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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생각한다 - 20세기 사상의 정치학 : 국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토니 주트 &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저자는 1.동유럽 유대인 집안 출신으로 2.영미 주류 사회에 편입한 지식인이며 3.파탄과 번영의 20세기를 오롯이 살아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세계의 풍경을 '욕망하는 모험가'가 아니라 '탐구하는 역사가'의 시선으로 구술하는 바, 여기에는 무뎌지는 아웃사이더의 정체성을 붙들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스란히 간직해 온, 버려지고 잊혀진 주변부의 상흔들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과 언어, 문화들이 완전히 뒤얽혀 있던 합스부르크 왕국의 "이중 정체성"은 동유럽 유대인들이 "가장 완벽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자, 이들을 제일 먼저 추방한 곳이기도 했다."(p.35) 유대인들은 이해관계와 일체감으로 제국의 중심부에 묶여 있었지만,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대체로 빈곤했던 작은 세계"(p.41), 곧 외부와 거의 절연된 유대인 공동체에 속한 고립된 섬주민들이었다. 이들에게 관대한 전제정치를 소멸시킨 "민주주의는 대재앙"이었다. 허울뿐이던 제국의 보호가 사라지고 등장한 대중 사회는 "유대인을 편리하게 써먹을 수 있는 정치적 표적"(p.42)으로 취급할 뿐이었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에는 소위 말하는 지식인들의 열정과 확신이 커다란 기여를 했다. 파시스트 지식인들은 재치발랄한 교양인의 면모를 보였으며, 파시즘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큰 대조를 보인다는 점"(p.97)에서 강한 매력을 발산했다. 19세기에 자명했던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완벽하게 합리적인 계산법"(p.253)은 더 이상 유효한 논리가 아니었다. 마르크스주의 담론 역시 극단의 매력에 빠지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공산주의 사상가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 '나'가 아니라 '우리'가 그 일을 한다"(p.137)고 자신했다. "과정 자체가 옳다면 결과는 반드시 성공적일 것이라는 믿음"(p.55)은 그들의 신앙이었다.
저자는 "더 나을 가능성이 있는 미지의 미래를 위해 [본인이] 기꺼이 고초를 겪겠다고 말하는 것과 바로 이와 똑같은 증명할 수 없는 가설의 이름으로 타인의 고통이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전연 별개"라고 강조한다. 이 태도야말로 "20세기 지식인들의 죄악"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 미래를 위해 투자한 것이 없으면서도 그 미래에 관하여 자신들만이 완벽한 정보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p.130) 반복되는 좌절은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의 동력으로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암시했지만, 이들은 "노동자를 여성 아니면 학생이나 농민, 흑인, 그리고 마침내 게이"로 치환하면서, "현재의 권력과 권위의 배치에 만족하지 않을 이유가 충분한 집단이라면 무엇으로도 바꾸어 놓았다."(p.208)
대다수는 당대에 벌어지는 상황들이 너무 기괴하고 터무니없어서 비현실적인 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20세기를 옳게 이해한 사람들은 "카프카처럼 미리 내다보았던 자든 당대의 관찰자이든, 전례가 없었던 세계를 떠올려야 했다."(p.253) 모두가 무너지는 확신에 집착하는 동안 "유대인의 고통, 유대인의 절멸은 당시 대다수 유럽인들에게 물리칠 수 없는 관심사가 아니었다."(p.46)
이처럼 역사는 1인칭 기억으로 충분치 않다. 저자는 "공적인 기억은 <우리는 기억한다......>라는 1인칭 복수형으로 집단적으로 구체화된 것이며,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나면 이 개요가 기억을 대신하여 역사가 되는 것"(p.354)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역사는 파국의 재림을 막는 최후의 방벽이자, 전례 없는 세계의 탄생을 감시하는 카나리아인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가장 극적인 실패와 가장 극적인 성공이 공존했던 20세기의 유산으로 '(사회)민주주의'를 꼽는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비민주적인 다른 체제들에 맞서는 데에는 최선의 단기적 방벽이지만, 자체의 태생적 결함을 막아낼 수단은 못 된다. ... 민주주의는 그 자신의 부패한 형태에 굴복할 가능성이 매우 큰 시스템이다."(p.388) 아울러 "20세기가 폭력과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위협에 지배되었다는 가정은 옳지만, 폭력과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p.490) 전례 없는 세계는 상상을 넘어 다시금 현실이 될 수 있다.
결국, 민주주의의 부패를 예방하고 민주주의가 소수자들의 대재앙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유일한 길은 "더 많은 민주주의"이다. 이때의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주장했던 상대주의(relativism)가 아니라 다원주의(pluralism)가 원활히 작동하는 세계를 쓰는 바탕글이다. "다원주의는 상이한 종류의 진실이 지닌 도덕적 현실을 받아들이지만, 이것들을 전부 단일한 가치로 측정되는 단일한 저울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는 관념을 거부"(p.18)하는 태도이다. 이 태도는 민주주의 공동체가 자신을 거울삼아 수행하는 교육으로 달성되는 집단적 인내요, 관용의 오래된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