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 한국사 :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 조선 1 민음 한국사 1
문중양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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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비록 대외적으로는 제후국을 표방하며 중국과 조공 관계를 맺었지만, 안으로는 황제국을 자처하면서 모든 제도를 황제국 체제에 맞도록 운영했다. 이 점은 13세기 후반 이후 원 간섭기에 격하·수정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고려의 전 시기에 일관한 체제였다. 조선은 이 같은 고려의 체제를 참람한 것, 즉 정당한 분수를 뛰어넘는 것으로 규정했다. 제후국은 대외 관계뿐 아니라 국내의 제도와 문물도 격에 맞게 운영해야 하며, 그것이 성리학 이념을 원칙에 맞게 구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30) 그렇지만 황제 독재 체제를 확립한 명과 달리 "조선에서는 관료 집단을 중심으로 국시인 성리학의 정치 이념, 즉 신하의 정치적 역할을 강조하면서 군주와 신하가 협의를 통해 함께 국정을 운영해 가는 '군신 공치君臣公治'의 원칙을 충실히 구현하고자 했다." 신권주의와 왕권주의가 갈등을 일으킬 조짐이 왕조의 탄생기부터 잠복해 있었던 셈이다.(31)


# 조선 건국기의 국제정치

1. 명明 건국(1368) : 공민왕이 원元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명에 사신을 보내 책봉 관계 요청

2. 명의 요동 진출 : 원의 잔여세력 나하추를 제거하는 동시에 요동지방을 점령하여 철령위 설치를 통보

3. 고려의 요동 정벌 추진 : 우왕과 최영은 조민수와 이성계를 좌우사령관으로 삼아 정벌군 출정

4. 위화도 회군(1388) : 최영 유배, 우왕 폐위

5. 조선 건국(1392) : 요동 문제가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가운데 표면적으로는 대명 관계 정상화


"태조대 조·명 관계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난 가장 큰 갈등은 표전表箋 문제였다. 표전이란 조선에서 명으로 보낸 외교 문서인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을 가리키는데, 그 격식과 용어가 매우 까다로웠다. 명은 이 표전문 속에 명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의미의 글자가 섞여 있다는 이유로 조선의 사신을 억류하고 외교 문서의 작성자를 압송하라고 요구했다." "표전 문제가 양국 간의 현안으로 드러난 이면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선의 요동 정벌 움직임이었다. 즉 표전 문제가 처음 불거진 1393년부터 1398년까지 조선에서는 정도전의 주도하에 사병 혁파와 국군 체제 확립을 골자로 하는 군제 개혁을 추진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강력한 군사 훈련을 시행했다. 명은 이 같은 조선의 움직임이 요동 정벌을 위한 일련의 준비 과정이라고 보고, 군제 개혁 및 군사 훈련을 주도한 정도전을 요동 정벌 추진의 중심인물로 주목했다."(36-8)


# 1398년 홍무제(주원장)와 정도전(1차 왕자의 난)의 사망이라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문제 해소


"지리는 천문과 함께 국가를 경영하는 기초 학문으로 중시되었다. 천문은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고 예측해 정확한 역易을 만드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지리는 국토의 지형 지세·토지·인구·물산을 파악해 국정의 기초 자료를 마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개국 초기에 "천문과 지리 분야에서 국가적 사업을 추진한 데는 국가 경영에 활용하려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왕조의 개창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이념적 목적도 크게 작용했다. 천문도의 제작에는 하늘의 성좌를 측정해 별자리의 도수度數를 정확하게 밝히려는 과학적·실용적 측면과 더불어 조선 왕조의 개창이 하늘의 뜻에 따른 선양禪讓이었음을 강조하는 이념적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 마찬가지로 세계지도에서도 단순히 세계의 형세와 모습을 파악하는 차원을 넘어 새로이 개창된 조선 왕조를 만천하에 과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 의도를 드러낸 것 중 하나가 실제보다 과장된 조선의 크기이다."(54-5)


