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 한국사 : 17세기, 대동의 길 - 조선 3 민음 한국사 3
문중양 외 지음, 강응천 엮음 / 민음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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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청 교체기 전후의 사건

1. 누르하치의 굴기(1583, 선조 25)

2. 임진왜란(1592)

3. 후금後金 건국(1616, 광해군 8)

4. 후금이 명에 선전포고(1618)

5.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제국 성립 선포, 조선 침략(1636)

6. 명 멸망, 산해관을 통과한 청이 북경을 접수(1644)


"광해군은 크게 세 방향에서 대후금 정책을 펼쳐 나갔다. 먼저 후금의 동향을 파악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조선의 내부 정보가 유출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또 후금에 대해 유연한 자세를 취하면서 그들을 기미(상대를 견제만 할 뿐 직접 지배하지 않는 정책)하려 노력했다."(43) (1618년 누르하치가 이른바 일곱 가지 원한을 내걸고 명에 선전포고한 뒤 무순을 공격해 점령하자 명은 조선에 원병을 요구했다. 명의 원병 요구를 놓고) "광해군은 우선 파병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낸 주체가 명의 황제가 아니라 왕가수 등 신하라는 사실부터 문제 삼았다. 황제가 칙서를 내린 것이 아니므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광해군은 또한 조선의 약한 병력을 보내 봤자 명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내세워 파병을 회피하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료들은 "조선이 명의 번국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뒤, 조선이 원병을 파견하되 명의 지휘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45-6)


# 명군 총사령관 양호의 질타로 1619년(광해군 11) 1만 5000여 명의 병력 파견 / 심하전투에서 패전


"광해군은 (심하전투를 포함해 일련의 싸얼후 전투에서 명군이 대패한 후의 이른바) '전후 외교'에서도 수완을 발휘했다. 당시 요동 등지의 명군 지휘관들 가운데는 '조선이 고의적으로 항복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광해군은 이 같은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와 관련해 광해군은 먼저 심하전투에서 전사한 김응하를 현창하는 사업을 벌였다." "김응하 추모를 통해 심하전투 당시 '조선군도 목숨을 바쳐 분전했다'는 것, '조선이 거국적으로 그를 추모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강홍립이 고의적으로 항복했다'고 여기는 명의 의심을 해소하려는 계책이었다." "광해군은 또 명이 조선에서 재차 원병을 동원하려는 것을 차단하는 데 부심했다. 광해군은 후금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귀환한 도망병들의 견문 내용을 명에 알리는 한편, 조선군이 원정에 동참한 데 원한을 품은 후금이 보복 차원에서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49-50)


"명과 후금의 양단에 걸쳤던 광해군의 대외 정책은 서인이나 남인 신료들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샀다. 더욱이 광해군이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자행하고 경덕궁(지금의 경희궁) 건설을 비롯한 토목 사업에 집착하자 민심 또한 이반되었다." "1623년(인조 1) 3월 이 같은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문제 삼아 김류, 이귀 등 서인들이 중심이 되고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훗날 인조)이 주도한 정변이 일어났다."(57) 명은 "'인조와 새 정권이 명에게 충성을 다해야만 책봉해 준다'는 전제를 달고 있었다. 그나마 책봉을 결정하기까지 2년 이상 시간을 끌었다. 그 시간 동안 명은 '명분'과 '현실'을 놓고 고민한 끝에 '조선의 정변이 불법 찬탈임에도 불구하고 새 정권이 책봉을 간청하면서 오랑캐와 싸우겠다고 다짐하기에 봉전封典의 은혜를 베풀기로 했다'는 명분을 만들어 냈다. 명은 이제 조선에게 기존의 '재조지은'뿐 아니라 '봉전지은'을 베푼 존재로 떠올랐다."(59)


# 폐모살제廢母殺弟 : 서자 출신인 광해군은 즉위 후에 후환을 없애라는 대북파의 요구에 따라 영창대군(선조 말년에 인목대비가 낳은 아들)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유폐시켰다.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로 칸에 오른) 홍타이지는 1627년(인조 5) 조선을 침략해 당면한 난제들을 돌파하려 한다. 그것이 곧 정묘호란이다.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도발한 목적은 복합적이었다. 가장 큰 목적은 '목에 걸린 가시'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또 조선을 협박해 생필품의 교역 루트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했다. 홍타이지는 조선 침략군의 사령관에 (독립을 꿈꾸던 사촌형) 아민을 임명했다. 그의 능력과 충성심을 시험할 수 있는 절묘한 인선이었다." "1624년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군사력을 소모한 조선군은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후금군은 순식간에 황해도까지 남하하고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했다. 후금군도 한계를 안고 있었다. 개전 초기 모문룡을 제거하는 데 실패한 데다 전쟁이 장기화하면 배후에 있는 원숭환의 위협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후금군은 서울로의 진격을 멈추고 조선에게 화의를 제의했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과 후금은 화약을 체결했다."(62-3)


"후금과 화약을 맺은 조선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조 정권이 후금과 화친한 것은 '명을 배신하고 오랑캐와 화친했으므로 광해군 정권을 타도한다'는 인조반정의 명분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조선을 곤혹스럽게 한 것은 정묘호란 이후에도 명과 후금의 군사적 대결이 지속되는 사실, 그리고 양자의 싸움에서 후금이 계속 명을 이기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이 '부모국' 명, '형제국' 후금과 모두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65) 1633년, 산동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명군 지휘관 공유덕과 경중명이 토벌군의 공격을 피해 후금으로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조선군이 명의 편을 들고 후금군과 교전까지 벌이자 홍타이지는 격분했다. 정묘호란 이후 어렵사리 유지되던 양국의 화친 관계가 사실상 파탄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68)


"(1636년 마침내 제위에 오른) 홍타이지는 '조선 정벌'을 결심하고 그 이유를 하늘에 고하는 의식을 열었다. 홍타이지는 정묘년 맹약 이후 조선이 '저지른 과오'를 나열했다. '도망친 요민들을 명으로 넘긴 것', '명에는 병선을 빌려 주면서 후금에게는 그러지 않은 것', '공유덕 등이 귀순할 때 명을 편들고 후금은 돕지 않은 것', '인조의 유시에서 정묘년 화약은 부득이했으나 이제 대의로써 절교한다고 한 것', '조선인들이 맹약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와 산삼을 캐 간 것' 등을 조선 침략 명분으로 제시했다. 이윽고 12월 9일, 청군은 압록강을 건너 침략을 개시했다. 병자호란이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조선 조정이 고립무원의 상태에 처한 사실을 인지한 홍타이지는 항복을 요구했다. 그들이 조선에 제시하는 항복 조건은 갈수록 가혹해졌다." 전란을 타개할 계책이 전무한 것을 깨닫자,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송파의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한다."(71-2)


"병자호란 이후 인조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철저히 청에 순응하는 자세를 취해다. 그는 항복 이후 척화신들을 조정에서 배제하고 최명길 등 주화파 신료를 중용했다. 나아가 '자강을 도모해 청에 대한 복수를 도모하자'는 신료들의 주장에 응답하지 않고, 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신료를 파직시키기도 했다. 1640년(인조 18) 청이 자신의 '충성심'을 떠보기 위해 원손元孫을 입송시키라고 했을 때에도 철저히 순응하는 자세를 보였다." "1643년(인조 21) 순치제順治帝가 즉위한 뒤 청이 소현세자를 조기에 귀국시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입조론 때문에 겁먹었던 인조에게 이제 소현세자는 아들이 아니라 '정적'이자 '경쟁자'로 보였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의심하고 감시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부자 관계는 파괴되어 갔다. 급기야 1645년 2월, 소현세자가 영구 귀국했을 때 인조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급사한다. 곧이어 세자빈인 강빈 역시 역적으로 몰려 사사되는 비극이 일어났다."(81-2)


"임진왜란 직후의 상품유통 경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다. 시전 체제처럼 국가의 통제 아래 있던 교역 체계는 파탄에 이르렀다. 반면 장시처럼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있던 교역 기구는 계속 성장해 이전과 다른 유통 체제의 형성에 접근하고 있었다." (상품유통 경제의 발전은) "한편으로는 농민층 사이의 경제력 차이를 벌려 농민층 분해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토지에서 쫓겨난 농촌 사회의 유민流民들에게 상업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기회를 제공했다."(120)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공명첩空名帖(성명란을 비워둔 임명장)을 함부로 찍어 내거나 납속책納粟策(곡물을 바치는 대가로 상이나 벼슬을 주는 정책)을 통해 면천을 남발하는 시책은 신분제의 문란을 가져왔다." "지배층 자신들이 살아남아야 노비도 부릴 수 있다는 논리로 왜군의 목을 베어 오는 천인에게 면천을 약속했다."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하면서 또 많은 것을 가능케 했다."(121)


"(공물을 대납하고 대가를 받는) 방납防納의 메커니즘은 지방의 장시, 도성의 경시京市에서 공물을 사 들이는 행위를 통해 돌아간다. 이 행위의 주체인 방납인은 새로운 유통 구조 속의 상인층으로 등장했다. 방납인을 중심으로 하는 공물 방납의 확대는 한편으로는 불법적인 방납권을 통한 상업자본의 축적을 초래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장시의 확산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 나아가 농촌 경제에서 상품유통이 지닌 비중을 증대시켰다." "방납인들에게 경제적 이익은 떨쳐 버리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당시 방납인으로 활약한 것은 권세가의 하인, 중앙관청의 서리胥吏 등이었다. 이들은 지방에서 바친 공물에 흠집이 있다는 식으로 퇴짜를 놓았다. 그런 다음 다시 준비할 공물을 방납인에게 본래 공물 가격보다 턱없이 높은 가격으로 구해서 바치게 했다. 방납의 폐단은 관청의 유력자와 결탁한 방납인에 의해 저질러졌다. 이에 따라 농민은 본디의 공물 가격에 비해 훨씬 많은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126-7)


# 모순을 더해가는 세제

1. 무너지는 조용조租庸調(전세·잡역·공납) 체제 : 대토지 소유자의 이해관계에 맞게 점차 대부분의 토지를 하등전으로 분류하면서 전세 비중 축소, 용조 비중 증가

2. 악순환 고리 : 재정악화 → 증세 정책 시행 → 전세는 그대로인 채 공물 압력만 가중 → 농민의 토지 이탈과 초적으로의 변신 → 세수 감소와 정치·사회적 위기 초래 → 재정 악화


1649년(효종 즉위) "김육이 (1608년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도입된 후 제도와 관련 시설 미비를 핑계로 정체 상태에 있던) 대동법 시행을 주장한 것은 그의 말대로 안민安民의식과도 관련이 있지만 정치적 위기감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의 근본이 되는 삼남 지방이 동요하면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며 이 지역에서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김육의 주장에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이조판서 김집이 대동법 반대 진영의 선두에 나섰다. 김집은 아버지 김장생의 학맥을 이어받아 예학의 태두로 군림하며 문하에 많은 제자를 두고 있었다. 그는 공납제가 국왕에 대한 진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하며 공물을 쌀로 일원화하는 대동법 시행에 반대했다. 김육이 이를 반박하자 김상헌, 송시열, 송준길 등이 김육을 공격하며 김집을 두둔하고 나섰다. 이로써 대동법 논의는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 산당山黨과 김육, 신면 등 한당漢黨의 분열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137-8)


# 산당 : 향촌의 서원을 중심으로 결집한 세력 / 한당 : 한강 이북 도성에 거주하는 경화사족京華士族 세력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전 유목계 왕조들이 100년을 넘기지 못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청 또한 100년이 못 갈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다면 '홀로 남은 유교 문명국' 조선은 다시 밝아질 유교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식인들은 국내의 여러 질서와 문화를 철저히 유교식으로 정비하며 미래를 맞고자 했다. 정비는 유학에서 시작해 당대의 정치, 사회 등 모든 분야에 미쳤다. 유학, 특히 주자학의 성격부터 달라졌다. 주자학은 새 사회 건설의 이념이 되었다. 예학禮學이 중시되고, 학파에 뿌리를 둔 붕당이 형성되었다. 붕당의 정점에는 이념가인 산림山林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개인의 일상도 주자학적 예법에 따라 재구축되었다." 예송禮訟 논쟁이 이단 시비로 확대되는 장면은 "조선이 유교의 불씨를 보존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집단적 책임감을 전제하지 않으면 연출될 수 없었다. 그렇게 조선은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전형적인 주자학 국가로 재탄생하고 있었다."(175)


