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민중사 1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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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잉글랜드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인디언들의 땅을 강탈했다.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총독 존 윈스럽은 이 지역이 법적으로 '공지空地'라고 선포함으로써 인디언의 땅을 취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디언들은 땅을 '정복'하지 않았으므로 땅에 대한 '자연권'만 보유할 뿐 '시민권'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자연권'은 법적 효력이 없었다. 청교도들은 또한 성경 시편 2장 8절의 구절에 호소했다. "내게 청하여라. 뭇 나라를 유산으로 주겠다.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너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 그리고 무력으로 그 땅을 빼앗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로마서 13장 2절을 들춰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39) "공간, 즉 땅에 대한 욕구는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욕구였다. 그러나 땅이 부족한 상황에서, 경쟁이 지배하는 역사의 야만기에서 이런 인간적인 욕구는 종족 전체를 살육하는 것으로 전환됐다."(43)


"버지니아 사람들은 생존에 필요한 옥수수와 수출용 담배를 재배하기 위해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제 막 담배를 경작하는 법을 알아내어 1617년에 영국으로 첫 화물을 보내게 된 때였다. 흑인 노예가 답이었다."(58) "아프리카 각국에는 노예제가 존재했고, 때로는 유럽인들이 이를 근거로 들어 자신들의 노예무역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데이비드슨이 지적하듯이, 아프리카의 '노예'는 유럽의 농노에 더 가까웠다." "이들은 가혹한 노역을 해야 했지만 아메리카로 끌려간 노예들이 갖지 못한 권리를 누렸고 노예선과 아메리카 대농장의 인간 가축들과는 전혀 달랐다." "아메리카 노예제를 역사상 가장 잔인한 형태의 노예제로 만든 두 가지 요소가 아프리카에는 없었다. 첫째는 자본주의적 농업에서 기인하는 끝없는 이윤을 향한 광란이다. 둘째는 피부색에 따라 백인은 주인, 흑인은 노예라고 가차없이 구분하고 인종적 증오심을 이용함으로써 노예를 인간 이하의 지위로 떨어뜨린 것이었다."(62-3)


"노예소유주들은 노동력 공급과 자기들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복잡하고 강력한 통제체제를 발전시켰다." "노예들은 규율을 배웠으며, '자신의 분수를 알고', 검은색을 종속의 징표로 보며, 주인의 힘을 경외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를 버리고 주인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이라 인식하도록 자신이 열등하다는 사고를 끊임없이 주입받았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고된 노동 규율을 부과하고, 노예 가족을 해체시키고, 종교를 통해 마음을 달래주었다. 또한 노예들을 밭에서 일하는 노예와 그보다 조금 더 특권을 누리는 가내노예로 나눔으로써 그들 사이의 연대감을 파괴했다. 마지막으로 법률의 힘과 감독의 직접적인 힘을 통해 태형, 단근질, 수족절단, 사형에 처하는 방법이 필요했다."(77) "새로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흑인반란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식민지 초기에 흑인 노예만큼이나 나쁜 대우를 받고 있던 백인 계약 하인들이 흑인 노예와 손을 맞잡는 일이었다.(80)


"식민지 기간에 북아메리카 해안으로 온 이주민의 절반 이상이 하인이었다. 17세기에는 대부분 영국인이었고 18세기에는 아일랜드인과 독일인이었다. 하인들이 자유를 찾아 달아나거나 계약기간을 끝마치게 됨에 따라 점차 노예가 그들을 대신하게 됐지만, 1755년까지도 여전히 백인 하인이 메릴랜드 인구의 10퍼센트를 차지했다."(97) 식민지 관리당국은 백인 빈민들의 계급적 분노를 해소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즉 동부 해안지대의 비옥한 땅을 독점함으로써 땅 없는 백인들을 서부 변경으로 보내 인디언과 충돌시키고 해안지대의 부자들을 위해 인디언 문제에 대한 완충 역할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며, 한편으로 정부의 보호에 더욱 의존하게 만든 것이다." "엘리트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인디언과 전쟁을 벌여 백인의 지지를 얻고 가난한 백인들을 인디언과 맞서게 만들어, 있을 수 있는 계급 충돌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더 나았다."(108-9)


"에드먼드 모건은 버지니아 노예제에 관한 주의 깊은 연구에 근거해 인종주의를 흑백 간의 '자연적' 차이가 아니라, 계급적 멸시에서 기인하는 것, 즉 통제를 위한 현실적 장치로 보고 있다." "식민지들이 성장함에 따라, 아메리카 역사를 통틀어 엘리트의 끊임없는 지배를 위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 또 다른 통제기제가 있었다. 큰 부자 및 극빈층과 나란히 소농장주, 독립자영농, 도시 장인들이 성장했고, 이들은 상인 및 농장주들에게 힘을 더해 주는 대가로 작은 보수를 받으면서 백인 극빈층, 흑인 노예, 변경의 인디언 등에 대한 튼튼한 완충 지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런 충성을 물질적 이익보다 훨씬 강력한 무언가로 묶어두기 위해서 1760년대와 1770년대에 지배계급은 놀랄 만큼 유용한 도구를 찾아냈다. 그 도구는 곧 자유와 평등이라는 언어였고, 이를 통해 노예제나 불평등을 종식시키지 않은 채로도 영국에 맞서 혁명전쟁을 수행하기에도 충분할 정도의 백인들을 결속할 수 있었다."(113-4)


# 지배 체제 : 1단계 - 이간질(백인 하인과 흑인 노예), 2단계 - 완충지대(인디언과 이주민, 이주민과 중산층), 3단계 - 이데올로기(자유와 평등)


영국과 식민지 도시의 갈등 속에서 "식민지 도시의 숙련기능공들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었다. 즉 선거구민이 자신들의 대표자를 점검할 수 있도록 하는 대표의회의 공개회합, 입법의사당의 공공방청, 호명투표의 공표 등을 요구했다."(122) 혁명운동 지도층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중요한 전투는 대부분 북부에서 벌어졌으며, 이곳 도시들에서 식민지 지도자들 아래의 백인 주민들은 분열되어 있었다. 지도자들은 숙련기능공을 설득해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었는데, 숙련기능공들은 일종의 중간계급으로 영국 제조업자들과 경쟁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영국에 대항한 싸움에 이해관계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대對프랑스전쟁에 뒤이은 위기에서 일자리를 잃고 굶주리고 있던 가난한 대중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은 영국에 대항하는 이런 군중의 에너지를 이용하려 하면서도 군중이 자신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도록 에너지를 억누르고자 했다."(126-7)


"로열 나인Loyal Nine이라 불린 보스턴의 정치집단은 1765년 8월 인지세법에 항의하는 행진을 조직했다." 이들은 시위대가 인지담당관의 재산 일부를 파괴하며 흥분한 모습을 보이자 자체 무장순찰대를 창설하고 군중들과 선을 그었다. "압도적인 저항 때문에 인지세법이 철회되자 보수파 지도자들은 폭도들과 관계를 끊었다."(128) 곧이어 보스턴 차 사건이 벌어지자 "영국 의회는 탄압법Coercive Act을 제정, 매사추세츠에서 사실상 계엄령을 실시하면서 식민지 정부를 해체하고 보스턴 항구를 폐쇄했으며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자 이에 반대하는 읍민회의와 대중집회가 열렸다." "보스턴을 비롯한 여러 도시의 교신위원회들은 이 집회를 환영했으나 사유재산을 파괴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자유의 아들들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은 코네티컷의 밀퍼드에서처럼 무법상태를 "가장 혐오한다"고 공언했으며, 애너폴리스에서처럼 "공공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경향이 있는 모든 폭동과 불법집회"에 반대했다."(131-2)


1776년 출간된 페인의 <상식Common Sense>은 애국적 정서를 모든 계급에게 고무하는 언어를 감동적으로 서술했다. 페인은 상, 하원제를 비난하고 전체 인민을 대표하는 하나의 대의체를 주장하여, 상류층의 우려를 사기도 했지만 "일단 혁명이 진행되자, 하층계급 민중들의 군중행동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점점 더 분명히 했다." "훗날 페인은 헌법 채택을 둘러싼 논쟁 기간 동안 다시 한 번 강력한 중앙정부를 선호하는 도시 장인들을 대표하게 됐다. 페인은 그런 정부가 어느 정도 큰 공동의 이해를 대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혁명이 단합된 민중을 위한 것이라는 신화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135-6) 1776년 독립선언서에 명기된 "정부에 대한 인민 통제, 반란과 혁명의 권리, 정치적 폭정과 경제적 속박 및 군사적 공격에 대한 분노의 언어는 대다수 식민지인을 결속시키고 상호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영국에 반기를 들도록 설득하기에 매우 적합한 언어였다."(138-9)


"영국과의 군사적 충돌 그 자체가 당대의 모든 것을 지배함으로써 다른 문제들을 왜소화시켰고, 사회적으로 중요했던 하나의 싸움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편을 택하게 만들었으며, 독립에 대한 관심이 전혀 분명하지 않은 혁명의 편으로 사람들을 몰아댔다. 지배 엘리트들은 세대를 거치면서─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전쟁이 내부의 문제로부터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사실을 배운 듯하다."(150) 도망간 영국파에게 "몰수한 토지는 혁명의 지도자들에게 이중의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분배됐다. 지도자들과 그 친구들은 부자가 됐고, 새 정부에 대한 폭넓은 지지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소농민에게도 약간의 토지가 분배됐다. 실제로 이것이 곧 새로운 국가가 과거와는 다른 특징이 됐다. 광대한 부를 소유하게 된 이 나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부유한 지배계급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며, 동시에 부자와 무산자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중간계급을 충분히 창출할 수 있었다."(158)


찰스 비어드는 <헌법의 경제적 해석>에서 "1787년에 필라델피아에 모였던 55명의 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사고를 언급함으로써 부자들이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정부를 직접 장악하거나 법률을 제정한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헌법에 적용했다." "그리하여 비어드는 헌법 제정자들의 대부분이 강력한 연방정부를 수립하는 데 어느 정도 직접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음을 알아냈다. 제조업자는 보호관세를, 금융업자는 채무 상황에서 지폐 사용의 중단을, 토지 투기업자는 인디언 토지를 침범할 경우에 보호를, 노예소유주는 노예 반란이나 탈주를 방지할 수 있는 연방의 보장을, 채권소유자는 채권 상환을 위해 전국적 과세를 통해 돈을 조달할 수 있는 정부를 요구하거나 원했다. 비어드는 네 개의 집단, 즉 노예, 계약 하인, 여성, 무산자들은 제헌회의Constitution Convention에 대표를 보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제헌회의는 이들 집단의 이해를 반영하지 않았다."(169)


