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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민중사 1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8년 12월
평점 :
뉴잉글랜드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인디언들의 땅을 강탈했다.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총독 존 윈스럽은 이 지역이 법적으로 '공지空地'라고 선포함으로써 인디언의 땅을 취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디언들은 땅을 '정복'하지 않았으므로 땅에 대한 '자연권'만 보유할 뿐 '시민권'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자연권'은 법적 효력이 없었다. 청교도들은 또한 성경 시편 2장 8절의 구절에 호소했다. "내게 청하여라. 뭇 나라를 유산으로 주겠다.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너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 그리고 무력으로 그 땅을 빼앗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로마서 13장 2절을 들춰냈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39) "공간, 즉 땅에 대한 욕구는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욕구였다. 그러나 땅이 부족한 상황에서, 경쟁이 지배하는 역사의 야만기에서 이런 인간적인 욕구는 종족 전체를 살육하는 것으로 전환됐다."(43)
"버지니아 사람들은 생존에 필요한 옥수수와 수출용 담배를 재배하기 위해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제 막 담배를 경작하는 법을 알아내어 1617년에 영국으로 첫 화물을 보내게 된 때였다. 흑인 노예가 답이었다."(58) "아프리카 각국에는 노예제가 존재했고, 때로는 유럽인들이 이를 근거로 들어 자신들의 노예무역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데이비드슨이 지적하듯이, 아프리카의 '노예'는 유럽의 농노에 더 가까웠다." "이들은 가혹한 노역을 해야 했지만 아메리카로 끌려간 노예들이 갖지 못한 권리를 누렸고 노예선과 아메리카 대농장의 인간 가축들과는 전혀 달랐다." "아메리카 노예제를 역사상 가장 잔인한 형태의 노예제로 만든 두 가지 요소가 아프리카에는 없었다. 첫째는 자본주의적 농업에서 기인하는 끝없는 이윤을 향한 광란이다. 둘째는 피부색에 따라 백인은 주인, 흑인은 노예라고 가차없이 구분하고 인종적 증오심을 이용함으로써 노예를 인간 이하의 지위로 떨어뜨린 것이었다."(62-3)
"노예소유주들은 노동력 공급과 자기들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복잡하고 강력한 통제체제를 발전시켰다." "노예들은 규율을 배웠으며, '자신의 분수를 알고', 검은색을 종속의 징표로 보며, 주인의 힘을 경외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를 버리고 주인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이라 인식하도록 자신이 열등하다는 사고를 끊임없이 주입받았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고된 노동 규율을 부과하고, 노예 가족을 해체시키고, 종교를 통해 마음을 달래주었다. 또한 노예들을 밭에서 일하는 노예와 그보다 조금 더 특권을 누리는 가내노예로 나눔으로써 그들 사이의 연대감을 파괴했다. 마지막으로 법률의 힘과 감독의 직접적인 힘을 통해 태형, 단근질, 수족절단, 사형에 처하는 방법이 필요했다."(77) "새로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흑인반란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바로 식민지 초기에 흑인 노예만큼이나 나쁜 대우를 받고 있던 백인 계약 하인들이 흑인 노예와 손을 맞잡는 일이었다.(80)
"식민지 기간에 북아메리카 해안으로 온 이주민의 절반 이상이 하인이었다. 17세기에는 대부분 영국인이었고 18세기에는 아일랜드인과 독일인이었다. 하인들이 자유를 찾아 달아나거나 계약기간을 끝마치게 됨에 따라 점차 노예가 그들을 대신하게 됐지만, 1755년까지도 여전히 백인 하인이 메릴랜드 인구의 10퍼센트를 차지했다."(97) 식민지 관리당국은 백인 빈민들의 계급적 분노를 해소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즉 동부 해안지대의 비옥한 땅을 독점함으로써 땅 없는 백인들을 서부 변경으로 보내 인디언과 충돌시키고 해안지대의 부자들을 위해 인디언 문제에 대한 완충 역할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며, 한편으로 정부의 보호에 더욱 의존하게 만든 것이다." "엘리트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인디언과 전쟁을 벌여 백인의 지지를 얻고 가난한 백인들을 인디언과 맞서게 만들어, 있을 수 있는 계급 충돌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더 나았다."(108-9)