# 천상열차분야지도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


"고려 말 혁명 과정에서 정도전의 가장 큰 공헌은 척불斥佛 운동의 전개와 반혁명 세력의 숙청에 앞장섰던 점이다. 1391년(공양왕 3) 4월 정도전은 성균관의 여러 관원과 함께 공양왕의 호불好佛 성향과 각종 불사佛事를 비판하면서 강력한 불교 배척을 요구했다. 정도전의 척불 운동은 기본적으로는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측면에서는 혁명 세력의 정책에 비협조적이던 공양왕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와 더불어 반혁명 세력의 중심 인물인 이색이 불교에 우호적인 점을 이용해 그의 입지를 약화하려고 했다." 여기에 더해 조준은 "1388년 7월 상소를 올려서 사전 개혁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수조지를 파악해서 이를 몰수한 뒤 관료들에게 재분배하는 것이 조준이 주장한 사전 개혁의 골자였다. 이로부터 사전 개혁은 가장 중요한 정치 현안으로 떠올랐다."(73-4)


# 1391년 5월 과전법科田法 공포


"중앙집권적 관료 체제의 추구는 권문세족과 지방 호족이 토지와 농민에 사적 지배권을 행사하던 고려 말 정치의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고려 말 권문세족과 지방 호족은 권력과 부를 이용해 불법적으로 토지와 농민을 침탈했다. 이는 귀족의 토지 겸병과 농장 경영으로 이어지고 그에 따라 농민층이 몰락했다. 농민층의 몰락은 결국 국가 재정 기반의 붕괴를 초래했다." 새롭게 건설되는 중앙집권 체제의 형태에 대해 "정도전은 중앙집권적 관료 체제 운영의 주도권을 재상이 가지는 재상 중심의 권력 구조를 추구했다. 그는 왕위는 한 가문에서 세습하는 것이므로 국왕이 항상 현자賢者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국왕은 상징적인 최고 권력자로만 머물러야 했다." "반면 이방원은 국왕 중심의 정치 운영을 추구했다. 국왕이 상징적인 최고 권력자로 남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국정을 직접 주도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77-8)


정도전의 군제 개혁에 반발하여 1차 왕자의 난(1398)을 성공시킨 태종이 가장 먼저 시행한 정책은 아이러니하게도 "군권의 일원화를 위한 군제 개혁과 사병 혁파였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400년(정종 2)에 군제 개혁을 단행해 종친과 공신들이 사적으로 거느리던 군사들을 모두 삼군부에 소속하도록 하고, 지방의 절제사節制使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사 지휘권도 모두 삼군부로 귀속시켰다." 이와 더불어 "전국에 걸쳐 양전量田 사업, 즉 토지조사 사업을 시행해 전국 토지의 수량과 소유관계 등을 파악했다. 또 호구조사도 시행해 전국의 가구 수와 인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호적을 새로 정비했다. 그리고 새로 정비한 호적의 내용을 기준으로 16세 이상의 남자들에게 일종의 신분증명서인 호패號牌를 소지하도록 하는 호패법을 시행했다. 전국의 토지와 호구 조사 결과는 사람들의 신분을 파악하고 토지세와 군역 등의 세금을 거두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었다."(84-6)


고려 말기부터 이어진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위협은 조선 건국 이후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다. "조선은 투항해 오는 여진족은 포상을 내리며 적극적으로 환영했고, 그러지 않은 여진족이라도 문호를 개방했다." "고려 때만큼 심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에 들어서도 왜국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나라의 근심이 왜국만한 것이 없다國家所患莫甚於倭."라고 할 정도였다." "여진과 왜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젊은 왕 세종이 성리학적 이상 국가로 나아가기에 앞서 반드시 풀어야 하는 선결 과제였다. 중화 체제의 모범 국가로서 주변 세력을 교화하되 안 되면 무위武威를 과시해서라도 문화적이고 평화로운 관계로 들어오게 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명 중심의 중화 체제에서 확고한 위상을 지키고 그에 걸맞는 영역을 확보해야 했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세종은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나라 밖으로 정벌군을 보낸, 몇 안 되는 조선 국왕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105)


