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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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승전의 영광과 축복을 몸소 체험하면서 "일본이라는 국가의 생존은 '제국의 영유(領有)'에 달려 있으며, 일본은 자위(自衛)를 위해서 영토를 확대해온 것"(46)이라는 호전적 애국주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정치가들이 국내의 농촌 과잉인구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만주를 일본 국민의 발전을 위한 "독점적 지역"으로 재인식하면서, 만주는 "생명선"이자 일본의 "특수권익"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나갔다.


기획원을 본거지로 삼아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 건설을 추진했던 일본의 혁신관료들은 일찍이 기타 잇키가 <일본개조법안>에서 주장했듯이 폭력을 수반한 국가개조를 옹호하였고, "독자적인 법칙 아래 운동을 완성하는 사회의 구조 또는 그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그 공학적인 지도를 실행"(31)해야 한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사회과학도 수용했다. 기시를 비롯한 이들은 국가를 철저하게 "관리하는 테크노크라트적 지도자"(33)로 자신들을 자리매김했다.


떠오르는 제국 일본에게 만주는 조선을 지배하고, 중국을 제압하며, 소련을 감시하는 교두보이자, 미국과 벌이게 될 최후의 한판을 준비하는 병참기지였다. '세계제패'라는 막중한 운명을 짊어진 만주국은 계획경제, 군부독재, 사상통제가 한 몸을 이룬 거대한 병영국가로서 야심찬 '정치가'와 '군인'들의 등용문이었다. "박정희를 '군인'으로 변신시킨 것도, 기시 노부스케를 '정치가'로 단련시킨 것도 모두 만주제국이라는 대일본제국의 '분신'이었던 것"이다.(12)


박정희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을 이념으로 하는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제도나 사상 면에서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황민화정책이 본격화"(107)되던 193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냈다. "박정희와 같은 청년들이 나중에 '피지배민족'에서 '제국적 주체'로 변모하고 만주에서 활약할 꿈을 꾸려고 했던 것도 이러한 제국 일본의 동심원적인 확대가 가져온 '음덕' 덕분"(47)이었으며, "박정희가 택한 길은 '동아신질서'에서 제국의 정당한 주체로서의 지위를 살려 황국 군인이 되어 그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었다."(122)


그러나 1944년 12월 소위 임관과 1945년 7월 중위 진급이라는 그의 짧은 성공은 종전(終戰)으로 중단되었다. "만주에서 종전을 맞이한 박정희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도하는 광복군에 합류한 뒤 이듬해 5월에 귀환선 편으로 부산에 도착했다."(123) 1948년 여순사건에 따른 숙군작업에서 남로당 가입이 적발된 박정희는 1949년 2월의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으로 파면이 언도되었지만, 그마저 10년 감형과 형집행정지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를 부활시킨 것은 백선엽을 비롯한 만주군 선배들의 배려와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이었다. 


한편, 미국의 일본점령을 "일본 국민 길들이기, 모럴의 파괴"(200)라고 규정한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을 향한 "잃어버린 뿌리에 대한 열렬한 향수"와 "심오한 꿈이 깃든 강력한 정치"(160)에 대한 대중의 갈망을 연료 삼아 전후 정치권에서 부활을 도모했다. 그는 점령에 대한 반동으로 확산되는 "내셔널리즘 풍조"를 적극 이용하여 세력을 얻었고, 만주국에 적용하던 통제경제 실험을 "일본적 경제시스템의 원형"(178)으로 단단히 이식시켰다. 기시에게 "일본헌법은 일본의 빛나는 전통과 역사를 깎아내리는 전전부터의 오점"에 불과했으며, "자주적인 헌법을 새로이 제정하는 것"(206)만이 점령정치의 굴욕을 씻는 유일한 길이었다.