"에드먼드 모건은 버지니아 노예제에 관한 주의 깊은 연구에 근거해 인종주의를 흑백 간의 '자연적' 차이가 아니라, 계급적 멸시에서 기인하는 것, 즉 통제를 위한 현실적 장치로 보고 있다." "식민지들이 성장함에 따라, 아메리카 역사를 통틀어 엘리트의 끊임없는 지배를 위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 또 다른 통제기제가 있었다. 큰 부자 및 극빈층과 나란히 소농장주, 독립자영농, 도시 장인들이 성장했고, 이들은 상인 및 농장주들에게 힘을 더해 주는 대가로 작은 보수를 받으면서 백인 극빈층, 흑인 노예, 변경의 인디언 등에 대한 튼튼한 완충 지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런 충성을 물질적 이익보다 훨씬 강력한 무언가로 묶어두기 위해서 1760년대와 1770년대에 지배계급은 놀랄 만큼 유용한 도구를 찾아냈다. 그 도구는 곧 자유와 평등이라는 언어였고, 이를 통해 노예제나 불평등을 종식시키지 않은 채로도 영국에 맞서 혁명전쟁을 수행하기에도 충분할 정도의 백인들을 결속할 수 있었다."(113-4)
# 지배 체제 : 1단계 - 이간질(백인 하인과 흑인 노예), 2단계 - 완충지대(인디언과 이주민, 이주민과 중산층), 3단계 - 이데올로기(자유와 평등)
영국과 식민지 도시의 갈등 속에서 "식민지 도시의 숙련기능공들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었다. 즉 선거구민이 자신들의 대표자를 점검할 수 있도록 하는 대표의회의 공개회합, 입법의사당의 공공방청, 호명투표의 공표 등을 요구했다."(122) 혁명운동 지도층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중요한 전투는 대부분 북부에서 벌어졌으며, 이곳 도시들에서 식민지 지도자들 아래의 백인 주민들은 분열되어 있었다. 지도자들은 숙련기능공을 설득해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었는데, 숙련기능공들은 일종의 중간계급으로 영국 제조업자들과 경쟁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영국에 대항한 싸움에 이해관계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대對프랑스전쟁에 뒤이은 위기에서 일자리를 잃고 굶주리고 있던 가난한 대중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은 영국에 대항하는 이런 군중의 에너지를 이용하려 하면서도 군중이 자신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도록 에너지를 억누르고자 했다."(126-7)
"로열 나인Loyal Nine이라 불린 보스턴의 정치집단은 1765년 8월 인지세법에 항의하는 행진을 조직했다." 이들은 시위대가 인지담당관의 재산 일부를 파괴하며 흥분한 모습을 보이자 자체 무장순찰대를 창설하고 군중들과 선을 그었다. "압도적인 저항 때문에 인지세법이 철회되자 보수파 지도자들은 폭도들과 관계를 끊었다."(128) 곧이어 보스턴 차 사건이 벌어지자 "영국 의회는 탄압법Coercive Act을 제정, 매사추세츠에서 사실상 계엄령을 실시하면서 식민지 정부를 해체하고 보스턴 항구를 폐쇄했으며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자 이에 반대하는 읍민회의와 대중집회가 열렸다." "보스턴을 비롯한 여러 도시의 교신위원회들은 이 집회를 환영했으나 사유재산을 파괴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자유의 아들들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은 코네티컷의 밀퍼드에서처럼 무법상태를 "가장 혐오한다"고 공언했으며, 애너폴리스에서처럼 "공공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경향이 있는 모든 폭동과 불법집회"에 반대했다."(131-2)
1776년 출간된 페인의 <상식Common Sense>은 애국적 정서를 모든 계급에게 고무하는 언어를 감동적으로 서술했다. 페인은 상, 하원제를 비난하고 전체 인민을 대표하는 하나의 대의체를 주장하여, 상류층의 우려를 사기도 했지만 "일단 혁명이 진행되자, 하층계급 민중들의 군중행동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점점 더 분명히 했다." "훗날 페인은 헌법 채택을 둘러싼 논쟁 기간 동안 다시 한 번 강력한 중앙정부를 선호하는 도시 장인들을 대표하게 됐다. 페인은 그런 정부가 어느 정도 큰 공동의 이해를 대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혁명이 단합된 민중을 위한 것이라는 신화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135-6) 1776년 독립선언서에 명기된 "정부에 대한 인민 통제, 반란과 혁명의 권리, 정치적 폭정과 경제적 속박 및 군사적 공격에 대한 분노의 언어는 대다수 식민지인을 결속시키고 상호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영국에 반기를 들도록 설득하기에 매우 적합한 언어였다."(138-9)
