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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6세기, 성리학 유토피아 - 조선 2 ㅣ 민음 한국사 2
한명기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평점 :
"(15세기 사대부들은) 도덕적 자의식이 강한 사의 정체성보다는 국왕의 명을 충실히 따르는 관료적 지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16세기에 이르러 서서히 변해 갔다. 변화의 바람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하나는 과거제와 관련한 것이었다. 과거가 지배층으로 편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함에 따라,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 응시생들의 숫자가 확대·누적되면서, 외형적으로나마 사의 모양새를 갖춘 독서인 층이 확대되었다." "변화의 또 다른 바람은 정부 안의 권력구조 개편을 통해서 불어오고 있었다. 중·하급 엘리트 관료인 청요직들이 공론을 내세우며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해 감에 따라 도덕적 권위와 함께 사 의식이 한층 더 강조되었다. 청요직들은 도덕적 권위에 근거한 언론言論 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해 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도덕적 가치와 권위가 하나의 권력으로 실체화하고 있었다."(30)
# 청요직 : 깨끗한 명성을 중시하는 청직(사헌부, 사간원, 홍문관)과 정치적으로 중요한 관직이라는 의미의 요직(이조와 병조의 낭관, 의정부의 사인, 검상 등 관료 선발에 관여하는 자리)을 합친 말
"청요직들은 <홍문록>, '서경署經', '피혐避嫌' 등을 적절히 활용해 청요직 인선에서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장치들을 확보해 갔다. <홍문록>은 동료 평가에 기초한 홍문관의 자체적인 인선 명부라 할 수 있는데, 동료들의 평판이 인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특징이다. 서경은 대간에서 5품 이하의 관직에 임명된 관료들의 신원을 조사하는 일을 말한다. 하지만 성종대부터 서경은 단순한 신원 조사에 그치지 않았다. 당사자의 명망과 도덕적 흠결 여부까지도 평가해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면 그에 대한 서경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임명을 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피혐은 어떤 혐의를 받는 관료들이 사직을 요청해 국왕의 처치를 받는 것을 말한다. 대간은 피혐을 특정 안건을 거부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특히 대간에서 부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헌부나 사간헌에 임명되면 피혐을 통해 끝까지 그의 임명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35-6)
즉위하자마자 성종의 장례 절차 문제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당 건립 여부를 놓고 "연산군과 대간이 격한 대립을 반복하는 동안 대신들은 다소 복잡한 양상을 보이며 우왕좌왕했다. 이는 성종대 이래 국왕이 대신들을 친왕 세력으로 적극적으로 유인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재상과 대신들은 직급상으로는 대간보다 상위에 있었지만, 도덕적 명분을 선점한 대간이 공론을 표방하며 대신들의 비리를 들추거나 불합리한 국정 운영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게 되자 그만큼 대신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태종대나 세조대처럼 대신들에게 도덕적인 흠결이 있어도 국왕의 신임을 내세워 대간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도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국왕의 대신 보호는 약해지는 가운데 대간이 공론의 소재처라는 위상까지 얻게 되자 대신들은 그만큼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42-3)