"<연방주의론> 10호에서 제임스 매디슨은 당파 간 분쟁에 시달리는 사회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의정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쟁은 '여러 불평등한 재산의 분배'에서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재산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는 사회에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형성해 왔다." 매디슨의 말에 따르면, 문제는 부의 불평등으로부터 오는 당파간 투쟁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매디슨은 모든 결정을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내림으로써 소수파를 통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179) "헌법은 남부 노예소유주의 이해와 북부 화폐소득자의 이해를 조정한 타협의 결과물이었다. 13개 주를 하나의 거대한 상업시장으로 통합하려는 목적에서 북부의 대표자들은 주간州間 통상을 규제하는 법을 원했으며, 그런 법률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연방의회의 다수표만 획득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남부는 노예무역을 불법화하기 전에 20년의 유예기간을 두는 대가로 이에 동의했다."(181)


인디언들은 때로 마을을 불태우기 전에 온정적으로 말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무력으로만 다루어졌다. 그러나 "독립 전쟁으로 약화된 워싱턴의 민병대는 인디언을 물리칠 수 없었다. 정찰부대가 차례로 분쇄 당하자 워싱턴은 회유책을 쓰려고 했다. 전쟁장관 헨리 녹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디언이 먼저 거주하고 있으므로 땅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1791년 토머스 제퍼슨은 국경 안에 사는 인디언들은 해치지 않을 것이며, 정부는 인디언 땅을 잠식하려고 하는 백인 정착민들을 이주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1803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준주를 사들여 영토 규모가 두 배로 되자─이로써 서쪽 국경이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미시시피 강을 건너 로키 산맥까지 확장됐다─제퍼슨은 인디언들이 좀더 좁은 지역에 정착해 농사를 짓도록 장려해야 한다고 연방의회에 제안했다. 또한 백인과 교역을 시켜 부채를 지게끔 하고 이 부채를 땅으로 상환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228-9)


이러한 상황은 앤드루 잭슨이 1814년의 말편자만곡부전투Battle of Horseshoe Bend에서 대승을 거두어 국민적 영웅이 된 후 바뀌었다. "1814년에 잭슨이 크리크족과 맺은 협정은 새롭고 중대한 사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협정은 인디언들에게 토지에 대한 개인소유권을 부여함으로써 인디언을 서로 분열시키고 토지의 공동소유제를 파괴했으며 일부는 땅으로 매수하고 나머지는 무시해 버렸다─서구 자본주의의 정신을 특징짓는 경쟁과 묵계를 도입한 것이다."(232) "잭슨은 플로리다가 탈주 노예와 약탈을 일삼는 인디언들의 은신처라고 주장하면서 습격을 시작했다. 잭슨의 말에 따르면 플로리다는 미국의 방위에 없어서는 안 될 지역이었다. 이것은 근대 정복전쟁의 고전적인 서문이 된 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1818년의 세미놀 전쟁Seminole War으로 미국은 플로리다를 획득하게 됐다. 학교 교실의 지도에는 "1819년 플로리다 매입Florida Purchase"라고 고상하게 표기되어 있다."(233-4)


"잭슨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주에서 자신들의 영토에 거주하는 인디언에 대해 주의 통치권을 확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이들 법률을 통해 인디언들은 법적 단위로서의 부족이 폐지되고, 부족회의가 불법화되고, 추장의 권한이 사라졌으며, 민병대 및 주세州稅의 의무를 지게 됐지만 투표권 및 소송권,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권리는 갖지 못했다. 인디언 영토는 분할되어 주에서 실시하는 추첨에 의해 분배됐다. 백인들은 인디언 땅에 정착하도록 장려됐다."(239) "1828년에 서부 체로키족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연방정부는 새로운 영토(체로키족이 강제로 쫓겨난 서부의 황량한 땅)를 "미국의 가장 확고한 보증하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 영구적인 고향"이라고 발표했다."(245) 인디언을 서부로 몰아내는 가차없는 이 거짓말의 향연은 훗날 눈물의 행렬Trail of Tears이라고 알려진 1838년 10월 1일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1850년에 통과된 탈주노예법Fugitive Slave Act은 멕시코 전쟁으로 얻은 영토(특히 캘리포니아)를 자유주nonslave state로 연방에 편입시키는 대가로 남부 주들에게 양보한 것이었다. 탈주노예법으로 인해 노예주들이 전에 노예였던 사람을 되찾거나 탈주 노예라고 지목한 흑인들을 그냥 잡아가는 일이 용이해졌다."(319) "노예무역을 종식시키는 법률의 시행에는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면서 탈주 노예를 노예 신분으로 되돌리도록 규정한 법령은 엄격하게 시행한 것은 다름 아닌 연방정부였다. 앤드루 잭슨 행정부하에서 남부와 합작해 노예폐지론 간행물이 남부주들로 반입되지 못하게 한 것 역시 연방정부였다. 1857년에 노예 드레드 스코트는 인간이 아니라 재산이므로 자유를 위해 소송할 수 없다고 선고한 것 또한 다름 아닌 합중국 대법원이었다." "연방정부는 백인들이 지배하는 조건에 한해서만, 북부 산업 엘리트들이 정치, 경제적으로 필요로 할 때에만 노예제를 종식시킬 생각이었다."(330)


"산업의 요구와 신생 공화당의 정치적 야망, 인도주의의 미사여구를 완벽하게 결합시킨 인물은 다름 아닌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330) 링컨은 1861년 3월의 취임연설에서 남부와 탈퇴한 주들을 회유했다. "나는 남부 주들에 존재하는 노예제도에 대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섭할 의사가 없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내게는 그렇게 할 법적 권리가 없으며 또 그렇게 할 의향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넉 달째 이어지면서 프레먼트 장군이 미주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에 저항하는 노예주인들의 노예는 자유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자, 링컨은 이 훈령을 철회했다. 링컨은 메릴랜드, 켄터키, 미주리, 델라웨어 등 4개 노예주를 연방에 묶어두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전쟁이 점점 격화되면서 사상자가 급증하고, 승리에 대한 절망감이 고조되고, 노예폐지론자들의 비판이 링컨을 떠받치는 너덜너덜한 연합세력을 갈가리 찢어 버릴 태세를 보이자, 링컨은 그제서야 비로소 노예제를 반대하는 행동에 착수했다."(333)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도 "흑인들은 링컨 재임 당시 부통령을 역임했고 전쟁 막바지에 링컨이 암살당한 뒤 대통령에 오른 앤드루 존슨에 의해 여러 해 동안 방해를 받았다. 존슨은 흑인들을 돕는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흑인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지 않음으로써 남부연합 주들의 연방 복귀를 수월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복귀한 남부 주들에서 존슨 재임 기간 동안 '흑인단속법black codes'을 실시했는데, 이는 해방된 노예들을 여전히 대농장에서 일하는 농노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349-50) "북부에서 흑인들의 예속을 받아들이기 위해 사고의 혁명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상기해야만 한다. 남북전쟁이 끝났을 당시, 북부 24개 주 가운데 19개 주가 흑인의 투표권을 허용하지 않았다. 1900년까지 모든 남부 주가 새로운 헌법과 법령을 통해 흑인에 대한 공민권 박탈과 분리를 법제화했다."(364)


기술 발전과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사업이 늘어나면서 투자의 안정성이 필요해지자 1850년대 중반에는 가격협정과 기업합병이 빈번했다. "투자 위험을 최소화하는 또 다른 방법은 정부로 하여금 알렉산더 해밀턴과 제1차 대륙회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인 역할, 즉 기업의 이익을 돕는 역할을 확실히 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각종 교과서는 당시를 노예제를 둘러싼 논쟁으로 가득 채우고 있으나, 남북전쟁 전야에 있어서 국가 운영자들의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노예제 반대 운동이 아니라 돈과 이윤에 있었다."(384-5) 1830년대에 이미 "펜실베이니아를 비롯한 주에서 10시간 노동법이 등장했지만, 이 법들은 고용주가 피고용자와 서면계약을 통해 노동시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 시기의 법률은 계약에 대한 강력한 보호장치를 발전시키고 있었으며, 노동계약은 대등한 양자 간의 자발적인 합의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었다."(393-4)


"남북 전쟁에서 1900년에 이르는 동안 증기와 전기가 인력의 자리를 차지했고, 철이 목재를, 강철이 철을 대체했다." "이 모든 것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과 기계를 만들어 내는 천재적인 발명가와 새로운 기업의 유능한 조직자, 또는 관리자가 필요했으며 또한 토지와 광물이 풍부한 국토, 고되고 비위생적이며 위험한 노동을 할 수 있는 엄청난 인력이 필요했다. 유럽과 중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새로운 노동력을 형성했다." "몇몇 백만장자는 무일푼에서 출발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1870년대 섬유, 철도, 강철 회사의 중역 303명의 출신에 관한 한 연구를 보면 90퍼센트가 중간계급이나 상류계급 집안 출신이었다. '거지에서 부자로'라는 호레이쇼 앨저식 이야기는 소수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실이었지만, 대부분은 신화, 즉 통제를 위해 유용한 신화였다."(437-9) 대표적인 사례로 "1900년에 이르면 모건은 전국 철도의 절반인 16만 킬로미터의 철도를 장악했다."(442)


상호 이해관계로 엮인 독점산업들의 과도한 담합을 저지하기 위해 1890년에 셔먼 반트러스트법Sherman Anti-Trust Act이 제정되었으나, "1895년 대법원은 셔먼 반트러스트법이 무해한 것이 될 수 있도록 이 법을 해석했다. 대법원은 제당 산업의 독점이 통상상의 독점이 아니라 제조상의 독점이며, 따라서 셔먼 반트러스트법을 통해 연방의회의 규제를 받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미국 정부 대 E. C. 나이트 사 판결). 대법원은 또한 셔먼 반트러스트법은 주간州間 파업(1894년의 철도파업)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데, 이런 파업이 통상을 제약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대법원은 고소득에 대해 높은 세율을 적용하려는 연방의회의 작은 시도를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그 뒤 몇 년간 대법원은 셔먼 반트러스트법은 통상을 제약하는 '불합리한' 결합만을 금지한다고 말하며 스탠더드 석유회사와 아메리칸 담배회사의 독점을 파괴하지 않았다."(448)