"영국과의 군사적 충돌 그 자체가 당대의 모든 것을 지배함으로써 다른 문제들을 왜소화시켰고, 사회적으로 중요했던 하나의 싸움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편을 택하게 만들었으며, 독립에 대한 관심이 전혀 분명하지 않은 혁명의 편으로 사람들을 몰아댔다. 지배 엘리트들은 세대를 거치면서─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전쟁이 내부의 문제로부터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사실을 배운 듯하다."(150) 도망간 영국파에게 "몰수한 토지는 혁명의 지도자들에게 이중의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분배됐다. 지도자들과 그 친구들은 부자가 됐고, 새 정부에 대한 폭넓은 지지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소농민에게도 약간의 토지가 분배됐다. 실제로 이것이 곧 새로운 국가가 과거와는 다른 특징이 됐다. 광대한 부를 소유하게 된 이 나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부유한 지배계급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며, 동시에 부자와 무산자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중간계급을 충분히 창출할 수 있었다."(158)
찰스 비어드는 <헌법의 경제적 해석>에서 "1787년에 필라델피아에 모였던 55명의 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사고를 언급함으로써 부자들이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정부를 직접 장악하거나 법률을 제정한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헌법에 적용했다." "그리하여 비어드는 헌법 제정자들의 대부분이 강력한 연방정부를 수립하는 데 어느 정도 직접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음을 알아냈다. 제조업자는 보호관세를, 금융업자는 채무 상황에서 지폐 사용의 중단을, 토지 투기업자는 인디언 토지를 침범할 경우에 보호를, 노예소유주는 노예 반란이나 탈주를 방지할 수 있는 연방의 보장을, 채권소유자는 채권 상환을 위해 전국적 과세를 통해 돈을 조달할 수 있는 정부를 요구하거나 원했다. 비어드는 네 개의 집단, 즉 노예, 계약 하인, 여성, 무산자들은 제헌회의Constitution Convention에 대표를 보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제헌회의는 이들 집단의 이해를 반영하지 않았다."(169)
"<연방주의론> 10호에서 제임스 매디슨은 당파 간 분쟁에 시달리는 사회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의정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분쟁은 '여러 불평등한 재산의 분배'에서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재산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는 사회에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형성해 왔다." 매디슨의 말에 따르면, 문제는 부의 불평등으로부터 오는 당파간 투쟁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매디슨은 모든 결정을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내림으로써 소수파를 통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179) "헌법은 남부 노예소유주의 이해와 북부 화폐소득자의 이해를 조정한 타협의 결과물이었다. 13개 주를 하나의 거대한 상업시장으로 통합하려는 목적에서 북부의 대표자들은 주간州間 통상을 규제하는 법을 원했으며, 그런 법률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연방의회의 다수표만 획득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남부는 노예무역을 불법화하기 전에 20년의 유예기간을 두는 대가로 이에 동의했다."(181)