조정의 분위기가 날로 험악해져갔지만 "청요직 인사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강개한 언론은 멈출 수가 없었다. 눈앞에 뻔히 보이는 연산군의 허물을 묵과할 수 없었을뿐더러, 언관이 몸을 사리는 태도를 보였다가는 동료들 사이에서 자칫 소인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45) 그 결과 "연산군대에는 모두 두 차례의 사화가 일어났다. 연산군 초반 왕과 대간의 갈등이 격해지면서 발생한 무오사화와 연산군의 폭압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무오사화는 김일손의 사초 문제에서 시작해 김종직 문인들을 붕당으로 규정하고 일부 대간들을 능상凌上의 명목으로 단죄한 사건이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자의적인 국정 운영과 폐비 윤씨 문제가 결부되어 신료 전체가 치도곤을 당한 사건이었다. 두 사화의 공통점은 연산군 자신이 능상이라 부르던 조정 내 하극상의 분위기를 일소하려 했다는 점이다."(48)
연산군은 주색잡기에 탐닉하고 왕실의 정통성과 국왕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남발했을 뿐만 아니라 "문묘에 모셔져 있던 공자와 선현들의 위판位版을 태평관·장악원·서학 등으로 옮기고, 성균관 강당과 대성전을 흥청들과의 연회 장소로 삼았다." "그 밖에도 연산군은 사간원을 폐지하고 홍문관마저 혁파해 군주에 대한 간쟁과 왕이 들어야 할 수업 자체를 없애 버렸다. 또 사초를 검열해 자신에 대한 비평을 막았다." "결국 폭력을 극대화한 연산군의 통치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폭력으로 종말을 맞았다.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이 주도한 중종반정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폭력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어육漁肉이 되어 가는 생민을 구원한 거사'로, 연산군의 치세를 부정하며 성종대로 돌아간다는 의미의 반정反正이라는 말로 칭송되었다. 그러고는 모든 제도를 원상태로 되돌리면서 연산군을 폭군으로 규정하고, 그가 사문과 도덕에 씻을 수 없는 죄인임을 천명했다."(51)
"거사에 성공한 박원종 등은 연산군을 폐위하고 정현왕후 소생의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국왕으로 옹립했다. 그가 바로 조선 최초의 반정 군주인 중종이다." 반정 공신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왕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중종의 또 다른 노력은 연산군과 대비되는 반정 군주의 면모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중종은 도덕의 이름으로 집권의 정당성을 수식하고 그를 통해 신료와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자 했다." 중종은 연산군이 폐지한 각종 제도들을 성종대 모습으로 되돌리도록 명했으며 "충신·효자·열부·절부의 정표 가운데 무너진 것을 세우게 하고, 1511년(중종 6)에는 무려 2940절에 달하는 <삼강행실도>를 반포했다. 연산군의 집정으로 퇴락한 풍속을 삼강오륜을 밝힘으로써 회복하겠다는 포부를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도 <삼강행실도>를 반포한 적이 있지만 거의 3000절에 달하는 분량은 이전과는 다른 무게감을 주었다."(56-7)
"조광조가 조정에 첫발을 디딘 것은 청요직들의 영향력이 크게 신장하여 국왕 및 대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1515년(중종 10)이었다." "조광조가 청요직들 사이에서 높은 신망을 얻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사회적 기강이 크게 퇴락한 상황에서도 그가 도학자로서 한결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성 청요직들을 압도하는 강직한 주론자主論者로 기능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는 당시 청요직 사이에서 가장 중시되는 자질로 평가받고 있었다."(63) "주론자란 대간 언론의 향방을 지휘하는 일종의 오피니언 리더였다. 조선 후기의 경세가 유수원은 조선 시대 첫 번째 주론자로 조광조를 꼽고 있는데, 이들 주론자는 청요직 연대를 통해 언론의 활성화가 일상화되는 상황에서, 대간 언론이 권력에 위축되지 않도록 독려하며 특정한 안건에 대한 언론의 개시와 종결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었다."(66)
# 신씨 복위 상소 사건(조광조의 논변 승리)의 의의
1.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세력이 조정의 실세로 등장
2. 청요직 내부에서도 직급보다 도덕적 권위가 우선시 됨
3. 공론 형성의 기제가 도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계기 마련