박정희 역시 "막강한 군을 배경으로 하는 리더십, 소수의 경제 테크노크라트에 의한 의사결정과 자원배분 권한 독점, 수출시장 확보와 기술력 및 외자 도입을 목적으로 하는 대외관계 구축, 중화학공업화를 향한 적극적인 재정지출, 그리고 만주국협화회를 방불케 하는 국민동원을 위한 새마을운동 등"(218) 만주국과 유사한 형태로 국가를 조직했다. "박정희 정권 치하의 한국은 만주국에서 거행된 국민대회, 추도식, 전몰자기념비, 학생웅변대회, 표어 짓기, 반공대회, 체조, '건설'이나 '재건'이 붙은 슬로건, '총력안보', '총동원' 등을 모조리 모방"(271)한 병영국가였다. 기시가 청출어람의 옛 식민지 지도자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월 혁명 이후 "한 번 더 혁명해야 한다. 혁명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외친 함석헌은 물론이요, <사상계>의 지식인들도 "정부의 무능과 분열, 인플레이션과 실업자의 증가, '혁명과업'의 후퇴 등을 엄하게 추궁하면서 경제번영의 건설과 국민성의 '개조'라는 두 측면에서 국가발전의 이정표를 제시"(220)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시 강력한 국가주의는 모두의 염원이었다. "빈곤에서의 해방이라는 경제적 욕망과 '조국 근대화'라는 민족주의적 욕구"(224)가 전국민을 감싸고 있었기에,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 프로젝트는 자율과 동원이라는 양대 엔진을 달고 힘차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혼돈에 빠진 조국을 구해낸 "중흥의 아버지"는 1968년 제2경제론을 표방하여 동원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것은 "일본의 교육칙어를 상기시키는 '국민교육헌장'의 제정과 민족교육의 강화"(243)를 통해 추진되는 정신의 동원이었다. '화랑도'에서 민족정신의 기원을 찾는 이선근의 '신라중심사관'은 "북한과 대치하며 민족사관을 정립해서 이데올로기 면에서 국내체제를 다잡으려는 박정희 정권에게 유용"(266)한 수단이었다. 


마침내 "1972년 11월 21일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91.9퍼센트의 투표율과 91.5퍼센트의 찬성으로 유신헌법이 확정"되었다. 대통령이 "국회해산권과 긴급조치권을 장악하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함으로써 의회와 사법에도 견제"(252)당하지 않는 초법적인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그 마지막은 다시금 혼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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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역사
마크 마조워 지음, 이순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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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은 오랫동안 발칸을 안개에 가려진 이교도의 땅이자, 폭력에 물든 변방으로 취급해 왔다. 주류 사학자들은 오스만제국을 "기원, 전통, 종교가 유럽과 확연히 다른 곳"이며, "유럽 문명이 태동한 지역을 통치하는 '아시아족', '유목민', '야만인'들"의 점령지라고 외면했다. 오스만제국이 유럽에 편입된 것은 "제국이 쇠락하는 것이 분명해지고 러시아가 부상하는 것에 대한 우려감이 팽배해진"(p.30) 근대의 길목에서였다.

발칸을 일군 농민들에게 오스만제국은 안전지대라는 의미에서, 20세기 유대인들의 피난처였던 합스부르크 제국과도 같은 존재였다. "앞선 세기의 기독교인 지주들은 날이 갈수록 농민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는데, 오스만제국이 싹쓸이를 해준 것이 바로 이 지배계급"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훗날의 발칸 국가들의 모습은 "자체 귀족층이 없는 '농민 민주주의', 다시 말해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 형태를 띠게 되었다."(pp.60-1)

오스만제국 시절에도 발칸 인구는 태반이 기독교도였는데, 이것은 "기독교도들이 높은 세금을 물고 있었고, 이들이 대규모로 개종할 경우 제국의 재정이 허약해질 것"(p.101)을 우려한 술탄이 개종에 별 열의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교회는 오스만제국의 방임 아래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가톨릭 공세를 피해 착취와 부패에 물들어갔고, 이는 "농민들이 '그리스' 교회에 착취당했다는 감정을 갖게 되어 결과적으로 발칸 민족주의가 태동하는 원인이 되었다."(p.107)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1789년 나폴레옹이 오스만 이집트를 침공한 것은 발칸 기독교도 지성인들의 정치적 생각을 급진적으로 바꿔놓았다."(p.134) 리가스는 "국민이 언어나 종교에 관계없이 주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여, 아직 윤곽도 잡히지 않은 '국가Nation' 개념을 오스만 왕조와 정교회 앞에 놓았다. 그러나 "'루마니아'나 '불가리아'라는 말은 1830년도까지도 일부 지식인과 운동가들에게만 의미 있는 말이었고,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도 그 점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었다." 그때문에 "신생국 지도자들은, 오스만의 세계관에 푹 젖어 있는 농촌 사회에서 국가를 새롭게 창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pp.156-7)

