법이념을 지지했으며, 여성·프로테스탄트·유대인·흑인노예 같은 소수자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팸플릿들을 발표했다."(275-6)


"콩도르세의 계몽사상과 혁명사상은 그의 유작인 《인류의 진보에 대한 역사적 개요》에 종합되어 있다. 혁명이 폭력과 아나키의 위협을 받고 자신의 앞날에는 기요틴이 기다리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계몽사상가로서 인류의 진보는 계속될 거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간직했다." "'진보'가 콩도르세의 독창적인 개념은 아니다. 보댕, 파스탈, 데카르트 같은 프랑스 근대 철학자들은 인류의 역사가 진보한다고 생각했으며, 18세기의 사상가 가운데 카스텔뢰,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볼네도 진보를 지지했다. 특히 콩도르세의 정치적 멘토인 튀고르는 1750년 소르본대학에서 《인간정신의 연속적인 진보에 대한 철학적 개요》를 발표한 바 있다. 콩도르세는 섭리의 개념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완전히 세속적인 차원에서 '진보'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이전의 진보론에서 진보했다." "콩도르세 사후인 1795년에 출판된 《개요》는 계몽철학의 유언이었고 포스트 테르미도르의 참고서가 되었다."(297-301)


10 당통─구국의 영웅인가 부패한 기회주의자인가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는 혁명 동지이자 친구였다. 그들은 서로를 높이 평가하면서 혁명을 이끌어왔다. 그들은 〈혁명의 두 기둥〉, 〈자유의 두 기둥〉으로 불렸다. 19세기에 공화주의 전통은 당통을 복권시켰다. 미슐레는 1792년 여름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한 당통을 혁명의 화신이라고 평가했고, 당통의 죽음과 함께 공화국이 죽었다고 보았다. 에드가 키네는 당통의 〈대담함〉 연설에서 민중의 함성을 들었다. 그 무렵, 실증주의자인 콩트는 당통을 실증주의의 예언자로 묘사했다. 프랑스 계몽주의에는 볼테르의 부정적 합리주의, 루소의 종교성, 디드로의 원原실증주의라는 세 가지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혁명기에 각각 〈지롱드파의 회의주의, 로베스피에르의 신정정치, 당통의 갱생적 해방〉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갱생적 해방이란 그리스도교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제3공화국의 공화주의자들은 혁명의 공화주의적 화신이면서도 공포정치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을 찾았는데 당통이 그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333)


"로베스피에르는 '청렴지사'였다는 점에서 당통의 부패는 더욱 비교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당통은 부패했을까? 거의 모든 역사가는 당통이 돈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프랑수아 퓌레는 마티에가 입증한 자료들이 당통의 부패를 확인해준다고 인정했지만, 역사는 〈도덕의 학교가 아니다〉라며 당통이 혁명의 대의를 위해 기여한 바를 간과하지 않았다." "국가가 혁명과 전쟁이라는 위기에 빠져 있을 때 혁명가를 평가하는 기준이 '도덕'이나 '이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당통은 혁명을 이상주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거나 '덕의 공화국'을 건설한다거나 하는 천년왕국적인 관념을 가지지 않았다. 그에게 혁명은 인간의 조건을 현실적으로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현실에 발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적을 박멸하기보다 화합하려 했고,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려 했으며, 전쟁보다 평화를 원했다."(334-6)


11 로베스피에르─혁명의 수사학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을 루소와 동일시했다. 그가 쓴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장 자크 루소의 영혼에게 바치는 헌사〉는 정치적 유언같은 분위기를 띠고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헌신하겠다고 다짐하는데, 그가 꿈꾼 새로운 사회는 '덕'이 지배하는 사회이고, 그 '덕'은 〈신과 같은 분〉으로 추앙하는 루소가 제시한 것이다. 〈헌사〉에서 유독 《고백》만 강조한 것은 '박해받는' 루소의 이미지를 자기의 이미지에 투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로베스피에르는 루소가 동시대의 계몽사상가들로부터 박해받았듯이 자신도 동시대의 혁명가들로부터 박해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박해의식은 혁명이 심화될수록 그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혁명기의 일반적인 정신병리가 그렇듯이 로베스피에르는 의심, 불안에 시달렸으며 그럴수록 집요하게 음모를 고발했다. 그에게 비우호적인 매체들은 그를 〈정신병자〉, 〈광인〉이라고 부르는 등 그의 심리 상태를 의심하기도 했다."(341)