"운디드니 학살이 있었던 1890년, 인구조사국은 내륙 국경 설정이 완료됐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팽창을 본성으로 하는 이윤 체제는 이미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507) 1898년 2월 아바나 항구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메인Maine 호가 원인불명의 폭발로 침몰하자 "매킨리와 산업계 모두 스페인을 쿠바에서 몰아낸다는 자신들의 목표가 전쟁을 통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으며, 그에 수반되는 부수적 목표, 즉 쿠바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 확보 역시 쿠바 반란자들의 손에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개입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519) "훗날 미 국무장관 존 헤이가 '눈부신 작은 전쟁splendid little war'이라 부른 전쟁에서 스페인 군대는 석 달 만에 패했다. 미군은 쿠바 반란군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스페인이 항복했을 때, 어떤 쿠바인도 항복조건을 협의하거나 항복문서에 서명할 수 없었다."(526)


전쟁이 끝나자 미국 자본이 대거 쿠바에 상륙했다. "1901년 당시 쿠바 광물 수출량의 최소한 80퍼센트가 미국의 수중에 장악됐고 그 대부분을 베슬리엄 철강회사가 차지했다."(528) "스페인-미국 전쟁은 미국이 수많은 나라를 직접 병합하는 결과를 낳았다. 쿠바에 인접한 카리브 해의 스페인령 푸에르토리코가 미군에 의해 접수됐다. 거리상 태평양 전체의 3분의 1이나 떨어져 있는 섬으로, 이미 미국 선교사와 파인애플 대농장 소유주들이 침투해 미국 관리들이 "수확할 일만 남은 다 익은 배"라고 묘사한 하와이 제도는 1898년 7월 상하 양원 합동 결의안으로 병합됐다. 비슷한 무렵에 일본으로 가는 길목인 하와이 서쪽 3,700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웨이크Wake 섬도 점령됐다. 그리고 필리핀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태평양의 스페인령 괌 역시 접수됐다. 1898년 12월에 스페인과 조인한 강화조약으로 미국은 2,000만 달러를 지불하고 괌,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등을 공식적으로 넘겨받았다."(531)


한편 국내적으로는 체제 안정을 기하고 민중 봉기를 진정시키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1900~1920년대가 '혁신주의'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새로운 법안들이 통과됐다는 점에 있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행정부 아래 육류검사법Meat Inspect Act, 철도와 송유관을 규제하기 위한 헵번법Hepburn Act, 순정식품의약품법Pure Food and Drug Act 등이 통과됐다. 테프트 행정부에서는 만-엘킨스법Mann-Elkins Act으로 전화 및 전신 체계를 주간통상위원회의 규제 아래 뒀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기에는 독점의 성장을 통제하기 위해 연방통상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를 창설하고 전국의 통화와 은행체제를 규제하기 위해 연방지불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을 도입했다. 테프트 행정부는 누진소득세를 허용하는 헌법 수정조항 16조와 원래의 헌법이 규정하는 대로 주의회의 간접선거 대신 일반투표로 직접 상원의원을 선출하도록 하는 헌법 수정조항 17조를 제안했다."(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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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7-02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인데, 좋은 서평을 써주시니 읽고싶은 마음이 더 생깁니다.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역사라는 학문을 어느 특정집단이나 당시 주류였던 관점에서 벗어나, 민중의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인듯 합니다.

nana35 2018-07-02 12:43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신다니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 사회주의를 넘어
앙드레 고르 지음, 이현웅 옮김 / 생각의나무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20세기가 폭력과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위협에 지배되었다는 가정은 옳지만, 폭력과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20세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자유주의가 조만간 승리하리라는 것은 그 시대의 사태 전개를 봐서는 정말로 예상되지 않는 일이었다.


<20세기를 생각한다>, 토니 주트, p.490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이론은 계급대립에 대한 실증적 연구나 프롤레타리아의 근본성격에 대한 정치투사로서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관찰을 하거나 정치투사적 경험을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사명, 즉 마르크스식으로 말하면 그 계급적 존재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구성하는 역사적 사명을 발견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이 사실에 대해 자주 강조했다. 프롤레테르들을 실증적으로 관찰한다 하더라도 결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사명을 알 수 없다. 반대로 프롤레테르들의 계급적 사명을 이해할 때 그들의 진실한 존재를 파악하게 된다. 따라서 프롤레테르들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얼마나 의식을 갖고 있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른 식으로 말해, 프롤레타리아 존재는 프롤레테르들에 대해 근본적으로 선험적이다. 프롤레타리아 존재로 인해 프롤레테르들은 올바른 계급노선을 선험적으로 보장받는다."(15)


# 프롤레테르 : 프롤레타리아를 구성하는 개개인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이론은 기독교와 헤겔철학, 과학주의가 통합된 사상이며, 그 중에서도 중심축은 헤겔철학이다. 헤겔철학에서 "역사는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 시간이 끝나는 곳에서 신의 통치가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신은 자신들의 선험적 작업의 의미를 여전히 이해 못하는 역사적 인간들을 매개로 자신의 도래를 완성해간다. 그런데 이 역사적 인간들에 대해 신의 작업은 선험적인 변증법을 통해 완성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인간들의 의식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여기서 마르크스 변증법의 모태를 알아본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헤겔의 변증법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내용을 간직한다. 개인들의 의식에서 독립해 존재하는 역사의 의미, 그리고 개인들이 역사로부터 무엇을 얻건 그들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는 역사의 의미,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그 의미는 헤겔처럼 "허황된 모습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팔과 다리로 실현될 것이다."(18-9)


"마르크스가 (필연성과 실존성의 연결 고리에 대해서) 대답할 수 없었던 까닭은 프롤레타리아는 구성원 개인이 모든 존재가 될 능력을 갖고 있다는 명제와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것을 소유해야 할 필연성을 갖고 있다는 명제가 동일한 층위의 명제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자는 철학적 층위에 속한다. 마르크스가 헤겔철학을 차용해 만들어낸 프롤레타리아의 이상理想으로부터 도출되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세계와 역사의 원천으로서 자신을 의식하는 '노동'을 실천할 보편적 가능성의 존재다. 반대로 모든 것을 소유해야 할 필연성을 갖고 있다는 명제는 프롤레타리아화化의 역사적 과정에 대하 분석으로부터 도출되었다(혹은 그러한 분석으로부터 도출되는 명제이기를 바란다). 사실상, 이 분석으로는 앞의 철학적 전제를 정립할 수 없다."(31-2) "마르크스는 전문기술을 지닌 다양한 노동자들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이상을 지닌 프롤레테르의 모습을 보았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35)


"계급적 존재로서 프롤레테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그는 노동력을 지닌 다른 인간과 무한하게 교체 가능한 존재로서 착취를 당하지만, 또한 바로 무한하게 교체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에─다시 말해, 그 자신과 완전히 동일하게 전적으로 소외된 타자들과 마찬가지로 하찮은 '타자'이기 때문에─다른 모든 프롤레테르들과 힘을 합해 착취자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은 '자본'의 권력과 정대칭의 관계에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가 "자신"의 자본에 대해 소외되어 있고 자본의 공무원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매우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프롤레테르도 그 동일한 '자본'을 "집단적으로 소유하게" 될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소외될 것이다."(47-9) "따라서 완전히 프롤레타리아화한 노동자는 사회를 위해서만 노동한다. 그는 추상적 보편노동의 순수한 제공자이고, 결과적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순수한 소비자다."(50)


"이제는 완전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는 노동과 관계 맺지 않는다. 노동은 완전하게 규격화되었고, 무기체적 과정이 되었다. 노동자는 스스로 진행되는 작업을 보조하고 이것에 자신을 맞춘다. 그는 더 이상 작업을 하지 않는다. 노동이 노동자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노동자는 노동에 대해 무관심하다. 월말에 임금이 나오는데, 중요한 일이 있다면 이것뿐이다." "이런 원한어린 태도가 '자신의' 일을 하는 프롤레테르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다. 그들은 수동적인 프롤레테르를 원했을까? 그렇다면 프롤레테르는 수동적으로 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그는 사람들로부터 강요당한 수동성으로부터, 이 수동성을 강요한 사람들에 대항할 무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프롤레테르에게서 수동적인 능동성을 원했다. 그런데 그는 능동적인 수동성을 가질 것이다."(52-3)


"프롤레테르들은 자신들의 완전한 헐벗음을 내면화하며 부르주아 세계의 폐허 위에서 보편적 프롤레타리아 사회를 이루어내는 대신, 자신들의 완전한 의존성을 인정하고 자신들을 책임질 것을 요구하기 위해 헐벗음을 내면화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급적 요구가 이런 식으로 대중적 요구로 바뀌는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계급적 요구는 (원자화되고 서로간의 연결성이 없는 프롤레테르들로 구성된) 대중의 소비에 대한 요구로 바뀌고, 이 경우 프롤레테르들은 사회로부터, 다시 말하면 권력으로부터, 현실적으로 다시 말하면 국가기관으로부터 그들이 갖거나 창조하기 불가능한 것을 받고자 한다. 이때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투쟁은 권력의 지위에 자신들의 대표자를 앉히기 위한 대중적 행위로 축소된다."(54-5)


"따라서 자신들이 국가에 의지하는 만큼, 역으로 국가도 노동자들에 대해 의무를 가져야 한다는 요구가 노동계급에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노동계급은 스스로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가 그 계급에 대해 모든 의무를 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국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국가도 노동계급이 절대적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노동계급이 국가권력을 차지해야 하는데, 이렇게 실제로는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을 책임지고 있다. 노동계급과 국가권력 사이에 놓인 모든 장벽은 사라지는 경향이 있고, 계속 이렇게 된다면 상황은 다루기 쉬울 것이다. 곧 지금까지 존재해온 정치적 중개, 그람시가 말한 의미의 시민사회 고유의 제도, 자율적인 사회적 관계와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은 독점자본주의에 의해 이미 모든 현실성을 상실했다."(57-8)