"종교의 시대가 끝나고 이데올로기의 시대"(p.186)가 오는 발칸을 지배한 것은 민족주의였다. 19세기 민족주의는 독일과 이탈리아 같은 신생국들을 "더 크고 합리적인 경제 통합체"(p.20)로 묶어준 반면, 발칸에서는 국가의 난립을 자극했다. 발칸의 신생국들은 저마다 "중세나 고전시대로 돌아가 자신들의 국가적 뿌리를 캐내려" 노력했고, "자국 역사가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그 시기[오스만제국]를 지워버리라고 주문했다."(p.37) 아울러 그들은 유럽 국가군에 끼기 위해서 "제국주의 압제에 항거하는 민족주의 투쟁과 저항을 벌였다는 그럴싸한 기록"(p.38)을 찾아나섰다.

그러나 발칸의 승리는 "강대국들의 힘을 빌려서야 결실을 맺은 무기력한 것"(p.143)이었기에, 정치가들은 "영토 확장에 대한 꿈"으로 훼손된 야망을 충족시키고자 했다. 발칸의 신생국들은 제1차 세계대전 후 "강대국들에게서 분배받은, 다시 말해 자국 영토 외곽에 놓인 '회복 안 된' 이웃사촌들의 땅이나 역사적 땅은 모두 자국 땅이라 고집했다." "대중적 실지(失地) 회복 운동은 여론을 결집시켰고, 국경 침입을 일삼는 비정규군의 자금 조달원이 돼주었으며, 강대국들의 조언이나 소망에 반하는 무모한 행위를 하도록 발칸의 군주들을 윽박질렀다."(p.165)

강대국들은 발칸 민족에게 자결권을 심어준 것이 아니라, 민족 순혈주의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만을 남겼다. 이는 "강요된 개종, 대량 처형,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도주"를 초래했으며, 신생국들은 "유럽에 남아 있던 오스만 지방들을 민족성 원칙에 따라 일소하려는 노력"(p.192)을 경주했다. 이 작업에는 이념이 중요하지 않았다. 국가 현대화에 몰두한 진보세력들도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 활발한 사회적, 경제적 개혁을 펴서 나라를 20세기로 진입시킨다"(p.197)는 명분 하에 소수 민족을 탄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강대국들의 의지 아래 "1929년 이후 발칸의 모든 나라에는 민주주의 대신 우익 독재정권"이 수립됐지만, 이들은 "농민의 불안정 고용이라는 난국을 타개해야 하는, 다시 말해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부르주아지 정치인과 이들을 계승한 보수적 정치인들에 대한 이런 환멸이 결국 1945년 이후 소련의 감시하에 좌파가 이룬 경제 소생 계획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p.209)

발칸의 비극은 그들이 "국가 건설을 위한 기나긴 투쟁으로 20세기를 거의 다 소진"하는 동안, 세계가 요동치면서 "국가라는 생각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었다는 점이다."(p.226) 발칸을 위협하는 것은 더 이상 제국의 도전이나 주변국의 적개심이 아니라 자신들의 뒷덜미를 잡아채는 "국제 경제"이다. 서유럽은 오랫동안 "발칸의 폭력을 원시적이고 비현대적이라고 몰아세우면서"(p.238) 야만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했다. 이제는 "국제 경제"가 제국의 가면을 건네받아 발칸을 갈아넣은 맷돌을 열심히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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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생각한다 - 20세기 사상의 정치학 : 국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토니 주트 &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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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1.동유럽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2.영미 주류 사회에 편입한 지식인이며 3.파탄과 번영의 20세기를 오롯이 살아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세계의 풍경을 '욕망하는 모험가'가 아니라 '탐구하는 역사가'의 시선으로 구술하는 바, 여기에는 무뎌지는 아웃사이더의 정체성을 붙들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스란히 간직해 온, 버려지고 잊혀진 주변부의 상흔들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과 언어, 문화들이 완전히 뒤얽혀 있던 합스부르크 왕국의 "이중 정체성"은 동유럽 유대인들이 "가장 완벽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자, 이들을 제일 먼저 추방한 곳이기도 했다."(p.35) 유대인들은 이해관계와 일체감으로 제국의 중심부에 묶여 있었지만,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대체로 빈곤했던 작은 세계"(p.41), 곧 외부와 거의 절연된 유대인 공동체에 속한 고립된 섬주민들이었다. 이들에게 관대한 전제정치를 소멸시킨 "민주주의는 대재앙"이었다. 허울뿐이던 제국의 보호가 사라지고 등장한 대중 사회는 "유대인을 편리하게 써먹을 수 있는 정치적 표적"(p.42)으로 취급할 뿐이었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에는 소위 말하는 지식인들의 열정과 확신이 커다란 기여를 했다. 파시스트 지식인들은 재치발랄한 교양인의 면모를 보였으며, 파시즘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큰 대조를 보인다는 점"(p.97)에서 강한 매력을 발산했다. 19세기에 자명했던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완벽하게 합리적인 계산법"(p.253)은 더 이상 유효한 논리가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 담론 역시 극단의 매력에 빠지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공산주의 사상가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 '나'가 아니라 '우리'가 그 일을 한다"(p.137)고 자신했다. "과정 자체가 옳다면 결과는 반드시 성공적일 것이라는 믿음"(p.55)은 그들의 신앙이었다.

