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리엔트 이산의 책 24
안드레 군더 프랑크 지음, 이희재 옮김 / 이산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19세기 후반, 세계사는 유럽중심적 발명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좀바르트는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탄생하게 된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유럽의 '합리성'을 들면서, 그 기원이 유대교에 있다고 주장했다. 베버도 이런 입장을 수용했다." 베버는 세계의 주요 종교가 신화적이고 마술적인 요소, 한마디로 반反합리주의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지만, 유럽인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의 수혜"를 받았기 때문에 현실을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76-7) 이런 유럽중심주의는 "19세기의 사회학으로부터 막강한 원군을 얻었다. '사회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오귀스트 콩트와 헨리 메인 경 같은 사회학자는 '과학'과 '계약'에 바탕을 둔 새로운 형태의 사유와 사회조직, 낡은 '전통적' 사유와 사회조직을 구분하면서 전자가 후자를 대체했다고 주장했다.(78) 마르크스 진영도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구분한다.


이 책의 핵심 논지는 "1500년 이후 지금까지 세계 규모의 분업과 다국간 무역이 이루어지는 단일의 글로벌한 세계경제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십자군 원정 이후 "유럽인이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던 아시아에 어떻게 해서든 접근해 보려 했던 것도 이런 세계정치경제의 구조와 역학"에 진입하기 위해서였다.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가 '지리상의 발견'에 이르고 이후 서반구의 '신'세계가 구세계 경제와 통합된 것도, 1498년 바스코 다가마의 아프리카 순항 이후 유럽과 아시아의 관계가 긴밀해진 것도 결국은 아시아의 흡인력 탓이었다."(129) 세계경제는 압도적으로 아시아에 의존하고 있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경제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아시아의 풍부한 물산과 그에 대한 유럽의 강한 수요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도 따지고 보면 동아시아 시장과 금을 확보하려는 기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35-6)


유럽이 구조적으로 무역적자를 겪고 있었다는 것은 "전체 수출품 중에서 금은이 차지하는 비율이 3분의 2를 밑돈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가령 1615년의 경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총수출물량 중에서 금액으로 환산하여 6%만이 일반 상품이었고, 나머지 94%는 지금(地金)이었다." 영국은 "자국 공산품의 '수출 진흥'을 위해 총수출액 가운데 영국 제품을 최소한 10% 포함시킨다는 조건 아래 영국 동인도회사에 특허장을 내주었다. 그러나 영국 동인도회사는 얼마 되지 않는 자국 상품을 팔 수 있는 시장을 찾아내는 데 늘 애를 먹었다."(157) "결론적으로 말해 유럽은 아메리카의 화폐를 거저 먹듯이 가져다 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에서 주변적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아마 그 돈마저 없었더라면 유럽은 세계경제에 명함도 못 내미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새롭게 발견한 수입원과 자금원은 유럽의 생산력을 키워 주었고, 이것은 다시 인구성장으로 연결되었다."(160)


"동남아시아는 권역 내에서 생산한 향신료와 주석을 유럽·서아시아·인도에 수출했다. 그런가 하면 인도에서 수입한 물품을 중국으로 재수출하기도 했다. 중국은 동남아시아의 최대 고객이었다. 동남아시아의 대對유럽 수출은 대중국 수출의 8분의 1에 불과했다. 동남아시아는 또한 권역 내의 임산품·목화·금을 인도·중국·일본 등지로 수출했다. 또 인도에서 은을 받아 일부는 말라카를 거쳐 중국으로 재수출했다. 따라서 동남아시아는 인도·서아시아·유럽과의 무역에서는 흑자를 보고 중국한테서는 적자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195-6) 18세기의 일본 인구는 "세계인구의 겨우 3%였지만, 10만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에 거주하는 비율은 무려 8%나 되었다. 결국 여러 가지 증거로 미루어볼 때 도쿠가와 시대 내지는 그 이전 시대가 '정체'되었다거나 '폐쇄적'이었다거나 '봉건적'이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소리다."(201)