"노동자들의 권력에 대한 생각, 혁명적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생각은 포스트-테일러리즘 시대에 그 생각들이 부여받던 의미와는 매우 다른 실제적인 의미를 갖는다. 권력의 지위에 오르는 일을 목표로 삼았던 그 노동계급은 비참하고, 탄압받고, 무지하고, 일정하고 안정된 거처나 직업이 없던 민중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소유한 전통·엘리트층·문화·조직 때문에 노동민중 한가운데서나 일반적 의미의 사회 내에서 헤게모니를 쥘 잠재성이 있던 계층이었다. 이 계층에게는 권력을 가진다는 것이 부르주아지의 자리를 빼앗은 다음 국가를 경영할 지위에 앉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반대로 노동의 권력을 행사하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 즉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기생계급인 부르주아지, 그 탄압적 기구의 존재로 인해 부르주아지가 민중의 궐기를 우습게 보는 국가를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66-7)


"생산조직의 자율성을 파괴시킨 그 기술적 전문화·경제적 집중화 과정이 노동자들의 자율성의 원천인 예능적 기술을 파괴시켰다. 테일러리즘으로 인해, 생산에 필요한 노동자들의 위계와 질서의 자리에 공장의 지휘부에서 고안하고 강제한 경영자 중심의 위계와 질서가 들어앉았다. 치열한 투쟁의 과정들을 거친 다음 예능적 기술의 노동자들은 제거되고, '생산의 하사관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은 비록 프롤레타리아 출신이지만 고용주 측에 속하게 됐다. 즉 그들은 지도부에서 교육 받고 선별된 다음, 다른 노동자들을 지도하고 감시할 권력을 부여받았다. 생산작업은 자율성이나 기술적 권력이 없는 원자화된 노동자들로 구성된 대중에 의해서만 수행됐다. 이런 대중에게 생산에 대한 "권력을 쟁취한다"는 사상은 의미가 없다. 적어도 오늘날의 공장에서는 의미가 없다."(69-70)


"권력의 정당성을 이루는 토대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자본주의 사회의 해결되지 않는 커다란 문제 중 하나다.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따른다면, 항상 가장 능력있는 사람이 지배적 위치에 설 수 있어야 한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능력주의의 존재를 전제하고, 이 능력주의는 권력 관계들이 매우 유연하고 쉽게 변화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따라서 사회는 물적으로나 제도적으로는 변화하지 않더라도, 사회 내의 이런 유동성을 막아서는 안 된다. 어제의 승자가 오늘, 그보다 더 능력있는 사람이 있다면, 대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현 상태를 유지하려 하지 않는 권력, 자신의 권력을 특정인에게 위임하려 하지 않는 권력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상, 권력은 지배적 지위를 독점한다는 것이고, 지배적 지위는 필연적으로 특권화되고 희소성을 갖는 경향이 있다. 이런 지위들 중의 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들이 그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84-5)


대다수가 지배적 지위를 추구하지만, "사람들이 갖게 될 모든 지위는 이 지위에 필요한 자질과 함께,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지배적 제도의 경화증은 권력의 관료화와 더불어서 발생한다. 아무도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위해 권력을 획득할 수 없다. 그는 단지 매우 작은 권력이 부여되어 있는 지위들 중의 한 지위에 오르기를 시도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들이 더 이상 권력을 소유하지 않고, 권력의 지위들이 인간들을 소유한다. 더 이상 '자아'의 개성을 확장할 능력을 갖고 있는 개인들이 자신들에 맞추어 그 지위들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 지위들이 지위를 점하는 인간들을 맞추어 가공해낸다." "이 변화는 개인 자본가가 익명적 집단, 기업가가 '은행', 고용주가 '자본'과 그 공무원들(곧 경영자들)에 의해 대체된 시기부터 현실에 뿌리내렸다. 모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휘·경영 기관이 이윤창출과 자본유통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구조화되었다."(86-7)


"프롤레타리아는 구성적으로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비록 프롤레타리아의 대표자들이 '자본'에 의해 설치되어 있던 지배기구를 장악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 자본의 지배와 유사한 것을 재생산할 것이고, 이어서 그들 스스로가 기능적 부르주아지가 될 것이다. 지배기구 내에서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이 점하던 자리를 차지하며 그 계급을 축출할 수 없다. 그러한 시도를 하는 계급은 권력을 이양받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지위를 이어받을 따름이다."(99-100) 사회적 생산의 토대가 되는 업무를 담당하는 "기능적 권력을 제거함으로써 지배관계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곧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떠맡는 것과 같다. 지배관계를 제거할 유일한 가능성은 곧 권력과 지배를 분리시키고 시민사회·정치권·국가 각각의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해, 기능적 권력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전에 정해진 한정된 자리를 그 기능적 권력에 부여하는 데 있다."(101)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노동은 더 이상 노동자의 고유한 행위가 아니다." "노동자는 더 이상 "자신의" 노동에, 생산과정 내 자신의 역할에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다. 모든 일이 그를 제외한 채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 자체는 노동자와 마주해 그를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어떤 일정량의 물화物化된 행위다." 따라서 노동자가 "노동 가운데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노동의 주인이 되고, 노동을 위해 권력을 정복하는 일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노동의 본성·내용·필요성·방식들을 부정하며 노동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만이 문제다. 그런데 노동을 거부한다는 것은 또한 노동운동의 전통적 전략과 그 조직적 형식들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곧 노동자로서 권력을 정복할 필요가 더 이상 없는 대신, 노동자로서 기능하지 않을 권력을 정복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권력이 문제가 된다. 계급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107-8)


"노동계급과 달리, 이 비非계급은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나지도 않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들의 낙인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이 계급은 자본주의의 위기로 인해, 그리고 새로운 생산기술들의 영향력에 따른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생산관계들의 해체로 생겨났다. 따라서 마르크스를 따를 때 노동계급이 지니고 있어야 하는 부정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 부정성은 새로운 장소로 이동해 근본화됐다." "실제로 이 비계급은 노동의 소멸과정에 따라 생산현장을 떠나게 된 사람들 혹은 지적 노동의 산업화(즉 자동화와 정보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에 못 미치는 일자리를 얻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한다. 이 비계급은 실제적으로나 잠재적으로, 지속적으로나 일시적으로, 완전하거나 부분적으로 실업상태에 있는 임시직의 모든 사람을 포괄한다. 이 비계급은 노동, 곧 노동의 존엄·가치화·사회적 효용·욕망에 토대를 두었던 구舊사회가 해체되며 나타난 산물이다."(108-9)


"그들에게서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그들이 노동계급이나 다른 어떤 계급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라는 명칭에서도, 아니면 이와 대칭선상에 있는 '실업자'라는 명칭에서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이 신新프롤레테르는 은행·관공서·청소서비스업체·공장 등 어디에서 일하건, 무차별한 직무에 일시적으로 고용되어 있는 비노동자다. 그는 "아무 일이든" 하고, 또한 "아무나" 그를 대신해서 그 일을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생산관계를 매개로 사회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사회의 전반에 자리한 생산기구가 '노동'을 만들어내고, 우연적이고 서로 교환될 수 있는 개인들에게 우연적인 형식으로 그 노동을 강요한다." "젊은 마르크스가 모든 특수한 형식으로부터 해방된 보편적 가능성을 그 안에서 보았던 프롤레테르는 오늘날에는 기구들의 보편화된 능력에 대항하는 특수한 개인성일 뿐이다."(113-4)


"타율성 영역은 개인들의 생활과 사회의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을 프로그램화하고 계획화해 가장 효율적으로, 곧 가장 적은 노력과 자원을 들여 생산하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 자율성 영역에서는 개인들이 경제영역 바깥에서 혼자서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든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데, 이 상품과 서비스는 생활에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욕망과 취향과 상상력에 따라 만드는 것이다."(156) "사회공간을 (사회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비인격적인 일을 하는) 타율성의 영역과 (모든 것이 진행될 수 있는) 자율성의 영역으로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조직하더라도 두 영역이 어떤 경우든 서로에 대해 닫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평범화된 노동들로 구성된 사회화된 섹터의 존재를 통해 각자가 공동체의 협소한 공간을 벗어날 수 있고, 공동체가 자급자족적 경향 때문에 폐쇄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165-6)


"사회적으로 결정된 노동을 없앤다 하더라도, 혹은 각자가 객관적으로 필요한 모든 일의 완수규칙을 내면화하도록 설정했던 외부적 의무들을 폐기한다 하더라도 해방은 생겨나지 않는다. 반대로 해방은 필연성의 영역이 타율적인 일들을 강요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타율적인 일들의 기술적 요구사항들은 도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정확한 규칙을 정해 그 일들을 특정 사회공간 내로 한정시키는 데 있다. 필연성의 영역과 자율성의 영역을 분리하는 것이 후자의 영역을 최대한 확장하기 위한 조건이다."(168) "필연성의 영역을 축소하는 일은 생활에 필요한 것을 물적으로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노동량만을 축소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일은 또한 직접적인 생산이 필요로 하는 외부의 비경제 시스템과 국가의 활동들을 축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축소는 생산기구 자체와 이 생산기구가 결정하는 노동의 분할이 조정될 때만 가능하다."(170)


"후기산업사회의 사회주의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국가의 철폐가 아니라 지배의 철폐다. '법'과 지배, 국가기구와 지배기구는 지금껏 항상 혼동되어 왔지만, 분리되어야 할 것들이다. 실제로 국가기구들은 모든 지배의 원천도 그 최종동기도 아니다. 그 기구들 자체는 지배의 사회관계 때문에(한 계급의 전 사회에 대한 지배 때문에) 존재하고,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지배양식에 자신들의 고유한 지배양식을 추가하며 그 사회관계를 연장하고 강화한다. 국가기구들에 의한 사회의 지배는 자본이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집중화를 통해 지배함으로써 생겨난 결과이자, 그 지배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다." 지배기구를 걷어내면 나타나는 "국가는 협업과 중앙적 규제 수단들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최소로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끝으로 국가는 자율성 영역의 확장을 위해 스스로의 권력과 고유 영역을 축소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186-7)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역사의 종말로서 유토피아가 존재한다. 세계 공산주의, 전 지구적 민주주의, 천년왕국 등 종류만 다를 뿐이다.