저자는 "더 나을 가능성이 있는 미지의 미래를 위해 [본인이] 기꺼이 고초를 겪겠다고 말하는 것과 바로 이와 똑같은 증명할 수 없는 가설의 이름으로 타인의 고통이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전연 별개"라고 강조한다. 이 태도야말로 "20세기 지식인들의 죄악"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 미래를 위해 투자한 것이 없으면서도 그 미래에 관하여 자신들만이 완벽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p.130) 반복되는 좌절은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의 동력으로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암시했지만, 이들은 "노동자를 여성 아니면 학생이나 농민, 흑인, 그리고 마침내 게이"로 치환하면서, "현재의 권력과 권위의 배치에 만족하지 않을 이유가 충분한 집단이라면 무엇으로도 바꾸어 놓았다."(p.208)

대다수는 당대에 벌어지는 상황들이 너무 기괴하고 터무니없어서 비현실적인 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20세기를 옳게 이해한 사람들은 "카프카처럼 미리 내다보았던 자든 당대의 관찰자이든, 전례가 없었던 세계를 떠올려야 했다."(p.253) 모두가 무너지는 확신에 집착하는 동안 "유대인의 고통, 유대인의 절멸은 당시 대다수 유럽인들에게 물리칠 수 없는 관심사가 아니었다."(p.46)

이처럼 역사는 1인칭 기억으로 충분치 않다. 저자는 "공적인 기억은 <우리는 기억한다......>라는 1인칭 복수형으로 집단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며,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면 이 개요가 기억을 대신하여 역사가 되는 것"(p.354)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역사는 파국의 재림을 막는 최후의 방벽이자, 전례 없는 세계의 탄생을 감시하는 카나리아인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가장 극적인 실패와 가장 극적인 성공이 공존했던 20세기의 유산으로 '(사회)민주주의'를 꼽는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비민주적인 다른 체제들에 맞서는 데에는 최선의 단기적 방벽이지만, 자체의 태생적 결함을 막아낼 수단은 못 된다. ... 민주주의는 그 자신의 부패한 형태에 굴복할 가능성이 매우 큰 시스템이다."(p.388) 아울러 "20세기가 폭력과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위협에 지배되었다는 가정은 옳지만, 폭력과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p.490) 전례 없는 세계는 상상을 넘어 다시금 현실이 될 수 있다.

결국, 민주주의의 부패를 예방하고 민주주의가 소수자들의 대재앙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유일한 길은 "더 많은 민주주의"이다. 이때의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주장했던 상대주의(relativism)가 아니라 다원주의(pluralism)가 원활히 작동하는 세계를 쓰는 바탕글이다. "다원주의는 상이한 종류의 진실이 지닌 도덕적 현실을 받아들이지만, 이것들을 전부 단일한 가치로 측정되는 단일한 저울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는 관념을 거부"(p.18)하는 태도이다. 이 태도는 민주주의 공동체가 자신을 거울삼아 수행하는 교육으로 달성되는 집단적 인내요, 관용의 오래된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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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리스인가? - 호메로스에서 플라톤까지 그리스고전읽기
자클린 드 로미이 지음, 이명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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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그리스 사랑은 H.D.F. 키토 못지않다. 저자에게 그리스는 역사의 시작점이며, 통찰과 은유의 황금시대였다. 그리스는 다른 민족을 힘으로 징벌하지 않았고 종교와 사상, 민족 등 모든 '다름'에 대한 관용이 넘치는 무대였으며, 시민들 사이의 평등을 통해 자유를 구현한 시대였다. 구체적 사실로부터 추상화를 끌어낸 이상적인 전형(Idea)의 집결지였다.