"로베스피에르가 요구하는 (정치적) '덕'은 국가의 법을 따르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바로 이 덕으로부터 공포가 나온다. 사적인 이익을 앞세우는 사람은 반혁명적이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된다. 평화시라면 이런 사람들은 정상적인 법 절차에 따라 재판받고 처벌받을 것이지만 혁명시에는 이러한 절차를 따를 수 없다. 〈신속하고 준엄하며 단호한 정의〉가 필요하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정부는 폭정에 대한 자유의 전제專制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자유의 전제〉라는 모호하고 모순적인 말은 자칫 로베스피에를 아나키스트 같은 자유주의자로 오해하게 할 수 있으나, 그가 말한 자유는 혁명기의 자유였고, 개인적인 자유나 시민적인 자유가 아니라 공적인 자유, 국가의 자유였다. 따라서 자유의 전제는 국가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반反자유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혁명가 로베스피에르에게 공포정치, 자유의 전제, 덕의 공화국은 동일한 수사였다."(363)


12 마라와 코르데─혁명의 두 순교자


"마라는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는 타인의 재산, 자유, 생명을 침해할 권리가 있다.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억압하고 노예화하고 학살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마라는 의회의 혁명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라는 《민중의 친구》를 간행하면서 철저하게 민중의 입장을 대변했다." '1793년 4월 5일 자코뱅 클럽 의장으로 선출된 후 마라는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지롱드파에 맞서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반혁명이 국민공회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봉기합시다. 예, 봉기합시다! 혁명의 모든 적과 혐의자들을 체포합시다. 우리가 절멸당하지 않으려면 모든 음모자를 가차 없이 절멸시킵시다. 뒤무리에가 왕정을 회복하기 위해 파리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지롱드파 의원 29명이 축출된 이후에도) 마라는 욕조에 들어가서도 쉬지 않고 국민공회에 보복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의원들은 마라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마라의 생물학적 생명은 물론 정치적 생명도 사실상 끝났던 것이다."(381-4)


"(마라를 살해한) 코르데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구국의 영웅이자 통합의 영웅으로 인식되었다. 코르데는 귀족이면서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에 공화파와 왕당파로 분열된 나라를 통합하는 인물로 기념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그리스도교 이름 Marie Anne Charlotte Corday은 쉽게 그녀를 공화국의 수호여신 '마리안'으로 변모시켰다. 코르데는 원했던 대로 마라를 죽였고 희망했던 대로 천사로, 잔다르크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가 기대했던 마라의 죽음과 함께 자유가 찾아왔는가? 마라는 이미 정치적 생명이 끝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다. 마라의 경쟁자들은 내심 마라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코르데는 본의 아니게 그들을 도와준 셈이 되었다. 코르데는 마라를 영웅으로, 자유의 순교자로 만들었고, 그의 숭배에 불을 붙인 것이다." "마라를 '민중의 친구'로, 코르데를 반혁명적인 왕당파로만 보는 것은 복잡한 역사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이다."(411-2)


3부 혁명사


13 버크와 페인의 엇갈린 예언


"국민의회는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며 〈인간의 자연적이고 양도 불가능하고 신성한 권리들〉을 선언했지만, 버크는 이러한 추상적인 계몽주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버크에게 자연법과 자연권은 형이상학적으로는 진리이지만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허위다. 국민의회 의원들이나 파리 민중같이 무지하고 천박한 사람들이 말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지혜가 없고 미덕이 없는 자유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있을 수 있는 모든 해악 중 최대의 것이다. 그것은 감독이나 규제가 없는 상태의 어리석음, 죄악, 광기이기 때문이다.〉" "버크는 10월 6일 사건에서 공화주의를 예감하며, 광신적인 혁명가들과 무지한 민중이 지배하는 '민주정'은 한 사람의 군주가 지배하는 전제정보다 훨씬 잔혹할 것임을 예견한다. 버크는 또한 프랑스혁명이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중의 자의적인 전제정으로 전락한 다음 최종적으로는 민중적 장군의 지배로 끝맺을 것임을 예언한다."(425-7)