...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안내자로서보다는 신념과 정치적 행동의 견인차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과거의 도그마가 더는 우리에게 매력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처음부터 거대한 속임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현재 많은 사람이 공산주의의 종언을 "환상의 종언"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사 분석은 추도사가 아니다. 1945년 직후에 사람들은 전체주의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했다. 악마에 사로잡힌 광기 어린 한 독재자가 사람들에게 최면을 걸었던 정치적 병리 현상쯤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 대륙이 받은 상처를 그저 몇몇 정신 나간 인간들의 소행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으며, 그 상처가 남긴 정신적 외상이 히틀러나 스탈린의 정신세계 속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좋건 싫건 간에 파시즘과 나치즘 모두 대중 정치·산업화·사회 질서라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했다. 자유민주주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리자면, "나쁜 과거를 내던지고 시간의 망각 속에 묻어버리면서 과거에 좋았던 것만을 우리의 유산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

유럽에서 자유주의는 여러 가치 체계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며 다른 것들도 존재한다. 유럽의 20세기는 이들 가치 체계 사이에 벌어진 분쟁에 대한 이야기다. 


<암흑의 대륙>, 마크 마조워, pp.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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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코뮌 고려대학교 교양총서 4
가쓰라 아키오 지음, 정명희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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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2월혁명의 결과 제2공화정부가 태어나고 보통선거가 선언되었을 때, 부르주아 공화파 임시정부는 노동자 세력을 철저히 진압하고 홀로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12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농민들의 지지를 얻은 루이 나폴레옹이 압승하자 권력의 항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1851년 12월 21일의 국민투표는 약 740만 표 대 60만 표라는 압도적인 표 차로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추인했고, 이듬해 1월 대통령의 임기를 10년으로 연장하여 그 권한을 대폭 확장시킨 신헌법이 발표되었다." 꾸준히 제정 부활을 도모한 끝에 1852년 12월 2일,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하고 제2제국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1852년의 헌법을 약간 수정·보완한 '제국헌법'에 의하면 행정·군사·외교의 전권은 황제에게 집중되고, 도지사prefet, 지방장mairie을 포함하여 모든 관직은 임명제로 바뀌며, 장관은 황제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고, 책임내각제는 완전히 부정되었다."(28-9)


"카를 마르크스는 제2제정의 지배체제를 보나파르티즘이라고 부르고, 그 국가를 보나파르트 국가라고 규정한다. 그에 의하면 보나파르티즘이란, 부르주아지가 자체적으로 국가를 통치할 능력을 이미 상실하고, 노동자계급이 아직 그 능력을 획득하고 있지 못한 시기에, 계급들 사이의 조정자를 표방하여 보수적인 소토지 소유 농민=분할지 농민을 정치권력의 기반으로 삼아 성립된 반동적 독재체제이며, 자본에 의한 노동의 노예화를 실현한 국가권력의 가장 불순한 형태로 규정된다." "많은 노동자는 황제사회주의에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으며, 산업자본주의는 제정권력에 질서 유지와 산업의 보호·장려를 기대했다. 부르봉 정통 왕조주의에 가까운 관계에 있는 가톨릭 세력도, 정부가 교회의 활동에 편의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제정을 지지했고, 또한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농민의 사대주의적 경향은 보나파르트 가家의 카리스마적 권위가 뿌리 내리기에 훌륭한 토양이었다."(29-30)


"나폴레옹 3세는 권력의 자리에 앉자, 혁명의 재발을 방지하면서 근대화를 추진하려던 대大부르주아지와 제휴하여 적극적인 경제팽창 정책을 내세웠다." "이 시기의 경제적 번영을 상징하는 것은, 생시몽주의자 유대인 프레르 형제가 설립한 '크레디 모빌리에'(동산은행動産銀行)로 대표되는 거대한 투자은행의 출현과 수도 파리를 시작으로 대도시에서 실시된 대규모 도시계획사업이다."(32-3) 1860년 나폴레옹 3세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영불통상조약을 맺어 자유무역 체제로 돌아서자 "대부분의 산업자본가는 일제히 반대의 불길을 당겨, 황제의 이탈리아 정책에 반감을 갖는 가톨릭 세력과 손잡고 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36-7) 황제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기대했지만, 영국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접하면서 "정치의식에 눈뜨기 시작했던 노동자는, 이제 황제의 '가부장적 온정주의paternalisme'의 포로가 되는 것을 감수하지 않게 되었다."(41)


"1867년 공황을 계기로 하여 사회정세에 나타난 가장 현저한 변화는, 도시의 공장노동자가 노동운동의 제1선에 등장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그들은 해고, 임금삭감, 노동강화라는 자본 공세에 직면하여 계급의식에 눈떴다. 이들 대다수의 공장노동자들은 산업혁명의 진전과 함께 농촌에서 도시로 급격히 흡수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농민적 성격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으며, 어떻든 대자본이나 황제의 가부장적 온정주의적 지배에 이끌리는 경향이 있기는 했지만, 불황이 심각해지자 도시 직인층이 갖는 혁명의식을 흡수하여, 자본에 대한 임금노동의 해방을 짊어지는 체제개혁 세력으로서의 자신들의 존재와 힘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노동운동은 여기에서 프루동적인 동업조합의 상호주의의 껍질을 벗고, 동업조합 내부에 설치된 저항조합을 모체로 하여 혁명적 노동조합syndicat을 조직하는 방향성을 분명히 보이기 시작했다."(49-50)


# 제정 말기 혁명운동의 지도층

1. 자코뱅파 및 프티부르주아적 급진공화파 : 민주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모인 학자, 저널리스트, 변호사, 예술가 집단

2. 블랑키파 : 무장봉기를 일으켜 혁명독재를 실현하고자 분투했던 블랑키를 중심으로 단결된 집단

3. 제1인터내셔널 지도층 : 순수 프루동주의자에서 혁명적 집산주의자collectivistes로 이행한 집단(생산수단을 공유하는 평등사회를 구상했지만 혁명독재는 반대)


"1870년 7월, 스페인 왕위계승 문제가 발단이 되어 돌발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국내에서는 혁명운동에 뒤흔들리고 국제 정세에서는 고립되어, 국내외 양쪽으로 궁지에 몰린 나폴레옹 3세가 제정 연명의 최후 수단으로 시도한 군사적 모험이었다."(65-6) 그러나 1870년 9월 2일, "메스 구원에 실패하고 거꾸로 스당에 몰린 마크-마옹 지휘하의 프랑스군은 황제와 함께 프로이센의 군문軍門에서 투항했다. 황제는 포로가 되었다. 이틀 후 9월 4일 일요일, 스당 항복의 보고에 전격적인 충격을 받은 파리 시민들은 자연발생적으로 봉기하여 약 50만 명의 시민이, 블랑키파를 선두로 하여 임시로 소집된 입법원 회의장인 부르봉 궁으로 밀고 들어갔다." "스당의 항복은 제정 최후의 보루였던 군사권력의 붕괴를 의미했다. 여기에서 지배의 기초가 완전히 파헤쳐져 무너져 버린 제2제국은 파리 민중의 돌풍을 정면으로 받아 썩은 나무가 쓰러지듯이 맥없이 주저앉아 버렸다."(68-9)


부르주아 공화파 의원들로 구성된 국방 임시정부는 표면상으로는 "한 치의 토지도, 우리 성채의 돌멩이 하나도 양도하지 않는다"(외무장관 파브르)고 공언하면서 "내심으로는 목전에 닥친 프로이센군보다는 무장한 민중, 즉 국민군 쪽이 훨씬 두려웠다."(82) "당연히 '총출격'을 요구하는 혁명 세력·국민군 병사와 구실을 내세워 결전을 회피하려고 하는 국방정부와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고조되어 간다. 블랑키파는 이제 확실하게 '국민배신 정부' 타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정부와 혁명 세력의 협력관계는 열흘 가량 지나자 냉각되고 적대관계로 바뀌었다. 민중의 자주적 관리조직으로서의 '코뮌' 선거를 요망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온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였다. 이 시점에서 민중이 마음속에 그린 코뮌이란, 무엇보다 대혁명 때의 '혁명적 코뮌'의 이미지였다. 여기에 더해 중세도시에서 쟁취했던 코뮌 자치권에 대한 기억이 오버랩되었다."(85)


1871년 1월 25일부터 26일까지 베르사유에서 교섭이 진행되어, "21일 동안의 휴전, 휴전 기간 중 강화講和의 가부를 묻는 '국민의회' 선거 시행, 쌍방의 점령 지점에서의 전투행위 정지, 파리 성벽의 무장해제, 파리를 지키는 요새의 프로이센군에 의한 점령, 정규군 1개 사단과 국민군을 제외한 파리군의 항복, 프로이센군에 대한 2억 프랑의 전시과세 지불 등의 굴욕적 조항을 짜넣은 휴전조약이 조인되었다."(120) 2월 8일, 파리에서 열린 국민의회 선거에서는 급진공화파가 대거 승리를 거두었지만, 보르도 국민의회는 티에르를 행정장관으로 지명하여, 노동계급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사태 수습을 추진하였다. "3월 17일부터 18일 밤까지 외무부에서는 파리의 국민군에 대한 기습작전을 협의하기 위한 각료회의가 열렸다. 작전의 개략은, 파리의 전 정규군을 동원하여 도시 전체를 점령, 국민군을 일격에 무장해제시키고, 중앙위 전 멤버와 주요 혁명가를 체포한다는 것이었다."(143)


3월 18일 새벽에 감행된 정부군의 기습은 자연발생적으로 봉기한 민중·국민군 병사들의 저항과 정부군 병사들의 배반으로 실패했다. "티에르는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자, 즉각 파리를 포기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는 1848년 2월혁명 때 당시 국왕 루이 필리프에게 전술적으로 일단 수도를 철퇴한 다음, 지방의 병력을 재결집시켜 파리를 탈환한다는 작전을 건의했던 일을 떠올렸다."(153) "리옹, 마르세유, 나르본 등 많은 지방도시에서 파리를 모방하여 코뮌 운동이 타오르고 있었다는 것을 아울러 떠올리면, 신속한 결단과 행동만이 승리를 가능케 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중앙위는 티에르 정부의 도주로 생긴 파리의 정치적 공백을 틈타 거저 들어온 정치권력을 즉각 행사하려고 하지 않고,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대신해야 할 자신들의 사명을 완수하는 일에 주저했다. 그들은 결국 결정적인 승리의 기회를 스스로 놓아버렸다."(158-9)