# 왜구 진압 및 교역 재개

1. 기해동정 : 이종무 함대의 쓰시마 정벌(1419)

2. 계해조약 : 부산포, 내이포, 염포 등 삼포 개방(1443)


# 여진 정벌 및 교역 재개

1. 4군 : 최윤덕 부대가 압록강 일대 여연, 자성, 무창, 우예의 4군 점령(1437), 

2. 6진 : 김종서 부대가 두만강 일대 회령부, 경원부, 종성군, 경흥군, 온성부, 부령부의 6진 구축(1449)


"1492년(세종 11년) 간행된 <농사직설農事直說>은 가장 널리 알려진 조선 시대의 농업 서적이다." 고려 시대에는 원元의 농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가 두루 쓰였는데 조선의 풍토에 알맞는 독자적인 농서 편찬이 필요한 상황에서, 세종이 그 일은 해낸 것이었다. "세종은 조선의 농서를 편찬하면서도 그것이 태종의 치적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내세웠다. 태종이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 <농상집요>의 주요 내용을 초록하고 이두로 번안해 농서를 편찬했으니, 세종은 그 업적을 계승한다고 표방한 것이다. 이때 세종이 더욱 강조한 것은 바로 오방五方 풍토의 개별성이었다. 오방은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위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천하의 여러 곳을 가리키며 조선이 중국과 구분되는 지역임을 강조한다." "1428년(세종 10) 세종의 명령을 받은 하삼도下三道 관찰사가 각지의 농법을 종합해 올린 책자를 기반으로 정초와 변효문이 편찬한 책이 바로 <농사직설>이다."(119-20)


"하늘을 대신해 인간 세상을 통치하라는 명을 받은 자로서 왕은 하늘의 뜻을 받들기 위해 항상 정성을 다해 천문을 읽어야 했다. 그렇기에 천문학은 제왕학이었다. 천문학을 학습하는 것은 제왕된 자의 의무이고, 천문역법을 독점하고 세상에 반포하는 것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제작으로 시작된 조선의 천문역법은 세종대에 이르러 완성된다.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수립한 독자적인 역법으로 이해되는 '칠정산'이 그것이다."(136-7) "요 임금은 역법을 확립하고 순 임금은 혼천의를 만들어, 완벽한 역볍을 확립해 정확한 때를 일러 주고자 했다. 이것이 곧 하늘을 공경하는 정치였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성군으로 추앙받는 우 임금은 황하의 물줄기를 트는 치수 사업을 벌여 황폐해진 중원 지역을 평정했다. 천문역법 사업이 위대한 요·순 임금을 따르는 것이라면, 측우기와 수표의 창제 및 측정 제도의 확립은 우 임금을 따르는 성군의 정치였다."(146)


"조선 왕조는 유교적 이상 국가를 구현하고자 예악 정치를 표방했다. 여기서 예禮와 악樂이란 추상적 구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가 질서를 위한 것이라면 악은 조화를 위한 것이다. 질서와 화합을 위해 필요한 예악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체로서, 형정刑政의 근본을 이루며 왕도의 필수 요건이다. 중국 고전인 <예기> 「악기」에 따르면 예악 형정이 추구하는 궁극은 민심을 하나로 해 잘 다스려진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조선의 역대 왕은 이러한 통치 원리를 바탕으로 치도治道를 갖추고자 노력하고, 그를 위해 예와 악이 정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음악적 안목이 남달랐던 세종은 "음의 시가時價를 표기할 수 있는 정간보井間譜를 창안하고, 아악기의 표준이 되는 편경을 우리의 기술로 만들어 냈다. 또한 아악雅樂을 정리하고, <여민락與民樂>,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 등의 음악을 만들어 국가 전례를 거행하는 데 긴요한 성과를 이룩했다."(151-2)