인디언들은 때로 마을을 불태우기 전에 온정적으로 말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무력으로만 다루어졌다. 그러나 "독립 전쟁으로 약화된 워싱턴의 민병대는 인디언을 물리칠 수 없었다. 정찰부대가 차례로 분쇄 당하자 워싱턴은 회유책을 쓰려고 했다. 전쟁장관 헨리 녹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디언이 먼저 거주하고 있으므로 땅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1791년 토머스 제퍼슨은 국경 안에 사는 인디언들은 해치지 않을 것이며, 정부는 인디언 땅을 잠식하려고 하는 백인 정착민들을 이주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1803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준주를 사들여 영토 규모가 두 배로 되자─이로써 서쪽 국경이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미시시피 강을 건너 로키 산맥까지 확장됐다─제퍼슨은 인디언들이 좀더 좁은 지역에 정착해 농사를 짓도록 장려해야 한다고 연방의회에 제안했다. 또한 백인과 교역을 시켜 부채를 지게끔 하고 이 부채를 땅으로 상환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228-9)
이러한 상황은 앤드루 잭슨이 1814년의 말편자만곡부전투Battle of Horseshoe Bend에서 대승을 거두어 국민적 영웅이 된 후 바뀌었다. "1814년에 잭슨이 크리크족과 맺은 협정은 새롭고 중대한 사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협정은 인디언들에게 토지에 대한 개인소유권을 부여함으로써 인디언을 서로 분열시키고 토지의 공동소유제를 파괴했으며 일부는 땅으로 매수하고 나머지는 무시해 버렸다─서구 자본주의의 정신을 특징짓는 경쟁과 묵계를 도입한 것이다."(232) "잭슨은 플로리다가 탈주 노예와 약탈을 일삼는 인디언들의 은신처라고 주장하면서 습격을 시작했다. 잭슨의 말에 따르면 플로리다는 미국의 방위에 없어서는 안 될 지역이었다. 이것은 근대 정복전쟁의 고전적인 서문이 된 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1818년의 세미놀 전쟁Seminole War으로 미국은 플로리다를 획득하게 됐다. 학교 교실의 지도에는 "1819년 플로리다 매입Florida Purchase"라고 고상하게 표기되어 있다."(233-4)
"잭슨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주에서 자신들의 영토에 거주하는 인디언에 대해 주의 통치권을 확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이들 법률을 통해 인디언들은 법적 단위로서의 부족이 폐지되고, 부족회의가 불법화되고, 추장의 권한이 사라졌으며, 민병대 및 주세州稅의 의무를 지게 됐지만 투표권 및 소송권,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권리는 갖지 못했다. 인디언 영토는 분할되어 주에서 실시하는 추첨에 의해 분배됐다. 백인들은 인디언 땅에 정착하도록 장려됐다."(239) "1828년에 서부 체로키족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연방정부는 새로운 영토(체로키족이 강제로 쫓겨난 서부의 황량한 땅)를 "미국의 가장 확고한 보증하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 영구적인 고향"이라고 발표했다."(245) 인디언을 서부로 몰아내는 가차없는 이 거짓말의 향연은 훗날 눈물의 행렬Trail of Tears이라고 알려진 1838년 10월 1일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1850년에 통과된 탈주노예법Fugitive Slave Act은 멕시코 전쟁으로 얻은 영토(특히 캘리포니아)를 자유주nonslave state로 연방에 편입시키는 대가로 남부 주들에게 양보한 것이었다. 탈주노예법으로 인해 노예주들이 전에 노예였던 사람을 되찾거나 탈주 노예라고 지목한 흑인들을 그냥 잡아가는 일이 용이해졌다."(319) "노예무역을 종식시키는 법률의 시행에는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면서 탈주 노예를 노예 신분으로 되돌리도록 규정한 법령은 엄격하게 시행한 것은 다름 아닌 연방정부였다. 앤드루 잭슨 행정부하에서 남부와 합작해 노예폐지론 간행물이 남부주들로 반입되지 못하게 한 것 역시 연방정부였다. 1857년에 노예 드레드 스코트는 인간이 아니라 재산이므로 자유를 위해 소송할 수 없다고 선고한 것 또한 다름 아닌 합중국 대법원이었다." "연방정부는 백인들이 지배하는 조건에 한해서만, 북부 산업 엘리트들이 정치, 경제적으로 필요로 할 때에만 노예제를 종식시킬 생각이었다."(330)