3월 28일, 정식으로 성립된 파리코뮌의 정책을 살펴보면 "의회식 기관이 아니라, 동시에 입법하고 행정하는 직접 민주주의적 '행동 기관'(마르크스)이 되어 '돈이 덜 드는 정부'라는 구상하에서, 사법관을 포함한 모든 관리는 철저한 리콜제─언제라도 해임이 가능하고, 민중에 대해서 직접 책임을 지는 대표제─에 따르고, 관리의 정치적·직업적 선서 의무는 폐지되며, 그들의 봉급은 노동자의 최고임금 수준을 넘지 않을 것 등이 정해졌다(4월 2일). 또 관리의 겸직에 의한 이중 수당 취득이 금지되었다(5월 4일). 상비군-정규군은 폐지되고 코뮌의 국민군이 시의 치안과 방위를 맡으며, 표현·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 인권과 시민의 자유는 반혁명 세력 단속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충분히 보장되었다. 또한 노동자의 생활개선을 위한 사회정책이나 노동자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적 정책이 차례로 나오고, 세속화된 무료 의무교육을 통하여 대중의 교육 수준 향상이 도모되었다."(199)


"노동위나 교육위의 업적과 반대로 코뮌의 약점을 분명하게 노출시킨 것은 보안위원회와 재정위원회다. 국가의 종교예산이 폐지되고 수도회의 자산이 몰수된 것은 코뮌 정신에서 볼 때 당연한 조치였으나, 대혁명 때의 생-쥐스트를 자처하는 블랑키주의자 리고를 '대표'로 하는 보안위는 성직자·반코뮌파에 대하여 종종 필요 이상의 공포정치를 행했다. 특히 교회시설을 제멋대로 접수하고, 많은 성직자와 수도사를 체포한 것 등은 중소 부르주아지들에게 쓸데없이 불안을 조장해, 베르사유 쪽에 '박해'라는 그럴싸한 선전 재료를 제공했다." 또한 재정위원회가 프랑스은행 장악에 소홀한 틈을 타서, 프랑스은행은 "베르사유가 파리와 싸우기 위해 은행 앞으로 발행한 2억 5천 7백 63만 7천 프랑의 어음을 인수"하여 코뮌 반대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엥겔스와 많은 역사가들은 프랑스은행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을 코뮌 패배의 중대한 요인 중 하나로 꼽는다."(207-8)


"티에르는 지방의 소란을 진압하면서, 비스마르크와 교섭하여 휴전조항을 완화시키고, 3월 말까지 약 6만 5천의 정규군 병력을 베르사유로 집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4월 1일, 국민의회에서 '멋진 육군'을 극구 칭찬한 티에르는 파리 공격 결정을 내렸다." "이날 오후 공격 소식을 들은 파리에서는 비상소집의 북소리가 울리고, 베르사유군의 만행에 격앙된 군중은 즉시 베르사유로 총공격을 하자고 주장했다. 이 시점에서 파리는 현역 국민군 8만 명, 주둔 국민군 11만 4천 명, 여기에 벨기에인 700명, 폴란드인 400명 등 외국인 의용병을 보태면 20만 가까운 병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일찍 실시된 총사령관제의 폐지와 징병제의 철폐가 전반적인 군기와 지휘 능력에 악영향을 끼쳐, 실제 전투요원은 약 4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227-8) 더구나 군사권력을 대표하는 국민군 중앙위와 문민권력을 대표하는 코뮌정부 사이의 알력은, 코민 측의 열세를 더욱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코뮌의 이중 삼중의 내분이 베르사유 쪽에 더욱더 허점을 이용할 여지를 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티에르는 보르도에 예정되어 있던 내전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전국 도시회의 개최를 금지하고 지도자를 체포하여 파리와 지방도시를 완전히 단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프로토를 개입시켜 수차례에 걸쳐 이뤄진, 인질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블랑키를 석방시키려는 교섭도 티에르에 의해 간단히 무시되었다. 다르부아 대주교의 친서를 가지고 파리에서 파견된 인질 중의 한 사람인 라가르드 신부는 굳은 서약에도 불구하고 파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블랑키 한 사람과 인질 전원을 교환하자는 최후의 제안마저 티에르에게 냉정히 거절당하는 것으로 5월 13일의 교섭은 최종 결렬되었다. 티에르는 파리에게 피의 값을 치르게 한다는 구실을 얻어내기 위해, 오히려 대주교의 처형을 바라고 있었다."(250-1)


5월 21일 일요일, "적이 성벽에 바짝 다가와 성문을 살피고 있을 때도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는, 정규군이 침입해 와도 3월 18일처럼 민중과 손을 맞잡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공기가 넘치고 있었다. 대부분이 농민 출신인 정규군 병사들은 패전 콤플렉스가 있는 데다가 파리의 반란 때문에 귀향이 늦춰졌다는 원망이 겹쳐, 파리 시민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해 피에 굶주린 흉포한 야수가 되어 있었다." "21일 밤이 되자 두애, 비누아 장군이 인솔하는 베르사유군 본대가 도착하여, 포앵 뒤 주르 지구에서 속속 파리로 들이닥쳤다. 트로카데로, 개선문은 밤 사이에 점령당해 포로의 총살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피의 주간'이라고 불리는 처참한 시가전의 막이 올랐다."(254-5) "23일, 베르사유군은 몽마르트르 고지를 탈취하고 바티뇰, 제1구, 중앙지구도 점령했다. 3월 18일의 한을 풀어줄 때가 이윽고 왔다는 듯이, 사령관은 로제 가街를 시작으로 점령지구에서 연맹병과 일반시민 대량학살을 조직적으로 개시했다."(257)


코뮌의 씨를 말리려는 백색 테러는 5월 28일 베르사유군 사령관 마크-마옹의 파리 정복 선언을 무색케 할만큼 끊임없이 자행되고 나서야 끝났다. "코뮌의 붕괴는 프랑스의 노동운동·혁명운동에 괴멸적 타격을 주고, 그 발전을 10년 이상이나 늦추었다. 인터내셔널을 금압하는 '뒤포르 법'이 제정되어 시민 자유는 대폭 제한되었다. 또한 인터내셔널의 국제조직도 각국 정부의 억압과 영국의 노동조합 운동가의 이탈, 스위스에 망명하여 코뮌 무정부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은 바쿠닌의 분파행동 등 때문에 쇠퇴에서 해체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코뮌은 국제 사회주의의 혁명운동에 준 영향을 별도로 생각해도, 왕당파나 제정파의 군주제 부활 음모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고, 제3공화제 확립에 무시할 수 없는 공헌을 했다. 민주주의적인 공화주의 세력의 끈질긴 운동으로, 1880년 코뮈나르의 전면적 대사면령이 결정되었을 때, 프랑스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은 새로운 부활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2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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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살상수학무기 - 어떻게 빅데이터는 불평등을 확산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캐시 오닐 지음, 김정혜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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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경제의 원동력인 수학 모형 프로그램들은 대다수가 "인간의 편견, 오해, 편향성을 코드화했다. 그리고 이 코드들은 점점 더 우리 삶을 깊이 지배하는 시스템에 그대로 주입됐다."(15) 대량살상수학무기(WMD) "모형 자체는 속이 보이지 않는 블랙박스로, 그 안의 내용물이 영업 비밀처럼 엄격하게 보호된다. 이것은 매스매티카 같은 컨설팅업체들에게 일거양득의 효과를 가져다준다. 첫째,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알고리즘이 지닌 가치보다 훨씬 많은 수수료를 청구할 수 있다. 둘째, 평가 대상이 모형의 작동 원리에 대해 모르기에 모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정하려는 시도를 할 가능성이 줄어든다. 대신에 평가 대상자들은 모형의 기준에 맞춰 열심히 일하고 규칙을 준수한다. 모형이 그들의 노력을 제대로 평가해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세부 사항이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평가 결과에 의문이나 이의를 제기하기란 더더욱 쉽지 않다."(24-5)


WMD이 안고 있는 세 가지 위험 요소는 '불투명성, 확장성, 그리고 피해'다. 비즈니스에 중요한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알고리즘이 공개되지 않은 모형에 쓰인 가정들은 파괴적인 피드백 루프를 통해서 자신의 가정들을 정당화하는 환경을 창조한다. "은행의 대출심사모형이 당신에 대해 채무불이행 위험이 높다고 판단하면 어떻게 될까? 이것이 지독한 오해에 불과할지라도 온 세상이 당신에게 '예비 채무불이행자'라는 똑같은 꼬리표를 붙일 것이다. 꼬리표 정도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 꼬리표는 당신이 아파트나 일자리를 구할 때는 물론이고 자동차를 렌트할 때조차 기준이 되어 당신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58-9) 문제의 핵심은 "알고리즘에 의해 작동되는 모형이 수백만 명의 면전에서 기회의 문을 닫아버리고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조차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가끔은 지극히 하찮은 이유로 그렇게 한다."(61)


금융위기 직전까지만 해도 "투자자들은 MBS(주택저당증권, mortgage-backed securities)에 투자하는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복병이 있었다. 바로 불투명성이었다. 투자자들은 증권에 포함된 주택담보대출 각각의 건전성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증권에 포함된 내용물을 얼핏이라도 짐작해볼 수 있는 방법은 신용평가기관의 분석가들이 평가한 등급이 유일했다. 그런데 분석가들은 자신이 등급을 매기는 금융상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기업들에서 수수료를 챙겼다."(75) 금융과 첨단기술이 안겨주는 혜택을 장악한 계층의 사람들은 "똘똘 뭉쳐 서로 칭찬하는 사회mutual admiration society를 형성한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시스템을 악용한 것과 대단한 행운이 결합된 결과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성공을 적자생존의 사회적 다윈주의가 작동한 결과임을 납득시키려 한다."(90)


"데이터를 처리하는 기계들 스스로가 우리의 데이터를 샅샅이 조사하면서 우리의 습관과 희망, 두려움과 바람을 찾아내고 있다." 인터넷이 등장한 뒤 "전세계 사람들이 자신의 삶, 일, 구매 경험, 우정 등에 관해 무수히 많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언어를 처리하는 기계들을 위한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학습 말뭉치training corpus가 자연스레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손글씨와 종이에서 이메일과 SNS로 소통의 도구를 바꿈에 따라 기계들이 우리의 언어를 연구하고 비교하면서 언어의 문맥과 관련해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진전은 신속하고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을 통해 향상된 "자연언어 처리 능력은 광고주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의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이제 프로그램은 특정한 단어의 의미를 안다. 아니, 적어도 가끔은 그 단어를 특정한 행동이나 결과와 충분히 관련시킬 수 있을 만큼은 안다."(135-8)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인터넷 세상에서 드러낸 선호도와 패턴을 토대로 수많은 모형에서 나뉘고 분류되어 점수가 매겨진다. 이런 정보는 합법적인 광고 캠페인의 튼튼한 토대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약탈적인 광고들의 연료가 된다.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만 골라서 지킬 수 없는 거짓 약속을 하거나 지나치게 높은 비용이 드는 약속을 해서 바가지를 씌우는 악질적인 광고 말이다."(126) 전형적인 WMD인 약탈적 광고는 절박한 사람들을 찾아내 표적공략한다. 일례로, 배터롯 칼리지는 신입생 모집원들에게 "복지수당을 수령하고 자녀가 있는 편모, 임신한 미혼여성, 최근에 이혼한 사람, 자긍심이 낮은 사람, 저임금 종사자, 최근에 가까운 사람과 사별한 사람, 신체적·정신적 학대 피해자, 최근 출소자, 약물 중독 재활 치료 유경험자, 장래성이 없는 직종 종사자"를 집중 공략하라고 지시했다.(129)