유교에서 예는 "일상 행동의 기본일 뿐 아니라, 사회·국가·세계 질서의 근본으로 간주되었다." "주자학은 한발 더 나아가 예를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질서와 일치시켰다. "예를 행하는 데는 조화가 중요하다禮之用, 和爲貴."라는 <논어>의 구절에 대해 주희는 "예는 천리가 적절하게 행해진 것이고 인간 만사의 의식과 법칙이다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라고 해석했다. 이로서 예는 천리의 형상물이자 사회 운영의 기준이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주자학적 예법의 정착을 압박한 외부 요인이었다. 양 난을 겪는 과정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고 사회 질서가 혼란해졌기 때문이다. 국가와 사회의 재건을 두고 조선 지배층은 이미 정착하고 있던 주자학적 예법을 강화하는 방향을 택했다." "남인 학자 장현광이 "다스림에는 예교禮敎보다 더 앞서는 것이 없고, 학문은 예학보다 더 간절한 것이 없다."라고 한 발언에서는 예로써 사회 질서를 재건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볼 수 있다."(195-6)


적장자가 부친을 계승하는 종법 질서가 예법의 기초를 이루고 명분 질서를 고정하게 되면서 "외가의 비중이 약해진 자리는 부계父系 시조를 중심으로 구성된 본관本貫이나 본관 안의 특정 지파가 결속한 문중門中이 차지했다. 문중은 17세기 이후 공고해지기 시작했다. 문중은 시조나 뛰어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현창 사업 등을 통해 결속력을 다졌다. 또 제사를 위한 토지 등의 명목으로 문중 재산을 형성하고, 종계宗契·종회宗會 등 다양한 모임을 결성해 일종의 사회 조직으로도 기능했다. 향촌에서도 부계 성씨를 중심으로 한 동성 촌락同姓村落이 생겨났다. 본관이나 문중의 구성원들은 정기적으로 족보를 제작해 구성원들이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동본同本 의식을 공유했다." "부계 친족 위주의 질서가 17세기에 대세를 이루게 된 이유는 종법을 중심으로 이완된 사회 질서를 재편하려 한 사회 구성원의 선택 때문이다."(200)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념화된 유교를 택했다. 주자학이 '주의화主義化'한 것이다. 이를 가장 일관성 있게 구축한 사상가는 송시열이었다. 그는 '오늘날은 송이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와 같다'고 해 자신의 시공간을 주희의 시공간과 동일시했다. 또 '주자가 조정의 부름에 응했던 것은 복수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해 주희를 대학자뿐 아니라 중화 문화의 수호자로도 부각했다."(180) "송시열의 '주자 식으로'와는 다른 경로의 유교 문명을 구상한 지식인도 있었다. 주자학과는 다른 모델을 체계적으로 구상한 대표적인 학자는 유형원이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먼 옛날 이상 사회를 건설했다는 성왕聖王의 통치 시스템을 조선의 현실에 맞추어 제시했다. 고대 중국에서 시행되었다는 평등한 토지 제도인 정전법井田法을 근간으로 교육·군사·관료 시스템을 정비하자는 그의 주장은 이념보다는 공공 시스템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주자학보다 더 근본적이었다.(182)


"사대부들이 사용하는 용어가 '복수설치'(復讐雪恥)로부터 '북벌'로 바뀌어 간 것 역시 중화 의식과 관련이 깊다. 복수설치는 의리를 천하에 보여 수치를 씻고 잔존한 남명의 중국 복권을 돕는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북벌은 다르다. '벌伐'이란 말은 천자가 난적亂賊을 토벌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북벌은 남명조차 망했으므로 유일한 정통인 조선이 청을 토벌한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조선이 소중화나 중화로 특별할 수 있는 근거는 '유교 문화의 실현'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교는 보편 정신이자 문화이므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청, 일본 등도 유교 문화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얼마든지 중화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청이 한족을 지배하는 논리도 그 논리에 근거해 있었다. 명은 민심을 잃어 내분으로 망했고 천명을 얻은 청이 명을 위해 복수했다는 것으로 통치의 정당성을 내세웠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청은 명보다 더 뛰어난 내치로 민생을 안정시키고 있었다."(190)


새로운 국제관계가 안정기로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장생에서 송시열로 이어지는 서인 산림은 주자학에서 강조하는 보편 원리를 중시했다. 주자의 <가례>는 의리와 예법의 일반 원칙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 왕실도 적용 대상이었다. 송시열은 장유長幼라는 보편 원칙 앞에는 왕실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체이부정(體而不正, 아들이지만 맏이가 아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보편 예법을 왕실에 관철할 것인지 여부는 국왕의 위상과 연동된 민감한 문제였다." "윤휴와 허목으로 대표되는 남인 산림은 생각이 달랐다. 의리와 예법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점에서는 그들도 송시열과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의리를 대변하는 국왕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했다." "따라서 윤휴는 모든 신민은, 그가 왕의 어머니일지라도, 군주에 대해 동일한 예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허목은 종통을 이은 군주는 장유長幼의 차례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주장했다."(208-9)


# 예송논쟁

1. 기해예송(1659) :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계모인 장렬왕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벌인 논쟁

2. 갑인예송(1674) : 효종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시어머니인 장렬왕후가 맏며느리에 해당하는 상복을 입을 것인가, 둘째 며느리에 해당하는 상복을 입을 것인가를 놓고 벌인 논쟁


"그러나 환국기를 지나면서 (17세기 주자학의 이상을 주도하던) 산림의 위상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붕당 사이의 대립과 논쟁이 격화함에 따라 산림이 공론이 아니라 자기 정파의 이해만을 대변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붕당정치의 대안으로 탕평 정치가 전개되고 국왕이 군사(君師, 국왕이자 사대부의 스승)를 자임하며 성왕을 표방하자, 산림의 위상은 결정적으로 격하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의 변화도 산림의 지위가 떨어진 원인이었다. 18세기에 접어들자 도시의 문물이 흥기하고 학문이 전문화되어 갔으며 새로운 학문 풍조도 일어났다. 이런 변화 속에서 향촌에서 유교 경전 위주로 공부를 하던 산림의 사회 인식과 식견은 뒤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산림의 정치적 영향력은 영조 대에 현격히 축소되며, 정조 대에는 노골적으로 친왕적 속성을 드러내는 산림도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세도 가문의 식객과 같은 인물도 나와 산림은 점차 형식적인 지위로 전락해 간다."(222)


# 주요 환국

1. 경신환국庚申換局(1680) : 종친 복선군과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이 올라오자, 숙종이 남인 전체를 정계에서 도태시키고 서인 일색의 정권을 구성한 사건

2. 기사환국己巳換局(1689) :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희빈 장씨의 소생을 원자元子로 정한 숙종의 결정을 비판하다가 서인 대다수가 파직되고 남인이 대거 기용된 사건

3. 갑술환국甲戌換局(1694) :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려는 음모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서로를 맞고변하자, 숙종이 새로 총애하던 숙원 최씨(영조의 모친)와 가까운 서인의 손을 들어준 사건

4. 신임환국辛壬換局(1721-22) : 신축년(1721)의 환국과 임인년(1722)의 옥사를 합쳐 부른 말. 노론이 경종의 병세를 빌미삼아 왕세제였던 연잉군(영조)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다가 정권을 잃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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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 - 조선 2 민음 한국사 2
한명기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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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사대부들은) 도덕적 자의식이 강한 사의 정체성보다는 국왕의 명을 충실히 따르는 관료적 지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16세기에 이르러 서서히 변해 갔다. 변화의 바람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하나는 과거제와 관련한 것이었다. 과거가 지배층으로 편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함에 따라,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 응시생들의 숫자가 확대·누적되면서, 외형적으로나마 사의 모양새를 갖춘 독서인 층이 확대되었다." "변화의 또 다른 바람은 정부 안의 권력구조 개편을 통해서 불어오고 있었다. 중·하급 엘리트 관료인 청요직들이 공론을 내세우며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해 감에 따라 도덕적 권위와 함께 사 의식이 한층 더 강조되었다. 청요직들은 도덕적 권위에 근거한 언론言論 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해 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도덕적 가치와 권위가 하나의 권력으로 실체화하고 있었다."(30)


# 청요직 : 깨끗한 명성을 중시하는 청직(사헌부, 사간원, 홍문관)과 정치적으로 중요한 관직이라는 의미의 요직(이조와 병조의 낭관, 의정부의 사인, 검상 등 관료 선발에 관여하는 자리)을 합친 말


"청요직들은 <홍문록>, '서경署經', '피혐避嫌' 등을 적절히 활용해 청요직 인선에서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장치들을 확보해 갔다. <홍문록>은 동료 평가에 기초한 홍문관의 자체적인 인선 명부라 할 수 있는데, 동료들의 평판이 인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특징이다. 서경은 대간에서 5품 이하의 관직에 임명된 관료들의 신원을 조사하는 일을 말한다. 하지만 성종대부터 서경은 단순한 신원 조사에 그치지 않았다. 당사자의 명망과 도덕적 흠결 여부까지도 평가해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면 그에 대한 서경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임명을 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피혐은 어떤 혐의를 받는 관료들이 사직을 요청해 국왕의 처치를 받는 것을 말한다. 대간은 피혐을 특정 안건을 거부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특히 대간에서 부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헌부나 사간헌에 임명되면 피혐을 통해 끝까지 그의 임명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35-6)


즉위하자마자 성종의 장례 절차 문제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당 건립 여부를 놓고 "연산군과 대간이 격한 대립을 반복하는 동안 대신들은 다소 복잡한 양상을 보이며 우왕좌왕했다. 이는 성종대 이래 국왕이 대신들을 친왕 세력으로 적극적으로 유인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재상과 대신들은 직급상으로는 대간보다 상위에 있었지만, 도덕적 명분을 선점한 대간이 공론을 표방하며 대신들의 비리를 들추거나 불합리한 국정 운영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게 되자 그만큼 대신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태종대나 세조대처럼 대신들에게 도덕적인 흠결이 있어도 국왕의 신임을 내세워 대간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도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국왕의 대신 보호는 약해지는 가운데 대간이 공론의 소재처라는 위상까지 얻게 되자 대신들은 그만큼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42-3)


조정의 분위기가 날로 험악해져갔지만 "청요직 인사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강개한 언론은 멈출 수가 없었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연산군의 허물을 묵과할 수 없었을뿐더러, 언관이 몸을 사리는 태도를 보였다가는 동료들 사이에서 자칫 소인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45) 그 결과 "연산군대에는 모두 두 차례의 사화가 일어났다. 연산군 초반 왕과 대간의 갈등이 격해지면서 발생한 무오사화와 연산군의 폭압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무오사화는 김일손의 사초 문제에서 시작해 김종직 문인들을 붕당으로 규정하고 일부 대간들을 능상凌上의 명목으로 단죄한 사건이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자의적인 국정 운영과 폐비 윤씨 문제가 결부되어 신료 전체가 치도곤을 당한 사건이었다. 두 사화의 공통점은 연산군 자신이 능상이라 부르던 조정 내 하극상의 분위기를 일소하려 했다는 점이다."(48)