조광조와 기묘사림이 주도한 개혁은 "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시도되었다. 하나는 도덕적 가치의 확산을 추구하는 것으로,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성리학적 질서에 바탕을 둔 사회 운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성리서들의 보급, 문묘 종사 운동, 향약의 보급, 사전祀典 체제의 정리, 여악의 폐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75) "개혁의 두 번째 방향은 '누가 정치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관료로 선발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퇴출하는 것이었다. 기묘사림은 성리학 이념에 충실한 새로운 인재들을 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과거 시험의 한계, 즉 문장을 위주로 하는 시험 방식을 바로잡아 응시자의 성리학 지식과 도덕 수양을 중시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시행했다." "현량과의 시행은 조선 왕조 최초의 천거과라는 의의와 함께 도학에 소양을 가진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점을 시험제도를 통해 선언했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77)
"중종은 조광조가 왕권을 반석에 앉혀 주리라는 판단에서 그를 발탁했다. 물론 중종이 도학자로서의 조광조의 학식과 인품, 그리고 이상을 향한 열정에 매혹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안한 자신의 왕좌를 안전하게 지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중종은 (도교 의식 집행 기관인) 소격서昭格署 혁파와 (아무런 공도 없이 공신에 책봉된 자들의 거짓 공훈을 없애기 위해) 위훈 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하는 조광조를 보면서 자신과 그의 길이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광조를 신임하면 할수록 국왕인 자신의 권위보다는 도덕과 도학의 권위가 높아졌으며, 그것은 다시 자신의 권력을 제약했다. 간혹 성군이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자신이 손에 쥘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와 기묘사림으로 대표되는 청요직 연대가 통제할 수 없는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현실적인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 기묘사화가 일어났다."(82-3)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은 과거의 어느 임금 못지않게 도학 정치에 관심을 갖고 지치에 따른 통치를 펴고자 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제대로 뜻을 펴 보지도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인종의 뒤를 이은 국왕이 바로 명종이다. 명종대는 명종 자신보다도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시대로 더 많이 인식된다. 문정왕후의 치세에서 마지막 사화인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임꺽정의 난도 일어났다. 수많은 사림이 목숨을 잃거나 유배를 떠났고 백성의 삶은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세조가 훈척의 세력화를 조장한 이래 공공의 선보다는 사익 추구를 더 밝히는 훈척 세력의 폐단이 가장 극성을 부린 시대가 바로 문정왕후의 치세였다." "훈척 세력은 (공납 비리에서 비롯되는) 사회 경제적 파탄을 아랑곳하지 않고 지방 관아와 결탁해 토지를 넓히며 농민의 생활 터전을 빼앗았다. 지도층이 공공성과 도덕성을 상실한 조선 사회는 거세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102-3)
"16세기 조선에서 살아가던 보통 백성은 훈척 정치의 농단에 그대로 노출된 채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방납의 폐단 등 부세賦稅 제도의 문란 때문에 제대로 살길을 헤쳐 나갈 수 없었다. 훈척 세력은 토지를 넓히고 사행使行 무역(사절단이 외국을 오갈 때 이루어지던 무역)에 개입해 이득을 꾀했다. 게다가 연안 지역에서 개간할 수 있는 땅을 차지하고 백성을 동원해 간척하는 방법으로 대토지를 손에 넣었다. 지방 수령은 탐욕을 감추지 않고 공물의 방납 등을 자행하고 있었다." "임꺽정이 반란을 일으킨 가장 큰 원인은 농민들이 땅을 잃어버린 데 있다. 훈척 세력과 내수사가 자기 소유의 토지를 넓혀 나간 데다 수령들이 부세 과정에서 탐학을 부리는 바람에 농민들은 경작할 토지를 잇따라 빼앗겼다. 살길이 없어진 농민들이 무리 지어 도적으로 변신했고, 그 도적들 가운데 유력한 이가 바로 임꺽정의 무리였다."(130-1)