# 10월 6일 사건 : 파리 민중이 왕과 왕비를 튈르리 궁에 감금한 사건


"페인은 시종일관 공화주의라는 시각으로 프랑스혁명을 바라본다. 페인이 생각하기에 정부 형태는 민주정, 귀족정, 군주정, 대의정의 네 종류가 있다. 공화정은 군주정을 제외한 다른 세 형태의 정부와 결합할 수 있는데 대의정과 가장 잘 어울린다." "페인은 미국 독립혁명을 이어받은 프랑스혁명이 유럽혁명 나아가 세계혁명의 기폭제가 되기를 기대했다. 그는 유럽의 모든 나라가 불법적인 전제군주에서 해방되어 공화국을 수립하면 전쟁이 사라질 것이라고 낙관했으며 '유럽의회'의 구성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혁명은 전쟁과 공포정치로 탈선했다. 혁명이 전쟁과 민중 개입을 유발해 공포정치로 탈선할 것이라는 혁명의 메커니즘을 내다보지 못한 페인에게 그것은 탈선이었다. 페인은 프랑스에서도 미국 독립혁명과 같은 공화주의 혁명이 성공하여 번영을 이룰 것으로 생각했으나 전통적인 왕국 프랑스와 신생국 미국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페인의 이상주의는 고상했으나 비현실적이었다."(442-3)


14 미슐레의 공화주의 프랑스혁명사


"미슐레가 시도한 공화주의 프랑스혁명사의 주인공은 (부르주아가 아니라) 민중이다. 민중이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민중은 언제나 선하고 언제나 옳다는 그의 민중관은 다분히 낭만적인 인식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9월 학살의 민중은 7월 14일의 민중이나 8월 10일의 민중과는 다른 민중이었다는 미슐레의 변론은 역사적이지 못하다. 민중은 처음부터 폭력적이었다. 루소를 비롯한 계몽사상가들이나 브리소를 비롯한 혁명가들은 민중을 덜 계몽된 존재로 파악했고, 그리하여 프랑스에서 공화정을 수립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인식했다." "미슐레는 혁명이 본궤도를 달리던 시기를 민중 혹은 민중과 엘리트가 함께 혁명을 주도하던 시기로 보는데, 바로 1789년 7월 14일부터 1792년 8월 10일까지이다. 민중이 혁명 전선에서 물러나고 엘리트 혁명가들이 혁명을 주도하면서 혁명은 궤도에서 이탈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한 공포정치 시기가 바로 그 시기이다. 미슐레는 이 두 시기를 대조적으로 바라본다."(464-5)


"미슐레는 〈의심〉, 〈질투〉, 〈고발〉, 〈무고〉, 〈비방〉, 〈독선〉, 〈위선〉 등과 같은 용어로 로베스피에르의 행동을 분석하며, 로베스피에르를 〈대고발자〉, 〈이단 재판관〉이라고 규정한다. 미슐레는 로베스피에르가 〈청렴지사〉라는 세간의 평가를 거부하지는 않으나, 이러한 도덕주의를 무기 삼아 〈내적인 숙정〉을 외치는 사람보다는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는 적과 타협하고 필요하면 매수하는 당통을 위대한 정치가로 보았다." "미슐레는 루이 16세의 처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당시 국민은 국왕 처형을 원하지 않았는데도 산악파는 다수파인 지롱드파에 대한 정치공세 차원에서 국왕 처형을 주장했고, 그 결과 왕을 순교자로 만들어 왕국을 신성하게 만들고 교회를 부활시킴으로써 공화정에 타격을 입혔다는 것이다. 루이 16세는 유죄였으나 〈당시로서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고, 처형은 국가 이익을 해쳤다는 것이 공화주의 혁명사가가 〈당시의 모든 역사가에 맞서서〉 국왕 처형을 비판한 이유이다."(463-4)


15 한나 아렌트와 프랑스혁명


"아렌트가 보기에, 프랑스혁명은 미국혁명과 마찬가지로 공화국을 수립하면서 혁명의 길에 들어섰으나, 빈자들이 혁명에 개입하면서 '정의'가 '법'을 위협했고 역사적으로 누적된 고질적인 사회문제가 사회혁명을 일으켜 최종적으로 '자유의 전제', '덕의 공포', '공포정치'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은 공화국 체제의 수립이라는 정치혁명을 넘어 사회혁명으로 이어졌다는 이유로 진정한 혁명의 지위를 누려온 반면, 미국혁명은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독립에 그쳤을 뿐 혁명으로 진화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아렌트는 이러한 인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아렌트는 불평등, 빈민 등과 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한 혁명이 진정한 혁명이라는 통념을 거부하고 공화국의 수립을 진정한 혁명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미국혁명이 진정한 혁명이다. 프랑스혁명은 혁명의 모델이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러시아혁명이 프랑스혁명을 모델로 삼음으로써 그 역시 재앙으로 끝나고 말았다."(485-6)