연산군은 주색잡기에 탐닉하고 왕실의 정통성과 국왕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남발했을 뿐만 아니라 "문묘에 모셔져 있던 공자와 선현들의 위판位版을 태평관·장악원·서학 등으로 옮기고, 성균관 강당과 대성전을 흥청들과의 연회 장소로 삼았다." "그 밖에도 연산군은 사간원을 폐지하고 홍문관마저 혁파해 군주에 대한 간쟁과 왕이 들어야 할 수업 자체를 없애 버렸다. 또 사초를 검열해 자신에 대한 비평을 막았다." "결국 폭력을 극대화한 연산군의 통치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폭력으로 종말을 맞았다.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이 주도한 중종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폭력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어육漁肉이 되어 가는 생민을 구원한 거사'로, 연산군의 치세를 부정하며 성종대로 돌아간다는 의미의 반정反正이라는 말로 칭송되었다. 그러고는 모든 제도를 원상태로 되돌리면서 연산군을 폭군으로 규정하고, 그가 사문과 도덕에 씻을 수 없는 죄인임을 천명했다."(51)


"거사에 성공한 박원종 등은 연산군을 폐위하고 정현왕후 소생의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국왕으로 옹립했다. 그가 바로 조선 최초의 반정 군주인 중종이다." 반정 공신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왕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중종의 또 다른 노력은 연산군과 대비되는 반정 군주의 면모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중종은 도덕의 이름으로 집권의 정당성을 수식하고 그를 통해 신료와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자 했다." 중종은 연산군이 폐지한 각종 제도들을 성종대 모습으로 되돌리도록 명했으며 "충신·효자·열부·절부의 정표 가운데 무너진 것을 세우게 하고, 1511년(중종 6)에는 무려 2940절에 달하는 <삼강행실도>를 반포했다. 연산군의 집정으로 퇴락한 풍속을 삼강오륜을 밝힘으로써 회복하겠다는 포부를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도 <삼강행실도>를 반포한 적이 있지만 거의 3000절에 달하는 분량은 이전과는 다른 무게감을 주었다."(56-7)


"조광조가 조정에 첫발을 디딘 것은 청요직들의 영향력이 크게 신장하여 국왕 및 대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1515년(중종 10)이었다." "조광조가 청요직들 사이에서 높은 신망을 얻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사회적 기강이 크게 퇴락한 상황에서도 그가 도학자로서 한결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성 청요직들을 압도하는 강직한 주론자主論者로 기능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는 당시 청요직 사이에서 가장 중시되는 자질로 평가받고 있었다."(63) "주론자란 대간 언론의 향방을 지휘하는 일종의 오피니언 리더였다. 조선 후기의 경세가 유수원은 조선 시대 첫 번째 주론자로 조광조를 꼽고 있는데, 이들 주론자는 청요직 연대를 통해 언론의 활성화가 일상화되는 상황에서, 대간 언론이 권력에 위축되지 않도록 독려하며 특정한 안건에 대한 언론의 개시와 종결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었다."(66)


# 신씨 복위 상소 사건(조광조의 논변 승리)의 의의

1.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세력이 조정의 실세로 등장

2. 청요직 내부에서도 직급보다 도덕적 권위가 우선시 됨

3. 공론 형성의 기제가 도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계기 마련


조광조와 기묘사림이 주도한 개혁은 "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시도되었다. 하나는 도덕적 가치의 확산을 추구하는 것으로,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성리학적 질서에 바탕을 둔 사회 운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성리서들의 보급, 문묘 종사 운동, 향약의 보급, 사전祀典 체제의 정리, 여악의 폐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75) "개혁의 두 번째 방향은 '누가 정치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관료로 선발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퇴출하는 것이었다. 기묘사림은 성리학 이념에 충실한 새로운 인재들을 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과거 시험의 한계, 즉 문장을 위주로 하는 시험 방식을 바로잡아 응시자의 성리학 지식과 도덕 수양을 중시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시행했다." "현량과의 시행은 조선 왕조 최초의 천거과라는 의의와 함께 도학에 소양을 가진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점을 시험제도를 통해 선언했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77)


"중종은 조광조가 왕권을 반석에 앉혀 주리라는 판단에서 그를 발탁했다. 물론 중종이 도학자로서의 조광조의 학식과 인품, 그리고 이상을 향한 열정에 매혹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안한 자신의 왕좌를 안전하게 지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도교 의식 집행 기관인) 소격서昭格署 혁파와 (아무런 공도 없이 공신에 책봉된 자들의 거짓 공훈을 없애기 위해) 위훈 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하는 조광조를 보면서 자신과 그의 길이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광조를 신임하면 할수록 국왕인 자신의 권위보다는 도덕과 도학의 권위가 높아졌으며, 그것은 다시 자신의 권력을 제약했다. 간혹 성군이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자신이 손에 쥘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와 기묘사림으로 대표되는 청요직 연대가 통제할 수 없는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현실적인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 기묘사화가 일어났다."(82-3)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은 과거의 어느 임금 못지않게 도학 정치에 관심을 갖고 지치에 따른 통치를 펴고자 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제대로 뜻을 펴 보지도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인종의 뒤를 이은 국왕이 바로 명종이다. 명종대는 명종 자신보다도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시대로 더 많이 인식된다. 문정왕후의 치세에서 마지막 사화인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임꺽정의 난도 일어났다. 수많은 사림이 목숨을 잃거나 유배를 떠났고 백성의 삶은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세조가 훈척의 세력화를 조장한 이래 공공의 선보다는 사익 추구를 더 밝히는 훈척 세력의 폐단이 가장 극성을 부린 시대가 바로 문정왕후의 치세였다." "훈척 세력은 (공납 비리에서 비롯되는) 사회 경제적 파탄을 아랑곳하지 않고 지방 관아와 결탁해 토지를 넓히며 농민의 생활 터전을 빼앗았다. 지도층이 공공성과 도덕성을 상실한 조선 사회는 거세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102-3)


"16세기 조선에서 살아가던 보통 백성은 훈척 정치의 농단에 그대로 노출된 채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방납의 폐단 등 부세賦稅 제도의 문란 때문에 제대로 살길을 헤쳐 나갈 수 없었다. 훈척 세력은 토지를 넓히고 사행使行 무역(사절단이 외국을 오갈 때 이루어지던 무역)에 개입해 이득을 꾀했다. 게다가 연안 지역에서 개간할 수 있는 땅을 차지하고 백성을 동원해 간척하는 방법으로 대토지를 손에 넣었다. 지방 수령은 탐욕을 감추지 않고 공물의 방납 등을 자행하고 있었다." "임꺽정이 반란을 일으킨 가장 큰 원인은 농민들이 땅을 잃어버린 데 있다. 훈척 세력과 내수사가 자기 소유의 토지를 넓혀 나간 데다 수령들이 부세 과정에서 탐학을 부리는 바람에 농민들은 경작할 토지를 잇따라 빼앗겼다. 살길이 없어진 농민들이 무리 지어 도적으로 변신했고, 그 도적들 가운데 유력한 이가 바로 임꺽정의 무리였다."(130-1)


한편 15세기 후반, 흉작기에 농촌 지역 주민들이 서로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는 장시場市가 정기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 무렵 농촌 사회에서 장시를 통해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각 지방 장시를 연결해 물품을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장악한 사상私商 계층이 성장한다. 임진왜란을 지나면서 시전 중심으로 재화가 유통되던 경기 지방에서도 장시가 자주 개설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장시가 읍치의 범위를 벗어나 산림 지대까지 확대되었다. 읍치란 지방 고을의 중심 공간으로 대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해안 지방의 경우 읍성이 없는 곳도 있었다. 행정이 행해지는 읍치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사직단 등의 제사 시설, 향교, 장시 등이 들어서게 마련이었다. 농업 사회인 조선에서 읍치를 벗어나 장시가 뻗어 나갔다는 것은 중대한 변화였다. 뿐만 아니라 인접한 장시들 간에 흡수·통합·이동 등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장시의 연계망이 형성될 기반도 마련되었다."(119-20)


16세기에 재인식한 새로운 사상으로서의 성리학은 "부계父系 남성 위주의 가족 질서, 붕당을 중심으로 한 사림 정치, 서원과 향약 등을 기반으로 한 향촌 질서 등 사회 전반을 가로지르는 질서의 원형을 제공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이 바로 이 시기, 16세기에 탄생한 것이다."(147) " 사림은 새로운 지배 이념으로서 성리학의 가치를 탐구하며, 성리학의 기본 경전인 <소학>과 사서삼경 등에 구결을 붙이고 한글로 풀이했다. 그리하여 이황의 <삼경사서석의>, 이이의 사서언해, 경서언해교정청의 <소학언해>·사서삼경 언해 등이 출현했다." 이와 더불어 16세기에는 "과전법이 사전의 지급 대상을 현직 관료로 제한하는 직전법으로, 다시 관에서 전조田租를 수취해 전주에게 지급하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로 변하며 해체해 가자 양반들의 경제적 지위가 불안정해졌다. 따라서 새로운 사상이었던 성리학은 조선 전기와는 달리 중소 지주층의 이념으로도 재발견될 수 있었다."(158-9)


# 16세기 이전의 현실 의례

1. 결혼 풍습 : 남귀여가男歸女家의 솔서혼率壻婚(데릴사위)이 일반적, 처가외동딸인 경우 처가의 제사를 물려받는 외손 봉사奉祀도 시행

2. 상속 제도 : 남녀 모두 똑같이 재산을 나누는 균분상속

3. 족보 기록 : 남녀순이 아니라 출생순으로 기록

4. 제사 풍습 : 아들딸이 돌아가면서 부모의 제사 시행


"역설적이지만 사림들이 새로운 사상을 만드는 데 몰두할 수 있었던 계기는 사화였다. 그들은 사화 때문에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향촌 사회에 머물며 학문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은 정치적 탄압을 피해 주로 충청도 충주를 중심으로 남한강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공립 교육기관을 대체할 민간 교육기관인 서원에 주목하게 되었다."(167) "서원의 성립이 갖는 사회적 의의는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사족이 자율적으로 지역 언론을 공론화하고 도학적 모범을 보인 인물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사림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다. 둘째 서원의 강학 활동을 통해 각 지역에서는 학파가 성립하고 재생산됨으로써 성리학이 융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지역사회에서 서원을 중심으로 사림의 공론을 결집해 사족 지배 체제를 확립·유지할 수 있었다. 나아가 서원과 연결된 산림이 출현해 도학을 무기로 중앙의 정계까지 좌우할 수 있었다."(169)


# 서원과 더불어 사족의 지위를 강화한 지역 조직

1. 향회 : 향안에 등록된 양반 사족들의 정기 모임

2. 향안 : 부모와 처가 세 가문의 3대조 조상에 대한 심사를 통과한 양반 사족들을 등록한 명단

3. 유향소 : 관아 다음 가는 위상을 가진 향촌의 비공식적 기관


1565년에 즉위한 선조는 사림 중심의 정치 질서를 만들었다. "사림의 지지를 받으며 등극한 선조는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경사經史를 토론했다. 명종 때 여러 차례 징소徵召(임금이 특별히 부름)를 받고도 조정에 나오지 않던 명유名儒 이황에게는 예폐禮幣(경의를 표하기 위해 보내는 물건)를 극진히 해 나오도록 권유했다."(177-8) "이황의 <성학십도>, 이이의 <성학집요聖學輯要> 등 성학에 대한 이론서들은 이전의 제왕학과 달리 신하들이 제왕학의 기준점을 제시한다는 데 특징이 있었다. 특히 이 책들은 조선 전기에 중시된 <대학연의>와 달리 국왕을 사대부의 논리에 따라야 하는 존재로 파악해 조선 후기 사림 정치의 이론적 모델을 제시했다. 사림은 이러한 제왕학 이론을 실제로 경연과 같은 제도에서 적극 활용해 국왕에게 성학을 가르치고 또 이를 적극적으로 따르도록 유도했다. 조선 후기에 붕당정치, 예송禮訟 등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시기 변화한 정치사상에 힘입은 바 컸다."(181)


# 동아시아 7년 전쟁을 칭하는 한중일 삼국의 공식 명칭

1. 한국 : 임진왜란(임진년에 왜구들이 쳐들어와 벌인 난동)

2. 일본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벌 - 분로쿠게이초노에키(분로쿠·게이초 연간의 전쟁)

3. 중국 : 항왜원조抗倭援朝(일본에 맞서 조선을 도운 전쟁)