이처럼 알고리즘은 기본적인 명령에 따라 데이터를 처리할 뿐이지만, 그 명령을 내리는 사람(혹은 집단)의 의도가 모형 안에 속속들이 배어 있다. "미국 정부는 1965년에 시행된 고등교육법Higher Education Act에 소위 '90-10법칙'이라고 불리는 조항을 포함시켰다. 이 조항은 대학들이 재정의 최대 90%까지만 연방정부의 원조를 받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9대1이라는 비율의 근거는 학생들이 교육비의 일정 부분을 감당할 때 자신의 교육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영리 대학들은 이 조항의 허점을 공략하는 사업 계획을 만들었다. 저축이든 은행 대출이든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수천 달러를 긁어모을 수 있다면, 영리 대학들은 그 학생들의 이름을 빌려 그 금액의 9배나 되는 돈을 정부에서 지원받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영리 대학들에는 학생 하나하나가 막대한 수익 창출원이 됐다."(142)


"가난한 동네에서 경미한 범죄는 흔한 일이다. 오죽하면 어떤 지역에서는 경찰들이 그런 범죄를 범죄가 아니라 반사회적 행동antisocial behavior, ASB이라고 부르겠는가." 이런 2군 범죄를 예측 모형에 포함시키면 "더 많은 경찰이 가난한 동네로 출동하게 되고, 당연히 그런 동네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체포당할 것이다." 이는 바로 유해한 피드백 루프가 활성화되는 전형적인 과정이다. "경찰 활동 자체가 새로운 데이터를 생성시키고, 이런 데이터가 다시 더 많은 경찰 활동을 정당화해준다. 그리고 교도소는 피해자가 없는 범죄victimless crime를 저지른 수많은 범죄자들로 넘쳐나게 된다. 이런 범죄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동네 출신이고, 또한 대부분 흑인이거나 히스패닉계다. 설령 모형이 '색맹', 다른 말로 피부색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피부색과 소득 수준에 따라 거주 지역이 뚜렷이 구분되는 오늘날 미국 도시에서 지리적 요소는 인종에 대한 유효적절한 대리 데이터다."(151-2)


"미국 직장인들 사이에 최근 유행하는 신조어가 있다. '클로프닝clopening'이 바로 그것이다. 이 단어는 상점이나 카페의 종업원이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매장 문을 닫고 퇴근한 다음, 불과 몇 시간 후 새벽 동도 트기 전에 다시 출근해서 매장 문을 여는 것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한 명의 종업원이 매장 문을 닫고 여는 클로프닝은 기업의 입장에서 볼 때 물류logistics적으로 타당한 업무 방식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수면 부족과 빡빡한 일정에 쫓기는 것을 의미한다."(208) 일정 관리 소프트웨어가 양산하는 "불규칙적인 장시간 근무는 노동자들이 더 나은 근무 조건을 요구하거나 스스로 조직화하는 것을 힘들게 만든다. 대신 노동자들은 극심한 불안감과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급격한 감정 변화를 겪고 있다." 더욱이, 일정 관리 소프트웨어에게 착취당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자녀도 커다란 피해자다. 이런 부모를 둔 아이들은 평범한 일상을 경험하지 못한 채 성장한다."(217-8)


"보험사들은 신용평가 보고서에서 신용평가점수를 얻은 다음, 자사의 고유한 알고리즘을 통해 자체적인 등급이나 e점수를 생성시켰다. 이런 등급이나 e점수는 '책임 있는 운전 습관'을 대신하는 대리 데이터"로 활용된다. "자동차 보험비를 산정하는데 '돈을 어떻게 관리하는가'가 '어떻게 운전하는가'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273) 보험사들은 이를 악용해서 저신용 고객층에게 "과다한 보험료를 부과함으로써 실리를 챙긴다. 운전 기록이 깔끔해도 신용평가점수가 낮은 운전자는 사고 위험이 낮기 때문에 보험사에 복덩어리다. 게다가 그 운전자의 보험 계약에서 발생한 수익의 일부는, 보험사가 사용하는 모형의 비효율적인 측면을 보전해준다. 신용평가 보고서가 완벽해서 보험료를 적게 내는 운전자가 음주 운전 사고를 일으켰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그 손실을 신용평가점수가 낮아도 운전 습관이 좋은 운전자들의 보험료로 메울 수 있다."(275)


"현대의 소비자 마케팅은 정치인들을 특정한 유권자들에게로 데려다주는 새로운 경로를 제공한다. 이제 정치인들은 각 유권자 집단의 욕구에 맞춤화된 정보를 들려줄 수 있다. 일단 그렇게 하고 나면, 유권자들은 정치인들에게서 들은 정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큰데, 그 주장이 자신들의 기존 믿음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확증편향이라고 부른다." 정치참모들은 micro-targeting이라는 "신용카드업계의 전술을 차용함으로써 막대한 유권자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각자의 가치관과 인구통계학적 정보를 고려해 유권자를 다양한 하위집단으로 분류했다. 그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이웃한 두 집이 동일한 정치인으로부터 각각 다른 내용의 우편물이나 팸플릿을 받게 됐다. 가령 같은 후보로부터 한 집은 야생동식물 보호를 약속하는 우편물을, 바로 옆집은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우편물을 받는 식이다."(311-2)


정치가와 유권자 사이의 이런 "정보의 비대칭asymmetry of information은 여러 집단이 손을 잡고 힘을 합치는 것을 막는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다."(325) 정보의 비대칭 말고 또 다른 비대칭이 있다. 바로 관심의 비대칭이다. "알고리즘에 의해 투표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투표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음 선거에서는 관심의 융단폭격을 받게 된다. 여전히 투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면 애시당초 투표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유권자들은 관심에서 거의 배제된다. 정치 시스템은 투자 수익률이 가장 높은, 다른 말로 가장 적은 비용으로 표심을 바꿀 수 있는 유권자들을 열심히 찾는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때로는 투표 기권자들이 돈 먹는 하마처럼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정치 시스템의 이런 역학은 양극화를 부추긴다. 특정 계층은 물과 양분을 쏟아부어가며 살뜰히 보살피고, 나머지 계층은 영원히 방치되고 있다."(327-8)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WMD들은 상위 계층 사람들, 즉 부자들에겐 확연히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그들만을 따로 모아 배타적인 마케팅을 전개한다. 가령 카리브 해에 위치한 아루바로 휴가를 가도록 추천하고, 세계 최고의 경영대학원 중 하나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준다. 그러니 부자들은 세상이 갈수록 편리해진다고 생각할 만하다." 이런 표적 마케팅 기법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특성 때문에 사회의 승자들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모형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볼 수 없다."(330) "돈으로 영향력을 사는 오늘날 사회에서 WMD의 피해자들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나 다름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과 범죄로 개인적 비난에 시달리기 십상이지만, "사회적 통념에서 보면 가난의 병폐는 질병에 가깝다. (오늘날 정치권의) 빈곤 퇴치 노력은 중산층에게까지 그 병폐가 확산되지 않도록 차단시키는 것이 전부다."(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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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리엔트 이산의 책 24
안드레 군더 프랑크 지음, 이희재 옮김 / 이산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19세기 후반, 세계사는 유럽중심적 발명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좀바르트는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탄생하게 된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유럽의 '합리성'을 들면서, 그 기원이 유대교에 있다고 주장했다. 베버도 이런 입장을 수용했다." 베버는 세계의 주요 종교가 신화적이고 마술적인 요소, 한마디로 반反합리주의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지만, 유럽인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의 수혜"를 받았기 때문에 현실을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76-7) 이런 유럽중심주의는 "19세기의 사회학으로부터 막강한 원군을 얻었다. '사회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오귀스트 콩트와 헨리 메인 경 같은 사회학자는 '과학'과 '계약'에 바탕을 둔 새로운 형태의 사유와 사회조직, 낡은 '전통적' 사유와 사회조직을 구분하면서 전자가 후자를 대체했다고 주장했다.(78) 마르크스 진영도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구분한다.