한편 15세기 후반, 흉작기에 농촌 지역 주민들이 서로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는 장시場市가 정기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 무렵 농촌 사회에서 장시를 통해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각 지방 장시를 연결해 물품을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장악한 사상私商 계층이 성장한다. 임진왜란을 지나면서 시전 중심으로 재화가 유통되던 경기 지방에서도 장시가 자주 개설되었다. 17세기 이후에는 장시가 읍치의 범위를 벗어나 산림 지대까지 확대되었다. 읍치란 지방 고을의 중심 공간으로 대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해안 지방의 경우 읍성이 없는 곳도 있었다. 행정이 행해지는 읍치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사직단 등의 제사 시설, 향교, 장시 등이 들어서게 마련이었다. 농업 사회인 조선에서 읍치를 벗어나 장시가 뻗어 나갔다는 것은 중대한 변화였다. 뿐만 아니라 인접한 장시들 간에 흡수·통합·이동 등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장시의 연계망이 형성될 기반도 마련되었다."(119-20)
16세기에 재인식한 새로운 사상으로서의 성리학은 "부계父系 남성 위주의 가족 질서, 붕당을 중심으로 한 사림 정치, 서원과 향약 등을 기반으로 한 향촌 질서 등 사회 전반을 가로지르는 질서의 원형을 제공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이 바로 이 시기, 16세기에 탄생한 것이다."(147) " 사림은 새로운 지배 이념으로서 성리학의 가치를 탐구하며, 성리학의 기본 경전인 <소학>과 사서삼경 등에 구결을 붙이고 한글로 풀이했다. 그리하여 이황의 <삼경사서석의>, 이이의 사서언해, 경서언해교정청의 <소학언해>·사서삼경 언해 등이 출현했다." 이와 더불어 16세기에는 "과전법이 사전의 지급 대상을 현직 관료로 제한하는 직전법으로, 다시 관에서 전조田租를 수취해 전주에게 지급하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로 변하며 해체해 가자 양반들의 경제적 지위가 불안정해졌다. 따라서 새로운 사상이었던 성리학은 조선 전기와는 달리 중소 지주층의 이념으로도 재발견될 수 있었다."(158-9)
# 16세기 이전의 현실 의례
1. 결혼 풍습 : 남귀여가男歸女家의 솔서혼率壻婚(데릴사위)이 일반적, 처가외동딸인 경우 처가의 제사를 물려받는 외손 봉사奉祀도 시행
2. 상속 제도 : 남녀 모두 똑같이 재산을 나누는 균분상속
3. 족보 기록 : 남녀순이 아니라 출생순으로 기록
4. 제사 풍습 : 아들딸이 돌아가면서 부모의 제사 시행
"역설적이지만 사림들이 새로운 사상을 만드는 데 몰두할 수 있었던 계기는 사화였다. 그들은 사화 때문에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향촌 사회에 머물며 학문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은 정치적 탄압을 피해 주로 충청도 충주를 중심으로 남한강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기존의 공립 교육기관을 대체할 민간 교육기관인 서원에 주목하게 되었다."(167) "서원의 성립이 갖는 사회적 의의는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사족이 자율적으로 지역 언론을 공론화하고 도학적 모범을 보인 인물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사림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다. 둘째 서원의 강학 활동을 통해 각 지역에서는 학파가 성립하고 재생산됨으로써 성리학이 융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지역사회에서 서원을 중심으로 사림의 공론을 결집해 사족 지배 체제를 확립·유지할 수 있었다. 나아가 서원과 연결된 산림이 출현해 도학을 무기로 중앙의 정계까지 좌우할 수 있었다."(169)
# 서원과 더불어 사족의 지위를 강화한 지역 조직
1. 향회 : 향안에 등록된 양반 사족들의 정기 모임
2. 향안 : 부모와 처가 세 가문의 3대조 조상에 대한 심사를 통과한 양반 사족들을 등록한 명단
3. 유향소 : 관아 다음 가는 위상을 가진 향촌의 비공식적 기관