# 동아시아 7년 전쟁을 바라보는 한중일 삼국의 시각

1. 한국 : 전쟁의 승패를 중시하여 침략자 일본을 물리친 조선의 승리와 대첩을 강조하고, 그것을 이끌어낸 무장과 의병들의 영웅적인 활약상 탐구

2. 일본 : 삼한 정벌론의 연장이자 '일본의 국위를 선양한 선구적인 쾌거'로 재조명하여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대외 팽창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

3. 중국 : 제1차 중·일전쟁으로 칭하여 청일전쟁 때 일본에 패배한 사실을 반성하는 한편, 조선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은혜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강조


# 동아시아 7년 전쟁이 끼친 영향

1. 한국 : 국토가 황폐화되고 기근·전염병·포로 등으로 인구 격감, 지배층의 권위 추락과 기존 질서에 대한 회의와 반감, 현실도피적인 사상 유행

2. 일본 : 지역의 군사 강국으로 자리매김, 조선에서 약탈한 인적·물적 자산을 바탕으로 근세 사회 발전의 초석 마련,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 수립

3. 중국 : 막대한 전비 조달을 위해 증세와 징집, 징발을 강행하면서 재정적자와 민심 악화, 요동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여진세력이 만주 지역에서 급부상


"전쟁 전부터 모화慕華 의식이 커지고 있던 참에 임진왜란을 맞아 명이 원군을 보낸 것은 조선과 명의 관계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1593년 1월 평양전투의 승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던 조선 지배층에게 '재조지은', 즉 망해 가던 나라를 다시 세워 준 은혜로 인식됐다. 이제 명은 '상국'이자 '부모국'인 동시에 종사를 구해 준 '은인'으로까지 추앙된다." "선조는 전쟁이 끝난 뒤 논공행상할 때, 이순신 등 공을 세운 무장들을 제쳐 놓고 명에 청원사請援使로 다녀온 정곤수를 일등 공신이자 원훈元勳으로 녹공했다. 그것은 이순신을 비롯해 백성 사이에서 영웅으로 떠오른 무장들의 활약과 공로를 상대적으로 축소하려는 의도였다. 선조는 왜란 초반 의주로 파천했을 뿐 아니라 전쟁 극복에 이렇다 할 활약이 없었다. 따라서 명군의 은혜를 강조하는 데에는 실추된 자신의 권위를 만회하려는 의도가 있었다."(252-3)


임진왜란 참전과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각종 반란을 계기로 명의 국력이 쇠퇴하고 요동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의 세력이 급속히 커지자 조선은 두 가지 난제에 직면한다. 하나는 건주여진의 군사적 위협을 막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을 이용해 누르하치를 견제하려는 명의 이이제이책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 조선은 임진왜란 중에도 건주여진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와 서인은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세력은 광해군이 내정에서 범한 실책과 더불어 명에 대한 배신을 정권 타도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명에 대한 배신이란 다름 아닌 재조지은의 배신을 의미했다. 이후 인조 정권의 대외 정책은 자연스레 친명의 방향으로 기울고, 이 과정에서 후금과의 관계는 파열음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 귀결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었다."(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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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 조선 1 민음 한국사 1
문중양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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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비록 대외적으로는 제후국을 표방하며 중국과 조공 관계를 맺었지만, 안으로는 황제국을 자처하면서 모든 제도를 황제국 체제에 맞도록 운영했다. 이 점은 13세기 후반 이후 원 간섭기에 격하·수정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고려의 전 시기에 일관한 체제였다. 조선은 이 같은 고려의 체제를 참람한 것, 즉 정당한 분수를 뛰어넘는 것으로 규정했다. 제후국은 대외 관계뿐 아니라 국내의 제도와 문물도 격에 맞게 운영해야 하며, 그것이 성리학 이념을 원칙에 맞게 구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30) 그렇지만 황제 독재 체제를 확립한 명과 달리 "조선에서는 관료 집단을 중심으로 국시인 성리학의 정치 이념, 즉 신하의 정치적 역할을 강조하면서 군주와 신하가 협의를 통해 함께 국정을 운영해 가는 '군신 공치君臣公治'의 원칙을 충실히 구현하고자 했다." 신권주의와 왕권주의가 갈등을 일으킬 조짐이 왕조의 탄생기부터 잠복해 있었던 셈이다.(31)


# 조선 건국기의 국제정치

1. 명明 건국(1368) : 공민왕이 원元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명에 사신을 보내 책봉 관계 요청

2. 명의 요동 진출 : 원의 잔여세력 나하추를 제거하는 동시에 요동지방을 점령하여 철령위 설치를 통보

3. 고려의 요동 정벌 추진 : 우왕과 최영은 조민수와 이성계를 좌우사령관으로 삼아 정벌군 출정

4. 위화도 회군(1388) : 최영 유배, 우왕 폐위

5. 조선 건국(1392) : 요동 문제가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가운데 표면적으로는 대명 관계 정상화


"태조대 조·명 관계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난 가장 큰 갈등은 표전表箋 문제였다. 표전이란 조선에서 명으로 보낸 외교 문서인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을 가리키는데, 그 격식과 용어가 매우 까다로웠다. 명은 이 표전문 속에 명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의미의 글자가 섞여 있다는 이유로 조선의 사신을 억류하고 외교 문서의 작성자를 압송하라고 요구했다." "표전 문제가 양국 간의 현안으로 드러난 이면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선의 요동 정벌 움직임이었다. 즉 표전 문제가 처음 불거진 1393년부터 1398년까지 조선에서는 정도전의 주도하에 사병 혁파와 국군 체제 확립을 골자로 하는 군제 개혁을 추진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강력한 군사 훈련을 시행했다. 명은 이 같은 조선의 움직임이 요동 정벌을 위한 일련의 준비 과정이라고 보고, 군제 개혁 및 군사 훈련을 주도한 정도전을 요동 정벌 추진의 중심인물로 주목했다."(36-8)


# 1398년 홍무제(주원장)와 정도전(1차 왕자의 난)의 사망이라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문제 해소


"지리는 천문과 함께 국가를 경영하는 기초 학문으로 중시되었다. 천문은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고 예측해 정확한 역易을 만드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지리는 국토의 지형 지세·토지·인구·물산을 파악해 국정의 기초 자료를 마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개국 초기에 "천문과 지리 분야에서 국가적 사업을 추진한 데는 국가 경영에 활용하려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왕조의 개창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이념적 목적도 크게 작용했다. 천문도의 제작에는 하늘의 성좌를 측정해 별자리의 도수度數를 정확하게 밝히려는 과학적·실용적 측면과 더불어 조선 왕조의 개창이 하늘의 뜻에 따른 선양禪讓이었음을 강조하는 이념적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마찬가지로 세계지도에서도 단순히 세계의 형세와 모습을 파악하는 차원을 넘어 새로이 개창된 조선 왕조를 만천하에 과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 의도를 드러낸 것 중 하나가 실제보다 과장된 조선의 크기이다."(54-5)


# 천상열차분야지도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


"고려 말 혁명 과정에서 정도전의 가장 큰 공헌은 척불斥佛 운동의 전개와 반혁명 세력의 숙청에 앞장섰던 점이다. 1391년(공양왕 3) 4월 정도전은 성균관의 여러 관원과 함께 공양왕의 호불好佛 성향과 각종 불사佛事를 비판하면서 강력한 불교 배척을 요구했다. 정도전의 척불 운동은 기본적으로는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측면에서는 혁명 세력의 정책에 비협조적이던 공양왕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와 더불어 반혁명 세력의 중심 인물인 이색이 불교에 우호적인 점을 이용해 그의 입지를 약화하려고 했다." 여기에 더해 조준은 "1388년 7월 상소를 올려서 사전 개혁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수조지를 파악해서 이를 몰수한 뒤 관료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이 조준이 주장한 사전 개혁의 골자였다. 이로부터 사전 개혁은 가장 중요한 정치 현안으로 떠올랐다."(73-4)


# 1391년 5월 과전법科田法 공포


"중앙집권적 관료 체제의 추구는 권문세족과 지방 호족이 토지와 농민에 사적 지배권을 행사하던 고려 말 정치의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고려 말 권문세족과 지방 호족은 권력과 부를 이용해 불법적으로 토지와 농민을 침탈했다. 이는 귀족의 토지 겸병과 농장 경영으로 이어지고 그에 따라 농민층이 몰락했다. 농민층의 몰락은 결국 국가 재정 기반의 붕괴를 초래했다." 새롭게 건설되는 중앙집권 체제의 형태에 대해 "정도전은 중앙집권적 관료 체제 운영의 주도권을 재상이 가지는 재상 중심의 권력 구조를 추구했다. 그는 왕위는 한 가문에서 세습하는 것이므로 국왕이 항상 현자賢者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국왕은 상징적인 최고 권력자로만 머물러야 했다." "반면 이방원은 국왕 중심의 정치 운영을 추구했다. 국왕이 상징적인 최고 권력자로 남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국정을 직접 주도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77-8)


정도전의 군제 개혁에 반발하여 1차 왕자의 난(1398)을 성공시킨 태종이 가장 먼저 시행한 정책은 아이러니하게도 "군권의 일원화를 위한 군제 개혁과 사병 혁파였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400년(정종 2)에 군제 개혁을 단행해 종친과 공신들이 사적으로 거느리던 군사들을 모두 삼군부에 소속하도록 하고, 지방의 절제사節制使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사 지휘권도 모두 삼군부로 귀속시켰다." 이와 더불어 "전국에 걸쳐 양전量田 사업, 즉 토지조사 사업을 시행해 전국 토지의 수량과 소유관계 등을 파악했다. 또 호구조사도 시행해 전국의 가구 수와 인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호적을 새로 정비했다. 그리고 새로 정비한 호적의 내용을 기준으로 16세 이상의 남자들에게 일종의 신분증명서인 호패號牌를 소지하도록 하는 호패법을 시행했다. 전국의 토지와 호구 조사 결과는 사람들의 신분을 파악하고 토지세와 군역 등의 세금을 거두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었다."(84-6)


고려 말기부터 이어진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위협은 조선 건국 이후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다. "조선은 투항해 오는 여진족은 포상을 내리며 적극적으로 환영했고, 그러지 않은 여진족이라도 문호를 개방했다." "고려 때만큼 심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에 들어서도 왜국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나라의 근심이 왜국만한 것이 없다國家所患莫甚於倭."라고 할 정도였다." "여진과 왜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젊은 왕 세종이 성리학적 이상 국가로 나아가기에 앞서 반드시 풀어야 하는 선결 과제였다. 중화 체제의 모범 국가로서 주변 세력을 교화하되 안 되면 무위武威를 과시해서라도 문화적이고 평화로운 관계로 들어오게 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명 중심의 중화 체제에서 확고한 위상을 지키고 그에 걸맞는 영역을 확보해야 했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세종은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나라 밖으로 정벌군을 보낸, 몇 안 되는 조선 국왕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105)


# 왜구 진압 및 교역 재개

1. 기해동정 : 이종무 함대의 쓰시마 정벌(1419)

2. 계해조약 : 부산포, 내이포, 염포 등 삼포 개방(1443)


# 여진 정벌 및 교역 재개

1. 4군 : 최윤덕 부대가 압록강 일대 여연, 자성, 무창, 우예의 4군 점령(1437), 

2. 6진 : 김종서 부대가 두만강 일대 회령부, 경원부, 종성군, 경흥군, 온성부, 부령부의 6진 구축(1449)


"1492년(세종 11년) 간행된 <농사직설農事直說>은 가장 널리 알려진 조선 시대의 농업 서적이다." 고려 시대에는 원元의 농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가 두루 쓰였는데 조선의 풍토에 알맞는 독자적인 농서 편찬이 필요한 상황에서, 세종이 그 일은 해낸 것이었다. "세종은 조선의 농서를 편찬하면서도 그것이 태종의 치적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내세웠다. 태종이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 <농상집요>의 주요 내용을 초록하고 이두로 번안해 농서를 편찬했으니, 세종은 그 업적을 계승한다고 표방한 것이다. 이때 세종이 더욱 강조한 것은 바로 오방五方 풍토의 개별성이었다. 오방은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위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천하의 여러 곳을 가리키며 조선이 중국과 구분되는 지역임을 강조한다." "1428년(세종 10) 세종의 명령을 받은 하삼도下三道 관찰사가 각지의 농법을 종합해 올린 책자를 기반으로 정초와 변효문이 편찬한 책이 바로 <농사직설>이다."(119-20)