"산업의 요구와 신생 공화당의 정치적 야망, 인도주의의 미사여구를 완벽하게 결합시킨 인물은 다름 아닌 에이브러햄 링컨이었다."(330) 링컨은 1861년 3월의 취임연설에서 남부와 탈퇴한 주들을 회유했다. "나는 남부 주들에 존재하는 노예제도에 대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섭할 의사가 없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내게는 그렇게 할 법적 권리가 없으며 또 그렇게 할 의향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넉 달째 이어지면서 프레먼트 장군이 미주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에 저항하는 노예주인들의 노예는 자유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자, 링컨은 이 훈령을 철회했다. 링컨은 메릴랜드, 켄터키, 미주리, 델라웨어 등 4개 노예주를 연방에 묶어두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전쟁이 점점 격화되면서 사상자가 급증하고, 승리에 대한 절망감이 고조되고, 노예폐지론자들의 비판이 링컨을 떠받치는 너덜너덜한 연합세력을 갈가리 찢어 버릴 태세를 보이자, 링컨은 그제서야 비로소 노예제를 반대하는 행동에 착수했다."(333)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도 "흑인들은 링컨 재임 당시 부통령을 역임했고 전쟁 막바지에 링컨이 암살당한 뒤 대통령에 오른 앤드루 존슨에 의해 여러 해 동안 방해를 받았다. 존슨은 흑인들을 돕는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흑인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지 않음으로써 남부연합 주들의 연방 복귀를 수월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복귀한 남부 주들에서 존슨 재임 기간 동안 '흑인단속법black codes'을 실시했는데, 이는 해방된 노예들을 여전히 대농장에서 일하는 농노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349-50) "북부에서 흑인들의 예속을 받아들이기 위해 사고의 혁명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상기해야만 한다. 남북전쟁이 끝났을 당시, 북부 24개 주 가운데 19개 주가 흑인의 투표권을 허용하지 않았다. 1900년까지 모든 남부 주가 새로운 헌법과 법령을 통해 흑인에 대한 공민권 박탈과 분리를 법제화했다."(364)
기술 발전과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사업이 늘어나면서 투자의 안정성이 필요해지자 1850년대 중반에는 가격협정과 기업합병이 빈번했다. "투자 위험을 최소화하는 또 다른 방법은 정부로 하여금 알렉산더 해밀턴과 제1차 대륙회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인 역할, 즉 기업의 이익을 돕는 역할을 확실히 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각종 교과서는 당시를 노예제를 둘러싼 논쟁으로 가득 채우고 있으나, 남북전쟁 전야에 있어서 국가 운영자들의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노예제 반대 운동이 아니라 돈과 이윤에 있었다."(384-5) 1830년대에 이미 "펜실베이니아를 비롯한 주에서 10시간 노동법이 등장했지만, 이 법들은 고용주가 피고용자와 서면계약을 통해 노동시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 시기의 법률은 계약에 대한 강력한 보호장치를 발전시키고 있었으며, 노동계약은 대등한 양자 간의 자발적인 합의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었다."(393-4)
"남북 전쟁에서 1900년에 이르는 동안 증기와 전기가 인력의 자리를 차지했고, 철이 목재를, 강철이 철을 대체했다." "이 모든 것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과 기계를 만들어 내는 천재적인 발명가와 새로운 기업의 유능한 조직자, 또는 관리자가 필요했으며 또한 토지와 광물이 풍부한 국토, 고되고 비위생적이며 위험한 노동을 할 수 있는 엄청난 인력이 필요했다. 유럽과 중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새로운 노동력을 형성했다." "몇몇 백만장자는 무일푼에서 출발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1870년대 섬유, 철도, 강철 회사의 중역 303명의 출신에 관한 한 연구를 보면 90퍼센트가 중간계급이나 상류계급 집안 출신이었다. '거지에서 부자로'라는 호레이쇼 앨저식 이야기는 소수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실이었지만, 대부분은 신화, 즉 통제를 위해 유용한 신화였다."(437-9) 대표적인 사례로 "1900년에 이르면 모건은 전국 철도의 절반인 16만 킬로미터의 철도를 장악했다."(442)