"세종이 문자 창제 프로젝트를 은밀히 추진한 것은, 신하들이 반발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지배층은 한문을 배워서 과거 시험을 볼 수 있었는데, 과거 시험은 양반 관료로 편입되어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반이었다." "세종이 한글을 이용해 처음으로 공개적인 사업을 추진한 것은 1444년 2월 16일 집현전의 관리들을 시켜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한 일이다." 마침내 한글과 관련해서 공개적으로 일이 추진되자 "최만리 등은 상소문에서 언문 창제와 같은 중대한 일을 신하들의 공론을 모으지 않고 졸속으로 진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임금의 건강이 안 좋아 요양을 떠나면서까지 그리 급한 일도 아닌 언문 관련 사업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이 상소문은 세종이 한글 관련 사업을 은밀히 추진했다는 것, 그리고 세종이 한글 관련 사업에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169-71)


"세종의 맏아들 문종은 자질과 인품이 뛰어나 서른둘이 되던 1442년부터 국정을 대리하며 통치 경험을 쌓았지만 즉위 2년 만에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로 붕어했다. 그 뒤를 이어 즉위한 단종은 겨우 열하나의 어린 나이였다. 국왕의 때 이른 붕어와 어린 세자의 즉위라는 돌발 상황은 그 자체로 중요한 정치적 위기였지만, 그 위기는 또 다른 조건 때문에 더욱 심각해졌다. 그것은 단종을 둘러싼 숙부들의 존재였다. 세종은 대군만 여덟 명을 두었는데, 특히 둘째 수양대군과 셋째 안평대군은 능력을 높이 평가받았다. 두 사람은 단종이 즉위했을 때 삶에서 가장 정력적인 나이인 삼십대 중반이었다."(184) "1452년 7월 28일, 수양대군은 권람의 추천으로 한명회를 만났다. 기록에 따르면 수양대군은 그를 처음 만난 뒤 '나라의 선비國士'라고 극찬하면서 오랜 친구처럼 여겼다. 며칠 뒤에는 신숙주를 포섭했다." "거의 동년배인 세 사람의 만남과 제휴는 14개월 뒤 계유정난의 성공으로 이어져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188)


# 계유정난(1453)

1. 권람의 노비 계수가 김종서를 위시한 재상들이 안평대군을 옹립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수양대군에게 고변

2. 수양대군이 먼저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김종서와 아들 김승규를 살해

3. 수양대군 일파가 대궐과 도성 주요 지점을 장악한 뒤 조극관, 황보인 등을 유인, 살해

4. 숨이 끊어지지 않은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반전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귀양


"단종은 세조가 즉위한 뒤인 1455년 윤6월 20일 상왕의 자리로 물러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7월 11일 곧바로 태상황에 추대되었다. 그해 10월 13일 명도 칙사를 보내 세조의 즉위를 인정해 주었다. 세조의 체제는 순조롭게 안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조에게 지울 수 없는 도덕적 오점이 있는 것은 자명했다. 그의 체제가 뿌리내리기까지는 또 한 번의 진통과 최종적 조처가 필요했다. 그것은 사육신 사건과 단종의 사사였다." "성삼문 등이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1456년(세조 2) 6월 계획이 누설되어 실패한 사육신 사건은 다시 한번 많은 희생자와 함께 세조에게 큰 도덕적 상처를 남겼다. 이런 변란의 궁극적인 원인은 단종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당하고, 그의 일가친척이 숙청당하는 일련의 사태를 거친 뒤 "다섯 달 만인 1457년 10월 24일 사사賜死됨으로써 16세의 짧고 비극적인 생애를 마쳤다."(192-3)


"세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집요하게 추구한 과업은 왕권의 강화였다. 그는 다양한 제도와 확고한 태도로 그 목표를 끊임없이 추구했다. 그 결과 세조는 외형적으로 매우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내면에는 상당한 한계도 잠복해 있었다."(199) "왕권의 절대성에 관련된 세조의 생각은 1467년 12월 "친히 정사를 보고 권력이 아래로 옮겨 가지 않는 것이 군주의 도"라고 한 발언에 가장 잘 집약되어 있을 것이다. 이 발언이 치세 끝머리에 나왔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세조는 이런 원칙을 재위 내내 강력히 관철했다. 그러나 부당한 집권이라는 태생적 결함 때문에 세조는 어느 때보다 많은 공신을 양산했고 한명회·신숙주·정인지 등으로 대표되는 소수 대신들에게 크게 의지해 국정을 운영했다. 그리고 그런 통치 방식은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권력이 아래로 옮겨가는' 결과로 이어졌다."(201)