"하늘을 대신해 인간 세상을 통치하라는 명을 받은 자로서 왕은 하늘의 뜻을 받들기 위해 항상 정성을 다해 천문을 읽어야 했다. 그렇기에 천문학은 제왕학이었다. 천문학을 학습하는 것은 제왕된 자의 의무이고, 천문역법을 독점하고 세상에 반포하는 것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제작으로 시작된 조선의 천문역법은 세종대에 이르러 완성된다.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수립한 독자적인 역법으로 이해되는 '칠정산'이 그것이다."(136-7) "요 임금은 역법을 확립하고 순 임금은 혼천의를 만들어, 완벽한 역볍을 확립해 정확한 때를 일러 주고자 했다. 이것이 곧 하늘을 공경하는 정치였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성군으로 추앙받는 우 임금은 황하의 물줄기를 트는 치수 사업을 벌여 황폐해진 중원 지역을 평정했다. 천문역법 사업이 위대한 요·순 임금을 따르는 것이라면, 측우기와 수표의 창제 및 측정 제도의 확립은 우 임금을 따르는 성군의 정치였다."(146)


"조선 왕조는 유교적 이상 국가를 구현하고자 예악 정치를 표방했다. 여기서 예禮와 악樂이란 추상적 구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가 질서를 위한 것이라면 악은 조화를 위한 것이다. 질서와 화합을 위해 필요한 예악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체로서, 형정刑政의 근본을 이루며 왕도의 필수 요건이다. 중국 고전인 <예기> 「악기」에 따르면 예악 형정이 추구하는 궁극은 민심을 하나로 해 잘 다스려진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조선의 역대 왕은 이러한 통치 원리를 바탕으로 치도治道를 갖추고자 노력하고, 그를 위해 예와 악이 정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음악적 안목이 남달랐던 세종은 "음의 시가時價를 표기할 수 있는 정간보井間譜를 창안하고, 아악기의 표준이 되는 편경을 우리의 기술로 만들어 냈다. 또한 아악雅樂을 정리하고, <여민락與民樂>,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 등의 음악을 만들어 국가 전례를 거행하는 데 긴요한 성과를 이룩했다."(151-2)


"세종이 문자 창제 프로젝트를 은밀히 추진한 것은, 신하들이 반발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지배층은 한문을 배워서 과거 시험을 볼 수 있었는데, 과거 시험은 양반 관료로 편입되어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반이었다." "세종이 한글을 이용해 처음으로 공개적인 사업을 추진한 것은 1444년 2월 16일 집현전의 관리들을 시켜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한 일이다." 마침내 한글과 관련해서 공개적으로 일이 추진되자 "최만리 등은 상소문에서 언문 창제와 같은 중대한 일을 신하들의 공론을 모으지 않고 졸속으로 진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임금의 건강이 안 좋아 요양을 떠나면서까지 그리 급한 일도 아닌 언문 관련 사업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이 상소문은 세종이 한글 관련 사업을 은밀히 추진했다는 것, 그리고 세종이 한글 관련 사업에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169-71)


"세종의 맏아들 문종은 자질과 인품이 뛰어나 서른둘이 되던 1442년부터 국정을 대리하며 통치 경험을 쌓았지만 즉위 2년 만에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로 붕어했다. 그 뒤를 이어 즉위한 단종은 겨우 열하나의 어린 나이였다. 국왕의 때 이른 붕어와 어린 세자의 즉위라는 돌발 상황은 그 자체로 중요한 정치적 위기였지만, 그 위기는 또 다른 조건 때문에 더욱 심각해졌다. 그것은 단종을 둘러싼 숙부들의 존재였다. 세종은 대군만 여덟 명을 두었는데, 특히 둘째 수양대군과 셋째 안평대군은 능력을 높이 평가받았다. 두 사람은 단종이 즉위했을 때 삶에서 가장 정력적인 나이인 삼십대 중반이었다."(184) "1452년 7월 28일, 수양대군은 권람의 추천으로 한명회를 만났다. 기록에 따르면 수양대군은 그를 처음 만난 뒤 '나라의 선비國士'라고 극찬하면서 오랜 친구처럼 여겼다. 며칠 뒤에는 신숙주를 포섭했다." "거의 동년배인 세 사람의 만남과 제휴는 14개월 뒤 계유정난의 성공으로 이어져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188)


# 계유정난(1453)

1. 권람의 노비 계수가 김종서를 위시한 재상들이 안평대군을 옹립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수양대군에게 고변

2. 수양대군이 먼저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김종서와 아들 김승규를 살해

3. 수양대군 일파가 대궐과 도성 주요 지점을 장악한 뒤 조극관, 황보인 등을 유인, 살해

4. 숨이 끊어지지 않은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반전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귀양


"단종은 세조가 즉위한 뒤인 1455년 윤6월 20일 상왕의 자리로 물러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7월 11일 곧바로 태상황에 추대되었다. 그해 10월 13일 명도 칙사를 보내 세조의 즉위를 인정해 주었다. 세조의 체제는 순조롭게 안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조에게 지울 수 없는 도덕적 오점이 있는 것은 자명했다. 그의 체제가 뿌리내리기까지는 또 한 번의 진통과 최종적 조처가 필요했다. 그것은 사육신 사건과 단종의 사사였다." "성삼문 등이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1456년(세조 2) 6월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한 사육신 사건은 다시 한번 많은 희생자와 함께 세조에게 큰 도덕적 상처를 남겼다. 이런 변란의 궁극적인 원인은 단종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당하고, 그의 일가친척이 숙청당하는 일련의 사태를 거친 뒤 "다섯 달 만인 1457년 10월 24일 사사賜死됨으로써 16세의 짧고 비극적인 생애를 마쳤다."(192-3)


"세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집요하게 추구한 과업은 왕권의 강화였다. 그는 다양한 제도와 확고한 태도로 그 목표를 끊임없이 추구했다. 그 결과 세조는 외형적으로 매우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내면에는 상당한 한계도 잠복해 있었다."(199) "왕권의 절대성에 관련된 세조의 생각은 1467년 12월 "친히 정사를 보고 권력이 아래로 옮겨 가지 않는 것이 군주의 도"라고 한 발언에 가장 잘 집약되어 있을 것이다. 이 발언이 치세 끝머리에 나왔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세조는 이런 원칙을 재위 내내 강력히 관철했다. 그러나 부당한 집권이라는 태생적 결함 때문에 세조는 어느 때보다 많은 공신을 양산했고 한명회·신숙주·정인지 등으로 대표되는 소수 대신들에게 크게 의지해 국정을 운영했다. 그리고 그런 통치 방식은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권력이 아래로 옮겨가는' 결과로 이어졌다."(201)


# 세조의 주요 정책

1. 호패법 재시행(1459), 인구조사 실시(1461)

2. 백성에게 부과하는 공물 축소(1457), 공물 명세서 횡간橫看 제정(1464)

3. 풍년에 곡식을 사들여 흉년에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상평창 설치(1458), 현직 관원에게만 과전을 지급하고 세습을 금지한 직전법職田法 실시(1466)

4. 군사제도 개편(1457) : 중앙의 오위五衛와 지방의 진관鎭管 체제 수립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재위 14개월 만에 붕어했다. 인위적인 사고는 아니지만, 원자인 제안대군이 세 살밖에 안 된 상황에서 국왕이 붕어한 것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또 한 번 격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짙은 큰 위기였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실현되지 않았다. 15년 전 어린 국왕의 등극이 가져온 정치적 공백을 파고들어 집권한 훈구 대신들은 그때의 경험을 살려 이 위기를 진정시켰다. 왕실과 대신은 가장 중요한 후사 문제에 신속하게 합의했다."(216) "성종 초반 왕권의 위상과 정치의 전체적인 양상은 이 시기를 이끈 두 개의 이례적 제도인 (세조비 자성대비의) 수렴청정과 원상제로 파악할 수 있다." 자성대비와 정치적 주도권을 공유한 대신들의 주요 기구인 원상은 '승정원의 재상'이라는 이름이 알려 주듯이, "국가의 최고 중신인 재상을 국왕과 가장 가까운 관서인 승정원에 근무케 하는, 그러니까 의정부와 승정원의 기능을 합친 매우 변칙적이며 강력한 특별 기구였다."(217-8)


"성종에게 진정한 원년은 수렴청정과 원상제가 종결되고 친정을 시작한 1476년이었을 것이다. 훈구 대신들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에 변형된 왕정을 시행할 수밖에 없었던 성종에게 가장 시급한 정치적 과제는 왕권을 강화해 대신들의 입지를 축소하는 것이었다."(222) "삼사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함께 부르는 이름이다. 탄핵과 간쟁을 고유한 임무로 부여받은 삼사는 국왕 및 대신과 긴장 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이 본원적으로 큰 관서였다. 조선의 역사에서 삼사가 본격적으로 대두한 첫 시점은 성종 중반 무렵이었다. 이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직접적인 동기는 성종의 정책이었다. 성종은 대신의 견제 세력으로 삼사를 육성해 신하들 내부의 견제 구도를 형성하려고 했다." "삼사가 중앙 정치의 한 축으로 대두함으로써 그동안 국왕과 대신이 주도하던 체제에서 국왕-대신-삼사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구도로 이행한 것이다."(228-9)


"대신과 삼사의 표면적인 대립은 해당 관원이나 통설처럼 '훈구파'와 '사림파'라는 정치 세력의 성향보다는 <경국대전>에서 규정하고 보장된 그 관서의 기본 임무에서 발원한 측면이 더 크다고 판단된다. 다시 말해 대신의 보수적 성향이나 삼사의 진보적 태도는 그 관원의 자발적 선택이나 집단적 성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소속한 관서의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되었다." "아울러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실은 이처럼 대신과 삼사의 기능은 서로 매우 다르고 고정적이었지만, 그 구성원은 언제나 유동적이었으며 긴밀한 인적 연속성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의 유망한 관원들은 대부분 삼사를 거쳐 대신으로 승진했다." "즉 조선의 주요 관원들은 젊을 때는 삼사에 근무하면서 탄핵과 간쟁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지만, 그 뒤 나이를 먹고 품계가 올라 대신이 되면 그 관직에 합당한 현실론적 태도를 나타낼 가능성이 컸다."(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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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와 공작 사이언스 클래식 31
헬레나 크로닌 지음, 홍승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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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다윈주의, 그 경쟁자들과 배교자들


서로 다른 개체들에서 무작위로 일어나는 변이들의 일부는 유전된다. 이 변이들은 유기체의 생존과 번식에 작용하는 효과와는 무관하게 발생하지만 "자신이 부여하는 적응적인 장점에 따라 차별적으로 승계된다.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개체군들은 더 잘 적응된 개체들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후 환경이 변해서 이전과는 다른 적응들이 유리해지면 생명체들은 점차 분기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 즉 자연 선택이 경이로운 결과물들을 만들어 내는 방식의 핵심은 작지만 많은, 축적된 변화들의 힘이다. 자연 선택이 원시 수프에서 난초와 개미로 단숨에 건너뛸 수는 없다. 그러나 수백만 개의 작은 변화들, 이전에 일어났던 변화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아주 긴 시간 동안 축적된 변화들로, 극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이익이 된다 해도, 단지 우연일 뿐이다. 하지만 절대로 있을 법하지 않은 우연은 아니다." "즉 자연 선택의 힘이란 무작위로 생성되는 다양성에서 기인한다."(31)