16 알베르 소불의 마르크스주의 프랑스혁명사


"소불이 마르크스주의에 충실한 역사가라는 사실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소불이 근대의 농민을 중세의 농노처럼 묘사한 것, 귀족의 특권을 과장한 것, 부르주아 혁명의 성과에 대해 지나치게 인색한 것, 민중혁명의 폭력성에 대해 둔감한 것 등은 바로 이념적 편향성에서 나온 것이다." "소불이 외면한 것, 그것은 부르주아 혁명의 성과이고, '자유, 평등, 형제애'에 가려진 폭력이며, 롤랑 부인이 절규한 자유의 이름으로 자행된 〈범죄〉이다. 소불이 1791년 헌법을 부르주아 헌법이라고 폄하하고 1793년 산악파 헌법을 〈정치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적인 특징들을 확정지은 헌법〉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편파적이다. 1793년 헌법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졸속 제정되었고, 콩도르세 헌법안보다 민주주의가 후퇴한 헌법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 헌법은 헌법으로 시행하기에 적절하지 못했고 산악파 혁명가들에게는 의회 선거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시행이 유보되었다가 폐기되었다."(505-6)


"소불은 마라의 죽음을 애도하고, 로베스피에르를 〈어떤 상황에서도 통찰력 있고 단호하게 민중의 권리를 옹호했다〉라고 평가했다." "소불은 로베스피에르가 부르주아로서 노출한 모순과 한계를 그가 유물론자가 아니라 유심론자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러한 설명은 자신이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임을 노출하는 또 다른 편견이다." "소불은 마르크스주의 도식에 의거하여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규정하며, 부르주아 혁명에서 민중혁명으로 이행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주목한다. 그는 '자유의 전제'에서 희망을 본다. 그는 민중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혁명사를 해석하며 평가한다. 민중사가에 의하면 전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왕의 전제는 나쁘지만 민중의 전제는 그렇지 않다. 왕의 폭력은 나쁘지만 민중의 폭력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클로드 마조리크의 말대로 소불의 《프랑스혁명사》가 '고전'인 것은 맞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고전이다."(506-7)


17 프랑수아 퓌레의 수정주의 프랑스혁명사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개념으로 바라보면, 부르주아 혁명의 발발은 필연적이기 때문에 그만큼 구체제는 봉건적 생산양식의 모순이 축적된 위기의 시기여야 한다. 대부분의 프랑스혁명사 개설서가, 특히 마르크스주의 프랑스혁명사가 한결같이 '구체제의 위기'로 시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중세가 끝나고 300~400년이 지났음에도 혁명 전 프랑스 농촌은 여전히 가혹한 봉건적 부과조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여기에다가 혁명 전에 나타난 '귀족의 반동'은 구체제의 위기를 심화시켰다는 것이니, 봉건제를 타파하는 부르주아 혁명은 필연성과 정당성을 획득한다." "퓌레는 '상황론'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지만, 혁명 초부터 〈혁명은 전쟁이었고 평화는 반혁명이었다〉며 전쟁에 혁명에 내재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공포정치 역시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생겨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혁명에서 생겨난 필연적인 현상이라는 (퓌레의) 관점은 혁명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며, 반혁명파의 혁명관이기도 하다."(518-21)


"퓌레는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뿌리를 자코뱅주의에서 찾는다. 퓌레가 보기에, 러시아혁명은 자코뱅의 이데올로기를 이어받았다. 퓌레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란 혁명의식을 떠받치는 두 개의 신념체계를 가리킨다. 하나는 모든 개인적·도덕적·지적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환원하여 정치적인 해결 대상으로 보는 신념체계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행동과 지식과 도덕 사이에는 완전한 합치가 존재한다는 신념체계이다. 정치가 진실과 허위의, 그리고 선과 악의 영역이 될 때, 그리고 선한 것을 악한 것으로부터 가려내는 것이 정치라고 할 때 역사의 세계는 완전히 새로운 동력을 지니게 된다. 마르크스가 적절히 말했듯이, 혁명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환상'을 구현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혁명은 사회경제적 적대감의 산물이 아니라 정치적 환상의 산물이다. 프랑스혁명사가로서 퓌레는 환상에 의해 과거를 바라보지 말 것과 환상에서 깨어날 것을 강조하고 있다."(525-7)