세계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했던 의미를 분석할 때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요인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하나는 생산과 수출 양면에서 중국이 세계경제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은의 최종적인 '배수구'와 다를 바 없었던 중국의 역할과 기능이다." 명은 송조와 원조에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던 지폐 발행을 중단하고 대신 동전과 은편(銀片)에 의존했다. 아울러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실시하고, 나중에는 모든 세금을 은납화했다. "중국 경제의 규모, 중국 사회의 급증하는 은 수요, 중국의 어마어마한 무역흑자는 전세계적으로 은의 수요를 폭증시켰고, 이것은 은 가격의 급등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중국 사회가 근세에 은에 기초를 둔 사회로 전환하지 않았다면, 유럽과 중국에서 '가격혁명'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한 [은을 팔아 연명하던] 스페인 제국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플린과 지랄데스의 지적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206-7)


중국은 17세기 중엽을 제외하고는 "유입된 화폐가 생산과 거래를 자극하고 경제 전반의 상업화를 촉진시켜 화폐의 유통속도도 끌어올렸다."(269) 은 유입과 무역 활성화가 유발한 자극효과와 팽창효과가 극명하게 드러난 지역은 중국 남부였다. "상인들은 나중에 수확한 농산물을 받는 조건으로 농민 생산자에게 자본(은의 수출입에서도 직·간접적으로 얻었을 것이다)을 전대(前貸)했다. 농민이 상업판도의 변화에 대응하여 [목화 같은] 환금작물을 재배할 경작지를 새로 개간하지 않고 기존의 논을 사탕수수나 양잠 경작지로 전환한 것은 경제학적으로 보았을 때 합리적이었고 시장제도의 측면에서도 그럴듯한 선택이었다. 결국 중국 남부에서 전개된 현상은 벵골과 흡사한 면이 있다. 상업화가 진전되면서 농경 및 취락의 경계가 확대되었다. 이를 자극한 것은 외부로부터의 수요 증대였다. 이것은 국내 수요와 공급의 증가를 유발했으며, 해외에서 유입된 새로운 화폐가 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했다."(274-5)


결국 유럽중심주의가 유포시킨 신화와는 정반대로 "대륙간 무역[이것은 대부분의 지역교역, 국지교역을 포함한다]에 관여하던 모든 기업가는 합리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이 보유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동인도회사와 리버풀의 노예상인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와 말라바르의 후추 농장주도, 인도 상인도, 아프리카 노예 수출상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따라서 유럽중심주의자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던지는 혹평은 역사적으로 사실무근이다. "폴라니처럼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태도도 곤란하다. '아시아적 생산양식'(마르크스)도, '수력(水力)/관료제사회'(비트포겔)도, '합리성'의 결여 내지는 비합리주의라는 낙인(베버, 좀바르트)도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움츠러들게 하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재분배적'(폴라니)이라든가 '전통적' 사회(러너와 로스토를 비롯하여 서양의 모든 근대화론자) 같은 범주도 과녁에서 벗어나기는 마찬가지다."(357)


아시아에서 "18세기 후반에 A국면이라는 팽창기가 막을 내리고 (순환적으로?) 수축기로 접어들면서, 주변적 지위에 머물러 있던 서양이 세계경제와 세계체제에서 자신의 절대적·상대적 입지를 강화할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제야 서양은 (일시적인?) 패권의 시대로 접어들 수 있었다. 요즘 식으로 유비해서 말하자면, 세계경제의 주변에 머물러 있던 동아시아의 '신흥공업경제지역'이 현대 세계경제의 위기에 의해 발흥이 가능해진 것이다."(415) 아시아의 정치·경제적 불안을 낳은 주원인은 "유럽에서 들어온 은이었을 공산이 크다. 구매력과 소득이 커지면서 특히 아시아 지역의 국내시장과 수출 시장에서 수요가 확대되었다. 이것은 소득의 분배를 점점 왜곡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여, 서민들의 유효수요를 제한하면서 정치적 긴장을 고조시켰을 것이다." 18세기 후반, 특히 마지막 30년 동안 아시아에 쇠락의 조짐이 나타나면서 "가장 먼저 기울기 시작한 것은 페르시아였고, 그 다음이 인도였다."(420-1)


그러면 서양은 어떻게 발흥했는가? "한마디로 말해 유럽인은 그것을 샀다. 처음에는 아시아라는 열차의 좌석 하나를 샀다가 나중에는 열차 전체를 사들였던 것이다." 유럽인은 은을 캐내,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하여금 캐내도록 강요하여 더 많은 화폐를 만들어냈다. 유럽인은 또 아메리카 대륙을 무대로 수익성이 높은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브라질·카리브 해·북아메리카 남부 일원에 건설한 플랜테이션에서 노예를 부려 농산물을 생산했다. 물론 노예무역을 통해서도 화폐를 얻었다."(435) 유럽인은 "아시아 물건을 유럽에 수입하여 얻은 수익보다 아시아 역내의 이른바 '지방교역'에 참여해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또한 많은 유럽인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로 아시아 상품을 재수출하여 추가 수익을 올렸음을 물론이다." 이처럼 유럽이 월등히 앞선 생산력을 자랑하던 아시아 지방교역에 참여한 것은 결국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441)