"1859년에는 자연을 해석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이 존재했다. 공리주의적 창조론자들은 적응의 복잡성과 숙련된 솜씨, 기발한 유용성, 동물 혹은 식물이 그 주변 환경에 세심하게 들어맞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종들 사이의 관계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유기체들을 개별적으로 연구했다. 반면 이상주의자들은 까다로운 세부 사항들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창조의 거대한 전체 계획과 자연의 다양성을 통합하는 패턴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둘 사이의 차이와 절충점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두 학파는 하나의 원칙으로 수렴된다. 즉 자연을 조사하면 의도적인 설계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다윈주의가 겪은 가장 큰 도전이자, 가장 큰 승리는 바로 적응 증거였다. 또 다른 증거인 다양성의 패턴들은 단지 진화가 사실이라고 상정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주된 문제는 적응적인 설계의 복잡성을 설명할 수 있는 진화 기제를 발견하는 일이었다."(40-1)


"자연 선택의 원료들, 즉 진화의 기반이 된 변화, 차이, 돌연변이들은 생겼을 때부터 설계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것들은 임의로 우연히 생겨났다. 여기서 '임의'는 무작위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적응적인 가치 측면에서 임의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라는 의미다."(43-4) "날개는 새의 환경에 적합하다. 날개가 주변 환경에 꼭 맞게 창조됐기 때문이 아니라 새의 조상들이 과거 환경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완전성'이 나타나리라고 기대한다. 즉 조상 대의 적응이 현재는 관련 구조의 완벽함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역사는 기능 변화의 유산 또한 남겨 놓았다. "어떤 물고기들은 부레가 부력을 만드는 기능을 제대로 발달시키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대신 부레는 원시적인 호흡 기관이나 폐로 바뀌어 있다." 이것은 유능한 창조자의 특징이 아니다. 적응은 "신성한 숙련공"의 작업이라기보다는 "숙련된 땜장이"의 작업에 훨씬 가까워 보인다."(55-6)


"이상주의자들에게 의도적인 설계란 특정 유기체가 아니라 창조의 전체적인 패턴에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전체 종들에 관한 거대한 계획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 종에서의 적응의 효율은 당연히 희생될 수 있다. 이상주의자들은 완전성을 강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완전성을 강조하려고 특별히 애쓰기까지 했다."(58) 그러나 다윈이 생각하기에는 "어떤 '불완전성'도 거대한 패턴의 하위 요소들이 아니며 계통 발생과 자연 선택의 유산이다." "창조주가 한 기관이 다양한 기능들(때로 원래 기능에 비해서 중요성이 적은 기능들)을 수행하게 만들고, 어떤 기관들은 쓸모없는 흔적 기관으로 바꾸어 그들 모두를 마치 서로 무관한 것처럼 배열한 후, 긴밀히 협업하도록 만들었다는 말에 우리는 진정 만족할 수 있을까? 오히려 모든 난초 후손들의 공통적인 특징들이 있으며, 현재 난초들의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구조는 오랫동안 느린 변화의 과정을 거치며 생성됐다는 시각이 훨씬 단순하고 지적이지 않을까?"(61-2)


"몇몇 다윈주의자들이 라마르크주의에 끌리는 이유 중 하나는 다윈 이론은 자연 선택이 작용하는 변이들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마르크주의는 적응의 원천을 설명해 준다. 적응은 환경이 제기한 도전들과 필요에 반응해 나타난다. 또 다른 이유는 희망이다. 다윈주의가 등장한 이래로 종종 표명됐던 이 희망은 라마르크주의가 진화에 질서를, 다윈주의에는 결핍됐다고 느껴졌던 지표를 부여하리라는 희망이다." "새뮤얼 버틀러는 다윈주의가 자연이 맡은 어떤 심각한 역할에서도 마음과 의지와 의도를 제거했다고 느꼈다. 반대로 그는 유기체가 주변 환경에 적절하고 창조적으로 반응하는 라마르크적인 기제에 매혹됐다. 그는 이 기제가 마땅히 주어져야 했던 목적성을 진화의 중심부에 부여했다고 생각했다." 라마르크주의의 마지막 매력은,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측면이다. "라마르크적인 유전 양상이 우리가 더 나은 미래에 도달하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76-8)


# 도킨스의 반론

1. 사용과 불용 : 적응은 사용과 불용이라는 매우 제한적인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다. 가령, 원시 형태의 눈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고 해서 눈의 적응 복잡성이 초래될 수는 없다.

2. 형질 획득 : 라마르크주의는 지시 모형(그 환경에 적합한 형질을 획득한다)이고 다윈주의는 선택 모형(다양한 변화 중에서 미미하게나마 개선을 불러온 형질이 선택된다)이다. 지시 모형은 선택 모형을 전제로 삼아야 한다.

3. 배 발생학 : 라마르크주의는 배 발생 과정을 청사진과 집의 관계처럼 상호작용이 가능하다고 보지만, 실제로는 레시피와 케이크의 관계처럼 비가역적이다(체세포는 생식세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 다윈주의를 대체하려는 그 외의 주장

1. 정향진화 : 생물이 자연선택이나 다른 외부의 힘과는 독립적으로, 어떤 예정된 방향을 따라서 진화한다는 주장

2. 돌연변이설 : 돌연변이가 일으키는 불연속적, 급진적 진화가 종의 기원이 된다는 주장


"지난 몇십 년 간 다윈 이론은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 한때 개별 유기체들에 초점을 맞추고 유전 단위를 암묵적으로 언급했던 다윈주의의 설명은 유전자에게 영광의 자리를 내주었다. 또 한때 다윈주의가 유기체의 구조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유기체의 행동, 특히 사회적 행동과 진화의 산물 중 하나인 제도와 책략에 대한 연구가 급증하고 있다."(103) "고전 다윈주의가 개별 유기체와 그 자손들의 관점에서 자연 선택의 작용을 분석할지라도 자연 선택이 궁극적으로는 복제자가 거주하는 유기체보다는 복제자를 다룬다는 생각이, 이 유기체 중심적인 견해 내부의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었다. 이것은 결국 번식 성공(reproductive success)이 실제로 관련되는 부분이다. 오늘날의 다윈주의는 이 시점을 택한다." "유전자의 차이는 표현형 효과에서의 차이로 나타난다. 자연 선택은 표현형의 차이에 작용해서 유전자에 작용한다. 따라서 유전자들은 표현형적 효과의 선택 가치에 비례해 다음 세대에 전달된다."(111)


"유전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한 유전자의 표현형적 효과가 지닌 전체적인 선택 가치이다. 우리가 초록 눈동자에 상응하는 유전자라고 이야기할 때는, 그 유전자가 가진 효과 중 단지 한 특성만을 골라내고 있을 뿐이다. 갈색 눈동자를 만드는 유전자와 초록 눈동자를 만들어 내는 유전자들 사이의 차이점이 더 가느다란 발톱, 더 긴 팔다리, 더 작은 턱 등 모든 다른 종류의 특징들을 야기할 수도 있다." "이러한 다면 발현 효과(pleiotropic effect, 하나의 유전자가 둘 이상의 표현 형질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유전자의 시각에서 보면, 표현형들은 적응과 부수 효과로 깔끔하게 나뉘지 않는다. 단지 여러 표현형적 효과가 있을 뿐이며, 적응이란 이 효과의 전체 이익이 전체 비용을 상회하는 특수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자연 선택은 표현형적 효과들에서 오는 되먹임으로 유전자에 작용한다."(112-3)


# 새의 부리는 부리를 만드는 유전자들의 표현형적 효과이지만, 새는 부리를 이용하여 둥지를 만든다. 즉 표현형적 효과가 새의 신체를 넘어 확장된 것이다.


"그렇다면 개체의 이익에 호소하던 유기체 중심적인 이론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뛰어난 성공을 거두었을까? 간단히 대답하면 유기체 중심적인 다윈주의는 훌륭한 근사치라는 것이다. 이기적인 유전자에게조차 성공적인 전략은 바로 그 유전자가 깃든 유기체의 생존과 번식을 촉진하는 일일 것이다." "유기체가 단지 유전자들의 운송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질지라도, 유기체는 유전자를 운반하기에 안전해야만 한다. 그래서 게놈 속의 다양한 유전자들은 더 많은 개체의 생존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것이다. 더욱이 유전자들은 혼자 고립되어 선택되는 게 아니라, 유전자 풀(gene pool, 유전자 공급원, 유성 생식을 하는 집단에서 집단 내 모든 개체들 안에 있는 유전 정보의 총합)에 속한 다른 유전자들의 배후 사정과 비교하여 선택된다. 따라서 어느 정도는 자신이 신체를 공유하는 다른 유전자들과 공존해 선택된다."(118)


"우연은 적응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만약 적응적인 가치가 없다고 추정되는 형질들을 설명하는 일이라면, 우연은 타당한 설명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우연은 다윈 이론에서 실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각 세대에서 개체군 내의 유전자들은 전 세대의 유전자들의 표본일 뿐이다. 확실히 자연 선택은 무작위 추출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연 선택이 아닌 단순한 표집 오차에 따라 일부 유전자들이 제거되고 다른 유전자들이 그 자리를 대체할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어떤 종류의 표집 오차든지, 작은 개체군에서 그 가능성은 증가한다. 유전적 부동(genetic drift)으로 알려진 이 아이디어는 근대 다윈주의의 일부분을 차지한다." 유전자 빈도의 우연한 변화는 선택이 작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다. 유전적 부동이 적응 이론으로 병합된 "창시자 원리(founder principle)는 특정한 유전형이 우연하게 지리적으로 고립됨으로써, 새로운 유기체 집단이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 설명한다."(154)



3부 개미


"새는 경계음(alarm call)을 낸다. 이것은 매우 이타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다른 개체들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행위는 포식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우리는 이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친족 선택(kin selection)은 자신의 친척들에게 도움을 주는 개체의 행동을 자연 선택이 선호할 수 있다는 원리다. 비록 그 도움이 유기체 자신에게 전가하는 비용이 클지라도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한 유전자를 상상해 보자. 그 유전자는 자신이 자리 잡은 유기체가 다른 유기체들 속에 있는 자신의 복제품을 돕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문제는 그 도움이 차별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만약 경계음을 내는 유전자를 보유하지 않은 새들도 경계음을 내는 유전자를 가진 새들만큼이나 많은 도움을 받는다면, 자연 선택은 이 유전자를 선호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가족 내로 이타주의를 제한하는 것이다."(404-5)


"그러나 수혜자가 그 동물의 친족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이타적인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상호 호혜성(Reciprocity)이 하나의 답이다. 이타주의로 보이는 행동이 실제로는 행위자들에게 이익이 된다. 그들은 각자 협동에 실패했을 때보다 성공했을 때가 더 나은 방식으로, 이타적인 호감을 교환하는 중일 수 있다. 선한 행동을 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답례로 선한 행동을 되돌려 받음으로써 보상된다."(407) "호혜적 이타주의자(reciprocal altruist)들은 서로를 인식하는 수단, 즉 선행을 하는 상대를 선호하고 그렇지 않은 상대를 제외시키는 식별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 작업을 위해 고도로 발달된 두뇌를 가질 필요는 없다. 아니, 두뇌는 전혀 필요 없다. 친족 선택에서 주목했던 것처럼 지능적인 식별과 동등한 기능을 가진 다른 수단이 그 역할을 할 것이다. 소라게와 말미잘처럼 서로 의존적인 두 종들 사이에서는 접촉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413)


"친족 선택과 호혜적인 이타적 협동은 이타주의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잘 자리 잡았다. 훨씬 개성적인 설명은 자하비의 핸디캡 이론이다. 우리는 이미 이 이론을 성적으로 선택된 화려함에 대해 직관에 반하는 설명으로 다룬 적이 있다. 이타주의에 적용했을 때, 핸디캡 이론은 세계를 당혹스럽게 뒤집어 놓았다. 보초병처럼 행동하는 새를 고려해 보자. 그 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친족을 돕거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자하비는 "전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그 새는 스스로를 돕기 위해서, 또 그 일이 위험하기 때문에 보초를 서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봐." 노래꼬리치레는 동료들에게 "나는 보초병의 의무를 짊어질 만큼 충분히 강하고 원기 왕성하고 기민해. 이 비용을 감당하고도 여전히 번성할 수 있어. 당신들도 여기에 의지할 수 있어. 오직 자질이 뛰어난 개체만이 스스로 핸디캡을 그렇게 많이 감당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다."(414)