18 장클레망 마르탱의 프랑스혁명 구하기


"장클레망 마르탱이 자신의 저서 《폭력과 혁명》에서 자코뱅 프랑스혁명사 해석을 지키기 위해 사용한 첫 번째 전략은 폭력의 '평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폭력은 프랑스혁명에서만 자행된 것이 아니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동시대의 대서양 연안 국가들에서 일어난 혁명에서도 자행되었다. 여기에서 장클레망 마르탱은 프랑스혁명은 다른 혁명들보다 더 폭력적이었음을 인정한다." "프랑스혁명의 폭력성이 극심했던 것은 그것이 구체제의 폭력과 연속이면서 동시에 '혁명'이라는 '새로운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폭력이었다〉는 수정 해석의 공세에 맞서 자코뱅 혁명사가들이 취한 전략은 '비교'라는 방법을 동원하여 혁명의 폭력성을 당연시하는 것이었다. 혁명만 폭력을 자행한 것이 아니라 반혁명도 폭력을 자행했으며, 프랑스혁명만이 아니라 다른 혁명에서도, 구체제에서도 폭력이 자행되었는데 왜 프랑스혁명만 비난하느냐는 것이다."(534-8)


"그러나 '공포정치' 특히 1794년 봄 이후 자행된 '대공포정치'는 국가폭력이라는 점에서 혁명이 책임질 사안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가장 중대한 과제와 맞닥뜨린) 장클레망 마르탱의 전략은 '공포terreur'는 인정하되 '공포정치Terreur'는 부정하는 것이었다. 방데 전쟁에서 학살은 있었어도 제노사이드는 없었듯이, 공포는 있었어도 정부 차원의 체계적이고 법적인 공포, 즉 '공포정치'는 없었다는 것이다." "장클레망 마르탱은 로베스피에르의 권력 집중을 두려워한 과격 공포정치가들이 목월의 법을 악용하여 죽음을 양산함으로써 로베스피에르를 독재자, 공포정치가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열월 정변'을 일으켜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한 후 〈공포정치〉라는 말을 '만들어내어' 모든 책임을 로베스피에르에게 전가했다고 말한다. 공포정치가 실제로 의사일정에 오른 것은 1793년 9월 5일이 아니라 '열월 정변' 이후이며, 명실상부한 공포정치가 자행된 것도 이때라는 것이다."(543-8)


4부 맺음말


"프랑스혁명은 미국 독립혁명과 달리 정치혁명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혁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컸다. 오랜 절대군주정 체제를 지나면서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그만큼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에 대한 반혁명의 반발은 혁명 못지않게 커서 내전으로 충돌하기 십상이었다. 계몽사상과 미국 독립혁명의 영향을 받은 혁명가들은 이상주의로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도 대외전쟁을 도발할 필요을 느꼈고, 유럽의 강국인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과 체제 변화는 주변의 왕정 국가들에게 위협적이었다. 따라서 프랑스혁명은 대외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전쟁은 비상 체제를 요구했는데, 그것이 바로 공포정치였다. 공포정치를 낳은 것은 직접적으로는 전쟁이지만 근원적으로는 혁명이었다. 혁명은 구체제를 타도하고 신체제를 건설하여 역사의 진보에 이바지하는 측면이 있지만 공포정치와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큰 위험한 실험이다."(576)


"프랑스혁명이 공포정치로 이탈한 것은 프랑스가 충분히 계몽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혁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계몽사상가들은 프랑스 민중이 충분히 계몽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며 이 점에서는 루소도 마찬가지였다. 혁명 전부터 공화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라파예트나 브리소 같은 혁명가들도 당시의 프랑스에 공화정을 수립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입헌군주정의 수립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민중이 계몽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행된 혁명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을 프랑스혁명은 잔인하게 보여주었다. 혁명, 그것은 순수, 선함, 독선, 위선, 오만, 광기가 용솟음치는 거대한 소용돌이이며, 잔혹한 격전장이다. 혁명은 전쟁이고 폭력이다. 프랑스혁명의 실상은 프랑스혁명을 〈자유, 평등, 박애〉의 모범적인 시민혁명으로 동경하고, 혁명을 이상적인 사회 변혁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이상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울린다."(5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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