"산업혁명의 주요 무대였던 직물시장에서 영국과 서유럽은 분명히 인도·중국·서아시아와 경쟁을 벌여야 했다. 따라서 상대적인 공급과 수요의 차이는 세계 전체 속의 상호관계에서 지역마다 부문마다 다른 비교비용과 비교우위를 낳았다." 결국 세계경제의 일부 지역에서 미시경제적 대응을 통해 "기술개발에 대한 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산업현장에 적극적으로 투입된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내부' 여건이 아니라) 이런 세계경제의 보다 거시적인 경쟁상황을 바라보아야 한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유럽의 '내부' 여건(또는 공업도시 맨체스터나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제작소)이 세계경제에 참여함으로써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경제/세계체제의 구조와 역학이라는 동일한 힘이 전세계 모든 지역에 걸쳐 비교비용, 비교우위, 합리적 대응을 낳는 것이다."(450)


경제 발전에 따른 아시아 주요 국가의 인구 증가와 소득 양극화는 국내의 유효수요를 늘리기 위해 "노동절약적·동력발생적 기술개발에 자본을 투자할 가격 인센티브를 증대시킨 것이 아니라 생산의 임금비용을 끌어내렸다.  엘빈도 유명한 '고차적인 균형의 함정론'을 개진하면서 애덤 스미스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생산·무역·제도·기술 모든 면에서 너무나 유리한 상황과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던 중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원인을 설명한다. 엘빈의 테제에 담긴 본질은 중국은 그때까지 풍부한 인간노동과 부족한 토지 그리고 다른 자원의 토대 위에서 수세기에 걸쳐 발전시킨 농업, 운송, 제조업 기술을 가지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는 것이다. 엘빈은 (아시아가) 제도의 실패로 인해 '발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제도 등에 입각한 생산, 자원이용, 인구의 급속한 성장으로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자원이 희소해졌던 것이라고 주장한다."(466-7)


골드스톤이 특히 강조하는 요인은 "여성이 마을에 속박되어 있음으로 해서 값싼 농업생산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이다. 포메란츠도 비슷한 요인을 지적한다. 도시의 산업노동자는 여전히 그들의 고향마을에서 생존에 필요한 식량의 일부를 끌어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생존물자의 일부는 골드스톤의 지적처럼 여성에 의해 값싸게 생산되고 있었다. 고용자인 산업기업가와 시장의 관점에서 바꿔 말한다면 농업생산이 여성노동에 의해 효율적이면서 값싸게 이루어진 덕분에 임금재는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가격이 쌌다." 따라서 "노동은 얼마든지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노동의 공급가격은 낮았으며 소비재에 대한 노동자의 수요는 감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력을 절약하거나 생산과 수송 부문에서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는 데 투자를 해야 할 인센티브는 거의 없었다. 엘빈은 '균형의 함정'이라는 독특한 이론으로 이런 상황을 요약했다."(485)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발흥을 낳은 체제로서의 글로벌한 구조와 그 연속성은 서양에서 하나의 출발점을 표시한다. 이는 그 이전 서양의 주변적 지위로부터 연속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글로벌 경제가 보다 산업적인 방향으로 진행하여 하나의 전체로서 세계경제체제 안에서 서양의 위치가 이동한 그런 불연속성의 출발점이다." 기본적으로 동일한 세계경제와 세계체제 내부에서 진행된 "역사의 장기적 추세가 근세에 드러낸 두 번의 '굴절'이 있었다. 하나는 1500년 이후 신대륙을 구대륙으로 포섭한 콜럼버스식 교환이다. 또 하나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인구성장률, 생산성 증가율, 나아가서는 자원을 둘러싼 압력의 교체이다. 이것이 1800년을 전후하여 산업혁명을 낳았다. 이것은 두 세계경제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굴절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경우에나 유럽은 변화의 주도자로서보다는 변화의 도구로서 행동했던 것이다."(5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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