이 책의 핵심 논지는 "1500년 이후 지금까지 세계 규모의 분업과 다국간 무역이 이루어지는 단일의 글로벌한 세계경제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십자군 원정 이후 "유럽인이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던 아시아에 어떻게 해서든 접근해 보려 했던 것도 이런 세계정치경제의 구조와 역학"에 진입하기 위해서였다.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가 '지리상의 발견'에 이르고 이후 서반구의 '신'세계가 구세계 경제와 통합된 것도, 1498년 바스코 다가마의 아프리카 순항 이후 유럽과 아시아의 관계가 긴밀해진 것도 결국은 아시아의 흡인력 탓이었다."(129) 세계경제는 압도적으로 아시아에 의존하고 있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아시아의 풍부한 물산과 그에 대한 유럽의 강한 수요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도 따지고 보면 동아시아 시장과 금을 확보하려는 기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35-6)


유럽이 구조적으로 무역적자를 겪고 있었다는 것은 "전체 수출품 중에서 금은이 차지하는 비율이 3분의 2를 밑돈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가령 1615년의 경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총수출물량 중에서 금액으로 환산하여 6%만이 일반 상품이었고, 나머지 94%는 지금(地金)이었다." 영국은 "자국 공산품의 '수출 진흥'을 위해 총수출액 가운데 영국 제품을 최소한 10% 포함시킨다는 조건 아래 영국 동인도회사에 특허장을 내주었다. 그러나 영국 동인도회사는 얼마 되지 않는 자국 상품을 팔 수 있는 시장을 찾아내는 데 늘 애를 먹었다."(157) "결론적으로 말해 유럽은 아메리카의 화폐를 거저 먹듯이 가져다 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에서 주변적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아마 그 돈마저 없었더라면 유럽은 세계경제에 명함도 못 내미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새롭게 발견한 수입원과 자금원은 유럽의 생산력을 키워 주었고, 이것은 다시 인구성장으로 연결되었다."(160)


"동남아시아는 권역 내에서 생산한 향신료와 주석을 유럽·서아시아·인도에 수출했다. 그런가 하면 인도에서 수입한 물품을 중국으로 재수출하기도 했다. 중국은 동남아시아의 최대 고객이었다. 동남아시아의 대對유럽 수출은 대중국 수출의 8분의 1에 불과했다. 동남아시아는 또한 권역 내의 임산품·목화·금을 인도·중국·일본 등지로 수출했다. 또 인도에서 은을 받아 일부는 말라카를 거쳐 중국으로 재수출했다. 따라서 동남아시아는 인도·서아시아·유럽과의 무역에서는 흑자를 보고 중국한테서는 적자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195-6) 18세기의 일본 인구는 "세계인구의 겨우 3%였지만, 10만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에 거주하는 비율은 무려 8%나 되었다. 결국 여러 가지 증거로 미루어볼 때 도쿠가와 시대 내지는 그 이전 시대가 '정체'되었다거나 '폐쇄적'이었다거나 '봉건적'이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소리다."(201)


세계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했던 의미를 분석할 때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요인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하나는 생산과 수출 양면에서 중국이 세계경제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은의 최종적인 '배수구'와 다를 바 없었던 중국의 역할과 기능이다." 명은 송조와 원조에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던 지폐 발행을 중단하고 대신 동전과 은편(銀片)에 의존했다. 아울러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실시하고, 나중에는 모든 세금을 은납화했다. "중국 경제의 규모, 중국 사회의 급증하는 은 수요, 중국의 어마어마한 무역흑자는 전세계적으로 은의 수요를 폭증시켰고, 이것은 은 가격의 급등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중국 사회가 근세에 은에 기초를 둔 사회로 전환하지 않았다면, 유럽과 중국에서 '가격혁명'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한 [은을 팔아 연명하던] 스페인 제국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플린과 지랄데스의 지적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206-7)


중국은 17세기 중엽을 제외하고는 "유입된 화폐가 생산과 거래를 자극하고 경제 전반의 상업화를 촉진시켜 화폐의 유통속도도 끌어올렸다."(269) 은 유입과 무역 활성화가 유발한 자극효과와 팽창효과가 극명하게 드러난 지역은 중국 남부였다. "상인들은 나중에 수확한 농산물을 받는 조건으로 농민 생산자에게 자본(은의 수출입에서도 직·간접적으로 얻었을 것이다)을 전대(前貸)했다. 농민이 상업판도의 변화에 대응하여 [목화 같은] 환금작물을 재배할 경작지를 새로 개간하지 않고 기존의 논을 사탕수수나 양잠 경작지로 전환한 것은 경제학적으로 보았을 때 합리적이었고 시장제도의 측면에서도 그럴듯한 선택이었다. 결국 중국 남부에서 전개된 현상은 벵골과 흡사한 면이 있다. 상업화가 진전되면서 농경 및 취락의 경계가 확대되었다. 이를 자극한 것은 외부로부터의 수요 증대였다. 이것은 국내 수요와 공급의 증가를 유발했으며, 해외에서 유입된 새로운 화폐가 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했다."(274-5)


결국 유럽중심주의가 유포시킨 신화와는 정반대로 "대륙간 무역[이것은 대부분의 지역교역, 국지교역을 포함한다]에 관여하던 모든 기업가는 합리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이 보유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동인도회사와 리버풀의 노예상인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와 말라바르의 후추 농장주도, 인도 상인도, 아프리카 노예 수출상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따라서 유럽중심주의자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던지는 혹평은 역사적으로 사실무근이다. "폴라니처럼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태도도 곤란하다. '아시아적 생산양식'(마르크스)도, '수력(水力)/관료제사회'(비트포겔)도, '합리성'의 결여 내지는 비합리주의라는 낙인(베버, 좀바르트)도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움츠러들게 하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재분배적'(폴라니)이라든가 '전통적' 사회(러너와 로스토를 비롯하여 서양의 모든 근대화론자) 같은 범주도 과녁에서 벗어나기는 마찬가지다."(357)


아시아에서 "18세기 후반에 A국면이라는 팽창기가 막을 내리고 (순환적으로?) 수축기로 접어들면서, 주변적 지위에 머물러 있던 서양이 세계경제와 세계체제에서 자신의 절대적·상대적 입지를 강화할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제야 서양은 (일시적인?) 패권의 시대로 접어들 수 있었다. 요즘 식으로 유비해서 말하자면, 세계경제의 주변에 머물러 있던 동아시아의 '신흥공업경제지역'이 현대 세계경제의 위기에 의해 발흥이 가능해진 것이다."(415) 아시아의 정치·경제적 불안을 낳은 주원인은 "유럽에서 들어온 은이었을 공산이 크다. 구매력과 소득이 커지면서 특히 아시아 지역의 국내시장과 수출 시장에서 수요가 확대되었다. 이것은 소득의 분배를 점점 왜곡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여, 서민들의 유효수요를 제한하면서 정치적 긴장을 고조시켰을 것이다." 18세기 후반, 특히 마지막 30년 동안 아시아에 쇠락의 조짐이 나타나면서 "가장 먼저 기울기 시작한 것은 페르시아였고, 그 다음이 인도였다."(420-1)


그러면 서양은 어떻게 발흥했는가? "한마디로 말해 유럽인은 그것을 샀다. 처음에는 아시아라는 열차의 좌석 하나를 샀다가 나중에는 열차 전체를 사들였던 것이다." 유럽인은 은을 캐내,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하여금 캐내도록 강요하여 더 많은 화폐를 만들어냈다. 유럽인은 또 아메리카 대륙을 무대로 수익성이 높은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브라질·카리브 해·북아메리카 남부 일원에 건설한 플랜테이션에서 노예를 부려 농산물을 생산했다. 물론 노예무역을 통해서도 화폐를 얻었다."(435) 유럽인은 "아시아 물건을 유럽에 수입하여 얻은 수익보다 아시아 역내의 이른바 '지방교역'에 참여해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또한 많은 유럽인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로 아시아 상품을 재수출하여 추가 수익을 올렸음을 물론이다." 이처럼 유럽이 월등히 앞선 생산력을 자랑하던 아시아 지방교역에 참여한 것은 결국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441)


"산업혁명의 주요 무대였던 직물시장에서 영국과 서유럽은 분명히 인도·중국·서아시아와 경쟁을 벌여야 했다. 따라서 상대적인 공급과 수요의 차이는 세계 전체 속의 상호관계에서 지역마다 부문마다 다른 비교비용과 비교우위를 낳았다." 결국 세계경제의 일부 지역에서 미시경제적 대응을 통해 "기술개발에 대한 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산업현장에 적극적으로 투입된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내부' 여건이 아니라) 이런 세계경제의 보다 거시적인 경쟁상황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유럽의 '내부' 여건(또는 공업도시 맨체스터나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제작소)이 세계경제에 참여함으로써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경제/세계체제의 구조와 역학이라는 동일한 힘이 전세계 모든 지역에 걸쳐 비교비용, 비교우위, 합리적 대응을 낳는 것이다."(450)


경제 발전에 따른 아시아 주요 국가의 인구 증가와 소득 양극화는 국내의 유효수요를 늘리기 위해 "노동절약적·동력발생적 기술개발에 자본을 투자할 가격 인센티브를 증대시킨 것이 아니라 생산의 임금비용을 끌어내렸다.  엘빈도 유명한 '고차적인 균형의 함정론'을 개진하면서 애덤 스미스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생산·무역·제도·기술 모든 면에서 너무나 유리한 상황과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던 중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원인을 설명한다. 엘빈의 테제에 담긴 본질은 중국은 그때까지 풍부한 인간노동과 부족한 토지 그리고 다른 자원의 토대 위에서 수세기에 걸쳐 발전시킨 농업, 운송, 제조업 기술을 가지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는 것이다. 엘빈은 (아시아가) 제도의 실패로 인해 '발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제도 등에 입각한 생산, 자원이용, 인구의 급속한 성장으로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자원이 희소해졌던 것이라고 주장한다."(466-7)


골드스톤이 특히 강조하는 요인은 "여성이 마을에 속박되어 있음으로 해서 값싼 농업생산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포메란츠도 비슷한 요인을 지적한다. 도시의 산업노동자는 여전히 그들의 고향마을에서 생존에 필요한 식량의 일부를 끌어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생존물자의 일부는 골드스톤의 지적처럼 여성에 의해 값싸게 생산되고 있었다. 고용자인 산업기업가와 시장의 관점에서 바꿔 말한다면 농업생산이 여성노동에 의해 효율적이면서 값싸게 이루어진 덕분에 임금재는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가격이 쌌다." 따라서 "노동은 얼마든지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노동의 공급가격은 낮았으며 소비재에 대한 노동자의 수요는 감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력을 절약하거나 생산과 수송 부문에서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는 데 투자를 해야 할 인센티브는 거의 없었다. 엘빈은 '균형의 함정'이라는 독특한 이론으로 이런 상황을 요약했다."(485)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발흥을 낳은 체제로서의 글로벌한 구조와 그 연속성은 서양에서 하나의 출발점을 표시한다. 이는 그 이전 서양의 주변적 지위로부터 연속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글로벌 경제가 보다 산업적인 방향으로 진행하여 하나의 전체로서 세계경제체제 안에서 서양의 위치가 이동한 그런 불연속성의 출발점이다." 기본적으로 동일한 세계경제와 세계체제 내부에서 진행된 "역사의 장기적 추세가 근세에 드러낸 두 번의 '굴절'이 있었다. 하나는 1500년 이후 신대륙을 구대륙으로 포섭한 콜럼버스식 교환이다. 또 하나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인구성장률, 생산성 증가율, 나아가서는 자원을 둘러싼 압력의 교체이다. 이것이 1800년을 전후하여 산업혁명을 낳았다. 이것은 두 세계경제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굴절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경우에나 유럽은 변화의 주도자로서보다는 변화의 도구로서 행동했던 것이다."(5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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