상호 이해관계로 엮인 독점산업들의 과도한 담합을 저지하기 위해 1890년에 셔먼 반트러스트법Sherman Anti-Trust Act이 제정되었으나, "1895년 대법원은 셔먼 반트러스트법이 무해한 것이 될 수 있도록 이 법을 해석했다. 대법원은 제당 산업의 독점이 통상상의 독점이 아니라 제조상의 독점이며, 따라서 셔먼 반트러스트법을 통해 연방의회의 규제를 받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미국 정부 대 E. C. 나이트 사 판결). 대법원은 또한 셔먼 반트러스트법은 주간州間 파업(1894년의 철도파업)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데, 이런 파업이 통상을 제약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대법원은 고소득에 대해 높은 세율을 적용하려는 연방의회의 작은 시도를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그 뒤 몇 년간 대법원은 셔먼 반트러스트법은 통상을 제약하는 '불합리한' 결합만을 금지한다고 말하며 스탠더드 석유회사와 아메리칸 담배회사의 독점을 파괴하지 않았다."(448)
"운디드니 학살이 있었던 1890년, 인구조사국은 내륙 국경 설정이 완료됐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팽창을 본성으로 하는 이윤 체제는 이미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507) 1898년 2월 아바나 항구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메인Maine 호가 원인불명의 폭발로 침몰하자 "매킨리와 산업계 모두 스페인을 쿠바에서 몰아낸다는 자신들의 목표가 전쟁을 통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으며, 그에 수반되는 부수적 목표, 즉 쿠바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 확보 역시 쿠바 반란자들의 손에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개입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519) "훗날 미 국무장관 존 헤이가 '눈부신 작은 전쟁splendid little war'이라 부른 전쟁에서 스페인 군대는 석 달 만에 패했다. 미군은 쿠바 반란군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스페인이 항복했을 때, 어떤 쿠바인도 항복조건을 협의하거나 항복문서에 서명할 수 없었다."(526)
전쟁이 끝나자 미국 자본이 대거 쿠바에 상륙했다. "1901년 당시 쿠바 광물 수출량의 최소한 80퍼센트가 미국의 수중에 장악됐고 그 대부분을 베슬리엄 철강회사가 차지했다."(528) "스페인-미국 전쟁은 미국이 수많은 나라를 직접 병합하는 결과를 낳았다. 쿠바에 인접한 카리브 해의 스페인령 푸에르토리코가 미군에 의해 접수됐다. 거리상 태평양 전체의 3분의 1이나 떨어져 있는 섬으로, 이미 미국 선교사와 파인애플 대농장 소유주들이 침투해 미국 관리들이 "수확할 일만 남은 다 익은 배"라고 묘사한 하와이 제도는 1898년 7월 상하 양원 합동 결의안으로 병합됐다. 비슷한 무렵에 일본으로 가는 길목인 하와이 서쪽 3,700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웨이크Wake 섬도 점령됐다. 그리고 필리핀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태평양의 스페인령 괌 역시 접수됐다. 1898년 12월에 스페인과 조인한 강화조약으로 미국은 2,000만 달러를 지불하고 괌,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등을 공식적으로 넘겨받았다."(531)
한편 국내적으로는 체제 안정을 기하고 민중 봉기를 진정시키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1900~1920년대가 '혁신주의'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새로운 법안들이 통과됐다는 점에 있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행정부 아래 육류검사법Meat Inspect Act, 철도와 송유관을 규제하기 위한 헵번법Hepburn Act, 순정식품의약품법Pure Food and Drug Act 등이 통과됐다. 테프트 행정부에서는 만-엘킨스법Mann-Elkins Act으로 전화 및 전신 체계를 주간통상위원회의 규제 아래 뒀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기에는 독점의 성장을 통제하기 위해 연방통상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를 창설하고 전국의 통화와 은행체제를 규제하기 위해 연방지불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을 도입했다. 테프트 행정부는 누진소득세를 허용하는 헌법 수정조항 16조와 원래의 헌법이 규정하는 대로 주의회의 간접선거 대신 일반투표로 직접 상원의원을 선출하도록 하는 헌법 수정조항 17조를 제안했다."(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