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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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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승전의 영광과 축복을 몸소 체험하면서 "일본이라는 국가의 생존은 '제국의 영유(領有)'에 달려 있으며, 일본은 자위(自衛)를 위해서 영토를 확대해온 것"(46)이라는 호전적 애국주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정치가들이 국내의 농촌 과잉인구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만주를 일본 국민의 발전을 위한 "독점적 지역"으로 재인식하면서, 만주는 "생명선"이자 일본의 "특수권익"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나갔다.
기획원을 본거지로 삼아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 건설을 추진했던 일본의 혁신관료들은 일찍이 기타 잇키가 <일본개조법안>에서 주장했듯이 폭력을 수반한 국가개조를 옹호하였고, "독자적인 법칙 아래 운동을 완성하는 사회의 구조 또는 그 메커니즘을 파악하고 그 공학적인 지도를 실행"(31)해야 한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인 사회과학도 수용했다. 기시를 비롯한 이들은 국가를 철저하게 "관리하는 테크노크라트적 지도자"(33)로 자신들을 자리매김했다.
떠오르는 제국 일본에게 만주는 조선을 지배하고, 중국을 제압하며, 소련을 감시하는 교두보이자, 미국과 벌이게 될 최후의 한판을 준비하는 병참기지였다. '세계제패'라는 막중한 운명을 짊어진 만주국은 계획경제, 군부독재, 사상통제가 한 몸을 이룬 거대한 병영국가로서 야심찬 '정치가'와 '군인'들의 등용문이었다. "박정희를 '군인'으로 변신시킨 것도, 기시 노부스케를 '정치가'로 단련시킨 것도 모두 만주제국이라는 대일본제국의 '분신'이었던 것"이다.(12)
박정희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을 이념으로 하는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를 제도나 사상 면에서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황민화정책이 본격화"(107)되던 193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냈다. "박정희와 같은 청년들이 나중에 '피지배민족'에서 '제국적 주체'로 변모하고 만주에서 활약할 꿈을 꾸려고 했던 것도 이러한 제국 일본의 동심원적인 확대가 가져온 '음덕' 덕분"(47)이었으며, "박정희가 택한 길은 '동아신질서'에서 제국의 정당한 주체로서의 지위를 살려 황국 군인이 되어 그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었다."(122)
그러나 1944년 12월 소위 임관과 1945년 7월 중위 진급이라는 그의 짧은 성공은 종전(終戰)으로 중단되었다. "만주에서 종전을 맞이한 박정희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도하는 광복군에 합류한 뒤 이듬해 5월에 귀환선 편으로 부산에 도착했다."(123) 1948년 여순사건에 따른 숙군작업에서 남로당 가입이 적발된 박정희는 1949년 2월의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으로 파면이 언도되었지만, 그마저 10년 감형과 형집행정지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를 부활시킨 것은 백선엽을 비롯한 만주군 선배들의 배려와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이었다.
한편, 미국의 일본점령을 "일본 국민 길들이기, 모럴의 파괴"(200)라고 규정한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을 향한 "잃어버린 뿌리에 대한 열렬한 향수"와 "심오한 꿈이 깃든 강력한 정치"(160)에 대한 대중의 갈망을 연료 삼아 전후 정치권에서 부활을 도모했다. 그는 점령에 대한 반동으로 확산되는 "내셔널리즘 풍조"를 적극 이용하여 세력을 얻었고, 만주국에 적용하던 통제경제 실험을 "일본적 경제시스템의 원형"(178)으로 단단히 이식시켰다. 기시에게 "일본헌법은 일본의 빛나는 전통과 역사를 깎아내리는 전전부터의 오점"에 불과했으며, "자주적인 헌법을 새로이 제정하는 것"(206)만이 점령정치의 굴욕을 씻는 유일한 길이었다.
박정희 역시 "막강한 군을 배경으로 하는 리더십, 소수의 경제 테크노크라트에 의한 의사결정과 자원배분 권한 독점, 수출시장 확보와 기술력 및 외자 도입을 목적으로 하는 대외관계 구축, 중화학공업화를 향한 적극적인 재정지출, 그리고 만주국협화회를 방불케 하는 국민동원을 위한 새마을운동 등"(218) 만주국과 유사한 형태로 국가를 조직했다. "박정희 정권 치하의 한국은 만주국에서 거행된 국민대회, 추도식, 전몰자기념비, 학생웅변대회, 표어 짓기, 반공대회, 체조, '건설'이나 '재건'이 붙은 슬로건, '총력안보', '총동원' 등을 모조리 모방"(271)한 병영국가였다. 기시가 청출어람의 옛 식민지 지도자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월 혁명 이후 "한 번 더 혁명해야 한다. 혁명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외친 함석헌은 물론이요, <사상계>의 지식인들도 "정부의 무능과 분열, 인플레이션과 실업자의 증가, '혁명과업'의 후퇴 등을 엄하게 추궁하면서 경제번영의 건설과 국민성의 '개조'라는 두 측면에서 국가발전의 이정표를 제시"(220)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당시 강력한 국가주의는 모두의 염원이었다. "빈곤에서의 해방이라는 경제적 욕망과 '조국 근대화'라는 민족주의적 욕구"(224)가 전국민을 감싸고 있었기에,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 프로젝트는 자율과 동원이라는 양대 엔진을 달고 힘차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혼돈에 빠진 조국을 구해낸 "중흥의 아버지"는 1968년 제2경제론을 표방하여 동원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것은 "일본의 교육칙어를 상기시키는 '국민교육헌장'의 제정과 민족교육의 강화"(243)를 통해 추진되는 정신의 동원이었다. '화랑도'에서 민족정신의 기원을 찾는 이선근의 '신라중심사관'은 "북한과 대치하며 민족사관을 정립해서 이데올로기 면에서 국내체제를 다잡으려는 박정희 정권에게 유용"(266)한 수단이었다.
마침내 "1972년 11월 21일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91.9퍼센트의 투표율과 91.5퍼센트의 찬성으로 유신헌법이 확정"되었다. 대통령이 "국회해산권과 긴급조치권을 장악하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함으로써 의회와 사법에도 견제"(252)당하지 않는 초법적인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그 마지막은 다시금 혼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