1565년에 즉위한 선조는 사림 중심의 정치 질서를 만들었다. "사림의 지지를 받으며 등극한 선조는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경사經史를 토론했다. 명종 때 여러 차례 징소徵召(임금이 특별히 부름)를 받고도 조정에 나오지 않던 명유名儒 이황에게는 예폐禮幣(경의를 표하기 위해 보내는 물건)를 극진히 해 나오도록 권유했다."(177-8) "이황의 <성학십도>, 이이의 <성학집요聖學輯要> 등 성학에 대한 이론서들은 이전의 제왕학과 달리 신하들이 제왕학의 기준점을 제시한다는 데 특징이 있었다. 특히 이 책들은 조선 전기에 중시된 <대학연의>와 달리 국왕을 사대부의 논리에 따라야 하는 존재로 파악해 조선 후기 사림 정치의 이론적 모델을 제시했다. 사림은 이러한 제왕학 이론을 실제로 경연과 같은 제도에서 적극 활용해 국왕에게 성학을 가르치고 또 이를 적극적으로 따르도록 유도했다. 조선 후기에 붕당정치, 예송禮訟 등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시기 변화한 정치사상에 힘입은 바 컸다."(181)
# 동아시아 7년 전쟁을 칭하는 한중일 삼국의 공식 명칭
1. 한국 : 임진왜란(임진년에 왜구들이 쳐들어와 벌인 난동)
2. 일본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벌 - 분로쿠게이초노에키(분로쿠·게이초 연간의 전쟁)
3. 중국 : 항왜원조抗倭援朝(일본에 맞서 조선을 도운 전쟁)
# 동아시아 7년 전쟁을 바라보는 한중일 삼국의 시각
1. 한국 : 전쟁의 승패를 중시하여 침략자 일본을 물리친 조선의 승리와 대첩을 강조하고, 그것을 이끌어낸 무장과 의병들의 영웅적인 활약상 탐구
2. 일본 : 삼한 정벌론의 연장이자 '일본의 국위를 선양한 선구적인 쾌거'로 재조명하여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대외 팽창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
3. 중국 : 제1차 중·일전쟁으로 칭하여 청일전쟁 때 일본에 패배한 사실을 반성하는 한편, 조선에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은혜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강조
# 동아시아 7년 전쟁이 끼친 영향
1. 한국 : 국토가 황폐화되고 기근·전염병·포로 등으로 인구 격감, 지배층의 권위 추락과 기존 질서에 대한 회의와 반감, 현실도피적인 사상 유행
2. 일본 : 지역의 군사 강국으로 자리매김, 조선에서 약탈한 인적·물적 자산을 바탕으로 근세 사회 발전의 초석 마련,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 수립
3. 중국 : 막대한 전비 조달을 위해 증세와 징집, 징발을 강행하면서 재정적자와 민심 악화, 요동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여진세력이 만주 지역에서 급부상
"전쟁 전부터 모화慕華 의식이 커지고 있던 참에 임진왜란을 맞아 명이 원군을 보낸 것은 조선과 명의 관계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1593년 1월 평양전투의 승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던 조선 지배층에게 '재조지은', 즉 망해 가던 나라를 다시 세워 준 은혜로 인식됐다. 이제 명은 '상국'이자 '부모국'인 동시에 종사를 구해 준 '은인'으로까지 추앙된다." "선조는 전쟁이 끝난 뒤 논공행상할 때, 이순신 등 공을 세운 무장들을 제쳐 놓고 명에 청원사請援使로 다녀온 정곤수를 일등 공신이자 원훈元勳으로 녹공했다. 그것은 이순신을 비롯해 백성 사이에서 영웅으로 떠오른 무장들의 활약과 공로를 상대적으로 축소하려는 의도였다. 선조는 왜란 초반 의주로 파천했을 뿐 아니라 전쟁 극복에 이렇다 할 활약이 없었다. 따라서 명군의 은혜를 강조하는 데에는 실추된 자신의 권위를 만회하려는 의도가 있었다."(252-3)
임진왜란 참전과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각종 반란을 계기로 명의 국력이 쇠퇴하고 요동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의 세력이 급속히 커지자 조선은 두 가지 난제에 직면한다. 하나는 건주여진의 군사적 위협을 막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을 이용해 누르하치를 견제하려는 명의 이이제이책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었다. 실제로 조선은 임진왜란 중에도 건주여진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와 서인은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세력은 광해군이 내정에서 범한 실책과 더불어 명에 대한 배신을 정권 타도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명에 대한 배신이란 다름 아닌 재조지은의 배신을 의미했다. 이후 인조 정권의 대외 정책은 자연스레 친명의 방향으로 기울고, 이 과정에서 후금과의 관계는 파열음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 귀결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었다."(2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