이것은 수사가 아니다. 저자의 감탄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원형질에 대한 찬미이다. 저자의 심미안은 그리스 문화 전반을 능란하게 직조하여 마침내 구축한 조각상의 아름다움에 바치는 헌사가 아니다. 타당한 분석과 근거는 제시되지만 그것들은 '사후적'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발견된다. 조감도의 이데아는 가상 현실이 아니며 다만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이것은 광활한 공간에 부분들이 하나 둘씩 솟아올라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고 인과(因果)의 그물망으로 맺어진 전체로서의 관계가 법칙성을 내재한 자유에서 비롯했다는 사고이다. 그곳은 페리클레스가 장례식 추도사에서 "헬라스의 학교"라고 지칭한 타인의 모범이 되는 세계이지, 내전의 야수성을 몸에 붙인 제국, 곧 현실정치(realpolitik) 속의 아테나이가 아니었다.

다프네의 아름다움에 열정적으로 도취되어 일방적인 구애를 펼친 나머지, 자신의 애정을 상대방의 공포로 변질시켰던 아폴론의 사랑은 월계수의 비극으로 끝났다. 저자의 그리스 찬미는 정반대로 다프네가 깨달은 아폴론의 신적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단단한 껍질 속에 갇힌 열정이 제 발로 합일의 대상을 찾아나설 수 없는 반쪽의 펜던트와 같다.






<일리아스>에서 각 개인의 세세한 차이가 제거되고 인간 일반의 가장 본질적인 감정이나 반응이 드러나는 것은 단지 인물들의 성격을 단순화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사실 인물들 모두가 공통으로 가진 조건, 즉 `죽기 마련인` 존재라는 점을 끊임없이 환기함으로써 영웅은 위대한 존재인 동시에 유한한 존재라는 점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43)

헤로도토스는 참주 정치가 끝난 뒤의 아테네 체제를 규정하기 위해 `발언의 평등`을 뜻하는 단어를 사용했다. "누가 발언을 원하는가?"라는 저 유명한 물음에 아테네의 모든 자유가 집약되어 있다고 이야기한 후 에우리피데스는 표현을 달리해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보다 더 나은 평등을 상상할 수 있을까?" 133)

소크라테스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는 종교에 관한 일반적인 관용을 불허한 징표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와 도덕의 차원에서 이례적이었던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당시 아테네는 전쟁에 패하고 난 직후였다.
아테네에서 관용은 종교적 영역에서 추구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그 관용은 다른 영역에서 추구되어 나타났는데, 바로 인간관계의 영역이다. 144-5)

헤로도토스는 지난 사건들을 서로 잇는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그 사건들을 망각에서 구하려 했다.
첫 번째 목적은 기억이고, 그 다음은 과거에 속한 사실들을 연결하는 데 있다. 거기서 투키디데스로 옮겨 가면 엄청난 비약을 발견한다. 기억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과거를 이해할뿐만 아니라 되풀이되어 나타날 수 있는 보편적 연관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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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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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감방에서 나는 기다린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기다렸던가?
마지막 전단이 인쇄되기를,
마지막 수류탄이 던져지기를•••••• p.66


우리가 더 이상 닻을 올리지 않을 마지막 항구는 어디에 있는가? <모비딕>, p.585
Where lies the final harbor, whence we unmoor no more?


시퍼런 전장에 내던져진 이들 모두가 고통스런 현실을 끝장내고 싶어한다. 누군가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꿈꾸고, 누군가는 오래된 세계의 파멸을 꿈꾼다. 뒤바뀐 세상은 마지막 수류탄의 폭음이 불꽃놀이의 환호로 교체된 지상이거나, 마지막 항구로 들어서는 배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침몰의 바다이다.

우리는 모두 시대의 자식이다. 같은 모습과 같은 생활방식에 도취되어 살아간다. 우리의 세계는 깊은 침묵이 내려앉은 들판이다. 세계와 불화하는 자들은 안개 속에서 자아를 두드려 깨운다. 그들은 황혼녘이 되면 산과 바다로 나가 제 손으로 시대를 넘어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우리는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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