"벌목(Hymenoptera, 개미, 벌, 말벌을 포괄하는 집단)과 흰개미목(Isoptera)에는 불임 계급이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을 위해 일하는 종이 있다. 불임 계급들은 동료들의 새끼를 돌보고 군집을 방어하며 그 외 자신의 동료들에게 이익을 주는 수많은 시민의 의무들을 수행한다. 그들은 일생을 다른 개체들의 생존과 번식에 헌신한다. 자식을 남기지도 않는다. 확실히 이 점은 어려움을 제기한다. 자연 선택은 유전이 되는 적응들에 작용하는데 어떻게 이런 행동(이른바 진사회성eusociality)이 형성될 수 있는가? 불임 일꾼들은 어떻게 자기희생을 통해 이익을 얻는가? 또 그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이런 특성을 후세에 전하는가? 그 해답은 어떤 식으로든, 아마 친족 선택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번식 성공을 자식의 측면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친족 선택 이론은 우리에게 형제나 자매가 딸이나 아들만큼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465-6)


"공공 이익주의는 너무 멀리 퍼져서 사회성 곤충들의 군집을 상징적으로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시각이 흔해졌다." "이런 견해에서 이타주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자연적으로 기대되는 현상이다. 어쨌든 공동체가 실제로 하나의 개체라면, '이타주의'는 기능의 전문화일 뿐이다. 불임 일꾼들이 다른 개체들을 돌보는 이유에 대한 물음이, 왜 심장은 몸의 다른 부분을 위해 뛰는지에 대한 물음보다 더 합리적이지는 않다. (이것은 개체를 이기적인 유전자들의 운반자로 보기 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오늘날에는 심장에 대해서조차 이러한 질문을 던질지로 모른다) 곤충 군집은 이해관계가 서로 상충하는 무리가 아니라, "여러 부분들이 상호 연관돼서 협동하고, 그 결과로 생리적인 노동 분화가 나타난" 잘 통합된 전체이다. 이 단일 유기체 모형은 냉혹한 자연 이론을 비평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매력적이었다."(490)


"대부분의 근대 다윈주의자들은 선택압으로써 사회적 압력이 지니는 잠재적인 중요성을 더욱 강조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오늘날의 다윈주의는 '자기 자신 같은 타인들'이 생성 가능하고 강한 선택적인 힘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정신적 자질들의 경우, 심리학자인 니컬러스 험프리는 인간에서 자기 인식(self-awareness)이 진화하는 데 사회적 삶의 복잡성이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숙련되고 민감하게 다루어야 하는, 우리 주위의 특히 어렵고 복잡한 부분을 구성한다. 타인을 이해하고 다루기 위해 마음속에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간,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상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타인이 되는 것의 의미에 대한 모형으로 기능한다."(573-4) "헉슬리는 결국 우리의 도덕성이 자연 선택의 명령에 대항하는 전투이자 자연의 진로에 의식적이고 고되게 개입하는, 오직 문화적인 진화의 산물임에 틀림없다고 믿게 되었다."(581)


"인정하건대 우리는 독특하다. 그러나 독특하다는 사실이 독특하지는 않다. 모든 종들이 자신만의 방식을 가진다."(556) "헉슬리에게 문화는 자연 선택의 선호에 틀림없이 위배된다. 문화적인 진화는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들기 위해, 유전적인 진화에 반해서 진전해야만 했다. 헉슬리가 생각한 것처럼 다윈주의가 냉혹하다면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다윈주의는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의 감탄스러운 자질 중 대부분은 실제로 자연 선택보다는 문화의 유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유전자의 이기성에 굴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문화적 진화임에 틀림없다고 또 우리가 문화적 진화에 의존해야만 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자연 선택은 자기희생, 선행, 친절함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배제하지 않는다. 다윈주의적인 경로들이 이타주의를 이끌 수 있다."(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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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민중사 2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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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가운데 급진주의 작가 랜돌프 본은 "전쟁은 국가의 건강한 상태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유럽 국가들이 1914년에 전쟁을 시작함에 따라, 각국 정부는 번창하고 애국심이 꽃을 피웠으며 계급투쟁은 잠잠해졌다. 하지만 엄청난 수의 젊은이들이 종종 100미터의 땅이나 한 줄의 진지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죽어갔다. 아직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있던 미국에서는 국가의 건강에 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가 성장하고 있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어디에나 있는 듯 보였다. 계급갈등은 격렬했다."(11) 1914년 미국은 경제불황에 시달렸지만 1915년에 이르면 연합국(대부분 영국)의 군수품 주문이 경제를 자극하면서 1917년 4월까지 20억 달러 이상의 상품이 연합국에 팔려 나갔다. 호프스테터의 말처럼, "미국은 전쟁과 번영의 숙명적인 결합 속에서 연합국들과 이해를 같이하게 됐다."(16)


미국의 선전포고를 "미국 국민에 대한 범죄"라고 규정한 사회당은 1917년 지방선거에서 선전과 애국심의 물결에 맞서 20~30퍼센트에 달하는 득표율을 올리며 분전했지만, "1920년대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진정된 것처럼 보였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파괴됐고 사회당은 분열됐다. 파업은 무력으로 분쇄됐고 경제는 대중의 반란을 방지하기에 충분한 딱 그만큼의 사람들에게만 호전되고 있었다. 1920년대에 연방의회는 이민 할당수를 설정하는 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위험하고 불온한 이민자의 물결(1900~1920년 사이에 1,400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민 할당제는 앵글로색슨족에 유리하고 흑인과 황인종을 배제했으며 라틴계, 슬라브족, 유대인의 이민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KKK단이 1920년대에 부활되어 북부로 확산됐다. 1924년에 이르러 KKK단은 45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리게 됐다. 어디서나 벌어지는 폭도의 폭력과 인종적 증오 앞에서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는 무기력해 보였다."(51)


대공황 극복의 임무를 부여받고 1933년 대통령에 당선된 루즈벨트의 개혁은 앞선 입법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개혁은 위기를 극복하고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재조직하는 동시에 루즈벨트 행정부 초기에 성장한 심상치 않은 자생적인 반란─소작농과 실업자들의 조직화, 자조self-help 운동, 몇몇 도시에서 벌어진 총파업─을 저지한다는 두 가지 절박한 필요를 충족시켜야 했다." 체제 자체를 수호하기 위해 제정된 "전국부흥법National Recovery Act(NRA)은 경영자와 노동자, 정부가 동의한 일련의 규약에 의해 물가와 임금을 고정시키고 경쟁을 제한함으로써 경제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울러 "신임 행정부가 초기 몇 달 사이에 설치했던 또 다른 기구인 농업조정청Agricultural Adjustment Administration(AAA)은 농업을 조직화하려는 시도였다. 전국부흥법이 거대기업을 선호한 것처럼 농업조정청은 대농들에게 유리했다."(68-70)


"테네시강유역개발공사Tenessee Valley Authority(TVA)는 이례적으로 정부가 산업에 손댄─홍수를 조절하고 테네시 강 유역에서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정부 소유의 댐과 수력발전소 망을 구축했다─것이었다. 테네시 강 유역 개발공사는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소비자들에게 값싼 전력을 공급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사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도 했다. 그러나 뉴딜의 경제 조직화의 주된 목표는 경제를 안정화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목표는 반란이 현실적인 혁명으로 전환되지 않기에 충분할 만큼 하층계급들을 돕는 것이었다."(70) "전국노동관계위원회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를 설립하도록 한 1935년의 와그너법안Wagner Act이 통과된 것은 노동자 소요에 직면해 체제를 안정화시키기 위함이었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의 파업 물결(주로 사업장이나 공공시설에 들어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 앉아 있는 연좌파업 전술을 구사)은 그런 필요성을 더욱 가중시켰다."(84)


제2차 대전 기간 동안 제정된 미국의 여러 정책 가운데 하나는 파시즘의 복사판에 가까운 것이었다. "루즈벨트는 1942년 2월에 대통령령 9066호에 조용히 서명함으로써 영장이나 기소절차, 심문과정 없이도 태평양 연안지역의 모든 일본계 미국인─11만 명의 남자, 여자, 어린이─을 체포해 그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소개疏開시키고 내륙의 수용소로 이송해 감옥과 동일한 조건 아래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군에 부여했다."(112) "애국심과 전쟁 승리에 대한 전면적인 헌신이라는 압도적인 분위기가 넘쳐났고 미국노동연맹과 산업별조직회의가 무파업서약no-strike pledge까지 했지만, 기업의 이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데 반해 임금은 동결되는 데 좌절한 이 나라의 많은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전쟁 기간에 1만 4,000회의 파업이 벌어져 총 677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는데, 이것은 미국 역사상 어떤 시기보다도 더 많은 수치였다."(114)


"전쟁이 통제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사실은 여러 정부가 체득한 오래된 교훈이었다. GE 회장 찰스 E. 윌슨은 전시의 경제 상황에 너무나 만족한 나머지 "영구전시경제Permanent war economy"를 위한 기업과 군부의 지속적인 동맹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전쟁 직후, 전쟁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 동원해제와 군비축소에 찬성하는 듯이 보이자 트루먼 행정부(루즈벨트는 1945년 4월에 사망했다)는 위기와 냉전의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다. 소련과의 경쟁은 현실이었다."(127-8) "전후 10년 동안 미국은─혁명 억압을 목표로 하는 대외정책을 지지할 수 없었던 급진주의자들은 배제하면서─냉전과 반공 정책을 둘러싸고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공화당과 민주당의 국민적 합의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1950년대, 자유주의-보수주의 합의의 형성을 가속화시킨 사태가 벌어졌다─트루먼이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채 벌인 한국전쟁이 그것이었다."(130-2)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위스콘신 출신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는 트루먼보다 훨씬 더 나갈 수 있었다."(135) "1950년에 공화당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나 '공산주의 전선'임이 드러난 조직을 등록시키기 위한 국가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을 발의했을 때, 자유주의적 상원의원들은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1947년에 트루먼은 충성에 관한 대통령령을 반포, 법무부로 하여금 "전체주의나 파시즘, 공산주의, 정부전복의 성격을 갖거나 ····· 위헌적인 수단으로 미국의 정부형태를 바꾸려 하는 것으로" 확인된 조직들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했다." 국가적인 반공 분위기를 고조시킨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50년 여름에 있었던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이설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기소였다."(138-9) "혁명적인 정부─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아니면 반反유나이티드 사 정부든─를 저지하거나 전복시킨다는 민주당-공화당, 자유주의-보수주의 합의는 1961년에 쿠바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150)


# 피그스 만 침공


한편 "1954년에 대법원은 1890년대 이래 고수해 왔던 '분리되지만 평등하다'라는 원칙을 깨뜨렸다.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는 공립학교에서의 인종분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련의 사건을 대법원에까지 가져왔고, '브라운대 교육위원회 사건Brown v. Board of Education'에서 이제 대법원은 초등학교 학생의 인종분리가 "열등감을 만들어 ····· 학생들의 머리와 가슴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언급했다."(171) 1955년 말, 앨라배마의 주도 먼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가 시내버스 승차거부 운동의 서막을 열었다. 정부의 탄압과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먼고메리의 흑인들은 승차거부를 계속했고, 1956년 11월, 대법원은 현지 버스 노선의 인종분리가 불법이라고 판결했다."(173) "1965년 존슨 대통령과 의회는 훨씬 더 강력한 투표권법Voting Rights Law을 발의, 통과시켜 이번에는 연방정부가 현장에서 유권자 등록과 투표의 권리를 보호하도록 했다."(184)