# 세조의 주요 정책

1. 호패법 재시행(1459), 인구조사 실시(1461)

2. 백성에게 부과하는 공물 축소(1457), 공물 명세서 횡간橫看 제정(1464)

3. 풍년에 곡식을 사들여 흉년에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상평창 설치(1458), 현직 관원에게만 과전을 지급하고 세습을 금지한 직전법職田法 실시(1466)

4. 군사제도 개편(1457) : 중앙의 오위五衛와 지방의 진관鎭管 체제 수립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재위 14개월 만에 붕어했다. 인위적인 사고는 아니지만, 원자인 제안대군이 세 살밖에 안 된 상황에서 국왕이 붕어한 것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또 한 번 격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짙은 큰 위기였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실현되지 않았다. 15년 전 어린 국왕의 등극이 가져온 정치적 공백을 파고들어 집권한 훈구 대신들은 그때의 경험을 살려 이 위기를 진정시켰다. 왕실과 대신은 가장 중요한 후사 문제에 신속하게 합의했다."(216) "성종 초반 왕권의 위상과 정치의 전체적인 양상은 이 시기를 이끈 두 개의 이례적 제도인 (세조비 자성대비의) 수렴청정과 원상제로 파악할 수 있다." 자성대비와 정치적 주도권을 공유한 대신들의 주요 기구인 원상은 '승정원의 재상'이라는 이름이 알려 주듯이, "국가의 최고 중신인 재상을 국왕과 가장 가까운 관서인 승정원에 근무케 하는, 그러니까 의정부와 승정원의 기능을 합친 매우 변칙적이며 강력한 특별 기구였다."(217-8)


"성종에게 진정한 원년은 수렴청정과 원상제가 종결되고 친정을 시작한 1476년이었을 것이다. 훈구 대신들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에 변형된 왕정을 시행할 수밖에 없었던 성종에게 가장 시급한 정치적 과제는 왕권을 강화해 대신들의 입지를 축소하는 것이었다."(222) "삼사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함께 부르는 이름이다. 탄핵과 간쟁을 고유한 임무로 부여받은 삼사는 국왕 및 대신과 긴장 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이 본원적으로 큰 관서였다. 조선의 역사에서 삼사가 본격적으로 대두한 첫 시점은 성종 중반 무렵이었다. 이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직접적인 동기는 성종의 정책이었다. 성종은 대신의 견제 세력으로 삼사를 육성해 신하들 내부의 견제 구도를 형성하려고 했다." "삼사가 중앙 정치의 한 축으로 대두함으로써 그동안 국왕과 대신이 주도하던 체제에서 국왕-대신-삼사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구도로 이행한 것이다."(228-9)


"대신과 삼사의 표면적인 대립은 해당 관원이나 통설처럼 '훈구파'와 '사림파'라는 정치 세력의 성향보다는 <경국대전>에서 규정하고 보장된 그 관서의 기본 임무에서 발원한 측면이 더 크다고 판단된다. 다시 말해 대신의 보수적 성향이나 삼사의 진보적 태도는 그 관원의 자발적 선택이나 집단적 성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소속한 관서의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되었다." "아울러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실은 이처럼 대신과 삼사의 기능은 서로 매우 다르고 고정적이었지만, 그 구성원은 언제나 유동적이었으며 긴밀한 인적 연속성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의 유망한 관원들은 대부분 삼사를 거쳐 대신으로 승진했다." "즉 조선의 주요 관원들은 젊을 때는 삼사에 근무하면서 탄핵과 간쟁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지만, 그 뒤 나이를 먹고 품계가 올라 대신이 되면 그 관직에 합당한 현실론적 태도를 나타낼 가능성이 컸다."(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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