# 흑인 민권 운동

1. 앉아있기 운동sit-ins : 식당의 백인 전용 좌석에 앉기

2. 자유승차단Freedom Rides’ 운동 : 버스를 타고 남부 전역을 돌면서 인종분리 관행에 도전하려고 시도


"1946년 10월에 프랑스가 베트남 북부의 항구도시 하이퐁Haiphong을 폭격함으로써 누가 베트남을 통치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베트남독립동맹운동과 프랑스 사이에 8년간 이어질 전쟁이 시작됐다."(210) 그러나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하던 프랑스가 1954년 결국 철수하자 "미국은 베트남의 통일을 저지하고 남베트남을 미국의 세력권으로 안정시키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미국은 얼마 전까지도 뉴저지에 살고 있던 응오딘디엠Ngo Dinh Diem이라는 전직 베트남 관리를 국가수반으로 앉히고 예정된 통일선거를 실시하지 말라고 부추겼다. 1954년 초에 열린 미 합참회의 비망록은, 정보부의 평가에 따르면 "자유선거에 기반을 둔 해결이 이루어지면 연합3국(Associated States,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제네바회담으로 만들어진 인도차이나의 세 지역)을 공산주의의 수중에 빼앗기는 결과를 보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언급했다."(212)


"1968년 가을, 리처드 닉슨이 베트남에서 손을 떼겠다고 약속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닉슨은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1972년 2월에 이르면 15만 명도 안 되는 병력만이 남게 됐다. 그러나 폭격은 계속됐다. 닉슨의 정책은 '베트남화Vietnamization'─사이공 정부가 미국의 자금과 공군력을 이용해서 베트남 지상병력으로 전쟁을 계속 이어나간다는 정책─였다. 닉슨은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가장 평판이 나쁜 측면, 즉 이국만리의 땅에서 미군 병사들이 교전을 벌이는 상황만을 종식시켰던 것이다."(231-2) "반전운동은 닉슨 대통령이 캄보디아 침공을 명령한 1970년 봄에 정점에 달했다. 그해 5월 4일, 오하이오 주 켄트 주립대학에서 학생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위해 모여들자, 주 방위군이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학생 4명이 살해됐다. 한 명은 평생불구가 됐다. 400개 대학 학생들이 이에 항의해 동맹휴업을 벌였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학생 총파업이었다."(244-5)


여성 운동에서는 낙태가 주된 쟁점이었다. "1968년과 1970년 사이에 20여개 주에서 낙태를 금지하는 법률을 폐지하기 위한 법적 투쟁이 시작됐고, 정부 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론은 점점 강력해졌다." "마침내 1973년 초에 대법원은, 각 주는 임신 마지막 3개월 동안에만 낙태를 금지시킬 수 있으며, 4에서 6개월일 때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낙태를 규제할 수 있고, 임신 3개월까지는 임산부와 의사가 결정권을 갖는다고 판결했다(로 대 웨이드 판결Roe v. Wade, 도 대 볼튼 판결Doe v. Bolton)."(279) "1960년대의 여성운동이 미친 가장 심대한 효과는 흔히 전국 곳곳의 가정에서 모인 '여성집단들'에서 이루어진 '의식고양consciousness raising'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열등함에 대한 거부, 자기에 대한 확신, 자매애의 결속, 어머니와 딸의 새로운 유대 등을 뜻했다."(281)


1970년대 초반, 체제는 지배능력을 잃은 듯 보였다. "정부와 기업들에 대해 이처럼 전국적으로 적대감이 팽배한 이유는 의심의 여지없이 5만 5,000명의 사상자와 도덕적 수치, 정부의 거짓말과 잔학행위를 드러낸 베트남 전쟁 때문이었다. 이에 더해 '워터게이트'라는 단 한 단어로 알려지게 되면서─미국 역사상 초유의 일인─1974년 8월의 리처드 닉슨의 대통령직 사임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낳은 추문으로 인해 닉슨 행정부가 정치적 망신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331-3) "닉슨은 제거하되 체제는 유지하라는 구호가 제기됐다." "포드가 대통령에 오른 뒤 처음 한 일 가운데 하나는 닉슨을 사면함으로써 혹 있을지도 모르는 형사처벌로부터 그를 보호해준 것이었다." "워터게이트 침입사건 같은 기괴한 장난은 (미디어에서) 충분히 다루어졌지만, 현재진행형인 사례들─미라이 학살, 캄보디아에 대한 비밀 폭격, 연방수사국과 중앙정보국의 활동 등─은 최대한 스쳐 지나가듯 보도됐다."(340)


"체제는 1975년에 복잡한 공고화 과정을 겪었다. 이 과정에는 (캄보디아에 억류된 미국 선박을 구출한다는 빌미로 군사작전에 나섰던) 매이어게스 호 사건처럼 국내외에서 권위를 주장하기 위한 과거 방식의 군사행동이 포함됐다. 또한 환멸을 느낀 대중들에게 체제가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교정할 수 있다는 만족감을 줄 필요도 있었다. 공개적인 조사를 통해 특정한 범인들을 찾아내는 한편 체제 자체에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전형적인 방법이었다."(352) "헌팅턴은 "미국이 세계질서 체제의 헤게모니 강대국이었던" 사반세기가 종언을 고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았다. 그는 '민주주의의 과잉'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대에 대해 바람직한 한계들"을 제시했다. 헌팅턴은 이 모든 것을 미국의 미래에 극히 중요한 한 조직에 보고하고 있었다. 삼각위원회는 1973년 초에 데이비드 록펠러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조직한 기구였다."(361-2)


"레이건의 승리와 8년 뒤 조지 부시의 당선은 카터 집권기의 희미한 자유주의조차도 갖고 있지 않은 기존 체제의 또 다른 부분이 국가를 책임지게 됨을 뜻했다." "10여 년 간의 레이건-부시 집권기는 온건한 자유주의를 결코 넘어서지 않았던 연방 사법부를 압도적으로 보수적인 기관으로 변화시켰다. 1991년 가을에 이르기까지 레이건과 부시는 837명의 연방 판사 가운데 절반 이상을 교체했고, 대법원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수의 우익 판사를 임명했다." "레이건-부시 시기에 렌퀴스트의 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약화시키고, 사형을 부활시키며, 경찰의 권한에 대해 피구금자의 권리를 축소하고 연방의 지원을 받는 가족계획 병원의 의사들이 여성들에게 낙태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가로막는 등의 일련의 판결을 내렸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립학교 교육비를 부담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교육은 '기본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383-4)


"1986년에 베이루트에서 발간되는 한 잡지에 실린 기사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이 이란에 무기를 판매했고, 그 대가로 이란은 레바논의 과격파 회교도들에 의해 억류되어 있던 인질을 석방하기로 약속했으며, 미국은 이 무기 판매로 생긴 수익금을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에 제공, 무기를 구입하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란-콘트라 스캔들 전체가 미국의 기존 체제가 갖고 있던 이중적인 방어선을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가 됐다. 첫 번째 방어선은 진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만약 진실이 폭로될 경우 두 번째 방어선은 조사는 하되 너무 깊숙이 조사하지는 않는 것이다. 언론은 사건을 공표하기는 하지만 문제의 핵심에까지 다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백악관 참모진은 레이건과 부시의 관련성을 용의주도하게 은폐했다. 이것은 고위 관리가 부하직원들을 방패막이 삼아 자신의 관련성을 그럴듯하게 부인할 수 있는 정부의 익숙한 수단인 '그럴듯한 부인plausible denial'을 생생하게 보여준 사례였다."(403-5)


"미국의 권력이 여전히 전 세계에 뻗치기를 바랐던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를 괴롭힌 것은 바로 베트남 전쟁의 유산─절대다수의 미국인들이 그것은 끔찍한 비극일 뿐만 아니라 싸우지 말았어야 했던 전쟁이라고 느낀 것─이었다." "대통령에 오른 부시는 이른바 베트남 증후군─지배체제가 바라는 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극복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부시는 1991년 1월 중순에 이라크에 대한 공중전을 개시하면서 전국적인 반전운동이 전개되기 전에 신속하게 전쟁을 끝낼 수 있도록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했다."(458-9) "1989년에 소비에트 블록이 해체된 뒤 미국에서는 국방예산에서 수십억 달러를 절감해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위한 사회복지에 사용하자는 '평화 배당금'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페르시아 만 전쟁은 정부가 그런 논의를 저지하는 손쉬운 구실이 됐다." 부시 행정부의 한 각료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사담에게 빚을 진 셈이다. 그는 우리를 평화 배당금으로부터 구해줬다."(469)


클린턴은 자신이 '법과 질서'의 문제에 관해 강경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부단히 애썼다. "하원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되고 클린턴 역시 열렬히 지지한 1996년의 '범죄 법안Crime Bill'은 범죄문제에 대해 예방이 아니라 처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 법안은 사형을 모든 종류의 형사범죄로 확대시켰으며 교도소 신축에 80억 달러를 할당했다."(504) "양대 정당은 불법적인 이민자뿐만 아니라 합법적인 이민자에 대해서도 복지혜택(식품교환권, 노인 및 장애인 수당)을 박탈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클린턴 역시 이에 서명했다." 1996년 초, 의회와 대통령이 힘을 합쳐 통과시킨 '테러방지와 효율적 사형집행에 관한 법Antiterrorism and Effective Death Penalty Act'은 언제 어떤 범죄를 저질렀든 간에 유죄판결을 받은 이민자를 추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 법은 토박이 미국인인 티모시 맥베이가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정부 청사를 폭파한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통과되었다.(505-6)


"클린턴 행정부의 대외경제정책은 '시장경제'와 '민영화'에 강조점을 뒀다. 그 결과 구 소비에트권 국민들은 자타가 인정하는 비효율적이고 억압적인 과거 정권 치하에서 받아 왔던 사회복지를 박탈당한 채 이른바 '자유'경제에서 혼자 힘으로 삶을 꾸려 나가야 했다." "'자유무역'의 구호는 클린턴 행정부의 핵심 목표가 됐고, 의회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합세한 가운데 멕시코와의 북미자유무역협정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NAFTA)을 통과시켰다." "자유무역을 지지한다는 미국의 주장은 믿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미국 정부는 기업의 이익을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인 '국익'에 부합되지 않는 경우에 종종 무역에 간섭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멕시코의 토마토 재배업자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가로막기까지 했다. 자유무역의 원칙을 훨씬 더 극악무도하게 위반한 사례 가운데 하나로 미국이 이라크나 쿠바에 대한 식품과 의약품의 수송을 허용하지 않은 것을 들 수 있다."(520-1)


2001년 9·11 사태가 벌어지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즉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테러리스트들과 그들을 숨겨주는 나라들을 똑같이 다룰 것입니다." "의회는 헌법이 요구하는 선전포고 없이 군사행동에 착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시에게 부여하는 결의안을 서둘러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고 하원에서는 단 한 명─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캘리포니아 출신 바버라 리─만이 반대표를 던졌다."(552-3) 곧이어 "의회에서 통과된 '미국애국자법'은 단순한 혐의만으로도 기소 없이, 그리고 헌법에 규정된 정당한 법 절차에 따른 권리 없이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을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을 법무부에 부여했다. 이 법에 따르면 국무장관은 어떤 집단이든 '테러리스트'로 지정할 수 있으며, 그런 조직의 성원이거나 자금을 제공한 사람을 체포하고 구금, 추방할 수 있었다."(5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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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7-09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긴 리뷰 잘 읽었습니다. 다음주에 노동자 연대에서 맑시즘 개최하는데, 거기 북카페에서 이 책 살까합니다. ㅎㅎㅎㅎ 개인적으로 하워드 진을 존경합니다. 미국의 리영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nana35 2018-07-09 13:59   좋아요 0 | URL
직접 읽어 보시면 훨씬 풍부한 내용을 알게 되실 겁니다.
즐거운 공부하세요.

NamGiKim 2018-07-09 11:10   좋아요 0 | URL
맑시즘 끝나고 난 뒤 꼭 읽어야겠습니다.

NamGiKim 2018-08-11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na님께서 쓰신 서평이 제 서평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nana35 2018-08-11 20: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